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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과 에피는 나란히 쉘터 내부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어그로는 저쪽이 다 끌어줘서 움직이는 것은 수월했다.

"출입구는 그 더벅머리 놈이 지키고 있는 것 아니야?"

에피가 속삭였다.

지금 그들이 향하는 곳은 입구가 있는 곳과는 반대쪽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으로 가면 자살행위다. 이쪽에도···"

순간 유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타다다닥

곧 발소리와 함께 코너에서 감염자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유신은 평소처럼 톱날검을 휘둘러 은밀하게 놈을 처리하는 대신.

쾅!

더블배럴 샷건의 방아쇠를 당겼다.

아무리 유효사거리 밖이라고 하나 (구)시대의 기술이 집약된 이 올드건은 전율할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감염체는 납탄의 힘을 못 이기고 뒤로 붕 날아갔다.

"어째서 아깝게···"

시위를 당기고 있던 에피가 중얼거리던 그 순간.

콰아아앙!

날아간 감염체가 폭발했다.

어디선가 본듯한 익숙한 그 방식이다.

에피가 눈을 부릅떴다.

"이건···!"

"네가 내 부하들한테 써먹었던 방식을 그대로 사용해봤지. 어떤가? 너무 뻔했나?"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쉘터 내부에서 웅웅 울리고 있었기에 위치를 특정할 수는 없었다.

"뻔했다마다. 아류는 오리지널을 이길 수 없는 법이니까. 이 더러운 약탈자 녀석아."

마찬가지로 빈정거려준 유신은 냅다 옆에 있던 방문을 열고 뛰쳐들어갔다.

탕탕탕탕!

불과 1초 차이로 통로에서 모습을 드러낸 검은 복면이 총탄을 쏘아냈다.

이곳은··· 회의실이다.

유신은 집기들을 휙휙 던져서 입구를 막았다.

"도울게!"

"아니, 그럴 시간 없다."

그리고 조막만 한 손을 보태는 에피의 뒷덜미를 잡고는 냅다 뒤로 몸을 날렸다.

콰아아앙!

뒤늦게 박살 나는 문짝과 피어오르는 연기.

아마 유탄이라도 쏜 거겠지.

다행이 회의실은 꽤나 널찍한 공간이었다.

유신은 책상들과 의자들을 주변으로 던지고 쌓아 더미들을 비롯한 바리케이트들을 만들었다.

직후.

바스락.

파편을 짓밟으며 연기 속에서 검은 복면들이 튀어나왔다.

저 시커먼 녀석들은 웃기게도 방탄복과 군화, 개인 군장까지 충실하게 챙기고 있었다.

돼지같은 놈.

회의실 안으로 들어온 녀석들 말고도 바깥에서는 요란한 총소리가 쉴 틈 없이 울려 퍼졌는데. 아마 유신은 물론 이곳에 있는 감염자들 역시 다 쓸어버릴 생각인 것 같았다.

죽지도 않으며 공포를 느끼지도 않는 불사의 군대.

여기에 (구)시대의 열병기가 더해진다면 누워서 스프 먹기보다 쉬울 테니.

브루노의 입장에서라면 말이지.

"막다른 곳으로 들어왔군. 뭐, 그것도 내가 의도한 바였지만."

목소리는 좀 전보다 가까웠다.

하지만 여전히 브루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철저하기 그지없다.

동시에 당연시 해야 할 판단이기도 했다.

전열에 서는 동시에 전쟁을 하는 것은 병사들이어야 한다.

지휘관은 지휘만 하면 된다.

아니, 그래야 한다.

"바테라가 시켰나? 아니면 조합장?"

유신은 일부러 말을 걸었다.

아직 그것이 안 왔다.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라면 시간을 더 끌어야 한다.

"시간을 끌 속셈인가? 흐흐. 뻔히 보이는 속셈이로군."

브루노는 웃었다.

하지만 그는 완전히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복면들을 움직이지 않았다.

철저한 성격이지만 오만함 역시도 동시에 가지고 있거든.

"애석하게도 둘 다 아니다. 이건 처음부터 내가 짠 판이거든."

"네가 짰다고? 네놈 설마···"

"비밀은 영원히 묻혀있기에 비밀인 법. 너도 그만 잠들어라. 내 부하들이나 들개들하고 같이."

현실판은 좀 더 합리적이군.

어쩔 수 없나?

복면들이 방아쇠를 당기기 전.

유신은 내면의 에스트를 끌어올렸다.

"후우."

직후 곧바로 땅을 박찼다.

***

회의실과 조금 떨어진 곳의 통로.

브루노는 턱을 쓰다듬었다.

"미친 건가? 아니, 아니다. 저건 삶을 포기한 눈빛이 아니야."

구석에 숨어있던 유신이 냅다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총탄 아끼고 좋군."

브루노는 손가락을 튀기며 명령을 내렸다.

저것들 당장 처리하라고.

투타타타타!

두려움도 공포도 모르는 자신의 수족들은 이번에도 그의 기대에 부응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냅다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이전과는 달랐다.

"뭣?!"

브루노가 눈을 부릅 떴다.

초당 떨어지는 수십발의 납탄이 저 창백한 사내 하나를 저지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불똥을 튕기며 튕겨나가고 있었다.

경력이 짧지 않았던 클레이모어는 곧 이변을 눈치챈다.

'저 녀석 피부결이 갑자기 이상해졌다!'

자세히보니 도마뱀의 그것과도 비슷하다.

[레자드의 스케일 아머]

정답이었다.

유신은 브라키에게서 빼앗은 능력을 전력으로 운용하고 있었다.

같은 전철을 밟을 수는 없으니 안구 쪽은 철저히 보호하며.

위이이이잉!

크레딧을 먹어치운 톱날검이 미친 듯이 회전한다.

이 불사의 군대는 죽일수는 없지만···

'무력화 시킬수는 있지.'

기괴한 행태의 검이 번뜩였다.

불똥이 튀며 총구가 잘려나갔다.

압도적인 충격에 의해 복면인들은 마치 젤리처럼 바닥을 굴렀다.

쿵!

회의실을 빠져나온 유신은 복도를 살폈다.

어디냐? 어디 숨었···

거기구나!

곧바로 뒷걸음질치고 있던 브루노를 발견했다.

"쏴!"

저쪽과 이쪽의 거리는 수십 미터.

그 사이에는 유탄 발사기를 비롯한 폭발물들을 가득 지고 있던 복면인들이 장벽처럼 서 있었다.

아무리 레자드의 비늘을, 트롤의 재생력을 사용한다고 해도 산산조각 나버릴 무식한 화력들.

그 짧은 새에 판단을 내리고 이쪽을 사냥할 준비를 했다.

브루노 저 녀석도 보통내기는 아닌 것이다.

하지만···

모든 변수의 창출은 정보의 불확실성에서 온다.

그리고 강탈자는 이에 훌륭할 정도로 부합하는 직업이었다.

[방사능 트롤의 재생력]

[히트맨의 격동하는 육신]

쾅!

콘크리트 바닥이 움푹 파이며 유신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두 개의 총열이 불을 뿜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쉘터 프론티어

그 동안 경험이 좀 쌓이고 다른 능력자들에 대해서 알게 될 무렵.

에피는 유신이 굉장히 특별한 사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냉정한 판단력과 평정심. 영악한 꾀 같은 것이 아닌 능력 그 자체 말이다.

난대없이 힘이 세지고 빨라졌다가. 상처가 회복되기도 해.

불꽃은 또 어떻고. 게다가 이제는···

'총탄을 튕겨내고 있어.'

어지럽게 돌아가는 전장 속에서도 에피는 무기를 꽉 쥔 채 유신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보았다.

수십 미터 거리를 대번에 도약하는 병약한 인상의 청년을.

그의 손에서 뿜어지는 광휘를.

***

신체 강화 능력의 메커니즘은 간단한 것 같으면서도 복잡하다.

어떤 자는 안구가 강화되어 비정상적인 동체시력을 가지지만 육체가 이를 따라가지 못한다.

어떤 자는 구름까지 닿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각력을 얻게되지만 역시나 나머지 육신이 맞지 않은 부품처럼 삐그덕거린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데이브의 능력은 훌륭하다 볼 수 있다.

반사신경, 몸놀림, 근육과 뼈의 밀도, 인간의 다섯가지 감각들.

그 한계치가 높지는 않으나 모든 분야를 공평하게 상승시켜 준다.

즉 상대의 입장에서보자면 걸어가던 놈이 갑자기 달리게 된 것과 똑같았다.

적응이 안 될 수 밖에.

'맞아줄 건 맞아준다. 하지만 이쪽은 킹을 받아간다.'

유신에게 총탄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브루노는 다른 방식을 꾀했다.

아예 그냥 다량의 폭약을 때려넣어 방과 함께 그를 폭사시켜 버릴 생각을 한 것이다.

시기적절한 판단이었으나 복면인들은 섬세한 동작에 한해서는 조금씩 굼떴다.

그렇기에 생겨난 잠깐의 틈.

탕탕탕!

빗발치는 총탄의 포화 속을 꿰뚫으며 유신은 수십미터 거리를 순식간에 주파했다.

쾅!

직후 쏘아진 납탄이 수류탄의 핀을 뽑던 복면을 후려쳤다.

이윽고 벌어지는 놀라운 기예.

유신은 달리던 힘을 줄이지 않은 채 그대로 벽면을 찼다.

그리고 휘리릭 몸을 회전시키며 눈앞에 있던 복면인들을 뛰어넘었다.

잡았다. 라는 삼류 악당 같은 대사 대신 섬뜩한 총구만이 묵묵히 제 존재감을 뿜어낸다.

그 차가운 강선의 아래에는 눈을 부릅뜨고 있는 브루노가 있었다.

"···"

유신은 힘껏 방아쇠를 당겼다.

***

쾅!

터져나간 쉘이 죽음의 비를 흩뿌린다.

신체 강화와는 거리가 먼 사이킥 계열 능력자였던 브루노는 당연히 이 현상에 반응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유신은 승리를 직감했다.

난대없이 브루노의 목 부근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며 반투명한 역장이 생기기 전까지는.

콰장창

피륙이 뭉게지거나 성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명 대신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로자리아의 가호!'

또 다시 현실판 변수가 발생했다.

그러나 당황하면 안 된다.

생각은 짧았고 행동은 더 짧았다. 유신은 샷건을 재장전 하기보다 앞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곧바로 브루노의 목을 틀어쥐었다.

유신이 막 손아귀에 힘을 줘서 브루노의 목뼈를 부러트리려는 동시에.

철컥

옆에 있던 복면인 중 하나가 폭발장치의 트리거에 손을 올렸다.

"컥, 컥컥. 나, 날 죽이면 너도··· 죽는다."

울긋불긋 돋은 핏줄과 붉어진 얼굴.

버둥거리는 양팔과 다리.

그러나 눈동자는 뱀처럼 빛났다.

이 녀석 진심이다.

유신은 손아귀에 힘을 슬쩍 풀었다.

약간의 숨 정도만 통할 정도로.

이윽고 벽면을 엄폐 삼아서 사각지대마저 차단했다.

침을 질질 흘리던 브루노는 콜록거리면서 물었다.

"너, 대체 정체가 뭐냐."

절체절명의 상황.

목숨값에 대한 흥정 대신 오히려 의문이 먼저 터져나온다.

브루노의 눈은 지금 부릅 뜨여져 있었다.

그 정도로 유신이 선보인 행위는 기괴함을 넘어 경악스러웠다.

"신체강화, 변이, 원소, 재생력, 내가 방금 전에 본 능력들만 네 가지다. 그 어떤 클레이모어들이라고 해도, 아니, 능력자라 해도 이 정도로 다른 성질의 능력들을 동시에 다룰 수는 없어. 너는 대체··· 뭐지?"

"지금 그런 게 중요한가?"

이에 대응하는 유신은 늘 그렇듯 침착했다.

제 주변에 있는 총기든 폭발물이든 인질이든 그 모든 상황에서 초탈해 있는 것 처럼 보였다.

'벌집을 건드려버렸군··· 이건 괴물이다.'

브루노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유신을 바라보다가 후우 심호흡을 했다.

"그래, 이 엿같은 세상에는 밝혀지지 않은 비밀들이 참 많지. 묻어둬야 할 것도 많고."

그는 곧 탐욕스럽고 제 목표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부하들을 희생시키는 냉정한 사내가 됐다.

"협상을 하자. 너도 이런 지하에서 개죽음 당하고 싶지는 않을테니까."

***

협상이란 기본적으로 상대의 욕구를 탐색하고 자극하며 공감대를 형성하여 서로간에 목적에 부합하기 위함이다.

뭐, 어느 한 쪽이 주도권을 쥔 상태라면 이런 테크닉 따위는 무의미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그런 건 협상이라 할 수 없지. 통보잖아. 그냥.

"협상?"

"여기서 노획한 장비들의 절반을 주겠다. 처분이 곤란하다면 이쪽에서 대신 처리해주는 것은 물론 세탁까지 해주지."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브루노의 단어 선택은 꽤나 적절했다고 볼 수 있다.

아니, 놈의 입장에서는 그렇겠지.

이 저울추가 공평하다고 생각하고 있을테니.

"흠."

"너와 나의 첫인상이 최악이었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겠어. 내가 한 짓이 마음에 안 들었다는 것도 물론이야. 하지만···"

브루노는 머스크의 저택에서 처음 봤을 때 처럼 실없게 웃어보였다.

"이 황무지에는 영원한 아군도 적도 없는 것 알잖아? 앙금 따위는 털어버리고 보다 괜찮은 미래를 함께 그려보자고."

"나쁘지 않은 조건이군. 하지만 네 말해는 치명적인 결점이 하나 있다. 내가 널 어떻게 믿지?"

지금은 대등해보이나 문명의 땅으로 나가는 순간 두 사람의 입장은 판이하게 달라진다.

하나는 펑크시티 지부 소속의 클레이모어.

다른 하나는 떠돌이 출신의 용병.

이 압도적인 배경 차이는 많은 것들을 자아낸다.

가진 말의 무게부터가 다르며, 움직일 수 있는 권력부터가 다르다.

막말로 브루노가 약속을 어겨도 유신으로서는 대응할 수단이 없다.

물론 브루노는 바보가 아니었다.

홧김에 던져본 말 한 마디로 이 괴물을 설득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너 정도 되는 지식을 가진 자라면 잘 알겠지. 통제실에 가면 감시 카메라의 영상을 추출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안에는 지금까지 이곳에서 벌어진 상황이 모두 녹화되어 있다는 것도."

"나도 네 비밀을 하나. 너도 내 비밀을 하나씩 공유하는 거다. 서로가 딴 마음을 품을 수 없게."

두 개의 칼자루와 그 사이에서 피어나는 신뢰관계.

브루노는 유신에게 자신과 같이 손을 잡고 공범이 되자고 제안했다.

"호오···"

유신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요 녀석이 지껄이는 말이 꽤나 그럴듯했기 때문이다.

아마 다른 자였다면 홀라당 넘어가버렸을 만큼.

하지만···

"그게 끝인가?"

꾸욱.

유신은 느슨해졌던 손아귀에 힘을 줬다.

브루노가 컥컥 거렸다.

"뭘··· 크으. 더 바라는 거냐!"

"가성비가 안 맞잖아."

"가.. 성비?"

"이 세상에서 단 하나 뿐인 능력자의 은밀한 비밀과··· 고작 부패한 클레이모어의 흠집 하나랑 교환하기에는 너무 가성비가 안 맞아."

이를 제외하고서라도···

내가 원하는 건 처음부터 다른 거였단 말이지.

"거절하지."

일말의 여지조차 없는 단답에 발버둥이 멈춘다.

브루노는 본능적으로 무슨 당근을 던지든 이 괴물을 설득할 수 없을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녕 여기서 다 같이 죽자?"

브루노의 눈동자가 그 몸짓만큼이나 깊게 가라앉았다.

"크흐. 좋다! 누가 겁먹을 줄 알고?! 어디 한 번 죽어···"

와악 소리친 브루노가 에스트를 조종했다.

복면은 지체없이 자폭 스위치를 눌렀···

"···!"

그가 눈을 부릅 떴다.

각성한 후 늘 제 뜻대로 움직이던 충실한 능력이 자신의 뜻에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연결이 끊겼다?'

브루노의 시선이 휙 돌아갔다.

그곳에는 상체가 뜯겨나간 복면 아니, 에스트 인형들이 있었다.

우적우적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어느틈에 왔는지 태연하게 입을 오물거리고 있는 흑발의 소녀가 있었다.

소녀가 말했다.

"안녕? 아저씨들은 누구야?"

오싹 소름이 돋는다.

그 인성과는 달리 경험만은 진짜였던 브루노는 본능적으로 저게 인간이 아닌 그 탈을 쓴 무언가라는 것을 깨달았다.

"시, 시발! 어이! 지금 우리끼리 이럴 때가 아니··· 컥!"

우득.

유신은 뭐라 소리치려는 브루노의 목을 자비없이 꺾었다.

[에스트 주입 인형1호]

고오오오오

이윽고 브루노의 능력과 소지품을 강탈하자마자 곧바로 시체를 휙 던졌다.

[과도한 능력 흡수!]

[그릇이 넘칩니다]

[사용자의 선택에 따라 살아 움직이는 불꽃의 염화가 사라집니다]

프론티어 쉘터의 지배자이자 제3형 감염자.

포식하는 소녀.

귓가로 들려오는 끔찍한 뼈 씹는 소리들을 뒤로한 채 유신은 달렸다.

앞에는 멍한 눈으로 시위를 당기고 있던 에피가 있었다.

3형 감염자의 행위를 보고 기겁한 것 같았다.

"에피!"

"으, 응?!"

"튄다!"

***

일반적으로 황무지인들은 감염자들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저 어두컴컴한 지하에 처박힌 회색 피부의 인간들이라면 다같은 감염자라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망가진 세상의 특권계층.

극소수의 영민한 자들은 감염자들의 종류가 좀 더 다양하다는 것을 안다.

핵전쟁 이후 가혹한 환경에 노출되어 도태된 녀석들이 일반적으로 아는 2형 감염자들.

세상에 멸망하던 그 때. 대전쟁과 함께 인류를 전멸시킬 뻔 했던 바이러스 덩어리들.

밀폐된 지하쉘터나 연구소에서 동면에 빠져있던 팔팔한 녀석들이 1형 감염자들이다.

사실 1형 감염자들의 무서운 점은 매서운 육신과 병균의 유무가 아니다.

망가진 세상의 괴수들은 그보다 더 사나웠으며 흉폭했으니.

하지만···

1형 감염자들이 진짜 무서운 이유는 녀석들에게 내재된 불길한 가능성 때문이다.

극히 드문 확률로 1형에서 우화하여 탄생하는 변종들.

통칭 3형 감염자들.

방사능에 노출된 괴물과 인간들이 돌연변이라는 가공할 괴물이 되듯. 감염자들 역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의 한계를 벗어던진다.

그리고 그 결과는 치명적인 것을 뛰어넘어 재앙 그 자체다.

이를 증명하듯 웬만한 물리력이 통하지 않던 브루노의 에스트 인간들이 순식간에 사라졌지 않나.

"어디가아~ 놀자아! 꺄르륵!"

뒤편에서 들려오는 소녀의 환한 목소리.

타박타박 울리는 작은 발걸음 소리.

이곳이 어디 놀이터라면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을 터다.

하지만 이곳은 피와 내장, 시체들로 범벅된 지하 수십미터 아래의 콘크리트 감옥.

기괴한 환경 속 기괴한 존재의 추격.

순식간에 장르가 호러 서바이벌로 변했다.

"헉헉! 그래서 우리 지금 어디로 가?! 이곳은 입구와 반댓쪽이잖아!"

에피가 헐떡거리면서 물었다.

유신은 곧바로 답을 할 수 없었다.

한 번에 여러개의 능력을 운용하면서 온 과부화.

그리고 에스트의 고갈 때문에 육신이 한계에 달하고 있었기 때문.

"조금만 더 가면··· 크으, 지상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가 있다."

애초에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도 모르는데 출입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쉘터 프론티어에는 당연히 숨겨진 비밀통로가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뭔···"

"이쯤 됐으면 좀 닥치고··· 알아먹어! 탈출구다!"

"놀-자아~"

'거리는··· 대략 10미터 정도인가?'

다행이다. 간만에 맛보는 사냥감 때문인지 놈은 한껏 들떠있다.

그어어어어!

안도한 것도 잠시.

통로 저편에서 감염자들이 뛰쳐나왔다.

그 숫자가 상당하다.

"에이잇!"

에피는 전력으로 달리면서도 용케 시위를 당겼다.

퍽. 에피 또래의 소년이 쓰러져 케르륵 거렸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많은 숫자들이.

뿐만 아니라 군인 출신이었는지 방탄복과 헬멧을 차려입은 감염자들도 섞여서 앞길을 막았다.

"저기··· 유신? 우리 지금! 엿 된 것 같아!"

"이걸 써라!"

유신은 앞뒤 잴 것 없이 홀스터에 있던 리볼버를 휙 던졌다.

철컥. 그리고 더블배럴 샷건에 두 개의 쉘을 집어넣었다.

소녀와 사내가 나란히 방아쇠를 당겼다.

쾅!

비산하는 살점들과 핏물들.

"파, 팔이···"

에피는 반동으로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유신은 쓰러져서 버둥거리는 와중에도 아귀같이 손을 뻗는 감염자를 짓밟았다.

직후 벽면에 달려있던 안전유리를 깨고 손잡이를 내렸다.

쿠르르르.

이 통로에만 존재하는 비상용 격벽차단 장치다.

"달려어!"

[히트맨의 격동하는 육신]

"으악!"

합금벽이 떨어지기 직전.

에피의 뒷덜미를 잡고 슬라이딩한다.

두 사람이 들어온 것에 딱 맞춰 벽이 통로를 봉쇄했다.

"히히히. 숨바꼭질이야?"

물론 3형 감염자의 우걱거림 몇 번이면 뻥 구멍이 뚫렸지만 말이다.

하지만···

'시간을 끌기에는 충분하다.'

복도를 내달리던 유신은 연신 비상용 격벽들을 내렸다.

직후 집무실이라고 적힌 방문을 열어젖혔다.

코끝으로 스며들어오는 오래된 책 냄새.

그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확실하다. 이곳이다.

유신은 지체없이 비상용 패널을 조작해서 승강기를 호출했다.

띵.

부디 이 동앗줄이 저 괴물의 손아귀보다 빨리 닿기를 바라며.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쉘터 프론티어

붉은 융단이 깔린 바닥과 벽면을 빼곡하게 채운 책장들.

집무실은 고즈넉한 서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유신이 책상 아래에 있던 기기를 조작하며 레버를 당기자 마치 마법처럼 책장이 양옆으로 움직였다.

띵.

그리고 그 안.

불이 들어오고 있는 패널의 아래에는 자동차 정도는 가볍게 들어갈 것 같은 거대한 화물용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1F]

시발. 이건 게임하고 똑같구나? 그때는 캐릭터들이 패닉 상태에 빠지는 게 이해가 안 됐었는데. 이제는 이해가 된다.

초 단위로 피가 마르는 느낌이다.

"왜, 왜 안 오는 거야?!"

"인내심을 가져라."

속마음과는 달리 침착하게 말하던 그 순간.

끼리릭.

문고리가 돌아갔다.

이렇게 빨리?

욕설을 내뱉은 유신이 수류탄의 클립을 뽑았다. 곧 핀마저 뽑으며 던지려는 찰나.

"크흐, 으으."

유신이 행동을 멈췄다.

문 너머로 들어온 것은 3형 감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이?!"

에피가 꽥 소리쳤다.

그는 사냥꾼 게일이었다.

***

"나는 게이가 아니라···"

"용케도 살아남았군."

아무리 플린트락 머스킷이라고 해도 총은 총이다.

그걸 몇 발이나 맞았는데 살아있다?

반박하려던 게일은 힘겹게 숨을 내쉬며 품에 있던 빈 약병을 들어 보였다.

찰랑거리는 소량의 붉은 액체.

트롤의 피를 가공해서 만든 영약이다.

메트로폴리스 정도나 되는 대도시의 연금술 공방에서나 구할 수 있는 귀한 물건이지.

역시 숨겨진 한 수가 있었군.

"탈출하려는 건가?"

"그래. 자리는 널널하다. 합류하겠나?"

"감사히."

띵.

때맞춰 울리는 경쾌한 소리.

승강기가 도착했다.

세 사람은 얼른 탑승했다.

유신은 [1F]버튼을 누른 다음 닫힘 버튼을 연타했다.

쿠르르르

"염병."

그러나 전국의 모든 엘리베이터가 다 그렇듯 이 녀석 역시도 느리기 그지없었다.

"아오오오! 속 터지겠네! 뭔 놈의 탈출구가···"

느릿하게 닫히던 문을 보며 발을 동동 구르던 에피가 눈을 부릅떴다.

"히히히. 찾았다. 여기 있었구나?"

