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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序)

강엽은 황촉의 불을 껐다.

끄트머리만 간신히 남은 황촉을 내려다보는 강엽의 심정은 편치 않았다.

주야에 상관없이 과거 공부에 매진하기 위해 황촉을 샀지만 없는 살림에 황촉은 사치였다.

달빛이 밝다면 달빛에 의지해보겠지만, 오늘은 달빛도 먹구름에 숨어 어둡기만 했다.

'반드시 회시(會試)에 합격한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는지라 배움이 늦었지만 부모님은 아들을 지원해주셨다.

없는 살림에도 서당에 보냈다. 일찌감치 배움의 즐거움을 깨달은 강엽은 재능을 증명했다.

그리고 약관에 이르자마자 향시(鄕試)에 합격했다.

부모님이 역병으로 인해 돌아가신 후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회시, 나아가 전시(殿試)까지 합격하여 입신양명해서 증명할 것이다.

그분들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하지만 시험이 가까워져서 그럴까, 최근 들어 부쩍이나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중원 전역에서 모인 인재들 중에서도 합격 인원은 한줌도 되지 않는 것이 회시다.

강엽이 고장에서 제법 이름난 신동이었어도 회시에 합격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후... 잠깐 바람이나 쐴까.'

답답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밖에 나왔다.

삼경(三更)이 넘은 밤은 조용하다.

그랬어야 했다.

"살려주세... 흡!"

"조용히 해!"

괴로움에 가득한 신음소리.

하필이면 바로 옆에 있는 골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강엽의 미간이 절로 굳어졌다.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 순간.

"이봐, 여기도 사람이 있는데?"

어느새 담벼락을 딛고 선 사내가 강엽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히죽거렸다.

사내의 허리춤에 매달린 박도(朴刀)가 강엽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박도는 먼 길을 다니는 나그네라면 누구나 하나쯤 패용하고 다니는 물건이지만, 이 야심한 시각에 삿된 짓을 벌이는 인간이 평범한 나그네일 리가 없다.

'무림인!'

하필이면 무림인을 맞닥뜨릴 줄이야.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냥 밤산책이나 나왔는데, 그것도 집 안에만 있었는데 무림인을 만나다니.

웬 여인을 포대에 넣으려고 한 것만 봐도 이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명확했다.

"집이 작네. 형씨 혼자 사나봐?"

"...당신네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가주시오. 기왕이면 거기 있는 여인도 놓아주시고. 지금 당장 소리를 질러 사람들을 부를 수도 있소."

"크하하! 꽤 강단이 있는걸. 먹냄새가 나는 걸 보니 붓쟁이 나부랭이인 것 같은데."

"거기서 뭐 혀? 안 갈 거여?"

다른 한 사람까지 관심을 보였다.

얼굴 옆쪽에 흉터를 매달았고, 수염을 고슴도치처럼 기른 텁석부리 장한이었다.

"가야지. 그런데 단주가 남녀 상관없이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납치하라고 하지 않았나?"

"...참말이여? 이 화상, 뼈다귀밖에 없는 거시 가다가 뒈질 거 같은디?"

"그건 이놈의 불운이지."

"...."

강엽은 서서히 뒷걸음질을 쳤다.

도망치는 척하면서 소리를 질러 이웃들을 부를 생각이었다. 사람들이 전부 튀어나오면 이놈들이 뭘 하겠나.

하지만 목구멍을 쥐어짜기도 전에 두터운 손이 그의 입을 강제로 틀어막았다.

"읍읍!"

"안 되지. 함부로 떠벌리면."

뻐억!

사내의 주먹이 복부를 치자 강엽의 몸이 새우등처럼 꺾였다. 너무 아파서 눈알이 빠질 뻔했다.

'시발, 이게 무슨...!'

아닌 밤중의 홍두깨도 정도가 있지.

불과 일각 전까지만 해도 과거에 합격할 수 있을까 고민했었거늘, 이제는 과연 이자들로부터 무사히 도망칠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할 팔자로 바뀌었다.

"이 새끼도 들고 튀자고. 단주 그 인간도 물건이 많을수록 많이 벌 수 있다고 했잖아?"

1화. 대법 (1)

덜컹!

흔들리는 바닥 때문에 엉덩이가 아프다.

무심코 엉덩이를 어루만진 강엽은 안에 가득한 사람들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이게 무슨 꼴인지....'

손바닥만한 창문 틈새로 들어온 한 줄기 볕이 어두운 짐마차에 드리운 유일한 빛이었다.

단지 볕이 드리운 것만으로도 안도감이 드는 것도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근 두어 달간 좁은 짐마차에 갇혀 있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다만 강엽은 다른 문제로 낙담했다.

'지금쯤이면 회시도 끝났겠군.'

과거에 떨어질 것은 각오했다.

하지만 과거를 보지도 못할 줄이야.

사람 앞날은 알 수 없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햇볕의 방향과 뜨거워지는 무더위로 남서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아차렸을 뿐.

가까스로 용기를 내서 질문을 해도 욕설과 매타작만 돌아왔다.

기회를 봐서 도주하는 것도 두 손이 포승줄로 꽉 묶여있어서 여의치 않았고.

기껏 용기를 내서 도주를 시도했던 이들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런 일이 연이어 벌어지자 사람들은 희망 따위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강엽 역시 마찬가지.

앞날에 대한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어디론가 팔려가는 것 같은데... 설마 국경을 넘는 건가?'

남서쪽으로 두 달을 왔으니 지금쯤이면 귀주나 운남 어딘가를 지나고 있을 것이다.

이미 고향에서 수천 리나 떨어진 곳으로 온 시점에서 다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강엽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쿵쿵!

"이곳만 지나면 도착한다!"

문득 창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이보시오! 말 좀 물읍시다!"

짐마차에 있는 이들이 창살을 붙잡고 아우성을 쳤다.

"도착이라니! 여기가 대관절 어디요? 우린 어디로 끌려가는 거란 말이오!?"

"닥쳐!"

안면을 맞은 사내가 으악 소리를 내면서 주저앉았다.

코뼈가 부러졌는지 피가 흥건하게 쏟아지자 같이 소리쳤던 사람들도 덩달아 흠칫 놀랐다.

칼잡이가 눈알을 부라렸다.

"조용히 해. 뒈지고 싶지 않으면."

"...."

기세에 눌린 사람들이 눈을 내리깔았다.

저게 단순한 엄포가 아니라는 것은 지난 두 달간의 경험으로 뼈저리게 깨달았다.

한동안 마차가 덜컹거리는 소리만 이어지는 불편한 침묵 속에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채워주는 것은 칼잡이들이 낄낄거리며 떠드는 소리뿐이었다.

"이번에는 값 좀 후하게 받으려나."

"시발, 당연히 그래야지. 저번에 잡아온 놈들보다 더 많은데. 이번에 한 몫 챙기면 놀고 먹을 거다."

"아예 귀양(貴陽)에 가자고. 그래도 그쪽은 큰 도시니 기녀들도 예쁜 년들이 많겠지."

"쩝, 생각해보니 아쉽구먼. 저기 갇힌 계집들만 따먹어도 여자 생각이 이렇게 간절하지는 않을 텐데."

짐마차에 갇힌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강엽은 여인들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리는 것을 봤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지금은 그녀들을 위로하기보다는 칼잡이들의 얘기를 귀담아듣는 게 중요했다.

어쩌면 저들의 입에서 앞으로 팔려가는 곳에 대한 얘기가 나올지도 모르지 않은가?

하지만 민감한 얘기는 일절 듣지 못했다.

기껏 나온 얘기는 예전에 한 칼잡이가 욕정에 못 이겨 젊은 여자를 범했는데, 아랫도리가 뜯겨죽었다는 살벌한 얘기였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피부에 소름이 돋지만 지금 상황과는 하등 상관없는 이야기.

강엽은 김샜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시간낭비했군. 괜히 들었어.'

* * *

녹림이 우거진 험준한 골짜기.

짐마차가 더 이상 지나갈 수 없을 만큼 좁고 가파른 산길은 칼잡이들도 난색을 표하게 만들었으나, 그렇다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일 따위는 없었다.

짐마차를 한갓진 곳에 세워둔 칼잡이들이 문을 열고 사람들을 강제로 끌어내렸다.

'저런 애까지 잡아왔나?'

또 다른 짐마차에서 내린 사람들 중엔 앳된 소녀도 있었다.

특이하게도 머리카락은 선명한 금색이고 얼굴은 새하얀 색목인 소녀였다.

어른들 틈에 섞인 꾀죄죄한 색목인 소녀는 겁이 나는지 주변의 눈치를 보기만 했다.

참다 못한 칼잡이들이 등을 떠밀자 그제야 다른 사람들을 따라 대열에 합류했다.

"전부 내렸습니다, 단주님."

사람들의 머릿수를 세어본 칼잡이가 준마를 탄 남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험악한 칼잡이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문사풍의 준수한 남자가 말 위에서 섭선을 부치고 있었다.

얼굴 가득 난 자잘한 흉터들만 없었다면 유생이라고 해도 믿었으리라.

강엽은 차게 식은 눈으로 그 남자를 응시했다.

두 달간의 여정에서 칼잡이들의 입으로만 들었던 단주라는 작자를 처음으로 본 것이다.

'저자가 원흉이군.'

저자만 아니었어도 이런 고생을 할 일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삶도 파괴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잔도로 간다. 여기까지 온 이상 한 놈이라도 잃으면 손해가 막심해. 무슨 일이 있어도 상품들이 대열을 이탈하지 않도록 감시하도록."

"명을 받듭니다."

벼랑 위의 잔도는 조금만 삐끗해도 천장단애로 떨어질 수 있는 위험천만한 산길.

단주의 말마따나 애써 납치한 상품을 잃는 것은 손해였기에 칼잡이들은 포승줄을 풀었다.

"잠깐 자유로워졌다고 도망칠 생각은 말어. 여기서 도망칠 데도 없겠지만...."

도망치면 잔도를 벗어나야 하는데, 그럼 바로 천길 낭떠러지였다.

아무리 악귀같은 놈들의 손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황천 구경을 하고 싶은 사람은 없기 마련.

사람들은 덜덜 떨면서도 위태로운 잔도에 오르기를 택했고, 강엽은 대열의 중간쯤에 섰다.

