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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54

46화 영역 다툼(2)

46. 영역 다툼(2)

'해선 길드'와 '정진 길드'의 다툼이 시작된 것은 1주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진 길드 아니십니까? 여긴 어쩐 일로...

-능력자가 던전에 몬스터 잡으러 오지 다른 이유가 있나요?

-여기는 해선 길드 영역입니다만.

-그래서요?

-뭐..? 으악!

갑작스럽게 해선 길드가 점유 중인 던전에 들이닥친 정진 길드.

그들은 막아서는 해선 길드를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던전을 클리어했다.

당연히 주 수입원을 날려먹은 해선의 길드장 조성찬은 정진 길드를 찾아가 항의했다.

-갑자기 무슨 짓입니까?!

-던전을 클리어한 게 잘못인가?

-다른 던전들을 놔두고 왜 해선 길드의 영역에 왔냐는 말입니다.

-그거야 내 마음이지. 힘이 없으면 뺏기는 거야 당연한 거잖아.

-뭐라고?!"

그러나 정진의 길드장 홍채연은 오히려 적반하장의 태도로 당당하게 말했다.

-그나마 가진 것도 빼앗기기 싫으면 앞으로 조용히 지내는 게 좋을 거야.

-이건 약속이랑 다르잖아!

-약속은 지켜줄 가치가 있을 때나 지키는 거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조성찬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최근 들어서 정진 길드가 엄청난 속도로 성장을 했기 때문이다.

본래 비슷했던 두 길드의 전력은 이제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그 간극이 넓어졌다.

-야. 저기 봐라. 능력자면서 자존심도 없는 새끼들 지나간다.

-푸후훕.

-저 자식들이!

-참아... 길드장님 지령 내려온 것 몰라?

활동 영역이 비슷한 두 길드는 길에서 마주치는 경우가 잦았는데, 그때마다 정진 길드는 해선 길드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형님! 이대로 있을 거예요? 저놈들이 노골적으로 우리를 무시한다고요!

-그럼 어쩌겠냐... 전쟁이라도 할 거야? 다 죽는 꼴 보고 싶어?

부 길드장 조동원의 말에도 조성찬은 그저 참으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폭발 직전의 아슬아슬한 상황이 계속되던 중, 결국 오늘 일이 터졌다.

-더는 못 참아!

-못 참으면 어쩔 건데?

-으아아!

마침내 폭발한 해선의 부길드장 조동원이 정진 길드원에게 무기를 겨눴다.

해선 길드원 6명.

정진 길드원 5명.

분명히 해선 길드가 수적으로 유리한 싸움이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전투는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크으윽... 젠장."

정진 길드의 전력은 해선 길드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은 상태였다.

불과 몇 분도 지나지 않아서 해선 길드원들은 모조리 바닥에 쓰러졌다.

"퉤!"

정진 길드의 부길드장 우진형.

이번 일을 계획한 그가 바닥에 침을 뱉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처리했어?

"예. 길드장님. 놈들이 먼저 덤비게 유도했으니 문제는 없을 겁니다."

길드장 홍채연의 물음에 우진형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잘했네. 죽지 않을 정도로만 밟아주고 복귀해.

"예."

-특히 그 조동원이라는 부길드장 놈은 확실하게 밟아 둬.

"확실하게 말입니까?"

-그래. 앞으로 능력자 짓거리 못하도록 말이야.

"알겠습니다."

통화를 종료한 우진형이 길드원들을 불렀다.

"적당히 다리 하나씩만 부러뜨려놔. 조동원은 내가 직접 조진다."

"예."

"그나저나 임수범은 어디 있는 거야?"

전투 도중 임수범은 조동원에게 붙잡혀 날아갔었다.

조동원이 힘에 특화된 능력자였기 때문에 무려 수십 미터를 날아간 임수범.

"멍청하게 그걸 당하다니."

하지만 임수범의 맷집은 길드에서 최고였기에 우진형은 별다른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부길드장님."

"왜?"

그때였 갑자기 옆으로 다가온 길드원이 우진형을 불렀다.

"저기 누가 다가옵니다."

"뭐?"

길드원이 가리킨 곳을 보자 껄렁껄렁한 자세로 다가오고 있는 한 패거리가 보였다.

"저것들은 또 뭐야?"

그들은 한 남자의 목덜미를 잡은 채로 바닥에 질질 끌고 오고 있었다.

"잠시만..."

온몸으로 바닥청소를 하고 있는 남자의 인상착의가 어딘지 모르게 익숙했다.

"끄으으윽..."

"임수범..?"

조금 전에 날아갔던 길드원 임수범이 분명했다.

짐짝처럼 질질 끌려오는 임수범은 전신이 멍투성이였다.

우진형도 그의 복장을 몰랐다면 붓기로 인해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네들은 뭐야?!"

"..."

우진형의 말에도 놈들은 천천히 다가올 뿐이었다.

"이 자식들이... 죽고 싶어?!"

**

"그래서 네가 그 정진인가 정자인가 하는 길드원이고, 다른 길드랑 싸움 중이었다?"

"예..."

강현의 말에 임수범이 전신을 떨어대며 힘겹게 대답했다.

"또라이들 아니야? 대낮부터 길거리에서 싸움질을 벌여? 경찰들은 뭐하는 거야?"

"그... 지역에 자리 잡은 길드는 그곳에 공무원, 특히 경찰들이 뒤를 봐주는 많아서... 이미 매수가 끝났을 겁니다."

한재문의 설명에 강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개판이네. 일단 사과는 받아야지. 가자."

강현이 임수범의 목덜미를 붙잡고 바닥에 끌고 가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아 쓰러진 남자들과 그들에게 린치를 가하고 있는 이들이 보였다.

"네들은 뭐야?!"

"..."

"이 자식들이... 죽고 싶어?!"

우진형의 물음에 강현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귀를 후볐다.

"그쪽이 정자인가 뭔가 하는 길드에 부길드장이야?"

"그래. 내가 정진 길드 부길드장 우진형이다. 너희들은 누구냐."

"그건 알 거 없고, 여기 있는 네 길드원이 우리 밴을 박살 냈거든?"

"..."

"그래서 사죄의 의미로 보상을 좀 받아야겠는데."

"뭐?"

"나는 얘랑 부딪히는 바람에 무려 코피까지 났다니까."

강현의 말에 우진형이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무슨 소리를…."

"일단 차량 수리비랑 별도로, 내 코피 값만 일억은 받아야겠어."

터무니없는 말에 우진형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뭔 개소리야?!'

수리비야 그렇다 치더라도 코피로 일억을 요구하다니.

그렇다면 저기 변사체처럼 보이는 임수범의 치료비는 수천억 정도는 받아야 할 것이다.

"저 부길드장님..."

"왜?"

그때 한 길드원이 조용히 귓속말을 했다.

"저놈 강현인 것 같습니다."

"강현..?"

"예. 뒤에 있는 놈들은 아무래도 배데스 길드원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게 배데스 길드라고..?'

행색만 보면 어디 만화 속의 일본 폭주족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자들이 C등급 던전 공략에 명단을 올린 배데스 길드라니 믿기지 않았다.

"왜 가만히 있어? 치료비 달라고."

강현은 그렇지 않아도 오늘 하루 굉장히 심기가 불편했다.

신성아, 안유성이 돌아가며 스트레스를 받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판 모르는 놈들 때문에 코피까지 흘려?'

게다가 소고기도 먹지 못했다.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아니. 아주 좋지 않았다.

"네가 강현이냐?"

"내가 강현인데."

강현과 눈을 마주한 우진형이 흠칫 떨었다.

"치, 치료비는 줄 테니 관여하지 말고 꺼져!"

이상하게 대화를 나눌수록 몸이 떨려왔다.

마치 거대한 몬스터가 눈앞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길드원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던 우진형이 당차게 외쳤다.

"밴 수리비 2억, 내 코피 값 2억. 총 4억 내놔."

"형. 제가 느낀 정신적 피해보상 5억도 추가해야죠."

"우리 부길드장이 그렇다네. 그럼 다 합쳐서 깔끔하게 10억이다."

강현의 말에 우진형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뭐 이런 또라이 새끼들이 있어?!'

대화가 통하지 않는 놈들이었다.

"고작 밴 박살나고 코피 난 것 가지고 10억이라니, 장난쳐?!"

사실 그 밴도 문짝이 조금 찌그러진 것에 불과했다.

"11억."

"뭐, 뭐?!"

"개소리 한 번 할 때마다 1억씩 추가야."

막무가내의 태도에 결국 우진형의 참을성이 바닥났다.

몸을 옭아매던 공포는 차오르는 분노에 모두 타버린 지 오래였다.

"내가 신호하면 한 번에 달려들어. 강현부터 조진다."

"하지만 부길드장님... 저놈은 혼자서도 D등급 던전을 박살내는 괴물입니다."

"그딴 것들 전부 언론에서 부풀리는 거야. 게다가 놈은 지금 방심하고 있다고."

속삭이는 우진형의 말에 길드원들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뭐해? 돈 줄 거야 말 거야?"

"알겠다. 11억. 지금 보내주지."

말을 하며 우진형이 천천히 강현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줄 건데. 계좌이체?"

"그런데 지금 당장은 돈이 없어. 대신 이걸 주는 걸로 하지."

"이게 뭔데?"

"지옥행 편도 티켓이다!"

대답과 동시에 우진형이 전력으로 검을 휘둘렀다.

"어..?"

그러나 그 검은 허무하게 강현의 손에 붙잡혔다.

'맨손으로 검을 잡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검날을 손에 쥔 강현이 싸늘한 눈빛으로 우진형을 바라봤다.

"뭐하냐."

-파스스스

강현이 손에 힘을 주자 단번에 검이 박살나며 바닥에 흩어졌다.

우진형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그, 그게..."

