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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헉."

"맙소사."

고개를 돌린 호랭이와 병규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비명이 흘러 나왔다.

엿가락처럼 길게 찢겨진 귀탄의 육편들이 마치 비디오의 역 탐색을 보는 것처럼 천천히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짓이겨진 살과 피가 동그랗게 뭉치고, 골수를 쏟아내며 부러진 뼈는 언제 그랬냐 싶게 제 위치로 흘러들어 단단하게 굳어버린다.

잠깐 사이 눌러터진 계란프라이 같았던 상체는 거의 원형을 되찾은 상태였다.

"저놈 터미네이터도 아니고."

병규는 망연자실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고생을 해서 뭉개놓았는데도 소용없다니.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하하. 믹서기에 넣고 갈아야 하나? 그래도 안 되면 어떡하지?"

그나마 연륜이 있는 호랭이는 다소 놀라기는 했지만 금세 정신을 차리고 냉정하게 판단을 내렸다.

"멍하니 보고만 있을 게냐. 재생을 못하게 막아야지."

그 말에 병규는 불붙은 망아지처럼 허둥지둥 달려갔다. 막 붙기 시작한 다리를 끄집어 당겨서 저 멀리 던지기도 하고, 부글부글 끓으며 재생되는 부위에 도로변의 흙과 돌을 뿌리기도 했다.

그러나 허사였다.

차가운 비를 맞으며 땀이 얼굴을 타고 흐를 때까지 열심히 뛰어 다녔지만 귀탄의 재생능력을 막을 순 없었다.

귀탄의 재생능력은 그야 말로 엄청나다란 말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심지어 강변으로 날려버린 다리가 순식간에 부식되어 버리더니 끊어진 몸통부 위에서 금세 새살이 솟구쳐 나올 정도였다.

거친 숨을 헐떡이며 제정신을 차렸을 때엔 거의 완벽하게 재생 된 귀탄이 그들을 내려다보며 목울대를 부풀리고 있었다.

까드드드드.

그들의 머리 위로 짙게 드리운 그림자. 도로가의 가로등을 가려 버린 3미터가 넘는 길고 홀쭉한 동체. 풍선처럼 부풀고 있는 목. 그리고 놈에게서 물씬 풍겨오는 악취.

놈은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던 것이 분한 듯 길게 울부짖으며 적의를 고취시키고 있었다. 가히 압도적인 공포에 혼백이 다 달아날 지경이었다. 당장이라도 달아나고 싶지만 괴물이 눈앞에 떡 버티고 있는 바에야.

호랭이가 떨리는 음성으로 속삭였다.

"벼, 병규야. 아무래도 비장의 능력을 써야겠다."

"비장의 능력이라니요?"

"그 왜 있잖아. 요기를 내뿜는 손톱 말이야."

"그게 마음대로 안 되는 걸 알잖아요."

"썩을. 보통 이렇게 생명의 위기 닥치면 기다렸다는 듯이 숨겨진 능력이 확 튀어나와야 하는 거 아냐?"

"아마도 그게 현실과 만화책의 차인가 보죠."

사실 누구보다 미지의 능력이 발휘되길 바라는 사람이 바로 병규였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능력이 나오게 되는지도 모르는 형편이니.

까드드드드드.

놈의 울음소리가 또 들려왔다. 더불어 길쭉한 몸이 서서히 가라 앉았다. 대부분의 육식 동물들은 먹이를 사냥하기 전에 몸을 움츠린다. 한 번의 탄력적인 도약을 위해서다. 놈 역시 사냥감을 사냥 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미세한 틈을 보이는 순간 이 절대적인 괴수는 사슴을 덮치는 한 마리의 맹수처럼 순식간에 그들을 찍어 누를 것이다.

격한 자동차의 배기음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가늘게 들리던 소음이 불과 몇 초 만에 우렛소리처럼 커지더니, 전조등의 눈부신 빛이 어느새 아스팔트 위를 산란해 왔다. 소음이 커지는 시간이 지나치게 짧았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시끄러운 자동차의 배기음이 신경 쓰였나 보다. 병규를 노리고 있던 귀탄의 고개가 휘릭 뒤로 돌아갔다.

'이때다.'

병규는 어깨의 호랭이를 품안에 쑤셔 넣으며 즉시 죽어라고 뒤로 내뺐다. 취익 하는 파음이 다리를 쓸어오자 그는 뜀틀을 넘듯 펄쩍 뛰었다.

철퍽.

방금 전 그가 서 있던 자리에 놈의 거친 손바닥이 떨어지며 물이 사방으로 튀고, 단단한 아스팔트가 진흙처럼 터져 나갔다. 튀어 오른 몇 개의 파편이 청바지를 찢고 종아리와 허벅지에 박혀 들었지만 병규는 이를 악물고 달렸다.

한쪽에 쓰러진 스쿠터를 뛰어넘은 그는 가드레일에 기다란 흉터를 남긴 견인차 밑으로 미끄러지듯 숨어들었다.

콰앙.

그의 몸이 견인차 아래로 기어들자마자 묵직한 뭔가가 차의 옆면을 들이박으며 요란한 폭음을 터트렸다. 후두둑 떨어지는 쇳덩어리를 보며 병규는 욕을 씹어 삼켰다.

"죽일 놈."

휭 하니 날아온 쇳덩이는 다름 아닌 그의 스쿠터였다. 귀탄이 집어 던진 것이다.

까드드드.

펄쩍펄쩍 뛰어온 귀탄은 차 밑으로 손을 밀어 넣으며 쭉 훑었다. 놈의 날카로운 손톱이 머리칼을 아슬아슬하게 스친다. 병규는 더 깊숙이 몸을 옮겼다. 놈은 몇 번 더 손을 휘휘 젓더니 포기한 듯 한 걸음 물러섰다.

"젠장. 신고한 지가 언제인데 경찰은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야."

아마도 그의 신고는 장난전화 정도로 취급된 모양이다. 하긴 그렇게 급하게 끊었으니. 그래도 그렇지 확인차 슬금슬금 기어 나오기라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까드드드드드.

기묘한 울음소리가 커졌다. 밖에서 들려오는 기척이 묘하게 조용해졌다. 순간의 고요는 평온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폭풍전야의 그것이라고나 할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살 떨리는 전율이 그의 등을 타고 머리끝까지 쭉 훑어갔다.

'혀!'

병규는 스쿠터의 전조등을 가볍게 날려버리던 채찍 같은 놈의 혀를 떠올렸다. 그 긴 혀라면 견인차 아래까지 충분히 닿을 것이다.

"굴러라."

호랭이의 말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병규는 몸을 마구 굴렸다. 아스팔트 위의 빗물이 뺨과 머리칼을 흥건히 적시고, 자잘한 돌조각이 등과 배를 따끔따끔 찔러왔다.

취릭.

공기를 가르는 섬뜩한 파공음이 그의 어깨 부위를 스쳤다. 코끝을 쿡 찔러오는 독한 비린내. 역시나 놈은 혀로 공격해온 것이다. 4미터 정도? 아니면 5미터? 고무줄처럼 늘어지는 놈의 혀.

이제 더 이상 견인차는 괴물의 공격을 막아주는 방패가 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밖으로 뛰쳐나갈 수도 없으니, 병규와 호랭이는 그야말로 땅굴 속에 갇힌 오소리 신세라 할 수 있었다.

무섭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가르며 기괴한 배기음을 터트리던 스포츠카가 나타난 것은 바로 이때였다. 한순간 전조등의 불빛이 강하게 비치더니 자욱한 새벽을 날카로운 브레이크 소음이 모참이 찢어발긴다.

끼아아악.

얼마나 브레이크를 강하게 밟았는지 젖은 노면임에도 고무 타는 냄새가 멀리까지 진동했다. 사이드까지 당겼는지 차가 옆으로 크게 틀어지며 넘어갈 듯 한쪽으로 기우뚱하면서 위태위태 정지했다.

그 충격적인 등장으로 인해 한순간 귀탕과 병규, 그리고 호랭이 모두 넋을 잃고 스포츠카를 쳐다봤다. 쇼바의 탄성으로 덩실덩실 춤을 추던 차가 간신히 평형을 찾자 비로소 문제의 스포츠카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뜨겁게 달구어진 보닛 위로 빗물이 증발하여 무럭무럭 수증기를 토해 내고, 네 바퀴 또한 급브레이크의 충격으로 노곤한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신비스러운 배경을 깔며 나타난 스포츠카의 주인은 짧은 머리칼에 고급 양복을 쫙 빼입은 젊은 청년이었다.

"하이고. 화려하게 해치웠구만."

주위를 휘휘 둘러본 청년은 한숨부터 푹 쉬더니 전봇대처럼 서 있는 귀탄을 보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그나저나 멀리도 도망 왔네. 서울에서 사라진 놈이 뭐 먹을 게 있다고 이렇게 내륙 깊숙이 들어왔냐?"

견인차 아래에 숨어있던 병규와 호랭이는 괴물을 보고도 태연한 그의 모습에 내심 깜짝 놀랐다. 귀탄은 개구리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키는 무려 3미터가 넘고, 강철도 간단히 찢어발기는 날카로운 발톱과 진득거리는 표피, 그리고 썩는 듯한 악취가 있어 심장이 약한 사람이라면 보는 것만으로도 기절할 정도로 징그럽게 생겼다.

그런 흉악한 괴물을 앞에 두고도 청년을 조금도 긴장한 구석이 없었다. 가히 천하게 다시없는 강심장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어? 꼴을보니 한 번 아작이 났었던 모양이네."

밤송이 청년은 푸르스름하게 밝아오는 여명 속에서 용케 견인차에 뭉개진 괴물의 잔해를 확인하고는 어리둥절해 했다. 그는 눈앞에서 거친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귀탄은 보이지도 않는지, 느긋하게 견인차 주위에 흩어진 잔해를 살폈다.

"이놈이 아무리 멍청하다고 해도 달리는 차에 뛰어들었을 리는 없을 테고...."

청년의 눈에 고철뭉치가 된 스쿠터가 잡혔다. 그는 입가가 슬쩍 들어올려졌다. 소리 없이 웃은 그는 견인차 아래로 고개를 쑥 들이밀며 병규에게 물었다.

"이거 당신 작품이요?"

살기를 뿜어대고 있는 괴물에게 등을 훤히 드러내 보이는 그의 어수룩한 행동에 병규는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올 지경이었다.

"나에게 신경 쓸 시간이 있으면 당신 등 뒤나 조심해요."

"하하. 대답을 보아하니 당신이 처리한 게 맞는 것 같군."

그는 뭐가 그리 기쁜지 크케 헛웃음을 지어 보였다.

"자. 그럼 시민의 요청도 있고 하니 슬슬 용의자와 대화를 시도 해 볼까?"

그러나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귀탄은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목표가 사라졌지만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상의에서 꺼낸 장갑을 두 손에 천천히 끼우며 천천히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을 뿐이다.

괴물은 그곳에 있었다. 엄청난 점프력으로 가로등을 넘어 무서운 속도로 그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기습은 좋은데 너무 높이 뛰었어."

청년은 공중으로 솟구친 괴물을 겨냥하며 한 손을 지긋이 내밀어 보였다. 차 밑에서 몰래 훔쳐보고 있던 병규의 눈에 뻗쳐진 청년의 손에서 희끄무레한 그물 같은 것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착각인가 하여 눈을 비비고 보니 이번엔 보이지 않았다.

"저 녀석. 능력자로군."

그의 품속에 있던 호랭이가 삐죽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능력자?"

병규의 두 눈이 둥글게 떠졌다. 최근 들어 자주 듣게 되는 말 중의 하나다.

'능력자라면 저 사람도 뭔가 독특한 능력이 있다는 소리인데....'

그렇게 생각하면 적어도 지금 보이고 있는 여유만은 해석이 가능해진다.

"오라를 받아라!(捕快之捕繩)"

청년이 크게 소리치며 귀탄을 향해 뻗어냈던 팔을 호쾌하게 끌어당겼다. 그러자 놀랍게도 허공에 떠 있는 귀탄이 낚시줄에 걸린 물고기처럼 쭉 딸려오는 것이 아닌가!

철퍼덕.

아스팔트 위로 곤두박질친 귀탄의 몸뚱이가 묵직한 비명을 터트렸다. 재생력은 엄청나도 몸뚱이 자체는 강하지 않은 듯 당장 발 하나가 찰흙덩이처럼 터져 나가며 사방이 녹색 피와 징그러운 살점들로 반죽이 되어버렸다.

끼롸롸롸!

귀탄의 미친 듯한 울부짖음이 고요한 새벽하늘을 뒤흔들었다. 피를 줄줄 흘리며 맹렬히 발버둥을 쳤지만 보이지 않는 그물에 갇힌 것처럼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접수완료."

청년의 입가가 슬쩍 올라가며 매력적인 미소가 흘러나왔다. 병규가 그 고생을 했던 귀탄이 사내의 한 수에 허무하게 잡혀버린 순간이었다.

하지만 귀탄은 그리 순순히 당해줄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밤송이 청년이 씩 하고 미소를 그리는 순간, 썩은 악취를 풍기는 혓바닥이 먹이를 덮치는 독사처럼 그를 후려쳐왔다. 방심한 적을 노리는 불의의 기습. 그러나 청년은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으싸."

스텝을 밟듯 경쾌한 움직임으로 독액이 잔뜩 묻은 혓바닥 공격을 피해낸 그는 혀가 미치지 않을 만큼 멀찌감치 물러섰다.

"쓸데없이 반항하지 말고 그냥 잡혀. 이번엔 꼭 널 사로잡아야 하거든? 괜히 저번처럼 죽이기라도 하면 또 우리 대장에게 귀찮은 잔소릴 들어야 한다고."

귀탄을 상대하는 것보다 대장에게 잔소리를 듣는 게 더 두려운 모양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괴물인 귀탄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듯했다. 놈의 다음 행동은 그야말로 의외였다.

촤... 촤... 촤락.

채찍과 같은 혓바닥이 길게 쭉 뻗는가 싶더니 돌연 자신의 몸뚱이를 후려치는 것이 아닌가!

자해? 설마 놈은 잡히는 것보다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일까.

치지지지직.