절벽의 아득한 높이에 사람들이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투두둑...!

"히익!"

돌멩이가 떨어지는 소리에 겁을 먹은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벽에 달라붙었다.

강엽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떨어지면 시체도 못 찾아!'

하지만 살려면 걸어야 한다.

등 뒤에서 칼잡이들이 시퍼런 살기를 뿌리며 어서 걸으라고 종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망설이면 단매를 퍼부었다.

빠악!

"어서 빨리 걷지 못해!? 대열이 늦어지고 있는 게 안 보인단 말이냐!"

단매를 맞은 남자가 발발 떨면서도 일어났다.

곳곳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강엽은 용기를 내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보폭은 최대한 작게, 하지만 벽에 달라붙은 채 빠르게 나아가자 의외로 할 만했다.

'내려다보지 말자. 내려다보지 말자.'

앞만 보고 걸어야 한다.

강엽은 의식적으로 벼랑을 내려다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물론 그게 노력한다고 되겠냐만, 목숨이 경각에 달하자 집중력이 최고조로 발휘되었다.

그때 강엽의 눈에 무언가 눈에 띄었다.

그처럼 벽에 딱 달라붙어 가면서도 주변의 지형을 살피는지 열심히 고개를 돌리고 있는 인영.

'저 녀석은...?'

짐마차에서 내렸을 때 본 색목인 소녀였다.

'의외로 잘 걷잖아?'

처음 봤을 땐 겁먹은 기색이 역력했는데, 지금은 긴장했을지언정 다부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만 아래를 내려다볼 때마다 한숨을 쉬었다.

강엽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놀랐다.

'설마 뛰어내리려는 건가?'

뼈도 추리지 못할 높이였다.

벼랑 아래로 강이 흐르긴 하지만, 이 높이에서 떨어지면 땅이나 물이나 다를 게 없다.

그때였다.

"위험해!"

쿠구구궁...!

소녀의 머리 위쪽에서 돌덩이가 굴러떨어졌다.

대충 봐도 대여섯 명쯤은 우습게 깔아뭉갤 크기였으니 깔리면 피떡이 되리라.

아직은 거리가 멀지만 떨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깜짝 놀란 소녀가 강엽을 봤다가, 강엽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위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제서야 굴러떨어지는 돌덩이를 발견하고 사색이 된 소녀가 다급하게 몸을 날렸다.

콰아아아앙!

"으아악!"

무지막지한 충돌로 말미암아 직접적으로 맞지 않은 사람들도 균형을 잃고 추락했다.

물론 직접적으로 맞은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잔도에 진득히 흐르는 핏덩이가 그들의 운명이 어찌 되었는지 알려주었다.

예상치 못한 돌발사고에 선두에서 나아가던 단주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때 그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놀랍게도 돌덩이에 맞은 줄 알았던 소녀가 잔도 위의 벼랑을 올라가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밑으로 쏠렸을 때 벼랑을 기어올라서 탈출하려는 것이다.

"이 계집이 어딜!"

말의 잔등을 박차고 뛴 단주의 신형이 비조처럼 허공을 날아서 소녀를 향해 쭉 쏘아졌다.

소녀가 대경실색해서 도망치려고 했지만 단주가 몇 배는 빨랐다.

순식간에 위쪽을 점한 단주의 발길질이 소녀의 어깨를 인정사정없이 내려찍었다.

"...!"

입을 쩍 벌린 소녀가 떨어졌다.

이대로라면 그녀는 돌덩이를 피한 의미도 없이 벼랑 아래로 곤두박질칠 것이다.

하지만 허공에서 몸을 휘리릭 반전한 단주가 소녀를 따라잡더니 뒷덜미를 낚아채서 잔도로 던졌다.

직후 벼랑을 마치 평지를 달리는 것처럼 수직으로 매달려서 껑충 뛰어올랐다.

코앞에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에 강엽을 비롯한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떻게 사람의 움직임이...!'

거친 칼잡이들을 말 한마디로 휘어잡는 모습에서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신선이 구름 속에서 노니는 것처럼 자유로운 움직임이라니.

강엽은 말로만 듣던 무림의 고수를 실제로 보니 절로 주눅이 들었다.

"맹랑한 계집 같으니. 사고를 이용하면 도망칠 줄 있을 것 같았더냐?"

"...."

소녀는 어깨를 부여잡은 채 단주를 노려봤다.

칼잡이들이 달려들어 소녀를 억눌렀다.

"단주님, 괜찮으십니까!?"

"나야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지. 하지만 내가 나서기 전에 네놈들이 알아서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며, 면목이 없습니다."

칼잡이들이 식은땀을 흘렸다.

그들도 사고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소녀가 도망가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단주가 소녀의 몸 이곳저곳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마혈을 짚었으니 움직이지 못할 게다. 상품들 중에 적당한 놈을 골라서 업도록 시켜라."

"그러다 같이 굴러떨어지면...."

"그럼 네놈들이 업든가."

칼잡이들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무공을 익혔다지만 좁고 구불구불한 잔도는 그들에게도 위험했다.

설령 소녀의 몸이 깃털처럼 가볍다 해도 이런 데서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거기 너 이쪽으로 와라!"

"...저 말입니까?"

강엽이 떨떠름한 얼굴로 나왔다.

칼잡이들이 그를 낙점한 까닭은 간단했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잔도를 잘 걷는다는 것을 알고 일찌감치 눈여겨봤던 것이다.

물론 강엽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도 체력이 별로 좋지는 않은데... 얘를 데리고 무사히 잔도를 통과할 수 있을까?'

강엽이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나저나 넌 이름이 뭐냐?"

"...."

소녀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나라 잃은 것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는 게 도망치지 못해서 낙심한 것 같았다.

아니면 강엽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이든지.

'다른 나라에서 왔다면 중원말을 모를 수도 있지.'

어쩌다 노예상인에게 붙잡혔는지는 몰라도 나름대로 기구한 사연이 있는 것이리라.

1화. 대법 (2)

지긋지긋한 잔도를 벗어났을 때, 사람들은 칼잡이들에 대한 두려움도 잊고 주저앉았다.

일부는 아예 누워버렸지만, 지금만큼은 칼잡이들도 그들과 다를 게 없는 신세였기에 이전처럼 힘으로 윽박지르지도 못하고 개처럼 헥헥댔다.

강엽 역시 땀을 비오듯이 쏟아낸 것은 물론, 다리가 천근만근 무거워서 더 이상 걸을 힘이 없었다.

"시발, 이젠 때려죽여도 못 걸어...!"

강엽의 등에 업혀서 편하게(?) 온 색목인 소녀가 미안한 표정으로 강엽의 얼굴에 난 땀을 닦아주었다.

문득 거대한 인마의 그림자가 두 사람을 드리웠다.

"몸을 움직이는 걸 보니 마혈은 풀렸나 보군. 하긴 슬슬 풀릴 때가 되긴 했지."

신기막측한 기마술로 좁은 잔도를 통과한 단주가 땀 한방울 나지 않은 뽀송뽀송한 얼굴로 이죽거렸다.

소스라치게 놀란 소녀가 앙칼진 고양이처럼 자세를 낮추고 경계하는 태세를 취했다.

단주는 그런 소녀를 무시하고 강엽을 치하했다.

"사람 하나를 업고 여기까지 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용케 떨어지지 않았군."

강엽은 어이가 없었다.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했는데....'

"후후."

끝까지 얄밉게 웃은 단주가 짝 하고 박수를 쳤다.

혹여 노예들이 도망갈까 싶어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았던 칼잡이들이 즉시 몸을 일으켰다.

"쉴 만큼 쉬었으면 다시 일어나도록. 노예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묶어두는 것 잊지 말고."

곳곳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드러눕고 자고 싶었지만 칼잡이들의 서슬 퍼런 기세 때문에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하늘에 걸린 태양이 어느덧 서녘으로 넘어갈 시점이 된 만큼 단주가 서두르는 이유가 영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아직 대낮이어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금방 땅거미가 질 테니까.

후들거리는 다리를 짚으며 일어난 강엽은 칼잡이들에 의해 다시 포승줄에 묶인 신세가 됐다.

"출발한다!"

그때부터는 쭉 오르막길이었다.

여전히 거칠고 가팔라서 자칫 돌부리에 걸리면 크게 다칠 수도 있는 길.

그래도 잔도에 비하면 평지를 걷는 것과 다름없었기에 여정은 해가 저물기 전에 끝났다.

골짜기의 능선을 타고 지어진 산장(山莊).

족히 백여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큼지막한 산장은 흡사 고관대작의 별장처럼 보였다.

물론 민가도 없는 곳에 별장 같은 게 들어설 리가 없으니 저 산장 역시 평범한 장원은 아닐 것이다.

산장의 대문엔 단주가 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십수 명의 인원이 마중을 나와 있었는데, 하나같이 섬뜩한 핏빛의 장포를 걸쳤다.

유일하게 흑포를 입고 있는 무인만이 선두에서 단주를 맞이하며 공수의 예를 취했다.

"산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단주께서 오시는 것은 산 아래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안에 계시는가?"

"예. 단주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연회를 준비해놨으니 오늘밤은 편히 쉬시지요."

연회라는 말에 칼잡이들이 몸에 누적된 피로도 잊고 와아아 환호성을 질렀다.

물론 그들이 끌고 온 사람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말.

강엽을 비롯한 사람들은 묶인 채 끌려갔다.

* * *

칠흑 같은 어둠이 지배하는 지하였다.

벽에 걸린 횃불이 불그스름한 불빛을 드리우지 않았다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을 터.

'으스스하군.'

기분 탓인지 피내음이 나는 것 같기도 하다.

강엽의 뒤를 따라오는 소녀도 불안함을 느꼈는지 강엽의 팔소매를 꽉 붙잡았다.

한참을 내려간 끝에 도착한 곳은 놀랍게도 거대한 공동이었다.

천장에 가득한 종유석이나 바닥에서 돋아난 석순을 보아선 원래부터 존재했던 천연동굴이리라.

설마 산장의 아래에 이런 동굴이 있었을 줄이야.

"오오, 신입이다! 신입이야!"

"여자도 있어!"

동굴 안쪽은 창살이 빼곡했다.

앞서 동굴에 갇힌 사람들은 새로이 들어온 신입들을 발견하고 미친 듯이 발광했다.