다급히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강현은 조용히 손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

'아...'

거대한 손바닥이 다가온다.

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점차 가까워지는 손바닥 안에서 우진형의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짜악!

그게 우진형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해선 길드의 부길드장 조동원이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인사를 했다.

"고마워할 거 없어요. 그냥 제 볼일 본 거니까."

"아닙니다. 저희 길드의 은인이십니다."

"됐다니까요. 답례 같은 건 필요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마요."

강현이 심드렁하게 말하고는 소고기 집을 향해 걸어갔다.

"배고파 죽겠다. 얼른 가자."

"강현 님!"

"예?"

떠나려는 강현을 조동원이 붙잡았다.

"염치없지만 부탁드립니다.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어느새 바닥에 무릎을 꿇은 조동원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해선 길드원들도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저기 제가 좀 바쁘거든요. 이런 도움은 능력자 연합에 이야기해요."

"능력자 연합은 길드 간의 다툼에 개입하지 않습니다! 저희를 도와주실 분은 강현 님뿐입니다."

"제가 왜 도와야 하는데요."

"제발. 딱 30분만 시간을 내주십쇼. 제 말을 들어보면 분명 생각이 바뀌실 겁니다."

조동원의 말에 강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혹시 식사를 안 하셨다면 제가 근처에 맛있는 한우 집을 알고 있습니다. 거기로 모시겠습니다."

"그럼 일단 갑시다."

**

1인분에 10만 원이 넘는 최고급 한우 가게. 강현은 오늘의 스트레스를 모조리 풀 생각으로 정신없이 고기를 흡입했다.

"… 그렇게 된 겁니다."

그사이 조동원은 현재 길드의 상황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다.

"쩝, 쩝... 그러니까 그 정진 길드라는 놈들이 갑자기 강해졌다?"

"예."

"그 놈들이 강해진 게 무슨 이상한 약물을 먹은 것 때문인 것 같고?"

"맞습니다."

대략의 상황을 들은 강현이 고민에 잠겼다.

'뭔가 냄새가 나긴 하는데...'

시작은 정진 길드의 주도로 인근 길드 5개가 연합을 맺은 것이었다.

그렇게 덩치를 불린 연합은 결국 서울의 한 지역을 차지하는 것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정진 길드와 해선 길드는 가장 규모가 큰 길드로 연합 내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힘의 균형이 갑작스럽게 깨졌다...'

어느 순간부터 정진 길드가 엄청난 속도로 강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힘의 균형은 무너졌고, 본색을 드러낸 정진 길드가 이제는 다른 길드를 하나하나 잡아먹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우리 C등급 던전 공략이 얼마나 남았지?"

"이틀 뒤입니다."

"으음..."

신성아의 대답에 강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돕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다만 지금은 시간이 없어요. 공략이 코앞이라. 일단 던전 공략부터 완료하고 본격적으로 알아보는 걸로 합시다."

"예."

C등급 던전 공략이면 최소 1주일 은 걸릴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도와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 상황이었기에 조동원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의미로..."

"예."

"맥주 한 병만 더 시킵시다."

"알겠습니다..."

조동원은 눈물을 머금고 이달의 남은 카드의 한도를 계산했다.

47화 베난디의 숲(1) 20.01.18

47. 베난디의 숲(1)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길드장 홍채연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우진형은 고개를 숙인 채로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변명할 기회를 주지. 한번 지껄여 봐."

홍채연의 말에 우진형의 고개가 빠르게 올려졌다.

"솔직히 말하면 놈은 정말 차원이 달랐습니다! 같은 인간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닥쳐!"

"커헉!"

홍채연이 발길질이 거침없이 우진형의 복부를 강타했다.

"듣기 싫으니까 닥치라고..."

"죄송합니다."

홍채연은 히스테릭함의 끝을 무엇인지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우진형은 군기가 바짝 든 신병처럼 재빨리 일어나서 뒷짐을 지고 섰다.

"하아, 우진형."

"예. 길드장님."

"약을 더 구해올 테니 복용량을 지금보다 늘려."

복용량을 늘리라는 말에 우진형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길드장님... 지금도 그쪽에서 말한 허용치를 아슬아슬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더 이상 약을 늘렸다가 무슨 일이…."

-짜악!

홍채연의 손바닥이 우진형의 뺨에 작렬했다.

"지금 그깟 부작용이 중요해? 고작 강현 하나도 이기지 못하면서, 서울을 차지할 수 있겠어?"

"..."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해. 배데스 길드는 곧 C등급 던전에 들어갈 거야. 그 안에 해선 길드를 잡아먹고 전력을 강화한다."

"알겠습니다."

**

이틀 후.

"강현 님. 시간이 됐습니다."

"벌써 그렇게 됐나?"

드디어 공략의 날이 밝았다.

강현은 던전으로 이동하기 위해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하아..."

그와 동시에 터져 나오는 한숨.

락밴드가 타고 다닐만한 요란한 밴을 보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냥 새로 하나 사지 그랬냐."

"그래도 제 예술혼이 들어갔는데 쉽게 포기할 수는 없죠."

안유성은 문짝이 박살 난 밴을 기어코 수리해왔다.

사실 차량 내부는 멀쩡했기에 충분히 수리할 수 있었지만, 내심 차를 바꿀 기회라 여겼던 강현은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출발하겠습니다."

한재문이 시동을 걸고 'BADASS'가 새겨진 밴이 지하주차장을 벗어났다.

"형. 우리 밴에는 이름 안 붙여줘요?"

"갑자기 뭔 소리야?"

"형이 타고 다니는 그 고물차도 번틀리 2호라고 부르고 다니잖아요."

"그거랑 이거랑 같냐. 그리고 내 번틀리 2호는 아직 쌩쌩하거든?"

약속된 장소로 가는 길.

강현과 안유성은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재문아. 아직 멀었어?"

"도착했습니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밴이 멈춰 섰다.

"수고했어. 이제 가봐."

"예?"

"너는 사무실 가서 일해야지?"

"예..."

곧바로 내려진 축객령에 한재문의 입이 샐쭉하게 튀어나왔다.

'나도 구경하고 싶은데...'

한재문은 근처에 차를 대놓고 몰래 와서 구경하리라 다짐했다.

"자, 그럼 가볼까."

옷매무새를 점검한 강현이 밴의 문을 열어젖혔다.

동시에 사방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뭐야?"

예상치 못한 엄청난 환대에 강현이 당황했다.

'분명 신태길 팀장에게 기자들이 있을 거란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나 모여서 본격적으로 촬영할 줄은 몰랐다.

기자들은 강현이 시사회에 나타난 연예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C등급 던전 공략에 참여하게 된 각오 한 말씀 해주시죠!"

"데이언스의 연구소를 혼자 클리어했다는 소문이 사실입니까?!"

"이 밴은 본인 소유이신가요?!"

그렇지 않아도 독특한 길드 이름에 갑작스러운 참가로 이목을 끌던 강현이다.

거기에 더해 요란한 밴까지 끌고 나타나자 정말 제대로 이목을 끌어버렸다.

"너 때문에 이게 뭔 소란이냐."

"에이, 형도 좋으면서 그러네."

"지랄."

강현이 피식 웃으며 안전요원이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걸었다.

단 세 명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이들의 존재감은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을 압도했다.

"강현 님 덕분에 이런 경험도 해보는군요."

"아, 깜빡했네. 너도 관종이었지?"

"아닙니다."

신성아가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더욱 당당하게 걸었다.

목적지인 던전 앞에는 수많은 능력자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강현이 소란과 함께 등장하자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저것들이 그 배데스인가 뭔가 하는 길드야?"

"무슨 엉덩이인가, 그거?"

"복장은 어디 양아치나 다름없군."

"그냥 관심종자들이네."

그런 이들이 모이자 은연중에 뿜어내는 기운만으로도 상당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재미있네."

태연하게 그 기세를 받아넘긴 강현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놈들이 지금 우리나라 최고라는 거지?'

이들은 모두 던전의 최전선에 있는 정예들이다.

그 면면을 살펴보며 강현이 흥미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 씨. 오랜만입니다."

강현이 지정된 위치에 서자 익숙한 얼굴이 다가왔다.

"최동우 씨. 회의 이후로 처음이네요."

이 순간에도 카메라들은 정신없이 움직였다. 강현이 살갑게 최동우와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 실시간으로 세계에 송출됐다.

-배데스는 고작 3명으로 참가하는 거야? 어이없네. 어디 소풍 가는 것도 아니고.

-재들 복장 봐라. 가죽 재킷에 뭐하는 놈들이냐 저거.

-최동우랑 아는 거 보면 그냥 루키는 아닌 것 같은데?

-그건 모름. 최동우 원래 사교성 좋은 걸로 유명함.

생방송으로 송출하는 방송국에 엄청난 속도로 채팅이 올라왔다.

이러한 반응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나타난 루키. 그 모습은 지금까지 여느 대형 길드가 보여줬던 것과는 전혀 달랐기에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없었다.

"반갑습니다."

"오랜만입니다."

그러나 최동우에 이어 한세연, 그리고 다른 유명 길드장들도 강현에게 다가와 아는 척을 하자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졌다.

-뭐지? 한세연은 까다롭기로 유명하지 않나?

-불사랑 블랙 나이츠 길장도 인사함. ㄷㄷ...

-ㄹㅇ 강현 정체가 뭐냐.

-그 와중에 한세연 이쁘다.

-강현은 어디 조폭인 듯ㅋㅋㅋ

그 모습을 화룡의 길드장 박호연이 아니꼽게 바라봤다.

"흥, 다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꼬락서니 하고는."

박호연의 눈에는 저들의 의중이 훤히 보였다.

"보나마나 강현을 자기 길드로 영입하고 싶은 거겠지."

솔직히 말하면 배데스 길드는 4명으로 결성된, 길드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의 조직이었다.