끈적끈적한 독액은 놈의 무른 표피를 삽시간에 녹여버렸다.

끼롸롸롸롸롸....

진득한 귀탄의 비명소리가 고막을 때려온다. 괴로워할 거면 뭐하러 자해를 한 것일까. 그렇다고 놈이 자해를 즐기는 것 같지도 않았다.

살 타는 고약한 냄새와 함께 뭉클 피어난 독연. 그 속에서 거대한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귀탄 청년의 능력에 묶여 꼼짝도 못하던 놈이 서서히 몸을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독으로 내 오라를 끊어버린 건가? 생각보다는 똑똑하군."

무거운 음성으로 중얼거리는 청년. 그러나 말과 달리 그의 표정은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장갑을 손목까지 바짝 당기는 모습은 오히려 이렇게 돼서 잘됐다는 식의 호전적인 태도로 비춰졌다.

까드드드드.

귀탄의 울음소리. 그에 질 세라 청년도 호기 있게 외쳤다.

"와라!"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귀탄이 몸이 쏘아진 포탄처럼 날아 들었다.

가히 전광석화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재빠른 움직임. 허나 청년의 몸놀림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귀탄의 공격을 가벼운 움직임으로 피해낸 그는 훤히 드러난 놈의 등을 향해 소나기 같은 발길질을 퍼부었다.

콰두두두두.

눈부시게 호려한 발차기. 얼마나 빠른지 발그림자와 바람소리만 휭휭 들릴 뿐, 정작 발이 어디를 치고 있는지 전혀 보이지도 않았다. 동작 자체만 두고 봤을 때는 태권도 인 것 같은데, 그 빠름과 강력함은 대회용 태권도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비단 그의 발차기가 빠르기만 한것은 아니었다. 슬쩍슬쩍 내리치는 것 같은 타격에 귀탄의 등짝 위로 깊은 족적이 푹푹 파이고, 뼈가 부러지는 끔찍한 소음과 함께 갈라터진 살가죽을 뚫고 푸른색의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잠깐 사이에 귀탄의 큰 몸뚱이는 이미 절반 가까이 무너져 있었다. 엄청난 재생력으로 이내 재생되고 있긴 했지만 워낙에 청년의 공격이 거세어 재생되는 양보다 박살나는 양이 훨씬 많았다.

촤락.

비에 섞여 떨어지는 무수한 발길질에 꼼짝달싹 못하던 귀탄이 제 키보다 길게 늘어나는 혀를 채찍처럼 휘둘러왔다. 독으로 번들거리는 혀. 단순히 스치기만 해도 현재의 상황은 순식간에 역전 될 것이다.

"흥."

가벼운 콧바람 소리와 함께 청년의 오른발이 풍차처럼 크게 휘둘러졌다. 귀를 자극하는 큰 바람소리가 부웅 일어나더니 한 마리의 독사처럼 쏘아져오던 귀탄의 혀가 허무하게 튕겨져 날아간다.

"매가 부족했구나."

호기를 잔뜩 일으킨 청년의 공격이 한층 매서워졌다. 천지사방으로 폭풍처럼 몰아치는 그 엄청난 공격들. 아니 엄청난 건 둘째 치고 저런 동작들이 현실적으로 가능하기는 한 걸까?

"10단 콤보? 철권 마니아군."

"10단 콤보? 그게 뭐냐?"

"뭐. 그런 게 있어요. 저 사람 진지한 줄 알았더니 장난기도 다분히 있네요. 그나저나 우리 이만 여기서 나가죠. 저 사람이 알아서 상황을 정리해줄 것 같은데."

병규는 호랭이와 함께 견인차 밑에서 기어 나왔다. 둘이 옷을 툭툭 털고 있을 때쯤. 청년과 귀탄의 싸움도 대충 끝나갔다. 원래 생김새를 도저히 연상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망가진 귀탄이 청년의 오라에 다시금 묶였다. 이번엔 입조차 열지 못할 정도로 치밀하게 감싸버렸다.

청년은 귀탄을 사로잡자마자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대장? 아. 난데. 잡았어. 아아. 걱정 마. 이번엔 틀림없이 사로 잡았으니까."

호랭이과 병규는 그를 멀뚱히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대단한 사람이네요."

"그래. 썩 괜찮은 능력자로구나."

둘을 그렇게 고생하게 만들었던 괴물은 밤송이머리에겐 상대도 되지 않았다. 그 엄청난 움직임과 독으로 번들거리던 혀도 그의 옷깃조차 스치지 못했으니 말이다.

죽을 둥 살 둥 발악하던 것이 왠지 허탈하게 느껴졌다. 허무하게 잡혀버린 귀탄이 원망스러울 정도다.

"병규야. 아무래도 견인차 운전사 좀 살펴봐야겠구나. 아직까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나 보다."

그제야 잠시 잊고 있었던 빠아앙 하는 경적소리가 고막을 때려 온다. 시끄러울 정도의 소음인데 여태 잊고 있었다니. 그만큼 귀탄과 청년의 싸움에 몰입해 있었다는 증거이리라.

"네."

병규는 터덜터덜 운전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상황은 그렇게 끝났다. 적어도 그때엔 그렇게 생각되었다.

경적을 울리며 옆으로 누워있던 견인차의 후미가 거대한 쇠망치로 두들겨 맞기라도 한 것처럼 휙 미끄러지며 밤송이머리 청년을 후려갈기기 전까지는....

"으악."

처절한 단발마와 함께 청년의 단단한 몸이 배트에 맞은 야구공처럼 튕겨졌다.

키가가가각.

청년을 후려갈긴 견인차는 아스팔트를 벅벅 긁으며 미끄러지다 끝내 가드레일을 뚫고 도로변 도랑으로 굴러떨어졌다.

휘잉.

앞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바람. 병규는 그대로 굳어 있었다.

"뭐야?"

병규는 비명을 질렀다. 이게 무슨 개떡 같은 상황이란 말인가.

왜 멀쩡히 엎어져 있던 견인차가 갑자기 청년을 덮친 거지?

청년은? 무적으로 보이던 그가 왜 도로 저편에서 검붉은 피를 왁 하고 토하고 있을까.

아니 무게만도 몇 톤을 될 만한 견인차가 그렇게 장난감처럼 움직인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설마 청년의 오라에 잡힌 귀탄에게 염동력 같은 신기한 능력이라도 있었을까?

그때 기묘한 괴음이 그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까드드드드.

까득. 까드드득.

귀탄의 울음소리? 그런데 하나가 아니었다. 병규의 고개가 천천히, 고장난 목각인형의 못처럼 느리게 돌아갔다.

노란 가로등 아래,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웅크리고 있었다.

3미터를 훌쩍 넘는 키, 코를 찌르는 역겨운 냄새.

"한 마리가 더 있었군."

호랭이가 신음을 흘린다. 그렇다. 귀탄은 처음부터 한 마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새로 나타난 귀탄은 먼저 놈보다 덩치가 훨씬 크고 모습도 흉악했다. 먼저의 놈이 키만 멀뚱히 큰 삐쩍 마른 녀석이라면 이 녀석은 꽤 다부진 근육질의 몸매라고 할까.

까드득. 까드득.

까드드드드.

청년에게 잡힌 녀석과 새로 나타난 녀석은 교감이 통하기라도 하듯 코를 킁킁대며 울어댔다.

까드드드드.

덩치 큰 녀석이 돌연 그를 노려보며 목을 부풀린다.

녀석의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병규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지는 것 같았다. 작은 녀석도 어쩌질 못 했는데, 이젠 그 보다 훨씬 큰 녀석이 자신을 노려본다. 이건 암담한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가히 절망적 상황이 아닌가.

"어디서 이런 요물들이...."

호랭이의 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콰앙.

몽롱한 정신에 경종을 울리듯 갑자기 거대한 폭음과 함께 대지가 흔들렸다. 폭죽처럼 불꽃이 터지고, 폭발에서 튀어나온 묵직한 충격파로 대지가 우르릉 진동한다. 쏟아지는 빗줄기는 빛을 본 어둠처럼 사방으로 촤악 튕겨져 나갔다.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끊어진 가드레일 너머로 붉은 화염과 시커먼 연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견인차의 기름탱크가 폭발한 것이다. 꺼지지 않은 시동이 도로변으로 떨어지는 충격에 큰 문제를 일으킨 모양이다.

충격에 병규는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털썩 무릎을 꿇었다.

이때 갑자기 호랭이가 병규의 코를 깨물며 독촉했다.

"침착해라. 지금은 혼이나 빼고 있을 상황이 아니야. 운전사. 차안에는 아직 운전사가 남아있다."

번쩍 정신이 든 병규는 재빨리 호랭이를 잡아 어깨에 얹으며 물었다.

"그 밤송이머리는 어쩌고요?"

"녀석의 능력을 못 봤냐? 그렇게 쉽게 당할 놈이 아니야. 지금은 사고차량의 운전사를 구하는 게 먼저다."

그럴지도 모른다. 확실히 그의 능력은 질투가 날 정도로 대단했다. 하지만 능력자라고는 해도 몸뚱이는 인간이다. 무른 살과 푸석푸석한 뼈로 이루어졌다는 건 보통사람과 하등 다를 바 없다. 그런 사람이 무쇠 덩어리인 견인차와 그렇게 심하게 충돌하고도 무사하길 바란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 아닐까?

허둥지둥 끊어진 가드레일 너머로 달려가 보니 반쯤 녹아내린 견인차가 도랑 아래에 엎어져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폭발의 충격은 차의 후미를 강타해서 운전석은 아직 무사했다. 병규는 미끄러지듯 비탈길을 내려갔다.

차량의 문짝은 구겨진 휴지조각처럼 뭉개져 있었고, 깨진 창문 너머로 피투성이??? 된 운전사가 보였다. 그러나 뭉개진 문짝과 차체가 끈적끈적하게 눌어붙어 아무리 애를 TJ도 문을 열 수가 없었다.

운전자를 구하려면 강철을 잘라내는 장비가 꼭 필요했는데 119의 구조를 기다릴 만큼 느긋한 여유도 없었다. 지글지글 타는 화염이 차의 도장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기 때문이다. 운전자의 출혈도 상당한 듯 보였다.

"어쩌지."

어쩔 줄 몰라 하던 병규는 큼지막한 돌로 차 문의 이음새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캉캉 쇳소리만 요란하게 날 뿐, 휘어진 문짝은 꿈쩍도 않았다.

"부서져. 부서지란 말이다."

그는 원수의 가슴에 검을 박듯 악을 지르며 돌멩이를 휘둘렀다. 그러나 겉의 철판만 조금씩 우그러질 뿐이다.

"젠장."

허탈한 한숨이 입가에 맴돈다. 신경질적으로 돌멩이를 던져버린 그는 이번엔 맨주먹으로 문짝을 두드렸다.

"내 능력이라면 이럴 땐 나와줘야 할 것 아니냐."

뼈끝까지 시려오는 아픔. 피가 튀었다. 아프다 못해 주먹이 저려왔다.

"나오란 말이다!"

병규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비명을 질렀다.

츠각.

날카로운 소음. 발악적으로 내려치던 그의 손에서 푸른 요기가 맺히는 순간 그토록 굳건하던 문짝이 면도칼에 종이짝 찢어지듯 찢겨졌다.

쇠가 이렇게 물렀던가.

손을 휘휘 저을 때마다 두부처럼 퍽퍽 쪼개진다. 물을 가른 듯 아무런 저항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얍!"

병규는 기뻐할 틈도 없이 사선으로 쭉쭉 찢겨나간 철판을 벌리고 반쯤 뭉개진 차체에서 운전자를 끄집어냈다.

다행히 운전자는 살아있었다. 생각보다 부상도 심하지 않았다. 이마가 조금 깨지고 생채기가 이곳저곳 눈에 띄었지만 생각보단 멀쩡했다. 그를 거대한 모닥불처럼 불타는 견인차에서 끌어낸 병규는 죄책감에 몸둘 바를 몰라 했다.

이유야 어떻든 이 사람은 그 때문에 불행을 겪은 셈이 아닌가. 두려움에 앞서 위기에서 벗어날 생각만 했지 누가 피해를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가보죠."

도장면 전체에 기름이라도 부은 것처럼 활활 타오르는 견인차를 응시하던 병규가 몸을 일으켰다.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다. 요수의 발톱이 나오기 전까지는 엄두도 내지 못한 일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상대할 자신은?"

호랭이의 물음에 병규는 손을 들어 보였다. 손가락 끝에서 한자가량 뻗어 나온 푸르스름한 요수의 발톱. 처음으로 그의 의지대로 발현된 능력이다.

"해 봐야죠."

병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

병규가 허겁지겁 끊어진 가드레일을 통해 도로 위까지 올랐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괴물과 그 커다란 덩치에 비해 하찮게까지 보이는 인간의 처절한 사투였다.

"살아있었구나."

청년을 본 병규는 놀람과 기쁨이 반반 섞인 탄성을 흘렸다. 세상에 견인차에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처박히고도 살아있다니. 하긴 그랬으니 귀탄이 병규를 쫓아오지 않았지. 만약 그가 귀탄을 막아주지 않았다면 감히 견인차 운전사를 구해낼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군분투하고 있는 청년의 상태는 그리 좋지 못했다. 온 몸이 피투성이인데다 오른팔도 부러졌는지 부자연스러웠다. 무엇보다 바람처럼 빠른 그의 두 다리가 지금은 노쇠한 종마처럼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거칠게 몰아붙이는 귀탄의 공세를 그저 간신히 피해 내고만 있을 뿐. 입으로 울컥울컥 넘어오는 핏물이 그의 위중한 상태를 대변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잠시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병규와 호랭이의 두 눈이 마주쳤다.

"가자."

호랭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병규는 곧장 다리를 박찼다.

쉬엑.

주위 풍경이 무섭게 빠른 속도로 뒤쪽으로 지나가고, 저만치 있던 귀탄의 다리가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놈. 맛 좀 봐라."

병규는 번개같이 삼보를 내디뎠다.

빠바바바방.

폭죽처럼 터지는 폭음.

질풍삼연격이 터진 것이다.

