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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사, 살려줘...."

흑산괴가 엎어진 채로 애걸했다.

전신에 피칠갑을 한 것은 물론 살점이 뜯겨지고 손목은 잘려나가서 정상이 아니었다.

가만히 놔둬도 죽을 것 같은 게 이미 한 발을 저승 문턱에 걸친 것과 매한가지였다.

그럼에도 강엽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지금 그는 막 칠성의 마지막인 요광(搖光)의 자리를 밟은 상태였다.

흑산괴와의 거리는 불과 열세 보.

그가 물러난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중간에 가로막히기 때문에 칠성을 완성하지 못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놈이 방해하기라도 해서 경로를 벗어나면 무지막지한 압력에 넙죽해질 터.

"살려달라고?"

"모, 몸이...."

뒷말은 듣지 않아도 뻔했다.

뼈가 삐거덕거리는 소리만 들어도 흑산괴가 얼마나 큰 압력에 시달리는지 알 수 있었으니까.

강엽이 함정의 규칙을 파악할 동안 흑산괴는 자신의 용력과 내공을 믿고 계단을 올라왔다.

그 차이가 이런 결과를 만들었다는 것을 자각한 강엽은 우발에게 들었던 충고를 떠올렸다.

지혜는 인간이 써먹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했던 말이 새삼 구구절절 다가왔던 것이다.

이전이었다면 흑산괴 같은 무림 고수가 목숨을 구걸하는 꼴을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을 터.

"내가 널 살려주면 넌 무엇을 해줄 수 있지?"

"뭐든... 뭐든 다 할 테니까 제발...!"

"...좋아. 믿어주지. 일단 앞길 막지 말고 뒤로 물러나. 그래야 압력이 좀 풀려날 거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구쳤는지 몰라도 압력을 풀 수 있다는 말에 흑산괴는 허겁지겁 물러났다.

그가 물러나는 거리에 맞춰 조금씩 일보를 내딛은 강엽은 흑산괴의 옆을 지나쳤다.

멈춘 위치는 정확히 높에게서 사보 떨어진 거리.

"이, 이제... 됐지? 어, 어떻게 했는지 좀 알려줘...."

"알려주고말고. 한데 나도 좀 물어볼 게 있는데. 그 머리카락의 주인은 어찌 됐나?"

"...!"

흑산괴가 손에 쥐고 있는 머리카락.

남들의 것과 뚜렷히 구분되는 선명한 금색의 머리카락이 흑산괴의 손에 뭉텅이로 있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강엽이 지하뇌옥에서 야율산산과 함께 움직였던 것을 떠올린 흑산괴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 개새끼, 처음부터 알려줄 생각이...!"

솥뚜겅만한 손을 뻗지만, 이미 강엽은 북두칠성의 방향에 따라 걸음을 내딛은 상태.

게다가 걸음을 뗀 것과 동시에 흑산괴가 뻗은 계단이 옆으로 돌아가면서 두 사람을 멀리 떨어트려놨다.

가까스로 계단의 모서리를 잡은 흑산괴가 파리하게 질린 안색으로 소리쳤다.

"사, 살려줘! 뭐든지 할 테니까 제발...!"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말했을 텐데."

흑산괴를 향한 눈빛은 얼음장처럼 싸늘했다.

이제 와서 흑산괴를 단죄하거나 그에게 죽은 사람들을 대변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흑산괴처럼 살려두면 화근이 될 자를 굳이 구해줄 필요성을 못 느낄 뿐.

"어차피 널 살려줄 생각은 없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을 텐데, 스스로의 인생이나 돌이켜봐라. 적어도 심심하지는 않겠지."

"아, 안 돼! 가지 마...!"

흐느끼는 흑산괴를 무시하고 몸을 돌렸다.

등 뒤에서 욕지거리와 애원이 끊임없이 들려왔지만 강엽은 억지로 마음을 다잡았다.

이윽고 계단에서 떨어진 흑산괴가 지른 비명이 귓가에 오랫동안 맴돌았지만,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고작 흑산괴의 죽음으로 마음이 흔들린다면 앞으로 마주할 무수한 죽음들을 어떻게 견디겠는가.

어쩌면 우발처럼 뇌옥에서 만난 사람들이 적으로 돌변해서 자신을 죽이려고 들지도 모를 일.

그때마다 마음이 흔들린다면 어떤 고난이 따라도 살아남겠다는 각오를 견지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마지막까지 자신과 함께 싸웠던 금발의 소녀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듣지 못했다는 것만 빼면, 흑산괴를 처리하는 데는 아무런 후회도 없었다.

* * *

[한 명이 시험을 통과했다.]

"정말이오?"

모산혈조가 놀라서 물었다.

지금껏 수천 명이 도전했어도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 시험을 통과한 자가 나오다니.

[네놈이 바라던 일이 아니냐? 기뻐하지는 못할망정 떨떠름한 표정이나 짓는구나.]

"그야 그렇기는 하오만...."

이곳에 와서야 시험의 내막을 들은 모산혈조는 왜 아무도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는지 납득했다.

칠성과 육합, 오행에 따른 시험은 수시로 규칙이 바뀌는 함정들과 괴물들, 그리고 같은 경쟁자들로 인해 살아남는 것마저 여의치 않았다.

하물며 종국엔 내공마저 봉인된다고 하니 설령 고강한 내공의 소유자라 한들 생존을 담보할 수 없다.

'어려울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래서야 무림인들을 넣은 의미가 없지 않은가?'

그때 목내이가 코웃음을 쳤다.

[규칙을 알기만 하면 쉬운 시험이다. 그래도 간만에 사람다운 녀석이 나오니 좋군.]

"그래서 통과했다는 자가 누구요?"

[보채지 마라. 마침 오고 있으니까.]

과연 계단 아래쪽에서 터벅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사내가 덥수룩한 뒷머리를 긁적이며 나타났다.

"뭐야. 내가 가장 먼저 온 건가?"

"너는... 우발이라는 놈이군."

모산혈조는 단번에 알아봤다.

진혈강림대법을 펼쳤을 때 가장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삼인조 중에 한 명이었으니까.

"이거 선착순 맞지? 내가 먼저 왔으니까 시험에 통과한 거 맞수?"

"그렇다. 축하한다고 해야겠...."

[기다리도록.]

졸지에 말이 끊긴 모산혈조가 기분이 나빴지만, 목내이는 어쩐지 즐거운 기색으로 입꼬리를 당겼다.

"지금 뭐 하자는 거요? 시험에 통과한 사람은 한 명뿐이라고 말하지 않았소? 지금 저자가 눈앞에 있는데 뭘 또 기다리라는 거요?"

[그러니까 기다리라는 거다.]

목내이가 그렇게 말한 직후였다.

우발과는 다른 계단으로 한 사람이 올라왔다.

피투성이가 된 금발의 소녀를 업은 채로.

"하핫, 쉽게 죽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정말로 살아있을 줄은 몰랐는데. 하물며 짐까지 데려올 줄은."

우발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겪어본 바로 이 시험은 무공을 익히지 못한 강엽은 절대로 통과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강엽은 땀을 뻘뻘 흘릴지언정 상처 하나 없이, 게다가 소녀까지 짊어지고 정상에 올랐다.

"승자는 이미 정해진 것 같지만 궁금한걸.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냐?"

"당연히 걸어서 왔습니다. 계단이 하도 지랄맞아서 도중에 빙 돌아오긴 했지만요."

강엽도 우발이 있는 걸 보고 놀랐다.

그가 직접 겪어본 바 이 시험은 함정에 숨은 의미를 찾아내지 못하면 통과할 수 없었다.

한데 우발은 전신을 피로 목욕하긴 했어도 그보다 앞서 정상에 오른 것이다.

"걸어왔다... 하긴, 자네 체력으로 여기까지 뛰어오는 건 말이 되지 않았지. 그래도 무사히 온 걸 보면 칠성의 의미를 알고 있었나 본데."

"운이 좋았습니다. 당신은요?"

"나도 운이 좋았지. 우연히 사문의 보법이 칠성과 관련이 있어서 말이야."

저 말이 사실이라면 대단히 공교로운 우연이었다.

모산혈조도 새삼스럽게 우발을 봤다.

"무당의 보법에 칠성둔형보(七星鈍形步)가 있었지. 원래 무당의 제자였나 보군."

강엽도 무당파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무당파에 어떤 무공이 있는지는 모를지라도 무당파가 무림에서 어떤 위상을 갖는지는 잘 안다.

그런데 우발이 무당파의 제자였다고?

"정확히는 속가제자였지. 익힌 보법도 칠성둔형보가 아니라 형만 갖고 와서 새롭게 만든 보법이고. 하지만 그런 반푼이 보법으로도 이런 시험은 어찌어찌 통과할 수 있었던 모양이야."

하긴 우발이 무당파의 본산제자였다면 먹고 살기 위해 표사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포의족인 우발이 어떤 사정으로 무당의 속가제자가 되었는지는 모르나 그로 인해 시험을 무사히 통과했으니 인생이란 참으로 알 수 없다는 말이 딱 맞았다.

"한데 그 녀석은 어찌 찾은 거야?"

"근처에서 주웠습니다."

"그래서 데려왔다?"

"뭐 문제라도 있습니까?"

문제가 있냐고?

우발은 기가 차서 헛헛 웃었다.

"아주 많지. 이 시험이 선착순이라는 건 알고 있을 테지. 내가 살려면 다른 사람은 죽일 수밖에 없어."

"...."

강엽이라고 어찌 그걸 모를까.

하지만 흑산괴와는 달리 어린 소녀를, 심지어 한때나마 함께 싸운 녀석을 끊어내는 게 쉽지 않았다.

"그냥 죽게 내버려두지 그랬어? 그랬다면 적어도 내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었을 텐데."

"내 손이라... 저도 죽이겠다는 뜻으로 들립니다만."

"그럼 안 죽일 줄 알았냐!"

우발이 폭발적으로 달려들었다.

'늦기 전에 먼저 쓰러트려야 해!'

목내이가 좀 전에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가 먼저 도착했는데도 불구하고 강엽을 기다린 걸로 봐서는 그야말로 진짜 통과자였다.

강엽이 어떻게 통과했는지는 몰라도 소녀를 업고 있는 지금이 녀석을 죽일 절호의 기회였다.

'나를 원망하지 마라.'

이곳에서는 내공을 쓰지 못한다.

