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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화 베가본드 (3) >

디스테리온 링.

고대 유물 중에서도 높은 위치에 랭크하고 있는 사기적인 아이템이다.

이 아이템의 효과는 세 가지.

[세인트 월]

[하늘 아래 빛이 있나니]

[그대의 악업을 증명하라]

세인트 월은 이름 그대로 내 주위에 벽을 치는 능력이다.

강도는 가히 S랭크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팅! 캉! 까가각!

물론 단점이 없는 건 아니다.

내가 인지한 공간에 직경 5cm짜리 벽을 형성하는 능력이라, 상대의 공격을 완벽하게 읽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팅-!

하지만 내게는 바람의 길이 있다.

잠룡의 뿔은 한참 전에 꺼내 들었다.

"크하하! 나리. 하얀 각오의 창이란 놈은 언제 꺼낼 거요?"

"네 창이 농익을 때쯤."

"크흐. 역시 알고 계셨구만."

베가본드의 능력은 그의 창과 동화되어 큰 힘을 이끌어 내는 [붉은 맹세]다.

효과는 아주 간단하다.

전투를 오래하면 오래할수록 신체 능력이 올라가고, 녹슬었던 창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요컨대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진다는 거다.

이게 베가본드가 대규모 전장에서 큰 힘을 발휘하는 이유다.

다들 체력적으로 지쳐 갈 때, 베가본드는 더욱 강해져 가니까.

칭! 캉! 콰아앙!

세인트 월과 창이 마구 격돌했다.

숨 쉴 틈도 없을 정도로 맹렬한 찌르기.

이미 바람의 길이 가리키는 붉은 궤도는 20을 넘은지 오래다.

"크하~ 제공권이라는 게 이렇게 까다로운 거였나."

내가 하늘을 날고 있기에 이정도로 끝난 거지.

만약 내가 지상에 있었다면 세인트 월이 있던, 뭐하던 막을 수 없었을 터다.

"그 배리어. 마력 함유량이 꽤나 높은 거 같은데. 언제까지 그렇게 방어만 할 생각이요?"

"말했잖나. 네 창이 농익을 때 까지라고."

그리고 디스테리온 링의 두 번째 효과.

[하늘 아래 빛이 있나니]

이 특수 능력의 효과는 아주 [세인트 월]과 연계된다.

그 효과란 바로 하늘 아래에선 마력이 끊이지 않는다는 부스터 효과.

"지금 이 상태론 재미없으니, 봐주고 있는 거다. 멍청한 놈."

요컨대, 하늘 아래서라면 [세인트 월]을 무한히 사용할 수 있다는 거다.

······아. 무한정은 아니지.

애초에 10분 지속 시간이 있고.

나아가 나는 1분의 사용 제한이 있으니까.

"크하하하!"

베가본드가 돌연 대소를 터트렸다.

"과연 천사 나리. 오만함이 하늘을 뚫을 지경이야."

그리곤 다시 창을 움켜쥐었다.

"이 베가본드를 앞에 두고도 그런 소리를 지껄일 수 있다니―"

다음 순간.

"―말이지!"

베가본드는 내 앞에 있었다.

휘잉-

바람의 길은 바로 반응했다.

붉은 궤적이 하나.

둘.

열.

이십.

서른.

무한히 뻗어 나간다.

내가 자존심을 제대로 긁긴 한 모양이다.

설마 벌써 [창신연격]을 사용할 줄이야.

······뭐, 계획대로긴 한데!

나는 빠르게 세인트 월을 형성했다.

팅, 팅, 팅, 티이잉!

심장, 머리, 날개를 비롯한 급소를 방어.

쾅! 피익!

맞아도 크게 지장없을 공격은 무시했다.

내가 입고 있는 방어구의 내구를 믿었다.

지잉-

머리가 깨질 것 같다.

바람의 길과 세인트 월을 연계해서 사용하는 건 역시 무리가 있었나.

하지만 참을 만하다.

카앙! 치잉! 까가각!

······시발.

이게 공중에 떠서 별 다른 발디딤없이 내지른 일격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픽- 치익-

베가본드의 연격.

창신연격이 이어질 때마다 내 몸에 잔상처가 늘어갔다.

"크하하! 겨우 이 정도요? 이 정도로 그딴 오만한 소리를 지껄였냐고!"

찌르기의 호우는 끝나지 않았다.

나는 계속해서 막았다.

막을 수 없는 건 흘려냈다.

흘려낼 수 없는 건 피했다.

피할 수 없는 건 맞았다.

"큭."

그 공격은 5초가 넘게 이어졌다.

"크하~"

이 이상 중력을 무시할 수가 없었던 베가본드가 바닥에 착지했다.

"생각보다 별 거 아닌데."

착지해서 창끝을 내게 향하고 비아냥댔다.

내 전신은 어느새 끈적해졌다.

피.

피로 점철된 것이다.

괜찮다.

치명상은 없다.

참을 만하다.

나는 통증을 삼키고 무던하게 대답했다.

"너야말로 생각보다 약하군. 붉은 맹세가 없으면 이 정도인가."

"캬아~"

베가본드가 이마를 짚고 탄성을 터트렸다.

"나리는 진짜 모르는 게 없네."

뭐가 그리 즐거운지 몸을 바르르 떨어 가며 웃는다.

나는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40초.

이제 곧 40초가 흐른다.

곧 초인들이 베가본드의 감지 영역 내로 들어설 시간이며.

"그럼 이번엔 이쪽이 반격할 차례겠지."

내가 행동을 개시할 시간이다.

나는 서서히 지면으로 내려섰다.

"뭐하자는 거요?"

베가본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봐주는 거냐고 묻는 듯한 얼굴이다.

"무얼. 제공권을 포기한 건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다."

다른 초인들이 들이닥쳤을 때, 내가 날고 있는 모습을 보여 줄 수 없거든.

"······호오. 이제 좀 제대로 해 볼 생각이 든 거요?"

베가본드가 사납게 웃었다.

"그래."

네가 하지 말라고 해도 할 거다.

나는 디스테리온 링을 끼고 있는 손을 베가본드에게 뻗었다.

"뭘 하실 생······."

"그대의 악업을 증명하라."

그 순간.

"컥!"

베가본드의 신체가 흔들렸다.

한 손으로 머리를 짚고 비틀비틀.

"이, 건···!"

"네 죄다."

디스테리온 링의 세 번째 특수 스킬. [그대의 악업을 증명하라]

효과는 상대가 범한 죄만큼 능력치를 다운시키는 것이다.

그 효과는 정확히 20초.

베가본드가 행한 악업을 생각하면 대충 3랭크는 다운 되겠지.

"이, 런 시발!"

베가본드가 내게 달려들었다.

붉은 궤적이 보인다.

열 개의 궤적.

디딤발이 없었던 하늘에서도 열 개가 넘는 궤적이 보였던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약해졌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세인트 월을 사용했다.

카아앙-!

그와 동시에 오른손의 대검과, 왼손의 단검을 살포시 움켜쥐었다.

휘익-

첫 번째 궤적은 세인트 월로 방어.

그와 동시에 몸을 앞으로 전진시키는 것으로 2, 3번째 공격을 회피했다.

내 위치가 변한 걸로 붉은 궤적도 변했다.

세 개의 궤적.

그 궤적은 매우 조잡했다.

베가본드 자신의 당황이 느껴지는 궤적이었다.

나는 그 몸을 비틈과 동시에, 잠룡의 뿔에 강기를 둘렀다.

두 개의 궤적을 피함과 동시에, 단검으로 마지막 궤적을 흘려낸다!

"크윽!"

이걸로 베가본드는 무방비.

나는 빠르게 오른손의 대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상대는 전투광 베가본드.

능력치의 갑작스런 감소로 신체에 괴리감이 생겼을 텐데.

어떻게든 몸을 비틀어 내 대검의 궤적에서 벗어났다.

이미 궤적을 틀기는 늦었다.

이 회심의 일격은 베가본드에게 닿지 않는다.

베가본드가 미소 지었다.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

이 전투가 즐겁고 즐거워서 참을 수 없겠다는 표정이다.

나도 웃었다.

어디 즐길 수 있다면 즐겨 보던가!

디스테리온 링에서 빛이 났다.

[세인트 월]

내 인지하에 생성된 빛의 벽이 내 검의 궤적에 비스듬히 나타났다.

끼기기기긱!

인간의 힘으론 틀 수 없는 검의 궤적이,

끼이익!

빛의 벽에 의해 강제로 뒤틀렸다.

"!"

베가본드의 표정이 굳었다.

굳고 난 뒤에 경악으로 변했다.

······새끼. 이제 좀 보기 좋은 표정이네.

그럼 마무리를 해야겠지.

바짝-

내 전신의 솜털이 직각으로 서며. 맹렬한 기세가 내뿜어 졌다.

피이잉-!

"······!"

포식자의 살의.

상대의 내구를 2랭크 깎는 수인족의 포효.

지금 이 순간.

베가본드의 내구는 D랭크에 근접했다.

자.

준비는 모두 끝났다.

"흐으으읍!"

나는 전신의 힘을 오른손에 모았다.

마력을 모았다.

무기의 주인이 시키는 대로.

바람의 길이 가리키는 대로.

중력에 이끌리는 대로.

그리고 다음 순간.

촤아아아아아악-!

"끄아아아악!"

내 검은 베가본드의 살점을 꿰뚫고 있었다.

"······커허억!"

베가본드가 빠르게 멀어졌다.

오른쪽 어깻죽지부터 시작된 거대한 자상에서 피가 줄줄 흐른다.

"너······."

아쉽게도 치명상은 아니다.

베가본드는 최후의 최후에 신체를 비트는 것으로 치명상을 피했다.

"역시 전투광."

역시 베가본드.

엄청난 전투 센스다.

"······크흐흐."

베가본드가 웃었다.

"크하하하!"

상처를 붙잡고 하늘을 올려다 보며 포효했다.

"이 얼마 만에 입어 본 상처란 말인가! 얼마 만에 느끼는 피의 향기란 말인가!"

미친놈.

과연 전투에 미친 또라이였다.

"좋아. 아주 좋아!"

그의 전신에 흥건한 피가 그의 창, '붉은 맹세의 창'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자. 다시 붙어 보자."

그와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붉은 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붉은 맹세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설마 대균열을 처리했다는 천사가 겨우 이 정도 힘일 리는 없겠지."

그와 동시에 [그대의 악업을 증명하라]의 효과도 서서히 끊겨 가기 시작했다.

"자. 네 말대로 내 창이 농익었다."

B랭크의 베가본드는.

S랭크의 베가본드로 돌아오고 있었다.

"전초전은 이걸로 끝! 이제 네 하얀 각오의 창이란, 걸······."

광기에 넘치던 베가본드의 표정이 돌연 굳었다.

"······이, 건?"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파지직-

그와 동시에 디스테리온 링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Error!]

익숙한 에러 메시지.

그것은 1분이라는 시간이 모두 경과했음을 나타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반지를 빼 상자에 넣었다.

"이 또라이 새끼야."

동시에 입꼬리를 비틀었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놈이 내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게 천추의 한이다.

"내가 미쳤다고 너랑 1:1로 싸우냐."

"······이 새, 끼."

[그대의 악업을 증명하라]는 상대의 능력치를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이 능력치의 감소에는 '감각'도 포함되어 있다.

"눈치 못 챘지?"

그리고 감각이라는 능력치가 감소하면, 색적 능력에 이상이 생긴다.

베가본드는 초인들이 다가오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넌 이제 독 안에 든 쥐야."

다음 순간.

"이야. 진짜 성공했네."

"그러게요."

S랭크 초인들이 나타났다.

"장치 작동!"

"작동!"

사전에 깔아 둔 퇴로 차단 함정이 발동했다.

"누군지 모르지만, 고생했다."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내 앞으로 나섰다.

분명 신화 그룹 소속 S랭크 초인 중 한 명이었는데.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뒤는 우리한테 맡기고 푹 쉬어요."

이번엔 유화가 내 등을 툭 치고 앞으로 나섰다.

"이 정도로 판을 깔아 줬는데, 못 먹으면 바보죠."

"개 병신이지."

S랭크 초인만 여섯 명.

"방심하지 마라! 제대로 진형을 짜고 퇴로 봉쇄에만 주력해!"

"전투는 S랭크 초인들한테 맡겨라!"

수많은 초인들.

"새끼."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웃었다.

"싸움은 머리랑 인맥이야."

내 작전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으아아아아아!"

베가본드가 분노에 가득 찬 포효를 내질렀다.

* * *

"허억. 허억."

"······이 미친 새끼."

전투는 끝났다.

근래 보기 드문 대규모 전투였다.

오늘, 베가본드라는 전대미문의 빌런을 상대로 한 일대다수의 전투는, '강력한 개인을 어떻게 상대해야 되느냐'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귀중한 데이터가 되어 영원히 남을 것이다.

설치된 재래식 함정 94개소.

작약식 함정 47개소.

전장 버프 관련 초인 13명.

전장 디버프 관련 초인 4명.

원거리 요격 마도장비 5문.

원거리 요격 지원 전차 11대.

회복계열 능력자 13명.

전투 기록팀 8명.

수많은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을 쏟아 부은 작전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철저히 준비했음은 물론, 본인의 능력 이상을 발휘한 전투원의 수가 절반을 넘었다.

그러나,

S랭크 초인 셋 중상.

남은 셋 경상.

사상자 열.

부상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고.

물적 피해도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하지만 결국 승리했다.

치밀한 사전 준비의 승리였다.

결국 베가본드라는 강인한 빌런은 목숨을 잃었다.

"이 미친놈을······ 아까 그 짜가 천사는 어떻게 혼자서 1분이나 상대한 거야?"

비혼 길드 소속 S랭크 초인 209위. 김한울이 숨을 헐떡였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강해지는 베가본드에게 얼마나 경악했는지 모른다.

"선배. 신화 그룹 소속 초인인 거 같은데. 정보 없어요?"

"몰라. 아가씨의 개인적인 지인이라는 것만 알고 있어."

신화 그룹 소속 S랭크 초인 107위. 한창호도 마찬가지로 숨을 거칠게 내쉬고 있었다.

"이 정도로 확실하게 포위했는데도 이렇게 힘들었는데. 만약 습격을 당했다거나 하면······."

"야. 말도 하지 마라. 끔찍하니까."

베가본드의 전투력은 정말 엄청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지는 [붉은 맹세]에 더불어 온갖 전투 지속 스킬들을 이용하니, 진짜 창신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아마 그 초인이 상처를 입혀두지 않았으면 힘들었을 수도 있어요."

근처에서 상처를 치유하고 있던 유화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힘들었을 수도 있는 게 아니라. 힘들었을 거야. 아마 졌을 수도 있고."

그만큼 힘든 전투였다.

순간적으로 정적이 흘렀다.

"그 정체불명의 초인은 지금 뭐 하고 계시대냐?"

"일단 지아 아가씨가 상처를 치유한다고 데리고 갔어요."

"그래? 쯧. 근처에 있으면 몰래 얼굴이나 보려고 했더만. 대체 누구지?"

주위 다른 초인들의 대화를 들으며, 유화가 일어났다.

"길드장님! 아직 상처 치료 안 끝났어요!"

"괜찮아요. 이 정도는 자연 치유력으로 나을 거예요. 아람 씨는 저 말고 더 급한 초인 분들을 봐 주세요."

"아, 넵! 알겠습니다."

유화는 폐허의 구석 한적한 곳으로 이동했다.

이동해서 폰을 꺼내 들었다.

[서율 씨. 오늘 고생 많았어요.]

유화는 웃었다.

[상처 치료 잘 하시고요. 아. 그리고.]

'뭐? 신지아 쪽에 미끼를 맡을 적당한 초인이 있어?'

유화는 코웃음을 쳤다.

미끼 역할을 맡은 초인은 강서율이다. 확실하다.

[다음에 거짓말 한 대가는 제대로 받을 거예요.]

유화의 입가가 장난스런 호선을 그렸다.

< 57화 베가본드 (3) > 끝

< 58화 파악 (1) >

금요일 저녁.

진리의 구명자 본거지.

언노운을 포함한 여섯 간부가 다시 모였다.

"······."

싸늘한 침묵 속에서 언노운은 신문을 훑고 있었다.

마에스트로가 건네 준 신문이었다.

[어제 10시 경. 신화 그룹, 비혼 길드 공동 작전! 진리의 구명자 소속 빌런 '베가본드' 사살!]

베가본드의 사망에 대한 기사가 적혀 있는 신문이었다.

[신화 그룹에서 공개한 1분 남짓한 영상에 세계가 큰 충격에 휩싸였다.]

[······중략. 베가본드라는 빌런의 전투력은 뭐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했다. S랭크 초인이 여섯이나 나섰음에도 전투는 20분이나 지속됐다. 그 강함에 모두 치를 떨었다고 전했다.]

[······중략. 하지만 결국 승리한 건 초인들이었다. 제법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더 크다. 만약 이 막강한 빌런을 지금 처리하지 못했다면, 추후 발생했을 피해는 지금에 비할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베가본드의 강력함.

[그런 막강한 빌런을 함정에 빠트려 처리한 신화 그룹과 비혼 길드에게 큰 감사를 보낸다. NY타임즈- 크리안 베리톤 기자.]

그 베가본드를 완벽하게 함정에 빠트려 처리한 신화, 비혼에 대한 찬양.

기사는 그 두 가지 내용들이 길게 기록되어 있었다.

"다비드."

숨 막히는 긴장감이 흐르는 중.

언노운이 마에스트로를 불렀다.

"······예. 보스."

"제이스가 죽었다."

제이스 스칼렛.

베가본드의 본명이다.

"······예."

마에스트로를 비롯한 다른 간부들도 고개를 숙였다.

"함정에 빠졌다는 건 이해할 수 있다. 제이스가 멍청한 거야 원래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언노운이 의자 팔걸이를 검지로 툭툭 쳤다.

"하지만 죽었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아."

언노운의 표정은 매우 공허했다.

부하의 죽음에 슬퍼하지도, 분노하지도, 무언가를 느끼는 듯한 기색도 없었다.

"제이스는 싸움에 미친 멍청한 놈이지만, 어리석진 않다."

베가본드의 감지 능력은 간부들 중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1km내에 존재하는 마력 및 생명체는 모조리 탐지할 수 있다.

그런 베가본드의 감지망을 뚫고 완벽한 포위를 형성해 베가본드를 사살했다?

그것도 고작 100위권 밖 S랭크 초인 여섯 명이서?

언노운의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비드. 제이스가 왜 죽었을 것 같나."

침묵이 흘렀다.

"······그건."

마에스트로는 대답하지 못했다.

짐작 가는 이유가 있으나, 말로 내뱉기가 껄끄러웠다.

언노운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래."

베가본드의 감지 능력, 전투력, 성격, 초인들의 대응 속도.

기타 등등 모든 걸 다 따져 봤을 때,

"이 안에 베가본드의 정보를 초인 측에 건넨 배신자가 있다."

한국 초인 측은 베가본드의 정보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베가본드의 죽음을 설명할 수가 없다.

"······."

"······."

여섯 간부들 사이에 싸늘한 긴장감이 흘렀다.

모두 머릿속 한켠으로 생각하고 있던 일이었다.

언노운이 세상 즐겁다는 표정으로 간부들을 훑었다.

"내 질문에 진실로 답하도록."

언노운의 주위에서 검은 안개가 일렁였다.

"큭!"

"꺅!"

그와 동시에 여섯 간부들이 심장을 부여잡고 신음을 흘렸다.

여섯 간부들의 심장에 똬리를 틀고 있는 '절대복종의 맹세'가 발동한 것이다.

"이 안에 베가본드에 대한 정보를 어떠한 방식으로라도 유출한 자가 있나. 있다면 대답하도록."

언노운의 질문에 거짓을 고하면, 그 즉시 심장이 뒤틀려 사망한다.

"······."

"······."

그러나 간부들은 모두 조용했다.

그 누구도 답을 하지 않았다.

"흠."

그 말은 즉, 베가본드의 정보를 외부에 유출한 자가 한 명도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언노운이 자신의 마력을 거둬들였다.

"내 예상이 빗나간 모양이군."

잘 생각해 보니, 절대복종의 맹세가 있는 데도 불구하고 배신을 할 멍청한 간부가 있을 리가 없었다.

여섯 간부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설마 하긴 했는데, 이 안에 배신자가 없다는 것에 안도한 것이었다.

'······후.'

그중에서도 허미트의 안도감은 남달랐다. 실제로 강서율에게 붙어서 배신 비슷한 행위를 한 이력이 있었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다행히 잘 넘어간 모양이다.

"흠."

언노운이 다시 의자 팔걸이를 검지로 툭-툭- 리드미컬하게 치며 생각에 잠겼다.

'배신자는 없었다.'

그렇다면 베가본드는 어떻게 함정에 빠지게 됐고,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일까.

언노운의 뇌가 팽이처럼 회전했다.

생각할 수 있는 가설들을 차례차례 정립하고. 하나씩 소거해 가며, 최선의 답을 찾았다.

"모르겠군."

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애초에 다른 답이 있었으면 간부들 중에 배신자가 있을 거라는 결론을 내지도 않았다.

'초월적인 무언가가 나서기라도 한 건가.'

"······보스. 어떻게 할까요?"

침묵을 뚫고 마에스트로가 말문을 열었다.

"뭘 말이지?"

"이종족 조사를 비롯한 베가본드의 복수 말입니다."

"흠."

언노운이 턱을 매만졌다.

솔직히 베가본드의 복수 같은 건 어찌 돼도 상관없었다.

베가본드는 멍청했고, 약했기 때문에 죽은 것뿐.

그런 멍청한 놈에게 복수란 단어는 사치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종족 조사는 다르다.

공백의 10년에 대한 진실을 파헤친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이종족 조사는 반드시 필요하다. 고로, 다른 조사원을 파견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다른 간부를 보내기엔 국가전 준비가 너무 늦어진다.

게다가 지금 또 다른 간부를 보냈다가 베가본드처럼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언노운 자신도 세계의 뿌리를 대체할 아이템을 찾느라 여유가 없다.

"다비드."

고로, 여섯 간부는 보내지 않는다. 언노운도 움직이지 않는다.

"네 부하. 검령와 귀령을 한국에 파견하도록."

"예."

* * *

"이러한 이유들을 종합해 봤을 때, 최소 4개월간은 간부의 습격이 없을 겁니다."

나는 지아와 유화를 차례대로 바라보며 말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걱정이 태산인 얼굴들이었는데, 이제 좀 안심한 표정이 되었다.

둘 다 베가본드의 무지막지한 무력을 막상 두 눈으로 보고 나니, 추후 진리의 구명자에게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을 하길래 걱정 없을 거라고 설명했다.

국가전 테러 준비 때문에 빈손이 없을 거라는 점.

