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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미핥기가 울고 갈 가공할 만한 혓바닥

2. 안녕하십니까. 바퀴벌레 왕자입니다!!

3. 백성들아! 저 놈을 묻어버려다.

4. 쟤! 나 줘.

5. 오빠는 풍각쟁이야~

6. 불완전하기 때문에 넌 인간인 거야.

7. 쟤 저러다 작두 타는 거 아냐?

8. 아직도 바퀴벌레 타령이냐아아아!

9. Bonus Stage

1. 개미핥기가 울고 갈 가공할 만한 혓바닥

취리릭.

기묘한 파공성.

병규가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채찍과 같은 그림자가 식탁 위의 접시를 향했고, 사람들이 채찍(?)의 존재를 눈치 챘을 때엔 이미 케이크는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병규는 입에 무언가를 한 가득 머금은 채 우물추물하고 있었다.

"...?"

"...!"

떠들썩한 실내에 돌연 정적이 찾아왔다. 전경희를 비롯한 사람들은 지금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깨닫지 못하고 아연실색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방금 그의 입에서 뭐가 휙 나와서 케이크를 홱 하고."

"채찍 같은 것이."

뒤늦게 탁구공이 전경희의 발치에 떨어졌지만 그것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대체 순식간에 케이크 조각을 낚아채 간 채찍(?)의 정체가 무엇인가에 모든 사람들의 관심이 쏠려 있었다.

챙그랑.

예란이 들고 있던 쟁반을 떨어뜨렸다. 이어 그녀는 의문과 경악이 반반쯤 섞인 음성으로 발했다.

"혀, 혀가."

"메야?"

"설마. 방금 그게 혀였단 말야?"

병규에게로 묻는 듯한 시선이 쏟아졌다. 모두들 설마 하는 표정이었다. 병규는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예. 협니다."

그는 입을 벌리고 혀를 길게 빼내어 보였다.

"얼마 전부터 혀가 고무줄처럼 길게 늘어날 수 있게 돼서요."

그는 혀를 길게 늘여서는 케이크가 있던 식탁 위의 접시를 날름날름 핥아 보였다.

"...."

사람들의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병규는 나름대로 재주랍시고 과시한 거지만 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몇 미터나 길게 늘어난 혀가 접시를 싹싹 핥고 있는 모습이 결코 신기한 구경거리가 될 수 없었다.

사람들이 썰물 빠지듯 사사삭 뒤로 물러섰다. 그들의 표정은 병규의 재주를 신기해한 다기보다는 혐오스런 벌레를 본 것 같은 모습이었다. 심지어 한쪽에서는 조준엽이 구충제를 뿌린답시고 그의 주위에 독을 살포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특재대가 외계인을 들이기 시작했냐?"

"혀가 쏙... 혀가 쏙...."

"흑흑. 무서워."

"지구에 온 목적이 뭐냐!"

여기저기서 동시에 터져 나오는 경악성들, 그리고 비명소리가 사태의 심각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나, 뭔가 또 실수한 거야?"

병규는 울상이 된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했다. 대체 뭐가 잘못된 것일까. 능력을 보이라고 해서 할 수 있는 재주를 해 보인 것뿐인데. 그때 그렇게 좌절하는 병규 옆, 전경희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털썩 무릎을 굻었다.

"못 이겨. 도저히 못 이겨. 저런 괴물(?)을 어떻게 이겨. 절대로 절대로 못 이겨."

그녀는 난생 처음 절대적인 패배감에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푹~~!!

병규의 심장에 비수 박히는 소리가 터졌다.

그렇게 시끄러운 분위기 속에 대충 특재대 인원에 대한 소개가 끝났다. 이 밖에도 몇 명의 능력자들이 더 있었지만. 바쁜 관계로 파티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한다.

"흠. 그런데 특별히 초대한 게스트가 이직 안 왔네."

"게스트?"

병규의 물음에 운석의 얼굴에 게슴츠레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네가 아주 좋아할 만큼 귀여운 손님이지. 올 때가 됐는데 안 오네."

"아, 제가 조금 전에 봤어요."

쟁반에 맥주잔을 들고 다니던 권예란이 말했다.

"화장실 가는 길에 보니 들어오는 것 같던데 아직 안 왔어요?"

그 말에 운석은 두 눈을 가늘게 벼리며 주위를 둘레둘레 살폈다.

"어디? 어디? 에이. 없는데."

"그럼 대체 어딜 간 거지?"

권예란이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뭐, 괜찼을 거야. 좀 맹하긴 해도 길을 잃어버릴 정도는 아니니까."

말을 마친 운석은 허파에 바람이라도 들었는지 돌연 껄껄 웃어대기 시작했다. 주사도 참 독특한 사람이다. 말이 RH이는 것도 아니고 얼굴도 말짱한데 하는 행동은 영락없는 술주정뱅이니 원. 그나저나 미성년자에게 술을 먹인 사람이 대체 누굴까.

'귀여운 손님이라. 역시 능력자겠지?'

병규는 운석이 초대했다는 손님이 대체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지만 그 특별 게스트는 파티가 끝날 때까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다소 소박한 병규의 환영파티는 끝나가고 있었다. 모두들 툭별하다면 특별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동네 아저씨, 총각, 친구 같은 분위기 같아 병규는 나름대로 서먹함을 금세 잊을 수 있었다.

어두침침한 지하.

푸르스름한 형광등 불빛이 켜져 있었지만 실내에 웅크리고 있는 어둠을 완전히 쫓아내기엔 무리가 따랐다. 때문에 텅 빈 실내에 웅크리고 있는 세 사람의 발 아래엔 짙은 그늘이 드리우고 있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병풍처럼 한쪽에 가지런히 서 있는 거대한 석상이었다. 관리를 안했는지 울퉁불퉁한 표면에 물이끼 같은 것이 잔뜩 끼어 있었다.

"흐읍. 그녀를... 흐읍, 찾았다."

실내에 웅크리고 있던 세 사람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호흡기에 문제가 있는지 숨을 쉴 때마다 폐병환자처럼 힘겨운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잘됐군요."

세 사람 중 다른 하나가 대답했다. 앞서의 사내가 가래 끓는 듯한 불쾌한 음성이었다면 그의 것은 너무 가볍고 날카로워 요사함마저 느껴지는 그런 음성이었다.

"그런데... 쉽지... 흐읍. 않을 것 같다. 쓸데없는 버러지가... 흡. 붙어있다."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예상한 일이지요. 하지만 꼭 애햐 합니다. 대계의 완성을 위해서라도."

그의 음성엔 주위를 자극하는 묘한 흥분이 어려 있었다.

"흐읍. 내가... 가지."

차가운 음성의 남자를 말리지 않았다. 두꺼비같이 넙죽 엎드려 있던 사내가 뒤쪽의 석상을 턱짓했다."

"조심하십시오. 우리를 탈출한 갓파 몇 마리가 말썽을 부린 덕분에 반도 녀석들이 바짝 긴장한 모양입니다. 풍가들을 함께 데려가십시오."

"흐읍. 그렇게... 하지."

짧게 대답한 두꺼비 같은 자는 부스럭거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여태 침묵하고 있는 자에게 정중히 절했다. 바짓단에 작은 주렁주렁 매달린 쇳조각 때문에 움질일 때마다 소음이 일었다.

끼그극.

놀라운 일이 생겼다. 그가 몸을 움직이자 굳은 듯 서 있던 거대한 석상이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쿵쿵.

석상이 움질일 때마다 지하실이 공허한 울림을 토해 냈다. 그런데 그 석상. 어딘가 눈에 익다. 3미터에 이르는 큰 키. 몸보다 긴 팔 다리, 지독한 악취.

철컹철컹 하는 소음과 함께 창고를 막고 있던 거대한 셔터가 올라갔다. 그리고 음침한 사내와 거대한 괴물은 셔터 밖으로 펼쳐진 눈부신 빛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쾅 하는 소음과 함께 사내와 괴물을 집어삼킨 빛이 사라졌다. 셔터가 다시 내려간 것이다.

찰캉찰캉.

신경 거슬리는 소음이 점점 멀어지다 끝내 완전히 사라졌다.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던 과묵한 사내의 입이 열렸다.

"괜찮겠는가?"

요사스런 음성의 사내가 고개를 조아리며 물었다.

"폭풍의 군주시여.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마지막 사내는 침묵했다. 잠시 후 그가 우려가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혹여 일을 그르치지 않을까 걱정이다."

"걱정하실 것 없사옵니다. 이런 작은 나라의 능력자들쯤이야 감히 당신께서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조무래기들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혹여 그가 이 일을 알게 될까 걱정이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사내가 언급한 그가 주는 중압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과묵한 사내의 음성에 두려움 따위는 묻어있지 않았다. 다만 될 수 있으면 귀찮음을 피하자는 정도의 느낌뿐이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오직 '그'뿐이다. 만약 우리의 움직임을 그가 눈치 챈다면 일이 복잡해질 가능성이 있다."

"심려 마십시오. 오가마. 그라면 틀립없이 잘해 낼 것입니다."

요사스런 사내의 입가가 벌어지며 소리 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파티는 밤새도록 계속되었고, 여러 능력자들과 어울렸던 병규는 다음날 오전에야 특재대의 지하 사무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일요일인데도 도로는 차량으로 꽉 차 있고, 거리는 토요일 주오일제 근무의 영향 때문인지 오전임에도 제법 사람이 많았다.

특재대를 나온 병규는 정처 없이 서울 시내를 활보했다. 마음이 뒤숭숭했다. 자영에게 들은 가문의 속사정. 사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두둥 하는 충격은 없었지만 심경은 조금 복잡해졌다.

왜 아버지는 이런 얘기를 해주지 않은 것인지. 형들과 누나들도 자신처럼 이상한 능력이 있는 것인지. 어쩌면 신비한 능력을 가진 가문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옛말일 뿐이고, 이제는 자신만 빼고는 모두 평범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마음 같아서는 전화로 물어보고 싶지만 집을 뛰쳐나올 때 다짐한 것이 떠올라 괜히 가슴만 더욱 답답해졌다.

태풍이 휩쓸고 간 서울의 풍경. 거리는 강풍과 폭우로 엉망진창이었지만 하늘만은 여느 때보다 맑았다.

"가을도 아닌데 무슨 분위기를 그렇게 잡냐?"

호랭이가 툴툴거리는 음성으로 딴죽을 걸었다.

"분위기라니요. 취릭~! 그냥 오랜만에 서울도 올라왔고 해서 문명의 향기나 만끽하자는 의미죠."

"만끽은 개뿔. 정말 그런 거라면 뭐 볼만한 게 있는 곳으로 가던가."

뭐가 불만인지 호랭이는 연신 궁시렁거렸지만 더 이상 투덜거리지는 않았다. 방법은 잘못되었지만 병규의 불편한 심기를 풀어주려고 노력하는 것일 게다.

"궁금하면 가보지 그러냐?"

"에이. 취리릭~! 집나온 놈이 벌어 논 것도 없이 돌아가 봤자 뭐해요. 쪽만 팔릴 뿐이죠. 아구아구."

뒷머리를 벅벅 긁는 병규의 얼굴엔 씁쓸한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다...."

호랭이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에요?(왜요?)"

"좀 이상하지 않냐?"

"머가요?(뭐가요?) 아구아구."

호랭이는 뒤쪽으로 고개를 슬쩍 돌려 길가에 위치한 노점상들을 턱짓했다.

"아까부터 느끼는 건데, 우리가 지나간 다음엔 항상 비명 비스름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라. 뭐가 없어졌다고 그러는 것 같은데...."

"쩝쩝. 에니. 그넝 니가요.(에이. 그럴리가요.)"

대답하는 병규의 몸이 움찔한다.

"그리고 보니 네 입은 조금 전부터 계속 우물거리네. 뭘 먹는 걸 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말이다."

"꾸, 꿀꺽. 하하. 이거요? 그, 그냥 배가 고파서 그냥 뭘 씹는 척 하는 것뿐입니다. 하하하."

"병규야아?"

"네, 네에?"

호랭이의 두 눈이 초승달처럼 가늘게 여며졌다.

"웃음소리가 아주 많이 어색하구나."

"윽."

병규의 몸이 크게 떨린다. 역시 이 녀석은 거짓말이 서툴다. 예민한 호랭이님께서 그 정도 변화를 눈치 못 챌 리 만무하다. 물론 이미 말을 꺼내기 전부터 범행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말이다.

놀라운 것은 병규의 적응력이다. 그제만 해도 죽겠다고 그 난리더니 이젠 제대로 이용하고 있지 않은가?

"병규야?"

호랭이의 은근한 음성에 병규의 고개가 조금씩 움츠러들었다.

"네?"

"니가 했지? 오뎅이랑 붕어빵이랑 호떡이랑 떡볶이랑 번데기랑 순대 말야. 니가 했지? 고놈의 혓바닥으로 말이다."

병규는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려 했지만 호홍~ 하고 웃고 있는 호랭이의 눈빛을 보니 차마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네."

마지못해 시인한 병규. 호랭이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잘못한 건 알지?"

"네에."

병규는 참회의 눈물을 글썽였다. 호랭이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래. 잘못한 걸 안다니 됐다. 나도 네 마음 모르는 게 아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그랬을꼬. 간신이 번듯한 직장을 잡긴 했지만 아직 월급도 못받은데다 평소에 많이 굶주렸으니 무의식적으로 그랬겠지. 그렇지?"

"네, 맞아요. 바로 그런 겁니다."

병규는 감동의 눈물을 글썽이며 힘차게 대답했다. 평소엔 그렇게 못마땅하더니 지금은 아P 감동의 도가니탕이다. 병규의 글썽이는 눈빛을 받으며 고개를 주억거리던 호랭이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 됐다. 알면 됐어.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랬다고, 무의식중에 그런 건 아무 잘못 없는 거야. 그래서 말인데...."

호랭이의 미소가 아주아주아주 진해졌다.

"저기 앞에 보이는 꼬치구이 말이다. 왠지 맛있는 냄새가 나는 것 같지 않냐? 알겠지? 이번엔 잊지 말고 이인분이다."

"...?!!"

개미핥기가 울고 갈 가공할 만한 혓바닥으로 서울 시내 노점음식들을 모조리 탐식하고 돌아다니던 혓바닥 절도범(?) 두 명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지하철에 있었다. 그저 동물적인 감각으로 음식들만 찾아다니다 보니 이렇게 된 모양이다.

병규는 지하철 노선도를 보며 잠시 고민했다. 마음도 심란하고, 반 강제로 끌려오다시피 했지만 기왕에 서울까지 온 거 정말로 구경이나 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 머리나 식히지 뭐.'

본부장에게서 여비도 두둑하게 받았겠다, 구경이라도 실컷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있자. 어디를 가야 할까."

솔직히 아무리 서울이라도 계획 없이 상경한 사람이 놀 만한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것도 애완동물(?)과 함께 갈 수 있는 곳은 더더욱 드물었다. 일단 놀이공원은 무조건 패스고, 명동이나 동대문 같은 곳도 패션 같은 것에 관심이 없으니 영 흥미가 안 생긴다. 인라인이나 좋아하면 자유의 광장 같은 곳도 괜찮겠지만 역시 호랭이와 둘이 가기엔 마땅치 않았다.

'쩝. 이럴 줄 알았으면 구경이나 시켜 달라는 핑계로 본부장님이나 예란 누님을 꼬셔볼 걸 그랬나?'

물론 꼬셔지지 않을 가능성 같은 것은 손톱의 때만큼도 염두 하지 않았다.

결국 한참 고민 끝에 병규가 선택한 곳은 용산이었다. 전자제품과 컴퓨터로 가득한 그곳이 뭔 재미냐 하겠지만 전자계산학과인 그로서는 산만한 볼거리로 가득한 명동보다 오히려 컴퓨터 상가만 쭉 늘어진 용산이 더 구미에 맞았다.

표를 끊고 지하철 안으로 들어서는데 매표소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금발머리의 소녀가 영어로 뭐라고 열심히 떠들고 있는데, 그걸 알아듣지 못핸 매표소 직원이 당황하며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외국 애가 보호자도 없이 돌아다니네."

그때만 해도 병규는 그저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지하철로 한 시간 걸려 도착한 용산은 경기불황의 한파로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한산한 모습이었다. 그래서인지 손바닥만한 공간에 들어선 여러 업체들의 직원들은 예전보다 몇 배나 득달같았다. 한 구역을 지날 때마다 꼬드기는 통에 귀찮아 죽을 지경이다.

"이 동네는 너무 시끄럽구나."

호랭이는 시끌벅적한 전자상가의 모습에 치를 떨었다. 해일처럼 넘실대는 전자파에 온갖 잡동사니가 다 모여 있는 곳이 전자상가다. 고즈넉한 분위기를 즐기는 호랭이에게는 가히 지옥과 같다고 할 수 있었다. 호랭이의 구박에 밀려 병규는 결국 밖으로 나왔다. 비가 온 다음이라 바람이 조금 찼다. 거리에서 파는 핫바를 사먹으며 병규는 또 어딜가나 고민했다.

그냥 눈요기라고 하자는 생각에 온 것이어서 그다지 사고 싶은 물건다 없었다.

"여기 어디에 준엽이랑 녀석이 있다고 하지 않았냐?"

"!"

