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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언 나이트

컴퍼니 공인 괴물들의 강함을 1등급부터 9등급까지 나눈다면, 능력자들의 강함 역시 1~9까지의 위계로 나뉜다.

능력의 특이성, 본신의 경험과 여러 정치적 상황 등. 산정방식은 꽤나 복잡했지만 공통되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이 세상에서 7위계 정도 되는 인간은 결코 흔하지 않다는 것이다.

철의 마녀.

살아 움직이는 성채.

흡혈군주의 목을 벤 자.

클레이모어의 이명은 명성과도 연관되어있다.

조롱이 아닌 저 화려한 수식어들만 봐도 보통이 아니란 거지.

'예상되지 않은 만남이다.'

모니터 밖에서 수십, 수백 번의 캐릭터를 키울 동안 아이언 나이트가 이곳에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즉 이건 변수가 발생했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유신에게 좋지 않은 영향일 가능성이 컸다.

'에녹이 미트스튜의 토벌을 위해 의뢰를 맡겼었나?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에피."

"응?"

"튀자."

"크레딧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저 돈 귀신이 돈마저 마다한다?

굳은 얼굴로 창가를 힐끔거리는 유신을 보며 에피는 금세 상황을 파악했다.

"저 여자가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야? 차림새랑 탈것이 좀 요상하긴··· 가만 저거 입구에 있는 강철 벽이잖아? 저게 움직인다고?!"

"클레이모어다."

유신은 구석에 놓아두었던 짐가방을 매며 말했다. 에피는 입을 헤 벌렸다.

아무리 시골 촌년이라도 클레이모어의 악명?은 익히 들어봤던 것이다.

"크, 클레이모어··· 그럼 유신 너보다 강해?"

"클레이모어를 건드린다는 생각부터가 그들의 배후에 있는 컴퍼니. 갖가지 권력자들과의 연관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미친 짓거리지만···"

"내가 수십 명 쯤 있어도 저 여자의 발끝 하나 못 건드릴 거다."

아직까지는.

유신은 뒷말을 삼키며 고갯짓했다.

에피는 눈을 부릅떴다.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잘난척하며, 무슨 일이든 수월하게 풀어버리던 유신이 저런 소리를 하다니.

"그, 그렇구나! 알았어!"

에피 역시 짐을 다 챙긴 채 얼른 그 뒤를 따랐다.

"반대쪽으로 가서 벽을 타고 넘는다."

두 사람은 발걸음소리조차 줄인 채 움직였다. 다행히 촌장의 집과 아이언 나이트가 있는 곳의 거리 차이는 꽤 있으니···

"안녕."

그런 유신의 생각은 문 앞에 떡 하니 선 채 손을 흔들고 있는 미녀로 인해 끊겼다.

***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 잘생긴··· 흠. 뭐, 나쁘지 않은 페이스긴 하네."

에바그린은 선글라스를 젖힌 채 유신을 관찰했다.

유신은 그 짧은 대화에서 깨달았다.

아이언 나이트의 목표는 애초부터 괴물이나 밴디트 토벌도 아닌 자신이었다는 것을.

대체 왜?

'모래두지 타운에서의 일 때문인가? 하지만 그게 이 여자를 움직일 정도라고?'

"복장으로봐서 클레이모어로군. 여행자한테 무슨 볼 일 이지?"

머릿 속 의문과는 달리 유신은 침착하게 답했다.

에바그린은 풍선껌을 후우 불었다.

"뭐, 별건 아니고 너한테 좀 궁금한 게 있어서. 28구역 타운A에서 트롤을 처리한 게 너 맞지?"

"우린 바빠··· 읍!"

유신은 에피의 입을 막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28구역은 모르겠지만 한 타운에서 트롤을 처리한 것은 맞다. 협조가 필요하다면 기꺼이 따르지."

"후후. 눈치가 좋네."

오싹.

순간 웃고 있던 에바그린으로부터 섬뜩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별꼴 다 겪은 유신조차 비틀거릴 정도의 살기였다.

"거절하면 죽일 생각이었거든. 일단. 저 꼬맹이부터."

"으, 으아···"

에피는 바닥을 구르며 꺽꺽거리고 있었다.

아마 방금 전에 거절의 말을 입에 담은 것이 그녀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다.

스으윽

유신이 그런 소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직 자라나는 새싹일 뿐이다. 선구자로서 지켜주지는 못할망정 짓밟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나?"

"흐음? 내 눈에는 그냥 더러운 쥐새끼로만 보이는데?"

"그 쥐새끼가 있어야··· 컴퍼니도 운영되는 법."

에바그린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검은 머리칼의 사내를 바라봤다.

자신한테 위압 당한 상태에서도 끝까지 의지를 굽히지 않는 눈동자를 주시했다.

일단은··· 마음에 들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네. 그럼 갈까?"

피식 웃으며 몸을 돌린 에바그린이 또각또각 걸어갔다.

유신이 에피를 바라봤다.

"괜찮냐?"

"아, 으으··· 심장이 터질 뻔했어. 대체. 대체 뭐야. 저 미···"

그 정도의 살기를 정면에서도 받았는데 입을 털다니.

요 녀석도 진짜 난 년은 난년이다. 하지만···

"살고 싶다면 닥치고 있어라."

지금의 그 대담함은 그저 만용일 뿐이다.

"클레이모어들은 말대꾸를 좋아하지 않아."

특히나 아이언 나이트 저 여자는 더욱 그렇다.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면 일단 죽이고 보거든.

'여기에는 저 미친년을 제지할 수 있는 자들도 없고.'

"아, 알았어."

두 사람은 긴장한 채 밖으로 나갔다.

웅성거리는 바보들의 틈에서 맞춤형 정장을 쫙 빼입은 미녀는 오만하게 서 있었다.

[BMW]

자신의 애마 그란쿠페의 앞에서.

"여기는 너무 시끄러워서 좀 그렇고, 드라이브나 좀 하지?"

자동차 키를 휙휙 돌리던 에바그린이 운전석에 앉았다.

유신은 고민했다.

'뒷좌석? 조수석?'

염병. 시작부터 7대 재앙에 근접한 괴물을 만났다 보니 절로 행동을 조심하게 된다.

유신은 결국 자신은 조수석에 에피는 뒷좌석에 앉히기로 했다.

"아, 너희들 자리는 거기가 아니야."

지이잉

에바그린이 트렁크를 열어주기 전까지는.

"내 애마에 그대로 앉히기에는 지금 너희 상태가 좀 더럽거든. 이해해줄 거지?"

라디오에서 들리는 노랫소리와 깨끗하고 푹신한 쿠션.

은은한 방향제 향기까지.

(구)시대의 청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이 녀석은 확실이 이런 꼴로 앉기에는 양심의 가책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이해와 짜증은 늘 별개다.

"···그러지."

저 년은 진짜 게임하고 똑같다.

'옛날이었으면 너 교통법 위반으로 잡혀갔어 이 년아.'

싱긋 웃는 붉은 머리의 여자를 보며 유신은 '참을 인' 자를 새겼다. 곧 본인은 트렁크에 앉아 다리를 쭉 뻗고는 에피는 굴러 떨어지지 않게 구석에 처박았다.

"으악!"

한때 꿈꿨던 외제자 라이프에 대한 꿈을 이런 식으로 이루게 될 줄이야.

쿠르르르

수십만 크레딧짜리 세단은 그렇게 이예르폴을 벗어나 황무지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유신은 생각했다.

자신이 풀어준 수많은 생존자들 덕분에 이예르폴에 관한 소문은 점점 퍼져 나갈 것이다. 그리고 방랑자들은 더 이상 그곳으로 발걸음 하지 않겠지.

이예르폴은 점점 폐쇄적이게 될 거고, 천천히 몰락할 것이다.

에피가 원하든 원치 않든 말이다.

"이게 진짜 움직이네···"

소녀는 입을 헤 벌린 채 강철마차를 두리번 거리다가.

곧 멀어져 가는 고향. 그 속에서 여전히 살아가는 제 가족과 이웃들을 힐끔거렸다.

벽안에 담긴 감정에 미련이라고는 없었다.

'뭐, 상관 없나?'

***

"타운A에서 트롤을 처치. B시티에서 시장을 비롯한 대량 학살. 타운C에서 밴디트 무리를 비롯한 레자드 처치. 전적이 꽤나 화려하더군. 웬만한 신참들보다 나아."

'에밀리오는 내가 안 죽였는데···'

그 짧은 새 자세하게도 알아냈다. 하지만 이는 마냥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어느정도 규모가 되는 타운이나 도시에는 컴퍼니 소속의, 클레이모어의 편의를 봐주기 위한 정보원들이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움직이다 보니 그렇게 되더군."

"그랬다면 완수금을 챙겼겠지."

모래두지 타운에서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

유신은 어깨를 으쓱였다.

"클레이모어를 사칭하고 돈까지 챙긴다? 그런 미친 짓을 할 생각은 없어."

흐음.

에바그린은 운전대를 돌리며 입매를 올렸다.

"그 말은 곧 클레이모어를 사칭했다는 것은 인정한다는 건가?"

클레이모어 사칭은 중죄다.

컴퍼니에서는 구태여 나서서 잡지는 않으나 걸리면 좋은 꼴은 못 본다.

유신의 머리가 팽팽하게 돌아갔다.

여기서 말 잘 못하면 엿 된다.

"뭣도 모르는 녀석들이 그렇게 불러대더군. 난 끝까지 부정했는데도 말이지."

"그으래?"

어차피 CCTV나 녹음기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내용들.

증거가 어디 있단 말인가? 물론 닥치고 가서 벌이나 받아라. 라고 하면 할 말이 없었지만···

'이 여자가 그걸 원하는 것 같지는 않다.'

실적 때문에 여기까지 움직이기에는 아이언 나이트는 너무 거물이다.

유신은 상대의 노림수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궁금한 점은 그게 끝인가?"

"물론 아니지."

에바그린은 후우 풍선껌을 불며 룸미러로 유신을 힐끔거렸다.

"트롤. 어떻게 잡은 거지?"

"···"

이걸 말해? 말아?

유신은 고민했지만 곧 사실을 밝히기로 마음먹었다.

뭐 클레이모어를 상대로는 대단한 비밀도 아니거니와 숨겼을 때의 리스크가 너무 컸다.

"LPG가스통으로 잡았다."

역시나 에바그린은 이 말을 알아듣는 듯 휘파람을 불었다.

"호오."

이제서야 이해가 된다. 그랬다면 저 사내의 기행, 능력에 비해 과대한 화력도 충분히 낼 수 있다. 그다음 질문.

"지하철 내부에 그런 물건이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지?"

세상이 망한 지 백년하고도 비슷한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지구는 굳이 괴물과 방사능만이 아닌, 대지진과 빙하기, 호우를 비롯한 자연 재해를 거하게 맞았다.

그렇다보니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남은 자원을 모조리 끌어다 썼다.

책이란 책은 모조리 불태워서 불을 지피고, 기계장치를 분해해서 부품을 적출했지.

물건의 사용법도 이를 아는 사람들도 모조리 죽다보면 지식이란 건 결국 잊혀지기 마련이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 중에 이에 관해서 적힌 책이 있었거든."

"흐음."

유신의 답변은 애매했다.

그렇다고 마냥 트집 잡기에는 또 그럴듯했다. 아주 우연히 옛 지식을 계승한 노인네가 살아남아서 씨를 퍼트리거나 관련된 책들이 발견되기도 했으니까.

"그렇단 말이지···"

끼이이익

에바그린이 갑자기 핸들을 꺾었다.

그 바람에 차량이 덜컹거리며 유신과 에피가 비틀거렸다.

뿐만 아니었다.

쿵.

구석에 있던 상자가 열리더니 그 내용물을 쏟아냈다.

"···! 유, 유신 이거···"

'아이, 썅년. 운전하는 것 좀 보게.'

차를 좀 아끼란 말이다. 차르으을! 이제는 생산되지도 않는 물건이잖아!

눈가를 찌푸리던 유신이 에피가 가리킨 것을 살폈다. 곧 헛웃음을 지었다.

마치 미역 줄기처럼 꼬인 머리칼과 텅빈 눈두덩이.

벗겨진 피부와 연골만 남은 코까지.

트렁크를 굴러다니는 흉물의 모습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동시에 두 사람에게는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

'악령.'

하브람으로 가던 도중 만났던 돌연변이.

사냥꾼을 살해하고 두 사람을 궁지로 몰았던 그 괴물이 지금 이곳에 있다.

"어머 미안. 많이 놀랐니?"

대가리만 남은 채 혀를 삐죽 내민 채로.

"지나가다가 잡은 건데 마땅히 둘 곳이 없더라고. 그것 좀 다시 넣어줄래?"

아이언 나이트는.

물리력마저 통하지 않는 괴물마저 처단해버린 저 붉은 머리칼의 여자는.

"자, 이제 마지막 질문."

환하게 웃으며 비수 같은 질문을 던졌다.

"너 혹시 능력이 몇 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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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언 나이트

에바그린이 질문을 던진 순간. 유신의 머릿속은 어지럽게 돌아갔다.

강탈이라는 특성은 분명 이 세상에서 하나뿐인 강력하기 그지없는 능력이다. 하지만 남과 다르다는 것은 곧 특별하다는 의미였고, 그것은 곧 배척을 불러온다.

목숨보다 제 능력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능력자들.

그런 자신의 밑천이 남한테 그대로 넘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용납할까?

'그럴 리가.'

유신의 답은 아니다였다.

잘해야 편안한 죽음. 최악은 어디 연구실로 끌려가 실험체 신세가 되겠지.

그렇기에···

신중하게 답해야 한다.

저 질문을 던졌다는 것은 이미 자신이 여러 개의 능력을 다루는 것을 알고 있다고 봐야 한다.

조금만 탐문 해봐도 흔적은 남아있으니까.

하지만 정확한 개수까지는 모를 가능성이 컸다.

'세 개는 너무 많고, 한 개는 말도 안 되지. 이미 내가 불꽃과 재생력을 다루는 것을 알 테니까.'

그렇다면···

"두 개다. 재생력과 화염."

"흐음?"

순간 에바그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거기다가···"

이것의 도움을 좀 받았지.

유신이 탐욕의 에스트 병을 꺼내서 흔들어 보이기 전까지.

"유물이라··· 확실히 그게 있으면 불가능하진 않군."

단순히 두 개의 능력만을 다룬다고 했다면 의심했을 것이다. 시체들에 남아있던 상흔은 신체 강화 능력자의 소행도 엿보였으니까.

하지만 저게 있다면 주장에 신빙성이 더해진다.

"그런데 그걸 이렇게 순순히 밝힌다고?"

에바그린의 눈동자가 유신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고오오오

방금 전의 그 살기 역시 다시금 피어올랐다.

하지만 유신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침착하게 답했다.

"이미 다 알고 온 것 아닌가? 난 죽고 싶지 않다."

"···"

에바그린은 생각했다.

'거짓을 고하고 있을 확률은?'

'본사로 데려가 심문해볼까?'

에바그린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럴 때마다 섬찟한 기세가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에피는 바닥을 구르면서 차라리 차에서 뛰어내리는 게 맞지 않을까? 고민했고, 유신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평정을 고수했다.

짝.

"좋아. 결정."

천금같은 시간이 흐른 후. 에바그린이 갑자기 박수를 쳤다.

곧 지갑에서 뭔가를 꺼내 건넸는데.

유신이 살펴보자 그건 명함이었다. 눈앞에 있는 여자 에바그린의 명함.

"···?"

"관심 있으면 한 번 지원해봐."

그란쿠페가 멈췄다.

에바그린은 운전대에서 손을 떼고는 고개를 까딱거렸다.

"뭐해? 안 내리고."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황무지에서.

끝까지 제멋대로인 여자였다. 하지만···

"태워다줘서 고맙군."

유신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렸다. 손수 트렁크를 닫아주기까지 했다.

부아아앙!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멀어지는 세단을 보며 유신이 혀를 찼다.

"뒤질 뻔했네."

아직도 심장이 두근거린다. 7위계가 평상시에 저 정도 기세를 흘리고 다닐진대 그 윗등급인 '회장'과 7대 재앙은 어느 정도 일까?

'나아가고는 있지만 나는 아직 한참 약하다.'

물론 그렇다고 한들 마음이 꺾일 일은 없다.

모니터 밖 이방인의 머릿속에 있는 유물들과 히든피스들의 지식.

이 육체가 가진 가능성을 점점 개화시키다 보면 저 자리에 도달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테니.

유신이 주먹을 꽉 쥐던 그 순간.

"유시인··· 대체 뭔 짓을 저지른 거야···"

어째서 클레이모어의 타겟이 된 건가? 그리고 또 풀려난 건가?

에피가 물었다.

"···"

유신은 고민했다.

곧 얼마 지나지 않아 앞선 인과관계에서 결론을 도출해낸다.

"그렇군. 난 타겟이 된 게 아니야. 사이에 끼인 거지."

"응?"

"저 여자는 지금 더스트 봄에 대해서 조사하고 있다."

"더스트 봄···? 이 뭔데?"

"핵폭탄."

"행?"

"그리 귀엽게 부를 수 있는 게 아니다만··· 일단 나중에 설명해주마."

"치사해."

에피는 바닥을 탁탁 차더니 주변을 둘러보며 화를 냈다.

"으으으으! 어쨌든 그 여자 때문에 이게 뭔 지랄이야. 크레딧도 못 뜯어내고! 생전 처음 보는 곳에 떨궈졌잖아!"

"확실히 원치 않는 폭풍에 휘말린 것은 사실이지."

하지만.

"뜻하지 않게 기회가 온 것도 사실이다."

[(주)헬리오스사 이사]

[에바그린 쉘라이트]

'보나마나 추적기를 붙여놨겠지?'

버리면 요주의 인물로 찍힐 것이다. 우선 가지고 있자.

아니, 이용해 먹도록 하자.

유신이 손에 들린 명함을 바라보자 에피가 물었다.

"그 종이 쪼가리가 그렇게 대단해? 어째 더 깨끗하고 맨들맨들해 보이기는 하네."

"명성 있는 클레이모어가 자신의 명함을 준다는 것은 하나를 뜻한다."

"뭔데?"

"스카웃 제의."

"스카웃이 무슨 말···"

"자기 조직에 들어오라는 거지."

에피는 엑 소리를 내며 입을 벌렸다.

"그, 그럼 유신 네가 클레이모어가 되는 거야?! 막 저 여자처럼 요상한 옷도 입고 강철벽도 몰면서?"

반응도 이렇게나 격렬하게 튀어나오면 대답하는 재미가 있다.

유신은 그만 웃어 보였다.

"그건 아니고, 그저 시험에 응시할 자격만 줄 뿐이다."

"에이···"

그것도 잡고 싶어하는 녀석들이 널렸다는 사실을 소녀는 모른다.

그렇기에 에피의 입장에서는 보다 생산적인 일을 하기로 했다.

"그래서 우린 이제 어디로 가?"

유신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한때 푸른빛을 흘리던 생명의 땅은 이제 죽음의 먼지로 가득 찼다.

그 위에 널브러져 있는 철교의 흔적이 과거의 영광을 어렴풋이 보여줄 뿐이다.

광안대교를 뒤로한 채 유신은 터벅터벅 걸었다.

"낙원으로 간다."

(구)한국의 70퍼센트가 소멸되는 대재앙을 막으러.

***

푸쉬이익

톱니바퀴와 기어가 맞물리며 묵직한 소음을 자아낸다.

크레딧을 연료 삼아 돌아가는 발전기들이 힘차게 피스톤질을 한다.

파이프와 기관장치에서 뿜어지는 연기로 인해 늘 안개가 끼어있는 대도시.

마천루들 대신 뾰족하거나 동그란 양식의 구조물들이 즐비한 터전.

[메트로폴리스 아시아 지부]

[펑크시티]는 오늘도 우중충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느낌을 자아냈다.

50층 입니다.

투명한 엘리베이터 너머로 시내를 내려다보던 에바그린이 고개를 돌렸다.

또각또각

곧 기품있게 걸어서 [사장실]의 앞에 섰다.

메이드복을 입고 있던 여자 비서가 긴 치맛자락을 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무사히 귀환하셔서 다행입니다. 아이언 나이트."

"메이슨은?"

"그 변태 돼지라면 지금 안에 있습니다. 보나마나 제 한심한 취미 생활을 즐기며 낄낄거리고 있겠지요."

여비서는 혐오스럽다는 얼굴로 제 상관을 모욕했다.

얘는 진짜 한결같네. 에바그린은 피식 웃었다.

"그럼 들어가도 되겠네?"

"물론입니다."

큼직한 괘종시계, 구석에 쌓인 책과 휘어진 형태의 의자까지.

브라운 계통을 띄는 집무실은 역시나 이 도시처럼 '펑크'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푸슈, 푸슈. 두두두두!"

푹신한 의자에 앉아있던 턱시도 차림의 뚱뚱한 사내는 바빠 보였다. 양손에 플라스틱 쪼가리들을 쥔 채 서로 이리저리 휘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책상의 한쪽에는 이렇게 적힌 포장 박스가 놓여져 있었다.

[LEGO 사자 기사의 성]

또각또각

"응? 레이첼? 내가 분명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메트로폴리스 아시아 지부의 총괄자.

메이슨이 헉 소리를 냈다.

