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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본선 첫 경기를 앞두고 대기실에서 최종 점검에 들어간 권주민과 팀원들.

그들은 자신들의 개성을 한껏 뽐낸 장식으로 치장된 스켈레톤을 살피며 말했다.

"문제 없지?"

"SST 로고도 잘 달려있고. 문제 없어."

방송이 대히트하자 본선에 진출한 라이트닝에게 많은 기업에서 후원 제안이 들어왔다.

그중에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한 SST를 메인 스폰서로 삼아 스켈레톤의 가슴 장식에 SST의 로고를 그려 넣은 라이트닝.

그렇게 최종 점검을 한 권주민이 말했다.

"무조건 이기는 거야. 알았지? 방심하며 안돼!"

"당연하지!"

"걸린 돈이 얼만데!"

이미 예선에서만 천만 원이 넘는 상금을 획득한 라이트닝.

하지만 본선부터는 경기에 걸린 상금 액수가 차원이 달랐다.

예선처럼 토너먼트로 진행되는데 첫 경기의 승리 상금만 천만 원이고 그 다음부터 2배씩 상승하는 구조로 최종 우승하면 경기별 승리 수당만 도합 6억에 따로 우승 상금도 20억이나 지급되는데 어떻게 방심하겠나.

거기에 추가로 경기 결과에 따라 스폰서들에게 받는 후원금의 액수도 달라지니 결의를 다지는 라이트닝.

그때 대기실 문이 열리며 백상호가 들어와 말했다.

"준비는 끝났습니까?"

"예!"

"혹시 모르니 다시 한번 말씀 드립니다. 본선의 승리 조건은 상대의 무력화입니다. 박살을 내던 아니면 움직이지 못하게 하던 말이죠."

스켈레톤 손상을 우려해 표적을 이용했던 예선전과 다르게 진검승부를 펼쳐야 하는 본선.

하지만 권주민은 자신 있었다.

자신이 배우고 익혀온 격투 기술을 제대로 활용 할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그리고 경기에서 지는 순간 우리 파츠가 상대팀에게 강탈 당하는 것도 잊지 마시고. 지는 것도 분한데 기껏 만든 비장의 무기까지 빼앗기는 건 너무 비참하지 않습니까."

그 말에 권주민이 스켈레톤의 오른팔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렇겠죠. 이걸 빼앗기면 분해서 잠도 안 올게 분명하니까."

본선행의 기쁨을 누리고 있던 그들에게 주최측에서 전달된 내용은 바로 자신들만의 고유한 개성을 뽐낼 수 있는 파츠를 하나 구상해오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백상호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여 오른팔용 파츠 하나를 구상해낸 권주민.

하지만 그 오른팔은 그전에 달려있던 오른팔과 외형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권주민과 라이트닝이 노린 포인트였다.

상대로 하여금 외형으로 자신들의 파츠가 무엇인지 그리고 기능이 어떤 건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만들어 혼란을 주는 작전.

물론 뭐 경기가 방송으로 송출되면 모두 알아차릴 수밖에 없지만 최소한 그때까지는 비밀 무기로서 기능을 충실히 할 수 있으니까.

그때 대기실에 달려있는 모니터에서 해설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이번엔 세론 그룹 한지혁 회장님께서도 참관하셨군요!

그 말에 권주민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회장님이 직접?"

이러면 더욱 질래야 질 수 없지 않나.

권주민이 팀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회장님도 오셨다는데 우리가 지면 백상호 센터장님 체면이 뭐가 되겠어! 안 그래?"

"맞아!"

"절대 질 수 없지!"

그렇게 라이트닝이 전의를 다지자 백상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그 기세로 가는 겁니다."

그렇게 시간이 되어 스켈레톤과 함께 경기장에 오른 라이트닝.

그때 반대편에서 상대팀이 나타나며 거대한 전광판에 양 팀의 정보가 공개된다.

꽁꽁 숨겨져 있던 상대팀의 정보를 알게 된 권주민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강북만세팀."

장난스러운 팀명지만 그들의 실력만큼은 진짜였다.

서울에서 뛰어난 실력을 뽐내며 본선에 진출한 팀으로 우승 예상 투표에서 5위를 차지한 강팀.

백상호도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처음부터 어려운 상대를 만났군요. 김세호 강사면 저희 센터에서도 손에 꼽히는 프로그래머인데."

프로그래머 중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다는 교육 연구 센터.

그런 교육 연구 센터 안에서조차 한 손에 꼽히는 프로그래머가 조력자로 붙은 팀이라니.

하지만 권주민은 기죽지 않았다.

자신들의 조력자는 그런 김세호 강사조차 한 수 접을 수밖에 없는 최고의 프로그래머 백상호니까.

아무튼 상대가 누구인지 알았으니 스켈레톤에 달린 파츠를 확인한 권주민.

"꼬리?"

빨간색과 금색으로 칠해진 스켈레톤 뒤에 길게 달린 꼬리.

저것이 바로 강북만세팀의 파츠였다.

권주민은 바로 콘솔을 잡으며 말했다.

"저 꼬리로 할 수 있는 게 뭐 있지? 휘두르기?"

곧바로 휘두르기 공격에 대한 대처 알고리즘을 추가해나가는 권주민.

"생각나는 것들 다 이야기 해봐."

그러자 생각을 정리한 팀원들이 하나둘 의견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저걸로 다리를 후려쳐 균형을···"

"묶는용 아닐까?"

꼬리를 이용한 활용 방안을 줄줄이 이야기하는 팀원들.

그렇게 꼬리에 대한 여러 대처 방안을 추가한 권주민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역시 비밀 무기는 숨기는 게 답이야."

김세호 강사가 혀를 차며 말했다.

"어느 파츠인지 숨기겠다?"

그러자 강북만세의 리더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어디일까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김세호가 리더를 보며 말했다.

"일단은 탐색전을 해야 할 거 같군요. 최대한 방어적으로 세팅하세요."

그 말에 곧바로 알고리즘 세팅에 들어간 리더와 팀원들.

김세호가 백상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센터장님 생각인가? 아니면 라이트닝?"

백상호가 어디까지 개입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정보의 열세로 인해 한방 먹은 기분이 든 김세호.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센터장님. 이번엔 반드시 이길 겁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으로 늘 최고의 프로그래머라 칭송 받는 백상호.

그런 백상호를 따라잡기 위해 쉼 없이 노력해온 김세호이지만 그럼에도 백상호의 벽은 늘 높았다.

하지만 전투는 그간 프로그래머들이 전문적으로 해오던 분야가 아니지 않나.

그렇기에 어쩌면 이번이야 말로 백상호를 이길 수 있는 첫 기회일지도 모르는 일.

그때 리더가 말했다.

"세팅 끝났습니다."

"좋아요. 한번 해봅시다."

그렇게 시작된 1차전.

권주민이 경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탐색하려나 보내요."

분명 예선과는 비교조차 안되게 치열한 격투를 벌이는 스켈레톤들.

하지만 알고리즘은 세팅한 장본인인 권주민은 잘 알고 있었다.

이 격투는 어디까지나 탐색전에 불과하다고.

꼬리에 대한 여러 알고리즘을 추가한 게 무색할 만큼 상대팀의 스켈레톤은 꼬리 사용을 극도로 절제하고 있었으니까.

백상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럴 겁니다. 김 강사는 상당히 신중한 성격이니까."

"신중한 성격이라···"

그 말은 자신들이 비밀 무기를 꺼내 들지 않는 이상 저쪽도 함부로 꼬리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말.

잠시 고민하던 권주민이 말했다.

"그럼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해야겠네요. 하나는 신중하다는 걸 이용해 비밀 무기를 조기에 꺼내서 한방에 끝내는 것과 아니면 페이크를 줘서 우리 파츠를 오해하게 만드는 거. 센터장님이라면 어떻게 하실 거 같습니까?"

그 말에 고민하던 백상호가 말했다.

"저라면 페이크를 줄 거 같군요."

"페이크라."

권주민이 상대팀을 바라보며 말했다.

"센터장님이 김 강사님을 잘 알 듯 김 강사님도 센터장님을 잘 알 거 아닙니까? 그럼 우리가 페이크를 쓸 거라고 예측할 수도 있겠네요?"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러자 권주민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저희는 허를 찔러서 완전히 반대로 가보는 건 어떨까요?"

"음?"

갑자기 권주민이 빠른 속도로 콘솔을 조종하자 공세를 이어가던 라이트닝의 스켈레톤이 갑자기 거리를 벌리기 시작한다.

김세호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뭐지?"

불안한 마음이 든 김세호가 말했다.

"거리 좁혀보세요."

김세호의 말에 콘솔로 라이트닝의 스켈레톤에 접근하도록 알고리즘을 실시간으로 수정한 리더.

그런데 그렇게 자신들의 스켈레톤이 접근하자 라이트닝의 스켈레톤이 계속 경기장을 빙글빙글 돌며 거리를 벌리려는 게 아닌가.

"뭐지? 왜 거리를 벌리려는 거지? 설마 파츠를 쓰려고?"

그렇다면 상대의 파츠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기회.

하지만 김세호는 백상호의 완벽주의 성향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한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백상호는 늘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통제하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백상호가 이쪽의 패를 확인조차 안하고 먼저 카드를 꺼내 든다고?

심지어 외형을 통해 이쪽보다 정보에서 우위를 점한 상태인데?

김세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페이크구나."

자신들이 계속 탐색전만 하고 있으니 페이크를 통해 함정을 파는 것이라 확신한 김세호.

"그럼 말려들어선 안되지. 거리 벌려요."

김세호의 말에 리더가 콘솔을 조작하자 강북만세의 스켈레톤이 거리 좁히기를 그만두고 멈춰 선다.

"아마 우리가 조급해하며 달려들길 기다리는 걸 겁니다. 이제 겨우 1차전이니 무리할 필요 없어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거리를 벌린 두 스켈레톤.

그때 그렇게 거리가 벌려지자 라이트닝의 스켈레톤이 갑자기 몸을 한껏 뒤로 젖히며 오른손을 몸 쪽으로 끌어당기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을 보고 김세호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오른손. 오른손을 파츠로 착각하게 만들려는 겁니다. 확실해요."

"어떻게 할까요?"

"일단 방어 세팅 다시 한번 강화하고 언제든 대처할 수 있···"

그렇게 지시를 내리던 그때.

라이트닝의 스켈레톤이 웅크렸던 몸을 확 일으키며 강북만세의 스켈레톤을 향해 도약한다.

"어!?"

페이크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점프해 달려드는 모습을 보고 놀란 김세호.

"회. 회피! 회피해요!!"

이상함을 느끼고 급하게 회피를 지시한 김세호.

하지만 사람보다 월등히 우월한 스켈레톤의 갑작스런 도약에 맞춰 기존에 세팅된 방어 알고리즘을 회피 알고리즘으로 즉각 바꾸기엔 리더의 반응속도가 현저하게 떨어졌다.

"자. 잠깐!!"

그렇게 허둥지둥하는 사이 이미 달려들어 강북만세의 스켈레톤에게 오른손을 휘두르는 라이트닝의 스켈레톤.

그러자 강북만세의 스켈레톤이 기존에 세팅되어 있던 방어 알고리즘에 따라 양팔을 교차하고 꼬리까지 동원하여 막는다.

하지만.

쿠왕!!!

라이트닝의 스켈레톤이 휘두른 오른팔이 강북만세의 스켈레톤의 양팔을 강타하는 순간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양팔째로 박살 나며 강북만세의 스켈레톤을 바닥에 내리 꽂힌다.

"미. 미친?!"

스켈레톤의 세부 스펙을 잘 알고 있는 김세호이기에 저 위력이 절대 기본형 팔에서 나올 수 있는 위력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건 다시 말해 거리를 벌리고 가해온 저 공격이 페이크가 아닌 진짜 공격이라는 말.

"어. 어서 일으켜···"

하지만 김세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양팔이 박살 난 강북만세 스켈레톤의 몸통을 향해 내리 꽂히는 라이트닝 스켈레톤의 오른팔.

그리고 그 오른팔에 실린 거력은 그대로 강북만세 스켈레톤의 몸통을 박살내 버린다.

패배했음을 깨달은 김세호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말했다.

"···저 위력은 반칙이잖아."

예선에선 참가자들의 부족한 실력을 고려해 라운드 사이에 있는 정비시간에 알고리즘을 조작하도록 했지만 본선 팀은 모두 실력이 출중하기에 경기의 박진감을 위해 그 룰을 삭제하여 경기 중에도 할 수만 있다면 알고리즘을 손볼 수 있도록 했는데 역시나 그 결정은 옳았다.

예선전이었다면 짜여진 알고리즘대로만 치고 박았을 스켈레톤들이 경기 중에도 실시간으로 알고리즘이 바뀌며 더욱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펼쳤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설마 본선 첫 경기에서 그것도 1차전에 이렇게 승부가 날줄은 나도 몰랐단 말이지.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과감한데?"

두 스켈레톤의 파츠 모두 내가 직접 만들어주었기에 어떻게 상황이 돌아가는 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였다.

우선 강북만세의 꼬리는 제 3의 팔이자 다리로 이용하는 유틸성을 극대화한 파츠였다.

반면 라이트닝의 오른팔은 말 그대로 일격필살의 위력을 지녔지만 딱 3번을 휘두르면 과부하로 30초간 경직이 되어버리는 모 아니면 도의 동귀어진형 파츠.

물론 뭐 마법적으로 한계가 있는 게 아니라 라이트닝이 원하는 위력을 구현해주며 밸런스를 위해 내가 설정한 부작용이지만 아무튼.

"저걸 1차전에 대놓고 사용할 줄은 몰랐네."

원래라면 저 꼬리도 결코 나쁜 파츠는 아니었다.

꼬리를 이용하면 두 다리와 두 팔만 있을 때 할 수 없는 다양한 자세를 취할 수 있고 더욱 다양한 공격루트를 활용할 수 있기에 작정하고 딱 3번만 회피하는데 성공했다면 30초간 경직된 라이트닝의 스켈레톤을 그대로 제압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김세호는 1차전에서 바로 비밀 무기를 꺼낼 리 없다 생각해 방심했고 그 착각으로 인해 승패가 갈려버렸다.

"억울하겠네. 김 강사."

저 팔 파츠의 부작용을 모르는 만큼 김세호 입장에선 밸런스 붕괴급 파괴력이라는 생각이 들겠지.

게다가 꼬리를 제대로 활용해보지도 못하고 졌으니 얼마나 억울하겠나.

"그나저나 저 오른팔에 꼬리가 더해지면 상당하겠는데?"

긴 꼬리에 잡히는 순간 내리 꽂히는 오른손이라.

조합이 상당히 좋단 말이지.

"역시 재미 하나는 확실하네."

앞으로 팀들이 파츠를 강탈하면 강탈할수록 더 많은 조합이 생겨나며 경기가 더 재미있어 지겠지?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라이트닝 쪽으로 다가가 말했다.

"축하 드립니다. 라이트닝 팀원 분들. 그리고 백 센터장님."

그때 김세호가 그런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회. 회장님. 방금 그 공격은···"

"밸런스 맞춘 겁니다."

김세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뻔히 알기에 김세호의 말을 끊은 나.

"앞으로 경기가 남았으니 자세한 정보를 드릴 수는 없지만 무제한으로 저 위력을 낼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 그럴 수가."

그때 백상호가 김세호에게 다가가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김 강사님."

그러자 침울해있던 김세호가 말했다.

"저는 당연히 페이크인줄 알았습니다."

"저라면 그랬겠죠. 하지만 그 판단을 내린 건 제가 아니라 라이트닝입니다."

"···라이트닝이 판단한 거라고요?"

"예. 저희는 조력자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철저히 라이트닝이 도움을 요청하면 그에 조언을 해줄 뿐 경기에 관해선 일절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감독처럼 지휘를 주도한 김세호와 조력자로서 라이트닝에게 모든걸 맡긴 백상호.

이 차이가 바로 두 팀의 승패를 가른 포인트였다.

"아무튼 이번 경기는 라이트닝의 승리입니다."

그렇게 라이트닝의 승리를 공표한 나는 박살난 강북만세 스켈레톤의 꼬리를 떼어내며 말했다.

"당연히 이 꼬리의 새로운 주인은 라이트닝이고요."

나는 꼬리를 권주민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받으세요. 그리고 다시 한번 축하 드립니다."

"가. 감사합니다!!"

"꼬리도 잘 연구해서 다음에 더 멋진 경기 보여주길 소망합니다."

그렇게 상황을 정리한 나는 그 모든 장면을 찍고 있던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

"그럼 스켈레톤 대회. 모두들 재미있게 즐겨주시길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승리하여 새로운 파츠를 얻고 그 파츠를 이용해 새로운 조합이 나오는 등 그야말로 변수에 변수가 무궁무진하게 창출되는 경기들.

거기에 룰까지 변경되며 더욱 박진감 넘치게 변한 본선이 방영되자 열기는 더욱 후끈 달아올랐다.

그렇게 사람들이 스켈레톤의 경기에서 흥분을 느끼는 사이 나는 거기서 전투 알고리즘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았다.

"재미있는 조합 많네."

신기한 파츠들이 만들어지고 또 그 파츠들이 조합되어 세론 언데드 군단에선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기괴한 조합들이 줄줄이 생겨난다.

다리 파츠를 여러개 강탈하더니 아예 4족보행 스켈레톤부터 팔 대신 무기를 여러개 달아 무한 공격 컨셉의 스켈레톤까지.

그렇게 여러 조합을 살펴보던 나는 라이트닝의 스켈레톤을 살피며 말했다.

"그래도 역시 가장 좋은 건 이거야."

꼬리를 강탈하는데 성공한 라이트닝은 그야말로 승승장구 했다.

첫 경기에 이어 두 번째 경기도 승리하며 다리 파츠를 손에 넣은 라이트닝은 그 후 방송을 타며 비밀 무기인 오른팔이 공개되었지만 어떻게든 3번의 공격 안에 승리를 쟁취하며 3번 이후의 부작용을 철저히 숨기는데 성공한 라이트닝.

덕분에 사람들 사이에서 라이트닝은 이제 유력 우승후보로 거론되는 인기 팀이 되었다.

"이번 대회가 마무리되면 팀들을 프로구단처럼 만든 다음 일주일에 한두 번씩 서로 번갈아 가며 경기를 치르게 하는 거야."

이번에야 대회의 재미를 위해 강탈전을 열었지만 그때는 파츠도 모든 팀에게 전부 개방해서 팀들이 스스로 파츠를 조합해 연구하도록 만들어야지.

"좋다. 좋아."

이렇게 알고리즘을 연구해서 언데드 군단 재건에 필요한 알고리즘을 보강한다.

그때 문을 노크하며 들려오는 김덕배의 목소리.

"회장님."

"들어오세요."

회장실로 들어온 김덕배가 말했다.

"제안이 하나 들어와 살펴봤는데 세론의 취지와는 맞지 않아 거절했습니다. 그래도 회장님께서 알고는 계셔야 할거 같아 보고 드리러 왔습니다."

"무슨 제안인데요?"

"경기용 스켈레톤을 게이트용 스켈레톤으로 활용하고 싶다는 제안입니다."

듣자마자 바로 무슨 소리인지 알았다.

"누가한 제안입니까?"

"중소길드입니다."

애초에 몬스터로 만든 스켈레톤인 만큼 경기용 스켈레톤은 하급 각성자에 준하는 스펙을 지녔다.

당연히 그 전투력을 이용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들겠지.

"일반인이 컨트롤 가능한 스켈레톤이라면 일반인도 짐꾼 일을 넘어서 각성자를 보조해 직접적인 전투가 가능할거라고 하더군요."

보조?

아직 몰라도 뭘 한참 모르는 구만.

프로그래머 한 명이 백 단위의 일꾼 스켈레톤을 운용하는 만큼 팀들도 자신들이 만든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하는 스케레톤을 대량으로 만들어준 다음 게이트에 집어넣으면 각성자 없이도 알아서 게이트 몬스터에 맞는 알고리즘을 만들어 사냥하고 다닐걸?

그렇게 되면 각성자가 무슨 소용이야?

스켈레톤만 있으면 일반인도 사냥이 가능한데.

아주 자기들 밥그릇 차는 일인 줄도 모르고 제안을 보내오니 가소롭기 그지없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잘 거절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경기용 스켈레톤을 게이트에 들여보내는 일은 없을···음?"

잠깐만.

자신들이 만든 알고리즘 기반의 스켈레톤을 데리고 다니며 실시간으로 대처하는 팀들.

이거 사실상 스켈레톤 지휘관 아닌가?

"어?"

이거 알고리즘이고 자시고 스포츠 규모만 키우면 알아서 스켈레톤 지휘관들이 양산되는 꼴이네?

네크로맨서의 가장 큰 단점이 지휘체계가 오직 네크로맨서 본인에게만 전가된다는 건데 이런 식이면 스포츠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이 부담을 전부 분담할 수 있다는 거다.

그것도 몰개성한 세론의 언데드 군단과 달리 지휘관마다 모두 전투 스타일이 다른 개성 넘치는 언데드 군단.

"와."

이거다.

이거야 말로 내 귀찮음과 효율을 동시에 잡을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

"부회장님."

"예. 회장님."

"제가 스켈레톤 스포츠화에 책정한 예산이 얼마였죠?"

"올해 2천억 투자 예정이었습니다."

"늘립시다. 그것도 몇 배로. 대회 끝나자마자 리그 창설 발표하고 바로 진행하세요."

이런 거라면 안 할 이유가 없지.

스포츠의 성공이 곧 언데드 군단의 재건이나 다름없는데.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한 팀이 수십 개 이상의 스켈레톤을 통솔하는 대규모 전투 등등 한번 미친 듯이 달려봅시다."

86화

드디어 결정된 우승 팀.

그것은 바로 라이트닝이었다.

"우아아아아!"

상대 팀 스켈레톤을 박살 내고 포효하며 승리를 만끽하는 권주민과 팀원들.

나는 VIP석에서 그 모습을 보고 흐믓하게 웃으며 말했다.

"기특하네."

나 대신 알고리즘을 만드는 대리인 정도로 생각할 때는 별생각 없었는데, 저들이 나중에 나를 대신해서 스켈레톤을 지휘할 예비 지휘관이라 생각하자 기특하다는 마음이 든다.

"사람들에게서 마력을 모으고, 그 마력으로 스켈레톤을 만들면 저들이 알고리즘을 만들어 지휘하고."

