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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38

불사왕의 준동 (2)

대표로 참여했든 호위로 따라왔든, 이 회의장 내에 있던 강자들이 모두 전투에 참여한 건 아니었다.

일례로 제국의 마스터는 나라의 위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섰지만, 그와 함께 자리했던 대마법사는 황태자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뒤로 빠진 상태였다.

그리고 그렇게 싸움에 끼어들지 않고 관망하는 이들 중에는···.

"으으— 역시 저도 끼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어차피 저분들이 당하면 여기도 끝일 텐데. 아, 하지만 라포리님이 여길 부탁한다고···."

엘븐 킹덤의 신입 하이 엘프, 세실리 그랜우드도 끼어있었다.

하이 엘프가 된 그녀는 최근 물의 정령을 최상급으로 진화시켰을 정도로 빠르게 강해지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그리 능숙히 다루지는 못했다.

라포리도 그걸 알고 있으니 다른 엘프들을 부탁한다며 그녀를 결계로 보내고 자기 혼자 앞으로 나선 것이다.

콰르르릉!

휘오오—

라포리가 불러낸 최상급 정령은 셋.

강렬한 황금빛 전격이 시커먼 악령의 몸을 두들기고, 몰아치는 폭풍은 싸움에 끼어들려는 리치들을 견제했다.

[끄흐으— 정령 따위가 감히—! 공포로 절여 주마—!]

드레드 팬텀 파고스가 불사왕의 심연으로 뒤덮인 전신에서 짙은 공포의 파동을 발산했지만, 그것은 대지의 정령의 방어를 뚫지 못하고 허무하게 스러지고 말았다.

'역시 라포리 님은 대단해.'

순수한 존재인 정령은 오염에도 취약해, 저런 최고위 언데드를 상대할 때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그저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 만큼 상성이 최악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이 전장에는 언데드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불사왕까지 있지 않은가?

베테랑 정령사인 라포리에겐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정령의 급만 높을 뿐 아직 미숙한 그녀는 이야기가 달랐다.

'괜히 제가 끼었다간 오히려 라포리 님에게 방해가 될 가능성이 크겠죠. ···그것 때문에 절 뒤로 물리신 걸 테고.'

그리고 그에게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은 딸인 샤피론도 마찬가지였다.

'아빠···.'

당연히 고작 중급 정령을 다룰 뿐인 그녀는 고민할 주제도 되지 못했으나, 부친이 위험한 전장에 있는데 마음이 편할 자식이 얼마나 될까.

그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그녀들이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그 사이에서 태연한 기색으로 뭔가를 준비하는 이가 있었으니—.

"응? 해리스? 뭐 하시는 거죠? 설마 저기에 낄 생각인가요?"

"네? 해리스 씨가 뭘 어쩐다고요?"

해리스가 주머니에서 꺼낸 은빛 실을 자신의 활, 테미스에 단단히 고정하고는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그는 깜짝 놀라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에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으며 평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별거 아닙니다. 그냥···."

퉁—

슬쩍 튕긴 활시위에서 울려 퍼지는 묵직한 진동음.

역시 명품이라서인지 소리부터가 달랐다.

"가볍게 화살이나 한 발 쏠까 하고 말이죠."

"···네?"

황당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한 번 싱긋 웃어준 해리스가 결계 밖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산책이라도 나가는 것처럼 평온한 기색으로.

***

카아앙—!

푸른 오러에 감싸인 채 내질러진 검이 시커먼 기운을 머금은 양손검에 튕겨 나갔다.

검을 휘두른 기사가 급히 그것을 수습하려 했지만.

커다란 검날은 그 크기에 맞지 않게 영활한 움직임으로 그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푸화악!

기어코 기사의 상체를 베고 지나가는 양손검.

그의 곁에서 함께 싸우던 이들이 다급히 후속타를 저지하려 했지만, 그러기엔 이미 한참 늦어 있었다.

"커헉!"

흑마력이 담긴 검이 가차 없이 목을 치고 지나가자, 결국 기사는 주변의 도움이 오기 전에 그 자리에서 절명하고 말았다.

"투르칸 경!"

"쓰벌! 이런 괴물 놈이!"

분노한 채 자신에게 달려드는 인간들을 마주한 카람은 다시 천천히 사방을 훑으며 주변 인물들의 인적 사항을 확인했다.

'제국 황태자의 호위 기사, 카이엔 투르칸은 처리했고. 그럼 다음 사냥감은···.'

그는 실시간으로 불사왕에게서 전해지는 정보에 따라 곧바로 다음 '죽여도 되는 상대'에게 향했다.

대체 무슨 기준으로 그 살생부가 정해진 건지는 모르겠으나, 그에게 자세한 사정은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왕의 검일지니. 그저 그분께서 명하신 대로 따를 뿐. 왕께 뭔가 큰 뜻이 있으시겠지.'

콰드득—!

다시 그의 양손검이 앞을 막아서는 성기사의 두꺼운 갑옷을 베고 지나갔다.

하지만 이자는 허용 대상이 아니다.

카람은 그 성기사를 구하기 위해 달려드는 이와 무기를 맞대며, 부상자가 뒤로 후송되는 것을 방치하고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생각 이상으로 단단하군. 대체 신성 결계를 몇 겹이나 중첩한 거지? 평소라면 충분히 잘라버릴 수 있었을 텐데.'

사실 확인 사살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비살상 대상이라고 봐주거나 살살 휘두른 공격은 절대 아니었다.

결계 탓에 그의 힘이 온전히 발휘되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그보단 상대에게 가해진 방어 효과가 상상 이상이었다.

'결계 때문에 조금 버겁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진 버틸 만하다. ···저기 있군. 페이튼, 현 용병왕의 오른팔.'

안광을 번뜩인 그가 자신에게 덤벼드는 이들의 공격을 대충 쳐내며, 뒤쪽에서 데스나이트 하나를 상대로 대충 시간만 끌고 있던 이에게 달려들었다.

"으헉! 갑자기 왜 나한테!"

불사왕의 명대로.

이곳에 있는 이들에게 최대한의 공포를 각인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런 이상한 명령을 받은 것은 당연히 카람 혼자만이 아니었다.

***

싸움이 격화되자 곳곳에서 언데드가 파괴되며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했다.

불사의 군대는 버젓이 신성 결계가 발동 중임에도 불구하고 무서운 기세로 하나둘 생명을 수확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 사망자들은 하인리히가 미리 입수했던 명단을 통해 이미 조사가 끝난 이들이었다.

아무리 신분제가 만연한 세계라 해도 과하다 여겨질 정도로 악질이었던 놈들.

'현 용병왕 칸블, 각국 고위층과 야합해 양민들을 노예로 팔아넘긴 주동자. 증거가 없어 주신교단에서 직접 나서진 못했지만···.'

그때, 하인리히가 여러 강자의 도움을 받아 다시 한스에게 달려들었고.

그는 주변을 견제하듯 사방으로 검은 섬광을 흩뿌렸다.

콰과과광!

다급하게 그 공격을 막아내는 강자들.

하지만 '우연찮게도' 그중 유독 강맹한 기운을 품고 뻗어나간 광선 하나가 용병왕 칸블의 방어를 무시하며 그대로 그의 몸을 관통했다.

"커허억!"

치명상을 입은 그가 검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지만, 신성 결계 덕에 즉사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에 성녀를 비롯한 성직자들이 다급히 그를 치료하려 했으나···.

쿠웅—

"윽!"

갑자기 하인리히가 멀리 튕겨 나가고, 그로 인해 일시적으로 풀려난 불사왕이 날뛰는 통에 도무지 그쪽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 전장에 합류한 하인리히가 겨우 상황을 수습했을 때, 칸블은 이미 바닥에서 솟구친 그림자에 꿰뚫려 절명한 뒤였다.

'사실 처단해야 할 놈들은 저 안에 더 많긴 한데.'

멀리서 그 모습을 관찰하던 해리스가 슬쩍 고개를 돌려 결계에 숨어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호위로 따라왔던 기사가 죽은 이후로 노발대발하는 사이먼 황태자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저었다.

저 결계는 상당히 공을 들인 만큼 부수는 데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고, 만약 그렇게 하더라도 이후 다른 이들의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일단은 전장에 있는 놈들로 만족하는 수밖에.'

지금의 주 타깃은 방금 죽은 용병왕처럼 체면 때문에 차마 빼지 못하고 어영부영 참전한 놈들이었다.

물론 이렇게까지 해도 뭔가 이상하다고 위화감을 느낄 이들이 나오는 건 피할 수 없겠지만···.

'뭔 상관이야. 그래서 뭐 어쩔 건데?'

설마 불사왕과 용사가 한 편을 먹고 살생부를 만들어서 죽일 대상을 선별하고 있다고,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아니, 애초에 이제까지 벌어진 일들이 전부 불사왕의 소행으로 알려진 만큼 그럴 리는 없겠지.'

지금 대륙적으로 발생한 피해자 수를 추산할 수조차 없을 정도인데 뭔 놈의 선별이란 말인가.

당연히 뭔가 노림수가 있을 거라 여겨 머리털 빠지게 고민하겠지만, 그래봐야 우연이란 결과밖에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부자연스럽게 여겨지는 것도 좋지 않으니, 슬슬 이 정도에서 끝을 내야겠지.'

나름 괜찮은 마무리도 떠올랐으니, 이제 무대에 맞춰 행하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해리스! 지금이라도 돌아가자니까요! 여긴 우리 같은···."

"맞아요, 해리스 씨! 당신이 뛰어나다는 건 알지만 고작 중급 정령사가 나설 자리가···."

해리스의 양쪽에서 호들갑을 떠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결계를 벗어나자 걱정되어 따라온 이들.

조금 귀찮긴 했지만 그 마음이 고마웠기에 그는 빙긋 미소 지어주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저에게 다 생각이 있습니다. 세실리 님이 지금처럼 충격파만 막아주시면, 나머진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아니, 언제 저들이 이쪽을 공격할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렇게 태평할 수 있어요! 대체 뭘 어떻게 하려고!"

물론, 이렇게 무방비하게 나와 있다 해도 저들은 이쪽을 공격하지 않는다.

그렇게 일러뒀으니까.

"후우—."

해리스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활을 들어 전방에 겨누었다.

그리고 에나멜 대륙을 벗어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쏘아냈던 일격을 되새기며, 천천히 한 발의 화살을 빚어냈다.

흑마력과 신성력이 뒤엉키며 사방의 기운이 불안정하게 요동치고 있었지만.

세계수는 이 세계의 필터 역할을 하는 존재였고, 그 힘은 미력하나마 「세계수의 아이」에도 깃들어 있었다.

우우웅—

주변의 기운이 그에게로 빨려 들어오며 화살에 압축되었다.

동시에 주변에 모습을 드러내는 그와 계약한 정령들.

파지직! 화르륵—!

휘이잉! 우우웅—

사랑스러운 그의 정령들이 화살에 힘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정령이 오염될 수 있는 만큼 직접 화살에 깃들게 하지는 못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으니 아쉬운 대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중급 정령인 게 조금 개연성이 부족하긴 한데. 그건 시나리오로 어떻게든 하···.'

하지만, 그때.

내심 투덜거리던 해리스가 순간적으로 몸을 멈칫했다.

이질적인, 하지만 뭔가 포근한 기운이.

순간적으로 발끝에서 시작해 정수리까지 치달았다.

'아?'

머리끝에서 막혀있던 뭔가가 터지며 활짝 열리는 듯한 감각.

그리고, 그는 곧 깨달을 수 있었다.

"개체가 조건을 달성하여 성장합니다. 특수스킬「세계수의 아이」가 「세계수의 적자」로 진화합니다."

'···이런 기분이었구나.'

해리스가.

하이 엘프가 될 수 있는 '조건'을 달성했노라고.

'아니, 내가 뭘 했다고. ···물론 곧 할 생각이긴 하지만. 설마 미리 가불해 주신 건 아니겠지?'

그는 미묘하게 변화한 자신의 감각을 되새기며 눈을 감았다.

정식으로 하이 엘프로 개안한 게 아니라 극적인 변화는 없었으나, 명백하게 이전보다 할 수 있는 일의 한계가 늘어났다.

어쨌든, 이로써 조금 부족했던 개연성이 충족되었다.

"아? 해리스 씨···? 당신, 설마!"

바로 옆에 있던 세실리가 뭔가를 깨달은 듯 커다래진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하이 엘프였던 만큼 그가 자격을 갖춘 순간을 느낀 것 같았지만, 그것을 알 수 없었던 샤피론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코앞에서 눈에 띄는 변화가 일고 있었으니까.

"해리스! 정령이 갑자기···?"

파지지직—!

하이 엘프의 자격을 갖추고 「세계수의 적자」를 얻는 순간, 폭증한 자연력과 친화력이 한순간에 「정령술」에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거기에 가장 먼저 영향을 받은 것이 바로···.

"와트."

파지직!

번개의 정령 와트.

그의 첫 번째 파트너가 마침내 중급을 넘어서 상급에 이르렀다.

다른 정령들 또한 진화할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확실히 전보다 강해졌다.

"···이건, 세계수께서도 해리스 씨를 지지하신다는 거겠죠. 어디 원하는 대로 해 보세요. 그전까진 제가 최선을 다해서 지켜드리죠."

세실리가 뭔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전방을 주시했다.

분위기에 휩쓸린 샤피론도 마찬가지로 표정이 굳은 채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음··· 뭐, 상관없겠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해리스가 다시 정신을 집중하며 준비하던 공정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세계수의 가지로 만들어진 테미스와 팔찌에서 원래라면 그가 다룰 수 없었을, 더욱 짙은 자연력이 밀려들었다.

점점 압축되는 화살과 그곳에 담긴 정령의 힘.

그는 서서히 완성되어 가는 화살촉을 들어 가만히 목표를 조준했다.

쿠르르릉—!

불사왕과 용사가 다시 거세게 격돌하며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 충격은 주변을 휩쓸며 해리스가 있는 곳까지 들이닥쳤지만.

출렁—

세실리가 불러낸 물의 최상급 정령이 가뿐하게 그것을 상쇄시켜 그들은 조금의 피해도 입지 않았다.

'조금만 더···.'

용사, 하인리히의 몸에서 아우라가 솟구치며 일순 그의 손에 들린 빛의 검이 몇 배로 커졌다.

"하압—!"

곧이어 허공에 휘둘러진 성검에서 거대한 반월형의 검기가 쏘아져 나갔다.

그 신성한 빛의 칼날은 그의 앞을 막아서는 불길한 그림자를 가르고 불사왕에게로 향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성자님!"

때마침 타이밍 좋게 성녀와 추기경의 보조가 이어지며, 하인리히는 질풍같이 그 길을 내달렸다.

콰앙!

격돌하는 불사왕의 흑마력과 용사의 신성력.

다시 터져 나오는 충격파.

검과 마력이 교차하고, 성법과 흑마법이 맞부딪쳤다.

그 와중, 서서히 사고가 가속하며 세상이 느려진다.

오로지 한스와 하인리히, 해리스 셋만이 공유하는 시간이 흘러간다.

눈짓도, 몸짓도 주고받을 필요가 없다.

그저 한 몸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일 뿐.

한스가 격전 도중 몸을 미세하게 비틀었다.

거기에 맞춰 하인리히의 검이 실시간으로 경로를 수정하며 휘둘러지고, 한스는 다시 그에 대응해 흑마법을 사용했다.

마치 섬세한 공동작업을 하듯, 두 개체는 서로 공세를 주고받으면서 하나의 결과를 짜 맞춰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용사가 가한 필사의 일격이 불사왕의 마력 방벽에 막혔지만, 기어코 커다란 균열을 남겼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넘쳐나는 흑마력이 눈 깜짝할 새에 그것을 수복하던 순간.

가만히 때를 기다리던 화살 한 발이 쏘아졌다.

아무 소리 없이 쏘아진 그 무음의 빛줄기는 일직선으로 뻗어나가.

충돌의 여파로 사방에 흩뿌려진 마력 조각들을 스치고.

미처 수복되지 못한, 손가락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한 크기의 균열을 파고들어—.

콰득—

콰아앙—!

평소라면 절대 존재할 리 없었을, '있을 수 없는' 빈틈에 내리꽂혔다.

#139

불사왕의 준동 (3)

폭음과 함께 불사왕의 고개가 격하게 뒤로 젖혀졌다.

빠지지직—

불벼락이 그의 머리를 뒤덮으며 폭연이 피어올랐다.

그것을 신호로 일시적으로 멈춘 불사왕과 용사의 혈투.

"···성자님?"

어째선지 뒤로 물러선 하인리히가 진지한 표정으로 슬쩍 한 손을 들어, 추가 공격을 가하려던 다른 이들을 제지했다.

마치 뭐라도 감지한 것처럼.

그리고 그와 때를 맞춰, 거칠게 인간들과 치고받던 언데드들이 일제히 멈칫하더니 동시에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들과 싸우던 이들은 갑자기 상대가 사라져 숨을 고르면서도 상황 파악을 위해 긴장한 채 주변을 경계했다.

그렇게 아주 잠깐, 전장이 한순간에 정적에 휩싸였지만.

[큿— 크흐하핫! 아아— 이거 참, 제법이구나!]

