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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들었냐?"

"네."

형사들의 뒤를 뒤쫓던 도중 그들은 우연히 이한영과 가물치의 대화를 엿들은 병규와 호랭이는 시선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괴물 녀석이 포위를 당했다라. 어디 다치기라도 한 건가?"

호랭이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병규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는 소리다.

그가 알고 있는 발칸은 절대로 평범한 사람들에게 포위당할 존재가 아니다. 설사 수 백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더라도 그 빠른 다리로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발칸이 구석에 몰렸다?

감이 좋지 않다.

실력에 자신이 있는 사냥꾼은 자신의 몸뚱이를 이용해 맹수를 유인한다. 발칸이 포위당했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그런 생각이 떠오른 것은 우연일까?

"저희도 들어가 보죠."

"어떻게 들어가려고? 저 덩치들이 순순히 보내줄 것 같지도 않은데."

"잡지도 못할 만큼 빨리 달리면 돼요."

"뭐라?"

"꽉 잡아요. 호랭이."

말을 마친 병규는 돌연 전속력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가히 질풍 같은 빠르기. 얼마나 빠른지 정작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고 잔상만 보일 정도다.

"헛!"

골목을 지키고 선 떡대들도 병규가 맹렬히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어어 하는 사이에 이미 자신들 사이를 통과해 버리고 말았다. 눈 몇 번 깜빡일 시간이 벌어진 일이었다.

"방금 그게 뭐였지?"

"그, 글쎄."

떡대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병규의 가공할 스피드에 그들은 감히 쫓아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로켓이라도 등에 메고 있지 않는 한 절대로 잡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호랭이. 발칸을 잡을 수 있는 도술이라는 게 뭐예요?"

바람 같은 스피드로 골목 안으로 숨어든 병규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주박술(呪縛術)이라고 들어봤냐?"

"모르겠는데요."

"그런 게 있다. 잠깐 동안 상대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술법이지."

"아. 그걸로 발칸을 못 움직이게 하려는 건가보죠?"

"그렇지. 그런데 한 가지 제약이 있다."

"뭔데요?"

"한 번밖에 못 써. 도력을 봉인할 때 딱 일 회분만 남겨놓았거든."

"... 실수하면 절대로 안 되겠네요."

"하하. 걱정 마라. 설마 이 몸이 그런 초보자나 저지를 실수를 하겠느냐?"

호랭이의 너털웃음. 왠지 모르게 신임이 안 가는 병규였다.

한편 헐레벌떡 병규를 따라온 떡대들의 장벽에 가로막혀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녀에겐 전 형사의 장난감(?)도 병규와 같은 스피드도 없었다. 다만 있는 것이라곤 어깨에 멘 구두통 하나뿐인데.

"저기 잘생긴 아저씨들. 혹시 구두 닦으실 생각 없으세요? 요즘 봄맞이 할인행사 중인데."

그녀는 어떤 환경에서도 영업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촤악!

푸른빛이 허공을 가르자 붉은 핏물이 분수처럼 뿜어진다. 뒤이어 터지는 참혹한 비명소리.

"으아악."

"아악!"

허리가 양단된 두 사내가 피거품을 뿜어내며 땅 위로 허물어진다.

"흠흠. 좋은 냄새야."

발칸은 코를 벌름거리며 키득거렸다. 십여 명의 조폭들이 그의 발아래 시체가 되어 누워있다. 그를 포위했다고 알려진 성동파와 남방파의 조직원들이다. 병규의 불길한 예감이 그대로 들어맞은 것이다.

발칸은 이제 막 죽인 시신의 심장을 도려내어 입으로 가져갔다. 짜릿한 기운이 온몸을 휘감는다.

"크흐흐. 좋군. 흐흐흐흐."

싸늘한 달빛 아래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며 발칸은 희열에 들떴다.

달빛에 푸르게 변색된 그의 두 손.

놀랍게도 그의 손끝에서 레이저포인터에서 쏘아진 빛줄기처럼 푸르스름한 기운이 한 자나 솟구쳐 오르고 있다.

그 푸르스름한 기운은 그가 키메라의 몸이 되었을 때 하사받는 요수의 발톱. 마법사들이 소드마스터의 검기를 흉내 내어 만들어 낸 무엇이든 잘라버리는 절대의 검이다.

이계를 넘어오기 전에는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능력이었지만 차원의 문을 넘는 동안 붕괴된 육체와 더불어 지금까지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 시끄러운 폭주족 녀석들을 대량으로 해치우고, 다시 며칠 전 검은 양복 입은 녀석들의 심장을 대거 취하며 몸이 크게 회복되자, 요수의 발톱도 어느덧 다시 부활하게 된 것이다.

지금의 발칸의 전투력은 호랭이와 맞붙을 때와 비교하면 열 배 이상 강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변한 것은 그의 능력뿐만이 아니다. 그의 모습 역시 예전과 크게 달라져 있었다.

대머리였던 머리엔 짧은 머리칼이 가득 뒤덮여있고, 60대 노인처럼 주름이 가득했던 피부는 40대 정도의 것으로 팽팽해졌다.

"크크크크."

발칸은 득의의 괴소를 지었다. 골목 안으로 또다시 발걸음 소리가 들리낟. 새로운 먹이가 죽는 줄도 모르고 이곳으로 달려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귀찮은 경찰들이 몰려들기 전까지 몇 명이나 먹을 수 있을까. 30명? 50명? 가끔은 사냥보다 이렇게 저절로 굴러든 먹이를 노리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게다가 이 녀석들은 두려움도 모르고 달려드니 귀찮게 쫓아갈 필요도 없지 않은가.

"엇?"

발칸은 발견한 이한영은 깜짝 놀라 신음성을 발했다. 벌거벗은 발칸을 보고 놀란 것이 아니다. 그의 발아래. 고기조각이 되어 널려 있는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 그리고 질펀하게 널어진 내장들.

"이... 이...!"

그녀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연락을 받고 달려오는 잠깐 사이에 이런 참혹한 일이 벌어졌을 줄이야. 한편 발칸은 그녀를 보고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그녀의 미모에 혹한 것은 아니다. 키메라가 되면서 성욕도 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그녀에게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은 것은 그녀의 전신에서 어떤 압력이 풍겨져 왔기 때문이다.

"이얏!"

가물치가 연장을 꺼내들고 휘두른다.

시퍼런 칼빛이 예사롭지 않다. 그러나 발칸은 가볍게 요수의 발톱을 휘둘러 가물치의 칼을 베어 버렸다.

쩌겅.

무섭게 잘 갈려진 칼이 허무할 정도로 쉽게 잘려 나간다.

"엇?"

가물치가 머뭇거리는 사이 두 번째 공격이 그의 머리를 찍어온다.

"뒤로 빠져!"

이한영은 급히 그를 잡아당겼다.

취악.

소름 끼치는 요기를 발산하는 요수의 발톱이 아슬아슬하게 가물치의 앞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 녀석."

마침내 이한영이 나섰다.

부웅.

호쾌한 주먹질. 가녀린 그녀였지만 주먹을 뻗는 동작은 더없이 시원했다. 가슴이 뻥 뚫릴 정도로.

발칸은 그녀에게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왠지 좀 전의 비쩍 마른 녀석이 휘두른 검보다 이 여자의 주먹이 더 두렵게 느껴진 것이다.

발칸의 신형이 휘리릭 퍼지며 그 자리를 피한다. 덕분에 이한영의 일격은 엉뚱한 담벼락을 후려치게 되었다. 펑 하는 소음과 함께 돌무더기가 우수수 무너진다.

'권사인가?'

발칸의 표정이 가볍게 변했다. 이 여자. 뭔가가 있을 것 같긴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의 위력일 줄이야. 그런데 문제는 그가 그녀에게 느끼는 불안감이 단순히 권사에게서 느껴지는 것 이상이라는 점이다.

이 정도라면 가히 마계의 마인들에 준하는 압박이 아닌가.

'뭐지. 이 여자는?'

발칸은 긴장했다. 인간 중에서는 처음 만나 보는 강자다.

"어서 피해."

발칸의 앞을 막아선 이한영은 우선 부하들을 돌려보내려 했다. 가물치를 위시한 부하들은 머뭇머뭇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누님을 혼자 두고 갈 수 없었던 것이다.

"빨리 안 가? 너희들이 있으면 내가 제대로 싸울 수 없잖아. 설마 갓난아기처럼 일일이 뒤치다꺼릴 해줘야 하는 거야?"

그녀의 말에 가물치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곧 허리를 깊숙이 숙인 다음 자리에서 물러났다.

물론 방금 그녀의 말이 진심이 아니다. 그들 역시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있으면 그녀가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임은 확실하다. 발칸의 순간적인 움직임.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하지만 누님, 역시 평범한 인간은 절대 아니지.'

가물치는 이한영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다면 그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일단 경찰에 연락을 넣어야 한다. 놈이 생각보다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화기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가 막 핸드폰을 꺼냈을 때다.

"어이. 무슨 일인데 그리 급하게 가는 거야?"

맞은편에서 전 형사와 조형사가 느긋하게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가물치는 능글맞게 손을 흔드는 그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형사님. 마침 잘 오셨습니다."

"오우. 이거 생각지도 못한 환영인걸?"

전 형사는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다. 마치 정말로 기쁜 것처럼. 하지만 그와 달리 조형사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사람들이 경찰을 반길 때는 한 가지 경우밖에 없다. 선배릐 말대로 뭔가 큰 일이 터진 것이다.

가물치가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형사님. 급합니다. 빨리 경찰의 지원을 요청해 주십시오."

"지원? 무슨 일인데 그래?"

"발칸이 나타났습니다. 이미 여러 명이 놈에게 죽었습니다."

툭.

전 형사의 입에 물려있던 담배가 떨어졌다. 이건 생각보다 엄청난 사건이다.

"바보 같은 녀석들. 그런 일이 있었으면 빨리 말했어야 할 것 아냐. 설마 너희들끼리 해결하려고 한 거냐?"

휴대폰의 번호를 누르며 전 형사는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직통회선으로 전화를 건 그는 큰 목소리로 한참을 떠들었다.

"다행히 인근 주택가에서 먼저 신고가 들어간 모양이다. 잠시 후면 도착한다니 우선은 녀석이 다른 곳으로 도망가지 못하게 막기만 하자."

권총을 꺼낸 전 형사는 약실에서 공포탄을 빼버렸다. 발칸과 같은 살인마에게 공포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보이는 즉시 사살.

그것이 100여 명에 가까운 사망자들에 대한 애도일 것이다.

콰쾅.

묵직한 폭음과 함께 가녀린 인영 하나가 먼지구름을 뚫고 날아왔다.

"아앗. 누님."

땅 위에 털퍼덕 떨어진 인영을 본 가물치 들은 대경실색하여 달려갔다. 입가에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이한영. 바로 그녀였던 것이다.

가물치 들이 이한영을 감싸고 비명을 경악성을 지르는데, 이번엔 먼지구름이 부옇게 오른 골목 저쪽에서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터져 나온다.

"크아아아아악."

소름이 오싹 돋는 처참한 비명. 놀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먼지구름 속을 향한다. 바람과 함께 먼지가 날려가고 그곳에서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발칸이었다.

그는 어깨 한쪽이 은색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를 몹시 괴롭히는 모양이다.

"헤헤. 녀석에게 한 방 먹여줬지."

가물치에 기대어 몸을 일으키는 이한영이 힘없는 미소를 보였다.

"크아아악."

죽을 것같이 비명을 지르던 발칸. 돌연 갈퀴 같은 손으로 은빝으로 번들거리는 어깨의 생살을 과격하게 뜯어낸다.

투투툭.

근육이 찢어지는 끔찍한 소음. 사람들은 귀를 막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제해야 했다.

찍, 찌익...

마침내 어깨의 살이 절반 가까이 뜯겨지고 푸른 피가 폭포처럼 쏟아진다. 그러나 발칸은 더 이상 괴성을 지르지 않았다. 마침내 그를 고통스럽게 하던 은회색의 금속질을 벗겨낸 것이다.

"이년!"

발칸은 독기 어린 눈으로 이한영을 응시했다.

"곱게 죽을 생각은 버려라."

음산한 살기를 뿜으며 발칸이 성큼성큼 다가선다.

"이런 이제 힘이 별로 없는 데 어쩌나."

이한영은 처연한 미소를 지었다. 옷도 지저분해지고, 머리 모양도 망가진 낭패한 모습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아름다운 미모는 가려지지 않았다.

"잠깐. 잠깐. 그쪽과 마저 놀고 싶으면 먼저 우리의 허락을 받으시라고, 용의자 씨."

전 형사가 담배 연기를 피워내며 앞으로 나선다. 발칸의 눈이 찌푸려졌다. 전 형사의 손가락 사이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권총이 보였기 때문이다.

"푸른색 피라. 오늘 색다른 구경을 했어. 그래서 나도 좋은 구경을 시켜주지."

입에 문 담배를 빙글 돌린 전 형사는 권총을 꺼내들자마자 느닷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총을 쏘는 데 조금의 주저도 찾아볼 수 없다.

탕.

총성이 메아리가 되어 골목길을 떠돈다.

총알이 틀어박힐 때마다 발칸은 몸을 움찔하며 물러섰지만 별다른 타격이 없는 듯 곧 다시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미치겠네. 어디서 이런 괴물이 굴러왔을까 몰라. 하여간 너 역시 용의자니까 쓸데없는 절차를 씨불여 줘야겠지?"

전 형사는 총알 한 방에 하나씩, 미란다원칙(Miranda原則)을 중얼거리며 방아쇠를 당겼다.

탕.

"넌 아가리 닥쳐를 할 수 있고...."

탕.

"씨팔 놈의 개소시를 씨불이다가 법정에서 좆같이 불리해질 수도 있고...."

탕.

"돈 펴 발라 산 변호사로 취조실서 연장질 못하게 할 수도 있고...."

철컥.

"변호사 살 돈 없으면 그냥 얌전히 연장질 당해도 좋고, 인터넷에 맞았다고 지랄 발광 하소연해도 좋고...."

철컥.

"개소리 씨불이기 싫으면 얌전히 아가리 닥치고 있어도 된다. 이 씨팔놈아."

철컥철컥.

"젠장할. 어떤 미친놈이 미란다를 만들어서 사람 귀찮게 하는거야."

실탄을 다 소비한 전 형사는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총을 패대기쳤다.

"이런 개자식. 좀 죽어라."

탕탕탕탕.

조 형사가 화풀이를 하듯 총알을 쏟아 붓는다.

두 형사의 행동이 얼마나 과격했는지 조폭들이 오히려 몸을 움츠릴 지경이었다.

"보기보다 성깔 있는 형사님들이셨네요."

"그러게."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병규와 호랭이는 서로를 마주보며 두 형사의 히스테리 표출에 몸을 떨었다.

원래대로라면 벌써부터 나섰어야 했을 둘이지만, 워낙에 주위의 눈이 많아 주저하던 참이다.

"그런데 발칸 말이에요. 뭔가 확실히 달라진 것 같은데요."

"그래. 젊어진 것 같구나."

두 손을 내려뜨리고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 걷는 모습엔 전과는 다른 숨 막힐 듯한 기운이 느껴진다. 젊어지다니. 기력을 너무 쏟아 한꺼번에 늙는 경우는 봤어도 저 녀석처럼 몇 십 년이나 젊어지는 경우는 처음이다.