대부분 건장한 왈짜들이었는데 젊은 여인들에게는 노골적인 음담패설도 서슴지 않았다.

낯빛이 하얗게 질린 사람들이 그들을 여기까지 데려온 혈포무인들에게 간절한 시선을 보냈다.

정말 여기에 들어가야 하냐고 묻는 것처럼.

그러거나 말거나 혈포무인은 시큰둥하게 창살의 문을 열고 으름장을 놨다.

"들어가지 않으면 죽는다."

살얼음이 낀 것처럼 차가운 목소리에 흠칫한 사람들이 혈포무인의 눈치를 보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강엽까지 들어갔을 때였다.

쿠웅!

혈포무인이 지체없이 문을 닫아걸었다.

강엽은 물론 소녀까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지만, 혈포무인은 사무적인 어조로 차가운 현실을 통보했다.

"설마 너희를 한 자리에 모두 넣으리라 여겼던 건 아니겠지. 여기서부터는 다른 옥실에 간다."

"이 아이까지는 같이 들어가면 안 됩니까?"

강엽이 봤을 때 소녀는 무공을 익혔다.

절벽을 올라간 것만 봐도 그랬다.

비록 단주에게 제압당하기는 했어도 그건 단주가 압도적인 고수였기에 패한 것일 뿐, 절벽을 올라갔던 몸놀림을 보면 무공을 익힌 것이 확실했다.

이 지하뇌옥이 어떤 곳인지는 몰라도 강엽 혼자 있는 것보다는 소녀와 함께 잇는 편이 나을 터.

문제는 혈포무인은 여지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헛소리를 나불대면 혀를 잘라버리겠다."

강엽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

엄한 경고를 남긴 혈포무인이 남은 이들과 함께 멀어졌다.

소녀는 강엽이 마음에 걸리는지 자꾸만 고개를 돌렸지만, 혈포무인이 가로막고 있는 이상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내 힘으로 살아남을 수밖에....'

워낙 많은 사람들이 한 공간에 갇혀지내는 바람에 옹기종기 모여앉아도 자리가 비좁았다.

강엽은 중간쯤에 엉거주춤하게 자리를 잡고는 무거운 한숨을 쏟아냈다.

'이래서야 쪽잠을 자기도 힘들겠군.'

그렇게 주저앉아 시간을 보내니 어느덧 저녁을 먹을 때가 됐다.

예의 혈포무인들이 큼지막한 통을 끌고 와서 저녁밥을 나눠주는데, 여기까지 오는 동안 지겹게 먹었던 주먹밥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반쯤 송장이나 다름없던 사람들은 강엽이 감히 예상하지도 못한 격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밥이다!"

"비켜! 내 거야! 내 거라고!"

이제까지 가만히 있던 사람들이 들불처럼 들고 일어나서 아우성을 쳤던 것이다.

밥을 먹으려다 졸지에 엉덩방아를 찧은 강엽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자신을 밀친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아귀다툼도 이런 아귀다툼이 없었다.

혈포무인들은 뇌옥의 문을 열지도 않은 채 주먹밥을 던지고, 사람들은 주먹밥을 받아먹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밀고 쥐어뜯는 것을 마다치 않는다.

어쩌다 옆사람이 주먹밥을 잡았으면 단체로 달려들어 주먹밥을 쥔 손을 깨물어버리는 광경은 살벌한 걸 넘어 엽기적이기까지 했다.

"이런 미친."

며칠을 내리 굶은 짐승처럼 살벌하게 싸우는 모습.

그런데도 혈포무인들은 사람들을 말리기는커녕 희희낙락하며 싸움을 독전하고 있었다.

"하하! 잘한다. 그래, 더 싸워라!"

"독기를 품은 놈만 배를 채울 수 있다! 굶고 싶지 않다면 다른 놈의 밥을 빼앗아야 할 거다!"

살점이 터지고, 피가 흩뿌려질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발에 밟혀서 죽는 사람들까지 심심찮게 나왔다.

"대체 왜 저렇게까지...!"

"당연히 저럴 수밖에 없지."

느닷없이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강엽이 고개를 홱 돌리자 주먹밥을 우물우물 씹고 있는 중년인이 입가를 닦고 씩 웃었다.

"여긴 하루에 한 번밖에 밥을 주지 않으니까. 심지어 수량도 일정하지 않지. 그러니 저렇게 기를 쓰고 달려들 수밖에 없는 거야."

"하루에 달랑 한 끼라고?"

"그마저도 늦으면 못 먹는 거지. 자네처럼."

"...!"

강엽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단주의 언동으로 미루어 짐작하면 산장의 무인들은 큰 돈을 주고 사람들을 사서 뇌옥에 가둬둔 것이다.

그런데도 정작 사람들의 생사에는 별로 관심없는 것처럼 구니 어처구니가 없을 수밖에.

"나도 이유는 몰라. 뭐, 놈들이 떠드는 소리를 주워들으니 독기를 품어야 뭐가 잘 된다고 하던데. 나도 여기 끌려온지 얼마 안 돼서 말이지."

한마디로 자기도 아는 게 없다는 뜻.

"하지만 자네보다는 오래 지냈으니까. 내가 아는 걸 말해주자면, 계속 여기 갇혀지내지는 않는다는 거야. 조금만 기다리면 다른 곳으로 데려가는 모양이더군."

"거기가 어딘지는 모르고요?"

중년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끌려간 놈들이 돌아왔으면 뭐라도 물어봤을 텐데. 돌아온 놈이 한 명도 없어서. 그런데 우릴 여기에 가둔 놈들이 제물 운운하는 걸 보면 좋은 장소는 아니겠지."

"그런...."

진짜로 죽을 수도 있다는 건가.

강엽이 말을 잇지 못하자 남은 주먹밥을 목구멍에 털어넣은 중년인이 쩝쩝 씹으며 말했다.

"살고 싶으면 남의 것을 빼앗아야 할 거다. 여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니까."

* * *

중년인의 말대로였다.

배식은 하루에 딱 한 번.

그마저도 뇌옥에 갇힌 사람들의 머릿수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부족한 주먹밥만 배급됐다.

그나마 창살의 안쪽에 있는 여물통에 물이 있어서 그걸로 배를 채웠지만 굶주림을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이튿날에도 아귀다툼에 끼어들지 못하고 손가락만 쪽쪽 빨았다.

군자는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는 공자님의 말씀도 있다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로 굶어뒈질 판국이었다.

자신은 남들과 다르다며 체면을 고집하기에는, 자신 또한 남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지난 두 달간의 여정으로 충분히 깨달았다.

다만 평생 싸워본 적 없는 그의 물주먹으로는 저 아귀다툼 속에서 버틸 수가 없었다.

결국 강엽은 물로만 배를 채우면서 나날이 허덕이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 결과 구토와 설사를 반복하며 죽어가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대로는 안 돼.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해.'

그렇게 며칠의 시간이 다시 지났다.

"자네도 참 딱한 사람이야."

중년인은 고작 며칠 만에 앙상한 몰골이 된 강엽을 내려다보며 동정심을 금치 못했다.

"별로 깨끗하지도 않은 물인데 그렇게 허겁지겁 먹으니까 탈이 나지. 안 그래도 마른 친구가 이제는 거죽만 남았군. 뭐, 이렇게 죽는 것도 결국 본인의 팔자지."

"...."

대꾸할 기력도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럼에도 삶의 끈을 놓지 않은 강엽의 얼굴은, 뺨은 홀쭉해졌을지언정 두 눈은 형형하게 빛내면서 중년인을 노려봤다.

"쯧쯧, 노려본다고 뭐가 달라지나?"

"...며칠간 생각을 했습니다."

"무슨 생각?"

"약자인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

"그게 뭔데."

"기만입니다."

바로 그 순간, 단삼 소매에서 무언가를 꺼낸 강엽이 곧장 그것을 입에 넣었다.

"어?"

중년인의 눈이 커졌다.

강엽이 입에 넣은 것은 주먹밥이었던 것이다.

줄곧 아귀다툼에 실패하고 쫄쫄 굶었던 강엽이 언제 주먹밥을 구했단 말인가.

"...일부러 실패한 척을 했다고?"

"만천과해(瞞天過海)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유명한 삼십육계 중 제일계다.

무엇이든 자주 보면 의심하지 않게 된다는 격언.

중년인의 말대로 강엽은 며칠간은 쫄쫄 굶었을 뿐만 아니라 물갈이도 심하게 해서 꼴이 말이 아니었다.

점점 피골이 상접해가는 강엽의 꼬락서니를 본 사람들은 그가 머지않아 죽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아귀다툼에 끼어들어도 귀찮게만 여겼다.

강엽이 누군가한테 맞은 척을 하고 바닥에 쓰러져도 곧 죽을 놈이 살려고 애쓴다고 여길 뿐.

그의 손에 주먹밥이 들려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쉽게도 전 당신처럼 튼튼하지 못해서 말입니다. 살아남으려면 꼼수수밖에 없더군요."

"기가 막히는군."

중년인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난 우발이다. 한족은 아니고 포의족(布依族)이지. 포의족에 대해 들어봤나?"

"...이름은 들어봤습니다."

귀주와 운남 등지에서 살아가는 민족이었다.

강엽은 가끔 공부에 지쳤을 때 여러 잡서들을 읽으며 정신을 환기했고, 그중엔 중원 대륙에 살아가는 여러 민족들에 대한 것도 있었다.

포의족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고 있었다.

"포의족은 독자적인 언어를 쓴다고 들었습니다만. 한족의 말에 능숙하시군요."

"도시에서 살았거든. 이래봬도 표사 출신이야."

"무공을 익혔습니까?"

"변변찮은 수준이지."

하지만 그 변변찮은 무공만으로도 우발은 뇌옥에서는 압도적인 강자로 군림했다.

강엽처럼 속임수를 쓸 필요도 없었으리라.

"어쨌든 자네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잘 봤네. 굉장히 인상적이었어."

"무공을 익혔다면 그럴 필요도 없었겠죠."

강엽의 만면에 쓴웃음이 어렸다.

입신양명을 위해 공부한 공맹의 도리는 인간성의 밑바닥이 드러나는 진창에선 아무 쓸모도 없었다.

그저 다른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고육지책을 짜내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하지만 우발은 오히려 강엽을 위로했다.

