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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 순간 첸의 가슴팍에서 근육이 서로 엮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미친놈이네. 이거.'

승리에 대한 집착, 그리고 조금 더 나와 싸워 보고 싶다는 광기.

그 두 가지가 첸의 눈동자에서 엿보였다.

그는 지금 근육에 오러를 불어 넣어 자신에게 난 상처를 강제로 치료한 것이었다.

첸의 광영검이 또다시 형성되어 내게 휘둘러졌다.

기세가 더욱 강해졌다.

채엥, 채엥, 채엥.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끝없이 펼쳐진다.

첸의 검날은 더욱 강해져 왔으나 상대하는 내 기세도 한 층 더 강해졌다.

이길 수 있으면 이겨 봐라.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더 검을 나누었다.

바람이 고요해진다.

오직 우리 둘이 서로의 검을 받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핏물이 튀었다.

내 몸에도 종종 잔상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첸의 핏물이었다.

이 세계에서 그는 언제나 최강이었다.

이블제리아에게 꺾이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보다 강했다.

"아직, 아직이다."

그렇기에 강해지는 것이 더뎠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이블제리아를 만나 패한 뒤, 그는 또 한 영역 더 성장했다.

"나는 더 강해질 수 있다. 더 높은 영역이 있다."

이블제리아의 성화에 못 이겨 차기 가주인 자신의 딸을 내치면서도 그는 검을 내려놓지 않고 휘둘렀다.

그렇기에 강하다.

"나는, 나는!"

몇십 년을 쏟아부은 검술은 정말로 강했다.

그러나 1회차를 제외한 15년간의 세월을 생사가 교차하는 최전선에서 갈아 넣었던 나에게 닿기에는.

멀었다.

털썩.

첸의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온몸이 피투성이에 상처 위로 전류까지 파직파직 하고 튀고 있는 그는 엉망진창이었다.

나는 검을 천천히 위로 들어 올렸다.

첸은 아직까지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 듯싶었다.

아쉬움이 가득한 눈동자가 흔들렸다.

"딸과 같이 죽음이 닥치고서야 득도한 기분은 어떻지."

"아쉽다. 더, 조금 더 강해지고 싶다."

"그건 네 딸도 같은 마음이었어. 이블제리아의 손에 죽을 때 그런 마음을 품었을 거다."

첸이 눈동자가 서서히 떠진다.

신시아를 향해 그의 눈동자가 향했다.

"신시아."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첸은 힘없이 웃었다.

"미안하구나."

마지막 말을 끝으로 그는 눈을 감았다.

"하천성."

일순간 내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내가 뒤늦게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은발의 한 남성이 서 있었다.

첸의 머리 색과 같은 것을 보면 그는 첸의 자식인 듯싶었지만, 나는 그를 보고 서서히 눈동자가 커지기 시작했다.

"형님?"

그곳에는 하일성.

하씨 가문의 첫째 형님이 그곳에 있었다.

25화

Chapter 5 ― 미래를 지키는 현재

저 미소, 저 얼굴.

머리카락 색만 다르지 모든 것이 형님과 똑같았다.

내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감정이 드러났다.

하일성.

하씨 가문의 첫째 아들이자, 최대 상속자.

엘리트 중의 엘리트인 그는 압도적인 재능으로 언제나 최고를 달리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형님은 내게 우상이면서도 한편으론 너무 먼 존재였다.

너무 뛰어난 형님을 두었기에 나는 언제나 빛바랜 원석 취급이었다.

"또 보는구나. 하천성."

형제간에 성을 붙여 부르는 이유도 그만큼 형님에게 먼 존재 취급받는 것이겠지.

"...형님, 야신에 들어간 것입니까."

그런 형님을 만난 반가움보다는 내 눈빛에 경계의 기색이 서리기 시작했다.

23층을 최초로 클리어하고, 24층 초기에 일부러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던 자가 바로 형님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일성.

무엇보다 나를 막을 사람으로 야신이 꼽은 자였다.

'이게 누굴 호구로 보나.'

설마 내가 가족의 정이라도 느낄 줄 알았나.

미안하지만 형님께 가족의 정이라곤 1도 느끼지 않는 게 나다.

오히려 적이면 적이었지.

오랜만에 지구에서의 일이 생각나 열이 받은 나는 빠득 이를 부딪치곤 형님을 노려봤다.

"형님, 당신이 지구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줄은 몰랐습니다."

"나야말로 하천성 네가 지구로 돌아가고 싶을 줄은 몰랐다."

서로 반대되는 말이 오갔다.

"저야 당연히 돌아가고 싶죠. 저희 가문이 원체 크지 않습니까. 막내로 흥청망청 살고 싶기도 하고, 무엇보다 5년 동안 쌓은 걸 매일같이 다시 잃는 건 이제 지겹거든요."

"지구에서도 너는 잃기만 했을 텐데."

그리고 성질을 긁는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내 얼굴이 서서히 찌푸려지자 형님의 입가에는 잔주름과 함께 미소가 그려졌다.

"정신 차려라. 하천성. 넌 거기서든 여기서든 똑같은 인간이다. 그건 달라질 거 없어."

"그놈의 성질 긁는 태도는 여전하네."

나는 별천도를 하일성에게 겨누었다.

더 이상 말하면 봐주지 않겠다는 듯.

"야신에게 전해. 번지수를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다고."

"넌 그런 무른 성격이 문제인 거다."

그 순간 하일성의 검이 휘둘러졌다.

당연히 나는 그의 검을 손쉽게 피하리라고 믿었다.

갑작스레 세상이 뒤집어지기 전까지는.

"어?"

나와 같은 전 속성에 오러.

그 힘을 담은 검이 내 오러와 육체를 뚫고 목을 자른 것이었다.

내 목이 바닥을 데구르르 굴렀다.

그리고 하일성의 눈은 그런 나를 무덤덤히 바라보고 있었다.

잘 가라.

하일성의 입 모양만이 내 눈에 흐릿하게 비췄다.

[축하합니다. 2번째로 24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24층의 주인' '활약하는 그대의 잔상'이 당신에 클리어를 축하하며 보상을 지급합니다.]

눈을 뜬 순간 주위가 변해 있었다.

외딴 공간에서 상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앞에 둔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지금 내가 뭘 당한 거지.

'목이.'

처음으로 겪은 감각.

목가에 손을 올리자 파르르 떨렸다.

그 힘, 그 능력.

하일성은 나와 엇비슷할 수준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거센 의문이 몰아쳐 왔다.

일순간 멘탈이 무너졌다.

나와 같은 힘을 가졌다고?

나랑?

나랑?!

마음속에서 경악이 울려 퍼졌다.

"잠깐, 기다려. 그리고 클리어?"

동시에 또 다른 의문이 나에게 성큼 다가왔다.

목이 잘렸는데 퀘스트 클리어라니.

이해를 못 하겠다.

['24층의 주인' '활약하는 그대의 잔상'이 당신이 보스 몬스터로서의 제명을 다했음을 알립니다.]

그 말을 보고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던전의 공략 조건은 던전 관리자 즉, 최종 보스인 나를 쓰러트리는 것.

'그렇다는 건 하일성의 클리어 조건은.'

아마 하블리아 가문에 속한 자로서 또 다른 참가자가 만들어 낸 던전을 공략하는 것.

신시아와 내가 만났던 것도, 하블리아 첸이 우리를 찾아오게 된 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성좌가 이어 낸 길이었다.

"활약하는 그대의 잔상, 신시아는."

['24층의 주인' '활약하는 그대의 잔상'이 층의 시간은 다시 초기화되었음을 알립니다.]

초기화.

내가 이 층에서 이룩한 것들이 모두 없어졌다는 소리.

수없이 매번 겪었던 것이지만 또다시 밀려오는 짜증스러운 허탈감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일성이 말했던 내 무른 면은 이러한 것이겠지.

"하일성."

그의 이름을 중얼거린 나는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하일성은 나와 비슷한 수준의 힘을 가지고 있다.

어떻게 그러한 것을 얻은 것인지 모르지만, 야신이 하일성이 날 막을 존재라고 일갈한 이유도 그 능력 덕분이겠지.

'그렇다면 더 강해져 주마.'

잠시 멈추었던 내 열망이 다시 불타올랐다.

이제 내 앞길을 막는 놈들은 용서하지 않을 속셈이었으니까.

"기다려라."

그렇게 말하며 나보다 먼저 올라간 하일성을 따라 계단을 올랐다.

* * *

강해진다.

얻어야 하는 것은 검의 기본기, 그리고 그동안 등한시했던 클래스 획득.

현재 최강이라고 믿고 있던 환상이 깨진 이후 나는 천천히 스스로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층을 바로 연속해서 오르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우선, 하일성이 어떻게 강해졌는가에 대해 생각하고 내가 왜 졌는가에 대해 고민했다.

'방심, 그리고 클래스의 부재.'

압도적인 스텟.

그것이 있었기에 내가 한 것은 방심이라는 두 단어였다.

만약 24층의 클리어 조건이 내 죽음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허무하게 죽었다.

죽음.

5회차 동안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죽음을 나는 경험하고 말았다.

'클래스는 지금 당장 어찌하지 못해.'

하일성, 그가 어떤 클래스를 얻었는지는 몰라도 나와 동등할 정도의 힘을 얻었다.

그리고 첫발에 내 목을 갈라 버린 그 일격, 내 엄청난 능력치로도 쫓지 못했던 그 검격은 분명 클래스 효과다.

그것도 A급 이상의 클래스 효과.

그러나 나는 지금 당장 A급 클래스를 얻을 수 없다.

내가 과거에 얻었던 S급 클래스도 50층 이상에서야 구할 수 있는 거였으니까.

그리고 성좌가 모두 바뀐 지금 어느 곳에서 그 정도 급의 클래스가 나타날지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우선 내 검을 단련하기로 했다.

죽음이라는 아찔한 감정이 나를 담금질했다.

강해져라.

더 강해져라.

오랜만에 마음속에 상승욕이 자리매김했다.

눈빛이 번뜩였다.

조용히 휘두른 검날이 허공을 매만졌다.

하블리아 첸.

그는 나보다 약했지만 검술은 뛰어났다.

하일성.

그는 나와 대등할 정도로 강했다.

검이 또 한 번 허공에 메아리를 울려 퍼지게 한다.

호흡이 멈춘다.

검결이 대기를 타고 천천히 움직인다.

한 번의 휘두름에 모든 것을 내걸듯.

오러가 없는 검의 동작이 물결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스텟은 사실상 이미 최강에 다다랐다.

이전 회차의 육체와는 달리 부족했던 단련을 다시금 시작했다.

땀방울이 얼굴에 맺혔다.

모공의 미세한 떨림이 느껴진다.

가녀린 호흡이 심장 박동마저 느릿하게 만든다.

'강해진다.'

신념이 불타오른다.

허공을 응시하는 눈동자의 색이 진해진다.

주위 소리가 사라진다.

호흡이 멈춘다.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천천히.

느리게.

검이 휘둘러진다.

탁.

검집으로 되돌아온 검의 소리가 마치 주위를 일깨우듯 울렸다.

내 몸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고, 무호흡을 유지하던 것이 끝나자 숨소리가 가쁘게 울려 퍼졌다.

떠진 눈 사이로 진한 땀방울이 섞여 들어왔다.

입가에는 짭조름한 소금 맛이 느껴졌다.

나는 무려 세 시간 동안 오직 한 번의 휘두름을 한 것이었다.

그것도 오러 없이.

"씨, 발."

오직 한 번의 휘두름에 모든 것을.

그런 마음가짐으로 나는 이번 검격에 가진 전부를 담아 보았다.

그 결과, 몸 여기저기가 삐걱거렸다.

하지만 모자라다.

내 검술은 이보다 더 발전할 수 있다.

나는 이전 회차에서 하블리아 첸이라는 심검의 영역의 끝에 선 강자를 보았다.

나는 지금에 비해 스텟은 낮을지언정 이보다 더 강했던 육체를 기억하고 있다.

그렇기에 더 강해질 방법을 알고 있다.

"다시 한 번."

나는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세 시간, 또 세 시간이 흐른다.

총 세 번의 휘두름.

탈진할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어딘가 내 눈빛이 바뀌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세 번의 검격을 되새기며 이번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속의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오러 없는 검이 쐐액 하고 허공을 베고 지나간다.

안 된다.

느리다.

소리조차 따돌릴 수 없다면 내 검은 어느 누구에게도 닿지 못할 것이다.

검이 수없이 휘둘러진다.

최속의 빠르기를 얻고자.

세 시간, 또 세 시간을 투자한다.

그렇게 반나절이 지나간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해가 떠오르고 다시금 졌다.

무릎이 천천히 굽혀지며 바닥에 털썩 널브러진 나는 24.5층에 준비된 연습장에서 잠을 청했다.

그리고 또 눈을 떴을 때 처음과 같이 반복했다.

이틀, 나흘, 일주일, 한 달.

[끝없는 휘두름에 탑이 감동합니다.]

[B클래스 [검의 길]이 지급됩니다. 받으시겠습니까? YES/NO]

"드디어 떴다."

눈앞에 클래스 창이 떠오른 순간 나는 헐떡이던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

"YES."

짧게 대답을 내뱉은 순간 클래스가 몸에 깃들어졌다.

차오른 숨을 곱게 내뱉은 나는 클래스 창을 즉시 열어 확인했다.

[검의 길(B클래스) ― 성장형]

타입 : 패시브(active)

신기하네요! 상대의 공격 선로가 당신의 눈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걸로 당신도 예언가 뺨치는 능력이 생겼습니다!

이 클래스는 성장형 클래스입니다.

당신이 검에 대해 고민하면 더 고민할수록 더더욱 높은 경지로 끌어 올려 줄 것입니다.

과거 내 생사를 수없이 책임져 주었던 클래스.

'검의 길'을 본 순간 나는 비틀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오랜만에 얻어 낸 클래스에 옅은 희열감이 느껴졌으나 몸에 쌓인 피로감이 극심했다.

성장형 클래스 검의 길.

과거의 나는 비록 검의 길을 A클래스까지 밖에 성장시키지 못했지만 지금의 나라면 다르다.

S랭크, 아니, 그 이상으로 성장시킬 수 있을 거라 나는 믿는다.

'이걸로 하일성의 공격을 어떻게든 피할 수 있을까.'

모른다.

하천성의 첫 일격은 분명히 클래스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 클래스가 어떤 클래스인지 알아내기 전까지는 명확한 답을 내놓기 힘들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전부해 볼 속셈이었다.

검을 지팡이 삼아 나는 밖으로 겨우 빠져나왔다.

"하천성?"

그 순간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기에는 여러 사람이 함께 서 있었고, 그중에 한 여성이 나를 놀란 듯 바라보고 있었다.

희미하게 떠진 눈을 모아 여성의 얼굴을 다시 확인하자 나는 그녀가 검왕임을 깨달았다.

벌써 아래층 사람들이 이곳까지 도달할 만큼 시간이 지난 모양이다.

'그렇다면 하일성은.'

지금쯤 어디까지 갔을까.

그는 야신의 편이다.

하일성은 나를 죽였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나머지 야신 녀석들이 24층을 클리어할 때까진 내 죽음을 확신했을 것이다.

그러기 전까지 나는 필사적으로 단련했다.

검을 갈고 닦았다.

지금쯤이면 내가 죽지 않았단 걸 알아차렸을 테지.

기다려라.

곧 간다. 하일성.

'우선.'

쉬어야겠다.

나는 그대로 쓰러졌다.

* * *

"썅."

눈을 뜨자마자 욕설을 내뱉은 나는 얼굴을 감쌌다.

아무리 면식이 있던 검왕이 보였다지만 길거리 한복판에서 기절하다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만약 근처에 야신이라도 있었다면 그대로 목이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방심해서 당한 주제에 또 방심하냐."

한숨을 쉰 나는 몸 상태를 확인할 겸 마나를 돌려 보았다.

누가 회복 클래스라도 사용해 준 걸까, 몸 상태가 꽤나 편안했다.

26화

머리를 쓸어 넘긴 나는 복도 밖으로 걸어 나왔다.

아직 아침인 듯 부산해 보이는 1층을 힐끗 본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나를 도와준 건 검왕이었다.

그녀는 밑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나는 그런 그녀를 힐끗 보곤 머리를 긁적였다.

"검왕."

계단을 내려와 지명을 부르자, 그녀와 함께 있던 자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하이 랭커들이 잔뜩 있었다.

2위 대협, 4위 마술사, 6위 구천옥녀, 9위 검왕.

'전원 100레벨 대의 진입했나.'

나에 비하면 턱없이 약하다.

그러나 원래 회차대로였다면 어마 무시한 성장력이다.

여기 있는 전원이 한때 황제의 친위대였으니 그럴 만했다.

그러니 이렇게 전원이 다시 모인 것이기도 하고.

"하천성, 검왕이 그리 얘기하던 사람이 당신이었구나?"

구천옥녀가 나를 보고 반응했다.

상당히 어린 얼굴에 진한 선홍색 아이라인을 그린 그녀는 과거 회차에서 나와 얼굴을 마주한 적은 있었지만, 딱히 기억해 두지 않았는 모양이다.

하긴, 최전선에 섰던 사람은 나 말고도 수없이 많았다.

최전선에 선 자들 중에서도 최고로 뽑히는 황제의 친위대급 인물이 나를 기억 못하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검왕이야 면식이 있었다지만.'

나머지는 면식이 전혀 없다.

"흐응, 검왕의 말로는 그렇게 강하다던데 첫 만남부터 픽 쓰러지기네."

놀리듯 히죽 웃는 구천옥녀의 모습에 나는 검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검왕, 저번에 준 힌트의 보답인 셈 치자."

"어머, 나 무시당한 거야?"

입을 가리며 과장스럽게 구천옥녀가 웃었다.

구천옥녀는 5회차인 나보다 더한 8회차째인 한 베테랑.

능구렁이 같은 저 여자에게 넘어가면 괜히 귀찮아진다는 사실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힌트 하나 준 걸로 당당히 보답이라니. 당신도 참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네."

"호핫, 재밌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기가 빠진 듯한 검왕의 말에 마술사가 박수를 쳤다.

나를 치료한 회복 클래스를 가진 건 이 남자겠지.

과거 황제 친위대의 전속 회복사로 유명했던 게 바로 이 마술사였다.

"좋게 생각하거라. 그가 강자인 건 한눈에 알 수 있었으니."

마지막으로 대협이 살짝 뜬 눈으로 나를 지그시 보았다.

"그런 강자께서 왜 탑을 오르지 않고 우리에게 따라 잡혔을까."

구천옥녀가 슬며시 끼어들었다.

예리한 말에 모두가 나를 바라보았고 검왕 또한 의문을 가지고 있는듯싶었다.

"알아서 뭐 하게."

"까칠하네 까칠해! 암, 강자는 이래야지!"

그리고 당연히 내가 알려 줄 리가 없었다.

구천옥녀가 박수를 치며 박장대소를 터트리는 동안 나는 몸을 돌렸다.

"감사 인사는 했어. 난 그만 간다."

"잠깐만, 하천성, 그러고 간다고?"

"더 할 이야기가 있나?"

"아니, 그건 아니지만."

어딘가 아쉬운 눈동자를 취했던 검왕은 곧 결심한 듯 내게 한 발자국 다가왔다.

그러곤 고운 입술을 열었다.

"하천성, 여기에 머문 이유가 있지? 그렇다면 우리랑 함께 가지 않을래? 구천옥녀 말대로 당신이 층을 공략하지 못하고 있단 건 무언가 사정이 있다는 거잖아. 우리는 이번 층의 사전 조사를 마쳤어. 우리와 함께한다면 25층 공략도 그리 힘들지는 않을 거야."

그 말에 내 인상이 조금 찌푸려졌다.

틀린 말은 아니다만.

