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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재대에서 마련해 준 으리으리한 리무진에 오르며 병규가 물었다.

"참. 비밀임무가 있다고 하던데 그게 뭐야?"

달리 할 말도 없어서 아무생각 없이 툭하니 던진 질문이었다.

"...."

병규의 물음에 퀴니는 잠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동그랗게 떠진 눈동자에 어린것은 갈등? 아니면 고뇌?

병규는 괜히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 곤란하면 말해주지 않아도...."

"마왕."

그의 말을 끊으며 퀴니가 짧게 말햇다.

"응?"

"퀴니. 마왕 찾아."

무슨 말일까 곰곰이 생각하던 병규,

"혹시 방금 전의 그 말, 네가 찾는 것이 마왕이란 소리니? 그 지옥인지 마계인지 하는 곳에서 대왕 노릇하고 있는 우중충한 괴물 말야?"

퀴니는 고개를 위 아래로 끄덕였다.

"하하. 너도 농담을 할 줄 아는 구나. 난 네가 우스갯소리를 전혀 못하는 줄 알았어."

병규는 퀴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껄껄 웃었다. 그러나 그녀는 웃지 않았다. 조금 굳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을 뿐이다.

하여간 그렇게 병규는 퀴니라는 새 식구를 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지방으로 향하는 리무진의 지붕 위에는 잠시 잊고 있었던 외계의 불청객이 자리를 턱하니 차지한 채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었다.

"호오. 이곳의 마차는 정말 신기하군. 샤바. 물도 걸쭉하게 빛깔도 마음에 딱 드는 걸? 그야말로 신이 우리 불쌍한 백성들을 위해 안배한 별이 아닌가. 하하하. 이렇게 좋은 구경을 하다니. 모두 주인님 덕분이야. 샤바샤바."

5. 오빠는 풍각쟁이야~

"쿵짝 쿵짝 쿵짝 쿵짝~ 오빠는 풍각쟁이야~ 오빠는 욕심쟁이야아아~"

요란한 박자에 맞춰 울리는 다소 고전틱하고 엽기적인 노래. 병규의 아침은 늘 이처럼 약간은 독특한 자명종 소리와 함께 시작됐다.

그러나 평소에는 졸린 눈을 비비면서도 피식 웃게 만들던 엽기 만발의 노래가 오늘은 그렇게 짜증스러울 수가 없었다. 어제 그 난리를 치르고 밤늦게 잠들었으니까 피로가 아직 안 풀린 것이다.

"아으~ 누가 저 자명종을 좀 죽여줘!!"

병구는 눈도 뜨지 못한 채 베개를 머릐 위에 뒤집어쓰고는 비명을 질렀다.

짜증은 비단 그 혼자만 났던 것이 아닌가 보다. 그의 배 위에서 고롱고롱 잠자던 호랭이가 반쯤 뜬 눈으로 벌떡 일어서더니 쥐를 본 고양이처럼 자명종으로 달려든다.

"이눔시키! 이눔시키!"

발톱을 곤두세운 앞발로 공 굴리 듯 자명종을 찰싹찰싹 후려치고, 레슬링을 하더니, 급기야 자명종을 붕 던져놓고는 두 발을 가지런히 모아 호랭이식 썸머솔트킥으로 깔끔하게 마무리한다.

깽~ 하고 날아간 자명종은 건전지를 토하며 뻗어 버렸다. 가볍게 자명종을 퇴치한 호랭이, 승리감에 도취된 나머지 태생도 잊어버린 채 고개를 길게 빼며 늑대처럼 울어댄다.

"아우우우웅~~~!"

며칠 전에 본 늑대인간 영화가 감명 깊었던가 보다.

병규는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는 괴상망측한 표정으로 호랭이의 기행을 지켜봐야 했다.

"크헤헤. 이겼다."

호랭이는 죽어버린(?) 자명종 앞발을 올려놓고 거창하게 웃더니 곧 고롱고롱 다시 잠이 들었다. 아마도 자명종이 시끄럽게 울려대니 잠결에 달려들었던 모양이다.

"잠꼬대도 가지가지군. 뭐, 그래도 조용해졌으니 고맙다고 해야겠지?"

병규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그는 몰랐다. 이불 안에서 호랭이의 기행을 관찰하고 있는 두 눈이 있엇다는 것을.

'멍멍이. 칭찬.'

다음날, 기어코 사단이 일어났다.

자명종이 울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벌떡 일어난 퀴니. 자명종 앞에 쪼그려 앉은 그녀는 호랭이가 그랬듯 손바닥으로 자명종을 찰싹찰싹 때려댔다.

"이눔! 이눔!"

반쯤 감긴 눈까지 똑같다.

'서. 설마!'

졸린 눈으로 퀴니를 쳐다보던 병규는 돌연 불길한 예감에 몸을 흠칫 떨었다.

'분명 저거 다음에 호랭이가 했던 것이....'

그렇다. 두 발을 모으고 공중 일회전을 하며 갈기는 썸머솔트킥!

과연 퀴니.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자세를 잡더니 자명종을 위로 던지며 동시에 펄쩍 두 다리를 치켜든다.

그러나 아뿔싸!

그녀에겐 호랭이와 같은 순발력이 없었다. 결국 썸머솔트킥을 빙자한 그녀의 발라당 킥에 맞은 자명종은 '케엥~' 하는 처량한 비명을 지르며 창문을 뚫고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오 마이 갓!!"

병규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비명을 질렀다.

"제발 정상적인 사람과 살고 싶다고!!!"

잠시 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보니 이마에서 피를 주르륵 쏟고 있는 안세준이 한 손에 자명종을 들고 있었다. 지니가다 그녀가 날린 자명종을 정통으로 맞은 것이다.

깜짝 놀란 병규가 재빨리 그의 손에서 자명종을 낚아챘다.

"아아! 이럴 수가. 무사해. 무사해. 천만다행이야."

놀랍게도 자명종은 표면이 조금 찌그러진 것 말고는 멀쩡했다. 초침도 잘 굴러가고 있다. 이층에서 창문을 뚫고 90밀리 포탄처럼 날아간 것을 생각하면 기적적인 귀환이랄 수 있었다.

"아아.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아. 부처님 감사합니다. 알라~~!!"

병규는 자명종을 품에 안고 불특정 다수의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자명종 살 돈이 굳은 것이다.

"이, 이것 봐."

안세준이 그를 불렀다. 멀뚱히 쳐다보니 그는 피가 찔찔 새고 있는 자신의 이마를 가리킨다.

"뭐 이상한 거 안 보여?"

"어라. 어쩌다 그렇게 됐냐? 자빠진 거야?"

"...."

안세준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지켜보고 있던 호랭이가 포옥 한숨을 쉬었다.

"에휴.제발 정상적인 놈과 살고 싶다."

자명종을 날려버린 죄로 벌을 서고 있던 퀴니가 호랭이의 말에 동의하듯 한숨을 포옥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퀴니야. 잠깐만 이리와."

멀쩡히 길가다가 어느 집 삼층에서 날아든 자명종에 머리를 강타 당했다는 안세준의 기구한 사연(?)을 들은 병규는 당장에 퀴니를 불렀다. 퀴니는 두 팔을 쳐든 채로 쫑쫑 걸어왔다.

"얘가 그랬냐?"

안세준이 안면을 뒤틀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혼내주겠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퀴니의 귀여운 얼굴을 보니 도저히 화를 못내겠기 때문이다.

"휴. 다음부터 조심하라고 해."

고개를 흔들며 안세준이 나갔다. 그가 나간 후, 내내 웃고 있던 병규는 퀴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통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잘했어. 아주 잘했어."

자명종도 무사하고 얄미운 안세준에게 한 방 먹이기까지 하니 가슴이 다 시원해졌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그가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며 눈을 빛내고 있는 어두침침한 존재가 있을 줄은.

'호오. 칭찬받았다. 샤바.'

기다리고 기다리던 다음 날, 자명종이 울리자마자 호랭이가 벌떡 몸을 일으키고, 그런 호랭이를 꾹 누르며 퀴니가 몸을 굴리자마자 그런 그녀의 머리 위를 요란한 날갯짓소음을 동반한 바퀴벌레 왕자가 엄청난 스피드로 지나갔다.

바퀴벌레다운 반사신경과 민첩함으로 누구보다 먼저 자명종을 차지한 바퀴벌레 왕자.

그 다음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팔 대신 긴 더듬이로 자명종을 톡톡 쳐댄 바퀴벌레 왕자는 길게 심호흡을 하며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온몸을 이용! 자명종을 허공으로 던져 넣... 으려 했으나, 아뿔싸!

자명종을 허공에 던지기엔 다리가 너무도 짧았다. 그렇게 되자 자명종을 안고 뒤로 한바퀴 일회전 한 격이 되었고, 탄력을 받은 자명종은 마치 예전에 모 국회의원이 선보였던 유도기술처럼 바퀴벌레 왕자님의 뒤로 넘어가서....

까앙!

"쓰으으읍. 우아아아아악! 이번엔 또 뭐야!! 씨발라마!!!! 다 나와!!!"

바퀴벌레 왕자는 곧장 책상 아래로 도망가 버렸다.

"띠리리리리리링!"

"니나노~오. 닐리리아~ 닐리리아~ 니나노오~"

"빰빠라~ 빰빰빰~ 빠~~!! 일어나! 일어나! 아침이야~!! 일어나! 뺨뺨!"

"꼬끼요오오오오~ 자~ 이 소리를 영어로 하면? 꼬끼오로오우우우~"

아침의 시작을 알리는 가지각색의 잠여종 소리.

여느 가정집 같으면 시끄러운 소음에 눈을 뜬 주인이 반쯤 뜬 눈으로 자명종을 멈추고,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걸어갈 테지만, 병규의 자취방에선 그런 일상의 풍경과는 전혀 동떨어진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쿵짝 쿵짝 쿵짝 쿵짝~ 오빠는 풍각쟁이야~ 오빠는 욕심쟁이야아아~"

엽기 발랄한 자명종 노래 소리.

그런데 어째 소리가 좀 찌그러진다. 그럴 수밖에. 날이면 날마다 이리저리 메쳐지니 온전할 텅이 없지. 사실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만도 용한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시작이다.

벌떡.

후다다닥.

파다다다다.

자명종 소리가 들리지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활동을 시작하는 세 그림자. 당연히 호랭이와 퀴니, 그리고 바퀴벌레 왕자였다.

이른바 아침마다 벌어지는 자명종 격투. 이제는 아예 셋이서 태그매치를 한다. 퀴니랑 호랭이가 한편을 먹고, 바퀴벌레 왕자와 자명종이 한편을 먹는다. 당연히 바퀴벌레 왕자와 자명종의 연전연패. 하지만 매일 계속되는 패배에도 바퀴벌레 왕자는 굴하지 않고 매일매일 새롭게 의욕을 다졌다. 경기(?)가 끝난 후엔 항상 자명종을 더듬이로 다정스레 쓰다듬으며 작전회의를 한다. 말 못하는 자명종을 상대로 저렇게 진지할 수 있는 것도 나름대로 재주이리라.

바퀴벌레 왕자가 한쪽에서 궁상을 떠는 동안 만년 우승팀은 늘어지는 기지개를 켜며 오늘의 승리를 자축한다.

호랭이를 따라 등을 곱게 펴며 하품을 하는 퀴니. 그녀는 갈수록 호랭이를 닮아가고 있다. 아! 발로 귀를 털고 있다.

'저러다 맹수가 되어버리면 어쩌지?'

병규는 정말로 그녀가 걱정되었다. 가뜩이나 평범하지 않은 앤데. 그리고 그런 불만은 자연스레 호랭이에 대한 분노로 옮아간다.

퀴니나 바퀴벌레는 철이 없어서 그렇다 치더라도 신선씩이나 되는 호랭이는 왜 저렇게 쓸데없는 짓에 열을 올리는지.

'고양이 과의 숙명인 거야?'

화려한 기술을 연발하는 드림팀의 태그매치 경기를 관람한 병규는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꼭 학교에 가야 한다. 그동안 이런저런 일로 너무 많이 놀았다. 잘못하다간 출석일수가 모자라게 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병규가 대충 학교 갈 채비를 마치자 어느새 옷을 갈아입은 퀴니가 그의 옆에 착 달라붙는다. 비스듬히 메어진 작은 가방을 보니 오늘은 기어코 따라나설 모양이다.

"에효."

병규는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된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 퀴니가 고집을 부리면 아무도 못 말린다는 건 이미 여러 날 전에 확인했으니 말이다. 사실 소란만 안 피운다면 뭐라 그러는 선생님도 드무니 상관없기도 하다.

"아니. 병규야. 숨겨둔 애야?"

"헛. 금발! 너 언제 우리 몰래 백마를 습격한 거야?"

"능력도 좋네."

교실까지 가는 도중 마주친 녀석들이 퀴니를 보며 저마다 한마디씩 한다. 그런데 어째 보는 시선이 사촌동생이 아니라 부모자식 관계다.

"오오."

병규는 다시 한 번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지었다.

오랜만에 들어선 교실. 병규는 서먹서먹한 느낌을 받았다. 요즘 들어 워낙 이상한 일을 많이 겪어서 이젠 이런 평범한 일상에 오히려 이질감을 느낀다.

"에헴."

헛기침소리와 함께 깐깐하게 생긴 중년 사내가 들어왔다.

물리선생이다.

사실 물리 선생은 생긴 것만큼이나 지독한 인간이었다. 거의 매주 숙제에 시험문제도 책 한 권을 달달 외우길 바라는 그런 옹졸한 타입이다. 게다가 사람 무시하는 건 또 얼마나 좋아하는지. 태흥고등학교에 재임중인 교사 중에서 인기도 최악을 달리는 선생이 바로 물리선생이다.

막 교재를 펼치고 강의를 시작하려던 물리선생. 핸드폰을 꺼두지 않았나 보다. 벨이 울린다. 그런데 일이 꼬이려니 하필이면 그 벨소리가....

