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던전 테러(3)
38. 던전 테러(3)
"어디서 자꾸 돼지새끼 멱따는 소리가 들려?"
손가락으로 귀를 후빈 강현이 바람을 불었다.
"후우~"
덩치의 표정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죽여!"
돼지가 난폭하게 외치자 사방에서 악당들이 달려들었다.
강현은 태연하게 그것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공격을 피했다.
-부웅!
"이익, 왜 안 맞아?!"
"미친놈아! 눈 똑바로 안 떠?!"
손쉽게 모든 공격을 피하는 강현.
다급해진 놈들은 무리하게 무기를 휘둘렀다.
그러다 보니 좁은 공간에서 동선이 얽히며 서로가 서로를 방해하는 꼴이 됐다.
"네들 뭐하냐."
악당들에게 다가간 강현이 손바닥으로 한 놈의 싸대기를 후려갈겼다.
-짜악!
뺨을 맞은 놈이 공중에서 세 바퀴를 돌아 바닥에 쓰러졌다.
"바, 방심하지 마! 보통이 아니다."
"모두 침착해."
강현이 예사롭지 않은 실력을 가졌다는 것을 알자 악당들의 태도가 돌변했다.
"오호..."
그 모습을 보고 강현이 작게 감탄했다.
'확실히 지금까지 만난의 어중이떠중이들이랑은 조금 다르네.'
방금 전의 경솔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금세 자리를 찾는 모습.
과연 최상위의 D등급 던전을 공략하는 능력자들다웠다.
게다가 바닥에 쓰러졌던 놈도 어느새 뺨을 부여잡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퉤!"
놈이 침을 뱉자 그 속에서 피와 함께 하얀 무언가가 떨어져 나왔다.
"네놈. 절대 그냥은 안 죽인다!"
"그냥 안 죽이면 어쩔 건데?"
강현의 말에 뺨을 맞은 남자의 눈이 치켜떠졌다.
"살가죽을 전부 벗기고 이빨을 전부 뽑아버려서 다시는 그딴 재…!"
**
"뭐라고?"
"재성함니드아..."
붓기로 인해 뺨이 호X맨처럼 부풀어 오른 놈이 중얼거렸다.
"뭐?"
"죄애...죄애승…."
-짜악!
무언가를 말하려는 놈의 뺨을 강현이 인정사정없이 후려쳤다.
"왜 자꾸 앵앵거리는 거야? 짜증나게."
손바닥을 털며 강현이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엔트리아의 외피 스킬의 사용처를 깨달았다.'
건틀릿으로 뺨을 후려치자니 손맛이 덜하다.
그렇다고 맨손으로 치기엔 위력이 아쉽다.
고민하던 강현이 엔트리아의 외피를 쓰고 뺨을 후려치자 딱 위력과 손맛의 중간 합의점을 찾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제법 힘들었어."
특히나 처음 강현에게 다가온 돼지는 잡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놈은 고유 스킬이 맷집에 관련된 것인지 뺨 몇 대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뭐,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았지만."
결국 강현은 놈을 바닥에 메다 꼽고 파운딩으로 수십 방을 때리고 나서야 끝장낼 수 있었다.
"후우, 어쨌든 앞으로 더 강해져야겠어. 고작 이런 놈들에게 힘을 빼서야."
사실 처음부터 빌게인의 장검을 꺼냈으면 손쉽게 정리될 사건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강현은 애써 외면했다.
'뭐든지 손맛이 중요하지.'
강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을 때였다.
"감사합니다."
구석에 있던 신성아가 감사 인사를 건네 왔다.
"별거 아니에요. 오랜만에 스트레스도 풀었고."
"저는 신성아라고 합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숨기고 있었다.
강현은 그것을 눈치챘지만 모른 척해주었다.
"강현입니다."
'제법이네.'
강한 여성이란 생각이 들었다.
방금 전에 큰일을 당할 뻔했음에도 침착함을 유지했고, 지금도 결코 약한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
"이 은혜는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신성아가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강현이 손사래를 쳤다.
"됐어요. 은혜는 무슨."
인사를 나눈 후, 다시 길을 가려던 강현이 멈칫했다.
"혼자 나갈 수 있어요?"
"못 나갑니다."
칼같이 떨어지는 대답에 강현이 헛웃음을 삼켰다.
'그럼 보통 도와달라고 하지 않나?'
당장 자신이 떠나려고 하는데도 굳건히 서있는 모습이 영 웃긴 강현이었다.
'어쩌지? 지금 돌아가긴 좀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입구로 돌아가는 건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죽을 것을 뻔히 알면서 여 두고 가기도 찝찝했다.
결국 함께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는데 귀찮은 것은 둘째 치고, 강현은 이 여성을 코어룸까지 살려서 데려갈 자신이 없었다.
"으흠..."
강현이 고민하는 사이 신성아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혹시 던전을 클리어할 생각이십니까?"
"일단 코어룸까지 갈 생각이긴 하죠."
"그러면 제가 그곳까지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위험할 텐데요."
"제 몸 하나 정도는 지킬 수 있습니다. 절대 강현 님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
"강현 님을 죽은 듯이 뒤따르며 마정석만 채취하겠습니다. 물론, 채취한 마정석은 모두 강현 님에게 드리겠습니다."
"호오..."
강현은 신성아의 대답이 퍽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지금 돌아가자 하면 강현에게 폐가 될 것을 우려해서 그저 자신을 따르며 마정석이나 채취하겠다는 말을 한 것이다.
"그럼 그렇게 해요."
강현은 이미 코어 제거로 많은 돈을 벌고 있었다. 때문에 마정석은 어지간히 강력한 놈들의 것이 아니면 채취하지 않고 그대로 둔다.
시간이 아까웠고, 귀찮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성아가 그 일을 대신해 준다면 강현으로써도 딱히 손해 볼 것은 없었다.
"전투가 시작되면 돌봐줄 여유 같은 거 없으니까 알아서 살아남아야 돼요."
"예. 알고 있습니다."
그 후로 신성아는 자신이 내뱉은 말을 철저히 지켰다.
강현이 던전을 돌며 무아지경으로 적을 쓸어버리는 동안, 신성아는 교묘하게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전투가 끝나면 나타나 마정석만 빠르게 채취했다.
'은신에 관련된 스킬이라도 있는 건가...'
게다가 그녀는 가끔 위급한 상황에 강현에게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크르르르..."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주둥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괴망측한 아가리를 가진 놈이 강현에게 달려들었다.
놈은 마치 진드기처럼 빌게인의 장검을 물고 늘어졌다.
강현은 검을 휘둘러 놈을 떨어뜨리려 했지만, 놈은 검을 꽉 문 채로 한사코 떨어지길 거부했다.
"이게 귀찮게!"
단 1초가 아쉬울 정도로 급박한 상황에서 잠깐의 당황은 순식간에 위기로 탈바꿈한다.
"케에엑!"
잠시 놈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뒤쪽에서 날카로운 손톱을 가진 키메라가 강현의 목을 찔러왔다.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강현이 공격을 허용하려는 찰나.
어디선가 날아든 화살이 놈의 뒷목을 꿰뚫었다.
"커헉!"
"깜짝이야!"
뒤에서 들리는 괴성에 깜짝 놀라며 강현이 사체에 박힌 화살을 확인했다.
"땡큐!"
감사 인사를 한 강현은 마침내 검에 달라붙은 놈을 떨어뜨려 냈다.
"이 개새끼가!"
"케겡..."
강현의 발길질에 날아간 놈이 안쓰러운 신음소리를 냈다.
이빨이 박살나 전의를 잃은 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안으로 도망쳤다.
"후우, 이번엔 진짜 위험했네."
과연 D등급 상위권에 위치한 던전이다.
아직 코어룸을 지나치지도 않았는데, 벌써 크고 작은 위기를 수차례 겪었다.
"좀 쉬죠."
강현이 피범벅인 바닥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웠다. 그제야 온몸에 통증이 밀려왔지만 고통은 이제 강현에게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보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마력 고갈.
너무 막무가내로 싸운 탓에 벌써 마력이 바닥났다. 마력폭발은 고사하고 웨인의 비기를 유지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강현은 별 수 없이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그나저나 활을 주무기로 쓰는 사람은 처음이네요."
강현이 쉬고 있는 와중에도 마정석을 채취하던 신성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릴 때부터 활을 배워서 활 하나는 자신 있는 편입니다. 고유 스킬도 운이 좋게 시력에 관련된 것을 각성했죠."
"그런 거 함부로 말해줘도 돼요?"
초기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저마다 고유스킬을 떠벌리고 다녔지만 지금은 아니다.
고유 스킬은 말 그대로 하나뿐인 개인의 스킬. 비장의 한수이다.
때문에 언제부터인가 능력자들은 고유 스킬을 말하기 꺼려했고, 그것을 묻는 것은 굉장한 실례가 되었다.
"생명의 은인에게 무언가를 숨기는 짓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강현은 살짝 닭살이 올라왔지만 내심 만족했다.
'요즘 같은 때에 보기 드문 성격이네.'
강현이 눈을 감고 쉬던 도중 신성아가 말을 걸어왔다.
"강현 님."
"예?"
"뭐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말해요."
"어떻게 그렇게 강한 겁니까?"
강현이 잠시 대답을 고민했다.
"으음... 열심히 했으니까?"
"이런 말을 하긴 그렇지만 저도 누구보다 열심히 해왔다고 자부합니다. 아니, 던전에서의 전투는 생사가 걸렸기에 모두가 열심히 하죠."
"맞는 말이지만, 모든 노력이 다 같지는 않잖아요?"
"..."
"그저 더 열심히 하면 돼요.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아니면 처음부터 잘나게 태어나던가."
사실 죽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강현이기에 할 수 있는 노력이지만, 멍청하게 거기까지 떠벌릴 생각은 없었다.
"느낌이 코어룸에 가까워진 것 같으니까 이번에 좀 푹 쉬고 이동할게요."
"예."
강현의 말에 신성아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던전의 중심 핵(Main Core)이 제거되었습니다]
[외부로 향하는 포탈이 열립니다]
"어? 뭐야?"
갑자기 떠오르는 메시지와 함께 강현의 앞에 포탈이 나타났다.
"지금 이곳을 공략 중인 대형 길드는 없을 텐데..."
신성아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일단 나가서 생각하죠. 던전이 붕괴되면 위험하니까."
"알겠습니다."
**
던전 밖으로 나온 강현.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이었다.
"이게 무슨 난리야?"
강현의 눈앞에는 자신이 아직도 던전 안에 있다고 착각할 정도의 진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죽어!"
"크워어어!"
온갖 종류의 몬스터들이 사방에서 날뛰고 있었다. 그리고 능력자들이 저마다 장비를 꺼내 들고 몬스터들과 맞서 싸웠다.
"일단 정리부터 하고 생각하죠!"
"예!"
강현과 신성아가 난전 속으로 뛰어들었다.
"크하악!"
빌게인의 장검에 닿는 몬스터들이 괴성과 함께 썰려나갔다.
'아직 마력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최대한 아껴야 해.'
강현은 스킬을 사용하지 않고 순전히 본신의 능력만으로 움직였다. 그럼에도 이곳에 있는 어느 능력자보다 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으아악!"
대부분은 E, F등급에서 나온 몬스터들로 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강현이 있던 '데이언스의 연구소'는 사정이 달랐다.
능력자들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강력한 D등급 몬스터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밀려났다.
"키메라한테 덤비지 말고 빠져!"
[분노의 사자후가 발동됩니다]
[모든 적들의 사기와 능력치가 감소했습니다]
강현이 분노의 사자후를 발동했다. 그러자 난전 속에서도 똑똑히 들릴 만큼 거대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뭉쳐서 대형 유지하고 약한 놈들 위주로 잡아요!"
지시를 내린 강현이 직접 뛰어다니며 키메라들을 정리했다.
"키에엑!"
-스걱
붉은색 장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속절없이 몬스터들이 잘려나갔다.
강현의 폭풍 같은 활약으로 금세 상황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저 남자는 뭐야?"
"와, 단군 길드인가?"
제법 여유가 생긴 사람들이 날뛰는 강현을 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후우..."
몬스터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정리되었다.
간혹 던전 보스와 같은 강력한 개체가 나왔지만 문제는 없었다.
이전에도 혼자서 보스를 잡던 강현이다.
거기에 신성아의 보조가 더해지자, 손쉽게 보스까지 처리할 수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마침내 근방에 있던 모든 몬스터들이 정리되고, 안도한 사람들이 강현에게 다가와 감사 인사를 건넸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강현도 웃으며 마주 인사를 했다.
-나는 괜찮아. 뉴스 확인했는데 서울 인근에 던전만 터졌다더라.
아현에게 전화해서 안부를 묻자 다행히 아무런 일도 없었다고 한다.
"이제 정말 한 숨 돌려도 되겠지."
강현은 숨을 고르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주위에는 이제 몬스터의 사체만이 즐비하게 널려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저건 왜 아직 열려있지?"
그때 한 남자가 아직 문이 열려있는 데이언스의 연구소를 보며 말했다.
"시발! 아직 보스가 안 나왔어!"
강현도 워낙 정신이 없던 터라 미처 '데이언스의 연구소' 보스를 생각하지 못했다.
"모두 뒤로 빠져요. 곧 보스가 나올 겁니다!"
강현의 외침에 사람들이 주춤하며 물러났다.
-화악!
그 순간 던전에서 엄청난 양의 키메라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들의 뒤로 갈색의 로브를 입은 리치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리치는 해골이기 때문에 표정을 지을 수 없다. 하지만 강현은 놈의 몸짓에서 흘러넘치는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 무너지는 던전 안에서 키메라들을 모으고 있었던 건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키메라들을 보고 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조졌네...'
아무리 강현이라도 한 번에 저만한 수의 키메라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리치 데이언스]
마침내 걸음을 멈춘 놈이 양팔을 벌리며 고개를 쳐들었다.
-좋군
그것은 귀로 들리는 음성이 아니었다. 마치 언어 그 자체가 머릿속에서 울리는 듯했다.
"뭐야 몬스터가 말을 해?"
언어를 구사하는 몬스터를 처음 마주한 사람들이 동요했다.
"전부 제 말 잘 들어요."
강현의 말에 사람들의 불안한 시선이 모여들었다.
"여러분은 지금부터 최대한 이곳에서 멀어지세요. 그리고 단군이든 연합이든 지원 요청을 하는 겁니다."
