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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도 있었어. 하지만 이제 나를 엄마라고 불러 준 아이들이니까. 이젠 이 아이들이 내 자식이야."

숨이 멎은 지안이를 품에 안고 날아오른 화초선은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자기가 이러고 있는 동안 아이들이 배를 굶고 있을지도 모른다.

비록 지안이를 살리지 못했지만 다른 아이들을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돌아가자. 지안아, 애들한테 돌아가자꾸나."

인간들이 한다던 장례식을 치르자.

내 마음속에 이 아이를 품고 살아가자.

슬픔은 언젠가 잊힌다.

훗날 지안이를 추억으로라도 기억할 수 있게 살아가자.

그러한 생각을 하며 화초선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제일 먼저 비친 것은 검은색 연기였다.

무언가 타오르는 듯한 연기를 본 화초선은 심상치 않음을 느꼈고 급히 집으로 날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불타고 있는 자신의 집이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전신에 번개를 맞은 양 화초선의 몸이 덜덜 떨렸다.

"애들아, 애들아!"

지안이를 내려 두고 화초선은 불길로 뛰어들었다.

그녀의 몸은 불길에 피해를 입지 않는다.

그렇기에 아이들을 찾고자 급히 뛰어든 그녀는 곧 자신의 집에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집의 입구가 모조리 막혀 있었다.

누군가 나무를 덧대 망치질을 한 듯 못 자국이 여럿 나 있었다.

그걸 본 화초선은 아이들을 찾았다.

그리고 아이들의 방으로 들어온 순간, 화초선은 믿지 못할 광경을 보았다.

그곳엔 아이들이 쌓여 있었다.

환상종, 인간 할 것 없이 모든 아이들이 칼에 난도질당한 채 방 한구석에 쌓여 있었다.

불길이 붙어 하나둘 타오르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화초선은 비명을 질렀다.

얼굴을 감싸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미친 듯이 아이들에게 뛰어간 화초선은 아이들을 데리고 집 밖으로 나왔다.

그러곤 한 명씩, 한 명씩 모두 확인해 보았지만, 아이들 전원의 숨이 끊어져 있었다.

"엄, 마."

그 순간 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의 목소리에 흠칫한 화초선이 급히 숲속으로 뛰어갔다.

거기에는 전염병이 걸린 듯 상태가 엉망인 남자들에게 붙잡힌 예찬이가 있었다.

이미 분노의 물든 그들을 일격에 모조리 죽였고, 예찬이를 품에 안았다.

"예찬아, 괜찮아. 엄마가 왔어."

"미, 안해. 갑자, 기 사람, 들이 집에 들이닥쳐서. 전, 염병이 우리, 때문, 이라고. 그래, 서 태워야, 한다고."

그리 말한 예찬이는 울고 있었다.

화초선의 품에 안겨 사실을 전해야 한다는 듯 겨우겨우 입을 떼었다.

예찬이는 이미 칼에 찔렸다.

깊숙하게 찔린 칼은 내장을 헤집어 놓았고 그 결과 예찬이는 죽어 가고 있었다.

"엄, 마가 지켜, 주라고 했는데. 그 사람, 들이 애들을 죽이고 집 입구를 모, 조리 막, 고 불태웠어. 불태워 버렸어. 엄마, 엄마 애들이...."

더 이상 앞조차 보이지 않는 듯 허공을 휘젓는 예찬이를 보고 그녀는 그를 꽈악 끌어안았다.

"엄...마, 미안."

그리고 그 말 한마디를 끝으로 예찬이의 숨이 멎었다.

"아, 아아."

그 모습을 보고 터져 나오는 감정을 주체 못 한 화초선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 내렸다.

이 아이가 어째서 마지막으로 말해야 하는 것이 자신에 대한 사죄란 말인가.

어째서 그저 잘 자라나기만 하면 되는 아이들이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가.

세상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이 대체, 왜.

화초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전염병에 의해 정신이 망가진 그들의 분노가 아이들을 향했다는 것을 알고, 인간의 지독한 나약함에 치를 떨었다.

인간은 똑같은 실수를 계속해서 반복한다.

자신이 일궈 낸 미래를 불태워 버린 그들에게 화초선은 이제껏 없던 증오심을 느꼈다.

"지워 버리겠어. 인간 같은 거, 모조리 다."

분노의 화신이 된 그녀는 모든 것을 지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세상에 분노했다.

인간을 증오했다.

이상적인 미래를 이야기하던 그녀는 이제 없다.

미래는 무너졌다.

이런 현재가 존재하는 이상 그런 미래 따위 오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녀는 모든 것을 지워 나갔다.

그녀는 자신의 권능인 환상종 조종으로 수만 마리의 환상종들을 조종하여 인간의 나라를 덮쳤다.

화초선은 아이들이 떠오를 때마다 인간의 나라를 하나씩 지웠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세상이 멸망을 향해 나아 가고 있을 때 그 순간 한 명의 남자가 앞에 나타났다.

화초선도 잘 알고 있는 남자, 호백산이었다.

그는 환상잡이로서 이제는 사양신보다 더한 파멸의 화신이 된 화초선을 막고자 뛰어들었다.

"화초선!"

그녀의 이름을 부른 호백산은 매번 화초선에게 맞섰다.

맞서고, 또 맞섰다.

그럴 때마다 호백산은 쓰러졌고 나뒹굴었다.

「왜, 왜 너는.」

그러나 이상하게도 호백산이 쓰러질 때쯤 화초선은 아이들이 죽어 가던 모습 대신 자신을 엄마라 부르고 호백산을 산타라 말하며 따르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때문인지 매번 호백산의 숨통을 끊어내지 못하고 화초선은 떠나갔다.

이후에도 그는 끈질기게 화초선을 막았다.

화초선은 호백산이 자신을 막을 때마다 물었다.

왜 자신을 막냐고, 왜 그렇게 망가져 가면서도 맞서냐고.

그러나 호백산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마치 그 답은 네가 알고 있지 않느냐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몇십 년.

어느 날을 기점으로 호백산이 나타나지 않았다.

나라 하나를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선 화초선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호백산은 자신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죽은 걸까, 아니, 그 녀석이 그렇게 쉽게 죽을 리가 없지.

아무래도 이전에 상처가 꽤 깊었던 모양이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녀석이 떨어져 나갔다며 작게 웃었던 화초선의 얼굴에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유일하게 자신을 막아 주던 그 녀석이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을 상대할 수 없는 걸까.

결국 호백산도.

「엄마, 산타 아저씨 언제 와?」

「산타? 그 녀석이 왜 산타야.」

「매일 선물을 놓고 가잖아.」

선물.

아이들이 해 주었던 말이 생각났다.

호백산은 아이들이 남겨 놓은 마지막 선물이었을까.

자신이 더 이상 과오를 저지르지 않게 막아 줄 그러한 선물.

"호백산."

그 날을 기점으로 화초선은 종적을 감추었다.

언젠가 분명 호백산이 자신을 또 막고자 나타날 것이라 의심치 않으며.

이 굴레에서 자신을 벗어나게 해 줄 수 있을 거라 믿으며.

그녀는 호백산이 다시 일어서기를 기다렸다.

* * *

"여기까지야."

구천옥녀의 말이 끝마쳐지자 나는 화초선이 날아가 버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녀석은 마지막까지 호백산을 믿고 사양신이 되는 것을 거부했었나.

화초선의 과거사를 듣고 확신했다.

내 손으로 그녀를 죽인다 한들 이번 층은 클리어하지 못한다.

그녀의 죽음은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아니었다.

화초선의 끝도, 호백산의 마지막도 고작 이렇게 끝나야 할 것들이 아니었다.

"콜록."

그 순간 내 입에서 기침이 새어 나왔다.

입가를 가렸던 손을 보자 거기에는 핏물이 묻어 있었고 구천옥녀 쪽도 작게 기침을 내뱉고 있었다.

"쯧, 화초선의 전염병이야. 그래도 이 층에서만 걸리는 병인지 나가면 바로 나으니까. 문제는 없어."

환상종도 전염병에 걸리게 한다더니 내 오러도 뚫고 온다 이건가.

"구천옥녀, 난 일주일 뒤 바로 다시 층에 도전하겠다."

"뭔가 확신한 모양이네."

"그래, 확신했어."

멸망해 가는 세계를 돌아보며 나는 이 세계의 끝이 무엇임을 깨달았다.

"27층의 공략을 포기하겠다."

['25층의 주인' '잔혹함에 물든 인사'가 포기를 받아들입니다.]

['25층의 주인' '잔혹함에 물든 인사'가 당신의 다음 도전에 기대를 보입니다.]

포기 선언을 내린 순간 나는 24.5층으로 돌아와 있었다.

화초선이 사양신이 되고 나서 이미 다른 사람들은 포기 선언을 했던 모양인지 저마다 분주하게 다음 도전을 어떻게 할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나는 그 속에서 홀로 걸었다.

앞으로 일주일.

그 일주일 동안 나는 검의 길을 단련하며 차분히 기다릴 생각이었다.

이번 층의 공략 방법을 확실히 안 이상 남은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하천성, 일주일 뒤 여기서 기다리마."

그 순간 뒤에서 나를 따라 포기한 구천옥녀의 말이 들려왔다.

그녀를 힐끔 본 나는 알아서 하라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동료들에게 합류하는 그녀를 뒤로 한 채 걸어 나갔다.

* * *

일주일 뒤.

아직 차가운 공기가 남아 있는 새벽 아침 거리로 나온 나는 다음 층을 위해 계단 앞으로 걸어갔다.

그런 순간 내 눈에 띈 것은 네 사람이었다.

대협, 마술사, 구천옥녀 그리고 검왕.

내가 오자 넷은 내 쪽으로 시선을 모았고 나는 한숨을 내쉰 채 말했다.

"빨리도 왔구만. 혹시나 내가 몰래 클리어하고 도망갈까 싶기라도 했냐."

"의심하고 있긴 하지?"

구천옥녀가 비아냥거리자 나는 혀를 차곤 계단으로 다가갔다.

"하천성, 우리가 도울 건?"

그 순간 옆에 있는 검왕이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진심으로 돕겠다는 표정이었고 나는 그런 검왕을 보며 흥하고 콧방귀를 내쉬었다.

"너희 따위의 도움을 바랄까 보냐."

"...당신 정말 한결같구나."

검왕은 허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나답다는 양 씁쓸한 미소도 같이 띄웠다.

"저런 놈은 평생 안 변해. 자존심은 더럽게 세 가지고."

구천옥녀가 혀를 찼다.

"다른 의미로 올곧은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겠나."

대협이 한마디 거들었다.

"호핫, 함께 층에 들어간다는 점에서 이미 동료 느낌이지만요."

마술사가 싱글벙글거렸다.

그런 그들을 뒤로 한 채 나는 층에 올랐다.

필요 없다.

이 층의 공략을 위해서는 '나'조차도.

38화

뒷말은 그들에게 해 주지 않은 채 나는 감겼던 눈을 떴다.

['잔혹함에 물든 인사'가 관장하는 25층 Stage '환상에 잡아 먹힌 이들' 에 입장하였습니다.]

['25층의 주인' '잔혹함에 물든 인사'가 한 번 인사를 해 보입니다.]

['25층의 주인' '잔혹함에 물든 인사'가 설명을 적당히 생략합니다.]

이미 내가 클리어 조건을 알아냈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성좌는 설명조차도 생략해 주었다.

"도망쳐!"

그런 순간 처음과 같은 사람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함께 왔던 환상잡이들이 도주하고 낡은 동양식 건물 사이로 사양신이 얼굴을 내밀었다.

녀석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이전과 같이 달려들었고 나는 별천도를 뽑아 들었다.

육식(六式)

뇌뢰만참(雷雷万斬)

만 번의 베기가 이어졌다.

번개가 치고 만 조각으로 갈라진 사양신에게 손을 뻗은 순간 핏물이 몸에 물들었다.

[사양신의 핏물이 손으로 스며듭니다.]

[폭주한 사양신의 권능은 '전염', 그의 핏물이 당신을 환상종으로 만들려 합니다.]

이전과 같은 상황.

그리고.

[무력화의 반지가 발동됩니다.]

[환상종화가 50% 진행 도중 멈췄습니다.]

무력화의 반지가 발동된 뒤 팔이 검은색 비늘에 휘감기며 손톱이 새까맣게 변했다.

머리 위에 난 뿔까지 확인한 순간.

[권능 '전염'을 이어받았습니다.]

권능 '전염'을 이어받았다.

이걸로 밑 준비는 끝.

[축하합니다. 또 한 번 25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25층의 주인' '잔혹함에 물든 인사'가 이미 보상을 받은 당신에게 보상을 생략합니다.]

성좌 쪽에서도 25층 클리어를 알려 주었다.

고개를 들자 같이 들어왔을 검왕 쪽 일행이 보이지 않았다.

하긴, 처음에 25층은 개인 층이라고 설명했었다.

26층부터 통합되니 검왕 일행은 25층을 전부 통과하기 전까지는 나와 만나지 못할 것이다.

"편하게 됐네."

어차피 귀찮게 구는 녀석들이니 나는 오히려 좋아졌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조금만 기다리면 녀석들이 나타날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서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경계심이 가득한 기척을 느끼자마자 나는 그 방향으로 도약했고 곧이어 한 사람을 바닥에 깔아뭉갰다.

"아, 윽!"

그 대상은 호성아, 호백산의 딸이었다.

나에게 깔린 그녀는 오러까지 일으키며 벗어나려 했으나 내 힘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성아는 자신이 오러와 힘에서 밀린다는 사실에 경악했고, 그런 그녀를 구하고자 주위에서 무기들이 날아들었다.

하나 날아든 무기를 나는 아무렇지 않게 별천도를 휘둘러 박살 내었다.

무기를 잃은 자들이 놀란 표정을 짓고 멍하니 있을 때, 유일하게 이한만이 오러를 일으키며 내게 대항하려 했다.

"성아를 놔 줘!"

그러나 내게 덤벼든 이한은 한 손에 제압되었다.

성아와 같이 바닥에 눕혀진 이한은 빠져나가고자 발버둥 쳤고 귀찮아진 나는 녀석의 복부를 내리쳐 기절시켰다.

"이한!"

"걱정 마. 기절만 시켰으니까. 열쇠는 여기 있지."

성아의 바지 뒷주머니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 든 나는 녀석을 내버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아와 이한이 순식간에 제압된 탓에 다른 환상잡이들은 날 막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나는 성아의 집으로 향하는 열쇠 위에 오러를 일으키며 허공에 꽂았다.

그러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열리자 생겨난 문을 통해 그 안으로 들어섰다.

나를 보고 성아가 급히 따라오려 했으나 나는 이미 문을 잠근 뒤였다.

그렇게 내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복면을 쓴 자들이 무기를 들고 나타났다.

"비켜."

오러가 담긴 목소리가 퍼졌다.

단 한 번의 목소리로 전원의 몸이 굳었고 나에게 아무런 제지도 가하지 못했다.

그런 녀석들의 틈을 지나 마당을 따라 복도를 거닐던 나는 호백산이 있을 지하실로 내려왔다.

지하실에 내려오자마자 적이라 생각하여 나를 노리고 달려드는 자들이 있었으나 손쉽게 모두 제압해 주며 지하실 마지막 문을 열었다.

"꽤나 시끄럽게 등장하는군. 나원, 우리 백호 가문도 다 죽은 모양이야. 불청객 하나 못 막다니."

아쉽다며 혀를 차는 호백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어가는 자신을 한탄하며 화초선과의 마무리를 짓지 못한 그 목소리를 다시금 듣자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호백산은 앞으로 4일 뒤에 죽는다.

그렇기에 내가 이렇게 서둘러서 온 것이었다.

"호백산."

"내 이름을 아는 걸 보면 이미 우리 층을 들린 자인 모양이군. 미안하네. 나는 자네를 기억하지 못한다네."

투명한 유리 벽 너머의 침대에 걸터앉은 호백산은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직 자신의 죽음만을 기다리는 처지에 놓인 그에게 이 방은 마치 새를 가둬 둔 철장과도 같았다.

"그래, 네 말대로야. 나는 이 층의 너를 만나러 이전에 온 적이 있다. 그리고 너와 이야기를 나눴고 나는 너희 가문의 후계자가 되었었다."

"그렇게 소란스럽게 나타났음에도 아무런 상처도 없이 올 정도로 강함을 가졌으니 그럴만하네. 그래, 화초선은 쓰러트렸는가?"

"쓰러트리지 못했다. 그녀는 네가 죽은 뒤 사양신이 되어 버리니까."

그리고 이어진 내 말 한마디의 씁쓸한 표정이었던 호백산의 얼굴이 돌변했다.

마치 조금도 생각지 않던 것을 들었다는 양.

"그게 무슨 소리인가. 화초선이 사양신이 된다니."

"그 말 그대로다. 호백산, 화초선은 네가 죽은 뒤 사양신이 되어 이 세계를 멸망시켜. 그것도 순식간에 전 세계에 죽음의 병을 퍼트려서."

"멸...망. 그게, 그게 우리 세계의 끝이라고?"

멸망이라는 글자를 듣고 놀랐던 호백산의 눈빛이 서서히 변해 갔다.

허망함, 비통, 슬픔.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호백산은 결국 멸망하는 세계를 앞뒀다는 것에 전율했다.

자신이 지금껏 지켜온 세계가 단 한순간에 멸망의 길로 나아간다는 것에.

그것도 자기의 죽음이 기폭제라는 것에.

"호백산, 너는 네 기억을 모두 그저 성좌가 주입한 기억이라고 했지."

"...."

"다시 한 번 생각해 봐. 지금 네가 느끼는 그 감정이 정말로 성좌가 주입한 기억에 의해 만들어진 감정이냐. 네 과거는, 네가 말하던 과거들은 전부 성좌가 만든 것에 불과하냐."

"내 과거...."

"네가 지금까지 이뤄 낸 것이 전부 거짓이라고 생각하냔 말이다."

"...자네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절망으로 물들었던 호백산의 눈동자 사이로 의문이 띄워졌다.

그는 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도통 이해를 못하겠다는 양 유리 벽 너머에서 나를 직시했다.

"화초선과의 마무리. 그건 정말 남에게 맡겨도 되는 거냐."

"그건...."

호백산이 망설였다.

"네가 평생을 바쳐 온 그 일을 정녕 잘 알지도 못하는 이들에게 부탁할 거냐."

"하지만, 나는."

호백산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거의 움직이지 않는 다리, 주먹조차 제대로 쥐어지지 않는 손.

그것이 호백산의 몸이었다.

"호백산."

그리고 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화초선이 널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를 가둬둔 유리 벽을 깨부쉈다.

깨어진 유리 조각이 바닥에 나뒹굴며 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 너머에 호백산이 서 있었다.

그는 유리 벽을 세웠다.

세계와 벽을 세웠다.

유리 벽 너머에 일을 외면하고 오로지 죽음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지금 유리 벽이 깨지자 그는 단절된 세계와 다시 한 번 이어졌음을 깨닫고 한차례 몸을 움츠러트렸다.

나는 깨진 유리 벽 바로 앞에 다가섰다.

그러곤 무력화의 반지를 벗어 그에게 던졌다.

반지를 받은 호백산이 의아해하자 나는 늙고 병든 그에게 말했다.

"아직 네 싸움은, 인생은 끝나지 않았어."

나는 곧바로 별천도로 내 손을 베었다.

진득하게 묻어져 나온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그 손을 호백산에게 뻗었다.

유리 벽 안에서 아직 나오지 못한 호백산에게로.

"대체, 대체 왜, 대체 뭘."

내 손을 잡으려면 그는 유리 벽 밖으로 직접 나와야 한다.

전염병이 심해진 이후 줄곧 유리 벽 안에서 살아왔던 그는 더 이상 제대로 움직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네 힘으로 걸어 나와. 호백산."

그러나 그는 내게 의문을 쏟아 내면서도 발은 한 발자국씩 바닥을 딛고 나오고 있었다.

깨진 유리 조각이 맨발인 그의 발을 핏물로 물들였다.

통증이 그의 발을 깊숙이 찔러 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서서히, 서서히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나의 바로 앞에 섰을 때 그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자네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네. 하지만 이전에 봤던 내가 자네에게 한심한 소리를 늘어놓았는 모양이군."

고개를 숙인 그는 이전의 자신을 떠올리듯 힘없이 말했다.

"자네가 내게 무엇을 바라는지 나는 아직 깨닫지 못했네. 그렇지만 자네는 날 화초선의 앞에 다시 세울 생각인 게지."

그는 내가 던져 준 무력화의 반지를 손가락에 끼웠다.

그리고 그의 고개가 들어 올려졌다.

나와 마주친 호백산의 눈동자 속에서는 더 이상 이전에 죽음만을 기다리던 그가 없었다.

새롭게, 앞으로, 미래를.

한때 그가 세계를 지켰을 때의 그 눈동자를 그는 다시금 그리고 있었다.

호백산의 손이 내 손을 맞잡았다.

내 핏물이 호백산의 손에 물들어 가고 그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를 살며시 띄워졌다.

"부탁하네. 날 화초선 앞에 다시 한 번 세워 주지 않겠는가."

그 한마디와 함께 그의 세계가 다시금 뛰기 시작했다.

스며든 핏물은 권능 전염을 발동시켰고 그로 인해 그의 몸이 서서히 변화해 나가기 시작했다.

뿔이 솟아나고 망가졌던 손 위에 검은색 비늘이 덮어 씌워졌다.

무력화의 반지 덕에 50%만이 환상종으로 변화한 그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고 이전에 활기를 되찾았음을 깨달았다.

"그렇군. 환상종화인가."

"50%만 진행 시켰어. 화초선은 환상종을 조종하는 권능이 있다고 했으니까. 적어도 이걸로 그 권능은 안 통할 거야. 마음 놓고 싸울 수 있겠지."

그건 내가 직접 확인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다.

"반은 환상종이 되어서 괜찮겠지만 인간의 몸도 반이기에 네 몸은 여전히 전염병이 걸려 있을 거야. 기간은 조금 늘지 몰라도 조만간 네가 죽는 건 변함 없을 거다."

내 말을 듣고 그는 가볍게 자신의 팔을 풀었다.

그러곤 벽 쪽으로 다가가더니 벽을 쿠웅하고 치자 그대로 갈라졌다.

그 안에는 뼈로 된 오래된 칼 한 자루가 있었다.

칼을 손에 쥔 그는 이전에 생기 없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뭐 하는 가. 어서 안 가고."

생기를 되찾자마자 저런 태도인가.

과거 세계 최강의 환상잡이었던 모습으로 돌아간 듯한 호백산을 보며 나는 헛웃음을 흘리곤 그와 함께 지하를 빠져나왔다.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맡은 그는 가볍게 숨을 내쉬곤 그 즉시 자신의 몸의 오러를 둘렀다.

그와 함께 폭발적으로 도약한 호백산은 맹렬한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고 나는 그 뒤를 가볍게 따라나섰다.

"잘 따라 오는구만. 꽤나 오러를 끌어 올렸는데."

"너야말로 느려. 그 상태로 화초선한테 이길 수나 있겠어?"

"하하, 걱정 말게. 화초선 따위 문제가 안 되지."

그가 득의양양하게 외쳤지만 나는 알고 있다.

호백산은 전성기 때의 몸을 완전히 되찾은 게 아니다.

