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novel

7

< 69화 진정한 사용법 (1) >

결국 '자연이 승천하는 보고'는 끝까지 찾지 못했다.

나도 두 명도 끝까지 아쉬워했다. 근데 어쩌겠어. 해가 다 졌는데도 단서를 못 찾았는데.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금호. 너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얌전한 거 아니야?"

"냐아?"

지금은 흙먼지로 더러워진 금호를 씻기고, 드라이를 시키는 중이다. 고양이과 동물들은 물에 들어가는 걸 싫어한다고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얘는 샤워하는 걸 엄청 좋아한다.

내가 욕탕에 몸을 담구고 있노라면, 조용히 같이 들어와 내 어깨 위에 얼굴을 척 얹고, 몸에 힘을 쭉 푼 채 '냐아아···.' 소리를 내는 모습이란.

대체 어딜 봐서 호랑이야.

"물이 좋은 거야? 아니면 그냥 형이랑 같이 있으면 좋은 거야?"

잔잔한 바람에 금호의 금빛 털결이 파도친다.

금호가 슬쩍 고개를 들어서 작게 울었다.

마치 '둘 다 좋아요!' 주장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유 귀여워."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제는 진짜 내 얘기를 100% 다 알아듣는 듯한 모습이다.

금호 얘가 갈수록 머리가 좋아지는 것 같다.

아니, 실제로 지능을 포함한 전체적인 능력치가 상승하고 있긴 하다.

다름 아닌, [가디언]에 의해서.

"자. 다 말랐다."

나는 드라이기를 내려 두고, 금호를 안은 채 침대로 향했다.

그리곤 노곤노곤한 표정의 금호를 무릎 위에 올려 두고, 선반에 놓아 둔 신이 형의 선물.

[종족 특성 백과사전]을 펼쳤다.

촤라라라-

책장을 빠르게 넘겨, 드래곤족의 특성 쪽을 다시금 확인했다.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굉장한 효과의 특성들을 지나, 내가 찾던 특성을 발견했다.

[수호자의 계약]

지금까지 자체적으로 [가디언]이라 불렀던 금호와 나를 엮던 스킬의 실제 이름이었다.

[상호간의 동의가 있을 시, 수호자의 계약을 맺을 수 있다.]

[계약을 맺은 수호자는 주인의 근처에 일렁이는 잔여 마력을 흡수하여 성장한다. 이 시기에 수면 시간이 유독 길어진다.]

[개체에 따라 성장 방향이 다르고, 특수 능력도 천차만별이다.]

[주의. 계약중인 수호자가 완벽히 성장하기 전까진 다음 계약을 맺을 수 없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효과와 일치했다.

크기 조절은 금호의 특수 능력 중 하나일 것이고.

이전부터 생각했던 '금호 얘 너무 오래 자는 것 같은데?'에 대한 의문도 확실히 풀렸다.

중복 계약이 안 된다는 것도 사전에 몇 번이고 실험을 해 봤던 부분이다.

여기서 내가 주의깊게 봐야 할 건 마지막 주의 한 문장뿐이었다.

"성장을 마치면 다음 계약이 가능하다는 거구나."

원작에서 등장했던 드래곤들이 가디언을 몇 체나 데리고 다니던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뭐, 사실 금호의 성장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현재에 있어선 크게 의미없는 주의사항이다.

"음?"

책 아래에서 고롱고롱 소리가 난다 싶어서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금호가 완전히 잠들어 있었다. 이게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거지.

나는 금호가 깨지 않게 조심해서 책장을 넘겼다.

사락-

목적은 내가 익히고 있는 종족 특성들에 대한 스킬 효과를 복기하는 것이었다.

먼저 엘프족 항목.

[활의 수호자]

[바람의 길]

[바람의 살( 虄)]

이중에 '활의 수호자'와 '바람의 길'은 내가 알고 있는 스킬 효과와 9할 이상 일치했다.

[활의 수호자]

[활의 숙련도 상승]

[은은한 발걸음]

[시력 증가]

[바람의 길]

[상대의 행동에 따른 회피 및 반격의 길 제시]

[마력 유동에 미약한 효과를 보임]

문제는 [바람의 살]이다.

"······진짜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였네."

나는 바람의 살을 완전히 잘못 쓰고 있었다.

쏜 화살에 바람을 실어 탄속을 올린다.

바람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다.

이것들은 모두 부가효과일 뿐이었다.

[바람의 살( 虄)]

[바람을 응집하여 '화살'로 사용할 수 있다.]

[소유자의 마력에 따라 화살의 강도가 달라진다.]

이것이 바람의 살의 진정한 효과였다.

나는 화(火), 뇌(雷)에 이어서 풍(風) 속성까지 다룰 수 있는 몸이 됐다.

"삼중 속성."

게다가 화 속성과 풍 속성의 시너지는 어마무시하다.

S랭크 초인 상위 랭커인 '불의 마녀'와 '풍제(風帝)'가 협력하여 재해급 몬스터를 일격에 처리한 영상은 아직까지 회자될 정도다.

활로만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페널티는 있지만.

그걸 감안하고서도 엄청난 이점이다.

화살이 없는 상황에서 비장의 한 수가 될 수도 있고.

문제는 역시 마력.

지금의 나는 두 가지 속성은커녕 한 가지 특성도 제대로 다룰 수 없다.

결국 마력이 문제네.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페이지를 넘겼다.

수인족, 천족, 정령족 특성들은 내가 알고 있던 효과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내가 임의로 붙인 '포식자의 살의'라는 피어류 특성의 실제 이름이 진짜ㅣ '포식자의 살의'였다는 것 정도.

이건 좀 놀랐다.

내 네이밍 센스에 감탄해야 하는 건지, 스킬명을 대충 지은 신이 형을 비난해야 건지.

······아니, 그 형이랑 생각이 겹쳤다는 것에 절망해야 하는 건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다시금 페이지를 넘겼다.

[거인족 특성 일람]

마지막.

제일 최근에 얻은 거인족의 특성이 기록되어 있는 항목이었다.

"······이래서 그랬구만."

근력 상승 특성인 듯하여, 얻고 나서 환호는 질렀지만.

제대로 적용되지 않아서 머리가 아팠던 특성.

이 특성의 정확한 효과를 알게 됐다.

[압도적인 힘]

[모든 거인족이 성인식에 획득하는 종족 특성이다.]

[근력이 1랭크 상승한다.]

1랭크 상승.

아주 사기적인 효과였다.

보너스 포인트와 같은 효과지만, 제한이 없다는 게 진짜 개사기다.

내가 근력을 성장 한계인 A랭크까지 올린다면, 아무런 조건도 없이 S랭크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이니까.

문제는 맨 밑의 주의사항.

[주의. C랭크 이하의 근력에는 효과가 아주 미미하다.]

[근력 B랭크 미만은 '거인족' 취급을 받지 못한다.]

있는 놈을 더 있게 해 주는 특성이었다.

내 근력은 끽해야 E랭크.

이러니 당연히 제대로 효과가 발휘되지 않을 수밖에.

"······B랭크 언제 찍냐."

한 단계 랭크 업이니 좋아할 만한 일이긴 한데.

지금 당장 올라가는 게 아니라 묘하게 찝찝하다.

"아니지."

좋게 좋게 생각하자.

B랭크만 달성하면 A랭크 급 근력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게 되니까.

이거 완전 후반에 개이득 아냐?

"······아. 근데 너무 후반만 보면 초반에 게임 말아먹는다는 게 학계의 정설인데."

괜히 불안감이 치솟았다.

"에이. 아직 시간 좀 많이 남았으니까."

나는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억지로 털어냈다.

B랭크 까이꺼 올리면 되지.

* * *

월요일 수업은 토너먼트 대비를 위한 모의전이었다.

"다음. 강서율. 김민수."

"네."

내 대전 상대는 178위 검사.

공수에 밸런스를 맞춘 전투법을 구사하는 친구다.

능력치도 균등하며, 성격도 모난 구석이 없다.

어느 파티를 가도 평타는 칠 무난한 검사다.

"서율아. 한 대만 맞아 주면 안 되겠니?"

"응. 안 돼."

요컨대 특색이 없어서 파악하기 쉬운 전투 스타일이라는 거다.

내 바람의 길의 아주 좋은 먹잇감이지.

"아오! 진짜! 좀!"

벌써 10분째 상대의 공격을 피하는 데만 집중하고 있다.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건데?"

"둘 중 하나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반격을 했으면 한참 전에 끝났을 전투다.

하지만 나는 회피에만 전념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바람의 길이 더욱 뚜렷하게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뭔가 색이 더 짙어지고, 바람의 길 특유의 머리 아픈 느낌이 완전히 사라졌다.

지금까지는 5분만 넘어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는데, 지금은 10분이 지났음에도 멀쩡하다.

문신에 통증도 거의 없다.

말인즉 바람의 길이 완전 체화에 다다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최대한 전투를 길게 이어가고 있는 거다.

이런 기회가 흔치는 않으니까.

"너 나 싫어하냐? 내가 너한테 뭐 실수라도 했어?"

10분이 넘게 검을 휘둘러, 지친 것인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실수는 무슨. 그냥 회피 훈련이 좀 필요해서 그런 거야. 너도 이렇게 공격에만 전념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잖아? 즐기자고 서로."

내 체력이 쟤보다 2랭크는 떨어질 텐데도 나는 멀쩡하다.

이유는 하나.

회피 동작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움직임이 작은 만큼 체력 소모가 적었다.

"······오냐. 내가 꼭 한 방 먹이고 만다!"

상대의 검을, 그 검이 다가오는 붉은 궤적을 느끼며 종이 한 장 차이로 정확히 피한다.

그 회피에 큰 움직임은 필요 없다. 반 보면 충분했다.

"휘유."

"이익!"

과연 상대도 짜증이 치솟은 것인지, 검격이 제멋대로 변하기 시작했다.

일격.

이격.

뭔가 변화무쌍 해졌다.

지쳐서 신체에 힘이 빠졌다는 것도 이유의 한 가지가 됐겠지.

나는 계속해서 검을 피했다.

"와. 움직임 쿨한 거봐."

"간결함의 극의."

"오. 표현 좋은데?"

간결함의 극의.

지켜보는 다른 학생들 사이에서 그런 단어가 들렸다.

꽤나 마음에 드는 단어였다.

"오우."

내 머리칼을 스치는 검을 보며 탄성을 질렀다.

이번엔 조금 위험했다.

"허억. 허억."

상대가 기진맥진해서 그런가.

바람의 길의 예지가 아주 희미하게 어긋났다.

그럴 만하지.

제아무리 바람의 길이라고 해도, 피격 직전에 손아귀에 힘이 풀려서 검의 경로가 일그러지는 것까지 어떻게 파악한단 말인가.

······재밌네.

나는 미소 지었다.

후웅-!

그래.

바람의 길은 완벽한 예지가 아니다.

완벽에 가까운 길을 제시하는 것뿐.

그 예지를 보고 행동하는 건 내 역할이다.

상대가 얼마나 피폐했는지.

어떤 실수가 발생할 것인지.

그로 인해 발생한 변수는 무엇이 있는지.

바람의 길이 보여 주지 않는 정보들.

그러한 정보들을 다시금 상기했다.

"하아아압!"

다음 순간.

아주 굵은 궤적이 그려졌다.

필사의 의지가 느껴지는 붉은 바람. 그러나 묘하게 허술했다.

후웅-

바람의 길이 나타내는 길목대로라면, 반 보 왼쪽으로 피하는 것만으로 완벽히 피할 수 있을 검격이다.

하지만 나는 몸을 반대로 움직였다.

왠지 모르게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아마 특성, [무기의 주인]에서 느껴지는 직감과도 같은 감각이었다.

그렇게 정확히 한 걸음.

회피를 마쳤을 때였다.

"어으어!"

남학생의 입에서 힘빠진 소리가 나오더니.

휘익-

검을 쥔 손아귀에서 힘이 빠져 전체적으로 검이 흔들렸다.

비틀.

동시에 지지하고 있는 하체가 흔들리며 신체가 한쪽으로 쏠렸다.

그 결과.

검격은 바람의 길이 제시했던 길목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쾅!

바닥을 후려 쳤다.

만약 바람의 길을 맹신했다면 이번에야말로 일격을 허용했을 것이다.

"······."

깨달음을 얻은 순간이었다.

바람의 길은 완벽하지 않다.

바람의 길은 상대의 최선을 상정하여 길을 제시하는 예지에 가까운 뛰어난 특성이다.

하지만 상대가 최선의 상태가 아니라면, 허점이 생긴다.

손에서 힘이 빠진다던지 하는 검을 휘두르는 상대도 예상치 못한 변수는 바람의 길도 읽을 수 없다는 뜻이다.

바람의 길도 결국 하나의 선택지.

선택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

이런 당연한 걸 이제야 깨닫다니.

나는 쓰게 웃었다.

"아. 진짜 더는 못 하겠다. 항복!"

남학생이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단검을 넣고 남학생에게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고생했어. 덕분에 좋은 훈련이 됐어."

"······병 주고 약 주고 뭐 그런 거야?"

내 손을 잡고 지지대로 삼아 바닥에서 일어났다.

"마지막에 힘을 빼고 휘두르니까, 기술이 더 위력적이더라."

"빈말이라도 고맙다."

이 친구가 최선을 다해서 공격에 임하지 않았다면 얻을 수 없었을 깨달음이었다.

* * *

오전 단련이 끝나고.

"크으~"

개인 샤워실에서 나는 감탄을 내지르고 있었다. 거울 너머로 보이는 내 모습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좋아."

근육이 더 붙은 것 같다거나. 오늘도 내 얼굴에 취할 것 같다거나 하는 나르시시스트 같은 이유는 아니었다.

"드디어 바람의 길이 완전 체화됐구나."

오른쪽 어깻죽지의 세계수 문신이 붉은색에서 녹색으로 돌아왔다.

이러니 내가 감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얼굴은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

매력이 상승했을 텐데, 얼굴엔 눈에 띄는 변화가 없다.

역시 얼굴은 이 이상 건들 게 없다는 뜻인가.

그럼 매력 수치가 모조리 신체 구조 변환에 투입됐다는 건데.

이거 신체 능력치 성장 한계가 S랭크까지 오른 거 아닌가 몰라.

포식자의 살의도 슬슬 문신의 통증이 옅어지기 시작한 걸로 보아, 완전 체화가 그리 멀지 않은 것 같고.

"흐흐."

나는 간헐적으로 튀어 나오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샤워를 마쳤다.

< 69화 진정한 사용법 (1) > 끝

< 70화 진정한 사용법 (2) >

샤워를 마친 나는, 지아와 시연이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약속한 장소에 도착하자, 두 여성이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하하호호하면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일요일에 둘이서 놀러 갔다고 하던데, 그새 많이 친해진 모양이다.

"미안. 좀 늦었지?"

샤워가 좀 길어졌다.

두 명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로 쏠렸다.

"하나도 안 늦으셨어요! 선조님. 여기 앉으세요."

지아가 돗자리 빈 공간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기다리다 죽는 줄 알았어! 얼른 앉아! 지아가 오늘 도시락 싸 왔대!"

"아, 응."

나는 자리에 앉았다.

척 보기에도 호화로운 도시락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애초에 이게 도시락이 맞는 건가? 저거 딱 보기에도 찌개 그릇이잖아. 오히려 간이 뷔페 같은 느낌인데.

근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나는 고개를 돌렸다.

"······."

"······."

두 명이 뭔가 몽롱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내 시선에도 눈치 채지 못한 듯 멍하니 나를 바라본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어?"

"앗."

정신이 든 모양이다.

"서율아. 그, 혹시 샴푸나 바디 워시 바꿨어?"

하시연이 뚱딴지 같은 질문을 했다.

"아니? 그냥 샤워실에 있는 거 썼는데."

"그래?"

하시연이 뭔가 고민하는 듯했다.

지아도 마찬가지였다.

"왜?"

"그, 선조님한테 뭔가 좋은 향기가 나서요. 청량하다고 해야 할까."

"······향기?"

갑자기?

"응. 햇빛 냄새? 꽃밭 향기? 아무튼 되게 매력적인 향."

······매력적인 향기?

순간 무언가 떠올랐다.

"그래서 그런가? 오늘따라 더 멋있어 보이는 것 같기두 하고."

지아가 하시연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설마 매력 상승 효과야?

얼굴도, 신체도 이 이상 변할 게 없어서 체취를 매력적으로 바꿨다던가 뭐 그런 건가?

"······."

이러면 나가린데.

신체가 변화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말이잖아.

······에이. 아니겠지.

나는 불안감을 억지로 삼켰다.

"일단 밥이나 먹자. 배고프다."

"앗. 잠시만요."

지아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이거 먼저 드세요."

고급스러운 외견의 음료였다.

"뭔데?"

"마력 순환에 도움이 되는 드링크예요. 이번에 상품화에 성공한 신제품이에요."

"건강 음료라는 거네?"

"네!"

건강 중요하지.

나는 가볍게 뚜껑을 따서 한입에 털어 넣었다.

"오우."

목넘김이 상당히 좋다.

"되게 맛있네?"

"그쵸? 효과도 좋아요. 그거 마시고 나면 뭔가 마력이 잘 회전이 잘 되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지아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하시연이 슬쩍 끼어 들었다.

"그래? 마력 관련 드링크는 결국 플라시보 효과일 뿐이라고 울 오빠가 그랬는데."

찌릿.

지아가 하시연을 노려봤다.

초치는 말 하지 말라는 듯한 표정이다.

근데 하시연 말이 맞다.

이러한 마력 관련 드링크는 계속해서 출시되지만, 눈에 띄는 효과를 보이는 제품은 원작에서도 끝끝내 개발되지 않았으니까.

이것도 그냥 맛있고 몸에 좋은 고가의 드링크일 뿐이다.

마력 순환 기능?

있긴 해도 아주 미미하다.

"확실히 시연이 네 말대로 다른 드링크는 아무 효과도 없었는데, 이건 좀 달라. 아무렴 내가 선조님한테 이상한 걸 먹이겠니?"

······지아는 마력 유동에 민감하니까, 1% 미만의 아주 미세한 차이라도 체감이 되는 건가?

나는 가볍게 마력을 움직여 봤다. 동시에 내 눈이 부릅떠졌다.

"······어? 진짜네?"

"진짜?"

"어."

진짜 마력 순환 효율이 올라갔다.

"그쵸? 제 말이 맞죠?"

"어? 어."

아니 근데, 마력 순환 효율이 오른 건 좋아. 좋은데.

"근데 이거 효과가 좋아도 너무 좋은데?"

거의 마력 순환 효율이 두 배는 오른 것 같다.

마력 순환 효율이 두 배 향상했다는 말은 즉, 마력 운용 효율은 물론이거니와, 마력 성장 한계까지 모조리 상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게 드링크 효과면 만든 사람은 상이란 상은 다 받아야 한다.

······잠깐만.

마력 성장 한계 증가?

그 순간 내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거 설마 엘프족 완전 체화, 매력 증가의 효과야?

얼굴, 신체, 체취에 이어서 마력 혈관의 개변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

* * *

수업이 모두 끝나고.

저녁을 간단히 마친 나는 오늘 미리 예약해둔 사설 단련실에서 혼자 마력을 움직이고 있었다.

"오."

결론만 말하자면, 내 생각이 맞았다.

마력이 흐르는 혈관의 개변으로 인한 마력 순환 효율 상승.

매력은 얼굴, 신체, 체취를 넘어 보이지 않는 부위에 변화를 주기 시작한 것이다.

마력 혈관이 매력적인 형태로 변하고 있는 것이리라.

화르륵-

"와우."

손바닥 위에서 불꽃이 평소보다 찬연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혈관의 개선으로 마력 운용 효율이 상승했기 때문인지.

마력 소모량은 줄었고.

위력은 상승했다.

"이건 또 생각치도 못했던 행운인데."

어제까지만 해도 '종족 특성 백과사전'을 뒤져, 마력을 올릴 방법을 정리하고, 어떻게 하면 가장 높은 확률로 마력을 올릴 수 있을지에 대해서 생각했었는데.

설마 엘프족 완전 체화가 이런 행운을 가져다 줄 줄이야.

······이렇게 되면 엘프족의 특성을 우선적으로 습득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아니지."

잘 생각해 보니, 다음 변화가 마력 혈관에 영향을 끼칠 확률은 거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첫 엘프족 완전 체화 때는 얼굴의 미세한 변화와 더불어 신체 골격이 변화했다.

이로 인해 성장 한계 C랭크에서 A랭크 언저리까지 올랐다.

그리고 오늘 두 번째 완전 체화때는 체취가 바뀌고, 마력 혈관의 구조가 변했다.

신체 구조는 거의 변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성장 한계도 미세하게 오르긴 했지만, 결국 A랭크 언저리다.

눈에 신체 분석기를 달고 다니시는 피진호 교관님의 말이라 정확할 거다.

즉, 매력은 일정 수치 이상의 개변을 줄 수 없다는 얘기다.

아마 마력의 성장 한계도 상승에도 제한이 있겠지.

"······이번 주에 지아한테 말해서 정밀 검사 한번 받아 봐야겠네."

마력은 단련할 수 있는 기구가 없고, 피진호의 '신비를 보는 눈'은 마력을 완벽히 읽을 수 없다.

고로, 다른 확인 방법이 필요하다.

지아한테 봉인된 현 상태의 마력 정밀 검사가 필요하다고 하면, 몰래 자리를 마련해 줄 거다.

"시험 좀 해 볼까."

나는 마력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재 시간은 6시 50분.

신지아, 하시연과 실시하는 오후 단련은 8시 30분이니.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모드 설정. 사격 모드."

[훈련 모드를 전환합니다.]

동시에 옆에 놓여 있는 훈련용 활을 손에 쥐었다.

"타겟. 내구 A랭크."

[훈련용 타겟의 내구를 A랭크로 설정합니다.]

"설정 완료."

[훈련을 시작합니다.]

그 알림을 마지막으로, 주위 풍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었던 하얀 룸이 사격장의 풍경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언제 봐도 경이로운 기술력이다.

[설정을 완료했습니다.]

이내 모든 준비가 끝나고.

나는 사로에 섰다.

"후우······."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타겟을 노려보며 활을 들었다.

훈련용 활의 익숙한 감각을 느끼며 서서히 시위를 당겼다.

화살은 따로 챙기지 않았다.

화살통은 옆에서 굴러다니고 있다.

오늘 시험해볼 기술은 다름 아닌 '바람의 살( 虄)'이다.

바람을 화살로 응집해서 쏠 수 있는 사기적인 특성.

지금까지 내가 잘못 알고, 사용하고 있던 특성.

휘이잉-

내 의지에 따라 텅 빈 시위에 바람이 응집되기 시작했다.

산들바람 같았던 은은한 바람이 이내 소용돌이치며 돌개바람처럼 강렬하게 휘몰아쳤다.

이내 그것은 화살의 형태를 이루기 시작했다.

과거 [세계의 뿌리]를 사용할 때 사용했던 자연의 화살과는 또 다른 신비로운 화살.

"윽."