신태길이 아니었으면 허가조차 나지 않았을 소규모 동아리 같은 집단.

저 하이에나 같은 길드장들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아직 강현을 자신의 길드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군요?"

"그렇지. 쯧쯧. 저런 놈은 좋게 대해봤자 화만 부를 뿐이야. 아주 단단히 휘어잡아야 하지."

박호연이 어떻게 생각하든, 오늘의 최대 관심사가 강현인 것은 분명해 보였다.

"아아. 주목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때였다.

앞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반갑습니다. 대한민국 특수 능력자 관리팀의 신태길 팀장입니다."

능력자들 앞에 위치한 높은 단상에 신태길이 서있었다.

아직 그를 알지 못하는 능력자들이 웅성거렸지만, 신태길은 구태여 자신에 대한 의문의 해결해 주지 않았다.

"긴말하지 않겠습니다."

신태길이 200명이 넘는 능력자들의 시선을 받아넘기며 담담하게 말했다.

"세계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세계가 지켜본다.

많은 의미가 함축된 말이었다.

능력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여러분들에게 국가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희생하라는 말 따위는 하지 않겠습니다."

"..."

"이겨서 돌아오십시오. 돌아와서!"

"..."

"당당하게 부와 명예. 그 모든 걸 거머쥐십시오."

연설을 들은 강현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누가 썼는지 연설 한번 맛깔나게 지었네.'

부와 명예. 그리고 강함까지.

강현은 그 모든 것을 거머쥘 준비가 되어 있었다.

**

"스으읍~ 하아. 공기 좋네."

던전에 들어선 강현이 크게 쉼 호흡을 했다.

C등급 던전 '베난디의 숲'

숲이라는 이름답게 던전은 울창한 나무들로 우거져 있었다.

던전에 입장한 능력자들은 공터에 모여서 이동을 준비했다.

"잠시 주목합니다!"

갑자기 들리는 우렁찬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움직였다.

강현 또한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자, 높은 바위에 올라선 최동우가 보였다.

"공략은 사전에 이야기된 대로 길드 단위로 진행하겠습니다."

각 길드는 개별행동을 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산맥 지형에서 단체로 움직이는데 장애가 많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길드 간의 알력 다툼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유례없는 대규모의 공략.

사실 던전을 클리어한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바로 '누가' 던전을 클리어해서 명성을 높이냐는 것이었다.

"공략 도중 상황이 발생하면 플레어 건(신호탄)을 쏘십시오."

"..."

"그 신호를 보면 약속대로 다른 길드들은 즉시 그곳에 합류합니다."

플레어 건은 지난 회의에서 나온 내용이었다.

전자기기의 이용이 불가능한 던전에서 빠르게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고안한 수단이었다.

위기에는 빨간색 플레어 건.

코어는 초록색 플레어 건.

보스는 보라색 플레어 건.

각각의 길드는 개별 활동을 하는 대신 누군가 플레어 건을 쏘면, 즉시 그곳으로 합류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부질없는 짓이지.'

강현은 이 플레어 건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못하는 던전에서 약속을 안 지키면 어쩔 거야?'

플레어 건도 사실 하나의 구실일 뿐. 강현은 애초에 그것에 대한 기대를 버렸다.

"… 마지막으로,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상!"

전달이 끝나자 모든 길드들이 흩어졌다.

"우리도 가볼까?"

길드들이 이동하는 방향을 확인하고 강현 또한 이동하려 할 때였다.

어느새 다가온 최동우가 말을 걸어왔다.

"강현 씨는 우리와 함께 움직이는 게 어떻습니까?"

"같이요? 흐음..."

능력자 연합과 함께 움직이자는 제안에 강현이 고민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여러분 실력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C등급 던전에서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릅니다."

최동우의 말을 들은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하루 정도만 같이 다녀도 괜찮을까요?"

"던전이 끝날 때까지 함께 하셔도 괜찮습니다. 하하!"

최동우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호탕하게 웃었다.

잠시 후.

최동우가 자리를 뜨자 안유성이 다가왔다.

"형. 뭐예요?"

"뭐가."

"우리끼리 움직이려고 길드 만든 거 아니에요?"

"그렇지. 그래도 C등급이잖냐. 잘못 설레발치면 엉뚱하게 개죽음당할 수도 있어. 일단 하루만 간 좀 보자."

"현명하십니다."

신성아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아부를 내뱉었다.

**

능력자 연합과 합류한 강현.

그는 한동안 말없이 숲을 걸었다.

계속되는 산행에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 지루할 때쯤,

"강현 님."

신성아가 강현에게 말을 걸었다.

"왜?"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뭔데?"

"배데스가 무슨 뜻입니까?"

"뭐야. 지금까지 몰랐어?"

"예."

당당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신성아.

강현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왜 이제야 물어봐?"

"강현 님이 먼저 알려주실 줄 알았습니다."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강현이 실소했다.

조심스럽게 그 반응을 살피던 신성아가 입을 열었다.

"혹시 엉덩이…."

"아니야. 아니라고!"

그 뒤로도 강현 일행은 계속해서 농담을 주고받았다.

긴장감이라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모습에 다른 능력자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저것들은 뭐야?"

"던전이 무슨 놀이터인 줄 알아. 언론에서 좀 띄워줬다고 보이는 게 없군."

"어린놈들이 건방지게..."

겉으로 보기에는 강현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린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들이 은연중에 강현에게 가지고 있던 불쾌함을 겉으로 드러난 것뿐이었다.

신생 길드.

급부상한 슈퍼 루키.

어딘가 장난스러운 길드명.

"저런 놈이 우리 연합장님이랑 비교되는 것 자체가 수치야."

그런데도 위상은 최동우와 한세연까지 거론될 정도로 드높다.

다른 이들의 처지에서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는 것을 수밖에 없었다.

"신경 쓰지 마라."

"신경 안 쓰는데요?"

"그럼 메이스는 왜 꺼내는 건데?"

강현도 당연히 수군거림을 듣는 것 따위, 좋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실력으로 찍어 눌러준다.'

누구도 무시 못 하게 최고가 되기로 했다.

이런 사사로운 반응 따위. 실력 행사 한 번이면 박살 낼 자신이었었다.

-뿌우우!

"적이다!"

때마침 전방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강현이 씨익 웃었다.

"가자."

48화 베난디의 숲(2)

48. 베난디의 숲(2)

-뿌우우!

사방에서 울리는 뿔피리 소리가 정신없이 귓가를 때렸다.

"함정이다! 준비해!"

최동우의 외침에 연합원들이 재빨리 대열을 갖추었다.

-피슉.

"화살이다! 방어벽 전개!"

명령과 동시에 푸른 마법 방패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콰아앙!

끊임없이 날아오는 화살과 마법.

마치 폭격과도 같은 그 공격을 연합원들은 묵묵히 버텨냈다.

"언제까지 계속되는 거야?!"

누군가의 외침으로 영원할 것 같던 화살비가 멎었다.

"케륵!"

그리고 등장하는 놈들의 정체.

[고블린 경보병]

숲에 알맞게 위장한 전신 갑옷을 입은 고블린들이 사방에서 쏟아져 나왔다.

"케르르르...!"

"이놈들 보통 고블린이 아니다. 모두 조심해!"

고블린들은 지금까지 상대했던 여느 몬스터와 달랐다.

기습이 통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자 바로 대형을 갖춘 것이다.

마치 잘 훈련된 군인과 같은 움직임으로 놈들은 천천히 연합원을 압박했다.

"젠장! 별것도 아닌 놈들이!"

하나하나의 무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았지만, 뭉쳐있는 놈들은 원래 이상의 힘을 보여주었다.

'고작 고블린한테 뭐하는 거야?'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강현이 모든 버프 스킬을 활성화했다.

'단숨에 중앙으로 파고든다.'

어차피 개개인으로 싸우면 한주먹거리도 되지 않을 놈들이다.

"먼저 간다."

자리를 박차고 날아오른 강현이 고블린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미친, 뭐하는 거야!?"

"내버려 둬! 방어에나 집중해."

연합원들은 혼자서 적진으로 뛰어든 강현의 자살행위에 경악했다.

"고블린은 다 뒤져야 돼!"

강현이 감정을 잔뜩 실어 소리쳤다.

[분노의 사자후가 발동됩니다]

[모든 적들의 사기와 능력치가 감소했습니다]

"케륵?!"

마치 벼락이 치는 것 같은 굉음에 고블린들이 당황했다.

"마력 폭발, 마력 폭발!"

-콰광! 쾅! 쾅!

고블린의 사이로 들어온 강현이 사방으로 마력 폭발을 난사했다.

그 충격에 먼지가 비산하고 시야가 일순간 가려졌다.

-스걱!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먼지 속에서도 강현은 거침없이 움직였다.

사방으로 날뛰며 고블린을 학살하는 강현. 그의 검에 걸리는 것들은 모조리 베이고, 찢기고, 박살났다.

"키에엑!"

그때 강현의 뒤쪽에서 고블린 하나가 장검을 휘둘렀다.

강현은 그것을 눈치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턱!

강현의 갑옷 사이로 정확하게 고블린의 검이 작렬했다.

그러나 살갗이 베이기는커녕 북을 치는 것 같은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케륵..?"

"아프잖아. 새꺄!"

강현이 고블린의 머리를 움켜쥐고는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았다.

-콰직!

바닥에 부딪힌 놈의 머리가 단숨에 박살났다.

공격. 공격. 공격.

오직 그것만이 강현의 머릿속에 가득해 있었다.

'어지간한 공격은 그냥 몸으로 때우면 돼.'

'웨인의 비기'를 사용한 강현의 체력은 무려 47에 달한다.

거기에 '엔트리아의 외피'로 다시 피부를 보호하기까지 했다.

'피하고 막을 시간에, 한 번이라도 더 검을 휘두르는 게 이득이야.'