그저 망가졌던 몸을 적어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환상종이 된 몸이 받쳐 주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호백산은 화초선한테 제대로 대항하지 못할 것이다.

본인도 그걸 알고 있음에도 망설임 없이 화초선에게 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마지막을 화초선에게 불사르기 위해.

그렇게 우리는 성역을 향해 달렸다.

39화

여느 때와 같이 마당 마루에 앉은 화초선은 그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여기에 있으면 매번 예전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웃고 자기에게 장난을 치던 그 모습이 항상 아른거렸다.

그런 아이들을 보며 화초선은 즐거웠다.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은 오랜 기간 살아온 그녀에겐 늘 새로운 행복이었다.

그러나 그 행복은 더 이상 없다.

그날을 기점으로 모조리 사라져 버렸으니까.

가슴속에 또다시 분노가 고인다.

터져 나오려는 분노가 제멋대로 그녀를 집어삼키고 세상을 향해 그 증오를 표출하려 한다.

그것을 알고 화초선은 가슴팍을 짓눌렀다.

이전에는 이 분노와 직접 맞부딪쳐 막아 주던 녀석이 있었다.

그러나 녀석은.

더 이상 자신을 막지 못한....

"어?"

그 순간 화초선의 고개가 들어 올려졌다.

한 방향에서 익숙한 기운 하나가 느껴졌다.

그 기운은 자신을 노리는 것처럼 일직선으로 뛰어오고 있었고 화초선은 믿기지 않은 얼굴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더 이상 그 녀석은 일어날 수 없을 텐데.

자신의 분노와 수없이 부딪치고 부서진 끝에 결국 일어날 수 없는 몸이 되었을 텐데.

어떻게, 네가.

"호, 백산."

세 글자의 이름을 내뱉은 순간 그녀의 발이 앞으로 뻗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 과거와 엇비슷하게 세워 놓은 집에서 화초선이 뛰쳐나왔다.

그녀는 뛰었다.

자신을 향해 맹렬히 달려오는 그 기운을 향해 미친 듯이 뛰었다.

달리고 달려 성역의 끝자락까지 도착했을 때 그녀의 앞에.

그가 서 있었다.

"어떻게, 네가...."

입술이 달싹거렸다.

눈앞이 이상해졌다.

자신의 앞에 한 자루의 검을 들고 서 있는 남자를 본 화초선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다."

호백산이 입을 열었다.

몇십 년 만에 들은 그 목소리에 화초선의 눈동자에서 눈물 한 방울이 서서히 떨어져 내렸다.

화초선은 아이들을 인간의 손에 잃고 이성을 잃었었다.

자신의 분노를 감당할 수 없었던 그녀는 인간에게 그 분노를 쏟아 내었고 그 결과 수많은 인간을 몰살시켰다.

그런 그녀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인간도, 환상종도, 사양신도 그녀를 막을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 만은 달랐다.

그녀의 분노를 직접 몸으로 받아 내었던 그 만은 달랐다.

호백산.

5년 동안 자신의 아이들에게 음식만 주던 미련한 녀석.

5년이 되어서야 겨우 자신과 통성명을 한 한심한 녀석.

그리고 몇십 년 동안 자신의 갈 곳 잃은 분노를 받아 주었던 바보 같은 녀석.

"무슨 꼴이냐. 그게 무슨 꼴이야."

화초선이 눈물 섞인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호백산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인간의 몸은 전염병으로 썩어 가고 있었고 그러한 몸을 환상종화 된 반절의 몸이 겨우 받쳐 주고 있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상태였다.

"네 앞에 설 때는 늘 똑같았다."

하지만 호백산의 말대로 그는 늘 그랬다.

화초선에게 끊임없이 당하며 그는 항상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그는 서 있었다.

쓰러지지 않고 그녀에게 맞섰다.

"너는, 왜 나한테 그토록 미련하게 맞서는 거야."

그동안 묻지 못했던 말을 화초선이 내뱉었다.

5년째 되던 날 이후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대화를 못 했던 둘의 두 번째 대화였다.

"달래 주려고 그랬다."

"네 따위가 나를?"

"그래, 나 따위가. 나로서는 널 달래기에는 한참은 모자라더군. 그래도 최근에 잠잠해진 걸 보면 조금은 도움이 됐는 모양이지?"

끌끌거리며 호백산이 말하자 화초선은 그를 따라 작게 웃었다.

"그래, 그 말대로다. 한참을 너를 후두려 팼더니 조금은 개운해진 모양이야."

"거참 다행이로군. 세상이 더 이상 널 무서워하지 않아도 괜찮겠어."

"네 녀석 웃음이 많아졌구나. 처음 볼 땐 웃는 거라곤 1도 모르는 녀석이었는데."

"시간이 꽤나 많이 지났으니까. 네가 알던 사회성 없는 녀석은 없다. 네 덕에 나는 이 세계에서 영웅이야."

그리 말한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너무 오랫동안 대화를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서로가 서로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참 많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말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화초선."

"그래."

호백산이 검을 빼 들었다.

푸른빛의 검날이 태양을 받아 빛나고 그는 그 검을 그녀에게 겨누었다.

"이번에는 널 막겠다."

몇 번이고 들었던 그 말.

그 말의 화초선의 고개가 천천히 떨어졌다.

그러나 다시금 그녀의 고개가 들어 올려졌을 때는 입가에 호기로운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막아 보아라. 난 세계를 멸망시킬 화초선이다."

그리고 두 사람이 겹쳐 간다.

거대한 붉은색 매가 된 화초선의 날개가 호백산을 향해 내리치고 그에 맞선 호백산의 검이 휘둘러진다.

호선을 그린 검과 날개가 부딪칠 때마다 대지가 놀라 갈라졌다.

바람이 기겁하며 물러섰다.

하늘이 무서워 눈을 가렸다.

두 명은 세상이 낳은 최강의 생물이었다.

한쪽은 환상종의 최강, 다른 한쪽은 인간 쪽의 최강.

어떻게든 연결될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의 끈이 다시금 이어졌다.

일주일.

화초선과 호백산은 꼬박 일주일을 싸웠다.

피가 낭자하고 주변 일대가 날아갔지만 두 사람의 싸움은 멈출 기색을 몰랐다.

"화초선."

"그래."

호백산의 검이 깨졌다.

"나는 네가 미래를 보는 모습이 좋았다. 네 덕에 다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반대로구나. 난 네 덕에 지금을 알았어. 지금이 미래를 위해 나아갈 수 있는 밑바탕이란 것을 깨달았으니까."

호백산의 손이 그녀의 날개를 붙잡았다.

"그렇기에 널 막고 싶었다. 네가 그토록 바라던 미래를 부수려는 너를."

"그래, 네 덕에 지금을 지켰어. 네가 없었다면 나는 모든 걸 없애 버렸겠지."

호백산의 손이 무너져 내렸다.

"나는 너를 막았나."

호백산의 다리가 무너져 내렸다.

"나는, 나는 너를 막았느냐."

호백산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그래."

호백산의....

"너는."

호백산의....

"나를."

호백산의....

"막았어."

그렇게 호백산의 모든 게 무너져 내렸다.

"구해줬어."

외쳤다.

"지켜줬어."

또 한 번 외쳤다.

"너는 나를."

몇 번이고 말해 주겠다.

"너는 나를 몇 번이고 살려줬어."

몇 번이고 또 말해 주겠다.

후두둑.

빗물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화초선의 볼 가를 타고 내려온 빗물은 천천히 흘러 호백산의 눈가를 스쳐 지나갔다.

감긴 그의 눈동자는 떠지지 않았고 화초선은 그런 그의 볼을 천천히 감싸주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간지렀다.

"고마워."

그녀는 조용히.

"고마워...."

그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전했다.

세계는 빗물 속에서 그렇게 막을 내렸다.

* * *

[축하합니다. 2번째로 28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25층의 주인' '잔혹함에 물든 인사'가 당신에게 깊은 감사를 표하며 보상을 지급합니다.]

['25층의 주인' '잔혹함에 물든 인사'가 당신에게 성의를 표하고자 합니다.]

['25층의 주인' '잔혹함에 물든 인사'가 당신을 지목합니다.]

['25층의 주인' '잔혹함에 물든 인사'가 당신에게 세례를 내립니다.]

보상 알림을 눈앞에 두고 나는 가만히 화초선과 호백산, 두 사람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 층은 여기서 끝.

내가 떠난다면 또다시 호백산이 죽음을 기다리고 화초선이 절망한 세계로 변할 것이다.

그러나 그 세계는 언젠가 또다시 그들 나름대로에 결말로 이끌어 나갈 것이다.

그걸 알기에 나는 이 층에서 떠나 다음 층으로 향한다.

"...하천성."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검왕이 있었고 그녀는 내게 다가와 섰다.

"고마워. 당신 덕분에 층을 클리어했어."

"그래, 뭐, 그러냐."

왜일까, 뒤숭숭한 마음 탓에 나는 검왕의 감사 인사에도 대충 대답했다.

"성좌는 자신의 세계에서 늘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고 싶어 해."

"알아."

"그래서 힘든 거야. 맨 앞에 선 자는. 공략법을 모르니 스스로 방법을 찾아내고 결국 층의 결말을 봤을 때 자기가 이뤄 놓은 모든 것이 다 사라진다는 것을 아니까."

그리 말한 검왕은 황제 친위대로서 지금껏 겪어 왔던 그 일들을 추억하듯 씁쓸히 웃었다.

"나는 그렇기에 모두와 함께 층을 올라. 그 세계에서 보다 빨리 빠져나올 수 있으니까."

그리고 검왕은 내 손을 꼭 잡았다.

"하천성, 지금이 아니라도 좋아. 하지만 언젠가 당신이 빠져나올 수 없을 때는 내 힘이라도 빌려 줘."

그 말을 하고 검왕은 손을 놓은 뒤 동료에게 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보던 나는 손에 남은 따스함이 괜스레 짜증 나 손을 털어 내곤 몸을 돌렸다.

다음 층인 29층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이번에도 2번째.'

성좌의 알림을 보자마자 직감했다.

1번째가 누군지.

하일성.

그가 아직 크라운 로드를 오르고 있었다.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하려는 회귀자들이 층을 오르지 못하게 막기 위해서.

"썩을 자식이 지구에서도 여기에서도 앞서간다. 이거지."

빠득 이를 갈며 나는 바삐 계단을 올랐다.

평생 동안 네 뒤꽁무니만 봐왔다.

여기서까지 네 뒤꽁무니만 따라다닐 거라 생각하지 마라.

하일성.

* * *

그리고 그 무렵 이름 모를 층의 집.

그곳에 야신이 있었다.

그는 양손을 감싼 채 자신의 앞에 와 있는 편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천성을 발견했다라."

한 손으로 턱을 감싼 채 야신은 무표정하게 편지 내용을 읽었다.

편지에는 간단하게 쓰여 있었다.

[하천성이 28층을 통과했습니다. 그는 역시 죽지 않았습니다.]

예상은 하고 있었다.

24층의 공략법을 이후 전해 들었을 때 해당 층의 공략은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첫째로 던전을 클리어해야 하는 자, 둘째로 던전을 클리어당해야 하는 자.

자세히 말해 한쪽은 24층의 최강의 던전 이블제리아 혹은 또 다른 참가자가 만들어 낸 던전을 클리어하는 것.

또 다른 한쪽은 흑기사에게 던전 보스 몬스터로서 클리어 혹은 다른 참가자에게 던전을 클리어당하는 것.

이 두 가지가 24층의 성좌 '활약하는 그대의 잔상'이 만들어 놓은 클리어 방법이다.

하천성은 하일성에게 목이 베였고 그 결과 운 좋게도 던전 클리어 조건과 맞물려 살아남은 것이다.

그 점에서 야신 쪽은 하천성이 살아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한동안 소식이 없더니 다시 크라운 로드를 오르기 시작했다. 이거냐."

성좌들의 편애라도 받는지 운이 좋은 하천성의 모습에 야신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소식을 듣고 그가 기뻐할지 짜증 낼지 모르겠다고.

명백한 건 확실히 귀찮아 하겠지.

하지만 그는 다시 한 번 하천성을 죽여 줄 것이다.

하천성은 분명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하고자 층을 오를 테니까.

"형제 싸움을 크라운 로드에서 하는 녀석들은 어디에도 없겠지."

야신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렇게 그 세계의 밤이 저물어 가기 시작한다.

40화

Chapter 6 ― 체계를 부숴라.

검왕 보다 한 발 먼저 층을 오른 나는 그 뒤 곧바로 29층의 올랐다.

하일성을 쫓으려면 한시가 급했고, 그건 어서 빨리 다음 층을 공략해야 한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젠장, 한참 늦었구만.'

마지막 클리어 조건 탓에 28층에 꽤나 오래 머물렀다.

그렇다 보니 하일성이 지금쯤 얼마나 나아갔을지 감도 안 잡힌다.

'내가 하일성이라면 50층까지 그대로 달릴 거야. 50층부터는 다른 세계랑 합쳐지니까. 그때부터가 진짜 크라운 로드의 도전권, 그 전까지는 일종에 테스트일 뿐이야.'

하일성은 분명 크라운 로드의 첫 회차이다.

그런 그가 회귀자들을 넘어서서 가장 먼저 앞서고 있는 이 상황에 나는 이를 갈았다.

짜증 나긴 하지만 하일성은 여태껏 내가 봐 온 인물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 자식은 현실에서도 그렇고 크라운 로드에서 마저 맨 앞을 달리고 있었다.

"망할 형 새끼."

하나같이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다며 욕을 내뱉은 나는 29층에 도착했다.

['나태한 즐거움'이 관장하는 29층 Stage '우리가 노예냐'에 입장하였습니다. ]

['29층의 주인' '나태한 즐거움'이 당신의 입장을 굉장히 반깁니다.]

또 처음 들어 보는 이름.

이놈에 성좌 변동 때문에 대체 새로운 도전만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다 다음 말을 기다렸다.

평범한 중세의 가정집, 이전 층과는 다르게 판타지 계열의 층임을 눈치챘다.

['나태한 즐거움'이 29층 클리어 조건을 제시합니다.]

['우리가 노예냐' 당신의 친한 친구는 어느덧 20살, 나라의 부름을 받고 군대에 가야 할 시기입니다. 여자인 당신은 군대에 가지 않습니다만 건장한 남자인 친구는 군대를 가야 할 시기가 되어 하루하루 피 말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쩌죠. 방법이 없군요. 위로할겸 술이나 잔뜩 마셔 줍시다.]

[시간이 뒤틀린 층입니다. 이곳에서의 5일은 바깥에서 하루가 지나갑니다.]

[개인 클리어 층입니다. 입장 시 팀 등록을 한 자들과는 함께 입장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어진 설명을 본 순간 내 이마에 핏줄이 한줄기 샘솟았다.

뭐, 이 새끼가.

"야, 이 씨발 너 우리나라 사람이냐?"

['나태한 즐거움' 이 고개를 기울입니다.]

['나태한 즐거움' 이해 못 한 태도를 취합니다.]

이 망할 성좌 새끼가.

한순간 하일성을 향한 분노조차 잊을 정도로 맹렬한 분노를 느꼈다.

지금 당장 성좌의 목을 뽑아서 옆에 앉혀 놓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층부터 클리어하기로 했다.

'이딴 층 빨리 클리어해 버리든가 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린 순간 나는 한 가지를 잊었다.

[여자인 당신은 군대에 가지 않습니다만]

그 말을 떠올리자마자 나는 유리 공작을 이용해 내 앞에 거울을 만들어 내었다.

그 순간 내 모습이 거울에 비췄고, 곧 내 얼굴이 서서히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이전과 달라져 있었다.

허리춤까지 내려온 흑발, 조금 얇아진 얼굴선, 한눈에 보아도 여성 같은 체구.

예전에 딱 한 번 겪어 보았던 성별 전환 층이었다.

"썅."

욕설을 한마디 내뱉은 나는 유리 공작을 깨부쉈다.

그러곤 혹시나 하며 아랫도리를 살피자 역시 없어졌음을 눈치챘다.

이 층은 입장 시 모조리 여자로 만들어 버리는 층이었다.

"이 망할 성좌야! 여긴 공익 제도 같은 것도 없냐! 굳이 여자로 만들 이유가 있냐고!"

['나태한 즐거움'은 당신이 왜 화내는지 이해 못 한 표정을 짓습니다.]

이해 못 하면 이해해라.

이쪽은 5회차 동안 전역 10일 전으로 돌아간 몸이니까.

거칠게 나오는 숨소리를 겨우 억누르며 나는 문을 덜컥 열었다.

"그래서 그 친구란 놈은 어디 있는데."

['나태한 즐거움'은 조금 무서워하며 옆집에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이후 겁먹은 성좌의 대답을 듣고 밖으로 나왔다.

주위를 둘러보자 저 멀리 농장으로 보이는 집 한 채가 있었고, 나는 망설임 없이 그쪽으로 걸어갔다.

"어이."

농장처럼 지어진 집 한 채 앞에 도착한 나는 문을 두드리며 안쪽에 있는 사람을 불렀다.

그러자 곧 인기척과 함께 누가 뚜벅뚜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고 곧 끼이익 하고 문이 열렸다.

"천성아."

훌쩍, 방금까지 울고 있었던 듯 안에 있는 녀석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그런 녀석을 보고 나는 한숨을 내쉰 채 안으로 들어섰다.

"영장 나왔냐."

"...응. 나 어떡하냐. 천성아. 이제 10년 동안이나 군대에서 썩어야 한다."

우리나라보다 5배는 더 길다니.

5회차 동안을 통틀어 처음으로 나는 등장인물에게 측은함을 느꼈다.

나는 처음 본 녀석임에도 불구하고 녀석의 어깨를 탁탁 토닥여 주었다.

"형이 갔다 와 봐서 아는데 군대 별거 없다. 시간 금방 가. 그냥 초반에 열심히 해서 선임들이랑 친해지고 간부한테 잘 보이면 별문제 없이 군대 끝난다."

"형이라니. 그리고 천성아 너 왜 군대 갔다 온 것처럼 말해."

"썅, 그런 게 있어. 토 달지 마. 가뜩이나 짜증 나 죽겠으니까."

"아, 응."

어벙한 표정으로 대답한 녀석을 데리고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낡고 초라해 보이는 집, 그러나 있을 건 다 있어 보였다.

"술 있냐."

"있긴 한데."

"다 가져와. 같이 마셔 줄 테니까."

"천성아... 역시 내 친구는 너밖에 없는 모양이야."

원래 군대 가기 전에 잘해 주는 녀석들이 심적으로 제일 크게 다가오는 법이다.

오두방정 떠는 녀석에게 술이나 가져올 것을 지시한 나는 의자를 빼고 털썩 앉았다.

달라진 건 성별뿐인지 다행히 옷차림은 그대로 별천도도 허리춤에 잘 채워져 있다.

'클리어 조건은 또 알아서 찾아라, 이거겠지.'

일단 성좌가 제시했던 술이나 같이 잔뜩 마셔 주라는 말에 따르긴 했다만 분명 이 층의 클리어 조건은 따로 있을 것이다.

그렇담 내가 그 클리어 조건을 어떻게든 찾아내야만 한다.

'이딴 층 오래 머물고 싶지도 않고.'

얼른 클리어해서 넘어가든가 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있던 도중 친구라는 녀석이 저장고에 둔 듯한 술을 잔뜩 가지고 나왔다.

낡은 집인 만큼 술 상태는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확실한 건 마시면 무조건 취할 법한 류의 술이었다.

"일단 한 잔 까."

내 말을 잘 듣는 녀석은 곧바로 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서로 가볍게 잔을 마주치곤 목에 술을 넘기자 녀석은 크으 소리를 내며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술이 달아. 망할, 술이 달아. 천성아."

"원래 군대 가기 전에는 다 달아. 한잔 더 따라. 입대는 언제냐."

"내일이야. 내일 3시까지 군 훈련소로 가야 해."

미친, 영장 나오자마자 바로냐.

이쪽은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안 주는구만.

"그럼 속성으로 군대 꿀팁을 다 가르쳐 줄 테니. 오늘 귀에 잘 새겨 놔."

이 녀석 나라 군대랑 우리나라 군대가 얼마나 다를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나라에서 군인으로 부르는 거라면 이 녀석의 계급은 말단 병사일 것이다.

결국 사람 사는 곳은 엇비슷하다.

병사로 들어가는 이상 맞부딪쳐야 할 일들은 뻔하겠지.

그렇기에 나는 두런두런 군대 이야기를 해주었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알 법한 군대 이야기를.

한 잔, 두 잔이 한 병, 두 병이 되고 어느덧 둘이서 10병이 넘어가고 있을 때 녀석은 거의 반쯤 죽어 가는 표정으로 울고 있었다.

"천성아, 나 진짜 군대 가기 싫어. 내가 왜 가야 하는데. 나라가 해 준 것도 없는데. 귀족들은 나랏일 한다고 군대 안 간다는데 귀족들이야말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있는 애들 아니야? 걔들은 왜 안가고 일반 시민인 나는 가냐고."

"그래, 네 말대로 나라가 해 주는 것도 없는데 왜 가야 하는지 나도 모르겠다. 가 봤자 노예 취급밖에 안 하는데."

"나 많이 들었어. 올 때는 우리 아들 다치면 너희 아들이라면서. 난 아들이라고 해 줄 엄마도 오래전에 돌아가시고 없어. 그럼 난 대체 누구 아들이냐고."

많이 취한 듯 녀석은 엉엉 울었다.

나야 오러 덕분에 취기를 쉽게 물릴 수 있어서 괜찮지만 오러를 다루지도 못하는 이 녀석 입장으로서는 취기를 이길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놈 이름은 뭐지.

이름도 아직 듣지 못한 녀석이랑 군대 하소연이나 하고 있다니.

참, 나도 가지가지 한다고 생각하며 기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천성아, 나 여자랑 한 번 사귀어 보지도 못했어. 근데 군대 가면 남자밖에 없잖아. 나 어떡해야 하냐."

"그건 좀 불쌍하긴 한데...."

내 쪽은 그런 경우까지는 없었으니까.

내 대답을 들은 녀석은 한차례 훌쩍이더니 갑자기 나를 빤히 보기 시작했다.

나는 곧 녀석의 시선을 깨닫고 인상을 팍 찡그렸다.

지금 내 몸은 층 때문에 여자인 상태, 여자 한 번 못 사귀어 본 녀석의 눈빛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바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뒤질래."

"아, 아니, 미안."

이 썩을 자식이.

머리를 한 대 내려쳐 주려다가 만 나는 팔짱을 낀 채 다리를 꼬곤 물었다.

"너 이름은."

"내 이름, 어, 러쉬인데. 갑자기 이름은 왜."

"그냥 생각 안 나서."

"그렇지.... 10년 뒤면 나 따위는 잊어버리겠지."

무슨 말을 들어도 우울해지는 러쉬를 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일어나 도시로 가 보게."

"도시를 왜?"

"여자랑 한 번 사귀어 보지도 못한 놈 도와줄까 싶어서. 군대 가기 전에 여자 구경이나 마음껏 해 봐라. 어쩌면 아냐. 10년이나 기다려 줄 여자친구를 만날지도."

"그, 그러네! 그럴지도 모르잖아!"

그럴 리가 있나.

2년 동안 가는 군대도 헤어지는 녀석들투성이인데 10년씩이나 기다려 줄 여자는 어머니 말고 이 세상에 없다.