하지만 강엽 역시 무공을 익히지 못했으니 내공을 쓰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태극(太極)."

"뭣?"

우발은 일순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강엽이 일보를 내딛자 그 의미를 깨닫고 경악성을 토해냈다.

천지가 뒤집어졌다.

1화. 대법 (7)

우발은 하늘로 '떨어졌다'.

모순이었지만 실제로 그러했다.

머리와 발이 뒤집히더니 머리 위에 바닥이 있었고, 다리 아래에 허공이 있었다.

하지만 강엽은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우발의 입장에서는 바로 정면에 강엽의 얼굴이 아니라 다리가 있는 격이었다.

"큭, 이게 어찌된 거야!?"

"혹시나 당신이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만약을 대비한 건데 정말로 써먹게 될 줄이야...."

강엽이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그가 한 일은 간단했다.

칠성의 걸음을 거꾸로 밟은 것이다.

"처음 칠성의 규칙을 알아냈을 때 발견했습니다."

그때는 강엽도 전혀 예상치 못하다 우발처럼 당한 것이기에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하지만 그가 태극이라 이름 붙인 이 보법은 일정 반경 안쪽에서만 효과를 발휘한다.

거꾸로 된 칠성의 걸음을 완성하고 나서 일보.

거기서부터 칠보까지는 천지가 뒤집히며, 그 이후부터는 다시 올바른 방향으로 걸을 수 있었다.

"그런...."

우발은 아연실색했다.

강엽의 설명은 간단했다. 너무 간단해서 허탈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스스로 시행착오를 겪지 않고서는 발견할 수 없는 규칙이었다.

"음과 양은 상반되면서도 돌고 도는 것. 원래 이름은 모르지만 저는 태극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건곤대나이(乾坤大?移)다.]

목내이가 첨언하듯 덧붙였다.

[위급할 때 써먹을 수 있는 수법이지. 사문에서 배운 대로만 따라한 놈은 생각하지도 못하겠지만.]

"하늘과 땅을 크게 뒤집어버린다? 태극보다는 그쪽이 더 어울리는군요."

모산혈조는 오가는 대화를 듣고서야 저간의 사정을 깨닫고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유일한 통과자라는 게 그런 뜻이었나.'

엄밀히 말하면 우발은 시험의 의미를 통찰하고 규칙을 이용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사문에서 배운 보법을 그대로 써먹은 게 우연찮게 얻어걸린 것이니까.

물론 결승점에 통과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지만, 목내이를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목내이가 말했다.

[이전의 시험에서도 무공만 믿고 우격다짐으로 짐의 앞에 온 놈들이 있었지.]

그들은 목내이를 우롱한 대가를 치렀다.

지금도 저 아래에서 먹잇감을 찾아 서성거리는 괴물들의 일부가 된 채 이 세상을 떠돌았다.

"자, 잠깐...!"

[변명은 듣지 않겠노라. 감히 꼼수로 짐의 심기를 거스른 죄는 무겁게 치르리라.]

목내이의 팔이 올라간 것과 동시에 바닥을 뚫고 나온 붉은 줄기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때 강엽이 나섰다.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무어?]

이놈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목내이는 물론 모산혈조도 강엽이 대체 왜 우발을 위해 나서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통과자가 나왔는데 괴물을 늘릴 필요가 있냐는 겁니다. 당신은 불로불사의 저주인지 뭔지를 넘기면 죽을 거라고 했잖습니까?"

[감히 짐에게 명령하는 것이더냐!]

콰아아아앙!

목내이의 진노를 대변하듯 하늘에서 벼락이 요동쳤다.

살 떨리는 광경에 우발이 덜덜 떨었다.

하지만 강엽은 간덩이가 배 밖으로 나왔는지 지극히 태연한 얼굴로 담담하게 지껄였다.

"어차피 이 세상은 당신의 것. 제가 뭐라 하든 결국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겠지요."

[그걸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한다? 네놈이 통과자라 하여 짐이 못 죽일 줄 아느냐?]

"고작 의견 하나 피력했을 뿐인데 죽인다면 애초에 당신의 그릇이 겨우 그것뿐이라는 뜻이겠지요. 역사상 그 어떤 폭군이나 암군도 황태자가 말대꾸 좀 했다고 목숨을 거둔 예는 없습니다."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하나만 묻겠습니다. 제가 당신의 뒤를 잇는다면 저 괴물들은 어찌됩니까?"

[죽는다.]

그 말에 우발이 흠칫했다가 이내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낄낄거렸다.

"뭐야. 결국 죽일 거라는 말이잖아. 그럴 거면 그냥 깔끔하게 죽이시오. 모욕하지 말고."

[닥쳐라.]

"...!"

우발의 입술이 하나로 붙었다.

입을 열려야 열 수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보아하니 네놈은 이놈과 등에 업은 계집을 살리고 싶은 게로구나. 맞느냐?]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나한테 도움을 준 사람들이니까. 이 사람은 좀 그렇긴 하지만... 굳이 괴물로 만들고 싶지는 않고."

흑산괴 같은 놈들이야 괴물이 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겠지만 우발은 경우가 달랐다.

그가 크고 작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살아남은 만큼 괴물로 만들어서까지 능멸하고 싶지 않았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

"후회?"

[저 괴물들은 네 양분이 될 것이다. 이놈들을 죽인다면 큰 도움이 될진저.]

"양분이라...."

어떤 의미인지 와닿지는 않았지만 괴물을 늘릴수록 강해질 수 있다는 의미이리라.

눈 딱 감고 고개만 끄덕이면 뒷일이 편해진다.

"한때는 힘을 갈망했습니다."

힘이 있었다면 납치되지도 않았을 거니와 이리 개고생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강엽은 지난 몇 달간 무력함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약합니다. 힘을 원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말해줬습니다. 지혜는 인간이 써먹을 수 있는 가장 강한 무기라고."

그걸 말해준 사람이 옆에 있었다.

과거 자신이 해준 말을 들은 우발의 표정이 묘해졌고, 목내이의 표정도 묘해졌다.

"스스로를 진조라 칭하는 왕이시여, 감히 여쭙겠습니다. 당신이 주는 힘은, 고작 두 명의 인간이 없음으로 인해 쪼그라들 만큼 초라한 힘입니까?"

[....]

목내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무거운 침묵에 우발은 목울대만 꿀꺽 움직였다.

강엽의 손에도 진땀이 배어나왔다.

솔직히 '에라,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냅다 지르기는 했는데 목내이를 구슬릴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만약 목내이가 노기를 거두지 않는다면 우발과 소녀는 물론 자신의 목숨도 장담하지 못할 터.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목숨까지 빼앗긴다면 그야말로 천하에 다시없을 밑지는 장사였다.

'하지만 들어준다면 빚은 청산한다.'

문득 목내이의 광대뼈가 꿈틀거렸다.

[도발하는 솜씨가 일품이군.]

목소리에 은은하게 배인 분노를 느낀 사람들은 누구라도 할 것도 없이 바싹 굳어졌다.

[짐의 후계자여, 그 건방진 태도에 대한 보답으로 너의 청을 들어주겠노라.]

"아!"

우발이 탄성했다.

영락없이 죽는다고만 생각했거늘 강엽의 말 몇 마디에 목숨을 빚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끝내기는 아쉽구나. 두 개의 목숨을 살리려면 두 개의 목숨이 필요한 법. 넌 저들의 목숨을 위해 무엇을 내놓겠느냐?]

"애초에 가진 게 불알 두 쪽밖에 없는 놈이 뭘 내놓겠습니까? 그렇다고 불알 두 쪽을 내놓을 수는 없으니 대신 한 사람의 목숨을 내놓겠습니다."

[누구의 목숨을 말이냐?]

"저 늙은이의 목숨입니다."

강엽이 지목한 것은 모산혈조였다.

* * *

"헛소리!"

모산혈조의 낯짝이 붉어졌다.

숫자가 맞지 않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그는 제물로서 끌려온 게 아니었다.

그는 목내이와 거래를 맺었다.

목내이가 후계자를 찾을 때까지 도와주겠다고.

물론 그 대가로 피를 조금 덜어가겠지만, 그건 이제껏 헌신한 대가인 것을.

계획에 없이 목내이의 술법에 빨려들어오긴 했어도 목숨을 바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저자가 설마...!'

목내이의 눈매가 휘어졌다.

강엽의 말이 없더라도 모산혈조를 제물로 삼을 작정이었던 걸까.

"약속을 깨버릴 참이오?"

[무슨 약속 말이냐?]

"이익! 내가 후계자를 찾아주면 불로불사를 준다고 하지 않았소!?"

[아, 불로불사. 그래, 그런 약속을 하긴 했었지. 한데 짐이 미처 말하지 않은 게 있구나.]

"말하지 않은 것이라니?"

[짐이 일족을 멸족시킨 이유 말이다. 그 이유를 지금 말해주마. 흡혈귀는 하나면 족하다.]

"이 괴물이 정녕...!"

콰아아아앙!

말이 끝나자마자 수백 다발의 줄기들이 바닥을 뚫고 모산혈조를 향해 짓쳐들었다.

모산혈조도 그냥 당하지만은 않았다.

이 세상이 목내이의 공간인 만큼 무공을 쓸 순 없었지만, 그에겐 기괴막측한 사술들이 있었다.

그 사술들은 부적만 꺼내도 쓸 수 있으니 아둔한 무림인들과 다르게 그는 이 세상에서도 능히 목내이와 대적할 수 있었다.

그랬다고 여겼다.

[말하는 것을 금하노라.]

모산혈조의 입이 강제로 다물렸다.

[보는 것을 금하노라.]

모산혈조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듣는 것조차 금하노라.]

모산혈조는 이제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

시각과 청각을 빼앗기고 진언을 외울 입조차 봉인됐으니 사술을 쓰는 것도 글러먹었다.

목내이가 세상 잔인한 미소를 머금었다.

[분수에 넘치는 욕심은 화를 부르는 법. 그러게 잘 모르는 건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콰아아아아아앙!!

수백 다발의 줄기가 덩어리가 되어 모산혈조를 후려쳤다.

어마어마한 충격이 일대를 강타하자 강엽은 서 있는 그대로 얼어붙어버렸다.

이 공간에서 목내이가 절대적인 존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목내이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제법이군.]

쿠구구구구구...!

줄기를 뚫고 나온 검은 가시들.

거기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모산혈조가 못내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눈알을 부라렸다.