"너희가 도움 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 드는데."

그러자 분위기가 싸하게 변했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나와 비슷한 수준의 강함을 가진 하일성 앞에서 이들은 장난감조차 되지 못한다.

지금도 내가 가볍게 검을 휘두르면 모조리 목숨이 날아가 버릴 테니까.

"왜 그렇게 일부러 내치는 듯 말하는 거야."

검왕의 눈이 내게 향했다.

어딘가 아련함이 담긴 두 눈동자에, 나는 시선을 피했다.

"야신과 황제의 일로 충분히 겪었어.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란 걸."

그리고 나는 하이 랭커 넷을 직시했다.

"나는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할 거다. 혼자서."

거기에 너희 넷을 필요치 않다고 나는 고했다.

내 말의 뜻을 알고 구천옥녀도 활기차던 웃음 대신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황제도 못한 일을 혼자 해내겠다니 간이 크네. 그것도 우리들을 완전히 무시하면서 말이야. 검왕, 내 버려둬. 저런 아이는 옆에 두면 화만 일으킬 뿐이야."

구천옥녀가 말하자 검왕은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안되겠냐는 듯.

그러나 내 의지는 확고했고, 내가 가는 길에 그들은 필요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넷을 지나쳐 걸어 나갔다.

"잊어. 잊어. 더 좋은 남자도 많잖아."

"호핫, 세상의 반이 남자라지 않습니까. 잘 찾아보면 더 좋은 남자도 있을 겁니다."

"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야."

검왕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여관을 나온 나는 어느새 꽤 많은 랭커들이 24층을 올라왔음을 깨달았다.

저들도 지구로 돌아가고자 계속해서 노력 하고 있는 것이다.

'올라가자.'

수련은 끝났다.

남은 건 다시 층을 공략하는 것뿐.

하일성을 떠올리며 이를 바득 간 나는 다시 층을 오르기 시작했다.

* * *

['잔혹함에 물든 인사'가 관장하는 25층 Stage '환상에 잡아 먹힌 이들'에 입장하였습니다.]

['25층의 주인' '잔혹함에 물든 인사'가 시큰둥하게 인사를 해 보입니다.]

눈앞에 글자가 떠오르자마자 확인한 나는 어두운 공간에 둥둥 떠 있음을 깨달았다.

['25층의 주인' '잔혹함에 물든 인사'가 전합니다.]

[이번 층은 시나리오 층입니다. 25층부터 28층까지 연결되어 있으며 각 시나리오를 클리어할 때마다 다음 층으로 이동됩니다]

성좌의 알림에 나는 턱을 매만졌다.

전에 몇 번 본 적 있는 방식의 공략 층이다.

시나리오 층은 3층을 한 번에 건너뛸 수 있는 건 큰 메리트지만, 그만큼 큰 세계관을 가진 탓에 간혹 본래 층들보다 공략이 더 오래 걸리곤 한다.

꽤나 귀찮은 형식에 층이 벌써 나왔다고 생각하며 나는 다시 두 글자로 시선을 돌렸다.

하이 랭커 뿐만 아니라 여러 랭커들도 이미 24층에 진입해 있었다.

'하이 랭커들 중에서는 통과한 직후 바로 공략법을 공유하는 녀석들도 꽤 있으니까.'

그렇기에 공략법을 공유받은 자들이 이전 통과자들보다 빠르게 층을 공략한 것이다.

그렇기에 거리에 랭커들이 더러 있었던 거겠지.

'공략법을 공유 한 건 분명 검왕 쪽이겠지.'

과거 황제와 함께한 친위대인 그들은 저번 회차에서도 한 명의 힘이라도 더 빌리고자 아래층 사람들에게 공략법을 공유해 왔으니까.

그렇다는 건 이미 25층을 공략하기 시작한 자들도 꽤 있을 것이었다.

특히 검왕 쪽은 사전 조사까지 진행했다고 하니까.

그 순간 눈앞에 환한 빛이 내 몸을 감쌌다.

바닥에 덩그러니 떨어진 나는 눈을 잠시 깜빡였고, 곧 내 몸을 둘러 보았다.

이유는 몰라도 입고 있는 것은 제복, 거기에 주위 풍경은 확실히 바뀌었다.

어딘가 칙칙하지만 지구의 현대식 배경이 엿보이는 장소였다.

['25층의 주인' '잔혹함에 물든 인사'가 설명을 시작합니다.]

[2020년 세상은 과학의 시대. 그러나 과거의 옛 잔재, 신들의 부조물인 환상종이라는 생물에 의해 세상은 아직까지 신들의 잔재가 남아 있습니다. 몇천 년의 역사 속에서 수없이 있었던 전염병들. 그 전염병들은 바로 환상종이 세상에 분노했을 때 타락하여 변한 형태인 '사양신'에 의한 것들이라는 것을 인류는 밝혀냈습니다! 더 이상 인류는 전염병의 위협에 당하지 않고자 합니다. 모든 환상종을 죽이고 인류에게 평화를!]

[25층 시나리오 퀘스트, 당신과 급조해서 만든 환상잡이 팀은 환상종을 쫓던 도중 목표물이 폭주를 하였습니다. 폭주한 환상종은 이성을 잃고 전염병의 신, 사양신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젠 위험해진 목표물을 피해 본부로 돌아가 사양신을 잡을 궁리를 해 봅시다. 그리고 최강의 환상잡이가 되어 봅시다.]

"꺄아아아아악!"

"도망쳐! 도망치라고! 사양신이 되어 버렸어! 우리론 무리야!"

비명이 울려 퍼졌다.

뼈로 된 무기를 들고 있는 자들이 필사적으로 도주하고 나는 그 속에서 그저 태평히 글을 읽고 있었다

뭔지는 몰라도 본부라는 곳으로 돌아가면 답이 나오는 모양이다.

"우선 깜빡한 거. 24층의 보상을 받겠다."

층을 공략하기 전에 해 둘 건 해 두자고 생각한 나는 보상을 말했다.

[24층 클리어 보상으로 '무력화의 팔찌'가 지급되었습니다.]

허공에 작은 박스가 나타나자 나는 그것을 손에 쥐어 열었다.

그러자 거기에는 메시지대로 팔찌 하나가 들어 있었다.

나는 곧바로 착용을 해 보았다.

[무력화의 반지 효과가 발동됩니다.]

[상태 이상이 50% 면역됩니다.]

오, 꽤나 쓸만한 게 나왔다.

클래스의 효과인 스텟 고정에 비해 확실한 상태 이상 면역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기 때문이었다.

'23층의 보상은 딱히 좋은 게 없었지.'

23층의 보상은 마력 강화가 걸린 반지 아티팩트였기에 나에게는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전투 중 페이크 용도로 상당히 쓸 만할 것 같다고 생각하던 도중 나는 거슬리는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쿠웅.

그 순간 발자국 소리가 울려 퍼졌다.

층이 높은 동양풍 건물 사이로 얼굴을 드러낸 괴물은 침을 뚝뚝 흘리고 있었고 몸에는 각종 이상한 뿔들이 치솟아 있었다.

6개의 눈, 8개의 팔, 10m 정도 될 법한 크기에 검은색 털.

'저게 그 사양신이라는 건가.'

환상종이라는 게 세상에 분노 했을 때 된다는 괴물을 올려다보고 있자, 녀석의 벌렁거리는 코가 나에게 향했다.

동료라고 왔던 환상잡이들은 이미 전부 도망간 모양이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 순간 귓구멍이 찢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초음파라도 쓰는 듯한 괴성에 인상을 찌푸린 순간 거대한 팔이 나를 내려치려는 모습이 잔상처럼 눈에 들어왔다.

검의 길이 발동된 것이었다.

사양신의 공격을 가볍게 피한 나는 그대로 녀석의 머리를 주먹으로 내려쳤고, 녀석의 머리는 찌부러져 바닥에 쿠웅 찍혔다.

손에 질척한 검정 핏물이 묻어 나왔다.

"오호, 이것 봐라."

내 일격을 맞은 사양신이 몸을 꿈틀거리며 머리를 재생시킴과 함께 바닥에서 다시 일어났다.

재생이라니 상당히 귀찮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담."

육식(六式)

뇌뢰만참(雷雷万斬)

벌천도에서 만 개의 번개가 튀어 오른다.

만 번의 번개가 날카로운 절삭력을 품은 채 사양신을 덮치니, 순식간에 녀석의 몸이 산산조각났다.

나는 확신했다.

검이 더 날카로워졌다.

훈련의 성과가 있는 것이다.

'이제 하일성을 상대로 방심은 없다.'

만 개의 조각으로 떨어져 내린 사양신을 보며 검을 되돌린 나는 곧 눈을 크게 떴다.

조각들이 점차 합쳐지더니 곧 사양신의 형태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죽지 않는다?'

혹시 핵이라도 있나 싶었지만, 뇌뢰만참으로 모든 조각을 베었던 걸 감안하면 그리 보기 힘들다.

[사양신의 핏물이 손으로 스며듭니다.]

[폭주한 사양신의 권능은 '전염', 그의 핏물이 당신을 환상종으로 만들려 합니다.]

"하?"

그 순간 입에서 헛바람을 들이키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전염이라니 무슨 이딴.

[무력화의 반지가 발동됩니다.]

[환상종화가 50% 진행 도중 멈췄습니다.]

그 순간 팔에서 뿌드득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괴하게 뒤틀린 팔의 모습에 내 눈이 희미하게 떠지고 나는 즉시 타임 리셋을 발동시켰다.

번쩍.

눈앞이 점화했다.

그러나 여전히 내 팔은 기괴하게 뒤틀린 채 변화를 계속했고 그 순간 이마에서 저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무엇인가 하고 머리 위에 손을 올린 순간 나는 내 머리 위에 자그마한 두 개의 뿔이 자랐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내 팔 또한 검은색 비늘이 휘감기며 새까맣게 변한 손톱이 보였다.

[권능 '전염'을 이어받았습니다.]

"뭔 엿같은."

27화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척척 진행되는 기가 막힌 상황에 잠깐 멍하니 있자 사양신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가만히 있는 나를 집어삼키려 하자, 나는 녀석의 머리를 괴수처럼 바뀐 팔로 짜증스레 내려찍었다.

"크엑."

그 순간 이전에는 머리를 복구시켰던 사양신이 그러지 않고 버둥거리며 고통스러워했다.

그 모습을 본 내 눈이 한순간 의문에 물들고 나는 손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그렇군. 같은 환상종끼리의 공격은 통한다. 이거냐."

나는 곧바로 한 팔로 사양신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그러자 내 두들김을 견디지 못한 사양신이 곤죽이 되어 부서졌고 핏물을 한껏 뒤집어쓴 나는 퉷 하고 침을 뱉었다.

[축하합니다. 32번째로 25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25층의 주인' '잔혹함에 물든 인사'가 당신에게 조금 관심을 보이며 보상을 지급합니다.]

그 순간 층 공략 알림이 울렸다.

'이렇게 쉽게?'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곧 내 눈이 사양신에게로 향했다.

하긴, 생각해 보면 사양신이라는 저 녀석 통상적인 공격이 안 통한다.

저 사양신을 잡는 게 이번 층의 목표였다면 그리 쉬운 공략은 아닌 셈이다.

'그것보다 이 팔.'

또 성좌가 의도한 대로 흘러간 거겠지만 멋대로 몸이 개조당하는 건 기분 나쁘다.

성좌들은 기본적으로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관에서 참가자들이 무언가 역할을 해 주기를 바란다.

이번에도 분명 내게 바라는 역할이 있는 것이다.

['25층의 주인' '잔혹함에 물든 인사'가 26층의 설명을 시작합니다.]

[사양신을 죽인 당신, 운명의 갈림길에 섰군요. 최강의 환상종, 화초선이 당신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설명이 이어지자마자 절 같은 느낌에 고층 동양풍 건물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기척을 숨긴 여러 사람들이 나를 감시하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대가 어디 있는지 눈치챘던 나는 별천도를 휘둘렀다.

삼식(三式)

뇌격발도(雷擊拔刀)

별천도가 제자리를 되찾아 왔다.

그 순간 파직하고 번갯불 소리가 울렸고 그 자리에 숨어 있던 자들이 공격을 피하고자 뛰쳐나왔다.

내 검격에 튀어나온 사람은 두 명이었다.

한 명은 뼈로 된 건틀렛을 낀 무투파로 보이는 여성, 또 한 명은 뼈로 된 창을 쥔 차분해 보이는 얼굴의 남성이었다.

느낌상 저 뼈로 된 무기가 환상종이나 사양신을 잡는데 쓰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복면을 쓴 자들이 잇따라 다수 나타났다.

"사양신 소리를 듣고 왔건만 인간형 환상종이 있단 소린 못 들었어."

"조심해. 인간형 환상종은 드문 만큼 위험해."

긴장한 듯한 말들이 오갔다.

나는 턱을 매만지며 고민했다.

딱 보아도 환상잡이인 녀석들이다.

그렇다면 내가 굳이 적대할 이유가 없었다.

'일단 본부라는 곳에 가긴 해야 할 거 같고.'

나를 주시하는 사람들을 보며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순간 바지 속에서 만져지는 무언가에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곤 주머니 속에서 그것을 꺼내 보자 내가 환상잡이라고 증명하는 자격증이 손에 들려 있었다.

손수 하천성이라는 이름과 F급.

그렇담 여기선.

"어이."

나는 입을 엶과 동시에 경계하는 두 사람에게 환상잡이증을 들어 보였다.

"나 환상잡이야. 환상종이 아니야."

그러나 그런 내 말에도 사람들이 경계를 풀 기색을 안 보였다.

'여기선 나도 환상잡이인 모양이니 이놈들을 해쳤다간 정보 수집이 어려울 텐데.'

어두컴컴한 밤.

이렇게 끝없이 대치만 하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좀 믿어 줄래? 사양신을 잡다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라서. 나도 피해자라고."

"네가 환상잡이든 아니든 사양신을 죽일 정도의 힘을 가진 환상종이라는 것은 변함없다."

중심에 서 있던 남성이 눈초리를 날카롭게 띄우며 대답하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나도 더 이상 참지 않겠다는 듯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며 경고했다.

"그럼 여기서 나랑 한 따가리 하자고?"

오러가 담긴 목소리가 주위에 울려 퍼진다.

이 오러 한 번에 전원이 멈칫하였으나 급히 그 기색을 숨겼다.

상대한테 얕보이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죽음도 불사할 거 같은 반응은 나쁘지 않다만.

"반만 환상종이 됐다면 믿어 주냐."

한 번만 더 솔직하게 털어놔 봤다.

"그리고 내가 환상잡이가 아니라면 사양신을 죽일 이유도 없잖냐."

"환상종끼리의 다툼을 자주 있어."

"슬슬 깨달아라. 내가 너희들 죽일 생각이었으면 진작 다 죽였어. 그건 방금 느꼈을 텐데?"

이 말에는 남성도 대답하지 못했다.

전원이 방금 내 오러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대치만 할래. 빨리 해결책이라도 가져오던가 해 봐."

"...알았다. 여기로 거짓말 탐색이 가능한 환상잡이를 부르겠다. 그거라면 이 상황도 일단락할 수 있겠지."

그 거짓말 탐지기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나 자신이 환상잡이를 적대할 생각이 없다는 걸 보여 줄 수 있을 거다.

두 가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제안이라고 생각한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사실로 밝혀지면 의심했던 걸 사과하지."

의심이 많은 녀석일 뿐 나쁜 녀석은 아닌 모양이었다.

남성이 연락을 취하러 잠시 자리를 떴을 때 남성과 같이 복면을 쓰지 않은 여성이 나에게 슬쩍 다가왔다.

"성아님! 안됩니다!"

모두가 말리려는 기색이었지만 성아라 불린 여성은 지위가 상당히 높은 듯 차마 막지는 못했다.

그녀는 조심성 없이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고 나는 그런 성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내 팔에 관심이 있는지 힐끗힐끗 보던 성아는 내게 조심스레 한 발짝 더 다가와 물었다.

"저기, 그 팔 만져 봐도 돼?"

"안 돼."

그녀의 부탁을 단칼에 거절해 줬더니 조금 뾰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이름이 하천성 맞지. 너 아까 보니 강한 것 같던데 얼마나 강해?"

제복에 내 이름이 적혀 있어서인지 그녀는 그것을 언급하며 친근하게 굴었다.

주위 사람들은 그런 성아의 태도에 조마조마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너 같은 애들이 몇만 명 덤벼도 못 이길 만큼 강해."

내 말을 듣고 여성의 얼굴이 호기롭게 변했다.

"엄청난 자신감이네. 그럼 팔씨름해 보자. 이래 보여도 나 팔씨름에서 진 적 없거든."

꽤나 자신만만한 표정에 나는 잠깐 생각하다 환상종화 한 오른손을 뻗어 보였다.

그러자 여성은 고양이 같은 표정을 지으며 내 손을 잡았고 나는 망설임 없이 힘을 줬다.

휘릭, 쾅.

순식간에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돌고 땅에 처박힌 그녀는 어버버 한 표정을 지었다.

"성아님!"

주변에서 지켜보던 환상잡이들이 내 목에 무기를 들이밀었다.

전원이 모두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으나 나는 표정 변화 없이 성아라 불린 여자를 직시했다.

내 힘이 이 정도일 줄은 전혀 예상 못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곧 왼손을 뻗었다.

"한 번 더."

"성아님 제발!"

"이쯤 하십쇼! 저희도 이제는 못 참습니다!"

똥고집인가.

성아의 태도에 부하들이 기겁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나는 부하들을 아무렇지 않게 밀어내곤 왼손을 맞잡아주었고 이번에는 그녀 쪽에서 먼저 힘을 주었다.

이번에는 오러를 담았나.

그러나 나는 꿈쩍도 안 했고 방금 전처럼 내가 힘을 주자 이번에도 공중제비와 함께 그녀는 땅에 처박혔다.

그를 보던 모두가 입을 쩌억 벌린 채 번개를 맞은 양 그 자리에서 꿈쩍도 못 했다.

성아가 두 번이나 공중제비를 돌았다는 사실에 견딜 수 없는 듯싶었다.

그러나 그들과 달리 멍하던 그녀는 가만히 자기 손을 쥐었다가 폈다가를 반복했다.

마치 여운이라도 느끼는 듯한 표정으로.

"힘이나 더 키우고 와라."

"와, 와, 와와와."

감탄사를 연신 내뱉으며 자신의 손을 쥐었다 폈다 한 그녀는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 힘으로 처음 져 봐. 내 이름은 호성아야. 너라면 아빠한테 가능할 거 같아."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성아의 강아지 같은 똘망똘망 눈을 부담스러워하고 있자 남성이 돌아왔다.

그가 의문스럽게 우리를 보자 내가 말했다.

"얘 좀 이상해."

"원래 그래."

바로 납득하는군.

"그래서 방금 말한 거짓말 탐지기는 언제 오는데."

"곧 올거야."

"이미 왔습니다만."

남성이 입을 떼자마자 벙거지를 쓴 노인 한 명이 나타났다.

그는 나를 힐끗 보곤 앞으로 다가왔고, 신기한 눈초리로 내 모습을 돌아보았다.

"과연 환상종화가 진행 중이었다가 멈췄군요. 경황을 한 번 더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귀찮지만 내가 한 번 더 설명을 해 주자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시계가 반응하지 않는군요. 전부 진실입니다."

노인이 뼈로 된 시계를 내려다보고 사실을 고했다.

그러자 노인을 데려온 남성이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정식으로 사과하지. 오해를 해서 미안하다."

"이한님 고개를 숙일 필요까지야!"

이 부하 녀석들.

행동 하나하나에 너무 거창한 의의를 둔다.

내가 피곤하겠다는 표정으로 이한을 바라보고 있자 그도 쓴웃음을 지었다.