정말 기다려 준다면 그건 평생 머리 숙여 살아야 할 정도로 대단한 여자라고.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울고 있는 러쉬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곤 러쉬의 안내에 따라 한참을 걸어 도시에 도착했고, 해가 진 도시는 어느덧 밤이 되었다.

"러쉬, 여기에 클럽 같은 곳 있냐. 20대의 흥을 주체 못 하는 녀석들이 잔뜩 모이는 곳 말이야."

"클럽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그런 지하 술집이 있긴 해. 나라에서는 불쾌하다면서 단속하고 있지만, 몰래몰래 생겨나거든. 근데 흥을 주체 못 하는 20대는 귀족밖에 없지 않을까? 우리나라에서 평범한 남자는 20대를 전부 군대에서 보내니까."

"네가 말하면서 암울해지는 이야기 더 하지 말고 거기로 가자."

"아, 하지만 아마 들어가고 싶어도 입구에서 쫓겨날 거야. 다 같은 서민인 주제에 귀족 행세라도 하고 싶은 건지 드레스 코드라는 게 있어. 근데 내 옷은 이 꼴이라."

확실히 러쉬의 옷은 방금 전까지 농장에서 일하던 옷이었다.

그런 러쉬를 보고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쉰 뒤 따라오라며 까닥거렸다.

그러곤 이후 옷집 하나를 찾아낸 뒤 러쉬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제일 잘 나가는 거. 그리고 이 녀석한테 어울릴 것 같은 걸로 입혀줘."

그렇게 말하며 나는 수중에 돈을 꺼내 직원에게 건넸다.

"네, 네!"

내가 꽤나 많은 돈을 건넸기 때문일까, 직원은 화들짝 놀라며 급히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크라운 로드의 화폐는 전부 같은 것으로 통용되고 있다.

어느 층이라 한들 똑같이 사용할 수 있기에 돈에 관해서는 전혀 문제없었고 그를 알 리 없는 러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천성아, 진짜 괜찮아? 방금 꽤 큰돈이었잖아."

"넌 상관하지 말고 옷이나 갈아입어."

뭐가 클리어 조건인지 모르는 이상 이 녀석에게 득 될 만한 건 다 해 봐야 한다.

물론 무슨 짓을 한들 러쉬가 군대를 가는 건 변함 없을 것 같았지만 말이다.

41화

"...천성아, 내가 그동안 널 잘못 봤나 보다. 난 그냥 괴팍한 여자라고만 생각했는데, 네가 날 이렇게까지 챙겨 줄 줄은 몰랐어."

러쉬는 감동 먹은 듯한 표정으로 직원의 안내에 따라 옷을 갈아입었다.

몇몇 옷이 지나가고 러쉬의 옷차림을 쭉 살펴본 나는 그나마 가장 괜찮은 걸로 골랐다.

이후 미용실까지 데려가 머리를 깔끔하게 정리하자 러쉬는 그런대로 볼만해졌다.

적어도 여자에게 먼저 다가갔다고 욕을 먹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은 모양새다.

"나 좀 괜찮아졌나?"

"그럭저럭."

거울을 보며 긴가민가하는 러쉬를 보고 고개를 끄덕인 나는 녀석을 끌고 그대로 지하 술집으로 향했다.

남자는 입장 시 돈을 내고 여자는 돈을 받지 않는 것을 보며 클럽이랑 똑같다고 생각한 나는 지하 계단을 따라 내려갔고, 러쉬는 조금 들뜬 표정이 되었다.

"나 이런데 처음 와 봐."

"앞으로 10년 동안 쭉 못 올 테니까. 즐길 수 있을 때 즐겨라."

나 같은 경우에는 22년째 못 가 봤으니까.

괜한 과거 생각에 혀를 차며 지하를 마저 내려오자 나는 엇비슷하게 만들어 놓은 네온사인과 음악 소리에 헛웃음을 지었다.

이 성좌 놈 진짜 우리나라를 보고 이 층을 만든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복장 같은 경우에는 현대와 거리감이 있었지만 이성이 선호할 만한 노출도 높은 복장을 택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엇비슷했다.

"처, 천성아 이제 어떻게 해야 해? 뭘 해야 되는 거야."

"돈을 쓰면 사람은 저절로 다가오는 법."

그건 내가 재벌로 살아오면서 확실히 배운 것이다.

술을 내주고 있는 주인장 앞으로 다가선 나는 그의 앞에 탁하니 서곤 가볍게 미소 지어 보였다.

"주인장, 오늘 내 친구가 여기 있는 사람들 술 다 산다는군. 크게 한턱낼 테니 안에 준비한 술 다 가져와."

"예? 정말로 말입니까?"

"그럼 거짓말일까 봐? 쏘는 사람의 이름은 러쉬, 오늘 밤 신나게 놀고 싶다니까. 전해."

그 말과 함께 나는 주머니에서 금화를 쏟아 내었다.

금화를 본 주인장의 눈이 돌아가고 그는 급히 음악을 연주하던 자에게 뛰어갔다.

그러자 주인장의 말을 들은 연주자가 마이크를 쥐고 앞으로 뛰어나왔다.

"여러분 특보입니다! 오늘 술을 전부 산다는 통 큰 후원자님께서 나와 주셨습니다!"

그 말에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후원자님의 이름은 러쉬! 오늘 밤 거하게 즐기고 싶다고 하니 여러분들 그를 환영해 주길 바랍니다!"

"처, 천성아?"

내 행동에 놀란 러쉬가 나를 돌아보고 나는 녀석의 등을 떠밀었다.

"얼른 스테이지로 올라가. 네 얼굴을 확실히 보여 줘야 한 명이라도 더 다가올 거 아니야."

"그, 그렇지만 진짜로 괜찮은 거 맞아? 이렇게나 돈을 쓰면...."

"아, 거 말 많네. 애들 흥 깨지기 전에 올라가라고."

힘까지 줘서 강제로 위로 밀어 넣자 러쉬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스테이지 위로 올라갔다.

그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은 환호성과 함께 러쉬의 이름을 부르짖었고 러쉬는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인사를 한 뒤 사회자의 질문에 몇 번 대답하다가 내려왔다.

당연 오늘 밤 모든 술을 쏜 러쉬에게 하나둘 사람들이 다가가기 시작했고, 그중에는 러쉬가 원하던 꿈의 상대 정도는 한 명 있을 것이다.

비록 오늘 밤, 단 하루의 꿈이겠지만.

역시 돈의 힘은 위대하다며 벽에 기댄 나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 생각나네.'

마음껏 돈을 쏟아붓던 그 무렵이 떠오르자 조금 추억에 잠겼다.

형들에게 모든 관심을 쏟은 아버지는 나에게는 전혀 관심을 쏟지 않았으니까.

덕분에 참 지겨울 정도로 많이 놀았다.

"아가씨."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몇몇 취객으로 보이는 남자 무리가 다가왔다.

순간 아무런 반응 안 하던 나는 이상한 느낌에 설마 하고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고 그들은 느끼한 미소를 지었다.

"혼자 왔어? 바쁘지 않으면 우리랑 놀지 않을래?"

어이가 없어 한순간 목소리가 안 나왔다.

여자한테는 수없이 헌팅 당해 봤다.

그런데 남자한테 헌팅을 당해? 내가? 이 몸이?

이마 부근에 힘줄이 섰다.

"너희들 뭐해. 여성분이 불편해하잖아."

녀석들의 머리를 뭉갤 생각으로 손을 들어 올리려던 찰나 또 다른 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새로운 남자 한 명이 나타나 취객 무리 사이에서 나를 지키려는 양 나서고 있었고, 나는 기가 막힌 상황에 박수까지 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 세상은 주먹이 답이다.

주먹으로 해결하자.

"천성아."

만사 해결을 위해 주먹을 들려던 순간 이번에는 러쉬의 목소리가 들렸다.

녀석은 남자들 사이를 뚫고 급히 내게 다가와 손목을 잡았고 곧 나를 끌고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오늘 밤 술값을 모조리 내준 러쉬를 막을 사람은 없었고 그들은 아쉬운 양 입맛을 다셨다.

"너 뭐하냐."

그리고 그런 러쉬의 행동에 나는 어이없어 녀석을 바라보았다.

아까 전 러쉬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쌓여 있었다.

그건 러쉬에게는 또 없을 기회였다.

물론 사람들의 관심은 한순간이다.

비록 그가 오늘 밤 술값을 냈지만, 그 사실은 시끄러운 음악과 네온사인의 묻혀서 점차 잊혀 갈 것이다.

그렇기에 그 기회를 제대로 잡아야 했는데 녀석은 제 손으로 뿌리치고 내게 온 거다.

"친구가 곤란해 보였는데 안 나설 수가 있어?"

그리고 나는 녀석의 머리를 한 대 내려쳤다.

울상을 짓는 러쉬를 보고 이마를 감싼 채 한숨을 내쉬었다.

사내자식들 마음속에는 왜 항상 이런 영웅 심리가 있는 걸까.

"어서 사람들한테 돌아가. 난 그냥 이런 일 더 없게 집으로 돌아갈 테니까. 널 위해서, 아니, 날 위해서라도 제발 좀 놀아라."

층의 클리어 조건을 모르는 지금 유일한 클리어 조건 대상인 러쉬는 성좌가 말했던 대로 군대 가기 전에라도 술을 진탕 먹으면서 놀아야 한다.

그렇기에 나는 그가 내일 군대를 가도 조금이라도 아쉬워하지 않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내 지시에 러쉬는 비적비적 돌아갔고, 그 뒷모습을 보던 나는 녀석에게 말했던 대로 지하 술집을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시끄러운 음악이랑 네온사인이 없어진 덕에 조금은 편해진 기분을 느낀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단 러쉬는 여기에 두고 이 층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모아볼 속셈이었다.

'정보 수집에 제일 좋은 장소는.'

이런 세계는 정보를 사고파는 길드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 생각을 한 나는 그럴싸한 건물을 찾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한참을 돌아다닌 끝에 대놓고 정보 길드라고 적힌 건물 앞에 도착한 나는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내가 안으로 들어서자 점원이 반갑게 맞이했다.

그녀는 나를 살며시 보더니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남편이 바람이라도 피시나요?"

"헛소리 말고. 최근 이 나라에 일어난 큰 사건이랑 군대와 관련된 정보 다 가져와. 돈은 선금으로 이 정도 내지. 더 필요하다면 불러도 낼 거야."

농담을 내뱉던 그녀의 앞에 금화가 쏟아지자 눈이 휘둥그레진 그녀는 급히 안쪽으로 뛰어갔다.

그러곤 카운터 문을 열고 나오더니 내게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사모님,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한 번만 더 사모님이라는 말을 내뱉었다간 나 나간다."

"아, 네, 죄송합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아가씨."

서둘러 말을 바꾼 그녀는 방 하나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 후 그녀가 차와 다과를 내오고, 뒤이어 남자 몇 명이 고급지게 만든 상자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그 중 사내 하나가 상자를 열어 정중히 내게 내밀었고, 나는 안에 들어 있는 양피지 3장을 꺼내 들었다.

"최신 정보는 다 거기에 있습니다. 당연 군에 관한 정보도 있으며 원하신다면 더 깊숙한 정보도 제공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군에 관한 정보는 나라에서 기밀이다.

그러니 정보를 우선 합법적인 선에서만 공개해 주고 불법적인 것은 내 선택 사항으로 붙인 것이다.

양피지를 꺼내 대강 훑어본 나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고 그녀는 알아챈 듯 고개를 숙이며 나갔다가 잠시 후 불법 정보도 가져왔다.

모든 정보를 눈으로 훑은 나는 찻물을 들이키며 생각에 잠겼다.

'황제가 심한 병에 걸려 은거하던 중에 아래 녀석들이 황위 다툼을 하다가 직계가 서로의 손에 모조리 죽었다라.'

최근에 가장 큰 사건은 이러했다.

이 정보를 사는데 꽤나 큰돈을 요구했던 것을 보면 국민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극비 정보인 듯싶었다.

귀족들끼리만 쉬쉬하는 정보라는 거겠지.

그러나 문제는 이게 아니었다.

직계가 없어진 이상 병에 걸린 황제를 대신해 줄 핏줄을 누구라도 찾아야만 했다.

정보 길드도 아직까지 황제의 핏줄이 누구인지는 찾지 못한 듯싶었다.

그러나 수없이 많은 층을 클리어했던 나는 곧바로 눈치챘다.

'그래, 성좌가 장치를 안해 둘 리가 없지.'

뻔하다.

이 핏줄을 가지고 있을 녀석은.

'러쉬, 그놈이겠군.'

방금까지 나와 함께 있었던 곧 군대 갈 그 녀석이었다.

내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버려 두면 암살당하겠는데.'

정보에 따르면 이 나라에는 유명한 귀족들이 몇몇 있었다.

앞에서 말했던 대로 황제의 핏줄을 찾고 있는 이들도 있었지만, 귀족들 중에는 이 틈을 타 자신이 나라를 삼켜 보려는 야망을 가진 녀석들도 더러 있는 듯싶었다.

그런 녀석들에게 러쉬는 걸림돌이겠지.

그들은 러쉬가 황제의 핏줄임을 알아내자마자 암살자를 보낼 것이다.

'물론 이 녀석이 황제의 핏줄이 아닐 가능성도 미약하게 있기야 하겠지만.'

미리 경계해 둬서 나쁠 건 없다.

'그것보다 이 나라 곧 망하겠는데.'

내 생각 이상으로 내부가 썩어 있다.

게다가 그 내부가 썩어 나가면서 지난 2년간 끊임없이 나라가 갉아먹혀 가고 있었다.

'밖에서 봤을 때 일반 시민들은 겉으로는 문제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

지금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는 나라가 모래성이란 것도 모른 채 말이다.

나라의 불만은 품 돼 현재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빠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하루하루 생활하고 있는 거겠지.

그만큼 이 나라는 살고자 발버둥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구조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 생각한 나는 이번엔 군대에 관한 정보를 살펴보았다.

러쉬가 떠들었던 대로 귀족은 나랏일을 해야 한다면서 군대를 가지 않고 애꿎은 백성들만 주구장창 병사로 데려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 나라 그리티아는 생각보다 꽤 큰 나라였고, 그 결과 그리티아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나라들과 자주 전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로 인해 50년 전, 법으로 징집 제도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졌고 언제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20대 청년은 10년 동안 병사로서 복무해야 할 법이 생긴 듯하였다.

문제는 지금의 현 황제가 오른 이후 제국이 전쟁을 멈춘 지 20년가량 지났고, 그 결과 전쟁을 위해 징집했던 병사들은 사실상 나라에서 좋을 대로 이용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그리티아 국경 장벽 노동이었다.

인접 나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 50년간 꾸준하게 지어지고 있는 장벽은 마치 만리장성을 떠올리게 했고 당연 거기에 가장 투여 되고 있는 인력은 병사들이었다.

병사들 중에서는 제대로 된 임급도 못 받고 노예처럼 10년간 장벽만 짓다가 복무를 마친 자들도 더러 있었으며, 혹여나 사고로 다치면 그 즉시 전역시켜 주었지만. 그 책임은 당연 나라에서 전혀 지지 않았다.

'개판이로구만. 게다가 군대 안은 선임이나 간부가 당연하게 공갈, 협박, 폭력 등 우리나라 1900년대 군대 수준이고. 자살률은 물론 폭력으로 인한 타살률도 엄청 높아. 이 정도면 윗대가리 녀석들은 군대가 어떻게 돌아가던 조금도 관심 없는 수준이네.'

썩다 못해 시궁창만도 못한 상황에 나는 읽던 군대에 대한 정보를 접었다.

어디든 결국 군대는 똑같은 군대인 듯싶었다.

42화

'왕족끼리의 다툼으로 벌써 꽤 시간이 흘렀어. 귀족 녀석들이 바보가 아니라면 지금쯤 핏줄을 따라 쭉 가서 대략적인 정보는 어느 정도 잡았을 거야. 아니면 이미 유일하게 남은 황실의 핏줄에 대해 알고 있을 수도 있고.'

그렇담 가장 깔끔하게 암살할 방법은 뭘까.

만약 러쉬가 정말로 황제의 핏줄일 시 나라면 반드시 군대에서 사고사로 죽인다.

특수한 환경인 군대만큼 사고가 많이 일어나는 곳도 없으니까.

나는 모든 정보를 훑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왔다.

돈은 이미 진작 지급했기 때문에 점원은 '다음에 또 오세요.'라는 말을 하며 배웅했고, 나는 그 인사를 받으며 거리를 거닐기 시작했다.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따라붙었다.

인원수는 4명, 그들의 숙련된 발걸음 솜씨를 눈치챈 나는 자연스레 골목길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무방비하게 한참을 골목길을 걸어가자 그 순간 내 목에 검이 날아들었다.

꽤나 빠르다.

사람을 죽이는데 상당히 숙련된 솜씨였다.

하지만 나에게는 느리기 그지없었고 가볍게 손가락으로 검을 막은 나는 안면에 미소를 그려 주었다.

달빛을 받아 입가에 그려진 미소를 본 사내는 복면 너머에서 흠칫했으나 어느새 땅에 처박혀 있었다.

정보를 뜯어내기 위해 일부러 손대중은 해 줬다.

뇌진탕으로 기절 정도만 했을 테니 이 녀석은 내버려 두고.

나는 그 즉시 공격해 오는 두 명과 도주하는 한 명을 포착했다.

내 실력을 보고 두 명은 시간을 벌고, 나머지 한 명은 소속한 집단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는 속셈이다.

'뒷배가 있다는 소리군.'

오러로 보건대 셋 다 수준은 소드 엑스퍼트 급.

이 세계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낮은 수준은 아니다.

전문적으로 육성된 녀석들이겠지.

삼식(三式)

뇌격발도(雷擊拔刀)

두 사람이 나를 죽이고자 달려드는 순간 최속의 빠르기를 가진 검이 두 명을 베고 지나갔다.

자신들이 베인지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아직까지 검을 휘두르는 둘을 스쳐 지나간 나는 망설임 없이 별천도 위에 오러를 덧씌웠고 곧바로 도주하던 녀석을 향해 휘둘렀다.

사식(四式)

뇌도탄룡(雷刀彈龍)

번개의 오러가 용의 현상으로 휘감기고 기탄이 되어 도망치려던 녀석에게 정확히 적중했다.

오러를 조절하여 죽이지는 않았기에, 기탄에 맞고 한바탕 크게 구른 녀석은 기절한 듯 벽에 늘어져 있었다.

그 후 나는 기절한 녀석의 뒷덜미를 끌고 어벙한 표정으로 서 있는 둘의 앞에 다가왔다.

"뭐 해. 너희들 슬슬 알아차릴 때 되지 않았냐."

내 물음에 둘이 흠칫한 순간 둘의 다리가 각각 하나씩 잘려 나갔다.

이제야 자신들의 다리가 베었음을 깨달은 둘이 비명을 내지르려 했고, 나는 적당히 품 안에 있던 예비용 포션 하나를 들어 다리의 질질 부어주었다.

17층에서 받은 신체 손실 회복 물약이다.

1시간마다 다시 물약이 차는 성능 좋은 물건이지만 단점은 재생된 신체가 몸에 적응할 때까지 1시간가량 움직이지 않는다.

타임리셋이 있는 나에게는 그다지 쓸모없어서 넣어 둔 거지만 심문에는 최적화되어 있는 물건.

넷을 제압하여 골목길 벽에 몰아넣은 나는 빙그레 웃었다.

"자, 그럼 우리 대화를 해 볼까."

마음 편히 정보 캘 때가 가장 즐거운 법이다.

* * *

이후 정보를 모조리 뜯어낸 나는 가뿐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에는 나름 베테랑이라는 양 절대로 정보를 내뱉지 않으려는 그들이었지만, 이쪽도 베테랑이다.

1시간가량 잔뜩 괴롭혀 주니 녀석들은 그제야 하나둘 정보를 내뱉기 시작했고 모든 정보를 들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를 쫓아온 4명은 우선 그리티아 귀족들에게 고용된 자들이었다.

혹여나 정보 길드에서 황제와 관련된 정보를 사 가는 이들을 가능하면 사로잡거나 안된다면 무조건 죽이라는 명을 받았고 그들은 그걸 이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자신들처럼 움직이고 있는 집단 하나가 더 있다고 한다.

그들은 황제의 먼 핏줄을 쫓는 역할을 하고 있었고 현재까지 추정되는 3명 정도 죽였다고 한다.

그 이름을 불게 하자 그것까지는 모른다며 호소했고 몇 번 더 심문해 본 결과 같은 소리만 했기에 나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러쉬는 아직 노려지지 않은 모양이긴 한데.'

러쉬를 황제의 핏줄로 확신하고 있는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벌벌 떨고 있는 넷을 돌아보았다.

"안내해."

나는 차라리 그냥 그 집단을 잡기로 했다.

빙그레 미소를 지은 내 말에 그들은 울상을 지었고 내가 10분 정도 더 고문해 주자 비로소 나를 안내 해 주기 시작했다.

"함정 파 둬도 상관없어. 그거 부수고 만든 놈도 죽이고 너희도 죽인다. 너희 가족이든 친구든, 아는 사람이든, 혼자 키워졌던 그냥 싹 다 죽일 거야."

진심으로 한 말이었기에 넷은 어깨를 움츠러트렸다.

일부러 넷 다 한 명씩 심문시켰기에 넷이 공통으로 가리킨 장소로 향했다.

이후, 밖에서 본다면 그냥 상가 건물로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위치는."

"지, 지하에 있습니다만. 숨겨진 통로가 있는지라 저희가 함께 가야 할 겁니다."

"그럼 지상으로 나올 수 있는 출구는 몇 개나 있는데."

"그게 상가 건물 여기저기 출구가 있긴 합니다만."

"상가 건물로 이어진 출구 말고는 없단 말이지? 다른 지하로 이어져 있다던가."

"아, 예."

그 말을 들은 나는 별천도를 뽑았다.

그 순간 오러가 별천도 위로 휩싸였고 나는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콰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각!

상가 건물 전체가 날아갔다.

마치 부실 건설이라도 한 양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 건물에 의해 주위에서 난리가 나며 소란스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넷은 그 모습을 보고 번개라도 맞은 양 파르르 떨었고 그중 한 명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죄, 죄송합니다! 아직, 아직 출구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방금 말하셨던 대로 지하 출구가 하나 있으니 분명 위에 입구가 막혔다는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그쪽으로 탈출할 게 분명합니다!"

"응, 그렇지?"

내가 생글생글 웃고 있자 녀석은 더욱 커다랗게 "예!" 하고 외쳤다.

나머지 셋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자신들의 상황을 알아차렸는지 고개를 조아리기 시작했고 나는 셋의 머리를 가볍게 밟아주며 말했다.

"다음부터는 잘하자."

"예, 예!"

그 세 놈을 우그러트리기 전까지 짓밟아주자 유일하게 안 밟힌 녀석이 서둘러 나를 다른 출구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출구는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크기의 하수구였다.

오염된 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하수구 구멍 앞에 도착한 내가 가만히 고갯짓하자 아까 전 미처 진실을 밝히지 못한 한 명이 급히 하수구 구멍을 열더니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이, 다들 괜찮아? 위에 난리가 나서 지하 통로로 오긴 했는데. 뭔 일이 생긴 거야?"

안으로 들어간 녀석이 누군가 발견한 듯 하수구를 타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넘버 9냐. 우리야말로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고. 갑자기 우리 아지트 건물이 통째로 날아갔어."