머리가 순간 핑 돌았다.

마력 탈진 초기 증상이다.

처음 쓰는 거라 마력 조절을 잘못한 모양이다.

"후."

그래도 집중이 끊길 정도는 아니었다.

휘이이잉-

마지막 집중과 함께, 화살이 완전한 모습을 이루었다.

척 보기에도 굉장한 힘이 느껴지는 화살. 화살을 쥐고 있는 오른손에 묘한 떨림이 느껴졌다.

바람의 진동.

나는 그것을 느끼며 타겟을 노려봤다.

그리고 조용히 시위를 놓았다.

"으억!"

그와 동시에 강한 바람이 불었다. 내 몸이 뒤로 날아갔다. 거부할 수 없는 힘의 폭류를 느끼며 부유감에 사로잡힌 그 순간.

콰아아아앙-!

무지막지한 폭음이 울렸다.

그 직후.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후웅-

2차로 느껴지는 후끈한 바람.

폭발로 인해 발생한 후폭풍을 느끼며, 눈을 떴다.

"······헐?"

타겟은 찾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훈련 결과 집계 완료.]

[타겟 완파.]

[걸린 시간 6초 08.]

[시위를 당긴 직후 놓을 때까지 걸린 시간 1초 98.]

[총 평가 9.5/10]

[속사 훈련이 추가로 필요합니다.]

객관적인 지표를 보며 나는 다시금 입을 벌렸다.

"······2초도 안 걸렸어?"

체감상 10초는 족히 걸린 줄 알았는데.

스파이럴 애로우를 사용하면 이와 비슷한 파괴력을 낼 수는 있지만, 그건 준비하는 데만 엄청난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실전에서 사용할 수 없는 난이도만 더럽게 높은 보여 주기식 기술이라고 한 건데.

바람의 살은 첫 사용이기에 미숙한 마력 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2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위력을 억제해서 사용하면······."

마력 소모량을 제대로 조절하고, 생성 속도를 중점에 둔 채, 이 위력의 절반 정도의 효율을 낼 수 있게 만드는 데 성공만 한다면······.

"대박이다."

'바람의 살'의 사기성은 이게 다가 아니다.

"정밀 계산. 시위를 떠난 화살이 200미터 거리의 타겟에 닿는 데 걸린 시간."

[계산을 시작합니다.]

조금 전, 후폭풍에 뒤로 날아가 부유감을 느끼는 동시에 착탄하는 소리가 났다.

즉, 내 몸이 낙하하는 시간보다 화살이 타겟을 관통하는 시간이 더 짧았다는 말이다.

[계산 완료.]

[화살의 착탄까지 걸린 시간은 약 0.3초입니다.]

"······미친?"

바람 속성의 장점은 '속도'에 있다.

바람의 살은 그 특징을 제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이거 진짜 잘만 쓰면······."

내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 * *

현재 시간은 오후 10시.

"수고하셨습니다."

"후아! 힘들어!"

하시연, 신지아와 함께하는 단련이 모두 끝났다.

오늘은 기본적인 마력 운용에 대한 훈련을 했다.

"지아 너는 내가 오늘 알려 준 강기 사용법. 꼭 복습하고."

"넵!"

지아는 각을 제대로 잡은 채 칼 같은 대답했고.

"시연이 너는 잘 하고 있어. 그대로만 해."

"넹."

시연이는 누워서 적당히 손을 흔들며 설렁설렁 대답했다.

"시연이 너. 선조님이 기껏 시간 내서 단련을 봐 주셨는데 태도가 그게 뭐야."

하시연은 지아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

"놔 둬. 쟤 단련 끝나면 마력 탈진 직전까지 가서 정신이 없어."

그냥 너무 힘들어서 저러는 거다.

"그래도 저건 스승에 대한 예의가······."

"됐어. 나 그런 거 딱 질색이야."

선후배간의 규율이나, 고지식한 스승 같은 딱딱한 관계는 딱 질색이다.

"앗."

지아가 입을 막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아 너도 힘들면 눈치 보지 말고 쉬어. 너도 힘든 거 다 알아."

지아의 사지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얘도 오늘 마력을 과하게 사용해서,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 거다.

"······네."

지아는 고분고분 자리에 앉았다.

"근데 지아야. 진짜 이 단련실 매일 써도 되는 거야?"

"물론이죠."

"돈이 만만치 않게 들 텐데."

첨단 장비가 가득한 3인용 단련실이니, 값이 만만치 않을 거다.

"괜찮아요. 여기 저희 그룹 자회사에서 하는 거라. 이 정도는 아무 문제도 없어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지아의 표정을 보니, 진짜 아무 문제도 없는 모양이다.

"아. 지아야. 한 달 대여비 말해주면 내가 반 보내 줄게."

하시연이 여전히 흐물흐물 손을 흔들며 말했다.

여전히 정신이 멍한 모양이다.

저 느낌 잘 안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상태일 거다. 내가 그랬으니까.

"안 그래도 되는데. 말했듯이 부담되는 일도 아니고."

"그래도 같이 훈련받는 건데, 나눠 내야지. 나 그렇게 염치없는 사람 아냐."

누운 채로 고개만을 돌려서 지아를 올려다본다.

묘한 의지가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그래 그럼. 나중에 톡으로 보내 줄게."

지아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고마워."

분위기가 훈훈하다.

둘이 생각보다 많이 친해진 것 같아서 다행이다.

나는 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내일은 각자 토너먼트 준비 잘 하고."

내일은 합동 훈련이 없다.

모레있을 토너먼트를 대비해서 각자 준비해야 할 게 많다고 해서.

나도 마찬가지고.

"그럼 난 먼저 가 볼게."

"응."

"수고하셨습니다."

여기 샤워 시설이 하나밖에 없어서, 내가 먼저 자리를 비워 줘야 저 둘이 씻을 수 있다.

"내일 아침에 보자."

나는 적당히 손을 흔들며 단련실을 나섰다.

* * *

다음날.

전혀 예상치도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긴급 속보입니다. 오늘 새벽. 동해안 전역에서 해저 몬스터들이 대량으로 폭주, 범람하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광범위하게 벌어진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수많은 초인들이 현장에 투입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교실에서 뉴스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울렸다.

―끝도 없이 밀려 나오는 몬스터들의 물량에 오늘 아침 정부는 국가 재난 사태를 발령했는데요.

그 뉴스를 듣고 있던 사관생들 사이에서 걱정 어린 음성이 흘러 나왔다.

"와. 한국 진짜 무슨 일 나는 거 아냐?"

"아직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면서?"

내가 모르는 사건이었다.

변수가 발생했을 가능성도 다분히 있지만, 내가 봤을 땐 주인공이 나설 일이 없어서 스킵된 사건이 아닐까 싶다.

"근데 이렇게 되면 토너먼트는 어떻게 되는 거야?"

"글쎄. 지금 동해안 일대가 난리 난 상황에 축제나 다름없는 토너먼트를 개최할 순 없을 거고."

문제는 실기 시험의 연기로, 사건과 시험 기간이 겹쳐 버렸다는 것이다.

"안전 관리를 담당할 초인들이나 컨디션 관리를 도와줄 지원형 초인분들도 다 현장에 나가 계실 텐데. 일정대로 진행 가능한가?"

아마 무리겠지.

쟤들 말처럼 이 시국에 토너먼트를 벌인다는 욕먹을 짓을 이사장이 할 리도 없고.

애초에 인력도 부족할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수업 시작 시간이 20분이나 지났음에도, 피진호 교관이 나타나질 않고 있다는 게 무엇보다도 확실한 증거였다.

아마 긴급회의가 길어지고 있는 거겠지.

"실기 시험에 마가 꼈나."

"그러게. 시험 기간마다 무슨 일이 터지네."

웅성거림이 커져 가던 그때였다.

"다들 자리에 앉도록."

피진호 교관이 교실로 들어왔다.

뭔가 다급한 표정이다.

"다들 알고 있을 테지만, 동해안 쪽에서 국가 재난 사태가 발생했다."

"네."

"일이 이렇게 된 관계로, 실기 시험은 무기한 연기하기로 했다. 이해해 주길 바란다."

다들 별 불만은 없는 듯했다.

"추가로, 지금 이 시간부로 한국 초인 사관학교는 동해안 일대의 지원을 나선다. 1학년부터 4학년까지. 전부."

"······일반 시민 대피 유도와 시가지 방어를 담당하는 거군요."

지아가 말했다.

"정확하다."

동해안 일대를 아우르는 대범람.

우리 예비 초인들까지 투입하는 걸 보면 인력이 얼마나 부족한지, 그리고 얼마나 상황이 심각한지 알 수 있었다.

"정확히 30분 주겠다. 모든 장비를 챙겨 입고, 강당으로 모이도록."

"네!"

"마지막으로 하나 더."

피진호 교관이 나를 바라보며 말을 끌었다.

"강서율 사관생에겐 별도로 지원 요청이 왔다."

"네?"

피진호는 걱정과 기대가 반반씩 섞인 오묘한 표정이었다.

"네 뇌 속성 마법이 필요한 모양이다."

< 70화 진정한 사용법 (2) > 끝

< 71화 진정한 사용법 (3) >

나는 피진호 교관을 따라 속초 인근으로 이동했다.

"오. 왔구만."

동해안 몬스터 폭주 대책 본부에 들어서자, 거구의 사내가 나를 반겨 줬다.

"반갑다. 손세호다."

S랭크 초인 세계 랭킹 76위.

한국 랭킹 4위에 랭크되어 있는 초인으로, 한국 최고의 길드인 '수호의 결의' 길드장이기도 한 사람이다.

"강서율입니다."

"진호 너도 오랜만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손세호는 올해로 56세.

프로 초인으로 활동한 기간만 40년이 넘어가는 피진호 교관의 대선배다.

"그럼 바로 들어가자고. 한 시가 급하니까."

우리는 손세호를 따라 이동했다.

천막을 하나 넘어가자, 수십 쌍의 눈동자가 나에게 꽂혔다.

모두 느껴지는 기세가 만만치 않다.

유화를 포함해서 내가 얼굴을 알고 있는 길드장들만 세 명인 걸로 보아, 대표자 회의인 듯했다.

이런 자리에 내가 왜 낀 거지?

"쟤가 이번 작전의 핵심이야?"

"한숨만 나오네. 국가적 위기에 사관생의 힘을 빌려야 하는 처지라니."

부정적인 시선이 반.

"한국의 위기를 한국 최고의 유망주가 해결한다. 좋은 일이지."

"일본 그 야만스런 놈들이나, 미국의 고귀한 놈들한테 도움을 청하는 것보단 낫지."

긍정적인 시선이 반이었다.

부정적이라고 해도, 비단 날 못 믿겠다. 저런 떨거지 따위가? 같은 원색적인 시선이라기보단, 자신들의 부족함에 한탄하는 듯한 느낌이 강했다.

"그래도 어쩌겠나. 이번 일을 처리하기 위해선 뇌 속성이 꼭 필요한 것을."

어느새 중앙의 상석에 자리 잡은 손세호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두 명도 거기 앉게."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 걸 본 손세호가 자상하게 웃으며 근처의 빈 의자를 가리켰다.

우리는 자리에 앉았다.

"그럼 처음부터 설명하지."

그와 동시에 중앙에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현재 상황을 객관적으로 정리해 둔 보고서였다.

"오늘 새벽. 동해안 전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해저 몬스터 범람 사건의 원인을 찾았네."

홀로그램 화면에 거대한 오징어 형태의 몬스터가 떠올랐다.

"크라켄. 이미 호주에서 출현한 전과가 있는 재해급 몬스터지."

호주를 반파시킨 재해급 몬스터.

바다의 왕이라고 불리며, 해양 몬스터에 한해선 완벽한 통솔력을 지닌 지휘관이기도 하다.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그 한 마디로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음? 이해했다고?"

"네."

일개 사관생의 신분인 내가 소환된 이유.

"크라켄의 특징은 강력한 물리 방어력과 재생력입니다. 마법 방어력은 형편없지만, 화 속성 한정으론 막강한 내성을 지니고 있는 몬스터입니다."

나는 조금 놀란 표정의 손세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화 속성에 면역인 이상, 놈의 재생력을 억제할 수 있는 동시에 치명적인 데미지를 입힐 수 있는 공격은 뇌 속성 마법뿐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소환된 것 아닙니까?"

분명 호주의 크라켄은 미국에서 지원 나온 S랭크 9위에 집계된 초인. 뇌제(雷帝)가 일격에 태워 버렸다고 했지.

"듣던 대로 박식하군. 모든 필기 시험 만점이라고 했던가."

손세호가 껄껄대며 웃었다.

"맞아. 안타깝지만, 현재 한국에 뇌 속성을 다룰 수 있는 초인은 강서율 사관생밖에 없어."

"······미국의 도움을 바라긴 힘든 상황인가요?"

검증되지 않은 나보단 미국의 도움을 받는 게 더 낫지 않나?

"힘들진 않지. 다만, 그쪽에 지불할 대가가 너무 클 뿐."

"아."

나라 대 나라 간의 교섭이니, 많은 걸 내줘야 하는 건 당연했다.

"추가로 뇌제 그놈한테도 따로 대가를 지불해야 할 테고."

뇌제의 이름이 나오자, 사방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 싸가지 없는 새끼 얘기는 꺼내지도 마요."

"그 새끼를 움직이려면 얼마를 줘야 할지 상상도 안 가네."

원체 인성으로 유명한 초인이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좋아할 껀덕지가 없긴 하지.

"뭐 다른 질문 있나?"

손세호의 깊은 눈동자가 내 눈동자를 꿰뚫었다.

연륜이 느껴지는 강렬한 눈동자였다.

나는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며 대답했다.

"손세호 길드장님의 따님이 제 서포트를 담당해 주시는 겁니까?"

손세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커졌다. 그리곤 재밌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정말 머리 회전이 빠르군."

손세호 길드장의 딸. 손혜린.

그녀는 '우주의 기운'이라는 아주 특별한 버프형 특성을 보유하고 있는 최고위 서포터다.

뇌 속성 마법이 크라켄의 약점이라곤 해도, 내 비루한 마력으로는 크라켄에게 데미지를 입힐 수 없다.

"맞아. 혜린이를 포함해서, 온갖 서포트를 준비해 뒀네."

그리고 손세호가 이를 모를 리가 없다.

당연히 내 부족한 마력을 보충할 무언가를 준비해 뒀을 거라 생각했다.

"자네는 안전한 위치에서 낙뢰만 떨구면 돼. 놈의 재생력만 어떻게 할 수 있다면 나머진 우리가 어떻게든 하겠네."

"재생력 억제군요."

"정확해."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이러면 할 만하지.

"이 일만 잘 해결되면, 내 사례는 섭섭지 않게 하겠네."

손세호의 사례.

없던 의욕도 샘솟게 하는 마법의 단어였다.

"노력하겠습니다."

* * *

크라켄은 동해 한가운데에서 유유자적 헤엄을 치는 중이라고 한다. 덕분에 헬기를 타고 인근으로 날아가고 있는 중이다.

근데 이게 헬기라고 해야 하나.

뭐 이리 조용해?

마력을 동력으로 움직이는 특수 상황용 헬기라 그런가.

"여유로우시네요."

내가 헬기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자, 내 옆에 앉아 있던 여성.

손세호의 딸 손혜린이 말을 걸었다.

"그럴 리가요. 엄청 긴장하고 있습니다. 손혜린 씨야말로 엄청 여유로우신 것 같은데요."

"아니에요. 엄청 긴장하고 있어요."

"음."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손혜린은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규중처녀다. 유럽의 고풍스런 성 같은 데서 꽃꽂이를 하면서 살고 있을 것 같은 이미지.

뭔가 멍 때리는 것 같기도 하고.

"혜린이는 항상 저 표정이에요."

맞은편에 타고 있던 유화가 끼어들었다. 유화는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가드를 담당했다.

피진호를 비롯한 다른 초인들은 다른 헬기를 타고 목적지로 이동 중이다.

"애가 원체 멍해서. 멍 때리기 대회 같은 거 나가면 무조건 1등할 걸요?"

"내가 뭐."

유화랑 손혜린은 동갑이다.

한국 초인 사관학교 동기로, 제법 친분이 있다고 들었다.

"뭐, 성격은 저래도 실력은 굉장하니까. 믿으셔도 좋아요."

"······그거 칭찬이야?"

손혜린이 여전한 표정과 여전한 목소리 톤으로 물었다.

뭔가 나까지 느긋해지는 기분이다.

"아무튼 진짜 상상 이상일 테니까. 마음껏 날뛰셔도 될 거예요."

유화가 싱긋 웃었다.

유화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리라.

'내 숨겨 둔 힘을 조금 공개한다고 해서, 의심받지 않을 거다.'

그런 건 없는데 말이지.

"네."

그래도 일단 긍정했다.

실제로 손혜린의 '우주의 기운'은 최상급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꼽히는 버프 스킬이다.

쿨타임이 30일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단점이 없을 정도.

A랭크 초인이 '우주의 기운'을 받으면 S랭크 초인에 들어선 초인과 비슷한 능력치가 된다고 했던가.

E랭크 나부랭이인 나는 거의 B랭크에 근접하는 힘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거기에 협회에서 지원해 준 일회용 마법 증폭기(이거 하나에 52억이라더라.)를 이용하면 진짜 대미궁 때의 천벌을 뛰어 넘는 초강력 천벌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목표지점 도착 1분 전입니다! 다른 분들도 거의 도착하셨다고 합니다."

파일럿이 우리에게 도착을 알렸다.

"그럼 슬슬 준비하죠. 혜린아."

"응."

유화의 말에 손혜린이 내 손을 꽈악 움켜쥐었다.

"온 우주의 기운이 당신을 도울 거예요."

4차원스러운 매력이 뿜어져 나오는 말과 함께, 내 신체에 밝은 빛이 흘렀다.

두근-

심장이 크게 뛰었다.

혈관이 세차게 요동치고, 근육이 팽창했다.

마력이 흐르는 혈관 속 마력들이 마구 회전하며, 그 부피를 늘리고 있었다.

고대 유물을 쥐었을 때보다 강렬한 힘의 잔재가 전신을 떠돌았다.

"······이게 [우주의 기운]."

진짜 온 우주가 나를 돕는 기분이다.

"다 됐어요."

손혜린이 내 손을 놓았다.

"지속시간은 15분. 주의하세요."

"네."

알고 있다.

"목표지점 도착했습니다! 요격 팀들도 준비 완료라고 합니다!"

이후 우리는 목표지점에 도착했다. 헬기를 활공 모드로 전환해, 공중에 정확히 고정시키고, 문을 열었다.

후우우웅-!

세찬 바람이 내 전신을 훑고 갔다. 나는 바람을 받으며 시선을 내렸다. 푸른 바다 사이를 노니는 거대한 오징어가 보였다.

"거리가 너무 먼 거 아닌가요?"

유화의 말대로 확실히 좀 멀긴 하다.

"이 이상 다가가면 놈에게 감지될 가능성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먼 거리를요?"

"네. 호주에서의 전투를 기반으로 분석한 결과라고 하셨으니, 확실할 겁니다."

"세상에."

유화가 다시금 경악했다.

"괜찮습니다. 거리는 상관없거든요."

천벌.

하늘의 심판.

하늘 아래 사각은 없다.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일회용 마법 증폭기를 들고 작게 심호흡했다.

'마나의 은혜'는 이미 착용하고 있다. 신체에는 이제껏 느껴 보지 못했던 굉장한 양의 마력이 흐르고 있다.

파지직-!

쥐고 있는 마법 증폭기에 번개가 튀었다.

파직, 파직!

점점 더 강렬하게.

내 마력을 흡수하는 만큼 뇌기는 더욱 강해져 갔다.

"······."

뒤에서 헛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마력을 집중했다.

파지지지직-!

가득 찼던 마력이 어느덧 바닥을 보이기 시작할 때쯤.

"갑니다."

내 손아귀에서 일렁이던 벼락이 하늘로 승천했다.

쨍그랑-

동시에 마법 증폭기가 산산이 깨져 나갔고.

쿠르르릉-!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들렸다.

먹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의 천둥소리.

그 묘한 광경에 모두가 넋이 나간 바로 그때.

콰아아아앙-!

"꺄아악!"

"꺅!"

"으억!"

귀를 찢는 굉음이 울렸다.

* * *

"······."

"······."

헬기의 카메라로 상황을 보고 있던 대책 본부에서는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

"······크, 크라켄 사망 확인했습니다."

오퍼레이터의 보고를 듣고 모두가 정신을 차렸다.

"사망?"

아무리 최고급 버프 스킬인 '우주의 기운'을 받았다고 해도, 저 정도 위력은 말이 안 된다.

저건 뇌제와 비견될 정도다.

"마력 수치는?"

손제호가 당황을 삼키고 오퍼레이터에게 물었다.

혹여 강서율의 마력이 생각보다 높았던 것이 아닐까.

"마법 증폭기로 인한 증폭량을 제외했을 때, 함유 마력 자체는 B랭크 초인의 그래프를 조금 상회하는 정도입니다!"

그 말에 다시 모두가 경악했다.

"B랭크 마력으로 저런 터무니없는 위력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마력 활용도가 얼마나 뛰어난 거지?"

"마력 강도가 규격 외일 수도 있지."

뇌 속성이 약점이라곤 해도, 대형 몬스터는 대형 몬스터고. 재해급 몬스터는 재해급 몬스터다.

뇌제라면 모를까 고작 B랭크 초인의 마법 한 방에 죽는 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능력치를 제외하고는 모든 게 완벽한 천재라는 건가."

멍한 눈으로 다시 차트를 훑는 손세호에게 무전이 도착했다.

―치직···관측2팀입니다.

지직거리던 무전기 소리가 점점 선명해졌다.

―잠시 강력한 마나에 의한 유사 EMP 현상이 있어 무전이 끊겼습니다. 현재 크라켄 침묵 중. 돌입하면 되겠습니까?

손세호가 허허 너털웃음을 흘렸다.

"대기하던 초인들 모두 복귀하라고 해. 상황 끝났다고 전하고."

―상황 종료··· 말입니까?

"그래."

* * *

상황은 무사히 종결됐다.

크라켄이 죽자, 끊임없이 육지로 튀어 나오던 해양 몬스터들이 빠르게 사라지기 시작했고.

금요일인 오늘.

마침내 모든 경보가 해제됐다.

물질적인 피해는 제법 많았으나, 인적 피해는 거의 없었다.

그중에서도 사망자는 한 명도 없었다.

사람들은 정부와 초인들의 빠르고 정확한 대응에 찬사를 보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관심과 환호를 받은 것은 당연히 나였다.

"······이젠 놀랍지도 않다."

나는 인터넷 기사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크라켄을 일격에 처리한 한국의 뇌제.]

[지금껏 이렇게 화려한 행보를 보인 유망주는 없었다.]

[국민들이 강서율에게 기대를 거는 15가지 이유.]

꺼져 가던 불씨에 마른 장작을 넣어 줬다는 느낌이다.

······아니 뭐, 이제 와서 인기가 더 는다고 뭐 달라질 게 있나 싶기도 하고.