'역시 이계의 인간이라 다른 것인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발칸의 변화를 호랭이는 그렇게 납득했다. 하지만 한 가지 꺼려지는 것은 젊어진 것과 동시에 놈의 분위기 또한 상당히 변했다는 것이다.

대체 얼마나 강해진 것인가.

'게다가 손끝에서 나오고 있는 저 기운!'

마치 짐승의 발톱처럼 길게 뻗어 나와 보이는 그것은 신선인 호랭이마저 오싹함을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더 이상 잡생각을 떠올릴 여유가 없었다. 발칸이 괴성을 지르며 두 형사를 덮쳐갔던 것이다.

"꽉 잡아요."

병규는 호랭이에게 말한 뒤 재빨리 몸을 날렸다.

휘이익.

거센 파공음이 귓전을 스치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 병규와 호랭이는 발칸의 앞에 서 있었다.

"넌?"

전 형사를 베어 가던 발칸은 갑자기 나타난 병규를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뜬다.

눈에 익은 얼굴이다.

'이 녀석은 분명 산에서 내게 죽었을 텐데.'

아무리 다시 봐도 그때 그 녀석이다. 짜증이 날 정도로 도망을 치던 녀석이라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뱃속의 내장을 모두 헤집어 놓았는데 어떻게 살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살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눈앞에 나타난 이상 다시 죽으면 그만이다. 안 그래도 그때 하얀 털의 몬스터의 방해 때문에 심장을 뜯어먹지 못해 아쉬웠다.

"다시 한 번 죽여주마!"

발칸은 손끝으로 요수의 발톱을 꺼내며 병규를 베어 갔다. 그물처럼 사방에서 조여 오는 푸르스름한 기운. 그러나 병규는 오직 발칸의 가슴만은 노려볼 뿐이었다.

"하나. 두 주먹을 허리에!"

병규의 신형이 돌연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가공할 살기를 뿌리던 요수의 발톱은 허망하게 허공을 베어 버렸다.

"무슨!"

발칸의 경악성이 채 꺼지기도 전이다. 사라졌던 병규의 그림자가 그의 턱 아래에 나타났다.

"헛!"

발칸의 입에서 헛바람소리가 터지고, 병규의 어깨는 거대한 창이 되어 그의 아랫배 깊숙한 곳에 틀어박힌다.

쿵.

첫 번째 충격.

속이 뒤집히는 듯한 고통과 함께 발칸의 건장한 동체가 허공으로 둥실 떠오른다. 그러나 병규의 공격은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둘. 두 주먹을 가슴에!"

스프링이 압축되듯 낮아졌던 병규의 신형이 경쾌한 리듬을 타며 한 바퀴 휘돈다. 번개같이 휘둘러진 팔꿈치가 명치에 두 번, 송곳처럼 꽂히고!

쿠쿵.

두 번째 충격.

발칸의 입에서 피가 솟구친다.

"셋. 내 주먹은 질풍이다!"

뻥!

호쾌한 파음과 함께 질풍처럼 날아든 병규의 두 주먹이 발칸의 가슴을 헤집어 놓는다.

쩌걱.

가슴뼈가 박살나는 처절한 소음과 함께 발칸의 몸뚱이가 실 끊어진 연처럼 허공으로 솟구쳤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질풍삼연격(疾風三聯擊)!

아랫배, 명치, 가슴으로 이어지는 질품 같은 타격이다.

질풍삼연격의 폭발적인 타격을 한 몸에 받아낸 발칸은 푸른 핏물을 분수처럼 게워내며 무려 십여 미터 밖으로 나동그라졌다.

휘이이잉.

찬 바람이 불어온다.

장내엔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다들 입을 쩍 벌린 채 황망한 눈으로 병규를 쳐다볼 뿐이다.

"영기야. 쟤가 우리가 일 주일 내내 조사하던 그 병규란 애 맞냐?"

"글쎄요. 선배님. 생긴 건 분명 그 넘아가 맞는 것 같은데 행동은 영 딴 사람이네요."

전 형사와 조 형사는 서로를 쳐다보며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 얌전해 보이던 녀석이 휙 하고 나타나 들고뛰고 날뛰고 하더니 '빠바바바방'하는 폭음과 함께 발칸이 새처럼 날아 두꺼비처럼 저쪽 구석에 찌그러진다.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어?'

호랭이는 찢어져라 입을 벌린 채 병규를 올려다봤다.

사실 지금 가장 놀라고 있는 것이 바로 호랭이였다. 질풍삼연격은 폭주족과의 다툼 때 병규의 움직임이 하도 한심해서 호랭이가 장난 삼아 한 수 가르쳐 준 것이다. 그런데 불과 며칠 만에 이렇게 완벽하게 시전하다니. 아니 사실 병규의 질풍삼연격은 호랭이가 알고 있는 그것과는 많이 다른 것이다.

원래 질풍삼연격은 한 걸음에 한 방씩, 총 세 번의 권을 날리는 기술이다. 그런데 이 녀석은 가르쳐 주지도 않은 변화까지 동원해가며 무려 다섯 발의 공격을 해댔다. 아마도 가벼운 체중과 단련 되지 못한 주먹을 생각해서 팔꿈치 치기를 넣은 것이겠지. 하지만 무술이라는 것이 그렇게 생각한 대로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무엇보다 생각만큼 몸이 따라주지 못하는 게 문제다. 그런데 이 녀석은 따로 연습한 것 같지도 않은데 별안간 실전에서 놀라운 재주를 보인 것이다.

호랭이로서는 숨이 꼴깍꼴깍 넘어갈 정도로 놀랄 수밖에.

병규는 조용히 숨을 가다듬었다.

순간이지만 몸을 움직이고 권을 뿌릴 때 깊숙이 몰입되었다. 짜르르 풀리는 긴장과 함께 상쾌한 쾌감이 몰려온다.

주먹에 남아 있는 쩌릿한 느낌도 나쁘지 않다. 뼈가 시큰거리긴 했지만. 생각보다 몸이 움직여줘서 다행이다.

"크아아아악."

분노의 찬 괴성이 하늘을 떨쳐 울렸다. 깜짝 놀란 사람들의 고개가 일제히 괴성이 들려온 방향을 향한다.

발칸.

놈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피에 굶주린 야수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발칸의 상태는 감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배와 명치가 말뚝으로 박은 것처럼 푹 파였으며 오른쪽 가슴은 완전히 함몰되어 버렸다. 그러나 가슴뼈가 절반쯤 주저앉았는데도 놈은 멀쩡하게 살아 움직였다. 아니 멀쩡히 움직이는 정도가 아니라 두 눈에 독기를 줄기줄기 내뿜으며 성큼성큼 다가서는 것이다.

전신에서 푸른 핏물을 뿜으며 걸어오는 모습은 마치 지옥에서 막 기어 올라온 야차를 보는 듯하다.

"이 노옴."

발칸의 두 눈에서 시퍼런 귀화가 피어오른다.

분통이 터졌다. 저딴 놈에게 한 방을 먹다니. 간신히 회복된 육체를 이렇게 망가뜨리게 되다니.

아니 그보다는 순간이지만 병규의 움직임을 놓쳤다는 것이 더욱 분통터진다. 스피드는 그의 장기가 아닌가.

전에도 귀찮을 정도로 재빠른 녀석이었지만 지금은 감히 태만히 볼 수 없을 정도다.

대체 어떻게 다시 살아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은 완전히 달라졌다. 역시 예전에 확실하게 처리했어야 했다.

"갈기갈기 찢어 죽여주지."

발칸은 이를 으드득 갈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에게서 설기설기 뿌려지는 짙은 살기.

"헛."

사람들은 모두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병규는 침착했다.

믿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호랭이!"

"준비 다 됐다."

병규의 어깨에서 펄쩍 뛰어내린 호랭이가 발칸을 향해 나직이 으르렁거린다. 호랭이의 털이 죄다 허공으로 치솟는다. 그와 동시에 성큼성큼 걸어오던 발칸의 움직임이 멈춰버린다. 땅 아래에서 보이지 않는 실이 솟아나 전신을 옭아매는 것 같다.

"억."

발칸은 이마에 힘줄이 생길 정도로 힘을 썼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도 비지땀을 흘려야 했다.

호랭이의 주박술에 걸려든 것이다.

"병규야 지금이다."

호랭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도술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힘든 모양이다.

"알았어요."

병규는 대답과 함께 앞으로 뛰어나갔다.

발칸이 호랭이의 주박술에 꼼짝 못하는 지금이 기회다.

"크아악."

돌연 괴성을 토하더니 손끝에서 칼날같이 매서운 기운이 솟구친다. 그것은 스타워즈라는 영화에 등장하는 광선검처럼 투명한 푸른색 빛다발이었다.

광선검과 다른 점이라면 손가락마다 하나씩, 양손 모두 열 개나 되는 빛다발이 솟구쳐 나왔다는 점 정도.

쩌릿.

병규는 순간 뒷골을 엄습하는 섬뜩한 느낌에 본능적으로 뒤로 몸을 굴렸다.

쫘아악.

날카로운 파공음이 그의 등허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재빨리 일어난 병규는 점퍼의 뒤가 갈기갈기 찢어진 것을 보고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푸른 빛줄기를 쏘아내는 발칸은 두 손을 축 늘어트린 때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흐느적거리는 손가락의 움직임. 가슴의 기복. 놈은 더 이상 움직임에 장애를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병규의 다급한 물음에 호랭이의 신음 섞인 대답이 들려온다.

"크윽. 저 녀석. 예전보다 힘이 훨씬 세졌다."

주박술이 깨지고 만 것이다. 몸을 줄이기 전, 호랭이는 주박술을 위해 약간의 도력을 남겨두었다. 그런데 그 양에 문제가 있었다. 설마 이렇게 갑자기 발칸의 힘이 강해질 줄은 상상도 못한 것이다.

꿀꺽.

병규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지금까지 여유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은 호랭이의 주박술을 믿었기 때문이다. 헌데 그것이 깨져버렸다. 그리고 발칸은 두려울 정도의 살기를 내뿜으며 그를 압박해오고 있다.

병규는 고민했다.

정면으론 승산이 없다. 도망치는 것이 현명한 길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달아나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죽기 전의 맹세가 떠올랐던 것이다.

휘릭.

터벅터벅 다가오던 발칸의 그림자가 출렁하더니 어느새 그를 턱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다.

"준비는 됐나?"

'무슨 준비?'

병규는 묻고 싶었다. 발칸의 입술이 진한 살기를 뚝뚝 흘린다.

"처참하게 죽을 준비 말이다!"

말과 함께 아래에서 위로, 현란한 푸른 빛줄기를 쏘아내는 발칸의 손이 갈퀴처럼 쭉 훑어 오른다.

촤아악.

거친 파공음. 경악한 얼굴의 병규는 다섯 조각이 되어 갈라졌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발칸의 표정은 형편없이 찌그러졌다. 아무런 느낌도 없다. 분명 애송이 녀석을 베었는데 아무런 감촉도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잔상! 이 녀석이."

발칸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간다. 그에게서 5미터 정도 떨어진 곳. 호랭이를 손에 든 병규가 미끄러지듯 착지하고 있었다. 그가 벤 것은 고속으로 움직인 병규의 그림자였던 것이다.

물결치듯 일렁이며 사라지는 병규의 그림자를 보고 발칸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 움직임. 완전 그의 복사판이 아닌가. 게다가 처음엔 그저 귀찮은 정도에 불과했던 놈의 스피드가 이제는 그의 눈이 쫓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이런 죽일 자식!"

마치 놀림을 당한 것처럼 기분이 엉망이다.

"죽인다. 죽인다. 죽인다!"

쾅하는 폭음과 함께 발칸은 무시무시한 기세를 담고 병규에게 쏘아졌다.

"꽉 잡아요. 호랭이."

호랭이를 어깨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은 병규는 약간 흥분된 표정으로 앞을 보았다.

"죽인다아!"

괴성과 함께 발칸의 두 손이 날아들었다. 그 손끝에서 손톱처럼 길게 뻗어 나온 푸른 빛줄기가 머리를 절단하려 든다.

"흡!"

짧은 심호흡과 함께 마침내 병규가 움직였다.

"내 주먹은...."

타타탁

한 번, 두 번, 세 번!

황폐한 대지를 두드리는 천신의 쇠망치처럼 호쾌하게 땅을 두드리는 그의 발걸음.

"질풍이다!"

우렁찬 뇌성을 담은 그의 주머니 폭죽처럼 터져 나온다.

빠바바바방.

가슴마저 뻥 뚫리는 듯한 폭발음.

질풍삼연격!

그것이 다시금 터진 것이다.

"크아아아악."

병규의 질풍에 휩쓸린 발칸은 피보라를 뿜으며 저쪽 구석으로 튕겨져 날아간다.

"쿨럭. 쿨럭."

놈의 입에서 한 바가지의 핏물이 터져 나온다. 이번엔 꽤나 태격이 컸었던가 보다. 그러나 그 처참한 광경도 질풍의 권을 받고 뭉개진 그의 몸뚱이보다는 덜 비참했다.

가슴, 목, 그리고 얼굴.

질풍 같은 병규의 스친 부위가 마치 찌그러진 철판처럼 움푹 들어가 버렸다. 특히 얼굴 부위의 충격이 컸다. 부서진 턱이 목 아래에서 덜렁거린다.

꿈에 볼까 두려운 처참한 광경.

그러나....

그런 처참한 몰골이 되었으면서도 발칸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크크크크.

공포영화 속의 괴물을 보는 것 같은 그로테스크한 장면.

사람들은 전율했다.

발칸의 무지막지한 생명력에 그리고 그를 두 번이나 날려버린 병규의 폭발적인 움직임에.

'이, 이 녀석. 대체 어떻게 된 녀석이야?'

호랭이는 속으로 경악성을 질렀다. 단 세 번 펼친 것에 불과한 질풍삼연격. 그런데 이제는 절정을 넘어 완숙미가 풍길 정도다. 이런 엄청난 격투센스를 가진 녀석이 존재하다니.

소름이 오싹 돋을 정도다.

한편 소원이던 한 방에 보너스까지 날려준 병규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어느새 베어졌는지 그의 점퍼 소매가 잘개 쪼개져 바람에 나풀거린다.

'저 녀석의 손끝에서 나오는 저 푸른 빛줄기.'

너무 날카롭다. 가볍게 스친 것뿐인데 옷이 이 지경으로 찢어지다니.

'만약 피부에 당하기라도 한다면.'

아마 파절이처럼 잘게 다져질 테지.

이건 너무 불공평한 대결이다. 그는 벌써 두 번이나 혼신을 다해 공격을 명중시켰는데도 저 녀석은 불사신처럼 일어나는데, 자신은 녀석의 공격에 스쳐도 파절이 신세라니.

불공평하다 못해 억울할 정도다.

"휴."

병규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딴 생각에 빠져있을 때가 아니다. 허깨비처럼 일어난 발칸이 그를 향해 기분 나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심장이... 필요해."

비틀비틀 몸을 일으킨 발칸은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몸이 너무 망가졌다. 아직은 움직일 만하지만 더 이상은 위험하다.

"벌레 같은 애송이 녀석에게."