"쿵짝 쿵짝 쿵짝 쿵짝~ 오빠는 풍각쟁이야~ 오빠는 욕심쟁이야아아~"

'호, 혹시'

순간 섬뜩한 생각이 든 병규는 급히 무릎 위를 봤다. 호랭이가 벌떡 몸을 일으킨다. 팽팽하게 당겨지는 신경. 조건반사다.

'안 돼!!'

병규는 튀어 나가려는 호랭이를 재빨리 낚아챘다.

그러나 아뿔싸!

호랭이에게 신경을 쓰느라 옆에 앉아 있는 또 다른 위험분자를 간과하고 말았으니....

벌떡 일어난 퀴니. 가히 동물과 같은 몸놀림으로 책상 위를 내달린다. 그리고는,

"이눔! 이눔! 이눔!"

힘찬 구령과 함께 물리 선생의 싸대기를 시원스레 날리고, 이어 정강이를 걷어차 깽깽 뛰는 선생의 턱을 향해 호쾌한 발라당 킥까지 한 세트로 선사해 버렸다.

뻐걱! 하는 통괘한 소음과 함께 육중한 물리 선생의 몸이 뒤로 훌러덩 자빠져 버린다.

"허...."

병규의 입에서 힘없는 한숨소리가 흘러나온다. 문득 그는 생각했다. 혹시 자신은 저주받은 것이 아닐까? 왜 하는 일마다 이렇게 꼬이지? 괜스레 허탈한 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아직 그의 불행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니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선행. 채 어떻게 된 사태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신경 거슬리는 소음을 듣게 되었다.

파드드드.

"아야야. 이게 또 무슨 소리?"

고개를 든 선생의 눈에 뭔가 거무튀튀하고, 넓적하면서도 야리꼬리하게 생긴 것이 갈색 날개를 펼쳐들며 소리도 요란하게 날아들고 있었다. 그것은,

"바, 바퀴벌레!!"

그것도 초대형이다.

놀란 선생이 자지러지기도 전에 구석 으슥한 곳에서 튀어나온 초특급 바퀴벌레는 선생의 주름진 얼굴에 찰싹 달라붙으며 기쁜 목소리로 외쳤다.

"친구!! 샤바. 말을 할 수 있는 동료는 처음일세. 이젠 작전회의를 할 수 있게 됐어. 샤바샤바."

퀴니에게 맞는 것을 보고 자명종처럼 생각하게 되었는가 보다.

"컥."

선생의 검은자위가 위로 스르르 올라가더니 무슨 간질병환자처럼 온몸을 파르르 떤다. 그리고 입 밖으로 밀려나오는 게거품.

그 순간, 멍하게 풀어져있던 병규의 눈에 언뜻 초점이 잡혔다.

번개같이 후다닥 달려 나간 그는 선생을 붙들고 '어서 일어나게. 샤바. 자네가 누워있으면 태그를 할 수 없지 않은가!' 라고 외치는 바퀴벌레 왕자를 뻥 창밖으로 차버린다. 그리고는 물리 선생을 끌어안고 한바탕 통곡을 했다.

"이럴 수가. 선생니이이이이임!"

가슴 저 깊은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듯한 통한의 울음. 보는 사람의 눈시울이 다 붉어질 정도로 리얼한 연기였다.

"이 바보 녀석들. 지금 뭣들 하고 있는 거야. 선생님께서 바퀴벌레의 공격을 받고 실신하셨잖아. 빨리 119에 전화해. 그리고 사내 녀석들은 빨리 나와서 거들어!"

병규가 붉게 충혈 된 눈으로 고함을 지르자 엄청난 사태에 바짝 얼어있던 학생들이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마, 맞아. 선생님은 바퀴벌레에."

"그, 그런데. 그게 바퀴벌레가 맞긴 맞아?"

"푸, 풍뎅이 아닐까?"

"바보야. 무슨 풍뎅이가 항아리 뚜껑만하냐?"

"하, 하긴."

"그런데 방금 전의 바퀴. 말을 하지 않았냐?"

"그럴 리가! 분명 환청을 들은 거야."

"그, 그래. 많이 놀랐었으니까. 하하하. 우린 단체로 환청을 들은 거야. 하하하."

바퀴벌레 왕자를 보고 집단으로 쇼크를 먹었다 보다. 죄다 바퀴벌레에 관한 얘기뿐이다. 선생 역시 마찬가지라서 병원에서 정신을 차린 그는 바퀴벌레 노이로제 때문에 한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하여간 덕분에 퀴니가 저지른 일은 그렇게 유야무야 묻힐 수 있었다.

"휴. 자칫 했으면 퇴학당할 뻔했다."

정말이지 위험천만의 상황이었다. 생각만으로 아찔하다.

순간의 재지로 위기에서 벗어난 병규는 손으로 머리를 짚은 채 안도의 한숨의 쉬었다. 그런 병규의 허리를 콕콕 찌르며 퀴니가 물었다.

"변기. 나 미워?"

"에효. 아무것도 모르는 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니. 다 너에게 쓸데없는 걸 가르친 저 체신 머리 없는 호랭이 탓이지."

그날, 호랭이는 병규와 만난 이후로 처음 하루 종인 금연을 해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병규에게 차여 창밖으로 날아간 바퀴벌레 왕자는,

"친구! 어딨는가! 샤바. 친구!! 태그 연습하세! 샤바. 친구우우~! 샤바샤바."

라고 외치며 병원으로 실려 간 선생을 찾아 주위를 떠돌고 있었다.

'아무래도.'

어느 날 저녁, 부엌 싱크대 밑에서 자명종을 껴안고 '자명종군. 좋은 계획 없는가? 샤바~'라고 중얼 거리고 있는 바퀴벌레를 게슴츠레 바라보던 병규는 한참 음침한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저 녀석을 처치해야 할 것 같아.'

며칠, 그나마 좀 적응이 돼서 징그럽게 느껴지는 것은 많이 덜해졌지만, 문제는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서나 저 녀석이 따라붙는다는 점이다. 그것도 얼마나 교묘하게 숨는지 도무지 찾아낼 수 없을 정도다. 그나마 계속 안보이게 따라다니면 별 문제 될 것도 없겠는데, 가끔씩 놈이 꼭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서 주변을 풍비박산 내버리는 통에 미칠 지경이다.

일전엔 학교 화장실에 볼일을 보고 있을 때 나타나는 바람에 공동화장실이 순식간에 개인 전용실이 되어버린 적도 있었고, 등교 길에 겁도 없이 그의 옆에 나타나는 바람에 할생으로 가득 찬 등교 길을 허허벌판으로 만들어 버린 적도 있었다.

설사 폭탄이 떨어져도 그 지경까지는 안 될 것이다.

'이 상태로는 저놈의 초대형 바퀴벌레가 내 방에 산다는 걸 들키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야. 그럴 바엔 차라리 더 정이 들기 전에....'

병규는 마음을 굳게 다졌다.

우선 인터넷을 통해 바퀴벌레에 대한 지식을 쌓은 병규. 바퀴약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일반적인 방법부터 시도했다. 전날 저녁에 본 사극에서 짜증나는 와녀가 사약을 받던 장면을 떠올린 그는 바퀴약계의 사약이라고 할 수 있는 로취베 X트를 대량으로 구입했다.

"집에 바퀴가 좀 많으신가 보죠?"

"하하. 학교 창고에서 쓸 겁니다."

이상하게 생각하는 마트 직원에게 어색한 웃음으로 대꾸한 그.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바퀴벌레 왕자에게 잠깐 산책을 명한 후 대인용 발목지회 파묻듯 집안 곳곳에 로취베 X트를 설치했다. 말이 일곱 통이지 한 통에 여섯 개씩 든 것을 채 열 평도 안 되는 작은 방에 뿌려댔으니 곳곳이 지뢰밭이라고 봐야 했다.

"그래. 이 정도면."

바퀴벌레가 잘 다니는 길목 요소요소마다 지뢰를 설치한 병규는 고된 노동의 대가에 만족하며 일찍 잠이 들었다.

어둠이 스멀스멀 몰려오고, 여태 숨어있던 바퀴벌레 왕자가 슬금슬금 책상 아래에서 기어 나왔다.

평소처럼 자기의 구역을 순찰하던 바퀴벌레 왕자는 평소엔 보지 못한 묘한 녀석을 발견했다. 작은 집과 같은 모양으로 방바닥에 납작하게 붙어 있는 녀석이었는데, 작게 뚫린 구멍 안에서 맛있는 냄새가 솔솔 흘러나오는 것이엇다.

"어쩔씨구리. 넌 어디서 튀어나온 녀석이냐? 샤바. 정체를 밝혀라. 샤바."

당연히 그 녀석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괴이쩍은 표정으로 놈을 살펴보던 바퀴벌레 왕자. 문득 이 수상쩍은 녀석과 똑같이 생긴 놈들이 사방에 쫙 깔려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바퀴벌레 왕자의 두 눈이 반짝 빛을 발한다.

"오호라~! 샤바. 이제 보니 네놈들이 감히 이 왕자님의 나와바리를 어떻게 해보겠다고 모여든 모양인데? 샤바샤바."

불량스럽게 바닥에 침을 찍 뱉은 바퀴벌레 왕자는 괴성을 지르며 병규가 설치한 지뢰를 향해 용맹무쌍하게 달려들었다.

"쓴맛을 보여주마!! 쌰바아!"

다음 날 아침. 여느 때보다 상쾌하게 일어난 병규는 문밖을 나서다가 '헉.' 하고 경악을 내지르며 나빠져야 했다. 고생고생하며 방 구석구석 배치해 놓았던 지뢰들이 갈기갈기 찢어진 채로 문앞에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이 아닌가.

"뭐, 뭐야. 이건! 혹시... 네 잔꾀는 좁쌀만큼도 안 통한다는 경고의 의미?"

그의 머릿속으로 지뢰를 발견하고 피식~ 하고 웃는 바퀴벌레의 얼굴(?)이 떠오른다.

왠지 바퀴벌레에게 농락당한 느낌이 든 병규, 그 길로 당장 마트로 달려가 새로운 무기를 구해 가지고 왔다.

'이번만은, 반드시.'

회심의 미소를 지은 병규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바퀴벌레를 불렀다. 바퀴벌레 왕자는 부르자마자 장롱 구석에서 파다다다 날아왔다.

"오오. 주인님 절 다 불러주시고. 감격입니다. 샤바샤바."

그토록 멀리하던 주인이 자신을 불러주다니. 삼생의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기특한 바퀴벌레 왕자엿다.

감동의 눈물을 글썽이는 바퀴벌레를 보고 병규는 양심이 조금 찔렸다. 하지만 사나이가 칼을 뽑았으면 최소한 바퀴벌레 한 마리라도 처리해야 하는 법.

그래도 마지막이라고 그는 과감히 아끼던 참치 캔 하나를 뜯어 바퀴에게 주었다.

"그동안 너무 구박만 한 것 같아. 미안했다. 자, 이건 앞으로 잘 지내보자는 뜻에서 주는 거야."

"주, 주인님. 샤바."

바퀴벌레가 흘리는 눈물도 부엌이 홍수가 날 지경이다. 아까보다 양심이 조금 더 찔리는 병규. 그러나 애써 무너지려는 의지를 곧추세웠다.

"녀석. 어서 먹기나 해."

"네. 잘 먹겠습니다. 주인님. 샤바."

더듬이를 살랑살랑 흔들며 참치 캔으로 기어간 바퀴는 정말 게걸스럽게 참치를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병규는 문득 눈시울이 붉어졌다. 뒷짐을 진 그의 손에는 다 쓴 치약 통처럼 구겨진 튜브식 바퀴벌레약이 쥐어져 있었다.

지금 바퀴벌레 왕자가 먹고 있는 참치 안에는 좁쌀 반 톨만 한 분량으로도 바퀴가족 일가를 몰살시킨다는 치명적인 독약이 걸쭉하게 풀어져 있었다.

'휴. 정말 못 할 짓이구나.'

병규가 한숨을 쉬고 있을 때, 참치 캔을 먹던 바퀴벌레 왕자가 돌연 몸을 움찔 떤다. 병규는 천정을 올려다보며 다시 한 번 착잡한 심정으로 뇌까렸다.

'녀석. 부디 좋은 곳 가라. 다음엔 꼭 바퀴 말고 다른 종족으로 태어나길 바란다.'

그런데 웬걸 당장 몸을 뒤집으며 돌아가셨어야 할 바퀴벌레 왕자가 그를 부르는 것이 아닌가.

"저... 주인님."

"흡."

벌써 좋은 곳으로 갔겠지 생각한 바퀴벌레의 목소리에 숨이 턱 막힌 병규, 조심스레 고개를 내려 바퀴벌레를 쳐다봤다. 몸을 뒤집은 채 다리를 바르르 떨며 죽었어야 할 바퀴벌레 왕자가 그럴 보며 좀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병규는 입을 쩍 벌린 채 경악했다. 그런 그를 향해 왕자가 좀 미안한 표정으로 넌지시 말을 건넸다.

"저, 이거 좀 싱거운 것 같은데 고추장 좀 더 타면 안 될까요?"

"...!"

"젠장, 어떻게 해야 그 녀석을 퇴치하지?"

연이은 실패에 고심하던 병규는 평생 안 하던 공부까지 해 가며 바퀴벌레 퇴치에 열을 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그는 신문에서 좋은 힌트를 발견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신문에 나온 사건은 어느 악독한 여자가 남편을 죽이기 위해 남편의 신발에 매일 조금씩 농약을 뿌려 결국 1년여 만에 독살시켰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군. 한 방으로 안 된다면. 조금씩 조금씩 죽이면 되는 거야."