별로 신경은 안 쓴다.

"선조님. 이 글 보세요."

지아가 내게 자신의 폰을 내밀었다.

[화제의 5초. 강서율이 사용한 낙뢰(가명)의 함유 마력량에 따른 마력 강도, 활용력, 밀집도를 계산해 봤다.]

"······뭐야 이게."

정말 쓸데없는 글이었다.

크라켄을 처리한 낙뢰의 마력 함유량이 B랭크라고 오피셜로 발표됐기 때문일까.

저런 쓸데없는 계산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 계산대로면 마력 강도 혹은 마력 활용도는 S랭크 초인을 가볍게 뛰어 넘는대요."

무슨 내가 드래곤도 아니고.

"그냥 크라켄이 '악(惡) 속성'을 품고 있어서 그런 건데 말이지."

솔직히 크라켄을 일격에 처리한 건 운이 좋았다고 밖에 표현할 말이 없었다.

뇌 속성에 약한 '악(惡) 속성'이라니. 이거 완전 천벌의 밥이잖아.

크라켄은 이중 역상성을 버티지 못하고 자연으로 산화한 것뿐이다.

"에휴. 실기 시험만 또 날아갔네. 빨리 랭킹 올려야 하는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 못 들으셨어요?"

지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뭘?"

"이번에 이사장님이 표창장 주신다고 하던데요?"

"······표창장 받아서 뭐해. 졸업 후 취직할 때나 도움되는 거잖아 그거."

나한텐 필요없는 보상이다.

정부 감사패도 마찬가지고.

"표창장에 추가 학점 붙어 있는데요?"

"응?"

뭐가 붙어 있다고?

"진짜 모르셨어요? 정부 감사패에도 붙어 있는데."

순간 벙쪘다.

"······진짜?"

"네. 사회에 공헌하거나, 학교의 이름을 드높인 사관생에게 주어지는 가산점이라 보시면 되요."

······그런 게 있었어?

"오늘 새로 랭킹이 집계된다고 했으니까. 슬슬 나왔을 거 같은데."

지아가 스마트폰을 이리저리 만졌다.

"아. 30분 전에 떴네요."

그리곤 내게 다시 폰을 넘겼다.

[1위. 신지아.]

[2위. 하시연.]

여기까진 똑같았다.

중요한 건 그 아래 있었다.

"헐."

[63위. 강서율]

갑자기 44계단이 올랐다.

충격적인 건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거다.

"다음 주에 이사장님 표창장 받고. 가산점을 추가로 받으면······."

지아가 싱긋 웃었다.

"대충 3~40위 사이에 안착하시겠는데요?"

"······."

랭킹 올리기가 원래 이렇게 쉬웠나?

······나 지금까지 뭐 한 거지?

< 71화 진정한 사용법 (3) > 끝

< 72화 행동 (1) >

마에스트로의 자택에서 허미트가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

"허미트. 여전히 빠른 일처리군. 아주 마음에 들어."

"······마에스트로."

그런 허미트에게 마에스트로가 먼저 다가갔다. 평소 마에스트로의 성격을 알고 있는 부하들이 봤으면 눈이 튀어나올 만큼 경악할 모습이었다.

'마에스트로가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다니!' 하면서 말이다.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그 어렵지 않은 일도 제대로 처리 못하는 것들이 워낙 많아야 말이지."

마에스트로가 눈살을 찌푸렸다.

부하들의 어리숙한 모습을 떠올리자 자연스럽게 짜증이 치밀어 오른 것이다.

"내일 일은 이 근처라고 했던가."

"그래."

그래서 마에스트로의 자택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한 거다.

실제로 간부들이 자주 사용하는 거점이기도 하다.

'설마 마에스트로가 여기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이 자택은 하나의 거점이다.

당연히 누군가와 조우할 확률이 높고, 혼자만의 사색 시간을 좋아하는 마에스트로는 이 자택에 좀처럼 드나들지 않는다.

근처에 또 다른 개인 자택이 있기도 하고.

"마에스트로."

평소라면 껄끄럽기만 할 뿐이었겠지만, 오늘은 오히려 이 우연이 기껍다.

"한국 일은 어떻게 되고 있지?"

"한국? 아. 검령, 귀령 일인가."

한국에서 베가본드가 사망한 후, 그의 죽음에 관련된 일들의 조사는 마에스트로가 전담하게 됐다.

그 정보는 아직 간부들에게도 공유되지 않았다.

"신기하군. 네가 임무 외적인 것에 흥미를 지니다니."

"나도 감정이 없는 기계는 아니라서."

"하하! 내가 들었던 말들 중 가장 유머러스한 말이군."

은둔자 허미트.

임무를 받으면 기계적으로 임무만을 행하는 언노운의 개.

조직의 누구와도 친분이 없는 고고한 늑대.

그런 자가 베가본드의 죽음을 두고 감정을 논하고 있다.

베가본드와 말 한번 제대로 섞어 본 적 없는 허미트가 말이다.

이게 유머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뭐, 좋아. 간부로서 동일한 위치의 다른 간부가 죽은 일에 대해 흥미를 가지는 건 당연한 거니까."

마에스트로는 허미트의 의문이 감정에 기인한 호기심이 아닌 단순한 흥미 본위의 호기심이라 판단했다.

"근데 아쉽게도 확실히 파악한 정보가 없어. 가상의 천사를 미끼로 베가본드를 유인해 함정에 빠트렸다. 여기까진 파악했는데 말이지."

마에스트로가 검지로 테이블을 툭툭 치며 말을 끌었다.

"막상 가장 중요한 정보가 오리무중이란 말이지."

"······가장 중요한 정보?"

"그래."

마에스트로의 눈에서 이채가 흘렀다.

"우리가 천사를 찾는 걸 어떻게 알고 있었는가. 베가본드에 대한 건 어떻게 알고 있었는가. 어떻게 베가본드를 고립시켜 확실히 유인했는가. 모든 게 의문이야."

그 작전은 베가본드에 대해 미리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세울 수 없는 작전이었다.

그렇기에 언노운도 내부의 스파이로 눈을 돌렸던 것이다.

물론 절대복종의 맹세를 이용해 배신자는 없다는 게 밝혀지긴 했지만, 그로 인해 의문은 더욱 깊어졌다.

"자세한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선, 일의 주모자를 잡아 심문하는 수밖에 없는데······."

일의 주모자.

유화와 신지아를 의미했다.

"한국이란 나라는 쓸데없이 경비가 삼엄하단 말이지."

한국은 세계에서 네 번째로 안전한 국가다.

"······그 둘이라면 개인적인 경비도 무시 못 할 테니까."

"그래. 그중 한 명은 사관학교에서 대부분의 일과를 보내니, 접근하는 것 자체도 까다롭지."

마에스트로가 혀를 찼다.

검령과 귀령으로는 이 이상 정보를 모으는 건 무리다.

"허미트 네가 나서면 어떻게 될 것 같긴 한데."

"······."

허미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확실히 허미트가 나서면 유화나 신지아를 몰래 납치해 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허미트의 잠입 능력은 그만큼 뛰어나니까.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유화, 신지아는 어르신과 연이 닿아 있다.'

아마 강서율에게 보호받고 있는 것이리라.

그 둘을 납치하기 위해선 강서율을 먼저 어떻게 해야 한다.

'무리야.'

대정령.

그 막강한 존재의 가드를 뚫을 자신이 없었다.

애초에 '대정령의 맹약'에 걸려 있는 허미트는 절대 강서율에게 반항할 수 없다.

"뭐, 당장 할 일이 많으니 무리겠지."

마에스트로의 말에 허미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보스의 말대로 허미트 너까지 잃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베가본드가 당했다는 것은 다른 간부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상대가 우리의 정보를 파악하고 있다면, 베가본드의 죽음을 미끼로 함정을 판 뒤 우리가 나서는 걸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

언노운이 일단 놔두기로 한 건 이러한 것들을 모두 파악했기 때문이겠지.

"지금은 검령, 귀령을 계속 감시로 붙여 두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아쉽지만 이게 최선이다.

최소한 국가전에서 거사를 치르기 전까진 말이다.

"그보다 허미트. 이 기사 봤나?"

"기사?"

마에스트로가 신문지 한 장을 넘겼다.

[크라켄을 일격에 처리한 한국 초인 사관학교 소속 사관생 강서율!]

강서율에 대한 소식이었다.

"처음 본다."

허미트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지난 일주일간 음지에서 임무에 힘쓰느라 속세와는 완벽히 단절되어 있었기에 알 방법이 없었다.

"그렇겠지. 임무가 임무였으니까."

"그래서 이 기사가 뭐 어떻다는 거지?"

마에스트로가 왜 강서율에게 흥미를 가진 걸까.

"이 얼굴."

마에스트로가 신문을 바라보며 눈을 게슴츠레 떴다.

"묘하게 기시감이 들지 않나?"

"······모르겠는데."

허미트가 시치미를 뗐다.

혹시 자신과 강서율의 관계를 의심하고 떠보는 건가 싶었지만, 표정을 보니 그건 아닌 모양이다.

"흠. 착각인가?"

마에스트로.

다비드 페네스.

"왠지 눈에 익는단 말이지."

그는 12년 전 햇빛 고아원을 담당했던 간부다.

* * *

"······이상으로 강서율 사관생의 표창장 수여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짝짝짝-

대강당에 가득 차 있는 2천명의 사관생들로부터 힘찬 박수가 쏟아졌다.

"강서율 사관생은 자리로 돌아가 주시길 바랍니다."

"네."

정부 감사패를 받을 때는 되게 소소하게 하더니, 이사장 표창장은 뭐 이렇게 거창하게 하는지.

되게 쑥스럽네.

자리로 돌아가는 중 주위에서 소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개부럽네. 나도 속성 마력 타고 났으면."

"심지어 이중 속성이잖아. 쟨 진짜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 물고 태어난 거지."

내가 누군가에게 질투를 받다니.

신기했다.

"노력형인 줄 알았는데 천재형이었잖아."

"내가 알아봤거든? 강서율 과거에 수련했다거나 이런 기록이 아예 없다더라."

"뭐야. 그럼 능력치가 낮은 건 재능이 없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훈련을 안 해서 그런 거야?"

"그렇지. 그래서 훈련하니까 미친 속도로 올라가고 있잖아."

"와. 진짜 개부럽네."

사방에서 부러움으로 가득한 시선이 꽂힌다. 머쓱하면서도 묘하게 기분 좋은 것이. 인기의 맛이 이런 건가?

"서율아. 축하해."

자리로 돌아오자 지아가 환하게 웃으며 날 반겼다.

"축하축하."

뒤이어 시연이도 내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

나는 자리에 앉았다.

"다음 공지입니다."

사회를 맡은 교관의 말과 함께 강당이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번 크라켄 사건으로 인해 취소 예정이었던 수학여행이 강서율 사관생의 분투 덕분에 계획대로 진행되게 되었습니다."

"오!"

"미친 취소될 뻔했어?"

다시금 내게 시선이 몰렸다.

이번엔 질투 어린 시선보단 감탄과 감사로 가득 찬 시선들이었다.

이해는 한다.

수업을 빼고 당당히 여행을 갈 수 있는 기회를 날리는 건 슬픈 일이니까.

"이러면 또 얘기가 다르지."

"우리 모두 강서율 님한테 기도 올리자."

"철진아. 그거 뇌절이야."

근데 굳이 내가 아니었어도 취소는 안 됐을 거다.

원작에서도 무사히 진행됐으니까.

아마 뇌제의 힘을 빌려서 크라켄을 깔끔하게 처리하고, 수학여행을 떠난 게 아닐까.

수학여행은 원작에서도 꽤나 높은 비중을 차지한 에피소드다.

"수학여행은 예정대로 다음 주 월요일이다."

오늘이 월요일이니, 딱 일주일 남았다.

"다음은 여행지에 대한 공지다. 먼저 1학년."

4박 5일간의 제주도 여행에서 별의별 일들이 다 벌어진다.

"호주로 간다."

······응?

어디라고?

"와!"

"해외!"

주위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호주래. 호주."

"대박."

다들 호들갑을 떠는 걸 보니, 내가 환청을 들은 건 아닌 모양이다.

"원래는 제주도로 계획하고 있었는데, 이사장님께서 신신당부하셔서 말이지. 이번 1학년에겐 최고의 여행을 선사하라고 하셨다."

단상 위 교관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1학년은 동기 중에 강서율 사관생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도록."

"와!"

"서율이 짱!"

박수 소리부터, 휘파람 소리까지. 아주 난리가 났다.

이사장님이 기분이 많이 좋으신가보네. 해외까지 보내 주시고. 옆에서 지아가 내 옷 소매를 작게 당겼다. 그리곤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선조님 덕분에 정부에서 지원금이 나왔다나 봐요. 그것도 꽤나 많이."

"······그랬구나."

그나저나 여행지라는 게 이렇게 쉽게 바뀌는 거였구나.

그건 몰랐네.

"그리고 1학년은 좋은 소식이 더 남아 있다."

아직 끝난 게 아닌 모양이다.

"이번 1학년의 수학여행은 11박 12일이다."

"와!"

"미쳤다!"

1학년들 사이에선 찬양에 가까운 시선이, 2~4학년 사이에선 질투와 시기에 가까운 시선이 꽃혔다. 되게 난감하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또 뭐가 남았어?

"이번 1학년은 수학여행 기간 중 5박 6일 동안······."

교관이 의도적으로 말을 흐렸다.

모두의 기대감이 치솟았다.

"뭘까?"

"7성급 호텔 투어 이런 거 아냐?"

"난 자유 여행이면 좋겠다."

모두의 반응을 보며 교관의 입꼬리가 쓰윽 올라갔다.

어디서 많이 본 적 있는 미소.

왠지 모르겠지만, 피진호 교관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악마의 미소 같다고 해야 할까.

"호주 초인 사관학교의 실기 훈련 부지를 빌려, 서바이벌 훈련을 실시할 예정이다."

"······."

"한국 초인 사관학교 역사상 최초다. 실기 시험과 수학여행을 동시에 치르는 학년은. 축하한다."

정적이 흘렀다.

모두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싶은 표정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호주 초인 사관학교의 실기 시험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호주에서 서바이벌이면······."

"그 지옥의 서바이벌?"

"오 마이 갓."

아주 악독한 시험으로 세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지옥의 시험.

"푸하하!"

"축하한다! 1학년!"

"이러면 11박 12일 쌉인정이지!"

2~4학년 사이에서 위로 어린 박수 소리가 들렸다.

"······그 미친 시험을 5박 6일이나 치른다고?"

머릿속에서 끼이익 무언가 문이 열리는 듯한 환청이 들렸다.

헬 게이트가 열리는 소리였다.

* * *

―축하해요. 한국 최초로 해외 사관학교의 커리큘럼을 받는 영예를 얻으셨네요.

수화기 너머로 유화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야. 진호한테 훈련 영상 꼭 찍어 두라고 해라. 웬만하면 저 꼬맹이 위주로 찍으라고 하고. 나중에 보게.

그 옆에서 메이든의 목소리도 들렸다. 둘이 같이 있는 모양이다.

"거 참. 진심이 느껴지는 축하네요."

나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아 맞다. 수학여행 기간 동안 금호는 제가 맡아 드리면 되는 거죠?

"예.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이게 뭐 단순히 수학여행이라거나, 실전 훈련이면 모르겠지만, 명색이 '시험'인지라 금호를 데리고 갈 수는 없다.

진짜 아쉽네.

금호만 데리고 가면 5박 6일은커녕 1년이라도 버틸 수 있는데.

식량도 문제없고, 안전도 문제없고, 내 멘탈도 문제없고.

······에휴.

어쩌겠어. 형편성에 안 맞는 건 사실인데.

"그보다 계획은 어떻게 되고 있어요?"

―어떻게 되고 있긴. 잘 되고 있지.

메이든이 대신 답했다.

―네 말대로 의심스러운 임원도 몇 명 찾았고. 자재 쪽에도 의심스러운 부분을 찾았어. 확실히 모르고 봤으면 그냥 지나쳤을 정도로 은밀하게 새겨진 수식이더라고.

메이든이 혀를 찼다.

―일망타진을 위해서 일단 놔두긴 했는데, 이거 자재는 그냥 놔두면 문제가 클 것 같은데. 대충 보니까 봉인식 같거든?

"네. 거기 설치된 수식이 무사히 작동하면 골치 좀 썩일 겁니다."

국가전 경기장을 보수하는 자재에 걸려 있는 특수 장치들이 발동하면, 그 지역 전체가 일정 시간 봉인되고.

그로 인해 외부 지원은 올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이걸 파훼하면 놈들이 눈치 챌 거 아냐?

"눈치 채겠죠."

100% 눈치 챈다.

"그러니까, 자재에 걸려 있는 장치는 그대로 놔두고, 그 장치를 파훼하는 수식을 만들어 주세요."

고로, 장치는 그대로 두고, 카운터 장치를 만들면 된다.

―너 되게 쉽게 말한다?

"못 하나요? 천하의 메이든 크리티네스가?"

―거 참 귀여운 도발이네.

메이든이 코웃음을 쳤다.

―일단 대답하자면 못 할 건 없어. 파훼한 수식이 눈앞에 있으니까. ······쉽진 않겠지만.

메이든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그래. 어쩔 수 없지. 그 방법밖에 없긴 하겠네.

"네. 부탁드려요."

이걸로 한 수 확실히 앞섰다.

"그럼 전 이만 훈련하러 가 볼게요."

―아! 서율 씨!

전화를 끊기 전 유화가 다급하게 말했다.

"네?"

―혹시 몰라서 묻는 건데. 고대 유물. 필요해요?

······갑자기?

< 72화 행동 (1) > 끝

< 73화 행동 (2) >

갑자기 분위기 고대 유물.

되게 뜬금없네.

―필요없어요?

"아뇨. 필요하긴 한데."

너무 생각치도 못했던 말이라 당황스럽다.

―들었지 언니?

"······?"

―그래. 대미궁의 사례는 그걸로 하면 되겠네.

무슨 말이지?

―서율 씨는 고대 유물을 구입했다거나, 지니고 있다는 기록을 남기고 싶지 않은 거죠?

"네. 맞습니다."

맹호의 건틀릿을 몰래 요구하기도 했고. 콜렉터와의 거래 자리에서도 밀수를 요구했으니, 유화가 저렇게 판단하는 건 당연했다.

내가 고대 유물을 원한다는 거야 사전에 말했으니 당연히 알고 있을 테고.

"뭐 방법 있나요?"

기록에 남기지 않고 고대 유물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기가 막힌 방법이 있는 건가?

―방법이야 많죠. 한국쪽 언더루트에도 몇 개는 있을 거고. 돈을 많이 들이면 해외에서도 밀수입은 가능할 테고요.

그건 나도 생각했던 방법이다.

"근데 계속 그런 식으로 사들이면, 언젠가는 제 정보가 퍼질 확률이 높지 않나요?"

영원한 비밀이란 없는 법이다.

거래를 장부에 남기지 않고 비밀로 한다고 해도, 해당 거래를 수락한 '판매자'는 어느 정도 정보를 얻게 된다.

이게 한두 명이면 모르겠지만, 거래를 계속 이어 나감에 따라 거래자가 늘어난다면, 결국 비밀은 비밀이 아니게 된다.

―맞아요. 계속 구입하다 보면 정부'만' 모르는 상황이 될 확률이 높죠.

내가 돈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이유다. 내 위치가 고아원 출신의 일개 사관생인 이상, 고가의 고대 유물을 공식적으로 사들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중개를 제가 맡으면, '비혼 길드가 고대 유물을 모아서 무언가 하려고 하는 것 같다.'라는 식의 소문이 돌 테고요.

"그렇겠죠."

일단 저번에 마나에 새긴 송곳니를 구매한 언더루트 상인은 믿을 만한 것 같다.

장 비서님이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상인이기도 하고, 그쪽에서도 신뢰로 알아주는 상인이라고 했으니까.

뭐, 절대라는 건 없으니. 목에 칼이 들어오면 말을 하긴 하겠네.

아무튼 이런 이유로 나는 고대 유물의 습득처를 크게 [직접 습득] 혹은 [무수한 고대 유물을 지닌 개인과의 거래(콜렉터)]로 나눈 것이다.

그 외에도 유화나 지아처럼 확실히 믿을 만한 사람을 통한 습득이라던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구매는 하책이에요. 마음은 고맙지만······."

―짜샤. 우리가 언제 구매해서 준다고 했어?

"네?"

메이든이 콧방귀를 꼈다.

―나 메이든이야 메이든. 던전 크리에이터. 가만히 앉아 있어도 돈을 떼로 버는 여자.

메이든 크리티네스가 보유하고 있는 5개의 던전은 말 그대로 돈을 쓸어 담는다.

내 알량한 상상력으론 상상할 수도 없을 만한 거액이겠지.

"돈이 많은 거랑 고대 유물이 무슨 상관인가요?"

구매랑 상관없다며?

―유적지나 던전에서 습득 후, 등록도 안 하고 창고에 쳐박아둔 고대 유물이 몇 개 있어.

"······네?"

―굳이 푼돈을 위해서 귀찮은 등록 절차를 밟고, 판매자를 찾아 그것보다 더 귀찮은 절차를 통해 거래를 한다는 시발스러운 짓을 할 생각이 없었거든.

메이든이 큭큭 웃었다.

―그래서 몰래 쌔벼뒀지. 집 창고에.

"그거 불법 아닙니까?"

고대 유물은 등록이 의무화되어 있다.

―한국에 그런 말 있는 거 몰라? 걸리면 불법. 안 걸리면 합법.

"······."

부정을 못 하겠다.

―아무튼 중요한 건 우리 집 지하 창고 깊은 곳에 고대 유물이 잠들어 있다는 거지. 솔직히 몇 개인지는 모르겠어. 지금까지 관심도 없었거든 그런 쓰지도 못하는 골동품.

"그걸 저한테 주시겠다고요?"

―그래. 전부 다.

······세상에.

―대신 부탁 하나만 하자.

"부탁이요?"

메이든의 음성이 장난스런 음색으로 흔들렸다.

―이번 주 토요일. 시간 좀 비워 둬. 누나랑 마실 좀 나가자.

* * *

메이든과 토요일 오전 10시에 약속을 잡았다.

고대 유물도 그때 넘겨준다고 했다.

이렇게 운이 좋을 수가 있나.

"그치? 금호야?"

"갸릉."

지금은 화요일 오후 10시 30분.

나는 방에서 자기 전에 금호와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있었다.

"어떤 종족의 유물이 올까?"

설렌다.

지금 내 신체에 새겨진 문신은 엘프, 수인, 천사, 정령, 드래곤, 거인의 6종족으로.

천사를 빼고는 모두 녹색이다.

뭘 얻던 상관없다.

"아무거나 와라~"

그렇게 혼자 실실 쪼개고 있을 때였다.

우웅-

폰이 진동했다.

지아나 시연이, 혹은 유화 씨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공지?"

웬일로 학교 공지였다.