이 의문의 사태에 언노운은 직접 행동하기보단 '관찰'이라는 행동을 취할 거라는 점.

만약 다른 빌런을 보낸다고 해도 간부급이 아닌 일반 빌런을 보낼 확률이 높다는 점.

그 외 기타 등등의 이유로 당장 보복을 당할 걱정은 할 필요 없다고 전했다.

"그러니 괜한 걱정 마시고, 이번 간부 처리 건으로 얻은 이익들을 어떻게 더 극대화 시킬지나 고민하세요."

이번 일로 신화 그룹, 비혼 길드의 브랜드 평판은 크게 상승했다.

지금껏 단서도 잡지 못했던 진리의 구명자 간부 중 하나를 완벽히 사살했다는 것에 세계적으로 큰 갈채를 받았다.

······뭐, 공개된 전투 영상을 보고 박수를 안 칠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이게 참, 뭐라고 해야 할까요. 다른 사람이 한 말이었면 그걸 네가 어떻게 확신하냐고 코웃음치고 끝이었을 텐데. 서율 씨 말이라 그런가. 엄청 안심되네요."

유화가 다리를 쭉 펴고 편해진 얼굴로 말했다.

"고마워. 서율아."

지아도 훨씬 편해진 얼굴로 내게 감사를 건넸다.

"고맙긴. 내가 더 고맙지. 유화 씨도 고마워요."

이 둘이 아니었으면 베가본드를 처리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 둘이 내 말을 전적으로 믿어 준 덕분에 베가본드를 처리할 수 있었던 거나 다름없다.

인맥 만세.

"그나저나 두 분. 오늘이 마지막 필기 시험이라고 들었는데. 잘 봤어요?"

유화가 히죽 웃으며 나와 지아를 바라봤다.

뭔가 시험에 망했길 기도하는 듯한 표정인데.

이걸 어쩌나.

"만점인데요."

"세 문제 틀렸어요."

우리 둘 다 시험 오질라게 잘 봤는데.

"······."

아니나 다를까 유화의 표정이 썩었다. 두 눈에 '와. 재수없어.'라고 써 있는 듯했다.

나는 그런 유화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둘 다 고생 많았어요."

"······고생은 자기가 제일 많이 했으면서 무슨."

유화가 시큰둥한 눈으로 날 바라본다.

"그보다 저한테 거짓말 한 일. 마음 속에 잘 담아 두고 있으니까요. 아시죠?"

"······음."

유화는 미끼 역할을 맡은 초인이 나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애시당초 속일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안 했다.

"저 생각보다 뒤끝 심한 여자라는 거 알죠?"

"네. 잘 알죠."

그도 그럴 게 미끼를 맡은 사람은 [지아만 알고 있는 정체불명의 지인]이다.

나를 떠올리는 건 당연했다.

"다음에 무슨 일 있으면 한번 도와줄게요. 필요하면 연락해요."

나는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섰다.

* * *

"냐아앙!"

집으로 들어서자, 금호가 나를 반겼다.

"오구오구. 우리 금호. 형 기다렸어?"

나는 금호를 안고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으아. 어찌어찌 잘 해결됐네."

그 압도적인 무력을 자랑하는 변태 싸움광 베가본드를 이 빠른 시기에 처리하는 데 성공했다.

무척 기뻐할 일이지만,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A+랭크 고대 유물을 쓰고도 개 쳐발렸네."

제공권을 점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버티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것도 [붉은 맹세]를 조금도 활성화시키지 않은 베가본드를 상대로 말이다.

"하아."

역시 능력치의 벽은 너무 두껍고, 또 높았다.

아니 뭐, 사실 E랭크 나부랭이가 S랭크 초인을 상대로 1분이라도 버틴 것 자체가 기적이었긴 하지.

전적으로 디스테리온 링과 천익(天翼), 바람의 길을 비롯한 온갖 종족 특성들 덕분이다.

내 능력의 사기성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쯧."

허나 이는 반대로 말하면,

그런 사기적인 능력들을 총동원하고서도, 고작 1분을 버티는 게 다였다는 말이다.

"이 비루한 신체 같으니라고."

진짜 한숨밖에 안 나온다.

"냐앙?"

내 자조가 신경쓰였던 것일까.

금호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리곤 앞발을 들어 내 볼을 꾹꾹 누른다.

아. 힐링된다.

"우리 금호. 형 기운 내라고 꾹꾹이 해 주는 거야?"

"냐아."

나는 금호의 머리를 조금 거칠게 쓰다듬었다.

고롱고롱 소리를 내며 좋아한다.

"그래. 형 힘낼게."

금호 덕분에 힘이 솟는 기분이다. 그리고 뭐, 마냥 나쁘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내 신체 능력은 성장의 여지가 충분하다.

E랭크 나부랭이인 내가 A+랭크 고대 유물을 사용했다곤 해도, S랭크 빌런인 베가본드를 상대로 1분이나 버텼다.

이 말은 즉,

내 신체 능력치가 D랭크, C랭크까지 오르고.

나아가 S랭크에 오른 상태에서 고대 유물을 사용한다면, 내게 대적할 자는 없다는 말과 같다.

"······이번 베가본드 처리 일건으로 시간적 여유가 생기기도 했고."

아까 유화와 지아한테도 말했던 거지만, 아마 언노운은 한동안 한국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할 것이다.

제아무리 이종족에게 흥미가 있다곤 해도, 오랜 기간 준비해 온 국가전 테러 작전을 포기할 순 없을 터.

안 그래도 부족한 인력을 다시 나누는 짓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언노운의 성격을 생각하면 베가본드의 원수를 갚겠다고 감정적으로 행동할 가능성도 없겠다.

아마 확실하겠지.

그 외에도 온갖 정황 증거들을 종합해서 생각해 봤을 때.

한동안은 크게 문제없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시기에 바짝 성장해야 한다."

국가전 개최 1달 전.

아마 그 시기까지가 냉전 기간일 것이다.

원작에선 그때쯤 습격 준비가 모두 끝났었으니까.

"냐아아."

나는 금호의 목덜미를 살살 긁으며 생각했다.

목표는 국가전 개최 1달 전까지 모든 능력치 B랭크 달성.

조금 욕심을 부리자면 A랭크까지 올리는 것이다.

힘들겠지만, 불가능한 목표는 아니다.

"운만 잘 따라 준다면 일이 더 쉬워질 수도 있고."

······이번처럼 말이지.

나는 가슴 중앙에 손을 얹고 미소를 지었다.

붉게 물들어 있는 천족 문신에 손을 얹은 것이었다.

"설마 여기서 이게 나와 줄 줄은 몰랐는데."

천족 이단심판관들이 공통적으로 보유하고 있던 특성.

[천벌(天伐)]

나는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여기서 듀얼 속성이 됐단 말이지."

파지지직-

내 손에 번개가 번쩍였다.

< 58화 파악 (1) > 끝

< 59화 파악 (2) >

금요일 밤.

강서율이 먼저 떠나고 난 뒤.

둘만 남은 방 안에서 유화와 신지아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언론 쪽은 저희가 맡을 게요. 비혼은 다른 세세한 처리를 맡아 주세요."

"좋아요. 그쪽은 제 전문이기도 하고."

이번 베가본드 사살 일건으로 얻을 이점들을 좀 더 늘리기 위한 계획들을 짜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얼추 정립됐다.

"그럼 끝이죠?"

"다른 건 상황을 보면서 덧붙여 가면 되겠고. 끝 맞네요."

"······."

"······."

사무적인 얘기가 모두 끝나자,

자연스럽게 침묵이 내려앉았다.

평소 같았으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방을 나섰겠지만.

오늘은 둘 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으로 입술만 달싹일뿐이었다.

"이번 작전."

먼저 화두를 연 것은 유화였다.

"서율 씨 제안에 바로 승낙한 건, 역시 서율 씨가 피알레 알로를 처리해 준 은인이기 때문인가요?"

신지아가 강서율을 신뢰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예. 맞아요."

신지아는 대수롭지 않게 긍정했다.

"······저번엔 모른 척하시더니. 아주 쿨하게 긍정하시네."

"아니라고 해도 안 믿으실 거잖아요?"

"그거야 뭐."

신지아의 말에 유화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는 유화 씨는 왜 서율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나요?"

"그냥 서율 씨한텐 여러모로 도움을 받았다고만 말해 둘게요."

"아하. 그 도움의 대가였다?"

"예."

유화가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신지아도 여유롭게 웃었다.

찰나의 정적.

신지아가 넌지시 말했다.

"도플갱어 사건."

"······."

유화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리고······. 아마 김신우 비서와 관련된 일들."

"!"

이번에야말로 유화의 표정에 당황이 서렸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신지아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 두 사건이죠? 서율이의 도움을 받았다는 거."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요."

신지아는 여유롭게 차를 한 입 마셨다.

강서율에게 유화를 잘 봐달라는 메시지를 받은 날 이후.

신지아는 유화와 강서율 사이에 무언가가 있다는 걸 눈치 챘고. 그 즉시 조사에 임했다.

하지만 그 어떤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강서율이 유화와 자주 연락을 주고 받는다는 것은 금방 파악했는데, 정작 두 사람이 만난 계기에 대한 건 오리무중이었다.

유화의 정보 은폐는 그만큼 완벽했다.

"지금부터 할 얘기는 모두 가설이에요. 증거는 없어요."

고로, 신지아가 할 수 있는 것은 추측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와 알려진 정보만을 이용한 추론.

"도플갱어 체포 당일. 서율이도 체포 현장에 있었어요."

"······그런가요? 처음 듣네요."

"네. 도박장 입장 티켓을 준비해 준 사람이 저라서 잘 알고 있어요."

그날.

도플갱어가 체포된 날.

강서율은 다급하게 도박장의 입장권을 준비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 시간 그 장소에서 도플갱어가 체포됐다.

"그게 과연 우연일까요?"

"그거 참 기가 막힌 우연이네요."

두 사람은 동시에 미소 지었다.

감정을 완벽하게 감춘 무감각한 미소였다.

"각국에서 조사해도 단서조차 잡을 수 없었던 도플갱어를 우연히 들른 도박장에서 잡다니. 정말 엄청난 행운이네요."

"네. 지금 생각해도 운이 좋았죠."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도플갱어는 치밀한 빌런이었어요. 일말의 단서조차 잡을 수 없을 만큼 말이죠. 그런 도플갱어를 체포하고, 나아가 자백까지 받아냈다는 것은 확실한 정보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에요."

신지아의 눈에서 이채가 흘렀다.

"······그 정보 제공자가 서율 씨다. 그렇게 말하고 싶으신 건가요?"

"예. 시기적으로 서율이가 유화 씨와 교류를 시작한 것도 이때쯤이기도 했고."

만약 신지아가 강서율의 비범함에 대해 몰랐다면, 의심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신지아는 강서율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강서율이라면 세상 그 누구도 모르던 도플갱어의 정보를 알고 있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선조님은 세상에서 제일 완벽하신 분이니까.'

신지아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지아 씨. 작가 하셔도 되겠다. 제법 재밌는 가설이었어요."

유화는 당황을 최대한 감추고 태연하게 응대했다.

"더 듣고 싶네요. 그럼 신우 아저씨 얘기는 어떻게 엮이는 건가요?"

"그건 정말 별 거 없어요."

도플갱어 체포에 강서율이 얽혀 있다는 가설은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있다.

강서율의 비범함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김신우 살해 사건은 정말 말 그대로 추측.

아니 망상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화 씨는 냉정하고 의심 많고 계산적이에요."

"······눈앞에서 욕하시는 건가요?"

"아뇨. 칭찬하는 거예요. 치밀하시다고요."

덕분에 유화랑 상대할 때마다 진이 빠진다.

"그런 치밀한 유화 씨가. 고작 도플갱어 사건 하나 도움 받은 걸로 서율이한테 무조건적인 신뢰를 줄 리가 없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럼 서율이를 신뢰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을까."

"······."

"그러자 문득 김신우 비서 살해 사건이 떠오르더라고요."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자연스레 비혼 길드 내에서 벌어진 김신우 살해 사건에 대한 게 떠올랐다.

"유독 언론 통제가 심해서 의문이 많이 남는 사건. 마침 도플갱어 사건 직후기도 하고, 서율이와 유화 씨가 직접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한 시기랑도 일치하는 유일한 사건."

신지아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래서 가설을 세워 봤어요. 그 사건엔 무언가 크나큰 비밀이 있었던 게 아닐까. 그 일로 유화 씨가 서율이에게 큰 빚을 진 게 아닐까. 하고 말이죠."

"······."

유화의 표정이 살짝 멍해졌다.

추측과 망상의 영역이라고 보기엔, 너무나도 정확한 추론이라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모든 게 이해가 가더라구요. 유화 씨가 서율이를 신뢰하는 이유도. 둘의 친밀한 관계에 대한 것도. 유화 씨가 서율이의 숨겨진 힘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감을 잡고 있는 이유까지도."

이 모든 건 강서율의 비범함을 축으로 둔 가설이다.

강서율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절대 세우지 못할 가설.

"어땠나요? 제 추론은. 제법 그럴싸했나요?"

신지아가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예. 나름 재밌었어요."

"그럼 다행이네요."

유화의 표정이 평소보다 딱딱해진 걸 보면, 100%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맞아떨어진 모양이다.

'적어도 도플갱어는 확실한 거 같아.'

신지아는 그렇게 확신했다.

"말이 길어졌네요."

어느덧 자정이 넘었다.

"그럼 전 먼저 가 보겠습니다. 유화 씨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신지아가 이겼다 싶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밌는 얘기를 들었으니, 저도 재밌는 얘기 하나 해 드릴게요."

그런 신지아를 유화가 만류했다.

"피알레 알로. 당신의 어머니를 죽인 불구대천의 원수."

"······."

신지아의 표정이 확 굳었다.

갑자기 왜 그런 얘기를 꺼내냐는 듯한 표정으로 유화를 돌아본다.

"그는 진리의 구명자 소속 빌런이에요."

신지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명색이 부모님의 원수인데, 지아 씨도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요."

유화의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

진리의 구명자에 대한 분노였다.

유화에게 김신우라는 트라우마를 심어 준 거지 같은 조직.

"복수는 아직 끝난 게 아니라는 걸 말이에요."

두 여자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 * *

토요일.

오전에 개인 단련실에서 가볍게 [천벌(天伐)]의 시연을 마쳤다.

과연 하늘의 심판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굉장한 위력의 번개였다.

······물론 대단한 위력인 만큼 과연 마력 소모도 대단해서,

한 발 쏘고 마력 오링으로 탈진했다만.

그리고 지금은 점심.

기다리고 기다리던 물건이 도착했다.

"강서율 본인 맞으시죠?"

택배 기사가 내게 물었다.

"네. 맞습니다."

"사인 한 번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나는 택배 기사가 건넨 단말에 내 이름 석 자를 대충 적고. 다시 기사에게 넘겼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나는 거대한 박스를 낑낑대며 안고 방으로 향했다.

더럽게 무겁다.

쿵-

"어후."

방 안에 무사히 들어 와, 박스를 방 중앙에 내려놓았다.

"냐냥!"

금호가 앞발로 박스를 툭툭 건들며 잽을 날린다.

참으로 귀여운 동작이었지만······.

팍! 팍!

나름 단단해 보였던 고급 포장 박스가 넝마가 되어 가는 걸 보면 약간 무섭기도 하다.

작아져도 호랑이라 이거지.

나는 쓰게 웃으며 금호를 뒤에서 껴안아 들어, 내 무릎 위에 올렸다.

"그만. 그러는 거 아냐."

내 다그침에 금호가 금세 시무룩해졌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가만히 있어. 알겠지?"

"냐아···."

금호가 알겠다는 듯이 내 옆에 몸을 웅크려 누웠다.

얌전하게 있겠다는 신호였다.

나는 그런 금호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 완전히 넝마가 된 박스를 열었다.

"······뭐 열 것도 없네."

나는 박스를 적당히 북북 찢어서 안에 들어 있는 두 개의 캐리어를 바닥에 놓았다.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콜렉터가 보낸 캐리어다.

각각의 캐리어에는 고대 유물이 하나씩 들어 있다.

"후. 이 순간이 제일 설렌다니까."

박스 개봉식.

이 얼마나 설레는 단어란 말인가.

딸깍-

"크~ 소리 좋고."

나는 두 개의 캐리어를 모두 열었다.

"······다음은."

콜렉터가 톡으로 보낸 캐리어 오픈 방법 및 패스워드 12자를 차례대로 실행, 입력했다.

치이이잉-!

그렇게 약 30초 후.

두 개의 캐리어는 기계틱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보안이 완전히 풀린 것이다.

"오우."

캐리어에는 각각 거대한 돌 반지와, 적당한 크기의 단검이 들어 있었다.

"거인족의 반지와 수인족의 단검."

각각 [거인의 힘]과 [프로모시움 대거]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프로모시움 대거는 야생이 그대로 살아 숨쉬는 것 같은 형태의 단검이다. 무슨 신석기 시대에 나올 법한 외견이라고 해야 하나.

다음으로 거인의 힘은······.

"이게 어딜 봐서 반지야."

훌라후프 아냐?

내 허리보다 굵은 거 같은데.

이게 반지면 거인족은 진짜 얼마나 큰 거야.

원작에서 말하길 제일 큰 거인이 30미터를 넘는 신장을 지녔다곤 하던데. 수치로 들어선 도저히 상상이 안 간다.

"냐아······."

금호가 수인족의 단검을 보고 눈을 빛내고 있었다.

누가 수인족의 수호자 아니랄까 봐.

"조심히 가지고 놀아."

"냐아!"

내 말에 금호가 쏜살처럼 달려들었다.

어차피 단검은 보험용으로 쟁여 둘 생각이었기 때문에 당장은 필요 없다.

그리고 보험용이 아닌,

종족 특성 즉시 습득용 아이템으로 눈을 돌렸다.

"······자. 그럼 온 우주한테 기도해 볼까."

나는 거인족의 반지.

[거인의 힘]을 눈앞에 두고 기도를 올렸다.

제발 능력치 보정 특성 주세요!

"좋아."

망설임은 없었다.

나는 거대한 훌라후프(반지)에 손을 가져다 댔다.

"제발 좋은 특성 주세요!"

그리고 잠시 후.

"김신렐루야."

내 기도는 우주에 닿았다.

* * *

월요일 아침.

오늘은 실기 시험이 시작되는 날이다.

"무슨 시험일까?"

"제발 무인도 같은 데만 안 가면 좋겠다."

"나도. 잠은 편하게 자고 싶어."

시험 내용은 아직 공지되지 않았다. 악명 높은 한국 초인 사관학교의 첫 시험이니만큼, 다들 긴장하고 있는 모양새다.

"서율이 넌 긴장도 안 되나 봐?"

마찬가지로 묘하게 경직된 얼굴인 하시연이 내게 물었다.

"그닥?"

시험 내용을 다 아는데 긴장할 일이 뭐가 있겠어.

"그래? ······심장이 우리랑 다른가?"

하시연이 멍하니 내 가슴에 손을 얹고 중얼거렸다.

아마 천사와 인간의 심장이 달라서 그런가? 라는 의미로 말한 거겠지.

근데 얘 여기가 교실이란 거 까먹고 있는 거 같은데.

"뭐야. 둘이 사귀는 거야?"

"오늘부터 1일이야?"

"신지아 버림받은 거야?"

나는 이마를 짚었다.

연애에 흥미가 넘치는 20대 승냥이들한테 빌미를 줘 버리고 말았다. 이럴 때는 그냥 무덤덤하게 있으면 되지만.

"아, 아냐! 그냥 서율이는 안 떨린다고 해서. 그게······."

하시연 같은 놀림 받기 딱 좋은 성격의 소유자가 반응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닌데. 얼굴 붉어진 거 보니까 사귀는 거 맞는데."

"당황하니까 더 수상해."

시험 전이라 그런가.

다들 텐션이 이상하다.

하시연을 괴롭히는 걸로 긴장을 풀려고 더 그러는 거 같기도 하고.

"속성 마력 보유자 두 명끼리 붙어먹었다~ 이거 아냐?"

"으. 그런 거 아닌데."

뭐, 표정을 보니 다들 진심으로 나와 하시연이 사귄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 것 같으니 그냥 놔둬도 되겠지.

이제 곧 교관이 들어 올 시간이기도 하고.

"다들 앉아라."

때마침 피진호 교관이 들어 왔다.

"이번 년도 실기 시험에 대한 공지를 하겠다."

그 순간, 장난스러웠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다시 긴장으로 가득 찼다.

"올해 실기 시험은 4박 5일간 진행되는 가상 미궁 공략이다."

"······미궁 공략?"

"생각보다 평범하네."

사방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다들 안심하긴 이를 텐데.

"그리고 이번 너희를 시작으로, 향후 전 세계 사관학교에서 모두 이용하게 될 교육용 미궁 건설에 협조해 준 초인이 있다."

"아."

"설마."

교관이 미소 지었다.

불안한 미소.

사관생들 사이에선 진호's Devil Smile이라 이름 붙은 끔찍한 미소였다.

"세계 랭킹 32위. 던전 크리에이터 메이든."

"······아."

"세상에."

그 순간, 주위에서 절망 섞인 한숨소리가 울렸다.

"나 집에 전화해야겠다. 먼저 가는 불효자식을 용서하라고."

"······나도 유서나 좀 써 둬야겠네."

"나. 이 시험이 끝나면 고백할 거야."

"야 이 미친놈들아."

이런 농담 아닌 농담까지 튀어나올 정도.

이해는 한다.

세계 랭킹 32위 초인 던전 크리에이터 '메이든'

던전을 제조한다는 독보적인 재능을 지닌 세계에서 유일한 초인이다. 그녀가 만든 던전들은 초인들의 성장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만.

성격이 조금 이상하다고 해야 할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그녀는 남을 괴롭히는 걸로 희열을 느끼는 사디스트다.

남이 자기가 만든 던전에서 고통과 절망에 몸부림치는 게 그렇게 좋을 수 없다나.

여튼 그녀의 기술 아래 탄생한 미궁들은 하나 같이 이런 평가를 듣는다.

'이게 사람이 깨라고 만든 미궁이냐.'

제아무리 교육용이라지만, 그런 악명 높은 초인이 만든 미궁에 들어가야 한다니.

"걱정하지 말도록. 죽을 일은 없다."

"······아."

"망했다."

다들 절망하는 건 당연했다.

"흐흐."

물론 나는 아니다.

"그럼 다들 밖으로 이동하도록."

······아. 기대된다.

< 59화 파악 (2) > 끝

< 60화 메이든의 대미궁 (1) >

세계 랭킹 32위 초인.

던전 크리에이터 메이든.

"크크. 언제 시작하려나."

그녀는 상황실에서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니는 여전하시네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유화가 말을 걸었다.