원래는 네크로맨서 한 명이 해야 할 일을 한국인 전체가 분담하여 처리하는 셈.

어쩌면 이거야말로 인류 전체의 네크로맨서화라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권주민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우승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혹시 이후에 뭘 하실 생각이신가요?"

내 말에 권주민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상금을 받으면 일단 팀원들과 똑같이 나눈 다음 부모님의 낡은 차를 바꿔 드릴 생각입니다."

"아니, 아니. 저는 상금을 물어본 게 아닙니다."

나는 권주민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이걸 진짜 스포츠처럼 만들 생각이라서 말이죠. 앞으로도 스켈레톤 격투에 매진할 생각이 있냐는 말입니다."

내 말에 잠시 침묵하던 권주민이 말했다.

"만약 기회만 주어진다면··· 할 겁니다."

그렇겠지.

솔직히 이 정도 돈맛을 어디 가서 또 느끼겠어.

게다가 라이트닝까지는 아니더라도 방금 결승에서 패배한 팀도 억 단위 돈을 만지는 등 모두 내가 뿌린 돈맛을 한껏 느낀 상황.

나는 진행 요원이 가져다준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우선 우승한 라이트닝 팀에게 큰 박수 부탁드리겠습니다."

마지막 결승인 만큼 라이브로 진행되는 경기였기에 관중석에 가득찬 사람들이 열화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낸다.

"라이트닝!"

"만세!"

그리고 그중에서 완전히 라이트닝 스켈레톤 특유의 한 방 공격에 매료되어 팬이 된 사람들이 승리의 기쁨을 함께 만끽한다.

관객의 관심과 경기만으로 먹고살기 충분한 환경.

이게 바로 스포츠화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아니겠어?

그리고 스켈레톤 격투는 이미 이런 요소를 모두 갖춘 상황.

"여러분."

나는 관중을 보며 말했다.

"대회는 이걸로 끝났습니다."

그러자 아쉬움을 드러내는 사람들.

"재미있었는데."

"맞아. 이런 경기를 또 어디서 봐."

사람과 사람의 격투에선 있을 수 없는 마개조 파츠들과 우월한 스켈레톤의 스펙.

여기서 오는 박진감 넘치는 대결은 그들로서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을 거다.

각성자 간의 격투는 실력 차이도 있고 사망의 위험이 있어 불법으로 규정되어 있으니까.

나는 그런 관중들을 보며 말했다.

"아쉬우십니까? 하지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대회는 끝이 났지만 스켈레톤 격투는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하니까요."

나는 관중들을 향해 말했다.

"1대1도 재미있지만, 이 스켈레톤들이 무더기로 마치 전쟁하듯 싸우는 건 어떨까요?"

사람들이 눈을 빛낸다.

"저 스켈레톤으로 패싸움을 한다고?"

"미친. 개 재밌겠다."

나는 사람들의 반응을 즐기며 말했다.

"아니면 드넓은 장소에 흩어져 마치 서바이벌처럼 겨루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스포츠를 표방하지만 나에게 있어선 지휘관들의 실전 연습이나 다름없지.

"오오! 서바이벌."

"그것 말고 이런 것도 있습니다."

내가 아공간을 열자 그 안에서 미리 만들어 둔 거대 스켈레톤이 튀어나온다.

"여러 팀들이 힘을 합쳐 이런 대형 스켈레톤을 공략하는 겁니다."

그때 한 남자가 말했다.

"와, 대형 스켈레톤. 대형 스켈레톤끼리 싸우는 것도 쩔 것 같은데 그런 건 없나?"

원래 저것까지는 생각 안 했었는데 괜찮은 아이디어다.

거대 로봇은 남자의 로망이나 다름없으니까.

"거기에 이런 대형 스켈레톤끼리의 대결도 있을 수 있고요."

남자의 말을 듣고 즉석에서 내뱉은 말.

그러자 의견을 말했던 남자가 말했다.

"오! 내가 맞혔어!"

맞힌 게 아니라 의견을 그대로 가져다 쓴 거지만,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정식으로 선포하겠습니다, 스켈레톤 리그 창설을!"

나는 결승에서 패배한 팀을 향해 말했다.

"패배해서 억울하십니까? 리그에서 다시 한번 도전하시면 됩니다."

이번엔 다시 라이트닝을 보며 말했다.

"우승 상금이 부족하십니까? 리그에서 더 많은 상금을 타내시면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카메라를 보며 말했다.

"그리고 이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건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러우십니까? 그럼 도전하십시오! 스켈레톤 리그는 언제나 도전자를 환영하니까."

*

-라이트닝 우회합니다!

서바이벌 경기장으로 만들어진 넓은 장소에서 라이트닝의 스켈레톤들이 오른쪽으로 넓게 돈다.

그 사실을 모르고 전진만 하던 상대 팀.

그때 우회한 라이트닝의 스켈레톤들이 상대 팀의 허리를 공격한다.

-아! 기습이 제대로 먹혔어요!

해설자의 말과 함께 상대 팀 선수들로 전환된 화면.

갑작스러운 기습에 당황한 상대 팀 선수들이 다급히 콘솔로 스켈레톤들을 조종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런데 그때.

-어!

해설자가 놀람과 동시에 화면이 다시 전장 상황으로 전환된다.

-왼쪽에서도 라이트닝의 스켈레톤이 나타났습니다! 아까 정찰로 보냈던 스켈레톤인데 설마 이걸 노린 건가요! 아! 주노 팀 무너집니다! 급하게 빼고는 있는데 피해가 너무 커요!

그렇게 라이트닝의 기습에 완전히 무너져 내린 상대 팀.

-GG! 주노가 GG를 외쳤습니다! 이걸로 라이트닝은 리그에서 7연승을 가져갑니다!

그때 화면에서 라이트닝의 리더 권주민의 모습이 나온다.

여유로운 모습으로 콘솔을 내려놓은 권주민.

스켈레톤 리그 창설 이래 최고의 선수라 불리는 권주민다운 여유였다.

-이번에 FNK에서 권주민 선수에게 이적 제안을 했는데 단칼에 거절했다고요.

-맞습니다. 재계 12위 그룹을 모기업으로 둔 FNK답게 거액을 제안했는데, 라이트닝에서 뼈를 묻겠다며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라이트닝 입장에선 다행입니다. 권주민 선수가 없는 라이트닝이라니, 상상이 안 가니까요. 아무튼 이번 승리로 라이트닝은 잠시 빼앗겼던 리그 1위를 다시 탈환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때 TV를 시청하고 있던 남자가 말했다.

"쩝. 부럽네."

한지혁이 리그화를 선언한 지도 벌써 8개월이 지났다.

세론은 그 8개월 동안 자금을 무한정 쏟아부으며 스켈레톤 리그를 완전히 인기 스포츠 종목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고, 당연히 그런 인기는 돈이 몰리는 법.

그저 후원만 하던 기업들은 인기를 실감하고는 아예 직접 팀을 인수해 운영하는 등, 이제 스켈레톤 리그는 명실상부한 스포츠나 다름없었다.

거기에 최근 해외에서도 인기몰이를 하자 세론에서 조만간 해외 스켈레톤 리그 창설에 협조하겠다 공언한 상황.

"나도 그때 잘했으면 저 자리에 있을 수 있었을까?"

스켈레톤 업자로 활동하다 세론이 처음으로 개최한 대회에 참가했던 남자.

하지만 남자는 지역 예선에서 탈락해 버렸고, 그 후 깔끔하게 포기했지만 선수들이 벌어들이는 연봉을 생각하면 여전히 배가 아프다.

그때 가게 문이 열리며 한 손님이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손님이 진열대에 있는 각종 파츠들을 보며 말했다.

"4단 팔 있나요?"

그렇게 남자가 대회를 포기한 이후 선택한 것은 바로 스켈레톤 가게였다.

파츠가 등장하며 스켈레톤의 자유로운 개조가 가능해지자 세론은 그때부터 경기용이 아닌 실생활에 필요한 각양각색의 파츠들을 시장에 내놓았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일단 스켈레톤을 빌리는 건 똑같지만 그 후 파츠를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더 많은 상황에서 활용이 가능해진 스켈레톤.

당연히 그런 파츠 수요가 많아지자 남자처럼 스켈레톤 가게를 열어 아예 파츠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가게가 생겨났고, 이게 돈이 된다는 소문이 돌자 너도나도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

"있습니다. 어떤 버전으로 드릴까요."

"32버전이요."

"32버전."

남자가 잘 포장된 스켈레톤 팔이 담긴 박스를 꺼내며 말했다.

"여깄습니다. 뭐 박스 같은 걸 높이 올리시려나 봅니다?"

"예. 제가 주류 도매업을 하는데 주류 박스를 높게 쌓아야 해서요."

"아하. 그건 역시 스켈레톤이 딱이죠. 그럼 계산은 어떻게 해 드릴까요."

"여기 카드로······."

*

스켈레톤 리그를 활성화하고 그사이 민간 시장에 마개조를 도입한 나.

일단 스켈레톤 몸통에 메인보드처럼 모든 마법진을 집결시켜 놓고 그 몸통에 팔다리나 머리 그리고 각종 부속을 붙일 수 있도록 만들었지.

그런 다음 몸통을 대여료 받고 빌려준 다음 파츠는 알아서 구성하고 알고리즘은 스켈레톤 업자가 구성하는 방식으로 시장에 완전히 맡기니 세론은 그야말로 앉아서 돈 버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이번에 센터에서 고안한 파츠들입니다."

백상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전부 출시해요."

그전이라면 어떤 게 효율적이고 좋은지 먼저 확인했겠지만, 어차피 이제 모든 걸 시장에 맡긴 이상 그런 확인도 의미가 없다.

효율적이고 좋으면 시장에서 먼저 반응하여 잘 팔릴 거고, 효율이 별로면 시장에서 외면할 테니까.

"그나저나 백 센터장, 이번 달 수입이 어마어마하네요?"

내 말에 백상호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저번 달에 출시한 파츠가 제법 잘 팔려서, 덕분에. 하하."

그리고 이 파츠들을 연구하여 출시하는 센터의 강사, 아니 이제는 연구원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파츠를 만든다.

당연히 그 이유는 돈이었다.

나는 파츠의 판매량에 따라 그들에게 인센티브를 지급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어떻게든 잘 팔리는 파츠를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파츠를 만든다.

누군가가 4단 팔을 만들어 히트를 치면 다른 연구원이 그 4단 팔의 다른 버전을 만들거나 아니면 보강하는 식으로 말이다.

얼핏 생각하면 표절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애초에 그들 모두 같은 센터 소속의 연구원들이란 말이지.

거기다 한 명이 4단 팔을 만들어서 히트를 쳤다고 그 4단 팔을 그 연구원 버전만 인정해 주면 4단 팔의 발전은 거기서 멈춰 서기 마련.

그렇기에 나는 아예 전면 개방 하여 경쟁하는 구도를 만들었다.

덕분에 연구원들이 매일같이 알고리즘을 연구하며 더욱더 발전해 나가는 스켈레톤의 파츠들.

"모두 회장님 덕분입니다."

그래.

내 덕분이지.

하지만 이 모든 변화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거다.

사람들의 마력을 이용해 정수를 만들고 그 정수를 이용해 마법진 공장에서 프로티지 제품은 물론이고 이제는 파츠에 필요한 마법진까지 그려 넣으니, 이제 나는 사실상 이 모든 일을 관리하는 매개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란 말이지.

아마 내가 지금 당장 사라져도 최소한 지금까지 만들어 둔 스켈레톤을 계속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걸?

'이러다 스켈레톤이 미래의 로봇까지 전부 대체하는 것 아니야?'

물론 뭐, 먼 미래의 일이겠지만.

그렇게 백상호에게 센터의 보고를 듣고 있던 그때 내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 온다.

그리고 그 번호를 확인한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또 이 양반이네."

그 사람은 바로 국방부 차관 이선진.

나는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

"예. 접니다."

-회장님, 생각은 해 보셨습니까?

이선진이 말하는 것은 바로 스켈레톤의 전력화.

다시 말해 군대에서 사용할 군용 스켈레톤의 생산이었다.

"안 한다니까요."

-정말 끈질기시군요.

"차관님이야말로 포기를 모르시네요."

경호용과 경기용 스켈레톤이 대량으로 풀리며 스켈레톤의 전투력은 이미 검증이 끝난 상황.

동시에 리그에서 스켈레톤을 이용한 전략 전술이 점점 발전하자 대한민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조직 국방부조차 이제는 스켈레톤을 원하게 된 거다.

당연히 난 거절했지만 국방부에서 스켈레톤 전력화를 주도한 이선진 차관은 그야말로 끈질겼다.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포기를 모릅니다. 그러니 시간 좀 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또 같은 소리 하시려고."

스켈레톤으로 인해 강해지는 국방력과 그로 인한 이점은 이미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이번엔 좀 다를 겁니다.

"다르다고요?"

-접근 방법을 달리할 생각이라서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이쪽으로 오시렵니까? 아니면 제가 갈까요?"

이번에 확실히 안 한다 선포를 하고 와야겠다.

-오! 시간을 내주시는 겁니까? 기다리시죠. 제가 바로 가겠습니다!

*

그렇게 회장실에 온 이선진 차관이 말했다.

"회장님 한번 뵙기 참 어렵군요."

"어려운 게 당연하죠, 제가 일이 얼마나 많은데."

비록 상장되지는 않았지만 추정 매출액만으로도 이미 재계 10위 안에 진입한 세론이니까.

나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접근 방법을 달리하겠다 하셨죠. 말씀해 보세요."

"제 위치가 위치다 보니 그동안 너무 원론적인 이야기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민했죠. 어떻게 하면 회장님을 설득할 수 있을까."

이선진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어째서 회장님은 스켈레톤을 군용으로 쓰지 않을까 하고요."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스켈레톤으로 사회를 이롭게 하고 싶은 거지, 사람을 죽이는 군용으로 만드려는 게 아닙니다."

"압니다. 세론의 영업 방침은 늘 똑같았으니까. 하지만 그 이유가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선진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회장님이 군용 스켈레톤을 거부하는 이유는 국민들 때문 아닙니까?"

군용 스켈레톤의 문제는 바로 사람의 목숨이 군용 스켈레톤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거다.

과연 사람을 죽였을 때 그 군용 스켈레톤의 대처가 옳은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을 게 뻔하단 말이지.

물론 스켈레톤의 자체 판단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병기처럼 활용하여 스켈레톤을 부리는 사람이 판단하도록 두면 된다.

스켈레톤 리그의 팀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애초에 논란이 있을 수도 있는 일을 굳이 해서 욕먹을 걱정 할 필요가 뭐 있어?

그냥 안 해 버리면 그만인데.

"물론 이해는 합니다. 평판에 그 누구보다 민감한 분이시니까요."

이해한다는 사람이 이렇게 끈질기게 달라붙어?

"하지만 예전과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르지 않습니까?"

"상황이 다르다고요?"

"스켈레톤으로 인해 직업 상실을 우려하는 사람들 때문에 사양사업만을 해 오던 세론.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스켈레톤이 전국 소상공인들의 생업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이제는 아예 스포츠화되어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스켈레톤에 대한 사람들의 거부감이 사실상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이제 와서 스켈레톤 위기설을 대두하는 사람은 바보 취급을 당할 정도로 말이죠."

그건 그렇지.

내가 가장 우려했던 건 세론에서 받았던 공포와 혐오를 한국에서도 똑같이 당하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최근 스켈레톤이 전국적으로 보급되며 일상 생활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게 되자 이제는 스켈레톤이 당연시되는 상황.

"당연히 이제는 강력한 군용 스켈레톤이 국민을 지켜 준다? 반기면 반겼지 거부할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곤 서류 한 장을 꺼내 나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게 바로 그 증거입니다."

"이게 뭡니까?"

"기관에 의뢰한 설문 조사입니다."

설문 조사?

그렇게 서류를 받아 든 나는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스켈레톤의 군용 도입에 대한 찬성 의견··· 63퍼센트?"

이렇게 높다고?

"찬성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반대 의견도 스켈레톤에 대한 거부감보다는 스켈레톤의 성능에 대한 의구심 때문에 반대를 한 게 대부분이었고요."

방법을 달리했다는 게 이거구나.

"회장님이 우려하시는 걸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국방을 개인의 힘에 의지해서는 안된다며 군 내부에서 반발 의견이 나올지도 모르죠. 어쩌면 생각지도 못한 부작용이 나올 수도 있고. 하지만 보시다시피 국민들은 군용 스켈레톤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아까운 청춘이 국방의 의무에 낭비되고 있고요."

국방부 차관이 할 소리는 아닌거 같은데.

"저는 군용 스켈레톤으로 군인을 대체하려는 게 아닙니다. 군 인력이 불필요하게 낭비되는 부분을 스켈레톤으로 대체하려는 것뿐이죠. 일종의 무인 장비처럼."

설문 조사로 내가 가장 민감해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조사해온데다 스켈레톤을 군인이 아닌 무인 장비처럼 사용한다라.

나름 준비 잘 해왔네.

이선진 차관이 간곡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 일단 테스트만이라도 해보는 겁니다. 만약에 문제가 생긴다? 그럼 그때 백지화 하면 그만 아닙니까. 한 회장님. 부탁드리겠습니다."

87화

나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정확히 어떤 무인 장비를 말하는 겁니까?"

"스켈레톤 리그, 그게 정확히 제가 생각하는 군용 스켈레톤의 모습입니다."

이선진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한국은 청년층의 감소로 군 입대 인원이 계속해서 줄고 있습니다. 물론 현대의 전쟁은 첨단 장비가 한다지만, 결국 적국의 땅을 점령하는 건 보병인데 이 보병의 수가 계속해서 줄고 있다는 겁니다. 이때 스켈레톤 리그처럼 군인들에게 군용 스켈레톤을 배치해 주는 겁니다. 즉, 군인 하나하나가 분대화된다는 거죠."

내가 생각했던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방법.

스켈레톤은 자체 판단력 없이 그저 군인의 지시를 수행하는 무인 병기 딱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게 된다.

이렇게 되면 사실상 군인들 밑에 스켈레톤이라는 새로운 병사 계층이 생기는 것이니 논란의 소지도 없지.

"그렇게 되면 군의 필요 인력을 압도적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먼 미래엔 스켈레톤 병사와 사람 부사관만이 존재하는 군대가 탄생할 수도 있죠."

나는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많이 준비해 오셨네요."

"그래야 회장님을 설득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일단 좋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이 긍정적인 것도 알겠고 무인 장비도 현실성이 있는 건 알았습니다."

"그, 그럼!"

"하지만 여전히 걸림돌은 있습니다. 방금 본인 입으로 말씀하셨듯 군 내부의 반발."

스켈레톤을 무인 장비처럼 군인에게 배치해 분대화하면 군인이 판단을 내리고 스켈레톤은 그 판단을 수행할 뿐이니 문제될 건 없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그로 인한 군 내부의 반발.

"안보는 사람이 지켜야 한다는 생각부터 개인의 능력에 국방을 의지해선 안 된다는 의견까지, 군에서 반발할 요소는 차고 넘치지 않나요?"

"원래 모든 변화엔 반대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문제는 제가 그 반대를 감수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물론 돈이야 많이 벌겠지.

수만에서 많게는 수십만의 스켈레톤이 투입될 테니까.

하지만 내가 돈 벌 구멍이 그것만 있는 것도 아니니 굳이 그런 반발을 감수해 가며 진행할 이유가 없단 말이지.

"국민들이 원하지 않습니까."

"저는 100명이 원해도 10명이 반대하면 하지 않습니다."

노조가 반대하면 진출하지 않았고 알바 시스템도 일할 사람이 없는 시점이 되어서야 진출한 나다.

한국은 징병제 국가고 여전히 북한이란 적을 앞에 두고 있기에 그 무엇보다 민감한 것이 바로 군대.

그런 민감한 사안에 고작 설문 조사 하나 보고 뛰어들 수는 없지.

"그래서 일단 테스트만이라도 해 보자는 겁니다. 미래를 대비해 준비는 해 둬야지요."

"흠."

솔직히 맞는 말은 맞는 말인데······.

"게다가 병사를 중심으로 한 스켈레톤 분대화를 이야기했지만, 그것 말고도 스켈레톤이 필요한 곳은 차고 넘칩니다. 열악한 근무 조건의 최전방 경계부터 병사들에게 전가되던 각종 잡무까지. 제가 말한 테스트는 이 모든 걸 포함한 겁니다."

전투용이 아니라 경계용과 잡무용이라.

그 정도면 괜찮을 것 같은데?

나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좋습니다. 그 정도라면 협조하죠."

군인에 대한 복지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해결되길 원하지만 해결되지 않은 오래된 숙원.

그것만 해결해 줘도 사람들이 스켈레톤과 세론을 더욱 좋게 생각할 것 아니야.

군 입대를 앞둔 청년과 그런 청년을 가족으로 둔 가족들은 특히나.

이 정도는 해 볼 만하지.

내 말에 이선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정말이십니까!"

"예.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국민적 반발이 있거나 세론과 제 이름에 먹칠을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바로 발 뺄 겁니다."

내 말에 이선진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럴 일이 없도록 제가 전부 조치하겠습니다!"

"좋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선진에게 손을 건네며 말했다.

"한번 해 보죠, 군용 스켈레톤."

*

천천히 철조망을 따라 이동하던 스켈레톤.

그때 옆 수풀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자 곧바로 그쪽을 향해 경계한다.

그리고 수풀에서 고라니의 사진이 나오자 경계를 풀고 다시 걸어간다.

"멧돼지가 나오면 어떻게 합니까?"

내 말에 옆에 있던 백상호가 답했다.

"멧돼지처럼 위협이 될 수 있는 동물은 끝까지 경계를 유지합니다."

"사람이 나왔다면?"

"아군 인식표가 없으면 바로 제압에 들어갑니다. 그런 다음 바로 호출 벨을 눌러 부대에 연락을 취하고요."

지금 테스트 중인 스켈레톤은 최전방 경계 스켈레톤.

당연히 최전방엔 아군 아니면 적군만이 존재하기에 세팅을 하기도 쉬웠다.

그때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선진이 입이 찢어지도록 웃으며 말했다.

"저런 스켈레톤이 24시간 최전방을 지킨다니··· 완벽합니다."