[1학년 사관생에게 일괄적으로 공지함. 내일 수업은 실전 수업으로 대체됐음. 내일은 훈련용 장비가 아닌 실전 장비를 착용하고 수업에 임할 것.]

"아하."

목요일의 실전 수업이 수요일로 앞당겨졌다는 메시지였다.

* * *

수요일 아침.

오늘은 피진호 교관의 단련이 없었다. 실전을 앞둔 상황에선 쓸데없이 힘 빼지 말라는 게 교관의 철칙이거든.

"먼저 연천 필드에 대한 설명을 하겠다."

오늘 실전 훈련은 저번에도 했던 것처럼 필드 사냥이다.

저번엔 강원도 필드였다면 이번엔 경기도 북부 연천.

강원도 필드가 난이도적인 측면에선 가장 쉽지만, 메피스토 출현 이후로 완전히 봉쇄됐기에, 이곳을 대신 선택한 것이리라.

여기도 꽤나 쉽거든.

"지형은 산맥. 출현 몬스터는 모두 짐승형으로······."

교관의 TMI를 들으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서율아. 그 캐리어는 뭐야?"

마찬가지로 교관의 얘기를 흘려듣고 있었던 하시연이 소곤소곤 내게 대화를 걸어 왔다.

"비장의 무기."

"비장의 무기?"

저번 메피스토 사태가 생각나서 혹시 몰라 가져온 수인족의 유물. '프로모시움 대거'다.

보험용으로 챙겨 둔 유물이니, 보험용으로 가져왔다.

"혹시 몰라서 가져온 건데, 아마 쓸 일은 없을 거야. 주력 무기는······."

나는 허리춤에 걸어 둔 '잠룡의 뿔'과 등에 매어둔 '엘레시움 보우'를 차례대로 만졌다.

"평소처럼 이 두 개야."

"창은 안 써?"

"어."

오늘 장창은 가져오지 않았다.

캐리어를 챙겨 오면서, 짐이 너무 많아져서 장창까지 챙기는 건 무리였다.

"둘이 같은 팀이라고 티내는 거야?"

우리 대화에 지아가 끼어들었다.

"앗. 혼자 다른 팀에 배정받은 지아다."

하시연이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

그 말에 지아의 눈꺼풀이 짜증으로 경련했다.

이번 실기 시험은 평소처럼 6인 1조로 치러진다.

나와 하시연은 같은 2팀이고, 지아는 혼자서 1팀이다.

"신기하긴 하네. 나도 이제 37위인데. 2위인 시연이랑 붙고."

이번 이사장 표창 건으로 가산점을 받아 37위까지 올랐다.

뭔가 팀 배정이 될 때마다 시연이랑 붙고 있다.

"불공평해."

지아의 볼이 조금 빵빵해졌다.

질투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이겠지.

지아는 나를 많이 따르니까.

그런 지아를 바라보며 하시연이 장난을 걸었다.

"이게 다 내 평소 행실이 좋아서 그런 거 아니겠어?"

지아의 뺨을 콕콕 찌르며 해맑게 웃는다.

"······."

짜증이 치솟은 지아가 아무 전조도 없이 하시연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꺄악! 지아 너 비겁하게!"

이런 모습을 보면 둘이 진짜 많이 친해지긴 했다.

근데 소리를 지르면 안 되지!

"······거기 둘."

아니나 다를까 피진호 교관이 눈치 챘다.

아니, 원래부터 우리가 딴짓 하고 있단 건 알고 있었겠지만, 모른 척 해 준 걸 테지.

"딴청을 부리는 건 상관하지 않는다. 다만, 주위 사관생들에게 폐는 끼치지 말도록."

"······네."

"죄송합니다."

두 명이 고개를 숙였다.

내 저럴 줄 알았다.

둘 다 귀까지 빨개진 게, 꽤나 부끄러운 모양이다.

"그럼 마지막으로 필드 내의 금지 구역에 대해 설명하고 말을 마치겠다."

피진호 교관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각자 배부 받은 연천 필드의 맵을 펼쳐 봐라."

연천 북부의 휴전선 방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북한 측과 맞닿은 이 구간은 금지구역이다. 절대 들어가지 않게 주의하도록. 국제 문제가 된다."

연천 필드는 휴전선 너머의 북한 장풍군 필드와 연결되어 있다.

이 세계에서도 북한과 남한은 전쟁을 치르고 있으므로, 휴전선을 넘어가면 국제 문제가 된다.

그리고 또 하나.

"또한, 이 붉은 범위 내에는 재해급 몬스터가 서식하고 있다."

재해급 몬스터 '폭군 드레이크.'

정확히 휴전선을 중심으로 북한과 한국에 걸쳐서 똬리를 튼 몬스터다.

이게 '휴전' 중인 두 나라 사이에 자리를 잡아서 토벌조를 보낼 수도 없다.

북한에서 보내던, 한국에서 보내던 상대측에서 선전포고라고 받아들일 여지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북한 측에서 폭군 드레이크를 토벌한다고 초인 토벌단을 결성 후, 드레이크를 토벌하려는 척 하다가 휴전선을 넘어 온 사건도 있었고.

"폭군 드레이크는 자신의 영토로 침입만 하지 않으면 아무런 해도 없는 몬스터지만, 침입자에게는 가차 없는 놈이다. 절대 들어서지 말도록."

"네!"

물론 금지구역으로 향하는 길목은 철저히 봉쇄되어 있으니, 넘어가려고 마음먹어도 넘어가긴 힘들 테지만.

"그럼 지금부터 5분 후. 필드 사냥 실기 훈련을 시작하겠다. 각자 팀끼리 모여서 준비하도록. 이상!"

그 말을 끝으로 주위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교관님 너무 겁주신다. 어차피 막아 놔서 가려고 해도 못 가잖아."

"예전에 있었다나 봐. 자기의 힘을 증명한다고 억지로 방벽을 뚫고 드레이크의 영토로 침입한 사관생이."

"헐. 그런 미친놈이 있었어?"

10년 전에 한 명 있었다고 들었다. 그 사관생 때문에 연천 필드는 한동안 실기 훈련지에서 빠졌다던가.

"서율아. 우리는 어떻게 할까?"

하시연을 비롯한 2팀이 나를 중심으로 모였다.

"그 전에 하나만 확인할게. 내가 팀장을 맡는 거에 불만 있는 사람 있어?"

모두 조용했다.

각자 눈빛을 보아하니, 진짜 불만이 없는 모양이다.

"실기 훈련이라고 해도, 학점이 붙어 있는 훈련인데 불만 있는 사람이 어딨어."

"맞아. 오히려 행운이지."

"서율이 오더 개이득."

분에 넘치는 칭찬을 들으며 나는 옅게 미소 지었다.

"오케이. 그럼 내가 팀장을 맡을게."

맵을 펼쳤다.

그리곤 한 곳을 가리켰다.

"우린 이쪽을 공략할 거야."

"······여기 정예 몬스터들이 자주 출몰하기로 유명한 장소 아냐?"

"맞아."

평소라면 온갖 초인들로 붐빌 연천 필드지만, 그중에서도 이곳 정예 몬스터 출현 존은 더욱 붐빈다.

이유는 간단하다.

"허니 베어가 나오는 곳."

허니 베어를 잡기 위해서.

정확히는 허니 베어가 체내에 품고 있는 '꿀'을 얻기 위해서다.

"허니 베어의 꿀을 노리자는 거야?"

"어."

허니 베어의 꿀은 영약이다.

그것도 없어서 못 구하는 지고의 영약.

"평소엔 프로 초인들로 가득 찼을 테지만, 오늘은 우리 1학년이 전세 냈잖아?"

실기 훈련을 위해서 필드 하나를 통째로 대절했다.

"경쟁자는 많아야 492명이란 거네."

"모든 팀이 몰려오진 않겠지."

모든 팀이 허니 베어를 노리진 않을 테니, 많아야 150명 정도가 아닐까.

"물론 허니 베어의 출현 빈도를 생각하면 못 만날 확률이 99%긴 해. 근데 밑져야 본전이니까."

"······확실히 노려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정예 몬스터가 강하긴 해도 너희 둘이라면 문제없을 거고."

남학생이 나와 시연이를 차례대로 가리키며 말했다.

"정예 몬스터는 기본적인 점수가 높으니까. 꼭 허니 베어가 아니더라도 이득이지."

"난 찬성."

"나도."

모두가 찬성했다.

"좋아. 그럼 우리 2팀은 정예 몬스터, 가능하면 허니 베어를 노리는 걸로 하자."

* * *

대한민국 연천에서 북한 장풍군 사이를 잇는 휴전선에 존재하는 금지구역의 중추.

그곳에서 두 남녀가 감탄하고 있었다.

"이야. 폭군 드레이크라고 이름 붙을 만한데?"

검령.

"오빠. 저 이빨 봐. 물리면 즉사하겠다."

귀령.

마에스트로 산하의 진리의 구명자 소속 빌런이었다.

그 둘이 연천 필드의 주인. 폭군 드레이크를 마주한 채 연신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크기 자체는 그렇게 크지 않다.

대충 코끼리 두 배 크기 정도.

다만, 두 눈에서 느껴지는 위압감이, 전신에서 느껴지는 짜릿한 살의가. 저것은 절대 이길 수 없는 존재임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한 존재가 두 눈에 빛을 잃은 채 흐리멍텅하게 서 있다.

"동생아. 싸우면 당연히 지겠지?"

"응. 한 입에 꿀꺽. 우걱우걱. 괜히 호승심에 건들지 마. 바로 움직이기 시작할 테니까."

자신들의 상관인 마에스트로가 나선다면 모르겠지만, 자신들로는 이길 수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싸우겠냐. 나도 생각은 있어."

"오빠한테 뇌가 있었어?"

"이년이?"

하지만 두 명은 애초부터 싸울 마음이 있어서 이곳에 찾아 온 것이 아니었다.

"암튼 동생아. 부탁한다."

"맡겨 둬."

동생. 귀령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동시에 스산한 기운이 내려앉았다.

"귀령빙의."

동시에 고고하게 서 있던 드레이크의 신체가 뚝 멈췄다.

귀령의 특수 스킬은 특정 대상에 귀신을 씌워 조종하는 것이다.

다만, 확실한 의지를 지닌, 인간과 같은 대상에게는 사용할 수 없다.

"역시 마에스트로 님 말대로야. 내면 심리가 너무 강력해서, 간단한 인지 조작밖에 못할 것 같아."

"그 정도면 충분하잖아. 우리는 그놈이 날뛰는 혼란을 틈타서 신지아를 납치하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검령이 등에 메고 있던 여덟 개의 검을 공중에 띄우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빙의 조작. 인지 개변."

드레이크의 몸에서 싸늘한 귀기가 흘렀다.

"영토 인식 범위 수정."

귀령의 눈이 서슬 어린 빛이 뿜어져 나왔다.

"연천 전체."

< 73화 행동 (2) > 끝

< 74화 행동 (3) >

정예 몬스터 사냥은 생각한 것보다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개꿀이네. 이러다 1위 하는 거 아냐?"

"그러게. 생각보다 경쟁자도 별로 없고."

정예 몬스터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임에도 다른 팀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다들 안전책으로 정예 몬스터보다는 일반 몬스터를 잡기로 한 모양이다.

"지금 세 마리니까. 일반 몬스터를 잡았다고 치면······."

"대충 30마리 분 될 걸?"

"그쯤 되겠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도착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정예 몬스터만 만나고 있다.

"이러다가 진짜 허니 베어도 만나는 거 아냐?"

다들 신났다.

하시연을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잡는 정예 몬스터라서 경험치 상승량도 어마무시할 테니까.

기뻐하는 게 당연하겠지.

······난 경험치 같은 거 없다만.

"시연이 너 마력 상태는?"

"나?"

선두에서 사주를 경계하며 걸어가고 있던 하시연이 몸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대충 80% 정도 남았어."

"여유롭네."

"응."

실전 훈련이라 장비빨을 받고 있기도 하고, 딱 필요한 곳에서만 마력을 사용했기 때문에 마력이 부족할 일은 없었겠지만.

혹시 몰라서 물어봤다.

"그럼 만에 하나 위험한 일이 생기면 부탁해도 되겠네."

"······위험한 일?"

"어."

나는 단검을 빼 들었다.

동시에 지면이 흔들렸다.

아주 미세한 떨림이었지만, 이 떨림이 나타내는 바를 모르는 팀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미친."

"진짜 허니 베어라고?"

허니 베어.

외부의 마력을 정제해서 '웅담'에 녹진한 액체의 형태로 저장하는 특수한 몬스터.

특징은 웅담에 마력이 가득 차기 전까진, 활동을 하지 않고 지면에 숨어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미약한 진동은 허니 베어가 지면 위로 올라오며 발생하는 현상이다.

나는 진동의 중심지를 향해 자세를 잡으며 외쳤다.

"모두 전투 준비!"

진짜 예상치도 않았는데, 딱 나와 주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조심하고. 앞서 잡았던 세 마리에 비할 게 아닌 놈이야."

"응."

우리는 순식간에 위치를 잡았다.

이내 진동의 중심지에서 지면이 들썩거리기 시작하며.

콰아아앙-!

흙먼지를 휘날리며 거대한 곰이 모습을 드러냈다.

피부가 노란색인 걸 빼면, 평범한 곰이랑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다.

"가라 시연몬! 전광석화!"

선빵필승이다.

"시연시연······야! 내가 이거 밖에서 하지 말랬지!"

동시에 하시연은 검에 얼음을 두르고, 아직 정신을 못 차린 허니 베어에게 쇄도했다.

나도 조금 느리게나마 하시연의 뒤를 따라 이동했다.

치이잉-!

허니 베어의 손톱과 하시연의 검이 부딪치며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

하시연은 그 충격을 이용해서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와. 힘 쎈 거 봐."

하시연이 검을 쥐고 있던 오른손을 탈탈 털었다.

손이 저릿한 모양이다.

"원래 곰 형태 몬스터들이 힘이 쎄잖아."

다음은 나와 탱커 역할을 맡은 사관생이 돌격했다.

"흡!"

쾅-!

과연 탱커 포지션을 전담한 사관생답게, 방패로 허니 베어의 한쪽 앞발을 막고 내가 진입할 공간을 벌어 줬다.

"나이스!"

나는 허니 베어의 품으로 조금 더 접근했다. 그 순간, 내 몸에 하얀 빛이 일렁였다.

"전사의 노래!"

서포터를 담당한 여학생의 버프 스킬이었다.

한층 가벼워진 몸을 느끼며, 눈앞에 펼쳐진 바람의 길을 읽었다.

난생처음 보는 아주 굵은 궤적이 두 개.

하나는 내 옆구리를 노리는 궤적으로, 다른 하나는 방패를 든 사관생을 내려치는 궤적으로 그려졌다.

내가 피하면 탱커 친구가 저민 고기로 변해 버릴 게 분명하다.

어쩔 수 없지.

[무기의 극의]에 붉은 빛이 아른거리며, 단검에 붉은 강기가 일렁였다.

허니 베어의 앞발이 치켜 올려지는 것과 동시에.

피이잉-!

'포식자의 살의'를 발동했다.

허니 베어의 신체가 순간적으로 굳으며, 큰 빈틈이 생겼다.

나는 그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내 단검이 허니 베어의 안구를 노리고 쇄도했다.

푸욱-!

그러나 내 단검은 허니 베어의 오른쪽 앞발을 찌르는 데 그쳤다.

포식자의 살의로 인한 경직따위는 순식간에 풀어 버린 허니 베어가.

자신의 안구를 지키기 위해 단검의 궤적에 손을 가져다 댄 것이다.

평소라면 튕겨 나갔겠지만, '잠룡의 뿔'은 A랭크 무기.

훈련용 단검보다 훨씬 뛰어난 절삭력으로 놈의 피부를 뚫는 데 성공했다.

이걸로 허니 베어는 왼쪽 앞발은 탱커 친구에게, 오른쪽 앞발은 내 단검에 묶여 있는 상황이 됐다.

그 순간 하시연이 달려들었다.

먹이를 노리고 있던 한 마리의 매처럼 날렵하게.

순식간에 달려들어서 허니 베어의 오른쪽 앞발을 노렸다.

푸화아아악-!

피가 분수처럼 터지며, 허니 베어의 앞발이 하늘을 날았다.

"나이스!"

포식자의 살의로 내구가 깎여 있기에 가능했던 완벽한 절단이었다.

"크오오오오오!"

놈의 울부짖음과 함께, 이번엔 화살이 날아들었다.

뒤에서 기회를 보고 있었던 궁수 팀원의 화살이었다.

푸욱-

그것은 고통에 몸부림치던 허니 베어의 오른쪽 안구에 정확히 명중했다.

이걸로 오른쪽 팔도, 안구도 무용지물이 됐다.

오른쪽은 완벽한 사각이다.

그쪽만 노리면 무사히 놈을 처리할 수 있을 터다.

"야! 나 더 못 버텨!"

허니 베어의 왼쪽 앞발을 맡고 있던 탱커 친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시연이 너는 커버! 공격은 내가할게!"

"응!"

하시연과 다른 팀원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거리를 벌리는 데 성공했다. 나는 그 사이에 잠룡의 뿔을 회수해, 허니 베어의 우측에 자리 잡았다.

"후우······."

동시에 단검에 나선 형태의 강기를 형성, 회전시켰다.

마력 혈관의 진화 덕분에 더욱 빠르고, 강력한 강기가 탄생했다.

나는 재빨리 몸을 날렸다.

"어?"

기묘한 감각이었다.

빠르다.

내 몸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다.

마치 내 몸이 아닌 듯한 느낌이다.

······아니지.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집중하자!

휘이이잉-!

나는 나선형 강기를 일렁이고 있는 단검을 허니 베어의 목을 향해 찔러 넣었다.

오른쪽 안구도, 오른쪽 앞발도 없기에 오른쪽은 완벽한 사각이다.

추가로 왼쪽에서 다른 팀원들과 접전을 벌이고 있기까지 하다.

도저히 피할 수 없었을 공격이었다.

"!"

그러나 허니 베어는 반응했다.

야생 짐승 특유의 야성 덕분일까.

아니면 내 공격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일까.

"서율아!"

놈은 다른 팀원들의 공격은 모조리 무시한 채, 내게 손톱을 찔러 왔다.

완벽한 카운터였다.

이대로면 내 몸은 저 날카로운 손톱에 꼬치가 될 게 분명했다.

"큭!"

그 순간, 바람의 길이 열렸다.

질척한 살의로 번뜩이는 검붉은 궤적을 피할 유일한 방법이 내 눈에 보였다.

동시에 내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게 된다고?

내 신체 능력으로는 도저히 따라할 수 없을 것 같은 무리한 회피 루트였다.

그러나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방법이 없는 이상, 바람의 길을 믿는 수밖에!

나는 그 즉시 행동을 개시했다.

공중에서 몸을 비틀었다.

단검의 궤적을 바꿨다.

단검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강기의 방향에 맞춰서 무게 중심을 실었다.

허니 베어의 공격이 아래로 흐를 수 있는 각도로 정확히.

그리고 그 힘의 방향을 이용해서 내 몸을 튕겨 날린다.

찰나에 이루어진 이 움직임은.

끼기기긱! 치잉!

허니 베어의 손톱을 완벽히 흘려내기에 이른다.

그리고 비장의 한 수가 실패했다는 것은.

"빙벽일섬!"

커다란 빈틈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했다.

치잉!

시연이의 검에 더욱 싸늘한 냉기가 일렁이며 빛살처럼 움직였다.

서걱-!

무언가가 썰리는 소리와 함께.

쩌저적-

핏물이 얼어붙는 소리가 들렸다.

탁-

나는 낙법을 취하며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시선을 올렸다.

허니 베어의 목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쿠웅-

이내 모든 힘을 잃은 허니 베어의 신체가 지면에 털썩 쓰러졌다.

찰나의 정적 이후.

우리는 승리했다는 것을 자각했다.

"와. 씨. 죽을 뻔했네."

가장 먼저 최전방에서 싸우던 탱커 친구도 털썩 주저앉았다.

"서율아!"

모든 마력을 거둬들인 하시연이 내게 달려왔다.

얼굴에 걱정이 가득하다.

"괜찮아?"

"어? 어."

어안이 벙벙하다.

방금··· 내가 어떻게 피한 거지?

"활력의 노래!"

두 번째로 달려 온 서포터 팀원이 내게 회복에 도움이 되는 버프를 걸어 줬다.

"땡큐."

"와. 서율이 방금 움직임 뭐야?"

뒤이어 모든 팀원들이 내게 다가왔다.

"그 타이밍에 그런 움직임이 가능해?"

"반응 속도랑 대처 능력이 사람이 아닌데?"

다들 조금 전 내 회피 동작을 보며 감탄한 듯했다.

"아니, 그보다 서율이 너 순간 가속 스킬 같은 것도 있었어?"

"······순간 가속?"

멀리서 백업에 전념하던 궁사 팀원이 말했다.

"어. 마지막 대쉬부터 속도가 남다르던데? 마지막 회피 동작도 그랬고."

확실히 대쉬할 때, 몸이 가벼워진 듯한 느낌이 들긴 했다.

······잠깐만. 속도가 빨라졌다고?

"어? 서율아. 너 허벅지에 피난다."

"어?"

하시연이 내 오른쪽 허벅지를 가리켰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전 허니 베어의 손톱에 허벅지 쪽 보호구가 완전히 넝마가 되어 있었다.

"아니, 그, 이건."

덕분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하필 '수인족 문신'이 새겨져 있는 곳이 훤히 말이다!

"······어?"

처음에는 당황했다.

팀원들에게 문신을 들켰다는 것에서 오는 당황이었다.

"다행히 깊진 않네."

"연슬아. 치유의 노래도 걸어 줘야겠다."

"응."

그러나 그 당황은 곧 기쁨으로 변했다.

"근데 서율이 너 허벅지도 엄청 깨끗하다. 되게 하얗네."

"시연이 너 그거 성희롱이야."

"괜찮아! 서율이도 맨날 내 몸 찌르고 노니까 쌍방과실이야!"

"······너희 대체 무슨 사이야?"

내 허벅지에는 문신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밖에 없었다.

'포식자의 살의'는 조금 전 사용을 기점으로 '완전 체화' 됐다.

그리고 수인족의 완천 체화는 신체 능력 상승.

말인즉.

현재 내 신체 능력치는 D랭크로 상승했다.

"응. 별 문제없는 것 같아."

내 상처를 봐 주던 서포터가 내 허벅지에 붕대를 감아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따라 일어났다.

"아무튼 다들 고생했어. 허니 베어의 꿀은 어떻게 할까?"

"음. 일단 N분의 1로 나누는 게 낫지 않을까?"

하시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돈이 필요한 사람은 팔구. 아닌 사람은 먹구."

"제일 깔끔한 방법이네."

나도 동의했다.

참고로 나는 먹을 거다.

허니 베어의 꿀은 마력 용적을 늘려 주는 지고의 영약이거든.

너무 많이 먹으면 부작용이 생긴다곤 하는데, 80ml 정도면 그럴 걱정은 없다.