"나야 뭐 여전하지."

오늘 유화는 이곳 교육용 대미궁의 경호 임무를 맡게 됐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서, 현직 초인들을 사방에 배치해 둔 것이다.

"저번에 그 김신우 그 시벌롬 처리한 일은 어떻게 잘 해결 됐고?"

"예. 언니가 도와주신 덕분에 잘 해결됐어요."

"그럼 됐고."

유화는 김신우의 죽음을 무마시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얻었다.

메이든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근데 언니가 웬일로 이런 귀찮은 일을 돕기로 한 거예요?"

유화가 아는 메이든은 이런 귀찮은 일을 맡을 위인이 아니다.

"쯧."

메이든이 혀를 찼다.

"왜겠냐. 내 약점 쥐고 계시는 양아치 한 놈께서 협박해서 도운 거지."

"아. 진호 오빠요?"

"그놈 이름 꺼내지도 마. 그 거지발싸개 같은 놈. 비겁하게 20살 때 일을 들먹여?"

"······하하."

메이든의 외견은 유화와 크게 다를 거 없지만, 나이는 피진호와 동일한 41세다.

듣기론 사관학교 동기라서 이런저런 일이 많았다고 들었다.

"두고 보라지. 자기 학생들이 울부짖는 모습을 보면서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

메이든이 세상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근데 언니. 아마 이번 사관생들 쉽지 않을걸요?"

"뭐?"

메이든이 의자를 빙그르르 돌려 유화를 바라봤다.

불만 가득한 표정이다.

"황금 세대라고 불리잖아요. 이번 1학년."

"그건 알지. 당장 현역으로 뛰어도 문제없을 만한 애들만 열 명이 넘는다면서."

"맞아요."

"근데 그게 뭐."

메이든이 코웃음을 쳤다.

"현역 초인들도 고역을 치르는 게 내 미궁이야. 이제 갓 성인이 된 햇병아리들이 내 던전을 무사히 클리어할 수 있을 거 같아?"

자못 자신만만한 표정과 언동이었다.

"예. 적어도 한 팀은 아무렇지도 않게 통과할 거 같은데요."

메이든이 눈살을 찌푸렸다.

"누구? 신지아 팀?"

"에이. 걔는 아니죠. 실력은 있어도 경험이 없거든요."

유화가 신지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아니면 하시연 쪽?"

"음. 그 팀이 맞기는 한데, 하시연 사관생 때문은 아니에요."

"그럼 누구?"

유화가 모니터를 바라보며 살포시 웃었다.

"107위요."

"······107위?"

그 모니터 화면 속에는 107위, 강서율의 모습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 시작한다. 언니. 그럼 저는 위치로 돌아가 볼게요."

"뭐? 얌마! 하던 얘기 계속하고 가! 107위가 내 던전을 뭐!"

메이든의 날카로운 고성이 크게 울렸다.

* * *

메이든의 대미궁 공략 시험은 6명씩 팀을 짜서 이루어진다.

1학년은 총 498명이니, 총 83팀이나 된다.

물론 이 대미궁은 메이든이라는 걸출한 던전 크리에이터와 한국 정부 및 사관학교의 자금력이 합쳐져 만들어진 걸작 중의 걸작.

83팀이 동시에 공략을 진행해도 크게 문제가 없을 정도로 거대한 넓이를 자랑한다.

'돈지랄이 풍년이네.'라고 할 수 있겠지만, 꼭 돈지랄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오히려 투자라고 해야 할까.

이런 교육용 대미궁은 만들어만 두면 돈이 되거든.

타국에서 대미궁 이용료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꽤나 짭짤하다.

뭐, 그것도 잘 만들어야 가능한 얘기긴 한데, 제작자가 그 메이든이니 문제는 없을 거다.

남은 건 안정성 보장을 위한 실험을 몇 번 거치는 것뿐.

요컨대 우리가 그 안전성 실험의 피실험자로 당첨되었다는 거다.

"와. 나 인조 미궁은 몇 번 가 봤는데. 여긴 진짜 차원이 다른 거 같아."

하시연이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감탄했다.

우리 팀의 팀장님이라는 분이 경계는 안 하고 미궁 관광이나 하고 계신다.

"하 팀장님. 제대로 안 하십니까?"

"아, 넵. 죄송함다."

내 말에 하시연이 금방 긴장된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다들 사주경계 똑바로 하고. 여기 미궁이야. 그것도 메이든의 대미궁. 방심하다가 훅간다."

"오케이."

"응."

우리 팀은 하시연과 나를 포함해 2위, 107위, 180위, 291위, 381위, 473위로 이루어져 있다.

아주 적당한 밸런스라고 할 수 있겠다.

아니, 오히려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하시연과 같은 팀이 될 거라곤 기대도 안 했는데.

이러면 일이 쉬워진다.

발언하기가 편해지니까.

"저기 앞에 뭐 보이는데?"

앞서가던 하시연이 무언가 발견한 듯 내게 말했다.

"하 팀장님. 뭘 발견했으면 팀장님이 결정하셔야죠."

하시연이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지그시 바라본다.

그리곤 갸웃.

"······근데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왜 내가 팀장이야?"

"이 조합에 랭킹 2위가 팀장 안 하면 누가 해?"

뭘 그런 당연한 말을.

그러나 다른 사관생들한텐 당연한 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서율이 네가 해야지."

"강서율이 해야지."

"필기 1등이 해야죠."

다들 나를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고 있다.

"······내가 하라고?"

"응. 솔직히 미궁 공략에서 랭킹이 뭐가 중요해. 머리가 중요하지."

"맞아. 서율이 머리 좋은 건 다 아는 사실인데. 저번 가상 유적지 공략도 그랬고."

하시연에 이어 다른 팀원들이 하시연의 말을 두둔하고 나섰다.

나는 벙쪘다.

······이렇게 쉽게 지휘권을 얻는다고?

내 인식이 많이 좋아진 건가.

아니면 팀원들이 하나 같이 착한 건가.

둘 다인가?

"그럼 지휘권은 내가 잡는다? 다들 동의하는 거지?"

"응."

아무튼 개이득.

나는 공략 시작 5분 만에 지휘권을 잡았다.

"그럼 시연아. 앞에 뭐가 보였는지 브리핑."

"아, 응. 앞에 몬스터 세 마리가 보여. 대충 쥐처럼 생겼는데. 나는 난생 처음 보는 몬스터야."

쥐처럼 생긴 몬스터라······.

"혹시 전체적으로 갈색이고, 두 눈은 초록빛을 띄고 있지 않아?"

"어? 어떻게 알았어? 맞아."

"역병 쥐네."

내 예상이 맞았다.

그렇다는 건 이 대미궁의 내부가 원작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게 된다.

그럼 계획대로 진행해도 될 것 같다.

"어떻게 할까? 처리할까?"

"아니. 우회하자."

메이든의 대미궁 공략 필수 주의사항 1.

역병이란 이름이 붙은 몬스터는 반드시 피해라.

"역병 쥐는 처리하기는 쉽지만, 처리한 뒤가 문제야. 죽으면서 독을 뿜거든."

"아."

물론 교육용 던전인지라 마비독을 살포하는 게 다지만, 어찌됐건 독은 독. 흡수하면 굉장히 귀찮아진다.

"그럼 옆길로 돌아서 직진해야 하나?"

"아니."

그건 하책이다.

"공략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금. 괜히 중추로 진행해 봐야 다른 팀과 만나서 박 터지게 싸우는 게 다일 걸?"

"아. 맞네."

다른 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떻게 하게? 중앙에 도달한 순서대로 높은 점수를 받는 거잖아."

180위 남학생이 예리한 질문을 해 왔다. 근데 약간 헛똑똑이 느낌이다.

"등수는 너무 신경쓰지 마.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1등이나 10등이나 점수 차이는 20점밖에 안 나."

"어? 아. 진짜네."

교관이 설명을 의도적으로 등수에 집중시켜서 그렇지. 이 미궁의 공략에 중요한 건 등수가 아니다.

"우리는 외곽의 보물들을 모으자."

"외곽 보물?"

"그래."

나는 룰 북의 마지막 페이지 27번 항목을 보여 줬다.

[27. 대미궁 곳곳에는 '보물'들이 존재한다. 이 보물들에는 각각 랜덤한 점수가 부여되어 있다.]

"······이런 룰이 있었어?"

"아직 이 룰 북을 받은 지 얼마 안 돼서 다들 눈치 못 챘을 거야."

우리가 이 룰 북을 건네받은 것은 입장한 직후다.

대부분 점수 획득을 위해 빠르게 중심에 도착하는 것만 생각했을 것이다.

"눈치 챈 팀들이 있어도, 외곽 보다는 중심부에 존재하는 보물들을 노릴 확률이 높을 거고."

실제로 원작에서 외곽의 보물을 노리는 팀은 극소수였다.

솔직히 중앙 공략과 보물 습득을 동시에 노리는 게 더 효율적인 방법이기는 하다.

효율적인 만큼 경쟁자도 많아서 문제지.

"어때? 난 제법 승산 높은 전략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팀원 모두의 반응을 기다렸다.

"······확실히 서율이 말대로 10등이 밀려도 이 보물로 20점을 획득하면 이득이네."

"다른 팀과 교전할 확률도 적을 거고."

"응. 좋아. 서율이 말대로 하자."

하시연을 마지막으로 모두가 내 의견에 동의를 표했다.

"오케이. 모두 동의했으니 외곽 지역 공략으로 돌자."

우리는 중심부를 등지고, 뒤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거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술술 풀리는구만.

* * *

그 후로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다.

"파충류 형태 몬스터들은 외견만 위험해 보이는 거지, 별 거 아니야. 그냥 점수 덩어리라고 생각하면 돼."

"여기 함정이네. 해제하기 힘들 거 같으면 우회하자."

나는 적재적소에 지시를 내리며 공략을 이어 나갔다.

원작 지식과, 사전에 익혀 둔 지식들을 최대한 사용해서 최대한 안전하게.

"이 보물은 함정이야. 밑에 오묘하게 홈이 파여 있는 거 보이지?"

"오케이. 이건 진짜다. 근데 제단의 형태를 보니까, 무게가 줄어들면 함정이 발동하는 식이네. 이 돌을 대신 올리면 되겠다."

다들 내 말을 잘 따라 줘서 별로 어려울 일도 없었다.

이런 팀원들을 만난 나는 정말 운 좋은 팀장이라 할 수 있겠다.

"오케이. 잠시 휴식."

내 말에 다들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시연이 너도 쉬어. 주위 안전 확인했으니까."

"아, 응."

하시연이 마지막으로 바닥에 앉고, 나도 앉았다.

"이걸로 보물 3개네."

"크. 벌써 38점이야."

"정예 몬스터(점수 획득 네임드) 잡은 것까지 하면 50점 넘겼겠는데."

다들 공략이 술술 풀리고 있어서 그런가, 분위기도 좋았다.

"이게 다 우리 강서율 팀장님 덕분이지."

"그러게. 난 무슨 예언자라도 되는 줄 알았잖아."

"함정이란 함정은 다 파악하고 계셔서 제가 할 일이 없었어요."

다들 날 보며 감탄 어린 시선을 보내온다. 부담스럽다.

"너희가 내 지시를 잘 따라 준 덕분이지."

"와. 겸손함의 미덕까지."

"이 시대의 진정한 충무공······."

시선이 더욱 뜨거워졌다.

괜한 짓 했나 보다.

"아무튼 이 기세라면 오늘 내에 네 번째 보물까지 얻고 안전지대에서 잘 수 있을 거 같은데."

"캬~ 진짜 완벽하네."

오는 길에 안전지대도 하나 찾아 놨다. 아직 체력이 좀 남아서 일단 놔두고 왔지만.

약 10분간의 휴식이 끝나고.

"그럼 슬슬 출발해 볼까."

"그래."

우리는 다시 길을 나아갔다.

"앞에 몬스터 있다."

"하던 대로 알지?"

"오키!"

그렇게 약 30분 정도 더 나아갔을까.

"······오? 이 보물방은 왜 이렇게 커?"

우리는 네 번째 보물방에 도착했다.

"······와 씨."

나는 그 문을 바라보며 전율했다.

"이걸 첫 날에 찾았다고?"

"왜?"

하시연이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룰 북 36번 항목."

나는 대충 룰 북을 펼쳐서 팀원들에게 보여줬다.

[36. 대미궁에는 총 3개 아티팩트가 잠들어 있는 특수한 방이 존재한다.]

"······아티팩트?"

"그래."

미궁에 딱 3개만 존재하는 아티팩트.

"이름부터 느낌 오지 않아? 나는 이 아티팩트가 미궁 공략의 핵심 아이템이라고 보는데."

"······듣고 보니 그러네."

"3개 밖에 없다는 것도 그렇고. 응. 느낌 있어."

다들 내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아티팩트는 대미궁 공략의 키 아이템이다.

세 개의 아티팩트 중 하나가 외곽 쪽 보물방에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사이드 공략을 택한 거기도 하고.

······근데 설마 이렇게 빨리 찾을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외곽 쪽에만 총 20개의 트레져 룸이 존재한다.

솔직히 이틀 차까지 못 찾으면 포기하고 중앙으로 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하루 만에 찾아 버릴 줄이야.

운이 좋다.

"서율아!"

그때였다.

쩌저적-

하시연의 외침과 함께,

주위가 얼어붙는 소리가 들렸고.

캉! 캉!

얼음이 무언가와 부딪쳐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들렸다.

하시연이 빙결 마법으로 무언가를 튕겨 낸 것이리라.

"······화살?"

아니나 다를까 바닥에는 화살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익숙한 화살에 익숙한 마력이 느껴진다.

나는 빠르게 화살이 날아 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아."

"응. 지아네 팀이야."

어두운 통로 너머.

지아가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에반데?

왜 지아가 외곽 공략을 하고 있는 건데?

원작대로라면, 외곽을 공략하고 있는 건 최지훈이 속한 김철진의 팀이었어야 한다.

지아는 지금쯤 중앙에서 박 터지게 싸우고 있어야 하는데 왜 여기 있는 거지?

"서율아!"

······아니지.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대응 태세!"

우리는 즉시 진형을 구축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쒜에엑!

지아의 화살이 공기를 꿰뚫는 소리와 함께.

푸른 마력의 갑옷을 두르고 있는 검사를 선두로 세 명의 사관생이 달려들었다.

푸른 마력의 갑옷.

그 형태를 확인한 순간, 내 눈이 부릅떠졌다.

"최지훈!"

마갑을 두르고 있는 최지훈이었다.

카아앙-!

나는 단검을 꺼내 들어 최지훈의 검을 흘렸다.

······왜 이놈이 지아랑 같은 팀인 건데!?

< 60화 메이든의 대미궁 (1) > 끝

< 61화 메이든의 대미궁 (2) >

던전 크리에이터.

메이든은 상황실에서 분개하고 있었다.

"······저 새끼는 눈에 무슨 야간투시경이라도 달렸나."

다름 아닌 107위, 강서율 때문이었다.

"뭐 저런 새끼가 다 있어."

함정은 다 피해 가지.

몬스터도 위험도가 낮은 놈들만 골라잡지.

제일 경쟁자가 없는 꿀 외곽 지역만 골라서 공략하고 있지.

표정도 여유로운 것이 근처 공원에 산책이라도 나온 듯한 모습이다.

"······아 빡쳐."

교육용이라 다소 난이도가 낮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쉽게 깨는 거 아냐?

심지어 지금 향하고 있는 곳은 대미궁의 핵심 공략 아이템인 '아티팩트'가 잠들어 있는 보물방이다.

강서율, 하시연 팀이 저걸 먹으면 1등은 따 논 당상이나 다름없다.

"명색이 던전 크리에이터라는 이름이 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공략당할 수는 없다.

이렇게 된 이상, 공략 난이도를 조금 올리는 한이 있더라도······.

"······아. 그래도 가오가 있지. 쪽팔리게 교육용 던전에 개입하기도 뭐하고."

메이든이 기성을 내지르며 머리를 마구 흐트렸다.

근처에 유화가 있었다면, 노처녀 히스테릭이라고 중얼댔을 법한 광경이다.

"그냥 놔두자니, 또 화 고것이 으스대고 사라진 것도 고깝고."

메이든은 유화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적어도 107위는 아무런 문제없이 공략을 완수할 거라고 했던 말.

그건 메이든의 자존심을 건들다 못해, 마구 쑤시는 말이었다.

"······난이도를 조~금 올리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래.

다른 팀들도 제법 수월하게 공략하고 있기도 하고.

이건 더 나은 교육을 위한 선행이야. 맞아.

"크크."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하며 사악하게 웃고 있을 때였다.

"······음?"

돌연 다른 공략조의 영상이 눈에 들어왔다.

"오호라."

신지아와 최지훈이 포함되어 있는 팀의 영상이었다.

"이거 가만히 있어도 되겠는데?"

신지아 팀.

강서율 팀.

두 팀의 공략 방향이 겹쳤다.

이대로 가면, 두 팀은 아티팩트 룸 앞에서 조우할 게 분명하다.

"좋아. 일단 지켜보자."

이런 재밌는 구경을 놓칠 수는 없지.

"동귀어진(同歸於盡) 해 버리면 좋겠다."

메이든이 사디스틱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그러고 보니.'

문득 아티팩트 방에 대한 게 떠올랐다.

"출력 제한 기동식에 무리가 가진 않겠지?"

아티팩트.

던전의 공략을 수월하게 진행하게 해 주는 특수 아이템이다.

이 특수한 아이템을 제대로 구현화하기 위해서 메이든은 본래 자신의 던전에서 사용되는 기동식을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아티팩트는 제대로 구현하는 데 성공했지만.

다른 문제가 하나 생겼다.

바로 수호자가 너무 강하다는 것이었다.

메이든이 만든 특수 기동식은 아티팩트와 수호자를 묶어서 던전에 귀속시키는 아주 특이한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당연히 기동식을 그대로 사용하면 수호자도 출현할 수밖에 없다. 강함도 본래 메이든의 던전 수호자와 다를 바 없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메이든은 기동식의 출력을 저하하는 출력 제한 기동식을 설치했다.

교육용이라는 취지에 맞춰서 세이프티 설정도 제대로 넣어서 재조합한 수식이었다.

하지만.

"쯧. 시간이 부족해서."

완벽하진 않다.

개발 시간이 조금 부족했다.

상황에 따른 변수를 완벽히 체크하지 못했다.

그게 유일한 흠이었다.

그러나 메이든의 걱정은 곧 눈 녹듯이 사라졌다.

"뭐, 사관생들 싸움에 변수가 생겨 봐야 얼마나 생기겠어."

어차피 특수한 상황에서 발생할 변수들을 체크 못한 것뿐이지, 기본적인 체크는 완벽히 끝마쳤다.

단순히 물리적, 마법적 충격만으로는 출력 제약 기동식에 그 어떠한 타격도 주지 못한다.

그러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잠시 후.

"오오. 붙었다."

화면 너머 두 팀이 교전을 시작함과 동시에,

어느덧 메이든의 머릿속에서 걱정이란 단어는 완벽히 사라졌다.

* * *

칭! 캉!

"네가 왜 지아랑! 같은! 팀이 됐나! 했더니!"

나는 최지훈의 검을 흘려 받으면서 외쳤다.

"너 199위였지!"

"······비아냥인가?"

"아니! 그건 아니고!"

얘가 왜 김철진네 팀이 아니라, 지아네 팀이 됐는가에 대한 답.

아주 간단한 이유였다.

나한테 져서.

최지훈 이놈은 나한테 처참히 발려서 랭킹이 60계단가량 내려갔다.

그래서 팀 편성에 변수가 발생한 거다.

원작에서 외곽 공략을 제안했던 건 최지훈이었으니,

지금 지아가 외곽 공략에 나선 것도 이해가 간다.

"······진짜 지랄."

가지가지한다 진짜.

까가가각!

내 단검 위로 최지훈의 장검이 미끄러지듯 흐르며, 굉연한 마찰음이 울렸다.

"그보다 너! 언제부터 찰거머리로 종족이 바뀐 거야? 언제까지 들러붙을 건데!"

"당연한 소릴."

마갑의 헬름 너머 최지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너 말고 다른 팀원들이 모두 탈락 할 때까지다."

"······아오."

현재 전장은 1:1, 1:1, 4:4로 나뉘어 있는 상태다.

최지훈과 나.

하시연과 신지아.

그리고 나머지 4:4.

상황은 셋 다 우리팀이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지아 너! 자꾸 비겁하게 그럴 거야?"

"싸움에 비겁한 게 어딨니."

하시연과 지아의 싸움은 하시연의 아슬아슬한 약세가 이어지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지아를 무시할 수도 없다.

이런 단체 교전에서 신지아라는 명사수가 프리로 돌게 되면 그거야 말로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된다.

······그나저나 지아 쟤는 내가 혹시 시험 중에 만나도 봐주지 말고 덤비라고 했다곤 해도, 진짜 가차 없네.

"우측! 방패!"

"아오! 상성에서 너무 밀리잖아!"

4:4 전투도 상성에서 우리 팀이 완전히 밀리고 있다.

이대로라면 얼마 안 가 패배하게 되겠지.

"흡!"

쿠우웅!

"큭!"

최지훈과 내 교전도 결코 좋은 상황이라곤 할 수 없다.

막상막하.

용호상박.

이미 나와 한번 싸워 봤기 때문인지, 결코 일정 거리 이상 붙으려 하지 않는다.

찰거머리처럼 붙어서 내 발을 묶는 데 전념하고 있다.

"아오!"

덕분에 이도저도 못하는 상태다.

얘가 마갑이라는 단단한 갑옷을 앞세워 시간 끄는 데만 전념하니까 뚫을래야 뚫을 방법이 없다.

스파이럴 스피어고 정령의 불길이고 기회가 돼야 쓸 수 있는 거지.

이건 뭐 기회 자체가 없다.

바람의 길로도 기회를 잡을 수가 없다.

바람의 길은 엄밀히 따지면 상대의 행동을 '예지'해 최선의 길을 제시하는 것.

상대가 제대로 공격할 마음이 없는데, 바람의 길이 제대로 발동될 리가 없었다.

······진짜 귀찮아 죽겠네.

"우리가 이긴 것 같군."

최지훈이 검을 내리치며 말했다.

"뭔 벌써 승리 선언이야."

나는 단검으로 공격을 흘리며 혀를 찼다.

"너도 알 텐데. 4:4 교전은 곧 끝난다."

단검과 장검 사이에서 굉음이 울렸다.

"그럼 다음은 시연이가 될 테고."

카아앙!

"마지막은 네가 되겠지."

나는 최지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흥."

하지만 최지훈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뒤로 크게 도약하는 걸로 내 사정거리에서 벗어났다.

"씁."

진짜 귀찮네.