"용기를 가지라고. 지혜는 인간이 써먹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고 하잖아. 힘은 더 강력한 힘에 무너지지만, 지혜는 때로 강력한 힘을 무너뜨리니까."

"...과분한 칭찬은 됐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은 것은 기쁘지만, 꼼수는 언젠가 들통나기 마련.

실제로 눈치 빠른 몇 명은 자신이 굶어죽지 않은 것에 의심 어린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자연히 강엽의 시름은 날로 깊어졌다.

'그전에 돌파구를 마련해야 하는데....'

그리고 얼마 뒤.

그토록 바라마지 않았던 기회가 찾아왔다.

1화. 대법 (3)

"장로님."

붉고 주름진 손이 종이 위에 붓을 놀리고 있었다.

보고를 올리는 흑포무인은 노인의 뒤에서 가만히 시립한 채 노인의 입이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

백미백염의 노인은 산장을 둘러싼 험준한 산봉들을 화폭에 옮겨담고 있었는데, 썩 훌륭한 솜씨라고는 할 수 없어도 못난 솜씨 또한 아니었다.

이윽고 화룡점정을 찍은 노인이 수염을 쓸며 흡족한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돌렸다.

"어떠하더냐?"

"속하의 안목이 미천하여...."

"전문가의 평을 바란 것이 아니다. 그저 네 녀석이 품은 솔직한 감상을 말해주면 되느니라."

"훌륭한 그림이라고 사료됩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미사여구였다.

윗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과하게 아첨을 떨지 않으면서도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화법.

몇 번 고개를 끄덕인 노인은 그림을 치우고 흑포무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대법을 치를 준비가 됐다고 했던가?"

"예.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이번이 스물네 번째였지."

"...."

흑포무인이 입을 다물었다.

노인이 말한 대법이야말로 그들이 귀주성의 오지에 몇 년째 처박혔던 이유였으니까.

수많은 사람들을 모아야만 도전할 수 있는 대법을 스무 번이 넘게 시도하고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실패 요인들을 확인하는 등 소기의 성과를 얻었지만, 어찌 됐든 실패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저 실패에서 얻은 교훈을 발판 삼아 다음 도전을 할 뿐.

"뇌옥에 특기할 만한 자들은 없는고?"

"몇 명 있습니다."

흑포무인은 부하들을 통해서 알아낸 사실을 보고했다.

"가양도(可陽刀) 우발은 제일뇌옥을 홀로 평정했습니다. 다만 패거리를 이루거나 다른 사람들의 생사에는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들어본 이름이구나. 표국 업계에서 이름 좀 날렸다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다른 놈은 누가 있느냐?"

"흑산괴(黑山怪)라는 수배범입니다. 놈은 자신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몽땅 죽여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도 몇 명 주목할 만한 자들이 있습니다."

한동안 흑포무인의 입에서 나온 이름들은 모두 세간에 알려진 강호의 고수들이었다.

그게 명성이든 악명이든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것만으로도 실력은 증명된 셈이다.

"아, 또 하나 있군요. 이번에 들어온 자들 중에 색목인 소녀가 하나 있습니다."

앞서 이름이 언급된 자들과는 달랐다.

나이도 어리거니와 세간에 알려진 별호도 없었으며, 무리를 이루지도 못했다.

"생긴 게 반반해서 앞서 뇌옥에 들어간 왈짜들이 음심을 품었던 모양입니다. 각다귀(脚多鬼)라고 흑도에서 굴러먹은 놈이 왈짜들을 이끌고 있사온데, 그 계집을 능욕하려고 했다가 사지가 부러졌습니다."

각다귀는 이름 좀 날린 각법의 고수였다.

비조처럼 날아올라 발차기를 날릴 때마다 발이 소낙비처럼 쏟아진다고 하여 그런 별명이 붙었다.

한데 무명의 소녀에게 사지가 부러지는 수모를 당한 것이다.

혼자 싸운 것도 아니고 왈짜들을 이끌고 싸웠는데도 그런 결과가 나왔으니 자연히 흑포무인의 귀에도 들어갈 수밖에.

"나이 어린 색목인 계집이라... 이번에 왔다면 필시 암도상인(暗道商人)의 손을 탔을 터. 그자에게서 다른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느냐?"

"무공 깨나 하는 색목인 계집을 우연히 발견해서 잡아왔다고만 했습니다."

"사문은 알아냈고?"

"그게... 계집이 벙어리입니다."

강엽이 들었다면 놀랐을 것이다.

중원말을 몰라서 말을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전혀 다른 사정이 있었다는 뜻이니까.

"강호는 넓고 고수는 모래알처럼 많으니 그런 계집이 있어도 놀라운 일은 아니지. 그래도 이번에는 유독 고수들이 많구나."

고수라고 대법에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인신매매단을 통할 것도 없이 무림인으로만 뇌옥을 채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노인이 고수들을 주목하는 까닭은 간단했다.

의지가 단단한 고수들이라면 대법에 성공할 확률이 조금은 올라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

'그놈에 대해서 말씀드려야 하나?'

흑포무인은 며칠 전 혈포무인들이 올렸던 보고서를 떠올리고 살짝 고민했다.

제일뇌옥에서 웬놈이 속임수로 사람들을 속이며 몰래 끼니를 때우고 있다는 보고였다.

어찌나 실감나게 연기하는지 혈포무인들도 처음 몇 번은 속아서 그놈이 언제 죽을지 내기를 했다.

그런데 꾸역꾸역 살아남는 놈의 모습을 보고 그게 연기였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별거 아닌 놈이다. 이 정도 가지고 뭔 호들갑을 떠냐고 꾸지람이나 듣겠지.'

흑포무인은 그렇게 강엽에 대해 보고하겠다는 결심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노인의 말이 나직이 이어졌다.

"대법은 사흘 뒤에 시작하겠다."

* * *

"모두 나와라."

뇌옥의 문이 열렸다.

그래도 사람들은 좀처럼 나가지 못했다.

처음 갇힐 때만 해도 얼른 나가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는데, 막상 나갈 기회가 오자 망설여졌다.

"...."

혈포무인들의 저의를 의심하기 때문이었다.

저놈들이 어떤 종자인데 기껏 가둔 사람들을 아무런 이유 없이 풀어주겠나.

그런 의심들이 팽배한 이상 나오라는 말을 듣고 선뜻 몸을 일으킬 사람은 없었다.

혈포무인들도 사람들의 심정을 대강은 짐작했지만, 좀처럼 나올 기미가 안 보이자 짜증이 났다.

"두 번 말하지는 않는다. 정녕 피를 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히익...!"

허리춤의 도파(刀把)를 잡으며 쩌렁쩌렁하게 고함을 지르고 나서야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엉덩이에 불이 붙은 것처럼 서둘러 뇌옥문을 나온 사람들로 인해 복도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적당히 다른 사람들과 섞여 대열의 중간쯤에 선 강엽은 아는 얼굴들이 있는지 살펴봤다.

그보다 조금 더 빨리 나간 우발을 필두로 혈포무인들이 제일뇌옥이라 부르는 곳에 갇힌 사람들이 있었고, 그 너머에 다른 뇌옥에 갇혔던 사람들이 있었다.

다만 워낙 사람들이 많은 탓에 일전에 헤어졌던 금발의 색목인 소녀는 보이지 않았다.

'설마 죽은 건 아니었을 텐데....'

일전에 혈포무인들 역시 웬 색목인 계집이 악명높은 흑도의 고수를 뭉개버렸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직 어른도 되지 않은 꼬맹이가 거친 왈짜들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그 걱정이 기우로 끝난 것을 보면 역시 범상치 않은 녀석이었다.

'사람이 워낙 많아서 못 찾겠군. 그 녀석이라고 나오지 않았을 리는 없으니 어딘가에는 있겠지.'

그걸로 생각을 정리한 강엽은 혈포무인들의 말을 듣고 이동하는 사람들을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밖으로 나갈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혈포무인들은 오히려 동굴 깊숙이 들어갔다.

혈포무인들이 횃불을 들고 있기도 하고, 안쪽으로 가는 길목에도 횃불이 설치된 만큼 동굴의 어둠에 특별히 구애받지는 않았다.

미끄러운 내리막길이나 깎아지른 듯한 벼랑만 조심하면 위험하지도 않았고.

다만 반시진이 지나도록 계속 걷기만 하니 이 동굴이 얼마나 광활한지 의문이 들었다.

'지금까지 걸은 거리만 해도 족히 이십 리는 넘을 텐데....'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곳곳에 자리한 혈포무인들이 팔을 들고 나서야 대열은 간신히 멈추었다.

푹 한숨을 내쉰 강엽이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는...?"

족히 수백 명이 들어갈 만한 거대한 광장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키가 큰 탓에 비교적 멀리까지 내다본 강엽은 광장 한복판에 있는 '무언가'를 보고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석관(石棺)?'

무척이나 거대한 석관이었다.

길쭉한 직육면체의 석관은 길이만 일장에 달했으며 높이 역시 상당히 높았다.

상식적으로 저만한 석관이 존재할 수 없음에도 보자마자 석관부터 떠올린 이유는 명백했다.

석관의 뚜껑이 열려있을 뿐만 아니라 석관에 묻혔을 거라 짐작되는 목내이(木乃伊)의 시체가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석관의 크기가 과장된 게 아님을 보여주듯 목내이 또한 키가 팔척에 달했다.

'저 시체에 비하면 난 난쟁이겠는데.'

한편 석관의 주변엔 붉은 법복을 입은 자들이 혈포무인들과 함께 서 있었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은 붉은 장삼을 걸친 노인이었다.

얼마나 늙었는지 머리와 수염이 허옇게 샌 것은 물론 주름이 늘어지다 못해 흘러내릴 지경이다.

강엽은 직감적으로 그가 이 산장의 주인이자 무인들을 이끄는 우두머리임을 알아차렸다.

"이거 좋지 않은데...."

우발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작은 소리라서 혈포무인들의 귓가에는 들리지 않았지만 바로 뒤에 있는 강엽은 똑똑이 들었다.

"아는 노인입니까?"

"직접 보는 건 처음이야. 표사로 일하면서 소문만 들었지. 내 짐작이 맞다면 저 노친네의 정체는 모산혈조(茅山血祖)일 거야."

"그게 누군데요?"