그리고 안쪽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들 서로 숫자로 부르고 있냐."

"예, 저는 넘버 6, 이쪽은 넘버 7, 이쪽은 넘버 10입니다."

넷 다 복면 쓰고 있는 탓에 구분도 안간다만.

"리더는 넘버 1, 저희 중 가장 강합니다. 아, 방금 들린 목소리는 넘버 4입니다."

이제는 묻지 않아도 술술 정보를 내뱉어 주는 넘버 7이란 녀석은 강아지처럼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 왔다.

방금 전 상가를 가볍게 날려 버린 후 녀석들은 마치 내가 주인이라도 된 양 열심히 아양을 떨고 있었다.

"황제의 핏줄 제거는 넘버 3, 4, 5, 8이 하고 있었습니다. 넘버 4가 마침 아지트에 있던 모양이니 사로잡아서 이야기를 들으시면 될 거 같습니다."

그에 질세라 넘버 6이 급히 다른 정보를 건네주었다.

오호라, 그렇구만.

그리 생각한 나는 넘버 9와 짜증스레 이야기하던 넘버 4를 기다렸다.

잠시 후 하수구 밖으로 나온 넘버 4는 바깥에 있는 셋을 보곤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나를 발견한 뒤 곧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너희들 왠 계집을 데리고 왔어. 넘버 1이 암살을 위해서 계집은 멀리하라는 말도 까먹었냐."

"그래? 그럼 위쪽에서 일어난 일은 내가 했으니 그냥 멀리해서 넘어가 줄려고?"

내가 고갯짓을 하며 대답해 주자 넘버 4가 이해 못 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그는 무언가 알아차린 듯 눈을 크게 뜨더니 넷을 바라보며 외쳤다.

"네놈들 설마 배신한 거냐! 멍청한 것들! 넘버 1을 아는 녀석들이 배신을 해?!"

그리 외친 그는 허리춤에 있던 단도 두 개를 바로 뽑아 들었다.

"저 계집이 뭔지는 몰라도 너희들은 선택을 잘못했어. 우리 숫자의 차이를 잊은 모양인데. 나 혼자서 너희들을 죽이는 건 문제도 아니야. 물론 죽이진 않고 배신한 이유를 샅샅이 파헤쳐 줄 테지만."

"말이 많네."

"엇."

내가 자기 앞에 다가온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건지 넘버 4가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즉시 정신을 되잡자마자 내 목에 단도를 내질렀고, 나는 녀석의 복부를 가볍게 차올렸다.

"커흑?!"

복부에 맞자마자 하수구 천장과 부딪힌 후 하수구 물에 얼굴을 박은 녀석은 한차례 부들부들 떨었다.

나는 그런 녀석의 뒷덜미를 붙잡아 질질 끌고 온 뒤 바깥 풀숲에 던진 후, 곧 녀석의 등 위에 털썩 앉았다.

"그럼 너랑도 이야기를 좀 해 볼까."

"이, 야기?! 웃기지 마라! 네가 너 같은 계집한테 뭔가 말해 줄 것 같으냐!"

"저놈들도 처음엔 그랬어."

자신을 유인해 온 4명을 가리키며 말하자 넘버 4가 소리쳤다.

"이 쓰레기들이! 너희들은 넘버 1한테 다 죽었어! 모조리 죽은 목숨이라고!"

거칠게 외친 그가 씩씩거리자 넷은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대로 나는 망설임 없이 심문을 시작했고 잠시 후, 방금까지 자존심 넘쳤던 넘버 4가 눈물을 쏟고 있었다.

"제발, 제발 그만."

"슬슬 말해 줄 마음이 들었어? 아, 뭣 하면 넘버 1을 불러도 괜찮아. 그 녀석도 너랑 똑같이 해 줄 수 있으니까."

"죄송, 죄송합니다. 진짜로 제 모든 걸 걸고 사죄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제발 그만둬 주세요."

"몸에 달린 걸 몇 번 오러를 주입해 내부에서부터 터트렸을 뿐이잖아. 걱정 마. 회복 포션은 많아. 몇 번만 더 해 보자."

"아, 아아아! 말하겠습니다. 뭐든지 말하겠습니다! 이제, 이제 제발 그만해 주십쇼! 앞으로 제대로 살겠습니다. 평생 주인으로 모시겠습니다!"

침까지 흘리며 바닥에 머리를 쿵쿵 박는 넘버 4를 보고 어깨를 으쓱거린 나는 다리를 펴고 일어났다.

그러곤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일어나라고 손짓했고 넘버 4는 나를 따라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래, 이제 너희가 발견한 황제에 핏줄의 이름을 불러."

"예, 살해된 3명은 라탈리, 고르아, 쉬만이고 저희 조사로 알아낸 핏줄은 앞으로 코만, 쉬벨, 나리야 세 명이 더 있습니다."

"잠깐만, 러쉬라는 이름은 없어?"

"러, 러쉬 말입니까? 저희가 조사한 것에는 아직 없습니다만. 아, 호, 혹시 저희가 못 찾은 걸 수도 있습니다! 저희도 최근에 정보를 받고 움직이기 시작한 거라 아직은 전부 알아낸 것이 아닐 수도!"

"알았어. 일단 닥치고 있어."

내가 혹여나 또 심문할까 봐 점점 목소리가 커지는 넘버 4를 합죽이 시킨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설마 하는 거지만 정말 러쉬는 그냥 군대 가기 하루 남은 녀석일 뿐인 건가.

이상하다.

내 감은 분명히 러쉬가 황제의 핏줄이라고 외치고 있는데.

성좌가 그냥 아무렇지 않게 러쉬라는 사람의 곁에 나를 둘 이유도 없었을 텐데 이해가 안 간다.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 건가.'

['나태한 즐거움'은 그 의문에 침묵합니다.]

43화

성좌 쪽에서도 전혀 알려 줄 생각이 없다는 반응이 나왔다.

쯧, 이렇게 계속 유추하는 건 취미가 아닌데.

나도 구천옥녀처럼 층을 클리어하는 데 유용한 클래스라도 좀 찾아봐야 하나.

'황제가 있을 때는 주변의 다른 녀석들이 그 부분을 채워 줬으니까 그럴 필요 없었는데.'

혼자서 빠르게 층을 공략하기 위해서 전투적인 부분만 집중적으로 보완했더니, 나보다 더 뛰어난 하일성의 등장에 또 새롭게 강해질 방법을 찾아야 하고. 나 원.

"넘버 4, 나머지 인원들은 어딨어."

"저와 활동하던 셋은 지금 각자 코만, 쉬벨, 나리야를 죽이러 갔습니다. 넘버 1을 제외한 나머지 넘버들은 핏줄을 조사하고 있고요."

"그럼 그 넘버 1은 어디에 있는데."

"그, 황제의 두 아들 중 둘째 아들을 죽인 게 넘버 1입니다. 지금은 귀족들의 곁에 머물고 있다는 것만 저희가 알고 있습니다. 넘버 1은 저희에게도 비밀로 하고 혼자 움직이는 타입인지라."

호오, 황제의 아들을 들키지 않고 죽일 수 있을 정도면 보통내기는 아니겠네.

제국의 황제의 아들을 암살할 수 있다는 건, 녀석들의 말대로 넘버 1이 이 층에서 상당한 강자라는 소리겠지.

"아, 그리고 전해 듣기론 황제는 이미 죽은 게 유력하다고 합니다."

"나도 대강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그 정보를 접한 녀석들은 다 그럴 거라 짐작하고 있을걸."

정보 길드에서 굳이 황제를 죽었다고 표현 안 한 이유는, 위쪽에서 쉬쉬하고 있었기 때문일 거다.

통치자인 황제가 승하하고 그 밑에 직계까지 모조리 죽었다는 것이 주변국에 퍼진다면, 제국에게는 큰 위협이니까.

그러나 실상은 일개 정보 길드가 이런 정보를 가지고 있는 시점에서 다른 국가의 수뇌부가 머저리가 아닌 이상, 전부 이 사실을 손에 쥐고 있겠지만 말이다.

"그래, 넘버 4, 그럼 너는 나머지 녀석들과 계속 연락을 지속해라. 그리고 넘버 1에게는 습격이 있었다고 전해. 너희가 적으로 있는 상대는 있지?"

"아, 예, 타 국가의 암살 집단도 있고 암암리에 용병 길드랑도 몇 번 부딪쳤죠."

"그럼 그놈들이 한 것으로 대충 설명해. 어렵지는 않잖아?"

"네, 절대 어렵지 않습니다."

미소 짓는 내게 넘버 4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들은 계속하던 일 해. 겸사겸사 핏줄을 찾는 녀석이 있으면 나한테도 알려 주고. 아, 그래도 이렇게 되면 내 밑으로 들어오는 건데 아무것도 떨어지는 게 없으면 짜증 나잖아?"

그리 말한 나는 백금화를 하나씩 꺼내 들었다.

그러곤 내 앞에 부복하고 있는 녀석들에게 하나씩 던져 주었다.

"이건 앞으로 너희들 고용 값이라 생각해. 기간이 갱신될 때마다 더 지급해 주마. 뭐, 모자라지는 않지?"

백금화를 받은 녀석들은 잠깐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가 내 말에 대답이 늦었음을 깨닫곤 급히 고개를 숙였다.

"절대 안 모자랍니다."

겉으로는 티를 안 내도 속으로는 꽤 희희낙락하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기에 나는 그냥 넘어갔다.

사람 간에 힘으로만 누르는 수직적인 관계는 오래 지속되기 힘들다.

하지만 거기에 돈의 힘을 더하면 생각 이상으로 깊은 충성심을 끌어낼 수 있다.

그걸 잘 알고 있기에 나는 이젠 부하가 된 녀석들을 두고 몸을 돌렸다.

'우선 러쉬에게 돌아갈까.'

광란의 밤을 열심히 보내고 있을 녀석에게 돌아가기로 한 나는 가기 전에 연락은 너희들 알아서 해 오라고 넘버 녀석들에게 전해 둔 뒤 그때의 지하 술집으로 돌아왔다.

아래로 내려오니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이 북적였고 나는 눈으로 인파들 사이에 있을 러쉬를 찾았다.

그놈이라면 아직도 여자랑 이어지지는 못했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몇 번 둘러 봤을까, 그제야 나는 러쉬가 없음을 깨달았다.

고개를 기울인 나는 오러를 두른 뒤 건물 주위에 옅게 분산시켰다.

러쉬 녀석의 오러는 기억해 뒀다.

사람마다 몸에서 흘러나오는 오러는 제각각이다.

그것을 생각하며 천천히 오러를 주위로 늘려 보던 순간 그 끝에 러쉬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것도 다수의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는 러쉬가.

'설마.'

만약 귀족들이 넘버 녀석들에게만 암살 의뢰를 해 둔 게 아니라면.

나는 급히 계단을 뛰어올랐다.

그러곤 러쉬가 있는 방향으로 단숨에 뛰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에 러쉬가 암살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부터 옆에 붙어 있어야 했나.

자책하듯 입술을 깨물며 그렇게 달려간 결과, 나는 뒷골목에 도착했고 거기에 널브러진 러쉬와 그런 그의 주위를 둘러싼 남성들을 보였다.

녀석들의 행색은 뒷골목에서 자주 출몰하는 부랑자 행색이었고, 그들은 지금도 러쉬를 몇 차례 두드려 패고 있었다.

"뭐야, 이 녀석 진짜 돈 없는데."

"아, 진짜 그렇게 돈 쓰던 녀석이 빈털터리인 게 말이 되냐."

"웬 벼락부자인가 했더니. 쯧."

술집에서 러쉬가 돈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잡배가 붙은 거였나.

한숨을 내쉬며 그들에게 다가선 나는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한 대씩 쥐어박아 주었다.

그러곤 웅크리고 있는 러쉬의 머리를 검지로 두 번 두드렸다.

곧이어 정신을 차린 러쉬는 자신을 더 이상 두드려 패는 사람이 없단 걸 알아차리자 의문스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러쉬는 나와 눈을 마주치곤 급히 놀란 듯 주위를 둘러보며 외쳤다.

"천성아! 오면 안 돼! 지금...."

무어라 말을 하려던 녀석은 주위에 남성들이 쓰러져 있는 걸 보곤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꼴이 되었어도 도와 달라는 말보다는 내가 위험에 처할까 도망치게 하려는 걸 보며 나는 흐음 하고 소리를 내뱉었다.

멍청한 구석에 찌질 하긴 해도 뭐, 나쁜 놈까지는 아닌가.

"어떻게 된 거야? 설마... 천성이 네가 한 거야?"

"그럼 당연히 내가 했겠지. 누가 이랬겠냐. 어쩌다 이놈들한테 끌려 나왔냐? 너 정도 돈을 썼으면 가게 입장에서도 이런 잡배한테서는 지켜 줬을 텐데."

이렇게나 돈을 쓰는 녀석은 다음에도 또 써줄 확률이 높다.

그러니 가게에서도 이런 손님을 지키는 차원에서 가게 안에서는 절대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사전에 사람을 붙여 두기라도 했을 텐데.

"아, 그게 어떤 여성분이랑 좋게 이어져서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시길래 따라 나오다가 날 뒤쫓아 온 모양이야. 그래도 다행히 그 여성분은 잘 도망갔고. 나만 진탕 맞았지. 뭐."

"아니, 아마 그 여자도 한패일 확률이 더 높다는 생각이 드는데. 지금쯤 어디선가 보고 있을걸."

"...그런 이야기만 하면 세상에 너무 꿈이 없지 않아?"

"곧 군대 가는 네가 아직 꿈을 꿔?"

러쉬는 내일이면 다가올 미래를 떠올리며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녀석의 머리 위에 포션을 부어 주던 나는 엉망진창이 된 옷을 보고 난 뒤 한숨을 내쉬었다.

"이 꼴론 글렀네. 시간도 꽤 많이 됐고."

벌써 새벽 3시다.

나름 인연 하나 쌓아 줄까 싶었더니 그건 힘들 것 같고.

포션 덕에 회복하긴 했지만 두들겨 맞았던 것 때문에 러쉬도 지친 모양이다.

게다가 러쉬는 암살당할 위험이 있다.

그걸 감안하면 여기에 더 두는 것도 그렇겠지.

"돌아가자. 내일 갈 준비해 놔야지."

러쉬 쪽에서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나 러쉬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녀석의 집에서 적당히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숨 자고 일어나자 하루가 지나 있었다.

암살을 대비해 녀석의 집의 빈방에서 잤던 나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깨어 방 문을 열고 나오자 평소와 같은 옷을 입은 러쉬가 보였다.

녀석의 뒷모습은 군대를 가는 녀석답게 지금만큼은 참 씁쓸해 보였다.

왜 이때 김광석의 노래 '이등병의 편지'가 그렇게 생각날까.

"러쉬."

"아, 천성아 일어났어? 미안, 웬만하면 너 안 깨게 조용히 나가려 했는데."

"훈련소까지는 꽤 가야 된다고 했었지."

그래서 녀석은 아침 일찍 일어나 준비한 것이었다.

"응, 천성이 넌 안 와도 돼. "

"남 위하는 척은 그만해도 돼. 멍청아. 군대 가는 날이 오면 전부 다 포기하는 듯이 구는 녀석들을 한두 번 본 줄 아냐. 가자. 맛난 것도 하나 사 줄 테니까. 먹고나서 두고두고 기억해라."

"천성아, 넌 진짜 내 친구구나."

현실은 하루 안 사이긴 하지만 오랜만에 군대 갈 놈을 보니 옛날이 생각나서 괜스레 안쓰러웠다.

그렇게 러쉬와 나온 나는 길거리를 걸으며 말했다.

"훈련소 근처에는 원래 맛있는 곳 없으니까. 괜히 거기서 먹지 말고 가기 전에 해결하자. 그리고 무엇보다 훈련소 앞에서 먹으면 뭘 먹든 입맛 떨어져."

"그거 어제도 말했다? 가만 보면 천성이 넌 군대 갔다 온 거 같아."

갔다 왔다.

아니, 정확히는 갔다가 20년째 돌아가지를 못하고 있다.

'썩을, 이번 회차도 실패하면 또 군바리다. 그 모습으론 절대로 못 돌아가지.'

문제는 이 다짐을 이전 4회차 때도 똑같이 했다는 거지만 말이다.

나는 러쉬와 적당히 담소를 나누며 녀석이 먹고 싶다는 음식을 하나 먹여 주곤 훈련소 앞까지 동행했다.

시간은 2시 30분, 입소 전까지는 꽤 이른 시간이었지만 여기저기에 사람들이 있었다.

남자들은 대부분 풀이 죽은 얼굴이고 부모님들은 착잡한 표정이었다.

여자 친구가 있는 녀석들은 껴안으며 '들어가서 편지해. 기다릴게.'라는 말을 나누고 있었다.

"사람 많네."

"다 네 동기들이다. 그냥 전부 너랑 똑같은 날 제대하는 녀석들이라고 생각해."

"하핫, 우리나라에 태어난 게 죄지. 그래도 기왕 이렇게 된 거 우리나라 잘 지키고 올게."

들어가고 하루 만에 바뀔 생각일 텐데 왜 입소 직전에는 전부 저 말을 하는 걸까.

어디나 사람 속은 다 똑같다고 생각하는 동안 30분이 지나가고, 군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훈련병들에게 모이라며 여기저기 말하고 다녔다.

"천성아, 나 갈게. 안에서 편지는 쓸 수 있다니까. 편지 자주 쓸게. 휴가 나오면 보자."

"그래, 잘 가라."

그 말을 남기고 러쉬가 훈련병들 사이에 섞여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 앞에 나온 군인이 한차례 훈련병들에게 말을 했고 곧 뒤돌아서며 가족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자제분들을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10년간 저희가 책임을 다해서 멋진 군인으로 키우겠습니다."

구라치네.

"훈련병 전원 차렷! 지금까지 키워 준 부모님들께 경례!"

그 순간 다들 어정쩡하게 거수경례를 했다.

몇몇은 왼손을 들어 올리기도 하고 일부는 엉뚱한 곳에 손을 가져다 대기도 했다.

안에 들어가서 제식 훈련부터 받겠구나 생각하고 있으려니, 훈련소 안으로 훈련병들이 들어갔고 배웅하던 부모님들도 조금씩 떠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던 나는 적당히 몸을 풀며 인적이 드문 장소로 걸어갔다.

"넘버 9."

"예."

내가 부르자마자 넘버 9가 부복 자세로 나타났다.

어젯밤 러쉬가 잠들었을 때 나는 넘버 9를 불러 몇 가지 부탁을 해 놓았던 것이다.

그를 보며 나는 손을 뻗었고 그는 곧바로 내게 옷을 건네주었다.

그 옷은 그리티아 제국의 군복이었고 나는 상의와 바지를 탈의하곤 그 자리에서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길어진 머리카락은 목까지 올 정도로만 잘라내곤 나머지는 말아 올려 군모에 눌러 쓰자 그럴듯해 보였다.

"저, 하천성 님."

"왜."

마지막으로 군화를 신던 순간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넘버 9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녀석을 돌아보자 넘버 9는 내 가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슴 쪽이 조금 티 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말을 듣고 가슴 쪽을 내려본 나는 혀를 찼다.

가뜩이나 머리카락 때문에 귀찮았는데 이번에는 신체냐.

44화

옷은 일부러 사이즈를 조금 크게 맞췄는지라 허리나 엉덩이 쪽은 괜찮아 보였지만 가슴 쪽은 넘버 9의 말대로 확실히 여자인 게 티가 났다.

"압박 붕대가 있긴 한데 이거라도 쓰셔 보심이."

혹시나 해서 미리 챙겨 온 건가.

주머니에서 자연스레 나온 압박 붕대를 보고 나는 잠깐 현타가 왔다.

원래 남자인 내가 남장을 하고 있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까.

어쨌든 넘버 9에게 압박 붕대를 건네받은 나는 가슴팍을 칭칭 동여매었다.

조금 숨이 막혔지만 어떻게든 묶은 난 곧바로 군복을 다시 입은 뒤 넘버 9를 돌아보았다.

"어떠냐."

"겉으로 보기에는 잘 모를 것 같습니다. 목소리 쪽은 음성을 변조하는 마법 아티팩트를 가져 왔습니다. 사용하시겠습니까?"

"그래."

어차피 웬만하면 눈에 안 띄게 숨어 다닐 거긴 하지만 만약을 대비해야 하기에 나는 녀석에게 마법 아티팩트를 받아 두었다.

"계급은 백인장으로 달아 두었습니다. 군 내부에서 어디를 돌아다녀도 크게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아, 그리고 일단 백인장이 될 때까지 어디서 활동했는지에 관련한 더미 정보도 만들어 두었습니다. 한 번 읽어 보시면 누가 말을 걸어도 대응하기 수월하실 겁니다."

목소리 테스트를 해 보던 나는 넘버 9가 전해 준 종이를 받곤 대강 눈으로 훑었다.

"고마워. 그럼 난 가 볼 테니까. 너희도 마저 일해. 별일 있으면 바로 오고."

"예, 아, 그리고 이건 연락망 도구입니다. 혹시 필요하시면 바로 사용해 주시면 될 거 같습니다."

"땡큐. 고생했다."

연락망도 주머니에 챙겨 넣은 나는 곧바로 군 훈련소에 침입했다.

오러로 기척을 감춘 이상 침입은 그리 어렵지 않았고 간부 군복인 만큼 부대 앞의 길거리를 돌아다녀도 딱히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나를 보고 경례를 하는 녀석들이 더 많을 정도였다.

'사람이 많기도 하고 하나하나 확인할 방법도 없으니 이 정도가 당연한 거겠지.'

그래도 훈련소 내에는 먹고 자고 할 훈련병이 대부분일 테니 간부가 가면 반드시 눈에 띌 거다.

거기서부터는 주의하며 움직이자고 생각하고 이동하던 찰나.

웨에에에에에에엥!

갑자기 사이렌 소리 같은 게 급히 울렸다.

이 세계에 비행기는 없을 터지만 마치 공습경보를 알리는 것처럼 엄청난 소리에 내가 멈칫하고 올려다보고 있자 주위에서 사람들이 소란스럽게 나왔다.

"미친, 전쟁이다! 전쟁이라고!"

갑자기 전쟁이라니.

내가 황당한 표정으로 보고 있자 준기사급들이 나와 여기저기 고래고래 소리치기 시작했다.

"경비단장님한테서 소식 떨어졌다! 이번에 들어온 훈련병들도 우선 모두 데리고 오라고 하신다!"

"예? 훈련병들까지 말입니까? 걔들 써먹지도 못합니다! 전부 개죽음당할 게 뻔하지 않습니까!"

"썩을, 소식도 없이 옆 나라 소틀리아가 공격해 왔어! 다른 쪽에 바로 지원 요청을 하긴 했지만 지금으로서는 훈련소가 제일 가깝다. 뭐가 됐든 성벽이 뚫리면 끝장이야. 어떻게든 인원수라도 채워 넣어서 시간 벌이를 해야 해!"

"아, 진짜 준기사님, 걔들 이제 막 군복 입었습니다. 이런 개죽음으로 모는 게 말이 됩니까."

"나도 미치겠다. 근데 걔들도 여기 들어온 이상 군인이야. 위에서 명령 내려오면 어쩔 도리가 없다고."

갑자기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보며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성좌가 의도한 대로 보기 좋게 상황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무슨 목적이냐.'