강현이 뛰어든 지 1분도 지나지 않아 수십의 고블린이 바닥에 쓰러졌다.

"저도 갑니다!"

고블린의 진형에 틈이 생긴 것을 확인하고 안유성도 날아들었다.

"하하하! 고블린은 은근히 손맛이 좋다니까!"

휘둘러지는 메이스에 맞은 고블린의 몸통이 그대로 터져나갔다.

놈이 걸친 조잡한 갑옷 따위로는 거대한 못이 박힌 안유성의 메이스를 막아낼 수 없었다.

"케륵, 케륵!"

"케에엑..."

무엇하나 해보지도 못하고 동료들이 죽어나가는 모습에, 고블린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케엑! 케엑, 케르르륵!"

그때 다른 놈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고블린이 괴성을 내질렀다.

고블린 주제에 무려 2m는 될 법한 큰 키를 가진 놈이 부하들을 다그쳤다.

-피슉!

"케, 케엑..."

그러나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에 목을 꿰뚫린 놈은 허무하게 바닥에 쓰러졌다.

"나이스!"

그 후로도 신성아의 저격은 계속되었다.

그녀는 빠르게 전장을 이동하며 요주의 적들을 처리했다.

"지금이다! 밀어붙여!"

마침내 고블린의 진형이 완전히 와해되자 최동우가 돌격을 명령했다.

그 기세에 놈들은 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등을 돌려 달아났다.

"이겼다!"

"와아아아!"

예상외로 손쉽게 첫 승리를 가져간 연합원들이 환호했다.

"배데스인가 하는 놈들 뭐야? 엄청나잖아?!"

"뭐, 제법이긴 하네..."

"소문이 과장이 아니었어."

연합원들은 언제 그들을 욕했냐는 듯 태도를 돌변하고, 칭찬하기에 바빴다.

'강현이야 이미 대단하단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머지도 만만치 않아.'

전장을 정리하며 최동우가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고블린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쉽게 이길 상대는 아니었다.'

일정한 체계를 갖춘 전략적인 상대였다. 놈들이 비록 고블린이라 할지라도 위협적일 수밖에 없었다.

"허허..."

잠시 고민하던 최동우는 그저 허탈하게 웃을 뿐이었다.

**

그 후로도 배데스 길드는 거침없이 적들을 도륙했다.

그것이 오크가 되던, 오우거가 되던, 상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오늘만 사는 시한부 인생처럼 그들은 적들 사이로 뛰어들 뿐이었다.

"오늘 저 배데스라는 놈들 엄청났어."

"엄청나기는 무슨 완전히 미친놈들이더구먼."

"그래서 저놈들처럼 할 수는 있고?"

연합원들은 이제 완전히 배데스를 인정했다.

계속된 전투 속에서 그들의 도움을 받지 않은 이가 없었기에 당연한 이야기였다.

"다들 수고했다. 이제 야영 준비를 시작한다!"

시간이 흘러 하늘에 처음 보는 붉은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날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최동우가 야영을 지시했다.

"이대로 단숨에 공략하자고!"

저들끼리 모여 모닥불을 피운 연합원들.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하는 그들의 표정에는 피로보다는 편안함이 감돌았다.

"먹자."

"예."

강현 또한 일행과 모여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같이 식사해도 되겠습니까?"

수프가 담긴 그릇을 들고 최동우가 다가왔다.

"예. 편하신 대로."

강현의 말에 최동우가 근처에 앉았다. 강현은 어색한 분위기에 괜히 헛기침을 했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둘이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네.'

그동안 묘하게 느껴지던 친근감에 몰랐다. 지금 이 순간은 사실상 최동우와 하는 첫 대화라고 봐도 무방했다.

"저기, 최동우 씨..."

"예."

"아, 연합장님이라 불러야 했나?"

"편하신 대로 부르시면 됩니다."

최동우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냥 동우 씨라 부를게요."

직설적인 강현의 말에 최동우가 호탕하게 웃으며 좋아했다.

"아니면 이렇게 같이 만난 것도 인연인데 편하게 형, 동생 하는 건 어떻습니까?"

"저야 좋죠."

본격적으로 말을 편하게 하게 되자 분위기가 빠르게 풀어졌다.

잠시 모닥불을 보며 수프를 먹던 최동우가 입을 열었다.

"오늘 자네들이 싸우는 것을 보고 굉장히 놀랐다네."

솔직하고 담백한 말.

최동우는 마침내 강현에게 찾아온 이유를 꺼내 들었다.

"내 상식을 파괴하는 싸움이었어."

"..."

"자네도 튜토리얼을 겪었으니 알겠지? 리더십에 관한 내용 말이야."

튜토리얼 4단계. 리더십.

강현에게 딱히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분명 많은 성장을 한 단계였지만, 그만큼 힘들었던 단계이기도 했다.

"예. 협동, 리더십을 배우는 곳이죠."

"맞아. 내가 가장 많은 것을 배운 단계이지."

"저는 동우 형님이 던전 이전부터 전투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요."

능력자 교육 학교에서도 최동우의 전술을 모방한다. 그 정도로 최동우의 지휘, 용병술은 뛰어났다.

"사실 이전에 군인이기는 했네."

"역시."

개인의 무력도 최상급이었지만, 사람들을 이끄는 능력은 더욱 뛰어난 사내.

그것이 그를 연합장의 자리까지 오르게 했다.

"처음 자네들의 전투를 본 순간 나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느낌이었어."

"예?"

"자네들이 그동안 내가 배우고 익힌 것들을 모조리 부정했다는 말일세."

"..."

"그 대담함! 자유로움! 순수함! 솔직히 부러웠네. 할 수만 있다면 강현 동생 아래로 들어가서 비결을 배우고 싶을 정도야."

"그 정도까지야... 하하..."

조금 흥분한 듯한 최동우.

진심 어린 그의 말에 민망해진 강현이 웃었다.

'비결이 어디 있어? 그냥 신경 안 쓰는 거지...'

강현은 죽어도 부활하고, 안유성은 미친놈이다.

'그것도 재능충에 미친놈이지.'

단지 그뿐이다.

그게 비결의 실체였다.

"그렇게 말해주시니 고맙네요."

"하지만 역시 그건 안 되겠지."

"예. 조금..."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던 강현이 다급히 화제를 돌렸다.

"저도 사실 형님을 보면서 엄청 감탄했습니다."

"그렇게 띄어주지 않아도 괜찮네."

"아니, 사실인데요. 뭘."

갑작스러운 말이기는 했지만 솔직한 감상이었다.

강현은 정말 최동우의 전투를 보고 감탄했다.

'1대1은 어떻게 되겠지만... 용병술은 정말 비교가 불가능해.'

애초에 강현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리더십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것은 폭력과 억압으로 점철된 튜토리얼 4단계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능력자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어떠한 상황에도 침착하게 대응하는 것."

"..."

"쉬워 보일 수 있지만 아무나 못 하는 일이죠."

최동우의 지휘는 단순하게 딱 두 가지만을 중요시했다.

효율성. 그리고 안전.

"제가 연합원들을 지휘했다면 벌써 3분의 1은 바닥에 누웠을 거예요."

"하하! 너무 비행기 태우지는 말게. 어쨌거나 나는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왔어."

"저야 언제든 환영이죠."

"좋아. 자네는 정말 멋진 사내야!"

"예?"

"점점 더 마음에 드는구만! 하하!"

"저는 여자가 좋습니다."

"..."

빠르게 친해진 둘의 이야기는 밤이 깊어질 때까지 이어졌다.

**

"으아아! 도와줘!"

비명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한 강현이 재빨리 검을 휘둘렀다.

그 기세에 검을 휘두르던 오크가 으르렁거리며 물러났다.

"고맙습니다!"

이튿날.

공략대는 더욱 깊은 곳을 향해 나아갔다. 그럴수록 밀림은 울창해졌고 적들은 더욱 강해졌다.

첫날 마음껏 날뛰던 강현도 이제는 진지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신성아!"

강현이 외침과 동시에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자 멀리서 활시위가 풀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쐐애액!

간발의 차로 강현의 옆을 스쳐간 화살이 오크의 팔을 꿰뚫었다.

"퀴엑!"

고통에 멈칫하는 잠깐의 순간.

1초도 되지 않는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스걱

빌게인의 장검에 오크의 머리가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강현은 놈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이미 다른 오크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도대체가 끝이 없어?!"

놈들의 숫자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었다.

'마력을 아껴야 해.'

강현이 장기전을 벌일 때 가장 먼저 바닥나는 것이 마력이다.

때문에 강현은 '웨인의 비기'와 '거인의 힘'도 사용하지 않고, 순수 본신의 능력으로만 움직였다.

"얼마 남지 않았다. 힘내라!"

"예!"

최동우의 외침에 진형을 짜고 있던 연합원들이 힘차게 호응했다.

"퀴에엑!"

오크들은 괴성을 내지르며 연합원들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탄탄하게 갖춰진 대형은 어떠한 격세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결국 놈들은 점차 지쳐가고 두터운 방어벽 앞에 하나둘 무릎을 꿇었다.

"퀴에에..."

"끝났네."

마침내 강현이 마지막 오크의 목을 날렸다.

"와아아! 또 이겼어!"

"이번에도 완승이야!"

전투의 승리. 살아남았다는 기쁨에 연합원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동우 형님."

모두가 전투의 뒷정리를 하고 있던 때 강현은 최동우에게 다가갔다.

"이 던전. 아무리 생각해도 좀 이상하지 않아요?"

"무슨 말이지?"

"너무 쉽잖아요."

갑작스러운 강현의 말에 최동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던전이 쉽다..."

"지금까지 죽은 사람 아무도 없죠?"

"그렇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확실히 무언가가 이상했다.

"맞아. 아무리 던전 초입이라지만 난이도가 낮은 감이 있네."