이번에야 말로 문이 열리며 3형 감염자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낡은 드레스와 앙증맞은 구두.

소녀는 두께 5㎝가 넘는 합금벽들을 건너왔다기에는 너무 멀끔한 차림새였다.

그저 입가에 약간의 핏물과 쇳조각들만 붙어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더 기괴했다.

"유신! 앞에! 앞에!"

접근하게 놔두는 순간 무조건 죽는다.

저건 특정한 계통을 제외한 모든 능력자들의 천적이다.

팅.

유신은 이미 풀다만 안전핀을 홱 뽑으며 수류탄을 던지고 있었다.

저 개체의 특성을 고려.

포식하는 소녀가 먹어치우지 못하도록 손에서 2초 동안 굴린 수류탄을.

"공놀이야?"

지연폭발의 효과는 탁월했다.

난데없이 머리통이 두 배나 커진 소녀는 입을 쩍 벌린 채 수류탄을 삼키려다가.

콰아아앙!

눈앞에서 터진 쇳조각들의 향연에 그만 붕 날아갔다.

"끼아아아아악!"

우화 후 처음 입어본 상처.

이로인해 피어나는 하울링은 뇌를 송곳으로 콕콕 찌를 정도로 강력했다.

승강기 마저 흔들거릴 정도였으니까.

"으아아아아!"

"크윽."

그 리듬에 맞춰 세 사람이 비틀거렸다.

피투성이가 된 소녀는 금세 자세를 다잡고는 네발로 기어오며 입을 쩍 벌렸다.

그 순간.

그들의 눈앞에 어둠이 찾아왔다.

드디어 승강기의 문이 닫힌 것이다.

이 거대한 탈출구는 곧 약간의 진동과 함께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빠르지 않은 속도로. 느릿하게.

'지상까지의 거리와 승강기의 속도를 고려했을 때 약 20초 정도···'

유신이 생각하던 그 때.

"후우, 후우. 저건 대체 뭐지? 감염자인가?"

3형 감염자를 처음 본 게일이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몸이 붕 뜨는 기분을 기분 좋게 느끼던 에피는 한숨을 내쉬었다.

"살았다."

그 말을 들은 유신이 움찔거렸다.

"악!"

직후 에피에게 딱밤을 날렸다.

금발 머리 소녀는 억울함에 유신의 종아리를 걷어찼다.

"씨이! 또 왜애! 내가 뭘 잘못 했다고!"

"네 그 입방정이 잘못했다."

"입? 내가 뭐라 했어? 그냥 살았다라고 한 마디···"

쿠웅!

순간 거대한 진동이 울렸다.

직후 끼기기기긱 쇠 마찰하는 소음이 울리더니 난대없이 승강기의 바닥을 뚫고 뭔가가 튀어나왔다.

흔들거리는 그것은 살더미를 뭉쳐놓은 것 같은 촉수였다.

에피가 눈을 부릅떴다.

"이, 이건···!"

"명심해라. 이런 게 클리세란 거다."

그 마법의 주문은 죽은 녀석도 부활시킨다고.

크레딧을 털어 넣은 유신이 손잡이를 돌렸다.

연료를 머금은 사냥꾼의 발톱이 흉흉하게 돌아갔다.

번뜩이는 톱날.

일행을 노리고 솟아오르던 촉수들이 잘려나갔다.

느릿하게 올라가던 승강기가 다시금 제 속도를 되찾았다.

그 순간 울리는 또 다른 목소리.

"해, 해치웠나?"

"야이···!"

소녀가 닥치자 이제는 저 수습생 놈이 또다시 기름을 끼얹는다.

유신은 두 멍청이를 걷어차며 바닥을 굴렀다.

과연 현명한 판단이었다.

콰직 소리와 함께 그들이 서 있던 승강기 바닥 부분이 통째로 뜯겨져 나갔으니까.

"아파파파파파파~"

흐릿하게 빛을 내는 엘리베이터의 조명 아래로.

포식하는 소녀의 본 모습이 드러난다.

여전히 앙증맞은 소녀의 몸뚱이에. 이에 어울리지 않는 지름 3미터짜리 거대한 머리통.

환 공포증을 연상시킬 정도로 무수히 박혀있는 수십 개의 이빨.

두 개의 눈두덩이 역시 안구 대신 이빨이 박혀있다.

소녀의 탈을 쓴 괴물은.

아니 이제는 그 탈마저 벗어던진 악귀는, 몸에서 돋아난 촉수로 통로를 거미처럼 찍어오르며 일행을 향해 적의를 드러냈다.

"진짜 시발! 시발! 좆같이도 생겼네!"

뻥 뚫려버린 중앙 대신 벽면에 등을 기대고 있던 에피가 리볼버를 뽑아들었다.

탕탕!

직후 기묘한 각도로 이쪽으로 날아오던 촉수들을 저격했다.

유신은 여전히 돌아가는 톱날검을 꽉 쥔 채 타이밍을 노리다가.

"배고파-아아아아!"

포식하는 소녀가 쏘아낸 혓바닥을 찍어 내렸다.

콰드드득

"크윽."

분명 살더미를 후려쳤건만 무슨 쇳덩이를 가르는 것 같다.

톱날검 역시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피와 살육을 분해하는 대신 티티티팅 불꽃을 튀기며 헛돌았다.

그러나 이 전율할 정도의 무기는 역시나 기대 이상의 위력을 보여줬다.

"끼아아아악!"

구멍 너머로 머리를 쩍 내밀려는 괴물을 저 아래로 밀어낸 것이다.

하지만 마냥 상황은 좋게만 풀리지 않았다.

불안전한 지면.

상상이상인 3형 감염자의 신체 강도.

잦은 전투로 인해 누적된 피로.

순간 시야가 핑 돌았다.

유신은 그만 무기를 놓치며 비틀거렸다.

그아아아아!

그리고 그 아래에는 3형 감염자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이런 시발.

"유시이이이인!"

이를 보고 있던 에피가 팔을 휙 뻗었다.

그러나 너무 짧아서 닿지 않자 아예 훌쩍 몸을 날려서 그를 붙잡았다.

당연히 지지대가 없는 두 사람은 오히려 나란히 추락했다.

유신이 얼굴을 구겼다.

"무슨 멍청한 짓···"

"그렇다고 그냥 둬?! 너 혼자 보낼 순··· 으, 으아아아아!"

비명을 꽥 지르던 에피가 눈을 부릅 떴다.

팔이 빠질 것 같은 고통은 느껴졌지만 떨어지던 몸은 우뚝 멈췄다.

"꽉 잡아!"

사냥꾼 교육생 게일이었다.

에피의 조막만 한 손을 붙잡은 그는 쿨럭쿨럭 핏물까지 토하며 힘을 줬다.

"으아아아아!"

직후 고성과 함께 두 사람을 끌어올렸다.

"헤엑, 헤엑."

"고맙다···"

식은땀을 흘리던 유신이 말했다.

게일은 손을 휙 털다가 어울리지도 않게 농을 던졌다.

"잘 챙겨 먹어야겠군. 두 사람 다 가볍기 그지없어."

유신은 피식 웃다가 아래를 보며 얼굴을 굳혔다.

3형 감염자는 여전히 이쪽을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아아아아아!

녀석은 여전히 통로를 기어오르며 이빨을 날름거리고 있었다.

멀어진 게 무섭게 거리는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다행인 점은 우화한 후 이곳에서만 있던 녀석이라 몸뚱이의 사용이 익숙치 않다는 것일까?

'출구까지 남은 시간은 8초.'

하지만 그전까지 버틸 수 있을까? 설령 도착한다고 해도 황무지에서 놈을 따돌릴 수 있을 확률은?

관찰하고 고민한다.

이 육신이 가진 비범한 정신력과 집중력을 바탕으로 찰나의 순간 수없이 많은 상황을 가정해본다.

여기에 더해지는 현대인의 지식과 강탈자로서 이 세상을 유랑하며 쌓아온 경험들.

답이 나왔다.

이대로는 안 된다.

좋든 싫든 도박을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유신은 가라앉은 눈으로 말했다.

"짐 다 버려. 최대한 가볍게."

반론은 없다.

방아쇠를 당기던 에피도 게일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상 정지 스위치]

유신은 안전유리 아래의 손잡이를 내렸다.

"후우, 후우."

직후 바닥까지 남은 능력을 짜내 강탈자만의 권능을 또 한 번 행사했다.

[히트맨의 격동하는 육신]

초인이 된 그의 주먹이 향한 곳은 승강기의 천장이었다.

***

쾅!

흔들거리는 강철 와이어들 너머로 새카만 어둠이 보인다.

하지만 그 끝에는 미약한 빛도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와이어를 붙잡고 기어오르고 있던 에피가 벌벌 떨었다.

"이, 이게 맞아? 이건 진짜 미친 짓···"

"타이머는 얼마로 맞췄지?"

"그런 거 맞출 시간이 어딨나. 수동이다."

"···그렇군."

게일은 상처가 욱신거리는지 줄을 타면서도 인상을 찌푸렸다.

"말할 시간에 움직여."

유신은 팔을 움직이면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엘리베이터는 정지한 상태로 멀쩡히 멈춰있었고, 그 위의 두툼한 검은색 가방 역시 고이 올려져 있었다.

'젠장.'

유신은 속이 쓰려서 죽을 것 같았다.

저걸 얻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리고 저게 있으면 얼마나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는데?

하지만···

'목숨보다 귀하지는 않지.'

언젠가 기회는 다시 온다.

그것도 근시일 내에 더 큰 형태로.

살아만 있다면 말이다.

"추, 출구다!"

"나와라! 문부터 열어야 해!"

그 순간.

그들이 붙잡고 있던 와이어가 거칠게 흔들렸다.

곧 무슨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듯 승강기의 아랫부분이 사라졌다.

"용서 못-해애. 나쁜 어른들은··· 다아- 씹어먹어 버릴거야. 다아."

소름끼치는 쇠긁는 소리.

포식하는 소녀가 입을 몇 번 왕복했다.

그러자 이제 거대했던 화물용 엘리베이터는 천장 부분만 남아 대롱거렸다.

"응? 왜 없지? 맛없어···"

3형 감염자의 이빨 달린 눈이 딱딱거리며 위쪽을 주시했다.

"아아. 거기 있었어어?"

와이어를 잡고 있던 유신 역시 그 괴물을 내려다봤다.

그 잠깐 사이에 모습이 한결 더 끔찍하게 바뀌었다.

녀석의 피부결은 이제 창백한 시체색도 아닌 시커먼 검은색이 되었다.

포식하는 소녀의 능력은 간단하다.

저 역동적인 입을 움직여 뭐든 먹어치운다. 에스트든 합금이든 화기든 뭐든.

그리고 잡아먹은 것들의 성질에 따라 진화한다.

더 거대해지거나. 입에서 화염이나 독을 뿜는다거나.

아예 신체 구조도를 뒤바꾸어 날개 같은 것이 돋아나 공중을 배회한다.

실제로 유신이 멸세생을 플레이 할 때.

7대 재앙 중 하나인 여왕을 처리할 때 제일 까다로웠던 하수인이 저 녀석이었다.

마치 강탈자인 자신처럼 포식을 하면 강해지는 것과 더불어.

저 입만 까딱거리면 그 어떤 화기나 능력도 무효화 시킬 수 있으니까.

바꿔 말하면 그 말은.

'인식의 범위 밖에서 일어나는 공격은 못 막는다.'

소녀 괴물의 능력은 가변적이다.

마치 즉사기를 가진 캐릭터가 너 죽어. 라고 상대를 지정하지 않는 이상 능력이 발동되지 않는 경우와 같다고나 할까?

수십 차례의 실험을 통해 유신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핑.

대처법 역시 여기에 있다.

유신이 수류탄을 던졌다.

끼아아아아아!

촉수로 벽면을 짚으며 진격하던 괴물은 저 위험한 물체를 꿀꺽삼키며 흡수했다.

직후 입이 찢어져라 낄낄거렸다.

그 순간.

유신이 손가락을 튕겼다.

[에스트 주입 인형1호]

고통도 공포도 두려움도 모르는 이 무생물 같은 인형은.

괴물의 뱃속에서 주인의 명령만을 충실히 기다리던 이 인형은.

꾸욱.

지체 없이 손에 들린 격발기를 눌렀다.

콰아아아앙!

어둠에 물든 통로 속에서 무한한 섬광이 피어났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언제나 뒤처리가 더 힘들다

사아아아

손아귀 너머로 꺼끌꺼끌한 감촉이 느껴진다.

촉각 다음은 후각이었다.

지하의 퀴퀴하고 시체 썩은 내가 아닌 매캐하고 건조한 공기.

지난 1년 동안 지겹도록 맡았던, 미약한 방사능과 중금속 섞인 모래의 냄새.

"이곳이 반가워질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저물어가는 노을빛 아래.

엉망진창이 된 유신은 눈을 끔뻑거리며 얼굴을 쓸었다.

쿨럭, 쿨럭.

포식하는 소녀의 뱃속에 있던 폭약이 폭발하고, 폭발에 휩쓸리기 전에 승강기의 입구 밖으로 뛰쳐나오고, 다시금 통로를 지나 지상으로 빠져나오기까지.

한 순간 한순간이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살아남았군."

유신이 피식거렸다.

한계를 넘어서 짜낸 에스트 덕분에 머리가 깨질 것 같지만.

충격에 의해 몸 여기저기도 맛이 간 것 같지만 말이다.

그가 옆을 바라봤다.

총탄에 관통상을 입은 에피.

한쪽 팔이 빠진 게일 역시 낄낄거리고 있었다.

"진짜 뒤질 뻔했네! 이런 일을 매번 겪어야 된다는 거지?!"

"살아가면서 겪은 일들 중 가장 끔찍한 경험이었다."

곧 두 사람은 입이라도 맞춘 듯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살았다."

삶은 숭고한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그 하나로 큰 축복이다.

보고 듣고 느끼고 만지고 맛보고.

세 사람은 고통도 잊은 채 오감이 선사하는 향연에 마음껏 취했다.

아-우우우우우!

물론 그런 감동 역시도 이 비정한 황무지의 환경에 의해 금세 달아나버렸지만 말이다.

"라이어 울프인가?"

"이 똥개 새끼들이 어딜 감히··· 아윽!"

"일단 자리를 옮기지. 앞으로의 상황에 대해 대책도 마련할 겸."

***

뻥 뚫려있는 천장과 창문들로 별빛이 새어 들어온다.

풍화된 콘크리트 벽면에는 머리통이 사라진 모델이 햄버거를 들고 있다.

괴물들을 따돌리고 폐허 건물터에 자리를 잡은 세 사람은 모닥불을 중심으로 둘러앉았다.

"존나 맛없어."

에피는 투 헤드 스컹크의 고기를 씹으며 얼굴을 구겼다.

요 몇 주간 방사능 들개 여관에서 주인장의 훌륭한 음식들만 먹었으니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스컹크 고기는 망가진 세상 역시 역겨운 맛이거든.

아픈 몸으로 힘겹게 잡아왔건만 저런 반응이라니. 하지만 게일은 기분 나쁘다는 티도 없이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지? 브루노는··· 그 새끼는 클레이모어였다."

게일은 펑크시티에 위치한 사냥꾼들의 교육소 야경에서 훈련을 받았기에 잘 알고 있었다. 컴퍼니 휘하의 지원부대 소속. 가드들의 복장이 딱 저런 모양의 군복이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들이 무사히 저 방공호를 빠져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브루노가 죽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의뢰주인 바테라는 처음부터 놈의 수족이라고 봐야겠지. 조합장 역시도 이를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별 도움이 안 될 테고."

브루노가 이쪽을 먼저 공격하고 뒤통수를 쳤든.

이쪽은 그저 무고한 피해자로서 대응했을 뿐이든.

사실은 하나다.

클레이모어가 죽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

그것도 아주 깊게.

"어쩌면 클레이모어 살해 죄를 뒤집어 쓰게 될 거다."

망가진 세상에서 클레이모어라는 직위가 주는 파장은 그 정도로 컸다.

이에 비한다면 지금 유신 일행의 영향력은 길거리의 돌멩이나 다름없었고.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모닥불빛 너머 창백한 인상의 사내가 단언했다.

"어떻게?"

"영업비밀이라서 그건 말해줄 수 없고. 아무튼 우리가 할 일은 간단하다. 일단 해가 뜨고 장벽이 열리면 낙원으로 돌아가야 해."

도주나 은닉이 아닌 귀환.

부패한 경찰들 사이로 살인혐의를 받고 있는 억울한 피해자로서는 쉽사리 택하기 힘든 선택지였다.

하지만 유신은 이 사태의 유일한 해결 방안은 여기 있다고 생각했다.

'그자의 믿음을 얻어야 한다.'

"당신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무슨 수는 있는 모양인데. 하지만 위험부담이 너무 큰···"

"막말로 여기서 도주한다고 한들 우리 수준으로 컴퍼니의 추격을 따돌릴 수 있나? 뭐, 노스트라나 괴물 둥지 속으로 들어가거나 밴디트 패거리가 되면 가능은 하겠군."

살아는 있되 그게 사는 건가?

문명의 바깥으로 내던져져 짐승처럼 사는 것이 사는 거야?

"···"

한 번 실패한 인생이었지만 낙원에서 제2의 전성기를 달리던 게일은 답하지 못했다.

그저···

"당신 말대로 하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

날이 밝자 황무지를 넘어 낙원으로 되돌아왔다.

방사능 들개 여관의 종업원인 델리아는 늘 그렇듯 도도한 인상으로 추파를 쳐내다가 귀환한 유신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세상에··· 유신! 꼴이 그게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의뢰를 하다 좀 굴렀다."

"이건 그런 정도가 아니잖아! 꺄악! 에피 역시 팔에서 피가!"

사실 저 정도로 호들갑을 떨 사안은 아니다.

어젯밤 야영을 하면서 웬만한 응급처치는 다 했으니까.

-델리아. 여기 맥주···

-아저씨! 나 대신 홀 좀 봐주세요!

하지만 델리아의 눈에는 아닌 모양이다.

"물 끓여놓을 테니 우선 소독부터 하고 있어!"

그녀는 다급히 어딘가로 나가더니 붕대랑 약초를 가져왔다. 곧 유신의 상처를 봐줬다.

"괴물 사냥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건 알아. 하지만 위험하면 도망쳤어야지."

"도저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씁."

변명하던 유신이 신음을 삼켰다.

도끼눈을 뜬 델리아가 아예 붕대를 꽉 조였기 때문이다.

마치 상처에 빨간약을 그대로 들이부은 기분.

아아. 잠깐. 잠깐!

유신의 눈에서 눈물이 찔끔 흐르자 그녀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부드럽게 매듭을 지었다.

"내가 한건 응급처치일 뿐이야. 가까운 시일 내에 제대로 치료를 받아. 알겠어?"

"···알았다."

유신은 그답지 않게 긍정했다.

남의 대가 없는 호의.

순수한 걱정은 언제 느껴도 기분 좋은 것이었기에.

-델리아!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이냐? 나 혼자선 도저히···

-지금 나가요!

델리아가 나갔다.

에피는 잘 묶인 붕대를 만지작거리다가 몸을 떨었다.

"방금 전의 언니. 무서워··· 그 소녀 괴물보다 더···"

"···"

게일은 자신만 돌봐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 아쉬움을 느끼는지. 혹은 정말 이 방법이 맞는지 긴가민가한지 입맛을 쩝 다셨다.

"여기서 대기하면 되나?"

"그래. 얌전히 있으면 이 일은 곧 해결될거다."

"알겠다."

게일이 나가고 두 사람은 묵고 있던 방으로 향했다. 곧 늘어지게 한숨 잔 다음 의자에 앉아 제일 중요한 일을 시작했다.

바로 이번에 얻은 노획물의 감별.

"구시대 양식의 더블배럴 샷건이 한 자루. 전용 쉘 탄환이 81발. 그리고···"

유신이 맞은편에 있던 에피를 힐끔거렸다.

"그건 얼마나 남았냐?"

에피는 꼼지락거리더니 사냥꾼의 리볼버와 탄환들을 꺼내놓았다.

내가 챙겼을 때보다 확연히 총알 숫자가 줄어있다.

"그새 많이도 쐈군."

"어쩔 수 없잖아. 그 괴물 새끼가···"

"그래, 미래를 기약할 상황이 아니었지. 잘했다."

한숨을 내쉰 유신이 손을 내밀었다.

"으으. 줬다 뺏기 있어?"

에피는 리볼버를 만지작거리면서 입을 삐죽 내밀다가.

"자!"

눈을 질끈 감으며 그것을 내밀었다.

물론···

"됐다. 너 가져라."

유신은 받지 않았다.

"저, 정말?"

"그럼 다시 가져갈까?"

"아냐! 히히!"

처음부터 쉘터 프론티어에서 장비를 얻는다면 이럴 생각이었다.

자동소총과 스나이퍼 라이플 같은 최신식 장비들을 놔둔 채 부무장인 권총을 쓸 이유는 하나도 없었으니까. 물론···

'거기서 이거 하나만 달랑 가지고 나올 줄은 몰랐지만 말이지.'

유신은 고풍스러운 양식의 올드건을 툭툭 쳤다.

하필 포식하는 소녀가 브루노의 에스트 인형들과 그들이 매고 있던 화기 가방을 거의 다 먹어치운 것. 그나마 하나 남았던 것 역시 녀석을 처리하기 위한 함정으로 썼던 것.

모든 것이 통제되지 않는 변수였다.

목숨이라도 건진 게 다행인 수준.

하지만 사람은 언제나 얻은 것보다 잃은 것에 더 배 아파한다.

괴물 같은 능력자인 강탈자 역시 그 내부는 평범한 사람.

유신은 속이 쓰려 죽을 것 같았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긍정적으로.'

샷건의 저지력과 대인 공격력은 리볼버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특등 사수인 소녀 역시 제대로 된 화약 무기를 얻었다.

그리고···

스스로를 타이르던 유신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딱.

곧 미니어처 인형을 휙 던지며 손가락을 튕겼다.

[에스트 주입인형 1호]

손가락 세 마디 정도 되는 인형이 금새 부풀어 오르며 성인 남성만한 크기가 됐다.

복면을 뒤집어쓴 괴한은 아무런 미동도 없이 제 주인을 바라봤다.

이 땅에 떨어진 지 1년하고도 약간의 시간이 더 지났을 무렵.

유신은 드디어 클레이모어라고 불리는 강력한 능력자의 이능을 강탈하는 것에 성공했다.

두려움도 고통도 공포도 안 느끼는 병기.

오직 주인의 명에 충실히 따르며 싸우는 마리오네트들.

'단점도 있지만··· 장점 역시 확실한 능력이지.'

브루노는 결코 머저리가 아니었다.

압도적인 화력과 능력을 바탕으로 자만하지만 않았다면, 상대가 유신이 아니었더라면, 난데없이 끼어든 3형 감염자가 아니었더라면 승부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건 충분히 살아 움직이는 불꽃의 염화를 버리고 택할 만한 비수다.

'이 녀석이 모니터 속 버전과 얼마나 다른지는 천천히 연구해보는 걸로 하고.'

생각하던 유신이 고개를 돌렸다.

에피는 히히덕 거리는 것도 멈춘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들갑도 당황도 아닌 조용히.

유신이 말했다.

"짐작하고 있었지?"

이 꼬맹이는 바보지만 멍청하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세상 돌아가는 방식을 잘 안다.

"어느 정도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알겠네?"

"입 닥치고 있으란 거지?"

"그래,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다."

"비밀···"

에피는 우리 둘이란 말과 비밀이란 말을 되새김질하더니.

"응! 약속이야!"

조막만한 손을 접으며 새끼 손가락을 뻗어보였다.

"···"

유신은 이 유치한 장단에 맞춰줘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래. 약속."

소녀의 반짝이는 눈동자에 그만 한 수 접어줬다.

"어허! 복사까지 해야지!"

"아예 붙여넣기도 하지 그러냐."

"그거 좋은데?"

***

햇빛이 떨어지는 방 안.

검은 복면인이 팔을 휘적거린다.

아크로바틱한 움직임을 선보이며 춤을 추다가.

휙휙.

난대없이 주먹을 날리거나 발길질을 하거나.

침대 밑으로 숨어들어 숨을 죽이는 등.

마치 어린아이나 할 법한 행동을 하고 있다.

침대에 늘어지게 누워있던 유신은 턱을 쓰다듬었다.

"한 마리 까지는 어떻게 되겠는데. 두 마리 이상부터는 힘들군."

지난 며칠간 유신은 여관에만 틀어박혀 이 새로운 능력을 다루는 법을 연습했다. 브루노의 능력은 지금껏 흡수했던 괴물들의 능력보다 더 강력하며 기묘한 만큼 그 메커니즘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에스트도 많이 소모되고 일정 거리 이상이 떨어지면 조종이 안 돼. 지능은 또 똑똑한 듯 싶다가도 단순하고···"

마치 남부러울 것 없는 대기업 직원이 한탄을 토해내듯 유신은 이 새로운 힘의 단점들을 나열했다. 그 결론은···

사이킥 계열은 역시 다루는 게 쉽지 않다.

