webnovel

5

그러는 동안 나는 그라티아 제국이 어떤 나라인지 살폈다.

20년의 평화 시대. 그때도 수많은 부조리와 귀족들의 말썽이 남아 있었지만, 지난 2년은 그보다 더한 최악의 시대였다.

귀족들은 국민들의 착취를 당연하게 여기고, 말도 안 되는 법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으며, 그로 인해 나라는 걷잡을 수 없이 망가져 가고 있었다.

나는 조사를 통해 정리한 지표를 보고 그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지금 상태에서 만약 이 나라에 딱 한 번이라도 가뭄 같은 자연재해가 오는 순간.

그라티아 제국은 곧바로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라티아 제국. 겉으로 보기에는 시민들이 하하 호호하며 웃고 있었지만, 그 속은 끝없이 썩어 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건 이곳에서 20년간 살아온 러쉬가 나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일일 것이다.

녀석은 이 모든 걸 몸으로 직접 체감 했을 테니까.

"이 나라가 바뀌어야 한다는 걸 확신했어. 천성아, 나 황제가 될게. 나, 이 나라를 바꾸고 싶어."

자신이 황제가 될 수 있다는 걸 들은 순간부터, 그렇게 되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놓고 러쉬는 끝없이 고민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고민은 자연스레 그를 군중 위에 설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끌어 올려 준 모양이었다.

그에게는 황가의 핏줄이 있다.

그 핏줄이 지금에서야 겨우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러쉬의 눈에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의지가 담겨 있었다.

"좋아. 러쉬, 준비는 끝났다."

그리 말한 나는 주저앉아 있던 러쉬에게 손을 뻗었다.

"황제가 되어라."

그리고 그런 내 손을 러쉬가 맞잡았다.

* * *

이후 우리는 기절한 넘버 3를 데리고 앤드류 가문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꽤나 큰 저택이었던 탓에 방금까지 평범한 군인이었던 러쉬는 일변한 상황에 적응하지 못해 어색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러자 나는 그에게 조언했다.

"익숙해져. 사람은 첫인상이 모든 걸 좌지우지해. 귀족들에게 네가 조금이라도 밉보일 구석이 드러나면, 그건 순식간에 널 물어뜯을 약점이 될 거다."

"응, 알았어."

여태껏 평민이었으니, 일주일 정도 교육은 해 둬야겠지.

이전에 내가 넘버 3와 거하게 한 판 치른 덕분에 귀족 녀석들의 귀에도 우리가 왜 그곳에 갔는지 소문이 퍼질 것이다.

그 소문이 무르익을 때까지는 확실히 시간이 필요하겠지.

장차 그것은 자연스레 러쉬를 황제로 끌어 올려줄 발판이 되어 줄 거다.

"넘버 10, 러쉬를 데려가서 제대로 씻겨 놔. 애가 엉망이다. 그리고 밥이랑 옷도 좀 챙겨 주고. 난 이놈이랑 대화 좀 해 봐야겠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내게 대답한 넘버 10이 러쉬에게 안내를 하려 하자, 녀석은 어딘가 아쉬운 눈치로 나를 돌아보았다.

마치, 나와 대화를 더 못해서 아쉽다는 양.

어차피 당분간은 정신 교육을 위해서라도 나는 저놈이랑 하루 종일 붙어 다닐 텐데.

그때가 되면 나를 만나는 게 오히려 무서워질 거다.

그런 생각을 하며 지하실로 넘버 3를 끌고 간 나는 그 후, 녀석을 의자에 앉혀 두었다.

그러곤 녀석이 입고 있는 옷을 전부 벗긴 뒤, 몸 이곳저곳 다 확인해 보았다.

'자살용 도구라던가, 그런 느낌의 마법 문양 류는 없어 보이기는 하는데.'

혹시나를 대비해 나는 양 엄지를 들어 기절해 있는 녀석의 볼에 가져다 대었다.

그 즉시 오러를 이용해 미세하게 엄지로 누르자, 녀석의 턱뼈가 부러지며 입이 저절로 벌려졌다.

"혀 쪽에도 없네."

내장에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까지 내가 파헤칠 방법은 없었다. 그렇게 몸수색이 끝나자 녀석에게 포션을 적당히 부어 준 뒤 의자 하나를 가져와 털썩 앉았다.

"일어났지? 방금 그거, 일부러 너 깨우려고 한 것이기도 하거든."

내가 말을 걸자 넘버 3가 감겼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잠시 그는 말없이 나를 직시했고, 나는 갑옷을 입은 채 녀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할 말은?"

"...."

묵묵부답. 이전의 놈들과 달리 소드 마스터까지 오른 녀석이다.

그렇다는 건 다른 넘버들의 비해 정신력이 상당히 높을 게 분명하니, 웬만한 심문으로는 절대로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서서히 내 오러가 주위를 잠식하듯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너희들은 내가 오러를 못 쓴다고 알고 있는 모양인데."

그리고 퍼져 나간 오러는 순식간에 방 안을 가득 메워 버렸다.

구역질이 느껴질 정도로 밀도 높은 오러가 서서히 녀석의 목을 조여 나가기 시작했다.

흠칫. 여태껏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경지의 오러에 처음으로 넘버 3가 반응했다.

나는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고 녀석의 앞에 천천히 다가와 섰다.

그러곤 손으로 녀석의 턱을 잡은 뒤 내 투구를 벗어 바닥에 내던졌다.

"똑바로 봐라. 네놈이 믿고 따르는 넘버 1이 위인지, 내가 위인지."

억지로 턱을 잡혀 내 눈과 똑바로 마주치게 된 순간, 이제껏 없던 공포가 그를 엄습한 듯 표정이 변했다.

이 세계에서는 소드 마스터까지 승승장구하며 살아왔을 그이다.

실제로 이 층에서 소드 마스터라는 존재는 나라에서 인정하는 검제에 속할 정도로 뛰어난 경지다.

그런 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도달은커녕, 이와 비슷한 수준을 지닌 자도 만나 본 적 없었는데. 바로 지금, 그 경지에 오른 인간이 눈앞에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한 두려움 때문인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자 넘버 3의 시선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이윽고 방 안을 가득 메운 오러로 인해 녀석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하고 식은땀이 전신에서 쏟아져 내렸다.

거기에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늙어가며 눈가가 움푹 들어갔다.

끝에는 머리카락이 흰색으로 탈색되듯 물 들어가기 시작했고, 나는 그 무렵에 오러를 멈췄다.

"이제 이야기해 볼 마음이 생겼나?"

묶어 두지는 않았다.

어차피 넘버 3가 내게서 도망갈 방법은 없었다.

녀석은 그걸 깨달은 건지 머리를 바닥에 박은 채 조아렸다.

"뭐... 든지, 뭐든지 말하겠습니다."

더 이상 그에게 적의는 없었다.

정확히는 적의를 가질 수가 없다가 맞겠지만.

"그래? 잘됐네."

빙그레 미소를 띤 나는 넘버 3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한참 후, 나에게 모든 정보를 다 쏟아 낸 넘버 3는 마지막 기력을 다하고 혼절했다.

그 녀석을 다른 녀석들에게 맡긴 뒤, 나는 갑옷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러곤 러쉬의 방으로 찾아가 문을열자, 방금 막 식사를 꺼낸 그가 보였다.

"러쉬."

"아, 천성아."

내가 녀석의 이름을 부르자, 러쉬가 의자에서 일어나 반갑게 맞이했다.

"이제 쉴 시간 없어. 오늘부터 바로 교육에 들어간다."

"교육이라면?"

"황제로서의 몸가짐이다. 격식을 좋아하는 녀석들에게는 그 기대에 맞춰 줄 필요성이 있어. 늑대 소굴에 등장한 호랑이처럼 당당해지는 법을 가르쳐 줄 거다. 그리고 오러를 쓰는 법도 덤으로."

"어, 오, 오러? 내가 오러를?"

"걱정 마. 검에 두르거나 몸에 두르는 것 같은 신체를 지키는 용도의 오러가 필요한 게 아니니까. 넌 말 한마디, 한마디에 오러를 담는 방법을 배울 거다.

그리고 그것을 최대한 부풀리듯이 크게 보이는 법도 가르쳐 줄 거고."

"왠지 엄청 힘들 것 같은데...."

그 말에 나는 녀석의 다리 사이로 발을 쿵 내려찍었다.

흠칫한 러쉬가 한차례 몸을 벌벌 떨었고, 나는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운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네 입으로 황제가 된다고 했지?"

"네, 네!"

"그럼 그 말에 책임을 져야지. 말해 두지만, 군대보다 더 힘들 거다. 차라리 군대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게 해 줄 테니까."

"어... 아, 진짜로? 처, 천성아 우리 오랜만에 봤잖아. 내 얼굴 보니까 반갑지 않아?"

"그 말투랑 정신머리부터 고쳐 주마."

그리고 그 날, 러쉬의 비명이 밤새도록 울렸다.

그의 비명은 넘버들도 질릴 정도였다.

이후 나는 일주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녀석의 옆에 붙어 하나하나 가르쳤다.

내가 그동안 크라운 로드를 오르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

어느 녀석이든 두드려 패면 맞기 싫어서라도 배운다.

물론 본래라면 당근 같은 상도 첨가해 줘야 하겠지만,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당근을 넣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러쉬를 미친 듯이 매질해 주었다.

그 결과, 러쉬는 발걸음부터 바뀌었다.

당당하며 위엄 있어 보이는 발걸음, 그리고 걸음마다 오러를 일으켜 은근하게 새어 나오는 카리스마의 형성.

이어서 곧게 편 허리와 정면만을 직시하는 눈, 여유를 상징하는 입꼬리, 그리고 말을 할 때마다 상대를 억누를 수 있는 저음과 그 속에 오러를 싣는 것까지.

많은 변화가 있었으나, 문제는 억지로 오러를 깨워줬을 뿐이라 오러양이 적고 아직 능숙하게 다루지 못하여 이 모습은 30분 정도밖에 유지 안 되는 한시적인 카리스마였다.

그래도 그 30분 동안은 러쉬를 황제로 비출 만한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괜찮네. 썩 그럴싸해졌어."

"잘 모르겠군. 일주일밖에 안 되었으니, 나로서는 잘 체감이 가지 않는다만."

"그 말투 내 앞에서는 쓰지 마. 재수 없어 보여."

"알았어."

순순히 꼬리를 내리는 러쉬를 보고 나는 회중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도 얼추 되었고, 그가 황제로 나설 만한 자리도 미리 준비해 두었다.

"가자. 러쉬, 황제가 될 시간이야."

52화

"응."

일주일간의 교육이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러쉬에게는 더 이상 긴장감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를 만족스럽게 본 나는 창성의 기사로서 움직이고자 갑옷을 챙겨 입었고, 러쉬는 그런 내 뒷모습을 바라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천성아."

"어, 왜?"

갑옷을 무장하고 나서 투구를 들어 올린 내가 러쉬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러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달싹거렸다.

그 모습을 잠깐 보던 내가 의문을 느끼며 고개를 기울이자 러쉬는 얼굴을 돌린 채 우물쭈물거리다가 슬쩍 말했다.

"...황후라든가. 그런 건 어떻게 해야 할까 싶어서."

황후. 그러고 보니 이 녀석 단 한 번도 여자랑 사귀어 보지 못했었지.

불쌍한 놈.

"황제가 되면 그런 건 네 마음대로 정해. 나는 거기까지 신경 쓸 생각은 없어."

"그러면."

러쉬가 급히 나를 돌아보았다.

그 눈은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잠깐 그 눈을 바라보던 나는 곧 의도를 알아채고 서서히 인상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이 새끼가.

"뒤질래?"

"응, 미안."

짧게 사과하는 러쉬를 보고 나는 투구를 마저 썼다.

썩을, 이 망할 층, 빨리 공략해 버리든가 해야지.

지금은 잠깐 이 꼴이 됐지만, 난 남자다.

이 이상 더 남자가 꼬인다면, 토악질이 나올 것 같다고 생각한 나는 짜증스레 문을 열고 나왔다.

그러곤 풀이 죽은 러쉬를 이끌고 넘버 10과 함께 수도, 황성에 직접 발을 들였다.

그렇게 우리가 수도에 등장했으나, 앞 길을 막을 수 있는 자들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앞서 나간 우리의 뒤에 군의 장군들이 따라 걷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일주일간 나는 러쉬를 교육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장군들을 포섭했다.

귀족들의 세력 다툼으로 군은 아직까지도 피해를 입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전쟁은 계속 소모전으로 이어질 게 뻔하니 연합국에 둘러싸인 제국은 그들의 지속적인 공세에 서서히 좀 먹히듯 약해질 것이다.

그 사실은 장군급들도 전부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었고, 그들은 그 고충에 대해 매일 같이 토론하는 중이었다.

그때 우리는 현재 상황을 타개해 줄 러쉬의 존재를 그들에게 보여 줬다.

계속해서 군에 투자해 주었던 앤드류 남작이 데려온 히든 카드, 황제의 핏줄.

황제가 서거했다는 것이 거의 확실시 되고 뒤를 이어야 할 황족들의 모든 핏줄이 끊어진 상황에서, 앞으로도 군을 후원할 앤드류가 데려온 히든 카드는 장군들에게는 희소식과 다름없었다.

앤드류는 장군들과 약속했다.

이 나라를 전쟁에서 승리하게 만들겠다고.

그리고 그 승리를 새로운 황제가 안겨다 줄 것이라고 말이다.

새로운 시대를 반기는 양 커다란 창을 통해 새하얀 빛이 쏟아져 내려왔다.

그 빛 사이로 마치 원탁을 떠올리게 할 법한 거대한 원형 테이블이 중앙에 자리했고, 그곳에는 이 나라를 쥐락펴락했던 귀족들이 앉아 있었다.

공작부터 남작까지. 여러 종류의 작위를 가진 그들은 장군들과 함께 등장한 우리에게 시선을 모았고, 곧 뼈아픈 표정을 지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실 그라티아 러쉬 님의 입장일세. 모두 어찌 그리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는가?"

후작 급 장군 한 명이 귀족들에게 핀잔을 주자, 그들의 눈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황제 폐하의 알현을 뵙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무어라 외치기도 전에 귀족 사이에서 누군가 움직였다.

미리 우리 쪽에 붙기로 한 귀족들이 눈치 빠르게 러쉬를 황제라고 칭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우리 편으로 아직 넘어 오지 않은 귀족들은 그 광경에 이를 갈았다.

하지만 여기에서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면, 황제를 무시한 처사가 되기에 자신들의 입장도 난처해진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들도 뒤따라 고개를 숙이려 할 때.

"어허, 황제 폐하의 알현이라니. 그것참, 너무 무례한 말이군."

그 순간 귀족 한 명이 능글맞게 입을 열었다.

이내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그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의 이름은 로쉬아느 공작, 그의 말에 장군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례한 말이라니. 로쉬아느 공작, 그게 무슨 말인가? 황족의 핏줄인 그라티아 러쉬 님께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반대라도 할 속셈인가?"

"장군, 아무래도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일세."

흰색의 수염이 진하게 난 그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토를 단 장군에게 핀잔을 주었다.

모두의 얼굴이 의문으로 물드는 순간, 그는 황좌에 다가가 그것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아직 죽지 않으셨는데 어찌 그런 말들을 하나? 폐하께서 살아 있으면 이건 엄연한 반역이지 않는가?"

"폐하께서 살아 있다니? 무슨...."

"그동안 폐하께서 병으로 앓아누우셨는지라 황좌를 비우시긴 하셨지만. 지금은 전부 쾌차했네.

그러니 황제 폐하께서는 아무런 문제 없이 다시 제국을 통치하실 걸세."

덜컹, 그가 말을 마친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양 황좌 옆에 있는 황제의 대기실이 열렸다.

황제가 붕어했다면 절대 열릴 리 없는 방.

그 방이 열리자마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곳으로 쏠렸다.

곧 진한 죽음의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그러나 이 냄새를 맡은 자는 나밖에 없었는지, 모두의 시선은 문에서 떼어질 줄은 몰랐다.

곧 뚜벅뚜벅하고 발걸음 소리가 조용해진 홀을 메워 나가기 시작했다.

"화, 황제 폐하!"

누군가 경악을 담아 외친 목소리가 침묵을 깼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귀족들이 그를 향해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모두 오랜만에 보는군."

황좌, 그곳에 황제가 서 있었다.

2년 전, 병으로 모습을 감춘 뒤 어느 귀족에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황제가 멀쩡한 모습으로 등장한 것이다.

"내가 병으로 앓아누운 동안 제국이 꽤나 혼란스러워졌던 모양이군. 이제 걱정 말게나. 내가 다시 통치할 터이니."

그의 입이 열리자 내 등 뒤에 서 있던 장군들의 몸이 굳었다.

방금까지 러쉬를 지지했던 그들의 눈이 심할 정도로 흔들리며 식은땀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죽은 줄 알았던 황제가 멀쩡한 모습으로 등장한 지금, 러쉬의 존재는 어떻게 평가받을까.

당연하다.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가장 큰 골칫덩어리로 전락한다.

그것도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고자 제국에 반역을 일으킨 죄인으로.

"황제 폐하, 간악한 자들이 황제 폐하를 죽었다고 말하며 직계 황족들이 다들 돌아가신 틈을 타 나라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습니다. 이를 엄히 처벌해야 합니다."

공작 로쉬아느가 러쉬를 지지했던 장군들의 목숨에 종지부를 내릴 말을 전했다.

그러자 황제의 눈이 장군들에게 향했고, 장군들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아무런 소리도 내뱉지 못했다.

앤드류를 연기하는 넘버 10 또한 상황을 따라가지 못한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나는 러쉬에게 고개를 돌렸다.

러쉬는 황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가 나타난 시점에서 자신은 순식간에 죄인으로 전락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 러쉬의 눈에는 한 점의 의심도 없었다.

이 자리에 온 이상 자신은 황제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 눈은 생각 이상으로 마음에 들었다.

'그래, 러쉬. 넌 황제가 될 놈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내 입가에 진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렇군. 6검제."

공작의 말을 전부 들은 황제의 입이 열렸다.

그의 부름 한 번에 제국을 지키는 기둥인 6명의 검제가 앞에 나타나 부복하였고, 황제는 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저 간악한 자들을 모조리 죽여라."

"예."

그렇게 대답한 6검제가 우리를 향해 절도 있는 동작으로 몸을 돌렸다.

6명 전원이 소드 마스터 이상급의 실력.

그들 중 유일하게 길버트만이 입술을 깨문 채 나만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 오러가 흘러나온 순간 수많은 사선을 넘은 경험이 장군들마저 하나둘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우리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던 귀족들은 지금 상황을 매우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었고, 우리의 편에 섰던 자들은 세상을 잃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희비가 갈리는 원탁의 장 앞에서 나는 투구를 벗었고.

곧 바닥에 내던졌다.

데구르르르.

분위기를 깨는 투구 소리에 귀족들이 서서히 내게로 이목이 집중했고, 그러자 나는 별천도로 자신의 갑옷을 갈랐다.

6명이나 되는 소드 마스터, 게다가 저 중에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 급 녀석이 딱 한 명 있었다.

그런 수준의 상대와 싸운다면 갑옷은 그저 거추장스럽기 그지없는 물건일 뿐이다.

"여, 여자?"

"창성의 기사가 여자라고?"

투구를 벗은 데 이어, 몸을 감싼 갑옷까지 갈라지자 내 몸이 드러났고, 순간 그걸 본 귀족들 사이에 한차례 파문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들은 곧 내가 여자든 말든 신경 쓰지 않기로 한 듯 조용해졌다.

그리고 귀족들은 어차피 6검제 앞에 오러도 다루지 못하는 일개 용병 따위가 무얼 할 수 있냐는 눈을 했다.

"러쉬."

"그래."

제대로 황제 모드를 킨 러쉬는 오러가 담긴 목소리로 대답해 보였다.

나는 입가에 진한 호선을 그린 채 전방을 주시하며 과시하듯 외쳤다.

"넌 황제다! 이 나라의 황제가 될 남자다! 지금부터 네가 걸을 길은 핏빛 길이다! 그래도 걸을 테냐? 황제가 될 테냐! 이 나라를 바꿔 보겠느냐!"

내 거친 외침이 이 장소를 가득 메웠다.

메아리치듯 울린 목소리가 모든 사람의 귓가를 스치고, 이내 러쉬의 목소리가 뒤따라 이곳에 울려 퍼졌다.

"그라티아 러쉬, 이 몸이 앞으로 제국의 황제가 될 자다."

그가 장내를 깨듯 한마디를 외친 순간, 6명의 검제가 검을 뽑았다.

그들은 망설임 없이 오러를 퍼트리며 달려들었고, 나는 러쉬를 지키는 기사로서 그의 앞에 섰다.

내 눈동자가 번뜩였다.

몸속 깊숙이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마나가 맹렬한 속도로 손끝에 모여들었다.

파직.

한 줄기의 번개가 번쩍이더니,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 전신에서 이 자리의 어느 누구도 경지를 헤아릴 수 없는 오러가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뭐?"

나에게 검을 내지르려던 6검제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자신들은 발끝조차도 닿지 못했던 경지의 끝에 다다른 자를 보자마자 그들의 눈 속에 비치는 감정이 경악으로 물 들어갔다.

"나는 창성의 기사, 황제를 지킬 제국 제일의 검이다."

높게 치켜든 내 검에 번개가 자리 잡았다.

검에 맺힌 오러에 세상마저 두려워 눈을 가린 듯 주변이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경지가 모자란 귀족들은 모조리 쓰러져 나갔다.

검제들은 억지로 자신들의 검을 내게 내지르며, 그 공격에 오러를 한계치까지 쏟아부었다.

그러나 나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토옹.

어딘가에 맺힌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를 맴돈 순간.

내 검이 내리그어졌다.

그리고 세계는 빛에 집어삼켜졌다.

구식(九式)

낙뢰(落雷)

조용함이 감돌았다.

내리그어진 검의 끝 바로 앞에는 나를 상대한 검제들이 모조리 쓸려 나가 마치 자신들의 시대에 끝을 알리듯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내 앞에는 그중 유일하게 검을 내지른 자세에서 서 있는 자가 둘 있었다.

우선 한 명은 길버트, 마지막 내 공격을 눈치채고 검제 중 유일하게 방어를 택한 녀석이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녀석의 몸은 엉망진창이었고, 목숨만 부지한 그가 할 수 있는 건 겨우 숨소리를 내뱉는 것밖에 없었다.

"검제들 중 유일하게 방심을 안 했군. 길버트 백작."

"...다른 검제들도 방심하지 않았다. 그저 최선의 수가 다르다고 생각했을 뿐."

"그게 방심이야. 자신의 공격이 항상 남한테 닿을 수는 없는 법이거든."

그리 말한 나는 그의 어깨를 한차례 두드려 준 뒤 그를 지나쳐 걸어갔다.

"티안."

그 순간 그가 내 이름을 간절히 불렀다.

그의 부름에도 나는 멈추지 않자 길버트는 애가 타는 듯 외쳤다.