* * *

이후 일단은 나를 믿어 주기로 한 그들은 우선 본부로 나를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혹시나를 위해서 이거라도 차 줄 수 있을까.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안심할 거 같아서."

미안한 기색을 보이며 이한이 경찰이 쓸 법한 수갑을 꺼냈다.

"채우는 게 의미 있어? 내가 조금만 움직여도 수갑은 끊는데."

"그냥 보여 주기용이야."

성아의 말에 이한도 참 쓸모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는 듯싶었다.

뭐, 그들의 말대로 낀다한들 별로 효력이 있지는 않겠지만 신뢰를 위해 나는 순순히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이한이 수갑을 채웠고, 나는 팔을 당기기만 해도 끊어질 것 같은 수갑에 이한이 어떠한 수작도 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만큼 거짓말 탐지기를 믿는다는 소리겠지.'

그리 생각한 순간 이한이 뼈로 된 열쇠를 꺼내 들었다.

이어서 허공에 열쇠를 끼운 이한이 시계방향으로 빙글 돌리자 우리의 눈앞에 문 하나가 덜컥 나타났다.

이한이 문을 연 순간 끼익하고 열리며, 문 너머로 들판과 함께 호수의 중심에 떠 있는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한은 그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자."

그들과 같이 안으로 들어서자 그 순간 아름다운 경치가 눈에 들어왔다.

꽤나 커 보이는 건물에 이어진 다리 아래로 에메랄드빛 호수가 빛나고 있었고 저 멀리 나무가 우거진 숲이 엿보였다.

그런 내 앞에 선 성아가 두 팔 벌려 환영하는 몸짓을 했다.

"이곳이 환상잡이 본부. 몽환이야."

태평한 성아와 달리 나머지 사람은 긴장한 기색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혹시나 내가 환상잡이 본부에 잠입해서 무슨 짓을 할까 봐 바짝 긴장한 모양이었다.

"일단 검사를 좀 해 달라고 위에서 부탁이 왔는데 괜찮을까."

"여기까지 왔는데 안 따를 이유도 없잖냐."

내가 딱히 상관없다는 투로 말하자 이한은 여전히 미안한 기색을 보였다.

경계심이 가장 많았던 사람 치고 이 중에서 속이 가장 여린 모양이다.

"그것보다 나중에 나 좀 따라와 주면 안 될까? 부탁하고 싶은 게 있거든."

"하는 거 보고."

아까부터 질척거리는 성아에게 적당히 대답한 나는 철저한 감시 속에서 환상잡이 본부에 들어오게 되었다.

28화

그러곤 의외로 사람이 별로 없는 길을 걸어 나서자 나는 한 방에 도달할 수 있었다.

방문 안으로 들어서자 거기에는 흰색 가운을 입은 중년 여성 한 명이 있었다.

그녀는 안경 너머로 희미하게 눈을 뜬 채 나를 바라보았고 곧 옅은 미소를 지었다.

"환영하네. 하천성 군. 수갑은 풀고 오게나. 사람 대면하는데 수갑은 아니지."

그리 말한 순간 나는 가볍게 수갑을 끊었다.

그런 뒤 그녀의 앞에 놓인 의자를 빼 앉자 이한과 성아가 내 옆에 따라 섰다.

나머지들은 밖에서 대기인 모양이다.

"오는 길은 어땠는가. 소식을 듣고 일부러 사람들에게 자리를 피해 줄 것을 부탁하긴 했는데."

"어쩐지 사람이 없더라니."

"배려 좀 해 봤네. 사람 시선이란 게 당최 거북한 것이지 않는가."

끌끌거리며 웃던 그녀는 내 앞에 주스 하나를 내놓았다.

"난 환상종 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이주희일세. 반갑네."

"하천성이다."

이주희와 짧게 인사를 나누자 그녀는 내 옆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이한 군과 성아 아가씨는 자리를 비워도 괜찮네."

"하지만 소장님."

"괜찮네."

"주희 이모, 천성이 몸에 막 손대지 마. 나 이 애가 꼭 필요하니까."

성아는 마지막 말을 끝으로 이한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그 두 사람을 보던 이주희는 빙그레 웃었다.

"전해 듣긴 했다만 정말로 환상종화가 진행되었군. 인간 쪽 환상종은 종종 있긴 하지만 눈으로 직접 본 건 처음일세."

"미안하지만 반절만 됐어."

"알고 있네. 그 사실 때문에 자네를 내가 부른 것이기도 하고."

그리 말한 이주희는 내 앞에 키트 하나를 내려 두었다.

"급히 만들어 보았네. 자네가 과연 후에 사양신이 될지 안 될지 여부를 알 수 있는 키트일세."

잘도 단시간 안에 그런 걸 만들었다.

내가 묘한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자 이주희는 쓴웃음을 입가에 거닐었다.

"환상종 중 사양신이 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것을 구분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만든 것일세. 알게 된 건 모든 환상종이 사양신이 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단 것뿐이었지만. 자네 덕분에 이번 한 번만은 빛을 보겠군."

환상잡이들도 나름 환상종과의 타협점을 찾으려 했다는 건가.

"사양신이 전염병의 원인만 아니었다면 우리도 이런 짓을 하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야."

씁쓸한 웃음을 짓고 있는 이주희에게 키트를 받은 나는 그 안에 손가락을 넣었다.

그 순간 따끔한 감각과 함께 핏물이 키트 안으로 스며들었고, 그걸 들어 확인한 이주희는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축하하네. 자네는 사양신이 될 가능성이 전무하다고 나왔어."

그리 말한 이주희는 주스 캔을 따고는 내게 물었다.

"그럼 앞으로 어찌할 텐가. 환상잡이 일을 계속할 생각인가?"

"일단은."

"성아 아가씨가 좋아라 하겠군. 아무래도 자네가 마음에 든 모양이니까. 가능하면 나도 자네에 대해 연구하고 싶지만 이거 참. 성아 아가씨가 이미 으름장을 놓고 갔으니 아쉽군."

"호성아가 여기서 꽤나 높은 위치인가 보지?"

"자네 성아 아가씨에 대해 모르는 모양이군? 성아 아가씨는 4대 환상잡이 가문 백호의 첫째 딸일세. 무력으로 가장 유명한 가문이야. 최근 들어 백호 가문에서는 후계자를 위한 강자들을 찾고 있다더군. 정통 후계자인 성아 아가씨는 환상잡이에 그다지 관심 없는듯하여 그리된 거겠지."

꽤 높은 가문의 여자라고 생각하긴 했다만 이거 시작부터 꽤나 중요 인물들이랑 연관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높은 가문에서 후계자 찾기라.

이거 성아랑 한 번 이야기해 봐야 될지도 모르겠다.

"이한은?"

"창술 명가의 8대 환상잡이자 흑호 가문의 독자일세. 성아 아가씨만큼은 아니지만, 이한 군도 좋은 출신의 사람이지."

그래서 복면을 쓴 녀석들이 쩔쩔 맺던 것인가.

"환상잡이에게는 기본 상식인데 자네가 모르는 게 더 이상하군."

이주희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른 순간 나는 태평하게 내 이마를 톡톡 가리켰다.

"환상종이 내 몸을 잠식할 때 기억이 좀 날아가서 말이야. 그쪽은 애매해. 본부 위치도 어딘지 잊었을 정도였으니까."

내가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자 이주희는 잠시 의심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곧 거두어들였다.

딱히 건드리고 싶지 않겠다는 거겠지.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대답할 수 있는 선이라면 다 대답해 주겠네."

"화초선이라는 환상종이 어디 있는지 알아?"

내 질문을 듣고 이주희가 멈칫했다.

마치 진심으로 그 말을 묻고 있냐는 표정으로.

"혹여나 묻겠네만 화초선에게 갈 생각은 아니겠지?"

"갈 건데."

"미쳤군. 자살 행위일세. 자네 설마 화초선의 대한 것도 전부 잊어버렸는가?"

"잊었다고 해야 할까, 기억이 아예 없어. 그렇지만 몸이 이렇게 되고 난 직후 화초선을 찾아가라는 말이 들렸어."

적당히 거짓을 섞어서 말을 늘어놓자 이주희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환상종들 사이에는 화초선을 중심으로 모이는 무언가라도 있는 건가."

아무래도 새로운 오해를 만들어 낸 듯싶었지만 내 알 바는 아니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화초선이 대체 누군데?"

"화초선은 우리 환상잡이들의 가장 큰 숙적. 최강의 환상잡이 호백산도 죽이지 못한 환상종일세. 그 녀석 한 마리 때문에 환상종들이 인간과 대적 하기 시작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니까."

그리 말한 그녀는 다 마신 캔을 우그러트렸다.

호백산, 최강의 환상잡이, 이 여자 내가 필요한 정보를 술술 잘 내뱉어 준다.

'세계관 서술자 역할인가.'

말해 준 내용이 이 세계에서는 기본 상식이라곤 하나 그녀의 역할이 무엇인지 짐작한 나는 잠자코 말을 들었다.

"본래 환상잡이들의 목적은 환상종이 아닌 사양신 만을 사냥하는 거였네. 그러나 화초선이 인간을 대적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수많은 환상종들이 인간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환상잡이들은 사양신만이 아닌 환상종과도 싸워야만 하는 운명이 되었지."

가쁘게 쉰 숨소리와 함께 이주희는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 얼굴을 감쌌다.

"지금은 왜인지 휴식 중이지만 또다시 화초선이 움직이면 더 이상 화초선을 막을 자가 없네. 그 호백산도 결국 전염병의 감염 되어 죽어 가고 있으니까. 그러니 화초선의 노기를 건드리는 짓은 부디 그만두게나."

부탁을 하는 어조로 이주희가 말하는 동안 나는 그녀의 말을 곱씹은 뒤 다음 말을 이었다.

"미안, 내 상식이 짧았네. 조금 도와줄 수 있을까. 책이라던가 수업이라던가."

내가 순순히 받아들이자 그녀는 조금은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내일부터 예비 환상잡이들이 받는 수업을 등록해 두겠네. 그거라도 받으면서 상식을 채우게나."

"나야 좋지."

저쪽에서 정보를 제공해 주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어 나는 넙죽 받았다.

"그럼 이쪽에서 연락은 해 두지. 바쁜 시간 내줘서 고맙네. 밖에 나가면 안내인이 올 걸세."

마지막 말에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문을 열기 전에 힐끗 이주희를 살피자 마지막까지 '화초선은 건드릴 생각 말게.'라고 입 모양으로 전했고, 나는 그녀를 두고 밖으로 나왔다.

"왔어? 뭔가 당하진 않았고?"

내가 밖으로 나오자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성아가 호들갑을 떨었다.

그런 그녀를 내버려 두고 대화가 통할 것 같은 이한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 환상종에 대해 공부 좀 하려고 예비 환상잡이 수업을 듣는 걸 부탁 좀 해 놨다. 아, 그리고 사양신이 될 가능성은 없단다."

"응, 우리도 문자로 소식은 받았어. 우리 중 한 명이 당분간 동행한다면 별문제 없을 거라고 전해 주셨어."

"저요! 저요! 내가 함께 갈래!"

성아가 열심히 손을 들어 올리자 쓴 미소를 지은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성아가 같이 가는 걸로 하고 난 일단 보고하러 갈게. 하천성, 너도 오늘은 그만 들어가서 쉬어."

그렇게 두 사람과 헤어진 나는 안내인을 따라 이주희가 준비해 주었다는 방에 들어섰다.

침대 하나밖에 없는 단출한 방이었다.

나는 침대의 털썩 앉았고 곧 내 오른쪽 팔을 내려다보았다.

환상종화가 진행된 팔, 분명 권능으로 전염을 얻었다고 했다.

'하루가 꽤나 훅훅 지나갔다만 중요한 정보들이 잔뜩 있었지.'

나는 천천히 오늘 얻은 정보를 되새기기 시작했다.

환상종, 사양신, 환상잡이 등 이 층만의 세계관을 한 번 더 머릿속에 그려 보며 말이다.

'강제로 잔뜩 주입되는 정보에는 익숙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이번 층은 유난히 정보량이 많아.'

검왕. 네가 정보를 모으려고 안전지대 층에 오래 머문 이유를 알겠다.

마녀 때보다 도전하긴 쉽지만 모든 층을 깨는 건 더 어려울 듯싶었다.

'이런 층은 무작정 움직이는 건 골치지. 일단 흘러가는 대로 최대한 정보를 끌어모으는 게 최고다. 무엇보다 층의 목표인 화초선의 위치를 알아낼 때까지는.'

그렇게 결론을 내린 나는 우선 잠을 청했다.

지금 여기서 내가 사라졌다간 소란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기에, 천하의 하천성께서 얌전히 굴어 주기로 한 거다.

* * *

다음 날 나는 아침부터 찾아온 성아와 함께 예비 환상잡이 반으로 향했다.

성아는 싱글벙글했고 나는 복도를 따라 거닐다 그녀와 만날 때마다 급히 고개를 숙이는 학생의 모습을 보았다.

확실히 성아는 이 세계에서 높은 위치의 사람인 듯싶었다.

그들은 성아와 함께 걷고 있는 내게 관심을 보였고 예비 환상잡이 수업의 참가한 뒤로부터 삽시간에 내 소문이 퍼져 나갔다.

"환상종?"

"아니, 반 환상종이 된 사람이래."

"반 환상종 같은 게 있어? 그냥 인간 환상종 아니야? 저런 위험한 게 왜...."

"성아 님이 데리고 다니시는 거잖아. 이유가 있겠지."

여러 말들이 오가는 와중에도 차곡차곡 이 세계의 상식을 배워 나가니 어느덧 3일이 지났다.

지난 3일간 화제성에 비해 내가 그저 수업에만 참가했기 때문인지 같은 반 아이들도 슬슬 나에게 관심을 잃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예비 환상잡이 아이들 대신 내게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건 현직 환상잡이들이었다.

그들 중 몇몇이 종종 나를 찾아 왔고 그들은 반이 환상종이 되어 버린 내 상태를 조사하고 서로 토론을 나눴다.

지난 3일간 내가 얌전히 있어 준 덕택인지 나에 대한 경계심도 조금씩 줄어든 듯싶었다.

무엇보다 이 세계에서 나는 본래 환상잡이.

F급이라곤 하나 환상잡이로서 살아온 경력이 있기에 그들의 경계심도 보다 빨리 풀린듯싶었다.

'아, 슬슬 성미에 안 맞네.'

3일을 꼬박 수업만 들으며 얌전히 있었기 때문일까, 무작정 기다리기만 하는 것도 지치기 시작했다.

'검왕 녀석들은 이미 정보를 모았다고 했었지. 확실히 이번 층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구조네.'

그동안 꽤나 단순무식으로 층을 뚫어 왔던 나로서는 이번 층은 생각 이상으로 따분했다.

그렇게 환상잡이 인식에서도 나는 그저 환상종화가 반절 진행된 환상잡이라고 생각될 때쯤. 나는 평소와 같이 성아와 함께 예비 환상잡이 교실에 들어섰다.

그리고 나는 곧 내 눈을 의심했다.

"어라, 이거 하천성 씨 아니십니까."

"밤비."

"하핫, 이제는 다시 마도입니다만 그쪽으로 불리는 게 더 좋긴 하군요."

설마 이 녀석에게까지 따라 잡혔을 줄이야.

하긴, 밤비도 베테랑 회귀자.

여기까지 오는 게 그리 힘들지만은 않았으리라.

29화

"소문으로만 듣던 반 환상종이 하천성 씨였습니까. 설마 아직 여기 있을 줄은 몰랐네요. 한참 앞서 나갔을 거라 생각했는데."

"사정이 있었어. 그것보다."

밤비의 옷차림을 보고 나는 녀석을 바라보았다.

"너도 학생이냐?"

"아뇨. 전 강사죠."

"뭐? 강사?"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가벼운 웃음소리를 흘리는 밤비의 말에 나는 속삭이듯 물었다.

"너도 화초선한테 가야 하는 거 아니었냐."

"저도 나름대로 정보를 모으려고 강사를 한겁니다. 현재 화초선이 머무르는 장소는 꽤 윗사람들만 공유 하고 있는 일이라서 쉽지가 않습니다."

역시 당분간은 잠자코 있는 게 좋겠군.

반 환상종화 탓에 위험인물로 지목된 나에게 화초선의 정보가 떨어지려면 얌전히 있는 게 답이었다.

"천성아 지인이야?"

"일단은."

성아의 물음에 답하자 밤비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내가 보기에 그 행동이 어딘가 잔망스러웠지만, 그는 성아에게 최대한 예의를 보였다.

"백호 가문에 아가씨가 하천성 씨와 지인이실 줄은 몰랐네요. 인사가 늦었습니다. C급 환상잡이 스테일러 밤비입니다."

밤비 쪽은 벌써 실적을 꽤 냈는 듯 F급 환상잡이인 나와는 달리 이미 C급의 도달해 있었다.

강사도 하는 걸 보니 정보량은 저쪽이 압도적으로 많겠지.

'이놈을 좀 굴려 볼까.'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나는 생각을 접었다.

최근에 검왕 쪽과 부딪치고 나서 남과의 협력을 택할 생각은 안 들었다.

"예의 차릴 거 없어. 난 그냥 천성이 동행으로 온 거니까!"

밤비의 인사에 손사래 치며 반응한 성아는 내 팔을 꾹꾹 잡아당겼다.

그 행동에 하는 수 없이 그녀를 따라 자리에 착석하자, 그 순간 익숙한 인물이 내게 묘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당신, 참 태평하게 지내고 있네."

"...검왕, 너도 올라온 거냐."

그 자리에는 검은색 제복 차림에 검왕이 있었다.

"당신이 올라간 뒤 바로 따라갔어. 반 환상종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긴 했는데 설마 당신이었을 줄이야. 성좌들에게 꽤 사랑받는 모양이네."

"이게 사랑인지 독인지는 두고 봐야지. 이 팔 때문에 내 쪽은 움직임에 제약까지 걸렸다고."

"다른 회귀자들이 가지지 못한 걸 가졌으니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부정은 안 했다.

그래도 반 환상종 덕분에 남들이 환상잡이 급을 올려 정보량을 늘려 갈 동안 나는 쉽게 성아와 이한 등 중요 인물과 금방 마주했으니까.

"자, 강의를 마저 시작하겠습니다."

그 순간 마도가 강의를 시작했다.

"환상종이란 동물이 신격화된 존재들을 말합니다. 옛날이야기나 혹은 전설에 나오는 각종 신물들이 바로 그들이죠."

팔짱을 낀 채 마도의 수업을 전부 들은 나는 턱을 매만졌다.

성좌가 그냥 사양신을 잡으면 클리어할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하게 층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 성좌의 생각을 채워 줄 만한 무언가가 있을 텐데 지금 설명으론 마땅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그런 순간 성아가 눈에 들어왔다.

분명 이주희가 말한 게.

"성아, 이주희한테 들었는데. 백호 가문에서 후계자를 찾고 있다면서."

"혹시 관심 있어?"

내가 그냥 툭 던지듯 물은 순간 옆에 있던 성아가 급히 반응했다.

눈을 초롱거리는 성아를 보고 나는 고개를 기울이면서 대답했다.

"일단은."

"내가 예전에 우리 집에 가자고 몇 번 말했었지. 아빠한테 소개시켜 주고 싶다고."

"그게 설마...."

"맞아. 우리 가문에서 나를 대신할 후계자로 난 천성이 네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야."

성아의 말에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진작에 진행될 수 있었던 이야기였나.

"넌 환상잡이에 관심 없는 모양이지."

"응, 우리 아빠가 너무 오랫동안 환상잡이로 살아갔거든. 그걸 봤더니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아빠는 내가 화초선을 막아 줄 거라 믿고 있지만."

조금 씁쓸하게 웃은 성아의 말에 나는 그녀에게 대답했다.