그리고 자신이 이 능력을 원주인처럼 다루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강탈과 숙련은 또 다른 문제였다.

'아오, 머리야.'

달맞이 초를 복약해 몸뚱이를 회복시킨지 얼마나 됐다고 또 골골 거리기 시작한다.

유신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방문을 나섰다.

이 몸뚱이를 여기서 더 악화시키지 않으려면 제때 제 때 영양분을 섭취해줘야 됐기 때문이다.

"어서와~ 오늘도 풀코스?"

"부탁하지."

종업원인 델리아는 늘 그렇듯 환하게 미소 지으며 음식들을 내어줬다.

유신은 식사를 하며 그녀의 참새 같은 재잘거림을 기분 좋게 들었다.

"저기 유신. 이번에 네가 데려온 일행 말이야."

오늘은 주정뱅이 욕이 아닌 좀 더 특별한 이야기로군.

"게일 말인가? 걔가 왜?"

"그 이런 말 하면 안 되는 건 아는데···"

"···?"

"뭔가 이상한 낌새가 난다고나 할까? 다른 손님들을 보는 눈이 심상치가 않더라고. 그 사람 혹시··· 그쪽이야?"

델리아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설마 너는 아니지? 라는 시선을 보내왔다.

"···"

그러고보니 죽은 아멜리아도 그런 말을 했었지.

그때 당시에는 그냥 비아냥거리기 위해서 꺼낸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쯤 되면 그 녀석 정말···'

"난 게이가 아니다."

"꺄아악!"

뒤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델리아가 기겁했다.

유신은 고개를 돌려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있는 게일을 살폈다.

아하. 자세히 보니까 왜 델리아가 그런 생각을 가졌는지 알겠다.

"너 생긴게 조금···"

"···?"

"그윽하게 생겼군."

"멕이는 건가?"

"아무튼 델리아."

"으, 응."

"이 녀석은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다."

맹세코 유려한 곡선을 좋아한다.

"그래? 휴우. 다행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렇게 델리아와 담소를 나누며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던 그 때.

콰앙.

난대없이 여관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곧 내리쬐는 태양과 이것이 만들어낸 음영 아래서 푸른 군복을 입은 자들이 척척 모습을 드러냈다.

예약되어 있지 않은 불청객들이다.

"저, 저자들입니다!"

나 억울하다. 라고 주장하는 듯한 강력한 외침.

군복들에게 둘러싸여 초췌한 안색으로 이쪽을 손짓하는 자는 용병 조합의 조합장이었다.

군복을 입은 자들은 전에 봤다시피 클레이모어 휘하의 지원부대 가드들이고.

'드디어 오셨나?'

유신은 들고 있던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입가를 훔쳤다.

기다리다가 눈 빠지는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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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뒤처리가 더 힘들다

"어쩐 일이시죠?"

델리아는 웃고 있던 얼굴을 굳히며 평상시의 도도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저 피 냄새 나는 병사들이 두렵지도 않은 모양.

아니, 아닌가?

자세히보니 양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저자로군."

"들었던 외향과 일치해."

가드들은 자기들끼리 뭐라고 숙덕거리다가.

그들 중에서 견장을 좀 더 많이 차고 있는 자가 앞으로 나왔다.

"컴퍼니 휘하 가드 소속. 제임스다."

"가드님들이 이곳에는 어쩐 일로···"

"그쪽 아가씨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우리 목적은 당신 앞에 있는 자들이니까."

"설마?"

델리아는 눈을 크게 뜬 채 유신을 바라봤다.

그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태연하게 고기를 썰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던 걸까?

가드 제임스는 인상을 구기며 소리쳤다.

"조합 소속의 금패 용병 유신과 에피! 그리고 게일! 너희들은 지금 클레이모어 살해 혐의를 받고 있다! 순순히 조사에 응하라! 그러지 않는다면 목숨은 보장할 수 없다!"

무슨 일인가 눈치를 보던 주인장과 손님들도.

올게 왔다며 얼굴을 쓰다듬는 게일도.

"유, 유신이? 클레이모어를··· 살해?!"

연인의 충격적인 과거를 알게 된 여인 같은 반응을 내보이던 델리아도.

여관에 있던 모두가 경악했다.

단 한 사람 유신만 빼고.

"당신의 말에는 어폐가 있지만··· 일단은 협조하지."

***

수갑을 찬 채 가드들을 따라 연행된 곳은 낙원에 마련된 특별지구였다.

여러 채의 대저택들이 즐비한 이곳에는 꽤나 특별한 구조물이 한 가지 있었는데.

그건 한 채의 아파트였다.

태양빛에 반짝이는 저 푸른 창들도.

모든 게 납작해진 세상 속 혼자서 고고하게 솟아있는 저 모양새도.

퍽 특별해 보인다.

마치 자신은 남들과는 다르다는 듯 주장하는 것 같달까?

물론 가까이 간다면 창문도 금이 가거나 깨져있고, 외벽 역시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일행이 연행된 곳은 그런 아파트의 지하주차장이었다.

평소라면 고가의 외제차들이 즐비했을 이 공간에는 지금 의자를 비롯한 철제 구속구, 집게나 쐬꼬챙이 같은 갖가지 고문용 도구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 으스스한 공간에서 유신과 에피, 게일은 마치 범죄자들처럼 취조를 당하기 시작했다.

"브루노님과 휘하 가드들은 왜 죽였나?"

에피와 게일은 언질받았던 대로 입을 다물었다.

답하는 건 유신이었다.

"우리는 그들을 죽이지 않았다. 억울하군."

"순순히 포박에 응하길래 의아했건만. 역시나 무고를 주장하기 위해서였나?"

"그래, 그러니까 발언권 정도는 주겠지? 우리가 그들을 죽였다고 확신하는 이유는?"

"용병 조합의 조합장과 바테라의 증언이 있었다. 너희들이 유적을 탐사하는 도중 구시대의 지하쉘터를 발견했으며 사안의 중요도에 따라 브루노님과 가드들이 나섰으나 돌아오지 못했다고."

제임스는 피딱지가 굳은 망치를 만지작거리며 위압감을 조성했다.

"이 사실까지 반박하지는 않겠지?"

조합장은 덤덤한 얼굴로 마치 이 상황과 자신은 동 떨어졌다는 듯 말했다.

얼마 전 손수 차까지 따라주며 조합의 보배니 뭐니 지껄일 때와는 차원이 다른 반응이었다.

'스네이크맨 아록.'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대번에 꼬리 자르기에 나섰다.

이 새끼는 게임이나 현실이나 다른 게 없다.

그러든 말든 유신은 침착하게 답했다.

"이봐. 말이 앞뒤가 안 맞잖아. 하찮은 용병 놈들이 감히 클레이모어와 가드들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은 빼놓고서라도. 우리들이 발견한 지하쉘터는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었다. 그런 곳을 애당초 조합장과 바테라가 어떻게 알았다는 거지?"

입을 열려는 조합장을 제임스가 막아섰다.

"···브루노님 께서는 애초에 그곳에 지하쉘터가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하. 이거 완전 음흉한 자식들이셨네. 하긴 그러니까 그 허크 인지 하는 자식이랑 같이 이쪽 뒤통수를 쳤지."

참다 못한 에피가 쏘아붙였다.

"···"

제임스는 침묵했지만···

"이 들개년이 뚫린 입이라고···!"

옆에 있던 대머리 가드가 냅다 손을 올렸다.

그곳에는 지글거리는 부지깽이가 들려있었다.

"···!"

부지깽이가 소녀의 눈으로 떨어졌다.

"제임스 왜···"

제임스가 이를 말리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동료를 말린 그는 한쪽 귀에 손을 올린 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는데.

"네, 네. 알겠습니다."

곧 유신 일행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따라와라. 너희들을 뵙고자 하는 분이 계신다."

저벅저벅

제임스와 가드들의 인도 아래 세 사람이 떠났다.

에피에게 부지깽이를 휘두르던 대머리가 침을 퉤 뱉었다.

"빌어먹을. 들개 새끼들이···"

그는 유신 일행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흠칫 놀랐다.

떨어지는 태양과 콘크리트 구조물이 만들어낸 음영 아래.

그보다 더 시커먼 검은빛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삭막하고 건조한 살인자의 눈동자.

"···"

유신이 시선을 돌리자 대머리 가드는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턱을 딱딱거리며 내뱉었다.

"뭐, 뭐하는 녀석이야 저거···"

***

빌딩의 최상층.

불어오는 바닷바람과 이에 반사된 햇볕이 아름답게 내리쬐는 역광 속.

테이블에 앉아 있던 소년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아. 데려왔군요. 고생했습니다. 제임스."

"하!"

제임스는 지금까지의 고압적인 태도를 버린 채 부동자세를 취했다. 그 충성을 받는 것은 한 소년이었다. 갈색 머리칼에 갈색 눈. 자수가 놓아진 로브를 입고 있는 한 신비로워 보이는 소년.

"에스트 패턴이 굉장히 특이하네요. 이거 상당히 흥미로운데요. 뭐, 우선 앉으시지요. 죄인 여러분."

소년의 행동은 더 놀라웠다.

살해 혐의를 받고 있다면서 잡아와 놓고서는 웃으면서 자리를 권하는 것 아닌가?

에피와 게일은 생각했다.

딱 보아하니 범상치가 않다. 상황을 보면···

'클레이모어로군.'

물론 이 망겜의 고인물이었던 유신은 눈앞의 상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클레이모어 메이지라고 합니다."

클레이모어 메이지.

컴퍼니 펑크시티 지부 소속의 4위계 능력자.

주 능력은 원소계열.

그것도 단일 계통이 아닌 여러 계통의 능력과 여기서 파생된 테크닉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실력자.

통칭 마법사.

'컴퍼니에서도 기대주로 촉망받던 능력자였지. 조커급이니까.'

게임 상에서도 더스트 봄에서 사망하지만 않는다면 후에 손꼽힐 정도의 능력자가 된다.

이를 증명하듯 유신은 느낄 수 있었다.

기세를 숨기고는 있지만 소년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신비로우면서도 파괴적인 힘을.

하지만.

신은 완벽하지 않다고들 했던가?

"우선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하나 전하고 싶네요."

이자 역시 마냥 정상인은 아니었다.

"응?"

"···?"

"브루노 그 개자식을 처리해줘서 고맙습니다."

꽤나 뒤틀려 있거든.

***

"나참. 열악하기 짝이 없다니깐요 정말. 아무리 이곳이 구 한국의 변방이라고는 하나··· 능력자를 구속하는 데에 꼭 필요한 에스트 수갑 조차도 없다니."

에스트 수갑은 능력자 출신의 범죄자를 구속할 때 사용하는 도구다.

소지자의 에스트를 차단하는 기능이 있다.

메이지는 제 동료의 살인범을 눈앞에 두고도 냉소적이게 말했다.

"흠흠."

가드 제임스가 주의하라며 눈치를 줬지만 이 소년은 들은 채도 하지 않았다.

'이 자라면 이렇게 반응할 줄 알았다.'

알면서도 유신은 사실을 부인했다.

"···우리는 브루노를 죽이지 않았다."

그게 이쪽에서 내보여야 할 반응일 테니까.

지금 이 말의 의도를 유도심문 같은 거라고 생각할 테니.

"아아. 그러시겠죠. 그 탐욕스러운 돼지가 그래 보여도 실력은 있는 편이라. 별 어중이떠중이한테 죽을 리가 없죠."

기분 나쁜 처사였지만 당연한 판단이었다. 메이지는 브루노의 실력을 알았지만 이쪽의 실력은 몰랐으니.

분명 무슨 사고가 생겼다고 보는 거겠지.

듣고있던 에피가 말했다.

"그럼 우리들은 왜 잡아 온 거야?!"

"절차란 게 있지 않습니까. 어쨌든 이 사건은 이 조용한 도시에서는 나름 대사고라. 어떻게든 인과관계를 파악해야 되니까요."

소년은 제 나이 또래의 소녀를 이채 어린 눈으로 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는 되셨겠죠? 묻겠습니다. 그 지하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겁니까?"

"···"

유신은 프론티어 쉘터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물론 브루노는 이쪽이 죽인 것이 아니라 3형 감염자의 손에 의해 죽은 걸로.

'뭐, 틀린 말도 아니니까.

"쯧. 요근래 바쁘게 돌아다니긴 하던데. 설마 그런 일을 꾸미고 있었을 줄이야··· 더군다나 이 유배지 근처에 3형 감염자라니. 역시 세상은 참 무섭네요."

메이지가 순순히 수긍하자 가만히 있던 게일이 혹시? 하는 얼굴로 말했다.

"우리 말을 믿어주시는 겁니까?"

"믿는다라···"

메이지는 차를 마시며 싱긋 웃다가.

"그것 참 팔자 좋은 소리네요. 나는 처음부터 여러분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냥 보고서에 작성할 내용이 필요했을 뿐이에요."

툭 내뱉었다.

"···"

선을 긋는 냉정한 어조.

저쪽은 애초부터 이쪽이 무고한지 아닌지는 상관없다.

그냥 제 일을 털어버릴 구실이 필요했을 뿐이다.

신랄한 말투와 밀고 당기기.

무슨 수십 년 묵은 애늙은이를 상대하는 것 같다.

"여러분들의 주장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있다면 또 모를까요."

'젠장.'

게일은 회의적이었다.

3형 감염자를 처리하면서 일어난 폭발에 의해 유적은 무너졌다.

당연히 그 아래의 지하쉘터 역시 마찬가지.

진실은 폭음과 함께 사라져버린 것이다.

"반응으로 봐서 증거는 없는 것 같네요. 조만간 컴퍼니에서 조사단이 올 겁니다. 저는 여러분을 변호할 수도, 그런 생각도 없어요. 바테라와 조합장은 이미 당신들을 클레이모어 살인범으로 지목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흉수가 3형 감염자라고 주장하죠. 서로 상반된 주장인 겁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겠죠?"

힘 겨루기가 벌어질 것이다.

두 집단이 가진 권력이나 인맥에 의해 더 유리한 쪽으로 저울추가 기울겠지.

그 결과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을테고.

"씹."

"엿됐군."

에피도 게일도 할 말을 찾지 못해 입술만 씹어댔다.

두 사람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유신을 원망스럽게 쳐다봤다.

자기만 믿으라면서?

'유신! 뭐라도 좀···'

에피가 유신을 툭툭 치며 속삭이려던 그때.

"증거는 없지만···"

가만히 있던 유신이 말했다.

"증인이라면 있다."

"호오."

에피와 게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신의 말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지옥에서 빠져나온 것은 우리 셋뿐이다. 그런데 무슨 증인이···

"그 증인은 지금 어디 있죠?"

콰창.

유신은 차고 있던 수갑을 아무렇지 않게 부숴버렸다. 곧 누군가를 불러달라고 청하는 대신 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렇게 분위기를 잡으며 튀어나오는 것은 빳빳하게 잘 다려진 명함 한장.

당연히 메이지의 반응이 좋을 리가 없었다.

"명함? 지금 저랑 장난 하십니까? 이게 무슨 증인···"

"이건 평범한 명함이 아니다. 자세히 봐라."

"···?"

"이건 아이언 나이트의 명함이다."

"아, 아이언 나이트님?!"

유신이 툭 내뱉은 순간.

명함을 들고 있던 메이지의 덤덤한 눈이 부릅 뜨였다.

덜그럭.

이에 그치지 않고 테이블에서 번쩍 일어나며 찻잔까지 쏟았다.

지금까지의 침착하고 냉담한 반응과는 차원이 다른 반응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야 그럴 수 밖에.

자신의 조직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이 냉소적인 애늙은이는.

'아이언 나이트의 열혈한 팬이거든.'

***

"안에 서린 특유의 에스트 패턴. 확실해. 아이언 나이트님의 것이 맞아···"

메이지는 마치 예술품을 다루듯 떨리는 손으로 명함을 만지작거리다가. 조심히 내려놓았다.

"당신. 이거 어디서 났습니까?"

소년의 눈동자가 형형스럽게 빛났다.

그 기세는 거짓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유신은 늘 그렇듯 침착했다.

"스카웃 제의를 받았다."

"어디서?"

"이에르폴 근처의 황무지."

"···확실히 그런 이야기를 지부로부터 들었었지요."

메이지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이언 나이트. 아니, 에바그린님은 애초에 아무렇게나 명함을 뿌리지 않는다.

그렇다보니 시중에 유통되지도 않지.

즉.

이건 진짜다.

"···"

이 종이쪼가리는 그 사건을 직접 본 당사자도 증인도 아니다.

그냥 한 여자가 내민 변덕의 결과물일 뿐이다.

하지만···

"당신들의 말. 믿도록 하죠."

"조사단한테는 내가 잘 말해두겠습니다."

중립을 지키던 저울추는 대번에 이쪽으로 기울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무리와 각성 그리고 전조

이쪽을 지지해주겠다는 메이지의 확답에 게일의 눈이 부릅 뜨였다.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로 클레이모어를 설득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것도 저 종이 쪼가리 하나로.

대체 저게 뭐지?

그리고 이 녀석의 정체는 뭐냐?

브루노와 3형 감염자를 처리한 것만 봐도 보통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유신과 함께 다닌 지 오래된 에피는 감탄 대신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여자 진짜 높은 사람이었구나.'

'설마 이 모든 걸 짜두고 움직인 건 아니겠지?'

'아냐. 진짜 그럴 수도 있어. 유신은··· 저 재수 없게 잘난 놈은 미래를 본다고 했으니까.'

"믿고 있었다구!"

에피는 수갑 찬 팔로 유신의 허리를 쿡쿡 찔렀다.

게일 역시 환하게 웃었다.

이대로면 서로가 좋게 좋게 끝날 것 같았다.

"그게 끝인가?"

유신이 툭 던진 한 마디만 아니었다면.

"우리 말을 믿는다며?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클레이모어의 함정에 빠져 누명을 썼다가 방금 풀려난 셈이다. 이에 합당한 처벌과 보상을 요구한다."

"어, 음?"

증인이나 증거도 없이 상황진술만으로 이쪽의 말을 믿어주겠다고 한 것은 명백한 메이지의 호의였다. 하지만 유신은 그것으로도 모자라 보따리까지 더 내놓으라고 한다.

웃고있던 게일의 입매가 꿈틀거렸다.

그는 왜 그러냐며 유신의 어깨를 툭툭 쳤다.

"···하아?"

얼토당토 않는 요구에 제임스 역시 기가 막힌 듯했다.

"이봐. 지금 사안은 메이지님으로서도 굉장히 무리하시는···"

제임스가 말을 멈췄다.

짝짝짝!

로브를 쓴 소년이 웃으며 박수를 쳤기 때문이다.

"하하하하! 이야~ 이거 말이 그렇게 되나요?"

경악을 넘어선 메이지의 눈동자는 이제 흥미로 반짝이고 있었다.

음. 난 이런 눈빛이 더 무섭더라.

진짜 광인들이 대부분 이렇거든.

하지만 이제 와서 말을 무를 순 없는 노릇.

광인을 앞에 둔 광인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습니다."

다행이 메이지는 시원하게 승낙했다.

"거짓진술을 한 조합장은 파면될 겁니다. 부패한 클레이모어와 사적으로 결탁한 바테라 역시 이에 합당한 벌을 받겠지요. 재산몰수? 정도면 되겠지요?"

모든 생리가 돈으로 돌아가는 이 비정한 도시에서, 노쇠한 늙은이가 손에 들린 유일한 비수를 잃었다.

보아하니 그다지 청렴하게 살아오지도 않은 것 같은데.

아마 그는 비참한 최후를 맞을 것이다.

이는 조합장 역시도 마찬가지다.

"꼴 좋다! 개자식들!"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에피가 말했던 재산몰수와 사회환원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그 크레딧이 누구에게 환원될지는 모르겠지만.

"보상은?"

"어디 보자. 뭘 주는게 좋을까··· 아아. 당신. 꽤나 괜찮은 걸 가지고 있군요."

고민하던 메이지는 유신의 목 부분을 까딱거렸다.

설마?

유신은 목에 걸려있던 탐욕의 에스트 병을 건네주었다.

"원래라면 크레딧이나 좀 던져주고 끝내려고 했는데··· 뭐, 아이언 나이트님의 얼굴을 봐서라도, 장차 후배 될 사람에게 눈도장 좀 찍는다고 생각하죠."

메이지는 눈을 감으며 에스트 병에 정신을 집중했다.

곧 시퍼런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찰랑거리던 유리병이 그 색을 오롯이 머금었다.

[신비술사의 법칙을 뒤흔드는 냉기] x 1

"받으세요. 사용법은 그냥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으면 빵! 하고 쏴주면 됩니다."

'직접 죽이고 강탈한 게 아니니 한 번 밖에 사용할 수 없지만···'

이건 틀림없이 치명적인 한 수가 될 터.

유신은 메이지의 능력을 안다.

그 중에서 냉기 계열 권능이 얼마나 범용성이 좋고 까다로운지도 안다.

그리고···

"메이지님!"

제임스가 놀라서 소리쳤다.

클레이모어가 자신의 밑천을 까발리며 남한테 능력을 빌려준다는 것이 얼마나 큰 호의인지도.

'이건 좀 예상 밖인데.'

"어때요? 이 정도면 화가 좀 풀렸습니까?"

"뭐, 어느 정도는?"

"하하하! 컨셉 한 번 제대로네요. 이게 뭐 그런 건가? 쿨찐?"

멋들어지게 웃어보인 소년은 손가락을 튕기며 고갯짓했다.

제임스는 불편한 얼굴로 에피와 게일과 에피의 수갑을 풀어주었다.

수갑을 박살 내버린 유신을 힐끔 노려본 것은 덤이었다.

"가보세요. 짧지만 좋은 만남이었습니다."

메이지는 다시금 테이블에 앉은 채 여유롭게 찻잔을 들어 올렸다.

유신 역시 만족스럽게 웃으며 뒤돌아서서 나갔다.

누명을 벗는 것을 넘어 또 다른 보상을 쟁취했으니.

***

"무, 무슨 오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제가 잘못 알고 있었···"

메이지의 일처리는 확실했으며 또한 빨랐다.

조합장과 바테라는 순식간에 구속되고는 자비를 구걸했다.

'울부짖는 그 표정 하고는.'

남의 몰락 속에서 피어나는 뿌듯함을 뒤로한 채 유신 일행은 다시금 방사능 들개 여관으로 되돌아왔다.

미심쩍어하는 주인장 대신 종업원인 델리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들을 맞이해줬다.

"역시 그렇지? 오해일 줄 알았어! 유신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

아닌데? 존나 가차없이 죽였는데?

진실을 알고 있는 소녀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아, 존나.'

반박하고 싶다.

막돼먹은 소녀인 에피는 이 선하고 참한 아가씨가 좋았다.

하지만 동시에 뭔가 짜증 났다.

그러니까 마냥 꿈속에 갇혀 사는 저 모습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야 하나?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이 변질된 감정인 것이다.

물론.

'유신 한정으로 저런 거 같지만···'

소녀는 유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입을 다물었다.

어지간히 피 말리는 상황이었는지 게일은 침착했던 모습을 집어던진 채 테이블에 앉아 소리쳤다.

"파티다! 오늘 같은 날은 파티를 열어야 해!"

"네가 사는 건가?"

"물론이다. 일이 이렇게 잘 풀렸는데 그것 하나 못 살까?"

유신은 공짜 밥을 거부하지 않았고, 주인장은 매출을 올릴 기회를 마다하지 않았다.

세 사람의 테이블에는 곧 한가득 음식들과 술상이 차려졌다.

"악!"

"넌 아직 어려."

"씨이."

목숨 걸고 미끼 역할을 시킬 때는 언제고 이런 곳에서는 또 고지식하다.

에피는 술잔으로 가져가던 손을 멈추며 주스를 홀짝거렸다.

독주를 원샷한 게일은 피식거리면서 말했다.

"진짜 미친놈인 줄 알았다."

"음?"

"거기서 누명을 벗은 것으로도 모자라 보상 역시 요구하다니 말이야."

"아아. 그거."

건강을 생각해 과일주를 홀짝거리던 유신이 답했다.

"뭐, 서로 간에 이해관계가 일치했으니까. 이 정도는 당연히 받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

그 쪽은 조직을 좀 먹는 썩어빠진 싹을 하나 제거해서 좋고.

이쪽은 엿 먹은 것에 대한 복수는 물론 능력을 강탈해서 좋고.

"음? 이해관계?"

게일이 이해하지 못하자 유신은 탁자를 두드렸다.

"그쪽에서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나? 브루노를 처리해줘서 고맙다고."

"설마···"

그제서야 이해가 됐는지 게일은 입을 떡 벌렸다.

"응? 뭔 재밌는 얘기해?"

이런 쪽으로는 머리가 안 굴러가는 소녀가 끼어들었다.

유신은 자신의 설명을 좀 더 보충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것도 아주 상세하게.

"메이지는 처음부터 일을 이렇게 처리할 생각이었을 거다."