"만족하십니까?"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덥고. 거기에 길도 좋지 않아 보급도 어려운 게 최전방입니다. 저 경계 임무만 스켈레톤이 맡아 줘도 군 장병들에게 엄청난 도움이 될 겁니다."

"···그나저나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시지요."

"왜 이렇게까지 군인들에게 신경 쓰는 겁니까?"

처음엔 이선진 차관을 스켈레톤을 이용해 국방력을 강화하려는 사람 중 하나 정도로 생각하며 색안경을 끼고 봤는데, 함께 일을 해 보니 이선진 차관의 관심이 단순히 국방력에만 가 있는 게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군인들에 대한 처우 그 자체를 생각하는 듯하다고 해야 하나?

이선진 차관이 흐믓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연히 신경 써야지요. 오히려 늦어도 너무 늦은 겁니다. 한국은 경제적으로 선진국 반열에 올랐지만 징병제로 인해 군인들에 대한 처우가 너무 열악하죠. 사람들은 군대의 첨단 무기에만 신경 쓰지만 결국 그 첨단 무기를 다루는 건 병사입니다."

이선진 차관이 스켈레톤을 가리키며 말했다.

"생각해 보시죠. 저 스켈레톤 덕분에 최전방 근무에서 제외된 군인들. 이들은 더욱더 훈련에 매진할 수 있고 이는 곧 국방력 강화나 다름없지 않을까요."

흠.

이선진 차관.

나름 괜찮은 사람이네.

국방부 차관이라는 사람이 일선 군인에게 이 정도로 신경 쓸 줄이야.

"게다가 국방비 절감 효과도 어마어마합니다. 앞으로 군인들의 월급은 계속 오를 예정이니까요."

알바 시스템과 다르게 만약 정말 도입된다면 국방부가 대량으로 동일한 알고리즘의 스켈레톤을 도입하게 될 테니 대여 비용으로 저렴하게 200만 원을 책정한 나.

최근 군인 월급을 일반인과 비슷하게 현실화하는 걸 추진 중이라는 걸 생각하면 스켈레톤의 가성비가 훨씬 더 압도적이었다.

스켈레톤들은 먹을 식량은 물론 잠을 잘 공간과 보급품도 필요 없으니까.

"그렇게 절감한 국방 예산을 이용해 군인들의 복지와 신규 장비 도입에 사용하면 한국군을 더욱더 강력한 강군으로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그게 바로 제가 군용 스켈레톤 도입을 추진한 이유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괜찮네요."

"하하. 감사합니다."

아무튼 이 정도면 됐겠지?

나는 백상호를 보며 말했다.

"센터장님이 국방과학연구소랑 잘 협업해서 처리해 주세요."

이선진의 면을 봐서 직접 나와 보기는 했지만 이제 내가 이런 걸 직접 처리할 짬은 아니잖아?

밑에 있는 연구원 수가 몇 명인데.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때 이선진이 말했다.

"아. 그리고 스켈레톤을 이용한 병사의 분대화는 어떻게······."

민감한 내용을 언급하는 이선진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건 천천히 하시죠. 다른 것도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경계용과 다르게 직접 전투를 해야 하는 분대용 스켈레톤은 아무래도 신중하게 접근해야지.

그러니 최대한 나중으로 미뤄 놓는다.

내 말에 이선진이 아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아무튼 그럼 저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일이 많아서."

그렇게 백상호에게 국방부와의 협업을 일임하고 떠나려는 그때.

멀리서 군복을 입은 사람이 위풍당당한 보폭으로 이쪽을 향해 걸어온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이선진 차관의 표정이 굳는다.

"유동구 중장."

중장이면 별 세 개?

장군님이시네.

그때 우리에게 다가온 유동구가 이선진 차관을 향해 경례를 하며 말했다.

"충성."

이선진 차관이 경례를 받아 주자 유동구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한 회장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아. 예."

"군용 스켈레톤을 만드신다고요."

"일단은 테스트지만요."

유동구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정말 스켈레톤이 병사를 대신할 수 있습니까?"

이선진 표정이 굳을 때 알아봤다.

이놈 반대파구나.

그때 이선진이 유동구를 잡아끌며 말했다.

"중장님, 저쪽으로 가서 저랑 이야기하시죠."

그렇게 유동구와 함께 구석으로 이동한 이선진.

흥미가 생긴 나는 청력 강화를 시전해 둘의 대화를 엿들었다.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무슨 일이긴 무슨 일이겠습니까.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할 우리 훌륭한 스켈레톤 병사가 잘 만들어지고 있는지 궁금해서 왔지요."

"···그때도 설명했지만 대한민국의 인구수는 계속해서 줄고 있습니다. 당연히 입대 인원도 줄어들 수밖에 없고요. 그 대체 방안으로 스켈레톤만 한 게 있습니까?"

"있지요. 로봇도 있고, 아니면 첨단 장비를 늘려도 됩니다."

"로봇? 이제 겨우 걸음마 단계인 로봇으로 병사를 대신한다?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인 줄 아십니까?"

"당연히 어렵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한지혁 회장 개인 한 명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보다는 훨씬 안전합니다."

안전이라.

유동구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관님은 민간 출신이라 잘 모르시겠지만 군인에겐 능력도 능력이지만 충성심 역시 중요합니다."

"설마 로봇에게 충성심이 있다는 소립니까?"

"아니, 반대입니다. 로봇에겐 충성심이 없지만 스켈레톤에겐 충성심이 있지요. 문제는 그 충성심이 국가가 아닌 한지혁 회장에게 향한다는 거지만."

유동구가 내 쪽을 힐끔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래요. 백번 양보해서 경계까지는 저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병사들에게 스켈레톤을 배치해서 분대화한다? 취지는 좋습니다. 부족한 군 인력을 보충할 수 있고 소수의 병력으로 대규모 군대를 지휘할 수 있으니까. 심지어 스켈레톤은 사람이 아니니 작전에 대한 부담도 훨씬 줄어들지요. 그런데 만약 그 스켈레톤들이 총구를 반대로 겨누면 어쩔 생각이십니까."

"한지혁 회장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일을 할 사람은 절대 그럴 것처럼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때 이선진이 말했다.

"지금 중장님께서 한지혁 회장이 허튼짓하는 걸 걱정하시는 거? 충분히 이해합니다."

"이해하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중단을······."

"하지만 그런 걱정이 의미가 있습니까? 이미 대한민국 정재계 인사 중에 경호용 스켈레톤을 부리지 않는 사람이 드문 게 현실입니다. 한마디로 한지혁 회장이 한국을 뒤집어엎으려 했다면 진작에 뒤집어엎고도 남았다는 말입니다."

그건 그렇지.

지금 당장 내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한국 전체가 마비될 테니까.

"거기에 스켈레톤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진 덕분에 한지혁 회장이 없는 한국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그럼 경계를 할 게 아니라 한지혁 회장을 같은 목표를 공유하는 동지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오호?

"이번 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지혁 회장은 스켈레톤을 제공해 국방력을 강화하고 국방부는 한지혁 회장에게 비용을 지불합니다. 동시에 한지혁 회장이 가장 신경 쓰는 국민들에게서 한지혁 회장이 좋은 평판을 받도록 만들어 주고요."

단순히 국방력 강화 정도라 생각했는데 거기까지 고려해서 추진한 거였어?

그때 유동구가 말했다.

"저는 그것도 이해가 안 갑니다. SS급에 재벌 그룹 회장이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국민들 눈치를 보냐 이 말입니다. 혹시 압니까? 나중에 국가를 전복해 독재자가 되기 위해 미리부터 평판 관리를 하고 있는 건지."

이야.

상상력 풍부한데?

"게다가 이렇게 한지혁 회장에게 의지하다 한지혁 회장이 죽기라도 하면 어쩝니까. 인공 정수 시스템으로 유지는 할 수 있다지만 그럼에도 한지혁 회장이 있고 없고는 천지 차이입니다!"

나 수명 길다.

나중에 은퇴하면서 싹 정리할 거라고.

아무렴 이렇게 국민 평판 신경 써서 이미지 잘 만들어 놓고 무책임하게 전부 버려 둔 채 은퇴하겠어?

"아무튼 저는 결사 반대입니다!"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하고 출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유동구.

"흠. 반대파와 찬성파라."

양쪽 모두 이해 간다.

민간 출신으로 군의 효율을 우선시하는 이선진 차관과 군인답게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는 유동구.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분대화 미루기 잘했네."

아무튼 저 반대파인 유동구도 경계까지는 이해한다지 않나.

그럼 딱 거기까지만 하면 되지.

굳이 이런 아수라장에 발 담가서 고민할 필요 없잖아?

반대파와 찬성파가 알아서 정리해 오면 나는 거기에 맞춰서 움직이면 그만.

나는 느긋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아서 잘 정리해 오라고, 나는 해 달라는 대로 해 줄 테니까."

*

순조롭게 테스트가 진행되어 완성된 테스트 버전의 경계형 스켈레톤.

이선진은 이 경계형 스켈레톤을 중요도가 덜한 지역에 우선 배치 하여 실전 테스트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테스트 결과 스켈레톤이 배치된 소초에서 아주 높은 만족도를 보여 준 경계형 스켈레톤.

평소라면 소초의 병사들이 3교대로 번갈아 가며 경계를 서야 하는데, 경계를 스켈레톤이 담당하고 소초의 병사는 소초 내에서 대기하고 있다 이상 상황이 발생했을 때 출동하기만 하면 되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 테스트 결과를 언론에 흘린 이선진.

"반응 좋네."

병사들의 업무 부담을 줄여 군 입대 인원 감소에 대응할 거라는 뉴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국방비를 절약해서 정예 강군으로 만들자는 사람부터 아예 병사를 전부 스켈레톤으로 대체하자는 사람들까지.

물론 반대 의견도 존재했다.

늘 그렇듯 내가 사라지거나 죽으면 어쩌냐는, 이제는 너무 많이 들어서 지겨운 레퍼토리부터 한 사람에게 모든 걸 맡기는 건 위험하다 등등, 많지는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반대 의견.

"네네. 전부 수용하겠습니다."

경계용이랑 각종 잡무를 대신할 스켈레톤만 해도 앞으로 수만 개는 필요할 테니까.

"그나저나 확실히 스켈레톤이 현대 전투에서 사기는 사기란 말이지."

보급이나 인명 손실 같은 요소는 다 배제하고 딱 전투 하나만 봐도 그렇다.

만약 북한군이 스켈레톤을 공격하려 한다면 그들이 가진 소총은 사실상 무용지물이 될 테니까.

뼈밖에 없는 스켈레톤을 소총으로 맞히기가 얼마나 힘들겠어.

그렇다면 폭발성 화기를 써야 되는데, 수만에 달하는 스켈레톤을 일일이 하나하나 폭발성 화기로 처리한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지.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재미있네. 현대 화기로 무장한 스켈레톤 군대라."

이것도 내 언데드 군단을 막는 데 도움이 되기는 할 텐데.

"스켈레톤 분대화라······. 찬성파가 이기면 진짜 한번 만들어 볼까?"

그렇게 잠시 고민하던 그때 이선진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예. 전화 바꿨······."

-회장님!

다급한 이선진의 목소리에 실린 당혹감.

본능적으로 무슨 일이 터졌다는 걸 느낀 나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일 있습니까?"

-경계를 서던 스켈레톤이 장교 하나를 오인 제압 해서 부상을 입혔습니다.

"오인 제압이요?"

-그, 그게, 그 장교가 인식표를 소지하지 않고 있었답니다.

현재 테스트 버전의 경계용 스켈레톤은 인식표를 사용해서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고 있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테스트용이기에 임시로 그렇게 만든 거고, 앞으로는 다양한 아군 인식 방법을 추가해 나갈 예정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사고가 나다니.

"거기 테스트 구역인 것 통보 안 했습니까?"

-당연히 했는데, 그 장교가 아무 생각 없이 인식표를 놓고 나갔다 합니다.

"부상은 어떻습니까?"

-그, 그게, 스켈레톤의 제압에 저항하다 굴러떨어지는 바람에 다리가 골절됐답니다.

어이가 없네.

테스트 중인 걸 뻔히 아는 놈이 인식표를 놓고 가고, 어차피 제압만 한다는 걸 알면서 굳이 저항해서 부상을 입어?

"···일단 알겠습니다. 자세한 건 만나서 이야기하죠."

그렇게 통화를 마친 나는 혀를 차며 말했다.

"꼬투리 잡히겠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장교의 부주의로 인한 사고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을 게 뻔하다.

특히 반대파 입장에선 스켈레톤의 안전성을 지적할 수 있는 좋은 기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설마 고의로?"

스켈레톤 도입에 반대하는 반대파가 꾸민 일인 것 아니야?

물론 우연에 우연이 겹쳐 벌어진 사고일 수도 있지만, 30년간 전장에서 굴러먹으며 단련된 감이 말해 준다.

이 사건은 뭔가 인위적이라고.

"만약 정말 조작이라면··· 후회하게 될 거야."

정말 반대하고 싶었으면 스켈레톤을 건드리지 말고 날 설득했어야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는지를 나에게 확실히 보여 주면 나는 바로 발을 뺐을 테니까.

그런데 설득은 시도조차 안 하고 내가 가장 신경 쓰는 스켈레톤의 신뢰도를 건드린다?

그건 절대 그냥 못 넘어가지.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인 법이야."

일단 지금은 증거도 없고 심증만 있는 상황이니 그냥 넘어간다.

그런데 만약 계속 비슷한 일이 반복된다?

그럼 날 건드린 데에 대한 대가를 확실히 치르게 해 준다.

나는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원아웃 적립."

88화

장교의 부상은 테스트 장소 진입 시 스켈레톤이 아군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가슴에 반드시 부착해야 하는 인식표를 부착하지 않아 벌어진 일이기에 유야무야 넘어갔지만, 당연하게도 이 사건은 반대파들이 스켈레톤을 반대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만약 사람이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라는 논리로 말이다.

물론 이선진 역시 스켈레톤이 원리 원칙을 확실하게 지켜서 벌어진 일인 만큼 오히려 경계가 더욱 확실해질 거라며 반발하였다.

아무튼 그렇게 찬성파와 반대파의 충돌이 있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오호."

이번엔 스켈레톤의 경계 구역 이탈이 문제가 되었다.

경계용 스켈레톤은 철책을 따라 경계를 하도록 알고리즘이 짜여 있는데, 테스트 구역 철창 인근에 나무가 쓰러지며 철책을 가려 버리는 사고가 난 거다.

당연히 인식 가능 한 범위 내에 철책이 보이지 않자 알고리즘에 따라 철책을 찾아 나선 스켈레톤.

그런데 철책을 가린 나무 뒤로 가파른 언덕이 자리하고 있어 결국 철책을 찾는 데 실패하고 점점 더 수색 범위를 늘리다 경계 구역을 이탈해 버린 거다.

"이런 우연이 있나. 정말 공교로운걸?"

딱 스켈레톤이 인식할 수 없게 교묘히 철책을 가리고, 하필 또 그 뒤로 언덕이 있었다니.

뭐, 덕분에 경계용 스켈레톤 알고리즘의 허점을 찾았으니 고맙긴 하지만······.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투아웃."

너무 노골적이잖아.

"이쯤 되니 분대용 스켈레톤을 더 도입하고 싶어지는데?"

나는 청개구리다.

누군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사람.

원래는 반대파와 찬성파끼리 알아서 결정하면 따를 생각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내 반발심이 더욱 불타오른단 말이지.

나는 내 뒤에 부동자세로 서 있던 박인귀에게 말했다.

"박인귀."

"예, 회장님."

"유동구 중장, 조사 좀 해 봐."

"알겠습니다."

"걸리면 안 된다."

박인귀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염려 놓으십시오. 제가 직접 움직이겠습니다."

"그럼 안심이고."

이런 일엔 역시 박인귀가 제격이지.

중국 정부의 더러운 일을 해 주다 이제는 내 그림자가 된 박인귀.

박인귀는 자신의 길드원을 이끌고 한국으로 귀화한 후 한국 내의 조선족들을 장악하며 조직망을 만들어 둔 상태였다.

"어떤 걸 조사해 올까요."

"지금까지 사고 났던 것과 연관성 등등 알아 올 수 있는 건 전부 다."

분명 유동구는 말했다.

경계까지는 이해한다고.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경계용을 넘어서 분대용까지 만들어질까 봐 미리 선수를 친다?

하지만 이것도 나름 국책 사업인데, 이렇게 무리를 해 가면서까지 나서는 건 좀 이해가 안 된단 말이지.

일단 유동구가 지시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이 유동구이니 유동구부터 조사한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내 지시를 받은 박인귀가 나가자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반대파가 가장 염려하는 게 분대용이잖아? 까짓것 만들지 뭐."

그래야 더욱 발악하며 무리수를 두던지 아니면 포기하던지 할테니까.

"그러게 왜 날 건드리냐고."

*

군인 하나가 9개의 스켈레톤과 함께 달려간다.

그러다 군인이 멈춰 서자 함께 멈춰 선 스켈레톤들.

"경계, 저쪽."

군인의 지시에 스켈레톤들이 페인트 총을 들고 군인이 지시한 방향을 경계한다.

"흩어져서 엄폐 경계."

그 말에 이번엔 주변에 있는 지형지물 뒤로 이동해 경계하기 시작한 스켈레톤들.

그때 경계하는 쪽에 사람 모양의 간판이 여러 개 나타난다.

그러자 적을 발견한 스켈레톤들이 호출 벨을 누르고, 군인이 외쳤다.

"공격!"

그 말에 간판을 향해서 페인트탄을 발사하는 스켈레톤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만!"

내 외침에 공격을 멈춘 스켈레톤들.

그사이 나는 간판에 다가가 결과를 확인하였다.

"인식표 달린 간판은 공격 안 하고 딱 적군만 공격했네."

나는 이선진 차관을 보며 말했다.

"어떻습니까, 분대형 스켈레톤? 나중에 아군 인식 방법이랑 명령 방법만 더 추가하면 될 것 같은데."

그러자 이선진 차관이 입이 찢어지게 웃으며 말했다.

"이겁니다! 제가 말했던 게 바로 이겁니다!"

반대파의 행동이 괘씸해 내가 직접 나서서 만든 분대형 스켈레톤.

분대형 스켈레톤은 사실상 군인이 조종하는 일종의 무인 지상형 드론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음성인식으로 컨트롤이 가능한.

이것만 해도 현대의 로봇 기술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성능과 가성비를 지녔지.

물론 이게 끝이 아니었다.

나는 이선진 차관에게 말했다.

"하지만 문제가 없는 건 아닙니다. 이 스켈레톤들은 결국 제 소환수 아닙니까? 물론 저는 한국에 위해가 되는 일을 할 생각이 없지만, 그 정도로는 안심하기 어렵죠. 그럼 해결 방법은 간단합니다. 여기에 자폭장치를 다는 겁니다, 언제든 폭파시킬 수 있도록."

처음엔 인공 정수를 이용한 자체 조작 시스템을 만들어 줄까 생각도 했었는데, 생각해 보니 그런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마법은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으니 내가 능력으로 이런저런 대처를 해 두었다 말해도 저들이 안 믿으면 그만이니까.

그래서 생각해 낸 게 아예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목줄을 채우는 것.

"자폭장치······."

"예. 뭔가 갑자기 통제가 안 된다거나 그러면 그냥 폭파하면 되잖습니까? 게다가 그렇게 되면 스켈레톤을 적에게 돌격시켜 자폭 병기로 활용해도 되고요."

이선진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자폭 병기로 활용한다."

"추가로 인공 정수를 이용해서 설사 제가 없더라도 기존 스켈레톤을 유지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도록 조치해 드리죠."

유동구 중장이 이선진에게 했던 반대 의견에 대한 대처 방안.

"그것 말고도 군이 원하는 거라면 전부 수용하겠습니다."

나는 진짜 이걸로 뭔가를 할 생각이 전혀 없으니까.

"어떻습니까?"

이선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거라면 군도 반대할 명분이 없을 겁니다."

"그렇죠?"

"조만간 육군 회의가 있을 예정인데, 그때 장성들에게 공개하겠습니다. 이거라면 반대파들도 마음을 돌릴지도 모릅니다. 아. 그래서 말인데, 혹시 한 회장님도 참석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외부인도 참석 가능합니까?"

"스켈레톤에 대해서 가장 잘 아시는 분이 바로 한 회장님 아닙니까."

회의라.

좋지.

애초에 하는 짓이 괘씸해서 나선 건데, 반대 의견에 대한 대처를 모두 완료한 스켈레톤을 보고 그들이 보일 반응이 궁금하기도 하고.

"좋습니다. 참석하죠."

*

"······."

회의에 참석한 장성들이 분대형 스켈레톤을 보고 침묵한다.

군인 하나가 9개의 무인 장비를 통솔하여 전투를 치르는 아득히 먼 미래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 화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영상을 공개한 이선진이 말했다.

"이게 바로 이번에 한지혁 회장님이 만드신 분대형 스켈레톤입니다. 군인 한 명이 한 분대의 역할을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군의 필요 인력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고 동시에 인명 사고에 대한 부담도 줄일 수 있죠."

그 말에 한 장성이 차관을 보며 말했다.

"혹시 군인 없이도 작전이 가능합니까?"

장성의 말에 차관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한 회장님, 설명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능은 합니다. 아주 단순한 작전이라면 말이죠. 예를 들어 특정 방향을 향해 계속 전진하며 적을 공격하라는 정도는요."

"그러다 민간인을 향해 오인 사격을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걸 대비해서 이중, 삼중으로 안전장치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무기가 없는 대상은 제압을 하게 되어 있는 식으로 말입니다."

내 말에 잠시 침묵하던 장성이 말했다.

"···괜찮군요. 가격은 어떻게 됩니까?"

"한 달에 200만 원. 대신 박살 났을 경우 스켈레톤 재료비와 제작비 200만 원만 주시면 바로 다시 만들어 드립니다."

내 말에 장성이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

"전투에 투입한 병사를 잃어도 200만 원에 보충이 가능하고, 심지어 월급도 없이 24시간 잠도 안 자고 작전을 하는데 고작 200만 원?"

가성비 죽이지?

그래서 세론에서도 마왕군이 나한테 작살난 거야.

도저히 일반 병사로는 스켈레톤과 교환비가 안 나오거든.

장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주 훌륭합니다. 군인으로서 저런 병사를 부릴 수 있다면 상대가 누구라도 이길 자신이 있습니다."

그때 침묵하던 유동구 중장이 말했다.