귀탄의 큰 동체가 허공을 떠오른다. 그러나 병규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타격감이 전혀 전해지지 않았다. 놈의 몸통을 후려갈기는 느낌은 마치 무른 진흙을 두드린 것처럼 질척거리기만 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철퍼덕 엎어졌던 귀탄은 곧바로 일어선다. 그러나 병규는 바람처럼 내달리며 그대로 놈의 발목을 그었다. 요수의 발톱은 귀탄의 살과 뼈를 무른 두부처럼 파고들었다.

서걱.

서늘한 절삭음과 함께 괴성을 지르던 귀탄이 휘청하며 균형을 잃었다. 왼쪽 다리의 근육이 절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으론 턱없이 부족하다. 놈의 지독한 재생력이라면 이 정도의 피해는 단숨에 복구할 수 있을 것이다. 병규는 아예 끝장을 보기로 했다.

두 손을 좌우로 크게 펼쳐낸 채 힘을 모으자 요수의 발톱이 두 배는 더 길게 늘어나 무려 두 자가량이나 뻗었다. 더불어 힘이 팔 쪽으로 쭉쭉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무래도 요수의 발톱은 체력을 심하게 소비시키는 모양이다. 속전속결!

"이얍!"

기센 기합성과 함께 두 손을 힘껏 교차시켰다.

촤아아악.

너무도 생생한 절삭음이 귓가를 때리고 곧바로 귀탄의 비명성이 하늘을 떨쳐 울렸다.

키롸롸롸롸!

잘려나간 놈의 무릎이 우울한 푸른색 피를 쏟아내며 아스팔트 위를 데굴데굴 굴러갔다. 다리가 떨어져 나간 고통에 귀탄은 미친듯이 발버둥쳤다. 아무리 상처가 재생된다고 해도 고통만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이제 머리를...."

아무래도 놈을 저지하려면 머리를 날려버리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발목을 노린 것도 녀석의 머리통을 손에 닿을 수 있는 높이까지 낮추기 위해서였다. 병규는 괴로워하는 귀탄의 머리를 향해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뒤통수를 대고 누워 있는 놈의 머리통을 봤을 때, 병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이제 마지막이다. 그런데 아뿔싸! 설마 그것이 놈의 함정일 줄이야.

병규가 귀탄의 머리를 날려버리려 요수의 발톱을 치켜들었을 때, 귀탄의 두 손이 마치 촘촘한 그물처럼 좌우에서 그를 압축해 오는 것이 아닌가. 이대로는 놈의 머리통을 날려버린다 해도 그 역시 놈의 두 손 사이에서 바람 빠진 풍선처럼 터져버릴 것이다.

좌우앞뒤 어디로도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병규는 무의식적으로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물론 장벽처럼 감싸 쥐여지는 손바닥을 뛰어 넘어갈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저 위험에서 벗어나려는 무의식적인 반응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데 웬걸! 무의식적으로 뛰어오른 그가 좌우에서 압축해오는 귀탄의 거대한 손바닥을 넘어 무려 사, 오 미터나 뛰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빡!

발아래 저만치에서 무거운 소음과 함께 귀탄의 손바닥이 마주쳐졌다. 그대로 있었으면, 아니 그의 두 다리가 순간 상상을 불허할 절도의 탄성을 보이지 않았다면 그의 몸은 놈의 두 손 사이에서 단물을 짜낸 오렌지처럼 박살이 났을 것이다.

"뭐, 뭐얏!"

허공에 둥실 떠오른 병규는 생각지도 못한 사태에 수영을 하듯 허겁지겁 손발을 휘저었고, 당황한 중에도 어떻게 간신히 균형을 잡아 두 발로 무사히 떨어질 수 있었다.

삼층 정도의 높이에서 떨어진 것인데도 발끝에서 시작되어 무릎 위까지 이어지는 엄청난 탄성에 별 다른 충격을 받지 않았다. 허벅지 아래가 탱탱한 고무로 변해버린 것 같다고나 할까. 아니 그보다는 탄성이 엄청난 스프링 같았다. 사뿐사뿐 걷는데도 통통 하고 튀어 오른다.

"히야. 나한테 이런 능력도 있었나?"

살짝살짝 발끝을 튕기는 것만으로도 무려 2미터가량 점프가 된다.

"좋아. 이 능력이라면."

신기한 듯 몇 번 허공으로 떠오르던 병규의 두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한편 병규가 새롭게 발견한 재주에 흥미를 더해가고 있을 때, 그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호랭이는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온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쩍 벌어진 아가리는 벌통이 자리해도 충분할 정도였다.

'성마. 이 녀석 요괴의 능력을 흡수하는 능력자?'

호랭이는 곧 고개를 저었다. 터무니없는 소리다.

능력자들에겐 반드시 능력을 빌려주는 수호신이 있다. 하지만 세상 그 어디에도 요괴의 능력을 흡수하는 수오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수호신이 없는 능력자가 존재할 수 없으니 요괴의 능력을 흡수하는 능력자 역시 존재할 수 없다는 소리다.

'하지만 방금 이 녀석의 점프력은....'

문제는 바로 그것이다. 방금 병규가 보인 능력이 귀탄의 능력이었다는 사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의 빠른 다리와 손에서 나온 요수의 발톱도?'

그때는 발칸의 피를 먹었었다. 발칸은 인간이라 할 수 없는 손재. 이계에서 온 괴물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요괴의 능력을 흡수하는 능력자란 말인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호랭이의 생각은 계속 이어질 수 없었다. 병규를 놓친 귀탄의 분노한 괴성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키롸롸롸롸롸!

고막이 찢어질 정도로 울어 제친 놈은 거친 숨을 드르렁 마시더니 돌연 엄청난 높이로 도약하며 병규의 머리 위를 덮쳐왔다. 성난 놈의 분노가 거대한 먹구름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러나 병규는 더 이상 물러서지 않았다. 웬일인지 그의 얼굴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가득 넘쳤다.

"네 녀석의 짝꿍에게 당했던 것을 백 배로 앙갚음해 주마!"

거창하게 호통을 친 병규는 용수철을 누르듯 몸을 접었다가 맹렬히 펴며 그대로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휘이익 하는 바람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린다.

몸을 아래로 잡아끄는 듯한 중력의 마수에서 간신히 벗어났을 때, 그는 어느덧 10여 미터 상공에까지 도달해 있었다. 그보다 조금 아래, 귀탄의 머리통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본래 가지고 있던 특유의 순발력에 탄성이 더해지자 훨씬 늦게 점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더 빨리 정점에 도달한 것이다.

까드드드드.

저 밑에 있어야 할 병규가 돌연 자신의 머리 위까지 튀어 오르자 흠칫 놀라던 귀탄이 목을 부풀렸다. 채찍같이 긴 혀를 쏘아내려는 것이다.

"아차!"

병규는 뒤늦게 귀탄의 또 다른 능력을 생각해 내고 인상을 썼다.

허공에 뜬 상태라 놈의 혓바닥을 도무지 피할 재간이 없었다. 꼼짝없이 당해야 하는가. 그야말로 위기의 순간.

"정신없는 녀석들. 날개도 없는 놈들이 공중전이라니 이게 무슨 미친 짓거리냐!"

호랭이가 우는소리를 하며 병규의 어깨 위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노련한 스카이다이버처럼 네 다리를 활짝 펼쳐내며 짜릿한 공중유영을 즐긴 호랭이는 앙증맞은 발톱을 세우며 풍선처럼 부푼 귀탄의 목을 물고 늘어졌다.

끼롸롸!

귀탄이 고통스럽게 발버둥을 쳤다. 역시나 큰놈이나 작은놈이나 약점은 이 목이었던 것이다.

"호랭이. 최곱니다!"

호랭이의 목숨을 건 스카이다이빙 덕에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난 병규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환호성을 질렀다.

"이젠 네 녀석 차례다."

"네엡!"

힘차게 대답한 병규는 어찌어찌 불안정하게 자세를 조정하며 간신히 귀탄의 머리꼭대기에 올라섰다.

"이놈. 죽어라."

한손을 놈의 머리빡에 처박아 자세를 고정시키자마자 요기가 파도처럼 치솟는 요수의 발톱을 귀탄의 머리꼭대기에 쑤셔 박았다. 사람으로 비교하면 정수리, 즉 백회(百會)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키롸롸롸.

미친 듯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온다. 사람이라면 단번에 즉사할 위치니 고통스러운 것도 당연하리라. 하지만 이 정도로는 녀석의 엄청난 재생능력을 도저히 막을 수 없다.

병규는 영혼을 불사른다는 느낌으로 귀탄의 머리통에 쳐박은 속에 모든 힘을 쏟아 부었다. 전신의 기력이 손을 통해 터진 독처럼 무시무시한 속도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지옥으로 꺼져버렷!!"

순간 병규의 두 눈에서 안개처럼 스며 나오던 요기가 몇 배나 짙어졌다.

추아악.

잘 드는 식칼이 고깃덩이를 싹둑 썰어낼 때의 그 섬뜩한 절삭음. 머리로 쑤셔 박은 요수의 발톱이 거대한 창처럼 솟구치며 놈의 목뼈와 뱃속의 내장을 헤집고 사타구니 사이로 삐죽 튀어나왔다.

키악!

귀탄의 큰 동체가 벼락이라도 맞은 듯 움찔 떨렸다. 뒤이어 찾아오는 경련. 발끝부터 시작해 머리 위까지 서서히 잠식해 들어오는 그 잔인한 떨림. 그러나 경련은 머리끝에 다다른 순간 거짓말처럼 멈춰버렸고, 다음으로 귀탄의 동체를 휩쓸고 온 것은 거대한 붕괴였다.

쿠쿠쿵.

귀탄의 큰 동체가 아스팔트 위로 떨어지자 고여있던 빗물이 파도처럼 일어나 사위를 휩쓸었다.

쏴아아아아아.

빗소리가 거세졌다. 단단한 아스팔트 위로 떨어진 빗물이 뿌옇게 부서져 나간다.

병규는 피를 게워내며 잔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귀탄의 몸 위에 굳어버린 듯 서 있었다.

'이번에도 제정신이 아닌가.'

호랭이가 걱정스런 얼굴로 병규를 올려다봤다. 지금껏 병규는 큰 힘을 쓸 때마다 기억도 못할 정도로 무아지경이었다. 마침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 병규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웃는 듯 우는 듯 미묘한 표정으로 요수의 발톱이 솟아난 손을 들여 보였다.

"호랭이. 이거 기분 정말... 드럽네요."

가슴이 콱 막힌 듯한 음성. 병규는 처음으로 온전한 정신이었다. 그래서 뜨거운 피가 펄펄 끓는 살아 있는 생물의 맨살을 가르는 느낌을 너무도 생생하게 체험해야 했다. 악몽처럼 끔직한 일이었을 테지.

"휴우."

호랭이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작은 강아지 같은 그가 한숨이라니. 평상시라면 귀엽다며 속으로 끅끅대고 웃었을 테지만 지금은 왠지 분위기가 무겁다.

"담배나 하나 줘봐."

"... 네."

머뭇거리며 대답한 병규가 셔츠의 안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지만 호랭이를 위해 항상 대신 가지고 다녔다.

주섬주섬 꺼내든 담배.

빗물에 젖어 축축했다. 하긴 그렇게 정신없이 빗속을 뛰어다녔으니. 병규는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헤. 어쩌죠? 다 젖어버렸는데."

"젠장."

호랭이는 발로 아스팔트 위에 고여 있는 빗물을 걷어차며 욕을 했다. 단 하나뿐인 낙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내 것이라도 피우겠소?"

병규 앞에 불쑥 내밀어진 손, 그리고 그 손에 쥐어진 막 뜯은 듯한 디스 한 갑. 어느새 다가온 밤송이머리가 그를 향해 배시시 웃음을 보인다.

청년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칼처럼 버려져 있던 외관은 봉두난발에 상거지 꼴로 변해버렸고 깔끔한 미소를 머금은 입가 역시 핏물로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이 녀석도 디스야? 젠장. 저 녀석과 처음 만날 때가 생각나는군."

호랭이가 구시렁거린다. 하지만 연신 혀로 입술을 축이는 걸 보니 어지간히 반가운 모양이다.

청년에게 담배를 받아든 병규는 호랭이 입에 한 개비를 물려주고 불을 붙여 주었다.

"음? 담배 안 하십니까?"

"네. 호래... 강아지가 피워서."

병규는 어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하. 이 좋은 걸 왜 안 하는지 모르겠네."

병규 옆에 털썩 주저앉은 청년은 담배에 불을 당겼다. 흐읍 하고 깊게 빨아들인 연기에 머릿속이 핑 하고 돈다.

"카. 역시 이 맛이야."

몸이 노곤하게 퍼져있을 때 피우는 담배 한 모금의 쾌락. 온몸이 자르르 녹아버리는 것 같다.

"젠장할. 죽여주는구만. 이 맛에 담배를 못 끊는다니까."

싸구려라며 꿍얼거리던 호랭이가 극찬을 한다. 질이 어쩌고 궁상맞게 따지고 들었어도 역시 없는 것보단 백 배는 좋은가 보다.

"신기한 강아지네. 담배도 피우고."

밤송이 청년이 호랭이를 흘끔 쳐다보며 한마디한다.

빠직.

귀여운(?) 호랭이의 콧잔등에 주름살이 잡혔다. 한참 분위기를 잡고 있는데, 강아지라니! 게다가 저 피식 하는 웃음은 또 뭔가. 이런 상황에 가만히 있으면 절대 호랭이 신선님이 아니다.

"아 씨팍. 돌겠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것이 누구더러 강아지래. 죽어라 죽어."

분통을 터트린 호랭이가 청년의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졌다. 생각 같아서는 본신을 드러내어 겁이라도 확 주고 싶지만 그게 맘대로 되어야 말이지.

"호. 제법 성깔도 있고."

피식 웃은 청년이 손가락으로 호랭이의 콧잔등을 톡하고 쳤다. 원래 힘이 센 것인지 일부러 그런 것인지 바짓가랑이를 물고 들어지던 호랭이가 비질에 쓸린 낙엽처럼 데굴데굴 굴러갔다.