물론 전쟁이 일어날 듯한 조짐은 보였다.

그런데 그걸 러쉬가 들어 오자마자 터트리다니.

혀를 차며 나는 우선 열심히 대화하고 있는 준기사에게 다가갔다.

그는 내가 다가온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곤 고개를 돌렸고 나는 급히 뛰어 왔다는 양 연기하며 그에게 경례를 보였다.

"자네는?"

"티안 백인장입니다. 서부 지역 쪽에서 활동하다가 최근 동생이 입대한다는 소식을 듣고 휴가를 내어 훈련소로 왔다가, 경보 소리에 급히 와 보았습니다만 제가 도울 게 있겠습니까?"

능숙하게 연기를 하며 그에게 말해 보자 준기사는 잘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휴가 중에 미안하네. 자네가 활동하던 부대에는 미리 연락해 두겠네. 지금은 우리를 좀 도와주게나. 훈련소다 보니 이십인장은 많지만 백인장 인원이 너무 부족해. 자네가 그쪽을 좀 도와주겠나. 지금 상황이 영 말이 아니라서."

"그렇게 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동생이 훈련소에 들어왔는지라 걱정되어 가능하면 오늘 들어온 훈련병 쪽 인원을 배치받고 싶습니다만 괜찮겠습니까."

"인원이 많은데 괜찮겠나?"

"예, 최근에 막 들어온 훈련소 인원이라면 배치된 백인장 인원도 없지 않습니까. 다른 백인장들은 자신이 익숙한 이십인장과 병사들과 함께해 주는 것이 훨씬 더 도움될 겁니다."

"젠장, 진짜로 고맙네. 전쟁이 끝마치면 술 한잔 사지. 티안 백인장 꼭 기억해 두겠네."

그리 말한 준기사는 옆에 있던 이십인장에게 날 안내해 줄 것을 부탁하곤 급히 뛰어갔다.

['나태한 즐거움'이 당신의 연기력에 박수를 칩니다.]

그 뒷모습을 잠깐 본 나는 성좌의 메시지를 보곤 혀를 찼다.

당연하지.

이쪽이 층을 공략해 본 게 한두 번인 줄 아나.

이런 식의 급박한 상황을 겪어 본 것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다.

하물며 넘버 9에게 더미 정보까지 전부 받은 시점에서 티안이라는 백인장은 나 그 자체다.

'나중에 나가면 배우라도 해 볼까.'

이만하면 나름 잘생겼겠다, 우리 집안 배경이면 알아서 캐스팅 해 줄 테고, 어차피 아버지는 나한테 회사를 물려줄 생각은 1도 없으니 의외로 재밌을지도 모르겠다.

"이십인장 자네 이름은."

"이레믹 이십인장입니다. 티안 백인장님, 괜찮으시겠습니까? 훈련병들은 백인장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엉망입니다."

"괜찮네. 훈련병들은 지금 어디 있나."

"이제 막 군복으로 갈아입은 뒤 무기 지급을 받았을 겁니다. 지금 연병장에 모아두라고 이야기해 두고 나오긴 했는데...."

"잘됐군. 바로 가지."

그리 말한 나는 이레믹과 함께 훈련병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모래가 깔린 연병장에 모인 훈련병들은 무기를 품에 안은 채 벌벌 떨고 있었고 그 인원들은 대략 1,000명 가까이 되어 보였다.

확실히 준기사가 말했던 대로 인원이 많았다.

'러쉬는 저기 있군.'

끝자리에 서서 머리를 감싼 채 벌벌 떨고 있는 러쉬를 확인한 나는 이레믹이 준비한 마이크 옆에 섰다.

1000명이나 되는 인원이라곤 하나 훈련병이기에 그들은 이십인장이 맡고 있었고, 배정된 이십인장은 대략 10명 정도 있었다.

나머지 훈련병을 관리하고 있는 자들은 병사 중에서 차출된 조교들이겠지.

그들 또한 전쟁이라는 말에 억지로 서 있는 것일 뿐 다들 겁먹은 눈치였다.

"아아, 훈련병들."

내 목소리에도 훈련병들은 집중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나 원, 내가 군대 간부가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한숨 나오는 일이지만 나는 크게 외쳤다.

"훈련병들!"

내 목소리가 터져 나오자 소란스러웠던 소리가 급히 줄어들었다.

그들을 보며 나는 가볍게 상황을 정리하여 알려 주었다.

그 뒤 우리가 전쟁에 바로 투입될 것임을 이야기하자 그들의 얼굴 낯빛이 급격하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한다 한들 통하지 않는다.

아무리 대단한 연설이라도 그들에게 통할 리가 없다.

저들은 군인이 아니다.

강제로 나라에 징용된 그저 평범한 청년들일 뿐이다.

"끌려온 너희들에게 해 줄 말은 없다. 다 싫겠지. 도망가고 싶겠지. 너희는 군인이 아니라 그저 강제로 징집되어 온 사람들일 뿐이니까."

그리고 나는 그런 그들과 같은 병사로서 이야기해 주었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났다. 너희가 도망치면 그 대신 너희 가족들이 죽는다. 안다. 이런 이야기는 백날 천날 들었을 거란 거. 아니까, 또 말하는 거다. 하지만 오늘 너희 가족들은 너희를 배웅하고자 이곳에 왔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몇몇이 멈칫하였다.

그러곤 서서히 하나둘 나를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너희가 훈련소에 들어온 지 불과 1시간밖에 되지 않았다. 너희 가족은 지금도 밖에 그리고 근처에 있어. 집으로 돌아가고자 떠났어도 고작 1시간 거리를 갔을 거다. 고작 1시간이다. 말로는 30분도 걸리지 않아 도착할 거리겠지."

그들은 하나둘 깨닫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가족이 코앞에 있다.

전쟁의 위험 바로 앞에 노출되고 있었다.

그것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너희는 검이 있다. 건강한 신체가 있다. 하지만 너희 가족들은? 부모님은? 무기도 없고 너희를 키우느라 늙었다. 스스로 지킬 힘이 너희보다 압도적으로 부족해. 당장 전쟁이 일어났다. 성벽이 무너지는 순간 병사들이 이곳으로 들이닥칠 거다. 지금 너희 가족들은 그 위험 바로 앞에 직면해 있는데도 너희들은 맞서 싸우기는커녕 자신이 왜 끌려왔는지에 대해서만 생각할 속셈이냐!"

별천도를 들고 쿠웅 바닥을 내려찍었다.

행동 하나에 훈련병 전원이 나를 올려다보고, 나는 그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군대는 언제나 너희의 가족을 인질로 잡아 이야기한다. 나는 그게 싫다. 그렇지만 지금 너희에게 해 줄 말은 이것밖에 없다. 목숨을 바치라고도 안 하겠다. 그러니."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모인 장소에서.

"가족을 지켜라."

전쟁이 현실로 다가왔을 때 제일 먼저 떠올릴 그들을 지키라고 나는 말했다.

훈련병들의 눈시울이 한차례 붉어졌다.

그들은 입술을 꽈악 깨물었고 이내 하나둘 결심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들을 보며 단상에서 내려왔다.

'쯧, 괜히 내 병사 시절이 생각나서 짜증 나네.'

물론 난 전쟁을 겪어 본 것은 아니었지만 과거에 병사였던 내가 이런걸 하고 있으려니 괜스레 짜증이 났다.

그러나 층의 클리어를 위해서 필요한 거라면 어쩔 수 없었다.

"이동하겠네. 이십인장들은 훈련병들을 끌고 오도록. 이십인장 한 명은 나와 선두에 선다. 내 옆에서 길 안내를 맡게나."

"백인장님께서 선두에 서시겠단 말입니까?"

"그럼 누가 선두에 서나. 빨리 움직이게. 시간이 없다."

내 말을 듣고 놀란 이십인장의 눈가에서 조금씩 신뢰가 묻어 나오기 시작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아까 보았던 이레믹이 처음에 의아했던 눈에서, 이제는 신뢰 있는 상관을 보는 눈이 되어 제일 먼저 나섰다.

그를 본 나는 승낙하듯 한차례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성벽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제일 조심해야 하는 건 러쉬가 죽지 않게 하는 것.'

내 얼굴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으나 단상 위에 올라 연설을 한 덕에 거리감도 있었고 거기다가 목소리, 군복, 여자인 내가 이곳에 있을 리 없다는 생각까지 더해져 러쉬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 듯싶었다.

티안 백인장의 가짜 지위는 언제든지 버릴 수 있다.

그렇담 최대한 러쉬를 지키는 쪽으로 가자고 생각한 나는 성벽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전쟁은 벌써 시작되고 있었다.

여기저기 소란스러운 소리가 울려 퍼지고 성벽 너머에서 거친 싸움 소리가 들려왔다.

성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상대 군대를 막고자 우리 쪽에서도 병사들을 내보내기 위해 임시로 열어 둔 것이었다.

"백인장님, 어쩌시겠습니까."

경보를 듣고 급하게 온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다른 쪽 병사들은 벌써 몰려들어 싸우고 있었다.

그 모습을 잠깐 바라본 나는 이레믹에게 물었다.

"자네 혹시 오러를 다룰 줄 아나."

"예? 제가 제대로 오러를 다룰 수 있다면 진작 준기사라도 달았을 겁니다."

이 세계 수준은 그 정도인가.

넘버 녀석들이 생각 이상으로 실력이 높았음을 짐작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45화

"우선 훈련병들은 성벽 앞 주위를 둘러싸듯 막는다. 인원이 많아 보이게 최대한 빼곡하게 서도록. 녀석들은 아직 기초도 안 되어 있다. 저 속에 집어넣어 봤자 아군, 적군 구분도 못 하고 검을 휘두르다가 비명횡사할 거다. 그렇다면 차라리 적한테 우리 뒤에는 이만큼의 예비 아군이 있다 정도로만 보여 주는 식으로 배치해도 충분할 거야."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렇담 백인장님께서는 그럼 직접 훈련병들을 지휘하시겠습니까?"

"아니, 그건 이레믹 이십인장 자네가 맡게나. 지금의 나로서는 다른 이십인장들과 커뮤니케이션이 잘 될 수가 없어. 자네가 이십인장 사이에서는 제일 짬이 높으니 나 대신 맡게나."

"예? 제가 말입니까? 그렇담 백인장님께서는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저놈들을 쳐부수고 오지."

내가 적군을 가리키며 짧게 말하자 이레믹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곤 도약했고 곧바로 성벽 위로 올라갔다.

성벽 위에서 소틀리아 적군을 내려다본 나는 몸을 가볍게 풀었다.

저 녀석들에게는 미안하게 됐지만 적군이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넘버, 아무나 좋으니까 내가 말해 뒀던 러쉬를 지켜라. 걔가 죽으면 너희들도 죽는다."

그리 말한 뒤 연락망 도구를 품에 넣어 둔 나는 발의 오러를 끌어올리곤 그 즉시 하늘로 뛰어올랐다.

바람을 헤치며 공중으로 뛰어오른 나는 그대로 소틀리아 군 사이로 착지했고 그로 인해 바닥에 깔린 몇 녀석이 죽어 나갔다.

내 갑작스러운 등장에 소틀리아 군이 당황한 채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나는 그 즉시 병사가 쥐고 있던 검 하나를 빼앗아 휘둘렀다.

'튀지 않으려면 함부로 오러도 못 쓰니.'

서걱, 수십 개의 목이 잘려 나가며 핏물이 튀었다.

그 사이에서 시선을 돌리자 나를 발견한 간부 한 명이 급히 외쳤다.

"저, 저놈, 저놈부터 죽여!"

그리 외친 간부가 급히 병사들을 지휘했다.

창과 검을 든 병사들이 나를 막고자 뛰어들었고, 나는 그걸 보고 가볍게 코웃음 치며 검을 휘둘러 나가기 시작했다.

한 번의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수십 명이 죽어 나간다.

마음먹고 검을 휘두르면 일격에 전부를 없애 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런 짓을 한다면 너무 눈에 띈다.

적당한 영웅, 그 정도로만 비치자.

그렇게 생각한 나는 열심히 적군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검을 휘두르고 다녔다.

"이놈!"

그 순간 내 앞에 말을 탄 기사 한 명이 나타났다.

거대한 헬버드를 들고 전신에 플레이트 메일을 입은 그는 나에게 맹렬히 돌진해 왔고 손에 쥔 무기에는 오러가 휩싸였다.

"이 악마놈! 죽여 주마!"

그리 외친 그가 헬버드를 휘두르며 맹렬히 달려오자 나는 몸을 비스듬히 낮추곤 그대로 말의 다리를 갈랐다.

달려온 말의 다리가 잘려 나가며 헬버드를 든 기사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지자, 나는 별천도에서 핏물을 털어 낸 후 그를 돌아보았다.

"무, 무슨, 오러도 보이지 않았는데 설마 그냥 힘으로 말의 다리를?!"

일부러 눈에 띌까 봐 오러는 쓰지 않고 있었는데 녀석들에게는 그렇게 비쳤나.

"이 괴물!"

헬버드를 내던지고 검을 든 그가 소드 엑스퍼트 상급의 오러를 두른 채 내게 휘둘러 왔다.

채엥!

하나 맹렬하게 덤빈 것에 비해 나는 그의 검과 함께 플레이트 메일까지 한 번에 절단시켜 버렸다.

순식간에 즉사한 그에게서 뿜어져 나온 핏물이 내 몸을 덮었지만 얼굴 가장자리만 쓰윽 닦아 낸 나는 군모를 고쳐 쓰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나를 본 적군들이 경악하며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물러나기 시작했고, 나는 검을 돌리며 그들의 다시금 섰다.

"너네가 안 오면 내가 간다."

그리고 또다시 검이 휘둘러졌다.

* * *

하천성이 적군을 헤집고 다닐 무렵, 성벽 위에 푸른색 머리칼의 한 청년이 서 있었다.

그의 옆에는 경비단장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고 가만히 전황을 보고 있던 그는 물음을 던졌다.

"저자는 누구지."

"예? 누, 누구 말입니까?"

"지금 소틀리아 적군 속을 혼자서 헤집고 다니는 저자 말이야."

그의 말에 경비단장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곤 소틀리아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3만 명이나 되는 소틀리아 군 사이에서 돌아다니는 자가 누구인지 그로서는 잘 알 수가 없었다.

"오러도 쓰지 않고 혼자서 싸워 나가고 있다라."

오러로 강화된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청년은 몸을 돌렸다.

"됐네. 내가 나서지. 우리 쪽 군사들도 곧 올 거야. 이 인원으로 잘 버텼어."

"예, 감사합니다. 백작 각하."

경비단장이 더욱 고개를 숙이자 백작으로 불린 남자는 하천성과 같이 벽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 순간 그는 성벽 아래에 빼곡히 모여 있는 훈련병들을 보았다.

1000명 정도 되는 그들은 멀리서 본다면 성벽 입구를 지키고 있는 병사들로 보였고, 그들을 잠시 바라보던 그는 검을 뽑으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 * *

"야, 저, 저기, 뭔가 이상하지 않냐."

"어, 어. 맞아. 저게 뭐냐."

그 무렵 무기를 든 채 벌벌 떨고 있는 훈련병들 사이에서 조금씩 말들이 오고 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말대로 저 멀리서 무언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방금까지 아군과 싸우던 적군들이 어느 때부터인가 앞이 아니라 뒤쪽에 신경을 쓰면서 무어라 소리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뒤에 뭐가 나타났나."

"잘 모르겠는데."

그 순간 적군 사이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구르듯 나오면서 수십 명의 목을 베어 버린 그는 한차례 숨을 가다듬곤 다시 안으로 뛰어 들어갔고 그걸 본 훈련병들 몇몇이 어벙한 표정으로 서로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저, 저거, 아까 연설하던 그 군인 아니야?"

"확실히 백인장이었어. 맞아. 그 이후로 안 보이기 시작했는데 설마 혼자서 적군 사이로 들어간 거야?"

"방금 내가 뭘 본 거냐. 사람이 저렇게 쉽게 죽는 거였어? 백인장은 전부 다 저런 거냐고."

훈련병들이 소란스럽게 이야기를 나눌 무렵 훈련병들 맨 앞에 서 있는 이십인장 이레믹은 경악하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느라 제대로 상황을 못 본 훈련병들과 달리 그는 줄곧 상황을 직시하고 있었다.

하천성이 일순간 성벽 위로 뛰어올랐을 때부터 그는 하천성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눈치챘다.

그러나 그가 적군을 막고자 아군과 협력하러 갔으리라 생각했지 혼자서 적군 속을 헤집고 다닐 거라 예상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방금 전 적군 사이를 헤치고 나온 것은 하천성이었고, 그를 본 이레믹의 눈이 경악을 느끼며 미친 듯이 흔들렸다.

"티안 백인장님, 분명 오러도 쓰고 있지 않았어. 설마 그냥 힘만으로...."

그게 사람이 가능한 일인가.

게다가 저 속에는 오러를 다루는 기사들도 필시 있을 텐데.

"이레믹, 방금 뭐야. 훈련병들 말로는 아까 전 티안 백인장님이라는데. 사실이야?"

그 광경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같은 이십인장 한 명이 멍하니 있는 이레믹에게 물었다.

그의 물음에 잠깐 멈칫한 이레믹은 서둘러 방금 전 상황을 전했고 이십인장들은 하나같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그게 말이라도 되냐는 듯이.

그 순간이었다.

그의 앞에 한 청년이 나타난 것이.

푸른색 머리카락을 뒤로 묶고 귀족 복장을 한 그는 망토를 두른 채 천천히 적군 사이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의 뒷모습을 본 이십인장 한 명이 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길버트 백작이다. 길버트 백작이야!"

"뭐!? 살았다. 우린 살았어!"

그를 알아본 이십인장들이 하나둘 희망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훈련병들에게까지 들렸고 훈련병들의 표정도 뒤바뀌었다.

길버트 백작, 올해 27세.

그는 그리티아 제국이 자랑하는 6검제 중 한 명이었다.

그의 경지는 소드 마스터, 그의 이름은 당연 다른 국가에도 널리 퍼질 정도로 유명인이었고 그가 등장하는 것 하나만으로 같은 편들의 기세가 올라가고 상대가 억눌릴 정도다.

그런 그가 전쟁이 일어난 이 자리에 직접 등장한 것이었다.

"이겼어. 이겼다고!"

한 이십인장이 외친 순간 길버트 백작이 한차례 검을 휘둘렀다.

소드 마스터 급 오러가 담긴 그의 검이 휘둘러진 순간 소틀리아 군사 중 상당수가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그의 등장에 사람들이 환호하고 그가 다시금 앞으로 걸어 들어간 순간 한 사람이 굴러 왔다.

* * *

'거참, 오러 안 쓰고 몸을 막 휘두르니까. 자주 구르네.'

물론 넘어진다고 다칠 몸은 아니긴 하지만 오러를 안 쓰기로 한 이상, 병사들 공격도 피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그럴듯해 보일까 싶어 몇 번 피하다가 구른 것이었다.

"넌."

그 순간 한차례 굴러 무리에서 떨어져 나왔을 때 곱상하게 생긴 사내놈이랑 눈이 마주쳤다.

이 세계의 귀족인 듯 고급스러운 옷을 잠깐 힐끗 본 나는 방금 전 오러로 검을 휘두른 녀석이 저놈이란 걸 금방 눈치챘다.

'소드 마스터 급 정도는 되나.'

그래도 나름 떵떵거리고 살 수 있을 정도의 급이지라고 생각하며 나는 녀석에게서 눈을 떼곤 다시 적군 사이로 들어갔다.

적군이 무슨 갑옷을 두르든, 얼마나 단단한 방패를 들어 올리든 상관없이 힘 하나로 일반 검을 둔기처럼 휘두르고 다녔다.

그렇게 한참을 적군 사이를 이리저리 돌아다녔을까, 이제는 입고 있는 군복이 핏물로 잔뜩 범벅 되어 검게 물든 상태가 된 나는 후우 하고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오러 없이 움직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지만 생각 이상으로 나쁘지는 않았다.

뒤를 힐끔 보자 적군은 우리 쪽 아군이 추가로 들어오면서 후퇴를 외치며 도주하고 있었고, 그들을 보던 나는 이번에는 아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꽤나 활약하고 다닌 거 같은데.'

날 추앙하고 있는 녀석들이 좀 있지 않을까 싶어 훑어보자 나에게 시선을 주는 녀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전원이 아까 전에 봤던 그 소드 마스터 놈을 추앙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이 층에서 이름을 날린 녀석인 듯 모두가 그의 등장 하나로 전쟁을 이겼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적당히 영웅 행세 좀 해서 층 공략 좀 원활하게 해 볼려고 했더니.... 뭐, 됐나. 러쉬 놈은 잘 살아 있는 모양이고.'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한 나는 군모를 다시금 고쳐 쓰곤 사용하던 적군의 검을 바닥에 꽂은 뒤 돌아섰다.

"백인장님!"

내가 돌아오자 놀란 이레믹이 급히 뛰어왔다.

시킨 대로 대열을 잘 지키고 있었기에 그를 마주한 나는 잘했다는 듯이 그의 어깨를 한차례 두드려 주곤 훈련병들 앞에 섰다.

이레믹은 급히 이십인장들을 시켜 훈련병을 집중시켰고 나는 그들에게 격려의 말을 해 주었다.

"모두 고생 많았다. 너희 덕분에 전쟁을 이겼다."

"와아아아아아!"

전쟁을 이겼다는 말 하나에 모두가 커다랗게 환호했다.

훈련병 중 아무도 죽지 않고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었다.

"이십인장들, 나중에 적당히 정신 교육해 놓도록. 아마 오늘 이긴 것에 취하는 녀석들도 있을 거다."

"알겠습니다."

이제는 내 말을 척척 잘 들어 주는 이십인장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나는 성벽 안으로 돌아갔다.

성벽 여기저기에서 다친 이들이 급하게 실려 가고 있었고 나를 따라온 이레믹이 내게 급히 물었다.

"백인장님, 괜찮으십니까? 피가...."

"내 피가 아니니 걱정 말게. 아, 괜찮다면 다른 군복 좀 준비해 주겠나? 갈아입을 장소도 좀 있었으면 좋겠군. 이후에 전쟁 상황을 다른 백인장들과도 상황 이야기를 나눠야 할 텐데 이 꼴로 나설 수는 없잖나."

"아,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훈련소가 그리 멀지 않으니 그쪽에서 갈아입으시죠. 아직 모르나, 회의는 분명 훈련소 쪽에서 하실 겁니다."

"고맙군."

그에게 감사를 표한 나는 이레믹과 함께 훈련소로 먼저 돌아왔다.

그러곤 그에게 예비 군복을 전해 받은 뒤 훈련소의 구비된 공용 욕실로 들어왔다.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나는 군모와 상의를 벗은 뒤 핏물 범벅인 몸을 확인하곤 압박 붕대를 풀었다.

이것 때문에 숨이 꽤 막혔었는데 풀고 나니 좀 편해졌다.

'내가 남장이라니 무슨 꼴이냐.'

46화

나는 한순간 성좌를 욕하고 싶은 기분을 느꼈지만 참기로 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넘버 중 한 명 붙어 있지."

"예."

러쉬를 지키라고 한 이후, 전쟁이 끝났을 때부터 나는 넘버 녀석들 중 한 명이 내 뒤를 따라다니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렇기에 내 부름에 넘버 7이 곧장 부복한 채 나타났고, 나는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했다.