"전직 모산파의 장문인. 불로불사의 비술을 알아내겠답시고 방문좌도에 빠져서 제자들을 이끌고 혈교에 투신했다더군."

"맙소사! 혈교라면...!"

강엽이 목구멍을 쥐어짰다.

무림과 연이 없는 그도 혈교란 이름은 들어봤다.

그릇된 교리로 양민들을 혹세무민하고, 인명을 살상하여 나라에서 사교로 지정한 사마외도.

평범한 사람들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설마 혈교의 인물이었을 줄이야.

"확실한 겁니까?"

"저 노친네가 쓴 금관이 모산파의 신물이야. 게다가 소문에 따르면 모산혈조는 혈교의 마공을 익혀서 손가락이 붉그스름하다더군. 저 노친네가 딱 그렇지. 혈교에서 장로의 자리까지 올라갔다고 들었는데...."

과연 우발의 말대로 장삼 소매 사이로 슬쩍 드러난 노인의 손가락은 피를 바른 것처럼 시뻘갰다.

이렇게까지 증거가 확실하다면 부정할 수 없었다.

"문제는 저 석관은 뭔지 통 모르겠다는 건데... 고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무지하게 컸구만."

모산혈조를 알아본 것은 우발만이 아니었다.

뇌옥에 잡혀온 무림인들 중 일부가 모산혈조를 알아봤고, 모산혈조가 과거 혈교에 투신하여 쌓은 수많은 악업들이 그들의 입을 통해서 알음알음 흘러나왔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시퍼렇게 질린 것은 당연지사.

곳곳에서 술렁임이 일었다.

"조용히 하지 못할까!"

"입을 여는 놈들은 목을 베어버리겠다!"

혈포무인들의 일갈에 술렁임이 멎었다.

"...."

수백 명이 모인 광장에 숨막히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찌나 조용한지 옆사람이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까지 들렸다.

그때서야 흑포무인이 노인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장로님."

"으음."

모산혈조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잠시 목을 가다듬은 그가 입을 열자 쇠를 긁는 것마냥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나왔다.

"네놈들이 짐작한 대로 노부는 모산혈조가 맞다."

"역시!"

곳곳에서 장탄식이 터졌다.

그의 악명을 알고 있는 무림인들은 모산혈조가 자신들을 대상으로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두려워했다.

벌벌 떠는 군중을 쭉 둘러본 모산혈조가 낮게 클클거렸다.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느니라. 노부가 네놈들에게 주려는 것은 일생일대의 기회니까."

그걸 믿는 바보는 없었다.

하지만 살기를 번뜩이는 혈포무인들로 인해 무림인들은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모산혈조의 말을 듣고 판단하겠다는 분위기였다.

"노부는 한평생 불로불사의 비술을 찾아 천하를 떠돌았느니라. 먼 옛날 시황제가 서복을 시켜 불로초를 찾게 한 것처럼, 노부가 직접 서복이 되어 중원 대륙은 물론이고 주변의 새외들과 저 먼 곳에 있는 열사의 땅까지 가서 불로불사의 비술을 찾았지."

강엽은 어이가 없었다.

불로불사라는 허황된 꿈으로 인생을 낭비하다니.

게다가 하는 말로 미루어보건대 저 노인네는 아직도 불로불사가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이 많은 사람들을 붙잡고 그들의 삶을 파괴한 것이다.

'미쳤군. 완전히 정신이 나갔어.'

그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닌지 비교적 앞에 있던 사람들 중 누군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불로불사의 비술을 찾았소?"

바위처럼 굴강한 근육을 가진 텁석부리 사내였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혈포무인들이 목을 치려는 것을 모산혈조가 손을 들어 막았다.

그리고 텁석부리 사내를 뻔히 바라보았다.

"이름이 무엇이냐?"

"정중산. 강호의 친구들은 흑산괴라고 부르오."

"호오, 네놈이 흑산괴로군. 네 이름은 종종 들었다. 반항하는 자들은 죽이고 여인들은 겁탈했다지?"

"...그, 그게 뭐 어쨌다는 거요?"

흑산괴가 처음으로 당황했다.

모산혈조가 이 일을 걸고 넘어지면 무사할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던 걸까.

강엽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경멸 어린 눈빛을 보냈지만, 정작 당사자는 모산혈조의 눈치만 보느라 감히 돌아보지 못했다.

"껄껄,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네놈을 징치할 거였다면 벌써 했을 게야. 알고도 내버려둔 것은, 노부가 원하는 대법에 네놈 같은 부류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법?"

"불로불사의 비술을 찾았다고 물었더냐?"

"...!"

"그렇다. 노부는 불로불사의 비술을 찾았느니라. 인고의 세월 끝에 마침내 불로불사의 괴물이 잠든 장소를 찾아낸 것이야!"

어디일지는 뻔했다.

그들이 발을 딛고 있는 이 동굴이야말로 모산혈조가 평생을 찾았던 장소였으리라.

어쩌면 불로불사의 괴물이란 다름 아닌....

'뭔가 이상한데.'

강엽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불로불사의 괴물인데 왜 죽은 거지?'

그렇지 않은가.

모산혈조의 말마따나 영원히 사는 괴물이라면 왜 관짝에 누워있는지 설명이 되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후우....]

석관의 목내이가 눈을 떴다.

1화. 대법 (4)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군. 늙은 애송이.]

"당신 같으면 포기하겠소? 눈앞에 불로불사의 과실이 있는데 말이오."

[푸흐흐,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는구나. 불로불사는 저주에 불과한 것을.]

"글쎄올시다. 노부의 귀엔 가진 자의 투정으로 들리오만."

코웃음을 친 목내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고작 상반신만 일으킨 것인데도 도가의 전설 속 탁탑천왕을 연상시키는 장대한 거구.

비쩍 말라서 살가죽만 남은 얼굴에 비웃음이 실렸다.

[하찮은 잡졸이 건방지기까지 하구나. 짐이 마음만 먹으면 죽은 목숨인 것을.]

"...."

모산혈조는 이를 악물었다.

오랜 세월 잠들었던 목내이는 전성기 시절보다 많이 쇠약해졌다.

그럼에도 마주할 때마다 심신이 옥죄었다.

[네 속셈은 눈치챘지. 꽤 깜찍한 짓을 벌였더구나. 마음 같아선 당장 머리통을 터뜨려주고 싶지만... 약속은 약속이니 참겠다.]

"이번엔 쓸 만한 후보들이 많소."

[그건 짐이 판단한 일.]

석관을 빠져나온 목내이가 단숨에 손을 뻗어 가까운 혈포무인 한 명을 붙잡았다.

"으헉!"

"이게 무슨 짓이외까!?"

부하가 붙잡히자 흑포무인이 기겁해서 칼을 들었지만 모산혈조가 엄하게 호통쳤다.

"가만 있지 못하겠느냐!"

"하오나 장로님!"

"갈!"

흑포무인이 칼을 잡은 그대로 굳어졌다.

뇌옥에 갇힌 사람들을 저승사자처럼 대했던 혈포무인은, 막상 자신이 사로잡히자 오들오들 떨었다.

목내이가 입꼬리를 당겼다.

[오랜만의 식사로구나.]

그리고 다음에 일어난 일은 모두를 경악시켰다.

끄아아아악-!

광장 가득 혈포무인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목내이가 혈포무인의 목덜미를 짓씹었던 것이다.

몸통째로 붙잡힌 혈포무인은 바둥거리기만 할 뿐 감히 반항하지 못하고 안색이 허옇게 질려간 끝에 동공의 빛이 꺼져버렸다.

쓰레기마냥 시체를 내던진 목내이가 입가의 피를 닦았다.

[영겁과도 같은 인생에서 흡혈이야말로 짐이 쾌락을 느낀 유일한 오락이었지. 오랜만에 마신 생혈의 맛이 참으로 감미롭구나. 가히 극상의 맛이로다.]

"괴물이!"

졸지에 눈앞에서 부하를 잃은 흑포무인은 치를 떨었다.

[큭큭, 누굴 탓할까. 스스로 영면을 택한 짐을 깨운 것은, 다름 아닌 네놈들인 것을. 선택을 했다면 그에 따른 책임도 져야 하는 법.]

그러자 모산혈조가 말했다.

"괜한 말다툼은 그만하시오. 여기 당신의 뒤를 잇기 위한 후보들이 준비됐소. 총 218명이오."

[겨우?]

"여태 소모한 후보들까지 합치면 수천 명을 헤아리오."

그 말에 목내이는 뭔가 마뜩찮은 듯 턱을 긁적이면서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쩔 수 없지. 좀 아쉽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해볼 수밖에....]

한숨처럼 중얼거린 그가 석관 위에 걸터앉고는 광장에 모인 군중들을 쭉 훑어보았다.

눈이 마주친 사람들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마비되는 충격에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저건 괴물이다. 요괴야.'

강엽이 입술을 깨물었다.

사람의 피를 먹는 마물이라니.

모산혈조의 말이 맞다면 저 괴물은 감히 상상치도 못할 세월을 살았고, 저 스스로 영생을 사는 게 지겨워져서 잠을 잔 것에 불과하다.

그야말로 괴력난신(怪力亂神)의 현신이 아닌가.

[강단 있는 놈도 있는걸.]

강엽과 시선이 얽힌 목내이가 씩 웃었다.

[만나서 반갑다. 짐은 머나먼 태곳적에 진조(眞祖)라고 불렸으며, 한때 짐과 같은 일족을 이끌었던 왕이었다. 이름은 들어봐도 모를 테니 생략하자.]

앞서 사람 하나를 쥐어짜는 모습을 보지만 않았다면 인간적이라고 생각했을 자기 소개였다.

[짐은 짐의 일족을 멸족시키고 무덤을 만들어 잠들었느리라. 때문에 이 세상에 짐의 일족은 한 명도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운명은 얄궂어서 기어이 짐의 기록을 찾아낸 인간이 짐의 영면을 깨웠구나.]

그 대목에서 잠시 모산혈조를 흘깃거린 목내이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 늙은 애송이가 너희에게 불로불사를 약속했다지? 그건 사실이다. 짐은 너희 중에서 후계자를 고르려고 한다. 불로불사의 저주를 떠넘기려고 말이다.]

전설의 불로불사가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고 하자 사람들은 의미심장한 얼굴이 되었다.