"······그, 나 별로 한 것도 없는데 괜찮아?"

팀원 한 명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에이. 서포터가 제대로 백업 해 줬으면 다 한 거지. 다른 애들도 그렇고."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긴 한데······."

다들 적재적소에서 훌륭한 움직임을 보여 줬다.

"그럼 다 동의한 걸로 알고 허니 베어의 꿀은 정확하게 나누는 걸로······."

그때였다.

"쿠오오오오오―!"

저 멀리서 짐승의 괴성 소리가 들렸다.

전신에 소름이 쫙 올라오며 나도 모르게 다리가 떨릴 정도로 맹렬한 기세를 품은 울부짖음이었다.

"뭐, 뭐야?"

"지금 그 울음소리는······."

"되게 가까웠지?"

다른 팀원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중 내가 느끼고 있는 당황과 불안은 다른 팀원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설마."

이 필드에서 저 정도의 기세를 품은 포효를 내지를 수 있는 존재는 내가 알기론 하나밖에 없다.

"폭군 드레이크?"

"뭐?"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드레이크의 영역은 이곳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다.

드레이크가 영역을 넘어서 여기까지 튀어 나올 리가 없다.

그러나 불안은 곧 현실이 됐다.

"꺄아아악!"

"도망가!"

저 멀리서 비명 소리와 함께, 나무들이 우그적 우그적 밟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까가각. 쿵!

우리 앞의 거대한 나무가 수수깡처럼 부러짐과 동시에.

"미친."

"크오오오오오오!"

폭군 드레이크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이빨 사이에는 아직 식지도 않은 피가 뜨끈하게 흘러내린다.

이미 몇 명을 씹어 죽인 것이다.

그리고 다음 사냥감은 우리인 듯했다.

"······이런 시발."

나는 근처에 놓아 둔 캐리어를 향해 전력으로 달렸다.

그러나 캐리어를 열 시간도 없었다.

쿵! 쿵! 쿵!

놈이 나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서율아!"

하시연이 놈에게 달려들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꺅!"

이대로라면 나는 반드시 죽는다. 아니, 나뿐만이 아니다.

2팀은 전멸이다.

"제길."

내 신체에 마력이 급격하게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윽!"

순간 머리가 핑 돌며, 어지럼증으로 인해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띠잉-

1초. 아니 2초 정도 흘렀을까.

아무튼 내가 드레이크의 먹이가 되고도 남았을 시간이 흘렀다.

나는 서서히 눈을 떴다.

"크르르···."

금빛이 보였다.

눈에 익은 찬연한 금빛 털.

"······금호야?"

금호가 내 앞에 위풍당당하게 서서 드레이크와 대치하고 있었다.

근 한 달 만에 보는 원래 크기의 금호였다.

대체 얘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지? 아니 그보다.

"너······ 왜 이렇게 커졌어?"

원래부터 코끼리만 했던 금호는 두 배로 커져 있었다.

< 74화 행동 (3) > 끝

< 75화 분노 (1) >

검령, 귀령 남매는 하늘에서 상황을 보고 있었다.

비행은 검령의 기술인 '이기어검술'을 이용해 하늘을 떠다니는 검 위에 서 있는 것이었고.

추가로 귀령의 특성을 이용하여 은신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뭐야 저 호랑이는?"

검령이 드레이크와 싸우고 있는 금호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왜?"

"저길 봐. 한창 날뛰고 있을 시간인데, 왜 이렇게 조용한가 했더니."

폭군 드레이크에 대적할 만한 몬스터가 연천 필드에 있었던가?

귀령이 드레이크를 바라봤다.

풀숲 너머, 사관생들의 생명력이 보인다.

"음. 근처에 사관생들이 있는 걸 보니까. 수호수 아닐까?"

"수호수가 재해급 몬스터와 다이다이 깔만큼 쎄다고?"

"부자들의 돈지랄이겠지."

"계획에는 지장 없을까?"

"음. 잠시만. 볼게."

귀령이 사방을 둘러봤다.

그녀의 눈은 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오히려 더 좋아진 것 같아. 날뛰는 범위가 축소되긴 했는데, 그 덕분에 경계 범위도 집중됐어."

경계 범위의 축소로 신지아를 납치하는 것이 더 쉬워졌다.

"그렇구만."

검령이 만족한 듯이 웃었다.

"그나저나 저 호랑이. 속도만 빠른 쭉정이네."

검령이 드레이크와 금호의 싸움을 지켜보며 넌지시 말했다.

"다른 스펙에서 드레이크가 압도적이야."

"저 정도면 잘 싸우는 거 아냐? 영역을 벗어나서 약화되긴 했어도, 재해급 몬스터랑 1:1로 버티는 거 보면."

"그렇긴 하다만."

얼핏 막상막하처럼 보이는 괴수 대전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드레이크는 공격에만 전념하고 있고, 금호는 회피에만 전력을 다하고 있다.

금호는 말 그대로 겨우겨우 버티고 있을 뿐이다.

"오! 방금 아까웠다!"

드레이크 앞발톱이 금호의 피부를 스쳤다. 다만 조금 얕았다.

"크~ 이게 괴수 대전의 맛인가? 재밌네."

검령이 껄껄대며 박수를 쳤다.

"오빠. 찾았어."

귀령이 한 방향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신지아를 포함한 1팀이 긴급 알림을 받고, 입구로 돌아가고 있었다.

"드디어 찾았냐."

귀령의 눈, '귀안'은 생명체만을 탐지한다.

지형지물을 무시하는 생명체 탐지는 이번 계획의 핵심이었다.

"드디어라니. 빨리 찾은 거지."

"뭐, 빠른 건 아니더라도 적당한 타이밍이긴 하네."

검령이 한 방향을 바라보며 사납게 웃었다.

"초인 놈들이 드레이크가 있는 쪽으로 빠르게 모이고 있구만. 딱 좋아."

검령의 특성은 '강자생존'. 강자를 느끼는 힘이다.

지금 강자들이 드레이크 쪽으로 몰리는 게 느껴진다.

"그럼 슬슬 행동하자고."

검 위에 선 검령이 목에서 뿌드득 소리를 내며 스트레칭을 했다.

* * *

"서율아. 금호 위험한 거 아냐?"

"······좋은 상황은 아니지."

우리는 멀리 떨어져서 금호와 드레이크의 전투를 바라보고 있었다.

드레이크가 왜 영토 밖으로 나와서 모습을 드러냈는가에 대한 건 아직도 오리무중이었지만.

금호가 나타난 이유는 추측해 볼 수 있었다.

가디언.

[수호자의 계약]의 힘일 거다.

특수 능력은 천차만별이라고 했으니, 아마 그 능력 중 하나겠지.

내 마력이 7할 가까이 사라진 게 그 증거다.

주인의 위기를 감지하고 날아올 수 있는 그런 특수 능력이 있는 게 아닐까.

"으. 저러다가 금호 크게 다치는 거 아냐?"

"우리 금호 다치면 안 되는데."

처음에는 금호라는 걸 몰랐던 팀원들은 두 번째 괴수의 등장에 두려워했지만.

금호라는 걸 알자마자 180도 태세를 바꿨다.

'우리 금호 힘내라!'

부터 시작해서,

'금호야! 다치면 안 돼!'

까지.

아주 팬 클럽 나셨다.

이해는 한다만.

나도 우리 금호 안 다치면 좋겠어.

"일단 괜찮을 거야. 드레이크의 강인한 맷집과 재생력을 뚫을 공격은 없지만. 속도는 금호가 위거든."

금호 특유의 감지 능력과 야성.그리고 빠른 속도가 있는 이상 드레이크에게 당할 일은 없다.

드레이크가 영역을 벗어났기에 완전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도 한 가지 이유가 되겠지.

"그래도 방금 손톱에 긁히기도 했구."

시연이가 불안한 듯이 말했다.

"저러다가 실수 한 번 하면······."

공격에 전념하는 드레이크.

방어에 급급한 금호.

유리한 건 당연히 드레이크였다.

방어만 해서는 이길 수 없으니까.

결국 시간은 드레이크의 편이다.

"괜찮아."

하지만 그건 드레이크와 금호가 1:1로 싸웠을 경우의 얘기다.

"시간은 우리 편이니까."

슬슬 올 때가 됐다.

한국 초인 사관학교 최강의 교관이.

"다친 사람은 없는 것 같군."

"교관님!"

피진호 교관.

그가 도착했다.

"자세한 상황은 전화로 다 들었다."

서늘한 검명과 함께 검집에서 검을 빼어 들었다.

"나중에 금호한테 맛있는 거라도 사줘야겠군."

터벅. 터벅.

우리를 지나쳐 드레이크와 금호가 싸우는 곳으로 걸어간다.

"다들 긴장해!"

"영역을 벗어나 약화됐다곤 해도 재해급 몬스터야!"

그런 피진호의 뒤로 뒤늦게 도착한 교관들이 하나둘씩 병장기를 빼어 들며 전투태세를 취했다.

"피진호 교관님. 조금 전까지 엄청 다급하게 뛰어오신 거 알아?"

그중, 한 여교관이 우리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의무실을 맡고 계시는 교관님, 진설하 교관님이셨다.

"아마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르셨을걸?"

그렇게 말하며 피진호 교관에게 시선을 돌렸다.

우리도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음 순간.

피진호의 신영이 신기루처럼 흔들리더니.

촤아아아악!

"쿠오오오오오!"

드레이크의 피부엔 거대한 자상이 새겨져 있었다.

"봐. 검흔이 엄청 투박하지? 화나셨다는 증거야."

"어······."

"음······."

다들 어리둥절하다.

"아. 피진호 교관님이 검을 휘두르는 걸 처음 보겠구나."

"네."

당연하지만 나도 처음 본다.

"아무튼 영역 밖으로 나온 드레이크는 우리 상대가 못 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네."

드레이크가 영역에서 나오지 않는 이유.

재해급 몬스터로 지정된 이유는 다름 아닌 특성 때문이다.

지정된 영역 내에서 강해진다는 심플한 특성.

그 특성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드레이크는 교관들의 합공을 버틸 수 없다.

덤으로 금호가 계속해서 시야를 분산시키고 있으니, 이정도면 프로 초인들이 도착하기도 전에 처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나저나 금호. 되게 똑똑하다 얘."

진설하 교관님이 내게 말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랑 연계하는 건데도 어쩜 저렇게 딱딱 치고 빠지는지. 저런 교육은 어떻게 했니?"

진짜 감탄한 표정이다.

나도 보면서 놀라는 중이다.

열댓 명이 넘는 초인들과 연계하는 건 처음일 텐데, 아주 깔끔한 움직임이다.

"나중에 금호 데리고 의무실에 놀러 와. 맛있는 거 내 줄 테니까. 금호 건강 상태도 봐줄 겸."

"네."

교관들의 등장으로 머리가 아주 냉정하게 식었다.

나는 침착해진 상태로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드레이크는 왜 도망가려고 하질 않는 걸까.

애초에 영역 내에서 왜 나온 건지도 모르겠다.

누군가가 영역 내에 침입을 했다고 해도, 영역 밖으로 도망치면 쫓지 않는 것이 드레이크의 습성이다.

드레이크에게 영역은 그만큼 중요하다.

그런 드레이크가 저렇게 사냥을 당하고 있는데도, 도망갈 기색이 1도 없다.

그 사실에 너무나도 큰 위화감이 느껴졌다.

필사적인 반항.

그 모습은 마치 자신의 새끼를 지키려고 하려는 어미의 필사적인 모습과 비슷했다.

그리고 드레이크에게 있어 '새끼'란 '영역'이다.

지금 저 모습은 영역에 들어온 침입자를 필사적으로 막으려고 하는 모습 같지 않은가.

"······잠깐만."

······이 장소를 자신의 영역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건가?

착각?

"설마!"

"서율아. 왜?"

순간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 같은 충격이 느껴졌다.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현재 상황과 원작의 지식이 섞여서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결론은 빠르게 도출됐다.

······지아가 위험하다.

나는 빠르게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지아한테 연락할 생각이었다.

[부재중 통화 : 신지아]

아니나 다를까, 조금 전 지아에게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정신이 없어서 눈치 채지 못했다.

"제길!"

불안이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서율아?"

"서율 사관생?"

나는 즉시 캐리어에서 '프로모시움 대거'를 꺼내 들었다.

전신에서 힘이 용솟음친다.

"제 스마트폰의 위치 정보를 바탕으로 추가 지원 부탁드립니다."

동시에 바닥을 박차고 내달렸다.

"서율아!"

뒤에서 시연이와 교관님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신체가속!"

프로모시움 대거에서 밝은 빛이 흘러나오며, 내 신체가 가속했다.

* * *

신지아를 포함한 1팀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사관생치고는 제법이야! 크하하!"

도주 중에 갑작스레 등장한 검령, 귀령 이인조 빌런에게 완전히 발을 묶여 버렸다.

도움을 요청하려고 해도, 휴대폰은 한참 전에 박살났다.

강서율에게 전화를 거는 동시에 검령이 박살냈다.

"오빠. 빨리 끝내. 시간 없어."

"동생아. 이쪽으로 다가오는 강자의 기운이 하나도 없는데 뭐가 걱정이냐."

"그러다가 마에스트로 님한테 또 혼난다?"

"······음. 그건 조금 무섭군."

둘은 여유로웠다.

"······."

신지아는 슬쩍 주위를 살폈다.

신지아를 제외한 1팀 팀원들은 모두 치명상을 입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다행히 모두 숨은 붙어 있다.

'일부러 숨을 붙여 놓은 거야.'

자신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뭐야 그 앙칼진 눈빛은. 나한테 반하기라도 했어?"

"오빠. 세상에 그 어떤 여자가 오빠를 보고 반하겠어. 정신 차려."

신지아의 상태도 그리 좋지는 못했다. 장비는 반쯤 파괴됐고, 전신에 자상이 가득했다.

실전 훈련을 대비해 풀 장비를 착용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훈련용 장비를 착용하고 있었다면 한참 전에 쓰러졌을 것이다.

"아무튼 빨리 끝내."

"알겠다. 알겠어. 거 참 성미만 급해서."

검령이 귀를 후비며 앞으로 나섰다. 동시에 그의 등 뒤에 떠다니던 8자루의 검이 신지아를 향해 쏘아졌다.

검들이 제각각 의지를 지닌 것처럼 자유분방하게 움직인다.

그 기이한 움직임에 신지아는 완벽하게 반응하지 못했다.

하지만 피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저들의 목적은 나를 생포하는 것.'

고로 절대 심장이나 머리 같은 즉사의 위험이 있는 급소는 노리지 않는다.

공격 범위는 사지.

그것도 기동성을 죽이기 위해 두 다리에 집중될 가능성이 크다.

즉, 두 다리만 어떻게든 지켜내면 된다.

신지아는 필사적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이미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반으로 잘려 버린 활은 검을 튕겨내는 용도로 사용했다.

바닥을 구르면서, 필사적으로 검을 피했다.

상처에 흙먼지가 들어가며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아픔이 느껴졌다.

푸확!

급소와 다리를 제외한 신체에 계속해서 상처가 늘어갔다.

그러나 신지아는 개의치 않았다.

'······두 팔이 사라져도 괜찮아. 다리만 멀쩡하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어.'

다리에 상처를 입는 순간 모든 게 끝난다.

다리만 지키면 된다.

그런 강인한 의지로 버티고 또 버텼다.

"독하네. 쟤."

"그러게."

그 모습을 보며 검령과 귀령이 혀를 내둘렀다.

실력 차이는 하늘과 땅 만큼 난다.

그저 검령과 귀령의 목적이 신지아를 '생포'하는 것이기에 시간이 걸리고 있다 뿐이지.

만약 생사결이었다면 신지아는 1분도 채 되지 않아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적당히 포기해. 어차피 주위에 느껴지는 기척은 없어."

강자는커녕 느껴지는 인기척도 없다.

"다들 드레이크 신경 쓰느라 바쁠 때니까."

귀령도 마찬가지였다.

주위를 다시 쓱 훑어봤지만,

근처에 생명체는 보이지 않는다.

검령과 귀령 입장에서는 신지아가 저렇게 필사적으로 버티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저 모습은 마치 시간만 버티면 누군가가 반드시 구해 주러 올 거라 확신하는 모습 같지 않은가.

그러나 신지아의 분투는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꺅!"

"옳거니!"

한 자루의 검이 신지아의 종아리를 크게 베어 냈다.

털썩-

힘이 빠진 신지아가 바닥에 철푸덕 쓰러졌다.

"드디어 쓰러졌네."

"그러게. 예정보다 1분 정도 늦었어."

"음. 이건 마에스트로 님도 용서해 주시지 않을까?"

"아마도?"

검령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다른 검으로 신지아의 남은 한 쪽 다리에도 큰 상처를 입혔다.

푸확!

"끕!"

크게 피가 튀었다.

"그럼 슬슬 튈 준비 하자고."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신지아는 입술을 꽉 짓씹었다.

"하아··· 하아···."

이제 정말 사지가 말을 듣지 않는다.

너무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일까. 정신이 점점 아득해져 간다.

당장이라도 잠들 것 같은 몽롱함과 함께, 신지아의 희망이 조금씩 마모되어 갔다.

자신은 아마 목숨을 잃게 되겠지.

진리의 구명자에게 끔찍한 방법으로 고문을 당할지도 모른다. 사례집에서 본 것처럼 누구에게도 말 못할 꼴을 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제일 슬프고 분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죄송해요. 선조님.'

신지아는 강서율에 대한 정보를 굉장히 많이 알고 있다.

지금 저들에게 납치되면, 그 정보는 빌런들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선조님이 힘을 봉인하면서까지 지키고 싶었던 비밀을······.'

신지아 자신이 고통에 못 이겨 불게 될 수도 있고.

진리의 구명자 소속 빌런들 중에 마음을 조종하거나, 정보를 불게 만드는 특성을 지닌 자가 있을 수도 있다.

아마 높은 확률로 정보는 유출될 것이다.

신지아는 그것이 제일 걱정됐다.

'이렇게 된 이상······.'

그렇기에 신지아는 목숨을 끊기로 했다.

어차피 적들의 손에 넘어가면 자신은 죽는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렇게 혀를 강하게 깨물려고 할 때였다.

"얘. 자살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

"!"

귀령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내 특성 중에는 '치유'도 있거든. 너만 괴로워질 거야."

"······아."

그 말과 함께, 신지아의 눈엔 초점 대신 절망이 어렸다.

정말 이걸로 끝이구나.

'죄송해요. 선조님······.'

신지아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자. 그럼 진짜 돌아가자고."

"응."

그렇게 검령이 신지아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였다.

촤아아아악-!

무언가가 잘리는 소리와 함께.

"······어?"

검령의 손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턱-

바닥에 떨어진 검령의 손을 누군가의 발이 짓밟았다.

"좆 같은 새끼들아."

전신에 혈관이 파열할 듯 튀어 나와 있는 남자.

"반갑다."

지옥의 악귀나찰이 겹쳐 보일 정도로 짖은 살기를 내뿜고 있는 강서율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강서율은 귀령의 뒤에서 단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 75화 분노 (1) > 끝

< 76화 분노 (2) >

캉!

아쉽게도 내 단검은 귀령의 목을 베어 내지 못했다.

순식간에 정신을 차린 검령이 두 개의 검을 움직여서 내 공격을 막았다.

역시 일이 쉽게 풀리진 않는 모양이다.

검령이 잘려나간 팔의 단면부에서 피를 줄줄 쏟으며, 사나운 형상으로 나를 노려본다.

"······너. 어디서 나타났지?"

검령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옆에 서 있는 귀령도 마찬가지였다.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다.

당연하겠지.

지금 검령의 '강자생존'과 귀령의 '귀안'에는 내 존재가 감지되지 않을 테니까.

그렇기에 첫 기습으로 놈의 팔을 잘라낼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저들의 특성에 감지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검령과 귀령의 특성은 '시스템'에 기반한 색적 능력이다.

검령의 강자생존이 강자를 판단하는 기준은 능력치.

귀령의 귀안이 생명체라 판단하는 것도 능력치를 감지하는 것이다.

물론 저놈들한테 곧이곧대로 대답해 줄 생각은 없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슬쩍 시선을 내려 전신에 상처를 입고 숨을 색색이는 지아를 살폈다.

심한 상처다.

그 상처를 보고 있노라니, 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분노.

지아가 타겟이 될 거란 걸 알면서도 안일했던 나 자신에게 느끼는 분노이자,

지아를 이 지경으로 만든 저 두 빌런에게 느끼는 분노였다.

꽈아악-

나는 '프로모시움 대거'를 다시금 움켜쥐었다.

그리고 지면을 박찼다.

빠르게 풍경이 변한다.

"오빠!"

"큭!"

프로모시움 대거의 첫 번째 고유 특성 '신체 가속'

말 그대로 신체의 민첩성을 올려주는 버프형 특성이다.

캉! 칭!

포식자의 살의 완전 체화로 D랭크에 다다른 민첩에, '프로모시움 대거' 자체의 성능.

거기에 '신체 가속'으로 추가적인 부스트가 추가됐다.

현재 내 민첩은 A랭크 초입에 다다랐을 거다.

"이, 새끼가!"

상대는 내 빠른 속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여덟 자루의 부유하는 검을 자유자재로 다룬다는 공수만능의 특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방어에만 전념하고 있는 게 그 증거다.

캉! 까가각!

사방에서 철소리가 울렸다.

물론 검령은 지아를 1:1로 압도할 만큼 강력한 전투력을 지닌 빌런이다.

신체 능력은 S랭크에 가까운 누구보다도 간부에 가까운 전투력을 지닌 빌런.

그의 민첩은 A랭크 상위.

즉, 나를 아득히 뛰어넘은 상태다.

"이 날파리 같은 새끼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움직임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 날파리도 못 잡는 너는 뭐지? 아메바인가?"

첫 번째.

특성 차이.

같은 A랭크라도 특성에 따라 전투력은 천차만별이다.

그리고 나는 일반 특성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종족 특성들과, '무기의 주인(만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조금 능력치가 밀리더라도 대등하게 싸울 수 있다.

"어째서··· 감지가! 큭!"

카앙!

그리고 두 번째 이유.

검령과 귀령의 색적 능력이 나에겐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시력에 의존한 채 전투를 벌이던 검사가 시력을 잃은 것과 같다.

검령의 '이기어검'은 '강자생존'의 색적 능력이 없으면 성립할 수 없는 특성이다.

8개의 검을 자유자재로 다룬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니까.

한쪽 팔을 잃은 상태라는 것도 한 가지 이유가 되겠지.

"오빠! 꺄악!"

귀령은 애초에 전투에 특화된 빌런이 아니다. 당장은 신경을 꺼도 된다.

나는 벼락같은 공세를 이어 갔다.

바람의 길을 따라서 검을 어지럽게 내리긋자, 여덟 자루의 검들이 자석처럼 얽혀 든다.

"이 자식, 어떻게······!"

조급함이 섞여 단순해진 여덟 개의 검로는 바람의 길에 의해 모조리 간파될 뿐이다.

