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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157

수도 침공 그 후 (1)

그 거리가 거리인 만큼, 엘븐 킹덤을 포함한 에나멜 대륙의 사절단들은 정상 회의가 끝났을 때 가장 먼저 로셀리아 대신전을 떠났다.

이후 각 신전들의 협조를 받아 빠르게 동부로 이동한 그들은 하루 만에 대륙의 동쪽 끝에 있는 숲에 도착했고, 지금은 라포리와 세실리가 운용하는 '숲의 길'을 통해 에나멜 대륙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결국 이온 대륙에선 동부 숲과 신전을 오갈 때 빼곤 내내 신전 안에만 있었네요. 놀러 온 게 아니니 당연하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래도 뭔가 좀···."

해리스와 함께 숲길을 걷던 샤피론이 나직이 투덜거렸다.

그녀의 복장은 올 때와는 다르게 상당히 가벼워져 있었는데, 그 많던 짐들은 지금 그녀의 손목에 걸린 아공간 마도구에 얌전히 담겨 있었다.

뭔가 현실을 깨달은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아 안쓰럽기도 했지만···.

원래 다 이런 식으로 어른이 되어 가는 거겠지.

"그래도 세계 각국의 여러 사람을 만날 기회가 흔한 건 아니지요. 거기다 그들 모두 어지간해선 보기 힘든 위치에 있는 이들이기도 하고요."

부스럭 부스럭—

해리스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위로하며 그 손에 팝콘 봉지를 쥐여 주었다.

"아니, 제가 어린애도 아니고! 왜 자꾸 무슨 말만 했다 하면 이렇게 먹을 걸 주는 거예요? 나도 당연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건 알고 있다고요?"

그러자 이번엔 그 대우에 불만이 생겼는지 그녀가 재차 불평을 토하긴 했지만, 당연히 손에 쥐어진 팝콘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조용히 숲길을 걸으며 부지런히 냠냠거리던 샤피론이 문득 뭔가가 떠올랐다는 듯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거리를 둘러볼 기회가 없는 건 해리스도 마찬가지였는데, 이건 어디서 구해 오신 거죠? 치사하게 혼자만 나갔던 건가요!"

"아! 선물 받은 겁니다, 선물. 그 왜 얼마 전에 만났던 친구 있지 않습니까, 덩치 큰. 헤어지기 전에 아공간 마도구에 이것저것 챙겨서 주더군요."

"아··· 그, 신기하던 분 말이죠? 전 처음에 수인족의 친척뻘이라도 되는 줄 알았어요. ···어? 용인이라면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닌가?"

곤란한 화제를 피하고자 가볍게 주의를 돌렸더니, 또 거기에 홀랑 넘어간 그녀가 이번에도 쓸데없는 고민을 하며 머리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때 그 고민을 해결해주기 위해 끼어드는 이가 있었으니.

"아니, 아니! 수인이랑 용인은 한참 다르다고, 아가씨?"

그들의 대화를 들은 듯, 한 수인이 넉살 좋게 다가왔다.

사자와 같은 치렁치렁한 갈기와 할리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거대한 덩치.

불사왕의 습격에 맞서 한 자리 차지했었던 와일드 랜드의 대표, 사자 수인 라이오넬이었다.

"수인은 그냥 날 때부터 그런 종족이고, 용인은 드래곤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생명체지. 물론 그렇게 만들어진 용인은 번식을 통해 피를 후대에 계승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래도 그 뿌리는 엄연히 달라."

그는 회의 내내 별다른 말도 없다가 싸울 때만 사납게 날뛰었던 장본인이 맞나 의심될 정도로 그들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아가씨 손에 들린 그건 뭔가? 왠지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아마 먹을 거에 홀려서 접근한 것은 아닐 것이다.

조금 사심이 있어 보이긴 했지만.

"아, 이거요?"

그리고 그 노골적인 질문에 샤피론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연신 부스럭거리던 팝콘 봉지를 그대로 라이오넬에게 내밀었다.

그간 그녀가 식탐이 많다고 생각했던 건 해리스의 오해였던지, 남에게 주는 것이 조금도 아깝지 않다는 듯 거리낌 없는 행동이었다.

"이미 다 먹었는데, 냄새라도 맡아 보실래요?"

"···아니, 괜찮아 아가씨.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난 코가 좋거든."

아무래도 그냥 빈 봉지라 미련이 없을 뿐이었던 것 같았다.

그녀의 뻔뻔함이 상당히 당황스러웠는지 잠시 멈칫하던 그는 이내 헛기침과 함께 다시 말을 이었다.

"흠흠, 그나저나 엘븐 킹덤에는 여러모로 신세를 지는구만. 거기 형씨 덕에 불사왕을 물리치기도 했고, 이렇게 대륙 간 이동에도 도움을 받고 말이야."

"서로 도울 수 있으면 돕는 게 좋지요. 그런데 라이오넬 님도 그때 상당히 많이 다치셨다고 들었는데, 지금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응? 아아! 당연하지. 그때부터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아직도 골골거리겠나? 거기다 대신전의 집중 치료까지 받고서 후딱 털고 일어나지 못하면 수인이라고 할 수 없지!"

과연 선천적으로 강한 육체를 타고나는 수인다운 자부심이었다.

"쓰읍, 이거 에나멜에도 빨리 주신교단의 신전을 하나 세우든가 해야지. 그 소식은 들었지? 지금 제국의 수도에서 큰일이 벌어졌다는 거."

"···예, 불사왕이 제론에 쳐들어왔다고."

하지만 이미 그들은 숲의 길을 통해 한창 이동 중이었던지라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애초에 그들은 전투 지원이 아니라 사절단의 역할로 왔으니 뭘 하기도 힘들었겠지만.

"신전의 게이트를 통해 이동할 수 있었으면 좀 더 즉각적인 대응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사실 삼백 년 전에도 한 번 논의되기는 했는데, 불사왕이 쓰러지고 나서 흐지부지됐다고 하더라고."

물론 에나멜 대륙의 이종족들 중에서도 각자의 종교보다 주신을 우선하는 성직자들이 있긴 했으나, 그들의 종교 시설은 커다란 사원까지가 한계였다.

당연히 게이트를 설치할 수 있는 최소 조건인 신전은 단 하나도 없었고.

신전을 건설하기 위해선 온갖 자재뿐만 아니라 고위 성직자들도 많이 필요했는데, 에나멜 대륙에서 그 모든 조건을 만족하기 위해선 종족 차원의 협조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주신을 존중한다지만, 엄연히 국교가 따로 있는 이들이 돕기는 애매하지.'

굳이 방해는 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신전을 세운다는 걸 직접 돕기도 뭐하다.

삼백 년 전에 그 필요성이 대두되었다지만, 바꿔 말하자면 이후 삼백 년간은 딱히 필요할 일이 없었다는 뜻이니.

'그래도 이번 정상 회의에서 다들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니까. 이번에 돌아가면 이종족 수뇌부들끼리 따로 협의한 후에 확실히 결정되겠지.'

그리되면 대륙 차원의 지원으로 빠르게 신전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필요한 고위 성직자들을 이온 대륙에서 데려오는 것은 하이 엘프들이 맡게 될 터.

'···뭔가 운송 수단으로서의 필요성만 더욱 대두되는 것 같은데.'

하이 엘프 후보 해리스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젠 그것도 남의 일이 아니었으니까.

이온 대륙에서 한창 큰일이 벌어지고 있던 그 시각.

해리스가 포함된 이종족 사절단은 그렇게 사건 사고 없이 평화로운 숲길을 거닐고 있었다.

***

로셀리아 대신전의 제3 중앙 식당.

"크하핫—! 이제 좀 허기가 가시는군! 간만에 격렬한 운동을 했더니 속이 영 허했는데. 살짝 부족하지만 과식은 좋지 않으니 여기까지만 할까?"

흐뭇한 얼굴로 배를 쓰다듬으며 그 문을 위풍당당하게 나서는 이가 있었으니···.

"거참, 대충 양념 치고 구워만 줘도 된다고 했는데. 역시 대신전의 요리사들이라 그런지 실력만큼 사명감도 투철하구만! 나야 덕분에 맛있게 잘 먹었다지만."

바로 제론으로 지원을 나갔다가 다시 성지로 돌아온 야만 전사 할리였다.

그리고 그가 나선 식당의 안쪽 주방은 이미 한바탕 전쟁이 치러진 듯, 요리사들이 저마다 가쁜 숨을 내쉬며 축 늘어져 있었다.

"···역시 강적이로군. 오늘은 전보다 더해."

"밖에서 격렬한 싸움을 하고 돌아온 직후라고 하니 아무래도 그 영향이 있겠지요."

"후후후, 하지만 우리에겐 안 되지. 우리 제3 중앙 주방이야말로 대신전의 최정예···."

"그, 저기··· 주방장님?"

승리를 만끽하고 있는 그의 말을 수석 조리장이 조심스럽게 끊었다.

물론 주방장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공들여 만든 음식이 불과 몇 초 만에 목구멍으로 꿀떡꿀떡 사라졌을 땐 하마터면 그조차 마음이 꺾여버릴 뻔했으니.

하지만 이곳은 대신전의 식사를 책임지는 곳 중 하나.

하루에도 수백 명의 성전사와 성기사들을 겪는 만큼 대식가에게는 상당한 내성이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게 문제였다.

"곧 저녁 식사 시간입니다. 그, 이미 조금 지체되어서 지금부터 바로 준비를 하지 않으면···."

"···그랬었지, 참."

교단의 일을 도와준 손님인 할리에게 제공한 식사는 사전에 예정되어 있던 업무가 아니었다.

즉, 그들이 원래 맡은 일과인··· 거친 훈련으로 한껏 굶주린 수많은 아귀들을 만족시키는 일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후, 그래. 겨우 이 정도로 약한 소리 할 순 없지. 빨리빨리 움직여라 이놈들! 언제까지 늘어져 있을 거냐? 우린 로셀리아 최고의 정예인 제3 중앙 주방이다!"

"네! 주방장님!"

그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새로운 전쟁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원래라면 쉬어야 할 시간에 만만찮은 상대와 사투를 벌인지라, 어쩌면 모든 일이 끝난 후엔 몇 명쯤 쓰러질지도 몰랐지만···.

설령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지더라도 아무런 문제 없었다.

그야 이곳은, 대륙 최고의 의료시설을 자랑하는 로셀리아 대신전이었으니까!

"어— 역시 조금만 더 먹을 걸 그랬나? 벌써 살짝 출출한데···."

그렇게 결의가 휘몰아치는 주방을 뒤로한 할리는 요리사들이 들었으면 뒷목 잡았을 말을 중얼거리며 대신전의 복도를 거닐었다.

사실 아공간에 잔뜩 쟁여둔 온갖 고기를 먹으면 되긴 하나 그래도 요리사가 직접 만들어준 음식이 더 맛있는 건 당연하지 않겠는가.

다른 사람이 보면 그냥 목구멍에 들이붓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그의 초월적인 미각은 그 짧은 순간에도 미세한 맛조차 놓치지 않았다.

'아니, 됐다. 이 정도면 평소보다 많이 먹은 편이기도 하고. 아무리 공짜라도 여기서 더 바라는 건 양심 없는 짓이지.'

한스와 불사의 군대를 상대하며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한 뒤였긴 했으나, 스스로를 이 시대 최후의 양심이라 자부하는 만큼 이 정도 배려는 기본 소양이었다.

'···그건 그렇고, 하인리히는 아직 좀 시간이 필요해 보이는군.'

손님의 신분으로 지원 갔을 뿐인 할리는 제론에서의 일이 끝나고서 바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하인리히는 뒷정리를 위해 그곳에 남을 수밖에 없었는데,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교단 측의 최고 책임자라 할 수 있는 그가 곧바로 자리를 피하기엔 무리였던 것이다.

'거기다 제론 대신전은 로한 공국에 대한 파병 문제에다가 이번 일까지 겹쳐서 한창 일손이 부족한 상황이기도 하고.'

그래도 제론과 성지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 할리를 이곳으로 돌려보내 줄 정도의 여력은 있었다.

이후 로셀리아 대신전의 실무자들이 그쪽으로 떠났으니, 하인리히도 조만간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번 일은 어떻게든 일단락됐군.'

불사왕의 수도 침공 이후.

황실을 시작으로 한 제국 지도층부터 뒷골목 조직을 비롯한 사회의 밑바닥까지, 그야말로 수도 전역이 사태를 수습하느라 몸살을 앓았다.

결국 황궁의 결계는 마지막까지 파괴되지 않았던지라 그곳에서 추가 피해가 발생하진 않았지만···.

불사왕과 직접 맞서야 했던 기사단의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친 것은 물론, 마스터 급 기사인 황실 수호대장도 상당한 부상을 입어 당분간 요양에 들어가야 했다.

동시에 대대적인 습격을 받았던 귀족가와 여타 조직들 또한 그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한스에게 종속되며 그 마력의 일부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 불사의 군대에게 「심연의 눈」의 일부 능력, 일명 악업(惡業) 판별기를 부여해 상당히 가차 없이 청소를 진행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올리비아 혼자서 그 모두를 일일이 통제하기는 한계가 있으니. 물론 그만큼 평소보다 기준이 가혹해진 면은 있지만.'

뭐, 그건 어쩔 수 없지 않겠는가?

그게 불만이면 평소에 나쁜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어차피 누군가가 희생해야 한다면 그것은 악인이어야 한다는 게 그의 평소 지론이었다.

물론.

그 자신도 결코 '선'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한참 전부터 자각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세아는 생각 이상으로 황녀와 유대감이 강해 보였지.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는데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적극적이었단 말이야. 또 이제 포로들도 신경 써서 관리해야 할 테니, 이건···.'

"아, 할리 님? 여기 계셨군요. 잠깐 대화 가능하십니까?"

그렇게 생각에 잠긴 할리가 식후 운동을 하기 위해 훈련장으로 향하던 도중, 갑자기 그에게 다가와 게 말을 거는 이가 있었다.

결사대에 그를 추천함으로써 이곳까지 오게 만든 이들 중 한 명.

간판인 '용병왕'을 대신해 용병 길드의 실무를 총괄하는 사무총장이었다.

#158

수도 침공 그 후 (2)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한적한 정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이번에 제론까지 가셔서 큰 활약을 하셨다고요."

격식을 갖춘 단정한 복장과 오일을 발라 올백으로 뒤로 넘긴 머리.

자신을 패트릭이라 소개한 그 서른 후반의 사내는 용병보단 공무원처럼 보이는 인상이었다.

"알고 계시겠지만, 이번에 용병왕이던 칸블 님이 전사하시면서 저희 길드도 상당히 혼란스러워진 상황입니다."