녀석은 너무 변했다. 스피드는 감히 그가 따를 수 없을 정도고, 토닥거리는 반항이 고작이던 녀석의 주먹은 우레처럼 몰아친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잡아도 끝장을 낼 수 있는데, 계속해서 당하기만 하다니.

참을 수 없는 치욕. 분노가 용솟음친다. 그러나 지금은 망가진 몸을 수복하는 것이 먼저다.

굶주린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다행이 검은 양복을 입은 녀석들과 긴 머리의 여자, 그리고 총을 쏘아 갈기던 녀석들이 떠나지 않고 남아있다.

'클클. 조금만 기다려라.'

그는 애송이를 향해 썩은 미소를 보여주었다. 애송이 녀석이 움찔 어깨를 떤다.

"심장! 심장을 내놔!"

발칸은 괴성을 지르며 사람들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목표는 창백한 표정의 이한영이었다.

"엇!"

발칸의 뜻 모를 미소에 긴장하고 있던 병규는 놈이 돌연 다른 사람들을 향해 돌진하자 헛바람을 삼켰다.

"달려라. 병규야!"

호랭이의 급하게 소리친다. 말이 터지자마자 병규는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휘이잉.

귓가를 스치는 바람소리. 어느새 병규는 이한영의 앞에 서 있게 되었다. 발칸보다 늦게 출발했는데도 도착은 그가 훨씬 빠르다.

"이놈!"

발칸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진다. 이런 징그러운 자식.

"함께 죽어라."

발칸은 요수의 발톱을 무려 한 자나 뽑아내어 병규와 이한영을 향해 휘둘렀다.

'피해봐라. 네가 피하면 뒤의 여자가 죽는다. 알량한 동정심으로 뛰어들었겠지만 네놈 역시 살아남으려면 몸을 피할 수밖에 없을 테지.'

발칸의 입술이 추악한 미소를 그린다.

그러나 그가 하나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었다.

병규는 이미 한 번 죽었던 사람. 그래서인지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상태였다.

죽음을 완전히 떨쳐버리진 못했지만 적어도 저 혼자 살겠다고 가녀린 여자를 죽음 앞에 내몰 정도로 나약하지는 않았다.

'간격이 부족해.'

질풍삼연격을 펼치기엔 발칸과의 간격이 너무 적다. 질풍삼연격외엔 별 다른 공격법을 모르는 병규에겐 이것은 매우 난감한 상태였다. 그러나 생각할 시간도 없다. 발칸의 공격은 이미 코앞까지 밀려들었다.

병규는 화들짝 놀라며 엉성한 자세로 주먹을 날렸다. 워낙에 엉성한 동작이라 별 다른 위력도 없었다. 하지만 하늘이 도왔는지 때린 부위가 하필이면 뭉개진 턱이었다.

"쿠엑."

발칸은 피를 뿜어내며 쿵쿵 뒷걸음질쳤다. 충격이 상당한 모양이다. 하지만 충격을 받은 것은 병규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엑."

병규는 고개를 길게 빼며 토악질을 했다. 어쩌다 보니 발칸이 토해낸 피가 입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남의 입에서 튀어나온 피를 삼키게 되다니. 생각만으로도 속이 매슥거린다. 그러나 그런 메스꺼움은 식도와 위장이 타들어 가는듯한 통증에 곧 잊혀져 버렸다.

뜨겁다.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다. 뱃속이 지글지글 끓는다.

그리고 이상하게 손끝이 가려워 온다. 발칸의 피를 먹은 부작용일까? 설마 이 녀석의 피는 독?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이런 경우가 있었던 것 같은데.'

약수터에서 발칸을 처음 만났을 때에도 그는 놈의 피를 마셨었고, 한동안 고통에 몸부림을 쳐야 했다.

"병규야. 왜 그러냐?"

그의 상태가 이상함을 느낀 호랭이가 걱정스럽게 물어온다. 그러나 병규는 으으 하는 신음성만 낼 뿐이었다.

가렵던 손끝이 이젠 뜨거뤄 미칠 것 같다. 얼마나 괴로운지 손가락 끝을 깨물어 뜯고 싶을 정도다.

그런데 저 괴물 같은 자식은 왜 또 달려드는 것일까.

"크아악."

악취 풍기는 그 괴성. 이젠 지겹다.

"지겨워."

병규의 입술이 열리며 힘없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지겹단 말이다!"

병규는 뇌리를 지끈거리게 만드는 짜증을 두 손에 담아 발칸을 향해 휘둘렀다. 그 순간 뜨거워 미칠 것 같던 손가락 끝에서 뼈가 시릴 듯한 냉기가 뻗어 나갔다.

촤아아악!

한순간 허공이 무수한 조각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잘게 쪼개진 채 무너지는 대기의 파편 속에서 귓가를 자극하는 서늘한 절삭음이 들려온다.

서걱!

손끝에서 느껴지는 그 생소한 감각!

병규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찢어질 듯 부릅떠진 발칸의 두 눈이 보였다.

섬뜩한 살기를 뽐내던 녀석의 눈동자에 지금 깃들어 있는 것은 고통, 그리고 죽음?

그제야 병규는 볼 수 있었다. 발칸의 허리에 몇 개의 푸른 선이 그물 모양으로 그어져 있음을. 그 푸른 선은 처음엔 보일까 말까한 가느다란 선이었는데, 시간이 가면서 점점 굵어지더니 잠시 후엔 푸른 핏물을 울컥울컥 토해 냈다.

발칸의 눈가에 거센 경련이 일어나더니 눈동자가 점점 회색빛으로 탁하게 물들어간다.

그리고 다음 순간.

털퍼덕.

상체가 기우뚱하더니 내장을 후두둑 떨어트리며 뒤로 넘어갔다. 그리고 상체가 땅바닥에 털퍼덕 떨어진 후에야 비로소 피를 분수처럼 쏘아올리고 있던 발칸의 하반신이 앞으로 엎어졌다.

"...."

병규는 발칸의 상체와 하체가 양단되는 충격적인 장면에 온몸이 굳어 버렸다.

'왜?'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다. 문득 그는 손끝에서 느껴지던 서늘한 감각을 기억해냈다.

정신이 빠진 듯 멍하니 서 있던 그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를 향한다. 흐릿한 그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그의 손가락 끝.

푸르스름한 빛이 한 자나 뻗어 나와 있었다.

그것은....

발칸이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하던 요수의 발톱이었다.

병규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일 줄 몰랐다.

"너. 어떻게 된 거냐?"

호랭이가 놀란 음성으로 묻는다. 병규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신이 먼저 묻고 싶은 심정이다. 왜 발칸의 능력이 자신에게 그대로 복제되어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설마 피?'

그러고 보니 그의 몸이 갑자기 빨라진 것도 발칸의 피를 삼킨 후의 일이다. 독이라 생각한 발칸의 피가 사실은 특수한 능력을 발현시켜주는 효능이 있었던 것일까. 혹시 이대로 영영 이 광선검처럼 생긴 걸 열손가락 끝에 주렁주렁 매달고 다녀야 하는 건 아닐까?

불안한 마음에 고개를 내려보니 다행스럽게도 요수의 발톱은 사라지고 없었다.

"휴."

별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 녀석.'

호랭이는 심각한 표정으로 병규를 올려다봤다. 비상한 능력을 가진 능력자라는 것은 처음 볼 때부터 알았다. 보통사람이 그렇게 빨리 달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녀석은 호랭이가 알고 있는 여타의 능력자들과는 많은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대체 어떤 능력자인 거지?'

호랭이는 어려운 문제를 만난 것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한편 놀라운 광경을 목도한 사람들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발칸이 죽었다.

그것은 분명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경찰력이 총동원되고도 못 잡은 살인마를 어린 고등학생이 잡았다는 것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마지막에 발칸을 처치한 그 수법은 놀랍게도 살인마인 발칸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기술이었다.

'대체 저 아이는 뭐란 말인가.'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발칸이 죽었음에도 주변의 공기는 차갑게 냉각된 채 쭉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데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용기 있게 병규에게 접근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까 전엔 대단하던걸?"

부드러운 음성과 함께 멍하게 병규의 어깨를 이한영이 툭하고 쳤다. 그제야 병규는 상념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린 병규는 다시 한 번 딱딱하게 굳어야 했다. 그녀의 등 뒤로 병풍처럼 쭉 늘어선 조폭들의 면상이 눈에 확 들어왔기 때문이다.

"어이. 너희들 때문에 귀여운 동생이 긴장하잖아. 저쪽으로 가 있어."

이한영이 인상을 찡그리며 턱짓을 하자 조폭들은 궁시렁궁시렁 투정을 부리며 물러난다.

"내 이름은 이한영이다."

그녀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빨간 입술 속에 감춰진 가지런한 치아가 맛깔스런 미소와 더불어 환한 아름다움을 전해주었다.

"병규, 태병규라고 합니다."

손바닥을 청바지에 쓱쓱 문댄 병규는 황송하다는 듯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단단하리라 생각했던 그녀의 손은 예상과 달리 촉촉하고 따뜻했다.

"고등학생 같아 보이는데?"

"고등학교 2년입니다."

"에에, 18? 그럼 나랑 2살 차이밖에 안 나잖아."

그녀가 놀란 듯 소리쳤다. 놀라기는 병규도 마찬가지였다. 2살 많다면 그녀는 스물이란 소리가 된다. 조직을 이끌기엔 지나치게 젊다. 게다가 그녀는 여자가 아닌가. 거친 사내들의 무시 속에서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을 것인가는 굳이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내가 너보다 개미 눈곱만큼 나이가 많으니 누님이라고 불러라."

나이차가 조금밖에 안 난다는 것을 유달리 강조하는 그녀의 말에 병규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네. 누님"

"병규야. 이 여아에게 능력이 뭐냐고 물어봐라."

호랭이가 그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능력자!'

병규는 촉각을 곤두세웠다. 전에 호랭이가 자신을 보고 능력자라고 부른 적이 있다. 어쩌면 자신의 이상한 능력이 능력자라는 호칭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저 그런데 실례가 안 되면 누님의 능력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어? 내가 능력자인 걸 어떻게 알았어?"

이한영이 놀란 듯이 묻는다. 이번에도 호랭이가 대답할 말을 대신해 주었다.

"발칸의 어깨가 은색으로 변한 걸 봤다고 그래."

"발칸의 어깨가 은색으로 변한 걸 봤거든요."

이한영은 입술을 곱게 모았다.

"호오. 생각보다 관찰력이 좋은걸? 좋아. 뭐 대단한 것도 아니니까 말해 줄게. 내 수호신은 불가사리.(원래 이름은 불가살이. 조선조에 등장했다고 하는 괴물로 쇠를 먹고 자란단고 한다.) 쇠를 흡수하거나 발출할 수가 있어."

"쇠를 흡수하는 능력요?"

"그래."

이한영은 곧바로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발그스레한 그녀의 손바닥은 별달리 특이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정신을 집중하자 손바닥에서 수은같이 생긴 액체금속이 땀처럼 송알송알 배어 나왔다.

"아까 녀석의 어깨는 이걸로 한 대 쳐준 거야. 그때 방심하지만 않았으면 굳이 네가 나서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녀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문득 병규는 의문이 생겼다.

"갑자기 또 한 가지가 궁금해졌어요."

"뭐가?"

"그렇게 흡수된 쇠는 어떻게 되는 거죠? 저, 혹시 볼일 보실 때 나오는 건가요?"

이한영의 뺨이 잘 익은 복숭아처럼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그런 건 숙녀에게 묻는 게 아니야."

그녀는 그의 머리를 콩하고 쥐어박으며 매몰차게 말했다.

"아고야."

병규는 두 손으로 맞은 곳을 비비며 고통을 호소했다. 살짝 내려친 것 같은데 마치 해머의 모서리로 찍힌 것처럼 아프다. 이한영이 그의 등을 두들기며 맑게 웃었다.

"사내자식이 엄살은. 그런데 넌 수호신이 뭐냐?"

"아이고. 정말로 아프단 말입니다."

병규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자신의 행동이 단순히 꾀병으로 보였다는 게 억울했다. 정말로 머리가 쪼개지는 것처럼 아팠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호신이라니요?"

"몰라?"

병규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이한영의 한쪽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모른다는 병규의 대답이 언뜻 이해되지 않는 눈치다.

"네 힘의 근원 말이야. 보통은 꿈에 보인다거나. 환상으로 보게 되는 거. 능력자들은 백이면 백, 모두 꿈이나 환상을 통해 수호신의 존재를 알게 된다고 들었는데?"

병규는 뺨을 긁적이며 가만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런 일이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특별히 어떤 존재와 만난 기억은 없었다. 굳이 말한다면 호랭이 정도. 하지만 그의 능력은 호랭이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짜식. 가르쳐 주기 싫은 모양이구나."

병규의 등을 소리 나게 팡팡 두드려 준 이한영이 씩 하고 진하게 웃는다. 의뭉스런 병규의 태도에 기분 상했을 수도 있을 텐데 그녀는 예의 씩씩한 미소를 보였다.

"자. 명함이다. 나중에 필요하면 연락해라. 그냥 놀러 와도 상관없고. 내 술을 무제한으로 사주마."

명함 한 장을 넘겨준 그녀는 갑자기 그의 귓가에 입을 가져가더니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네 능력이 발칸하고 비슷하다고 핵도 너무 걱정 마. 무력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성자의 성검(聖劍)도 악마의 혈도(血刀)도 될 수 있는 거니까. 그리고 내 가슴 만진 거. 어떻게 책임질 거냐?"

움찔.

병규의 어깨가 흠칫 떨린다.

"후후후."

병규가 당황하는 모습을 즐겁게 감상한 그녀는 손을 흔들며 동료들에게로 걸어갔다. 따뜻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병규는 그녀가 건네준 명함을 보고는 픽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성격은 터프한 누님이 명함은 참 귀엽네."

그녀의 명함엔 '무엇이든 다 해결해 드리겠습니다!'라는 노골적인 문구와 함께 그녀의 이름 석 자가 웅위한 필채로 새겨져 있었다. 병규를 웃게 만든 것은 명함의 바탕그림이었다. 험악하고 경직된 분위기의 광고문구와 달리 명함의 배경은 꽃과 SD캐릭터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명함만 가만 들여다보면 마치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주는 정의의 소녀 탐정단 분위기가 물씬 풍겨질 정도였다.

"언제 술 한 번 얻어먹으러 가야겠군."

병규는 명함을 들여다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때 차가운 손이 그의 어깨를 툭 짚었다.

"너 정체가 뭐야?"

"헉."

헛바람을 삼킨 병규. 번개같이 고개를 돌려보니 전 형사와 조 형사가 음울한 표정으로 서 있다. 병규는 가슴을 쓸어내리면 반문했다.

"저, 정체요?"

병규는 찔끔한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사실 그도 자신의 능력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두 형사는 그렇게 속 좁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 녀석. 너 아까 전에 엄청 멋있었다고. 아냐? 난 딴 사람인 줄 알았다니까."

"음음. 그런데 손가락 끝에서 나오던 그건 뭐냐? 발칸하고 똑같은 거던데. 설마 무슨 특별한 무공을 연마한 거냐?"

이들은 능력자라는 것 자체를 모르는 듯 자신들끼리 상상의 나래를 펼쳐댔다.

"아하하."

병규는 뒷머리를 긁으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두 형사의 따뜻한 배려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때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야 경찰이 도착하는 모양이다.