잠시 후, 그 침묵을 깨는 음산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무래도 지닌 격과 마력의 밀도 차이가 있는 만큼, 해리스의 공격은 그에게 그리 큰 피해를 주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이 무의미한 공격이었다고 볼 수도 없었는데.

그것을 증명하듯···.

후두둑—

당대 불사왕의 상징이나 다름없던 기괴한 가면이 박살 나 바닥으로 흩뿌려졌다.

오직 일부만이 남아 아직도 그의 얼굴에 달라붙어 있는 나무 가면.

"으음."

"저것이···."

그리고 「커스터마이징」으로 공들여 만든, 압도적인 카리스마의 잘생긴 해골이 공개되었다.

완벽한 조형을 자랑하는 매끈한 두개골과 예리한 턱선, 가지런하고 뾰족한 건치,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구멍에서 타오르는 안광.

"···과연, 살벌하군. 꿈에 나올까 두려울 정도야."

"후우— 젠장, 시선을 못 마주치겠어···."

그러나 아쉽게도 대중의 평은 그리 좋지 못했다.

물론 외형상의 문제라기보단 존재 자체의 공포 효과 때문이 더 크겠지만, 면전에서 대놓고 저런 반응은 좀 아니지 않은가.

만약 한스가 마음이 굳건한 이가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상처받았을 것이다.

"끄끅끅··· 저건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인간의 두개골이 아닌데, 무슨 종족이지? 설마 마족 태생이었나? 아니, 뿔이 없는 걸 보니 혼혈?"

개중엔 대주술사처럼 예리한 눈썰미로 한스의 성형을 눈치챈 이도 있었으나, 지금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세상을 오시하듯 거만하게 그들을 내려다보던 불사왕이 입을 열기 시작했으니까.

[별거 아니라 여겨 무시했던 피라미가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 줄이야. 아주 흥미롭군.]

그의 눈길이 구석의 결계 앞에 서 있는 엘프들에게로 향했다.

여전히 태연한 기색의 해리스와 한껏 긴장한 채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당당하게 선 세실리, 거의 기절 직전인 샤피론까지.

그에 주변 다른 이들의 시선도 그쪽으로···, 특히 범상치 않은 활을 든 채 가장 앞에 서서 정면으로 불사왕과 마주한 해리스에게로 집중되었다.

아직도 활에서 피어오르는 묵직한 기운은 그가 좀 전에 행한 공격의 당사자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심지어 불사왕 휘하의 언데드들은 왕에게 무례를 범한 저 건방진 엘프를 찢어 죽일 듯 기세를 돋웠으나···.

[흐음— 마음이 바뀌었다. 오늘은 이만 물러나지.]

한스의 한 마디에 곧바로 기운을 갈무리하며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말에 가장 먼저 발끈해 나선 이가 있었으니.

"누구 마음대로! 여기가 그렇게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인 줄···!"

"성녀님."

한껏 흥분해 앞으로 나섰던 리에스타가 하인리히의 부름에 말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지금 저희는 제대로 싸울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쌓인 피해가 너무 크기도 하고요."

"···하지만!"

불사왕이 쳐들어오고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건만, 신성 결계의 도움까지 받은 강자들이 벌써 열이 넘게 사망했다.

또 부상자는 수십에 달했는데, 부족한 실력임에도 사명감으로 전투를 보조하기 위해 끼어든 성기사들이 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에 반해 불사의 군대가 얻은 피해는 언데드의 파손뿐.

물론 완전히 파괴되어 영구적 손실로 이어진 전력도 제법 되었지만, 그게 어디 사람의 생명에 비할 수 있겠는가?

또 잔해들로 수복까지 할 수 있는 언데드들과는 다른 만큼, 이쪽이 좀 더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번 건으로 주신교단의 입지도 상당히 흔들리겠지.'

단순히 침입을 허용한 것은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어도, 교단이 주최한 행사에서 사망자까지 나온 건 도저히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손해를 감수해야 할 터.

심지어 이곳은 그들의 홈그라운드가 아닌가?

어찌 보면 하인리히가 전의 일을 수습하자마자 한스가 곧바로 거하게 사고 친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이번에 벌인 일은 결코 의미 없는 난장판이 아니었다.

'한스의 위험성과 그에 맞설 존재인 하인리히를 세계에 어필할 기회, 덤으로 해리스의 데뷔까지. 거기다 불사왕과 용사가 존재하는 한, 교단의 발언권은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어.'

오히려 이참에 과하게 강한 교단의 영향력을 살짝 조절했다 생각하면 그리 나쁠 것도 없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탈리아 왕국에 똬리를 틀고 있는 하인즈가 활동하기 더 편하기도 할 테고.

"···후우."

하인리히와 잠시 시선을 마주하던 리에스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국 수긍한 그녀가 입술을 짓씹으며 뒤로 물러서고, 그는 다시 앞으로 나서 정면으로 불사왕과 마주했다.

격렬한 전투로 곳곳에 상처가 생기고 지저분한 모습이 된 채 숙적과 마주한 용사.

하인리히도 남들처럼 지쳤을 것이 분명할 텐데도, 그 존재감은 전혀 쇠하는 일 없이 마주한 불사왕에게도 전혀 뒤지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야말로 그의 유일한 대적자라는 것을 세상에 다시 한번 강조하듯이.

[크흐흣— 여흥이 조금 길어졌구나. 처음엔 그저 인사만 하고 갈 생각이었거늘. 뭐, 확실히 인상적이긴 했다.]

뻔뻔한 웃음을 터트리며 그들을 조롱하듯 내려다보는 불사왕.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기에 갑자기 쳐들어왔다가 물러난다는 것인지, 그걸 이해할 수 있는 이는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지만···.

애초에 심연의 존재인 불사왕의 사고를 평범한 이들이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 정도면 됐겠지? 이제 슬슬 퇴장해 볼까?'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스르륵—

하나둘 바닥의 어둠으로 사라져가는 언데드들.

쳐들어온 적들이 대놓고 후퇴하고 있었지만, 이미 기세가 꺾인 각 세력의 강자들은 그저 당장의 싸움에 끝난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아 참, 요즘 광기에 빠진 몬스터들 때문에 정신이 없다지? 공들여 준비해 준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더군.]

"···한니발 스트라우스, 네놈!"

[크크큭, 안 그래도 바쁠 텐데 내가 너무 시간을 뺏었구나. 어디 마음껏 발버둥 쳐 보거라. 이 몸이 즐겁게 감상해 주마.]

"하! 다음엔 결코 이렇게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 그것도 재밌을지 모르겠군.]

언데드들을 모두 수습한 한스가 허공을 미끄러지듯 움직여, 뒤쪽의 창가에 커다랗게 뚫린 구멍 밖으로 날아올랐다.

회의가 끝난 직후에 싸움이 벌어졌던 만큼, 이미 바깥은 캄캄한 어둠이 드리워 있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아직 절망은 시작되지도 않았으니, 좀 더 분발해 보도록 해라. 그렇지 않으면···.]

그리고 그 달빛 하나 보이지 않는 밤하늘 한가운데에서.

듣는 이를 공포에 빠뜨리는 음성이 나직이 울려 퍼졌다.

[너희는, 멸망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대회의장을 습격했던 불사왕이 모습을 감췄다.

"······."

"···크흠."

불편한 공기가 감도는 대회의장.

난장판이 된 이곳에서, 모두는 불사왕의 예언과도 같은 말에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

'좋아, 좀 많이 오글거리긴 했지만 나름 괜찮은 마무리 대사였다. 이것도 많이 하다 보니 익숙해진 것 같네.'

정작 당사자는 별생각이 없었지만.

***

"허···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정말 대단하군요."

"역시 라포리 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저도 바로 옆에 있으면서 얼마나 놀랐는지! 다른 나라 사절단분들도 해리스 씨를 눈여겨보시더라고요!"

라포리와 세실리가 마치 신기한 것을 마주한 듯 해리스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자격을 얻는 것을 직접 본 건 그들도 처음이었던 것이다.

"으으— 치사하게 또 혼자 앞서 나가고 있어···."

샤피론이 구석에서 혼자 구시렁거리긴 했지만, 해리스가 말없이 팝콘 봉지를 쥐여 주니 금세 다시 조용해졌다.

"하아— 그나저나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세실리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숙소 밖의 창문을 바라보았다.

불사왕이 모습을 감춘 후.

로셀리아 대신전은 잠들지 못하는 밤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일단 숙소로 보낸 사절단과 별개로 그들은 사건의 뒷정리를 해야 했으니까.

다행히 엘븐 킹덤을 비롯한 에나멜 대륙 측에선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다.

와일드 랜드의 대표가 상당한 부상을 입기는 했으나, 곧바로 이어진 주신교단의 치료로 큰 부작용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글쎄요, 지금 가장 정신없는 건 주신교단일 테니까요. 일단 조금만 기다려 보지요."

라포리의 말대로, 이후 며칠간 교단은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전투의 사상자들을 수습하고, 전장이 되었던 대회의실을 정리했다.

그리고 경비도 한층 강화되어 전시체제 수준의 방비가 이어졌다.

이미 철통같이 대비를 갖춘 회의 장소가 뚫렸는데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싶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도 없지 않은가.

또 과거에 한 번 실패한 적 있던 불사왕의 침입 경위 파악도 재차 진행되었다.

이번엔 마탑 맹주의 도움까지 받아 가며 정밀 조사에 들어갔으나, 아쉽게도 결과는 그리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뒷수습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와중에도 그들은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 잊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시급하게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렇게 불사왕의 습격이 있은 지 고작 사흘이 지난 후.

이전과는 다른 회의실에서 '대륙 정상 회의'가 다시 정상적으로 재개되었다.

"상황의 심각성은 모두 인지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2차 회의가 열린 직후, 코델리아 추기경이 낮은 목소리로 꺼낸 말이었다.

전과는 다르게 자리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무거운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당대의 불사왕, 한스는 시종일관 예상을 벗어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거기다 그 능력 또한 예측불허라 대응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죠."

그것은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이들이 경험해 봤기에 절실히 체감한 바였다.

대표가 사망해 새로 파견되어 온 몇몇 이들도 상황을 파악한 건 마찬가지.

"부끄럽게도 저희 주신교단은 불사왕의 침입을 제대로 막지 못했습니다. 그로 인해 또다시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죠."

그녀의 자책 어린 말에 사이먼 황태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미 요 며칠간 한껏 실랑이를 벌인 탓에 이 자리에서까지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오른팔이나 다름없던 수하를 잃은 것은 그에게도 큰 타격이었기에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된 서문이 맺은 결론은 결국 하나였다.

최대한 빨리, 모두의 힘을 합쳐 이 회의를 끝마치고 불사왕에게 대응할 준비를 하는 것.

이견의 여지 하나 없는 그녀의 말에 모두가 동의하며, 이후의 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모두가 위기감을 가진 만큼 첫 회의 때 보였던 삐걱거림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아직도 좀 사리는 느낌이 있긴 한데. 뭐,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이들은 각자의 조직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으니 자기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건 당연했다.

그래도 서로 날을 세우는 일 없이 지금처럼 최대한 합의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발전했다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아침.

평소와 같이 회의를 위해 숙소를 나서려던 대표들에게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갑자기···? 어떻게?!"

"아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모두의 반응은 대동소이했다.

전조 없이 전해진 소식에 대한 경악과 당황.

그러나 그중에서도 유독 격한 반응을 보인 이가 있었는데···.

"무··· 뭐? 아, 아니. 말이 안 되잖아! 어제까지만 해도 별 이상이 없었는데 어떻게 갑자기!"

로한 공국의 대공자, 데니스 로한이었다.

그는 곧 열릴 정상 회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곧바로 수하들과 함께 대신전의 게이트가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로한 공국, 모든 국경의 방어선 붕괴.

그간 잘 버티고 있던, 그의 조국이 한순간에 무너졌다는 소식이 전해졌으니까.

그리고 그 소식을 들은 대부분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아직 절망은 시작되지도 않았으니, 좀 더 분발해 보도록 해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멸망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불사왕이 했던 불길한 경고가.

바로 이것을 뜻하는 것이었노라고.

#140

불사왕의 준동 (4)

회의장을 습격했던 불사왕이 떠난 직후.

'부자연스럽다.'

아제리온 제국 정보부의 고위 간부이자, 이번 정상 회의에 황태자의 보좌관으로 참여한 오드레 자작이 느낀 감상이었다.

'어떻게 대신전에 침투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과정도 그리 간단하지는 않았을 거다. 그런데 굳이 그런 수고를 감수해 놓고, 이렇게 변덕 부리듯 갑자기 떠난다고?'

그는 세상 모든 이들의 행동에는 목적이 있다고 믿는 부류였다.

'차라리 놈에게 뭔가 노림수가 있었고, 그걸 달성한 후 유유히 빠져나갔다고 보는 게 맞겠지.'

아기가 우는 것에도 타당한 이유가 있듯, 그것이 설령 미친놈의 사고라 하더라도 그들 나름의 논리와 근거가 있는 법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보인 불사왕의 모습은 광인의 행동이라 생각하기에도 뭔가 부자연스러웠다.

'물론 용사를 비롯한 이들도 그리 만만하지는 않으니, 싸움이 더 진행되었다면 어떻게든 몰아낼 수 있었겠지. 희생이야 커졌겠지만 어쨌든 대신전이었으니까.'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고작 열 몇 명이 죽는 걸로는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뒤쪽에 따로 마련되었던 결계까지 파괴되어, 그 안에 있던 자신을 포함한 사절단이 떼죽음 당했을 지도 모른다.

그들 입장에서는 다행이라고 봐야 할 일.

하지만···.

사락— 사락—

오드레는 여러 사람의 인적 사항이 적힌 서류를 다시 꺼내 살펴보았다.

그곳엔 회의 참여자 명단을 확보한 직후 제국 정보부에서 조사했던 내용이 담겨있었다.

'제국 출신의 카이엔 투르칸 백작, 황태자 전하의 수족. 용병 길드의 칸블과 페이튼, 용병왕과 그 오른팔. 샤로티 왕국의···.'

그리고 사망자에 대한 내용을 다시 훑어보던 그는 결국 그들의 공통점을 엮어낼 수 있었다.

'하나같이 뒤가 구린 구석이 있던 이들이군. 비슷한 조건을 가지고도 그 전투에서 살아남은 이는 있지만, 적어도 죽은 이들 중에 선량한 이는 없다.'

우연일까?

···아니, 그는 우연 따윈 믿지 않는다.

모든 일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고, 그건 이 사건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문제는 그가 그 이유를 도저히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쁜 놈들만 골라 죽이는 불사왕이라니, 그만큼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악인의 영혼에 담긴 부정적인 힘을 수집하기 위해? 그러면 굳이 다른 이들을 죽이지 않는 것보다, 모조리 죽이고 그중에서 선별하는 게 더 편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어떤 흑마법 의식에 필요한 과정이었나? 그도 아니면···.'

온갖 가설과 추론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지만, 뚜렷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오드레는 며칠간 골머리를 싸매며 혼자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사망자들의 공통점 외에도 불사왕이 순순히 물러난 이유 또한 의문인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내가 너무 고정관념에 얽매인 걸까? 하긴, 불사왕이 보통의 미친놈들과 같을 리는 없겠지.'

그는 지금껏 흑마법사를 비롯한 수많은 광인의 행동 원리를 분석한 베테랑 수사관이기도 했으나, 그래봤자 그들도 고작 인간에 불과했다.

애당초 불사왕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노릇.

그렇게 내심 이번 일을 분석하는 것을 포기하고 있던 찰나, 마침내 그에게 로한 공국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다.

당연히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존재는 하나밖에 없었다.

점점 더 복잡해지는 상황에, 그는 눈을 질끈 감으며 속으로 그 이름을 뇌까렸다.

'···불사왕, 한스.'

그 만악의 근원인 이름을.

***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립니까?! 로한 공국이 무너져요?"

"위태롭긴 하지만 아직까진 잘 버티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급작스럽게 일이 커지다니···."

"뭔가 전조 증상이라도 있었을 게 아닙니까? 그럼 어떻게든 미리 연락받을 수···."

대륙 정상 회의가 열린 회의장 내부가 시끌벅적해졌다.

모두 예고 없이 전해진 소식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온 대륙에 대해 잘 모르는 이종족들도 나라 하나가 결국 무너졌다는 소식에 심각한 표정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덜컹—

그렇게 한창 혼란스럽던 와중.

회의장의 문이 열리며 로한 공국과 마탑, 교단의 대표들이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떠들썩하던 공간이 한순간에 조용해지며 일제히 그들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하지만 데니스를 비롯한 이들은 딱딱한 얼굴로 조용히 자리에 앉을 뿐, 앞으로 나선 것은 마찬가지로 굳은 표정의 코델리아 추기경이었다.

그녀는 다른 이들의 의문을 이해한다는 듯 곧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공국이 완전히 멸망한 건 아닙니다. 하지만···."

로한 공국은 남쪽을 제외한 삼면을 북부 산맥과 접하고 있어, 광기 사태가 벌어지고 나서부턴 국가가 총력을 기울여 국경을 사수하는 중이었다.

또 주신교단도 그곳에 소재한 신전 병력은 물론, 본단의 팔라딘을 포함한 증원까지 파견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그들을 돕고 있었는데—.