도망치라는 강현의 말에 신성아가 반발했다.
"안됩니다. 강현 님을 버리고 가란 말입니까?"
"여기서 저기 있는 키메라 한 마리라도 상대할 수 있는 사람 있습니까? 방해하지 말고 사라지는 게 도움이에요."
부정할 수 없는 말에 사람들이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길지 않은 전투였지만 이들은 모두 강현에게 도움을 받아 살아남았다. 그런데도 강현이 홀로 남겠다고 말하니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저희도 남아서 싸우겠습니다."
"당신들은 도움도 안 된다고! 그러니까 얼른 가!"
키메라들이 움찔하는 것을 본 강현이 다급하게 외쳤다.
당장이라도 놈들이 달려와 학살극을 벌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씨발! 그냥 꺼지라면 꺼져! 어서!"
강현의 입에서 거친 말이 터져 나오자 비로소 사람들이 몸을 돌려 달려갔다.
-누가 보내준다는 것이냐.
그때 리치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모든 키메라들이 일제히 달리기 시작했다.
놈들을 보며 강현이 웨인의 비기와 거인의 힘을 활성화했다.
"참나, 이게 뭐하는 짓인지..."
같잖은 영웅이 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자신은 선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선자는 더욱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이렇게 하고 싶었다.
"어차피 나는 다시 살아난다. 그러니까... 제대로 한번 놀아 보자."
각오를 마친 강현이 인벤토리에서 우르그의 거대 망치를 꺼내 들었다.
"어딜 가려고! 잡것들아!"
[분노의 사자후가 발동됩니다]
스킬을 사용한 강현이 망치를 전력으로 휘둘렀다. 평소와 달리 육체의 부하를 생각하지 않은 혼신의 일격이었다.
-콰아아앙!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굉음과 함께 단번에 콘크리트 바닥이 박살나며 흙먼지가 비산했다.
그 기세에 키메라들이 주춤했다.
"거기 해골 빠박이."
강현의 부름에 리치가 지긋이 응시했다.
"이런 잡놈들 치우고 화끈하게 대장전 어때?"
순간 표정이 없는 리치에게서 어이없음이 느껴졌다.
-거절한다.
"기대도 안 했다 새끼야. 퉤! 다 들어와!"
39화 던전 테러(4)
39. 던전 테러(4)
"연합장님! 큰일입니다!"
서울 근교에 위치한 던전 수십 개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는 대참사.
처음 사태가 벌어졌을 때 최동우는 밀린 서류 업무를 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몬스터 웨이브입니다!"
훗날 '제3의 몬스터 웨이브'라 불리는 이번 사태는 앞선 두 번의 웨이브와 명백히 다른 점이 있다.
바로 누군가의 고의로 발생했다는 것이다.
"몬스터 웨이브라니?"
"서울 근교에 위치한 수많은 던전들의 문이 개방됐습니다."
"뭐..?"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현재 실시간으로 거리에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당장 직속 연합원을 모두 소집하게! 나도 바로 나가도록 하지."
"예!"
던전을 여는 방법은 간단하다
보스를 무시한 채로 메인 코어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면 던전에 남아 있던 몬스터들은 붕괴되는 던전에서 살아남기 위해 외부로 향하는 포탈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연합원들을 이끌고 현장에 도착한 최동우가 슬픈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즐비해있는 시체들.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 나왔건만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몬스터들에게 희생당한 뒤였다.
"남은 사람들이라도 구해야 한다! 서둘러라!"
"예!"
수백 명의 능력자들을 이끌고 최동우는 가장 앞장서서 몬스터를 도륙했다.
어떠한 것이든지 그의 앞을 막아서는 것들은 단숨에 쪼개지고, 꿰뚫렸다.
"크엨!"
-콰아아앙!
단순한 전투의 반복.
능력자 연합은 무려 두 시간 동안 치열하게 싸운 끝에 한 지역에서 몬스터를 몰아낼 수 있었다.
"연합장님. 여기는 이제 정리된 것 같습니다."
"후우, 다음은 어디지?"
잠시의 휴식도 갖지 않고, 최동우는 곧장 다음 목적지를 물었다.
"예. 이제 앞으로…."
"연합장님!"
그때였다.
다음 행선지를 설명하는 지부장의 말을 끊고 누군가가 다급히 달려왔다.
달려온 여성은 급하게 뛰어온 것인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연합장님. 지원 요청입니다!"
"자네 어디 지부 소속인가?! 지금 지원 요청 온 곳이 한두 군데야?"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에 도움이 필요한 곳은 넘쳐났다.
그렇지 않아도 바쁜 상황에 불필요한 보고를 하는 여성을 지부장이 아니꼽게 바라봤다.
"저, 그게 워낙 중요한 일이라..."
"신경 쓰지 말고 말해보게."
최동우가 나서서 말하자 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언스의 연구소 문이 열렸다고 합니다. 많은 능력자들의 지원 요청이 있었습니다."
"으음..."
데이언스의 연구소라는 이름에 최동우가 신음성을 삼켰다.
'그곳을 남겨두는 게 아니었는데...'
부하들이 큰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하여 공략을 미루던 던전이었다.
'결국 이런 식으로 돌아오는군.'
사실 굳이 그것을 최동우가 공략을 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최동우는 이 사태가 자신의 잘못인 것처럼 죄책감이 들었다.
"내가 직접 가겠다. 너희들은 예정대로 다음 장소로 이동해서 시민들을 구하도록."
"안됩니다. 만약에라도…."
혹여 최동우가 위험에 처할까 걱정한 지부장이 말리려 했지만, 최동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만. 반론은 듣지 않겠다. 함께할 정예 50명을 선발해 주게."
"알겠습니다..."
비장함이 감도는 표정.
지부장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
"푸후!"
강현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핏물을 토해냈다.
"씨벌,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네."
지금까지 몇 마리나 베어냈는지 모르겠다.
강현의 근처에는 키메라뿐만 아니라 온갖 종류의 사체들이 끔찍하게 널려 있었다.
-포기해라.
"원래 그딴 말 씨불이면 주인공 각성 순서인 거 모르냐?"
머리를 울리는 리치의 말에 강현이 끌끌거리며 웃었다.
-실성했군.
"실성은 지랄. 너는 보스라는 놈이 뒤에서 입만 나불거리고, 쪽팔리지도… 쿨럭!"
시간을 끌기 위해 말을 하던 강현이 재차 핏물을 토해냈다.
'마력이 바닥이야. 육체 재생도 이제 한계인가...'
정말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금 즐거운 것 같기도 했다.
'제법 보람찬 죽음이잖아.'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다. 몬스터도 오랜만에 원 없이 베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지가 잘린 채로 널브러진 몬스터의 사체가 적어도 200구는 넘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말하겠다.
"뭐?"
-저항하지 말고 내 부하라 돼라. 그럼 목숨은 살려주지.
"오오..."
관대한 리치의 말에 강현이 씨익 웃었다.
"X까."
[정신 지배에 저항합니다]
전투 초반부터 계속되던 스킬이 또다시 강현을 공격했다.
정신 지배는 리치가 서로 다른 종류의 몬스터를 규합한 비장의 한 수. 그러나 강현에게는 튜토리얼에서 받은 강인한 정신의 반지가 있었다.
이름 : 강인한 정신의 반지
등급 : B
내구도 : 100/100
능력 : 착용자에게 A등급 이하의 모든 정신 관련 마법, 상태 이상에 면역을 부여한다.
이것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강현도 몬스터와 함께 다른 사람들을 습격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멍청한 놈. 죽어라.
마지막까지 강현에게 마법이 통하지 않자 리치가 최후의 공격을 명령했다.
가볍게 휘두른 리치의 손짓에 남아있는 모든 몬스터가 한꺼번에 밀어닥쳤다.
"으아아아!"
[분노의 사자후가 발동됩니다]
강현도 마지막 힘을 짜내 고함을 내지르며 마주 달려 나갔다.
-콰아아아앙!
그때 갑자기 강현의 앞에 무언가가 떨어지며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와아아! 연합장님을 따라라!"
동시에 강현의 뒤쪽에서 거대한 함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뭐야..?"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강현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대단한 일을 해주었네."
남자다움이 느껴지는 중저음의 목소리. 구릿빛 피부에 강인한 턱선, 넓은 어깨가 돋보이는 남자였다.
"최동우..?"
대한민국 능력자 연합.
연합장 최동우.
TV에서나 보던 유명 인사가 강현의 앞에 서있었다.
'쓸데없이 멋있게 등장하기는...'
그렇게 강현의 의식이 끊어졌다.
**
최동우와 능력자 연합은 해일처럼 몬스터를 밀어붙였다.
연합에서 가장 정예라 할 수 있는 이들과, 무려 한국 최고라 불리는 최동우의 공세다.
이미 강현과의 싸움으로 지쳐있던 몬스터들은 속수무책으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연합장님. 고생하셨습니다."
"자네도 수고했네."
"후우... 결국 놈은 도망쳤군요. 지금이라도 쫓을 까요?"
리치는 상황이 불리해지자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최동우는 곧바로 뒤쫓으려 했지만 몸을 사리지 않고 방해하는 몬스터들로 인해 결국 놓치고 말았다.
"아닐세. 이미 늦었어. 우선 부상자들을 수습해주게."
"알겠습니다. 연합장님. 그런데…."
연합의 간부가 최동우를 바라보며 말을 끌었다.
"할 말이 있나?"
"그 남자는 누구입니까?"
최동우는 낯선 남자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 있었다. 그 모습에 간부가 의문을 표했다.
"연합장님이 아시는 분입니까?
"나도 처음 보는 남자라네."
"예? 그러면 왜..."
간부의 말에 최동우가 환하게 웃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영웅이 될 사내를 안아보겠나."
**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 보였다.
'내 방 천장이 아니네. 내가... 살아남은 건가?'
죽음을 각오했다.
대단한 희생이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이제 와서 강현에게 죽음이란 조금 기분 나쁘고 불편한 것에 불과했으니까.
'용케도 살았구만.'
팔에 무언가 걸리는 느낌에 강현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침대 맡에 머리를 기대고 잠든 강아현이 보였다.
'아현이... 회사는 갔다 온 건가? 그러고 보니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강현은 베이트 길드 사건 이후로 집을 나왔다. 그때부터 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조차 모르고 정신없이 전투만 반복했다.
"후우..."
강현의 한숨 소리를 들은 것인지 아현이 몸을 꿈틀거렸다.
"으음... 으어어?!"
서로의 코가 닿을 듯한 거리.
눈을 뜨자마자 강현의 얼굴을 마주한 아현이 깜짝 놀라 일어났다.
"일어났냐?"
강현이 태평하게 말했다.
상황 파악을 끝낸 아현이 대뜸 눈에 불을 켰다.
"야이 새끼야! 너 이러려고 집 나갔어?!"
"뭐, 뭐?! 이년이 오랜만에 오라버니를 만났는데 인사는 못할망정!"
강현은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기 때문에, 아현은 차마 때리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만 질러댔다.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평소에 연락도 안 하던 놈이 대뜸 병원에 입원해서 걱정이나 시키고. 도대체 뭐 하고 다니는 거야?"
"어차피 나 안 죽는 거 알잖아."
"몰라! 네가 뒤지고 다시 일어나는지, 그대로 쳐 누워서 다시는 못 보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귀 바로 옆에서 들리는 사자후에 강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게 뚫린 입이라고!"
**
김지선은 오늘 당직 간호사였다.
"이게 무슨 소리야?"
이 시간이라면 조용했어야 할 병원이 이상하게 소란스러웠다.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이자 근처 병실에서 들리는 소리인 것을 알 수 있었다.
"...!"
저곳은 높은 사람이 각별히 봐달라고 요청한 환자가 있는 특실이다.
다급해진 그녀가 복도를 내달렸다.
"꺄아…."
"너, 이거…."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김지선이 다급히 병실 문을 열었다.
"환자분 무슨 일이세요!?"
문을 연 김지선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놔라!"
"네가 먼저 놔!"
"네가 놓으면 나도 놓는다고 했지?"
그녀의 눈앞에는 서로의 머리끄덩이를 붙잡은 채로 소리를 지르는 남매가 있었다.
"..."
**
"완벽하게 나았습니다. 정말 놀랍군요."
다음날 아침.
의사의 확답을 받은 강현이 병원을 나왔다.
"거참, 검사할 것도 없다니까 귀찮게."
마력만 회복되면 모든 상처는 육체 재생 스킬로 낫는다. 그러나 그것은 강현만 아는 사실.
병원의 입장에서는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던 환자가 하루 만에 퇴원을 하겠다고 하니, 말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다행이네."
알고 보니 강현이 기절한 지 이틀이 지난 상황이었다. 그사이 몬스터는 정리되고 지금은 제법 안정을 되찾았다고 한다.
강현도 죽음을 각오했지만 결론적으로 살아남았기에 모든 것이 잘 풀린 것이다.
▫이름 : 강현
▫칭호 : 튜토리얼 졸업자 외 3개
▫레벨 : 50
▫상세 능력치 :
·근력 27 (+4)(+2)
·순발력 25 (+3)
·체력 27 (+3)(+2)
·마력 26 (+3)(+4)
·추가 스텟 : -
▫고유 능력 : 부활
▫능력 : 중급 검술(D), 하급 방패술(E), 최하급 석궁술(F), 하급 체술(E), 최하급 둔기술(F), 마력감지(E)
▫스킬 : 분노의 사자후(C), 상급 육체 재생(A), 일도양단(D), 거인의 힘(B), 마력폭발(D), 웨인의 비기(D), 엔트리아의 외피(E)
강현의 상태창은 제법 화려하게 변해있었다.
능력 '체술'이 하급으로 상승했고, 새로운 능력 '둔기술'과 '마력감지'를 획득했다.
마력감지는 어째서인지 시작부터 E등급이었다.
이 외에도 스킬 '엔트리아의 외피'와 '웨인의 비기' 또한 등급이 상승했다.
"아주 훌륭해."
특히나 웨인의 비기의 등급이 상승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잠시만... 칭호가 하나 늘었네?"
원래 강현의 칭호는 총 세 개였다.
참지 않는 자.
튜토리얼 졸업자.
잔인한 가정 파괴범.
하지만 상태창에 4개의 칭호가 뜨는 것을 보고 강현이 재빨리 확인했다.
불굴의 의지 : 극한의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의지를 가진 사람에게 주어지는 칭호.
효과 : 모든 스텟 +1, 신체가 한계에 이를수록 집중력이 상승한다.