병규가 곤란한 표정으로 서 있는데 전 형사가 그의 어깨를 툭툭 털어주며 점잖게 말했다.

"또 경찰서 들락거리는 건 싫지? 어서 가봐."

"네? 그래도 돼요?"

"짜식. 괜찮으니까 가 봐도 돼. 뭐, 발칸을 처치한 영웅이 되어서 득달같은 기자양반들과 다시 친해지고 싶다면 남아있어도 되고."

"절대 사양입니다."

병규는 두 손을 힘차게 휘둘렀다. 폭주족 사건으로 기자라면 학을 떼게 된 그다.

"그럼."

병규는 두 형사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주고는 병규가 후다닥 달려가는데, 호랭이가 그의 어깨에서 펄쩍 뛰어내린다.

"어? 왜요?"

"잠깐만."

후다닥 뛰어간 호랭이는 작은 상자 하나를 물고 왔다. 뭐냐고 물으니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병규가 가만 보니 그저 녹이 잔뜩 슨 조그마한 무쇠상자에 불과했다. 위아래로 나누어진 이음새로 보니 작은 물건들을 집어넣는 보석함인 모양이다.

"이런 고물 상자를 어디다 쓸려고 챙겨온 거예요?"

바람처럼 달리며 병규가 묻자 호랭이는 자랑스럽게 히죽 웃는다.

"비싸 보이지 않냐? 분명 보석같은 게 들어 있을 게야."

"하하."

병규는 허탈하게 웃었다. 역시 이 놈의 털복숭이 연초마니아는 신선 같지가 않다.

'뭐 아무렴 어때.'

병규는 더욱 속력을 내어 달리기 시작했다. 피를 묻힌 찝찝한 기억을 날려버리려는 것처럼.

"야. 이놈아. 날려가겠다. 좀 살살 좀 달려."

호랭이가 죽는다고 비명을 질러댔다.

잠시 후, 현장에 경찰과 중화기로 중무장한 특수부대원들이 도착했다. 그러나 그들이 할 일은 기껏해야 뒷수습에 불과했다.

발칸이 죽었다.

경찰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환호성을 질렀다. 한 달 이상 계속된 야근이 마침내 끝난 것이다. 물론 씁쓸한 소식도 있었다. 이번에도 10여 명의 희생자가 발견된 것이다. 그러나 발칸을 잡았다는 기쁨에 경관들의 표정은 대체로 밝은 편이었다.

마침 현장에 형사 두 명이 있었던 관계로 정황조사도 손쉽게 끝날 수 있었다. 전 형사는 발칸을 잡은 영웅에 대해 '아는 바 없음'이라고 대답했다. 발칸을 발견하고 추적하던 중 비명소리가 들려 쫓아와 봤더니 발칸이 상체와 하체로 양단된 채 쓰러져 있었다는 설명이었다.

이한영과 그녀의 부하들은 그의 증언에 확고한 증인이 되었다. 몰론 그들 역시 병규에 대해선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벌떼처럼 현장에 나타난 기자들은 발칸을 처리한 영웅에 대해 저마다의 견해도 기사를 썼다. 어느 신문엔 피해자 가족의 복수극이라는 기사가 실렸고, 다른 기사엔 현장에 있던 조폭들이 의심스럽다는 기사가 실렸다.

기사 내용이 어떻든 간에 사건은 그렇게 종결될 수 있었다.

한편 그 즈음, 경애라는 구두닦이 소녀는 사건현장을 헤매고 있었다. 이미 밤이 늦은 시각인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구두만 보이면 신나게 쫓아가서 야간 출혈 대 서비스 중이니 구두 한 번만 닦으시라고 홍보하곤 했다. 그러나 밤중에 누가 구두를 닦겠는가. 게다가 살인사건이 일어난 현장인데. 당연히 그녀는 번번이 거절당해야 했고, 그때마다 소녀는 시무룩한 표정이 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또 새로운 목표를 찾아내고는 신이 나서 달려간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그녀는 아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하하. 사막 한가운데 떨어뜨려 놔도 살아남을 것 같은 아인걸?"

전 형사는 호쾌한 웃음을 터트리자 조 형사가 맞장구를 친다.

"사막부족을 상대로 모래 장사를 할지도 모릅니다."

"하하, 그렇군."

그녀를 보자니 피로가 싹 가시는 것 같은 두 사람이었다. 그러나 둘은 곧이어 들려온 소식에 얼굴표정이 굳어지고 말았다.

부검을 위해 운반 중이던 발칸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불길한 소식이 바로 그것이었다.

사건 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고층 빌딩 옥상.

이한영의 사무실에 나타났던 오로치라는 사내가 큰 가방을 든 채 주위의 기척을 살피고 있었다.

"좋았어."

한참 동안 꼼꼼하게 주위를 확인한 그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쉰다.

"흐흐흐. 생각지도 못한 수익이군."

큰 가방을 쳐다보며 오로치는 냉기가 풀풀 날리는 웃음을 흘렸다. 녹색진물이 흥건히 묻어 있는 가방엔 경찰들이 백방으로 수색하고 있는 발칸의 시신이 들어 있었다.

이한영의 뒤를 몰래 추적하던 그는 우연찮게 발칸이 병규에게 당하는 모습과 발칸의 시신이 경찰들에 수송되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의외로 시신의 수송이 허술하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자신의 능력인 최면술을 사용하며 시신을 탈취하여 이곳으로 도주한 것이다.

발칸.

최근 한국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살인마. 그 역시 발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발칸은 한국에 상륙하기 전 일본을 먼저 경악하게 만든 살인귀였다.

일본의 능력자들이 그렇게 애써도 잡지 못한 녀석을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행운이다. 사실 그의 입장에서는 발칸이 죽건, 아니면 죽지 않고 계속 살인을 하고 돌아다니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지금은 남의 나라 일에 불과하니까. 그런 그가 발칸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은 다름 아닌 발칸이 인간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생명체라는 것 때문이다.

푸른색의 피. 경이로운 생명력. 그리고 다채로운 능력들.

세상 어디를 뒤져봐도 이런 인간은 없다.

비록 시신이 불과하지만 최근 막바지에 이른 갓파 연구에 많은 참고가 될 것이다.

"지저분하게 생겼군."

가방을 열고 발칸의 시신을 확인한 오로치는 손수건으로 코를 감싸 쥐었다.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시체의 부패가 절반 정도 진행되었다. 이대로라면 아지트까지 가기도 전에 다 썩어 버릴지도 모른다. 오로치는 핸드폰으로 수송할 차량과 인력을 호출하고는 가방의 지퍼를 다시 닫았다.

그때 막 지퍼를 잠근 가방에서 기이한 소음이 들렸다.

쩍!

"뭐야?"

불길한 생각이 든 오로치는 서둘러 가방을 열러 보았다. 발칸의 가슴이 세로로 쭉 갈라져 있었다.

"이게 무슨!"

오로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귀중한 연구재료가 못쓰게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걱정이다. 그러나 순간 번쩍이는 호기심은 숨길 수 없었다. 과연 이놈의 내부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인간과 비슷한 구조일까? 아니면 전혀 다를까.

그는 괴이한 미소를 지으며 벌어진 가슴속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때였다.

휘릭.

돌연 찢어진 가슴 안에서 채찍 같은 촉수가 튀어나왔다.

"으헛."

오로치는 대경실색하며 물러났지만 촉수의 움직임이 조금 더 빨랐다. 전선처럼 쭉 뻗은 촉수다발이 목을 칭칭 감는다.

"크륵."

오로치의 입에서 거품소리가 새어나왔다. 무시무시한 압력으로 목을 조여 오는 촉수들. 오로치는 손을 버둥거리며 촉수를 뜯어내려 했지만 전혀 소용없었다.

오히려 더더욱 숨통을 조여 온다.

"커컥."

오로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혈관이 툭툭 불거진다. 숨을 쉴 수가 없다. 최면술이 주특기인 그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목을 휘감은 촉수들을 뜯어낼 수가 없었다.

그때 전혀 새로운 소음이 그의 신경을 자극해 왔다.

찌극. 츠르륵. 찌익 찍.

끈적끈적한 소리와 함께 갈라진 발칸의 가슴에서 푸르스름한 무언가가 스르로 밀려나온다.

"컥컥컥."

오로치의 눈알이 툭 불거졌다.

그것은. 발칸의 벌어진 가슴 사이에서 슬그머니 나타난 그것은 다른 아닌 심장이었다.

촤라라락.

목을 조여 오는 압력이 더욱 거세졌다. 오로치는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려야 했다. 그의 입이 쩍 벌려진 순간, 촉수에 딸려나온 발칸의 심장이 그의 목구멍으로 콱 틀어박혔다.

"끅."

오로치의 눈알이 하얗게 돌아간다.

츠르르르

그의 목을 죄던 촉수들이 술술 풀려나더니 목구멍으로 넘어간 심장을 따라 거대한 문어처럼 오로치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촉수가 모두 입 속으로 사라지자 오로치는 푸들푸들 경련을 일으켰다.

감전된 것처럼 극심한 경련. 그러한 경련은 얼마 후 거짓말처럼 뚝 멈춰졌다. 그리도 잠시 후 갑자기 번쩍 떠지는 오로치의 눈. 어찌된 일인지 그의 눈동자는 시퍼런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크크크크."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그의 입가에 조용히 새어나온다.

"멍청한 녀석. 덕분에 살았다."

오로치를 잠식한 발칸은 특유의 괴소를 흘렸다. 정말 위험한 순간이었다. 중간에 이 멍청한 녀석이 시신을 훔쳐내지 않았다면 검시관의 낯짝도 못보고 완전히 부패해 버렸겠지.

몸을 옮기는 것은 지독하게 위험한 모험이어서 완벽한 키메라인 자신으로도 성공확률이 10퍼센트에도 안 된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이번엔 완벽하게 성공했다. 이야말로 하루 빨리 힘을 길러 이드라센을 구하라는 신의 계시가 아닌가.

"놈!"

흡족한 미소를 뿌리던 발칸의 두 눈에서 돌연 스산한 살기가 뻗친다.

병규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다음번엔 내가 네놈의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어발겨 주마."

발칸은 이를 으드득 갈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두 사람이 그곳에 나타났다. 오로치의 연락을 받고 발칸의 시신을 인수하기 위해 달려온 사람들이었다.

발칸은 오로치의 뇌를 뒤져 두 사람에 대한 기억을 찾아냈다.

"아마키리와 쓰치노코?"

사내들은 갑자기 총사가 자신들의 이름을 부르자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네. 총사님. 하명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다."

발칸은 만족스런 미소를 흘렸다.

'완벽해.'

이제부터 당분간 오로치로 있으면서 힘을 모으면 된다.

"아지트로 가자."

"네."

코가 땅에 닿을 듯이 절을 한 두 사내는 썩는 냄새로 진동하는 가방을 집으려 했다.

"그것은 이제 필요 없게 되었다. 어서 빨리 안내나 해."

"... 네."

두 사람은 오늘따라 총사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필요 없게 될 물건 때문에 자신들을 호출하다니. 완벽주의자인 그의 성격에 비추어 보면 별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미키리와 쓰치노코를 앞세우고 비밀 아지트로 들어선 발칸은 그곳의 최상층에서 절대적인 존재감을 풍기는 한 사내를 만나게 되었다.

'수사노오. 신풍의 주군이자 폭풍의 군주라 불리는 절대의 능력자.'

그는 신풍에서 오로치가 유일하게 고개를 숙여야 하는 남자였다. 발칸은 그에게 오페투지하며 공손하게 말을 올렸다.

"주군. 다녀왔습니다."

"...."

수사노오는 한참이나 대답이 없었다. 이상하게 생각한 발칸은 오로치의 뇌를 탐색해봤지만 이유를 찾아내지 못했다. 다만 가끔 그가 이런 식으로 침묵을 즐긴다는 것만을 알게 되었을 분이다.

"일어나라."

한참 만에 수사노오의 말이 떨어졌다.

'헉'

발칸은 경악했다. 말과 함께 수사노오에게서 상상도 못할 압력이 밀려나왔기 때문이다.

발칸은 덜덜 떨리는 몸을 간신히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좋지 않아 보이는군. 갔던 일은 어떻게 됐는가?"

"송구스럽게도 그녀는 저희의 제의를 거절하였습니다."

"흐음. 안타까운 일이군. 하지만 사람은 많으니 심려할 바는 아니다. 피곤한 듯 보이니 돌아가 쉬거라."

"네."

고개를 깊숙이 숙여 보인 발칸은 뒷걸음으로 수사노오의 면전을 벗어났다.

"휴."

밀실을 빠져나온 그는 땀을 비 오듯이 흘렸다. 정말이지 평생 흘릴 땀을 한순간에 쏟아낸 것 같다.

'인간 중에도 그런 자가 있었다니.'

수사노오를 생각하면 절로 몸이 떨려온다. 이드라센을 침범한 마족들 중에도 그 정도의 존재감을 보이는 놈은 드물었다.

'낯설군.'

쉬려고 찾은 오로치의 침실이지만 남의 방이라 그런지 발칸은 통 휴식을 취할 수가 없었다. 옷이 답답하다.

이계에 온 이후로 항상 치부만 가린 간편한 차림으로 돌아다녔다. 그런데 이제와 생소한 문명에 녹아들려니 불편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옷의 단추를 풀던 그는 문득 차원을 통로로 넘을 때 우연히 챙긴 작은 상자가 없어졌음을 깨닫게 되었다.

"아깝군."

발칸은 나직하게 혀를 찼다. 무슨 수를 써도 열 수 없는 물건이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만 일 년이 넘게 들고 다니던 것이라 갑자기 없어지니 허전하다. 대체 그 안에 무엇이 들었기에 그렇게 꽁꽁 봉해져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쓸데없는 잡념이군. 차라리 이 시간에 이 몸의 기억이나 더듬겠군. 혹 쓸 만한 것이 있을지."

가만 내버려두어도 어차피 영혼이 육체에 동화되며 자연스럽게 기억들이 전이되겠지만 이 방식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발칸은 복도를 천천히 걸으며 혼란스럽게 스며드는 오로치의 기억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십여 분이 지났을 쯤. 돌연 발칸의 어깨가 크게 흔들렸다.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기억을 찾아낸 것이다. 뛰듯이 방을 나선 발칸은 몇 개의 어두운 통로를 지나 커다란 창고를 찾아내었다. 그곳에서 그는 동질감이 느껴지는 거대한 존재들과 만날 수 있었다.

"하하하. 놀랍군. 이곳의 인간들도 이런 것을 만들 수 있었는가?"

발칸은 대소를 터트렸다. 어둠 속에 반짝이는 존재들을 보니 마치 가족을 만난 것처럼 반갑다.

"크흐흐. 영악한 놈. 타국의 국민을 상대로 이 녀석들의 위력을 실험해 볼 생각이었군."

일본인인 오로치가 왜 한국에 기반을 닦으려 노력할까를 살피다가 찾아내게 된 것이 바로 이 녀석들이다. 놀랍게도 녀석은 자신과 관계된 사람이 아니라면 떼로 몰살을 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냉혈한이었다.

"좋아. 네 녀석의 실험. 내가 대신 해 주지. 크흐흐흐."

음침한 미소를 흘리던 발칸은 문득 한 남자를 떠올리고는 차가운 미소에 한 줄기 살기를 띠었다.