곰곰 생각해본 병규는 이운석이 독쟁이라 부르는 준엽이 용산에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는 소릴 들은 것을 기억해 냈다. 그조차 잠깐 까먹었는데, 호랭이가 용케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선인상가 외곽의 어디에 있다고 했었지. 아마?'

자연스레 선인상가 쪽으로 발길을 잡았다.

선인상가 뒤편의 거리는 쇠퇴하고 있는 용산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었다. 마치 삼십 년쯤 입은 양복처럼 후줄근한 모습. 공장처럼 빽빽하게 들어선 건물들은 문을 연 곳보다 셔터가 닫힌 곳이 더 많았다. 간혹 문이 열려 있는 도매상의 직원들도 누가 왔다 갔다 해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권태로움과 무료함만이 그들의 얼굴에 머물러있을 뿐이다.

"에고. 여기서 어떻게 준엽 형의 가게를 찾지?"

병규는 빽빽하게 들어선 건물들 사이에서 연락처도 없는 준엽의 영업점을 찾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새삼 절감하게 되었다. 뒤늦게 용산이 얼마나 광활한 곳인지 깨닫게 된 것이다. 이거야말로 서울 난장에서 박 서방 찾기 아닌가.

슬렁슬렁 한 집씩 살피다보면 찾게 되겠지라고 간단하게 생각한 게 실수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전화번호라도 받아오는 건데.'

후회는 언제나 늦기 마련이다.

"어쩔 거냐? 더 찾아볼 테냐?"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네요. 그만 돌아가죠."

막 병규가 몸을 돌렸을 때였다.

"Help me~!"

저 끝에서 뛰어온 금발머리 여자아이가 그의 몸과 크게 부딪혔다. 길이 이렇게 넓은데 하필이면 그와 부딪히다니. 우연히 부딪혔다기보다는 고의적인 태클이라고 봐야 했다.

"아이고. 등뼈 휘어지는 줄 알았다. 뛸 때는 앞을 보고 다녀야지. 내 등짝에 먹다 남은 핫도그라도 붙어 있었니?"

소녀를 안고 데굴데굴 굴러간 병규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물었다. 평소라면 당연히 짜증이 났을 테지만 여자애라 그런지 말이 부드럽게 나갔다.

게다가 그의 품에 쓰러지듯 안겨 있는 아이가 오들오들 떨고 있다면 더더욱 감싸주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그런데 얘, 어쩐지 눈에 익은 것 가은데.'

그때였다.

부리나케 달려오는 급한 발소리와 함께 복면을 쓴 남자 하나가 나타났다. 황당하게도 녀석은 벌건 대낮인데도 불구하고 날이 시퍼런 단도를 들고 있었다.

품에 안겨 작은 새처럼 숨을 헐떡이는 소녀와 칼을 든 괴한을 번갈아 보며 쳐다보던 병규,

"오호라. 대충 어떻게 된 시나리오인지 알겠다."

그의 두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불알 찬 사내 주제에 요상한 것(?)에 맛(?)을 들인 모양인데. 나 참, 말로만 변태를 들었지 진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여긴 보는 눈이 많으니 자신 있으면 따라와 봐."

병규는 소녀의 손을 잡고 으슥한 골목으로 걸음을 옮겼다.

병규의 어깨 위에서 말없이 사태의 추이를 살피고 있던 호랭이가 병규에게 넌지시 물었다.

"너 혹시 사단이 일어나길 바라는 거 아니냐? 마음이 복잡하니 대판 싸워보기라도 하겠다는 심보라든가 말이야."

병규는 속으로 뜨끔했지만 모르는 척 입을 놀렸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세요. 전 절대로 약한 소녀를 돕기 위한 정의로운 마음에서 그런 것뿐입니다."

"이 아이를 돕고 싶었다면 간단히 경찰에게 전화를 해도 될 텐데?"

호랭이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이미 만사 다 들킨 모양이지만 의지의 한국인 병규는 끝까지 밀고 나가기로 했다.

"어허. 그런 책임감 없는 짓을! 경찰은 너무 늦어요.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합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제 손으로 깨끗이 마무리 짓겠습니다."

"흐음. 어째 너 요즘 들어 부쩍 성격이 활달해진 것 같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병규는 호랭이의 비꼬는 말을 능숙하게 받아넘겼다.

한편 소녀의 뒤를 쫓고 있던 괴한은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놈 때문에 괜히 일이 복잡해지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알아서 으슥한 곳으로 들어간다.

수없이 임무를 행했지만 이런 경우는 또 난생 처음이다.

"운동 좀 했나보군. 가소로운 자식."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저런 상대가 오히려 처리하기 편했다. 자만심 강한 녀석의 폐에 구멍을 내는 것은 그야말로 누워서 떡먹기다.

과연 뒤를 쫓아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서자 그 놈이 두 손을 척하니 허리에 걸친 채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다.

"하하. 예까지 따라오다니. 용기는 가상하네요. 변.태.아.저.씨."

나름대로 정곡을 콕 찌르는 말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복면사내는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주위에 사람이 없을을 보고 적이 안심한 듯 목을 빙빙 돌려가며 근육을 풀고 있었다.

제대로 한 판 뜰 모양이다.

병규의 고개가 살며시 한쪽으로 기울었다.

'어래? 이 녀석 단순한 변태 아저씨가 아닌가? 설마 어린애의 코 묻은 돈을 노리는 쓰레기? 그리고 난 그런 일에 어이없게 말려든 지나가던 불쌍한 행인?'

일명 퍽치기라고 해서 행인의 뒤통수를 친 후에 맞은 놈이야 죽은 말든 돈을 챙기는 악독한 놈들이 있다.

그렇다면 녀석은 상대를 잘못 만난 셈이다. 비록 아직 힘을 능수능란하게 쓸 수는 없지만 병규 역시 엄연한 능력자. 퍽치기 따위가 상대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

그의 생각대로 녀석은 애초에 대화의 여지조차 없는 듯, 품속에서 작은 단도 하나를 더 꺼내들었다. 양손에 나눠진 두 개의 단도.

'그래도 이쯤에서 어설픈 협박 정도는 있어야 하는 거 아냐?'

그러나 그의 바람과 달리 괴한은 유치한 대사의 협박을 입에 담지 않았다. 오히려 음침한 미소를 입가에 드리우며 천천히 다가설 뿐이다.

"크크."

웃음소리가 커진 순간, 놈의 손이 위에서 아래로 부드럽게 흔들렸다. 손끝에 있던 단도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물 찬 제비처럼 날아들었다.

"엇."

병규는 급히 상체를 숙였다. 호랭이의 등줄기를 스치고 지나간 단도가 뒤편 벽에 부딪히며 불꽃을 튀겼다.

"허억."

반쯤 졸린 눈으로 병규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호랭이가 화들짝 놀란다.

"위험한 놈이네. 이거."

힐끔 뒤를 돌아보며 병규는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협박도 없이 칼을 날리다니. 위협치고는 심각한 수준이다. 칼을 날린 지금도 킥킥대고 웃을 뿐 금품을 달라는 얘기 따위는 일절 없다.

사실 괴한의 입장으로서는 해치우려는 대상과 두런두런 얘기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터무니없는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저놈. 이상한 기운을 부린다."

호랭이가 그의 상의 안으로 파고들며 경고했다. 단도가 날아올 때 귀에 거슬리는 파공음을 들었던 것이다.

"알았어요."

상대에게 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긴장이 될 참이다.

좁은 골목. 빠져나갈 통로는 오직 괴한이 버티고 선 통로뿐. 본래는 적당히 시비나 붙으려고 시작한 일이지만 이쯤 되고 나니 스스로 함정에 빠진 격이다.

괴한이 소매 없는 재킷에서 다시 두 자루의 단도를 꺼냈다.

"저놈 대체 칼을 몇 개나 가지고 다니는 거야?"

단도는 고작 손바닥만한 길이에 불과했지만 칼을 여러 자루씩이나 들고 다니는 게 영 꺼림칙했다. 전문적인 칼잡이란 소리다.

병규는 방패로 쓸 만한 것이 없나 살폇지만 악취를 풍기는 쓰레기 봉지들만 쌓여 있을 뿐이었다.

"이거나 먹어라."

병규는 막 단도를 던지려 하는 괴한을 향해 쓰레기 봉지를 뻥 차버렸다. 반사적으로 칼을 휘두르자 노랑색 봉지가 터지면서 안쪽의 음식물이 와르르 쏟아졌다.

"칙쇼!"

괴한은 뒤로 펄쩍 물러서며 욕을 했다. 이런 일에까지 지저분하게 옷을 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얼래. 이 사람이 일본인인 모양이네, 일본인이 웬 강도짓? 배 탈 돈이 모자란 건가?"

"요즘 같은 시대에 무슨 배냐? 비행기 표면 몰라도."

"아! 호랭이 말이 맞겠네요. 저. 돈이 없으면 일본대사관에나 찾아가 보세요. 우리 나라는 댁 말고도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많아서 골치 아프거든요? 굳이 일본 문제아까지 받아들일 여유가 없어요. 아참, 한국말 못하는 것 같던데. 일본대사관을 일본말로 뭐라고 하지?"

긴장을 풀기 위해서인지 병규는 평소보다 말을 많이 했다.

"이럴 때는 서양말로 하면 되잖아. 서양말."

"오케이. 좋은 생각이네요. 일본도 영어 배우려고 꽤 투자를 많이 한다고 들었으니까. 아마 간단한 의사소통 정도는 되겠죠. 음. 그러니까. 유 고오르 투(You go to)... 음. 자패니즈으~ 음.음. 대사관이니까 대충 큰집이겠지. 빅(Big) 하우즈으~(House). 유아르~ 언더스텐. 그러니까 합해서. 유 고우르 투 자패니즈 빅 하우즈으~ 오케?"

(참고로 한국 내 일본 대사관은 'Embassy of Japan in Korea'다)

"...?"

물론 괴한은 병규가 무슨 소릴 지껄이는지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저놈 지금 나더러 일본 감옥에 들어가라고 말하는 거야? (Big House는 감옥을 뜻하는 은어다.) 미친놈."

괴한이 불쾌함을 병규의 발언에 분노를 높이고 있을 때 병규와 호랭이는 감격 어린 목소리로 호들갑을 떨었다.

"오오~ 병규. 너 외국말 좀 할 줄 아는데? 혀가 아주 제대로 꼬부라졌어."

"그죠? 카. 제가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제대로 했으면 통역사 저리 가라였을 겁니다."

"휘이~ 그래? 꽤 잘하는가 보네. 외국어 시험 치면 몇 점이나 나오는데?"

"그, 그게 토익시험은 제 신발치수 정도밖에...."

"헛! 그럼 200점도 훨씬 넘는 거잖아. 어떻게 하면 만점에 두 배가 넘는 고득점을 할 수 있는 거냐? 히야. 어쩐지 혀가 참기를 처바른 것처럼 매끄럽다했더니."

"하하. 제가 원래 뽐내길 싫어해서 그렇지 좀 잘난 면이 많죠. 하하하."

(참고로 Toeic은 990점 만점이다.)

"그래. 역시 사람은 하나 정도는 잘하는 게 있기 마련이구나."

"하하. 아직 호랭이가 모르는 장점이 바닷가의 모래알만큼이나 많답니다. 푸하하하하."

둘의 잡담은 그야말로 점입가경. 눈앞에서 칼을 들고 서 있는 괴한 따위는 아P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 같았다.

괴한의 눈에서 적의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은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일. 냄새나는 음식물 쓰레기도 뒤집어써서 짜증이 머리끝까지 솟구쳤는데 정작 놈은 깽깽거리는 강아지와 요사스럽게 웃어가며 남의 속을 박박 긁고 있다니.

"고통 없이 죽여주려 했더니 안 되겠군. 손가락 끝에서 발끝까지 갈기갈기 찢어 죽여 주마."

물론 병규와 호랭이는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위협적인 분위기만큼은 충분히 전달받을 수 있었다.

"어이구. 그러고 보니 저 사람 칼 들고 있었지요? 깜빡 잊었네."

"생각해보니 그러네. 네 화려한 외국어에 잠시 정신이 팔려서 잊고 있었다. 골치 아프니까 단 제압한 다음 경찰에 넘기는 것이 좋겠다."

"네. 알겠어요."

병규가 대답하기 무섭게 돌연 괴한이 칼을 휘둘러왔다.

"죽어."

휘익.

날카로운 칼바람 소리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그런데 막상 칼을 휘두른 앞을 보니 병규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는 것이 아닌가.

"위!"

고개를 쳐들자 과연 병규가 그의 머리 위를 뛰어 넘어가...다가 갑자기 살 맞은 새처럼 아래로 뚝 떨어졌다.

"꾸엑."

덕분에 괴한은 그에게 깔리고 말았다.

"에고. 이거 너무 날카롭네."

귀탄의 점프력으로 몇 미터나 훌쩍 뛰어넘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요수의 손톱으로 벽에 잠시 지지하려고 했던 것이 실수였다. 마음먹은 대로 능력이 발휘된 것은 정말 기쁜 일이긴 한데, 손끝에서 푸르스름하게 튀어나온 요수의 발톱은 날카로워도 너무 날카로워서 잠시 몸을 고정시키려던 의도와는 달리 단단한 건물 벽을 그대로 두부처럼 쪼개버렸고, 덕분에 병규는 쭉 갈라지는 건물 벽을 따라 그대로 아래로 뚝 떨어져버린 것이다.

그의 발밑에 깔린 괴한은 그대로 거품을 물고 기절해 버렸다. 불의의 일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때문이다.

"뭐,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가 좋으니 만사 땡이네."

쾌활하게 웃어준 병규는 끈 대신 괴한의 점퍼를 벗겨 그를 묶어 버렸다.

"그나저나. 넌 어쩌다 이런 못된 사람에게 쫓기게 됐니?"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괴한을 처리한 병규는 이번엔 금발의 소녀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충격이 너무 컸던 걸까? 소녀는 무서운 일을 겪었음에도 무표정한 얼굴로 멀뚱히 그럴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그를 보는 눈동자가 잘게 흔들린다,

'어? 이 애. 머리만 염색한 건가?'

금발이라 외국인인 줄 알았는데 눈동자가 검었다. 요즘엔 애나 어른이나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다니니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닐 텐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소녀의 눈썹마저 금발이라는 것이다. 보통 눈썹은 염색을 하지 않는다는 걸 생각하면 특이한 일이다.

'그러고 보니 본부장님도 황금색 눈동자였었지.'

둘 다 외국인처럼 머리색이 황금색이지만 생김새 자체는 전혀 달랐다. 본부장인 자영의 얼굴선이 아기자기한 동양적인 색깔이라면, 가늘게 떨고 있는 소녀는 서양인 특유의 시원시원한 얼굴곡선을 가지고 있었다. 한 가지 별난 점이라면 보통 코쟁이라면 애나 어른이나 일단 거부감부터 들기 마련인데, 이 소녀는 묘하게 정겨운 분위기가 난다는 것이었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고향친구 같다랄까?

병규는 저도 모르게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정말 귀엽게 생겼구나. 그런데 어쩌다 이런 곳까지 오게 됐니? 외국애가 이런 데 혼자 있으면 위험해. 쓰레기는 오빠가 치워줬으니까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렴."

그러나 소녀는 여전히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주춤주춤 다가오더니 병규의 팔소매를 붙들고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는 것이다.

그때, 묘한 눈길로 소녀를 지켜보고 있던 호랭이가 고개를 휙 쳐들었다.

"사람들의 인기척이 즈껴진다."

"네?"

병규가 미처 호랭이의 말에 어떤 반응을 나타내기도 전,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여섯 명의 사내가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얼굴에 뒤집어쓴 두건과 손가락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단도의 서늘한 칼 빛. 방금 전에 병규가 해치운 괴한과 한패거리임이 분명했다.

"너 생각보다 원한 산 일이 많은 것 같네. 아니면 네 부모님이 그런 걸까?"

병규는 그의 허리에 매달려 있는 소녀를 내려다봤다. 대략 중학생쯤의 나이로 보이는 데, 아직 소녀임에도 불고하고 눈물나게 예뻤다. 인형같이 예쁘다는 말은 꼭 이 소녀를 위해 있는 말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쪽 계열(?)을 즐기는 변태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변태의 눈에 쏙 들 만큼 귀엽고 예쁘다고 해도 저렇게 많은 수의 인원이 한꺼번에 덤벼들다니.

틀림없이 어떤 조직적인 음모가 바닥에 깔려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병규는 그것에 대한 해답을 그녀가 입고 있는 옷차림에서 찾았다. 한마디로 소녀의 옷은 무지하게 비싸 보였다. 비싸서 그런지는 몰라도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촉부터가 평민들의 그것하고는 완전 다르다. 그 야들야들한 감촉에 눈물이 핑 돌 정도다.

'이 애, 아마도 외구계 대기업 회장의 손녀딸이거나. 아니면 국내에 들어온 외국 주요 인사의 딸 정도 되는 거겠지?'

사연을 대충 짐작해 내자 본격적인 고민이 시작된다. 도와주는거야 당연한 일이겠지만 상대가 어디 좀 많아야지. 게다가 죄다 위험한 냄새가 풍긴다.

쩝.

"이걸 어쩐다."