목내이의 봉인술은 그새 풀어버린 듯 카랑카랑하게 외쳤다.

"짐승만도 못한 괴물 같으니!"

[어허. 누가 누굴 욕하는지 모르겠구나. 짐이 할 말은 아니지만, 너 또한 괴물이지 않은가?]

목내이가 사람의 피를 먹는 괴물이라면, 모산혈조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수천 명을 죽인 괴물이었다.

둘 다 죽으면 지옥 밑바닥을 예약해둔 몸이니 서로 욕해봤자 누워서 침 뱉기밖에 안 된다.

"닥치지 못할까!"

모산혈조가 꺼낸 부적에서 희끄무레한 형체들이 수도 없이 쏟아져나오며 귀곡성을 토해냈다.

[망자인가?]

"수천 년 묵은 괴물이여, 네놈의 술법은 낡았다. 이 땅의 술법은 대를 이어 발전해 왔음이야!"

끼아아아아아아!

쿠르르릉...!

벼락치는 하늘에서 수백 마리의 망자들이 울부짖는다.

그야말로 인세에 도래한 지옥이 따로 없는 광경에 우발은 몸이 뒤집힌 상태에서도 비명을 질렀다.

"시발, 이게 다 뭔 일이야! 괴물들끼리 싸우면 우리까지 휘말리는 거 아냐!?"

"...우리 편이 이기길 바랍시다."

목내이가 이겨야 그들이 살 수 있었다.

하물며 강엽은 모산혈조를 죽이려고 했으니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애초부터 불구대천의 원수였지.'

"죽엇!"

[다 사라져라.]

이번에 이긴 것은 목내이였다.

말 한마디에 하늘을 덮은 수백의 망자들이 일소된 것이다.

[여기는 짐의 세상이다. 네놈이 하찮은 재주나마 써먹으니 이길 것 같았더냐?]

"커억!"

모산혈조가 허리를 꺾고 검은 피를 토해냈다.

목내이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촤르르륵!

이번엔 핏빛의 사슬들이 바닥을 뚫고 나와 모산혈조의 사지를 뚫고 처박아버렸다.

하지만 모산혈조의 몸뚱이는 수천 장의 부적으로 흩어지면서 사슬들을 흘려버렸다.

[인정하마. 네놈의 술법은 짐조차 보지 못했던 것. 그렇기 때문에 더 탐이 나는구나. 후계자에게 선물하기에 안성맞춤이지 않은가?]

멀지 않은 곳에서 다시 나타난 모산혈조가 모멸감을 느꼈는지 피 묻은 수염을 파르르 떨었다.

"...그래, 괴물 네 말대로 이 세상에서 싸우는 건 문제가 많구나. 하지만 바깥은 노부의 세상이다. 노부의 부하들이 있다는 걸 잊지 말거라."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제자들이 노부를 부르고 있구나. 그 아이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능히 나갈 수 있느니라."

허세는 아닌 듯 모산혈조의 몸이 점차 빛깔을 잃고 있었다.

목내이의 허락을 받지 않고도 제자들의 도움을 빌어 스스로 이 세상에서 빠져나가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막지 않으마. 네놈의 선천지기를 절반쯤 가져간 걸로 만족해야겠군.]

"이, 이놈이...!"

[농담이다.]

목내이의 눈이 번뜩이는 것과 동시에 모산혈조가 있던 자리에서 붉은 줄기가 불쑥 솟구쳤다.

사타구니에서 정수리까지 일직선으로 꿰뚫린 모산혈조를 노려보며 목내이가 중얼거렸다.

[짐은 한번 점찍은 사냥감을 놓치지 않느니라.]

1화. 대법 (8)

온갖 기묘한 사술들로 위기를 헤쳐나간 모산혈조도 이번만큼 허를 찔린 게 분명했다.

컥 하고 외마디 단말마를 남기면서 축 늘어졌다.

그러나 목내이는 그조차 허상임을 알아봤는지 혀 차는 소리와 함께 중얼거렸다.

[도망쳤군.]

줄기에 꿰뚫린 모산혈조의 몸이 점점 투명해지더니 허공에 녹아들 듯 사라졌다.

간발의 차로 놓친 것이다.

"...여길 나가면 또 싸워야겠군요."

모산혈조가 죽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싸움에서 좌장의 유무는 큰 차이였다.

[걱정하지 말거라, 후계자여. 놈은 선천지기의 팔할을 빼앗겼다. 안 그래도 죽을 날만 바라보고 있는 놈이 선천지기까지 빼앗겼으니 정신을 잃었겠군.]

당장 삼도천을 건너도 이상하지 않은 용태였다.

그 말을 듣고서야 강엽은 안심했다.

"오히려 잘 됐습니다."

모산혈조가 치명상을 입은 채 정신줄을 놨다면 바깥에 있는 적들도 구심점을 잃어버린 셈이었다.

차라리 모산혈조가 죽었다면 복수를 결의했겠지만, 어쨌건 숨이 붙어있는 이상 쉽사리 의견을 모으지는 못할 터였다.

싸울 것인지, 아니면 물러나서 숨을 고를지 의견을 모으느라 우왕좌왕하지 않겠는가.

목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렇겠지.]

콰직!

다음 순간 붉은 줄기들이 바닥을 뚫고 나와 강엽의 팔다리를 휘감기 시작했다.

부지불식간에 야율산산을 놓친 강엽이 경악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가장 중요한 계산이 남지 않았느냐.]

붉은 줄기들은 강엽뿐만 아니라 우발과 야율산산까지 칭칭 감싸면서 완전히 봉했다.

[짐을 이용해서 가장 까다로운 적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좋았다. 훌륭한 차도살인지계였어. 백점 만점에 백점을 주마. 하지만... 짐에게 모든 걸 맡기고 넌 탱자탱자 놀려는 심보가 너무 고약하지 않느냐?]

"...!"

자신의 노림수가 진즉 간파됐다는 것을 깨달은 강엽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목내이의 말마따나 그를 앞세워서 바깥의 적들을 쓸어버릴 심산이었으니까.

[그게 꼭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 자고로 후방이 안정되어야 앞마당이 튼튼해지는 법이니까. 하지만 시련을 극복하지 않고서야 어찌 성장하겠느냐.]

그러니 얼른 강엽에게 불로불사의 저주를 물려주고 자신은 나 몰라라 하겠다는 말이었다.

우발과 야율산산을 붙잡은 것은 승계 작업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차단한 것이다.

"기껏 얻은 후계자를 위험에 빠트리겠다고?"

[프흐흐, 말하지 않았느냐. 시련이 없으면 성장도 없는 법이라고. 어차피 맞을 매 좀 일찍 맞는다고 생각하려무나.]

이미 말로 설득할 단계는 지났다.

목내이는 강엽이 무슨 말을 지껄이든 이미 저주를 물려주고자 결심을 단단히 굳힌 상태였다.

* * *

[먼 옛날엔 온갖 요마와 괴력난신들이 창궐했다.]

이 땅에 통일된 왕조가 들어서기 전의 시절이었다.

[흡혈귀도 그중 하나였지. 그들이 언제부터 존재했는지는 짐도 모른다. 다만 흡혈귀는 존재할 때부터 인간을 잡아먹고 살았지.]

당시엔 무공이 존재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인간은 흡혈귀에 대항할 힘을 갖고 있지 못했다.

[하지만 흡혈귀에게도 천적이 있었다. 하늘 높은 곳을 차지하고 앉아서 세상을 굽어보는 오만한 태양이었다.]

태양볕에 노출된 흡혈귀들은 불타서 죽었다.

그 외에 순은에도 취약했지만, 그조차 태양이 준 공포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흡혈귀들은 철저히 어둠 속에서 숨어살며 인간들을 사냥했다.

그리고 때로 자신의 피를 인간들에게 나누어주고 그들을 흡혈귀로 만들면서 세력을 불려나갔다.

[한때는 너무 많은 흡혈귀들 때문에 작은 왕국들이 멸망한 적도 있었지. 그때 짐은 깨달았다.]

흡혈귀는 강한데 인간은 약하다.

흡혈귀는 태양에 노출되지만 않으면 영원히 살아간다.

흡혈귀가 줄지 않고 늘기만 하면 언젠가 이 땅을 사는 인간들이 멸종될 것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흡혈귀들은 깨달았다.

[흡혈귀는 하나만 있으면 족하다는 것을.]

동족 사냥이 일어났다.

동족을 죽이고 피를 탐닉했다.

[동족의 피를 마시면 강해진다. 살아남은 흡혈귀들은 점점 강해졌고, 종국엔 재앙이 되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고 있었다.

당시엔 중원 곳곳의 선산에 자릴 잡은 도관(道觀)들을 중심으로 원시적인 무공이 태동하던 시기였다.

세월이 흘러 도관들은 현문(玄門)의 기틀을 닦았고, 천축에서 온 달마가 소림에 정착해 소림권을 창시하면서 중원 무공은 일대 변화를 맞이한다.

그중 한 흡혈귀가 무공의 세계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음을 알아보고 매료되었다.

그는 정체를 숨기고 수많은 도관을 전전하면서 무공을 섭렵했고, 오랜 세월 심도 깊게 탐구한 끝에 마침내 흡혈귀만이 익힐 수 있는 무공을 창안하기에 이르렀다.

바야흐로 마공의 탄생이었다.

[짐은 그 힘으로 동족들을 사냥하여 마침내 일족의 힘을 하나로 모았느니라.]

그는 너무 강해져버렸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불사의 몸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손짓으로 땅을 뒤집고 강을 갈랐다.

천하제일의 무인이 와도, 제국의 황제가 대군을 일으켜도 그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처음엔 좋았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모든 게 시들시들해졌지. 이 세상의 그 어떤 지고한 쾌락도 짐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영겁의 동면에 빠졌다.

언젠가 자신이 이룩한 힘을 물려줄 후인이 나타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후계자여, 너는 짐처럼 불노불사는 아닐 것이다. 하나 네 안에도 가능성은 남아있다.]

강엽이 불로불사를 이루려면 목내이가 그렇듯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수련해야만 한다.

그때부터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몸이 된다.

[네가 불로불사를 바란다면 그것도 좋겠지. 그러나 다시는 사람으로 돌아가지 못하리라.]

강엽은 살기 위해서 시련을 극복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사람의 피를 빨아먹으면서 연명하는 괴물이 되는 것이었다.