에바그린이 웃는 낯으로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 크흠."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레고를 조심히 내려놓더니 다리를 턱 꼬며 시가를 빼물었다.

"고생했어. 아이언 나이트."

분위기 잡아봤자 뭣도 없다. 이미 지부장에 대한 환상은 박살 난 지 오래였으니까.

물론 아주 오래전에.

"그 취미는 여전하네."

"흠흠. 네가 외제 차 모으는 것보다 낫지 뭐. 더 경제적이고, 남한테 피해도 안 주고···"

"그만. 닥치고 업무 보고나 받지?"

말과는 달리 에바그린의 손에서 서류 쪼가리가 나오는 일은 없었다.

그럼 그렇지. 메이슨은 한숨을 푹 쉬며 서랍에서 보고서와 펜을 꺼내 들었다.

"28구역 A타운에서 불멸자에 대한 토착민의 오보 수정. 3급 위험종 트롤 처리 완료."

"네가 따로 조사해본다던 그 일은 어떻게 됐지?"

"인형사는 아니더군. 놈의 끄나풀도 아니었어. 에스트의 패턴이 달랐거든."

"흐음. 새롭게 합류한 외세일 가능성은?"

메이슨이 탁자의 어느 한 부분을 꾹 눌렀다.

푸쉬이익.

그러자 증기가 뿜어지더니 벽면에 걸려있던 액자가 휙 돌아갔다.

[전 노스트라 조직원 현 A급 수배자 인형사]

[광명교주 썬 바일런의 행적 조사]

구릿빛으로 반짝이는 보드에는 특정 인물들의 사진과 동선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또각또각

에바그린은 그 복잡한 보드의 제일 아래.

[하브람의 시장 에밀리오] [탈주 레자드 브라키] [칼잡이 존]

에밀리오와 브라키의 사진을 찍었다.

"이 두 놈이 그 사칭범의 손에 죽었다."

"이쪽의 의심을 덜기 위한 꼬리자르기 일수도 있지 않을까?"

팅.

메이슨은 어느새 진중한 표정으로 시가에 불을 붙였다. 하지만 에바그린은 쉭 손가락을 튕기며 웃었다.

"멍청한 소리군. 놈들은 이미 우리가 추격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제 수족을 잘라낼 리가 없어."

에바그린은 지도에 표시되어 있든 중소규모의 타운과 에어리어, 자유도시를 툭툭 찍었다.

"어차피 말단들이야 아는 것도 없을뿐더러. 컴퍼니는 그렇게 쉽게 침투할 수 없을 테니까."

그곳은 하나같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놈들은 지금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하는 상황이란 말이지."

툭. 데구르르.

애써 불을 붙였던 시가가 반으로 갈라진다.

"염병. 내 공간에서 담배도 못 피나?"

메이슨이 울상을 짓다가 에바그린과 눈을 마주치자 흠칫 굳었다.

철의 마녀가 더 이상의 방종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듯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흐, 흐흠. 알았어. 아이언 나이트! 아니, 선배! 그래서 내가 뭘 하면 돼? 지원을 더 보낼까? 애들 좀 더 굴려?"

일곱 도시의 지배자 중 하나는 바로 꼬리를 내렸다.

에바그린은 안타까운 눈으로 후배였던 자를 내려다봤다.

변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더니 나태해졌다. 칼날 같던 기세는 이제 뭉툭하게 변했다.

권력이란 참으로 치명적인 독이다.

"그래, 이 안건을 주요 사항으로 올리고 본사에도 보고를 올려."

또각

안타까움을 숨긴 채 붉은 머리칼의 마녀는 팔짱을 턱 꼈다.

"A급 수배범과 신흥 종말론자들의 결탁··· 심상치 않아. 분명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더 있을 거야."

메이슨은 부랴부랴 보고서를 작성하더니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참 그 사칭범은?"

"응?"

"그 친구는 어떻게 했냐고. 늘 하던 대로 죽였나?"

"아아. 그거···"

짜증스럽게 구겨진 미간이 펴졌다.

에바그린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얼마 만에 본 조커 급인데.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겠어? 명함 하나 던져두고 왔지."

참고로 그 명함에는 추적기가 부착되어 있다.

메이슨이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조커.

쓸모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9위계도 하지 못하는 기적을 선보이는 자들.

"선배가 손속에 자비를 둘 정도라니. 대단한 녀석인가 보군."

"글쎄···"

"음?"

"하지만 가능성은 보였어."

단순히 두 개의 능력을 다룰 수 있다는 것에서 베푼 자비는 아니다.

분명 희귀하지만 그런 녀석들은 컴퍼니 전체로 본다면 널렸으니.

그러나···

'그 눈이 마음에 들었단 말이지.'

감히 자신을 앞에 두고도 냉정함을 잃지 않는 눈동자.

침착하면서도 대담한 그 행보와 정신력.

능력은 갈고닦을 수 있어도 인간 본연의 기질은 깎아내는 것이 더 힘든 법.

"장차 거물이 될지도..."

아시아 지부 최강의 능력자는 유신에게 내재된 재능을 간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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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

디데이는 인류 문명의 대부분과 생명체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러나 그런 죽음의 구름들도 피아식별을 할 때가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각 나라의 번화가와 수도권을 우선하여 먹어치웠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울.

한때 인구 천만을 넘기던 대도심은 이제 없다.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채 완전한 불모지가 되었다.

그렇다보니 핵전쟁의 여파를 그나마 덜 받은, 나라의 끝자락으로 생존자들이 몰려드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모든 생명체들의 필수 구성 요소인 생명의 근원.

해안가가 존재하는 지역에 인프라가 몰려드는 것도.

"낙원은 그렇게 탄생했지."

이 엿 같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

가장 포근하며 안온한 지상낙원.

유신은 눈앞에 펼쳐져 있는 콘크리트 장벽을 보면서 말했다.

스케빈저, 피난민, 온몸을 꽁꽁 싸맨 수상한 행색의 자들까지. 그의 앞과 뒤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붐볐다.

모두 다 낙원으로 들어가기 위한 행렬이었다.

"헤에."

에피는 유신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주변을 힐끔거렸다. 낙원은 지금껏 봤던 타운이나 자유도시와는 다른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조잡한 쓰레기 벽이 아닌 규격화된 장벽과 철조망 외에도 곳곳에 드높은 감시탑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발리스타와 투석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저런 걸 맞으면 흔적도 안 남겠는걸?"

"사람 잡으라고 만든 게 아니니까."

경비원들 역시 괴물의 등껍질로 된 갑옷을 차려입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등. 뭔가 체계가 잡혀있는 듯 보였다.

"다음."

그 때 경비원이 손짓했다. 유신과 에피의 차례였기에 두 사람은 검문소 앞에서 멈췄다.

"이 도끼는 뭐야···"

"이 동그란 건 또 뭐지?"

나이프와 석궁까지는 그런대로 넘어갈만 했는데. 브라키로부터 빼앗은 톱날검과 다이너마이트가 문제였다. 특히나 다이너마이트를 툭툭 쳐보는 바보의 모습에 유신이 기겁했다.

"그 기이한 외양. 메트로폴리스의 물건이로군."

"아, 대장."

그 때 경비대 복장을 한 노인이 나타났다.

그는 노쇠했지만 여전히 곧은 허리를 자랑했는데. 눈매는 부리부리했으며 결정적으로 몸에서 짙은 화약 냄새가 났다.

유신은 본능적으로 상대를 알아봤다.

'은퇴한 사냥꾼이로군.'

상대 역시.

"사냥꾼인가?"

낙원쯤 되면 이런 자도 경비로 부린다.

사기꾼은 코트 자락을 슬쩍 젖혀 총을 보여줬다.

"냄새가 옅은데··· 신참인가?"

노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곧 두 사람의 무기를 돌려주며 손을 휘저었다.

"통과."

동업자의 친절 덕분에 두 사람은 수월히 낙원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사냥꾼 흉내라는 건 좋구나."

에피가 고개를 까딱거렸다.

엄중한 경계만큼이나 출입이 까다로운지 낙원에 들어오지도 못한 채 쫓겨나는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

"그렇게 좋은 현상은 아니야."

"응?"

"사냥꾼의 손이 필요할 정도로 위험한 일이 있다는 셈이니까."

이곳에선 돈이 곧 법이다.

"뭐, 저 경우에는 크레딧이 없어 보여서 그런 거겠지만."

낙원이 돌아가는 방식은 21세기의 물질만능주의와 흡사하다. 메트로폴리스 만큼은 아니어도 말이지.

음음. 경청하던 에피의 고개가 이리저리 돌아갔다.

"와아. 사람 존나 많아."

그동안 지나쳤던 타운이나 자유도시는 깡촌처럼 보일 정도로 유동인구가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입을 헤 벌리고 있던 그녀는 곧 실망을 금치 못했는데.

"이게 끝이야?"

잡초가 피고 노후화 된 구 시대의 건물들. 간혹 보이는 오두막들.

사람이 많다는 것만 빼면 다른 도시와 별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

피난민이든 방랑자들이든 그토록 갈망하는 꿈의 도시.

낙원, 낙원 했지만 그렇게 거창한 건 없었다.

"뭘 기대한 거냐?"

"음. 삐까뻔쩍하게 빛나는 집이랑 날개가 달린 사람들?"

에피의 머릿속에 있는 낙원은 천국과도 비슷한 모양이다.

유신은 상상해보더니 피식 웃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해."

"그래서 더 슬픈 거야. 환상이 깨졌잖아."

"하지만 상업지구로 가면 좀 다를 거다."

"음?"

낙원이 다른 자유도시들과 다른 점 하나.

그 크기가 어마어마하다.

도시가 상업지구와 일반지구, 특수지구.

세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을 만큼.

대륙 근처에 있는 메트로폴리스 펑크시티 만큼은 아니어도 현재 구 한국에서는 가장 큰 도시다.

"일단은 방부터 잡자."

두 사람은 계속해서 걸었다. 어느 순간 앞에 있던 것보다 더 크고 깨끗한 건물들과 좌판들. 호객행위를 하는 더 많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어떤 곳에는 3층짜리 목조 저택이 세워져 있기도 했다.

상업지구에 도착한 것이다.

"이상한 냄새나."

그 때 에피가 코를 킁킁거렸다. 주변에 널려있는 땀 냄새는 아닐 것이다. 그건 이미 코가 마비될 정도로 맡아온 악취일테니. 에피가 말하는 냄새는 조금 다른 거였다.

"비린내? 썩은 내? 뭔가 요상한···"

"당연하지. 이 근처에는 바다가 있거든."

"바다?"

"염소와 소듐, 마그네슘, 황과 칼로 이루어진···"

"지금 일부러 어렵게 말하는 거지?"

함께 한지 좀 됐다고 요 꼬맹이도 유신의 의도를 알아챘다.

사기꾼은 피식 웃었다.

"쉽게 말해 물에 소금 탄 거다."

"물에다가 소금을 왜 타? 그럼 못 먹잖아!"

"애초부터 그렇게 만들어진 놈이거든."

'더스트 봄의 전조증상도 확인해볼겸 한 번 볼까?'

따라와라. 유신은 상업 지구의 끝자락 쪽으로 걸었다. 그럴수록 비린내가 심해졌다. 인적도 드물어지기 시작했다.

'뭔가 으쓱한데. 바람은 또 왜 이렇게 많이 부는 거야.'

에피가 생각하던 그 순간.

쏴아아아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헤에···"

소녀는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쭉 뻗어있는 지평선 너머는 전부 푸른빛이었다.

태양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그것들은 별무리라고 봐도 될 정도로 투명했다.

남포동과 다대포 인근은 사막화 된 지 오래였기에 해수가 메말라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좀 달랐다.

노후되고 부서졌지만 여전히 견고한 방파제 너머로는 파도가 물결치고 있었다.

"흠."

파도를 오래 보지 마라. 자칫하다가는 홀려버리고 말 테니.

뱃사람들조차 이런 말을 던질 정도로 바다는 이상한 마력이 있다.

'수위는 그대로군. 아직 녀석들이 움직이지는 않은 건가?'

(구)한국의 메인 시나리오를 생각하던 유신이 고개를 돌렸다.

바다를 처음 본 에피의 반응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냄새는 구린데. 생긴 건 존나 이쁘네."

저건 언어지식이 부족해서 저렇게 말하는 걸까? 아니면 원래 감성이 저런 걸까?

유신은 역시나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 순간.

"이보쇼. 낙원에 처음 오는 거요?"

순찰이라도 돌고 있었는지 경비원 둘이 다가왔다. 아니, 이 경우에는 시티가드라고 불러야겠지. 유신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다만?"

"흐흐. 촌놈들이었군. 거 바다가 너무 이쁘다고 가까이가면 안 되오."

유신은 경비의 우려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모르는 일행을 위해 얌전히 입 다물고 있었다.

"왜 들어가면 안 되는데?"

에피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척. 경비가 지평선의 어느 한 곳을 손짓했다.

촤아아악

순간 파문이 일더니 파도가 양쪽으로 갈라졌다. 곧 그 속에 도사리고 있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라-라라라라!

어림잡아도 5미터는 될법한 덩치의 거대한 악어였다.

'4급 위험종 크로켄.'

끝이 아니었다.

놈을 비롯한 갖가지 수장룡과 어인들까지.

평온했던 바다는 어디로 가고 괴물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

사실 풍경에 가려지기는 했지만 해안가 주변에는 여러 구조물들이 많았다.

방파제 말고도 나무로 만들어진 장벽, 감시탑에 설치된 발리스타까지.

다 해변가의 괴물들이 이곳에 침범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것이었다.

소녀는 감동도 잊은 채 창백한 낯빛으로 뒷걸음질쳤다.

"바다는··· 무서운 곳이구나."

멸망한 세상에서 인간들의 영역이란 이토록 보잘것없다.

[ㅎ운대]

녹슬고 풍화된 간판만이 물 위에 둥둥 떠다닐 뿐이다.

***

촤르르륵

침대 위에서 푸른색 칩들이 우수수 쏟아진다.

이를 세어보던 유신이 턱을 쓰다듬었다.

"겨우 6650크레딧이라···"

"이게 겨우라고?"

옆에 있던 에피가 미친놈 보듯 유신을 바라봤다.

그녀는 에녹의 비밀금고 등을 털어봤기에 잘 안다. 중소규모 타운의 크레딧을 다 끌어모아도 2천이 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즉 유신은 지금 타운 세 개를 운용할 수 있을 정도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부에 대한 기준은 상대적인 법.

"콜록, 콜록."

중금속과 독성물질에 중독되어 서서히 죽어가는 몸뚱이.

타고나길 약골로 태어났지만 과도하게 굴리느라 삐그덕 거리는 관절과 장기들.

이 몸을 케어할려면 이 정도 돈으로는 택도 없다.

무엇보다도···

'내가 얼마나 굴렀는데.'

지난 1년동안 그 개지랄을 하고 모은 재산이 이것뿐이라면 허탈할 수 밖에 없다.

적어도 평범한 사람이 아닌 유신의 관점에서라면.

이 세상 누구보다도 특별한 능력을 지닌 그의 관점이라면 말이다.

'물론 몇 달간은 이 엿같은 세상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지만.'

"그거 좀 재수 없는 소리인 거 알지?"

"익숙해져야 될 거다. 나와 함께 다니려면 말이지."

이 세상이든 저 세상이든 돈이 있다면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는 법이다.

다가올 멸망을 막기 위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세력을 구축할수록 굴리는 돈의 액수는 천문학적으로 커질 터. 이런 푼돈에 놀라서는 곤란하다.

에피는 함께라는 말에 움찔하더니 조막막한 가슴을 내밀어 보였다.

"헹. 물론이지. 맡겨만 줘!"

"···내려가자."

떨떠름한 표정을 한 유신은 돈주머니를 품에 넣은 채 1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끼이익, 끼이익

전체적으로 브라운 톤을 띄는, 아예 원목을 이용해 새로 지은 이곳의 이름은 날뛰는 방사능 들개 여관.

이름과는 달리 침대의 짚과 이불도 햇빛에 잘 말려서 깨끗했고, 쥐나 벼룩도 없었다. 심지어 문에는 잠금장치까지 있었다.

물론 그만큼의 대가가 있었다.

식사 별도 하루 숙박비만 10크레딧.

낙원의 물가가 다른 곳보다 비싸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폭거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돈 아낄 때가 아니다.'

할 것이 천지에 널린 유신에게는 마음 놓고 편하게 쉴 수 있는 쉼터와 음식에 개수작을 부리지 않는 청렴한 주방장이 필요했다.

그리고 많은 크레딧을 필요로 하는 곳일수록 이런 요건에 부합하는 곳일 가능성이 컸다.

자본주의의 순기능 중 하나지.

"우선···"

유신은 앞으로의 계획을 점검해보았다.

-제대로 된 영양공급 및 쓸만한 약초와 의사를 찾아 이 몸뚱이를 치유해야 한다.

-내면의 에스트를 갈고 닦아 강탈 능력을 비롯한 본신의 힘을 더욱 강화시켜야 한다.

-요 꼬맹이를 이제 제대로 된 사수이자 히트맨으로서 키워야 한다.

-결론적으로 인형사와 광명교의 흔적을 쫓아 더스트 봄을 막아야 한다.

할 건 많고, 하나같이 까다로우며 끔찍한 난이도였다.

그러나···

'애초에 포기할 거였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다.'

이방인은 주먹을 꽉 쥐며 의지를 불태웠다.

차근차근 하지만 빠르고 철저하게 움직여 보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낙원

"어머, 내려오셨네요~"

음식을 만드느라 바쁜 여관주인 대신 한 여급이 유신을 맞이해줬다.

건강해 보이는 구릿빛 피부에 웨이브진 갈색 머리.

훌륭하게 발달된 골반과 가슴까지.

아마 이 여관의 숙박비가 이렇게 비싼 이유는 이 미녀 NPC덕도 있지 않을까?

"저기 델리아. 우리 밥 한 번만 같이 먹자니까? 응?"

"미안 콥슨. 일이 너무 바빠서."

"저기 델리아···"

"다음에요~"

웬 코쟁이 녀석과 취객들이 치근덕거린다. 여급은 도도해 보이는 얼굴에 걸맞게 냉정하게 때로는 자연스럽게 그들을 뿌리쳤다.

"와우. 이걸로 세 번째."

에피가 휘파람을 불었다.

두 사람이 앉아서 기다리는 그 짧은 순간에도 벌써 세 번째 희생자가 고배를 마셨다.

"주문받겠습니다."

마침내 여급이 주문을 받기 위해 다가왔다. 목소리 톤이 묘하게 상기되어 있다.

흠. 이 여자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사이드 퀘스트든 메인 스토리든 뭐든···

유신은 그런 시선으로 여급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당사자는 민망할 정도로 꽤나 오래.

"흠흠. 저기 손님?"

"아, 미안하군."

사과를 한 유신은 여급을 향해 크레딧 뭉치를 건넸다.

"여기서 제일 비싸고 맛있는 걸로."

이 정도쯤 되는 식당이라면 생물도 취급할 것이다.

방사능과 중금속 섞인 괴물 고기 말고, 제대로 된 식사를 하며 영양 섭취 좀 해보자.

"···"

순간 침묵이 감돌았다. 게다가 기묘한 일이 발생했다. 여급이 여관주인에게 주문을 전달하지 않은 것이다.

뭐지? 유신이 생각하던 순간.

짝.

여급이 난대없이 유신의 뺨을 때렸다.

"이 변태가···! 난 그딴 일은 안 한다고 몇 번 말해요!"

염병?

***

"정말, 정말 미안해··· 그런 요구를 하는 손님들이 너무 많아서···"

델리아가 쩔쩔매며 양손을 모았다.

"얼레리 꼴레리."

에피는 킥킥거렸고, 유신은 붉어진 제 뺨을 만지작거렸다.

"날 그런 시정잡배로 보면 곤란한데 말이지."

이 여자 손이 참 매섭다. 웬만한 전사라고 해도 믿을 정도.

이게 종업원의 힘인가?

"정말! 정말 미안! 유신이라고 했지? 이걸로 퉁칠 생각은 없지만 우선 저녁 식사값은 안 받을게! 원하는대로 다 시켜! 그리고··· 그리고···"

세상을 살다보면 얼굴이 개연성이라는 말이 이해가 된다고 했던가?

마치 미드에 나오는 퀸카처럼 생긴 미녀가 저렇게 안절부절해하니 별로 짜증이 일지는 않았다.

당사자가 진심으로 미안해하기도 했고···

'내가 너무 오래 쳐다보기도 했으니까.'

오해를 살만한 행동 역시 이쪽에서 해버렸으니.

무엇보다도···

이걸 기회 삼아 정보를 얻으면 되겠지.

유신은 사소한 일에 연연하지 않았다.

"일단 이건 서비스야. 뭐, 더 먹고 싶은 것 있어? 사과 파이라도 구워줄까?"

델리아가 내려놓은 접시에는 옥수수 두 덩이가 올려져 있었다. 아무리 낙원 내부에서 대규모 경작지를 운영한다지만 그래도 괴물 부산물이 아닌 동물 고기나 채소는 값이 제법 나갔다.

즉 이건 그녀 나름대로 정말 미안해 한다는 뜻이었다.

유신은 그녀의 호의에도 구태여 값을 지불했다.

"안 줘도 되는···"

"음식 대신 뭐 좀 물어봐도 되겠나?"