저 강력한 방어력을 앞세워서 버티기식 전술을 구사하니까, 이렇게 귀찮을 수가 없다.

기본적인 스펙 차이에서도 밀리니까 진짜 뭘 할 수가 없다.

"너는 강하다. 네 단검술은 달인의 영역에 들어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지훈이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그것뿐. 역시 신체 스펙이 발목을 잡는군."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견제에만 힘쓴다.

"네 전투는 반격에 특화되어 있다. 신체 능력 부족을 커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전투법이겠지만."

나는 최지훈을 뚫을 수도, 떨쳐낼 수도 없었다.

"그게 네 약점이다. 너는 반격 없이는 아무것도 못해."

"······비겁하게 팩트로 찌르네."

이거 참 신랄하기도 하셔라.

굳이 최지훈이 말 안 해도 잘 알고 있다.

"확실히 내 낮은 신체 능력을 커버하려면 반격 특화 전술을 사용할 수밖에 없어."

결국 고대 유물을 사용하지 않는 상태의 나는 최지훈도 뚫을 수 없을 만큼 약하다.

"근데 난 이게 약점이라곤 생각 안 하거든."

"······뭐?"

방어에 특화된 상대가 버티는 데 전념하면 뚫을 수 없다.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인데······.

"그건 그냥 네가 버티기 전략을 버릴 수밖에 없게 만들면 되는 것뿐이잖아."

상대가 공세로 나올 수밖에 없게 만들면 될 뿐이다.

"······내가 버티기 전략을 버리게 만든다고?"

최지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는 듯한 표정이다.

나는 씨익 웃었다.

"시연아!"

웃으며 하시연을 불렀다.

"왜애!"

과연 하시연도 약이 바짝 오른 것인지, 평소보다 톤이 높다.

"수호자 공략이고, 마력 보존이고 뭐고 다 필요 없으니까!"

"너 무슨 짓을 하려······."

나는 최지훈의 말을 끊고, 크게 소리쳤다.

"쓸어버려!"

치열한 전투 소리로 가득하던 던전 내부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알겠어!"

하시연이 웃었다.

쩌저저적-!

동시에 공기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지아 너랑 랭킹전 할 때 쓰려고 아껴 뒀던 건데······."

하시연의 신체에 얼음으로 이루어진 갑옷이 형성됐고.

"어쩔 수 없지."

그녀의 검에 얼음이 코팅됐다.

"여기서 탈락하면 랭킹전이고 뭐고 의미 없으니까."

하시연을 중심으로 반경 3m.

모든 것들이 얼어붙었다.

쩌저적-

마지막으로 그녀의 두 발에 스케이트 모양의 부츠가 생겨났다.

빙결의 성역 심화 스킬.

빙결여제(氷結女帝)

하시연이 자세를 취했다.

마치 피겨 선수들의 출발 자세 같은 특이한 자세.

"그럼 간다?"

다음 순간,

키이이잉!

얼음(스케이트)과 얼음(얼어붙은 지면)이 마찰하며 들리는 굉음이 울렸고.

"!"

하시연은 지아 코앞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콰아앙-!

지아는 마력으로 배리어를 형성해 하시연의 검을 막았다.

"꺅!"

그러나 현재 하시연의 검은 다급하게 생성한 배리어로 막을 수 있는 위력이 아니었다.

쨍그랑-!

배리어가 깨져 나가며, 그 충격에 지아가 허공을 날았다.

하지만 지아는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고양이처럼 사뿐하게 내려앉아, 바로 속사.

휙, 휘익!

동시에 하체에 마력을 집중해 거리를 벌린다.

쩌저적-

하시연은 화살을 완벽하게 튕겨 내며 다시 지아에게 접근한다.

어중간한 화살은 얼음 갑옷을 믿고 무시한다.

이로 인해 행동에 제약이 줄어들어 기동성은 더욱 빨라졌다.

"또 어딜 가!"

"큿!"

이번엔 지아도 예상하고 있었는지, 빠르게 마력을 방출하며 하시연의 공격을 흘려 냈다.

전투는 이 흐름의 반복이었다.

지아는 피하고, 하시연은 접근한다.

과연 1위와 2위다운 치열한 격전이었다.

"저 모습은······."

"시연이 필살기. 빙결여제."

신체능력 상승.

공간 인지력 상승.

빙결 출력 상승.

스케이트 부츠로 순식간에 얼린 바닥을 매끄럽게 이동하는 것으로 말도 안 되는 속도를 낸다.

촤아아악-!

"······날았어?"

천익을 모방한 얼음 날개로 공중의 가동도 자유롭다.

공중에 얼음의 길을 형성해, 그 길을 미끄러지는 것으로 공중에서도 속력이 줄지 않는다.

공중, 지상 상관없이 압도적인 기동력을 앞세워 마치 성난 들소처럼, 굶주린 매처럼 날카로운 돌격을 반복한다.

"저건 제아무리 지아라도 버티기 힘들걸?"

그 증거로 지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싶은 표정이다.

"동굴이라 지형적인 상성에서도 불리하고."

만약 필드가 넓은 초원, 혹은 숲이었다면 지아에게도 승산은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곳은 좁은 동굴 통로. 검사와 사수의 싸움이라면 사수에게 압도적으로 불리한 장소다.

"어때?"

지금까진 능력치 차이로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지만,

하시연이 빙결여제를 사용한 이상 이젠 그것도 불가능해졌다.

"이래도 버티기 작전 계속할 거야?"

"······큭."

최지훈이 버티기 작전을 고수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팀원들의 우세가 있었기 때문이다.

버티기만 해도 언젠간 지원이 올 테니까.

하지만 지금 하시연의 변화로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지아의 패배는 시간 문제.

이대로 버티기만 해서는 승부를 장담할 수 없게 됐다.

"계속 버틸 거면 버텨 보시던가."

나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버티다 보면, 시연이가 도와주러 오겠지 뭐."

아까 최지훈이 버티면서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 줬다.

"어쩔래?"

최지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상태로 작게 심호흡.

그리곤 검을 다잡고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본다.

"어쩔 수 없군."

조금 전과는 다르게, 명백하게 날 쓰러트리겠다는 투지가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이제 좀 재밌게 됐네.

화르륵-

나는 단검에 화속성 강기를 씌웠다. 그리고 동시에 최지훈의 품속으로 달려들었다.

"흥!"

최지훈도 지아가 밀린다는 사실에 다급해진 건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반격에 나섰다.

······좋아.

그 순간, 바람의 길이 열렸다.

후웅-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흐릿했던 반격의 길이 최지훈의 공격과 함께 뚜렷한 궤적을 그렸다.

칭! 캉! 까가각!

나는 그 길을 이정표로 삼아, 계속해서 움직였다.

툭-

그렇게 얼마나 검을 휘둘렀을까.

최지훈이 벽에 몰렸다.

기회다.

"큭!"

나는 그 틈을 파고들어 최지훈의 지근거리까지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

완벽한 기회.

나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화르르-

화 속성 강기에 '정령의 불길'이 스며들며, 흐릿한 백색으로 물들었다.

이것으로 마력을, 최지훈의 마갑을 태워 버릴 수 있게 됐다.

피잉-

나는 마지막으로 포식자의 살의까지 사용해서 최지훈의 움직임을 봉했다.

필승 패턴.

나는 승리를 확신했다.

"흐으읍!"

그러나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퍼어엉-!

최지훈의 마갑 옆면이 돌연 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내게는 충격조차 전해지지 않는 약한 폭발.

바람의 길이 읽지 못하는 마력의 유동.

······일부러?

아마 노리고 터트린 것이겠지.

내 공격을 피하기 위한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

아니나 다를까, 최지훈의 몸은 이미 내 공격 범위에서 벗어난 뒤였다.

자연스레 내 단검은 허공을 갈랐고.

까각-

동굴의 벽면에 박혔다.

"아오."

정령의 불길을 이렇게 허망하게 날려먹네.

안 그래도 가성비 최악인데.

그렇게 속으로 한숨을 쉬고 있을 때였다.

쿠구구구- 핑!

지면이 흔들림과 동시에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도망가! 이 빌어먹을 것들아!

여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뭐지?"

"방송? 교관인가?"

그리고 다음 순간.

끼이이익-

아티팩트 룸의 거대한 문이 서서히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 61화 메이든의 대미궁 (2) > 끝

< 62화 메이든의 대미궁 (3) >

"······뭐야?"

아티팩트 룸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 갑작스런 상황에 모두가 전투를 멈추고 그 방향을 바라봤다.

사아아-

수증기를 머금은 마력이 문 틈 사이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분명 이 아티팩트 룸의 수호자는 특수한 아이템에 특수한 기동식을 새기는 것으로, '물'의 속성을 품게 됐다고 했던가.

다른 두 아티팩트 룸이 '바람'과 '불'이니 아마 확실할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저 수증기는 수호자의 마력이라는 말이 되는데.

"수호자가 자기 혼자서 밖으로 나온다고······?"

당황스럽다.

전투가 너무 치열해서 그 소리를 듣고 마중 나오기라도 한 건가?

그럴 수가 있나?

―멍하니 보고만 있지 말고 튀라고! 이 새끼들아!

조금 전 들렸던 여성의 목소리가 더욱 다급해졌다.

그 목소리로 말미암아, 지금이 아주 긴박한 상황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왜 튀라는 거지?"

"이, 일단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 튀어야 되는 거 아냐?"

내가 말했다.

"아니. 늦었어."

―늦긴 뭐가 늦···

여성도 눈치 챈 것 같다.

―늦었구나. 시발!

지금 이 상황이 긴급 상황. 즉,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라면 도망갈 수는 없다.

현재 우리 12명은 치열한 전투로 꽤나 소모된 상태다.

수호자에게서 도망간다 해도 최소 6명은 낙오될 게 분명하다.

고로, 도주는 없다.

그리고 다음 순간.

쾅-!

서서히 열리던 문이 활짝 열렸다.

"푸른··· 동상?"

"저게 수호자야?"

해룡 같이 생긴 얼굴.

전체적으로 푸른 외관.

손에 들고 있는 삼지창.

"포세이돈."

바다의 신 포세이돈.

분명 그런 이름이 붙었었지.

―씁. 준비해! 돌격한다!

그 외침과 동시에 수호자, 포세이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를 향해 삼지창을 찔러 온다.

"어딜!"

빠른 움직임이었으나, 빙결여제를 사용하고 있는 하시연이 조금 더 빨랐다.

어느덧 포세이돈의 앞을 막은 하시연이 거대한 얼음을 형성해 놈의 진로를 막았다.

저 포세이돈은 메이든의 미궁을 대표하는 정예 몬스터지만, 이곳에 있는 포세이돈은 교육용.

출력 제한이 걸린 열화판이다.

지금의 하시연이라면 아무 문제없이 막을 수 있을 터였다.

······그래야 했다.

쨍그랑!

"꺅!"

하지만 하시연의 빙결 마법은 너무나도 손쉽게 깨져 나갔다.

"······뭐?"

그래도 다행히 방금 전 빙결 마법에 부딪쳐 삼지창의 궤도가 틀어졌다.

삼지창은 엉뚱한 곳을 향해 쇄도했다.

콰앙-

다름 아닌, 동굴의 벽면을 향해서.

"미, 미친."

"파괴력이 무슨······."

벽면은 산산조각이 났다.

상상했던 것보다 배는 강력한 파괴력이었다.

저게 열화판이라고?

―1분, 아니 2분만 버텨! 초인들이 곧 도착할 테니까!

아까부터 생각하고 있던 건데, 이 묘하게 날카로우면서도 히스테릭한 목소리.

"······메이든 크리티네스 님인가요?"

―그럼 누구겠냐! 아무튼 2분만 딱 버텨 봐!

그 메이든이 이렇게 개입할 정도면, 진짜 어지간한 일이 아닌 모양이다.

내 표정이 더욱 심각하게 가라앉았다.

"다들 들었지! 긴급 상황이야! 전투는 일시 휴전! 지금은 저 수호자를 막는 것만 생각하자!"

내가 소리쳤다.

"시연이랑 최지훈! 그리고 방패 둘! 놈의 공격을 피하는 것만 생각해!"

"알았어!"

"······이해했다."

상황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버티는 수밖에 없다면 버텨야지 뭐 어쩌겠어.

2분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다.

"원거리 딜러들은 지아 네가 지휘하고!"

"······알겠어."

"명심해! 절대 공격할 생각은 하지 마! 원거리는 전위의 백업에 전념하고! 전위는 최대한 회피 위주로!"

나를 제외한 모두가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하시연을 필두로 포세이돈의 시선을 끌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과 조금 떨어져서 상황 파악을 위해 질문을 건넸다.

"지금 정확히 어떤 상황인 거죠?"

―설명할 시간이 없어! 아무튼 버텨!

스피커 너머로 무언가 타닥타닥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메이든의 18번인 수식 조정을 실시하고 있는 거겠지.

"흠."

생각보다 강한 포세이돈.

당황한 메이든의 목소리.

이 상황은 내 [정령의 불길]을 머금은 단검이 벽면에 박히자마자 발생했다.

그리고 [정령의 불길]은 마력까지 불태우는 정령의 불꽃이다.

이들을 종합해서 생각해 보면.

"······출력 제한 기동식이 깨진 겁니까?"

이런 결론이 나온다.

―너, 그건 또 어떻게 알았······. 후.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래. 맞아.

"그럼 세이프티 설정까지 풀렸다고 보면 되는 겁니까?"

―······어.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내 정령의 불길이 출력 제한 기동식을 미국으로 보내 버린 것 같다.

"이해했습니다. 지형지물에 충격은 최소화하면서 대기 중인 초인들이 도착할 때까지 버텨라. 이거군요."

기동식에 문제가 생긴 거라면, 그 기동식이 매몰되어 있는 동굴 구조물에 이 이상 피해가 가게 해선 안 된다.

―······너 진짜 뭐냐?

"아닙니까?"

―어? 아니! 맞아! 맞긴 한데······.

"알겠습니다."

2분.

마침 하시연의 빙결여제의 남은 시간과 얼추 일치한다.

"버텨 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수호자가 나온 문을 확인했다.

아티팩트가 봉인되어 있는 방.

······보험 삼아 아티팩트를 챙겨둘 필요가 있겠는데?

수호자는 여기서 미쳐 날뛰고 있으니 문제없고.

그럼 남은 건 봉인뿐.

음.

봉인이 3개였던가?

* * *

약 1분이 흘렀다.

"반복한다! 외곽 A2-B3372 에리어 문제 발생! 기동식 파괴로 인해 수호자가 폭주했다!"

상황실.

메이든은 다급한 얼굴로 현재 상황을 전달하고 있었다.

"반복한다! 시험을 치르고 있는 사관생들은 지금 즉시 공략을 멈추고 안내에 따라 이동하고! 현장에서 대기하는 초인들은 A2-B3372 에리어로 집결!"

그녀의 주위에는 수많은 수식들이 가득 떠올라 있었고.

그녀의 손은 쉴 새 없이 그 수식들을 터치하고 있었다.

타다다닥-

조금 전 문제가 생긴 기동식들을 원거리에서 교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괴물 같은 것들! 그게 어딜 봐서 사관생들이야!"

메이든은 조금 전 신지아 팀과 하시연 팀의 전투를 떠올리며 투덜거렸다.

빙결 마력을 미친 듯이 퍼부으며 돌격을 반복하던 하시연.

그 미친 돌격을 어떻게든 회피하던 신지아.

"······그게 사관생이면 내 후배들은 절반 이상 나가 뒤져야 돼!"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치열한 싸움이었다.

현역 초인들의 대결을 보는 듯한 착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걱정거리는 지금 손에 쥐어져 있는 팝콘과 콜라가 다 떨어져 간다는 것뿐이었다.

"······107위."

하지만 강서율이 강기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하면서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타다다닥-

수식들을 계속해서 손보며,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무슨 짓을 하면, 출력 제한 기동식을 완전히 절단을 낼 수 있는 건데······!"

분명 하시연의 빙결 마법이 곳곳에 영향을 주면서, 출력 제한 장치에 타임렉이 발생하긴 했다.

하지만 결코 붕괴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강서율의 단도가 동굴의 벽면을 찌른 순간 모든 기동식이 파괴됐다.

"진짜 뭐하는 놈이야 그 새낀!"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해 '출력 제한 기동식 파괴'라는 결론까지 도출해 낼 정도로 뛰어난 두뇌.

긴급한 상황임에도 순식간에 상황을 읽어, 완벽에 가까운 지휘를 내린 통솔력과 행동력.

마지막으로 출력 제한 기동식을 파괴한 정체불명의 능력까지.

절대 평범한 사관생이 아니다.

'······나중에 화한테 부탁해서 한번 만나보던가 해야지!'

―언니!

무전기에서 유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나 지금 바쁜―"

―A2-B3361부터 시작해서 모든 길목이 붕괴했어요!

"―뭐?"

메이든이 다급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훑었다.

"시발!"

유화의 말대로 통로가 모조리 붕괴되어 있었다.

전투의 후폭풍이겠지.

수식 교정에 열을 올리느라 정작 중요한 상황을 보지 못했다.

―어쩌죠? 강행돌파 할까요?

"안 돼! 강압적으로 뚫으려 하면 미궁 전체가 붕괴될 가능성도 있어."

―······알겠어요. 그럼 이쪽에서 최대한 조심하면서 뚫어 볼게요.

"그래. 부탁한다."

메이든은 메인 모니터.

강서율과 신지아가 수호자와 전투를 벌이는 장면을 훑었다.

다들 크고 작은 상처를 입고 있다.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어떻게든 버티고 있다.

"······제기랄."

하지만 그것도 슬슬 한계에 가까운 듯했다.

버티기의 핵심인 하시연 사관생의 움직임이 눈에 띠게 느려졌다. 아마 마력이 부족한 거겠지.

'그런 고출력 마력을 계속해서 뿜으면서 5분간 싸운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긴 한데.'

어쨌든 하시연은 이제 곧 한계에 다다른다.

그리고 하시연이 행동을 멈춘다는 것은 곧, 전멸을 의미한다.

'생각해. 생각해라! 이건 내 미흡함이 불러일으킨 참상이야. 내가 해결해야. 어떻게든······ 어떻게든 해결해야!'

그렇게 손톱을 짓씹고 있을 때였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스피커 너머로 강서율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그쪽으로 가는 통로가 막혔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했더니만. 역시 그렇군요.

강서율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메이든은 유화를 포함한 초인들의 모습을 확인했다.

"3분. 아니, 2분!"

다들 구조 작전도 많이 수행해 봤던 프로들이라 그런가.

통로를 뚫는 게 제법 빠르다.

2분이라면 어떻게든······.

―2분이라··· 버티긴 힘들 것 같네요.

"······아."

메이든이 한탄했다.

메이든이 생각하기에도, 지금 저들이 2분을 버티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부탁 하나만 해도 됩니까?

"······말해."

메이든이 입술을 짓씹으며 시선을 내렸다.

아마 유언이라도 남기고 싶은 것이리라.

'다 내 탓이야.'

마지막까지 제대로 안전 검사를 했어야 했는데.

만에 하나를 대비해야 했는데.

후회가 썰물처럼 밀려 왔다.

―나중에 유화 씨랑 같이 밥이나 한 끼 같이 합시다.

"······뭐?"

그러나 강서율의 말은 메이든이 생각했던 말과 전혀 달랐다.

―할 얘기가 좀 있어서요. 아마 서로에게 좋은 얘기가 될 겁니다.

이 새끼는 이 상황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아. 그리고 지금 즉시 수식을 조정해서, 포세이돈의 약점. 뇌(雷) 속성 데미지 피해량을 증폭시켜 주세요.

메이든의 눈이 당황으로 떨렸다.

포세이돈의 약점에 대한 건 그러려니 할 수 있다.

충분히 추측하고도 남을 이름과 속성이니까.

하지만 약점 증폭 기능에 대한 건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 위치에서도 그 정돈 가능하죠? 원래 메이든 씨의 미궁에서도 자주 사용하는 기초 개변식일 테니까.

당황을 넘어 경악으로 변했다.

"······너. 진짜 뭐야?"

마치 벌거벗겨진 듯한 착각이 일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러내고 있는 듯한 착각.

"대체 어디까지 알고······."

―10초 내에 부탁합니다.

강서율이 목에 건 묘한 형태의 목걸이를 벗고, 주머니에 넣었다.

―시간 없어요.

그리곤 허리에 걸려 있던 악세사리 운송 캐리어에서 푸른색 반지를 꺼내 장착했다.

메이든이 이를 꽉 물었다.

"······오냐. 5초 내에 해 주마!"

타다다다닥-!

메이든의 손이 빛의 속도로 움직였다.

그리고 정확히 5초 후.

"증폭 설정 완료했다! 이 건방진 놈아!"

―확인했습니다.

"근데 이걸로 뭐 하려고! 너네 파티에 뇌 속성 같은 희소한 속성 마력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은······."

메이든의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진 것은 그때였다.

"너···! 그 아티팩트는 또 언제 빼 왔어!"

강서율은 오른손에 푸른 구슬을 들고 있었다.

―아까 틈을 봐서 슬쩍 빼왔습니다.

"대체 언제······."

못 봤다.

수식을 조정하느라 바쁘기도 했고, 강서율보단 포세이돈의 전투를 관찰하는 데 더 주의를 기울였으니까.

"아니, 그보다 봉인을 그 짧은 시간에 풀었다는 거야?"

―예.

"······."

메이든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저새끼는 진짜 정체가 뭐야?'

그게 그렇게 쉽게 풀 수 있는 봉인이 아닌데.

"하."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 아티펙트의 효과는 단순한 마법 증폭이야! 뇌 속성 부여 같은 부가 기능은 없······."

―알고 있습니다.

강서율의 신체에 하얀 스파크가 튀었다.

"!"

동시에 메이든의 동공이 확장됐다.

"···뇌기?"

강서율은 화 속성 강기로 이름을 떨쳤다.

하지만 지금 그가 다루고 있는 건 명백한 뇌(雷)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이, 이중 속성!"

강서율은 화(火), 뇌(雷)의 두 가지 속성을 지닌 특이 체질이라는 것.

―다들 즉시 이탈해!

강서율이 소리쳤다.

―큰 거 한 방 간다!

그리고 다음 순간.

콰아아아아아앙-!

"꺄악!"

귀를 찢는 천둥소리와 함께, 모니터가 백색으로 변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귓가엔 이명만이 가득하다.

지이이잉···

그렇게 귀의 이명이 조금씩 멎어갈 때 쯤 메이든은 눈을 떴다.

"마, 말도 안 돼."

모니터 너머.

메이든이 자랑하는 3대 속성 수호자 포세이돈은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저 새끼··· 진짜 뭐하는 놈이야···?"

메이든의 두 눈동자가 경악으로 세차게 요동쳤다.