병규는 곤란한 일이 있을 때면 으레 그렇듯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말 몇마디로 해결될 상황은 절대 아닌 것 같다. 게다가 이들의 동료가 저쪽에 거품을 물고 기절해 있는 형편이니.

'이럴 때는 도망이 최고지.'

경계하듯 뒷걸음질치던 병규는 돌연 쓰레기 봉지를 발로 뻥 차고는 그대로 소녀를 안고 잽싸게 점프했다. 이미 인간의 능력을 훨씬 상회하는 신체능력. 단번에 무려 5~6미터를 붕 떠오른 그는 좌우의 벽을 차례로 밟으며 위쪽으로 솟구쳤다.

그런데 일이 쉽게 안 풀리려고 그러는지, 막 옥상으로 오르려 하는 순간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머리 위에서 두 자루의 단도가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엇."

병규는 깜짝 놀라며 급히 신형을 틀었다. 두 자루의 단도는 아슬아슬하게 그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놀라운 일은 이제 막 시작된 것에 불과했다. 놀랍게도 휘릭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빗나간 단도들이 돌연 고개를 휙 틀어 다시 그를 노리는 것이 아닌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뭐야. 이건."

대경실색한 병규. 급한 와중에도 왼손에 요수의 발톱을 꺼내들고 크게 빙글 돌렸다.

티팅.

요행인지 두 자루의 단도 모두를 쳐낼 수 있었다. 하지만 덕분에 균형을 잃고 아래로 떨어지게 되었다.

쉬익. 바람소리가 귓가를 진동한다.

무려 10미터 상공에서 수직으로 곧바로 떨어지는 것이다. 병규는 솔직히 말해 겁이 조금 났다. 저 멀리 보이는 땅바닥이 갑자기 눈앞까지 튀어 오르는데 어느 누가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귀탄에게서 흡수한 능력은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발이 땅이 닿자마자 기묘한 탄성이 허벅지 아래에서 일어나며 반동으로 그를 한 번 더 허공을 튕겨 올렸다. 병규는 제비처럼 몸을 휘돌며 안전하게 착지할 수 있었다.

긴장으로 손발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통증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병규는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저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데도 무사하다니.'

쾌감과도 같은 묘한 전율이 등허리를 훑고 지나간다.

그런 놀라움은 그를 공격한 괴한들도 마찬가지인 듯, 무심한 눈동자들에 놀라운 빛이 잠깐 스쳤다.

그때, 병규의 가슴에 안긴 소녀가 몸을 조금 흔들었다.

'아차차.'

그제야 소녀를 안고 있었음을 상기한 병규는 급히 손을 풀어주었다.

"콜록."

너무 꼭 안고 있어서 숨이 막혔던가 보다. 소녀는 손을 풀자마자 얕은 기침을 했다. 그나마 그 난리 통에도 크게 다친 곳이 없어 다행이다.

"괜찮니?"

소녀는 그 큰 눈으로 병규를 올려다보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아이들 같으면 울기부터 했을 텐데. 어떻게 이런 어린 아이가 이렇게 대범할 수가. 게다가 그 치명적으로 반짝거리는 눈빛이랑. 자칫했으면 상황도 모르고 뺨을 비빌 뻔했다. 하긴 그럴 여유도 없었지만,

"병규. 위!"

호랭이의 급박한 경고성. 병규는 그녀를 안은 채로 발끝으로 땅바닥을 가볍게 퇴겼다. 가볍게 튀겼다곤 하지만 그의 순발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 그의 머리를 노리고 수직으로 떨어진 비도가 땅에 박혔을 땐, 이미 그는 골목의 안쪽 깊숙한 곳에 몸을 착지하고 있었다.

"저 녀석들 칼을 마음대로 부리고 있어요."

병규는 가쁜 숨을 헐떡였다. 호랭이의 경고가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당할 뻔했다.

"아무래도 바람을 부리는 놈들 같다."

"바람요? 어느 녀석이죠?"

그 녀석만 먼저 처리하면 나머지를 상대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병규는 눈을 예리하게 빛내며 골목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오고 있는 녀석들을 차례로 노려보았다.

"한 놈이 아냐. 저 녀석 모두에게서 같은 냄새가 나."

"뭐라고요? 저 녀석들 전부요? 능력자들은 수호신이 있어야 한다면서요. 그렇게 똑같은 능력을 가진 능력자가 한꺼번에 있을 수 있는 겁니까?"

"모르겠다. 하지만 녀석들에게서 똑같은 냄새가 나는 것은 사실이야. 그것도 시궁창에서 흘러나오는 썩은 바람 냄새가 말이야."

코를 킁킁대던 호랭이는 정말로 그런 냄새가 나는 것인지 인상까지 잔뜩 찌푸린다. 유감스럽게도 병규는 후각이 그리 발달된 것은 아니라서 썩은 바람 냄새가 어떤 것인지는 맡아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제 능력자 여섯을 한꺼번에 상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하. 그냥 모른 척하고 가면 봐주지 않을까요?"

"말도 안 통하잖아. 그러고 너 설마 이 여아를 저런 놈들에게 넘길 생각이냐?"

"하하. 당연히 농담이었어요."

호랭이의 추궁에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이는 병규였다.

"어, 그런데 두 녀석이 안 보이네?"

방금 전까지 분명 골목 안으로 들어온 녀석은 여섯이었는데, 잠깐 사이 넷으로 줄었다. 그렇다면 둘은 어디로 간 것일까. 뒤로 빠졌을까? 그렇다면 좋겠지만, 녀석들의 능력이라는 바람과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 있는 다른 한 가지 가능성은....

"제길, 역시 위에 있잖아."

두 놈이 거미처럼 병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호랭이. 얘 좀 잠깐 보살펴 주세요."

호랭이를 소녀의 머리 위에 올려준 병규는 눈썹이 휘날리도록 앞으로 내달렸다. 어차피 소녀가 목적이라면 죽이지 않을 것이다. 방해가 되는 자신을 먼저 처리하려 들 테지.

"억?"

"헛."

병규가 갑자기 앞으로 튀어나오자 입구를 막고 있던 네 놈들은 깜짝 놀라 경악성을 흘렸다. 뭐가 이렇게 빠른지. 몸을 움직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눈앞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재빨리 품에서 꺼낸 단도를 휘두르려 했다.

"너무 늦어!"

벼락같이 외친 병규는 돌연 무릎을 굽혔다 쭉 펴며 허공으로 치솟았다.

빠각.

마침 그에게 칼을 휘두르려 했던 녀석의 턱이 병규의 뒤통수와 부딪히며 통쾌한 소음이 터져 나왔다.

"케엑."

입으로 피를 뿜으며 뒤로 나자빠지는 녀석. 턱뼈는 확실히 박살났을 것이다. 물론 일을 저지를 병규의 뒤통수도 멀쩡할 리 만무했지만 병규는 신음을 흘릴 새도 없이 그대로 나는 새처럼 공중으로 솟구치며 몸을 한 바퀴 휘돌렸다.

까마득히 멀어진 지상.

그리고 금발의 소녀를 향해 수직 하강하고 있는 두 녀석. 병규는 자신을 노릴 것이라 생각했지만 녀석들은 병규가 빠져나가자 얼씨구나나 하며 그녀를 노렸다.

"저 녀석들이!"

으득 이를 깨문 그는 그대로 건물 벽에 두 다리를 착 모았다. 수직으로 선 벽에 두 다리를 대고 수평으로 서게 된 병규, 마치 중력의 영향에서 잠시 벗어난 것 같았다.

그러나 지구상의 모든 물체는 반드시 땅으로 떨어진다. 이것은 절대 불변의 법칙, 이미 1660년대 하필이면 사과나무 옆을 지나던 재수 좋은 뉴턴이라는 과학자가 발견해내지 않았던가.

얼굴의 피가 쏠리고, 병규의 몸 역시 자연스레 아래로 쏠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병규는 중력의 힘을 그대로 이용했다.

"으다다다다다!"

다리의 순발력을 폭발시키며 그대로 벽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수직의 벽을 달리는 것이다. 정녕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기사.

물론 괴한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제비처럼 떨어지는 병규의 몸뚱이를 향해 그들은 단도와 수리검을 소금 뿌리듯 뿌려댔다. 헌데 그들의 비쾌한 대응보다 병규의 동물적인 감각이 한 발 앞섰다. 암기가 비처럼 쏟아져오자 병규는 곧장 발을 박차고 맞은편 건물 벽으로 건너뛴다. 그리고 또다시 건물 벽을 평지처럼 내달리는 것이다. 인간의 한계를 넘은 순발력과 무지막지한 점프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헉."

"무슨 저런!"

터져 나오는 경악성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허공을 수놓은 암기들은 지남철을 따르는 쇳가루처럼 병규를 향해 곧바로 방향을 틀어왔다.

병규 또한 암기를 등짝에 수놓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암기가 다가올 때마다 그는 좌우의 벽을 지그재그로 밟아대며 무서운 속도로 소녀를 향해 떨어져 내려갔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그가 몸을 허공으로 솟구친 후부터 요수의 발톱이 계속 건물 벼에 박혀 있다는 것이다. 필설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로운 요수의 발톱은 병규가 움질일 때마다 마치 낙서를 하듯 벽을 긋고 다녔다.

"이 놈들!"

가히 핵탄두와 같은 기세로 무섭게 내리꽂는 병규, 그러나 두 내는 이미 소녀를 품에 안을 정도 까지 가까워져 있었다. 두 눈을 꼭 감은 소녀의 가녀린 얼굴이 막 괴한의 품에 가려질 찰나, 다급해진 병규는 최악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더러운 손 저리 치웟!"

취리릭.

욕설과 함꼐 병규의 입에서 무언가가 채찍처럼 쏘아졌다.

"크악."

뭔가 물컹한 게 눈을 쓱 훑자 두 괴한은 무의식적으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 짧은 틈, 전 체중을 실은 병규의 무릎이 왼쪽 괴한의 목덜미를 후려갈겼고, 그 반동으로 팽이처럼 회전한 병규의 발이 오른쪽 사내의 면상을 그대로 밟아버렸다.

"커억."

"크악."

두 사내는 격한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땅을 굴렀다.

쿵.

두 사내를 박살내며 허공에서 몇 차례나 회전을 거듭한 병규는 결국 균형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등부터 바닥에 떨어졌다.

"아욱. 젠장. 등짝의 수난 시대군."

절로 욕이 나온다. 그나마 두 사내를 이용해 충격을 줄였으니 망정이지 그대로 등부터 떨어졌다면 그대로 등뼈가 아작 났을 것이다/

"아파?"

몸을 움츠리고 있던 소녀가 쪼르르 달려와 병규를 부축하며 짧게 물었다. 그 순진한 눈동자에 병규는 고통 중에도 불구하고 여색하게 웃었다.

"아, 아냐. 괜찮아."

힘드 없으면서 부축하려고 낑낑거리는 소녀의 따뜻한 손길에 등허리를 진동하는 통징이 휙 하니 날아가 버린다. 하지만 통증은 소녀 때문에 잠시 잊는다 해도 입안의 찝찝함만은 어쩔 수 없었다.

"퉤퉤. 으...짜! 웬만하면 얼굴 좀 세탁하고 다니지."

병규는 오물이 묻기라도 한 것처럼 침을 뱉었다. 아무리 위급한 상황이었다지만 음식 맛이나 평가할 귀한 혀가 남의, 그것도 딸랑딸랑한(?) 사내자식의 눈탱이를 훑었다는 것이 영 찝찝했다.

침을 퉤퉤 뱉으며 병규가 몸을 일으키는 동안 좁은 골목길엔 잠시 정적이 흘렀다. 괴한들은 말이 없었다, 오직 바닥에 누운 세 명의 신음만이 흘러나올 뿐.

병규가 건물 벽을을 평지 달리듯 달리고 다시 두 사내를 번개같이 박살낸 것은 필설로는 길었지만 실제로는 눈 깜짝할 만큼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것으로 평범한 사람이 보았다면 병규가 허공에서 몸을 뒤틀며 벽에 두 발을 가져간 순간, 갑자기 소녀를 덮쳐가던 두 사내가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

말이 없던 괴한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순식간에 동료 셋이 쓰러졌다. 상대를 얕보던 마음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 이제는 이 강적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논의해야 했다.

방법은 오직 하나. 셋이 동시에 달려드는 것. 지금까지 본 대로라면 녀석은 점프력과 빠른 몸놀림 외에는 별다른 무기가 없는 것 같다. 손끝에서 그림자처럼 푸르스름하게 솟구쳐 나온 발톱모양의 기운이 의심스럽긴 하지만 쓸데없이 건물 벽에다 낙서나 하는 용도라면 굳이 경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차차창.

괴한들이 허리에 손을 가져가자 그들의 허리띠가 쇳소리를 내며 곧게 펴졌다.

"요대검!"

호랭이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요대검은 허리띠 대신 허리에 차는 몽창몽창 휘는 부드러운 검으로 보통 연검이라 부르는 물건이 바로 이것이다. 요대검은 검신이 매우 유연하고 탄력적이며 칼날이 매우 날카롭다. 또 워낙에 검신이 잘 휘므로 수련하기 어렵지만 대신 제대로만 익히면 초식의 무한한 활용이 가능해 상대하기 매우 까다로웠다.

팟.

요대검을 꺼낸 세 복면인이 동시에 몸을 날렸다. 한 명은 위로, 나머지 둘은 바닥에 기듯이 낮게 달려든다. 그야말로 바람처럼 표홀하고 날카로운 움직임. 게다가 삼인이 일체가 되어 위와 아래로 동시에 덤벼드니 엄밀한 그물망에 갇힌 듯 상대하기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병규는 소녀에게 엉거주춤 부축을 당한 상태로 별반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서워서 얼굴이 파랗게 질린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입가에 그려진 미소는 마치 사냥감이 덫에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사냥꾼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바보들. 누가 쓸데없이 벽에다 낙서를 하겠냐?"

말과 동시에 병규의 몸이 분리되기라도 한 것처럼 빠르게 움직이며 좌우의 벽을 뻥뻥 걷어찼다.

괴한들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저 놈이 미쳤나? 왜 갑자기 쓸데없이 벽을?'

그들의 생각이 미쳐 끝나기도 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쩌저저저적.

놀랍게도 병규의 가벼운 발길질에 두꺼운 건물 병이 마치 하늘에서 내리꽂는 뇌전을 그대로 모셔온 것처럼 요란한 소음과 함께 쩍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괴한들의 입 또한 갈라지는 벽과 함께 위아래로 쩍 벌어졌음은 물론이다. 그물망처럼 잘게 쪼개진 벽, 벽을 걷어찬 뒤 괴한들을 향해 씩 웃어주는 병규, 그다음은 뻔한 수순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우르르르르릉.

거대한 진동과 함께 좌우의 빌딩 벽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먼저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던 괴한이 쏟아지는 돌덩이에 '켁' 하면서 떨어졌고, 그 다음은 우박처럼 쏟아지는 건물 잔해 아래에서 얼이 빠져 있는 두 괴한의 차례였다.

"잘 가~"

얄밉게도 병규는 간물 잔해 속으로 묻히는 괴한들을 향해 정답게 손을 흔들어 주기까지 했다.

휘이이이~.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하늘 높이 솟구친 먼지구름을 날려버렸다. 진하게 묻어나던 먼지가 가라앉자 그 속에서 사람인지 먼지덩어리인지 구분하기 힘든 세 개의 작고 큰 덩어리가 움직이는 게 보인다.

"이런 무식한 자식아! 무슨 일을 이렇게 과격하게 처리해."

호랭이가 몸을 푸르르 떨며 고함을 쳤다.

"하하하.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병규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멋쩍게 웃었다. 얼마나 먼지를 뒤집어썼는지 검은 머리카락이 아예 허옇게 보일 정도였다.

"그러다 사람이 죽었으면 어쩔 뻔했냐?"

성을 내는 호랭이의 음성에 한 가닥 근심이 서려 있었다. 아무리 막무가내로 나가는 호랭이라고 해도 신분이 신선인지라 살생이 꺼려지는 건 당연했다. 그건이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도 말이다.

"에이. 설마요. 저 녀석들도 한 가닥 하는 능력자니, 틀림없이 무사할 거라 믿었어요. 뭐, 그래도 죽는다면 어쩔 수 없죠. 정당방위니까요. 먼저 죽이려 한 건 녀석들이니까 재수 없게 죽어도 어쩔 수 없죠. 천벌입니다. 하하하."

"휴. 간단해서 좋구나."

호랭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먼저 날 죽이려 했으니 죽어도 싸다니. 신선인 호랭이의 입장에서 본다면 참으로 발칙한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었다. 뭐, 그래도 이번엔 특별히 봐주기로 했다. 다행히 일곱 녀석의 심장소리가 아직 들려오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무섭게 쏟아지는 건물 잔해 속에 파묻히고도 살아있다니.

"대체 누구 운이 좋은 건지 모르겠군."

호랭이의 툴툴거리는 음성에 한 간닥 안도의 숨이 섞여 있었다.

"문 닫은 공장들이었던 모양이네요."

괴한 셋을 파묻고 무너진 벽 내부엔 흰 천으로 뒤덮인 기계들 뿐, 사람의 그림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좌측의 건물은 타이어 조각이 널려 있었고, 우측엔 상자마다 수북하게 쌓인 작은 컴퓨터 칩들이 보였다.