"아이고. 삭신이야. 아이고 호랭이 죽네. 어린놈이 신선을 죽이네. 흐윽 내가 어쩌다가 이 꼴이 됐을꼬. 신통력만 되찾으면 한방감도 안 되는 녀석에게. 아이고 억울해라."

호랭이는 퍼질러지게 앉아 꺼이꺼이 하며 신세한탄을 했다. 그 와중에도 입에 문 담배를 뻐끔거리는 꼴이란.

"이젠 울기까지. 가지가지 하는군. 보고만 있어도 심심하진 않겠어."

호랭이를 보며 씩 웃어 보인 청년, 문득 그는 병규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운석이오."

"병규입니다."

"이런 곳에서 능력자를 만나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소."

반갑다는 말일까, 아니면 의외였다는 의미일까.

털털하게 웃어 보인 그는 피우다 만 꽁초를 털어버리고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그럼 일을 마무리해 볼까."

벌떡 몸을 일으킨 그는 아스팔트 위에 길게 늘어진 귀탄에게 걸어갔다.

"역시. 또 재생되고 있군."

병규가 쓰러트린 귀탄의 상흔이 서서히 재생되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요수의 발톱에 당한 상처는 재생되는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렸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원상으로 회복될 것이다.

"세상에 머리가 완전히 터져 버렸는데도 살아있다니."

호랭이의 입에 물려있던 담배가 툭하고 떨어졌다. 몸통을 갈라도 안 되고, 머리를 잘게 쪼개버려도 소용없다니.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괴물이 아닌가. 그가 알고 있는 귀탄은 절대로 이런 요괴가 아니었다.

'대체 저 괴물은 뭐지?'

수백 년을 살아온 그지만 이런 엄청난 괴물이 있다는 소문은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다.

"거참. 그 강아지 한 번 요란하게 짖어대네."

오라 능력으로 머리가 쪼개진 귀탄을 꽁꽁 둘러싸 고치고 만들어 버린 이운석이 호랭이를 보며 입가를 들어올렸다. 하긴 호랭이의 말은 병규에게 만 통용되는 것이니, 심각한 혼잣말도 그에겐 그저 애 닳은 강아지의 울음소리 정도로 들렸을 테지.

"큭큭큭."

멍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병규의 입에서 어이없는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다지 재미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왠지 웃음이 멈춰지지가 않았다.

"웃지 마. 임마!"

이번엔 병규의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지는 호랭이였다.

빵빵. 빠아아앙~. 빵빠방.

신경질적으로 울려대는 경적소리들. 한두 대만 울려도 소란스러울 텐데, 한꺼번에 수십 대가 울려대니 시끄러운 정도가 아니라 귀가 따가울 정도다.

출근길에 차가 막히는 것은 이제 수도권만의 일은 아니라서, 조금 큰 규모의 도시라면 매일 아침마다 시내로 진입하려는 차량들로 도로가 북새통을 이룬다.

전국의 도로망이 거미줄처럼 구축되어 있다지만 출근시간에 맞춰 일순간에 밀리는 차량들을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다. 그런데 오늘은 그러한 양상이 더욱 심했다.

가뜩이나 내륙으로 상륙한 태풍 탓에 느릿느릿 거북이 운행을 하고 있는 판에 시내로 진입하는 4차선 도로를 군경이 완벽하게 통제해 버린 것이다.

바리케이드 대신 정차해 놓은 경찰차 너머엔 중무장한 특수부대원들과 거대한 포신을 번뜩이고 있는 장갑차까지 눈에 띄었다.

분노한 운전사들이 도로를 막은 이유를 캐물었지만 외곽선 통제를 맡고 있는 경찰들은 한사코 군경합동훈련이라는 어중간한 대답을 할 뿐이었다.

"제기랄. 무슨 놈의 훈련이 도로통제까지 하는 거야?"

"간첩이라도 내려온 건가?"

운전자들은 경적을 울리며 불만을 토로했지만 통제를 담당하고 있는 군경의 심각한 분위기에 어쩔 수 없이 외곽순환도로 쪽으로 방향을 돌려야 했다.

군경합동훈련이라는 명목하에 통제되고 있는 안쪽은 실제 외부에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엄중한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반경 500m에 걸쳐 이중 삼중의 통제선과 보안통제가 이루어졌고, 사건의 중심부엔 보안등급이 굉장히 높은 요인들만 출입이 허가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 현장엔 생각처럼 대단한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파손된 아스팔트와 고철덩이가 되어버린 몇몇 쇠붙이. 그리고 미친 짐승이라도 집어넣은 듯 이따금씩 쿵쿵 하고 소란스런 소음을 터트리는 거대한 트레일러 한 대가 전부였다.

"맨손으로 한 작품이란 말이죠? 이것이."

견인차량에서 떼어온 듯한 자동차 문짝을 살피고 있던 여자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한 손에 깁스를 한 이운석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랬지."

여자의 시선이 다시 부서진 문짝으로 돌아갔다.

'신력인가? 아니면 마력(魔力)? 그도 아니면 전혀 다른 이 능력?'

그런 구분을 가능케 하는 몇 가지 표증이 있지만 휴지조각처럼 구겨진 문짝에서는 그 어떤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순수한 힘?'

그녀의 고운 이마 위로 살짝 주름이 그어졌다. 간혹 위기에 처한 인간이 상상 이상의 기력을 발휘하는 경우는 있지만 그렇다 해도 명백히 한계는 있는 법. 평범한 인간이 몇 겹이나 되는 철판을 맨손으로 찢어발길 수는 없는 것이다.

"C급 정도의 능력자 같군요."

10여 분 가까지 면밀히 살펴본 그녀가 내린 결론이었다. 절단면이 너무 예리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 이상의 능력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곧 자신의 평가를 수정해야 했다.

"한 가지 들은 말이 있는데...."

이운석이 넌지시 말을 꺼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아무래도 그의 힘. 괴물과 관련 있는 것 같아."

"괴물로 변신이라도 했나요?"

"그런 건 아니지만.... 물어보니 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던 모양이야. 그때에도 인간과 비슷한 괴물의 피를 마신 적이 있는데, 견인차의 문짝을 찢어발긴 힘은 그때 생긱 모양이더군."

"흐음."

그녀의 붉은 입술 사이로 나직한 침음성이 흘렸다. 이운석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신경 쓰이는 게 있는데 말야."

"...?"

"그가 스크래그를 박살낼 때, 한순간 놀랄 만한 점프력을 보였였거든."

"점프요?"

"그래. 한 10여 미터 가까이 허공으로 부웅 날았지. 마치 스크래그의 점프력을 보는 것 같았어."

"설마 몬스터의 능력을 복사해 내는 능력자? 믿을 수 없어요."

여자의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몬스터의 힘을 카피하다니. 터무니없는 소리다. 만약 정말로 요괴의 능력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쩌면 그는 사상 초유의 M 등급일지도....'

"그런데 그는 지금 어디 있죠?"

그녀의 음성이 조금 빨라졌다. 그녀의 은근한 재촉에 이운석은 예의 미소를 보였다.

"일단은 연락처를 확보한 뒤 집으로 돌려보냈지."

활처럼 흰 그녀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런 특별한 능력자를 그냥 돌려보내다니. 규정상 특재대(특수재해대책본부)의 추가 요원이 도착할 때까지 신병을 확보했어야 했다. 그녀의 불편한 심기를 눈치 챈 듯 이운석이 약간의 말을 첨가했다.

"사실 그와 간단한 약속을 한 가지 했어."

"약속이라고요?"

"돈이 궁해 보이는 것 같아서 좋은 아르바이트 자리를 소개시켜 준다고 했지."

"네?"

그녀의 두 눈에 이번엔 의혹이 맺혔다. 좋은 아르바이트라니?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요즘 말이야."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선 이운석이 웃음 띤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특재대에 인원이 부족하지 않아?"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의 미간에 물결을 이루던 주름이 활짝 펴졌다. 역시나, 이 남자는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일을 허술하게 처리하는 것 같아도 결과적으로 보면 언제나 깔끔했다.

그를 특재대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단순히 신병을 확보하는 것보다 훨씬 이득이리라. 물론 병규라는 그 남자 역시 손해 볼 것은 도 없다. 오히려 그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지도.

"잘했어요."

굳게 닫혀있던 그녀의 빨간 입술이 황홀한 미소를 그렸다.

한편 그 즈음, 병규의 자취방 화장실에서는 엄청난 비명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우왁. 혀가! 내 혀가아아아아아아아!"

서명하는 곳이 어디죠?

귀탄과 피 튀기는 일전을 보낸 다음 날, 병규는 오랜만에 경애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동안 시간대가 안 맞아서 한 집에 살면서도 서로 만날 수 없었던 것이다.

"와. 그럼 이번엔 개구리 괴물과 한바탕 한 거야?"

"귀탄이라니깐. 귀탄. 그리고 반응이 그게 뭐냐? 남은 죽다 살았구만."

생고생한 경험을 스펙타클(spectacle)하고 엘레강스(Elegance)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경애는 만세를 부르며 좋아한다. 아무리 힘들었다고 입 아프게 설명해도 전혀 씨알도 안 먹힌다. 뭐, 정의의 히어로에게 고난과 좌절은 필수요소라나?

아무래도 병규의 말을 안 믿는 것 같은 눈치다. 하긴 요즘 같은 세상에 괴물 얘기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이 이상한 거겠지.

"에고. 내 신세야."

호랭이가 포옥 한숨을 내쉰다.

지엄하신 호랭이 신선님께선 지금 인형대신 그녀의 품에 안겨 있었다. 처음엔 여자에게 안기는 걸 극도로 싫어하던 호랭이였지만 한동안 그녀에게 시달린 후부터는 그녀의 품속에서 고롱고롱 잠이 들 정도의 적응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빠. 호랭이에게서 담배 냄새가 나. 담배 좀 그만 피워."

"담배 안 핀다니깐. 담배 쪽 얘기라면 네가 안고 있는 복슬복슬한 연초마니아에게 따져!"

"정말? 호랭이가 피웠어?"

호랭이는 눈을 말똥말똥 뜨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잠시 호랭이를 내려다보고 있던 경애가 비명을 지르며 정신없이 고개를 비벼댄다.

"아앙. 너무 귀엽다. 이렇게 귀여운 호랭이가 담배라는 왕 거짓말이다. 그지?"

"앙."

강아지처럼 귀엽게 대답하는 호랭이. 갈수록 호랭이가 경애의 애완동물화되는 것 같아 걱정이다. 저러다 영영 신선일 못하게 되는 건 아닌지. 그러면 그도 피곤해진다. 호랭이가 매일 피워대는 담배 값 때문에 등골이 휠 지경이다.

'그나저나 편의점 일도 못하게 됐는데 어쩌지?'

스쿠터는 완전히 고철덩이가 되어버려서 수리가 아예 불가능했다. 덕분에 병규는 편의점 새벽일도 그만둬야 했다. 이제 다른 일자리를 잡아야 할 터인데, 마땅한 일이 없어 고민이었다.

'이대로는 다음 학비도 못 내게 생겼네.'

그렇다고 학교를 때려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꽉 끼는 양복을 입은 두 명의 사내가 병규의 자취방을 찾아온 것은 바로 이런 때였다.

"잠시 같이 가 주셔야겠습니다."

말과 함께 제시된 신분증은 놀랍게도 특별검사라는 명칭이 떡하니 박혀 있었다.

"엑? 검사가 왜?"

문득 병규는 전날의 일을 떠올렸다. 이운석이라는 이름의 밤송이 청년, 분명 공무원이라고 했었지.

"혹시 이운석 씨가?"

두 사내의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당황하던 병규는 침착을 되찾았을 수 있었다.

'뭔가 빽이 있는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검사를 부릴 정도였나? 앞으로 출세하려면 잘 보여야겠군.'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병규는 사내들에게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수업 때문에 그러는데. 갔다가 바로 올 수 있을까요?"

병규의 말에 두 사내는 씩 하고 웃었다.

"이미 학교로 공문이 내려갔을 겁니다."

"...."

그들의 발 빠른 대처에 병규는 할 말을 잃었다.

그렇게 반 강제적으로 납치된 그. 두 시간 후. 서울 중심가의 대형 빌딩에 도착하게 되었다. 30층 높이에 기하학적인 조형미마저 느껴지는 대형 빌딩은 의외로 썰렁했다.

뭔가 한 가닥 하는 분위기를 기대했지만 입구의 경비도 오십대 후반의 평범한 인상이었고, 오가는 사람들도 바쁜 회사생활에 쫓기는 샐러리맨들이었다. 주위의 다른 빌딩들과 하등 다를 바 없는 풍경이랄까.

병규는 이런 평범한 빌딩의 모습에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특별검사까지 출동시킬 정도라면 SF 영화 속의 철통같은 경비는 몰라도 은밀하고 비밀스런 구석이 조금쯤은 있어야 할 텐데, 너무 평범했다. 지나칠 정도로.

"이쪽입니다."

병규와 사내들은 경비실 옆쪽의 창고처럼 보이는 푸른색 문 안으로 들어갔다. 지하로 통하는 원형 계단을 내려가자 은행의 금고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철문을 만났다.

'이제야 제대로 되어가는군.'

병규는 속으로 역시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상의 평범한 모습은 지하의 비밀을 묻어버리기 위한 위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는 채 1분도 가지 못했다. 핵폭발에도 견딜 것 같은 이 강철 문짝은 단지 두껍고 커다랗다 뿐이지 지문검색과 안구 서치와 같은 특별한 보안은 전혀 장치되어 있지 않았다. 심지어 평범한 번호식 자물쇠도 없어서 그냥 힘껏 당기자 끽 하고 열려버리는 것이 아닌가.

"왠지 허무하네."

김이 쫙 빠져버린 병규가 터덜터덜 철문 안으로 들어서는데 그를 안내한 두 사내가 문 밖에서 부동자세로 선 채 따라오지 않았다.

"저희들은 보안등급이 낮아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병규는 좀 황당한 생각이 들었다. 평범한 자물쇠 하나 안 달려 있는 곳에 무슨 보안등급을 따지는지.

"수고하셨습니다."

사내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병규는 안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오래된 하수구같이 생긴 둥근 통로를 조금 걷자 저쪽에서 눈에 익은 남자가 손을 흔들며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어서 와."