"아, 음. 그래. 내가 답해줄 수 있는거라면야."

"낙원 내부에 괜찮은 실력을 가진 의사가 있을까?"

현실이 된 게임이란 건 방대하기 그지 없다.

유신이라고 모든 npc들과 가게의 위치를 아는 것은 아니었다.

"의사라··· 의사는 잘 모르겠어. 그런 건 저기 특별지구에 사시는 클레이모어 님들이나 돈 많으신 분들이 찾는 거니까. 하지만 약방이라면 알아."

"호오."

"사거리에 있는 로톤씨의 가게야. 여관주인 아저씨가 덤벙대기 때문에 자주 가봤어."

친절하게 주변 건물들의 특징까지 알려주며 설명해준다.

델리아는 유신의 날카로운 하지만 창백해 보이는 안색을 살피더니 물었다.

"많이 안 좋아? 혹시 내가 때려서 더 심해진 건 아니지···?"

붉어진 뺨을 쓰다듬기까지 했다.

한 번 빚을 지워두니 이런 걱정까지 들어온다.

유신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것과는 상관 없다. 오랜 지병이라."

그 후로 낙원의 최근 동향이라던지. 양심적인 잡화점이라던지. 용병 조합의 위치라던지.

토착민이 흔하게 알 수 있는, 하지만 외부인들은 잘 모르거나 통수 맞을 수도 있는 것들을 물었다.

델리아는 손님들을 응대하면서도 틈틈히 답변해주었다. 나중에 가서는 죄책감을 덜었는지 빙긋 웃으면서 이 쪽의 이야기를 물어보기도 했다.

"개맛있어. 하브람의 그 사기꾼에 비하면 이 집은 천국인걸?"

만족스러운 식사와 정보수집을 끝마친 두 사람은 방으로 돌아왔다.

문 앞에는 유신이 지불했던 음식값이 봉투에 담겨 그대로 되돌아와 있었다.

[정말 미안!]

앙증맞은 필체와 함께.

델리아···

그 외양 만큼이나 훌륭한 마음씨를 가졌는걸.

침대에 누워있던 유신은 손가락을 튕겼다.

"아."

이제 기억났다. 저 npc가 누군지.

"저주받은 신부 델리아."

그게 쟤였구나?

그냥 널리고 널린···

초반부 네임드 몬스터 중 하나라서 생각나는 게 늦었다.

'이거 잘하면... 어인 놈들의 위치를 찾을 수 있겠는걸.'

유신이 계획을 곱씹을 때.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에피가 투덜거렸다.

그녀는 맨바닥에 누워 있었는데. 당연히 방값을 계산한 유신이 꼬마애라고 호의를 베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너무해. 이렇게 작은 아이를 맨바닥에서···"

"닥치고 자라.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훈련에 들어갈 테니까."

"네에."

소녀가 양촛불을 후 껐다.

오래된 창문 밖에서는 취객들의 고성방가와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낯선 곳에서의 하룻밤이었지만 두 사람은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이 멸망한 세상에서는 익숙한 일이었기에.

***

방사능 들개 여관은 비싼 값을 하는 만큼 꽤나 괜찮은 편의 시설이 하나 있었다.

바로 널찍한 뒤뜰이 존재한다는 것.

여관주인에게 크레딧을 듬뿍 얹어준 유신은 짚으로 된 허수아비를 내려놓았다.

유신이 손짓하자 경쾌한 소리가 울린다. 퍽. 직후 쏘아진 석탄이 허수아비의 머리를 후려쳤다.

"맞췄다!"

"최대 사거리는 210미터. 유효 사거리는 70미터 정도인가?"

이를 살피던 유신이 턱을 쓰다듬었다. 저 멀리서 방방 뛰고 있던 에피가 다가와서 가슴을 내밀었다.

"에헴. 어때? 이 몸의 실력이?"

딱!

"악!"

"한참 부족하다. 그 정도 실력으로는 괴물이니 밴디트도 잡을 수 없어."

"씨이."

꿀밤을 먹이며 면박을 주기는 했지만 유신은 속으로 흡족해했다.

제대로 만든 복합 소재의 궁도 아니고 나무로 된 구닥다리 물건이다.

거기다가 에피는 아직 꼬맹이에 불과했다.

바람의 영향.

불안정한 주변환경.

부족한 근력.

이 모든 페널티를 감수한 채 이 정도 결과를 낸다는 것은 사수로서의 그녀의 재능이 대단하다는 것을 뜻했다.

"하나만 물어보자."

"뭔데?"

"이걸 쏠 때 무슨 느낌이 들지는 않았나?"

"느낌?"

웬 뜬구름 잡는 소리? 라는 말은 튀어나오지 않았다.

에피는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확실히 요상한 게 느껴지기는 해. 방아쇠를 당길 때 손에 착 감긴다고 해야 되나? 상대도 더 크게 보이는 것 같고··· 많이 쏘면 눈이랑 머리도 아파."

'에스트는 각성했고.'

"그 밖에 다른 건?"

"딱히?"

[일곱 번째 기회]

능력은 아직 개화하지 않은 것 같고.

"음."

사실 사수로서의 능력은 이미 충분하다. 당장 실전에서 굴려먹을 수 있는 정도. 하지만···

"활 쏘기는 그만하고 지금부터 내가 하는 동작을 따라해라."

석궁은 잘 쏴봐야 사람이나 1급 위험종 대가리를 부수는 게 끝이다. 쇠뇌 정도는 돼야 2급이나 3급한테 유의미한 타격을 입힐 수 있다.

에피의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육체의 미숙함이다. 정확히는 근력의 부족이라고 봐야겠지.

'궁수는 옛날부터 힘캐였으니까.'

"으에? 동작 요상해. 그리고 헥헥. 존나 힘들어어!"

팔굽혀펴기, 윗몸 일으키기, 지옥의 유격체조 등.

유신은 전생에서 배웠던, 바위 지고 산 타기 같은 이 시대의 미개한 운동법과는 궤를 달리하는 트레이닝을 시켰다.

효과 하나는 확실하지만 어른조차도 견기디 힘든, 21세기였다면 아동학대라고 불렸을 행위들.

"흐악, 흑."

땀이 후두둑 떨어진다. 입에서는 연신 거친 숨이 흘러나온다.

하지만 에피는 멈추지 않았다.

고향에서 버림받은 소녀는 알고 있었다. 유신을 따라가기 위해서라면 이런 훈련쯤은 견뎌야 한다는 걸. 그래야 또다시 버림받지 않는다는 것을.

그렇기에 필사적으로 짧은 팔다리를 움직였다.

'역시 독종이야.'

유신은 냉정을 가장한 채 소녀를 내려다보다가 노련하게 당근 역시 던졌다.

"언제까지 그런 장난감 가지고 놀래?"

"헥헥, 뭔 개소리."

유신은 코트를 젖히며 리볼버를 툭툭 쳤다.

"제대로 된 것도 다뤄봐야지."

은빛으로 반짝이는 총신과 브라운 계통의 고급스러워 보이는 손잡이.

-타앙-!

이예르폴 전체를 공포에 떨게 했던 뱀 인간. 브라키를 일격에 침몰시킨 작은 괴물.

"헤에···"

소녀는 이 엿 같은 세상에서 무력하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중죄인지 알고 있다.

제 한 몸 건사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도.

그렇기에 유신이 내보인 당근은 아주··· 아주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이딴 고통쯤은 금방 털어버릴 수 있을 만큼.

"이이이이익!"

"앞으로 3시간 동안 15회씩 하고 1분 쉬고, 다시금 반복해라. 어지러운 끼가 돈다면 그늘로 가서 휴식하고. 알겠나?"

일단 신체단련 위주로 커리큘럼을 짜자. 그 후로 차근차근 유의해야 할 괴물이나 능력자들. 에스트에 대해서 가르치면 되겠지.

"알았어!"

유신은 살기 위해서 춤추는 어린 꽃을 보다가 크레딧 약간을 품에 넣어주었다.

"배고프면 이걸로 밥 챙겨 먹고. 잠시 나갔다 온다."

"잘··· 헥헥. 다녀와아!"

한 때는 그런 때가 있었다.

아이는 연약하고, 미숙한 게 당연하며, 보호받기만 하면 충분한 시대가.

하지만 지금은 그런 명제 따위 길거리 쓰레기만도 못한 세상이 되었다.

이제는 어른도, 아이도 알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강해지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을.

***

"후우."

에피의 훈련을 봐주고 또 얼마나 걸었다고 현기증과 함께 다리가 후들거린다.

옛날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점점 몸 상태가 나빠지는 것이 실시간으로 체감되고 있었다.

'이예르폴에서 너무 구른 탓이겠지.'

등가교환.

강력한 힘은 그만큼의 대가를 필요로 했다.

히트맨과 매드니스 카우의 능력을 중첩으로 쓴 채. 사냥꾼의 발톱을 휘둘러서 그럴 것이다.

트롤의 재생력은 그의 신체를 원상태로 되돌리기만 할 뿐. 근원에 자리 잡은 독성과 종양을 치유해주지는 못할 테니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터벅.

걸음을 멈춘 채 땀을 닦는 유신의 앞에는 델리아가 말해줬던 약방이 있었다.

"쯧쯧. 스케빈저 생활을 오래 했나 보군."

가게의 주인은 염소수염을 기른, 아주 전형적이게 생긴 노인이었다. 그는 유신을 살피자마자 혀를 찼다.

"···"

손님이 들어오자마자 대뜸 무당 같은 소리를 한다.

보통 사람 같으면 신통하다고 여겼을 텐데 현대인은 대뜸 의심부터 들었다.

'사기 치는 거 아냐?'

"눈 밑이 검은 게 내부에서부터 썩어들어가고 있고, 연신 기침을 내뱉는 게 폐 역시 안 좋아."

사실 중금속 중독으로 인한 폐병은 황무지인들이라면 누구나가 달고 다니는 지병이다.

여기다가 유신의 창백한 안색과 지저분한 행색. 약방을 방문한 목적을 따져본다면 저 정도 추리쯤은 쉽지. 하지만···

'여기서는 이것도 못하는 새끼들이 널렸단 말이지.'

누차 말하지만 이곳은 바보들의 세상이다.

'제대로 소개시켜줬구나 델리아.'

굳이 주변에 널려있는 약초들과 탕약 냄새를 제외하고서라도 믿음이 갔다.

"델리아의 소개로 왔는데."

"아아. 그 가슴 큰 처자? 흘흘. 그래서 뭐, 아는 사이라고 값이라도 깎아달라는 건가?"

"그것까지는 바라지 않아. 그냥 값을 너무 후려치지만 말아 달라는 거지."

유신이 너스레를 떨었다.

노인은 뭐 이런 놈이 다있지? 라는 시선으로 그를 보다가 와하하하 웃었다.

"이거 간만에 유쾌한 병자로군. 좋네. 자네와 가슴 큰 아가씨의 인연을 봐서 내 특별히 20프로만 남겨먹도록 하지."

그럼 평소에는 얼마나 남긴다는 건데?

라는 생각은 접어두자. 약초의 유통, 정제, 보관, 판매까지 하나같이 사람들 손을 안 타는 게 없을 테니까.

'저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도 없고.'

"그래, 뭘 찾고 있나? 자랑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낙원에서 약방은 여기가 최고야."

유신은 주변을 슥 둘러보다가···

"아스피린이나 페니실린, 게보린 정도?"

툭 내뱉었다.

"으음?!"

여유로워 보이던 노인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이놈은 뭔데 그걸 알고 있는 거지?'

약방 경력만 수십 년.

손님 입에서는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낙원

유신의 말을 듣고 로톤이 제일 먼저 한 생각이었다.

오랜 세월을 거치다 보면 자연스레 이쪽 업계에 대해서 관록이 쌓이고 비화 같은 것들도 알게 된다.

그 중에서도 유신이 말한 것은 이제 잘 언급되지도 않는 약들이었다. 구 시대의 잔재들이니까.

소위 말하는···

"전설의 영약들을 찾는군. 그런 이야기는 어디서 들었나?"

"어렸을 때 조부로부터."

유신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약국에만 가면 몇백 원에도 구할 수 있던 약들이 이제는 전설이라고 불리다니. 그는 이런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어이가 없어지고는 했다.

'역시 없을 줄 알았지.'

(구)인류의 지하 벙커나 메트로폴리스나 가야 구할 수 있는 걸 여기서 어떻게 구한단 말인가?

물론 알면서도 던진 이유가 있었다.

조금 더 이 약방의 수준을 알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저 노인한테 얕보이고 싶지 않았다.

"내 가게가 아무리 낙원 최고라고 자부하지만 그런 건 없어. 그건 크레딧이 있다고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과연 노인의 태도가 달라졌다.

그저 지인 소개로 온 얼치기가 아니라 그래도 뭘 좀 아는 놈으로.

물건을 살 때 이런 이미지는 중요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관계의 우위란 것도.

"그런가? 그러면··· 도라지랑 민들레 한 묶음씩."

"두 개 다해서 100크레딧이다."

하나같이 염증을 완화시켜주고 항생제 비스무리한 효과가 있다.

산이나 길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풀떼기들이 이제는 사람 목숨값보다 비싸게 됐다.

당연했다. 모든 것이 메말라 버린 세상.

스케빈저들 역시 목숨을 걸고 저걸 캐고 다닐 테니까.

'괜찮은데?'

사실 유신은 이 가게에 들르기 전 다른 약방에도 들렀었다.

그곳에선 정확히 120크레딧을 불렀다.

"아, 그리고···"

유신은 값을 지불하며 또 한 가지를 더 물었다.

"···?"

"여기 달맞이 초는 있나?"

노인의 얼굴에 이제 여유는 없었다.

그저 혀를 차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거 진짜 제대로 된 손님이로군."

21세기에도 온갖 사기꾼들이 넘쳐났듯.

이곳에서도 역시 별 효과가 없는 풀떼기들을 중화제라며 섞어서 팔고는 했다.

진짜로 그렇게 알고 있거나 알면서도 속이는 것이다.

저 노인의 경우에는 후자라고 봐야겠지.

그렇기에 뒤통수를 맞지 않으려면 자신의 증상에 맞춰 특정한 약재를 복용해야 했다.

앞서 말한 두 약초는 현재 유신에게 딱 필요한 것들이다.

과하지 않게 적당한 가격으로 몸을 케어할 수 있는 것들.

마지막으로···

"자네쯤 되면 잘 알겠지. 달맞이 초의 가격이 어마어마한 거."

디데이 후 이 세상의 생태계는 크게 뒤틀렸다. 그런데 그게 또 악영향만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마치 소설책에서나 나오는 것처럼 대단한 효능을 가진 약초들이 몇 개 나타난 것이다.

'산 정상에서 300일 동안 달빛을 받아야만 피어오르는 꽃.'

하지만 뽑는 것이 하루라도 지난다면 그대로 시들어버리는 꽃.

그 까다로움만큼이나 이 약초의 효능은 굉장하다.

망가진 신체의 재생. 감염 및 세균질환의 치료.

유신이 게임상에서 봤을 때는 어지간한 21세기의 약물보다도 뛰어난 효과를 가지고 있다.

온갖 질병을 주렁주렁 달고 죽어가는 캐릭터가 조금은 더 싸울 수 있게 해줬으니.

'분명 그런 설정이었지.'

말도 안 된다는 생각 따위는 들지도 않는다.

이곳은 게임 세상이니까.

"얼마지?"

"5천 크레딧."

노인은 손가락 다섯 개를 펴 보였다. 하지만 그는 별 기대를 하지는 않는 것처럼 보였는데. 아무리 봐도 초라한 행색의 유신이 그 정도의 거금을 가지고 있을 거란 생각이 안 들었기 때문이다.

촤르르륵

"허어."

물론 그 생각은 돈주머니를 쏟아내는 유신을 보며 바뀌었지만 말이다.

'에피한테 크레딧을 받지 않았더라면 사지도 못했겠군.'

무슨 약초 하나가 타운 세 개를 운용할 수 있을 정도의 가격이라니.

역시나 더럽게 비싸다.

"자네 무슨 클레이모어나 사냥꾼이라도 되는 건가? 어떻게 이런 거금을···"

"물건은?"

유신이 말을 끊은 것도 개의치 않을 정도로 노인은 기뻐 보였다.

그는 실실 웃으며 크레딧을 세어보더니 곧 고급스러워보이는 목함을 가지고 왔다.

달칵. 쿠션까지 깔린 상자 안에는 한 떨기 꽃이 있었다.

대낮에도 은빛으로 반짝이는 게 약초에 대해서 무지한 자가 보더라도 이게 심상치 않은 물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의 존재감이었다.

'저 광채와 다섯 개의 잎사귀. 진품이다.'

"우리 가게에서도 하나밖에 안 남은 물건이야. 낙원 전체로 따져봐도 몇 개 안 남았겠지.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데. 이건 진품이야. 의심되면 먼저 먹어보라고."

로톤의 호언장담과는 별개로 게임상에서는 수백 번을 봐온 물건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 효능은 또 어떨까? 유신은 기대감반 두려움 반으로 약초를 씹었다.

"···!"

털썩.

그리고 곧바로 정신을 잃었다.

***

"유, 신. 유신."

"···"

"괜찮아?"

눈을 뜨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탐스러운 갈색 머리칼이었다. 그 아래에 자리한 눈동자에는 걱정이 또 한 가득이다. 유신은 이 npc가 누구인지 안다.

어인에게 끌려가 그들의 씨받이가 되는 여자.

끝내 괴물로 타락해 차가운 심연을 헤매는 마녀.

지금은 그저 한 여관의 종업원일 뿐인 여자.

"델리아."

"응. 나야.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로톤 아저씨가 날 불렀어. 네가 약을 먹고 갑자기 쓰러졌다면서."

유신은 주변을 둘러봤다.

누런 벽면과 침대. 그 와중에 인형이라던지 앙증맞게 꾸며져 있는 방의 모습.

상황으로 봐서 델리아의 집인 모양인데···

"네가 날 옮겨준 건가?"

"응. 너 보기와는 달리 엄청 가볍더라?"

이 건강해 보이는 미녀는 깡마른 사내를 들어올릴 정도의 힘은 있는 모양이다.

"그렇군··· 아마 약효가 너무 좋아서 내 몸이 감당하지 못한 것 같다."

유신은 얼굴을 쓸었다.

기절하기 전. 달맞이 초가 입에 닿을 때의 그 질감.

씹으면 씹을수록 퍼져나오는 열감과 기운들.

내부에서부터 소용돌이치던 상쾌함.

유신은 약초를 씹는 그 한순간 동안 정말이지 다양한 경험들을 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놀라운 결과를 제공했다.

'몸이 가볍다.'

지끈거리던 머리와 잔기침이 확연히 줄었다. 뼈마디나 근육통의 강도도 약해졌다.

마치 감기에 걸렸을 때 약을 먹고 한숨 푹 잔 것 처럼 개운한 기분이었다.

'굉장하군... 에스트도 더 잘 움직이는 느낌이야.'

물론 다시금 전투를 하고 황무지를 돌아다니면 금방 재발할 것이다. 하지만 잠깐이라도 증세를 약화시켰다는 것만으로도 거금을 들여 구매한 보람이 있었다.

어쨌든 이 약해빠진 몸뚱이가 완전히 구제불능은 아니란 소리니까.

"몸이 정말 안 좋았나 보네. 지금은 좀 괜찮아?"

그 때 유신의 이마로 차가운 손수건이 닿았다. 이제보니 델리아는 옆에 앉아 자신을 간호해주고 있었다. 생전 처음 받아보는 호의에 유신은 당황했다.

"괜찮다. 그보다 가게는?"

"잠깐 주인 아저씨한테 맡겨두고 왔어. 아저씨도 돈 많은 손님을 잃기 싫은지 보내주더라구."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델리아의 호의는 고마운 것이었다. 그 누가 손님이 쓰러졌다고 제 생업을 내팽겨치고 와줄까?

자칫하다가는 괴물도 밴디트도 아닌 노상에서 죽을 뻔 했다.

얘가 이러는 이유는 아무리 봐도···

"그 때 뺨을 맞은 것에 대한 빚은 이미 치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정보도 얻었고, 음식값도 안 받았잖아?

이 말에 대한 델리아의 반응은.

짝!

"얘도 참! 날 대체 뭘로 보는거야아···"

유신의 팔을 후려쳤다.

"큭."

"앗, 미, 미안! 나는 그냥 네가 나를 너무 나쁜년으로 보는 것 같길래···"

"···그럼 이건 그냥 너의 순수한 호의인가?"

"너는 굳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거래처럼···"

말을 하던 델리아가 입을 다물었다.

곧 유신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그래. 이건 내 순수한 호의야."

베시시 웃었다.

"첫만남은 비록 최악이었지만 계속 보다보니 점점 진국인 사내에 대한 내 호의."

"···"

어색한 침묵이 방안에 감돈다.

델리아는 취객을 쫒아내던 때의 냉정한 말투와는 달리 산새처럼 속삭였다.

"배는 안 고파? 죽이라도 좀 끓여줄까?"

유신의 침묵이 더 길어졌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지금 두 가지의 저울추가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나는 잠깐의 안주라는 욕망.

하나는 지금껏 해왔던 대로 목표까지의 질주라는 고행.

이 저울추의 승자는···

"고맙다 델리아.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다."