"그렇죠."

"이 정도면 상위권에 위치한 D등급 던전의 수준이니까."

"흐음..."

잠시 고민하던 최동우가 말을 이었다.

"어쨌든 방심할 수는 없는 일이지."

"예."

"어쩌면 이 던전 자체가 C등급 중에서 하위권에 위치한 곳일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 정말 강한 보스가 있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렇죠."

던전의 난이도는 종합적으로 결정된다.

여러 지형적 요소.

몬스터의 숫자와 무력.

보스의 무력.

무엇 하나가 떨어진다면 다른 것이 그만큼 등급에 맞게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제 슬슬 따로 움직여도 괜찮지 않을까 해요."

"응? 이렇게 갑자기 말인가?"

강현이 떠나간다는 말에 최동우의 낯빛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역시 '그것' 때문이겠지?"

"예. 박호연에게 한방 먹여 줘야죠."

"꼭 내기를 해야겠나?"

"자존심을 그렇게 긁어놨는데 이대로 있을 수는 없죠. 이미 판을 벌이기도 했고."

갑자기 강현이 입에서 화룡의 길드장 박호연이 거론된 이유.

그것은 하루 전.

던전에 들어온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49화 베난디의 숲(3)

49. 베난디의 숲(3)

던전에 들어선 직후.

박호연은 화룡 길드를 이끌고 강현을 찾아왔다.

"강현."

"뭐야?"

화룡 길드는 이번 공략에 가장 많은 인원으로 참가했다.

그 숫자는 무려 80명.

자신의 뒤에 서있는 든든한 숫자를 믿은 것인지 박호연은 한층 자신만만해 보였다.

"건방진 것은 여전하구나."

"그쪽도 재수 없는 건 여전하네."

"너와 그 양아치 같은 놈들. 고작 셋이서 뭘 할 수 있을 것 같나?"

계속되는 박호연의 시비에 강현의 표정이 점차 험악해졌다.

그럼에도 박호연은 대놓고 강현을 깔보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너희들은 이번 던전 공략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잘 알지. 나는 너 같은 하찮은 종자들이 어떤 사상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알고 있거든."

"이 개새끼가 시비 걸려고 왔어?"

결국 폭발한 강현의 입에서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천한 놈이라 그런지 입도 험하군."

"닥치고! 용건이 뭐냐고?!"

강현이 흥분하자 박호연이 거리를 벌리며 침착하라는 손짓을 했다.

"워워, 진정하라고."

"진정하기를 바랐으면, 갑자기 사람 찾아와서 지랄하지를 말았어야지."

"그렇게 분하면 나랑 내기 하나 하는 게 어때?"

"뭐..?"

"누가 던전 공략에 더 큰 기여를 하는지 겨루자는 거다."

갑작스러운 내기 제안에 강현이 생각에 잠겼다.

"무슨 내기인데?"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닌가?"

강현과 박호연의 주위에는 어느새 모든 공략대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을 둘러보며 박호연이 말을 이었다.

"누가 먼저 보스를 잡고 던전을 클리어하는가."

실로 오만한 말이었다.

던전 공략 내기.

즉, 이곳에 있는 다른 길드를 제치고 자신이 던전을 공략하겠다는 의미였다.

명백히 다른 이들을 무시하는 발언에 모여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내가 이룩한 화룡 길드야. 못할 리가 없지.'

하지만 박호연은 개의치 않았다.

'언제까지고 너희들만 그렇게 대단할 줄 알았나?'

사실 박호연은 다른 길드장들에게 열등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깟 튜토리얼 좀 높게 통과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지.'

박호연은 튜토리얼을 4단계까지 밖에 클리어하지 못했다.

비록 그가 '염제'라 불리며 뛰어난 화염 능력자로 이름을 날렸지만, 그 열등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그가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바로 길드를 키우는 것.

'내가 길드고, 길드가 나다.'

마침내 그는 화룡 길드를 대한민국의 최고로 키워냈다. 이제 길드란 그 자신과 마찬가지였다.

"야."

갑작스러운 강현의 부름에 박호연이 생각에서 깨어났다.

"낯짝도 존나게 두껍네. 우르르 몰려와서 한다는 소리가 고작 3명이랑 던전 공략 내기를 하자고?"

"길드 대 길드의 싸움이다."

"..."

"길드원의 숫자도 결국 길드의 힘. 문제 될 게 있나?"

박호연은 무엇이 문제인지 정말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진지하게 하는 말이야? 이것도 또라이네.'

헛웃음을 삼킨 강현이 말을 이었다.

"하! 재미있네. 그래서 내가 이기면 뭘 줄 건데?"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네가 이긴다면 이걸 주지."

이름 : 이스터에그

등급 : ?

내구도 : 10/10

설명 : 장난을 좋아하는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이스터 에그. 파괴 시 발동된다.

능력 : ?

"너라면 이게 뭔지 알겠지?"

"이게 뭔데..?"

평온한 말과 달리 강현의 눈동자가 약간 흔들렸다.

'이건 분명 관리자와 관련된 물건이다.'

주먹 정도 크기의 묵직한 구슬.

'장난을 좋아하는 누군가'란 이 던전과 시스템을 만든 관리자가 분명했다.

'하지만 박호연은 튜토리얼을 졸업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알고 있지?'

강현의 고민은 이어지는 박호연의 말에 해결되었다.

"시치미 떼지 마라. 네가 이미 특수 능력자 관리팀에 들어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

특수 능력자 관리팀.

그곳에서 신태길 팀장이 관리자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었다.

강현은 이미 관리자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하며 한동안 이야기를 들었었다.

'저놈도 거기 소속이었구나...'

상황 파악을 끝마친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 참! 너! 눈치 하난 빠른 놈이구나!? 하하하..."

"흥."

그리고 이어지는 발연기.

"어쨌든 너는 내기에 그걸 걸겠다. 좋네. 그럼 나는 뭘 걸지?"

"네가 진다면 1년 동안 화룡 길드에 소속돼라."

"으음... 그리고?"

"그것뿐이다. 대신 그동안 철저하게 길드원으로서 활동하고, 내 명령에 따라야 한다. 나도 너를 길드원으로 대우하도록 하지."

생각보다 조건이 나쁘지 않았다.

저 '이스터 에그'라는 물건의 가치가 불확실함에도 충분히 해볼 만한 도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래는 성립된 건가?"

"그래. 벌써부터 드x곤볼 가질 생각에 두근두근 하네."

"하하! 그거야 두고 보면 알겠지. 그럼 이곳에 있는 모두가 증인이다."

박호연이 주위를 가득 메운 능력자들을 보며 말했다.

"나는 한 입으로 두말 안 해. 새꺄."

강현은 산뜻한 미소로 대답해 주었다.

**

잠시 아이템을 떠올린 강현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정말 괜찮겠나?"

"예?"

"화룡 길드는 거대한 길드야. 그들을 상대로 이기는 게 쉽지는 않을 텐데... 아니 이 던전 자체를 셋이서 클리어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세."

"그건 제가 생각해 둔 게 있습니다."

확신에 찬 강현의 말.

최동우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들이 잘못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지만, 항상 조심하게."

"예."

"강현 동생도 예상했지만 플레어 건이라는 것은 형식적인 것일 뿐. 아무런 쓸모도 없을 거야."

이번 공략에 참가한 이들 중 던전 클리어에 실패하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굳이 다른 길드와 공적을 나눠가질 생각 또한 없었다.

"지금처럼 던전 난이도가 낮은 상황이라면 더욱 확실하다 봐야겠지."

"..."

"어쩌면 경쟁 길드가 망하기를 바라는 이들이 존재할지도 몰라."

"예. 저도 예상하고 있어요."

"항상 조심하게. 혹시 위기가 생긴다면 세 가지 플레어 건 모두를 동시에 쏴. 그러면 아무리 멀리 있어도 내가 달려갈 테니."

"말이라도 고맙네요."

"정말이라네. 하하하!"

그렇게 최동우와의 마지막 인사를 끝내고, 배데스 길드는 능력자 연합과 갈라졌다.

**

"이게 도대체 몇 번째냔 말이냐!"

화룡의 길드장 박호연.

항상 여유롭고 오만했던 평소와 달리 그는 잔뜩 흥분해 있었다.

"후우... 이번 피해는 몇 명이지?"

"사망자 둘, 중상자 셋입니다. 당장 목숨을 잃지 않을 정도로 치유하긴 했지만, 전투에 참여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젠장! 젠장! 으아아아!!!"

박호연은 하루하루 피가 말라 가는 기분이었다.

"그 쥐새끼 같은 놈들 때문에..."

처음 이틀간은 정말 신이 나서 사냥을 했다. 예상과는 달리 몬스터들의 수준이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들을 도륙하는 화룡 길드의 유일한 난관은 험준한 산맥 지형뿐이었다.

하지만 셋째 날이 되면서 상황이 변했다.

"설마 '베난디'라는 게 종족의 이름이었을 줄이야..."

C등급 던전 베난디의 숲.

여기서 '베난디'는 모두의 예상처럼 단순한 보스 몬스터가 아니었다.

베난디는 바로 산맥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종족의 명칭이었다.

"멀대 같은 놈들. 잡히면 전부 산채로 구워주마!"

베난디는 2m 정도의 장신에 활을 주 무기로 사용했다.

그들은 마치 숲의 일부처럼 녹아들었으며, 철저하게 게릴라전을 펼쳤다.

활을 이용한 저격.

지형지물을 이용한 함정.

심지어 다른 몬스터를 끌어들여 난전을 유도하기도 했다.

그렇게 벌어진 전투 도중 이따금씩 날아드는 화살은 마력을 머금고 있어 굉장히 치명적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나."

"놈들의 근거지를 찾아 박살 내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인 것 같습니다."

