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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오늘은 좀 늦었네?"

동네 친구인 경수 엄마의 말에 찬영 엄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필요한 게 있어서 주문하느라고."

"인터넷?"

"응."

이제는 아주머니들도 애용하는 인터넷 쇼핑.

그리고 이 인터넷 쇼핑에 한번 중독되면 아주머니들은 그 편리함에 헤어 나오지 못했다.

찬영 엄마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로 신선식품이 아닌 냉동식품이나 각종 잡다한 물건은 모두 인터넷으로 해결했다.

"포르미로 주문한 거야?"

그 말에 찬영 엄마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포르미? 그게 뭐야. 나는 벅스만 쓰는데?"

"포르미 몰라? 요즘 한창 뜨는 사이트인데?"

"그래?"

"가격도 싸고 배송도 빠르더라고. 쿠폰 준다길래 한번 써 봤는데 정말 좋더라."

그렇게 포르미에 대한 극찬을 이어 가는 경수 엄마.

"확실히 세론이 다르긴 달라. 스켈레톤으로 물건을 배송한다니."

"세론? 포르미가 세론 거야?"

"응."

"그래? 곤란하네······."

에너지 판매 부스 덕에 한결 팍팍했던 살림이 조금 나아지며 세론 애찬론자 중 한 명이 된 찬영 엄마.

하지만 인터넷 쇼핑만큼은 달랐다.

"에이. 그래도 옮기는 건 안 할래."

"왜?"

"그 뭐냐, 가입도 해야 되고 인증 뭐도 해야 되고, 복잡하잖아. 내가 그걸 어떻게 해? 벅스도 아들한테 부탁해서 가입한 아이디로 비밀번호만 입력해서 간신히 쓰고 있는데."

이제는 인터넷에 제법 적응하기는 했지만, 컴맹인 주부 입장에서 새로운 사이트 가입은 벅찰 수밖에.

"다시 부탁하면 되지. 나도 그렇게 했어."

"됐어. 내가 벅스 적응하면서 모르는 걸 계속 물어봤다가 아들놈한테 짜증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데. 왜 같은 걸 또 물어보냐, 밑에 동의 체크 안 보이냐, 어쩌고저쩌고. 어휴. 그 난리를 또 겪으라고?"

그러자 포르미를 극찬하던 경수 엄마가 말했다.

"그래? 포르미는 쓰레기도 대신 버려 주는데 그냥 벅스 쓰겠다고?"

"···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 쓰레기를 버려 준다니?"

"포르미 회원으로 가입하면 스켈레톤이 물건 가져다준 다음 집 앞에 있는 쓰레기 전부 수거해 가 줘. 덕분에 완전히 쓰레기에서 해방이라니까? 집에 쓰레기 안 쌓아 놔도 되고 매번 왔다 갔다 안 해도 되고, 얼마나 좋은데."

그 말에 흥미가 동한 찬영 엄마가 말했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해 봐."

그렇게 포르미의 스켈레톤 배송과 쓰레기 수거 서비스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찬영 엄마가 경악하며 말했다.

"그럼 쓰레기 버려야 할 때 주문만 하면 되는 거네?"

"내 말이 그 말이야. 스켈레톤 배송이 주문하면 반나절 만에 오니 잠깐 딴 일 하는 사이에 물건은 가져오고 쓰레기는 가져간다니까?"

"어머, 어머."

어차피 사야 할 물건인데 가격도 싸고, 심지어 중간에 쓰레기까지 버려 준다니.

찬영 엄마가 박수를 치며 말했다.

"역시 세론이라니까. 세상에, 쓰레기까지 신경을 써 주네."

"그치? 그니까 찬영 엄마도 빨리 포르미로 갈아타."

"아들 눈치 보여서 안 옮기려 했는데, 이건 못 참지."

그렇게 핸드폰을 들어 올린 찬영 엄마가 찬영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엄마.

"찬영아, 어디야?"

-학원 끝나고 집 가는 중.

찬영 엄마가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부탁할 게 좀 있는데. 해 줄 수 있을까?"

-뭔데?

"인터넷 사이트에 좀 가입해야 될 것 같아서."

-또?!

찬영이가 지친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알려 줘도 금방 까먹고 계속 물어볼 거잖아!

그 말에 찬영 엄마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놈의 자식이, 먹여 주고 재워 줬더니 그것 하나 해 주는 것 가지고 왜 이렇게 유세야?"

-그게 아니라 답답해서 그렇지. 하아. 그래서 뭔데?

"엄마가 벅스 쓰고 있잖아. 근데 포르미가 그렇게 좋다더라고. 그래서 포르미로 갈아타려고."

그러자 찬영이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엄마, 그냥 쓰던 것 쓰면 안 돼? 벅스 적응하는 것도 한참 걸렸잖아.

"좀 해 줘라. 응? 대신 엄마가 맛있는 것 해 줄게."

-보나 마나 저번처럼 한 달 내내 전화해서 들들 볶을 거잖아.

계속 툴툴거리는 찬영의 말에 결국 화가 난 찬영 엄마.

"야이 자식아! 넌 엄마가 좀 해 달라면 그냥 해 주면 되지 뭐 그렇게 말이 많아?! 막말로 내가 학교 가는 길에 쓰레기 좀 버려 달라고 하면 곱게 버려 준 적이 몇 번이나 돼! 어?!"

-아니, 여기서 쓰레기가 왜 나와?

"왜 나오긴! 포르미에서 쓰레기 버려 준다니까 그러지!"

그 말에 침묵하던 찬영이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그렇게 포르미에 대해 찬영 엄마가 이야기를 해 주자 찬영이가 말했다.

-정말이야? 대신 버려 준다고?

"그래. 엄마도 좀 편하게 살자. 응?"

-그럼 그거 해 주면 나 이제 학교 가는 길에 쓰레기 안 버려도 되는 거야?

"당연하지! 나라고 좋아서 너랑 아빠한테 쓰레기 들려서 내보내는 줄 알아?"

그러자 찬영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거라면 못 참지. 엄마, 기다려. 지금 바로 갈게! 바로 가입해서 알려 줄게!

*

콘크리트층이 박살 나 간다.

그것도 빠른 속도로.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한 번만 옮기면 평생 쓰레기 대신 버려 준다는데 누가 마다하겠어."

당연하게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한 건 바로 이번에 도입한 쓰레기 분리수거 서비스.

음식물과 일반 쓰레기는 봉투에 담아 두고 플라스틱이나 캔 그리고 비닐 같은 재활용 쓰레기는 그냥 한군데 뭉쳐 두면 나머지는 전부 스켈레톤이 알아서 하는 방식이다 보니 사람들은 이 서비스에 눈이 돌아가 너도나도 포르미에 가입한다.

심지어 물류 센터가 없어 서비스되지 않는 지역에선 빨리 서비스를 도입해 달라며 아우성을 칠 정도.

물론 그 과정이 순탄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쓰레기를 문 앞 지정된 장소에 두면 수거해 간다니까 자잘한 쓰레기를 말 그대로 쌓아만 두는 바람에 손이 두 개뿐인 스켈레톤이 수거할 수 없자 왜 수거 안 해 가냐며 진상을 부리는 놈들부터 일반 쓰레기를 재활용이랍시고 함께 두는 놈들 등등, 그야말로 인간성의 끝을 보았지.

그렇기에 이번에 새로 도입한 게 손잡이가 달린 수거용 박스.

냄새가 새어 나가지 않게 고안한 박스를 집 앞에 놔두면 그 박스의 허용 용량까지만 쓰레기를 담게 하고, 가득 담긴 쓰레기 박스를 수거할 때 스켈레톤이 가져온 빈 박스를 그 자리에 다시 놓는 방식.

그렇게 수거한 박스는 세론과 제휴를 한 근처 고물상에 가져다주면 스켈레톤들이 일반 쓰레기와 음식물은 따로 버리고 재활용은 그 자리에서 분류하여 처리했다.

추가로 일반 쓰레기와 음식물 쓰레기는 반드시 봉투에 넣어 버려야 하며 만약 이를 어길 시 수거를 거부한다 통보하니 그제서야 안정화된 쓰레기 분리수거 서비스.

"그나저나 의외로 재활용이 돈이 되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의외로 재활용 쓰레기를 처분하며 크지는 않지만 제법 쏠쏠한 수익이 나온다.

"재활용 사업이라. 이거 잘만 하면 의외로 돈 될지도 모르겠는데?"

나중에 시간 나면 한번 생각해 보자.

"판매는 순조롭습니까?"

내 말에 포르미 사장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환상적입니다."

"환상적이라고요?"

"쓰레기라는 게 수시로 배출되는 것 아닙니까. 거기에 허용 용량까지 정해 주니 사람들이 주기적으로 물건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오! 그렇겠네."

한 번에 몰아서 주문하는 게 아니라 틈만 나면 수시로 물건을 주문해야 쌓인 쓰레기를 처리할 수 있으니까.

"덕분에 객단가가 점점 높아지는 추세입니다. 아, 객단가는 고객 한 명당 포르미에 지불하는 비용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고객들이 포르미에 돈을 더 많이 쓰고 있다는 소리잖아?

서비스받기 위해서.

"훌륭하군요."

"아무튼 일단 한번 쓰레기 분리수거 서비스에 적응한 사람들은 설사 포르미가 가격을 올리더라도 쉽게 이탈하지 못할 겁니다. 워낙 말도 안 되는 서비스니까요. 그렇게 물류 창고를 지어 서비스 지역을 늘리고 고객을 지속적으로 확충하면······."

포르미 사장이 황홀한 표정으로 말했다.

"벅스의 1위 자리를 빼앗아 오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어쩌면 정말로 모두 밀어내고 포르미가 한국 전체를 석권할지도 모르고요."

"혹시나 해서 다시 한번 이야기하는데, 지금이야 포르미 이름 쓰지만 나중에 인지도 좀 오르면 이름 바꿀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저 제가 만든 회사가 1위에 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벅찬 것뿐입니다."

오케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계속 갑시다, 전부 다 먹어 치울 때까지."

*

물류 센터를 하나둘 오픈할 때마다 주변 고객들을 그야말로 흡수하며 미친 듯한 속도로 성장한 포르미.

당연하게도 그런 포르미가 끌어들인 고객들은 모두 다른 회사의 고객들이기에 기존 인터넷 상거래업체의 타격은 어마어마했다.

특히 포르미처럼 간신히 목숨 줄을 연명하고 있던 중소 업체들은 콘크리트층의 이탈 가속화로 점점 적자 규모가 눈덩이처럼 커지자 하나둘 백기를 들었다.

그렇게 백기를 든 중소 업체들 중 일부가 세론을 찾아와 역인수를 제안하고, 내가 그들의 인수 제안을 받아들이며 그들의 물류 창고까지 흡수해 점점 규모를 갖춰 간 포르미.

물론 3강 업체들의 타격도 만만치 않았다.

그나마 벅스는 1위 기업답게 엄청난 투자를 유치하며 포르미에 버금가는 저가 공세를 펼친 덕에 그러저럭 점유율을 지켰지만, 2위와 3위는 어버버하다 점유율이 큰 폭으로 떨어진 상황.

그러자 인터넷 상거래업체의 구도가 완전히 재편되었다.

"2위와 3위가 연합을 한다고요?"

"예. 서로 주식을 교환한다고 합니다."

주식까지 교환한다는 건 진짜 한 기업처럼 움직이겠다는 뜻.

"그렇게 되면 물류 창고부터 많은 것을 공유하여 물류비를 최소화할 수 있으니 당장 급한 불은 끌 수 있으니까요."

확실히 이 인터넷 상거래 사업은 규모의 경제가 핵심이니 포르미와 벅스에 치이는 2위와 3위 입장에선 그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일 테지.

1위를 지키기 위해 발악하고 있는 벅스와 점유율 하락으로 연합을 한 2위와 3위.

그리고 막대한 자금력을 앞세워 중소 업체를 흡수하며 바짝 추격하기 시작한 포르미까지.

"점유율이 각각 어떻게 됩니까?"

"2위와 3위가 연합하며 38퍼센트로 1위입니다. 그다음이 벅스 30퍼센트. 그리고 저희 포르미가······."

포르미 사장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20퍼센트로 3위입니다."

포르미를 인수하고 고작 몇 달 만에 이룩한 점유율 20퍼센트.

비록 돈을 어마어마하게 쏟아붓기는 했지만, 투자한 보람이 있다.

인터넷으로 물건을 주문하는 사람 5명 중 한 명이 포르미를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 사실상 이파전이네요."

분명 연합을 하여 지금 당장의 점유율은 연합이 1위다.

하지만 그건 그저 몰락해 가는 자들의 발악일 뿐.

아무리 모든 걸 공유하여 물류비를 줄인다 해도 로봇 시스템을 전격 도입 한 벅스와 스켈레톤을 이용한 포르미에는 비빌 수 없으니까.

즉, 저 점유율은 그저 보여 주기 식의 물 근육에 불과하다는 거다.

그리고 저 물 근육은 조만간 벅스와 포르미에게 갈가리 찢어 먹히게 되겠지.

"지금처럼만 계속 갑시다."

스켈레톤으로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다.

이제 남은 건 누가 먼저 나자빠지냐의 치킨 게임뿐.

그리고 난 그 최후의 승자가 포르미라 확신한다.

자금력이면 자금력, 노동력이면 노동력, 포르미가 다른 업체에 비해 부족한 것은 단 하나도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렇게 보고를 마무리하려는 순간 포르미 사장의 핸드폰이 울린다.

포르미 사장이 눈치를 주자 나는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중요한 전화인가 보네. 받으세요."

"예, 그럼."

내 허락을 받고 핸드폰을 들어 올린 포르미 사장.

그런데 포르미 사장의 안색이 점점 굳는다.

"···정말이야? 알겠어."

그렇게 통화를 마친 포르미 사장이 나를 보며 말했다.

"회장님, 안 좋은 소식입니다."

"안 좋은 소식이요?"

"전국 택배 노조에서 포르미가 택배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며 공식 성명을 냈답니다."

*

내가 이 사업을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는 바로 택배 일손 부족으로 과로에 시달린다는 뉴스 기사 때문이었다.

그런데 불과 몇 달 만에 이번엔 일자리가 부족하다며 성명을 낸 택배 노조.

"스켈레톤 배송 도입 후 배송 기사 한 명당 커버 범위가 늘어나 일자리가 부족해졌다?"

"예. 그렇게 발표를 했다고 합니다. 포르미가 계속 성장하면 일자리가 더욱 줄어들 거라며······."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놈들 이거 웃긴 놈들이네?"

분명 겉으로만 보면 그럴싸한 주장이다.

배송 기사 한 명이 더욱 넓은 범위를 감당하는 게 바로 스켈레톤 배송의 장점이니까.

하지만 그 속사정을 알면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우리 스켈레톤 배송 비율이 얼마나 되죠?"

"대략 35퍼센트입니다."

포르미가 분명 스켈레톤 배송을 앞세워 빠르게 성장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물품을 스켈레톤들이 배송하는 것은 아니었다.

스켈레톤 배송이 가능한 물건은 어디까지나 포르미의 물류 창고에 미리 쌓아 두고 언제든 출고할 준비가 된 상품들뿐으로, 이 상품의 수는 전체 거래 규모의 35퍼센트에 불과했다.

나머지 65퍼센트는 기업이나 개인이 포르미에 판매자로 등록하여 개인 판매를 하는 거고, 이것들은 판매자가 물건을 가지고 있기에 주문이 오면 일반 택배 회사를 이용해 배송하는 방식.

물론 나중 가면 이것도 통합 운영 하여 판매자들이 직접 고객에게 물건을 보내는 게 아니라 택배 회사를 통해 포르미의 중간 집하지에 물건을 보내면 포르미에서 그걸 스켈레톤으로 운반해 주는 하이브리드 방식을 도입할 예정이긴 하지만, 그래 봤자 결국 스켈레톤 배송의 비율은 50에서 60퍼센트에 불과할 거다.

아직 계획에 불과한 하이브리드 방식조차 이럴진대 지금 당장은 말할 것도 없지.

"우리 점유율이 지금 20퍼센트니까 3분의 1이면 대충 한국 전체 거래에서 8퍼센트 정도가 스켈레톤 배송이란 소리잖아요?"

"맞습니다."

"저번엔 배송 인원을 최소 25퍼센트 이상 늘려야 한다 주장하더니 고작 8퍼센트 줄어든 걸로 이 난리를 쳐? 심지어 스켈레톤 배송 하는 기사랑 거점 직원 생각하면 더 적을 텐데?"

애초에 내가 누군가.

평화로운 은퇴를 위해 한국 한정으로 지나가던 낙엽도 조심스럽게 밟는 사람이다.

당연히 스켈레톤 배송을 도입하고 그로 인한 일자리 감소 문제까지 모두 고려해서 이 정도면 괜찮겠다 싶어 진출을 결정한 거란 말이지?

회사 내부 계산에 따르면 현재 부족한 택배 기사의 수는 대략 20퍼센트.

그나마도 대부분의 택배 기사가 근로시간을 초과해가며 일을 감당하고 있었기에 그런 점까지 고려하면 스켈레톤 배송이 8퍼센트가 아니라 30퍼센트를 차지해도 택배 기사들의 일자리는 위협받을 일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고작 이정도 가지고 공식 성명까지 발표하다니.

"다른 회사들은 여전히 배송 기사 부족에 시달리고 있을 텐데, 배때기가 불러도 너무 부른 것 아니야?"

포르미 사장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회장님, 그냥 무시하시죠. 어차피 자기들끼리 조금 떠들다가 잠잠해질 겁니다. 회장님 말씀처럼 이건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니까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안 되죠. 우리야 저게 말도 안 된다는 소리인 걸 알지만 일반인들은 아니지 않습니까."

분명 내막을 알고 있는 내 입장에선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일반 소비자 입장에선 그럴싸하게 들리는 주장이다.

즉, 내가 가장 신경 쓰는 약점을 확실히 찌른 셈.

"설마 경쟁업체에서 사주라도 받았나?"

스켈레톤과의 경쟁을 이길 수 없으니 일반인들에게 호소하는 방법으로 나온 걸지도 모르겠다.

포르미 사장도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내가 너무 유하게만 나갔나 보다.

그래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들고 나와 여론에 호소하는 거겠지?