"처음... 부터. 처음부터 오러를 쓸 수 있었나?"

마지막 물음이라는 듯 외치는 그에게 나는 시선을 주지 않고 그저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그래."

"...미안하군. 난 널 담을 그릇이 아니었는 모양이야...."

그는 마지막으로 씁쓸한 웃음을 남기곤 쓰러졌다.

그를 지나친 나는 쓰러지지 않고 버틴 다른 한 녀석과 눈을 마주쳤다.

녀석의 얼굴은 반 이상 뭉개져 있었고, 그 흉측한 상처 사이로 또 다른 얼굴이 눈에 보였다.

"네가 넘버 1이구나."

그 말에 곧바로 얼굴 가죽을 뜯어낸 넘버 1의 검에서 다시금 오러가 피어올랐다.

그 오러는 확실히 그랜드 소드 마스터급.

넘버의 수장인 그는 제국이 자랑하는 6검제에 숨어들어 있었다.

그것도 6검제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으로.

53화

넘버 1은 이 층에서 일종의 최종 보스 역할을 맡고 있는 모양이었다.

"넘버들을 네놈에게 다 빼앗길 거라곤 생각 못 했다."

"좀 더 교육을 잘해 두지 그랬어. 아니면 네가 나보다 더 강했어야지."

내 도발에 넘버 1이 곧바로 검을 휘둘러 왔다.

문득 신시아와 첸을 떠올린 나는, 오랜만에 제대로 된 싸움을 해 볼 수 있겠다며 미소를 그리곤 검을 맞받아 쳤다.

넘버 1은 멈추지 않고 연격을 휘둘렀다.

나와 맞부딪친 그의 검은 처음에는 작은 파도 같았다.

그러나 그 파도는 멈추지 않고 점점 몸집을 불리기 시작했다.

가악식(假惡式)

적파심검(赤波心劍)

결국 그 파도는 너무도 커져 끝내는 이 세계를 모조리 다 잡아먹었다.

그렇게 그의 검은 완전한 파도가 되었다.

일식(一式)

뇌전섬뢰(雷電閃雷)

그 순간 번개가 튀어 올랐다.

세상을 집어삼킨 파도를 부서트리고 그 자리에 땅이 드러났다.

[B클래스 검의 길이 발동 중입니다.]

내 눈이 진노랑빛으로 물들었다.

클래스 검의 길에 의해 나는 그 검의 선로를 모조리 꿰뚫고 있었고, 깨져 나가는 파도 너머에서 그걸 알아챈 넘버 1의 눈동자가 커졌다.

자신의 뛰어난 검술이 내 검술에 뚫린 것이다.

이제는 내 차례였다.

이식(二式)

섬뢰적선(殲雷迪渲)

파훼한 그의 검술을 뚫고 번개가 번개의 꼬리 물었다.

그리고 다음 연격이 물 흐르듯 끊임없이 이어지자, 이번에는 넘버 1 쪽에서 방어를 시작했다.

그렇게 선로를 타고 계속해서 검격을 몰아쳐 가 넘버 1이 이를 꽉 깨물곤 계속해서 받아쳤다.

하나 내 오러는 전 속성.

부딪칠 때마다 전류가 터지니, 그것을 막고 있는 넘버 1의 오러는 차근히 깎여 나가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내 기세는 더더욱 오르고 있었다.

내가 이보다 더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인지, 녀석은 내 검술을 어떻게든 끊어 내려 안간힘을 썼다.

그 순간이었다.

그가 아래에서 위로 검을 긋자, 마치 거대한 용이 아래로 추락하듯 폭포와 같이 내리쳤다.

가악식(假惡式)

용추폭뢰(龍墜瀑雷)

하늘에서 쏟아지는 폭포가 내 검을 억지로 짓눌렀다.

넘버 1은 그로 인해 이어지던 내 검술이 끊기자마자, 곧바로 오러를 자신의 검에 휘감아 올랐다.

그렇게 끌어모은 오러를 검에 두른 그는, 고요함을 품은 채 천천히 하지만 막을 수 없게 허공을 그었다.

가악식(假惡式)

청우(淸遇)

고요함 속에서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내 가슴팍에는 어느새 핏물이 맺혀 있었고, 그것은 곧 마치 빗물처럼 서서히 아래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공격을 한 넘버 1의 몸이 공간과 함께 절단되어 있었다.

잘린 공간 사이에 번개가 맺히고 이내 그곳을 집어삼켰다.

오식(五式)

무형뇌절(無熒雷絶)

공간을 집어삼킨 번개가 사라지자 그의 몸에 사선 자국이 나타나더니, 곧 천천히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나는 가슴팍의 맺힌 핏물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검을 내렸다.

상대가 그랜드 소드 마스터까지 오른 녀석이다 보니 힘 조절은 없었다.

'첸 이하, 신시아 이상 정도인가.'

가장 최근에 만난 검술가들을 떠올리며 조금 아쉬운 눈치를 보였다.

검의 길이 발동되긴 했으나, 이 정도 경험으로는 이 클래스의 레벨이 올라가지 않는다.

'역시 소드 엠페러급 정도는 만나고 싶구만.'

혀를 차며 별천도를 허리춤에 찬 검집에 넣자 뒤에서 내 오러에 간신히 기절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모두 굳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

그들은 숨소리 하나 제대로 내지 못한 채 단 한 명의 사람에게 제국이 자랑하는 6검제가 쓰러지는 광경을 두 눈으로 보았음에도, 아직 믿기지 않는 듯하였다.

뚜벅뚜벅.

그때 그들의 경악 사이로 러쉬가 걸어 나왔다.

그는 나를 따라 옆에 선 뒤 황제의 앞에 다가섰다.

그라티아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때였다.

러쉬가 황제의 앞에 서자마자 튀어나온 녀석이 있었다.

그 자는 공작 로쉬아느.

공작은 생각 이상으로 정신력이 강했는지, 기절하지 않았다. 그는 이전보다 10년은 늙어 버린 얼굴 위로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러쉬의 앞을 막아섰다.

그의 눈에는 인간을 초월한 내 모습에 대한 두려움이 심어져 있었다.

달달.

그의 몸은 계속해서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황제의 자리를 넘겨서는 안 된다는 의지 하나로 우리 앞을 막아선 것이다.

광기에 물든 인간은 두려움을 이겨 낼 수 있는 법이다.

'넘버 3에게 들은 대로네.'

내가 넘버 3에게 들은 것은 로쉬아느 공작이 몰래 벌인 일이었다.

20년 동안 이어진 평화는 로쉬아느에게는 달갑지 않았다.

그는 제국이 지금 보다 더 커져 이 세계를 지배할 최고의 국가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전쟁광, 현재 나이 62세. 과거 40년 동안의 전쟁을 목도한 그에게 붙어 있는 별명이었다.

* * *

「로쉬아느, 네가 나라를 지켜야 한다. 이 나라는 언젠가 최고의 국가가 될 것이다.」

「로쉬아느, 전쟁이다. 또 전쟁이야. 잘 보아라. 전쟁은 발판이다. 우리 최강의 그라티아 제국이 다른 나라를 집어삼킬 수 있는 최고의 명분. 제국은 전쟁에서 진 적이 없다. 그러니 언젠가 반드시 최고의 국가가 될 것이다.」

「제국은 우월하다. 제국민은 모두 우월한 민족이지. 기억해라. 로쉬아느, 제국은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진 국가다.」

이것은 로쉬아느 공작이 어릴 적부터 그의 아버지에게 들었던 말이었다.

로쉬아느 공작에게 최강의 제국이란 단어는 진리였고 언제나 옳았다.

실제로 그는 전쟁을 겪는 동안 압도적인 무위를 보인 제국에 의해 차례차례 무너져 가는 국가들을 보며 아버지의 말씀이 옳았음을 다시금 되새겼다.

그렇게 40년.

1살일 때부터 시작하여 40살이 될 때까지 이어진 전쟁에서 제국은 연이어 승리했다.

즉위한 황제가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말을 할 때까지는.

"말도 안 됩니다! 황제 폐하! 제국은 계속해서 승전보를 올리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모든 나라를 집어삼키고 세계 최초의 통일 국가로서 자리할 게 분명하지 않습니까!"

"로쉬아느, 나도 아네. 제국의 군은 다른 나라의 군대보다 대단한 것을. 하지만 실상을 보게나. 국민들이 전쟁에서 계속 소모되었어. 그들은 무한히 생성되는 게 아니야. 이대로 전쟁을 지속한다면 제국은 결국 무너질 걸세."

"제국이 무너진다뇨?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제국은 언제나 옳습니다. 국민들 또한 제국을 위해 그 한 몸 바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모든 제국민이 그러기를 바라고 있을 겁니다!"

"제발, 정신을 차리게 로쉬아느. 자네의 사상은 너무 위험해. 세간이 자네를 뭐라고 부르고 있는지는 아나? 전쟁광일세. 전쟁광. 자네는 전쟁에 너무 오랫동안 삼켜졌어. 이제 현실로 돌아오게나."

즉위한 황제는 전쟁에 적극적인 이전 황제와 달리 너무도 평화주의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 즉위하기 전까지만 해도 황제는 전쟁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즉위하자마자 그는 돌변하여 국가를 위하려면 전쟁을 멈춰야 한다는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당연히 반발이 있으리라 예상했으나, 하지만 황제는 생각 이상으로 치밀했다.

전쟁으로 지쳐 가는 귀족들에게 로쉬아느나 다른 전쟁파 귀족들이 눈치 못 채게 그의 생각을 말해 두었고, 그 결과 그들의 동의를 등에 업고 덜컥 휴전을 선언해 버린 것이었다.

전쟁광인 로쉬아느는 끝까지 그 의견에 반대했으나, 이미 결정된 일이었다.

결국 휴전을 하되 징집 제도는 그대로 둬야 한다며 악착같이 주장했고, 황제는 강경파인 그들을 진정시키고자 그것에 동의했다.

그리고 지난 20년간 나라는 평화를 유지했다.

그렇게 20년씩이나 평화가 지속되자, 전쟁을 주장하던 귀족들도 서서히 사라졌고, 그들은 그 대신 자신의 이득만을 챙기는 이기적인 모습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국가를 위한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 개인주의가 범람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로쉬아느는 토악질이 나왔다.

본래라면 군대로 들어가던 돈들이 자신만 득을 챙기면 된다는 귀족들의 뒷돈으로 빠져나가고, 제국이 자랑하던 철혈의 군대는 노동 착취 대상의 쓰레기 집단으로 전락했다.

멍청한 귀족들로 인해 전쟁에 투자되어야 할 돈들이 애꿎은 곳으로 새어 나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군대를 노예 취급하며 다루는 귀족들의 모습에 그는 진절머리가 났다.

그래서 그는 이 썩어 빠진 나라를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때 기연을 얻었다.

우연히 참석한 술자리에서 넘버 1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의 실력이 검제 급임을 확인했다.

그와 우호적인 관계를 만든 로쉬아느의 머릿속에 한가지 빛이 생겼다.

다시 전쟁을 일으켜 썩어 가는 제국을 다시금 최고의 국가로 만들 방법이.

* * *

"나라를 엉망으로 만든 뒤, 전쟁할 수 있는 기회를 다시 쥔 건 기분 좋았나?"

러쉬의 물음에 로쉬아느는 입을 달달 떨었다.

그러나 눈빛만은 죽지 않았다.

"이 나라는, 이 나라는 최고의 국가가 될 나라다! 전쟁의 밑 준비도 전부 끝마쳐 뒀었다! 그런데 네놈이, 네놈들이 나타나서!"

이를 아득바득 가는 공작은 피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물들어 버린 그의 사상은 남이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황제를 죽일 속셈이냐? 네가 황제를 죽이면 그건 반역이다. 네가 데려온 러쉬라는 놈은 절대로 황제의 자리에 앉을 수 없을 거다! 그걸 알고도 황제를 죽일 속셈이냐!"

"넘버 3에게 들었어. 오래전에 없어진 네크로맨서 마법을 넘버 2가 가지고 있다지."

내가 입을 열자 공작의 어깨가 움찔하고 한차례 떨렸다.

"황제는 진짜로 병들었어. 그건 사실이었지. 하지만 황제는 네 생각 보다 일찍 죽었다. 그 결과, 본래라면 황제가 서거하기 전에 차근히 계획대로 죽여 나갔어야 할 황족들의 세력 다툼이 훨씬 빨리 시작되고, 그건 네 생각 이상으로 커졌다. 그리고 귀족들의 파 가르기와 함께 세력 다툼이 본격화되자 황족들이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상황이 벌어졌겠지. 그래도 넌 거기까지는 괜찮았을 거다. 어차피 황족들을 제 손으로 죽여 나라를 혼란하게 보이게끔 만들어 다른 나라의 침략을 유도한 뒤 전쟁을 시작할 속셈이었을 테니까."

제국에게는 전쟁을 시작할 명분이 없다.

자칫해서 평화를 깨고 전쟁을 시작했다간 전 세계의 몰매를 맞을 테니까.

그렇기에 로쉬아느는 일부러 다른 나라에게 허점을 보여 제국을 공격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예상보다 더 참혹했다.

국가는 돌보되 자식은 돌보지 못한 탓인지 황제의 핏줄들은 20년간에 평화 속에서 제멋대로 자랐고, 그들은 황제가 죽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서로를 물고 뜯었다.

그렇게 황제의 자리를 두고 죽고 죽이는 싸움이 이어지다가 끝내 둘째 황자만이 남았을 때, 로쉬아느는 이미 예상과 다른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넘버 1을 시켜 황제의 마지막 핏줄인 둘째 황자를 죽였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황족들이 죽고 나서도 귀족들의 세력 다툼은 멈추지 않았고, 그들은 고작 2년 사이에 맹렬하게 나라를 갉아 먹기 시작했다.

게다가 타 국가도 바보가 아니었다.

서로가 먼저 제국을 잡아먹고자 공격해 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들은 옛 전쟁에서 당했던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 연합을 만들어 버렸다.

애초에 황족들 간의 피 튀기는 내부 전쟁이 일어났을 때부터 그의 계획은 박살 나 있었다.

원래라면 그는 본래 황족들이 차례차례 죽어 나라의 대표자가 없어졌음을 극비 정보인 것처럼 각 국가에 퍼트려 그들이 서로 먼저 제국을 삼키고자 달려드는 구도로 끌어 내려 했으니까.

하지만 황족끼리 다툼이 커지는 바람에 일개 정보 길드에까지 정보가 들어간 시점에서 계획은 실패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밀어붙였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의 모습이다.

54화

나라의 내부는 엉망이 되었으며 정작 그의 주도하에 키워 나갔어야 할 군대는 손도 못 대었고, 제국이 혼란해진 틈을 타 각국은 연합을 형성해 제국을 위협해왔다.

최악이 최악을 부른 것이다.

"아둔한 녀석, 계획이 실패했다면 받아들이고 새로운 방법을 찾았어야지."

"웃기지 마라! 황제는 평화 사상에 찌든 주제에 제국을 제대로 통치할 능력도 없었다! 오히려 귀족들에게 우습게 보인 덕분에 그들이 활개 치는 것조차 제어 못했지! 이런 쓰레기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다면 제국은 최고의 국가가 되었을 거다!"

내가 빈정거리자 궁지에 몰린 로쉬아느가 스스로 자신의 범행을 모조리 실토했다.

이미 이야기 도중부터 정신이 상당히 나가 있었던 거겠지.

이제 더 이상 도망칠 길이 없다는 걸 알고 자포자기한 거다.

그의 말대로 평화주의에만 찌들어 있는 황제는 이 나라를 제대로 통치 못 했다.

그 때문에 귀족들은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다 한들 전쟁이라는 수단으로 그 상황을 반전시키려 한 로쉬아느도 똑같은 놈이었다.

그런 로쉬아느를 보고 러쉬가 신랄하게 비난했다.

"차라리 할 거면 성공하지 그랬나? 네놈은 능력 없는 자가 권력을 쥐었을 때가 가장 위험하다는 사실을 몰랐다."

"이익!"

정곡을 찔린 로쉬아느가 러쉬에게 주먹을 휘둘러 왔다.

꼴에 오러는 쓸 줄 아는 듯 나름 오러를 쌓아 공격했는데, 러쉬는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그의 주먹을 맞았다.

그러곤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은 채 눈동자를 맹렬히 불태우며 말을 이었다.

"네놈이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에 빠졌는지 아느냐! 네놈이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전쟁 준비도, 다른 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국가를 지키기 위해 군에 들어온 국민만이라도 책임을 다해 귀족들의 손에서 지켰어야 했다!"

쩌억!

울분에 찬 러쉬의 주먹이 로쉬아느의 얼굴을 짓뭉갰다.

"적어도 귀족이라면 귀족답게 국민을 책임지는 법부터 배워라."

손을 털어 낸 러쉬는 황제 쪽을 힐끔 보았다.

"로쉬아느의 말대로입니다. 황제 폐하도 기왕 할 거 좀 잘하지 그랬습니까?"

그를 보며 러쉬가 쓰디쓴 한숨을 내쉰 순간, 황제의 목이 갑자기 덜컥 비틀렸다.

러쉬가 그 괴기한 모습의 놀라 몸을 빼려 할 찰나 황제의 전신에서 수천 개의 독침이 발사되어 사방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저 시체라고 생각했던 것이 한순간에 시한폭탄으로 변하자 나는 러쉬를 밀어내고, 별천도를 휘둘렀다.

검에서 뿜어져 나온 풍압으로 독침들이 산산조각이 났다.

그러나 러쉬를 밀어내는 행동을 한 탓에 반응이 한 박자 늦었다.

독침 중 일부가 다리에 검을 휘두르기 전에 박힌 것이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목이 비틀린 황제에게 곧바로 손을 뻗어 녀석의 가죽을 뜯어내었다.

그러자 모습이 드러난 작은 키의 여자애가 급히 공간 마법을 발동하려려 하고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여자를 걷어찬 뒤 그대로 내려찍어 짓밟았다.

넘버 2가 네크로맨서 능력으로 황제를 조종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 안에 있었을 줄이야.

이번 건 러쉬가 맞을 뻔했던 만큼 좀 아찔했다고 생각하며, 나는 한숨을 내쉰 채 다리에 박힌 독침을 바라보았다.

체력이 높은 만큼 이딴 걸로 죽지는 않겠지만, 따끔거리는 게 꽤 거슬린다.

"천성아!"

내가 독침을 손으로 빼고 있자 러쉬가 다급하게 뛰어왔다.

그러곤 독침에 맞은 내 다리를 보더니 그는 무릎을 꿇고 비명 어린 소리를 내질렀다.

"독침이, 안 돼, 안 돼! 의사! 빨리 의사를 불러와!"

이 녀석이 왜 이리 오버해.

잠시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나는 러쉬가 왜 이러는지 곧 알게 되었다.

갑작스레 황제의 몸에서 사방으로 독침이 퍼진 탓에, 벽에 있던 로쉬아느가 그걸 피할 새도 없이 맞았고, 이내 녀석이 한 방에 급사해 버렸다.

그 모습을 본 러쉬가 나도 그렇게 될까 봐 지금 이러고 있는 것이었다.

"야, 나 안 죽어."

"어, 어어?"

그러자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러쉬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곤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의아해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천성아, 너 사람 맞아?"

"그럼 뭐로 보이냐?"

"여, 여신?"

"뒤지려고."

머리를 쥐어박으려다 만 나는 한숨을 내쉬곤 다리 위에 포션을 뿌렸다.

맹독이라 한들 내 엄청난 체력 스텟을 뚫을 방법은 없었기에 손쉽게 포션으로 회복했다.

그러고 나는 고개를 들었다.

원탁의 장에는 기절해 버린 귀족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다른 수많은 귀족과 장군들은 모두 러쉬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는 나는 녀석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이, 러쉬. 마무리할 시간이다."

내 말을 듣고 러쉬가 장내의 모두를 돌아보았다.

아까 전 로쉬아느가 자신의 입으로 범행을 모조리 실토했고, 황제 속에서는 그에 가담한 넘버 2까지 있었으니 상황은 사실상 종결된 것이었다.

그렇기에 마지막으로 이 일을 마무리 지어 줄 자가 필요했다.

곧이어 러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귀족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가 천천히 황좌에 걸어가 앉았고, 곧 모두에게 시선을 돌린 순간.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귀족들 전원의 목소리가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29층의 주인' '나태한 즐거움'이 당신의 행보에 박수를 칩니다.]

['29층의 주인' '나태한 즐거움'이 당신을 지목합니다.]

['29층의 주인' '나태한 즐거움'이 당신에게 세례를 내립니다.]

그 순간 29층 클리어가....

어라?

눈앞에 뜬 창을 보고 내 고개가 옆으로 기울여졌다.

성좌의 지명은 본래 성좌가 의도하지 않은 특별한 길을 나아갔을 때 성좌가 내게 관심을 가지고 지목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나태한 즐거움은층을 클리어했다는 메시지 대신 나를 지목했고 그 뜻은 러쉬가 황제가 되는 길은.

"...층을 클리어하는 방법이 아니라고?"

이내 입에서 허탈한 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29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 *

러쉬를 황제로 만든 이후, 3일 정도가 흘렀다.

현재 나는 황궁의 방 하나에서 쉬면서, 아직까지도 클리어를 못 했다는 사실에 상당히 열불이 난 상태로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는 실정이었다.

"야, 이 썩을 성좌 놈아. 러쉬를 황제로 만들어 놨잖아! 여기까지 해 놨다고! 그렇다면 당연히 층을 클리어했다는 메시지가 나와야 되는 거 아니야?! 대체 이게 뭐냐고!"

내가 커다랗게 소리쳤음에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성좌 쪽에서 생각한 결말에 러쉬가 황제가 되는 것은 처음부터 포함되어 있지 않은 일인 것이다.

책상을 콰앙 친 나는 머리를 감쌌다.

드디어 이 모습에서 벗어나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29층이 끝나자마자 다음 층 나아가기 위한 마음의 다짐도 하고 있었다.

근데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대체 이게 뭔....

똑똑.

그 순간, 내 방문을 한차례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황제인 러쉬가 마련해 준 방인 만큼 내 방을 두드릴 수 있는 건, 내가 황궁에 머물 동안 배정된 직속 하녀뿐이었기에 곧바로 방문을 열었다.

다소곳이 선 직속 하녀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내게 격식에 맞는 인사를 해 보이곤 말했다.

"창성의 기사님, 폐하께서 부르시옵니다."

"걔가 왜?"

"자세한 것은 저도 모르는지라...."

가 보면 알지 않겠냐는 직속 하녀의 말에 나는 화를 식히곤 하는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

갑옷 없이 당당히 황궁 복도를 활보해도 나를 막을 사람은 없었다.

지나가던 귀족들은 오히려 창성의 기사인 내게 고개를 숙일 지경이었다.

하긴, 러쉬 녀석이 그 자리에서 내 신분을 후작으로 올려 버렸으니 어쩔 수 없겠지.

녀석은 마음 같아서는 공작으로 올리고 싶어 하는 듯했으나, 내가 정도껏 하라고 눈치 주자 후작에서 그친 것이다.