"오, 이건 또 뭐야?"
마력이 들지 않는 칭호가 생겼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다.
게다가 효과 또한 매우 훌륭했다.
"강현 씨."
한창 강현이 스텟창에 빠져있을 때였다. 누군가 강현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예?"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검은 양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정중하게 말하며 명함을 건넸다.
"대한민국 특수 능력자 관리팀?"
"신태길 팀장이라고 합니다."
정부에 소속된 사람이 접촉해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강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으시다면 식사라도 하시면서 이야기하는 게 어떻습니까?"
"저야 좋죠."
마침 출출했던 차라 강현은 흔쾌히 승낙했다.
"그런데 신태길 씨."
"예."
"초면에 실례인 건 알지만 이 말은 꼭 해야겠습니다."
"말씀하시죠..."
갑자기 강현이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잔뜩 긴장한 신태길이 마른침을 삼켰다.
"저녁식사."
"...?"
"소고기는 안 됩니까?"
40화 길드 창설(1)
40. 길드 창설(1)
최동우로부터 도망친 리치 데이언스. 그는 경기도의 한 야산에 위치한 F등급 던전 '쿠르카 부락'에 숨어들었다.
던전을 공략하던 능력자들을 모두 죽이고, 모든 쿠르카를 굴복시킨 데이언스는 고민에 빠졌다.
'나는 누구인가...'
'데이언스의 연구소'라는 던전 안에 있을 때는 오직 던전을 지키고 능력자들을 죽여야 한다는 본능만이 존재했다.
하지만 던전의 메인 코어가 부서진 순간, 그는 무엇인가 어긋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리고 이 맹목적인 살의(殺意)...'
자신의 이름 외에 기억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인간을 죽이라고 외친다.
'원래 망자(언데드)들은 산자에 대한 원한을 품지만, 이 정도까지 심하지는 않을 터...'
조금 더 고민하면 해답이 보일 것 같았지만 누군가 기억을 막고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런 때에 불청객인가...'
실마리가 보이려는 찰나, 휘하에 둔 쿠르카들이 웅성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모두 모여라.
데이언스의 명령에 두 눈이 붉게 물든 쿠르카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리치 데이언스."
동시에 수많은 능력자들과 함께 한 남자가 나타났다.
"내 밑으로 들어와라."
오만한 자세로 앉아있던 데이언스가 뼈만 남은 새하얀 손을 들어 올렸다.
-내 앞에서 그딴 망발을 하다니. 용기 하나는 칭찬해 주마.
"누가 너를 그 던전에서 해방시켜 줬다고 생각하는 거냐?"
-해방이라...
"너 혼자서 뭘 할 수 있지? 얼마 지나지 않아 넌 사냥당할 거다. 하지만 나에게 오면 안정된 곳에서 네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지."
말을 하는 남자, 최민준의 말에 불쾌해진 데이언스가 신경질적으로 두개골을 달그락거렸다.
-멍청한 소리군. 인간은 오직 두 종류만이 있을 뿐이다. 나를 섬길 인간. 그리고 나에게 죽을 인간이다.
데이언스는 정신 지배를 사용했다.
하지만 최민준의 몸에서 피어오른 붉은 마력이 손쉽게 데이언스의 정신 지배를 튕겨냈다.
"이딴 잡기술이나 보자고 너를 찾은 게 아냐."
-가라.
데이언스는 최민준의 말을 무시하고 손을 까닥거렸다. 그러자 정렬해있던 쿠르카들이 미친 듯이 달려 나갔다.
"쿠룩, 쿠룩."
"쿠라아악!"
백에 가까운 몬스터들이 달려오고 있었지만 최민준의 표정은 편안했다.
데이언스의 정신지배를 튕겨낸 붉은 마력이 또다시 움직였다.
"쿠룩!"
한 순간에 달려오던 모든 쿠르카들이 마력에 붙잡히며 버둥거렸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군. 네 처지를 깨닫게 해 주지."
최민준이 고개를 까딱임과 동시에 늘어서 있던 부하들이 쿠르카를 학살하기 시작했다.
**
"여기 고기가 정말 맛있네요! 쩝쩝..."
"입에 맞으신다니 다행입니다."
병원에 들어가고 제대로 된 끼니를 먹지 못했던 강현은 포식을 했다.
"음... 그러니까 저보고 정부 소속이 되라고요?"
"예.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강요는 아닙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신태길이 했던 제안을 떠올리며 강현이 고민했다.
"그럼 구체적으로 저한테 무슨 이득이 있는데요?"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모든 것을 해드립니다. 저희는 단순한 공무원이 아닙니다. 정부에서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만든 특별한 조직입니다."
특수 능력자 관리팀.
정부에서 튜토리얼을 높은 성적으로 통과했거나, 남들보다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능력자를 모아 만든 조직이었다.
"정부는 모든 능력자를 통제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라 생각했습니다.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고요."
전체 성인의 절반가량이 능력자인 세상에서 섣불리 무언가를 규제하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던전 클리어를 강제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정부는 세계적인 추세에 맞추어, 포상을 주는 방법으로 최대한 부드럽게 능력자들을 움직였다.
"대신 최고의 능력자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어 두기로 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득이 되는 그런 관계 말입니다."
"애매모호하게 말하지 마시고 직설적으로 해주시죠."
"혹여나 신변에 이상이 생길 경우 훈장과 함께 국가유공자의 예우를 해드리고, 평생 남은 가족 분들을 책임져 드립니다."
"..."
"그 외에도 자금적인 지원은 물론이고, 법망에서 일정 부분 자유로워지는 것 등. 혜택을 말씀드리자면 끝이 없습니다."
끝도 없이 줄줄 이어지는 혜택들.
솔직히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던 강현은 내심 놀랐다.
"확실히 파격적이기는 하네요."
"예."
"하지만 혜택이 크다는 건 그만큼 의무. 해야 할 일도 많다는 거겠죠."
"부정하진 않겠습니다만, 저희가 부당한 요구를 하거나, 많은 것을 강요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
"강현 씨는 그저 지금과 같은 생활을 유지하시면 됩니다. 다만 저희가 도움을 요청할 경우. 그때만 움직여 주시면 됩니다."
"으음..."
강현이 고민하는 기색이자 신태길이 쐐기를 박았다.
"능력자 연합의 회장 최동우 씨. 단군 길드의 한세연 씨. 모두 저희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여러 뛰어난 능력자분들이 있으니 강현 씨에게도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까짓것 들어가죠."
**
신태길과의 이야기를 끝낸 후 집으로 향하던 강현이 생각에 잠겼다.
-사실 조만간 일이 생길 것 같습니다.
특수 능력자 관리팀에 들어가자마자 일거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정부에서 던전 테러를 일으키는 세력의 꼬리를 붙잡았습니다. 머지않아 놈들의 머리를 밝혀내면 대대적인 공격이 있을 겁니다. 그때 강현 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테러를 일으키는 집단.
강현과도 꽤나 질긴 악연을 가진 곳이었다.
'어차피 한번 손봐주려던 곳인데 잘 됐어.'
강현은 언젠가 그 순간이 온다면, 확실하게 복수할 것을 다짐했다.
"일단 지금은 집에 가야지."
집을 향하려고 열쇠를 찾던 순간 강현의 머리가 번뜩였다.
"아! 번틀리 2호가..."
강현은 던전 앞에서 기절하고 곧바로 병원으로 실려 왔었다.
그의 애마 번틀리 2호는 데이언스의 연구소 앞에서 잠자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모르겠다. 그냥 택시 타고 가자."
그때였다.
"응?"
긴 흑발을 포니테일로 질끈 묶은 여성 강현의 앞을 막아섰다.
'데이언스의 연구소에서 만난 여자였지. 그러니까 이름이...'
고민 끝에 강현이 입을 열었다.
"신소이 씨?"
"신성아입니다."
"아! 예. 신성아 씨."
"여태껏 강현 님을 찾아다녔습니다."
뜬금없이 자신을 찾았다는 말에 강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저를요? 왜?"
"여기 던전에서 회수한 마정석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갑작스러운 던전 폭파로 약속한 마정석을 받지 못했었다.
"그냥 가지셔도 괜찮았는데."
"아닙니다. 은혜를 입었는데, 그런 짓은 절대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신성아는 강현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서 능력자 연합의 회장 최동우의 사무실까지 막무가내로 쳐들어갔었다.
그런 엄청난 내막까지는 몰랐던 강현은 별생각 없이 웃었다.
"뭐, 정 그러시다면야."
신성아는 인벤토리에서 꺼낸 마정석을 하나하나 건넸다. 강현은 그것을 받아 그대로 자신의 인벤토리로 옮겼다.
"끝인가요?"
"예."
"생각보다 더 많네요."
예상외로 많은 마정석을 얻게 된 강현이 함박 미소를 지었다.
강현은 돈에 대해서 과거처럼 그리 집착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공짜 수입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라 생각했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수고하세요."
"강현 님."
볼일이 끝나고 곧장 떠나려는 강현을 신성아가 붙잡았다.
"무슨…."
돌아선 강현은 자신의 코앞까지 바짝 다가온 신성아의 얼굴을 마주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불타오르는 신성아의 눈을 보며 강현이 조금 뒷걸음질 쳤다.
"저를 거두어 주십시오!"
"예..?"
순간 찾아온 뇌정지(腦絶).
그리고 강현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이게 뭔 개소리야?'
이런 강현의 속마음과는 달리 신성아는 정말 진지해 보였다.
"부탁드립니다. 강해지고 싶습니다!"
강현이 대답을 하지 않고 주저하자 신성아가 무릎을 꿇었다.
'처음부터 정상은 아니라 생각했는데... 미친년이었어. 얼른 피하자.'
고개를 숙인 신성아를 내버려두고 강현은 모르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지나쳤다. 그러나 금세 달려온 신상아가 다시 강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부탁드립니다!"
"아니. 저보고 어쩌라고요."
길바닥에서 멀끔하게 생긴 젊은 여성이 무릎을 꿇고 애원하고 있었다.
드라마에서도 보기 힘든 장면에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무슨 일이지?"
"그냥 받아줘라!"
"여자 인물도 예쁘구먼 너무하네."
"남자 인상을 봐. 사채업자 아니야?"
강현이 두 손으로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시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자 새하얀 구름이 두둥실 떠다녔다.
"알겠으니까 일어나요."
강현이 손을 뻗어 신성아를 일으킴과 동시에 주위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워후, 멋지다!"
"예쁜 사랑 하세요!"
"..."
순간 돌아오려던 강현의 인내심이 다시 도망쳤다.
강현은 우르그의 거대 망치를 꺼내 들었다.
-콰아앙!
가볍게 들어서 내려찍었음에도 근처의 사람들이 휘청거릴만한 진동이 전해졌다.
"전부 꺼져."
나직하게 울려 퍼지는 한마디.
"미친놈이다아!"
"꺄아아아!"
**
우여곡절 끝에 강현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올 수 있었다.
물론, 신성아도 함께였다.
간단한 음료를 내온 강현이 자리를 권하고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됐다.
"저한테 바라는 게 뭐예요?"
짜증이 묻어나는 강현의 말투에 신성아가 고개를 숙였다.
"억지 부려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꼭 강현 님과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왜요?"
"그러면 분명 저도 강현 님처럼 강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아니, 저랑 같이 다니면 강해진다는 보장 있어요?"
"그건…."
"제 말 안 끝났습니다."
강현의 말에 신성아가 입을 꾹 다물었다.
"강해지고 싶다. 뭐. 좋아요. 개인의 가정사까지 내가 파헤칠 건 아니니까."
"..."
"하지만 길거리에서 그러는 건 좀 아니지 않아요? 나도 딱히 예의 있는 인간은 아닌데, 이건 아니지."
"거기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신성아는 정말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괜히 마음이 약해진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일단 같이 다닌다고 칩시다."
"감사합니다!"
"끝까지 좀 들어요."
"..."
"같이 다닌다고 쳐도, 저 사냥하는 모습 봤죠?"
"예."
"따라올 자신 있어요?"
"..."
"댁 목숨은 무슨 열 개정도 되나? 아니면 뭐 구경만 하면 강해지는 스킬이라도 있어요?"
강현의 말에 신성아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모두가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제가 괜히 혼자 다니는 게 아니에요. 평생 따라만 다니면서 마정석 캘 건 아니잖아요."
강현이 지금까지 혼자서 사냥하는 것을 고집한 것도 이유가 있었다.
강현은 상처를 입어도 회복하고 죽어도 부활한다. 그리고 그 능력을 활용하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결국 강현의 전투는 남들과는 차원이 다른 터프함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보조라면 잘할 자신이 있습니다."
"무슨 제 보조만 하면 지금보다 더 빨리 강해질 수 있대요? 확실해요?"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러는 건데요?!"
"그건…."
신성아가 무언가를 말하려던 그때, 강현의 스마트 폰이 울렸다.
"미안해요. 잠시."
"괜찮습니다."
스마트폰 액정에는 안유성의 이름이 떠있었다.
"어. 웬일이냐."
-형! 한 건 하셨던데요? 크크큭.
전화 너머로 들리는 장난스러운 목소리. 갑자기 터져 나온 뜬금없는 말에 강현이 인상을 구겼다.
"한 건 했다니? 뭔 소리야."
-서울 한복판에서 여자 무릎 꿇리고, 거대 망치로 난동. 능력자 이대로 괜찮은가?
"뭐...?"
-와 헤드라인 잘 뽑았네. 이거.
전화를 끊은 강현이 다급히 포털사이트에 접속했다.
간단한 검색을 거치자 안유성이 말한 뉴스 기사가 보였다.
-사형 제도 부활 시급
-나 저기 있었는데 여자가 무슨 약점 잡혔는지 사채업자 같이 생긴 놈한테 무릎 꿇고 빌고 난리도 아니었음
-말세다말세...
-완전 양아치 사채업자인 것 같네요.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댓글들에 강현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죄송합니다."
옆에서 같이 뉴스를 보던 신성아가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인 것을 알고 사과했다.
"그만. 아무 말도 하지 마요."
극심한 스트레스와 두통.
뇌를 꺼내서 망치로 두들긴 다음 다시 집어넣으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었다.
오랜만에 짜릿하게 올라오는 분노에 강현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편하게 생각하자.'
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어 오해하게 한 신성아.
도심에서 망치를 내려쳐 시민들에게 위협을 가하고 기물파손을 일으킨 강현.
