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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이 세계는 인터넷도 통신망도 없는 세상이었으나, 과학 대신 이능이 발달한 만큼 어떤 소식이 각 지방에 전파되는 속도 자체는 느린 편이 아니었다.

물론 보통이라면 정보에 예민한 상인 길드나 지역 유지 등의 상류층이 자기 이익을 위해 적당히 제어함으로써, 대중에게까지 소문이 퍼지는 시간을 조절하는 편이었지만···.

이번에 알려진 불사왕의 부활에 대한 소식은 그 성격이 달랐다.

처음엔 사회의 안정을 위해 통제했던 그 정보는 어느 순간 더는 감출 수 없을 지경이 되었고, 결국 언데드의 준동과 몬스터 광기 폭주 사태를 기점으로 대대적으로 공표되기에 이르렀다.

기득권들도 현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선 사회에 공포가 만연하는 걸 감수하고, 확고부동한 '적'에게 주민들의 불만을 집중시키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로 인해 이 세상 모든 악의 근원, 불사왕에 대한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급속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자네, 그 소식 들었나? 제국 북쪽에 있는 로한 공국이 결국 멸망했다는군."

"허어— 나라가 멸망해? 설마 그거···."

"물론 그 '불사왕 한스'가 벌인 짓이지. 그가 직접 몬스터들을 이끌고 쳐들어가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는데, 죽은 사람만 수십만이라 하네!"

"···허 참, 세상 불안해서 살 수가 있나. 제발 이곳은 안전해야 할 텐데."

그 소식은 이번 로한 공국 몰락을 계기로 과장을 담아 더 빨리 확산되었고—.

"제시 엄마, 그 얘기 들었수? 글쎄 저번에 마을 댐이 무너진 게, 부실 공사가 아니라 그 한스의 추종자들이 몰래 벌인 일이라 하오!"

"아이고, 그런 쳐 죽일 놈들이 있나. 그것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가만? 듣고 보니 작년 농사를 망친 것도 좀 수상한데, 그것도 놈들이 밭에 독이라도 뿌린 거 아녀?!"

"어머, 어머! 세상에! 정말 그런가?"

아예 모든 불행한 일을 그에게 전가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으어엉~ 나 이름 바꾸면 안 돼? 애들이 한스라고 막 뭐라고 그래···."

"크흠, 아무리 그래도 이름을 바꾸는 건···."

"그래! 그러는 게 좋겠다. 당신도 고집 좀 그만 부리시오! 그깟 흔해빠진 이름이 뭐라고. 이러다 애 잡겠소!"

"···어쩔 수 없지. 음, 그럼 바꿀 이름으로 하인즈는 어떠냐?"

그것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으며, 보수적인 성향의 부모들조차 서둘러 자식을 개명시키기에 이를 정도였으니.

그의 악명은 상상 이상으로 부풀려져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고 있었다.

대도시를 넘어 중소 도시와 작은 마을은 물론 산골의 화전민촌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그 이름이 퍼지기 시작한 건 에나멜 대륙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결국.

"업적 달성! 모두의 원망과 증오를 한 몸에 받는 '세계의 적'이 되었습니다."

"아우테리카 차원의 살아 있는 지성체 절반 이상이 당신을 적이라 판단했습니다. 보상으로 특전 「여분의 목숨」을 부여합니다."

"업적을 달성해 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카르마가 추가로 상승합니다."

정식 공표 이후, 서서히 대륙을 뒤덮어 가던 한스의 영향력이 마침내 어떤 임계점을 넘어섰다.

#148

용사 파티 (2)

"하아—."

면담이 끝나고 자신이 머물던 방으로 돌아온 이세아가 침대에 몸을 던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진솔하게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자, 성자는 포용력 넘치는 미소와 함께 그녀를 이해해주었다.

오히려 이쪽이 죄책감이 느껴질 정도로 흔쾌히.

'그리고 그 사내도··· 하긴, 내가 알아챈 걸 성자가 몰라봤을 리 없겠지.'

은근히 신경 쓰이던 야만인 사내 '할리'에 대해서도 걱정할 필요 없다는 확답을 받았으니, 이제 가벼운 마음으로 황궁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될 터였으나···.

그녀의 머릿속은 대신전에 오기 전보다 더 혼란스러워진 상태였다.

"그거, 역시 하회탈인가?"

대화가 끝나기 직전 성자가 그려서 보여준 가면의 도안 때문에.

'아니면 그림으로 봐서 비슷하다고 느낀 것뿐? 단순한 우연인가? 진짜 하회탈이라면, 왜 그게 이 세계에 있는 거지?'

아니, 사실 따지고 보면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이상할 게 없다.

이 세계— 아우테리카에는 자신만 온 게 아닐 테니까.

그녀는 지난 8년간 황녀의 비호 아래 안전하게 성장했다지만, 원래 이계에서의 생존률은 고작 20퍼센트 정도에 불과했다.

거기다 자신은 이미 돌아갈 조건을 만족한 입장이었으니, 아주 단순히 계산해도 지금쯤 4명은 이곳에서 죽었을 거라는 뜻이었다.

'물론 확률은 독립시행이니 반드시 그러리란 법은 없지만, 그래도 기댓값이란 게 있으니.'

그리고 살았든 죽었든, 그중 한국인이 있었다면 이곳에 하회탈의 디자인이 전파된 건 그리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고향을 잊지 않고자 가지고 왔다가 분실했을 수도 있고, 향수에 젖어 직접 조각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렇게 만든 가면을 누군가에게 선물하거나 판매했을지도.

'···그 사람이 불사왕과 관련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 그만한 존재가 단순히 아무 가면이나 쓰고 다니진 않았을 테니.'

분명 무언가 의미가 있으니 그 가면을 고른 것일 터였다.

어쩌면 자기에게 대적하던 이를 죽이고 빼앗은 것일지도 모르고, 부활을 도왔던 이가 권한 걸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어쩌면 불사왕의 정체가 바로···.

"후우—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 그리고 맞든 아니든 이제 와선 나랑 상관없는 일."

처음으로 접한 동향 사람의 흔적이라 동요해버렸지만, 사실 그녀가 지금 이렇게 고민해봤자 하등 쓸모없는 문제였다.

계속 매달려있기엔 별로 유쾌하지 않은 사실이기도 했고.

'그러고 보니, 이 세계에 있을 다른 지구인들은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자신은 여러 곳을 돌아다니지 않아 그간 조우할 기회가 없었지만, 어쩌면 마주치고도 서로 눈치채지 못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누군가가 먼저 티 내지 않으면 딱히 알아볼 방법이 없는데, 그녀도 그걸 내색하고 다니는 편이 아니었으니.

'돌아가기 전에 한 번 대화 정도는 나눠보고 싶네. 이왕이면 같은 나라 사람이면 더 좋고.'

그 짧은 생각을 끝으로 복잡한 상념을 잠시 덮어둔 그녀는 가만히 눈을 감고 명상에 빠져들었다.

뜻밖의 일로 어지럽혀진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

이세아가 한창 혼자만의 고뇌를 이어가던 시각.

아우테리카에 전송된 또 다른 한국인···의 일부인 할리는, 진지한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상념에 잠겨 있었다.

'세계의 적이라···. 이런 업적도 있었나.'

이번에 한스가 달성한 그 업적은 그냥 문구부터가 비범하기 그지없었다.

하긴, 한 차원에 살아 있는 지성체 절반 이상의 적의를 사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이 정도면 충분히 업적이라고 할 만했다.

더불어 특전인 「여분의 목숨」 또한 그 점을 감안해서 부여된 것일 테고.

'애초에 이런 조건을 달성한 자는 그만큼 쉽게 죽지 않을 능력을 갖춘 데다, 카르마도 귀환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수급했을 테니 무슨 의미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러나 지금껏 주어진 특전은 원래 전부 그런 식이었다.

자력으로 차원을 넘어 귀환하면 「이계전송진 소환」을.

언데드의 정점인 불사왕이 됨으로써 「즉사 면역」을.

틀림없이 좋은 건 사실이지만, 자신처럼 특별한 경우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적용하기도 애매했으리라.

'나한테야 어느 쪽이든 도움이 되니 상관없겠지.'

이번 특전인 「여분의 목숨」은 말 그대로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스킬이었다.

「즉사 면역」처럼 특정 조건에 한정해서 목숨 줄을 붙들어주는 게 아니라, 그냥 죽으면 최상의 상태로 부활할 수 있게 되는 엄청난 이적.

당연히 그런 능력을 무한정 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쿨타임이 굉장히 기네. 일 년에 한 번이라니. 그래도 효과를 생각하면 오히려 양호하다고 봐야 하나?'

본체가 지구에 있으니 이세계의 시간으로 치면 10년에 한 번이지만, 아바타들은 어지간해선 죽을 일이 없으니 만약을 대비한 보험으로 유용할 터였다.

'좋아, 이건 됐고. 그럼 다음은···.'

문득 상념에서 빠져나온 할리가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보았고.

그와 동시에 하인리히도 시선을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그렇게 한 자리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혀들었다.

"······."

"······."

응접실 내부를 맴도는 기묘한 침묵.

두 아바타는 한마디의 말도 없이 그저 입가에 미소만 머금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인리히는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포근해지는 자애로운 미소를, 할리는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흉악한 미소를 지은 채로.

다른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따로 면담 시간을 잡기는 했으나, 주변에 보는 이도 없는데 귀찮게 혼잣말할 필요도 없으니 그저 이렇게 멍하니 시간을 때우는 중이었다.

'음?'

그러다 문득, 하인리히의 시선에 화려한 문신이 가득 새겨진 할리의 벌거벗은 상체가 들어왔다.

저 우락부락한 근육을 비롯한 압도적인 육체는 보이는 것 이상의 밀도를 지니고 있었고, 생체력을 다루는 할리에게 그건 곧 전투력과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보니 아바타끼리의 싸움은 하인리히와 한스 말고는 없었지? 이 둘은 양쪽 다 무투파인데, 직접 부딪치면 어떻게 될까?'

갑작스레 떠오른 호기심이었지만 때마침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이대로 멍하니 있기엔 시간이 아깝기도 했고, 서로의 능력을 보는 것 또한 면접의 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벌떡!

그렇게 마음먹는 즉시, 두 사람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대신전을 가로질러 그들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훈련장 한쪽에 구비된 한 대련 시설이었다.

"엇! 안녕하십니까, 성자님. 그런데 이쪽엔 무슨 일로···."

갑자기 하인리히가 나타나자 훈련장의 담당 성기사가 놀라서 인사했다.

최고 수준의 수호 결계가 둘러진 이 대련장은 내부의 충격파가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게 설계되어 있어, 팔라딘 수준의 상대도 전력을 다한 실전적인 훈련을 가질 수 있는 유용한 장소였다.

당연히 하인리히와 할리의 싸움에는 이곳만 한 곳도 없었다.

"아— 수고하십니다. 잠시 훈련 시설을 이용하고 싶어서 말이지요. 이쪽분과 잠시 대련 시간을 가질까 합니다."

"크하하핫! 힘과 혼을 총동원한 맞부딪침이야말로 진정한 사나이의 교류지! 이건 당연한 절차다! 하하핫!"

주변의 이목이 집중된 만큼 곧바로 캐릭터에 몰입한 대사가 튀어나왔다.

성자가 함께한 자리에서 행해진 무례한 언행에 성기사의 미간이 꿈틀거렸지만, 바로 옆에 있는 하인리히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도 별다른 내색 없이 뒤로 물러섰다.

슬쩍 시선을 내려 할리의 근육을 눈으로 훑으며.

그리고—.

"오! 성자님께서 대련이라니!"

"상대는 누구죠? 칼코스의 전사인가요? 훌륭한 육체로군요."

"음··· 결사대의 일원으로 추천받은 자로군. 그럼 이건 성자님의 시험인가? 과연 저자가 저 근육만큼의 실력을 보여줄 수 있을까?"

곧바로 소식을 들은 성기사와 성전사들이 모여들어 대련장 주변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높은 수준에 이른 이들의 대련은 보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는 만큼, 이 대련장은 주변에서 참관할 수 있는 시설도 잘 갖춰져 있었다.

물론 성자인 하인리히가 원한다면 그들 모두를 물릴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

이참에 주신교단의 정예들 앞에서 그들의 힘을 과시하는 것도 좋은 기회가 될 터.

이 웨이트 트레이닝의 신봉자들에게 할리의 멋진 근육이 그저 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차례였다!

'자, 그럼 가 볼까?'

대련이라곤 하지만 둘 다 자신이 조종하는 만큼 수 싸움은 불가능하다.

어떻게 하든 짜고 치듯 공세를 주고받는 형세가 될 수밖에 없다 보니, 할 수 있는 건 단순히 가진 역량을 비교하는 것뿐.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제법 유의미한 측정은 될 것이다.

그렇게 주신의 성자이자 불사왕의 대적자인 용사, 빛의 기사 하인리히와.

남부에는 가본 적도 없는 야만 전사이자 키메라 용인, 광전사 할리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

실전 대련이라곤 하지만 주변의 이목이 있는 만큼, 할리의 완전체 모드와 '광기'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하인리히의 보증이 있다지만 그걸 대놓고 사용하는 건 좀 그렇지 않은가.

"크하하하핫—!"

콰아앙—!

그러나 그걸 제외하더라도, 전투에서 보여주는 할리의 위압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이전보다 더 부풀어 오른 근육과 전신에 돋아난 검붉은 비늘, 양 눈에서 줄기줄기 피어오르는 안광.

날카로운 손톱이 튀어나온 오른손은 마치 용의 앞발과 같았고, 왼손의 거대한 검은 도끼는 「생체 오러」로 뒤덮여 거인이라도 반으로 쪼갤 듯이 매운 기운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또 그 우월한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체력은 몸 안에 쌓인 에너지를 태워 전신의 각인을 활성화시켰으며, 주위를 휘몰아치는 마나 폭풍은 그의 모든 행동을 보조해주었다.

"허어··· 저게, 용인인가?"

"···워낙 희소한 종족이라 뭐라 말할 수 없군. 그런데 모든 용인이 저런 능력을 지녔다면 그들이 지금처럼 멸종 위기에 처할 리가 없을 텐데···."

"역시 근육은 거짓말하지 않는군요."

"음음!"

대련을 지켜보던 이들이 그의 위용에 감탄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폭력적으로 몰아치는 할리의 움직임은 파격과 변칙을 내포하고 있었으나, 그 안에는 체계적으로 단련된 규칙성과 기본기가 뒷받침되어 있었다.

쿠우웅—!

짙은 검붉은 오러가 뒤덮인 도끼가 성검과 부딪친 동시에, 오른손의 손톱이 하인리히의 하체를 쓸어간다.

도끼를 흘리고 가볍게 한발 물러나는 그에게 따라붙으며 다시 할리의 왼손이 유려하게 무기를 휘둘렀다.

단순히 힘뿐만 아니라 기교까지 갖춘,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가공할 전투력이었고.

그것을 인정한 건 할리를 상대하는 본인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잘못 생각했군. 그냥 무작정 짜고 치는 판이 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직접 겪어보니 생각보다 더 할리의 전투 방식이···.'

예측불허.

직접 몸을 조종하고 있음에도 그 움직임을 쉽게 예상할 수 없었다.

할리로 하여금 본능적인 전투를 가능하게 했던 「야성」이 진화한 스킬, 「광란의 야수」는 단순히 광기를 더 효율적으로 다룰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거의 모든 움직임을 이성이 파악하지 못한 무의식의 영역에서 행하고, 본능적으로 하인리히의 빈틈을 찔러 공격해온다.

사고를 공유하는 만큼 오히려 그것을 역이용해 스스로가 의식하지 못한 부분만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오는 것이다.

'···이거, 굉장히 효율적인 수련 방법인데?'

자기 자신이 파악하지 못한 빈틈을 극복하는 훈련으로 제격이지 않은가?

상당히 과격하지만 효과는 보장된 방법이었으며, 그것에 매료된 하인리히는 어느새 본래 목적을 잊고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 집중하며 서서히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콰지직!

콰아아앙—!

그렇게 치열한 싸움이 이어지고, 할리는 저장한 에너지를 모두 불사르겠다는 듯이 점점 더 과격한 공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공격은, 끝내 하인리히에게 닿지 않았다.

치명적인 각도에서 날아온 도끼날이 성검에 흘려졌다.

허점을 노리고 불시에 솟아오른 발끝은 도달하기도 전에 목표를 놓쳤다.

성검기와 신성력으로 뒤덮인 손이 날카로운 손톱을 쳐내고.

광검에 휩싸인 검날은 단단한 비늘을 베어 갈라, 그 몸을 피투성이로 만들고 있었다.

"···검의 움직임이, 아름다워. 저런 건 처음 보는데···."

"그런데 성자님이 조금 너무 하시는 것 같지 않아? 지금이라도 말려야 하나?"

"아직은 괜찮다. 저 남부 전사, 겉은 피범벅인데 상처는 이미 전부 회복됐으니. 흠, 저것도 용인이라서인가?"

순수한 육체의 스펙만으로는 할리가 압도적인 우위였다.