[약 삼천여 명.]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억울하게 끌려와서 괴물이 된 사람들은 그토록 많았다.

강엽이 저주를 계승하면서 그들의 혼(魂)은 목내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하늘로 귀천했다.

하지만 백(魄)은 이 세상에 남아 강엽의 재능을 개화시킬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넌 짐이 악하다고 욕할지도 모르지. 짐은 부정하지 않겠다. 짐은 마(魔)로 태어나 악(惡)으로 살았으니. 하지만 너의 삶은 오롯이 너 자신만의 것. 네가 어떤 길을 가든 짐은 관여치 않겠노라.]

이미 목내이의 육신은 재가 되어 흩날리고 있었다.

다리에서부터 천천히 흩어지는 육신을 내려다본 목내이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 그래. 떠나기 전에 선물을 줘야겠군.]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강엽 외의 두 사람을 묶은 붉은 줄기들이 앞으로 끌려왔다.

줄기에서 풀려나온 두 사람이 쓰러졌다.

"크헉! 켁켁!"

"...!"

두 사람 모두 엎드려서 숨을 꺽꺽 토했다.

야율산산은 피투성이가 된 채 정신을 잃었지만 지금은 어쩐 일인지 멀쩡한 신색이었다.

[고개를 들어라, 잡것들아.]

어느 안전이라고 거부할까.

두 사람 모두 혼비백산해서 고개를 들자 목내이가 입꼬리를 길쭉하게 찢으면서 웃었다.

[후계자와 약속한 것이 있으니 너희들의 목숨을 거두지는 않겠다. 하지만 그냥 내버려두기도 뭣하군. 그러니 나름의 조치를 취하겠다.]

"뭐, 뭘 하려고...!?"

우발이 발작하듯 소리치는 찰나 목내이의 큼지막한 손이 그의 얼굴을 우악스럽게 틀어쥐었다.

[네놈은 납치된 이후의 기억을 잃을 것이다.]

강엽에 대한 것도, 이 세상에서 겪은 일에 대해서도 우발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우발이 고장난 인형처럼 털썩 쓰러지자 야율산산의 동공이 태풍을 만난 것처럼 흔들렸다.

목내이의 손이 그녀의 머리를 짚었다.

[기혈이 꼬였구나. 필시 극음의 영약을 복용하다 주화입마에 든 것이렷다?]

야율산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혈이 꼬인 것은 그렇다 쳐도 그 경위까지 단숨에 알아낸 목내이의 통찰력이 놀라웠다.

[네 기억은 빼앗지 않겠다. 바깥으로 나가면 네가 해주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지.]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나가면 자연히 알게 될 거라면서.

[그 보답으로 네 몸을 고쳐주마.]

야율산산의 머리를 주먹으로 살짝 내려치자 야율산산이 허리를 꺾으면서 피를 왈칵 토했다.

막혀있던 혈도가 시원하게 뚫리면서 울혈을 토한 것이다.

[짐이 목숨을 살려주었고 몸까지 고쳐주었으니 그 은혜는 대대손손 갚아도 모자랄 것인즉. 너는 짐의 후계자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피를 토한 야율산산도 우발의 옆에 널브러졌기에 대답을 하지는 못했다.

붉은 줄기들을 불러 두 사람을 치워버린 목내이가 후련해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미 몸은 절반까지 사라졌다.

[너무 오랫동안 살았지. 이젠 쉴 때가 되었어.]

태곳적에 태어나서 영겁의 세월을 살아온 괴물은 마침내 그토록 바랐던 영면을 얻었다.

그리고 강엽이 깨어났다.

* * *

"저 산장인가?"

백의를 입은 사람들이 산봉에 선 채 바람을 맞았다.

야밤의 산이 쌀쌀하다는 것을 감안해도 그들의 주변에 흐르는 공기는 특히나 서늘했다.

평생을 연마한 무공의 기운이 은연중 흘러나오면서 공기를 얼렸기 때문이었다.

"그렇습니다."

"하찮은 놈들이 감히 북해의 공녀님을...!"

산장을 노려보는 눈빛도 몸에서 흘러나온 한기 못지않게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내상을 입은 공녀를 치료하기 위해 중원에서 가장 용하다는 신의(神醫)를 찾는 여정에 올랐다.

하지만 작은 마을에 체류하던 중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에게 습격을 당했고, 그 와중에 그들이 지켰던 공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뒤늦게 공녀를 쫓았을 때는 너무 늦었다.

공녀를 납치한 무뢰배들은 싸늘한 시체가 되었는데 공녀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제서야 추종술의 전문가를 대동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인근 표국에서 웃돈을 주고 길을 잘 아는 표사들과 번견을 고용했고, 발품을 팔고 수소문을 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서야 공녀의 행방을 찾은 것이다.

'암도상인이라는 자가 있습니다.'

'그자가 누구입니까?'

'악명높은 노예상인입니다.'

'...!'

'소문에 따르면 그자는 표국으로 위장한 채 노예들을 운송한다고 하더군요. 표국이니 짐마차를 써도 사람들은 의심을 하지 않을 겁니다.'

'하면 공녀님은...!'

'운이 나쁘면 이미 새외로 팔려갔을지도 모릅니다.'

중원을 빠져나가면 찾을 길은 영영 없어진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암도상인이라는 자의 흔적은 귀주성으로 이어졌다.

이후 귀양(貴陽)을 지나쳐 사람이 살지 않은 오지로 가더니, 며칠 뒤에 다시 귀양으로 돌아왔다.

암도상인을 따르는 칼잡이 중 누군가가 기루에서 술독에 취해서 이렇게 나불거렸다고 한다.

무릉산맥의 깊은 골짜기에 큰손이 산다고.

귀양의 마당발을 자처하는 표사들과 그들이 고용한 하오문의 도움이 없었다면 몰랐을 소식이었다.

"우리는 공녀님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다."

백색무복을 걸친 여인이 자책하며 하는 말에 무인들 사이에 숙연한 분위기가 드리워졌다.

"그러니 공녀님을 반드시 구해야만 한다. 하지만 만에 하나, 공녀님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면... 우리의 목숨으로 공녀님과 궁주님께 사죄드리자."

차마 불경한 망언을 입에 담지 못했지만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공녀가 팔려간 곳은 가까스로 알아냈음에도 팔린 이유에 대해서는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만약 공녀가 목숨을 잃었거나 여인으로서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당했다면 목숨으로 사죄해야 할 터.

여인이 빠득 이를 갈며 상처 입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설혼대(雪魂隊), 감히 북해의 공녀님을 납치한 벌레 새끼들을 한 놈도 빠짐없이 몰살시켜라!"

2화. 괴물 (1)

강엽은 낯선 감각에 휩싸였다.

평생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고양감이었다.

전신의 뼈와 근육,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신경, 심지어 작은 솜털까지 생생하게 느껴졌다.

주먹을 쥐었다 편다. 지금이라면 바위도 부술 수 있을 것 같았다.

콰아앙!

자신을 가둔 벽을 때린다.

마치 새가 알을 깨고 부화하듯 주먹을 연달아 내치면서 벽을 부수고 또 부수었다.

주르륵...!

갈라진 틈에서 흘러내리는 수액.

균열이 점점 커지면서 수액이 웅덩이를 이루었다.

이윽고 나무가 좌우로 벌어지면서 알몸의 남자가 걸어나왔다.

"후우...!"

길게 숨을 토해내며 눈을 뜬다.

요사하리만치 붉은 안광이 어둠 속을 훑고 지나갔다.

그 남자, 강엽은 곧 위화감을 감지했다.

밤하늘을 가로지른 찬란한 은하수와 하늘을 촘촘히 수놓은 수많은 별들. 은은한 빛을 내리쬐는 보름달과 하늘 높이 솟은 아름드리 교목들.

동굴을 벗어나서 바깥으로 나온 것이다.

'나무가 암반을 뚫고 나온 건가?'

인적이 없는 숲속이었다.

나오자마자 모산혈조 일당과 대거리하는 것을 걱정했던 강엽으로서는 한시름 덜은 셈이었다.

흡혈귀가 되었다지만 이제 막 각성한 힘으로 수십 명의 무인들을 뚫고 모산혈조를 죽이는 것은 무리였으니까.

모산혈조가 빈사지경에 처했다고 해도 목내이의 세상에서도 가공할 사술을 보여줬던 작자가 쉽게 당해주진 않을 터.

자신의 손으로 복수하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어차피 얼마 살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여기서 적들을 몰살시키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보다는 몸을 빼는 게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문제는 두 사람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건데.'

우발과 야율산산.

사실 강엽에게 두 사람을 구해줄 의무는 없었다.

하지만 기껏 목내이에게 사정해서 목숨을 붙여놨는데 나 몰라라 하는 것도 애매했다.

만일 그들이 적들의 수중에 있다면 필시 강엽을 꼬실 미끼로 쓰일 테니 자신이 돕지 않는다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일단은 사정을 알아보고, 구할 수 있으면 구하되... 정 안 되면 포기해야겠지.'

싸움을 피하는 게 관건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강엽이 불현듯 표정을 굳혔다.

진한 피냄새가 산바람을 타고 와서 코끝을 찌르고 있었다.

짐승의 피가 아니었다.

"...사람?"

수풀을 헤치고 간 곳에 있는 것은 동굴에서 봤던 술사의 시체였다.

솔직히 술사의 시체가 나올 줄은 몰랐기에 당혹스러웠지만....

더 당혹스러운 것은 자신의 내면에서 솟구치는 충동이었다.

시체의 입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피를 보자 갈증이 일었다.

피를 마시고 싶다.

시체의 목덜미에 이빨을 박고 게걸스레 피를 빨고 싶다.

옛날엔 메스껍던 피냄새가 산해진미처럼 감미롭게 느껴진다.

흡혈귀가 됐을 때부터 각오하고 있었음에도, 막상 이런 식으로 자신이 괴물로 변했음을 자각하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후회하기는 너무 늦었지."

설령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똑같은 결정을 내렸을 터.

지금 당장 자결할 게 아니라면, 거부감이 들더라도 다른 사람의 피를 빨아야만 한다.

'음, 그래도... 옷은 입고 나서 빨아야겠지?'

아무렴 짐승처럼 벌거벗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피가 좀 튀긴 했어도 원단이 붉은색이라서 입을 만했다.

술사의 옷으로 갈아입은 강엽은 신발까지 신은 뒤 법복의 밑단을 조금 찢어만든 끈으로 길게 자란 머리카락을 질끈 동여멨다.