여덟 개의 검을 막아서는 단 하나의 검.

단 일 합.

누가 먼저 지칠지는 자명한 일이었다.

푸확!

"큭!"

어느덧 검령의 신체는 크고 작은 자상으로 가득했다.

정확히 10초 안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몰아붙인다면, 검령의 목을 베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

하지만 내게는 그럴 시간이 없다.

50초.

내가 이 '프로모시움 대거'를 손에 쥔 후로 흐른 시간이다.

지아를 찾기 위해서,

빠른 이동을 위해 사전에 '프로모시움 대거'를 들 수밖에 없었고.

이동하면서 30초라는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앞으로 10초 후.

나는 이 단검을 손에서 놓아야 한다.

그리고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10초 안에 검령을 마무리하는 건 무리인 듯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일단 공격을 멈추고 지아의 앞에 자리잡았다.

계획대로 그 수를 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후우."

차가운 분노를 느끼며,

내 정신이 더욱 차갑게 식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 * *

신지아는 몽롱한 시선으로 강서율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뢰해 마지않는 믿음직스러운 등. 그 등이 분노로 점철되어 거칠게 들썩이고 있었다.

그의 분노를 느끼며, 신지아는 죄송함을 느끼는 동시에 안도했다.

'나 때문에 화를 내 주시는구나.'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났다.

강서율이 질 리가 없다고 확신하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일까.

조금씩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늦어서 미안하다."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신지아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입술만 달싹일 뿐.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피곤하면 조금 자고 있어. 일어나면 모든 게 끝나 있을 테니까."

자상한 목소리.

그 목소리에 긴장감이 스르르 풀려 갔다.

꾸벅, 꾸벅.

신지아의 정신이 점점 아득해지더니, 이내 뚝 끊겼다.

"······."

그 모습을 힐끔 바라본 강서율이 다시 분노로 가득 찬 얼굴로 검령을 노려봤다.

검령과 귀령은 강서율에 대한 경계심이 극에 달해 먼저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 전의 그 초속의 전투를 생각하면 경계하는 게 당연했다.

'······저 새끼는 대체 뭐야.'

속도는 절대 빠르지 않다.

아니, 빠르다면 빠르지만 반응하지 못할 속도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응할 수가 없다. 어떤 자세에서도 반드시 빈틈을 노려 오고, 일격 일격이 치명적이다.

게다가 감지가 통하지 않아, 이기어검을 마음껏 펼칠 수도 없다.

'제길.'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오빠. 시간이 없어."

귀령이 소곤대듯이 말했다.

눈앞의 남자가 아무 말도 없이 혼자 이곳에 왔을 리가 없다.

당연히 교관이나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고 온 것이겠지.

"······알고 있다. 주위의 움직임이 산만해졌어."

아직 이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진 못한 것 같지만, 그것도 시간문제겠지.

"동생아. 혼란귀를 부탁한다."

혼란귀.

결계형 특성으로, 짧게나마 인식을 비틀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알았어."

싸늘한 마력이 퍼졌다.

강서율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검령은 그 즉시 반응했다.

'조금은 익숙해졌어!'

강자생존이 없는 것에 아주 조금은 익숙해졌다.

강서율의 움직임이 조금은 잘 보인다.

여덟 자루의 검을 동시에 날려, 강서율을 포위했다.

그 순간, 강서율의 전신에서 마력이 넓게 방사됐다.

화르르르르륵-!

반투명한 불꽃.

너무 은은해서 이게 정말 불길인지 착각마저 일 정도로 나약한 불길이었다.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 마력으로 '이기어검'을 막을 수는 없다.

'이겼다!'

검령이 승리를 확신하며 미소를 지었을 때였다.

"찾았다."

강서율의 입꼬리도 씨익 올라갔다.

그의 눈은 한 자루의 검을 정확히 노려보고 있었다.

"무슨!"

그리고 다음 순간, 강서율의 신체가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검령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움직임으로 네 개의 검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고,

촤악!

두 개의 검은 살을 내주며 피했다.

까가각-!

그리고 남은 두 개의 검 중 하나를 단검으로 비스듬히 흘려내더니.

마지막 한 자루의 검을 강하게 후려쳤다.

콰아아아앙!

맹렬한 충돌음과 함께, 마지막 한 자루의 검이 지면에 쑤욱 박혔다.

하지만 대가가 없는 건 아니었다.

무리하게 마지막 검을 후려쳤기 때문일까.

강서율의 단검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단검은 정확히 검령의 발 앞에 꽂혔다.

공격을 막고 자신의 무기를 놓치다니, 누가 보면 멍청하다고 매도할 만한 모습이었다.

'병신!'

실제로 검령도 똑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강서율은 웃었다.

파지지직-

그의 오른손.

'프로모시움 대거'를 쥐고 있던 손에선 스파크의 잔상이 튀고 있었다.

[Error! Error!]

익숙한 에러 메시지를 보며 쾌재를 불렀다.

'저스트 1분!'

모든 것은 계획대로다.

* * *

나는 바닥에 깊이 박혀 부들부들 떨고 있는 이기어검을 바라보며 목에 걸고 있는 '무기의 극의'를 거칠게 벗어 던졌다.

그리고 그 검을 손에 쥐어 들어 올렸다.

"병신! 그 검은 귀속 아이템! 네가 들 수 있는 무기가······!"

"알아."

검령의 주력 무기.

레비테이션 소드.

효과는 여덟 자루로 분신하는 '여덟 자루의 검'

또한 각인의 불길과 마찬가지로 습득 시 사용자에게 귀속되는 '귀속형 아이템'이며.

마지막으로.

"특성. 이기어검을 보유한 자만 착용할 수 있다. 다 알고 있다고."

특성 제한이 걸린 아이템이기도 하다.

나는 레비테이션 소드를 뽑아 들었다.

손에 착 감기는 맛이 일품이다.

그 순간, 허공을 날던 일곱 자루의 검이 스르르 사라졌다.

"······너!"

귀령의 눈이 경악으로 확장됐다.

"조금 전의 마력 방사는 이 검의 본체를 알아보기 위한 거였어."

각인의 불길과 정령의 불길의 콜라보레이션.

마력을 태워 버리는 정령의 불길을 은은하게 살포하여, 레비테이션 소드의 분신체에 미약한 자극을 줬다.

조금 전, 거리를 벌리고 5초간 가만히 있던 것은 이 광범위 방사를 준비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분신체는 미세하게 형태가 일그러졌고, 나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다음은 간단했다.

마지막 남은 힘을 다 짜내서 놈의 검을 피하고, 본체를 정확히 가격. 즉시 이동하지 못하게 바닥에 쳐박아 버렸다.

"고맙다. 이건 내가 잘 써 주마."

나는 레비테이션 소드를 이리저리 휘두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너, 이 새끼!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짓을 했냐고?"

능력치 제한.

종족 제한.

특성 제한.

나는 이것들을 무시할 수 있는 '힘'을 지녔다.

시스템의 법칙을 완전히 무시하는 힘을 지녔다는 말이다.

그리고 '착용시 귀속 아이템'도 결국 시스템의 법칙 중 하나일 뿐이다.

물론 저들에게 내 비밀을 알려 줄 생각은 조금도 없다.

"좋은 짓."

나는 그 법칙을 무시할 수 있는 세계에서 유일한 이단아.

그런 나한테 귀속 제한을 믿고 아이템을 휙휙 던져 오다니.

잘 써 달라는 거나 다름없잖아?

그래서 잘 써 주기로 했다.

"그럼 슬슬 끝내자고."

나는 레비테이션 소드에 얼마 남지 않은 마력을 가능한 한 퍼부었다.

"여덟 자루의 검."

지이이잉-!

검이 두 자루로.

네 자루로.

그리고 마지막 여덟 자루로 늘어났다.

나는 본체를 쥔 채로, 일곱 자루의 검을 하늘에 띄웠다.

"······어떻게 이기어검까지!"

검령이 당황한 듯 손가락질 하며 소리쳤다.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귀령도 마찬가지였다.

"너희 용의 역린이라고 알아?"

나는 둘이 당황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말했다.

"건드리면 반드시 살해된다. 뭐 이런 뜻을 가진 말인데."

내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너흰 내 역린을 건드렸어."

일곱 자루의 검 끝이 귀령과 검령을 가리켰다.

검령은 예비 무기따윈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레비테이션 소드와 이기어검을 완전히 신뢰했기 때문이다.

"둘 다 죽어."

나는 검을 쏘았다.

이기어검.

처음 사용해 보는 특성이지만, 사용 방법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시바알!"

검령이 포효하며 바닥을 굴렀다.

과연 검령이라고 해야 할까.

무기도 없는데 훌륭한 회피였다.

"꺄악!"

전투 능력이 부족한 귀령은 양 다리에 검이 꽂인 채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익숙지 않은 통증에 정신을 잃은 듯하다.

주위에서 느껴지는 꺼림칙한 마력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혼란귀가 풀린 것이리라.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나는 귀령의 두 다리에 꽂인 검까지 빼서 검령을 노렸다.

검령의 이마에 식은땀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제길! 제길! 제기이일!"

설마 자신이 이기어검에 당하리라곤 생각도 못했겠지.

나는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골계(滑稽)

광대의 익살스러움이 느껴지는 발버둥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검령의 눈에서 필사의 의지가 느껴졌다. 죽음을 각오한 자의 눈이다.

그가 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바닥을 굴렀다.

"너만은 꼭 죽인다!"

바닥에 박힌 '프로모시움 대거'를 줍기 위한 행동이었다.

무기가 없는 이상, 그렇게 나오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지만.

"병신."

그마저도 내 계획 중의 하나였다.

내가 괜히 프로모시움 대거를 그쪽으로 날렸는 줄 알아?

탁-

검령이 프로모시움 대거를 손에 쥔 순간.

파지지지지직!

"끄아아아아악!"

맹렬한 스파크가 튀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떨림이다.

거절 현상.

자격이 없는 자가 고대 유물에 손을 댔을 경우 벌어지는 '반동'이다.

"짜릿하지?"

심할 경우 즉시 재가 되어 버리기도 한다.

다행히 프로모시움 대거의 거절 현상은 그 정도까진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냥 조금 강력한 전류 정도로 끝난 것 같다.

"끄, 어어어···억."

털썩-

검령이 흰자위를 뜬 채 바닥에 널브러졌다.

"바닥에 떨어진 무기를 함부로 주우면 안 된다는 거 몰라? 귀속형 아이템이면 어쩌려고 그래?"

나는 전신을 파르르 떠는 검령을 바라보며 조소했다.

"이, 시··· 바을 새끄가. 느가 할 마리···."

혀가 마비된 것인지, 제대로 발음도 못하고 있다.

"하."

대충 내가 할 말이냐고 하고 싶은 거겠지.

나는 레비테이션 소드 두 자루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거 웃기는 놈이네."

내 등 뒤로 두 자루의 검이 솟구쳤다.

두 자루의 검이 각자의 방향을 정하자 검령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어···어으······!"

"내가 할 말이냐고?"

검은 허공에 박힌 듯 마침내 정확히 고정되었다.

"너랑 내가 같냐? 이 새끼야?"

내 눈동자에서 시퍼런 안광이 흘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컥!"

"꺄악!"

두 자루의 검은 검령과 귀령의 목을 꿰뚫고 있었다.

"그냥 나가 뒤져."

내 분노가 차갑게 일렁였다.

< 76화 분노 (2) > 끝

< 77화 뒤처리 (1) >

검령과 귀령의 숨이 완전히 끊긴 것을 확인한 나는 가장 먼저 지아를 비롯한 1팀 사관생들의 상처를 확인했다.

"······다행이다."

모두 살아 있다.

이 정도 출혈량이면 과다출혈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정신만 잃었을 뿐, 어찌어찌 모두 숨은 붙어 있다.

초인의 생명력 덕분이리라.

나는 간이 포켓에서 응급 치료약을 꺼냈다.

하나밖에 없어서 가장 상처가 심한 지아의 상처에 바르기로 했다.

"읏."

따가운지, 눈을 감은 채로 신음을 내뱉었다. 아름다웠던 얼굴이 먼지와 피로 엉망이다.

"에휴."

다 내 실수다.

검령과 귀령의 능력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드레이크와 연결짓지 못한 내 실수.

······아니, 거기까지 예측한다는 것 자체가 오만인가.

나는 쓰게 웃었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검령의 시체 옆에 꽂혀 있는 프로모시움 대거를 향해 다가갔다.

"······이걸 어떡하지?"

이걸 숨겨야 하는데 숨길 방법이 없다.

급하게 오느라 장비 운반 캐리어를 두고 왔다.

나는 프로모시움 대거에 손을 댔다.

파직-!

"앗 따거!"

역시 쥘 수 없다.

"······진짜 큰일인데."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귀령이 펼친 혼란귀의 여파가 아직 남아 있다.

혼란귀의 효과가 모두 사라지면, 지원이 도착할 거고.

지원 온 초인들은 당연히 프로모시움 대거에 관심을 가질 거다.

그 다음은 단검이 고대 유물이라는 걸 알아 챌 것이고.

내가 이 단검을 쥐었다는 것도 금세 밝혀질 것이다.

진설하 교관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 장면을 봤으니까.

그럼 내 비밀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것만큼은 어떻게든 피해야 한다.

"대충 30초 남았나."

혼란귀의 여파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대충 30초.

그 전에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그러나 내 생각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이게 대체······."

"!"

뒤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 온 것이다.

나는 잽싸게 뒤를 돌았다.

"유화··· 씨?"

유화였다.

유화는 다급한 몸짓으로 정신을 잃고 있는 사관생들을 차례차례 살피고 있었다.

"휴."

모두 숨이 붙어 있다는 걸 알았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결계를 뚫고···?"

어떻게 혼란귀를 뚫고 온 거지?

"출동 요청 받고 왔죠. 결계는 그냥 뚫고 왔고요. 제 은신은 외부 상태이상에 면역이거든요."

"아."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런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혼란귀를 무시할 수 있었던 거구나.

"그보다."

유화가 검령, 귀령의 시체를 훑고. 마지막으로 내 발치의 프로모시움 대거를 노려봤다.

"역시."

무언가 확신에 찬 눈빛이다.

설마 이게 뭔지 아는 건가?

"······그거. 에일 씨한테 받은 고대 유물이죠? 수인족의 유물."

나는 이마를 짚었다.

다른 사람들은 대거의 정보를 확인하지 않는 한, 이게 고대 유물인지 일반 아이템인지 알 방법이 없다.

하지만 유화는 다르다.

유화는 콜렉터와 나 사이를 연결하는 파이프다.

당연히 이 단검에 대한 걸 자료로 봤을 거다.

그걸 기억하고 있는 거겠지.

"그,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된 이상 약속의 플랜 C.

'사실 전 수인이에요! 컹컹!'

작전으로 갈 수밖에 없다!

"전 사실······."

그렇게 거짓을 입에 담으려고 할 때였다.

"됐어요. 다 알고 있으니까."

"예?"

유화가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내 말을 끊었다.

나는 벙쪘다.

······알고 있다고? 뭘?

"무슨 말······."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해요. 시간 없잖아요?"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와 허리춤의 포켓에서 손바닥만 한 상자를 꺼내 들었다.

"뭘 하시려고······."

"일단 이걸 숨겨야 되잖아요?"

"그, 숨겨야 되는 건 맞는데."

촤라라락-

동시에 상자 요란한 기계 소리를 내며 점점 부피를 늘려갔다.

"······휴대용 운송 캐리어?"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프로 초인들은 하나씩 소비하고 다니는 고가의 장비다.

"네. 크진 않지만, 단검 정도는 충분히 들어갈 거예요."

유화는 그 장치를 열어, 프로모시움 대거 앞에 두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패널을 조작했다.

그러자 캐리어에서 마력이 뿜어져 나오며, 프로모시움 대거를 감쌌다.

"······반중력 장치까지 달려 있네요?"

저거 엄청 비싼 걸로 아는데.

"익숙해지면 제법 편리하거든요."

유화의 조작에 맞춰 바닥에 박혀 있던 단검이 두둥실 떠올라, 캐리어 안으로 쏙 들어갔다.

탁-

유화가 마지막 조작을 마치고 캐리어를 닫은 순간이었다.

―이쪽이야!

―인식 장애 결계가 풀렸어!

멀리서 초인들의 소리가 들렸다.

혼란귀가 완전히 풀린 모양이다.

"서율 씨."

유화가 캐리어를 들고 내게 말했다.

"저만 믿어요."

"······?"

내 머릿속이 의문으로 가득 찼다.

* * *

폭군 드레이크 폭주 사건은 말 그대로 드레이크가 미쳐서 날뛴 사건으로 처리됐다.

희생자는 총 12명.

두 팀이 드레이크에게 희생되었다.

오늘 아침.

학교에서 그 12명의 장례식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오후 7시.

나는 유화의 멘션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안타깝네요. 꽃다운 나이에."

유화가 내게 차를 건네며 쓰게 웃었다. 나는 그 차를 홀짝 마셨다. 씁쓸한 차를 마셨기 때문일까. 내 입가도 씁쓸해졌다.

"지아 씨는 어때요?"

"다리에 상처가 심하긴 한데, 다행히 후유증은 안 남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아직 깨어나진 못한 거구요?"

"예."

지아가 병원에 이송된 지 24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지아는 아직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마력을 너무 과하게 써서 그런 걸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요."

내 표정이 좀 그랬던 것일까.

유화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보다 귀령, 검령 일은 어떻게 처리 됐나요?"

"잠시만요."

유화가 찻잔을 테이블에 내리고,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사건 처리 서류였다.

"일단 신화 그룹이랑 얘기해서, 공식적으론 발표하지 않기로 했어요. 사관학교 측에서도 발표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표했고요."

"역시 그렇게 됐군요."

신화 그룹의 금지옥엽(金枝玉葉)이 진리의 구명자 소속 빌런에게 납치를 당할 뻔했다니.

신화 그룹 입장에서도, 사관학교 측 입장에서도 숨기고 싶은 치부일 테니까.

당연히 숨기고 싶어 할 수밖에.

"아. 그리고 프로모시움 대거 말인데요."

흠칫.

유화의 말에 내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 단검의 존재는 제가 잘 감췄으니까,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거예요."

"······그렇군요."

유화가 싱긋 웃었다.

그 후로 짧은 정적이 흘렀다.

"유화 씨는······."

나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어떻게 고대 유물을 사용할 수 있는지. 궁금하지 않나요?"

"네."

유화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차를 홀짝였다.

"그때도 말했지만, 이미 다 알고 있거든요."

내 눈썹이 날카로워졌다.

유화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뭘 알고 있다는 건가요?"

유화가 확신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서율 씨의 과거."

내 과거?

······설마.

유화가 또 하나의 서류를 꺼내 내게 넘겼다.

[햇빛 고아원 생체 실험 기록]

······또 너냐?

생체 실험 보고서.

또 네가 범인이야?

근데 이거 어떻게 찾은 거야?

사건을 은폐하는 데 일조한 당사자가 아니면 손에 넣을 수 없는 기록일 텐데.

아니, 그보다 햇빛 고아원 인체 실험이랑 내가 고대 유물을 사용할 수 있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

"서율 씨는 종족 융합 프로젝트의 생존자죠?"

"······."

아닌데요.

시스템 초월 프로젝트의 생존잔데요.

"수인족의 고대 유물을 사용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실험에서 수인족의 인자를 융합했기 때문일 테고요."

그건 창조주한테 술 마시고 막말했다가 시스템에 에러나서 그런 겁니다.

"이러면 첫 교섭에서 맹호의 건틀릿을 요구했던 것도 납득이 가요."

그 일은 도플갱어도 처리할 겸 뭐 하나 얻을 게 없나 생각해 보니, 그것밖에 안 떠올라서······.

"실험을 벌인 건 진리의 구명자. 복수심을 품는 건 당연해요. 그래서 진리의 구명자를 쫓는 거잖아요. 피알레 알로, 도플갱어, 표일찬, 베가본드. 대가를 바라지 않는 이유도 복수를 위해서일 테고요."

그것들은 그냥 여러 가지 상황이 겹쳐서 그랬던 것뿐이다.

진리의 구명자는 그냥 내 목적에 방해되는 놈들이라서 없애 버리려는 것뿐.

아니, 애초에 피알레 알로는 진리의 구명자도 아닌데, 왜 저 사이에 껴 있는 거야?

"진리의 구명자에 대한 정보에 빠삭한 이유는, 실험 당시 연구원들의 말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 맞죠?"

그건 내가 원작 소설을 알고 있기 때문이고.

"다양한 고대 유물을 모으시는 걸로 보아, 수인족을 제외한 다양한 종족들의 인자도 품고 있을 가능성이 클 테고요."

다른 종족의 인자를 이식받은 적은 없다.

"제 말 중에 틀린 게 있나요?"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어, 음.

뭐가 틀렸냐고 물으신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겠다.

······그냥 다 틀렸다.

물론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당황해서 입술을 달싹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눈동자도 마찬가지로 당황으로 갈 곳을 잃고 마구 흔들렸다.

"······아."

그러자 유화가 세상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랬죠."

죄책감으로 점철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안해요. 그 일은 서율 씨한텐 트라우마일 텐데. 제가 섬세하지 못했어요."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

그리곤 옆에서 나를 상냥하게 안았다. 내 신체가 당황으로 경직됐다.

"지금까지 많이 힘들었죠?"

"······."

나는 녹슨 기계처럼 목을 끼기긱 돌려서 코앞에 있는 유화의 얼굴을 바라봤다.

날 똑바로 직시하는 유화의 눈동자엔 물기가 가득했다.

"혼자서······ 그 실험을 몇 년이나 버텨 내고. 아무한테도 말 못한 채 혼자서······."

목소리가 울먹임으로 떨렸다.

"하지만 이젠 괜찮아요."

유화가 내 양 어깨를 붙잡고, 환하게 웃었다.

내가 본 유화의 미소 중 가장 싱그러운 미소였다.

"앞으로 서율 씨 옆엔 제가 있을 테니까요."

"······."

그 미소를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

아니.

생각을 그만뒀다.

* * *

―······진짜?

그날 밤.

유화는 메이든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진짜 그런 낯 뜨거운 말을 했다고?

"······으으으."

유화는 침대에 누워 얼굴을 박은 채 신음을 흘렸다.

―푸하하하하!

수화기 너머로 메이든의 웃음소리가 호쾌하게 울렸다.

―화 네가 감수성이 풍부한 건 익히 알고 있었다만. 설마 그정도일 줄은 몰랐다. 크크!

유화는 귀까지 시뻘개진 채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니이! 어, 언니가 그 표정을 봤어야 한다니까요? 제 얘기가 이어질 때마다 눈에서 빛이 사라져 가는 게 얼마나 안타깝던지."

배게에서 눈을 뗀 유화의 얼굴은 토마토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입술도 막 부들부들 떨리고! 동공은 갈 곳을 잃은 채 흔들리고! 안색은 점점 창백해져 가고! 진짜 장난 아니었다니까요!"

―······그 정도였어?

메이든이 웃음을 멈췄다.