"그래, 그 녀석에게도 선물을 보내줘야겠어. 깜짝 놀랄 마한 선물을 말이야. 크흐흐흐."

까드드드드드드.

거대한 그림자가 그의 살기에 반응하며 낮게 울음을 터트렸다.

핀셋이 필요할 것이오!

쏴아아.

지겹게도 비가 내렸다.

"우라지게 쏟아지는군."

이 빗속에서, 그것도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캄캄한 야밤에 비상 근무를 서야 하는 형사들의 신세는 단순히 처량하다는 말만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정도다. 모두들 담배나 태우며 애써 짜증을 달래고 있었다.

"무슨 5월에 태풍이냐."

건조한 봄 날씨치고는 굉장히 드문 일이다. 그것도 최대풍속이 40m/s나 되는 중형 태풍이라니. 아직 영향권에 든 것도 아닌데 안면을 때리는 바람이 대단했다. 그래서인지 현장의 형사들은 대부분 우비차림이었다. 개중의 몇이 우산을 들고 버텨보지만 바람에 날리는 빗방울에 쓰나마나고 그나마 강풍에 휘말려 우산만 못 쓰게 될 뿐이다.

"그런데 왜 접근하지 말라는 겁니까?"

덥수룩한 수염의 조형사가 꺼칠한 표정으로 전 형사에게 물었다. 조 형사와 함께 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의 집 부근에서 잠복근무를 서고 있다 긴급연락을 받고 출동한 전 형사는 피로가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대답했다.

"사람이 죽었다더군."

"살인사건이군요."

조 형사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반문한다.

얼마 전, 세한 무역에서 겪은 기괴한 일 이후로 이 귀엽지 않은 후배는 한층 더 태도가 불량스러워진 것 같다. 지금도 하늘같은 선배가 말씀하시는데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이나 해대고 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전 형사의 다음 말에 두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순경 둘이 당한 모양이야."

"엇!"

조 형사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삼켰다.

순경이 죽었다면 이것은 단순한 살해사건 이상의 문제가 된다. 순경은 모두 총을 소지하고 있다. 그런 그들이 제압되었다는 것은 범인이 상당한 무장을 하고 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설혹 별 다른 무시 없이 경찰들을 제압했다 하더라도 이제는 경찰의 무기를 습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골치 아픈 것은 감히 경찰을 해치울 수 있는 범인의 광기다. 이 정도 되면 잡으려는 쪽도 목숨을 걸어야 한다.

"어쩐지 경비들까지 출동했다 했더니."

조 형사가 경비라고 부르는 KNP(Korean National Police 868 Group) SWAT는 1983년에 신설된 경찰 특공대로 통상 KNP868로 불리고 있다.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의 특수결찰 SWAT를 모델로 만들어졌지만 워낙 조용한 나라라서 그런지 소규모의 인질극이나 납치극 외에 아직 별 다른 활동이 없었다.

월드컵과 같은 국제 행사에서 주요 인사들의 호위임무를 주로 수행했기 때문에 경찰들 사이에서는 경비라고 불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아직까지 별 다른 성과가 없다 해도 스틸코아탄도 막을 수 있다는 방탄조끼와 텍티컬 라이트, 레이저 사이트가 달린 MP5A5 등의 중화기로 무장한 KNP 대원들은 위험한 현장 근무에서 더없이 듬직한 아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집에 숨어 있는 범인이 대체 누군데 특수진압 차량까지 출동한 겁니까? 테러리스트라도 한 부대 입국한 모양이죠?"

조 형사의 물음에 전 형사는 담배를 입에 물며 대답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바깥 숲 쪽에는 707부대 애들까지 배치되었다고 하더군."

"맙소사. 이건 테러 정도가 아니라 전쟁 수준이로군요."

특전사 예하의 707 특수임무대대는 대한민국 최정예 요원들만을 모아놓은 특수부대다. 그들의 활약상은 뚜렷이 알려진 바가 없지만, 군관계자들에게 대한민국에서 가장 뛰어난 특수부대를 고르라면 누구나 주저 없이 입에 올릴 부대가 바로 그들 707 특수부대다.

"이렇게 난리인데, 신기하게 똥파리들이 하나도 안 보이네."

똥파리란 기자들을 말하는 은어다. 지저분한 곳에 파리가 보이듯 귀신같이 냄새를 맡고 모여든다고 해서 경찰들은 기자들을 그렇게 부르곤 했다.

"보도통제가 내려졌다더군."

"허어. 큰일은 큰일인 모양이군요."

군부독제 체제라면 모를까, 대통령도 우습게 씹히는 문민정부 시대에 언론의 접근까지 제한할 정도면 사안의 심각성은 생각보다 훨씬 대단하다는 얘기가 된다. 그야말로 대 무장간첩작전에 준하는 군경 여합작전이 아닌가.

"그런데 왜 진입을 않고 있죠? 인질이라도 잡고 있는 건가요?"

"그런 보고는 받지 못했다. 얼핏 들으니 협상을 요구하는 전화 따위는 아직 없었다고 하더군."

"그럼 왜 청승맞게 비를 맞고 이렇게 대기하고 있는 겁니까? 이 정도 병력이면 테러리스트라고 한순간에 쓸어버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물론 상대가 테러리스트라면 이렇듯 소총의 유효사거리 안에서 한가롭게 잡담이나 나누고 있을 수도 없을 테지만 말이다.

"한 사람을 기다리는 중이라더군."

"예?"

조 형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고작 한 사람 때문에 이 많은 병력이 적을 코앞에 두고도 진입을 못한다? 청승맞게 비까지 맞으면서?

어이없는 일이다. 전 형사는 후배의 얼굴이 일그러져 가는 것을 감상하며 라이터를 담배에 가져갔다. 손으로 감싸며 몇 번인가 라이터를 당겼지만 강한 바람 때문에 자꾸만 불이 꺼져 버렸다.

"젠장. 되는 일이 없군."

라이터를 쓰레기통에 신경질적으로 던져버린 그는 짜증이 한 가득인 얼굴로 어둠 속에 음습하게 녹아든 이층 가옥을 노려봤다. 기한도 없이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는 건 그 역시도 싫은 일이다.

그때 손 하나가 나타나 그의 입에 물려 있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제트엔진 같은 소음을 발하는 파란 불꽃은 바람에도 꺼지지 않았다.

"바람이 심한 날은 지포나 터보라이터가 좋지요."

뻐끔뻐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쳐다보니 말끔한 외관의 낯선 젊은이었다. 전 형사는 버릇처럼 눈동자를 빙글 굴리며 청년을 분석했다.

나이는 대략 이십대 중반. 탄탄하게 다져진 몸을 보니 운동깨나 한 듯하다. 불을 붙여줄 때 잠깐 본 손은 크고 탄탄한 굳은살로 뒤덮여 있었다. 적어도 취미로 운동을 하는 작자는 아니란 소리다. 밤송이처럼 뻣뻣하고 짧은 머리칼은 멋이라기보다는 지독하게 실용적인 냄새를 풍겼다.

"대기한 지 얼마나 됐습니까?"

짧은 머리칼의 청년이 물었다. 그의 시선은 음산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는 전원주택에 고정되어 있었다. 뽐내지는 않았건만 강한 자신감이 청년의 전신에서 은은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공무원이군.'

전 형사는 청년이 공무원일 것이라 단정했다. 그것도 젊은 나이에 꽤 높은 요직에까지 오른 엘리트.

"2시간. 먼전 온 사람들은 3시간째라더군."

틀림없이 자신보다 계급이 높을 테지만 굳이 신분을 밝히지 않은 상대에게까지 존대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래 기다리셨군요."

전 형사에게 고개를 돌린 청년은 가지런하고 깨끗한 치아를 보이며 웃었다.

"이제 곧 돌아가실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는 느긋한 걸음으로 경찰 통제선으로 다가갔다. 완전무장한 특수 부대 요원들이 험한 표정으로 앞을 가로막았지만 그가 양복 상의를 젖혀보이자 그대로 부동자세로 굳어버렸다.

시장 바닥처럼 어수선하던 집 주변의 사람들은 그제야 청년의 존재를 확인하고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던졌다.

"사람들의 시선은 언제나 적응이 안 되는군."

어깨를 으쓱해 보인 청년은 현관문을 부드럽게 밀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누굽니까? 저 작자는."

조형사가 멍한 눈으로 청년이 사라진 문을 응시하며 물었다.

"모른다."

전 형사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빙글 돌리며 대답했다.

"하지만 우리가 세 시간이 넘도록 기다린 자가 바로 그인 것만은 확실하겠지."

그는 자동차의 범퍼에서 엉덩이를 떼었다. 기다리던 사람이 왔으니 굳이 비를 더 맞을 이유가 없을 것이라 생각에서였다. 차 안의 눅눅한 훈기를 느끼고 싶었다.

"좀 쉬자."

허나 그가 차 문을 열 때까지 조 형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계속 비를 맞을 텐가?"

전 형사가 컬컬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러나 조 형사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열려진 문 안쪽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전 형사가 그의 어깨를 짚자 그제야 고개를 돌리며 실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사람, 우산을 안 쓰고 있었는데, 옷이 전혀 비에 젖지 않았어요."

쏴아아아아.

빗소리가 굵어졌다.

"휘유."

현관으로 들어선 청년은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거실을 비롯한 1층의 상태는 그야말로 풍비박산. 이제 제주지역에 상륙했다는 태풍이 이 집에만 먼저 불어닥친 것처럼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꽤나 사치품으로 보이는 대형 LCD 텔레비전은 반으로 부서져 있고, 원목으로 짠 고급 탁자와 소파들은 톱질이라도 한 것처럼 박살이 나 있었다. 소파에서 터져 나온 듯한 솜뭉치와 스펀지 조각이 굵은 눈송이처럼 잔해를 덮고 있었다.

"꽤 화려하게 해치웠는걸."

신발을 신은 채 뚜벅뚜벅 걸어 실내로 들어서자 비로소 피비린내가 확 하고 끼친다. 냄새를 날려버리려는 듯 청년은 손가락으로 코를 몇 번 훑었다.

초현실주의 작가의 거대한 작품처럼 엉망이 된 거실을 지나가는 눈초리로 쓱 훑어본 청년은 바닥에 질질 끌린 듯한 핏자국을 따라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촤촤촤촤촤.

시끄러운 물소리가 그를 반겼다.

주방 역시 반쯤 뭉개진 상태였다.

비스듬히 무너진 싱크대에서 토해진 식기들이 바닥을 어지럽히고 있었고, 활짝 열린 수도꼭지에서 쏟아진 물줄기가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주부로 추정되는 시신은 물바다가 된 부엌에 깨진 사기그릇과 함께 반쯤 잠겨 있었다. 죽기 직전까지 발버둥친 듯 옷은 갈가리 찢겨진 채였고, 손톱도 빠지거나 꺾여 있었다. 이리저리 비틀린 그녀의 몸은 당시의 극심했던 고통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청년은 주방에서 두 가지 중요한 흔적을 발견했다.

하나는 거실의 소파를 토막 낸 것처럼 네 가닥으로 뜯겨진 벽지였고, 다른 하나는 시신의 상태였다.

시신은 머리가 없었다. 아니 있기는 했다. 다만 두개골만 남아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피부는 질펀하게 녹아 긴 머리와 함께 액체 풀처럼 바닥에 게게 눌어붙어 있었고, 근육 조각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녀의 얼굴에는 뇌와 눈알이 있어야 할 자리가 훤한 동공으로 텅 비어 있었다.

"피부를 녹이고 골수를 빨아먹었다라. 그런 악 취미를 가진 녀석이 몇 있긴 한데."

청년은 이런 시신을 자주 접했던 듯, 당장 토악질을 해도 충분할 만큼 참혹한 광경을 앞에 두고도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지갑에서 은백색의 짧은 막대를 꺼내 끈적끈적 녹아 있는 시신의 얼굴 근육에 슬쩍 찔러 넣었다.

이물질이 닿은 피부가 지독한 냄새와 함께 흰 연기를 뿜어냈다. 그 냄새만으로도 청년은 대충 결과를 짐작할 수 있었다.

띠.

과연 막대 끝에 붙은 발광램프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독이군."

후보로 점찍었던 놈들 중에 독과 관련된 종은 딱 한 종류뿐이다.

"놈이군."

청년은 상의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0번 버튼을 꾹 눌렀다.

"여~ 대장? 찾았어. 음.... 역시 대장의 추측대로 스크래그(Scrag)(민물트롤(Freshwater Troll). 아가미가 달린 트롤로 강에서 서식하며, 강가나 배위의 존재들을 습격하는 몬스터이다. 스크래그의 생김새는 3미터가 넘는 큰 키에 팔다리가 가늘고 긴 반면 입은 대단히 넓은 모양을 하고 있다. 독특하게도 스크래그의 재생능력은 오직 물속에서만 작용한다고 한다.)였어. 후딱 해치우고 갈게."

랩을 하듯 흥겹게 일련의 말들을 쏟아낸 그는 대답도 듣지 않고 핸드폰의 폴더를 닫았다.

"자 그럼. 이놈들이 어디에 있을까나."

일층에 큰 방이 두 개 있지만 별 다른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방에 놈들이 있었다면 굳이 그가 찾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벌써 게걸스럽게 달려들었을 테니까.

청년의 발은 자연스럽게 2층으로 향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그는 또 한 구의 시신을 만났다.

경찰제복. 신고를 받고 출동했던 경찰인 모양이다. 그는 주방의 시신과 달리 얼굴이 멀쩡했지만 대신 가슴이 깊게 함몰되어 있었고, 등 뒤로 터져 나온 피가 제복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해머 같은 것으로 찍어낸 걸까?

청년은 조심스럽게 시신의 고개를 돌렸다. 왼쪽은 깨끗했다. 그러나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관자놀이 쪽으로 손가락이 드나들만한 작은 구멍이 보였다. 드릴로 파낸 듯이 머리통 안쪽까지 뚫려 있는 상처 부위엔 으깨놓은 두부조각 같은 뇌수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역시나 골을 파먹은 흔적이다.

'아니. 이 경우는 빨아먹은 거라고 해야겠지.'

다행이라면 이 경관은 가슴이 함몰된 최초의 일격에 심장파열로 즉사했을 것이란 사실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주방에서 본 주부의 경우처럼 자신의 골수가 남에게 빨리는 끔찍한 경험을 했어야 했을 것이다.

"하긴 압사당하는 것도 그다지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겠지."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안구가 돌출되었을까. 청년은 장갑을 낀 손으로 숨진 경찰의 눈알을 제자리에 넣어주고, 눈을 감겼다. 일을 마친 그는 벌떡 몸을 일으키자마자 달음질하듯 이층 계단을 한꺼번에 뛰어올랐다.

바람이 일 정도로 날쌘 동작이었지만 작은 발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이층엔 방이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넓은 거실과 화장실이 하나. 이층 역시 일층과 마찬가지로 아수라장이었다. 청년의 고개가 반쯤 열려진 방으로 향했다.

형광등이 깜빡깜빡 점멸하고 있는 방의 안쪽. 기묘한 소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찌극. 쩝. 찍. 짜각짜각.