"우리 말을 믿고 바테라와 조합장을 벗겨 먹는 쪽으로? 그런데 왜···"

그러나 이런 식은 아니었겠지.

"원래라면···"

이쪽이 절망에 빠져서 허덕거릴 때 선심 쓰는 척하며 손을 내밀었을 것이다.

도와줄 테니 뭘 해줄 거냐?

같이 거래를 제안하며.

"그렇게 빚을 지워둔 채 이쪽을 이용해먹을 생각이었겠지."

꽤나 쓸만한 장기말이니까.

어떻게든 누명을 벗어야만 하는 상황인 우리들로서는 거부할 수가 없었을 테고.

"···"

상황을 이해하게 된 에피의 얼굴이 굳었다.

유신은 피식 웃었다.

"이를테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란 거다."

뭐, 자신의 순발력과 대응 덕분에 그 계획은 물 건너갔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지금 생각해보건대 참···

'쉬운 새끼가 없다.'

하나같이 웃는 얼굴로 통수를 치거나 어떻게든 이용해 먹으려고 한다.

현실이 된 게임 세상의 난이도는 굳이 괴물들과 식인종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 그 엿 같은 꼬맹이. 그럼 인심 쓰는 척하면서··· 어떻게 그런··· 난 좋게 봤는데···"

"뭐든 보이는 대로 믿어선 안 된다."

오늘도 인생의 쓴맛 하나를 알아버린 에피를 유신이 위로했다.

"뭐, 결과만 따지자면 잘 풀렸으니 됐어. 보상도 받았고."

아이언 나이트와의 만남이 이런 호재로 돌아올 줄이야.

유신이 여유롭게 술잔을 기울이자 에피가 딴지를 걸었다.

"유신. 너만 챙겼잖아."

"음음."

게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하지만 너희들은 목숨을 부지했지."

내가 없었으면 가능했을 것 같나?

물론 곧바로 여유롭게 튀어나오는 반박에 두 사람은 똥씹은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반박할 수가 없군."

"으으! 그게 진짜 재수 없는 점이야!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한 번을 안 져준대?!"

얄미워서 죽으려고 하는 소녀의 악 소리와 함께 술자리가 무르익어갔다.

***

에스트란 모든 능력자들의 근간이 되는 신비로운 힘이다.

그 유래가 진정 디데이와 괴물들로부터 왔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가라앉아 있던 것들이 종말을 트리거로 분화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몇 안 되는 밝혀진 진실 중의 하나.

개개인의 능력자들이 다룰 수 있는 에스트는 한정적이며 그 절대적인 용량 역시 다르다.

어떤 자는 타고난 에스트 보유량을 가졌지만 운용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어떤 자들은 타고난 운용능력을 선보이지만 보유량 자체가 미미하다.

어떤 자들은 대단한 능력을 가졌지만 운용능력과 보유량 모두가 떨어진다.

망가진 세상.

총과 화약 대신 신비가 범람하는 시대.

그 복잡한 세상만큼이나 다양한 속사정을 가진 능력자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여기에···

이 세 가지 모두 특출난 재능을 가진 한 사내가 있었다.

맨바닥에 앉아 명상을 하고 있던 유신이 움찔거렸다.

마치 우주를 연상시키듯 별무리가 촘촘히 박힌 세상.

오직 그만이 볼 수 있는 찬란히 빛나는 내면 속에서는 지금 세 개의 고리가 느슨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방사능 트롤의 재생력]

[히트맨의 격통하는 육신]

[에스트 주입 인형1호]

포효하는 녹색의 거인.

뒷골목 암살자의 냉혹한 눈동자.

왕좌에 앉아 여유롭게 병사들을 내려다보는 군주.

새로운 주인을 섬기게 된 이 세 가지의 능력들은 각자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빛나며 제 존재감을 과시했다.

유신은 그 세 가지의 능력들을 힐끔 살피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의 목적은 지금 저것들이 아니었다.

그는 이 무한한 공간 속에.

오직 강탈자만이 가질 수 있는 권능의 공간 속에 또 하나의 영역을 창출해내는 것을 원했다.

'해볼까?'

내면에 요동치는 에스트들을 한 곳으로 집중시킨다.

그리고 의지를 담아 명령한다.

구축하라고.

"큭."

한 시간.

하루.

일주일.

한달.

혹은 일 년.

아득할 정도의 시간들이 지나간다.

마치 미숙한 어린아이가 복잡한 퍼즐을 맞추듯.

지겹고 짜증나고 현학스러운 기분이 연거푸 들이닥친다.

하지만 유신은 포기하지 않았다.

꾸준히. 한 걸음씩 나아가며 구축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화악.

그의 내면에서 섬광이 피어올랐다.

심상세계를 가득 채울 정도로 타오르던 그 빛은 이내 한곳으로 모이더니 작은 고리를 생성해냈다.

[새로운 그릇]

그 외양은 세 가지의 능력들을 담고 있는 틀과 비슷하게 생겼다.

마침내 유신은 본신의 한계를 한 단계 더 뛰어넘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기적이었다.

그 어떤 능력자라고 해도 이렇게 단기간에, 이끌어주는 이 하나 없이 능력을 진화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까.

하지만...

이 재능 넘치는 사내는 기어이 이를 해내고야 말았다.

"후우."

유신이 눈을 떴을 때는 막 떨어지는 석양이 방안을 고즈넉하게 비추고 있었다.

심상 세계에서는 아득할 정도의 시간이 지났지만 이곳에서는 채 반나절도 지나지 않은 것이다.

지독시리 기묘한 위화감과 탈력감.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집어삼킬 정도로 강력한 성취감.

"이 짓도 못 해먹겠군."

말과는 달리 만족스럽게 웃은 유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식은땀을 훔치며 창문을 열었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

운명의 장난인지 혹은 안배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노리고 있던 먹잇감 중 하나가 제 발로 기어들어왔기 때문이다.

'칼잡이 존.'

마침내 (구)한국의 70%가 사라지는 대재앙.

더스트 봄의 전조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뒷골목 속으로 사라지는 흉터 가득한 사내를 보며 유신은 옆에 두었던 더블배럴 샷건을 집어들었다.

칼이 총보다 더 강할까?

아니면 역시나 총이 더 강할까?

뭐...

"대보면 알겠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무리와 각성 그리고 전조

그의 이름은 원래부터 존이 아니었다.

티니라는 사내치고는 퍽 귀여우며 애 같은 이름이었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도 나름의 순수를 간직하라며 부모님이 지어준.

하지만.

여느 황무지 출신들이 그렇듯 부모를 잃은 티니는 소매치기로 인생을 개척하고, 끝내는 살인귀가 됐다. 그중에서도 극히 드문 확률로 능력을 각성해 이 바닥에서 명성까지 떨치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티니는 제 이름을 버렸다.

바야흐로 칼잡이 존의 탄생이었다.

***

마치 거미줄처럼 널려있는 빨랫감들이 바람에 펄럭거린다.

그 중심.

저벅저벅

좁디 좁은 골목들의 사이를 가로지르는 건 한 사내였다.

모래먼지에 풍화된 더러운 로브를 쓰고 있는 전형적인 황무지 이방인.

저놈으로 할까?

벽면에 기대어 있던 몇몇 주민들이 사내를 힐끔거렸다. 낙원에서는 세금을 안 내면 추방당한다. 그렇기에 낙후지대에 사는 거친 인부들은 간혹 이런 식으로 부수입을 올리고는 했다.

하지만.

"···"

로브 사내와 눈을 마주친 순간 날건달들은 움찔 굳었다.

'뭔 놈의 눈빛이···'

로브가 만들어낸 음영 아래.

예리하게 날 선 눈동자가 번뜩인다.

그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잔혹함과 피의 냄새를 감지한 것이다.

"흠흠. 오늘 날씨가 참 좋군."

"암. 그라제. 일하기 딱 좋은 날씨여."

해가 지고 있건만 되도 않는 말을 지껄이며 주민들이 슬금슬금 멀어졌다.

로브 사내가 피식 웃었다.

그러나.

"이 새끼 이거 눈까리 보소···?"

어디서나 눈치가 없거나 용기 있는 자들은 있는 법.

문신을 주렁주렁 단 거대한 덩치가 로브 사내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에 그치지 않고 삐딱하게 고개를 꺾으며 그를 쿡쿡 찌르기까지 했다.

"어이, 너. 외지인이지? 낙원은 처음 같은데. 이곳에는 한 가지 법칙이 있다."

"법칙?"

"그래, 이곳에서는 세금을 걷는다. 외지인 같은 경우 마주치는 사람마다 10크레딧씩."

얼토당토 않는 개소리였다.

하지만 로브 쓴 사내가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 자리를 피하던 주민들 몇이 고개를 돌렸다.

저거 생긴 것만 저렇지 사실은 맹탕 아닌가?

이거 우리도 좀 끼면···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툭.

로브 쓴 사내가 덩치를 스쳐 지나갔다.

"여기 10크레딧."

이윽고 손에 들린 칩을 후두둑 떨구는데.

덩치는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있는 것이 아닌가?

저벅

로브 쓴 사내가 발걸음을 내디뎠다.

덩치의 얼굴이 쩍 갈라지며 핏물을 뿜어져 나왔다.

범인은 인식하지도 못한 그 짧은 순간.

로브 사내의 손에는 어느새 시퍼렇게 빛나는 검 한 자루가 들려있었다.

"히익!"

깔끔하게 토막 난 단면.

그 아래로 후두둑 떨어지는 김이 펄펄 나는 장기들.

접근하던 구경꾼들이 기겁했다.

"큭큭큭."

로브 쓴 사내는 비릿하게 웃으며 피 묻은 크레딧을 주웠다.

"돈을 줘도 먹지를 못하는군. 어이, 거기 너희들."

"네, 네!"

"이것 좀 처리해주지 않겠나?"

"그, 그게···"

"그러지 못하겠다면 내 기분이 안 좋아질지도 모르겠는데···"

"무, 물론입니다! 형님!"

우웨에엑!

구토소리, 두려움 섞인 시선, 진한 피 냄새.

언제나 느껴오던 것들.

그리고 느끼고 싶은 것들.

존은 칼을 휙 휘둘러 잔여물을 털어냈다.

스르릉. 그리고 검집에 칼을 집어넣고는 다시금 걸었다.

♫♫

태연하게 콧노래까지 부르며.

'일단 접선지역에서 대기하다가 신호가 오면 날뛰라고 했지.'

아직 루키이기는 하나 뒷세계에선 제법 날리는 칼잡이인 존은 현재 누군가에게 고용 당한 상태였다.

바로 이 업계에서는 전설로 취급받는 A급 범죄자 인형사라는 자로부터.

'선수금만 수 천 크레딧에 노스트라와의 연줄.'

중간에 이상한 광신도들이 끼어있다고는 하는데···

그딴 건 상관없다.

돈 같은 것 역시 상관없다.

그저 컴퍼니조차 쩔쩔맨다는 최악의 범죄 조직 노스트라라는 곳이 궁금하다.

그곳에는 얼마나 많은 괴물들이 우글거릴까?

"크흐."

투쟁심.

그것이 존을 이 자리까지 오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오직 잔혹함만을 겸비했다면 그는 진작 황야의 먼지로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저벅.

이 칼잡이는 감 역시 범인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나와라. 쥐새끼."

존의 시선은 어둠이 드리워진 한 골목을 향하고 있었다.

쥐새끼 하나 없는 것 같은 그곳은 침묵에 잠겨있었는데.

저벅.

곧 그 어둠 속에서 정말로 사람이 튀어나왔다.

거무틔틔한 머리칼에 눈동자를 가진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

하지만 존이 주목하는 것은 그런 사내의 생김새가 아니었다.

'치렁거리는 옷··· 사냥꾼.'

바로 사내의 복장이었다.

"네가 칼잡이 존인가?"

사내가 말했다.

"···"

탁!

존은 대답 대신 땅을 박찼다.

그리고 사내의 시선과 손의 방향을 가늠하며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스르릉.

눈 깜빡할 새에 빠져나와 이빨을 날름거리는 칼날.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는 그 보폭과 기세는 가히 벼락이라고 부를만했다.

'급소만 피한다. 그리고···'

벤다.

존은 수년 동안 생사를 넘나드며 단련한 자신의 신체와 능력을 믿었다.

상대의 코트 자락에서 시커먼 총구가 번뜩일 때까지도 그 믿음은 깨지지 않았다.

쾅!

두 개의 총구가 나란히 불을 뿜으며 수십 개의 파편을 토해내지만 않았더라면.

"커어···"

뒷세계의 루키는,

훗날 낙원의 도심을 피로 물들일 악당은.

피투성이가 돼서 형편없이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믿기지 않는다는 시선으로 흐릿한 눈을 끔뻑거렸다.

"말도··· 안 되는···"

"뭐가 말이 안 돼?"

음영 속의 사내는.

"칼이 총보다 강한 게 더 말이 안 되지."

여유롭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

불과 한 뼘 차이였다.

유신은 샷건을 코트 자락 안에 수납하며 목을 만지작거렸다.

주르륵 묻어나오는 핏물.

예리하며 빠르다.

그만큼 존의 솜씨는 대단했다.

그 짧은 새에 총구의 방향을 보고 몸을 날리는 동시에 검을 휘둘렀으니까.

'이게 산탄총이 아니었다면 당하는 건 이쪽이었겠지. 두 발이 나란히 나가지 않았더라도 위험했겠어.'

고작 마우스 달칵거리면 죽는 엑스트라가 이 정도 존재감이라니.

쉬운 새끼가 없네.

유신은 혀를 차며 싸늘하게 식어버린 존의 시신에 손을 가져갔다.

[살인귀의 정제되지 않은 검술]

[살인귀의 강화된 육체]

이 세상에서 오직 그만이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권능이 주르륵 떠오른다.

신체강화는 이미 데이브의 것이 있으니 고려할 대상이 못 된다.

선택할 것은 당연히 지금의 내가 가지지 못한 것.

[살인귀의 정제되지 않은 검술]

유신은 구축해낸 새로운 그릇에 존의 능력을 흡수했다.

고오오오

흉터가득한 사내가 칼 한 자루만을 찬 채 황야를 거침없이 가로지른다.

유신의 기억과 육신에 존의 부산물이 스며든다.

'이놈은··· 이런 세상을 보고 있었나?'

"이 잡놈들이! 무슨 소란이냐!"

저 멀리 경비대가 달려온다.

만족스럽게 미소를 짓던 유신은 바닥을 굴러다니던 태도를 주워들었다.

딱!

곧 손가락을 튕기며 자리를 박찼다.

"···"

건물 옥상에서 총구를 겨누고 있던 소녀 역시 몸을 날렸다.

***

"진짜 빠르더라. 난 그 녀석이 칼을 뽑는 것도 못 봤어."

테이블에 앉아있던 에피가 툭 내뱉었다.

만약을 대비 유신을 서포트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건만 존의 움직임을 놓치자 자괴감을 느끼는 모양.

털썩.

두툼한 가방을 옆에 내려놓은 유신은 음식을 씹으며 답했다.

"그럴 수밖에."

괴물만 상대해본 너는 아직 대인전의 경험이 부족한 것은 물론.

"칼잡이는 속도가 생명이니까."

상대의 기량이 뛰어났으니까.

세상에.

총을 든 상대에게 칼을 들고 달려들 생각을 하다니.

황당한 짓거리였지만 꼭 말도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에스트의 출현과 열병기들의 몰락.

이 미친 세상은 칼잡이가 날뛰기에 너무나도 좋은 환경이다.

실제로 살아남는 놈들은 다 그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고.

나중에 가면.

"반사신경만으로 총탄을 튕겨내거나 피하는 놈들도 있다."

"···그게 말이 돼? 그쯤 되면 그건 더 이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5위계. 아니, 4위계의 최상위권만 가도 그 정도다.

이 가혹하면서도 신비로운 환경은 인간이라는 종의 한계를 점점 탈피시키고 있었다.

답답한지 에피는 오렌지 주스를 소주처럼 크아 들이키며 말했다.

"그럼 그런 괴물들을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뭘 배우고자 하는 행동은 항상 좋은 법이지.

유신은 모니터 밖에서, 그리고 안에서 겪은 경험을 적절히 섞어 조언했다.

"우선 내가 오늘 존을 상대했던 것처럼 이쪽에서 미리 자리를 잡는 거다."

수 백미터 밖의 개활지나 고지대.

인파들의 틈.

땅 아래나 건물 내부.

주변환경을 이쪽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설계한 상황에서 최적의 타이밍에 저격한다.

"전장을 선택하는 것 역시 싸움의 방법이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지."

유신 역시 그랬다.

준비된 곳에서 준비된 함정을 팠기에 수월하게 존을 잡았다.

물론.

"이 명제는 칼잡이들한테도 통용되지. 그렇기에 그들 역시 마냥 쉽게 당해주지는 않아. 오히려 이쪽의 의도를 간파하고 역습을 가해오기도 하지."

존만 해도 자신의 복장을 보고 바로 총을 연상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것은 물론 벽면을 박차며 움직임에 페이크까지 섞었다.

"음. 한 마디로 내 나와바리에서라면 반은 넘게 먹고 간다는 이야기군. 이걸 이용하려면 대가리도 잘 굴려야 하고."

이제는 사라진 일본어가 소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저게 이런 식으로 남아있을 줄이야.

소녀는 곧바로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두 번째 방법은 뭔데?"

"전에 말했었지? 총알에 에스트를 담는 거다."

고명한 검사들이 에스트를 무기에 담아 검기처럼 날리듯. 총잡이들 역시 이 파괴적인 힘을 제 비수에 담을 수 있다. 물론···

"형태가 고정되어 있고 신체와 가까운 검보다는 훨씬 어렵지. 아직 능력도 깨우치지 못한 너한테는···"

"어림도 없다는 소리네···"

에피는 푸후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휘휘 저으며 턱을 괸 채 생각에 빠져들었다.

유신이 보기에 방금 전의 전투를 복기해보는 것 같았다.

'흠. 이미지 트레이닝은 중요하지.'

생각하던 유신이 고개를 돌렸다.

"왜! 왜 안 된다는 건데?! 내가 뭐가 부족하다고-!"

웬 취객이 붉어진 얼굴로 와악 소리를 쳤기 때문이다.

물론 그 대상은 이 여관의 마스코트이자 인기녀 델리아였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콥슨. 난 아직 누군가를 좋아하기에는 너무 정신이···"

"웃기지-마! 저 새끼한테는 꼬리까지 쳐 놓고서는!"

코가 큰 사내 콥슨이 손짓하는 쪽은 유신이었다.

갈색 피부의 라틴계 미녀는 유신을 떨리는 눈동자로 바라보다가···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유신과는 그런 관계가 아니야. 그냥 단골이니까."

"개소리! 저 멀대랑 나란히 걸어가는 걸 내가 봤···"

콥슨이 입을 다물었다.

저벅저벅

가만히 있던 유신이 이쪽으로 걸어와 그를 내려다봤기 때문이다.

"내가 뭐라고?"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훨씬 더 크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동자와 허리춤의 검은 이 혈기 가득한 청년도 입을 다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그게···"

"남자의 질투는···"

유신이 비웃음을 머금었다.

"꼴사납군."

"크흑!"

속에서는 열불이 치솟았지만, 마음만으로는 이미 이 녀석을 갈기갈기 후려치고 있었지만.

현실의 콥슨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끼이익.

그저 더 이상 망신을 당하기 전에 여관을 뛰쳐나가는 것밖에는.

델리아는 유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유신."

유신은 늘 그렇듯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답지 않게 기행을 한 가지 했다.

"델리아."

"응?"

"받아라. 선물이다."

"으, 응? 갑자기?"

분위기 잡은 것과는 달리 꽃을 엮어서 만든 초라한 반지가 내밀어 졌다.

하지만 델리아는 실망하지 않았다.

이걸 주는 당사자가 당사자일 뿐더러···

"와아. 이뻐··· 빛을 내는 꽃이라니."

꽃반지가 은은한 빛을 머금고 있었기 때문이다.

'추적은 확실하게 되는 것 같고.'

사내의 냉정한 속마음도 모른 채 처녀는 얼굴을 붉혔다.

"고마워. 소중하게 간직할게."

곧 왼손 약지에 그걸 살포시 낀 델리아가 험험 헛기침을 했다.

"저 유신. 괜찮으면 오늘 일 끝나면 같이 식사라도···"

"다음에. 내가 바쁜 일이 있어서. 오늘은 빨리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다. 너도, 나도."

"아, 그, 그래···"

벌써 두 번째 거절이다.

이쯤 되면 정이 떨어질 만도 한데 델리아의 마음은 오히려 더 커져만 갔다.

온기가 피어오르는 따뜻한 목조 건물 안에서는 그렇게 한 여인이 사랑을 피워나갔다.

이방인은 머리를 굴렸다.

그 바깥.

'용서 못해··· 용서 못한다고! 개같은 창년같으니!'

저 차가운 도시의 외곽에서는 음울한 욕구가 번들거렸다.

촤아아악

푸른달이 떠있는 해변가에서는 물고기 인간들이 춤을 췄다.

વ્યક્તિને!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광명교

"오늘 하루도 고생하셨어요!"

"그래, 고생했다. 조심해서 들어가고."

주황색 불빛이 넘실거리던 여관의 문이 닫혔다.

"으으으. 피곤해라."

기지개를 쭉 피던 델리아는 곧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흙바닥이 아닌 자갈이 깔린 대로.

저 멀리서부터 풍겨오는 바다냄새.

낙원.

델리아는 이 거대한 도시가 좋았다.

이곳은 여자라고 해서, 힘이 없다고 해서 남한테 억압당하거나 그런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흐흐."

인생사가 그렇듯 100퍼센트는 아니었다.

비틀거리던 한 취객이 음흉한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을 훑어보았다.

아니, 이에 그치지 않고 몇 걸음 다가오기까지 했다.

"···"

델리아가 품에 있던 은장도를 만지작거리면서 소리를 지르려던 그 순간.

삐이이익!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취객은 화들짝 놀라 골목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척척척.

절도있는 발 소리와 함께 나타난 것은 거리를 순찰하던 경비대원들이었다.

한 손에는 횃불을 다른 손에는 창을 들고 있던 그들은 순찰 도중 호루라기를 한 번씩 불어 재꼈는데.

바로 방금 전 델리아가 겪었듯이 수상한 낌새를 보이는 자들에게 경고를 주기 위함이었다.

"정지!"

경비대가 멈췄다.

선두에 있던 각진턱의 사내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퇴근하니 델리아?"

경비조장 한수였다.

"네."

"데려다 줄까?"

"괜찮아요. 한스 대장님."

"하지만 요즘 치안이 부쩍 안 좋아졌는데···"

"그래도 혼자서 귀가까지 못하면 나가서 죽어야죠. 저 때문에 바쁘신 시간을 쓰실 필요는 없어요."

델리아는 예의 바르게 하지만 단호히 거절했다.

그녀는 한수의 여성 편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앞에서는 저렇게 매너있고 다 내줄 것 처럼 보이지만.

한 번 낚이는 순간.

'아주 그냥 짐승처럼 다룬다지.'

한수의 배경에 혹해 몸도 마음도 내줬다가 인생이 망가져 버린 여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듣기로는 부하 경비대원들 역시 끼어든다고 했다.

여관 종업원인 델리아는 그 누구보다도 소문에 민감했다.

"···흠. 그래,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말만 해. 너라면 내가 당장에 도와줄 테니까."

"네. 감사합니다."

"이동!"

한수는 아깝다는 눈초리로 힐끔 거리다가 걸음을 옮겼다.

델리아는 후우 한숨을 쉬다가 다시금 걸었다.

"아아. 정말··· 짜증나."

큼지막한 눈에 시원시원한 이목구비.

이와 대비되는 미려한 턱선.

델리아는 부모가 물려준 이 얼굴이 좋았다.

하지만 동시에 원망스럽기도 했다.

이 망가진 세상에서는 일단 구멍이 세 개라면 모두 다 박고 봤지만 그 당사자가 미인이라면 더 많은 파리들이 꼬였기 때문이다.

이 시달림이 귀찮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유신···"

자연스럽게 델리아의 생각은 한 사내를 향했다.

호의란 것이, 배려라는 것이 존재해서는 안 되는 세상.

그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는 참 이질적이었다.

남들과는 달리 자신을 음흉한 눈빛으로 보지도 않았고, 그냥 한 번 자빠뜨려 보려고 수작을 부리지도 않았다. 늘 정중하게 선을 지키며 편하게 대해줬다.

늘상 사람들에게 시달리던 델리아에게 그것은 하나의 큰 충격이었다.

그렇기에···

"날 이렇게까지 애타게 만든 건··· 네가 처음이야."

꽃반지를 만지작거리는 델리아의 앞에는 어느새 밤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

창백한 달 아래의 바다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인양 꿈틀거렸다.

촤아아악

오늘만큼은 저 수평선 너머에서 꿈틀거리는 해룡도, 부둣가로 접근하다가 화살 세례를 받고 깜짝 놀라 도망치는 물고기 인간들도 아름답게 보였다.