사람들 평판 신경 쓰는 나이니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해서.

"확실하게 해 줘야겠네."

통계만 내 봐도 바로 알 수 있는 이런 걸 성명이랍시고 들고 나와 나를 방해하다니.

기왕 이렇게 된 거, 확실하게 조져 주지.

팩트를 기반으로.

"통계자료 싹 조사해서 가지고 오세요."

나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전부 한 번에 박살 내 버립시다."

96화

"반응은 어때?"

전국 택배 노조 위원장의 말에 노조원이 답했다.

"특별한 반응은 없습니다. 세론의 이미지가 워낙 좋다 보니 알아서 잘할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노조원들은?"

"노조원들이 오히려 부정적으로 반응하고 있습니다. 8시간만 일해도 다른 업체에서 12시간 이상 일하는 만큼 벌어들이다 보니 모두 포르미를 노리고 있었는데, 이번 발표로 불이익을 받을지도 모른다며······."

"쯧. 이렇게 생각들이 없어서야. 세론이 모든 택배 기사들을 전부 고용해 줄 게 아닌 이상 공공의 이익을 생각해야지. 지금처럼 인력난이 계속돼야 택배 기사 몸값이 계속 오를 것 아니야."

택배 기사 부족과 서비스 경쟁으로 인력난을 겪는 업체들은 택배 기사 확보에 열을 올렸고, 당연히 그 과정에서 택배 기사가 받는 몫도 점점 올라가고 있었다.

당연히 택배 노조가 인력 확충이 시급하다며 발표를 한 건 과로도 과로지만, 그보다는 업체들에게 자신들이 이렇게 귀한 존재라는 걸 각인시켜 주기 위함이었다.

물론 실제로 인력난이 심각해 택배 기사의 평균 근로시간이 12시간을 넘어 14시간까지 늘어나기는 했지만, 그만큼 돈을 많이 버니 노조 위원장 입장에선 생색을 내기 딱 좋던 상황.

그런데 갑자기 세론이 포르미를 인수하며 모든 게 어그러졌다.

스켈레톤 배송을 앞세워 점유율을 흡수하고 택배 기사의 빈자리를 채워 나가기 시작한 거다.

택배 기사 부족과 과로를 핑계 삼아 택배 기사들의 불만을 끌어내고 업체들에게 큰소리를 내 오던 위원장 입장에서는 이런 포르미가 달갑지 않을 수밖에.

"추가 발표 준비해."

그러자 노조원이 주저하며 말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요?"

"뭐?"

"세론 아닙니까. 한지혁 회장이 일자리 문제가 불거질 만큼 막 나가지는 않을 텐데······."

"너까지 그런 소리야? 이런 일은 그런 상황이 닥치기 전에 미리 예방하는 게 중요한 거라고! 잔말 말고 빨리 준비해!"

"···알겠습니다."

그렇게 추가 발표를 지시한 바로 그때.

위원장실 문이 열리며 직원이 들어와 말했다.

"위, 위원장님!"

"왜."

"한지혁 회장님이 오셨습니다!"

"뭐?!"

놀란 위원장이 밖으로 나가자 이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는 한지혁이 보인다.

노조 특성상 기업 오너가 등장하면 일단 반발하기 일쑤인데, 그 모습을 넋 놓고 지켜보는 노조원들.

그 모습을 보고 위원장이 외쳤다.

"뭐 하는 거야?! 약속도 안 된 사람이 왔는데 그냥 들여보낸 거야?"

"하, 하지만······."

그때 위원장 앞까지 다가온 한지혁이 말했다.

"약속도 안 된 사람이 왔다?"

대한민국 10대 재벌 기업 중 하나로 성장한 세론 그룹의 회장이자 SS급 각성자인 한지혁.

그 위압감에 잠시 주춤한 위원장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죠. 그런데 무단으로 침입한 건 위원장님이 먼저 아닐까요. 뒷일은 생각도 안 하고 무작정 발표부터 진행해서 나를 곤란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어떻게 무단 침입입니까!"

"예고도 없이 저질러서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건 똑같으니까? 아무튼."

한지혁이 느긋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 계속 세워 두실 겁니까? 설마하니 제가 노조 사무실에 놀러 온 거라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그러곤 비서가 들고 있는 서류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면 뭐, 지금 이 자리에서 이야기할까요? 그럼 지금보다 더 많이 불편하실 텐데."

"···들어오시죠."

그렇게 위원장실로 안내받은 한지혁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비서에게 서류를 건네받은 한지혁이 말했다.

"우선 저희 포르미에서 진행하는 스켈레톤 배송의 비율은······."

처음엔 엄포라도 놓으러 온 건가 싶었는데, 의외로 자신이 했던 발표에 대한 반론 관련 내용을 이야기하는 한지혁.

'의외로 애송이군.'

규모가 있는 조직은 결국 정치와 다를 바 없다.

즉, 진실보다는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고 느껴지는지가 중요하다는 말.

그런 상황에서 발표한 당사자인 자신에게 저런 통계자료를 들이밀며 설득을 하는 게 무슨 소용인가.

위원장은 계속해서 통계자료를 통해 하나하나 반박하고 있는 한지혁을 향해 말했다.

"그만하시죠. 그래 봤자 제 생각은 변하······."

그런데 한지혁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들으세요, 그쪽 설득하러 온 건 아니니까."

"···예?"

"아무튼, 그렇기에 스켈레톤 배송을 지금 비율로 유지한다는 가정하에 포르미가 전체 점유율을 50퍼센트까지 끌어올린다 해도······."

그렇게 계속 반박을 이어 가는 한지혁.

"···해서, 결론은 택배 기사 일자리가 위협받기는커녕 오히려 택배 기사의 과로가 줄어들고 스켈레톤 배송 기사라는 양질의 일자리가 더욱 양산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자, 발표 끝났습니다. 어떤가요?"

한지혁이 위원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만간 언론에 발표할 내용인데."

"뭐라고요?"

"참고로 여기에 더해 앞으로 포르미는 전국 택배 노조 소속 노조원은 배송 기사로 계약하지 않겠다는 것도 선언할 겁니다. 이런 통계자료도 없이 무작정 일부터 저지르는 노조는 영 신뢰가 안 가서 말이죠."

한지혁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러면 노조원 이탈이 상당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노조원의 숫자가 곧 노조의 힘이다.

그런데 포르미는 그런 노조원들이 탐내는 걸 가졌단 말이지.

바로 몸도 편하면서 돈도 잘 버는 스켈레톤 배송 기사들.

그저 운전만 하면 스켈레톤이 알아서 배송을 해 주고, 돈도 따박따박 박히는 데다, 근무시간까지 짧으니 얼마나 좋나.

그런 스켈레톤 배송 기사에 노조원을 배제하겠다니 위원장이 버럭하며 말했다.

"노조를 탄압하려는 겁니까!?"

"아니요. 갈아타라는 거지. 노조가 여기 밖에 없습니까? 포르미에도 택배 노조가 있고 그외에 다른 노조도 많잖아요."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냥 여기 전국 택배 노조만 아니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탄압이라니요."

"그. 그건."

나는 느긋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튼 포르미는 계속 점유율을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그 말은 앞으로 더 많은 배송 기사가 필요해진다는 말이죠. 그때 공식 석상에서 선언하는 겁니다. 전국 택배 노조 소속 노조원은 전부 배제하겠습니다, 그리고 노조 탈퇴 기간이 긴 사람부터 우선 고용 하겠습니다, 이렇게요."

사람들의 반응은 이미 체크하고 왔다.

별 관심이 없거나 부정적인 게 대부분.

이때 내가 대놓고 전국 택배 노조에 부정적인 생각을 내비치고 갈아타기를 종용하는 거다.

물론 이로 인한 부작용도 있을 거다.

전국구 노조를 회사가 외압으로 굴복시키려 한다는 시선이 생길 수 있으니까.

그래서 발표 전에 위원장을 찾아온 거다.

발표해서 전면전으로 확산되기 전에 먼저 항복시키기 위해서.

"그, 그랬다간 세론에도 타격이······."

"세론 타격이 클까요, 여기 타격이 클까요. 내가 말이에요. 그간 너무 유하게만 나왔던 것 같아. 그래서 이번에 아주 본보기를 보여 주려고요. 배려를 해 줬는데 이런 식으로 갚아 오니 배신감이 들어서 말이죠."

나는 위원장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게다가 저는 개인적으로 이번 발표에 뭔가 다른 꿍꿍이도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 다른 꿍꿍이?"

"아무리 생각해도 전국 택배 노조가 포르미와 이야기 한 번 안 해 보고 대뜸 선빵을 갈기는 게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누군가가 노조를 부추기거나 선동을 한 게 아닌 이상. 그래서 조사를 부탁해 뒀습니다."

위원장의 눈이 거세게 흔들린다.

"그, 그게 무슨 소립니까."

"박인귀 길드장님이 저랑 아주 절친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박인귀 길드장님에게 부탁했죠. 추가로 제가 여기저기 인맥이 많아 그런 사람들에게도 부탁해 뒀고요. 아시죠? 군납 비리 사건."

나에게 걸려서 그야말로 탈탈 털려 나간 군납 비리.

내 말에 위원장이 마른침을 삼킨다.

"군납 비리 때처럼 아주 탈탈 털어서 정의 구현 시키려고요."

솔직히 말해서 위원장 정도 되면 뒤에서 뭘 해도 반드시 해 먹었을 거다.

꼭 이번 발표 때문이 아니더라도 구린 구석이 무조건 있을 거라는 말.

그런데 군납 비리를 초토화시킨 내가 대놓고 조사를 하겠다 하는데, 압박이 안 가려야 안 갈 수가 없지.

거기에 노조원을 포르미 배송 기사로 받지 않음으로 인해 노조가 흔들릴지도 모르는데, 이 정도면 위원장 입장에서 최악 중의 최악이지.

"좋으시죠? 위원장님도 그런 나쁜 놈들이 노조에 암약하는 꼴 보기 싫을 것 아니야. 제가 대신 청소해 드리죠."

"자, 잠시만!"

나는 위원장의 말을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 혹시라도 뭔가 상황 변화 있으면 연락 주시고요."

*

그렇게 위원장을 방문하고 며칠이나 지났을까.

위원장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결국 백기를 들고 나온 위원장.

"다행이네요, 그렇지 않아도 며칠 안에 발표하려고 했었는데."

진심이었다.

이번엔 진짜 제대로 본보기를 보여 줄 생각이었으니까.

그런데 딱 발표 직전에 알아서 숙이고 들어온 위원장.

"이렇게 금방 착해지실 거면서 왜 괜히 건드리셔 가지고. 쯧쯧. 일단 정정 발표 하세요, 본인이 직접."

-그, 그렇게 되면 제 권위가······.

"그럼 내 권위는."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열심히 쌓아 올린 세론의 이미지는? 뭔가 착각하시나 본데, 나는 마지막 기회를 주는 겁니다, 다시는 그 누구도 이런 허튼짓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위원장님 선택지는 이 기회를 잡느냐 아니면 저와 진짜 작정하고 한판 붙느냐, 이것 두 가지뿐입니다."

내 말에 침묵하던 위원장이 말했다.

-···발표하면 조사도 중단되는 겁니까?

역시 조사가 가장 걱정이었지?

그렇지 않아도 조사해 보니 구린내를 풍기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럼요."

당연히 이건 립서비스다.

날 건드려 놓고 무사하길 바래?

노조 내에도 파벌이 있을 것 아니야.

잘 조사해 둔 다음 그 자료를 위원장 경쟁 파벌에 넘기면 위원장은 알아서 처리될 거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구슬려야 되니 좋은 말을 해 줘야지.

"대신 도대체 왜 그런 발표 했는지 이유를 말하세요. 내 상식으론 납득이 안 가서 그래."

-노, 노조원의 이익과 권위를 위해······.

"조사 계속해야겠네."

-으으.

"우리 시간 낭비 하지 맙시다, 위원장님. 그냥 예, 아니요로만 대답하세요. 이번 일, 위원장님 혼자 판단해서 저지른 것 맞습니까?"

-그, 그건.

"예. 아니요."

그러자 한참을 침묵하던 위원장이 말했다.

-아니요.

"오케이. 그럼 누군가가 부추긴 건가요?"

-···예.

"누굽니까."

-······.

"위원장님이 돈을 얼마나 받아먹었든 어쨌든 저는 신경 안 씁니다. 그냥 누군지만 알려 주면 그쪽이랑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 대답만 해요. 계속 거절하면 진짜 끝까지 갑니다?"

내 압박에 결국 위원장이 말했다.

-···벅스 이원진 이사입니다.

*

-···해서 스켈레톤은 어디까지나 인력난을 해소하는 것뿐, 택배 기사의 일자리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게······.

위원장의 정정 발표를 보고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노조는 이걸로 해결."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제 벅스 이 자식들을 처리해야 하는데······."

이원진 이사라는 사람을 통해 위원장과 접촉한 벅스.

벅스는 양 사의 경쟁이 치열해지면 치열해질수록 스켈레톤과 로봇이 더 많은 부분을 잠식해 나갈 거라며 위원장을 설득했다.

거기에 뇌물은 덤이고.

"내가 그동안 노조라면 껌뻑 죽어 줬더니 진짜 노조를 끌어들여?"

그간 국내 기업의 해외 공장을 한국에 유치할 때 국내 노조가 반발하면 바로 계획을 철회해 온 세론.

그러자 벅스에서 판단한 거다.

노조를 앞세우면 세론이 굽힐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위원장을 매수해 발표를 시킨 거다.

스켈레톤 배송의 확장을 막기 위해서.

"정정당당하게 사업으로 승부를 보려 했더니 이런 식으로 꼼수를 쓴다?"

물론 스켈레톤이 등장한 순간부터 정정당당과는 거리가 좀 멀지만, 아무튼 지금까지 경쟁은 서로가 서로의 점유율을 먹고 먹히는 정규전이었다.

그런데 벅스가 먼저 다른 세력을 끌어들여 비겁한 술수를 부린 상황.

그럼 나도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벅스의 약점이 뭐가 있지."

우선 떠오르는 건 자금력.

벅스는 로봇 시스템에 대한 투자와 함께 적자를 감수한 저가 정책을 펼치고 있어 적자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그러니 더욱 많은 적자가 생기도록 유도하면 제대로 한 방 먹일 수 있겠지.

"또 뭐가 있더라."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경영권. 그래, 벅스 대표는 지분이 적어."

그간 투자 유치를 위해 포르미처럼 사방에 지분을 남발해 온 벅스.

거기에 추가 자금 유치를 위해 상장까지 하며 김원철 대표에게 남은 벅스 지분은 17퍼센트에 불과했다.

그렇게 낮은 지분율로도 경영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1위인 벅스를 키운 장본인인 김원철이 벅스를 더욱 높은 위치로 키울 거라 믿는 투자자들이 우호 지분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지.

하지만 지금은 포르미라는 경쟁자가 나타나며 그 믿음에 금이 가기 시작한 상황.

"적대적 인수 합병."

그런데 여기서 세론이 적대적 인수 합병을 선언하고 벅스 지분을 무차별로 사들이며 투자자들을 세론 편으로 만들어 경영권 분쟁에 나서면?

김원철은 경쟁자인 세론에게 경영권이 넘어가는 걸 막기 위해 모든 자금을 자사 지분 매입에 쏟아부어 경영권 방어에 나설 거다.

그 과정에서 벅스 주가는 미친 듯이 치솟을 거고 그만큼 벅스의 자금은 더욱 빠르게 고갈되겠지.

외부에선 포르미와의 경쟁에 허덕이고 내부에선 경영권 다툼으로 썩어 들어 가고.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상황도 딱 좋네."

만약 기존 2위와 3위 업체의 연합 없이 벅스와 포르미 이렇게 둘만 남은 상황이라면 이 인수 합병 시도는 독과점 논란으로 정부 차원에서 제지당할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 외견상으론 연합이 가장 높은 지분율로 업계 1위를 하고 있는 상황 아닌가.

여기서 3위인 포르미가 2위 벅스를 합병해 경쟁 우위를 가져가려 하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흐름이지.

"그렇게 벅스를 인수해 버린 다음 물 근육만 남은 연합을 제치면? 한국 제패 완료네? 아니면 뭐, 인수하는 척만 해도 되고."

핵심은 벅스를 완전히 주저앉히는 것.

여기서 내가 지속적으로 경영권을 가져올 것처럼 싸움을 걸기만 해도 벅스의 자금력과 경쟁력은 급격히 떨어질 테니까.

즉, 나는 인수 합병에 성공해도 좋고 실패해도 상관없다 이 말씀.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개싸움은 너네가 먼저 걸었잖아? 나도 똑같이 개싸움 해 줄게. 대신 너네 집 안에서."

97화

"너무 쉽게 끝나 버렸어."

김원철의 말에 이원진 이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김원철의 지시를 받고 노조 위원장과 접촉한 이원진.

평소 노조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 온 한지혁이기에 노조를 앞세우면 스켈레톤 배송을 저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해 위원장에게 돈까지 찔러 주며 나서게 만든 건데, 한지혁이 직접 나서더니 순식간에 상황을 뒤집어 버렸다.

무려 위원장이 직접 나서 자신이 했던 주장을 번복해 버린 거다.

그렇게 위원장이 자기 체면만 구기면서 끝이 난 상황.

"어쩔 수 없지. 다른 방법을 찾아봅시다."

김원철이 노조를 끌어들이면서까지 포르미를 방해하려 한 이유는, 그간 로봇 시스템을 도입하며 적극적으로 대처해 왔지만 이번에 포르미가 벅스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쓰레기 처리라는 서비스를 들고 오며 위기감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인터넷 상거래업체에게 있어 대체 불가 한 서비스의 등장은 당연히 고객의 충성으로 연결되는 법이니까.

그때 이원진 이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최근 주가 흐름이 좋지 않습니까?"

그 말에 김원철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그렇죠."

포르미로 인해 점유율이 소폭 하락하며 주가 역시 하락 추세였던 벅스.

그런데 최근 그런 벅스의 주가가 천천히 다시 상승하고 있었다.