"···한창 몬스터들과 사투를 벌이던 도중, 알 수 없는 이유로 삼면의 방어선이 일시에 붕괴했다고 합니다. 또한, 그와 비슷한 시기에 공국의 중요 시설에 일제히 자폭 테러가 벌어졌습니다."

공국의 수도에 위치한 기사단의 본부, 주신교단의 신전, 마탑 연맹의 마탑 등···.

심지어 공왕이 거주하던 왕성까지 정체불명의 집단에게 공격받았다.

그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최소한의 병력만 남기고 국경 수비를 지원 중이던 신전은 큰 피해를 보았으며, 교단 기동력의 핵심이던 게이트까지 파괴되고 말았다.

물론 같이 공격받았던 곳들의 사정 또한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병력이 빠진 상태였다지만, 주신교단의 신전까지 파괴할 정도라고?"

"그뿐만이 아니라지 않습니까? 대체 동시에 몇 곳을 공격한 건지."

"타이밍을 보면 국경 쪽에 수작을 부린 것도 그들이겠지요. 심지어 그곳엔 교단은 물론 제국의 지원군까지 있었을 텐데."

추가로 밝혀진 정보에 다시 삼삼오오 떠들기 시작한 사절단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그들의 사고는 이내 한 곳으로 귀결되었다.

"이것 또한 불사왕 한스의 소행이겠지요?"

"설마···! 이곳을 습격했던 것도 일을 벌이기 전에 우리의 시선을 돌리려고?"

"그렇다고 하기엔 그의 행보가 좀 이상했···."

"결국 일이 이렇게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역시 그건 우릴 조롱하려 했던 것뿐입니다!"

그들이 사건의 흉수로 불사왕을 지목한 건 아주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그가 그간 쌓은 악명이 워낙 높다 보니, 처음엔 회의적으로 생각했던 이들도 나중엔 그 주류 의견에 자연스럽게 편승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대화를 들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 중에는.

주신교단의 성자이자 불사왕에 대적할 용사, 하인리히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속마음은 겉과는 상당히 달랐는데···.

'아니, 이건 대체 뭔 상황이야?'

아무 생각 없이 내뱉었던 한 마디가 업보가 되어 돌아온 현실에 당황한 것은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뜻밖의 사태에 미간을 찌푸리며 지금까지 전해진 정보를 차근히 되새겼다.

'어떻게든 로한을 멸망시키겠다는 악의가 느껴지는데. 밀려온 몬스터와 싸우는 도중에 일거에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추가 지원을 차단하기 위해 교단과 마탑까지 공격했어.'

어지간한 조직의 역량으로는 어림도 없을뿐더러, 짧은 시간 준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최소한 연 단위의 시간을 갈아 넣어야 가능할 터.

그리고 하인리히는 이만한 일이 가능한 일당 하나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역천의 서약···. 놈들이 움직인 건가.'

사실 그동안 워낙 많이 그에게 얻어터진 놈들이라 별것 아니라는 인식이 있었지만, 그들은 절대 만만한 놈들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심연을 열어 그 '광기'를 꺼낸 범인이라는 걸로 모든 것이 설명되지 않는가.

그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나라 하나 뒤엎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올드만에게서는 이번 일에 대한 내용은 듣지 못했는데. 역시 점조직이라는 게 문제인가.'

밴시 퀸 올리비아가 얻은 정보를 토대로 간부들이 총출동해 잡아 온 툴크 왕국 지부장 올드만.

그녀는 놈을 잡아놓고도 그 심장부에 새겨진 정체불명의 금제 때문에 정보를 캐내는데 난색을 표했으나, 그것이 마도의 극의에 오른 한스에게까지 통용될 리가 없었다.

'물론 자폭 코드에 가까운 술식이라 조금 번거롭긴 했지만.'

대상의 안위는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정보 유출을 막기 위해 영혼을 제한하는 금제였다.

「금단의 지식」에 따르면 인간은 어림도 없고 악마족 정도는 되어야 쓸 수 있는 고위 흑마법이라는데···.

'그래도 혹시 놓친 게 있을지도 모르니, 다시 한번 놈을 족쳐봐야겠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기엔 지금의 사안이 너무 컸다.

무너진 방어선에선 지금 이 순간에도 광기에 찬 몬스터들이 쉬지 않고 들이닥칠 텐데, 신전의 게이트는 물론 마탑까지 무너져 빠르게 지원할 방법도 사라졌다.

물론 후방 저지선도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미 나라의 모든 힘을 쏟아부은 최전선이 뚫린 마당에 그게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단순히 치안이 악화되는 정도가 아닌, 말 그대로 국가 존립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번 일에 제국의 제론 대신전에 계신 피레이 추기경께서 직접 나서주기로 하셨습니다. 제국 내의 교단 정예를 모아 최대한 로한 공국과 가까운 신전으로 이동한 후, 되도록 많은 이들을 구해 볼 예정이라고 하시더군요."

코델리아 추기경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이어졌다.

하지만 그 침착한 목소리의 내면에 담긴 끓어오르는 분노를 눈치채지 못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까지 대륙이 입은 피해도 상당했으나, 나라 하나가 패망하고 발생할 난민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후의 회의는 로한 공국에 대한 대응이 중심이 되었다.

일차적으로 빠른 지원이 가능한 주신교단과 아제리온 제국이 나서고는 있지만, 대륙 연합군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사안이었으니.

그렇게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는 와중.

하인리히는 그 상황을 지켜보며 조용히 상념에 젖어 있었다.

***

"뮬로, 로한 공국에 대해 새로 들어온 소식은 있나?"

"예, 로드. 지금은 국경이 완전히 무너져 2차 저지선에서 몬스터들을 막고는 있지만, 몬스터들을 제대로 막기엔 역부족이라고 합니다."

전 세계를 아우르는 정보조직을 만들기 위한 하인즈의 노력은 그간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다.

당연히 로한 공국 쪽에도 클랜의 뱀파이어가 파견 나가 있었고, 뮬로는 그를 통해 현지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받아볼 수 있었다.

'확실히 인재라니까. 이것도 혈마력에 통달한 뮬로가 있으니 할 수 있는 일이지.'

「정제혈정」으로 더 강해진 그는 이제 마음만 먹으면, 휘하의 뱀파이어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대륙적 규모의 정보 조직 수장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능력.

그렇게 하인즈가 내심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와중에도 그의 보고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급조된 2차 저지선은 구멍이 뻥뻥 뚫려 흘려보내는 몬스터들이 많아, 그나마 없는 것보단 나은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하지만 상황은 그조차 허용하지 않고 있었는데···.

"2차 저지선도 그리 오래 버티진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로한의 수도 앞쪽에 3차 저지선을 마련 중이라고 하지만···."

말을 잇던 뮬로가 입을 닫고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 뒤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흐음···."

하인즈가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물론 로한 공국이 위험하다고 뱀파이어 클랜을 이끌고 가서 도울 생각은 없다.

애초에 그럴 이유도 없고, 여건도 되지 못한다.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유페르쉬 클랜의 혈문(血門)도 상당한 시간과 자원을 소모하는 술법인데다, 아직 그들이 전면에 나서기엔 시기상조였다.

"역시, 그 수밖에 없는 것 같은데."

"네? 따로 하명하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다. 그보다 테오도르의 작업은 잘 진행되고 있나?"

"예. 클랜원들이 워낙 세계 곳곳에 퍼져 있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지만, 그래도 이곳으로 집결시키는 데에 큰 문제는 없답니다."

대륙의 서쪽 끝에 위치한 탈리아 왕국.

하인즈 2세는 이곳을 영역으로 삼고, 서서히 뱀파이어 클랜의 영향력을 확대할 예정이었다.

어느 정도 준비가 된 후엔 본격적으로 세상에 나서는 것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슬슬 한스도 본거지 하나 정도는 만들어 둘 때가 됐지.'

사실 불사의 군대를 지금처럼 계속 한스의 음차원 공간에 넣어두는 건 비효율적이었다.

군대를 제대로 운용하기 위해서는 주둔지가 필요했으며, 또 그들의 특성상 대륙인들이 접근하기 어렵고 인적이 드문 곳이 적합했다.

서부는 이미 하인즈 2세의 영역으로 정했고, 중앙은 제국과 성지가 있으며, 동부는 공화국과 섬나라인 마도국이 있다.

남부 사막은 인적이 드문 편이지만 최남단에 위치한 부족 연맹과 자주 부딪칠 수밖에 없다.

결국, 남은 곳은 오직 하나뿐.

'역시 마왕성은 그런 곳에 있어야 제맛이지.'

가혹한 환경과 거친 지형으로 아무나 접근하지 못하며, 온갖 사나운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대륙 최대의 마경.

초보자는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고레벨 필드 그 자체.

북부 산맥.

그곳이 가장 적임지였다.

'그렇다고 너무 깊숙한 곳에 숨으면 불사의 군대의 위용을 제대로 선보일 수 없지. 힘들지만 고생 끝에 도달할 수 있는 위치가 적당해.'

때마침 적당한 장소도 하나 있지 않은가.

그래, 예를 들어···.

'···로한 공국의 북쪽에 있는 산맥 정도면 딱 좋겠군.'

또 그렇게 되면 당연하게도.

그곳의 거주하던 기존 입주자들은, 강제로라도 그 소속을 바꿔야만 할 것이다.

'광기'에서.

'죽음'으로.

#141

인재 영입 (1)

"호오, 기어코 로한을 무너뜨린 건가? 말만 요란한 빈 수레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군."

내리쬐는 강렬한 태양, 작열하는 사막, 끓어오르는 대기.

그 극한의 환경 탓에 사람의 발길이 끊긴 남부 사막의 한 돌산 위에서, 로브를 뒤집어쓴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지평선을 바라보며 나직이 뇌까렸다.

"그래, 이 정도는 해 줘야지. 워낙 무능한 놈들뿐이라 실망할 뻔하지 않았나."

그의 혼잣말에 마찬가지로 로브를 뒤집어쓴 채 뒤에 서 있던 이들이 깊게 허리를 숙이며 고개를 조아렸다.

물론 허락 없이 함부로 입을 열었다간 머리가 터져나갈 수 있으니, 그 말에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 이쪽도 슬슬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되겠군. 당분간 대륙 놈들의 시선은 북쪽에 집중될 테니, 한결 편하게 진행할 수 있겠지."

지평선을 바라보던 그가 마침내 몸을 돌렸다.

그렇게 돌산 한편에 나 있는 동굴로 발걸음을 옮기던 와중, 갑자기 몰아닥친 돌풍이 그의 주변에 휘몰아쳤다.

펄럭펄럭—

거칠게 펄럭이는 로브 자락들.

그리고 선두에 선 덩치의 후드 사이가 한순간 벌어지며.

목까지 올라온 화려한 불꽃 문양의 문신이 드러났다 사라졌다.

"쯧, 참 지랄맞은 환경이야."

가볍게 혀를 찬 그는 대충 로브 자락을 여미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동굴로 모습을 감췄다.

이 대륙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광기의 씨앗'이 숨겨진 그 동굴로.

***

시간이 흐를수록 로한 공국의 사정은 점차 악화되어 갔다.

이제는 수도 인근만 간신히 지키고 있을 뿐, 국가로서의 기능은 이미 한참 전에 상실했다고 봐야 할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인 일이라면 아제리온 제국이 북상을 위해 병력을 끌어모으고 있다는 것.

그간은 공국이 버티고 있었기에 다른 곳에 힘을 집중하느라 비교적 허술했던 북부 국경에 빠르게 군사들이 집결하기 시작했다.

넓은 제국 본토에서도 계속해서 광기 사태가 벌어지는 중인 만큼, 이건 그들로서도 상당히 무리한 파병이었지만···.

그렇다고 로한 공국이 완전히 사라지게 방치하면 더 곤란해지는지라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추기경이 이끄는 주신교단의 정예들은 이미 출발했다고 하던가. 최대한 피난민들을 수도로 모으고 지원이 도착할 때까지 버틸 거라고 했지.'

제국 측에서도 최대한 서두르고 있다지만, 군대가 움직이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그 시간만큼 희생도 늘어날 수밖에 없는 일.

희생되는 이들의 수를 최대한 줄이려는 주신교단으로서는 그 방법이 최선이었다.

'하인리히는··· 당분간은 나서지 못하겠지. 그렇지 않아도 한창 대륙 연합군이다 용사 파티다 바쁜 와중에, 불사왕의 유일한 대적자인 용사가 자리를 비울 수도 없는 노릇이니.'

소수의 강력한 개체가 침입한 것이라면 모를까, 다수의 몬스터로 뒤덮인 국토 수복은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는 작업이었다.

아마 그가 나서게 되더라도, 그건 로한 신전의 게이트를 수복하고 이동이 원활해진 이후에나 가능할 터였다.

그리고 그렇게 대륙이 한창 혼란과 격변에 휩싸인 와중.

마침내.

[흐흠—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거늘. 그놈들은 아무리 잡아들여도 어디선가 튀어나와서 귀찮게 하는 데에 일가견이 있구나.]

불사왕 한스가 다시 아우테리카 차원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요즘 자리를 비울 때마다 뭔가 일이 터지는 것 같은데.'

물론 기분 탓이겠지만, 유페르쉬 클랜의 침략도 그렇고 지금 일도 워낙 사안이 크다 보니 바로 대응하지 못하는 게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당분간은 되도록 아바타들을 지구로 불러들이지 말아야겠군. 이제 「개체 투영」도 한 시간은 유지할 수 있게 되기도 했고.'

한창 대륙이 혼란스러운 지금, 갑자기 무슨 일이 어떤 식으로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특히 그 바퀴벌레 같은 역천의 서약 놈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으니, 원활한 '안방 극장'의 진행을 위해선 항상 만반의 준비를 해두는 게 좋았다.

'···아니, 생각해보니 열 받네? 내가 왜 그놈들 때문에 이렇게 골머리를 썩여야 하지?'

자신은 그저 평화롭게 '대륙 정복을 꾀하는 마왕과 그에 맞서는 용사'를 연출하고 싶을 뿐인데, 놈들 때문에 자꾸 사건이 커지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까진 어찌어찌 잘 엮어나가고 있었지만, 그의 통제에 따르지 않는 변수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번 일만 마치고 나면 좀 더 본격적으로 놈들을 털어봐야겠어. 이번엔 한스도 직접 나서야겠군.'

딱히 그가 직접적으로 큰 피해를 본 것은 없고 오히려 이쪽이 놈들을 쥐 잡듯 잡은 기억밖에 없었지만···.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바로 지금.

자신이 일을 벌이려는데 놈들이 방해된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후우··· 그래도 일단, 지금은 북부 산맥에 거점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자.'

그렇게 마음먹은 한스가 간부들을 소집해 그와 관련한 명령을 내리려던 순간.

대신전 습격 때도 부르지 않아, 계속해서 업무에 매진 중이던 밴시 퀸 올리비아가 귀가 솔깃해지는 정보를 가져왔다.

[왕께서 이전에 넘겨주신 이들과··· 최근에 잡아들인 간부에게 얻은 정보를 대조해··· 가장 가능성이 높은 장소를 위주로 조사를 진행했나이다···.]

유페르쉬 클랜을 움직인 이의 명을 받아 탈라리아에 잠입하려 했던 정예부대와 역천의 서약 툴크 왕국 지부장 올드만.

그리고 기존에 꾸준히 진행하던 그들에 대한 조사 결과까지.

그녀는 새로 얻은 정보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정보 등, 모을 수 있는 정보는 죄다 끌어모아 유력 범위를 좁히는 데 성공했다.

이후 이어진 것은 언제나 그랬듯, 유령들을 이용한 전수조사였다.

[그렇게 진행하는 와중···, 소녀가 이미 주시하고 있던 이들 중에··· 관련자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나이다···.]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였다.

[아제리온 제국, 수도 인근의 토베아 시···.]

그곳은 대륙 중심부에 자리한 제국의 수도, 제론을 둘러싼 황실 직할령 중 하나였다.

교통의 요지로써 나름 대도시에 근접한 규모를 보이는 곳.

[그곳에 유페르쉬 클랜을 움직인··· 역천의 서약의 고위 간부가 있나이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그녀의 집착에 가까운 집념에, 마침내 용의자들이 그녀의 시야에 포착되었다.

[호오— 수고했다, 올리비아. 때마침 놈들이 제국에 숨어 있었단 말이지?]

[그러하옵나이다···. 왕이시여···.]

그렇지 않아도 거슬리던 참이었는데 북부 산맥으로 가기 전에 잠깐 그곳을 들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제국과 공국은 지근거리에 붙어있는 만큼, 이번에 일을 벌인 놈들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어쩌면 그 당사자일지도 모르고.

[감히 건방지게 뒤에 숨어서 손가락만 까딱거리려 들다니. 이번엔 내가 직접 놈들을 끄집어내 줘야겠구나.]

그렇게, 한껏 벼르고 있던 불사왕 한스가.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다.

***

"뭔가 이상한데. 확실히 이상해."

탁한 금발의 청년이 화려한 방 내부를 이리저리 서성거리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리고 뭔가가 잘 풀리지 않는다는 듯 자기 머리를 이리저리 헤집고는, 안락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깊게 심호흡했다.

"후우— 아니, 너무 과민반응 하는 거겠지."