그의 육체는 거대 괴수를 압축해 놓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고, 그 몸에서 뿜어지는 폭력적인 에너지는 안 그래도 빼어난 파괴력을 더욱 증폭시켰다.

빠르고, 강하고, 변칙적으로 이어지는 공세.

그리고 그것은— 하인리히의 내면에 잠들어있던 무언가를 사정없이 자극했다.

'아, 이런 거였구나.'

「대축복 : 빛의 기사」와 온갖 성장 보정이 그의 깨달음을 보조하고.

오랜 세월 동안 다양한 괴물들을 상대하며, 수많은 천재의 손을 거쳐 개량되어 온 「로지아 성투법」이 빠르게 흡수되었다.

지식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차마 따라 하지 못했던 기술들을 순식간에 체득할 수 있었고, 그것은 또 다른 성장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개체가 반복된 훈련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스킬「무골」이 특수스킬「무도의 길」로 진화합니다."

성검을 얻고, 어느 경지에 오른 이후로 줄곧 정체되어 있던 「무골」이 마침내 벽을 넘어섰다.

#149

용사 파티 (3)

전투를 참관하던 이들은 하인리히의 변화를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공간을 가르는 검의 궤적과 묵직하게 내딛는 발걸음, 심지어 가볍게 내쉬는 호흡에서조차 숨 막히는 위압감이 풍겨 나오기 시작했으니.

"···성자님께서 벽을 넘으셨군."

"헛! 투스킨 경? 언제 오셨습···."

"쉿."

그리고 그것에 감탄한 건 교단 무력의 상징인 팔라딘 또한 마찬가지였다.

성자의 대련 소식에 조용히 다가와 참관하던 은빛날개 성기사단장, 팔라딘 투스킨은 대련장을 바라보며 남다른 감회에 잠겼다.

하인리히가 성전사이던 시절, 그 가능성만 보고 탈리아 신전에서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 바로 그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때의 성전사가 최단기간에 성기사가 되고 큰 공을 세운 것도 모자라, 성검을 뽑아 성자이자 용사까지 되었으니 어찌 담담할 수 있을까.

'거기다 성자님과 맞서는 저 용인 전사도··· 대단하군. 진심으로 싸우게 된다면 나도 힘들겠는데.'

주신교단의 팔라딘은 단순히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한 기사가 아니었다.

무인으로서의 경지는 기본일 뿐, 최소한 주교급의 신성력과 5개 이상의 축복까지 보유해야 오를 수 있는 명예로운 자리인 것.

당연히 그들의 전투력은 일반적인 잣대로는 판단할 수 없을뿐더러, 특히 방어적인 측면에서는 그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몬스터를 넘어서는 신체 능력과 야성적인 본능을 가진 데다 무인의 정제된 전투 체계까지. 역시··· 성자님의 동료가 되려면 저 정도 수준은 되어야겠지.'

투스킨은 대련장 바깥에서 할리를 바라보며 인정한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순간, 검붉은 오러가 이글거리는 거대한 도끼와 밝게 빛나는 성검이 다시 한번 충돌했고.

쿠우웅—!

수호 결계를 두들기는 커다란 충돌을 마지막으로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뒤로 물러섰다.

"크하하핫! 과연 용사님이시군! 이렇게 강한 전사는 처음이야!"

엉망이 된 몰골의 할리가 변이된 몸을 원상태로 되돌리며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격렬한 전투의 여파로 그의 몸은 온통 피투성이였으나, 「초재생」으로 회복된 그의 몸에는 이미 상처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으적으적!

그 대신 에너지를 너무 소모해 격렬한 허기가 밀려들긴 했지만.

그는 허리춤에 묶어뒀던 아공간 마도구에서 드래곤 고기를 꺼내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후우—."

그렇게 할리가 그 자리에서 고기 몇 덩이를 해치우는 모습을 보며, 하인리히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 곳곳이 찢겨나간 예복을 정리했다.

아무리 그가 용사라도 할리를 상대로 생채기 하나 안 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신체를 보호하는 강대한 축복과 신성력 덕분에 지금은 옷 외에는 이렇다 할 흔적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

그나마도 전부 「무도의 길」을 얻기 전인 전투 초중반에 난 상흔이었다.

'순간적으로 너무 몰입해 버렸군.'

그래도 의외의 성과까지 얻은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이번 일을 계기로 하인리히의 「무골」이 자극받아 무(武)에 대한 시각이 넓어지면서, 그것은 고스란히 스킬의 진화로 이어졌으니까.

이성을 중시한 평소의 전투에 본능을 우선하는 할리의 방식이 섞이며 생겨난 예상 밖의 시너지였다.

그 뜻밖의 공동 작업으로 인한 깨달음 덕인지, 머릿속이 시원해지고 기분 좋은 고양감이 그의 마음속을 가득 채웠다.

"축하드립니다, 성자님! 전부터 강하신 건 알고 있었는데, 그것조차 아직 성장 단계셨군요. 역시 성자님이야말로 이 대륙의 희망이십니다!"

"저 용인 전사도 대단하네요. ···저 정도 수준이라면, 성자님의 동료로 인정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전사여, 혹시 그대만의 특별한 근육 단련법이 있나? 우리 성기사단만의 특별 루틴이 있는데, 서로 교류의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떤가?"

"그거 좋군! 성자님의 동료가 더 강해지는 건 모두에게 좋은 일이지. 우리가 직접 함께하진 못해도 이런 식으로 도울 수는 있을 테니!"

참관하던 근육 덩어리들이 대련장을 빠져나온 그들에게 몰려와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그간 함께 훈련하며 유대감이 생겼던 하인리히에게는 물론, 이번에 실력을 증명한 할리에게도 거리낌 없이 대하는 그들의 공통 주제는 오로지 단련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말에 문득 하인리히의 뇌리에 다른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동료라··· 마왕을, 불사왕을 쓰러뜨리기 위한 파티란 말이지···.'

그건,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일에 대한 회의감이었다.

사실 현 상황은 처음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급박하고 여유 없이 전개되는 면이 강했다.

만약 그가 정말 용사로서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마왕을 상대하려 한다면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게 맞았다.

오히려 지금처럼 개인의 의견을 존중하며 '싫으면 말고' 식으로 대처하지 않고, 소속 국가와 추가로 협상하든지 해서 좀 더 강경하게 나갔을 터.

'지금도 정보부에서 여러 명단을 가지고 오면서 은근히 추가 대응을 청하는 분위기이기도 했고.'

하지만 처음부터 자신의 목적은 불사왕을 물리치는 게 아니라, 영웅담과 같은 서사를 쌓는 것이었지 않은가.

그리고 그런 '고전적인 이야기'에는 주인공이 온갖 역경을 헤치며 하나하나 동료를 모으는 과정 또한 전개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래, 할리의 대모험처럼.'

투쟁과도 같은 삶을 살면서 4막에서 사악한 흑마법사 한스에게 생체실험을 당하다 탈출한 할리.

그는 이후 상인 휴버트와 엘프 해리스, 드워프 하워드와 만나 우정을 쌓게 되고.

마침내 7막에 이르러서 용인의 피를 각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7막의 마무리가 바로 지금. 용사의 동료가 되는 거지.'

애초에 그가 처음 생각했던 '안방극장'의 전개 방향도 그쪽이었다.

여러 가지 사건이 연달아 터지며 결국 지금 상황까지 흘러와 버렸지만.

'이제 와서 그렇게 이야기를 진행하기엔··· 역천의 서약 놈들이 큰 사건을 펑펑 터트려대는 바람에 계획에서 너무 틀어졌어.'

사실 이곳 사람들 입장에서야 최대한 서둘러 전쟁을 준비하는 게 당연한 건데, 한스도 처음 생각과는 다르게 진행되는 사건에 페이스를 잃고 폭주한 감이 있었다.

지금 상태에서는 희생을 최소화하려는 기존 방침을 유지할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미심쩍게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을 텐데, 앞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불사왕의 개연성이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을 테니.

'처음 계획을 떠올렸을 때만 해도 적당히 나쁜 놈들만 족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해 보니 불사왕이라는 이름의 존재감이 너무 컸단 말이지.'

그저 뭔가를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재해급 규모가 되어버리니, 원하는 대로 상황을 끌고 가기도 힘들었다.

거기다 역천의 서약이 벌인 일도 겹쳐서 어느 순간 정말 전쟁이 코앞까지 다가와 버렸다.

'그렇게 되면 뭘 어떻게 하든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불가피해진다. 애초에 전쟁이라는 것 자체가 그런 구조니까. 이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렇다면 정말 방법이 없는 것인가?

눈 딱 감고 내 욕심을 위해 남의 희생을 강요하든, 그냥 이 정도에 만족하고 판을 접든 양자택일하는 수밖에 없나?

'그럴 수는 없지! 그냥 어떻게든 전쟁만 피하면 되는 것 아닌가?'

결국 침략의 주체 또한 자기 자신이었으니, 합의고 뭐고 복잡한 과정 거칠 필요 없이 그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문제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방법이었는데···.

그렇게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생각에 하인리히가 미간을 찌푸리며 상념에 잠겼을 때.

"성자님? 지금 시간 괜찮으십니까?"

성녀의 주재하에, 로셀리아 대신전의 수뇌부가 모두 모인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

로셀리아 대신전의 최심부에 위치한 작은 회의실.

공간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그 내부에 모인 이들의 면모는 하나같이 쟁쟁했다.

성자와 성녀, 두 명의 추기경을 비롯해 이단심문관장과 팔라딘, 대주교들까지.

그야말로 로셀리아 대신전의 모든 수뇌부가 한자리에 집합해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고 있었다.

"후우, 이거 큰일이군요. 대륙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일은 아직도 지지부진한데, 불사왕 한스는 본격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으니."

"로한 공국과 그리 멀지 않은 북쪽 산림이라···. 역시 이건 우리들을 조롱하려는 의도겠지요? 스스로 무너뜨린 공국이 완전히 몰락하는 걸 지근거리에서 지켜봐 주겠다는···."

"로한 사태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 희생은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테지요. 그 수많은 죽음이 그대로 불사왕의 힘이 될 것입니다."

긴급회의의 안건은 불과 얼마 전에 북부 산맥 내부에서 감지된 죽음의 기운에 대해서였다.

불사왕의 은폐 능력이 역대 최악이라 불릴 정도로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그만큼 커다란 기운의 유동을 완전히 차단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당연히 그 움직임은 성녀를 포함해 탐지계 축복을 지닌 이들에게 감지되었고, 곧바로 조사가 진행된 동시에 이렇게 긴급회의까지 열리게 된 것이다.

"이번 건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사안입니다! 그간의 경우완 차원이 달라요!"

리에스타 성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강한 어조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의 감지 능력은 교단 내 제일이었던지라, 다른 이들도 진지한 표정으로 그 말을 경청했다.

"단순히 불사왕 한스의 기운뿐만이 아니라 수만이 넘는 언데드의 존재도 함께 감지되었습니다. 그동안 모아왔던 전력을, 모두 한자리에 꺼내놓은 거예요. 그 말은 즉···!"

"···선전포고, 로군요."

"허어— 이런 상황에 말입니까···. 아니, 이런 상황이어서라고 해야겠군요. 그것도 로한 공국 방면이라···."

'어라?'

교단 수뇌부들의 표정이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마침 끊임없이 몰려드는 몬스터들 때문에 피난민 구출 작업에 난항을 겪고 있다는 연락을 받지 얼마 되지도 않은 참이었다.

완전히 무너져 내린 방어선과 무법천지가 되어 혼란에 빠진 영토.

수도에 모여 농성에 들어간 망국의 국민들과 저들끼리 뭉쳐 생존을 꾀하는 이들까지.

그런 상황에서도 힘겹게 사태를 수습하는 중이었는데, 난데없이 지근거리에서 불사의 군대가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당연하지만 지금 이 상태라면 제대로 된 수비도 불가능했다.

"그렇지 않아도 대륙 전체에서 몬스터들의 준동에 신음하는 상황이라 군대를 모으기도 힘든 상황이거늘···."

엎친 데 덮친 격인 상황에 피온 추기경이 나직이 탄식을 터트렸다.

대의를 위해선 과감하게 공국을 버리고 제국 국경에 새로 방어선을 마련해야 했지만, 아직도 공국령에 남아 버티고 있는 이들이 십만은 족히 넘을 텐데 어떻게 그들을 전부 외면할 수 있겠는가?

"···불사왕은, 우리의 선택을 지켜보며 웃고 있겠군요."

어느 쪽을 택해도 악수(惡手)밖에 없는 상황.

모두가 그의 악랄함에 치를 떨었다.

'이게 또 이렇게 된다고? ···아니, 내가 생각이 짧았군. 이렇게 되는 게 당연한 건데.'

한 명만 빼고.

주신교단의 성자, 하인리히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끄응, 이걸 또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지금 굴러가는 상황을 보니 선의로 한 행동이 오히려 방해만 된 것 같았다.

불과 조금 전에 다른 방법을 강구할 것을 다짐했는데, 바로 새로운 고민거리가 던져진 것이다.

"···제국의 병력은 어떻게 됐습니까?"

"1차로 북부 국경에 집결이 끝난 부대가 막 로한 공국령에 진입한 상황입니다. 현재까지 1만 명 규모의 군단 세 개가 각기 다른 길로 수도로 향했습니다. 추가 증원도 지속해서 이어지고 있고요."

"만약, 이 사실을 제국이 알게 된다면···."

"···바로 모든 작전을 취소하고 군대를 뒤로 빼려고 하겠죠."

모두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대규모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제국이 나서서 피난민들을 이끌지 않으면 교단이 백날 버텨 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신교단 측에서 입수한 정보를 제국에 전달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만약 그러다 정말로 불사의 군대가 남하하기 시작한다면, 로한 공국뿐만 아니라 제국까지 크게 흔들릴 수 있었으니까.

'아니, 제국이 바보도 아니고 그쪽에서도 금방 알아채겠지. 어쩌면 우리처럼 지금 회의 중일지도 모르고. ···그래, 역시 그 방법밖에 없겠구나.'

한스가 북쪽에 자리 잡음으로써 그 방향의 몬스터 유입은 줄겠지만, 구조 작업이 이어지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결국 하인리히는 결심을 굳히고 그 자리에서 눈을 감고 기도에 들어갔다.

집중되는 막대한 정신력에 순간적으로 믿음이 고양되고, 그에 따라 주신과 연결된 영맥이 급격히 팽창했다.

여러 가지 사건들과 업적을 달성하며 얻은 카르마로 무려 64만 포인트에 달하는 '정신력 강화'까지 사용한 후인지라, 그 효과는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우우웅—

그의 몸에서 한껏 증폭된 신성력이 뿜어져 나오며, 투명한 불꽃과도 같던 아우라가 짙은 광휘와 함께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엇!?"

"···성자님?"

눈 깜짝할 새에 회의실을 가득 채운 신성한 불길에 수뇌부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형체가 잡힐 듯 이글거리는 그 기운은 경이로울 정도로 순수했으며, 저도 모르게 경외심을 품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그렇게 모두의 관심이 집중된 순간.

하인리히가 경건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심 주신께 정의로운 사기꾼이 되는 걸 허락해 달라고 기도하며.

"잠깐 제 말을 좀 들어 주시겠습니까? ···주신께서, 저희에게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찬란하게 빛나며 그의 몸을 휘감는 아우라는, 그에 대한 허락의 증거였다.

아마도.

#150

용사 파티 (4)

회의실을 울리는 하인리히의 묵직한 한마디에 모두가 일제히 굳어버렸다.

신성력이 가득 담겨 절로 경건해지는 목소리는 둘째 치고, 그 말에 담긴 뜻에는 그만한 파급력이 있었던 것이다.

"주신께서··· 말씀이십니까?"

"허어—."

웅성거리며 경탄을 토하는 대신전의 수뇌부들.

신이 실존한다는 것은 아우테리카의 누구나가 인정하는 사실이었으나, 가진 격의 차이가 워낙 큰지라 그 의지를 필멸자들이 느끼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그 사정은 성직자들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신앙심이 강해질수록 점점 연결이 강해지고 그 존재감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게 되긴 하지만, 신의 뜻을 약간이나마 헤아리기 위해선 성녀 정도의 수준은 되어야 했으니까.

그런데 지금 하인리히가 주신에게 직접 계시를 받았다는 말을 꺼냈으니 그들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긴장한 표정으로 마른침을 삼키는 이와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는 이,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 그를 바라보는 이들까지···.

모두가 마음가짐을 바로 하고 자세를 고쳐 앉은 채 그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을 기다렸다.

'효과가 좋긴 하네···. 좀 부담스럽긴 하지만.'

하인리히는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성녀의 눈빛을 애써 무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상하다 여기지 않으셨습니까? 그간 불사왕 한니발 스트라우스가 보였던 모순된 행동이 말입니다."

조금 뜬금없다고 여겨질 수 있는 말이었지만, 그들은 별말 없이 성자가 던진 화두에 집중했다.

당연히 그 사실은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그저 상대가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던지라, 그 사고 패턴의 분석에 별다른 성과가 없었을 뿐이었으니.

"이번 대의 불사왕은 전대들과 확연히 다릅니다. 대륙을 죽음으로 물들이겠다는 강박에 얽매여있지 않지요."