대한민국에 장기불법체류 중인 불황의 현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영 씁쓸했다.

"사람은 없지만 여기 오래 있어서 좋을 건 없다."

호랭이가 한마디 한다. 건물에 사람이 없었다 해도 이 정도 소란이면, 벌써 경찰서나 소방서에 연락이 갔을 것이다. 여기 계속 있어봤자 귀찮은 일에 휩싸일 뿐이다.

"네."

고개를 끄덕인 병규는 그의 소매를 꼭 붙들고 있는 소녀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소녀는 뿌옇게 쌓인 먼지를 전혀 털 생각도 않고 큰 눈을 말똥거리며 병규를 올려다본다. 먼지를 뒤집어쓴 모습이 꼭 밀랍으로 만든 인형 같았다.

"자, 귀여운 아가씨. 우리 이 지긋지긋한 골목을 나가서 쭈쭈바나 빨면서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차분히 대화 좀 나눠볼까요?"

병규가 손을 내밀자 소녀는 무표정한 얼굴에 한 줄기 가는 미소를 보이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와. 웃으니까. 예쁜걸?"

병규는 환하게 웃으며 소녀의 코를 꼬집어 주었다. 손을 때자 소녀의 코에 손자국모양으로 뽀얀 살이 묻어 나온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작은 둔덕처럼 쌓여 있는 건물 잔해를 넘어 골목을 나섰다. 그러나 어두운 골목 밖으로 발을 내디디는 순간 병규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흐읍. 이 녀석들은.... 뭐지?"

귓구멍으로 거칠게 파고드는 탁한 음성.

골목 밖,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한 패거리의 검은 복면인들과 목에 가래라도 걸린 듯 탁한 음성을 뱉어내고 있는 거대한 떡대. 그리고 상상하기도 싫은 괴물, 귀탄이었다.

2. 안녕하십니까. 바퀴벌레 왕자입니다!

눈앞에 펼쳐진 어이없는 광경에 병규와 호랭이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절로 욕이 나온다.

어찌 욕이 안 나올 수 있을까. 힘겹게 일곱 괴한을 물리치고 몸도 마음도 가볍게 날라라~ 나서는데, 그 앞을 가로막는 다섯 명의 흑의 복면인과 괴물, 그리고 괴물에 준하는 거대한 덩치라니.

게다가 저 놈들. 이런 큰 소란이 벌어졌는데도 별달리 긴장한 구석이 없다. 게다가 검은 복면을 뒤집어쓴 새카만 놈들은 아예 대놓고 칼을 등에 메고 있는 게 아닌가.

대한민국 경찰이 엄청 우습게 보였나 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저렇게 버젓이 불법무기들을 메고 다닐 수 있을까.

병규가 속으로 욕을 하고 있을 때, 그나마 냉정함을 잃지 않은 호랭이는 차분히 흑의인들을 둘러보며 긴장감을 높이고 있었다. 일본도를 등 뒤로 비스듬히 비껴 찬 흑의인들에게서 좀 전에 상대한 괴한들과 같은 기운이 느껴졌던 것이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아까 전 그 놈들은 장난이었군.'

굳이 능력차를 계산한다면 세 배, 아니 네 배 정도?

아주 안정적이라고 할까. 좀 전의 괴한들이 기운을 주체하지 못하고 마음껏 방출하고 있다면 이 녀석들은 제대로 갈무리하고 있다.

'이 검댕이 녀석들을 상대하려면 골치 아프겠어. 저 망할 놈의 괴물도 그렇고. 하지만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아까부터 호랭이의 신경을 박박 긁고 있는 것은 이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거대한 덩치였다. 신장은 대략 2미터 30센티미터 정도. 엄청난 키에 또 몸은 얼마나 비대한지 스모 선수들은 감시 그 앞에서 몸매 예기도 못 꺼낼 판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기괴한 모양인데, 맨들맨들한 대머리에 입과 코를 감싼 강철 마스크, 또 어설픈 폭주족 흉내라도 내는 것인지 가죽을 잘라 만든 것 같은 옷엔 수많은 쇠사슬들까지 주렁주렁 매달려 있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쇳소리가 울렸다. 가히 스크린에서나 등장할 만한 해괴한 몰골이 아닌가.

생긴 것도 기괴하고 옷차림도 기괴하다. 말투는 더더욱 거슬렸다. 하지만 무엇보다 호랭이의 신경을 자극하는 것은 놈에게서 아무론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단 한 가지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능력자. 이 녀석은 능력자다. 그것도 상당한 수준의.'

능력자는 수호신에게서 힘을 빌어오기 때문에 그 자신은 별 다른 기운을 풍기지 않는다. 때문에 천하의 호랭이조차 능력자를 구별해낼 수 없는 것이다.

'오늘 일은 힘들지도 모르겠다.'

호랭이는 갈기를 잔뜩 일으켜 세웠다.

물론 이 거대한 떡대는 얼마 전 어두운 지하실에서 밀령을 받고 출동한 그 작자, 바로 오가마였다.

'대화, 이번엔 어떻게는 대화로 해결해야 된다.'

호랭이가 오가마를 보며 긴장을 높이는 동안 병규는 나름대로 활로를 모색하고 있었다. 지금 저 인원가 정면으로 부딪혔다간 곧장 천국행 편도 여행을 떠나게 될 것이 뻔하다.

그래서 그는 우두머리로 보이는 오가마와 대화를 시도하려 했다. 어떻게든 말로 해결을 봐야 한다. 아니면 경찰이 들이닥칠 때까지 시간이라도 벌어야 했다.

그러나 마음이 급하다고 그의 돌 같은 머리마저 급하게 회전이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결국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는 게....

"하하하. 저, 저기 무슨 일로 이렇게 우르르 몰려오셨나요? 조, 좋은 구경거리라도 있나 보죠? 저희는 지나가던 길에 봉변을 당해서. 아하하하. 갑자기 건물이 왜 무너졌을까? 아이 참. 시원하게 무너졌네. 하하하하."

라는 썰렁한 얘기였다.

당연하다는 듯이 오가마를 비롯한 흑의인들은 깔끔하게 그의 말을 무시했다. 사실 이 중에서 한국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도 고작 두 명에 불과했다. 한마디로 병규의 발악은 헛짓거리에 불과했단 소리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계속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하하. 바쁘신가 보네요. 그, 그럼 볼일 보세요. 저희는 그만 가, 가봐야겠네요. 하하하."

스스로도 뭐라고 지껄이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어수선을 떤 병규는 소녀의 손을 잡은 채 삐걱거리는 걸음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흐읍... 이상한 놈."

그의 엉성한 핑계에 대한 오가마의 대답은 그저 손가락 하나를 가볍게 튕긴 것뿐이었다. 순간 오가마 주위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던 흑의인들의 모습이 날카로운 바람소리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으악!"

소녀의 손을 붙들고 소박맞은 새색시인 양 쫄랑쫄랑 뛰어가던 병규는 갑자기 발밑에서 칼이 튀어나오자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었다. 특유의 순발력과 반사 신경으로 간신히 기습을 피한 그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했다.

어설픈 핑계가 안 통할 것이란 건 익히 짐작했던 일이지만 돌연 발밑에서 칼이 튀어나올 줄이야. 이번만큼은 호랭이의 경고조차 없어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녀석들은 기척이 읽혀지지 않아."

호랭이가 난감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더 이상 호랭이에게 기댈 수 없다는 말이 된다. 놈들의 변칙적인 공격에 안 그래도 환장하실 노릇인데 호랭이의 도움마저 없다면 한층 더 힘겨운 대결이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노릇.

파팟!

칼 두 자루가 땅속에서 튀어나온다. 마치 땅속에 박아 놓은 것처럼 삐죽 튀어나온 칼은 땅 속을 헤엄이라도 치듯 을씨년스런 모양 그대로 땅을 가르며 달려들었다. 사타구니를 갈라오는 두 자루 칼의 그 끔찍함이란.

"우왁. 이건 남자를 두 번 죽이는 공격이라고!"

울부짖듯 소리친 병규는 두 손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요수의 발톱이 땅속을 푹 파고들자 흙바닥이 폭발하듯 일어나며 흑의인 두 명이 튀어나왔다. 그중 한 명은 요수의 발톱에 당했는지 어깨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이제 모습을 보이는구나. 맛 좀 봐라."

드디어 흑의인들을 보게 된 병규는 팔소매를 걷어붙이며 씩씩하게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그는 곧 다시 뒤로 다다다 물러서야 했다.

또 다른 흑의인 둘이 무섭게 벼려진 일본도 위에 올라탄 채 붕 날아왔기 때문이다.

"이건 사기야. 닌자라면 방패연에 매달려야지. 칼을 타고 다니는 게 어디 있어. 이 개사기 닌자들아!"

병규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다시 한 번 울부짖었다. 그런 병규를 보며 호랭이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녀석은 시커먼 놈들의 비겁한 공격 때문에 화가 난 거야? 아니면 시커먼 놈들이 닌자답지 않아서 화가 난 거야?'

답이 무엇이건 간에 병규는 흥분한 화중에도 비교적 깔끔하게 대응해 내고 있었다.

요수의 발톱을 풍차처럼 붕붕 휘둘러대며 미간을 노리고 날아드는 일본도를 잘게 쪼개버리고, 그대로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몸을 꽈배기처럼 틀며 두 발로 일본도에서 뛰어내린 흑의인 둘을 걷어차 버린다.

마치 시원한 브레이크 댄스를 보는 것 같은 몸놀림.

대응이 얼마나 깔끔하고 시기적절한지 호랭이가 다 놀랄 정도였다.

'뭐야. 이 녀석. 갈수록 몸놀림이 좋아지잖아.'

경험이 늘수록 강해지는 거야 당연한 말이겠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이 녀석은 정말로 하루하루가 다르다.

'천부적인 감각? 그것도 아니면 숨겨진 능력이 드러나는 것일까?'

호랭이로서도 그 이유 무엇인지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답이 무엇이건 간에 병규의 수호신과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이란 것이엇다.

"앗. 위험해."

흑의인들의 괴상한 공격에 병규가 정신을 팔고 있는 틈을 타고 땅속에서 솟구쳐 오른 칼 한 자루가 소녀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놀란 병규가 소리를 지르며 막으려 들자 갑자기 휙 하고 방향을 바꾼다.

"으앗."

병규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처음부터 칼을 소녀를 노린 것이 아니었다. 소녀를 미끼로 병규를 노린 것이다.

"피햇!"

호랭이가 캥 하고 울었다. 거의 동시에 병규의 고개가 발작적으로 돌아갔다.

찍.

회심의 일도가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이, 이 녀석들!"

뺨을 타고 턱 아래로 방울방울 덜어지는 핏방울을 응시하던 병규의 입에서 억눌린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그의 두 눈에서 시퍼런 요기가 불길처럼 타오르며 요수의 발톱이 순간적으로 두 배 가까이 길어진다.

"감히!"

성난 분노의 불길이 땅 밑을 파고들었다.

퍼펑.

폭발하듯 흙이 터져 나가고 땅 속을 파고 들어간 그의 손아귀에 흑의인 한 명이 대롱대롱 매달려 올라왔다.

"!"

시퍼렇게 빛나는 병규의 두 눈을 보게 된 흑의인의 표정이 하얗게 질려간다. 한 밤에 만난 사신이 자신의 목에 낫을 들이댈 때의 그 절망과 막막함이라고 해야 할까.

"손은 쓰지마."

호랭이가 경고했다.

무쇠조차 쩍쩍 갈라버리는 손톱이니 사람을 썰었다간 어찌 될까. 모르긴 몰라도 푸줏간에 걸려 있는 고기들 보다 모양새가 안 날 거이다.

"알고 있습니다."

병규는 분노가 불처럼 이글거리는 상황에서도 신기할 정도로 제대로 알아들었다.

퍽.

둔탁한 소리. 순간 흑의인은 배에 묵직한 통증을 느끼고 그대로 엎어졌다. 창자가 가닥가닥 찢어지는 고통이란.

웩웩.

사내는 그대로 상체를 접은 채 위장에 든 것을 토해 냈다. 병규는 구토하고 있는 사내를 차갑게 내려보았다.

"비겁한 녀석."

그는 그대로 사내의 머리를 발로 밟아버렸다.

"큭."

발아래 깔린 녀석의 머리통이 바르르 떨리다가 곧 축하고 쳐진다.

쉬쉬쉭!

동료를 구하기 위해 복면인 둘이 성게 모양의 표창을 날렸다. 흑의인들과 관련된 것이면 무엇 하나 단순한 것이 없었다. 그 작은 표창들마저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복잡한 괘선을 그리며 쏟아지는 것이 아닌가.

"이것들이."

병규는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둘렀다.

부아앙.

손가락 끝에서 길게 뻗어나간 요수의 손톱이 허공을 찢어발기며 길게 울부짖는다. 그 울부짖음이 그리는 궤적에 수많은 암기들이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지고, 요행이 요수의 갈퀴 사이를 파고든 몇 개의 암기는 병규의 눈부신 움직임을 따라잡지 못하고 그저 맨 허공을 갈랐다.

"나 화났다."

병규의 성난 분노가 하늘을 쩌렁쩌렁 울린다. 어린 소녀까지 이용하는 놈들의 치졸한 공격에 드디어 그의 눈이 뒤집힌 것이다.

"크아아아아아!"

한바탕 성난 괴성을 토해 낸 그는 요수의 발톱을 인정사정없이 휘두르며 흑의인들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그의 분위기가 얼마나 험악한지 차분하고 조직적인 공세를 펴던 흑의인들조차 일시 당황하며 놀란 메뚜기인 양 사방으로 튀어 달아났고, 병규는 질풍노도의 기세로 그들의 뒤를 쫓았다.

"이리와아!!"

그러나 그는 그렇게 분노하여 막무가내로 달려 나간 때문에 소녀에게서 멀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 채 걱정스런 표정으로 병규를 보고 있던 소녀는 문득 자신의 주위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구름?'

무심코 위를 올려다 본 소녀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거대한 거한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흐음. 오로치가... 찾는 꼬맹이가... 너냐? 흐음. 어리...군."

거한은 다름 아닌 오가마였다.

어린아이라면 경기 일으키기 딱 좋은 몰골의 오가마. 그러나 그의 뒤에 우두커니 선 괴물에 비하면 그는 그나마 준수한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까드드드드드.

목을 부풀리면서 나는 기이한 울음. 그리고 그 코를 쥐게 하는 독한 냄새란. 게다가 키는 얼마나 큰지 머리 꼭대기를 쳐다보기 위해선 작은 소녀는 아예 뒤로 누워야 할 판이었다.

"하...."

갓파를 올려다보던 소녀의 동공이 활짝 열린다. 그리고 급기야 그 작고 앙증맞은 입술도 활짝 열려 버렸다. 하지만 소녀의 입술을 뚫고 나온 소리는 누구나 상상하던 그런 비명이 아니었다.

"화아."

탄성. 그리고 꽃망울을 터트리려는 꽃송이처럼 영롱한 웃음. 놀랍게도 소녀는 갓파의 흉악한 몰골을 보고 황하게 웃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손을 내민 채 타박거리는 걸음으로 갓파에게로 걸어갔다.

그녀가 한 걸음씩 가까워질 때마다 괴물의 숨소리가 높아진다. 누구보다 놀란 것은 오가마였다.

"흐읍. 안 돼!"

거칠게 외친 오가마는 막 갓파의 발을 잡으려드는 소녀의 앞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콰앙.

엄청난 주먹 힘에 땅이 반 자가량 푹 꺼져버렸다. 소녀는 깜짝 놀라 두어 걸음 물러섰다. 그러면서 애처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오가마는 소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대충 분위기로 말뜻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는 갓파를 가리키며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흐읍. 죽고... 싶냐? 이 녀석...은 사람을 먹는다. 흐읍. 지금도... 간신히 다루고 있는...데. 네가 건들면... 후읍. 당장 먹어 버릴걸?"

이것은 결코 소녀를 위협하기 위해 한 말이 아니다.

실제로 그들이 부리고 있는 갓파는 사람의 뇌수를 즐긴다. 그리고 통제가 제대로 안 되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은 야마타노 오로치의 강력한 최면으로 간신히 부리고는 있지만 언제 어떤 계기로 금제가 풀릴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아가마가 이 골칫덩어리를 굳이 데려온 것은 혹여나 반도의 능력자들과 싸우게 되었을 때를 대비한 것이었다. 경찰 따위는 처음부터 안중에도 없었다.

하지만 소녀는 오가마의 그런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하긴 아예 그의 말조차 알아듣지 못하니.

그녀는 두 볼을 팽팽하게 부풀리며 오가마에게 소리쳤다.

"어린 아이. 안 나빠. 아저씨. 나빠."

부정확한 발음으로 소리친 그녀는 갓파를 올려다보며 맑은 음성으로 외쳤다.

"착한 아기. 나쁜 아저씨. 혼내."

"흐읍. 뭐라는 거냐. 흐읍. 기분... 나쁜 계집. 일단... 흐읍. 네 입부터 막아야... 겠군."

오가마는 솥뚜껑 같은 두 손으로 소녀를 움켜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소녀를 한 치 앞에 두고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무언가가 그의 어깨를 콱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흐읍. 어떤...."