감성이 펼쳐내는 마술이랄까?

"에휴. 처량하게 여기 서서 뭐하냐. 가서 잠이나···"

뒤돌아서서 집으로 향하려던 델리아의 얼굴이 굳었다.

어느새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와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콥슨?"

방사능 들개 여관의 단골인 콥슨이었다.

그가 말했다.

"못 보던 반지네. 그 새끼가 준 거야?"

"···네가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유신을 그렇게 말하지 마."

"하."

콥슨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 미소는 지금껏 델리아가 봐왔던 것과는 달랐다.

사랑에 빠진 허술한 청년의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꾹꾹 억누르고 있는 얼음장과도 같았다.

델리아는 본능적으로 오싹함을 느꼈다.

그렇기에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할 말 끝났으면 난 갈게."

아니, 옮기려 했다.

"내가 밥 한 끼 같이 먹자고 할 때는 들은 채도 안 하더니··· 그딴 멀대가 준 싸구려 풀때기 하나에는 희희덕대기나 하고···"

미친 듯이 중얼거리던 콥슨이···

꽈아악.

"꺼어···"

냅다 다가와 목을 조르지만 않았다면.

"죽어어어어어! 죽어어어어! 이 걸레같은 년-아!"

콥슨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악에 받친 성인남성의 힘이란 굉장한 것이었다.

호흡이 막히자 힘 역시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설상가상 주변에는 인기척도 없었다.

"끄흡, 끄으으···"

흐릿해지는 시야 사이로 델리아는 다급히 품을 더듬거렸다.

그리고 손에 잡힌 그것을 냅다 찔러넣었다.

"끄아아아!"

비틀거리며 물러나는 콥슨의 옆구리에는 시퍼런 은장도가 박혀있었다.

"하아, 흐으. 흐으."

살았다. 이제 도망쳐서··· 경비대에 신고하면···

어?

델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콥슨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멀어지는 것은···

나?

풍덩.

-어어?! 이봐! 저기 사람이 빠졌어!

-뭐? 어서 건··· 이런 시발!

아련하게 들려오는 소란스러움.

거품이 뽀글거리는 소리.

그리고···

"વ્યક!!!"

정체를 알 수 없는 언어를 지껄이는 아가미 달린 생물.

눈앞을 가로막는 비늘 덮인 손.

델리아의 의식은 얼음장 같던 밤바다와 함께 깊이 가라앉았다.

마지막으로 한 사내의 모습을 그리면서.

***

"흐, 흐흐. 꼴 좋다. 가진 건 몸뚱이 밖에 없는 년이··· 함부로 놀리면 이렇게 되는 거라고!"

혈기 넘치는 청년 콥슨이 다급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는 미친듯이 골목길을 달리면서 낄낄거렸는데.

저벅.

곧 콥슨의 걸음이 멈췄다.

"···"

칠흑같이 검은 머리칼과 그보다 더 어두운 눈동자.

그의 앞에는 어느새 유신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콥슨은 헙 숨을 들이키다가 제 발에 걸려 변명부터 내뱉었다.

"내, 내가 한 게 아니야. 내가 한 게 아니라··· 컥."

검광이 번뜩이며 콥슨의 머리통이 바닥을 굴렀다.

유신은 질투심에 눈이 멀어 끝내는 선을 넘어버린 청년을 바라보다가···

그걸 퍽 걷어찼다.

"이 새끼도 게임하고 똑같네."

이 세상의 주인공인 플레이어의 개입 없이는 운명은 함부로 바뀌지 않는다는 걸까.

생각하던 유신은 곧바로 해변가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이미 소란을 눈치챈 경비병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 녀석들도 똑같다. 한발 늦는 것은.

"이봐 당신···"

그들이 뭐라고 지껄이던 말던 유신은 정신을 집중하며 에스트의 흐름을 추적했다. 생화(生花)에 에스트를 담았기에 그 흔적이 비교적 선명했다.

'어인의 속도를 감안하더라도··· 여기서 그렇게 멀지는 않다.'

유신이 눈을 가늘게 떴다.

말 그대로 등잔 밑이 어두웠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후우."

할 수 있을까?

공포를 거스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저 아래는 이미 인간의 영역이 아니었으니.

아니.

해야지.

물론 이 비범한 사내는 금세 의지를 다잡았지만 말이다.

[히트맨의 격동하는 육신]

유신은 한 마리의 맹수처럼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밤바다로 몸을 날렸다.

"어, 어이 이봐!"

풍덩!

***

강화 유리 너머로 산호초가 신비롭게 반짝인다.

그 사이사이.

열대어들을 비롯한 갖가지 해양 생물들이 춤사위를 부리고 있다.

"흠흠."

하얀 법복을 입은 중년인은 그 생명의 순환을 즐겁게 감상했다.

저 미약한 생물들의 발버둥도, 그보다 더 큰 포식자가 나타나서 다시금 새로운 순환을 이어나가는 것도.

콰직.

막 범고래의 이빨에 토막 난 물고기들이 붉은 선혈을 흩뿌릴 때였다.

다가가각

어디선가 기괴한 뼛소리가 울렸다.

중년인의 옆으로 한 여인이 다가왔다.

인형처럼 생긴 여인이었는데.

그 미려한 외관 때문이 한 소리가 아니었다.

밀랍처럼 창백한 피부결.

치마 아래. 구체 관절 인형을 연상케 하는 듯 딱딱 맞춰진 몸뚱이.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유리알 같은 눈동자.

여인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인형처럼 소름 끼치게 생겼다.

"작업. 진척도는요?"

과연 달칵거리는 여인의 턱관절은 심히 듣기 거북한 불현화음을 뱉어냈다.

하지만 중년인은 개의치 않은 듯했다.

허허. 오히려 기분 좋게 웃으며 답했다.

"안 그래도 확인해보려던 참이었습니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그러. 지요."

두 사람이 당도한 곳은 거대한 홀이었다.

"그러자 광명께서 말씀하시길!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라고 하셨다!"

단상에 서 있는 자가 소리쳤다.

"오오!"

"빛이여! 빛이여! 빛이여어어어!"

그 아래.

차가운 합금 바닥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무릎을 꿇은 채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이글거리는 열정의 도가니 속.

이 광적인 기도를 받는 자는 단상에 서있는 목사도, 실체 없는 믿음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광명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광명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목사의 너머.

(☢)

방사능 표시가 적힌 탄두들이었다.

***

광명교.

썬라이트 템플.

혹은 미치광이 종말론자들 중에서 가장 과격하고 품위 있게 미친 자들.

후에 더스트 봄이라는 사상 초유의 재난을 일으키는 이 무리들은 '핵'을 신봉한다.

···?

당황하지마라. 당신이 알고 있는 그 핵이 맞다.

핵폭탄의 핵. 핵융합의 그 핵 말이다.

무슨 이런 미친 새끼들이 다 있지?

이젠 하다 하다 핵폭탄을 신봉한다고?

라는 생각이 처음에는 들었다.

그러나 멸세생을 플레이하며 이들의 뒷배경에 대해서 알게 될수록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명교도.

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망가진 세상에 가장 잘 적응해버린 자들이다.

괴물과 식인종, 에스트나 괴이 같은 놀라운 신비들과,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존속을 이어나가고 있는 인류에 지대한 감동을 느껴버린 자들이다.

그러니까··· 이 망가진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는 로맨티스트들이라고나 할까?

지금 이말.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이 세상은 핵전쟁으로 인해 멸망했다. (다른 부가적인 요소들도 많지만 근복적으로는)

즉 광명교도들에게 있어 이 아름다운 세상을 탄생시킨 것은 다름 아닌 핵폭발이란 거다.

마치 창조신 같은 존재란 거지.

'캬! 핵 미사일을 믿는 광신도? 이거 존나게 신박하네.'

그 때는 머리를 탁 치며 감탄했었는데.

이게 현실로 다가오니 진짜 또라이들도 이런 상또라이들이 없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자정작용을 거쳐 겨우겨우 살만해진 이 땅에서 다시 한 번 핵폭탄이 터진다면 그야말로 죽음 밖에 남지 않을 테니.

아니, 어쩌면···

'죽음보다 더 끔찍한 것이 태어날 수도 있겠지.'

유신은 하브람으로 가는 도중 만났던 돌연변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유신은 스스로가 살아남기 위해.

이 엿 같은 세상을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이 망겜을 클리어하기 위해 이 광신도 새끼들을 막으러 왔다.

'델리아···'

그 답지 않게 찝찝한 짓거리까지 해가며.

그럴 수밖에.

아이언 나이트가, 컴퍼니가 쫓고 있는 이 종말론자들의 은신처는 평범한 방식으로는 절대 찾을 수 없는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바로.

쉬이이익.

수면 아래의 해저 기지다.

'혐오스러운 좆간놈들.'

시리도록 차가운 심연의 바닥.

잠수 중인 유신의 눈앞에는 거대한 돔 형태의 구조물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광명교

해저기지 마린폴은 본디 종말이 느릿하게 다가오던 무렵.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고 설립하던 대규모 쉘터였다.

그것도 본래 관광용으로 건립되던 것을 가로챈, 도시와는 멀지 않은 안정적인 장소에. 꽤나 파격적이며 시험적인 성향으로 지어지던 방공호.

하지만 정세가 급변하자 일어난 기업들의 줄도산.

여당과 야당의 극렬한 대립.

시민 단체들의 반발과 군대의 몰락 및 쿠데타까지 겹치자 이 심해의 요새는 완공되지 못한 채 어정쩡한 상태로 남고 말았다.

그러니까 게임 속 스토리에서는 이랬다는 말이다.

후우.

이제와서는 뭔 상관일까?

지금은 그냥 웬 능력있는 미치광이들이 암약하는 장소일 뿐이거늘.

유신이 생각해야 할 것은 어떻게든 이 해저 기지의 심처까지 침투하는 거다.

그리고 광명교가 트리거를 당기기 전에 놈들을 일망타진해야 한다.

다행이도.

꼬르르륵.

아직까지는 순조롭다.

유신은 가라앉은 선박에 몸을 숨긴 채 한 곳을 주시했다.

따개비가 앉은 중장비들과 뼈대만 남은 건물들의 사이.

유일하게 멀쩡한 돔 건물의 일부에는 빛이 새어나오고 있다.

중심에 설치된 해저용 엘리베이터는 수면 위까지 닿아있다.

그곳의 구석.

굳건히 닫힌 녹슨 철문이 바로 저 해저기지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물론 두 마리의 불청객들이 그 입구를 단단히 지키고 있었지만 말이다.

"વ્યક?"

"વ્!"

뼈로 된 작살을 쥔 채 아가미를 뻐끔거리고 있는 놈들의 정체는 어인이었다.

레자드만큼은 아니지만 튼튼한 비늘에 탄력적인 육체, 수중이라는 환경을 무기로 삼는 컴퍼니 공인 2급 위험종.

이놈들이 바로 광명교가 이 심해의 바닥에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였다.

"···"

등급이라는 게 꼭 괴물들의 위험도를 절대적으로 나타내지는 않는다.

그 환경과 특이성에 따라 언제든지 사냥꾼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다.

수중에서 해양 괴물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의 재앙과도 다름 없다.

'우회할 방법은··· 지금으로서는 없다.'

아무리 수십미터 아래의 바닥이라고는 하나 이 바닷속이 마냥 어두운 것은 아니었다.

곳곳에 방사능으로 인해 거대화된 산호들이 발광체를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상 접근하면 들킬 것이다.

그렇다면···

'끌어내야겠지.'

쉘터 프론티어에서 돌아온 직후 유신은 능력의 개발에만 매달리지 않았다.

앞으로 벌어질 미래를 대비 벌어질 수 있는 모든 변수들과 상황을 가늠하여 계획을 짰다.

그 안에는 당연히 수중전 역시 들어가있다.

유신은 검집에 매달아두었던 미니어처 인형을 툭 끊었다.

[에스트 주입 인형1호]

복면 인간은 금새 부풀어 오르더니 유신으로부터 무언가를 건네받았다.

곧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뛰쳐나갔는데.

어인들의 주의를 끌 정도로 거리를 좁히자 우뚝 행동을 멈췄다.

"વ્યક?"

어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난대없이 둥둥 떠다니는 시체가 나타난 것과 진배 없었다.

물론 자세히 본다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겠지만···

저 녀석들은 근본적으로는 물고기 대가리.

즉 지능이 높지 않다.

유신이 의도했던 대로 보초 중 한 놈이 에스트 인형으로 접근했다.

"વ્"

우선 손에 들린 작살로 푹푹 찌른다.

곧 아무 문제 없다는 것을 느꼈는지 물갈퀴 달린 손을 내민다.

어인들에게 있어 인간들은 아주 훌륭한 먹잇감이자 제물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순간.

딱.

유신이 손가락을 튀겼다. 에스트 인형은 마치 되살아난 시체처럼 기기긱 거리며 순식간에 어인을 끌어안았다.

!!!

당황하는 물고기 인간의 입안으로 불쑥 들어오는 손.

곧 그 안에서 터지는 주머니.

주머니 안에 든 것은 씨버드의 침샘이다.

마비 효과가 있으며 다량 섭취시 죽음에 이른다.

그리고 이 모든 효과들은 바다 생물들에 한해 극대화된다.

끄르르르륵!

이 심해의 병사는 제 신체의 장점을 뭐하나 살리지도 못하고 침몰했다.

뭍 생물은 부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기에 짜낸 유신의 잔꾀였다.

"વ્યક!"

뒤에서 이를 보고 있던 보초가 동태 눈깔을 부릅 떴다.

곧 다른 동료를 부르기 위해 아가미를 쩍 벌렸다.

실수였다.

녀석은 좀 더 주위를 살폈어야했다.

[히트맨의 격동하는 육신]

압도적인 육체의 프레임에 힘입어 은밀하게 접근한 암살자의 손길.

역시나 같은 방식으로 유신이 독연을 터트렸다.

마지막 한 녀석 역시 처리.

'브루노의 능력은 역시나 쓸만하다.'

사이킥 계열을 얻으니 전술의 폭이 훨씬 더 넓어졌다.

역시나 한 손보다는 두 손이, 두 손보다는 세 손이 더 낫지 않은가?

딱.

손가락을 튀겨 에스트 인형을 해제시킨 유신은 녹슨 문을 열어재꼈다.

곧 반투명한 역장 속으로 몸을 날렸다.

***

뚝뚝.

흘러내린 물방울이 지면을 적신다.

화려해보이는 외관과는 달리 통로는 녹슨 파이프와 반쯤 뜯겨나간 쇠로 된 벽면, 어둠으로 가득차 있다.

주변을 주의깊게 살핀 유신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입고있던 장비들을 벗었다.

어인의 가죽과 물갈퀴, 놈의 아가미로 만든 산소마스크 같은.

이 해저기지에 침투하기 위해 미리 준비해놨던 물품이었다.

"푸하."

아무리 퀘퀘한 수중 요새의 공기라고는 하나 산소통의 미약한 공기와는 차원이 다른 상쾌함이다. 고요히 하지만 즐겁게 숨을 들이마쉬던 유신은 생각했다.

'중간에 해룡을 마주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랬다면 겨우 얻은 네 개의 능력 중 하나를 지우고 어인의 특성을 강탈해야 했을것이다.

이쯤되면 의아함이 들것이다.

응? 해저 기지에 왜 뻔히 보이는 입구가 존재하며 수압 때문에 열리지도 않을 문을 열 수 있었지? 그리고 열린 문 사이로 물은 또 왜 안 쏟아져 들어오는거고?

이건 모두 다 광명교와 협력하고 있는 어인들의 특성 덕분이다.

이 녀석들은 마냥 수중에서만 생활하는 게 아니다.

마치 비버처럼 수중에 댐을 만들고 뭍 같은 공간을 만들어서 생활하는데.

그 때 사용하는 것이 바로 주술사가 만든 이 새하얀 막이다.

수 백미터 아래의 수압을 이겨낼 정도로 튼튼하며 출입이 용의할 정도로 탄력성이 넘치지.

말 그대로 인간의 잣대로는 이해하기 힘든 신비란 거다.

덕분에.

광명교는 컴퍼니의 추격을 피하며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유신의 침입 역시 수월하게 허용했고.

[방사능 트롤의 재생력]

'이쯤이면 된 것 같은데.'

툭툭.

귀를 치던 유신은 발동중이던 능력을 하나 더 해제했다.

다이빙이라고는 해보지도 않은 유신이 데이브의 힘을 빌려 수십미터 아래까지 잠수할 수 있었다면.

수압에 터지던 달팽이관과 얼음장 같던 바다의 기온을 버티게 해준 것은 다 이 녀석 덕분이었다.

물론 그 고통은 그대로 감내해야 했지만 말이다.

'개같은 놈들.'

유신은 이를 갈았다.

멸망주의자 놈들의 철두철미함은 정말이지 몸서리가 쳐진다.

이 가혹한 환경은 이미 하나의 큰 페널티다. 역시(구)한국의 메인시나리오 답달까?

기껏 히트맨으로 키워놓은 에피 역시 데리고 오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다면 해볼만 하지.'

산재해 있는 모든 요소가 주인공을 핍박한다. 그러나 유신은 낙담하지 않았다.

앞으로 상대하게 될 어인들과 광명교, 인형사는 분명 강대한 위협이다. 쉽사리 승리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

하지만.

자신은 녀석들의 능력을 알며 놈들은 자신이 가진 힘을 모른다.

자신은 강탈자다.

싸우면 싸울수록. 상대의 세력을 꺾을수록 더욱 더 강해질 수 있다.

이건 기상천외한 강자들이 즐비한 이 땅에서도 오직 유신만이 지니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도 쭉 지니고 있을 가장 큰 비수였다.

까딱하는 순간 거인마저 침몰시킬 수 있는, 지독시리 예리하며 날카로운 비수.

'젖은 곳은 없고.'

유신은 매고있던 가방에 수중 장비들을 넣었다.

곧 그 안에서 방수포를 꺼내 코트와 더블배럴 샷건, 탄약들을 끄집어내 무장했다.

"···"

모든 준비를 끝마친 유신은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

해저기지 마린폴의 구조도는 간단하다.

우선 어인들의 거주구인 외곽. 그리고 중심으로 가면 광명교도들이 생활하는 공간과 예배당이 나온다.

즉 유신으로서는 우선 어인들의 영역을 지나쳐야 녀석들의 본대를 상대할 수 있단 것이었다.

가급적이면 최대한 은밀하게.

촤아악.

휘어진 검날이 섬뜩하게 번뜩였다.

단칼에 머리가 날아간 어인이 아가미를 뻐끔거렸다.

그 모습이 아직도 자신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 듯 했다.

칼잡이 존의 능력은 훌륭했다.

사이킥 계열이 아니다보니 금새 손에 익었고, 데이브의 능력과 합치자 가공할 시너지를 내기 시작했다.

유신은 손에 들린 검이 자신의 의지대로 춤 춘다는 것이.

괴물의 뼈와 살이 물처럼 잘린다는 감각이 이런 것이다! 라는 것을 극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게 이류도 되지 못한 칼잡이의 수준이라고?'

그 전에 사냥꾼의 발톱을 휘두르던 것은 그냥 갖다대기만 했다라는 표현이 걸맞을 정도.

말 그대로 어린아이와 어른의 차이였다!

유신은 헛웃음을 지었다.

새삼 강탈자라는 직업의 사기성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한 사람이 인고의 노력과 재능을 불태워 얻어낸, 한평생 쌓아올린 업적을 순식간에 훔쳐올 수 있다니.

세상에 이런 불합리한 거래가 어디 있단 말인가?

후우. 진정하자.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유신이 눈을 가늘게 떴다.

'델리아는··· 기지의 중심부에 있나?'

아이언 나이트가 명함에 에스트를 담아 자신을 추적하고자 했듯.

같은 방식으로 델리아에게 추적기를 심어둔 유신이 그 흐름을 추적했다.

지금도 한창 움직이는 중이다.

아마 어인들의 손에 이끌려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 이동하는 거겠지.

그렇다면 아직 시간은 있다.

미끼로 쓴 것도 모자라 그녀가 괴물까지 되는 모습을 보는건··· 차마 유신으로서도 용납할 수 없다.

검을 휙 턴 유신은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애초에 쉘터로 작정하고 만들어졌던 만큼 마린폴의 구조도는 프론티어 쉘터와 비슷했다.

길다란 통로들과 마치 관짝같은 방문들이 양옆으로 주르륵 나있는, 낭만이나 감성과는 동 떨어진 아주 실용적인 구조도.

그렇기에.

덜컥, 덜컥.

사소한 소란이라도 방 주인들은 금새 단잠에서 깨어나버린다.

유신이 태도를 쥔 채 자세를 잡던 그 순간.

몇몇 개의 방문들이 열렸다.

철퍽.

곧 그 속에서 저주받은 심해의 족속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숫자는 총 아홉.

"쯧."

유신이 혀를 찼다.

하필 마주치지 않았으면 했던 괴물이 그 사이에 끼어있었기 때문이다.

조잡하게 뼈칼이나 창 등으로 무장한 다른 녀석들과 달리 산호초로 된 관과 지팡이를 든 붉은 물고기.

[열광하는 비린내 인도자 머라우더]

라는 네임드 어인이다. 3급 위험종이기도 한 녀석인데.

모니터 밖에서 만난다면 곧바로 쳐죽여야 할 대상 1순위다.

땅을 박찬 유신이 곧바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저 영악한 녀석은 제 동족들을 방패막이로 쭉 내밀며 냅다 바닥을 굴렀다.

그아아아아악!

곧바로 퍼지는 기괴한 울림.

"큭."

산자에게는 정신의 흔들림을.

심해의 족속들에게는 맹렬한 용기와 힘을.

어느 한쪽에게는 참으로 불합리한 주술이 발동됐다.

"વ્યક!"

인도자가 지팡이를 휘두르며 명령했다.

눈에서 붉은끼가 맴도는 어인들이 흉폭한 기세로 덤벼든다.

일단 물러난 유신은 재빠르게 상대의 무장 상태부터 살폈다.

'방패와 검을 든 녀석이 넷. 작살을 든 놈이 또 넷.'

그렇다면···

쉬이익.

어두컴컴한 통로 너머에서 네 개의 뼈창이 번뜩였다. 예상대로 투척수들이 가장 먼저 행동에 나섰다.

광폭화 주술 때문인가 그 속도가 가히 화살과 맞먹는다.

더군다나 좁디좁은 통로의 특성상 평소의 유신이었다면 아무리 데이브의 능력을 써도 몇 대 정도는 몸을 내줬어야 했을 맹공.

하지만.

[살인귀의 정제되지 않은 검술]

지금의 유신에게는 아니었다.

"···"

에스트를 끌어올리며 태도를 꽉 쥔다.

이에 호응하듯 내면에 있는 검객의 피가 끓어오른다.

유신의 두 눈과 손발이 저절로 움직이며 최적의 경로를 그려내기 시작한다.

저걸 어떻게 쳐낼지.

그리고 그 너머.

저것들을 어떻게 베어낼지.

생각은 짧았고 행동은 더 짧았다.

유신의 검이 현란하게 춤췄다.

탱탱탱탱!

네 번의 불똥이 튀며 뼈창들이 기괴한 각도로 튕겨나갔다.

그악?!

어인들이 당황하던 그 순간.

앞으로 뛰쳐나간 유신은 이미 녀석들의 방패를 짓밟고 도약하고 있었다.

두근.

거칠게 맥동하는 심장.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허우적거리고 있는 물고기 인간들의 모습.

유신은 한 마리의 새처럼 녀석들의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킥!

전열에 있던 어인들이 다급히 등을 돌렸다.

직후 유신의 검이 스쳐지나갔다.

뒤쪽에 있던 어인들이 또 다른 작살을 집어들었다.

직후 유신의 검이 스쳐지나갔다.

···

침묵 속에 잠겨버린 통로 속.

저벅.

유신이 한 걸음 내디뎠다.

툭데구르르.

이를 기점으로 주인 잃은 머리통이 바닥을 굴렀다.

그것도. 한 두개가 아닌 여덞개의 머리가 나란히.

"વ્યક?"

뒤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괴물.

주술을 준비 중이던 인도자가 비틀거렸다.

썩은 동태 눈깔이지만, 단지 괴물 새끼일 뿐이지만 녀석이 지금 느끼고 있을 당황이 절절히 느껴졌다.

물론.

"잘 봤나?"

유신으로서는 하등의 공감도 동정도 필요없을 광경이다.

"그럼 값을 치뤄야지."

이놈들은 이 세상을 좀 먹는 바이러스 덩어리들일 뿐이니까.

그, 그아아아아··· 칵!

휘둘러진 태도가 생선 인간의 머리를 쩍 갈라버렸다.

주술사 계열의 디버프 몹을 초장부터 죽이지 못했다면?

그 부하들부터 족치면 된다.

아예 버프를 걸 수 조차 없게 만들어버리면 그만이니까.

역시 아무리 망겜이라고는 하나.