"그래, 너희 집에 데려다줘. 너희 아빠를 만나 봐야겠어."

높은 직위에 오를 수 있다면 화초선의 위치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한 내 대답에 성아는 커다랗게 환호했다.

마치 벌써 내가 자신을 대신해 백호 가문의 후계자라도 된 양.

내가 쉽게 쉽게 정보를 얻어 가서일까, 옆에 있던 검왕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날 보고 있었다.

뭘 보냐고 쏘아 보아주자 검왕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참 여러모로 쉽게 쉽게 해결하네."

"나름 머리 좋게 움직이고 있어서."

"그냥 운이 좋을 뿐이지 않아?"

하핫, 웃기는군. 운도 실력이다.

그 뒤 수업을 마친 나는 성아와 함께 교실을 빠져나왔다.

그런 내 뒤를 검왕이 졸졸 따라왔고 그 뒤편엔 마도도 슬그머니 따라왔다.

"왜 따라오냐?"

"나도 백호 가문의 가고 싶으니 같이 데려가 줘."

들러붙으려는 심보인지 검왕이 자연스레 내 옆에 다가와 서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존심도 없냐. 너희들도 정보를 모았다면서."

"그런 거 1회차 때 버렸어. 그리고 정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잖아? 우리 서로 돕고 살자. 예이, 하천성 님, 세계 최강."

"...아부를 할 거면 좀 똑바로 하던가."

참 아부 같은 것도 못 하는 여자라고 생각하며 검왕을 보고 있자 내 옆에 스리슬쩍 한 명이 더 나타났다.

"저도 부탁드립죠."

마도 녀석도 달라붙기로 마음먹었는지 끈질기게 굴자 나는 성아를 돌아보았다.

"둘 다 절대 네 집에 들이지 마."

"와, 야박하게 구네."

"하천성씨, 너무 야박하네요."

내가 정보를 그냥 줄까 보냐.

실망이라는 검왕과 마도의 표정에 나는 콧방귀를 내쉬었다.

"꼬우면 너희도 인맥 만들던가."

"너무하네."

"제 야유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너희가 애들이냐."

실망했다면서 돌아서 버리는 두 사람의 모습을 짜증스레 보고 있자 옆에 있던 성아가 빙그레 웃었다.

"완전 절친들이네."

"그렇게 보인다면 네 눈이 뭔가 잘못된 걸 거다."

이후 우리는 건물 밖으로 나왔다.

바깥에서 성아는 자신이 가진 뼈 열쇠 뭉치 중 하나를 들었고 곧 철컥하고 허공에 열쇠고리를 열었다.

그 순간 눈앞에 방 하나가 보였다.

동양풍에 백호 그림이 돋보이는 여자아이 방에 성아는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고 나에게 따라오라는 양 손짓 했다.

그녀의 행동을 따라 부츠를 벗고 안으로 들어선 나는 여자아이 방 특유의 향을 느꼈다.

아무래도 이곳은 성아의 방인 듯싶었다.

"복도로 나가자. 아버지한테 나보다 강한 사람이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어."

그게 교환 조건이었기에 성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방문을 열고 나섰다.

그런 순간 그녀의 앞에 저번과 같은 복면을 쓴 자들이 부복하며 등장했다.

그들은 성아에게 극진한 예의를 보였고 손님으로 추정되는 나에게도 똑같이 예를 보였다.

"가자."

익숙한 듯 성아가 발걸음을 옮기자 나도 그 뒤를 따라나섰다.

마당이 보이는 꽤나 긴 복도가 이어졌을까, 한 방 앞에서 우뚝 멈춘 성아는 문을 두 번 두드렸다.

그러곤 방문을 열자 거기에는 한 여자가 앉아 있었고 그녀는 느긋하게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오, 하천성이잖아. 이제야 여기까지 왔나."

선홍색의 진한 아이라인, 남들보다 작은 체구, 손끝을 가릴 정도로 긴 의복.

구천옥녀였다.

그녀는 히죽 웃으며 나를 반기자 성아가 나와 구천옥녀를 돌아보았다.

"천성이가 아는 손님이야?"

"일단은."

이 녀석이 벌써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던 나는 꽤나 하네라는 표정으로 구천옥녀를 바라보았다.

과연 과거 황제 친위대라 이건가.

나는 뚜벅뚜벅 걸어가 구천옥녀의 앞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러자 그녀는 히죽 하고 웃어 보였고 나도 따라 웃었다.

옳거니 신경전을 해보자 이거지.

"일단 난 아빠 불러올게."

손을 흔들며 아버지를 부르러 가는 성아를 뒤로하고 나는 구천옥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느긋한 표정으로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고, 가는 손가락으로 입가에 묻은 찻물을 천천히 훔쳤다.

"우릴 무시한 것 치곤 꽤나 탑을 오르는 속도가 느리네? 자네라면 벌써 다음 층에 올랐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런 나도 비슷한 생각이었는데. 정보전의 달인이신 구천옥녀가 아직까지 여기에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거든."

우리는 또 한차례 서로를 보며 웃었다.

"꼴은 또 그게 뭔가. 뿔이라니 우스꽝스럽네."

"평생 10대의 몸뚱이로 살고 있는 녀석보단 괜찮은 꼴이지."

그러자 구천옥녀의 미소에 잠시 금이 갔다.

그녀는 15세의 나이에 크라운 로드에 들어온 만큼 회차를 반복할 때마다 20살에서 15살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겉모습은 실제 나이에 심하게 맞지 않아 나름의 콤플렉스였고 나는 지금 그 결점을 건드린 것이었다.

"검왕은 만났고 나머지 마술사와 대협은?"

"각자의 일을 도맡아 하고 있지. 그나저나 내가 알려줄 이유는 없을 텐데."

"그냥 도태된 거겠지. 이래서 내가 팀은 안 만들기로 한 거야. 서로 발목만 잡으니까."

"...하천성 이 이상 내 동료들을 욕하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

촤르르륵.

구천옥녀의 손에 책 하나가 쥐어졌다.

족히 천 페이지는 될 법한 책을 쥔 채 구천옥녀는 나를 노려보고 있었고 나는 서슬 퍼런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콤플렉스를 건드려도 무너지지 않던 포커페이스가 동료 욕을 한 걸로 돌변한 것이다.

"난 싸우는 걸 좋아해서 말이지. 후회나 하지 말라고."

"된데. 자, 가자. 아, 손님도 같이 오래요."

내가 별천도를 뽑아 들려는 순간 성아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금방이라도 싸울 것 같은 분위기에도 성아는 태평했고 따라오라는 양 손짓했다.

그 행동에 구천옥녀가 책을 거두어들이고 나도 따라 검을 돌렸다.

일단은 잠깐 휴전하기로 한 것이었다.

"따라와. 좀 이동해야 되어서."

그리 말한 성아는 안내를 시작했다.

복도를 따라 걸은 뒤, 마당에 놓인 새로운 건물에 들어선 우리는 몇 겹으로 된 문을 지나치고 또 지나쳐 지하에 도착했다.

새하얀 방에 유리가 쳐진 반대편 공간에는 한 노인이 앉아 있었고 그는 가늘게 뜬 눈으로 우릴 보았다.

가부좌를 틀고 마나를 운용하고 있었는 듯 그에게는 희미한 기운이 흘러나왔고 나는 그가 병들어 죽어 가고 있음을 눈치챘다.

"최근 사람을 많이 만나니 즐겁군."

낮게 읊조려진 중저음의 한마디.

그는 한마디를 내뱉자마자 거세게 기침을 하곤 입가를 스윽 닦았다.

흰색의 소복 차림을 입은 그는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거닐었다.

"반갑군. 젊은 환상잡이들. 내 이름은 호백산. 백호 가문의 가주다."

호백산이란 말이 들리자 나는 이주희에게서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이 노인이 바로 최강의 환상잡이였다.

그 순간 구천옥녀가 노인에게서 풍겨 나오는 강자의 기운을 느꼈기 때문일까, 그녀는 곧바로 가벼운 예를 차렸다.

"최강의 환상잡이를 뵙습니다. 저는 A급 환상잡이, 진홍상이라고 합니다."

A급.

그 단기간에 거기까지 올렸다, 이건가.

내가 묘한 표정으로 구천옥녀를 보고 있자 그녀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참은 어린 얼굴로 저런 표정 지어봤자 우습다만.

30화

"하천성이다."

"성아가 힘으로 졌다는 사람이 자네로군."

이미 정보는 접해 들었는지 그는 내 모습에도 토를 달지 않았다.

그 순간 호백산에게서 진한 오러의 압력이 느껴졌다.

상당한 레벨의 오러였지만 나에게는 통하지 않았고 호백산은 헛웃음을 흘렸다.

"과연, 화초선에게 도전할 정도의 능력은 있다. 이건가."

"병든 노인치곤 꽤 하네."

내 말을 듣고 노인은 턱 가에 난 수염을 매만졌다.

"내 전성기 때였다면 한 번 붙어 보고 싶지만, 이제는 몸에 번진 전염병을 오러로도 못 막는 상태가 되어서 아쉽군."

확실히 전성기 때였다면 그는 신시아도 뛰어넘을 강자일 듯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병든 노인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아빠, 어때 괜찮지. 천성이는 나보다도 강하다니까. 게다가 화초선한테도 관심 있어."

우리의 대화 사이로 성아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호들갑을 떨며 기쁘게 말했고 호백산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 그렇게 보이는구나."

"그럼 이제 내 부탁 들어줘."

부탁.

뭔가 호백산과 거래한 게 있었나.

내가 성아를 바라보고 있자 호백산에게서 대답이 들려 왔다.

"그럼 우선 하천성, 내 앞에 잠깐 와 주겠나."

"잠깐, 기다려 주시지 않겠습니까?먼저 도전권을 얻고 백호 가문을 찾은 건 저니까요."

호백산의 말이 이어지던 찰나 구천옥녀가 내 앞을 지나쳐 나섰다.

그녀는 목적을 가지고 이 집을 찾아온 듯싶었고 그런 구천옥녀의 말에 호백산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옮겨졌다.

"음, 확실히 순서는 중요하지."

먼저 왔다는 구천옥녀를 대우해 주기로 마음먹었는지 그는 가볍게 오러를 일으켰다.

그 즉시 그의 오러에 대항해 구천옥녀가 오러를 일으켜 왔고 둘의 힘이 한차례 부딪쳤다.

육체적인 싸움은 없으나 오러만으로 서로의 경지를 가늠해 보려는 속셈이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구천옥녀의 얼굴이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크라운 로드에서 스텟은 오러에 큰 영향을 미친다.

아무리 그녀가 8회차 동안 크라운 로드를 해온 베테랑이라지만 지금의 그녀는 고작해야 25층에 오른 회귀자.

당연 전 회차보다 마력 스텟이 턱없이 모자랐기에 25층 세계관의 최강자로 자리매김한 호백산의 오러에는 미치지 못했다.

물론 그녀의 능력은 오러만이 아니긴 하겠지만.

"흐윽."

옅은 신음과 함께 호백산의 오러에 눌리는 것을 간신히 견디는 구천옥녀를 보고 호백산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강하군. 유망 있는 신인이야. 얼마 안 가 S급 환상잡이도 넘볼 수 있겠어."

그러나 그 미소는 미래를 본 미소.

현재의 구천옥녀는 그에게 닿지 못했다는 소리였다.

구천옥녀의 입술이 깨물어졌다.

지금의 스텟으로는 호백산을 넘어설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그녀가 뒤로 물러섰다.

"감사합니다.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부탁하지. 언젠가 자네의 활약이 기대되는구만."

그리 말한 구천옥녀가 물러가자 이번에는 호백산의 시선에 내게 닿았다.

아까 전 오러에 대한 것은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시험해 보았다.

잠깐 내뿜은 내 오러는 호백산의 마음에 든 듯싶었고 그는 처음부터 구천옥녀에게 큰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 같다.

그저 후배 환상잡이에게 조언을 해 줄 속셈으로 구천옥녀와 오러 대항을 해본 것에 지나지 않겠지.

그걸 알고 있는 구천옥녀는 분한 듯싶었지만 그걸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발검을 하겠네."

오러를 형상화시켜 가상으로 싸워 내 경지를 가늠해 보겠는 건가.

재미있는 짓거리다.

내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리고 호백산의 입에도 호기로운 미소가 그려졌다.

오러로는 충분히 알았으니 다음은 어느 경지에 올라와 있는지 시험해 보겠다.

이 소리로군.

'좋아. 응수해 주마.'

호백산을 따라 내 검이 뽑혀 들어진다.

서로의 시선이 교차하고 대기 사이로 묘한 기운이 퍼져 나간다.

호백산이 먼저 검을 휘둘렀다.

사람의 3배는 될 법한 대검이 내게 덤벼들었고 나는 그에 응수하여 검을 휘둘렀다.

대지를 가를 듯 내려온 호백산의 검과 하늘을 삼킬 듯 올라간 내 검이 맞부딪친다.

채엥.

철의 소리가 울려 퍼진 듯한 감각이 들었다.

오러가 우웅하고 진동했다.

노인의 눈이 희미하게 떠진다.

우리는 멈추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일식(一式)

뇌전섬뢰(雷電閃雷)

백호선술(白虎仙術)

불패신마(佛敗信魔)

이식(二式)

섬뢰적선(殲雷迪渲)

백호선술(白虎仙術)

유아독존(唯我獨尊)

사식(四式)

뇌도탄룡(雷刀彈龍)

백호선술(白虎仙術)

화룡점정(畵龍點睛)

오식(五式)

무형뇌절(無熒雷絶)

백호선술(白虎仙術)

천상천하(天上天下)

육식(六式)

뇌뢰만참(雷雷万斬)

백호선술(白虎仙術)

용화불패(龍火不敗)

수많은 검술이 오고 간다.

강하다.

단순한 레벨로 치부하기에는 아쉬울 정도로 그는 강했다.

정교한 오러가 청아하게 빛났다.

오래도록 갈고 닦은 오러는 깊은 고혹감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내 오러는 무쇠와 같다.

투박하고 거칠고 자기주장이 거세다.

그렇기에 호백산의 오러와는 정반대였다.

그러나 고요는.

언젠가 깨질 수밖에 없다.

알고 있다.

그 또한 수많은 사경을 건너왔음을.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나 또한 수없이 많은 사경을 건너왔다.

그러니 지지 않는다.

내 눈에 불이 붙었다.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재밌다.

단순한 오러 싸움만으로도 이 정도의 실력을 보여 줬다.

그렇다면 그가 직접 싸운다면 어떨까.

하블리아 첸만큼이나 심도 있는 그의 실력이 본색을 드러낸다면....

쿨럭.

그 순간 호백산의 입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이마 가에서 진한 땀방울이 흐르고 그의 오러가 깨졌다.

병든 노인의 몸은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눈동자에 아쉬움이 깃들고 나 또한 중간에 합이 끊기니 같은 감정을 느꼈다.

끌끌거리며 한숨 섞인 웃음을 흘린 그는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무슨."

구천옥녀의 경악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한차례 눈꺼풀을 파르르 떨더니 내 뒷모습을 맹렬히 노려다 보았고 곧 고개를 홱 하니 돌려 밖으로 걸어나갔다.

방금 전 합으로 내가 얼만큼이나 강한지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검왕에게는 들었지만 이 정도라고는 상상 못 한 모양이로군.

"자네 같은 실력자가 어디서 나타났는지 몰라도 재미있었네."

그런 순간 입가를 마저 닦아낸 호백산이 미소와 함께 말해왔다.

"계속했으면 결국 내가 이겼겠지만 말이야."

"내가 전성기였을 때라면 부정했을 텐데 아쉽군."

자존심을 센 영감탱이구만.

"화초선은 나보다 강하다. 전성기 때의 나보다도 훨씬."

"상관없어. 내가 이겨."

"우물 안 개구리의 발언만 아니었으면 좋겠군."

그리 말한 것치곤 호백산의 눈은 이미 나를 인정하고 있었다.

오러를 맞부딪치고 내 경지를 그 나름대로 더듬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자신이 알고 있는 환상잡이 중에서는 가장 강하다는 것을 자각했으리라.

"아빠, 어때 괜찮지?"

호백산과 내 합을 가만히 지켜 보고 있던 성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호백산은 얼마간 침묵했고 곧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투박하지만 단단한 무쇠. 그리고 속은 꽤나 여리군. 적어도 우리 세계를 마음대로 유린하려는 마음은 아니야."

그 순간 호백산의 말에 내 시선이 돌아갔다.

이 녀석.

"반갑군. 도전자. 우리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하지."

"너 사도구나."

사도, 성좌가 만들어 놓은 세계의 관리자 겸 장치.

자신의 역할이 주입되어 따르는 자들과는 달리 세계의 법칙을 알고 있는 자들.

호백산은 그러한 사도였다.

'구천옥녀가 오러에서 힘도 못 쓰고 질만 했구만.'

사도는 강하다.

대개 그 세계에서 최강자의 위치에 있기 마련이니까.

최강의 환상잡이라는 건 헛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치고도 호백산은 일반 사도들과는 다른 부류의 사도인 것 같았다.

"너, 크라운 로드의 법칙을 알고 있는 사도구나."

"저주받은 몸이지."

그는 힘없이 웃었다.

"그런데 그걸 딸 앞에서 말해도 되나."

"뭐, 적당히 다른 의미로 해석해서 들릴 테니 걱정은 하지 말게나."

등장인물들은 이 층에 규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호백산의 말에 그는 가벼운 웃음소리를 띄웠다.

"화초선은."

"답해 주고 싶지만 아쉽게도 층의 규율이 있어서. 그 규율의 따라 알려 주겠네."

그리 말한 그는 우선 자신의 딸을 돌아보았다.

"알았다. 허락하마."

"좋아. 그럼 나 이한이랑 결혼해도 되는 거지?"

결국 포기한 듯 말을 내뱉은 순간 예상치 못한 말이 성아에게서 돌아왔다.

내가 성아를 바라보자 그녀는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우리 아빠는 내가 후대에 언젠가 화초선을 막아야 한다고 주구장창 입에 달고 살던 사람이었거든. 임신을 하면 환상잡이로서 살아가기 힘들어지니까. 아빠가 화초선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결혼은 절대 안 된다고 했었어."

그러니까 성아가 환상잡이, 차세대의 유망주였다. 이 소리인가.

나로 인해 그 제약이 풀렸으니 그녀는 금방이라도 밖으로 뛰쳐나갈 기색이었다.

"그래, 성아야. 난 이 자와 더 대화를 나눌 테니 너는 이한한테 알리러 가거라."

"응!"

커다랗게 대답한 성아가 밖으로 뛰어나가고 호백산과 나 둘만 남게 되자 그가 자조하듯 소리 내어 웃었다.

"우습지 않나."

"뭐가."

"우리 딸은 평생 결혼을 못 할 걸세. 정확히는 그런 미래는 존재하지 않겠지. 자네들이 층을 클리어하거나 포기하면 우리는 전부 또 원래대로 돌아가 버릴 테니까."

간혹 있다.

크라운 로드의 법칙을 깨닫고 움직이는 사도들이.

그런 그들은 대부분 자신의 인생이 비참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스스로 생명체라기보단 부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고 있었다.

호백산도 그와 같은 부류였다.

성좌가 세계를 만들어 내던 중 실수로 만든 오류인 건지, 아니면 이 또한 의도한 것인지 몰라도 그들의 눈에는 항상 희망이 없었다.

"내 기억도 영원히 이곳에 묶여 있을 걸세. 눈을 뜨면 자네들을 만난 걸 잊고 또 신세 한탄이나 하고 있겠지."

설령 사도라고 한들 그의 기억도 층이 클리어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다.

그렇기에 호백산은 사도지만 등장인물로서 영원히 전염병의 감염 되어 서서히 죽어 가는 인생만을 살아가는 것이다.