"확실히 그렇게 느끼긴 했습니다만···."

"그를 움직이는 행동 원리는 오로지 스스로의 흥미입니다. 저번에 대신전에 쳐들어왔을 때도 엘븐 킹덤의 해리스 님이 그 흥미를 충족시켰기에 순순히 물러난 것이지요. ···거기에 굳이 하나를 더하자면, 대중의 관심을 끄는 것 정도라고 할 수 있겠군요."

시작은 한스의 특이점을 그들에게 상기시키는 것부터였다.

"···확실히 일리가 있습니다. 저희가 심연의 문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됐을 때, 불사왕은 우리를 충분히 죽일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죠. 마치 자신이 한 짓에 대한 증인이라도 남기려는 듯이."

과거 남부 황무지에 파견되었던 팔라딘 하나가 조심스럽게 하인리히의 말에 동조했다.

"생각해보면 그런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불사왕이 전 대륙에 끼친 해악이 크긴 하나, 정작 그가 직접 모습을 드러낸 장소의 피해는 의외로 적었지요. 얼마 전 제국의 토베아 시에서 일어난 습격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본적으로 대륙을 파괴하려는 행보를 보이긴 하지만, 정작 본인이 자리한 곳에선 개인의 흥미가 더 우선 된다···?"

"바로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점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과거의 일들을 억지로 끼워 맞춰 현재의 주장에 신빙성을 더한다.

거기다 지금 하인리히는 어떤 개소리를 해도 설득력을 부여해 줄 주신의 권위를 등에 업고 있으니, 이들을 납득시키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저에게 커다란 흥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 그의 심장을 찔러 물리쳤을 때부터 시작된 그 관심은, 제가 성자가 되자 더욱 커졌지요."

그 점은 다른 이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불사왕이 그를 의식하는 행동을 자주 보이기도 했으며, 정상 회의 습격 사건 때는 오로지 하인리히만을 대화상대로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었다.

마지막에 자신에게 화살을 날린 해리스를 대할 때를 제외하면.

"저는 그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한 가지 내기를 제안할 생각입니다."

"네? 내기··· 말입니까?

그 말이 끝나자마자 순간 청중들의 반응이 미묘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역시 뻔뻔함이지.'

그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에 힘을 담아 말을 이었다.

"불사왕은 대륙을 정복하는 과정 자체도 하나의 놀이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럼 거기에 어울려주며 흥밋거리를 더해주는 대신, 한 가지 '규칙'을 추가하면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로한 공국 방면을 침공하지 않는 것인가요?"

그의 말을 경청하던 이들이 하나둘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이 그렇게 형편 좋게 풀릴 리가 있겠느냐는, 지극히 당연한 의문 때문이었겠지만···.

"물론 저쪽의 요구 조건에 따라 추가 변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기본 골자는 그렇습니다."

"···그런 조건을 불사왕이 받아들이겠습니까?"

"받아들일 겁니다."

그가 마음먹은 이상, 한다면 하는 거다.

'다소 억지를 부리는 한이 있어도, 다른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

지금 믿는 것은 오로지 주신의 위광뿐이었다.

"불사왕과 협상이라니···."

불편한 듯한 기색의 이단심문관장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아무리 그의 권한이 강하다 해도 신의 선택을 받은 성자까지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물며 지금은 주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밑밥까지 깔아둔 상황이지 않나.

"하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언데드들이 남하하면 어떻게 하지요? 곧바로 대비하지 않으면, 자칫하다간 공국만이 아니라 제국도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불사의 군대는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그걸 확신하시는 이유도 혹시?"

"···주신께서 알려 주셨습니다."

이제 슬슬 뭐라고 설득할 논리도 떨어져 그냥 무작정 밀어붙였다.

어떤 근거도 없는 막무가내 주장이었으나, 성자가 그렇다는 데 뭐 어쩌겠는가?

'아 몰라, 그렇다면 그런 줄 알라고.'

그의 단호한 대답에 교단의 수뇌부들은 그저 눈만 껌벅였으나.

시종일관 조용히 그를 바라보던 성녀는 그제야 초롱초롱한 눈으로 박수를 치며 감탄을 내뱉었다.

짝짝짝!

"역시 성자님이시군요! 주신께선 모든 걸 알고 계시지만, 부족한 저희는 그 뜻을 온전히 헤아릴 수 없지요. 저도 그 편린만 어렴풋이 느낄 뿐인데 정말 대단하세요!"

"하하하. 별말씀을···."

그는 양심의 가책을 무시하며 그저 뻔뻔한 웃음만 흘렸다.

아마 주신과의 감응 수준은 하인리히보다 성녀가 더 높을 터였다.

그는 신과 연결된 영맥 대부분을 오직 신성력 수급 용도로만 사용하는 중이었으며, 지금까지 주신에게서 느낀 감정 또한 '흥미'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건 마찬가지였고.

하지만 그렇게 성녀가 진심으로 감복한 듯 호들갑을 떨자, 그 분위기에 휩쓸리듯 주변의 반응도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모두 성자인 하인리히가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일말의 고민조차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럼 일단 성자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전제로 일을 진행하도록 하지요. 제국 측도 바보가 아니니 쉽지는 않겠지만, 일단 최대한 시간을 끌어 보겠습니다."

대륙에서 첫손에 꼽히는 조직이라기엔 황당하게 느껴질 정도의 의사 결정이었으나, 이것은 그만큼 그들이 성자인 하인리히를 믿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성자가 직접 주신의 이름까지 꺼내든 순간, 그것은 교단 내에서 절대적인 법칙이나 다름없어진 것이다.

'최근엔 불사왕에게 대응하느라 인류의 대변자 같은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이들의 본질은 결국 종교단체였으며, 이 자리에 있는 전원은 그 신앙심이 절정에 이르렀다고 인정받은 수뇌부들이었다.

'쉽게 말해서, 여기 있는 사람들은 나 빼고 전부 광신도들뿐이라는 거지.'

그리고 광신도에게 신의 말씀은 곧 진리였으니 이런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제국의 회군을 막는 건 잠깐이면 될 겁니다. 그들도 곧 저희의 뜻대로 따르게 될 테니까요."

"예? 혹시 그것도 주신께서 계시를···?"

그 의문에 하인리히는 그저 지그시 눈을 감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자주 하다 보니, 어쩐지 진짜로 방금 막 주신의 계시가 내려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니발 스트라우스··· 다음엔 제국을 노리려는 것 같은데, 나 하인리히가 있는 한 네 뜻대로 되진 않을 거다!'

굳은 결의와 경건한 믿음이 휘몰아치는 회의실.

한껏 자신의 역할에 몰입한 용사가 주먹을 불끈 쥐며 의욕을 불태웠고.

그런 그의 모습을 회의장 내의 이들이 믿음직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하도 혹사당한 탓에 기어코 마비됐는지, 신기하게도 더는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지 않았다.

***

한창 하인리히가 주신의 이름을 팔아 사기를 치고 있을 무렵.

대련을 마친 할리는 반가운 인연들과 오랜만의 재회를 나누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할리 님. 그때 헤어진 후로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전보다 더 커지셨네요."

"으하하핫! 이거 오랜만이야, 아가씨! 얼굴이 반질반질한 게 그동안 잘 지냈나 보구만?"

"다 할리 님 덕분이죠. 저도 이제 하이 엘프라구요?"

반갑게 그를 맞이하는 세실리 그랜우드와.

"간만에 뵙습니다. 음··· 그런데, 아니, 아닙니다."

할리의 변화에 뭔가를 느꼈는지 미묘한 반응을 보이는 라포리 그랜우드.

"오랜만입니다, 할리."

"아아— 반갑구만, 해리스! 후하핫!"

오랜 친구라는 설정의 해리스까지.

"과, 과연 이온 대륙이로군요. 그간 예상보다는 평범하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딱 제가 상상했던 대로···."

그의 위압적인 몰골에 압도당한 듯한 샤피론이 슬그머니 해리스의 뒤로 숨으며 작게 중얼거리긴 했으나, 그녀가 이상한 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기에 가뿐히 무시했다.

"할리 님, 제가 저번에 약속했었죠? 제가 하이 엘프로 개안하게 되면 제대로 다시 가호를 드리겠다고. ···지금의 할리 님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없는 것 보다는 나을 거예요."

그와 눈을 마주하며 배시시 웃는 세실리.

이번엔 그가 저번처럼 쪼그려 앉을 필요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세실리의 발밑에서 일어난 바람이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띄워 한순간에 그와 눈높이를 맞추었으니까.

화아악—

이어서 그녀의 입술이 할리의 이마에 닿는 것과 동시에, 그때와 마찬가지로 포근한 기운이 그의 몸에 깃들기 시작했다.

또한··· 하이 엘프의 자격을 얻은 해리스가 함께 있었기 때문인지, 이번엔 그 에너지의 성질까지 확실히 파악할 수 있었다.

'이거 단순한 자연력이 아니라 신성력과 그 성질이 비슷한데? 하이 엘프는 본인을 매개로 직접 세계수의 기운을 끌어올 수 있는 건가. 과연 세계수 교단의 제사장이라고 할 만하군.'

그리고 잠시 시간이 흘러, 그것이 온전히 할리의 몸에 깃들자—.

"「대자연의 가호」로 인해 개체의 속성 친화력과 저항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그때와는 다르게 이번엔 할리의 눈앞에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특별한 스킬이 생기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시스템까지 공언해 줄 정도면 그 효과도 생각 이상으로 크다고 봐야 하리라.

'해리스도 하이 엘프가 되면 곧 쓸 수 있게 될 텐데, 이거 몇 번이나 할 수 있는 거지? 어디 보자··· 일단 할리 몫은 아꼈고, 당연히 한스는 안 될 테고.'

당연히 이런 생각으로 이어진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또 그녀의 선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는데, 그녀가 세계수에게 하사받았던 가지의 일부로 만들어진 장신구가 바로 그것이었다.

"라포리 님의 조언을 받아서 할리 님의 취향에 맞게 만들었어요."

세실리의 말에 뒤쪽에 가만히 서 있던 라포리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 말대로, 목걸이나 허리띠에 걸 수 있게 조각된 그 장신구는 사나운 맹수 머리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흉악하고 생동감 넘치기 그지없었다.

딱 할리의 취향대로.

"으하하하! 이거 정말 마음에 드는구만. 굳이 이렇게까지 해 주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지!"

물론 말만 그렇게 할 뿐, 그 온갖 저항력과 더불어 추가 방어력까지 부여하는 장신구은 어느새 그의 허리춤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아마 그것이 앞으로 그 자리에서 떨어질 일은 어지간해선 없을 터.

"그나저나, 할리 님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군요. 그 짧은 시간 만에 이렇게 강해지시다니."

그렇게 세실리와의 일이 마무리되자,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라포리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하이 엘프답게 어느 정도 할리를 꿰뚫어 보았는지, 그는 뭔가를 걱정하는 기색이었지만···.

"···뭐, 할리 님도 생각이 있으시겠지요. 주신교단에서도 별말 없는데 제가 뭐라고 왈가왈부할 입장도 아니니. 그런데 여기까지 오셨다는 것은, 혹시 결사대에 참여하기로 하신 겁니까?"

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더니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역시 주신교단의 성자라는 최고의 뒷배가 있으니 이렇게 편하다.

"음? 아아—! 그거···."

그리고 그 질문에 할리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151

제국의 난 (1)

"그건 상황을 좀 지켜봐야 할 것 같은데, 일단 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소! 불사왕의 골통을 직접 부술 수 있다니, 이거보다 더 화끈한 싸움이 어디 있을까! 으하하핫—!"

할리는 라포리의 물음에 시원하게 답하면서도 어느 정도의 여지는 남겨두었다.

'일단 지금 중요한 건 무대니까.'

공주를 구하기 위한 모험을 떠난 용사가 하나둘 동료를 모아 마왕의 음모를 분쇄하고, 마침내 그가 기다리는 마왕성에 도착해 그를 쓰러뜨리는 동화와도 같은 이야기.

그런 전개를 위해선 용사와 마왕이 편하게 자웅을 겨룰 수 있는, 동시에 그것을 모두에게 과시할 수 있으며 온전히 그의 통제하에 놓인 반상(盤上) 위의 전장이 필요했다.

'고전이 꾸준히 사랑받는 것에는 이유가 있는 법. 용사 파티도 그 시나리오에 엮어 넣는 게 더 극적이겠지.'

하지만 그 전개의 설득력을 위해서는 '불사왕'의 흥미를 끌 만한 이름값이 있으면서도 제국이 함부로 경거망동하게 하지 못하게 할, 예컨대 납치당한 공주 포지션의 희생양이 필요했는데···.

다행히 그 역할에 딱 들어맞는 인물 하나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본인에게 출연 동의를 받진 않았지만.

"···그렇습니까? 아무튼 이렇게 만나서 다행입니다. 중요한 논의가 얼추 끝나 가는지라, 저희도 조만간 에나멜 대륙으로 돌아갈 생각이었거든요."

무엇보다 해리스가 하이 엘프의 자격을 얻기도 했으니, 개안 의식을 위해서는 세계수가 있는 곳까지 한 번 찾아갈 필요가 있었다.

물론 연합군과 결사대 문제도 있으니 금방 다시 오긴 해야겠지만 말이다.

'다른 사절단들도 슬슬 돌아갈 때가 됐지. ···물론, 제국 측도 마찬가지고.'

***

아제리온 제국의 수도 제론.

다그닥 다그닥—

넓게 포장된 길을 달려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한 사람이 밖을 내다보았다.

자그마한 체구에 푸른 로브를 두른 검은 머리의 여성.

성지의 로셀리아 대신전에 방문했다가 돌아온 이세아였다.

'평화롭네.'

그녀는 지금의 혼란스러운 정세와는 상관없다는 듯 평소와 같은 거리를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이곳은 제국의 수도인 만큼 아직 전쟁의 여파가 닿지 않았으나, 아마 이것도 그리 오래 가진 못할 터였다.

지금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선 많은 이들의 희생과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그녀는 지금, 그에 힘을 보태 달라 요청받았음에도 거절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이기적인 생각이라고 욕먹어도 할 말 없지.'

하지만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이세아에게는 대륙 전체의 안위보다 이곳에서 만든 작은 인연이 더 소중했다.

물론 불사왕을 막지 못하면 그녀가 지키고자 하는 것을 포함한 모두가 위험해진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 일은 자신이 아니더라도 할 사람이 많지 않겠는가?

먼저 나서서 지켜줄 이들이 많은 '세계'와는 다르게 지금 5황녀 라일리에게는 그녀가 꼭 필요했다.

아직은 모은 세력의 질적인 면과 결속력에 대해서는 황태자 측보다 많이 뒤떨어지는 편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줄곧 제국 내에만 있다가 지구로 돌아가게 될 줄 알았는데, 사이먼 때문에 성지도 방문해 보네.'

물론 그렇다고 황태자에 대한 그녀의 평가가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5황녀의 세력이 커지기 시작한 후부터 벌어진 그의 뒷공작을 질리도록 겪어본 당사자였으니까.

정말 피를 토하는 노력으로, 실제로 피를 토하기도 하며 어떻게든 전부 막아내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황궁에 도착해 곧바로 5황녀 궁으로 향한 그녀는 자신이 아직도 이 세상에 남아있는 이유와 마주할 수 있었다.

"프리스틴 자작님? 생각보다 일찍 돌아오셨군요?"

금실과 같은 찬란한 머릿결과 보석처럼 빛나는 청록색 눈동자, 이세아와는 반대로 늘씬한 키에 성숙한 몸매를 지닌···.

온몸에 고귀함과 위엄을 두른 5황녀, '라일리 카르테 아제리온'이 티 테이블에 앉은 채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그녀를 맞이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프리스틴 자작님과 할 얘기가 있으니, 이만 나가보세요."

부드러운 존대임에도 진득하게 묻어 나오는, 지배하기 위해 태어난 자의 위압감.

황녀의 그 나직한 명령에 주변에서 시중을 들던 시녀들이 공손히 인사하며 밖으로 물러갔다.

우웅—

둘만 남게 되자 이세아는 가볍게 손을 휘저어 평소처럼 방 내부에 보안을 위한 결계를 덧씌웠다.

황궁 내부에서는 함부로 마법을 사용하면 안 되지만, 황녀의 개인 호위이기도 한 그녀는 예외였다.

그렇게 모든 작업이 끝나고.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마주친 순간···.

"세아~! 잘 갔다 왔어? 교단에서 뭐래? 설마 세아의 유능함을 알아보고 강제로 결사대에 들어오라고 강요하진 않았겠지?"

5황녀 라일리가 후다닥 달려와 그대로 이세아를 끌어안았다.

"하아, 라일리. 일단 진정··· 우붑!"

한숨을 내쉬던 이세아는 자신을 끌어안고 정수리에 볼을 비비는 황녀를 제지하다, 오히려 그 품 안에 더 깊이 파묻힌 채 버둥거렸다.

"히힛— 역시 인형 같은 것보다 이쪽이 더 좋아. 아아~ 치유된다."

"···그믄··· 흐르그···."