"덕분에 투자자들도 만족해하고 있습니다. 다만 상승 이유가 아직 파악되지 않아 살짝 걱정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별다른 호재 없이 간신히 보합세만을 유지하던 벅스 주가의 갑작스러운 상승.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원래 주가라는 게 오르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는 건데. 오히려 이런 완만한 상승은 긍정적인 신호죠. 사람들이 벅스의 비전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그건 그렇지요."

"아무튼 주가 흐름도 좋고 자금도 아직은 여유가 있으니 향후 대책에 대해 고민을······."

그렇게 이원진과 이야기를 하던 바로 그때.

쾅!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한 임원이 대표실을 박차고 들어오며 말했다.

"대표님! 큰일 났습니다."

김원철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포르미가 또 무슨······."

"한지혁이 벅스에게 적대적 인수 합병을 선포했습니다! 지금 TV에서 실시간으로 인터뷰를 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김원철이 경악한 표정으로 외쳤다.

"뭐, 뭐라고요!?"

다급히 TV를 켜서 속보를 확인한 김원철.

-···두 업체의 시너지 효과로 현재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포르미도 더욱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인수를 결정했습니다.

그러자 김원철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뭐? 연합에 대응하기 위해 벅스를 인수해?"

말이 좋아 점유율 1등이지, 연합은 사실상 벅스와 포르미에 치여 어쩔 수 없이 힘을 합쳤을 뿐인 허울 좋은 회사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당연히 업계 전문가들은 모두 벅스와 포르미, 이렇게 양강 체제로 굳어질 거라 예상하고 있는데, 갑자기 여기서 적대적 인수 합병을 선포하다니.

그때 김원철은 이원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유 없는 주가 상승··· 설마 벅스 주식을 사 모으고 있었던 거야!?"

적대적 인수 합병을 선포했다는 건 주식을 매입해 강제로 벅스의 경영권을 가져오겠다는 거다.

당연히 선포하는 순간 주가는 폭증할 테니 적대적 인수 합병을 하는 기업은 물밑에서 조용히 주식을 사 모으다 나중에 선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렇다는 건 지금까지의 주가 상승은 한지혁이 벅스의 주식을 몰래 사 모으며 나타난 현상이라는 말.

김원철이 벌게진 얼굴로 외쳤다.

"이, 이 미친 또라이 새끼가!"

*

세론이 지금까지 사 모은 벅스 주식은 전체의 3퍼센트 수준.

원래라면 공시 의무가 생기는 5퍼센트까진 조용히 사 모을 수 있지만, 시간이 문제였다.

그나마 벅스 주가가 하락 중이어서 3퍼센트까지는 수월하게 사들일 수 있었지만, 너무 많이 사들이다 보니 역으로 주가가 상승하며 매입 속도가 점점 늦어진 거다.

물론 천천히 사들이면 주가도 유지시키며 매입이 가능하겠지만, 그럼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잖아?

그래서 그냥 질러 버린 나.

그렇게 내가 적대적 인수 합병을 선언하자마자 5만 원을 조금 넘던 벅스의 주가가 순식간에 6만 5천 원까지 급등해 버린다.

"어째서 적대적 인수 합병을 시도하시는 겁니까?"

한 기자의 질문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김원철 대표님께서 경영권을 포기하실 리 없으니까요. 그러니 강제로 가져와야죠. 저는 경영권도 없는 회사에 스켈레톤을 투입할 생각이 없어서 말입니다."

"그 말은 벅스를 인수하고 나면 벅스에도 스켈레톤을 투입하실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물론입니다."

이 정도는 질러 줘야 투자자들이 흔들리지 않겠어?

차라리 세론이 벅스 경영권을 가져가는 게 자신들에게도 이득이라는 생각이 들어야 김원철이 아닌 세론을 지지할 것 아니야.

적대적 인수 합병의 원리는 간단하다.

주식을 최대한 모으고 주주들을 설득해 50퍼센트 이상의 지지를 받는 상태로 주주총회를 열어 기존 경영자들을 내쫓으면 그걸로 끝.

아무튼 선전포고는 했고, 이제 공격을 할 차례다.

"현재 벅스 주가가 6만 5천 원까지 올랐군요. 앞으로 한 달간 7만 5천 원에 공개 매수를 하겠습니다."

기간과 금액을 정해 두고 공개적으로 주식을 매입하는 공개 매수는 적대적 인수 합병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동시에 회사 경영진을 상대로 내가 이만큼 지를 거라는 위협이기도 하고.

"매수 물량은 얼마나······?"

"무한정."

물론 이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금액이 사용될지도 모른다.

벅스 역시 세론만큼은 아니어도 시가총액 35조 원에 달하는 공룡 기업이니까.

하지만 내 계획대로 벅스가 무너지든 아니면 정말 벅스를 흡수하든, 한국 시장을 제패할 수만 있다면 그 까짓 돈은 전혀 아깝지 않다.

지금 당장 벅스와 포르미 모두 상대를 누르기 위해 조 단위로 투자하고 있는데 이 정도쯤이야.

그때 기자들끼리 수군거리며 이야기를 나눈다.

"타이밍 정말 잘 잡았네. 2위, 3위 합치는 걸 정부에서 제지할 방법이 없잖아."

"그래?"

"당연하지. 여기서 포르미가 벅스 먹어 치우면 단번에 1위로 올라서서 연합이랑 2강 구도가 나올 것 아니야? 그럼 연합은 자연스럽게 말라죽을걸? 그럼 포르미가 한국 시장 전부 먹고 끝날 거라고."

"연합이 그렇게 쉽게 무너질까? 나름 지금 1위인데."

그러자 기자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허울 좋은 1위지. 연합으로 합치기 전에 두 기업 점유율이 어땠는 줄 알아? 각각 25퍼센트랑 22퍼센트였어. 합치면 47퍼센트. 그런데 지금 몇 퍼센트지? 37퍼센트야. 얼마 전 38퍼센트였는데 또 떨어졌다고. 애초에 연합을 한 것도 포르미랑 벅스를 상대로 경쟁력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합친 건데, 심지어 그 포르미와 벅스가 하나로 합쳐진 걸 연합이 어떻게 이겨?"

"그렇네."

"문제는 어찌 됐든 연합의 점유율이 높은 건 사실이니 포르미가 벅스를 인수해도 독과점 문제에서 자유롭다는 거야. 연합이 아직은 멀쩡하니 양강 구도라 우길 수 있다는 거지. 그리고 연합은 인수 안 하겠다 공언하고 벅스를 꿀꺽한 다음 연합을 살살 말려 죽이면? 그걸로 끝."

기자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내부 사정을 아는 사람은 저게 보이지. 하지만 어찌 됐든 당장 독과점은 아니잖아?'

합법적으로 한국 시장을 완전히 먹어 치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만약 연합이 무너진 이후 인수를 시도했다면 독점으로 인한 부작용이 생긴다며 공정위에서 인수 자체를 무산시킬지도 모르니까.

아무튼 선전포고도 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여 볼까?

*

공개 매수를 선포하여 시장에 풀린 주식을 무한정 사들이기 시작한 세론.

당연히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중요한 건 지금 현재 벅스의 주식을 들고 있는 대주주들의 설득.

"벅스의 로봇 시스템과 스켈레톤 배송의 조화라······."

CnT 투자회사의 박영건 회장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거 정말 탐나는군요."

CnT 투자회사는 벅스의 지분을 4퍼센트나 보유한 대주주 중 하나.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죠? 이 조합이라면 벅스와 포르미는 순식간에 연합을 밀어내고 한국 시장을 석권할 수 있을 겁니다. 다만, 발표 때도 말했듯 저는 경영권 확보조차 못 한 회사에는 스켈레톤을 절대 투입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김원철 대표를 쫓아내야만 스켈레톤을 투입하시겠다 이 말씀이시군요."

"정확합니다."

"쉽지 않을 겁니다. 김원철 대표 우호 지분이 상당하니까요. 저 역시 그런 사람들 중 하나고."

"그래서 설득을 하러 온 겁니다."

나는 느긋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모두 회사를 운영하는 기업인이죠. 그리고 우리 같은 기업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수익 아닐까요. CnT 투자회사만 해도 세론 덕분에 벅스 주식으로 상당한 이득을 보지 않으셨습니까."

적대적 인수 합병 선포 이후 급등한 벅스의 주가.

당연히 벅스 주식을 대량으로 들고 있는 CnT 투자회사는 막대한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물론 그걸 가져다 팔아야 돈이 되는 거긴 하지만, 어찌 됐든 자산이 급등한 건 사실이니까.

"그건 그렇죠."

"하물며 벅스와 포르미가 힘을 합치면 그 정도로 끝나겠습니까? 김원철 대표, 분명 대단한 사람입니다. 평범한 일반인이 벅스라는 기업을 만들어 여기까지 성장시킨 거니까. 하지만 그거야 세론이 포르미를 인수하기 전의 일이죠. 과연 벅스가 포르미를 누르고 한국 시장을 석권할 수 있을까요?"

내 말에 한참을 고민하던 박영건이 말했다.

"언제쯤 시작할 예정이십니까."

"우호 지분을 충분히 확보하면 바로."

박영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CnT 투자회사는 세론을 지지하겠습니다."

"하하!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렇게 박영건 회장과의 협상을 마무리하고 밖으로 나간 나는 곧바로 김덕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회장님.

"그쪽 설득은 어떻게 됐습니까?"

또 다른 투자자를 만나러 간 김덕배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를 지지하겠다 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우리가 지금 확보한 게 몇 퍼센트죠?"

-CnT 투자회사까지 해서 모두 18퍼센트입니다.

"제법 많이 모았네요. 이거 김원철 대표님 똥줄 좀 타시겠어요."

공개 매수로 주식을 무차별로 사들임과 동시에 자신의 지지 기반인 투자자들을 설득하여 내 편으로 만든 상황.

아직까진 투자자들을 다독이며 관리하는 수준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이렇게 세론의 우호 지분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김원철은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궁지에 몰린 사람은 무리수를 두기 마련.

"조만간 임시총회 한번 열죠."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우리 쪽 줄 세우기 한번 할 겸, 힘도 과시할 겸 말이죠."

*

내 요청으로 열린 임시 주주총회.

안건은 바로 대표이사의 해임이었다.

해임 이유는 무리한 투자로 인해 벅스의 재정난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으로 사실상 그냥 핑계였다.

"들어가시지요, 회장님."

완전히 내 편이 된 박영건의 안내를 받으며 총회장 안으로 들어간 나.

그때 가장 앞자리에 앉아서 고개조차 돌리지 않는 한 남자가 보였다.

바로 벅스의 대표 김원철.

화도 나고 당혹스럽겠지.

그간 김원철은 벅스를 키운 창립자로 벅스 그 자체나 다름없기에 경영권 분쟁 따윈 상상조차 해 본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러게 왜 날 건드려?'

노조를 이용하지만 않았어도 그냥 정정당당하게 사업으로 승부를 봤을 텐데 말이야.

"제 자리가 어디죠?"

"저쪽입니다."

그렇게 내 편이 된 대주주들과 함께 의자에 착석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진행자가 단상에 오르며 주주총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렇게 안건이 공개되고 모두 발언 시간이 오자 한 남자가 손을 들어 올리곤 단상에 오른다.

그때 박영건이 내 귀에 속삭이며 말했다.

"임 전무입니다. 김원철 대표의 측근 중 하나죠."

"그렇습니까?"

그렇게 단상에 오른 임 전무가 말했다.

"해임 사유는 무리한 투자로 인한 재정 악화. 하지만 저는 이 주장이 전혀 근거 없음을 우선 말하고 싶습니다. 저희 벅스는 점유율 상승을 위해 그간 많은 투자를 해 왔고, 이제 점점 수익률이 개선되며······."

그렇게 김원철의 대변인으로서 이번 해임 안건이 부당하다는 걸 이야기하는 임 전무.

"···또한 벅스는 현재 상당한 여유 자금을 확보해 둔 상태로 우려하는 재정난이 없음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그러곤 주주들을 돌아보며 임 전무가 말했다.

"주주 여러분, 우리는 지금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습니다. 경쟁사인 포르미, 아니 세론이 적대적 인수 합병을 선언하며 이 사태를 만들었죠. 물론 이해는 갑니다. 스켈레톤과 로봇 시스템의 조화는 분명 큰 시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임 전무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과연 그 주장이 정말 진실일까요? 우리 벅스를 인수하여 내부에서부터 붕괴시키려는 그런 의도가 아닐지 의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여러분, 벅스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멈춤 없이 성장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건 김원철 대표님의 피땀으로 이룩한 결과고요. 과연 이런 벅스를 아무 상관도 없고 그 저의가 의심스러운 세론이 잘 경영해 낼 수 있을까요? 저는 아니라 봅니다."

그러곤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부디 김원철 대표에 대한 지지를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발언을 마치고 내려온 임 전무.

저쪽에서 이번 안건의 부당함을 주장했으니 이번엔 우리 차례다.

내 편이 되기로 결정한 이후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는 박영건 회장이 손을 들어 올리곤 단상에 오른다.

"건전한 재정을 말씀하셨는데, 그 재정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바로 우리 투자자들의 주머니입니다. 그 대가로 지분을 받기는 했지만, 문제는 우리가 언제까지 이 투자를 감수해야 하는지입니다. 끝없는 적자에 이제는 로봇 시스템 도입까지. 우리의 자금은 유한한데 벅스는 무한한 세론의 스켈레톤과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 싸움에 끝이 있을까요?"

그러곤 본격적으로 왜 세론이 벅스를 인수해야 하는지 주장해 나가는 박영건.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잘하네."

저쪽이 김원철 대표 원맨팀인 벅스를 내세우며 부당함을 주장하자 박영건은 투자자답게 투자금을 물고 늘어진다.

"이제는 안정화해야죠. 제가 지금까지 벅스에 투자한 돈만 7천억입니다. 예. 물론 초기 투자자라 분명 이득을 봤지요. 하지만 세론에서 주가를 매입하지 않았다면 벅스의 주가는 계속 떨어졌을 거고 어쩌면 손해를 봤을 수도 있죠. 그러니 이제는 끝내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박영건이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끝없는 싸움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입니다. 바로 타협. 그리고 이번 인수가 바로 그 타협의 일환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세론과 벅스가 힘을 합쳐 이 무의미한 경쟁에 종지부를 찍는 겁니다!"

그러자 내 편으로 돌아선 주주들이 박수를 치며 외쳤다.

"옳소!"

"이제는 바뀔 때가 되었지!"

그런 주주들의 외침에 김원철 쪽 주주들이 외친다.

"이 배신자들이!"

"세론에 인수돼 봤자 결국 포르미 2군 취급이나 당할 텐데 그게 무슨 타협이야!"

그러자 내 쪽 주주들도 바로 응수했다.

"그럼 계속 이렇게 돈을 쏟아붓자는 거야?"

"내가 내 권리 행사하겠다는데 배신이라니!"

잠시 과열되었지만 진행자가 나서서 간신히 그들을 진정시킨다.

"진정들 하시기 바랍니다. 총회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간신히 주주들을 진정시키자 진행자가 말했다.

"그럼··· 이제 대표이사 해임에 대한 안건, 표결 진행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시작된 벅스 대표이사 해임 표결.

그리고 그 결과는······.

진행자가 최종 표결 수를 보고 말했다.

"찬성률 37퍼센트로 이번 안건은 부결되었습니다."

우리의 패배였다.

하지만 우리의 표정은 패배자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밝았다.

"37퍼센트?"

"그렇게 높다고?"

그리고 반대로 김원철과 그의 측근들 표정은······.

"···37퍼센트? 그렇게 많이?"

"이런 미친."

승리자라곤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당황해한다.

그도 그럴 게, 37퍼센트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높은 찬성률이었으니까.

"대충 30퍼센트 정도 생각했는데. 오호."

대주주들을 설득하고 공개 매수로 사 모은 주식을 합쳐 내가 확보한 지분은 모두 25퍼센트.

여기에 중립적인 주주들의 표결이 더해지면 잘해야 30퍼센트라 생각했는데 무려 37퍼센트가 나온 거다.

이 말은 스켈레톤과 로봇 시스템의 조합이라는 말에 홀린 중립적인 주주들이 대거 이쪽에 표를 몰아주었다는 말.

나는 고개를 돌려 창백해진 안색의 김원철을 바라보았다.

"슬슬 감이 오지? 이거 여차하면 정말로 대표직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거. 그럼 움직여야지. 자사주도 팍팍 사들이고 경영권 방어 해야 할 것 아니야."

그렇게 김원철이 경영권 방어를 위해 무리하면 무리할수록 벅스의 체력은 급격히 저하되겠지.

그럼 나는 그때 가서 벅스를 어떻게 할지 결정만 하면 된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한번 재미있게 놀아 보자고."

98화

37퍼센트에 달하는 찬성률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김원철.

그런 김원철이 경영권 방어를 위해 선택한 것은 당연하게도 자사주 매입이었다.

나는 뉴스 기사를 보며 말했다.

"벅스도 공개 매입 시작했네요."

김덕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가격을 저희와 동일하게 책정했습니다."

"7만 5천 원?"

"그렇습니다."

"그럼 우리는 더 올립시다."

일반적으로 적대적 인수 합병이 시도되면 여러 가지 방어 수단이 존재한다.

각종 독소 조항을 넣어 인수 비용을 올린다거나 적대적 인수 합병을 시도한 상대 측의 주식을 역으로 매입해 정면 대결을 하거나.

그런데 문제는 이런 방법들이 세론에는 하나도 먹히지 않는다는 거다.

독소 조항이라 해 봐야 한국에서 할 수 있는 건 대표이사에서 해임되면 거액의 배상금을 물도록 고용 계약을 수정하는 정도인데, 그래 봤자 퇴직금을 조 단위까지 올릴 수는 없잖아?

거기에 상대 측 주식을 역으로 매입하는 방법은 양 사가 서로의 주식 10퍼센트를 상호 보유 하면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는 제도를 이용하는 건데, 문제는 세론이 상장되어 있지 않다는 거다.

즉, 벅스는 세론의 주식을 사고 싶어도 살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말이지.

그렇기에 벅스에게 남은 건 자사주를 공개 매수 하여 지분을 최대한 확보하는 수세적 방어 기법뿐.

그리고 그 자사주 매입에 소모되는 자금은 당연하게도······.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래야 벅스 쪽 여유 자금이 더 빨리 동날 테니까."