목내이가 불로불사를 저주라고 한 것도 잊고 영생을 사는 스스로를 상상하며 침을 삼켰다.

특히 무림인들에게 불로불사의 유혹은 대단히 컸다.

영원히 늙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천하제일, 아니 영세토록 강호 무림에 군림하는 것도 가능할 터.

모산혈조의 말마따나 눈앞에 불로불사의 과실이 있다면 따먹지 않고 배길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물론 짐의 후계자가 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마음 같아선 아무나 골라서 떠넘기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지. 오직 자격을 증명하는 자만이 짐의 후계자가 될 수 있느니라.]

"자격을 증명하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누군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서 돌아보자 강엽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보다 먼저 갇힌 사람들도 그 자격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을 터. 하지만 누구도 통과하지 못했겠지요. 그래서 아직도 이 짓거리를 하는 것이고요. 그들은 어찌 되었습니까?"

"조, 좀 닥쳐봐!"

우발조차 식겁해서 강엽의 입을 막으려고 했다.

강엽이 우발의 손을 쳐내며 짜증을 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너야말로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저, 저... 사람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게 없잖아!"

차마 괴물이라고 말하지는 못하고 적당히 돌려서 말했지만 알아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냥 괴물이라고 하세요. 사람 피 빨아먹는 괴물을 뭐하러 사람이라고 불러줍니까?"

"...!"

우발이 입을 떡 벌렸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목내이의 뒤에 있는 모산혈조나 흑포무인도 눈을 부릅뜬 채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다 분노라도 사면 어쩌려고 그래!?"

"죽겠지요."

"그걸 알면서 왜...!"

"자격을 증명하지 못해도 죽을 테니까요."

좀 전의 질문이 핵심이었다.

자격을 증명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찌 되었는가.

'그들이 살아있을 가능성은 만의 하나라도 없다.'

자그마치 수천 명이라고 했다.

수천 명이 살아서 나갔다면 진작에 소문이 퍼졌을 것이다.

산장놈들이 그걸 두고 보겠나.

"당신이 죽였든, 아니면 저들이 죽였든 자격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죽은 거 아닙니까?"

"뭐?"

우발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다른 사람들도 놀라서 목내이를 바라보았다.

[네 녀석의 말이 맞다.]

목내이는 흔쾌히 대답했다.

[자격을 증명하지 못하면 죽는다. 구태여 짐이 손을 쓰거나 저놈들의 손을 빌릴 것도 없지. 자격을 증명한다는 것은 짐의 시험을 통과한다는 뜻. 오직 한 사람만이 살아남거나, 혹은 모두 죽을 것이다.]

"불로불사를 얻지 못한 대가가 죽음이라... 꽤나 가혹하군요."

[상관없지 않느냐?]

목내이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리고는 엄지를 들어 뒤를 가리켰다.

[네놈들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없을진대. 시험을 보지 않겠다면 저놈들이 내버려둘까?]

"...."

강엽이 침묵했다.

굳이 모산혈조가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혈포무인들이 무언의 압박을 넣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선택지가 없어진다.

[짐에게 자비를 기대하지 말거라. 불로불사의 저주만 넘기면 이번에야말로 영면을 취할 거니까.]

"그냥 당신이 자결하는 건 안 됩니까?"

[짐은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

"...."

[왜 그런 눈으로 보는지 알겠는데 진짜다. 만약 네 녀석이 불로불사의 저주를 잇는다면 자결해보거라. 짐만큼 강하지 않다면, '의외로' 쉽게 죽을 수 있을 테니.]

물론 그건 시험을 통과해야 의미가 있었다.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이후의 일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한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얼추 다 알아들은 것 같군. 시작하도록.]

모산혈조가 붉은 법복을 입은 술사들, 모산파 시절부터 자신을 따라다닌 제자들에게 고갯짓을 했다.

각자 팔괘의 방위를 점한 술사들이 부적을 꺼내면서 진언을 외우기 시작했다.

* * *

쿠구구구궁...!

광장이 흔들렸다.

마치 지진이 닥친 것처럼 흔들리자 사람들은 혼비백산했다.

태연한 자들은 대법의 중심인 구궁(九宮)의 방위를 점한 목내이뿐.

어느 샌가 술사들을 보호하기 시작한 혈포무인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모산혈조와 흑포무인도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진혈강림대법(眞血降臨大法). 짐이 만들었지만 참 쓸데없이 요란한 대법이지.]

"노부의 공도 있다는 걸 잊지 마시오."

모산혈조가 구시렁거렸다.

진혈강림대법은 영생이 지겨워진 목내이가 자신의 후계자를 찾기 위해 고안한 술법.

자신의 일생을 바쳐 목내이를 찾아낸 모산혈조는 대법을 전수받고, 모산파의 비기들을 더해서 대법의 완성도를 비약적으로 높였다.

고오오오오오오...!

땅이 흔들리는 걸로 끝나지 않는다.

본격적으로 대법이 시작되자 팔괘의 꼭지점을 기점으로 피처럼 붉은 법문(法文)들이 떠올랐다.

바닥과 천장, 나아가 동굴의 암벽까지 빼곡하게 메운 붉은 법문들이 사특한 기운을 내뿜었다.

끼아아아아아아...!

귀곡성까지 메아리쳤다.

"사, 살려줘!"

"으아아아아악!"

마지막으로 지진을 틈타 암반을 뚫고 나온 핏빛의 나무 줄기들이 사람들의 몸을 칭칭 감았다.

한번 잡히면 남녀노소 상관없이 무기력하게 쓰러진다.

무림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대로는 죽은 목숨이다.

대법이 완성되기 전에 어떻게든 탈출해야 하는데 갑자기 툭 튀어나온 나무 줄기들에 막힐 줄이야.

"얼른 도망치자고!"

우발이 독촉했다.

불로불사고 나발이고 일단은 살아야지 않겠나.

강엽도 우발을 따라 도망쳤다.

생각할 시간이 있으면 뜀박질을 하는 게 낫다.

그러나 바닥을 뚫고 나온 줄기들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위기가 찾아왔다.

독사처럼 머리를 꼿꼿이 세운 줄기가 등 뒤로 쏘아진 것이다.

강엽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망할...!"

서걱!

"어?"

귀신에 홀린 심정이 이러할까.

공교롭게도 그를 구해준 사람은 지난날 동행했던 색목인 소녀였다.

누구한테 빼앗은지 모를 박도(朴刀)를 꼬나쥔 금발의 소녀가 강엽을 곁눈질했다.

"...."

말은 하지 않아도 뜻은 전해졌다.

일전에 자신을 업고 오느라 고생했던 빚은 이걸로 청산하겠다는 뜻이겠지.

"이봐, 소저! 누군지 몰라도 좀 도와줘!"

우발이 손을 흔들며 소리치자 소녀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는 강엽을 강제로 일으켜세웠다.

직후 손가락을 들어 한 장소를 가리켰다.

"내보내 주세요!"

"야, 이 새끼들아! 이거 치워! 죽여버리기 전에 당장 치우라고!"

강엽과 우발이 해쓱해졌다.

술사들의 안쪽에 붉그스름한 벽이 쳐져 있었는데, 안쪽에 갇힌 누구도 통과하지 못했다.

"시발! 이런 데서 어떻게 살아남으라고?"

무림 고수들도 잡히면 꼼짝없이 당하고 있었다.

암담한 절망감이 세 사람을 덮쳤다.

"자네 머리 좋잖아! 뭐 방법 없어!?"

"그런 게 있었으면 진즉 말했...."

말하다 말고 강엽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전제가 잘못됐군. 바깥이 아니라 안쪽이었어."

궁지에 몰려서야 살 길이 보였다.

우발이 묻기도 전에 강엽이 냅다 뛰기 시작했다.

목내이가 점한 구궁의 방위를 향해.

"뒤지고 싶어 환장한 거냐!"

"살고 싶으면 뛰어!"

욕지거리를 퍼붓던 우발조차 움찔 놀란 단호한 어조.

소녀 역시 황당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다가 뒤늦게 강엽의 장단에 맞춰 뒤를 따라갔다.

살기 위해선 모험을 해야 한다는 걸 인정한 것.

촤아아악!

소녀의 손에 들린 박도가 귀신 들린 칼처럼 춤을 출 때마다 줄기들이 잘려나간다.

[으하하! 대담하구나. 정면으로 들이박을 셈이더냐?]

목내이는 그런 세 사람의 반항이 못내 즐거운지 광소를 터뜨렸다.

세 사람을 향한 줄기들이 가열차게 늘어났지만, 어느새 강엽을 앞지른 소녀가 선두에서 길을 열었다.

그러다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지 애써 주운 박도를 우발을 향해 던지고는 육장을 내밀었다.

사아아아아아...!

장심에서 쏟아진 새하얀 한기.

성에가 낀 줄기들이 얼음장이 되자 목내이가 감탄했다.

[상당한 수련을 쌓은 음한지기로군. 하지만....]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줄기가 채찍처럼 휘어져서 소녀의 옆구리를 노리고 쇄도했다.

간발의 차로 줄기를 터뜨렸지만 소녀가 한 바가지나 되는 피를 울컥 토해냈다.

[내상을 입은 몸으로는 견디기 쉽지 않을 게야.]

하지만 바로 그때 뒤에서 우발이 나와 줄기들을 베어냈다.

"...그렇군. 그렇게 된 거였어."

어느 정도 거리를 좁히고 나서야 우발도 강엽의 노림수를 깨달았다.

역설적으로 목내이가 있는 이곳이야말로 줄기들이 자라지 않는 안전지대였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줄기들을 피하면서 안쪽으로 들어오자 목내이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싹수가 있는 놈들이구나. 좋다. 네 녀석들은 진정한 무대에 오를 자격을 손에 넣었느니라.]

목내이의 말이 끝난 것과 동시에 중심부에서 시커먼 어둠이 먹물처럼 쏟아져나왔다.

강엽을 비롯한 세 사람은 어둠에 삼켜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화. 대법 (5)

"으음."

강엽은 인상을 쓰며 몸을 일으켰다.

잠깐 정신을 잃었던 것 같은데, 고통스럽지는 않은 걸로 봐서 어딜 맞은 것은 아닌 듯싶었다.

빠르게 주변을 돌아본 강엽은 같이 어둠에 휩쓸린 우발이나 소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그들의 흔적이라고 할 만한 것조차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따로 떨어진 모양.