다행스럽게도 병규가 원하는 효능의 바퀴약은 이미 개발되어 시판 중이었다. 분필같이 생긴 문제의 바퀴약은 그저 바닥에 쭉선을 그으면 지나가는 바퀴들이 죽어버린다는 오묘한 신통력을 가지고 있었다.

멀리 서울까지 가서 문제의 비약을 구해온 병규, 입가에 침을 흘리며 열이 날 정도로 방바닥에 낙서를 해댔다.

"케헬헬. 이래도 안 죽나보자. 흐흐흐흘."

그날 밤. 병규는 유난히 포근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헉."

그의 입에선 전날과 마찬가지로 격한 신음성이 터져 나와야 했다.

온 동네에서 모여든 것 같은 각양각색의 바퀴들이 무려 3센티 두께로 칠해진 문제의 비약을 타고 넘으며 체육대회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엌에서 화장실까지 어이진 긴 선을 이용한 멀리뛰기. 식탁 아래 사각형으로 그려진 비약 안에서 행해지는 마루체조, 싱크대에 찬 세제물 속에서 행해지는 수영경기, 그리고 방 한바퀴를 도는 체육대회의 꽃 장거리 마라톤. 그리고 어디서 뜯어온 것인지 모를 꽃잎을 던지며 환호하는 바퀴벌레 응원단까지.

그들의 체육대회는 경기를 펼치는 선수는 물론, 응원하는 관객들마저 발 한 번만 삐끗해도 곧장 비약을 밟고 사망하는 죽음의 랠리였다.

"뭐냐. 쟤들?"

병규의 배 위에서 자고 있던 호랭이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입을 딱 벌린 채 굳어 있는 병규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죽으라고 줄 그어 놨더니 오히려 즐긴다?

"호오."

퀴니는 바퀴벌레 떼를 보고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원흉인 바퀴벌레 왕자는..., 동네의 어린 바퀴들을 모아놓고 일대 강연을 펼치고 있었다.

"오늘은 지뢰에 대비하는 법에 대해서 학습하겠다. 보통 잘 다니는 길이라고 방심하는 법이지만, 인간은 그런 허점을 교묘히 파고든다. 평소에 음식이 안 떨어져 있던 곳에 먹음직스러운 것이 있으면 무작정 달려들지 말아라! 4 미닛 44 서컨드 4444 밀리세컨드 이내로 즉사다. 입을 댔는데 약간이라도 시금컬컬한 맛이 아면 그냥 혼자 먹고 얌전히 죽어라. 괜히 식구들 챙겨준다고 가져 갔다가 '카드 값 비관 일가족 자살?"이란 제목으로 신문 일면 장식하지 말고.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그나마 조금만 조심하면 피할 수 있는 것들이다. 문제는 조심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 학습할 놈이다. 이 놈은....".

병규는 그대로 하얗게 타버리고 말았다.

"어쩔 수 없다. 다소 잔인하긴 하지만 최후의 방법을 동원하는 수밖에."

연이는 실패에 고심한 병규는 급기야 너무 잔인해서 지금껏 사용을 자제하던 금지된 술법을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애초에 그가 이 방법을 꺼렸던 것은 독일군의 잔인함을 그린 몇몇 영화를 감명 깊게 보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덩 이상 그런 약한 마음을 품을 수는 없다. 기왕 여기까지 온 거, 인정사정 봐줄 것 없이 터트려 버릴 생각이다.

"에? 샤바. 그냥 여기서 두 시간만 있으면 되는 겁니까. 오. 샤바. 그건 쉬운 일이지요. 샤바샤바."

"그래. 그렇게 해 준다니 다행이다. 그럼 금방 다녀올 테니 집 잘 지켜라."

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방구석에 혼자 남게 된 바퀴벌레 왕자는 자신을 믿어주는 주인의 신뢰에 잠깐 동안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오오. 구박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주인님은 날 신용하고 있었던 것이야. 그러니 집을 맡기지. 샤바. 속으론 다정해도 겉으론 냉정하게 큰일을 주도해 가는 과감한 결단력. 오오. 왕자인 내가 꼭 배워야 할 군주의 덕목이 아닌가. 샤바샤바."

그렇게 감격에 떨던 바퀴벌레 왕자, 문득 이상한 소음을 듣고 방으로 들어갔다.

치지지지지.

방 한 중앙에 놓여진 작은 접시, 그 위에 올려진 깡통으로 작은 불꽃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이것이 무엇인고? 어디에 쓰는 물건이고? 샤바."

다이너마이트처럼 심지가 타들아 가고 있는 깡통을 쳐다보며 바퀴벌레 왕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지는 빠르게 타들어 갔다. 그렇게 열심히 타던 심지가 깡통 안으로 사라졌을 때, 푸쉬이이익 하는 거친 소음과 함께 엄청난 연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래? 어래? 샤바?"

깡통에서 솟구쳐 오른 연기가 내부를 완전히 잠식하고 있는 병규네 집 문밖엔 '연막 살포 중'이라고 씌어진 종이가 팔락거리고 있었다.

'하하하. 오랜만에 산책을 하니 기분이 좋군.

호랭이와 퀴니를 데리고 공원 산책을 다녀온 병규는 개운한 표정이었다.

"하루 종일 실실 쪼개긴. 뭐가 그리 기분이 좋냐?"

"하하. 조금 있으시면 호랭이도 알게 될 겁니다."

호랭이의 퉁명스런 물음에 병규는 하하하 웃으며 문을 열었다. 돌연 확 하고 끼쳐오는 매캐한 냄새. 눈물이 찔끔하고 코가 시큼해진다.

"켁. 켁. 뭐, 뭐야. 이건."

호랭이가 두 앞발로 코를 문대며 괴로워했다.

"쿨럭. 아. 연막 한 번 엄청나네. 세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연기가 안 가시다니."

"어? 병규야. 퀴니. 저 녀석."

"헛."

병규는 입을 헤벌린 채 뒤로 넘어간 퀴니를 질질 끌어냈다.

"젠장. 그 약국 아저씨. 바퀴벌레 잡을 거라고 그랬지. 누가 생화학 무기를 달라고 했나. 바퀴 잡으려다 사람이 죽겠네."

자욱하게 낀 연막은 한참 후에야 가라앉았다. 환기나 시킬까 하고 방으로 들어간 병규는 자욱한 연막 속에서 벌어지는 수상한 작태에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꼼짝없이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바퀴벌레 왕자는 전에 체육대회 하던 그 멤버(?)들을 모아놓고 화생방 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겨우 이 정도에 쓰러져? 너무 허약하군. 샤바. 다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어이 너. 다리가 굽었잖아. 그래. 그렇게 활짝 펴. 넌 더듬이가 그게 뭐야! 기운차게 못해? 지금 너희들의 고생이 장차 자손의 면역력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샤바. 이런 기회 아무 때나 있는 게 아냐. 주인님이 우리 백성들을 위해 제공한 소중한 기회. 확실하게 살려야 한다. 자! 그럼 모두 같이 외쳐보겠다. 깨스! 깨스!

"으아악. 도저히 못 참겠다."

인간도 못 견딜 연막 속에서 태연히 면역강화훈련을 하고 있는 바퀴벌레들의 모습에 얼이 빠져있던 병규는 급기야 이성을 잃고 말았다. 뚜껑이 활짝 열려버린 그는 오래전에 사 놓고 사용하지 못했던 최후의 비밀병기. 분무식 레X드를 꺼내들고는 '어? 주인님 오셨어요? 샤바?'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바퀴벌레 왕자를 향해 무작정 분사해버렸다.

치이이이이이익.

피하고 자시고 할 새도 없이 분사된, 인간이 만든 가장 지독한 바퀴벌레 퇴치약.

과연 천하의 바퀴벌레 왕자도 참을 수 없었던지 움찔하더니 다리를 발발 떨기 시작한다. 그 길고 팽팽했던 더듬이마저 아래로 축 쳐져버리더니 이내 흐느적거린다.

"크하하하하하하하."

병규의 입에서 득의의 괴성을 터져 나왔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한 톨의 양심 때문에 주저하던 지난 과거가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렇게 병규가 'Mission Complete'를 외치며 환희에 젖어있던 그때, 분무를 맞고 바바바 떨던 바퀴벌레가 툭 하고 내뱉는 말 한마디.

"무. 푸헤헤. 이거 좋은데? 쌰이뱌. 꺼억~. 주인장 여기 바퀴약 1000cc 추가. 원샤스루~~ 샤아뱌. 푸헤헤. 바퀴왕국이여 영원하라. 백성들이여~ 세상을 다 가져라. 샤뱌뱌뱌뱌뱌뱌뱌."

"...!!"

바퀴벌레 왕자의 주정을 듣고 입을 쩍 벌린 채 굳어 있는 병규. 그 옆을 지나가던 퀴니가 양볼을 부풀리며 불만스레 한마디 툭 던진다.

"변기. 맨날 바퀴랑만 놀아. 퀴니 외로워."

"하...."

그 순간 호랭이는 입 밖으로 사람의 혼이 승천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오빠~. 나왔어. 보고 싶었지?"

열렬한 환영을 기대하며 삼천 원짜리 아이스크림을 들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경애는 확 달라져버린 집안 분위기에 움찔 놀랐다.

"왔...니?"

그녀를 돌아보며 힘없이 손을 흔들어주는 병규는 불과 며칠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마치 낙하산 대신 보자기를 들고 2000미터 상공에서 거꾸로 추락한 사람 같다 랄까?

얼굴은 여든 먹은 노인네처럼 주름이 가득하고, 머리엔 흰머리까지 보인다. 게다가 살짝 벌려진 입가로 허탈한 듯 흘러나오는 '허허허허허.'하는 자조어린 웃음이란.

"오, 오빠.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눈물을 글썽이며 달려간 경애는 그를 끌어안고 하늘이 떠나가라 오열했다.

"왜 이렇게 된 거야. 어쩌다 이렇게 된 거냐고. 누구야. 누가 그랬어. 어서 말을 해봐."

"그러니까...."

"아아. 맙소사. 이 흰머리 좀 봐. 얼굴 주름은 어떻고. 피부상태도 엉망이야. 이빨은 닦은 거야? 윽. 눈곱이다. 사람이 아무리 충격을 받았어도 씻기는 해야지. 방안 청소도 안 했지? 아아. 책상위의 이 먼지 좀 봐. 아, 원래 책상은 안 쓰는구나. 아냐 아냐. 푼수처럼 지금 이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지. 오빠 말해줘.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됐어. 응? 숨기지 말고 말해줘. 왜 말을 안 하는 거야!!"

"바퀴...."

"설마 말 못할 사정인 거야? 지나가는 여자라도 덮쳤어? 그래서 방송에 이름이라도 나온 거야? 그런 거야? 아니면 덮친 여자가 돈을 요구해?"

"벌레...."

"그것도 아니면. 헉! 깨달음? 드디어 도를 깨달은 거야? 약수터에서 선인이라도 만난 거야? 그래서 깨달음을 얻은 거지? 그런 거지? 그래서 지금 해탈이라고 하려는 거지? 안 돼. 가지마. 모처럼 경애가 아이스크림을 사 가지고 왔는데 오빠가 죽으면 내가 다 먹어야 하잖아. 내가 살 찌면 오빠가 책임질 거야? 안 돼. 가지 마 오빠. 내 다이어트를 위해서도 절대로 살아줘. 오빠아아아~"

"쿨럭!"

끝내 병규는 각혈을 하고 말았다.

"우앙. 오빠, 때가 된 거야? 이제 떠나는 거야? 이렇게 허무하게 떠나는 거냐고. 우아아앙. 가지 마. 가더라도 집문서랑 통장 비밀번호는 알려주고 가. 집이랑 돈이랑 남기고 가는 거 아깝잖아. 그러니까. 알려주고 가. 오빠. 아아아아앙. 오빠아아아아."

"컥컥컥. 커억."

경애의 절규(?)로 병규의 가슴은 아예 피로 물들어 버렸다.

바로 그때!

검은 그림자 하나가 그녀의 등 뒤로 소리 없이 접근했으니.

터엉~~

짧은 쇳소리와 함께 긴 여운을 남기는 진동음. 경애는 그대로 주저앉으며 두 손으로 머리를 마구 비벼댔다.

"쓰읍. 키아아아아아아아앙."

당해 본 사람만이 그 고통을 안다. 쟁반 모서리로 머리를 찍히면 얼마나 아픈지.

"이케케케케케. 아파라. 도대체 누구얏!"

도끼눈을 하고 빙글 뒤를 돌아본 경애는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작은 소녀를 보게 되었다. 금발 머리를 곱게 땋은 소녀는 정말이지 인형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귀여웠다. 동그랗게 뜬 맑은 눈과 빤질빤질 광택이 나는 코, 그리고 그 아래 자리잡은 발그스름한 입술이란 여자인 경애가 봐도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깜찍했다.

그러나 그런 귀엽고 앙증맞은 소녀의 손에 들린 각진 양철 쟁반을 보았을 때, 경애의 눈은 휘딱 뒤집어져 버렸다.

"뭐야! 너. 왜 남의 머리통을 후려갈긴 거야. 그걸로 맞으면 얼마나 아픈지 알아? 너 집이 어디야. 엄마 어딨어?"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들, 멀뚱멀뚱 경애를 쳐다보고 있던 퀴니의 그린 듯한 눈썹이 살짝 찡그려졌다.

잔소리를 한없이 쏟아내고 있는 경애를 가볍게 무시하기로 마음먹은 퀴니는 피를 토하며 몸을 푸들푸들 떨고 있는 병규를 가리키며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변기. 내꺼. 건들지 마."

"뭐라?!!"

물의의 일격을 받은 경애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너! 그게 무슨 소리야. 변기가 니꺼라니. 변기라면 화장실에 있잖아. 그런데 왜 오빠를 가리키면서 그런 소릴 하는 거야."

"얘. 대변기!"