'그런데 왜 죽은 거지?'

속곳만 입은 술사의 몸통엔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살갗은 시커멓게 멍들었고 표면엔 살얼음까지 끼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목내이의 세상에서 야율산산이 장법으로 줄기들을 얼렸던가?

강엽은 술사를 죽인 게 비슷한 수법이 아닐까 추측했다.

어쩌면 술사를 죽인 흉수가 그녀와 무언가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뇌리를 스쳐갔을 때.

얼어붙은 것처럼 싸늘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아직 살아있는 놈이 있었나?"

'위험하다!'

고개를 돌릴 새도 없이 바로 몸을 날렸다.

시퍼런 섬광이 술사의 시체를 나무와 함께 쪼개버렸다.

"큭...!"

간신히 피한 강엽이 이를 꽉 물었다.

눈 한번 깜빡이는 찰나의 간극에 생사가 나뉘었다.

흉수가 제법이라는 듯 입매를 비틀었다.

"놀라운걸. 그걸 피할 줄이야. 한데 저놈은 내가 죽인 술사인데... 어째서 그 옷을 입은 거지?"

백포장삼을 걸친 여인이었다.

몸매는 호리호리하고 누가 봐도 미인이라고 할 만큼 이목구비가 선명하다.

다만 여인치고는 키가 커서 강엽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았다.

"...당신은 누구지?"

"그건 이쪽이 물어야 할 말. 네놈은 대관절 누구길래 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이냐?"

"진정해. 난 우연히 근처를 지났을 뿐이다."

"한낱 비렁뱅이가 내 칼날을 피할 리가 없지. 왜 시체의 옷을 빼앗아입었는지 몰라도, 이실직고하지 않으면 물고를 낼 것이다!"

서로 진심을 숨기니 제대로 된 대화가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강엽은 여인이 산장을 습격했다고 확신했지만, 한편이라는 보장이 없었기에 정체를 밝힐 수 없었다.

만약 저 여인이 흡혈귀의 존재를 알고 있고, 위해를 가할 목적으로 온 거라면?

'모산혈조보다 위험하겠지.'

하지만 여인은 물러날 생각이 없어보였다.

자신의 말을 증명하겠다는 것처럼 당장에 출수할 기세였다.

어물쩡 넘어갈 수 없다면 다소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당신의 말이 맞다. 난 우연히 지난 게 아니야."

"진작 그렇게 나오셨어야지."

"하지만 당신을 믿지는 못하겠군. 모산혈조를 잡으러 온 건 확실한 것 같은데...."

"네놈이 믿고 말고는 중요치 않다. 모산혈조까지 아는 걸 보면 놈과 관계가 있구나. 순순히 실토하지 않으면 오장육부가 얼어죽는 경험을 하게 될 거다."

"금발의 소녀와 무슨 관계냐?"

강엽은 도박수를 던졌다.

여인이 야율산산과 관계가 있다면 반응할 터.

"감히 더러운 입으로 공녀님을 부르지 마라!"

쐐애애액!

강엽이 재빨리 반응했음에도 아까보다 곱절은 빨라진 검을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다.

갈라진 어깻죽지에서 시뻘건 선혈이 튀어올랐다.

"이런 젠장."

강엽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여인이 받은 충격과 비할 바는 아니었다.

"상처가 저절로 아문다니?"

깊이 갈라진 상처가 치유된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만 같은 광경에 그녀는 자신이 헛것을 본 게 아닌지 의심했다.

"지금껏 죽인 놈들은 그런 짓을 하진 못했는데... 역시 사술을 익힌 놈이었구나!"

"이봐, 난 당신이 말한 공녀와 한편이야! 살기 위해 함께 싸웠다고!"

"흥, 그 말을 믿으라고?"

여인이 코웃음을 치면서 검격을 내쳤다.

상처를 금방 재생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

"목이 떨어져도 살 수 있을까!"

"빌어먹을!"

강엽이 욕지거리를 토했다.

검으로 나무를 쪼개버리는 고수를 감당할 수 있을까?

'살려면 감당해야지!'

상처를 입는 것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심장이나 머리만 피하면 된다.

목숨이 경각에 달하자 흡혈귀의 생존본능이 깨어났다.

까앙!

"뭐...야?"

여인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한 뼘이나 길어진 강엽의 손톱이 그녀의 검을 튕겨낸 것이다.

완전히 튕겨내진 못해서 손톱이 깨지고 피가 흘러내렸지만, 상처는 눈 깜빡일 시간에 아물었다.

"날 몰아세운 건 어디까지나 당신이다. 그러니 죽더라도 날 원망하지 마라."

"...!"

여인이 발작적으로 검을 뿌렸지만 강엽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펄쩍 뛰어오른 강엽이 여인의 정수리를 향해 뒷꿈치를 찍었다.

검으로 베어버리기엔 강엽이 너무 빨랐기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났다.

강엽이 착지하는 틈을 타서 베어버릴 심산이었다.

하나 그조차 여의치 않았다.

콰아앙!

발차기를 맞은 땅이 폭발했다.

풀쪼가리와 흙먼지가 사방으로 비산한다.

예상치 못한 충격에 밀려난 여인이 나무를 박차고 뛰어들어왔다.

날카로운 섬광이 강엽의 어깨며 팔뚝, 옆구리 등을 가리지 않고 찔렀기 때문에 강엽은 금세 피투성이로 변했다.

특히 팔뚝은 뼈가 반 이상 잘려나갈 정도였다.

조금만 가까웠다면 몸이 양단되었을 가공할 검세.

하지만 숨 몇 번 쉴 동안에 깨끗하게 아물어버리니 도리어 여인이 환장할 지경이었다.

"뭐 이딴 괴물이...!"

캉캉캉! 캉캉캉캉!!

검광이 빗발치고 불똥이 튄다.

강엽이 부상을 아랑곳하지 않고 손톱을 휘둘렀지만 성긴 그물처럼 사방을 틀어막은 검세를 뚫지 못해서 연신 고전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머리와 심장만은 반드시 보호하면서 상처를 재생하니 쉽게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냥 죽이는 수밖에 없나?'

앞서 선언한 것과 달리 여인은 강엽을 죽일 마음까진 없었다.

어떤 상처든 금방 나아버리는 재생력에 진저리를 치긴 했어도 일단은 목숨줄을 붙여놔서 정체를 캐고, 모산혈조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아볼 작정이었으니까.

구태여 힘으로 제압하려는 것은 우열을 일깨워주려는 의도였지만, 계속 이런 양상이 이어진다면 마음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연신 물러나기 바쁜 상황에서도 강엽의 눈은 그녀조차 두려울 만큼 흉흉한 살기를 내뿜었던 것이다.

'그래. 점혈로 제압해서 못 움직이도록 하면....'

그렇게 마음먹었을 때.

"내가 이겼다."

"뭣이?"

강엽의 입꼬리가 말려올라갔다.

단순한 허세라고 치부하기엔 꺼림칙한 미소였다.

불길한 예감을 느낀 여인은 보다 강한 검초로 응수하려고 했다.

그전에 강엽이 선수를 쳤다.

"헛!"

불현듯 발목을 잡힌 여인이 깜짝 놀라서 강엽을 쫓는 것도 잊고 고개를 내렸다.

수풀 사이에서 나온 붉은 줄기가 발목을 휘감았다.

"이게 뭔...!"

수십 개의 줄기들이 팔다리를 옥죄이자 비명이 터졌다.

"아아악!"

"간신히 붙잡았군."

강엽이 땀으로 축축한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일각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이 베이고 찔렸는지 성한 구석이 없었다.

상처가 쌓일수록 재생력이 더뎌졌기 때문에 이 이상 지체했다면 결과가 바뀌었을지도 몰랐다.

'아니, 그녀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면 이미 첫수에 결판이 났겠지.'

싸우면서 많은 빈틈을 노출했다.

자신도 알았던 것을 여인이라고 몰랐을까.

그때마다 입맛을 다시면서도 빈틈을 찌르지 않았던 것을 보면 말했던 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살의를 품지 않은 것이리라.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잡혀줄 수는 없는 노릇.

방심을 유도하면서 깊숙이 끌어들였고, 의도를 의심하지 못한 여인은 함정에 걸려들었다.

'마침 혈목(血木)이 근처에 있던 게 천운이었다.'

강엽이 주먹으로 깨부수고 나온 나무는 목내이가 수족처럼 부렸던 붉은 줄기였다.

똘똘 뭉친 줄기들이 강엽이 흡혈귀로 변하는 동안 지켜주었던 것.

본래라면 강엽이 밖으로 나온 시점에서 소임을 다했겠지만, 강엽이 위기에 처하자 다시금 공명했다.

강엽은 혈목을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여인을 붙잡으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고.

'편리한 능력이지만... 여길 나가면 다시 쓸 수 없겠군.'

이제 막 흡혈귀가 되었을 뿐.

목내이처럼 흡혈귀의 능력을 자유자재로 다루려면 더 많은 경험을 쌓아야만 했다.

"이익! 놓지 못하겠느냐!"

"움직이지 마라. 목 졸리고 싶나?"

지난날 노예상인에게 끌려다녔을 때처럼 팔이 뒤로 꺾인 채 손목이 묶이고, 손목을 묶은 줄기가 위로 올라가서 목과 연결된 구조.

움직이면 스스로의 힘에 의해 목이 졸리는 악랄한 포박술이었다.

"당신이 나를 죽일 생각이 없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다짜고짜 공격한 것도 사실.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는다면 나도 독하게 손을 쓸 수밖에 없어."

"웃기지 마라. 내가 굴복할 것 같으냐?"

"네 상전은 무사한가?"

"...."

"무사하군. 그러니 행방을 묻지 않았겠지."

여인의 눈이 흔들렸다.

강엽의 말대로 궁의 무사들은 야율산산을 확보했다.

다만 그들이 발견했을 땐 야율산산이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어떤 문제가 있는지 모르는 만큼 일단은 산장 안에서 보호하면서, 한편으로는 도망친 적들을 추격해서 섬멸하고 있었다.

"혹시 우발이라는 자도 같이 있었나? 중년쯤 되는 포의족 사내인데, 머리는 산발을 하고 수염은 덥수룩하다. 키는 나보다 작고."

"...이름은 모른다. 그도 정신을 잃었으니까."

이렇게까지 상세하게 알고 있다면 부정할 수도 없었다.