이세아는 자신을 가두듯 끌어안는 황녀의 품에 갇혀 발음이 뭉개지면서도, 기어이 몸을 비틀어 그 품에서 빠져나왔다.

"아~ 왜! 세아 없는 동안 많이 답답했단 말이야! 테리는 세아보다 안는 맛이 없다구!"

그러자 입술을 삐죽이며 칭얼대는 황녀, 라일리.

'테리'는 이세아가 생일 선물로 주었던 곰 인형으로, 그녀가 잘 때마다 끌어안고 자는 애착 인형이었다.

"하아, 몸만 커서는 아직도 애야."

"흐흥! 밖에서는 나도 도도한 황녀님인데?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세아 앞에서 만이니까, 영광으로 생각하라구?"

라일리는 슬쩍 머리를 쓸어 넘기며 오만한 웃음과 함께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이세아는··· 170을 훌쩍 넘는 장신의 미녀를 흐릿한 눈으로 올려다보며, 다시 한번 세상을 원망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작고 귀여웠는데···!'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땐, 황녀는 또래보다도 유독 작았던 11살 꼬맹이에 불과했었으니까.

물론 지금은 어느 순간부터 쑥쑥 자라기 시작한 황녀에게 키도 몸매도 외모의 성숙함도 전부 추월당했지만 말이다.

그 이후로는 관계가 역전되어 줄곧 이런 취급이었다.

분명 만남의 시작은 이런 형태가 아니었는데.

-"와, 뭐야? 방금 순간이동 한 거야? 여기 결계 때문에 아무나 못 들어올 텐데. 혹시 대마법사?"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이세아는 이세계에 전이되자마자 귀족가의 사유지에 떨어진 것도 모자라, 정원에서 혼자 놀고 있던 어린아이와 마주하게 되었다.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이 세계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곳이란 말을 들은 순간, 그녀는 즉각 상황을 파악하고 모든 것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살기 위해서는 눈앞의 소녀에게 호의를 얻는 방법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게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는 소녀와 이런저런 대화를 주고받다 나온 말이, 이 낯선 세계에서의 본격적인 시작이 되었다.

-"재밌어! 그러니까 이곳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거지? 그럼 내가 도와줄게!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일반적인 경우였다면 운 나쁘게 전이 되자마자 처형당하는 꼴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명백히 운이 좋았다고 봐야 했다.

-"···나랑, 친구가 되어 줄래?"

-"친구는 무슨, 쪼끄만 게. 언니라고 불러."

-"언니? 언니는··· 무서운데."

시종일관 활기차던 아이가 조심스럽게 꺼내든 제안.

그때는 아이의 정체도 사정도 알 수 없었지만, 곱상하게 자란 듯한 어린 소녀의 표정에 담긴 외로움을 이세아는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하아, 그래. 그러면 그냥 세아라고 불러."

-"세아? 그게 이름이야? 이름 예뻐!"

-"그래, 고마워. 넌 이름이 뭐니?"

-"라일리! 내 이름은 라일리야!"

치열한 황궁에서 형제자매들의 견제를 피해 잠시 외가에 내려왔던, 아제리온 제국의 5황녀 라일리 카르테 아제리온(11세)과.

막 이세계로 떨어져 앞날을 걱정하던 지구의 고등학생 이세아(18세)가 처음 조우한 순간이었다.

이후 때론 친구처럼, 때론 자매처럼 지내오길 8년.

지금은 이미 여러 가지를 추월당한 입장이긴 했으나, 그녀는 여전히 라일리를 친동생과 같이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다.

마음을 터놓고 지낼 사람이 없었던 라일리가 그녀를 의지했던 것처럼, 이세아도 낯선 이세계에서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 준 그 아이에게 심적으로 상당히 의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발터 후작이 개수작을 부리려다 나한테 딱 걸렸지. 큰 오라비가 자리를 비운 틈에 공이라도 세우려고 했던 것 같은데, 오히려 경이나 치지 않을는지 몰라? 히힛!"

이세아는 자신을 붙잡고 자리를 비웠을 때의 일을 조잘조잘 떠드는 라일리를 웃으며 바라보다 살짝 마음이 불편해졌다.

아무리 라일리를 친동생처럼 아낀다지만, 애초에 다른 세상 사람인 그녀는 언제까지고 여기에 남아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시간 차가 있으니까, 아직 좀 더 있다가 가도 괜찮을 거야.'

마음속에 내세운 마지노선은 딱 10년, 지구 시간으로는 1년이었다.

이 세계에서의 시간으로는 대충 2년 남짓 남은 상황.

그 안에 이 아이가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아야 했다.

'만약 내가 떠나고 나면 친구 하나 없는 라일리가 지금처럼 웃을 수 있을까? 지금도 나 말고는 본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는 아인데···.'

물론 대마법사인 그녀의 조력이 있었다지만, 고작 19세의 나이로 황태와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세력을 꾸린 황녀의 수완도 절대 보통은 아니었다.

그 천재성은 이미 제국 내에 소문이 자자할 정도였으며, 밖에서 불리는 그녀의 별명은 무려 '철혈 황녀'였으니까.

지금처럼 그녀 앞에서는 저렇게 칠칠치 못한 모습을 보인다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마음을 터놓고 지낼 사람이 없다는 것은 큰 걱정거리였다.

이세아도 몇 번이고 황녀와 친하게 지낼만한 사람을 만들어 보려 했으나, 어렸을 때의 기억 때문인지 '이 세상 사람'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너무 컸다.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으니 천천히 고민해 보자. 그러고 보니까 내가 고2에 이곳에 왔으니, 돌아갈 쯤에는 고3이구나. 가만, 그러면 수능도 봐야 하나? 수능이 몇 개월 남은 시점이지?'

그 전까지 하던 심각한 고민과 비교하면 사소할 뿐이었지만···.

아우테리카 차원의 위대한 대마법사인 동시에 지구의 9년 차 여고생인 그녀에게는 나름 심각한 문제였다.

***

"자, 올리비아. 그간 조사해 왔던 내용들을 보완한 최신 정보야. 황궁을 비롯한 인근의 수비 사항과 관련 책임자부터, 수도 내에 머무르고 있는 귀족들의 인적 사항들까지. 이거 정리하느라 고생 좀 했다고?"

[이것이··· 그 앤드류라는 사내가 조사한 정보이옵니까···? 제법 쓸 만하군요···. 좋은 인재가 될 것 같사옵니다···.]

"쳇."

올리비아는 생색을 내려던 시아나를 무시하며 빼곡하게 기재된 서류를 순식간에 훑어 나갔다.

그 정보들을 위해 며칠 밤낮을 지새운 앤드류 위버의 피나는 노고가 있었지만, 사악하고 무자비한 불사의 군단 간부들은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 참! 왕께서 나중에 앤드류를 네 아래에 보내실 것 같던데. 걔 인간이니까 다룰 때 주의해야 한다는 건 알지?"

[걱정 마시지요··· 반항할 것 같으면 죽음보다 더한 공포를 체험시켜 주면 되겠지요···.]

"아니, 괜히 험하게 굴리다 망가져 버리면 아까우니까 조심히 다루라고! 인간은 먹을 거랑 수면을 보장해 주지 않으면 금방 죽어버리니까!"

[아··· 당연한 말을···. 저도 그렇게까지 거칠게 다룰 생각은 없사옵니다···. 원활한 영양 공급을 위해, 하루 세끼의 식사와 세 시간의 수면 시간을 보장하지요···.]

"어— 세 시간?"

올리비아와 대화를 나누던 시아나가 잠시 멈칫했다.

그래도 앤드류와 그간 함께한 인연도 있는데, 이쯤에서 한마디 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 용변과 세척 시간을 잊었군요···. 흐음··· 그래도 인간은 여가시간도 조금 필요할 테니, 하루에 18시간만 일하면 되겠사옵니다···.]

"저기, 그렇게 일을 시키면 오히려 점점 능률이 떨어질 것 같은데? 좀 더 풀어줘도 되지 않을까?"

[괜찮사옵니다···. 원래 그런 건 채찍질하다 보면 늘게 되어 있사오니···.]

그쯤에서 시아나는 확실히 마음을 굳혔다.

올리비아는 인간의 한계에 대해서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물론 하려면 할 수는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그건 결코 좋지 못할 터였다.

그 점을 지적하기 위해 그녀가 입을 열려던 순간···.

[육체가 있다고 하루 6시간이나 휴식이라니··· 부럽사옵니다···.]

'역시 그만두자. 미안, 앤드류.'

조용히 들려오는 올리비아의 혼잣말에 그녀는 고이 마음을 접었다.

생각해 보니 어차피 육체노동도 아닌데, 그리 가혹한 조건은 아니지 않겠는가?

편안히 자리에 앉아 능력만 사용하면 되니 하루 6시간 휴식이면 충분한 것도 같았다.

본인도 모르게 한 지구인의 미래에 먹구름이 들이찬 것과 별개로, 두 간부는 다시 본래의 주제로 돌아가 앞으로의 일을 논의했다.

불사왕이 내린 명을 완수하기 위해.

그렇게, 성자 하인리히가 '예지'한 대로.

불사왕 한니발 스트라우스가 제국을 습격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152

제국의 난 (2)

툴크 왕국의 타라크 시는 오늘도 분주한 사람들로 정신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북부 산맥에서 내려오는 몬스터의 수가 줄고, 강철의 성채 주변에 대규모 병력이 상주하기 시작하며 서서히 안정을 되찾아 가고 있다지만···.

아직 사태가 완전히 종결된 것이 아니다 보니 거리 곳곳에 용병들은 물론 상인들까지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어느새 타라크 최대 규모의 상단 중 하나로 성장한 휴버트 상회 또한 그중 하나였다.

"···그럼 그 일은 그렇게 처리하도록 하고, 이전에 맡긴 보석의 감정 결과는 어떻게 됐소?"

휴버트 상회가 들어선 커다란 건물의 상회주 집무실.

얼마 전에 장기 요양을 마치고 돌아온 휴버트가 서류를 뒤적거리다 한 간부에게 시선을 던졌다.

"예, 타라크의 귀금속 조합과 세 곳의 마탑에 감정을 의뢰한 결과, 전부 회주님의 예상대로 격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암암리에 이미 죽었다는 소문까지 돌았던 휴버트였으나, 그는 그것들이 모두 헛소문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복귀와 동시에 곧바로 새로운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바로, 전에 생각했던 '지구산 합성 보석'을 유통하는 것.

한창 사회가 혼란스러운 이때 무슨 귀금속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원래 가진 자들에게는 시기를 가리지 않는 것이 이런 물품이었다.

'오히려 다른 자산을 정리해 보관이 용이한 귀금속으로 바꿔 은닉하려는 자들이 많을 테니, 지금이야말로 이 사업을 시작할 적기라고 할 수 있지.'

그가 가져온 합성 보석은 큐빅 같은 겉만 비슷한 모조품이 아니었다.

고온, 고압의 실험실 환경에서 순도가 높은 물질로 만들어져 물리적, 화학적, 광학적으로 완벽한 보석이었다.

그런 만큼 오히려 천연 보석보다 내포물이 적어 매우 깨끗한 것이 특징이었고, 이 아우테리카에서 그것은 이질적이라 느껴질 정도의 파격이었다.

귀금속 조합의 감정사들이 일제히 혼란에 빠질 정도로.

'사치품의 가치는 그 물품이 얼마나 희귀한가에 따라 결정되는 법. 마법의 매개체로 사용할 수 없다는 약점은 있지만, 그것 또한 독특한 세일즈 포인트가 될 거다.'

그를 증명하듯 마법사들도 이것에 커다란 관심을 보이는 중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들에겐 실용성이 하나도 없는 예쁜 돌멩이에 불과했으나, 그것이 오히려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였던 것이다.

아무리 확인해 봐도 보석은 틀림없는데, 그것이 품고 있는 특성이 지금까지 봐 왔던 물건들과는 너무나도 달랐으니.

"···그래서 마탑은 물론 귀금속 조합도 적극적으로 구매를 타진해온 상태입니다. 그 희소성 때문인지 조금 부담스러워하는 모습이 있긴 했습니다만."

결국 지구산 합성 보석의 첫선은 매우 성공적이라는 소리였다.

애초에 너무 많은 물량을 풀 생각은 없었으나, 어차피 이 세상에서 이걸 본격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이는 자신뿐일 테니 너무 꽁꽁 싸매고 있을 필요도 없었다.

"그들을 통해 홍보 효과도 기대할 수 있겠지. 첫 거래인만큼 조금 할인해 주는 선에서 협상을 진행하도록 하시오."

소량씩 판매하게 될 이 프리미엄 상품은 앞으로 휴버트 상회가 규모를 키우는 데 쏠쏠한 도움이 될 것이다.

원래 희귀한 보석은 뇌물용으로도 최적이었으니까.

'물론 그 전에 이 땅의 주인인 아오니아 백작가에 진상할 필요도 있겠지.'

할리 때문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간 여러모로 편의도 많이 봐주었는데 이 정도 성의는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로 얻을 이득에 비하면 보석의 원가야 그리 비싼 편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아··· 그리고, 마빈?"

"예! 상회주님. 부르셨습니까?"

회의가 끝나기 직전, 휴버트의 나직한 호명에 수염이 무성한 사내가 얼른 대답했다.

그간 갖은 노력을 통해 동쪽 국경 너머의 제국과도 작게나마 교역을 성사한 공로가 있는, 상회의 동부 방면 확장을 맡은 담당자였다.

"제국 쪽과 관련해 할 말이 있으니 잠시 기다리시오."

"제국··· 말씀이십니까? 예, 알겠습니다."

작은 기회라도 있으면 놓치지 않는 게 상인의 올바른 자세.

그렇게 휴버트는 오늘도 열심히 상인의 본분을 다하고 있었다.

***

긴 시간 이어졌던 대륙 정상 회의가 마침내 종료되었다.

물론 모든 논의가 끝나지도 않았고 이제 고작 첫 번째 모임이 마무리된 것에 불과했지만, 그간 불협화음만 내던 각 세력이 뜻을 모아 의견을 합치했다는 데에는 큰 의의가 있었다.

그렇게 하나둘 대신전의 게이트를 통해 돌아가기 시작한 각국의 대표들.

하지만 그중 교단으로부터 뜻밖의 제지를 받은 이들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아제리온 제국의 황태자, 사이먼 카르테 아제리온이 이끄는 사절단이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럼 지금 우리더러 제국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아, 그런 얘기는 아닙니다. 그저 지금 돌아가시면 위험하실 수도 있다는 주의를 드리려는 겁니다."

"허어— 저희가 향할 곳은 아제리온 제국의 수도 제론입니다. 그 말은 제론이 위험하다는 뜻인데, 도대체 그런 말씀을 하시는 근거가 뭡니까?"

황태자의 보좌관으로 함께 따라온 귀족이 그들의 발길을 붙잡은 대신전의 주교를 채근했다.

상대가 상대인지라 함부로 대하지도 못하고, 그는 뒤쪽에서 언짢은 듯 이쪽을 바라보는 황태자의 눈치만 살피며 입술을 핥았다.

"으음, 성자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정확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제론에서 뭔가 변고가 있을 것 같다고 말이지요."

"예? 그러니까 한 사람의 말만 듣고 저희에게···."

"한 사람이 아니라 성자님이십니다. 그것도, 주신께 직접 계시를 받으신 분이시지요."

황당하다는 듯 무심코 내뱉은 말에 시종일관 조곤조곤 설득하던 주교의 목소리가 살짝 날카로워졌다.

무심코 내뱉은 말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던 모양.

"흠흠···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강요하는 게 아니라면 그냥 저희는 제 갈 길을 가겠다는 그런 의미로···."

그 예상 이상의 반응에 보좌관이 가볍게 헛기침하며 다시 입을 열던 그때.

"걱정해 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나."

뒤에서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던 황태자가 차가운 목소리로 그 말을 끊고 들어왔다.

"나는 제국의 황태자고, 수도 제론은 내게 안방과도 같은 곳이오. 문제가 생겨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거니와, 정말 변고가 생긴다면 오히려 내가 그 자리에서 직접 대처해야 마땅한 일. 교단이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오만?"

황태자 사이먼은 지금의 이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공국 파견군에 대한 교단의 간섭이 심해졌다는 보고를 들은 참인지라, 그들이 지금 보이는 모습 또한 무언가의 정치적 공작으로 보였던 것이다.

물론 교단과 성자라는 이름값이 있는 이상 그 경고가 완전히 빈말은 아닐 것이다.

뭔가를 감지하긴 했으니 그들이 이런 말을 하는 거겠지.

하지만 그들의 말을 듣고 그가 발길을 멈추고 안전한 곳에 숨는다면 그게 더 큰 문제가 된다.

'정상 회의의 참여를 위해 자리를 비운 것과는 사정이 다르다. 자칫하다간 라일리에게 빌미를 줄 수도 있는 일.'

거기다 자국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그는 수도의 방비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

제국은 얼마 전 대신전 습격 사건을 반면교사 삼아, 그 후부터 지금까지 총력을 기울여 황성에 철통같은 방비를 굳히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교단의 세가 강하다고 해도 아제리온 제국은 명실공히 세계 최강대국.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영토의 넓이와 자원, 그리고 인구수는 교단과 차원이 달랐고, 그 국력이 집중된 수도의 방비는 그야말로 철옹성이나 다름없었다.