그렇게 시녀를 따라 얼마 즈음 걸었을까. 내가 황제의 집무실 앞에 도착하자 문 앞에서 대기하던 또 다른 시녀가 집무실 문을 두드렸고, 이내 안에서 들어오라는 말이 들렸다.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자 거기에는 러쉬가 서 있었다.

녀석은 창문 가에 기대어 밤바람이라도 즐기는 표정이었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퉁명스레 물었다.

"왜 불렀냐?"

"아니, 황제가 되고 나서부터 한동안 못 본 탓에 천성이 네 얼굴을 잊어 버리겠다 싶어서."

"차라리 잊지 그랬냐."

"내가 널 어떻게 잊겠어."

내가 귀찮아하며 대답하자 러쉬가 작게 웃었다.

그러곤 창문 가에서 벗어나 내 앞에 다가왔다.

"차라도 마실래? 난 아직 황제로서 모자란 건지, 시녀들이 직접 하나하나 다 해 주는 건 영 그래서 내가 직접 타거든."

"필요 없어. 부른 이유나 말해."

층을 클리어하는 방법을 처음부터 다시 찾아야 하는 내 입장에서 러쉬는 이제 귀찮은 존재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런 태도에 잠깐 웃던 러쉬는 내 앞에 다가와 섰다.

"오늘 하루만 어디 놀러 가지 않을래?"

"지금 내가 놀 상황...."

입을 뻐금거리며 말을 이으려던 나는 순간 얼굴을 감싸곤 '그래.'하고 대답했다.

나는 러쉬가 황제가 되면 층을 클리어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성좌가 만들어 놓은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걷고 있었고 결국 층을 클리어하기 위한 조건은 충족하지 못했다.

'층을 다시 클리어하기에도 너무 늦었어.'

그렇다면 그냥 차라리 흐르는 대로 따라가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황제가 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놀아 보고 싶은 거지? 아직 새로운 황제가 즉위했다는 소식은 국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응, 그것도 있고."

전쟁이 한창이라고는 하나 당장에 러쉬가 할 일은 없다.

내가 넘버 1을 제외한 6검제를 전투 불능으로 만든 탓에, 그들이 회복할 때까지의 시간이 필요한 터라 러쉬가 황제에 올랐다고 알리는 것은 그 후에 정하기로 했다.

아마 정식으로 황제가 되고 나면평생을 일에 치여 바쁘게 살겠지.

안 그래도 이때까지 3개월을 군대에서 보내고, 그 후 일주일을 황제 수련을 받으며 지냈다.

그러니 러쉬에게도 쉴 시간이 하루쯤은 필요하다고 생각한 나는 창문을 열었다.

"편지 한 장 써놔. 나랑 나갔다 온다고. 안 그랬다가 괜히 소란 날라."

"미리 써 놨어. 천성이라면 허락해 줄 것 같았거든."

준비성은 좋네.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인 나는 녀석의 손을 잡았다.

"꽉 잡아."

한마디 말과 함께 오러를 이용해 바닥을 박찬 나는 순식간에 황궁의 높다란 벽을 넘었다.

그리고 착지하기 직전 자연스레 오러를 이용해 반동을 줄이자, 러쉬는 죽다 살아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적응해라. 돌아갈 때도 이렇게 할 거니까."

"나 죽을지도 모르겠는데?"

"수도권은 아직 전쟁의 여파가 안 왔었지? 가자. 마지막으로 네가 놀고 싶은 거 다 해 봐라."

손가락을 가리키며 마음대로 해 보라는 양 말하자, 러쉬는 작게 웃고는 나와 함께 거리를 거닐기 시작했다.

막상 놀고 싶다고 말한 것 치고는 별로 생각해 둔 건 없었던 걸까.

그저 이곳저곳 거리를 돌아다니며 음식을 먹거나, 간단한 놀음을 보거나 하며 시간을 보냈다.

밤이었던 만큼 3시간 정도 지나자 거리는 금세 한산해졌고, 나는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임을 느꼈다.

"별거 없었네. 지하 술집이라도 한 번 더 갈 걸 그랬나."

"별거 없지 않았어."

딱히 크게 놀 만한 거리는 없었다며 중얼거리자 러쉬가 갑자기 말했다.

내가 녀석을 돌아보자 러쉬는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그래? 네가 만족했다면 다행이고."

"만족 못 할 리가 없잖아. 천성이, 너랑 함께 논 건데."

"러쉬."

그 말을 듣고 내가 그를 부르려던 순간 러쉬가 내 손목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잠깐 멈칫하자 러쉬는 어딘가 슬픈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며 물었다.

"천성이, 너 떠날 거지?"

55화

Chapter 7. 머물고 싶은 자, 클리어하고 싶은 자

무언가 낌새라도 눈치챘던 걸까. 하긴, 러쉬는 눈치 없는 녀석은 아니었다.

"내가 황제가 된 날에 눈치챘어. 네가 떠날 거란 거. 그리고 그러기 위해 날 황제로 만든 거란 것도."

"러쉬."

"그래서 오늘 불렀어. 왠지 이게 마지막일 거란 생각이 들어서."

내 손목을 잡은 러쉬의 손이 한차례 떨렸다.

그 떨림에 내가 침묵하고, 러쉬는 힘겹게 미소 지었다.

"천성아, 난 네가 없었다면 아무것도 아니었어. 입대 날, 전쟁에 참가하고 그곳에서 내 인생은 분명 끝났을 거야. 그렇지만 네 덕에 모든 게 달라졌어. 지금 생각해도 실감이 안 나지만, 황제까지 되어 버렸어. 내 인생은 네가 바꿔 놓은 거야."

그리 말한 러쉬의 눈동자에 서서히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고마워. 정말로. 말할 수 없을 만큼. 고마워."

"...."

감사 인사, 그 말을 듣고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러쉬를 황제로 만든 건 그저 내가 층을 클리어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었으니까.

그러나 이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러쉬에게는 모든 게 현실이며 진실이었다.

하늘의 별이 러쉬의 등 뒤로 내려앉는다.

마치 성좌가 우리를 지켜보는 양 반짝이는 별들은 밤하늘을 가득 메워 나갔다.

그 별 사이에 선 러쉬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네가 있었기에 내가 있었어."

작별 인사를 하듯 말을 내뱉은 러쉬는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곤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

"고마웠어. 그리고 좋아했어. 다음에, 또 만나자. 네가 누구든 나는 널 알아볼게."

[축하합니다. 9번째로 29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29층의 주인' '나태한 즐거움'이 당신에 클리어를 축하하며 보상을 지급합니다.]

층의 클리어를 알리는 소리와 함께 메시지가 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러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주변이 온통 검은색의 배경과 같이 변하며 그와 함께 내 바로 앞에 다음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하나가 생겨났다.

이내 말없이 유리 공작을 사용하여 거울을 만드니, 거기에 비친 것은 본래의 내 모습이었고 나는 그걸 보며 잠시간 침묵했다.

이윽고 별천도를 뽑아 든 순간 내 몸에서는 이제껏 없던 엄청난 오러가 흘러나왔다.

그때 갑자기 러쉬의 얼굴이 잠깐 맴돌았다가 기억 사이로 사라졌다.

"야, 한판 싸우자. 네 녀석은 죽어야 돼."

['29층의 주인' '나태한 즐거움'이 귀엽게 웃음 짓습니다.]

"귀엽긴 뭐가 귀여워! 이 미친 새끼야! 클리어 조건을 이따위로 만들어 놔?!"

거칠게 소리치며 사방에 오러를 휘둘렀으나 검은색 공간은 일렁일 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내가 씩씩거리고 서 있자 성좌 녀석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까 전, 러쉬 녀석이 내게 마지막 말을 내뱉은 순간 깨달았다.

이 층의 클리어 조건은.

여자가 된 채 러쉬 녀석한테 고백을 받는 거다.

쉬웠다.

진짜로 쉽게 클리어할 수 있는 층이었다.

러쉬는 지금껏 나에게 줄곧 호감 있는 시선을 보내 왔으니, 한 번이라도 고백을 하게 내버려 뒀으면 층을 바로 클리어했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걸 모르고 그놈을 황제까지 키우느라 온갖 고생을 다 했음에도 그 끝이 이거라면.

화를 내뱉던 내 목소리에서 분노가 점차 사그라들었다.

"...러쉬는 층에 클리어 방법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냐?"

마지막 말, 이 말을 내뱉으면 모든 게 끝날 거란 걸 러쉬는 알고 있다는 듯이 내뱉었다.

그리고 내가 누구든 나를 알아보겠다고 한 말은 자신의 소꿉친구가 원래와는 다른 사람임을 녀석은 인지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내가 물음을 던지며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자 성좌의 메시지가 내려왔다.

['29층의 주인' '나태한 즐거움'은 비밀이라는 듯 입을 가립니다.]

대답할 생각은 없다. 이건가.

됐다.

그것보다.

"...9번째."

내 클리어가 9번째라고 되어 있었다.

분명 28층을 클리어했을 때 내게 떴던 메시지의 내용에는 2번째로 통과했다고 적혀 있었다.

그런데 이번 층에서 내가 헛고생하며 머무를 동안 8명이 날 추월하여 지나간 것이다.

나보다 앞선 하일성, 이전 층을 나와 함께 클리어한 검왕, 마술사, 구천옥녀, 대협.

그리고 나서도 3명이 이 층을 더 클리어한 거다.

순식간에 선두를 바짝 뒤쫓던 자리에서 후발 주자로 떨어진 지금의 상황에 나는 이를 까득 갈았다.

다른 녀석들이 성좌의 의도를 눈치채거나 러쉬에게 진작 고백을 받아 넘어갈 동안 나는 끊임없이 삽질을 했던 것이다.

['29층의 주인' '나태한 즐거움'은 당신의 클리어를 가장 인상 깊게 보았습니다.]

['29층의 주인' '나태한 즐거움'은 자신의 층에 최선을 다하는 당신을 매우 좋아하고 있습니다.]

['29층의 주인' '나태한 즐거움'이 당신에게 조심히 즐거웠었는지 속마음을 물어봅니다.]

"...내 쪽은 하나도 즐겁지 않아. 난 너희들과 달리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해야 한다. 이 썩을 무한 회귀를 빠져나가야만 한다고."

['29층의 주인' '나태한 즐거움'은 당신이라면 클리어할 것이라고 격려해 줍니다.]

성좌의 격려 따위 아무 의미도 없다.

그렇게 마지막에 순간에 기운이 빠진 나였지만, 곧 다음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시선을 돌렸다.

됐다.

클리어했으니 나아가자.

현재로서는 다음 층에 도전하는 게 지금의 나에게는 최선이었다.

나는 계단을 향해 발을 뻗었다.

이 지긋지긋한 회귀에서 빠져나가고자.

['29층의 주인' '나태한 즐거움'은 당신의 앞길을 응원합니다.]

아, 그것참. 더럽게 시끄럽네.

* * *

드디어 30층.

층의 앞 자릿수가 바뀌었다. 곧바로 29.5층을 지나 30층에 도착한 내 눈앞에 성좌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30층의 주인' '하늘을 걷는 신사'가 당신의 입장에 어깨를 으쓱입니다.]

['30층의 주인' '하늘을 걷는 신사'가 30층 클리어 조건을 제시합니다.]

['내 자식이 드래곤 로드인 것에 대해서' 이 세계는 드래곤이 모든 걸 좌지우지하는 세계, 이곳에서 당신은 드래곤의 알 하나를 분양받았습니다. 오러를 드래곤의 알에 주입하는 순간, 그 알은 당신의 DNA를 물려받은 채 부화합니다. 자, 이제 당신의 자식을 세계 최강의 드래곤 로드로 키워 봅시다!]

['30층'의 '내 자식이 드래곤 로드인 것에 대해서'는 '31층'과 층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30층'은 개인 클리어 층으로 오로지 자식을 키우는 데만 시간 투자가 가능하며, 30층에서 흐른 모든 시간은 바깥에서의 하루를 넘기지 않습니다.]

'통합 층인가? 30층에서 자식을 키우고 난 뒤 본격적으로 드래곤 로드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군. 이거, 무조건 먼저 들어오는 녀석이 이득이잖아.'

물론 31층부터는 개인 클리어 층이 아닌 이상, 한 명이 층 클리어를 하게 되면 나머지는 따라서 클리어가 된다.

그러나 보상적인 부분에서 클리어를 먼저 하는 게 훨씬 이득을 볼 수 있으니 내 입장에선 무조건 내가 먼저 클리어하는 게 이득이었다.

['30층' '내 자식이 드래곤 로드인 것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시간을 투자할 수 있으며, 불필요한 과정을 넘길 수 있는 '시간 생략 기능'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드래곤 자식의 나이는 최대 15살까지. 이제 마음껏 키워 보세요.]

그렇게 추가 설명이 끝나자, 내 시선 아래에 시계 같은 것이 생겨났다.

분명 이걸 조작하면 시간 생략 기능을 사용할 수 있는 거겠지.

'얼마큼의 시간이 지나도, 무조건 바깥 시간은 하루밖에 흐르지 않는다는 게 좋긴 한데.'

나는 힐끔 알을 보았다.

자식의 나이가 15살이 되기까지 있을 수 있단 건, 마음먹고 여기서 머무르고자 했을 때 30층에서 15년이라는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는 소리다.

한순간 15년 동안 검술이라도 단련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현재 내 스텟은 최대 능력치. 15년씩이나 검을 휘두르다 보면 뭔가 깨우치는 건 있겠지만, 그 깨우침 만으로 하일성을 꺾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 들었다.

그런 짓을 할 바에야 그냥 새로운 클래스를 얻는 게 더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시간 생략 기능은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순간, 내 주변이 고급스러운 방으로 바뀌었음을 눈치챘다.

이내 방 문을 열고 나오자 허공에는 화살표가 떠올랐고, 나는 그것이 분양받은 알의 방향을 가리키는 것임을 깨닫곤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걸어 지하 공간 같은 곳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성좌가 말했던 대로 드래곤의 알 하나가 놓여 있었다.

크기는 어린아이 정도 되는 알을 바라보곤 나는 성좌의 메시지 내용을 떠올리며 오러를 두른 채 알 위로 손을 옮겼다.

그 순간이었다.

새하얀 빛과 함께 알이 쩌저적 갈라지기 시작했고.

"응애애애!"

깨진 알 사이로 아기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알을 조심스럽게 뜯어내자 거기에는 꼬리와 뿔이 달린 1살짜리 아기가 있었다.

'전에는 여자로 만들더니, 이번에는 애 아빠로 육아냐.'

한숨을 내쉬며 아기를 손으로 감싸 들어 올리자 아기는 열심히 울었고,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아기를 키울 도구 정도는 다 마련해 뒀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지하실을 빠져나오자, 내 앞에 5명의 사람이 다가와 섰다.

4명은 여성, 나머지 1명은 노인이었다. 곧 그들은 내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해 보였다.

"반갑습니다. 하천성 님, 저희는 '하늘을 걷는 신사'께서 준비하신 아기를 키울 도우미입니다. 명령을 내리시면 뭐든지 따를 것이며, 기본적으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육아를 도울 예정입니다."

"아, 그래. 일단 이 애를 어떻게 해야 되는지 좀 알려 줄래?"

"받치는 자세가 잘못되셨습니다. 머리와 허리를 감싸듯 이렇게 들으셔야 합니다."

한 도우미의 말에 내가 대강 자세를 취하자 그녀는 잘했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그들은 나에게 방 하나를 안내 해주었다.

방은 꽤나 널찍했고, 주변에는 다양한 아기용 용품들이 여기저기에 배치되어 있었다.

나는 중심에 놓인 아기용 침대에 아기를 누였다.

그러자 내 옆에 따라온 도우미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아기의 이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름도 정해야 하냐."

"네, 물론입니다."

귀찮네.

진짜 육아하게 할 속셈인가.

"하애기."

"여자아이이니 좀 더 어울리는 이름으로 짓는 것이 어떠시겠습니까?"

도우미들이 진지하게 그건 아니라는 반응을 보이자,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대강 이름을 여러 개 불렀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들에게 번번이 기각당했다.

그러길 몇 분, 슬슬 열이 뻗쳐서 이제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나는 떠오른 이름을 내뱉었다.

"하연지. 이걸로 해. 더 이상 반대해도 그냥 이걸로 지을 거니까."

"네, 그럼 그걸로."

내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못 박자, 그들도 동의를 표했다.

겨우 이름을 지은 나는 눈앞에 누워 있는 연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연지]

[칭호 : 하천성의 딸]

종족 : 드래곤

성별 : 여

나이 : 1세

LV.1

체력 10

마력 10

힘 10

지력 10

민첩 10

—스킬 창—

드래곤 변환 [F랭크]

미니 브레스 [F랭크]

울음보 [F랭크]

그 순간 연지의 상태 창이 떠오르자, 대충 손으로 휘저어 껐다.

어쨌거나 이 애를 키우라는 거지.

'하지만 이런 상태면 키워 봤자인데.'

아기 상태인 연지를 키운다 한들 스텟이 오를 리가 없다.

적어도 걸을 수는 있어야 단련시키든 말든 하지 않겠는가.

"그렇담 우선."

나는 시간을 좀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상태인 연지를 계속 보고 있어 봤자 시간 낭비일 뿐이다.

56화

우선 3년.

연지가 3살이 될 즈음까지 돌리자고 생각한 나는 곧바로 화면 아래 위치한 시계를 돌렸다.

그 순간 주위 환경이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내가 정신을 차렸을 즈음에는 여러 가지가 바뀌어 있었다.

우선 주위에 배치된 물건들의 종류와 위치가 달라졌고, 방금까지 내 뒤에 있던 도우미들도 보이지 않았다.

방에 혼자 덩그러니 놓인 나는 잠깐 멀뚱멀뚱 서 있다가, 침대에서 연지가 사라졌음을 깨닫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순간 구석 자리에 한 아이가 보였다.

3살배기 정도밖에 안 된 조그마한 덩치의 아이는 쿠션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채 엉덩이 쪽에 돋아난 꼬리만을 살랑거리고 있었다.

내가 꼬리를 잡고 천천히 빼내자 쿠션 속에 파묻혀 있던 연지의 얼굴이 톡 하니 튀어 나왔다.

'뭔, 나랑 똑같이 생겼구만.'

DNA를 바탕으로 나온다더니, 그 말대로 어린 시절 사진 속 나와 상당히 빼다 박은 얼굴인 연지가 보였다.

그런 연지를 좀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자, 아이의 커다란 눈망울이 댕그랗게 변했다.

"누구야?"

앙증맞은 입술에서 어눌한 말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3살쯤이면 벌써 말도 할 수 있는 건가?

하긴, 드래곤인데 인간과 비슷하게 생각하는 것도 우습긴 하다.

"너 키우러 온 사람."

"몰라."

고개를 양쪽으로 세차게 저은 연지는 다시금 쿠션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시간을 너무 적게 돌렸군.

이 나이 대의 애는 본 적도 거의 없고, 키우는 방법도 모른다.

애초에 대화도 제대로 통하고 있는지도 의문이고.

"더 돌리는 수밖에."

한숨을 내쉰 나는 연지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그냥 과감하게 5년 정도 시간을 더 돌렸다.

처음과 같이 주변의 사물들이 급격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다시금 눈을 깜빡거렸을 즈음 방의 내부가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조금 전에는 아기들이 놀 듯한 방이었지만, 이제는 어린 꼬마 여자애가 사용할 법한 방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은 잘 돌아간 모양인데.'

창문 사이로 언뜻 비추는 햇빛을 느끼던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연지는 방에 보이지 않았기에 나는 하는 수 없이 그 녀석을 찾고자 방문을 열었다.

그 순간 문 앞으로 다급하게 뛰어오는 소녀 하나가 보였다.

등 쪽에 나부끼는 기다란 붉은색 머리카락, 아직 조그마하지만 조금씩 여자애의 티가 나기 시작한 모습.

그리고 누가 보아도 내 딸이라고 할 법한 외모를 가진 8살 어린애가 문 앞에 있었다.

뒤에서 쫓아오는 도우미에게서 도망치던 그 아이는 나를 올려다보곤 곧 고개를 기울였다.

"아저씨, 누구야?"

연지가 나를 보고 의아해하자, 나는 귀찮다는 양 이전과 같이 대답했다.

"너 키우러 온 사람이라니까."

그러자 연지는 이해하지 못 한듯 한차례 눈을 깜빡거렸고, 곧 뒤에서 다가온 도우미가 이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다.

"연지 님 이분이 연지님의 아버지이십니다."

결혼도 안 한 사람을 졸지에 아빠로 만들어 버리는 도우미의 말에 한숨을 내쉬고 있자 연지는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아빠? 정말로 아빠야?"

"내가 왜 네... 아니, 그래. 맞아. 내가 네 아빠다."

하는 수 없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대답하자 연지는 곧 서서히 눈살을 찌푸렸다.

보면 볼수록 진짜 나랑 똑같이 생겼네.

"연지는 아빠 같은 거 몰라. 이 아저씨, 처음 봐. 아저씨가 왜 연지 아빠야?"

불만 가득 섞인 연지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부정했다. 그리고 도우미의 등 뒤로 숨었다.

내가 그녀를 힐끔 보자 도우미는 말없이 내 눈을 피할 뿐이었다.

"나 같은 사람이 네 아빠라는 건 자랑스러운 거 아니냐? 내 핏줄을 이어받은 꼬맹이가 이렇게 멍청할 리가 없는데."

"멍청이? 지금 나보고 멍청이랬어?"

내 말을 듣자마자 연지가 도우미의 등 뒤에서 팍하니 뛰어나왔다.

그러곤 눈살을 한껏 찌푸린 채 나를 맹렬히 노려보았다.

"죽을래?"

"너야말로 죽을래?"

씩씩거리는 연지의 모습에 내 쪽도 맞불을 놓듯 눈살을 확 찌푸리자 아이는 지지 않고 째려보았다.

이 녀석 깡다구 하나는 있는 모양이긴 한데.

그렇게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도우미가 손을 들었다.

"두 분 다 죽는 건 상관없지만, 밖에서 좀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청소하기 귀찮은지라."

얘가 이런 성격으로 자란 건 저 녀석 탓이 아닐까 싶은데.

'썩을 성좌 녀석. 시간 생략 같은 능력을 쉽게 내준 이유가 있었구만.'

나는 8년의 세월을 돌렸다.

그렇다 보니 연지와 나 사이에는 자연스레 그만큼의 공백이 생긴 모양이었다.

삐진 양 내게 눈도 안 마주치고 있는 연지를 보며 나는 기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인정하자.

저 애는 내 딸이다.

그렇다는 건 나랑 성격이 상당히 유사하다는 소리.

'내 성격의 안 좋은 점을 닮았다는 건 고집도 더럽게 세다는 거겠지.'

내 고집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한 번 아빠라고 인정 안 하면 절대로 인정 안 하겠지.

'내가 마음에 들어 하는 타입이 어떤 녀석이었더라?'