부길드장의 말에 박호연이 지팡이를 내려쳤다.

"내가 그걸 몰라서 묻는다고 생각해?!"

"죄송합니다..."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다."

"예?"

"이대로 야금야금 길드원이 죽으면 결국 전멸이야!"

"..."

"차라리 숲을 전부 태워서 놈들이 숨지 못하게 해야겠어."

박호연의 말에 부길드장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하지만 길드장님! 그랬다가는 저희도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 차라리 다른 길드에 도움을 요청해 보시는 것이…."

"정말 이따위 신호탄을 쏜다고 그놈들이 올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세상 물정 모르는 부길드장의 헛소리에 박호연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설사 온다고 해도 무슨 의미가 있지? 결국 다른 놈들의 무시나 받으면서 꽁무니나 쫓아다니게 될 거다."

"..."

"그럼 길드의 명예는 끝이야! 클리어 보상? 하, 구경도 못할게 뻔하지!"

사람이 죽어나가는 상황임에도 박호연은 오직 명예와 보상 대한 이야기만 지껄였다.

'지금 이 상황에 그까짓 게 중요하냐?!'

부길드장은 욕이 턱 끝까지 차올랐으나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길드 마법사들을 준비시켜. 놈들의 방향으로 바람이 부는 지금이 기회다. 단숨에 끝내지."

"알겠습니다..."

**

최동우와 헤어진 강현.

그는 평소와 달리 신중한 모습을 보이며 천천히 숲을 나아갔다.

"아직 코어까지 거리가 제법 있어.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체력을 아끼자."

식생이 우거진 산맥은 걷기만 해도 상당한 체력소모를 강요했다.

강현이 느끼기에 코어는 하루 이틀로 도달할 거리가 아니었으므로 차근차근 나아가기로 결정했다.

"강현 님. 혹시 모르니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신성아의 물음에 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코어의 위치를 모르는 화룡이 우리보다 빠르게 도착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

"조금 늦더라도 최대한 신중을 기해서 움직이는 게 맞아. 코어에 도착했을 때 한바탕 할 체력은 남아있어야 하지 않겠어?"

"알겠습니다."

강현의 설명에 납득한 신성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정찰 좀 하자."

"예?"

"네가 그쪽 전문이잖아. 내가 최대한 몬스터는 피하며 움직일 예정이기는 한데 혹시 모르니까."

"..."

"네가 빠르게 진행방향을 한번 훑고 우리가 뒤따르는 방식으로 가자."

"알겠습니다."

"미안해. 피곤하겠지만 계속 전투를 이어가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괜찮습니다."

신성아는 은신, 정찰, 기동, 저격 따위에 특화되어 있었다.

때문에 이런 역할도 자주 맡아 왔던지라 딱히 불만은 없었다.

"우리는 천천히 움직이자."

강현과 안유성은 신성아가 지나간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형."

"왜?"

"이런 방식으로 코어까지 갈 생각이에요?"

"그게 베스트긴 하지."

"쯧. 지루하겠네요."

"그래 봤자 직선 코스로는 얼마 안 돼. 아마 3, 4일 정도면 도착할 거야."

"그동안 계속 걷기만 하라는 거잖아요."

"그럼 뭐 우리 셋이서 몬스터 군단이랑 싸우기라도 하려고?"

"그것도 나쁘지 않죠."

안유성의 대답에 강현이 인상을 구겼다.

"미친놈. 뒤지려면 혼자 뒤져."

그 이후로는 같은 패턴의 반복.

강현이 미리 몬스터의 마력을 감지해 안전한 경로를 정한다.

신성아는 혹시 강현이 놓친 것이 없나 그 경로를 확인한다.

그렇게 하루 종일 걷다가 잠을 청하고, 다음날 아침 다시 길을 걸었다.

"휴... 오늘도 등산. 등산. 등산!"

"등산이 뭐가 어때서. 즐겨 인마."

"보통 이런 때에 갑자기 팍! 하고 사건이 터지는데 말이죠."

"재수 없는 소리 할래?"

지루한 산행을 달래기 위해 강현과 안유성이 농담을 주고받던 때였다.

"크큭. 왔다."

갑자기 안유성이 웃음을 내뱉었다.

"뭐?"

강현은 갑작스럽게 들이닥치는 불안감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력은 잘 느껴지지 않는데...'

"강현 님!"

"뭐야?"

앞서 정찰을 나가 있던 신성아가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허억, 헉! 적입니다!"

동시에 그들 사이로 나타나는 낯선 몬스터.

"하아... 너 때문이다."

"제가 뭘요."

"네가 재수 없는 소리 찍찍 뱉어 대니까 이딴 상황이 벌어지는 거 아냐!?"

안유성은 빙긋 웃으며 강현의 짜증을 무시했다.

[베난디 척후병]

놈들 머리 위에 뜬 이름을 보며 강현이 신음성을 삼켰다.

"베난디라는 게 종족 이름이었다니."

아마 보스 몬스터나 지명 이름이 아니었을까 하는 모두의 추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일단은 이족보행 몬스터인가? 팔다리가 길고... 근육이 그렇게 발달한 것 같지는 않네.'

2m가 넘어가는 큰 키에 숲과 같은 녹색, 갈색이 어우러진 피부가 인상적이었다.

"하아악!"

"햐악!"

나타난 놈들은 강현에게 계속해서 '하악' 이라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형. 쟤들이 뭐라 하는 것 같은데요?"

"하아아악!"

"내가 듣기에는 그냥 하악질인데?"

하지만 가만히 보니 안유성의 말처럼 뭔가 의사를 전달하려는 것 같기는 했다.

다가오지 않고 계속 '하악! 하악!' 하는 것이 무언가 의사소통을 시도하고 있음은 분명해 보였다.

"제 육감이 말하기를 -더 이상 들어오면 가만두지 않겠다- 라고 하네요."

"무슨 육감에 텔레파시 기능이라도 있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진짜인데요."

안유성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것 참 편리한 능력이네..."

사실 놈들이 뭐라 말하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강현은 이 길을 지나서 코어를 향해 나아가야 했다.

"방심하지 말고, 셋을 세면 동시에 치고 나간다."

"예."

강현의 말에 안유성과 신성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둘, 셋!"

-파앗!

정확히 셋에 자리를 박차고 나간 일행이 전력으로 놈들에게 달려들었다.

"하아아악!"

그러자 놈들은 등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엄청난 속도와 함께 잽싼 몸놀림으로 나무 위로 올라간 놈들은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뭐야..?"

50화 죽음의 무게(1)

50. 죽음의 무게(1)

게릴라 전술이란 무엇인가.

하루 동안 놈들과 부대낀 강현은 게릴라전에 대해 책을 한 권 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피슉!

"또야?!"

활을 이용한 저격.

잊을 만하면 날아드는 이 화살은 상당한 위력을 품고 있었기에 무시할 수 없었다.

"으어억?!"

곳곳에 산재한 함정.

강현의 이동 경로가 코어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 놈들은 길목마다 함정을 만들어 놨다.

아무리 육체가 단단한 강현이라도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두두두두!

"온다! 준비해!"

끝으로 대규모 몬스터 유인.

놈들은 어떤 방법을 쓰는 것인지 몬스터들을 잔뜩 이끌고 나타났다.

몸에 화살을 꼽은 몬스터들 수십 마리가 미친 듯이 강현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아..."

이 세 가지 외에도 끊임없이 체력을 빼앗고, 신경을 긁는 방식으로 놈들은 밤낮없이 일행을 공격했다.

"으아아! 잠 좀 자자! 이 개새끼들아!"

강현이라고 그저 당하고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모든 버프를 활성화해 전력으로 놈들을 사냥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베난디 하나를 잡는 것에 너무 많은 체력이 소모됐다.

"분명 속도는 내가 더 빠른데... 쉽게 쫓을 수가 없어."

베난디의 숲이라는 이름처럼 이곳은 완전히 놈들의 영역이었다.

나무 사이를 제 집 마냥 뛰어다니는 놈들은 하나하나가 만화 속 닌자 같았다.

결국 혼신의 힘을 다해도 결과는 고작 한 마리를 잡는 것.

그것만으로는 이 상황을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피슉!

어디선가 또 화살이 날아들었다.

강현은 급히 고개를 틀어 화살을 피했지만 귀 끝이 조금 베이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는 끝이 없어."

"..."

"이대로 가다가는 코어에 도착하기 전에 체력이 먼저 바닥날 거야. 그럼 끝이지."

"놈들을 무시하고 코어로 무작정 달리는 건 어떻습니까?"

신성아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코어까지 거리가 제법 남았어. 그리고 그 방법은 너무 위험해."

"으음..."

"지금처럼 이미 체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우리끼리 시도할 작전이 아니야. 다른 누군가가 있으면 모를까."

그때 안유성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형."

"왜?"

"인질극을 한번 해보는 게 어때요?"

"인질극!?"

순간 강현의 머리가 번뜩였다.

'안유성 같은 놈들이나 떠올릴만한 발상이긴 하지만...'

꽤나 그럴듯해 보였다.

사실 지금 강현은 놈들을 없앨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각오가 되어 있었다.

"좋았어. 해보자!"

**

실패!

놈들은 동료가 잡히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복수라도 하려는 듯 더욱 거세게 공격을 가해 왔다.

"하아... 너를 믿은 내가 멍청이지."

"아까는 좋은 생각이라면서요."

차오르는 스트레스에 강현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피곤하다."

목숨을 담보로 한 술래잡기는 계속되었다.

게다가 코어에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질수록 놈들의 괴롭힘은 더욱더 집요해졌다.

"아직 안 해본 게 뭐가 남았지?"

그사이 일행은 이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생각해둔 것은 이미 다 했습니다."

신성아가 지금껏 실행한 계획들을 읊었다.