"잘 봤습니다. 스켈레톤의 유용함도 인지했고요.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유동구 중장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스켈레톤이 한지혁 회장님 고유의 소환수라는 점입니다. 물론 한지혁 회장님께서 한국에 공헌한 것들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나라의 안보를 한 개인의 능력에 의지한다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생각합니다."

공적인 자리이기에 에둘러 표현하긴 했지만 결국 어떻게 믿냐는 소리잖아?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결국 통제권이 저한테 있다는 게 문제인 거잖아요? 그래서 이선진 차관님께 제안한 게 자폭장치입니다."

"자폭장치?"

자폭장치에 대해 설명을 해 주자 몇몇 장성들의 표정이 변한다.

"자폭이라. 그거라면 괜찮은데?"

"이거라면 거의 무적의 군대 아닌가? 기껏 스켈레톤을 쓰러뜨려도 여차하면 폭발해 버리는데 어떻게 상대하겠어."

그렇게 반대하던 장성 일부의 의견에 변화가 생기자 유동구가 다급히 말했다.

"설사 그렇다 해도 만약 한지혁 회장이 부재 시······."

나는 유동구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제가 죽어도 유지되게 만들어 드리죠. 예비용도 가득 만들어 드리고."

자신이 말하는 족족 내가 대처 방안을 내놓자 멍하니 있던 유동구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아무리 그래도."

"추가로 군이 원하는 게 있다면 모두 수용하겠습니다. 원하는 안전장치부터 통제 방법 등등 구현만 가능하다면 전부 다."

내가 전부 다 맞춰 주겠다는데 뭐 어쩌겠어.

그때 한 장성이 말했다.

"혹시 탱크 무인 조종도 가능합니까?"

"물론 가능합니다. 이미 건설용 스켈레톤이 있으니까요. 연습 조금만하면 그까짓 건 아무것도 아니죠."

"그럼 헬기도 가능하겠군요."

"사람의 손을 필요로 하는 건 전부 가능합니다. 아. 원하시면 플라이 기능도 넣어 드리죠."

"플라이?!"

"힘들게 비행기로 공수부대 보낼 필요 있습니까? 그냥 스켈레톤을 하늘로 띄우면 되는데."

내 말에 한 장성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플라이로 하늘을 나는 스켈레톤. 이건··· 전쟁의 양상 자체를 바꿀 수 있어."

"대신 좀 비쌀 겁니다. 에너지도 많이 소모되고 추가 작업도 많이 해야 해서."

원하는 건 전부 다 해 드립니다 모드로 나오자 점점 스켈레톤 도입에 긍정적인 의견을 내놓는 장성들.

그러자 유동구가 발악하듯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말이 안 됩니다! 막말로 스켈레톤을 자폭장치에도 버틸 만큼 강하게 만들면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자폭도 버틸 만큼 강한 스켈레톤을 수십만씩 만든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럼 제가 뭐 하러 군대에 이놈들을 투입합니까? 그대로 그냥 한국을 전부 밀어 버리면 그만이지."

가정 자체를 너무 극단적으로 하자 결과도 극단적이 된다.

"자폭도 버틴 놈이 총탄 따위에 쓰러질 리 없잖습니까. 그런 놈 수십만이면 한국이 아니라 전 세계를 상대로도 해볼 만할 것 같은데요?"

그 정도면 거의 세론 언데드 군단급 아닌가.

내 말에 유동구 중장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그건."

"아무튼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제안은 여기까집니다. 스켈레톤을 진짜 인공지능을 가진 병사라 생각하지 마시고, 통제를 벗어나려 해도 그대로 자폭시켜 버리면 그만인 무인 지상형 드론 정도로 생각하시면 이해가 더 빠르실 겁니다."

내 말에 유동구가 무언가 더 말하려 하자 대장 하나가 말했다.

"유 중장님."

"예?"

"그만하시죠. 이 정도면 한 회장님도 할 수 있는 조치는 거의 다 한 것 같은데."

"큭!"

대장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솔직히 반대파입니다. 사실 지금도 그렇고요. 하지만 이렇게까지 조치를 하신다니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여전히 저는 군대에 사람의 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기에 전면 도입은 반대지만··· 플라이가 가능한 공수 전용 스켈레톤이나 최전선에서 싸워 줄 분대용 스켈레톤의 일부 도입은 나쁘지 않을 것 같군요. 무인 조종 스켈레톤을 이용해 탱크나 장갑차를 원격으로 조종한다는 것도 마음에 들고."

대장이면 사실상 반대파의 수장급 인사.

그런 대장이 저렇게까지 나왔다면 게임은 끝난 거나 다름없다.

"선배님!"

"선배라니! 여긴 공적인 자립니다! 유 중장!"

급했는지 대장을 선배라 불렀다가 한 소리를 들은 유동구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솔직히 이 정도면 인정할 만하지 않나?

도대체 왜 저렇게까지 반발하는 거야?

심지어 대장도 일부 도입은 찬성한 상황인데.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스켈레톤이 도입되면 안 되는 별개의 이유가 있는 것 아니야?

'스켈레톤이 도입되면 무슨 변화가 생기지?'

우선 복무에 필요한 인원이 줄어든다.

어쩌면 높아진 병사의 봉급을 고려해 징병제가 아닌 모병제로 전활될지도 모르고.

하지만 이건 군의 전력 유지만 된다면 장군인 유동구와 아무런 상관 없는 일 아닌가.

나는 씩씩거리고 있는 유동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무튼 스켈레톤이 도입되면 안 되는 무언가가 있는 건 확실하네. 그나저나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계속 날 방해하고 태클을 걸어? 쓰리 아웃. 넌 끝이다.'

*

나는 박인귀가 조사해 온 정보를 보며 말했다.

"부상 입은 장교, 유동구 밑에서 오래 있던 사람이네."

"그렇습니다."

반대파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던 유동구.

그래서 유동구에 대해 조사를 지시했는데 이렇게 바로 잡히다니.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게 사고를 조작했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지만, 그것 대신 제법 큰 게 하나 걸렸다.

나는 자료를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어쩐지 반대가 과하다 싶었어."

유동구를 따라다니며 정보를 수집하던 박인귀는 SS급답게 유동구의 통화 내용을 엿들었는데, 그 내용이 가관이었다.

"군복 납품이라고?"

"예. 일신 섬유라는 회사인데, 군복과 속옷 그리고 침구류 등 군에서 사용하는 섬유제품을 만드는 회사였습니다. 작년 군 보급품 입찰이 총 20회 있었는데 이 일신 섬유에서 5건을 낙찰받았고요. 낙찰 금액은 50억 원입니다."

간단한 논리였다.

스켈레톤이 도입되면 군인 수가 줄어들고, 군인 수가 줄어들면 보급품도 줄어들지.

당연히 이걸 주 수입원으로 삼고 있던 일심 섬유 입장에서 스켈레톤 도입은 그야말로 치명적인 사건.

"유동구가 일신 섬유랑 관련이 있었구나."

하지만 그럼에도 동기로는 좀 많이 부족하다.

작년 낙찰금이 50억이면 유동구가 아무리 많이 뇌물을 받았다 해도 고작 몇억 수준일 텐데, 겨우 이 돈 때문에 그 난리를 친다고?

금액으로 보나 규모로 보나 중장급 인사가 이렇게까지 나설 만한 수준은 아니란 말이지.

나는 박인귀를 보며 말했다.

"일신 섬유에 대해서 더 조사해 와. 이게 전부가 아닐 거야. 분명히 뭔가 더 있어."

"알겠습니다."

그렇게 박인귀가 나가자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일신 섬유라."

사양되어 가던 한국 섬유 사업을 스켈레톤과 중앙아프리카의 면화를 이용해 완전히 장악한 세론.

그런 세론에게 섬유 회사가 반기를 들다니.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섬유 회사가 감히 세론을 건드려? 죽었다고 복창해라."

세론이 왜 한국 섬유산업의 왕인지 보여 주지.

89화

일신 섬유는 사업 매출의 90퍼센트를 군납에 의존하는 회사였다.

당연히 그런 만큼 스켈레톤을 병사로 부린다는 발상은 일신 섬유에게 있어서 중차대한 위기일 수밖에.

스켈레톤은 군복과 신발은 물론이고 그 외의 모든 보급품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다행히 군 내부에 스켈레톤 도입 반대파들이 존재해 어떻게든 도입 물량을 최소화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었는데, 최근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런 일신 섬유의 사장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점점 스켈레톤 도입 쪽으로 분위기가 흘러간다라."

세론에서 제시한 안전 방안을 듣고 점점 마음을 바꾸고 있는 반대파들.

그들이 가장 우려하는 건 스켈레톤들이 자신들이 아닌 한지혁의 통제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건데, 한지혁이 아예 작정하고 자폭장치는 물론이고 군이 원하는 모든 조치를 취하겠다고 하니 마음을 놓은 거다.

"멍청하긴. 아무리 그래도 한 사람한테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게 말이 돼!?"

그렇게 울분을 토한 뒤 한숨을 내쉰 일신 섬유 사장이 말했다.

"젠장, 일단 최대한 버텨 보는 수밖에."

이미 입찰로 확보해 둔 물량이 있고, 설사 스켈레톤이 도입된다 해도 지금 당장 군 입대 정원이 줄어드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마음을 다잡던 그때.

"사, 사장님!"

사무실 직원이 사장에게 말했다.

"도원에서 원단 납품이 힘들 것 같다고 합니다!"

"뭐?!"

도원은 일신 섬유에게 원단을 납품해 주는 회사인데, 갑자기 원단을 납품할 수 없다니.

사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미친."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유, 유성 산업에서 단추 납품이 어렵다고······."

"지퍼도 힘들다고 합니다!"

그 후로 줄줄이 납품 중단이 이어진다.

사장이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군복을 만드는 데 반드시 필요한 필수 부속들의 납품이 모조리 중단되다니.

사장이 다급히 옷을 챙겨 입으며 말했다.

"일단 대기하고 있어! 내가 가 볼 테니까!"

*

"죄송합니다."

원단을 납품하는 도원 사장의 말에 일신 섬유 사장이 이를 갈며 말했다.

"이건 경우가 아니지 않습니까! 갑자기 납품을 중단한다니요!"

"사정이 생겨서 그렇습니다."

"설명해 보세요. 납득이 가게 설명하지 않으면 앞으로 일신과 도원의 거래는 이걸로 끝입니다!"

한국의 섬유 사업이 완전히 몰락했지만 유일하게 살아남은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군납이었다.

군 보급품은 무조건 국내에서 생산해야 하기에 이 방파제가 저렴한 외국 제품으로부터 국내 군납 기업들을 보호해 준 거다.

당연히 그런 만큼 군납을 따낸 기업의 입김은 국내 섬유 시장에서 절대적이었다.

특히 도원 같은 원단 납품업체 입장에서 수십만 단위의 옷을 취급하는 일신 섬유 같은 군납 기업은 그야말로 최우선 고객.

물론 세론이 등장하기 전까진 말이다.

도원의 사장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거래 끊는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거래를 끊는다고까지 하는데도 납품을 거절하다니.

이미 도원에 들어오며 공장이 활발하게 가동되고 있는 걸 확인한 일신 섬유의 사장이기에 더욱더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끊길 땐 끊기더라도 이유나 알고 갑시다. 지금 도원뿐만 아니라 다른 회사들도 전부 납품이 어렵다는데, 이게 말이나 됩니까?"

그러자 침묵하던 도원의 사장이 말했다.

"역시 그랬군요."

역시 그랬군요?

도원 사장이 뭔가 알고 있음을 깨달은 일신 섬유 사장이 말했다.

"아는 게 있으면 말씀해 주시죠. 저도 뭔지를 알아야 거래처를 바꾸든 어쩌든 대처를 할 것 아닙니까."

그러자 침묵하던 도원 사장이 말했다.

"···그간 거래해 온 정을 생각해서 말씀드리죠.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입니다. 저도 정확히 이해한 건 아니라서."

도원 사장이 일신 사장을 보며 말했다.

"혹시 세론에게 밉보인 게 있으십니까?"

그러자 일신 사장이 흠칫하며 말했다.

"세··· 론?"

"짚이는 게 있으신가 보군요. 그럼 제 추측이 맞을 겁니다. 세론의 직원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혹시 일신 섬유랑 거래하냐고. 그러곤 은연중에 돌려 말하긴 했지만 일신 섬유와 거래하면 곤란할 것처럼 표현했고요."

일신 사장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럼 다른 회사들도······."

"아마 다들 비슷한 생각일 겁니다."

침묵하던 일신 사장이 말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렇게 갑자기 납품을 끊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일신 섬유는 군납 업체입니다!"

수십만 명분의 옷을 안정적으로 납품하는 군납 업체의 기존 위상을 믿고 이야기한 일신 사장.

"···예전이라면 그 한마디에 일희일비했겠죠.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세계 최대의 섬유 회사로 성장한 세론 신발입니다. 그 세론 신발이 중국과의 거래를 중단하고 국내에서 부속품을 조달하는 덕분에 원단 회사들은 물론이고 단추나 지퍼 같은 부속품 회사들은 창사 이래 최고의 호황을 맞이한 상황입니다."

한마디로 이제는 군납 회사 하나쯤은 세론에 비해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

"그, 그렇다 해도 어찌 됐든 하나라도 더 팔면 이득 아닙니까!"

그러자 도원 사장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시죠, 원단을 뭘로 만드는지. 면화입니다. 그 면화를 어디서 가져오죠?"

일신 섬유 사장이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세론··· 농업."

중앙아프리카를 개간하며 어마어마한 농경지를 확보한 세론에서 만든 세론 농업.

그리고 그 세론 농업의 주력 상품이 바로 면화였다.

"우리는 사실상 단순한 하청업체를 넘어 세론에게 면화를 공급 받고 대신 원단을 만들어 주는 원단 위탁 생산 업체나 다름없습니다. 게다가 지금 신발이나 옷 제조사들도 모두 세론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고 있습니다. 신발의 경우엔 협회가 사실상 세론 텃밭이나 다름없고. 아무튼 당연히 그들도 세론의 눈치를 보고 있으니 우리가 세론에게 밉보이면 우리에게 원단을 사 가겠습니까?"

도원 사장의 말에 일신 사장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린다.

"일신 섬유는 군납 회사라 체감이 안 되시나 본데,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한국에서 세론과 척을 지는 건 섬유 사업 안 하겠다는 소리나 다름없다는 겁니다."

도원 사장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아무튼 저희는 일신 섬유와는 거래하지 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가망이 없음을 깨달은 일신 사장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말했다.

"가 보겠습니다."

"살펴 가세요."

그렇게 일신 사장이 도원을 나서며 말했다.

"세론이··· 한지혁이 뭔가 눈치챘어."

일신 사장이 한참을 고민하더니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최후의 수단을 쓰는 수밖에."

*

원자재와 완제품을 쥐고 있는 최대 공급사이자 최대 고객사의 비위를 거스르려는 중간 업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예전에야 군납 몇십만이 아쉬워서 설설 기었지만, 세론 신발은 국내 회사들을 앞세워 중국의 저가 브랜드를 밀어내고 내수 5천만 고객을 확보한 것은 물론 해외로도 활발히 수출을 진행하는 세계 최대의 섬유 제조사다.

당연히 저울추가 기운 수준을 넘어서 섬유산업이란 운동장 자체가 세론 손아귀에 있는데 누가 감히 거부하겠어.

"군납 방패에 도취돼서 감이 없구만."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살살 말려 죽인 다음 유동구 중장 비리 사실만 캐내면 끝이야."

아마 모르긴 몰라도 유동구가 관여한 비리는 이것뿐만이 아닐 테니까.

그렇게 일신 섬유를 말려 죽인 이후를 생각하던 바로 그때.

박인귀로부터 전화가 걸려 온다.

-회장님.

"어. 뭐 좀 알아냈어?"

박인귀의 임무는 일신 섬유와 유동구의 관계 그리고 더 있을 비리를 조사하는 것.

그런데 박인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일신 섬유가 폐업 신고를 했습니다.

···뭐?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폐업 신고?"

원래 말려 죽일 생각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렇게 스스로 자결을 선택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나.

"미친 것 아니야? 갑자기 이렇게 폐업 신고를 한다고?"

유동구에게 뇌물까지 줘 가며 군납을 따내던 업체가 고작 이것 한 방 먹었다고 갑자기 회사 문을 닫아 버려?

-예. 일신 사장이 법무법인에 폐업 절차를 의뢰한 다음 잠적했습니다.

"잠적?"

이게 도대체 무슨 경우야?

만약 나라면 뇌물을 먹인 유동구를 움직여서 나와 협상을 하든 뭘 하든 딜을 했을 거다.

어떻게든 회사는 살려야 하니까.

그런데 세론에게 찍혔다는 걸 알자마자 바로 회사를 폐업해 버리다니.

이건 마치 꼬리를 자르는 듯한······.

"어?"

꼬리 자르기?

설마 지금 이거 꼬리 자르기 들어간 거야?

나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맞네. 역시 일신 섬유는 몸통이 아니었어."

그래.

어쩐지 중장급 인사가 움직이기엔 덩치가 너무 작다 했지.

"이놈들 판단 속도가 보통이 아닌데?"

나름 군납으로만 한 해 매출 50억을 올리는 회사를 바로 이렇게 꼬리 잘라 버리고 사장은 잠적하다니.

원래라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사장만 잘 숨어 있는다면 모든 일은 일신 섬유의 폐업과 함께 수면 아래로 사라질 테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상대는 나란 말이지.

"위치는?"

-부하가 붙어 있습니다.

나는 이미 박인귀를 시켜 일신 섬유의 주요 인물과 유동구를 면밀히 감시하던 상황이니까.

-데려올까요?

"음··· 괜찮아. 내가 직접 가지, 뭐."

괜히 잡아 왔다가 납치되었다며 꼬투리 잡힐 필요 없잖아?

직접 가서 아주 친절하게 설득하면 그만인데.

-그럼 제가 모시러 가겠습니다.

"오케이."

그렇게 통화를 마친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몸통이 어디인지 한번 이야기나 들어 볼까?"

*

"후우."

일신 사장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1년만 버티자."

어차피 비위 사실이 드러난 것도 아니고 그저 군납 업체 하나가 폐업했을 뿐 아닌가.

1년이면 모든 걸 깔끔하게 처리하고 정리한 뒤일 테니 그때는 밖으로 나가도 아무 문제 없을 터.

"젠장. 조금은 더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간 일신 섬유를 운영하며 짭짤한 수익을 올려 온 만큼 아쉬움이 클 수밖에.

그때 누군가가 벨을 누른다.

인터폰으로 배달 기사임을 확인한 일신 사장이 말했다.

"놓고 가세요."

그렇게 배달 기사가 배달 음식을 두고 떠나자 배달 음식을 가져오기 위해 문을 연 일신 사장.

그런데 그 순간.

턱.

열린 문틈 사이로 누군가의 손이 불쑥 들어와 문을 부여잡는다.

당황한 일신 사장이 문을 닫으려 했지만 누군가의 압도적인 힘에 의해 강제로 열린 문.

"어··· 어?"

그렇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대한민국의 7번째 SS급 각성자인 박인귀였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사람은······.

"안녕?"

바로 6번째 SS급 각성자이자 세론 그룹의 회장 한지혁이었다.

한지혁이 해맑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말했다.

"반가워. 오다가 마침 배달 기사분을 만나 가지고 다행이지 뭐야. 들어가도 되지?"

그렇게 박인귀를 앞세워 집 안으로 들어온 한지혁.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일신 사장이 외쳤다.

"이, 이건 사유지 불법 침입입니다!"

"응? 무슨 소리야, 불법 침입이라니. 이 집 네 거 아니잖아."

당연히 잠적을 위해 지인의 명의로 빌린 일신 사장은 말문이 막혔다.

"아무튼 그게 중요해? 내가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게 포인트지. 계속 피해 봐야 의미 없으니까 단념하라고. 박인귀 길드장님?"

그러자 박인귀가 종이에 적힌 주소를 읽기 시작했다.

"서울시 강동구··· 전라남도 여수······."

그 주소는 바로 일신 사장 가족들이 숨어 있는 곳들.

일신 사장이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그, 그걸 어떻게······."

"다시 말하지만 이걸 내가 어떻게 알았고 왜 알고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아. 내가 왜 찾아왔냐가 중요하지."

한지혁이 일신 사장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말했다.

"처음엔 일신 섬유가 몸통인 줄 알았거든?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중장급 인사가 청탁을 받을 만한 사이즈가 아니었단 말이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한지혁.

"그래서 압박 좀 가하려고 했더니 바로 꼬리를 자르고 도망치대? 그래서 더 확신했어. 이거 일신 섬유가 꼬리였구나 하고."

한지혁이 일신 사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택지 줄게. 전부 다 불고 꼬리로 끝날래, 아니면 네가 전부 뒤집어쓸래."

"즈, 증거는······."

"증거? 있지, 그것도 차고 넘치게. 설마 SS급이 둘이나 나섰는데 그까짓 것 하나 못 찾았겠어?"

2명의 SS급 각성자에게서 오는 압박감이 일신 사장을 짓누른다.

"으으."

"잘 들어. 참고로 나는 이 일 절대 그냥 안 넘길 거거든? 무려 삼진 아웃이라고. 나는 후환 남기는 걸 싫어해서 지옥 끝까지 파고들 거야."

한지혁이 일신 사장 귓가에 대고 말했다.

"감당할 수 있겠어? 혼자?"

일신 사장이 식은땀을 흘린다.

"대신 전부 다 불고 죗값 치르고 나오면 지켜 줄게, 아무도 위해를 가하지 못하게."

"···정말입니까?"

"그럼, 정말이고말고. 나는 합법적인 걸 좋아하거든. 죗값 치르고 나오면 죄가 없어질 테고, 선량한 민간인 지키는 건데 뭐가 문제야. 자, 그러니 말해 봐. 혹시 여기서 딴말하면 다른 놈 찾아가서 그놈한테 들은 다음 그놈만 지켜 준다?"

한지혁의 말에 결국 일신 사장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 그러니까."

*

일신 섬유를 꼬리로 둔 몸통.

그 몸통은 바로 유동구 중장 본인이었다.

"이야. 이거 완전 대대로 이어져 온 가업이었네?"

전직 중장이었던 유동구 중장의 아버지 대부터 시작된 사업.