그러나 무턱대고 찾기도 여의치 않은 게, 주변에 보이는 풍경이라곤 끝없이 이어진 계단뿐이었다.

'정신을 잃는 동안 다른 곳으로 옮겨진 건가?'

목숨을 위협받아도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두렵지만,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강엽은 조금씩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고개를 꺾어도 꼭대기가 보이지 않았다.

쿠구구구구궁...!

천둥벼락이 끊임없이 가로지르는 하늘을 보면서 강엽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덕분에 어둡지는 않군."

먹구름 사이에서 요동치는 저 천둥벼락이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돋지만, 사방이 훤히 뚫린 장소에는 벼락을 피할 장소도 없었다.

심지어 계단 아래는 끝없는 낭떠러지라서 다른 곳으로 가는 것도 마땅치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강엽은 계단을 올라갔다.

그러면서 자신을 이곳에 가둔 목내이의 속셈을 헤아리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진정한 무대에 오를 자격이 있다고 했었지.'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보고 있노라면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고작 이게 전부일 리가 없다.

대충 칠십 개쯤 올랐을 때, 강엽은 목내이가 말한 시험의 내용을 일부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몸이 무거워진다.'

발을 내딛는 힘에 무게가 실렸다.

그걸 억지로 참으면서 다시 칠십 개의 계단을 오르자 또 다시 몸이 무거워졌다.

고작 백사십 개의 계단을 올랐을 뿐인데도 땀이 비오듯이 흐르고 시야가 노래졌다.

다행히 누가 쫓아올 조짐은 안 보였기에 강엽은 한숨을 쉬며 계단에 주저앉아 종아리를 문질렀다.

'대충 무슨 시험인지 알겠군. 칠십 개씩 오를 때마다 몸이 무거워지면... 종국엔 수십, 수백 배로 늘어나서 자기 몸무게를 못 이기고 압사되겠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시험에 들었는데도 어째서 한 명도 통과하지 못했는지 이해가 됐다.

이런 계단이 끊임없이 이어지면 종국엔 몸이 수십, 수백 배로 무거워질 테니 견디지 못할 것이다.

둘 중 하나였다. 자기 몸의 무게에 짓눌려 죽거나 몸을 가누지 못하고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거나.

'꼭대기까지 올라야 통과로 간주되겠지. 굳이 계단이라는 형식을 취한 것을 보면 통과자는 선착순... 한 명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게 이런 뜻이었나?'

만약 그 추측이 옳다면 우발이나 소녀와 떨어진 것이 다행일지도 몰랐다.

결승점을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면, 그 외의 사람들은 모두 경쟁자라는 뜻이니까.

계단 옆엔 낭떠러지까지 친절하게 준비해주었으니 자기보다 앞서가는 놈은 밀어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무작정 서두르기엔 몸이 무거워지고 있고.'

선착순의 시험이라면 당연히 시간이 관건이지만, 체력을 아끼지 않으면 도중에 퍼질 것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체력을 아끼기만 해서는 언제 결승점에 도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아니, 강엽이 책상물림이라 농꾼보다 못한 체력을 지녔다는 것을 감안하면 결승점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은 거의 필연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지."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무릎을 잡고 일어난 강엽이 하늘 높이 이어지는 계단을 보며 다시 긴 한숨을 토해냈다.

* * *

[총 스물네 명인가?]

석좌에 앉은 목내이가 중얼거렸다.

이 장소는 그가 술법으로 만들어낸 공간이었다.

환술과 진법을 적절히 조화해서 만든 공간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되 영향력을 행사했다.

주변에 있던 자들을 강제로 끌고 와서 이 공간에 지박령처럼 묶어둔 것이다.

이제 그의 허락이 없으면 저들 중 누구도 살아서 이 공간을 빠져나갈 수 없었다.

"다 좋은데 노부는 왜 데려온 것이오?"

이 자리에 있는 자는 목내이만이 아니었다.

모산혈조도 석좌 옆에 시립하듯 서 있었다.

본인의 의지는 아니었다. 술법이 펼쳐지자 뭘 어찌할 새도 없이 같이 끌려왔다.

[프흐흐, 마음에 안 드나? 하긴,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빼앗기는 게 유쾌하진 않겠지.]

모산혈조는 말없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주름이 많은 이마가 더 흉물스럽게 찡그려졌지만, 목내이는 모산혈조를 돌아보지 않았다.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속셈은 뻔하지. 짐이 후계자를 정하면, 그 천한 사술로 짐의 후계자를 제압하고 피를 빼앗아서 진조가 되려는 게 아니더냐?]

"...그게 불만이면 지금이라도 노부를 당신의 후계자로 삼고 진조로 만들어주면 되지 않소."

[싫은데?]

무척이나 단호한 어조였다.

비록 입은 웃고 있으나 목내이의 눈은 북해의 빙해를 연상시킬 정도로 싸늘했다.

[늙은 애송이, 네놈이 짐을 찾아내서 깨운 것은 가상하다만... 짐의 후계자가 될 자격은 없다. 단지 죽고 싶지 않아서 불로불사의 업을 짊어지겠다고?]

"이익!"

모산혈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모산파의 제자가 되어 술법에 입문했을 때부터 그의 꿈은 언제나 불로불사였다.

죽는 게 두렵다, 죽고 나서 어찌 될지 두렵다, 이런 마음이 그로 하여금 방문좌도로 이끌었다.

그래서 자신을 따르는 소수의 제자들만 데리고 혈교에 투신하여 방문좌도의 술법을 연구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고통에 빠졌어도 개의치 않았다. 어찌 희생 없이 불로불사라는 위대한 비술에 도전하겠는가?

비록 불로불사의 비술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고대의 문헌을 연구하던 중에 흡혈귀라는 존재를 알았다.

진조는 흡혈귀의 근원격인 존재. 영원히 살아가며 어떠한 상처를 입어도 죽지 않는 괴물이었다.

오랜 세월 끝에 말라비틀어진 진조를 발견한 모산혈조는 그 힘을 빼앗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목내이의 힘이 예상을 웃돌았다.

수백 년 동안 피를 먹지 못해 쇠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모산혈조는 목내이를 제압하지 못했다.

목내이 역시 후계자를 찾는다는 목표가 있었기에 잠시 손을 잡긴 했지만, 지금처럼 서로의 뜻이 다를 때에는 속수무책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짐의 후계자는 짐만큼 강하지 못할 테니 네놈의 하찮은 잡술에도 당할지 모르지. 그러니 짐이 후계자를 찾기를 기원하려무나.]

"진혈강림대법을 스물세 번이나 시도하고도 후계자를 찾는 데는 실패했소. 정녕 후계자를 만들 생각이 있는 거요? 단순히 노부를 농락하고자 그런 거라면...."

[이번엔 다를 게다.]

모산혈조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까지 목내이가 진혈강림대법을 치를 때마다 모르겠다고 한 적은 많아도, 확신을 한 적은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짐의 후계자가 나올 것 같구나. 어떤 놈이 될지는 몰라도... 왠지 그럴 것만 같아.]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헛소리로 치부했겠지만 상대는 세상에서 누구보다 오래 산 괴물이었다.

뱀이 천년을 묵으면 이무기가 되고, 이무기가 천년을 묵으면 용이 된다는데 괴물이 천년을 묵으면?

"당신의 예감이 맞기를 바라야겠구려. 그래야만 노부의 비원이 이루어질 터이니."

[....]

그 말에 목내이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의미심장한 미소만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비록 석좌에 앉아있지만 그의 눈은 스물네 명의 후보들을 살피는 데 여념이 없었다.

* * *

야율산산.

운명으로부터 그런 이름을 부여받은 금발의 소녀는 이를 꽉 물면서 계단을 올랐다.

모산혈조가 암도상인이라 부른 단주에게 잡히기 전부터 그녀는 기혈이 꼬여 제대로 무공을 펼칠 수 없었다.

지하뇌옥에선 살기 위해 억지로 무공을 펼쳤지만, 그로 인해 내상이 도져서 각혈까지 했다.

간신히 살았다고 생각했을 무렵엔 사이한 술법에 휘말려 어딘지 모를 장소로 튕겨졌다.

강엽이 이백 개의 계단을 오르고 시험의 의미를 깨달은 것처럼 야율산산 역시 목내이의 노림수를 알았다.

내상을 입었어도 강엽보다는 튼튼한 덕에 천 개나 되는 계단을 오르고서야 숨을 고른 그녀는, 번쩍이는 벼락 사이로 잠시 비춘 계단들을 노려봤다.

'가장 먼저 도착하는 사람만 살 수 있어.'

나머지는 죽는다.

야율산산은 잠시 강엽을 떠올렸다.

그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만, 무공을 익히지 않은 그가 이 시험을 통과할 가능성은 없었다.

냉정히 말하면 계단의 절반을 오르기도 전에 몸이 넙치처럼 납작하게 짓눌리거나,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절벽 아래로 떨어질 공산이 컸다.

야율산산은 그가 죽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를 살리자고 자신이 죽을 생각은 없었다.

도울 방법도 마땅치 않았고.

'미안해요.'

마음속으로 사과를 하면서 계단을 올랐다.

몸을 찍어누르는 막대한 압력 때문에 다리가 후들거리고, 입에서는 쇳맛이 났다.

무리를 하느라 내상이 도진 것이다.

결국 걷는 도중에 쓰러졌다.

"...!"

내공을 끌어올리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야율산산은 마른 기침을 토했지만, 그때마다 콜록거리는 소리 대신 쇠 긁는 소리만 났다.

오래전 기혈이 꼬였을 때 그녀는 성대 좌우의 인영혈(人迎穴)을 다쳐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강엽은 그녀가 색목인이라 중원말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내상 때문에 말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고향이 그리웠다. 가족이 보고 싶었다. 사문의 어른들과 친구들의 얼굴이 눈에 아른거렸다.

살아서 그들을 다시 만나야 했다.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다.

'난... 살 거야!'

엉금엉금.

천근의 무게가 몸을 찍어눌러도 필사적으로 두 손으로 계단을 짚으며 몸을 끌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허억! 허억!"

힘겹게 계단을 오른 거구의 텁석부리 사내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정체는 앞서 모산혈조와 말다툼을 하다 망신을 당한 흑산괴였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도 정상이 아니었다.