일개 용병들의 우두머리라고 폄하할 수도 있으나, 이 대륙에서 용병왕이란 자리는 그만큼 가벼운 자리가 아니었다.

몬스터와 도적이 일상인 이 세상에서 용병이란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직업이었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대변해 줄 집단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그렇게 각지에 수많은 군소 길드들이 난립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난립한 길드들을 통합하고 그 힘을 하나로 묶어 지금의 체계를 세웠던 게, 삼백 년 전의 초대 용병왕.

그는 초월에 이른 무력과 길드를 통한 대륙적인 영향력을 기반으로, 다른 세력들에게 '왕'의 칭호를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용병들에게는 전설과도 같은 위인인 것이다.

'또 2대 불사왕을 쓰러뜨린 결사대의 일원이기도 했지.'

하지만 익히 알려진 대로 결사대의 최후는 그리 좋지 않았다.

용병왕 또한 어찌어찌 최후의 일전까지는 살아남았으나, 결국 그도 성검이 봉인되었던 지금의 피카올 대신전이 세워진 그 장소에서 전사해버리고 말았으니.

이후 그를 기리기 위해 용병 길드는 '용병왕'이란 칭호를 계승하기 시작했고, 다른 세력들도 그것을 용인하면서 지금처럼 전통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용병왕은 불사왕과의 싸움에서 뺄 수 없어. 아마 칸블도 그때 한스에게 죽지 않았으면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용사 파티에 자원했겠지. 아니면 아예 은퇴해 버리거나.'

하인리히가 그것을 받아주고 말고와는 별개로 말이다.

"이후 용병왕의 자리가 공석이 되고 나서 상황이 굉장히 복잡하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길드 내 가장 큰 파벌은 칸블 님과 페이튼 님이 돌아가시면서 사실상 대부분의 영향력을 잃었고, 그 힘을 흡수한 다른 파벌에서 차기 용병왕을 내세우···는 게 정상이겠습니다만···."

차분히 말을 잇던 패트릭이 이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용병왕이 되면 어떻게든 결사대에 참여해야 하니 말이지요. 만약 성자님이 거부하셔서 참여하지 못하더라도, 그 또한 자격 논란으로 이어질 테니 함부로 나서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결국 서로 눈치만 보는 중이란 소리였다.

"킁! 거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가? 갑자기 그런 소리를 나한테 늘어놓는 이유가 뭐야?"

할리는 이 눈앞의 사내를 잘 알고 있었다.

당연히 그도 사절단에 포함된 사람이었으니 조사가 이미 다 끝난 상황이었던 것이다.

용병 길드의 사무총장은 용병왕이 직접 임명하는 직위였고, 그는 은퇴한 전 총장의 뒤를 이어 얼마 전에야 그 자리에 오른 인사였다.

즉, 칸블의 측근이면서 동시에 길드 내 최대 파벌이었다는 곳에 속한 일원이라는 소리.

그가 직접 말했듯이, 지금은 유명무실해진 그 파벌 말이다.

'사실 이 인간도 상당히 아슬아슬하단 말이지. 한스가 대신전을 습격했을 때 결계 밖에 있었으면 그냥 같이 처리했을 텐데.'

여러 조사 내용을 대조한 결과, 그는 먼저 나서서 악행을 벌이기보단 위에서 내려온 명에 따라 벌어진 일을 수습하는 쪽이었다.

전형적인 예스맨이라고 볼 수 있을 터.

하지만 나쁜 놈에게 신임받을 정도로 일을 잘했다는 소리였으니 완전히 무고하다고 볼 수도 없었다.

"할리 님은 이번에 불사왕 한스와의 싸움에 자발적으로 나서셨지요."

"아, 그 용사님보다 더 강하다고 하니 영 근질근질해서 말이지! 뭐··· 확실히 강하긴 하더구만. 그래도 한 방은 먹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뇨, 그 성과와는 별개로 할리 님은 이미 충분한 용맹과 무력을 증명하셨습니다. 그것은 성자님께서도 이미 인정하셨을 정도지요."

그때, 시종일관 차분하게 말을 잇던 그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할리 님, 혹시 용병왕 자리에는 관심 없으십니까?"

"···호오?"

그에 할리는 이 사내의 속셈을 확실히 알아챌 수 있었다.

'썩은 줄을 버리고 라인을 갈아타시겠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직은 직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는 결국 차기 용병왕이 선출됨과 동시에 실각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오랜 세월 고생한 끝에 드디어 그 자리까지 오른 그로선 억울할 수밖에 없는 노릇.

그래서 찾은 돌파구가 바로 특정 파벌에 속하지 않았으면서도 그 무력이 증명된 할리였던 모양이다.

'생각해 보니 그가 할리를 추천했던 것도 칸블이 죽은 이후였지. 사무총장 정도면 각 지부의 정보에는 빠삭할 테니···. 킹메이커가 되어 권력을 유지하겠다는 말인가.'

용병 길드는 그 특성상 무력이 최우선 가치였으나, 삼백 년이 넘게 이어져 온 조직이다 보니 당연히 정치적인 면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런데 무력은 충분하지만 길드 내에 별다른 기반이 없는 할리에게, 아직 사무총장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패트릭의 권한이 더해진다면?

"크하핫! 용병왕이라? 흥미로운 제안이로군!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 볼까?"

굳이 찾아온 기회를 마다할 필요는 없었다.

***

초월에 도달한 흑마법사만이 사용할 수 있는 궁극의 주문, '영겁의 미궁'.

그 내부는 격리된 하나의 작은 세상과도 같아 특정한 조건을 만족하지 않는 한 빠져나갈 수 없었고, 그것을 둘러싼 외부 또한 차원을 가르는 수준의 공격이 아니라면 흠집도 나지 않았다.

또한 모든 부분을 술자 마음대로 조작할 수도 있었는데, 보통은 미궁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침입자를 배제하는 데에 사용하는 기능이었지만···.

'멋지군.'

한스는 그것을 자신만의 성을 꾸미는 하우징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허업—!"

"······!"

빛조차 빨아들이는 듯한 검은 벽돌, 곳곳에 새겨진 악마와 해골 등의 살벌한 장식, 가시처럼 높고 뾰족하게 세워진 첨탑.

성의 하늘엔 시커먼 먹구름이 끼어 있었고, 주변은 검은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음산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끼야아악—!]

덜그럭 덜그럭!

거기다 화룡점정으로 귀곡성과 언데드의 군세까지 더해지자, 끝내주는 분위기의 마왕성이 완성되어 버린 것이다.

[크크큭— 도망갈 생각은 하지도 않는 게 좋을 거다. 어차피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겠지만 말이지.]

포로로 잡힌 두 황족에게 나직한 경고를 던진 한스는 그들 반응에 내심 뿌듯함을 느끼며 안쪽으로 들어섰다.

내부 또한 기본적인 인테리어는 외부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그래도 바깥과는 다르게 생명체도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마련해 두었다.

"오, 오셨습니까! 왕이시여!"

"아아—! 부덕한 이 세상의 심판자이시여!"

"으으··· 피와 죽음을···"

바로 이놈들 때문에.

주민들을 납치해 인체 실험을 하던 흑마법사, 흑마력을 과하게 받아들여 살육에 미쳐버린 암흑 전사, 고위 악마를 소환하기 위해 산 제물을 바치던 악마 추종자, 재림한 불사왕을 신으로 섬기며 세상에 죽음을 퍼뜨리겠다는 광신도 등···.

그동안 한스가 열심히 수집한, 대륙 곳곳에서 문제를 일으키던 세상의 암 덩어리들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정상적이지 않은 인간군상에 그간 이런 인종을 볼 일이 없었던 두 황족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흠, 이놈들과 함께 두는 건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겠지. 격리 구역을 따로 만들어 둘까.'

이곳은 오롯이 그의 통제하에 있는 공간이었다.

의지가 일자 현상이 일어난 것은 즉각.

어느새 그들은 이전까지 있던 곳과는 별개의 주거 공간에 서 있었다.

그리고 한동안 이들을 감시하고 생활을 보조할 책임자는···.

"으으, 어쩌다 이런 삭막한 곳에서···."

"···시끄러워요, 앤드류. 나야말로 울고 싶으니까."

결국 마왕성까지 오게 된 지구의 각성자 앤드류 위버와 서큐버스 시아나였다.

'시아나는 변장 능력도 탁월하니까. 라일리 황녀를 담당하기엔 녀석만 한 인재가 없더란 말이지.'

황태자야 대충 숨만 붙어있어도 된다지만, 얼떨결에 데려온 황녀까지 그런 취급을 하기엔 영 찝찝하지 않은가.

···지금 하인리히 옆에서 시름에 잠긴 채 연신 한숨을 토해내는 이세아를 보기 미안하기도 하고.

'흐음— 역시 황녀는 이런 환경에 오래 잡아두기도 뭣하니. 빨리 해방 시나리오를 강구해 봐야겠군.'

사실 이미 따로 생각해 둔 게 있긴 했다.

황녀와 대마법사의 호의를 동시에 살 수 있는 이 기회를, 자신에게 도움이 되면서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절묘한 방안이.

***

'개판이군.'

앞으로의 일에 대해 논의하고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황궁을 방문했던 하인리히는 회의실을 나서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한스의 수도 침공이 가져온 여파는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우선 수도에 거주하던 많은 유력자들이 상당한 피해를 보았고, 그중에는 목숨을 잃은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것만 해도 엄청난 피해라 할 수 있는 상황에, 차기 황위에 가장 가까웠던 두 황족까지 한날한시에 생사조차 파악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 사실에는 황위를 물려주기 위해 후계자들을 지켜보던 황제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으며···.

또한 선장이 사라진 배에 타고 있던 선원들이 흔들리며 간을 보기 시작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시간의 우위를 가진 채 보수 세력을 중심으로 가장 큰 세력을 꾸린 황태자의 파벌.

뛰어난 지성과 정치력으로 신흥 귀족들을 주축으로 급격히 규모를 불린 5황녀의 파벌.

그리고 때를 맞춰 기회를 노리고 움직이기 시작한, 이미 주류에서 밀려났던 2황자와 그간 기를 펴지 못하고 있던 6황자까지.

아마 이 사태가 장기화할수록 정국은 점점 더 혼란에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사왕과는 별개로, 오로지 그들의 권력에 대한 욕심 때문에.

"후우— 죄송합니다, 성자님. 잠시 저희 쪽 사람들을 다독이고 오느라 좀 늦었습니다."

그리고 5황녀 파벌의 이탈을 최소화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녀, 이세아 프리스틴이었다.

아직까진 딱히 공을 세운 게 없어 경지에 비해선 낮은 작위를 가진 그녀였지만, 5황녀의 최측근인데다 강력한 대마법사이기도 한 만큼 파벌 내에서의 발언권은 절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중에 황녀가 돌아왔을 때를 대비해 두는 거겠지. 기껏 구해왔더니 있을 자리가 사라진 상태면 그것도 문제일 테니.'

상당히 조급할 텐데도 이렇게 차근차근 해야 할 일들부터 처리해 나가는 걸 보니, 과연 대마법사다운 냉철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성자님? 불사왕에게는 언제 쳐들어가실 건가요? 아! 일단 저희와 함께 할 이들부터 충원해야 할 것 같은데, 저에게 맡겨 주신다면 제가 직접 각국에서 쓸 만한 이들을 끌고··· 아니, 모시고 오겠습니다."

그 차분한 목소리로 내뱉는 대사는 전혀 냉철하지 못했으나, 이 정도는 사소한 문제라고 볼 수 있었다.

"이미 심사숙고해서 몇 분을 골라뒀습니다. 이번 일은 기동력은 물론 서로 간의 합도 상당히 중요한 만큼 아무나 받을 생각이 없거든요. 결국 나중엔 불사왕과 함께 싸워야 할 테니 말이죠."

"···그렇습니까. 아쉽군요."

무표정한 얼굴로 가볍게 입술을 핥는 이세아.

역시 조금 과격해진 것 같긴 했다.

"그런데 성자님?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만,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어떤 예고도 전조도 없는 습격에 대응하라니. 사실 이번 일도 성자님께서 미리 경고를 주시긴 하셨지만, 결국 대비가 부족해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리고 말았고···."

하인리히와 함께 나란히 복도를 걸으며 그녀가 걱정스러운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생각해 봐도 하필 그날 밖으로 나간 것이 후회되었던 모양이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근심 어린 말에, 그는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제가 괜히 그에게 그런 제안을 한 게 아닙니다. 주신께서 길을 밝혀 주시는 이상,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흘러갈 테지요. ···저도 아직 많이 부족한지라, 모든 사태에 확실히 대응할 수 있다고 확신은 드리지 못합니다만."

신실한 성직자···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광신도 기믹은 어떤 의문도 뭉개버릴 수 있는 만큼 굉장히 편리했다.

주신과 성자의 권위에 상대도 함부로 토를 달지 못하니까.

물론 끝에 가볍게 한 마디 붙여줌으로써 나중에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 그리고 황녀님께서도 금방 무탈하게 돌아오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느껴지는군요. 제 감은 제법 정확한 편이니 믿으셔도 좋습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 어린 애가 그런 환경에서 잘 버틸 수 있을지. 은근히 가리는 음식도 많은··· 앗! 죄송해요. 이 말은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언니라기보다는 엄마 같은 말을 중얼거리던 그녀가 움찔하더니 자기 입을 가볍게 두드렸다.

중학생 같은 이세아와 완숙한 성인 여성인 라일리 황녀의 외모를 생각하면 상당한 괴리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어쨌든,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거슬리는 것들을 박살 내 볼까!'

그렇게 납치당한 공주와 대마법사의 파티 합류라는 이벤트 이후.

용사의 속마음이라기엔 흉악한 생각을 시작으로, '안방극장'이 순조롭게 다음 챕터로 접어들었다.

#159

수도 침공 그 후 (3)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광활한 북부 산맥의 어딘가.

집채만 한 곰 형태의 마물 위에 앉아 그 털을 쓰다듬으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이가 있었다.

"···이건 무슨 상황이지?"

로한 공국을 무너뜨리고 잠적했던 역천의 서약의 우두머리, 혁명가가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전해진 정보를 다시 반추했다.

'용사와 불사왕 간의 내기? 3년의 유예?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군.'

결국 그는 자신에게 전해진 정보를 신뢰하지 못하고 재차 확인 과정을 거쳤다.

아무래도 일을 벌이고 몸을 피하느라 정보망에 이상이 생겼다고 생각하며.

하지만 몇 번이나 확인하더라도 결과는 같았으니···.

불사왕이 대륙을 죽음으로 뒤덮는 데에 집중하지 않고, 오직 재미를 위한 유희를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에 예상을 따르지 않고 이상행동을 보일 때부터 미심쩍긴 했지만···.'