"호. 호호. 너 정말 웃기는 애구나. 오빠를 보고 변기라고 놀리다니, 장난이 심한 건지, 철이 없는 건지. 그래도 본인을 앞에 두고 그런 말을 하는 건 심했다. 앞으로 그런 얘기는 뒤에서 조용조용히 해라. 알았지?"

경애의 설명에 잠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은 퀴니. 무슨 소린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대충 옳은 말인 것 같아서 '응.' 하고 대답했다. 배시시 웃은 경애는 귀엽다는 듯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고집쟁이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말 참 잘 듣는구나. 그리고 오빠를 보고 '내꺼'라고 말하는 것도 잘못된 행동이야. 사람은 물건이 아니란다. 누군가의 소유가 될 수는 없는 거야. 앞으론 그런 말 절대 쓰지 말아요. 알았지?"

그러나 방금 전의 말 잘 듣던 아이가 이번엔 또 고개를 휘휘 젓는다.

"변기. 내꺼."

"윽. 얘가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내가 몇 번이나 말했어.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니까. 오빠가 들으면 얼마나 어이없겠니. 오빠. 피 좀 그만 토하고 정신 좀 차려봐. 방금 전에 얘가 한 말 들었지? 아이참 경련 좀 그만 좀 일으키고 사람 말 좀 들으라니까. 이럴 때 오빠가 따끔하게 한마디해야 한단 말이야!"

경애가 거칠게 흔들어대는 통에 정신을 차린 병규는 잠시 경애와 퀴니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끈적거리는 느낌에 턱에 묻은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보았다. 벌겋게 응어리진 피. 이걸 자기가 뱉었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서글플 수가 없었다.

"오빠. 뭐라고 말 좀 해달라니깐!"

경애가 독촉한다. 한참이나 손가락에 묻은 피를 응시하고 있던 병규는 초연한 표정으로 경애에게 선언하듯 말했다.

"나 그냥 퀴니 꺼 할리."

"무, 무엇이!"

쿠쿠쿵.

아닌 밤중에 날 벼락이라더니. 경애에겐 병규의 말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이럴 수가. 전혀 생각도 못한 전개에 예상도 못한 배신이 아닌가. 혼란스런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녀는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울먹울먹하며 울분을 토해냈다.

"그래. 그랬던 거구나. 집세를 올릴 생각인 거지? 한 달에 500원으론 모자랐던 거야? 알았어. 오빠. 내가 떠날게. 하지만 대신 호랭이는 내게 줘. 나도 오빠를 기억할 만한 것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니까 말야. 흐앙."

울음보를 터트린 경애는 호랭이를 향해 무작정 달려들었다.

"컥."

담배 한 모금 빨고 싶은 마음을 애완용 개 껌으로 간신히 달래고 있던 호랭이는 저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눈물을 뿌리며 강력하게 태클를 거는 경애의 박력! 천하의 호랭이님이라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스 바디태클로 버둥거리는 호랭이를 덥석 껴안은 경애는 방 한쪽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징징징 울어댔다.

병규는 아예 자포자기 상태였다. 그녀가 뭘 하든 신경도 Tm지 않고 그저 왜 이리 자신의 인생은 꼬이기만 하는지 골몰할 뿐이었다.

반면, 경애가 호랭이를 끌고 가는 것을 본 퀴니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사실 그녀는 생각이 단순한 싱물의 속마음을 엿볼 수 있는 재주가 있었다. 하지만 이 능력은 대상의 사고가 정말로 단순해야만 가능했기 때문에, 사람 같은 복잡한 생물에겐 통하지 않아 그다지 효용성은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경애는 그 속마음이 그대로 훤히 읽혀지는 것이 아닌가.

그녀의 마음속은 오직 한 가지 생각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500원...."

"...."

퀴니는 생각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한 에너지라고.

문득 그녀는 폭풍처럼 솟구치는 그녀의 음성적 에너지에 갇힌 멍멍이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구해줄 마음에 한 걸음 다가섰더니 웬걸, 경애가 고양이를 본 개처럼 으르릉대는 것이 아니가. 도저히 접근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안긴 호랭이도 이미 벗어나는 걸 포기했는지 한숨만 포옥 쉬고 있었다.

"안 돼. 이제 내겐 호랭이밖에 없어. 얘까지 빼앗아가게 할 순 없어."

그녀의 절규에 난감해진 퀴니. 무슨 생각 떠올랐는지 싱크대 아래에서 다 찌그러진 자명종 하나를 들고 나왔다.

"어? 그 자명종은 내가 오빠에게 선물한 건데. 어쩌다 그렇게 망가진 거야?"

경애는 두 눈을 깜빡이며 자명종과 퀴니를 번갈아 보며 쳐다본다. 순간 그녀에게서 읽혀진 생각은 '자명종 = 500원 + 500원 + 500원 + 500원 + 500원 + 500원 + 500원 + 500원+ 500원 + 500원'

이상한 공식이었다. 보통사람은 그냥 5000원이라고 할 텐데. 그녀는 모든 돈 계산을 500원짜리로 했다.

이상한 언니라고 생각한 퀴니는 피식 하는 짧은 웃음과 함께 기상벨 조정침을 또르르 돌렸다.

"쿵짝 쿵짝 쿵짝 쿵짝~ 오빠는 풍각쟁이야~ 오빠는 욕심쟁이야아아~"

마침내 울린 자명종.

그 순간 경애는 그토록 믿었던 호랭이가 단숨에 자신의 품을 벗어나 자명종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보아야 했다.

"에?"

채 충격이 가시도 전, 이번엔 자명종을 켠 소녀 역시 한 마리의 야수로 돌변하여 자명종을 향해 돌진한다.

그놈의 조건반사가 뭔지.

"무,무슨!"

황당한 사태에 그녀가 입을 못 다물고 있는 그때, 무언가가 경애의 다리를 톡톡 건드렸다. 또 뭐야 하며 고개를 돌려본 그녀는...

"하하. 안녕하십니까. 샤바. 가만 보니 이 댁 사모님 되시는가 보군요. 전 이번에 새로 주인님의 소환충이 된 바퀴벌레 행성의 바퀴벌레 왕자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혹시 기상벨 태그매치에 관심 없으세요? 요즘 새 파트너를 모집중인데. 샤바샤바."

"...!!"

샤아아아아아악

"응? 이거 핏기가시는 소리잖아?"

명상 중이던 병규는 돌연 들려온 소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머리를 산발한 웬 여자가 치마를 펄럭이며 대로변을 질주하더란다.

6. 불완전하기 때문에 넌 인간인 거야

"잠들었네."

"고 녀석. 잠자는 모습은 공주 같군."

고롱고롱 낮잠을 자고 있는 퀴니를 내려다보며 병규와 호랭이가 한 말이다. 가끔 생각지도 못한 일을 벌여서 사람 당황하게 만드는 소녀지만 잠자는 모습은 정말로 인형 같았다. 깊은 속눈썹에 반질반질 광이 나는 피부는 또 얼마나 좋은지 만지면 하얀 분이 묻어날 것만 같다.

"당분간 쭉 이렇게 잠잘 것 같은데요."

"잘됐군. 그 사이 후딱 갔다 오도록 하자."

소곤거리는 음성으로 의논한 병규와 호랭이는 쓰윽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막상 방을 나서자니 영 방 한구석이 신경 쓰인다.

"집세인상! 절대반대! 집세인상! 절대반대! 집세인상! 절대반대! 배고파서 못살겠다. 집주인은 세입자의 생활고를 배려해 달라. 집세인상! 절대반대! 집세인상! 절대반대!"

한쪽 구석에서 사요한 눈빛을 쏟아내며 계속 같은 말을 중얼거리고 있는 경애. 그녀는 '집세인상 절대반대' 라는 피켓을 들고 역시 같은 문구가 적힌 머리띠를 두른 채 며칠째 농성중이다. 병규가 아무리 집세인상은 없을 거라고 설명해줘도 막무가내다.

구두통을 두드리며 농성하는 그녀를 보며 병규는 황당함보다 측은함을 느꼈다. 대체 어떤 생활을 했으면 저렇게 오백 원에 목숨을 거는 걸까.

"나 잠깐 나갈 건데. 넌 어떻게 할 거니?"

피켓을 흔들고 있던 경애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어 보인다.

"빨래할 게 있어."

병규는 피식 웃었다.

다소 엉뚱한 면이 있긴 하지만 그녀는 정말 참한 살림꾼이다. 하루 종일 농성만 하고 있는 것 같은데도 자세히 보면 집안은 항상 청결하게 유지되고 있고, 소리 없이 알바도 다녀온다. 호랭이의 말에 의하면 밤늦은 시간엔 검정고시 준비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면 절로 나도 힘내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그녀에게서 집세를 받아야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파출부 급료를 챙겨줘야 하는 게 아닌 가하는 걱정이 들 정도다.

"금방 올 거야. 배고프면 찬장 뒤져봐. 라면 몇 봉지가 남아있을 거야."

"응. 잘 다녀오세요~오."

경애는 나가는 병규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어이구. 아주 입에 귀에 걸렸구먼. 귀에 걸렸어. 가이네가 둘이나 집안에 설쳐대니 그렇게 기분이 좋냐?"

집을 나서자마자 호랭이가 짓궂게 묻는다.

병규는 그저 히죽 웃기만 했다.

사실 요즘은 매일매일이 행복하기만 하다.

집안에서 온기가 느껴진다고 할까?

전에는 이 큰집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채 하루하루 의미 없이 지냈는데, 요즘은 사람 사는 것처럼 느껴진다.

지금의 행복이 깨지지 않기를.

병규는 언제나 잠들기 전 기도하곤 한다.

"그런데 말이야. 넌 왜 그렇게 경애에게 힘을 못 쓰냐?"

"음. 아마도 제 누님들과 경애가 정반대 성격이라 당황스러워서 그런가 봐요."

"누님? 친누이 말야?"

"네."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하구나. 가족들이 걱정도 안 되나? 어째 통 연락 주고 받는 꼴을 못 보겠구나?"

"하하. 뭐 서로 바쁘다보니."

호랭이와 잡담을 하며 길을 나서는데, 골목 맞은편에서 아는 사람들과 조우하게 되었다.

"어이. 외출하는 거야?"

붉은 색 스포츠카에 비스듬히 기대고 서 있던 이운석이 그를 향해 말을 건넨다. 그의 옆에서 한가롭게 담배를 꼬나물고 있던 홍대일은 한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오늘도 고생 많네."

홍대일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병규는 이운석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뭐, 고생이랄 것까지야. 공주님의 호위는 기사의 당연한 도리니까."

이운석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자 그 옆의 홍대일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대체 이 사람들은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건지.'

기회가 된다면 머리 뚜껑을 열어보고 내부를 관찰하고 싶을 정도다. 혹시 '로리'라는 두 글자만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닐까?

자영은 특재대의 인원을 나워 그중 일부에게 퀴니의 호위임무를 맡겼는데, 워낙에 지원자가 몰린 탓에 일 주일 단위로 사람이 교체되었다. 이번 주는 이운석과 홍대일의 차례였다.

"그런데 우리 공주님의 시.종.은 공주님을 방구석에 버려두고 대체 어딜 가는 거냐?"

여태 가만있던 홍대일이 볼살을 늘어뜨리며 묻는다. 그의 말 중에 유난히 시종이라는 단어가 강조된 듯한 느낌이 든다. 퀴니를 뺏어 간 병규가 어지간히 눈에 가시 같은 모양이다.

물론 병규는 억울했다. 어디까지나 퀴니가 따라온 것이지 자기가 납치한 게 아니지 않은가. 뻘쭘한 표정이 된 병규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볼일이 좀 생겨서요. 퀴니가 자는 사이에 잠깐 갔다 올 생각이에요. 잘 부탁드려요."

"그래. 뭐 애 보는 일도 피곤한 법이지. 여긴 우리가 맡을 테니 잘 갔다 와."

손을 흔들어 주는 이운석의 얼굴에 말끔한 미소가 걸린다.

이운석과 홍대일을 뒤로하고 병규는 곧장 학교 뒷산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가 굳이 퀴니가 낮잠 자는 시간을 틈타 학교 뒷간을 오르는 이유는 오로지 호랭이 때문이다.

그를 살리기 위해 막대한 도력을 상실하고 몸까지 줄어버린 호랭이는 가끔씩 이렇게 산에 올라 탁기를 배출하고 순수한 땅의 기운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것은 사람이 음식을 먹고 배설을 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근데 호랭이. 굳이 힘들게 도력을 회복할 필요가 있을까요? 호랭이는 지금 이대로도 귀여운데."

병규가 아쉬운 듯 말했다. 지금이야 어깨에 얹어놓을 정도로 작으니까 놀기 좋지만 본래의 몸뚱이로 돌아가면 깔려죽기 딱 좋을 판이다.

"녀석. 지금까지 그 놈의 봉인 때문에 몇 번이나 죽을 뻔했는데 아직 그런 소릴 하는 게냐."

"뭐, 그거야 지금까지의 이야기고. 앞으로 또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게다가 퀴니랑 같이 있는 한은 저렇게 빵빵한 호위들이 항상 붙어있을 텐데. 굳이 호랭이까지 나설 필요가 있을까요?"

병규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정말로 그는 호랭이가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냥 지금처럼 있기를 바랐다.

니코틴마니아라며 하루라도 빨리 호랭이를 처리하고 싶어했던 병규가 이렇게 180도 돌아서게 된 것은 모두 퀴니 덕분이다. 퀴니는 정부와 가스펠로부터 막대한 지원금을 받았는데, 그 돈의 일부가 생활비 보조금조로 병규의 통장으로 입금되었다. 헌데 그 액수가 장난이 아니다. 특재대에서 병규가 받는 월급을 제하고도 매일 소고기 파티를 해도 될 정도다.

이렇게 형편이 좋아졌으니 자연 호랭이에게 들어가는 담배 값 정도는 웃으며 꺼내줄 수 있게 되었다.