아무것도 모르면서 추측성 기사를 올린 기자.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불대는 인터넷 여포들까지.
'누구 하나의 잘못이 아니야. 모두의 잘못이라고...'
강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그냥 싹 다 잡아 족쳐야겠어.'
강현이 모든 관계자를 처리하려고 다짐하던 순간이었다.
다시 강현의 스마트폰이 다시 울렸다.
"왜 인마!?"
-신태길 팀장입니다.
"아... 예."
-저와 헤어지시자마자 한 건 하셨더군요.
신태길의 말에 강현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서 그쪽도 저 놀리려고 전화했습니까?"
-아닙니다. 이 건은 저희 쪽에서 처리할 테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예?"
-여론을 움직이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강현 씨는 소스도 충분하니 하루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신태길의 말에 강현이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까칠해서 미안해요. 방금 전에 시비를 건 놈이 있어서."
-괜찮습니다. 대신 강현 씨의 이름과 얼굴이 대중에 노출될 겁니다. 상관없습니까?
"예... 상관없으니 알아서 해줘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통화를 종료한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골치 아프네..."
-우우웅
그때 또다시 울리는 전화에 강현이 신경질 적으로 스마트폰을 들었다.
"예에!"
-형. 왜 끊고 그래요. 아직 말 안 끝났는데.
"또 뭔데?"
-우리 파티 사냥할래요?
41화 길드 창설(2)
41. 길드 창설(2)
"끼에에에!"
귓가를 할퀴고 지나가는 날카로운 고음.
고개를 들자 하늘을 날고 있는 수많은 거대 새들이 보였다.
놈들은 D등급 던전 '하피의 절벽'에 등장하는 하피였다.
하피는 여러 신화 속에 등장하는 익숙한 이름이다.
주로 여성의 상반신을 한 거대한 새로 자주 묘사되는데, 실제 몬스터는 조금 달랐다.
"끼아아아!"
"온다!"
허공을 배회하던 하피 하나가 강현을 발견하고는 빠르게 하강했다.
인간과는 비슷하지만 성별을 구별할 수 없는 기괴한 얼굴이 점차 가까워졌다.
-퉁!
"키에에!"
당겨진 활시위가 풀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하피가 괴성을 내질렀다.
어느새 놈의 오른쪽 눈에는 화살이 박혀 있었다.
피눈물을 흘러내리며 하피가 고통에 몸부림쳤다.
"마력폭발!"
하피가 잠시 멈칫하는 사이 강현이 놈의 얼굴을 향해 마력구를 던졌다.
-콰앙!
마력구에 직격 당한 하피의 얼굴 반쪽이 허무하게 날아갔다.
결국 하피는 더 이상 날지 못하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 모습을 보며 강현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나이스 샷."
"감사합니다."
어느덧 셋이서 함께 사냥을 다닌 지 2주가 흘렀다.
강현과 안유성. 그리고 신성아.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셋은 의외로 죽이 잘 맞았다.
"키에에엑!"
"죽어! 죽어! 하하하!"
전투 방식은 강현과 안유성이 개인플레이를 하고 신성아가 뒤에서 보조하는 것이었다.
이 별것 아닌 팀플레이의 효과는 강현의 생각보다 훨씬 뛰어났다.
'확실히 전투가 편해졌어.'
강현은 자신의 전투 방식이 굉장히 막무가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여태껏 누군가와 함께 사냥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들과의 사냥은 생각보다 효율적이었고 만족스러웠다.
"후우, 수고하셨습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신성아가 말했다.
이들의 근처로 내려온 열 마리가 넘는 하피는 어느새 모두 쓰러진 뒤였다.
"또 마정석 캐는 거야? 그거 안 해도 괜찮다니까."
신성아의 강력한 요청으로 첫날 이후 강현은 그녀에게 편하게 반말을 하고 있었다.
하피의 사체를 뒤적거리며 마정석을 찾던 신성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굳이 일일이 마정석을 채취하지 않더라도 이들의 수입은 일반적인 공략대를 압도했다.
다른 공략대들은 손대지 못하는 코어를 제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책정된 D등급 던전 클리어 포상금은 다음과 같다.
노말 코어 4000만 원.
메인 코어 2억 원.
이것도 최소 금액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코어를 박살내고 다니는데 왜 굳이 마정석에 목을 매? 그 시간에 편하게 쉬어."
"..."
"혹시 뭐 돈이 많이 필요해?"
"그건 아닙니다."
"그러면 왜?"
"..."
강현의 말에 신성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에휴, 그래. 그냥 마음대로 해."
"예."
"근처에서 메인 코어가 느껴진다. 조만간 보스가 나올 것 같으니까 준비해."
강현의 마력감지 능력은 날이 갈수록 상승했다.
이제는 제법 멀리서도 몬스터와 코어를 느낄 수 있는 수준이었다.
"형. 이번 던전 돌고 C등급 던전 가보지 않을래요?"
메이스에 엉긴 피와 건더기를 닦아내던 안유성이 말했다.
"고작 셋이서? 자신 있냐?"
"클리어하자는 게 아니라 가볍게 사냥만 가보자는 거죠."
"그리고?"
"그러다 해볼 만하다 싶으면 코어도 부수고, 보스도 도전하고. 어때요?"
"목숨을 담보로 한 아주 나이스 한 플랜이네. 쯧쯧."
고개를 저으며 강현이 혀를 찼다.
'나야 죽어도 부활한다지만, 저놈은 뭘 믿고 저러는 건지.'
그러던 도중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다.
'저런 놈이 여태까지 어떻게 던전을 돈 거야?'
안유성은 강하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혼자서 던전을 공략하는 일은 요원하다.
'던전 공략 파티의 권장 인원이 괜히 네 명 이상이 아닐 텐데.'
강현처럼 목숨이 남아돌지 않는 이상 다른 보조를 하는 인원이 몇 명은 필요했을 것이다.
"야."
"왜요?"
강현의 부름에 안유성이 고개를 돌렸다.
"너 지금까지는 어떻게 던전 공략했냐? 혼자? 아니면 파티?"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해요?"
"대답이나 해. 인마."
"음... 저야 당연히 돈 써서 사람을 구했죠."
강현이 대놓고 재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계속 그렇게 하지 왜 나랑 같이 사냥하자 한 거야?"
"애들이 가는 던전마다 죽어나가니 이제 잘 안 오더라고요. 계속 새로 구하기도 귀찮고."
"미친놈..."
강현은 보지 않아도 상황이 훤히 보이는 듯했다.
'보나 마나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들어서 난장판을 만들었겠지.'
강현이 안유성과 함께하며 확실하게 느낀 것이 있다.
안유성은 어떤 상황이든 자신의 활로를 생각하고 움직인다.
그는 절대 목숨을 건 도박을 하지 않았다.
'언뜻 보면 나처럼 막무가내로 들이대는 것 같지만, 저놈은 철저하게 계산 후에 움직이는 거야.'
다만 그 계산에 다른 사람의 안전은 포함되지 않는다.
안유성에 의해 시도 때도 없이 펼쳐지는 난전에 아마 많은 이들이 포기하고 떠났을 것이다.
'아무리 돈이 중요하다고 해도 목숨보다 소중하지는 않을 테니까.'
대충 상황을 납득한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슬슬 움직이자. 마력도…."
어느 정도 마력이 차오르자 이동하려던 강현이 멈칫했다.
'뭔가 있다.'
"형도 느꼈죠?"
"어."
안유성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미세하지만 마력이 느껴진다.'
지금 이곳은 메인 코어로 향하는 유일한 길목. 그런데 무엇인가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하지만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는 것은 깎아지른 절벽과 나무들 뿐이었다.
"야. 뭐하냐."
"쉬잇...!"
안유성은 마치 명상을 하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방해하지 마요."
잠시 그렇게 가만히 있던 그가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는 그대로 메이스를 들어 근처 바닥을 내쳐졌다.
-콰앙!
"끄아아아!"
터져 나오는 비명과 함께 갑자기 정체불명의 남자가 나타났다.
"이건 뭐야?"
**
D등급 던전 하피의 절벽.
그곳의 메인 코어를 향해 움직이던 정영식은 자리에서 멈춰 섰다.
"저것들은 뭐야?"
코어를 향해 가는 유일한 길목.
그곳에 세 명의 남녀가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흐음..."
사전에 들은 바로는 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조건 지나야만 하는 길.
"뭐, 별일이야 있겠어?"
자신은 은신 상태이다.
지금까지 자신을 알아본 능력자는 최민준이 유일했다.
고작 세 명에서 D등급 던전을 공략한다는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지만, 그뿐이다.
'미안하지만 던전은 내가 부숴야겠어.'
하늘을 날아다니는 하피가 도심에 풀린다면 아주 재미난 구경거리가 될 것이다.
'크크큭. 상상만 해도 즐거운걸.'
정영식이 속으로 낄낄거리며 길목을 지날 때였다.
"형도 느꼈죠?"
"어."
갑자기 앉아 있던 두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이것들 갑자기 왜이래?'
당황한 정영식이 그대로 멈춰 섰다.
"야. 뭐하냐."
"쉬잇...!"
전신에 문신을 한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더니 갑자기 눈을 감았다.
'설마 들킨 건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후각이 예민한 몬스터가 아닌 이상에야 자신이 걸릴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끊임없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때 갑자기 남자가 눈을 뜨더니 살벌해 보이는 메이스를 자신에게 휘두르는 것이 아닌가?
'이게 무슨..!'
-콰앙!
당황한 정영식이 피할 겨를도 없이 메이스는 그의 발등에 내려쳐졌다.
"끄아아아!"
"이건 뭐야?"
아찔하게 타오르는 고통에 온 몸이 마비되는 것만 같다.
"허억, 허억!"
고통에 몸부림치며 정영식이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
정영식의 발등은 엄청난 기세로 내려쳐진 메이스에 완전히 짓뭉개져 있었다.
'제길! 어떡하지?'
정영식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이 상태로 도망치기는 틀렸어. 빠르게 처리한다!'
판단을 마친 정영식이 재빠르게 안유성에게 검을 휘둘렀다.
-턱!
'뭐야!?'
그러나 그 검은 강현의 손에 허무하게 붙잡혔다.
"너 뭐냐."
강현의 눈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마치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모습.
그 눈을 마주한 정영식이 꿀꺽 침을 삼켰다.
'이건 뭐하는 놈이야...'
조용히 지나가려 했건만, 은신이 들키는 것도 모자라서 검을 맨손으로 붙잡았다.
'생각해라, 생각해...!'
정영식의 머리가 다시 한번 엄청난 속도로 회전했다.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바로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했어!'
"아니, 됐다."
"응...?"
"일단 맞자. 맞다 보면 생각이 나겠지."
"자, 잠깐! 잠깐만요!"
정영식이 다급히 팔을 내저었다.
"그래, 그래. 알겠어."
주먹을 쥐며 말하는 강현은 전혀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
"우우..."
계속된 구타로 인해 정영식의 얼굴은 처음보다 1.5배는 거대해진 것 같았다.
"예에... 맞습니다."
정영식이 퉁퉁 부르튼 입술을 힘겹게 달싹였다.
"네가 던전 브레이크(break)를 일으키고 다니는 놈이다?"
"예..."
강현의 말에 정영식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술술 부는데? 구라 아니야?"
"이 바닥에 의리가 어디 있습니까? 저는 여기서 죽기 싫습니다."
이제는 던전 브레이크라고 공식 명명된 던전 테러.
그런 테러를 일으키는 놈도 제 목숨은 소중한 것 같았다.
"제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저 나름 고급 인력입니다. 다른 놈들에 비해 정보도 많이 알고 있고. 분명히 쓸모가 있을 겁니다."
정영식의 저기 어필을 들으며 강현이 턱을 쓰다듬었다.
"잘 됐네."
신태길 팀장이 이 테러범을 보면 아주 좋아할 것 같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가서 듣자고."
저런 혹을 달고 보스 공략을 할 수는 없기에 강현은 곧장 던전을 벗어나기로 결정했다.
"갑자기 궁금한 게 있는데."
왔던 길을 되돌아가던 도중, 강현이 정영식에게 말을 걸었다.
"이런 일을 하는 이유가 뭐냐?"
"예?"
"아니, 그냥 솔직하게 이해가 안 돼서."
"..."
"다 같이 힘을 합쳐도 부족한 시대 아니냐? 아무리 위기의식이 없다지만 같은 사람. 그것도 같은 나라 국민을 상대로 그런 테러를 하는 이유가 뭐야?"
강현의 말에 정영식이 씁쓸하게 웃었다.
"조직에 속해 있는 놈들 대부분은 던전 사태 이전까지 사회의 최하층에 있었습니다."
"..."
"노숙자부터 시작해서 사기로 큰 빚을 떠안은 사람들. 기타 사회에 불만이 많은 놈들.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세상이 이렇게 변하고 힘이 생기니, 복수하고 싶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희를 무서워하고, 우러러봤으면 했죠."
"쯧."
혀를 찬 강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다고 이런 짓을 하냐."
'솔직히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만...'
아마 그들의 입장에서는 세계는 이미 멸망해 있었을 것이다.
더 이상 나빠질 구석도 없는 지옥 같은 삶에서 갑자기 힘이 주어지니 무슨 짓이든 못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그러면 안 되지 새끼야."
-퍽!
강현이 정영식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후려갈겼다.
'시발. 지가 물어봐놓고...'
정영식은 앞으로 절대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
던전 밖으로 나온 강현은 곧장 신태길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현 씨. 무슨 일이십니까?
"제가 나쁜 놈 하나 잡았거든요."
-예?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하는 신태길에게 강현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지금 당장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죠.
"알겠어요."
전화를 끊자 안유성이 말을 걸어왔다.
"뭐라고 해요?"
"지금 당장 온다더라."
"그때까지 뭐 하죠? 햄버거라도 먹을까요?"
"갑자기...?"
뜬금없는 안유성의 제안에 강현이 고민에 빠져있을 때였다.
"야. 저 사람 그 TV에 나온 사람 아니야?"
"실제로 보니까 분위기 장난 아니다."
"근육 완전 미쳤네."
이전까지는 강현과 안유성이 함께 걸으면 모세의 기적처럼 길이 열렸다.
어찌나 사람들이 피하는지 대낮에 거리를 걸어도 그들 근방 2m 이내는 한적할 정도였다.
그러나 신태길을 처음 만난 그날 이후. 강현은 불과 며칠 만에 국민 영웅이 되어 있었다.