유신은 품을 뒤적거리더니 델리아의 오늘치 일당을 대충 계산해서 침대 위에 올려놨다.

"앗. 유신? 어디가?!"

"일이 바빠서."

당황하는 처녀를 뒤로한 채 유신은 매정하게 집 밖을 나섰다.

이윽고 생각했다.

'은혜는 갚아야겠지.'

계획대로 델리아는 어인들, 광명교의 본거지를 찾기 위한 미끼로 쓴다.

하지만 그녀에게 닥칠 파국은 최대한 막아준다.

유신은 빚지고는 못 사는 사내였다.

***

"어디 보자. 방사능 탐색기랑 가스 마스크 두 개. 크레딧 추출기까지 다해서 1400크레딧이오."

그 동안 구할 곳이 없어서 못 구하던 필수품들을 샀다.

잡화점에서 값을 치른 유신은 앞서 샀던 다른 약초들을 씹으면서 걸었다.

에피를 훈련시키고 몸의 케어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했다. 그렇다면 이제 다음 목표를 향해서 움직여야 했다.

'강해져야겠지.'

이 세상에서 오직 자신만이 다룰 수 있는 권능인 강탈.

이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야 한다.

돈 역시 벌어야 한다. 방금 전에 산 물품으로 인해 전재산을 다 탕진했으니까.

이대로 가다가는 기껏 낙원까지 들어와서 다시 쫓겨나게 생겼다.

물론 유신은 이 모든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딱 맞는 장소를 알고 있었다.

터벅

마치 서부시대의 술집을 연상시키듯 양옆으로 스윙도어가 유신을 맞이했다. 왁자지껄한 소음과 열기 속으로 유신은 기꺼이 몸을 맡겼다.

곳곳에 놓인 원형 탁자들과 커다란 게시판. 정면의 데스크까지.

[헤븐즈 클럽]이라고 이름 붙여진 술집은 손님들로 인해 북적거리고 있었다.

-스위트홈에서 유적을 털었다는군. 시설 보호복이랑 보존장치, 석유까지 나왔다던데.

-존나게 부럽구만. 그 짝은 하이에나 짓거리도 이제 끝이잖아?

-서쪽 황무지에 개미지옥들이···

다들 어딘가에 흉터 하나씩은 기본적으로 달고 있었으며 건장한 체구를 자랑했다.

'여기도 별반 다를 게 없군.'

낙원이 자유도시와 타운, 에어리어와의 다른 점 두 번째.

그들은 도시에 닥친 문제를 언제 올지 모르는 클레이모어나 사냥꾼들에게만 맡겨두지 않는다.

통칭 용병조합.

이란 기관을 만들어서 자력으로 닥친 일들을 해결한다.

유신은 뚜벅뚜벅 걸어서 데스크 앞으로 향했다.

여느 판타지 게임처럼 미모의 여직원은 없었다. 하나같이 험상궂은 거한들 뿐이다.

당연했다. 사람이나 밴디트, 괴물 잡아 돈 버는 백정들을 다루려면 접수원도 그에 걸맞는 품격을 지녀야 했다. 그래야 개짓거리를 못할 테니까.

"일감? 완수보고?"

"신규등록을 좀 하고 싶은데."

사무적으로 답하던 접수원은 괴물모피로 만든 양피지와 펜을 집어들었다.

"이름이 뭐지?"

"유신."

"류신. 어려운 이름이군."

"유신이다."

"쳇. 류신이든 유신이든 알게 뭐야? 여튼 가입비는 50크레딧이다."

퉁명스럽게 크레딧을 갈취한 접수원은 용병조합이 돌아가는 방식에 대해서 설명해줬다.

"보나마나 그쪽 역시 돈을 벌려고 이런 시궁창까지 온 거겠지? 하지만 처음부터 대단한 일을 맡길 수는 없어. 우리도 당신이 놈팽이인지 밴디트인지 성실한 일꾼인지 확인해봐야 하니까."

요컨대 조합에는 신용도라는 게 있었으며 수주자가 그간 완수한 의뢰에 따라 등급이 부여된다는 뜻이었다.

"일단 처음은 동패부터 시작이다. 저기 게시판에 가보면 이것과 같은 모양을 달고 있는 의뢰서들이 있을 거야. 그걸 나와 같은 직원들한테 가지고 오면···"

탁.

대머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유신이 탁자를 치며 그의 말을 끊었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높은 등급을 얻을 수 있는 방법도 있다고 들었는데."

"시건방진 소리를 하는군."

날카로운 반응이었지만 사실 마초에게도 사정이 있었다.

그는 하루에 수 백명의 군상들을 상대한다. 그 안에는 별의별 또라이들도 다 있었으며 신의라고는 없는 놈들 천지였다. 이른바 서비스직의 고충이란 거다.

그런 와중에···

'비리비리해 보이는 녀석이 이런 말을 하다니.'

스트레스 때문에 정신이 없었던 마초는 유신이 매고 있는 기이해 보이는 톱. 특유의 날카로운 안광을 신경 쓸 수가 없었다.

"후우."

당장에라도 멱살을 잡고 싶었지만 마초는 인내심을 가지기로 했다.

"물론 그런 방법도 있지. 네가 그만한 능력을 보여준다···"

말을 하던 마초가 눈을 부릅떴다. 유신의 주머니에서 나온 물건 때문이다.

그건···

"레자드의 이빨이잖아···"

3급 위험종 레자드.

부족생활을 하는 습성과 특유의 특성 때문에 동급의 괴물들보다 더 까다로운 괴수.

물론 이게 직접 잡은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래도 최소한의 검증은 된다. 노획 역시 실력이었으니까. 뿐만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불꽃의 염화]

유신의 손에서 피어오르는 불꽃을 보며 마침내 마초는 입을 쩍 벌렸다.

"느, 능력자였나?!"

정신을 집중한다.

영약을 먹고 훨씬 더 좋아진 컨디션으로 에스트를 극한까지 밀어 넣는다.

화르르륵

유신의 능력은 기본적으로 강탈. 그러나 에스트를 다루는 솜씨와 재능 역시 웬만한 능력자들은 가뿐히 뛰어넘는다.

사람 머리통만 했던 불꽃은 어느새 천장까지 닿았다.

"어이쿠!"

마초는 비틀거리면서도 머리를 굴렸다.

낙원에 상주하는 사람들만 십만이 넘는다. 그 안에는 당연히 능력자들 역시 있었다.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원소 계열은 희귀했다.

위력이 좋고 직관적이며 범용성마저 좋았으니까.

'화력으로보나 최소 3위계. 그렇다면 레자드도 저자가 직접 잡았을 가능성이 크다.'

···

어느새 조합에 있던 사람들은 할일도 멈춘 채 유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는 스윽 그들을 훑어보다가 탁. 손뼉을 치며 불꽃을 꺼트렸다.

그가 말했다.

"이 정도면 증명이 좀 되었나?"

"무, 물론. 물론이오! 류신, 아, 아니! 유신!"

정신이 들자 사내의 날카로운 안광.

등에 메고 있던 기괴한 무기가 눈에 들어온다.

계산을 마친 마초는 똥 색깔을 띠던 패를 휙 던져버렸다.

이윽고 내밀어지는 금으로 된 패.

유신은 조합에 오자마자 곧바로 최고 등급을 얻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특별한 의뢰

퉁.

쏘아진 석환이 자이언트 라이노의 안구에 적중했다.

므어어어어!

비틀거리는 거대한 코뿔소의 머리 위로 시커먼 음영이 졌다.

끼리릭 손잡이가 돌아간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톱날이 회전한다.

"흡."

유신은 사냥꾼의 발톱을 내려찍었다.

콰지지직

울려퍼지는 소름 끼치는 소리.

비명을 지르며 발광하는 괴물.

그러든 말든 침착한 눈동자로 자비 없이 내려찍는 사냥꾼.

아니, 사기꾼.

──────!

이 삼박자의 합은 괴수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후우."

시체에서 훌쩍 뛰어내린 유신이 손잡이를 돌리자 톱날이 멈춘다. 피투성이가 된 그는 자신의 무기를 바라봤다.

튼튼하고 화력 괜찮고 다 좋은데 문제가 두 개 있다.

하나는 이것이 연료로 크레딧을 잡아먹는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휘두를 때마다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다 튀어서 온몸이 엉망이 된다는 거다.

'맹독 코모도한테는 못 쓰겠군.'

자칫하다가는 피에 섞인 산에 녹아내리겠어.

"진짜 무지막지한 무기네."

바위 위에서 쪼그려 앉은 채 저격 포지션을 잡았던 에피가 다가왔다.

"오래 쓸만한 건 아니야."

남들이 들으면 배가 불렀구나? 라고 할 소리를 태연히 던진 유신은 나이프를 뽑아들었다. 이윽고 자이언트 라이노의 시체를 고갯짓했다.

"으으. 저걸 언제 다 해···"

에피 역시 앓는 소리를 내면서 나이프를 뽑아들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괴물의 시신을 분해했다.

***

낙원은 한때 53사단이라 불리던 군부대와 해운대 지역 일부를 기점으로 장벽을 쌓아 만들어진 도시였다. 그 방대한 크기만큼이나 도시를 운용하고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들이 필요했는데.

첫째가 내부에 마련된 대규모 경작지였고, 둘째가 크레딧과 수력을 이용한 발전.

마지막으로 셋째가 괴물 사냥이었다.

고기나 뿌리는 식량으로. 가죽과 잎은 재가공해서 생필품으로.

도시의 덩치가 좀 된다면 괴물을 피하기보다는 잡아먹는 것이다.

그야말로 인간이란 종족의 적응력과 탐욕을 알 수 있었다.

문을 열고 조합 안으로 들어가자 웅성거림이 잦아든다. 모여있던 사람들은 유신을 힐끔거리거나 피했다. 마치 토끼떼 무리로 사자 한 마리가 들어선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현재 조합 내에서 유신의 유명세는 대단했다.

단기간에 어마어마한 실적을 올리고 있으나 그 조합이 매우 기괴하다면서.

꼬맹이와 병약한 미청년의 조합이 보기 쉬운 건 아니었다.

"···"

유신은 인정해야 했다.

이 꼬맹이가 정말 난 녀석이라는 걸.

사자의 심장과 여우의 잔꾀를 보유한 악당이라는 것을.

지난 몇 주 동안 겪은 지옥훈련과 실전을 요 녀석은 훌륭히 통과해냈다.

물론 그와는 별개로···

"와악!"

"히이익!"

[장벽 보수]

이제 좀 적응됐다고 일용직 노동자를 놀리는 꼬맹이의 뒷덜미를 잡는다.

"제발 좀 닥쳐!"

"킥킥."

그 인성까지는 어디 가지 않았다

"어서 오게 유신. 그리고 꼬맹이."

데스크로 향하자 이제는 익숙해진 대머리 접수원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입가에 웃음을 띤 채 손까지 흔드는 게 처음과는 분위기가 엄청 달라졌다.

"자이언트 라이노의 뿔. 확실하게 받았네."

이번에 유신이 처리한 의뢰는 한 약방으로부터 온 것이다. 녀석의 뿔은 타박상에 좋은 연고 재료거든.

"여기 완수금일세."

유신은 심드렁한 얼굴로 크레딧을 품에 넣었다.

금패, 금패. 거창하게 말하고는 있지만 실상 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주변을 돌아다니며 괴물을 처리할 뿐이다. 그런데 이게 또 황무지를 배회할 때 보다는 위험성도 적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메트로폴리스 다음으로 안전한 도시 근방에다가···'

(구)한국이니까.

저기 대륙이나 유럽 쪽으로 가면 몰라도 한반도. 그것도 남쪽 끝자락에서는 3등급 위험종 조차도 드물다. 그렇기 때문에 용병 조합에서는 3등급 위험종을 잡거나 엇비슷한 수준만 되도 금패를 준다.

물론 3등급 위험종만 해도 타운 하나를 괴멸시킬 전력이니 결코 쉽지 않은 괴물이지만···

바꿔 말하면 수준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즉 금패라고 꺼드럭거려도 실상은 3위계 능력자의 수준도 안 된다는 거다.

'애초에 이 세상에서 힘 좀 쓴다는 녀석들은 다 야경이나 컴퍼니에 소속되어 있을 테니까.'

노는 물이 너무 적다. 적어도 유신의 입장에서는.

그럼에도 유신이 요 몇 주간 용병 조합을 들락거리는 이유는 크레딧을 제외하고서라도 둘이다.

어차피 인형사와 광명교의 수작질은 낙원에서 벌어질뿐더러.

"이번 일 처리도 역시나 깔끔하군. 그래서 하는 말인데··· 자네. 혹시 좀 더 짭짤한 일을 해보고 싶지는 않나?"

때때로 거물이 낚이기 때문이다.

"호오."

"생각이 있다면 따라오게."

음흉한 대머리의 표정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눈가를 찌푸린 에피를 툭툭 치며 마초남을 따라간다. 의뢰소겸 주점 역할도 하는 1층이 아닌 2층에 위치한 집무실이었다.

덜컥

방음장치가 되어있는지 방안은 고요했다. 푹신한 의자에는 멀끔히 차려입은 중년인이 앉아있었다. 대머리가 고개를 숙였다.

"지부장님. 데려왔습니다."

"어서오게."

손짓으로 접수원을 돌려보낸 중년인은 그보다 더 예의 바르고 친절한 몸짓으로 두 사람을 맞이했다.

쪼르륵

손수 차까지 따라주기도 했다.

"자스민을 우린 거네."

대부분이 농사도 못 짓는 한량에 일확천금을 노리는 머저리들일 뿐이지만, 그럼에도 소속된 일꾼들만 수 천명이다.

이 거대한 조합을 이끄는 자가 이런 태도를 보인다니. 유신의 대접은 판이하게 달라졌다.

물론 그는 우쭐하거나 들뜨지도 않았다. 늘 그렇듯 덤덤한 태도로 혀끝만 차에 살짝 대며 물었다.

"보수가 후한 일을 주선해주신다고?"

"그렇네. 자네와 우리가 인연을 맺은 지도 꽤 되었으니까."

높은 등급을 받은 것과 신뢰도는 또 다른 문제였다.

이곳에는 실력과는 별개로 정직과 믿음, 신뢰 따위는 집어던진 사이코패스들이 넘쳐났으니까.

지난 몇 주간 유신은 에피와 둘이서 의뢰들을 쓸어버리며 크레딧과 조합의 신용을 얻었다.

눈 여겨보고 있던 지부장은 지금이 기회다 싶었던 거겠지.

게임 상에서는 비로소 쓸만한 의뢰들이 나오는 시점이었다.

"들어나 보지."

"머스크 씨로부터 온 의뢰네. 그자 휘하에 있던 자가 얼마 전에 유적을 하나 발견했는데···"

사람 사는 곳은 다 그렇듯 망가진 세상에서도 위계질서란 게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속에는 당장 먹고 사는 문제 따위는 신경 쓸 필요도 없을 정도로 힘과 권력이 있는 자들도 있었다.

낙원의 부호 머스크.

지금 지부장이 말하고 있는 의뢰인도 그 범주에 충분히 들어갔다.

"잠깐 들어갔다가 나온 스케빈저의 말에 따르면 상태가 매우 좋았다고 하더군. 구 시대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을 만큼."

여기서 말하는 유적이란 대부분 지하철이나 하수구 같은 지하시설을 의미했다.

핵전쟁이 터지기 시작한 후에는 대피소로 지정되며 시민들은 물론 군부대가 모이기도 했던 장소.

'에스트의 기운이 다른 곳보다 충만하기에 유물이 생겨나기도 하지.'

물론 그런 노다지가 따르는 장소는 대부분···

"내부는 위험하기 그지없고 말이지?"

"입구 부근에서 확인된 구더기 인간들만 수 백이었네."

알고 있던 대로 (구)해운대역이 맞다.

"내부로 들어간다면 그보다 더 많겠군. 어쩌면 콜로니가 있을 수도 있겠고."

"후후. 그래서 포기할 건가? 일단 완수금만 2500크레딧이네."

2분의1 달맞이 초다. 뿐만 아니라···

"안에서 나오는 물품의 가치에 따라서 추가금 역시 얼마든지 지불한다더군."

그 정도 규모라면··· 몇 개 빼돌려도 티도 안날 테고 말이야.

주름진 눈가가 윙크를 한다.

이 노회한 중년인은 사람의 욕망을 자극할 줄 알았다.

"···"

물론 유신은 처음부터 거절할 생각 같은 건 없었다.

'드디어 총알을 얻을 수 있겠군.'

더 강력한 괴물이나 능력자를 죽이고 그 힘을 빼앗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상태에서 자신의 무력을 가장 빠르게 확보할 수 있는 방법.

우선 총탄을 입수해서 허리춤에서 놀고 있는 이 리볼버의 빈 약실을 채워야 한다. 그리고 그 아래에 잠들어 있는 히든피스들 역시.

"···"

유신은 이 의뢰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정확히는 파묻혀 있던 유적의 입구가 다시 드러나는 그 순간만을.

"흠흠."

유신의 침묵을 오해했는지 지부장이 말을 덧붙였다.

"위험도 때문에 부담스럽나? 하긴 아이도 있으니까 걱정이 많겠지. 하지만 너무 우려 말게. 자네 말고도 다른 팀들도 있으니까. 모두들 우리 조합에서 꽤나 오랫동안 일해온 친구들···"

"하지."

"저, 정말인가?!"

"그럼 가짜일까?"

"하하하. 이 친구 농담도."

지부장은 처음에 보여줬던 진중했던 모습과는 달리 퍽 가벼워 보였다.

하지만 유신은 방심하지 않았다.

[NPC스네이크맨 아록]

어디서나 인간은 자신만의 무기를 하나쯤은 숨겨두고 있는 법.

사람 좋아 보이는 모습에 넘어가 마음을 놓는다면 실속은 못 건지고 이리저리 이용만 당하리라.

"언제쯤 출발하지?"

***

"진짜 엿 같은 세상이야."

"또 뭐가 그렇게 불만이냐?"

용병조합을 나와 걸어가고 있는데 에피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누구는 당장 먹고살기 위해서 아둥바둥 버티는데."

떨어지는 석양 아래.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일단의 노동자 무리다.

"끄아아아!"

공사를 하다 다쳤는지 한쪽 팔이 뭉개진 채 비명을 지르는 사내.

고된 농사일에 허리가 굽은 아낙 등.

풍요롭고 화목한 이 도시의 민낯들.

"누구는 제 취미생활이나 즐기기 위해 그 많은 크레딧을 쓰다니."

유신이 물었다.

"그 머스크라는 자가... 자신의 배를 채우는 대신 저 사람들을 도와줬어야 된다고 생각하냐?"

"그건 아니야."

"그럼 다 같이 공평해지고 싶단 거냐?"

"그것도 아닌데···"

에피는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그냥 배 아파서."

툭 내뱉었다.

"그리고 궁금해. 취미생활에 몇천 크레딧을 태우는 삶은 어떤 삶일까?"

석양빛에 반짝이는 에피의 눈동자는 호기심만을 담고 있었다.

복지니 이념이니 이런 개념은 아직 소녀에겐 무리인 모양이다.

"뭐, 그치들도 자기들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겠지."

유신은 전의 세상에서 철학도도 부호도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살다가. 세상의 톱니바퀴가 되어 퇴근 후에 맥주나 한 잔 하던 청년이었다.

사회란 야생에 막 내던져진 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

"세상은 원래 불공평하니까."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의 답변을 할 뿐이다.

"흐음."

에피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아! 소리를 냈다.

"저기 근데 이번에 가는 곳 정말 위험한 곳 맞지?"

"그래. 구더기 인간이 떼를 지으면 3급 위험종도 피하거든."

(구)해운대역은 게임상에서도 악명 높은 장소였다.

만약 콜로니까지 자리를 잡았다면 더 최악이다. 네임드 몬스터는 물론 그곳은 이제 놈들의 요새가 되어있을 테니.

뿐만 아니라···

그 아래 숨겨진 스트리트는 해운대역 보다도 끔찍한 지옥이다.

"그럼 나 이대로 괜찮은 거야? 아! 무서운 건 아니야! 그냥 지금 나한테는 쪼끔. 아주 쪼끔 버겁지 않을까 해서."

"그래서 지금 그걸 해결하러 가잖냐."

"응?"

유신은 곧바로 여관으로 돌아가는 대신 대장간으로 향했다.

"어서옵쇼!"

"이걸로 하지."

곧 그곳에서 에피에게 딱 맞는 무기를 한 자루 샀다.

"헤에."

소녀의 손에는 작은 활이 들려있었다.

트리 자이언트의 뿌리와 매드니스 카우의 뿔로 만든 복합궁이다. 꼬맹이가 당길 수 있을 정도의 장력을 가진. 하지만 그 소재 때문에 튼튼하고 어느 정도 위력도 있는 녀석.

"흐음."

에피는 활시위를 당기거나 영점을 맞춰보더니···

퍽.

금새 대장간의 한 켠에 마련된 허수아비의 머리를 꿰뚫었다. 그것도 300미터 거리에서.

정말이지.

"미친 재능이군."

지난 몇 주간 겪은 훈련과 실전은 소녀의 재능을 한층 더 꽃피웠다.

"히야. 이 꼬마 무슨 사냥꾼의 딸내미요? 내 여기서 장사한지 수십 년이 넘었는데. 저걸 맞추는 건 또 처음 보네."