"네. 평소였으면, 아니라고 시치미라도 뗐을 사람인데. 한 마디 말도 못하고. 어깨만 흠칫흠칫 떠는 게. 무슨 상처 입은 아기새 같았다니까요? 언니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 저랑 똑같이 행동하셨을걸요?"

유화가 정색했다.

메이든도 정색했다.

―아무리 그래도 '앞으로 서율 씨 곁엔 제가 있을 테니까요. 싱긋' 은 아니지.

"······읏!"

유화가 입술을 짓씹었다.

그 말에 다시금 부끄러움이 치솟았다.

'내가 미쳤다고 그런 말을 해서!'

―자료만 봐도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인데. 그 실험을 직접 겪은 사람이 트라우마가 없을 수가 없지.

메이든이 이를 바드득 갈며 말했다. 그 실험으로 죽은 메이든의 딸 레아를 떠올린 것이다.

―오히려 지금 웃고 있는 게 신기한 거야.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만약 자신이 강서율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었다면 어땠을까.

지금의 강서율처럼 웃고 장난치며 생활할 수 있을까.

유화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꼬맹이는 심지가 강하니까 알아서 잘 할 거야. 그런 애들한테 괜한 배려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으니까, 지금까지 대했던 것처럼 하고.

"저도 알고 있거든요?"

―알면 됐고.

유화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래도 나름 길드장인데, 언제까지 애처럼 취급하려는 건지.

―아. 그리고 생각보다 준비가 빨리 돼서. 내일 새벽 비행기로 한국에 갈 거야.

"고대 유물은요?"

메이든이 일단 귀국한 이유는 강서율에게 줄 고대 유물을 반입할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해로를 통해서 잘 오겠지. 고속선이니까, 금요일 밤쯤에는 도착할 것 같아.

"다행이네요."

―그나저나 그 꼬맹이가 좋아하려나 모르겠네.

유화가 넌지시 답했다.

"좋아하시겠죠. 그나저나 몇 개나 찾았어요?"

―뭐가?

"창고에 박혀 있던 고대 유물의 숫자요."

―아. 내가 말 안 했던가? 생각보다 별로 없더라고.

메이든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3개 있더라.

< 77화 뒤처리 (1) > 끝

< 78화 뒤처리 (2) >

설마 메이든 크리티네스의 딸이 원작의 강서율과 똑같은 실험을 받았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러면 메이든도 사건의 관계자라는 게 되니까, 유화가 보고서를 손에 넣은 것도 이해가 간다.

또한 원작의 메이든 크리티네스가 주인공을 편애하던 이유도 모두 설명이 된다.

죽은 자신의 딸과 같은 아픔을 공유하고 있는 주인공에게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근데 설마 나를 종족 융합 프로젝트의 생존자라고 판단할 줄이야. 상상도 못했다.

아니, 유화의 마음을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니다.

유화의 가설은 모두 이치에 들어맞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의문들이 내가 종족 융합 프로젝트의 생존자라고 가정할 경우 모든 게 설명 가능했으니까.

"아. 진짜 더럽게 꼬였네."

나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하시연, 신지아 그룹과 유화의 인식이 완전히 갈려 버렸다.

한쪽은 세계를 구원할 영웅.

한쪽은 진리의 구명자에게 인생을 빼앗긴 피해자.

도저히 묶을 수가 없는 착각이다. 이러면 세 명의 도움을 받는데 있어 제약이 좀 많아진다.

다행인 건 지아와 유화 씨가 견원지간이라는 건데.

둘을 화해시키는 건 일단 미뤄야 하나? 아니, 나중을 생각하면 둘이 친해지긴 해야 하는데.

"아오."

어쩌면 좋을까.

머리가 너무 복잡하다.

"금호야. 형 너무 머리 아프다."

"크앙."

금호가 내 품에서 고롱고롱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눈이 반쯤 감겨 있다. 피곤해 죽겠는데 무슨 일이냐는 듯한 표정이다.

"미안. 더 자."

금호는 작게 하품을 하고는 다시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드레이크 사건 이후.

금호는 무려 20시간을 내리 잤다.

무리를 했기 때문에 생긴 후유증이겠지.

나는 금호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형이 너 때문에 산다 진짜."

내 마음의 오아시스.

나는 천사처럼 자고 있는 금호를 살짝 들어 옆구리 쪽을 확인했다.

"······다 나았네."

다행히 드레이크와의 전투로 입은 상처는 거의 회복됐다.

아직 미세하게 흔적이 남긴 했는데, 이것도 오늘이 지나면 완전히 사라지겠지.

"고마워."

이미 몇 번이고 전한 말이지만, 몇 번을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금호가 아니었다면 나는 드레이크의 뱃속에서 저민 고기가 되어 버렸을 거다.

금호는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주 평온한 얼굴로 숨만 색색이고 있었다.

"······샤워나 하고 자야지."

그렇게 슬쩍 금호를 침대 위에 올려두고, 옷을 벗었다.

"아."

그러자 허벅지의 녹색 호랑이 문신이 눈에 들어왔다.

'포식자의 살의' 완전 체화와 함께 사라졌던 문신이지만, 프로모시움 대거를 사용한 뒤에 다시 생겼다.

"······어휴."

이 특성만 생각하면 한숨부터 나온다.

"얻어도 하필 이런 특성을 얻냐······."

그렇게 씁쓸하게 웃고 있을 때였다.

우웅-

선반에 놓아둔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하시연한테 온 톡이었다.

[서율아! 지아 깨어났어!]

* * *

밤 10시 20분.

나는 지아의 병실에 도착했다.

늦은 밤이라 면회 시간이 지났을 거라고 생각해서 내일 오려고 했는데. 시연이가 지금 와도 된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해서 바로 달려왔다.

"지아야. 다리 괜찮아?"

"응."

하시연이 세상 걱정스런 표정으로 지아의 몸 곳곳을 살폈다.

그래 봐야 하체는 이불에 가려져 있어서 볼 수 없을 테지만.

"괜찮긴 무슨. 아직 아프지?"

"아뇨. 안 아파요."

지아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싱긋 웃었다. 그러나 평소 해맑은 미소가 아니었다.

뭔가 접대용 미소처럼 보인다고 해야 할까.

아마 연기하고 있는 거겠지.

내가 걱정할까 봐.

"언제쯤 퇴원할 수 있대?"

지아가 잠시 머뭇하더니 말했다.

"······짧으면 일주일. 길면 한 달까지도 갈 수 있대요."

"중환자잖아. 그러면서 안 아프다고?"

이 세계의 진보된 기술력으로 입원 한 달이면 진짜 엄청난 거다.

"아니에요. 그, 후유증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집중 치료를 할 뿐이지 절대 상처가 깊거나 한 건······."

끝까지 안 아픈 척을 할 생각인 것 같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안 아프면 다행이고."

"네."

그냥 그러려니 해야지.

환자를 상대로 계속 말싸움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면 지아 너는 호주 못 가는 거야?"

조용히 상황을 보고 있던 하시연이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호주 수학 여행. 취소 안 됐어?"

"아. 못 들었겠구나. 응. 취소 안 됐어."

"그래?"

지아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 12명이나 사망한 사건이 벌어졌으면, 여행은 대대적으로 취소되는 게 맞다.

하지만 이번엔 좀 상황이 묘하다.

"원래는 취소됐어야 하는데. 호주 측 사관학교랑 약속한 게 있어서 취소하긴 뭐하다나 봐."

나라 대 나라의 교섭이니만큼, 섣불리 약속을 깨기가 뭐한 상황이겠지.

"실기 시험을 세 번이나 미루는 것도 부담스러웠을 거고."

기껏 호주의 시험장을 5박 6일이나 빌렸는데, 그대로 날리긴 아까웠다는 이유도 있을 거다.

"냉정하게 말해서, 사관생이 죽는 게 그리 드문 일도 아니고."

"······그렇죠."

"그치."

두 명이 쓰게 웃었다.

초인과 마찬가지로 사관생의 사망률은 아주 높다.

평균적으로 500명이 입학하면 졸업하는 것은 450명 정도다.

물론 1학년에서 12명이나 사망자가 나온 건 드문 일이긴 하다.

1학년 수업은 2~4학년 수업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고 볼 수 있다.

1학년 수업은 안전에 중점을 둔 '수업'들이고, 2~4학년 수업은 실전에 중점을 둔 '훈련'들이다.

"아쉽게도 나는 호주엔 못 갈 것 같아."

지아가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웅. 아쉽다."

하시연도 마찬가지로 아쉬운 듯했다. 요즘 둘이 부쩍 친해지고 있으니, 아쉬울 수밖에.

"그럼 이번에 랭킹 1위는 시연이가 되겠네?"

"응? 나?"

하시연이 고개를 갸웃했고.

"······네?"

지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호주를 못 가면 실기 시험도 못 치를 테고. 그럼 평균 점수를 받을 거 아냐."

"······."

"시연이는 못해도 상위 득점일 테고. 그럼 랭킹 1위는 100% 시연이가 되는 거 아냐?"

"아. 그게 그렇게 되는구나."

하시연이 납득한 듯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

지아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입술을 달싹이는 게 꽤나 당황한 듯했다.

"······선조님. 잠시만요. 짧게 전화 한 통만 할게요."

"어? 어."

그러다 곧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여보세요? 태진 아저씨?"

세상 비장한 표정으로 자기의 비서한테 전화를 걸었다.

"저 일요일에 퇴원할 거예요."

"지, 지아야?"

지아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다.

"아니요. 몰라요. 그냥 할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퇴원해야 하는 일이 생겼어요."

신지아.

승부욕의 화신.

"예, 무조건이요."

지아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나와 하시연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우리를 바라보며 지아가 싱긋 웃었다.

"갑자기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서 호주. 갈 수 있게 됐어요."

"어······. 그, 그래? 다행이네."

뭔가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지아의 비서님께서 알아서 말려 주실 테니까.

괜히 내가 나설 필요가 없다.

······말리기 힘들 것 같기도 하고.

에이. 괜히 랭킹 얘기를 꺼냈네.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곧 11시.

늦어도 너무 늦은 시간이다.

"그럼 난 이만 가 볼게. 지아 너도 피곤해 보이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앗. 나도."

그런 나를 따라 하시연도 일어났다. 나는 마지막으로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튼 별 이상 없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아."

지아가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무언가 자조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바보처럼 가장 중요한 말을 하는 걸 잊었네요."

"응?"

그러더니 곧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선조님. 저를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 *

금요일 수업은 모두 자습으로 대체됐다. 교관들이 사건의 뒤처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는 모양이다.

"체단실이나 가자."

"나랑 대련할 사람?"

"나는 좀 쉴래."

"오. 나도 기숙사 가야겠다."

말이 자습이지, 사실상 자유 시간이나 다름없었다.

"시연아. 간만에 대련 콜?"

"좋지~ 지훈이도 같이 가는 거야?"

"물론."

근처에서 하시연, 김철진, 최지훈 삼인방이 간만에 모였다.

저 셋이 모이는 건 간만에 보는 것 같다.

시연이가 지아랑 친해진 이후로, 지아랑 많이 붙어 다니기도 했고. 요즘 김철진이랑 최지훈이 둘이서 뭘 하고 있는 듯했기도 했고.

"시연이 너 지훈이 달라진 거 보면 엄청 놀랄걸? 얘가 훈련을 진짜 얼마나 미친놈처럼 하던······ 읍."

"닥쳐라 김철진."

아하.

둘이서 비밀 특훈을 하셨다 이거구만.

"아."

내 시선을 느낀 것일까.

하시연이 나를 보고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서율아~ 너도 같이 할래?"

"오. 서율이 좋지."

김철진은 당연히 찬성했고.

"그러면 4명이라 짝도 딱 맞는군."

내가 끼는 것을 꺼려할 줄 알았던 최지훈마저 찬성하고 나섰다.

"랭킹전의 수모를 오늘 갚아 주지."

두 눈에서 전의가 활활 타오르고 있다. 아하. 그런 거였구만.

"좋아. 승자로서 패자의 도전을 받아 주겠어."

나는 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의 장난스런 말에 최지훈의 눈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날 씹어 삼키겠다는 의지가 충만한 눈빛이었다.

동시에 냉철함이 느껴진다.

확실히 지금 모습만 봐도 성장한 게 느껴진다.

"강서율. 오늘 네게 패배를 맛보게 해 주지."

"자신감 봐라? 그러다 또 지면 어쩌려고 그러냐?"

최지훈이 사납게 웃었다.

"내 사전에 두 번의 패배는 없다."

* * *

"······내 사전에 다섯 번의 패배는 없다."

"푸핫."

나는 이를 바드득 갈고 있는 최지훈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끅끅."

옆을 보자 김철진도 소리죽여 웃고 있었다.

최지훈은 앞선 세 번의 대련에서 내게 세 번 연속으로 패배했다.

그래 놓고 하는 말이 저거다.

웃음이 나오는 건 당연했다.

"와. 근데 지훈이 진짜 엄청 쎄졌다."

하시연이 옆에서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도 동의한다.

내가 D랭크로 올라서 할 만했던 거지. E랭크였으면 위험했을 거다.

"마갑도 되게 활용도가 높아졌구. 신체 능력은 말할 것도 없구."

"엣헴."

그 말에 김철진의 콧대가 높아졌다. 왜 네가 반응해?

"이게 다 내 부단한 노력 덕분 아니겠습니까."

"닥쳐라 김철진."

"어허. 최지훈 제자. 그게 스승한테 할 말인가."

"개소리."

최지훈의 격렬한 반응에 김철진이 더욱 신나서 말했다.

"아. 떠오른다. 천하의 최지훈이 내게 무릎을 꿇고. '김 선생님, 훈련이 하고 싶어요······!' 하며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진짜 죽인다."

최지훈이 검을 휘둘렀다.

"으억! 야! 급소를 노리는 건 아니지!"

뭐지. 덤 앤 더머인가.

그나저나 최지훈의 급격한 성장은 역시 김철진의 도움 덕분인가.

"······쯧. 특별히 이번만 봐주겠다."

최지훈이 검을 거뒀다.

"봐주긴 개뿔. 지쳐서 그런거 다 알거든?"

김철진이 코웃음을 쳤다.

최지훈은 세상 짜증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더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표정이다.

그 표정을 보며 김철진이 세상 만족한 미소를 짓더니.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럼 서율스. 다음은 나랑 한 판 뜰까?"

두 눈에 숨길 수 없는 호승심이 느껴졌다.

"좋지."

안 그래도 예전부터 싸워 보고 싶었다.

정확히는 김철진의 특성 '식스센스'를 직접 경험해 보고 싶었다고 해야 할까.

"잠시만. 가볍게 몸 좀 풀고."

"오케이."

나는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최지훈과의 대련에서 축적된 피로를 조금이라도 풀기 위해서였다.

손목 발목을 돌리고, 목과 어깨를 푼 뒤에 가볍게 점프를 뛰었다.

"워, 뭐야 캥거루야?"

"높다~"

가볍게 뛴 것치곤 점프가 좀 높긴 했지만, 아무튼 가볍게 뛴 거다.

"내가 점프력은 좋거든."

이번에 새로 얻은 수인족의 특성 때문에 점프력이 상승했기 때문이다.

"특성 같은 거야?"

"비슷해."

"그런 특이한 특성도 있어?"

"······그러게 말이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프로모시움 대거를 사용해서 새로운 특성을 얻은 것까진 좋은데. 왜 하필 많고 많은 특성들 중에 '꽝'을 뽑냐고.

[토족의 점프력]이 뭐야 [토족의 점프력]이.

물론 나쁜 건 아니다.

도약해서 접근하거나, 점프 공격을 하거나 할 때 도움이 되기도 하고. 무려 '상시 패시브' 특성이기 때문에 페널티가 아예 없기도 하고.

그렇다고 좋은 것도 아니다.

없다고 불편할 건 전혀 없거든.

요컨대, 계륵 같은 특성이라 할 수 있겠다.

"에휴."

그래도 재밌긴 하네.

맨땅에서 트램펄린 타는 것 같아서.

나는 속으로 실없이 웃으며 점프를 반복했다.

하하하.

재밌다.

그때였다.

"우왓!"

갑자기 신체에 위화감이 느껴지며 균형을 잃었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감각. 허니 베어를 상대할 때 느꼈던 그 감각이다.

······설마.

휘익-

나는 단검을 들고 가볍게 허공에 휘둘렀다. 가볍다.

"······뭐야? 왜 빨라졌어."

김철진이 당황한 듯 말했다.

당황스러운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 최지훈과 대련할 때보다, 속도가 확연하게 빨라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휘익- 휘익-

단검이 품고 있는 힘 자체가 다르다.

내 생각이 맞으면 이건······.

"나 잠시만. 화장실 좀."

"어? 어. 갔다 와."

나는 내 가설에 확신을 얻기 위해 빠르게 화장실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오른쪽 허벅지를 확인했다.

"······없어."

수인족의 문신이 없다.

아침에 샤워할 때까지만 해도 있었던 '녹색 문신'이 없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하루 만에 완전 체화가 됐다고?

수인족 특성 [토족의 점프력]이 완전 체화를 이루었다.

······설마 효과가 떨어지고 사용하기 쉬운 특성일수록 체화가 빠른 건가?

이러면 얘기가 좀 다른데.

< 78화 뒤처리 (2) > 끝

< 79화 선물 (1) >

금요일 밤.

나는 책상에 앉아서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이러면 토족의 점프력도 꽝이 아니지."

D랭크[85/99]

개인 단련실에서 측정해 본 내 근력, 민첩, 체력 능력치의 수치였다.

"꿀이 줄줄 흐르는구나."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D랭크[35/99]였는데. 하루 사이에 세부 수치 50이 상승했다.

이제 정말 C랭크도 멀지 않았다.

다만 B랭크는 좀 멀게 느껴진다.

"역시 랭크가 오를수록 증가폭이 줄어드는구나."

처음 '들끓는 순혈의 피'가 완전 체화됐을 때는 랭크가 하나 오르고도 세부 수치가 남았다.

그리고 다음 '포식자의 살의'가 완전 체화됐을 때는 E랭크[70/99]에서 D랭크[35/99]정도로 세부 수치로 치면 60정도가 상승했다.

그리고 오늘.

'토(兎)족의 점프력'이 완전 체화된 것으로 세부 수치가 50정도 상승했다.

즉, 높은 랭크로 갈수록 수치 상승이 더뎌지고 있다는 것이다.

"당연한 거긴 한데······."

보너스 포인트가 높은 랭크를 올리는 데 더 많은 수치를 요구하는 건 괜히 그런 게 아니다.

F랭크에서 E랭크가 되는 것보다.

B랭크에서 A랭크가 되는 게 10배 이상 힘들기 때문에, 10배의 보너스 포인트를 요구하는 것이다.

초인들도 그걸 알기에 최대한 높은 랭크에서 보너스 포인트를 사용하고 싶어 하는 것이고.

그래도 이게 어디야.

F랭크 나부랭이가 두 달 만에 D랭크+가 됐는데.

나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완전 체화에 대한 정리] 노트를 접었다.

"좋아."

나는 책상 구석에 놓아 둔 작은 상자를 꺼냈다.

"영약 섭취는 항상 옳지."

이 상자에는 허니 베어의 꿀이 들어 있다.

수요일 연천 필드 사냥에서 획득한 부산물이 이제야 분배된 것이다.

폭군 드레이크 사건 및, 사관생들 사망 처리 때문에 분배가 늦었다고 한다.

"이 작은 병 하나가 억을 넘는다니."

나는 100ml 병에 담겨 있는 영롱한 노란빛의 액체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확실히 꿀 같은 색이긴 하다. 엄청 고급스러운 느낌의 꿀.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뽕-

뚜껑을 여는 소리가 경쾌했다.

매혹적인 단내가 코끝을 간질였다. 내 울대에서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울렸다.

"간다."

나는 단숨에 들이켰다.

꿀이라는 이름답게 단 맛이 입안 가득 감돈다.

그러면서도 너무 달지 않다. 감미로운 단맛이라고 해야 할까.

목넘김도 예술이다.

식도를 타고 부드럽게 넘어가며 청량한 감각이 아래로 쭉 뻗어 나간다.

허니 베어의 꿀은 순식간에 내 뱃속으로 사라졌다.

"와우."

이게 영약인가.

원래 약은 쓰고 맛없는 거라고 하던데. 이 세계에서는 다른 모양이다.

또 먹고 싶어질 정도로 중독성 있는 단 맛이었다.

과다 섭취의 부작용만 없으면 또 구해 보겠는데.

"아.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정신을 차렸다.

중요한 건 맛이 아니라 효능이다. 마력 용적 상승. 과연 얼마나 큰 변화가 있을지.

나는 기대를 품고 눈을 감았다.

혈관 사이사이, 마력을 보내는 특수 기관 '마력 혈관'에서 마력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마력 혈관이 모이는 신체의 중심. 심장 부근에 일렁이는 무형의 기운.

'각인의 불길'에 의해 화 속성을 품고 있는 내 마력이 저장된 곳.

마력 용적이 늘어나면 가장 먼저 변화가 생기는 곳이다.

나는 그곳에 감각을 집중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 늘었는데?"

내 예상보다 훨씬 큰 변화폭이었다. 원체 내 마력통이 작았기 때문일까. 대충 1.2배는 증가한 것 같다.

겨우 1.2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기껏해야 필드에서 구할 수 있는 약이고, 몇 억짜리 영약이다.

효능은 있되, 극적인 변화를 기대하긴 어렵다는 말이다.

B랭크 초인들의 마력 용적 변화율이 1.03배 정도라는 걸 감안하면 1.2배는 정말 엄청난 증가량이다.

"······마력 혈관의 진화로 흡수율이 올랐다거나 그런 건가?"

엘프족 완전 체화 덕분이 아닐까. 아마 확실할 거다.

"아무튼 개꿀."

기대한 것보다 큰 성과를 얻었으니, 아주 만족한다.

"끼앙."

"일어났어?"

어느새 일어난 것인지, 내 발치에 금호가 뺨을 비비고 있었다.

그리곤 가볍게 점프해서 내 무릎 위로 올라오더니.

"······여기서 자는 거야?"

다시 몸을 웅크리고 잠들었다.

내 몸에서 느껴지는 향취가 좋은지, 내 품에 얼굴을 푸욱 묻고는 고롱고롱.

내 얼굴에 자연스레 미소가 감돌았다.

우웅-

그때 책상 위에 올려둔 폰이 진동했다.

[꼬맹이. 내일 11시 알지?]

메이든 크리티네스에게 온 톡이었다.

[네. 물론이죠.]

까먹을 리가 없잖아.

내일은 메이든에게 고대 유물을 건네받는 날이다.

* * *

클래식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는 휘황찬란한 방.

마에스트로는 그 중심에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귀령의 힘으로 드레이크의 인식을 조정해서 양동을 펼친 뒤, 약해진 경계망을 뚫고 신지아를 납치한다는 작전은 수포로 돌아갔다.

제법 가능성 높은 작전이라 생각했는데, 결국 납치 미수로 그치고 말았다.

"재미있어."

마에스트로가 사납게 웃었다.