나는 말 잘 듣는 녀석들은 대부분 싫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런 녀석들은 반드시 내 아랫것으로 생각하기에 동등한 관계는 절대로 되지 못한다.

그렇다고 반대로 내 위에서 군림하려고 하는 놈들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힘으로 억눌러 봤자 좋을 거 없어. 호승심만 잔뜩 생겨서 어떻게든 아득바득 넘어서려고 할 테니까.'

그러한 생각을 하던 도중 어라 하며 뭔가를 떠올린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내 딸이라고는 하나 연지와 내가 굳이 친해질 필요가 있을까?

지금도 나한테 적의를 팍팍 보이는 연지다.

저런 애랑 친해지려면 몇 년을 투자해도 모자랄 게 분명한데, 뭐 하러 내가 그래야 한다는 말인가.

'굳이 아빠 역할을 할 이유가 없잖아? 내 성격을 닮았다면 경쟁심 하나는 엄청나게 높을 테니 그걸 이용하면 그만이야.'

그리 생각한 나는 연지의 앞에 당당히 다가섰다.

그러곤 다시금 나를 노려보고 있는 연지에게 히죽 웃어주며 입을 열었다.

"야, 꼬맹이."

"연지는 꼬맹이 아니야. 등신아. 정말로 죽어 볼래?"

꼬맹이란 말에 연지가 짜증을 부리며 내 발목을 발로 걷어찼다.

전혀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로 인해 분노가 일어 이마에 살짝 주름이 진 나는 애써 환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일단 너와 나의 격차를 좀 알려 주마."

가볍게 말한 나는 연지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눈 깜빡할 새에 일어난 일에 연지가 발버둥 쳤으나, 나는 개의치 않고 그 즉시 손에 잡은 녀석을 냅다 던졌다.

순식간에 허공을 날아오른 연지의 눈동자가 커졌다.

나는 곧 반대편으로 달려가서 그 녀석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볍게 받았다.

그렇게 그 행동을 몇 번 정도 반복해 주자 정신없이 허공을 날아다닌 연지는 곧 내 손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기가 전혀 반응도 못 하고, 마치 장난감처럼 이리저리 날려졌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듯싶었다.

"어때? 수준 차이가 좀 느껴지냐? 너 같은 게 몇천 명이 뭉쳐도 난 못 이겨. 내가 어느 정도 강한 지 감이 잡히지?"

"익, 이익!"

곧 정신을 차리곤 마구 발버둥 치기 시작한 연지는 내 손에서 빠져나왔다.

그러곤 그 즉시 허리춤에 차고 있던 본인의 손아귀에 맞는 검을 뽑아 들곤 내게 맹렬히 휘둘러 왔다.

"검사로서 싸우자 이거지."

연지의 행동에 나는 응수하듯 별천도를 뽑아 주었다.

그러곤 아무렇지 않게 연지의 검을 한차례 받아쳐 준 뒤, 오러조차 쓰지 않고 그녀의 검을 저 멀리 튕겨 내 주었다.

그 충격으로 검을 놓친 탓에 그걸 쥐고 있던 녀석의 손아귀가 까져 붉게 물들었다.

이내 믿을 수 없다는 양 연지는 나를 바라보았다.

"내 검술이...."

"그걸 검술이라고 배웠냐?"

내가 가소롭다는 듯 비웃자 얼굴을 확 찌푸린 연지의 모습이 점차 변화했다.

머리에 뿔이 돋아나고, 얼굴에는 붉은색 용의 피부가 나타났으며, 하의를 뚫고 꼬리가 뻗어 나왔다.

그와 함께 연지의 입 앞에 생긴 구체가 주변의 빛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드래곤들이 자주 사용하는 브레스였다.

자기 나름의 필살기인 걸까.

연지의 목에서 타고 올라온 불꽃이 빛의 구를 휘감은 순간 화염이 터지듯 뿜어지며 내게 날아들었다.

"후."

그러나 나는 오러를 끌어모은 입김 한 방으로 그 브레스를 지워 버렸다.

그걸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뜬 연지는 내가 역으로 불어 보낸 자신의 브레스를 맞은 탓에 얼굴이 새까맣게 탔고, 이내 캑캑거리며 검은 연기를 내뿜었다.

"뭐 했냐?"

"어, 어아!"

그 후 연지의 그은 얼굴이 점점 붉어져 가기 시작했다.

자신과 나의 격차를 방금 전 걸로 확실히 깨달은 듯 그녀의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내 화를 참지 못하고 눈물까지 새어 나오자, 나는 녀석의 눈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꼽냐? 꼬우면 나보다 강해지든가."

이 도발 한마디에 연지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금 나를 발로 걷어차려 하자, 나는 그 발을 걸어 넘어트려 주었다.

그러자 연지는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내 엉덩이를 손으로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를 노려보았다.

그걸 보고 내가 물러서지 않고 도리어 힘을 주어 쏘아보자, 입술을 꽉 깨문 연지는 획 하니 돌아섰다.

이후 복도 끝을 지나 떨어뜨린 검을 집은 뒤 거칠게 문을 열고 나가 버리는 연지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옆에 선 도우미가 입을 열었다.

"저런 어린애를 괴롭히시면 기분이 좋습니까?"

"나라고 좋아서 이러는 줄 아냐? 쟤 성격은 내가 제일 잘 알아서 이러는 거야. 이것 말고는 답이 없다고."

"처음에 만났을 때, 잘 타일렀으면 괜찮았을 겁니다. 하천성 님과 다르게 연지 님을 손수 키운 건 저희들이니까요."

그 말을 듣고 나는 도우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너 그냥 도우미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귀찮게 구네?"

"그게 저희의 역할이기에. 저희는 연지 님을 올바르게 키워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연지 님은 하천성 님보다도 자존심이 훨씬 강하십니다. 마을에서 열린 청소년 검술 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었으니까요. 프라이드가 높습니다."

그런 것까지 있었나.

검을 쥔 모습에서 자신감이 묻어 나오던 것이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나보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도우미의 말을 적당히 흘려들으며 곧바로 연지의 뒤를 쫓았다.

저택 밖에는 마을 하나가 자리해 있었다.

"연지 님, 어디 가세요?"

"오늘은 가정부들이랑 같이 안 다니시네요?"

여기저기서 연지에게 말을 걸어왔지만, 녀석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며 길을 따라 뛰었다.

그러곤 얼마 안 가서 연지는 들판에 도착했다.

아까 집을 나서기 전 주운 검을 뽑아 든 채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는 그런 연지를 바라보다가 상태 창을 켰다.

[하연지]

[칭호 : 하천성의 딸]

종족 : 드래곤

성별 : 여

나이 : 8세

LV.9

체력 16

마력 28

힘 25

지력 26

민첩 18

—스킬 창—

드래곤 변환 [E랭크]

미니 브레스 [E랭크]

파이어 볼 [F랭크]

파이어 볼이라, 도우미에게 마법이라도 배운 적 있는 건가?

어찌 되었든 상태 창을 살펴보니, 우리와 달리 레벨이 오르면 따로 분배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스테이터스가 따라 오르는 듯하였다.

그리고 마법.

그건 다 좋은데 내 분야가 아니다.

내가 잘 다루는 건 검술. 마법 쪽은 상당히 쥐약이었기에 나는 상태 창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스테이터스 중 마력과 지력이 높은 걸 보면 연지는 아무래도 마법 쪽에 재능이 더 있는 모양이긴 한데.

'난 마법은 못 가르치니 뒤로 제쳐 두자. 어차피 지력과 마력이 높으면 오러 친화력이 높다는 소리기도 하니 나쁠 것 없지.'

오러는 마력과 지력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렇기에 힘이나 민첩이 밀리더라도 어느 정도는 오러로 커버할 수 있을 것이다.

"히야압!"

녀석을 어떻게 키울지 생각하고 있던 순간 기합과 함께 연지가 슬라임을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그러곤 마구잡이로 슬라임에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고, 나는 그 뒷모습을 지켜보며 턱을 매만졌다.

'어릴 때부터 이것저것 배우긴 한 건가?'

57화

마구잡이라고는 하나, 청소년 검술 대회에서 1등을 한 경력이 거짓은 아니라는 듯 나름 잘 휘둘렀다.

아마도 도우미 녀석들이 가르친 모양인데 그래도 녀석들이 아예 쓸모없는 건 아닌 모양이다.

녀석의 검술을 보며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순간 연지의 손에서 파이어 볼이 쏘아져 나와 슬라임을 불태웠다.

슬라임에게 굳이 마법까지 쓸 필요가 있나 싶긴 하지만, 그 일격으로 슬라임이 죽었다.

이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자신의 힘이 얼마나 남았나 확인한 연지는 곧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시선이 향한 곳은 딱 보아도 몬스터가 튀어나올 법한 숲속.

이내 그곳을 향해 연지는 망설임 없이 발을 내뻗었고, 나 또한 그녀의 뒤를 쫓아 숲속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주변에 풀어 둔 오러의 감각에 가까운 거리에서 다수의 발걸음이 움직이고 있음이 느껴졌다.

어린애 정도 크기의 발걸음, 그와 함께 귓가에 스치듯 들려오는 게걸스러운 목소리, 고블린이다.

한참이 지난 후, 연지 또한 고블린의 소리를 들었는지 귀를 쫑긋 세우곤 조심히 다가갔다.

그러자 얼마 안 가 연지의 눈에 모닥불을 피우고 생쥐를 굽는 고블린 3마리가 포착되었다.

그 종류의 몬스터를 몇 번 잡아 본 적 있는 듯 연지의 움직임은 나름 조심스러웠고, 검을 쓰는 대신 제일 먼저 마법을 캐스팅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파이어 볼이 쏘아졌다.

그 마법이 태평히 앉아 있던 고블린 한 마리의 머리에 직격했고, 연지는 다른 녀석들이 놀라 일어나기 전에 먼저 움직였다.

곧이어 연지가 아직 상황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 고블린 한 마리를 검으로 베었다.

얕다.

마법은 잘 다뤄도 오러는 제대로 다룰 줄 모르는 듯 연지의 검은 고블린의 가슴팍을 조금 베어 내는 것에 그쳤다.

그러는 사이 나머지 한 마리가 활을 들어 올렸다.

연지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눈앞의 고블린만 신경 썼고, 그걸 본 나는 하는 수 없이 활 든 고블린에게 오러를 쏘아 보냈다.

"끼익!"

그러자 흠칫한 고블린이 활과 화살을 놓치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고 벌벌 떨었다.

그리고 파이어 볼로 머리가 불탔던 나머지 고블린도 오러로 못 움직이게 막아 연지가 1:1로 고블린을 상대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주위에 신경을 전혀 못 쓰는 걸 보아하니 역시 어린애네. 처음에 파이어 볼을 날린 건 괜찮은 판단이었지만, 이 판단도 어디서 본 걸 따라 한 수준인 모양이고.'

몬스터를 제대로 마무리를 하는 법을 아직 깨우치지 못한 모양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연지는 고블린 한 마리를 향해 필사적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연지와 고블린의 키 차이는 엇비슷하다.

처음에는 고블린이 연지에게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지만, 곧 상대의 검이 엉망이란 걸 깨닫고는 공격을 피하며 기회를 노리기 시작했다.

"안 되지."

하나 그걸 그냥 두고 볼 일 없는 내가 고블린에게 오러를 풍겼다.

내 오러를 정면으로 맞은 고블린이 한순간 몸이 굳었고, 그때 연지의 검이 또 한 번 그 녀석의 가슴팍을 베고 지나갔다.

"끼이익!?"

가슴이 베이고 나서야 멈칫한 몸이 풀린 고블린은 연지를 향해 성을 내듯 마구잡이로 둔기를 휘둘렀다.

그것에 연지가 맞을 뻔했지만, 나는 그때마다 고블린의 움직임을 제지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끝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고블린이 연지의 검에 맞고 쓰러졌다.

고블린을 쓰러트린 연지는 지친 듯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고 마치 자신의 승리를 자축하는 양 검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저건 어디서 보고 배운 걸까.

'그래도 지금은 자신감을 키우는 게 우선이겠지. 위험한 짓을 잔뜩 하더라도 내가 있고.'

그런 생각을 하며 오러로 제압하고 있던 활 든 고블린을 풀어 줄 때, 나는 내 오러의 감각에 무언가 느껴져 바로 시선을 돌렸다.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는 발걸음이 딱 보아도 이쪽 상황을 알아채고 달려오는 것 같았다.

'귀찮게.'

하는 수 없이 남은 고블린을 사냥하고자 숨을 고르고 달려드는 연지를 뒤로한 채, 나는 내 오러의 감각에 걸린 녀석에게 발을 돌렸다.

얼마 안 가 그곳에 도착하자 풀숲을 해치고 사람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홉고블린 한 마리가 등장했다.

"크라락!"

아무래도 방금 전 연지가 마주한 고블린들의 주인이라도 되는 듯 적의가 느껴지는 소리를 내지른 홉고블린은 철로 된 둔기를 내게 휘둘러 왔다.

"시끄러워."

그렇게 한마디를 내뱉은 나는 그 즉시 홉고블린의 머리를 손으로 쳤다.

그러자 홉고블린의 머리가 튕겨 날아오르며 몸과 안녕을 고했다.

레벨은 20 정도 될까? 연지가 상대했다면, 일방적으로 연지를 죽일 수 있을 녀석이었다.

'그래서 원래는 도우미들이 무조건 따라왔던 거였구만.'

이번에는 내가 따라갔으니 굳이 그러지 않았던 거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연지에게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자 연지는 몇 번 몬스터를 사냥해 본 경험이 있는 듯, 익숙하게 고블린의 귀를 잘라 챙겨 온 주머니에 넣곤 이마를 닦았다.

"그 자식, 잘 때 고블린 귀를 붙여 주겠어."

고약한 짓을 하려 하는군.

뒤에 가서 엉덩이를 걷어 차줄까 했다가 그냥 내 버려둔 나는, 그 후로도 기척을 숨긴 채 연지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나에게 엉망으로 당한 것을 화풀이하듯 자신이 잡아 본 경험이 있는 몬스터들을 마구잡이로 잡고 다닌 연지는 이윽고 체력이 동났는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신발을 벗어 조그마한 발을 주물럭거리며 숨을 돌리던 연지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숲을 빠져나갔다.

그래도 자기 몸에 한계가 어느 정도인지는 제대로 인식하고 움직이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이것저것 알았네. 특히 이 녀석한테 부족한 게 뭔지. 무엇보다 오러를 다루는 법을 우선적으로 익히게 해야 할 것 같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마을로 돌아온 연지는 골목길 앞에서 우뚝 발걸음을 멈췄다.

"나와."

그 한마디에 나는 순간 멈칫했다.

설마 저 꼬맹이가 나를 알아차렸나 했지만, 잠시 후 연지의 앞에 남자애들 몇 명이 나타나자 그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녀석들은 무슨 주인이라도 따르는 양 연지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연지님, 오늘 치 상납금입니다."

"그런 건 됐어. 그런 것보다 너희들 내 상대나 좀 해."

"상대 말인가요?"

의아함을 보이던 아이들은 얼마 안 가 연지의 검술 상대가 되었다.

남자애들과 검술 대련을 시작한 연지는 이내 모두를 쓰러트렸다.

오늘 하루 동안 몬스터 사냥에 체력을 전부 다 쏟아부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볍게 이긴 걸 보면, 또래 아이들은 연지에게 전혀 상대가 안 되는 듯싶었다.

"역, 역시 연지님. 저희로는 이길 방법이 없네요. 청소년 검술 대회 1등 다우십니다."

"그러면 뭐해? 이걸로는 아무것도 안 된다고."

나를 떠올린 건지 분한 표정으로 연지는 바닥을 쿵쿵 내려찍었다.

어린애들은 대부분 어른을 쉽게 얕보곤 한다.

연지도 그와 같은 부류였겠지.

"너희들 다 한꺼번에 덤벼."

"어, 괜찮으시겠습니까?"

"지금 날 물로 보는 거야? 오늘 내가 사냥한 몬스터들을 감안해도 너희 몇 명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놀란 한 아이의 말에 연지의 인상이 팍 찡그려지자, 아이들은 주춤거리며 모형 검을 들었다.

그러곤 연지의 말대로 모두가 달려들자 녀석은 검술을 이용해 아이들을 차례차례 쓰러트렸다.

물론 인원수가 많은 만큼 종종 상대의 검에 맞곤 했지만 악착같이 견디며 아이들을 모두 모든 아이들을. 쓰러트려 내었다.

그제야 조금 개운한 얼굴이 된 연지는 아이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던 나는 연지보다 먼저 저택에 돌아왔고, 곧 적당한 장소를 물색했다.

"야, 연지 방 저기지?"

"네, 맞습니다."

연지의 방이 있는 위치를 확인한 나는 그 방의 창문에서 가장 잘 보이는 위치를 찾은 뒤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곤 창문 쪽을 힐끔 확인한 나는 별천도를 뽑아 들었다.

그러자 내 검에서 서서히 오러가 끌어 오르기 시작했고, 나는 예전 검의 길을 깨우쳤을 때와 같이 검을 휘둘러 나가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방으로 돌아온 연지가 정원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진 것을 알아챘다.

내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연지의 시선이 따라오고, 녀석은 어느새 모습을 숨길 생각조차 못 한 채 내 검술을 지켜보았다.

'그래, 그래, 눈앞에 자기보다 훨씬 잘하는 녀석이 있으면 자연스레 그걸 빼앗을 생각을 해야지.'

연지는 내가 직접 가르치려 들면 절대로 할 리가 없다.

반항을 안 하면 다행이리라.

하지만 훔쳐보는 거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나한테 복수를 한다는 생각도 들 것이고, 무엇보다 검술 대회에서 1등을 했던 만큼 검술에 관심이 높은 연지는 그것을 핑계로 더더욱 내 검술을 훔쳐보고 싶을 것이다.

일단 이거면 충분하다.

어느 정도 검술을 펼친 뒤 연습을 마친 내가 창문 쪽을 힐끔 보자 연지가 재빨리 고개를 낮추며 숨었다.

계기는 심어 줬다.

이만큼 보여 줬으면, 다음에도 또 훔쳐보겠지.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당장은 이거면 돼. 검술에 관심이 많았던 건 그나마 다행이군.'

숨어 버린 연지 쪽을 확인한 나는 볼에 흐른 땀방울을 훔치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도우미."

내가 부르자마자 옆에서 불쑥 도우미 한 명이 나타났고, 나는 복도를 거닐며 그녀에게 말했다.

"8년 동안 연지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설명 좀 해 줘야겠다."

"네, 얼마든지요."

나는 이제야 내가 없는 동안 연지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듣기로 했다.

* * *

가정부에게서 연지의 성장 과정을 전부 들은 나는 오늘 격렬히 움직인 탓에 금방 잠든 연지를 바라보았다.

내 예상대로 8년간 나는 쭉 집을 비웠던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 결과 저택의 근처에 살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전부 연지를 안쓰럽게 여겼고, 나는 딸도 제대로 안 키우는 개새끼가 되어 있었다.

'설정상 나는 이 마을의 영주와 같은 위치인 거 같고.'

다른 사람이 날 어떻게 보든 아무래도 좋았다.

문제는 연지다.

내가 8년 동안이나 자리를 비운 탓에 겉으로는 쾌활하게 지내고 있는 연지지만, 자기 나름 속앓이를 한 듯싶었다.

아이에게 부모란 전부다.

그 전부가 연지에게서 8년 동안 쭉 비어 있었다.

그 골은 아마 생각 이상으로 깊을 거고, 이런 내 예상대로 연지가 앞으로도 나를 아빠로서 인정할 리는 없을 것 같았다.

'역시 이쪽 노선으로 꺾는 게 옳았어.'

나는 부모로서 역할을 하기에는 이미 한참 늦었다.

그렇다면 연지의 라이벌이자 스승의 역할로서 있는 게 가장 좋을 듯싶었다.

'앞으로 연지가 자는 시간이거나, 나와 함께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에는 무조건 시간 생략 기능을 써야겠군.'

이거라면 최대한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한다면 오히려 내가 스파르타식으로 움직이게 되겠지만.

"썩을, 됐어. 앞으로 적어도 몇 달은 감안해야지."

그리 생각한 나는 이번에는 다른 곳에 시선을 옮기기로 했다.

나는 아직 저번 층 공략 보상과 성좌의 지목을 통해 무슨 권능이 지급되었는지 보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것부터 확인해 볼 속셈이었다.

"29층의 보상을 받겠다."

[29층 클리어 보상으로 소뤼에느의 영약이 지급되었습니다.]

그 순간 손에 영약 하나가 쥐어졌다.

영약을 잠깐 매만진 나는 영약의 효과를 확인해 보았고 곧 호오 하고 턱을 매만졌다.

소뤼에느의 영약의 효과는 간단했다.

마시면 효과가 지속되는 동안 경험치를 더 오르게 만드는 상승용 영약인 것이다.

지속 시간은 1시간 정도지만, 하루가 지나면 다시 회복되는 무한 포션의 종류였다.

'이건 운이 좋았네. 때마침 이런 게 나와 줄 줄이야. 물론 나한테는 쓸모없지만.'

연지한테 사용하면 알맞은 영약이다.

'그래, 그러고 보니 영약 같은 것도 존재했지. 이번 회차에서는 딱히 영약 같은 걸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었으니 신경 안 썼는데.'

그리 생각하며 나는 연지 쪽을 바라보았다.

단순히 몬스터 사냥을 하며 경험치를 얻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영약을 먹이는 것도 스텟을 올리는 데 영향을 줄 것이다.

'기왕 키우는 거 최대한 강하게 만들어 보자고.'

도우미 녀석들에게 이 층에 존재하는 영약의 정보를 모아 봐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이번에는 내 상태 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29층의 성좌 나태한 즐거움의 권능은 '죄악 태만'

"뭐야, 이건."

죄악 태만을 보고 내 고개가 옆으로 기울여졌다.

[죄악 태만]

신께서 내려 주신 어느 재능이라도 하루 동안 1회 거부할 수 있습니다.

주의, 사용할 때마다 죄악이 당신의 몸에 깃듭니다.

신께서 내려 주신 재능?

58화

턱을 감싼 채 나는 상태 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

잠시 생각에 잠긴 나는 곧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 사람은 바로 황제, 그도 죄악이란 단어가 붙은 권능을 하나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분명 죄악은.'

가톨릭 칠죄종, 교만, 인색, 질투, 분노, 음욕, 식탐, 태만이다.

그중 내가 얻은 것은 태만.

그런데 그 밑에 적힌 신께서 내려 주신 어느 재능이라는 건.

'클래스 혹은 같은 종류의 권능을 말하는 건가.'

두루뭉술하게 설명된 글이었지만, 만약 클래스나 권능을 사용한 공격을 한 번 정도 막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라면.

'방어계, 그것도 최상위 능력이잖아.'

내 추측이라곤 하나 '어느 재능이라도'라는 말이 붙은 이상 상대가 S급 클래스를 사용한들 1회는 막을 수 있다는 소리다.

설마 크라운 로드에 이런 종류의 권능이 존재했을 줄이야.