대장간 주인이 혀를 내둘렀다.

"히히. 거 아재가 사람 볼 줄 아네. 내가 좀··· 켁!"

또 우쭐대기 전에 얼른 뒷덜미를 잡고 대장간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여관으로 돌아가려는데 에피가 말했다.

"저기 유신 내가 생각을 좀 해봤는데 말이야."

"뭐냐?"

"이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거 같아."

"욕심도 많군. 아직 무기에 에스트를 담을 수도 없고, 능력도 개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네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아니, 그게 아니라."

"···?"

"이 화살촉에 말이야. 독을 발라보는 건 어떨까?"

살아남기 위해 점점 지혜를 터득해가는 소녀의 모습에 유신은 휘파람을 불었다.

"호오."

마침 내 사흘 후.

유신은 접선지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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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의뢰

"칫. 그냥 바로 그곳으로 가면 되지. 왜 이렇게 귀찮게 하는 거야?"

"제 손발이 되어줄 녀석들을 직접 보고 싶었나 보지."

접선지역은 다름 아닌 낙원의 특별지구에 자리한 대저택이었다. 이번 의뢰의 의뢰주이기도 한 머스크의 집.

농사지을 땅도 부족하다며 장벽 확장 및 개간 작업에 수많은 인력과 자본을 소모하는 주제에 머스크의 저택은 널찍한 정원도 존재했다.

그곳에서 사냥개를 키우는 것은 물론. 큼직한 덩치를 가진 경비원들은 삼 연발 크로스 보우와 괴물 껍질로 된 방패마저 들고 있었다.

확실히 자유도시보다는 수준이 높다.

'경호대장도 능력자였지? 아마···'

"이곳입니다. 이미 다른 분들은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를 맡았던 집사가 문을 열었다. 생각을 끊은 유신은 주변을 슥 둘러봤다.

유화로 그려진 그림과 조각상들 사이로 널찍한 소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각양각색의 특징을 가진 사람들이 역시나 그 개성만큼이나 다양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앞머리가 눈을 가릴 정도로 덥수룩한 사내가 한 명.

공업용 망치와 진압용 방패를 든 2미터 짜리 거인이 한 명.

거대한 활을 매고 있는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가 한 명.

몸에 꽉 끼는 가죽옷을 입고 검을 찬 여자가 한 명.

'능력자들이다.'

위계가 낮은 자들은 감지하지 못하지만, 재능 넘치는 유신은 저들의 몸에서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에스트들을 느낄 수 있었다.

거인을 제외한 셋 모두가 능력자다.

본격적으로 이 세계관이 확충되기 시작한다.

하긴 그래도 조합에서 금패를 받을 정도의 실력.

3급 위험종을 잡아낼 정도가 되려면 능력자나 사냥꾼이 아닌 이상 힘들겠지.

'문제는 내가 모르는 얼굴들이란 건데.'

딱 한 녀석만 빼고.

현실판 변수가 다시금 벌어졌다.

"흐음."

유신과 에피가 들어서자 다리를 쩍 벌린 채 앉아있던 더벅머리 사내가 툭 내뱉었다.

"조합의 수준도 땅에 떨어졌군. 웬 병자 하나와 애새끼까지 불러들이다니."

"조합의 수준도 땅에 떨어졌네. 웬 노숙자 새끼도 불러들이고 말이야."

유신은 헛웃음을 지었다.

이 꼬맹이의 욕설이 나날이 진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닥쳐, 좆까라고 했을 텐데···

'이제는 비아냥 거릴 줄도 아네.'

"너, 꼬마. 세상 무서운 줄 모르면···"

"텃세는 거기까지 부리는 게 어때?"

그때 가죽옷을 입은 여자가 끼어들었다.

"저 두 사람 자격은 충분해. 요즘 조합에서 한창 날리고 있잖아."

유신에 관한 소문을 들었는지 거인과 활잡이 역시 슬쩍 긍정했다.

그러자 더벅머리 사내는 쳇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건···"

여자가 말하던 그 때.

치지지직

벽면에 걸려있던 오래된 티비가 점멸했다. 곧 흐릿한 화면 속에서 턱시도 차림의 노인이 나타났다.

"반갑네. 조합 여러분."

전자음이 섞였으나 듣기 좋은 중후한 목소리.

대부호 머스크다.

과연 낙원 최고의 자산가답게 그는 화상 통신으로 제 뜻을 전달하고 있었다.

"저게 대체 뭐야? 어떻게 그림에서 사람이···"

21세기의 찬란했던 유산은 바보들의 경악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몇몇 익숙해 보이는 자들도 있었지만 말이다.

LG꺼네.

그중에 하나였던 유신은 덤덤한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CCTV까지 달려있다.'

이 낡아빠진 저택은 겉모양과는 달리 꽤나 최신식이다.

"나에 대해선 이미 다 알고 있을 테니 소개는 생략하도록 하지. 여러분들의 시간. 나의 시간 모두 소중하니까 말이야."

화면 속의 부호는 여유롭게 와인잔을 흔들었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움직여?

모여있던 용병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찰나.

"본론으로 들어가서 접선지를 내 저택으로 정한 이유는 간단하네. 일을 맡기기 전 자네들의 실력을 한번 보고 싶었기 때문이야."

"그게 무슨···"

활잡이가 눈을 찌푸린 순간.

콰앙.

멋들어진 방문이 홱 젖혀졌다. 곧 그 너머에서 시커먼 복면을 쓴 자들이 나타났다.

끼리릭!

죽음이 당겨지는 소리.

유신은 잽싸게 소파 뒤로 몸을 숨겼다. 에피도 챙길려고 보니 요녀석은 이미 바닥을 구르며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퍽.

여기에다가 활잡이의 가세까지. 양측에서 쏘아진 화살들이 서로 간의 살점을 탐했다. 하지만 두 쪽 다 목표를 이루지는 못했다.

타다다닥

복면남들은 화살을 맞은 상태에서도 칼을 뽑은 채 덤벼들었고, 이쪽의 용병들 역시 기민하게 반응하며 엄폐물 뒤로 숨거나 피했기 때문이다.

"테스트라며! 진짜 죽일 기세잖아!"

"자, 잠깐! 저 새끼들 뭐야!"

머리와 복부.

에피와 활잡이의 화살이 적중한 부위다. 하나같이 치명적인 급소들.

"···"

그러나 녀석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접근해서 칼을 내려찍었다.

"우오오오!"

거인 용병은 그 흉흉한 공격을 피하기보다 다른 방안을 택했다. 손에 들린 (구)시대 양식의 진압용 방패를 쭉 내민 채 돌격한 것이다.

채앵!

막고.

쿵.

부순다.

아주 단순하게, 그래서 더 강력하게.

거인 용병의 손에 들린 망치가 복면남의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쳇."

여자 용병은 이런 정면 대결은 약해 보였다. 손에 들린 검으로 복면남의 칼을 막고는 있는데. 힘이 달리는 듯 점점 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꾸우욱. 이대로 가다가는 자세를 잃고 두 토막이 날 것 같았다.

"크으으···"

갑자기 그녀의 동공이 세로로 갈라지기 전까지는.

"크아아아아!"

여린 턱선이 뒤틀리며 주둥이가 튀어나온다. 손톱과 발톱이 단검처럼 늘어났다.

반인반수가 된 여인은 검을 버리며 순식간에 복면남의 뒤를 잡더니.

"···!"

그 목을 참수시켜 버렸다.

그 밖에 활 대신 단검을 뽑아든 활잡이, 잽싸게 2층으로 도망치며 시위를 당기는 에피. 주변에 놓인 집기를 휘둘러 반격하는 더벅머리까지.

용병들은 모두 제각각 습격자들에게 치명상을 가했다.

"무슨!"

복면남들이 하나같이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계속 덤벼들기 전까지는.

"이놈들 뭔가 이상해! 감염자들인가?!"

더벅머리가 당황했다. 무슨 공격을 가하든 목이 날아가든. 녀석들은 마치 불사신처럼 무기를 휘둘렀기 때문이다.

"···!"

다른 용병들 역시 동요하기는 마찬가지.

긴박하게 돌아가는 그 순간.

철컥.

유신이 움직였다. 손잡이를 돌리자 톱날이 요란하게 돌아간다.

괴물의 두터운 가죽과 뼈도 수월하게 갈라버린 무구. 사냥꾼의 발톱이 이빨을 드러냈다.

"흡."

유신이 톱날검을 휘둘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흉흉한 무기가 향하는 곳은 복면남이 아니었다.

같이 싸우고 있던 동료. 더벅머리 사내를 향해서였다.

***

"이런 미친놈이···! 이봐! 갑자기 이게 무슨 짓···"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았나? 그만. 이 장난질을 멈춰라."

주변이 동요하던 말던 유신은 차갑게 내뱉었다.

유신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에피가 가장 먼저 이변을 알아챘다.

"녀석들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쪽을 죽일 듯이 덤벼들던 복면남들이 멈췄다. 곧 유신 쪽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더벅머리 사내 쪽을.

"···"

더벅머리남의 얼굴에는 어느새 당황이란 감정은 사라져 있었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호기심. 그리고 놀라움.

피식.

그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녀석들에게서 너와 똑같은 패턴의 에스트가 느껴지더군."

유신은 더벅머리남과 대치 중인 복면남을 가리켰다.

"여기에다가 방금 전에 의뢰주가 말한 테스트라는 단어를 결합해보면 쉽게 답이 나오지."

"...확실히 비슷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난 아무 것도 못 느끼겠는데..."

공감하는 자도 있고, 여전히 감을 못 잡는 자도 있다.

"자신의 능력을 꽤나 과신하는군."

"결과가 증명해주고 있지 않나?"

그러나 유신의 판단은 옳았다.

딱.

더벅머리남이 손가락을 튀기자 복면남들이 마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렸기 때문이다.

그르르륵

바닥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복면남을 작게 축소한 듯한 봉제인형. 그리고 그들이 사용하던 무기들.

[에스트 주입 인형1호]

유신의 기억 속에 있는 더벅머리남의 능력이었다.

진짜였잖아? 용병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제 그것 좀 거둬주지 않겠나?"

"···"

유신이 무기를 거뒀다. 더벅머리 남은 휴우 한숨을 쉬다가 다른 용병들의 사나운 눈동자를 맞이했다.

"진짜 죽일려고 했어!"

"이 새끼가···"

티비가 다시 켜지며 머스크가 모습을 드러내지만 않았더라면 몇 대 얻어맞았을 것이다.

짝짝짝

"훌륭하군. 역시 조합은 날 실망시지키 않아."

노인이 흡족하게 박수를 쳤다.

더벅머리남은 피곤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머스크 님의 경호대장 브루노다. 나도 위에서 까라고 해서 깠을 뿐이라고."

"경호대장? 그렇다면 이 자는 의뢰에 참여하지 않는 건가?"

활잡이가 물었다.

더벅머리남은 능글맞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면 속의 노인은 무정하게 명령을 내렸다.

"테스트는 끝났네. 믿고 일을 맡길 테니 어서 출발하도록."

"···"

의뢰를 하기도 전에 힘을 빼버렸다. 그러나 어디서든 억울하면 출세해야 했다.

금패 용병이라고는하나 근본적으로는 '을'일 뿐인 용병들은 궁시렁 거리면서 움직였다.

단 한 사람 유신만 빼고.

그는 나가면서 더벅머리남 브루노를 힐끔거렸다.

그야···

머스크의 경호대장은 브루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정체는 따로 있다.

'이거 뭔가···'

냄새가 났다.

***

저택의 창가에 선 브루노가 떠나가는 용병들을 내려다봤다.

곧 그는 고개를 돌렸는데.

"오셨습니까 머스크님."

문이 열리며 등장한 노인 머스크 때문이다.

"···"

하지만 머스크의 반응이 이상했다.

"말씀을 낮춰주시지요. 브루노님."

오히려 고용자인 브루노한테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보인 것이 아닌가?

그가 말했다.

"아무리 연기라고는 하나 들을 때마다 심장이 떨립니다. 당신 같은 분을 상대로···"

브루노가 씨익 웃었다.

"그럴까? 아무튼 잘해줬다 머스크. 덕분에 꽤나 괜찮은 판을 짤 수 있었어."

"별말씀을요. 그나저나···"

잔에 술을 채워 브루노에게 공손히 건넨 머스크가 창가를 바라봤다.

"저자들만으로 충분하겠습니까?"

"뭐, 부족한 면들이 많이 보이기는 한데··· 나쁘진 않아. 특히나 그 검은 머리."

"유신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래, 그 녀석."

에스트 감지능력과 상황판단력이 제법이다.

그 두 가지만 꼽는다면 웬만한 클레이모어급.

"부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떠나가는 용병들의 뒷모습을 보며 클레이모어 브루노는 술잔을 기울였다.

***

새롭게 발견된 유적지.

(구)해운대역은 낙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애초에 지진과 공습으로 인해 출입구만이 무너져 내렸을 뿐이니까.

물론 그렇다고 한들 그곳까지 가는 여정이 쉽다는 것은 아니다. 황무지는 언제나 괴물과 약탈자들로 득시글거렸기에.

'무쇠 멧돼지 포착. 내가 처리하지.'

활잡이의 이름은 게일이었다.

그는 일행이 알아듣지도 못할 수신호를 혼자서 하고는 혼자서 행동에 나섰다.

그러나 그가 들고 있는 대궁과 그 실력만큼은 진짜였다.

쐐애액 퍽.

일격에 2등급 위험종을 처리했으니까.

'부수지 못하는 두개골 대신 눈을 노렸다. 정확도가 상당해.'

신체강화 계열일까? 매고 있는 두툼한 가방에도 분명 그 나름대로의 비장의 무기들이 가득 들어있을 것이다.

"···"

에피는 경쟁심이라도 느끼는지 얼굴을 굳혔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데.'

유신은 통성명을 했던 일행을 쭉 둘러봤다.

전위를 맡을 수 있는 비능력자 거인 허크.

원거리 요격이 가능한 에피와 게일.

특유의 몸놀림과 능력으로 후방 선점이 가능한 아멜리아.

강력한 원소 계열 능력으로 혹시 모를 변수를 차단할 수 있는 자신까지.

(구)해운대역의 탐사를 위해 한곳에 모인 용병들의 조합은 유신이 보기에도 썩 훌륭했다.

'강탈할 만큼의 메리트는 없지만 말이지.'

그러나···

속세의 모든 일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게일이 괴물의 사체에 추출기를 박아넣었다. 유리관 너머로 피어오르는 푸른 입자들은 곧 영롱한 빛을 띠는 칩더미들이 됐다.

그가 그것을 챙기려는 찰나. 가죽옷을 입은 변이 능력자 아멜리아가 딴지를 걸었다.

"그거 네가 다 챙기게?"

"애초에 내가 잡은 거다만?"

"여기 그 정도도 못 잡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게일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러나 아멜리아는 코웃음을 쳤다.

"네가 계속 그런 식으로 일하면 재미 없을 거란 얘기야. 분배를 공평하게 하지 않는 이상."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그럼 답 나왔군. 어디 한 번 경쟁해볼까? 각자가 잡은 괴물은 각자가 챙기고, 서로 간에 역할에 따라서 기여도를 두는 걸로."

경력도 좀 쌓였겠다.

금패쯤 되면 실력에 자부심도 있겠다.

아직 본격적으로 유적이 들어서지도 않았건만 이 자식들. 벌써부터 이권 다툼을 시작했다.

이를 보고 있던 유신의 머릿속에서 한 가지 명언이 떠올랐다.

사람이 다섯 이상 모이면 반드시···

'쓰레기가 존재한다던가.'

더스트 봄을 일으키는 광명교도 그렇고, 훗날 메트로폴리스 하나를 통째로 날리는 노스트라도 그렇고.

21세기든 망가진 세상이든 역시 문제는 좆간이다.

유신은 한숨을 내쉬었다.

(구)해운대역에 이런 느슨한 마음가짐으로 갔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하기 때문이다.

유신의 목적지인 그 아래의 지하쉘터는 더더욱.

'어쩔 수 없다.'

굳이 괴물만이 아닌 음지에서 암약하고 있을 녀석들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힘을 아껴야 한다.

그렇기에···

"거기까지 하지."

이 들개 새끼들을 길들여야 한다.

화르르륵

유신의 손에서 시뻘건 화염이 피어올랐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구)해운대역

사실 용병들이 이렇게 크레딧이 집착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낙원에서 그것도 금패 용병까지 갈 정도라면 단순히 생존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삶의 즐거움을 아는 자들.'

풍요로운 식사, 따뜻하고 깨끗한 거주지, 고된 노동에서 벗어나 즐기는 취미생활, 더 좋은 장비나 케어를 통해 보장받는 생존의 허들.

이 모든 것들을 크레딧으로 해낼 수 있다.

21세기든 망가진 세상이든 돈만 있다면 인생은 참 살만한 것이다.

그것도 매우, 매우.

"···"

유신이 적의를 뿜어내자 아멜리아와 게일의 기세가 사나워졌다. 두 사람은 다투던 것도 미뤄둔 채 유신을 경계했다.

끼이익

그 중간에 낀 에피의 활시위.

일촉즉발의 상황.

휙. 유신은 냉정한 얼굴로 불덩이를 던졌다.

그러나 그 불꽃은 두 사람을 향하지 않았다.

끼아아악!

두 사람의 발밑에서 은밀하게 접근 중이던 괴수. 개미지옥을 향했지.

집게를 낼름거리던 지저의 괴물은 불길에 휩싸여 발광하다 죽었다.

사그작 거리는 모랫소리는 그치지 않았는데. 밑에 다른 놈들도 있었던 모양이다.

유신이 말했다.

"지금 우리끼리 이럴 때인가?"

황무지는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무법지대다. 아니, 익숙해져서도 안 된다.

방심이 초래할 치명적인 결과. 판돈이 되는 목숨은 하나뿐이니.

아멜리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이 녀석 태도를 좀 보라고. 도저히 타협할 생각이 없잖아."

"자신이 잡은 사냥감을 왜 공유해야 하지?"

하아. 이 새끼들 진짜.

유신은 얼굴을 쓸었다.

"스케빈저들에 따르면 (구)해운대역에 존재하는 구더기 인간들만 백 마리가 넘는다고 들었다. 필시 깊숙한 곳에는 그 이상도 넘쳐나겠지."

곧 이 들개들을 납득시키기 위한 설득을 시작한다.

"개판이 벌어질 거다. 그런 상황에서 네가 잡았니 내가 잡았니 따질 정신이 있을까?"

"역시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렇게 비효율적으로 하다간 죽기 딱 좋···"

유신이 자신의 의견을 두둔하자 아멜리아가 신나서 말했다.

유신은 그런 아멜리아를 무시한 채 타죽은 개미지옥에게 다가갔다.

푹. 곧 괴물의 배에 추출기를 꼽고는 크레딧을 추출했다.

피어오르는 푸른 칩은 총 다섯 개.

그는 매고 있던 가방을 하나 풀더니 그 안에 크레딧을 던져넣었다.

가방 안에는 그 크레딧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없었다.

"잡스러운 녀석들은 공동으로 분배하지. 그 밖에 값어치가 나가는 녀석이나 유물, 구시대 물품은 기여도에 따라서 나누는 걸로. 어떤가?"

말이라는 것은 주변상황, 이를 꺼낸 주체자의 분위기와 화술에 따라 받아들여지는 정도가 다르다. 왜 프로파간다가, 악마적인 선동꾼이 그렇게 위험하겠나.

행동하되 먼저 솔선수범 나선다.

삐딱한 어조 대신 적당한 높낮이의 어조로 기분 좋게.

일방적인 주장과 설득은 하늘과 땅 정도의 차이가 있다.

"···"

게일은 말없이 무쇠 멧돼지에서 추출해낸 크레딧을 가방에 던져넣었다. 그 행동은 그가 유신의 제안에 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지표였다.

"하."

아멜리아는 그렇게 날을 세우던 자가 유신의 말에는 금방 수긍한 게 마음에 안 든 모양이다. 그래서 삐딱하게 말했다.

"저 새끼 게이야?"

"···뿌득."

아오, 이 답 없는 놈들.

또다시 분위기가 과열되려는 찰나.

"나도 동의하겠다. 지금으로서는 그게 가장 합리적이군."

그 덩치만큼이나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허크가 입을 열었다.

"그럼 가방은 당신한테 맡기지."

갈등의 당사자들이 아닌 제 삼자에게 바톤까지 터치한 것으로 피튀길 뻔한 이권 다툼이 끝났다.

"그나저나 기분 탓인가? 이 부근에 개미지옥들이 갑자기 많아진 것 같은데···"

방금 전까지 살벌하게 기세 싸움을 하다가 이제는 또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옮긴다.

'진짜 답 없네.'

아귀같던 용병들을 보던 에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유신 정도면 양심적인 편이었구나.'

***

[1ㅂㅓ]

음침하게 생긴 숫자판이 반쯤 부서져 덜렁거린다.

그 아래에는 어린아이 한 명 겨우 들어갈 정도의 구덩이가 있었다.

아멜리아가 혀를 찼다.

"스케빈저 자식들은 어떻게 이 안으로 들어갔대?"

유신은 손가락에 불을 피워 내부를 슬쩍 비춰보았다.