그의 얼굴이 와락 찌푸려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뭔가 다른 방식으로 일을 도모하리라 생각했는데, 지금 상황이 흘러가는 걸 보니 불사왕이 심연에서 비롯한 영향력을 완전히 극복한 것 같았다.

'말도 안 된다. 심연을 이겨낼 수 있는 이는 존재하지 않아.'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에게 적용되는 강제력이었고, 거기다 그 당사자가 '인간'이기까지 하다면 절대 바뀌지 않는 법칙이나 다름없었다.

'설마 불사왕이 생전에 인간이 아니었나? 아니, 아니. 그 정도 문제가 아니다. 설마 이종족이었더라도 큰 차이는 없어.'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의문을 품지 않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물론 주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도, 그 권위를 얕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말 그대로의 의문.

각 종족에게는 그들만의 종교가 있었다.

엘프들은 에나멜 대륙 한복판에 솟아오른 '세계수'를 신봉했고, 드워프들은 '불과 금속의 신'을 모셨다.

수인들은 각자를 상징하는 동물 신을 모시는 토착 종교가 있지만, 그것들도 결국 '짐승의 신'의 분체(分體)에 불과했다.

물론 해당 종족들만 그 종교를 따르는 건 아니다.

당장 소수 교단이긴 하지만 바다의 신이나 대지의 신 같이 인간들에게 제법 퍼진 종교도 있었으니.

하지만 그들도 결국 뿌리는 저마다의 종족신으로부터 비롯한 것이었다.

그런데 왜 인간은 그런 종족신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가 없을까?

분명 의문스러운 일이었으나 그에 의문을 품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냥, 원래부터 그랬으니까···. 모두가 그렇게 여기고 있지.'

창조주인 주신은 필멸자가 재단할 수 없는 거대한 개념이나 법칙에 가까웠다.

원래라면 이렇게 세상에 간섭하며 믿음에 따라 신성력과 축복을 내리는 일은 없었어야 정상이라는 뜻.

지금 하는 일은 그저 세상에 오류가 발생하지 않도록, 이전에 누군가가 하던 일을 대신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인간에게도 분명 그들만을 위한 신이 있었다.

지금은 주신에 의해 역사는 물론 인과에서조차 지워져 존재의 편린조차 남아있지 않았지만.

그는 틀림없이 이 세상에 존재했다.

"어쩔 수 없군. 발테온에겐 미안하지만 광기는 내가 가져가야겠어. 죽음이 운명을 벗어난 이상 더 이상 남에게 맡겨두고만 있을 수는 없겠지."

혁명가는 지금쯤 한창 남부에서 일을 벌이고 있을 덩치 큰 전사를 떠올리며 혀를 찼다.

어찌 보면 역천의 서약에서 가장 일을 잘해 준 친구였지만, 지금은 다른 이의 사정을 봐줄 때가 아니었다.

그는 앉아있던 곰 마물의 위에서 몸을 일으키고 근처에 있던 심연의 상흔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내내 얌전하던 마물의 눈에서 그제야 핏빛 안광이 타오르며, 거친 포효와 함께 숲 안 어딘가로 달려가 사라졌다.

"인간의 신을 위하여."

나직한 한 마디만을 남기고 그대로 상흔으로 자신의 몸을 밀어 넣는 인영.

그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인간의 신'의 유일한 사도였으며.

아우테리카 차원의 쓰레기통, 심연으로 추방당한 신의 복권을 위해 헌신하는 혁명가였다.

***

용병 길드의 사무총장 패트릭이 할리에게 한 말의 요지는 간단했다.

'그러니까 나머지는 자기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나는 명성만 더 신경 쓰라는 말이지. 그것도 전 대륙에 고루 퍼질 정도로.'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지만 결국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런 뜻이었다.

지금 할리는 실력에 비해 이름이 그리 알려지지 않은 편이라 명성을 좀 더 높일 필요가 있다는 것.

물론 그도 그동안 용병 생활을 하며 특급이라 불릴 임무도 여럿 처리했고, 최근에는 몬스터 광기 사태에서 큰 활약을 하며 위명을 떨치고 있긴 했으나···.

그것은 대륙 서부, 그것도 툴크 왕국 북부 지역에만 국한된 명성이었다.

'뭐, 사실 따지고 보면 할리의 용병 경력은 아직 일 년도 채 되지 않았으니까.'

명성의 확산에는 시간 또한 중요한 요소였다.

그의 경쟁자라 할 수 있는 다른 용병왕 후보들도 하나같이 긴 시간 꾸준히 이름값을 쌓아 올리며 지금의 위치에 오른 이들.

그 무력 또한 용병들의 우상이라 불리기에 충분한 마스터 급에 이른 이들이었으니, 객관적으로 본다면 경력 차이가 상당히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직접 싸우기만 한다면 전부 다 박살 내 버릴 자신 있는데!'

하지만 그런 무식한 방법으로는 얻게 될 인지도만큼 잃을 민심도 만만치 않을 터.

아무리 무력이 중시되는 단체라고는 하나, 작은 단체도 아니고 대륙적인 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길드의 수장이 되기 위해서는 좀 더 세련된 방법이 필요했다.

사실 도장 깨기라는 유구한 전통도 있으니 그 방법에 매력을 느낀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천만다행하게도 할리에게는 더 좋은 대안이 있었다.

콰아앙—!

강렬하게 터져 나오는 폭음과 솟구치는 검은 불기둥.

"으아악!"

"이, 이놈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피도 눈물도 없는 혹정과 가혹한 수탈로 악명 높은 영주 일가, 샤로티 왕국의 베오인 백작가가 알 수 없는 무리의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불길에 휩싸였다.

영주성을 둘러싼 사방에서는 수천의 언데드 병력이 물밀듯이 밀려들고 있었다.

"크히힉! 모든 것은 그분의 뜻대로! 죽음으로써 이 세상을 정화하리라!"

습격을 주도하는 이들의 몸에서 자기 생명력을 불태운 흑마력이 들불처럼 피어올랐다.

살 생각 따윈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추후를 생각하지 않는 그들의 악의가 영지를 뒤덮었다.

사실 이런 습격은 여기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모종의 이유로 한동안 잠적했던 어둠의 세력들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하나둘 고개를 치켜들기 시작한 것이다.

오랜 세월을 세상의 음지에 기생하며 힘을 키워온 그들의 저력은 절대 만만치 않았다.

하물며 지금은 안 그래도 몬스터 때문에 정신없는 시국이지 않은가.

그런 상황에서 자기 목숨조차 도구로 사용하며 교활하게 빈틈을 노리고 오는 놈들은 피해를 가중하는 데에 단단히 한몫하고 있었다.

파아앗!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그 테러 행위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이들이 있었으니—.

"후우, 이번엔 한 번에 도착했네요. 다행히 그리 늦지 않은 것 같구요."

"점점 능숙해지시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대마법사라도 다수와 함께 이렇게 장거리를 이동하는 것은 쉽지 않을 텐데 말이지요."

"그만큼 자주 사용했다는 소리니 좋은 소식은 아니네요. 그 정도로 상황이 안 좋다는 뜻이니까."

환한 빛무리와 함께 등장한 네 명의 인물이 바로 그들이었다.

"카하하핫! 언제까지 떠들고 있을 거지? 그럼 나 먼저 가보도록 하지!"

"···저도, 가겠습니다."

커다란 도끼를 든 근육질의 거한과 창을 든 음울한 인상의 중년 사내가 먼저 벼락같이 적진에 파고들었다.

"큭! 저놈들 먼저 죽여!"

"마, 마법이 안 통하잖아?! 무슨 이런 괴물이!"

"크흐하핫! 어딜 도망가느냐, 이리 오너라!"

가장 먼저 돌진한 할리는 용의 비늘을 이용한 강대한 항마력으로 상대의 모든 공격을 무시하며 연신 커다란 도끼를 휘둘렀고···.

쉬시식— 쉬아악!

"푸히힛! 그만 죽어··· 켁!"

"으아악! 살려주··· 아? 사, 살았어?"

창을 든 회색 머리 사내의 창은 빠르게 공간을 격하며 위기에 빠진 이들을 구원했다.

"일단 언데드들의 수를 줄일 필요가 있겠군요. 이만한 수를 이끌고 기습을 할 수 있었다니, 역시 불사왕이 따로 손을 쓴 거겠죠."

우우웅—! 콰아앙!

그리고 이세아의 몸에서 솟구친 어마어마한 마나가 순식간에 신비를 구현하며 언데드 수백을 한 번에 휩쓸기 시작했다.

"큭! 정말 예지라도 하는 건가? 이렇게 빨리 오다니!"

백이 넘는 추종자들과 수천의 언데드 군세가 실시간으로 눈 녹듯 녹아내리는 모습에 그들의 우두머리인 흑마법사가 이를 갈았다.

처음부터 저들이 올 거라 예상하기도 했고, 이미 살 생각도 버린 상태이긴 했지만··· 그 위용이 상정했던 것보다 더 위였던지라 저도 모르게 초조해졌다.

'역시 여기가 내 무덤인가 보군.'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대로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는 노릇.

죽을 때 죽더라도, 이 세상에 자신이 존재했다는 흔적은 남기고 가야 하지 않겠나!

고오오오—

그는 곧바로 생명력을 불태움과 동시에 심장의 마력을 억지로 폭주시켜, 원래라면 사용할 수 없었을 대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영혼을 대가로 이 일대의 모든 것을 죽음으로 물들이기 위해서.

"크히힉— 더러운 기득권 놈들. 똑똑히 기억해둬라! 우리의 저항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죽음이야말로 귀천을 따지지 않고 모두에게 평등한 가치!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

"네 사상은 잘 알겠다만."

그러나 마법을 준비하며 세상을 저주하던 그의 말문은 본의 아니게 끊길 수밖에 없었는데···.

푸욱—

"커헉—!"

"쓸데없는 말이 너무 많아."

"아, 아니··· 결계가 있었는데···."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하인리히가 그의 심장에 성검을 깊게 박아 넣고 있었다.

물론 그의 말대로 제법 여러 종류의 방비가 있긴 했지만, 고작 그 정도 실력으로는 흑마법의 천적인 「축복 : 광검」을 막을 수 없었다.

이후 심장에 박힌 성검을 통해 주입된 빛은 흑마법사의 몸속을 휘몰아치던 사악한 마력을 고스란히 불살랐고, 결국 그는 별다른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재가 되어 흩날렸다.

그리고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와아아—!"

"사, 살았어!"

그들은 고작 넷에 불과했으나 수천에 달하는 적들을 모두 정리하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정말 안타깝게도,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을 때는 이미 대부분의 영주 일가가 습격과 동시에 이어진 암습에 유명을 달리한 후이긴 했지만.

"부디 그들에게 주신의 자애가 함께하길."

짧게 묵념한 하인리히는 백성들이 슬그머니 영주성을 터는 것을 못 본 척하며 다친 사람들을 부지런히 치료해주었다.

"아이고~ 성자님, 구해주셨는데 이렇게 치료까지 해 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힘든 이를 돕는 것은 주신을 따르는 이라면 응당 해야 할 의무이지요."

"그것참 올바른 마음가짐이구만! 역시 주신교단의 하인리히 성자님다워!"

"아, 부끄럽군요. 할리 씨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렇게 추임새를 넣는 할리까지 동원해서 이곳 사람들에게 이름을 각인하는 작업까지 마무리하고, 그들은 다른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다시 이세아의 곁으로 모였다.

그들 같은 고급 인력이 언제까지고 한 장소에 오랜 시간을 투자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건 그렇고, 역시 제법 쓸 만하네. 능력도 성품도 합격선이라 뽑긴 했는데. ···그 사정도 그렇고 말이지.'

하인리히는 창을 든 잿빛 머리에 푸른 눈의 중년 사내, 지오스 칼킨을 슬쩍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오스는 용사 파티에 대한 소식을 듣고 참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찾아온 강자로, 그를 용사 파티로 뽑은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그 능력.

아직 초월에도 이르지 못한 순수한 오러 사용자가 공간을 넘어서는 공격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익힌 비의가 굉장히 특별한 것이란 소리였다.

···욕심이 날 정도로.

자신만의 체계를 정립하고 기운을 완성해 그 길의 끝에 선 것이 극의.

다른 차원에서는 소위 소드 마스터나 화경(化境)이라고도 불리는 이들로, 따로 운용하지 않더라도 자연적으로 활성화된 기운이 모든 능력을 보조하며 직접 운용할 때의 효율도 폭증한다.

애초에 가진 기운의 밀도가 차원이 다르기에 어떻게 사칭할 수도 없었고.

그리고 거기서 더 성장한 끝에, 마침내 틀을 깨부수고 존재로서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 초월이었다.

검으로 공간을 가르고, 의지만으로 현상을 일으키며, 자연스럽게 인과마저 읽어낸다.

각자가 초월하는 방식이 다르기에 그것은 정확히 한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었다.

일례로 제국 근위 기사단장인 콘웰은 모든 것을 '베는' 능력으로 심연의 기운마저 무처럼 썰어 버릴 정도였으니.

'그런 면에서 저건 굉장히 군침 도는 기술이라는 거지. 어떻게 잘 구슬린 다음에 슬쩍 말이라도 꺼내 봐야겠다.'

아마 그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지오스를 받아들인 두 번째 이유인, 그의 개인사 때문에.

'심연을 열기 위해 불사왕이 벌인 짓··· 으로 알려진, 전 대륙적으로 일어났던 제물 사태 때 가족이 휘말렸다고 하던가.'

그는 레스크 왕국의 귀족이었지만 이세아처럼 오로지 실력만으로 그 지위를 쟁취한 자였다.

평민이자 고아였던 그는 아내와 자식에게 커다란 애착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만 그들이 변을 당하고 만 것이다.

즉, 그가 용사 파티에 참여한 동기는 사명감이 아닌 오로지 불사왕에 대한 복수심이었다.

그리고 하인리히는··· 삶의 의지를 잃은 눈으로 복수의 기회를 달라며 간청하는 그를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

'···나랑 비슷하기도 하고.'

물론 복수는 확실하게 도와줄 것이다.

그가 방금 죽인 놈들 중에도 역천의 서약 소속이 제법 많았고, 그것은 그 비극의 주동자들을 모두 처치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터.

"그럼, 이동하겠습니다. 마력에 저항하지 마세요."

우우웅—!

끝없이 흘러나오는 이세아의 마력이 그들의 주변을 감싸고.

이윽고 그들은 샤로티 왕국의 베오인 백작령에서 모습을 감췄다.

자잘한 규모의 습격은 '예지'로 주의를 주어 대비할 수 있게 하였으며, 이처럼 커다란 규모의 침공에만 용사 일행이 직접 나서고 있음에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것과 비례하여, 용사 하인리히와 그 동료들의 명성도 대륙 전체에 조금씩 퍼져나가고 있었다.