"이놈아. 내가 불편해서 그런다. 됐냐? 코딱지만한 여우한테도 희롱 당하는데 열 안 받게 생겼어?"

코딱지만한 여우란 특재대 본부장인 자영을 뜻하는 말이다.

"헤헤. 뭐, 그렇게 솔직하게 말씀하신다면야."

기분 좋게 웃은 병규는 한가로운 학교 뒷산을 경쾌하게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바퀴벌레 왕자가 몰래 뒤따랐다.

"오오. 오늘따라 주인님 기분이 좋으신 것 같은데? 샤바. 그럼 기회를 봐서 사모님을 내 태그 친구로 소개시켜 달라고 말해봐야지. 샤바샤바." 바퀴벌레 왕자는 아직도 경애를 포기하지 못한 모양이다.

"으샤. 공주님은 산책이라도 안 나오시려나. 구경거리도 없이 대기하고 있으려니 지루하네."

하품을 하던 이운석이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다.

말이 공주님 호위지, 잠복 수사하는 형사들과 다를 바 없는 신세다. 하루 종릴 대기상태로 기다려 봤자 퀴니 얼굴 보는 건 기껏해야 몇 분 정도에 불과할까.

그나마 그는 한가롭게 놀 생각으로 이일에 자원한 거라 이 느긋함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반면 홍대일 선배는 심각할 정도로 열심이다. 나사에서 새로 개발했다는 최신형 망원경을 들고 틈나는 대로 병규의 자취방 쪽을 들여다보고 있다. 얼마나 망원경을 들여다봤는지 눈 주위가 동그랗게 패일 정도다. 이 정도면 열성을 넘어 스토커의 경지에 돌입했다고 봐야 옳다.

그래도 그나마 이 선배는 좀 나은 편이다.

지난주 호위 기사들이었던 조준엽 선배와 김한식 선배는 각종 첨단 장비를 동원해 병규네 집을 엿보다가 주민들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게 한 바탕 곤욕을 치렀고, 배기철 선배와 전경희는 아예 병규네 집에서 숙식을 하며 호위를 하겠다거 해서 물의를 일으켰다.

사태가 이 정도면 이미 특재대는 퀴니의 사설능력자부대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런데 수색조는 아직 그 녀석들 본거지를 못 찾았다냐?"

"오리무중이라네요. 다른 기록은 말할 것도 없고, 공항이나 항만으로 입국한 기록조차 없답니다."

"그 녀석들이 어디 보통 녀석들이냐. 그런 기록이 남아있으면오히려 이상한 일이지. 그건 그렇고 심문은 어떻게 됐어? 설마 한식 선배가 맡았는데 아무것도 못 알아낸 것은 아닐 테고."

"아아. 그 어설픈 닌자 녀석들이야 예전이 다 불었죠. 한식 선배가 불 꼬챙이를 빙빙 돌리며 '홋시 인권유린이란 말을 알고 있나?'라고 묻자마자 안색이 변해서는 물어보지도 않은 말까지 다 불어버리더라고요."

"하하. 당연한 일이지. 난 그 선배에게 걸리고도 입 다물고 있는 녀석은 아직 단 한 명도 못 봤다. 그런데 녀석들이 다 불었는데도 아직 아지트를 못 찾았단 말이야?"

"네. 그 녀석들. 무슨 금제를 당했는지 병규와 싸우기 전의 일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더라고요."

"흠.그래. 확실히 간단하게 생각할 일은 아니군. 그건 그렇고 오늘따라 우리 공주님께서 낮잠을 오래 주무시네. 지금도 예쁜데 대체 얼마나 더 예뻐지시려고 그러시...!"

낯짝도 두껍게 공주님 예찬론을 읊고 있던 홍대일이 돌연 입을 닫는다. 그 옆에서 한가롭게 담배를 빨고 있던 이운석 역시 표정이 변해버렸다.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

두 사람의 눈동자에 동시에 깃든 것은 절절한 긴장감. 그것도 걷은 팔뚝으로 소름이 오싹 돋을 정도의 것이다.

동시에 고개를 끄떡인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재빠를 동작으로 병규의 집을 향해 뛰었다. 목표는 하나. 그렇다면 지킬 것도 하나다. 그러나 채 몇 걸음 가기도 전에 그들은 등 뒤에서 들리는 묘한 목소리에 발을 멈춰야 했다.

"냐. 좋은 찬데?"

대체 언제부너 그곳에 있었던 것일까.

이운석의 빨간 스포츠카 지붕 위엔 못 보던 여자 한 명이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검은 식 기모노에 삽으로 석고를 처바른 듯 허연 얼굴의 그녀는 돌아보는 두 사람을 향해 색기 넘치는 미소를 보였다. 의도적인지 치마사이로 빙어같이 흰 다리가 슬쩍 모습을 보인다.

"냐. 이런 멋진 차 꼭 한 번 타보고 싶었어."

그녀의 간드러진 목소리에 소름이 오싹오싹 돋았다.

"그런데 난 오픈카가 좋은데 어쩌지?"

애무하듯 차체를 쓰다듬는 그녀,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의 손이 맞닿은 곳이 지글지글 끓으면서 녹아내린다. 단지 손으로 가볍게 쓸어내린 것뿐인데, 자동차의 도장이 부글부글 끓고, 차체가 엿가락처럼 녹아내리는 것이다.

"능력자!"

이운석이 무거운 음성으로 소리쳤다.

"근데 얘를 어떻게 깨우나."

세상 모르고 잠든 퀴니를 내려다보며 경애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배가 살살 고픈 걸 보니 식사시간이 된 것 같은데, 병규가 애지중지하는 공주님은 일어날 생각은 안 하신다. 그렇다고 청승맞게 혼자 먹는 것도 좀 그렇고.

첫날의 안 좋은 추억은 잊은 지 오래. 어느덧 그녀는 퀴니와 바퀴벌레 왕자에게 적응하고 있었다. 퀴니는 그렇다 치고 바퀴벌레 왕자와도 친해지다니. 정말 놀라운 친화력이 아닐 수 없다.

"정말 귀엽네."

잠이 든 퀴니의 볼을 콕콕 찌르며 경애는 새삼 감탄했다. 뽀얗게 묻어날 것만 같은 피부와 오뚝한 콧날, 긴 속눈썹까지. 여자들이면 모두가 바랄 만한 완벽한 조건이 작은 얼굴 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아닌가.

예쁘고 귀여운데다 부자라고까지 하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다.

"좋겠다. 넌."

경애의 표정이 조금 시무룩해졌다. 퀴니와 비교하니 새삼 처량한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녀는 곧 두 손으로 뺨을 찰싹 때리며 기운을 충전했다.

"에잇. 힘내자. 경애! 세상이 널 몰라주면 세상이 알아줄 때까지 열심히 뛰면 되는 거야."

금세 용기백배해진 그녀.

"퀴니야. 우리 라면 먹자~아."

막 그녀가 퀴니를 깨우려 할 때였다.

콰콰쾅.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소음과 함께 돌연 방의 한쪽 벽이 우르르 허물어졌다.

"뭐, 뭐야?"

갑자기 벽이 허물어지자 경애는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이게 대체 무슨 난리란 말인가.

"흐읍."

푸석하게 날아오른 먼지를 뚫고 지옥에서 막 기어 나온 듯한 무시무시한 괴인이 그녀의 동공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괴인을 본 경애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꿈에 볼까 두려운 괴물이 아닌가.

그려늘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던 괴물이 가래 끊는 음성으로 물었다.

"흐읍. 바퀴... 벌레는... 흐읍. 어디 있나!"

"불이라도 났나?"

기분 좋게 집으로 귀가하던 병규는 시끄럽게 울려대는 사이렌 소리와 소란스런 사람들의 외침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골목 안에서 오른 검은 연기가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불이 나도 큰불이 난 모양이다.

좁은 골목을 턱하니 막아선 소방차와 그 틈바구니를 빽빽하게 들어찬 구경꾼들.

"으. 집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험난할 중이야."

병규는 골목길로 진입하기 위해 꽤나 힘든 여정을 거쳐야 했다.

"여?"

툴툴거리며 골목길로 들어서던 병규의 입에서 난데없는 의문성이 흘러나왔다.

폭풍이 한차례 훑고 지나간 듯한 풍경. 아니 작은 화산이라도 폭발한 듯한 광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쯤은 녹고 반쯤은 무너진 담벼락, 가로수는 번개라도 맞은 듯 검게 그을려 독한 연기를 뿜고 있었고, 콘크리트 바닥은 가뭄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져 검게 변한 흙덩이를 토해놓았다.

잘못 찾아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골목길의 모습은 축격적이고 생소한 광경이었다.

툭.

마트에 들러 사온 아이스크림 봉지가 바닥에 툭 떨어졌는데 그는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맙소사."

병규의 입에서 경악성이 흘러나왔다.

이번 주 내내 골목을 지키던 빨간 스포츠카는 지붕이 다 녹아버린 을씨년스런 모습으로 비 맞은 수채화 같은 풍경 한쪽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소란의 한 귀퉁이, 백도어가 열린 구급차 옆에 팔과 어깨를 붕대로 칭칭 감은 이운석이 착잡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뗳게 된 거야!"

병규는 그의 어깨를 으스러져라 쥐며 독촉했다.

"... 놈들이 왔었다."

고개 숙인 이운석의 입에서 맥없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놈들?

어떤 놈들 말야." "아마도... 전에 퀴니를 노렸던 바로 그 놈들인 것 같다."

"뭐? 그래서."

"...."

이운석은 차마 뒷말을 잇지 모했다. 하지만 그의 자괴감 어린 표정은 이미 대답을 한 셈이나 다름없었다.

"이, 이 바보자식."

병규는 그를 신경질적으로 밀어붙이며 윽박질렀다.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하필이면 잠깐 자리를 비운 시간에 이런 일이 터지다니.

"그만해라. 다친 사람을 다그쳐서 어쩌겠다는 거냐!"

호랭이가 일침을 놓았다. 그제야 병규는 그가 움켜쥐고 있던 이운석의 어깨 부위가 피로 흥건해졌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너무 흥분하지 마. 녀석도 최선을 다했다. 보면 모르겠냐?"

호랭이의 말에 병규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고 보니 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대일 선배는?"

이운석은 말없이 엠블런스 안을 턱짓했다. 의식도 없는 피투성이의 환자 하나를 두고 의사와 간호사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가슴이 무너졌다.

한심스럽다.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한 그들을 위로해 주지는 못할망정, 한순간 치미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몹쓸 짓을 하다니. 한심스럽고 답답해서 혀라도 뽑아내고 싶을 지경이다.

"제길."

욕지기를 뱉으며 벌떡 일어선 병규는 사람들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전력을 기울여 바람처럼 달렸다. 골목길을 지나 허름한 그의 이층집까지 한달음에 내달린 그는 훤하게 열린 방문을 보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층격을 받았다.

처음이다. 자기 집에 들어가기 무섭다는 생각이 든 것은.

꿀꺽.

병규는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심장의 두근거림을 안고 한 걸음, 한 걸음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지는 걸음을 옮겼다.

"...."

반쯤 뭉개진 s방안의 모습에 병규는 머릿속이 텅 비는 것 같았다.

"병규야. 경애. 경애가 있다."

귓가에 종이라도 울린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허겁지겁 들어간 병규는 무릎을 모으고 훌쩍거리고 있는 경애를 발견할 수 있었다.

병규는 그녀를 거칠게 잡아 흔들었다.

"무슨 일이야. 퀴니는. 퀴니는 어디 갔어!"

"흑흑. 오빠...."

"퀴니는 어디 갔냐니까!"

그녀는 그가 흔드는 대로 맥없이 출렁였다. 눈물이 비처럼 뿌려졌다.

"말해. 말하라고.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된 거냐고."

괴성을 지르던 그가 경애를 확 밀쳤다. 그녀가 묵직하게 쓰러진다. 그녀를 노려보며 병규는 악을 질렀다.

"멍청아. 도망갔어야지. 퀴니를 데리고 달아났어야지. 바보야. 도대체 뭘 한 거야. 보나마나 멍하니 구경만 했겠지. 그 어린것이 녀석들에게 붙들려 울고불고 비명을 지르는 동안 바보처럼 비명만 지르고 있었겠지. 멍청아. 도대체 넌 뭐야. 뭐냐고. 대체 뭘 한거야. 뭘 한 거냐고! 떼라도 써보지 그랬니. 니가 잘 하는 건 그것뿐이잖아. 놈들에게 억지라도 부려보지 그랬냐고 이 바보야!"

짝.

머릿속으로 번쩍 빛이 튀어 올랐다. 오른 쪽 뺨이 열기로 확 달아오른다.

"알았어."

그의 뺨을 갈긴 경애가 말했다.

고운 볼을 타고 내린 눈물방울이 턱 아래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 그 눌물을 머금은 눈동자.

가슴에 쑤셔 박힌 칼이 서서히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은 아픔.

"내가 찾아올게."

병규는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경애를 붙잡을 수 없었다.

머릿속이 텅 비는 것 같았다.

여자가 우는 걸 처음 봤다.

아니 보기는 많이 봤지만 자신의 앞에서, 그것도 자신이 내뱉은 말과 행동 때문에 슬퍼 우는 것은 처음이었다.

눈물이 가득 찬 눈동자가 울고 있었다.

또르르 떨어지는 한 방울의 눈물이 그렇게 가슴 아플 수 없었다.

"젠장."

병규의 입에서 욕지기가 튀어나왔다.

그 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그다.

여린 여자애가 할 수 있는 아무 일도 없었을 테지. 아니, 무사한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다. 하지만, 그렇지만.... 다만 답답해서, 찢어지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어서. 그래서 소리친 것뿐인데. 그런 것뿐인데. 그런데....

쾅.

병규는 발악을 하듯 맨주먹으로 방바닥을 내리쳤다.