수 미터 아래에 회색 타일들이 보인다.

이제보니 발견된 입구는 계단 쪽이 아니라 천장 쪽이다.

몇몇 무너진 곳이 보이기는 하지만 좁은 입구와는 대비되게 내부는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다.

구더기 인간들 역시 안 보였다.

아직까지는.

"모래만 조금 걷어내면 되겠군."

"무너질 수도 있으니 지지대를 설치해두는 게 좋을 것 같다."

"일이 틀어질 때를 대비해 탈출구 역시 마련해둬야 해. 아예 입구를 좀 더 확장시키지."

이권다툼이 끝나자 이 아귀들은 훌륭한 협동플레이를 보여주었다.

조막만했던 입구는 순식간에 일행 중에서 제일 큰 덩치인 허크가 들어갈 정도로 넓고 견고해졌다.

변이 능력자 아멜리아의 공이 컸다.

"그동안 헛으로 살아남은 게 아니거든."

비록 짧았다지만 그동안의 여정에서 유신은 추측한다.

아마 아멜리아는 스케빈저 출신이었을 거다.

때로는 이득보다도 생존을 중시하는 것. 특히나 그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저 녀석은 사냥꾼··· 아니, 사냥꾼 교육을 받다 낙오된 녀석이겠군.'

틈만나면 사냥감이니 날카로운 기세를 풍기는 게일은 야경에서 수업을 받던 교육생이었을 거다.

조합에 소속된 상태로 구르는 걸로 보아 총은 못 받았겠고. 아마 교육을 수료하지 못하고 떨어져 나간 거겠지.

'저 묵묵한 녀석은 군인 느낌이 나는데. 경비대 출신일 수도.'

관찰하고 추론하고 생각한다.

이 황무지에서 살아온 자들은 알고 있었다.

지금은 이렇게 하하호호 웃으며 협력하고 있지만 상황이 긴급해졌을 때.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는 게 인간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상대에 대해 알고 나를 숨기는 것은 생존이든 전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지침이다.

'그 녀석들 역시 이를 염두해두고 판을 짰을 터.'

잠시 이 의뢰의 흑막을 떠올리던 유신은 구덩이 아래로 조심히 몸을 날렸다.

사박

"방사능 수치는 바깥과 크게 다르진 않는 것 같고···"

아멜리아는 나침반 형태로 된 방사능 탐색기를 살피다가 유신을 힐끔거렸다.

"에스트는 아끼는 게 좋겠어. 전투가 벌어지면 당신이 불 좀 피워달라고."

바깥에 있을 때보다 몇 배는 작은 목소리.

거의 입술만 달싹거리는 수준이다.

그럴 수밖에.

단순히 배회하는 괴물을 잡는 것보다 녀석들의 주거지에, 그것도 지하로 쳐들어가는 것은 위험도 면에서 몇 배나 차이 난다. 방심하다가는 그대로 골로가는 수가 있다.

사람은 아주 사소한 계기로도 죽을 수 있는.

연약한 생물이니까.

유신은 제외한 모두가 횃불을 치켜들었다.

살인귀들의 얼굴이 마치 괴물처럼 붉게 물들었다.

그 누구보다도 현대적인 면모를 간직한 공간에서 저런 구시대적인 발광체라니.

'이게 대체 뭔 개지랄이지?'

때때로 지금 처한 상황에 웃음이 난다.

던전이 되어버린 지하철역의 안에서 이방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킁."

사전에 합의했던 대로 허크는 방패를 쭉 내민 채 전위를 자처했다. 게일과 아멜리아가 좌우를. 에피와 유신이 후방경계를 맡았다.

스윽.

'위치로 봐서 홀로 들어가기 전에 꺾이는 공간이다.'

몇 걸음 옮기지도 않았을 때 게일이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찢어진 옷가지와 뼛조각, 핏물의 흔적이 보였다.

오래된 것이 아니라 비교적 싱싱한 것.

거기다가 무언가를 질질 끌고 간 자국과 끈적한 점액질까지.

"스케빈저들이군."

제일 처음 이곳을 발견했던 스케빈저들의 절박했던 상황.

그들이 느꼈을 절망과 고통이 엿보였다.

"거의 흔적도 남지 않았군. 확실해. 숫자가 더럽게 많아."

애도 따위는 없다. 그저 정보를 교합해 신뢰도를 높일 뿐이다.

이 피도 눈물도 없는 새로운 하이에나들은 조심히 걸음을 옮겼다.

코너를 막 돌았을까.

찰팍찰팍

어디선가 질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어어어어

곧바로 가래 끓는 소리가 이를 뒤따랐다.

이곳은 이미 놈들의 영역.

어둠에 익숙해진 눈동자에 빛을 내리쬐는 것은 침입자들.

애초부터 기도비닉 같은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앞서 나가지 마! 대열 유지한 채 천천히 잡는다!"

손전등과는 다르게 횃불의 가시거리라는 것은 미약하기 짝이 없다.

그렇기에 허크는 어둠 속으로 횃불과 크레딧 조금을 휙 던졌다.

화르르륵

피어오르는 광명이 주변에 깔려있던 살덩어리들을 비춘다.

맥동하던 수십 개의 고치들은 곧 부르르 떨면서 얼굴을 들어 보였는데.

주름지고 뭉개진 인간의 상체에 하체는 애벌레처럼 생겼다.

[컴퍼니 공인 2급 위험종 구더기 인간]

그아아아아!

놈들은 그 특유의 신체구조 때문인지 양손으로 하체를 지탱하며 끌고 다닌다. 그렇기에 완력이 대단히 발달되어 있고 손톱과 이빨에는 마비독도 있다.

즉.

"잡히지 않게 조심해라."

손아귀에 걸리는 순간 찢긴다.

물론···

[살아 움직이는 불꽃의 염화]

이 사내한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유신의 손에서 시뻘건 화염이 뿜어졌다.

***

구더기 인간들은 보통 지하에 자신들만의 굴을 파놓고 그곳에서 생활한다.

그렇기 때문에 개체들은 어둠을 꿰뚫는 눈과 습기에 적응하는 메리트를 얻게 되는 동시에 부작용 역시 얻는다.

그건···

끼아아아아악!

빛과 열에 취약하단 것이다.

유신이 던진 불덩이가 터질 때마다 한 두놈의 구더기 인간이 타죽었다.

그보다 더 많은 숫자가 고통에 몸을 뒤틀었다.

이정도 기세라면 유신 혼자서도 이놈들을 다 쓸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떨어진다!"

이 마경은 더 이상 인간들의 영역이 아니다. 구더기 인간들은 굳이 바닥만이 아닌 천장. 환기구나 개구멍 같은 곳에서도 기어오며 먹잇감을 노리고 있었다.

유신은 완벽한 인간이 아니다. 그에게도 사각은 존재한다.

막대한 권능을 뿜어낼 수 있는 에스트 역시 무한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는 결점을 보완하고자 한다.

괴물이 무리짓듯 인간들 역시 무리를 짓는다.

쿵.

휘둘러진 진압용 방패가 뒤틀린 인간을 밀어냈다.

거대한 덩치의 비능력자는 능숙하게 거리를 재며 망치를 내려찍었다.

"으으. 존나 징그럽네."

기겁하던 에피가 시위를 당겼다.

복합궁이 탄력적으로 튕기며 천장에서 유신을 향해 덤비던 구더기 인간의 눈을 꿰뚫었다.

퍽.

평소라면 그렇게 큰 위력은 없었을 것이다. 시력이란 게 대부분 퇴화된 녀석들은 안구 역시 그저 살덩이의 집합일 뿐이니.

하지만.

그으으으아!"

놈은 얼굴을 감싸며 몸을 뒤틀었다. 곧 제 피부색보다 더 시커먼 낯빛으로 변하며 죽어가기 시작했다.

[그렘린의 체액과 자이언트 렛의 독주머니]

두 개를 적절한 비율로 혼합하면 꽤나 괜찮은 독이 만들어진다. 구더기 인간들한테는 특히나 더 효과를 발휘한다.

스케빈저들이나 용병들이라면 누구나가 탐낼 정도의 비법은 당연히 유신의 작품이다.

쐐애액

소녀는 굳은살 박힌 손으로 연신 시위를 당겼다.

옆에 있던 게일 역시 천장이나 개구멍 같은 까다로운 곳에서 덤벼오는 구더기 인간들을 요격했다.

게일은 생각했다.

분명 활의 위력이나 숙련도는 이쪽이 더 높다. 하지만···

'빌어먹을 정도로 정확하다.'

푹.

심장.

그아아아아!

전위를 맡는 허크를 향해 손을 뻗는 위협적인 녀석.

유신이나 아멜리아의 배후를 노리는 놈들.

소녀는 전장을 폭넓게 주시하며 일행이 곤경에 처할 때 마다 치명적인 속사를 쏘아냈다.

'어떻게 이런 꼬맹이가··· 대체 무슨 능력을···'

유신이 그들을 관찰했듯 용병들 역시 유신 일행을 관찰했다. 훗날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하지만 그중에서도 게일의 경우는 특별했다.

그의 내면에는 좀 더 끈적한 자괴감이 서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방심의 결과는 곧.

"야! 정신 안 차려?!"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진다.

"···!"

아멜리아의 목소리에 게일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저 멀리서 느릿하게 접근하던 구더기 인간이 팔을 휘적거렸다. 그러자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지더니 눈앞에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그아아아아!

느리다고 방심하면 순식간에 들러붙는다.

그건 저 지저의 괴물들의 영악함이었다.

사냥감의 방심을 일으키기 위한 속임수.

우드득.

악력만으로도 사람의 뼈와 살을 분리시키는 괴물이다.

게일은 뼈가 뒤틀리는 고통에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퍽.

그런 구더기 인간의 머리통이 반으로 갈라지지만 않았더라면.

"후우, 후우."

거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본 게일이 본 것은 기괴한 톱날검을 든 유신의 모습이었다.

그는 한 손으로는 불꽃을 한 손으로는 미친 듯이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는데.

누가봐도 다른 용병들의 몇 배나 되는 숫자를 처리하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한 것 역시 유신의 솜씨였다.

주변의 정리가 얼추 끝나자 용병들은 괴물들에게서 크레딧을 추출하기 시작했다.

아멜리아가 역시나 딴지를 걸었다.

"똥폼 잡더니만 꼴 좋네."

"···"

"너. 지금 뭐하냐? 너 하나 때문에 대열이 흐트러지면 여기서 전멸할 수도···"

"거기까지 하지."

독설을 내뱉는 그녀를 유신이 제지했다.

그는 게일을 물끄러미 보더니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내가. 네 목숨 한 번 구한 거다."

사냥꾼의 계율 중에 그런 게 있다.

사냥꾼은 절대 공짜로 일하지 않는다. 공짜로 뭘 받지도 않는다.

낙오된지 오래였지만 여전히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던 게일은 유신이 한 말의 뜻을 이해했다.

"명심하지."

유신이 싸우는 모습을 본 아멜리아는 입술을 삐죽거릴 뿐이었다.

유신은 어느새 이 융화되지 않는 들개무리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계획대로다.

"움직이자."

***

사각을 보완하며 놈들을 사냥하고, 퇴로를 확보하는 동시에 철저하게 주변을 정리하고.

사냥이든 탐사든 모든 것은 얼마나 철저히 준비했느냐에 따라. 얼마나 변수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느냐에 따라서 그 허들이 달라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 파티는 꽤나 쓸만했다.

애초에 이 엿 같은 땅에서 괴물 사냥으로 밥 벌어먹던 놈들이니까.

손발을 맞추기 시작하자 탐사는 점점 더 안정성을 띄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면 뭐하겠는가?

"예쓰~"

과실을 따먹을 때가 됐다.

[GS24]

희미한 빛 너머로 보이는 역 내부.

온전하게 보관된 구시대 양식의 건물을 보며 용병들은 웃었다.

유신 역시 냉정을 가장했지만 속으로는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서는 손전등 하나가 웬만한 집 한 채 값을 넘는다.

아아. 찬란했던 21세기여.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구)해운대역

치약이나 세척액 같은 사소한 생필품부터 시작해서 음식, 속옷까지.

한 때 시민들의 생활을 책임졌던 편의점은 만물창고라고 불릴 정도로 다양한 품목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편의점은 창문만 깨져 있다는 것만 뺀다면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고.

물론···

"이거 쓸 수 있는 거 맞아?"

에피가 썩은 얼굴로 말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만큼 멀쩡한 물품은 찾아볼 수 없었다.

통조림이든 보존식이든 음식들은 이미 부패한 것을 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비닐이나 옷가지 등이 그나마 멀쩡해···

바스락.

찢어지기 일보 직전의 풍화상태다.

"후후후. 역시 아직은 애새끼네."

"뭐라는 거야 노처녀가."

아멜리아가 비웃자 에피가 도끼눈을 떴다.

"우리한테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야."

그러나 산전수전 다 겪은 여인은 기분 나쁜 티도 없어 보였다.

"이게 존나게 쓸모없어 보여도 뭐 어때? 어차피 높으신 분들의 취향만 맞춰주면 되는 건데."

상태가 엉망이지만 일단 챙긴다.

구 시대의 양식을 간직한 물건이라면 모조리 챙긴다.

어차피 의뢰주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유희용 컬렉션.

이로인해 파생될 정신적 만족감과 부와 영향력의 과시일 테니.

"역시 재수 없어."

에피는 욕설을 내뱉었다

알고는 있어도 역시나 기분 나쁜 상황이었다.

이쪽은 지상 수십 미터 아래에서 목숨 걸고 싸우고 있는데 그 의도가 고작 저거라니.

그러든 말든 아멜리아의 말은 이어졌다.

"그리고 잘 찾아보면 쓸만한 것들도 많아. 구 시대의 유산은 튼튼하거든. 예를 들면···"

아멜리아가 풍화된 포장지를 벗기자 합성 소재로 된 동그란 막대가 튀어나왔다.

"짠. 발광 횃불이야."

이곳에서는 손전등을 저리 부른다.

달칵, 달칵.

"음? 왜 안 나오지? 분명 봤을 때는···"

"건전지가 없으니까."

"건전지?"

말을 내뱉은 유신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저 너머.

뻥 뚫린 창고와 그곳에 차곡차곡 쌓여있던 식량 포장지들.

그리고 주변에 남은 상흔들.

이 몸뚱이의 집중력과 정신력은 현대인의 그것과는 궤를 달리했다.

그렇기 때문에 유신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포착할 때가 종종 있었다.

유신의 머릿속에서 어떤 상황이 그려졌다.

공습으로 인해 무너진 지하철역.

식량 창고를 독점한 특정 그룹과 그러지 못한 자들.

점점 격해지는 감정싸움.

결국 서로를 향해서 겨누어진 날붙이들.

막지 못한 비극.

'구더기 인간들은 그렇게 탄생했겠지.'

유신은 창고 안에 있던 엉망이 된 해골을 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뭐, 이 유적의 비화에 대한 추론은 여기서 끝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전혀 쓸모 없는 감상이었으니까.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챙긴 것 같은데. 어떡할 거야?"

아멜리아가 물었다.

유신은 물론 다른 용병들의 답 역시도 정해져 있었다.

인간의 탐욕은 쉽게 꺼트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철퍽철퍽

그들은 괴물 소굴이 된 폐지하철 역 안으로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

***

화재용 마스크와 방독면, 이제는 생산되지 않는 순도 높은 철인 스테인레스제 식기들과 각종 전자기기까지.

온전히 보존된 지하철역은 그야말로 보물창고였다.

공용 배낭을 가득 채우는 것을 넘어 일행이 가져온 여분용 배낭까지 다 채울 정도로 그 양이 많았으니까.

"대박이야. 대박! 다 가져다 팔면 몇만 크레딧은 나올걸?"

타닥타닥

타오르고 뭉개진 구더기 인간들을 짓밟으며 아멜리아가 낄낄거렸다.

일행도 말은 안 하지만 만족스러운 기세였다.

"저 아래 쪽은 그냥 지나치는 게 좋겠군."

게일은 계단의 아래쪽. 승강장을 가리켰다.

셔터가 내려져 있어 접근이 여의치 않은 것은 둘째 치고, 저 아래는 너무 넓다. 뭐가 있을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구더기 인간보다 더한 괴물이 나오는 것은 치명적인 변수다.

"동의한다."

"흐음. 나도 동의. 내 감이 말하는데 여기서 손 떼면 딱 좋을 것 같데."

허크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멜리아 역시 긍정하다가 슬쩍 옆을 보면서 미소 지었다.

"그래도 여기는 까보고 가야겠지?"

[역무원실]

이곳은 구더기 인간들도 건드리지 않았는지 전면부의 유리들조차도 멀쩡했다. 그 내부는 뭔가를 덧댔는지 뿌옇게 가려져 있었지만 말이다.

아멜리아는 습관대로 락핏으로 잠금장치를 풀려다가.

달칵

수월하게 열리는 문에 당황했다.

그리고 곧···

"이런 시발!"

두 눈을 부릅뜬 채 날아갔다.

***

"꺼어어···"

바닥을 구르며 신음하는 그녀는 죽지 않았다.

충격의 순간 잽싸게 몸을 날린 모양.

용병들은 당황했지만 곧 전투태세를 갖추며 문 너머를 주시했다.

꾸물꾸물

회갈색 반죽들을 하나로 뭉쳐놓은 것 같은 그것은 끊임없이 맥동하며 제 존재감을 알렸다.

그것은 살점으로 된 촉수들을 뻗어 무언가에 꽂아 넣고 있었는데.

"겕큵."

촉수들을 머리에 침처럼 박아넣은 채 얇은 피막 안에 갇혀있던 것은 인간들이었다.

복장으로봐서 사라졌던 스케빈저들로 추정된다.

"저, 저건···"

"하이브로군. 이미 콜로니화가 진행 중이었나?"

황무지의 괴물들은 그 종류만큼이나 다양한 습성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야경이나 컴퍼니에서는 이런 괴물들을 극비리에 따로 분류하고는 있었는데. 구더기 인간과 놈들의 숙주인 하이브는 이물 타입이다.

주변 영역이나 유기체를 오염시켜 자신들만의 영역을 구축하지.

'놈이 있다는 말은···'

철컥.

유신은 손잡이를 돌리며 톱날검을 휘둘렀다. 불꽃이 튀며 문 너머로 손을 뻗었던 녀석이 비틀거렸다.

흠칫하던 허크가 소리쳤다.

"또 한 놈 더 있다!"

문을 비집고 나오는 녀석은 지금껏 봤던 구더기 인간들을 한 곳에 뭉쳐놓은 듯한 모양새였다.

크-으으으으

쭈굴쭈굴한 얼굴도 네 개. 팔과 다리도 네 개. 손에 들린 스케빈저들이 쓰던 연장은 여덞 개.

둥지가 있다면 이를 지키는 파수꾼 역시 존재해야 하는 법.

네임드 괴수 기괴한 이툴루크.

그 흉흉한 외양이 주는 위압감은 상당했다.

"저건 대체 뭐야! 젠장! 아무튼 더럽게 위험해보이는군! 적어도 3급이다! 모두 조심해!"

설상가상 위협을 피해 웅크리고 있던 구더기 인간들 또한 스멀스멀 나타나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벌어진 변수.

그리고 절체절명의 상황.

탐욕으로 풀려있던 용병들의 얼굴이 굳었다.

하지만 유신은 웃었다.

애초부터 그는 늘 최악의 상황을 염두해 두었으니까.

어디서든, 생과 사를 가르는 것은 한 발자국 더 나아가느냐. 덜 디디느냐다.

***

[이툴루크의 돋아나는 팔]

[구더기 인간의 녹아내리는 육체]

뒤틀린 시신에 손을 얹고 있던 유신의 얼굴이 썩어들어갔다.

이 특성을 개화시켰을 때의 자신의 모습이 상상됐기 때문이다.

'역겹지만 한 수는 확실히 되겠지. 하지만···'

이를 얻으려면 트롤이나 히트맨, 염화, 세 가지 중에 하나의 능력을 지워야 한다.

아니면 탐욕의 에스트 병에 담겨있는 일회용 능력. 레자드의 스케일 아머를 지우거나. 그러나···

'그만한 가치가 없다.'

유신은 판단했다.

재생력과 원소, 신체강화. 이 능력들의 조화를 깨트리는 것이 오히려 더 손해다.

그렇기에 추출기를 써서 크레딧만 갈취했다.

절대 저 능력에 대한 생리적 혐오감 때문이 아니다.

절대.

유신이 공용가방에 크레딧을 담자 아멜리아는 질린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당신 괜찮아?"

"뭐가 말이지?"

"제일 앞장서서 놈과 싸웠잖아. 멀쩡하냐고."

"이래 보여도 강골이라."

"아니, 그런 뜻이 아닌데."

주변을 둘러보자 게일과 허크 또한 같은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녀석들은 자신의 능력을 잘 모른다.

재생력이 있으니 보다 과감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도.

그렇기에 오히려 이툴루크의 공격을 면밀히 살피며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것도.

이 세상에서 오직 강탈자만이 행할 수 있는 기행.

무지는 곧 독이며 지식은 곧 힘이니.

"쉴 만큼 쉬었으면 저거나 마무리하지."

유신은 모든 장기말들을 다 잃어버린 하이브를 고갯짓했다.