포르미와의 경쟁을 위해 쌓아 둔 실탄이었다.

로봇 시스템을 도입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과 적자를 감당하기 위해 벅스가 아껴 둔 실탄.

그 실탄이 적대적 인수 합병 때문에 엉뚱하게도 자사주 매입에 전부 소진되어 가는 거다.

그것도 적대적 인수 합병으로 인해 원래 가치보다 훨씬 더 비싼 주식을 사는 데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피눈물이 나겠지.

그 자금은 이런 곳에 쓰려고 챙겨 둔 게 아니니까.

"그나저나 일반 주주들만 노났네요."

나와 김원철의 경영권 분쟁으로 인해 고공 행진 하는 벅스의 주식.

당연하게도 기존에 벅스 주식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이 분쟁이 더욱더 오래 지속되길 바랄 거다.

그래야 주가가 계속 오를 테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벅스 주식 좀 사 모아 둘 걸 그랬습니다. 하하."

김덕배의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안 산 게 잘한 겁니다. 혹시라도 나중에 팔게 될 때 저랑 부회장님은 함부로 처분도 못 할 테니까요."

기껏 가격도 올려 놓고 투자자들도 설득해 같은 편으로 끌어들여 놓더니 갑자기 전부 익절하고 혼자 빠진다?

당연히 벅스 주가는 폭락할 거고 투자자들과 일반 주주들은 이런 세론의 행보를 극렬하게 비난할 거다.

애초에 이번 적대적 인수는 주가 차익으로 돈을 벌려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경영권 분쟁을 일으켜 벅스의 기초 체력을 완전히 소진시켜 무릎 꿇린 다음 한국 시장을 제패하는 게 목적이니까.

"그럼 지금 벅스 주식을 계속 가지고 계실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당연하죠. 돈 때문에 욕먹을 짓 안 합니다. 게다가 제가 계속 위협을 해 줘야 김원철이 발악을 할 것 아니에요."

"흠."

그때 잠시 고민하던 김덕배가 말했다.

"그럼 만약에 정말로 찬성률 50퍼센트를 넘겨서 김원철을 대표이사직에서 끌어내리고 경영권을 장악하면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그 말에 나는 턱을 괴며 말했다.

"사실 그게 가장 고민입니다. 인수하면 세론 최초로 주식이 분산된 상장 기업을 가지는 셈이니까요."

벅스를 인수하면 효과는 확실할 거다.

벅스의 점유율을 빼앗아 오는 과정 없이 곧바로 한국 시장을 장악할 수 있으니까.

문제는 역시 세론의 낮은 지분율.

지금 공개 매수를 해서 7퍼센트까지 지분을 끌어올렸지만, 이 모든 분쟁이 끝나도 세론의 벅스 지분율은 아무리 많아도 30퍼센트를 넘기 힘들 거다.

이유는 간단하다.

투자자들은 쉽사리 자신의 지분을 매각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설사 그들이 지분을 매각한다 해도 주가 폭등 전 벅스의 시가총액이 35조 원이었으니 지분 인수에만 수십조가 필요하다는 말인데, 아무리 세론이라도 그건 좀 많이 부담스럽단 말이지.

즉, 경영권을 유지하려면 우호 지분을 잘 관리해야 한다는 말.

혼자 모든 걸 결정하고 독단적으로 처리해 온 내 입장에선 상당히 골치 아픈 상황이 될 게 분명했다.

"그냥 경영권 분쟁으로 벅스만 박살 낼까, 아니면 진짜 인수해서 포르미 2군으로 부릴까 아직도 고민이네요."

"혹시 지분 100퍼센트를 유지하시려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음···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내 돈 내 맘대로 쓰고 싶어서?"

언데드 군단 재건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을 감당해야 하니까.

"그렇다면 저는 그냥 인수하는 게 맞다고 봅니다."

오호?

"왜죠?"

"어차피 벅스는 인수돼도 포르미의 2군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세론은 지분을 100퍼센트 보유한 포르미에 더 공을 들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럼 벅스의 점유율은 아주 자연스럽게 점점 떨어질 테죠. 즉,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라는 겁니다."

그거 말 되네.

"그리고 만약 인수를 하지 않는다면 결국 벅스를 망가트린 다음 여전히 벅스에 남아 있는 콘크리트 고객을 천천히 흡수해 나가는 방법뿐인데, 그렇게 되면 인수를 하나 안 하나 모두 시간이 소모되지 않습니까? 그럴 바엔 그냥 인수한 다음 시간을 소모하는 쪽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생각해 보면 지금 세론은 과거의 세론과 차원이 다른 존재다.

그전에야 회사가 작아서 그런 일에 몹시 민감했지만, 이제 덩치도 커질 만큼 커졌으니 고작 회사 하나 지분 가지고 고민하기보단 대국적으로 보는 게 맞지.

"제가 좀 지분에 과하게 집착하기는 했죠. 감사합니다. 좋은 조언이네요."

"별말씀을."

"그럼 인수를 한다는 전제하에 움직입시다."

"알겠습니다."

"아무튼 향후 계획은 대충 정리되었고······."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김원철도 발동 걸렸으니 계속 달려 볼까요?"

*

세론이 공개 매수 가격을 올리면 그에 질세라 벅스도 매수 가격을 올리는 무한 경쟁.

그 덕분에 5만 원을 호가하던 벅스의 주가가 순식간에 13만 원까지 2.5배나 올라갔다.

상황이 그쯤 되자 관망하던 사람들이 너도나도 경영권 분쟁이 끝나기 전에 팔아야 한다며 주식을 던졌고, 덕분에 더욱 빠르게 매입되어 가는 주식들.

"이야. 자금이 그냥 쭉쭉 빠지네."

당연하게도 그렇게 많은 주식이 시장에 풀릴수록 자금 소모 속도 역시 가파르게 상승한다.

7퍼센트에서 10퍼센트까지 지분을 올리는 데 무려 2조 5천억이 소모되었을 정도.

하지만 상관없다.

나도 이렇게 놀랄 정도면 김원철은 거의 숨이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라는 말이니까.

"자금 조달은 문제없죠?"

"충분합니다."

오직 벅스 원툴로 적자를 감수하는 김원철과 포르미 외에도 많은 계열사에서 꾸준히 이익이 창출되는 세론.

기본 덩치도 세론이 훨씬 큰데 수익마저도 압도적이니, 애초에 벅스는 자금력 면에서 세론의 상대가 아니다.

아무튼 상황이 이쯤 되자 김원철이 아주 처절하게 발악하기 시작했다.

대주주들에게 스톡옵션과 각종 혜택을 미끼로 내밀어 우호 지분 확보에 열을 올리는 김원철.

덕분에 아직까진 김원철의 우호 지분이 건재하지만, 그 대가로 벅스는 계속해서 허약해져만 간다.

자사주 매입에 돈을 쓰고 스톡옵션 약속으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적은 지분을 나중에 또 나눠 줘야 하니까.

"흠. 그나저나 너무 망가져도 곤란한데."

여차하면 인수하기로 가닥을 잡은 만큼 김원철이 벅스를 너무 막장으로 몰아내면 나중에 그걸 수습하는 것도 문제니까.

"김원철 쪽 대주주들을 좀 흔들어 줘야 하나?"

결국 핵심은 대주주들이 누구의 손을 들어 주느냐이다.

김원철이나 세론이나 아무리 날뛰어도 절대 자력으로 지분율 50퍼센트를 넘길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적당히 망가진 시점에서 대주주들을 압박해 언제든 내 편으로 돌릴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하지만 어떻게?

김원철은 스톡옵션 같은 눈에 보이는 각종 혜택을 약속하지만 내가 보여 줄 수 있는 건 스켈레톤이 도입된 벅스의 미래뿐.

나는 잠시 고민하다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음? 잠깐만."

아무리 김원철에 대한 지지가 강하다 해도, 김원철이 경영권 방어를 위해 벅스를 지속적으로 무너트리면 아무리 우호적인 대주주라도 결국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애초에 대주주가 김원철을 지지한 이유는 포르미의 2군이 되는 것보다는 김원철의 벅스가 자신이 보유한 주가 가격에 긍정적이라 판단하기 때문인데, 그런 김원철이 벅스를 지속적으로 파괴한다?

그럼 아무리 우호적이라도 흔들릴 수밖에 없지.

"이때 내가 대주주들 목줄을 미약하게라도 잡고 흔들면 바로 넘어오지 않을까?"

게다가 내가 인수를 주저했던 게 대주주들의 지분 때문에 벅스를 내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없을 거라는 걱정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그런 대주주들의 목줄을 잡고 있을 수 있다면 벅스를 더욱 쉽게 통제할 수 있을 터.

"목줄이 필요해, 대주주들을 통제할 목줄. 역시 가장 좋은 방법은······."

나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돈지랄이지."

*

"내일 또 임시총회군."

다은 산업의 회장이 혀를 차며 말했다.

"세론, 징하구만, 징해."

세론에서 시작한 적대적 인수 합병.

그 여파로 벅스는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경쟁력 확보를 위해 투자돼야 할 자금이 전부 자사주 매입에 들어갔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김원철을 지지하는 이유는 연합을 제치고 독과점 장벽을 방패 삼아 포르미와 벅스 2강 구조로 만들어지는 것이 벅스에게 있어서 가장 최상의 결과라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다은 회장도 최근 김원철의 광풍 행보에 슬슬 지쳐 가고 있었다.

벅스의 자금이 점점 동나 가고, 이러다 벅스가 완전히 망가지는 게 아닌가 걱정이 들 정도로 말이다.

그때 다은 산업 회장에게 걸려 온 한 통의 전화.

바로 김원철이었다.

"예, 대표님."

-회장님, 내일이 임시총회군요.

"알고 있습니다."

-세론 이놈들이 포기를 모릅니다. 하하.

그 누구보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음에도 투자자인 회장 앞에서 어떻게든 여유로움을 유지하려 하는 김원철.

-회장님과 저희만 굳건하면 경영권을 빼앗길 일이 없는데 말이죠. 하하. 내일 믿고 있어도 되겠지요?

내일 총회에서 대표이사 해임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해 달라는 요청.

그 말에 잠시 고민하던 다은 산업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걱정 마시지요."

-직접 들으니 안심입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렇게 통화를 마친 다은 산업 회장이 말했다.

"일단 지금은 계속 김원철을 밀어주자."

살짝 고민이 되기는 하지만, 당장 벅스가 무너질 정도는 아니니 일단은 김원철을 지지하기로 마음먹은 다은 산업 회장.

"김원철 대표 17퍼센트에, 자사주로 매입한 게 7퍼센트. 여기에 다은 산업 5퍼센트랑 우호 지분 더하면··· 이번에도 큰 이변 없이 부결되겠지."

그렇게 김원철을 지지하기로 결정을 내린 바로 그때.

이번엔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온다.

"음? 누구지?"

그렇게 전화를 받은 다은 산업 회장.

"여보세요?"

-다은 산업 회장님이십니까?

"맞습니다만, 누구십니까?"

-하하. 제 목소리 기억 안 나십니까?

그 말에 기억을 더듬던 다은 산업 회장의 머릿속에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 회장님?"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한지혁 회장.

-오! 기억해 주셨군요.

다은 산업 회장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주총 때문에 연락 주신 겁니까? 죄송하지만 저는 김원철 대표를 지지할 생각입니다."

-왜죠?

"벅스와 포르미가 한국 시장을 양분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니까요."

-벅스가 이렇게 망가져 가고 있는데도?

"그 대신 회장님의 세론 그룹도 많은 자금을 소모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지지부진한 싸움도 언젠가는 끝나겠죠."

-글쌔요. 저는 제법 여유가 있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다른 곳의 투자도 병행하고 있었거든요.

"다른 곳?"

-예. 소스를 좀 알려 드릴까?

그렇게 한지혁의 입에서 튀어나온 회사명을 들은 다은 산업 회장의 목덜미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뭐, 뭐라고요?! 그게 지금 무슨 소립니까!"

-아니, 회사가 참 유망해 보여서 말이죠. 아무튼 그 투자와 관련해서 이야기를 좀 할 게 있는데······.

한지혁이 웃음기 띤 목소리로 말했다.

-대화를 나누실 준비가 되셨을까요?

*

"문제없지?"

총회에 참석한 김원철의 말에 임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저희 자체 지분 24퍼센트에 우호 지분까지 해서 모두 60퍼센트, 확인 완료 했습니다."

"좋아."

첫 주총 때 찬성률 37퍼센트가 나오며 경악했지만, 그 후 우호 대주주를 관리하고 자사주를 매입하며 어떻게든 60퍼센트를 방어해 온 김원철.

그렇기에 이번에도 큰 이변 없이 대표이사 해임 안건은 부결될 거라 확신했다.

그때 문이 열리며 늘 그렇듯 자신의 편으로 붙은 주주들을 이끌고 총회장 안으로 들어온 한지혁.

김원철은 그런 한지혁을 노려보며 말했다.

"절대 순순히 안 당해. 벅스는 내 회사야. 내가 만든 내 회사라고."

그 말에 임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안심하시죠, 대표님."

그렇게 다시 진행자가 단상에 오르며 시작된 총회.

우호 투자자들은 김원철이 왜 자리를 유지해야 하는지 주장하고 반대 측은 김원철이 해임되어야 하는 이유를 외친다.

그렇게 발언이 끝나고 시작된 표결.

의결권 행사가 모두 끝나자 김원철이 우호 대주주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에도 저희가 이길 겁니다. 여러분의 지지에 감사드립니다."

그 말에 웃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대주주들.

그런데 그때 유독 굳은 표정을 하고 있는 몇 명의 대주주들이 보였다.

그중에서 가장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는 다은 산업 회장의 표정이 특히나 심각하다.

"다은 산업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김원철의 말에 다은 산업 회장이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합니다."

그 불길한 말에 김원철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예? 그게 갑자기 무슨······?"

그때 진행자가 말했다.

"모든 표결이 완료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

당황한 모습의 진행자.

그 모습을 보고 한지혁 측 주주가 말했다.

"빨리 결과 발표 하세요!"

뭔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걸 느낀 김원철이 다은 산업 회장에게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설마 찬성하신 겁니까?"

그러자 다은 산업 회장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 다은 산업 회장의 확인 사살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은 김원철.

"어제만 해도 지지해 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요. 분명 그럴 생각이었는데··· 세론에서 그간 몰래 다은 산업 주식을 매입해 왔었습니다. 그러다 어제 5퍼센트를 넘겨 공시 대상이 되었고요."

"예?!"

"말은 투자 목적이라 하지만··· 결국 이 싸움에서 손 떼라는 협박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투자 때문에 다은 산업까지 벅스처럼 난장판이 나는 꼴은 차마 볼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갑자기!"

그때 독촉을 받은 진행자가 결국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이번 주총 안건인 대표이사 해임건은··· 찬성률 54퍼센트로··· 최종 가결되었습니다."

그 말에 김원철이 무너지듯 자리에 앉는다.

"가결··· 됐다고?"

창사 이래 단 한 번도 대표이사에서 내려온 적 없던 김원철이 강제로 끌어내려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한지혁이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 다가온다.

"다은 산업 회장님?"

"예."

"감사합니다. 대신 약속드린 것처럼 앞으로 세론은 다은 산업 회장님의 영원한 우군이 될 겁니다, 다은 산업이 세론을 지지해 주는 한."

그 말에 김원철은 이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갔다.

벅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다은 산업의 주식을 비밀리에 5퍼센트까지 매입한 세론.

그리곤 다은 산업 회장에게 이야기 한거다.

벅스처럼 다은 산업을 상대로 세론이 적대적 인수 합병을 시도할지도 모른다고.

그러면서 동시에 만약 순순히 세론 편에 선다면 이미 매입한 5퍼센트 지분을 이용해 다은 산업의 대주주로서 앞으로 다은 산업에서 벅스와 비슷한 경영권 분쟁이 있을 시 무조건 현 회장의 편에 서겠다는 조건도 내걸은 거다.

결국 본거지인 다은 산업으로까지 확전되는 걸 우려한 다은 산업 회장이 그 조건을 받아들였고 그렇게 다은 산업과 세론은 서로가 서로의 백기사가 되었다.

벅스의 지분을 들고 세론을 지지해주는 다은 산업과 다은 산업의 지분을 들고 현 회장을 지지해주는 세론 이렇게 말이다.

벅스 지분을 확보하기 위해 그 지분을 보유한 회사의 지분을 또 사드리는 그야말로 돈지랄 그 자체.

김원철이 이를 갈며 말했다.

"이이, 한지혁!"

"응? 언제부터 저한테 말을 놓으신 겁니까?"

"이건 너무하잖아!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그러자 한지혁이 천천히 김원철에게 다가와 말했다.

"왜 이래, 먼저 시비를 건 건 그쪽이면서."

"뭐······?"

"노조. 그러게 처음부터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했으면 내가 이렇게까지 했겠어? 하지만 뭐, 덕분에 한국 시장을 쉽게 먹을 수 있게 됐으니 전화위복이라고 할까?"

"으으!"

한지혁이 김원철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아무튼 그간 수고했어. 벅스는 내가 대신 잘 키워 줄게. 그럼 조심히 가라고, 전 대표이사 양반."

99화

벅스처럼 경영자 쪽 지분이 적어 경영권이 불안한 회사들의 지분을 매입해 그들의 우호 대주주로 남는 대신 벅스에서 지지를 받는 작전.

이 작전은 제대로 먹혀 결국 주주총회에서 김원철을 해임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김원철은 여전히 17퍼센트 지분을 보유한 최대 주주임을 이용해 어떻게든 반격의 기회를 엿보았지만, 이미 대세가 넘어갔음을 직감한 대주주들이 하나둘 이쪽에 붙으며 결국 김원철의 반격은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벅스 주가 많이 떨어졌네요. 천천히 사 모으죠."

그렇게 벅스의 경영권이 세론에 넘어오며 안정화되는 사이 가파르게 올랐던 벅스의 주가가 빠르게 하락한다.

그도 그럴 게, 지금 벅스 주가는 나와 김원철의 경영권 분쟁으로 상승한 말도 안 되는 수준의 가격이었으니까.

그렇게 제자리를 찾아가는 벅스 주식을 천천히 사 모아 지분율을 지속적으로 늘리도록 지시한 나.