"자네는 몇 번째 크라운 로드를 올랐는가."

"5번."

"꽤나 올랐군. 5번이나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릴 때의 기분은 아이러니할 거야. 나는 적어도 기억만은 지워져 버리니 다행이지만 자네들은 모든 걸 기억하겠지."

자기는 지난 일이 사라지는 것조차 추억 못 한다며 호백산은 한탄했다.

"자네들이 우리 세계의 어떤 결과를 가져오던 그건 내게는 끝이지. 그저 전염병에 의해 서서히 죽을 뿐이야."

"나한테 이러한 말을 하는 이유는?"

사도라곤 하나 그가 회귀자에 불과한 나에게 이런 말을 내뱉을 이유는 없었다.

그렇기에 물음을 던져 보자 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특수 능력 때문일세. 오러로 부딪쳐 보면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어느 정도 파악이 되지. 이걸로 화초선이랑 꽤나 오랫동안 싸워왔네. 그것이 정말로 나의 기억인지, 만들어진 기억인지는 몰라도 추억이 새록새록 하구만."

그리 말하고 호백산은 서 있기 지쳤다는 양 침대의 털썩 주저앉았다.

"물론 나 이상으로 강했던 점도 있네. 이번 층에서 나보다 강한 도전자를 보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그렇다는 건 이 이야기는 나 말고는 다른 자에게는 안 했다는 소리와도 같겠지.

적어도 이번 회차에서는.

"화초선의 대한 이야기해 줄 수 있어?"

"층을 클리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겐가?"

"뭐,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도 있어서."

"그러지."

그리고 오랜 기간 평생을 바쳐 싸워온 한 환상잡이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31화

그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은 전염병에 휩싸여 죽어 가고 있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사양신이 마을을 덮치고 난 뒤 사람들은 하나둘 병에 걸렸다.

그리고 그 병은 순식간에 사람들을 좀먹어 갔다.

"어머니. 다녀왔어요."

사내아이는 야생 새 한 마리를 손에 쥔 채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들고 낡은 집안에 들어섰다.

집안은 오랫동안 관리를 안 한 탓에 엉망진창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다.

눈과 귀를 잃고 서서히 장기가 뒤틀려 죽어 가는 전염병에 걸린 어머니는 아들이 다가왔음에도 아무런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사내아이는 마른 수건으로 식은땀을 흘리는 어머니의 몸을 닦고 잡아 온 새로 한 끼를 때우며 그렇게 살아갔다.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내며 늘 산에 놀러 가던 옆집의 동갑내기 친구가 죽었다.

언제나 밝게 인사해 주며 자신의 집 앞 나무에 열린 감을 따 주던 아주머니가 죽었다.

게임기 앞 아이들이 시끄럽게 굴면 소리 지르던 구멍가게 아저씨였지만 가끔씩 먹으라며 사탕을 주던 그가 죽었다.

전염병을 고칠 약을 찾으러 온다던 아버지의 소식이 끊어졌다.

그리고 이듬해.

사내아이의 어머니가 죽었다.

사내아이는 그렇게 혼자가 되었다.

"쯧, 마을 사람은 전부 죽었군."

그리고 다음 해에 한 집단이 마을을 찾았다.

입가를 천으로 가리고 마을 주위를 둘러보던 그들은 마을 사람 전부가 전염병으로 죽었음을 깨닫곤 혀를 찼다.

자신들이 빨리 왔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그들의 머릿속에 스쳤으나 전 세계를 돌고 있는 그들도 한계는 있었다.

"어, 저기 사람 있다!"

그 순간 길목을 터덜터덜 걷던 한 사내아이가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사내아이가 당연 전염병에 걸렸을 걸 알고 있었지만 생존자를 그대로 죽게 할 만큼 매정한 인간들은 아니었다.

자신의 몸 위에 오러를 일으켜 전염병의 대처를 하고 바삐 사내아이에게 달려온 그들은 곧 의문을 띄웠다.

이 마을에 퍼진 전염병은 눈과 귀를 멀게 하고 내장을 뒤틀리게 만드는 죽음을 부르는 병이었다.

그럼에도 사내아이는 멀쩡했다.

옷은 엉망, 씻은 지도 오래된 사내아이였지만 그 아이는 전염병이 걸린 기색이 전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마을이 멸망하고 꽤 시간이 지나 식량이 다 떨어졌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의 몸에는 생기가 느껴졌다.

"이 아이."

"그래, 특이 체질이다. 선천적으로 오러를 몸에 펼치고 있는 특이 체질."

간혹 있다.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체질을 가진 자가.

실제로 사내아이는 인식 못 하고 있었지만 그의 몸에는 오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내아이에게 다가간 한 여성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애야 몇 살이니."

"8살."

"...8살?"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경악이 오고 갔다.

비록 지금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해 왜소한 체격인 사내아이였지만 그들의 눈에 사내아이는 최소 14살 정도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8살.

혹시 자기 나이를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말이 사람들 사이에서 오고 갔지만 무리의 중심에 선 남자는 달랐다.

흔히 말하는 천하장사, 그 급을 넘어선 압도적인 육체를 사내아이가 타고난 걸 눈치챘다.

"이 아이를 데리고 간다."

"예? 어쩌시게요?"

"환상잡이로 키운다. 자질은 충분히 있어."

남다른 사내아이의 자질을 눈치챈 그는 아이와 시선을 맞추고자 자세를 낮췄다.

"꼬마야 이름은."

"호, 백산."

"마을을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하지만 더 이상 이런 마을이 만들어지지 않게 네가 도와주지 않겠니?"

그리 말한 남성은 사내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사내아이는 남성이 내민 손을 잡았다.

환상잡이들에게 거두어진 호백산은 이후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 환상잡이로서 성장해 나갔다.

무리의 중심, 현 환상잡이의 리더 격인 강민혁이 호백산을 본 눈은 옳았고 그의 기대 이상으로 호백산은 환상잡이로서의 기술을 흡수했다.

압도적인 신체, 처음부터 오러를 다룰 수 있던 특이 체질, 그 두 가지가 맞물린 끝에 호백산은 어느새 환상잡이들 중 가장 강해졌다.

"저 혼자서 다니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후 호백산은 강민혁에게 홀로서기를 부탁했다.

확실히 다른 환상잡이들은 호백산의 속도를 따라오는 것이 힘들었고, 도리어 위험에 처하는 환상잡이들을 구하다가 자기가 피해를 입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기에 호백산 입장으로서는 오히려 혼자 사냥하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백산아, 현재만 보지 마라. 환상잡이들은 집단이여야 해. 혼자서 모든 걸 막아 낼 수는 없어."

"지금도 사양신에 의해 사라지는 마을이 있습니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 언제까지고 발목이 잡힌다면 그것 또한 옳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환상잡이는 민혁 형님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저 일개 단원일 뿐입니다."

그 말을 듣고 강민혁은 아쉬운 소리를 내뱉었다.

어린 시절 마을이 멸망하고 홀로 살아남고자 발버둥 쳤던 호백산은 사람과 어울리는 법을 잊었고 그건 환상잡이들 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험한 상황이 생기면 제일 먼저 사람을 구하는 게 호백산이었다.

그는 일종에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가 손쓸 수 없이 죽고 마을을 잃었을 때 그의 마음속에는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면 안 된다는 각인 같은 것이.

"부탁합니다. 민혁 형님."

강민혁은 호백산이 환상잡이 사이에서 조금씩 변해 가길 바랐다.

그러나 다른 자들보다 훨씬 강한 호백산은 더더욱 고립될 뿐이었다.

결국 강민혁은 호백산을 보내 주고, 집단을 떠난 그는 홀로 사양신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호백산이 떠난 뒤 환상잡이 내부에서도 여러 의견이 부딪치기 시작했다.

"환상종도 언젠가 사양신이 될 녀석들입니다. 그런 녀석들을 그냥 두고 보자뇨."

"환상종은 인간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는다는 건 자네들도 알지 않나."

"그럼 저들이 사양신이 되어 또다시 전염병을 일으키는 걸 두 눈 뜨고 보고만 있으라는 겁니까! 언제까지 사양신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니실 생각입니까!"

환상종, 신들의 부조물인 그들은 세상에 분노하였을 때 타락하여 사양신이 된다.

그렇기에 사양신이 되기 전에 환상종을 죽인다면 그걸 방지할 수 있다.

그들은 그렇게 주장하고 있었다.

하나 환상잡이 리더인 강민혁은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하지만 환상잡이들 대부분은 사양신의 전염병에 의해 마을이 멸망하였거나 가족을 잃어 그들에게 원한을 품은 자들.

강민혁같이 환상종에게 원한을 가지지 않는 자들은 드물었고 점차 그들의 불만은 쌓여 갔다.

그리고 그 끝에 그 원한은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와 환상잡이가 둘로 갈라졌다.

강민혁을 따라 사양신만을 사냥하는 환상잡이와 환상종도 잡아야 한다는 환상잡이들로.

환상종을 잡는 것에 반대하는 강민혁이었지만 그들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고 결국 두 집단은 완전히 갈라서고 만다.

그 무렵 호백산은 사양신을 사냥하고 다니고 있었다.

그의 앞을 막을 수 있는 사양신은 없었고 수없이 많은 마을을 구해냈다.

그리고 그가 한 마을의 들렸을 때 그는 외딴집 한 채에 도착했다.

낡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집이었으나 크기는 꽤 컸다.

마침 쉴 곳이 필요했던 그는 그 안으로 들어섰고 곧 신기한 광경을 보았다.

거기에는 어린아이들이 있었다.

정확히는 어린 환상종과 인간 아이들이.

"이건...."

"아저씨 누구야?"

호백산을 보고 호기심을 느낀 아이들이 다가온 순간 그의 앞에 갑작스레 불길이 떨어졌다.

발등 바로 앞에 떨어진 불길에 호백산이 고개를 들자 거기에는 붉은색 머리카락을 한데 묶은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호백산을 맹렬히 노려보고 있었고 아이들의 주인인 듯싶었다.

"썩 꺼져라. 인간, 네가 올 곳이 아니다."

인간, 마치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는 듯 말한 여성의 말에 호백산은 그녀가 환상종임을 눈치챘다.

"미안하군. 빈집인 줄 알았어."

두 손을 들며 싸울 생각은 없다는 듯한 호백산을 보고 그녀는 눈초리를 날카롭게 띄웠다.

그런 그녀에게 호백산은 주위 아이들을 바라본 채 자신의 의문을 던졌다.

"환상종과 사람을 같이 키우고 있는 건가?"

"알 거 없을 텐데?"

"아니, 그냥 궁금해서."

순수한 의문을 보인 호백산의 태도에 경계하던 그녀는 곧 쯧 하고 혀를 찬 뒤 말을 내뱉었다.

"그저 홀로 남은, 다 같은 아이들일 뿐이야."

홀로, 그 말에 호백산의 반응이 미묘해졌다.

아이에게 홀로라는 것은 부모를 잃었다.

그런 이야기겠지.

하지만 아이들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평생을 웃음 없이 살아온 자신과 달리 이 아이들은 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게 다가올 정도로 밝고 겁 없었다.

자신과 같이 눈앞에서 부모를 잃었다면 이럴 수가 없었을 텐데.

"...."

어딘가 가슴속 한 편이 이상해진 기분을 느낀 호백산은 잠시 후 그녀에게 쫓겨났다.

그러나 내쫓기고 얼마 뒤 호백산은 종종 이 집을 다시금 찾았다.

자신의 마음속에 생긴 이 응어리를 쫓아 호백산의 발걸음이 이 집으로 향했던 것이다.

하지만 안에 들어가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아이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거리를 집 앞에 두고 호백산은 말없이 떠나기를 반복했던 것이다.

전쟁과 기아, 사양신 등 여러 가지 문제가 터져 나오며 먹거리를 구하기 힘들던 시기.

그 시기에 호백산이 주는 음식은 거절할 수 없는 것이었고 아이들은 호백산이 구해 준 음식으로 배불리 먹었다.

그것이 5년 가까이 반복되자 집의 주인인 여성도 조금씩 호백산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5년이 되던 해 음식을 두고 떠나려던 호백산의 앞에 그녀가 나타났다.

"또 음식만 두고 떠나는 거냐."

"날 그다지 달갑지 않게 여기는 듯싶었으니까."

"넌 사회생활이란 걸 전혀 해 본 적 없는 모양이구나. 5년 동안 이렇게 음식만 두고 떠나는 게 더 무섭다. 차라리 말을 걸어."

"미안하군. 그런 소리는 자주 들었다."

"...그냥 들어와. 아이들이 널 산타 취급하며 언젠가 잡겠다고 벼르고 있는 통에 이제 더 이상 숨기기도 어렵다."

산타란 말에 눈을 깜빡거린 호백산은 먼저 들어서는 그녀를 보곤 망설이다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어, 누구야?"

"엄마가 누구 데려오는 거 처음이야!"

"남편감이야?"

"너희들이 그렇게 말하던 산타다."

집 안 여기저기서 모여든 아이들이 조잘거리는 말에 그녀는 한숨을 쉬며 말해 주었다.

그러자 아이들의 눈이 반짝거렸고 곧 와와거리며 호백산의 주위에 몰려들었다.

"아저씨, 아저씨가 산타야?"

"아저씨 덕분에 매일 맛있는 게 나와. 엄마, 요리 못하는데도 맛있어!"

아이들은 5년 전에 보았을 때보다도 더 밝았다.

그런 아이들과 마주한 호백산은 처음에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다행이네."

그 날 호백산은 어머니를 잃은 이후 처음으로 웃음을 지었다.

비록 그것이 아주 미약한 웃음이라고 할지라도.

32화

자신과 같이 부모를 잃었다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의 밝은 모습이 어딘가 호백산을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그 날 아이들과 함께 밥을 먹고 그들을 재운 호백산은 집 마당 마루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런 그의 옆에 다가온 그녀는 방금 타온 찻잔을 내려주며 물었다.

"산타, 너 이름은."

"호백산."

"퍽퍽한 이름이네. 5년 동안이나 이런 짓을 해 온 이유는 뭐냐."

"모르겠어. 뭔가 해야만 될 것 같았어."

"과거에 대한 보상이냐."

그녀의 말에 호백산의 시선이 돌아갔다.

"네 얼굴을 보면 다 나와. 너 같은 부류가 가끔씩 있거든. 어린 애들한테 자신의 과거를 비춰 보고 감정 이입하는 덜떨어진 녀석들이."

덜떨어졌다라.

확실히 자신은 그럴지도 모른다.

"어때. 5년 동안 애들 배 따뜻하게 채워 주니 좀 만족했어?"

"그것도 모르겠어."

"그야 그렇겠지. 본질적인 건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

그리 말한 그녀는 한두 걸음 호백산에게서 물러서 달빛 아래에 섰다.

붉게 빛나는 머리카락은 달빛을 받아 아름다웠고, 그런 그녀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최근 몇 년간 인간들이 환상종을 사냥하기 시작했어."

"들었다."

"지금 우리 집에 있는 환상종 아이들은 전부 그런 인간의 손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야. 그렇다고 인간 아이들이라고 다르지는 않아. 사양신에 의해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대다수지."

그리 말한 그녀는 씁쓸히 웃었다.

"환상종이 세계에 분노해 사양신이 되고, 사양신은 인간에게 전염병을 퍼트려 마을을 멸망시키고, 더 이상 사양신이 생기지 않게 하고자 인간은 환상종을 사냥하기 시작하고, 부모를 잃은 환상종 아이들은 또다시 세계에 분노하지. 영원한 악순환이야."

"그 말은 인간이 환상종을 사냥하지 않았더라면 괜찮았을 거란 소리인가."

"아니, 그건 아니겠지. 우리는 일종의 장치다. 세계가 만들어 낸 장치. 인간은 너무 많고 그에 의해 굶주려 죽는 생명이 더욱 많아지고 있어. 그걸 본 신들이 인간의 수를 줄이기 위해 우리 환상종들에게 사양신이라는 저주를 내린 거다. 이 세계를 유지 시킬 장치로서."

달빛을 받은 그녀의 웃음은 너무도 슬퍼 보였다.

"그 저주가 있는 한 인간과 환상종은 끝없이 싸울 거다. 분명 그 끝은 없겠지. 어느 한쪽이 멸망하기 전까지."

"그걸 알면서 인간과 환상종을 동시에 키우고 있는 건가."

"그래, 세상은 늘 현재만으로 돌아가지는 않으니까. 미래에는 좀 더 다른 그러한 미래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은 뛰어나. 머리가 좋지. 언젠가 우리가 더 이상 사양신이 되지 않을 무언가를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 그때가 온다면 인간과 환상종은 함께 살아갈지도 모를 일 아니냐."

꿈 같은 일.

하지만 수명의 끝이 없다고 여겨지는 환상종에게 그건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

정말로 언젠가는 그러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이름은."

호백산이 물음을 던지자 그녀는 자조하듯 웃고는 그를 돌아보았다.

"화초선, 잘 기억해 둬라."

이것이 호백산과 화초선의 첫 인연이었다.

그러나 그 인연이 마지막이 될 거라곤 두 사람 다 생각하지 못했다.

호백산이 떠나고 얼마 후 다시금 음식을 들고 집을 찾아 왔을 때.

집은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호백산의 귀에 한 소식이 들려 왔다.

화초선이라는 환상종이 수만 마리의 환상종을 이끌고 인간의 나라들을 연이어 멸망시키고 있다는 소식이.

호백산은 달렸다.

화초선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뛰고 또 뛰었다.

그날 밤 달빛 아래에서 미소 짓던 그녀가, 언젠가 꿈같은 미래를 말하던 그녀가 어째서 이런 짓을 벌이느냐고 외치며 달렸다.

몇 날 며칠을 화초선의 뒤를 쫓아 달리고 달린 끝에 그는 겨우 그녀의 앞에 당도했다.

붉은색의 거대한 매가 되어 하늘을 날고 있는 그녀는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음에도 화초선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게 인간 나라를 통째로 불살라 버린 그녀의 앞에 호백산이 섰다.

"화초선!"

호백산이 그녀의 이름을 부른 순간 매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의 눈동자는 분노로 물들어 있었고 그 맹렬히 타오르는 분노에 호백산은 오싹함을 느꼈다.

그녀는 지금껏 만났던 어떠한 생물보다도 강했다.

인간과 환상종 더 나아가 사양신을 통틀어서, 거기에 자신이 마주했던 모든 걸을 포함 시켜도 그녀는 강했다.

그리고 자신보다도.

그러나 누가 보아도 세계 그 자체를 증오하듯 분노한 그녀였지만 그녀는 사양신이 되지 않고 여전히 환상종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뜻으로 세계를 멸망시키고 있다는 듯이.

「...호백산」

호백산을 알아본 그녀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온 순간 호백산이 외쳤다.

"어떻게 된 거냐! 무슨 일이야! 네가 왜 이런 짓을 하는 거냐!"

그의 외침에 화초선은 침묵했다.

「인간, 인간은 믿을 존재가 아니었다. 이 세계에서 인간은 모조리 죽여야만 해.」

그리 말한 화초선이 한 줌의 불길이 되어 사라졌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호백산은 그녀가 진심임을 눈치챘다.

그녀는 정말로 인간을 이 세계에서 지워 버릴 속셈이었다.

"백산!"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호백산에게 익숙한 인물인 강민혁이 있었다.

그는 호백산의 등장에 놀라 있었다.

오래도록 사양신의 소식만 전해 받던 그가 자신보다 먼저 여기에 와있었기 때문이었다.

본래 두 집단으로 나누어진 환상잡이였지만 환상종이 완전히 인간과 대립하기로 한 이상 사양신만을 잡고 있을 수는 없었던 그는 환상잡이들을 이끌고 여기로 온 것이었다.

결국 강민혁 편 환상잡이들도 인간을 사냥하는 환상종들과 맞붙기 시작한 것이었다.