-D등급 던전을 홀로 막아선 사내
-정체불명의 히어로. 사실 이미 유명한 고블린 슬레이어?
-연합장 최동우 발언. 그 사내는 영웅이 될 재목이다!
대대적인 테러가 있던 날.
강현은 사람들을 보내고 홀로 몬스터를 막아섰었다.
-이 건은 저희 쪽에서 처리할 테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강현이 대로변에서 난동을 부려 욕을 먹고 있을 때.
신태길이 저 말을 내뱉자마자 갑자기 테러 당일 있었던 일이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그리고 cctv 영상, 능력자들의 인터뷰, 증언들이 말 그대로 쏟아져 나왔다.
덕분에 강현은 단번에 스타덤에 올랐다.
-그 사람은 정말 수준이 달랐어요. 같은 능력자가 맞는지 의심스러운 정도였습니다.
-그 정도인가요?
-예. 그런 사람이 저희를 구해준 것도 모자라서 마지막까지 혼자 남아서 이곳을 지키겠다고 말하는데, 정말이지 눈물이 났습니다.
-뛰어난 능력에 희생정신까지. 대단하신 분이네요.
-맞습니다. 개인적으로 최동우 씨나, 한세연 씨보다 더 강한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강현이 우르그의 망치로 난동을 부린 것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묻혔고, 온 대한민국이 강현을 추앙하기에 바빴다.
그것은 분명 욕을 먹는 것보다는 좋은 일이었지만 조금 씁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저기... 싸인 한 장만 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때 한 여학생이 쭈뼛쭈뼛 다가왔다.
강현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리 주세요."
"아니 아저씨 말고, 저기 저 잘생긴 오빠요."
학생의 손끝은 안유성을 가리키고 있었다.
비즈니스 미소를 짓던 강현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푸하하! 형 뭘 기대한 거예요?"
"닥쳐."
"아무리 강현 님이라도 미성년자는 안 됩니다."
"그건 무슨 개소리야?!"
요즘 들어서 신성아도 안유성을 따라 강현을 놀리는데 재미를 붙이는 중이었다.
-퍽!
심기가 불편해진 강현이 정영식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왜 때립니까?!"
정영식이 표독스럽게 노려보며 말하자 강현도 마주 눈에 힘을 줬다.
"뭐?!"
-퍽!
"씨발..."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정영식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고개를 숙였다.
바닥을 바라보는 그의 눈가는 어쩐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42화 길드 창설(3)
42. 길드 창설(3)
"와아! 감사합니다!"
안유성에게 사인을 받은 학생이 잔뜩 들떠서 뛰어갔다.
그러자 주위에서 쭈뼛대며 눈치를 보던 사람들도 용기를 얻었는지, 하나둘 말을 걸기 시작했다.
"저기, 고블린 슬레이어 맞으시죠? 팬이에요!"
"저희 형이 덕분에 죽지 않고 살았다고 말했어요. 고맙습니다."
"생명의 은인이에요!"
처음에는 이런 관심들이 어색하고 불편했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강현도 익숙해졌고, 지금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강현 씨."
한창 사인에 열중하던 도중이었다. 몰려든 인파를 헤치며 익숙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오랜만이네요."
강현이 깔끔한 정장 차림의 신태길에게 인사를 건넸다.
"예. 반갑습니다. 안유성 씨도 계셨군요."
자연스럽게 인사하는 둘.
신태길과 안유성은 이미 안면이 있는 듯했다.
'이 자식은 뭔데 안 끼는 곳이 없어?'
지난번 단군 길드의 일도 그렇고, 만나는 사람들 마다 안유성을 알고 있으니 내심 신기했다.
"안유성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
"안유성 씨도 저희 팀에 영입 대상이셨습니다. 깔끔하게 거절하셔서 어쩔 수 없지만요."
어쩐지 조금 씁쓸함임 묻어나는 말투였다.
"어쨌든 감사합니다. 벌써부터 이런 성과를 올리실 줄은 전혀 예상 못했는데, 아주 좋습니다."
강현에게 정영식을 인계받은 신태길이 드물게 미소를 지었다.
"혹시 원하시는 보상이 따로 있으십니까?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보상 이야기에 강현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으음... 일단 당장은 필요한 게 없네요. 그냥 좋은 아이템이나 있으면 챙겨줘요. 마력 관련된 걸로."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해요."
볼일이 끝나자 돌아가려던 강현을 신태길이 붙잡았다.
"강현 씨.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예?"
"여기서는 좀 그렇습니다. 자리를 옮기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러죠. 뭐..."
강현의 허락이 떨어지자 신태길과 함께 온 정장 차림의 남자들이 길을 열었다.
"공무 집행 중입니다. 물러서 주시기 바랍니다."
드라마, 영화 속에서나 보던 모습을 보며 강현이 내심 감탄했다.
'뭔가 간지 나네.'
얼마 지나지 않아 몰려든 인파 사이로 널찍한 통로가 만들어졌다.
일행과 함께 그곳으로 빠져나온 강현의 앞에 거대한 벤이 멈춰 섰다.
"차에 타시면 됩니다."
뒤따르는 신태길의 말에 강현이 곧장 차에 올랐다.
"와, 살 것 같다."
내부는 완전히 한겨울처럼 서늘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8월의 뙤약볕 속에서 기다렸을 강현을 배려한 것 같았다.
몸이 잠기는 푹신한 의자에 앉자 차량 내부의 냉장고에서 꺼낸 시원한 음료가 놓였다.
"이거 말고 맥주는 없어요?"
강현의 말 한마디에 음료는 곧장 맥주 캔으로 바뀌었다.
-딸깍
"크아아아!"
무더운 여름에 시원한 맥주는 말 그대로 진리였다.
강현은 그렇게 한동안 맥주를 마시며 계속 감탄사를 내뱉었다.
"크흠..."
잠시 기다리던 신태길이 헛기침을 하자 그제야 강현이 맥주 캔을 내려놨다.
"이제 말씀해 주시죠. 할 말이라는 게 뭐예요?"
"강현 씨. 혹시 소식 들으셨습니까?"
"...?"
뜬금없는 소식 이야기에 강현이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제 중국에서 세계 최초로 C등급 던전의 완전 클리어에 성공했습니다."
"완전 클리어라면..."
"보스 공략 및 메인 코어 제거에 성공했다는 뜻입니다."
강현은 얼핏 뉴스에서 본 기억을 떠올렸다.
"확실히 던전을 클리어하기 위해 대규모 공략을 할 거라는 뉴스는 본 것 같은데, 그게 어제 끝났나 보네요."
"예. 인해전술이라 제법 피해가 있었습니다만,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은 그걸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었겠죠."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나라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능력자도 그만큼 많이 존재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두루뭉술하게 둘러가지 말고 빠르게 요점만 말하죠."
강현의 말에 신태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실 조만간 한국에서도 C등급 던전의 완전 클리어를 시도할 예정입니다. 그때 강현 씨도 참가해 주셨으면 합니다."
최초로 C등급 던전이 등장한 지 한 달이 넘은 시점이다.
그사이 한국도 C등급 던전의 노말 코어 제거에는 성공했다.
총력을 기울인다면 어쩌면 메인 코어의 제거도 가능할지 몰랐다.
"다른 길드들은 가능 여부를 떠나서, 큰 피해가 생길 것을 우려해서 굳이 모험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노말 코어만 제거하면 던전이 붕괴(개방)되는 일은 없을 텐데, 굳이 모험을 하는 이유가 있어요?"
던전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문이 열리고 몬스터가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노말 코어만 제거한다면 그 시간은 리셋 되기에 충분히 안전하게 관리할 수 있었다.
"고작 세계 최초 타이틀을 뺏겼다고 조급해져서 그런 건 아니죠?"
"그건 아닙니다."
"그러면요?"
"사실 아직 노말 코어조차 제거하지 못한 던전이 하나 있습니다."
"으음..."
노말 코어조차 제거하지 못했다면 던전에서 언제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올지 모른다.
"시간은 얼마나 남았어요?"
"앞으로 이주일입니다."
"알겠어요. 참가하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강현의 대답에 표정이 밝아진 신태길이 말을 이었다.
"우선은 길드 단위 공략을 할 예정입니다. 때문에 강현 씨 개인의 참가는 힘들고, 소규모라도 길드를 구성해 보시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신태길이 안유성과 신성아를 훑어보며 말했다.
"참나, 엉큼하네요."
강현의 길드에 속하게 함으로써 안유성과 신성아까지 끌어드리려는 속셈이었다.
속내가 뻔히 보이는 말에 강현이 헛웃음을 삼켰다.
"뭐, 어차피 저도 하려던 일이니 그렇게 하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그래서 클리어하면 보상은 정해졌어요?"
"으음, 솔직히 당장 해드릴 수 있는 것은 금전적인 보상밖에 없습니다."
"..."
"하지만 차후 강현 씨가 길드, 세력을 만들었을 때,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조건 자체는 딱히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강현은 이미 충분히 많은 돈을 벌고 있었고, 강함에 대한 것 외엔 별다른 욕구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죠."
그러나 강현은 흔쾌히 승낙했다.
'C등급을 경험하는 것 자체로도 나쁘지 않아. 그리고 더 중요한 건...'
또 다른 강자들.
아마 이번 공략에 최동우와 한세연을 포함해 한국의 최상위에 위치한 거대 길드가 모일 것이 분명했다.
이것은 다른 이들의 전투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
다음 날.
강현의 번틀리 2호가 조용한 카페 앞에 멈춰 섰다.
"왔어요?"
안유성은 차량에서 내리는 강현을 보고 인사를 건넸다.
"형 그 똥차는 언제까지 끌고 다닐 거예요? 돈도 많이 벌면서."
강현의 번틀리 2호는 중고로 구입한 저렴한 국산 세단이다.
연식도 제법 오래된 것으로, 한눈에 보기에도 수억 원을 호가해 보이는 안유성의 차와 나란히 있으니 유독 초라해 보였다.
"차가 굴러만 가면 됐지 뭔 상관이냐."
"뭐, 형 생각이 그렇다면야."
안유성도 딱히 크게 신경 썼던 것은 아닌지라 그러려니 했다.
"신성아는?"
약속한 시간이 다가와도 신성아가 보이지 않자 강현이 물었다.
"저기 오네요."
-부아아아앙!
안유성이 가리키는 방향에서 갑자기 굉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등장 한번 요란하네."
왕복 6차선 도로 끝에 검은색의 거대한 바이크가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고 있었다.
점차 가까워지자 몸에 밀착되어 늘씬한 몸매가 드러나는 가죽옷을 입은 운전자가 보였다.
-끼이이익!
마침내 바이크가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강현의 코앞에 멈춰 섰다.
바이크에서 내리며 헬멧을 벗자 긴 머리칼을 찰랑이는 신성아의 얼굴이 보였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아냐. 나도 지금 왔어. 가자."
모두 모이자 강현이 거침없이 카페 문을 열어젖혔다.
이미 요란한 소음이 있었던지라 일행은 단번에 이목을 집중시켰다.
"뭐하는 사람들이지?"
"아! 나 인터넷에서 본 적 있어."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은 강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휴. 너네 무슨 관심종자야? 제발 좀 평범하게 다녀라."
피어싱에 문신이 가득한 초사이언 머리의 안유성.
좀처럼 보기 힘든 전신 가죽옷에 차가운 인상의 신성아.
한 명은 세계에 몇 대 없는 스포츠카를 끌고 다녔고, 다른 한 명도 쉽게 볼 수 없는 거대 바이크를 몰고 다녔다.
어디를 가든 시선을 끌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형 인상이나 펴고 말해요."
"강현 님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둘의 딴지에 강현은 조용히 혀를 찰뿐이었다.
'내가 뭐 어때서?'
제법 유명세를 탄 이후로 강현은 나름 튀지 하지 않으려 주의했다.
오늘도 최대한 평범해 보이기 위해 어제 막 산 귀여운 뽀통령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나온 것이다.
"무슨 유치원생 옷을 입고 나왔어요?"
"유치원생은 무슨! 오버하지 마."
"..."
"어제 산 옷인데... 좀 작은 것 같긴 하네."
"조금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때 멀리서 강현의 등에 그려진 뽀통령을 보고 한 아이가 다가왔다.
"엄마, 뽀통령이야!"
어린이들의 친구!
어린이들의 대통령!
아이는 해맑게 웃으며 자신의 우상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그 해맑은 표정은 강현과 가까워질수록 점차 일그러졌다.
"이게 뭐야..?"
이내 강현의 등에 그려진 뽀통령과 마주 선 아이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엄마. 뽀통령이 이상해! 으아앙!"
강현의 등판에 있던 거대한 뽀통령은 아이가 알던 모습과 많이 달랐다.
강현의 지나친 근육으로 인해 티셔츠가 옆으로 잔뜩 늘어나 버린 것이다.
때문에 원래도 콩알만 하던 뽀통령의 눈이 완전히 찢어져 노려보는 모양새가 되었다.
"쯧쯧."
"동심 파괴에 앞장서시는 모습 보기 좋습니다."
"이런 씨발..."
깊은 한숨을 내쉬며 강현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호연아!"
그때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어머니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죠."
"예..."
어머니는 분명 사과를 하고 있었지만 강현을 향한 두 눈동자에는 경멸이 담겨있었다.
"엄마가 이상한 사람들한테 함부로 가지 말라고 했지?"
"잘못했어요. 으아앙!"
'아니, 도대체 내가 뭘 했다고...'
괜히 억울함이 차오른 강현이 씁쓸하게 그 모습을 바라봤다.
"에휴, 됐다."
그렇게 어린이들의 인기스타가 되려던 강현의 계획은 무산으로 돌아갔다.
"다 필요 없어. 바로 본론으로 가자."
강현의 말에 둘의 시선이 모였다.
"오늘 모인 이유는 잘 알겠지만 길드 때문이야."
"드디어 시작입니까?! 저는 언제든 준비되어 있습니다."
"나도 들어갈게요."
아직 이야기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결론이 나버렸다.
"좀 진지하게 들어. 조금 있으면 C등급 던전에 들어가는 건 알고 있지?"
"예."
"거기에 길드를 만들어서 참가할 생각이야."
강현의 말에 둘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요."
"사실 우리끼리는 D등급 보스도 만만하진 않아. 당연히 C등급으로 가면 목숨이 위험하겠지. 그러니까 너희들도 잘 생각해 보고…."
"갈게요."