고개를 돌리자 녹색의 커대한 덩어리가 눈 안으로 가득 차 온다. 그를 내려다보는 세로로 커다랗게 갈라진 것은 놀랍게도 눈동자.

황망하게도 그의 어깨를 잡아 붙든 것은 제어되지 않는 괴물, 갓파였다.

"흡. 뭐...?"

그의 답답한 숨소리가 빨라진 순간, 도저히 움질일 것 같지 않은 오가마의 거대한 몸이 붕 떠올라 그대로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쿠아아앙.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대지가 흔들린다.

"이런. 흐음."

오가마는 땅바닥에 누워버릴 것이 믿기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인정하긴 싫어도 분명한 사실. 그리고 그를 메친 것은 지금까지 수족처럼 부리던 괴물, 갓파다.

"마수를... 마음대로... 흡. 부릴 수... 있다는 말. 흡. 사실이었군."

놀라 부르짖는 그를 갓파가 지그시 내려다본다.

까드드드드드.

놈의 목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착한 아기. 부탁해."

갓파에게 한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 준 소녀는 곧바로 병규에게로 뛰어갔다.

병규는 아직까지 눈이 뒤집힌 상태 그대로였다. 미친 듯이 괴성을 지르며 흑의인들을 쫓아다니고 있었다.

좋지 못한 상황이다.

처음엔 그의 과격한 행동에 당황하던 흑의인들이었지만 지금은 차츰 태세를 정비하며 조직력을 되찾고 있었다.

그녀가 타박거리는 뜀박질로 채 몇 걸음 걷기도 전에 흑의인 하나가 칼로 병규의 머리를 찍어내고 있었다.

놀란 소녀는 급히 두 손으로 인을 맺으며 힘껏 소리쳤다.

"실드!(Shield)"

"이놈아, 제발 정신 좀 차려라."

병규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호랭이는 정말로 필사적으로 외쳤다. 처음 열이 뻗쳤을 때만 해도 어느 정도 이성이 잇는 것 같더니 지금은 완전히 미쳐 날뛰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도 없는 지 주위 기척을 좇아 동물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눈이 뒤집히면 앞이 안 보인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정말 그러는 놈은 처음이네. 오래 살다 보니 별의별 놈을 다 보게 되는구나.'

호랭이는 어떻게는 병규를 진정시키고자 노력했다. 그의 귀를 깨물기도 하고 어깨를 할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병규는 더더욱 날뛸 뿐이었다. 이쯤 되자 호랭이도 더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지금으로선 무섭게 돌아치는 병규의 어깨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것도 힘에 벅차다.

그런 와중에 호랭이는 보게 되었다. 병규의 머리를 갈라오는 한 자루의 칼을!

"이놈아. 정신 차려!"

호랭이는 목이 터져라 버럭 고함을 질렀다.

우뚝. 혼신을 다한 것이라 봉인된 신력이 흘러나왔는지 이번엔 약간이나마 효과가 있었다. 발광하던 병규의 몸이 잠시 멈춰진 것이다. 그러나 피하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칼은 이미 병규의 이마를 쪼개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가냘픈 소녀의 음성이 들린 것은.

"실드!"

그리고 믿지 못할 기적이 일어났다. 병규의 머리 위로 거무스름한 빛깔의 투명한 막이 생겨난 것이다.

짜가강.

투명한 막과 검이 부딪히자 불꽃이 요란하게 튀었다. 투명한 막은 유리 깨지듯 산산이 부서졌지만 사내 역시 무사하진 못했다. 용하게 칼을 놓치진 않았지만 반탄력으로 호구가 찢어지며 뒤로 벌러덩 자빠져 버리는 것만은 면할 수 없었다.

"큭!"

그 와중에 병규가 정신을 차렸다. 눈앞을 번득인 현란한 칼 빛과 찢어지는 소음이 자극이 되었던 모양이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이놈아. 이제 정신을 차렸냐? 상황 파악은 일단 나중으로 미루자. 저 녀석. 넘어진 녀석을... 빨리!"

호랭이의 급박한 재촉에 병규는 혼란스런 상황에서 그대로 몸을 한 바퀴 빙글 돌리며 발로 녀석의 가슴을 찍어 버렸다.

뽀각.

"컥."

뼈 부러지는 소음이 터졌다. 모르긴 몰라도 갈비뼈 두세 대는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는 부족하다. 갈비뼈가 부러져도 사람은 충분히 움직일 수 있다. 물론 바라의 기운을 이용해서 칼을 마음대로 부릴 수도 있을 것이다.

호랭이는 어정쩡하게 쓰러트려서 후환을 남기느니 아예 기절시키는 쪽을 낫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놈 말고도 상대해야 할 녀석이 셋이나 남았다.

"확실하게 기절시켜."

호랭이의 호령에 벌떡 일어난 병규는 엎어져 있는 사내를 향해 발을 날렸다. 혹시나 부러진 가슴뼈가 폐를 찌를까 봐 아예 눈 딱 감고 뒤통수를 힘껏 찼다.

퍽.

수박이 땅바닥에 떨어졌을 때의 질퍽한 소음이 터지며 사내의 몸이 축 늘어진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사내를 기절시킨 병규가 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물었따. 눈앞에 붉게 보이고, 심장이 무섭게 뛰고 있다. 잠깐 동안 정신을 놓았던 것 같은데 일이 어떻게 된 일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녀석아. 너 잠깐 정신이 나갔었단 말이다. 대체 어떻게 된 거냐?"

"글쎄요."

병규는 머리를 긁적였다. 왜 잠깐 정신이 나간 걸까. 도무지 모르겠다. 녀석들이 소녀까지 이용하는 걸 보고 화가 머리끝까지 뻗쳤던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혹시 내 수호신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의혹이 강하게 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 따름이다.

"아직도 딴 생각이냐? 아직 세 놈이나 남았다. 정신 바짝 차려."

호랭이의 호통에 병규는 느슨해진 경각심을 곧추세웠다.

과연 동료가 쓰러지는 모습에 잠시 주춤했던 놈들이 즉각 반격을 가해왔다.

두 녀석이 현란하게 몸을 날리며 병규의 좌우로 달려들었다. 녀석들은 영악하게도 조금 거리를 두고 각종 암기들을 소나기처럼 뿌려댔다.

'다 막는 건 불가능해.'

빠르게 판단한 병규는 가볍게 발끝을 튕겼다. 그의 몸이 긴 호선을 그리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발밑으로 암기들이 스쳐간다. 몰론 영화에서처럼 빗나간 암기들을 사이좋게 대신 맞아주는 멍청한 엑스트라들은 이 자리에 없었다. 암기가 빗나가자마자 두 녀석은 곧장 그를 향해 몸을 솟구쳤다.

칼을 비켜 세우며 날아드는 놈들의 눈가에 득의의 미소가 떠오른다.

멍청한 녀석. 허공에서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진리. 급한 마음에 몸을 띄웠겠지만 그것이 도리어 제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과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만의 생각이었다. 물론 허공에서 운신이 자유롭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대책도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흑의인들의 결정적인 실수는 그들이 더 이상 암기를 쓰지 않고 칼로 병규를 베려 했다는 것이다. 물론 암기를 던지고 싶어도 방금 다 소비해서 어쩔 수 없었겠지.

휘이이잉.

병규가 팔랑개비처럼 몸을 휘돌자 시리도록 푸른 음영이 허공에 그려졌다. 그가 가진 최대의 무기. 요수의 발톱이었다.

쩌거겅. 쩌겅.

흑의인들의 칼은 그야말로 수수깡처럼 부서져 나갔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이 채 일그러지기도 전에 병규의 두 다리가 날아들었다.

퍼퍽!

둔탁한 소음이 터지고 두 흑의인은 볼품없는 모양으로 땅을 굴렀다. 쓰러지는 그들 사이로 병규가 고양이처럼 날렵한 자세로 뛰어내렸다.

멋들어지고 완벽한 승리. 여유만 있으면 승리의 V 자라도 그려주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그 장면에 그가 상상도 못한 반전이 있을 줄이야. 쓰러진 줄로만 알았던 흑의인들이 별안간 몸을 굴러 병규의 팔과 다리에 엉겨 붙는 것이 아닌가.

"엇?"

놀란 병규는 몸을 거칠게 흔들었지만 그들은 꿈쩍도 않았다. 심지어 요수의 발톱이 허벅지살을 마구 헤집어 놓는데도 손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엉겨 붙어 한 덩어리가 된 그들을 향해 마지막 남은 흑의인이 검을 빼어들고 달려들었다.

살을 주고 뼈를 깎는다.

극단적인 처방을 내린 셈이다.

두 흑의인에게 잡혀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황. 동료의 희생을 딛고 병규를 향해 단도를 날리는 놈의 입가에 미소가 보였다. 그러나....

취리릭.

채찍 소리? 막 칼을 날리려는 순간, 뭔가 뭉클한 것이 얼굴을 쓱 훑어오는 것이 아닌가. 칙칙하고 끈끈한 무엇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자동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지만 그는 제대로 수련을 거친 고수. 무의식적인 반응과는 별개로 두 팔은 그대로 병규를 베어갔다.

그러나 눈을 감는 바람에 그는 작은 그림자 하나가 달려드는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호랭이님께서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병규와 사내 사이에 다리처럼 놓여진 긴 혓바닥. 그 위를 바람처럼 내달린 호랭이는 발톱을 팍 세워서는 막 표창을 날리려 하는 사내의 얼굴에 긴 사선을 그어 주었다.

"끄악!"

면상이 찢겨나가는 통증에 사내는 비명을 질렀다.

퍼펑.

두 번의 폭음. 그리고 뭔가 묵직한 것이 쓰러지는 소음이 들려왔다. 그는 얼굴에 묻는 축축한 것을 손으로 쓱 문대며 재빨리 앞을 살폈다.

맙소사.

잠깐 사이 목숨을 걸고 적의 손발을 묶었던 두 동료는 배를 부여잡은 채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의 귓가에 들려오는 섬뜩한 음성.

"퉤퉤. 너 감히 내 순결한 혓바닥으로 너의 면상을 핥게 했지? 괘씸한 녀석. 혓바닥의 순정을 가져간 악독한 놈. 넌 다른 놈보다 딱 두 배만 더 맞아라."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일행 중에 드물게 한국말을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거짓말!!!'

그는 소리쳤다. 자신의 얼굴을 쓱 훑고 지나간 게 이 녀석의 혀라고? 그건 이미 인간이 아니잖아!

"아리에나이!(말도 안 돼)"

그는 비명을 질렀다. 그런 그를 무참히 짓밟는 병규의 한마디.

"시끄러! 뭐라 하는지 못 알아듣겠어. 일단 맞아!"

퍽퍽퍽퍽퍽.

음침한 골목길을 통쾌하게 울리는 소음. 털썩. 마침내 묵은 쌀자루같이 사내가 퍼져버렸다. 그런데 상태가 다른 녀석들에 비해 영 안 좋다. 거의 얼굴을 못 알아볼 정도가 아닌가. 가만 지켜보고 있던 호랭이가 한마디 툭 던졌다.

"두 배 라매?"

"이 정도도 많이 봐 준 거예요. 퉤."

땅바닥에 침을 툭 뱉으며 불만스레 대답하는 병규였다.

그럴 수밖에, 첫날 밤 새색시에게 주기 위해 고이 간직하고 있던 혓바닥의 순결(?)을 엉뚱한 놈이 가져갔으니 얼마나 억울했을까. 급하게 뻗어내느라 그만 녀석의 입술에 혀가 잠깐 스쳐 지나갔던 것이다.

"후우"

병규와 호랭이가 흑의인들과의 싸움에서 무사히 승리를 거두자 소녀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겼다.

위태로운 순간도 있었지만 이제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던 그녀는 문득 '착한 아기'가 생각났다. 무서운 아저씨를 상대로 잘하고 있을까? 잘하고 있을 거야. 그 아인 무척 강한 힘을 가졌으니까.

소녀는 '착한 아기'를 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순수하고 맑은 눈에 '착한 아기'의 거대한 등이 보였다.

녹색 이끼와 지글지글 주름진 피부, 거기에 검버섯처럼 드문드문 피어 있는 곰팡이들.

헛구역질이 절로 날 정도로 징그러운 모습이었지만 소녀의 눈에는 오히려 귀엽게만 보였다,

"착한 아기."

소녀는 이상하게 추악한 괴물을 아기라고 불렀다. 그것도 착한 아기라고. 저 거대한 덩치를 보고 왜 '착한 아기'라는 전혀 안 어울리는 이름을 붙였는지 의문이다.

"힘내."

그렇게 소녀가 방긋 웃으며 타박타박 몇 걸음 옮겼을 때였다.

까드드드드드.

괴성에 가까운 울부짖음.

소녀의 걸음이 문득 멈춰졌다.

"착한 아기. 왜?"

그녀의 검은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그리고...

찍!

듬직하게만 보이던 괴물의 거대한 어깨 한쪽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그 사이로 샘솟듯 솟구치는 징그러운 녹색 피.

찌지직.

균열이 점점 더 심해지고 더 많은 피고 솟았다. 균열 사이로 피에 물든 허연 어깨뼈가 보인다.

가슴 앞에 모인 소녀의 두 손이 덜덜 떨려 온다. 그 떨림은 '착한 아기'의 몸에 생긴 균열이 심해질 때마다 점점 더해만 갔다.

쫘아아아악!

벼락? 소녀의 귀에는 정말 그렇게 들렸다. 그 거대한 괴물의 등짝이 젖은 헝겊처럼 허무하게 좌우로 찢겨져 나가고 그 사이로 핏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철퍽!

땅바닥에 쏟아진 핏물이 묵직한 소음을 토하고 범람하는 강물처럼 주르르 퍼져 나간 녹빛 강물은 소녀의 발목까지 찰랑찰랑 차오르며 지독한 악취를 풍겼다. 그리고 그 녹색의 핏물 위로 후두둑 떨어지는 징그러운 내장들.

소녀의 두 눈에서 영롱한 눈물방울이 또르르 굴렀다.

"착한 아기. 일어나. 일어나."

그녀의 가녀릴 두 어깨가 구슬프게 떨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애달픈 울음소리는 곧 이어 들려온 탁한 목소리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후웁, 애... 먹이는...군."

양쪽으로 찢겨져 너덜거리는 괴물 사이로 오가마의 기괴한 몰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양손은 좌우로 뜯겨나간 괴물 조각을 쳐들고 있었다.

설마, 맨손으로 갓파를 찢어발겼단 말인가? 그 엄청난 괴물을?

믿을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그것 말고는 젖은 빨래처럼 그의 양손 아래 축 늘어진 괴물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흡."

오가마를 본 소녀의 입이 한껏 벌려졌다. 무엇에 놀란 듯 그녀의 맑은 두 눈마저 크게 확장되었다.

입. 괴물과의 격투로 벗겨졌는지 그의 코와 입을 가리고 있던 마스크가 어딘가로 없어지고 없었다. 그런데, 저것이 진정 사람의 얼굴일까? 그에겐 코와 입이 없었다, 대신 깊에 움푹 들어간 엄청난 흉터.

거대한 철근이 머리의 절반 가까이 파 들어간 것 같은 엄청난 흉터였다.

"흐읍. 물이... 없으니. 흐읍. 이 녀석 재생... 걱정은 없겠군. 흐읍."

오가마가 두 손을 놓자 피륙을 모두 쏟아낸 괴물의 거죽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털퍼덕,

파란 핏물을 튀기며. 그 처참한 소리에 소녀는 저도 모르게 두 귀를 막았다.

"흐읍, 자... 이제 못다 한 얘기... 흡. 해 볼까?"

찌극. 찌극.

아직 살아 펄떡펄떡 뛰는 괴물의 내장을 밟아 터트리며, 오가마의 거대한 몸이 소녀를 덮어갔다.

"맙소사. 뭐 저런 괴물이."

병규의 몸이 덜덜 떨린다. 절대적 절망감이라고 할까. 비 오는 날 아스팔트 위에서 그렇게 애먹으며 간신히 침묵시킨 괴물이 저렇게 허무하게 무너지다니. 녹색의 피 안개 속을 성큼성큼 걸어 나오는 오가마의 거대한 모습은 가히 지옥의 틈바귀에서 흘러나온 사신의 그것처럼 비춰졌다. 절로 몸과 마음이 위촉되어 버린다.

더불어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의혹.

'대체 저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작은 소녀 하나를 잡기 위한 인원치고는 너무 거창하다. 벌건 대낮에. 닌자 같은 놈들게 괴물, 거기다 그 괴물보다 더 괴물 같은 놈까지. 설사 미국 대통령 딸을 납치한다고 해도 이렇게 크게 일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다.

병규가 정신적인 혼란에 빠져있을 때, 호랭이가 빠른 목소리로 말했다.

"병규야. 도망이다. 저 아이를 데리고 달아나자."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과연 신선, 연륜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어려운 상황에서 가장 최선의 선택을 생각해 내니 말이다.

병규는 즉각 몸을 움직였다. 잠시도 지체할 틈이 없다. 가녀린 소녀는 금방이라도 오가마의 큰 손이 잡힐 듯이 보였다.

온힘을 다한 병규의 몸은 그야말로 한 줄기 바람과 같았다. 아니. 그것으론 부족했다. 눈 한번 깜빡이는 사이 병규는 이미 오가마의 손아귀에서 소녀를 낚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꽉 잡아!"