이걸 보니 지금까지 받은 권능들이 다 우습게 느껴질 정도다.

'혹시 죄악과 관련된 권능들은 다 이런 성능을 보이는 건가?'

하긴, 황제도 이와 관련된 권능을 지녔었다는 걸 생각하면 보통의 능력들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여겨지긴 한다마는.

하지만 마지막 말이 괜히 거슬린다.

죄악이 내 몸에 깃든다는 말은 일종의 패널티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일단, 사용은 자제하는 게 좋겠어. 뭔지는 몰라도 패널티가 있다면, 급할 때만 쓰는 게 좋겠지.'

게다가 내 몸은 튼튼하다.

비록 하일성 때는 예상치 못한 일격에 당하긴 했지만, 그건 예외적인 경우이고, 웬만해서는 상처 입을 일조차 없다.

그러니 이건 하일성 같은 녀석을 상대할 때를 위해 히든카드로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생각보다 괜찮은 걸 얻자, 29층에서 한 일들이 헛고생은 아니었다는 것에 조금은 만족한 나는 시간 생략 기능을 만졌다.

그 순간, 밤이 지나가고 해가 나타났다.

순식간에 시간이 흘러 아침이 된 것이다. 이내 내가 의자에서 일어나자, 막 잠에서 깬 연지가 눈을 비비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곤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 천천히 침대에서 기어 나왔다.

그리고 곧 녀석의 눈살이 화악 찌푸려졌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말버릇하곤. 네가 너무 엉망진창이라 아침부터 하나 정돈 가르쳐 줄까 해서 왔다."

"너한테 그런 건 하나도 안 받고 싶거든?"

"그래?"

연지의 말에 나는 손을 들었다.

그 순간 손에서 오러의 불길이 일어났고, 이어서 내 속성을 따라 전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곧 오러는 점차 응축되어 가기 시작했고, 이런 갑작스러운 광경을 목격한 연지가 경악하듯 외쳤다.

"...오러."

나는 이미 도우미에게서 이 층의 정보를 대강 파악했다.

연지가 나갔던 검술 대회는 마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또래 아이들이 모여 한 검술 대회에 불과했다.

그런 만큼 오러를 사용하는 사람은 당연히 단 한 명도 없었고, 성인 중에서도 마을에서도 오러를 다룰 수 있는 자는 거의 없는 듯하였다.

그 탓에 연지는 오러를 본 적이 드물었기에, 검술에 열의가 있는 만큼 오러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들어 보니 도우미들은 오러를 가르칠 수 있는 영역은 아닌 듯싶었고.'

그 결과, 연지는 나름대로 오러에 대한 갈망이 쌓여 있는 상태였다. 물론 욕망만 있다고 그걸 다룰 수 있게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다행히 연지는 마법을 사용할 줄 알지.'

자고로 마법이란 오러에 상상력을 더한 것.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오러의 기본기를 이미 갖추고 있다는 뜻과도 같다.

나는 오러를 가르쳐 본 경험이 꽤 있기에, 내게 배운다면 하루 안에도 쉽사리 깨우칠 수 있으리라.

"피, 필요 없어!"

내가 뭘 가르치려고 하는지 깨달았는지 연지가 눈을 꽉 감고 외쳤다.

하지만 검술 대회에 나갈 만큼 검술에 관심 있는 연지에게 오러를 배울 수 있다는 건 큰 기회다.

그렇기에 연지는 입으로는 싫다고 외치면서도 실눈으로 내 오러를 열심히 힐끗거렸다.

"오러 하나 못 피우는 녀석을 과연 검사라고 할 수 있을까?"

내 말을 듣고 연지의 어깨가 한차례 움찔거렸다.

"참 쉽게 배울 수 있는 건데 말이야. 검사라면 자고로 오러 정도는 다룰 줄 알아야 진정한 검사이건만...."

혀를 차며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연지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런 연지를 보며 한 번 더 물었다.

"배울래?"

"싫, 싫, 싫지는 않은데."

차마 싫다고는 못하겠는지 연지는 눈을 피하며 애매모호하게 대답했다.

내가 그 대답에 못 알아들은 척 고개를 기울이고 있자, 연지는 곧 나를 쳐다보며 크게 외쳤다.

"싫지는 않다고! 가르쳐 보던가!"

"거참, 누굴 닮아선지 몰라도 성격 나쁜 꼬맹이네."

"꼬맹이 아니야! 오러나 내놔!"

확, 바깥에 던져 버릴까 보다.

어쨌든 저쪽에서 받아들여 줬으니, 나는 말한 대로 오러를 가르쳐 주기 위해 우선 연지를 데리고 저택의 정원으로 향했다.

연지는 얼른 배우고 싶은 건지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고, 정원에 도착하자 나는 우선 녀석에게 가부좌를 틀게 했다.

"꼬맹이, 마법 써 본 적 있지?"

"꼬맹이 아니라니까."

"아무렴 어때. 써 본 적 있어, 없어?"

"있는데."

투덜거리는 연지의 등 뒤에 앉은 나는 손 위에 오러를 피어 올렸다.

"그래, 그럼 마법을 방출하는 것과 같이 지금부터 내가 오러를 주입할 테니까, 이 느낌을 네 몸에 두른다고 생각해."

툴툴거리면서도 막상 배울 때가 되자 연지는 나름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철없은 9살짜리 꼬맹이라도 관심 있는 분야에서는 이런 거겠지.

그 뒤로 1시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본래라면 이런 식으로 한다 한들 금방 깨우치는 게 불가능한 것이 오러지만, 나름대로 단련해 왔기 때문인지 그녀의 몸 주변에서 얕은 오러가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오러는 전신으로 뻗어 나갔고, 곧 그녀의 몸 주위에 파직 하는 천둥소리가 한차례 울렸다.

나와 같은 전 속성, 내 유전자를 이어받았으니 당연한 것이긴 했다.

오러를 느낀 연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그러곤 나를 획 하니 돌아보며 무언가 이야기하려다가, 곧 인상을 팍 찌푸리더니 고개를 다시 돌렸다.

"이런 거, 나 스스로도 할 수 있었어...."

"아, 그래."

대충 대답한 나는 연지에게서 손을 떼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별천도를 뽑은 뒤, 나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의아해하는 연지에게 말했다.

"배웠으면 시험해 보고 싶지 않냐?"

그리고 내 말을 들은 연지는 그 뜻을 눈치챘는지, 나를 따라 일어서며 검을 들었다.

"후회할 거야!"

"딱히."

한마디를 내뱉은 순간 연지가 오러를 옅게 뿜으며 바닥을 박찼다.

아직 오러를 쓰는 게 엉성하기 때문일까.

아직 오러의 힘을 제대로 조절 못 한 듯 엉성한 자세로 뛰어오른 연지는 이에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도 내게 검을 휘둘러 왔다.

"오러는 세부적인 조절이 가능해. 전신에 두르기만 하는 건 비효율적이지. 다음부터는 발가락에만 담는 느낌으로 대지를 박차 봐라."

그러면서 연지의 검을 받아쳐 내자, 바닥에 착지한 연지는 대답할 생각도 안 하고 내게 다시 검을 휘둘러 왔다.

딱히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저 내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조금씩, 조금씩 이런 방식으로 주입하듯 교육하다 보면 자연스레 연지는 내 말을 떠올리고 자신 나름대로 성장을 거듭할 것이다.

"기억해라. 옅게 그리고 깊게. 오러는 정밀하게 다루면 다룰수록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 오러는 물과 같아. 조금만 건드려도 파장이 일어나고, 그걸 이용해 수없이 많은 형태로 변화할 수 있다. 오러가 마법이 될 수 있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야."

아래쪽에서 휘두른 연지의 검을 끊어 낸 나는 검 위로 오러를 둘렀다.

곧 번갯불이 한 차례 튀고, 그 기운을 검에 담아 연지를 내리쳤다.

그러자 급히 발가락 끝에 오러를 집중한 연지가 자세를 뒤틀며 그 장소에서 이탈했다.

그러나 너무 많이 주입한 듯 착지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한차례 뒹군 연지였지만, 나름 배운 게 있는 모양이다.

그래, 바로 그거다.

그런 식으로 배워 나가라.

말로는 내뱉지 않았지만, 연지를 보며 한줄기 미소를 그린 나는 다시금 그녀와 맞붙었다.

이후, 결과는 오러를 전부 다 쏟아 내어 지쳐 쓰러진 연지가 패한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래도 나름 잘 버텼다고 생각하며 탈진한 연지를 안으로 데려가 쉬게 두고 나는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녀석이 회복할 만큼의 시간을 앞으로 돌리자 어느덧 밤이 되었다.

그러고 나서 한동안 의자에 앉아 적당히 시간을 보낼 즈음, 저 멀리서 다급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 방문 쪽을 힐끔 보자 연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녀석은 숨을 열심히 고르며 나를 바라보았다.

"왜?"

내가 무뚝뚝하게 되묻자 윽 하고 소리를 낸 연지는 이내 결심한 게 있는 듯 나를 바라보곤 말했다.

"내, 내일도 나랑 붙어. 내일은 내가 이길 거야!"

드디어 경쟁심과 성장 욕구에 불이 붙었나.

내가 가장 원한 대답이다.

하지만 부족하다.

"내가 뭐 하러 너 같은 약한 애랑 붙냐?"

"이, 이이."

내가 가볍게 폄훼하자 부들거리던 연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랑 계속 대련해 봤자 실력이 늘 거란 보장은 없다. 앞으로 매일 같이 네가 잡을 몬스터를 정해 줄 테니까, 앞으로는 할당량 채워 오면 상대해 주마. 그리고 이거, 사냥하기 전에 꼭 마셔."

그리 말한 나는 연지에게 소뤼에느의 영약을 던져 주었다.

내게서 영약을 받은 연지는 잠깐 영약을 살피더니 내게 물었다.

"이게 뭔데?"

"네가 조금이라도 빨리 성장하게 도움을 주는 약이다."

"나 약 싫은데. 써."

"그럼 평생 나한테 지겠지."

진다는 말에 움찔거린 연지는 눈살을 찌푸리곤 영약을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앞으로는 안 져!"

역시 자존심 하나는 쌔다 이건가.

내게 그리 외친 연지는 문을 쾅 닫곤 복도를 도도도 뛰어가 버렸다.

"도우미."

그런 연지를 보고 있던 내가 도우미를 부르자 문을 열고 여자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녀에게 돈뭉치를 건넸다.

"이걸로 성장에 도움 되는 영약을 모조리 구입해. 비싸든 말든 상관없어. 돈은 더 있으니까. 그리고 그 영약은 내가 시켜서 산 게 아니라, 연지가 나를 이길 수 있게 도와주려고 구매했다고 해."

"직접 주면 먹지 않을까 그러시는 겁니까?"

"그래, 나보단 지금껏 연지를 키워온 너희가 훨씬 연지랑 친숙하니까. 아무리 도우미라도 이 정도는 도와주겠지?"

"알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도우미는 돈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이후, 또다시 시간 생략 기능을 만져 다음 날로 돌렸다.

그렇게 순식간에 5달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연지에게 꾸준히 몬스터 사냥을 시키고, 대련까지 병행하니 녀석은 계속해서 성장해 나갔다.

그와 함께 매일 같이 복용하는 소뤼에느의 영약과 도우미들이 구해온 각종 영약들을 마구잡이로 섭취한 연지는 눈에 띌 정도로 급격히 성장했고, 어느덧 오러도 소드 엑스퍼트 하급의 들어섰다.

'빠르군. 영약 효과 하나는 제대로인가.'

물론 앞서 말했듯 내가 매일 같이 그녀가 잡기에는 아슬아슬한 몬스터를 선정해 준 덕도 있었다.

실제로 연지는 거의 빈사 상태가 되기 직전까지 몬스터를 사냥하고 집에 돌아왔다.

그 상태로 대련에서 얻어터지고, 회복용 영 물약을 듬뿍 마신 뒤 기절하듯 잠들었다.

이런 걸 5달이나 반복하니 성장할 수밖에 없겠지.

첫날에는 자존감도 다 던져 놓고 울면서 '싫어. 이제 안 할래.'라는 말을 내뱉은 적도 있긴 했다.

하지만 우습게도 연지는 다음 날이 되면 어기적어기적하며 나를 찾아왔다.

그러곤 어제 울었던 것은 없었던 일이라는 양 나한테 몬스터를 지정받고 사냥하러 떠났다.

자존감과 경쟁심, 성장 욕구가 한데 똘똘 뭉친 연지는, 하루가 지나면 지기 싫다는 마음에 힘들어도 다시 일어서는 것이다.

나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다가 한 번 무너져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 보다, 매일 같이 쓰러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자가 더더욱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연지의 이러한 회복 탄력성만큼은 확실히 칭찬할 만했다.

누굴 닮았는지는 잘 몰라도 자존심이 부서져도 바로 회복시키는 것 하나는 탁월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입 밖으로는 절대로 안 내뱉었지만.'

이러한 부분은 칭찬받아 봤자 괜스레 기분 나쁜 게 있으니까.

59화

그렇게 또 5달이 흘렀다.

어느덧 9살이 된 연지는 영약의 효과 덕분인지 부쩍 성장한 모습으로 내 앞에 섰다.

소드 엑스퍼트 하급까지는 빠르게 달성했지만, 더 위로 오르는 것은 꽤 힘겨웠던 건지 이제야 막 중급이 된 그녀는 나와 검을 맞댔다.

곧 녀석의 검에 전 속성의 오러가 끓어올랐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내 검술을 훔쳐 자신의 검술을 만들어 낸 연지는, 이전보다 훨씬 성장하여 내게 맞섰다.

게다가 몬스터랑 매일 같이 뒹군 덕택에 이기고자 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법을 배운 녀석은, 반쯤 드래곤이 되는 용인화에 브레스까지 쏟아부으며 싸웠다.

하지만 결과는 또다시 패배.

이를 빠득빠득 갈면서 투지를 불태우는 연지를 힘차게 걷어차 준 나는 '내일 다시 와라.'라고 말하곤 몸을 돌렸다.

그리고 1년.

10살의 연지는 검술의 수준만 따지면 소드 엑스퍼트 상급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그에 비해 1년간 오러 쪽은 거의 성장이 멈췄다고 할 정도로 아주 더뎠던 만큼 조바심을 느낀 것인지 녀석은 최근 부쩍 짜증이 많아졌다.

시도 때도 없이 짜증을 부리고, 도우미들에게도 상당히 까칠해져 있었다.

그 모습을 잠깐 지켜보던 나는 고민하며 턱을 매만지다가 곧 한 가지 눈치챘다.

'사춘기냐. 이 녀석.'

10살, 아직 사춘기가 오기에는 먼 나이라고 생각하지만, 연지는 일반 아이들과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성장을 도와주는 영약을 꾸준히 복용했다는 것.

그 증거로 연지는 또래 아이들에 비해 체형이 꽤 큰 편이었다.

그 때문에 본래라면 더 늦은 나이에 올 사춘기 또한 앞당겨져 온 것이었다.

가뜩이나 나에게 매일 같이 져서 프라이드가 박살 나고 성장 속도가 더뎌져 스트레스가 쌓이는데, 사춘기까지 왔으니 난리가 날 수밖에.

"골치네."

나도 사춘기는 겪어 봤기에 이 시기 아이들은 무슨 짓을 해도 짜증부터 내고 본다는 걸 안다.

'그렇다면 슬슬 스트레스 발산이라도 해 줘야 할까? 매일 같이 나에게 지기만 한 탓에 지쳐 가는 것 같기도 하고.'

적당한 게 없을까 싶어 찾아보자 나는 이 세계의 수도 드라고니스에서 용족 대회가 매년 열리고 있음을 알아냈다.

마침 일정도 가깝고, 또래 용족의 수준도 알 수 있을 테니 이거라면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꼬맹이."

"그 꼬맹이 소리, 지겹지도 않아?"

내 부름에 검을 받아치던 연지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조만간 용족끼리 실력을 겨루는 대회가 하나 있다. 거기서 이기고 와."

내 말을 듣고 엉덩이를 털며 일어난 연지가 물었다.

"갑자기 왜?"

"네 수준 좀 알고 오라고. 주변을 돌아보며 환기할 때가 됐다."

"환기는 무슨."

투덜거리며 검을 다시 쥔 연지는 나를 노려다 보았다.

"너한테 이길 때까지 다 의미 없어."

"평생 가도 못 이긴다니까."

"이, 이이!"

내 도발에 열이 뻗친 양 연지가 다시 달려들었다.

그래도 내가 항상 도발해 온 탓일까. 그래도 연지는 이제 분노 정도로 이성을 잃어 판단을 흐리진 않았다.

겉보기에는 항상 열 받아 있는 시한폭탄 같은 모양새지만, 속은 생각 이상으로 냉정한 것이다.

이건 연지한테 강점으로 작용되겠지.

그렇게 오늘도 나에게 두들겨 맞은 연지는 다음 날, 나와 함께 집을 나섰다.

* * *

"오러를 계속 발동한 상태로 뛰어간다. 마차 같은 편한 걸 탈 생각하지 마."

"내가 먼저 도착하면 어쩔 건데?"

"그럴 일은 전혀 없으니 중간에 나가떨어지지나 말아라."

그리 말하며 우리는 꽤나 무식한 방법으로 드라고니스를 향하기 시작했다.

본래라면 마차를 타도 일주일은 걸리는 거리고, 걸어간다면 한 달은 더 걸릴 거리다.

그러나 오러를 이용해 강화된 육체로 뛰기 시작한 우리는 불과 3일 만에 그 거리를 주파했고, 드라고니스에 도착했을 무렵에 연지는 눈이 다 풀린 채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런 연지를 들고 호텔 하나에 들어선 나는 욕조에 따뜻한 물을 가득 담은 뒤 체력 회복용 포션을 졸졸 뿌렸다.

그러곤 체력이 완전히 고갈된 연지의 옷을 깔끔히 벗기고 그대로 연지를 욕조에 빠트려 둔 뒤 음식을 시켰다.

"멀었구만. 멀었어."

참고로 우리는 3일 동안 단 하루도 자지 않았다.

우습게도 이건 내가 강행한 것이 아니라, 연지 쪽에서 자처한 결과다.

내가 적당히 쉬는 동안 나보다 먼저 도착하려고 쉬지도 않은 채 뛴 탓에 이 상황을 초래한 것이었다.

물론 연지가 결국 졌지만.

'그동안 내가 좀 무식하게 키우긴 했나.'

적자생존. 몬스터를 사냥할 때는 주위의 도움 일절 없이 스스로 먹고 자며 생존에 유리한 체력과 반사 신경을 기르게 했다.

그 탓인지 연지의 발상은 상당히 무식해져 있었다.

연지의 머릿속에는 힘이라는 것은 언제나 옳고, 육체는 한계치까지 몰아넣었을 때 성장한다는 것이 당연시되어 있는 것이다.

그 덕분에 폭풍 성장을 하고 있긴 하다만, 여러모로 장래가 걱정된다.

"아니, 내가 왜 얘 장래를 걱정해?"

나는 연지가 그냥 강해지기만 하면 그만인데, 뭐 하러 걱정을 한 건지.

마침 음식이 오자, 나는 밥을 먹으며 연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 순간 덜컹하며 문이 열렸다.

상당히 길어진 붉은색 머리카락이 연지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녀석은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마치 강아지처럼 머리에 묻은 물기를 푸르르 털어 내었다.

그러곤 비적비적 걸어와 내 앞에 앉아선 음식부터 먹었다.

물이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꼴을 차마 더 볼 수 없었기에 수건을 들고 온 나는 연지의 머리와 몸을 닦았다.

내가 자신을 닦아 주든 말든 한참을 굶은 배를 채우는 게 우선이라는 양 열심히 먹은 연지는 잠시 후 배가 가득 찼는지 바로 드러누웠다.

"옷 입어라. 이제 와서 감기는 안 걸리겠지만, 보기 흉하다."

내 말을 듣고 입술을 비죽 내밀은 연지는 비적비적 옷을 입었다.

그러곤 체력이 다 회복되었는지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내게 말했다.

"그래서 대회는 언제인데?"

"원래의 일정보다 일찍 도착했으니까, 이틀 뒤."

"그동안 뭐할 건데?"

"뭐, 평소랑 같지 않겠냐? 두들겨 맞고, 기절하고, 자고, 반복."

"무식해."

"내가 보기엔 네가 젤 무식한데?"

"난 안 무식해!"

씩씩거리는 연지를 보며 어깨를 으쓱거린 나는 침대에 털썩 누웠다.

그러자 의자에 앉은 채 나를 보던 연지가 비적비적 내 옆에 다가오더니, 내 가슴을 베개 삼아 누웠다.

"무겁다. 내려가라."

"나 안 무겁거든요. 완전 가볍거든."

"유치하게 굴지 마. 쥐어박기 전에."

내 말에 연지는 내 가슴 위에서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결국 머리에 한 대 쥐어박아 주자, 그제야 얌전히 다른 베게 하나에 누운 연지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야."

"왜."

"나한테 이렇게 해주는 이유가 뭐야?"

뜬금없는 물음에 나는 연지를 힐끔 보았다.

아무 생각 없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내가 자신을 도와주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나.

이유야 그냥 층을 클리어하기 위해서긴 하다만.

이 녀석이 원하는 대답은 그런 건 아니겠지.

'여기선 원하는 대답을 해 주도록 할까.'

약 2년 가까운 세월 동안 매일 같이 얼굴을 보고 지냈기 때문인지, 나한테 꽤 정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고.

"내 딸이니까."

녀석이 원했을 법한 대답을 들려주자, 나를 쳐다본 연지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딸 이름 한 번 안 불러 주는 아빠가 세상에 어디 있어?"

"내 눈엔 네가 100살이 되도 꼬맹일 거다."

"나 꼬맹이 아니라니까. 매일 봤는데 얼마나 컸는지 몰라?"

"매일 보는데 눈치채는 게 더 이상하지 않냐? 원래 이런 건 가끔씩 만나는 사람이 더 잘 느끼는 법이야."

내 논리적인 설명에도 연지는 툴툴거렸다.

그래도 뭔가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는지, 이불속에서 꼬물거리던 연지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대련할래."

이제 3일 동안 빠졌던 체력 다 회복했다, 이건가.

좋다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곧바로 연지와 함께 대련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틀 뒤, 대회 당일이 되었다.

* * *

접수는 이미 해 두었던 만큼 대회장에 시간에 맞춰 느긋하게 가기만 하면 되었다.

이윽고 나는 연지와 함께 호텔을 나섰다.

이후, 대회장에 도착한 나는 장비는 잘 챙겼는지 확인하듯 연지에게 물었다.

"검은."

"보면 몰라? 챙겼어."

"손수건은."

"챙겼어."

"영약은."

"아침에 먹는 거 봤잖아. 오늘따라 왜 이렇게 귀찮게 해?"

아니, 그냥 뭔가 찜찜해서 이것저것 말하게 된다만.

손을 파닥거리며 그만 좀 하라는 연지는 어느새 호명되는 참가자들 사이로 갈 때가 되었다.