그것은 바로 자신 휘하의 측근을 꼬드겨 전역시킨 뒤 그 측근에게 군납 사업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물론 측근이 직접 나설 수는 없으니 측근의 가족들을 앞세워서 말이다.

그렇게 측근을 이용하여 군납 사업을 통해 이익을 취한 다음 적당한 시점에 회사를 폐업하는 식으로 감시를 피해 왔던 유동구 중장과 그의 아버지.

"지금은 일신 섬유 하나가 전부야?"

그러자 일신 사장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알기로 군복 쪽은 유동구 중장이 꽉 잡고 있다 알고 있습니다. 저도 자세하게는 모르지만 군납 회사 중 몇 개는 유동구 중장과 연관이 있을 겁니다."

"도대체 몇 년이나 해 먹은 거야?"

"아무리 못해도 아버지 대까지 합치면 40년은 넘은 걸로······."

그러니까 그 지랄을 떨었지.

일발성으로 몇억 받는 수준을 넘어 아버지 대부터 가업처럼 이어져 온 사업이 스켈레톤으로 인해 휘청거리게 생겼으니 눈이 돌아갈 수밖에.

"작년 입찰 20건 중에 5개를 먹은 일신 섬유가 50억. 그리고 이런 기업이 몇 개 더있다? 그럼 1년 매출액이 백억을 훨씬 넘는다는 소리네? 그걸 40년 동안 했으면··· 어휴. 수백억도 넘겠는데?"

나는 일신 사장을 보며 말했다.

"네 몫이 얼마야."

"저는 1년에 2억이었습니다."

"일신 섬유가 생긴 지 5년이었으니까, 10억?"

"예··· 그리고 2년 안에 폐업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쉽게 폐업을 해 버렸던 거다.

어차피 폐업을 염두에 두고 운영해 온 회사였으니까.

"그런 다음 다른 측근이 나와서 또 다른 회사를 운영했겠네?"

"예··· 그런 식으로 계속 굴려 왔으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40년 동안 문제 한 번 없었던 거지? 그 많은 사람들이 연류되었으면 중간에 말이 새어 나갈 법도 한데."

"유동구 중장은 전체 수익 중 절반 이상을 측근에게 주었습니다. 은퇴 자금 지원이란 명목으로요."

유동구 중장.

제법 남자구나?

이익을 자신이 독식하는 게 아니라 측근들에게 자신의 몫 이상을 나누어 주어 입막음을 한 거다.

심지어 나라에서 주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은퇴 자금 지원이란 탈을 쓰고 쥐여 주니 측근들 입장에선 얼마나 유동구 중장이 고맙겠어.

일발성 돈을 노리기보다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측근들을 관리해 오며 여러 회사로 분산시키고 지속적인 폐업을 통해 안정성을 확보해 온 유동구 중장.

역시 장군답게 부하들 다루는 통솔력이 보통이 아니다.

물론 그 통솔력이 나라를 위해서가 아닌 본인과 측근들의 사리사욕에 쓰였다는 게 문제지만.

"역시 충성심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동구 중장답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좋아. 덕분에 확실하게 잡을 수 있겠어. 그나저나 기왕 이렇게 된 거, 협조할 생각 없어?"

"혀, 협조요?"

"응. 군에 이야기해 봤자 자기들끼리 쑥덕거리고 적당히 묻어 버릴 것 같단 말이지? 그래서 아예 일을 키우려고, 군에서 묻지 못하고 모조리 정리할 수 있도록. 그 정도 등은 떠밀어 줘야 움직일 것 아니야. 대신 협조하면 네가 번 돈 일부는 가져갈 수 있게 해 줄게."

범죄와의 타협이지만 그 타협으로 더 많은 비위자들을 잡을 수 있다면 해야지.

나는 효율을 그 무엇보다 중시하니까.

돈을 일부라도 챙길 수 있게 해 준다는 말에 일신 사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뭘 하면 됩니까?"

"잘 들어.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하냐면······."

90화

"젠장."

유동구 중장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한지혁이 개 같은 자식."

아버지 대부터 내려온 사업은 유씨 집안에 엄청난 부를 안겨 주었다.

비록 군인이라는 신분이 있어 대놓고 부를 과시할 수는 없었지만, 그간 유씨 집안이 쌓아 온 재산만 수백억.

거기에 여전히 유씨 집안을 따르는 전역한 측근들은 유씨 집안의 든든한 파트너였으니, 앞으로도 유씨 집안의 사업은 영원하리라 생각했다.

당연하게도 이런 사업을 현재 대위로 복무 중인 아들에게 넘겨줄 생각으로 열심히 관리해 온 유동구.

그런데 그때 세론이 등장했다.

"뭐? 분대형 스켈레톤?"

유씨 집안의 사업은 큰 자본과 기술이 필요 없는 섬유에 맞춰져 있었다.

수시로 폐업과 창업을 반복해야 했으니 당연한 선택.

그렇게 군복과 내복 등 군인들에게 제공되는 섬유 관련 군납을 거의 장악하고 있던 유씨 집안.

그런데 세론의 스켈레톤이 도입되면 이 섬유 관련 군납이 축소될 수밖에 없지 않나.

물론 전면 도입은 여전히 반대 여론이 있어서 시간이 걸리기는 하겠지만, 이 사업을 아들에게 물려줄 생각을 하고 있던 유동구에게 있어서 이건 그야말로 유씨 집안 사업의 근간을 흔드는 중차대한 도전.

그래서 적극적으로 나서며 도입을 반대해 온 건데······.

"도대체 어떻게 안 거지?"

갑자기 세론이 일신 섬유를 압박하기 시작한 게 아닌가.

그것도 아주 대놓고.

한지혁이 무언가 냄새를 맡았다는 걸 확신한 유동구는 바로 일신 섬유 폐업을 지시하고 사장을 잠적시켰다.

일단 회사를 날려 버리면 모든 일은 회사와 함께 사라지는 법이니까.

"그래. 이번에도 넘길 수 있어."

40년간 이어져 온 가족 사업.

당연히 그 과정에서 많은 풍파가 있었다.

양심선언을 하려는 측근이나 수상함을 느끼고 조사를 하는 외부인 등등.

하지만 유씨 가문은 회사를 폐업시키고 군 내부 인맥을 이용해 사건을 무마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모든 풍파를 막아 내었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 유동구 중장.

그런데 그때.

유동구가 사업용으로 쓰는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 온다.

유동구가 주변을 잠시 살피고는 핸드폰으로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

"내가 당분간 전화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세론이 냄새를 맡았으니 당분간 사릴 생각으로 측근들에게 연락 자제를 지시한 유동구.

그런데 그 지시를 무시하고 연락을 취한 측근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

-주, 중장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데."

-일신 섬유 사장이 기자들을 이끌고 군납 회사들을 방문하고 있답니다!

"뭐!?"

일신 섬유 사장은 중령으로 전역한 측근의 사촌 동생.

집에서 놀고 있는 백수라기에 아무 걱정 없이 일을 맡겼다가 최근 세론에게 꼬리를 잡혀 잠적하라 지시했는데, 갑자기 기자들을 이끌고 군납 회사들을 찾아다니고 있다니.

"그놈 미친 것 아니야!? 잠시만 기다려."

그렇게 통화를 마치고 일신 섬유 사장의 사촌 형인 중령에게 전화를 건 유동구.

-주, 중장님.

"야! 너 미쳤어!?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그, 그게, 이놈이 제 연락은 무시한 채 독단적으로 벌인 일입니다!

"뭐?"

유동구 중장이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독단적으로 벌인 일이라고?"

고작해야 백수로 집에서 놀던 놈이 사촌 형인 중령과 자신의 지시를 어긴 채 단독으로 이런 규모의 일을 벌일 리가 없다.

본능적으로 한 사람이 머릿속에 떠오른 유동구가 이를 갈며 외쳤다.

"한지혁!"

*

서류를 들고 한 군복 납품 회사에 기자들과 쳐들어간 일신 섬유 사장이 외쳤다.

"저와 일신 섬유는 불법으로 군 입찰에 참여해 내부자 정보로 군복을 낙찰받았습니다!"

일신 사장의 말에 기자들이 계속해서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제 사촌 형의 강권으로 어쩔 수 없이 대리 사장을 맡아 지금까지 운영해 온 일신 섬유. 하지만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버는 돈이 과연 정당한 돈인가! 늘 고민하고 또 고민했습니다. 그렇기에 결심했습니다."

일신 사장이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사실을 외부에 알려 정의를 되찾기로 말입니다!"

그때 한 기자가 말했다.

"내부자가 누굽니까? 사촌 형입니까?"

"아닙니다. 사촌 형은 중령으로 전역하였기에 그 정도 힘을 가지고 있지 않죠. 그 내부자는 바로 유 모 장군!"

그러자 기자들이 수군거리며 말했다.

"유씨 장군이 몇 명이나 있지?"

"못해도 열 명은 될걸?"

그렇게 일신 사장이 기자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던 그때, 방문한 회사의 사장이 창백한 표정으로 나와 말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일신 사장이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내부자는 뭐고 불법은 또 뭡니까? 저희는 그런 것과 전혀 관련 없습니다!"

"당당하다는 말씀이시군요."

"맞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함께 검증을 받으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걸 제안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예?"

"일신 섬유는 이 거대한 범죄 조직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이 범죄 조직이 어디까지 손을 뻗어 놨는지 알 도리가 없다는 거죠. 그래서 군납 회사들에게 정식으로 검증받을 걸 요청하기 위해 이렇게 찾아온 겁니다, 범죄 조직을 색출하기 위해서."

일신 사장이 들고 있던 서류 뭉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일신 섬유가 5년간 영업해 오며 쌓은 회계 자료들입니다. 이 자료와 교차 검증 하여 정상적인 군납 회사가 맞는지 확인하는 겁니다."

그러자 회사 사장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저보고 회사 내부 자료를 공개하라는 겁니까?"

"맞습니다."

"제가 왜요? 무슨 법적 근거로?"

"법적 근거는 없습니다. 단지 정의를 위해 도와 달라는 것뿐이죠."

그야말로 막무가내식 화법을 이어 가는 일신 사장.

다른 것도 아니고 무려 회사의 장부를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공개하라는 말에 당연히 군납 회사 사장은 거부했다.

"내가 미쳤습니까? 정식으로 수사가 나온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우리 회사 장부를 공개해야 합니까? 게다가 검증이라 했는데, 그 검증은 누가 하고요!"

그런 사장의 말에 조용히 옆에서 지켜보던 양복을 입은 무리가 나타나 말했다.

"그건 저희가 하겠습니다."

"···누구십니까?"

"세론의 법무 팀입니다."

세론이라는 말에 군납 회사 사장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린다.

"세, 세론?"

한국 섬유 사업을 지배하고 있는 세론이 이렇게 직접 나서다니.

당연히 군납 회사 사장의 등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때 법무 팀 직원이 군납 회사 사장에게 다가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해합니다. 회사의 은밀한 내용이 전부 노출될 텐데 어떻게 걱정이 안 되시겠습니까."

"저, 저희는 절대 비리를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것 말고 다른 걸 말하는 겁니다. 사소한 횡령이나 회계 실수 같은 것 말이죠. 사장님, 저희는 그런 것엔 전혀 관심 없습니다. 오직 비리 회사를 잡기 위해 나선 거라서 말입니다. 만약 자료를 넘겨주신다면 저희 법무 팀이 철저히 검증한 다음 사소한 실수 같은 건 묻어 두겠습니다."

"묻어··· 둔다고요?"

"법인 카드를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했다거나 이런 건 솔직히 말해서 안 하는 회사가 없지 않습니까?"

"으음······."

"하지만 이 일이 커지고 정부와 국방부가 본격적으로 나서면 묻으려야 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그 전에 저희 법무 팀의 도움을 받아 면죄부를 받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법무 팀 직원의 말에도 여전히 망설이는 사장.

"만약··· 거절하면 어떻게 됩니까."

"사기업인 저희가 뭘 어떻게 할 수는 없지요. 다만······."

법무 팀 직원이 조용한 목소리로 사장에게 말했다.

"회장님께서 사장님에게 크나큰 실망을 하시겠죠. 하지만 반대로 협조하신다면··· 회장님이 크게 기뻐하시며 사장님의 회사가 앞으로 사업을 하는 데 있어 상당한 도움을 드릴 겁니다."

섬유 회사 입장에선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제안.

"제,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회사의 회계 자료 검토를 저희에게 의뢰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시면 됩니다."

사장이 직접 자신의 회사에 부정행위가 없는지 세론에 검토를 부탁하는 형식.

이런 식이라면 평범한 회계법인에서 제공하는 회계 서비스와 다를 바 없으니 문제될 일도 없었다.

사장이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그··· 사소한 실수가 제법 있을 텐데."

"저희는 오직 군납 비리만을 찾는 겁니다. 사장님이 성매매를 하셨든 아니면 페이퍼컴퍼니를 두고 비자금을 빼돌리셨든 전혀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일이 커져서 정부와 국방부의 직접적인 감사를 받기 전에 적당히 눈감아 주는 세론에게 의뢰하여 면죄부를 받고 동시에 세론의 회장 눈에 들 수 있는 기회.

"게다가 이번에 제대로 청소를 하고 나면 군납 빈자리가 많이 생길 텐데··· 저희가 적극적으로 밀어드리면 그 빈자리 차지하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지 않을까요."

결국 사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정식으로 의뢰하겠습니다."

*

일신 사장의 군납 회사 순회는 뉴스를 타고 세상에 알려졌다.

"대략 4분의 1 정도 되는 회사가 순순히 협조하기로 했습니다."

김덕배의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4분의 1이면 나쁘지 않네요."

이번 일을 일으킨 이유는 간단했다.

일신 섬유가 세론의 압박에 무언가 반응을 취할 거라 예상했던 것처럼 섬유산업에서 절대적 위치에 있는 세론이 나선 이상 정상적인 섬유업체라면 협조를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거부한다?

그건 유동구가 되었든 아니면 유동구 아닌 다른 내부자가 되었든 무조건 비리와 연관되어 있다는 증거다.

이유는 간단하다.

세론이 작정하면 회사는 존립이 불가능한 상황인데, 그런 상황에서조차 자료 공개를 거부한다는 건 회사의 존립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니까.

자본주의 세상에서 회사의 존립보다 더 중요한 게 뭐겠나?

당연히 비리지.

물론 다른 사정이 있을 수도 있지만, 어차피 내 제안을 거절해 봤자 국방부와 정부가 나서서 강제로 조사를 할 게 분명한 상황인데도 끝까지 숨기는 건 분명 떳떳하지 못한 사정이 있기 때문일 테니 아무 상관 없다.

"싹 순례 방문 해서 사건 키우면 정부랑 국방부도 안 나설 수가 없겠죠. 그때 세론이 나서서 자료 제출 한 회사들 보호해 준 다음 비리 회사들 싹 쳐 내고 그 자리에 협조한 회사들 앉힙시다."

아무튼 정상적인 회사··· 그러니까 완전히 깨끗한 건 아니지만 최소한 군납 비리는 저지르지 않은 회사들 입장에서 이건 기회다.

불법적으로 납품을 따내던 경쟁자들을 모조리 쳐 낼 기회니까.

그러니 더욱더 자료 제출을 거부하면 의심이 될 수밖에.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런데 그때 나에게 걸려 온 의문의 전화.

"한지혁입니다."

-···한 회장님.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바로 유동구 중장이었다.

"오호? 중장님 아니십니까."

-그만합시다.

"뭘 그만해요."

-지금 벌어지는 모든 것, 제가 졌습니다.

그 와중에 녹음될까 봐 주어는 전부 빼고 말하는 것 보소?

아주 치밀한 양반이야.

그러니 아버지랑 같이 40년을 해 처먹었지.

"졌다고요?"

-예. 앞으로 적극적으로 협조하겠습니다. 그러니··· 여기까지만 합시다.

그래.

진작에 이렇게 나와야지.

발등에 불이 떨어지니 몸이 덜덜 떨리지?

하지만 패배를 인정한다고 해서 그만둘 거였으면 시작도 안 했다고.

"아직도 착각하고 계시네요. 중장님은 진 게 아닙니다."

나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그라운드에서 퇴장당한 거지."

-···한 회장님, 나 중장입니다, 어쩌면 대장에 오를지도 모르는. 제 힘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필요 없는데요. 저 진짜 법대로 사는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비리에 찌든 사람이랑은 같은 공간에서 숨 쉬는 것도 역겨워서 말이죠."

틀린 말은 아니라고?

내가 얼마나 법을 잘 지키는데.

물론 한국에서 한국 법 한정이지만.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냥 하던 대로 하세요. 패배 인정하면 뭐 내가 봐줄 줄 알았나?"

-큭!

결국 참던 화를 폭발시킨 유동구.

-나 중장이야! 대한민국에 33명밖에 없는 중장!

"알죠. 잘 알죠. 근데 나는 7명밖에 없는 SS급이니 내 쪽이 더 귀한 것 아닌가?"

말문이 막힌 유동구가 말했다.

-진짜 끝까지 해보자 이겁니까?

"허세 부리기는. 애초에 유 중장님은 저랑 싸울 체급도 안 돼요. 결국 어쩌니 저쩌니 해도 섬유 사업 아닙니까? 사업을 전부 측근들 친인척과 지인에게 맡기니 감이 없으시나 본데, 군납이든 뭐든 한국에서 세론 도움 없이 섬유 사업은 불가능합니다. 한마디로 전부 내 손바닥 안이라고."

나는 조롱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한번 발악해 보세요, 이미 게임은 끝났으니까. 끊습니다?"

-한 회장님! 한 회장!

그렇게 유동구의 외침을 무시하고 전화를 끊어 버린 나.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정의를 구현해 볼까?"

*

일신 사장을 앞세워 군납 회사들을 완전히 뒤집은 세론.

당연히 국민들은 군납 비리에 분노하였고, 정부와 국방부는 전수조사를 시작했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유동구는 필사적으로 반항했다.

측근들과 자신의 연결 고리를 끊고 군 내부의 인맥을 활용해 어떻게든 무마하려 시도한 유동구.

하지만 회사 하나에 대한 조사라면 모를까, 모든 섬유 관련 군납 회사를 전수조사 하는데 그걸 전부 막기란 불가능한 일.

그렇게 유동구와 관련된 회사들의 비리가 하나둘 터져 나왔고, 그렇게 유동구는 천천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유동구가 아닌 다른 내부자도 줄줄이 엮여 나오며 한바탕 홍역을 치른 군부.

때문에 국방부에서 이런 일을 벌일 거면 언질이라도 해 주지 그랬냐는 아쉬운 소리를 들었지만, 솔직히 그냥 알아서 하도록 맡겼으면 이렇게까지 조사를 했겠어?

보나 마나 군부의 위상이 추락한다며 내부에서 깨작깨작 덮어 버리기 급급했을 게 뻔한데.

아무튼 군납 비리 혐의로 군 재판에 넘겨진 유동구와 그의 측근들.

하지만 나는 그걸로 만족하지 않았다.

"면직이나 이런 건 안 돼요. 무조건 파면입니다."

군 비리가 밝혀지고도 적당한 수준에서 처리된 게 어디 한두 번이야?

유동구가 나와 관련 있는 이상 절대 그냥 못 넘긴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국민들 이목이 이렇게까지 집중되어 있는데, 당연히 유동구 중장은 파면될 겁니다."

좋아.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일단 파면시켜서 일반인으로 만든 다음 줄줄이 민사소송 넣어서 탈탈 털어 줘야지."

"민사요?"

"솔직히 유 중장 그간 저질렀던 죗값 전부 치르게 하지는 못하잖아요?"

무려 40년이다.

그 옛날에 해 먹었던 기록을 지금 와서 찾아내기도 힘들고, 찾아낸다고 한들 입증도 어렵단 말이지.

게다가 우리나라 법상 징벌적 처벌이 안 돼 벌금도 벌어들인 돈에 비해 적을 게 분명하고.

그러니 일반인 신분으로 만든 다음 공정한 거래를 위반했다며 정상적인 군납 회사들을 통해 끊임없이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거다.

재산을 함부로 쓸 수 없도록 가압류를 걸고 허구한 날 재판에 불려 다니도록.

그렇게 계속 귀찮게 만들면 결국 유 중장은 숨겨 둔 재산을 몰래몰래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되지.

그때 감시하도록 붙여 둔 박인귀의 부하를 이용해 숨겨 둔 재산을 파악한 다음 한 번에 모조리 빼앗으면?

유 중장은 숨겨 둔 재산이기에 신고도 할 수 없고, 그대로 빈털터리 신세가 되는 거다.

파면당해 군인으로서의 명예도 잃고 그간 모은 재산도 모조리 털리면 유 중장에게 남는 건 아무것도 없지.

아무튼 이걸로 유 중장은 끝.

"어쩌다 보니 본의 아니게 극성 반대파를 몰아내 버렸네요."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나머지 반대파분들 대부분 일부 도입 정도는 인정하고 계시니 사업에 속도 좀 내 볼까요?"

모두가 가기 싫어하는 군대를 스켈레톤으로 대체하여 국민들의 환영도 받고 돈도 벌고.

이거야말로 일석이조지.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군용 스켈레톤 연구도 거의 끝났으니 정식으로 출시하겠습니다. 원하는 도입 물량 말씀해 주세요, 얼마든지 만들어 드릴 테니."

91화

순차적으로 군용 스켈레톤이 도입된다.

여기에 스켈레톤 리그가 활성화되고 상금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오르자 선수들이 경쟁적으로 창과 방패처럼 상대를 파쇄하기 위한 새로운 스켈레톤과 전략 전술을 고안하고 그걸 또 파쇄하기 위해 또 다른 방법을 들고 나오고.

"순조롭네."

덕분에 전투형 알고리즘이 아주 빠른 속도로 성장해나간다.

군에서는 현대 병기와 현대 전술이 접목된 군용 스켈레톤이 발전해나가고 리그에선 냉병기를 이용한 나 혼자였다면 상상하지도 못했을 별의별 신기한 버전의 스켈레톤들이 나오면서 말이다.

이제 이 스켈레톤들은 향후 내 언데드 군단과의 결전에서 특수 부대 역할을 톡톡히 하겠지.

세론 언데드 군단의 알고리즘은 이런 전투 방법을 지닌 적과의 상대를 염두 해두지 않고 만든 거니까.