시야는 노래지고 입에서는 단내가 풍겼다.

부들거리는 팔다리는 숫제 감각이 사라져서 이제 자기 몸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삶에 대한 집착으로 천 개가 넘는 계단을 오른 끝에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시발, 저게 뭐야...!?"

별안간 시야에 얻어걸린 무언가에 식겁한 흑산괴가 벌떡 일어나서 경계태세를 갖췄다.

그러다 아래쪽의 계단에 엎어져 있는 금발의 소녀를 보고 눈을 얇게 떴다.

어느 지점부터 이웃한 계단끼리는 합쳐졌는데, 마침 두 사람이 있는 곳이 기점이었던 것이다.

"각다귀를 죽인 계집인가?"

그가 갇힌 제팔뇌옥은 각다괴가 갇힌 제칠뇌옥과 비교적 가까이에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각다귀와도 각별하게 지냈는데, 서로 놀이 삼아서 새로 들어온 계집을 하룻밤에 얼마나 많이 겁탈하는지 미친 내기를 벌이기도 했다.

하루는 각다귀가 새로 들어온 색목인 계집을 찝적거리길래 질투심을 품은 적도 있었다.

꾀죄죄한 꼴이긴 해도 자세히 뜯어보면 눈이 번쩍 뜨이는 아름다운 계집이었던 것이다.

그 계집의 손에 각다귀가 팔다리가 몽땅 부러져서 목숨을 잃는 것을 본 이후엔 질투심이 싹 달아났지만, 언제나 마음속엔 색목인 계집에 대한 음심을 품었다.

한데 그 계집이 정신을 잃은 채 자신의 앞에 쓰러지는 광경을 볼 줄이야.

"쩝, 지금 이 꼴만 아니었어도...."

입맛을 다신 흑산괴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계집질에 미쳤어도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딴짓거리를 할 만큼 음심에 물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계집이 정신을 차려서 자신을 따라온다면 위험해진다는 자각은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죽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야율산산의 머리채를 잡은 흑산괴는 소녀의 몸을 계단 아래로 던지려고 했다.

갑자기 괴성이 울리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것이다.

"키아아악!"

"이런 미친! 이게 무슨...!"

계단 아래의 절벽을 타고 기어올라오는 괴물들.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되 더 이상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몰골이었다.

창백한 낯짝 위로 핏줄들이 돋아있고, 검은자위가 사라진 눈동자는 광기로 허옇게 번들거린다.

몸의 한 부분과 연결된 붉은 줄기를 보는 순간 흑산괴는 불현듯 저 괴물들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대법이 시작되었을 때 붉은 줄기를 피하지 못하고 사로잡힌 사람들이었다.

"미, 미쳤어. 완전히 미친 게야...."

이곳이야말로 지옥이다.

흑도 무림에서 어지간히 굴러먹은 흑산괴도 이성이 마비되는 충격에 얼굴이 해쓱해졌다.

방금까지 죽일 생각 만만이었던 야율산산을 계단 아래로 던질 생각도 못했다.

괴물들이 짐승처럼 낮게 자세를 잡았다.

"크르르르!"

"으으! 으아아아아아!"

흑산괴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 * *

"저게 무슨...?"

강엽이 걷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계단을 올랐을 때처럼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헥헥댔던 모습은 아니었다.

지금도 땀을 미친 듯이 흘리긴 해도 그건 천 개가 넘는 계단을 올랐기 때문일 뿐.

오히려 중간중간 휴식을 취하면서 체력을 비축했기에 흑산괴나 야율산산보다 양호했다.

걷은 도중 계단에 숨겨진 비밀을 깨닫고, 그걸 역이용해서 함정을 파훼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쩐지 묘하게 쉽더라니... 다른 함정이 있었나?"

두 사람이 들으면 어이없어할 소리였다.

몸이 짓눌릴 것 같은 압력을 견디며 계단을 올랐건만 애초에 그걸 피할 방법이 있었다고 한 것 아닌가.

물론 그들이 강엽의 한탄을 들을 수는 없었다.

강엽은 그들이 있는 곳에서 한참 떨어진 또 다른 기점에 와 있었으니까.

"크르르륵...."

그곳에도 괴물들이 있었다.

그들을 보는 강엽의 표정이 묘해졌다.

분명 보기만 해도 절로 두려움이 밀려오는 낯짝인데, 보고 있자니 뭔가 이상했다.

"이것들... 원래 이렇게 느린가?"

괴물들은 굼벵이처럼 느렸다.

1화. 대법 (6)

'그렇군. 이놈들도 몸이 무거워진 거야.'

강엽을 둘러싼 괴물들은 얼추 열 마리.

계단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보면 실제 숫자는 그보다 많겠지만, 올라오는 족족 계단의 압력에 걸려서 움직임이 느려졌다.

올라오자마자 피를 토하거나 짓눌린 채 끙끙 앓는 모습은 그걸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기껏 자신들을 잡으러 온 괴물들까지 압력의 영향을 받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만약 강엽이 함정의 허실을 꿰뚫지 못했다면 위험에 처했을 것이다.

'애초에 저 밑에서 빌빌거리고 있었을 테니 이 괴물들을 만나지도 못했겠지만.'

어쨌든 여기서 어기적댈 이유가 없었다.

괴물들이 움직이지 못할 때 얼른 빠져나가야 한다.

강엽은 계단의 '특정 지점'만 밟음으로써 압력을 받는 일 없이 괴물들 틈바구니를 빠져나왔다.

이 지점들은 눈에 띄지 않느나 분명히 존재하며, 조금만 틀어져도 무시무시한 압력이 닥친다.

무공을 익히지 못한 강엽이 그 압력을 마주한다면 잠시도 견디지 못할 것은 불보듯 뻔한 일.

그렇기에 혹시라도 방위를 틀리지 않도록 긴장감을 유지하며 심력을 쏟아야 했다.

문제는 괴물들이 분명 느리긴 해도 강엽을 표적으로 삼고 뒤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점점 숫자가 불어나기까지.

언젠가부터 백 마리로 늘어난 괴물들이 살기를 토해내면서 강엽을 뒤쫓고 있었고, 강엽은 그런 괴물들을 피해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다른 쪽에도 비슷한 숫자가 붙었다면... 아까 잡힌 사람들만 있진 않겠지.'

적어도 수천 명의 사람들.

그들이 모두 괴물이 되었다면 미친 듯이 불어나는 괴물들의 숫자도 이해는 된다.

수천 마리의 괴물들에게 쫓긴다고 생각하면 등줄기가 오싹해지지만, 이성이 없는 괴물들이 함정의 규칙을 꿰뚫어보는 일 따위는 없을 터.

'...라고 생각하는 게 순진한 거지.'

이미 여기까지 왔다는 것 자체가 함정의 규칙을 파악하고 대응했다는 소리나 진배없다.

함정은 안배한 목내이가 그걸 알면서도 가만히 두고볼 리가 없으니 변수가 발생하리라.

머지않아 그 징조가 나타났다.

'놈들이 점점 빨라지고 있다.'

조금씩 기민해지는 괴물들의 움직임.

본래의 움직임을 되찾으면 용빼는 재주가 없는 이상 붙잡힐 것이 명백했다.

'위험하면 마지막 수를 쓸 수밖에 없겠지.'

처음 함정을 꿰뚫고 나서 알아낸 또 다른 규칙.

까딱하면 자신도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웬만하면 쓰고 싶지 않았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렇게 조금씩 각을 재던 강엽이 마지막 수를 쓰려고 하는 그때,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쿠구궁...!

뒤쪽의 계단이 갑자기 움직인 것이다.

"캬아아아악!"

갑작스러운 사태에 대비하지 못한 괴물들이 쓰러지거나 절벽 아래로 추락한다.

설마 이제 와서 계단이 움직일 거라고 생각지 못했던 강엽은 염통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몇 걸음만 늦었어도 저기서 떨어지는 것은 자신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면 현기증이 난다.

'...변수가 또 하나 늘어났어.'

움직인 계단은 옆의 계단과 붙고, 그 뒤의 계단은 또 다른 계단과 붙고 있었다.

뒤를 돌아본 강엽은 계단이 이어진 방향이 일정 규칙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콧잔등을 찡그렸다.

"칠성(七星) 다음은 육합(六合)이라...."

처음에 알아낸 규칙은 칠성판(七星板)을 본따서 북두칠성의 별자리에 따라 계단을 밟아야 했다.

한데 이제는 육합까지 신경 쓰며 계단을 밟아야 하니 처음보다 훨씬 어려워진 것이다.

예를 들어 네 번째인 천권(天權)이나 다섯 번째인 옥형(玉衡)을 밟았을 때 계단이 움직인다면 다시 계단이 이어지지 않는 한 함정에 빠지는 셈이었다.

'이 육합이 음양가의 규칙을 따른 거라면, 오행(五行)의 규칙까지 껴있을 공산이 크다.'

여기서 잘못된 방향을 택하면 가까운 길을 두고 멀리 우회하는 경우가 생긴다.

재수 없으면 괴물들과 맞닥뜨릴 수도 있고.

쿠구구구구궁...!

이 순간에도 계단이 연쇄적으로 움직이며 다른 계단과 맞붙고 있었기에 빠르게 결정해야 했다.

'점이 칠성. 선이 육합. 시간이 오행이다!'

육합에 의하면 인목과 해수가 만나면 인해합목을 이루며, 오행의 상생에 의해 목은 화와 화합한다.

이는 두 번째로 긴 계단으로 이동하면 다음엔 세 번째로 긴 계단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뜻.

이 와중에도 칠성의 별자리에 맞춰 계단을 건너야 하니 어려워도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예측이 조금이라도 빗나가거나 걸음을 내딛는 데 실수하면 바로 나락행이었다.

이제부턴 휴식을 취할 틈도 없었다.

강엽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계단을 올랐고, 계단의 숫자에 맞춰 이동 경로를 계산해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꺾었다가 다시 우회했다.

난관은 뜬금없이 찾아왔다.

머릿속으로 계산한 대로 앞으로 나아간 끝에 한 사람이 앞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그를 발견한 강엽은 암담해졌다.

'하필이면 이 인간이라니.'

마침 그 사람도 강엽을 알아봤다.

"너, 넌...!"

계단에 엎어진 채 빌빌거리는 거한.

그의 정체는 흑산괴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