"알겠습니다, 회장님."

나는 김덕배를 바라보며 말했다.

"부회장님, 고생많으셨어요."

부회장직을 달고 있지만 그룹 내에서 김덕배의 별명은 비서실장이었다.

말이 좋아 부회장이지, 사실상 내가 지시하면 김덕배가 알아서 처리하는 방식이 고착화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어쩔 수 있나.

큰일이야 내가 결정을 하지만, 자잘한 디테일까지 내가 챙길 수는 없잖아?

그러니 부회장인 김덕배가 나를 대신해 그룹 내정을 도맡는 역할을 할 수밖에.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조만간 보너스 잔치 한번 할 거니까 기대하세요."

"하하. 감사합니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이제 벅스에도 스켈레톤 배송 도입하세요. 물론 포르미와 차별점은 둬야겠죠? 포르미 PB 상품은 포르미에서만 취급하게 두고, 스켈레톤 배송만 적용하세요. 이벤트도 포르미 위주로 몰아주고."

"쓰레기 서비스는 어떻게 할까요."

"쓰레기 서비스는··· 뭐, 그냥 다 해 주죠. 너무 대놓고 차별하는 것도 좀 그러니까."

어차피 나에게 목줄이 잡힌 대주주가 이미 과반을 넘은 이상 경영권에 문제가 생길 일은 없으니 벅스와 포르미 이렇게 두 체제로 간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벅스도 먹었겠다, 팍팍 가 볼까요?"

*

벅스에 전격 도입 된 스켈레톤 배송.

덕분에 스켈레톤 배송은 더욱더 보편적인 서비스가 되었다.

빠르게 물건을 받고, 거기에 더해 쓰레기도 스켈레톤이 대신 버려 주고.

그렇게 스켈레톤 배송이 보편화되자 이 서비스를 따라갈 수 없는 연합의 점유율은 당연하게도 큰 폭으로 하락하기 시작했다.

주변에 스켈레톤 배송을 쓰는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연합의 사이트를 사용하던 사람들은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게 연합의 점유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그때, 엉뚱하게도 다른 곳에서 포르미와 벅스로 인한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그곳은 바로 대형 마트들.

"대형 마트 매출이 떨어졌다고요?"

"예."

원래부터도 인터넷 상거래업체의 활성화로 인해 기존 물류 공룡들이 운영하던 대형 마트들은 타격을 받아 왔었다.

그렇기에 대형 마트들이 직접 인터넷 상거래 시장에 뛰어들며 대응해 왔지만, 벅스와 포르미가 모든 걸 밀어내고 독주하기 시작하니 타격이 더욱 커질 수밖에.

"특히 쓰레기 서비스 영향이 컸답니다. 쓰레기 서비스에 길들여진 소비자들이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서라도 물건을 저희에게서 구입하다 보니 자연스레 대형 마트 방문 횟수가 줄어들 수밖에요."

"재미있네."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할 게 뭐 있습니까, 그냥 우리는 우리 일 하는 거지."

대형 마트들의 위기?

재미는 있지만 내 관심사는 아니다.

애초에 이미 세론이 등장하기 전부터 인터넷 상거래업체에 밀려 위기를 겪어 온 게 대형 마트들 아닌가.

게다가 아무리 벅스와 포르미가 점유율을 흡수해도, 그 자리에서 직접 물건을 보고 고르는 원초적 재미를 가진 대형 마트는 비록 매출은 줄어도 어떻게든 살아남을 테니까.

아마 앞으로 식자재를 대량으로 매입할 땐 마트를 이용하고 소량의 소비재를 매입하는 건 포르미와 벅스를 이용하는 식으로 완전히 자리 잡을 거다.

"고객 본인이 귀찮더라도 직접 물건 골라서 사 가는 게 좋아 마트 가는 것 아닙니까. 사업 영역이 겹치긴 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아무튼 그건 그거고, 슬슬 수익성 개선을 해 볼까요?"

그간 벅스와의 경쟁을 위해 최저가를 내세워 사실상 포르미로는 돈을 한 푼도 못 벌어 왔단 말이지.

하지만 이제 스켈레톤 배송도 완전히 정착되어 사람들의 일상에 파고들었으니 상황이 달라졌다.

"가격을 살짝씩 올리고 시간이 좀 지나면 멤버십 가입비도 올립시다."

연합과 비슷한 가격만 유지해도 사람들은 스켈레톤 배송과 그 서비스에 취해 절대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

"수익성 개선 지시하겠습니다."

역시 이래서 시장을 독점하는 게 중요하다니까?

일단 시장을 장악하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돈 벌어먹을 구석이 넘쳐 나니까.

"좋습니다. 그럼 다음 보고가······."

그렇게 김덕배와 이야기를 나누던 그때 내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바로 게이트 관리청의 이진영.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연락 오네."

최근 정부와 협력할 만한 사업이 별로 없어서 연락을 안 했더니 안부 전화 한 건가?

기특하구만.

"예. 전화 받았······."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전화를 받았는데 이진영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회장님! 일본에서 불안정 게이트가 나타났습니다!

임계점 없이 생겨나는 즉시 몬스터를 토해 내기에 가장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키는 게 바로 불안정 게이트다.

하지만 발생 빈도가 높지 않아 대응 시스템을 잘 구축해 둔 국가라면 큰 피해 없이 막아 내는 게 일반적인데, 이진영이 이렇게 다급히 연락을 했다는 건······.

"설마 언데드?"

-맞습니다!

나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등급은요."

-미정입니다. 개체별 강함이 천차만별인 데다 수까지 많아서 일본 정부에서 등급을 매기지 못했답니다.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사진이나 동영상 있습니까?"

-지금 메일로 바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이진영으로부터 날아온 메일 속 사진과 영상을 확인한 나.

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맞네!?"

도심에 질서 정연하게 도열하고 있는 언데드들.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세론의 언데드 군단.

처음 나타난 이후 단 한 번도 출현한 적이 없어 혹시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닐까 기대했는데, 아니었다.

'이런 미친. 친위대 데스 나이트도 있어?'

스켈레톤의 외형을 하고 있는 지구의 데스 나이트와 다르게 썩은 피부와 새카만 갑옷으로 무장한 친위대 데스 나이트.

이 친위대 데스 나이트는 세론의 강자들을 이용해 만든 데스 나이트로, 강함만 따지면 SS급 이상이었다.

그런데 그런 친위대 데스 나이트가 무려 4기나 있는 상황.

심지어 그런 친위대 데스 나이트를 따르는 데스 나이트도 50여 기가 넘고 그 외의 일반 병종의 언데드도 어림잡아 천이 넘는데, 그게 도심 한복판에 나타났다고?

나는 김덕배를 향해 말했다.

"지금 당장 비행기··· 아니, 비행기도 너무 늦어. 아무튼 저 일본 가 봐야 할 것 같거든요? 뒷수습을 좀 부탁합니다!"

*

"컥!"

언데드 몬스터의 공격을 받아 건물에 처박힌 일본의 SS급 각성자 나카무라가 피를 흘리며 말했다.

"이, 이런 미친."

처음 도시 한복판에서 천이 넘는 언데드 몬스터가 나타났을 땐 그 누구도 걱정하지 않았다.

원래 게이트는 높은 등급의 게이트일수록 적은 수의 몬스터가 나타나기 마련이기에 천이 넘는 몬스터가 나타났다니 당연히 F급이나 E급을 예상한 사람들.

그런데 그런 몬스터를 처리하러 간 긴급 대응 팀들이 순식간에 갈려 나가고 주변 시민들이 무더기로 죽어 나가기 시작한 거다.

깜짝 놀란 일본 정부는 곧바로 여러 중견 길드에 처리 의뢰를 했지만, 그런 중견 길드마저 순식간에 갈려 나가자 이제는 SS급 각성자를 길드장으로 둔 최상위급 길드들까지 동원된 상황.

그런데 그런 최상위급 길드들까지 언데드들에게 박살 나기 시작한다.

특히 가장 선두에 있는 검은 갑옷을 입은 언데드 4기.

이 4기는 그간 수없는 몬스터를 잡아 온 나카무라로서도 처음 만나는 괴물이었다.

일본 전체의 SS급 각성자 11명 중 6명이 동원됐는데, 저 4기와의 전투에서 속수무책으로 밀리다 2명이나 목숨을 잃은 상황.

나카무라가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여기는 나카무라."

그러자 무전기에서 일본 게이트 관리청 청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황은 어떻습니까.

"최악입니다. 시민들을 전부 퇴거시키고 후퇴해야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여긴 인구만 50만에 달하는 도시입니다! 그렇게 빨리 퇴거 작업이 될 리가······.

현장 상황도 모른 채 지껄이는 청장에게 화가 난 나카무라가 소리를 질렀다.

"이미 SS급이 두 명이나 목숨을 잃었다고! 이러다간 전멸이란 말이야!"

그 말에 청장이 경악하며 말했다.

-SS급이··· 두 명이나?

"지금 당장 후퇴해야 합니다. 아니면 우리는 모두 전멸입니다."

-그, 그럼 저놈들을 어떻게 막습니까? 계속 전진하고 있는데!

살아남은 길드원들을 추스려 후퇴를 준비하는 SS급들을 바라보며 나카무라가 말했다.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각성자를 대규모로 소집해 숫자로 밀어붙이거나, 아니면 다른 나라의 SS급을 대규모로 지원 받거나."

두 가지 모두 지금 당장 바로 조치할 수 없는 방법들.

결국 침묵하던 청장이 말했다.

-일단 후퇴하세요, 귀중한 인재를 잃을 수는 없으니. 주민들에겐 퇴거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무전을 마친 나카무라가 말했다.

"후퇴하겠다 말은 했지만··· 저놈들이 순순히 보내 줄 리 없겠지?"

놈들은 언데드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지능적이었다.

마치 후퇴하는 적이 가장 격퇴하기 편하다는 걸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빈틈을 보이는 순간 귀신같이 그 포인트를 파고들어 각성자들을 학살하는 언데드들.

아마 각성자들이 전면 후퇴 하는 순간 놈들은 각성자들을 추격하며 학살할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나서서 각성자들의 퇴로를 확보해 줘야 한다는 말.

나카무라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여기가 내 무덤이구나."

결심이 선 나카무라가 건물에서 뛰어내리며 외쳤다.

"주민들은 퇴거될 거다! 우리에게도 후퇴 명령이 떨어졌고!"

그 말에 겁에 질린 각성자들이 반색하며 후퇴를 하려던 그 순간.

"하지만 우리가 후퇴하는 순간 놈들은 우리를 추격하며 사냥을 할 거다! 그간 몬스터를 사냥해 온 우리가 몬스터에게 사냥당하는 건 너무 비참하지 않나?!"

나카무라가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결사대로 여기에 남아 놈들의 추격을 저지하고 최대한 시간을 끌 거다! 나와 함께할 사람 있나!"

나카무라의 외침에 몇몇 각성자들이 포기한 표정으로 말했다.

"젠장. 와이프한테 작별 인사도 못 했는데."

"하아. 길드장님이 나섰는데 내가 빠질 수는 없잖아. 저도 남겠습니다."

그렇게 사실상 목숨을 포기한 결사대가 모집되자 나카무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끌어들여서 미안하다. 하지만 우리가 하지 않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될 거야. 그래도 이것 하나만큼은 약속하지. 일본은 우리를 영웅으로 기억할 거다."

"그런 보람도 없었으면 나서지도 않았습니다."

그때 한 SS급 각성자가 다가와 말했다.

"나카무라······."

그 사람은 바로 나카무라의 라이벌로 유명한 SS급 각성자.

"시간 없으니 빨리 후퇴해."

"···오래 못 버틸 거다."

"알아. 하지만 내 능력 알잖아. 지금 남은 SS급 중에선 그나마 내가 제일 오래 버틸걸? 최대한 사람들이 없는 쪽으로 유인할 테니 어서 가, 시간 없으니까."

그러자 SS급 각성자가 망설이더니 말했다.

"···고맙다. 만약, 정말 만약에라도 살아 나오면··· 술 한잔하자."

그 말에 나카무라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기회가 있다면 말이지."

그렇게 결사대의 전면에 나선 나카무라가 외쳤다.

"최대한 시간을 끈다! 사람들이 대피할 수 있을 때까지!"

*

한쪽 눈과 한 다리를 잃은 나카무라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성공적이네."

나카무라와 남은 100명의 결사대는 도심 특유의 복잡한 지형을 이용해 언데드 군단을 유인하고 전진을 저지하는 데 총력을 다했다.

특히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초속 능력을 적극 활용하여 4기의 괴물 언데드를 유인하여 시간을 끄는 데 성공한 나카무라.

물론 그 대가로 모든 결사대가 사망하고 나카무라도 다리와 눈을 하나씩 잃긴 했지만, 그 대신 30분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나카무라가 후들거리는 손으로 무전기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후퇴는 어떻게 됐습니까?"

-···전부 후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시간을 벌어 준 덕에 주민들도 순조롭게 퇴거하고 있고요. 그 주변엔 이미 아무도 없습니다.

"그거 다행이군요."

-지금이라도 도망칠 수 있다면 빨리 도망치십시오.

청장의 말에 나카무라가 잘려 나간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안타깝게도 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 다리가 하나 날아가서 말이죠."

-···큭.

"그놈한테 술 한잔하자는 약속 못 지킬 것 같아 미안하다고 전해 주시죠, 나름 라이벌 놀이 하며 정들었는데. 대신 나한테 고마운 마음이 있으면 남은 우리 길드원들이랑 가족들 잘 부탁한다고······."

그때 나카무라의 라이벌이 무전기를 청장에게서 빼앗았는지 라이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책임지지. 내 모든 걸 걸고 약속한다. 내 가족처럼 돌보겠다.

"그래. 부탁 좀 할게."

그때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괴물 몬스터를 본 나카무라가 말했다.

"아. 여기까진가 보네."

-···넌 영웅이다.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한 영웅.

"나뿐만 아니라 남아 있는 모든 결사대도 전부 영웅이야."

-물론이다.

"아무튼 믿고 간다."

그 말을 끝으로 무전기를 집어 던진 나카무라가 후들거리는 손으로 검을 지팡이 삼아 일어나며 말했다.

"왔어? 그래도 순순히 죽어 줄 수는 없지. 자!"

나카무라가 한쪽 다리로 간신히 균형을 잡고 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덤벼! 죽을 날짜는 내가 못 정했지만, 죽을 때 모습만큼은 내가 정한다!"

그렇게 죽을 각오를 하고 검을 들어 올린 그 순간.

부우우우웅!

하늘에서 마치 비행기라도 나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진다.

"어?"

그 소리에 하늘을 올려다본 나카무라.

그리고 나카무라는 보았다.

양복을 입은 한 청년이 엄청난 속도로 이쪽을 향해 날아오는 것을.

"잠깐. 어디서 본 얼굴··· 어? 한지혁?"

한국어를 따로 배울 만큼 한국에 관심이 많은 나카무라는 바로 알아보았다.

날아오는 사람의 정체가 바로 세론 그룹의 회장이자 한국의 6번째 SS급인 한지혁이라는 걸.

나카무라가 어설픈 한국어로 외쳤다.

"당장 도망가! 너무 강하다!"

하지만 그런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하늘에서 내려와 착지한 한지혁.

한지혁이 나카무라를 보며 말했다.

"한국어 하네요?"

"조금. 빨리 도망쳐. 너무 강하다."

"도망가라 배려도 해 주시고. 좋은 분이시구나. 그럼 더 도망갈 수 없지."

그러곤 고개를 돌려 주변에 널린 사람들의 주검을 본 한지혁.

"···많이 죽었네."

한지혁이 뭔가 서글픈 표정으로 언데드 몬스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얘들아, 왜 그랬어. 실망스럽게."

한지혁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다.

"그래, 뭐. 너네가 무슨 생각이 있겠냐. 그냥 하던 대로 하는 것뿐인데. 못 멈추겠지? 걱정하지 마."

그리고 아공간이 열리며 무수히 쏟아지는 한지혁의 스켈레톤들.

한지혁이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직접 멈춰 줄 테니까."

100화

내가 그간 SS급 몬스터 사체를 수입하고 중국 각성자의 시체를 이용해 만든 SS급의 수는 모두 20개.

이 20개의 스켈레톤들이 친위대 데스 나이트당 5개씩 붙어 상대해 나간다.

당연하게도 중국 각성자로 만든 SS급들은 이런 상황을 대비해 다른 스켈레톤들과 비슷한 모양의 뼈 갑옷을 입혀 두었지.

그래서 능력만 안 쓰면 저게 몬스터로 만든 건지 사람으로 만든 건지 분간이 안 가는 수준.

아무튼 그렇게 SS급 스켈레톤과 치열한 전투를 펼치고 있는 친위대 데스 나이트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친위대 데스 나이트 하나 상대하려면 SS급 각성자가 3명씩은 붙어야겠네.'

SS급 각성자가 SS급 스켈레톤보다 보통 1.5배 정도 강하니 대충 맞겠지.

나는 이어서 세론 언데드 군단을 상대하고 있는 지구 언데드 군단을 확인하였다.

다행히 그간 만들어 둔 언데드 군단의 수가 제법 많고, 특히 S급의 경우 SS급보다 구하기 쉬워 많이 만들어 둔 덕분에 비교적 수월하게 데스 나이트를 상대해 나간다.

그 외에 천에 달하는 일반 병종도 내가 소환한 3천의 언데드 군단에 의해 하나둘 쓰러지는 상황.

'문제없이 처리할 수 있겠어.'

그런데 그때 세론 쪽 언데드 군단에 변화가 생겼다.

일본 각성자를 추격하기 위해 흩어져 있던 놈들이 강력한 적의 등장에 친위대 데스 나이트를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한 거다.

"아, 맞다. 경보."

위기 상황엔 상위 언데드를 중심으로 모여 방어진을 펼치도록 되어 있는 1호 경보.

여기서 내 추가 지시가 없는 상황에서 현재 부대의 과반을 잃으면 2호 경보가 뜨며, 그때부터는 방어를 도외시한 공격에 나선다.

1호 경보는 시간을 끌기 위해서 만든 거고, 2호 경보는 도저히 구출할 방법이 없으니 발악이라도 하라는 의도였지.

"나도 참 징하구나. 별의별 걸 다 해 놨었어."