'그래, 그 상대가 설령 불사왕이더라도 말이지. 놈이 불사의 군대를 통째로 끌고 오지 않는 이상, 대신전을 습격했을 때처럼 소수로는 어림도 없다.'

사이먼 황태자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으나···.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본인의 안전이었으니, 교단의 경고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는 만약을 대비해 평소 이상의 경비를 자국에 요청하고, 수도 방위군에 압력을 행사에 추가 호위 병력까지 차출한 후.

약 하루의 시간이 지나 모든 준비가 끝나고 나서야 게이트를 넘어 제론 대신전으로 이동했다.

···그 모든 노력 또한.

이미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 있을 뿐이었지만.

***

[오호— 과연, 제국의 수도라 할 만하군.]

발밑에 가득 펼쳐진 구름바다 위.

온몸에 어둠을 두른 한스가 빛조차 빨아들이는 깊은 눈으로 지상을 굽어보고 있었다.

「심연의 눈」으로 보이는 제국의 수도, 제론의 방비는 확실히 보통이 아니었다.

도대체 자원과 인력을 얼마나 쏟아 부었는지 황궁이 있는 중심부는 온갖 술법이 빼곡하게 도배되어 있었고, 그곳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뻗은 결계 또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수도 근방에 대한 색적 능력도 상정한 것 이상이야. 이거 여기서 조금만 더 가까이 접근하면 아무리 기운을 은폐하더라도 금방 들통나겠는데?'

전 대륙을 범위로 두고 있는 성녀의 탐지야 어떻게든 회피할 수 있었으나, 저 도시에 펼쳐진 결계처럼 일정 범위를 집중적으로 감시하는 형태는 당장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불사왕이 가진 기운 자체가 워낙 광포해서 이 이상 기운을 숨기는 건 도저히 무리였으니.

'위성 도시였던 토베아와는 차원이 다르네. 어쩌면 그것 때문에 더 수도 수비에 공을 들인 걸지도 모르겠군. 하긴 근방의 도시가 털린 게 불과 얼마 전이니 당연한가.'

거기다 추가로 하인리히를 통해 교단 이름으로 전해진 경고 또한 한몫했으리라.

어찌 보면 자승자박이라 할 수 있겠지만, 한스는 그것에 대해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이쪽도 평소 이상으로 많은 준비를 했으니까.'

이번 일은 상당히 중요한 시나리오인 만큼 그간 모아왔던 것들도 아낌없이 투자했다.

강렬한 인상을 주는 데는 스케일이 크면 클수록 효과적이지 않겠는가.

'슬슬 때가 되었군.'

마찬가지로 타이밍 또한 굉장히 중요한 요소였으나, 그것 또한 그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제 시작해 볼까.'

구름 위에 떠 있던 한스가 운석처럼 떨어져 내렸다.

삐이잉! 삐이이잉—!

땡땡땡땡—!

그와 동시에 도시에서 시끄러운 경보음들이 울려 퍼졌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 빨리 가속했다.

우우웅!

한순간에 도시 전체를 감싸고 휘도는 어마어마한 에너지.

그것은 눈 깜짝할 새에 수많은 술법들을 작동시켰고, 마치 연쇄 작용이라도 하듯 퍼져나간 빛무리는 도시를 아름답게 물들였다.

콰아앙—!

직후, 한스의 몸이 수도를 감싼 결계와 그대로 충돌했다.

[크흐흐흣— 제법 신경 쓰긴 했다만, 고작 이런 결계로 이 몸을 막기엔 어림도 없지.]

그는 스파크를 튀기는 결계를 가볍게 찢고 안으로 들어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삐이이잉—! 삐이잉!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빽빽하게 발동한 술법들로 어느새 철옹성이 되어 버린 도시 중심부의 거대한 황궁이었다.

마법과 주술, 연금술 등의 온갖 이능이 한데 뭉쳐 시너지를 이룬— 아우테리카 차원을 대표하는 신비의 결정체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대체 돈을 얼마나 갖다 바른 건지···. 제대로 발동한 모습을 보니 생각 이상으로 장관이네. 아무리 한스라도 저걸 부수려면 시간이 제법 필요하겠어.'

애당초 그의 목적은 황궁을 직접 타격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기껏 이렇게 수도까지 와서 저걸 보고 그냥 지나치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인사 정도는 해 주는 게 도리겠지.'

그래야 저들이 돈을 들인 보람이라도 느낄 테니까!

그렇게 한스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따뜻한 배려심을 마음에 품은 채 나직이 입을 열었다.

[자아, 나오너라. 엔트라시오, 헤라토스.]

그와 동시에, 그의 몸을 뒤덮은 어둠이 꿈틀거리며 순식간에 주변을 잠식해 나갔고···.

그 안에서 거대한 두 그림자가 공간을 찢으며 밖으로 튀어나왔다.

[쿠오오오——!]

[캬아아아——!]

거센 바람을 일으키며 포효하는 두 마리의 본 드래곤.

하지만 그들은 고작 시작에 불과했다.

[그럼 올리비아, 다른 놈들의 통솔은 너에게 맡기도록 하지.]

[맡겨만 주시옵소서···. 소녀, 최선을 다해 왕의 명을 이행하겠나이다···.]

하나둘 그의 주변에 모습을 드러내는 불사의 군대 간부들과···.

쿠우웅—!

"으아아악!"

퍼엉—!

"빨리 피해!"

도시 곳곳에서 폭음과 함께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랐다.

미리 잠입했던 노예··· 아니, 엑스트라들이 한스의 침입을 신호로 동시에 일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저기도 시작됐군. 역시 수도라 그런지 토베아보다 털어버릴 곳도 많더란 말이지. 뭐, 일이 끝나면 알아서 살아남아야겠지만.'

물론 그렇게 생존한다고 해도 남은 것은 다음 현장에 투입될 미래뿐이겠으나, 운이 좋다면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도 있는 노릇 아닌가?

원래 희망이란 게 다 그런 법이었다.

[크후후— 아아, 좋구나! 이것이야말로 파멸의 전주곡일지니! 필멸자들이여, 내 이름을 기억하라! 내가 바로 불사왕, 한니발 스트라우스이니라! 크하하핫—!]

그렇게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자기 어필과 함께.

마침내 불사왕이 제국의 수도, 제론을 직접 침공했다.

#153

제국의 난 (3)

콰아앙—!

"꺄아악!"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대륙의 최강국인 만큼 오랜 평화에 젖어 있던 제국의 수도, 제론이 갑작스러운 폭음과 비명으로 가득 찼다.

[끼히히힛!]

[으우우···.]

수많은 유령이 연신 귀곡성을 흘리며 허공을 날아다니고.

챙—! 촤앙!

"막아!"

"이놈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수도 전역에 배치된 수비군과 귀족가의 경비들이 습격해온 언데드를 비롯한 악의 추종자들과 격렬히 충돌했다.

하지만 그 모두를 통틀어서 가장 눈에 띄는 장소는 따로 있었으니···.

당연하게도, 수도의 정중앙에 위치한 황궁이 바로 그곳이었다.

[크워어어——!]

[키야아아——!]

듣는 이를 공포에 빠뜨리는 드래곤의 포효.

그리고 그것과 동시에.

죽음을 형상화한 것과 같은 두 줄기의 시커먼 기운이 그대로 황궁에 내리꽂혔다.

쿠웅! 콰아아앙—!

다행히 황궁을 둘러싼 찬란한 은빛 결계가 그 끔찍한 기운을 막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 안에 모여 있는 이들은 결코 웃을 수 없었다.

공격 하나하나를 막아낼 때마다 결계가 눈에 띄게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으니까.

"큭! 불사왕도 모자라 본 드래곤들까지···! 현재 피해는 어떤가?!"

"현재까지 낙오 인원은 4명뿐입니다! 하지만 이만한 공격이 계속된다면, 다른 이들도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결계의 중추를 이루는 마법진 위에서 황궁 마탑의 탑주, 대마법사 로렌스 후작이 이를 갈며 눈앞에 떠오른 영상을 노려보았다.

브레스 직후 발동시킨 요격 마법으로 본 드래곤들은 뒤로 물러난 상태였지만, 불사왕 한스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시커먼 죽음의 기운을 피워 올리며 후속타를 준비하고 있었다.

"젠장! 다음 공격이 온다! 모두 충격에 대비해!"

쿠우우웅—!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폭음이 터져 나오고, 황궁을 둘러싼 결계를 따라 거대한 마력 충격이 역류해 오기 시작했다.

"커헉!"

"으으··· 죄, 죄송합니다. 더 이상···."

추가로 누적된 충격을 이기지 못한 마법사 두 명이 파랗게 질린 채 마법진에서 물러났다.

이로써 현재까지 낙오한 인원은 여섯 명.

결계의 효율을 극한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보조만 하고 있을 뿐인데도, 그것조차 버티기 힘들 정도의 여파가 계속해서 전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나가떨어진 건 한창 배우는 중인 어린놈들뿐이지만, 지금은 한 손이라도 시급한 상황이다. 이렇게 하나둘 빠지고 나면 나중엔 고위 마법사도 버티기 힘든 상황이 될 터.'

로렌스 자신이 이 악물고 방어에만 매달린다면 몇 시간 정도는 버틸 수도 있겠으나, 반격 없이는 그저 샌드백 신세가 될 뿐이었다.

이후의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이상 지금 상황이 계속 이어져 봤자 좋을 건 없었다.

"큭, 프리스틴 자작은! 황궁이 이 난리인데 지금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설마 이 상황에서조차 아직도 황녀님 옆에만 붙어 있는 건 아니겠지?!"

그간 황궁에 상주하던 대마법사는 총 세 명.

한 명은 황태자와 함께 정상 회의에 참여했고, 다른 한 명인 이세아는 아직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설마 아직도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 텐데.

"그··· 그게, 제가 알아봤습니다만···. 프리스틴 자작은 오전에 황녀님과 함께 황궁을 나섰다고 합니다."

"뭣? 하필 지금 밖에 있다는 말인가? 그것도 황녀님과?"

로렌스 후작이 당황하던 순간에도 마력의 역류는 계속되고 있었고.

그들은 다시 두 명의 마법사가 더 낙오하고 나서야 다시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가만, 그러고 보니 황태자 전하도 오늘 성지에서 돌아오신다고 하지 않았나?"

"맞습니다. 그, 사실 이미 예정 시간이 지났는데···. 시기를 따져보면 아마 지금쯤 저 난장판 어딘가에···."

"···맙소사. 타이밍 참 거지 같군."

결국 그는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이 위급한 순간에 하필 두 명의 대마법사와 두 명의 황위 계승자가 모두 저 바깥에 있다는 것이다.

가장 안전한 이곳이 아닌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르는 저곳에.

콰아앙—!

하지만 그의 참담한 심정은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듯, 그 와중에도 불사왕의 공격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

콰아앙—!

황궁이 있는 방면에서 다시 한번 거센 폭음이 터져 나왔다.

"황녀님, 이쪽으로 오시지요."

가볍게 라일리 황녀를 끌어당긴 이세아가 한 손을 허공에 뻗자, 시퍼런 기운이 순식간에 응집하며 날아오던 돌조각 하나를 막아냈다.

"···고마워요, 프리스틴 자작."

주변에 수행인들과 호위 병력도 함께하는 만큼 격식을 차린 대화를 나누고 있었으나, 그들은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심경을 나누며 다시 안전한 장소를 찾아 움직였다.

'하필 지금 일이 터지다니. ···경고를 해줄 거라면 좀 더 정확하게 해 달란 말이야.'

이세아는 내심 한숨을 내쉬며 애꿎은 교단을 원망했다.

황녀 일행이 황태자의 복귀 날에 황궁을 나섰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가 교단의 경고를 핑계로 자신의 호위를 위해 병력을 추가로 차출하면서, 군부 쪽에 따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낌새가 포착되었던 것이다.

정치 문제가 끼어들어 버리면 황녀도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는 일.

안 그래도 열세인 상황에서 대응조차 늦을 수는 없었고, 오히려 이걸 잘 이용해서 역공의 발판으로 만들 생각도 있었다.

'지금 와서는 괜한 짓이 되어버렸지만.'

하지만 교단에서 전해진 경고라는 것도 '조만간 제론에서 무슨 일이 터질 것 같다'는 정도여서, 무작정 기약 없이 황궁 안에 숨어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겨우 그 추상적인 한 마디가 무서워서 집 밖으로 나오지도 않는 지도자를 도대체 누가 믿고 따르겠는가.

'수도의 방위 결계가 작동한 이상 아무리 대마법사인 나라도 함부로 순간이동을 할 수는 없어. 안전하게 이동하기 위해선 인가받은 마법진이 필요한데···. 아니, 황궁이 저렇게 공격받고 있는데 통로를 열어뒀을 리 없지.'

만약의 사태에 지휘부의 탈출을 위한 통로는 있겠지만, 적이 침투할 우려가 있으니 들어오는 입구는 전부 막아놨을 것이다.

결국 황궁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포기하고 이 바깥에서 알아서 생존을 꾀할 수밖에 없는 상황.

'거리는 좀 멀지만 역시 대신전으로 가서 게이트를 이용하는 게 가장 안전할 것 같네. 여차하면 다른 사람들은 다 버리고 라일리만 챙겨서···.'

"아."

그렇게 타개책을 떠올리며 일행을 선도하던 이세아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이동하면서도 계속해서 은밀하게 마력을 흩뿌려 주변을 탐색하던 그녀의 감각에 굉장히 익숙한 기운이 감지된 것이다.

"프리스틴 자작? 무슨 일이죠?"

"그게···."

라일리 황녀의 물음에 입을 열면서도 그녀의 표정은 찡그려진 채 펴질 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느껴진 이 마력은···.

"아무래도 황태자 전하가 근처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마력을 흩뿌려 주변을 탐색하는 이 기운은 분명 황태자와 함께 정상 회의에 참여했던 가필드 백작의 것이었다.

자신이 그를 감지한 만큼 분명 그도 자신의 위치를 파악했겠지.

아무리 상황이 안 좋다지만, 그간 황태자가 벌였던 짓들을 생각하면 그와 함께하는 건 썩 좋은 방법이 아닐 터였다.

라일리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인상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이쪽으로 접근해 옵니다. 어떻게 할까요?"

하지만 저쪽의 판단은 그녀들과 달랐던 모양이었다.

하긴, 더러운 짓을 해도 황태자 쪽이 했지 이쪽은 일정 선만은 꼭 지켰으니 생각이 다를 수밖에.

아직 제법 거리는 있었으나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들을 피하기도 곤란했다.

황태자가 무서워 도망친 5황녀, 위기 상황에 힘을 합치는 것을 거부한 이기주의자, 대의를 저버리고 개인의 감정을 우선한 소인배···.

이걸 이용해 저쪽에서 또 어떤 프레임을 씌우려 할지 몰랐으니까.

"후우—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죠. 모두 끝까지 긴장을 유지하고, 절대 빈틈을 내보이지 않도록 하세요."

결국, 결의를 다진 그들이 황태자 일행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아?"

다시 한번 멈칫한 이세아가 한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황태자 일행이 있는 곳과 비슷한 방향, 하지만 좀 더 먼 곳에서···.

"이건···."

마치 타오르는 태양처럼 뜨겁고, 정열적이며, 찬란한 기운이.

고오오오—

맹렬한 속도로 다가와.

후우웅—!

거센 후폭풍과 빛의 잔영만을 남기고, 그대로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꺄악!"

"빠, 빨라···!"

한순간 몰아치는 바람에 시녀들이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으며, 황녀의 호위를 맡은 기사들은 검을 반쯤 들어 올린 채 마른침을 삼켰다.

그저 지나친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강렬한 존재감을 새기고 떠난 이였지만, 사실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잘 아는 이세아는 곧바로 감각을 끌어올리며 그 기운이 향한 황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때를 맞춘 듯, 그곳에서.

쿠우우우웅—!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폭음과 함께 강렬한 여파가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다행히 수도 전체를 감싼 결계 덕에 한껏 억제된 상태였으나, 지금까지 터져 나온 것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충격파였다.

"···성자, 하인리히 세인트 랜드가드···."

그 발원지에서 끓어오르듯 발산되는 기운에 이세아가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낮게 읊조렸다.

"네? 설마, 방금 지나간 게 성자님이었나요?"

"예에? 주신교단의 성자님 말씀이십니까? 그 용사라는···!"

"서, 성자님이 방금 저희 곁을 지나치셨다고요? 오, 주신이시여!"

그녀의 혼잣말에 황녀는 물론 다른 이들도 한꺼번에 반응했다.

저도 모르게 신께 기도를 올리는 신도도 있을 지경.

하지만 성자란 본디 그런 존재였다.

굳이 그 격을 따지자면 황제와 동급··· 아니, 지금 같은 대륙의 위기 상황에서는 그 이상이라고 봐야 하리라.

'따지고 보면 저 남자야말로 이 세상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겠네.'

신이 선택한 이 세상의 구원자.

물론 그 무거운 이름값에 비례한 중압감이 항상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을 터였다.