세상의 전복을 꿈꾸는 악의 조직 '역천의 서약'.

그곳에 소속된 지구 출신의 각성자, 앤드류 위버가 의자에 깊게 몸을 파묻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는 고위 간부인 시아나의 명에 따라 여러 곳의 동향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최근 고유스킬인 「궤적 관측」에 감지된 여러 꺼림칙한 조짐들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진 상태였다.

'대체 일이 어떻게 된 거지?'

첫 번째로, 탈라리아로 향한 직후 갑자기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유페르쉬 클랜.

성혈을 관측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벗어나는 만큼, 그들과 브로코슬락 클랜의 싸움을 직접 보진 못했다.

'하지만 무슨 문제가 생긴 건 분명하다.'

그도 그럴 것이, 시아나가 보냈을 지원군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지 않았나.

심지어 그들도 자신이 관측할 수 없는 격이 높은 존재와 엮여 버렸는지 끝내 그 이유에 대한 정보도 알아낼 수 없었다.

'탈라리아로 향하던 도중 갑자기 행적이 끊겼어. ···혹시, 브로코슬락의 성혈이 그 자리에 있었나?'

눈앞에 검은 장막이 드리운 것처럼 무엇도 확실히 파악할 수 없으니,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의문투성이였다.

두 클랜 간 싸움이 어떻게 끝났는지, 지금도 탈라리아에서 자신의 시선을 가로막는 존재는 대체 누구인지, 시아나가 보낸 이들은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 수 있는 게 단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 무력감이 느껴진 건 오랜만인데. 아니, 이건 전보다 더하군.'

과거 고유스킬의 수준이 낮았을 때도 이렇게 막막함이 느껴지진 않았다.

애초에 그때는 그만한 격의 존재들과 엮일 일도 별로 없었을뿐더러, 설령 볼 수 없는 일이 있더라도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금방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대한 카르마를 투자해 스킬을 상당히 강화한 지금, 한껏 자신감이 차오르고 야망에 불타오른 순간에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되니···.

"굉장히··· 짜증 나는군."

또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툴크 왕국 북부 강철의 성채에서 한창 활약 중인 정체를 알 수 없는 야만인.

처음 앤드류가 북부 산맥에 갔다 온 파티의 존재를 알았을 때는, 그들이 뭔가 비밀스러운 임무를 받고 산맥 내에 숨어있던 강자를 데리고 온 것인가 의심했었다.

그 대상이 표면적인 목표인 드워프였든 아니면 전혀 다른 존재였든, 그래야 「궤적 관측」에 감지된 이상이 설명되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단 말이지. 그들은 드워프 구출 의뢰를 받고 산맥으로 향한 게 맞아. 이상한 건 그 야만인 놈이다.'

시련을 겪고 성장했다고 하기엔 갈 때와 올 때가 너무 다르다.

아예 같은 인물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로.

지금도 그의 격이 자신의 시야를 가로막아 여전히 흐릿한 상태이지 않은가.

'중간에 잠깐 자리를 비웠던 건지 강철의 성채에서 모습을 감췄던 적이 있긴 한데···.'

그 또한 신전을 통해 어디론가 이동했을 거라고 추측만 할 뿐, 정확한 행적은 추적할 수 없었다.

'그 야만인, 확실히 뭔가 있어. 북부 산맥에서 관측된 마력의 충돌은 아마 불사왕과 드래곤의 것일 확률이 높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산맥을 다녀온 이가 갑자기 그렇게 강해졌다고? 그것도 용의 힘을 사용하면서?'

그 '할리'라는 야만인을 직접 살펴보는 것은 힘들었지만, 주변에 퍼진 소문을 통해 정보 수집은 꾸준히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사실 그가 매우 희귀한 종족인 '용인'이었다는 것까지 알아낼 수 있었는데···.

'아냐, 뭔가 냄새가 난다. 산맥에 들어설 때와 나올 때의 차이, 그 사이의 간극. 대체 원인이 뭐지?'

근거도 논리도 부족한 비약적인 사고였으나, 극도로 발달한 그의 직감이 계속해서 위화감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어떠한 가정을 세워도 그것을 뒷받침할 정보가 없는 한은 무의미한 추측이 될 뿐이었다.

하긴··· 그 야만인이 대륙의 재앙인 불사왕과 힘을 합쳐, 광룡을 사냥해 잡아먹었으리라고 누가 예상할 수 있겠는가.

미친놈 소리나 듣지 않으면 다행이지.

"끄응, 일단 이것도 넘기자. 당장 중요한 문제는 아니니까."

조직에서 내려왔던 명령과 엮여있어 신경 쓰고는 있었으나, 그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는 만큼 굳이 파헤치지 않아도 상관은 없었다.

이대로 넘기긴 찝찝하긴 했지만 정말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으니.

"확실하다. 이놈들, 우연이 아니야. 정확히 역천의 서약을··· 우리를 추적해 오고 있어."

불사의 군대가 보이는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바로 그것이었다.

얼마 전에 이상을 감지한 앤드류가 그에 대한 내용을 시아나에게 보고한 바 있었다.

거기다 자신과 직접 연관된 사안이다 보니, 그 후로도 상황을 예의 주시하며 놈들을 살피고 있었는데···.

'놈들이 서부를 지나 중앙으로 활동 영역을 옮기고 있다.'

평소 날카롭다 자부했던 직관이 쉴 새 없이 경종을 울리고, 치미는 불안감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지만 앤드류는 애써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했다.

'놈들이 중앙 지역으로 접근하고 있지만, 그래도 변방에서부터 다가오고 있어. 난 지금 제국의 한가운데에 있으니 여기까지 오는 데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거야.'

심상치 않은 조짐이 감지된 것은 맞으나, 그게 지금 당장 급하게 움직일 사안은 아니었다.

심지어 그가 있는 곳은 다른 지부처럼 지하 조직도 아니고, 어엿한 제국의 귀족 저택이지 않은가.

'···그래도 이대로 있을 순 없겠지. 시아나 누님에게 말해서 뭔가 대책을 세우든지 해야겠군.'

본능이 계속해서 알 수 없는 불길함을 경고했지만, 그는 이성적인 사고를 우선하며 차분하게 앞으로의 대응 방안을 모색했다.

지금 느껴지는 감정은 그저 과민반응일 거라고만 치부하면서.

'쯧, 당분간은 밖에 나가지 말고 좀 사려야겠군. 한동안 따분해지겠어.'

그렇게 억지로 자신을 타이른 앤드류는 탁자에 놓인 위스키를 까서 그대로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식도를 태울 것 같은 독한 술이 들어가자, 그제야 마음이 편해지고 서서히 위기감이 사그라졌다.

이미 조심하기엔 한참 늦었다는 것도 모르고.

그가 숨어 있는 저택 주변으로.

하나둘 유령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142

인재 영입 (2)

서서히 사위가 어둑해질 무렵.

다그닥 다그닥—

도시의 대로를 달리는 마차 안에서 분홍색 머리와 자주색 눈을 한 아름다운 여성이 조용히 차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그 얼굴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무구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녀의 내심은 결코 평안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건···.'

치미는 위화감에 그 여인, 시아나는 시선을 창밖에 고정한 채로 기감만을 퍼뜨려 주변을 탐지했다.

하나, 둘, 셋···.

전과는 달리 확연히 늘어난 유령체의 숫자들.

심지어 그중 몇은 그녀를 감시 대상으로 설정했는지 일정 거리를 두고 마차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상황이 그쯤에 이르자 그녀는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꼬리가 밟혔구나!'

불사의 군대, 밴시 퀸 올리비아가 이쪽을 조사 중이란 것을.

하지만 대체 무엇 때문에 들킨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고작 유령체를 통해서는 철저하게 인간으로 위장한 자신의 정체를 간파할 수 없었을 텐데.

'아냐, 아직 내가 그 시아나라는 걸 알아채진 못했을 거야. 조사가 시작된 건 뭔가 다른 이유 때문이겠지.'

만약 올리비아가 자신이 그 '서큐버스 시아나'라는 것을 알고 감시 대상으로 삼은 거라면, 이보다 좀 더 철저하게 움직였을 터였다.

지금은 마치 일반적인 인간을 대상으로 정보전을 펼치는 것처럼 그녀를 대상으로 했다고 하기엔 좀 허술한 면이 있었다.

'그럼 대체 어디서 꼬리가 밟힌 거지? 제국 귀족으로서는 아닐 테고··· 역천의 서약 활동? 올드만을 통해서?'

그녀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러나 그는 시아나의 본명은 물론, 그녀의 근거지가 제국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를 터였다.

그들은 애초부터 그 정도 수준의 협력 관계에 불과했으니.

'탈라리아에 보냈던 녀석들의 연락이 갑자기 끊겼을 때부터 불안했건만. 설마 그 일과 연관이 있는 건가?'

결국 그녀는 곧바로 파악할 수 없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경로로 위치가 노출되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원인이 뭐가 되었든, 이렇게 관심을 산 이상 더는 여기에 있을 순 없겠어. 일단 자리를 피해야겠지.'

그렇게 되면 여러 가지를 포기해야만 하니 당연히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지금 그녀가 가지고 있는 아제리온 제국 귀족 신분은 상당히 오랜 기간 공들여 만들어낸 자리이지 않은가.

하지만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올리비아가 관심을 가졌다는 말인즉, 불사왕의 시선도 이쪽으로 향했다는 뜻과 마찬가지였으니까.

이대로 지체했다간 다시 불사의 군대로 끌려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 돼! 또다시 입대라니! 죽어도 싫어!'

자리와 신분 정도는 얼마든지 다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에 불사왕에게 잡힌다면, 또다시 그가 토벌될 때까지 영원히 예속되는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래, 도망가자.'

그렇게 생각하자 확실히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곧바로 몸만 숨기기엔 아쉬운 것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열심히 기반을 닦아뒀는데!'

나중을 돌아올 때를 대비해서 최소한의 안배 정도는 해 놔야 하지 않을까?

새로 시작하기 위한 밑천도 어느 정도 챙겨야 할 테고···.

'···설마 지금 바로 들이닥치진 않겠지? 불사왕정도 되는 거물이 몸소 나서지도 않을 테고.'

아마 나서더라도 올리비아를 비롯한 간부진들만 움직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제국의 도시 한복판에 있는 만큼, 그들만으로는 쉽게 일을 도모하지 못할 터.

그럼 그들이 찾아올 준비를 마칠 때까지 최소한 며칠 정도의 여유는 있다는 말이었다.

결국 욕심을 버리지 못한 시아나는 자신을 합리화하며 일단 저택으로 향했다.

그녀가 챙겨야 할 유용한 것 중에는 물론 '앤드류 위버'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느 정도의 제약은 있지만, 앉은 자리에서 대륙 곳곳의 정세를 파악하는 데는 그만한 능력이 또 없었다.

다그닥 다그닥— 덜컹!

마침내 저택에 도착하자 곧바로 문을 열고 내린 그녀는 자기를 마중 나온 사용인들의 인사를 무시하고 곧바로 앤드류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직행했다.

콰앙—!

망설임 없이 열어젖히는 손길에 커다란 소음을 내는 문짝.

하지만 지금은 겨우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앤드류—!"

"으잉? 누님? 갑자기 무슨 일이십···."

"지금 바로 이동할 준비를 하세요!"

"···오오! 역시 누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셨군요! 제가 먼저 말씀드리려고 했는···."

"됐으니까, 바로 움직여요!"

안락의자에 널브러진 채 술독에 빠져 헤실거리던 앤드류가 그녀의 강압에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동안 시아나는 흑마법으로 만든 아공간에 필요한 물건들을 챙기며, 어떻게 손을 써 둬야 기반 손실이 가장 적을지 고민을 이어갔다.

'이건 꼭 챙겨야 하고··· 이 건은 포기하기엔 그간 들인 공이 아까운데. 어떻게 현상 유지만이라도 할 수는 없을까? 그리고 저건···.'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야반도주를 준비하며 바쁘게 움직이던 와중.

사아아—

싸늘한 감각이 목덜미를 스쳤다.

'아?'

그녀는 이 감각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저택에 빼곡하게 설치된 보안 결계를 뒤덮는, 불가해할 정도로 짙은 압도적인 힘을.

깊고 어두우며, 무겁고도 끈적한.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심연 같은 죽음.

설마 했던, '그'의 존재감이었다.

'아아악—! 그냥 다 버리고 튈걸!'

결국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시아나는, 그저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

'토베아 시··· 대도시 급이라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만큼 작은 곳도 아니지.'

그리고 이만한 규모의 도시는 그 나름대로 온갖 이상 상황에 대한 방비도 철저하기 마련이었다.

그 말인즉슨, 처음부터 조용히 잠입하기도 쉽지 않거니와···.

아무리 철저하게 은폐 결계를 구축한다고 해도 그 마력의 여파를 온전히 감추긴 힘들다는 소리였다.

조용히 일만 보고 떠나긴 불가능한 상황.

그래서 준비했다.

위잉— 위이잉—!

콰아앙—!

"으악! 갑자기 뭐야?!"

"꺄아악—!"

도시 곳곳에서 비상 경보음이 울려 퍼지고 그에 맞춰 폭음이 터져 나왔다.

화려한 저택과 허름한 뒷골목을 막론하고 시작된 그 폭발은, 점차 어둠에 잠겨가던 도시를 한순간에 혼란으로 몰고 갔다.

'자, 그럼 가 볼까?'

조용히 움직이기 힘들다면 소란 속에서 움직이면 될 일이다.

한스는 부하들이 활동을 개시한 틈을 타, 미리 펼쳐두었던 결계 안으로 조용히 스며들었다.

결계 속에서 마주한 평범한 귀족 저택 하나.

하지만 그건 겉모습일 뿐, 그 내실은 비범하기 그지없었는데···.

'과연, 상당히 신경 썼는데? 어지간한 이들은 이 보안 장치들을 인지하지도 못했겠군.'

「마도의 길」과 「마력 지배」를 비롯한 능력들이 연달아 발동하며 저택에 걸린 마법들을 숨 가쁘게 분석했다.

인식 왜곡부터 시작해 기운을 은폐하는 것과 침입자를 배제하는 결계들까지.

하나같이 수준 높은 술법들이었던지라 이걸 정상적으로 파훼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겠지만.

콰지직—!

파직!

물론 압도적인 힘을 가진 불사왕에겐 해당 사항이 없었다.

그저 한껏 기운을 끌어올린 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그의 몸에 깃든 압도적인 밀도의 흑마력에 보안 결계의 복잡한 마력 구조물이 짜부라지며 무력화되었다.

'어디 보자, 그럼 일단···.'

우우웅—

그렇게 공간을 일그러뜨리는 존재감을 발산하며 순식간에 내부로 들어선 한스의 몸에서, 마력을 품은 파동이 저택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저택 내부에서 하나둘 기절해 쓰러지는 이들의 기척이 느껴지고—.

곧바로, 그것에 저항한 이들이 포착되었다.

[거기 있었군.]

그리고 다음 순간.

한스는 이미 그들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히··· 히익···!"

그곳에 있는 것은, 갑자기 허공을 찢고 나타난 그를 보고 격하게 몸을 떠는 탁한 금발의 사내 하나와···.

[음? 너는?]

어느새 바닥에 넙죽 엎드려 절하고 있는 분홍 머리칼의 여성 하나였다.

"아아—! 왕이시여, 드디어 오셨군요. 소녀, 왕께서 다시 강림하시길 목이 빠져라 기다렸습니다!"

"누, 누님?"

한눈에 봐도 알 수 있는 무조건적인 복종.

그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옆에 있던 남성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으나, 지금 그녀는 그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오호호··· 왕께서 좀 더 편히, 확실하게 대륙을 정복하실 수 있도록 소녀가 그간 열심히 준비했답니다? 인간들 틈에 은밀히 숨어들어 오랜 세월을 오직 왕을 향한 충심으로 버티며 기회를···."

분홍 머리의 여성은 식은땀까지 흘리며 필사적으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불사왕, 한스는 그녀가 왜 이런 태도를 보이는지 곧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악마족 서큐버스, 시아나.'

대주교급 성직자라도 긴가민가하게 여길 정도로 완벽하게 인간으로 위장하고 있었지만, 모든 마(魔)를 탐지하는 그의 「심연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전대 불사왕 휘하에서도 10위권에 가까운 녀석이었던 거 같은데.'

그녀는 인접 차원인 마계에서 소환되어 온 악마로, 말 그대로 어쩌다 보니 불사의 군대에 합류하게 된 케이스였다.

그의 뇌리에 남은 정보를 뒤적여 보니 무력은 그럭저럭 쓸 만한 정도지만 올리비아처럼 그 외의 방면으로 더 유용한 인재라는 평이 있었다.

'하긴, 악마 주제에 정체를 숨긴 채 제국 귀족 행세를 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지. 확실히 수완이 대단하긴 한 것 같군.'

신전을 비롯한 최상위권 강자들의 눈까지 속였다는 뜻이니, 뒷공작에 있어선 그야말로 최고의 인재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은 잠적했다 딱 걸린 전(前) 간부일 뿐이었지만.

[크크큭, 보아하니 그동안 정말 편하게 지낸 것 같구나?]

"그, 그렇지 않습니다! 소녀는 오직 이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그런 것 치곤 꽤 공들여 숨어있었던 것 같은데.]