< 62화 메이든의 대미궁 (3) > 끝

< 63화 인맥은 힘이다 (1) >

사건은 빠르게 정리되어 갔다.

사상자도 없었고, 부상자도 경상에 그쳤으니, 큰 일로 번지지 않았다.

아니, 큰 일로 번질 뻔했지만, 정부가 최선을 다해서 수습했다고 해야 할까.

메이든의 교육용 미궁으로 외화 벌이를 좀 해야 하는데, 첫 시연식부터 이런 큰 실수를 했다는 이슈를 남길 순 없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정부의 수습 끝에 [포세이돈 폭주 사건]은 일종의 테러에 의한 것으로 처리가 되었다.

메이든에게 앙심을 품었던 빌런 중 하나가 대미궁 자재에 특수한 장치를 해 뒀고, 그것이 발동했다. 뭐 이런 식이었다.

사건 당시 포세이돈을 상대했던 사관생들도 대부분 정부의 주장을 믿는 듯했다.

"정부는 정보 조작이 참 허술하네요."

지아를 빼고는.

"메이든 크리티네스가 특수한 장치가 되어 있는 자재를 눈치 못 챘을 리가 없잖아요. 아마 시간이 부족해서 안전 관리에 헛점이 생겼고, 시연이와 선조님의 빙, 화 속성 마력에 영향을 받아 파괴됐다. 뭐 이런 거겠죠."

"······.""이런 일이 퍼지면 추후 대미궁 장사에 문제가 생길 테니 속이는 걸 테고요."

"······그, 그러게."

결정타는 내 [정령의 불길]이었긴 한데, 그것만 제외하면 얼추 맞는 가설이었다.

지아 얘는 진짜 나와 관련되지 않은 일에 한해선 두뇌회전이 어마무시하다.

솔직히 무서울 정도다.

"그보다 선조님. 이제 몸을 움직이는 건 괜찮으세요?"

"음."

나는 양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위화감이 없나 실험해 봤다.

"괜찮은 것 같은데."

"다행이네요."

어제 천벌(天罰)을 사용한 후.

나는 마력 탈진으로 쓰러졌다.

그 전에 [정령의 불길]을 써서 마력 자체가 부족했기도 했고.

[아티팩트]를 이용해서 천벌의 효과를 증폭시키느라, 신체에 무리가 가기도 했기 때문이다.

[마나의 은혜]를 사용해 [마력 감응] 특성을 활성화 시킨 상태로 사용하지 않았으면, 이보다 더한 후유증에 시달렸을 게 분명하다.

"근데 선조님. 모두가 다 보는 데서 봉인을 푸는 게 부담스러우셨을 거라는 건 이해하는데. 그렇다고 뇌 속성 마력까지 사용할 필요가 있었나요?"

지아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중 속성은 너무 눈에 띄는 것 같은데······. 그, 적들에게 의심받기라도 하면······."

적들.

언젠가 찾아 올 대전쟁에서 세계를 멸망 시킬 악의 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지아는 내가 힘을 봉인하고 있는 건 그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알고 있으니, 걱정하는 게 당연했다.

"괜찮아. '격'을 해방하지만 않으면 그들에게 감지될 일은 없으니까."

고로 나는 오늘도 구라를 치기로 했다.

"격··· 이라 하시면?"

지아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그 있잖아. 내가 대균열을 닫은 날. 그때 나한테 느껴지던 묘한 기운. 기억 해? 찌릿찌릿한 압박감이라고 해야 하나. 경외심 같은 거."

정확힌 내게서 느껴지는 게 아닌, 신이 형이 만든 '안티 바이러스'에서 느껴지던 기운이다.

나도 느꼈거든.

"아. 그 감각. 그게 격이군요······."

지아가 납득한 듯했다.

"그럼 격을 해방하지만 않으면 언론에 얼마나 주목을 받던지 상관없다는 거네요? 적들에게 감지만 되지 않으면 되니까."

"그렇지."

"아하."

지아가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

좋아.

오늘도 내 구라는 완벽했다.

"그보다 언론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

나는 우물쭈물하며 물었다.

"역시 관심이 엄청난가?"

"네."

"······얼만큼?"

"음······."

지아가 입술을 오므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선조님이 생각하는 선에서 최고로 인기 많은 탑스타를 떠올려 보세요."

순간 머릿속에 수많은 탑스타들이 떠올랐다.

"생각하셨나요?"

"······어."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설마 내가 그 급이라는 건 아니겠지?

"대충 그 3배 정도라고 보시면 되요."

"······응?"

잘못 들었나?

"뭐라고?"

"지금 생각하신 탑스타들 인기의 3배 정도라고 했어요."

"······헐."

잘못 들은 게 아닌 모양이다.

"진짜 그 정도야?"

"네. 이중 속성은 그만큼 특별한 체질이니까요. 엘프나 천족에겐 그리 특별한 게 아닐지도 모르지만요."

지아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말을 이었다.

"거기에 추가로 마력 운용력도 뛰어나다는 게 증명됐지. 필기는 항상 만점인데다가, 최근 시험 영상들이 공개되면서 지휘 능력에 대한 극찬도 받았지."

"······."

"심지어 최근 신체 능력치가 E랭크로 일괄적인 상승을 이루면서, 성장에 대한 기대치도 엄청나게 올랐고요. 마지막으로 포세이돈이라는 걸출한 수호자를 일격에 보내 버릴 정도로 완벽한 낙뢰에, 정부의 정보 조작으로 빌런의 테러를 막았다는 영웅적인 스토리까지 붙었어요."

지아가 옅게 웃었다.

"인기 없을 수가 없는 상황 아닌가요?"

"······그러네."

당시에는 어쩔 수 없이 사용했던 것들인데, 시간이 흘러 이렇게 모아두고 보니 엄청난 조합이 돼 버렸다.

"근데 뭐, 이런 관심은 순간적인 거니까. 저번처럼 금방 사그라들지 않겠어?"

관심이란 덧없는 것.

저번 화 속성 강기 때를 떠올려보면, 이번 인기도 일시적인 것이리라.

"글쎄요······."

지아가 오묘한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선조님."

그리곤 활짝 웃으며 말했다.

"힘내세요!"

"······."

이렇게 불안한 응원은 난생 처음이었다.

* * *

지아의 말이 맞았다.

이번 관심은 저번 화 속성 강기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강서율 사관생! 우리 제레온 길드로 오시면······."

"KBC방송국에서 왔습니다! 인터뷰 좀 할 수 있을까요?"

"더 원 길드에서도 러브콜을 보냈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잘생김의 비결은 뭔가요?"

병원에서 한 걸음 나서자마자, 인파에 둘러 쌓였다.

이대로 다시 병실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가 샘솟았다.

"자신이 이중 속성을 지녔다는 건 언제부터 알게 됐습니까?"

"능력치 성장 추세가 상당히 가파르던데!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마력 운용에 대해서 팁을 주자면?"

스카우터들보다 기자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저번에 화 속성 강기로 주목받았을 때는 기자들은 손에 꼽힐 정도밖에 없었는데.

"세계에서 유일한 이중 속성을 지닌 초인이 한국에서 나왔다는 것에 대한민국 국민들의 기대가 엄청난데요. 혹시 한 마디 남길 말이 있을까요?"

"이 기세라면 한국 최초로 세계 초인 랭킹 1위 집계도 가능할 거라는 말이 많던데! 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인기의 의미를 바로 이해했다.

이건 일종의 '국뽕'이다.

왠지 한국 사람이 세계에서 두각을 보이면 자기도 어깨가 으쓱하고 그런 거.

나도 원래 세계에 있을 때, 손흥민 선수나 김연아 선수, 그리고 BTS가 세계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기사들을 보면서 괜히 혼자 자부심이 뿜뿜하곤 했으니까.

"신화 그룹에 입사하기로 했다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인가요?"

"신지아 양과 특별한 관계라는 말은······."

"하시연 양과도 각별한 관계라는 소문이······."

그나저나 기자들의 기세가 진짜 상상 이상이다.

여기서 말 한 마디 잘못 꺼냈다간, 진짜 훅 갈 것 같은데.

그렇다고 계속 이대로 있을 수도 없고.

어쩌면 좋을까······.

그렇게 고민에 잠겼을 때였다.

"자자. 다들 길 좀 비켜 주시겠어요?"

어느새 나타난 것인지 내 옆에 나타난 유화가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유화!"

"비혼 길드장님과도 자주 만난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입니까?"

"소문에 의하면 세 다리를······."

"정말 기자 본인도 한 명의 남성으로서 부러울 따름입니······."

유화의 등장에 기자들은 더 신나서 달려들었다.

그런 기자들을 보며 유화가 싸늘하게 미소 지었다.

"여러분들이 한국의 초특급 유망주한테 흥미를 가지시는 건 저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강서율 사관생은 아직 부상의 후유증이 남아 있거든요."

유화의 말과 함께 후끈한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만약 그 후유증 때문에 추후 문제가 생기면······ 여기 계신 기자님들이 책임지실 건가요?"

"······그건."

기자들이 조용해졌다.

와. 이걸 이렇게 찌르네.

신의 한 수였다.

"다들 이해 하셨으면 길을 터 주시겠어요?"

그 말과 함께 기자들이 조금조금씩 길을 터주기 시작했다.

다만, 얼굴엔 불평불만이 가득하다.

"감사해요. 강서율 사관생과의 인터뷰는 추후 자리를 만들어 볼 테니까, 너무 나쁘게 생각하진 말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우리 초특급 유망주의 건강이 우선이잖아요? 괜찮죠? 강서율 사관생."

"아. 네. 괜찮습니다."

그 순간, 기자들의 표정이 대부분 풀렸다.

"인터뷰 우선권도 주시는 겁니까?"

"그럼요. 이 자리에 있으신 기자님들은 대우해 드려야죠."

"······그렇다면야."

그 말과 함께 모든 불평불만이 사라졌다.

스카우터들은 유화의 짬밥에 밀려서 입도 뻥끗 못하고 있다.

"오우."

S랭크 초인 특유의 카리스마와 세간의 관심을 역으로 이용해서 기자들을 입 다물게 만들고.

인터뷰 우선권을 비롯한 당근을 이용해서 기자들의 불평불만까지 싹 없애 버리다니.

이게 연륜인가.

"그럼 갑시다."

"아, 넵."

나는 유화를 뒤따라 이동했다.

"타세요."

이어서 유화가 준비해 둔 리무진에 탑승했다.

뒤이어 유화가 내 옆에 탑승했다.

"기사님. 출발하세요."

"네."

그렇게 우리는 기자들과 스카우터들을 뒤로하고 떠났다.

"어우. 지쳐."

대충 10분 정도 시달린 것 같은데, 진이 쭉 빠진다.

유화가 무언가 버튼을 누르자, 앞자리에 벽이 생성됐다.

뒷 좌석에서 몰래 대화를 하기 위한 장치인 것 같다.

"기자들이 훨씬 극성맞죠?"

"네."

스카우터들의 예의 바른 응대와는 격이 다르다.

스카우터들이 커피라면 기자는 T.O.P라고 해야 할까.

"그러게 거기서 왜 뇌 속성 마력을 사용하셨대."

······왜긴요.

살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으니까 그랬죠.

"이렇게까지 화제를 끌어 모아서 뭘 하시려고 그러실까."

유화가 오묘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역시 진리의 구명자를 유인할 미끼가 되기 위해선가요?"

국가전 출장이 목표.

화제 몰이.

진리의 구명자에 특화된 정보력.

이러한 것들을 종합해 봤을 때, 유화가 저런 결론에 다다르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예. 맞습니다."

나는 긍정했다.

"······웬일로 부정을 안 하시네요?"

"저번 베가본드 일로 99% 확신 하셨을 거 아니에요. 제 목적이 뭔지."

유화가 잠시 뜸을 들이고 말했다.

"진리의 구명자를 이 세계에서 완전히 지워 버리는 것. 맞죠?"

저 확신하는 눈빛.

봐. 이미 속으로는 결론 내고 있었네 뭐.

"네. 맞습니다."

"······역시."

유화가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복잡해 보이는 표정이다.

내 확답을 받고 개운한 표정을 지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근데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학교로 가는 길이 아닌데?

"앗. 내 정신 좀 봐. 중요한 걸 잊고 있었네요."

유화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옥화당으로 가고 있어요."

"······갑자기요?"

지금 시간은 오후 5시 40분.

학교 수업도 거의 끝나갈 시기고. 마침 저녁 먹을 시간이기도 하고.

나야 좋긴 한데.

"왜요?"

유화가 이제 막 퇴원한 사람을 데리고 어딜 갈 리가 없다.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는 이상.

"밥 한 끼 하자고 하셨다면서요? 저랑 언니랑 해서."

"······아."

세계 랭킹 32위 초인.

던전 크리에이터.

메이든 크리티네스.

포세이돈을 처리하기 전에 나중에 밥 한 끼 같이 하자고 하긴 했다.

이 기회에 메이든과도 친분을 만들어 두면 좋을 거 같아서.

인생은 '인맥'이니까.

······제안하고 싶은 일도 있고.

"근데 메이든 씨 지금 엄청 바쁠 때 아니에요? 사태 수습 때문에."

"그렇긴 한데. 언니가 또 궁금한 게 있으면 못 참는 성격이라서······."

"아하."

나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궁금한 것도 궁금한 건데, 여러모로 자존심이 상했나 봐요. 서율 씨가 너무 공략을 깔끔하게 해서."

"하하."

"그 외에도 포세이돈 사건을 잘 수습해 준 일에 대한 보답에 대한 얘기도 좀 하자고 하셨고. 언니가 또 은원관계엔 철저하시거든요."

"네. 알고 있습니다."

은혜는 5배로 갚고.

원한은 500배로 갚는다.

메이든 크리티네스의 좌우명이다.

"아무튼 사례는 좀 기대하셔도 좋을 거예요."

"네. 기대되네요."

그리고 그녀는 진리의 구명자에게 아주 큰 원한을 품고 있다.

< 63화 인맥은 힘이다 (1) > 끝

< 64화 인맥은 힘이다 (2) >

우리는 종업원의 안내에 따라 19번 방으로 이동했다.

"언니. 들어갈게요?"

"오냐."

유화는 노크도 없이 쿨하게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뒤따라 들어 갔다.

"더럽게 빨리도 온다."

첫 눈에 본 순간 바로 납득했다.

'아. 이 여자는 메이든 크리티네스구나.' 하고.

"기자들한테 좀 시달려서 좀 늦었어요. 아니, 근데 뭐 벌써부터 술을 마시고 있어요?"

메이든은 편하게 양 다리를 쭉 뻗고 바닥에 주저앉아, 마찬가지로 세상 편하게 벽에 기대고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옥화당에 왔으면 일단 전통 소주를 마시는 게 예의 아니겠냐. 크으~"

메이든이 소주를 원샷 하고 시원한 탄성을 내질렀다.

행동만 봐선 영락없이 나이에 걸맞게 41세 아저씨인데,

모습은 20대 여성.

소설 속 묘사와 아주 판박이었다.

"에휴. 내가 못 살아 진짜. 일단 서율 씨. 앉아요."

한숨을 쉰 유화가 나를 맞은편에 앉히고, 자기는 메이든의 옆으로 이동해 앉았다.

"벌써 한 병을 다 마신 거예요? 세상에."

"벌써는 무슨. '아직' 한 병이지. 나 앵간해선 안 취하는 거 알잖아."

실제로 메이든의 주량은 엄청나다. 원작에서 드워프와 술내기를 할 정도였으니, 말 다한 거다.

"왜? 너도 한 잔 할텨?"

내 시선에 눈치 챈 메이든이 내게 술잔을 내밀고 살짝 흔들었다.

"언니! 이제 막 퇴원한 사람한테 무슨 술을 권유해요."

"아따. 화 너 오늘따라 잔소리가 좀 심하다?"

유화의 고성에 메이든이 한쪽 귀를 막고 투덜댔다.

"손님 앞에서 무슨 추태에요."

"추태는 무슨. 술 마시는 게 무슨 죈가?"

뭔가 부부싸움을 보는 것 같아서 재밌다.

"암튼 술잔은 일단 내려 놔요. 기껏 데리고 왔는데 예의가 아니잖아요."

"고지식한 년. 넌 그래서 남자가 안 생기는 거야. 이제 곧 서른이면서 뭐하는 거야?"

와. 이걸 계란 한 판으로 공격한다고?

유화의 미간이 씰룩였다.

짜증이 치솟은 표정이다.

"언니. 말은 똑바로 해야죠. 저는 말 그대로 '안' 만나는 거거든요? 시간이 없어서."

메이든이 비웃었다.

"시간 핑계. 연애 못 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변명이지. 다른 사람들은 시간이 있어서 연애하니?"

"······큭."

연륜에서 나오는 팩트 폭격에 유화가 입술을 짓씹었다.

"제, 제가 어디가 부족하다고 남자를 못 만나요? 얼굴 되지. 몸매 되지. 능력 있지. 이게 다 제가 안 만난다는 증거―"

"성격이 글러 먹었잖아. 너 같은 여자랑 사귀면 딱 1달만 좋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야. 알아 이년아?"

유화의 표정이 확 굳었다.

"······."

와.

신랄하다. 신랄해.

옆에서 듣는 내 가슴까지 아릴 정도다.

그런 유화의 반응을 보며 메이든이 큭큭 웃었다.

만족한 듯한 표정이다.

"암튼 알겠다. 확실히 중요한 대화를 앞두고 술을 마시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

그렇게 말하며 술잔을 책상 위에 올려두곤 나를 빤히 바라본다. 아니 이미 마시셨잖아요 근데.

"자기소개는 필요 없지? 나는 네 이름을 알고. 너도 내 이름은 알 테니까."

"네."

역시 시원시원하다.

"근데 너는 진짜 정체가 뭐냐?"

화법도 돌려 말하는 것 없이 직설적이다.

"내 미궁에 대한 건 대체 어떻게 그리 잘 알고 있는 거야?"

"조사해 보셨잖아요. 아주 평범한 사관생입니다."

"평범하긴 개뿔."

메이든이 코웃음을 쳤다.

"네가 평범하면 다른 사람들은······"

"언니. 일단 먼저 해야 할 말이 있잖아요."

메이든의 말을 유화가 끊었다.

"아. 그랬지. 내 정신 좀 봐."

메이든이 큼큼 목청을 가다듬었다.

"일단 내 관리 소흘로 위험한 상황에 빠트려서 미안하다. 사과하마."

아주 쿨한 사과였다.

"아닙니다."

근데 사과받기가 참 뭐하다.

엄밀히 따지면 내 [정령의 불길]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서.

"내가 해결해야 했을 일을 대신 해결해 준 것도 고맙고."

그것도 사실상 내 똥 내가 치운 거나 다름없고.

······물론 메이든의 과실도 조금은 있긴 하다.

안전 점검을 완벽하게 하지 못 했다고 했으니까.

그래도 8~9할 이상은 내 탓이지만.

"별 말씀을. 초인 지망생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그래도 은혜는 입혀 두면 좋은 법.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아무튼 덕분에 내 커리어나, 대미궁 운영에 큰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는 건 사실이니까. 사례를 해야겠지. 뭐 필요한 거 있어?"

역시 시원시원한 성격답게 바로 사례 얘기로 넘어간다.

"물질적인 사례보단 메이든 씨의 도움을 얻고 싶습니다."

"내 도움?"

"네."

"뭔데?"

나는 살짝 뜸을 들였다.

"진리의 구명자에 대한 겁니다."

그 단어가 나오자, 메이든의 표정이 순식간에 썩어 들어갔다.

역시 원작과 마찬가지로 메이든 크리티네스는 진리의 구명자를 증오하는 게 분명하다.

"말해 봐."

"저는 놈들한테 한 방 먹일 계획을 짜고 있습니다. 그 계획에 메이든 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한 방 먹인다고?"

"네."

메이든은 진리의 구명자에게 부모님과 남편, 그리고 딸을 잃었다. 증오하는 게 당연하다.

"네가 그놈들에 대해서 뭘 아는데?"

"최소한 메이든 씨보단 많이 알고 있을 겁니다."

"······증거는? 네가 진리의 구명자에 대한 정보를 나보다 많이 쥐고 있다는 증거."

메이든은 직설적인 성격이지만, 의심이 많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초인 세계에서 굴러 온 여인이니 만큼 의심이 없을 리가 없다.

보통 상황이었다면 설득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오히려 의심받고 끝이었을 테지.

"도플갱어, 김신우, 베가본드."

하지만 이 자리에 유화가 있는 이상, 설득하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다.

"그 세 사건의 정보를 유화 씨에게 건넨 건 접니다."

메이든이 유화를 바라보며 '맞아?' 하고 눈으로 물었다.

"네. 맞아요."

유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

메이든의 표정이 더욱 굳었다.

무언가 생각이 많은 듯했다.

아직 의심이 풀리지 않은 것이리라.

내가 진리의 구명자 소속 빌런이고, 내부에서 분열을 일으키기 위해서 이런 행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유화는 내게 속고 있다.

대충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일단 의심의 싹을 송두리째 뽑는 것부터 시작해야겠지.

"믿지 못하시는 건 당―"

"오케이."

돌연 메이든이 내 말을 끊었다.

"······네?"

"오케이라고. O.K. 몰라? 승낙한다고."

메이든이 다시 술잔을 들어 소주를 한 입에 들이켰다.

나는 벙쪘다.

"거 참. 대미궁에선 똘똘하더만 지금은 왜 이렇게 어벙해. 아까 말했던 진리의 구명자 새끼들 엿먹일 계획에 동참하겠다고. 이놈아."

"······아, 네. 감사합니다."

그저 멍했다.

이렇게 쉽게 받아들인다고?

그 메이든 크리티네스가?

아무리 유화의 증언이 있었다고 해도 납득이 빨라도 너무 빠르다.

메이든의 성격이면 오히려 유화가 내게 속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인데.

"왜? 싫어? 표정이 좀 띠껍다?"

"······아뇨. 그럴 리가요. 엄청 감사하고 있습니다."

의아할 뿐이지, 절대 싫은 건 아니다.

"그럼 됐고."

메이든은 다시 술잔을 채워서 입으로 가져갔다.

"그럼 자세히 얘기해 봐. 계획이 뭔데?"

······진짜?

일이 이렇게 술술 풀린다고?

"벙어리냐? 말 안 해?"

"아, 넵. 설명하겠습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나는 유화와 메이든에게 국가전에 진리의 구명자의 대대적인 테러가 있을 확률이 높다는 것과.

그 대응 방안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

* * *

강서율의 긴 얘기가 모두 끝나고.

메이든은 강서율을 먼저 돌려보냈다.

"의외네요."

옥화당 19번 방에는 메이든과 유화만 남았다.

"뭐가?"

유화의 말에 메이든이 대수롭지 않게 되물었다.