물론 기본 스펙도 뛰어나고 미지의 적과 전투에도 대응할 수 있도록 디테일하게 만들어둔 만큼 어느 정도는 대처가 가능할거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내가 있었다면 곧바로 완벽한 대응 방법을 업그레이드 했겠지만 업그레이드의 주체가 없는 세론 언데드 군단은 늘 정확히 어느 정도 대처하는 것 이상의 성능은 발휘하지 못하겠지.

그러다 빈틈이라도 발견하면 그 빈틈을 집요하게 노리면 된다.

세론 언데드 군단은 그 빈틈을 매꿔줄 나란 존재가 없으니까.

"이제 돈만 열심히 벌면 되겠다."

그렇게 전투용 알고리즘이 마치 진화의 과정을 보듯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나가고 있으니 그 발전을 뒷받침해줄 돈만 있으면 된다.

막대한 돈을 쏟아 부어 인공 정수를 매입하고 그 인공 정수로 높은 스펙을 지닌 언데드를 만들고.

"일단 100조는 넘었는데···"

그리고 그 돈을 벌어다 줄 세론은 현재 한달 매출액이 10조에 육박하여 1년 추정 매출 100조를 돌파한 상황.

하지만 이 정도로도 부족하다.

100조 매출을 달성하기는 했지만 이건 에너지 시장의 유통 과정에서 생긴 뻥튀기의 영향이 컸기 때문이니까.

"에너지 시장 전망이 좋기는 하지만 순이익이 너무 적어."

사람과의 공존과 안정적인 마력 공급을 중점에 두고 시작한 사업인 만큼 매출은 높지만 순이익이 다른 계열사에 비해 현저히 낮았다.

그나마 프로티지의 순이익이 높기는 하지만 인공 정수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발전소의 경우엔 여전히 원자력보다 생산 단가가 높아 마진율이 3퍼센트를 왔다갔다하는 수준.

물론 매출이 높은 만큼 3퍼센트라 해도 상당한 돈이었지만 아쉬운 건 사실이었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새로운 먹거리 없나?"

돈도 벌고 욕도 안 먹을 수 있는 일.

하지만 떠오르는 게 없다.

이미 비싼 노동력으로 인해 해외로 유출된 산업은 거의 다 진출했단 말이지.

"그냥 하던 일이나 열심히 해야 되나."

이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세론은 지금도 계속 성장하고 있으니까.

아마 지금 사업들만 잘 키워도 내가 목표로 하는 금액까지는 언젠가 달성할 수 있겠지.

"그래도 아쉬운데."

하지만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면 개척할수록 목표는 더욱 가까워지는 법.

"뭐 없나?"

보통 세론 그룹 덩치가 되면 기술을 개발해 최첨단 분야로 발전해나가는 게 보통.

그런데 세론은 자체 기술력이랄 게 스켈레톤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이제 와서 연구원들 데려다가 기술 연구하라고 해 봤자 따라잡을 수 있을 리도 없고."

그렇다면 역시 스켈레톤의 압도적인 노동력을 이용하는 게 가장 베스트인데.

"흠."

그렇게 잠시 고민하던 그때 모니터에 띄워둔 포털에서 한 뉴스가 눈에 띈다.

"···택배 기사 총 파업."

무언가에 홀린 듯 그 뉴스 기사를 클릭해본 나.

"최근 근로자의 감소로 택배 기사에 과중한 업무가 부담 되어···"

그렇게 내용을 모두 확인한 나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여기도 인력난이 생겼구나?"

에너지 매입으로 인한 파트 타임 알바들의 감소.

그 여파를 가장 크게 체감한 건 소상공인이지만 이쪽 배달과 택배 같은 업종도 마찬가지였던 거다.

사람들이 할일 없으면 배달이라도 뛰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니까.

진입장벽이 워낙 낮기에 직장인들도 투잡으로 파트 타임을 뛰는 게 바로 배달.

택배 역시 상하차 등등 수많은 인력이 소모되는데 에너지 매입의 보편화로 수입이 안정화되니 이런 힘든 일을 하려는 사람이 줄어들 수밖에.

"택배. 배달. 오호?"

그러고 보니 미국 인터넷 상거래 업체의 기업가치가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지 않았나?

그렇게 인터넷에 그 업체를 검색한 나는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와. 2천조?"

고작 택배 배송해주는 회사의 기업가치가 2천조라니.

"이거 돈 되는 구나?"

물론 에너지 시장에서 세론의 순수입이 낮은 것처럼 유통 쪽의 마진은 적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매출 뻥튀기 효과가 엄청나며 동시에 일단 한번 자리를 잡으면 완전히 눌러앉을 수 있게 되는 것이 바로 이런 유통 업종.

그래서 한국에서도 각종 인터넷 상거래 업체들이 손해까지 감수해가며 출혈 경쟁을 하는 거 아닌가.

일단 자리만 확실하게 잡으면 돈이 된다는 걸 미국의 2천조짜리 인터넷 상거래 기업이 증명했으니까.

"이거 해볼까?"

서로 출혈경쟁을 하는 인터넷 상거래 업체들.

거기에 마침 인력난까지 겹쳤으니 세론이 들어가기 딱인데?

"스켈레톤으로 택배를 배송하는 거야."

예전이라면 엄두도 못 냈을 사업이다.

수많은 집들을 방문하는 알고리즘을 언제 하나하나 만들고 있어.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소상공인들에게 알바 스켈레톤이 뿌려지며 전국 각지에 사설 스켈레톤 가게와 업자들이 생겨날만큼 보편화된 스켈레톤 알고리즘 기술.

이걸 이용하면 충분히 해볼만하지 않을까?

"인력난이 심각해진 택배기사들을 흡수해서 스켈레톤이랑 잘 조합하면 인력난도 해소하고 일자리도 유지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느낌 온다.

이건 된다고.

하지만 문제가 있다.

"스켈레톤이 배송한다고 해서 특별한 경험이 생기는 건 아니잖아."

결국 소비자는 돈을 내고 주문한 물건을 수령하는 것뿐인데 그 배송을 스켈레톤이 하던 사람이 하던 소비자는 아무 상관이 없단 말이지.

물론 인력난을 기회 삼아 배송비를 절감해 저렴한 가격으로 배송이 가능하겠지만 그래서는 임팩트가 너무 약하다.

나는 한국의 유명 인터넷 상거래 홈페이지를 확인하며 말했다.

"미사일 배송. 한밤 배송."

그리고 그건 다른 인터넷 상거래 업체들도 마찬가지.

그들은 자신들만의 장점을 내세우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고안하고 도입한다.

"이런 특징적인 게 필요한데. 꼭 세론의 인터넷 상거래 업체를 이용해야만 하는 이유가 필요해."

뭐가 좋지.

나는 잠시 고민하다 눈을 번뜩 뜨며 말했다.

"전부다 합칠까?"

생각해보면 이런 서비스들은 결국 인력을 갈아 넣어서 유지하는 구조다.

당연히 인력에 한계가 있는 이상 서비스 할 수 있는 범위는 한정이 될 수밖에.

하지만 내 인력에는 한계가 없단 말이지.

"그래. 전부 다 합치는 거야."

특정 시간에 배달한다거나 이런 게 아니라 주문 즉시 최단 기간 안에 배송하는 거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테스트 해보자."

택배 상자를 든 스케레톤이 걸어가다 한 아파트의 입구를 확인한다.

그 입구에 적힌 동 숫자를 확인하고는 그 안으로 들어가더니 호수에 맞게 택배 상자를 내려놓는 스켈레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잘하네요?"

그러자 백상호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게 물건 진열도 하는데 이 정도는 일도 아니죠."

많은 집들을 일일이 배정해야 하기에 작업량이 만만치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내 예상보다 그간 연구 센터가 축적해온 알고리즘 기술은 뛰어났다.

그간 소상공인들에게 맞춤형 알고리즘을 제작해주며 쌓아 올린 노하우를 이용해 개별 집으로의 이동 동선을 만드는 게 아니라 아예 스켈레톤이 직접 숫자를 인식해 그 숫자에 맞는 집을 찾아가는 사실상의 인공지능급 성능을 뽐내는 스켈레톤.

"백 센터장님. 이걸 이용한 택배 사업 가능성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인도도 잘 만들어져 있고 구획이 딱딱 나뉘어있으니 충분히 가능합니다."

"크."

좋다 좋아.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가 있다고요?"

"스켈레톤은 운전을 할 수 없고 상품이 파손될 수 있어 뛸 수도 없으니 이걸로 효율이 나오려면 어마어마한 숫자의 스켈레톤이 필요할겁니다."

맞는 말이다.

결국 스켈레톤 택배를 하려면 거점이 필요한데 이 거점에서 스켈레톤을 바로 보내면 왔다갔다하는 시간이 엄청나게 소요되겠지.

하지만 상관없다.

"그건 백 센터장님이 스켈레톤으로만 택배를 하려고 생각을 해서 그런 겁니다."

"예?"

"늘 그렇듯 세론은 공존을 중요시 하잖아요? 저는 택배기사들의 업무 자체를 바꿀 겁니다."

"업무를 바꾼다니 그게 무슨···"

"앞으로 택배기사들은 물건을 배달하는 게 아니라 스켈레톤을 배달할겁니다. 일종의 항공모함 역할을 하는 거죠. 거점에서 택배 기사들이 주소지 입력이 완료된 스켈레톤과 물건을 함께 싣고 난 다음 정해진 장소에 가서 트럭의 문을 열면 스켈레톤들이 정해진 주소로 택배를 배송하는 거죠."

이게 바로 내가 생각한 택배 기사와 스켈레톤의 공존 방식이었다.

아파트 단지 하나를 예로 들어 택배 기사가 아파트 단지 중간에 트럭을 세우면 그 트럭에 있는 스켈레톤들이 쫙 뿌려지며 전체 아파트 단지를 동시에 배송하는 거지.

"그렇게 배송을 완료한 스켈레톤들은 다시 트럭으로 돌아오죠. 그럼 택배기사는 그 스켈레톤을 데리고 다시 거점으로 갑니다. 그사이 거점에선 다음 배송지 주소를 입력한 스켈레톤과 물건을 준비해두었다가 택배 기사가 돌아오면 새로운 스켈레톤과 물건을 트럭에 넣고 돌아온 스켈레톤으로 다음 배송을 준비하는 식으로 계속 사이클을 돌리는 겁니다."

이런 식이면 택배 기사 하나가 감당할 수 있는 구역이 어마어마하게 넓어지지.

당연히 기사 혼자 수백 개씩 배송할 때와 달리 동시 다발적으로 뿌리니 배송속도도 압도적으로 빨라지고.

"이거라면 택배 기사들과 공존이 될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백상호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회장님이십니다. 전부 스켈레톤으로 할 생각만 하다 보니 제 시야가 좁았습니다."

"그럴 수 있죠. 하루 종일 스켈레톤만 붙들고 계시니. 아무튼 계속 연구해주세요. 한국의 주거 형태는 아파트 뿐만 있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어쩌면···이걸로 해외 진출을 할지도 모르니 해외도 염두에 두시고."

미국 하나 먹고서 2천조라잖아.

그런 탐스러운 시장을 어떻게 그냥 넘겨.

한국 평정에 성공하면 바로 해외 진출한다.

"알겠습니다. 모든걸 염두에 두고 진행하겠습니다."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럼 알고리즘은 부탁하겠습니다. 저는 이제 경영자로서 할 일이 있어가지고."

"후우."

한국 인터넷 상거래 업체인 포르미.

연 매출 3조원을 자랑하는 한국 인터넷 상거래 업체 7위에 랭크 된 회사로 겉으로만 봐서는 아주 건실한 기업이었다.

매출도 높고 순위도 높고.

하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야말로 누더기나 다름없었다.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업체들간의 치킨 게임은 그야말로 점입가경이었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유통 기업의 마진율은 매우 낮은 편인데 고객을 유치하기 위해 각종 이벤트를 뿌리며 적자가 누적되고 이제는 심지어 인터넷 상거래의 가능성을 확인한 대기업들까지 진출한 상황.

일단 자리에 눌러 앉으면 모든걸 갖게 될 거라는 생각에 그들은 경쟁자가 먼저 나가떨어지기만을 기다리며 대규모 적자를 감수한다.

"이제는···한계야."

그리고 이 미친듯한 치킨 게임에서 업계 7위인 포르미는 한계에 봉착했다.

상위권 기업은 가능성이 보이기에 투자 유치도 활발하고 대기업을 모회사로 둔 기업들도 모기업의 막강한 자금 지원을 받으며 버티고 있지만 스타트업으로 시작했고 순위도 7위로 애매한 포르미는 그야말로 모든걸 스스로 해결해야 했으니까.

그나마 초반엔 기획했던 여러 이벤트들이 대박을 터트리며 투자유치를 받은 덕에 여기까지 성장했지만 다른 기업들의 미친듯한 자금 공세에 밀려 점유율과 매출 모두 떨어지기 시작한 포르미.

그리고 인터넷 상거래 업체에게 있어서 점유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는 건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적자를 감수해서 점유율을 끌어올리고 점유율을 미끼로 투자를 유치해 그 자금으로 또 다시 적자를 감수하여 점유율을 끌어올리는 구조를 견뎌내야 왕좌에 오를 수 있는데 이 사이클이 무너진 거니까.

"···팔자. 다른 방법이 없어."

결국 궁지에 몰린 포르미 대표의 선택은 매각이었다.

이대로 적자만 누적되다 더욱 회사가 망가지기 전에 팔아 치우는 것이 지옥 같은 치킨 게임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팔면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왕좌가 아니면 의미가 없는 이 치킨 게임에서 중도 탈락한 포르미에게 남은 가치는 오직 점유율뿐.

"600억을 넘기는 힘들겠지."

대표 본인이 생각해도 막대한 부채를 끌어안고 있고 성장동력도 잃은 포르미의 가치는 많아야 3천억.

그간 투자를 유치해오며 지분을 계속 넘겼기에 대표 본인이 쥐고 있는 지분은 20퍼센트.

그러니 포르미 전체 가치를 3천억으로 잡았을 때 대표 본인이 가진 지분의 가격은 600억이었다.

그것도 맥시멈으로 잡았을 때 말이다.

"겨우 600억이라··· 이거 벌자고 그 모진 고생을 해왔다고?"

일반인 기준에서는 어마어마한 금액일지 모르지만 조 단위 매출을 올리는 기업을 직접 자신의 손으로 일군 대표 입장에선 초라해도 너무나 초라한 금액이었다.

만약 포르미가 왕좌의 자리를 차지했다면 600억이아니라 조 단위를 훨씬 넘었을 테니까.

그 동안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투자자에게 알랑방구를 뀌어가며 해왔던 노력들이 떠오른 대표.

"···그래도 방법이 없잖아. 팔자."

더 회사가 망가지면 600억이 아니라 휴지조각이 될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매각을 결심한 그때.

"대. 대표님!"

비서가 문을 박차고 들어와 말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투자가 절실한 포르미 입장에서 돈 많은 손님은 언제라도 환영인 법.

"누군데?"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비서에게 누군지 물어본 포르미 대표.

그런데 그런 비서의 입에서 나온 인물의 이름은 포르미 대표의 상상을 아득히 넘어서는 거물이었다.

"세론 그룹 한지혁 회장님이십니다!"

"하. 한지혁 회장님!?"

상장되진 않았지만 추정 매출로만 한국 10대 재벌 기업 중 하나로 손꼽히는 세론 그룹.

그런 세론 그룹의 지분을 100퍼센트 홀로 가지고 있는 한지혁은 비공식적으로 개인 자산 기준 한국 제일의 부자였다.

그리고 이런 부자의 투자를 유치할 수만 있다면 포르미 대표가 꿈꿔온 왕좌의 자리를 향해 다시 도약하는 것도 꿈은 아닐 터.

포르미 대표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당장 모셔···아니 내가 직접 나가지."

그렇게 바로 달려나간 포르미 대표.

"하. 한 회장님!"

그런 포르미 대표의 눈에 TV에서만 보던 한지혁 회장이 서있다.

"어서 오십시오!"

"예. 반갑습니다. 한지혁입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대표실로 정중히 한지혁을 모신 포르미 대표.

"회사 좋네요."

"하하. 그렇습니까?"

한지혁의 긍정적인 반응에 신이 나서 회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 대표.

"전국 각지에 물류 센터를 두고 빠른 배송을 통해···"

그런 대표의 말에 한지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준다.

"괜찮네요. 그 정도 인프라면."

그렇게 신이 나서 설명하던 대표가 아차 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제가 경황이 없어서 무슨 일로 방문하셨는지 여쭙지도 못했군요. 혹시 무슨 일 때문에 오신 건지···혹시 투자?"

제발 투자 제안이길 기대하며 한지혁을 바라본 포르미 대표.

하지만 한지혁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투자제안이 아니었다.

"아. 투자는 아니고요."

투자가 아니란 말에 대표가 다급히 말했다.

"마. 만약 투자만 해주신다면 포르미를 대한민국 최고의 인터넷 상거래 업체로 만들 자신이 있습니다!"

"물론 포르미를 최고의 인터넷 상거래 업체로 만들 생각에 온 거긴 한데 대표님이 아니라 제가 직접 하려고요."

"···예?"

"인수 제안을 하러 왔습니다. 제가 생각한 포르미 전체의 가치는 5천억. 부채는 당연히 전부 떠안고 가고요."

비록 기대한 투자 제안은 아니지만 포르미의 가치를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두 배 가까이 높게 책정한 한지혁.

대표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내 지분 가치가 천억 원?"

비록 기대한 투자 제안은 아니지만 600억에 매각할걸 고려하던 대표에게 있어서 더 많은 금액을 받고 이 치킨 게임에서 탈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셈.

하지만 아쉽다.

'세론이 작정하고 뛰어 들면···성공할 확률이 커.'

사업 성공률 100퍼센트를 자랑하는 세론 아닌가.

당연히 욕심이 생길 수밖에.

'절반만 팔고 나머지 절반은 들고 있을까?'

세론이 뛰어들어 포르미가 부활에 성공해 왕좌의 자리를 차지하면 지금 지분의 가치는 몇 배로 상승할 터.

그렇게 지분 판매를 고민하던 그때 한지혁의 대표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요?"

"솔직히 지금 포르미 상황이면 5천억은 매우 과한 금액입니다. 그런데도 5천억을 제시한 이유는간단합니다. 듣자 하니 포르미 지분 관계가 좀 복잡하다면서요?"

"투자를 받으며 지분을 나눠준 바람에 그렇습니다."

한지혁이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거 싹 정리해오세요. 모두가 같은 시점에 포르미의 지분 100퍼센트를 저한테 넘기면 방금 말한 조건으로 매입해드리죠. 하지만 한 명이라도 거절한다? 그 지분이 몇 퍼센트이건 간에 저는 매입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본인 지분 비싸게 처분하고 싶으면 다른 투자자들 설득해오세요. 저는 백 퍼센트 아니면 안 하는 주의라서."

92화

인터넷 상거래의 핵심은 인지도다.

아무리 좋은 시스템을 만들고 서비스를 무더기로 퍼줘도 고객이 없으면 아무 소용도 없으니까.

그런 점에서 볼 때 포르미는 딱 적당한 회사였다.

애매한 순위지만 나름 인지도가 있고 동시에 위기를 맞이하여 좌초 직전이기에 저렴한 가격으로 매입할 수 있는 회사.

문제는 스타트업답게 투자자들에게 지분을 쪼개주며 지금까지 성장해오며 지분이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는 거다.

그래서 아예 통 크게 돈을 질렀지.

돈 좀 아끼자고 투자자 하나하나 만나며 지분을 매입하면 그 과정에서 반드시 알박기를 하려는 사람이 나올게 분명하니까.

그리고 그 선택은 옳았다.

포르미 대표가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말했다.

"투자자 전원에게 받은 동의서 입니다."

내 제안을 수락한 포르미 대표가 투자자들을 만나 받아온 지분 위탁 동의서들.

그런데 이 지분 위탁 동의서를 받아오는데 걸린 시간이 무려 3주다.

"고생하셨네요."

"···솔직히 힘들었습니다. 세론이 나섰다니 어떻게든 지분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말이죠."

"어떻게 설득하셨습니까?"

"지금 안 팔면 앞으로 다시는 이 가격에 팔 수 없을 거다. 거절하면 세론은 다른 회사를 알아볼거다. 이렇게 설득했죠. 그래도 설득이 안되면 동의한 투자자들이랑 같이 쳐들어가서 압박도 하면서 겨우겨우 받아온 겁니다."

그래.

그럴 줄 알고 내가 돈으로 지른 거지.

포르미 대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예전엔 포르미 지분 가져가고 투자금 달라며 설득했는데 이번엔 완전히 반대였으니까요."

투자금을 유치하기 위해 감언이설도 마다하지 않던 대표가 이제는 다시 지분을 토해내라며 설득한 상황.

확실히 재미있긴 하네.

"아무튼 지분 위탁 동의서 여기 있습니다."

대표가 위탁 동의서를 건네자 비서와 법무팀이 받아 들고 확인에 들어간다.

그 사이 대표가 나를 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포르미를 인수해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뭐긴요. 한국 최고의 인터넷 상거래 업체로 만들어야지."

"기존 업체들과 경쟁이 쉽지 않을 겁니다. 세론 못지 않은 대기업을 모기업으로 둔 회사들도 죽을 쑤는 판국이니까요."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다른 회사랑 세론은 다르죠. 저희는 스켈레톤이 있지 않습니까?"

"스켈레톤?"

내가 구상한 내용을 알려주자 포르미 대표가 입을 쩍 벌리며 말했다.

"그. 그런 것도 가능합니까?"

"가능합니다."

"그런 식이라면 배송 속도가 차원이 다르겠군요."

"그래서 가능성이 있다 판단해 포르미 인수를 추진한 겁니다."

포르미 대표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런 게 가능한 줄 알았다면 진작에 세론이랑 이야기 해봤을 텐데."

"아마 소용 없었을걸요? 세론은 중소 기업까지만 스켈레톤을 빌려주고 있으니까."

"그냥 아쉬워서 해본 소리였습니다. 아! 그럼 물류 센터도?"

"예. 물류 센터에도 스켈레톤 배치해야죠."

물류 센터 역시 인터넷 상거래 업체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기존의 인터넷 상거래 업체가 판매자와 고객을 연결해주는 플렛폼이었다면 이제는 치열한 경쟁 끝에 상거래 업체가 직접 판매자의 물건을 물류 창고에 쌓아둔 다음 주문이 들어오면 즉각 가져다 배송해주는 게 대세로 자리잡은 상황이었다.