"호, 호호··· 그간 미처 연락드리지 못한 점, 굉장히 송구하게 생각···."

다시 그녀의 변명이 시작되었으나, 더 이상 그 쓸데없는 말을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더욱 철저하게 임무를 완수하려는 마음으로, 제 사리사욕을 채운 건 절대 아니···."

[시아나—]

"흐익?!"

우우웅—

그가 그 이름을 입에 담은 순간, 기묘한 울림이 퍼지며 시아나의 몸속으로 파고들었고.

그와 함께 삼백 년 전의 강제 계약이 재차 갱신되며 새롭게 덧씌워졌다.

"아아···."

그 여파로 어느새 뿔이 튀어나온 것도 모른 채, 그녀는 자신의 몸으로 흘러들어오는 불사왕의 기운에 신음을 흘렸다.

다른 언데드 간부들과는 달리 그녀는 죽음의 힘에 영향을 받아 전보다 더 강해진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기어코 다시 입대해 버렸구나.'

그녀가 불사왕에게 다시 종속되는 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또르르—

원치 않았던 재입대에 저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 한 방울.

"아, 아? 그, 저도 모르게 감격의 눈물이? 이것이야말로 제 충심의 발로가 아니겠습니까? 오호호홋···."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는 생존 본능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입을 놀렸다.

그에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한스의 시선이, 이번엔 아직도 딱딱하게 굳은 채 쭈뼛거리는 사내에게로 돌아갔다.

'이놈은 뭐지? 몸에 마나는 충만한데 마법도, 오러도 배운 흔적이 없군.'

탁한 금발의 방탕해 보이는 사내는 그 눈길에 그대로 굳어버렸지만, 한스는 그러든 말든 포식자가 먹이를 훑듯 찬찬히 그를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수련을 한 흔적은 없는데 신체 능력은 기이할 정도로 좋아. 이건 마치···, 어? 설마?'

정상적인 단련을 통한 성장이 아닌, 외부의 영향으로 인한 육체 강화.

그는 이런 현상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왕께서 이 아이에게 관심이 생기셨나 보군요? 앤드류! 어서 인사를 올리도록 하세요."

"예, 옙! 안녕하십니까! 전 앤드류 위버라고 합니다. 그··· 잘 부탁드립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리바리한 태도를 보이는 금발의 사내, 앤드류.

하지만 지금 한스의 흥미를 끄는 것은 그의 정확한 정체였다.

그리고 어느새 세기의 간신으로 빙의한 시아나는 어떻게든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그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술술 털어놓았다.

"앤드류 또한 제가 대업을 위해 구한 인재랍니다? 그의 능력이 얼마나 유용한지 왕께서도 보시면 깜짝 놀랄 거예요. 그간 그가 어떤 활약을 했는지···."

그리고 그 이야기의 말미에, 마침내 그가 원했던 정보가 튀어나왔다.

"···또 한 가지 놀랄만한 사실은, 그가 바로 이계인이라는 점이죠! 마계도, 정령계도 아닌 전혀 다른 차원계 출신이라고 하네요. 오호호."

[···호오? 다른 차원이라?]

한스가 안광을 번뜩이며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시아나가 멋대로 자신의 개인 정보를 누설하고 있었지만, 앤드류는 뭐라 항변조차 하지 못하고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비굴한 웃음을 지었다.

"예, 예··· 불사왕님. 저는 그, 지구라는 곳에서 왔습니다요. 헤헤···. 이제 곧 있으면 9년이 다 되어갑죠, 예옙."

그리고 그의 대답은, 한스에게 특별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나 말고 다른··· 지구 출신의 각성자.'

아우테리카 차원에 전송되어 온 지도 2년이 가까워져 가는 지금.

처음으로 동향 사람을 만난 순간이었으니까.

#143

인재 영입 (3)

[지구라··· 아주 흥미롭구나.]

공간을 얼려버릴 듯 음산하게 울려 퍼지는 낮은 목소리.

하지만 그것은 마력의 진동에 의한 소리일 뿐, 육성이 아니었던지라 그 안에 담긴 감정을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후우··· 젠장, 어쩌다 이런 개 같은 상황이···. 왜 일이 이렇게 된 거지?'

앤드류 위버는 겉으론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면서도, 속으로는 온갖 욕지기를 내뱉었다.

당장 맞닥뜨린 현실부터 그간 자신의 보호자였던 시아나의 태도 변화, 앞으로의 일에 대한 걱정 때문에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그래도 상황을 보니 다행히 죽이진 않을 것 같군. ···죽지만 않으면 된다, 죽지만.'

안타깝게도 최근 고유스킬을 강화하느라 포인트를 제법 소모한 상황이라, 당장 지구로 '귀환'해 도망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가 지금껏 어떻게 카르마를 모아왔던가?

역천의 서약에 붙어서 그들이 필요한 정보를 구해주는 것만으로도, 안전하면서도 쏠쏠하게 포인트를 수급해오지 않았나.

'그래, 어찌 보면 오히려 잘 됐어. 불사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면 역천의 서약보다는 이쪽에 붙는 게 더 유리할 거야.'

아직 본격적인 침공이 시작되지 않은 상태라 상황을 낙관적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었지만.

사실 조금이라도 식견이 있는 이들은 현 불사왕이 역대 최악의 위협이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특히 그 기동력과 은폐력은 덩치만 큰 세력들에게 치명적이지.'

어떤 결계도 그의 움직임을 막을 수 없고, 어떤 추적으로도 위치를 감지할 수 없다.

그 두 가지 능력만으로도 이미 게임은 끝났다고 봐야 했다.

기존 대(對) 불사왕 전략인 '연합군으로 불사의 군대의 발을 묶고 결사대를 투입해 결판' 내는 방법이 원천 차단된 셈이었으니까.

'그래! 당장 역천의 서약도 불사왕의 눈치만 보며 몸을 사리고 있는데, 이참에 아예 이쪽에 붙어 버리자. 그럼 포인트도 더 달달하겠지?'

시아나가 살살 알랑방귀를 뀌는 모습을 보아하니, 그녀를 통해 자신의 쓸모도 충분히 증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충분한 카르마 포인트를 모으게 된다면···.

사아아—

그때, 갑자기 강해진 한기에 앤드류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고는, 슬쩍 고개를 들어 앞을 살폈다.

그리고.

'으헉! 씨벌, 깜짝이야!'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그를 이리저리 훑어보던 불사왕과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저도 모르게 질끈 감은 눈과 다시 푹 숙여지는 고개.

가면이 부서진 탓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흉악한 해골과 거칠게 타오르는 안광이 강렬하게 그의 뇌리에 때려 박혔다.

아주 잠깐 정면으로 바라봤을 뿐인데도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흐음.]

아니, 사실 가까이 있는 지금도 머릿속을 사정없이 휘젓는 공포심에 제정신을 유지하기 버거울 지경이었다.

그간 고유스킬을 강화하며 성장한 정신력과 「명경지수」의 보조가 없었다면 그대로 기절해 버렸을지도 모를 정도였으니.

그리고 지금의 경험은, 그의 결심을 더욱 굳건하게 만드는 데 한몫해 주었다.

'···그래. 이제 카르마도 모을 만큼 모았으니, 귀환 포인트가 쌓이는 대로 곧바로 지구로 튀어야겠다.'

상대는 죽음의 화신이나 다름없는 불사왕.

지금 목숨을 건졌다고 언제까지나 자신이 안전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괜히 그때 가서 후회하는 것보단 기회가 왔을 때 바로 빠지는 게 좋겠지.

터억—

"흐익?"

하지만 그때,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손이 그의 정수리를 움켜쥐었다.

장갑을 끼었음에도 느껴지는 딱딱함과 서늘한 감각은 순식간에 불길함을 증폭시켰지만.

[아아— 걱정하지 마라. 죽일 생각은 없으니.]

한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태도로 말을 이을 뿐이었다.

[그저 가벼운 금제일 뿐이다. 괜히 도망가기라도 하면 서로 귀찮아지지 않겠느냐? 크크큭.]

"오호호,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부디 왕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셔요."

그 와중에도 옆에서 살랑거리는 시아나가 상당히 거슬렸지만, 지금 앤드류에겐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부, 불사왕님? 한스 님? 끄으읍···!"

[한스가 아니다.]

한순간에 머릿속을 파고드는 흑마력.

[내 이름은, 한니발 스트라우스이니라.]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 터인 그 목소리에 묘하게 짜증이 섞여 있다고 생각하며—.

결국 지구 출신 각성자, '앤드류 위버'는 불사왕에게 종속되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가정방문을 통해 평화롭게 인재를 영입한 한스가 한창 그들과 면담하고 있을 무렵.

스으으—

그들의 곁에서 흐릿한 연기가 뭉치듯 한 여인의 형상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왕이시여··· 명하신 대로··· 숙청이 끝나가고 있사옵니다···.]

커다란 귀족가와 뒷골목의 지하 조직을 위주로 진행된 습격은 올리비아의 지휘하에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처음엔 잠깐 관심을 끌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이왕 시작한 거 겸사겸사 그들을 본보기로 삼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어찌 된 게 가장 국력이 강하다는 제국이 그 부패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단 말이지. 물론 현대인인 내 기준이 너무 빡빡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대상을 선정하는 것 자체도 그저 자기만족에 불과했다.

이제는 이겨냈다지만 트라우마까지 생길 정도의 강박감이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니까.

'애초에 대륙 전체를 기만하고 있는 내가 선이라는 생각은 한 적도 없었고.'

이건 남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의 마음을 지키기 위한 이기적인 기준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한스가 잠시 상념에 빠져있던 와중, 보고를 위해 왔던 올리비아와 시아나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 안녕? 올리비아? 오랜만이네?"

[시아나···.]

삼백 년만의 재회에 그들이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전 불사의 군대에서도 비슷한 서열과 임무를 맡았던 둘이었기에 그들은 다른 이들에 비해 유독 친분이 깊은 편이었다.

[용케 아직도 살아있었사옵니까···? 드디어 죽어버린 줄 알고 기대했사옵니다만···.]

"어머나, 나도 반가워? 그런데 너 그 옷 빨아 입기는 하니? 항상 볼 때마다 같은 옷인 것 같아서 말이야."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는 두 여성이었지만, 아쉽게도 그들의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그럼 우린 이만 물러나도록 하지. 일단 시아나 너는 이곳 상황을 수습하고 합류하도록 해라. 너에겐 묻고 싶은 말이 아직 많이 남아 있으니.]

"명을 따르겠습니다."

한스의 말에 시아나가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나중에 그녀의 지위를 쓰게 될 일이 있을지도 몰라 유예를 줬지만, 어차피 이미 종속이 된 이상 도망칠 길도 없었다.

물론 그것은 앤드류 또한 마찬가지였고.

그리고 그녀가 숙였던 허리를 다시 폈을 때, 이미 한스와 올리비아는 그 자리에서 사라진 후였다.

저택을 뒤덮었던 불사왕의 결계 또한 어느새 흔적도 없이 증발한 상태.

그들은 왔을 때처럼, 떠나는 것도 갑작스러웠다.

"······."

"······."

하지만 시아나와 앤드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괜히 섣불리 입을 열었다간, 그것이 그대로 불사왕의 귀에 들어갈까 봐.

웅성웅성—

그 침묵은 저택 내에서 기절했던 이들이 하나둘 일어나고, 도시 전체가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일 때가 되어서야 깨어졌다.

"···누님, 실망입니다. 그렇게 망설임 없이 저를 팔아넘기시다니."

"하, 앤드류? 일찍 죽는 게 소원이었으면 진작 말하지 그랬어요?"

불평을 토했던 앤드류는 생각 이상의 뾰족한 반응이 돌아오자, 입을 꾹 다물고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시아나는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는 한숨을 푹 내쉬며, 저택 내부의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졸지에 깃발을 바꿔 달게 생겼군요. 갑자기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는데."

그녀가 조용히 투덜거리기 시작하자, 그는 살며시 그 뒤를 따라붙으며 그에 동조했다.

여전히 주위의 눈치를 살피듯 조심스러운 어투였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들켰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그 눈에 든 이상 우리가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으니까요."

사실 금제까지 받기는 했지만, 아직 '귀환'을 믿고 있는 그는 그저 잠시만 참자는 생각뿐이었다.

'나중에 슬쩍 지구로 돌아가 버리면 되겠지. 아예 다른 차원으로 가 버리면 뭐 어쩔 거야?'

설마 그 종속이 차원을 넘어서까지 영향을 끼치진 않을 것 아닌가.

불사왕이 차원이라도 넘어서 쫓아온다면 또 모를까, 앤드류는 아우테리카에 오기 전까지 다른 차원의 존재가 지구에 나타났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래도, 이번 대의 불사왕께서 미남이라는 점은 마음에 드네요. 제가 얼굴을 좀 따지는 편인데."

"···네?"

그렇게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르던 앤드류가 눈을 껌벅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뭔가 잘못 들었나 싶어서.

"솔직히 전대 불사왕께선 좀··· 잘생겼다는 말과는 거리가 멀었죠. 생각해 보세요, 앤드류. 안 그래도 냄새도 지독한 언데드들 틈에서 눈요깃거리도 없는데, 제가 힘이 나겠어요?"

"어··· 그, 그렇죠?"

"그런 면에서 이번 부대 내 복지는 나름 괜찮은 편이네요. 물론 군대란 빠질 수 있으면 빠지는 게 가장 좋지만."

그는 자신이 반응하기 곤란한 말이 연달아 나오자, 그녀의 말이 끊긴 틈을 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 그런데 누님. 미남이라는 건 방금 만난 그··· 불사왕 한스, 아니 한니발? ···님을 말씀하시는 거 맞죠?"

"당연하잖아요? 그럼 누굴 말하는 거겠··· 아! 하긴, 당신은 인간이었죠."

그녀는 앤드류를 흘깃 바라보다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완벽한 두상에 카리스마 있는 눈매와 안광, 강인함이 물씬 풍기는 턱뼈를 알아보지 못하다니. 정말 인간들의 심미안은 미개하기 그지없네요. 뭐, 그 덕에 제가 쉽게 다룰 수 있는 거기도 하지만요."

그리 말한 서큐버스 시아나가 자신의 분홍빛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녀의 외양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심미안의 결정체였지만, 원래 자신이 갖지 못한 것에 끌리는 건 본능이지 않나.

"후우, 어쨌든! 앤드류 당신은 이만 방에 돌아가 짐이나 정리하세요. 아마 앞으로 상황도 많이 변할 테니, 마음의 준비도 좀 해 두시고."

"어, 네···. 알겠습니다."

그에 앤드류는 그저 실없는 말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들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온, 폭풍과도 같은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

"크흥! 이것 참 신기하구만. 요 며칠 눈에 띄게 몬스터수가 줄었는데?"

툴크 왕국 최북단, 강철의 성채.

언제 와 같이 육체미를 뽐내는 복장을 한 할리가 콧바람을 뿜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주변에 보이는 것은 그간 쌓이고 쌓인 몬스터들의 시산혈해뿐이었지만, 그가 이번에 쓰러뜨린 수는 며칠 전과 비교하면 확연히 줄어있었다.

"설마 이것도 로한 공국 사태와 관련이 있는 건가?"

까드득— 까득!

그는 손에 쥔 마석을 연신 입에 넣고 씹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단순히 내부의 문제로 국경 방어선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 몬스터들을 인위적으로 유도하기까지 했다면 훨씬 더 심각한 문제이지 않은가.

'쯧, 제국에 있던 시아나는 그 사건과 관련이 없었단 말이지.'

거기다 그녀가 알고 있던 정보들을 이용해 로한 사태의 주동자, 일명 '혁명가'를 추적하려 해 보았지만··· 당연히 일이 그리 쉽게 풀릴 리가 없었다.

"과연, 명불허전이군."

"저게 그 유명한 용인 할리인가? 과장된 소문인 줄 알았는데···."

그렇게 할리가 찝찝한 표정으로 성채 내부로 들어서자, 이제는 익숙한 반응이 그를 반겼다.

이미 그를 알고 있던 이들부터 이번에 처음 본 이들까지, 경외와 경계가 담긴 시선이 그에게 쏟아졌다.

"오셨습니까, 형님!"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형님!"

또한 그가 지나갈 때마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는 용병들도 이제는 익숙한 풍경이었다.

···아무리 봐도 연식이 그보다 훨씬 많아 보이는 이들이었지만.

'내 지구 나이가 아직 스무 살이고, 아우테리카 생활은 이제 2년 정도밖에 안 됐는데···.'

하지만 훌륭한 야만 전사가 되기 위해 성형을 거듭한 할리의 겉모습은 이미 충분히 형님 소리를 들을만했던지라, 그는 차마 뭐라 항변할 수도 없었다.

그저 그들을 향해 손을 휘저어줄 뿐.

그리고 자신의 숙소에 들어선 그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할리의 앞으로 하나의 전언이 도착해 있었다.

그것도 타라크 신전에서 출발하여 용병 길드와 아오니아 백작에게까지 전달된, 아주 특별한 전언이었다.

'드디어 왔나.'

물론 그는 그걸 확인하기 전부터 어떤 내용인지, 이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은 '용사 파티'의 후보로 선정된 할리를.