"어디서나 방법은 있지."

유신은 이 직관적이면서도 깔끔한 능력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인간의 조건

······!

귓가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어딘가에 실려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데···

눈꺼풀이 너무 무겁다.

쿵!

"허억!"

느껴지는 충격에 델리아가 눈을 떴다.

곧 숨을 들이쉬자마자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기침이 새어나왔다.

"콜록, 콜록, 콜록!"

폐부를 쥐어짜는 듯한 고통 덕분일까?

그때서야 델리아는 자신에게 일어났던 상황을 기억해냈다.

나... 물에 빠졌었지?

그런데 이렇게 멀쩡한 걸 보면 구조된 것 같은데···

아, 설마 유신이?

소금기 때문에 끈적한 눈두덩이를 비빈다.

미약한 두근거림을 느끼던 여인이 맞이한 상황은.

"끄아아아악!"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현세에 강림한 지옥이었다.

***

피와 오물이 가득한 베이지 톤의 거대한 홀 내부.

"વ્યક!"

어인들이 춤을 춘다.

생선 대가리를 달고 있는 놈도 있고, 문어나 게 같은 갑각류도 있다.

둥둥둥!

울리는 북소리.

이리 뒤뚱. 저리 뒤뚱.

흥겹다는 듯이 몸을 흔드는 녀석들의 중심에는 큼직한 구멍이 있었다.

부글부글.

심해의 바닷물이 넘실거리는 그 근처 바닥은 강화 유리로 되어있었다. 그렇기에 그 아래가 훤히 보였는데.

"저, 저게 대체 뭐야··· 저게···"

델리아는 그만 존재해서는 안 될 것을 봐버렸다.

오-오오오오

꿈틀거리는 무언가는 수천 마리의 뱀을 뭉쳐놓은 것처럼 보였다.

아니,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그저 썩어가는 고깃덩이를 겹겹이 뭉쳐서 엉망진창으로 빚어놓은 것 처럼도 보였다.

그것은다리가두 개였다가네개가됐다가 수십개가 되었다.

촉수들은끊임없이분열하고재생하고부패하는 것을 반복했다.

찰팍.

수면위로 드러난 살덩이의 형태가 변했다

꺄르르르.

휘어지는 세 개의 검은 공간은 마치 눈코입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그것이 웃고있다고 주장하는 듯 했다.

감정이 있다고 주장하는 듯 했다!

"어, 으, 어어, 어."

사람은 너무도 극심한 공포를 느끼거나 위압 당한다면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는다.

그저 바보처럼 신음성을 흘리며.

졸졸졸.

아래춤이 젖어들 뿐이다.

온다.

오고있어...

저게 오기전에··· 전에···

"전에에에에에!"

구릿빛 손이 눈두덩이를 더듬거린다.

꽈악! 곧 손톱이 살갖을 파고들 정도로 악력을 준다.

"이봐! 정신차려!"

누군가가 머리를 홱 잡아당기지만 않았더라면 델리아는 아마 스스로 두 눈을 뽑아버렸을 것이다.

"아, 아아?"

"저걸 계속 쳐다보면 안 돼! 미쳐 버린다고!"

고개가 억지로 돌아갔다.

벌거벗은 흉터 투성이의 숏컷 여자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델리아는 곧 자신 역시도 홀딱 벗고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저 여자와 나란히 웬 철창안에 갇혀있다는 사실도.

"내가···"

정말 얼빠진 말이었지만.

"왜 여기 있죠?"

델리아는 그 말 한 마디 밖에 던질 수 없었다.

***

여인의 이름은 애쉬였다.

꽤나 거칠게 자랐는지 그녀는 냉소적으로, 하지만 알아듣기는 편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왜 여기 있냐니? 우린 지금 잡혀 온거야. 저 물고기 새끼들한테."

"···"

"짐작가는 게 있나보네. 모습으로봐서 섬 쪽은 아닌 것 같고··· 낙원 출신인가?"

"···네."

"운도 지지리도 없네. 그 안전한 곳에서 하필 이곳까지 끌려오더니 말이야."

쯧 혀를 차는 애쉬의 말에 담긴 속뜻은 그게 끝이 아닌 것 같았다.

찰팍찰팍

"વ્યક!!!"

물갈퀴 부딪치는 소리.

괴인들의 괴성을 뒤로한 채 델리아는 몸을 웅크렸다.

맨살에 닿는 쇠의 느낌이 껄끄럽다.

시리도록 차갑기도 하다.

그러나 전라 상태에서 오는 부끄러움과 불편도 치미는 공포를 이겨낼 순 없었다.

델리아가 불안한 어조로 물었다.

"저건··· 대체 뭐에요?"

"나도 몰라. 하지만 감히 짐작해보건데··· 저 엿같은 생선 새끼들의 왕. 같은 게 아닐까?"

애쉬의 짐작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저건 어인들의 왕이었다.

너무도 오래 살았기에 탈피에 탈피를 거듭하다 끝내 종의 뒤틀림까지 일어난 무언가.

유신이 싹을 짓밟으려는 미래의 악 중 하나다.

"우린··· 이제 어떻게 되는거죠?"

"···알고 싶어?"

차갑게 굳은 에쉬의 얼굴에는 이제 공포를 넘어 체념이란 감정이 서려있었다.

그녀가 고갯짓을 한 곳에는 또 다른 철창들이 있었다.

"살려주세요. 살려···"

"흑흑흑."

"다 죽여버리겠어! 이 물고기 새끼들!"

성별, 연령 불문의 역시나 홀딱 벗은 사람들이 갇혀있었다.

그들은 울부짖거나 빌거나 분노하거나 절망에 빠지는 등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었는데.

그 때.

고오오오오!

양수 속에 갇혀있던 흉물이 기묘한 울림을 퍼트렸다.

둥! 둥. 둥···

울리던 북소리가 끊긴다.

어인들이 자기들끼리 눈짓을 하더니 갑자기 춤사위를 멈췄다.

···

그와 동시에 갇혀있던 사람들 역시 침묵에 잠겨들었다.

그건··· 앞으로 벌어질 어떤 일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찰팍찰팍

몇몇 어인들이 철창 앞으로 다가왔다.

곧 녀석들은 자기들끼리 수근거리며 철창에 갇힌 사람들을 손짓했는데.

이윽고 철창을 열어 사람들 몇을 끄집어냈다.

"놔! 놔 이 새끼들아! 이거···"

구릿빛 피부의 선원같은 남자가 저항했으나 금세 조용해졌다.

어인들의 손속은 결코 자비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끄아아아!"

몸에 구멍이 몇 개 뚫리면 범인의 의지 같은 건 쓰레기통에 처박힐 뿐이다.

어인들은 사람들을 끌고 갔다.

공교롭게도 홀의 중심에 뚫린 구멍.

뭐라 지칭해야 될지 모를 흉물이 있는 곳이었다.

서, 설마?

치미는 불안한 상상은 현실이 되었다.

보다 더 끔찍한 형태로.

"안돼! 안돼애애애!"

풍덩. 물보라가 친다.

어인들은 사내를 그것에게 바쳤다.

그것은 사내를 스윽 훑어보고, 만지작거리고, 킁킁 냄새를 맡더니.

쩍. 한입에 집어삼켜버렸다.

"···!"

섬뜩하게 울리는 뼈 부서지는 소리.

방금 전까지 같은 공간에 있던 동족의 비참한 최후.

이를 보고 낄낄거리는 동태 눈깔의 비린내 나는 것들.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금 확인받는 생명이란 것의 가치.

"꺄아아아아악!"

이 모든 것들이 종합된 공포에 델리아가 비명을 질렀다.

차례를 기다리던 다른 제물들 역시 비명을 질렀다.

어인들은 그러든 말든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쾅!

난대없이 문이 열리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설마?!

순간 델리아의 마음속에서 한 사내가 떠올랐다.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믿음직스러운 한 사내가.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자들은 기대했던 사내가 아니었다.

그러나 델리아의 눈에는 희망이 깃들었다.

"사, 사람?"

비록 유신은 아니었지만 일단의 무리가 이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자신들처럼 어인에게 붙잡혀 온 것이 아니라. 멀쩡하게 두 발로.

환하게 웃으며.

"살려주···"

철창을 붙잡은 채 소리치려던 델리아의 얼굴이 굳었다.

무언가 낌새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들어온 무리는 마치 짜맞추기라도 한듯 새하얀 로브 같은 것을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어인들은 그런 낯선 무리에게 아무런 적개심도 취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વ્યક~"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해보였다.

싱긋.

하얀 옷을 입은 무리 역시 마주 인사를 했다.

"이게 무슨···"

"눈 깔아."

그 때 애쉬가 말했다.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있었다.

아니, 저 하얀 무리를 향해서는 적개심도 섞여있었다.

"저들 눈에 뜨이지 말라고. 최대한 더 살고 싶으면."

델리아가 움찔 고개를 숙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풍덩 소리와 비명의 합주가 울렸다.

"여전히 교합은 암컷하고만 일어나네요."

"저래보여도 왕은 일단 남자니까요. 혈기 왕성한. 흐흐."

"하지만 기대했던 반응은 나오지 않고 있어요. 실험이 잘못된 걸까요?"

"표본이 부족했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가능성은 무한하니까요."

옆집 아줌마처럼 포근하게 생긴 중년 여인도, 자신 또래의 어리숙해보이는 청년도, 선량한 인상의 노인도 마치 산책이라도 온 듯 태연하게 중얼거린다.

그 대화에서 델리아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것들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의 탈을 쓴 짐승? 괴물? 아니, 그보다 더 끔찍한 것들이다.

"어떻게··· 이런···"

황무지의 여인은 세상의 흉악한 일면을 또 하나 깨달았다.

그러나.

"호오."

그녀에게 닥친 불행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 분으로 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어느새 접근한 흰색옷의 무리가 델리아를 보며 눈을 반짝였기 때문이다.

"참한 아가씨네요. 엉덩이도 튼실한 것이 아주 순풍순풍 잘 낳게 생겼어요."

그건 마치 우리안에 갇힌 짐승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선하게 웃은 중년 여자가 철창 속에서 델리아를 꺼냈다.

"이, 이거 놔! 놔아아아!"

델리아는 거칠게 저항했다.

취객들을 뿌리치던 때보다 더 격렬히!

하지만 토실한 중년 여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가씨. 호호. 아가씨는 보다 더 나은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새로운 도전을 하시는 거랍니다?"

그저 핏줄 선 손으로 델리아를 꽉 붙든 채 태연하게 속삭였다.

미쳤다. 이 새끼들은 진짜 미쳤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이···!

"이런 짓을 할 수 있어!!!"

바락바락 악을 쓰며 델리아는 생각한다.

사람에게는 결코 넘어선 안 될 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뒷골목 깡패든, 사기꾼이든, 하다못해 살인귀든.

남을 기만하고 상처입히고 죽이기까지 하는 이런 악한들조차 그런 행위들을 할 때는 일말의 반응 정도는 나타내기 마련이다.

미약한 동공의 움직임.

쾌락에 짓는 입가의 떨림.

제 치부를 숨기기 위한 무표정한 가면 등등.

하지만 이들에게는 그런 게 없다.

"어머나. 이런 짓이라니요. 우리들은 그저 이 세상을 더 희망차고, 아름답게 만들려는 것일 뿐인걸요."

태연하게 미소 짓고 있건만 역설적이게도 그 안에 드러나는 감정이라고는 없다.

그저 해야할 일을 한다라는 의무감 뿐이다.

저들은 정말 자신들의 행동이 옳다고 믿고 있다.

저것이 정녕 정의라고 관철하고 있다.

그저 봉사라고 생각한다.

방금 전에 말했듯이 이 세상을 더 이롭게 하기 위한 봉사.

당연히 지금의 저 행위에 일말의 동요 따위는 없다.

광명교.

썬라이트 템플.

-인간에게 있어 중요한 무언가가 결여되어 버린 인간들.

그렇기에 저들은.

인간이라 할 수 없다.

"흐윽."

델리아가 끌려가는 그 순간.

"멈춰!"

누군가가 소리쳤다.

같이 갇혀있던 수감자 애쉬였다.

"애쉬씨!"

그녀의 외침이 아무런 소용 없는 아우성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델리아는 절망하는 와중에도 가슴 속에서 한줄기 따뜻한 것이 차올랐다.

동료애? 인류애? 아, 이 세상이 그래도 완전히 썩은건 아니구나?

하지만 그런 델리아의 마음은.

"지금 넣지 말고, 조금만 있다가 이 표본만 따로 넣도록 하지요."

애쉬의 입가에서 피어오른 비릿한 미소와 함께 무너져내렸다.

"···?"

"그동안 너무 무분별하게 실험했어요. 이번에는 개체별로 나타나는 다양성을 한 번 관찰해보자고요."

"알겠습니다. 애쉬 자매님."

애쉬는 철창에서 빠져나와 새하얀 법복을 걸쳤다.

곧 빛나는 눈동자가 새겨진, 얼굴 전체를 가리는 천 재질의 마스크를 썼다.

"어머. 왜 그래? 충격이라도 먹은거야? 후후후후."

애쉬 역시 광명교도였던 것이다.

그것도 제물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보다 면밀히 관찰하기 위해 직접 수고를 택한 고행자.

***

홀의 중심.

바닷물이 만들어낸 양수 속에는 흉물이 둥둥 떠다녔다.

그녀의 손에 잡힌 여인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방법과 도구로 희롱당하고 있었다.

휘둘러지는 촉수 정도는 예사로 보일 정도로.

부그르르륵!

암컷은 쾌락이 아닌 오직 고통과 비명만을 내뿜었다.

물론 그것 역시 저 깊은 블루홀에 파묻혀 물거품으로만 치환될 뿐이다.

저건 더 이상 교접이 아니다.

교배지.

괴물의 신비와 인간의 악의가 합쳐져 만들어낸 파생물인 것이다.

기이익.

갈색 머리칼의 미려한 얼굴이 푸르스름하게 물든다.

앞으로 한 발자국만 더 내디디면 괴물이 도사리고 있는 양수 속으로 떨어진다.

"···"

자결을 방지하기 위해 입과 양팔마저 속박당한 델리아는 잠깐 과거를 회상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콥슨 그 자식의 수작을 받아주어야 했을까?

아니면 그저 다른 여급들처럼 음식도 나르며 웃음도 팔고 몸도 팔아야 했을까?

아니면···

갑작스레 나타난 그 신비로운 인상의 사내한테 호감을 느끼지 않아야 했을까?

모든 것이 망가지고 뒤틀려 버린 세상.

어디서부터 잘못 된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단 하나.

후회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즐거웠어 델리아."

그건 바로···

'유신.'

그를 만난 것이다.

"네 고귀한 희생은 이 세상을 빛으로 물들이는 것에 큰 도움이 될거야. 아니, 어쩌면··· 너 역시 종의 한계를 벗어나 필멸의 굴례를 벗을 수도 있겠지."

애쉬가 델리아를 툭 밀었다.

고-오오오오!

흉물은 세 가지의 구멍을 접으며 웃었고, 델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쾅!

"···?"

굉음과 함께 느껴지던 부유감이 멈췄다.

"커억."

애쉬는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핏물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에 박혀 있는 것은 흉흉한 빛을 내고 있는 한 자루의 태도.

그리고 이를 붙잡고 있는 것은···

"으, 으읍! 으으으읍!"

유신!

"딱 맞춰서 왔군."

애쉬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한 채 델리아를 붙잡고 있던 유신은,

"다친데는 없지. 델리아?"

늘 그렇듯 피식 웃어보이며,

촤아악!

한 손을 휘둘렀다.

"끄으··· 네놈은 뭐···"

애쉬의 목이 하늘로 치솟았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인간의 조건

이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인간에 대한 혐오감에 몸서리치게 된다.

인간의 악의에 경악을 넘어 감탄하게 된다.

그와 동시에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지난 1년동안 황무지를 배회하던 내 마음속에 있는 인간이란 녀석들은 대부분이 그러했다.

***

"애, 애쉬 자매님!"

"꺄아아아악! 살인이야! 살이이이인! 고행자께서 당하셨다!"

"어떻게 여기까지···"

유신이 애쉬를 처단한 순간.

광명교도들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눈 앞에서 동족을 품평하고 괴물과 교배시키던 때의 태연함과는 극명히 다른 반응이었다.

"읍··· 푸하!"

델리아를 포박했던 줄을 끊으며 유신은 생각했다.

아, 진짜 엿같다. 이걸 현실에서보니 더 엿같다.

이딴 새끼들을···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예르폴에서는 그래도 공동체를, 자신들의 안위를 보존한다는 같잖은 명분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이놈들은 대체 뭐지?

그들의 교리대로 인간이라는 종의 개량?

새로운 여명의 시대를 열기 위한 고행?

아니, 다 개소리다.

이것들은 그냥 다 미쳤다.

순진한 어린아이가 곤충들을 가지고 놀며 해체하고 불태우듯.

그저 순수한 악.

그 자체인 것이다.

그렇기에···

"델리아."

"으, 응. 응! 유신!"

"구석에 잘 숨어있어라."

유신 역시 순수하게 분노했다.

탁!

델리아를 밀치는 동시에 유신의 검이 휘둘러졌다. 날아오던 뼈창들이 불똥을 튕기며 튕겨나갔다.

유신이 인간 아닌 것들에게 분노하듯.

인간 아닌 것들 역시 인간에게 분노했다.

정확히는 자신들의 축제를, 경배하는 왕의 의식에 훼방꾼을 놓은 침입자에 대한 분노를.

"વ્યક!"

여과없이 표출했다.

찰팍! 쿵쿵쿵!

괴물들의 파도가 들이닥친다.

물고기 인간들이 뼈로 된 방패와 칼을 꾹 쥔 채 달려든다.

분노하는 와중에도 딱딱 잡힌 오와열.

지금껏 상대한 녀석들과는 다르다.

저건 군대였다.

그것도 왕을 지키기 위한 친위병.

"લાવોવ્ય!!!"

그 맹렬한 기세는.

쾅!

코트 자락이 젖히며 유신의 손에 들린 두 개의 총신이 불을 뿜음과 동시에 꺾였다.

샷건이란 본디 산탄으로 적을 찢어발기는 무기였다.

그 세례는 신도들이 몰려 있을수록 더 빛을 발하는 법이었다.

케엑!

옛 인류의 유산은, 그 찬란했던 악의는 괴물들의 상상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전열은 너무도 쉽게 무너졌다.

유신은 거침없이 그 속으로 파고들었다.

꾸욱.

태도가 부르르 떨렸다.

직후 소름끼치는 비명을 지르며 날뛰었다.

번쩍.

머리를 잃은 시체가 피분수를 뿜어냈다.

우선 한 개.

땅을 박차며 찔러오는 창을 피하고, 당황하는 놈의 얼굴을 그으며 또 한 개.

전열이 무너진 군대란 대게 오합지졸인 법이었고, 유신의 신체능력은 어인들보다 확연히 위에 있었다.

그의 검광이 번뜩일때 마다 어인들은 머리통이 날아가거나.

게에에엑!

상체가 반쯤 갈라져 내장을 쏟아냈다.

그건 학살이었다.

"세, 세상에···!"

"조심하세요! 뒤, 뒤쪽!"

핍박당하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구원의 서사시였다.

물론 상황은 마냥 순조롭게만은 풀리지 않았다.

어인들은 기본적으로 해양 생물들이 변이되어 태어난 괴물들.

그 종류 만큼이나 다양한 종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처럼.

므어어어어!

양손을 채찍으로 변환시켜 휘둘러오는 문어 인간이나,

끼에에엑!

은밀하게 천장에 달라붙어 있다가 껍질을 이빨처럼 찍어 내려오는 쉘 타입처럼 말이지.

"···"

물론 유신은 당황하지 않았다.

산제물의 방으로 들어오기 전. 머릿속으로 수십번의 트레이닝을 거쳤다.

그 안에는 지금 벌어지는 상황들과 자신이 대응해야 할 방안들 역시 있었다.

물론 현실과 상상에서 오는 괴리감은 극명하다지만···

유신이 그동안 겪었던 경험은 이를 매꿔주기에 충분했다.

퍽.

유신은 비틀거리던 어인 한 놈을 걷어찼다.

문어 어인의 채찍은 허무하게 제 동족의 등판을 갈아버렸다.

동시에 몸을 낮추며 검을 휘둘러 주변에 있던 놈들의 발목을 갈라버린다.

철컥.

그와 동시에 재장전되는 더블배럴 샷건.

쾅!

곧바로 이루어지는 격발.

떨어지던 조개 어인은 산산이 조각나며 피륙을 떨궈댔다.

후두둑 떨어지는 핏물은 녹색빛을 띠고 있었다.

쉘 타입의 체내에 존재하는 산성액이다.

치이이익.

"વ્યક!"

비명을 지르며 한층 더 혼란에 빠져드는 심해의 군대.

이 자리에 태연하게 서 있는 것은 유신 뿐이었다.

"···"

물론 상황은 마냥 유신에게 좋게만 흘러가지는 않았다.

[히트맨의 격동하는 육신]

[살인귀의 정제되지 않은 검술]

두 개의 능력을 동시에 운용한다는 것은 곧 두 배의 에스트를 필요로 한다는 것과 같았다. 물론 압도적인 재능을 가진 유신에게 내재된 에스트는 아직 넘쳐흐를 정도로 많다.

하지만.

뚝뚝.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유신의 내면은 점점 고갈되고 있었다.

거기다가 이 나약한 몸뚱이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반동까지.

앞으로 벌어질 전투를 생각한다면. 이건 결코 좋은 상황이 아니다.

설상가상.

촤아아악!

가각! 가각!

어인들의 왕이 기거하고 있던 양수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3미터는 됨직한 대게 형태의 어인이었는데.

'장군 겔라폭스.'

인도자와 마찬가지로 왕을 보필하는 네임드 몬스터 중 하나다.

3급 위험종으로 특수성을 배제하고 무력과 피부 강도만을 생각한다면 훨씬 더 까다롭다.

촤아아악!

녀석을 기점으로 물 속에서 솟아오르는 다른 어인들.

오오오오오!

병사들의 위용에 안심하며 몸을 웅크리는 저주받은 살덩이.

뿐만 아니었다.

쾅!

"형제님들! 무사하십니까?!"

은밀하게 자리를 피했던 광명교도 몇 명이 되돌아왔다.

그들의 손에는 파이프와 증기 기관으로 이루어진 원통형 물체가 들려있었는데.

크레딧 버스터라는 장비다.

크레딧을 연료삼아 안에 달린 쇠공을 발사하는···

그래, 이 시대표 대포다.

광명교도들은 기본적으로 공학자들이거든.

"이단자여! 당신이 왜 갑자기 이런 극악무도한 짓을 벌이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저지른 만행으로 인해 형제님들이 피를 흘린 이상. 우리들로서도 더는 묵과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경계하며 대열을 정비하는 어인들을 뒤로한 채. 검을 휙휙 턴다.

'날이 조금 나갔군.'

유신은 헛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봐라. 저 자식들은 말투 마저 저렇다.

마치 자신들이 피해자인양. 선역인양 지껄인다.

소용없다는 걸 알지만··· 유신은 이걸 비꼬지 않고는 도저히 참을수가 없었다.

"만행이라니 어이가 없군. 그럼 저기 갇혀있는 사람들은 뭐지? 인형인가?"

"···저분들을 탈옥시키는 게 당신의 목적이었습니까?"

온화한 인상의 노인은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힐끔 거리더니.

달칵.

방아쇠를 당겼다.

쾅! 크레딧 버스터가 푸른 불꽃을 뿜어내며 노인의 몸이 휘청거렸다.

굉음과 후두둑 떨어지는 먼지 너머로 보이는 건···

처참하게 조각난 육편 뿐이었다.

"흘흘. 어디, 만족하셨습니까? 이걸로 당신과 우리들을 이어주던 악연의 끈은 사라진 것 같은데요."

새하얀 눈썹과 입매가 호선을 그린다.

손에 한가득 피를 묻힌 살인자는 아무렇지 않게 미소지었다.

개소리였다.

노인의 행동은 절망과 분노로부터 파생되는 복수라는 끈을 또 하나 더 만든 것 뿐이었다. 물론 노인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건 그저···

화풀이.

"아니, 아니군요. 아직 저 뒤편에 있는 아가씨가 남아있군요."

웃고 있는 저 미치광이들 역시 인간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광기에 몸을 맡겨도 그 내면에는 지성체로서의 희노애락이 남아있다는 것이지.

그걸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이런 짓을 한다는 건···

"역시 너희들은 쓰레기다."

"구제가 불가능한 오물 덩어리들."

이 세상을 좀 먹는 악.

그 자체.

"흘흘. 이단자의 속삭임 따위···"

여유롭게 웃어보인 노인이 크레딧 버스터를 들어올렸다.

뒤편에 있던 교단원들 역시 마찬가지.

공교롭게도 그 방향은 모두 유신이 아닌 구석의 델리아를 향하고 있었다.

"어디 한 번 피해보시지요.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제발 피해주십시오. 그편이 더··· 아름다울 것 같거든요."