이운석이었다. 그의 나이 올해로 18세. 공교롭게도 병규와 동갑이었다. 그날 밤의 인연으로 두 사람은 말을 놓기로 했다.

그런데 담배는 그렇다 치고 고 2짜리가 스포츠카라니. 무면허 운전이 아니냐고 따져 물었더니 특재대는 특별히 국가에서 발급 해주는 면허가 있다나? 하여간 그는 학교도 그만두고 특재대에서 착실히 미래를 설계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 병규를 가장 경악하게 만든 것은 그의 얼굴이었다. 생긴 것은 제법 번득하게 생겼는데, 문제는 나이가 들어 보인가는 것이다. 보는 사람마다 22살 이하로 안 보니 이 정도면 심각한 문제다.

"오느라 수고했다. 검사 녀석들이 괴롭히지는 않았냐?"

그는 어색하게 웃는 병규를 어깨동무하며 괜한 잡소리를 늘어 놓았다.

"가슴엔 왠 붕대야?"

병규가 이운석의 가슴을 턱짓하며 물었다. 귀탄에게 부러진 팔 말고도 이운석의 가슴엔 붕대가 칭칭 감겨있었다.

"그땐 몰랐는데, 나중에 병원에 가보니 갈비뼈가 몇 개 부러졌었나봐. 일이 주 정도는 불편할 것 같아."

이운석은 손가락으로 부러진 부위들을 가리키며 한숨을 푹푹 쉰다.

"일이 주? 뼈가 부러졌는데 치료기간이 고작 그거야? 한 몇 달 고생해야 하는 게 정상 아냐?"

병규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묻자 이운석은 느끼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노노노~. 그런 말씀은 이 몸의 수호신인 기린(麒麟)(봉황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평화와 번영의 전조라 일컬어지는 성스러운 짐승. 기린은 모든 털가죽 있는 짐승들의 왕으로, 유명계(幽明界 : 저세상)와도 잘 통하는 신비로운 짐승이다.)님을 너무 우습게 보신 겁니다. 사실 뼈가 부러진 것도 너무 창피한 일이라 어디다 하소연도 못할 지경이랍니다. 훌쩍훌쩍."

세상에나, 견인차에 그렇게 심하게 부딪혀 놓고도 살아 있는 게 다행이라는 말은 못할망정 뼈가 부러져서 창피하다니.

'도대체 인간이긴 한 거야?'

불만스레 궁시렁거리는 병규였지만 그 자신 역시 그런 존재임은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 맞다. 나 궁금한 게 있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병규가 물었다.

"무엇이 궁금한가? My Friend~ 뛰어난 국가공무원에게 뭐든 물어보시게."

"귀탄 말야. 그거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요물이야?"

"귀탄?"

"어제 만난 괴물 말야."

"아아. 스크래그 말이군. 흐흠. 너 혹시 요 근래 언론에서 연일 보도한 살인사건 기억 나냐?"

"살인사건?"

고개를 갸웃하며 기억을 되돌려보지만 딱딱하게 굳어버린 그의 두뇌는 퍼석한 돌가루만 날릴 뿐이었다.

"뉴스에서 한창 떠들어댔잖느냐. 뇌가 사라진 엽기적인 살인마가 나타났다고."

그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호랭이가 귀를 쫑긋 세우며 참견했다.

"아! 그 사건?"

병규는 손바닥을 두드리며 탄성을 질렀다. 호랭이의 말을 듣고 보니 언뜻 본 기억이 난다. 피해자의 뇌가 사라져버려 장기매매와 관련된 사건이라느니 미치광이 살인마의 소행이라느니 말들이 많았던 사건이다. 더구나 북상하는 태풍과 함께 살인 또한 북쪽으로 점점 올라오고 있다는 것이 전해져 한동안 언론은 살인마의 이름을 태풍이라 지으며 연일 난리도 아니었다.

"맞아. 바로 그 사건."

"설마. 그 살인마가?"

병규의 물음에 이운석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스크래그. 바로 그놈이지. 뉴스에선 뇌가 사라진 것으로 단순 보도됐지만 사실은 빨아먹은 거야. 뇌에 구멍을 내고는 혓바닥으로 쭉쭉 핥아먹었지."

이운석의 자세한 설명에 병규는 진저리를 쳤다.

"사람의 뇌를 빨아먹다니 지독한 놈이네. 그런데, 그 스크 뭐라고 하는 놈은 어디서 온 거야? 자연 발생된 것 같지는 않은데."

"오우. 감 좋은걸. 그걸 눈치 채다니."

이운석은 과장되게 소리치며 병규의 어깨를 두드렸다. 병규는 어색하게 웃었다. 감이 좋긴 개뿔. 죄다 호랭이가 말하는 걸 대신 읊어주는 것뿐인데. 이운석의 말이 이어졌다.

"사실 그게 어디서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녀석인지 알지 못해서 특재대도 고민이 이만 저만이 아니라고."

"저런 정말 큰일이네. 그런데 그런 놈이 과연 몇 마리나 있다는 거지?"

"그걸 모르니 더 걱정일세. 이 일 때문에 본부가 발칵 뒤집혔어. 상부에선 한시바삐 처리하라고 난리지, 단서는 없지. 덕분에 요즘 우리 대장 불쌍하게 됐다."

대화하는 동안 그와 이운석은 통로 끝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곳엔 앞서 본 것과 같은 거대한 철문 하나가 떡 버티고 있었는데 이번만은 그나마 신분을 확인하는 절차가 있었다. 그것마저 실망할 정도로 간단한 것이긴 했지만. 그저 문 옆에 붙은 마이크에,

"납니다. 문 열어주세요."라고 소리치는 게 다였으니 말이다.

'이렇게 허술하게 관리할 거라면 뭐하러 이렇게 거창한 문짝을 달아놓은 거냐? 도대체.'

이 문짝 만들 돈으로 가난한 자신에게나 투자해 주지라는 생각이 무럭무럭 솟았다.

"얼래? 또 복도야?"

철문 안쪽으로 들어서자마자 그의 눈으로 쏘아져 들어오는 것은 또다시 끝도 없이 펼쳐진 좁은 복도였다.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지하실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러온다.

'염치도 없는 복도 같으니라고.'

무슨 뱀 굴도 아니고 어떻게 이렇게 염치없이 이어지는지. 만약 설계자가 눈앞에 있다면 당장 주리를 틀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얼마간 복도를 걸은 병규는 급히 자신의 생각을 수정해야 했다. 이놈의 복도는 뱀 굴이 아니라 개미굴이다. 통로는 개미굴처럼 다른 통로와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각각의 통로 끝엔 어김없이 하나의 방이 존재했다. 이운석을 따라 걷는 몇 분 동안 지나친 복도만도 20여 개. 결국 20개의 방을 지나친 셈이다.

병규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이운석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곳저곳 구경시켜주고 싶긴 한데 대장이 먼저 보고 싶다고 말해서 말이야. 우선 본부장실부터 들르자."

"에? 대장?"

병규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대장과의 면담이라니. 갑자기 끌려오게 된 터라 이력서도 준비 못하고 마음의 준비도 안 되었는데.

"자, 잠깐. 화장실 좀 가자. 머리라도 손질을 좀 해야...."

"하하. 괜찮아. 괜찮아. 보면 아마 마음에 쏙 들 거야."

이운석은 쾌활하게 웃으며 안절부절못하는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본부장실은 많은 방문으로 이어진 통로 끝의 검은 문이었다.

"어서 오세요."

이곳의 총 책임자인 본부장은 의외로 20대 중반 정도의 젊은 여자였다. 산더미같이 쌓인 서류더미와 전쟁중인 엑스맨의 대머리 아저씨 정도를 생각하고 있던 병규에게 그녀는 그야말로 색다른 반전이었다.

"잠시 나가 있을 테니까. 얘기 끝나면 불러. 대장."

병규를 안내한 이운석이 씩씩하게 말하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본부장이란 여자에 대한 태도가 이웃집의 친한 누나 대하듯 한다고 해야 할까. 그의 말투와 행동 어디에도 상사에 대한 예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본부장은 얼떨떨하게 서 있는 병규를 푹식한 소파로 안내했다. 병규가 자리에 앉자 그녀는 책상 모서리에 놓여있는 얇은 서류 뭉치를 손에 들고 찬찬히 소리 나게 읽기 시작했다.

"태병규 씨. 나이는 18세. 현재 태흥고등학교 2학년 재학 중. 맞나요?"

"네."

병규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력서를 제출한 기억은 없는데 어떻게 알까 의아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아이큐 111. 중학교까지의 생활기록부 상의 특이점 없음. 잘하는 특기도 기록된 바 없고, 잘하는 운동도... 기록상엔 없군요. 흠, 지나칠 정도로 평범한 기록이군요."

병규는 자신의 학적사항에 대해 줄줄 나열하는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가 이운석을 만난 것이 어제, 고작 하루 만에 이렇게 세세한 부분까지 조사되어 있다니. 그야말로 놀랄 노자다.

"좋아요. 이번엔 가족 관계를 보도록 하죠."

서류를 훑어보던 그녀의 눈썹이 조금 찌푸려졌다. 그녀는 난감한 문제에 부딪힌 것처럼 잠시 말을 끊고 콧소리를 냈다.

"흐음. 천하기업의 설립자이자 2년 전 고인이 되신 태수동 회장님의 3남 2녀 중 막내라. 태씨라는 말을 듣고 설마 했지만 정말로 천하기업의 자제 분이실 줄은 몰랐군요."

경탄 섞인 음성으로 중얼거리던 그녀는 보고서 뒷장에서 의외의 문구를 발견하고 다시 한 번 가볍게 탄성을 질렀다.

"집을 나올 때까지만 해도 능력자로서의 자질 제로? 한 번도 능력을 발현시킨 적 없음이라고? 이 얘기 정말인가요?"

확인하듯 묻는 그녀의 얼굴엔 못 믿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병규는 멀뚱멀뚱 그녀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사실 질문은 그가 그녀에게 하고 싶었다.

'왜 그녀는 내 집안에 대해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걸까. 그리고 자질이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지?'

그의 혼란스런 마음을 눈치 챈 그녀의 눈썹이 다시 한 번 역팔자로 휘어졌다.

"혹시 집안에 대한 얘기를 전혀 듣지 못하셨나요?"

병규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군요."

서류를 탁자 위에 정갈하게 올려놓은 그녀는 관찰하듯 잠시 병규에게 시선을 모았다.

'황금색?'

그녀의 눈동자는 빠져들 것만 같은 황금색이었다. 그러고 보니 머리카락과 눈썹도 눈부신 황금색이다. 처음엔 염색한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원래부터 그런가 보다. 혼혈 같아 보이진 않는데, 참 특이한 느낌이다.

한참 동안 그녀는 말이 없었다. 무겁게만 느껴지는 침묵. 병규는 답답했다. 그때 그의 어깨에 늘어져 있던 호랭이가 탁자 위로 뛰어내리며 말을 걸었다.

"병규 너...."

병규는 혹시 그가 무언가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 가닥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그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호랭이는 어깨에서 내려오자마자 그의 손목을 왕하고 물며 발버둥쳤다.

"이 녀석. 너 부잣집 아들내미였구나. 부친이 회장씩이나 되는 사람이었어? 그럼 엄청 부자였다는 소리잖아. 그런데 그런 집안의 부잣집 도령이 그렇게 돈 몇 푼에 징징 우는소릴 했냐? 불쌍한 신선의 담배 값에 손을 부르르 떨었어? 이 짠돌이. 쫌팽이. 쪼다 같은 놈. 허이구야. 그동안 눈치 보며 담배 동냥하던 생각하면, 허이구야. 억울해라."

그의 손목을 물고 긁으며 버럭버럭 성을 내던 호랭이는 끝내 털퍼덕 주저앉아 꺼이꺼이 한풀이를 한다.

"하아. 역시나."

허파가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깊은 한숨을 내쉰 병규는 과감히 호랭이를 무시하기로 결정했다.

"어떻게 신선이란 작자가 입맛 열면 담배 타령이냐."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그의 음성에 호랭이에 대한 실망과 회한이 진하게 묻어있었다.

"호호호."

돌연 본부장이 어깨를 들썩이며 큰소리로 웃었다.

"그렇게 억울해 하실 것도 없어요. 자료에 의하면 병규 씨는 정말로 돈이 없는 거니까. 2년 전에 빈손으로 집을 나온 후로 아예 집안과는 인연을 끊었거든요. 보고서에 의하면 누이와 몇 번 통화한 것 말고는 연락한 기록도 전무하군요."

"쳇. 그런 거냐? 괜히 좋다 말았네."

본부장의 말에 호랭이는 언제 징징거렸냐는 듯 기지개를 활짝 켠다. 금방 태도가 돌변하는 걸 보니 눈물까지 찔끔거리던 신세한탄은 연기였던 것이 분명하다.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병규는 그대로 뻥찐(?) 표정이 되었다.

"어머? 그 표정 귀엽네요."

본부장이 병규의 얼굴을 가리키며 까르르 웃었다. 처음 보았던 다소 사무적인 태도와는 크게 대비되는 행동이었다.

"저, 저, 호랭이의 말이 들리세요?"

병규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럼요."

본부장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랭이가 콧방귀를 뀌며 입을 열었다.

"흥. 이제는 좀 컸다고 말을 막하는 구나. 꼬맹이 여우야."

"호호. 꼬맹이란 소릴 들을 나이는 까마득한 옛날에 지났답니다. 호랭이님. 지금은 오히려 호랭이님께서... 푸훗."

"어쭈. 방금 전의 그 신경 거슬리는 웃음은 뭐야?"

"아. 봄이라서 그런지 꽃가루 알러지가..."

"뭬야? 요즘은 여우도 꽃가루에 캑캑거리냐?"

"호호. 보기보다 예민하답니다."

은근히 불꽃 튀는 말싸움. 병규의 혼란은 점점 심화되었다. 그는 손을 펼쳐 두 사람 사이를 막으며 질문을 던졌다.

"자, 잠깐만요. 여우, 여우라니요?"

호랭이가 심드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구미호보고 여우라고 부르는 게 잘못이야? 그럼 여시라고 부를까?"