"무사했구나! 다행이다."

"...민혁 형님."

하늘을 올려다보며 강민혁의 이름을 부른 호백산은 그를 돌아보았다.

"화초선은 제가 막겠습니다."

"뭐? 아니, 너 혼자서 화초선을 막는 건 불가능해. 화초선은 지금껏 나타난 사양신들보다도 훨씬 강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화초선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습니다. 그녀는 제가 막아야 합니다."

호백산의 진심을 본 강민혁은 침묵했다.

그러나 한눈에 보아도 호백산이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중 어느 누구보다도 그가 강함을.

그렇기에 그의 말대로 화초선을 막을 수 있는 자는 그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알고 강민혁은 입술을 깨물었다.

평생을 혼자 살아온 그에게 또 무거운 짐을 지게 해야 한다니.

"...그렇담 도우마. 예전 네가 홀로 설 때와는 상황이 달라. 화초선을 막지 못하면 인간은 끝이다. 최선을 다해 도울 테니 화초선을 막아다오."

"감사합니다."

강민혁에게 대답한 호백산은 또다시 화초선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화초선이 나타날 때마다 호백산 또한 같이 나타났다.

강민혁의 전폭적인 지지 하에 그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정보를 듣고 그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또 너냐. 호백산!」

「날 막지 마라! 막지 말아라!」

「인간은 모조리 사라져야만 해! 모조리 다!」

"화초선."

"멈춰라. 화초선."

"화초선, 이번에는 널 막겠다."

호백산은 번번이 화초선에게 당했다.

그녀에게 상처를 입혔지만 자기는 죽을 위기에 당하고.

나라를 지켜 냈지만 자신은 죽을 위기에 당하고.

사람을 구해 냈지만 자신은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백산은 일어섰다.

화초선을 막고자.

그녀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조금이라도 더 막아 내고자.

언젠가 그녀가 자신의 한 행동에 후회하기 시작할 때 그 회한을 조금이라도 덜고자.

더 나은 미래를 바라는 그녀의 진심을 알고 있기에 그것을 언젠가 다시 깨우쳐 줄 것을 알고 있기에 호백산은 그녀를 막았다.

이기지 못한다.

그건 진작 알고 있었다.

물론 호백산은 계속해서 강해졌다.

그러나 그 강함은 화초선에게 닿기에는 너무 멀었다.

그래도 그는 화초선이 나타나면 또다시 나타나 그녀를 막았다.

몸이 엉망진창이 되고, 오러가 부서지고, 부서진 오러 사이로 전염병마저 스며들었다.

그래도 그는 또 일어섰다.

「왜, 왜 너는.」

"...이번에는 막겠다."

상처투성이의 엉망이 된 채 화초선이 있는 곳에 또다시 나타난 호백산.

그가 나타나면 화초선은 언제나 인간을 죽이던 것을 멈추고 그와만 싸웠다.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가 쓰러지면 이내 그 자리를 떠났다.

한 해, 두 해, 세 해, 네 해.

호백산은 어느새 모든 인간의 희망이 되어 있었다.

인류 중 어느 누구도 막지 못한 화초선을 물러가게 만들어 주는 인류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한때 두 집단으로 갈라졌던 환상잡이들도 다시 뭉쳤다.

아니, 인류가 호백산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화초선을 막는 호백산을 위해 모든 걸 다 쏟아부었고 호백산은 그들의 도움으로 다시금 일어나 그녀를 막아 내었다.

그리고 호백산이 마흔아홉이 되던 해.

그가 처음으로 더 이상 일어설 수 없게 되었다.

한쪽 다리는 이미 움직이지 않았고 양팔 중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건 왼쪽 새끼손가락 하나였다.

호백산은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몸이 도와주지 않았다.

화초선에게 갈 수 없다고 몸이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호백산이 나타나지 않자 그 해부터 화초선이 종적을 감추었다.

그렇게 그녀가 어딘가로 사라지자 몸이 완전히 망가져 버린 호백산의 소식에 절망하던 세계가 차츰차츰 평화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백산아, 화초선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은 지 벌써 3년이나 됐어."

"알고 있어. 민혁 형님, 그렇지만 화초선과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다시 일어나야 해. 그녀와는 확실히 매듭지어야만 해."

"호백산!"

목발을 짚고 침대에서 다시 일어나 수련하려는 호백산의 모습에 강민혁이 호통쳤다.

강민혁은 입술을 깨문 채 호백산의 어깨를 감쌌고 곧 천천히 그를 다시 앉혔다.

"쉬어. 우리 모두 그동안 너무 너에게 의지했잖아. 제발 이제는 좀 쉬어. 넌 더 이상 움직일 수 있는 몸이 아니야. 네 딸을 봐. 태어나고 나서 네가 화초선을 뒤쫓는 모습만 보다가 그 뒤론 전부 병상에 누워 있는 모습만 봐 왔어. 이젠 너희 가족도 생각하라고."

"...가족."

잠시 잊고 있었지만, 확실히 호백산은 가족을 만들었다.

강민혁이 소개해 준 여자는 호백산을 무척이나 좋아했고 그가 하는 모든 일을 성심성의껏 지지 해주었다.

그런 그녀에게 별다른 마음을 품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 여자라면 가족이 되어도 괜찮겠다며 호백산은 생각했고 둘은 얼마 지나지 않아 딸을 낳았다.

그러나 호백산은 화초선을 막고자 나서야 했고 딸은 그녀의 엄마가 홀로 키워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던 그녀는 작년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혼자 남은 여섯 살짜리 그의 딸은 여전히 호백산을 어려워하고 있었고, 또래 친구도 이한이라는 남자아이 한 명밖에 없을 정도로 외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네가 잃었던 부모를, 그 슬픔을 네 딸에게도 겪게 할 셈이냐."

그리고 그 말을 듣고 호백산은 천천히 고개를 떨어트렸다.

"...형님, 화초선과의 일은 끝나지 않았어."

"알아."

"그런데, 그런데 내가 화초선을 두고 나를 위해도 괜찮은 걸까."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네 딸을 위해서라고 생각해. 화초선은 그만 잊어. 우리가 너에게 너무 큰 부담을 줬다. 그동안 미안했다. 백산아."

그리 말한 강민혁은 호백산을 감싸 안아 주었다.

"그만 쉬자. 백산아. 이제 그만. 그만 쉬자꾸나."

"...응."

그 날 호백산은 환상잡이를 그만두었다.

33화

"여기까지일세. 화초선과 내 이야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이거냐."

"모르겠군. 이제는. 그 후로 딸아이를 키우는 데 집중했으니. 그 아이는 나만큼이나 재능 있어. 문제는 내가 평생을 환상잡이로 살아온 덕택에, 성아는 환상잡이에 질려 있는 모양이지만 말이야."

그걸 눈치챈 호백산이 일부러 딸의 행복을 위해 이러한 제안을 했던 거겠지.

딸이 인류의 수호자가 되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론 자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았으면 하고 그는 내심 바라는 듯싶었으니까.

"자, 그럼 자네는 나에게 어떤 결말을 보여줄 건가? 내가 그 끝을 볼 때까지 살아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몰라."

"가벼운 대답이군."

그는 옅은 미소를 흘렸다.

"본론일세. 하천성, 우리 백호 가문에 들어와 주겠나. 화초선은 4대 가문 모두의 동의가 있을 때 장소를 공유 기로 해서 말일세."

"알았어. 화초선이 어디 있는 줄만 가르쳐 준다면 그래도 되겠지."

[축하합니다. 12번째로 26층을 클리어하셨습니다.]

['25층의 주인' '잔혹함에 물든 인사'가 적당히 당신에게 보상을 지급합니다.]

그 순간 성좌의 메시지가 울렸다.

이번 층의 클리어 열쇠는 화초선을 찾아가기 전에 4가문에 속하는 거였나.

['25층의 주인' '잔혹함에 물든 인사'가 설명을 시작합니다. ]

[27층 시나리오 퀘스트, 훌륭하게 4대 가문에 속하게 된 당신. 축하합니다! 이제 4대 가문의 일원으로서 최고의 환상잡이를 목표로 달려 봅시다. 타도! 화초선!]

앞선 사실을 전부 들은 나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화초선을 잡는 걸로 과연 이 층이 공략될까라는 의문이 살며시 들었다.

'성좌는 언제나 여러 갈림길을 만든다.'

층을 공략할 수 있는 열쇠는 언제나 하나가 아니다.

성좌의 세례를 받는 일도 성좌가 만들어 낸 길 중 여태껏 가지 않았던 새로운 길을 개척했을 때 부여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성좌는 꼭 다른 길을 만들어 둔다.

'하일성은 강해. 성좌의 세례 중에 쓸모없는 것이 다수 있긴 하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도움 될 거야.'

하일성에게 밀려 후발 주자가 된 이상 나는 챙겨 갈 수 있는 것은 모조리 챙겨 가야만 했다.

"다른 가주들이 자네를 한 번 만나 보고 싶다더군. 나는 일단 보고 나서 동의를 해 주겠다고 한다만."

귀찮게 하는구만.

하긴, 자기들 입장에서도 화초선이라는 세계의 문제가 걸려 있는데 허투루 넘어가 주지는 않겠지.

그가 사도였기에 호백산과의 일이 잘 풀렸던 것뿐이지 다른 녀석들 입장에선 이곳이 현실이다.

"안내는 바깥에 대기 시킨 안내원이 해 줄걸세. 미처 말하지 못했지만 주연화를 주의하게나. 그 여자는 치졸한 면이 있으니까."

그리 말한 호백산은 지친 몸을 이끌고 침대의 털썩 앉았다.

마치 죽음만을 기다리는 듯한 표정으로.

그런 그를 잠시 보던 나는 왔던 길을 되돌아 나왔고 바깥에서 한 남성과 마주했다.

그는 나에게 가볍게 인사를 보였고 이후 준비한 검은색 밴에 올라타 회의장으로 안내를 받았다.

이후, 1시간가량을 달린 결과 회의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검은색 톤의 벽으로 이루어진 30층 건물 앞에 주차된 밴에서 내리자 나는 미리 준비된 양복을 입었다.

눈에 보이는 건 중요 하다.

저들이 호백산과 같이 날 인정 해 주지 않는다면 화초선의 위치를 알 수 없다.

자리에는 격식이 필요한 법.

재벌집 막내아들로 살아온 덕택에 격식 갖추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를 따라 정장을 입은 성아와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안내를 맡으러 나온 경호원이 인사와 함께 우리를 안으로 인도했다.

VIP 전용이라 적힌 엘리베이터의 오른 뒤, 나는 창가에 비치는 바깥 네온사인을 바라보며 오랜만에 이런 기분을 느낀다고 생각했다.

'이런 게 오랜만이라니. 나도 참 험난하게 살았네.'

헛웃음을 흘리고 있으려니 30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우리는 안내역을 따라 내린 후 복도를 잠깐 걸었고 곧 회의장 문 앞에 도착했다.

직원으로 보이는 두 여성이 우리에게 인사를 하며 문을 열자 안에는 기다란 책상 하나와 전형적인 회의실 분위기의 방이 있었다.

각 책상에는 환상잡이로 보이는 사람들이 격식을 갖춘 복장을 한 채 앉아 있었다.

나는 안으로 들어섰다.

모인 사람들 중에는 이한이 있었고 그 옆에 성아가 붙어 앉았다.

벌써 사실을 알린 듯 이한은 조잘거리는 성아의 말에 애써 웃음 짓고 있었고, 그런 두 사람을 보던 나는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환상잡이의 주요 인물들은 다 모인 모양이다.

그 순간 내 시선이 한곳에서 멈췄다.

그곳에는 내가 아는 인물이 있었고 내 눈살이 살짝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마술사?"

"호핫,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하천성 씨!"

내가 마술사가 여기 있다는 것에 의문을 표하자 그는 해맑게 미소를 그렸다.

"네가 어떻게 여기 있지?"

"하천성 씨랑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8대 명문가 기린의 후계자 인지라!"

기린의 후계자.

분명 이주희도 기린 가문 사람이라고 했는데.

이 녀석도 나랑 같은 루트를 타고 있었나.

"구천옥녀는 알고 있나."

"그것도 하천성 씨가 백호 가문 후계자가 된 뒤에지만요."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마술사의 말에 나는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마술사도 베테랑 회귀자, 본인만의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을 테니 여기까지 온 게 이상하지는 않다.

"하핫, 웃기는구만. 최근에 막 갑자기 후계자 자리를 메운 녀석들이 아는 사이라. 이거 좀 이상하지 않나?"

그 순간 우리의 대화에 누군가 딴지를 걸었다.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푸른빛 머리카락을 가진 중년 남성이 앉아 있었고 그는 못마땅한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청룡 가주입니다."

마술사가 속삭이듯 가르쳐 주자 나는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가 속한 백호 가문과 같은 4대 가문이었다.

그리고 내가 화초선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과도 같은 사람이다.

"세대교체가 일어나는 시기라 생각하면 되지 않나?"

"호백산이 인정했다고 기고만장한 것 같은데."

말을 끊은 청룡 가주에게서 오러가 흘러나왔다.

푸른 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하는 오러 속에서 청룡 가주의 눈이 번뜩였다.

"고작 후계자 자리 하나 꿰찼다고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마라."

적대심이 하늘을 찌르는군.

이런 놈들한테는 말 같은 건 통하지 않는다.

"왜, 그럼 한 판 붙을까. 나한테 지면 화초선 위치를 알려 주는데 동의하는 거야."

통하는 건 무력이다.

선빵 필승,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는 걸 보니 금방이라도 들이받을 것 같은 청룡 가주의 모습에 나는 오러를 끌어 올리려 했다.

"둘 다 그쯤 하려무나."

그 순간 맥을 끊는 목소리가 울렸다.

가장 중심에 자리에 앉아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붉은색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중년 여성의 말이었다.

붉은 머리, 붉은색의 기다란 동양풍 옷에 그려진 주작의 모습.

이 여자가 주작 가주겠지.

호백산이 주의하라고 했던 여자다.

"이름은?"

"하천성이다."

"반갑다. 내 이름은 주연화, 주작 가문의 가주란다."

할머니가 어린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듯 말한 그녀는 가벼운 웃음을 흘리곤 탁자를 가리켰다.

"일단 이야기를 하고 싶으니 앉아 주겠니."

이쪽은 그래도 말이 통하는 편인가.

주작 가주의 말에 이미 앉아 있던 성아 옆에 자리하자 주연화가 입을 열었다.

"자, 다들 흥분된 기색은 지우고 우선 가볍게 하천성에게 화초선의 위치에 대한 걸 알리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

몇몇이 손을 들었다.

그들의 눈빛은 나를 못 믿는 눈치였다.

화초선은 이 세계의 가장 큰 위험, 섣불리 화초선의 위치를 알릴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차례대로 반대 측 이야기부터 들어 볼까."

그리 말한 순간 제일 먼저 청룡이 입을 열었다.

"네놈의 반이 환상종이 된 건 이주희에게 들었다. 물론 사양신이 될 가능성이 없다는 것도 전해 들었고. 그렇지만 그걸로 네놈이 환상종 편이 아니라는 증거가 있나?"

이 팔이 문제인가.

주연화가 내게 대답할 수 있느냐고 시선을 옮기자 나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대답했다.

"내가 환상종 편이면 이렇게 물어보면서 화초선에게 갈 리가 없잖냐."

내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그리고 내가 환상종 편이었으면 이 자리에 있는 모두 다 죽었어."

오히려 도발해 보았다.

내가 강하게 나왔기 때문일까, 몇몇은 표정을 구겼지만 일부는 이런 내 패기에 오히려 마음에 든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호백산의 뒤를 이으려면 그 정도 패기는 있어야 한다는 양. 그러자 청룡 가주가 딴지를 걸었다.

"무엇보다 이주희는 기린 가문 소속이다. 널 알아보는 저놈과 같은 소속이라고. 사양신이 안된다는 것부터가 이미 거짓말로 위장된 걸 수도 있다."

"이주희는 내가 잘 알아. 그건 걱정 마라."

주연화가 기린 가문의 사람들 대신 이주희를 감쌌다.

마술사에게 시선을 돌리자 녀석은 해맑게 웃을 뿐이었다.

"실적도 없는 자를 믿을 만큼 저희에게 인재가 없다 생각하는 겁니까."

새로운 놈이 토를 달았다.

"실적 따지는 놈들의 단점이 뭔지 알아? 새로운 건 죽어도 인정 못해. 왜냐하면 자기 실적이 새로운 것으로 뒤집어지는 걸 두려워하거든."

한 명이 딴지를 건 순간 나는 곧바로 받아쳤다.

내 말을 듣고 그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고 나는 기세를 몰아 모두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 불만이 있는 녀석은 덤벼. 원하는 만큼 싸워 줄 테니까. 대신 나한테 지면 수긍해. 새로운 별이 나타난걸. 너희가 호백산에게만 의지했던 화초선을 내가 없애 주마."

"개자식이!"

마지막 선언을 고한 순간 청룡이 들고 일어났다.

이도류를 빼 든 청룡이 덤빈 순간 나는 녀석의 머리를 붙잡았고 그와 동시에 바닥에 내리꽂았다.

"크악?!"

그래도 꼴에 실력은 있는지 기절하지는 않은 모양이지만 청룡은 옴짝달싹 못 한 채 내 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걸 본 회의실 내의 사람들은 얼굴이 굳은 채 눈동자만 크게 뜰 뿐이었다.

청룡이 이렇게 막말을 내뱉기는 하지만 전투에 관해서는 꽤 일가견 있었겠지.

그러나 그런 청룡을 내가 일격에 제압해 버렸으니 당황한 것이다.

"너희들한테도 화초선은 처치 곤란한 존재잖아? 지금껏 잡지 못했던 이유도 그런 이유고. 그만 인정하고 나한테 화초선에 대한 정보를 넘겨."

그 순간 내 오러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퍼진 오러는 주변을 장악했고 몇몇은 숨을 쉬기 힘든 듯 어깨만을 흠칫거렸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압도다.

상대를 짓누를 수 있고, 내가 어느 정도 강자인지 보여 줘야 한다.

그리고 내가 오러를 거두어들였을 때.

쿠당탕.

의자에서 몇 명이 넘어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거칠게 숨을 쉬며 새하얗게 질린 그들은 내 얼굴을 보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이 회의장의 주축인 주연화를 직시했다.

"안내해라."

한마디를 내뱉은 순간 주연화는 태평하게 웃었다.

"화초선은 지금 활동을 안 하고 있어. 지금 상태면 앞으로도 안 할 수도 있지. 그걸 감안하면 굳이 널 보낼 이유가 있을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가만두고 보겠다는 거냐."

"터지지 않을 폭탄은 오히려 가만두는 게 나을 때도 있는 거지. 지금의 우리가 그 증거잖아?"

주연화가 눈을 빛냈다.

자기 말에 반박할 수 있겠냐는 뜻을 담아서.

그리고 그 말에서 눈치챘다.

사도이기에 모든 걸 아는 호백산과 달리 그들에게는 이 불안전한 평화가 더 중요했다.

34화

"네 말대로 화초선이 나타날 때마다 나라 하나가 사라졌어. 거기서 죽은 사람들은 돌아 오지 않아. 하지만 지난 몇십 년간 화초선은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어. 마치 활동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은 양. 그런 상황에 너를 화초선에게 보내는 게 우리에게 옳을까? 네가 설령 화초선을 이길 수 있다고 한들 그 싸움 후의 피해 여파는? 그건 누가 책임질 거지?"

이들은 설령 내가 화초선을 쓰러트릴 수 있더라도 보내지 않을 속셈이다.

주연화는 불안전한 평화를 우선시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이 평화는 절대로 깨져서는 안 될 것이었고 그걸 깨려는 자가 있으면 무조건 막을 속셈이었다.