온화하게 웃어보인 노인이 방아쇠에 손을 걸쳤다.

그아아아아아!

겔라폭스의 명령에 어인들 역시 진군을 준비했다.

"유신! 나, 난 신경쓰지 말고 어서 도망쳐! 제발! 부탁이야!"

'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타적이군.'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아무리 유신이라고 해도 저 가공할 병기와 어인들의 군대를 동시에 상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피식.

지금 같은 순간에도.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유신은 웃었다.

딱. 그리고 손가락을 튕겼다.

급박한 전투 와중에도 흩뿌려놓았던, 광명교도들의 아래에 절묘하게 깔아두었던 트랩에.

내가 힘에 부치면··· 남의 손을 이용하면 되지.

[에스트 주입 인형1호]

"뭐, 뭐야 이건?!"

노인이 당황했다.

난대없이 지면에서 무언가가 솟아오르더니 자신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그건 전신이 시커먼 복면인들이었다.

유신이 여관에서 능력을 갈고닦을 때와는 달리 다섯 개의 인형들이.

'죽여라.'

곧 그들은 광명교도들의 목을 턱 붙잡고는.

"어, 어억!"

뚜두둑.

자비없이 꺾어버렸다.

···

"વ્યક???"

덤벼들던 어인들도 델리아도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당황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한 가지 사실을 더 알아야 했다.

진짜 악몽은.

"장비 고맙다."

지금부터라고.

딱.

유신이 다시금 손가락을 튕겼다.

에스트 인형들은 광명 교도들의 손에 들린 크레딧 버스터들을 집어들더니.

끼리릭 쾅!

냅다 방아쇠를 당겼다.

오-오오오오!

어인들과 그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왕을 향해.

***

토막나고 뭉게진 시신들이 산처럼 쌓여있다.

거기서 흘러내리는 핏물로 인해 홀 안은 마치 싸구려 슬래셔 무비에나 나올법한 장소로 변모했다.

타닥타닥.

그리고 그 중심.

뻥 뚫린 구멍안에서 불길이 끓어오르고 있다.

기름을 들이붓고 불을 붙였기에 치이익 수증기 역시 피어오른다.

오-오오오오···

그 안에서 발버둥치며 천천히 무너져 내리는 거대한 살덩이.

얼굴이 붉게 물든 유신은 식은땀을 훔쳤다.

어인들의 왕은 광명교와 어인들이 바치는 산제물을 계속해서 섭취하다 끝내 5급 위험종까지 진화한다.

그리고 동해를 넘어 아시아 대륙 근처의 대해를 아우르는 폭군이 된다.

자신은 지금 일어날 수 있는 그 미래를 틀어막았다.

광명교도들이 무기를 가져올 것도.

오히려 이를 역으로 이용해 전력차를 극복하는 것도.

모두.

유신이 설계했던 그림들이다.

비록 그게···

'저 사람들의 희생까지는 염두해두지 못했지만···'

유신은 안타까운 눈초리로 박살난 철창과 그 아래의 육편들을 힐끔거렸다.

풋.

순간 머릿속으로 누군가의 비웃음이 들렸다.

아니.

사실은 아니잖아?

우리 스스로마저 속이지는 말자고.

그냥···

귀찮았던 것 아니야?

"···"

델리아 하나 챙기는 것도 버거운 상황에서 짐덩이가 수십으로 늘어나는건 사양이니까.

그건 통제할 수 없는 변수니까.

넌 뭐하는 놈이냐? 라는 생각도 잠시.

'개소리. 난 그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야.'

유신은 곧바로 사실을 부정했다.

이 망겜을 클리어하고 21세기로 돌아가, 가족의 따뜻한 품에서 다시금 건실한 청년으로 되돌아가야 할 나는 그 정도로 막장은 아니라고.

푸흐...

끝끝내 스스로를 속이는군.

마치 기사가 명예를 부르짖으며 도적질을 일삼는 것과 같아.

뭐, 그게 네가 택한 방식이라면야···

비아냥 거리던 목소리가 끊겼다.

푸욱.

품 속에서 느껴지던 온기 때문이다.

"유신, 유시인···"

취객들의 희롱도 아무렇지 않게 넘기던 이 아가씨는, 경비대의 협박도 아무렇지 않게 넘기던 이 당찬 아가씨는,

마치 엄마를 찾는 아이처럼 유신에게 매달려 눈물을 쏟았다.

유신은 잠깐.

통제 가능한 시간 내에서 델리아를 끌어안고는 토닥였다.

"괜찮다. 다 끝났어. 괜찮을거다."

잠시 후.

꼼지락거리던 델리아가 슬쩍 유신에게서 떨어졌다.

그녀의 얼굴은 화산처럼 시뻘겠다.

다 큰 처자가 전라의 상태로 사내에게 매달렸다.

방금 전 자신의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모양이다.

유신은 습관적으로 코트를 벗어줄려다가 더블배럴 샷건의 수납을 생각.

할 수 없이 죽어있는 광명교도의 옷을 벗겨 걸쳐주었다.

"이제 좀 괜찮은가?"

"···으, 응."

"무섭지는 않고?"

유신의 말은 중의적인 의미였다.

도처에 널려있는 이 참혹한 광경들이 무섭지 않냐?

그리고 이 광경을 만들어낸 내가 무섭지는 않냐?

네가 알던 내 이미지랑은 다를텐데?

그런 뜻이었다.

델리아는 이 말 뜻을 알아들었다.

그리고···

"무서워."

솔직하게 답변한다.

"하지만 무서워하면 안 되는 거잖아. 넌 나를··· 구하러 와줬으니까."

물기 어린 갈색 눈동자가 오롯이 나를 주목한다.

그 난리를 겪었음에도 여전히 약지에 꼭 끼워져 있는 꽃반지에서는 산뜻한 향기가 풍겼다.

"···"

유신은 침묵했다.

동시에 속으로 답변했다.

그건 사실이 아니야.

난 너를 외면했다.

콥슨에게 목을 졸릴 때도, 바다에 빠질 때도, 어인들한테 납치당하는 그 순간까지도 말이다.

나는 다 보고 있었다.

그리고 알고 있었다. 네가 겪을 그 고통과 공포 역시도.

하지만 외면했지.

너를 미끼 삼아 이 녀석들의 은신처를 찾아내야 했으니까.

[저주받은 신부 델리아]

[어인의 씨받이 델리아]

그 대가로 그저 네가 맞이했을 파국을 막아주면 되겠지? 라고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줬으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델리아."

"응."

"난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다."

그런 눈동자로 날 보지 마라.

난 위선자...

아니, 그조차도 되지 못한 이기적인 인간일 뿐이다.

유신은 주장했다.

하지만.

"···알아."

델리아의 답변은 유신의 생각을 뛰어넘었다.

"네가 마냥 날 구하기 위해서 온 건 아니라는 것을."

마치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

델리아는 바보가 아니었다.

유신의 성향.

그의 철두철미함.

그가 옆에 놓아두었던 방수용 가방까지 모든 정황을 본다면 알 수 있다.

아, 나는 그저 이 사내의 목적이 아니라 그 중간에 낀 무언가라는 것을.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

"어쨌든 결과적으로 넌 나를 구해줬는걸."

"이 지옥 속에서··· 나를 건져내줬는걸."

나한테 있어서 너는 최고의 영웅이자 남자인 걸.

속으로 못다한 말을 내뱉으며.

스윽.

델리아의 양손이 유신의 가슴팍을 붙잡았다.

"그 사실 하나면 충분해."

"응. 그렇고 말고."

곧 천천히 고개를 올리며 겹쳐온다.

그 물기젖은 눈동자와 달큰한 숨결.

터질 것 같은 고동소리.

유신은 마치 마력에 사로잡힌 듯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콰앙!

갑작스레 열어젖힌 문짝만 아니었다면.

'인형사인가?'

"이게 뭔 상황이야? 아주 그냥 개판이 나있잖아?"

"형제님들? 자매님들? 어, 어떻게 이런..."

그 속에서 튀어나온 것은 법복 차림의 두 남녀였다.

쌍둥이처럼 아주 둘이 꼭 닮았다.

'하긴 녀석이 지금 타이밍에 움직일리가 없지.'

유신은 안심하는 한편 진한 아쉬움을 느꼈다.

하. 시발.

내 팔자가 그럼 그렇지.

"앗!"

"저 문으로 나가서 조금만 걸으면 방이 하나 보일거다. 그 안에 숨어있어라."

스르릉.

유신은 델리아를 밀치며 검을 뽑아들었다.

"이 일이 끝나면 데리러 갈 테니까."

"응! 조심해!"

일말의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다.

델리아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유신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까 잘 알고 있었다.

그저 남는 것은 진한 아쉬움 뿐.

델리아가 달려나갔다.

"···"

두 남녀는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곧 유신을 힐끔 거리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이거 네가 그런거냐?"

"이 상황. 당신들이 그런 건가요?"

적개심과 함께 두 사람의 몸에서 은은한 에스트가 피어오른다.

유신은 저자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광명교주의 오른팔과 왼팔 겪인 최측근들.

통칭 징벌하는 남매.

공교롭게도 저 두 년놈들 모두 다 능력자들이다.

유신이 노리고 있는 먹잇감이기도 했다.

저것들을 죽이고 능력을 강탈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 있을 결전에 대한 대비가 모두 끝난다.

물론...

'쉽지만은 않겠지만...'

"그래. 인간 아닌 것들을 손 좀 봐줬지."

삐뚤어지게 웃은 유신이 손가락을 튕겼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도열해 있던 에스트 인형들이 방아쇠를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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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을 뒤엎다 (무료 마지막화 입니다)

"하여! 우리들은 광명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이 육체가 바스러질지언정 겁먹고 두려워해서는 안 될지니!"

"오오!"

예배가 끝나고 광명교도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순례, 인도, 설파.

평범한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테러와 납치, 생체실험으로 불리는 흉악한 짓거리가 그들의 일과이기는 했으나 광명교도들의 주된 목적은 설립된 이래로 단 하나였다.

신의 재림.

어떻게 하면 빛의 인도자를 이 땅으로 다시금 불러들일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또 한 번 세례를 내려 인류의 무궁한 발전을 꾀할 수 있는가?

그리고 지금.

그간의 노력이 결실을 맺으려 하고 있다.

"오! 오오오오! 그렇군! 이렇게 된 거였나?!"

예배당은 애초부터 마린폴의 설비실 내부에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미치광이들은 이곳에 자리한 첨단기기들을 재가동 시키는 것도 모자라···

"여러분! 드디어! 드디어 해냈습니다!"

이를 이용 핵폭탄의 원리를 밝혀내는 것에 성공해버렸다.

"마침내 우리들의 신을 영접할 그날이 온 것입니다-아!"

광명교주는 고글을 벗으며 열띤 얼굴로 소리치자.

"아아. 광명이여···"

"드디어. 드디어···"

함께 연구를 하고 있던 신도들 역시 털썩 무릎을 꿇으며 눈물을 흘렸다.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인형처럼 생긴 여인. 인형사가 말했다.

"해낸,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인형사 형제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세상에! 신이 세 분이었다니···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부터 손을 써야 했다니."

인형사는 핵폭탄도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몰랐다.

내부에 있는 뇌관을 건드려야 이 모델들이 기폭이 가능한지도 몰랐다.

그저.

"기기긱. 그럼 이제. 가능한 겁니까?"

앞으로 벌어질 혼란에 씨익 미소 지을 뿐이다.

"원리를 분석하는 것에 성공했으니. 얼마 걸리지 않을 겁니다. 이제 조금만···"

"교주님!"

광명교주가 답하던 그 순간.

문이 열리며 신도가 달려왔다.

곧 그는 유신의 침입과 그로 인해 벌어지고 있는 참상에 대해서 말했다.

"납치? 사람들을 구해? 이 무지몽매한···"

분노하던 교주는 곧 한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아니, 그보다 이곳까지 침입해 왔다고요? 어떻게···"

설비실은 어떻게든 가동이 가능했지만 감시카메라는 아직 손보지 못했다.

인력과 예산의 부족, 수심 수백 미터 아래의 해저 기지라는 이점을 맹신한 탓도 있었다.

"만약 컴퍼니의, 끄나풀이라면, 우리에겐 시간이, 없습니다."

인형사는 다른 점에 주목했다.

입으로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했지만 그게 본 목적이 아닐 수도 있다.

이곳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결코 찾을 수 없는 장소니까.

"제가, 처리하죠."

인형사가 품에 있던 신비로운 빛을 내는 구슬을 만지작거렸다.

"아뇨, 인형사 형제님께서는 이곳에서 해주셔야 될 일이 있습니다. 시간이 우리 편이 아니라면 더더욱이요."

광명교주가 손짓했다.

똑 닮은 듯한 쌍둥이 남매 두 명이 새하얀 옷을 치렁거리며 다가왔다.

"부탁드립니다 형제님들."

"광명의 뜻대로."

"알았수다."

클레이모어들을 사냥한 전적까지 있는 이 두 남매는 현 광명교의 최고 전력들이다.

"이제 조금입니다. 이 미천한 손이 그분에게 닿기까지. 아주 조금만 남았단 말입니다."

징벌자들을 내보낸 교주는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핵탄두를 만지작거렸다.

"방해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곧 광기에 찬 미소를 지었다.

***

3급 위험종인 겔라폭스도. 끔찍한 정신파를 뿜어내는 어인의 왕도 침묵시켜버린 병기가 불을 뿜었다.

(구)시대의 박격포만큼은 안 되어도 크레딧 버스터는 분명 전율할 정도의 무기였다.

하지만.

콰아아앙!

굉음과 연기의 진노 아래에 있는 것은 멀쩡하게 서 있는 두 남녀였다.

"저 녀석들 체형이 판박이군. 움직임도 뭔가 삐걱거려. 사이킥 계열인가?"

"우리 교단의 무기들을 이런 식으로··· 망자의 부장품에 손을 대는 그 행위! 뻔뻔하기 짝이 없군요!"

태연한 목소리가 퍼져 나간다.

연기가 사그라들자 그들이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드러났다.

사내의 주변으로 딱딱 맞춰서 펼쳐져 있는 투명한 막 때문이었다.

징벌하는 남매의 첫째.

견고한 방패 드위르.

[에스트 방패]

소유자의 주변으로 에스트를 이용한 장막을 만든다.

소유자의 에스트가 충분한 한, 압도적인 충격이 아닌 이상 깨지지 않을 견고한 방패를.

그 능력은 간단하면서도 치명적이다.

그리고.

"징벌하겠습니다!"

둘째.

심판하는 손 드위나르.

단아한 인상의 여자가 손바닥을 펼쳤다.

그 위에 새겨진 기하학적인 문양이 반짝이며 유신에게로 쏘아졌다.

"···"

피하거나 반격할 틈 같은 건 없었다.

저건 애초에 그럴 수 없는 거거든.

반짝.

그리고 이 문양이··· 아니, 낙인이 새겨진 순간.

"징벌!"

드위나르가 휘두른 주먹이 샛노랗게 번쩍였다.

쿵.

"큭!"

유신의 얼굴 근처에서 빛이 터져나갔다.

유신이 난데없이 신음성을 흘리며 비틀거렸다.

두 사람과의 거리는 수십 미터가 넘는데도 말이다.

염병.

이해가 가는가?

저거 가불기다.

낙인이 새겨지는 것도 어지간하면 못 피하고, 새겨진 직후라면 저쪽에서는 이쪽을 마음껏 타격할 수 있다.

"흐으읍."

비록 그것이 능력을 사출하는 데에 시간이 필요하며,

"징벌!"

쾅!

그 타격이라는 게 사람을 한 번에 죽일 정도는 아니어도 말이다.

"···"

유신의 입가에서 주르륵 핏물이 흘렀다.

저건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창과 방패.

방호능력에 극도로 치중한 채 이쪽을 마음껏 찔러대는 공방일체다.

도주와 모략에 특화된 광명교와 딱 맞는 능력이기도 하지.

딱.

이에 대응하기 위해 유신이 손가락을 튕겼다.

에스트 인형들은 다시 한 번 방아쇠를 당겨 자욱한 연기를 만들어내더니.

척척!

그 중 한 녀석이 은밀히 달려나갔다.

어인왕이 가라 앉아있던 외부의 바다와 연결되어 있는 블루홀로.

'여기서 통하지 않는다면··· 장막이 없는 곳을 노리면 되지.'

'아니면 그냥 바닥 채로 붕괴시켜서 수장시켜 버린다.'

하지만.

"어딜 하찮은 수작질입니까!"

드위나르의 표식이 그 에스트 인형에게 새겨졌다.

퍽! 곧바로 빛이 반짝이며 에스트 인형이 붕 날아갔다.

고오오오!

잠깐의 틈이었지만.

그 잠깐은 드위르가 블루홀 주변에 자리를 잡는 것.

보호되지 않던 자신들의 아래에 얇은 장막을 하나 더 구축할 정도의 시간은 되었다.

"역시 사이킥 계열이 맞았군요. 느낌이 달라요."

"···"

남매가 이 공간에 처음 들어왔을 때. 동료들이 살해당한 그 시점에서도 그들은 묘하게 침착한 기색을 유지했었다.

아니, 오히려 어리숙하게 질문부터 던졌었지.

그건 페이크였다.

능력자들끼리의 전투에서, 상대가 가진 힘을 먼저 파악하는 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을 이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남아있는 그 탄두. 이곳을 수장시킬 정도로는 한참 부족하군."

일말의 변수마저 차단한 사내 드위르가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징벌!"

쾅! 그러는 동안에도 드위나르의 권능이 유신의 몸을 후려쳤다.

"..."

데이브의 능력으로 신체를 강화하고 있음에도 뼈가 시리고 장기가 파열당할 정도의 강격이다.

아마 맨몸뚱이로 맞았다면 진작에 피를 토하며 쓰러졌겠지.

물론 트롤의 재생력이 있으니 스태미너전으로 가면 밀리지는 않겠지만···

'시간은 결코 내 편이 아니다.'

철컥.

유신은 코트를 젖히며 더블배럴 샷건을 방아쇠를 당겼다.

쾅!

그리고 에스트 인형들한테 무차별 사격 명령을 내렸다.

'죽여라.'

그 답지 않은 방식이었다.

혹은 꽤나 과감한 차선책이었다.

"호오. 압도적인 화력으로 이쪽을 뚫어보시겠다?"

드위르는 전면부의 장막에 에스트를 밀어 넣으며 웃었다.

"글쎄. 아무리 봐도 네 탄환이 떨어지는 게 내 에스트가 고갈되는 것보다 더 빠를 것 같은데."

이건 확신에 가까운 직감이었다.

교단을 노리는 수많은 하이에나들과 컴퍼니의 추격을 뿌리치면서 쌓아올린 하나의 확증이었다.

쾅!

한 발.

쾅!

또 한 발, 그리고 또 한 발.

"참회하십시오!"

물론 유신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이토록 무모한 짓거리를 감행한 이유가 있었다.

그건.

'지금.'

유신은 연결되어 있던 끈 하나에 명령을 내렸다.

부그르르륵

온통 푸르고 검은 세상 속에 파묻혀 있던 존재는 찰칵.

지체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쿵!

"무슨···!"

바닥에서 직격으로 울리는 충격에 드위르가 비틀거렸다.

"분명 세 마리가 맞는데?"

곧 당황한 얼굴로 유신의 뒤편에서 우직하게 방아쇠를 당기고 있던 에스트 인형들을 바라봤다.

"설마? 처음부터 물속에?"

곧 그 전말을 눈치챈다.

"오라버니?!"

정신의 흔들림은 곧 에스트의 흔들림.

순간 방벽이 약해졌다.

"가라."

유신은 세 명의 에스트 인형들을 돌격시켰다.

남은 탄두와 연료인 크레딧을 모두 모아 자살특공 시킬 요량으로.

콰아아앙!

세 명의 인형들이 대폭발을 일으켰다.

"크으윽."

"꺄아악!"

갈라지는 자욱한 연기.

스르릉.

그 사이로 서슬퍼렇게 울리는 검명.

"허억."

칼날은 금이 간 장벽을 꿰뚫은 채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자신의 미간 앞에서 멈춘 태도를 보며 드위르가 식은땀을 흘렸다.

살았다.

절체절명의 순간 방벽의 앞부분에 에스트를 집중시킨 덕분이었다.

그동안 쌓인 전투경험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정도의 테크닉이었다.

"쳇."

유신이 다급히 더블배럴 샷건을 꺼내들었다.

곧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

"징벌!"

드위나르의 능력이 사출되며 유신을 후려쳤다.

"큭."

형편없이 바닥을 구르는 사내를 보면서도 드위르는 전처럼 웃어 보이지 못했다.

'지금 당장 죽여야 한다!'

방금 전에 선보인 한 수로 인해 그는 이미 유신이 극도로 위험하다는 것을 인지한 상태였다.

"드위나르!!! 녀석을 제압해라!"

"아, 알았어요!"

드위나르가 능력을 사출하며 유신의 손을 찍어내렸다.

철컥.

드위르는 품속에서 권총을 꺼내들었다.

바로 지금 같은 상황을 대비 비장의 한 수로 숨겨두고 있던 보험을.

"죽어라."

드위르가 방아쇠를 당기던 그 순간에도 유신의 얼굴은 태연했다.

아니, 오히려.

피식 여유롭게 웃었다.

'뭐지? 왜 웃는···'

탕!

드위르의 불길한 생각은 울려퍼지는 총성과 함께 끊겼다.

공교롭게도 이 총성은 그가 당긴 것이 아니었다.

"어? 오, 오라버니? 오라버···"

탕!

그의 동생인 드위나르 역시 마찬가지.

"커억."

아니, 이 경우에는 아니었다.

조준이 조금 빗나갔는지 여동생 쪽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바닥을 굴렀다.

"어떻게··· 분명···"

죽음이 목전에 들이닥친 순간.

흐린 눈을 한 드위나르가 포착한 것은.

반짝.

천장의 벌어진 틈으로 내밀어진 총구와.

탁.

그 아래에서 기어나오는 에스트 인형이었다.

"처음부터··· 두 마리를···"

의문이 해소된다.

그와 동시에 드위나르가 쥐고 있던 생명의 끈 역시 탁 끊겼다.

광명교주가 자랑하던 집행자들은 차가운 시신이 되어 핏물을 흘렸다.

"후우. 이것 참··· 쉬운 놈이 없다니깐."

유신은 늘 그렇듯 한탄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

한 마리는 바닷속에, 에피의 리볼버를 쥔 다른 한 마리는 천장의 보이지 않는 틈새에.

그리고 나머지 셋은 역으로 잘 보이는 곳에.

보이는 것이 전부일 거라 상대를 맹신하게 만든다.

당황하고, 안간힘을 쓰며 이쪽이 가진 패를 숨긴다.

유신은 이미 이 공간 자체를 자신만의 영역으로 구축한지 오래였다.

전장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그가.

그토록 철두철미한 그가 아무런 대비도 없이 상대를 맞이 했을 리가 없었으니까.

물론 델리아와의 일은 조금 예상외였기는 한데···

"흠흠."

잠시 물기 젖은 눈동자를 떠올리던 유신이 헛기침을 했다.

곧 쓰러진 시신에 손을 가져다 댔다.

[에스트 장벽]

[과도한 능력 흡수!]

[그릇이 넘칩니다!]

[사용자의 선택에 따라 방사능 트롤의 재생력이 사라집니다!]

오랫동안 신세 졌던 카쿨의 능력이 사라진다.

꾸욱.

그 공허함을 맥동하는 다른 신비가 채운다.

유신은 주먹을 쥐며 내면을 타고 흐르는 새로운 힘을 느꼈다.

'재생력을 잃어버린 것은 뼈 아프지만···'

이걸로 됐다.

이 능력만 있다면 인형사의 그 까다로운 권능에 대항할 수 있다.

'후일을 생각하면 패턴을 좀 바꾸는 게 좋겠지.'

유신은 즉석에서 장벽의 양식과 색을 조정했다.

마치 드위르의 것이 아니라 다른 방호 능력인 것처럼.

물론 야전에서 이렇게 손쉽게 행할 수 있는 작업은 아니었지만···

유신에게는 별것 아니었다.

이 육체에 내재된 재능은 그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으니.

능력을 조정한 유신의 시선은 이제 드위나르의 시체로 향했다.

"쯧."

그가 혀를 찼다.

'저것도 챙길 수 있다면 좋은데···'

손끝에 상처만 나도 신경 쓰이는 게 사람의 심리.

드위나르의 징벌의 심판은 분명 훌륭한 비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내 상황에서 뺄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에스트 인형, 데이브의 신체강화, 칼잡이의 정제되지 못한 검술.

무엇하나 인형사와의 결전에서 없어선 안 될 능력이 없다.

게다가 저 능력에는 치명적인 결점이 하나 있다.

바로 본신이 가진 순수한 육체의 힘만 적용받는다는 것.

즉 육체강화 능력이 없다면 약골에 불과할 뿐인 유신으로서는 그림의 떡이란 이야기다.