"젠장."

쾅쾅.

두 번, 세 번...

살 껍질이 찢어지고 뼈마디가 욱신거린다.

젠장. 그런데 왜 아프지 않지? 맞지도 않은 가슴은 또 왜 이리 아픈 거야. 누구야. 누가 내 가슴을 찢어놓은 거야! 누구냐고!

쾅쾅쾅.

피가 튀었다. 바닥을 끈적끈적하게 적신 피가 방울져 그의 얼굴을 적셨다. 또르르 굴러 떨어진 묽은 핏방울이 눈물처럼 뺨을 적시고 턱 아래에 맺혔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고함을 질렀다. 고함인데 왜 울음처럼 들리는 걸까. 왜 통곡처럼 들리는 거지? 어떤 놈이야. 어떤 놈이 비명을 지르는 거냐고!

미친 듯이 바닥울 쳐대던 그의 움직임이 어느 순간 뚝 멈춰졌다. 하얀 털을 날리며 작은 신선이 의연한 자태로 그의 주먹 아래서 있었다.

"그만해라."

달빛을 담은 그 눈빛이 그에게 말했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넌 인간인 거야."

비로소 병규는 울 수 있었다.

"퀴니 님의 구출작전에 특재대의 모든 재원을 쏟아 붓겠습니다."

급하게 소집된 임시 회의에서 본부장인 자영은 심각한 말로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물론 모든 인력을 투입하겠다는 그녀의 과격한 발언에 단 한 사람의 대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퀴니가 납치된 것만으로도 특재대를 대 혼란상태였다. 그런데 거기에 이운석과 홍대일이 당했다는 비보까지 전해졌다. 지금 특재대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흉흉 그 자체였다.

"지금 진행 중인 모든 수사는 이 시점을 기해 모두 중지됩니다. 데모게이트 조사에 투입된 정보부의 대원들 역시 전원 이번 작전에 투입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번 사건은 단순한 납치사건이 아닙니다. 이건 명백한 특재대에 대한 도전이며. 체제를 부정하는 불순한 음모입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퀴니 님은 단순히 특재대의 손님이 아니라는 점을. 그녀는 우리의 가족입니다. 그녀가 우리 특재대의 명백한 일원이라는 데 이의가 있는 분은 없을 줄 압니다. 수사에 만전을 기해주십시오. 이미 상부의 허락을 얻어 군경의 협조를 요청한 상태입니다."

자영의 지시는 그야말로 총력전이나 다름없었다. 정말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아낌없이 쏟아 붓는 것이었다. 능력자들은 단 한마디의 반대도 없이 묵묵히 현장으로 떠났다.

그 후로 3일. 군경에 협조를 구해 전국적인 규모의 대규모 수색 작업에도 불구하고 사건은 오리무중. 여전히 사라진 퀴니의 행방은 찾을 수 없었다.

자영을 비롯한 특재대는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퀴니가 무사할 확률은 턱없이 줄어드는 것이다.

"수사의 폭을 넓힙니다. 현재 국내에 입국한 것으로 알려진 일본인은 모두 조사대사에 포함시키세요. 한국 국적의 일본인 2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상되는 적들의 규모를 생각해볼 때 일반 가정집에 숨어있을 가능성은 전무합니다. 문을 닫은 공장이나 창고들을 집중적으로 수색하세요. 특재대의 사활이 걸린 일입니다. 모두들 힘들겠지만 그녀를 구출하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합시다."

시간이 갈수록 특재대의 긴장은 심해졌고, 수사 범위는 무한정으로 넓어졌다. 초조해진 대원들의 신경 역시 칼처럼 날카로워졌다.

음주운전 특별 단속기간이란 핑계로 전국적인 교통통제가 이루어졌다. 경찰은 모든 전과자를 상대로 탐문작업을 벌였고, 군엔 테프콘2가 발령된 상태였다.

그런 상황이 벌써 일 주일째.

사정을 모르는 방송은 연일 정부의 의도를 거칠게 질타했고, 신문에선 북한과의 전쟁 위험에 대한 믿지 못할 소식들이 연일 특집기사로 다뤄졌다.

정부와의 협조를 통해 이뤄진 사상최대의 수색작전. 하지만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뭔가 조그만 단서라도 있어야 복잡한 매듭을 풀듯 뒤를 쫓을 수 있을 텐데, 정말로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말도 안 돼!"

자영은 책상을 두드리며 고함을 질렀다. 지난 일 주일 동안 단 한 순간도 쉬지 못한 그녀는 굉장히 초췌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소란을 피웠는데 어리도 사라졌는지 전혀 흔적도 없다는 게 말이 돼? 그 동네 사람들은 눈구멍이 모두 잘못되기라도 한거야? 왜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 거냐고."

그녀는 손톱을 깨물며 뚜껑 닫은 볼펜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심각하게 초조해하는 모습이다.

지금 본부장실엔 호랭이와 병규, 그리고 자영. 이렇게 셋밖에 없었다. 나머지 인원은 죄다 현장에 투입된 상태다. 자영은 병규가 흥분할까 봐 일부로 작전에서 배제시켰다. 현장투입이 아직 이른 감도 있었고, 자칫 감정을 앞세워 일을 그르칠까 저어한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병규가 멍하니 손놓고 구경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일이 벌어진 그날 저녁부터 아예 특재대 밖을 나서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늘어만 가는 암담한 정보들. 병규의 표정 역시 점점 굳어만 갔다.

"안 되겠어요. 내일까지 단서를 찾지 못하면 선계의 힘을 빌려야겠어요."

호랭이가 깜짝 놀란다.

"너. 그게 무슨 말인지 알고나 하는 소리냐? 선계의 힘을 빌리겠다니. 자칫하면 선호의 자격을 박탈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자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무거운 얼굴로 시선을 창가로 두었다.

"이대로 두었다간... 이 나라는 끝장이에요."

"무슨 말이야. 설마 어린아이 하나 없어졌다고 그런 일이 벌어지겠니? 피곤해서 신경이 날카로워진 줄은 안다면 조금 차분하게 기다려 봐.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게다."

"후. 아니에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이번 일은."

호랭이는 그녀의 말에서 엄청남 무게를 감지해 냈다. 가슴을 누르는 그 압박감이란 구미호인 그녀를 심각하고 압박하고 있었다.

"간단한 일이 아니라니. 아무래도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 것 같구나."

호랭이가 넌지시 물어보자 자영은 병규에게 슬쩍 시선을 주며 착잡한 속사정을 드러냈다.

"사실 아므르 퀴니 님은 단순히 가스펠의 비밀특사 따위가 아니에요."

"그쯤은 예상했다. 비밀특사 정도로 보기엔 그녀에 대한 처우는 너무 대단해. 나라 전체가 들썩일 정도라니. 어느 나라 대통령의 영애라도 되는 거냐?"

멍하니 있던 병규가 고개를 들어 자영을 주시했다. 여태 무반응이던 그가 퀴니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관심을 보인다.

잠시 한숨을 쉬며 심란한 마음을 다스리던 자영은 곧 믿지 못할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그녀는, 아므르 퀴니 님은 실은 유럽의 능력자연합인 가스펠의 실질적인 총수예요."

"뭣!"

호랭이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물론, 가스펠에서 내세우는 표면적인 총수는 따로 있어요. 하지만 실제로 가스펠을 지배하고 있는 배후는 바로 퀴니 님이예오."

"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거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제 십오륙 세에 불과한 꼬마가 어떻게 한 국가도 아닌 유럽 전체 능력자들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단 말니다. 농담 식으로 주고받았던 '로리 공화국' 어쩌고 하는 헛소리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그녀의 배경이 어떤 것인지는 저도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다만 실재로 가스펠에서 그녀의 존재란 거의 신앙에 가까워요. 아마 퀴니 님의 특별히 당부가 없었다면 우리 나라는 가스펠에서 파견된 호위 능력자들로 바글바글했을 거예요."

"그, 그런 일이."

냉정한 표정으로 자영의 설명을 듣던 병규마저 경악을 금치 못해E다. 그런 비사가 숨어 있을 줄이야.

"만약 그녀에게 무슨 일리라도 생긴다면 일본은 가스펠의 표적이 되어 버릴 거예요. 그리고 우리 나라 역시 불똥이 튀겠죠. 퀴니 님이 사라진 곳이 이곳이니까요. 결코 그들은 가만 있으려 하지 않을 겁니다. 이게 무슨 소린지 아시겠어요? 능력자들 간의 전쟁이 벌어진다는 말이에요. 그 어떤 검색에도 걸리지 않는 살아 있는 핵폭탄들이 거리 한 복판에서 터질 거란 말예요."

"녀, 녀석들은 그런 걸 알고 있을까?"

"아마도 알고 있을 거예요. 히로부미는 멍청한 작자가 절대 아니니까요. 설사 그가 모른다 해도 부관인 오로치는 확실하게 감지하고 있을 거예요."

"그런데 그 멍청이들이 왜 그런 위험까지 감수해 가면서 그 꼬맹이를 데려간 거지?"

"글쎄요."

미진한 그녀의 음성. 호랭이는 그녀가 무언가 짐작하고 있음을 눈치 챘다.

"뭐냐. 숨기지 말고 털어봐라."

"혹시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일본은 지금 데몬게이트라는 다국적 기업에 의해 상당히 불안정한 상태예요. 겉으로는 평온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부는 능력자들 간의 갈등으로 혼란 그 자체죠. 그리고 이미 승세는 서서히 데몬게이트 쪽으로 많이 기울어진 상태예요. 정보부의 보고로는 이미 7할 이상의 능력자들이 데몬게이트에 흡수됐다고 해요. 이미 데몬게이트의 영향력은 정계와 재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죠. 최근 극우단체들의 홀동이 활발해진 것도 데몬게이트의 배후조작으로 정보부에서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히로부미 같은 국수주의자가 그런 꼴를 그냥 보아 넘길 수 있을 턱이 없죠. 히로부미는 오래전부터 일본 내 반 데몬게이트 조직의 두목으로 활동하면서 데몬게이트의 사업 확장을 저지하는데 총력을 기울였어요. 아마 이번 일도 그 것과 관련 있을 거예요."

"데몬게이트."

병규는 침음성을 흘렸다. 이상하게 요 근래 자주 언급되는 이름이다, 대체 어떤 조직이기에.

"이미 가스펠에서는 퀴니 님의 실종에 대해 알고 있는 듯해요. 최근 정보부에 등록된 다수의 유럽계 능력자들이 입국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어요.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큰일이 벌어집니다."

자영은 굳은 목소리로 외쳤다. 호랭이는 더 이상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자영의 판단은 옳은 것이다.

확실히 그 같아도 같은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문제는 여간해서는 인간계에 간섭하지 않으려는 선계의 방침. 이것이 있는 한 설사 허락이 떨어진다고 해도 시간이 많이 지체될 것이 뻔하다.

자영으로선 최후의 선택을 한 셈이지만 상황 자체는 암담했다. 자칫하다간 국내 영토에서 유럽 연합과 일본의 능력자들의 전쟁이 벌어진다. 과거 청일 전쟁의 한 장면이 다시금 재현되려 하는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이야. 고작 꼬맹이 하나 가지고 전쟁이라니."

호랭이는 황담함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줄이야. 어쩐지 퀴니가 병규를 따라간다고 했을 때, 모두가 반대하더니 그 이면엔 이러한 복잡한 사정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호랭이."

묵직한 분위기에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는데, 여태 조용히 있던 병규가 몸을 일으켰다.

"저와 잠시 어디 좀 가죠."

"더디로? 무슨 일이죠?"

자영이 물었다. 그녀의 말끔한 이마위로 근심이 한 가닥 걸려 있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각났어요."

병규는 그녀를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특재대를 나선 병규는 잠시 말없이 걸었다.

흔들리는 거리. 굳은 얼굴로 열심히 길을 걷고 있는 행인들. 소란스러운 자동차 소음. 뻑뻑한 매연. 불쾌한 냄새. 우중충한 가로수들. 보도블록 위에 검게 말라 붙어 있는 껌 자국들.

그리고 어깨 위의 호랭이에게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담배냄새의 향긋함.

"어쩔 작정이냐?"

호랭이가 물었다.

"아무래도 녀석들은 지하 깊숙한 곳에 숨은 것 같아요."

"그거야 당연한 일이고. 그래서 네가 뭘 할 수 있다는 거지?"

호랭이의 물음에 병규는 말없이 주머니에서 지갑과 핸드폰을 꺼냈다. 오래된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낸 호랭이를 향해 팔랑팔랑 흔들어 보였다.

"어두운 곳에 숨었으면 어두운 곳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물어봐야겠죠?"

동그랗게 눈을 뜨는 호랭이. 그는 피식 실없이 웃으며 명함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누님? 아, 저 혹시 기억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전에 발칸 일로... 예. 예. 기억해주시는군요. 감사합니다. ... 네. 저 근데 누님에게 한 가지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7. 쟤 저러다 작두 타는 거 아냐?

"뭐야? 이게."

통화한 누님이 일러준 장소에 도착한 병규는 턱을 한껏 벌린 채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제대로 찾아온 거 맞냐?"

어깨 위의 호랭이가 눈을 비스듬히 흘겨 뜨며 묻는다. 그 눈빛이 꼭 '이놈 혹시 길치 아냐?"라는 느낌이다. 병규는 괜히 뒷머리를 긁적였다.

"잘 찾아온 것 같은데."

명함 뒤에 휘갈겨 쓴 메모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가게 옆의 금은방도 맞고, 맞은편의 큰 백화점도 맞다. 모든 게 메모한 그대로인데 정작 본 건물이 영 아니다.

조폭 아지트를 찾아 왔는데 이건, 이건... 웬 빵 가게란 말인가. 게다가 입구에서부텨 쭉 늘어선 여학생들의 줄이란.

"아무래도 잘못 찾은 모양이네요. 다시 한 번 전화해 보죠."