"가겠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온 대답에 강현이 해탈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너희랑 무슨 이야기를 하겠냐."
43화 길드 창설(4)
43. 길드 창설(4)
"강현 님."
"왜."
"그런데 길드원은 저희 셋뿐입니까?"
신성아가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뭐가 더 필요해?"
"길드는 하나의 사업체와 마찬가지입니다. 원래라면 능력자뿐만 아니라, 보조원, 사무원 등 많은 인력이 필요합니다."
"음..."
"자연스럽게 이들을 고용하고 유지하기 위한 자금도 필수죠."
돈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에 안유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 돈 많으니까 신경 쓰지 마요."
"알겠으니까 닥쳐봐."
강현이 안유성의 말을 끊어 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일단은 우리 셋으로 간다."
"..."
"당장 아무것도 모르는 놈을 막무가내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어. 그리고 우리가 돈에 쪼들리는 것도 아니잖아?"
"예."
"혹시나 네가 마정석 채취하는 게 귀찮아서 하는 말이라면 앞으로 안 해도 괜찮아."
"그건 아닙니다."
신성아는 절대 그런 뜻이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됐고."
강현이 박수를 쳐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이제 가장 중요한 길드 이름을 생각해 보자."
"길드 이름..."
강현의 말에 신성아와 안유성이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대충 생각해 봤어?"
커피에 담긴 얼음이 모두 녹을 만큼 시간이 흘렀다.
강현의 질문에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면 일단 안유성."
강현이 턱짓으로 안유성을 지목했다.
팔짱을 낀 채로 눈을 감고 있던 안유성이 번쩍 눈을 떴다.
"미치광이 어때요?"
"꺼져."
"아아, 잠시 만요. 그럼 루나틱(lunatic)은요?"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듯한 단어에 강현이 턱을 쓰다듬었다.
"어감은 괜찮은 것 같은데, 무슨 뜻이냐?"
"미치광이요."
"미친 새끼. 꺼져. 다음 신성아."
이번에는 신성아가 턱을 괴고는 진지하게 눈을 빛냈다.
"강현의 강한 친구들 어떻습니까?"
"뭐?"
강현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진심이냐?"
"예. 멋지지 않습니까?"
"하아..."
강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어차피 인생은 혼자 사는 거야.'
세상 모든 일이 그렇지 않은가.
강현은 이들의 도움을 받는 것을 포기했다.
"됐어. 이름은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럴 거면 물어보지나 말지."
"닥쳐."
안유성의 투덜거림을 무시하고 강현이 다음 안건을 꺼내 들었다.
"다음은 길드의 룰(rule)이야."
"룰 말입니까?"
"어. 한국말로 규칙! 이건 아주 중요한 거야."
"맞습니다."
"사실 내가 여기 오면서 몇 가지 생각해 둔 게 있거든?"
강현의 말에 둘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총 세 가지인데, 우선 첫 번째. 누구보다 강해진다."
"좋습니다."
신성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쓸 데 없는 시비는 걸지 않는다."
"왜 저를 보면서 말하는 건데요?"
"네가 제일 잘 알겠지."
잠시 안유성을 노려보던 강현이 말을 이었다.
"마지막 세 번째. 받은 만큼 돌려준다."
"은혜든 원한이든 받은 만큼 돌려주란 말입니까?"
"정확해. 나는 양아치가 되기 싫고 호구가 되는 건 더 싫거든. 모두 이의 없지?"
강현의 말에 둘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 그럼 이 세 개를 기…."
"그런데 강현 님."
"왜?"
갑자기 신성아가 강현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길드 창설하려면 준비할 것이 많지 않습니까?"
"그렇지."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 외에도 수많은 서류 작업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으음..."
"게다가 세 명에서 길드 창설이 가능한지도 의문이군요."
"그건 신경 쓰지 마."
신성아의 말투에 강현이 문제없다는 듯이 말했다.
"신태길 팀장이 전부 알아서 해줄 거래."
"예?"
"나한테는 그냥 길드원이랑 길드 이름만 전해달라는데?"
"역시 권력이 좋기는 하군요..."
**
-제가 보고 있는 게 길드 창설 신청서가 맞습니까?
그날 저녁.
신태길이 전화를 하자마자 내뱉은 말이었다.
"문제 있어요? 인원이 적어서 그런 거면 나중에 더 추가할게요."
-그게 아니라, 길드 이름이...
"영어라서 좀 그런가?"
-하아...
신태길이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영어는 문제 되지 않습니다.
"그럼 그대로 해줘요."
-진심이십니까?
"진심인데요."
강현이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어디 빌런 연합이라도 만드셨습니까? 도대체 배데스(Badass)가 뭡니까?!
잔뜩 흥분한 신태길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간지 나지 않아요?"
강현이 낄낄거리며 말하자 신태길이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나쁜 엉덩이 뭐 이런 겁니까?
"무슨 소리예요?! 엉덩이라니.
-그럼 뭡니까?
"굉장히 멋지고, 대단하고, 아주 쿨한 녀석들이라는 뜻이에요.
강현의 장난스러운 말에 신태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진짜라니까 그러네. 좋은 뜻이니까 걱정하지 마요."
-저도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신태길은 미국 아이비리그를 졸업한 인재였다.
"그리고 신태길 씨."
-예
"혹시 길드 사무실이 필요한데 마련해 줄 수 있어요?"
-적당한 곳으로 준비해 놓겠습니다.
"좋네요."
시원시원한 대답에 강현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저번에 보내준 테러범 놈한테서는 뭐가 나왔어요?"
강현은 문득 지난번에 안유성에게 발등이 박살난 놈이 떠올랐다.
-예상보다 협조적입니다. C등급 던전 공략 이후에 놈들을 소탕하기 위한 대대적인 작전을 실시할 예정입니다.
"굳이 공략 이후로 미루는 이유가 있어요? 던전 공략전에 얼른 처리하는 게 좋은 것 같은데."
-놈들의 규모가 생각보다 거대합니다. 한꺼번에 일망타진을 하려면 철저하게 조사하고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어요. 던전 공략 날짜는 언제예요?"
-5일 후입니다.
생각보다 제법 여유가 있었다.
소규모로 움직이는 강현은 다른 길드처럼 많은 준비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천천히 준비하면 될 것 같았다.
-그전에 사전 회의에 참석하셔야 합니다.
"사전 회의?"
-예. 이번 던전 공략에 능력자 연합을 포함한 7개의 길드가 참가할 예정입니다. 미리 길드장님들을 모시고 공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습니다.
"그건 또 언제인데요?"
-내일입니다.
**
어두운 방안.
한 남자가 불도 켜지 않은 채로 소파에 몸을 파묻고 있었다.
남자는 너저분하게 있는 자신의 머리를 흔들었다.
"무슨 일이냐."
남자의 말에 뒤에 기립해있던 여성이 다가왔다.
"정영식이 붙잡혔습니다."
그 말에 소파에 있던 남자, 최민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누구한테?"
"강현이라는 놈입니다."
강현.
이번에 데이언스의 연구소 건으로 크게 이슈가 된 이름이지만, 최민준은 이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다.
정의현과 함께 베이트 길드를 창설하고 지원한 것이 바로 최민준이었기 때문이다.
'전부터 거슬리는 놈이야...'
정영식은 은신 스킬을 지니고 있어 차후에도 요긴하게 쓸 예정이었다. 그런데 강현으로 인해 계획이 틀어져 버렸다.
"약물은 얼마나 완성됐지?"
"아직 시간이 필요합니다. 실험체도 부족한 상황인지라..."
여성의 말에 최민준의 인상이 잔뜩 찌푸려졌다.
"안 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일정을 앞당겨.
"알겠습니다."
**
-한국 최초의 C등급 던전 공략! 능력자 연합과 6개의 길드 참가 예정.
-단군 길드의 한세연. 강력한 공략 의지 보여.
-최동우. 대한민국 능력자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릴 사건이다.
-지금 세계의 관심은 한국의 던전 공략에 쏠려있다.
정부의 C등급 던전 공략 발표가 나자마자 뉴스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C등급 던전의 완전 클리어.
단숨에 최고의 이슈가 된 던전 공략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관심을 가질 정도였다.
[공략 참가 목록]
-대한민국 능력자 연합
-단군(檀君)
-불사(不死)
-화룡(火龍)
-수호자(守護者)
-검은 기사단(Black knights)
-배데스(Badass)
그리고 함께 발표된 던전 공략 참가 목록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능력자 연합이랑 10위권 길드가 들어가는 건 알겠는데 배데스는 뭐임?
-나쁜 엉덩이인가?
-조회해보니 어제 생긴 신생 길드다.
-길드장 이름 강현. 저거 고블린 슬레이어 본명이었던 것 같은데
그곳에 있는 생소한 길드명에 사람들이 설전을 벌였다.
-강현이 벌써 저기 들어갈 클래스라고? 이제 막 사건 하나로 떴는데 너무 거품 아님?
-또 로비 같은 거 했겠지 뭐.
-로비? 뒤지고 싶나. 강현 클라스 안 봤으면 닥치고 있어라. 뚝배기 터뜨려버리기 전에.
"형."
안유성의 부름에 강현이 다급히 스마트 폰을 집어넣었다.
"왜?"
"슬슬 가야죠."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오늘은 던전 공략을 위한 길드장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강현은 혼자 가려고 했지만 안유성과 신성아가 구태여 따라나서겠다고 길드 사무실에 모였다.
"그래. 오늘 다녀오면 사무실 좀 꾸며놓자."
신태길은 약속대로 사무실을 마련해 주었다.
무려 강남에 위치한 빌딩의 한 층을 통으로 내준 것이다.
하지만 내부에 놓여있는 집기라고는 강현 앞에 놓인 책상과 의자가 전부.
드넓은 내부가 오히려 삭막함을 더하는 것만 같았다.
"제가 꾸며 놓을까요?"
안유성의 말에 강현이 그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70년대 펑크락 밴드도 형님하며 울고 갈 만한 쇼킹한 패션이었다.
"넌 절대 안 돼. 차라리 신성아한테 맡기지."
"그럼 제가 합니까?"
옆에서 듣고 있던 신성아가 밝은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아니."
"쳇."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겠지만 전투 외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놈들이다.
강현은 나중에 정식 업체를 불러서 리모델링을 하리라 다짐했다.
"일단 가자. 늦겠다."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강현이 서둘러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이건 또 뭐야..?"
사무실 앞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는 리무진을 보고 강현이 벙찐 표정을 지었다.
"제가 불렀어요."
어지간한 중형 버스보다 길어 보이는 검은 리무진은 보는 것 만으로 압도되는 듯했다.
말 그대로 귀티가 줄줄 흘러내리는 모습에 사람들이 연신 셔터를 누르며 사진을 찍어대고 있었다.
"도련님 오셨습니까."
"지금 출발할 거예요."
"알겠습니다."
이전에도 만난 적이 있던 안유성의 전속 운전기사였다.
"야. 좀 평범한 차는 없냐?"
"형도 불편하게 따닥따닥 붙어가고 싶진 않잖아요."
사실이기에 부정할 수는 없었다.
"어휴... 됐다. 그냥 가자."
차에 올라타며 강현은 길드 전용 자동차와 운전기사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신태길 팀장이 알아서 해주겠지?'
신태길이 듣는다면 당장 혈압에 뒷목을 부여잡을만한 생각을 하며 좌석에 몸을 뉘었다.
'좋긴 좋네.'
전에도 느낀 것이지만 이 차량은 좋아도 너무 좋았다.
조금만 앉아 있으면 바로 잠이 올 정도.
아마 베테랑 운전기사의 솜씨도 한몫했을 것이다.
"지금 몇 시지?"
"13시 59분입니다."
예상보다 차가 막혀 늦게 생겼다.
회의는 정확히 14시에 시작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꼭 5분 전에는 도착해서 자리에 착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태길이 신신당부하던 것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으음..."
조금 전부터 계속 울리던 스마트폰을 애써 외면하던 강현이 결국 문자를 확인했다.
-어디십니까. 5분 전입니다.
-전화는 왜 안 받으시는 겁니까. 무슨 일 있으십니까?
-강현 씨 어디십니까? 14시 정각입니다. 다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전화 받으십시오. 야이 씨ㅂ…
서둘러 화면을 껐다.
"멀었어요?"
"도착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인 던전 관리 기구 본부에 도착했다.
리무진 문을 열자 현대적으로 지어진 거대한 건물이 보였다.
"이런 건 또 언제 만들었데?"
"이번에 새로 지은 건물입니다."
"그래? 세금낭비 제대로 하네."
잠시 건물을 구경하던 강현이 머리를 흔들었다.
"건물 구경이나 할 때가 아니지. 지금 몇 시야?!"
"14시 4분입니다."
"얼른 가자!"
빠른 걸음으로 건물로 들어간 일행은 곧장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목적지인 11층을 누르고 문이 닫히려는 찰나, 두터운 손이 문을 붙잡았다.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곧이어 능력자로 보이는 10명의 무리가 엘리베이터에 올라섰다.
이들은 모두 붉은 계열의 장비를 입고 있었는데 상당히 화려한 모습이었다.
-삐... 정원 초과입니다.
장비의 무게 때문인지 적정 무게인 1000kg을 넘겨 엘리베이터가 경보를 울렸다.
"크흠..."
계속해서 경보음이 울렸지만 새로 탑승한 이들은 내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것들은 뭐야?'
강현이 고개를 돌려 빤히 그들을 쳐다봤다.
"안 내려요?"
"허, 참... 우리가 누군지 모르나?"
강현이 눈치를 줬지만 이들은 적반하장으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 화룡 길드야!"
말을 한 남자가 멋들어지게 치장된 망토를 보란 듯이 펄럭였다. 망토에는 불타는 용이 포효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
그 모습을 보고 강현의 표정이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화룡이고 나발이고, 바쁘니까 좋은 말로 할 때 내려."
44화 던전 공략 회의 - 20.02.29
44. 던전 공략 회의
"화룡이고 나발이고, 바쁘니까 좋은 말로 할 때 내려."
강현이 이빨을 꽉 깨물며 말했다.
"뭐라고? 이 자식이! 화룡 길드 몰라!?"
"너 뭐하는 놈이야?"
"하아... 시벌."
"뭐, 뭐?! 씨이벌? 말 다 했냐!?"
절로 욕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강현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렇지 않아도 회의에 늦었는데 웬 멍청이들 덕에 더 늦게 생겼다.