청년은 들고양이처럼 조용한 움직임으로 방 가까이 접근했다. 그리고는 열려진 문틈 사이로 내부를 살폈다. 단출한 장식의 실내엔 집주인으로 보이는 사내가 사지를 활짝 펼친 자세로 누워있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맡에 그가 찾고 있던 것이 달라붙어 있었다. 어떻게 보면 거대한 개구리 같은 모양이었지만 세상의 그 어떤 개구리도 인간의 뇌수를 빨아먹지는 않는다. 괴물은 사내의 정수리에 난 구멍으로 길고 가는 혀를 쑤셔 박은 채 뇌수가 풍기는 비린내를 정신없이 탐하고 있었다.

끼이이이익.

청년은 일부로 소리 나게 문을 열었다.

카악.

놈의 고개가 번개같이 돌아온다. 얼굴의 반이나 차지하는 두 개의 큰 눈알과 세로로 쭉 갈라진 파충류 특이의 녹색 눈동자.

"이런 식사를 방해한 건가?"

청년은 어색하게 웃으며 문을 완전히 열었다.

까드드드드드.

놈의 목울대가 풍선같이 부풀더니 바다지 안쪽을 긁어대는 듯한 기묘한 소리를 낸다. 한밤에 누는 개구리의 울음을 백 배쯤 부풀린 것 같은 소음. 집안으로 들어서면서부터 조금씩 풍기던 비린내가 서너 배쯤 독해졌다.

"기분이 꽤나 상했나 보군."

까드드드드.

두 번째 울음. 이번엔 앞서와 달랐다. 울음과 함께 놈이 덤벼든 것이다. 커다란 덩치에 비해 날렵한 움직임이었다. 발을 박찬다고 생각한 순간 이미 놈의 육중한 그림자가 청년의 머리를 덮어오고 있었다.

"성질도 급하셔라."

청년은 여유 있게 웃으며 앞선 발을 슬쩍 뒤로 뺐다. 물갈퀴가 펄럭이는 괴물의 앞발이 그를 스쳐서 문짝을 후려갈겼다.

퍽.

합판으로 만든 문짝이 허무하게 뚫리며 그 뒤의 벽이 쿵하고 진동한다.

"휘유."

괴물의 일격에 거미줄처럼 쩍쩍 금이 간 벽의 모습에 청년은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무시무시하군."

괴물이 가볍게 휘두른 위력은 단순히 무시무시한 정도가 아니다. 스치기만 해도 뼈와 살로 된 인간의 연약한 육체 따위는 손쉽게 허물어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청년의 얼굴에서는 긴장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입가에 말끔한 미소마저 맺혀있었다.

"스크래그. 한 번쯤 트롤의 종자와 붙어 보고 싶었지."

까드드드드드.

그의 말에 호응하듯이 괴물이 긴 울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괴물의 녹색동체가 거대한 해일처럼 밀어닥쳤다.

콰쾅쾅. 퍼더더덕.

"내부에서 건물 철거라도 하고 있는 거야?"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는 가옥들. 조 형사가 황당한 표정을 금치 못했다. 그런 것은 전 형사를 비롯한 현장의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건물의 소란은 대단했고, 또 요란했다, 이따금씩 멀쩡한 벽이 폭발하듯 터져 나가서 사람들이 대피하는 소동까지 빚었다.

긴박감 넘치는 고함과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총소리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기중기로 건물을 때려부수는 듯한 지금의 소음은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떤 무기를 쓰면 저렇게 할 수 있는 거야?"

전 형사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아는 한 화약 냄새와 격총 소음을 동반하지 않고 이렇게 화려한 파괴의 미학을 선보일 수 있는 무기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한 가지는 있다.

"혹시...."

조 형사가 요상한 표정으로 묻는 듯한 시선을 던지자 한창 담배를 뻐끔거리던 전 형사가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아마도 그도 그쪽 부류인 것 같다."

전 형사와 조 형사가 공유하고 있는 비밀. 발칸의 일로 만났던 병규와 이한영. 이른바 능력자라 부르는 사람들이라면 맨손만으로도 충분히 저런 소란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저렇게 부서지는데 집이 온전할 수나 있을까?"

조 형사의 생각에 호응이라도 하듯 건물의 오른쪽 귀퉁이가 불안하게 흔들리더니 도미노 쓰러지듯 요란스럽게 무너져 내렸다. 장대 같은 빗줄기 속에서도 먼지구름이 몇 미터씩이나 치솟고 부서진 건물 잔해가 폭죽처럼 사방으로 비산했다.

"젠장."

전 형사와 조 형사는 욕을 씹어 삼키며 급히 차에 탑승했다.

후두둑.

허공 높이 치솟은 잔해들이 쏟아지는 비와 함께 바리게이트 대신 주차되어 있던 경찰차 위로 떨어지자 병든 닭 울음소리 같은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귀 따갑게 울려댄다. 현장 책임자는 급히 통제선을 10미터 바깥으로 물렸다.

쏴아아아아아.

소란스러운 상황과 경쟁이라도 하듯 비가 더 거세졌다.

전 형사는 와이퍼로 앞 유리창에 부옇게 쌓인 먼지를 치우려다 생각을 달리했다. 작은 먼지 같은 것이라면 모를까 나뭇가지나 돌조각을 와이퍼로 밀었다간 유리창에 흠집만 생길 것이다.

"귀찮은 날이군."

전 형사는 좌석 뒷자리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던 수건을 꺼내들고 차 밖으로 나섰다. 마침 조 형사도 쭈뼛하며 그를 따라 나왔다. 전 형사는 수건을 그에게 던져주었다.

"후배. 좀 닦아라."

조 형사의 입술이 찌그러졌지만 선배의 근엄한 미소에 군말 없이 수건인지 걸레인지 불분명한 헝겊쪼가리를 받아들었다. 불성실하게 걸레질을 하고 있는 조 형사를 보고 아예 세차를 시켜 버릴까 고민하고 있는데, 절반쯤 허물어진 가옥의 현관문이 열렸다.

좀 전의 밤송이머리 청년이 배시시 웃으며 나왔다.

이층 집 하나를 송두리째 날려놓은 것치고는 의외로 그는 멀쩡한 모습이었다. 상의가 조금 너덜너덜해지긴 했지만 현관만 남고 홀랑 다 날아간 가옥에 비할 수 있을까.

그가 모습을 보이자마자 기독타격대 뒤쪽에 대기 중이던 특수 차량에서 방사능센터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흰 가운의 사내들이 관을 닮은 긴 알루미늄 상자를 끌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청년이 현관문에서 비켜서며 그들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핀셋이 필요할 게요."

놀라는 사내들의 표정에 희미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 청년은 상의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 난리 중에도 용하게 핸드폰은 멀쩡했다. 그는 예의 0번 버튼을 눌렀다.

"잡았어. 대장. 아아. 그런데 사로잡는 건 실패했어. 아아. 시끄럽게 소리치지 말라고. 나도 최선을 다한 거니까. 그런데 약간의 문제가 생겼어. 목격된 스크래그가 모두 몇 마리라고 했지?"

빈둥빈둥 놀면서 시급은 딥따 센 알바자리?

발칸과 살 떨리는 대결을 펼쳤던 병규는 집에 오자마자 골아떨어졌다. 마치 잠에 걸신이 들린 사람처럼 잠에 취해있던 병규는 다음 날 오전 일찍 일어났으나 먹을 게 없다는 심각한 사태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동안 경찰서에 출근도장 찍느라 먹을 것을 전혀 장만하지 않은 것이다.

할 수 없이 늘어지게 잠에 취해 있는 호랭이를 어깨에 짊어지고 시내로 나선 병규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옷 보따리를 끌어안고 길바닥에 나앉은 경애를 보게 되었다.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결국 야간 구두닦이가 망해버려서 집세도 못 내게 되고 쫓겨나게 된 거란다.

보따리를 부여잡고 서럽게 엉엉 울어대는 그녀를 보며 병규와 호랭이는 난감해졌다.

"어떻게 할 거냐?"

"음."

잠시 고민하던 병규는 삶의 비애가 어쩌고 하며 훌쩍거리는 경애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괜찮다면 우리 집에 와도 될 것 같은데. 이층이 비어 있거든. 물론 나 혼자 사니까 불편한 건 좀 있겠지만."

병규의 말에 서럽게 울던 경애가 어깨를 움찔 떤다. 옷소매로 눈물자국을 훔친 그녀는 빨갛게 부은 눈우로 질문을 던졌다.

"계약금과 월세는 얼만데요?"

"계약금? 그런 거 안 줘도 되는데."

"안 돼요. 길바닥에 나앉는 한이 있어도 남의 집에 공짜로 얹혀 살 순 없어요."

그녀는 의외로 단호했다. 병규는 생각했다.

'이미 길바닥에 나앉아놓고선.'

그래도 이처럼 완강하니 어쩔 수 없다.

"좋아. 계약금 10만 원에 월세 만 원으로 하자."

겉치레가 뻔한 조건. 그러나 소녀는 이번에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비싸요. 계약금은 500원짜리 네 개, 월세는 500원짜리 한 개로 해요."

"엥. 계약금 이천 원에 월세는 오백 원?"

듣고 보니 황당하다. 이건 칼만 안 들었다뿐이지 날강도가 아닌가.

'차라리 이럴 거렸으면 그냥 공짜로 들어오던가.'

병규는 황당했다. 병규가 그녀의 엉뚱함에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리고 있는데 불안한 표정으로 흘끔흘끔 그를 올려다보던 경애는 혹시나 그가 딴마음을 품을까 새로운 조건은 제시한다.

"대, 대신 청소랑 빨래랑 설거지는 제가 할 게요. 그러면 안 될까요?"

애처로운 그녀의 목소리.

별규는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이 소녀는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데 천부적인 재주가 있는 것 같다.

"좋아. 잘 부탁해."

병규는 흔쾌히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두 소능로 조심스레 맞잡으며 경애는 머리가 땅에 닿을 듯이 꾸벅 고개를 숙여보였다.

"사장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샤방한 미소와 함께한 그녀의 한 마디.

"사, 사장님?"

병규의 얼굴이 어색하게 일그러졌다.

경애를 집으로 데려온 병규는 일단 욕실부터 개방했다. 얼굴에 묻은 검댕이부터 지우자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일단 말끔하게 단장하고 나온 그녀를 본 병규는 입이 쩍 벌어졌다. 이건 완전 사람이 달라 보인다. 검댕이가 묻어있을 때에도 좀 괜찮은 정도였지만 깨끗이 씻겨 놓으니 이건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엄청나게 예쁜 것이 아닌가.

발칸의 일로 우연히 알게 된 이한영이 부드러운 외모와 그에 상반되는 카리스마로 사람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는 스타일이라면, 경애는 통통 튀는 고무공처럼 귀엽고 발랄했다.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머금어지는 그런 아기자기한 귀여움을 가지고 있었다.

하여간 그렇게 그들의 동거는 시작되었다.

처음 한동안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채 한 달이 지나기도 전에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원인은 생활비.

돈이 다 떨어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경애야 월세 500원의 조건이면서도 지가 먹을 건 지가 벌어오고 가끔씩 보너스(?)라는 해괴한 이유를 들어 찬거리도 들고 오지만, 이놈의 털북숭이 담배 마니아는 하등 도움되는 것이 없다.

무슨 공장 굴뚝하고 친분관계가 있기라도 한 것인지 조막만 한 덩치에도 불과하고 담배를 하루에 무려 세 갑씩 피워댄다. 그것도 입이 얼마나 고급인지 국산담배 양담배 가리지 않고 모조리 사 달래서 뻑뻑 피워대더니 마지막에 결정했답시고 고든 것이 가장 비싼 담배였다.

그나마 양심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뒤늦은 애국심의 발로인지 양담배 선택 안 해준 것만은 무척 다행이다. 하지만 공장 굴뚝처럼 끊임없이 담배를 치워 없애는 호랭이는 그의 재정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가뜩이나 담배 값도 비싸진 판에.

그동안 수차례에 걸쳐 금연운동을 벌여봤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담배를 못 끊을 바엔 집을 떠나라는 협박에 호랭이는 원래 몸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돌봐주는 계약조건엔 지속적으로 담배를 공급하는 조건도 자동적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며 뻔뻔하게 맞섰다.

결국 병규는 포기상태. 결국 병규네 일가(?)는 파탄재정을 향해 숨 가쁘게 달리고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해야겠다."

어느 날 불현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병규가 소리쳤다. 호랭이는 신념으로 똘똘 뭉친 그의 선언에 깊은 감명을 받은 듯 한마디 감상을 전했다.

"지랄한다."

"...."

호랭이의 정감 넘치는 대사에 감격한 듯 병규는 잠시 침묵했다. 물론 미려한 언어적 유희로 톡 하고 쏘아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유감스럽게도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그의 자취방에서는 둘 말고 한 사람이 더 있었던 것이다.

"신기하네. 호랭이는 병규 오빠가 말을 할 때마다 왕왕 짖어. 꼭 대답하는 것 같아."

호랭이를 껴안고 있던 김경애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호랭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아직까지 병규 혼자뿐. 덕분에 통괘하고 신랄한 호랭이의 대사가 그녀에게는 모두 앙앙거리는 견어(犬語 : 일명 개소리)로 들리는 것이다.

"휴."

호랭이의 한마디에 목뒤까지 치솟은 혈압을 간신히 식힌 병규는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이러다 서른도 안 돼서 고혈압으로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내가 어쩌다 저 골칫덩어리를 껴안게 되었누.'

인생 다 산 늙은이처럼 한숨이 절로 솟는다.

'그런데 무슨 일을 해야 하나.'

일은 하긴 해야겠는데, 공부와 병행하려니 여간 조건이 빡빡한 게 아니다. 수업 때문에 천상 야간 파트타임자리를 구해야 할 판인데, 그런 자리가 흔한 것도 아니고 있다고 해도 월급이 짜서 벌이가 영 시원찮았다.

"일단을 화보부터 뒤져봐야겠군. 에휴. 어디 일 적게 하고 돈 많이 주는 일자리 없나."

병규가 푸념할 때다.

"오빠. 내가 알아봐 줄까?"

경애가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무엇이!!"

두 눈을 번뜩이던 병규는 초롱초롱한 그녀의 표정에 '아뿔싸'하며 탄식을 토했다. 그녀의 예전 직업이 떠올랐던 것이다. 지금은 페스트푸드 점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형편이 많이 좋아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직업은 야간 구두닦이. 파산하기 딱 좋은 아이템에 올인하다 결국 그녀는 길거리에 나앉았다.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애써 창밖의 달을 응시하며 넌지시 말을 걸었다.

"흠흠. 뭐, 뭘 알아봐 준다는 거야?"

"빈둥빈둥 일하면서 월급은 딥따 쎈 알바 자리."

"무엇이!!!"사기꾼의 전형적인 대사 같은 경애의 말에 병규의 인내심은 너무도 쉽게 한계를 보였다. 끊어질 듯 홱 돌아간 모가지와 자동차 전조등을 방불케 하는 강렬한 눈빛, 그리고 턱을 타고 줄줄 흘러 내리는 침이 그의 현재 심리상태를 그대로 반영했다.

"쓰, 쓰읍. 정말? 정말이야?"

"그러엄~. 날 믿으라고 오빠. 내가 이래뵈도 발이 딥따 넓잖아."

"흠. 하긴 여자치고는 발이 좀 크긴 하... 윽."

병규의 명치에 통렬한 일격을 선사한 경애는 불만스레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흥. 내가 알아봐 주는 게 싫은 거야? 싫음 말고."