그가 막 핸드폰의 폴더를 열었을 때다. 입구의 여학생들을 헤치고 거구의 사내가 밖으로 나왔다.

하얀 앞치마에 불룩 올라간 흰 빵모자.

빵집 종업원인 모양이다. 그런데 대체 이 빵집의 주인은 무슨 생각으로 이 사람을 종업원으로 쓰는 그런 발칙한 생각을 한 것일까.

세상 어느 빵집 종업원이 뺨따구(?)에 10여 바늘이나 꿰맨 흉측한 상처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눈은 또 얼마나 날카로운지 슬쩍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손님 쫓아낼 생각으로 쓴 것이라면 진짜 완벽한 종업원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어. 저 녀석."

사내를 쳐다보던 호랭이가 귀를 쫑긋 세운다.

"저 녀석 그때 그 녀석이잖아."

저 사내를 특재대의 한식 선배 제자로 초빙하면 어떨까 하는 궁리를 하고 있던 병규는 호랭이의 말에 눈을 오므렸다.

'누구더라?'

떠오를 듯한데 가물가물하다. 그가 굳어버린 기억세포를 일깨우고 있을 때, 저쪽이 먼저 아는 척을 해 왔다.

"여어."

"아. 이제 보니."

그제야 병규는 그가 누군지 생각났다. 그 날, 발칸과 피 튀기는 혈투를 벌렸을 때, 이한영을 비호하고 있던 조폭 중의 하나다.

"잘 찾아왔네."

뺨따구 흉터 사내가 불쑥 손을 내민다.

"네. 네. 아주. 찾기 쉽던데요."

그의 손을 재빨리 잡아 붙들며 병규가 대답했다. 찾기야 무지하게 쉬웠지. 다만 믿기지 않아서 돌아갈까 고민했다는 것이 문제지.

"일단 들어가자."

사내는 입구에 진을 친 여학생들을 밀치며 병규를 안으로 안내했다.

여학생들은 빵 가게 안에도 우글우글했다. 그 소란스러움과 열기란, 작은 콘서트 현장을 방불케 했다.

"누님은 제빵실에 계시다."

사내가 가리키는 인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병규는 검은 양복을 흰 앞치마와 빵모자로 치장한 조폭들의 환호를 받으며 한창 빵을 만들고 있는 이한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사내의 말처럼 빵을 만들고 있었다.

아주 박력 넘치는 모습으로.

아니 빵을 만드는 그녀가 왜 방망이와 사시미를 들고 설친단 말인가!

"어? 왔냐?"

사시미를 흔들며 반갑게 맞는 그녀. 병규는 어색하게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 네."

"지금 좀 바쁘니까. 기다려라. 곧 끝난다."

"네. 고, 고생하세요."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다시 빵 만드는 작업에 열중했다.

퍽퍽퍽!!

밀가루 반죽에 야구방망이가 사용되고,

휘릭!!

손님에게 나갈 케잌은 사시미로 깔끔하게 제단 한다.

촤르르륵! 드득!!

빵 위에 얹혀진 크림은 체인과 톱날을 이용해 멋지게 치장한다.

"머, 멋있네요."

"그러네. 나름대로 박력 있고."

빵과 케이크 만드는 과정이 이렇게 박력 넘칠 수 있다는 걸 비로소 깨닫게 된 병규와 호랭이였다.

사실 이 정도만 해도 차분하게 만 보였던 이한영의 이미지를 깨트리기 충분한데, 대체 실내에 흐르는 이 배경음악은 또 뭔가.

"쾌지 나 칭칭 나네~~ 쾌지 나 칭칭 나네~~"

이것은 국보급 전통가요(?)가 아닌가!

놀랍게도 그녀는 '쾌지나 칭칭'의 박자에 맞춰 덩실덩실 칼과 방망이를 휘두르고 있었다. 단지 춤만 추는 게 아니다. 가끔씩 '얼쑤~' '지화자~' 하고 외치는 부하들의 추임새를 따라 펄쩍펄쩍 재주까지 부린다.

만약 그녀가 하얀 앞치마만 두르지 않았어도 내림굿하는 무당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호랭이 역시 그런 생각을 했던가 보다.

"재, 조금 있다 작두 타는 거 아냐?"

"정말로 그럴까 걱정이네요."

일찌감치 빵 가게 영업을 끝낸 그녀는 병규를 이층으로 안내했다. 잠시 사라졌다 나타난 그녀는 샤워를 했는지 물기가 촉촉한 머리에 긴 목욕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수건으로 머리칼의 물기를 짜내던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앉아있는 병규를 보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놀랐냐?"

"네? 아. 조금요."

"빵 가게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

"네. 사실 그러네요."

그의 대답에 의기양양하게 웃은 이한영은 의자 뒤에 시립한 사내에게 으스대듯 말했다.

"거 봐라. 완벽하잖아."

뺨에 흉터가 있는 사내가 이빨을 보이며 허리를 숙인다.

"그렇군요. 누님. 사실 지금까지 누님이 손대서 실패한 일이 있었습니까?"

"하하하. 족제비. 사람 부끄럽게."

이한영은 뺨에 흉터가 있는 사내를 족제비라 부르며 얼굴을 붉혔다. 저럴 때는 천상 여잔데. 방금 전에 제빵실에서 본 그건 대체 뭘까.

호랭이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 미안. 무슨 얘기인지 궁금하겠구나."

병규가 묵묵히 있자 이한영이 말을 걸었다.

"실은 말야. 내 아이디어였거든."

"네?"

"빵 가게 말야. 내가 하자고 했어. 경찰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서 말야."

"누님 말로는 만화책에서 본 것이라더군. 그런데 설마 빵 가게가 이렇게 잘 될 줄은 몰랐다."

족제비가 한마디 거든다.

"그게 나도 의외야. 설마 이렇게 듬직한 녀석들이 카운터를 보는데 사람이 몰릴 줄 누가 알았어? 역시 되는 사람은 뭘 해도 된다니까."

그녀의 털털한 웃음. 사내처럼 시원시원한 웃음인데도 그녀의 어깨에서 찰랑거리는 젖은 머리칼과 어울리자 묘한 매력이 된다.

"설마 빵 장사가 본업보다 더 잘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왜 장사가 잘되는 걸까."

그녀는 오히려 걱정이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호랭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틀림없이 그 빵 만들 때 추는 춤 때문일 거야."

'얼쑤~' 하는 추임새에 그녀가 현란한 춤사위를 보이자 가게안의 여학생들은 기절이라도 할 것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하다.

"저, 누님."

조용히 듣고만 있던 병규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는 이한영과 조폭들의 계속되는 우스개 소리에도 내내 심각한 표정이었다.

"에이. 참. 사내자식이 죽을상을 해가지고는. 말 해봐. 무슨 일이야?"

병규는 얼굴을 굳힌 채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어려운 일입니다."

"알아. 너 같은 녀석은 웬만한 일에는 꿈쩍도 안 한다는거. 괜찮으니까 말해. 나중에 쓸 일 있으면 나도 똑같이 부려 먹어줄 테니까."

그녀의 말에 병규는 작게 웃음을 보였다. 역시 이 누님은 화끈하다. 애초에 안 된다는 소리는 아예 입 밖에도 내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다소 부담이 되는 부탁을 하러 올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누님에게 부탁드릴 일은...."

그렇게 병규는 말자루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결국 없어진 꼬맹이 하나를 찾아야 된다는 말이지?"

이한영은 30분에 걸친 병규의 설명을 그렇게 간단하게 정리했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가출 소녀를 찾아 달라고 부탁한 것으로 오해할 정도로 태연한 태도다.

물론 퀴니에 얽힌 복잡한 사정과 이후에 발생할 수 있는 혼란에 대해 전부 설명할 수 없었기에 사태가 다소 약하게 전달된 면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에 일어날 수 있는 복잡한 사태만은 제대로 알려주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태도는 여유만만이다. 경이로울 정도의 평정심이라고 할까.

"일단 찾는 것은 문제가 없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병규의 얼굴이 금방 활짝 펴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가 대뜸 절을 하려고 하자 이한영은 손을 펴 보이며 그의 행동을 막았다. 아직 그녀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이 문제야. 한 달이건 일 년이건, 죽었든 살았든간에 실종자는 언젠가 반드시 행방을 알 수 있게 되어있어. 문제는 내일, 하루 만에 찾아내는 게 사실상 힘들다는 거지. 이쪽의 프로라도 말이야."

"역시. 그런 겁니까?"

병규는 적이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역시나. 이런 결과를 전혀 예상 못한 것은 아니지만 막상 직접 들으니 가슴에 묵직한 쇳덩이라도 들은 것처럼 무겁다.

"자식. 세상 다 산 늙은이처럼 얼굴이 그게 뭐냐!"

팔짱을 낀 채 그를 잠시 보고 있던 이한영이 벌떡 일어나며 알밤을 먹인다.

"이 녀석아. 내가 힘들 것 같다고 했지 불가능하다고 했냐?" "그, 그럼?"

병규가 놀란 눈으로 보자 그녀는 입가에 짙은 미소를 띠었다.

"해보자. 망할 놈의 일본 녀석들. 찾아보자고. 할 수 있을지 못할지는 나중에 생각하고 말야."

"누님."

병규는 그녀의 말과 행동에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았다. 이렇게 감격스러울 수가. 단지 한 번 마주친 정도에 불과한 하잘것없는 인연인데 이 정도까지 신경 써 주다니. 마치 날 때 헤어진 피붙이를 다시 만난 느낌이다.

"무슨 분위기가 이따위야. 이거 조금만 더 하면 누님 절 받아주십시오라는 말이 나오게 생겼잖아?"

호랭이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푸념한다.

"그럼. 지금 당장 나가보죠."

이한영의 허락을 얻어낸 병규는 흥분된 표정으로 벌떡 일어섰다. 한시가 급하다. 시간이 촉박한 만큼 서둘러야 한다. 그런데 곧바로 시작하자는 그녀의 말에 사람들의 반응이 영 시원찮았다.

이한영은 달랑 전화 한 통을 한 뒤로 계속 자리를 지키고 앉아 수하들과 이런저런 잡담만을 나눴다.

병규는 갑갑했다. 또각또각 흘러가는 초침이 심장을 옥죄어 오는 것 같았다.

"바보야 앉아."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이한영이 한심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병규는 그녀를 멀뚱히 쳐다봤다. 불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해보자고 외치던 사람이 지금은 왜 또 이렇게 태평한 걸까. 정말로 어떤 계획이 있는 걸까? 병규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쯧. 녀석. 표정 참 가관이다. 그렇게 조급하냐? 그래도 사람의 일이란 때와 시가 중요한 법이야. 아무 단서도 없이 지금 나가서 어딜 뒤지겠다는 거야? 본격적인 일은 내일부터야. 오늘 저녁에 애들을 풀어놓으면 새벽까지는 우선 의심 가는 곳에 대해 알아봐 올 테니까 그때 움직이면 되는 거지. 알았어? 그러니까 지금은 우선 푹 쉬어둬. 내일 발바닥에 땀나도록 찾으려면 말이야."

그녀의 자세한 설명에 병규는 크게 깨달을 수 있었다.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래. 지금은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다. 그렇게 실수를 했으면서도 아직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다니. 매번 후회하면서도 쉬이 고쳐지지 않는다.

일단은 쉬자. 놈들을 찾아내게 되면 반드시 크게 몸을 쓸 일이 있을 테니 쉬어 두는 게 좋겠지.

그러나 생각과 달리 몸의 긴장은 쉽게 풀리자 않았다. 쉬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머릿속이 지글지글 끓고 눈이 또렷해진다.

"허이구. 녀석. 용쓴다. 하기야 마음먹은 대로 안 되는 것은 십분 이해가 가지만 말이야.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은근한 어투로 말을 꺼낸 이한영은 목욕 가운을 출렁이며 벽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알콜은 긴장을 풀어주는 데 도움이 된다지?"

그녀가 벽장에서 꺼낸 것은 독한 위스키였다.

"자. 그렇게 부담 느끼지 말고 조금만 해. 긴장이 풀어질 정도로만 말야."

난감한 표정의 병규에게 술잔을 내민 그녀는 소파에 털썩 앉으며 자신도 한 잔을 따랐다.

다리를 꼬자 가운이 살짝 벌어지며 늘씬한 종아리가 드러났다. 기껏 노출되는 부위래 봐야 짧은 치마보다 못한 정도지만 남자의 심리라는 것이 묘해서 수영복보다 미니스커트가 더 야해 보이는 법. 찰랑이는 술잔을 입가에 가져가는 그녀의 모습은 가슴이 벌렁거릴 정도로 섹시해 보였다.

물론 그녀 자신이 보기 드문 미인인 것도 한몫 했음은 물론이다.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찰랑이는 갈색의 긴 머리칼. 긴 목욕 가운을 걸친 그녀는 정말 뒷거리를 배회하는 거친 사내들과 어울리는 여자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휴~"

"하아~"

돌연 들려온 한숨 소리에 주위를 둘러보니 조폭 형님들이 천정을 올려다보며 감격의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왠지 그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병규였다.

분위기도 좋고, 늘씬한 미녀와 함께 술잔을 기울인다. 모든 게 완벽한 분위기다. 그러나 병규에겐 한 가지가 부족했다.

'기왕이면 술을 주지.'

유감스럽게도 그의 술잔에 담긴 것은 비싼 위스키가 아니었다. 톡 쏘는 맛의 탄산음료였다. 미성년자에겐 절대 술 안 준다는 것이 바른생활 아가씨의 지론이었다. 덕분에 병규는 술 대신 콜라를 홀짝거리며 이한영의 입술로 술이 넘어가는 모습을 구경만 해야 했다.

하여간 그렇게 시작된 술자리. 결론부터 말해서,

이한영은 술이 너무 약했다.