#160

수도 침공 그 후 (4)

마침내 사절단 일행이 에나멜 대륙의 엘븐 킹덤 외곽부 숲에 도착하자, 이종족들은 저마다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나라가 있는 곳으로 헤어졌다.

'그러고 보니 엘븐 킹덤도 대륙 중심부라는 교통의 요충지에 있어서 집결지로도 제격이네.'

이렇게 말하니 정말 하이 엘프가 운송 수단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명색이 한 종족의 지도부인데.

"헥, 헥— 이, 이거 생각보다 힘드네요. 라포리 님께서 보조해 주셨는데도 이 정도라니···. 이걸로 어떻게 바다까지 건너셨는지 정말···."

실습 겸 라포리와 함께 '숲의 길'을 운용했던 세실리가 연신 땀을 훔치며 앓는 소리를 냈다.

사실 다른 이들은 그냥 숲길을 걸은 게 전부였지만, 그녀는 왕복하는 내내 라포리 옆에 붙어서 그것과 관련한 교육을 들어야 했다.

이온 대륙으로 갈 때는 기운을 사용하는 법 등의 이론적인 면을 배우고, 돌아올 때는 길을 이끄는 그의 옆에서 조금씩 거들며 실제 운용까지 마쳤다.

그리고 대륙 내부에 들어선 직후부터는 세실리가 주도권을 쥐고 실습까지 마쳤는데···.

"잠깐 한 저도 이 모양인데 이걸 그렇게 오래 유지하셨다니. 역시 라포리 님은 대단하시네요!"

"하하하, 이것도 요령이 필요한 일이지요. 세실리 님도 금방 익숙해지실 수 있을 겁니다."

그의 위로에 세실리가 배시시 웃고는 저 멀리 우뚝 솟아있는 세계수를 바라보며 감회에 젖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뭔가 기분이 이상하네요. 처음 바다를 건너왔을 때는 제가 개안하게 됐었는데, 두 번째는 해리스 씨라니. 뭔가 징크스가 있는 거 같은데요? 이거 다음번은 누가 될 까요? 우후후."

"앗, 다음은 제 차례에요! 제가 먼저 예약해 둘게요!"

기회를 포착하고 냉큼 끼어드는 샤피론의 눈이 이글거렸다.

그간 내색은 안 했어도 라이벌이라 생각했던 해리스에게 결국 추월당한 게 어지간히 분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잠깐의 대화를 끝으로 사절단 일행은 곧바로 세계수로의 여정을 시작했다.

원근감을 무시하는 거대한 나무를 향해 걷기를 며칠.

해리스는 도중에 마주친 여러 마을에서 들려오는 음악 장르의 변화에, 자신이 행했던 문화 침식 계획이 반쪽짜리 성공이었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대단한데. 그것들을 흡수해서 아예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 버렸군. 일단 영향을 주긴 했으니 성공이라고 봐야 하나?'

과연 음악에 진심인 종족다웠다.

어차피 그의 목적은 다른 방식으로 카르마를 수급하는 것이었으니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성과였지만.

'드디어.'

하지만 지금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다.

이동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도달한 것이다.

하늘을 떠받칠 듯 웅장하게 솟아오른 거대한 나무, 세계수의 가지가 닿는 바로 아랫부분에.

"아!"

그리고 해리스는.

"세계수가 자신의 아이를 바라봅니다."

그 어느 때보다— 세계수의 존재를 선명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주신은 너무 거대해 그 편린조차 느낄 수 없었으나 세계수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물론, 그 또한 아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줄기는 우주까지 닿을 듯 하늘 높이 솟구쳤고, 세상을 뒤덮을 듯 휘감은 가지에는 열매 대신 별이 맺혔으며, 뿌리는 그가 딛고 선 행성을 움켜쥐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경외감이 들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감.

그에 비하면 자신은 나무에 기생하는 자그마한 진드기에 불과했다.

휘이이잉—

그 경이로운 심상에 위압되어있던 해리스는 어느새 자신의 코앞에 작은 주먹만 한 붉은 열매가 다가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을 매단 가지를 받치고 있는, 그리고 자신의 주변을 휘돌고 있는 형형색색의 정령들도 함께.

과거에 이미 한 번 보았던 풍경이었다.

그가 크게 심호흡하자 폐부 깊숙한 곳까지 상쾌한 공기가 스며들었다.

그때 자신은 세실리가 개안 의식을 치르는 것을 저 바깥에서 지켜보며 이 충만한 공기만을 취할 수밖에 없었지만···.

해리스는 그 '세계수의 열매'를 쥐고 망설임 없이 그대로 입가로 가져갔다.

아삭—

'아!'

한 번 씹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그 과육이 전부 자신의 목구멍으로 흘러 들어와 있었다.

열매에 응축되어 있던 고밀도의 에너지가 순식간에 육체로 퍼져나가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부분이 그에 영향을 받아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신을 휘돈 에너지의 종착지는 그의 양쪽 눈이었다.

안구 전체에서 느껴지는 찌르는 듯한 통증.

그 일련의 과정이 끝나자, 그는 왜 하이 엘프가 되는 의식을 '개안'한다고 하는지 여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마치 필터가 벗겨지듯 세상이 한 꺼풀 그 베일을 벗었다.

"개체가 조건을 달성하여 성장합니다. 특수스킬「별의 관조자」를 획득합니다."

"개체가 조건을 달성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스킬「정령술」이 특수스킬「자연의 부름」으로 진화합니다."

단순히 시야가 넓어진 수준이 아니었다.

3인칭 시점으로 보듯 주변을 인식할 수 있었으며,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평소보다 훨씬 몽환적이었다.

마치 '숲의 길'을 통해 보았던 주변 풍경처럼···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별의 관조자」라···. 이게 그동안 하이 엘프가 보여줬던 여러 능력의 핵심이었군.'

공간을 넘어 숲길을 이동하는 능력도, 타인에게 가호를 내려줄 수 있는 능력도, 숲을 통해 목표물을 탐지하는 능력도.

전부 이 스킬을 매개로 세계수의 힘을 빌려 이뤄지는 이적이었다.

우우웅—

그와 동시에 짤막하지만 강렬한 세계수의 의지가 그의 뇌리를 뒤흔들었다.

주신에게서 느껴졌던 것보다는 훨씬 선명했으나, 그 또한 특정한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는데···.

해리스는 직감적으로 그 뜻을 파악할 수 있었다.

-너를 지켜보겠다. 나의 아이야.

그에 대한 흥미와 무언가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약간의 의구심.

그 짧은 의지를 끝으로 더는 직접적인 의사가 전해지진 않았지만, 그와 세계수 사이에 영맥이 단단하게 연결된 상태라는 것은 확실히 느껴졌다.

-개체명 : 해리스

-종족 : 하이 엘프

-공통 특성 : 「마인드 허브」, 「페르소나」, 「초회복」, 「명경지수」

-개체 특성 : 「세계수의 적자」, 「자연 동화」, 「별의 관조자」, 「자연의 부름」, 「요정 사법」, 「조화의 선율」

-특이 사항 : 세계수의 제사장인 하이 엘프로 개안하며 영맥을 통해 그 힘을 빌릴 수 있게 되었다. 자연력과 친화력이 급격하게 성장해 모든 정령들이 진화를 앞두고 있다. 모든 동식물에게 무한한 사랑을 받는다.

급격한 변화에 따른 여파 때문일까.

그는 몸에서 힘이 빠지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해리스 님의 개안 의식이 끝났···."

"조심히 안쪽으로 옮기···."

그렇게 마침내.

세계수도 모르는 사생아로서 이 세계에 왔던 해리스가, 정식으로 입양되어 당당하게 호적에 올라가게 되었다.

***

"후우—."

정원을 산책하던 밝은 금발에 청록색 눈을 한 미녀, 아제리온 제국의 5황녀 라일리 카르테 아제리온이 몇 번째인지도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불사왕에게 납치당해 감금당한 지도 어느덧 일주일이 넘은 시점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환경도 깔끔하고 대우도 나쁘지 않아.'

그녀가 있는 거주 구역은 커다란 정원을 중심으로 여러 채의 작은 숙소 건물이 세워진 형태였다.

감옥 같은 환경을 생각했던 그녀에겐 상당히 의외인 일이었고, 각자에게 주어진 숙소 건물도 혼자 살기에는 충분히 넓을 정도로 여건이 좋았다.

'왠지 모르게 감시자도 이것저것 배려해 주는 듯한 느낌이고. ···적어도 나에게는.'

대체 바깥에선 무슨 일을 하는지, 이곳에 올 때마다 지쳐 보이는 앤드류라는 사내가 황태자를 노예처럼 막 대하는 거에 반해···.

그녀를 담당하는 리리스라는 여자는 오히려 자신의 시녀라도 되는 것처럼 상당히 세심하게 챙겨주고 있었다.

물론 감시역인 만큼 거리감은 있었으나, 스트레스 배출구라도 되는 것처럼 시도 때도 없이 사이먼을 갈구는 사내 쪽에 비하면 천사나 다름없었다.

'그건 좀 쌤통이긴 하지. 난 운이 좋다고 봐야 하려나.'

하지만 그걸로 무작정 좋아하기에는 그녀가 지금 처한 상황이 너무 암울했다.

아무리 대우가 양호하다고 해도 그녀는 자유가 없는 포로의 신분이었으니까.

그동안 그녀가 한 일이라고는 할당된 거주 구역을 돌아다니다 사이먼과 마주쳐 말싸움하거나, 혼자 조용한 곳에서 명상하며 마법을 수련하는 것이 전부였다.

'틀어박혀서 수련하기에는 딱 좋은 환경이네. 그동안 바쁘단 핑계로 손 놓고 있었는데, 이참에 다시 진지하게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딱히 할 일도 없으니.'

어렸을 때부터 교양 차원에서 배운 것이었지만, 그녀도 마법에 어느 정도의 소양은 있었다.

무려 그 이세아에게 처음 마법의 기초를 알려준 것이 그녀였으니 당연한 일.

'물론 금방 역전당하긴 했지만. 내가 몇 년 동안 배운 걸 한 달도 안 돼서 넘어선 건 좀 너무하지 않나?'

자신은 그때 이후로도 줄곧 초급의 문턱을 넘지 못한 상태인데 말이다.

그렇게 이세아를 생각하며 툴툴거리던 황녀는 입가에 작은 미소를 매달고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지금 그녀가 이렇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전부, 그만큼 이세아를 믿기 때문이었다.

언제 여기서 나갈 수 있을지 기약이 없으며, 어쩌면 불사왕의 변덕에 죽는 것보다 못한 꼴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을 버티게 해 주는 유일한 버팀목.

'살아만 있다면··· 세아가 반드시 구하러 와 줄 거야.'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저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무력감에 라일리는 쪼그려 앉은 채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자식에 대한 사랑보다는 경쟁을 통한 후계자 선출이 우선이었던 황제.

라일리만 세상에 남긴 채 일찍 세상을 떠난 어머니 4황비와, 그녀를 눈엣가시로만 여기는 황후, 황비들.

그리고 황위를 계승하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치열하게 싸워왔던 형제자매까지.

'세아··· 언니.'

가장 친근해야 할 가족이 이 모양인데다, 변방의 작은 자작가인 외가는 그녀를 보호해 주기는커녕 이리저리 눈치만 보기에 바빴다.

그 사정은 시중을 들던 사용인들도 마찬가지였으니, 그녀는 이 세상 사람들에 대한 불신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진작 언니라고 불러줄걸. 그게 뭐가 힘들다고.'

그런 환경 속에서 라일리가 진정한 가족애를 느낀 것은 오로지 이세아뿐이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반쯤 애완동물 주워오듯 데려온 감이 있었는데···.

우우웅—

그렇게 그녀가 정원 구석에서 혼자 궁상을 떨고 있던 순간.

거주 구역 중심부의 '보이지 않는 문'을 열고 황녀의 감시자인 리리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손에는 기절한 듯한 사내의 뒷덜미를 잡고 질질 끌면서.

"하아— 앤드류는 또 황태자님을 괴롭히는 중인가 보군요. 하여튼."

그녀는 라일리가 있는 쪽을 힐끔 보더니, 이내 신경도 쓰지 않고 곧바로 마력을 일으켜 그를 호출했다.

"시··· 아니, 리리스 누님! 부르셨습니까? 갑자기 무슨 일··· 어? 그, 그 사람은?"

그녀의 호출에 사이먼을 들볶으며 강제로 숙소 대청소를 시키던 앤드류가 껄렁거리며 다가오다가, 기절한 사내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져 후다닥 달려들었다.

늘 피곤에 젖어있던 모습과는 달리 그는 신기한 것을 보는 표정으로 연신 그 사내의 옷차림을 훑어보았다.

"갑자기 성 옆쪽에서 나타났다고 하더군요. 주변에 있던 언데드들이 공격하려고 하니까 성 안으로 도망쳐왔다고. 이 근방에서 공간이동은 불가능했을 텐데 말이죠."

"누님! 틀림없습니다! 이 사람, 저랑 같은 세계 출신입니다!"

이 세계에선 보기 힘든 양식의 옷과 방검복을 비롯한 호신용품.

그녀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그가 들뜬 듯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고···.

'같은 세계?'

여전히 구석에 쪼그려 앉은 채 뻘쭘하게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라일리의 귀가 쫑긋거렸다.

"아, 그럴 것 같긴 했는데 역시였네요. 왕께서도 미리 짐작하셨는지 이자도 여기서 따로 관리하라고 명하셨어요. 아무튼 이것도 귀한 샘플인데, 일단 여기다 가둬두면 도망가지도 못할 테니까."

"하핫— 이거 참, 난데없는 신입이라니. 그것도 떨어져도 하필 이런 곳에··· 푸흐흣."

앤드류가 뭔가 나쁜 생각을 했는지 음흉한 웃음과 함께 실실거리기 시작했지만, 그 웃음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아, 참! 앤드류? 이제 당신은 더 이상 여기 올 필요 없어요. 처음부터 그걸 말해주려고 부른 거였는데."

"어, 네? 그럼 지금 하는 일은···."

"후우— 앞으로 이쪽 일은 제가 도맡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당신은 저쪽에서 하던 일에만 집중하면 될 거예요."

"엇, 어, 그··· 그럼 업무 시간은···."

"이쪽 일이 없어진 이상, 그건 이제 온전히 올리비아에게 달린 거겠죠?"

마치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양,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아, 안 됩니다! 저 여기서 일하게 해 주십쇼, 누님! 이러다 저 정말 죽습니다!"

"왕께서 내린 명령이라 어쩔 수 없네요. 아, 그리고 앞으로 당신의 숙소는 이쪽이 아니라 저쪽 구역이니 헷갈리지 않도록 하세요."