"형. 얘들 다 족쳐도 상관없죠?"
"가만히 있어봐."
안유성도 기분이 좋지 않은지 당장 메이스를 꺼내 놈들의 머리를 후려칠 기세였다.
좁은 엘리베이터 안이 순식간에 긴장감과 열기로 채워졌다.
"이쯤 하지. 너희들이 내려라."
"하지만 길드장님!"
"내리라고 했다."
길드장이라 불린 남성의 말에 몇몇 사람들이 움직였다.
곧이어 경보음이 멈추고 엘리베이터가 위로 움직였다.
-우우우웅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며 나는 소음이 기묘한 불편함을 가렸다.
"조금 전에는 실례했습니다."
어색함이 극에 달하기 직전.
길드장이라 불린 남성이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11층에 가시는 것 보니, 이번 공략에 참여하시는 겁니까?"
"예. 뭐... 그렇죠."
"저는 화룡 길드의 길드장. 박호연이라고 합니다."
"강현입니다."
박호연이 손을 내밀자 강현이 마지못해 마주 잡았다.
얼굴에는 적나라하게 짜증이 드러난 채였다.
'이런 건방진 놈이...'
화룡 길드는 불사 길드와 함께 국내 2위의 자리를 다투는 초대형 길드이다.
전반적인 수준은 불사 길드에 비해 떨어졌으나, 길드원 수 국내 1위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만큼 한 번도 밀린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감히 화룡 길드의 길드장인 내게 이딴 태도를 보여?'
박호연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겨우 억눌렀다.
여기서 성급하게 화를 내는 것은 여러모로 좋지 않았다.
-띵!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11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 신태길이 잔뜩 굳어있는 얼굴로 이들을 맞이했다.
"10분이나 늦으셨습니다."
"미안해요. 웬 병신들이 엘리베이터에서 안 내려서."
강현의 말에 분위기가 살얼음판처럼 변했다.
화룡 길드원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으며 박호연 또한 더 이상 침착함을 유지하지 못했다.
"벼.. 병신 새끼들?!"
잔뜩 치켜 올라간 박호연의 눈에서 불꽃이 튀겼다.
"푸후흡!"
그와 대조적으로 안유성은 뭐가 그리 좋은지 키득거렸다.
"..."
신성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표정을 유지했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다시 지껄여 봐."
박호연이 씹어 내뱉듯이 말했다.
"왜? 기분 나쁘셨나? 그러니까 병신 소리 듣기 싫으면 다음부터 예의 좀 지키라고 병신아."
강현은 평소답지 않게 상당히 예민했다.
별 시답잖은 것으로 갑질을 하려는 모양새를 보니 베이트 길드가 떠올랐던 것이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분위기에 신태길이 중재에 나섰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니 이 건방진 자식이…."
"빨리 입장하시죠. 다른 길드의 마스터들께서 기다리십니다. 더 늦으면 이번 던전 공략에서 제외하겠습니다."
공략에서 빼버리겠다는 말이 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사람들이 움직였다.
-뚜벅, 뚜벅
발소리만이 조용히 울리는 복도는 폭풍전야처럼 느껴졌다.
화룡 길드원들은 끊임없이 강현을 노려봤다.
당장 검을 꺼내 뒤통수를 후려치지는 않을까 걱정이 들 법한 상황.
그러나 강현은 주위가 어떻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당차게 회의장 문을 열어젖혔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날카로운 시선들이 날아와 꽂혔다.
그들은 처음 보는 강현을 파악하기 위해 정신없이 눈을 굴렸다.
'저 남자가 강현인가?'
'박호연이야 원래 그런 놈이라지만, 처음부터 지각이라니. 쯧.'
'옷차림은 어디 동네 양아치들 같군.'
누구 하나 고운 시선이 없었으나 최동우만은 달랐다.
강현의 얼굴을 본 그가 반갑게 인사를 건네 왔다.
"강현 씨. 반갑습니다."
"아! 최동우 씨."
강현도 이미 한번 도움을 받은 이력이 있기에 반갑게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실제로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이네요. 지난번에는 고마웠습니다."
"사람들을 구한 영웅에게 그런 말을 듣다니 영광입니다. 하하하."
최동우와 인사를 나누던 도중 한세연도 아는 척을 해왔다.
"오랜만입니다."
"예. 오랜만이네요."
"큰일을 치르셨다 들었습니다."
"에이, 별거 아니었어요."
최동우와 한세연.
대한민국의 유일한 튜토리얼 졸업자 두 명이 모두 반갑게 강현을 맞이했다.
그 장면을 보며 사람들이 눈을 빛냈다.
'최동우야 원래 사교성 좋은 거로 유명하다만...'
'폐쇄적으로 운영되는 단군과도 친분이 있어?'
그러는 사이 강현은 자신의 팻말이 놓인 자리에 앉았다.
그것으로 총 7개의 의자가 주인을 찾았다.
능력자 연합의 회장. 그리고 국내에서 가장 강력한 5개 길드의 길드장들이 모였다.
그 사이에서 불편할 법도 했건만 강현은 흔들림 없는 편안함을 보였다.
"오래 기다렸습니다. 바로 회의 시작하겠습니다."
"새 친구 소개는 없는 건가?"
회의가 시작되려는 순간 한 남자가 이의를 제기했다.
화룡과 함께 2위를 다투는 불사 길드.
그곳의 길드장 '한명도'였다.
"으음, 강현 씨. 자기소개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죠."
신태길의 말에 강현이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났다.
"먼저 지각해서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배데스(Badass) 길드의 길드장 강현입니다."
의례적인 박수가 회의실을 채우고.
곧이어 사람들의 질문세례가 이어졌다.
"기존부터 있던 길드인가요?"
"아니요. 어제 만들었습니다."
"길드원은 몇 명입니까?"
"길드장인 저와 부 길드장 두 명. 총 셋입니다."
강현이 대답이 이어질수록 사람들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졌다.
전혀 이 자리에 끼일만한 커리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장난쳐? 신생 길드인 것도 모자라서 세 명으로 C등급 던전을 공략하겠다고?! 너 뭐하는 놈이야!"
화룡의 박호연이 삿대질을 하며 악에 받친 채로 소리쳤다.
"아... 진짜 아까부터 존나 귀찮게 하네. 불러서 왔는데 어쩌라고."
"뭐, 뭐?!"
강현은 귀를 후비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크하하! 저 친구 마음에 드는데?"
그 모습을 보고 화룡과 앙숙 관계인 불사의 한명도가 호탕하게 웃었다.
"이 건방진 새끼가!"
"거기까지만 하게."
벌게진 얼굴로 박호연이 일어났다.
하지만 최동우가 제지하자 못 이기는 척 자리에 앉았다.
'회의장만 아니었어도...'
이곳에 모인 이들 중 누구 하나 만만한 이가 없었다.
아무리 박호연이라지만 성급하게 화를 낼 만한 자리가 아니었다.
"너는 회의 끝나고 보자."
"인사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박호연의 경고에 강현은 대답조차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감사합니다. 그럼 본격적인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신태길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이번에 공략할 던전은 C등급 베난디의 숲입니다."
"베난디의 숲이라... 정글 지형인가?"
"정글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산맥입니다. 정찰팀의 보고에 의하면 고블린부터, 오크, 오우거 그 외에도 굉장히 다양한 몬스터들이 등장한다고 합니다."
예상외로 익숙한 몬스터들의 이름이 열거되자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베난디는 그럼 무슨 뜻인가?"
지금까지 던전 이름은 항상 그곳에 서식하는 몬스터의 이름을 따서 나온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베난디의 숲' 던전도 높은 확률로 '베난디'라는 몬스터가 대거 등장할 것이라 예상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베난디'는 던전의 보스 이름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으음..."
"그렇다고 해서 방심하시면 안 됩니다. 숲의 몬스터들은 기존에 상대했던 놈들과 차원이 다릅니다. 이제까지 몬스터들이 민병대라면 지금 이놈들은 정규군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기존과는 달리 체계적으로 움직이며 사냥하고, 개인의 기량 또한 월등히 올라간 상태입니다. 마치 잘 훈련된 군대와 같다고 보시면 될 겁니다."
훈련된 군대라는 설명에 사람들의 얼굴이 굳었다.
같은 몬스터라도 막무가내로 덤비는 것과 체계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길드장들은 벌써부터 던전에서 벌어질 일들이 눈에 펼쳐지는 듯했다.
"공략은 길드 단위로 움직이는 것이 기본입니다만... 가능하면 다른 길드와 연합해서 움직이시는 것을 권유합니다."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자존심이 강했고.
던전 보상과 공략에 따른 명예에 욕심이 가득한 상태다.
신태길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신태길은 연합에 대해 더 언급하지 않고 넘어갔다.
어차피 말해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다음은 공략 규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현재까지 베난디의 숲에서 일반 코어는 한 번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
"때문에 던전에 오직 메인 코어 하나만 존재한다는 가정을 하고 대비를…."
한창 회의가 진행되던 도중이었다.
'뭔가 이상한데...'
뒤쪽에 서서 대기하던 안유성이 눈을 빛났다.
'저 아저씨는 뭐야?'
강현의 옆에 앉아있는 남자.
수호자 길드의 길드장 박세현이었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박세현을 바라보던 안유성이 천천히 움직였다.
"뭐합니까?"
함께 서 있던 사람들이 자신을 불렀으나 안유성은 무시했다.
'오랜만에 육감이 강하게 울린다.'
그의 고유스킬 육감이 무언가 잘못될 것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형. 뭐가 이상한데요."
"무슨 소리야? 회의 중이잖아. 급한 거 아니면 이따가 이야기해."
"아니 지금 당장 움직여야…."
그때였다.
"크륵, 큭..."
갑자기 옆쪽에서 기괴한 음성이 들려왔다.
안유성이 재빨리 인벤토리에서 메이스를 꺼냈다.
"이봐 당신! 뭐하는 거야?!"
"잠깐만! 길드장님이 좀 이상하지 않아?"
수호자 길드의 박세현은 고개를 숙인 채로 신음하고 있었다.
갑옷 밖으로 드러난 그의 피부에 징그러운 핏줄들이 올라온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강현이 못 볼 꼴을 봤다는 듯이 인상을 찡그렸다.
"야. 이 아저씨 왜이래?"
"형. 지금 죽여야 돼요."
안유성이 다짜고짜 메이스를 휘두르려 했다.
강현은 다급히 안유성의 팔을 붙잡았다.
"미쳤냐!? 갑자기 길드장을 죽여?"
말을 함과 동시에 강현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아, 원래 미쳤지.'
그렇다 해도 그것이 면죄부가 되지는 않는다.
무턱대고 거대 길드의 길드장 머리통을 박살 낸 다음, '얘가 원래 미쳐서요. 하하!' 같은 변명 따위를 할 수는 없었다.
"비켜!"
그때 수호자 길드원이 달려오더니 안유성을 밀쳐냈다.
수호자 길드원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박세현을 살폈다.
"길드장님 괜찮으십니까?!"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박세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크르르륵...!"
"길드장님...?"
그것은 괴물의 얼굴이었다.
더는 인간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기괴해진 모습.
"크아아!"
두 눈이 완전히 붉게 물든 박세현이 괴성을 내질렀다.
동시에 내지른 손이 단숨에 길드원의 배를 꿰뚫으며 사방으로 피가 뿜어졌다.
"크큭. 이럴 줄 알았어. 죽어!"
안유성은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망설임 없이 메이스를 휘둘렀다.
-퍼걱!
그러나 박세현은 길드원의 시체를 방패 삼아 메이스를 막아냈다.
그리고 다른 팔을 휘둘러 안유성을 쳐냈다.
"크헉!"
가벼운 손짓처럼 보였으나.
팔에 얻어맞은 안유성은 단숨에 건물 벽까지 날아가 부딪혔다.
"이런 개새끼가!"
안유성이 날아가는 것을 본 강현이 즉시 모든 스킬을 활성화했다.
강현이 어금니를 꽉 깨물며 전력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뒤져!"
정확하게 박세현의 턱에 작렬하는 주먹.
-콰과과과광!
박세현은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 온갖 집기들을 박살내며 회의실 끝에 처박혔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무슨 위력이 저래...?"
"방금 주먹질한 거야!?"
분명 단순한 주먹질이었다.
하지만 그 위력은 어지간한 몬스터나 능력자라면 한 방에 머리가 터져나갈 정도였다.
'시벌! 힘 조절을 잘못했어. 죽으면 골치 아픈데.'
안유성이 다치는 모습에 흥분해서 힘을 과하게 주었다.
아무리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지만.
거대 길드의 길드장을 무턱대고 죽였다가는 문제가 생길 것이 뻔했다.
"뭐야. 멀쩡하네?"
그러나 걱정과는 달리 박세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났다.
박세현은 뼈가 어긋난 듯 목이 묘하게 뒤틀려 있었는데 본인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뚜둑, 뚜두둑
박세현이 목이 움직일 때마다 들리는 살벌한 소리가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마침내 원래대로 목이 자리를 잡자 박세현이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강현도 마주 웃었다.
"그쪽도 한 터프 하는구나?"
**
회의실 사건이 일단락되고, 밖으로 나온 강현이 무심하게 안유성을 바라봤다.
"괜찮냐?"
"예. 별거 아니었어요."
다행히 던전 관리 기구에는 치유 스킬을 가진 능력자가 대기하고 있었다.
스킬로 몸을 회복한 안유성이 쌩쌩한 모습으로 웃었다.
"그나저나 그 길드장이 미쳐버린 건 어떻게 안 거야?"
"감이죠."
"쯧."
결국, 박세현은 생포됐다.
다만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원래도 강한 그였지만 괴물처럼 변하고 한층 더 강력해졌던 것이다.
단순 신체 스펙으로는 모든 버프를 받은 강현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혼자였으면 약간 어려울 수도 있었지.'
그러나 그곳에 있었던 이들은 대한민국 최고의 능력자들.
모든 길드마스터들이 나서자 박세현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제압되었다.
"그 남자. 왜 그렇게 변한 걸까?"
"으음..."
강현의 물음에 신성아가 턱을 쓰다듬었다.
"수호자 길드는 말 그대로 인류를 수호한다는 신념으로 모인 단체입니다. 길드장 박세현은 올곧은 성품으로 유명했고, 길드원들 또한 그의 추종자가 대다수입니다."
"무슨 사이비 종교 단체 같네."
강현이 말에 신성아가 고개를 저었다.