거기에 지금 보니 20개의 SS급 스켈레톤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던 친위대 데스 나이트들의 동작이 시시각각 변화한다.

적의 공격 패턴에 따라 유동적으로 대처 방법을 달리하는, 그야말로 전천후 알고리즘다운 대응이었다.

"···잘 만들었네."

내가 만든 거지만 내가 봐도 잘 만들었어.

확실히 지금 지구의 알고리즘과 비교하면 차원이 다르단 말이지.

하지만 문제없다.

지구 언데드 군단은 비록 미숙하지만 그 미숙함을 보완해 줄 내가 있고, 세론 언데드 군단엔 내가 없으니까.

"그나저나 이번 일은 못 숨기겠지?"

어색한 한국말을 하던 SS급으로 추정되는 일본 각성자가 저기서 입을 쩍 벌린 채 나를 보고 있고, 사방에 설치된 CCTV까지.

거기에 일본 정부도 바보가 아닌 이상 정찰 드론이든 뭐든 전부 동원해서 이곳을 보고 있을 것 아닌가.

"수백의 각성자가 막지 못한 몬스터들을 똑같이 물량으로 막아 냈다라."

이러다 세계 유일의 SSS급 되는 것 아니야?

하지만 뭐··· 난 그게 아니어도 이미 세론 그룹의 회장으로서 한국 제일의 부자이자 세계 부자 순위 100위 안에 드는 사람 아닌가.

거기에 S 하나 더 붙었다고 달라질 건 없다.

"그냥 즐기자. 내 힘 알았으면 덤비는 놈도 줄어들겠지, 뭐. 아무튼."

일단 지금은 전투에 집중할 시간.

"나름 이것도 기회잖아? 내 알고리즘 최대한 회수할 기회."

그러니 오늘 전투는 오직 스켈레톤에게만 맡기는 거다.

나는 손을 들어 올려 지구 언데드 군단의 전투 알고리즘을 실시간으로 수정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알고리즘을 수정해 나가던 나는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이거 상황이 웃기네."

뭐랄까.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와 싸우는 듯한 느낌?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해보자고, 세론 한지혁."

*

높은 상공에 드론을 띄워 현장을 보고 있던 관리청 통제실엔 적막만이 가득했다.

"저게 뭐야."

수많은 각성자와 일반 시민의 목숨을 앗아 간 언데드 몬스터를 더 많은 언데드 몬스터가 막고 있다.

그리고 그 언데드 몬스터를 소환한 사람은 바로 한지혁.

그 모습을 보고 청장은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건··· 레벨이 다르잖아."

모두들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한지혁에겐 많은 고위급 소환수가 있을 거라고.

그래서 한지혁에게 붙은 별명 중엔 1인 길드도 있었다.

경호용 스켈레톤과 숨겨 두었을 전투용 스켈레톤을 생각하면 혼자서 길드 하나 몫은 충분히 할 거라며.

하지만 단언컨대 저 정도까지 예상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무려 일본 최정상 길드 6개를 투입하고도 사망자를 낸 채 도주하게 만든 언데드 몬스터들을 소환수만으로 막고 있다니.

"저건··· 1인 길드가 아니라 군단이야. 1인 군단."

그렇게 청장이 멍하니 있던 그때 일본의 SS급 각성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멍 때릴 땝니까? 나카무라가 살았습니다! 당장 구조 팀을 보내야지요!"

"아!"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그 말에 청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부탁드립니다."

그 말에 길드원들을 이끌고 부리나케 달려가는 SS급 각성자.

그 모습을 보고 다시 영상으로 고개를 돌린 청장이 말했다.

"돈도 잘 벌고, 무력도 강하고. 도대체 없는 게 뭐야?"

세론 그룹이 나타나며 외국에 유출됐던 산업을 끌어오고 새로운 먹거리를 지속적으로 발굴하자 계속해서 떨어져 가던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역으로 우상향하기 시작했을 정도.

그런데 심지어 이제는 SS급 불안정 게이트를 단독으로 막아 낼 수 있는 괴물이라는 것까지 밝혀졌으니 한국에게 있어 한지혁은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이쯤 되니 왜 저런 각성자가 일본에는 없는지 한스러울 정도였다.

그때 청장아 아차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나저나 한지혁 회장이 언제 일본에 입국해 있었지?"

사건이 터지고 고작 몇 시간도 안 됐으니 당연히 한지혁이 입국해 있다 개입한 거라 생각한 청장.

그런데 한 직원이 검색을 해 보더니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청장님, 한 회장이 몇 시간 전에 한국에서 중역 회의를 했다는 한국 뉴스가 있습니다."

"뭐? 몇 시간 전? 설마··· 능력으로 날아서 온 거야? 소식을 듣자마자? 그것도 불법 입국을 감수하고 한국 정부와 이야기도 없이?"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된 청장은 왜 저런 각성자가 일본에 없는지 한탄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한지혁은 이웃 나라인 일본의 위기를 전해 듣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날아와 지금 저곳에 있는 거였다.

"대인이구나. 한지혁 회장은 대인이었어."

지금까지 해외에서 한지혁에 대한 이미지는 이기적인 사업가였다.

한국에서는 이미지 관리를 통해 호감을 사고 있지만, 동남아와 중국 입장에선 자국 산업을 빼앗아 가는 적이며 선진국에서는 스켈레톤으로 만든 물건을 저렴하게 팔아 자국 제조업 경쟁력에 악영향을 끼치는 인물이었으니까.

일본 역시도 세론과 해저광물 사업을 진행할 때 한지혁이 강짜를 놓아 많은 부분을 양보해야 했는데, 그런 한지혁이 이런 위기 상황에 그 누구보다 먼저 나서 일본을 돕다니.

"저··· 그럼 불법 입국 건은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긴 어떻게 해, 조용히 우리 선에서 처리해야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날아와 우리 일본을 지켜 준 사람이야. 그런 사람에게 불법 입국 했다며 수사라도 할 거야 어쩔 거야? 내가 법무성 쪽에 이야기해 둘 테니 그냥 조용히 있어."

*

"끝."

마지막 친위대 데스 나이트를 끝으로 세론 언데드 군단을 모조리 처리했다.

마음 같아선 몇 개 잡아다가 마법진을 연구하고 싶지만, 이미 저번에 해 봤을 때 마력이 대체된 마법진을 읽을 수가 없었기에 그냥 모조리 박살 냈다.

그렇게 상황을 정리하고 주변을 둘러본 나.

"하······."

치열한 전투의 흔적으로 주변 일대의 건물이 모조리 박살 났고 사람들의 시신도 사방에 넘쳐 난다.

이 모든 게 내가 지구로 돌아오며 생긴 일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다.

"젠장."

그냥 나는 평화롭게 은퇴하고 싶었던 것뿐인데.

"···언젠가 또 나오겠지?"

대비를 해야 한다.

이놈들은 세론 언데드 군단의 일부에 불과하니까.

그렇게 멍하니 있는데 멀리서 헬기가 날아와 지상에 사람들을 내려 준다.

"땡큐! 땡큐!"

그러곤 내리자마자 내 손을 부여잡고 땡큐를 외치는 중년 남자.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노 땡큐. 노 땡큐."

나 때문에 벌어진 일로 감사의 인사를 받으니 민망해도 이렇게 민망할 수가 없다.

그때 남자가 손짓을 하자 한 사람이 다가와 한국말로 말했다.

"이쪽은 일본 관리청 청장님이십니다. 한지혁 회장님의 도움에 정말 감사하다고 하십니다."

"아닙니다. 사람이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잖아.

내 똥은 내가 수습해야지.

"그렇지 않다고 하십니다. 지원 요청조차 하지 못했는데 먼저 이렇게 타국을 위해 나서 주는 건 영웅적 행위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내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 입장에서 나는 위기 상황에 나타나는 백기사일 테지.

나는 청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사망자가 얼마나 될까요."

"정확히는 모르지만, 일반인과 각성자를 포함해 천 명 가까이 될 거라고 하십니다."

씨벌··· 천 명이나 죽었어?

겨우 이 정도 나온 걸로?

미치겠네, 진짜.

'후우.'

속으로 한숨을 쉬고 있는데 청장이 말했다.

"지금 총리님께서 감사의 인사를 하기 위해 기다리고 계신다 합니다."

총리?

보나 마나 기자들 쫙 깔아 놓고 구구절절 감사하니 어쩌니 같은 미사어구를 늘어놓으며 귀찮게 할 게 분명하겠지?

거절하자.

그렇게 거절하려던 순간.

"부디 총리님과 만나 사건이 해결되었음을 알려 불안해하는 일본 국민들을 안심시켜 주셨으면 한다고 하십니다."

아.

이런 젠장.

그렇게 나오면 내가 어떻게 거절해!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헬기 타면 됩니까?"

*

총리를 만나고 각종 부처 사람들과 미팅을 한 다음 다시 도시로 돌아온 시민들을 직접 만나는 등, 평소의 나라곤 상상조차 못 할 일정을 모두 소화한 나.

대충 기자회견이나 한번 띡 하고 나머지는 부하 직원들에게 떠맡기던 나지만, 나 때문에 가족을 잃고 좌절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그냥 두고 보나.

나에게 아들의 복수를 해 줬다며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던 노파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는다.

세론에서의 나는 그야말로 냉혈 그자체였지만 그래도 최소한 나에게 우호적이거나 무고한 사람을 상대로 무력을 휘두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은퇴하러 지구에 돌아온 것만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다니.

그때 청장이 웃으며 말하고 옆에서 통역사가 통역을 해 준다.

"정말 감사하다고 하십니다."

"뭘요."

"덕분에 국민들이 안심했다고 하십니다. 아. 그리고 한 회장님 팬클럽도 생겼다고 합니다."

"팬클럽이요?"

"예. 회원 수도 제법 빠르게 늘고 있으니 그만큼 일본 국민들이 한 회장님에게 감사해한다는 뜻이겠죠."

아오.

팬클럽이 웬 말이야.

"아무튼 그간 한국과 일본의 사이가 좀 냉랭했는데, 한 회장님 덕분에 훈훈한 분위기도 만들어질 것 같다고 하십니다."

미치겠다.

졸지에 양국 친선 대사가 돼 버렸네.

"···그나저나 사망자 정확한 통계는 나왔습니까?"

내 말에 청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반인 사망자 586명에 부상자 2,432명. 각성자는 사망자 461명에 부상자 370명입니다."

사망자만 천 명이 넘네.

나는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부상자도 많고 피해 복구에 상당한 돈이 필요하겠군요. 피해 복구 지원금을 세론 그룹 이름으로 기부하겠습니다."

마음 같아선 죄책감을 덜어 내기 위해 사망자들에게 따로 돈을 쥐여 주고 싶지만, 그랬다간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게다가 나야 이게 언데드 군단이 저지른 사고라는 걸 알지만 다른 사람들 입장에선 다른 불안정 게이트에서 벌어지는 사망 사고와 다를 바 없는데, 여긴 돈을 주고 저긴 왜 안 주냐는 소리도 나올 것 아니야.

그러니 넉넉하게 기부금을 전달하는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노선.

"유가족들을 보니 마음이 좀 아파서 그러니 그들을 위해 써 주세요."

그러자 청장이 감격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몬스터들을 처리해 주신 것도 모자라 기부까지 해 주신다니, 일본을 대신해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하십니다."

"아닙니다. 그나저나 시간이 너무 늦었네요. 저도 좀 쉬어야 할 것 같은데."

그 말에 청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눈치도 없이 시간을 너무 빼앗았다며 죄송하다고 푹 쉬시라고 하십니다."

"예."

그렇게 청장과 통역사가 돌아가고, 일본 정부가 마련해 준 호텔에 올라간 나는 침대에 누우며 말했다.

"유가족들에겐 따로 혜택을 주자."

그들을 위한 게 아니라 죄책감을 덜고 나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해서.

어차피 물건 수출을 위해 해외 각국에 설립한 세론의 지사가 있으니 혹시 취업을 원하면 최우선으로 취업시켜 주는 거다.

"그나저나 이거 문제네."

가까운 일본에서 일이 터졌고 바로 개입했는데도 천 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왔다.

그럼 만약에 일본이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 같은 먼 나라들이고 이번처럼 도심지에서 튀어나오면 사망자는 몇 배로 늘어나겠지.

"바로바로 개입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한데."

일단 지금 당장 생각나는 건 전용기다.

그것도 언제든 대기하다 내가 필요하면 바로 날 수 있는 초음속 전용기.

"오케이. 일단 전용기 하나 지르자."

지금 주문하면 수령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니 일단 주문해 놓고 중고 기체 하나 사서 먼저 운용해야겠다.

"거기에 추가로 내가 갈 때까지 시간을 지연시켜 줄 언데드도 미리미리 해외 이곳저곳에 뿌려 두면 딱인데······."

나는 잠시 고민하다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이참에 아예 본격적으로 해외 진출 해 버릴까?"

그간 한국에서 해 오며 검증된 시스템을 해외에 도입하는 거다.

에너지를 매입하고 그 에너지로 스켈레톤을 굴리고.

그렇게 스켈레톤을 보편화한 다음 그 사이에 전투용 스켈레톤을 숨겨 두는 거지.

그런 다음 이번과 비슷한 사고가 터지면 곧바로 전투용 스켈레톤을 투입해 시간을 벌고, 그사이 내가 전용기로 날아가 개입하여 처리하면 끝.

"어차피 한국 시장은 너무 좁았어. 이 기회에 해외로 진출해서 에너지 대량으로 공급 받고 그 에너지로 SS급 이상의 언데드도 만드는 거야."

친위대를 상대하기 위해 5개씩이나 투입되었던 SS급 스켈레톤들.

앞으로 더 많은 고위급 언데드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이 정도 힘으론 부족하다.

지금까지는 사체가 살아생전 가졌던 힘을 복구하는 게 가장 마력 효율이 좋아 그렇게 해 왔지만, 이제는 효율이고 나발이고 마력과 돈을 쏟아부어 그 이상의 언데드를 만드는 거다.

수천 구의 사체를 합쳐 미트 골렘을 만들고 사기를 한 개체에 몰아주어 본래 능력 그 이상을 발휘하도록 만드는 식으로.

그걸 위해선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돈과 마력이 필요하지.

"일본. 일단 일본부터 먼저 시작하자."

마침 이번 사건으로 나에 대한 호감도가 극에 올랐으니 딱이다.

"좋아. 이제는 해외로 간다."

101화

피해 복구 기부금이라 적힌 팻말을 현지 주민 대표에게 건네며 밝게 웃자 사방에서 카메라 셔터음과 함께 라이트가 터져 나온다.

그렇게 기부금 전달식이 끝나자 주민 대표가 내 손을 부여잡으며 무어라 무어라 일본어로 말한다.

이렇게 거액의 기부금까지 주시다니 너무너무 감사하다는 말로 지금까지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제는 단어 몇 개를 들으면 무슨 말인지 유추가 될 지경.

"별말씀을."

그렇게 기부식을 끝내고 내려오자 일본 정부에서 붙여준 외교관이 다가와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한 회장님."

언데드 군단을 막아낸 다음 곧장 한국에 가지 않고 일본에 남아 일본 정부의 요청을 소화하다 보니 일본에서 수월한 의사 소통을 위해 붙여준 외교관.

나는 그런 외교관을 보며 말했다.

"이제 전부 끝난 거죠?"

"맞습니다."

총리와 면담을 하고 언론과 인터뷰를 하는 등 일본 정부에 협조적으로 응해준 나.

나로 인해 피해를 받은 사람들에 대한 속죄의 의미도 있지만 이렇게 잘 협조할수록 나에 대한 일본 국민의 호감과 지지를 최대한 끌어낼 수 있기에 더욱 적극적으로 임했지.

그리고 드디어 이번 기부식을 끝으로 모든 공식 일정이 끝났다.

"잠깐 조용한 곳으로 가서 이야기 좀 하실까요?"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차례.

그렇게 외교관을 데리고 조용한 회의실로 이동한 나는 외교관을 보며 말했다.

"보아하니 민심은 많이 진정된 거 같네요."

비록 내가 막아주기는 했지만 각성자 수백을 포함해 무려 천명이 넘는 사망자와 수천 명의 부상자가 나온 대형 사고.

그런 상황에서 일본 정부는 성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나를 적극 이용했다.

일본 정부와 나는 해저 채굴을 함께 할 만큼 끈끈한 사이라는 걸 강조함과 동시에 그런 신뢰관계가 쌓여있기에 내가 바로 개입해서 막아낼 수 있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야 이번 상황이 일본 정부의 협상력 덕분에 막아졌다는 그림이 그려지니까.

아무려면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개입한 나 덕분에 얼떨결에 막았습니다 보단 이쪽이 훨씬 국민들에게 보여주기 좋잖아?

그리고 나는 그런 일본 정부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여러 차례 총리 같은 고위층과 만나며 나와 일본 정부가 끈끈한 사이임을 과시했다.

그래야 나중에 딴소리를 못할 테니까.

아무튼 그렇게 드디어 밑밥을 가득 깔아놨으니 본격적으로 움직일 시간.

"뉴스에서 그러던데요. 만약 내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피해는 지금보다 몇 배로 커졌을 거라면서요."

"그렇습니다. 한 회장님이 아니라면 결국 미국에 지원을 요청하는 수밖에 없는데 요청을 한다고해서 바로 보내주는 것이 아닌 만큼 그렇게 허비되는 시간 동안 일본은 더 큰 피해를 봤을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일본 정부가 저한테 빚을 진 거라 봐도 무방하겠죠?"

내 말에 외교관이 슬쩍 눈치를 보며 말했다.

"한 회장님 같은 좋은 친구를 둔 덕분 아니겠습니까?"

역시 외교관답게 직설적으로 찌르니 슬쩍 돌려서 답한다.

하지만 뭐 외교적 언어야 내 알 바 아니고 난 내 할말만 하면 그만이니까.

"친구일수록 거래는 정확해야 한다는 말도 있죠. 그런 의미에서 일본 정부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세론의 에너지 거래를 일본에 진출시키고 싶습니다."

사람들에게 돈을 주고 마력을 사오는 에너지 거래.

분명 국민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이지만 중국의 반발처럼 이 에너지 거래는 국가들의 상황에 따라 받아들이는 기준 역시 다를 수밖에 없었다.