"그··· 흉악한 친구들 있는 곳 말이십니까···?"

필사적으로 애원하는 앤드류와 어쩔 수 없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는 리리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라일리의 호기심 어린 시선은 기절한 사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세계인··· 세아와 같은···.'

감시자인 앤드류가 이계인이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지금 그녀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제 막 이곳으로 넘어온 듯한 저 흑발의 사내였다.

그러고 보니 그의 복장도 그렇고, 그녀가 이세아를 만났을 때의 상황과 비슷했다.

물론 그때는 그녀의 외가가 있던 귀족가의 정원이었다면, 이번엔 불사왕의 본거지 근처라는 점이 달랐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저 사람. 운이 지지리도 없네. 하필 첫 시작이 이런 곳이라니.'

이세아를 통해 이계 전송에 대해 알고 있던 라일리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를 살펴보았다.

이세아도 그녀의 제안이 아니었다면 곤란하긴 매한가지였겠으나, 그래도 그게 이곳만 하겠는가?

"황녀님? 상황은 대충 들으셨겠지만, 앞으로 이 사람도 여기서 지내게 될 거예요."

"아!"

그렇게 생각을 잠겨있던 도중, 언제 다가왔는지 리리스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황녀님도 언제까지 여기 계실지 모르는 입장이고. 황태자님 말고도 말동무가 있으면 좋지 않겠어요?"

"······."

"아, 그러고 보니 이 남자가 먼저 자기 이름을 밝혔다고 하던데— 뭐라고 했더라?"

리리스는 잠시 고민하더니 아직도 기절한 채 자기 손에 잡힌 사내를 흘깃 내려다보았다.

정신을 잃었음에도 알 수 있는 부드러운 인상과 살짝 처진 눈매, 이세아와 상당히 비슷한 인종인 흑발 청년을.

"···헤스페론이라고 했던가? 뭐, 자세한 소개는 당사자에게 직접 듣도록 하세요. 그럼 저는 이만 이 사내를 숙소에 가져다 놔야겠네요."

갓 이세계로 전송되어 온 지구의 각성자.

헤스페론이 불사왕의 포로로 잡혀 들어온 순간이었다.

#161

하회탈 라이즈 (1)

"최근 뉴스도 그렇고, 사건 사고가 준 것이 확실히 느껴지네."

"진짜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러다 정말 큰일 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는데 말이야."

요즘 서울뿐만이 아니라 한국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이 확실히 체감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국내의 치안이 말도 안 되게 올라갔다는 것.

여전히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해외의 소식과 비교했을 때 이질감까지 느껴지는 그 현상은 이제 모두의 일상에 깊숙이 파고들고 있었다.

물론 그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정부 기관인 이능관리국도 열심히 뛰어다녔고, 귀환자 협회 휘하의 가디언들도 범죄자 검거에 많은 성과를 올렸으니 그 공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마땅히 그들의 이름 위에 올라가야 할 존재가 하나 더 있다는 것을.

-솔직히 하회탈 아녔음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들처럼 개판이었다. ㅇㅈ?

-가디언도 열심히 한 건 맞는데, 그래도 하회탈 등장 전후로 너무 차이가 심하니까 어떻게 커버 쳐 줄 수가 없음.

-근데 진짜 하회탈은 정체가 뭐임? 역시 여럿이서 한 사람인 척하는 거겠지?

언제부턴가 등장해서 서울의 밤을 평정하고 마침내 한국 전역에 출몰하기 시작한 괴인, 하회탈.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한 그에 대한 소문은 도저히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산되었고, 마침내 유명인들의 SNS와 TV프로 등에도 심심찮게 언급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에 힘입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인터넷 커뮤니티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하회탈'의 팬 사이트인 '새벽의 서낭당'이었다.

하회탈이라는 전통적인 이미지와 주로 한밤중에 활동하는 그의 행적에서 따온 이름으로,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으며 그 세가 급격히 커지는 중이었다.

당연히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는, 이 현대의 다크 히어로에게 관심을 표하는 것은 일반 대중들뿐만이 아니었다.

이능관리국 범죄수사과 하회탈 수사팀.

"으아아—! 언제까지 이렇게 되도 않는 꼬리잡기만 해야 하는 겁니까?! 이제 그만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어요? 그냥 잘하는 일 하게 내버려 둡시다!"

"저 새끼 저거 또 병 도졌네. 야! 막내 약 먹을 때 지났다!"

"예, 팀장님. 에라이—! 이 자식아. 우린 뭐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아냐? 위에서 시키는데 뭐 어쩌겠냐."

퍽퍽—!

선배 요원들이 CCTV를 돌려보다가 발광하는 강태산의 뒤통수를 치며 기꺼이 매를 선사했다.

이 막내는 주기적으로 맞지 않으면 발작을 일으키는 병이 있어, 마음이 아프지만 어쩔 수 없는 처사였다.

"요놈 이거 오늘따라 뒤통수가 손에 착착 달라붙네."

"아, 악! 선배님! 정신 차렸슴다! 선배님!"

"그래, 임마. 어쨌거나 각성자의 범죄를 파악하는 게 우리가 할 일이다. 사감은 넣지 말고 일하자고."

"···으윽,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회탈의 뒤를 추적하기 위한 정부 기관의 손길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고···.

한국 귀환자 협회 서울 남부 지부.

"쓰읍, 역시 혈맹이랑 하회탈이랑 연관 있는 것 같은데. 특히 헤테로시스 쪽 파벌이랑."

"헤테로시스라면 요즘 급부상한 혈맹 내 정예 전투 집단이 아닙니까? 하인즈라는 가명의 8레벨 흡혈귀가 리더였죠?"

"그래. 강경파를 몰아내고 나서는 상당히 평화적으로 나와서 세력을 확장하는 것도 눈감아 주고 있었는데···."

어차피 지하 조직이라는 곳은 아무리 뿌리 뽑아도 잡초처럼 다시 자라나기 마련이었다.

그러면 차라리 지금의 혈맹처럼 치안에 협조적인 단체에 힘을 실어주어, 그들을 자체적으로 단속하는 게 여러모로 효율적인 일.

실제로 지금까지 그 효과는 아주 만족스러웠는데, 혈맹의 통제와 하회탈에 대한 공포심까지 겹쳐 그들의 관할 구역은 제법 훌륭한 치안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이거, 하회탈이 독자적인 행보에 더해 혈맹 쪽에서 따로 정보를 받고 움직이는 거 같아."

"정보라면, ···살생부 말씀이십니까?"

"뭐, 그렇게도 말할 수 있겠네."

비서와 대화하던 지부장 윤지윤이 미간을 찌푸리다 그대로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아무리 그녀라도 섣불리 파고들기에는 하회탈이란 존재가 너무 부담스러웠다.

이미 밝혀진 사실만으로도 그는 어지간한 세계의 마왕급이라 할 수 있는 강자였으니.

괜히 그를 잘못 건드렸다가 지금 유지하고 있는 선을 잃고 폭주라도 하게 된다면, 말 그대로 서울 한복판에 재앙이 강림하게 될 것이다.

"···일단은 조금만 더 지켜볼까."

결국 그녀는 눈을 감고 사태를 좀 더 관망하는 것을 선택했다.

이능관리국과 귀환자 협회.

이렇게 대표적인 조직들 외에도 수많은 정보 조직이나 범죄 집단, 거기다 번천회까지도 은밀히 하회탈을 조사하고 있었다.

하회탈을 빼놓고는 작금의 한국 정세에 대해 도저히 논할 수 없을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우우웅—

[크흐흣— 아직도 이런 짓을 벌이는 놈이 있다니. 간덩이가 부은 녀석이구나. 한번 배를 갈라서 직접 확인해 봐야겠어.]

"이건, 진법인가? 너는 누구냐!"

한스는 오랜만에 신선한 반응을 마주하고 있었다.

요즘 뒷세계에 충분한 공포를 심어주었다고 생각했는데, 딱히 숨기려는 기색도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놈을 잡으러 왔더니 저런 태도였던 것이다.

"···네놈이 그 하회탈이란 녀석인가. 요즘 위명이 자자하다지? 과연 흉악한 마기로군."

심지어 그를 마주하고도 오히려 호승심을 불태우기까지.

단순히 귀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생긴 무지에서 비롯한 만용이 아니었다.

아무리 한스가 심장의 기운을 최대한 감추고 있다지만, 이렇게 그를 정면으로 마주하면서도 저리 당당할 수 있는 이는 절대 많지 않았으니까.

'그만큼 자기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고오오오—!

과연 그의 예상대로 한순간에 상대의 몸에서 무거운 기세가 흘러나오며 점점 존재감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여러 기운이 섞인 듯 지저분하고 혼탁한, 하지만 묵직하고 위압적인 기운이 한스가 쳐둔 결계 내부에 가득 퍼져나갔다.

'타인의 생명력을 갈취하며 쌓은 기운인가? 특이하군. 이런 불안정한 기운을 가지고도 폐인이 되지 않고 저만한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니.'

어쩌면 그와 관련된 고유스킬이라도 있을지 모를 일.

놈이 가진 기운의 밀도는 명백히 아제리온 제국의 근위 기사단장 콘웰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래, 보아하니 그 명성이 허명은 아니었던 모양이군. 설마 하회탈이란 놈이 강시일 줄은 몰랐는데, 뭔가 특이한 대법이라도 완성한 모양이지?"

지금의 한스는 온전한 하회탈을 쓰고 해골을 감추고 있었으나, 저 정도 강자에게 온전히 기운을 숨기기란 무리였다.

물론 지구엔 다종다양한 고유스킬이 있었으니 어떻게든 변명할 수 있는 문제였지만 말이다.

[크크큭, 이렇게 당당하게 나에게 맞서는 놈은 오랜만이라 굉장히 신선하군. 아주 재밌어.]

"흐— 그 재미가 언제까지 가나 한번 볼까?"

콰지지직—!

말이 끝나기도 전.

거친 파열음이 지척에서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흑마력 방벽을 꿰뚫는 어마어마한 속도의 공격.

하지만 피격 순간에 한스에게서 뻗어 나온 수십 가닥의 '심연' 때문에 놈의 기습은 후속타로 이어지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이쪽의 반격 또한 큰 효용을 보지 못했지만.

심연의 뱀이 근방에 있던 놈을 꿰뚫으려던 순간, 그 찰나 만에 상대는 이미 저 멀리 떨어져서 경계의 눈으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빨라. 역시 대인전에 특화되었다는 무림계 출신인가. 그래도 이만한 경신법을 사용하는 상대는 처음인데.'

쾌속의 일격과 이탈.

경신법은 무술과 내공이 주가 되는··· 통칭 무림계 차원이라 불리는 곳에서 애용되는 수법으로, 마법사 입장에서는 굉장히 까다로울 수밖에 없는 기술이었다.

"···뭐지, 그건? 평범한 마기가 아니군. 그토록 음습하면서도 순수한 기운이라니. ···천마도 그 정도 수준은 아니었는데."

마귀의 손을 닮은 검붉은 강기를 양손에 덧씌운 사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자신만만했던 이전의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심연의 기운을 직접 마주한 그는 극도로 경각심이 치솟은 모습이었다.

'그걸 지금 깨달아 봐야 이미 늦었지만.'

투웅—

한스의 가벼운 발 구름 한 번에 음습한 파동이 바닥을 타고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파동이 지나간 자리에서, 빛조차 빨아들이는 짙은 심연이 피어올라 그들을 감싼 결계를 뒤덮었다.

즈즈즉! 즈즉!

기존의 결계는 놈을 잡아두기에는 불안한 감이 있어 좀 더 확실한 일 처리를 위해 그것을 보강하는 작업이었다.

놈이 그 기동성으로 결계를 부수고 달아나면 상당히 곤란했으니까.

"···하! 이 몸을 상대하면서 느긋하게 진법이나 만지고 있었단 말이지? 이 천살마제 님을 앞에 두고?"

그런 한스의 모습이 심기를 건드렸는지, 기세를 날카롭게 벼리던 상대가 이를 갈며 씹어뱉듯이 말했다.

휘황찬란한 자신의 별호를 당당하게 밝히면서!

'어우, 자기 입으로 유치하게 천살마제가 뭐야···. 부끄럽지도 않나?'

지켜보는 자신이 다 민망할 지경 아닌가.

하지만 그는 상대의 언행을 한심스러워하는 내면과는 달리, 평소 배려가 몸에 밴 신사답게 놈이 머쓱하지 않도록 장단을 맞춰주었다.

[크흐흐흣— 기껏 다 잡은 사냥감을 놓치는 것만큼 짜증 나는 일은 없으니 말이다. 자아,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자꾸나!]

당연하게도, 이미 마모된 양심은 전혀 아프지 않았다.

***

콰아앙!

"크헉! 이 끈질긴 놈이!"

그렇게 약 1시간.

싸움은 생각 이상으로 길게 이어졌다.

사실 상대의 무력도 대단하긴 했지만, 무엇보다 그 기동성 때문에 영 까다로웠던 것이다.

중간부터 놈이 도주를 시도하며 흔들린 결계의 손상도 상당했는데, 사전에 보강해 두지 않았으면 정말로 놓쳐버렸을 정도였다.

'그래도 슬슬 끝나가는군. 다행히 「개체 투영」 시간 내에 마무리할 수 있겠어.'

쉬아아악—!

앞쪽으로 뻗은 그의 손을 중심으로 심연의 기운이 그물처럼 퍼지며, 놈의 퇴로를 차단하듯 사방을 뒤덮었다.

"젠장! 뭐 이런 거지 같은 기운이!"

곳곳의 상처를 통해 죽음이 육체를 침식하는 와중에도 놈은 억지로 몸을 움직여 거세게 반항했다.

'확실히 자신만만할 만했네.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으니 마법사와의 전투 경험도 얼마 없었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저 천살마제에게 일반적인 흑마법은 거의 통용되지 않았다.

몸을 뒤덮은 호신강기는 강대한 항마력을 부여했고, 날카롭게 정련된 마귀의 손은 공격적인 마력의 흐름을 가닥가닥 끊어 놓았다.

그걸 이용해 어지간한 흑마법은 마력의 흐름을 따라 쳐내기도, 흘리기도, 아예 갈라버리기도 할 정도였으니, 평소보다 더한 수고가 들어갈 수밖에 없는 노릇.

[하지만 그것도 심연 앞에서는 무의미하다.]

하필 그의 기운은 심연과의 상성이 극악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혼탁하고 불안정했던 내공이 그것과 마주할 때마다 빠르게 오염되며 흔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주 공격해서 쳐내든, 호신강기로 막아내든 꾸준히 대미지가 누적된다.

그로서는 미칠 수밖에 없을 지경.

하지만 사실 이것조차도 아우테리카에서의 위용에 비하면 한스의 전력이 상당히 약화된 것이었다.