성지의 로셀리아 대신전에 초대하는 내용이었으니까.

#144

로셀리아 대신전으로 (1)

땅—! 따앙—! 땅!

후끈한 열기로 가득한 공간에서 규칙적으로 금속을 두들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치이익—

쇠를 두드리는 단조와 급격히 식히는 담금질, 다시 가열하는 뜨임 등.

복잡하고 손이 많이 가는 공정들이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부드럽게 이어졌다.

"후우···."

그리고 마침내 그 모든 공정이 끝나고.

연마 작업까지 마친 예리한 검날에 미리 만들어둔 손잡이를 연결해 한 자루의 검이 완성된 순간.

"개체가 반복된 훈련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스킬「야금술」을 획득합니다."

···드워프 하워드는 시스템으로부터 '대장장이'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오호라, 드디어 나왔구만! 으허헛—!"

수련을 통해 하나의 기술이 '스킬'이 되었다는 것은, 그 행위에 쌓인 업이 일정 수준을 넘어섰다는 뜻이었다.

이후 관련된 일을 할 때마다 추가 보정을 부여해 좀 더 원활한 성장을 할 수 있게 도와주는, 이세계에서 넘어온 각성자의 특권 중 하나.

그런 것을 휴버트 상단의 업무와 병행하면서 고작 몇 주 만에 이뤄낸 것이다.

하워드는 망치를 쥔 자기 손을 바라보며 천천히 감각을 되새겼다.

드워프의 예민한 감각에 망치를 쥔 손아귀의 미세한 변화가 감지되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좀 더 정교하게, 좀 더 효율적이게, 좀 더 자연스럽게 도구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으음, 좋군. 「장인정신」과의 시너지도 상당하고. 이것도 쌓인 숙련도에 따라 성장하는 스킬이니, 시간이 갈수록 효과는 점점 더 강해지겠지.'

스킬을 얻은 타이밍도 매우 적절했다.

때마침 내일이 타라크에 돌아온 할리를 통해 드워프 자오닉을 소개받는 날이지 않은가.

'이제 전과는 달리 강철의 성채 쪽 상황도 많이 안정되었으니까.'

광기 사태 발발 직후 위험한 지경까지 몰렸던 강철의 성채는, 시간이 흐르고 하나둘 지원 온 병력이 늘기 시작하며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또 로한 공국 방면의 영향인지 최근 몬스터 범람이 크게 줄면서 뜻밖의 여유까지 생긴 상황.

그래서 그는 이참에 그간 미뤄왔던 일을 한꺼번에 해치워버릴 생각이었다.

'할리가 로셀리아 대신전으로 떠나기 전에, 하워드를 자오닉에게 소개하고 새 도끼도 받아야지.'

일전에 아오니아 백작이 그에게 새로운 무기를 약속한 적이 있었다.

자오닉도 할리가 쓸 무기라는 말에 별다른 반발은 하지 않았고, 곧바로 타라크의 대장간으로 자리를 옮겨 작업에 착수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주의 시간이 지난 지금, 마침내 그 도끼가 완성되었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원래는 자오닉이 직접 무기를 챙겨 강철의 성채까지 운송해줄 예정이었지만···.

'때마침 신전에서 전해진 소식도 있으니, 그냥 내일 할리가 직접 타라크에 방문해 수령하기로 했지. 덤으로 하워드도 소개하고.'

그래서 지금 「야금술」을 얻은 것이 더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이 정도 수준이라면 그에게 기본도 안 되었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 테니.

그렇게 기대 속에 하루가 지나고.

평소처럼 상회의 업무를 마친 하워드는 할리와 함께 타라크 시 소유의 중앙 대장간으로 향했다.

'그래도 이제 휴버트가 복귀할 때까지 며칠 남지 않았군. 한스를 이리저리 이동시킨 것 때문에 상당히 지체된 감이 있었는데.'

물론 앞으로 비슷한 일이 벌어지지 않게 대책도 수립해야겠지만, 지금은 일이 정상 궤도로 돌아오게 된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웅성웅성—

"어이, 저기 좀 봐봐."

"아— 요즘 유명한 할리로군. 타라크로 돌아왔나 보지? ···응? 그런데 저건···."

"드워프?"

위풍당당하게 대로를 거니는 그들에게 몰리는 시선들.

2미터가 훌쩍 넘는 덩치의 할리와 그의 허리춤에도 못 미치는 키의 하워드가 나란히 걷는 모습은 상당한 주의를 끌었으나, 이제 이 정도 관심은 간지럽지도 않았다.

그렇게 대장간에 도착한 그들은 미리 잡힌 약속대로 곧바로 안쪽으로 안내되었고.

마침내 할리는 자오닉과 오랜만에 재회할 수 있었다.

"으하핫! 오랜만이군, 자오닉! 그간 잘 지냈나?"

"···어? 어어! 그래, 이거 오랜만이야. 그동안의 활약은 들었네.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구만!"

그런데 그가 보이는 태도가 뭔가 이상했다.

정확히는 할리가 데려온 하워드와 마주한 순간부터 뭔가 미묘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맞아, 이쪽이 자네가 소개해주고 싶다던 그 드워프인가? 확실히 상당히 어려 보이는 친구로군."

그리고 정신이 딴 데 팔린 듯 할리와 대화하던 그의 고개가 다시 하워드에게로 돌아갔다.

신경 쓰이는 것을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흠흠! 반갑습니다. 어르신! 하워드라고 합니다."

"···그래, 반갑군. 난 자오닉 스틸스톤이라고 하네."

텁수룩한 수염이 무성한 사내 둘이 나누는 대화치곤 위화감이 굉장했지만, 같은 드워프의 눈으로 봤을 때는 하등 이상할 것 없는 대화였다.

다른 종족인 할리의 눈에나 그들이 서로 비슷한 연배의 털북숭이로 보일 뿐, 하워드의 눈에 비친 자오닉은 상당히 완숙해 보이는 인상의 멋들어진 중년이었다.

반대로 자오닉의 눈에는 그가 파릇파릇한 애송이로 보일 터.

'아까부터 좀 이상하네. 부정적인 건 아닌 것 같은데, 뭔가 미묘하군.'

지금 그의 반응은 단순히 오랜만에 마주한 동족이라서 보이는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뭐랄까, 그보다는 좀 더 밀접하고 감성적인···.

"흠흠, 갑자기 이런 말을 하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는데···."

그때, 자오닉이 헛기침과 함께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자네 혹시 어디서 날 본 적 있는가?"

"음, 제가 어려서부터 이리저리 떠돌아다녔지만 같은 종족을 마주한 건 어르신이 처음입니다."

"그럼 역시, 양친은···."

"예, 어렸을 때 돌아가시고 줄곧 저 혼자 지냈습니다. 할리를 만나기 전까진 말이죠."

그들의 대화가 거기까지 이어지자, 할리는 그제야 자신이 나서서 '할리의 대모험' 5막 2장, '떠돌이 드워프와의 만남' 편을 늘어놓으려 했으나···.

"···그래, 그런가. 그렇겠지."

여전히 자오닉은 혼자 상념에 잠긴 채 혼자 중얼거릴 뿐이었다.

"아, 미안하네. 왠지 자네가 남처럼 느껴지지 않아서 말이야. 이건··· 그래, 먼 길을 떠났던 자식이나 손자가 되돌아온 것 같군. 물론 난 독신이지만 말일세! 후하하핫!"

"아, 그러셨군요. 으허헛!"

"크하핫! 난 또 이별한 가족이라도 있는 줄 알았지!"

도중에 자신 때문에 분위기가 침체된 것을 알아챘는지 자오닉이 억지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무안하지 않게 하워드와 할리도 함께 웃어 주었지만, 내심으로는 순식간에 지금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이거 설마···. 엘린느의 영향인가?'

드워프 자오닉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냈고, 오랜 세월을 함께하며 자식처럼 아껴왔던 곡괭이계의 신병이기(神兵利器) 엘린느.

그것이 바로 하워드 탄생의 밑바탕이 된 매개체였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손자가 맞긴 하지.'

역시 그도 장인인 만큼, 자신이 빚어낸 창조물과 관련된 하워드에게 뭔가 느낀 게 있는 것 같았다.

"후우— 미안하구만. 괜히 혼자 감상에 젖어서 그만. 아차! 일단 도끼부터 줘야겠군. 이리로 와 보게나."

하지만 곧 그는 마음을 다스리듯 머리를 털고 뺨을 가볍게 두드리고는, 무기의 인계를 위해 그들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도착한 작업실의 안쪽에 '그것'이 있었다.

"내가 최선을 다해 만든 도끼지. 자네의 주문대로 오로지 내구성을 극한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흑마강을 통째로 가공하고, 날 부분에는 무려 아다만티움까지 씌운 걸작이라네!"

그가 가리킨 곳에 놓여있는 전체가 검은빛 금속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도끼 하나.

"유일한 단점이라면, 너무 무거워서 실전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다는 점일까? 휘두르기는커녕 들 수 있는 사람도 얼마 없겠지만··· 자네에겐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2미터가 넘는 굵고 긴 손잡이에 걸맞은 커다란 도끼날과 창끝, 반대편의 날카로운 갈고리까지.

그것은 '도끼'라기 보단 '도끼창'에 가까운 외형을 하고 있었으나, 또 단순히 그리 간주하기엔 굉장히 커다란 날을 가지고 있었다.

"오오— 이건! 굉장히 크고 아름답군!"

그리고 그 게임 속 거대 몬스터들이나 다룰 법한 흉악한 무기는, 그야말로 할리의 취향에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냉큼 도끼가 놓인 곳까지 달려간 그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것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후웅—

그저 바닥에 놓인 걸 들어 올렸을 뿐인데도 공기가 움직이는 육중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으로 압도적인 무게를 지니고 있었지만···.

"제법 묵직하기도 하고! 역시 무기는 이래야 제맛이지! 크하하핫!"

물론 할리에게는 딱 적당한 무게감일 뿐이었다.

부웅— 붕—!

넓은 작업장 한편에서, 한 손으로 가볍게 휘젓는 도끼에 살벌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람이 일었다.

"일단 이름은 '자이언트 킬러'라고 붙이긴 했네만, 자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바꿔도 상관없네."

"아아, 그걸로 충분하지! 딱 어울리는 이름이기도 하고! 카하핫!"

마음에 드는 무기를 손에 넣자 저도 모르게 계속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과연 드워프제 무기답게 이 도끼는 심미적인 부분도 굉장히 뛰어났는데, 그저 가지고만 있어도 허영심을 채워줄 수 있는 고급스러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물론, 이걸 직접 마주할 이는 명품에 대한 감탄보단 체념에 가까운 한탄이 먼저 튀어나오겠지만.

"그런데··· 자네 정말 괜찮겠나? 내 작업이 끝나고 소식들을 듣자니, 그간 상당히 많은 일들이 있었다던데."

그렇게 할리의 만족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자오닉이 문득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대신전을 습격한 불사왕이 로한 공국을 무너뜨린 것도 모자라, 얼마 전엔 제국의 토베아까지 쑥대밭으로 만들었다지?"

아무나 알 수 없는 세계정세에 관한 이야기였으나, 그도 나름 영주의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만큼 이 정도 정보를 입수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거기다 이건 딱히 기밀이랄 것도 없이 대륙적으로 떠들썩한 커다란 사안이지 않은가.

"그런데 난데없이 결사대에 추천이라니···. 물론 자네가 부족하다는 건 아니지만, 뭔가 갑작스러운 감이 있구만."

그가 추천받았다는 것은 누군가 추천을 한 이가 있다는 소리다.

그건 대중에 공개되지 않은 정보였지만, 할리는 그들이 누군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용병 길드와 부족 연맹 쪽이었지.'

길드 측은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이상할 것 없었으나, 남부에 있을 부족 연맹이 좀 의외이긴 했다.

아무리 그가 남부 전사를 표방하고 있다지만, 제대로 된 접촉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하핫! 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지! 내 앞을 가로막는 것들은 이 도끼로 죄다 골통을 부숴버리면 될 뿐!"

어떻게든 신상 도끼를 빨리 써보고 싶어 손이 근질거리기 시작한 할리가 연신 콧김을 뿜었다.

마음 같아선 바로 북부 산맥으로 쳐들어가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그보다 자오닉, 내가 부탁했던 건 생각 좀 해 봤나? 오늘 직접 보니 어때?"

"음··· 저 친구에게 가르침을 좀 줬으면 한다는 거 말이지?"

그의 말에 자오닉은 심각한 표정으로 하워드를 힐끔거리며 다시 고민에 빠졌다.

단순히 조언 몇 마디가 아닌, 좀 더 제대로 된 가르침에는 그만큼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드워프의 비전(秘傳)'이라고는 불리기는 하지만, 그게 모든 드워프에게 무조건 공개되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장인이라는 이들이 자격도 없는 이에게 자신의 지식을 전수할 리가 없으니.

물론 다른 종족들처럼 폐쇄성이 짙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들의 기술은 보통 가족이나 부족 단위로 전수되는 면이 있었다.

아무리 할리의 부탁이라도 오늘 처음 본 이에게 전수할 만한 지식은 아니라는 소리.

하지만···.

"···그래, 어차피 내가 그간 쌓아온 것들을 영원히 묵히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 이렇게 이온 대륙에서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이겠지."

자오닉의 입에서 나온 것은 시원한 승낙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친구, 아무리 생각해도 남 같지가 않아. 허참— 신기한 노릇이군."

"하, 하하핫! 이게 다 운명 아니겠나! 암, 그렇고말고!"

엘린느를 납치한 장본인인 할리가 어색한 웃음으로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렇게, 마침내 하워드는 자오닉에게 정식으로 '드워프의 비전'을 배울 수 있게 되었고.

모든 일을 끝마친 할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로셀리아 대신전으로 이동했다.

#145

로셀리아 대신전으로 (2)

이온 대륙은 아우테리카 차원에서 가장 거대한 땅덩어리였다.

총면적은 대충 지구의 유라시아 대륙과 비슷한 수준으로, 두 번째 크기인 에나멜 대륙의 4~5배는 될 정도.

하지만 지구처럼 대륙 전체를 인간들이 지배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이 세계는 몬스터들이 실존하는 세상이었고, 그들은 인간과 영역 다툼을 벌일 수 있을 정도로 강성한 세력을 자랑하고 있었으니까.

태생부터 인간을 압도하는 강인한 육체 능력, 어떤 극한의 상황에서도 살아남는 질긴 생존력, 소수가 불과 몇 년 만에 부락으로 성장하는 무식한 번식력.

거기다 그 몸에 흐르는 생체력은 마나 수련을 하지 않은 이들에겐 넘을 수 없는 벽과도 같았다.

마나를 다루기 위해선 오러나 마력 등으로 가공해야 하는 인간과는 달리, 그들은 그저 숨 쉬고 사냥감을 잡아먹는 것만으로도 체내의 생체력을 증가시킬 수 있었다.

대신 그 힘은 오직 육체 강화와 저항력에만 국한되는지라, 다른 이능에 비해 활용성은 극히 떨어지지만···.

사실 그 압도적인 몸뚱이가 최고의 무기인 몬스터들에게 그런 건 아무 문제도 되지 못했다.

그렇게 대륙 곳곳의 산과 계곡 등을 비롯한 지형에 터를 잡은 그들은 오랜 세월 인간 국가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자리해 왔다.

'탈리아 왕국의 골칫거리인 마물의 숲 또한 그중 하나일 뿐. 그 정도 수준의 금지(禁地)는 대륙 전체에 널리고 널렸지.'

물론 이미 주신교단이 한 차례 마물의 숲을 헤집었던 것처럼, 일시적으로는 그 지역을 정복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완전히 몬스터를 박멸하고 안정화하기 위해선 그를 아득히 넘어서는 노력과 자본, 희생을 감수할 필요가 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와는 다르게, 이온 대륙 북쪽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거대한 '북부 산맥'은.

인류가 차마 범접할 수 없는— 최악의 마경이었다.

혹한의 추위와 온갖 맹독성 생물이 가득한 극한의 환경.

몬스터는 어마어마한 면적에 걸맞게 끔찍할 정도로 많은 머릿수를 자랑했고, 오랜 세월 약육강식에서 살아남아 걸러진 우월한 개체들도 득실득실했다.

심지어 이번에 심연이 열리며 퍼진 '광기'가 농축되기에 최적의 환경까지 갖추었으니, 이만하면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지옥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지옥의 한가운데에서···.

[호오, 좋군. 아주 마음에 들어.]

훌륭한 입지의 부동산 매물이라도 발견한 듯,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가 있었다.

그저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 공간을 일그러뜨리는 존재감을 발산하는, 대륙의 절망이자 죽음의 화신.

불사왕 한스였다.

[왕께서 하명하신 대로··· 여러 조건을 따져 위치를 선정했사옵니다···. 공국과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 주변 몬스터의 분포와 지형의 험준함까지 따져가며···.]

그리고 그 옆에서는 올리비아가 마치 공인중개사라도 되는 것처럼 열심히 설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오직 불사왕을 만족시키기 위해 밤낮없이 유령들을 부려가며 일하고 난 직후였으나, 이제 그녀에게 이 정도 업무는 일상과도 같았다.

[수고했다, 올리비아. 이곳으로 결정하면 되겠군.]