"러쉬는."

"문제없이 잘 있습니다. 제가 지킬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 고생했다."

"그리고 하천성 님, 러쉬 님에 대한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 순간 어젯밤에 부탁해 두었던 또 다른 이야기가 나왔다.

내가 말해 보라는 양 넘버 7을 바라보고 있자 그는 곧바로 내 의문을 풀어주기 위해 대답했다.

"직계입니다. 꽤 멀긴 하지만. 직계가 맞았습니다."

그리고 돌아온 대답에 나는 얼굴에 한줄기 미소를 그렸다.

역시, 성좌 녀석이 그냥 러쉬를 친구로 붙여 놓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괜히 계속 좌불안석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

"좋아. 알아내 줘서 고맙다."

"앞으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조심스레 녀석이 물음을 던지자 나는 흐음하고 잠깐 고민에 빠졌다.

그러곤 곧 가벼운 미소를 띄워 보였다.

"그놈을 황제로라도 만들어 볼까."

"그럼 저희가 돕겠습니다."

장난스러운 말이었지만 넘버 7의 눈에는 진심으로 보였던 걸까.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그를 보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너희 마음대로 해. 난 씻기나 해야겠다. 나가 봐."

"예."

그리 대답한 넘버 7이 사라지자 나는 곧바로 군복 하의도 마저 벗으려 했다.

"어, 어어, 추, 충성! 길버트 백작 각하! 아, 예. 안에 계십니다만."

그 순간 밖에서 무언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이어 들린 길버트 백작 각하란 말에 내 고개가 기울여지고, 이상한 낌새를 느낀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무슨 일이지.

"옷을 갈아입고 나오신다 하셨으니 금방 나오실 겁니다. 예? 들어가시겠다고요? 어차피 갈아입고 금방 나오실 텐데 굳이... 백, 백작 각하?"

그 순간 누군가 안으로 들어온다는 소리에 나는 급히 바지를 다시 올렸다.

그러곤 급히 바닥에 떨어진 군복 상의를 들어 올리는 순간 공용 욕실 문이 열렸다.

욕실 문과 나는 일직선상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아까 전 보았던 소드 마스터 녀석이었고, 녀석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상의를 들어 올리는 자세에서 그대로 굳어진 내가 그를 바라보고 있자, 한차례 고개를 기울였던 그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말고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씨발."

뭔가 묘하게 수치스럽다.

게다가 저놈 백작이라고 했다.

그렇담 계급이 상당히 높은 놈인데 저런 놈한테 걸린 건 골치 아프기 그지없다.

'그냥 튈까.'

잠깐 고민했지만 나는 곧 고개를 저었다.

저놈 내 얼굴을 봤다.

소드마스터급 되는 녀석들이라면 이 층에서 중요한 녀석이고 그렇다면 층을 클리어할 때 또 언제 마주칠지 모른다.

'됐다. 됐어. 적당히 속여 넘기자. 군인이 되고 싶었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군인이 되지 못하여 남장을 하고 입대한 설정으로 가자고. 이 나라는 여군이라는 제도 자체가 없는 모양이니까.'

그리 생각하며 나는 대충 물로 씻어 낸 뒤, 가슴에 압박 붕대를 묶곤 이레믹이 주었던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머리카락을 끌어올리고 군모를 쓴 내가 밖으로 걸어 나오자 거기에는 백작이 서 있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이레믹은 그가 물린 듯싶었다.

"...사과하지."

"괜찮습니다. 군에 성별을 속이고 들어온 제 잘못입니다. 군인이 되고 싶어 이런 모습으로라도 들어왔지만, 오늘로 끝입니다. 백작 각하께 들켰으니 죄는 달게 받겠습니다."

적당히 신파극에서 볼 법한 말을 늘어놓자 그는 조금 당황한 듯싶었다.

그러곤 내 표정이 우울해지는 걸 보자마자 급히 입을 열었다.

"아니다. 걱정 말아라. 너에 대한 건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테니."

"백작 각하께 거짓말을 시킬 수 없습니다."

"거짓말은 누구든 한다. 그리고 네 비밀 하나 정도 숨겨 준다고 문제 될 건 없다."

"정말이십니까?"

내가 다시금 되묻자 길버트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하하, 얘도 바보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백작 각하께서 저를 찾아오신 듯하신데, 무슨 일로 저를."

바보에게 조심스레 물음을 던져 보자 그는 이제야 자신이 날 찾아온 이유를 떠올린 듯 원래 표정으로 돌아왔다.

"네가 적군과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 분명 오러를 다루지 않았지?"

"예, 그렇습니다만."

"오러를 못 다루는 건가?"

"다룰 수 있었다면, 준기사라도 되지 않았겠습니까."

아까 이레믹이랑 똑같은 소리를 해 봤다.

"...그런데도 그 실력이라."

"선천적으로 체력과 힘이 좋았습니다. 물론 그만큼 단련하기도 했습니다."

"분명 백인장이었지. 근무하던 곳은?"

"서부 지역 쪽입니다만. 지역명도 말씀드립니까?"

"아니, 됐다. 본론으로 돌아오지. 내 기사가 될 생각이 없나."

싫은데.

솔직하게 말하려다가 나는 말을 멈췄다.

여기서 괜히 뺐다 간 오히려 이상하게 보이겠지.

태도를 보아하니 기사가 되는 건 엄청난 영광인 듯하고.

"제가 여자인 걸 아시는데도 말입니까?"

"상관없다. 나는 네 실력을 보고 결정한 거다."

이 핑계도 안 먹히나.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진지하게 고민하는 척을 해 보였다.

한 3분 정도 말을 할까 말까 망설여 준 뒤 곧 그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백작 각하."

"...거절인가?"

"저는 아직 오러를 못 다룹니다. 제가 기사가 된다면 당연 오러를 다루는 기사들 사이에서 분란이 일어날 겁니다."

"그건 상관없다. 네 실력으로 직접 증명하면 다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할 거다."

"제가 그 분란을 견딜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니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이라 하면."

"제가 오러를 직접 다룰 수 있게 되었을 그때, 기사로 직접 받아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오늘 백작 각하님께서 싸우시는 모습을 보고, 저는 꼭 백작 각하님 밑에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나오면 이 상황은 가볍게 물릴 수 있겠지.

역시 연기는 재능의 영역에 올랐다고 생각하며 그를 올려다보자 길버트는 잠깐 침묵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네 뜻을 따르마. 네가 오러를 발현했을 때 우리 가문을 바로 찾아와라. 네 이름을 미리 말해 놓지... 그나저나 이름은?"

"티안이라고 해 주시면 됩니다."

그리 말한 나는 길버트가 더 말하기 전에 그에게 고개를 한차례 숙이곤 서둘러 떠났다.

이후, 이레믹과 합류한 나는 한차례 회의에 참가하여 경비단장이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걸 들은 뒤 훈련병들이 머무는 건물로 돌아왔다.

"방은 저희가 따로 하나 마련해 두었습니다. 거기에서 쉬시면 될 것 같습니다."

"고맙네. 아, 그러고 보니 러쉬라는 훈련병을 불러 주겠나."

"러쉬, 아, 그때 말씀하셨던 동생분이신가 보군요. 당연히 걱정되시겠죠. 바로 불러 드리겠습니다."

그리 말한 이레믹은 나에게 방 하나를 소개해 주곤 바로 러쉬를 찾아갔다.

방의 내부에 구비된 의자 위로 털썩 앉은 나는 군모를 눌러쓰곤 하품을 내뱉었다.

오랜만에 오러를 안 쓰고 힘만으로 움직였다 보니 웬일로 피로가 느껴졌다.

똑똑.

"훈련병 러쉬,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이레믹이 잠깐 교육을 한 듯 군인 말투를 쓴 러쉬가 쭈뼛쭈뼛하며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하루 사이에 전쟁까지 겪은 통에 훈련소에 들어갔을 때 보다 훨씬 지쳐 보였다.

그런 그를 본 나는 내 얼굴을 제대로 쳐다도 못 보는 러쉬를 위해 군모를 벗었다.

"러쉬."

그러곤 목소리를 바꿔 주는 아티팩트를 끄자 러쉬가 멈칫하더니 나를 제대로 쳐다보았다.

그 순간 러쉬의 얼굴에서 의아함이 샘솟았다.

내가 누군지 알아차릴 때까지 그에게는 한차례 시간이 필요했고, 곧 그는 나를 알아차렸다.

"처, 천성아? 네가 어떻게 여기에."

"반갑냐?"

"어라, 어, 백인장님이 천성이 너라고? 어? 어라."

"내 원래 직업이야. 몰랐지? 나 뒷세계 쪽 인간이거든."

넘버 같은 케이스를 참고해 농담 섞인 거짓말을 늘어놓았음에도 러쉬는 그를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아직 혼란스러운 듯싶었다.

"뭐, 됐어. 그것보다 군대는 어떻냐."

긴장을 좀 풀어 줄 겸 군대 이야기를 꺼내 보자 러쉬는 내가 자신이 알던 하천성이란 걸 깨닫곤 급히 여러 이야기를 내뱉었다.

고작 하루였음에도 할 말이 많았는지 이것저것 이야기하던 러쉬는 점차 조금씩 혼란이 풀렸고, 곧 안도감에 눈물까지 흘렸다.

"군대 오자마자 전쟁이라니. 나 진짜 죽는 줄 알았어.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그래, 고생했다."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몸을 둥글게 만 녀석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입대하자마자 전쟁, 내가 군인이 되어 봤던 입장으로서는 세상을 저주할 만했다.

"진짜 너 없었으면 나 어떡했냐. 나 정말 거기서 죽었을지도 몰라."

침울해졌던 러쉬는 나를 구세주라도 된 양 바라보았다.

그런 러쉬를 잠깐 마주 보고 있던 나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야, 러쉬. 너 군대에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면 어떻게 할 거냐."

진지하게 꺼낸 이야기였기에 러쉬 또한 내 얼굴에 드러난 뜻을 알아차렸다.

정말로 내가 그를 군대에서 나오게 할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그 뜻은."

"네가 군대를 나올 수 있는 방법을 찾았어. 당장은 아니겠지만 말이야."

"방법이 뭔지 가르쳐 줄 수 있어?"

러쉬의 물음에 나는 답을 해 주기로 했다.

"넌 지금 죽은 황제의 먼 핏줄이야."

"으응?"

그러나 이해 못 했다는 양 러쉬가 고개를 기울이자 나는 그에게 설명이 부족했음을 눈치챘다.

일반 시민들은 아직 황제는 물론, 황위 다툼으로 인해 그와 관련된 핏줄까지 전부 죽었음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차근히 러쉬에게 상황 설명을 해 주기 시작했다.

내 설명을 전부 들은 러쉬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쳐다봤다.

"천성아, 넌 그런 걸 대체 어떻게 아는 거야."

"말했잖아. 난 뒤쪽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아까 콘셉트 그대로 가 보기로 했다.

"그리고 네가 그 황제의 핏줄이야. 네가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어."

"내가 황제?"

아직 상황을 제대로 못 받아들인 듯 어벙한 태도를 취하는 그를 보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내가 군대를 빠져나올 수 있는 이유가 뭔지 알았지. 소틀리에 왕국이 갑작스레 전쟁을 시작한 이유도 분명 황위 다툼과 관련 있을 거야. 그 이야기가 녀석들 귀에 들어간 거겠지. 제국의 내부가 혼란스러운 걸 알고 이때다 싶어 전쟁을 시작한 거야. 아마 곧 있으면 다른 나라들도 점차 제국을 공격해 오기 시작할 거고."

그리 말한 나는 러쉬의 양어깨를 잡았다.

"그래서 너한테 말하는 거야. 계속해서 전쟁이 일어나면 황위 다툼을 하던 귀족들도 내부에만 신경을 쓰기가 힘들어져. 지금처럼 황제가 없는 이상 제대로 된 갈피를 못 잡는 귀족들은 더욱 혼란해져 서로서로 휘둘릴 거고, 그 결과 내부의 힘은 계속 깎여 나갈 거야. 그때 네가 등장하면 돼. 황제의 핏줄을 가진 네가 등장하면 내부 분열과 전쟁 탓에 혼란스러웠던 귀족들은 네가 왕위에 오르는 걸 제대로 저지하지도 못할 거야."

"어, 으응, 근데 그런 상황에 내가 황제가 된다 한들 달라지는 게 있을까? 일단 전쟁이 터졌잖아. 그렇담 내가 황제가 되어도 나아질 건 없을 거 같은데. 그리고 내가 귀족이라면 황제인 나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죽이려 할 거야."

"아니, 네가 확고한 발언권을 가질 수만 있다면 그것 하나로 꽤 달라질 거야. 군대 사정은 사전에 확인해 뒀어. 귀족들이 군대를 막 굴리고 있긴 하지만, 군 수뇌부 쪽은 제일 윗사람의 말을 듣는 체계로 짜여 있어. 네가 제일 먼저 얻어야 할 건 군 지휘권이야. 전쟁이 일어났을 때만큼 군의 위치가 올라가는 경우는 없어. 그러니 네가 군을 다루게 된다면 귀족들도 너를 함부로 하지 못해. 게다가 다른 나라들은 황제와 황위 다툼으로 엉망이 된 내부를 노리고 공격해 올 거야. 이럴 때 황제라는 구심점이 생기면 내부 분열이란 약점이 보완되지."

"...."

내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러쉬는 손으로 입가를 눌렀다.

47화

그러곤 이것저것 생각해 보는 듯하더니 그 뒤 나를 돌아보았다.

"천성아, 너 원래 이렇게 머리가 좋았던가."

"뭐, 임마? 난 원래 똑똑하거든?"

"아니, 나는 천성이 너만 있다면 정말로 황제가 되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너라면 내가 황제가 되든, 뭐가 되든 지켜 줄 수 있을 거 같아."

내 말을 듣고 서서히 황제가 될 수 있다는 것에 확신을 가지기 시작한 러쉬를 보곤 나는 가볍게 혀를 찼다.

"너무 신뢰하지 마. 내가 한 이야기들은 어디까지나 가장 그럴듯하게 짜인 가정이야. 그사이에 벌어질 일들은 나도 책임 못 져. 그런 것들은 그때, 그때 대처해야 하니까."

"응, 그건 알아. 애초에 나 따위가 황제가 된다는 건 여러모로 무리기도 하고. 그래도 천성이 너한테는 내 핏줄이 필요한 거지?"

그 순간 예리한 말이 들려왔다.

내가 고개를 들어 잠시 멍하니 러쉬를 바라보고 있자 그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나도 바보는 아니야. 천성이 네가 왜 날 황제로 만들려는 건지는 몰라도, 네 이야기에서 나는 일종의 들러리잖아. 천성이 넌 내 핏줄을 구실로 황제의 자리에 올려놓을 이유가 있는 거지?"

나는 층을 공략하기 위해서 러쉬를 황제로 만들 속셈이었다.

생각 이상으로 눈치가 빠른 러쉬의 말에 나는 무어라 답하려다가 곧 말을 멈췄다.

거짓말은 됐다. 그냥 솔직하게 굴자.

"그래, 러쉬. 난 널 황제로 만들 필요가 있어. 그 이유를 말해 줘 봤자 너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난 널 황제로 만들고 싶어."

"하하, 오늘 막 입대한 내가 황제가 될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하긴 한데."

그리고 러쉬는 내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 천성이 네 뜻이라면 따르고 싶어."

어제 하루 동안 쌓아 놓은 그와의 친분이 생각 이상으로 효과가 좋았던 걸까.

물론 그것도 있었겠지만.

'성좌 녀석 일부러 러쉬와 나를 아는 사이로 만들어 둔 이유가 있었군.'

거기에 더해 러쉬를 일부러 입대 전날의 사람으로 지정해 둔 것도 전부 하나같이 이유가 정해져 있었다.

입대 전날이라는 특수한 상황, 군에 입대하는 사람의 친구로 넣어 두면 누구든지 우선 그를 어떤 방식으로든 위로해 주려고 할 테고 그 위로는 러쉬와의 좋은 관계를 자연스레 만들어 줄 것이다.

이전부터 알던 친구 사이라는 점까지 작용한다면 러쉬는 나에게 신뢰감을 가질 것이고, 그 신뢰감을 바탕으로 나라는 인물이 그에게 황제가 되겠냐는 제안을 했을 때 러쉬가 받아들일 확률이 매우 높아지는 것이다.

['나태한 즐거움'이 당신의 생각에 흥미를 보입니다.]

내 추리를 정정할 생각 따위 없다는 듯 성좌의 메시지가 떠오르자,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너희들은 원래 그런 녀석들이니까.

항상 제멋대로 길을 정해 놓고 참가자가 그 길에 오르면 자신의 길을 어떻게 따라가는가를 보고 즐기는 그런 녀석들.

메시지에서 시선을 뗀 나는 러쉬를 돌아보았다.

일단 내가 가는 방향은 잘못되지 않았다.

뭐가 되었든 이 층의 공략에는 러쉬가 황제가 되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 황제가 되어 줘. 러쉬. 넌 황제가 될 사람이야."

그리 말한 나는 시계를 쳐다봤다.

벌써 잘 시간이 되어 있었고, 러쉬 또한 지쳐 있음을 눈치챈 나는 한차례 박수를 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좋아. 러쉬, 이야기는 여기까지. 넌 우선 돌아가서 쉬고 있어. 나머지 이야기는 나중에 또 하자."

"응, 알았어."

자리에서 일어난 러쉬는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 순간 자리에서 일어나던 그는 잠깐 머뭇거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저기 천성아 나 황제가 되면 너한테 한 가지만 부탁 좀 해도 될까."

"응? 뭔데?"

러쉬가 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던 내가 의문스레 물었다.

그러자 그는 잠깐 나를 가만히 보더니 곧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야. 나중에 말할게. 이런 건 부탁이라고 하기 그러니까."

나는 그런 그의 행동에 의아해하다가 '나가 볼게.'라고 하곤 나간 러쉬를 본 뒤 머리를 긁적였다.

무슨 말을 하려 한 거지.

뭐, 그것보다 나는 주머니를 뒤져 넘버들과의 연락망 오브젝트를 켰다.

"이야기할 게 있다."

― 예, 뭐든지 말씀하십시오.

넘버 4의 대답이 들려왔다.

"넘버 7에게 들었겠지. 난 러쉬를 황제로 만들 거다."

― 예, 전해 들었습니다. 저희는 하천성 님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러니 러쉬 님을 황제로 만드는 계획을 돕겠습니다.

본인들 입장에서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다.

나를 따르기로 한 이상 내가 러쉬를 황제로 만들면 그들에게는 그만한 뒷배가 없다.

게다가 나는 그들에게 재력과 힘 두 가지를 동시에 보여 주었다.

그건 넘버들에게 내가 진심을 다하면 러쉬를 황제로 만들어 줄 수 있다는 확신이 들게 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이득을 전제로 간다.

그들도 거기까지 계산을 마친 것이겠지.

"그래, 이제부터 내가 말하는 정보와 관련된 건 싹 다 모아와. 그리고 자신의 가문 이름을 팔려는 녀석이 있다면 어떻게든 구해라. 남작이든 뭐든 상관없어. 내가 귀족으로 위장할 신분이 필요하니까."

― 본부대로.

연락망이 끊기고 나는 기지개를 쭈우욱 폈다.

밑 준비는 이걸로 됐고.

'일단 잘까.'

나는 한숨 자기로 했다.

* * *

다음 날 한차례 백인장 회의에 참가하자 동부 지역 인접 국가들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역시 소틀리아 왕국이 공격한 것은 그냥 신호탄일 뿐이었다.

제국이 어떻게 대응하는지 보고자 쏘아 올린 신호탄 전쟁, 곧 있으면 다른 나라에서도 본격적으로 움직이겠지.

'우선 나는 정보와 지시 관련으로만 움직이도록 하고.'

넘버들에게 정보를 전해 받으며 나는 그렇게 서서히 러쉬를 황제로 만들어 갈 준비를 해 나가고 있었다.

'소틀리아는 신호탄 전쟁에서 졌으니 우선 이쪽은 조용할 거야. 그렇다면.'

슬슬 훈련소를 뜰 때가 온 모양이었다.

러쉬에게는 제대로 준비가 될 때까지는 계속 군 생활을 해야 할 것을 이야기해 놨으니 내가 떠나도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우선, 가능하면 전쟁에서 계속 눈에 띄는 활약을 몇 번 해야 한다. 다른 귀족들 입장에서는 탐낼 만한 영웅상급으로. 하지만 오러를 사용 못 해서 기사로 들이기에는 꺼림칙한 그 정도로만.'

더미 정보 만들기는 넘버들이 재주껏 잘해 주고 있다.

'군인은 한 장소에 묶이기 쉬워. 러쉬의 상태도 확인했으니 군인 신분은 여기서 포기한다. 지금부터는 용병으로 들어가서 움직인다.'

오히려 여기서 소드 마스터 놈에게 활약을 빼앗긴 게 기회가 되었다.

나를 뇌리에 깊게 기억하는 녀석들은 얼마 없을 테니까.

여기서 내가 빠지더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으리라.

'얼굴이야 투구 같은 걸로 가리면 그만이지. 오히려 잘됐어. 갑옷을 입으면 오히려 여자인 게 더 들키지 않아서 수월해. 갑옷은 눈에 띄는 특이한 색깔이 좋겠네.'

전장에서 눈에 띌만한 갑옷은 푸른색 정도면 충분할 거다.

거기에 일부러 핏물이 배지 않는 마법 같은 걸 걸어 두면 더더욱 눈에 띌 거다.

그 뒤 넘버들이 구해 놓은 귀족 가문에서 나를 직접 고용하는 형태로 위장한다.

과거 신분은 군인이었다는 것까지 섞어 둬서 소문을 퍼트리면 후에 내가 티안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아는 녀석들도 군인을 은퇴하고 용병으로 살고 있구나라고 알아서 납득해 줄거다.

'길버트 녀석은 소드 마스터, 군과 밀접하게 관련된 이상 아마 또 연관될 확률이 높아. 미리 더미 정보를 만들어 두는 건 나쁘지 않겠지.'

그리 생각을 마친 나는 다음 건에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 그 전에 또 하나 구해 놓을 것이 상회 길드.'

전쟁이 일어났다.

그렇다면 전쟁 관련 물자들을 크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상회 길드들이 있을 것이고, 그 유력한 상회 길드들 다수에게 귀족 가문의 이름으로 큰돈을 투자한다.

당연 이때다 싶어 움직이는 상회 길드들 입장에서 귀족 투자자는 절대 놓칠 수 없는 상대이기에 최선을 다해 꼬리를 흔들 것이다.

그리고 흔들리는 꼬리를 보고 다른 귀족들도 하나둘 투자한 귀족 가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겠지.

돈이 모이는 곳에는 날파리가 꼬이는 법.

자연스레 돈과 관련하여 접촉하려는 탐욕스러운 녀석들이 늘어난다.

그리고 탐욕을 부리는 녀석일수록 보다 많은 재산과 높은 지위를 가진 놈들이 많다.

'물론 맨 꼭대기에 있는 녀석들을 움직이려면 이 정도로는 안 되겠지.'

상회 길드의 투자자로서 가문의 이름값을 올리고, 접촉해 오는 녀석들 중 군과 관련된 녀석들을 선별한다.

그 뒤 자신의 안위를 지키고 싶다는 것을 핑계 삼아 자연스레 군 쪽에 관심을 보이는 척을 한다.