역무실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는 저건 하나의 거대한 알집이자 기생체다. 생산능력은 있어도 자체적인 전투능력은 없다.

에피는 피막 고치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스케빈저들을 살피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것들 모습이 점점 변하고 있잖아?"

그녀의 말대로였다.

스케빈저들은 살점이 녹아내리고 피부색이 뒤틀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일행이 지금껏 잡은 구더기 인간들을 연상케 했다.

설마?

"그래, 구더기 인간들은 본래 인간이다."

유신의 충격적인 발언에 일행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들은 괴물들이나 잡을 줄 알았지 그 비화까지는 몰랐으므로.

"영양분을 흡수하기 위해 붙잡아 놓은 줄 알았는데···"

허크가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교본에 분명 그런 내용이 있었지."

게일은 이채 어린 시선이 유신을 향했다.

"우욱. 흥미로운 이야기는 존나게 고마운데. 그냥 빨리 처리하면 안 될까? 나, 속 안 좋아."

아멜리아는 유신에게 손짓했다. 저 크고 역겨운 걸 일일이 다 토막쳐서 죽일 수는 없으니 깔끔하게 태워달라는 뜻이다.

유신은 고개를 저었다.

"거절하지."

"엑?"

"에스트가 바닥이다."

물론 내면에 있는 에스트는 아직 충분하다. 하지만···

만약을 대비해야 한다.

그렇기에 유신은 배낭에 들어있던 구 시대 양식의 술과 산화된 기름들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불씨 정도는 빌려줄 수 있지."

"하아. 그래? 부탁해."

"물론 이건 공금에서 빼겠다."

"···다, 당연하지."

말하는 걸로 봐서 어떻게든 내 지분을 빼먹을 생각이었던 모양인데.

죽을 고비를 넘겼음에도 여전히 탐욕스러운 승냥이들을 보던 유신은 기름통들을 홱 던졌다.

치익

피워올린 불씨도 함께.

끄-어어어어!

괴물과 인간이 내지르는 합주가 역 안에서 울려 퍼졌다.

***

타닥타닥

잿더미가 된 콜로니를 뒤로한 채 용병들은 귀환할 준비를 했다. 콜로니가 품고 있던 크레딧과 스케빈저들의 유품까지도 알뜰하게 챙긴 것은 물론이었다.

"한 몇 달간은 푹 쉬어야지. 호스트도 부르고 마사지도 받으면서···"

콧노래를 부르던 아멜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거인 용병 허크가 심각한 표정으로 역무실의 한쪽을 힐끔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이 덩치. 뭐 하고 있어? 거기 꿀 발라놨냐?"

"이걸 봐."

허크가 손짓한 곳을 아멜리아가 바라봤다.

곧 그녀는 두 눈을 크게 떴다. 구석에 웬 거대한 구멍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것은···

"저거 강철로 된 벽 같은데. 그리고 저기에 달린 건 전자식 기기 아니야? 귀중한 물품 보관할 때 쓰는 거."

다들 여기로 좀 와봐!

사냥꾼 게일과 유신, 에피가 구멍을 살폈다.

곧 그들 역시 눈을 가늘게 떴다.

강철의 빛으로 번들거리는 합금소재 문과 도어락.

눈앞에 있는 것은 장벽이었다. 그것도 단순한 금고 수준이 아니라 사람이 왕복할 정도로 컸다.

"이건···"

"방공호로군."

"방공호?"

유신이 턱을 쓰다듬자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세상이 멸망하기 전. 힘깨나 있는 자들이나 종말론자들의 거주지."

"거 말이 어려운데. 좀 쉽게···"

여기 에피 2호가 있다.

"존나게 튼튼하고 아늑한 땅굴이다."

미리 유신에게 언질을 들은 에피를 제외하고 셋의 눈이 부릅 뜨였다.

그 말은 곧.

"또 다른 보물 상자란 뜻이잖아?!"

수확을 올린 지 얼마나 됐다고, 또다시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보면서 유신은 웃었다.

사실 (구)해운대역은 겉핥기에 불과했다.

진짜 보물들은 저 안에 도사리고 있었으니까.

(구)인류의 지하쉘터.

저곳에는 총기와 탄약을 비롯한 인류 문명의 정수가 그대로 쌓여있다.

'아직까지는 순조롭군.'

유신의 목적은 애초부터 이곳이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쉘터 프론티어

미리 발견해줘서 고맙군.

아니었다면 이쪽이 나설 생각이었는데 말이지.

유신은 가라앉은 눈으로 허크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거 어떻게 들어가지? 딱 봐도 이걸 풀어야 되는 것 같은데."

도어락은 페이크다. 애초에 적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한 요새에 출입구를 저렇게 쉽게 만들어 놓을 리가 없으니. 이걸 뚫는 방법은···

"너희들 장님인가?"

"뭐?"

"여기에 입구가 있지 않나?"

애초부터 열려있다.

유신은 역무실을 연결하는 통로와 방공호 사이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사각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개구멍이 있었다.

"이건···"

"구더기 인간들의 짓이로군."

놈들의 마비독에는 미약한 산 성분도 섞여 있다. 동면과 세력확장을 반복하던 녀석들이 마침내 이 쉘터를 발견한 거지. 그리고 그때 우리가 들이닥친 거고.

'역시 이 세상은 게임 속이다.'

유신은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절묘할 정도의 우연이 발생할 수 있을까?

어쨌든 입구는 발견했으니 이제···

"들어갈 건가?"

게일이 말했다.

하지만 실상 의견을 구한다는 뉘앙스는 아니었다.

아멜리아와 허크의 답변 또한 그랬다.

"살짝 간만 보고 위험하다 싶으면 튀는 걸로?"

"동의한다."

평범한 시민 거주구가 아니라 종말을 대비한 자의 요새라니.

이 얼마나 군침이 도는 먹잇감이란 말인가?

'이걸 노렸구나?'

에피가 유신을 보며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소녀는 유신으로부터 지하철역 아래에 뭔가가 더 있을 수도 있다는 언질을 들었다.

그게 이거일 줄은 몰랐지만.

유신은 늘 그렇듯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

***

쉘터 프론티어.

놀랍게도 이 녀석은 핵전쟁이 한창 벌어지는 와중에 지어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각자의 그룹 구성원들의 이익들이 모여 만들어진 일종의 연합체다.

그게 아니라면 어떤 미친놈이 지하철역 부근에 쉘터를 짓겠는가?

다 시간과 예산의 문제 때문에 타협했다는 거지.

그렇다보니 레이저 트랩이라던가. 고압 전류장 같은 덫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튼튼한 콘크리트와 합금 벽으로 주변을 둘러쌓을 뿐이다.

축축하다.

구멍을 빠져나와서 발을 디딘 게일이 제일 먼저 느낀 것이었다.

혹여 쉘터의 생존자, 침입자들에게 발각될 때를 대비 횃불을 껐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스윽스윽

그는 야경에서 배웠던 대로 어둠에 순응하기 전에 온몸의 감각을 이용했다. 시력 대신 촉각, 후각, 청각에 집중한다.

'미약한 습기가 있군. 괴물의 괴성이나 인기척은 안 느껴지고···'

'이건 뭐지? 시큼한 냄새? 독연인가?'

집중하던 게일이 눈을 가늘게 뜬 그 순간.

"화장실이군."

뒤이어 그를 따라나온 유신이 말했다.

"뭐, 뭣?"

"넌 왜 변기에 머리를 처박고 있나?"

"···"

그 순간에 맞춰 게일의 암순응이 끝났다. 과연 자신의 눈앞에는 수세식 변기통이 있었다. 오래 묵은 변과 누런 오줌으로 가득한.

시발.

자괴감에 빠진 전직 사냥꾼 수련생을 뒤로한 채 유신은 주변을 살폈다. 모니터 너머로 보던 것보다는 훨씬 현실감 넘치며 음울해 보이지만 자신이 알던 그 장소가 맞다.

쿵! 쿵!

그아아아악!

때를 맞춰 흐릿한 유리문에 머리를 처박는 한 그림자의 모습까지도.

"···!"

유신은 전투태세를 갖추는 용병들을 제지하며 에피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인간형처럼 보임. 머리를 노릴 것.

-오키.

그 동안 함께 손발을 맞춰온 소녀는 곧바로 시위를 당겼다.

쾅 소리와 함께 침입자가 화장실 내부로 침입한 순간.

가볍게 튕겨 나간 화살이 적중했다. 가래 끓는 소리를 내던 그림자는 비틀거리다가 풀썩 쓰러졌다. 물론 유신의 품속으로.

"···"

조용히 문을 닫은 그는 일말의 소음조차 죽인 채 시신을 눕혔다.

"이건···"

헤졌지만 깔끔한 셔츠.

헝클어진 머리칼과 탁한 눈동자.

침입자의 정체는 인간 여자였다. 하지만 평범한 인간은 아니었다.

"감염자잖아?"

창백한 피부와 꿰뚫린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타르 같은 핏물.

쉘터에 들어오자마자 일행을 제일 처음 맞아준 것은 감염자였다.

핵전쟁이 남겼던 최초의 재앙이자 이제는 찾아보기도 힘든 식인귀들.

허크가 중얼거렸다.

"외관이 깔끔해. 이런 놈이 여기 있다는 말은···"

"이 쉘터는 이미 감염자들로 득시글거리고 있다는 소리군."

말을 받은 아멜리아도, 사냥꾼 교육생 게일도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당장에 1급 위험종인 방사능 들개만 해도 이런 움직이는 시체보다 훨씬 더 까다롭고 사나웠다.

그런 녀석들을 수도 없이 잡아본 이 백정들이 시체 따위에 겁을 먹을 리가 없었다.

감염자한테 물린다고 감염자가 된다는 이야기도 거짓으로 밝혀졌고 말이다.

하지만···

"방심하지 않는 게 좋겠군."

유신만은 여전히 얼굴을 굳힌 채였다. 아니, 그는 지금껏 보여줬던 그 어떤 모습보다 신중해 보였다.

"고작 감염자 따위···"

"방금 전에도 그렇게 행동하다가 죽을 뻔했지."

역무실에서의 변수를 말하는 거다.

"큭."

아멜리아가 입술을 씹었다.

유신에게 빚이 있던 게일이 그를 두둔했다.

"확실히.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곳이 황무지다. 그 아래의 지저는 더욱더 그렇고."

"네에, 네에."

시작부터 게일과 트러블이 있었던 상황.

유신과 게일이 뭉치는 것처럼 보이자 아멜리아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 싸웠다고는 하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란 게 이렇게 얄팍하다.

하지만···

'봉합할 시간 같은 건 없다.'

이 쉘터의 주인이 낌새를 알아차리기 전에 빨리 챙길 것만 챙겨서 나가야 하니까.

"내재된 적이 미지수인 이상 최대한 은밀하고 신속하게 움직인다."

물론 용병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유신의 당부가 아주 당연한 사실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너머.

이곳에서 얻게 된 물건들의 지분 싸움을 생각한다면 마냥 굽신거릴 수는 없다.

탐욕은 때때로 삶의 원동력이 되나 대부분은 그 삶을 파괴시킨다.

***

프론티어는 꽤나 큰 쉘터였다.

층별로 구역이 나누어진 초대규모 쉘터 정도는 아니지만. 족히 몇 백 가구가 자급자족을 하며 평생을 살아갈 수 있을 정도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물론 지금 그 아늑했던 공간은 핏물과 내장, 시체들과 되살아난 시체 등.

악몽에서나 나올 법한 장소로 변모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쐐애액

쏘아진 화살이 벽면에 머리를 처박고 있던 남성의 관자놀이를 꿰뚫었다. 화살을 회수하는 에피를 뒤로한 채 유신은 합금제 문을 열었다.

그어어어어!

하체가 날아가 바닥을 기며 다가오는 감염자들.

그 속도가 꽤나 빠르다.

물론 이쪽보다 날랠까?

유신은 톱날검을 가동하지 않은 채 마치 장작처럼 놈들을 찍어 내렸다.

정리가 끝나자 허크가 출입문을 닫은 채 철컥 잠궜다.

직후 곧바로 횃불을 피워올렸다.

화르르륵

"여긴 또 어디야?"

에피가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 덩치만 한 시커먼 관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락커룸이다."

"락커룸?"

"옷이나 장비들을 보관할 때 쓰는 곳이··· 대박!"

아멜리아가 눈을 부릅떴다. 반투명한 락커룸의 안에는 무광색으로 번들거리는 옷가지들이 들어있었다. 그녀는 잘 몰랐지만 방탄복과 화생방 보호복이다. 뿐만 아니라.

"이건! 총이로군!"

게일이 눈을 부릅떴다.

산탄총을 비롯한 자동소총, 저격용 라이플과 유탄 발사기까지.

역시나 잠금이 걸린 거치대 안에는 각양각색의 총기들과 탄약들이 거치 되어 있었다.

이 남쪽 땅에서는 돈 주고도 구하지 못하는 진귀한 무구들.

유신의 눈이 반짝였다.

'쉘터 프론티어의 무기고.'

멸세생을 처음에 시작할 때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사냥꾼으로 한다면 무조건 거쳐야 하는 히든피스존이다. 아니, 그냥 무슨 캐릭터를 고르든 여긴 무조건 와야 한다. 그만큼 들인 수고에 비해서 얻을 수 있는 기회비용이 가장 컸으니까.

물론···

철컥, 철컥.

"이거 잠겨 있는데?"

아멜리아는 신나서 락커를 열려다가 낭패감을 씹었다.

으드드득

어찌나 급했는지 팔까지 변이시켜서 뜯으려는 걸 유신이 제지했다.

"잠깐."

"왜 또?!"

"저걸 봐라."

유신이 가리킨 곳은 락커에 달린 도어락이었다.

그곳에는 새빨간 등이 점멸하고 있었다.

"전력이 통하고 있다는 거다."

"그게 뭐 어쨌다고? 나 튼튼해. 그 정도로 안 죽는다고."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후우."

유신은 한숨을 쉬었다.

이 스케빈저 아가씨는 폐허가 된 구 문명지대나 좀 털어봤지. 이런 현대식 유산은 처음인 모양이다.

'이 우매한 것들을 진짜 어쩌면 좋을까?'

다른 용병들 역시 그래 보이기에 유신은 설명을 덧붙였다.

"구 시대의 전자기기들이 신비로운 기능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알고 있겠지? 머스크의 저택에서 봤지 않나."

"···"

"전력이 통한다는 것은 이곳에도 그와 비슷한 기기들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딱 봐도 위험한 냄새를 풀풀 풍기는 무기를 보관해둔 곳에 함정 하나 없을까?"

거창하게 함정까지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경고는 울리겠지.

'그렇게 되면 이 쉘터의 주인 역시도 낌새를 알아차릴 터.'

"그럼 어쩌라는 건데?! 당신은 이걸 열 수 있는 방안이라도 있다는 거야?!"

아멜리아가 히스테릭하게 소리쳤다.

잦은 전투로 인해 피로가 누적된 상황.

어마어마한 보상을 눈앞에 둔 채. 거듭 딴지를 거는 유신의 모습에 폭발한 모양.

늘 말하지만 이성과 감성은 별개의 영역이다.

"이 아줌마가 미쳤나! 유신 말이 틀린 거 하나 없는데. 어딜 소리를 지르고···"

격분하는 에피를 유신이 말렸다.

이런 반응 따위 동물원 원숭이들을 상대해준다고 생각하면 편하다.

"이 정도 규모의 쉘터라면 필시 메인 시스템실··· 아니, 관리실이 있을 거다. 그곳만 찾으면 이걸 열 수 있을 거야."

"···안 열리기만 해봐."

아멜리아가 쳇 혀를 찼다.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야."

그녀가 설득된 이상 게일은 물론 화합을 중시하는 허크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

관리실은 손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어차피 유신의 머릿속에 이곳의 지리는 다 입력되어 있는 상태였으니.

"여기에는 움직이는 그림들이 가득하네?"

메인 시스템실은 상황실도 겸하고 있었다.

당연히 수십 대의 모니터들과 복잡한 기기들이 가득한 이곳은 쉘터 곳곳을 비추고 있었다.

"우리 모습도 그럼 여기서 다 보였다는 거잖아? 미친···"

오싹 돋는 소름에 에피가 입을 헤 벌렸다.

그르륵, 그르륵.

그녀는 천장에 설치된 올가미도.

그 옆에 놓인 약통과 유서도.

목을 매단 채 버둥거리고 있는 감염자도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다.

"어이, 이거 존나게 복잡해 보이는데. 너 이거 풀 수 있···"

철컥.

아멜리아가 눈을 부릅떴다.

저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는 복잡해보이던 기기를 몇 번 두드리더니 진짜로 잠금을 풀어버린 것이다.

무기고 역시 CCTV가 돌아가고 있었기에 그녀는 그 모습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떻게··· 이건 구 시대의 양식으로 된 거라고··· 웬만한 학자들도 못 푸는···"

"긴가민가했는데··· 유신. 역시나 너는 사냥꾼이로군. 그러면 그 지식과 능력이 이해가 돼."

게일의 눈이 뱀처럼 빛났다.

"호오!"

'그냥 한글로 친절하게 다 적혀있더만 뭘...'

용병놈들이 감탄하든 말든 유신은 개의치 않았다. 그저 가라앉은 눈으로 모니터를 통해 쉘터 내부를 살폈다.

쿵! 쿵! 식당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흑인 사내.

아니고.

멍하니 앉은 채 흘러내린 자신의 장기를 집어넣고 있는 병사.

아니고.

어린이용 놀이방에서 곰 인형을 가지고 노는 소녀···

찾았다.

다행이 이곳과는 멀리 떨어져 있군.

낌새를 알아차린 것 같지도 않아.

안도의 한숨을 내쉰 유신은 다시금 바깥을 고갯짓했다.

"가지. 더는 구할 수 없는 보물을 챙기러."

떠먹여주기도 지쳤다.

어서 챙길 거 챙기고 쉬자.

***

끼리릭.

구시대의 열병기들이 흉흉한 빛을 반짝였다.

시설용 보호복을 비롯한 최첨단 방독면과 5형 방탄복.

9mm파라블럼부터 시작해서 12게이지 쉘과 매그넘.

수천 발은 족히 넘어보이는 탄약들까지.

으음. 이 기름과 쇠의 녹진한 냄새.

눈앞에서 반짝이고 있는 보물들의 휘광에 후손들은 그만 눈이 멀어버렸다.

"미친, 미친 미친 미치이이이인! 이건 진짜 최고야! 이딴 쓰레기들하고도 비교도 안 된다고!"

아멜리아는 시뻘게진 눈으로 (구)해운대역에서 챙겨온 스크랩들을 쓰레기처럼 쏟았다.

이윽고 닥치는 대로 그것들을 가방 안에 쑤셔 넣다가 무언가가 생각난 듯 퍼뜩 유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흠흠. 저기 말이야."

"뭐지?"

"그, 음. 미안해."

"···허?"

"지금껏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굴었지? 요즘 일이 너무 안 풀렸었거든. 시작부터 저 게이··· 아니, 게일 녀석이랑 다투기도 했었고."

흉터 가득한 손이 머리를 긁적거린다.

황무지를 배회하며 아등바등 살아온 여인의 얼굴에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이 떠오른다.

"그래서 내가 날카롭게 반응했어. 정말 미안. 유신. 당신이 아니었다면 일이 이렇게 잘 풀리지 않았을 거야."

그것은 죄책감과 미안함. 그리고 부끄러움.

이 엿 같은 땅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선한 감정들이었다.

틱틱 대기는 했지만 본성마저 악은 아니었던 모양.

흠. 유신이 이 낯간지러운 말에 뭐라 답을 할지 고민하던 그 순간.

"그러니까 나가면 같이 술이라도 한 잔···"

퍽.

웃으면서 말하던 아멜리아의 머리가 박살 났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쉘터 프론티어

흉터 가득하나 웃는 모습이 아름다웠던 여인의 얼굴이 박살 났다.

사람이었던 것이 한순간에 육편으로 화하는 것에는 채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유신은 긴장의 끈을 놓고 있지 않았던 덕택에 자신에게도 날아들던 죽음의 낫을 피할 수 있었다.

"날래군."

얼굴에 튄 핏물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채, 마치 쓰레기를 치우는 듯 무심하게 말하는 남자는···

허크였다.

지금껏 묵묵히 일행의 전위를 맡으며 제 역할에 충실했던 남자.

그 뒤편에 있던 사냥꾼 수련생 게일은 확연히 당황하고 있었다.

"너, 이게 무슨···"

말과는 달리 그의 노련한 양손은 대궁의 시위를 당긴다.

하지만.

타타탕!

갑작스럽게 문이 열리며 여러 발의 총구가 불을 뿜는 것이 더 빨랐다.

"끄으."

비정상적으로 기다란 총신과 파이프관.

활이나 (구)시대의 유산과는 약간 다른 모양새.

게일이 쓰러지면서 본 것은 일제사격을 마치고 연기를 뿜는 머스킷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쥐고 있는 푸른색 군복을 입은 사내들이었다.

"네놈··· 처음부터···"

게일의 흐릿한 시선은 자신을 쏜 흉수들을 향하지 않았다.

무감정한 그들의 뒤편에 있는 더벅머리의 사내를 향했다.

"우선 고맙다는 말을 전하지. 일이 이렇게 잘 풀릴 줄이야···"

브루노가 씨익 웃으며 말을 하던 그 순간.