소녀를 부둥켜안으며 소리친 그는 정말로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렸다.

"흐읍?"

오가마는 문득 손아귀에서 없어진 소녀의 존재에 눈살을 찌푸렸다. 눈동자를 슬쩍 들어올리자 이미 20여 미터 밖을 신나게 내달리고 있는 병규의 등이 보인다.

"어딜 감히."

오가마가 한 손을 내밀었다.

쑥~!

"헉!"

병규는 돌연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무슨 일이야!"

병규의 어깨에서 떨어진 호랭이가 데굴데굴 땅을 구리며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힘없이 대답한 병규는 고개를 품으로 돌렸다.

"괜찮니?"

뺨과 코에 검댕이 잔뜩 묻은 소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요란하게 넘어지는 와중에도 그는 두 손으로 소녀를 꼭 감싸고 보호했던 것이다.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쉰 병규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데 되지 않았다. 일어서기는커녕 팔에 힘조차 들어가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억눌린 것과는 달랐다. 힘이,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그런 증상은 비단 그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젠장. 왜 이래."

호랭이는 등을 땅에 대고 발라당 누운 그대로 괴로운 비명을 질렀고, 소녀는 병규에게 깔린 채 가쁜숨을 할딱였다.

"저 녀석의 능력이 바로 이거구나."

"힘을 줄 수가 없어요."

"두꺼비. 녀석의 수호신은 사람의 생기를 흡수하는 두꺼비 놈인가 보다."

"그럼 어떻게 하죠?"

"없어. 적어도 지금 이 몸으로는. 돌아버리겠네. 도력이 돌아오면 간단한 일인데."

호랭이가 안타까운 듯 소릴 질렀다.

치르릉. 치르릉.

귓전을 때리는 쇳소리. 오가마의 몸에 붙은 쇠사슬이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시끄러운 소음을 토하고 있었다.

놈이 다가오고 있다.

걸음이 느리긴 하지만 이렇게 손끝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라면 녀석의 걸음이 지금보다 몇 배 느리더라도 대응할 방법이 없다.

"경찰들은 대체 왜 안 오는 거야!"

건물이 무너진 게 언젠데 아직도 안 나타난단 말인가. 아니 이런 소란인데도 인근 주민들은 눈과 귀가 멀었단 말인가. 신고를 해도 수백 통은 했어야 할 텐데.

'이대로 당해주긴 너무 화가나. 무슨 방법이 없을까?'

호랭이는 느릿느릿 다가오고 있는 오가마를 주시했다. 녀석의 한 손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걷는 게 힘든 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녀석은 치켜든 손을 내리지 않았다.

'저 손. 분명 능력을 발휘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손이 가리키는 구역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호랭이는 발을 움직여 보려 애썼다. 안 된다. 미동은 하지만 제대로 움직여지진 않는다.

'그럼 어쩐다? 몸은 꿈쩍도 할 수 없는데. 대체 뭘 움직여야!"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

"병규야!"

"네?"

병규가 눈만 데구루루 굴려 호랭이를 보며 대답했다.

"그렇군. 말은 할 수 있구나."

호랭이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마도 온몸의 근육 중에서 가장 힘이 센 근육이 혀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도 아니면 생기를 뺏기는 부위의 우선순위가 다른 것일 수도 있다. 눈동자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증거다.

'말은 가능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활용할 수 있는 이점은 호랭이의 말은 병규만이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

"병규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라."

"네?"

"묻지 마라. 시간이 없다. 조금 있다 내가 신호하면 네 혀로 힘껏 날 밀어라. 있는 힘껏! 멀리 날려버리겠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그리고 몸에 기운ㄷ이 돌아오면 전속력으로 뛰어라 방향은 아무 쪽이나 상관없다. 알았지?"

"... 알았어요."

"좋아. 그럼."

잠깐 심호흡을 한 호랭이가 입을 ㅎ나껏 벌리며 크게 소리쳤다.

"지금이다."

촤라락.

병규의 혀에서 채찍처럼 뻗어나간 물컹한 살덩이가 호랭이를 밀었다. 호랭이가 워낙에 가벼워 밀어내는 것은 크레 어렵지 않았다.

땅위를 구르며 주르르 미끄러져 나간 호랭이.

"움직일 수 있다."

호랭이는 네 발을 곧게 추스르며 반갑게 소리쳤다. 역시나 녀석의 능력은 일정한 범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호랭이의 계획이 끝난 것은 아니다.

"엇?"

과연 호랭이의 기대대로 오가마는 호랭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 이제 그 손으로 날 가리키는 거야.'

호랭이의 계획이란 사람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하는 것이었다. 본래 사람의 의식이란 예상치 못한 현상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면이 있다. 가령 떨어진 사과 하나를 줍기 위해 허리를 숙이다 사과 전부를 쏟아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

호랭이가 노린 것이 바로 그것이다. 과연 오가마는 능력의 범위에서 빠져나간 작은 짐승에 정신이 팔려 무의식적으로 손을 움직였고, 호랭이의 기운이 빠지는 순간 병규가 벌떡 몸을 일으킬수 있었다.

"됐다."

"달려!"

환호성과 같은 호랭이의 외침. 모든 것은 계획대로다. 그러나 오가마의 다른 손이 움직이고, 달려가려던 병규가 앞으로 크게 꼬꾸라지면서 그 계획은 엉망진창이 된 채 원점으로 돌아가 버렸다.

"젠장. 두 손으로 각각 펼쳐낼 수 있는 능력이었군."

호랭이의 입에서 욕이 나왔다. 이젠 정말 방법이 없다. 최후만이 남은 것이다.

그때 병규의 품속에서 작은 소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것은 컴컴한 어둠 속으로 스며든 한 줄기 희망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리스(Grease)"

"흐업."

돌연 오가마의 왼발이 쭉 미끄러지면서 다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병규와 호랭이는 동시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놈의 속박에서 벗어난 것이다.

"대체."

병규는 의문으로 가득한 눈을 소녀에게 보냈다. 소녀의 고사리 같은 손가락이 복잡한 인을 그리고 있었다.

'모를 일투성이로군. 하지만 지금은 우선....'

병규는 오가마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어차피 저 녀석의 능력 앞에서 도망가는 건 불가능 하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은!

"끝장을 내자."

호랭이가 병규의 어깨 위로 뛰어 올라왔다.

상대는 상상도 못할 능력자. 하지만 이제 그 힘이 두 손에서 나온다는 걸 알게 되었다.

"손을 절단 내 주마!"

힘껏 소리친 병규는 땅바닥을 힘껏 박차며 허공으로 뛰어 올랐다. 새처럼 날아오른 그의 두 팔에서 갈퀴 같은 요수의 발톱이 무려 두자나 뻗어 나왔다.

"흡. 감히...!"

비틀거리던 오가마가 급히 손을 뻗었다.

퍼펑!

거친 폭음이 울리며 먼지구름이 회오리치듯 솟구쳐 올랐다.

철커덩.

수인으로 맺었던 마나를 풀며 가쁜 숨을 내쉬던 소녀는 문득 들려온 쇳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병규가 땅을 박찬 자리에 작은 상자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그것은 과거 호랭이가 주워온 물건으로 과거 발칸이 차원을 넘어올 때, 아공간에서 우연찮게 구한 미지의 물건이었다. 그동안 병규과 호랭이는 이 상자 안에 혹여나 귀중한 것이 들어 있지는 않을까 열어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은 실패. 결국 반 포기상태였는데 혹여나 능력자들 중에 잠긴 물건을 풀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호랭이의 조언에 반신반의의 마음으로 챙겨오게 되었다. 하지만 파티다 뭐다 정신없이 놀다보디 그만 깜빡 잊고 말았다.

소녀는 눈을 빛내며 상자를 집어 들었다. 상자 표면에 복잡하게 음각되어 있는 그림들. 그러나 그녀의 눈엔 그것이 그림이 아니라 어엿한 문자로 보였다.

그녀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마치 노래와 같은 주문이 흘러나왔다.

"암흑에서 태어나 어둠의 자유를 그리는 그대여. 그 잿빛 날갯짓에 하늘을 숨죽이고, 성난 발걸음에 세상을 잠재우는 외로운 종결자. 이제 깊은 암흑 속에 웅크린 그대의 여섯 발자국이 영겁의 수면의 깨고 척박한 대지 위에 깊은 족적을 남기리니. 마신의 어린자식들이여. 결배할지어다. 그대...."

주문이 계속됨에 따라 소녀의 작은 몸이 허공을 조금씩 떠올랐다. 그렇게 무려 일 미터가량 떠올랐을 때.

부웅.

돌연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상서롭지 않은 기운을 뿜어냈다. 그리고 곧이어 그녀의 손가락 끝에 맞닿은 상자의 금속부분이 침식되듯 검게 물들어갔다. 먹물이 묻은 듯 상자에 음각된 백색그림들이 지워지고, 마침내 쩌정 하는 유리 꺠지는 듯한 소음.

그리고 다음 순간!

해머로 찍고 바이스로 압축해도 열리지 않던 상자의 표면이 모빌조각처럼 촤르륵 일어나더니 윗부분이 갈라지며 철커덩 열려버리는 것이었다.

촤아악.

빛 무리. 상자 안에서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그 빛은 우리가 익히 보아오던, 따사롭고 따뜻한 느낌의 그것이 아니었다. 검은 먹구름 같은 어둠의 빛이 스멀스멀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압축된 듯한 어둠의 광체는 감은 눈꺼풀 안으로 들어와 동공을 직접 자극한다.

츠츠츠츠츠.

둥둥 떠올랐던 소녀의 몸이 조금씩 가라앉자, 반대로 검은 빛 덩어리는 물속으로 헤엄치듯 위로 떠올랐고, 소녀의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새로운 변화를 일으켰다.

쉬쉬쉬쉬.

바람소리가 일며 사방으로 퍼져 나가던 암흑의 빛이 빨려들듯 중심으로 일제히 모여들었다. 잠시 후, 암흑의 빛을 모조리 흡수한 검의 덩어리의 표면이 흑영처럼 번들거렸다.

꿀꺽.

병규의 목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호랭이 역시 혼란스런 표정으로 뚫어져라 검은 덩어리를 쳐다봤다. 막 병규와 일격을 나누던 오가마는 으스스한 눈길을 잔뜩 찌푸리며 검은 덩어리를 응시했다.

무얼까. 저건 대체.

꼬리뼈에서 시작된 전율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등허리를 타고 머리끝을 스치더니, 온몸의 솜털마저 파르르르 솟게 만든다.

이 순간, 모든 시간의 흐름자저 정지된 듯 모든 이의 시선은 검은 덩어리에 몰렸다.

파삭.

검은 덩어리가 미동하자 모든 이가 흠칫 놀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둥둥 떠 있던 검은 덩어리가 살그머니 펴졌다.

납작하게 붙어있던 검은 등껍질이 부스스 쪼개지며 얇은 피막 같은 날개가 드러났다. 뒤이어 가시 같은 3쌍이 발들이 촤르르~ 펼쳐진다.

파드드드드.

날개가 움직이자 귀에 거슬리는 소임이 인다.

"저... 저건은 설마!"

병규의 눈이 놀라움에서 경악으로 급격히 변질되었다. 암흑 덩어리에서 깨어난 존재. 그것은, 아니 그것의 모습은 그가 익히 알고 있는 무엇과 너무도 닮아있었다. 무섭다기보다는 혐오스러운, 그리고 그의 방에서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존재.

기지개를 한 그것은 훑어보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놀란 눈을 부릅뜨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여섯 개의 다리를 활짝 펴 보이며 명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바퀴벌레 왕자입니다!!"

3. 백성들아! 저 놈을 묻어버려라

모두들 숨을 죽였다.

그 순간만큼은 바람마저 움직임을 멎었다.

허공에 떠오른 무려 사람의 머리통만한 바퀴벌레 왕자를 보고 모두 할말을 잃었다.

바퀴벌레는 징그러운 날개를 퍼덕거리며 감상하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금발의 소녀를 거쳐 흑의인들. 두꺼비 사내를 막 지났을 때,

"뭐, 뭐야? 저거!"

병규가 경악성을 질렀다. 순간 바퀴벌레와 그의 시선이 딱 마주쳤다.

"아! 샤바!"

돌연 바퀴벌레는 세 쌍의 다리를 낙하산처럼 활짝 펴며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주인님! 샤바, 주인님이시죠? 그렇죠? 주인니이이이임!"

소름이 쫙 끼칠 정도로 정겹게(?) 소리친 바퀴벌레는 엄마와 상봉한 마르코(주. 엄마 찾아 삼만 리의 주인공)처럼 눈물을 뿌리며 병규에게 달려들었다.

바퀴벌레 왕자에 대한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손톱만한 바퀴벌레가 달려들어도 기겁을 할 판에 이놈의 무려 사람 대갈통만 한 놈. 그야말로 징그러운 놈이 사상초유의 크기로 달려드는 것이다.

"히이이이익!"

병규는 사지를 허우적거리며 자지러졌다. 이것은 당연한 반응이다. 정신없이 물러서는 모습이 기괴하다기 보다는 불쌍하다.

"어라?"

바퀴벌레는 병규의 반응이 의아한 모양이었다.

"너, 너 뭐야!"

병규가 발작적으로 소리쳐 물었다.

"누구냐니요, 주인님이 불렀잖아요. 전 주인님이 소환한 바퀴벌레 행성의 바퀴벌레 왕자예요."

"나, 난 너 같은 거 부른 적 없어."

"그럴 리가요."

그때 소녀가 다가와 바퀴벌레의 등껍질을 쿡쿡 찔렀다. 바퀴벌레가 빙글 돌아서자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녀는 바퀴벌레 왕자가 전혀 징그럽지 않은 모양이다.

"나야."

"어? 나라니?"

한국말이 서투른 소녀는 봉인이 풀린 상자를 들어 보이며 다시 짧게 말했다.

"나야."

"설마. 네가 날 풀어줬다는 거야?"

"응."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이상한데."

바퀴벌레 왕자는 병규와 소녀를 번갈아 보며 혼란스러워하더니 몸 전체를 갸우뚱해 보였다.

"원래 소환사와 소환충 사이에는 유대감이랄지, 친근감이랄지 하여간 말로 표현 못할 느낌이 있어야 하는데, 근데 너에게서는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아."

"동질감?"

"같은 부류라고 느끼는 것 말야."

"흐음."

소녀는 턱을 감싸며 곰곰 생각했다.

바퀴벌레 왕자의 꼼지락거리는 여섯 개 다리와 긴 더듬이는 너무도 매력적이고, 번질번질한 등껍질은 침이 꿀꺽 날 정도로 탐나지만 아무래도 저걸 안고 다니면 여기 사람들이 굉장히 싫어할 것 같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지만 같은 부류라는 말에 묘한 반발심이 일었다.

그래서 소녀는 바닥에 떨어진 상자와 병규를 번갈아 가리키며 바퀴벌레 왕자에게 말했다.

"이 상자, 쟤꺼!"

소녀가 배신 때리는 순간,

"헉!"

병규의 입에서 숨 가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소녀가 인정하자마자 바퀴벌레 왕자는 곧바로 더듬이를 촐랑거리며 고개를 휘익 돌렸다. 곧이어 검고, 넓적하고, 다리 많고, 긴 더듬이가 출렁거리고, 밤색의 그물망 날개가 파드드득 소란스럽고, 각질의 몸뚱이가 삐거덕거리는, 그런 복합적인 징그러움을 예술의 경지로 표출하기 시작했다.

"오옷! 역시 당신이 제 주인님이었군요. 샤바. 한눈에 딱 알아봤습니다. 왠지 말로 표현 못할 친근감을 받았사옵니다. 샤바샤바."

다시 눈물을 뿌리며 달려드는 바퀴벌레 왕자.

"끄아악. 저리가! 저리가!"

병규는 광견병 걸린 강아지처럼 미쳐 발광했다.

"크흐흐. 같은 부류. 크큭. 같은 냄새가 난다고? 크크크."

호랭이가 상황도 잊은 채 실실 쪼갠다. 반대로 병규의 얼굴은 그야말로 광인 대기 상태였다.

"주인니~ 임."

바퀴벌레의 부르짖음이 묘하게 애달프다. 왜일까.

"흐읍. 뭐... 냐. 이 사태는... 흐읍."

매사 지나칠 정도로 진지하던 오가마. 하지만 그마저도 바퀴벌레 왕자의 출현 후부터는 분위기에 휩쓸려 잠시 혼이 빠져 있었다. 이런 추태가 있나.

'일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지?'

의기양양하게 나섰건만 어느새 오로치에게서 받은 수하들과 갓파까지 모조리 아작이 나있다. 그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이게 모두 하찮은 벌레 때문에 와들와들 떨고 있는 눈앞의 조그만 녀석 때문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다.

"흐읍. 이노옴!"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는 음성과 함께 그의 거대한 주먹이 병규의 머리통으로 날아들었다.

부우우웅.

대포라도 날아가는 듯 요란한 파공성.

"으악."

귀밑을 스쳐가는 날카로운 바람소리에 병규는 깜짝 놀랐다. 뭔가 진득한 것이 뺨을 타고 내려왔다. 손으로 찍어 보니 벌건 피가 묻어 나온다.

'아차차. 그러고 보니 괴물 같은 녀석과 싸우고 있었지.'