'흑마력과는 다르게 심연의 기운은 지구에서 효율이 반감된단 말이지. 마치 신성력처럼···. 기운에 따라 뭔가 기준이 있는 것 같은데 아직 잘 모르겠군.'

그동안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일이었지만, 강자를 상대로 전력을 투사하다 보니 그 단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아무래도 이것에 관해서도 여러 기운을 통해 비교하며 실험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남들은 할 수 없는 방법이었으나 그는 직접 체험해 볼 수도 있는 간단한 일이었으니.

하지만 아무리 아우테리카에서 보다 효율이 떨어진다고 해도, 그냥 흑마력만 운용하는 것보다는 압도적으로 뛰어난 위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에 맞서서 이렇게 오래 버티는 상대도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상대였지만···.

푹! 푸북! 푸화악!

그 반항도 이제 끝이었다.

"커헉!"

마침내 놈이 피하지 못한 심연의 줄기가 하나둘 그 몸에 틀어박히기 시작했다.

굶주린 맹수처럼 죽음의 침식이 그간 혹사당한 육체를 게걸스럽게 파고들었다.

[아주 훌륭하구나. 너라면 대단한 언데드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거다. 뜻밖에 횡재했군.]

"크아악! 개소리하지 마라! 나는 강환계의 공포로 군림한 천살마제다! 현경(玄境)에 오른 내가 여기서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것 같으냐!"

고오오—!

요동치는 강대한 내공과 함께 거친 손짓으로 심연을 뜯어내는 마귀의 손.

하지만 몸이 이 지경인 이상, 아무리 내공이 많아 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강환계··· 확실히 차원에 대해 알아보다가 얼핏 본 기억이 있어.'

그런데 한 차원의 공포라고까지 불렸다니, 한스랑 상당히 비슷한 타입이지 않은가?

상대가 동업자라는 것을 알게 되니 그도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촤르륵!

"끄윽!"

천살마제가 다시 사방에서 짓쳐 드는 심연에 구속된 채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스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며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강환계의 공포라··· 나와 비슷하구나. 이것도 인연인데 특별히 너에게만 알려주도록 하마.]

상대가 먼저 자기소개를 했는데 그에 답하지 않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그렇게 칠흑 같은 심연의 결계로 뒤덮인 공간 안에서.

이 세상의 모든 부정함을 한데 모아 빚어낸 것 같은 부조리한 존재가 한 인간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몸이 바로 아우테리카에 강림한 공포이자 대륙의 절망, 죽음의 지배자인 불사왕이시니라.]

이름은 굳이 밝히지 않았다.

···어차피 이 녀석에겐 말해봤자 의미도 없을 테니까.

이윽고 한스의 손에서 뻗어 나온 심연이— 천살마제의 몸을 완전히 뒤덮었다.

#162

하회탈 라이즈 (2)

현경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했다고 할 수 있는 경지로, 그만큼 지닌 격이 높아 타인의 뜻대로 다루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스스로를 완성하고 틀을 탈피한 정신은 모든 외부 간섭에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었고, 고고하며 오롯한 영혼은 인위적인 변화를 용납하지 못했다.

심지어 이미 사망한 시신마저도 잔류 사념의 영향을 받아 항상성을 지니고 있었으니, 그 육체를 재활용하기 위해선 실력은 기본이고 온갖 사전 준비와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끄으아아악—!]

물론 드래곤마저 타락시켜 언데드로 만드는 불사왕에게는 조금 손이 많이 가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호오— 이 녀석, 번천회의 끄나풀이었구나.]

한스가 자신의 손에 머리가 잡힌, 꿈틀거리는 인간의 형상을 한 심연 덩어리를 내려다보며 새삼스럽다는 듯 나직이 읊조렸다.

우우웅—!

전투가 벌어졌던 결계 내부에 빼곡히 들어찬 마법진과, 제물로 사용된 수많은 언데드들.

그것들을 이용해 천살마제의 영육(靈肉)에 심연을 한계까지 들이부은 결과였다.

'이세계로 가기 전부터 놈들과 연이 있던 놈이군.'

그것도 전송되기 전에 자신이 살아왔던 모든 흔적을 지운 후, 위에서 내려온 명령에 따라 각성 테러를 저지르고 튀었던 놈이었다.

무려 약 2년 전에.

'다른 차원에서만 20년 가까이 살아 온 놈이란 말이지···.'

당연히 놈은 돌아오자마자 번천회와 접촉을 시도했지만, 한스 때문에 한국에서 완전히 잠적한 그들과 연락이 닿을 턱이 없었다.

그 이후 자기 실력만 믿고 날뛰다 지금 이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상하군. 지금처럼 경지에 오른 후라면 모를까, 그때는 이자도 평범한 일반인이었을 텐데 뭘 보고 끌어들인 거지? 단순히 우연인가?'

각성 후의 유예 시간은 고작 24시간.

그 짧은 시간 만에 설득했다고 보기는 힘드니 훨씬 전부터 접촉이 이루어졌다는 뜻일 텐데···.

'이만큼 조심스러운 놈들이 한 놈만 걸리란 식으로 무작정 수작을 부리진 않았을 거야. 그랬다면 이미 한참 전에 그 존재가 알려졌겠지.'

하지만 너무 오래전의 기억이었던 데다, 방사능 이상의 극독인 심연으로 억지로 영육을 뒤흔든 탓인지 천살마제에게선 더 이상 추가 정보를 얻어낼 수 없었다.

이것과 관련해서 휘하에 조사를 지시하기로 마음먹은 그는 문득 드는 아쉬움에 내심 한탄했다.

'···여기선 아우테리카와 달리 정보 습득 경로가 한정되어 있어서 답답하단 말이야.'

정보화시대라고 할 수 있는 현대 지구에서 지금 그가 이용할 수 있는 창구는 헤테로시스를 위시한 혈맹뿐.

이제는 제법 커다란 세력으로 성장한 그들이었으나, 떳떳하게 나설 수 없는 음지의 조직이라는 한계는 어쩔 수 없었다.

'으음, 이거 혈맹과는 별개로 양지쪽의 정보를 알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아우테리카에서 하인리히가 그러했던 것처럼 주류 세력의 움직임과 정보를 알 수 있으면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될 터.

그러나 철저한 시스템과 인프라가 갖춰진 지구에서는 그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신분을 증명하는 것도 일인 데다가, 그 후에 신뢰를 쌓는 건 더 힘든 일이지.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할 테고.'

이미 이능관리국에 입사한 강태산의 도움을 받으면 어느 정도 가능할지도 몰랐지만, 녀석은 아직 말단에 불과한 데다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하기도 꺼려졌다.

'주류 세력과 연이 있으면서 신뢰를 쌓을 정도로 오래 함께했고, 그러면서도 양질의 정보를 접할 자격을 만족시키기가 어디 쉬운··· 음?'

그때 문득, 그의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가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이능관리국과 연관이 있는 건 분명하고, 수사에 도움을 줄 정도면 제법 신뢰도 있다는 뜻이겠지.'

한스가 대신전에서 세 번째 불사왕의 파편을 탈취하고 지구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범죄자들에게 남겼던 저주를 통해 눈이 마주친, 제법 실력 있는 흑마법사가 하나 있었다.

'그 정도 실력이면 제법 윗선과 선이 닿아 있을 거야. 어쩌면 가디언 쪽과도 안면이 있을지 모르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이상의 적임자는 없었다.

심지어 흑마법사라 한스가 다루기 쉽기까지 하다니, 이건 인연을 넘어서 운명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크흐흣, 아주 훌륭한 인재로군. 자— 그럼, 지금은 어디 있는지 한 번 볼까?]

오늘은 「개체 투영」의 지속시간이 다해서 바로 찾아갈 순 없겠지만, 일단 위치만이라도 파악해 두기 위해 곧바로 「심연의 눈」을 발동했다.

사아아—

한스의 눈구멍에 어둠이 들어차며 사방의 빛을 빨아들였다.

인구에 비해 좁은 땅을 가진 한국, 거기다 영혼까지 관측당한 흑마법사라면 무언가 특별한 고유스킬이라도 가진 게 아닌 한···.

[거기 있었군.]

절대로 그의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

곳곳에 가로등이 켜지고, 밖에 나왔던 사람들도 하나둘 귀가하기 시작한 늦은 시간.

이능관리국 소속의 흑마법사, 안성진은 주차한 차에서 내리며 한창 뒷정리 중인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 영업 끝났···. 어머~ 성진이 왔니! 얘는 일도 바쁠 텐데 뭐 하러 또 왔어?"

"에이, 괜찮아요. 나는 내 전공과 관련된 사건만 조사하면 돼서 그렇게 바쁜 편도 아냐. 특히 요즘은 치안이 좋아져서 사건도 별로 없는 편이고."

그는 자연스럽게 청소를 도우며 넉살 좋게 대답했다.

물론 사건이 줄었다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가 바쁘지 않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크건 작건 범죄를 일으키는 이들 중엔 흑마력 사용자의 비율이 굉장히 높았고, 반대로 그처럼 협조적이면서 능력 있는 흑마법사는 희귀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게 내 일상을 희생해도 된다는 소리는 아니지. 어떻게 되찾은 평화고, 어떻게 다시 만난 가족인데.'

대륙 인구의 절반이 흑마력 추종자인 미친 세상에서 아등바등 발버둥 치다가 겨우 돌아온 그였다.

극한의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을 강화하느라 귀환이 늦어진 만큼, 힘들게 마주한 이 일상이 더없이 소중했다.

"그래, 요즘 말이 많더라. 하회탈인가 하는 사람이 나쁜 놈들을 죄다 때려잡고 있다고."

"아, 아하하···. 그, 그렇지. 하회탈··· 대단하지."

어머니의 입에서 나온 그 이름에, 가족에게도 자신이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알리지 않았던 안성진의 입가가 경련했다.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그에게 악몽으로 남아 있었으니까.

"크흠— 성진이 왔냐?"

"네, 아버지!"

"이왕 왔으니까 이거나 좀 먹어봐라. 품질 관리를 위해서는 이렇게 주기적으로 확인을 해줘야 하는 법이야."

그때 주방에 계시던 그의 아버지가 먹을거리를 한가득 테이블에 차리며 청소하던 그를 억지로 자리에 앉혔다.

전부 그가 오자마자 곧바로 조리한 음식인지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버지, 또 뭘 이렇게까지···."

"어허! 이것도 다 가게를 위해서다. 순순히 협조해라!"

물론 그 말이 핑계라는 사실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부모로서 자식에게 푸짐한 밥상을 차려주고 싶을 뿐이라는 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는가.

후르륵—

"역시 아버지 요리는 언제나 최고네요."

"그럼, 당연하지. 누가 만든 건데?"

"어휴~ 이 양반도 오늘따라 참 주책이야!"

가족이 둘러앉은 식탁에서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고 모두의 얼굴에서는 미소만이 가득하다.

그가 바라왔던 평화로운 일상, 화목한 가정.

안성진은 따뜻한 미소로 가족들을 바라보며 신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자신이 살아서 이 작은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그리고 앞으로도 이 일상을 유지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바라던 순간.

'······!'

신은.

그의 자그마한 소원을 외면했다.

오싹—

갑자기 느껴지기 시작한,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척이.

아주 가까운 곳에서 그의 육감을 자극했다.

"음? 갑자기 왜 그러냐?"

"성진아?"

"···간이 잘못됐나? 그럴 리가 없는데. 어, 설마 이물질이···!"

호흡이 가빠진다.

바로 곁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멀리서 윙윙거리듯 아득하게 울려 퍼진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야!'

하지만 혼란에 빠지던 그의 정신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부산떠는 부모님을 마주하자, 찬물을 맞은 듯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가 냉정을 되찾자 뒤늦게 발동한 고유스킬 「극기」와 「명경지수」 등의 스킬이 추가로 평정을 유지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아, 아···! 죄송해요! 깜빡하고 결재 서류를 올리지 않았단 게 생각나서···! 으아, 그거 오늘 퇴근 전에 올리고 왔어야 하는데!"

"으잉? 깜짝 놀랐잖냐! 정신을 어디에다 두고 다니는 거야?"

"아유, 이미 벌어진 일 어쩌겠어. 그런데 그렇게 사색이 될 정도라니, 중요한 일이니?"

일단 당장의 상황을 수습하는 것부터.

"죄송해요. 일단 당직 서는 분한테 전화 먼저 하고 올게요. 아! 음식은 포장했다가 집에 가져가서···."

그는 그렇게 아직도 걱정스레 바라보는 두 분을 안심시키고 식당을 나섰다.

'후우, 그럼 가 볼까.'

아직도 한자리에 멈춰선 채 은근히 그에게 신호를 보내는 서늘한 기척.

그에 안성진도 전과는 달리 차분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괜찮아. 이렇게 조용히 부르는 걸 보니 적의는 없을 거야. ···아마 뭔가 내게 바라는 게 있겠지.'

아까는 당황해서 순간적으로 패닉에 빠져버렸으나, 지금은 기절까지 했던 저번과는 상황이 달랐다.

그때는 방어력이 취약한 영체 상태로 그 존재감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바람에 일시에 충격이 몰려왔지만, 지금은 일찍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극기」까지 발동시킬 수 있었다.

사용자의 굳건한 의지만 계속해서 이어진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무너지지 않게 해 주는 그 스킬은, 그가 흑마력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 일등 공신이었다.

'후우, 이곳인가.'

그는 마침내 신호가 이어지는 식당 인근의 골목길 앞에 도착했다.

빛 한 점 없어 마치 지옥문처럼 보이는 그곳에, 그는 깊게 심호흡하며 성큼 발을 디뎠다.

고오오오—

그와 동시에 주변 풍경이 한순간에 변화했다.

바닥과 벽면은 물론 하늘까지 뒤덮은 채 꿈틀거리는 짙은 어둠.

'···정말로 지옥에라도 들어온 것 같네.'

그리고 그는 마침내 그 공간의 중심에서 자신을 부른 이와 마주할 수 있었다.

마치 죽음을 뭉쳐 인간의 형상으로 빚은 듯, 압도적인 존재감을 흩뿌리는 그 존재를.

'까마득하군. 내 수준으로는 경지를 가늠할 수도 없어. 대체 얼마나 화후가 깊으면 죽음과 일체화까지 이룬 거지? 일단 귀환할 수 있었다는 것은 진짜 언데드는 아니라는 건데. 뭔가 특별한 스킬이라도 있···.'

그렇게 머리가 복잡해지려는 찰나, 마력을 공명시킨 음산한 웃음소리가 그의 상념을 끊고 들려왔다.

[크크큭— 내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잘도 도망가지 않고 여기까지 왔구나. 무모한 건지 용감한 건지.]