"겨, 경애야. 농담이야. 농담. 하하하. 설마 내가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했을 리가 없잖니."

병규는 그녀를 달래느라 한동안 진땀을 흘려야 했다. 대체 발 크다고 말한 게 왜 삐칠 사유가 되는 건지 도무지 이해 못할 그였다. 그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부족하여 은근히 눈빛으로 호랭이에게 압력을 가했다.

"협조 안 하면 담배 없습니다."

"큭. 사악한 놈."

여간한 일에는 미동도 않는 호랭이였지만 담배문제 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신선 체면에도 불구하고 경애에게 온몸을 바쳐 갖은 아양을 떨어야 했다.

병규의 헌신적인 봉사 때문인지 아니면 호랭이의 아양 때문인지 결국 그녀는 일자리를 알아봐 주겠다며 쫄래쫄래 나갔다.

"흑흑. 공짜로 방도 나눠준 은인에게 이래도 되는 거예요? 나 꼭 이러고 살아야 해요?"

그녀가 사라진 후, 병규는 홀로 콜라 병을 깔짝이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옆에서 담배를 꼬나문 호랭이가 그의 발을 두드리며 위로했다.

"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니. 다 그 놈의 돈이 원수지."

다음 날, 그녀는 용케 편의점 알바 자리를 구해 왔다.

"손님 오면 계산이나 하고 평상시엔 빈둥빈둥 놀면서 가게 정리나 하면 돼 오빠."

"오오!"

경애의 말에 병규의 두 눈은 감격의 빛으로 일렁였다. 듣고 보니 정말로 빈둥빈둥 놀면서 돈 벌 수 있는 획기적인 알바 자리인 것 같았다.

"고맙다. 경애야. 흑흑. 이 은혜 평생 잊지 않으마."

"응. 평생 잊지 마."

"... 저기, 경애야 이런 경우엔 보통 아유 뭐 이런 걸 가지고. 라는 식의 말해주는 거 아니니?"

"응? 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하는 그녀. 차마 그게 예의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하하하. 뭐 그런 식의 농담도 있다는 거지 뭐."

"호호호. 정말 재미없는 농담도 다 있네. 호호호."

"...."

썰렁한 대화였다.

하여간 그렇게 병규는 편의점 알바를 시작했다. 그리고 채 하루도 지나기 전에 그는 편의점 가판대를 붙들고 '속았다'를 연발해야 했다.

편하게만 보이는 편의점은 사실 전혀 편하지 않았던 것이다.

단순히 카운터에 앉아 POS기라 불리는 기기로 돈 계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냉장고의 술이나 음료수도 틈틈이 꽉꽉 채워 넣어야 하고, 또 새벽 시간대에 쏟아져 들어오는 본사의 배송을 받아 매대에 진열해야 한다. 웃기는 것은 매대 정리나 냉장고를 채울 때에도 손님이 들어오는지 수시로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건을 훔쳐 가는 엉뚱한 놈들이 심심찮게 있기 때문에 항상 손님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골치 아픈 것은 취객이다. 어디서 퍼 마셨는지 술이 머리꼭대기까지 올라서는 아무나 보고 삿대질이고 욕이다. 처음에는 살살 달래도 보고 얼러도 보지만, 열이면 둘 셋 정도는 멱살잡고 흥분하게 된다. 덕분에 병규는 일 시작한 지 하루만에 경찰서에 출근도장을 찍어야 했다.

"사악한 것. 쉬운 알바 자리를 구해 준다고 하더니. 결국 이거였냐."

병규는 앞치마를 입에 문 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 모습을 한심스fp 보던 호랭이가 혀를 차며 한마디 던진다.

"쯧쯧. 그 아이가 보기엔 빈둥빈둥 놀면서 일하는 것으로 보였겠지. 걔가 무슨 일을 했는지 잊은 거냐?"

"...."

병규는 할 말이 없었다. 생각해보니 배부른 소리였던 것이다. 경애는 철도 들기 전부터 세상을 떠돌았다던데. 변변한 옷이 없어 어디 깔끔한 알바 일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투자금이 적다는 이유로 구두닦이를 했을까.

"헤요. 일이나 해야겠습니다."

병규는 기지개를 쭉 켜며 일어섰다. 경애를 생각하니 도저히 불평을 할 수가 없었다.

날개도 없는 놈들이 공중전이라닛!

"3,800원입니다. 4,000원 받았습니다. 여기 200원입니다. 안녕히 가세요."

기계적으로 계산을 마친 병규는 편의점을 나서는 손님에게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이젠 제법 능숙해졌는걸."

손님을 대하는 태도를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점장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하하하. 일 주일이나 했는데 당연한 결과지요."

일 주일 만에 비로소 일에 적응된 것 같다는 말이 무에 그리 기쁜지 병규는 가슴을 쑥 내밀어 보이며 쾌활하게 웃었다. 서른 중반쯤 되어 보이는 점장이 허허 하고 따라 웃는다.

"녀석. 자신만만해 하는 것은 좋은데, 그러다 언젠가 크게 한 방 먹을지도 모른다."

"걱정 마세요. 사나이 병규 철학에 한방에 인생 역전한은 일은 있어도 한방에 패가망신하는 경우는 없으니까요."

"하하. 네 말처럼만 되면 얼마나 좋겠냐."

껄껄 웃은 점장은 벽에 걸린 시계로 시선을 옮겼다. 시침은 새벽 4시를 막 지나가고 있었다.

"이런. 벌써 시간이 됐구나. 워킹 채워 넣고 집에 갈 준비해라."

"네. 알겠습니다."

앞치마를 챙겨든 병규는 냉장고를 채우기 위해 백룸으로 향했다. 불황이라 그런지 냉장고의 물건들도 별로 빠지지 않았다. 금방 일을 끝낸 그는 대충 손을 씻고 밤새도록 두르고 있던 냄새나는 앞치마를 옷걸이 위로 집어던졌다.

"아우. 드디어 끝이다."

길게 기지개를 켜자 새벽 내내 혹사당한 뼈마디가 비명을 질러댄다.

"에고. 허리야."

"녀셕. 한창 나이에 엄살은. 그만 낑낑대고 얼른 집에나 가."

"네네네."

근무시간표에 근무시간을 적어 넣은 병규는 가볍게 뛰는 걸음으로 편의점을 나섰다.

"가보겠습니다."

"그래. 수고 많이 했다."

점장이 그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직 차기만 한 새벽. 병규는 어둠과 여명이 혼탁하게 뒤섞인 푸르스름한 도시 속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텅 빈 새벽의 도시는 참 묘한 느낌을 준다. 잠들어 있다기보다는 죽어 있는 느낌이랄까.

도시는 두 가지 얼굴이 있다고 말한다. 낮의 활기찬 도시와 그리고 유흥가의 현란한 네온사인만큼이나 흥청망청 녹아드는 환락의 도시.

병규도 얼마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에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그런 생각이 많이 변했다.

그가 본 도시는 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활기와 환락. 그리고 그 이면에 잠들어 있는 죽음만큼이나 고즈넉한 적막의 얼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새벽의 도시는 언제나 이렇게 숨 막히는 표정이다.

아마 동트기 전의 미묘한 어둠이 그런 느낌을 들게 하는 모양이다.

뿌다다다다다다.

스모그인지 안개인지 구별할 수 없는 뿌연 습막을 헤치며 병규는 스쿠터를 달렸다. 침침하게 쏟아지는 비로 시계가 좋지 못했다.

다행이라면 도로가 텅 비어 있다는 것. 이따금씩 지나다니는 택시를 제외하면 차도 거의 볼 수 없다. 비행장의 활주로처럼 훤하게 뚫려 있는 도로를 보면 누구나 질주하고 싶어지는 것이 본능이지만 그가 타고 있는 스쿠터는 시속 60Km가 한계다. 그것도 최고 속도로 계속 달리다 보면 한 시간도 못 가서 엔진이 눌어붙을 것이다.

"이 굼벵이 어떻게 좀 안 되겠냐? 차라리 내가 뛰는 게 훨씬 빠르겠다."

점퍼의 후드에 들어가 있던 호랭이가 그의 어깨에 두 발을 턱 올리며 빈정거렸다. 원동기의 불안한 움직임에도 태연한 것을 보니 꽤 여러 번 타본 모양이다.

"일해서 돈 버는 거 기왕이면 멋들어진 차나 아니면 좀 큰 오토바이를 살 것이지. 촌스럽게 스쿠터가 뭐냐? 스쿠터가? 차라리 세발 자전거를 몰지그래?"

호랭이가 놀린다. 병규는 그저 씩 웃고 말았다. 자기 사정을 뻔히 알고 있는 호랭이니까.

병규가 나니는 고등학교는 도시의 외곽에 자리하고 있어서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언제나 30분 정도는 스쿠터로 달려야 했다. 평소라면 새벽의 찬 공기를 가르며 달리는 것이 꽤 즐거운 레포츠가 될 수도 있겠지만 오늘은 추적추적 비가 내려 영 꽝이다.

확실히 밤일은 몸에 좋지 않은 모양이다. 저녁부터 새벽까지의 일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전신이 노곤해진다.

"역시 쉬운 일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아."

병규는 쓴 웃음을 머금으며 스로틀을 당겼다.

끄아아아아앙.

아스팔트를 두드린 스쿠터의 요란한 엔진음이 꼭 아이의 울음 소리 같다. 하긴 보잘것없는 출력으로 빗속을 전속력으로 달리니 힘이 부치기도 할 것이다.

소음만 심한 스쿠터로 기분을 내던 병규와 호랭이가 귀를 찢는 듯한 풀 브레이크의 날카로운 소음을 들은 것은 편의점을 출발한지 10여 분가량이 지났을 때의 일이었다. 빗소리와 요란한 스쿠터의 엔진음 속에서도 사고의 굉음은 선명하게 전해져 왔다.

"사고다."

과속을 하던 차가 빗길에 미끄러지는 사고는 흔한 편이다. 방금 사고가 났으니 어쩌면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경우도 있을지 모른다.

병규는 즉시 스로틀을 당겼다.

50cc 엔진이 비명을 지르며 힘겨운 질주를 시작했다. 어깨에 매달려 있는 호랭이가 관성에 밀려 후드로 곤두박질쳤다.

"너 무슨 운전을 이따위로 해!"

호랭이의 타박소리가 들렸지만 병규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사고 현장엔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갤로퍼 한 대가 가드레일을 뚫고 도로 밖 도랑을 뒹굴고 있었다. 다른 차와 충돌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운전미숙이거나 십중팔구 졸음운전이리라.

병규는 119에 전화를 하며 곧장 가드레일을 타 넘었다. 혹시 부살자가 있으면 차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잠깐."

호랭이가 그의 어깨를 살짝 물으며 경고했다.

"수상한 기운이 느껴진다."

병규는 달려가려던 생각을 멈추고 가드레일에 등을 기댄 후 전복된 차량을 유심히 살폈다. 핸드폰에서는 정확한 위치를 물어보는 전화요원의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태흥 고등학교에서 시내 방향으로 12km 지점입니다."

짧게 설명을 마친 병규는 추적추적 내리는 빗속에 검은 배를 드러내며 누워 있는 갤로퍼를 응시했다. 박살난 차량의 앞 유리창 부위에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차량의 운전가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조금 자세히 살펴보니 이상하다. 어둑어둑한 논둑이어서 확신할 순 없지만 사람치고는 그림자가 너무 길었다.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부연 물보라 속에서 번들거리고 있는 지저분한 녹색의 광채. 옷이 그런 색깔이라면 괼장히 촌스러운 차림일 것이다.

"사람이 아니다."

어느새 그의 어깨 위에서 갈기를 세우고 있던 호랭이가 코를 실룩거리며 작게 속삭였다. 굳이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병규 역시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경유의 알싸한 냄새에 섞여 지독한 악취가 코를 자극해 왔던 것이다.

"귀신?"

"잡귀 같은 건 아니야. 육체가 있다. 하지만 사람은 절대로 아니야."

호랭이는 확신하듯 말했다. 멀리서 보기엔 놈은 긴팔원숭이를 쭉 늘려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떠오르는 가운데 예의 주시하고 있던 그림자에서 돌연 두 개의 녹색 광망이 떠올랐다. 놈이 이쪽을 본 것이다.

"뛰어!"

호랭이가 급히 소리쳤다. 병규는 반사적으로 가드레일을 뛰어 넘어 스쿠터 위에 올라탔다.

"왜? 무슨 일이에요?"

시동을 걸며 묻자 호랭이는 다급한 음성으로 독촉했다.

"어서 달려라. 놈의 냄새가 가까워진다."

엔진의 불규칙한 진동이 시트로 전해져오기 무섭게 병규는 스로틀을 최대로 당겼다.

부다다다.

스쿠터가 힘겨운 비명을 지르며 조금씩 앞으로 밀려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파핫 하고 길쭉한 물체가 가드레일을 넘어왔다. 병규는 기겁을 하며 튕기듯 스쿠터를 밀었다.

탕.

강한 충격에 오토바이가 휘청하더니 뒷바퀴가 주르르 미끄러진다. 놈이 스쿠터를 후여갈긴 것이다. 병규는 미끄러지는 뒷바퀴를 체중을 이용하며 강제로 바로잡으려 애썼다. 그의 발을 축으로 스쿠터의 후미가 촤르르 밀려난다. 그나마 스쿠터의 중량이 비교적 가벼운 편이라 발 하나로 간신히 제어할 수 있었다. 간신히 균형을 잡고 뒤를 돌아보니 주르륵 내리는 빗속에 길쭉한 괴물이 우그러진 철판조각을 들고 있었다.

크기는 대략 3미터 이상. 개구리가 연상되는 청녹색의 지저분한 피부가 가로등 불빛에 번들거리고 있었다.

"뭘 멍하니 있는 거야. 달려!"

호랭이의 급박한 외침에 정신이 번쩍 든 병규는 발을 박차며 오토바이를 밀었다. 스쿠터는 엔진이 무척이나 작은지라 출력도 보잘것없었다. 때문에 급격한 가속력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평소에는 전혀 불편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속이 탈만큼 답답하다. 반면 개구리를 닮은 괴물은 커다란 키에도 불구하고 스프링처럼 온몸이 탄력적이면서도 빨랐다.

병규는 브레이크를 잡으며 체중을 오토바이의 앞쪽으로 실어 스쿠터의 뒷바퀴를 살짝 띄웠다. 일명 잭나이프라고 불리는 재주로 제동장치와 체중이동을 이용한 묘기다.

촤아악

괴물의 갈퀴 같은 손이 도로 위의 수막을 시원하게 걷어냈다. 만약 재빨리 뒷바퀴를 들지 않았다면 무시무시한 일격에 여지없이 찌그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병규는 불안정한 자세에서 스로틀을 최대로 당겼다. 공회전하던 뒷바퀴가 헛바퀴를 돌며 아스팔트 위의 수막을 괴물의 얼굴로 쏘아댔다. 괴물이 주춤하는 사이 병규는 죽어라고 스쿠터를 달렸다.

"방금 그게 대체 뭡니까?"

벌렁거리는 가슴이 채 진정되지도 않았다.