다행히 그녀의 노고가 빛을 발했는지 이 장소는 한스의 마음에 쏙 들었다.

충분히 군부대가 거주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산이면서, 주변엔 더 높고 거친 산세가 둘러싸 대낮에도 햇빛 한 점 들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위치.

그 때문인지 사시사철 폭설이 쏟아지는 최북단도 아니건만 바닥에 쌓인 눈이 녹지 않아 서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냥 보기에도 음산하고 으스스한 것이 마왕성이 들어설 자리로 딱이로군.'

거기다 높은 능선이 모이는 주변은 몬스터들이 자주 이용하는 산길이라도 되는지, 교통의 요충지처럼 수많은 개체가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이 또한 최적의 입지 요인이라 할 수 있을 터.

[자아— 그럼, 입주 준비를 해야겠구나.]

스으으—

한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가 서 있는 주변 바닥이 순식간에 끈적한 어둠으로 뒤덮여갔다.

음차원에 수납한 언데드들을 꺼낼 때 그가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었지만, 지금 발동한 마법엔 기존의 현상과 크게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크흐흣, 그동안 답답한 곳에 박혀있느라 고생 많았노라. 어디 이제 마음껏 뛰어놀아 보거라.]

스으으으—

땅을 뒤덮은 검은 어둠이 그림자처럼 퍼져나갔다.

끝도 없이 멈추지 않고 뻗어나간다.

···계속해서, 산을 완전히 집어삼킬 듯이.

그리고, 마침내 산을 뒤덮고서야 영역 확장을 멈춘 바닥의 어둠 속에서.

덜그럭—

[키에엑!]

까드득—!

수많은 언데드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좀비, 스켈레톤, 구울, 가스트, 와이트, 듀라한···.

수십, 수백, 수천, 수만···.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던 인영이 한순간에 산을 가득 채우자, 주변의 식물들이 끔찍한 죽음의 기운에 순식간에 말라비틀어지기 시작했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생명체에게 치명적인 기운이 공간을 잠식하며, 대기에는 사체에서 뿜어지는 유독성 물질이 섞여 들었다.

그렇게 어둠에 뒤덮인 산 하나가 완전히 죽음에 물들자 「금단의 지식」에 적힌 다음 흑마법이 발동했다.

쿠구구궁—!

바글바글 들어찬 수많은 언데드와 주변을 집어삼키는 죽음의 기운 한가운데에서.

거대한 진동과 함께—.

'마왕성'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을 빚어 만든 듯한 검은 벽돌과 곳곳에 새겨진 살벌한 조각, 여기저기 솟아난 높고 뾰족한 첨탑들까지.

그야말로 모범적인 마왕성 그 자체였다.

'정확히는 '영겁의 미궁'이라는 흑마법이지만. 한스에게 외형 변경 정도야 일도 아니지.'

역시 내부까지 한 번에 구현하는 건 무리였으나 '영겁의 미궁'은 내부를 술자 마음대로 수정할 수 있으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중요한 건, 바로 지금 그의 눈앞에 훌륭한 마왕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으니까.

덜그럭— 덜컥—!

[크워어어—!]

이후 이어진 일은 기존에 생각했던 대로 영토 주변을 청소하는 것이었다.

명색이 불사왕의 영토인데 살아 움직이는 몬스터가 이리 많다는 건 자존심 문제이지 않은가!

마침 이 인근이 몬스터 밀집 구역이기도 했으니, 놈들을 싹 다 잡아서 언데드로 만들면 한스에게도 유용한 전력이 되어줄 터였다.

'덤으로 로한 공국도 한숨 돌릴 수 있겠지. 이걸로 마왕성이 있는 북쪽 방면의 침공은 크게 줄어들 테니까.'

대놓고 돕지는 못하지만 이정도 편의 정도는 봐줄 수 있었다.

어차피 그 몬스터들은 고스란히 한스의 전력으로 편입되는 셈이었으니, 그가 손해 볼 일이 없기도 했고.

'버림패로 쓸 만한 녀석 중 일부도 여기에 데려다 놔야겠네. 역천의 서약의 간부였던 올드만 정도면 제법 사이즈도 크고 좋겠군.'

그간 한스와 불사의 군대가 대륙 서부 지역에서 꾸준히 진행했던 작업도 순조로이 마무리되어, 희생양으로 써먹을 만한 놈들도 상당히 많아진 상황이었다.

불사의 군대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이제 흑마법사와 악마 숭배자 같은 놈들을 찾아볼 수도 없을 정도.

심지어 그중에는 불사왕을 섬기는 광신도마저 있을 지경이었으니···.

'즉, 지금 서부 지역의 안정에 한스가 매우 큰 역할을 했다는 뜻이지.'

대륙 최강의 국력을 가진 제국은 물론 동부의 공화국과 남부의 부족 연맹도 상당히 버거운 상황이거늘, 약소국들이 모인 서부가 가장 피해가 적은 건 전부 그의 보이지 않는 노력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걸 순수한 선의로 받아들여 줄 이는 아마 없겠지만.

'아, 그래. 그 녀석도 이곳에 데려와야겠군.'

그리고 새로 마왕성에 입주할 이들 중에는.

토베아에서 만났던 지구의 각성자, 앤드류 위버도 포함되어 있었다.

'생각 이상으로 유용한 고유스킬이란 말이지. 대륙 전역에 원하는 대로 CCTV를 깔 수 있는 능력이라니. 아니, CCTV보단 보이지 않는 드론 쪽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네.'

그런 유용한 능력을 제대로 써먹으려면 멀리 두는 것보단 가까이 두고 수시로 자극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 않겠는가.

'그 녀석, 눈빛도 흐리멍덩하고 영 게을러 보이는 느낌이었으니.'

물론 단순한 첫인상일 뿐이었으나, 초월의 격에 오른 한스가 내린 판단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신뢰도를 가지고 있었다.

'여긴 놀 것도 없으니까 딴짓도 못 하겠지. 안 그래도 올리비아가 바빠 보였는데 그 밑에 붙여주면 좋아하겠군.'

그렇게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앤드류 위버의 처우가 결정되었다.

물론 인간이 살 수 있을 만큼 환경이 갖춰진 후에나 진행될 일이었지만.

***

[그래, 시아나. 보고할 게 있다고?]

-그렇습니다, 왕이시여! 제가 괜히 제국의 귀족이 되었던 것이 아니랍니다? 저번에 말씀드렸듯, 그간 대륙 정복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열심히 수집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인테리어가 진행된 마왕성 내부의 거대한 공간.

수많은 뼈로 이루어진 커다란 왕좌 위에 앉은 한스는 제국에 있는 시아나와 통신을 주고받고 있었다.

'능력 말곤 볼 게 없는 앤드류는 데려와도 상관없겠지만, 제국의 자작위를 가지고 있는 시아나는 그 지위가 아깝단 말이지. 일단은 저곳에 두고 좀 지켜볼까.'

시아나가 귀족이 된 과정은 굉장히 간단했다.

어린아이로 변한 그녀가 그 특유의 매력으로 자작가에 입양된 후, 10년 이상에 걸쳐 일어난 '불의의 사고'로 집안의 일원들이 하나둘 목숨을 잃은 것뿐이었으니까.

결국 유일하게 남은 그녀가 가문을 집어삼키게 된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래서, 욕심 많은 사이먼 황태자는 상당히 다루기 쉬운 편입니다. 제가 한창 작업을 걸고 있던 와중이기도 하지요. 정말 만만치 않은 상대는 황태자의 정적인 5황녀 '라일리 카르테 아제리온'입니다.

아제리온 황가엔 총 세 명의 황자와 네 명의 황녀가 있었다.

그중 2황자는 황태자에게 밀려 힘을 잃은 상태였으며, 3황녀와 4황녀도 결국 황위를 포기하고 혼인하는 것을 택했다.

아직 십 대 초반인 6황자의 세력은 너무나 미약하고 7황녀는 열 살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 상황인데 5황녀만이 황태자의 호적수로 인정받고 있다는 거지.'

보통의 경우였다면 아무리 그 재능이 뛰어나다 해도 5황녀가 황태자의 라이벌이 될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황가에서는 장자로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후계자로 선정되는 데 커다란 이점으로 작용했고, 자연스럽게 이어진 시간의 우위는 세력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을 테니.

-라일리 황녀는 그 뛰어난 지성으로 황제의 총애까지 받고 있었지만, 외척의 힘도 약한 그녀가 지금의 세력을 일구는 데는 한 사람의 역할이 굉장히 컸지요.

그리고 그자가 바로 시아나가 말하는 제국 내에서 최대의 걸림돌이 될 자였다.

온갖 위기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5황녀를 지켜온, 파벌의 무력을 상징하는 자.

5황녀의 최측근이면서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함께해 온 오랜 친구.

또 대륙에서 손꼽히는 대마법사 중 한 명이자···.

-이세아 프리스틴 자작. 그녀는 왕께서 대업을 이루시는 데 큰 방해가 될 겁니다! 최우선 제거 대상이에요!

이번에 '용사 파티'의 일원으로 추천받은 인물이기도 했다.

-사실, 저도 프리스틴 자작과 마주했다가 하마터면 들킬 뻔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론 최대한 그녀를 피해 다니는 실정이지요. 대주교의 이목도 속였던 저였는데···.

즉, 지금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마법사라는 평도 상당히 축소된 거라는 주장이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황녀를 더 확실하게 지키기 위해 그 힘을 숨기는 중이라고.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어린 마법사가 그 정도 수준이라는 건,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얼마나 더 성장할지 알 수 없다는 소리지요. 그녀가 더 크기 전에 싹을 자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시아나는 이번에 '이세아 프리스틴'이 로셀리아 대신전으로 향했다는 첩보도 전달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 수는 없으나, 그녀가 용사와 함께하게 된다면 큰 위협이 될 거라는 소리도 함께.

물론 그녀가 말한 이야기는 한스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확실히 대단하군. 이 정도 수준이면 어지간한 간부들은 상대도 안 되겠어. 그런데 이십 대 후반이라··· 아무리 많이 쳐 줘도 십 대 후반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데?'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지금, 로셀리아 대신전으로 이동한 할리가 그녀를 정면으로 마주한 상황이었으니까.

#146

로셀리아 대신전으로 (3)

아우테리카는 수많은 종족이 함께 살아가는 전형적인 판타지 세상이었다.

하지만 지구에서의 일반적인 인식과는 다른 점도 있었는데, 이곳은 서양인들이 주류가 된 그런 배경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지역에 따라 다수를 차지하는 비율의 차이만 있을 뿐, 종족만큼이나 다양한 인종과 혼혈들이 한데 어우러져 살아가는 다채로운 세상.

그리고 그 말인즉슨, 이 세계에는 지구의 동양인도 그리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지금, 할리의 앞에 있는 이 여성처럼.

'그런데 아무리 동양인이 다른 인종에 비해 더 어려 보인다지만··· 이 여자는 그걸 감안해도 너무 동안인데?'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의 가슴께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소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150센티를 조금 넘어 보이는 아담한 키에 드레스와 비슷한 원피스 형태의 푸른 로브.

가슴까지 닿는 흑발은 머리 끈으로 묶어 한쪽 어깨 앞으로 늘어뜨렸고, 흑요석처럼 빛나는 검은 눈동자는 감정의 동요 없이 그를 고요하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그 동양인치곤 흰 피부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아무리 봐도 이십 대 후반 같지 않았다.

'솔직히 많이 쳐 줘도 고등학생이지, 이 정도면 중학생이라 해도 믿겠군. 아, 설마 다른 종족의 혼혈인가?'

그렇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엘프 같은 장수종의 피가 약간이나마 섞였다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그렇게 할리가 근육이 꿈틀거리는 굵은 팔뚝을 움직여 뒷머리를··· 아니, 뒤통수의 마수 가죽을 벅벅 긁고 있을 때.

"초면에 실례입니다만, 혹시 다른 종족의 혼혈이신지요?"

상대의 입에서 먼저 그 질문이 튀어나왔다.

그녀도 그와 마주하고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듯이.

어딜 봐도 건장한 인간 그 자체인 할리의 뭘 보고 혼혈이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대마법사다운 뛰어난 통찰력이었다.

"으음—? 아아! 난 용인(龍人)이니까 드래곤 혼혈이라고 볼 수 있지. 몇 대 위에 피가 섞였는지는 잘 모르지만! 으하핫!"

"용인··· 그랬군요. 실례했습니다. 저는 아제리온 제국에서 온 이세아 프리스틴이라고 합니다."

그녀가 차분하게 자신을 소개하며 그 자그맣고 가녀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해왔다.

할리는 그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약지와 소지를 접은 채로 그 손을 잡고 천천히 위아래로 흔들었다.

자칫 잘못 힘을 줬다간 상대의 손뼈가 으스러질 수도 있는 만큼, 매우 조심스러운 몸짓이었다.

"하하핫! 난 할리라고 부르면 된다. 지금은 툴크 왕국에 머무르고 있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남부 전사라고 할 수 있지!"

"···네? 아, 네."

호탕한 그의 자기소개에 압도당한 듯 어색한 미소로 응대하는 이세아.

"그런데 혹시 아가씨도 혼혈인가?"

"아, 저는···."

그렇게 대신전의 한 복도 앞에서.

150센티를 조금 넘는 자그마한 소녀와 2.3미터에 육박하는 거구의 사내가 우연히 조우했다.

***

"후우—."

할리와 헤어지고 자신의 숙소로 돌아온 이세아가 침대에 드러누우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녀가 졸지에 이 로셀리아 대신전까지 오게 된 건, 두말할 것도 없이 교단 측의 초청 때문이었다.

대(對) 불사왕 대응 특수 기동 타격대.

간단하게는 '결사대' 혹은 '용사 파티'라고도 불리는 그 부대는 위험한 만큼 영광도 함께하는 자리였다.

출신 국가에서는 위인으로 추대하고, 그들이 지나온 생애는 역사서로까지 남으며 음유시인의 노래가 되어 전승된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던 이들도 모두 단명했으니, 그 영광을 오래 누린 이는 하나도 없지만.'

그러나 어지간한 수준으론 범접할 수도 없는 불사왕을 직접 상대하는 게 그들의 임무였던 만큼, 그에 지원할 수 있는 이들도 마스터 급 무인과 대마법사 등 극의에 이르는 것이 최소 조건이었다.

당연히 용사 파티는 자연스럽게 대륙 최강자들이 모인 최정예 전투 집단이··· 돼야 했을 터였지만.

세상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우선 대륙 최강자라는 기준도 굉장히 모호하지.'

이 세상이 게임도 아니고 개인의 능력치에 정확한 수치가 매겨져 있을 턱이 없었다.

비교를 위해서는 일정 기준을 넘어선 경지와 세간의 평가, 그간 이뤄온 업적 등을 판단의 근거로 삼을 수밖에 없는데···.

애초에 비슷한 경지에 오른 이들끼리도 상성과 경험에 따라 결과가 바뀌는 게 실전이었다.

대륙 최강자를 뽑는 대회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 각자의 능력을 분석해 정확한 순위를 매기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심지어 아우테리카는 전대 불사왕 사태와 곳곳에 자리한 몬스터들 때문에 인간끼리의 전쟁이 있은 지도 오래된 상황.

용사가 된 하인리히처럼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특별함이 있다면 모를까, 아쉽게도 현재 알려진 강자 중엔 그만한 인물이 없었다.

현실이 그랬으니 일단 자격이 되는 이들의 지원을 받고, 면접과 검증을 통해 적합한 인재를 선발할 수밖에 없었으나···.

여기에 또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바로 지원자가 없어도 너무 없다는 것.

역사가 말해주는 그 위험성 때문이기도 했으나, 그들이 선뜻 나설 수 없는 데엔 좀 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결사대에 들어가게 되면 상당히 오랜 시간을 라일리 곁에서 떨어져 있어야 할 텐데, 지금 시기에 그럴 수는 없어.'

그리고 그런 이유로 부대 합류를 고사하려는 이들 중에는.

아제리온 제국의 대마법사, 이세아 프리스틴 자작도 포함되어 있었다.

강자는 필연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른 경우가 많았으며, 그만한 위치에 선 자는 지켜야 할 것도 그만큼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당장 자기 가족이, 도시가, 나라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의를 위해 그 모든 걸 제쳐두라고 하면 따를 이가 얼마나 될까.

만약 그렇게 자리를 비웠다가 정말 소중한 것을 잃게 된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지고?

힘이 없어서 지키지 못한 것도 아니고 자기가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사태가 그 원인이었다면?

그리고 '적'이 그 자신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수작을 부려오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것이 불사의 군대든··· 혹은 정적(政敵)이든 말이다.

'사이먼 황태자 때문에 일이 귀찮게 됐어. 교단의 초청을 무작정 거절할 수도 없고. 그래도 잠깐 자리를 비우는 것 정도는 괜찮을 테니까···.'

그런 이유로 결사대에 자원하는 이는 거의 없다시피 했고—.

꼭 필요한 일인 건 모두가 알고 있지만, 자기가 직접 나서고 싶진 않은··· 그렇게 서로 눈치만 보는 상황이 된 것이 작금의 현실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본 요건이 굉장히 높아 자격이 되는 이들도 얼마 없는 실정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니, 결국 교단은 추천받은 이들을 시작으로 강자들을 초청해 대화를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에게 가장 먼저 추천받았던 이세아도 거기에 포함된 건 당연한 사실.