"언니가 이렇게 쉽게 누군가를 믿는 모습은 처음 봤어요. 100% 의심하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유화는 평소 메이든의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자부한다.

그런 그녀가 일언반구도 없이 의심을 접었다는 게 굉장히 신기했다.

"의심이라······."

메이든이 술잔을 이리저리 흔들며 쓰게 웃었다.

"의심할 사람을 의심해야지."

그리움과 애처로움이 섞인 오묘한 눈빛이었다.

"······언니?"

유화로서는 난생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화야."

"네."

"내가 진리의 구명자를 쫓고 있는 건 알고 있지?"

뜬금없는 말이었다.

"네? 네. 당연하죠."

12년 전.

메이든의 부모를 포함해서 남편에 딸까지 진리의 구명자에게 살해당했다.

언론에 직접적으로 공개되진 않았으나, 알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어떻게 살해당했는지는 알고?"

"······그건."

유화가 말을 흐렸다.

메이든의 가족이 어떤 방식으로 살해당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한두 명이겠지.

그리고 유화는 당연히 모르는 사람에 속한다.

"모르겠지. 진호한테도 말 안 했는데, 네가 어떻게 알겠냐. 빌런과 싸우다 죽었다. 딱 그 정도만 알겠지."

메이든이 술을 입에 털어 넣고 넌지시 말했다.

"부모님은 목을 베여서 일격에 돌아가셨고."

메이든의 눈이 분노로 번뜩였다.

"상재 씨는 전신을 난도질당해 과다 출혈로 사망."

김상재.

메이든 크리티네스의 남편으로 당시 A랭크 초인의 반열에 올라 있던 유망주였다.

"나도 초인이니까. 여기까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냐. 부모님도 초인이셨고, 남편도 초인이었으니까."

"언니······."

초인이 빌런과 싸우다가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통탄할 일이지만,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초인으로 산다는 건 그러한 죽음을 곁에 두고 산다는 것과 같으니까.

"근데 말이다. 화야."

메이든의 눈이 악귀나찰 저리가라 할 정도로 살벌하게 빛났다.

"내 딸. 레아의 죽음은 도저히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가 없어."

"납치당해서 그 후로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 였나요?"

"나도 처음엔 그런 줄 알고 있었어."

레아 크리티네스.

메이든의 딸.

"화야. 내 딸은. 레아는 말이다."

메이든의 목소리가 바르르 떨렸다.

"인체 실험을 당해 죽었어."

유화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인, 체··· 실험이요?"

"그래. Sunshine church. 햇빛 예배당이라는 곳에서 벌어졌지."

메이든이 유화에게 자료를 하나 넘겼다. 진리의 구명자에 의한 비인도적인 실험이 상세히 적혀 있는 파일이었다.

"······우읍."

사람 같지 않은 몰골을 한 사람의 사진을 본 유화가 헛구역질을 했다.

"······이, 이게 대체."

"시스템 초월 프로젝트. 종족 융합 프로젝트. 특성 개조 프로젝트. 그 외에도 한 가득이지."

많아야 10살로 보이는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사진.

전신에 비늘 같은 게 달려 있는 아이의 사진.

오장육부가 터져 나가 끔찍한 몰골로 방치된 아이의 사진 등등.

온갖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사진들로 가득했다.

유화의 동공이 마구 떨린 것은 그때였다.

"······레, 레아."

마지막 페이지.

레아로 보이는 여자 아이의 사진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1년."

꽈드득.

메이든의 손아귀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레아가 그 거지 같은 실험을 견디며 나를 부르짖은 기간이 무려 1년이야."

실험 보고서에는 자세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피험체 207호 보고서 1일 차.]

[엄마. 살려 주세요. 라고 외치기만 했다.]

[13일 차.]

[엄마, 아빠, 아파요. 엄마, 아빠. 이 말만을 반복하기 시작.]

[43일 차.]

[시각에 따른 시스템의 변화를 파악 해 보기로 함. 두 눈을 절단.]

···

···

···

[342일 차.]

[실험체 207호 사망.]

보고서를 읽는 유화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떨렸다. 보고서를 쥐고 있는 손에 자연스레 힘이 들어가며, 종이에 구김이 생겼다.

"이, 이 인간 같지도 않은 개 같은 새끼들······!"

유화의 눈꼬리에 눈물이 맺혔다.

통탄의 눈물이었다.

"화야. 내가 이 햇빛 예배당의 실험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 아니?"

"······그건."

메이든이 다른 보고서를 하나 더 넘겼다.

"한국 측에서 극비리에 넘어 온 보고서 덕분이었어. 최초의 실험장이 한국에서 발견됐고, 다른 지역 실험장에 대한 정보를 입수 했거든."

보고서의 이름을 확인한 순간.

유화의 동공이 이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확장됐다.

"햇빛··· 고아원 인체 실험··· 사건?"

"그래."

햇빛 고아원이라면 분명히······.

"강서율. 그놈이 살던 곳이지."

"······아."

유화가 헛숨을 들이켰다.

"강서율. 그놈은 말이다. 그 시발 같은 인체 실험의 유일한 생존자일 거다."

나이적으로도 일치하고, 햇빛 고아원에서는 유일한 생존자가 있다는 기록이 있었다.

아마 확실하겠지.

"···말, 도 안 돼."

"그래서 진리의 구명자에 대한 정보를 그렇게까지 자세하게 알고 있는 거야. 실험을 당할 때, 연구원들한테서 온갖 얘기를 다 들었을 테니까."

실험용 쥐 앞에서 입을 조심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자세한 기록은 없다만. 내 생각엔 강서율 그놈은 이종족 융합 프로젝트의 유일한 성공 사례가 아닐까 싶어."

"······이종족, 융합이요?"

유화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그래. 두 가지 속성을 다루는 건 인간에겐 어려울지 몰라도, 이종족에겐 아주 간단한 일이니까."

드래곤, 천사, 엘프, 뱀파이어, 정령, 요정에 심지어 수인까지.

두 가지 이상의 속성 마법을 다루는 이종족들에 대한 기록은 널리고 널렸다.

"이종족···?"

그 순간, 유화의 머리가 번뜩였다.

'유물.'

고대 유물.

강서율은 타 종족의 고대 유물을 모으고 있었다.

왜 그런 골동품을 모을 필요가 있는지 항상 의아했다.

'하지만 그게 강서율에겐 골동품이 아니었다면?'

메이든의 가설이 맞다면,

강서율은 신체에 이종족의 인자를 품고 있다는 게 된다.

그리고 이종족의 인자를 품고 있다는 건······.

'해당 이종족의 고대 유물을 착용할 수 있다는 게 아닐까?'

유화의 전신에 소름이 쫙 올라 왔다.

'확실해.'

유화는 확신했다.

메이든의 가설대로라면 모든 게 맞아떨어진다.

강서율이 진리의 구명자에게 증오심을 품고 있는 이유도.

진리의 구명자에 대한 정보에만 자세한 이유도.

그가 고대 유물을 모으는 이유 까지도.

"언니 말이 맞는 것 같아요."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강서율은 이종족 융합 프로젝트의 생존자였어.'

< 64화 인맥은 힘이다 (2) > 끝

< 65화 인맥은 힘이다 (3) >

메이든과 얘기가 잘 끝났다.

이걸로 내 계획의 밀도가 더욱 올라갈 것이다.

이게 참 생각보다 일이 술술 풀려서 어안이 벙벙하다.

메이든을 설득하기 위한 수많은 준비를 해 뒀는데, 한 방에 오케이 할 줄은 진짜 몰랐다.

"유화 씨가 사전에 얘기를 좀 해 둔 건가?"

내가 메이든과 만나고 싶다고 한 얘기를 듣고, 사전에 둘이 얘기를 나눴다던가 한 게 아닐까.

"······아니지."

그런 것치고는 도플갱어, 김신우, 베가본드의 일건에 대해서도 처음 듣는 눈치였다.

즉, 사전에 별다른 얘기를 나눈 건 아니다.

"그럼 뭐지."

나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메이든 크리티네스.

원작에서도 제법 비중 있는 조연으로, 던전을 만든다는 독보적인 특성을 지닌 초인이다.

이 특성을 이용해 만든 쉘터형 던전에서 농성을 벌인 적도 있었던가.

특이한 점이라고 해 봐야 메이든이라는 캐릭터의 주인공에 대한 애정 정도다.

애정이라고 해도 남녀간의 '사랑' 같은 게 아니고, 부모자식 간의 애정. '모정(母情)' 같은 거다.

"오묘하긴 했지."

메이든이 주인공의 동료가 되는 과정은 이른바 '개연성'이 없었다.

그냥 어느 순간 등장해서, 어느 기점으로 주인공을 편애하기 시작했다. 별다른 계기도 없었다.

당시에는 그냥 단순히 주인공의 조력자를 만들기 위한 장치구나.

정도로만 여기고 넘어갔는데.

소설이 현실이 된 이상, 그런 작위적인 마음의 변화는 없을 터.

"그럼 주인공을 편애하게 된 계기가 있다는 건데."

소설엔 묘사되지 않은 계기.

메이든 시점으로 진행됐을 어떠한 이야기.

그런 게 있을 확률이 높았다.

"냐아."

"아고. 깼어?"

내가 계속 끙끙댔기 때문일까.

내 품에서 잠들어 있던 금호가 깼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본다.

"미안. 다시 자."

나는 금호의 머리를 살포시 쓰다듬어 줬다. 금호는 금세 꾸벅꾸벅 졸더니, 이내 다시 잠들었다.

오늘은 목요일.

월요일 아침에 보고 4일 만에 보는 거라, 엄청 보고 싶었다.

금호도 마찬가지였는지, 날 보자마자 거의 미쳐 날뛰었다.

덕분에 1시간 넘게 놀아 주고, 지금은 침대 위에 같이 쓰러져 있는 중이다.

나는 금호의 털결을 쓸어내리며, 생각을 마저 정리했다.

······일단 메이든과의 일은 잘 풀렸으니 넘어가자.

의문이 남긴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원인보단 결과.

메이든이 내 계획을 도와주기로 했다는 결과가 중요한 거니까.

덤으로 유화의 조력도 얻게 됐고.

여러모로 잘 해결됐다.

그럼 앞으로 내가 해야 될 일이 뭐가 있지.

나는 앞으로 준비해야 될 일들은 다시금 정리하기로 했다.

일단 국가전 테러 대비는 메이든과 유화가 맡아 주기로 했으니, 당장 내가 뭘 할 필요는 없다.

두 번째는 실기 시험.

포세이돈 폭주 사건 때문에 실기 시험 자체가 중단, 연기됐으니, 당연히 재시험이 치러지겠지.

그 실기 시험을 준비해야 한다.

······뭐 이것도 이번 사건 해결의 대가로 가산점을 받기로 했으니, 목표로 삼았던 등수까지 올라가는 일에 큰 문제는 생기지 않겠지.

애초에 어떤 재시험을 치를지 알 수도 없는데, 준비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도 하고.

이것도 패스다.

그럼 세 번째.

베가본드 일건으로 한국에 조사를 들어 올 진리의 구명자 소속 빌런들의 대비.

지금까지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걸로 봐서, 역시 간부급이 움직이진 않은 것 같고.

일반 소속 빌런들이 움직이고 있을 확률이 크다.

물론 이 또한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내 정보가 적들의 귀에 들어간 게 아닌 이상, 내게 직접적인 위해를 끼칠 순 없을 테니까.

그나마 걱정인 게 베가본드를 직접 처리한 신화 그룹, 비혼 길드의 안위인데.

이것도 간부급이 직접 움직이지 않는 이상 걱정할 필요는 없다.

고로 이것도 패스.

다음에 발생할 에피소드야 사관학교 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니, 그때그때 행동하면 될 뿐이고.

"······음."

뭔가 단기적으로 해야 할 일은 다 그대로 놔둬도 된다는 결론이 나왔다.

뭐 빼먹은 거 없나?

나는 다시금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똑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좋은데?"

이것은 절호의 성장 타이밍이라고 할 수 있다.

별다른 변수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약 1달.

그 1달이 에피소드와 에피소드 사이의 공백이다.

이 기간 동안은 강해지는 것에 전력을 다하자.

행동 방침이 정해졌다.

"아."

맞다.

행동 방침은 방침이고.

정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는 슬쩍 금호를 침대 옆에 내려 두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책상에 앉아서 새 노트를 펼쳤다.

노트의 이름은 뭘로 할까.

그래. 이걸로 하자.

[나를 둘러싼 인물들의 생각.]

주위 인물들의 나에 대한 인식을 정리해 둘 노트다.

슬슬 정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슬슬 너무 복잡해지고 있기도 하고, 주위 인물들끼리 교류가 벌어지기 시작했으니, 내 정체가 발각될 가능성이 있다.

그때를 위한 대비를 해 두려는 거다.

[신지아 : 하프 엘프(천족+엘프), 세계의 구원자.]

일단 지아는 걱정할 필요 없다.

내 말이라면 된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애라서, 내가 엘프가 아니라는 것만 안 들키면 이 관계는 계속해서 유지될 테니까.

[유화 : 힘을 숨기고 있는 사관생. 진리의 구명자에 대한 정보에 빠삭함. 진리의 구명자에게 복수심을 품고 있음.]

유화는 좀 복잡하게 엮여 있다.

근데 뭐, 어떻게 보면 다 맞는 말이긴 하다.

힘이 '없는 걸' 숨기고 있다는 점까지 완벽하네.

[하시연 : 천족. 스승님. 세계의 구원자.]

하시연은 지아와 어느 정도 비슷한 인식이다. 천족으로 알고 있느냐, 천족+엘프족으로 알고 있느냐의 차이일 뿐.

[피진호 : 무기의 주인을 지닌 2대 웨폰 마스터.]

이거야말로 큰 문제는 없겠지.

내가 '무기의 극의'를 지니고 있는 이상, '무기의 주인'을 지니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최지훈 : 햇빛 고아원 실험장. 시스템 초월 프로젝트 생존자.]

이것도 마찬가지.

착각이 아니라 팩트.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허미트 : 대정령, 언노운의 적.]

허미트에겐 '대정령의 맹약'이 걸려 있다. 내 정보를 발설하지 말라는 금제에 걸렸으니,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메이든 : 아마 유화와 비슷한 인식.]

메이든은 그냥 유화와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지.

[에일 크리스 : 재미있고 특이한 꼬맹이.]

콜렉터.

이 양반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냥 재밌으면 장땡인 양반이기도 하고, 자기한테 드래곤족의 유물을 주는 사람은 다 자기편! 뭐 이런 생각도 가지고 있는 양반이라서.

[언노운 : 인식 못함.]

아직은 전혀 상관없지만 일단 언노운까지 적어 두기로 했다.

"······와우."

적어 두고 보니 진짜 대환장파티가 따로 없다.

단순히 시스템이 없다는 걸 숨기기 위함이었을 뿐인데.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온 거지?

"어휴."

그렇다고 이걸 수습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막말로 이제 와서 '사실 나 뭣도 아니었고 시스템이 에러난 애송이야!' 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그냥 처음부터 시스템이 없다고 솔직하게 털어 놨으면 더 나았으려나?"

지아가 나를 처음 찾아왔을 때.

그때 솔직하게 모든 것을 털어 놨다면······.

"아니지."

그건 아니다.

이 세계에서 시스템이란 지니고 있는 게 당연한 것이다.

99.99%확률도 아니고 100%다.

예외는 없다.

시스템을 지니지 못하는 것은 몬스터나 짐승들뿐.

즉, '시스템을 지니지 않는다.' 라는 말은 '인간이 아니다.' '짐승이나 몬스터다.' 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그렇기에 진실을 털어 놓을 순 없었던 것이다.

······시스템이 없다는 게 진리의 구명자 놈들 귀에 들어가면 진짜 '내 인생 The End'라는 이유도 있었고.

"어휴."

어쩔 수 없다.

나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이대로 밀고 나가는 수밖에."

* * *

금요일 아침.

나는 평소처럼 개인 단련실로 향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운동을 하고 있던 피진호가 기구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은 아침이다."

가벼운 인사와 함께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곤 신체 이곳저곳을 주도면밀하게 살핀다.

"신체에 뇌 속성에 대한 건 따로 보이지 않는군."

내 신체 상태를 확인하나 했더니, 뇌 속성에 대한 걸 확인하고 있는 거였어?

"신체 컨디션은 괜찮군. 단련을 해도 전혀 무리가 없을 컨디션이다."

아. 신체 상태도 확인하셨구나.

"그래. 어디 뇌기에 대한 얘기를 좀 들어 볼까."

피진호 교관이 세상 즐거운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새로 습득한 스킬입니다. 이름은 '낙뢰(落雷)' 신체 내부의 마력 성질이 바뀌는 게 아니라 공기 중에 응집시킨 마력을 뇌기로 변환하는 식의 스킬입니다."

천벌은 각인의 불길과는 다르다.

'각인의 불길'은 말 그대로 신체의 속성을 바꿔 주는 것이지만,

천벌은 단순히 마력을 이용하여 낙뢰를 떨어트리는 스킬의 일종이다.

"마력 혈관에 영향을 주지 않는 특수 스킬이라는 건가."

"네."

신체에 변화가 없으니, 피진호 교관의 신비를 보는 눈으론 확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중 속성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잡기술입니다."

속성 마력의 사기성은 범용성에 있다.

하시연의 빙결여제가 그러하듯, 대부분의 속성 마력은 미친 성능을 자랑한다.

하지만 내 '천벌'은 단순히 낙뢰를 떨어트리는 게 전부다.

속성 마력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범용성이다.

······물론 마력량에 따라 다른 속성 마법 뺨따구를 때릴 만큼 강력한 데미지를 줄 수 있는 사기적인 스킬이기도 하다만.

"아니. 그건 엄연한 이중 속성이다."

피진호 교관이 옅게 웃었다.

"속성 마력의 범용성은 확실히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속성의 상성으로 인한 데미지 증폭'이다."

속성의 상성.

저번 물의 수호자인 포세이돈이 번개에 큰 데미지를 입었던 것처럼, 이 세계의 속성에는 확실한 '상성'이 존재한다.

요약하자면 포켓몬 같은 거다.

"범용성이 떨어지면 어떤가. 너에겐 최고의 범용성을 지닌 화 속성 마력이 있는데. 낙뢰는 비장의 한 수로 아껴 두면 되는 것뿐이다."

피진호 교관이 입꼬리를 올렸다.

"앞으로 한국에서 해저 몬스터들이 폭주하면 네 덕을 많이 볼 것 같군."

"······하하. 그러려면 마력량을 많이 늘려야겠네요."

천벌은 [마나의 은혜]를 착용해, 마력 감응을 활성화 시켜도 두 발이 한계다.

그마저도 쓰고 나면 이번처럼 쓰러질 게 분명하다.

"그래. 아직 시간은 많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도록."

"네."

피진호가 내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조금 늦었군. 바로 아침 단련으로 들어가겠다. 마력은 어떻게 해 줄 수 없지만, 신체는 맡기도록. A랭크까지는 반드시 만들어 줄 테니까."

"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운동에 임하기로 했다.

잠시 후.

"······크허억. 허업."

"아직 3개 남았다. 팔에 힘 풀지 않는다!"

힘들지 않으면 단련이 아니다.

피진호 교관의 격언이다.

"앞으로 두 개!"

"끄으으읍!"

분명히 신체 능력치가 전반적으로 E랭크(70/99)까지 올랐다고 들은 것 같은데.

F랭크였던 시절보다 더 힘들다.

"라스트!"

마법의 단어 라스트.

나는 남은 힘을 쥐어짰다.

"쉬어!"

"크허어억."

나는 그 즉시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이어서 벌러덩 드러누웠다.

"허업··· 허어업."

라스트의 아랍어 버전이나, 모스부호, C언어 버전을 들을 줄 알았는데.

다행히 진짜 라스트였던 모양이다.

"오늘 단련은 여기까지 하겠다. 수고했다."

"수, 수고하셨습니다아······."

말할 힘도 없었다.

교관은 그런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혹여 운동을 더 시킬까 싶어서 물었다.

"여전히 경이로운 신체 회복 능력 속도다 싶어서 말이지. 저번에 골격이 변한 뒤로 더욱 빨라졌군."

엘프족 완전 체화 덕분에 신체 구조가 변한 일을 말하는 거다.

"그게 자연 회복력이라는 게 더 놀라워."

교관이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 기세라면 다음 주부터 진행될 토너먼트 개최 전까지 D랭크 언저리에 들어서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 같군."

"······토너먼트요?"

갑자기 웬 토너먼트.

"아. 오늘 아침에 공지될 예정이었던가. 내가 성급했군."

피진호 교관이 큼큼 목청을 다듬었다.

"뭐, 1시간 뒤면 알게 될 사실. 미리 말해도 상관없겠지."

아. 혹시 그건가?

"다음 주 수요일부터 재시험을 치를 예정이다."

역시.

맞구나.

"시험 방식은 토너먼트. 3일간 치러질 개인 토너먼트다."

"되게 기본적인 방식을 채용했네요."

토너먼트.

전통적이고 아주 기본적인 시험 방식이다.

"그래. 13년 전까지만 해도 항상 실기 시험은 토너먼트였지. 용케도 알고 있군."

시험 준비 단계에서 조사해 봐서 얼추 알고 있다.

"그럼 혹시 우승자 혜택도 부활했습니까?"

"그것도 알고 있었나."

우승자 혜택.

만약 그 혜택이 부활했다면, 이번 시험은 내게 있어 아주 큰 기회다.

"그래. 혜택도 같이 부활했다."

교관이 미소 지었다.

"토너먼트 우승자에겐 국가전 참전 권한이 주어질 예정이다."

내 눈에서 이채가 흘렀다.

"좋네요."

꼭 이겨야 할 이유가 생겼다.

"눈빛에 힘이 넘치는군."

"그럼요."

"그렇다면 2부 운동 시작이다."

< 65화 인맥은 힘이다 (3) > 끝

< 66화 세 번째 유적지 (1) >

금요일 수업은 아주 정신없었다.

간만에 본 나를 향해 반 친구들이 쉴 새 없이 질문을 퍼부었고.

웬일로 2~4학년 선배들이 나를 찾아오는 기현상까지 벌어졌다.

지금까지는 자존심 때문인지, 신입생에게는 적응 기간을 준다는 암묵적인 룰 때문이었는지.

선배들이 찾아오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이중 속성 사건으로 자제심이 완전히 사라진 모양이다.

"후배님. 우리 동아리 들어 올 생각 없어요?"

"다음 달에 검술 대회가 있는데, 혹시 검술 동아리 관심 있어?"

"야. 검술은 무슨. 얘 창 다루는 거 봤잖아. 창술 동아리로 와라."

점심시간을 쪼개서도 이렇게 날 찾아오는 걸 보면, 내가 탐나긴 탐나는 모양이다.