여인이 시인하자 강엽이 재차 물었다.

"이름을 말해라."

"...아설하."

"소속."

"그건...."

여인이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때였다.

"우리는 빙궁에서 왔단다."

신선처럼 천천히 하강하는 백발의 노파.

그녀를 알아본 아설하가 경악성을 토했다.

"장로님!"

2화. 괴물 (2)

강하다.

강엽은 직감했다.

이 노파와 싸우면 자신이 죽으리라는 것을.

단순히 지는 것을 넘어 목이 썰릴 것 같은 예감.

오척 단신의 노파에게 그만한 힘이 있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지만, 이미 강엽은 모산혈조라는 노마두가 싸우는 모습을 목도한 바가 있었다.

이 노파가 모산혈조만큼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은 확실했다.

흡혈귀의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도망쳐라. 다음을 기약해라.'

하지만 도망칠 수 있을까?

'몸을 돌리면 죽는다.'

노파는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그녀가 자신을 죽이지 않을 거라고 믿고 도망치는 것은 순진한 일.

"노인장께서는 누구십니까?"

"네가 잡은 아이와 같은 곳에서 온 늙은이란다. 그러는 아해야말로 누구인고?"

"별 시답잖은 이유로 살을 맞을 뻔한 불쌍한 피해자입니다."

"거참 이상하구나. 이 할미의 눈에는 아해가 우리 궁의 아이를 겁박하는 걸로 보이는데."

"어쩌겠습니까. 다짜고짜 죽자고 덤비는데. 일단 잡아두고 시시비비를 가려야지요."

"산산 그 아이와는 무슨 관계더냐?"

"그게 누굽니까?"

"네가 말한 금발의 소녀 말이다. 야율산산. 우리 궁주님의 금지옥엽이지."

"이름은 처음 듣습니다. 그녀가 한번도 자기 이름을 말한 적이 없으니까요."

"음, 하긴... 그 아이가 목을 다쳐서 목소리를 내지는 못하지. 살기 위해 같이 싸웠다고 했느냐?"

'이미 다 듣고 있었군.'

우연히 아설하가 위기에 처한 것을 발견한 게 아니라 저간의 사정을 꿰뚫고 있던 것이다.

언제부터 그들의 싸움을 보고 들었는지 몰라도 일이 어찌 돌아갔는지 정도는 알고 있을 터.

노파는 아설하부터 야단쳤다.

"설혼대주라는 녀석이 공녀와 부하들을 놔두고 적들부터 쫓다니. 네 성격이 급한 것은 알았지만, 오늘 일을 보니 실망을 금치 못하겠구나. 공녀의 호위로 적합한 인선인지 의구심이 들 정도야."

"...붙잡힌 마당에 무슨 변명을 하겠습니까.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돌아가면 일년 면벽을 명하겠다."

아설하는 면목이 없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안 그래도 사지를 묶였기 때문에 더 처량하게 보였지만 강엽은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노파를 응시하며 말했다.

"야율산산이 제정신이라면 저에 대해 말했을 터. 그럼에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건, 역시 그녀는 아직 깨어나지 못한 모양이군요."

"아해의 말이 맞단다. 산산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어. 그래도 모산혈조가 뭔가 수작을 부렸다는 것은 궁의 무사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그 아이와 함께 있었다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려줄 수 있겠지?"

노파가 강엽을 여태껏 놔둔 이유였다.

아설하와는 다르게 그녀는 존재감만으로 강엽을 꽁꽁 묶었기에 힘을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

강엽이 입을 다물었다.

야율산산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려면 진혈강림대법과 목내이에 대해서도 말해야 했다.

그럼 필연적으로 자신이 목내이의 뒤를 이어 흡혈귀가 되었다는 결론에까지 이르게 될 터.

그 모든 전말을 알고도 노파가 자신을 살려둘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에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흘흘, 말하기 싫은 이유가 있는 모양이지? 하지만 이 할미는 꼭 들어야겠는데...."

협박을 한 것도 아니고 기세를 뿜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강엽은 태산이 자신을 향해 밀려드는 압박감을 받고 돌처럼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쐐애애애액!

밝은 섬광이 밤하늘을 갈랐다.

워낙 높은 곳까지 올라갔기에 교목들이 빽빽이 자란 숲 속에서도 훤히 보였다.

"궁의 무사들이 쏜 신호탄입니다!"

"그렇구나."

노파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강엽을 돌아봤다.

"아해가 운이 좋구나. 저 신호탄은 공녀가 깨어났으니 귀환하라는 뜻이다."

"...!"

"하지만 이 상황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지. 아해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산산의 말을 들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만약 거짓부렁을 늘어놓은 거라면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집어치우라는 경고였다.

아설하처럼 노파 역시 강엽을 믿어야 할지 반신반의했기에 강엽을 데리고 가려는 것이다.

"싫다고 해도 끌고 가시겠군요."

"네가 산산과 인연이 있다면 그 아이가 무사한지 궁금하지 않겠느냐?"

강엽으로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야율산산의 한마디에 자신의 목숨이 달린 셈이지만 그녀가 제정신이라면 '약속'을 기억하고 있을 테니까.

"좋습니다. 가시죠. 대신 야율산산이 제 신원을 보증하면 저를 고이 놓아주셔야 합니다."

"나 빙오선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마."

* * *

야율산산은 정신이 몽롱했다.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은 기분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는 누군가와 나눈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조바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한 조바심이 그녀로 하여금 몽롱한 꿈속의 바다에서 나가도록 독촉했다.

"헉!"

"공녀님!"

야율산산이 헛바람을 삼켰다.

깨어난 직후라 눈빛이 흐리멍텅했기에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공녀님, 정신이 드십니까? 속하 아설하입니다! 빙오선 장로님께서도 오셨습니다!"

"아설... 빙오 장로...?"

목이 메어서 중간중간 툭툭 끊기는 목소리.

하지만 아설하는 감격에 겨워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야율산산을 꼭 껴안았다.

"예, 그렇습니다! 송구합니다, 공녀님! 속하가 불민하여 공녀님을 지켜드리지 못했습니다!"

"...설하 언니. 숨 막혀! 나 죽어!"

아설하의 가슴팍에 묻힌 야율산산이 켁켁거렸다.

하마터면 공녀를 질식시킬 뻔한 아설하가 얼굴이 벌게져서 허둥지둥대며 놔주었다.

그때 빙오선이 나섰다.

"이 할미를 알아보겠느냐?"

"장로님께서 여긴 어떻게...?"

"네가 납치당했다는 급보를 전해받았거늘 어찌 한가하게 궁에서 기다리겠느냐?"

궁의 무사들이 정체불명의 집단에게 공격받고, 야율산산이 납치당했다는 급보가 전해지자 빙궁은 발칵 뒤집혔다.

그래서 빙오선이 궁주의 부탁을 받고 노구를 이끌고 먼 북해에서 귀주성까지 달려온 것이다.

경공만 따지면 궁주를 능가하는 그녀는 며칠 만에 수천 리에 달하는 길을 주파하여 귀양까지 왔다.

이후 궁의 무사들이 남긴 밀마를 발견하고 무릉산맥의 장대하고 험준한 기슭에 숨겨진 산장까지 찾아온 것이다.

그녀가 왔을 때는 야율산산이 구조된 뒤였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했기에 곁을 지키고만 있었다.

그러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태동한 것을 감지하고 한달음에 아설하가 싸우는 곳까지 갔다.

그곳에서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강엽이 어떤 상처를 입든 순식간에 재생하는 것까지 본 것이다.

그것만 해도 팔십년 노강호 인생에서 듣도 보도 못한 기사였건만, 그녀의 놀람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야율산산은 목소리를 되찾을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다만 그녀가 나았다는 것만 알 뿐.'

'그럴 리가....'

야율산산은 주화입마에 걸렸다.

십이경맥 중 세 군데가 꼬였고, 그중 인영혈이 지나는 족양명위경맥이 심하게 꼬이는 바람에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북해에서 제일 고명한 의원조차 두 손 두 발 들어서 중원에서 신의라 불리는 의원을 찾아간 것이다.

한데 뜬금없이 나았다고 하니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결국 저 아해의 말이 맞았구나.'

강엽은 벽에 기댄 채 야율산산이 깨어나서 고향 사람들과 해후를 나누는 것을 보고 있었다.

야율산산이 알아보기 전까지는 먼저 나설 생각이 없는 것처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느냐?"

"...네. 그런데 죄송해요. 말씀드리지 못할 것 같아요."

"이유가 있겠지?"

"약속을 나눴어요."

그 말에 빙궁의 무사들이 일제히 강엽을 돌아보았다.

자연히 야율산산도 그들의 시선을 쫓았다가 벽에 기댄 강엽을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다.

"공자님!"

"...정말 아는 사이였나?"

아설하가 뜨악해서 중얼거렸다.

하마터면 상전의 지인을 죽일 뻔한 것이다.

물론 실제로 살심을 품지는 않았어도 공격했다는 것은 명백하니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빙오선은 그냥 지나가지 않았다.

"설혼대주."

아설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물론 당시엔 강엽의 정체를 몰랐으니 힘으로 제압하고 전후사정을 알아본다는 선택은 합당했다.

다만 강엽이 야율산산과 그냥 안면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함께 싸운 사이라는 게 문제였다.

만약 공녀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을 죽였다면 천하의 몹쓸년이라고 욕먹으며 손가락질당했을 터.

얼굴이 화끈거리고 수치심이 들었지만 아설하는 자신의 실수를 외면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가 강엽에게 허리를 숙이며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왜 언니가 사과를 해요?"

사정을 모르는 야율산산만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서로 오해가 쌓인 게지. 이번엔 우리가 잘못해서 아무래도 눈치가 보인다만...."

"공자님은 절 구해줬어요. 절 구해줄 필요가 없었는데도요. 공자님이 아니었으면 단언컨대 전 이 자리에 없었을 거예요."

빙오선이 쓴웃음을 지었다.

강엽은 서로 목숨을 빚졌다고만 했을 뿐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야율산산의 말을 들어보면 그녀가 더 많은 구명지은을 입은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해가 안 되는구나. 무슨 일을 겪었는지 말할 수 없다니. 저 사내와 약속을 나눴느냐?"

"아, 아니에요. 다른 사람... 아니,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다른 존재예요."

뭔가 횡설수설하는 말투였지만 빙오선은 이 자리에서 자세히 캐묻지는 않기로 했다.