그것이 그녀가 이 세계를 지켜나가는 법이었다.

'협박... 아니, 통할 리가.'

자기 목숨을 잃더라도 주연화는 절대로 화초선의 대해 밝히지 않을 것이다.

그 확고한 진심이 그녀에게서 엿보였다.

시선을 뒤로 돌리자 나머지 녀석들도 주연화와 같은 눈빛을 취한 자들이 있었다.

'겁쟁이 녀석들.'

이라고 하기에는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를 지키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이었다.

호백산이 평생을 다해 막고, 그가 힘을 다하자 겨우 움직이지 않기 시작한 화초선을 그들은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래서는 말이 안 통해.'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들은 내가 화초선에게 닿는 걸 필사적으로 막을 것이 분명했다.

결국 그 회의에서 나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밖으로 걸어 나와야만 했다.

* * *

건물 밖으로 걸어 나온 나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넌 또 왜 쫓아와."

고개를 뒤로 돌리자 거기에는 마술사가 서 있었다.

"그야 같은 정보를 얻은 사이지 않습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힘을 합쳐서 같이 클리어하죠!"

"난 혼자서도 클리어할 수 있어."

"호핫, 정말이십니까?"

이 녀석 벨까.

옆에서 상황을 본 마술사의 도발에 내 인상이 팍 찡그려졌다.

"너도 나랑 똑같이 화초선을 만날 방법은 없을 텐데?"

"그렇죠. 전 무리입니다. 오늘 일로 주작 가주에게도 단단히 찍혔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건 하천성 씨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해맑은 미소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찌푸린 인상으로 마술사를 보고 있자 그는 웃는 얼굴에는 침 못 뱉는다는 듯 히죽 웃었다.

"저에겐 다른 동료들이 있으니까요."

"동료?"

"예, 차근히 실적을 쌓고 있을 동료들 말입니다! 그들이라면 분명 조만간 화초선에게까지 도달할 실적을 얻겠죠!"

그 녀석들을 믿고 있다. 이 소리인가.

검왕, 대협, 구천옥녀를.

하긴, 구천옥녀는 벌써 환상잡이 A랭크에 도달했을 정도다.

"어떻습니까? 하천성 씨도 저희와 함께해 보지 않겠습니까?"

그는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냈다.

그 순간 나는 마술사가 왜 기린 자리까지 올라와 나에게 아는 척했는지 이제야 눈치챘다.

"너, 이 자식."

녀석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같은 기린 가문인 이주희를 이용해 나에게 호백산이 후계자를 찾고 있다는 정보를 흘리고 여기까지 올라오게 한 뒤, 주작 가문의 주연화와 섣불리 만나게 해 그들에게 나에 대한 경계심을 심어 준 것이다.

주연화는 의심이 많은 자였다.

그녀는 분명 내가 실적을 채워 온다 한들 나에게 화초선의 위치를 가르쳐 주지 않으려 할 것이다.

내가 자신들에게 협조를 하는 편이 좋도록 유도하고자 마술사는 상황을 계획한 것이다.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의 웃는 얼굴 사이로 게슴츠레 띄워진 눈동자가 하이 랭커였던 이유를 표하고 있었다.

"...이 머저리가 왜 그딴 짓을 한 거냐. 내가 이 층을 공략하면 너희들도 저절로 층을 클리어하게 되어 있어. 지금껏 크라운 로드를 해 온 네놈이라면 충분히 알고 있을 텐데?"

"하천성 씨."

분노가 담긴 내 외침에 그는 웃던 얼굴을 거두어들였다.

"몇 달간 검왕은 당신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반드시 편으로 들여야 된다고. 어쩌면 황제보다도 당신이 더 강할지도 모른다면서 말이죠."

그리 말한 마술사는 내게 한 발자국 다가왔다.

"그래서였습니다. 당신은 저희를 믿지 않죠.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야신과 같은 자가 되지 않을 거란 보장이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이전 회차 때와 똑같은 짓을 반복하자는 거냐! 이전 회차 때 야신이 배신하고 회귀자들 사이에서 분란이 생긴 뒤 통째로 회차를 날려 버렸던 짓을 지금 네가 벌이려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겠냐!"

"그 이전 회차 때문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없게 되는 회차를 겪었기에 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전 사실 이번 회차 클리어는 힘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성좌 변동으로 바뀌어 버린 층, 이전보다도 훨씬 느린 공략 속도. 100층에 도달하는 건 턱없이 힘들겠죠."

마술사는 내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

"그렇다면 다음 회차를 위해서라도 야신의 사례를 방지해야 합니다. 강한 힘을 가졌고 그걸 멋대로 휘두르고 있는 위험 인자들을 미리 걸러 두어야만 합니다. 곁에 둘 수 없다면 언젠가 또 다른 칼날로 당신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누가 압니까? 저는 더 이상 야신과 같은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합니다."

"...너희 무리 전부 같은 생각이냐."

"아니죠. 저만의 독단적인 판단입니다. 전 저희 동료들이라면 언젠가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하리라 믿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당신 같은 사람을 그냥 둘 수는 없죠. 동료들에게 언젠가 해가 될지도 모를 당신을 말입니다."

"난 야신 따위 되지 않아."

"그걸 증명하고자 하면 저희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당신이 저희 동료가 된다면 제가 방해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마술사가 다시 옅은 미소를 띄웠다.

신뢰를 얻고 싶다면 자신들과 함께하자고 마술사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내 손이 별천도로 향했다.

이 녀석 살려 두면 앞으로 날 계속 방해할 듯싶었다.

괜한 싹을 남겨 둘 이유는 없다.

하지만 문제는.

이 녀석을 여기서 죽이는 순간 야신뿐만 아니라 다른 회귀자들도 모조리 적으로 돌리게 된다.

마술사는 회귀자들에게 그동안 수많은 신뢰를 쌓아 온 녀석이니까.

사방팔방이 적.

이제는 어느 누구도 믿지 않는 나지만.

나는 별천도의 손잡이를 눌렀다.

「하천성!」

「당신, 정말로.」

「힌트를 준 걸 당당히 보답이라니. 당신도 참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이네.」

「하천성, 여기에 머문 이유가 있지? 그렇다면 우리랑 함께 가지 않을래?」

「왜 그렇게 일부러 내치는 듯 말하는 거야.」

나에게 친숙하게 달라붙던 검왕이 떠올랐다.

그동안 3회차나 크라운 로드를 겪었음에도 아직도 순진무구한 그 여자가 동료의 죽음에 분노하며 내게 검을 겨눌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 와서 검왕과 합류하여 층을 클리어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검왕 녀석과 맞붙게 되는 상황을 또한 그다지 원하지 않았다.

야신이나 하일성 하나만으로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은데 다른 참가자에게까지 발목 잡히고 싶지는 않았다.

「넌 그런 무른 성격이 문제인 거다.」

비웃는 듯한 하일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어쨌다는 거냐.

내 이런 무른 성격이 어쨌다는 거냐.

이게 나라는 녀석인데 이것을 버리면서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하는 게 의미가 있을 듯싶으냐.

그리 생각한 나는 그를 벨 것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기분은 나빠졌기에 녀석의 복부를 한 대 걷어찼다.

순식간에 튕겨져 날아간 마술사는 바닥을 나뒹굴었고 곧 콜록콜록하며 기침 소리를 내뱉었다.

"마술사, 건방진 소리를 눈감아 주는 것도 이번뿐이다."

"호핫, 확실히 야신 같은 사람은 못 되실 모양입니다."

나에게 걷어차진 주제에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 마술사를 보고 나는 혀를 찼다.

방금 것도 일종의 시험이었나.

내가 자신을 벤다면 확실한 위험 인자고, 베지 않는다면 적어도 야신 같은 인간은 되지 못할 사람으로 판단하는.

꼴에 짜증 나는 짓거리를 해 준다며 한 대 더 패 주려다가 괜히 내 주먹이 아까워서 그만뒀다.

"그러고 보니 하천성 씨는 몇 층이십니까?"

"안 알려줘."

"분명 27층이시겠죠.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화초선은 분명 보스 몬스터, 쓰러트리면 시나리오가 완료돼야 할 텐데 층이 너무 이르다고 생각 들지 않습니까? 화초선을 잡아 27층을 클리어해도, 28층은 어떻게 클리어해야 할까요."

그건 나도 한 생각이다.

화초선을 쓰러트리는 것이 이 층의 본 목적은 아닐 거라고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히죽 웃는 마술사를 보며 눈살을 찌푸린 나는 몸을 휙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내 뒷모습을 보며 마술사는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언제든지 오십쇼! 저희는 넓은 마음으로 하천성 씨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무시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호백산에게 가서 규율을 어기고 화초선의 위치를 알려 달라고 하는 수밖에.

그 순간 누군가 내 옷깃을 누군가 잡았다.

마술사인가 하고 홱 하니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성아가 있었고 그녀의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혀 있었다.

"아빠가 위독해지셨어."

최악은 최악을 낳는 모양이다.

* * *

성아와 함께 급히 백호 가문의 집으로 돌아온 순간 백호 가신 중 한 명이 빠르게 안내를 시작했다.

호백산을 만났던 지하로 성아와 함께 내려간 순간 나는 진득하게 흘러나오는 죽음의 냄새를 느꼈다.

호백산이 죽어 가고 있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이 정도로 급격하게 나빠질 줄은 나도 성아도 몰랐다.

"아빠!"

성아가 울음을 터트리듯 외치자 투명한 벽 너머에서 호백산이 희미하게 눈을 떴다.

전염병 탓에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는 공간에서 호백산은 홀로 죽어 가고 있었다.

"너, 무리하고 있었군."

내 말에 호백산은 웃음조차 짓지 못했다.

허락은 받았냐는 그의 눈빛에 나는 고개를 저었고 호백산은 기다란 탄식을 내뱉었다.

그는 지금까지 오러를 이용해 전염병이 몸 깊숙이 들어 오는 것을 방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의 오러가 전염병을 견디지 못할 만큼 쇠약해진 것이다.

나는 투명 벽에 바짝 붙었다.

"호백산, 본부에서는 내가 화초선에게 가는 걸 반대 했어. 넌 알고 있지? 화초선이 어디 있는지. 가르쳐 줘."

그는 곧 죽는다.

실시간으로 그의 오러가 죽어 가고 있는 게 보였다.

내 다급한 말을 듣고 호백산은 부들거리며 손을 들어 올리려 했으나 곧 그 손이 다시 떨어져 내렸다.

"호백산! 정신 차려! 호백산!"

쿠웅, 투명 벽을 한 대 친 나는 입술을 까득 깨물었다.

회의에 장인 주연화가 가르쳐 주지 않기로 마음먹은 이상 다른 이들도 그 뜻을 같이할 거다.

그렇다면 유일하게 화초선의 위치를 내게 알려 줄 수 있는 호백산 뿐이었다.

"아빠!"

성아의 목소리가 커다랗게 울리고 호백산의 숨소리가 작아졌다.

호백산이 죽었다.

화초선을 상대로 평생을 바쳐 왔던 그는 자기 딸의 손조차 잡아 보지 못하고 몸속에 쌓인 전염병에 의해 눈을 감았다.

유리 벽 속에서 그는 생명을 마감한 것이다.

고작해야 여기서 죽을 운명이었던 거냐.

성좌가 짜둔 스토리는 매번 왜 이런 식인 거냐.

입가에 쓰디쓴 물이 올라오자 나는 울고 있는 성아를 두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청아하게 떠오른 달이 별들과 함께 빛나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는 짜증스레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호백산이 죽고 주연화가 나를 경계 대상으로 삼은 지금 내가 화초선의 위치를 알아낼 길이 모조리 사라졌다.

남은 건 주연화나 다른 자들이 경계심을 풀 때까지 그에 걸맞은 환상잡이로서 살아가는 것뿐인데 그 길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몰랐다.

마술사가 해 놓은 짓거리가 교묘하게 겹쳐서 괜히 상황이 더 힘들어졌다.

'그 자식 더 패 놓을 걸 그랬나.'

이것까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그때 주먹을 아끼지 말 걸 그랬다.

"냐앙."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고양이 소리가 울려 퍼졌다.

35화

내가 시선을 돌리자 거기에는 가면 같은 걸 쓴 흰색 고양이가 나를 보며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그러곤 담 위로 번쩍 올라가더니 마치 따라오라는 양 돌아보았다.

'새로운 찬스냐.'

성좌가 의도한 게 뻔했지만 화초선에게 닿기 위해 나는 녀석의 뒤를 쫓아갔다.

그렇게 으슥한 골목길에 도착하자 고양이가 발걸음을 멈추더니 한차례 위로 뛰어올라 공중제비를 한 후 사람으로 변했다.

정확히는 몸만 여자 사람 형태가 된 고양이가 가면을 쓰고 서 있었다.

"냐앙, 반인 화초선 님이 어디 계신지 알고 싶은 게지."

그 순간 뜻밖의 말이 돌아왔다.

'화초선을 따르는 환상종이로군.'

녀석의 정체를 짐작하며 바라보자 그녀가 앞발로 가면을 매만진 채 말했다.

"마침 화초선 님께서 직접 찾고 계신다냥. 날 따라오면 안내해 주겠다."

오호라, 이것 봐라.

이쪽에서 찾아내려 했더니 이번에는 저쪽에서 직접 찾아와 주셨다.

"대신 조건이 있다냥."

조건, 녀석의 말에 내 시선이 향했다.

"조건?"

"간단한 거다. 백호 가문의 딸 호성아의 목을 따 와라. 그럼 친히 안내해 주겠다."

['25층의 주인' '잔혹함에 물든 인사'가 살며시 미소 짓습니다.]

성좌의 알림을 보고 나는 눈가를 잠깐 매만졌다.

"왜 그러냥? 화초선 님에게 데려가려면 이 정도는 증명해야지."

"개나 소나 실적에, 증명에...."

까득, 내 몸에서 오러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내 힘에 고양이 환상종의 털이 바짝 섰고 내게서 한두 걸음 물러섰다.

"화초선이 시켰냐."

"그, 그래!"

딱 보아도 거짓말인 것이 티가 났다.

분명 화초선에게 들은 말은 그냥 나를 데려오라는 소리였겠지.

"슬슬 너희들 입맛대로 따라 주는 것도 지치기 시작했다."

콰직, 주변 땅이 갈라지기 시작한다.

피어오른 오러가 공기를 잠식하고 스파크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나는 목에 매었던 넥타이를 풀어 헤치며 눈을 부라렸다.

"내 식대로 간다."

"냐앙?!"

내가 뛰어오르자 고양이 환상종이 급히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내 민첩을 이길 수는 없었고 나는 녀석의 꼬리를 잡고 바닥에 꽂았다.

그러곤 두려움에 떨고 있는 고양이 환상종에게 말했다.

"고양이는 목숨이 9개가 있다지? 어디 시험해 볼까."

"...냐아앙."

서슬 퍼런 내 미소에 구슬픈 고양이 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 * *

이후 내가 공포로 완전히 억눌렀기 때문일까, 순순히 안내를 시작한 고양이 환상종을 보고 나는 읊조렸다.

"함정 칠 생각하지 마라. 아무리 그래봤자 빠져나간다."

"...알겠다냥."

등 뒤에서 계속 오러를 피어 올렸기 때문인지 어깨를 움츠러트리며 고양이 환상종은 안내를 계속했다.

"여기서부터는 성역이다. 다른 환상종들도 대부분 여기서 지내고 있다냥."

비슷한 골목길을 몇 번 지나치자 갑자기 나타난 산의 풍경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공간 마법에 결계까지 걸려 있군.'

정석 루트대로 밟지 않으면 절대로 도달하지 못하는 길인 셈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 넓은 층을 뒤져서 찾을 속셈은 없었지만 이 정도로 복잡하게 만들어 놨나. 혼자서는 죽어도 못 찾았겠군.'

주연화는 이 길을 알고 있는 걸까.

어쩌면 4대 가문조차도 화초선의 위치를 대략적으로 짐작하고 있을 뿐 확정은 못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군.'

비이상적으로 커다란 나무들은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다.

족히 50m는 넘게 뻗친 차원이 다른 크기의 나무들을 바라보며 나는 고양이 환상종의 뒤를 따랐다.

"몽몽."

그 순간 목소리 하나가 울려 퍼졌다.

고양이 환상종 이름이 몽몽인 모양인 듯 그녀는 발걸음을 우뚝 멈춰 섰고 거대한 나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나무 사이로 거대한 가면을 쓴 인디언 추장 같은 환상종이 나타나 내게 창을 겨누며 물었다.

"저 녀석이냐."

"그래."

"무사히 잘 데려왔구만."

날 한 번 훑은 환상종은 땅을 뚫고 나온 나무뿌리를 휙휙 밟고 올라섰다.

"따라와. 이제 내가 안내할 테니."

안내자가 바뀐다는 말에 고양이 환상종 몽몽이 슬그머니 뒤로 발을 빼었다.

하나 그걸 놓칠 리 없는 나는 몽몽의 뒷목 가죽을 잡아 들었다.

"어딜 가려고. 넌 끝까지 따라가야지."

"냐앙, 차사 녀석이 안내한다고 하지 않느냥!"

"만약 거짓말이면 복수할 대상은 있어야 하잖아?"

화풀이로라도 데려가겠다는 말에 몽몽은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 마라. 그럴 생각이었으면 성역까지 데려오지도 않았다냥."

그건 그랬을 것 같다마는.

어쨌든 나는 몽몽을 데리고 차사라는 환상종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나무를 타는 차사의 뒤를 쫓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고 한참을 안으로 들어간 끝에 어느 외딴집 한 채에 도착했다.

한 번 불탄 적 있는 듯한 집을 본 나는 호백산이 해 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왔느냐."

안에서 어딘가 메마른 듯한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당 마루에는 붉은색 머리카락을 묶은 여성이 앉아 있었고 그녀는 한눈에 보아도 미인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그녀가 화초선임을 눈치챘다.

"화초선."

그녀의 이름을 부른 나는 그 앞으로 다가갔다.

이번 층에 오르고 그렇게나 찾아다녔던 그녀를 드디어 만난 것이다.

"내가 어지간히 유명인이긴 한 모양이군."

"이 세계에서 널 모를 사람은 없지."

"그렇겠지."

그리 말한 그녀는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를 부른 이유는 간단하다. 네가 죽인 사양신, 그 녀석에게서 권능을 이어받았지."

화초선의 말에 나는 그때 일을 떠올렸다.

[권능 '전염'을 이어받았습니다.]

분명 그런 말이 있기는 했었다.

그런 나를 보고 화초선이 계속해서 말했다.

"그 권능을 사용해 줘야겠다."

"사용하라고? 어디에다가."

"인간들한테."

그녀의 말에 내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러자 화초선은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네 권능 전염은 생물을 환상종화 시키는 특별한 힘이다. 그 힘이 있다면 인간들도 환상종으로 만들 수 있지."

"인간을 환상종으로 만들어서 얻을 건?"

"녀석들을 죽이는 것도 질렸다. 아무리 죽이고 죽여도 인간은 벌레처럼 계속 기어 나와."

증오의 휩싸인 화초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이를 빠득 갈며 눈을 부라렸다.

"그렇다면 문제인 인간을 모조리 바꾸면 된다."

인류를 환상종화 하여 멸종시키겠다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그녀가 내뱉었다.

그 정도로 화초선은 인간에게 깊은 증오를 품고 있는 듯싶었다.

"싫다면."

"명령이다."

그 순간 화초선의 기색이 바뀌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붉은색으로 물든 채 나를 직시했고, 나는 그런 그녀와 눈을 마주친 뒤 고개를 기울였다.

뭘 하느냐는 양.

내 반응을 보고 화초선도 날 따라 의아함을 느끼더니 곧 그녀는 눈살을 찌푸렸다.