딱히 한국과 별 상관이 없는 후진국들은 없던 자원이 생겨나 수출하는 셈이니 반대할 이유가 없지만 일본은 한국과 역사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긴밀하게 얽혀있는 나라.

그런 나라에서 오직 세론에만 의존해야 하는 에너지 거래를 순순히 받아들일까?

이 에너지 거래가 완전히 정착하고 에너지로 발전소를 굴리며 스켈레톤이 움직이면 국가 기반의 일부가 세론에게 종속되는 꼴인데?

절대 그럴 리 없지.

아니나 다를까 외교관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에너지 거래 말입니까?"

"예. 한국은 얼추 다 끝났으니 이제 해외로 진출하려고요."

"그럼 다른 사업들도···"

"당연히 진출해야죠. 아. 물론 공장은 계속 한국에서 돌릴 거지만."

협력사 하나 한국으로 들여올 때마다 경제적 효과가 얼마나 큰데 그걸 일본이랑 나눠 먹겠어.

일본 진출은 어디까지나 에너지 확보와 판로 개척 그리고 전역에 스켈레톤을 배치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자 내 말을 이해한 외교관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스켈레톤만 일본에 들여온다는 소린데 일자리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한국은 해외 공장을 유치하여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고 그 일자리에 스켈레톤을 배치하는 방식이지만 이건 말 그대로 스켈레톤을 이용해 일본에 있는 기존 일자리를 대체한다는 이야기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일본에 불리한 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일본은 이미 인력난으로 인해 해외 노동자들 데려오고 있잖아요?"

젊은 층의 인구감소와 무기력증을 이미 한국보다 먼저 경험하고 있는 일본.

그런 일본은 이미 인력난 문제로 인해 해외 노동자 비율이 한국보다 훨씬 높은 상황이었다.

"해외 노동자를 데려오나 스켈레톤을 쓰나 거기서 거기 아닐까요? 거기에 한국을 보면 아시겠지만 에너지 매입이 도입되면 힘들고 수입이 적은 일을 기피하는 현상이 더욱 가속화됩니다. 그때 스켈레톤이 그런 빈 자리를 메우는 거죠. 추가로 그로 인해 새로운 일자리도 생겨날 거고. 그러니 실제 일본 국민이 일자리 문제로 힘들어 할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그렇게 두고 보지도 않을 거고요."

하지만 그런 내 말에도 표정을 풀지 못하는 외교관.

그도 그럴게 아무리 호감도가 급증했다지만 일본에게 있어서 나는 외국인이고 그런 외국인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는 건 정부에게 어마어마한 부담이 되니까.

여기서 가장 확실한 건 당근과 채찍.

우선 나는 채찍을 휘둘렀다.

"물론 일본 정부가 제 부탁을 거절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럼 그냥 독자적으로 진출하면 그만이니까."

"예?"

"제가 부탁을 드린 건 어디까지나 일본 정부와 끈끈한 사이라는 걸 더욱 부각하기 위해서지 일본 정부가 꼭 필요해서는 아니니까요. 해외 기업의 현지 진출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물론 에너지 매입을 안정성 문제로 걸고 넘어지며 정부 차원에서 막을 수는 있겠지만 그럼 다른 사업만 진출하며 그만이죠."

한마디로 너네가 어떻게 나오던 나는 개썅마이웨이로 가겠다는 선포.

그렇게 어차피 막지 못할 흐름이란 걸 강조한다.

"으음."

이제 채찍질은 했으니 당근을 내밀 차례.

"외교관님. 원래도 일본은 내수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돈을 뿌려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에너지 매입까지 도입되면 내수 경기가 더 살아날 거 아닙니까."

그간 버블 붕괴 이후 잃어버린 30년이라 불리며 경제 침체를 겪어온 일본.

일본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각종 사업을 진행하여 돈을 무차별로 뿌려왔다.

시장에 돈을 뿌려 내수 경기를 활성화시키기 위해서.

그런데 이때 에너지 매입을 도입하여 일반인에게 돈이 뿌려지면 그 효과는 배가 될 터.

그야말로 일본에게 딱 맞는 정책이 아닐 수 없다.

다만 문제가 그 모든 과정이 내 손아귀에 있다는 것이 걸릴 뿐.

아무튼.

"추가로 이것도 제안 드리죠. 게이트 방위 조약."

"게이트 방위 조약이요?"

"이번 일처럼 일본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게이트 문제가 발생할 시 일본 정부가 저에게 요청하면 무조건 개입하는 거죠."

불안정 게이트에 대한 불안감을 호소하는 일본인들을 달랠 수 있는 최고의 패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외교관의 표정이 확 달라진다.

"무조건 개입 말입니까?"

"예. 무조건. 아시죠? 요즘 SSS급을 따로 지정해야 되는 거 아니냐는 소리 듣는 거."

SS급 6이나 포함된 각성자 집단도 패퇴시킨 몬스터를 단신으로 막아낸 나.

당연히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여러 각성자 기구에서 나를 SSS급으로 별도 분류해야 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다.

물론 내 무력이 아닌 스켈레톤의 무력만 부각되었기에 진짜 그게 통과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아무튼 내가 기존의 분류 기준을 뛰어넘는 강자라는 건 대부분이 인정한다는 말이었다.

"물론 몇 가지 조건은 있을 겁니다. 한국에 비슷한 상황이 있다면 한국을 최우선시하고 한번 요청을 할 때마다 비용도 지불해야 한다 등등."

이렇게 되면 일본도 일본이지만 나한테도 나쁠 게 없다.

언데드 군단이라면 어차피 개입해야 할 거로 생색내는 셈이고 만약 아니라면 처리해봐야 사기와 마력이 모두 소멸해 재활용이 불가능한 언데드 군단과 달리 재활용 할 수 있는 강력한 사체를 무더기로 얻을 기회니까.

심지어 출장비까지 쏠쏠하게 챙기며 말이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떻습니까? 이런 조건이면 일본 정부 체면도 살고 국민들 달래기엔 딱 일거 같은데."

외교관을 통해 내 제안을 받아 든 일본 정부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내 무력을 언제든 동원할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이지만 그 대신 세론과 나에 대한 일본의 의존도가 급격히 올라갈 테니까.

그렇게 한참을 고심하던 일본 정부는 결국 결정했다.

에너지 판매 특별구역을 일본과 협의해서 결정하는 조건하에 받아들이기로.

"그래. 지들이 어쩌겠어. 일단 살고 봐야지."

역시 가장 핵심은 게이트 방위 조약이었다.

이미 호되게 당해본 입장에서 나의 무조건적인 개입은 일본 정부가 가장 쉽고 빠르며 효과적으로 꺼내 들 수 있는 패이니까.

동시에 일본 국민들을 안심시키기에도 딱 좋고.

그렇게 일본과의 조약을 체결하고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출국장을 나서자마자 사방에 밀려오는 기자들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한 회장님!! 대한 일보 기자입니다!! 한가지 질문만···"

"전격적으로 개입을 결정하신 이유가 뭔지 이야기 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일본에서 순식간에 스타덤에 올라 하루 종일 뉴스에 보도된 나지만 그건 한국도 비슷했다.

평소 일본보다 SS급 각성자가 적어 자존심이 상해있던 한국인들 입장에서 일본 각성자가 막지 못한 몬스터 무리를 한국의 각성자가 홀로 막아냈다는 사실은 뽕에 취하기 딱 좋은 뉴스거리였으니까.

그렇게 기자들이 나에게 몰려든 그때 기자들 사이를 비집고 온 김덕배와 김덕배가 끌고 온 경호원들.

"인터뷰는 나중에 하겠습니다! 일단 뒤로 물러서세요!"

그렇게 경호원들로 기자들과 나 사이에 벽을 만든 김덕배가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회장님."

참 할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합니다. 이렇게 오래 있을 줄은 나도 몰랐네."

"갑자기 보고받다 말고 일본으로 무단 출국하신 덕분에 제가 수습하느라 얼마나 고생한 줄 아십니까?"

보나마나 김덕배 본인도 뭐가 뭔지 파악이 안 되는 상황인데 사방팔방에서 전화가 오고 연락이 오니 죽을 맛이었겠지.

심지어 그 상황에서 내가 없는 세론 그룹의 각종 사업들도 진두지휘 해야 하니 얼마나 정신이 없었겠어.

"워낙 사안이 긴급해서 말이죠. 하하."

그러자 김덕배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다음부터는 제발 미리 말씀이라도 좀 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갑자기 전용기를 주문하라지 않나 일본 진출 준비를 하라지 않나."

"바빠서 설명도 제대로 못 드렸네요. 사방팔방 불려 다녀가지고 저도 정신이 없었거든요."

"아무튼 자세한 건 가시면서 이야기 하시죠."

그렇게 경호원들과 함께 기자들을 헤치며 준비해둔 차로 이동한 나와 김덕배.

"일본 진출은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조만간 일본 정부에서 공식 발표를 할 텐데 제가 일본과 게이트 방위 조약을 맺었거든요? 그대 신 일본에 세론이 진출해서···"

그렇게 일본에서 있었던 일과 향후 계획을 김덕배에게 알려준 나.

그러자 한참을 듣고 있던 김덕배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드디어 해외로도 진출하는 거군요. 그것도 제대로."

"그렇죠."

"세계 3위 경제 대국이자 수출 위주인 한국과 다르게 내수 규모가 엄청난 일본이라. 엄청난 기회군요. 마침 회장님에 대한 호감도 최상 수준이고."

"그렇죠? 제가 그거 조율하느라 늦은 거라니까요."

"···그래도 미리 말씀을 해주셔야 이쪽에서 더욱 수월하게 대처할 수 있는 거니 부탁 드리겠습니다."

"알겠어요. 알겠어. 아무튼 간에 일본 정부도 협조적이니 본격적으로 시작해볼까요?"

그간 쌓아 올린 노하우를 확실하게 선보일 시간.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일본도 스켈레톤 맛 보여주고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겁니다."

게이트 방위 조약을 일본 정부가 공식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진출한 일본.

물론 그 과정에서 조약 체결을 왜 같이 진행하지 않았냐며 한국 정부가 섭섭해 했지만 여기서 한국 정부가 끼면 정치적 논리가 작동되며 민감한 여러 문제가 함께 도마 위에 오를 거고 조약 체결이 지지부진해질게 뻔하지 않나.

그래서 적당히 한국 정부를 달래고 나 혼자 속전속결로 진행한 나.

아무튼 그렇게 조약이 공식 발표되며 또 한가지 발표된 게 바로 에너지 매입 특구였다.

이 특구를 방위 조약 최우선 적용 도시라 포장하여 에너지 매입과 방위 조약을 한데 묶어 국민들의 반발을 최소화한 일본 정부.

마침 호감도도 절정인데다 특구로 지정되면 게이트 사고가 나도 가장 먼저 최우선으로 개입해준다니 특구의 일본인들은 환영할 수밖에.

아무튼 그렇게 일본 정부에서 공식으로 지정한 특구는 바로 후쿠오카였다.

후쿠오카가 특구로 지정된 이유는 여러모로 지금 현 상황에 가장 어울리기 때문이었다.

인구는 140만으로 적당하고 한국과 가장 가까운 도시라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아 한국에 대한 반감이 적음과 동시에 IT와 스타트업을 적극 유치하는 스마트 특구이기도 했다.

덕분에 신기술에 대한 거부감도 적어 딱 이었지.

아무튼 그렇게 후쿠오카를 특구로 선정하고 가장 먼저 도입한 것은 에너지 매입과 스켈레톤이었다.

일단 에너지 매입으로 물꼬를 트고 그걸로 생긴 빈틈을 스켈레톤으로 채워나가는 방식.

원래도 인력난이 심한 일본이기에 큰 문제 없이 정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생겼다.

"거부감이 상당한데? 이건 예상 못했다."

분명 후쿠오카는 한국에 대한 반감이 비교적 적은데다 나에 대한 호감도 높긴 하지만 문제는 스켈레톤 그 자체.

최근 게이트 사태로 큰 피해를 입은데다 그간 몇 년에 걸쳐 스켈레톤이 서서히 녹아 든 한국과 다르게 일본 사람들은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으니 스켈레톤이 나타나기만 해도 깜짝 깜짝 놀라며 경기를 일으키는 거다.

특히 나이가 많아 나에 대한 호감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으로 한국에 대한 거부감이 기본 장착된 장년층을 중심으로 스켈레톤에 대한 반감이 극심한 수준.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 스켈레톤이 나타나기만 해도 신고를 하고 가까이 가길 거부한다고?"

한국에서는 상상조차 못한 일이 벌어지는 상황.

"이거 골 때리네. 후우."

하긴.

생각해보면 한국에서도 초반엔 스켈레톤에 대한 반감을 없애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지 않았나.

그 덕에 지금 한국에서 스켈레톤은 주변에서 돌아다니는 게 너무나도 당연한 세상이 되었고.

하지만 일본은 그 과정이 전부 스킵 되어있단 말이지.

"스켈레톤에 대한 거부감을 줄여야 되는데 뭐 좋은 방법 없나?"

그렇게 한참을 고민했지만 마땅히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인가."

이런 근본적인 거부감은 단기간에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아니면 뭐 현지화 해볼까?"

프로티지 제품이 미국 현지 상황에 맞춰 방탄 기능을 갖춘 것처럼 일본에 맞는 현지화를 통해 스켈레톤의 거부감을 줄이는 방법.

"일본은 만화 천국이지? 스켈레톤이 주인공인 만화라도 하나 만들어서 뿌려? 아니면 애니메이션?"

나름 괜찮은 방법일거 같긴 하지만 이것만으로 될까?

만화로 보는 스켈레톤과 실물 스켈레톤은 전혀 다르잖아.

"다른 방법 찾아보자."

그렇게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일본 재계 정보를 모아둔 사이트에 접속하였다.

"역시 가장 확실한 건 현지 기업을 보는 거지."

자본주의 시장에서 성공한 기업은 그 사회의 양상을 보여주는 단면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렇게 일본 재계 순위대로 기업들을 하나하나 확인한 나.

"은행. 증권사. 전자제품. 한국이랑 비슷한데?"

한국은 어려운 시기 잘 나가던 일본을 벤치마킹하여 성장해온 나라.

그래서인지 재계 순위에 있는 기업들의 주력 사업이 한국과 일본 모두 비슷비슷하다.

"흠."

그렇게 기업을 확인하던 그때.

나는 그 사이에서 한국 재계 순위에선 본적조차 없는 업종의 회사를 하나 발견하였다.

"···테마파크?"

그것은 바로 미국의 유명 테마파크인 마우스 랜드를 프렌차이즈화 해 만든 도쿄 마우스 랜드를 운영하는 회사.

물론 여기까지는 이상할 게 없다.

한국도 테마파크는 있고 사업 규모도 상당하니까.

그런데 이 회사는 그 수준이 그야말로 넘사벽.

"테마파크 운영하는 회사가 일본 시가총액 10위라고!?"

고작 놀이공원 운영회사가 한국 돈으로 시가 총액 80조원을 자랑하며 일본 전체 기업 랭킹 10위에 올라가있다니.

심지어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아는 일본의 유명 게임 회사조차 테마파크 운영사보다 시가 총액이 낮다.

"매출액의 80퍼센트가 보유한 2개 테마파크에서 나온다면 정말 놀이공원만 운영해서 시총 10위를 달성했다는 거잖아? 이런 미친."

이제 막 발견해서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한국은 어쩐지 모르겠지만 일본에서 테마파크는 돈이 된다는 거.

그리고 동시에···

"테마파크면 노는 곳이잖아. 이거라면 거부감을 줄이기 딱일텐데?"

스켈레톤을 이용해 놀이기구를 만들고 스켈레톤이 사방에서 돌아다니며 서빙도 하고 서비스도 하는 스켈레톤 테마파크.

이거야말로 일본에 최적화된 현지화 사업 아닐까?

돈이 된다는 건 이미 시총 10위에 오른 저 회사가 증명한데다 일본인의 스켈레톤에 대한 거부감도 줄일 수 있는 일석이조의 사업.

나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이거 한번 알아보자."

102화

"스켈레톤 테마파크."

한국의 유명 테마파크를 기획한 기획자를 초청하여 내가 구상한 내용을 설명하자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거 재미있군요. 원래 테마파크라는 건 콘셉트가 반은 먹고 가는 법이니까요."

"그렇죠?"

"스켈레톤으로 만든 놀이 기구와 스켈레톤들이 서빙하는 테마파크. 분명 이건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군요."

기획자가 종이에 무언가를 쓰면서 말했다.

"테마파크가 성공하려면 3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합니다. 우선 콘셉트. 이건 뭐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그야말로 독보적이니 넘어가고, 두 번째는 규모와 재미지만 이것도 돈이라면 남부러울 것 없는 한 회장님께서 작정하고 돈다발을 풀면 이것도 문제가 안 되니 패스. 문제는 3번째입니다."

기획자가 종이에 인지도라 쓰면서 말했다.

"인지도. 정확히는 인기라 해야겠지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마우스 랜드가 성공한 건 마우스 랜드의 놀이 기구가 재미있는 것도 있지만, 마우스의 애니매이션에 대한 대중의 호감도가 극도로 높기 때문입니다. 만화로 보던 마우스를 현실에서 보고 느낄 수 있으니 어떻게든 찾아가는 거죠."

그건 그렇지.

나 역시도 어렸을 적부터 마우스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란 사람이라 마우스 랜드 한번 가 보는 게 소원이었으니까.

"하지만 회장님이 테마파크를 구상한 건 스켈레톤에 대한 일본 사람들의 거부감을 중화하기 위해서 아닙니까? 한마디로 선후가 뒤바뀌었다는 겁니다. 인기를 얻고 그 인기를 이용해 테마파크를 만드는 건데, 인기를 얻기 위해 테마파크를 만드는 꼴이 된 거죠."

그게 또 그렇게 되는 건가.

"차라리 이걸 한국에 만들면 장담컨대 곧바로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릴 수 있을 거지만, 일본은 글쎄요. 물론 워낙 콘셉트가 독보적이라 언젠가는 거부감이 줄어들어 성공하겠지만,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테마파크를 만드려는 건데 그것조차도 시간이 걸린다니.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러자 기획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결국 테마파크의 성공은 오직 그곳에서만 누릴 수 있는 재미가 있느냐인데, 스켈레톤은 그게 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일본인에게도 익숙한 한 가지가 있죠. 바로 공포의 집."