"그걸 바라신 게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감히 당신에게서 도망칠 자신도 없고요. ···하회탈."

안성진은 눈앞의 존재를 바라보며 깊게 심호흡했다.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이 공간의 공기는 절대 건강에 좋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렇게라도 해서 마음을 가다듬어야 할 것 같았다.

'젠장, 상대에게 적의가 없는데도 이 지경이라니. 하위 흑마력을 지배하는 능력인가?'

그 시선을 마주하자 체내의 흑마력이 절로 위축되고,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공포의 아우라는 사정없이 그의 정신력을 갉아먹고 있었다.

정말 「극기」가 아니었으면 그 자리에 엎드린 채 자비만 구걸했을지도 몰랐다.

[현명한 판단이다. 과연, 나름대로 배려해 준 보람이 있군.]

곧바로 그 식당에 들이닥치지 않고 이렇게 조용히 신호만 보낸 걸 말하는 것이겠지.

그 점에 대해서는 안성진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부모님이 이 존재를 마주했다간 농담이 아니라 정말 심장마비가 올지도 몰랐으니.

"···그래서, 저를 부르신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극악한 범죄자들만 상대한다고 알고 있었습니다만."

거기까지 말하다 아차 한 안성진은 황급히 뒷말을 덧붙였다.

"참고로 저는 흑마법사지만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습니다! 제 고유스킬이 흑마력의 영향으로부터···."

[아아, 그것 때문에 찾아온 게 아니니 안심해라.]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하회탈의 확답에 그제야 그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어느새 등은 식은땀에 축축이 젖어있었으나, 일단 자신에게 위해가 올 것 같지 않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그럼··· 어째서 저를?"

[내가 이 나라의 치안에 상당히 기여하고 있는데 말이지. 일을 하다 보니 여러 가지로 귀찮은 면이 상당히 많아.]

조금 뜬금없다고 느껴지는 대답.

하회탈이 검은 장갑을 낀 손을 들어 올려 천천히 그를 가리켰다.

[너, 상당히 쓸 만해 보이더구나.]

"아? 감사···."

[크흐흣— 그러니 내 노예가 되어 주어야겠다.]

그 말에, 조금 이르게 안도했던 안성진의 얼굴이 다시 창백해졌다.

#163

하회탈 라이즈 (3)

온갖 첨단기기가 들어찬 실험실 내부.

"자아~ 다 됐습니다. 이제 눈을 떠 보세요! 새로운 세계가 당신을 기다립니다!"

하이톤의 촐싹거리는 듯한 사내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잠에서 깨듯 수술대에 누워있던 한 삼십 대의 남성이 천천히 '두' 눈을 뜨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우호홋! 역시 아주 혁명적인 눈이군요! 크흐~ 부럽네요, 부러워. 당신은 정말 운이 좋았던 겁니다! 사실 그건 내가 먼저 쓰려고 했던 건데···."

수다스럽게 떠드는 목소리를 무시하며 율령자는 상체를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과연, 두 달 전의 사건으로 생겼던 좌측의 시야각 제한이 사라졌다.

"내 한쪽 눈을 뽑아버리고 그걸 대신 달려고 했는데, 하필 직전에 회주에게 딱 걸려버리고 말았지 뭡니까? 회주가 어찌나 짜증을 내던지! 그때 혼나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머리가 아픕니다."

대꾸도 없는데 혼자 열심히 떠드는 '닥터'가 신경 쓰이긴 했으나, 덕분에 새로운 눈을 얻은 것도 사실이었으니 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단순한 실명이 아니라 영체가 손상된 것이 원인이라 어떤 안구를 이식해도 소용이 없었거늘···.'

의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말 그대로 영구적인 손실.

하지만 그 문제 또한 다른 방식으로 우회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었다.

"···물론 고유스킬이 눈을 통해 발현되니 그야 아깝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한쪽은 남아있는 데다 로망까지 실현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말이지요. 개혁과 진화야말로 인류가 추구해야 할 궁극의 가치인데!"

지잉— 징—

그 과장된 호들갑을 한 귀로 흘리며, 눈의 초점을 옮길 때마다 새로 이식한 안구 쪽에서 미세한 진동이 감지되었다.

그러나 카메라의 조리개가 움직이며 생기는 그 기계음은 본인에게만 작게 느껴질 뿐, 외부에서는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조용했다.

그는 한쪽에 놓인 거울을 통해 자신의 눈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평범한 검은 눈과 대비되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왼쪽 눈동자 테두리엔 은은한 푸른빛의 원이, 그 안쪽의 홍채에는 기하학적인 문양이 가득 채워져 신비롭게 발광하고 있었다.

기계 공학과 마도 공학이 합쳐져 탄생한 이 궁극의 의안은 안구의 형태를 하고 눈구멍에 들어가 있지만, 그 메커니즘은 실제 눈과는 전혀 다른 마도구였다.

그렇게 그가 자신의 새로운 눈을 감상하고 있을 때···.

턱! 휘릭—!

누군가가 어깨를 잡아채는 것과 함께 휙 돌아간 시야에,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한가득 들어찼다.

어느새 바로 옆까지 다가온 닥터가 수염이 무성한 얼굴을 무섭게 들이밀며 율령자의 머리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리고 한 손을 뻗어 의안이 이식된 왼쪽 눈을 활짝 벌리더니 다시 요모조모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야~ 역시 캘리카스 차원의 기술은 혁명적이라니까요? 제가 그 차원에 갔어야 했는데 말이죠! 이렇게 간접적인 방법으로밖에 접할 길이 없다니, 이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율령자는 다시 자신의 면전에다 침을 튀기며 떠드는 그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후줄근한 실험복과 산발한 회갈색 머리를 한 중년의 서양인.

초라한 겉모습이었지만 이 사내는 절대 만만히 볼 수 없는 상대였다.

첫 이계 전송에 휘말렸던 1세대 귀환자라는 것은 부차적인 요소일 뿐, 그는 현 번천회의 기술력을 주도해 온 세기의 천재였으니까.

마법과 주술을 비롯해 연금술과 마도 공학 등, 각 차원의 신비를 끌어모아 개량하는 작업은 그 악마적인 두뇌와 그가 가진 「진리의 눈」이 없었다면 시작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햐햣! 마침 이 의안을 달고 귀환한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죠? 그쪽 차원에서도 굉장한 고가라고 들었습니다만!"

"그렇군요. 그리 귀한 물건을···.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닥터."

이런 물건이 지구에 있다는 것은 당연히 이걸 가져온 이도 있다는 소리였다.

귀환 직전까지 열심히 모은 전 재산을 쏟아부어 새 눈을 구하고 돌아왔던 귀환자가.

물론, 지금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래서 말입니다만? 내 율령자 당신에게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네."

하여튼 이 남자의 분위기는 따라가기 힘들다고 생각하며, 율령자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당신을 그렇게 만든 존재, 하··· 하해?"

"하회탈입니다."

"어쨌든! 그 스마일 마스크 말입니다만? 굉장히 흥미가 가더군요. 호기심에 조금 알아봤는데 재밌는 소리도 많고!"

남의 말을 듣지 않는 닥터가 혼자 들뜬 어조로 말을 이었다.

"당신도 알 테지만 우리가 이렇게까지 박살 난 건 한국이 처음이란 말이죠? 물론 계획이 실패하는 일이야 다른 나라에서도 비일비재하지만, 그래도 아예 기반 자체가 날아간 건 좀? 아! 그렇다고 뭐라고 하는 건 아닙니다? 회주가 수긍한 이상 내가 뭐라 할 입장도 아니고 말이지요!"

언제나처럼 싱글벙글 웃는 얼굴.

하지만 그 맑은 눈은 위험하다 느껴질 정도로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 활동은 언제 다시 시작할 생각이지요? 물론 급한 일은 아니니 당장 움직이지 않더라도 딱히 문제는 없지만. 그래도 뭐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닌지?"

그 욕망에 가득 찬 은근한 물음에 율령자의 눈꼬리가 파르르 경련했다.

손상되었던 눈 문제는 이번에 해결되었으나, 하회탈과의 싸움에서 산송장이 되었던 지가 고작 두 달 전이었다.

그때 족히 몇 년은 정양해야 할 심각한 부상을 입은 터라, 솔직히 당장 숨 쉬는 것도 버거운데다 두 다리도 움직이지 않아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는 처지였지만···.

문제는 동아시아 지부장인 율령자보다 총괄 기술부장인 닥터의 지위가 더 높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전 준비를 계획 중에 있었습니다. 언제까지 그곳을 방치할 수는 없으니 밑 준비 정돈 미리 해 두는 게 좋을 테지요."

"우홋! 좋습니다, 율령자!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좋은 실험체가 들어올 날이 기대되는군요! 뭐부터 시작하는 게 좋으려나~!"

그리고 원래 악의 조직은 다 블랙 기업인 법이었다.

***

"후우— 개운하네."

평소 일과대로 실내 헬스장을 다녀온 나는 느긋하게 샤워까지 마친 후, TV 소리를 라디오 삼으며 안마의자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았다.

역시 집이 크고 돈도 많으니, 필요한 것들을 전부 미리 구비해 둬서 쓸데없이 밖에 나갈 일이 없었다.

생각해 보니 요즘엔 「개체 투영」을 통한 외출 말고는 집 안에만 처박혀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에이, 어쨌든 나간 건 나간 거지. 하루 한 번 꾸준히 외출해 사람을 만나고 다니다니. 굉장히 사교적이군!'

「개체 투영」을 사용하면 한성현이라는 나 개인보단 아바타를 움직이는 느낌이 더 강하고, 그나마도 만난 사람들이 대부분 범죄자란 사실은 일단 제쳐 놓기로 했다.

이 이상 깊이 따지고 들면 내가 너무 불쌍해 보이니까.

"흐음, 그나저나 그 흑마법사··· 안성진이라고 했던가?"

나는 전신을 주무르는 안마의자의 강도를 최대로 올리며 지난밤 찾아갔던 인재를 떠올렸다.

출신 세계가 다른 만큼 정확히 판단할 순 없었지만, 그는 아우테리카 기준으로 대마법사에 살짝 못 미치는 정도의 실력자였다.

하지만 패도적인 흑마력의 특성을 생각해 보면 순간 전투력만은 크게 부족하지도 않을 터.

'물론 내가 바라는 건 전투력 쪽이 아니지.'

다행히 그는 이쪽의 평화적인 스카우트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흔쾌히 받아주었다.

상호 동의하에 계약까지 맺어 아주 약간의 강제력까지 행사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 감히 배신할 엄두는 내지도 못할 것이다.

'약속은 소중한 거니까. 악인은 아닌 것 같으니 딱히 막 대할 생각은 없지만, 허튼짓하는 건 용납 못 하지.'

어차피 무리한 일을 시킬 생각도 없었다.

그저 이쪽이 원하는 정보를 가져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준다면 그것으로 충분했으니.

또 일만 잘해 준다면 직원 복지 차원에서 이것저것 챙겨줄 의향도 있었다.

'천살마제를 언데드로 만드는 작업도 순조롭고···.'

당연하지만 그간 이용했던 시신과는 격이 다른 만큼 함부로 다룰 수는 없었다.

최고의 재료를 제대로 써먹기 위해선 그에 합당한 시간과 노력, 자원을 투자해야 하는 법.

「아바타 클라우드」를 통해 아우테리카의 원조 한스에게 보내진 천살마제의 시신은 언데드로 만들기 위한 사전 작업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언데드가 필요할 때는 심장의 종속 아공간으로 이쪽에서도 꺼낼 수 있을 테니 상관없겠지. 용량이 그리 크지 않아 많은 수는 힘들겠지만, 어차피 지구에선 대규모 병력이 필요 없으니까.'

그야말로 최고급 재료를 들이붓고 있으니 천살마제··· 아니, 이제 줄여서 '살마'도 상당히 만족스러운 녀석으로 재탄생할 것이다.

심연 과다복용의 부작용으로 영혼이 많이 상한 게 조금 마이너스 요소긴 해도, 어차피 언데드란 게 나사 몇 개씩은 빠진 놈들이니 그것도 큰 상관은 없었고.

"카르마 포인트는··· 오?"

안마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하나둘 정리하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한스가 제국의 수도 제론을 습격하기 얼마 전에 64만짜리 '정신력 강화'를 사용한 상태였건만, 이후 벌인 일의 규모가 워낙 컸던지라 제법 짭짤한 포인트가 들어와 있었다.

'확실히 안방극장의 효과가 좋단 말이야. 그거 쓴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80만이라니.'

그나마도 제법 빠른 속도로 꾸준히 증가하는 중으로, 다른 각성자들이 알면 말도 안 된다며 기함할 증가세였다.

이제 고유스킬 강화를 위해 필요한 포인트는 120만.

이만하면 다음 단계에 이르는 것도 그리 오래 걸리진 않으리라.

-그럼 다음 주제로 넘어가 볼까요? 요즘 한창 말이 많으니 여러분들도 한 번쯤 들어 보셨을 겁니다. 일명 '하회탈'이라는 각성자에 대해서죠!

-아~ 그렇죠! 요즘 한창 말이 많은 분이죠.

그때, 라디오 삼아 틀어 뒀던 TV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그 화제는 금방 그의 정체에 대한 의문부터 시작해, 여태까지 벌여왔던 일의 정당성에 대한 갑론을박으로 이어졌다.

-···통제되지 않는 무분별한 무력은 위험합니다! 심판의 기준이 본인의 주관이라니, 법치주의 국가에서 이게 말이나 되는···.

-···물론 그 행위가 무조건 옳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가 우리나라의 치안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건 해외 소식을 조금만 접해도 금방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아, 그렇죠. 이번에 일본에서도 큰 난리가 있었다고 했죠? 사망자만 수백 명 규모의 참사가···.

현대 지구는 그야말로 혼란의 극치였다.

온갖 역경과 사선을 넘어 힘을 얻고 돌아온 초인들이 한국에서만 만 단위에 이를 정도다.

전 세계적으로는 얼마나 있을지 추산할 수도 없을 지경.

그나마 가족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이유로 사회를 수호하려는 쪽의 세력이 더 강해 현 체재가 유지되고는 있으나, 잠재된 시한폭탄이 여기저기 널려있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인 것이다.

'흑마력 사용자나 마인뿐만이 아니라 힘과 욕망에 취한 각성자도 만만찮은 위험 요소지. 한스의 무력으로 탄압이나 다름없이 억제하는 지금도 그런 놈들이 꾸준히 튀어나오는데, 그만한 제어도 없다고 한다면···.'

딱 그게 현재 해외의 실정이었다.

물론 다른 나라도 강자가 없는 게 아니었고 한스처럼 무자비하게 범죄자를 사냥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개중엔 그의 사역 마법처럼 나름의 범죄 감지 체계를 꾸린 이들도 있었으나···.