"반인한테는 내 권능이 안 통하는 건가?"

뭔가 술수를 쓴 건가.

여전히 의문스레 자길 쳐다보는 나의 모습에 화초선은 이제는 지쳐 버린 듯한 눈을 하고 말했다.

"됐다. 싫다고 한들 네가 반항할 방법은 없다. 반항하면 네 목숨이 날아갈 테니까. 네가 제일 먼저 환상종화 시킬 녀석은 한 명이다. 호백산, 그놈을 환상종화 시켜라. 나에게는 환상종을 조종할 수 있는 권능이 있다. 이거라면 원수인 호백산을 영원히 내 종으로 바꿔 버릴 수 있지."

그리고 화초선이 그 말을 내뱉은 순간 나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화초선."

그녀의 이름 석 자를 부른 순간 화초선이 내게 의문을 보였다.

"호백산은 죽었다."

"뭐?"

이어서 내가 내뱉은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화초선의 눈에서 의문점이 띄워졌다.

그러곤 내가 이후 대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지쳐 버렸던 그녀의 눈이 서서히 커지더니 내게 한 발자국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다시, 다시 말해 봐라. 호백산이 뭐?"

"죽었다. 오늘 전염병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어."

"그럴 리가 있나. 그 녀석은 내가 아는 녀석 중 가장 강한 녀석이야. 전염병 따위로 죽을 리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말을 내뱉은 그녀는 무언가 목매인 듯 목소리를 내뱉었다.

"몽몽! 이 녀석은 네가 데리러 갔었지! 네가 보고 온 걸 말해라!"

화초선이 급히 몽몽에게 외치자 녀석은 꼬리를 만 채 조심스레 말했다.

"그, 제가 갔을 때 호백산이 죽기 직전이라며 인간들이 떠드는 소리가 있긴 했습니다만 정확한 건...."

"이 녀석이 날 마중하러 왔을 때가 내가 호백산의 마지막을 보고 나왔던 시각이다."

겁에 질려 어눌한 몽몽의 말을 내가 확실시해 주자 화초선이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한차례 비틀거렸다.

"정말, 정말로 그 녀석이 죽었다고?"

이전에 지쳐 보였던 표정이 사라지고 그녀의 얼굴은 서서히 엉망진창이 되어 갔다.

수만 가지 감정에 휩싸인 그녀는 견디지 못할 무언가에 짓눌려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호백산이 죽었.... 어?"

'이 녀석 설마.'

나는 이제야 제일 처음 호백산을 환상종화 시키라는 화초선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안돼. 안돼. 안돼. 안돼. 나를, 나를 누가, 이제 누가 나를 막아 주는데. 내 분노를 대체 누가!"

화초선은 호백산이 자기 노예 같은 게 되어 버리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화초선은.

호백산이 다시 일어나 자신을 진정으로 막아 줬으면 하고 있었다.

환상종화를 시켜 전염병을 이겨 낸 호백산이라면 분명 환상종이 되었다 한들 자신을 막으러 올 것이라고 화초선은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인류 멸망? 아니, 이 녀석은 그런 걸 원한 게 아니야.'

한눈에 알아보았다.

화초선은 더 이상 인류를 멸망시키거나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 녀석은 그저 호백산에게 모든 걸 맡긴 거다.

인류가 멸망하든 말든 호백산이 그저 자신을 막아 줬으면 한 것이다.

화초선은 자신의 분노가 너무 오래되어 그것을 멈추는 방법을 잊고 지금껏 자신을 막아 줬던 호백산에게 의지할 뿐인 텅 비어 버린 인형이었다.

그녀의 뜻을 알아차린 내 눈이 찌푸려졌다.

그리고 이번 층을 클리어할 유일한 방법 또한 동시에 알아차렸다.

겨우 화초선에게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27층인 이유와 아직 오르지 못한 28층의 존재 이유까지.

'이번 시도는.'

"거짓말, 거짓말하지 마라. 그 녀석은, 그 녀석은 나를."

얼굴을 감싼 채 서서히 주저앉기 시작하는 그녀의 눈에 커다란 눈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 눈물은 갈 곳 잃은 분노가 뒤섞인 붉은 피눈물이었고, 그렇게 절망에 빠진 화초선을 보고 나는 확신했다.

'실패다.'

"화초선을 죽여라! 하천성!"

그 순간 뒤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기에는 구천옥녀가 서 있었다.

내 뒤를 밟은 건가.

용케도 들키지 않고 뒤쫓아 왔다고 생각한 순간 내 시선이 앞으로 쏠렸다.

거기에 있던 화초선의 몸이 서서히 녹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의 몸이 붉은색의 진득한 액체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와 비슷한 붉은색 뼈가 솟아오르고 징그러운 형태를 만들어 가는 그 모습은, 내가 제일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 본 것과 같았다.

사양신.

화초선이 사양신이 되어 가고 있었다.

36화

사양신에게는 검이 안 통한다.

그걸 알고 있는 내가 환상종화 된 주먹을 휘두르려던 순간 그 즉시 사양신으로 변한 화초선의 몸이 커다랗게 부풀었다.

순식간에 산 크기만큼 부풀어 오른 탓에 진득한 그녀의 몸이 나는 물론이고 날 뒤쫓아온 구천옥녀와 성역에 살던 모든 환상종까지 뒤덮어 버렸다.

'무슨.'

꼬륵, 마치 물속에 빠져 버린 듯한 느낌에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상황에 처한 나는 즉시 몸에 오러를 둘렀다.

그러곤 환상종화가 된 팔을 휘저어 봤지만 물속에서 팔을 휘두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뿐 사양신이 된 화초선에게는 조금도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퍼엉!

그 순간 폭발음이 울렸다.

사양신으로 변한 화초선의 거체가 하늘로 치솟으며 전방위로 뻗어져 나갔고, 그 덕에 겨우 그녀의 몸에서 해방된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끝났네."

그러곤 지금의 상황을 이해 못 한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자 구천옥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내게 다가왔고 기다랗게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구천옥녀."

"쯧, 겨우 네 뒤를 쫓아 화초선을 찾아 왔다고 생각했건만 곧바로 사양신이 될 줄이야. 나갈 준비나 해야겠어."

"설명 좀 해 주지? 내 덕에 여기까지 왔으니 정보 공유 정도는 해 줄 수 있을 텐데?"

혼자만 알고 말하지 말라는 투로 그녀에게 채근하자 구천옥녀는 한숨을 내쉬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방금 전 화초선이 사양신이 되었지."

"그래."

"우리는 이전 도전에서 이미 한 번 겪어서 알아. 그녀가 사양신이 되면 이 세계는 멸망한다."

"멸망한다는 건."

"그녀는 이 세계에서 최강의 환상종이야. 아까 전 봤지. 화초선의 사양신, 그건 무슨 짓을 해도 막을 방법이 없어. 그리고 그렇게 사양신이 된 그녀는 지금껏 유례없던 전염병을 일으켜. 그것도 환상종을 포함한 전 세계 모든 생물에게. 전 회차에서도 그랬어. 우리가 정보를 모으던 도중 그녀가 사양신화해 버려서 그대로 세계가 멸망하고 우리도 급히 도전을 포기해야만 했지. 그래도 이번 회차에서는 화초선의 위치를 알았으니 그녀가 죽기 전에 뭐든 해결 방법이 있겠지."

그리 말한 그녀는 이제 포기 선언을 하려는 듯싶었다.

그 순간 나는 구천옥녀의 팔을 붙잡았고 꽤나 앙상한 팔을 가진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왜 또."

"구천옥녀, 넌 눈으로 본 녀석의 과거사를 기록할 수 있는 심안 클래스가 있지?"

최전선에 같이 서 보았기에 알고 있다.

구천옥녀는 층을 보다 빨리 공략하기 위해 한 클래스를 얻었다.

그건 눈으로 본 상대의 과거사를 돌아볼 수 있는 클래스였고 그 클래스는 층을 클리어하는데 언제나 큰 도움을 주었다.

그렇기에 황제도 그녀를 친위대로서 극진하게 모셨던 것이다.

그녀가 그러한 클래스를 가지고 있다는 건 최전선에 선 자들에게는 유명한 이야기였고 층을 공략할 때마다 그녀의 도움은 늘 크게 작용했다.

그 물음을 듣고 그녀는 나에게 붙잡힌 팔을 빼내며 노려보았다.

"있어. 내가 이번 회차에 들어서고 제일 먼저 찾은 클래스니까. 방금 전 화초선을 두 눈으로 봤으니 과거사는 확실히 기록되었을 거야. 그래서 그게 왜?"

"가르쳐 줘."

내 말을 듣고 구천옥녀는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내뱉었다.

"내가 너에게 그럴 이유가 있을까?"

"이번 층을 클리어할 방법을 내가 알아냈으니까."

구천옥녀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러곤 게슴츠레 뜬 눈으로 나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기 시작했다.

"클리어할 방법을 알아냈다고?"

"네 말대로 이번 도전은 실패야. 그렇지만 다음 도전에서 확실히 클리어할 방법을 찾았다."

"널 믿고 싶지는 않은데."

"믿으라고는 안 해. 하지만 알려 준다면 이 층에서 더 이상 시간을 소비할 필요는 없을 거다. 다음 도전 때 너희가 같이 들어와도 별말 안 할 테니까."

"...너 이렇게나 부탁할 거면 차라리 그냥 우리랑 협력해서 크라운 로드를 클리어하는 게 더 좋지 않아?"

이해 못 한 표정을 짓는 구천옥녀를 보며 나는 콧방귀를 내쉬어 주었다.

"너희랑 함께하면 층을 클리어하는 데 늦어."

그리고 내 태도를 보고 구천옥녀는 기가 차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 도움을 바라는 주제에 아직도 자존심 부리는 네가 어떤 의미론 존경스럽네."

그런 뒤 한숨을 내쉬며 1000장은 족히 될 법한 책 하나를 허공에서 꺼내 든 그녀는 나를 힐끔 보며 말했다.

"뭐, 좋아. 나는 네가 그다지 마음에 안 들지만 층만 어떻게든 클리어된다면 좋으니."

마치 쪽수를 알고 있다는 양 책장을 펼친 그녀는 한 페이지에서 우뚝 멈춰 섰고 그 장을 보며 화초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 * *

전쟁, 기아, 사양신, 세상에는 여러 재앙이 들이닥치면 제일 먼저 피해를 보는 건 언제나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새로운 미래를 가져다주지만, 늘 현재에 의해 희생되었다.

아이들은 눈물을 쏟는다.

그들은 부모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고 나아 갈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이든 환상종이든 같았다.

아이는 아이일 뿐이었다.

화초선이 그런 생각을 품는 이유는 간단하다면 간단했다.

그녀는 한때 아이를 배 속에 품었었다.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아이를 잃었다.

아이의 아비는 그 일을 계기로 사양신이 되어 버렸고 화초선은 제 손으로 자기 남편의 생을 마감시켜야 했다.

엄마라는 소리 한 번 들어보지 못한 채 아이를 잃고 제 손으로 남편을 죽인 화초선은 약 100년 동안 자취를 감추었다.

깊디깊은 동굴 속에서 화초선은 지켜 주지 못한 아이와 남편에게 눈물을 쏟으며 홀로 살아갔다.

100년 뒤 그녀가 바깥으로 나왔을 때 그녀의 마음속에는 아이에 대한 응어리가 남겨져 있었다.

그녀는 피폐해져 있었다.

그렇게 그저 황야를 걷기를 며칠, 화초선의 눈에 한 마을이 들어왔다.

그 마을은 습격이라도 있었는지 엉망이 되어 있었고 사람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화초선이 그런 마을을 지나 걸어가기 시작하자, 그 발소리를 듣고 마을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이 슬쩍 그녀를 보러 나왔다.

아이들은 겁과 호기심이 뒤섞인 눈으로 그녀를 관찰했고 그런 모습을 본 화초선은 이상하게도 거기서 떠날 수 없었다.

아이들은 모두 부모 없이 자기들끼리만 살아남아 있었다.

자신은 배 속의 아이를 잃었지만, 그 아이들은 같이 숨 쉬던 부모를 잃은 것이다.

그동안 모든 걸 내려놓았던 화초선이었지만, 그녀는 부모로 잃고 굶어 죽어 가는 아이들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엄마의 배 속에서 힘들게, 간절하게 세상에 나온 아이들이 희생되고 있는 것을 그녀로선 견딜 수 없었다.

마치 세상에 낳아 주지 못한 자신의 아이를 위해 속죄하는 양, 화초선은 아이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갈 곳 잃은 아이들을 위해 화초선은 집을 하나 만들었다.

낡은 집이었지만 컸고 부모 잃은 아이들을 키우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어느새 그 집에는 환상종, 인간 할 것 없이 모두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기 시작했다.

"엄마! 개구리 잡았어!"

개구쟁이 아이가 있었다.

"엄마, 가루가 자꾸 나 괴롭혀."

친구들에게 자주 괴롭힘 받는 아이도 있었다.

"엄마, 이거 선물이야."

꽃을 엮은 왕관을 주는 아이도 있었다.

"엄마, 나 이거 사 주면 안돼?"

가끔씩 떼를 쓰는 아이도 있었다.

제각각 다 전부 달랐지만 아이들에게 공통된 것이 있었다.

아이들은 어느새 전부 화초선을 엄마라고 부르고 있었다.

부모를 잃었던 그들에게 화초선은 어머니였고 부모였다.

아이를 낳지 못했던 화초선이었기에 엄마라는 말이 처음은 어색했지만 조금씩,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아니, 이제는 그 아이들에게 엄마라는 두 단어는 화초선에게 전부가 되어 가고 있었다.

비록 자신의 아이에게는 듣지 못했던 말.

하지만 이제는 자신의 아이가 되어 준 아이들에게 듣는 그 말.

환상종 아이, 인간의 아이.

화초선은 둘 다 차별 없이 키워 나갔다.

언젠가 이 아이들이 커서 세계로 나아갔을 때 그땐 분명 지금보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줄 것만 같았다.

지금과는 다른 미래를 가져올 수 있을 것 같았다.

환상종이 세상에 분노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

아이가 부모를 잃지 않아도 되는 세계.

그런 세계가 올지도 모른다고 화초선은 생각하고 있었다.

간혹 집을 지나치던 인간들이 환상종과 인간의 아이가 함께 어울려 있는 모습을 보며 경악하고 질색했지만 아이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아이들에게는 환상종이든 인간이든 전부 가족이었고 친구였으니까.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한 인간이 방문했다.

추레한 옷차림, 짧게 밀어 버린 머리카락, 그리고 몸에서 진득하게 나온 전투의 냄새.

화초선은 그를 보자마자 그가 환상잡이임을 깨달았다.

불과 몇 년 전 생겨난 단체인 환상잡이라는 단체는 사양신들을 전문적으로 죽이고 다니는 집단이었고 최근에는 환상종까지 사냥하고 있다는 소식이 있었다.

화초선은 경계심을 품었다.

그를 매몰차게 내쫓았으나 의외로 환상잡이는 별다른 반응 없이 나갔다.

하지만 그 후로 그는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자신들의 집 앞에 먹거리를 두고 갔다.

처음에는 경계하며 먹을 것을 전부 버린 화초선이었지만, 그녀는 얼마 안 가 그가 음식의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어느 날 아이들이 화초선보다 먼저 음식을 가져와 먹고 있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맛있다며 기뻐했다.

그 모습을 보고 화초선은 조금씩, 조금씩 그에게 경계심을 풀기 시작했다.

"엄마, 산타 아저씨 언제 와?"

"산타? 그 녀석이 왜 산타야."

"매일 선물을 놓고 가잖아."

화초선은 자기 나름대로 아이들을 챙겨 먹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창때인 아이들에게는 화초선이 구해 오는 밥으론 모자랐는지 그가 가져다주는 음식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렇게 5년, 화초선은 그가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슬슬 질려서 그만두겠지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고 결국 그녀는 5년째 되던 해에 그의 앞에 나섰다.

직접 이야기해 본 그는 사회성이 결여된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 속에는 화초선이 어린아이들에게 보았던 부모를 잃은 아이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그가 아이들처럼 구원받지 못한 남자였음을 화초선은 눈치챘다.

이름은 호백산, 살짝 멍청한 것 같지만 그가 아이들을 보고 지은 미소를 보고 화초선은 자신의 생각을 조금 고쳤다.

호백산이 떠나가고 아쉬워하는 아이들을 뒤로 한 채 화초선은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분명 다음에 또다시 오겠지.

그때 보면 지금까지 얻어먹은 게 꽤 있으니 자신도 밥 한 끼 정도는 챙겨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화초선은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근처 마을에 사양신이 나타났고, 그 결과 주변에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다.

그때 마을에 놀러 나갔던 인간 아이 한 명이 감염되었고 화초선은 급히 그 아이를 다른 인간 아이들과 떨어트렸다.

아이의 증세는 날이 갈수록 심각해져 갔기에 화초선은 어쩔 수 없이 그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섰다.

"당분간 절대로 밖에 나오면 안 돼. 밥은 해 놨으니까. 일주일만 너희들끼리 지내고 있어. 알았지? 예찬아, 네가 애들을 잘 지켜 줘야 한다."

"응, 엄마."

또래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예찬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화초선은 전염병 걸린 아이 지안이를 업고 집을 떠났다.

37화

"지안아,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거라."

"엄마, 엄마. 나, 앞이, 앞이 안 보여. 엄마, 어딨어."

"나 여기 있어. 곁에 있으니까. 지안아, 조금만 더 참자. 다 왔으니까."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치유 능력이 있는 환상종을 찾아 화초선은 최대한 빠르게 날았다.

날고, 날고 또 날아, 며칠을 쉬지 않고 화초선은 이동했다.

혹여나 아이가 떨어질까, 조심하며 그녀는 악착같이 날았다.

"엄, 마."

"지안아, 다 왔어. 다 왔어."

방금 전까지 등에서 끙끙거리던 지안이에게 급히 외친 그녀는 드디어 지인인 환상종에게 도착했다.

화초선을 발견하자 당황한 그의 앞으로 급히 뛰어내린 그녀는 지안이를 품에 안고 그에게 외쳤다.

"요마! 도와줘! 지안이가, 지안이가 아파!"

요마라 불린 지인 환상종은 갑작스러운 화초선의 등장에 놀란 것도 잠시, 서둘러 지안이를 살폈다.

"...이미 죽었어. 손 쓰기에는 늦었다."

"뭐?"

그러나 그에게서 돌아온 대답에 화초선이 급히 지안이를 살폈다.

요마의 말대로 지안이는 벌써 숨을 거두었다.

그 모습을 본 화초선은 천천히 바닥에 무릎 꿇었다.

방금, 아주 조금 전까지 자신을 부르던 지안이였다.

그런데.

그런데 왜.

정말 앞으로 조금이면 됐는데.

「엄마, 이거 선물이야.」

「엄마, 이번에는 반지야. 나 잘 만들지? 언젠가 엄마한테 진짜 반지를 만들어 줄 거야.」

귓가에서 지안이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이 아이는 언제나 자기에게 꽃으로 만든 물건을 선물해 주곤 하였다.

그 물건들은 전부 화초선이 준비해 둔 서랍장에 곱게 넣어 두었고, 그녀는 그걸 평생 버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건 부질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또 자신의 아이를 구하지 못했다.

또.

"인간은 약하니까. 전염병에 참 쉽게 죽지."

안타깝다는 양 혀를 차는 요마의 말에 화초선은 터덜터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초선, 어쩌게."

"...돌아가야 해. 다른 애들이 기다리고 있어."

그리 말한 화초선이 입구로 다가가자 따라 나온 요마가 이해 못 한 표정으로 물었다.

"소문으로 듣긴 했지만 왜 그렇게 아이들에게 집착하는 거냐. 설마 한참도 더 된 사산한 네 아이 때문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