저 망할 놈의 바퀴벌레 때문에 잠깐 잊고 있었다.

'젠장 잊을 걸 잊어야지. 목숨이 걸린 일인데.'

다급히 몸을 일으키는 병규, 그러나 그가 채 자세를 잡기도 전에 오가마의 이격이 그의 머리를 짓누를 듯 내리꽂히고 있었다.

미처 요수의 발톱을 꺼내들 여유도 없었다. 아직 마음 가는 대로 능력이 발현되는 정도까지는 못되었던 것이다.

"으악"

다급한 김에 병규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 순간,

"무엄하다. 감히 내 주인님께 무슨 짓이냐!"

검은 덩어리 하나가 빛의 속도로 날아들었다.

바퀴벌레 왕자였다.

급하게 날아온 바퀴벌레 왕자는 병규의 팔에 매달렸다. 넓적한 바퀴벌레가 팔에 매달리니 꼭 팔목에 차는 방패처럼 보였다.

"흡. 지저분한... 벌레. 뭉개준다!"

휘이이이잉.

거친 파공음이 공기를 쥐어뜯는다. 그리고 곧바로 들려온 뼈와 살점이 으스러지는 듯한 끔찍한 파열음.

빠가각.

과연 병규와 바퀴는 한데 뭉쳐 쥐포가 되어버렸을까? 그렇게 한데 뒤섞여서 어찌어찌 말도 안 되게 부활하면 바퀴인간의 저주?

"끄으윽."

진득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병규의 것도 바퀴벌레의 것도 아니었다. 놀랍게도 신음소리의 주인공은 무자비한 주먹을 날리던 오가마였다.

쿵쿵.

큰 족적을 남기며 뒷걸음질치는 오가마의 얼굴은 온통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리고 바퀴벌레 왕자와 병규를 찍어 누르며 새로운 이야기의 실마리(바퀴인간의 저주?)를 제공할 듯싶었던 그의 무쇠와 같은 주먹은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처참하게 뭉개져 있었다.

고속으로 달리는 기차에 주먹질을 하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피부는 사포질을 한 것처럼 죄다 벗겨져 있고, 손가락뼈는 가닥가닥 부러져 길게 찢겨나간 근육조직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보는 것만으로도 놀라 까무러치거나 토악질을 할 만한 치명적인 부상이었다.

그러나 오가마는 잠시 눈가를 찡그렸을 뿐, 마치 남의 일인 양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히려 팔엔 눈길도 안 준 채 병규의 팔에 매달린 바퀴벌레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흡. 저놈의... 벌레!"

마지막 순간, 그의 주먹이 징그러운 벌레의 등짝을 후려갈기려는 찰나, 바퀴벌레의 등껍질에서 음습한 기운이 튀어나와 그의 주먹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거였다.

물론 바퀴벌레 역시 무사하진 않았다.

"아뜨뜨뜨뜨."

바퀴벌레 왕자는 뜨거운 화상이라도 당한 것처럼 날개를 파닥거리며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별반 다른 부상은 보이지 않았다.

오가마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주먹 하나가 회생불능으로 완전히 박살난 대가가 고작 아뜨뜨?

바퀴벌레의 등껍질이 아무리 딱딱하다 한들, 그의 주먹 역시 같은 두께의 철판쯤은 무리 없이 뚫어버릴 수 있는 강권. 애초에 말도 되지 않는 결과가 아닌가.

다른 건 몰라도 고작 지저분한 벌레와의 대결에서 참패를 당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안겨주었다.

그런데 돌연한 사태에 분노한 것은 비단 그뿐이 아니었다.

"이런 발칙한 놈. 감히 이 몸의 주인님을 암살하려 하다니. 그 죄. 일벌백계의 형벌로 다스리리라.

오가마를 발가락질하며 버럭버럭 고함을 지른 자칭 바퀴벌레 왕자. 갈색의 날개를 파다닥거리며 허공을 날아오르며 힘찬 목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오오. 머나 먼 별의 백성들아. 너희들의 왕자가 왔으니 어서 나타나 명을 따르라. 명을 따르라."

바퀴벌레 왕자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방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그런 바퀴벌레의 기이한 행동에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죄다 인상을 찌푸렸다.

"흐읍. ...?"

"저 놈. 또 뭐 하는 거야?"

일이 어떻게 굴러가는 것인지 정신이 하나도 없던 호랭이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헌데, 마치 그런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소름이 오싹 돋는 기이한 소음의 귓가를 갉아먹어 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

"뭐, 뭐야. 이 소린."

얼이 빠져있던 병규가 벌떡 일어서며 안절부절못한다. 그만큼 파도처럼 멀리서 다가오는 소음은 듣기 괴로운 것이었다. 특히 귀가 예민한 호랭이가 다른 사람보다 괴로움이 더 했다.

"윽. 미치겠다."

호랭이는 앞발로 두 귀를 꼭 누른 채 끙끙거렸다.

그때,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방을 살피고 있던 소녀가 한쪽을 손가락질했다.

"저기."

"뭐, 뭐야?"

병규와 호랭이는 급히 소녀가 가리킨 곳을 쳐다봤다. 하지만 웬걸. 그다지 이상한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그러네. 어? 그런데 병규야. 저 건물 도색이 참 특이하지 않냐? 칙칙한 갈색이네."

"예? 에이 설마요. 어떤 미친놈이 건물을 똥색으로 칠... 해져 있네요. 어엇. 그러고 보니 다른 건물들도 모두 색이 시켜매요. 광택도 별로 인 것이...."

"벼, 병규야. 아무래도 이상하다. 따, 땅도 시커매."

"네? 헉!!"

병규의 입에서 경악성이 튀어나왔다. 그러고 보니 그들 주변으로 사방 10여 미터를 제외한 거의 모든 땅이 한결같이 흑갈색으로 번질거리는 것이 아닌가.

"이, 이거 설마."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생각. 절대로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 줘."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사실이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하늘에 떠 있는 바퀴벌레 왕자의 호령이 떨어졌다.

"저 악적을 묻어 버려라!"

그리고 모두는 보게 되었다. 주위를 가득 뒤덮은 셀 수 없이 많은 바퀴벌레 떼가 회오리처럼 일어나 폭풍처럼 하늘을 가린 바퀴벌레들이 다시 낙뢰처럼 떨어지는 모습을.

파다다다다다다다다닥.

후두두두두두두두두두둑.

기막힌 소음과 함께 오가마는 말 그대로 바퀴벌레 무리에게 파묻혀 버리고 말았다.

"욱!"

병규의 두 볼이 둥그렇게 솟았다. 호랭이는 이미 그 옆에서 토악질을 하는 중이었다.

한 마리만 봐도 징그러워 돌아버리실 바퀴벌레가 한 무더기. 아니 집채만큼이나 모여서는 눈, 코, 입 안 가리고 전신으로 달려드니. 그 엄청난 모습이란!! 아프리카의 메뚜기 떼들은 그에 비하면 차라리 귀여울 정도다.

"착한 백성들이여. 녀석에게 지옥 끝을 보여주거라."

마침내 바퀴벌레 왕자의 마지막 명령이 떨어졌다.

촤촤촤촤촤촤촤....

파드드드드드드드드....

헬기의 프로펠러 소음을 수천 배 확대시킨 것 같은 엄청난 소음이 폭풍처럼 일어났다. 그리고 그런 소음 속에서 한 덩어리처럼 뭉쳐있던 바퀴벌레가 거대한 해일처럼 일어나 파도처럼 밀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속에 꼼짝없이 갇혀있던 오가마는....

"흡흡흡흡흡흡흡!!"

놀랍게도 바퀴벌레 파도 속을 열심히 헤엄치고 있었다. 징그러운 벌레 속에서 손발을 움직이며 발버둥치는 모습에서, 병규와 호랭이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절대적인 공포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감히 눈뜨고 못 볼 정도로 비참했다.

"아악!! 저건 지옥이야!!!!"

병규는 두 손으로 머릴 감싸 쥐며 절규를 터트렸다.

파도가 휩쓸고 가듯 오가마가 쓸려나간 자리엔 얇게 눌려터진 바퀴벌레 시신만이 가득 남았다.

하늘 높이 떠올라 바퀴벌레 떼를 선두 지휘하던 바퀴벌레 왕자는 더듬이를 길게 빼내며 안타까운 탄성을 질렀다.

"맙소사. 이별의 백성들은 왜 이리 약한 거지? 고작 저 정도 녀석을 날려버리는데 저렇게 많은 수가 죽으면 어쩌자는 거야? 아무래도 날 잡아서 수련 좀 시켜야겠는걸? 샤바샤바."

금발머리 소녀로 비롯된 엄청난 사건은 그렇게 바퀴벌레 왕자(그것도 외계 생명체!)에 의해 파격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비록 사건은 끝나 버렸지만 결과는 승자 없는 패자들만의 잔치라고 할 수 있었다.

주범이라고 할 수 있는 오가마는 바퀴벌레 파도(?)에 휩쓸려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 버렸고, 호랭이는 한쪽 구석에서 속을 뒤집고 있었으며, 하얗게 타버린 병규는 등에 붙어 있는 바퀴벌레 왕자가 '주인님 사랑해요~ 제 사랑을 받아주세요~ 샤바'라고 지껄이는 것도 모른 채 실없는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일의 발단이라고 할 수 있는 금발의 소녀는 바퀴벌레 왕자가 들어있었던 빈 상자를 들고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상황은 잠시 후 승용차 한 대가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급하게 정차한 차량에서 뛰듯이 내린 사람은 다름 아닌 특재대의 요원중의 한 명인 포이즌 마스터, 조준엽이었다.

어제 마신 술에 얼큰하게 취해있던 그는 이제야 불온한 기운을 감지하고 부리나케 달려온 것이다.

현장을 둘러본 조준엽은 입을 떡 벌리며 경악했다.

"뭐, 뭐야 이거. 전쟁이라도 터진거야?"

사방에 기절해 있는 흑의인들에, 악취를 뿜고 있는 녹색 살덩이들. 게다가 저쪽편의 공장건물은 벽이 송두리째 무너져 있기까지하다. 화약 냄새만 났다면 십중팔구 테러라고 단정지었을 것이다.

"다른 건 그렇다 치고 웬 벌레들이. 에잉? 이거 다 바퀴벌레 아니야? 이 동네, 단체로 방역이라도 했나? 그럼 저기에 자빠져 있는 녀석들은 설마 방역하다가 질식해서 기절이라도 한 거라는 거야? 거참 모를 일일세."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주위를 둘러보던 준엽은 소란의 한 중앙에서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 넌 어제 새로 들어온 신입대원이잖아. 빵꾸라고 했던가? 이봐 빵꾸. 어떻게 된 거야? 여기서 무슨 일이 터진 거야? 이 녀석 무슨 먼지를 이렇게 뒤집어썼지? 이봐. 가스폭발이라도 있었냐? 이봐. 어? 근데 이 녀석 등 뒤의 이건 또 뭐... 엄마야! 이, 이건 또 뭐야. 바, 바퀴? 그것도 초대형 바퀴벌레잖아. 고, 고놈 참. 귀엽게 생겼구나."

바퀴벌레 왕자를 발견한 조준엽의 눈이 반짝 빛을 발한다. 그의 능력은 독. 독을 다루는 사람인만큼 기이한 생물에 대한 관심이 지대할 수밖에 없었다.

헌데, 그가 막 병규에게 쫙 달라붙은 초대현 바퀴벌레를 잡아채려고 할 때, 누군가 그의 등을 콕콕 찌르는 것이었다.

"누구냐?"

고개를 돌려보니 병규와 마찬가지로 먼지를 허옇게 뒤집어쓴 소녀 하나가 그를 멀뚱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처음엔 누군지 몰라 눈살만 찌푸리고 있던 준엽. 잠시 후 그는 하늘이 떠나가라 고함을 질렀다.

"퀴, 퀴니 님이 아니십니까? 아니 어쩌다 이런 꼴이 되셨습니까. 퀴니님이 어제부터 행방불명이 되셔서 지금 특재대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는 자기 딸 나이 뻘밖에 안 되는 소녀의 몸을 정성을 다해 털면서 어디 한군데 잘 못된 곳은 없는지 눈에 불을 켜고 찾았다.

잠시 후, 준엽은 퀴니하고 밝혀진 소녀와 반쯤 혼이 나간 병규, 그리고 그의 애완동물(?)을 챙기고는 특재대 사무실로 직행했다.

그렇게 그 날의 소란은 주동자들이 모두 자리를 뜸으로써 대충 정리가 되었다.

바퀴벌레 왕자가 폭풍처럼 나타나 허리케인처럼 휩쓸고 지나간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사거리, 그곳에 주차된 검은색 승합차 안에서 이상한 대화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제 끝난 것 같군요. 끊어두었던 회선을 연결할까요?"

굵직한 사내 물음에 젊은 청년쯤으로 보이는 음성이 리드미컬하게 대답한다.

"그렇게 해. 아! 그리고 촬영된 영상은 즉각 본사로 전송하도록 하게."

"네."

그들의 끊어 놓았다는 회선은 다름 아닌 경찰서의 전화 회선. 사건이 그 지경에 이르도록 경찰의 출동이 없었던 것은 바로 그런 연유였다.

이들의 움직임은 실로 치밀하여 인근 경찰서로 유입되는 전화회선만 손을 봐 둔 것이 아니라 경찰서 근방에 설치된 휴대폰 용 안테나마저 모두 부서 버리는 용의주도함을 보였다.

또한 소방서에서 먼지구름을 발견하고 출동하려는 것도 단순히 방역작업 중 사고라고 미리 전화를 넣어 막았다. 한마디로 사건이 벌어진 일대 구역을 외부와 철저히 차단시켜 버린 것이다.

대체 무슨 이유로.

그 후로 잠시 동안 몇 차례 단조로운 단음이 울렸다. 모든 작업이 끝난 듯 질문을 던졌던 사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영상송출 작업도 모두 끝났습니다."

"수고했네."

"저. 그런데...."

"궁금 한 거라도 있나?"

"총수께서는 왜 저런 어린 소녀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걸까요? 능력자라면 넘쳐날 만큼 많으실 텐데."

"모르지. 아마도 열도 녀석들과 같은 이유가 아닐까?"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것으로 미루어 질문을 던진 사내보다 한참이나 상관으로 보이는 청년조차 총수의 뜻을 짐작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렇게 대화는 일단 끝을 맺었다. 그런데 잠시 후 사내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렸다.

"오래된 시계군요."

청년의 시계가 굉장히 보기 드문 것이었나 보다. 청년이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골동품을 좀 좋아하는 편이지."

4. 쟤! 나 줘

특수재해대책본부의 깊숙한 곳에 위치한 회의실.

평소라면 썰렁한 한기만 가득했을 넓은 실내엔 본부장인 자영을 비롯하여 수명의 증력자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공공연하게 세금도둑이라는 비하를 들으면서도 좀처럼 회의라는 것을 모르던 그들에게 오늘과 같은 분위기는 실로 범상치 않은 일이었다.

한데 모여 앉은 그들 앞에는 병규와 퀴니가 자리하고 있었다.

'미치겠네.'

수많은 시선이 온몸에 꽂히자 병규는 온몸이 근질거리는 것 같아 미칠 것만 같았다.

이렇게 삼엄하고 심각한 분위기라니, 마치 취조를 받는 것 같은 기분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그 만은 그런 느낌을 받았다. 퀴니와 둘이 앉아있다지만 실상 거의 대부분의 질문은 그에게 쏟아졌고, 대답도 혼자 해야 했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옆에 앉은 퀴니는 말이 서툰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 어리기 때문인지 질문도 거의 받지 않았고, 간혹 묻더라도 병규의 대답이 사실인지 확인하는 정도에 그쳤다.

면담은 꽤 오랜 시간 계속되었다. 딱딱한 의자에 굳은 자세로 앉아있어야 했던 병규는 온몸이 석화되는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퀴니가 더 없이 부러웠다.

조준엽의 차에 실려 특재대 본부까지 오게 된 병규는 이곳에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퀴니가 능력자라는 사실.

그것도 유럽 능력자 연합인 가스펠(Gospel)에서 파견된 특별인사로 모종의 임무를 띠고 한국에 파견된 비밀요원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파티가 끝날 무렵, 이운석이 찾던 특별 게스트가 바로 그녀였던 것이다.

그녀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가스펠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있었다. 그녀의 배경이 얼마나 대단한지 한국 정부에서도 은근히 그녀에 대한 예우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모두가 그녀를 존대하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한 가지 기이한 것은 아무도 그녀의 능력이 무엇인지, 또 그녀의 수호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었는데, 심지어 본부장인 자영조차 그녀에 대한 정보는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병규는 일단 헛웃음부터 터트렸다.

세상에. 가스펠이란 곳이 단체로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어린아이를 보호자 하나 없이 무작정 지구 반대편으로 보내버릴 수 있단 말인가. 혹시나 해서 병규는 본부장에게 퀴니의 나이를 물어봤다. 겉보기보다 나이가 많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열두 살이란다.

확실히 또라이들만 모인 조직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 병규였다.

"생기를 흡수하는 능력자라."

병규의 설명이 끝나자 이운석이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조준엽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받았다,

"확실히 일본의 능력자 중에 그런 녀석이 있다고 들었다. 게다가 그 녀석은 병규가 말한 인상착의와 아주 흡사해."