계획 1 : 몰살 → 실패

계획 2 : 인질 → 실패

계획 3 : 고문 → 실패

계획 4 : 견제 → 실패

"이것도 실패, 저것도 실패, 실패, 실패…."

"그만, 그만! 알겠으니까 그만해!"

"예."

눈 밑이 거뭇거뭇하게 내려앉은 강현이 히스테리를 부렸다.

"네가 어떻게 활로 슉, 하고 안 될까?"

"이런 지형에서는 활의 사용이 제한됩니다만."

"쟤들은 잘만 쏘잖아!"

"저와는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까."

강현도 알고 있었다.

저렇게 숨어서 이동하고 저격하는 적들을 활로 맞힌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그저 너무 답답해서 뭐라도 하고 싶은 심경으로 말한 것뿐이었다.

"미안하다... 너희는 나보다 더 피곤할 건데."

그나마 강현은 육체 재생으로 몸의 피로가 덜했지만, 안유성과 신성아는 말 그대로 정신력 하나로 버티는 중이었다.

특히 정찰 역할까지 했던 신성아는 당장에라도 쓰러지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으아아! 미치겠네!"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는 답답한 상황에 강현이 소리를 질렀다.

"슬슬 동이 트고 있습니다."

"하아..."

저 멀리 떠오르기 시작하는 태양이 강현의 얼굴을 비추었다.

눈 밑에 그늘진 다크서클이 유독 돋보이는 듯했다.

-퍼엉!

그때였다.

멀리서 희미한 폭음이 들렸다.

하늘을 보자 새벽 어스름을 밝히는 붉은 신호탄이 보였다.

"위기신호다!"

고민할 여유 따위 없다.

이대로 있다간 메인 코어에 도착하기 전에 과로사할 지경이었다.

"가자!"

강현이 곧장 짐을 챙겨 달렸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지금보다 더 상황이 악화되지는 않겠지.'

**

사방에서 비명소리가 난무했다.

-퍼엉!

"부길드장님 신호탄을 쐈습니다!"

붉은빛을 본 한시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더 버텨! 이제 다른 길드의 지원을 올 거다!"

수호자 길드의 부길드장 한시환.

길드장 박세현의 부재로 그는 부득이하게 이번 공략대의 대장을 맡았다.

'제기랄! 이럴 때 길드장님이라도 계셨다면...'

지난 회의에서 괴물처럼 변한 길드장 박세현은 결국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죽었다.

강인하고 리더십 넘치던 박세현의 부재는 목숨이 위급한 지금에 이르자 더욱 크게 느껴졌다.

"으아아! 살려줘!"

어디선가 들려오는 비명.

시선을 돌리니 또 하나의 길드원이 몬스터의 손에 꿰뚫려 죽어가고 있었다.

"포기하지 마라! 조금만 더 버텨!"

한시환이 길드원들을 독려했다.

그럼에도 길드원들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희망도 찾아볼 수 없었다.

모두가 피투성이에 지친 모습.

당장에라도 피곤함에 쓰러질 것 같았지만, 몰려드는 몬스터는 쉴 틈을 주지 않는다.

"캬아아아악!"

"케에엑!"

끊임없이 나타나는 몬스터들이 개미 떼처럼 보였다.

도대체 이 산맥의 어디에 이렇게 많은 몬스터들이 숨어 있었는지 한시환은 궁금할 지경이었다.

'개 같은 놈들...'

원래대로라면 이렇게 까지 상황이 나빠지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박세현이 죽자 길드 간부들이 너도나도 이빨을 드러냈고, 결국 길드는 여러 갈래로 쪼개지기 직전의 상황에 이르렀다.

-C등급 던전 공략은 예정대로 진행합니다!

다른 간부들의 반대로 길드장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한시환.

그는 무너져가는 길드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길드장으로 인정받기 위해 이번 공략대를 이끌었다.

"그저 내 욕심이었군."

공략은 실패했다.

"애초에 나는 길드장의 그릇이 아니었던 걸지도 모르겠어."

죄책감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자신이 죄 없는 길드원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만 같았다.

"지금쯤 놈들은 잔치를 벌이고 있겠군."

길드에서 자신이 죽기만을 바라고 있을 간부들을 생각하니 이가 갈렸다.

-쿵, 쿵!

순간 땅이 울리는 소리에 한시환의 고개가 돌아갔다.

저 멀리 숲을 헤치고 나오는 오우거 세 마리가 보였다.

"그래. 아주 쐐기를 박는구나... 하하하!"

이미 지칠 대로 지친 길드원들은 놈들을 막을 수 없다.

"오, 오우거다!"

"씨발! 이렇게 죽을 순 없어!"

"어디가! 대열을 이탈하면 안 돼!"

그 모습을 보며 한시환이 모든 것을 포기했다.

바닥에 검을 내려놓는 한시환을 보며 길드원이 달려왔다.

"부길드장님 뭐하시는 겁니까? 이대로라면 곧 전멸입니다!"

"..."

"길드원들을 이끌어 주십시오! 조금만 버티면 다른 길드의 지원이…."

"지원은 없다."

"예..?"

"지원은 없다고 했다."

한시환의 말에 길드원의 당황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면 신호탄은 왜..?"

어째서 자신에게 신호탄을 쏘라고 명령한 것이냐 따지고 싶었지만, 그것을 제대로 말할 정신조차 없었다.

"그건 그저 길드원들에게 힘을 북돋아주기 위함이었어. 지원은 없을 거야."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다.

약한 자를 짓밟고 더 높은 곳을 향하는 세계에서, 그런 약속 따위를 믿을 정도로 한시환은 순진하지 않았다.

"우린 끝이야."

한시환의 선언에 모든 길드원들의 얼굴에 절망이 내려앉았다.

"나는 죽더라도 싸우다 죽겠어."

"엄마... 흑흑..."

"울지마! 우리는 수호자 길드다!"

삶의 끝에서 누군가는 환하게 불타올랐고, 누군가는 가족을 찾았다.

그렇게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인생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을 때였다.

"잠 좀 자자! 이 썅놈들아!"

순간 숲의 나무들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분노의 사자후가 발동됩니다]

[모든 적들의 사기와 능력치가 감소했습니다]

전력으로 달려오던 강현이 그대로 몬스터 무리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콰앙!

"죽어!"

강현은 지금까지의 서러움을 갚으려는 것처럼 미친 듯이 날뛰었다.

뒤이어 도착한 안유성과 신성아도 곧바로 전투에 가세했다.

"강현 님. 오우거 먼저!"

"알고 있어!"

신성아의 말에 강현이 곧장 오우거들을 향해 달려갔다.

"우어어!"

세 마리의 오우거가 강현을 발견하고 괴성을 내질렀다.

"미안한데 지금은 길게 못 놀아주겠다!"

'웨인의 비기'를 사용한 강현이 곧장 오우거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푸슉!

단번에 오우거의 눈에 틀어박히는 빌게인의 장검.

"마력 폭발!"

강현은 오우거의 눈에 마력구를 날리고 곧장 다른 놈을 향해 달려갔다.

뒤처리는 안유성이 해줄 거라는 믿음에서였다.

"지, 지원이야! 지원이 왔어!"

"와아아!"

강현이 몬스터 사이에서 날뛰는 모습에 수호자 길드원들이 환호했다.

'저게 내가 알고 있는 오우거가 맞는 건가?'

모두에게 희망의 불꽃이 살아나고 있었지만, 한시환의 얼굴은 그리 밝지 못했다.

'수호자 길드는 몇 명이 달라붙어야 겨우 제거하는 몬스터 이건만...'

배데스 길드는 오우거 세 마리를 고작 일 분도 지나지 않아 무너뜨렸다.

"우아아아!"

그때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또 다른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부길드장님! 단군입니다!"

"뭐?"

"단군 길드가 왔습니다!"

다급히 길드원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자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스무 명의 사람들이 보였다.

그 선두에는 긴 흑발을 휘날리는 여성. 한세연이 있었다.

"지원이다!"

"살았어! 단군이라고!"

모두가 살 수 있다는 희망에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한시환은 더욱 절망했다.

'나는, 나는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던 거냐...'

자신의 길드원은 이미 절반이 몰살당한 상황이다.

그에 반해 단군 길드와 배데스 길드는 처음 출정했던 인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이 정도로 차이가 심하다고?'

'여태껏 내가 한 노력들은 뭐지?'

'우리 수호자 길드가 이렇게 무능해?'

혼란스러웠다.

저들이 보이는 기행은 죽은 길드장 박세현이 살아 돌아오더라도 무리일 것이 분명했다.

'아니...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최선을 다했기에 대한민국에서 다섯 번째 길드라는 영광을 거머쥘 수 있었다.

'그저 저들이 특별한 것이겠지.'

단 3명으로 생존한 배데스.

스무 명의 길드원이 전부 살아남은 단군.

"완전히 괴물들이군."

둘 모두 수호자 길드는 다가설 수조차 없는 괴물들이었다.

**

배데스와 단군의 합류로 상황은 빠르게 종료됐다.

모든 몬스터들이 쓰러지고 주어진 잠깐의 휴식.

"끄으으..."

너도나도 쓰러져 눈을 감기 바빴지만, 그럴 수 없는 이들이 있었다.

"정면 돌파만이 답입니다."

세 명의 길드장은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모였다.

"더 이상 체력이 빠지기 전에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합니다."

한세연이 먼저 의견을 제시했다.

"지금 길드원의 체력이 한계에 달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휴식을 취하고 움직이는 게 어떻습니까?"

"저희 길드에 피로를 해소하는 스킬을 가진 능력자가 있습니다. 완전한 회복은 힘들겠지만 임시방편 정도는 될 겁니다."

한세연의 대답에도 한시환의 표정은 풀릴 줄을 몰랐다.

"그렇다고 해도 코어의 위치를 모르지 않습니까... 무작정 움직이다가는 결국 모두 죽을 겁니다."