귀신 인형들이 튀어나와 사람을 놀래키는 공포의 집.

이걸 인형이 아니라 진짜 언데드가 튀어나오게 만들면 끝내주지 않을까 하고 나도 생각했지.

하지만 나는 이내 이 시스템의 문제를 파악해서 바로 머릿속에서 지웠었다.

애초에 사람들의 거부감을 중화하기 위해 친근한 콘셉트로 찾아가려는 건데, 대놓고 사람을 놀래키고 공포스럽게 만드는 공포의 집은 오히려 마이너스였으니까.

나는 회의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진짜 언데드가 튀어나오니 기존 공포의 집과는 비교조차 안 될 테고 독보적인 건 사실인데, 그러면 거부감이 강한 사람은 애초에 찾아오지도 않을 거고, 기껏 찾아온 사람도 거부감이 증폭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기획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습니다. 하지만 방향성만 잘 잡으면 오히려 좋은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방향성?"

"기존 공포의 집은 아주 수동적인 놀이 시설입니다. 그저 걸어가다 튀어나오는 무언가에 놀라는 게 전부죠. 하지만 여기서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무언가를 쥐여 준다면 어떨까요."

기획자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방금 회장님 말씀을 듣고 제가 머릿속에 떠오른 게 있습니다. 혹시 스켈레톤이 박살 난 것처럼 위장하는 것도 가능합니까?"

"가능하죠."

"그럼 완벽합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겁니다. 공포의 집에 들어가는 사람에게 검을 하나 쥐여 줍니다. 그리고 그 검으로 갑자기 튀어나온 스켈레톤을 공격해서 특정 부위를 맞히면 스켈레톤이 부서지는 거죠."

오오?

"그렇게 스켈레톤이 박살 나면 경험치를 얻습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안으로 들어가며 갑자기 튀어나오는 언데드를 상대해서 레벨을 올리다 보스와의 일전을 치러 그 보스마저 물리치면 성공."

"그건 RPG 아닙니까?"

"맞습니다.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RPG를 공포의 집에 섞는 겁니다. 그렇게 언데드에게 놀라는 것만이 아니라 무찌르는 경험을 반복적으로 심어 주면 거부감이 좀 덜어지지 않을까요."

이야.

이거 괜찮네?

역시 유명 기획자는 다르구나.

"일본인들은 이세계나 이런 걸 좋아하지 않습니까. 이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겁니다. 세론의 테마파크에 오면 이세계 모험의 경험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거죠."

이세계?

이세계라면 내가 전문가잖아.

나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미니 세론 대륙 한번 만들어 봐?"

여기에 RPG를 섞어 모험과 낭만이 충만한 세상을 만드는 거다.

나는 기획자를 보며 말했다.

"RPG를 섞은 공포의 집, 우리 한번 진지하게 이야기해 볼까요."

*

"심심해."

키요시의 말에 친구가 말했다.

"노래방이나 갈까?"

그러자 키요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질렸어. 뭔가 색다른 재미있는 건 없나?"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키요시가 몸을 축 늘어트리며 말했다.

"세론 덕분에 에너지 팔아서 지갑은 두툼해졌는데, 할 게 없네."

세론의 에너지 매입과 에너지 거래 시장이 후쿠오카에 도입되며 주민들의 생활엔 많은 변화가 생겼다.

수만 엔의 추가 수입이 생긴 덕에 생활이 여유로워지며 더 많은 여가 생활을 즐기는 사람들.

하지만 관광객을 위한 시설은 많아도 현지인만을 위한 놀이 시설은 없기에 심심할 수밖에.

"아아. 나도 전생 트럭에 치여서 이세계로 가고 싶다."

"미친놈. 킥킥."

키요시의 말에 키득키득 웃던 친구가 지나가는 한 트럭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트럭 온다. 혹시 알아? 저게 전생 트럭일지. 가서 치여 봐."

그 말에 아무 생각 없이 트럭을 바라본 키요시.

그런데 트럭을 본 키요시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어?"

친구가 가리킨 트럭은 일반 트럭이 아니라 광고판을 붙인 홍보용 트럭이었다.

그런데 홍보용 트럭에 붙은 문구가 키요시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트럭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모험과 낭만이 가득한 세론 대륙으로 오세요!

"세론 대륙?"

키요시의 반응을 보고 함께 트럭을 확인한 친구가 말했다.

"세론 그룹에서 외곽에 뭘 만들고 있다더니, 그게 저건가?"

"그래?"

"어. 제법 넓은 부지에 공사하더니 완성됐나 보네. 근데 저게 도대체 뭐야. 세론 대륙? 스켈레톤도 그려져 있고. 테마파크 같은 건가?"

그 말에 키요시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한번 가 볼까?"

"넌 스켈레톤 안 무서워?"

"무섭긴 뭐가 무서워. 그게 진짜 위험했으면 한국인들은 벌써 다 죽었을걸? 왜. 무섭냐?"

그 말에 친구가 발끈하며 말했다.

"무섭기는 뭐가 무섭냐?"

"그럼 가 보자. 어차피 할 일도 없잖아."

"좋아. 가자!"

"보자. 주소가······."

*

그렇게 후쿠오카 외곽에 새로 생긴 세론 대륙에 도착한 키요시와 친구.

제법 큰 규모의 돔 형식으로 만들어진 세론 대륙이지만, 아직 인지도가 없어서 그런지 입구 앞은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들어가자."

그렇게 입구에 있는 매표소로 가서 가격을 확인한 키요시와 친구.

"5천 엔?"

상당히 비싼 가격의 입장료.

키요시는 잠시 고민했지만 모험과 낭만이라는 말이 계속 떠올라 결국 지갑에서 5천 엔을 꺼내 입장료를 지불하고 안으로 들어갔고, 곧 안내원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여러분은 이제 모험과 낭만이 가득한 세론 대륙에 들어가실 겁니다. 세론 대륙엔 비록 흉폭한 괴물과 언데드들이 도사리고 있지만, 선택받은 여러분이라면 잘 헤쳐 나갈 수 있으실 겁니다. 그럼 무운을 빕니다."

마치 게임 프롤로그 같은 설명을 들은 다음 닫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보인 것은 바로 바닥에 꽂힌 검 두 자루.

누가 봐도 뽑아 가라 만들어 둔 모양새에 키요시가 검을 뽑자 검에서 요란한 효과음과 함께 음성이 흘러나온다.

-선택받으셨습니다.

"선택?"

그때 키요시와 마찬가지로 검을 뽑은 친구가 말했다.

"뭘까? 아직은 감이 안 오는데.

"일단 들어가 보자. 들어가 보면 알겠지."

"알았어."

그렇게 검을 들고 안으로 들어간 키요시와 친구.

"와······."

그리고 그들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돔으로 만들어진 세론 대륙 안에는 어두컴컴한 숲이 조성되어 있던 거다.

그때 친구가 옆으로 계속 가 보더니 말했다.

"이쪽은 막혀 있다."

"아마 길 따라 쭉 진행하라는 이야기겠지."

"이런 건 좀 인위적이네. 그런데 분위기가 왜 이렇게 음산하냐."

그렇게 친구와 길을 걷던 그때.

달그락. 달그락.

사각지대에서 검을 든 스켈레톤이 갑자기 튀어나온다.

"헉!"

스켈레톤의 등장에 놀란 키요시와 친구.

그때 스켈레톤이 그들을 발견하고는 검을 치켜들고 그들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온다.

"도, 도망가자!"

하지만 그런 친구의 말에 키요시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야, 괜히 우리한테 검 쥐여 줬겠어? 싸우라는 소리잖아."

"한지혁 스켈레톤이 몬스터들 썰어 젖히는 영상 못 봤어!? 우리가 어떻게 이겨!"

"정신 차려. 여긴 놀이 시설이라고! 진짜 강한 스켈레톤을 뒀을 리가 없잖아."

그렇게 다가오는 스켈레톤을 향해 당당히 다가가는 키요시.

그때 스켈레톤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든다.

"쿠어어!"

그 소리에 잠시 흠칫한 키요시지만, 자세히 보니 소리만 요란하지, 다가오는 속도도 느리고 검도 천천히 휘두르는 게 아닌가.

가볍게 검을 피하고 들고 있는 검으로 스켈레톤을 공격한 키요시.

그리고 키요시의 검이 스켈레톤을 가격하는 그 순간.

-띵!

후두두둑!

띵 소리와 함께 스켈레톤이 박살 나며 후두둑 떨어진다.

그리고 그때 검에서 음성이 흘러나온다.

-경험치 1을 얻으셨습니다. 다음 레벨 업까지 남은 경험치 9.

그 말에 키요시의 입꼬리가 꿈틀거린다.

"스켈레톤 잡아서 레벨을 올려라 이거지? 제법 잘 만들었는데?"

키요시가 친구를 돌아보며 말했다.

"가자! 돈도 냈는데 제대로 즐겨야지!"

*

음산한 분위기에 갑자기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스켈레톤들.

그리고 그런 스켈레톤의 기습 공격을 막지 못하고 맞았을 때 검에서 체력이 감소했다는 음성이 튀어나오자 키요시와 친구는 그제야 확실히 알았다.

여기는 공포의 집 콘셉트를 가진 RPG 세상이라는 걸.

그렇게 조심조심 이동하며 스켈레톤을 계속해서 잡아 가던 그때.

-레벨이 올랐습니다.

먼저 10마리를 잡은 키요시의 검에서 레벨이 올랐다는 음성이 흘러나온다.

-불의 검 능력을 각성합니다. 불의 검을 외치면 시전됩니다.

"능력을 각성했다고?"

그렇게 새로운 무언가를 얻은 바로 그때.

"키에에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나타난다.

그전처럼 스켈레톤이겠거니 생각하고 바로 고개를 돌린 키요시와 친구는 입을 쩍 벌리며 말했다.

"유, 유령!"

그것은 바로 파란빛을 내뿜는 유령이었다.

기괴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유령의 모습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

"으아아!"

간신히 스켈레톤에 적응했던 친구가 다시 공포에 휩싸이자 이번에도 키요시가 나서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부웅!

검은 그저 유령을 스쳐 지나갈 뿐 아무런 대미지도 주지 못한다.

"어?"

오히려 유령이 휘두른 공격을 맞은 키요시.

-체력이 2 감소했습니다. 남은 체력 17.

키요시가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공격이 안 먹히잖아!"

체력이 떨어졌다는 음성이 나오는 걸로 보아 이 유령 역시 배치된 몬스터 중 하나인 건 분명한데, 공격이 먹히질 않는다니.

그때 키요시는 방금 각성했다는 불의 검이 떠올랐다.

"그래! 유령은 속성 공격을 해야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거야!"

그러곤 키요시는 외쳤다.

"불의 검!"

그러자 진짜로 검에서 불이 쭉쭉 뻗어 나오는 것 아닌가.

"와······."

그 환상적인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던 키요시가 타오르는 불에 손을 얹는다.

"뜨겁진 않네? 이걸 어떻게 구현한 거지?"

그때 친구가 유령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저놈 좀 빨리 어떻게 해 봐! 너한테 다가가고 있어!"

그 말에 정신을 차린 키요시가 유령에게 불의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유령이 아까와 다르게 몸부림치며 괴로워한다.

"키에에엑!"

"먹힌다!"

그렇게 여러 번의 칼질을 하자 천천히 소멸한 유령.

-경험치를 3 얻으셨습니다.

"와······."

처음엔 놀이 시설이라며 방심했지만, 갑자기 튀어나오는 스켈레톤과 유령으로 긴장감을 유발하고 거기에 마치 진짜로 선택받아 능력을 각성하는 듯한 느낌까지, 그야말로 완전히 몰입해 버린 키요시.

"미쳤는데?"

그때 정신을 차린 친구가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이거 너무 리얼하잖아."

"그렇겠지, 아마 진짜 소환수일 테니까. 그래도 끝내주잖아. 어디 가서 이런 경험을 해 보겠어!"

"그건 그렇지. 아오. 심장 아파."

"계속 가 보자."

그렇게 유령을 물리치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데, 갑자기 어두침침한 주변과 다르게 밝은 빛이 나는 마을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곳에 적혀 있는 간판을 읽은 키요시.

"시작의 마을?"

그렇게 마을 안으로 들어가자 각종 가판대가 보이고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게 아닌가.

그때 한 사람이 놀란 표정으로 키요시와 친구에게 다가와 말했다.

"설마 용사의 검? 용사님이십니까?"

그 말에 키요시는 알았다.

이 마을은 중간 거점이고 여기 있는 사람들은 NPC를 연기하고 있다는 것을.

키요시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거 완전 제대로네? 좋아. 제대로 즐겨 보자."

*

메이드 카페 같은 것도 꾸준히 수요가 발생하는 일본에 맞춰, 한국인은 오글거릴지 모르지만, 제대로 현지화한 세론 대륙.

마음 같아선 진짜 던전 같은 장소를 만들고 체험하게 해 주고 싶었지만, 많은 고객을 동시에 입장시켜야 하는 놀이 시설이라 어쩔 수 없이 일자 진행을 해야 하는 구조로 만들었다.

그래야 사람들이 줄줄이 들어가며 개별적인 모험을 즐길 테니까.

거기에 추가로 이번 세론 대륙은 테스트적 성향이 강해서 난이도도 낮추고 상당히 직관적으로 만들었지.

튜토리얼 수준의 초반 구간을 지나, 시작 마을을 거쳐 본게임에 들어가서 사냥을 통해 강해진 다음 보스를 잡는 방식.

그리고 앞으로 반응이 좋으면 내가 그간 세론에서 겪었던 많은 일들을 스토리로 짜내서 시즌별로 새로운 콘셉트를 잡아 다시 방문해도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었는데, 벌써부터 반응이 심상치 않다.

"손님들이 물밀 듯이 몰려오고 있답니다."

비록 콘셉트이긴 하지만 정말로 언데드 몬스터를 처리할 수 있는 경험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세계 유일무이의 놀이 시설이니까.

기획자가 입꼬리가 찢어지도록 웃으며 말했다.

"거기에 시작의 마을에서 나오는 매출도 상당합니다."

시작의 마을은 NPC 역할을 하는 직원들이 식사와 체력을 회복해 주는 포션 등을 현금 받고 파는, 테마파크로 치면 푸드 코트와 굿즈 상점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무조건 시작의 마을을 거쳐 가는 사람은 거기서 입장료와 별개로 돈을 소모할 수밖에 없지.

나는 매출표를 보고 히죽 웃으며 말했다.

"마우스 랜드 2개 운영하는 것만으로 어떻게 시총 10위에 들었는지 알겠네."

테마파크의 순수익률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시설만 잘 관리하고 고객만 끊임없이 유입되면 돈이 계속해서 굴러 들어오는 구조니까.

그런데 심지어 스켈레톤은 고장 날 일도 없어 유지비가 저렴하고, 시작의 마을에서 파는 음식들도 폭리 수준의 가격이다 보니 세론이 가져가는 순이익 비율이 제조업과는 비교조차 안 되는 수준이었다.

"이 정도면 성공인 겁니까?"

"당연히 성공입니다. 이제 앞으로 시즌마다 새로운 스토리와 콘셉트를 적용하면 고객들의 재방문율도 높아질 겁니다. 아! 아니면 아예 전 세계에 여러 세론 대륙을 만들어 각기 다른 스토리를 적용하는 건 어떨까요? 그럼 전 세계 세론 대륙을 돌아가며 방문하는 사람이 생겨날지도 모릅니다."

크.

그거 듣기만 해도 대박이네.

"저는 이걸로 만족 못 합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테스트에 불과하니까요. 최종적으론 각종 놀이 기구가 모두 모여 있는 스켈레톤 테마파크로 갈 겁니다. 세론 대륙은 그 일부이고요."

"잘 알고 있습니다."

"스켈레톤에 대한 거부감은 어떻습니까?"

"아직 오픈한 지 얼마 안 돼 정확하지는 않지만, 재미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으니 거부감도 빠르게 줄어들 겁니다."

세론 대륙의 RPG 체험을 통해 스켈레톤을 자주 접하여 거부감도 줄이고 돈도 벌고, 최고다.

그렇게 보고서를 보던 그때 나는 방문 고객 분포도를 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중장년층 고객이 많이 없네요."

"아무래도 직접 몸을 써야 하다 보니 그럴 수밖에요."

"중장년층에게 어필할 만한 건 없나. 흠."

나는 놀이공원에 갔을 때 봤던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놀이 기구. 각종 먹거리. 화려한 장식들."

그때 한 가지가 떠오른 나는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퍼레이드."

"퍼레이드요?"

"테마파크에서 캐릭터들 옷 입혀서 퍼레이드 하잖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게 메인 이벤트 중 하나이죠."

"스켈레톤으로 그런 퍼레이드를 기획해서 보는 즐거움을 주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러자 기획자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그럼 아예 메카물 애니메이션 회사와 협업해서 애니메이션 속 명장면을 현실에서 재현하는 건 어떨까요. 일본의 중장년층도 어렸을 때 거대 로봇 만화를 보며 성장해 온 세대니 먹힐 겁니다."

"오오!"

그거 나이스 아이디어다.

결국 퍼레이드도 사람이 옷을 입고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뿐이잖아.

그럼에도 사람들은 열광하고.

그럼 거대 스켈레톤에 로봇 스킨을 입혀 거대 로봇을 구현한 다음 그 로봇들을 이용해 애니메이션을 현실에서 재현하는 거지.

사람 캐릭터는 아무리 잘 구현해도 본판이 다르기에 이질감이 있지만, 이거라면 그야말로 거의 똑같이 만들 수 있을 거다.

나는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그것 좋네요. 거대 스켈레톤 로봇에 플라이 마법을 걸어서 공중 전투도 구현해 주고 용사의 검처럼 화려한 이펙트가 나도록 만들면 사람들이 환장하면서 달려들겠죠?"

내 말에 기획자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게 맡겨 주시면 제대로 기획해서 오겠습니다."

"오케이."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결국 테마파크는 로망의 현실화 아닙니까? 일본인의 로망, 실현시켜 줍시다."

10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