"에?"

병규의 목이 망가진 인형처럼 끼그극 어색하게 돌아갔다. 본부장은 빨간 입술을 예쁘게 오므리며 대답했다.

"네, 저 구미호 맞아요."

"에에에?"

병규는 제자리에서 팔짝 뛰고 말았다.

"호호. 하지만 단순한 구미호가 아니에요. 선호(仙狐)이기도 하답니다."

병규의 반응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관찰하고 있던 본부장이 한마디를 보탰다.

"선호요?"

"수행을 통해 신선이 된 여우를 말하는 거다."

호랭이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그러니까 호랑이 신선인 호랭이처럼 선호는 여우 신선을 말하는 거군요?"

"어헛. 어디 감히 여우랑 이 지엄하신 호랭이님을 비교해?"

"어머 어머. 호랭이님. 말씀이 지나치세요. 감히 제가 호랭이님과 비교될 수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저 역시 구미호라는 번듯한 타이틀이 있다고요. 게다가 선호인증시험 사상 최단기간 합격자라는 명예로운 기록보유자이기도 하고요. 평범한 선호와 똑같이 취급하시면 정말 곤란해요."

"안 평범하긴 개뿔. 하긴 꼬리가 아홉 개나 달린 놈이 요귀가 안 되고 신선이 된 게 좀 특이하긴 하지. 그나저나 네가 여기 있는 걸 보니 선계의 인간계 개입이 본격화된 모양이구나."

"네. 각성한 능력자들의 능력이 선계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정도라 모두들 바짝 긴장하고 있어요."

"그 태평스런 양반들이 긴장할 정도야? 대체 어느 정도기에 그래?"

"아직까진 개입 포기라 정확한 통계는 불가능하지만 일반 선인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능력자들도 몇 명 보고되었다고 들었어요."

"일반선인으론 감당이 안 돼? 헹. 분명 또 할 일 없는 노인네들의 괜한 걱정일 테지."

"그렇게 간단한 얘기가 아닌 것 같은데요."

"됐어. 그런 쓸데엇는 얘긴 이제 됐고, 여기에 파견된 건 너뿐이냐?"

"아니요. 오늘은 볼일 때문에 출근하지 않으셨지만 저 말고도 삼부선인께서 함께 계세요."

"사, 삼부선인?"

여태 본부장의 무릎 위에서 거드름을 피우던 호랭이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뜬다.

"아니. 그 다 늙어빠진 영감탱이가 대체 뭐가 부족해서 인간계에 있는 거야?"

테이블 위로 팔짝 뛰어오르는 걸 보니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다.

"심심하시다고 잠깐 인간계 구경 오신 거죠. 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삼신님과 툭탁거리신 모양이인데, 여기저기 참견만 하고 일은 통 안 하셔서 걱정이에요. 휴우."

본부장은 정말로 고민이라는 듯 한숨을 쉬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삼부선인이라는 사람이 어지간히 일을 안 하는 모양이다. 그녀의 말에 호랭이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삼부선인과 삼신할마탱이가 싸웠어? 그럼 삼신할마탱이는 안 오겠네?"

"네. 여기 온 이후로 아직 한 번도 뵌 적이 없어요."

"하하하. 그래? 하하하하. 둘이 싸웠어? 그것 참 잘됐다. 크하하하하."

호랭이는 뭐가 그리 좋은지 탁자를 앞발로 탁탁 두드리며 껄껄 웃는다. 가만 보아하니 호랭이는 삼부선인이 싫은 게 아니고, 그로 인해 삼신할매를 만나게 될까 두려웠던 모양이다. 하긴 그렇게 심하게 당했으니 꿈에서도 보기 싫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호랭이를 쳐다보는 두 사람의 표정이 가관도 아니었다.

작은 강아지가 아가리를 벌리고 아웅아웅 웃는 걸 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등을 바닥에 비비면서 몸을 꼬아대는 것은?

호랭이 딴에는 기분이 좋아서 그러는 것이겠지만 보는 사람의 입장에선 결코 무심하게 바라볼 수 없었다.

"풋."

"흡."

본부장은 금히 두 손으로 입을 막았고, 병규는 볼을 부풀리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어? 너희들 표정이 왜 그러냐?"

호랭이가 두 사람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 동그랗게 떠진 눈이란.

"안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지진이라도 난 듯 부르르 떨던 본부장은 결국 폭발하고야 말았다. 감정폭발! 그녀는 그만 지엄하고 위대하신 호랭이님을 덥석 껴안아 버리는 사고를 저지르고 말았다.

"헛."

병규는 돌연 변해버리는 본부장의 태도에 흠칫 놀랐다. 그리고 다시금 머릿속에 새겨지는 호랭이의 위대함. 사람을 홀리는 구미호를 홀려버리다니. 어쩌면 여자에 한해 절대 무적일 수도 있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친다.

"꺄아. 귀여워. 호랭이님. 너무 귀여우세요."

"헛. 이게 무슨 요망한 짓이냐. 놔라. 이년아. 허엇. 얼굴 비비지 마."

"아이. 부드러워.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호랭이님이 이렇게 귀여우신 줄. 호랭이님. 이 기회에 그냥 제 것이 되시는 게 어떠세요?"

"말이 되는 소릴 해라. 내가 인형이냐? 네 것이 되게?"

"안 될까요?"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다시 물었다. 애절한 그녀의 표정엔 구미호 특유의 묘한 색기가 넘쳤다. 그러나 호랭이는 남자라면 금세 껌뻑 넘어갈 듯한 그녀의 현란한 시선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안 돼."

"정말로요?"

"응."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호랭이. 결국 본부장은 눈물과 함께 호랭이를 놔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호랭이를 풀어주며 뇌까린 그녀의 말이 묘하게 자존심을 박박 긁는다.

"흑흑. 역시. 그런 것이었군요. 호랭이님은 역시 삼신님의 것이었군요."

"이, 이것아. 누가 삼신할마탱이 것이란 말이냐! 난 그 할마탱이 얘기만 들어도 치가 떨리는 게 바로 나야."

"정말요?"

"당연하지."

호랭이가 씩씩거리며 흥분하자 호히려 안도의 한숨을 쉬는 본부장이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행이라고 뇌까리는 걸 보니 호랭이가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이다. 물론 그것이 아정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애완동물에 대한 솬심인지는 두과 봐야 할 문제지만.

한편, 두 신선(짐승이기도 한)의 대화를 흥미진진하게 관람하고 있던 병규는 대충 사태가 수습되는 것 같자 여태 궁금해하던 것을 물어볼 수 있게 되었다.

"두 분 말씀을 가만 들어보니 신선들이 인간계에 들어오게 된 것에 무슨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요."

"아. 내 정신 좀 봐. 손님을 앞에 두고. 실례했습니다."

병규의 말에 화들짝 정신을 차린 자영이 깊숙이 상체를 숙여 보였다. 신선 같은 근엄함도, 정보 고위직의 거만함도 찾을 수 없는 공손한 모습. 물론 병규는 전혀 불만이 없었다. 숙여진 그녀의 블라우스 너머로 깊게 파인 골짜기를 훔쳐보는 것만으로도 '얼씨구나~ 땡 잡았네~'였으니 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 이름도 안 알려드렸네요. 특수재해대책본부, 줄여 특재대의 본부장을 맡고 있는 자영이라고 해요."

자영이라 이름을 밝힌 구미호 본부장은 잠깐 동안의 다소 칠칠맞던 모습에서 벗어나 본래의 차분하고 냉철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음. 그나저나 어떻게 설명해 드려야 할까. 능력자가 무엇인지는 아시죠?"

그녀의 물음에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웅은, 특이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 거라고 들었습니다."

"비슷해요. 하지만 그냥 특이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능력자라고 부르는 건 아니에요. 능력자라고 불리기 위해선 우선 기본적으로 평범 이상의 이 능력을 쓸 수 있어야 하고, 또 능력을 빌려주는 수호신이라는 존재가 있어야 해요. 물론 꼭 이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보고 된 능력자들은 모두 이 경우에 해당 되었죠."

"말씀을 가만 들어보니 생각보다 그런 능력자가 많은가 보죠?"

"사실 그렇게 엄청나게 많은 건 아니에요. 우리 나라는 100만 명 중의 하나 정도로 그나마 다른 나라에 비해 굉장히 많은 편이죠. 물론 선계에서 통계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능력자 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아마 각성되지 않은 능력자들까지 포함하면 수가 조금 더 늘어날 거예요. 그런 이유로 특재대를 비롯한 세계의 특수능력자 협회들은 능력자들의 정보를 모으는 한편, 편의상 능력자들의 힘의 정도와 위험성. 그리고 주위게 미치는 영향력을 종합평가해서 A에서 F까지의 등급을 매기고 있죠. 참고로 저희 특수재해대책본부, 줄여서 특재대에서 집중적으로 관리하는 등급은 A에서 C 등급까지지요. 가령 이운석 씨는 공식적으로 B+ 급으로 판정되었지요."

"꼭 학점 같군요."

병규는 사람을 능력에 따라 분류한다는 말에 씁쓸한 표정을 보였다.

"다소 사무적으로 틀릴지는 모르지만 체계적인 관리를 위해선 불가피한 일이랍니다."

지영의 표정은 지극히 사무적이었지만 그녀의 말투는 싱그러운 봄바람처럼 나긋나긋하기 이를 데 없어 찝찝했던 마음이 절로 녹는 것 같았다.

"그러면 아까 전에 말씀하신 인반 선인으론 감당이 안 되는 능력자가 A 급입니까?"

"아니요."

지영의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그녀가 고개를 흔들 때마다 황금빛 머리카락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사실 A 등급 위에도 한 가지 스페셜 등급이 따로 있어요. 그들은 좀 특별해요. 전 세계를 통틀어 몇 되지 않는데다 능력의 정확한 수위조차 파악되지 않았죠. 그들의 등급은 M. mystery, 또는 miracle의 약자죠. 간단하게 말해 측정불가 등급이라고 할 수 있어요."

"측정불가라."

병규의 표정이 애매해졌다. 신선들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능력이라니. 대체 어느 정도일까.

"대충은 능력자에 대해 알고 계시는 것 같군요. 그렇다면 어떻게 능력자가 나타나게 되었는지도 알고 계신가요?"

잠시 끊어졌던 이야기의 맥을 자영이 자연스럽게 이어나갔다.

"원래부터 있었던 것 아닙니까?"

병규가 눈을 깜빡이며 되묻자 자영은 입가를 살짝 들어올리며 황홀할 정도의 미소를 보였다.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면 어떻게든 일반인에게도 그런 이야기가 알려졌겠죠. 사실 능력자가 나타나게 된 시기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요. 가장 최초의 보고가 불과 30년 전이었으니까요."

"30년밖에 안 됐단 말입니까!!"

병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놀라 부르짖었다.'엄마야~'하며 깜짝 놀란 장여이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너, 너무 놀라시는데요?"

"아니. 그게 왠지 놀라주어야 할 타이밍인 것 같아서."

병규는 은근슬쩍 자리에 도로 앉으며 쑥스러운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 그런가요?"

억지웃음을 짓는 자영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하하. 문위기가 좀 굳은 것 같아서 개그 좀 해 봤습니다."

병규가 뻘쭘한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큰소리로 웃었다. 가만 지켜보고 있던 호랭이가 코웃음을 치며 한마디한다.

"두 번만 더 개그 했다간 여기서 동계 체육대회가 열리겠다. 이 녀석아."

"그렇게 썰렁했나요?"

병규의 물음에 호랭이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모피코트 장만을 심각하게 고려해 봤다."

호랭이가 모피코트를 입는다라. 거기에 선글라스 하나만 씌워 놓으면 멋진 그림이 될 것 같지 않은가?

"음음. 능력자의 각성에 대한 얘기를 하자면 소울임펙트(Soul Impact) 현상에 대해 말을 안 할 수 없겠군요,"

가볍게 헛기침을 한 자영이 어렵사리 뒷말을 이어나갔다.

"소울임펙트. 해석하면 영혼 충돌쯤으로 부를 수 있겠네요. 말 그대로 소울임펙트는 인간의 영혼에 어떤 충격이 일어난 현상을 뜻해요. 즉, 능력자들이 태어나게 된 어떤 영혼차원의 계기라고 볼 수 있죠. 사실 소울임펙트는 눈에 보이는 어떤 현상을 뜻하는 말은 아니에요. 갑자기 어느 날 동시에 능력자들이 각정하게 된 현상을 두고, 틀림없이 그들의 영혼에 어떤 형태의 계기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으로 나오게 된 이야기죠. 하여간 이러한 의미로 불리는 소울이펙트는 지금까지 총 네 번이 있었어요. 30년 정 북미 지역을 시작으로, 20년 전 한국, 중국, 일본을 위시한 동남아 일대 지역세 세컨드 임펙트가 일어났고, 10년 정의 서드 임펙트는 유럽, 그리고 가장 최근에 발생된 포스 임펙트는 아프리카 지역이었어요. 그렇게 소울임펙트로 능력을 각성한 능력자들은 이상하게도 신화나 전설 속의 존재들과 깊은 연관이 있어요. 왜 소울임펙트라는 현상이 일어났는지, 또 소울임펙트로 각성된 능력자들에게 어째서 수호신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는 아직 의문. 세계 능력자 연합에서 총력을 기울여 연구 중이지만 아직 뚜렷이 밝혀진 것은 없어요."

마침내 자영의 설명이 끝났다.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병규. 돌연 펑 소리와 함께 머리 위로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앞으로 꼬끄라져 버렸다. 자영이 '엄마야~' 하면서 놀라는 가운데 신음소리 섞여 병규의 혼잣말이 들려왔다.

"으으. 너무 어려운 얘기야."

그의 뇌 성분이 딱딱한 돌덩이와 얼마나 유사한지 똑똑히 확인 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쯧쯧. 멍청한 녀석. 넌 머리통 속에 뇌 대신 짱돌을 처박고 다니냐? 이 쉬운 설명을 어찌 그리 못 알아들어. 쉽게 말해서 소울임펙트라는 현상 때문에 능력자들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그런 소울임펙트가 총 세 번 있었다는 거다. 그중 우리 나라는 그 두 번째 소울임펙트와 연관이 있다는 말이고."