군과 관련된 자들은 당연 상회 길드를 좌지우지할 정도의 투자자가 군 쪽에도 돈을 투자할 낌새를 보인다면 무조건 환영일 테고, 그 투자자의 등장은 윗선의 귀에까지 흘러 들어갈 것이다.

그렇담 자연스레 군의 수뇌부와 연결 고리를 가질 테고, 그때 가문 쪽에서 군에 적극적으로 투자하여 그들에게 매우 중요한 인물로서 확고히 자리 잡게 한다.

'상회 길드에게 투자할 때도 일부러 군 관련 산업에 투자하면 더더욱 놓칠 수 없는 인물이 되겠지.'

이래서 돈이 중요한 거다.

결국 돈이 있으면 무슨 일이든 해결하는 데 큰 밑바탕이 되어 주는 것이다.

'적당한 돈을 가지고 있으면 의심하지만, 너무 큰돈을 가지고 있으면 오히려 의심하지 못하지. 돈의 출처 따위 중요하지 않을 규모로 움직이면 그럴 엄두도 못내.'

전쟁은 더더욱 커질 것이다.

평화에 오랫동안 찌든 위쪽은 서로 세력 다툼을 하느라 엉망진창, 군에 신경 쓸 겨를 따위 없을 것이다.

그때 내가 만들어 놓은 귀족 가문이 군을 착실하게 장악하고, 이후 전쟁이 무르익어 군의 중요성이 확고하게 올라갔을 때.

'우리 측에서 직접 러쉬를 황제로서 등장시킨다.'

마치 체크메이트를 두듯 러쉬를 떠올린 나는 관련 정보가 적힌 종이를 서서히 읽어 내렸다.

나는 현재 군부대를 나온 뒤, 더미 정보에서 정식으로 은퇴한 걸로 잘 정리가 되었다.

"기사님, 어딜 가십니까? 주먹밥 하나라도 사 가시지 않겠습니까. 전쟁 전에 두둑이 먹어 둬야죠."

"미안하지만 난 기사가 아닐세. 그냥 용병이야."

"하하, 저희 눈에는 갑옷을 입으신 분들은 다 기사로 보입니다."

시장 한복판을 지나고 있으니 노인 한 명이 정겹게 말을 걸어왔다.

"자네는 이곳에 전쟁이 일어난다는 소식 못 들었나. 도망이나 치게."

"근래에 2년 동안 나라 상태가 개판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저 같은 늙은이는 떠난다 한들 타지에서 살아남기는 힘듭니다. 그냥 이렇게 기사님들 같은 분들에게 주먹밥이나 팔고 그렇게 사는 거죠."

"쯧, 나 원. 하나 주게."

노인에게 주먹밥 하나를 구매한 나는 주머니에 넣어 두곤 가볍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현재 나는 가장 전쟁이 터질 조짐이 보이는 그라티아 제국의 변방 리오네에 와있었다.

리오네에 배정된 군이 있다곤 하나, 다른 쪽에서도 연이어 전쟁 조짐이 보이고 있어서 수도에서는 지원군 없이 배정된 인원으로 지키라는 말이 내려왔다.

그렇기에 리오네 가문에서는 전쟁에서 버티고자 급히 용병들까지 고용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뭐야, 저 파란 건."

"하핫, 눈에 띄고 좋네. 뭐. 화살 맞고 죽기 딱 좋겠다."

"예전부터 전쟁에서 활약하고 싶은 녀석들이 저런 걸 종종 입긴 하지. 전쟁도 못 겪어본 머저리들이 말이야."

용병들이 모인 장소에 도착하자 전쟁에 이골난 용병들이 나를 손가락질하며 비웃었다.

살펴보니 제국만 오랫동안 전쟁 없이 평화롭게 지냈고 타 국가끼리는 자주 전쟁이 있었던 건지, 그쪽에서 활동하던 용병들인 모양이었다.

나는 방금 전 손가락질하던 녀석들 앞에 다가갔다.

"뭐야, 불만 있어?"

"그럼, 불만 있지."

내가 다가오자마자 경계의 빛을 띄우는 용병들을 한차례 내려다보곤 나는 망설임 없이 머리를 한 대씩 쥐어박았다.

48화

내가 자신을 치는 걸 눈으로 좇아 오지도 못한 녀석들은 비명을 지르며 널브러졌고 나는 그런 그들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내 흉을 내 눈앞에서 보는데 불만 없을 리가 있겠냐. 뒤지고 싶지."

"악, 아악, 이, 미, 미친 새끼가."

아직 정신을 덜 차린 듯하여 한 대씩 더 쥐어박아 준 나는 손을 털면서 일어났다.

"앞으론 깝치지 마라. 또 눈 부릅뜨고 다니면 다음엔 이걸로 안 끝난다."

기절한 놈들을 내버려 두고 나는 리오네 가문의 용병 신청소에 가 작성을 마친 뒤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곤 투구의 아래를 열어 아까 사 온 주먹밥을 우물거리고 있을 때쯤, 방금 전에 나한테 당한 녀석들이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녀석들은 오던 도중 누군가에게 달라붙어서는 나를 보며 뭐라 떠들어댔다.

그리고 잠시 후, 이번에는 덩치가 꽤 큰 녀석이 나타났다.

2m는 될 법한 키에 몽둥이를 든 녀석은 나에게 뚜벅뚜벅 다가왔고 곧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우리 애들을 괴롭힌 게 너냐."

"아서라. 너 다친다."

"하하, 듣기는 했지만 정말 겁대가리 없는 놈이군. 나는 엑스트라 용병단의 단장 롤수아 엑스트라...."

더 이상 이야기하기 귀찮아진 나는 갑옷이 덮인 다리로 녀석의 복부를 걷어찼다.

말도 다 이어가지 못하고 날아간 놈은 아까 전에 그에게 일러바친 후 득의양양하던 녀석들과 부딪혔고 그바람에 한차례 크게 뒹굴었다.

꽤나 힘을 담아 차 준 덕분인지 엑스트라 놈은 위에 있던 것을 게워 내며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저 롤수아 놈을 저렇게 쉽게?"

"와, 웬 괴물 한 명 나타났네. 방금 오러도 안 쓰지 않았냐."

"순수 힘이네. 저거."

옆에 보던 용병들은 오히려 잘됐다는 양 낄낄거리고 있었다.

수치심에 얼굴이 울긋불긋해진 롤수아였지만, 내가 투구 너머에서 그를 노려보자 움찔거리더니 조용히 무리들과 함께 사라졌다.

방금 전 발차기로 확실히 급이 다름을 깨달은 것이다.

"젠장, 전쟁이다! 옆 왕국 세투라에서 군사를 이끌고 오기 시작했다! 용병들은 지금 당장 바로 성벽으로 이동하라는 영주님의 말씀이다!"

그 순간 속보를 전하고자 뛰어온 병사 한 명이 급히 용병들에게 외쳤다.

용병들은 익숙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도 그들을 따라 일어났다.

곧이어 경보 소리가 영내 전체에 퍼져 나가자 아직 대피 못 했던 시민들도 집을 버리고 떠나가기 시작했다.

"씨발, 거 많구만. 세투라는 원래 징병제 국가라 군이 많은 걸로 유명하긴 한데."

"저놈들 오늘 안에 무조건 리오네를 뚫을 속셈이야. 소틀리아전 이후 본격적으로 왕국들이 제국 대항 연합을 시작했다는데, 이게 진짜 전쟁의 신호탄일 거다."

"어이, 속보다. 다른 지역 쪽에서도 전쟁이 시작됐단다. 연합국 녀석들 본격적으로 제국을 깎아 먹을 속셈이야. 제국 입장에서는 군을 분산시켜야 하니 토악질 나오겠구만. 이거, 제국 변방은 웬만하면 다 날아가겠는데."

"그럼 좋지. 인마. 용병들이 돈 벌기 좋은 시대가 다시 왔잖냐!"

리오네를 지키고자 이동하는 용병들 사이에서 여러 이야기가 오고 갔다.

전선에 서는 녀석들의 이야기는 중요한 정보가 많기에 하나하나 귀 기울여 듣고 있던 나는 어느새 리오네의 성벽 앞에 도착했다.

"활을 재라! 손이 남는 녀석들은 영내에 구비된 투석기를 죄다 가져와!"

"용병놈들! 너희 중에서도 활 쏠 수 있는 놈은 모조리 올라와! 성벽이 뚫리면 끝장이다!"

군인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소리치고 용병들은 그놈들 참 시끄럽다며 투덜댄 채 각자 노련하게 움직여 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느긋하게 성벽 위로 올라왔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자들을 보곤 그중 뛰어가던 병사 한 명을 붙잡았다.

"야, 투석기에 쓸 돌들은 어디 뒀어."

"예? 아, 저쪽에 있습니다. 기사님."

갑옷을 보고 나를 기사로 오해한 그가 급히 대답하곤 다시 뛰어갔다.

병사가 가르쳐 준 방향을 돌아본 나는 성벽에서 뛰어내려 투석기에 사용할 돌들이 잔뜩 쌓인 곳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투석기를 빨리 가져오라며 고래고래 소리치는 백인장이 눈에 띄자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어이, 백인장, 그 돌 좀 내가 써도 될까?"

"뭐? 쓰긴 뭘 쓰나. 자네 용병이지?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이 돌들은 투석기에 사용할 걸세."

"결국 어차피 던져서 적한테 보낼 거잖아. 그럼...."

그 말을 하곤 나는 돌 밑에 손을 넣곤 그대로 들어 올렸다.

"어, 어어?!"

사람 10명 크기 정도 될 법한 돌을 가볍게 들어 올린 나는 성벽 쪽으로 몸을 돌렸고.

"날리면 그만이지."

그대로 투포환을 하듯 하늘로 돌을 던져 올렸다.

힘을 담아 던진 돌은 맹렬한 속도로 성벽을 지나쳐 상공을 날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커다랗게 쿠웅 하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 사이로 비명도 들리는 걸 보아하니 제대로 직격한 모양이었다.

"내가 전부 다 쓴다."

입을 벌린 채 다물 줄을 모르는 백인장에게 말한 나는 다음 돌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백인장이 직접 보고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자, 자네 대체 정체가 뭔가. 대체 무슨 힘이."

"창성. 그냥 그렇게 기억해 둬라."

대강 이름을 만들어 둔 나는 그대로 다음 돌을 던졌다.

또다시 날아간 돌이 적군에게 직격하자 하나, 둘 투석기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빠른 속도로 돌이 날아가는 것에 이상함을 느낀 자들의 시선이 내게로 향하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냐."

"인간 투석기잖아. 저건."

"저런 게 가능한 건 소드 마스터급 아니야? 실존하는 괴물이냐. 저거."

"멍청아. 오러를 안 쓰고 있잖아. 순수 힘이라는 소리라고!"

"나 아까 봤어. 저 녀석 롤수아 놈을 한 방에 때려눕힌 놈이야."

그리고 여기저기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용병과 군인 할 거 없이 그들은 너도나도 내가 하는 행동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고, 급히 정신 차린 애꿎은 지휘관만 전쟁 중이니 정신 차리라는 양 소리쳐대고 있었다.

그렇게 모든 돌을 날린 나는 손을 탁탁 털어 낸 뒤 성벽으로 한 번에 뛰어올랐다.

몇 10m는 될 성벽을 한 번에 뛰어오른 나를 보고 사람들이 경악스러운 반응을 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세투라 왕국군 쪽을 가볍게 확인했다.

방금 전 수십 개나 되는 돌을 날린 덕택에 군대의 전진이 잠시 중지되어 있었다.

피해는 상당히 있어 보였고, 그들은 또다시 투석기의 돌이 날아올까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상황 좋고.'

나한테 이목이 집중된 지금이 딱이라고 생각한 나는 그대로 성벽 위에서 뛰어내렸다.

내 행동에 놀란 몇몇이 그것을 보고 무어라 소리쳐댔으나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바닥에 가볍게 착지했다.

등에서 뽑은 것은 날이 거의 무뎌진 둔기와도 같은 대검, 그 대검을 손에 쥔 채 나는 홀로 세투라 군을 향해 나아갔다.

"응? 저거, 뭐야. 뭔가 오는데?"

"기사?"

전진을 잠깐 멈췄던 세투라 군 쪽에서도 상황을 알아차린 듯 내 쪽에 시선을 두기 시작했다.

흩날리는 흙먼지 사이로 전신이 푸른색으로 도배된 갑옷을 입은 나는 확실히 눈에 띄었고 그들은 잠시 의아해하다가 곧 지휘관에 지시에 따라 전투 준비를 했다.

몇 개의 견제용 화살이 날아왔으나 갑옷에 의해 막혔고 나는 대검을 붕붕 휘두르기 시작했다.

검의 회전력이 더해지고 저쪽에서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려는 순간 나는 대검을 던졌다.

회전력을 가진 대검은 맹렬한 속도로 날아가 멍하니 있던 자들의 몸을 모조리 갈라 버렸다.

그 사이로 달려든 나는 몸이 반 토막 난 시체 사이에서 검 하나를 뽑아 쥔 뒤 적진 한복판에 뛰어들었다.

그 후는 종횡무진이었다.

대검을 한차례 던져 놓고 적의 무기를 빼앗아 한참을 휘두르며 전진 한 후, 다시 대검을 주워 던져서 뚫는 것을 계속해서 반복하기 시작했다.

당연 내 행동에 적군도 어떻게든 대처를 하고자 지휘관들이 소리를 질러댔으나 나는 그 지휘관마저도 죽여 버렸다.

"괴물! 이 괴물아!"

"죽여! 왜 저 녀석 한 명을 못 막는 거야! 대체 저놈은 뭐냐고!"

"기사들이 모조리 죽어 나가. 말도 안 돼. 우린 5만이라고, 근데 5만이나 되는 군사가 왜 저놈 한 명 때문에 리오네 성벽 한 번 못 두드려 봐야 하냐고!"

울분에 찬 목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그 말대로 전쟁이 제대로 터지기 직전의 상황에서 나 혼자서 세투라를 아무렇지 않게 뚫어 버리고 있으니 난리가 난 것이다.

'그렇다고 나 혼자서 전부 다 죽일 속셈은 아니지만.'

오히려 다 죽으면 곤란하다.

세투라가 다시 회복한 뒤 계속해서 제국을 두드려 줘야 제국군의 효용 가치가 커질 테니까.

실제로 이렇게 내가 한 지점을 뚫고 있긴 하지만, 죽인 적군의 수가 기껏해야 1,000명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홀로 1,000명이나 되는 사람을 뚫고 나가고 있다는 사실은 세투라 군에게 공포로 전염되었다.

청색의 기사, 그 한 명이 마치 정말로 5만 명을 압도하고 있는 상황인 셈이다.

'일반 병사들 괴롭히는 건 여기까지 하고. 남은 건.'

내 시선이 돌아갔다.

이 군을 제일 위에서 지휘할 고위 장교급 녀석을 발견한 나는 내게 어떻게든 창을 찌르던 녀석의 머리를 밟고 뛰어올랐다.

공중으로 날아오른 나는 고위 장교가 있는 장소 바로 앞에 도착했고, 휘황찬란한 갑옷을 입은 그는 나를 보자마자 당황하여 말을 급히 내뱉었다.

"비켜라! 비켜! 다들 저놈을 막아라! 저놈은 내 목을 노리고 있다!"

그는 내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급히 외치며 도망치려 했다.

고위 장교 곁에는 당연 수준 높은 기사들이 있었고, 그들은 나를 막고자 오러를 끌어 올린 채 공격해 왔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무력감을 선사하듯 한 명, 한 명을 손쉽게 쓰러트린 후 말을 타고 도망가던 지휘 장교의 바로 뒤로 도약했다.

이내 핑그르르, 목 하나가 잘려서 굴러떨어지고 뒤이어 뛰어가던 말 위에서 시체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렇게 모든 기사와 고위 장교까지 베어 버린 내가 바닥에 착지한 순간 곁에 있던 자들이 히익 하는 비명과 함께 나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적군 한복판임에도 불구하고 내 반경 5m에는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고, 그들은 공포에 눈물까지 쏟으며 어떻게든 나한테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저 멀리서 갑자기 와아아아 하는 함성과 함께 말발굽 소리, 사람이 뛰어오는 소리 들이 섞여서 들려왔다.

리오네 쪽에서 성문을 열어 군사를 내보낸 것이었다.

나 하나 때문에 고위 장교가 죽고 세투라의 사기가 급격하게 떨어졌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승기를 잡고자 군사를 보낸 것이다.

처음에 세투라가 리오네를 공격하러 온 것과 달리 이번에는 리오네 쪽에서 급습을 시작하자 당황한 세투라 군이 급히 후퇴를 외치기 시작했다.

나는 나한테서 도망치는 녀석들을 가볍게 쫓으며 검을 휘둘렀고 그 때문에 세투라 군의 후퇴는 더더욱 가속화되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전장이 그라티아 제국 마크를 단 아군들로 꽉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동경, 선망, 영웅. 사람을 수천 명이나 죽인 사람에게 보내질 시선은 아니긴 했지만, 지금만큼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준 최고의 아군.

나는 그런 시선들을 뒤로한 채 성벽 안으로 돌아왔다.

49화

사람들은 너도나도 압도적인 무용을 보여준 나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고, 리오네 가문 영주까지 급히 나와 내게 사례를 하겠다며 나섰다.

그러나 나는 모든 걸 거절한 채 원래 받기로 한 돈만 받고 사라졌고 그 행동은 자연스레 소문을 만들어 냈다.

「리오네에 괴물 같은 놈이 나왔대. 혼자서 세투라 군 5만 명을 상대했다는데?」

「난 더 많았다고 들었어. 맨손으로 투석기용 돌을 던졌다는 소문도 있더라.」

「멍청아. 소문이 아니라 진짜야. 우리 형이 그 전쟁에 참가했는데 직접 보고 미쳤다면서 편지 써 왔다고.」

「이름이 뭐였지. 분명.」

「창성, 창성이야. 창성의 기사라고.」

「기사는 아니지 않나. 그냥 용병이잖아. 듣기론 오러도 못 쓴데.」

「오러를 못 쓰는 게 더 대단하잖아. 전부 자신의 순수 육체만으로 해 냈다는 건데. 오러 쓴다고 떵떵거리는 기사들보다도 훨씬 더 대단한 거라고!」

여러 가지 소문들이 급격하게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소문은 또 다른 소문의 꼬리를 물며 점점 불어났고, 사람들은 창성의 기사라는 존재를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양 여러 전쟁에서 계속해서 등장했다.

그때마다 늘 새로운 전설을 써 내려 갔고 나와 관련된 것들이 어느 정도 진실성을 품은 소문임이 확인되었다.

이후 전쟁에서 마치 나를 따라 하는 양 청색의 갑옷을 입는 자들도 점차 늘어났다.

'계획대로 잘 흘러가는구만.'

어느새 창성의 기사는 적군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아군에게는 영웅이 되어 있었다.

비록 오러를 못 다루지만 자신의 힘으로 모든 걸 해낸다.

그러한 콘셉트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새로운 인상을 심어 주었다.

오러는 기사들만이 다루는 특권이라는 인식이 있다.

일반적인 사람은 누구나 시기와 질투를 한다.

그렇기에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을 보면 부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질투한다.

그것이 기사라는 상징에 대한 인식.

그러나 오러를 쓰지 않고 순수 힘으로만 싸워 나가는 나의 등장은 기사에 대한 질투심으로 얼룩졌던 사람들에게 마치 기사들의 특권을 무너트리는 검과 같이 보였을 것이다.

사람은 오러를 쓰는 자보다 못 쓰는 자가 당연히 더 많다.

그렇기에 오러를 못 쓰는 자들, 그것도 일반 시민들이 창성의 기사에게 더더욱 커다란 지지를 보였다.

뿐만 아니라 탐욕을 부리지 않고 언제나 용병들이 받는 돈과 똑같이 지급을 받는 모습은 창성의 기사를 더더욱 영웅으로서의 덕목을 갖췄다고 판단하게 만들어 더더욱 나의 영웅화를 가속했다.

'슬슬 이번 전쟁에서 움직임을 멈춰 볼까.'

꽤나 오랫동안 전쟁 여기저기를 돌아다닌 나는 이제 브레이크를 걸 타이밍임을 눈치챘다.

오러도 없이 영웅이 되어 기사 소리까지 듣고 있는 나 때문에 비교당하는 일반 기사들은 나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었고, 귀족들은 나를 자기 패에 넣기를 원하면서도 휘하에 있는 기사들의 시선 탓에 섣불리 행동할 수가 없었다.

이 정도까지 영웅담이 만들어졌으니 이제 충분한 셈이다.

'남은 건 넘버들이 잘 다듬어 놓고 있는 돈 많은 부호 앤드류 남작의 밑 사병으로 들어가는 것. 그렇게 되면 앤드류는 단순히 돈만 많은 부호에서, 기사들이 시기하는 자도 품을 수 있는 포부가 큰 자로 인식될 거야. 영웅을 품을 수 있는 귀족으로서의 시민들의 지지는 덤이고.'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마지막 전쟁을 치르고자 참가했다.

내가 나타나자 주위가 나를 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선망의 눈빛 여럿이 내게로 향했다.

"창, 창성의 기사님. 저는 꼭 당신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갑작스레 내 앞에 다가온 어려 보이는 청소년 한 명이 검을 꼬옥 끌어안은 채 내게 커다랗게 외쳤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투구 너머에서 미소를 지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 내 모습은 전쟁이 한창 진행 중임에도 훈훈한 분위기를 형성해 주었다.

영웅의 형상은 이런 행동 하나하나가 결국 주요 포인트였다.

"하, 기사?"

그 순간 기가 막히다는 목소리가 하나 튀어 나왔다.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을 입은 그는 옆에 몇몇의 사람을 대동한 채 사람들 사이를 지나고 있었고, 곧 내 앞에 다가와 서서 못마땅하다는 듯이 노려보았다.

"기사는 얼어 죽을. 오러도 못 쓰는 놈이 무슨 기사냐? 너 같은 걸 기사라고 인정해 줄 것 같냐? 얼굴 투구도 벗지 못하는 놈이. 네놈 얼굴 못 봤다는 사람이 여기 수두룩해! 솔직하게 굴자고. 안이 엄청 더럽게 못생겼거나 혹은 범죄자라던가 그런 거 아니냐?"

내가 줄곧 투구를 쓰고만 다녔기 때문일까, 그는 그 부분을 트집 잡으며 나를 귀찮게 굴었다.

이런 놈이 꼭 한 명씩 있다.

기사 작위를 가지고 있고, 귀족이며 오러도 못 쓰는 자가 영웅으로 추앙받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그런 놈들이.

그리고 나는 평소 성격대로 눈앞의 놈을 날려 줄 속셈이었다.

이 녀석은 창성의 기사가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 모르는 모양이다.

나는 내 신경에 거슬리는 놈들은 귀족이고 뭐고 모조리 날려 왔다.

그래서 귀족들이 더욱 날 싫어하기도 하는 거고.

처벌을 하고 싶어도 전쟁통에 나 하나 잡고자 수많은 병사들을 보내는 것도 그렇고, 막상 나를 잡을 만한 인물도 제국의 6검제 급이 아니고서야 없다는 말이 나돌고 있을 정도였으니 귀족들 입장에서는 내가 싫어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더욱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다녔다.