별로 아쉽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번 작전은 성공하던 실패하던 상관없었다.

신지아 납치에 성공했다면 베가본드 일건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 테니, 더 좋았겠지만.

애초에 성공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생각했다.

'베가본드를 그렇게 완벽하게 처리한 자가. 이런 허술한 작전에 걸릴 리가 없지.'

애시당초 작전은 '실패'하는 게 목적이었다.

정보가 없는 현 상황에서 새로운 정보를 얻기 위해선 희생할 필요가 있었고.

그 희생양이 바로 검령과 귀령이었다.

마에스트로가 손에 쥐고 있는 컨트롤러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벽에 영상이 하나 송출됐다.

―좆 같은 새끼들아. 반갑다.

검령, 귀령과 강서율이 전투하는 장면이 영상으로 송출되고 있었다.

애초에 두 명이 실패할 거라 확신했던 마에스트로는 사전에 준비해 둔 초소형 드론으로, 해당 전투를 촬영했다.

"다시 봐도 사관생의 전투력이 아니군."

10초 남짓한 짧은 전투.

혼자서 검령을 압도하는 모습은 마에스트로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전신에 도드라진 혈관. 순간 강화형 도핑 스킬을 사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고. 검령과 귀령의 반응이 굼뜬 걸로 보아, 색적 및 감지 스킬을 억제하는 스킬을 지녔을 가능성이 크다.'

검령을 압도할 정도로 효과 좋은 버프 스킬을 지니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대체적으로 저런 스킬들은 효과가 짧다.

그 증거로 강서율은 자신이 압도하고 있던 상황에서 공격을 멈추지 않았는가.

'저건 강화 스킬의 시간 제한이 가까워져서, 시간을 벌기 위함이다. 이미 경각심은 충분히 줬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실제로 당황한 검령, 귀령이 섣불리 공격을 못하고 있다.

'저런 허세에 속다니.'

멍청한 놈들.

마에스트로는 혀를 찼다.

―동생아. 혼란귀를 부탁한다.

영상은 이것을 마지막으로 끊겼다.

마에스트로가 준비해 둔 초소형 드론이 혼란귀를 뚫지 못한 것이다.

"······예상은 했지만 아쉽군."

마력을 이용해서 은신에 최적화시킨 드론이기에, 마력적인 혼란을 야기하는 혼란귀를 뚫을 수 없을 거라곤 사전에 예상하고 있었다.

알면서도 이 방법을 사용한 건 연천 필드 주위, 유독 삼엄한 센서를 뚫을 드론이 이것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흠."

그리고 시간이 제법 흘러.

다음 영상이 흘렀다.

혼란귀가 완전히 풀린 후의 영상이었다.

―비혼 길드장님!

목이 뚫린 채 절명해 있는 검령, 귀령의 시체가 가장 먼저 보였다.

다음으로 꽤나 고전했는지, 신체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고 있는 강서율의 모습이 보였다.

―이 둘은 제가 처리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화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 강서율이 어떻게든 버티는 중, 유화가 난입했고. 유화가 검령과 귀령을 마무리한 것일 테지.

이 짧은 영상으로 마에스트로는 확신을 얻었다.

"역시 유화가 주모자였나."

베가본드를 함정에 빠트린 계획의 주모자는 유화가 분명하다.

도플갱어를 잡은 점이나, 표일찬을 처리한 점까지 생각해 보면 유화는 조직 내부의 정보를 꽤나 많이 파악하고 있는 것이리라.

'혹은 유화를 앞세운 배후가 있을 수도 있지.'

마에스트로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저 강서율이라는 사관생이 배후일 가능성도 있다.'

강서율은 유화와 꽤나 친한 것 같기도 했고.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일단 강서율에 대한 조사를 해 봐야겠어.'

가능성이 낮은 일들부터 차례대로 배제해 나가는 게 마에스트로의 일 처리 방법이다.

안 그래도 처음 얼굴을 봤을 때부터 뭔가 신경쓰이기도 했고.

"웬일로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허미트인가."

그런 마에스트로의 뒤로 허미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지?"

"저번에 네가 부탁했던 일. 강서율의 조사가 끝나서 말이지."

"오호."

마에스트로의 눈에서 이채가 흘렀다.

"설마 그 허미트가 내 개인적인 부탁을 들어 줄 줄이야. 사실 기대도 안 했는데 말이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겸사겸사 한 것뿐이다."

"흠. 아무튼 좋은 타이밍이군."

허미트가 책상에 서류를 몇 장 던지며 말했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지."

서류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강서율 조사 결과]

"강서율의 과거에 의심 가는 점은 단 하나도 없었다."

"하나도 없다?"

마에스트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래. 특이한 점이라고 해 봐야 고아원 출신이라는 것 정도였다."

"흠."

마에스트로가 서류를 빠르게 훑기 시작했다.

"네 말대로 샛별 고아원이라는 보호 시설 출신이라는 것 외에 특이한 건 없군."

허미트의 말대로였다.

특이한 거라고 해 봐야 가족구성 란에 [샛별 고아원] 출신이라고 적혀 있는 것 정도였다.

'허미트의 조사라면 믿을 만하지. 강서율이 배후라는 가설은 일단 배제해도 되겠어.'

이 보고서를 보면서 확신을 얻었다.

강서율은 재능 있는 사관생일 뿐이다.

신지아의 위기에 누구보다도 빠르게 달려 들 수 있었던 것은 신지아의 부재중 전화를 봤기 때문일 가능성이 다분했고.

필사적이었던 것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유화의 주변 조사에 집중하면 된다.'

마에스트로가 씨익 웃었다.

"······."

허미트는 그런 마에스트로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다행히 의심하진 않는 것 같군.'

마에스트로가 보고 있는 강서율의 조사 기록은 허미트가 조작한 기록이다.

마에스트로의 보고서뿐만 아니라, 조직 내에 존재하는 기록 자체도 간단히 은폐해뒀다.

'햇빛 고아원.'

허미트는 강서율의 '진짜' 과거에 대해서 생각했다.

'강서율. 너는 대체 뭐지?'

허미트의 동공이 의문과 당황으로 떨렸다.

* * *

다음날 점심.

나는 약속 장소인 강남 인근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현재 시간은 오전 10시 45분.

약속 시간 15분 전이다.

카페에 두 여인이 들어 온 것은 그때였다.

척 봐도 세련된 패션으로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는 20대 '처럼 보이는' 미녀 메이든 크리티네스와 평소처럼 정장을 입고 있는 미녀 유화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두 명을 반겼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서율 씨 되게 빨리 오셨네요."

유화가 싱긋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그러나 메이든의 표정이 매우 싸늘했다.

"······너도냐."

세상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무슨 일 있는 건가? 아님 내가 뭐 실수라도 한 건가?

"옷이 그게 뭐냐?"

"네?"

"블랙진에 검은 티라니······."

메이든이 짜증으로 경련하는 미간을 누르며 한숨을 쉬듯이 말했다.

"어······. 괜찮지 않나요?"

이상한가?

"괜찮냐고? 당연히 괜찮지. 마스크가 사기니까."

아. 그런 건가?

"꼬맹이 너. 그 얼굴로 그렇게 입고 다니기 아깝지도 않냐?"

"딱히 아깝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요."

메이든이 한 손으로 눈을 가리며 한탄했다.

"내 주위엔 왜 이런 것들뿐이냐."

"······언니. 왜 절 봐요?"

메이든의 한숨이 더욱 깊어졌다.

"하나는 여의도국회의사당룩에. 하나는 올블랙충이라니."

"······."

"······."

나랑 유화는 꿀먹은 벙어리가 됐다.

"안 되겠다. 너네 오늘 옷 좀 사자."

메이든의 두 눈에서 열기가 활활 타올랐다.

나는 그런 그녀를 멍하니 바라봤다.

메이든 크리티네스.

세계 랭킹 32위에 등재되어 있는 던전 크리에이터.

그녀의 던전은 두 가지로 유명하다.

첫 번째는 당연히 악독함이고.

두 번째는.

"꼬맹이 넌 하는 김에 머리도 좀 하고. 내가 잘 아는 헤어 디자이너 하나 있는데. 마침 이 근처거든."

디자인이다.

"굳이 그럴 필요까진······."

"일단 데일리룩 위주로 몇 벌 맞추고······. 근처에 괜찮은 백화점이 어디 있더라. 아니다, 편집샵부터 시작하자.""아니. 그니까."

메이든은 내 말을 듣지도 않는 듯했다.

"화야. 꼬맹이 장비 발주 건으로 블랙 스미스 한국 지부랑 예약 잡아 둔 게 몇 시였지?"

"7시요."

······응?

"지금 블랙 스미스라고 했어요?"

블랙 스미스.

내 '잠룡의 뿔'을 제작한 중국의 대형 메이커.

A랭크 이하의 장비는 취급도 안하는 장인 메이커다.

거기서 내 장비를 맞춘다고?

"왜? 싫어? 너무 흔한 메이컨가? 다른 데로 할까?"

메이든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뇨. 싫은 건 아닌데······. 너무 비싸지 않나 해서요."

"꼬맹아."

메이든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말 안 했니? 이 누나는 돈이 썩어난다고."

와.

"누나만 믿고 따라 와."

뭔데 멋있지?

< 79화 선물 (1) > 끝

< 80화 선물 (2) >

강남의 한 백화점에서 나는 마네킹 A 역할을 하고 있었다.

"좋아. 완벽해. 화 네가 보기엔 어떠냐."

메이든이 마네킹 B 역할을 맞고 있는 유화에게 물었다.

"DDP 패션위크에서 본 것 같네요."

"꼬맹이 너는?"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말했다.

"어······. 어울리긴 하는 것 같은데. 너무 부담스러운 거 아닌가요?"

메이든이 이마를 짚었다.

"됐다. 내가 패션 고자들한테 뭘 바라냐."

나와 유화의 옷차림은 30분 사이에 확 달라져 있었다.

유화는 딱딱한 정장 차림이 아니라, 화사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나는 무슨 아이돌 저리가라 할 정도로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전에 입고 있던 옷이 더 좋은 거 같다.

이 옷은 너무 부담스럽다.

"······."

옆을 보자 유화도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의 복장을 바라보고 있다.

얼굴에 '정장이 더 단정하고 이쁜 거 같은데.'라고 쓰여 있는 듯했다.

"거기 점원 아가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메이든이 가게의 점원에게 말을 걸었다. 그 말에 주변에서 우리를 관찰하던 점원이 답했다.

"올해의 트렌드를 120% 반영한 최고의 코디네이트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메이든 크리티네스 님. 감탄했습니다."

메이든의 입꼬리가 쓰윽 올라갔다.

"이게 정상인의 반응이야. 알겠냐? 이 패션 고자들아."

메이든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혀를 찼다.

"아무리 그래도 패션 고자까진······."

나는 아직도 아리송했다.

점원의 말은 믿을 수가 있어야지. 옷을 팔기 위해선 안 어울리는 옷도 다 어울린다고 포장할 분들이잖아.

······이렇게 된 이상 공정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제 3자의 의견을 받아 보는 수밖에 없다.

찰칵-

나는 거울 너머의 내 모습을 찍었다.

"뭐하게?"

"친구들한테 물어보게요. 잘 어울리냐고."

"좋은 방법이네."

"앗. 저도 올려봐야겠네요."

유화도 친구들의 자문을 구할 생각인지,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메이든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팔짱을 꼈다.

나는 [스승님과 제자들!] 톡방에 사진을 올렸다.

[사진 첨부]

[이 옷 어떤 것 같음?]

반응은 칼 같았다.

[신지아 : 와! 선조님 그 옷 뭐예요? 되게 잘 어울려요!]

[하시연 : 대박대박! 완전 센스있다.]

"······."

[진짜? 그정도야?]

[신지아 : 네! 얼굴이 부각될 수 있도록 튀지 않는 색채로 잘 꾸민 것 같아요. 게다가 톤온톤! 평소부터 이렇게 입고 다니시지.]

[하시연 : 이거 서율이 네가 직접 고른 옷 아니지?]

아니, 맞긴 한데.

[...왜 그렇게 생각 해?]

[하시연 : 그야 서율이 너 검정색 성애자잖아. 누가 골라 준 거야?]

검정색 성애자.

검정충.

······그렇구나. 주위에선 그렇게 보이고 있었던 거구나.

옆을 보자 유화도 넋이 나간 표정을 하고 있었다.

친구들한테 '정장 성애자가 웬일로 그런 화사한 옷을 입었어? 애인 생겼어? 누군데? 지병은 없어? 결혼은 어디서 할 건데?' 라고 한소리 들은 듣한 표정이다.

"친구들이 뭐라고 하든?"

그런 나를 보며 메이든이 이죽대며 말했다.

"······잘 어울린대요."

"또? 누가 골라 줬냐고 안 묻든?"

"······."

어떻게 알았지?

"아무튼 이제 알겠지? 넌 패션 고자야."

"······예."

지아랑 시연이까지 이렇게 극적인 반응을 보이는 걸 보니, 내가 옷을 좀 많이 못 입긴 했던 모양이다.

"좋아. 이해했으면 다음 가게로 가자."

메이든이 점원에게 카드를 건네며 말했다.

"네?"

나와 유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끝난 거 아니에요?"

"언니. 한 벌씩 샀으면 됐지."

그러자 메이든이 코웃음을 쳤다.

"너네 센스를 보면, 최소 4~5벌씩은 준비해 줘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서 그런다. 그래야 좀 넉넉하게 입을 거 아냐."

메이든이 못난 딸, 아들을 보는 것 같은 어머니 같은 미소를 지었다.

* * *

그렇게 약 5시간.

우리는 메이든 크리티네스의 마네킹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좋아. 완벽해."

헤어까지 손질을 완벽히 마친 우리는 저녁을 먹기 위해 레스토랑에 앉아 있다.

"평소부터 그렇게들 하고 다니면 좀 좋냐."

"······."

"······."

피곤해서 절대 이렇게 못 하고 다닐 것 같은데요.

"특히 꼬맹이 너. 그 마스크에 그런 옷차림은 가히 죄악이나 다름없는 거야. 알아?"

"······예."

나는 순순히 인정하기로 했다.

5시간 따라다녀 보니까 아주 잘 알겠더라. 옷차림 하고 머리만 바뀌었을 뿐인데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지더라고.

손 댈 곳 없을 정도로 훌륭한 마스크에 피진호의 극진한 훈련으로 단련된 신체.

거기에 메이든 크리티네스의 손길이 더해지자, 말 그대로 폭발적인 시너지가 일어났다.

진짜 오늘 혼자 돌아다녔으면, 최소 10명 이상의 여성에게 대쉬를 당했을 거다.

아니, 진짜로.

자화자찬이 아니라 눈에서 하트 광선을 쏘는 사람들이 최소 10명은 있었다.

"아무튼 초인도 사람이니까. 장비만이 아니라 이런 일반 패션 같은 거에도 신경 쓰고 좀 그러란 거야."

메이든이 내게 스테이크 한 점을 넘겨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특히 꼬맹이 너는 좀 쉬기도 하고. 진호 그놈 얘기를 들어 보니까, 아주 그냥 훈련하는 기계더만."

"제가 좋아서 하는 건데요 뭐."

그러고 보니, 메이든은 피진호 교관과 동갑이었지.

"꼬맹이 너. 취미생활 같은 거 있어?"

"취미······. 딱히 없네요."

"최근에 영화를 봤다거나. 누구랑 놀러 갔다거나 한 적은?"

"그것도 딱히 없는 것 같아요."

쉬는 날에도 어지간해선 훈련, 혹은 이후의 변수를 최소화하기 위한 계획 세우기 같은 일들을 했으니까.

"······그러냐."

메이든이 무언가 슬픔으로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곤 유화와 짧게 눈을 맞추더니, 다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밥이나 먹자. 7시 약속이니까."

"아. 넵."

블랙 스미스 한국 협회와 잡아 둔 예약이 7시라고 했지.

* * *

오후 6시. 빠른 석식을 마치고, 우리는 메이든의 차로 블랙 스미스 한국 지부 본사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고대 유물은 어떻게 됐나요?"

정신이 없어서 가장 중요한 걸 까먹고 있었다.

메이든이 백미러 너머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떻게 됐긴. 트렁크에 잘 보관되어 있지."

"이 차 트렁크요?"

"어. 이따가 집에 데려다 주고 주려고 챙겨왔지. 왜? 어떤 유물이 들어 있는지 궁금해?"

메이든이 운전을 자동 주행으로 전환시키더니, 몸을 확 돌려 나를 바라봤다.

장난스런 미소를 짓고 있다.

뭔가 물어봐도 안 알려 줄 것 같은 분위기다.

"······궁금해요."

그러나 호기심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어떤 종족의 고대 유물인지. 몇 개의 유물이 있는지.

너무 신경 쓰였다.

"안알랴줌."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메이든이 깔깔 호탕하게 웃으면서 이어 말했다.

"짜샤. 미리 알려 주면 재미없잖아."

메이든이 손을 쭉 뻗어 머리를 마구 흐트러트리며 웃었다.

그녀의 손목에서 화한 향수향이 체온과 함께 화악 풍겨져 나왔다.

"지금은 블랙 스미스에 어떤 장비를 의뢰할까. 그거나 잘 생각해 둬."

"······네."

우리는 약 30분을 달려, 블랙 스미스 한국 지부에 도착했다.

"어서 오십시오."

직원의 안내를 받아 건물의 최심부로 이동했다.

사무실이나 접견실로 갈 줄 알았는데, 웬 공방이지?

"이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땡큐."

메이든이 작게 손을 흔들었다.

직원은 작게 목례한 후에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똑똑-

"아재. 들어갑니다?"

메이든은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연 순간, 내부의 후덥지근한 공기가 내 낯을 스치고 지나갔다. 용광로의 아주 뜨거운 열기.

탕- 탕- 탕-

그 뜨거운 방 안에서 한 노인이 쇠를 두드리고 있었다.

백발을 가지런히 모아 묶고, 흰 수염이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는 노신사였다.

"예의가 없는 건 여전하구나."

노신사가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채 넌지시 말했다.

탕, 탕, 철과 철이 부딪치는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울렸다.

"우리 사이에 뭘 또 그런 걸 따지신대."

"우리 사이가 뭐?"

"아빠와 딸 같은 사이?"

"지랄이 아주 풍년이구나."

노신사가 코웃음을 쳤다.

"아무튼 조금만 기다려라. 거의 다 마무리됐으니까. 사무실에 가서 아무거나 먹고 있어."

"예예."

메이든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메이든은 이 공방을 나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저 몽롱한 눈으로 철을 두드리는 노신사를 바라볼 뿐.

나도 멍하니 노신사의 모습을 바라봤다. 전혀 화려하지도 않고, 신기하지도 않은 평범한 망치질이었으나, 왠지 모르게 눈을 뗄 수 없었다.

"멋지지?"

메이든이 넌지시 말했다.

"우리 아재. 솜씨가 세계 제일이거든."

메이든의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호의가 가득 아른거렸다.

"정일용 어르신이세요."

옆에 있던 유화가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아."

중국 최고의 대장장이 정일용.

그 사람이 이 사람이구나.

원작에서 이름은 몇 번 언급 됐는데, 직접적인 등장은 없었다.

확실히 메이든 크리티네스와 연줄이 있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중국인이시죠?"

"그럼요."

"한국어 되게 잘하시네요."

"기본적인 언어는 다 할 줄 아세요. 공부가 취미인 분이라서."

"······오우."

대단하신 분이었구나.

우리는 계속해서 정일용 어르신의 망치질을 바라봤다.

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듯한 느낌이다.

그렇게 약 10분이 흘렀을까.

"늙은이가 망치 두드리는 모습이 뭐 그리 재밌다고 빤히 보고들 있나."

노신사가 모든 망치를 놓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아. 실례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나와 유화가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메이든이 말했다.

"됐어. 뭐라고 하는 거 아니야. 그냥 쑥스러워서 대충 둘러댄 거지. 이 아재 생긴 거랑 다르게 되게 내성적이거든."

"헛소리하지 마라. 건방진 꼬맹이."

정일용이 혀를 차며 메이든을 내려다 봤다.

"뭐요. 꼬장꼬장한 아재."

그런 정일용을 올려다보며 메이든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오랜만이다. 너도 슬슬 머리에 새치가 보이기 시작한 것 같은데."

"그러는 아재는 슬슬 새치도 빠지기 시작한 것 같은데."

"주름도 좀 생기기 시작한 것 같고."

"아재는 주름이 싹 사라졌네. 해골이 되려고 그러나?"

말은 조금 험하지만, 둘 다 입가는 웃고 있었다.

"여전히 건방진 것 같아서 다행이구나. 오랜만이다."

"응. 오랜만. 그보다 아재. 여기 애들 소개부터 할게. 화는 알지? 몇 번 봤으니까."

유화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얘가 오늘 신청할 장비를 입을 꼬맹이. 강서율."

정일용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연륜에서 나오는 묵직한 시선에 왠지 모를 긴장감이 솟았다.

"강서율입니다."

"정일용이다."

노신사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붙잡고 가볍게 악수를 했다. 과연 대장장이다운 아주 거친 손이었다.

"듣자하니 진호 제자라지?"

"네. 그렇습니다."

피진호 교관과도 연이 닿아 있는 모양이다.

"나쁘지 않군."

정일용이 미소 지었다.

"그치? 애가 괜찮아."

"그래. 네 눈은 몰라도 진호 눈은 믿을 만하니까."

"······이 아재가 말을 또 섭섭하게 하시네."

정일용이 메이든을 힐끔 보고는 다시 코웃음을 쳤다. 같잖다는 표정은 덤이었다.

"아무튼 내가 이 꼬맹이 장비를 만들어 주면 된다. 이 말이지?"

"엉? 어."

"흠."

정일용이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는 듯했다.

"역시 힘들 것 같으면 다른 장인 하나만 소개시켜 줘. 입 무겁고 실력 좋은 사람으―."

"좋아. 승낙하마."

"어?"

그 흔쾌한 승낙에 메이든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진짜?"

메이든이 엄청 기뻐 보였다.

"왜. 내가 맡는 게 마음에 안 드냐?"

"아니. 당연히 좋은데. 너무 의외라서 그러지. 아재. 앞으론 장비 발주 의뢰 안 받는다고 도망치듯이 한국으로 온 거잖아. 진절머리가 난다고."

"그렇긴 하지."

정일용이라는 최고의 장인이 왜 한국 지부장을 맡고 있나 했더니, 그런 이유였구나.

"솔직히 크게 기대도 안 했는데. 무슨 바람이 분 거야?"

"별 이유는 없다. 너랑 진호가 동시에 마음에 들어 하는 아이기도 하고."

정일용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내 가슴팍을 바라봤다.

연보라색으로 빛나는 몽환적인 눈.

"꽤나 재밌는 아이 같아서 말이지."

그의 눈은 정확히 옷 속에 넣어둔 [무기의 극의]를 향하고 있었다.

······설마 [무기의 극의]에 대해 아는 건가?

< 80화 선물 (2) > 끝

< 81화 선물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