스으윽.

이제는 금이 쩍 간 태도를 주워든다.

드위르가 남긴 권총과 탄약을 입수하는 것도 까먹지 않는다.

"···"

유신은 죽은 두 남매를 바라봤다.

곧 무슨 변덕이 들었는지 부릅 뜨여진 그들의 눈을 감겨주었다.

모니터 밖 이방인의 머릿속에서 한 가지 이야기가 지나간다.

이 비정한 황야의 모래먼지 속.

부모를 잃은 두 남매는 광명교주에게 키워졌고, 여동생 쪽은 교주에게 깊은 부정을 느끼며 그의 충실한 수족이 됐다.

오빠 쪽은 이 단체가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드위나르의 맹목적인 추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협조한다.

저 남매의 뒤에는 이런 속사정이 있었다.

그리고 멸세생의 스토리 중에는 이 남매를 설득해 동료로 맞이하는 루트도 분명히 있었다. 동료가 된 그들은 꽤나 괜찮은 친구들이었지.

하지만···

'너무 어려운 길이지.'

늘상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게 더 어렵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유신이 택할 수 있는 방법도 아니다.

그에게는 강력한 권능이 서린 특전도, 꼼수를 써서 키운 강력한 캐릭터도 없었으니까. 난 그저···

"모니터 속 이방인일 뿐이니까."

유신은 고요히 걸음을 옮겼다.

이 엿 같은 시나리오의 종착지를 향해.

***

"폭발의 범위가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타이머는 어떻게 맞춰야 할까요?"

"그건···"

문 밖에서 미약하게 새어나오는 빛.

그리고 축제라도 일어난 듯 왁자지껄한 소음.

도무지 핵폭탄을 터트릴 거라고는 생각도 되지 않는 어조들이다.

그야말로 기습하기에도 최적의 요건이다.

하지만.

'인형사라면 곧바로 반응할 거다.'

그 정도의 강자다.

그 정도의 괴물이다.

유신은 초조함을 억누르며 타이밍을 쟀다.

어떻게 하면 찰나의 틈을 비집고 변수를 최대한 줄일 수 있을지 생각한다.

30초.

1분.

5분.

지근거리의 핵탄두를 뒤로한 채.

천금같은 시간의 흐름을 뒤로한 채.

인내하며 기다린다.

마치 포식자가 발톱을 드러내며 사냥을 준비하듯.

"어어! 교, 교주님! 이게 왜···!"

'지금!'

유신은 곧바로 문고리를 돌렸다.

제일 먼저 경배를 위해 마련된 단상과 붉은 차양막.

(☢)밝은 조명아래 나열된 수십 개의 탄두들이 보인다.

그리고 다른 한쪽.

실험실 내부에는 법복을 입은 이 시대의 공학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침입자가 태연하게 자신들의 심장까지 발을 들이밀었는데도 말이다.

"이쪽으로!"

"조심해! 한 분이라도 손상되면 안 된다!"

놀랍게도 아무도.

오직.

"기기긱?"

새하얀 그 공간 속에서 홀로 이질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여인.

마치 구체관절 인형처럼 생긴 소름 끼치는 여자만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유신을 바라볼 뿐이다.

인형사.

이 망가진 세상의 최고 권력자이자 무력집단인 그 컴퍼니조차 토벌에 애를 먹고있다는 최흉의 범죄자 집단.

노스트라의 전 멤버.

현 A급 수배자.

별다른 숭고하거나 특별한 목적도 없이, 그저 인류의 혼란과 말살이라는 대의만을 내걸고 있는 자.

"그토록, 자신만만, 하더니."

조립된 턱관절이 조소를 머금었다.

이 공간 속에서 오직 그녀만이 유신의 침입에 곧바로 반응해왔다.

인형사가 쥐고있던 구슬을 휙 던졌다.

곧 그 구슬들은 세 개로 분열하며 섬뜩한 빛을 머금었다.

번쩍!

지이이잉!

뿜어져 나오는 빛더미들.

그 파괴의 세례는 막 크레딧 버스터를 조준하는 에스트 인형들도.

더블배럴 샷건을 꺼내든 유신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매서운 속도로 날아들었다.

툭, 투두두둑.

불똥과 함께 포신이 잘려나간다.

그 매끄러운 단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는 이를 쥐고있던 유신과 에스트 인형들 역시 마찬가지.

웬만한 공격에는 내성을 겸비한 저 맹목적인 군단이, 저 하늘거리는 인형의 손짓 한 번에 무력화 당한 것이다.

"하찮은,"

콧방귀를 뀌던 인형사의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쓰러진 줄 알았던 유신이 움찔거리더니 곧바로 자리를 박찼기 때문이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크레딧 버스터.

아마 지금 같은 상황을 대비 한 대를 몰래 숨겨두고 있었던 모양.

"호, 오."

인형사는 사내의 몸놀림과 노련함에 감탄했다.

그리고 그 용기와 만용에 경의를 표하며 에스트를 집중했다.

저 총탄이 아무리 빨라도 자신의 손에 들린 이 유물보다 빠를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철컥.

사내가 노리던 것은 애초부터 이쪽도.

그렇다고 교주도 아니었다.

막 인형사를 조준하던 유신이 냅다 몸을 돌렸다.

그 묵직한 총구가 향하는 곳은···

수중기지의 한 쪽에 크게 나있는 강화 유리였다.

콰아아앙!

"뭐, 뭐야?! 무슨 일이야?!"

"기긱?"

'어디 물장구 한 번 쳐보자고.'

태연하게 미친 짓거리를 벌인 유신이 피식 웃었다.

쿠르르르르!

몰아치는 파도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인형사 (유료시작) >

이 해저기지는 수심 수백미터 아래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들이닥치는 수압 역시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콰아아아아!

울려퍼지는 소리가 마치 천둥이 치는 듯하다.

대자연의 분노가 인간들이 이룩한 하찮은 것들을 게걸스럽게 먹어 삼켰다.

그것도. 아주 압도적인 기세로.

"이, 이게 무슨···!"

당황하던 교주의 시선이 유신 쪽을 향했다.

'징벌자들이 이렇게 빨리 당할 줄이야!'

자식처럼 기르던 드위르 남매에 대한 애도는 없다.

그저 교주의 시선은 파도에 휩쓸리는 실험동 내부와 그 끝에 존재하는 핵탄두를 뚫어져라 주시했다.

"마, 막아아아아! 신을 지켜라!"

눈을 부릅뜬 교주의 손에서 샛노란 광명이 피어났다.

여기서 사출된 빛으로 된 십자가가 깨진 창을 틀어막았다.

"크으윽!"

대단한 능력이며 의지였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다.

쩍, 콰장창!

한 번 균열이 생긴 장벽은 더 이상 그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으니까.

오히려 종양처럼 퍼지고 깨져나가며 점점 더 그 영역을 넓혀나가기 시작했으니까.

물론.

"으아아아아!"

"광명이시여!"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약간의 시간 정도는 벌 수 있었으니까.

바닷물에 흠뻑 적셔진 신도들은 본인들이 수장될 위기에 처했음에도, 그토록 믿고 따르는 수백 킬로그램 짜리 신을 지키려고 했다.

결국.

유신의 한 수로 인해 싸움의 양상이 바뀌었다.

이 전장은 이제 시간제한이 걸린 데스게임이 되었다.

자.

과연 침몰하는 배 속에서 탈출할 사람은 누구인가?

누가 먼저 목표를 달성할 것인가?

"전력의 부족을 인지, 주변, 환경을 말미암아, 판을 완전히, 뒤엎겠다?"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도 인형사는 자신이 내릴 수 있는 최적의 판단을 했다.

우선 자신의 계획을 망치고 있는 저 침입자부터 완전히 배제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번쩍!

신비로운 빛을 뿜어내는 구슬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다시금 지르르 울리며 파괴스러운 빛을 사출할 준비를 했다.

그 순간.

인형사가 우뚝 행동을 멈췄다.

고오오오오

유신의 손에 들린 번쩍이고 있는 목걸이를 알아봤기 때문이다.

'탐욕의 에스트병.'

한 번에 한해 능력자의 능력을 담을 수 있는 유물.

'푸른 색깔을 띄고 있다··· 저 안에 담긴 능력의 성질 역시 이와 연관이 있을 터.'

이쪽이 공격을 감행하는 순간 저 유물 역시 발동될 것이다.

공교로울 정도로 딱딱 맞아 떨어지는 타이밍이었다.

그렇기에.

인형사는 생각한다.

저 녀석은 이쪽과의 전력차를 파악하자마자, 곧바로 자신의 목숨을 판돈 삼아 이 판을 뒤엎을 만큼 영악하며 저돌적이다.

그런 녀석이 지금 같은 상황에 저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즉. 나를 한 번에 제압할 정도로 강력한 능력이···

'저 안에 담겨있다고 봐야 한다.'

인형사는 물에 흠뻑 젖어있는 자신의 몸뚱이를 떠올렸다.

그곳에서 곧 몇 가지의 가능성을 띄워낸다.

'벼락 혹은 냉기.'

아니면 그것마저 페이크일 수도 있겠지.

뭐가 됐든.

"뜻대로, 놔둘 순 없지."

인형사는 흉악한 범죄자였지만 동시에 노련한 도망자였으며 능력자였다.

유신과의 대치가 이루어진 그 찰나의 순간.

그녀는 유신이 노리는 바를 정확히 간파해냈다.

그렇기에.

스윽.

인형사 역시 이 상황을 뒤엎으려고 한다.

바로 이 몸뚱이에 새겨져 있는 특별한 능력을 이용하여.

[악몽의 나락]

인형사가 양손을 모으며 에스트를 끌어올렸다.

콰직.

공간이 일그러지며 세상이 뒤틀렸다.

그 틈으로 퍼져 나가는 요사스러운 빛.

이에 삼켜진 두 사람의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변이.

강화.

원소.

사이킥.

대부분의 능력자들의 능력은 위 네 개의 범주 안에 들어가 있다.

각각의 장단점이 있으며 서로 간에 상성 역시도 존재한다.

하지만.

극히 드물게도 위 네 가지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능력도 있었는데.

그건 바로 이공간 계열이다.

기상천외한 능력들 중에서도 꽤나 특별하며.

이질적이고.

까다롭지.

"···"

물컹.

알록달록한 색감을 가진 매트가 푹신하게 발을 받친다.

그 주변으로는 역시나 오색달록하게 페인트칠 된 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아파트도, 주택도 아니다.

어딘가 현실과 동떨어져 있으면서도 이쁨과 앙증맞음에 치중한 느낌.

그래, 마치 동화 속 인형의 집들 같다.

꺄르르르르!

이를 증명하듯 어디선가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철컥, 철컥.

태엽이 돌아가는 소리가 울리며 굴뚝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빛에 휩싸였던 유신을 맞이한 것은 해저 기지가 아니었다.

전혀 낯선 새로운 공간이었다.

'역시 반응할 줄 알았다.'

그리고 이렇게 나올 것까지도.

유신이 생각하던 순간.

도잉, 도잉.

울리는 요상한 소리.

매트가 기괴할 정도로 요동친다.

맞은편에서 아장거리면서 뭔가가 기어오고 있다.

자세히 보자 저건 아기였다.

에헤헤헤.

턱관절을 달칵거리며 기어오고 있는 꽤나 귀엽게 만든 아기의 인형.

···

아무리 잘 만들었다고 하나 그것도 때와 시기를 가려야 하는 법이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갑자기 저런 게 등장한다면 즐거움 대신 두려움밖에 자아내지 못한다.

하지만.

유신은 냉정하게 인형을 무시했다.

곧바로 뒤에 있는 벽면에 턱 하니 기댄 채 손가락을 튕겼다.

[에스트 방벽]

그의 주변으로 투명한 장막이 생겨난다.

직후.

지이이잉!

유신의 시선이 닿지 않는 사각에서 빛이 번뜩였다.

방금 전 인형사가 다루던 그 파괴적이면서도 재빠른 빛이.

카가각.

에스트 인형도 크레딧 버스터도 갈라버린 그 빛은 이 장막을 꿰뚫지는 못했다.

그저 거울에 반사되듯 허무하게 틀어막혔다.

휘유.

'효과 좋고.'

유신이 속으로 휘파람을 불던 그때.

"감이, 좋군."

근처에 있던 집의 창문이 열리며 인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생각했다.

'까다롭군.'

난대없이 떨어진 낯선 공간.

그리고 눈앞에서 튀어나온 적의 술수일지도 모를 꺼림칙한 무언가.

대다수의 능력자들은 눈앞의 상황에 정신이 가기 마련이었다.

미약하게라도.

하지만 저 사내는 이를 간파 오히려 후방을 점유하며 방어 태세에 나섰다.

마치 수가 읽히는 기분이었다.

"조작에 이어, 보호, 능력이라···"

"두 개의, 능력을, 다루다니, 조커급인가?"

인형사의 모습은 꽤나 바뀌어져 있었다.

방금 전에 보던 복장이 아닌 귀여운 프릴이 달린 드레스를 입었기 때문.

물론 그래 봤자 움직이는 구체관절 인형처럼 생겼다.

거기다가 저 감정이라고는 담기지 않은 저 목소리.

꺼림칙할 뿐이다.

유신은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왜 그걸 말해줘야 하지?"

"그야, 넌 이제 곧, 죽을 테니까?"

딱.

인형사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녀의 주변으로 둥둥 떠다니던 세 개의 구슬들이 유신의 앞으로 날아들었다.

곧 부르르 떨리더니 지이이잉!

빛을 뿜으며 그의 장벽을 강타하기 시작했다.

마치 용접을 시작하듯이.

치이이익!

투명한 장벽이 녹아내린다.

불과 손가락 반 뼘을 차이에 두고 죽음이 이빨을 날름거린다.

하지만 유신은 당황하지 않았다.

정신의 흔들림은 곧 에스트의 흔들림.

'나는 안전하다. 적어도 내 주변을 둘러싼 이 공간만은 완벽히 나의 통제 안에 있다.'

단호하게 믿으며 정신을 집중한다.

그러자.

순식간에 에스트 방벽이 수복되었다.

"···"

인형사는 입을 다물었고, 유신의 웃음은 진해졌다.

"지금 상황을 보고도 여전히 자신만만한가 보지?"

일반적으로 방호 능력은 능력의 그 고등함도 영향을 받지만 소유자의 에스트의 질과 양, 정신력의 영향도 받는다.

즉 지금의 상황은 유신에게 내재된 힘과 재능이 인형사의 공격을 튕겨낼 정도로 뛰어나단 것이었다. 당연히 드위르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그래, 이걸론··· 안 되겠군."

인형사는 순순히 사실을 인정했다.

자신의 손에 들린 이 무구는 애초부터 범용성만을 생각하며 가지고 온 것이었으니.

"하지, 만."

인형사는 손가락을 튕기며 제 무기를 회수했다.

"이건, 어떨까?"

곧바로 에스트를 끌어올리며 능력을 조율하기 시작했다.

끼아아아악!

순간 어디선가 끔찍한 비명이 들려온다.

밝고 화창하던 푸른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든다.

"끼이이이익!"

기어오던 아기 인형의 머리가 쩍 갈라더니. 자글자글 주름진 뇌의 단면을 드러낸다.

끝이 아니었다.

오-오오오오!

한 쪽 눈이 빠지거나 사지 어디가 절단된 인형들.

쿵! 쿵!

주변에 있던 집의 문이 열리며 마치 거인과 비슷한 크기를 가진 흉악한 인형들이 쇠파이프나 피 묻은 도끼 등을 들고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곳은, 나의 영역, 영원히 깨지 못하는, 악몽의, 나락."

군단을 등에 업은 저 기괴한 외양의 여인은.

"이 안으로 들어온, 이상."

"너는 이미, 죽어있다."

덤덤하게 유신의 죽음을 선고하며 명령을 내린다.

죽이라고.

끄아아아악!

순식간에 뒤바뀐 분위기.

맹목적으로 상대의 죽음만을 바라며 질주하는 광기의 인형들.

그 아비규환의 상황 속에서도 유신은 침착했다.

그건 그가 새로 얻은 이 능력과 몸뚱이에 내재된 재능만을 믿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건···

'사기 치고 있네. 엿같은 년··· 아니, 놈이.'

바로 이 능력의 비밀과 파훼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악몽의 나락]

인형사가 가진 저 이공간 계열 능력은.

영역에 들어온 존재가 동요하거나 공포에 질리는 순간 발동된다.

그 때 마다 피식자의 에스트를 흡수.

저 환상들이 물리력을 가지게 되거든.

즉.

'쫄지마. 쫄지마.'

겁먹지만 않으면 된다.

이건 인내와의 싸움이다.

"···"

유신은 웃었고.

"끼릭."

인형사 역시도 웃었다.

능력자들간의 대결에서 굳이 상대와 칼을 맞대고 분쇄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

공간에 들어온 자로 하여금 특정한 룰을 강요하거나 소유자에게 특별한 권능을 주는 아공간 계열. 그런 전율적인 능력에도 당연히 단점들은 있었다.

우선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고 특별한 룰을 강요하는 만큼 에스트의 소모가 극심하다.

이를 한 번 사용할 정도면 웬만한 능력들을 수십, 수 백번은 쓸 수 있을 정도.

그리고···

능력에 대한 비밀이 파헤쳐진 순간 위의 모든 장점들은 그 효과가 철저하게 반감된다.

'어떻게···'

전 노스트라의 멤버이자 A급 수배자인 인형사는 지금 당황하고 있었다.

쾅!쾅!쾅!

끄아아아아악!

군단은 분명 자신의 통제하에 있었고, 지금도 맹렬하게 저 미물을 짓밟아대고 있었다. 하지만 저 미약한 사내는 조금의 당황도, 공포도 내보이지 않았다.

투명한 막 아래에서.

"그 정도냐?"

여유롭게 손까지 흔들어 보였다.

1분.

5분.

10분.

시간은 계속 흐른다.

그럴수록 인형사의 내면은 고갈되어 갔고 구축한 세계는 불안정해졌다.

결국···

딱.

인형사가 손가락을 튕기자 환상 속의 군단이 사라졌다.

쿠르르르

뒤이어 세상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 빛더미가 이뤄내는 괴리 속에서 그녀가 허탈하게 말했다.

"이번 싸움은, 내가 졌군."

이곳은 시공간이 뒤틀린 장소.

당연히 이곳에서 흐른 시간은 현세에 영향을 거의 미치지 않는다.

즉 귀환했을 때라면 유신은 비장의 한 수를 쥐고 있는 상태 그대로이며.

자신은 에스트가 고갈된 껍데기 상태다.

인형사는 생각했다.

'처음부터 능력을 쓰지 않고 그냥 싸웠더라면?'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래, 그랬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때의 내 상황에서는 그게 최선의 판단이었다. 변수는 오직 하나.'

'저 녀석은 내 능력을 알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나는 놈에 대해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

능력자들간의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능력의 강대함도, 에스트의 질과 양도 아니다.

상대의 패를 누가 먼저 읽을 수 있느냐. 이를 이용해 누가 먼저 더 견고하게 판을 짤 수 있느냐다.

인형사는 덤덤하게 패배를 시인했다.

그리고 후일을 기약하고자 한다.

"나름, 잘 숨겼다고 했는데,"

"컴퍼니의 추격이 여기까지, 닿았는가?"

저건 단순한 정찰병이 아니었다.

자신의 능력을 파악.

정확하게 카운터를 칠 수 있는 히트맨이었다.

그 덕택에 공들여온 이번 계획은 완전히···

끝났다.

인형사는 유신이 컴퍼니 소속의 클레이모어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의 정체가 실은 모니터 밖의 예언자라는 사실을 몰랐다.

"너, 이름이 뭐지?"

그렇기에.

"에바그린이다."

유신의 답 역시 정해져 있다.

"에바, 그린? 철의, 마녀···?"

인형사는 유신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약간 꼬아 유신의 뒤에 아이언 나이트가 배경으로 있다고 받아들였다.

"이거 거물이··· 영광, 이군."

인형의 덤덤한 웃음과 함께 세상이 깨어졌다.

콰아아아아아!

두 사람을 다시금 맞이한 것은 침몰하고 있는 해저 기지였다.

"기리릭."

패배를 예감했으나 가만히 앉아서 당해주지는 않는다.

운명은 언제나 포기하지 않는 자가 쟁취하는 것이니.

인형사는 다시금 세 개의 구슬을 띄워 보였다.

하지만.

지잉, 지잉···

에스트가 고갈된 그녀에게 더는 이 유물을 다룰 힘 같은 건 없었다.

그렇기에.

[신비술사의 법칙을 뒤흔드는 냉기] x 1

유신은 쥐고 있던 메이지의 선물을 지체없이 터트릴 수 있었다.

사아아아아

서릿발 같은 냉기가 퍼져 나간다.

이에 공명하듯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든다.

···

"후우."

모든 것이 얼어붙어 버린 세상.

뼛속까지 시리는 한기를 뒤로한 채 유신이 입김을 뿜었다.

철컥.

더블배럴 샷건의 총구가 향하는 곳에는 미려하게 조각된 인형이 있었다.

한 쪽 팔을 뻗은 채.

이쪽을 뚫어져라 주시하며.

아주 하얗게.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다.

마치···

인형처럼.

쾅!

유신은 자비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 강탈과 탈출 >

콰장창.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인형사의 머리통 일부가 날아갔다.

아무리 냉각 상태라고는 하나 믿기지 않을 정도의 내구도였다.

곧 그 이유가 드러났다.

치지직.

단면 아래에서 연기를 피워올리는 것은 강철로 휩싸인 뇌였다.

사이보그? 기계?

애초에 저것은 순수한 인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끼기긱.

속박이 풀리자 인형사의 감정 없는 눈동자가 유신을 주목한다.

철컥. 느닷없이 조립된 입이 열리며 시커먼 총구가 튀어나왔다.

저건 인형사의 마지막 발악이자 치명적인 비수였다.

수 없이 벌어졌던 수 싸움.

결정적인 순간에 거머쥐게 된 승리.

그 어떤 전사라도 아주 약간은 마음을 놓을 수 밖에 없는 상황.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

유신의 목숨을 거둬가기 위한, 이 판을 뒤엎기 위한 비수.

하지만.

번쩍.

그 순간 유신의 태도가 번뜩였다.

덜렁거리던 인형사의 목이 하늘로 치솟았다.

탕!

허무하게 허공을 가르는 총소리.

버티다 못해 산산이 조각난 태도.

유신은 그녀의 마지막 안배조차 꿰뚫고 있었다.

'기껏 여기까지 왔다가 저 짓거리에 뒤진 게 얼마나 많은데···'

"후우."

콰아아아아!

그 잠깐 사이.

차오르던 물은 어느새 가슴께까지 잠길 정도가 되었다.

광명교도들은 얼어붙어 있더나 수장되어 둥둥 떠다니거나 몇몇은 이 자리를 벗어났다.

제일 중요한 교주는···

보이지 않는다.

'핵탄두도 몇 개 사라졌다.'

유신은 혀를 찼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더 지체한다면 자신 역시 같은 꼴이 될 것이다.

그 전에 후환이 될 교주를 죽이고 델리아를 데리고 탈출해야 한다.

단···

[악몽의 나락]

[과도한 능력 흡수!]

[그릇이 넘칩니다!]

[사용자의 선택에 따라 살인귀의 정제되지 못한 검술이 사라집니다!]

아쉽다는 눈으로 손잡이만 남은 검을 휙 던지는 유신의 내면에 새로운 힘이 깃든다.

부산물이 만들어낸 환상 속의 여인은 몸에 딱 맞는 정장을 입은 채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후후후후.

자신이 만들어낸 영역 안에서 발버둥치는 피식자들을 내려다보면서.

공교롭게도 그 여자는 지금 죽어있는 인형사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드디어 손에 넣었다.'

유신이 눈을 반짝였다.

이공간 계열 능력은 희귀하면서도 강력하다.

사이킥 계열인 브루노의 능력이 유신의 전술의 폭에 큰 도움을 줬듯.

앞으로 이 능력 역시 유신의 충실한 손발이 되어주리라.

그리고···

찰팍.

끝이 아니었다.

유신은 물 위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는 얼어붙은 구슬을 건졌다.

[파라오의 눈]

이라는 유물이다. 인형사가 다루던 무기로서 그 효능은 전에 봤던 것과 같다.

소지자의 에스트를 소모해 광선처럼 사출해낸다.

거리가 멀어지면 위력이 약해지며, 일정한 강도의 장갑에는 막힐 정도로 한계가 있지만···

'빠르며 공중에서도 조종이 가능하기에 범용성이 좋지.'

사람은 어차피 작은 바늘 하나로도 죽는다.

이 정도 성능을 가진 유물이라면 크레딧을 주고도 못 구하는 귀물이다.

"이쪽에서 잘 써주지."

이제는 들리지 않을 말을 내뱉으며 유신은 망자의 유품을 갈취했다.

콰아아아아!

곧 가라앉고 있는 핵탄두들을 뒤로한 채 물살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