"그럼 잘 가···

쾅!

머스킷과는 차원이 다른 강력한 소음이 락커룸 내부를 울렸다.

***

"커어···"

벌러덩 넘어진 허크가 멍하니 자신의 복부를 내려다봤다. 곧 엉망진창으로 헤집어져 핏물을 뿜어내는 것을 보더니 눈을 부릅떴다.

"브루···노님. 살려···"

그것이 허크의 마지막 단말마였다.

퉁 데구르르.

붉은색 탄피가 바닥을 구른다. 배신자를 처단한 유신은 다시 한 번 자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엄폐해!"

쉘이 착탄 된 순간 쇠구슬들이 흩날렸다. 무기고는 그렇게 큰 방이 아니었음으로 소름 끼치는 불꽃 소리가 연달아 따다당 울렸다.

잠시 후.

고개를 숙이고 있던 브루노와 그의 휘하에 매수된 가드들이 본 것은 훤히 열려있는 환기구뿐이었다.

치익.

"총기에 익숙하군. 거기다가 이 건물의 구조까지 꿰고 있다니. 뭐하는 녀석이야. 젠장···"

말과는 달리 브루노는 여유롭게 담배에 불을 붙였다. 황무지인들이 피는 싸구려 담뱃잎이 아닌 정제된 연초를.

"후우."

"추격할까요?"

"그래, 놈이 빠져나가기 전에 반드시 잡아야 한다."

이 일은 낙원에 위치한 클레이모어 사무실도, 컴퍼니도 모른다.

음지에서는 수두룩하게 일어나는 상황이라고는 해도 들키면 좋은 꼴은 못 보는 것이다.

물론 황무지 들개의 증언 따위를 누가 믿어줄까 싶기도 하지만···

'메이지 그놈이 눈에 불을 켜고 있단 말이지.'

"···"

가드들의 사기는 그렇게 좋지 않아 보였다.

그것에는 불법적인 일에 가담한다는 양심의 가책과 더불어 그들의 지휘자인 허크의 죽음과도 연관되어 있다.

브루노는 첩자 노릇까지 시킨 부하가 죽었음에도 태연하게 담배나 피고 있었으니까.

그게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일까? 브루노가 덧붙였다.

"여기 있는 것들. 다 처분하면 두당 몇만 크레딧은 돌아갈 거다."

"···!"

"그 정도면 남은 일생 편히 보내기에는 충분하지. 안 그런가?"

가드들의 긴장이 꽉 조여졌다. 그들의 슬픔과 두려움을 잡아먹은 것은 탐욕이란 감정이었다.

브루노는 능글맞게 웃으며 (구)시대의 열병기들을 고갯짓했다.

"출입구는 내가 지키겠다. 무장 후에 너희들은 우선 메인 시스템실을 확보하고 놈의 위치를 파악. 천천히 몰아가라. 그리고 덫이 완성되면 날 부르도록."

"하!"

절도있게 경례를 한 가드들이 뛰쳐나갔다.

"스읍."

브루노는 필터만 남은 담배를 허크의 시신 위로 툭 던지고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고오오오

피어오르는 에스트.

[에스트 주입 인형1호]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복면남들이 어느새 그의 주변을 둘러쌌다.

이윽고 무기고에 구비된 최신식 장비들로 무장을 시작했다.

투타타타타!

브루노의 뒤를 노리던 감염체들이 순식간에 벌집이 돼서 쓰러졌다.

"상태 좋고~"

휘파람을 불면서 방아쇠를 당긴 인형을 살피던 브루노는 곧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건들건들 걸어가기 시작했다.

"으차. 그럼 이제··· 사냥을 시작해볼까."

능글맞게 웃는 그의 얼굴에 공포나 절박함은 없었다.

화력도. 능력도. 세력도 모든 것이 이쪽이 위였으니까.

이건 일방적인 사냥이 될 것이다.

***

매끈한 은색통로가 탱탱 소리를 낸다.

유신과 에피는 지금 환기구 내부를 기어가고 있었다.

통로가 좁다. 이 삐쩍 마른 몸뚱이로도 움직이는 게 여의치 않을 정도.

그나마 저 꼬맹이 정도나 수월하게 운신 가능할까?

"개 같은 새끼들!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구나!"

에피는 울분을 삭히다가 속삭이듯 말했다.

"뒤통수가 얼얼해 뒤지겠어."

"통수라··· 뭐, 그렇게도 볼 수 있나?"

유신은 브루노가 자신의 뒤통수를 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굳이 게임상에서의 스토리 덕분이 아니라. 클레이모어인 녀석이 구태여 졸부의 경호원 노릇까지 하며 이쪽을 염탐한다는 것에서 의심을 느꼈으니.

하지만···

'셋 중 어떤 녀석이 첩자인지는 몰랐다.'

이쪽의 동선을 파악하고 타이밍을 노리려면 첩자를 심어둬야 한다.

게임 상에서는 이런 이야기까지는 나오지 않았다.

그저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지친 상태일 때 브루노가 짜잔하며 등장해 싸웠을 뿐이니까.

그렇기에 현실이 된 세상에서 유신은 순수히 본신의 능력만으로 판단을 내려야 했다.

열등감 덩어리인 전직 사냥꾼 교육생 게일.

욕심 많은 스케빈저 아멜리아.

묵묵한 허크.

유신은 이 세 명의 용병 중에 브루노가 심어둔 첩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고민했다.

최악의 경우 세 명 다 한통속일 수도 있다고 판단하여 경계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반응이 조금 더 느렸다.

허크의 움직임이 유신의 예상보다 훨씬 더 날랬다.

'적어도 가드들은 몇 놈 처리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장비도 좀 더 괜찮을 걸로 챙겼어야 했고.'

유신은 손에 들린 섬세한 장식과 나무 손잡이가 인상적인 더블배럴 샷건을 바라봤다.

하필 제일 가까이 있던 게 이것뿐이라 이걸 먼저 챙겼다. 그다음은 리볼버에 호환되는 45구경 탄환이었고.

"이대로 가만히 있을 거 아니지?"

"당연한 소리."

어차피 브루노 일당은 이쪽 역시 처리해 모든 증거를 처분하려 할 것이다.

둘 중 한쪽이 죽지 않는 한 탈출 역시 여의치 않다.

무엇보다도···

'이 꼬맹이 말마따나 얻어맞고는 못 살지.'

참고 인내하면서 사는 건 현대인이었을 때면 충분하다.

"에피."

"응."

"넌 뭐 챙겼냐?"

"올라갈 때 가방을 떨궈서 이거 정도?"

유신의 뒤에 있던 에피는 손에 들린 물건으로 유신의 다리를 툭툭 쳤다.

음. 이 오돌토돌한 감촉과 차가움. 동글동글하면서도 날카로운 손잡이. 이건···

순간 유신은 오싹 소름이 돋았다.

"조심. 조심해라. 핀 건드리지 말고."

"핀이 뭔데? 튀어나온 이거 말하는 거야? 에잇."

"이 미친 꼬맹아!"

지하 수십 m 아래의 괴물들이 우글거리는 쉘터 내부.

동료들은 다 죽고, 탐욕스러운 클레이모어는 최신식 병기로 무장한 채 자신들을 뒤쫓고 있다.

하지만 유신은 지금 그 상황보다 이 꼬맹이 한 녀석이 더 무서웠다.

"히히. 장난이야."

"···"

정정한다. 더 짜증나며 거슬린다.

그 녀석들은 통제 가능하며 처리할 수 있는 변수였지만 이 꼬맹이는 어디로 튈지 몰랐으니까.

마치 이 쉘터의 지배자처럼.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으니 이제 곧 발광하겠지. 그 전에 처리하고 빠져나가야 한다.'

유신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건 수류탄이란 거다. 네가 아끼느라 똥이 되어버린 다이너마이트보다 훨씬 더 위협적인 물건이지."

"헤에. 그럼 이걸 이용하면 그 새끼들을 엿먹일 수 있는 거야?"

"어느 정도까지는? 아무튼 잘했다."

덕택에 꽤나 괜찮은 그림이 그려진다.

쿵쿵.

유신은 아래로 나 있는 환기구의 입구 중 하나를 걷어찼다.

곧 착지하며 주변을 둘러보자 식당이었다.

그아아아아!

덤벼드는 감염체들.

샷건을 선반에 둔 유신은 사냥꾼의 발톱을 휘둘렀다.

"유신!"

뒤이어 뛰어내린 에피가 시위를 당기길래 얼른 덧붙였다.

"두 마리는 남겨놔라."

"응?"

"미끼로 써야 될 테니까."

녀석들은 이쪽의 세력을 애새끼 하나와 능력자 하나로 알고 있지만 그건 틀렸다.

놈들의 적은 이 지하쉘터 전체다.

***

퉁!

무광색의 돌격소총이 불을 뿜었다.

소음기 덕분에 소리는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그 결과는 아니었다.

인간의 연약한 피륙 같은 건 뻥 구멍이 뚫리며 사그라들었으니까.

"이거 죽이는데?"

이 전율적인 무기의 주인이 된 남자 테리가 씩 웃었다.

그의 옆에 있던 턱수염을 기른 동양인 요시모토.

죽은 허크 대신 가장 경력이 많았던 사내가 테리를 꾸짖었다.

"집중해라 테리. 상대는 능력자다. 그리고 우리와 비슷한 무장을 가지고 있다."

"네, 넵. 요시모토씨."

선임의 질책에 정신을 차린 테리가 왼손에 힘을 줬다.

그 손에는 큼직한 바디벙커가 들려있었다.

총탄이나 폭발물들을 막기 위해 설계된, 유신이라는 사내의 능력을 겨냥해 챙겨온 보호구.

"확인된 능력은 화염 계통이다. 그리고 야경의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아이언 나이트는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고, 이 척박한 황무지에서 타운을 넘어 소문이 돌기에는 유신은 아직 아마추어에 불과했다.

즉 브루노와 그 일당은 유신의 능력을 한 가지라고 상정하고 있었다.

저벅저벅

그렇게 가드들이 넓은 방위를 능숙하게 경계하며 주변을 수색하던 그때.

두 사람이 끼고 있던 소라 모양의 이어폰에서 음성이 들렸다.

-가드1 가드2 응답하라. 이쪽은 가드3. 메인 시스템실 점거완료. 타겟을 찾았다.

"여기는 가드1 카피."

-북동쪽에 위치한 식당이다. 감염자들의 시신을 산처럼 쌓아둔 채 아래에 엎드려 있다. 아마 위장전술로 추정··· 치지지직. 변수 발생.

[쉘터 프론티어 안내도]

내부에서 가져온 지도를 살피던 야마모토가 눈을 가늘게 떴다.

"···!?"

-놈이 카메라를 부쉈다. 타겟이 있을거라고 추정되는 장소는 더 이상 식별이 불가능하다.

커넥션 셀의 껍질로 만들어진 통신기는 꽤나 훌륭한 음질을 자랑했다.

덕택에 탐색조인 두 사람은 돌아가는 상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요시모토가 통신기에 손을 올렸다.

"타겟과 같이 다니는 애새끼의 위치는?"

-파악되지 않는다. 건물 어디에도 없어.

"그렇다면···"

요시모토는 브루노와 머스크로부터 받은 브리핑을 떠올렸다.

우선 소재가 파악된 능력자 쪽 말고 변수를 창출해낼 수 있는 녀석부터.

금발머리의 꼬맹이···

나이에 맞지 않게 대단한 활 솜씨를 지녔다지?

활이라는 무기의 은밀성.

작은 체구가 가지는 이점.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볼 때···

"능력자 쪽은 미끼다. 아마 녀석이 시선을 끄는 틈을 타서 꼬맹이를 이용 이쪽을 급습할 생각이겠지."

요시모토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격 포인트는 환기구나 화장실일 가능성이 크다. 그 두 곳만이 유일하게 카메라가 없는 곳이니까."

"감염체를 미끼로 시선을 끌 수도 있다. 가드3이랑 가드2는 주의하라."

-가드3 카피.

-가드2 카피.

브루노에게 매수되어 개인장비를 가지고 이 약탈전에 참여한 가드들은 총 여섯이었다.

부패했다고는 하나 어쨌든 그들은 훈련받은 병사들이었다.

그 안에는 (구)시대의 양식을 상정하며 만들어진 시가전도, 전술 훈련들도, 지식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판단은 나름 적절하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유신은 직접 그 시대를 겪으며 2년 동안 지옥을 경험했다는 것.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사람의 상상력과 악의라는 게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것만 뺀다면 말이다.

그 순간.

쿵!

천장에 있던 환기구가 굉음을 냈다.

경계하고 있던 요시모토와 테리는 그 방향을 향해 냅다 방아쇠를 당겼다.

퉁퉁퉁퉁!

굉음이 울린다. 번들거리던 합금벽은 금세 흉흉한 구멍들이 뚫렸다.

'맞췄나?'

라고 생각하던 순간.

철퍽.

벌어진 환기구의 틈으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수류탄! 피···"

뒷걸음질치던 요시모토가 말을 삼켰다.

떨어진 그것은 폭발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건···

"고기?"

웬 큼직한 고깃덩이였다.

주변으로 냄새를 다 퍼트릴 정도로 선혈을 줄줄 흘리는.

끼아아아아악!

요란한 격발음.

어디서 풍기는지 몰라서 짜증 나던 미끼의 등장.

코너 너머에서 냄새를 맡은 감염체들이 개떼처럼 달려들기 시작했다.

"으, 으아아아아!"

패닉에 빠진 테리 대신 요시모토는 침착하게 수류탄을 휙 던지며 소리쳤다.

"이런 잔꾀를! 퇴각한다! 일단 다른 팀과 합류해서 천천히 외곽에서부터···"

말을 하던 요시모토의 눈이 부릅 뜨였다.

수류탄이 터지며 비산하는 파편들과 살점들 너머.

조각난 채 날아오는 감염체의 옷 속에 있던 무언가가 그의 시선을 끌었기 때문이다.

치이이익

타들어가는 도화선.

붉디 붉은 저 아담한 몸체.

요시모토는 죽음이 목전까지 들이민 것을 깨달았다.

"개같은···"

물론 인생사.

주마등이 닥쳤을 때는 항상 너무 늦었다.

콰아아앙!

부패한 군인들은 폭발에 쓸려나갔다.

자신들보다 몇 수는 앞선 유신의 꾀에 의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쉘터 프론티어

-녀석들의 숫자는 총 일곱이다. 물론 능력을 사용한다면 수십 명이 되겠지만 브루노의 성격상 녀석은 출입구를 지키고 나머지 부하들로 우리들을 몰 가능성이 크다.

-세 팀, 혹은 두 팀으로 나뉘겠지. 그 중 한쪽은 메인 시스템실을 점거해 이쪽의 동선을 파악하려고 할 테고 나머지 녀석들로 수색을 할 텐데···

유신은 감염체의 핏물로 환기구를 비롯한 쉘터의 약도를 휙휙 그렸었다.

-현재 우리가 있는 식당으로 오려면 이 통로를 반드시 지나쳐야 한다. 녀석들은 이쪽의 동선을 완전히 파악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이쪽 역시 마찬가지야.

그렇기에 오히려 이쪽에서 덫을 놓는 거다.

***

콰아아앙!

아래쪽에서 울리는 폭음에 에피는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이 유신의 계획대로 딱딱 풀렸기 때문이다.

물론···

'뒤질 뻔 했지만 말이지.'

"괴물에 폭탄을 끼워서 팔 생각을 하다니... 정말이지 유신 당신 존나게 악취미야. 하지만 그래서 더 어울려! 당신답다고! 킥킥!"

에피는 피가 흐르는 어깨를 부여잡으며 낄낄 거리다가 다시금 환기구 내부를 기어가기 시작했다.

***

갑작스럽게 들려오던 총성과 폭음이 멈췄다.

우어-어어어어!

잠긴문 바깥에서는 산자들의 살점을 탐하고 있는 식인귀들의 괴성이 들려온다.

유신은 상황이 제 뜻대로 풀렸음을 깨달았다.

'우선 한 쪽은 처리했고.'

쉘터 내부에 존재하는 감염자들만 수 백이다. 일부러 소음을 줄이고 인도까지 하며 녀석들을 최대한 적게 사살했었다. 다 지금의 상황을 가정하고서.

'나머지 녀석들도 휘말렸다면 좋겠지만··· 뭐, 아니어도 상관은 없다.'

유신은 가드들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았다.

무전을 날릴 틈도 없이 다른 수색조의 신호가 끊겼다.

그렇다면 어떻게 판단할까?

동료들의 원수를 갚자?

놈들이 뭔 개수작을 더 부리기 전에 피해를 감수하고 움직이자?

그럴리가.

시발 뭐지? 저거 보통이 아닌데?

일단 상황 파악 및 전략을 다시 짜보자.

정도로 생각하며 경계심을 더 높이지 않을까?

바로 그것이 유신이 노리는 점이었다.

이 판은 데스매치가 아니라 타임어택이거든.

보다 은밀한 쪽이 더 유리한.

물론.

"방심해서는 안 되겠지."

늘상 이쪽이 생각할 수 있는 건 상대 쪽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염두해둬야 한다.

그러면 적어도 반은 가거든. 전술의 폭도 넓어지고.

철컥.

더블배럴의 총열을 젖혀 쉘을 집어넣은 유신은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

유신에게는 다행스럽게. 가드들에게는 불행하게 상황은 풀려나갔다.

탕!

-끄아아아악!

무전 너머로는 비명이.

영상 너머로는 동료들이 산채로 분해되는 모습이 피어난다.

통제실 의자에 앉아 이를 보고 있던 가드가 책상을 후려쳤다.

"빌어먹을!"

난대없이 1팀과의 연락이 끊기더니 곧 파도처럼 몰아닥친 감염자들의 공세에 2팀 역시 유명을 달리했다. 이제 남은 것은 상황실에 있는 자신들과 브루노뿐이었다.

'2형 감염자에 비해 1형이 훨씬 더 날래고 강하다는 걸 간과했다.'

근본적인 원인을 따지자면 타겟의 신출귀몰한 능력과 전술적 판단 때문이겠지만 말이다.

가드는 침을 꿀꺽 삼키며 옆에 있던 동료 레이드를 바라봤다.

평상시 손을 더럽혀도 오히려 낄낄거리며 이를 훈장 삼아 떠들고 다니던 그의 낯짝 역시 자신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어떻게 하지?"

"이, 일단 브루노님과 합류하자."

그-아아아아아!

쿵! 쿵!

"녀석들이 조금 잠잠해지면 말이야."

그들의 머릿속에 브루노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당연했다.

그는 일인 군대라고 불리는 사내니까.

···

시간이 흐른 후.

더는 감염체들의 발소리도 문 두드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동료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인 레이드는 문고리의 잠금장치를 조심히 풀었다.

철컥.

이윽고 총구를 내민 채 바깥을 조심히 살피던 그는.

"···!"

굳어버리고 말았다.

"안녕."

경계하던 감염자도 아니고.

열살 정도로 보이는 작은 소녀가 문 앞에 우두커니 선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겟과 같이 다니는 꼬맹이인가?

그 약아빠진 저격수가 이렇게 대놓고 모습을 드러낸다고?

총구를 소녀에게 향하고 방아쇠에 손을 올리는 그 찰나의 순간까지.

레이드의 머릿속은 어지럽게 돌아갔다.

하지만 곧 그는 치명적인 결함을 알아챌 수 있었다.

우선 타겟이 달고 다니는 소녀는 금발머리다.

하지만 저 소녀는 갈색이다.

결정적으로.

'아무리 봐도 비정상적이야.'

프릴이 달린 드레스와 앙증맞은 구두.

손에 들고 있는 곰인형까지.

낡았지만 소녀가 입고 있는 복장은 평범했다.

이 종말이 일어난 세상에는 어울리지 않게 기이할 정도로.

마치 저 주변을 돌아다니는 감염자들과 같이···

"아저씨들은 누구야?"

고개를 갸웃거리는 소녀의 얼굴은 천진난만했다.

하지만 레이드는 오싹 소름이 돋았다.

무언가 이상하다.

라고 느낀 순간 그는 지체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투타타타타!

무자비한 납탄의 세례에 소녀의 여린 몸은 형편없이 찌그러졌다.

"허억, 허억, 허억."

빈탄창이 울리는 공허한 약실 소리.

동료의 당황 섞인 음성.

그 모든 것들을 뒤로한 채 레이드는 거친숨을 내쉬었다.

부디 이 한방으로 자신의 불안감이 해소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파. 아파-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파파파파파파파파!"

소녀는 죽지 않았다.

수십 발의 총탄을 맞고도 기괴한 각도로 몸을 꺾으면서 일어나 이쪽으로 기어왔다.

"아파파파파파파. 기기기기기긱!"

변조한듯 끔찍하게 늘어지는 쇠 긁는 음성.

황소도 잡아먹을 정도로 커진 입과 박혀있는 수십 개의 이빨들.

그 악의적인 몸짓과는 반대로 호선을 그리는 눈동자.

"히히."

이제서야 이 쉘터의 음산하면서도 기괴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새하얀 복도에 새겨진 파괴의 흔적들도, 곳곳에 늘어져 있는 썩은 살점들과 핏자국들도.

"여기 오는 게 아니었···"

콰직.

그것이 레이드가 생에서 마지막으로 본 광경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