연지는 만 8세에서 15세까지의 아이들이 참여하는 청소년 쪽 시험을 치르게 될 예정이기에 어린 용족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내 호명되자마자 돌아보지도 않고 걸어가는 연지 쪽을 보고 있던 나는 입을 열었다.

"꼬맹이."

내 부름에 연지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기고 와라."

"당연한 거 아니야?"

흥 하고 콧방귀를 내쉬는 연지를 보고 나는 저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이후, 연지가 청소년 참가자들과 함께 대기 장소로 걸어갔다.

무슨 말이라도 좀 더 해 줬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이내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딸애가 참가했나 봐요?"

그러던 순간 옆에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한 여성이 서 있었고, 그녀는 인자한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아, 네."

"자식이 대회 같은 곳에 나가면 뭔가 불안하죠. 혹시나 대회에서 떨어져 좌절할까, 사람들 앞에서 떨지는 않을까 걱정되곤 하니까요. 그래서인지 대회를 참가시키고 나면 자식의 뒷모습을 잊지 못해 여기서 서성거리시는 부모들도 꽤 있답니다."

딱히 난 그런 건 아니다만.

"자그마한 애가 벌써 혼자 하겠다고 투정 부리는 모습은,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서운하죠."

이어서 호호 하고 입가를 가리며 웃던 그녀는 '다 그런 법이에요.'라고 혼자 말하곤 가 버렸다.

그녀의 행동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던 나는, 그저 오지랖이었을 뿐이라 생각하며 관람석으로 향했다.

그렇게 청소년 참가자들의 예선 경기가 하나둘 지나가고, 나는 그걸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지켜보았다.

"다음 예선전, 하연지 대 신드라렌."

사회자가 선수를 호명한 순간 대기석에서 연지가 벌떡 일어났다.

그 모습이 상당히 불안해 보였으나, 연지는 오러를 한 차례 피어 올리며 숨을 들이키곤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그런 뒤, 그 자그마한 발로 도도 뛰어 경기장 위로 올라왔고 곧바로 상대와 마주했다.

상대는 13살의 용족 남성.

영약의 덕분인지 연지와 체격 차이가 그리 나지 않았다.

"옆에 있는 마력공이 신호를 보내는 순간, 시합 시작입니다."

두 사람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사회자가 경기장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경기장 하늘에 있던 마력공에 새겨진 숫자가 천천히 내려갔고, 이내 그것이 '0'이 되자 구가 경기 신호음을 거칠게 내뿜었다.

하연지 일식(一式)

뇌명발검(雷鳴俗劍)

내 뇌격발도를 보고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낸 연지의 발검술이 터져 나왔다.

그 검은 천둥이었다.

고속으로 뽑은 검은 상대의 목을 취할 수는 없으나, 상대의 인식을 넘어선 압도적인 속도와 소리의 울림으로 일순간 기절하게 만든다.

신드라렌은 급히 창을 쥐었지만, 연지의 검에서 터져 나온 천둥에 직격당해 눈을 새하얗게 까뒤집어졌다.

이어서 상대의 몸이 급격하게 앞으로 고꾸라지기 시작했고, 연지는 즉시 바닥을 박차며 검의 오러를 피어 올렸다.

하연지 이식(二式)

뇌염성뢰(雷炎聲雷)

화염 마법과 함께 전 속성의 오러가 검을 휘감아 올랐다.

빛의 속도에 미치기에는 아직 모자라, 소리를 아슬아슬하게 따라잡은 재빠른 검이 신드라렌의 목에 정확히 들어갔다.

"그만."

그 순간 사회자가 연지의 검을 검지와 엄지만으로 막았다.

같은 용족인 사회자는 소드 마스터급이었기에, 연지의 검을 막기는 충분한 실력이었다.

자신의 제지에 연지가 검을 거두자, 사회자는 신드라렌의 상태를 확인하곤 연지 쪽에 손을 뻗어 주었다.

"하연지 승리."

처음 뇌명발검에 직격당했을 때부터 신드라렌에게 승기는 없었다.

설마 이렇게 쉽게 이길 거라고 생각 못 했는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던 연지는 주변을 휙휙 돌아보더니 이내 나를 발견했다.

그렇게 시선이 마주치자 나는 설마 칭찬이라도 받고 싶냐는 투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연지는 이내 인상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획 하니 돌리곤 자리로 돌아갔다.

"저 애 올해 10살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대단하네요. 방금 오러는 소드 엑스퍼트 상급이었죠? 천재네요. 우리 애가 저런 애를 상대하면 어쩐담."

여기저기서 부모들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드 엑스퍼트 정도로 천재라니, 저 녀석들도 아직 멀었다.

"그래도 좀 무식해 보이지 않나요? 용족이란 고귀함이 있어야 하는 법인데."

그러던 그때, 내 귓가로 들린 불쾌한 말에 내 인상이 확 찌푸려졌다.

"야, 방금 누구야."

오러를 담은 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60화

"히이익."

"억, 억."

방금 내뱉은 목소리의 주인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자, 내 오러 하나로 짓눌려 고개조차 못 돌리는 떨거지들밖에 없었다.

그런 주제에 연지를 멋대로 평가하는 꼴이 우스웠다.

'자기 자식이나 잘 키울 것이지.'

흥 하고 짜증스레 콧방귀를 내쉰 나는 오러를 거두곤 다음 경기를 지켜보았다.

그 이후로도 연지는 계속해서 승승장구했다.

내가 그동안 가르쳐 온 것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었다는 양 연지와 1합조차 나누지 못한 녀석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야 그렇겠지.

오히려 당연한 결과다.

[하연지]

[칭호 : 하천성의 딸]

종족 : 드래곤

성별 : 여

나이 : 1세

LV.79

체력 101

마력 133

힘 109

지력 129

민첩 120

—스킬 창—

드래곤 변환 [D랭크]

미니 브레스 [B랭크]

파이어 볼 [D랭크]

이그니스 글라디오 [C랭크]

하연지식 검술 [C랭크]

연지의 스텟은 현재 모조리 세자릿수를 넘겼다.

소드 마스터의 경지가 100레벨대임을 생각하면, 연지는 21레벨만 더 올리면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온 것이다.

그런 연지가 이제야 소드 엑스퍼트 하급에 오를까 말까 한 녀석들에게 질 턱이 있나.

'그래도.'

4강전까지 올라오니 눈에 띄는 녀석들이 몇몇 있었다.

까닥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수준의 참가자가 섞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지를 제외한 3명 전원 15살, 청소년기의 마지막을 앞둔 용족들이 연지의 남은 대전 상대였다.

"4강전 하연지 대 릴리오스."

이후, 사회자의 지명에 따라 연지가 경기장으로 올라왔다.

청소년 대회는 아무래도 본 대회보다 상대적으로 주목도가 낮다.

거기에다가 떨어진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간 부모들이 꽤 있는 탓에 관람석이 많이 비었다.

그러나 본 대회의 8강전부터는 내일 치르기로 되어 있었기에, 그 경기들을 보던 관람객들이 어느새 청소년 대회로 몰려들었다.

그 결과, 이전보다도 훨씬 많아진 관객 수 앞에서 청소년 대회 4강전이 치러지게 되었다.

관객의 수가 늘어날수록 압박감이 심해진다.

수많은 기대와 시선은 자연스레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드니까.

하지만 내 유전자를 받은 연지답게 그녀의 얼굴에는 일말의 불안감조차 없었다.

오히려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풀풀 흘러나왔다.

그도 그럴 게 첫 경기에서 연지는 이미 긴장감 따위 전부 날려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방심하지도 않겠지.'

적자생존을 익힌다는 이유로 괜히 몬스터 소굴에 던져 놓은 게 아니다.

방심하면 몬스터에게 언제든지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살아온 연지이기에 그럴 일은 더욱 없을 듯싶었다.

그러면서 나는 상대인 릴리오스를 바라보았다.

앞에서 말했듯이 15살의 소년.

연지가 아무리 영약으로 인해 체격이 커졌다고 한들 사춘기의 끝물에 도달한 그는 녀석보다 머리 두 개 정도 더 컸다.

게다가 흘러나오는 기운은 소드 엑스퍼트 하급 수준인 데다가, 거기에 더해 녀석은 4서클 마법까지도 다룰 수 있는 모양이었다.

검의 경지에서는 연지에게 밀리지만, 마법만 따졌을 때는 저쪽이 훨씬 위다.

그래도 내가 그동안 대전 상대였던 만큼 연지는 마법사와 싸워 본 경험이 상당히 적으니까, 이번 기회를 통해 여러모로 배우는 게 있겠지.

"경기 시작은 아까와 같습니다. 준비하세요."

말을 마친 사회자가 경기장 아래로 내려오자 여기저기서 열심히 하라는 응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청소년 대회이다 보니 독려가 많았다.

이전과 같이 신호음이 울려 퍼지고, 연지는 첫 라운드와 같은 방식을 고수했다.

하연지 일식(一式)

뇌명발검(雷鳴俗劍)

천둥소리가 울리며 녀석의 검이 릴리오스를 급습했다.

하지만 이미 연지의 전투 방식을 눈여겨보고 있던 릴리오스는 소리를 지우는 마법을 이용해 연지의 검술에 대응했다.

그러곤 즉시 검 하나를 손에 쥔 그는 이동 마법인 블링크로 사라지더니, 이내 연지의 등 뒤에서 나타났다.

연지 또한 그런 릴리오스를 놓치지 않았다.

오러가 담긴 검이 곧바로 릴리오스를 향해 휘둘러지고, 둘은 세 차례 정도 검합을 주고받았다.

그러는 사이 릴리오스의 등 뒤에서 불꽃의 채찍 여러 개가 연지에게 휘둘러졌다.

재빠르게 채찍을 받아쳐 낸 연지는 검을 바닥의 박아 넣곤 오러를 급속히 검에 주입했다.

그 순간 폭발한 잔해에 의해 먼지바람이 주변을 휘감자, 연지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 릴리오스가 한 차례 물러나려 했다.

"어딜 가려고."

하지만 연지는 이미 릴리오스의 바로 앞에 있었다.

몸을 빼려던 녀석의 얼굴 바로 앞에 검을 내지른 연지는 망설임 없이 릴리오스의 얼굴에 손바닥을 뻗었다.

하연지 삼식(三式)

뇌박(雷拍)

쩌억, 소리가 한 차례 울렸다.

릴리오스의 얼굴에 정면으로 닿은 손바닥은 강한 뇌력을 내뿜어 그의 정신을 일순간 날려 버렸고, 직격당한 얼굴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쌓아 올린 경지는 헛된 게 아니라는 양 릴리오스는 조건 반사적으로 마법을 사용해 전신에 실드를 팽팽하게 둘렀다.

하연지 사식(四式)

뇌염천참(雷炎千斬)

그러자 전 속성의 오러 위로 화염이 깃들어 올랐다.

연지의 팔에 둘린 오러가 팽팽하게 부풀기 시작했고, 그것은 그녀의 팔을 한계치까지 가속화했다.

천 번의 베기가 일순간 릴리오스의 실드 위를 뒤덮었다.

무수히 쏟아지는 화염과 번개가 그의 실드 위를 맹렬히 덮치더니, 파직하고 깨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걸 들은 릴리오스가 어떻게든 정신을 되잡았다.

자신의 실드가 깨지는 즉시 끝장이라는 것을 눈치챈 릴리오스의 전신에 푸른색 비늘이 솟아올랐다.

용인화를 사용한 릴리오스는 코피를 쏟아 내면서도 마법을 캐스팅하여 발동했다.

4서클 마법 인페르노(Inferno)

화염 마법이 검을 휘두르던 연지를 뒤덮었다.

그 잠깐의 틈에 릴리오스의 눈동자가 노랗게 물들더니, 이내 그의 입가에서 응축된 오러 덩어리가 빛을 뿜어 내었다.

용족의 비기 브레스다.

새까만 연기가 연지를 뒤덮은 상태에서 릴리오스의 브레스가 연지에게 쏘아지기 직전, 연기 사이로 손이 뻗어 나왔다.

녀석의 손은 릴리오스의 브레스를 짓누르더니, 그의 얼굴을 감싸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았다.

콰앙!

거친 소리가 울려 퍼졌고, 이내 흩어지는 연기 사이로 용인화를 한 연지가 드러났다.

붉은색의 비늘이 얼굴에 돋아난 채 입가에 삼킨 연기를 내뿜고 있던 연지는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방금의 일격으로 릴리오스는 기절 해 버렸다.

그의 얼굴에서 손을 뗀 연지가 사회자를 돌아보자, 사회자는 고개를 끄덕인 뒤 녀석의 손을 들어 주었다.

"승리, 하연지."

그가 판정을 발표하자 숨죽이고 대회를 지켜보던 관중들이 폭발적으로 소리를 내질렀다.

갑작스러운 환호성에 경기에만 집중하던 연지도 조금 당황하여 주변을 돌아보며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강하네! 터프하구만!"

"마법을 용인화해서 정면으로 받았군! 연지라는 애의 드래곤 속성은 화염인 거 같은데, 마지막에 릴리오스의 판단이 아쉬웠어. 화염 마법이 아니라 다른 속성 마법이었다면 브레스까지 연계할 수 있었을 텐데."

왁자지껄한 소리가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던 연지는 이내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연지를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내 태도를 보고 실망한 듯 입을 삐죽 내밀은 연지는 대기석으로 돌아가 다음 경기를 위해 곧바로 치료받았다.

"다음 4강전 세렌 대 소락."

그리고 연지의 다음 상대가 정해질 경기가 시작되었다.

지명을 받은 두 사람이 걸어 올라왔다.

소락은 창을, 세렌은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럼 하던 대로."

그리고 사회자가 아래로 내려간 순간 경기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지르던 찰나에 누구보다도 빠르게 세렌의 검이 움직였으나, 그걸 눈치챈 자들은 몇 없는 듯싶었다.

일순간이었다.

소락이라는 용족의 목에 검이 스쳐 지나가고, 그의 의식이 꺼진 것이.

바닥을 나뒹군 소락이 움찔거렸다.

그가 아무런 반응도 못 하고 쓰러지자, 사람들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세렌 승리."

소드 마스터 경지였기에 알아차린 사회자는 경기장에 올라와 세렌 쪽의 승리를 발표하자, 세렌은 덤덤한 모습을 한 채 대기석으로 돌아갔다.

세렌, 이 대회에서 가장 강하다고 생각한 녀석이 결국 끝까지 남았다.

그도 그럴 게 그녀의 경지는 소드 마스터 하급의 도달해 있었으니까.

세렌은 한 세계관에서 나름 주름 잡을 수준의 용족인 셈이었다.

"세렌? 설마 아티쿠스님의 딸인가?"

"아티쿠스님이라면 현재 로드 후보 중 한 명인 그분을 말하는 거야?"

"그래서 그런 거 였구만. 그런데 고작 15살에 저런 실력이라니. 차기 로드는 이미 정해진 거 아닌지 모르겠군."

"15살에 소드 마스터? 나 원, 세계가 뒤집어질 노릇이구만."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아는 정보가 흘러나왔다.

로드 후보, 거의 2년 가까이 이 층에서 머물면서 내 나름대로 정보는 모을 만큼 모았다.

그동안 시간 생략 기능을 사용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활용했기에 생각보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짧지도 않았다.

'쯧, 이런 층에 걸리면 가면 갈수록 목표 의식이 희미해져. 5회차까지 달려온 20년이라는 기간은 전부 이런 시간들이 포함된 시간이니까. 육체는 몰라도 정신 쪽으로는 벌써 몇 살을 먹었는지 기억이 안 날 지경이라고.'

이러한 점 때문에 정신병에 걸려서 도중에 망가지는 녀석들이 한둘이 아니다.

실제로 한 층에 너무 오래 머무르다가 그 세계에 빠져 버려 그곳에서만 평생 살아가기를 택한 녀석들도 더러 있었을 정도니까.

성좌는 야비하고 치졸하다.

사람들을 어떻게든 층에 묶어 놓게 하려고 하고, 그들이 자신들의 세계 속에서 평생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렇게 그 세계에 참가자가 완전히 빠져 버리게 되면, 성좌는 그자에게는 클리어를 선언해 주지 않는다.

다음 층으로 나아가고자 하지 않았으니, 시험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하나 그런 자들도 결국 5년이 지나면 모든 게 초기화되어 스타트 지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현실과 이야기를 구분하지 못하게 된 녀석들은 대부분 얼마 못 가 망가진다.

결국 크라운 로드는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사람을 망가트리기 위해 존재하는 세계인 셈이다.

나는 역시 이딴 세계 따위 빨리 벗어나는 게 답이라 생각하며 혀를 차곤 연지를 쳐다보았다.

본론으로 돌아와 로드라는 것은 앞에서 성좌가 한번 설명했듯이 연지가 목표로 도달해야 한다.

드래곤 로드. 즉, 용족들의 군주.

이 세계에서 용족이라는 것은 지배자의 위치에 있다.

드래곤의 알은 세계의 수도 드라고니스의 존재하는 '용린의 신목'에서 나오며, 그 알은 이 세계에서 일정 이상의 명성을 쌓은 자들에게 종족에 상관없이 주어진다고 한다.

물론 같은 용족끼리도 알을 받을 수 있다.

'참 여러모로 귀찮은 시스템이야.'

연지가 15살이 되었을 때 30층이 클리어되고 드래곤 로드의 자리를 놓고 본격적으로 다투는 31층으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연지의 상대는 그러한 로드 후보 중 한 명의 딸, 말 그대로 있는 집 자식이라는 소리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해 소드 엑스퍼트 상급의 연지에게 소드 마스터 하급을 이기라는 소리는 터무니없는 것이다.

61화

"세렌의 다음 상대는."

"하연지라는 애야. 여기까지 잘 올라왔는데 아깝게 됐구만."

여기저기서 안타까워하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들은 대기석에 앉은 연지에게 동정의 눈빛을 보냈고, 나는 가만히 녀석을 지켜보았다.

연지의 눈에는 자신이 패배할 것 같다는 기색이 조금도 비치지 않았다.

소드 마스터 하급, 그게 어쨌단 말인가.

항상 대련한 내가 소드 마스터 따위는 오러를 쓰지 않고도 박살 낼 수 있는 사람인데. 고작 그 정도로 연지가 쫄 리가 없었다.

'그래, 뭐든지 쫄면 지는 거다.'

어떠한 상대가 와도 쓰러트릴 수 있다는 자신감은 강력한 무기다.

설령 남들이 그건 무모함이라고 손가락질하더라도 쉽게 무릎 꿇고 수긍하는 녀석이야말로 머저리다.

과거, 지구에서 모든 걸 포기했던 나처럼.

"결승전 하연지, 세렌."

연지와 세렌 두 사람이 경기장 위로 올라섰다.

기다란 보랏빛 머리카락을 나부끼는 장신의 세렌은 연지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연지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경기 준비하시고, 시작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준비되었음을 확인한 사회자가 경기장 아래로 내려가자 신호음을 내는 구체가 떠올랐다.

삐이이이이이이!

그리고 곧 경기 시작 음이 터져 나왔다.

아까 전과 같이 일격으로 끝낼 속셈인지 세렌은 즉시 검을 휘둘렀다.

채엥!

그런데 호기롭게 공격한 세렌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분명 소드 마스터급의 오러를 담은 일격임에도 불구하고 연지가 자신의 검을 눈으로 좇은 뒤 그대로 받아 쳐낸 것이었다.

그야 그렇겠지.

내가 휘두른 검은 저것보다도 훨씬 빨랐으니까.

게다가 연지는 효율적으로 오러를 다루는 법을 내게서 계속해서 배웠다.

비록 연지가 아직 소드 엑스퍼트 상급의 경지라곤 해도 경험의 차이가 난다.

세렌이 검을 한 차례 더 휘둘렀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연지는 검을 막자, 세렌의 눈빛이 점점 묘해지기 시작했다.

맨 처음에 휘두른 자신의 검을 받아친 게 우연이 아님을 눈치채기 시작한 것이다.

"몰랐네. 이 대회에서 내 검을 받아 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했어."

그리 말한 세렌은 전보다 진지하게 임해야 함을 느끼고 오러를 피어 올렸다.

소드 마스터급 오러가 그녀에게서 흘러나오자 주변 사람들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자신감 한 번 높네."

세렌의 말에 헛웃음을 흘린 연지는 은은하게 오러를 피어 올렸다.

세렌에 비하면 분명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파괴적인 위력이 드러나지도 않았고, 주변을 장악할 만큼 강대한 오러도 아니었다.

경기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에 동정이 깃들기 시작했다.

곧이어 연지와 세렌이 맞부딪쳤다.

서로의 검이 몇 차례나 오갔지만, 본래라면 오러양만으로도 짓눌려야 할 연지는 생각 이상으로 선전하고 있었다.

세렌의 모든 검을 받아 쳐 내는 와중에도 간혹 공격까지 섞어 넣는 등, 비등비등한 실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연지를 보는 세렌의 눈빛이 더욱 묘해지기 시작했다.

"강자랑 싸우는 법을 잘 아네. 그렇게 검을 다루는 애들은 잘 없는데."

세렌의 말대로 연지는 세렌과 검을 나눌 때마다 집중적으로 팔과 검에 오러를 주입했다.

반대로 피해야 할 때는 오로지 다리와 발에만 집중적으로 오러를 넣음으로써 그때그때 대응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 전신에 소드 마스터의 오러를 두르고 있는 세렌의 방어를 뚫을 수는 없었기에 연지의 공격은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매일 같이 이런 거라도 안 하면 아무것도 못 하니까."

입술을 꽉 깨문 연지가 치열하게 세렌에게 맞섰다.

서로의 검술이 난무했다.

오러 쪽은 세렌이 훨씬 우위, 그러나 검술만으로는 연지도 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압도적인 우위도 아니었다.

결국 오러의 차이로 인해 연지가 조금씩 밀리며, 그녀의 몸 사이사이에 잔상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예상보다 싸움이 길어진 덕분일까. 세렌 쪽도 눈에 띄게 지쳐 가기 시작했다.

앞선 싸움에서 검격 한 번만으로 이겨 왔던 만큼 연지라는 강적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초조함과 함께 정신적, 육체적인 피로가 몰려온 것이다.

'느긋이, 저 초조함을 계속해서 이끌어 낸다.'

늘 우위에 있던 사람은 한 번 상황이 제 뜻대로 돌아가지 않기 시작하면 점차 초조함에 잡아 먹혀 간다.

반대로 항상 아래에 있던 자는 초조함 대신 승리를 위한 길을 모색하고자 끊임없이 물어뜯는다.

연지는 나와의 수련을 통해 줄곧 아래에서부터 야금야금 상대를 삼키는 법을 배웠다.

비록 잔상처가 늘어나고 체력이 떨어져 갔지만, 연지의 눈은 흔들임 없이 오로지 세렌의 빈틈만을 노리고 있었다.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도 전신에 오러를 두르는 걸 계속해서 지속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상대방을 빠르게 쓰러트려야 한다는 초조함은 공격에 무리한 힘을 싣게 만든다.