희생과 헌신은 그에겐 일상과도 같은 일이었겠지.

고작 한 사람을 챙기는 것만도 버거운 이세아 자신과는 백만 광년쯤 떨어진 위인이라 봐야 했다.

'···저 사람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것이 이 사태에 대한 책임감이든, 어떤 숭고한 사명감이든··· 아마 그녀가 그를 이해할 일은 앞으로도 없을 테지만.

***

"당황하지 말고 전열을 유지해! 아직 결계는 멀쩡하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너희는 자랑스러운 제국의 황실 수호대다! 황제 폐하께 실망을 안겨드릴 셈이냐!"

결계의 경계에서 일전을 준비하던 이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하인리히가 가볍게 입술을 핥았다.

'딱 타이밍을 잘 맞췄군.'

제론 대신전은 제국의 수도에서도 외곽에 있었다.

사실 성지를 제외하면 제론뿐만 아니라 신전 이상 규모의 시설이 위치한 곳은 어디나 사정이 비슷했다.

차지하는 부지가 넓은 것은 둘째 치고, 그곳에 상주하는 성기사단과 성전사대 같은 무력 집단을 그 땅의 지배자들이 그리 달갑지 않아 했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여기는 황제까지 기거하는 제국의 수도였으니 당연한 일.

사실 보통 주민들은 도시 내부 곳곳에 자리한 작은 기도소나 사원을 이용했으니, 특수 시설이나 다름없는 대신전의 접근성은 딱히 상관없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말인 즉, 수도의 중심부에 있는 황궁과 대신전의 거리는 그만큼 멀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으며.

하인리히처럼 초인적인 능력을 갖추지 않은 이상 단기간에 그 거리를 주파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래, 아직도 어중간한 곳에서 얼쩡대던 황태자처럼 말이지. ···이세아와 5황녀까지 있을 줄은 몰랐지만.'

끼기기긱! 콰앙!

그는 광검을 휘둘러 앞을 막아선 검은 낫을 쳐내고, 곧바로 다시 불사왕에게 달려들어 죽음의 기운을 베어 갈랐다.

[크하하핫! 역시! 네가 내 앞을 막아설 줄 알았다. 나의 유일한 대적자, 하인리히여! 어떻게 알고 이렇게 빨리 찾아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용사라면 응당 그 정도는 해야겠지. 크흐흣!]

"세상 모든 만물은 주신의 뜻 아래에 있나니. 너 또한 그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역대 모든 불사왕들이 그랬듯 너도 곧 그들의 뒤를 따르게 될 것이다, 한니발!"

찬란한 광채가 휘감긴 황궁을 배경으로 대치한 불사왕과 빛의 기사.

그 동화와도 같은 환상적인 무대에서, 지옥에서 올라온 듯한 음산한 목소리와 신념이 가득 담긴 굳건한 목소리가 맞물리며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쿠오오오——!]

[캬아아아——!]

그에 화음을 넣는 것처럼, 황궁에서 뻗어져 나오는 광선을 피해 하늘을 맴돌던 본 드래곤들이 하인리히를 내려다보며 일제히 포효를 내질렀다.

하지만 불사왕은 그 이상의 개입을 차단하듯 가볍게 손을 내젓고 다시 그를 내려다보았다.

[재밌구나, 아주 재미있어. 빛의 기사, 하인리히 세인트 랜드가드. 너는 아는가? 나는 너와 마주할 때마다, 네가 나의 앞길을 막아설 때마다, 오히려 살아있음을 절실히 실감한다. 이미 죽은 몸임에도 말이지!]

세상을 품에 안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는 양손을 활짝 벌린 채 고개를 치켜들고 하늘을 우러렀다.

[자아—! 좀 더, 좀 더 내게 가르쳐다오. 삶을! 생의 의지를! 죽음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굳건한 마음을!]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마력을 울려 만들어낸 목소리임에도 짙게 느껴지는 그것은···.

오로지 본인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집착'이었다.

그리고 그에 화답하듯, 상서로운 빛에 휘감긴 하인리히가 천천히 성검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이제야 확실히 알겠구나. 그날, 내게 그런 계시가 내려온 이유를."

유려하게 움직인 검날의 빛이 허공을 아름답게 수놓고, 그 검끝은 마침내 정확히 불사왕을 겨누었다.

마치 연극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 또한 신의 인도하심이라."

진짜로 연극이었지만.

#154

제국의 난 (4)

오랜 평화에 젖어있던 제국의 수도 제론은 갑작스러운 난리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모두에게 평온한 죽음을—!"

"마, 막아! 놈들이 백작님을 노린다!"

흑마법사를 비롯한 한스의 추종자들이 눈이 뒤집혀 각자에게 주어진 목표를 습격했다.

역천의 서약을 포함한 그 불순 분자들은 그간 철저한 통제 속에서 자결도 하지 못한 채, 말 그대로 죽지 못해 사는 억제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이번 일은 그런 상황에서 내려온 불사왕의 첫 번째 명령이었던 것이다.

이미 한참 전에 망가진 사고를 가지고 있던 그들은 자신의 목숨조차 도외시하고 오로지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움직였다.

설령 그러다 죽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죽음 또한 종속에서 벗어나게 해 줄 탈출구에 불과했으니까.

그들만으론 조금 버겁다 싶은 곳은 어김없이 언데드들과 그 간부들이 합류해 판을 흔들었고, 기습의 이점 덕분인지 지금까지 그 작업은 그럭저럭 순조롭게 이어지는 중이었다.

[흐음··· 이쪽은 대충 정리 됐···. 아, 거기 당신? 당신의 다음 목적지는 그쪽이 아니랍니다···? 대체 얼마나 멍청하면 유령들의 인도도 제대로 따르지 못하시는지···. 그런 뇌는 빨리 버려 버리는 게 낫지 않나 싶사온데, 소녀가 도움을 좀 드리오리까···?]

그리고 그 모두를 통솔하는 것이 바로 언제나 든든한 한스의 오른팔, 밴시 퀸 올리비아였다.

그녀는 전투 쪽은 신경도 쓰지 않고 오로지 유령들을 통해 무대를 조율하는 데에만 힘쓰는 중이었다.

수도를 감싼 결계는 그 내부에서 날아다니는 유령들을 한계까지 약화시켜, 도저히 전투가 불가능할 수준으로 만들어 버렸지만···.

처음부터 그들의 역할은 도망만 다니며 올리비아의 눈과 귀, 그리고 입이 되어주는 것이었으니 딱히 문제 될 것도 없었다.

[모든 것은 왕의 뜻대로···.]

그녀는 대기가 요동치는 방향을 일별하고는 다시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집중했다.

기습으로 이점을 볼 수 있는 시기가 지나, 슬슬 인간들의 반격이 거세지고 있기도 했으니.

***

"크헉—!"

"무리하지 마! 우리의 역할은 시간을 버는 것뿐···!"

한순간에 밀집하는 흑마력.

그것은 눈 깜짝할 새에 어떠한 법칙성을 띠었고, 이내 지고한 신비가 되어 세상에 현현했다.

쿠르르릉!

저주를 머금은 매서운 검은 폭풍이 주변 일대를 휩쓸면서 그에 휘말린 수십의 기사 중 일부가 그대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흐음, 황성 옆이라 그런지 결계의 영향이 강하긴 하군. 아무리 적당히 했다지만 이 정도까지 효과가 떨어질 줄이야.]

그 기사들이 온갖 마도구를 걸치고 강화 마법까지 받은 제국의 최정예 기사단이라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 어떤 준비를 하든, 격이 되지 않는 이들은 그저 시간을 버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테니.

우우웅— 콰아앙!

그때 황궁을 둘러싼 결계 겉면에 거대한 황금빛 마법진이 생성되고, 그곳에서 강렬한 빛의 물결이 다시 한번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심연이 뭉친 듯한 어둠에 가로막혀 목표에 큰 타격을 주지는 못했으나.

그로 인해 발생한 아주 작은 틈은 근접 전투를 맡은 이들이 접근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주기엔 충분했다.

"하압!"

어둠 속의 등대처럼 전신에 신성한 아우라를 휘감은 용사, 하인리히.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빛무리는 계속해서 끔찍한 기운에 노출된 이들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으며, 그것은 그들의 몸과 마음을 회복시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불어 넣어 주었다.

하지만 그의 진가는 그런 보조 능력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으니···.

화아악—!

'광검'과 '증량'의 축복을 머금은 그의 성검이 새로 얻은 「무도의 길」의 깨달음을 담아 휘둘러졌다.

흐르는 듯, 멈춘 듯. 새벽을 가르는 여명과도 같은 그 검은 동시다발적으로 발동한 흑마법들을 베어 가르며, 불사왕에게로 향하는 길을 활짝 열었다.

"지금!"

"하압—!"

그 순간 기회를 노리던 두 명의 제국 기사가 순식간에 짓쳐 들었다.

황궁의 경비를 총괄하는 황실 수호대장과 황제를 지키는 근위 기사단의 단장.

둘 다 극의를 넘어서 불사왕과 직접 맞상대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이들이었다.

황궁 내에 있는 또 다른 마스터인 부단장은 황제를 밀착 경호하기 위해 참전하지 않았지만, 그런 건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단장이란 사람이 보이는 위용이 대단했다.

스칵— 서걱—

달빛처럼 서늘한 검광이 한스에게서 뻗어 나온 수많은 검은 뱀들을 가르고 지나갔다.

정확히 마력의 맥을 베어 버리는 그 검술은 하인리히마저 감탄을 터트릴 정도로 효율적이면서도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저 노인, 대단한데? 아무리 농도가 낮다지만 심연의 기운을 뭉쳐 만든 것을 저리 쉽게. 이만한 강자가 황궁에 숨어 있었다니, 과연 제국이란 건가. 나이 때문인지 체력이 좀 부족해 보이긴 한데···.'

자글자글한 주름에 걸맞지 않은 건장한 체구의 노인, 근위 기사단장 콘웰은 검사로서 초월에 다다른 이였다.

저 정도 수준이라면 할리는 물론이고, 온전한 성혈이었던 비스크 유페르쉬조차 단독으로 처리할 수 있을 터.

'물론 온갖 스킬과 「혼혈진화」로 일반적인 성혈보다 강해진 하인즈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그는 그저 순수한 경지로만 따지자면, 하인리히조차 용사와 각성자로서의 여러 보정이 없이는 상대가 안 될 것 같은 고절한 검사였다.

'왜 아제리온 제국이 대륙 최강국인지 알겠네. 거기다 강자들이 여기에 있는 이들이 전부도 아닐 테고.'

"으랏차!"

그렇게 그들의 저력에 감탄하는 순간, 여러 공세에 힘입어 발생한 한스의 빈틈에 짐승처럼 달려드는 이가 있었으니—.

콰아앙—!

검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는 도끼를 장작 패듯 내려찍는 이.

로셀리아 대신전에 있다가 제론으로 지원하러 온 용맹한 야만 전사, 할리였다.

"크하하핫! 여기 오면 불사왕의 골통을 부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오긴 했는데! 이거 부서지긴 하려나 모르겠구만!"

[호오, 제법이군.]

빠지직!

아슬아슬하게 손가락 한 마디만큼의 거리를 두고 검은 기운에 가로막힌 도끼날.

그는 미련 없이 몸을 뒤로 날려 공간을 꿰뚫는 심연의 뱀을 피하고, 이번엔 한 손에 손톱을 길게 뽑은 채로 다시 달려들었다.

'밸런스를 맞추려고 할리까지 부르긴 했는데, 생각 이상으로 제국의 저력이 만만찮군.'

이미 성지의 여유 전력은 대륙 곳곳에 지원을 보낸 후라, 성자까지 자리를 비운 대신전에서 더 이상 전력을 빼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교단 대신 할리가 '자발적으로' 제국 지원에 나선 것이었는데···.

이제 보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던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위이잉—! 콰르르릉!

그를 직접 상대하는 강자들과 더불어, 황궁의 결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마법 지원의 수준이 굉장히 높았던 것이다.

[흐음, 이거 제법 번거롭구나.]

한스는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번개를 가볍게 막아내며 불평을 토했다.

전투가 이어지며 꾸준히 자리를 옮겼음에도 불구하고, 황궁을 매개로 발동한 마법은 수도 전체를 사정거리로 두고 있는 듯 조금도 약해지지 않고 있었다.

'사전에 파악한 정보로는 저 안에 남은 대마법사는 이제 고작 한 명일 텐데.'

그런데 그가 황궁의 결계를 통해 하급 마법사들의 보조까지 받자, 대마법사가 대여섯 명은 되는 것처럼 쉴 새 없이 고위 마법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크워어어——!]

[키야아악——!]

콰아아앙!

쿠우웅!

심지어 본 드래곤 두 마리가 계속해서 결계를 두드리는 중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황궁의 결계는 위태롭게 흔들리는가 싶다가도 내부에서 안정적인 에너지가 꾸준히 공급되자, 금세 다시 모습을 회복하길 반복하고 있었다.

'마력 흐름을 보아하니, 지금이 기회라 여겨 무리해서 여력을 쥐어짜 내는 것 같긴 한데···. 흐음, 드래곤 하트까지 사용 중인가? 필사적이군.'

어쨌든 그 노력이 가상하기도 했으니 이제 황궁을 노리는 것은 여기까지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애초에 인사 이상의 의미는 없기도 했고, 슬슬 처음 계획을 시작해야 할 때였다.

[자아, 좀 더 분발해 보거라. 흥이 식으려고 하지 않느냐?]

콰드득!

"크악!"

"티모스 경!"

한스에게서 뻗어 나온 수십 줄기의 심연 중 하나가 지친 한 기사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그 기원이 기원인지라, 어지간히 격이 높지 않은 이상 급소에 물리면 곧바로 즉사였다.

그렇게 성장한 「심연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된 존재의 악업(惡業)을 기준으로, 그의 발목을 잡던 이들이 하나둘 죽어 나가길 한참.

자연스럽게 이동을 거듭한 그들의 싸움은 어느새 그가 목표로 한 지점까지 이르러 있었다.

'찾았다.'

그렇게 한스는.

데스나이트 로드 카람과 아크리치 드웰을 비롯한 언데드 병력에 발목을 잡혀 있던 이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당연히 그와 싸우던 제국 기사들도 그들을 발견한 건 마찬가지.

황실 수호대장과 근위 기사단장도 그쪽을 바라보며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엇? 황태자 전하? 5황녀님까지?"

"허어— 가필드 백작에 프리스틴 자작도 있군. 두 황손 분들까지 모시고 있으면서 아직까지 이 위험한 곳에 남아 있다니···."

이미 격전을 치르는 중이었는지 엉망이 된 행색의 백이 넘는 정예군.

그들 틈에서 한껏 거리를 두고 있던 두 황족과 대마법사들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콘웰 공!"

"후우, 그것이 저희도 어쩔 수가···."

당연히 그들도 피하려고 시도해 보긴 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결국 합류한 그들이 대신전으로 이동하던 도중, 불사의 군대와 그 간부들이 나타나 작정한 듯 달라붙어 방해하는 데 뭘 어쩌겠는가?

아무리 뿌리쳐도 끈질기게 달라붙어 오는 그들 때문에 불사왕의 기척이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피하지 못한 그들이었다.

"큭, 아무튼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

"···언데드들이 몰려온다!"

그 조우를 통해 전투가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빠진 틈을 타, 제국 측 인사들이 서둘러 합류했지만···.

그들이 전열을 재정비할 시간은 그리 길게 주어지지 않았다.

때를 맞춰, 도시를 휘젓던 불사의 군대가 일시에 싸움을 멈추고 이곳을 중심으로 집결하기 시작했으니까.

[위대한 죽음의 왕을 위하여!]

[이 세상에 절망을— 나약한 이들에게 끊이지 않는 공포를—!]

수도의 결계 탓에 이곳에 소환된 언데드들은 하나같이 고급 병종들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것은 바로 이전 대전쟁의 주역이었던 불사의 군대 간부진들.

콰아앙—!

그 갑작스러운 공세에 당장은 인간 측이 밀리고 있는 형국이었지만, 결계의 도움과 황궁의 마법 지원이 함께하는 이상 곧바로 무너질 정도는 아니었다.

단지, 정신없이 흘러가는 혼전의 양상이 되며 서로에게 신경 쓰기가 더 힘들어졌을 뿐.

[아아, 역시 제국의 수도라는 건가. 역시 이런 방법으로 금방 무너뜨리긴 힘들 것 같구나. 으음··· 거기다 방해꾼들이 많아서 그런지 생각했던 것보다 재미가 없기도 하고.]

그리고 마침내.

한스가 먼저 운을 띄우며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불사왕, 가엾은 망자의 왕이여! 너는 지금 벌이는 일들이 즐거운가? 심연의 속삭임에 따라 세상을 죽음으로 뒤덮고, 그에 맞서려는 이들과 싸우는 것이?"

[크후후— 그런 저열한 망념 따위 이미 극복한 지 오래다. 아까도 말했을 텐데?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생과 사의 충돌에서 오는 그 격렬함이라고!]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물론 용사와 마왕이 힘을 합해 만들어 가는··· 전 대륙을 대상으로 한 사기극이었다.