지켜보고 있던 호랭이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자영의 설명을 간단하게 함축시켜 주었다.

"오오. 그런 말이었습니까? 그렇게 간단히 알아들으시다니. 과연 훌륭하십니다. 호랭이님."

병규는 정말로 호랭이가 존경스러운 듯 두 눈을 반짝였다. 기고만장해진 호랭이. 담배를 꼬나물고 다리까지 꼬면서 애써 거드름을 피운다.

"헤헴. 이제라도 알아봤으니 다행이군. 넌 날 모시는 것 만해도 영광인 줄 알아야 해. 그러니 앞으로 담배 공급량을 좀 늘리도록 해라."

양반다리를 하고 누워서 내리는 명령. 물론 병규가 네 영감마님 하고 순순히 따를 리 만무했다. 슬그머니 돌아가는 눈동자만 봐도 딴 마음을 품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건... 생각 좀 해 보도록 하죠."

당연히 평생 생각만 하다 말 것이다.

그렇게 병규와 호랭이가 사이좋게 노닥거리는 동안 자영은 병규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병규와 호랭이의 사연은 선게에선 꽤 유명한 이야기다. 말도 못할 말썽꾸러기를 한 인간이 떠맡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선계의 선인들은 대부분 인간 하나 망친 거라고. 괜히 날개 달고 천계 갈 인간 하나, 미친 광돌이로 만들어 버린 거라며 개탄했다.

물론 자영 그녀 역시 그렇게 생각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순진하게 좋은 결말을 바라기엔 그동안 호랭이가 저지른 일이 너무 많았다. 오죽했으면 선인들의 우두머리인 태상노군 님이 무려 석 달 열흘간 삼신님께 치성을 드려 호랭이를 맡겼을까.

하지만 지금 본 둘의 관계는 그간의 걱정을 일시에 일축시켜 버릴 정도로 좋았다. 좀 툭탁거리는 면이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지만 그것도 다 정이 들어서일 테지.

그런 이유로 지영은 병규를 새삼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신선들마저 포기한 폭주 건달 신선나부랭이 호랭이와 저렇게 무난하게 지낼 수 있다니. 이운석을 통해 들은 병규의 믿지 못할 능력보다 오히려 그런 면이 더 빛나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물론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호랭이가 선계에 있을 때처럼 난동을 부리려 해도 부릴 수 없는 몸이 되었다는 것과 병규가 호랭이를 괴롭히고 후환을 두려워할 만큼 계획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결정적으로 호랭이의 목숨 줄인 담배를 병규가 조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데 뭔가 빼먹은 것 같은데.'

뒤늦게 병규는 문득 여기서 끝날 얘기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넘어간 게 있는 것 같았다.

"아. 그러고 보니 그걸 안 물어봤네요. 저 본부장님."

"네에?"

병규가 부르자 자영은 환하게 웃으며 얼굴을 들이댔다. 이마가 닿을 듯 그녀가 다가서자 도리어 병규가 흠칫 놀라며 조금 물러섰다. 빨갛게 모여진 그녀의 입술에 괜히 뺨이 붉어졌다.

"저, 저기. 지금까지 설명은 잘 들었는데요. 한 가지 궁금한 것이. 그 뭐시냐 아까 전에 제 집안 얘기가 나왔을 때 왜 그렇게 놀라셨는지. 설마 그 소울임펙트나 능력자 같은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겁니까?"

나름대로 병규는 심각했다. 집안 얘기인데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영은 병규가 그럴수록 더욱 표정을 밝게 했다. 그리곤 아무 일도 아니라는 투로 충격적인 말을 쏟아낸다.

"꽤 유명하거든요. 아니. 제일 유명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이 쪽 방면에서는."

"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능력자 집안입니다. 태씨 문중은."

쿠쿵.

그 순간 병규는 가슴 무너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입을 다문 채 잠시 멍하게 있었다. 그리곤 심각하게 고민을 시작했다. 자신의 집안에 그런 내력이 있을 줄은 꿈에도 짐작 못했다. 얘기는커녕 불온한 낌새조차 느낀 적이 없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는 고독했다. 특별히 가족관계가 나쁜 건 아니었다. 오히려 당시엔 대기업가의 막내로 남들이 상상도 못할 귀여움과 부귀를 한껏 누리며 살았다. 문제는 바로 자신에게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두 눈이 문제였다.

남들에게 안 보이는 것, 다른 사람들이 못 보는 것. 귀신과 요괴가 보였기 때문이다. 귀신을 보는 어린아이가 과연 평범한 사람들 틈에서 행복할 수 있을까? 어쩌다 유령이 보인다고 말하면 새파랗게 변해버리거나 그를 멀리하며 수군대는 사람들. 그런 이유로 병규는 항상 외로웠다. 그리고 항상 두려웠다.

그랬는데, 그렇게 두렵과 외롭고 괴로웠었는데, 그런 것들이 이제 보니 다 집안 내력이었다니. 그런데 왜 아무도 얘길 해 주지 않았을까. 왜 돌아가신 어머니는 이상한 것이 보인다는 내 말에 깜짝 놀라며 절대로 누구 앞에서도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을까.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자영에게 들은 집안 내력에 비하면 다른 사항들은 하찮게 느껴질 정도다. 그 모습이 한심해 보였던지 호랭이가 한마디했다.

"아서라. 고민은 멍청한 너와는 전혀 안 어울린다."

"하하. 그렇죠?"

하지만 그래도 병규는 불안정안 모습이었다.

그 후로 자영은 몇 가지 질문을 더했다. 언제부터 능력에 눈을 뜨게 되었으며 어느 정도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병규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덕분에 호랭이가 거만을 떨며 많은 정보를 흘렸다. 정보 하나당 담배 한 갑의 값비싼 대가를 받긴 했지만.

한참 설명을 들은 자영이 병규의 능력에 대해 정리했다.

"그러니까 몬스터의 피나 살점을 먹게 되면 그 몬스터의 힘을 쓸 수 있다는 거군요."

"그런 것 같다는 거지 확실한 건 아니다."

"네. 정확한 것은 아니고, 그 힘 또한 자유롭지 못하다."

"그나마 요즘엔 어느 정도 잘 다룰 수 있게 될 것 같더라."

"흠...."

잠시 자영은 병규의 능력에 대해 생각에 잠겼다. 대체 그의 가치를 어느 정도로 봐야 할까. 현재의 능력만으로 따지고 보면 B급 정도. 하지만 잠재력을 감안했을 때에는 쉽게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요괴의 힘을 어느 정도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지, 받아들인 요괴의 힘을 어느 수준까지 활용할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그의 수호신은 대체 무엇일지. 그 밖에도 불확실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그가 태씨 문중의 자손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리고 폭주 건달 왕 날라리 변태 신선인 호랭이를 마음대로 대하는 것 역시 절대로 간단한 능력은 아니지.'

결국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뿔테 안경 너머로 평범한 외모의 병규를 응시하던 자영은 서류철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냈다. 맨 위에 계약서라고 씌어 있었다.

"이게 뭐죠?"

"보시다시피 계약서예요."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계약섭니까?"

병규의 물음에 자영은 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특재대에 들어오신 것을 축하드려요."

"엥?"

병규의 두 눈이 커졌다.

"... 저기, 그러니까 제가 특재댄지 특활부선지 하는 곳에 들어가겠다고 말한 기억은...."

"초봉으로 연 2천. 일이 없는 한 출근할 필요 없음. 위험수당 지급!"

"허허. 기껏 그런 유혹으로 넘어갈 만큼 값싼 남자가 아닙니다. 전."

"전기세. 수도세. 인터넷 통신료. 자동차세. 전액 대납에 업무에 사용된 기름값까지 계산해 드립니다."

"이보세요. 도대체 사람을 뭐로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대체!!"

"...군 면제."

"서명하는 곳이 어디죠?"

"...."

누가 말릴 세라 부리나케 서명을 마친 병규가 뒤늦게 생각이 난 듯 자영에게 물었다.

"아. 잊을 뻔했는데, 특재대에서 하는 일이 뭐죠? 요괴사냥입니까?"

"뭐. 요괴사냥도 가끔 하지만 주 업무는 폭발물 제거예요."

"폭발물 제거?"

병규의 눈이 휘둥그레 떠진다. 웬 폭발물? 설마 굉장히 위험한 곳에 발을 들인 것 아닐까 하는 불길한 예감이 뒤통수를 슬그머니 후려친다. 그런 병규를 보며 자영은 정말로 묻어날 것만큼 화사한 미소를 보였다.

"네. 가끔 있거든요. 능력자 가운데. 시한폭탄 같은 존재가. 그런 폭발물들을 처리하는 것이 저희의 주 업무죠."

땀 냄새가 짙게 배어 있는 운동기구들. 벽은 물론 천장까지 도배를 하다시피 걸려 있는 거울. 실내를 빙 둘러쳐진 스피커와 눈부신 조명. 그리고 한쪽에 마련된 대형 에어컨과 최신식 샤워실.

여느 훌륭한 스포츠 센터의 내부 풍경처럼 보이는 이곳은 사실 특재대의 전용 헬스실이었다. 고작 스무 명가량이 사용하는 장소 치고는 지나치게 비효율적으로 큰 이곳에 지금 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조촐한 파티를 열고 있었다.

파티의 주제는 신입대원 환영회. 당연히 병규를 위한 파티였다.

"지나치게 조촐하잖아."

본부장이란 여자가 환영파티를 해야겠다며 수선을 피우기에 대단한 만찬을 기대했건만 기껏 준비한 게 근처 마트에서 사온 맥주 몇 짝과 포테이토 칩 안주가 전부다.

'겉보기엔 화려하고 대우도 좋은 전문직 같은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네.'

병규는 좀 전에 한 계약이 과연 잘한 것인지 다시 한 번 재고했다.

"이것 봐. 모두들 바쁜 몸인데도 널 축하해주기 위해 납시셨는데 표정이 그게 뭐냐? 자자. 이리와. 내가 사람들을 소개시켜주마."

이운석이 한쪽에 멀뚱히 서 있는 병규의 손을 잡고 무작정 잡아 끌었다. 이 작자는 생긴 것도 터프하고, 성격도 털털한데 술은 무척 약한 듯, 맥주 몇 잔에 금세 얼굴이 빨갛게 익어서는 걸음마저 비틀거린다. 말하는 꼬락서니는 더더욱 가관이다.

"자. 이쪽의 뻘건 머리 꼬댕이를 짤랑이고 있는 알딸딸한 미모의 아가씨는 우리 특.재.대.릐 왕초, 대빵, 고도리이신 구미호 본부장님. 인사해."

왕초, 대빵은 알겠는데 고도리는 대체 뭔지. 한숨을 쉬며 병규가 '이미 소개받았잖아요.'라고 말했지만 이운석은 막무가내였다. 빨랑 인사를 하란다. 결국 병규는 에고에고 하며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두 번째 뵙습니다."

자영은 예쁘게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호호. 네에."

"헤~. 우리 고도리 이쁘지? 하지만! 벗! B.U.T. 저 뽀장뽀장한 얼굴과 쭉쭉이 빵빵... 쩝... 하려간 속으면 안 돼! 간을 빼 먹을지도 몰라. 알았냐? 왜냐고? 왜냐하면, 울 이쁜 고도리 대빵은 여우걸랑. 하하. 여우야. 그것도 꼬리가 아홉 개나 달린 구미호."

"피. 전 채식주의자라니까요. 괜히 신입대원 겁주지 말아요."

"예입, 알겠습니다. 고도리 대빵!"

거창하게 거수경례를 한 이운석은 슬금슬금 도망가고 있는 병규의 목을 잽싸게 낚아챘다.

"어딜 가냐?. 내가 소개시켜 준다니까. 자자~ 다음은 꺽다리 아저씨다."

다음으로 소개받은 인물은 2미터 가까이 되는 장신의 중년인이었다. 고개를 꺽어야만 얼굴을 볼 수 있는 키 큰 사람이 머리는 또 얼마나 긴지, 앞머리가 턱 아래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헤. 여기 까무잡잡 얼굴의 배기철 선배는 몸의 연성을 마음대로 할 수 있지. 흐믈흐믈~ 하게도 되고, 빳빳하게 할 수도 있어. 그래서 별명이 흐믈흐믈 고슴도치! 특재대에서 부인이 가장 행복할 것 같은 남편부문에 5년간 당당히 일위. 생각해봐. 몸의 연성이 자유롭다면 틀림없이 그 딸랑이도 길었다 줄었... 아야."

"이놈아. 술 처먹었으면 곱게 취해. 헛소리 좀 하지 말고. 다 큰 어른 보고 딸랑이가 뭐냐? 딸랑이가."

"헤헤헤."

이운석의 머리를 콩 쥐어박은 검은 얼굴의 중년사내는 엄한 얼굴로 다그치긴 했지만 입가에 자상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아, 저어기 컴퓨터 가게 아저씨가 있다. 보러가자."

이번에 그가 소개한 사람은 30세 정도의 마른 체구를 한 조준엽이었다.

"에헴. 이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용산에서 컴퓨터 가게를 하고 있는 행님이시다. 앞으로 깍듯이 뫼셔라."

이운석이 허리를 넙죽 굽히자 같이 섰던 병규도 얼떨결에 허리를 숙이고 말았다. 훤칠한 두 청년이 머리가 땅에 닿을 듯이 허릴 숙이자 준엽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놈. 술 한 잔 먹으니 예의 참 발라지네. 그래도 기왕이면 다음부터는 컴퓨터 가게주인 말고 해커라고 소개시켜줘라. 알았지?"

"에이. 행님, 해꺼는 무슨. 참. 이 행님은 특별히 조심해라. 독쟁이(Poison Master)니까. 이 행님이 주는 건 몽창 은 바늘로 찔러 봐야 해. 알았지?"

"어쭈 어쩐지 잘나간다고 했더니. 역시. 이 녀석아. 술 먹고 꼬장 부린다고 하면 오냐 젊은 객기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그냥 넘어가 줄줄 알았냐? 고연 놈. 못된 버릇을 즉시 바로잡아주는 것도 분명 웃어른의 의무렷다."