세렌의 검격이 더더욱 강해졌다.

그에 따라 오러의 증폭량이 늘었고 그러한 기운은 곧 검에 집중되었다.

이전보다 강해진 검격에 연지는 대응하지 못하기 시작했다.

그걸 깨달은 세렌의 공격이 더욱 거세져 가자, 연지는 막기보다는 피하는 것을 최대한 택했다.

그렇게 회피하던 연지의 발꿈치가 경기장의 끝에 닿았다.

더 이상 뒤로 물러날 수 없음을 깨달은 연지와 세렌의 눈이 마주쳤다.

이내 승기를 잡았다는 확신에 세렌의 눈동자가 강렬하게 빛났다.

그러자 이제껏 남겨 놓았던 오러를 모두 끌어모은 그녀의 검이 오러로 인해 영롱하게 빛났다.

이어서 세렌의 몸 위로 용의 피부가 돋아나고 그녀의 동공이 세로로 변했다.

그와 함께 마지막 일격을 하고자 세렌이 연지를 향해 검을 세차게 휘둘렀다.

'대부분 마지막 검격에는 자신의 전력을 담아. 끝내기 위한 일격, 그 일격에 온 힘을 담는 만큼 공격이 실패할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한 연지가 바닥을 박찼다.

피하는 것이 아닌 정면 돌파.

오러를 담은 세렌의 검 앞에서 조금도 주춤하지 않고, 오히려 달려드는 연지를 보며 세렌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 잠깐의 틈을 절대 놓치지 않기 위해 연지는 자신의 입에 브레스를 생성했다.

새어 나가려는 오러를 억누르고 억눌러 모은 연지의 브레스는, 검에 오러를 집중하느라 몸에 두르고 있던 오러가 약해진 세렌에게 확실한 피해를 줄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고 세렌도 검을 휘두르던 자세에서 즉시 브레스를 만들어 내었다.

숙련도가 다르다는 양 연지보다도 빠른 속도로 생성된 브레스가 연지의 것과 맹렬히 부딪쳤다.

콰아아아앙!

폭발하는 소리가 귓가를 맹렬하게 때리고, 지켜보던 관중들이 풍압에 의해 의자 뒤로 넘어졌다.

당황한 관중들이 급히 몸을 일으켜 경기장 쪽을 바라보았지만, 브레스의 의해 자욱해진 연기가 주변의 시야를 가렸다.

연지는 브레스를 쏘아 낸 뒤에도 멈추지 않았다.

세렌의 브레스로 인해 상당한 열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바로 앞에서 나타났다.

그 순간 세렌의 검이 재차 휘둘러졌다.

이미 자세를 잡았던 세렌은 연지를 향해 맹렬히 공격했고, 연지는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검을 내질렀다.

내지른 두 개의 검들이 서로를 향해 휘둘러진다.

먼저 베는 자가 승리하는 상황.

그 사실을 깨닫고 둘의 오러가 주변 공간마저 일그러트릴 만큼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 끝에 두 개의 검이 동시에 허공에서 우뚝 멈춰 섰다.

하나는 연지의 머리 위.

하나는 세렌의 목 앞.

교차되어 검을 멈춘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하고, 곧 입가에서 옅은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실전이었다면 누구의 목이 먼저 날아갔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대회에서는.

"세렌, 하연지 무승부."

이는 대회의 마무리를 의미했다.

"와아아아아아!"

사회자의 말이 들린 순간 숨을 참고 있던 관객들이 소리를 내지르며 환호성을 터트렸다.

그 환호성은 세렌보다는 연지를 향해 있었다.

소드 마스터급인 세렌을 상대로 소드 엑스퍼트인 연지가 무승부로 이끌어 내었다.

실전이었다면 결국 그 끝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연지는 급의 차이를 극복하고 놀라운 경기를 보여 준 것이다.

경기가 끝나자, 연지는 그대로 내려가 대기석에서 치료를 받았다.

마지막 브레스에서 두 사람의 차이는 명백했다.

연지는 세렌의 브레스를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오러를 두르지 못했기에 열상을 입었다.

그에 반해 세렌 쪽은 브레스가 날아들자마자 다시 자신의 몸에 오러를 일으키며 연지의 공격을 견뎠다.

그 증거로 열상을 입은 연지에 비해 세렌은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기회를 노린 연지는 비록 승리는 아닐지언정 무승부로 결과를 이끌어 내었다.

'뭐, 정작 본인은....'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관중석을 지나 참가자 대기실로 향했다.

그곳의 관리원에게 연지의 부모임을 알리고 복도를 걷던 나는 방 앞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방 안에는 연지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나를 힐끔 보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런 뒤 가까이 다가온 연지는 말없이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곧 얼굴을 파묻은 채로 연지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나는 녀석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연지는 승리를 향한 집착이 강하다.

그리고 냉정하게 승부의 결과를 볼 줄 안다.

앞에서 말했듯이 대회이니 무승부로 결과가 난 것이지, 종합적으로 따져 보았을 때는 사실상 세렌의 승리였다.

실제로 연지의 검이 세렌의 목에 닿기 직전 그녀의 몸에는 다시금 오러가 피어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 오러는 연지가 벨 수 없는 영역이었다.

대회가 아니었다면 결국 연지의 검은 그녀에게 닿지 못하고 세렌의 검에 베였을 것이다.

"만날 나한테 졌으면서, 분한 거냐?"

처음 나한테 졌을 때도 이렇게 분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한테 수없이 져가면서 다른 의미로 마음에 새겨 둔 게 있는 거겠지.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지지 않겠다고.

"안 졌어. 비겼단 말이야."

투정 부리듯 외치는 연지를 보고 어깨를 으쓱거린 나는 녀석을 품에서 떼어 놓았다.

연지의 얼굴은 콧물과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그녀는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보이기 싫다는 양 마구 비볐다.

"내가 키운 녀석은 무조건 최강이어야 해."

"그럼 난 잘못 자란 거네."

"아니, 덜 큰 거지. 아직 멀었단 거야."

그리 말한 나는 연지를 두고 그녀에게 물었다.

"넌 앞으로 뭐가 되고 싶냐?"

검술에 대한 재능을 밑바탕으로 생겼던 막연히 강해지고 싶은 마음.

그리고 나와의 수련 속에서 분함이 뒤섞여 막연히 강자의 뒤를 뒤쫓았던 마음.

갈피를 잡지 못했던 그 마음은 지금 연지에게 새로운 길을 내어 주려 할 것이다.

사람에게 목표 의식은 중요하다.

막연한 것보다도 확고한 목표가 그 사람을 보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들어 준다.

내가 과거에 아무런 목표도 없이 살아왔기에 나는 그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어찌 되었든 크라운 로드에 들어왔기 때문이니까.

"...강해지고 싶어."

"얼마큼."

"누구한테도 지지 않을 만큼."

그런 연지에게 나는 천장을 가리켰다.

"이 위에 뭐가 있는지 기억하냐?"

"용족들의 세계 지룡천."

연지가 15살이 되고 나서야 개방될 31층의 스테이지 지룡천.

그곳을 언급한 순간 연지의 눈이 내게로 향했다.

"드래곤 로드는 이 세계에서 최강의 자리다. 네가 앞으로 만날 모든 존재들의 최고위. 될 수 있겠냐?"

물음을 던져 연지의 마음속에 파문을 일으켰다.

고작 10살밖에 안 된 꼬맹이지만, 어리다고 해서 마음가짐이 어른보다 못한 것이 아니다.

할 수 있겠냐는 내 물음을 듣고 연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껌이야. 드래곤 로드도 되고, 전부 쓰러트려서 최강이 된 뒤에 너도 이길 거니까."

"마지막은 절대 불가능하겠지만 말이야."

확고한 목표 의식을 보인 연지에게 나는 가벼운 미소를 지어 주곤 고갯짓했다.

"나가자. 마음먹었으면 그걸 책임질 수 있을 만큼 강해져야 할 테니까."

아까까지 분했던 감정은 이미 잊은 듯 연지는 투지를 불태웠다.

좋다. 이걸로 연지에게 의지는 확실히 심어 두었다.

'이제 더 빡세게 굴릴 수 있겠군.'

저 정도 의지면 앞으로 내가 어떻게 굴려도 잘 따라와 주겠지.

내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연지는 전혀 모르는 듯싶었지만, 나는 그저 녀석이 얼마나 더 성장할지 기대할 뿐이었다.

['30층의 주인' '하늘을 걷는 신사'가 당신에게 고개를 절레절레 젓습니다.]

62화

레벨, 스텟, 그것은 절대적인 수치다.

가끔 클래스로 레벨과 스텟의 격차를 뒤집을 때도 있지만, 그것은 차이를 극복할 만큼이나 강한 클래스의 경우.

대부분은 레벨과 스텟의 격차 앞에 무릎 꿇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층에 거주하는 등장인물들에게마저도 적용된다.

그러나 레벨은 일정 이상부터 오르는 것이 더디다.

레벨을 올리기 위해 필요한 건 경험치.

경험치란 단순히 몬스터를 쓰러트리는 것부터 시작해 깨달음과 같은 정신적인 각성까지 다양하게 얻을 수 있다.

등장인물들은 회귀자와 달리 스테이터스를 마음대로 올릴 수 없다.

그들도 계속해서 레벨업은 하지만, 스테이터스는 제멋대로 오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와 달리 그들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노화된 몸에 의해 스테이터스가 반감되는 부정적인 효과도 존재한다.

'하지만 경험치를 얻는 방식은 우리와 같아. 레벨이 오르면 오를수록 경험치의 요구량이 많아지는 것마저.'

연지의 현재 레벨은 79.

동급의 몬스터를 1,000마리는 잡아야 1업을 할까 말까 한 레벨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빠른 속도로 레벨을 올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하다.

더 높은 레벨의 몬스터를 많이 잡으면 그만이다.

클래스가 없는 연지는 나와 같은 방식으로 레벨업을 할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대회를 끝마친 뒤, 곧바로 연지를 사냥터로 데려왔다.

키우는 것에 초점을 맞춰 준 덕분에 30층은 1레벨대부터 300레벨 사냥터까지 다양하게 있다.

덕분에 나는 사냥할 몬스터들을 마음껏 고를 수 있었고, 그 결과 연지보다 20레벨 높은 녀석들이 잔뜩 있는 사냥터에 갈 수 있었다.

20레벨 이상 높다는 것은 몬스터들이 전부 소드 마스터급은 된다는 소리.

이런 녀석들이 만약 어느 마을이나 나라로 쳐들어가면 순식간에 그곳이 없어지겠지만, 층의 규율 때문인지 사냥터 밖으로는 나가지 않고 있었다.

'이거, 완전히 참가자들한테도 유익한 층이잖아. 마음먹으면 300레벨까지는 여기서도 올리겠는데.'

5년이라는 시간, 고레벨대의 몬스터들, 그리고 마을이라는 안전지대.

한 번이라도 회귀를 겪어 본 녀석들이라면 이러한 사실을 놓칠 리가 없다.

만약 마음먹고 악용했다면 15년이 지날 때 층을 포기하고 다시 도전하면서 계속해서 성장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소리였다.

'물론 그런 미친 짓을 하려는 녀석들은 그리 많지 않겠지만, 또 없다고도 못하지.'

만약 그런 게 가능했다면, 나와 동급의 녀석이 튀어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게 호락호락하지는 않겠지만 말이야.'

내가 특수한 경우지, 지금껏 가장 높은 레벨이었다는 황제마저 레벨 999가 고작이었다.

물론 그 정도의 레벨과 스텟 수치는 최전선에 선다고 한들, 5년 동안 아무리 노력해도 도달할 수 있을 법한 수치가 아니지만.

결국 좋은 사냥터가 있다고 해도 15년이라는 시간을 온전히 투자해도 올리는 데 한계치는 명백히 존재할 것이다.

게다가 이 층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자식을 드래곤 로드에 도전할 수 있도록 키우는 것.

그걸 소홀히 했다가는 다음 층 공략이 힘들어진다.

'그래도 참가자 녀석들은 이번 층을 이용해서 어떻게든 레벨을 올리겠지. 그 뜻은 곧 다음 층부터 다른 녀석들도 공략 속도가 빨라질 거란 소리고.'

회귀자들이 이 층을 기회로 삼지 않을 리가 없다.

대표적으로 검왕 쪽이 그렇다.

분명 다음에 만났을 때는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해져서 나타나리라.

그래봤자 나한테는 안 되겠지만.

"저걸 잡으라고?"

"왜, 이제 와서 쫄았냐?"

절벽의 아래에 우글거리는 마스터급 몬스터 집단을 보고 연지가 되묻자, 나는 환한 미소로 대답해 주었다.

내 도발에 울컥한 연지는 눈살을 찌푸리곤 검을 뽑았다.

"쫄 리가 없잖아!"

"그래, 그럼 가라."

그녀의 외침을 듣고 나는 망설임 없이 연지를 절벽 아래로 걷어찼다.

순식간에 내 발의 차인 연지가 당황한 듯 동그랗게 눈을 뜨더니, 곧 비명과 함께 욕설을 내뱉으며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곧이어 아래에서 몬스터들과 연지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저래 보여도 나에 의해 매일 같이 몬스터 사냥에 나서던 연지다.

그때보다 수준을 훨씬 더 올리긴 했지만, 쉽게 당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 내가 직접 따라온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자, 시작하자고. 파라만의 피리."

내 입에서 휘파람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휘파람 소리는 산속 곳곳으로 퍼져 나갔고, 곧이어 산맥의 끝자락부터 무수한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파라만의 피리의 권능에 홀린 몬스터들이 모조리 이곳으로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래에서 연지의 비명이 들려왔다.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파라만의 피리를 계속해서 불었고, 그 결과 연지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처지가 되었다.

물론 그녀가 죽을 일은 없다.

내가 온 이유도 그러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니까.

'죽기 직전까지 경험치를 쌓는 게 당분간의 목표.'

레벨과 스텟이 규격보다 높아지면 깨달음이 없어도 오러는 저절로 개방된다.

현실적으로 레벨을 올리는 것보다 깨달음을 얻는 게 더 빠르기에 후자를 우선시하는 것뿐.

그렇기에 레벨을 단시간에 상승하기 위해서는 이 방식이 최선이다.

그러면서 나는 연지가 도저히 이기지 못할 수준의 몬스터는 오러로 적당히 물렸다.

아무리 그래도 수준은 맞춰 줘야지.

그렇게 연지가 몬스터 소굴에서 꼬박 하루를 버텼다.

녀석은 검을 휘두르는 힘이 완전히 사라져 눈동자가 풀린 채 바닥에 쓰러졌다.

그런 연지의 앞에 몬스터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들려던 순간, 내가 절벽에서 내려왔다.

내가 등장하자마자 움직임을 멈춘 몬스터들을 두고, 연지를 절벽 위에 데려온 뒤 회복 약을 전신에 뿌렸다.

"흐악, 허억!"

이후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연지가 몸을 한 차례 파르르 떨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겨우 두려움이라는 것을 깨닫기라도 한 양 그녀는 절레절레 고갯짓했다.

"일어났냐?"

내 물음을 듣고 연지는 나를 획 돌아보았다.

맹렬히 노려보는 그 눈동자에는 분노가 섞여 있었고, 나는 그런 연지를 보며 말했다.

"뭘 봐. 또 갈 건데."

"가다니? 뭘...."

녀석이 의문을 품는 찰나, 나는 이미 연지의 목덜미를 잡고 들어 올리고 있었다.

"악, 아악! 놔, 놔! 이 미친놈아!"

내가 무엇을 하려는 지 눈치챈 연지가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지만, 나는 꿈적도 안 하고 악마와도 같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튜토리얼 재밌었냐? 이게 본편이야."

"악마! 사탄! 쓰레기! 머저리! 사이코패스!"

자기가 아는 단어를 모조리 내뱉고 있는 연지를 든 채 절벽 앞에 도착한 나는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몬스터들을 보며 말했다.

"네가 누구한테도 지지 않을 만큼 강해지고 싶다고 했지."

연지의 어깨가 한차례 움찔거렸다.

"그럼 적어도 저런 몬스터는 아무렇지 않게 다 잡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냐."

"상식을 넘어섰잖아!"

"상식을 지켜서 최강이 될 수 있을 리가 있나. 사자는 자신의 새끼를 절벽에서 떨어트리는 법."

환한 미소와 함께 잡고 있던 연지의 목덜미를 놓은 나는 떨어지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열심히 해 봐. 차기 최강."

"하천성, 이 개쓰레기야!"

그리고 비명 속에서 연지는 다시 몬스터 소굴로 떨어졌다.

저거 매일 같이 '너, 너.'거리더니만, 이제는 날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군.

아무렴 어때 하는 생각과 함께 나는 또다시 연지가 실신할 때까지 기다릴 뿐이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1년이 지났다.

처음 3달간은 처음과 같이 실신을 반복했으나, 도중부터는 연지가 쓰러지는 일이 현저히 줄어 나갔다.

극한의 상황에 몇 번이나 놓이고 나니 연지의 담력이 늘은 것도 있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본인도 자신의 성장세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나는 과감하게 시간 생략 기능도 사용하기 시작했다.

원래도 강함에 집착하던 녀석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이후에는 아예 처음부터 내게 회복 약을 받은 다음 내려가 싸웠다.

당연히 사냥터는 연지가 레벨이 오를 때마다 계속해서 높은 곳으로 옮겼으며, 그래서 싸움 도중 위험한 적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연지 나름대로 그러한 위험을 헤쳐 나가면서 그녀는 더욱더 성장했고, 어느새 혼자 내버려 둬도 스스로 할 정도가 되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시간 생략 기능을 사용하기를 반복한 결과, 어느덧 2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갔다.

올해로 13살이 된 연지는 지난 3년간 몬스터 소굴에서 뒹굴기를 반복했고, 그로 인해 그녀의 레벨은 이전보다 훨씬 더 올랐다.

거기에 영약을 꾸준히 섭취한 덕분인지 신체도 쭉쭉 성장해 13살임에도 불구하고 연지는 벌써 165cm의 키를 가지게 되었으나, 최근에는 성장이 멈춘 듯싶었다.

어느덧 소드 마스터를 돌파한 연지의 검은 날이 가면 갈수록 날카롭게 연마되어 갔다.

"죽어어어어!"

그리고 그렇게 되고 나서 연지는 종종 나에게 덤벼드는 경우가 생겼다.

마치 자신이 어느 정도 성장했는지 살피기라도 하려는 양 내가 적당히 누워서 쉬고 있으면 그 틈을 노려 급습했다.

물론 그때마다 깔끔하게 조져 주었다.

연지는 분한 듯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도 이러고 나면 한 달 정도는 나한테 덤비지 않고 수련에 매진했다.

최근 들어서는 쉬는 와중에도 오러를 정제하기 시작했다.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은 연지는 주변의 오러를 느끼며 호흡하고 차츰차츰 그에 대해 깨우쳐 나갔다.

폭발적인 육체 성장을 따라 정신적 성장도 함께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나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30층의 주인' '하늘을 걷는 신사'가 그것이 부모의 흐뭇함이라고 알려 줍니다.]

지랄하고 있네.

저대로 성장해 주면 31층 공략이 쉬울 것 같으니까 이러는 것뿐이다.

"야, 하연지."

그리고 그녀가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수준에 올랐을 때, 나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녀석의 머리 앞에 섰다.

"나 어디 좀 갔다 온다."

"왜, 마을 가게?"

"아니, 이번에는 멀리 갈 거야. 한 1년은 걸릴 거다."

내 말을 듣고 연지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지난 4년간 연지와 나는 몬스터 소굴에서 거의 온종일 같이 있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 내가 갑자기 1년씩이나 자리를 비우겠다고 하니, 녀석도 놀란 것이다.

"드디어 그 낯짝 안 봐도 괜찮은 거야?"

하하, 죽일까.

"멋대로 생각해. 이제 너 혼자서도 충분하잖냐?"

내 말을 듣고 연지는 잠깐 볼을 긁적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돌아올 거지?"

"왜 쓸쓸하냐?"

"그런 거 안 느끼거든. 이제 와서 아빠 행세하려 하지 마."

연지는 건방진 표정을 지었다.

이마의 딱밤 하나 때려 줄까 싶었지만, 됐다고 생각한 나는 녀석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럼 1년간 끝내 놔라. 돌아왔을 때 이도 저도 아니면 혼날 줄 알아."

"그때쯤이면 나한테 손도 못 댈걸?"

"그건 두고 볼 일이지."

그렇게 연지와 이야기를 마친 후, 1년간 본격적으로 30층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혹여나 있을 클래스를 찾아보았다.

층에는 대부분 새로운 클래스를 얻을 단서가 존재한다.

그 단서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 결과 나는 딱 한 가지 괜찮은 클래스를 찾을 수 있었다.

[세계의 끝자락에 있는 용천성의 마지막 잔상을 죽였습니다.]

[A클래스 용천성의 용포가 지급됩니다. 받으시겠습니까? YES/NO]

A클래스. S급 클래스는 아니라지만, 그래도 A급이다.

클래스에는 큰 연이 없는 나에게 가장 높았던 클래스는 고작해야 B급인 검의 길.

그렇기에 여기서 A클래스가 등장한 건 상당한 행운이었다.

"YES."

대답을 내뱉은 순간 클래스가 몸에 깃들어졌다.

나는 즉시 클래스 창을 열었고 내용을 확인했다.

63화

[용천성의 용포(A클래스) ― 유지형]

타입 : 액티브(active)

발동 시 당신의 몸에 반투명한 용포가 둘립니다. 당신의 오러에 따라 용포는 보다 강력한 방어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용포는 타인에게도 사용 가능합니다! 좋아하는 이성에게 용포를 벗어 멋지게 둘러 주면 당신도 드라마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단, 주의하세요. 전(電) 속성 혹은 운(雲) 속성 오러를 가진 사람이 착용할 경우 적으로 인식된 자를 용포가 자동적으로 공격합니다.

방어계 특화 클래스인가.

체력이 높은 나에게는 그리 중요한 클래스는 아니지만, 타인에게 써 줄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유익하다.

층을 공략하는 도중 만약 등장인물을 지켜야 할 때가 온다면, 용천성의 용포는 유용하게 사용 가능하리라.

'층을 공략하는 데 도움 되는 클래스로군. 구천옥녀를 보고 그런 종류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긴 했는데, 나쁘지 않네.'

게다가 전 속성 오러의 부가 효과도 마음에 든다.

자신의 능력 여하에 따라 강해지는 클래스이니 여기저기 쓸 곳이 많으리라.

이걸 얻기 전, 여러 일에 휘말렸던 나는 지난 1년을 떠올렸다.

리치 왕에게서 천하절색이라던 공주를 구출하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오크 족이었다던가.

그리고 그 오크 족이 내 씨앗을 원한다며 달려들었을 때는 다시 생각해도 진절머리 난다.

물론 그걸 계기로 용천성과 이어져 클래스를 얻은 것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1년이나 투자했으면 나도 S급 클래스 정도는 튀어나와 줄 것이지.'