덕분에 판매자에게서 물건을 가져오는 과정이 사라지며 배송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한 인터넷 상거래 업체들.

그 대신 수많은 판매자들의 물건을 물류 창고에 가득 쌓아 두고 보관해야 했기에 물류 창고의 효율적인 관리는 인터넷 상거래 업체의 능력을 가늠하는 핵심 중의 핵심이었다.

당연히 그렇게 중요한 곳인 만큼 스켈레톤을 투입해서 효율을 극한으로 끌어올려야지.

"···직원들 고용 유지는 되는 겁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세론이 설마 기존 직원을 내쫓을까요. 스켈레톤이 있어도 결국 사람 손은 필요합니다. 그리고 포르미의 물류 창고는 그 수가 너무 적고요."

업계 7위인 포르미 역시 물류창고에서 직배송하는 대세에 편승하여 각지에 물류 창고를 건설했지만 그 수는 간신히 서울과 부산 같은 몇몇 대도시만 간신히 커버하는 수준.

당연히 그걸론 내가 구상하는 구조를 만들 수 없으니 돈을 무지막지하게 투자해서 전국에 물류 창고를 무더기로 지을 예정이었다.

"물류 창고를 대규모로 확충하신다는 말씀이시군요."

"당연하죠. 한국 전체를 커버할 만큼 물류창고를 늘릴 겁니다. 당연히 그 물류창고에도 사람 인력은 필요하니까 기존 직원들을 분산 배치해야죠. 아마 지금 직원들로도 모자를 걸요?"

"그럼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물류센터 건설 비용이 상당한데 돈을 얼마나 투자하시려고···"

"무한정."

애매하게 할거면 시작도 안 했지.

화끈하게 조 단위로 질러서 전국에 동시 다발적으로 물류 센터와 스켈레톤을 배치할 중간 거점을 확충한다.

대표가 부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한테 그런 자금력이 있었다면 포르미를 더 높은 위치까지 올릴 수 있었을 텐데."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올리시면 되죠."

"예?"

"아무래도 처음 진출하는 분야라 이쪽에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말이죠. 인수 후에 대표님께서 사장 자리를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비록 시장에서 도태되어가기는 하지만 오랫동안 인터넷 상거래 업체를 운영해온 사람이니 내부 관리는 잘할 거 아닌가.

어차피 스켈레톤 배치하고 어쩌고 하는 건 전부 나와 연구 센터 몫이니 대표에게 사장자리를 주고 내부 관리를 도맡게 하는 거다.

"사. 사장이요?"

"예. 세론 그룹 계열사 사장. 나름 괜찮은 자리 아닙니까?"

내 말에 대표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그냥 뒷방으로 밀려나나 생각했는데···제가 만든 회사인 만큼 소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그런 마음가짐이면 됐습니다."

그때 서류를 확인하던 비서가 말했다.

"회장님. 확인 끝났습니다."

"100퍼센트 맞습니까?"

"예. 이대로 진행하면 저희가 포르미 지분 100퍼센트를 인수하게 됩니다."

오케이.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인수 절차 마무리 할까요?"

포르미 지분 100퍼센트를 인수한 다음 내가 만난 건 바로 포르미의 직원들.

물류 센터 직원들은 스켈레톤을 배치해도 물류 센터를 확충해 고용을 보장한다니 쉽게 넘어갔지만 문제는 배송 기사들이었다.

월급을 받는 물류 센터 직원들과 다르게 배송 기사들은 건당 배송료를 받는 식으로 회사와 계약된 일반 사업자들이었으니까.

일단 나는 배송 기사들을 초청해 스켈레톤을 이용한 새로운 배송 방식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트럭으로 지정된 위치에 도착하면 스켈레톤이 알아서 물건을 배송한 다음 돌아오는 방식입니다."

스켈레톤을 이용한 배송 방법을 직접 보여주자 배송 기사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면 우린 운전만 하면 되는 거잖아? 상하차도 스켈레톤이 하고."

"그러네?"

일단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배송 기사들.

그때 한 배송 기사가 말했다.

"그런데 배송량이 많지 않은 곳은 어떡합니까? 솔직히 포르미 주문량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지 않습니까."

정확한 지적이었다.

현재 포르미는 물류 창고가 위치한 대도시는 직접 계약한 배송 기사들을 통해 빠르게 배송해주고 있지만 그 외의 지역은 능력 밖이기에 기존 택배사들에 위탁하여 배송하는 상황.

그런데 업계 7위라는 애매한 위치 덕분에 대도시조차도 주문량이 그리 많지 않은 지역이 많았다.

특히 주택가의 경우 3~4군데 배송하고 나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야 할 정도로 말이다.

"간단합니다. 그때는 버스기사처럼 하면 되죠. 한 지역에 스켈레톤들을 내려준 다음 바로 다음 지역으로 이동해서 다음 스켈레톤을 내려주는 식으로. 그럼 스켈레톤은 배송을 완료한 다음 내렸던 그 장소에 다시 가있을 테니 다시 똑같은 코스로 스켈레톤을 수거해오면 끝입니다."

내 말에 배송 기사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오! 그거 괜찮네."

배송 기사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거운 물건 들고 계단 오르락 내리락 안 해도 되고 좋은데?"

"그러니까."

그때 한 배송 기사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확실히 배송 부담이 줄어들어 좋긴 한데···대신 배송비도 줄어드는 거 아니야?"

"아."

"게다가 한 명당 커버하는 범위가 늘어나니 배송 기사도 예전보다 덜 필요할거고."

그래.

이게 핵심이다.

지금 포르미는 한 건당 800원을 배송 기사들에게 지불하는 상황.

당연히 스켈레톤을 이용해 배송하는 시스템이 도입되면 저 가격이 변할 수밖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연히 업무 내용 자체가 변하는 만큼 건당 비용도 바뀔 겁니다. 10분의 1인 80원으로. 거기다 근무 시간도 8시간으로 줄이고요."

그러자 배송 기사들의 눈이 휘둥그레 해지며 말했다.

"아니. 10분의 1까지야 한번에 많이 배송하니 이해하는데 근무시간을 줄인다고요?"

"이건 좀 아닌 거 같은데."

근무 시간을 줄인다고 한 이유는 간단했다.

우선 10분의 1로 비용을 줄여도 아마 배송 기사들이 가져가는 돈은 오히려 늘어날 테니까.

이들은 대부분 1톤 탑차를 이용해서 배송을 하고 있는데 여기에 구겨 넣으면 스켈레톤 10개정도는 거뜬히 들어갈 수 있다.

거기에 더 큰 대형 트럭을 동원하면 더 많은 스켈레톤을 싣고 다닐 수 있게 될 거고.

물론 그만큼 짐을 많이 실을 수 없게 되지만 그거야 이번에 중간 거점을 대규모로 만들어 수시로 오고 가게 하면 오히려 배송량은 늘어날 터.

거기에 포르미가 점점 인지도를 쌓으면 주문량도 덩달아 늘어나 수익성은 점점 더 좋아지겠지.

그때쯤 되면 8시간만 일해도 그전에 12시간씩 일할 때보다 오히려 수입이 더 높아질걸?

아무튼 이렇게 시간당 버는 수입이 늘어나는데 굳이 과로를 방치할 이유가 없다.

괜히 더 벌고 싶다고 무리하게 일하는걸 내버려뒀다가 과로사라도 하면 세론 이미지에 타격이 올 거 아니야.

세론이 하면 다르다는 걸 보여줘야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저희 계산에 따르면 10분의 1로 줄이고 8시간만 일해도 그전보다 가져가는 수입은 더 늘어날 테니까요."

내 말에 대다수의 배송 기사들이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몇몇 배송 기사들은 여전히 반발했다.

"그게 아니라 일할 수 있는 권리를 세론에서 일방적으로 제한한다는 게 문젭니다."

"흠?"

"더 벌고 싶으면 더 일할 수 있게는 해줘야지요. 우리가 세론 정직원도 아닌데."

"지금 인력난으로 과로문제가 심각한 거 아니었습니까?"

"심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인 사업자인 우리의 근무시간을 세론이 제한할 권한은 없습니다!"

"버는 수익이 늘어날 거라니까요?"

"해보지도 않고 그걸 어떻게 확신합니까? 그리고 설사 그 말이 맞다 해도 12시간 일하면 그보다 훨씬 더 많이 벌 수 있는데 그 기회를 박탈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과로해서 힘들다 길래 배려해준 건데도 지랄이네.

"그럼 어떻게 해달라는 겁니까?"

"10분의 1까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근무 시간은 자유롭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다 사고 터지면?"

"그럴 일 없습니다."

말로는 뭔들 못해?

그래 놓고 사고 터지면 나한테 지랄할거잖아.

"안됩니다. 무조건 8시간."

"···지금 배송 기사 부족으로 회사들 모두 배송 기사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는데 너무 배짱 부리시는 거 아닙니까?"

"그럼 다른 회사 가시면 되겠네요. 대신 한번 가시면 세론과 재계약은 없습니다."

내 엄포에 움찔한 배송 기사.

"그. 그건···"

이 정도 배려해줬으면 나는 할거 다 했다고.

이렇게 했는데도 불만이면 본인이 떠나야지.

"아무튼 이 조건에서 한걸음도 물러설 생각 없으니 알아서들 판단하세요. 어차피 모두 개인 사업자들이시잖아요?"

나는 비서를 보며 말했다.

"나머지는 알아서 정리해주세요."

"예. 회장님."

그렇게 정리를 맡기고 김덕배와 함께 차로 이동한 나.

"부지 매입은 돈 아끼지 말고 하세요. 비싸도 최대한 교통 편하고 좋은 곳으로."

"알겠습니다."

"자. 이제 대충 마무리 되었겠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슬슬 대도시부터 스켈레톤 배송 시작해볼까요?"

가전 제품이 필요해 습관처럼 인터넷 쇼핑앱을 켠 남자.

"미사일 배송이 역시 최고지."

그가 애용하는 미사일 배송은 현재 업계 1위 기업이 내놓은 서비스로 월마다 몇 천원을 지불하면 주문한 바로 다음날 그것도 무료로 배송해주는 서비스였다.

덕분에 작은 물건도 부담 없이 지를 수 있어 미사일 배송만 사용하던 남자.

그런데 그때 티비에서 처음 보는 광고가 나왔다.

"어? 권주민?"

광고에 나온 사람은 바로 스켈레톤 리그 최강팀인 라이트닝의 리더 권주민.

권주민이 엄지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라이트닝보다 빠른 스켈레톤 배송!

그러자 권주민 뒤에 있던 스켈레톤들이 상자를 들고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때 권주민이 입고 있는 옷의 로고를 확인한 남자가 말했다.

"뭐야. 포르미?"

한때 애용했지만 미사일 배송에 맛들려 이제는 접속조차 하지 않는 포르미의 광고.

평소라면 그냥 광고 하나보다 하고 넘겼겠지만 유명 선수인 권주민과 스켈레톤이 등장하자 호기심이 생긴다.

"그러고 보니 세론에서 인터넷 상거래 업체 하나 인수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게 포르미였어?"

바로 그때 권주민이 말한다.

-우리는 반나절 만에 간다! 아침에 주문하면 저녁에 집 앞으로!

"반나절?"

-스켈레톤 배송으로 혁신을 경험하세요! 세론이 하면 다릅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포르미 로고가 떠오르며 마무리된 광고.

그 광고를 본 남자는 홀린 듯 그간 방치해두었던 포르미 앱에 들어갔다.

잠깐의 업데이트 이후 켜진 포르미 앱.

"스켈레톤 배송. 한 달에 2천원을 내면 스켈레톤 배송 지정 물품은 배송비가 공짜라고?"

여기까지는 미사일 배송과 크게 다르지 않은 서비스.

그런데 시간이 기가 막히다.

"스켈레톤이 반나절 만에 배송한다니···"

아침에 주문하면 저녁에 도착하고 저녁에 주문하면 새벽에 도착하는 반나절 배송.

"이거 미사일 배송이랑 한밤 배송 합친 거네? 심지어 그것도 더 빠르게."

그때 남자의 눈에 이벤트 내용이 보였다.

"첫 가입자에겐 3달 무료고 5만원 할인 쿠폰을 준다고? 와. 세론이 인수하더니 아주 돈을 뿌리는 구나?"

이런걸 그냥 두면 합리적인 소비자가 아닌 법.

이렇게 돈 뿌리는 이벤트가 있으면 나중에 갈아탈 땐 갈아타더라도 일단은 뽑아먹어야 할 거 아닌가.

"어? 거기에 추첨 이벤트? 1등 자동차. 2등···프로티지 제품? 그것도 50명이나 뽑아? 이건 무조건 해야지."

그렇게 스켈레톤 배송에 무료로 가입한 다음 상품을 쭉 훑어보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고른 남자.

"도착 시간도 뜨네. 19시니까 저녁 7시? 스켈레톤으로 어떻게 배송하는지 구경이나 해봐야겠다."

물건을 주문해두고 집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던 남자는 문득 슬슬 스켈레톤 배송이 약속한 도착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아파트 창가에서 주차장을 내려다본 남자.

"오! 포르미다!"

그때 마침 포르미의 배송 트럭이 아파트로 들어오는 거 아닌가.

"설마 저 트럭을 스켈레톤이 운전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데 트럭이 갑자기 아파트 앞이 아닌 단지 정중앙에 멈춰 선다.

그리곤 배송 기사가 내려서 트럭 문을 여는 순간.

"컥!"

트럭에서 상자를 가득 든 스켈레톤들이 줄줄이 튀어나온다.

그리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스켈레톤들.

"광고 내용이 저거였구나! 아! 이래서 반나절 배송이라 한 거야?"

스켈레톤을 이용해 한 단지를 동시 다발적으로 배송하는 방식.

이제야 반나절 배송의 원리를 이해한 남자가 말했다.

"···이거 진짜 편하겠는데?"

무려 기존 업체들이 내놓은 오만 잡가지 서비스를 모두 하나로 합친 스켈레톤 배송.

"당분간은 이것만 써야겠다."

그렇게 스켈레톤 배송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93화

포르미의 물류 창고가 있는 대도시부터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최단기간으로 배송하는 스켈레톤 배송을 도입한 결과는 훌륭했다.

적자를 감수하며 서비스를 마구 퍼 주자 어차피 공짜에다 쿠폰도 주니 한번 써 보자는 생각에 가입을 한 사람들이 그 속도에 만족하며 눌러앉기 시작한 거다.

"점유율이 오르고 있습니다."

"몇 퍼센트인가요?"

"현재 3.8퍼센트입니다."

기존 포르미의 점유율은 3.4퍼센트.

0.4퍼센트 오른 게 뭐 대단한 거냐 할 수도 있지만, 고객 수로만 따지면 수만 명에 달하는 인원이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몰리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심지어 스켈레톤 배송이 적용되는 몇 개의 대도시에서만 이 정도 인원을 끌어들인 거니, 물류 창고가 완성되고 본격적으로 전국 배송을 하면 그 점유율은 더욱 가파르게 오르겠지.

"직원들은 잘 적응하고 있습니까?"

"스켈레톤과 처음 일하는 거다 보니 시행착오가 많기는 했지만, 프로그래머들을 대거 투입한 덕에 이제는 다들 잘하고 있습니다."

"좋네요."

이제 고객을 끌어들일 기반은 잡았으니 고객들의 지갑을 열게 만들 상품도 잘 진열해야지.

"협력 업체들 상품 다 들어왔죠?"

그리고 그런 점에서 세론은 다른 인터넷 상거래업체와는 비교조차 안 되는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다.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가장 많이 구매하는 제품은 바로 소비재다.

이제는 신선 상품도 많이 거래되고 있다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마트에서 직접 사는 걸 선호하는 사람이 많은 반면, 전자 제품 같은 소비재는 유통기한도 없고 모든 상품이 균일하기에 인터넷에서 판매하기 최적화되어 있지.

그리고 세론에겐 전자 제품부터 다양한 소비재를 만드는 협력사가 천 개 넘게 있단 말씀.

"다 들어왔습니다."

"오케이."

처음엔 그저 돈만 보고 들어왔는데, 막상 해 보니 기존 사업들과의 시너지가 어마어마하다.

여지껏 제조업 중심으로 성장해 온 세론에게 있어서 포르미는 우리 제품과 협력사의 제품을 직접 진열할 수 있는 좋은 판로나 다름없었으니까.

"협력사들한테 수수료 깎아 줄 테니 그만큼 저렴하게 팔아 달라고 요청하세요."

제조사를 압박해 어떻게든 최저가로 만들어야 하는 다른 회사들과 다르게 우리는 모든 걸 직접 만드니 더욱 수월할 수밖에.

"알겠습니다."

"마음 같아선 다른 업체에 올라간 걸 전부 내리고 포르미에서만 독점 판매 하라 하고 싶지만··· 당장은 힘들겠죠."

점유율이 4퍼센트에 불과한 포르미에 모든 걸 올인하라는 건 나머지 96퍼센트의 시장을 포기하라는 이야기나 다름없으니까.

"다른 시장을 포기할 만큼 포르미가 성장한다면 몰라도 지금 당장은 안 될 겁니다."

"그냥 해 본 소립니다, 아쉬워서."

"게다가 공정위가 개입할 수도 있습니다."

"아. 공정거래위원회."

그렇네.

세론의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협력사들을 압박했다며 개입할 수도 있겠구나.

그건 안 되지.

공정위는 경제 경찰이라 불리는 정부 조직으로, 말이 좋아 경찰이지, 경제에만 한정하면 경찰과 검찰, 거기에 법원의 역할까지 모두 하는 막강한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결국 포르미를 키우는 게 핵심이네요."

하지만 그런 공정위도 결국 포르미가 시장 지배적 지위에 오른 다음 독점 납품 받는다면 개입할 근거가 사라진다.

누가 봐도 협력사들이 우리에게 독점 납품하는 쪽이 이득이라면 그건 공정한 거래의 일환이되니까.

하지만 지금 포르미에 독점 납품을 강요하는 건 확실한 불공정 거래.

"이거 딜레마네."

점유율을 성장시키려면 우리만의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무언가를 하려면 점유율이 높아야 하는 아이러니함.

"이러니까 그렇게 돈을 쏟아부은 거구나."

결국 뭐가 됐든 점유율이 알파이자 오메가인 인터넷 상거래 경쟁.

이제 대충 이 시장의 흐름이 보인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잘됐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일단 한번 올라가면 쉽게 안 내려온단 이야기니까."

좋아.

제대로 해 보자고.

"자금이 얼마가 들든 상관없으니 광고 무한정 집행하세요."

돈지랄이 뭔지 확실하게 보여 주지.

*

TV만 틀면 포르미의 광고가 나온다고 말할 만큼 적극적으로 홍보에 나선 포르미.

여기까지라면 사람들이 광고를 도배한다며 욕을 할지도 모르지만, 막상 진짜 써 보면 와! 소리가 나올 만큼 사람들이 스켈레톤 배송에 만족하자 입소문을 타며 점점 포르미의 점유율이 상승했다.

하지만 이런 포르미의 행보를 탐탁지 않아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한국 인터넷 상거래업체 1위를 달리고 있는 벅스의 대표 김원철이었다.

"후우. 세론이라니."

인터넷 상거래업체 간의 경쟁은 그야말로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했다.

오만 잡가지 상거래업체들이 난립하며 서로가 서로를 이기기 위해 미친 듯이 경쟁해 오던 나날들.

이 경쟁은 마라톤과 비슷했다.

그것도 모두가 쓰러질 때까지 달리고 또 달려야 하는 종점 없는 마라톤.

그런 미친 듯한 경쟁에서 벅스는 계속 달려왔다.

뒤처진 업체들이 쓰러질 때마다 더욱 힘을 내서 언젠가 혼자 남게 될 거란 기대감 하나로 여태까지 버텨 온 벅스.

중간에 대기업들까지 난입하며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지만 벅스는 오직 앞만 보고 달렸고, 덕분에 어느새 한국 인터넷 상거래업체 1위의 자리를 쟁탈할 수 있었다.

물론 2위, 3위 업체와 근소한 차이의 1등이기에 불안감은 여전했으나, 1위라는 타이틀은 이 경쟁에서 가장 우위에 있다는 증거이기에 더욱 힘을 내 온 벅스의 김원철 대표.

그런데 갑자기 이 경쟁에 어마무시한 상대가 등장했다.

그것은 바로 세론.

"스켈레톤으로 물류 창고를 돌리고 물품을 배송한다고? 그럼 야간 수당도 지불 안 할 테니 유통 비용이 확 줄어들 텐데. 젠장."

자금력은 말할 것도 없고, 스켈레톤 노동자란 치트키를 가지고 있는 기업 세론.

거기에 세론은 협력사로 수많은 제조 회사를 거느리고 있기에 오직 유통만 전문으로 하는 벅스 입장에서는 기존 대기업들의 진출보다 더욱 위협적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가장 좋은 방법은 아직 포르미의 점유율이 형편없는 지금 확실하게 말려 죽이는 거지만, 세론의 자금력과 직접 인수를 주도한 한지혁의 행보를 볼 때 쉽게 물러설 리가 없었다.

그 말은 마라톤 경쟁답게 장기전을 준비해야 한다는 말.

김원철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일단 물류비를 최대한 줄여야 돼."

장기전으로 가면 갈수록 스켈레톤을 사용하는 세론과 사람 직원을 사용하는 벅스와의 물류비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질 게 뻔하니까.

"로봇 물류 시스템."

그리고 그 유일한 대안은 바로 로봇을 이용한 물류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

이미 인건비가 비싼 여러 선진국에서 도입한 시스템으로, 유통 효율과 속도를 올려 주는 데다 유지비도 저렴하기에 각광받았지만, 그간 도입을 주저해 온 건 바로 초기 비용 때문이었다.

로봇 시스템을 도입하려면 물류 센터를 통째로 갈아엎어야 하는데, 벅스가 보유한 물류 센터는 크고 작은 걸 모두 합쳐 전국에 수천 개.

당연히 이렇게 많은 물류 센터를 전부 로봇 시스템으로 갈아엎으려면 어마어마한 돈이 소요될 게 분명했으니까.

그동안은 비용이 부담스럽고 이미 1등을 차지했기에 주저하고 있었는데, 세론이 달리기 시작한 이상 벅스도 이 카드를 꺼내 드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슬슬 수익이 나와 적자 좀 줄어든다 싶었는데······."