그들이 싸움을 멈추고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자, 하인리히와 함께 한스를 상대하던 이들도 공격을 멈추고 다른 곳에 힘을 보태며 일단 상황을 지켜보았다.

가장 큰 적이라고 할 수 있는 불사왕이 알아서 싸움에서 빠져 줬는데 괜히 자극할 필요는 없었으니.

[최초에 원했던 것은 힘이었으나, 그 대가로 나는 생을 잃고 그저 흘러가듯 존재할 뿐이었다. 존재 의의를 잃고 관성대로 오직 힘과 죽음만을 추구하며.]

불사왕의 회고가 나직이 흘러나왔다.

시끄러운 전장 속이었으나, 마력을 담은 그의 목소리는 전혀 쇠하는 일 없이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이 자리에 있는 누구나가 들을 수 있도록.

[하지만 그때 마주한 것이다! 일개 성기사의 몸으로 스스로의 생을 불사르고 죽음에 맞서, 기어코 이 불사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은— 나의 대적자. 그래, 하인리히 세인트 랜드가드. 너를 말이다!]

서사를 쌓아간다.

불사왕과 용사의 만남에서부터 시작된 계기와 그로 인해 일어난 변화.

그 후부터 그는 관성적으로 이어가던 대륙 멸망의 야욕보다 개인의 흥미를 우선하기 시작했다.

극단적인 파멸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비교적 온건한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고 봐도 좋을 터.

물론 심연을 열어 광기 사태를 일으키고 공국을 파멸시키는 등 그 행보 자체를 멈춘 건 아니었으나, 그것도 세상을 멸망시키고자 하는 목적과는 거리가 멀었다.

굳이 따지자면···.

"관심 끄는 방식의 스케일이 크기도 하구나."

그것은 힘을 가진 미친놈이 자신을 봐 달라고 난장을 치는 행위였다.

물론 그 세계급 민폐는 작은 변화 정도로는 바꿀 수 없었던, 기본적으로 내재한 극악(極惡)한 본성이 큰 영향을 준 것이었다.

'···라는 설정이지. 미친놈의 사고방식이라 하면 부족한 설득력도 뭉개버릴 수 있으니까.'

하여튼, 둘의 대화는 지금부터가 본론이었다.

"불사왕, 한니발. 그렇다면 차라리 나와 내기를 하나 해보는 건 어떤가?"

정확히 말하자면 대화라기보단 1인극이라고 해야겠지만.

#155

제국의 난 (5)

[호오, 내기라? 크크큭— 그것참 흥미롭군. 일단 말이나 들어 보지.]

이후 이어진 말의 요지는···.

로한 공국 방면을 통해 대규모 전쟁이 벌어지면 성자인 그도 온전히 불사왕에게만 집중할 수는 없으니, 일단 전쟁은 제쳐두고 다른 방식으로 승부를 가리자는 것이었다.

[아아— 따분한 이야기로구나. 설마 그런 단순한 제안을 내가 받아들이리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불사왕의 그 냉담한 대답은 전투 와중에도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이들 모두가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이 제안의 전제 조건은 그의 흥미를 끌 요소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으니, 그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면 더 이상 대화는 진전될 수 없었다.

그에 하인리히가 재차 입을 열려던 순간···.

[···아니지, 잠깐의 여흥이라면 나쁘지 않을 것 같구나. 크흣, 마침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가 꺼내든 재미있는 생각이란 바로.

전 대륙을 말판으로 삼은— 일종의 보드게임이었다.

불사왕이 특정한 곳을 공격하면 용사는 그곳을 막는다.

막는 데 실패한다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인류의 손실로 직결되고, 성공할 경우엔 공격에 나섰던 불사왕 측의 병력을 각개격파 할 수 있다.

용사 측의 승리 조건은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불사왕의 공세를 막아내고 마왕성으로 향해 그를 쓰러뜨리는 것.

패배는 당연히 말판이 되었던 대륙의 멸망이었다.

[물론 이쪽이 제안을 받아주는 만큼, 그쪽에 페널티도 있어야겠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뭔가 건수라도 발견했다는 듯이 음흉한 웃음을 흘린 한스가 천천히 말을 덧붙였다.

[첫 번째, 시간과 장소에 대한 통보는 없다. 그저 이 몸이 내킬 때, 내키는 장소를 파괴할 생각이니까. 명색이 성자라면 그 정도는 알아서 대처해야 하지 않겠느냐?]

"으음···!"

또한 이 '놀이'의 시간제한에 대해서도.

[두 번째, 네 재롱에 어울려주는 것은 삼 년까지다. 지루한 내기를 오래 끌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크흐흣, 과연 그 안에 내 목을 치러 올 수 있을지 기대되는구나. 그 기다림 또한 색다른 즐거움이 되겠지!]

새로운 관심거리에 흥미가 동했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는 한스.

그렇게 대규모 전쟁을 막고 어떻게든 피해를 줄이려는 용사와, 오로지 자기의 즐거움만을 추구하는 사악한 불사왕 간의 내기가 성사되었다.

어차피 인류 측으로선 더 이상 나쁠 것도 없는 조건으로.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방심한 순간.

[그리고 세 번째···.]

그의 뒷말이 이어지며—.

심연을 담은 듯한 시선이 전장의 한구석으로 돌아갔다.

***

5황녀와 황태자가 합류했을 당시.

"오랜만이군, 라일리. 나 없는 동안 제법 편하게 지냈나 보구나. 여러모로 살이 아주 많이 쪘어."

"오라버니야말로 회의는 잘 갔다 오셨나요? 교단 분들에게는 죄송하기 그지없네요. 이번에도 그렇고, 오라버니가 가는 곳마다 환란이 생기는 걸 보니 주신께 저주라도 받으신 것 같은데."

그들은 만나자마자 웃는 얼굴로 서로를 매도했다.

황태자는 서서히 성장하며 시시각각 자신의 자리를 위협해 오는 라일리 황녀를 견제하기 위해 온갖 더러운 수작을 서슴지 않았고, 그녀는 그에 대항하기 위해 더 독하게 나갈 수밖에 없었으니···.

이미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탄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당장 그들이 마주한 상황이 상황인데다, 중립에 속하는 수도 방위군의 인사들도 함께 있다 보니 그 이상 대놓고 반목하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조차 정치적인 면을 생각해야 하는 게 황족의 업이었으니까.

그렇게 꺼림칙한 동행을 하며 대신전으로 향하던 것도 잠시.

결국 그들은 노린 듯이 쫓아오는 불사의 군대에게 발이 묶이는 처지가 되고 말았으며.

···그건 곧 불사왕과 조우하게 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때 어떻게 해서든 라일리만이라도 데리고 빠져나갔어야 했나?'

우우웅—!

이세아의 몸에서 마력이 끓어 넘치듯 부풀어 올랐다.

그것은 잠시도 멈추는 일 없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쩌저적—!

특정 법칙에 따라 엮인 그 거대한 에너지는, 마침내 극빙(極氷)의 이적이 되어 공간을 휩쓸었다.

[크악! 이 인간 꼬맹이가 감히!]

콰지직!

그리고 그 공격을 간신히 막아낸 아크리치 드웰이 온몸에 서리가 낀 채로 이를 갈며 분통을 터트렸다.

그간 어찌어찌 직격만은 막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마법에 결국 수많은 언데드를 영구 손실했을 정도였다.

하나같이 상급에 속하는 쓸 만한 부하들이었는데!

'카람 님과 함께할 때는 아등바등 시간만 끌면서 눈치만 보던 녀석이었는데, 이렇게 직접 상대하려니 죽을 맛이군!'

그 카람은 지금 웬 늙은 기사를 막기에도 바빠 딴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다른 간부들도 저마다 바쁘게 움직이기는 마찬가지.

이 전장에서 한가한 것은, 태평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불사왕과 용사가 전부였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마법사로서의 역량은 저 꼬마가 나보다 위다.'

그 어려 보이는 외모를 생각하면 자존심이 남아나지 않을 정도였으나, 그래도 그건 그녀가 세기의 천재라 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였다.

무엇보다 드웰이 이해할 수 없는 건···.

'인간 주제에 무슨 마력이! 지금까지 고위 마법을 몇 번이나 퍼부었는데 아직도 처음처럼 쌩쌩하다니!'

오랜 세월을 살아온 그를 압도하는 그녀의 마력량이었다.

심지어 그는 불사왕과의 종속을 통해 어느 정도의 흑마력까지 간접적으로 지원받을 수 있지 않은가?

이것만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후우."

드웰이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건 말건, 이세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몸 안에 차오르기 시작한 마력을 끌어올렸다.

사실 그녀의 끊임없는 마력에는 특별한 비법이 있는 게 아니었다.

이건 그저 그녀의 고유스킬인 「무한동력」의 효능일 뿐이었으니.

본인이 다룰 수 있는 에너지를 폭증시켜주는 그 스킬 덕분에 그녀가 운용할 수 있는 마력의 양은 그야말로 무한에 가까웠다.

본인이 대마법사라 출력 또한 문제 될 것이 없어, 약간의 시간만 주어진다면 그야말로 고위 마법을 쉬지 않고 쏘아낼 수도 있을 지경.

'마법을 배운다고 대부분의 카르마를 그쪽 스테이터스에 투자하느라, 정작 고유스킬의 강화 레벨은 그리 높지 않지만.'

하지만 이 정도 수준만 해도 일반적인 마법사는 넘볼 수도 없는 전투 지속력을 가질 수 있었다.

물론 상대가 불사왕 정도 된다면 그런 장점도 별로 의미는 없을 테지만 말이다.

그녀는 다시 새로운 마법을 준비하면서도 전황을 파악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쿠오오오——!]

[캬아아아——!]

쿠우웅!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저 멀리서 황궁의 결계를 두들기는 두 마리의 본 드래곤과 그들을 요격하려는 마법진이었다.

어느 순간 로렌스 후작의 마법 지원이 끊겼다고 생각했는데, 결계의 광채가 흐릿해진 걸 보니 더는 이쪽에 추가 지원을 해 줄 수 없을 정도로 무리해 버린 것 같았다.

[나를 무시하는···!]

그녀는 앞에 있던 아크리치가 뭐라 떠드는 것을 무시하고, 다시 시선을 돌려 이번엔 주변 전장을 살펴보았다.

물론 준비한 마법을 그에게 쏟아붓는 것은 잊지 않고서.

스카칵—!

채앵!

[크어어!]

"크윽! 구울 따위가!"

전장의 한쪽에선 근위 기사단장 콘웰이 그녀를 애먹였던 데스나이트 로드를 밀어붙이고 있었으며, 다른 쪽에선 황실 수호대장이 아귀처럼 커다래진 입을 앞세우고 달려드는 구울 로드를 상대하고 있었다.

"크하하핫! 부서져라!"

거기다 양손에 언데드들을 하나씩 잡고 팽이처럼 돌며 적진을 온통 헤집고 있는, 검붉은 비늘에 뒤덮인 거대한 덩치와···.

화르르륵— 콰앙!

[슬슬 한계인가—? 너의 공포가 느껴지는구나—!]

"개소리!"

거대한 드레드 팬텀을 상대로 저항하는 가필드 백작까지 확인한 이세아는 안도한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곳곳에서 벌어지는 제국 기사단과 불사의 군대 간의 싸움도 대체로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었으니, 크게 걱정할 만한 부분은 없어 보였다.

'불사왕이 끼지 않아서인지 크게 밀리는 곳은 없네. 저쪽이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그녀의 시선이 다시 가필드 백작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에겐 스킬과 스테이터스의 보정이 없는 만큼, 연달아 벌어진 전투에 피로가 누적되었는지 지쳐 보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마어마한 강자인 데스나이트 로드를 상대로 시간을 벌기 위해 그녀와 함께 그야말로 전력을 쥐어짜 가며 마력을 쏟아부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저런 전장이 아니었다.

이세아가 이 일대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로 불사왕 한스와 성자 하인리히가 있는 곳.

아까부터 이어지던 그들의 대화는 슬슬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올 수 있을지 기대되는구나. 그 기다림 또한 색다른 즐거움이 되겠지!]

그녀는 물론,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의외의 전개로.

'···뭐야 그게. 정말 미친 거 아냐? ···아니, 미친 게 맞겠구나.'

그저 놀이를 위해 대륙을 장기판으로 삼겠다는 불사왕과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그것을 받아들인 성자.

'아니, 성자가 먼저 제안한 거였던가? 어쨌든 다행이네. 미친놈인 덕분에 어떻게 일이 잘 해결될 것 같으니. ···설마 저런 대화까지 나눠 놓고 여기서 끝장을 보려 하지는 않겠지?'

그러자 역시 무리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생각했던 대로 만약 조금 상황이 힘들어졌다고 그녀가 라일리만 데리고 전장을 빠져나갔다면, 이후 5황녀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줄었을 터.

'사실 호위들과 떨어진 상태에서 언데드 간부들에게 따라잡히면 더 위험해서 실행에 옮기지 못한 거지만. 그래도 상황이 좋게 끝났으니 다행··· 어?'

그렇게 그녀가 아주 살짝 마음을 놓던 찰나.

[그리고 세 번째···.]

불사왕 한스가 나직한 말과 함께.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마치 심연을 담은 듯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얼어붙는 시선.

거기다 아무리 봐도 그 해골에 붙은 가면 조각이 하회탈의 일부가 맞는 것 같단 생각은, 지금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쩌저저저정—!

콰가가각!

방심한 탓에 인지하는 것이 아주 조금 늦었을 뿐인데.

그 순간에 수십 줄기의 심연이 사방에서 뻗어 오고, 같은 수만큼의 검광이 그 모든 것을 쳐냈으며, 역으로 거대한 빛의 검이 불사왕의 방벽을 베어내는 일까지 동시에 일어났으니까.

"한니발!"

[아아— 진정해라. 잠깐 필요한 절차일 뿐이다.]

갑작스러운 불사왕과 용사의 충돌에 거대한 충격파가 주변을 휩쓸자, 사람들이 저마다 긴장감을 끌어올리며 만약을 대비했다.

하지만, 이미 무언가에 대응하기엔 한참 늦은 이도 있었는데···.

"커헉!"

지친 상황에서도 드레드 팬텀을 견제하며 무리하고 있던 가필드 백작이 검은 피를 토했다.

어느새 바닥에서 솟구친 몇 줄기의 심연의 뱀이 그의 몸을 꿰뚫은 채, 전신을 칭칭 감아 아가리를 목덜미에 처박고 있었다.

"가필드 백작!"

"이게 무슨!"

경악한 황태자와 제국 기사들이 노성을 내지르고, 하인리히 또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다시 성검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그때.

푸화아악—!

불사왕 한스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기운이 뿜어져 사방을 뒤덮었다.

마치 지금까지는 장난이었다는 듯 급격하게 세를 불리는 끔찍한 존재감.

일반적인 흑마력이 아닌 죽음이 내포된 짙은 심연의 기운이··· 수도를 뒤덮은 결계의 영향력을 잠식해 들어가며 주변을 어둠으로 물들였다.

파지지직—!

그 반발력에 기운끼리의 경계면에서 연신 스파크가 튀었다.

심지어 그 범위에 든 언데드들도 결계의 영향에서 벗어나, 점점 더 그 존재감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신성한 아우라를 퍼뜨려 사람들을 보호한 하인리히 덕에, 그 저주스러운 기운이 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가 불사왕의 기세에 잠깐 정신이 팔려 미처 신경 쓰지 못한 사이.

[응당 내기에는 상품이 걸려 있어야 하는 법.]

"커— 커컥!"

모두가 갑작스러운 변화에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절명한 가필드 백작이 지키고 있던 황태자가 이미 불사왕의 손에 넘어간 후였다.

"황태자 전하!"

"네놈, 불사왕!"

분노한 제국 기사들과 그 앞을 막아서는 언데드들로 순식간에 장내가 혼란스러워졌으나···.

이세아는 그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평소 황태자를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초점을 알 수 없는 불사왕 한스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고, 그 심연의 눈구멍과 정면으로 마주하자.

소름 끼치는 오한이 그녀의 등줄기를 타고 치달았다.

'···라일리!'

위기를 감지한 직후, 순간적으로 이세아의 정신력이 고양되며 사고가 가속하기 시작했다.

느린 시간 속에서 황녀가 있을 옆쪽으로 천천히 돌아가는 고개와 반대로, 몸 안을 가득 채운 마력은 노도와 같이 움직여 순식간에 그녀가 원하는 마법을 구성했다.

'괜찮아. 전투 전에 라일리 주변에 미리 결계를 설치하기도 했고, 상시 소지하고 있는 마도구도 있으니 잠시만이라도 시간을 벌어 줄 수 있다면···.'

빠른 상황 판단과 대처 방안 모색, 그리고 완성을 목전에 둔 마법.

그녀는 찰나 만에 모든 방침을 결정하고 마음을 굳혔다.

설령 무리하는 한이 있더라도 라일리를 이 자리에서 빼내기로.

하지만.

그녀의 고개가 완전히 옆으로 돌아갔을 때.

[우후후··· 굉장히 아름다운 아가씨 아니옵니까···. 제 소싯적이 떠오르옵니다···.]