'그 모든 능력을 한 몸에 갖춘 한스에 비할 바는 못 되지. 거기다 은밀성과 기동력까지.'

거기다 인구에 비해 국토 면적이 좁다는 것도 크게 한몫했다.

그런 여러 가지 요소가 합쳐져 지금의 평화로운 한국이 완성된 것.

"후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테라스로 향했다.

땅값이 싼 서울 교외 지역이라 가능했던 넓은 정원이 정갈하고 깔끔하게 관리되어 있었고, 곳곳에 자리한 조경석과 정원 장식들도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물론 무턱대고 발을 들였다가는 지옥을 경험하게 되겠지만.'

이곳은 그간 한스와 하인즈 2세, 하인리히와 해리스의 능력까지 총동원해 만든 방범 장치가 빼곡히 심어진 마경이었다.

정원 장식품은 전부 술식의 매개체였으며, 그 배치 또한 「마도의 길」로 심사숙고해 결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철옹성의 중심이 되는 존재가 바로 자신.

이 안에 있는 한, 나는 절대적으로 안전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래, 이제 한국 쪽은 대충 정리됐으니 좀 더 시야를 넓혀 보자.'

마침 '살마' 건으로 번천회가 상당히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암약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마당이다.

그런 경우가 이번 한 번만 있지는 않았을 터.

아마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비일비재했을 것이다.

'그간 놈들이 한국에서 발을 뺐다고 오래 방치해두긴 했지. 일단 가까운 나라부터 발을 넓혀 볼까.'

한국처럼 주기적으로 관리하지는 못할 테지만, 한번 청소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것이다.

약간의 번거로움 정도는 놈들을 엿 먹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혼란스러운 해외를 직접 방문하는 건 조금 꺼려지는 게 사실.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개체 투영」으로 가볍게 산책하듯 순찰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지 않은가.

'흠··· 한스의 지금 일정이 어떻게 되더라.'

살마를 언데드로 만드는 작업은 상당히 긴 숙성 과정이 예정되어 있으니 문제없고.

마왕의 기본 소양인, 조무래기를 보내 용사 일행을 레벨 업 시키는 과정도 미리 올리비아에게 지시해 두면 충분했다.

'흐음, 별문제는 없군. 뭐, 문제가 생기면 바로 불러들이면 되겠지.'

그게 아바타 역소환의 가장 큰 장점이었으니까.

그렇게 하회탈의 해외 진출이 결정되었다.

일단은— 가장 가깝고 사이즈도 적당한 일본으로.

#164

하회탈 라이즈 (4)

라일리 황녀가 불사왕의 성에 잡혀 온 지도 어느덧 이 주일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과연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해야 할지, 어느새 이곳에 익숙해진 그녀는 처음과 달리 그럭저럭 평온한 생활을 영위하는 중이었다.

어차피 당장 걱정만 하고 있어봐야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일단은 쓸데없는 근심거리들을 전부 내려놓고 마음의 안정부터 찾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황녀의 태도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 하나 있었으니···.

"흐흠—? 그럼 헤스페론은 본명이 아니었다는 말인가요?"

"어, 네. 그렇죠? 그래도 이세계로 가는 건데, 새로운 시작에 걸맞은 멋진 이름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나 싶어서···. 아하핫!"

바로 얼마 전부터 이곳에 새로 입주하게 된 이세계인, 자칭 헤스페론이었다.

"그럼, 본명은요?"

"하승훈입니다만, 그냥 헤스페론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그쪽이 더 폼 나니까요!"

"하스··· 흠, 좋아요.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

라일리는 눈앞의 맹해 보이는 사내를 못마땅한 눈초리로 흘겨보았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한 그는 이세아와 같은 인종의 사람이었지만, 가진 성격은 전혀 달랐다.

그녀가 다소 냉정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총명하고 성실한 우등생 타입이었다면, 이 남자는 똑똑해 보이는 외견을 하고서도 허술하고 어리바리한 면이 강했다.

불사왕에게 감금당해 언제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는 심각한 상황인데, 저렇게 아무 걱정 없이 태평하게 웃는 모습을 보면 괜히 근심에 빠져있던 자신만 바보 같아질 정도.

하지만 그런 그도 놀라울 정도로 이세아와 닮은 면이 한 가지 있었는데···.

파지직—

바로 마법에 대한 압도적인 재능이었다.

"오오! 됐다, 됐어! 라일리, 여기 여기!"

"또, 또. 존칭 똑바로 붙이세요!"

"앗, 미안합니다! 들떠서 그만. 그런데 이것 봐요. 이건 전에 했던 것보다 더 쉬운데요?"

헤스페론의 손바닥 위에서 하얀 스파크가 꿈틀거렸다.

이것도 인연이겠다, 그냥 이세아를 가르칠 때가 생각나 가볍게 한 수 베풀 생각이었건만···.

그의 성장 속도는 그때의 그녀보다 더 가팔랐다.

'···혹시 지구인이란 이들은 선천적으로 마법에 대한 재능을 타고나는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누구는 십 년 동안 아직도 초급에 머물러 있는데, 이 인간들은 양심도 없는지 연달아 그녀를 제치고 지나가려 하고 있었다!

'으으, 아무리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렇지. 그래도 십 년인데.'

하지만 이건 그녀가 그의 특수성을 알지 못했기에 생긴 오해였다.

틀림없이 '헤스페론'은 마법을 처음 배우는 것이 맞았으나···.

'이 정도야 뭐. 아무리 흑마법과는 방향성이 다르다지만 기초 마법 정도로 헤매면 한스의 이름값이 아깝지.'

무려 불사왕인 한스와 사고를 공유하는 그였다.

물론 육체적인 제약 때문에 고위 마법까지 따라 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은 마법의 기초를 다지는 단계가 아닌가?

거기다 「사악한 지혜」, 「금단의 지식」, 「마도의 길」, 「마력 지배」 등 마법 계열 스킬들까지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상황이다.

노벨상 수상자가 슈퍼컴퓨터까지 켜놓고 옆에서 정답을 알려주는데, 고작 중학생 수준의 문제에서 쩔쩔맬 리가 없는 일.

"···참 잘했어요. 그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죠. 후우— 세아보다 더한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참고로 전송 초기에 이런 보조도 없이 황녀를 추월했던 이세아는 그냥 천재가 맞았다.

그리고 라일리 황녀와 헤스페론이 그렇게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같은 공간에 갇혔던 사이먼 황태자는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황태자 전하? 제가 분명 청소에 침구류 세탁, 정원 손질까지 끝내 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제 말이 말 같지 않으셨나 봅니다?"

"크윽— 나, 나는 아제리온 제국의 황태자다! 이런 일을 해 봤을 리가 없지 않느···."

"또 말대꾸를 하시는군요? 역시 체벌이 부족했던 걸까···. 어쩔 수 없네요."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난···."

"우후훗! 자, 이리 오세요. 새사람이 되도록 확실하게 교육해 드리죠. 원래 성장에는 아픔이 동반되는 법이랍니다?"

"아니! 라일리는 가만히 두면서 왜 나만!"

전 감시자인 앤드류의 괴롭힘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 이번엔 리리스라는 가명을 사용 중인 시아나의 장난감이 되어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찰싹—

작은 승마 채찍을 휘두르며 즐거운 미소를 짓는 시아나.

제국 귀족으로 위장하기도 했던 그녀에게 황태자를 마음대로 가지고 놀 기회란 굉장히 뜻깊은 것이었다.

물론 라일리 황녀는 황태자가 뭔가 또 밉보일 짓이라도 했다고 생각할 뿐이었지만, 사실 거기에도 불사왕의 입김이 닿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왕성 대전 한가운데에 놓인 왕좌.

한스는 그 위에 앉은 채 내부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한눈에 살펴보고 있었다.

'흐음, 포로들 쪽은 딱히 신경 필요 없겠군. 헤스페론이 있으니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알 수 있겠지.'

마왕성 내의 추종자들을 관리하는 일은 전부 시아나에게 맡겨두고, 심연에 푹 담겨 순조롭게 숙성 중인 살마의 관리는 아크리치 드웰에게 일임하면 될 터였다.

역시, 그가 당장 필요한 일은 딱히 없었다.

[그럼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나머지 일은 너에게 위임하겠다. 올리비아.]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왕께서 하명하신 대로 따르겠나이다···.]

한스의 나직한 명령에 올리비아가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갑자기 어디로 자리를 비운다는 것인지, 왜 자신들을 두고 가는 것인지 당연히 모든 것이 의문이었지만···.

그녀는 감히 불사왕에게 반문하지도 못하고 그저 수긍할 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을 둘러본 한스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다.

***

야심한 밤.

후우웅—

희미한 달빛만이 비추는 어두운 밤바다 위를 조용히 스쳐 지나가는 검은 그림자 하나가 있었다.

밤의 어둠에 동화되어 기척도 없이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무언가.

당연히 그 정체는, 지구로 넘어온 불사왕 한스였다.

'아직 가 본 적이 없는 곳이니 함부로 공간 이동을 할 수도 없고. 번거롭지만 일단은 이렇게 하는 수밖에.'

그는 공간을 넘어 부산까지 이동한 직후, 곧바로 동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바다를 건너기 시작했다.

레이더나 위성 등에 감지당하지 않기 위해 저공비행으로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지만, 물론 그 '천천히'의 기준은 한스 입장에서일 뿐이었다.

부산에서 출발한 지 10분 만에 대마도를 지나치고, 20분이 넘어서자 슬슬 일본 열도의 모습이 가시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부산에서 30분이면 후쿠오카까지 도착하고도 남겠군. 하긴, 서울에서 부산까지보다 더 가까우니.'

일본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인 규슈의 후쿠오카는 부산과 거리가 가장 거리가 가까운 대도시였다.

그래도 기념할 만한 하회탈의 첫 일본 진출이니,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곳에서 시작하고 싶어서 선정한 장소.

'첫 해외여행이기도 하고.'

도중에 밀입국 등을 감시하기 위해서인지 미약한 방범 결계가 느껴졌으나, 그는 숨 쉬듯 자연스럽게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이 야심한 시각에도 환하게 빛나는 항구로 향하려던 순간.

'음? 이건?'

이곳과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그에게 굉장히 친숙한 기척이 감지되었다.

'···한번 가 볼까.'

일반적으로 한스에게 익숙하다는 것은 절대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일본 땅을 밟기도 전에 일부터 시작하게 될 것 같다고 예감하며, 그는 곧바로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이동했다.

촤아아— 철썩—

그렇게 도착한 장소는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는 제법 커다란 배 한 척이었다.

안 그래도 어두운 밤바다에서 주기적으로 몰려오는 파도에 천천히 흔들리면서도, 마치 유령선처럼 빛 한 점 없이 가만히 부유해 있는 선박.

그 내부에서 그가 아니었다면 쉽게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한 흑마력과 죽음의 기운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과연, 나름 신경 썼는지 결계도 꼼꼼하게 설치되어있군.'

하지만 한스는 마치 안방에라도 들어가듯 자연스럽게 배 안으로 진입해 선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직후 그가 안에서 마주한 것은 딱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누가 봐도 사악한 의식인 피의 주술진이 사방에 그려져 있었으며, 기괴한 형상의 촉매들이 여기저기 배치되어 음산한 분위기를 더하고 있었다.

거기다 중심부의 제단에 배가 갈라진 채 제물로 바쳐진 이들의 시신들까지.

'어떻게 흑마력을 사용하는 놈들은 이렇게나 하는 짓이 똑같은 건지.'

그간 아우테리카에서 잡아들였던 놈들도 그렇고, 한국에서 사냥했던 놈들도 그렇고.

기운의 특성상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한탄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그때, 제단 주변을 둘러싸고 저들끼리 낄낄거리며 떠들던 십여 명의 남녀가 뒤늦게 그를 발견하고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경계, 경고, 긴장, 살의 등···.

그래봤자 하나같이 한스에게 비비기에는 일천한 수준이었으나, 그는 곧바로 놈들을 처리하지 않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흐음, 이거 난감하군.]

"%*#%&!"

"@&*#%#?"

놈들이 뭐라고 떠들긴 하는데, 그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으니까.

자연스럽게 의사소통이 되는 곳에 너무 익숙해져서 잠시 잊고 있었다.

물론 지금이야 당연히 갑자기 침입한 그를 경계하는 내용이겠지만, 그래도 당분간 일본에서 활동할 생각이었는데 원활한 의사소통은 필수이지 않겠는가?

'정황만으로 함부로 판단하다간 실수할 수도 있으니.'

원래 무슨 활동을 하든 해외에서는 언어가 필수인 법.

하지만 이것도 사실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크크큭— 필요하다면 지금부터 배우면 되겠지.]

언어를 모르면 배우면 될 뿐.

간단한 일이었다.

고오오오—!

적어도 그에게는.

"허업!"

"큭!"

선실 내부를 가득히 채우는 거대한 존재감.

긴장한 채 기세를 돋우던 놈들이 일제히 심장을 붙잡고 비틀거렸다.

어떻게든 반항하려고 노력하지만, 체내의 흑마력이 제멋대로 날뛰며 통제를 벗어나고 손발조차 마음대로 가누지 못한다.

그 도마 위에 올라온 생선이나 다름없는 모습을 바라보며, 놈들에게 천천히 다가간 한스가 그대로 한 녀석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끄아아악!"

그리고 순식간에 머릿속의 기억을 읽어 들였다.

다만 평소와 다른 점이라면 강렬한 사건 등을 비롯한 기억을 뒤지는 게 아니라, 놈의 언어 계통을 위주로 훑어 내리고 있다는 것.

그러나 하나의 언어를 습득하는 일이 그렇게 쉬울 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정신력뿐만 아니라 다른 능력도 좀 올려야겠는데. 기억력과 추론력, 사고력 같은 것들을···.'

어차피 한 번 올려두면 두고두고 도움이 될 것들이다.

마침 그에겐 매우 풍족한 포인트가 남아있었고, 그것은 지금도 꾸준히 증가하는 중이니 아낄 필요도 없었다.

'마침 본격적으로 마법을 배우고 있기도 하니, 시기상으로도 나쁘지 않군.'

그렇게 본체가 열심히 포인트를 소비하는 동안, 한스는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식간에 눈앞에서 한 명이 희생되자 겁을 먹은 기색으로 위축된 이들.

갑작스러운 봉변에 그들의 눈빛에는 억울함까지 담겨있었다.

'···뻔뻔스럽게도 말이지.'

그는 슬쩍 시선을 돌려 제물이 되어 희생된 이들의 시신을 한 번 바라보고는, 다시 본격적인 '학습' 절차에 들어갔다.

다행히 그를 가르쳐 줄 원어민 강사는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그것도 아주 헌신적인 이들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