그간 규모의 경제를 활용하여 열심히 수익률을 개선한 덕에 적자 폭을 많이 줄일 수 있었는데, 로봇 시스템 도입에 막대한 비용이 투자되면 개선해 둔 적자 폭이 다시 큰 폭으로 늘어날 수밖에.

김원철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좋아. 하자. 어차피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었어. 그냥 예상보다 시기가 빨리 온 것뿐이야."

김원철이 비서실에 전화를 걸었다.

-예, 대표님.

"투자자들 미팅 잡아 주세요. 자금을 확보해야겠습니다."

*

포르미의 등장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어버버 하던 다른 인터넷 상거래업체들과 다르게 1위인 벅스는 확실히 민첩했다.

"로봇 물류 시스템 도입?"

스켈레톤으로 치고 나가니 로봇으로 응수하는 벅스.

나는 벅스의 투자 발표를 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앞으로 5년간 로봇 시스템 구축에 10조 원 넘게 투자한다는데, 벅스에 이 정도 자금이 있습니까?"

그동안 수없이 출혈경쟁을 해 오며 만성 적자에 시달린 벅스가 갑자기 대뜸 10조 원이나 투자한다는데, 이게 가능한가?

"상장을 통해 확보해 둔 자금이 있고 추가 투자를 유치하기로 했답니다."

"투자를 해 준대요?"

김덕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이미 벅스에 수많은 돈을 쏟아부은 투자자들 아닙니까. 당연히 벅스가 타격 받는 걸 원치 않겠죠."

이미 투자한 돈 때문이라도 다시 재투자를 감행하는 투자자들.

나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튼 재미있네요. 어쩌다 보니 로봇과 스켈레톤 대결이 됐어."

벅스의 최첨단 로봇 물류 시스템과 세론의 스켈레톤 물류 시스템의 대결.

물론 로봇 시스템을 도입해도 배송만큼은 여전히 사람이 해야하기에 여전히 스켈레톤 배송이 우위를 차지하겠지만 그래도 물류비가 획기적으로 감소하면 세론과 한번 해볼 만하기는 할 거다.

하지만 스켈레톤은 로봇과 확실하게 다른 또 하나의 강점이 있지.

그것은 바로 도입 속도.

"모든 물류 창고에 로봇 시스템을 도입하는 데 5년 잡았다는 거죠?"

"맞습니다. 하지만 전문가 말에 따르면 5년도 상당히 타이트하게 잡은 거랍니다."

"이거 시간 싸움이네."

만약 세론이 전국 유통망을 구축하기 전에 벅스가 로봇 시스템을 도입하면 경쟁은 더욱 어려워질 거다.

반대로 벅스가 로봇 시스템을 완성하기 전에 세론이 스켈레톤을 도입한 전국 유통망 구축을 완료하면 벅스는 로봇 시스템 구축에 들어가는 비용과 경쟁으로 인한 점유율 하락이란 이중고를 동시에 겪어야 하고.

"물류 센터 더 빨리 만드세요. 투자 계획도 발표하고."

"얼마로 발표할까요."

"우리도 똑같이 10조. 대신 기간은 1년만 잡으세요."

"알겠습니다."

나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나저나 로봇 시스템이 도입되면 포르미만의 경쟁력을 더 높일 필요가 있는데."

스켈레톤의 대항마가 나타났으니 다른 부분에서 우리만의 세일즈 포인트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협력사 독점이 너무 아쉽단 말이지."

역시 가장 좋은 건 오직 포르미에서만 살 수 있는 독점적인 물품의 확보.

나는 잠시 고민하다 눈을 빛내며 말했다.

"잠깐. 꼭 기존 상품 라인업을 가져다 팔 필요는 없잖아?"

어차피 유통시장은 베끼고 베끼는 것의 연속이다.

당장 벅스만 해도 미국 유통 기업을 벤치마킹해서 고스란히 한국으로 들여와 적용한 것 아닌가.

많은 혜택을 주는 멤버십 가입을 통해 고객을 묶어 두고 그걸 기반으로 점유율을 올리는 방법.

그럼 포르미 역시 기존 유통 회사들이 그간 해 온 검증된 마케팅을 똑같이 따라 하면 그만.

"PB 상품. 그래, 이거다."

제조사와 협력하여 자체 브랜드 상품을 만들어 유통하는 대형 마트들.

이 PB 상품은 저렴한 가격으로 고객을 유인하는 일종의 미끼 상품이었다.

"PB 상품 만들어 포르미에서만 팔면 공정위도 뭐라 하지 못하겠죠?"

"기존 라인업이 아니라면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좋았어. 그럼 협력사들에게 PB 상품 개발 요청하세요, 적당한 성능을 가진 걸로."

보통 대형 마트들은 제조사와 협력하여 매출을 보장해 주는 대신 물건의 가격을 대폭 낮추는 방법을 통해 PB 상품을 만든다.

하지만 세론은 여기서 한발 더 나갈 수 있지.

"스켈레톤 비용 빼 줄 테니 최대한 싸게 만들어 달라고 하세요."

협력사들은 스켈레톤을 이용해 물건을 만드는 대신 세론에 스켈레톤 대여 비용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여기서 그 대여 비용을 아예 빼 주면 다른 회사는 상상조차 못 할 수준의 가격으로 물건을 만들 수 있지.

"알겠습니다."

나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러다 가성비 입소문이 나서 품절 대란이라도 나면? 크. 홍보 효과로 이만한 게 없지."

광고 백날 때리는 것보다 이런 품절 대란 홍보 효과가 훨씬 자연스럽고 확실하니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가성비 입소문이 나려면 진짜 미친 듯이 저렴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상품 몇 개 골라서 진짜 마진 한 푼도 안 남기고 원가로 팔면 가성비 입소문 날 확률이 올라가지 않을까요?"

원래 가성비 입소문은 자연스럽게 퍼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원래부터도 가성비 상품을 만드는 세론에서 작정하고 몇 개 품목을 지정해 미친 듯이 싸게 내놓으면 인위적으로 가성비 입소문을 유도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김덕배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 거라면 협력사가 아니라 세론 자사 상품을 위주로 하면 될 것 같군요."

"그렇죠! 우리가 직접 만든 걸 싸게 판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어."

이 경쟁은 상대가 먼저 지쳐 떨어져 나가면 이기는 싸움이다.

그렇기에 모두들 적자를 감수해 가며 덩치를 키우고 있는 거고.

그럼 우리도 발맞춰서 움직여 줘야지.

김덕배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일단 세론 신발에 옷이랑 양말 등 PB 상품을 준비하도록 하고 SR 전자에도 PB 상품 개발 지시 내리겠습니다."

"좋아요. 대신 너무 많이 만들면 기존 제품 판매에 영향이 있을 수 있으니 적당히 조절해 주시고요. 그 정도는 알아서 해 주실 수 있죠?"

"물론입니다."

"좋습니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물가 시대, 당신의 지갑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크! 좋아! 가성비의 끝판왕을 보여 주는 겁니다! 무조건 최저가!"

94화

공짜 할인 쿠폰을 마구 뿌리기에 사용해 보았다가 스켈레톤의 빠른 배송에 매료되어 포르미를 즐겨 사용하기 시작한 남자.

그렇게 오늘도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 포르미 앱에 접속한 남자는 새로 생긴 카테고리를 보며 말했다.

"포르미 존?"

뭔가 싶은 마음에 손가락으로 포르미 존을 눌러 본 남자.

"PB 상품이네?"

유통사에서 제조사와 협업하여 내놓는 자체 상품.

당연히 이런 PB 상품은 적당한 품질의 싼 가격이 매력 포인트이기에 아무 생각 없이 가격을 확인한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마시고 있던 커피를 뿜었다.

"풉!"

쌀 거라 예상은 했지만 가격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던 거다.

"포르미 티셔츠 한 장에 천 원?!"

물론 잘만 찾아보면 이보다 저렴한 몇백 원짜리 티셔츠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거야 완전 듣보잡 회사가 만들었다 악성 재고로 쌓인 싼티 나는 제품들이나 해당하는 말이고, 이건 무려 포르미가 자기들 이름을 걸고 내놓은 제품 아닌가.

그렇다면 최소한 평타는 할 수준의 품질이라는 말.

"제조사가··· 세론 신발?!"

제조사명을 보니 더욱더 확신이 선다.

"세론 완전히 작정했구나?"

그 후로 남자는 계속해서 다른 포르미 상품도 확인해 보았다.

"포르미 신발 4,900원. 탁상용 선풍기 6,900원. 와, 미쳤네."

그야말로 미친 가성비의 포르미 제품들.

그런데 더 대단한 건 이제 막 시작한 PB 상품 라인업 수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이었다.

"천 개는 훨씬 넘는 것 같은데?"

남자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세론이구나."

어마어마한 수의 제조사를 협력사로 거느린 세론만이 할 수 있는 물량 공세.

"여기 있는 것들만 써도 사는 데 아무 지장 없겠는데?"

그때 마침 포르미 존에 붙어 있는 로고가 눈에 띈다.

"고물가 시대, 당신의 지갑을 지키세요. 암, 지켜야지. 이렇게 싸게 주는데 어떻게 거절해."

그렇게 필요했던 물건들을 마구잡이로 장바구니에 담은 남자가 말했다.

"햐. 포르미 최고다. 충성 고객 될 테니까 앞으로도 이렇게만 해 줘라, 진짜."

*

"이런 미친."

벅스의 대표 김원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천 개?"

어느날 갑자기 오픈한 포르미의 PB 상품들.

그런데 그 수가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임원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예. 그것도 실시간으로 늘어나고 있다 합니다."

물론 벅스도 PB 상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수는 고작 20여 개.

그도 그럴 게, 벅스는 어떻게든 가격을 저렴하게 납품 받아야 하기에 제조사를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했으니까.

그 과정에서 너무 무리한 요구로 인해 협업이 뒤집어지는 경우도 다반사인 만큼 PB 상품은 늘리고 싶다 하여 마구잡이로 늘릴 수 있는 상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PB 상품을 무려 천 종이나 동시에 출시하고 심지어 실시간으로 품목이 늘어 가고 있다니.

"···다 협업사 물건입니까?"

"예."

생필품 같은 소비재는 한국의 인건비 상승으로 인해 대부분 중국이나 동남아로 대세가 넘어갔었다.

그러다 세론이 나타나며 다시 한국으로 끌어들인 협력사의 수가 무려 천 개 이상.

그 회사들은 모두 자잘한 전자 제품이나 생필품을 만드는 회사들로, 그 회사들이 전부 나서 PB 상품을 양산하니 이런 결과가 나온 거다.

한국 최대이자 사실상 유일한 소비재 생산업체인 세론만이 가능한 방법.

김원철이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래서 내가 그렇게 경계했던 건데······. 하아. 미치겠군."

잠시 침묵하던 김원철이 말했다.

"혹시 세론이 협력사를 압박해서 PB 상품을 만들어 낸 건 아닙니까? 그런 거라면 공정위에 신고해서 훼방을 놓을 수 있을 텐데."

사실상 세론이 없으면 사업 자체를 할 수 없는 협력사들.

당연히 을인 그들의 입장에서 세론이 강짜를 부리면 울며 겨자 먹기로 제품을 납품할 수밖에 없게 된다.

벅스가 우월한 점유율을 무기로 업체들을 압박해 어떻게든 싸게 물건을 팔게 만드는 것처럼 세론 역시 우월한 지위를 이용한 건 아닌가 의심한 김원철.

그러자 임원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아니랍니다."

"아니라고요?"

"PB 상품 개발을 제안했지만 거절해도 아무런 제지가 없었다 합니다. 기존 상품도 똑같이 팔 수 있게 해 줬고요. 그 예로 PB 상품을 제외한 나머지 제품들은 저희 사이트에도 전부 똑같은 가격으로 올라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참여율이 그렇게 높다고?"

"저희에게 납품해 주던 세론 협력사 직원에게 물어봤는데, PB 제품은 특성상 품목당 오직 한 제품만 내놓지 않습니까. 헤어 드라이기면 딱 한 종류의 헤어 드라이기만 이렇게. 거기에 마침 포르미 점유율 상승도 심상치 않고, 무엇보다 한지혁 회장이 직접 나섰으니 무조건 성공할 거라 생각해 미리 선점하자는 생각으로 참여한 거라 합니다."

"역시 강적이구나."

그간 여러 대기업들이 참전해 와도 꿋꿋이 맞서 싸워 온 벅스.

그중엔 세론 그룹보다도 더 큰 기업도 있었지만 김원철은 자신 있었다.

인터넷 상거래 시장은 기존 시장과 완전히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었기에 자금은 많지만 굼뜬 대기업 정도는 충분히 해볼 수 있다 생각했으니까.

실제로 그런 대기업들을 누르고 벅스가 1위를 달리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

그런데 세론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아예 상품 자체를 자기들이 직접 만드는 회사다 보니 대처할 방법이 없는 수준.

"우리도 이 가격에 내놓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임원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불가능합니다. 물론 하자면 못 할 건 없지만, 적자가······."

"큭!"

잠시 고민하던 김원철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말했다.

"우리도 최저가로 갑니다."

"예?"

"언제는 적자 아니었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이걸로 포르미를 밀어내기 쉽지 않을 거, 잘 압니다. 애초에 물건을 직접 만드는 세론을 어떻게 가격으로 이기겠습니까. 하지만 2위와 3위는 아니죠."

치열한 경쟁 끝에 인터넷 상거래 시장은 1위부터 3위까지의 3강 구도로 굳은 상황.

그렇게 되자 다들 눈치를 보며 서서히 가격을 올리는 등 수익성을 개선하며 속도를 조절하고 있었는데, 세론이 포르미를 인수하며 미친 레이스가 다시 시작되었다.

당연히 그에 발맞춰 같이 뛰어야 하니, 어차피 이렇게 된 거 2위와 3위를 밀어내기 위해서라도 적자를 감수하며 움직인다는 게 김원철의 판단이었다.

"로봇 시스템으로 물류비를 절감해도 배송은 스켈레톤을 이길 방법이 없어요. 포르미 물류 센터가 만들어지고 전국적으로 배송을 하게 되면 점유율 하락은 불 보듯 뻔합니다. 그럼 2위, 3위에게서 점유율을 빼앗아 와 벌충해야죠."

현실적인 김원철의 대응책에 임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해했습니다.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렇게 임원이 나가자 김원철이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어떻게든 살아남는다, 어떻게든. 벅스는 절대 쉽게 무너지지 않아."

*

초저가의 PB 제품 공세와 더불어 물류 창고 확충에 따른 서비스 지역 확대.

이 두 가지가 더해지자 포르미의 점유율은 가파르게 오르기 시작했다.

거기에 내가 일부러 원가 수준으로 팔아 치우는 몇몇 PB 상품은 정말로 입소문을 타며 포르미 PB 상품 전체의 가성비 이미지가 더욱 확고해진다.

덕분에 포르미 PB 상품 하면 최저가에 적당한 품질을 떠올리게 된 사람들.

그렇게 자금력과 세론 그룹과의 시너지 덕분에 미친 듯이 성장해 나가는 포르미였지만, 한 가지 난관에 봉착했다.

"점유율 상승 폭이 줄어들었네요."

분명 오르고는 있다.

서비스 지역이 계속해서 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상승 폭이 그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상황.

"왜 이러는 겁니까? 가격도 싸고 배송도 빠른데."

그러자 포르미의 사장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중도층 흡수가 거의 끝난 것 같군요."

"중도층?"

"혜택만 좋다면 언제든 주거래 사이트를 갈아타는 고객을 중도층이라 부릅니다. 여기까진 돈으로 커버할 수 있지만, 이제 문제는 충성 고객입니다. 정확히 말해서 콘크리트층이라 부르는 편이 맞겠군요."

콘크리트층이라.

쉽게 안 옮긴다는 거지?

"왜 안 옮기는 겁니까?"

"···귀찮은 겁니다."

"엥?"

"돈 몇 푼 때문에 익숙한 주거래 사이트를 바꾸기 귀찮아하는 사람들이 바로 콘크리트층입니다. 이 사람들은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광고를 하든 이벤트를 뿌리든 신경 안 쓰고 쓰던 사이트만 계속 쓰는 사람들이죠. 아마 저희 포르미 앱에는 접속조차 해 본 적 없을 겁니다."

와.

그 정도야?

"···솔직히 저희 포르미도 그런 콘크리트층 덕분에 지금까지 버텨 온 거고요."

"아."

완전히 이해했다.

누가 봐도 3강 업체에 비해 서비스 품질이 떨어지는 포르미.

그런데도 3퍼센트대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어 신기했는데, 저 콘크리트층 덕분이었구나.

포르미에 유입되어 정착한 다음 바꾸기 귀찮아 그냥 쓰던 포르미만 계속 쓰는 사람들.

"이래서 한번 눌러앉으면 그걸로 끝이라는 거구나."

"맞습니다."

일단 정착해서 익숙해지면 오직 그 사이트만 쓰는 사람들.

이런 콘크리트층의 존재가 바로 인터넷 상거래업체의 근간이었다.

"콘크리트 깨부술 방법 없습니까?"

그러자 대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단기간에 깨부수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콘크리트층에서도 이탈자가 나오기는 하지만, 그 속도는 회장님 기대 이하일 겁니다. 그래서 이 경쟁을 마라톤이라 부르는 거고요."

언제든 휙휙 이동하는 중도층과 다르게 진득이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모셔 올 수 있는 콘크리트층.

"그래서 다른 상거래업체들이 멤버십에 각종 혜택을 추가해 주는 겁니다. 멤버십에 가입하면 OTT를 무료로 보게 해 주는 등의 부가 서비스를 제공하여 그 혜택에 완전히 적응시켜 이탈을 더욱 힘들게 만드는 거죠."

부가 서비스를 이용해 콘크리트층을 더욱 단단히 붙들어 놓는 방법.

"우리도 OTT 서비스 해야 되나? 그런데 그런다고 콘크리트들이 금방 이쪽으로 넘어오지는 않겠죠?"

"물론입니다."

콘크리트층은 단단하다.

그래서 일단 한번 끌어들이면 든든한 밑바탕이 되어 주지.

하지만 포르미를 인수하여 이제 막 달리기 시작한 세론에게는 이 든든함이 걸림돌로 다가온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콘크리트를 깨부수려면 기존 방법으로는 안 된단 소리네."

지금까지 포르미는 다른 업체들의 마케팅 방법을 따라하되 더욱 개선하는 식으로 차별화를 해 왔다.

다행히 이 작전이 중도층에게 먹혀서 점유율을 끌어올리고는 있지만, 콘크리트층을 박살 내기엔 매우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다.

고작 조금 더 개선되거나 저렴한 것 정도론 귀찮아하는 콘크리트층 사람들의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이게 할 수 없으니까.

즉, 콘크리트를 박살 낼 확실한 한 방이 필요하다는 뜻.

나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뭐가 있을까, 우리만이 해 줄 수 있는 특별한 서비스."

역시 그 기반은 스켈레톤이지.

하지만 스켈레톤으로 배송하고 물류 정리 하는 것 말고 해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나는 잠시 고민하다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잠깐. 지금 핵심은 귀찮은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사이트를 옮기는 것보다 더 귀찮은 걸 해결해 준다면 엉덩이를 들썩일 것 아닙니까."

"어··· 그게 그렇게 이어지나요?"

마침 귀찮음에 한해선 나 역시 만만치 않은 사람이란 말이지.

요즘 들어 거의 일 중독자처럼 지내고는 있지만, 아무튼.

나는 눈을 감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집에 있을 때 뭐가 제일 귀찮았지?"

설거지?

청소?

물론 이것들도 귀찮기는 하지만 이런 영역의 일은 아예 집안일의 영역이라 건드리기 애매하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주문을 하면 스켈레톤이 집앞을 방문한다. 그때 스켈레톤이 뭘 해 줄 수 있지?"

잠시 고민하던 나는 아차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쓰레기! 쓰레기가 있었어!"

"예? 쓰레기요?"

"물건 배송이 끝나면 스켈레톤은 빈손 아닙니까! 그때 고객이 쓰레기를 현관 앞에 놔두면 스켈레톤이 수거해 가는 거예요!"

"어······?"

쓰레기 분리수거는 모든 집의 숙원이나 다름없다.

당장 나만 해도 세론에 가기 전 원룸에서 혼자 살 때, 상자에 쓰레기를 모아 두었다가 양이 너무 많거나 날파리가 꼬일 것 같으면 그때 한 번에 몰아서 쓰레기를 버리지 않았나.

당연하게도 한 번에 몰아서 버리는 만큼 양이 많아서 더욱 버리는 걸 기피하고, 버리는 걸 기피할수록 쓰레기가 쌓여 가는 악순환의 연속.

그때 늘 생각했다.

누가 나 대신 쓰레기 좀 버려 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런데 이걸 스켈레톤이 대신해 주는 거다.

그야말로 사람 실생활에서 가장 귀찮은 부분을 해결해 주는 셈.

나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멤버십에 가입한 사람들 현관 앞에 테이프를 붙여 일정한 공간을 만듭니다. 그다음 고객이 물건을 주문하고 그 공간에 쓰레기를 놔두면 스켈레톤이 와서 그 옆에 물건을 놔두고 쓰레기는 가져가는 거죠."

내 말에 사장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쓰레기 수거··· 배송 스켈레톤에게 딱 맞는 일이군요."

"어떻습니까, 이런 서비스. 이 정도면 귀찮아하는 콘크리트층 움직이기엔 충분하지 않을까요?"

"···솔직히 이 정도까지 해 주면 저 같아도 바꿀 것 같긴 합니다."

"그렇죠?"

"그럼 수거한 쓰레기는 어떻게 할까요."

"그거야 분리수거 하는 곳에 가져다 버리면 되죠."

수거하는 게 문제지 그다음은 솔직히 일도 아니니까.

"아니면 거점으로 실어 와 버려도 되고. 물론 트럭에 냄새 배면 곤란하니 공간 따로 만들어서 거기에 싣고 오는 식으로. 어? 그럼 아예 분리수거도 스켈레톤이 할 테니 한군데 몰아서 버리라 할까?"

이거야말로 귀찮아하는 콘크리트층을 빨아들이기엔 최고의 방법.

나는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오케이. 쓰레기 분리수거 서비스, 이거 도입합시다."

9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