깍지 낀 손위에 턱을 올려놓은 채 내내 심각한 표정이던 자영이 한마디 툭 던진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오가마라는 두꺼비 수호신을 가지고 있는 자인 것 같네요."

"맞아. 바로 그 녀석이지."

"그렇다면 생각보다 문제가 심각하군요. 오가마란 자는 상상도 못할 거물과 선이 닿아 있으니까요."

"히로부미 이토. 수사노오라는 M 급 배경을 가지고 있는 능력자."

"그리고 그 녀석의 부관 노릇을 하고 있는 기요타카 쿠로다도 무시할 수 없는 자예요. 야마타노 오로치라는 자의 능력은 아직까지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부하들의 절대적인 충성심으로 보아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정보부에서는 그를 최소 A 급 이상의 능력자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래. 이번 일을 일으킨 것이 이토가 맞다면 스크래그에 대한 것도 대충 이해가 된다. 녀석이라면 충분이 그런 괴물을 만들어낼 재력이 있지. 문제는 왜 퀴니 님을 노렸는가 하는 것인데."

정신없이 오고가던 대화의 맥이 갑자기 끊겨버렸다. 아무도 이토가 퀴니를 원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계속될 것 같던 침묵을 자영의 차분한 음성이 깨트렸다. 그녀의 고개가 한쪽 구석으로 돌아가자 누가 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모두의 시선 역시 그녀를 따른다.

"저건 도대체 뭐죠?"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쏟아진 실내의 한 구석. 사람 머리통만한 바퀴벌레 한 마리가 긴 더듬이를 살랑거리고 있었다.

"오~ 이제야 날 알아봐 주는군. 샤바"

병규의 눈치만 살살 보고 있던 바퀴벌레 왕자는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지자 마음이 흡족한 듯 날개를 펼치며 날아오르려 했다. 그러나 곧바로 떨어진 병규의 날카로운 한마디.

"찌그러져 있어."

바퀴벌레 왕자는 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구석으로 파고들며 더듬이로 주인의 심기를 살피는 데 주력했다.

"바퀴벌레군."

김한식이 웅 하고 울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바퀴벌레야."

이운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

"바퀴벌레 맞아요."

권예란 역시 찻잔을 나르던 손길을 멈추고 한마디 거든다.

"바퀴벌레 맞잖아. 케케케."

준엽이 게걸스럽게 웃는다.

"바퀴벌레예요. 확실해요."

자영이 손뼉을 마주치며 최종 결정을 내렸다.

그렇다.

구석에서 병규 눈치만 보고 있는 저 녀석은 지나칠 정도로 크고, 또 사람의 말을 하는 것이 아리송하긴 하지만, 명백한 바퀴벌레인 것이다.

단지 보통의 바퀴벌레와 달리 눈이 매우 크고 동그라며 그 아래 역삼각형 모양의 입이 있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사소한 차이에 불과하지만 사람처럼 눈을 깜빡이는 모습이 어찌 보면 귀엽기도 했다. 물론 취향을 몹시 타는 귀여움이겠지만.

'뭐야. 왜들 이렇게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거지?'

병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한바탕 난리라도 날 줄 알았더니.

그러나 그거 어찌 알까. 사람들이 차마 그 앞에서 입을 다물고 있다는 것을. 꾹 다문 그들의 입은 지금 사실 비명을 지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있는 것이었으니, 그들의 속마음을 살짝 들여다 보면....

'맙소사! 설마 수호신이 바퀴였던 거야?'

'오 마이 갓뜨!'

'으으. 어딘지 평범하지 않다 했더니.'

'혓바닥 때부터 알아봤다니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바퀴벌레라니 너무했다.'

'바퀴벌레 수호신이야? 세상에 이런 괴사가 있나.'

'망하려는 거야. 휴거야! 드디어 천지가 뒤바뀌려는 거야!'

'젠장. 어떻게 하면 저 수호신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을까? 케케.'

'도대체 수호신을 어떻게 현실세계로 부를 수 있었을까?'

'바퀴벌레니까 뭐든지 가능할 거야.'

'그래. 바퀴벌레니까.'

'바퀴벌레라면 말 돼.'

병규가 들었다면 기절초풍할 음침한 생각들이 묘한 전파를 타고 서로의 마음속을 넘나들고 있었다.

탁.

자영이 두 손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요. 오늘 얘기는 이걸로 마치도록 하죠. 그리고 이 자리에서 한 가지 확실히 해둘 것은, 이번 일을 꾸민 것이 누구이건, 목적이 무엇이건 간에 허락 없이 귀빈을 납치하려 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특재대에 대한 명백한 도전으로 간주된다는 거예요. 잠시 후 따로 명령사항을 전해 드릴 테니 대원 여러분께서는 부디 특재대를 벗어나지 말길 바랍니다. 특별한 볼일이 있으신 분은 제게 따로 통보해주세요. 이번 사건이 끝날 때까지 모두 최선을 다해 임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병규 씨?"

"네. 네?"

자영이 갑자기 부르자 병규는 당황하여 벌떡 일어서며 대답했다. 자영은 그런 그에게 곱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고생하셨어요. 입대하시자마자 큰일을 해내셨군요. 오늘 일은 상부에 보고해서 수당에 가산되도록 하겠어요. 자, 그리고 이건 이번에 발급된 신분증이에요.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세요."

"신분증요?"

자영이 내미는 걸 받아보니 특수재해대책본부 소속을 알리는 카드였다. 뒤쪽에 마그네틱 처리가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신용카드로서의 용도도 있는 모양이다. 카드를 찬찬히 살펴보던 병규는 하단부에 코드라고 씌어 있는 부분이 눈에 띄었다.

"저, 본부장님. 이게 뭐죠?"

"뭘 말씀하시는 건가요?"

"COPY라고 써 있는 거요."

"아. 그건 병규 씨의 식별 코드예요."

"코드? 아이디 같은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바로 그런 거죠. 특재대는 소수정예의 부대이기 때문에 식별번호보다는 이와 같은 식별코드로 전산등록을 하거든요."

"흐음. 카피라."

카피. 복사. 복제란 의미다. 묘하게 그의 능력과 연관되는 것 같다. 아마도 그런 뜻에서 이런 코드가 붙게 된 것일 테지.

병규는 묘한 기분이 되었다. 그런 그를 자영이 따뜻한 말로 축하한다.

"축하해요. 이젠 정식으로 특재대의 요원이 되신 거예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따뜻한 그녀의 목소리에 병규는 온몸이 살살 녹는 것 같았다.

구미호에게 괜히 홀리는 게 아니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마음과 다르게몽롱한 미소가 입가에 떠올랐다.

"저야말로."

"호호호."

손으로 입을 가리며 자영이 작게 웃었다. 어떻게 그 모습조차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지.

하여간 회의는 그렇게 끝났다.

사건의 전말도 밝혀지고, 새로운 임무도 내려졌다. 대원들은 하나 둘 회의실을 빠져나갔고, 병규 역시 엉거주춤 그들을 따라 밖으로 나가려 할 때였다.

멀뚱멀뚱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던 퀴니가 총총걸음으로 자영의 책상으로 걸어갔다.

"볼일이 있으세요? 퀴니 님?"

자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를 잠시 올려다보던 퀴니는 돌연 손가락을 들어 병규를 가리키며 큰 소리로 소리쳤다.

"쟤. 나줘."

처처척.

밖으로 나가던 사람들의 발걸음이 동시에 멈춰졌다. 그들의 얼굴에 동시에 떠오른 경악이란.

'뭐, 뭐냐. 이 전개는?'

병규의 턱으로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 내렸다.

퀴니의 폭탄선언 이후, 회의실은 난데없는 폭풍에 휘말려야 했다. 대원들은 하나같이 눈에 불을 켜고 퀴니를 말렸다.

'저놈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라는 걱정스런 물음에서, '인간은 사고파는 물건이 아닙니다.' 라는 지극히 교과서 같은 훈계까지.

너도나도 우르르 몰려들어 왁자지껄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어야 했던 병규. 그는 정말러 지금의 상황이 의아했다. 왜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저렇게 결사적으로 날뛰는 것일까.

그저 한두 사람 정도 알아듣게 조용히 설명하면 될 것을. 저렇게 벌 떼처럼 왁자하게 떠드니 오히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지 않은가.

과연 그런 이유에선지 별의별 악담을 쏟아내며 어떻게는 말려보려던 대원들의 눈물겨운 투쟁은 뚝심으로 똘똘 뭉친 십이 세 소녀에겐 전혀 무소용이었다.

퀴니는 그야말로 막무가내였다.

그 어떤 말도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심지어 병규의 수호신이 바퀴벌레라는 악담을 소곤거렸을 때엔, 질색하기는커녕 오히려 두 눈을 빛내며 '호오~' 라는 흡족한 감탄사를 토했을 정도다. 상황이 이쯤 이르자 모두는 두 손을 들고 항복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본부장인 자영뿐.

"안 됩니다."

자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강력하게 거부를 표했다.

"퀴니 님은 지금 무서운 적의 표적이에요. 무려 M 등급의 능력자가 당신을 노리고 있단 말입니다."

그녀의 논리 정연한 설명에 퀴니는 가볍게 인상을 찡그리며 짧게 물었다.

"안 돼?"

"안 됩니다."

자영은 단호하게 답했다.

"알았어."

잠시 그녀를 올려다보면 퀴니가 빙글 몸을 돌리더니 성큼성큼 문밖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든 자영이 조심스렇게 물었다.

"저. 퀴니 님. 어디 가시는 건가요? 숙소로 가시는 거면 제가 직접 모시겠습니다."

자영이 목소리를 높이자 막 문밖을 나서던 퀴니가 힐끔 뒤를 돌아봤다. 소녀의 대답은 이번에도 짧고 간결했다.

"나. 가출. 안녕."

싸아아아아악.

자영을 비롯한 모든 요원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신다.

"퀴, 퀴니 님!"

"빠, 빨리 모, 모셔오세요."

대원 서넛이 허겁지겁 달려가서 몸부림치는 퀴니를 덜렁 들어왔다.

의자에 앉혀진 퀴니는 입을 한 발이나 내민 채로 소리 없는 반항을 계속했다.

"하아."

자영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난감한 한숨이 흘렀다. 대체 저 막무가내를 어떻게 말려야 할까. 그때 턱을 쓰다듬고 있던 이운석이 입을 열었다.

"그냥 퀴니 님 요청대로 하는 건 어때요?"

기다렸다는 듯이 사람들의 날카로운 시선들이 그의 반반한 얼굴로 일제히 꼽혀든다. 이운석은 능청스럽게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태연스레 말을 이었다.

"퀴니 님께서 정말로 병규를 소유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아마 정이 들어서 헤어지기 싫으신 모양인데, 그렇게 좋으면 잠시 함께 있으라고 하죠 뭐.

곧 반대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특히 사내들의 반응이 전에 없이 드셌다.

"무슨 소리냐!"

"팔팔한 청년이 사는 집에 어린 소녀를? 말도 안 되는 소리!"

"네 녀석도 남자라면 알 것 아니냐. 자취생 방이 얼마나 불결한지. 오죽 했으면 수호신이 바... 하여간 안 돼!"

"먹는 건 또 어떻고. 일주일이 안 돼서 영양실조로 쓰러져 버리실 거야."

목소리 크기 경쟁이라도 하듯 목청을 높이는 사내들의 말에 병규는 내심 어이가 없었다. 그들의 가만 말을 종합해보면 그의 방은 식량공급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눈 덮인 시베리아 한가운데에 고립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 허구 많은 성토들 중에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은 독쟁이, 조준엽의 말이었다.

"넌 뉴스도 안 보고 사냐? 치마만 두르면 애 어른 할 것 없이 발정하는 게 요즘 애들이다. 저렇게 귀여운 퀴니 님이 녀석의 집에 같이 살게 돼 봐라. 아마 이틀도 안 돼서 애 엄마가 되어 버릴걸?"

'애. 엄. 마!!'

두둥.

병규는 또 한 번 여린 가슴에 상처를 받았다. 나름대로 순진무구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해온 18년. 그러나 주위는 그를 파렴치한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마음에 상처를 받자, 멍청할 정도로 순진하게만 살아온 지난 세월이 허무하게 느껴진다.

아마 주위에 여자들만 없었다면 그는 '타락해 버릴 거야!' 라고 외쳐버렸을 것이다.

"호. 이틀 만에 애를? 흐흐. 재주도 좋네."

가뜩이나 활활 타오르는데, 호랭이가 옆에서 기름을 살살 들이 붓는다. 말도 짜증나지만 흘끔흘끔 쳐다보는 호랭이의 시선은 더 기분 나쁘다.

그때 가만 사태의 추이를 살피고 있던 자영이 다소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퀴니 님... 뜻대로 하는 게 좋겠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경악성들.

"네엣?"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장."

"대장. 지금 제정신이야?"

"대장님! 적들이 또 언제 퀴니 님을 노리게 될지 모르는 긴급상황입니다."

"모르시는 겁니까? 남자 혼자 사는 자취방이란 말입니다. 그것도 이제 한창 팔딱팔딱한(?) 나이라고요."

경악성들 중엔 병규의 음성도 섞여 있었다.

"에? 그게 말이 돼요?"

자영은 슬쩍 고개를 창밖으로 돌려 대원들의 눈빛을 피하며 뒷말을 이었다.

"퀴니 님께서 뜻을 굽히실 생각이 없으시니 어쩔 수 없어요. 그리고 전 병규 대원을 믿어요.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는 불경한 짓 따윈, 절대로 하지 않을 거라고 말이죠."

확신에 찬 그녀의 음성에 병규는 가슴이 뭉클했다. 고작 하루 밖에 안 된 수하를 이렇게 믿어주다니. 그야말로 감동 아닌가. 그러나 그녀는 병규의 생각과 조금 다른 궁리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요즘 애완동물은 머리가 좋으니까 주인이 못된 짓을 하면 아마 알아서 막겠죠."

분명 호랭이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다.

으드드득.

호랭이 입에서 이빨 가는 소리가 터져 나왔음은 물론이다.

"애~ 완~~ 동~~~ 무을?!"

호랭이가 자영을 향해 이빨을 갈고 있을 때, 병규는 조금 불량해진 표정으로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쳇. 그럼 그렇지. 믿어주긴 개뿔?"

묘하게 닮은꼴인 주인(?)과 애완견(?)이었다.

결국 자영의 선택은 그대로 최종결정으로 굳어졌다.

아무도 퀴니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대원들은 눈물을 머금고 그녀를 보내기로 했다.

갑자기 자영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퀴니는 특재대에서 관리하는 평범한 능력자가 아니다.

유럽의 십여 개 국가가 인정하고 유럽의 능력자 협회인 가스펠에서 공인한 비밀특사였다. 당연히 거처를 옮기는 것 하나에도 수십 통의 전화와 팩스가 필요했고, 그보다 수십 배는 많은 허가가 필요했다.

의외로 상부의 허가는 즉시 이루어졌다. 당사자가 원하고 있다는 한마디에 무조건 지원이라는 대답이 떨어진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퀴니가 병규의 자취방에 머무는 동안 소요될 식료품과 필수용품에 대한 비용을 계산하여 공문으로 발송하고, 호텔에 연락을 넣어 짐을 챙기게 했다.

그리고 대원들 중에 희망자를 선발하여 병규의 자취방 주위에 배치하고, 나머지 인원은 총력을 기울여 적의 은신처를 찾는 데 주력하도록 했다. 블러드머신이라고 불리는 살아있는 전쟁영웅, 김한식은 특별히 현장에서 생포한 일본인들을 취조하는 일을 맡았다.

그렇게 일단의 일들이 처리되고 나서야, 둥그런 찐빵모자를 쓴 퀴니가 대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병규 앞에 나타날 수 있었다.

"뭐 어쨌든 같이 지내는 동안 잘 부탁해."

병규는 인형처럼 예쁜 금발의 소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퀴니는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응."

병규와 퀴니의 손이 맞닿는 순간 그녀를 호위하고 있던 사내들의 표정이 일제히 찌그러졌다.

'저런 죽일 놈!'

'퀴니님!!!!'

'바퀴벌레가아아아아!'

'흑흑. 더럽혀지고 말았어.'

'안 돼. 나의 여신이 바퀴벌레 따위에게.'

절망에 가까운 그들의 절규. 겉으로 표를 내지 못 한다 뿐이지 그들은 지금 속으로 피눈물을 삼키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들은 지금까지의 불쾌했던 감정을 일시에 털어버리고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너 이름이 퀴니라고 했지?"

"응. 아므르 퀴니."

"그래. 예쁜 이름이네. 난 태병규라고 해. 앞으로 병규 오빠라고 불러. 잘 부탁한다."

"응. 잘 부탁. 대변기."

"...!!"

쨍그랑.

예란의 손에 들려있던 쟁반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후로 잠시 동안 회의실엔 한바탕 폭풍이 지나쳐갔다.

그때, 한쪽 구석에서 가만 눈치만 살피고 잇던 바퀴벌레 왕자는,

"오오. 주인님의 성함이 바로 대변기였군."

라는 감탄사를 흘리며 날개 안쪽에 '대변기'라고 정성스레 적어 넣었다고 한다.(물론 자기네 문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