"귀탄(鬼彈)(수신기에 등장하는 요물로, 중국 한(漢)나라시대 영창군(永昌郡)일대 강가에 출몰했다고 하는 괴물이다. 귀탄이 사는 물에는 독기가 있어 몸에 닿으면 병이 들리고 죽기까지 했다.)..... 인 것같다."

"귀탄?"

"물속에서 사는 괴물이지."

"물속에 사는 괴물이 왜 육지에서 설쳐대는 거예요?"

유감스럽게도 병규는 호랭이의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허덕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놈이 가드레일 위를 미친듯이 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속 60km의 스쿠터를 가볍게 따라잡는 귀탄의 운동능력에 혀를 내두를 판이다.

"제길."

병규는 급히 핸들을 꺾어 중앙선을 넘었다. 어떻게든 놈에게서 거리를 둬야 했다. 이 새벽에, 그것도 쏟아지는 폭우로 시계까지 불량한 마당에 도로를 역주행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하지만 그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위험한 줄 알면서도 모험을 해야 했다.

텅.

짧고 탄력적인 금속음. 그를 쫓아 귀탄이 가드레일을 박차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생긴 것도 개구리 같은 놈이 정말로 엄청난 점프력을 보여준다. 이 속도에서 놈에게 깔린다면 최소한 사망이다. 요행히 살아남는다 해도 놈의 요깃거리로 전락해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럴 수야 없지."

병규는 스쿠터를 옆으로 기울며 브레이크를 잡았다.

끼이익.

비에 젖은 브레이크가 비명을 지르고, 옆으로 넘어간 스쿠터가 아스팔트 위를 미끄러지며 파도 같은 수막을 퍼트린다. 스쿠터의 두 바퀴와 동체를 모두 이용한 급정지.

감작스레 스쿠터의 속력이 줄자 괴물은 그의 머리 위를 넘어 아스팔트 위로 떨어졌다. 어리둥절 뒤를 돌아보는데, 관성에 의해 물길 위를 무섭게 미끄러지던 스쿠터가 놈의 배로 거칠게 틀어박혔다.

"키엑."

귀탄의 길쭉한 몸뚱이가 한순간 꺾여졌다. 하지만 생각보다 충격은 크지 않은 모양이다. 스쿠터를 희생해 가면서 온몸으로 처박았지만 그저 괴물을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서게 만든 것이 다였다.

스쿠터의 중량은 귀탄에게 충격을 주기엔 지나치게 가벼웠다. 물론 상대가 사람이었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스쿠터를 몸으로 받아낸 놈은 키만 무려 3미터가 넘는 괴물이다.

"키아악."

긴 동체를 활짝 피며 놈이 울부짖었다. 불의의 일격에 흉폭한 성정이 폭발한 것이다. 입에서 풍기는 고약한 악취가 병규의 얼굴로 그대로 쏟아졌다.

"이거나 먹어라."

병규는 악을 지르며 놈의 배에 틀어박힌 스쿠터의 스로틀을 맹렬하게 당겼다.

츠카카칵

뒷바퀴가 빠르게 회전하며 전기톱질을 하듯 무서운 속도로 놈의 뱃가죽을 뜯어냈다. 아무리 출력이 딸리는 50cc 엔진이라지만 회전하는 바퀴의 마찰력은 상상을 불허한다. 전기톱처럼 맹렬히 회전하는 뒷바퀴에 말려 푸른 피와 문드러진 살점이 배기구 뒤쪽으로 모래처럼 흩뿌려졌다.

"키아아."

이번에는 꽤나 충격을 받은 듯 귀탄은 두 팔을 거칠게 버둥거렸다.

"아직 끝이 아니다."

병규는 아예 끝장을 내려는 듯 안장을 발로 힘꺽 차며 스쿠터의 뒷바퀴를 놈의 뱃속 깊숙이 틀어박았다.

"캬악."

쾅 하는 소음과 함께 귀탄의 큰 덩치가 뒤로 주르륵 밀려나갔다. 찢겨진 뱃가죽에서 흘러나온 피와 내장이 실패에서 실이 풀리듯 놈의 궤적을 따라 아스팔트 위로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저 정도면 제 아무리 괴물이라도 살 수 없을 테지."

병규는 아스팔트 위에 볼품없이 엎어진 귀탄의 몸뚱이를 노려보며 가쁜 숨을 헐떡였다.

"너, 스쿠터를 귀신같이 다루는데?"

호랭이가 입을 좌우로 쫙 벌리며 감탄한다. 한순간이긴 했지만 병규가 보여준 기민한 움직임은 결코 평범한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대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제가 스쿠터를 잘 다뤘다면 저렇게 맨땅에 처박는 무식한 짓 따위는 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병규는 배수로에 처박힌 스쿠터를 끌어올리며 푸념했다. 귀탄의 몸뚱이에 마지막 일격을 가하는 순간 폭발하는 듯한 반탄력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손을 놓은 것이다.

"젠장. 이번 달 알바비는 수리비용으로 다 날아가게 생겼네."

스쿠터는 백미러 하나가 박살나고, 왼쪽 몸뚱이에 숨길 수 없는 긴 흉터를 남겼다. 가만 보니 핸들도 좀 휜 것 같다. 쥐꼬리만한 알바비로 수리비를 감당해야 하는 병규에게는 크나큰 비보가 아닐 수 없었다.

"저 요괴는 도대체 뭡니까?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거예요?"

병규는 흥분된 목소리로 물었다. 상대가 괴물이니 수리비를 청구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귀탄은 본래 물에 사는 요괴다. 물이 없으면 살 수 없지. 아마도 이 비를 틈 타 이곳까지 흘러온 것이겠지."

"젠장. 어디서 저런 놈이 또 나타난 거지? 설마 호랭이가 요괴를 불러들이는 건 아녜요?"

"내가 삼장법사의 살코기로 보이냐? 저놈은 우연히 만난 것에 불과해."

"그러니까 이상한 거죠. 보통사람들은 평생가야 요괴 같은 거 안 만나잖아요."

"그거야 다 네놈의 팔자가 기구해서 그런 거지."

"아이그. 내 팔자야."

"그래. 니 팔자야."

병규 신세한탄을 조롱하고 있던 호랭이는 문득 귀탄에 대해 뭔가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굉장히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굉장히 중요한 사안 같은데 막상 생각하니 떠오르지 않았다. 뭔가 어렴풋이 떠오르려 할쯤이었다.

"저, 저게."

경악성에 급히 병규의 손이 가리킨 곳을 쳐다본 호랭이 역시 대경실색하였다.

"죽지 않은 건가!"

까드드드드.

억수같이 내리는 빗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차일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팔 넓이 정도로 벌어져 있던 뱃가죽은 잠깐사이 흔적도 없이 모두 나아 있었다.

"재생력."

호랭이는 잊고 있었던 귀탄의 특징을 떠올리며 신음성을 삼켰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높은 곳에서 아래를 향해 내 쏘아지는 살기 띤 괴물의 눈빛에 병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까드드드드.

놈의 목울대가 풍선같이 부풀었다. 놈에게서 풍기는 역겨운 비린내도 한 층 짙어졌다. 문득 호랭이는 귀탄의 또 다른 특기를 떠올리고는 크게 고함을 질렀다.

"독. 피해라. 놈이 독을 쏜다."

병규의 대응은 신속했다. 호랭이의 긴급한 외침이 들리자마자 재빠르게 옆으로 굴렀던 것이다.

쇄액 하는 채찍소리가 그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채찍이 대체 어디서.'

번개같이 일어난 병규는 채찍이라 생각한 것이 다름 아닌 괴물의 혀라는 것을 알고 다시 한 번 놀라야 했다. 입안에 말려있던 혀가 무려 오, 육 미터나 뻗어온 것이다. 혀라고 해서 인간의 말랑말랑한 살덩이를 떠올리면 오산이다. 놈의 혀에 스쿠터의 전조등이 박살난 것만 봐도 채찍에 버금가는 위력이 있다고 봐야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위험한 것은 그 혀에 진득하게 묻어 있는 멀건 침이다.

치이이익.

슬쩍 스친 그의 점퍼가 검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저놈의 침에 닿으면 모든 게 녹아버린다."

호랭이가 나직한 음성으로 경고했다.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 놈의 혀에 스치기만 해도 꼼짝없이 죽어야 할 판인데, 달리 대항할 무기도, 뾰족한 수단도 없다. 설령 피해를 입힌다 해도 엄청난 재생력으로 금세 원상복구 되어버리니 화염방사기 같은 중화기가 아닌 한 도무지 상대할 방법이 없다고 봐야 했다.

결국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도망가는 것뿐. 문제는 놈과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것. 넘어진 스쿠터를 세우고 시동을 걸 시간이 필요했다.

"젠장. 그때 그 힘만 있었어도."

발칸과 싸울 때 나왔던 요수의 발톱만 나와 줘도 할 만할 텐데. 이상하게 처음부터 자유롭게 쓸 수 있었던 빨리 달리는 능력과 달리 요수의 발톱만은 그 후로 한 번도 나와 주지 않았다.

"서둘러."

호랭이가 귀탄을 향해 풀쩍 뛰어오르며 소리쳤다. 마침 귀탄이 목울대를 부풀리고 있었다. 호랭이는 앙증맞은 이빨로 다짜고짜 풍선처럼 부푼 놈의 목을 물었다.

"크엑."

내장이 배 밖으로 흘러나와도 끄떡없던 귀탄이 발버둥에 가까운 호랭이의 공격에 죽을 것처럼 괴로워했다.

"여기가 이 녀석의 약점이었군."

놈이 괴로워하면 할수록 호랭이는 더욱 집요하게 목을 물고 할퀴었다. 귀탄이 넓적한 손으로 그를 뜯어내려 했지만 호랭이는 작은 몸을 최대로 활용하여 요리조리 피해 다녔다.

"호랭이."

가까스로 스쿠터에 시동을 건 병규가 호랭이를 불렀다.

"이제 그만 이별이다."

호랭이는 작별의 선물로 놈의 목에 8줄의 사선을 그어놓고는 펄쩍 병규의 어깨 위로 돌아왔다.

부다다다.

스쿠터가 요란하게 떨며 빗물로 가득 찬 도로 위를 내달린다. 머플러에 이상이 있는지 소음이 유난히 시끄럽다. 그나마 그렇게 처박았는데도 미끄러운 빗길을 제대로 달려주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전조등이 박살나버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병규는 죽어라고 어둠 속을 내달렸다. 허덕거리는 숨소리가 등 뒤를 바짝 쫓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놈을 떨구지?'

놈의 엄청난 스피드를 생각해볼 때 스쿠터로는 도저히 따돌릴 수 없었다.

그때 도로 저 멀리서 전조등 불빛이 떠올랐다. 병규의 두 눈에 그것은 천상에서 내려온 한 줄기 구원의 빛줄기와 같아 보였다.

화물차 높이 정도에서 번뜩이는 노랑 경광등. 견인차량이다. 필시 경찰의 무선을 도청하곤 서둘러 사고현장으로 달려오는 것일 것이다.

"여태 역주행을 하고 있었군."

멀리서 비춰오는 전조등 불빛에 아스팔트를 내려다본 호랭이가 혀를 찬다. 호랭이의 말처럼 스쿠터는 중앙선의 왼편을 죽어라고 달리고 있었다. 이상한 생각이 든 것은 그 다음이었다. 분명 중앙선을 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음에도 병규는 여전히 역주행을 계속 고집하는 것이었다.

이놈이 너무 무서운 나머지 눈깔이 뒤집혀 버렸다 걱정했지만 그도 아닌 듯했다. 병규의 두 눈은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전조등에 번쩍번쩍 빛을 발하고 있었다. 결코 공포에 눈이 먼 혼탁한 눈빛이 아니었다.

'설마 이 녀석.'

병규의 노림수를 짐작한 호랭이는 절로 표정이 굳었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지만 아무나 실행할 수는 없는 과감한 결단. 병규는 목숨을 건 도박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노리는 도박이 성공하려면 뒤를 바짝 뒤좇아오는 귀탄의 신경을 잠시 분산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대체 무슨 수로?'

그러한 의문은 병규가 갑자기 그를 덜렁 집어 듦으로써 해소될 수 있었다. 병규가 말했다.

"호랭이. 당신 신선이죠? 신선의 능력을 믿어요!"

"그게 무슨... 우웩!"

호랭이의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병규는 쓰레기봉지 던지듯 그를 뒤로 휙 던져버렸다.

"우웨에엑."

비명을 지르며 날아간 호랭이는 네 발을 활짝 펼친 자세로 귀탄의 면상에 철퍼덕 부딪히고 말았다.

귀탄의 시선을 가릴 방법이란 바로 그를 내던지는 것이었다.

"망할 자식!!"

졸지에 살아 있는 연막탄이 된 호랭이는 배신감에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그가 원하건 원하지 않았건 간에 병규의 노림수는 훌륭하게 먹혀들었다. 호랭이가 온몸으로 두 눈 앞을 막아버린 덕분에 귀탄은 엄청난 속도로 아스팔트 위를 질주해 오는 견인차를 전혀 눈치 채지 못 한 것이다

등 뒤가 환해진다 싶더니 끼이이익 하는 시끄러운 소음이 해일과 같은 충격을 안고 귀탄과 호랭이를 휩쓸었다.

콰아앙.

호랭이는 공중에 붕 뜨면서 죽어라고 병규를 욕했다. 어쩌다 그런 놈을 만나 이 고생인지. 이제 딱딱한 아스팔트와 진한 접촉의 순간을 가져야 하는 순간,

"나이스 캐치."

어느 사이엔가 달려온 병규가 그를 잽싸게 낚아챘다. 그를 덥석 끌어안은 호랭이는 눈물이 글썽이며 욕을 쏟아냈다.

"이놈아. 날 아예 죽일 작정이었냐!!"

"헤헤헤."

병규가 멋쩍게 웃었다.

"그래도 신선인데 뭔가 한 가닥 할 것 같아서요. 퉤퉤."

"이런 썩을! 도력이 봉인된 내가 무슨 한 가닥이냐! 그러다 내가 죽기라도 했으면 어떡하려고 그런게야!"

"에이. 그러니까 이렇게 구하려고 달려왔잖아요. 퉤퉤."

"이놈. 기분 나쁘게 왜 자꾸 침을 뱉어?"

"아무래도 괴물의 살점이 입에 들어갔나 봐요."

귀탄이 견인차와 충돌하면서 사방으로 피와 살점이 튀었는데, 그중 하나가 그의 입으로 들어간 모양이다.

"그런데 놈은 어떻게 됐냐?"

호랭이의 물음에 병규는 뒤쪽을 손짓해 보였다.

견인차는 그 어마어마한 중량과 무지막지한 속력으로 괴물을 가드레일에 짓이겨버렸다.

갈기갈기 찢겨져 아스팔트 위에 빨랫감처럼 널려졌으니 제아무리 대단한 재생력이라도 이제 더는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하긴 머리통과 발 사이의 거리가 20여 미터나 떨어져 있다면 찰흙으로 만든 몸뚱이라 할지라도 원상복구는 불가능할 것이다.

빠아아아앙.

견인차가 구슬프게 울고 있었다. 아마도 운전사가 핸들에 고개를 처박은 채 기절한 모양이다.

둘은 털털 떨고 있는 스쿠터 위에서 마주보며 크게 웃었다. 놈을 해치웠다는 생각에 한바탕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곧이어 들려온 기묘한 울음에 둘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까드드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