조준엽의 한 손이 소리 없이 스르르 올라갔다. 그 손바닥에 맺히는 진녹색의 어스름한 기운이란.

"히끅. 형님께서 진짜로 열 받았나 보다. 도망이다."

인색마저 녹빛으로 변하는 조준엽을 피해 달아나던 이운석과 병규는 쟁반을 들고 술과 안주를 나르고 있는 마른 체구의 여성과 부딪히고 말았다.

"아야."

"아이구야. 아야야."

"괘, 괜찮아요?"

쟁반에 이마를 살짝 찍힌 이운석이 죽는다고 엄살을 떨자 쿵 소리가 날 정도로 뒤로 크게 나자빠진 예란은 제 아픈 것도 잊고 남 챙겨주느라 정신이 없다.

'오~ 상당히 괜찮은데?'

병규의 그녀는 깔끔하고 조신한 모습에 순간 눈앞이 밝아지는 것 같았다.

긴 생머리에 바람이 불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가녀린 몸매. 무엇보다 한 송이 수선화 같은 부드러운 미소와 친절한 모습이 마음에 쏙 들었다.

"하이구야. 이마 다 까져버렸네. 까욱."

"어디봐요. 혹도 없고, 괜찮은 것 같은데."

"무슨 소리!! 방금의 충격으로 머리통이 팽팽 돌아버렸는데. 머리통 안의 두부가 스핀 먹어 버렸음 책임질 거야?!"

"호호. 머릿속에 두부가 들으셨어요? 한 번 꺼내줘 봐요. 정말 팽이처럼 팽팽 도는지 보게."

입을 가리며 웃는 그녀의 우스개 소리에 병규는 흠칫 놀랐다.

'저 여자, 조신한 줄 알았더니 의외로 살벌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아.'

"그런데 전 소개해 주지 않을 거예요?"

"아! 깜빡했다. 자자. 병규. 이쪽의 해실거리는 아리따운 아가씨는 권예란. 음. 나이 20세. 다 좋은데, 다만 쭈쭈기 싸이즈가~ 대충 보면 알겠지만 부실~."

"부실이라뇨. 그럴 때는 날씬하다고 하는 거예요."

존심 상하는 애기에도 불구하고 예란은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고 부드럽게 말했다. 가히 존경스러울 정도의 성품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도 이운석의 다름 말엔 정심(正心)이 깨어질 수밖에 없었다.

"에이~ 날씬은 무슨. 부실공사! 부실공사!"

"호호호. 뭐라고 하셨죠오?"

권예란의 웃음소리가 높아졌다. 단순히 웃음소리만 높아진 것 뿐인데도 이운석은 거의 발작적인 반응을 보였다.

"발작, 발작했다. 노처녀 히스테리다."

이제 겨우 나이 스물인 처자가 왜 노처녀가 되는 건지. 머리가 아프다며 엄살을 피우던 이운석은 갑자기 힘이 솟았는지 병규를 덜렁 들다시피 하며 또다시 도주의 길을 나섰다. 그러나 얼마 가지도 못하고 거대한 덩치의 거한에게 잡히고 말았다.

"잡았다. 욘석."

이운석을 낚아챈 사내를 보기 위해 병규는 한참이나 고개를 올려야 했다. 배기철이라는 남자도 컸지만 이 남자도 만만치 않다. 아니 오히려 철탑 같은 탄탄한 근육 때문에 훨씬 더 거대해 보인다고 할까? 드럼통 같은 그의 허벅지 하나만으로도 병규의 체중과 엇비슷할 것 같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은 온몸에 가득 그려진 흉악한 흉터들이었다. 겉으로 드러난 피부위로는 팔이며 다리며 어깨며 할 것 없이 마치 송충이가 기어간 듯한 끔찍한 흉터로 가득 뒤덮여있었다. 얼굴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일전에 만난 조폭들은 그에 비하면 순진한 유아원생 같아 보일 정도다.

"아이고 숨 막혀. 선배님. 숨 막혀 죽겠습니다."

이운석은 여자의 허리통만 한 그의 팔뚝에 가로막혀 버둥거리고 있었다. 이운석도 결코 작은 덩치는 아니었지만 거한에 비하면 고목나무에 붙어 있는 매미처럼 초라해 보였다.

"잘했어요. 한식 님."

거한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인 권예란은 공 차듯 이운석을 뻥뻥 걷어찼다. 뾰족한 하이힐로 인정사정없이 차니 이운석은 죽겠다고 난리다.

"커억. 켁. 아, 아파. 윽. 거긴! 아아악!! 으읍!"

비명소리가 시끄러웠던지 거한은 솥뚜껑 같은 손으로 이운석의 입까지 막아버렸다. 손바닥 하나로 얼굴 전체가 가려진다.

"케케. 녀석 결국 혼쭐이 나는구나."

간사한 웃음소리와 함께 조준엽이 병규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묻지도 않았는데 거한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김한식 선배시다. 나이는 대략 40은 넘은 것 같다. 척 보면 알겠지만 몸 쓰는 일 쪽에 종사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지. 지하세계의 전쟁에 달통한 전쟁 광으로 그쪽 사람들은 블러드머신이라고 부르는가 보더군. 우리 특재대에서 유일하게 능력자와 관계없는 사람이지만 선배의 육체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A 급 능력자에 준하는 덴저러스한 인물이야."

"과연 그렇군요. 그럼 얼굴의 흉터들도?"

"아니 그건 키우는 고양이가 할퀴어서."

"...?"

"이봐."

누군가 병규의 어깨를 툭하고 쳤다. 생소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뒷머리를 허리까지 길게 땋아 내린 스무 살가량의 여성이 서 있는 것이었다. 순간 병규는 눈앞에 작고 맹랑한 흑마 한 마리가 갈기를 휘날리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적당하게 그을린 피부의 그녀는 꽃과 같이 차분한 분위기의 앞서는 두 여인과는 또 다른 매력을 보였다.

훅 걷어붙인 팔과 짧은 반바지 아래로 보이는 그녀의 근육은 여성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탄탄해 보였다. 물론 근육이라고 해서 남자들처럼 우락부락한 몸집을 생각하면 착각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탱탱한 고무공 같다고 할까. 그녀의 피부는 손가락으로 찌르면 곧장 통하고 튀어나올 것처럼 묘한 탄력이 넘쳤다.

병규가 돌아보자 그녀는 치기 어린 미소를 보였다. 그 웃음이 또한 너무 매력적이었다. 땋아 내린 머리와 함께 길게 내려간 머리끈과 하얀 치아가 유난히 빛나 보인다. 아름다운 미녀보다는 잘생긴 미소년을 보는 것 같다. 아마 학창시절, 같은 여자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을 것 같다.

"난. 전경희라고 해. 태씨 문중의 사람이라던데, 실력 좀 볼 수 있을까?"

그녀는 매우 호전적인 태도로 두 손을 마주쳐 보였다. 당연히 병규는 이건 또 뭐냐는 식으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처음 보는 여자가 돌연 한판 붙어보자니. 신혼부부의 침실테크닉 같은 걸 해보자는 건 아닐 테고.(무지하게 바라마지 않지만) 설마 싸움질을? Oh~ No. 오늘 같은 날 싸움질이나 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는데다 여자랑 싸우기는 더욱 싫다. 이건 때려도 손해 아닌가. 그런데 주위 분위기는 그게 아니었다.

"뭐야. 전경희 한 판 붙으려고?"

"야야. 그만둬. 오랜만에 들어온 신입인데 또 그만두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오늘 같은 날. 싸움이라니요. 그만두세요."

자영까지 나서며 적극적으로 말리는 걸 보니 이거 분위기가 수상해도 너무 수상하다. 하지만 전경희는 느긋하게 웃었다.

"뭐 어때? 목숨 걸고 싸우자는 것도 아니고. 간단하게 실력 좀 보자는 건데."

"하지만 그의 능력은...."

"아 됐어. 대장 참견은 그만 둬. 난 그저 실력을 구경하고 싶은 것뿐이야. 명망 높은 태씨 문중의 사람이 과연 어떤 능력을 보여줄지 궁금한 것뿐이라고."

전경희의 눈이 기이한 열망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조심해라. 저 녀석은 전투력만으로는 우리 특재대 내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여자야. 한 대만 잘못 맞아도 곧장 황천행이다."

김한식이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충고한다.

'이것 봐요. 위험한 걸 알면 좀 말려 달라고요.'

병규는 속으로 울부짖었지만 이운석은 이미 저만치 물러난 후였다.

"할꺼지? 하자. 응? 붙자. 그래 줄 거지?"

전경희는 두 눈을 별빛처럼 반짝이며 계속 물었다. 만약에 안 된다고 했다간 밥숟가락 챙겨들고 따라붙을 것 같은 집요함이 느껴졌다.

'이거야 원. 귀여운 얼굴과 안 어울리게 무지하게 터프한 여자일세.'

병규는 난감한 듯 머리를 벅벅 긁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쉽게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대체 우리 집안의 능력이 뭐가 어떻다는 건지 모르겠군.'

과연 어떤 대결을 벌일까. 고개를 삐걱거리고 있는 모습으로 보면 분명 주먹다툼을 벌이자고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주위의 예상과는 달리 식탁을 질질 끌어 한쪽 벽에 바짝 붙이고는 그 위에 접시 두 개를 올려놓았다.

"능력자라는 사람들이 원시인처럼 주먹질이나 하는 건 좀 그렇잖아? 그래서 좀 신선한 내기를 생각해 냈어."

"내기?"

병규는 물론 존대를 하지 않았다. 나이도 어려 보이는 그녀가 먼저 반말인데 굳이 존대를 해 줄 필요성도 못 느꼈고, 또 왠지 배알이 뒤틀리기도 했다.

경희는 식탁에서 십여 보 정도 떨어진 자리에 경계선처럼 화장지를 길게 펼쳐 놓았다.

"이곳에서 저쪽의 접시에 놓여진 물건을 먼저 가져오는 사람이 이기는 것으로 하자."

"음. 순발력을 겨루자는 거야?"

"아니. 이곳에서 움직이면 안 돼. 즉 자신은 움직이지 말고 십 보 밖의 물건을 가져오는 거야. 대신 형평성을 위해 접시에 올리는물건은 자기가 직접 고르는 것으로 하자. 난 이 탁구공으로 하겠어."

그녀는 작은 탁구공을 왼쪽 접시 위에 올렸다.

"힘이 아니라 능력의 응용력을 겨루자는 말이군."

그제야 그녀의 뜻을 알아들은 주위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

"네가 머리를 쓰다니. 별일도 다 있군."

"대자앙. 오늘 해가 어느 쪽에서 떴죠?"

"글쎄요. 잠깐 나가서 확인해봐야겠네요."

"와. 신기한 구경을 다 하는데."

다들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가 머리를 쓰는 내기를 한다는 것에 놀랐다는 듯 한마디씩 했다.

"시끄러워요. 내가 정말로 침팬지 정도의 지능밖에 없는 줄 알았어요? 그동안은 머리 쓸 일이 없어서 그랬던 것뿐이란 말이에요."

전경희가 빽 소릴 지르자 주위 사람들이 움찔 놀란다. 그러나 그런 험악한 분위기 중에도 조준엽과 이운석은 한마디씩 하는 걸 잊지 않았다.

"무, 물론 침팬지 정도로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럼. 침팬지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돌고래 정도라면 모를까. 케케."

"이 양반들이. 오늘 아무래도 푸닥거리 한 번 해야겠네."

전경희가 소매를 걷으며 성큼성큼 다가가자 조준엽과 이운석이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다. 덕분에 내기는 잠시 중단되어야 했다.

"난 케이크 조각으로 하겠어."

병규는 오른쪽 접시에 케이크 조각을 올려놓았다.

"엥? 웬 케이크?"

"저건 잡기도 나쁠 텐데."

모두들 의문 어린 눈으로 접시 위의 케이크 조각과 병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탁구공을 올려놓은 전경희의 꽁수는 대략 짐작이 가지만 케이크를 올려놓은 병규의 생각은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후회는 없어? 상품이 안 걸려 있다지만 명성이 걸린 문제라고. 태씨 일가의 명성이 너로 인해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칠 수도 있다고."

전경희가 눈썹 끝을 살며시 올리며 묻자 병규는 씩하고 웃어 보였다.

"최선의 선택이야."

"좋아. 시작해볼까?"

전경희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몸을 푼다. 가볍게 스텝을 밟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시작해도 좋겠습니까?"

사회자를 자처하고 나선 이운석이 병규와 그 옆에 나란히 선 그녀에게 물었다. 두 사람은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

"핫."

시작 소리와 동시에 전경희는 맹렬한 동작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가히 전광석화와 같은 동작. 팡 하는 통괘한 소음과 함께 불쑥 내밀어진 그녀의 주먹 끝에서 대포알 같은 기운이 뻗어 나가 식탁 위의 탁구공을 강타했다. 맹렬한 권풍에 튀어 오른 탁구공이 맞은편의 벽에 부딪히고 그 반동으로 다시 이쪽을 향해 통통 뛰어왔다.

"역시 저런 수작이었군."

조준엽이 혀를 쯧쯧 찬다. 아무리 머리를 쓴 내기라 해도 결국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힘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하긴 그녀의 저돌적인 능력을 생각하면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벽에 튀긴 탁구공은 어느새 절반이나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병규는 아무런 대응도 취하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실력에 얼어붙기라도 한 것처럼 탁구공이 그녀의 발치까지 튕겨올 동안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그는 아예 승패에는 관심도 없는지 혀를 내두르며 전경희의 신묘한 묘기를 칭찬했다.

"세상에. 십 보 밖의 물체에 충격을 줄 수 있다니. 대단하네. 그 무협지에서 나온 권풍 비슷한 것 같아."

그는 그녀의 놀라운 실력에 대한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전경희는 우쭐해지면서도 겸손한 그의 태도에 왠지 조금 미안한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병규는 그녀의 실력에 놀란 것뿐이지 결코 승부 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네 능력 정말 멋있는걸. 처음에 얕잡아 보던 것이 미안해질 정도야. 하지만 이 승부는 반드시 내가 이기겠어."

말과 동시에 병규의 고개가 식탁으로 향했다.

취리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