······하기야. 1학년 사관생들의 동아리 활동 제한 기간이 1달도 채 남지 않았으니까.

미리미리 침을 발라 두겠다 이거겠지.

"시연아. 너는 당연히 검술 동아리 고를 거지?"

"검술 동아리는 무슨. 얘는 마법 동아리지. 빙결 마법 못 봤어?"

실제로 하시연의 주위에도 선배들이 몰려 있는 걸 보면 확실한 것 같다.

오히려 지아 주위에는 사람들이 없다.

하긴, 지아는 들어갈 동아리가 정해져 있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지금 가입하면 다음 주에 있을 토너먼트까지 철저하게 네 백업을 봐 줄 수 있어."

"야. 얘네 아직 적응 기간 안 풀렸거든? 앞서가지 마라."

"그러다가 신고 당해서 활동 정지 먹으면 아주 좋겠네."

"다들 암암리에 하고 있는 거 다 알거든? 같이 죽을 생각이면 그렇게 해 보던가."

개판 5분 전이다.

아니, 그냥 개판이라고 해야 하나.

"저. 선배님들."

어쩔 수 없지.

"제가 피진호 교관님의 제자인 건 알고 계시죠?"

피진호 교관님의 이름을 좀 파는 수밖에.

"······피 교관님?"

"얘가 걔였어? 1:1 교육을 받고 있다는?"

"그 정도도 조사 안 했냐. 쯧쯧."

아는 사람 반, 모르는 사람 반인 듯했다.

"그게 왜요?"

한 여선배가 대표로 내게 물었다.

"피진호 교관님께 수업을 받아 보신 선배님들은 아시겠지만, 제가 도저히 동아리 활동까지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서요······."

최대한 처량한 눈빛으로 애처로운 미소를 지었다.

"······아. 그렇게 힘들어?"

"예. 새벽 5시 반부터 등교 30분 전까지 1:1 개인 레슨. 한계까지 쥐어 짜이고 있습니다."

주위 선배들의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피 교관님의 단련을 1:1로 2시간 동안?"

"······너 어떻게 살아 있냐?"

몇몇 선배들은 동정의 눈빛을 보낸다.

"그래도 학점 관리나 추후 추천서 등을 생각하면 동아리 활동은 반드시 해야 할 거 아냐."

맞는 말이다.

확실히 사관학교에서 동아리에 들지 않는 건 페널티일 뿐.

무조건 드는 게 낫다.

동아리 활동은 학외활동 실적이나, 대회 출전 기록 등등.

추후 프로 초인으로 활동할 때를 대비해서 스펙을 많이 쌓아 둘 수 있는 기회의 장이다.

"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나도 동아리에는 반드시 들어갈 생각이다.

"다만, 가입에 관한 것도 피진호 교관님과 상담을 좀 해 봐야 할 듯해서······. 그냥 혼자 정하면······ 후폭풍이 무섭거든요."

"······어우."

"나 살짝 상상했어."

다들 작게 몸을 떨었다.

역시 피진호 교관님이다.

악명과도 같은 명성이 자자하다.

"그러니, 한동안 생각할 시간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제가 주력으로 다룰 무기도 아직 못 정했거든요."

무기의 주인 덕분에 모든 무기가 내 주력 무기나 다름없긴 한데, 일단 그렇게 변명해 두기로 했다.

"흠."

선배들이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좋아. 아직 한 달이나 남았겠다. 벌써부터 이렇게 닦달하는 건 가오가 안 서기도 하고."

"후배님이 생각을 정리하는 걸 기다릴게요."

다들 내 의견을 존중해 주기로 한 것 같다.

"아. 차기 창술 동아리 대표를 맡을 인재인데. 아쉽네."

사관학교에 재적 중인 사람들은 대부분 인성이 좋단 말이지.

초인 지망생들이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인성 검사를 철저히 해서 그런가.

"후배님이 가지고 있는 정부 감사패가 탐나는 건 아니고?"

"부정하지 않겠어. 그건 너네도 탐날 거 아냐?"

"인정."

내가 이렇게 선배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이유 두 번째.

이제 곧 받게 될 정부의 감사패.

이게 있으면 동아리의 예산이나, 활동에 큰 이점이 생긴다.

해외에서 개최되는 대회에 갈 때, 타는 비행기의 좌석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다거나.

최신식 비품의 배부 순서가 앞으로 돌아온다거나.

여러모로 이득이 많다.

"아무튼 알겠다. 후배님의 미래가 걸린 일이니까. 잘 생각해 보고."

"여기. 동아리 관련 안내서는 두고 갈 테니까, 한번 읽어 봐 줬으면 좋겠어."

선배들은 제각각 자기 동아리의 홍보 포스터를 내게 건넸다.

한 가득이다. 20장은 넘는 것 같은데.

"그럼 후배님들. 점심 맛있게들 하시고. 괜히 우르르 찾아와서 미안했어요."

그 말을 끝으로 선배들은 우르르 사라졌다.

"야. 저 후배님 얻은 놈이 거하게 한 턱 쏘는 거다?"

"오. 좋은데?"

나가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며 장난치는 걸 보면, 사이가 나쁜 건 아닌 것 같다.

하기야 동아리가 다르다 보니, 출장 대회도 다르고.

서로 경쟁자가 아니라 그런가.

"어휴."

폭풍이 지나간 기분이다.

"와. 서율이 진짜 대박이다."

"나 가입 제한 풀리기 전부터 저렇게 4학년 선배들이 몰려 왔다는 얘기 처음 들어 봐."

단순히 내 실력을 보고 그러는 게 아니라, 감사패가 목적일 거다.

말했듯이, 감사패는 여러모로 이점이 많아서.

"으아. 피곤해."

근처에서 다른 선배들에게 시달리던 하시연이 세상 피곤한 눈으로 내게 다가왔다.

"수고했어. 뭐 마음 가는 동아리는 있고?"

"······음. 마법보단 검술이 조금 더 끌리긴 해."

"하긴. 너는 마법에만 올인하기엔 범위가 너무 애매하니까."

"그치. 검술을 더 좋아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마법이 싫은 건 아니지만."

하시연이 허리춤에 걸려 있는 훈련용 검을 매만지며 작게 미소 지었다.

"일단 더 늦기 전에 밥이나 먹으러 가야겠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앗. 나도나도. 나 오늘 철진이랑 지훈이 둘이서 따로 할 얘기 있다고 해서 혼자야."

"그래?"

그 두 명이 하시연을 두고 얘기라. 웬일이지.

"그래 그럼. 지아야. 괜찮지?"

나는 옆에서 생각에 잠겨 있던 지아를 불렀다.

"응? 아, 응. 물론 괜찮지."

얘네 둘은 1위 자리를 놓고 싸우는 라이벌 관계긴 한데, 생각보다 사이가 괜찮다.

"지아 너는 무슨 동아리 들 거야? 역시 활?"

"아마 그럴 것 같아."

"글쿠낭. 그럼 차기 동아리장은 지아 네가 되겠네."

"그럼 좋겠네."

애초에 하시연 성격이 누군가에게 밉보일 성격이 아니기도 하고. 지아도 하시연이라는 전도유망한 초인과 척 질 생각은 없을 테고.

······뭐, 지아는 1위를 빼앗길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긴 한데.

"근데 뭐 먹으러 가는 거야?"

하시연이 내게 물었다.

"시간도 없겠다. 간단히 빵 어때?"

"난 좋아."

"나도."

우리는 적당히 빵을 사서 식당 인근 정원에 자리 잡고 앉았다.

"이번 토너먼트 있잖아."

빵을 우물거리던 하시연이 넌지시 화두를 열었다.

"서율이 너. 우승할 거야?"

"······응?"

'우승을 노릴 거야?' 같은 말이 아닌 '우승할 거야?'라니.

마치 내가 우승할 마음만 먹으면 무조건 우승 가능하다는 것처럼 말하네.

갑자기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온다고?

"아니 그, 저번에 국가전에 출장하는 게 목표라고 했던 게 생각나서. 마침 이번 재시험 토너먼트 우승자 혜택이 국가전 출장권이기도 하고."

아니, 우승할 생각이기는 한데.

저렇게 물어보면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잖아.

실제로 지아가 오묘한 눈으로 나와 하시연을 번갈아가면서 바라보고 있다.

"우승을 목표로 삼긴 하겠지? 시연이 너도 우승할 생각 아냐?"

"앗, 응. 그치그치."

하시연이 그제야 자기의 말실수를 눈치 챈 모양이다.

"그.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지아가 슬쩍 말을 열었다.

"계속 궁금했는데, 둘은 무슨 사이야?"

"무슨 사이냐니?"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지 알아보기 위해 되물었다.

"저번 대미궁 공략 때. 시연이 네가 그······ 빙결여제? 그걸 썼잖아?"

"응."

"그 스킬에 대해서 아는 건 서율이 너밖에 없었던 것 같아서. 실제로 우리 팀이었던 최지훈도 몰랐던 거 같고."

말 그대로 나와 하시연의 관계를 묻는 질문이었다.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하시연이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걸 묻는 질문이 아닐까.

"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럼 어떻게 할까.

일단 하시연과 지아의 인식은 어느 정도 공통된 부분이 있다.

단순히 천족과 엘프족의 하프으로 알고 있느냐.

아니면 천족으로 알고 있느냐의 차이일 뿐.

즉, 이 둘의 생각은 어느 정도 묶을 수 있다는 말이다.

"시연이한테 빙결여제를 알려 준 사람이 바로 나야."

나는 사실을 말하기로 했다.

"······서율이 네가?"

"응. 스승과 제자 같은 관계거든."

지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많이 놀란 표정이다.

"맞아. 매일 밤 강서율 교관님한테 극진한 지도를 받고 있어."

"······야. 표현이 야리꾸리하다?"

"앗. 헤헤."

하시연이 귀엽게 웃으며 입을 막았다.

"매일 밤···. 개인 지도···."

지아가 세상 부러운 눈빛으로 하시연을 바라본다.

그리곤 언젠가 영화에서 본 적 있는 눈 큰 고양이처럼 애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 눈이 '저도 지도해 주세요!' 라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근데 지아 너는 집에서 등교해서 시간이 애매할 텐데?"

"맞추겠습니다!"

얘 갑자기 존댓말 나오네.

뭐, 하시연도 가끔 장난삼아 존댓말을 하곤 하니까.

별로 이상하게 보지는 않는 것 같다.

"매일 밤 8시인데. 진짜 괜찮겠어?"

지아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보는 내가 어지러울 정도로 빠른 속도의 끄덕임이었다.

"시연이 너는?"

"응? 나아?"

옆에서 햄스터처럼 빵을 갉아 먹고 있던 하시연이 귀엽게 고개를 갸웃했다.

"나야 좋지. 대전 상대도 생기는 거고."

하시연이 거부할 리가 없었다.

얘 머릿속엔 경쟁자도 같이 성장한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 같은 건 아예 없는 모양이다.

"둘 다 괜찮다면 뭐."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오늘 밤부터 바로 합류하는 걸로 콜?"

"네!"

지아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날 저녁 6시 30분.

가볍게 식사를 마치고, 방에서 금호와 놀고 있는 중.

별안간 지아에게서 톡이 왔다.

[저, 선조님.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요.]

[응? 뭔데?]

[(우물쭈물하는 토끼 이모티콘)]

[그, 하시연 양도 선조님의 비밀을 알고 있는 건가요?]

아주 직설적인 질문이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교습을 해 준다는 얘기를 듣고 이런 생각에 이를 줄은 예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을 줄은 몰랐다.

[맞아.]

[(깜짝 놀라는 곰 이모티콘)]

나는 쿨하게 긍정했다.

말했듯이, 나에 대한 하시연과 신지아의 생각은 굉장히 비슷하다.

곧 나타날 미지의 적들을 막기 위해 행동한다.

그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힘을 봉인하고 있다.

내 정체가 이종족이다.

진짜 천족이냐, 천족과 엘프족의 하프냐. 이 차이일 뿐이지, 큰 차이는 없다.

지아가 좀 더 심화된 정보를 가지고 있다. 정도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둘 사이에 의견 교류가 생겨도 아무 문제도 없다는 거다.

오히려 미래를 생각하면 두 명이 친해지는 게 이득이다.

내 비밀이 그 둘을 엮는 계기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는 일이다.

[근데 시연이는 나를 천족이라고만 알아.]

[천족이요?]

[어. 저번 악마 강림 사건 때. 기억해?]

[앗. 넵.]

[그때 악마를 처리하느라 천족의 힘을 좀 썼거든.]

[(경악한 펭귄 이모티콘)]

[그렇게 이어진 거군요.]

[그렇게 이어진 거지.]

[그럼 하시연은 선조님이 엘프의 피를 이었다는 건 전혀 모르는 거네요?]

[그렇지.]

[아하.]

이렇게 해 두면 문제는 없을 거다.

구라의 법칙.

구라도 맞물리면 진실이 된다.

하시연과 신지아의 착각을 한데로 묶어 버리면, 내 말에 신빙성이 늘어난다.

내 정체가 발각될 일은 현저히 줄어든다.

게다가 이렇게 두 사람을 엮는 것으로 한 가지 이점이 더 생긴다.

[말 나온 김에, 주말에 시간 어때?]

[이번 주요? 이번 주 일정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라서 빼려고 하면 뺄 수는 있는데··· 무슨 일이신가요?]

[아니. 다른 건 아니고. 유적지 공략이나 갈까 해서.]

[···갑자기요?]

그 이점이란 다름 아닌, 유적지 공략 인원의 확충이다.

[엘프족의 유물이 잠들어 있는 유적지를 찾았거든.]

하시연이랑 금호.

셋이서 깨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컸지만.

지아까지 합류하면 얘기가 좀 다르다.

[콜?]

내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 66화 세 번째 유적지 (1) > 끝

< 67화 세 번째 유적지 (2) >

그날 밤.

오후 단련이 모두 끝났다.

"으아~ 힘들어."

하시연은 평소처럼 바닥에 널브러져 숨을 색색이고 있었다.

"······."

지아도 기진맥진한 건 마찬가지였다.

체면을 생각해서인지, 맨바닥에 앉고 싶지 않은 건지 간신히 서 있기는 한데.

말 그대로 버티고 있을 뿐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다.

"둘 다 괜찮아?"

"괜, 찮아."

"······응."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데.

오늘 단련은 평소와 다르게 단련장에서 이뤄졌다.

지아가 아무리 그래도 확실한 설비가 있는 곳에서 훈련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하여, 인근의 단련실을 대여했다.

뭐 신화 그룹과 연계되어 있는 회사의 단련실이라 공짜나 다름없었다나.

덕분에 이 넓은 단련실을 셋이서 사용한다는 호사를 누렸다.

"결국 무승부네."

오늘 단련으로 두 사람은 모의전.

저번 대미궁 내에서 내지 못한 승부를 지금 내겠다는 의도도 조금 있는 듯했다.

결과는 말했듯이 무승부.

"너, 넓은 곳에서 싸우니까. 붙기가 너무······ 힘들어어."

대미궁에서는 지형적인 이점을 살려 하시연이 압도했지만, 이곳 단련장은 사방이 뻥 뚫려 있는 평지다.

게다가 이번에는 지아가 빙결여제에 대해서 미리 알고 있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시연이 너······. 그 스킬 대체 방어력이 얼마나 높은 거야······."

그럼에도 지아가 이기지 못한 것은 확실한 공격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빙결여제의 갑옷과 바로바로 생성되는 빙벽을 뚫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둘은 소모전이 됐고.

정확히 5분이 지나, 빙결여제의 지속시간이 끝남과 동시에 지아도 탈진.

그 결과가 지금 이 모습이다.

둘 다 죽어 가고 있다.

"으."

결국 지아도 더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나는 둘에게 마나 이온 음료를 각각 하나씩 건넸다.

"고마워."

둘은 각각 감사를 전하고 음료를 마셨다. 뭔가 전신이 땀에 흥건히 젖어서 그런가.

신체의 윤곽이 확연하게 드러나서 조금 보기 민망하다.

나는 슬쩍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시연이 넌 말했듯이 마력 용적을 늘리는 게 관건이야."

하시연은 빙결여제의 지속시간을 늘리는 게 중요하다.

"응."

"지금 마력이 C+랭크라고 했나?"

"맞아. C랭크 72."

C랭크 1~33은 C-.

C랭크 34~66은 C.

C랭크 67~99는 C+가 된다.

실제로 능력치 창에 그렇게 뜨는 건 아니지만, 다들 1~99 사이는 텀이 너무 크니까 저렇게들 표기하고 있다.

"여전히 계속 늘고 있는 추세일 거고."

"응."

내 기억이 맞으면 하시연의 마력 성장 한계는 A랭크다.

A랭크(99/99) 이후로는 추가적인 단련으로 인한 성장이 아예 멈춘다.

"보너스 포인트는?"

"당연히 모아 두고 있지."

이 성장 한계를 뚫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이 바로 보너스 포인트를 사용하는 것이다.

레벨업을 할 때마다 1포인트가 주어지며, 이걸 사용하면 성장 한계를 넘어서 능력치를 올릴 수가 있게 된다.

"잘했어. 괜히 조급해하지 말고. 네 성장 속도를 보면, 못해도 A랭크까진 마력이 오를 확률이 커. 보너스 포인트는 그때 사용해도 늦지 않아."

"A에서 S로? 그럼 10포인트나 사용해야 하는데?"

"그만큼 네 마력 용적이 중요하다는 거야."

이 세계에서 레벨은 상당히 올리기 힘들다.

20레벨까지는 가볍게 사냥만 해도 오르지만, 그 후부터 급격하게 레벨업 속도가 감소한다.

대충 이 세계에서 제일 레벨이 높은 초인이 49였던가.

유화도 34레벨인가 그랬던 걸로 기억한다.

즉, 사관학교 졸업 시점에서 보너스 포인트는 20포인트라고 보면 된다.

이 보너스 포인트는 높은 랭크의 능력치를 올리려 할수록 더 많이 소모된다.

F랭크에서 D랭크까지는 각 랭크 업당 1포인트.

D랭크에서 B랭크까지는 각 랭크 업당 3포인트.

B랭크에서 A랭크로 올리려면 6포인트.

A랭크에서 S랭크로 올리려면 10포인트가 소모된다.

고랭크로 갈수록 성장 자체가 힘들고, 높은 효율을 내다 보니 이러한 포인트 소모 비율은 아주 합리적이라 할 수 있겠다.

"A랭크라······. 너무 멀다. 사관학교 졸업 전까진 달성할 수 있으려나."

이 보너스 포인트를 언제 사용하느냐가 관건이다.

너무 조급하게 사용하면, 미래를 포기하는 결과가 되고.

너무 늦게 사용하면, 사관학교 내에서 실적을 쌓을 수 없게 된다.

존버와 손절.

이 미묘한 줄타기가 중요하다.

"1년 내에 찍을 수 있을걸?"

"진짜?"

"진짜지 그럼."

"와······."

하시연의 표정이 세상 해맑아졌다. 그렇게 좋을까.

"지아 너도 마력 용적이 중요해."

"······어? 나도?"

멍하니 내 얘기를 듣고 있었던 지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어. 궁수한테 마력은 강기를 두르기 위한 곁다리다. B랭크 이상은 낭비다. 라는 말이 있잖아?"

"응."

"그건 지아 너한텐 해당되지 않는 말이야."

"?"

지아의 특성은 아직 개화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직은 마력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할 거다.

"지금 네 마력이 B+지?"

"응."

"그럼 지아 너도 A랭크 최대치를 목표로 두자. 그 후에 보너스 포인트를 사용해서 S랭크까지 올리고."

아직 개방하지 못한 지아의 특성은 '격세유전(隔世遺傳)'이다.

이 특성이 개화하기 위한 조건 중 하나가 바로 마력 S랭크 달성이다.

특성을 개화하기만 하면 지아는 말 그대로 언터쳐블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세계 최고의 원거리 사수가 된다.

"응. 알았어."

상식과 다른 말에 의문을 품을 법도 한데, 지아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의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나에 대한 믿음만이 가득했다.

"암튼 둘 다 고생 많았어. 아 맞다. 시연아."

"응~?"

이온 음료를 마시던 하시연이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내일 유적지 하나 공략하러 갈 건데. 시간 괜찮아?"

"내일? 음······."

하시연이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응. 괜찮을 거 같아."

"다행이네."

"또 우리 둘이 가는 거야?"

"······또?"

하시연의 말에 지아가 반응했다.

"저번에 시연이랑 둘이 유적지 공략하러 간 적이 있거든."

"그때 레벨 두 개나 올렸다?"

하시연이 해맑게 웃었다.

"이번엔 넷이 갈 거야."

"어? 넷?"

"넷이요?"

둘 다 놀란 눈으로 날 돌아본다.

셋도 아니고 넷? 이라는 눈빛이다.

"응. 여기 세 명이랑."

나는 픽 웃었다.

"금호."

"아~"

두 명이 납득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오후 3시 보는 걸로 하고. 약속 장소는······ 이따 따로 톡 보낼게."

어디서 만나는 게 좋으려나 생각 좀 해 봐야 할 것 같다.

스카우터나 기자들을 피해서 움직여야 되거든.

"그럼 난 먼저 들어가 볼게."

"아, 나도 같이 가. 기숙사로 가는 거지?"

하시연이 벌떡 일어나서 내게 달려왔다.

"그렇긴 한데."

나는 뒤쪽의 지아에게 눈을 돌리며 말했다.

"지아가 너한테 할 말이 있다고 하더라."

"응? 지아가?"

"어."

하시연이 몸을 돌려 지아를 바라봤다. 지아는 아주 진지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럼 둘이 얘기 잘 하고. 나는 먼저 갈게."

나는 가볍게 손을 흔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할 말이 뭐야?"

"음. 어디서부터 말하면 될까."

이제 지아는 하시연한테 나에 대한 얘기를 꺼낼 거다.

내 정체에 대한 것과, 내 목적에 대한 것까지.

내게 들었던 것들을 모조리 하시연에게 털어 놓겠지.

내 정체가 단순한 천족이 아니라, 엘프족과 천족의 혼혈이라는 것까지 모조리 다.

이건 내가 지아한테 부탁한 일이다.

내 입으로 하시연에게 직접 전해도 됐겠지만, 지아의 입으로 전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이 일로 두 명이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면 좋겠다 싶기도 하고.

왜 그런 말 있잖아.

비밀을 공유한 사람들끼리는 왠지 모를 유대감이 생긴다는 말.

나는 저 두 명이 그런 관계가 되길 바란다.

"······뭐, 잘 하겠지."

솔직히 말하자면,

했던 설명을 두 번이나 반복하긴 귀찮았다.

* * *

방에서 가볍게 샤워를 마치고.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침대로 향했다.