양주잔에 입을 대자마자 큭 하고 기침을 토하더니 벌써 눈이 풀려서 해롱해롱이다. 그녀가 입을 댄 양주잔을 보았다. 술은 그대로다. 그런데 어째서 이 누님은 취해버린 것일까. 설마 말로만 듣던 술 냄새만 맡아도 취해버리는 사람?

'아니 그런데 이렇게 술이 약한 사람이 뭐 하러 양주를 꺼낸거야?"

하긴 술이 이렇게 약한 양반이 분위기 띄워 주겠다고 술잔같이 들어준 것만도 고맙지. 하지만 누님의 노래 취향만큼은 정말이자 적응이 안 된다.

아까 전엔 쾌지나 칭칭이더니, 지금은 팽팽 풀려버린 눈으로 무려 니나노~ 를 열창(?) 하고 있다. 그녀가 닐리리아~ 닐리리아~ 니나노오~~~ 하고 길게 가락을 뽑으니 뒤쪽에 시립해 있던 십여명의 조폭들이 짝짝~ 짝짝짝~ 짝짝짝~ 하고 반주를 맞춘다. 이어 노래가 끝나자 '열창이었습니다. 누님!' 하고 일제히 허리까지 푹 숙인다.

"에헤. 칭찬은.... 녀석들! 야 너희들도 술 마시는 거 멀뚱히 구경만 하지 말고 춤이라도 춰봐."

"네. 누님."

일제히 대답한 십여 명의 조폭들. 돌연 그녀와 병규가 마주앉은 테이블 주위를 빙 둘러싸더니 서로의 손을 다정하게(?) 잡는다.

'뭐야? 설마 손에 손잡고라도 부르려는 거야?'

병규가 당황하는 가운데, 굳은 표정을 손을 맞잡은 그들이 슬슬 행동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강강술래~ 강강술래~ 달떠온다. 달떠온다. 강강술래~ 동해동천 달떠온다. 강강술래~"

아~~~!

꽉 끼는 양복의 그들이 부르는 강강술래의 박진감 넘치는 하모니와 번쩍번쩍 광나는 구두로 사뿐사뿐 펼쳐내는 그 발랄한 율동이란.

"풋~!"

병규는 저도 모르게 입에 든 콜라르 뱉어내고 말았다. 양주잔을 끌어안고 할짝할짝 술을 먹던 호랭이도 뒤로 발라당 자빠진다.

'수, 술을 못 마시겠어.'

눈만 마주쳐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풍기문란형 얼굴에 꽉 끼는 양복을 걸친 그들이 빙글빙글 돌며 묵직한 목소리로 노래를 합창한다.

강강술래를.

대단한 압박이 아닐 수 없었다. 병규는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좋아. 좋아. 귀여운 내 아기들. 고생했다."

강강술래가 끝나자 이한영은 자지러지게 웃으며 손뼉을 쳐주었다. 뻘쭘하게 있기 무안했던 병규도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박수를 쳤다. 혹시나 약 올리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어느덧 그날의 밤도 서서히 깊어만 갔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대충 끝날 것 같았던 그날의 행사는 전혀 상상치도 못했던 존재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화끈 달아오르게 되었다.

"어라?"

쾌활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흐릿한 시야 속으로 얇은 안테나 두 개가 아른거린다.

"이건 뭐야?"

쑥 잡아당기니 테이블 밑에서 사람 머리통만 한 둥글넓적한 것이 딸려 올라온다.

"어? 이게 뭐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놈인데."

그녀는 눈을 지그시 모으며 그것에게 초점을 맞췄다.

'헉!'

"저, 저놈이 어느새."

병규와 호랭이는 저도 무르게 헛바람을 삼켰다. 저 놈의 바퀴벌레. 언제 테이블 밑에 숨어 있었던 거지? 저렇게 큰놈이 테이블 밑에 숨어드는 것을 아무도 눈치 cowl 못하다니. 정말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얼떨결에 이한영에게 딸려 나온 바퀴벌레 왕자는 부끄러운지 발을 꼼지락거리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저, 저기. 주, 주인님의 대모님 되시는가 보죠? 샤바. 안녕하세요. 전 바퀴벌레 행성의 바퀴벌레 왕자라고 하는데요. 샤바. 그, 그런데 더듬이 좀 놓아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좀 예, 예민한 편이라. 샤바샤바."

"헉."

"억!"

초대형 바퀴벌레가 사람 말을 하자 여태 무표정하던 조폭들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크, 큰일이다.'

병규는 기겁을 했다. 지금까지 저 녀석이 나타나서 일이 엉망이 되어버린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으흐음."

바퀴벌레 녀석에게 지그시 모아진 누님의 눈빛이 조금 이상하다. 저러다 '아~' 하고 뒤로 넘어가면 그대로 박력 넘치는 형님들과 긴박감 넘치는 육박전을 치르게 될지도 모른다.

꿀꺽.

그의 목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그러나 우려했던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돌연 이한영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던 것이다.

"푸하하. 이 녀석 뭐야. 쇠똥만한 녀석이 말을 하잖아. 재밌는데. 하하하. 병규야. 얘도 네 친구냐?"

"치, 친구요?"

병규의 얼굴이 괴이하게 일그러졌다. 친구라니. 원수라면 또 모를까. 그때 간신히 그녀의 손에서 풀려난 바퀴벌레 왕자가 겸손하게 한마디했다.

"치, 친구라니요. 샤바. 절대로 아닙니다. 전 어디까지나 주인님의 소환충에 불과합니다. 샤바샤바."

"소환충? 그럼 인석이 널 부르면 넌 쪼르르 나타나는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거야?"

"그렇지요. 주인님께선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은인이십니다. 절 끔찍한 봉인에서 풀어주셨고 혹여 못된 길로 빠질까 야단도 쳐 주시고, 심지어 제 백성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투자도 아낌없이 해 주시니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난감할 지경이옵니다."

바퀴벌레 왕자는 감격에 찬 나머지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아낌없는 투자라."

호랭이는 힐끔 병규를 쳐다봤다. 역시나 모기향처럼 하얗게 산화하고 있다. 저 특대형 해충을 없애려고 얼마나 눈물나게 노력했던가. 그런데 그 모든 노력이 모두 지 백성들을 위한 과감한 투자였단다.

"절망할 만하지."

호랭이는 병규의 손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동감을 표했다.

"야. 이 녀석. 정말 멋진 놈인데? 보스를 위한 갸륵한 마음이 구구절절이 느껴져. 그렇지 않냐?"

"그, 그렇습니다. 누님!"

여태 태연하던 조폭 형님들, 이번만은 잠깐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긴 바퀴벌레를 상대로 보스니, 갸륵한 마음이니 하는 기상천외한 말들이 튀어나왔으니 놀랄 만도 했겠지.

"좋아. 이런 멋진 녀석에게 내가 술 한 잔 대접하지 않을 수 있나. 자, 받아라."

호탕하게 껄껄 웃은 이한영은 바퀴벌레 왕자에게 턱! 하고 술잔을 내밀었다.

"그런데 이건 이 녀석이 먹기 좀 그렇겠는걸? 야. 누가 대접 좀 들고 와."

부하가가져온 대접을 받은 그녀는 남아 있는 위스키를 모조리 털어 넣었다.

"자뭇 남자라면 이 정도는 해야지. 자 받아."

눈앞에 털썩 떨어진 대접을 난감하게 바라본 바퀴벌레 왕자는 슬쩍 병규의 눈치를 살폈다. 감히 주인 앞에서 마셔도 되는지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병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미 완전히 산화해 버린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아무말씀 없으신 걸 보니 괜찮다는 거겠지. 샤바?"

병규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위스키에 입을 댄 바퀴. 한 모금 삼키자마자 팽팽하던 더듬이가 축 늘어져버린다.

"저기... 샤바."

"왜? 독하냐?"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이한영이 쀼루퉁한 표정으로 묻자 바퀴벌레는 말하기 미안한듯 주저주저 이야기를 꺼냈다.

"좀... 밍숭맹숭한 것 같은데 바퀴약 좀 타주시면 안 될까요? 그 레이드~ 뭐라고 하는 게 좋던데요. 샤바샤바"

"...!"

사람들의 표정이 일제히 굳어버렸다. 놀랍도록 민감한 신경을 가진 바퀴벌레 왕자는 사람들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움찔 놀라며 주저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 한 300cc만 주셔도 되는데. 샤바."

휘청.

조폭형님들의 그 든든한 자세가 조금 흔들렸다. 흠칫 놀란 바퀴. 불쌍함이 절로 느껴지는 음성으로 최후의 한마디를 던졌다.

"고, 고추장이라도. 샤바샤바."

샤아아아아아아아아...

술자리를 빙 둘러싼 조폭 형님들에게서 동시에 울려대는 10ch써라운드 핏기가시는 소리.

묵묵히 술잔 속에 찰랑이는 술을 먹을까 말까 망설이던 호랭이가 고개를 쳐들며 한 마디한다.

"자꾸 들으니 묘하게 정드네. 이 소리."

모두가 빠삭 굳어있는데 이한영이 쾌활하게 웃으며 소리친다.

"야. 이 녀석. 비실거리게 생긴 것치고는 화끈한데? 300cc? 하하. 녀석. 그렇게 통이 작아서 어디다 쓰겠냐? 여봐라~ 준비하는 김에 그 레이~ 뭐시기라는 거 한 5,000cc 정도 가져와. 쩝. 그런데 바퀴약이라는 게 그렇게 맛있나? 이 참에 한 번 먹어봐? 여~ 잊지 말고 내가 먹을 것도 좀 챙겨 와~."

"쿨럭."

급기야 병규는 각혈을 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전국의 각처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이한영은 보기보다 이쪽계통에서 유명한 인물인 듯, 전국각처에서 날아든 전화로 전화통은 불이 날 지경이었다. 대부분이 며칠 전 마을로 새로 들어온 일본인이 있다거나, 얼마 전에 나타난 새로운 조직의 우두머리가 일본인 같아 보인다는 것, 또는 버려진 창고와 공장에 밤마다 불이 켜진다는 식의 보고들이었다.

"대단하다."

병규는 진정으로 이한영의 능력에 대해 감탄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녀의 손을 빌리는 것이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걱정이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연락 온 곳을 전부다 수색할 수 없을 것 같아 걱정이다.

자그마한 조직 하나 운영하는 정도의 사람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완이다.

오전 중에 연락 온 곳을 집계 낸 이한영은 몇 군데 협조를 구하는 연락을 한 후, 수하들을 불러 모았다.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려는 것이다.

"경기도 이외의 지방은 아예 포기해. 그쪽은 그쪽 애들에게 맡겨 놓으면 돼. 우리는 몇 패로 나뉘어 서울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듯 벙위를 넓혀간다. 녀석들이 제일 처음 나타난 곳이 서울이라는 점을 볼 때, 놈들의 본거지도 서울일 확률이 높다. 수도권만 봐도 하루 만에 모두 뒤지기엔 지나치게 광범위해. 샅샅이 뒤진다는 생각은 버려라. 놈들의 조직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생가해보면 분명 이상한 점이 있을 거야. 외부 경비가 철통같다던가. 오랫동안 방치된 건물이 너무 깨끗하거나 하는 것들에 주의한다. 놈들에겐 3미터가 넘는 거대한 괴물이 있다. 이런 괴물들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이동시키려면 대형 트레일러가 필수야. 쪽바리 녀석들이 일본에서 그딴 차량을 들고 왔을 리 없잖아. 그렇다고 새로 샀을 리도 없다. 기록이 남으니까. 내가 무슨 말 하려는지 알지? 최근에 대형 트레일러가 도난 된 지역이 있는지 알아봐. 멍청한 경찰처럼 신고 된 것들만 뒤지지 마. 그렇게 쉽게 해결될 일이었으면 굳이 우리 손을 빌리지 않아도 해결됐을 거다. 너희들이 알아봐야 할 것은 장물아비들의 물건이야. 불법으로 들인 물건이라 신고도 할 수 없는 장물 말이야. 이쪽을 중심으로 알아봐. 일단 의심 가는 곳을 발견하면 재빨리 내게 연락해. 알았나?"

"네! 누님."

그녀의 물음에 백여 명 가까이 모인 조폭들이 일제히 고개를 조아렸다. 병규는 이한영이 대해 새삼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제까지의 단순해 보이던 모습과 달리 수하들 앞에서는 무섭도록 냉철한 모습이다. 특히 사태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수색 범위를 한정하는 능력은 특재대 본부장인 자영에 비견될 만했다.

지시를 받은 조폭들과 이한영이 우르르 빵집을 나섰다. 주르르 내려가는 빵집의 셔터를 보며 병규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미안합니다."

깊게 고개를 숙이자 눈썹을 찌푸리고 있던 이한영이 그의 턱을 살짝 툭 하고 쳤다.

"됐어. 임마. 어차피 위장으로 하는 일이야. 그리고 말했잖아. 오늘 손해 본 만큼 나중에 네 녀석을 확실하게 부려먹어 주겠다고. 이번 일 끝나면 단단히 각오해. 알았지?"

"네."

병규는 입가에 진한 미소를 보였다.

"가자!"

그녀가 호령하자 조폭들이 일제히 차량에 올라탔다. 그렇게 암흑가의 손에 빌린 대대적인 수색이 시작되었다.

병규는 정말로 하루 종일 뛰어다녔다. 맹세코 잠시도 쉬어본 기억이 없었다. 차를 타고 다음 장소로 이동할 때도 그는 혹시나 휙휙 지나가는 풍경 속에 놈들을 찾을 수 있을까 눈을 부라렸고, 이한영은 지도와 전화기를 품에서 잠시도 떼지 못했다.

번화가를 제외한 서울의 거의 전 지역을 뒤지고, 이어 서서히 수색의 반경을 넓혀갔다. 서울 근교는 건물이 밀집된 지역이 드물만큼 숨어들기 적당한 곳이 많아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