"흡?"

이미 그곳에는 기척도 없이 모습을 드러낸 밴시 퀸, 올리비아가 뒤에서부터 라일리 황녀를 끌어안고 있었다.

"···안 돼!"

마력이 폭주한다.

체내에서 거의 완성되었던 마법의 구조를 무리하게 비틀고, 억지로 용도를 변경한다.

"크흡—!"

이세아의 코와 입에서 피가 역류했다.

하지만, 이 정도는 괜찮다. 당장 마법을 사용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렇게 그녀의 주변에, 저 유령에게서 라일리를 구해내기 위한 마법진이 순식간에 전개되고—.

[끄으—! 언제까지 날 무시할 셈이냐, 어린 인간아—!]

파지직!

갑작스럽게 뻗어 나온 흑마력의 방해에.

순간적으로 제 기능을 상실했다.

"아?"

그녀가 마력의 통제를 잃은 건 아주 잠깐에 불과했지만, 그 짧은 순간은 올리비아가 황녀를 데리고 불사왕의 곁으로 이동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으읏!"

[왕이시여··· 여기 대령했나이다···.]

[흐음— 그래, 역시 하나 보단 둘이 낫겠지.]

올리비아가 황녀를 데리고 오는 동안, 또 다시 하인리히와 충돌했던 한스가 천천히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불사왕의 포로가 되어 버린 황태자 사이먼과 5황녀 라일리.

황망하게 그들을 바라보던 이세아가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진 표정을 드웰에게로 향했다.

"너, 너··· 너—!"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분노에 떨리는 그녀의 몸에서 「무한동력」이 쉴 새 없이 가동하며 막대한 마력이 줄기줄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잠시 드웰을 노려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황녀를 응시하는 그녀의 얼굴은 얼핏 보면 언데드로 착각할 정도로 창백했다.

거기다 무리한 마력 운용의 여파로 코와 입에서는 핏물까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으니···.

그런데도 그녀가 지금 경거망동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대마법사에 이를 정도로 단련된 단단한 이성 때문이었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고 현기증이 날 정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을 직면했더라도, 그녀의 머리 한 켠은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며 육체를 통제하고 있었다.

지금 무작정 달려들어봤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안 돼! 코, 콘웰 공! 콘웰! 당장 나를 구해라! 안 된다! 나, 나는 이 제국의 황제가 될 몸··· 우읍!"

"후우, 후우—."

발버둥 치다가 입이 틀어 막힌 사이먼과, 침착하게 심호흡을 반복하며 냉정을 유지하려는 라일리.

[일단 아쉬운 대로 이 녀석들로 만족해 주마. 어디 열심히 해 보거라. 일단 살려 두긴 할 테지만, 인간의 몸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하니. 크크큭—.]

그렇게 제국의 차기 황제로 가장 유력한 후보 둘이—.

불사왕 한스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156

제국의 난 (6)

쿠르릉—!

빠지지직!

시커먼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수도를 감싼 결계가 연신 비명을 지르며 스파크를 튀겼다.

그리고 그 세기말적인 풍경 속에서, 일단의 목표를 달성한 한스는 서서히 부하들을 수습하며 퇴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그럼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겠다!]

"불사왕!"

언데드들이 어둠 속에 휩싸여 사라져 가고 있었지만, 그의 수중에 잡힌 두 인질 덕분인지 인간들은 경거망동하지 못하고 그저 이만 갈고 있었다.

'사실 황녀는 원래 예정에 없었는데.'

한스는 흑마력에 속박된 채 자신의 옆 공간에 떠 있는 두 황족을 바라보았다.

사실 애초부터 황태자만을 노리고 그가 게이트를 이용한 시기에 맞춰서 습격했다.

제론 대신전에서 출발한 그가 황궁에는 다다르지 못했을 시간으로.

'인질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고위층. 그러면서 행적도 쉽게 알 수 있고, 무엇보다···.'

"읍읍—!"

한스의 시선이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는 사이먼 황태자에게로 향했다.

그는 몸과 입이 억제된 상황에서도 제국 기사들을 노려보며 무언의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빨리 자신을 구해 내라고.

참으로 눈꼴신 인간이 아닐 수 없었다.

퍼억!

"껙!"

"화, 황태자 전하!"

"불사왕! 이게 무슨 짓이냐!"

뒤통수를 후려치는 흑마력 덩어리에 품위 없는 단말마와 함께 그대로 기절해 버리는 황태자.

그에 다시 기사들이 발광하기 시작했으나, 한스는 그쪽은 신경 쓰지도 않았다.

'이 녀석은 볼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단 말이지.'

첫인상부터 하는 짓까지 전부 밉상인 인간이었다.

거기다 제국에 만연한 온갖 부패에도 단단히 한몫하기까지 했으니, 당장 죽이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 여겨야 하리라.

'일단 이용 가치는 있으니까.'

그 효용이 다한 후에는··· 어떻게 될지 장담하지 못하겠지만.

이내 그의 시선이 라일리 황녀에게로 이동했다.

밝은 금발의 그 미녀는 이 상황에서도 심호흡을 반복하며, 날카로운 눈으로 냉정을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물론 심장이 요란하게 뛰는 데다 눈동자는 쉴 새 없이 지진을 일으키고 있었으나, 얼핏 봐서는 그 동요를 알아차리기 쉽지 않을 정도로 자기 관리가 철저했다.

'아직 스물도 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대단하군. 어쩌다 보니 줍게 됐지만, 유용하게 써먹을 구석은 어디든 있으니까.'

이쪽은 황태자와 다르게 별다른 사감이 없으니 그리 오래 잡아둘 생각은 없었다.

그저 에피소드 하나에서 극적인 효과를 위한 카메오로···.

'응?'

그때, 갑자기 느껴진 미묘한 이질감에 한스의 시선이 한쪽으로 돌아갔다.

초월을 넘어선 격을 완성해 인과를 느낄 수 있는 그였기에 감지할 수 있었던 그것은, 일반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이상 상황이었다.

'이세아?'

그 이변의 중심에 있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지구인 각성자.

주변을 감싼 무거운 공기 속에서, 그녀의 업이 꿈틀거리며 존재감이 서서히 팽창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침착하게 움직인다.

그 모습은 마치 눈앞에 떠오른 무언가를 읽는 듯했지만, 당연하게도 허공은 그저 텅 비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일련의 과정이 반복될 때마다 그녀는 한층 더 강해지고 있었다.

그쯤 되니 상황은 명백했다.

'그러고 보니 이세아는 8년 차였지. 거기다 제국의 귀족 신분을 가진 대마법사고. 돌아갈 카르마는 이미 충분하리만치 모았을 텐데. 설마···.'

귀환에 필요한 카르마는 100만.

거기에 추가로 얼마나 더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제 그녀는 위험해졌을 때 확실하게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수단을 잃어버렸다는 것이었다.

아니, 스스로 구명줄을 잘라 버렸다.

그 줄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서.

더는 도망갈 생각이 없다는 듯이.

강화가 거듭될수록 소모 카르마도 증가하다 보니, 그녀의 그 행위는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품은 기세는 이전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설마, 덤빌 셈인가? 황녀가 포로로 잡힌 상황에?'

하지만 그 설마가 사실인 듯, 그녀는 뒷일은 생각하지도 않는 것처럼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고오오—

어마어마한 마력이 한순간에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와 밀집한다.

주변의 마나를 끌어모아 만들어낸 현상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용도에 맞게 정제된 상태로, 댐이 방류하듯 한순간에 터져 나온 그것은 명백히 이 세상의 이치를 벗어나 있었다.

'이 정도면··· 초월? 아니, 아직 그 정도는 아니군.'

그리고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내는 그 이적을 한스는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차분히 그녀의 전력을 분석하면서.

압축된 마력이 전개되고, 규칙적으로 배열하며 더욱 증폭되고, 미리 설계한 대로 구성되어 토대를 쌓고, 의념으로 가공하며 방향성을 이끈다.

그 모든 과정이 그야말로 찰나 만에 이루어졌다.

"뭣?!"

"프리스틴 자작?"

그것이 워낙 빨라, 뒤늦게 반응한 주변 인간들이 그제야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이세아는 그에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고.

그저 담담히 자신이 준비한 것을 풀어놓았다.

찌이이잉—!

공기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그녀의 앞에 전개된 마법진에서 출발한 시린 광채의 광선이 그대로 허공을 갈랐다.

사출과 동시에 착탄한,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절대 막을 수 없는 필살의 일격.

극한으로 압축된 그 '빙룡의 숨결'은 상대가 급하게 만들어낸 흑마력 방벽을 무시하듯 찢어버리고.

목표였던 아크리치 드웰과 그 주변 일대의 언데드들을 통째로 뒤덮었다.

쩌저저적!

[커헉! 이, 어린 게 끝까지···.]

한발 늦게 마력의 응집을 느끼고 서둘러 대비하긴 했으나 그것만으로는 한참 부족했다.

결국 불시에 공격을 허용한 그의 목소리가 중간에 끊기고, 얼어붙은 육체가 서서히 부스러지며 얼음 가루가 되어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의 곁에 있다가 함께 얼음 동상이 되었던 언데드들과 함께.

물론 아크리치인 그의 근원은 한스가 가지고 있었으니 나중에 다시 부활할 수 있겠지만, 이번 일로 드웰이 감수해야 할 부담도 그리 작지만은 않을 터였다.

"하아— 하아—."

공격 직후,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발동한 대마법에 그렇지 않아도 창백했던 이세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더욱 사라졌다.

"이세아 프리스틴 자작!"

"이게 무슨 짓인가!"

하지만 다른 이들은 당황한 기색을 내보이며 그녀를 타박할 뿐이었다.

그들이 괜히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포로가 황위 계승권에 가장 가까이 선 두 사람인데, 그들을 잡고 있는 인질범은 무려 불사왕이다.

자칫 그의 심기를 거슬렀다가는 무슨 사달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노릇.

지금은 그저 불사왕이 자신의 말을 지키길 바라며 추후를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별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저, 아까 미처 끝내지 못한 승부가 있어서 말이지요."

"그게 지금 말이라고···!"

황태자 휘하의 기사 하나가 성난 목소리를 내뱉었지만, 그녀는 더는 대꾸하지 않고 시선을 돌려 한스를 바라보았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불사왕. 제가 당하고만은 못 사는 성격이라서요."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그녀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녀도 어느새 한스의 성향을 파악한 듯, 고작 이 정도 일로는 포로들을 해치지 않으리라 판단한 듯했다.

'하지만 왜지? 의미 없는 화풀이? 그렇게 경솔한 성격으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그녀의 생각이 맞긴 하나, 그렇다고 굳이 그런 행동을 보일 필요가 있었을까?

한스는 그를 의아하게 여겨 그녀를 관찰하다가···.

이세아의 시선이 자신이 아니라 살짝 옆으로 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로 5황녀 라일리에게로.

또한 그의 감각에··· 요란하게 뛰던 황녀의 심장박동과 거친 호흡이 서서히 진정되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허, 설마. 5황녀를 위해서였나?'

그는 비로소 그녀가 그런 무리한 짓을 벌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생각대로.

이세아는 올곧은 시선으로 라일리 황녀의 눈을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침착을 가장한 겉모습과는 달리 미처 숨기지 못해 잘게 떨리는 청록색 눈동자가, 시간이 지날수록 서서히 진정되어 가는 것을 아무 말 없이 기다려 주었다.

'···기다려.'

포로로 잡힌 라일리의 앞에서, 불사왕의 부하들을 가루로 만들어 버린 이세아의 공격.

그건 그저 분노에 휩싸인 화풀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신념의 표출이었으며, 동시에 그녀가 라일리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이세아는 오랜 세월을 함께하며 유대가 쌓이자, 라일리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고유스킬과 카르마 포인트의 존재에 대해서도, 그리고 자신이 언젠가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총명한 라일리는 오히려 그녀가 카르마 포인트를 더 쉽게 모을 수 있도록 여러모로 힘써 주었고.

스킬의 활용성에 대해 함께 고민해 그녀가 더 빨리 강해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것이 서로의 이별을 앞당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이세아가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하에.

'기다려!'

그런 시간이 있었던 만큼, 라일리 황녀는 이세아의 경지와 능력의 한계에 대해서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랬었다. 이전까지는.

방금 이세아는 이전의 라일리가 알고 있던 자신을 아득히 넘어서는 공격을 펼침으로써, 그녀에게 자신의 결의를 보이고 확신을 심어준 것이다.

이제 자신에겐 퇴로가 없다는 것을.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너를 구해낼 것이며, 절대 그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 상대가 설령 이 세상의 절망인 불사왕일지라도.

그러니, 나를 믿고 기다려라.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내가 너를 찾아낼 때까지!'

그리고 명석한 라일리 황녀는 이세아의 의도대로 그 신호를 곧바로 알아차렸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냉정을 유지하던 눈시울이 붉어지며 목울대가 꿈틀거렸으나, 그녀는 이를 악물고 그것을 삼키며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공포에 격렬하게 뛰던 그녀의 심장은, 어느새 평소처럼 고요히 뛰고 있었다.

[크크큭— 재밌군. 뭐, 됐다. 이 또한 여흥이라 할 수 있겠지. 오히려 흥미로운 녀석을 하나 더 발견해서 기분이 좋구나.]

그들 사이에 흐르는 무언의 유대를 바라보던 한스가 간단히 상황을 수습하며, 이번에야말로 진짜로 떠나기 위해 포로들을 데리고 찢긴 결계의 틈으로 몸을 띄웠다.

조연의 애드리브 때문에 잠시 지체되긴 했으나 이젠 정말로 퇴장할 때였다.

아직 남아있던 언데드들도 모두 음차원 공간에 수납한 상태였으니 이제 포로 둘만 챙기면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었다.

···물론 정말 이대로 가도 되나 싶을 정도로 찝찝한 기분이 가시지 않긴 했지만.

'쓰읍, 이거 영 나쁜 놈이 된 기분인데.'

아니, 기분 탓이 아니라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누가 봐도 나쁜 놈이 맞았다.

그것도 쌍욕을 먹어도 싼, 아주 전형적인 악당 그 자체였다.

···그것이 본인이라는 게 문제지.

그렇게 불사왕은 포로로 잡힌 두 황족과 함께 제론에서 모습을 감췄다.

한 편의 신파극만 남긴 채로.

***

♪~

딸깍! 딸깍!

흥겨운 음악이 흐르는 방 안에서 마우스를 클릭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 드디어."

평소와 같이 집 내부의 헬스장에서 운동을 마치고, 인터넷으로 최신 소식을 확인하던 나는 그 과정에서 매우 흥미로운 정보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New) 아우테리카 차원.

세계 귀환자 협회를 통해 공시되어 한국 지부의 사이트에도 공식 기재된— 새로운 차원에 대한 정보였다.

'어디 보자, 현재까지 확인된 귀환자는 두 명. 거기다··· 정보 자체는 딱히 별거 없네.'

차원에 대해 간략히 요약된 정보는 이미 전부 알고 있던 것들이었다.

공화국에 거주하던 정보 제공자가 협회에 상당히 적극적으로 협조했는지, 묘하게 동부 쪽 느낌이 강하긴 했지만.

'불사왕이 등장하고 광기 사태가 터지면서 서둘러 도망친 모양이군.'

그곳엔 유의할만한 사항으로 현 시국이 어지러워 상당한 주의를 요한다는 경고가 강조되어 있었다.

마왕이 강림해 세상을 침공하기 시작했다는 짤막한 문구와 함께.

"흐음···."

그리고 차분히 그 모든 정보를 확인한 나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당사자가 되니 뭔가 재밌네. 최신 정보가 갱신되려면 얼마나 걸리려나.'

정보가 공식적으로 기재될 정도면 두 명 이상의 귀환자가 발견된 직후에 이런저런 교차 검증까지 마친 후라는 소리였다.

차원 간의 시차까지 고려하면 상당히 구식 정보일 수밖에 없다는 뜻.

그래도 다른 지구인의 시점에서 자신의 행적을 평가한 것들을 보니 제법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벌써 순찰할 시간이군. 요즘엔 큰 문제를 일으키는 녀석은 별로 없긴 한데, 그래도 주기적으로 확인은 해야···. 아, 그러고 보니.'

「개체 투영」을 통해 한스로 변하려다 잠시 멈칫한다.

아우테리카의 정보가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말은, 시간이 지날수록 불사왕에 대한 정보도 지구에 알려질 가능성이 더 커진다는 소리와 같았다.

설마 그들이 동일 인물이라 여길 이들은 많지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이미 지구에선 하회탈이라 알려졌으니 아우테리카에서 활동할 때 쓸 가면이라도 바꿔야 하나? 가면이 부서지기도 했으니.'

아니면 지구에서만 제대로 된 하회탈을 쓰고 그곳에선 패션 아이템으로 부서진 조각만 걸치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반가면 같은 느낌이 들어서 은근히 마음에 들기도 했고.

'뭐, 천천히 고민해 보자.'

아주 사소한 고민이었다.

그가 벌인 짓 때문에 한창 혼란에 빠져들기 시작한 아제리온 제국의 정국에 비하면.

#157

수도 침공 그 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