일반 시민들에게는 영웅, 귀족들에게는 줫 같은 반쪽짜리 기사로.

"창성의 기사."

내가 손을 들어 올리던 순간 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선가 들어 본 목소리에 고개를 틀자 거기에는 반반한 얼굴에 푸른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다.

그가 누군지 눈치챈 나는 손을 내렸고, 내 앞에서 이죽거리던 귀족 놈은 깜짝 놀라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제국의 검제 길버트 백작 각하를 뵙습니다!"

그가 커다랗게 외친 순간 이제야 길버트를 알아차린 일반 병사들도 덩달아 놀라 귀족에게 예를 차리는 자세를 취했다.

그는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고 내 앞으로 다가와 내 손목을 잡았다.

"잠깐 따라와라."

내가 어깨를 한차례 으쓱거리며 그에게 끌려가자 사람들이 '검제가 영웅을 데려가 버렸다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 아니냐는 듯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사람들 사이를 지나쳐 길버트가 머물고 있는 듯한 건물에 들어선 뒤, 그는 방 하나로 나를 데려갔다.

그러곤 문을 철컥 잠근 뒤 나를 돌아보았다.

"...무례는 사과하지. 하지만 아무리 봐도 내가 아는 사람 같았다. 그리고 네 쪽도 별 반항 없이 따라온 건 나랑 같은 이유에서였겠지."

길버트가 그리 말하자 나는 딸칵 하고 투구를 벗었다.

그러곤 옆에 투구를 내려놓자 지난 한 달간 조금 더 길어진 머리카락이 목가에서 나부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길버트 백작 각하."

내가 인사를 올리자 그는 나를 보곤 자그맣게 한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은퇴를 했다고 들었다. 그 소식에 급히 너를 찾아가 봤는데 이미 떠나고 없더군. 그런 와중 창성의 기사라는 오러를 쓰지 않고 전장을 호령하는 자의 소문이 들려왔지."

"그 뒤에 쫓아 오신 겁니까?"

"정확히는 네가 내 쪽으로 온 게 맞겠지. 이번 전쟁의 지휘는 내가 맡았으니까."

물론 다 알고 온 거지만, 나는 그의 말에 조금 아쉬운 눈길을 보냈다.

"...개인적으로 쫓고 있긴 했다. 난 널 진심으로 내 기사로 들이고 싶었으니까."

그리 말한 그는 나를 잠깐 직시하더니 곧 물음을 던졌다.

"은퇴를 한 이유는."

"전쟁이 난 상황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세력 다툼이나 하는 귀족들을 보며 이 나라를 위해서라도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군을 포기하고 나온 건가. 네 성별까지 숨기면서 겨우 들어간 군을."

"나라를 지키고자 들어간 군의 실상에 실망했습니다. 지금의 군은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죠."

"...미안하군. 귀족들의 세력 다툼은 귀족들의 잘못. 내가 모든 귀족을 대표할 수 있는 권리는 없다만, 대신해서 너한테 사과하마. 너라는 사람을 담기에는 지금의 군은 너무 그릇이 작았다."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백작도 같은 귀족일 텐데, 그도 지금의 상황이 그리 달갑지는 않았는 모양이다.

그리 말한 길버트는 양 주먹을 꽉 쥐곤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나는 너를 품을 수 있다. 다시 한 번 내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해 주지 않겠나."

"제가 모든 기사들의 적이 되었음을 아심에도 그리 말씀하십니까. 백작님에게서 돌아서는 기사들도 상당수 있을 겁니다."

"그건 내가 책임지겠다. 지금의 기사들은 평화에 너무 오랫동안 찌들었어. 그렇담 오히려 너를 받아들임으로써 그들의 반발을 이용해 널 뛰어넘고자 하게 만들어 자신의 실력을 갈고닦는 기사가 늘어나도록 유도하면 된다."

"꽤 솔직하게 저를 이용하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군요."

"그만큼 진심인 거다. 내 기사가 되지 않겠나. 티안. 그때보다도 난 네가 더욱 내 기사가 되어 줬으면 하고 있다."

최선을 다해 나를 설득해 보려는 그를 보고 나는 옅게 미소 지었다.

내 미소를 보고 길버트가 무어라 말하려던 순간 내 목소리가 그보다 먼저 나왔다.

"죄송합니다. 길버트 백작님, 전 더 이상 기사가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

"...."

"저는 앞으로 오러를 쓸 수 있게 되더라도, 오러를 쓰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창성의 기사로 살아오며 수많은 사람이 기사라는 것에 여러 가지 반감을 지니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들의 영웅이 된 이상, 전 이제 그들을 저버릴 수 없게 되었죠."

내 말을 듣고 그는 아쉬움이 가득 담긴 눈동자를 표할 뿐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최근 앤드류 남작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그는 제가 군인이 될 수 있게 도와준 사람이죠. 제 힘이 필요하다고 하여 은혜를 갚을 겸 잠시 그와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그는 군을 바꾸고 싶다고 합니다.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군으로. 그의 뜻에는 저도 동의하니 아마 당분간은 그를 따르게 될 거 같습니다."

"앤드류 남작이라면 최근 군수 산업에 힘을 싣고 있는 그 자 말인가."

"예."

"...알았다. 더 이상 권유하지 않겠어. 네 뜻이 그러하다면 내 의견을 밀어붙여 봤자. 의미 없겠지."

포기한 길버트의 대답이 돌아오자 나는 투구를 다시 고쳐 썼다.

그러곤 몸을 돌려 걸어 나가려 하자, 그는 내게 길을 내어 주더니 곧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다음에도 또다시 만날 수 있겠나?"

어딘가 아련함으로 물든 듯한 그의 눈을 보자 나는 문을 열고 나가며 대답해 주었다.

"예, 다시 보게 될 겁니다."

그걸 끝으로 방을 나온 나는 피곤이 몰려옴을 느꼈다.

한동안 전쟁에서 여기저기 굴러다닌 데다가 수많은 사람을 볼 때마다 머릿속에 기억해 두게 설정하여 넘긴 결과, 슬슬 피로감이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 커다란 목욕탕에서 혼자 맥주라도 시원하게 마시고 싶네.'

이번 층은 워낙 내가 쉴 새 없이 나서야 할 게 많다 보니 확실히 휴식이 한 차례 필요한 모양이었다.

육체적으로는 지치지 않지만, 정신적인 피로감이 계속해서 쌓여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만 쉴까 싶지만 안 되겠지. 29층에서 꽤 시간을 쏟고 있는 마당이야. 분명 검왕 쪽도 들어와서 움직이고 있겠지. 개인 클리어 층임을 감안하면 어쩌면 그 녀석들이 나보다 먼저 클리어했을 가능성도 있어.'

단순히 힘으로만 되는 세계는 아니다.

오히려 상황을 얼마나 잘 유도해서 이끌어 내느냐가 이 층에서 중요한 것이었으니까.

그 점에서 검왕 일행에게는 마술사가 있다.

마술사의 실력이라면 분명 손쉽게 상황을 유도해 나가고 있을 테고 구천옥녀의 과거시를 보는 능력까지 더해지면 말할 것도 없겠지.

'놀고 있을 시간이 없다.'

그리 생각한 나는 우선 눈앞에 닥친 전쟁부터 막고자 나섰다.

50화

이후 마지막 전쟁을 끝마치고 며칠이 지났다.

전쟁이 끝난 이후 창성의 기사는 잠시간 휴식을 가져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 결과 과거 그의 친우라 소개된 앤드류 남작의 자택에서 머물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국에 퍼졌다.

그동안 수없이 달려온 창성의 기사를 봐 왔던 시민들은 그가 큰 부상이라도 입었을까, 걱정했고 한편으론 그 또한 인간이라는 점을 되새겼다.

거기에 더해 앤드류 남작에 대한 소문도 같이 퍼지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그가 상회의 큰손이 되었다는 것과 전쟁을 위해 군에도 투자하고 있다는 소식이.

처음 듣기에는 '뭐야, 그냥 돈 벌려고 그러는 거잖아.'라는 시민들의 반응이었으나 창성의 기사가 앤드류와 친우라는 소리를 듣고 인식이 바뀌었다.

지금의 군대의 문제점은 20대 시절에 10년이란 세월을 바친 남자들이 잘 알고 있었고, 앤드류가 그러한 문제점들을 개선하고자 한다는 소문도 함께 퍼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귀족들에게 비난받을 것을 알면서도 전쟁 영웅 창성의 기사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그의 포부는 시민들에게 상당히 좋은 인상이 되었다.

'인상은 서서히 바뀐다. 아무리 귀족이라도 곁에 늘 귀족만 있는 게 아니야. 하녀, 하인, 자신의 옆에서 시중을 들거나 하는 그들과 가까운 자들은 사실 일반 시민들이다. 그들에게 앤드류가 좋은 인상이 되어 가면 되어 갈수록 자연스럽게 그 인상은 귀족들에게도 전염된다.'

그리고 거기에 감회 되는 젊은 귀족들이 존재할 것이다.

젊음이란 새로운 사상에 쉽사리 물들곤 한다.

그들은 한때의 호기심에 쉽사리 빠지고 어른들이 삶에 지쳐 내려놓은 꿈들을 가슴속에 품는다.

젊음이란 삶을 오래 산 자들의 눈에 간혹 멍청하고 무식해 보이더라도 세상을 바꾸는 결과물을 내놓는 힘이 있다.

젊은 귀족들 사이에서 앤드류 남작의 이야기가 활발히 오고 가기 시작하자, 어른들의 압력에 짓눌려 있던 자들이 하나둘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전쟁이라는 혼란 통에 귀족들은 자신의 자식을 미처 살필 겨를이 없었고, 그것은 그들의 자식들에게 생각의 자유를 쥐여 주었다.

하나둘 앤드류의 편이 늘어 나가기 시작한다.

이 나라를 바꿔야 한다는 젊은이 생각이 그들 사이에서 빠르게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군 쪽은... 어디 보자.'

자료를 통해 귀족의 동태를 살핀 이후, 나는 종이를 따라 내려가며 군 쪽 상황을 살폈다.

평화에 찌든 탓에 귀족들이 등한시했던 군에 앤드류는 지난 세 달간 전폭적인 지원을 보였다.

그의 투자는 계속되었고, 그 결과 군 내부에서 앤드류의 지원으로 인해 부족한 재정 때문에 개선되지 못하던 부분들이 빠르게 바뀌어 나가고 있었다.

군에서는 전쟁에서 지친 병사들의 상태가 나빠지지 않게 하고자 앤드류의 지원금을 그쪽 방향으로 다 쏟아붓고 있었고, 앤드류 또한 그와 같은 결정에 환영하며 그들의 군대 개선에 도움을 주었다.

그건 점차 앤드류의 입김이 군대에서 강해지기 시작했다는 소리와도 같았고, 앤드류의 지원이 세달이 넘게 지난 지금에서야 겨우 군 쪽에 시선을 기울이기 시작한 귀족들이 하나둘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전쟁이 시작된 지 한 달, 그들이 등한시했던 군이 매우 빠른 속도 커져 가기 시작했고, 본래라면 자신들에게 고개도 못 들던 장군급들이 귀족 회의에서 항상 주도권을 쥐어 가기 시작했다.

그 주도권을 가진 장군급들이 득세하며 크게 지지하기 시작한 자가 있었는데.

그것이 앤드류 남작이었다.

거기까지 오고서야 귀족들이 현재에 상황을 알아차렸다.

지금 시대 흐름의 중심에 누가 섰는지.

그리고 지금 누구의 뒤에 붙어야 그 흐름을 탈 수 있는지 또한.

거기에 그들 사이에 한 가지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황가의 핏줄을 이어받은 남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슬슬 부를 때가 됐나.'

손에 쥔 펜을 가볍게 빙글빙글 돌리며 나는 입술 가를 매만졌다.

앤드류 남작의 대외적인 모습은 넘버 10을 분장시켜 앞세웠다.

얼굴이 반반한 그인 만큼 쾌활한 이미지에 어울리게 앤드류 남작을 잘 연기해 주었다.

'원래라면 마음 편하게 내가 했을 텐데.'

길버트 녀석한테 제대로 찍힌 탓에 창성의 기사가 나라는 사실이 알려진 터라 어쩔 방도가 없었다.

창성의 기사와 앤드류는 같은 인물이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슬슬 포섭하지 못한 넘버들도 움직일 거라 생각하는데 말이야.'

의외로 넘버 녀석들이 두려워하던 넘버 1에게서 전혀 이렇다 할 행동이 없다.

넘버 4에게 듣기론 연락이 두절된 지가 꽤 되었다고 하며, 그라면 아마 자신들이 배신한 것을 눈치챘을 거라 덧붙였다.

'그런데도 다른 넘버들이 움직이게 그냥 둔다라.'

넘버 녀석들은 생각 이상으로 유용하다.

이 녀석들을 부하로 받아들인 덕분에 말도 안 되게 일을 수월하게 진행하고 있으니 말이다.

거기에 자신들 말고 다른 넘버들도 슬슬 꼬드겨 현재는 넘버 4부터 넘버 10까지 모두 내 수중에 있다고 봐도 무관했다.

남은 건 1, 2, 3.

넘버 4의 말로는 1, 2, 3는 자신 백 명이 덤벼도 못 이길 강자들이라는데.

'그건 딱히 문제될 건 없을 거 같고.'

그저 넘버 녀석들을 이만큼 정보전에 능하게 키운 것이 그들이라고 하니 조금 궁금하긴 했다.

"넘버 7."

"예."

내가 녀석을 부르며 자리에서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넘버 10을 불러. 슬슬 러쉬를 불러올 때가 됐다."

"알겠습니다."

내게 대답한 넘버 7이 사라지고 나는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러쉬와의 첫 대화 이후 3달이 지난 지금, 이제 황제가 나타날 때가 온 모양이다.

* * *

이후 앤드류로 분장한 넘버 10과 함께 나는 창성의 기사로서 러쉬가 배정받은 군대를 찾았다.

그곳은 상당한 변방 지역이었고 최근 막 전쟁이 끝마친 터라 꽤나 난리가 난 상황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눈까지 내리고 있으니 병사들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리라.

"창성의 기사다."

"옆에는 앤드류 남작님이야. 두 분이 왜 여기 온 거야?"

병사들이 우리를 알아보고 수군거렸다.

그들의 대화를 한 귀로 듣고 흘리며 말을 타고 얼마간 갔을까, 군부대 앞에 도착하자 급히 남성 한 명이 뛰어나왔다.

경비단장으로 보이는 그는 제일 먼저 앤드류에게 급히 인사를 올리곤 말했다.

"반갑습니다. 앤드류 남작님,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아닐세. 중요한 일이라 내가 올 수밖에 없었네. 아, 뒤따라 오는 마차에 방한 보급품을 실어 왔네. 병사들에게 좀 뿌리게나. 전쟁에 나서는 병사들이 이리 추워해서야 쓰나."

"예, 감사히 받겠습니다!"

앤드류의 말에 경비단장은 화색을 띄웠다.

안 그래도 겨울철에 전쟁까지 일어난 터라 보급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었는데 앤드류가 직접 보급품을 챙겨 와 줬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잘 연기해 주는 넘버 10을 본 나는 먼저 말에서 내렸고 앤드류 또한 뒤따라 내렸다.

그러곤 서둘러 다가온 병사에게 말을 맡긴 우리는 경비단장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난로를 켜겠습니다."

"괜찮네. 우리는 한 사람만 데리고 바로 떠날 셈이니."

"병사들 중에 한 명을 데려가신다고 하셨죠. 혹시 이유를 물어도 괜찮겠습니까? 일단 징집 대상으로 모집한 사람을 그렇게 데려가는 건 법에 어긋나는지라."

경비단장이 순박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묻자 앤드류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한 법을 만들어 내는 황제가 될 분일세."

"...황제라뇨.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자네도 경비단장으로 꽤 오래 있었으면 들리는 게 많지. 예를 들어 황제 폐하께서 은거하시던 중 남은 황족들끼리 왕위 다툼을 하다가...."

"크흠."

더 이상 말하는 건 위험하시지 않겠냐고 경비단장이 반응하자 앤드류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그거일세. 여기에 황제 폐하의 핏줄을 이어받은 자가 있네."

"저, 정말입니까? 그렇다면."

"자네 부대가 그분께 어떻게 대했는가가 후에 미래가 되겠지. 뭐, 내가 한 번 만나 본 적이 있는 터라 그런 걱정은 말게나. 그럴 분은 아닐세."

얼굴이 낮빛이 급격하게 나빠지는 경비단장의 어깨를 거하게 웃으며 두드려 준 앤드류는 그를 바라보았다.

"자, 안내해 주게나. 그분의 성함은 러쉬, 최근에 이곳으로 넘어온 병사일걸세."

"당, 당장 찾아오겠습니다."

경비단장이 급히 밖으로 뛰쳐나가자 앤드류는 웃던 모습을 멈추었다.

"넘버 10, 그 이후로 넘버 9이 계속 러쉬 곁에 머무르고 있었지."

"예, 나라가 혼란스러운지라 러쉬 님에게 암살 시도를 하는 자는 없었다고 계속 보고 받았습니다. 무탈히 군 생활을 하고 계신 듯합니다."

"그래."

넘버 10에 대답을 듣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내 가방 주머니에 들어 있던 연락망 아티팩트가 급히 울렸다.

뭔가하여 아티팩트를 들어 보자 거기에서 넘버 9의 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하천성 님! 넘버 3가 나타났습니다! 넘버 3가 지금 러쉬 님을 죽이러 왔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넘버 10에게 이곳에 남으라고 눈짓하곤 나는 그 즉시 그 장소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침착하게 대응해. 러쉬를 최대한 지켜라. 난 근처에 있다. 적어도 한 번까지는 버텨라. 내가 그때 들려 준 포션을 사용해도 상관없으니까."

나는 오랜만에 오러를 일으키고 전력 질주로 달리기 시작했다.

러쉬의 위치는 넘버 9에게 지속적으로 전해 듣고 있었다.

내가 도착한 순간 칼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경비단장이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어떻게든 러쉬를 지키라는 양 외치고 있었고 주변에는 병사들과 간부 쪽도 몇 명 죽은 듯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의 끝에 넘버 9가 한 사람과 악착같이 싸우고 있었다.

발돋움질을 한 번 한 나는 그 즉시 넘버 9의 목덜미를 잡아 뒤로 당기며 그대로 앞에 있던 남자의 복부를 차올렸다.

"오, 막았네?"

신음 한 번 없이 검집으로 막은 그는 부서진 검집을 바닥에 던진 후 한차례 뒤로 물러섰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허리춤에서 기다란 장도를 빼 들었고, 나는 투구 너머에서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래, 넌 좀 강하다. 이거지. 이 층에는 소드 마스터 급이 꽤 많은가 봐."

보자마자 눈치챘다.

이 녀석 길버트보다는 낮지만 소드 마스터 경지에 오른 놈이다.

넘버 4녀석이 괜히 과장해서 말한 게 아니라. 이거지.

나는 대검을 바닥에 던졌다.

대검은 애초에 취향이 아니다.

오랜만에 항상 허리춤에 매여 있던 별천도를 뽑은 나는 눈을 빛냈다.

오러 없이도 소드 마스터랑 싸울 수 있다는 걸 한 번 보여줘 볼까.

"넘버 9, 러쉬를 데리고 물러서 있어. 다른 놈들이 더 왔는지 저놈한테 물어봐야 하니까."

"예."

내 말에 대답한 그는 구석에 숨어 있던 러쉬에게로 갔다.

자신의 목을 노리고 나타난 넘버 3 탓에 상황 파악을 못 따라가던 러쉬는 내 정체를 알아차렸는지 내게 급히 외쳤다.

"천성아!"

"러쉬, 본명은 숨겨 둬라. 지금은 창성의 기사거든."

러쉬에게 대답한 순간 넘버 3가 오러를 일으키며 달려들었다.

오러의 속성은 화염. 불꽃 같은 오러가 일렁거리며 내게 한 차례 휘둘러지자 나는 별천도로 맞받아쳤다.

피잉.

그 순간 갑옷 가슴팍 쪽에서 미세한 울림이 들렸다.

바로 반응하며 몸을 뒤로 빼자 그 자리에 검격이 스쳐 지나갔고 나는 그게 넘버 3의 검술임을 눈치챘다.

내가 물러서자마자 넘버 3는 멈추지 않고 장도를 휘둘러 왔다.

그때마다 피잉 거리는 소리와 함께 예상치 못한 곳에서 검이 스쳐 지나가자, 나는 휘파람을 불었다.

재밌는 기술이다.

한 차례 목을 노리고 찔러 오는 장도를 고개를 틀어 피한 순간 넘버 3는 곧바로 목을 베고자 찌르는 자세에서 베기 자세로 바꾸었다.

검을 상당히 섬세하게 다루고 있는 그였지만 나는 그를 보며 오히려 한줄기 미소를 그렸다.

51화

"으자아!"

곧 짧은 기합과 함께 내 검이 위에서 아래로 크게 휘둘러졌다.

그로 인해 공기의 맹렬한 마찰이 생기자, 압도적인 위력의 풍압이 터져 나왔다.

갑작스레 뿜어져 나온 풍압은 앞에서 검을 휘두르던 넘버 3를 통째로 날려 버렸고, 녀석은 내 힘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지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당혹감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나는 녀석의 바로 앞에 도달했다.

그러자 넘버 3가 급히 전신에 오러를 끌어 올렸지만, 그러기엔 이미 늦었다. 내 손은 녀석의 얼굴을 붙잡은 뒤 그대로 땅에 내리꽂아 주었다.

으직.

머리가 으깨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그래도 몸에 오러를 둘렀으니 죽지는 않았을 거다.

하지만 지면 아래로 1m 가까이 박혀 버린 탓에 넘버 3는 땅에 꽂힌 듯한 형태가 되었다.

이런 꼴을 당했으니 바로 정신을 차릴 수 있을 리 없다.

곧 땅에 박힌 녀석을 빼냈다. 이내 얼굴이 뭉개지고 눈을 까뒤집은 넘버 3를 확인한 나는 손을 탁탁 털어 내었다.

"역시 이렇게 제압하는 게 제일 편하지."

소드 마스터급까지는 역시 오러 없이도 힘으로 충분히 제압 가능했다.

물론 그랜드 소드 마스터 수준까지 올라가면 힘만으로는 좀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새삼 50층 이후가 기대된단 말이지. 거기에서는 소드 엠페러급들도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하니까.'

물론 50층에 올라가기 전에 하일성 놈부터 처리해야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넘버 3 탓에 잠시 자리를 피했던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들었다.

그러자 나는 마치 가방을 드는 양 녀석의 뒷덜미를 잡은 채 질질 끌고 왔다.

"러쉬, 오랜만이네. 오래 기다렸냐?"

내가 인사를 해 보이자 러쉬는 이전보다는 조금 어른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직접 전쟁을 겪었으니 자연스럽게 성장한 거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이겨 내면 사람이 바뀌곤 하니까.

"얼마 안 기다렸어."

"군 생활은 어때? 재밌더냐?"

"하하, 끔찍했지."

우리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경비단장이 식은땀을 흘렸다.

"그래도 천성아. 이번 세 달간 확실히 알았어."

3달, 바깥이라면 순식간에 지나갈 시간.

그러나 군대 안이라면 틀리다.

군대는 바깥과 시간이 다르게 가니까.

그렇기에 지난 3달간 러쉬는 내 제안을 듣고 줄곧 고민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