'최후의 수단도 있으니 목숨이 위험하진 않겠지만, 라일리 옆을 오래 비워두는 것 자체가 본말전도야. 내가 뭐 때문에 아직도 여기 남아있는 건데!'

결정을 바꿀 생각이 없음에도 그녀가 로셀리아 대신전에 직접 찾아온 것은 최대한 교단에 성의를 보이기 위함이었다.

이 대륙적인 위기 상황에 성자가 희생까지 자처하며 앞으로 나섰는데, 개인적인 이유로 불참 메시지만 달랑 보낸다면 밉보일 가능성도 있지 않겠는가?

'아무리 교단이 온건한 성향이라도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황위를 위해선 교단과 척지는 상황은 최대한 피해야 해. ···사이먼 그 개 같은 놈 때문에.'

다시 황태자의 뻔뻔한 얼굴이 떠오른 이세아가 조용히 이를 갈았다.

평소 냉철하다 자부했던 평정심이 깨지고 내면에 짜증이 들끓었다.

물론 그녀가 성공적으로 불사왕을 토벌하고 살아남아 영웅이 된다면 오히려 상황이 뒤집히겠지만, 그게 그리 짧은 시간에 가능할 리 없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면··· 5황녀 라일리는 세력 싸움에서 뒤지는 걸 넘어서, 타의로 '불의의 사고'를 당하게 될 확률이 매우 높을 테고.

'사이먼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인간이지. ···그나저나 아까 그 사람, 할리라고 했던가?'

인상을 찡그리며 애써 좋지 않은 생각을 떨쳐내던 이세아는 사고를 전환하고자, 복도에서 우연히 만났던 거구의 사내를 다시 떠올렸다.

"처음엔 웬 몬스터가 대신전에 침입한 줄 알았는데."

단순히 덩치가 크다고 그렇게 판단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원소계 마법이 전공이긴 했지만, 5황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던 만큼 다른 분야에도 상당히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지식과 그녀의 특별한 재능이 합쳐진 눈에 비친 할리의 모습은—.

'그 왼쪽 눈도 그렇고, 그건 절대 자연적인 생명체가 가질 수 있는 기운이 아니야. ···키메라나 포식계 마물이라면 모를까.'

마치 초대형 몬스터를 인간의 형상으로 압축해 놓은 것 같은, 어마어마한 생명력이 그 몸을 구성하는 세포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틀림없이 그것은 몬스터들이 가진 힘의 원천인 변질된 마나, 생체력일 터.

심지어 그에겐 보통의 생명체라고 볼 수 없는 이질감까지 있었다.

마치 여러 부품을 모아 조립한 기계처럼 일관성 없는 기운이 정체불명의 힘으로 한 데 엮여 있다고 여겨질 정도로.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할리의 몸에 잠재된 '광기'와 미묘하게 잔류한 음습한 흑마법의 흔적이었다.

그건, 만약을 대비해서라도 결코 쉽게 넘어가선 안 되는 사안이었다.

'혹시 불사왕 한스가 보낸 끄나풀일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혹시나 해서 그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대화를 통해 뭔가 정보라도 더 얻기 위해.

"그런데 용인이라면··· 잘 모르겠네. 워낙 희귀한 종족이라 문헌으로 남은 자료도 별로 없으니."

그녀가 느꼈던 위화감이 용인의 종족 특성이라고 한다면 딱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거기다 직접 악수하며 느꼈던 그의 주변에 머문 마나의 반응 또한, 그가 용의 피를 이었다는 데에 신빙성을 부여하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지. 마침 이후에 성자와 만날 예정이 있으니 그때 넌지시 일러두는 게 좋겠다.'

결국 그녀는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판단은 교단 측에 떠넘기기로 마음먹었다.

이걸로 점수라도 더 딸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

탈리아 왕국 브라이트 공작가의 지하실.

하인즈는 자신의 앞에서 태평하게 하품하고 있는 여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래, 결정에 후회는 없겠지?"

"하암— 당연한 소릴 하는구나. 아무리 내가 오래 살았어도 죽는 것보단 사는 게 더 좋지 않겠니···?"

나른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말은 두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어차피 이제 곧 수명이 다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와···.

'역시 눈치 하난 빠르군.'

그렇게 자연사하기 전에 그에게 포식당하지 않겠느냐는 의미까지.

그녀는 하인즈가 비스크 유페르쉬를 잡아먹고 성혈에 오르는 순간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던 만큼, 그렇게 판단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실제로 그럴 생각이기도 했고.

"후후후— 사실 다른 것보다 피의 진화 그 자체가 너무 흥미로워서 참을 수가 없구나. 몇 번이나 봤는데도 이해할 수 없던 그 변화를 내가 직접 체험할 수 있다니, 이만큼 매력적인 일이 어디 있겠니!"

조용히 시작된 브리키의 목소리가 저 혼자 흥분한 듯 점점 높아졌다.

반쯤 감겨있던 눈도 조금씩 커지기 시작하더니, 말이 끝날 즘엔 초롱초롱 빛날 정도가 되었다.

"물론 하인즈 네가 앞으로 만들어갈 뱀파이어의 미래가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단다? 그걸 지켜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 되겠지. 내가 그동안 생각했던 것보단 더 멋지지 않겠니?"

"그래, 이쪽도 성혈 급 뱀파이어가 하나 더 있으면 앞으로의 일에 큰 도움이 되겠지. 그러니 구경만 할 생각 하지 말고 그 미래를 위해서 직접 노력해라."

하인즈는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딜 감히 뒷짐 지고 지켜보기만 하려 한단 말인가?

그건 가장 상급자인 자신의 특권이었다!

'뭐, 그렇다고 정말 놀기만 한다는 건 아니지만. 그런데 내가 열심히 일하는 와중에 부하가 빈둥대는 꼴은 용납 못하지.'

그리고 브리키의 뒤로 돌아간 그가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 넣을 때까지, 그녀는 저항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기다렸다.

「정제혈정」이 핏속의 흡혈인자를 진화시키는 것을.

자신에게 찾아올 새로운 변화를!

"흐으으— 아아! 그렇구나. 이것이!"

마침내, 본격적인 변화가 시작되었다.

끓어오르는 피, 열을 뿜어내는 모공, 뒤틀리는 뼈와 근육.

세포 하나하나가 한계를 뛰어넘으며, 시시각각 죽어가던 그녀의 생명력이 다시 조금씩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득히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시작의 혈맥' 뿌리 중 하나, 아우테리카 뱀파이어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브로코슬락'이—.

이세계에서 온 잡종, 하인즈 2세에 의해 더럽혀··· 아니, 더욱 발전한 모습으로 진화하며 긴 대륙의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는 순간이었다.

물론 그와 동시에.

아우테리카 뱀파이어 클랜 연합, '하이브리드(Hybrid)'가 완전한 성혈 하나를 더 보유하게 된 순간이기도 했다.

#147

용사 파티 (1)

"저는 주신의 뜻을 받드는 첫 번째 검, 하인리히 세인트 랜드가드라고 합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이렇게 시간을 내어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성자님. 저는 아제리온 제국의 이세아 프리스틴입니다. 주신께 선택받은 대륙의 구원자께서 부르시는데 당연히 와야지요."

로셀리아 대신전의 한 응접실에서 두 남녀가 마주한 채 서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면담을 위해 후보자와 성자의 일대일 자리가 마련된 것.

"성자님?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하지만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세아가 처음 꺼낸 화제는, 할리에게서 감지된 꺼림칙한 기운과 이질감에 대한 것이었다.

'그래도 나름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만만치 않군.'

물론 그것에 대해 그가 할 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지만.

"그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미 저희도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분이거든요."

"역시 그랬군요. 교단에서 그리 판단했다면 괜한 걱정이었네요."

그렇게 당당하게 그녀의 우려를 불식시킨 후, 주제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불사왕에 대항할 '용사 파티'의 주축은 성자이자 용사인 하인리히였기에, 이 건은 그가 전권을 가지고 진행 중이었다.

이번 일에 한해서는 성녀조차 그저 조력자일 뿐, 모든 결정은 전적으로 그의 개인 판단에 맡겨진 것이다.

"···그래서 저를 높이 평가해주신 점은 정말 감사합니다만, 여러 사정 때문에 직접 힘이 되어드리진 못할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지금.

하인리히는 세 번째로 진행된 면담에서 세 번째 거절을 맞이하고 있었다.

'애초에 다들 내켜 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대부분 정치적인 이유로 추천받아 온 거기도 하고.'

차분하게 말을 잇던 이세아가 공손히 허리를 숙이며 사죄했다.

그 정중하고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모습에는 누구라도 마음이 누그러질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있었다.

하물며 그녀의 외양은 어리고 가녀린 소녀의 모습이지 않은가?

실제 나이와는 별개로 직접 대할 때 마음이 약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에 하인리히도 그녀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생활 연기의 달인답게 그 속마음은 달랐지만.

'이 얼굴로 나보다 연상이라고? 역시 아무리 봐도 이 여자, 지구 출신인 것 같은데.'

그는 설득을 위해 대화를 나누면서도 천천히 그녀를 분석했다.

나이를 먹지 않는 얼굴과 동양적인 외모에, 이름조차 묘하게 한국적이다.

바로 얼마 전에 지구의 각성자인 앤드류를 만나기도 했던 만큼, 단순히 우연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엔 걸리는 점이 많았다.

'그래서 할리와 악수할 때 한 번 확인하기도 했었는데···.'

그녀와 악수를 나누었던 것은 짧은 순간에 불과했으나, 할리의 예민한 감각이 그녀의 몸 상태를 파악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물론 상대는 대마법사인 만큼 따로 기운을 운용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생명체의 몸에 관해선 권위자나 다름없는 그에겐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근육의 미세한 떨림과 체내에 흐르는 생체 전기, 심장 박동을 비롯한 내부 조직의 움직임, 그리고 혈압, 체온, 호흡 등의 변화까지.

인간의 신체는 그 자체만으로도 많은 정보를 품고 있었고, 「돌연변이」와 「육체변이」 등을 통해 한계를 넘어선 할리는 그것을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가 바로—.

'애매해. 하필 마법사라서인지 앤드류처럼 신체에 두드러진 특징이 없어. 카르마로 정신력이나 마력 관련 능력을 상승시켰다면 할리가 알 방법이 없으니.'

증거 불충분이었다.

초기에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약간이나마 신체 능력을 올리는 게 유리했을 텐데, 그녀는 그저 조금 건강한 일반인 수준에 불과했다.

물론 지금 수준에서야 마력과 강화 마법을 이용하면 어지간한 전사 이상의 신체 능력을 보이겠지만, 이세계 진입 초반에도 그러진 않았을 거 아닌가?

'5황녀 쪽에서 손을 썼는지 과거에 대한 기록도 확실하지 않고. 이 세계는 고위층이 아니면 개인 정보가 지구처럼 체계적으로 관리되지도 않으니···.'

그녀가 귀족위를 받은 건 고작 3년 정도에 불과했다.

찾을 수 있는 그 전의 기록은 약 8년 전, '어린 황녀가 재능 있는 평민 마법사를 데려와 후원했다'는 게 전부일 뿐.

'후원받은 지 고작 5년 만에 제국의 귀족위를 받을 정도로 성장했다는 건 확실히 대단하긴 하지만.'

그야말로 자수성가의 표본과도 같은 인재였다.

그리고, 그래서 더 의심이 갔다.

그 와중에도 둘의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아마 성자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제 사정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모든 이들이 대의를 따르진 않을 테니 말이죠."

그녀는 솔직하게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주신교단은 정보력도 만만치 않은 세력인 만큼, 이미 알고 있을 거라 여겼는지 말을 돌리지도 않았다.

'황태자 때문이란 말이지.'

그녀의 말을 듣자 문득 사이먼 황태자의 그 뺀질뺀질한 얼굴이 떠올랐다.

정상 회의 내내 은근히 정치질을 걸어오며 거슬리게 하던 그의 언행과 뒷조사를 통해 알게 된 그의 악행도.

'황태자와 5황녀의 황위 경쟁이라. 거기다 황태자가 훨씬 유리한 상황이라고···?'

문득 그의 뇌리에 나쁜··· 아니, 정의로운 생각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아직은 구상 단계일 뿐이었지만, 일단은 기억해 뒀다가 나중에 꼭 써먹기로 다짐했다.

"알겠습니다. 교단은 절대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지요. 나중에 마음이 바뀌시면 언제든 연락해 주십시오."

"네, 정말 죄송합니다. 저도 여건이 되었다면 꼭 함께했을 텐데. 마도를 추구하는 자로서, 그것을 악용하는 흑마법사는 용납할 수 없으니까요."

그렇게 자리가 파해지며 그녀의 의례적인 말을 듣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번뜩이며 스쳐 지나갔다.

"아! 프리스틴 자작님? 그러고 보니 한 가지 조언을 구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저희 교단 쪽에선 도저히 결론이 나오지 않은 문제라 대마법사의 고견을 듣고 싶군요."

"그런 거라면 상관없습니다만. 여긴 마탑의 맹주님도 계신 걸로 알고 있는데, 마법적 자문은 그 분께 여쭤보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하하하, 물론 그분께도 이미 부탁드렸었습니다. 최대한 많은 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어서 말이지요."

하인리히는 대충 둘러대며 예복에서 펜과 수첩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수첩을 한 손에 든 채 천천히 무언가를 그려 나가며,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그녀에게 입을 열었다.

"저희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문제인데, 아직까지 딱히 결론이 나오지 않은 상태입니다. 신학사들은 물론 자문을 청했던 마법사와 주술사들도 확신을 내릴 수 없다는군요."

"그런 문제라면 제가 큰 도움은 되어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만···."

"괜찮습니다. 간단히 의견만 내어 주셔도."

마침내 작업을 끝마친 그가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이세아를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혹시 불사왕 한니발 스트라우스가 쓰고 다니던 가면에 대해 아십니까?"

"예, 나무로 만든 웃는 가면이라고 하더군요.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자가 웃는 얼굴이라니, 악취미가 따로 없지요. 그야말로 모두를 조롱하려는 광인의 사고방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흠흠, 그렇죠. 그리고 이게, 그 가면의 개략적인 도안입니다."

가볍게 헛기침한 하인리히가 그녀에게 수첩을 내밀었다.

"제가 그림에는 재주가 없어서 세세한 부분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전체적인 인상은 비슷할 겁니다. 이걸 보시고 어떤 마법적 의미가 있는지 떠오르는 대로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그렇군요. 하긴, 가면은 의식에 자주 사용되는 매개체이기도 하···."

그리고 수첩을 받아 그림을 본 그녀의 몸이.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 어, 이건···!"

저도 모르게 벌어진 입에서 새어 나오는 새된 목소리.

시종일관 차분한 기색을 유지하던 이세아의 표정이 격렬히 요동쳤다.

그 자리에서 가볍게 그린 만큼 세세하게 묘사되지는 않았지만, 그 특징은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휘어진 눈매, 짙은 눈썹, 자글자글한 주름, 커다란 주먹코.

한국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가면이었다.

"왜 그러시죠? 뭔가 아시는 게 있나요?"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잠깐 착각한 것 같습니다. 그··· 어렸을 때 살던 마을에서 잠깐···."

"흐음, 이와 비슷한 가면이 있었다는 말이군요? 혹시 그 마을이 어딘지 알 수 있겠습니까? 불사왕의 연고지가 그 지역일지도 모르···."

"아뇨, 아뇨! 그, 동네의 어린애가 심심풀이로 만들었던 거라! 예, 장난감 대용이었죠. 그러곤 금방 질려서 그대로 부숴버렸지만요. 그냥 옛 추억이 떠올라 과하게 반응해 버렸군요. 하하···."

면담 내내 일체의 동요도 없던 그녀가 당황하는 모습에 흥이 나, 저도 모르게 너무 괴롭혀 버렸지만—.

'딱 걸렸어.'

이로써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 이 여자도 지구의 각성자였구나.'

하지만 하인리히는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아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군요. 뭔가 단서라도 있었으면 했는데."

"···예, 이것에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는··· 전 잘 모르겠군요.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녀의 동요는 빠르게 가라앉았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정보를 접해 순간적으로 평정심을 잃긴 했지만, 그녀 또한 극의에 이른 대마법사.

냉정을 되찾고 신색을 회복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하긴, 8년 이상 지구 문명과는 담쌓고 살아오다 갑자기 하회탈이 들이밀어지면 놀랄 만하지.'

그것도 그냥 나타난 게 아니라, 이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절대 악이자 죽음의 화신인 불사왕의 가면으로 등장했으니.

한국인이라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래, 한국인이라면 말이지.'

첫 번째로 마주한 지구인인 앤드류는 미국인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로 마주한 이가 자신과 같은 국적의 사람이라니, 우연도 이런 우연이 어디 있단 말인가.

'어차피 한스의 가면에 대한 정보는 금방 퍼질 수밖에 없어. 그걸 본 게 한두 명도 아니고.'

그런 정보를 이렇게 유용하게 써먹었으니, 이 정도면 굉장히 흡족한 결과였다.

이걸로, 그녀를 어떻게 써먹을지 확실히 결정할 수 있었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