야율산산의 눈빛에서 공포를 엿봤기 때문이었다.

빙궁의 장로인 그녀가 있는데도 말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두려운 존재였던 걸까.

그때 야율산산이 조심스레 물었다.

"공자님, 몸은... 괜찮으신 건가요?"

"아직까지는 괜찮은 것 같다."

야율산산은 강엽이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안다.

그녀와 우발을 살리기 위해 목내이와 거래를 했고, 그 결과 흡혈귀가 되었다는 것을.

사실은 조금 달랐지만 야율산산도 목내이의 세상에서 일어난 일을 전부 알지는 못했다.

"공자님이 없었으면 전 죽었을 거예요. 벼랑에서도, 동굴에서도, 그... 세상에서도. 공자님은 제 목숨을 세 번이나 구해주셨어요."

이건 강엽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동시에 빙궁의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강엽이 자신을 세 번이나 구해주었으니 알아서 처신하라는 우회적인 경고.

상전의 은인을 죽일 뻔한 아설하는 다시 한번 얼굴이 누렇게 떴고, 빙오선도 쓰게 웃었다.

"이 늙은이도 실례가 많았소. 늦었지만 공자가 겪은 일에 유감을 표하는 바이오."

그녀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비록 지은죄가 있다 해도 그녀 같은 노강호가 새파란 애송이에게 사과를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심지어 말투도 달라지지 않았나.

"고개를 드십시오. 서로 간에 쌓인 오해를 풀었으니 은원은 남지 않았습니다."

꼬투리를 잡아봤자 좋을 게 없다.

강엽의 입장에서는 이쯤에서 빙궁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떠나는 게 가장 깔끔했다.

빙오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원한은 풀었지만 은혜가 남았소. 천하의 모든 문파가 그렇듯 북해빙궁 역시 은원을 잊지 않는다오. 공녀의 목숨을 세 번이나 살려주었으니 우리 역시 공자에게 셈을 치러야 저울의 추가 맞을 터."

강엽이 야율산산을 돌아보자 그녀는 얼른 받으라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빙오선이 소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 늙은이의 보은패요. 언젠가 이걸 갖고 북해에 찾아오면 빙궁의 사람들은 공자를 은인으로 맞이할 것이오. 설령 이 늙은이가 죽은 이후라도 말이오."

'빙궁에 찾아갈 일이 있을까?'

북해에 있다고 했으니 장성 넘어 새외까지 찾아가야 할 텐데 그럴 일이 있을까 싶었다.

그렇지만 받아서 손해를 볼 일은 없었기에 강엽은 빙오선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혹시 달리 원하는 게 있으면 말씀하시구려. 우리가 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주겠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당연히 돈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든, 다른 곳으로 가든 일단은 돈이 있어야 뭐든 해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강엽은 다른 걸 물었다.

"모산혈조는 어찌 됐습니까?"

"그는 도망쳤소. 모산파의 제자들과 혈교의 악귀들이 목숨 걸고 호위했다고 하오. 어쩐 일인지 궁의 무사들이 덮쳤을 땐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던데...."

"그럼 이 산장은 빈집이나 다름없군요."

"일단은 그렇소만."

지금은 불의의 기습을 받고 후퇴했지만, 상황이 일단락되면 모산혈조 일당이 언제 돌아올지 몰랐다.

야율산산도 깨어났겠다, 빙궁의 무사들도 떠날 참이니 무언가를 약탈하고자 한다면 지금밖에 기회가 없었다.

"지금부터 제가 할 일을 눈감아주셨으면 합니다."

강엽은 산장을 약탈할 작정이었다.

2화. 괴물 (3)

강엽이 모산혈조의 방에서 나온 것은 오경이 막 지났을 무렵이었다.

야율산산이 물었다.

"정말 그거면 되겠어요?"

강엽이 챙긴 것은 얼마 없었다.

산장 어딘가에서 찾은 피풍의와 죽립을 걸치고, 등 뒤에 작은 바랑을 멘 게 전부.

그걸로는 산장의 재화 중 일할도 가져갈 수 없지만 강엽은 챙길 만큼 챙겼다고 생각했는지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충분하다. 내가 원한 '귀물들'은 모두 챙겼어."

"...귀물들이요?"

가치에 비해서 부피가 작은 보석이나 금괴일까?

야율산산이 눈치를 보았다.

"나머지는 우리가 가져가도 된다고 했죠?"

"어차피 빙궁이 없었다면 털지도 못했을 거다."

강엽이 챙기지 못한 보물들은 빙궁이 차지했다.

나중에 모산혈조가 뒷목을 잡을 걸 생각하면 남은 보물을 몰아줘도 전혀 아깝지 않았다.

문득 야율산산이 손가락을 꼬물거렸다.

"음, 혹시... 빙궁에 오실 생각은 없으세요?"

"빙궁에?"

"빙궁에 사술이나 술법에 조예가 깊은 사람은 없지만, 그걸 고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야율산산은 차마 흡혈귀라고 말하지 못했다.

강엽이 그걸 언급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호의는 고맙지만, 일단은 개인적으로 알아볼 생각이다."

평범한 의원은 고치지 못한다.

어쩌면 천하제일의 신의가 와도 소용없을지 모른다.

흡혈귀는 병이 아니니까.

'근본부터 바뀐 거지.'

사람과 비슷하게 생겼어도 속알맹이는 다르다.

실제로 강엽은 흡혈귀가 된 이후로 자신이 내면부터 바뀌어가고 있음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그럼 나중에라도 성수장(聖手莊)에 가보세요."

"성수장?"

"제가 원래 가려고 했던 곳이에요. 중원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신다는 신의가 계세요."

"...기회가 되면 꼭 들르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만큼 대단한 의원이라면 흡혈귀를 고치지는 못할지라도 강엽조차 모르는 흡혈귀의 비밀을 알아낼지도 모르지 않나.

그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지만, 시도해볼 만한 가치는 있을 터.

그 말을 듣고서야 야율산산이 말갛게 웃었다.

"참. 떠나기 전에 이름 좀 알려주세요. 공자님은 제 이름을 아는데 전 공자님 이름을 모르잖아요."

강엽의 표정이 묘해졌다.

야율산산과 처음 만났을 때 그녀에게 이름이 뭐냐고 물었는데.

어쩌다 보니 자신은 그녀의 이름을 알고,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모르게 돼버렸다.

고개를 숙인 강엽이 그녀만 들을 수 있도록 작게 속삭였다.

"강엽이다."

"...읏!"

야율산산이 살짝 움츠러들었다.

왠지 새하얀 고양이가 털을 곤두세우는 것만 같은 모습.

피식 웃은 강엽은 빙궁의 무사들과도 눈인사를 나누었다.

지은 죄가 있는 아설하는 다시 고개를 숙였고, 그 옆엔 빙궁의 사람들과 당분간 같이 가기로 한 우발이 강엽을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이런 식으로 헤어지게 될 줄은 몰랐는데... 어쩌면 이런 방식이 가장 나을지도 모르지.'

강엽이 몸을 돌렸다.

"그럼 건강하게 지내라."

"...공자님도요."

야율산산과의 작별을 뒤로한 채 강엽은 쪽빛으로 물들어가는 밤하늘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동이 트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길을 서둘러야 했다.

* * *

강엽은 후회했다.

"젠장, 이거 생각보다 꽤... 힘든데...."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태양볕.

날붙이에 베이고 찔려도 재생력 덕분에 통증을 거의 느끼지 못했건만, 태양볕의 고통 앞에선 그런 재생력조차 무색해졌다.

마침 태양볕이 맨손에 닿자 살갗이 타면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큭...!"

치이이익!

얼른 피풍의로 가렸음에도 살점이 녹아내리다시피 했다.

뼈가 드러난 손은 서서히 아물고 있었지만, 이전만큼 빠르게 회복되진 않았다.

'치명적일 거라곤 생각했지만....'

목내이가 괜히 경고한 게 아니었다.

만약 사방이 훤히 노출된 장소에서 태양볕을 쐬었다면 그 자리에서 잿더미가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나마 먹구름이 와서 망정이지.'

서쪽에서부터 몰려오는 먹구름.

하늘이 흐려지자 태양도 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쏴아아아아아!

굵직한 장대비가 미친 듯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는 게 마음에 들진 않아도 지금이야말로 태양을 피할 적기였다.

한동안 산 속을 누빈 강엽은 암벽 사이에 숨겨진 작은 동굴을 발견하고 냉큼 들어갔다.

태양이 목숨을 위협하는 만큼, 시간이 조금 지체되더라도 날이 저물 때까지는 숨어있는 게 최선이었다.

다만 기다리고만 있어야 한다는 게 답답하긴 했다.

'좀 심심한데....'

가만히 앉아만 있으려니 좀이 쑤시는 기분.

강엽은 시간을 때울 겸해서 바랑에서 주섬주섬 서책을 꺼냈다.

그것은 모산혈조의 서가에서 훔친 모산파의 술법서였다.

"...."

빗소리 속에서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낮게 깔린다.

본디 모산파는 진나라 사람인 위존자가 개파한 유서깊은 도문.

따라서 술법서 역시 도가에 대한 깊은 이해를 요구하고 있었지만, 강엽은 어쩐지 술법서의 구결이 그렇게 어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금까지 읽어본 도가 경전은 도덕경을 비롯해 기본적인 몇 가지밖에 없는 강엽으로서는 퍽 당혹스러우면서도 신기한 기분이었다.

'왜 그런지 알 것 같군.'

흡혈귀의 피에 잠재된 영성(靈性)이 그걸 가능케 했다.

그것도 그냥 흡혈귀가 아니라 진조의 영성이 아닌가.

비록 강엽은 술법에 문외한이지만 그에게 피를 물려준 목내이는 진혈강림대법을 창시할 만큼 술법에 정통했던 존재.

그의 후계자가 된 강엽은 흡혈귀의 능력은 물론이고 술법에 대한 재능까지 물려받은 것이다.

'지금 당장 익히는 건 무리겠지만... 공을 들일 가치는 있겠어.'

훔친 술법들을 일부라도 익힐 수 있다면 살아남는 데 큰 도움이 될 터.

하지만 얼마 안 가 강엽은 비급을 내려놔야 했다.

뜻밖의 불청객이 동굴 밖을 서성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침 불청객도 동굴에 선객이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거기 누가 있는가?"

'음?'