우웅- 우웅-

침대 위에 놓아 둔 스마트폰이 마구 진동하고 있다.

"뭐지?"

이 시간에 전화라도 온 건가?

나는 수건을 머리에 얹은 채로 폰을 들었다.

[스승님과 제자들의 방!]

"······단톡?"

단체 톡방이었다.

나는 톡을 확인했다.

[신지아: 선조님. 얘기 잘 끝났어요. 이 톡은 정보 교환용으로 만들어 봤어요.]

[(눈에서 별빛을 뿜어내는 강아지 이모티콘)]

역시 예상대로 지아와 하시연이 만든 단톡이었다.

[하시연: 헐. 지아 너 서율이를 선조님이라고 불러? 왜?]

[신지아: 왜긴. 선조님을 선조님이라고 부르는데 이유가 있니?]

[하시연: 와. 대박.]

다행히 얘기는 잘 끝난 것 같다.

나는 계속 밀린 톡을 읽어 나갔다.

둘이 북 치고 장구 치고 잘 놀고 있다. 내 예상대로 유대감이 조금 생긴 모양이다.

"다행이네."

그렇게 최신 메시지까지 다 읽었다.

[하시연: 그럼 나도 서율 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신지아: 당연하지. 선조님은 세상에서 제일 위대하신 분. 최소한의 예의를 담아 존칭을 하는 게 당연해.]

"이런."

나는 부랴부라 답장을 했다.

[하지마. 지아 너는 몰라도 시연이한테 존댓말 시키면 다른 애들이 다 보는데서 존댓말 하고 난리 난다.]

[신지아: (깜짝 놀라는 곰 이모티콘)]

[하시연: ㅎㅎ. 부정하고 싶은데, 부정을 못하겠당.]

부정하면 양아치지.

[어쨌든 얘기가 잘 끝난 것 같아서 다행이네.]

[하시연: 응응! 진짜 엄청 놀랐어! 공백의 10년. 2차 대전쟁. 세계 멸망. 아우. 다시 떠올려도 머리아프당.]

지아가 잘 설명한 모양이다.

[하시연: 아무튼 1년 뒤. 악마의 봉인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는 거지? 그때부터 본격적인 세계 위기가 시작된다는 거고.]

[맞아. 검은 악마 메피스토. 그놈의 봉인이 풀리는 게 시발점이야.]

그 뒤로 온갖 이종족들이 재출현하기 시작한다.

[하시연: 솔직히 서율이 네 정체가 천족이든, 엘프와 천족의 하프든 간에 뭐가 다른진 모르겠는데. 진실을 듣게 되서 기뻐. 말해줘서 고마워. ㅎㅎ.]

[신지아: 뭐가 다른지 모르긴! 선조님은 대영웅 레이네 라인필드 님의 후손! 전설 중의 전설이야!]

[하시연: 음. 내 입장에선 그냥 똑같이 굉장한 사람인데.]

[신지아: ...됐다. 말을 말자.]

"큭큭."

재밌네.

[아무튼 둘 다 고생 많았고. 내일 오후 3시에 보자.]

[장소는 음. 강릉까지 가야 하는데. 지아야 최대한 몰래 이동할 수단이 있을까?]

마땅한 수단이 없단 말이지.

스카우터랑 기자 무서워.

[신지아: 있습니다! 없어도 만들겠습니다! 꼭 준비해두겠습니다!]

[어? 어... 그래 고맙다.]

[하시연: 지아 너 반응이 되게 재밌다.]

[신지아: 조용히 해.]

나는 장난스런 미소를 지었다.

[미안. 조용히 있을게.]

[신지아: 아, 아앗! 아니에요! 선조님한테 한 말이 아니라...]

눈앞에서 지아가 마구 손사래를 치는 모습이 떠올랐다.

[농담이야 농담. 아무튼 그럼 내일 기숙사 앞에서 만나면 될까?]

[신지아: 아, 넵! 이동 시간을 생각해서 대충 1시 정도에 모시러 가면 될까요?]

[응. 부탁할게.]

[신지아: 넵!]

[하시연: 나두 알겠오~]

[그럼 내일 1시에 보자. 잘 자.]

나는 그 말을 끝으로 톡을 닫았다.

단톡의 알림을 끄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안 그러면 밤새 진동할 것 같아서.

"으아~"

동시에 침대에 뻗어 누워 사지를 쫙 늘려 기지개를 켰다.

노곤고곤하다.

아. 머리 덜 말렸는데.

근데 드라이로 말리기는 귀찮고.

그냥 잘까?

"냐아아."

마침 금호도 피곤해진 것인지, 내게 들러붙어서 몸을 말았다.

"그래. 그냥 자자."

베개가 좀 젖으면 어때.

지금 내가 자고 싶다는 게 중요하지.

"······."

그렇게 정신이 스르르 끊겼다.

* * *

다음날 오후 3시.

우리는 강릉 칠성산 초입에서 탐색을 하고 있었다.

칠성산 인근이라는 것만 알지, 정확한 위치를 몰라서 노가다를 뛰는 중이라 할 수 있겠다.

"진짜 여기 유적지가 있는 게 맞아?"

하시연이 넌지시 물었다.

"선조님이 있다고 하면 있는 거야. 조용히 탐색이나 해."

지아가 아무런 미혹도 없는 음성으로 답했다.

"······미안. 만 년 동안 지형 구조가 좀 많이 바뀌었네."

그리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구라를 쳤다.

"아~ 그렇구나."

하시연이 바로 납득했다.

이쯤 되면 내 주된 능력이 '구라'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조금만 더 고생해 줘. 분명 근처에 마력으로 둘러싸인 장벽이 있을 거야."

탐색을 시작한지 아직 10분밖에 안 됐다. 벌써 찾을 수 있을 거라곤 기대도 안 했다.

적어도 1시간은 찾아 봐야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

"갸르르르···."

"금호야?"

내 품에 안겨 있던 금호가 한 방향을 바라보며 으르렁대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거대한 암벽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

"여기 뭐 있어?"

금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금호는 야생동물이다.

당연히 색적 능력이 있긴 하다.

근데 마력을 탐지하는 능력까지는 없었는데.

······혹시 가디언 화로 강화된 건가?

아니, 그보다 유적지의 입구가 암벽이 아니었을 텐데.

나는 의문을 한가득 품으며 암벽을 손으로 짚었다.

"진짜 뭐 있네."

확실히 뭔가 오묘한 위화감이 느껴진다.

"찾았어?"

하시연과 지아가 내게 다가왔다.

"음. 글쎄."

나는 암벽에 대고 있는 손에 마력을 불어 넣었다.

각인의 불길과 정령의 불길의 콜라보레이션.

화르륵-

유적지를 가로막고 있는 마력 장벽에 흠집을 내서 장벽의 구조를 자체붕괴 시킬 생각이다.

반투명한 화염이 일렁였다.

암벽에 들러붙어 아주 작은 구멍을 냈다.

쿠구구구-!

주위 구조물이 살짝 진동했다.

그리고 잠시 후.

"와."

"환영이었구나."

암벽이 스르르 사라지며, 특이한 형태의 입구가 나타났다.

누가 봐도 유적지의 입구였다.

······입구긴 한데.

"선조님. 여기가 '자연이 승천하는 보고' 입구 인가요?"

"······여기 아닌데?"

"어? 아니야?"

지아 뒤에서 하시연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 아냐."

이곳은 내가 찾던 유적지, [자연이 승천하는 보고]가 아니다.

애초에 자연이 승천하는 보고는 동굴형 유적지가 아니다.

"뭐야 이건."

당황스럽네.

제일 당황스러운 게 뭐냐면.

입구에 떡하니 서 있는 안내 표지판에 적혀 있는 메시지다.

[Present for you]

[From. KIM GOD]

······형이 여기서 왜 나와?

< 67화 세 번째 유적지 (2) > 끝

< 68화 세 번째 유적지 (3) >

[Present for you]

[From. KIM GOD]

이 장난스런 메시지와 발신인의 이름.

확실하다.

김신.

그 형의 메시지다.

"유적지 입구에 웬 영어?"

"누가 이미 공략을 완료한 유적지가 아닐까요?"

하시연과 지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그건 아닐 거야."

"왜?"

"······이유는 설명하기 힘든데. 확실해. 이미 공략된 유적지는 아니야."

이건 다른 공략자가 남긴 메시지가 아니니까.

게다가 저 Present for you.

널 위한 선물이라는 메시지를 보면 말 그대로 선물이 잠들어 있을 확률이 크다.

그 형이 주는 선물이라니, 묘하게 불안하긴 한데.

안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

"들어가자."

"진짜?"

"어."

나는 이 정체불명의 유적지를 공략하기로 했다.

시답잖은 선물이기만 해 봐라.

죽인다 내가 진짜.

* * *

"네. 언니. 이쪽 일은 잘 되고 있어요."

한편 그 시간 유화는 메이든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베가본드 일도 잘 되고 있고?

"그럼요. 애초에 그쪽이야 신화 그룹도 돕고 있어서 제가 할 일이 그리 많지도 않고요."

―하긴. 그 양반들이 알아서 떠 먹여 주시겠지. 브랜드 평판도 벌써 많이 올랐더만. 좋겠다?

"네. 초인 기업은 결국 이미지니까요."

분명 두 달 전까지만 해도, 도플갱어 때문에 이미지가 바닥으로 처박힐 위기였는데.

이렇게 반등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매일 밤 그 꼬맹이 기숙사 방향으로 절하고 자. 양심이 있으면.

"······절까지 하는 건 좀."

―이년 봐라? 도플갱어 잡아 줘. 김신우라는 쓰레기를 손수 나서서 분리수거 시켜 줘. 게다가 베가본드라는 희대의 빌런을 처리하는 영예까지 줬는데. 그 정도도 못해?

"······."

듣고 보니, 많이 받긴 했다.

"······됐어요. 절 같은 쓸데없는 짓 말고, 직접 도와줄 거니까."

―오~ 우리 화 멋있는데~?

메이든이 킥킥 웃었다.

"그보다 언니. 국가전 습격 조사에 대한 건 어떻게 됐어요?"

―아. 그거?

옥화당에서 강서율은 진리의 구명자가 국가전을 습격할 것이며, 어떻게 습격할 계획인지 모조리 말했다.

문제는 이 발언을 뒷받침 해 줄 증거가 없었다는 것.

그렇기에 메이든은 이 정보가 사실인지 아닌지, 조사하기로 했다.

―역시 그 꼬맹이 말이 맞는 것 같아.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실제로 매수된 임원들도 있는 것 같고.

그리고 그 결과 강서율의 말은 사실로 밝혀졌다.

"······역시 그렇군요."

그 말은 즉, 강서율의 정체가 실험장의 생존자라는 게 더욱 확실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햇빛 고아원도 내가 추가로 조사를 해 봤는데. 이것도 확실한 것 같아.

"이유는요?"

이미 99% 확신하고 있다.

하지만 99%와 100%는 다른 법.

―햇빛 고아원 실험장 사건에 수성 그룹이 얽혀 있다는 건 이미 말해서 알고 있지?

"네."

―그 수성 그룹 쪽에서 좀 더 자세히 기록된 보고서를 건네받았어.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 있지? 보내 줄 테니까 확인해 봐.

"잠시만요."

유화는 빠르게 길드 계정을 열었다. 그리고 메이든이 보낸 메일을 열어, 첨부 파일을 확인했다.

"······이 사진."

유화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맞는 것 같지?

10살 남짓한 남자 아이의 사진.

신체에 온갖 바늘이 꽂혀 있고, 죽는 생선 같은 눈동자를 하고 있는 남자 아이.

얼굴이 지금보다 훨씬 앳되고, 흉터도 좀 많지만,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얼굴임은 분명했다.

"서율 씨······."

유화의 99% 확신이 100%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 * *

유적지 내부는 아주 조용했다.

"여기 그냥 동굴 아냐?"

"유적지 같은 느낌이 하나도 안 드네요."

몬스터도 함정도 묘한 구조물도 없다.

평범한 동굴이랑 전혀 다를 바 없는 풍경이 20분이나 계속되고 있다.

"조용하니까 더 불안하지 않아? 갑자기 뭐 나올 것 같고."

"불길한 소리 하지 마."

나는 두 여성의 수다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신이 형은 내가 이 장소를 발견할 것을 어떻게 알고 여기다가 메시지와 선물을 남긴 것일까.

왜 메시지를 이런 얼토당토 않는 장소에다가 남긴 것일까.

그 형의 생각을 모르겠다.

애시당초 이 세계에 날 던져 놓은 목적이 뭘까.

"어? 저기 뭐 있다."

하시연의 말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하시연이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장소에 확실히 무언가가 있었다.

"······보물상자?"

황금빛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상자. 누가 봐도 보물상자였다.

"대박. 여기 그럼 진짜 유적지였어? 완전 날로 먹었네."

먼저 하시연이 기뻐했고.

"이렇게 덩그러니 보물상자만 놓여 있다니. 함정이 아닐까요?"

지아는 의심했다.

그리고 나는······.

"함정은 아니야."

세상 떨떠름한 표정으로 보물상자를 노려봤다.

동시에 상자에 손을 뻗었다.

"서, 선조님!"

"괜찮아."

이게 함정일 리가 없었다.

나는 보물상자의 자물쇠를 손에 쥐었다.

세 가지 숫자를 입력하면 열리는 자물쇠.

그 자물쇠 밑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끝 아닌 끝. 한 번이라도 틀리면 폭발함.]

"끝 아닌 끝? 이걸로 숫자 세 개를 유추하는 건 힘들지 않을까?"

"시연이 말이 맞아요. 폭발한다고 적혀 있기도 하고. 위험해요."

"괜찮다니까."

이건 오직 나만이 풀 수 있는 암호다.

"이미 풀었으니까."

"······벌써요?"

이 세계 [S급 상태창]의 연재분 마지막 화의 소제목은 이렇다.

[859화 끝 아닌 끝.]

여기서 세 글자 숫자 조합이면 답은 정해져 있는 거나 다름없다.

나는 자연스럽게 자물쇠에 손을 가져갔다.

[8, 5, 9]

입력을 마치고 자물쇠 옆면의 버튼을 눌렀다.

철컥-

자물쇠가 열리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자물쇠가 안개처럼 사라졌다.

번쩍-!

"꺅!"

보물상자가 열리며 빛이 터져 나왔다.

이내 모든 빛이 멎고 눈을 뜨자.

"없어?"

보물상자는 사라져 있었다.

"······책?"

그리고 그 보물상자가 놓여 있던 위치에 두꺼운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 * *

동굴을 빠져나온 우리는 다시 유적지의 입구를 찾기 시작했다.

2시간 넘게 수색한 것 같은데, 아직도 못 찾았다.

"이러다 해 지겠다."

하시연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넌지시 말을 꺼냈다.

"그러게."

현재 시간은 오후 6시 19분.

슬슬 노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잠깐 쉬면서 밥이나 먹자."

체력적으로는 문제없지만, 밥은 먹어 가면서 공략해야지.

"찬성!"

먼저 하시연이 벼락 같이 내게 다가왔다.

"해가 지기 전에 입구를 먼저 찾는 게 좋지 않을까요?"

지아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음. 해가 질 때까지 못 찾으면 오늘은 포기하지 뭐."

솔직히 이렇게까지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 금방 찾을 줄 알았는데.

"암튼 일단 먹자. 일도 먹으면서 해야 능률이 오르는 법이야."

"맞아. 먹다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는 말도 있고."

하시연이 내 말에 동조하고 나섰다.

"······."

지아는 아직까지 내키지 않는 표정이다.

'조금만 더 찾으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 표정을 하고 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지아 한정 필살기를 사용하기로 했다.

"내가 배고파서 그래."

지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으.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선조님의 허기를 생각지 못하고······."

"아니, 죄송할 건 아니고."

"최대한 빠르게 준비하겠습니다!"

지아가 냉큼 내 옆으로 다가와 바닥에 캐리어 크기의 네모난 기계 장치를 고정시켰다.

그리고 버튼을 누른다.

촤라라락-

그러자 장치가 펼쳐지며 간이 캠핑 도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던전, 미궁, 유적지 등등.

외부 활동이 잦은 초인들을 위한 캠핑 세트였다.

"와. 이거 신형이네?"

하시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응. 이번에 제휴 업체에서 샘플을 몇 개 받았거든."

기계틱한 테이블과 의자.

텐트라고 부르기도 뭐한 간이형 집까지.

말 그대로 첨단기술의 산물이었다.

"선조님. 준비 다 됐어요! 여기 앉으세요!"

"어? 어."

설마 이런 걸 준비해 왔을 줄은 몰랐다.

저번에 시연이랑 둘이 유적지 공략을 했을 때는, 돗자리 하나 깔고 바닥에서 먹었는데.

의자에 앉자, 지아가 하나둘씩 음식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모두 보존식이긴 한데, 뭔가 포장지가 고급지다.

"이것도 샘플?"

"네. 이번에 베가본드를 처리한 일로 외국 기업과 새로운 파이프가 생겼거든요. 이건 그 업체들에서 일단 먹어 보라고 보내 준 것들이에요."

"써 보고 마음에 들면 계약하자. 이런 건가?"

"네."

그렇게 모든 세팅이 끝나고.

"그, 보존식이라 좀 맛이 없어도 이해해 주세요."

지아가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평범하게 맛있어 보이는데."

하시연이 먼저 포장을 뜯고, 닭처럼 보이는 고기를 입으로 가져갔다.

나도 뒤따라 아무 팩이나 뜯어서 입에 물었다.

"······뭐야. 이거."

왜 이렇게 맛있어?

이게 보존식이라고?

보존식 특유의 건조한 느낌이 전혀 없다. 오히려 촉촉하다.

당황하고 있는 와중, 옆에서 허겁지겁 먹는 소리가 들렸다.

옆을 보자, 하시연이 말도 없이 음식을 흡입하고 있었다.

배가 많이 고팠나 보네.

"입에 좀 맞으시나요?"

지아가 걱정 가득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어? 어. 되게 맛있네. 일반식보다 더 맛있는 것 같아."

진심이다.

"다행이네요."

지아가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 후로, 우리는 대화도 없이 식사에만 열을 올렸다.

지아도 조용히 먹는 거에만 집중하는 걸 보니, 배가 고프긴 고팠던 모양이다.

"후아."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산 중턱의 잔잔한 풍경.

공기도 좋고 풍경도 좋고.

뭔가 나들이 나온 기분이다.

"아. 맞다. 서율아."

어느 정도 배를 채운 것인지, 음식에서 손을 뗀 하시연이 내게 물었다.

"아까 그 책은 뭐였어? 되게 심각한 표정으로 보던데."

아까 동굴 보물상자에서 얻은 두꺼운 책을 뜻하는 거다.

"······음. 별거 아닌 백과사전?"

별거긴 한데.

"백과사전?"

"어. 볼래?"

나는 가방에서 책을 꺼내 하시연에게 넘겼다. 두껍긴 더럽게 두꺼운 데다가, 표지는 하드 커버.

진짜 딱 보기에도 백과사전을 연상케 하는 외형이었다.

"한글이네?"

"응. 한글이더라."

하시연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백과사전을 펼쳤다.

그 옆에서 지아도 슬쩍 백과사전을 흘겨보고 있다.

"······목차. 종족별 특성 일람?"

"어? 이거."

하시연이 고개를 갸웃했고.

지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번에 선조님이 저한테 빌려 가신 책의 전 종족 버전인가요?"

지아에게 빌린 엘프족 특성이 기록된 책은 엘프어로 적혀 있어서 읽을 수 없었다.

"맞아."

온갖 종족 특성들이 기록되어 있는 백과사전.

다른 사람이 보면 그냥 '흐음. 이런 특성도 있구나.' 하고 넘어갈 만한 내용들이지만, 나한텐 큰 의미가 있는 백과사전이다.

사락- 사락-

하시연이 책장을 빠르게 넘겼다.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걸 보니, 뭔가 찾는 게 있는 모양이다.

대충 나를 슬쩍슬쩍 쳐다보는 걸 보니, 천족에 대한 게 기록되어 있는 페이지를 찾아보는 게 아닌가 싶은데.

"여기 있다. 천족."

맞네.

옆에서 지아도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페이지를 바라보고 있다.

"천익. 천족 특유의 비행 기관이다. 근력과 체력이 높을수록 오래, 민첩이 높을수록 빠르게 비행할 수 있다. 또한 마력 순환에 특출난 기관으로, 천익을 펼칠 시, 마력 랭크가 한 단계 올라가는 기능이 있다. 오오."

하시연이 나와 책을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다시 책장을 넘긴다.

"앗. 이거 혹시 그때 그 낙뢰야?"

"뭔데?"

"천벌."

예리하네.

"맞아."

"맞구나."

하시연이 신나서 천벌의 설명을 읽기 시작했다.

"신성 속성과 뇌 속성이 복합된 신성한 번개. 악(惡) 속성에 큰 피해를 준다."

"······마력 함유량에 따른 피해량 증폭. 마력만 충분하다면 드래곤마저 일격에 죽일 수 있다."

옆에서 지아도 이제는 대놓고 보기 시작했다.

"이거 한 방이면 악마들은 꼼짝도 못하겠다."

"아니. 역사적인 기록에 따르면 천사와 악마는 비슷한 전투력이라고 했어. 분명 이 천벌에 버금가는 특성이 악마족에게도 있을 거야."

하시연의 말에 지아가 반박했다.

"아. 그럴 수도 있겠다."

두 명은 신나서 페이지를 넘겼다.

"봐. 있잖아."

"진짜네."

무슨 동물원에 처음 온 아이 같은 느낌이다. 나는 그 둘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말했듯이 저 책은 내게 큰 의미를 지닌 백과사전이다.

지금까지 내가 종족 특성을 사용했던 방법은 이렇다.

원작에 언급된 특성이라면 내 기억을 바탕으로 추측해 사용했고.

원작에 언급되지 않은 특성은 어떻게든 시행착오를 반복한 끝에 알아내서 사용했다.

하지만 이 백과사전을 얻은 이상, 더 이상 시행착오를 반복할 필요가 사라졌다.

"선조님. 이 책. 앞으로 벌어질 2차 대전쟁에서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맞아."

그뿐이랴.

온갖 종족들의 특성이 모조리 기록되어 있으니, 추후 있을 몇몇 이종족들과의 전투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됐다.

정보는 힘.

이 백과사전은 내게 큰 힘이 되어 줄 것이다.

"앗. 선조님. 이 바람의 살( 虄)이라는 특성 혹시 선조님도 사용하실 수 있나요?"

"응. 쓸 수 있어."

"와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게 제일 중요한 건데.

내 특성을 더욱 정확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됐다.

"대단하네요. 바람을 화살로 응집해서 쓸 수 있다니."

나는 웃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는 지금까지 종족 특성들을 잘못 사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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