"게다가 국내 5위에 랭크된 길드이기도 합니다."
"크흠..."
국내 5위라는 말에 강현이 괜히 헛기침했다.
"어쨌든 그런 거대 길드의 길드장이 왜 그렇게 변했는지... 아마 강압적인 방법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는 굉장히 강한 사람이었으니까요."
신성아는 박세현에 대해 제법 자세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원래 알던 사람이야?"
"아닙니다."
"그런데 제법 잘 안다?"
"인류를 수호한다! 멋지지 않습니까?"
신성아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말했다.
강현은 왜 신성아가 박세현에 대해 술술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됐다. 정부에서 조사한다 했으니 알아서 하겠지."
"예."
"너희는 한동안 좀 쉬어. C등급 던전 공략까지 꽤 남았으니까. 그동안 계속 달렸잖아."
"강현 님은 일정이 있으십니까?"
"아니 없는데. 할 거 없으면 던전이나 돌아야지."
강현이 5초 전에 자신이 했던 말을 번복했다.
"괜찮으시면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형. 저도요."
"그래."
그들은 C등급 던전 공략 전.
D등급 던전을 공략하며 휴식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45화 영역 다툼(1)
45. 영역 다툼(1)
"오늘 오는 거 맞아요?"
-예. 곧 있으면 도착할 겁니다.
"고마워요."
-차량은 마음에 드십니까?
"괜찮던데요? 밴(van)이라니. 연예인 기분도 나고 좋더라고요."
-다행입니다. 그럼 공략 날에 뵙겠습니다.
신태길과의 통화를 종료한 강현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각종 맥주와 탄산음료들이 줄지어 늘어선 모습이 보였다.
"크아! 좋다."
단숨에 맥주 한 캔을 비운 그가 빈 캔을 쓰레기통에 던졌다.
"아무리 봐도 너무 넓단 말이지."
신태길이 마련해준 사무실은 제법 큰 빌딩의 한 층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었다.
대충 둘러봐도 수백 평은 되어 보이는 공간. 그러나 그 넓이에 비해 지나치게 텅 비어있는 사무실은 썰렁하다 못해 삭막했다.
"샤워실도 설치하고, TV랑 소파도 놓을까? 침실도 하나 만들고. 길드 사무실이지만 설치하지 말란 법도 없잖아?"
"동감이요."
안유성은 언제 가져온 것인지 고급스러운 원목 책상에 데스크톱 PC를 설치해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PC룸도 하나 만들어야겠네."
신태길이 이 모습을 본다면 당장 사무실을 비우라고 소리칠 게 분명하지만,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할 일이다.
"좀 있으면 신규 길드원 면접 보러 올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띵동
그때였다.
조용하던 사무실에 인터폰이 울렸다.
"벌써 왔나?"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입구로 걸어간 신성아가 문을 열자 작은 체구의 남성이 보였다.
"여기가 배데스 길드 사무실이 맞나요...?"
"맞습니다."
"저 오늘 면접 보기로 한 사람인데..."
"들어오라 해."
안쪽에서 들리는 강현의 말에 신성아가 자리를 비켜주었다.
'와, 진짜 강현이야. 실제로 보니 완전 분위기 작살난다. 쳐다만 봐도 맞을 것 같아.'
남자는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며 강현에게 걸어갔다.
회장님 의자에 거만하게 앉아있던 강현이 서류를 꺼내 들었다.
"한재문 씨 맞죠?"
"네, 넵!"
"이름 한재문, 나이 27살. 169.7cm에 59kg? 이런 신체사이즈는 왜 적은 거야?"
강현의 혼잣말이었지만 괜히 뜨끔한 한재문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거 없어요. 그냥 한 말이니까. 여기서 무슨 일 하시는지는 들었죠?"
"네. 길드 관련 업무를 볼 거라고..."
"그냥 혼자서 길드를 운영한다고 생각하면 편해요. 그래도 사람이 셋뿐이니 크게 일은 없을 겁니다."
"예."
"그리고 우리가 이동할 때는 운전도 담당하셔야 해요."
"알겠습니다."
"신태길 팀장한테 아주 엘리트란 말을 들었어요. 기대할게요."
"예! 잘 부탁드립니다!"
마침내 운전기사가 생겼다는 생각에 강현이 흐뭇하게 웃었다.
"아, 너네도 상관없지?"
생각해 보니 아직 신성아와 안유성의 의견을 묻지 않았다.
"상관없어요. 혹시나 돈 필요하면 말해요."
"강현 님이 마음에 드시는 걸로 충분합니다."
시원스러운 둘의 승낙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부 길드장들도 마음에 든다고 하네요. 월급은 천만 원. 보험 같은 건 난 모르니까 신태길 팀장이랑 이야기하시고. 혹시나 돈 더 필요하시면 말씀하시고."
"예!"
"그럼 길드에 들어온 걸로 알고 앞으로는 말 편하게 합니다?"
"알겠습니다!"
예상보다 훨씬 큰 봉급 때문인지 한재문의 눈이 더욱더 초롱초롱해졌다.
'진짜 천국은 이곳에 있었어!'
사실 그는 흔히 말하는 능력자 오타쿠였다.
능력자를 선망해서 던전 관리 기구에 들어갔고, 후에 신태길에 의해 특수 능력자 관리팀에 영입됐다.
'안유성과 신성아도 듣던 대로 압박감이 장난 아니야.'
안유성은 게임을 했고, 신성아는 그저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콩깍지가 씐 그의 눈에는 그것마저도 멋져 보였다.
'반드시 이곳을 국내 1위 길드로 키워내고 말겠어!'
한재문이 한창 다짐을 하던 그때, 신성아가 무언가를 꺼내왔다.
"강현 님."
"왜?"
"저희도 길드 제복이 있으면 소속감과 유대가 더 깊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갑자기?"
"예!"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길드 제복이란 말에 한재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당연히 해야지! 아주 훌륭한 생각이야!'
길드에 들어오자마자 덕질 요소가 늘어나는 순간이었다.
"사실... 제가 이미 준비해놓은 것이 있습니다."
"그래? 그럼 한번 보자."
신성아는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친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강렬한 분위기로 유명한 강현인데, 복장까지 갖추면 얼마나 멋질까?'
잔뜩 흥분한 한재문이 저도 모르게 코를 벌렁거렸다.
그러나 그 기대는 채 10초도 가지 못하고 박살났다.
"저게 뭐야..?"
순간 당황한 나머지 한재문이 저도 모르게 육성을 내뱉었다.
신성아가 꺼내 든 옷이 가죽 재킷이었기 때문이다.
'저딴 걸 길드 복장으로 하겠다고?!'
그것도 그냥 가죽 재킷이 아닌, 80년대 폭주족이나 입을 법한 흉물스러운 징이 박힌 가죽 재킷이었다.
"등에는 붉은 글씨로 크게 'BadAss'를 새겼습니다. 안유성 씨의 의견을 받아들여 해골 로고도 만들어서 새겨봤는데 썩 괜찮은 것 같습니다."
"줘봐."
재킷을 받아 든 강현이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걸 길드 복장으로 하자는 거야?"
"예."
"진지한 거지?"
"예."
신성아가 해맑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버려."
"예?"
"버리라고. 나도 진지하게 하는 말이야. 싹 다 버려."
"..."
그 해맑던 표정은 금세 나라를 잃은 표정으로 변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지난 며칠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얼마라고요?
-천만 원.
-너무 비싸지 않습니까?
-참나, 아가씨. 장인의 예술혼을 무시하는 거요? 그럴 거면 그냥 어중이떠중이들이나 찾아가쇼.
-아닙니다. 여기서 하겠습니다.
거금을 들여서 동대문 잡상인에게 디자인을 의뢰하고,
-이 가죽이 이번에 새로 나온 신소재거든요? 얼마나 튼튼한지 칼로 내려쳐도 흠집도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얼마입니까?
-지금 사시면 딱! 원가인 500만 원에 해드립니다.
-너무 비쌉니다.
-그럼 세 벌 합쳐서 1300 어떻습니까? 고객님이 너무 미인이셔서 제가 특별히 깎아드리는 겁니다.
-좋습니다.
아는 친구의 동생의 지인의 아버지 소개로 주문 제작까지 맡겼다.
그 뒤로도 조금이라도 멋지게 보이기 위해 필사적으로 고민했다.
-후후...
마침내 오늘.
완성된 옷이 왔을 땐 뛸 뜻이 기뻤지만, 서프라이즈를 위해 티를 내지 않았다.
-강현 님이 보시면 엄청 좋아하시겠지.
계속해서 웃음이 실실 새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정말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었다.
"너 우냐?"
"아, 아닙니다..."
뒤로 돌아선 신성아의 어깨가 들썩였다.
그녀의 가죽 재킷 뒤쪽에는 커다랗게 'BadAss'라는 단어가 쓰여 있었다.
"아니 도대체 왜?!"
"형이 너무했네요. 누나가 얼마나 열심히 준비한 건데."
"닥쳐!"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한 신성아가 사무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쾅!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긴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
강현은 한재문이 온 기념으로 단체 회식을 결정했다.
반대 따위는 듣지 않는 그는 곧장 길드원들과 함께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왔다.
"그렇게 좋냐?"
"예. 좋습니다."
항상 무표정을 고수하던 신성아였지만 지금만큼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후우... 그래. 그거면 됐지."
신성아가 준비한 재킷은 맞춤 제작을 한 것처럼 몸에 딱 맞았다. 그런 옷을 셋이서 함께 맞춰 입으니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기도 했다.
"한재문. 운전 부탁해."
"알겠습니다..."
어째서인지 잔뜩 풀이 죽어있는 한재문이 열쇠를 받아 들었다.
"차를 어디 세워뒀더라."
밴(van)에 찾기 위해 강현이 지하 주차장을 두리번거렸다.
"저기 있잖아요."
안유성이 가리킨 곳을 본 강현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저게 우리 밴이라고..?"
분명 신태길이 보내준 밴과 같은 차종은 맞았다. 그러나 본디 검은색으로 심플하게 도색되어 있던 밴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네 짓이냐?"
"예. 멋지지 않아요? 어제 사람들 불러서 밤새도록 작업했어요."
"뒤지고 싶어?"
온갖 도료로 요란하게 칠해진 밴은 재킷과 같은 거대한 해골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마치 불타는 것 같은 필체로 보닛에 쓰여 있는 'BadAss'가 인상적이었다.
"이거 중고상에 넘기고, 똑같은 밴으로 새로 구입해."
"흐흑... 열심히 준비했는데..."
"우는 척하지 마라. 진짜 죽여 버리고 싶으니까."
"쳇."
스트레스에 머리를 쓸어 넘기려던 강현이 멈칫했다.
'더 이상 머리에 자극을 주면 탈모가 올지도 몰라... 그것만은 절대로 안 돼.'
아직 머리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강현은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씨발... 그래. 다 내 잘못이다. 누구를 탓하겠냐."
강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밴에 올라탔다.
'여기 뭔가 이상해...'
한재문은 잔뜩 꿈에 부풀어 배데스 길드에 들어왔건만, 그 꿈은 불과 한 시간 만에 와장창 무너져 내렸다.
그가 생각한 길드, 능력자는 절대 이런 것이 아니었다.
'무슨 마피아, 갱단도 아니고 이게 뭐냐고?! 게다가 묘하게 멍청해!'
한재문은 당장에라도 안유성과 신성아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무슨 짓이냐고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제법 괜찮지 않아요?"
"..."
"나름 공들여서 한 건데."
"입 열지 마라. 죽인다."
**
저녁 식사 메뉴는 강현의 의사가 적극 반영된 소고기였다.
강현은 유독 소고기를 좋아했다.
항상 가난했던 그에게는 소고기가 성공의 상징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야. 저기 봐. 자동차 완전 요란한데?"
"배데스? 그거 이번에 만들어진 신생 길드 아니야?"
신호를 기다리던 도중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소고기 생각에 조금 풀어졌던 강현의 기분이 다시 상해버렸다.
"길드 홍보도 되고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런 강현의 기분을 알지 못하고 신성아가 해맑게 말했다.
"얼마나 남았어?"
"거의 다 왔습니다."
"다행이네. 얼른 가자. 빨리 소고기를 먹지 않으면 미칠 것 같으니까."
그러나 강현의 기대와는 달리, 한참이 지나도 차량은 움직이지 않았다.
-빵, 빵!
곳곳에서 경적소리가 들려오고 기다리다 지친 운전자들이 차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왜 안 가는 거야!"
"싸움 낫나 본데?"
근처의 사람들이 웅성대는 모습에 강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또 뭐야. 슬슬 배고파지는데 짜증… 쿠헉!"
강현이 밴에서 내리려는 찰나 무언가가 날아와 밴에 처박혔다.
덕분에 문을 열던 강현의 얼굴이 그대로 문과 부딪혔다.
"씨발! 뭐야?!"
"뭔가 날아와 부딪힌 것 같습니다."
"어떤 새끼가... 잠깐만, 이거 피야?"
"예. 코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강현의 코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평소에 피를 흘리는 일이야 일상이지만, 멀쩡한 상태에서 코피만 흐르자 묘하게 기분이 불쾌했다.
"안 돼!"
강현이 피를 본 안유성이 갑자기 비명을 내질렀다.
"괜찮아. 그렇게 심하게 다치지는 않았…."
"비켜요!"
말을 하던 강현을 밀친 안유성이 다급히 밴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옆 문짝이 박살난 밴을 허망하게 바라봤다.
'이 새끼... 내가 아니라 차를 걱정한 거였어?'
강현은 화가 치밀어 오른다기보다는 그저 어이가 없었다.
"큭, 크큭... 크하하하!"
잠시 문짝을 바라보던 안유성이 얼굴을 부여잡고 미친 듯이 웃었다.
예술혼을 불태운 밴이 하루 만에 망가졌다는 사실이 제법 큰 충격인 듯했다.
"죽여 버리겠어..."
"정신 차려 인마."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안유성이 눈을 번뜩였다. 때마침 밴에 처박혔던 남자가 바닥에서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뭘 꼬라봐?!"
남자는 꽤나 강한 능력자인지 밴에 부딪히고도 별다른 부상이 없어 보였다. 그런 그가 강현과 안유성을 향해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뭔데? 죽고 싶어?!"
검을 들고 위협했지만 둘은 무심하게 남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뭐, 뭐..?!"
"..."
"뭐냐고, 요..."
그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46화 영역 다툼(2)
46. 영역 다툼(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