공교롭게도 불청객과는 구면이었다.

설마 산장을 나오고 나서 이자를 만날 줄이야.

"혹시 장로님의 제자인가?"

불청객은 아직 강엽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하기사 술사들의 법복을 입었으니 모산혈조의 제자로 착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그럼 이용할 건덕지가 있겠지.'

강엽은 배를 잡으면서 끙끙 앓는 신음을 흘렸다.

바깥에서 서성거리는 자가 마음껏 착각하도록.

뇌옥에서 보고 들은 게 있었기에 흉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쳤나 보군. 금창약이 줄 테니 기다리게."

말은 그러면서도 칼자루를 움켜잡고 있는 것이 수상쩍은 기미가 보이면 바로 칼을 뽑을 기세였다.

아설하와의 싸움으로 말미암아 무림 고수들이 얼마나 빠른지 배운 강엽은 상대가 제 기량을 발휘하도록 놔둘 생각이 없었다.

상대가 입은 흑포 자락이 자신의 간격에 들어올 때까지 계속 고통에 허덕이는 모습을 연기했다.

"끄윽...!"

"자네 정말 괜찮나?"

좀 더 가까이 왔다면 좋았겠지만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일정 반경 안쪽으로는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강엽은 상대의 신중함에 혀를 차면서 거리를 쟀다.

상대가 오지 않는다면 이쪽에서 갈 수밖에.

'지금이다!'

강엽이 땅을 박차며 뛰어들었다.

* * *

흑포무인은 섬전처럼 반격했다.

동굴이 어두운 데다 강엽이 머리를 숙이고 있어 얼굴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뭔가 께름직한 예감이 들었고, 가까이 와서야 뭐가 이상한지 깨달았다.

'이놈은 술사가 아니다!'

강엽에게서는 모산파 술사들 특유의 퇴폐적인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굶주린 맹수를 맞닥뜨린 것마냥 오싹한 한기가 등골을 훑고 지나갔다.

그는 자신의 감을 신뢰했다.

"이놈!"

전광석화처럼 뽑혀나온 칼날이 어둠을 꿰뚫었다.

강엽은 피하지 못했다.

아니, 굳이 피할 필요가 없었다.

동굴의 천장이 낮고 너비도 좁았기에 흑포무인에게 허락된 공간은 한정되었던 것이다.

흡혈귀가 되면서 얻은 초감각이 숙련된 무인의 움직임을 손금처럼 들여다봤다.

시선과 표정, 근육의 움직임, 칼끝이 향하는 방향까지.

칼집에서 벗어난 칼날이 향한 곳엔 심장이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 강엽은 몸을 살짝 틀었다.

내력이 깃든 칼날이 근육을 찌르고, 늑골과 폐부를 가르는 감각이 선명하게 전해진다.

"흐읍!"

강엽의 눈에 핏발이 섰다.

어쨌든 심장을 피했으니 반은 성공한 셈이었다.

흑포무인의 팔뚝을 붙잡아서 단단히 옥죄였다.

폐부를 관통한 칼날을 더 깊숙이 밀어넣으며 앞으로 나아가자 흑포무인이 흠칫 굳어졌다.

이제야 강엽을 알아본 걸까?

"네놈은...!"

콰작!

"끄아악!"

날카로운 송곳니가 흑포무인의 목덜미를 꿰뚫었다.

어젯밤 강엽은 빙궁의 눈치가 보여서 피를 마시지 못했다.

지금이야말로 처음으로 사람의 피를 마시는 것이었다.

그것도 모산혈조 다음으로 강한 흑포무인의 피를!

쭈와아아아악!

흡혈의 쾌감이 고통을 눌렀다.

시간이 지날수록 흑포무인의 얼굴은 핏기가 가시면서 창백해졌고, 반대로 강엽의 힘은 강해졌다.

흑포무인은 강엽을 죽이려면 몸통을 파고든 칼날에 대량의 내력을 주입하여 칼날을 폭발시키는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칼날이 터져나가면 그 조각들이 심맥을 찢어발길 테니 흡혈귀라고 해도 무사치 못할 터.

그러나 흡혈의 여파인지 내공이 이어지지 않았다.

"꺼걱...! 끄윽...!"

마침내 만족할 만큼 포식한 강엽이 손으로 툭 밀치자 흑포무인은 매가리 없이 쓰러졌다.

송곳니에 뚫린 목덜미가 간헐적으로 피를 토해낸다.

"더럽게 아프군."

강엽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등까지 빠져나온 칼날을 빼냈다.

칼날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바람에 내부는 엉망진창이었다.

다만 피를 가득 마셨기 때문인지 생각보단 견딜 만했다.

칼날을 빼내자 근육이 수축하면서 출혈이 멈추었고, 뼈와 장기가 수복되기 시작했다.

모산혈조가 그토록 부르짖었던 흡혈귀의 불사력을 목격한 흑포무인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큭, 크크...! 이게 흡혈귀란 말이지...? 장로가... 끅, 괴물을 만들었어...."

"뭘 새삼스럽게. 누가 들으면 흡혈귀 처음 본 줄 알겠군."

휘하의 부하가 목내이에게 피를 빨려 절명하는 광경을 직접 보지 않았던가?

흑포무인이 쓰게 웃었다.

"젠...장, 그렇지. 나도 당할 줄은 몰랐는데...."

"모산혈조를 호위해야 할 놈이 왜 홀로 움직이는 거지? 무슨 바람이 불어서 산장에 돌아온 거냐?"

"...."

흑포무인은 대답하는 대신 강엽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것만으로도 흑포무인의 심중을 파악한 강엽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나를 데려가려고 온 거였나. 이런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다니 그 늙은이도 참 어지간한걸."

"흐, 흐흐... 동감한다. 참... 지랄맞은, 끄윽... 늙은이지. 그 나이 처먹고, 욕심만... 많아서 말이야...."

가진 피의 절반 이상을 빼앗긴 흑포무인은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은 모산혈조를 욕하면서 죽었다.

"...."

강엽은 흑포무인의 눈빛에서 초점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신색을 가라앉혔다.

흡혈귀가 되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요 근래 너무 많은 일을 겪었기 때문인지 큰 감흥이 일진 않았다.

다만 이런 광경을 앞으로 살아가면서 계속 보게 될 거라고 생각하니 입맛이 썼다.

흡혈귀가 사람의 피를 먹는 한 어쩔 수 없이 겪는 숙명일 터.

문제는 그 이후였다.

'시작됐군.'

우우우우웅...!

위장을 가득 채우다 못해 흘러넘칠 것 같은 피가 빠르게 소화된다.

변화를 감지한 강엽은 즉시 바닥에 주자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흡혈귀가 피를 마시는 이유.

그건 피에 내재된 타인의 선천지기를 흡수하기 위함이었다.

강엽이 흡수한 흑포무인의 선천지기는 그의 전신 경맥을 돌면서 한 점으로 수렴했다.

세인들이 단전이라고 부르는 곳, 바로 아랫배의 기해혈을 향해서.

'혈공(血功)....'

목내이가 만든 내공심법.

오직 흡혈을 통해서만 지고한 경지에 오를 수 있는 흡혈귀 전용의 독문심법이었다.

내가 호흡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혈공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경맥을 돌며 단전을 키우고 있었다.

이윽고 운기가 끝났을 때.

강엽의 눈에선 섬뜩하리만치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3화. 낭인 (1)

귀주에서부터 천릿길을 주파한 강엽은 사천성 동부의 대도시 중경에 다다랐다.

굳이 중경을 행선지로 잡은 것은, 언젠가 책에서 '중경은 장강과 가릉강이 만나는 유역에 위치해서 수시로 안개가 끼는 데다 흐린 날이 맑은 날보다 많다'는 글귀를 읽은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흡혈귀에게는 제격이지.'

야심한 시간이라 성문은 굳게 닫힌 상황.

도시로 들어가려면 성벽을 넘어야 하는데, 지난 며칠간 흡혈귀의 몸에 익숙해진 강엽은 관병들 몰래 들어갈 자신이 있었다.

툭!

야조처럼 훌쩍 성벽을 넘어 반대편에 가뿐히 착지한다.

성벽을 순시하는 관병들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신출귀몰했다.

'좋아. 도시에 들어오는 것은 성공했고....'

은신처만 찾으면 되는 상황.

근처에 있는 객잔을 발견한 강엽은 주렴 입구를 헤치고 들어갔다.

주인장과 점소이는 탁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입에서 침까지 흘리고 있는 게 가만히 두면 아예 머리를 박고 잠잘 기세였기에 강엽은 일부러 인기척을 내서 두 사람을 깨웠다.

"헉! 소, 손님!?"

"뭐야. 손님이라고?"

점소이에 이어 정신을 차린 주인장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강엽을 발견하고 입가의 침을 슥 닦았다.

"이 느지막한 밤에 손님이 오실 줄은 몰랐구먼. 묵으러 오셨수? 식사도 하실 텐가? 지금 남은 건 만두밖에 없긴 한데."

"식사는 됐고 방하고 목욕물만."

"이 밤에 목욕을?"

"셈을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럼 은전 석냥은 주셔야 되겠는데."

뜨거운 물을 대령하는 것부터가 힘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커다란 목조통에 뜨거운 물을 여러번 퍼날라야 하는데, 장작을 준비하는 것부터 물을 데우는 것까지 모두 사람의 손을 거치기 때문에 방값보다 비쌌다.

그래도 은전 석냥은 심한 바가지였지만 강엽은 군말없이 돈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오는 동안 개울에서 대충 씻기는 했어도, 뜨거운 물에서 근육을 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강엽이 남루한 몰골답지 않게 선뜻 돈을 내놓자 주인장도 할 말이 없는지 머리만 긁적거렸다.

"야, 가서 물 좀 데워라!"

점소이의 표정이 썩었지만 주인장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막 깨달았다는 듯이 강엽을 곁눈질하면서 말을 이었다.

"아차차, 남은 방이 별로 없수다. 좀 그늘진 방에서 묵으셔야 할 것 같은데...."

뻔히 보이는 수작이었지만 강엽은 따지지 않았다.

볕이 잘 드는 방을 줬다면 오히려 바꿔달라고 말했을 터.

'목욕은 여러번 할 거니까. 그걸로 갈음한 셈치면 되겠지.'

누가 손해를 볼지는 두고 볼 일.

강엽이 고개를 끄덕이자 주인장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면서 방을 안내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