나는 클래스 쪽에는 항상 운이 없었다.

5회차나 살아왔음에도 고작해야 검의 길이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높은 클래스라는 게 그 증거다.

물론 이번 회차에는 쓰레기 클래스들을 조합해 S급 클래스 이상의 효율은 봤다지만, 그래도 참 운 한번 지지리 없는 것이다.

「형님은 참 클래스 복은 없는 거 같습니다. 괜찮은 클래스만 있었어도 황제 친위대는 들어가지 않았겠습니까?」

과거에 내 옆에서 촐랑거리던 한 녀석이 떠올랐다.

마지막에 죽을 때 크라운 로드를 깨 달라고 눈물 흘리며 감성 팔이 하던 녀석이.

고개를 저어 회상에서 깬 나는 지금쯤 연지가 머물고 있을 사냥터에 도착했다.

1년씩이나 얼굴을 보지 않았던 만큼 녀석이 어느 정도로 성장했는지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자네, 지금 태화천산에 들어가려는 겐가?"

산 앞에 도착한 순간, 바위에 앉아 있던 노인이 이쪽을 보며 물어왔다.

태화천산이라 불리는 이곳은 제천대성이 숨을 거뒀다는 전설의 산이다.

이곳에서 나타나는 몬스터의 평균 레벨 대는 300대이며, 30층에 주어진 최종 사냥터라고 봐도 무방했다.

"죽을 속셈이 아니라면 돌아가게. 이곳은 사람이 들어갈 곳이 아니야."

"네가 뭔데? 이곳에 파수꾼이라도 돼?"

내 물음을 듣고 노인은 끌끌하며 가볍게 웃었다.

"아쉽게도 파수꾼은 아닐세. 나는 이곳 태화천산에 기운에 묶여 버린 지박령. 그저 자네 같은 젊은이들이 태화천산의 소문을 듣고 들어가 죽는 꼴을 지켜보는 영일 뿐일세."

"그렇다면 몇 달 전쯤에 용족 한 명이 들어간 것도 봤겠네?"

"...용족, 기억하네. 매우 어린 여자애였지. 하지만 그 아이에게서 나오는 기운은 범상치 않았어. 태화천산도 그 아이를 기다렸다는 듯 받아들였고. 지금까지 살아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산에 묶인 자신은 막지 못했다는 양 쓸쓸해 보이는 눈동자를 취하는 그를 보고 나는 태화천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다리게. 무슨 목적인지는 모르겠다만, 그 아이는 그래도 강자였네. 자네 같은 자는 들어가는 즉시 태화천산의 기운에 짓눌려 죽을 걸세!"

"그거 알아? 사람은 가까이 있는 나무는 볼 수 있지만, 그 나무가 뿌리 내린 산은 볼 수 없는 거."

"무슨 소리를...."

"내가 들어가는 걸 계속 지켜봐 봐. 뭔가 보이는 게 있을 거다."

그리 말한 나는 노인을 두고 태화천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참을 걸었을까, 저 멀리서 노인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마치 인간이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았다는 양 벌벌 떠는 그의 목소리를 뒤에 두고 나는 태화천산을 올랐다.

[태화천산의 기운이 당신을 짓누릅니다.]

[무력화의 반지가 발동됩니다.]

[태화천산의 기운이 50% 반감됩니다.]

디버프인가, 귀찮게 하는군.

나는 짜증스레 오러를 주위에 확산시켰다.

[당신의 마력 수치가 너무 높습니다. 태화천산의 기운이 오히려 짓눌립니다.]

[태화천산의 기운이 한순간에 소멸되었습니다.]

[태화천산의 기운에 묶여 있던 지박령들이 풀려났습니다.]

아까 전 그 영이 풀려났나.

딱히 신경 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 나는 그렇게 산을 탔다.

얼마나 산속을 걸었을까. 멀지 않은 곳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울렸다.

그 발소리는 한두 개가 아니었고, 대부분 육중한 무게를 가지고 있는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 기척을 쫓아가자, 절벽의 끝을 내달리는 다수의 몬스터가 시선에 보였다.

전신에 둘린 갈색빛의 갈기와 털, 10m는 족히 될법한 몸집, 멧돼지와 소를 뒤섞어 놓은 듯한 외형. 이 괴수들은 바로 육중선안이라 불리는 295레벨의 몬스터였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급은 와야 겨우 잡을까 말까 한 육중선안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미친 듯이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 몸으로 잘도 절벽을 타고 내달렸다.

그리고 그 뒤를 쫓는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오늘 저녁밥!"

붉은색의 휘날리는 머리카락, 하도 오랫동안 입은 터라 낡아 빠진 옷, 그리고 먹잇감을 향해 맹렬히 번뜩이는 눈동자와 얼굴에 진하게 드러난 용족의 비늘.

내 딸인 하연지였다.

육중선안의 머리를 붙잡아 바닥의 내리꽂아 움직임을 제지한 연지는 등에 차고 있던 검을 즉시 휘둘러 녀석의 목을 깔끔히 베어 내었다.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검격을 몇 차례나 견뎌 낼 수 있는 육중선안의 피부는 연지의 검 앞에서는 무력한 것이었다.

절벽 아래에서 자신이 잡은 사냥감 위에 턱 하니 앉은 연지는 도망치는 나머지 육중선안들을 아쉬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런 연지를 보며 나는 기척을 완전히 숨기고, 육중선안을 옮기려는 녀석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러곤 연지가 나를 알아차리기 전에 자연스레 기척을 풀자, 녀석의 머리카락이 바짝 곤두서더니 즉시 검을 뽑았다.

그 순간 연지의 검에서 폭발적인 오러가 흘러나왔다.

호오, 이 녀석 소드 엠페러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나.

층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등장인물들의 기본 능력치가 오른다고는 하나 앞에서 한 번 언급한 적 있듯이 소드 엠페러 급은 50층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지금이 30층임을 감안하면 연지는 생각 이상으로 강해진 것이다.

"꼬맹이."

내가 녀석을 부르자 경계 섞인 눈이 되었던 연지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곤 이내 나를 인식한 듯 즉시 바닥을 박차고 뛰었다.

"죽어어어어!"

1년 만의 재회이건만 아주 멋진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도 소드 엠페러를 눈앞에 두더니, 과연 성장하긴 성장했나.

녀석의 검격은 제일 처음 휘두르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주변에 공기가 일그러지고 바람마저 소스라치게 놀라 연지의 검격을 피해 달아났다.

처음부터 전심전력으로 부딪쳐 오는 연지를 보고 별천도를 뽑은 나는 녀석의 검을 흘려주었다.

그러자 녀석의 검에 담긴 오러가 그대로 주변 일대를 날려 버렸다.

태화천산의 기운이 주위를 짓누르고 있음에도 연지의 오러를 견디지 못한 것이었다.

"쓸 만해졌네."

연지는 14살, 그리고 곧 며칠 뒤면 생일을 맞이해 15살이 될 예정이었다.

평생을 검에 바쳤음에도 그랜드 소드 마스터 최상급에서 그친 하블리아 첸이 연지를 보면 원통해 하겠군.

"쓸 만해졌다고? 태화천산에서도 더 이상 날 이길 수 있는 몬스터는 없거든?!"

그리 외친 연지가 연격을 날려 왔다.

전 속성과 그녀의 화염 마법이 휘감겨 첫 검격보다도 강해진 검격이 연이어 날아들었다.

나는 그때마다 느긋하게 연지의 검을 모조리 받아 쳐 낸 다음, 이번에는 내 차례라는 양 녀석의 배를 걷어차려 했다.

그러자 전보다 성장한 것은 거짓이 아니라는 양 막지 않고 오히려 도약하여 내 발 위에 올라선 연지는 그 상태로 몸을 회전해 검을 내 머리 쪽으로 휘둘렀다.

쩌엉!

오러를 집중시킨 손가락을 이용해 연지의 검을 막아 낸 나는, 눈을 커다랗게 뜨는 연지의 이마를 딱콩 하고 때렸다.

상당히 많은 오러를 담았기에 공간까지 일그러뜨릴 정도의 위력이 담긴 꿀밤에 이마를 맞은 연지는 순식간에 뒤로 날아가 태화천산의 절벽에 몸을 부딪쳤다.

그래도 육체가 어느 정도 성장한 모양인지 내게 이마를 맞은 것 말고는 별다른 상처가 없는 연지가 울상을 지은 채 나를 바라보았다.

"대체 뭐야. 뭘 어떻게 해야 그렇게 강해? 내가 1년 동안 얼마나 강해졌는데...."

"내가 좀 노력파거든."

언제나 노력하는 하천성이시다.

그리 말한 뒤, 나는 비적비적 일어나는 연지를 두고 그녀의 상태 창을 열었다.

[하연지]

[칭호 : 하천성의 딸/타고난 학살자/태화천산의 주인]

종족 : 드래곤

성별 : 여

나이 : 14세

LV.321

체력 359

마력 443

힘 320

지력 382

민첩 470

—스킬 창—

드래곤 변환[A랭크]

미니 브레스[A랭크]

파이어 볼[B랭크]

이그니스 글라디오[A랭크]

이그니스 오라[A랭크]

하연지식 검술[S랭크]

레벨 321, 그리고 레벨에 비해 훨씬 더 높은 스텟은 400레벨대 수준이었다.

레벨이 오를 때마다 분배할 수 있는 스텟 포인트가 다섯 개씩 주어지는 우리와 달리, 자동적으로 스텟이 오르는 등장인물은 보너스 스텟보다도 상승 폭이 높았다.

'게다가 종족 보너스도 있고.'

용족이 이 층에서 최강이라 불리는 이유는 일반 사람보다 레벨업을 할 때 스텟 상승 폭이 높다는 점이 가장 컸다.

거기에 스텟을 올리는 영약도 줄곧 먹여 왔고.

'스텟만 본다면 소드 엠페러에 도달할 만한데. 아직 그 정도는 아닌 모양이네.'

스텟으로 아예 찍어 눌러 버린다면 깨달음 따위 없이도 강해질 수 있지만, 연지의 스텟은 그 정도는 아니다.

단지, 소드 엠페러의 밑바탕이 될 수 있는 수준까지는 온 것이다.

"그동안 뭘 하다가 온 거야?"

"이것저것."

궁금증을 보이는 연지에게 대강 대답한 나는 태화천산의 주인이 된 녀석의 상태를 확인했다.

30층에 최대의 사냥터는 이곳 태화천산이다.

이러한 태화천산에서 주인이 되었다는 소리는 더 이상 사냥터에서 연지를 성장시키지 못한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1년 만에 봤는데 반갑지도 않아?"

"그런 감상이라도 해 주기를 바랐냐. 1년 동안 꽤나 감상적으로 됐네."

"말 참 못되게 해."

칫 하고 연지는 혀를 찼다.

그러면서도 티는 내지 않지만, 내가 자신을 다시 찾아온 것이 은근히 기쁜 듯싶었다.

"슬슬 몬스터 사냥은 졸업할 때가 된 모양이다."

졸업이라는 말에 연지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나는 시간 생략 기능을 계속해서 사용했다지만, 연지는 4년이라는 기간 동안 줄곧 몬스터 소굴 속에서 살아왔다.

실제로 그녀는 수렵인에 가까운 몰골이 되어 있었다.

64화

"정, 말로?"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는 듯 연지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이 세계에서 유명한 태화천산에서 마저 성장이 더뎌지기 시작한 만큼, 아무래도 바깥세상에 관심이 가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더 이상 널 성장 시킬만한 요소는 없는 것 같고. 드래곤 로드가 되려면 어느 정도 사람처럼은 보여야 하니까."

"그 말은 뭐야. 내가 지금 몬스터처럼 보이기라도 한다는 거야?"

"알긴 아네. 너 지금, 몬스터 그 자체야."

콕 짚어서 사실을 말해 주자 연지가 욱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14살의 소녀인걸. 지금 날 보면 너도나도 예쁘다고 칭찬하기 바쁠 거라고!"

저 자존감은 대체 어디서 흘러나오는 거지.

하긴, 이 녀석은 내 DNA를 물려받았으니.

외양은 내가 여자 모습일 때와 상당히 유사해졌다.

물론 날 닮은 이상 얼굴이 모자라지 않은 건 사실이다.

"됐고, 일단 따라와."

"어디 갈 건데?"

"씻으러. 네 꼴이 얼마나 엉망인지, 네 눈으로 직접 봐라."

"내 꼴이 이런 건 대부분 네 탓 아니야?"

녀석의 정론에 나는 한 차례 침묵했다.

"그럼 잘 씻고 살던가."

"태화천산의 강은 오러가 멋대로 범람해 있어서 차분하게 씻기 힘들단 말이야."

하긴, 이만큼 성장했어도 나처럼 태화천산의 기운 그 자체를 짓누르는 건 할 수 없겠지.

그렇게 연지와 함께 입구로 돌아오자, 그곳에 있는 바위에 자리하던 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방금의 메시지가 알려 준 것처럼 정말로 풀려난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내 앞에 흰색의 도복과 삿갓을 짓눌러 쓴 노인이 갑자기 나타났다.

"미안하네. 내 짧은 식견으로 자네 같은 사람을 몰라봤네."

그 노인은 아까 전 바위 위에 있던 노인이었다.

지박령에서 풀려났으면 다시 묶이기 전에 성불이나 할 것이지 왜 여기 있냐는 눈으로 보고 있자, 그는 내게 한 차례 고개를 숙였다.

"감사를 전하고 싶어서 이렇게 기다렸네."

"아, 그래."

어차피 의도한 것도 아니고 적당히 인사하고 사라지라는 양 내가 손짓하자, 그가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보다 자네, 좋은 검을 가지고 있군."

검이라는 말에 나는 별천도를 내려다보았다.

그야 좋은 검이긴 하지만. 설마 죽은 녀석이 남의 물건을 눈독이라도 들이려는 건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노인을 돌아보자, 그는 삿갓을 눌러쓰곤 입가에 띤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나는 신선 도복룡. 자네에게 감사의 의미로 검에 한 가지 좋은 걸 해 주겠네."

내가 반응하기도 전에 노인은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별천도가 빛을 머금었고, 이내 그의 모습이 반투명하게 변했다.

"기다려. 너 뭔 짓을 한 거야."

무슨 짓을 한 건지 가르쳐 주지 않고 성불하려는 그를 보며 내가 짜증스레 외치자, 그는 합장을 해 보였다.

"진명을 가진 성좌들에게 앞으로도 신념을 굽히지 말기를."

이어진 말에 내 눈동자가 커다랗게 떠졌다.

'사도?'

아니, 아니다.

사도가 저런 말을 내뱉을 리가 없다.

진명을 가진 성좌, 그러한 말을 50층 이하의 사도가 내뱉을 수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30층의 주인' '하늘을 걷는 신사'가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30층의 주인' '하늘을 걷는 신사'가 급히 항의를 합니다.]

뒤이어 30층의 성좌 '하늘을 걷는 신사'가 반발하며 외쳤다.

그러나 그 항의가 통할 리가 없다.

'50층 이상의 성좌들만이 가지는 진명.'

성좌에게 진명이란 일종의 계급이다.

즉, 방금 나타난 신선 도복룡이라는 자는 50층 이상의 성좌와 관련된 인물이라는 것이다.

'50층 이상의 성좌가 아래층에 개입하는 일은 잘 없는데.'

성좌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고 있는 건가.

5회차나 반복한 나라도 성좌들이 무슨 일을 꾸미는지 알 수는 없다.

['우웅'하고 '별천도'가 소리를 내뱉습니다.]

그러던 그때 눈앞에 뜬금없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내 고개가 천천히 별천도를 향해 내려가자, 그것이 나의 시선을 눈치챈 듯 부르르 떨었다.

['별천도'가 당신의 시선을 의식합니다.]

['별천도'가 당신에게 기쁨을 표현합니다.]

무슨, 잠깐, 이딴.

사고가 멋대로 정지했다.

별천도가 지금 성좌와 같은 방식으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별천도'는 개안을 했습니다. 자신을 통하여 성좌들이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전합니다.]

개안.

본래라면 50층 아래에서 내뱉어지지도 않을 말들이 별천도에게서 흘러 나왔다.

'썩을, 망할 성좌 놈들이.'

이가 빠득 갈렸다.

그렇군.

무슨 목적으로 나에게 이런 짓을 했는가라고 생각해 보니, 내 별천도를 자신들이 관람할 수 있는 카메라로 만들기 위해 그랬던 것이다.

성좌들은 기본적으로 관음을 즐기는 변태 녀석들이다.

새로운 흥밋거리가 있으면 매우 기뻐하고, 거기에 큰 관심을 가지며 다가온다.

녀석들은 흥미가 삶의 주된 목적인 것이다.

그런 그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내가 지금껏 성좌들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던 건, 이유가 있었다.

성좌들에게 제일 처음 존재가 알려지는 것은 50레벨부터 정해지는 지명이다.

내 기억상으로 성좌들에게는 일종의 네트워크가 존재한다.

지명은 그러한 성좌들의 네트워크에 등록되어 이름을 알리는 것이고, 그것으로 성좌들은 참가자들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지명으로 인해 50층이 넘어가면, 본격적으로 성좌들의 개입이 시작되지.'

50층 이전까지 성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에 드는 참가자에게 세례를 내려 권능을 하사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50층 이후부터 개입하는 진명을 가진 성좌들은 다르다.

그들은 세례를 넘어서 참가자의 배후성이 되어 줄 수 있다.

세례로 내려지는 권능은 대부분 미약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성좌가 직접 배후성이 된다면 성좌의 세례로 주는 권능 따위가 아니라, 그들의 능력 그 자체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50층 이후부터가 골치 아픈 것이다.

'성좌가 배후성이 되어 주는 건 참가자들만 해당하는 게 아니니까.'

내가 굳이 50층까지를 튜토리얼이라고 이야기한 것도 그러한 점 때문이다.

맨 처음 지명을 얻으면 그때부터 성좌가 참가자를 인식하며, 그자가 50층까지 어떤 식으로 성장하는지 성좌들은 지켜본다.

그리고 그 참가자의 행보에 따라, 배후성이 될지 말지를 선택한다.

그렇기에 아직 50레벨을 찍지 않아서 지명을 얻지 못했던 나는 성좌들에게 인식되지 않았을 텐데.

이제 와서 갑자기 성좌들이 나를 인식했다라.

['조소하는 신데렐라'가 슬그머니 고개를 숙입니다.]

['조소하는 신데렐라'가 조금 경솔했다며 사과합니다.]

그 순간 아주 오래전에 본 녀석의 말이 눈앞에 떠올랐다.

이 자식이 퍼트렸나.

앞에서 말했듯이 성좌에겐 네트워크가 존재한다.

조소하는 신데렐라는 제일 처음 나를 지목한 성좌다.

회차를 반복해도 1층은 언제나 조소하는 신데렐라다. 그리고 녀석 50층까지의 성좌 중 유일하게 진명을 가지고 있는 성좌.

그렇기에 지명도 없는 나를 선택한 그녀에게 의문을 품은 성좌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들이 네트워크를 통해 수소문한 결과 이렇게 된 모양이었다.

['조소하는 신데렐라'는 비밀을 지키고자 나름 노력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마 이건 사실이겠지.

만약 이 녀석이 처음부터 주변에 내 이야기를 퍼트리고 다녔다면, 진작 다른 성좌들이 나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30층에 오고 나서야 상황이 이렇게 된 건 그만큼 조소하는 신데렐라가 내 정보를 숨겨 줬다는 뜻이 된다.

됐다.

지명을 굳이 얻으려 하지 않았던 건 성좌 녀석들이 관음하는 게 기분 나빠서였다.

어차피 50층에 들어가게 되면 자연스레 벌어질 일이다.

내 강함은 진작에 규격 외였으니까.

'배후성에 의존할 생각은 없어.'

내가 기억하는 최상위 성좌들이라면 모를까, 떨거지 놈들에게는 관심 없다.

아쉬운 건 내가 이번 회차에서 줄곧 애용하던 별천도가 성좌 놈들의 관음용 카메라가 되어 버린 거지만.

['별천도'가 당신과 이야기할 수 있음에 즐거워합니다.]

지금껏 별천도와의 추억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버릴까.'

하지만 지금 와서 별천도만큼 괜찮은 검도 구하기 쉽지가 않은데.

['별천도'가 당신의 의중을 궁금해합니다.]

쯧, 좋은 검을 구하면 바로 바꾸든가 해야지.

['30층의 주인' '하늘을 걷는 신사'가 조촐하게 분노합니다.]

자신의 층의 다른 성좌들이 개입했다는 것에 하늘을 걷는 신사가 외쳤지만, 그 분노는 갈 곳 없는 분노일 뿐이었다.

진명을 가진 성좌에게 진명 없는 성좌가 대들어 봤자 위쪽은 코웃음 칠 뿐이다.

"뭐 해? 아까부터 멍하니 서서."

연지가 고개를 기울인 채 묻자, 나는 이쪽에는 신경 끄기로 했다.

성좌가 보든 말든 나는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하는 게 목적이다.

그렇담 지금 30층에 집중하는 게 가장 우선시 되어야만 하는 일이다.

"가자."

이후 나는 연지를 근처 마을로 데리고 가 우선 깨끗이 씻게 했다.

꾀죄죄한 연지는 투덜거렸지만, 자신도 씻는 건 싫지 않은 듯 한 시간 정도 목욕에 전념했다. 이후 바깥에 나온 연지는 겨우 사람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미리 마을에서 구매한 옷을 연지에게 주자 녀석은 불만 섞인 표정을 지었다.

"센스 구져."

"발가벗고 다니고 싶지?"

방금까지 거지꼴로 다닌 녀석이 내 센스가 어쩌고저쩌고.

내 말에도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기 옷을 내려다보는 연지를 보고, 짜증스레 한숨을 내쉰 나는 녀석에게 돈뭉치를 던졌다.

"그럼 네가 사와."

"좋아."

처음부터 이랬으면 되지 않았냐는 표정을 지은 연지는 그 뒤 곧바로 옷가게로 갔다.

"대체 뭐가 다른 거냐?"

잠시 후, 머리까지 해서 돌아온 연지의 모습을 보고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산 옷이랑 별반 달라진 게 없었기 때문이다.

"바지 색도 다르고 위에 입은 외투도 다르잖아. 바보야?"

10대의 관점은 도통 이해를 못 하겠다.

내 눈에는 거기서 거기다만.

연지를 보고 아무래도 좋다는 양 어깨를 으쓱인 나는 여관을 나온 뒤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몬스터 소굴을 나왔다는 것에 연지는 기쁜지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그래서 이제 뭐 해?"

"몬스터랑 싸웠으니 이제 사람이랑 싸워야지."

"이제 나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을걸?"

연지는 자신감 넘치게 대답했다.

확실히 1년간 30층 여기저기를 돌아다닌 내 생각도 연지와 비슷하다.

이 층에서 더 이상 연지를 이길 법한 녀석들은 없다.

자신보다 아래인 상대와 계속 싸워 봤자 득이 될 건 없다.

하지만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너희들 별천도를 통해 보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