"놈들의 방어가 갈수록 거세지고 있습니다. 분명 지금의 진행방향이 올바르다는 증거입니다."

"그건 확실한 근거가 아닙니다!"

"그럼 지금 상황에 다른 해답이 있습니까?"

"..."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한시환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저기요."

그때 말없이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강현이 손을 들었다.

"코어의 대략적인 위치는 제가 알고 있습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세히 설명할 순 없지만 코어를 느낄 수 있거든요."

"어떻게 그런 일이..."

"게다가 한세연 씨의 말대로 놈들의 저항이 거세지는 것을 생각하면 거의 확실하다고 봐야죠."

강현의 말에 한세연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러면 혹시 코어까지 남은 거리도 알고 계십니까?"

한세연의 질문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길어야 하루. 쉬지 않고 달린다면 반나절 안에 도착할지도 모릅니다."

강현의 말에 한시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정말 얼마 남지 않았군요. 하지만 우리에게 그런 체력이 남아 있습니까?"

평소에 한나절을 달리는 것쯤이야 조금 피곤한 수준이지만, 지금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저희 길드원들은 이틀 동안 눈 한번 제대로 붙이지 못했습니다."

"..."

"게다가 일반 평지도 아니고 험준한 산맥이지 않습니까?"

한시환이 고개를 돌려 바닥에 쓰러져 있는 길드원을 바라봤다.

"저들을 보십시오."

"..."

"이들 보고 저 끔찍한 숲을 뚫고 달려가라는 건, 그저 죽으라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달려야 합니다."

한세연이 강경하게 말했다.

"수많은 낙오자들이 생길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천천히 움직이면, 또다시 새로운 몬스터 무리가 공격해 올 겁니다."

"..."

"그럼 그때는 수호자 길드원 전부가 죽을 겁니다."

"..."

"한 명이라도 더 살리고 싶으면 결국 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냉혹한 말에 한시환이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이미 저들을 한번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누군가를 죽이는 결정을 내리란 말입니까?"

"..."

"당신들은 어떨지 몰라도 우리 길드는, 저는 정말 한계란 말입니다..."

"한시환 씨라 했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한시환이 강현을 바라봤다.

"거 답답해서 못 들어주겠네. 왜 이렇게 징징대요?"

"예..?"

"한계면 뭐 어쩌라는 건데? 다른 해결책 있어요?"

"..."

"우리가 뭐 어부바해서 달리기라도 해줘야 하나?"

"아니, 그렇게 말하지는…."

"한시환 씨. 정신 똑바로 차려요."

강현이 두 눈이 알 수 없는 광기로 번들거렸다.

"던전에서는 약하면 죽는 겁니다. 아니, 당신들은 이미 약해서 한번 죽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왔기 때문에 살았죠. 내 말이 틀렸습니까?"

"..."

"적어도 내가 여기 온 이유는 말이죠.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지 아무것도 못하는 애새끼들을 떠맡으려 온 게 아니란 말입니다."

모욕적인 말에 한시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애새끼들이라니... 아무리 당신이 도왔다고 해도 너무한 거 아닙니까?!"

한시환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그러나 강현은 이미 피곤함과 짜증이 극에 치달은 상태였다.

이런 때에도 다른 이의 기분을 생각해줄 정도로 강현은 성인군자가 아니었다.

"내 말 똑바로 들어."

"으..윽!"

앞으로 뛰쳐나간 강현이 한시환의 멱살을 강하게 틀어쥐었다.

"지금 이건 당신 길드만의 문제가 아니야. 자칫하면 다른 사람들까지 전부 다 같이 골로 가는 거라고."

"흡...!"

"그러니까 닥치고 따르던지 아니면 그냥 꺼지던지 확실하게 해."

"허억, 허억..."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한시환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

"다른 사람을 이끄는 자리에 섰으면, 당신이 정말 그들의 대장이라면."

"..."

"대장답게 마지막까지 책임을 져. 먼저 무너지지 말라고."

강현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사실 한시환도 자신이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맞습니다..."

한시환이 자신의 길드원들을 바라봤다.

'그래. 내가 먼저 포기해서는 안 돼. 한 명이라도 더 많은 길드원을 살리려면 달려야 한다.'

결심을 한 한시환이 고개를 들었다. 그 눈동자는 조금 전과 달리 흔들리지 않았고,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죄송합니다. 추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해보죠."

51화 죽음의 무게(2)

51. 죽음의 무게(2)

"크아아아!"

벌어진 주둥이에서 끈적끈적한 침이 흘러내렸다.

흉포한 눈빛의 몬스터는 당장에라도 강현을 찢어발길 기세였다.

"입 다물어. 침 튀긴다!"

-퍼억!

몬스터의 턱을 올려친 강현이 계속 앞으로 내달렸다.

"허억, 허억!"

강현의 뒤를 따르는 능력자들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지만 쉬지 않고 달렸다.

"더는 못... 크헉!"

순간 돌부리에 걸린 남자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일어나! 여기서 멈추면 죽는다!"

"허억, 허억!"

한시환이 남자를 붙잡았지만, 말할 힘도 없든 그는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움직이라고! 여기까지 와서 죽을거야!?"

"키에에엑!"

근처까지 다가온 몬스터들의 괴성이 들려왔다.

"으아아!"

결국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마지막 힘을 쥐어짰다.

살기 위해서는 움직여야 했다.

한걸음도 떼기 힘들 만큼 지쳐있었으나, 멈추면 죽음이다.

"전부 정신 차려!"

강현이 큰 소리로 뒤따르는 이들을 격려했다.

"하아, 어떻게 저렇게 움직일 수 있지?"

"인간이 아니야."

사실 이들 중 가장 많은 부담을 떠안고 있는 이는 선두에 있는 강현과 한세연이다.

하지만 그들과 뒤따르는 이들의 거리는 좁혀지기는커녕 갈수록 벌어지고 있었다.

"다 왔어! 곧 있으면 코어에 도착한다!"

코어가 가진 마력의 파동이 점차 가까워진다.

강현은 온 힘을 다해 외쳤다.

"으아악!"

또 다른 이가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출발할 때 50명에 달하던 인원은 이제 40명도 남지 않았다.

"하아악!"

그때였다.

숲에 숨어 다니기만 하던 베난디들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드디어 나설 생각이 들었냐?"

"하악!"

"너희도 슬슬 쫄리기 시작했겠지."

놈들을 보며 강현이 분노에 찬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이것만 기다렸어. 새끼들아!"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는 검격.

그 검에 맞은 베난디가 들고 있던 활과 함께 반 토막이 났다.

"마지막이다! 이놈들만 밀면 끝이야!"

"으아아! 밀어붙여!"

상황은 금세 난전으로 치달았다.

코어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인 베난디 무리.

정말 끝이라는 생각에 죽을힘을 다해 싸우는 능력자들.

그러한 능력자들을 따라오던 각종 몬스터들.

"전부 가지고 있는 신호탄 전부 쏘아!"

강현의 말에 모든 능력자들이 가진 플레어 건을 하늘에 쏘았다.

-퍼펑, 펑, 펑!

강현도 플레어 건을 쏘고는 스킬을 발동했다.

"이제 제대로 놀아보자!"

[분노의 사자후가 발동됩니다]

대혼란.

피아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숲은 혼란의 도가니였다.

"하아악!"

"입냄새 나잖아!"

-퍽!

강현이 앞에서 소리치는 베난디의 턱을 후려쳤다.

놈은 턱 뼈가 수십 조각으로 깨어지며 허공을 날았다.

'역시 별거 아니었어.'

예상대로 베난디 본신의 전투력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순수한 무력으로 치면 오크보다 조금 더 약한 것 같았다.

"강현 님."

"왜?!"

한창 전투가 이어가던 도중,

"뭔가 이상합니다."

강현에게 다가온 신성아가 말을 걸었다.

"지금 바쁜데 이따가…."

"숲에 불이 난 것 같습니다."

"뭐!?"

불이라는 말에 강현이 눈이 치켜떠졌다.

그의 시선이 다급히 신성아가 가리킨 곳으로 움직였다.

"씨벌, 저건 또 뭐야...?"

엄청난 규모의 불길.

산맥 전체를 뒤덮으며 오는 불이 번져오고 있었다.

아직 제법 거리가 남았지만,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이곳까지 덮칠 것이 분명했다.

"갑자기 저게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시간이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코어에 도착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불길을 본 한세연이 다급하게 외쳤다.

"젠장! 거의 다 왔는데 이게 뭔 지랄이야!"

이제 정말 코앞에서 코어가 느껴졌다.

다급함을 느낀 베난디들도 앞뒤 가리지 않고 정신없이 덤벼오는 상황이다.

"와아아!"

그때 어딘가에서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불사 길드다! 불사 길드가 왔어!"

대한민국 2위에 랭크된 불사길드.

한명도가 이끄는 그들이 숲을 헤치고 나왔다.

"얘들아!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조져라!"

"예!"

한명도의 말에 불사 길드원들이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인사는 조금 뒤에 합시다!"

강현과 한세연을 본 한명도가 손을 흔들며 웃었다.

"블랙 나이츠다!"

"능력자 연합도 왔어!"

"최동우, 최동우야!"

불사. 블랙 나이츠. 능력자 연합.

마침내 화룡 길드를 제외한 모든 공략대가 모였다.

불길을 피해 움직이던 이들이 신호탄을 보고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

'이제 끝이 보인다.'

강현은 가장 선두에서 적들을 돌파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의 시야에 메인 코어가 들어왔다.

"이제 잠 좀 자자!"

강현이 거침없이 코어를 향해 달려가던 도중이었다.

"뭐야?!"

갑자기 나타나 빠른 속도로 접근하는 푸른빛.

그것이 머리에 닿기 직전 강현이 고개를 숙였다.

-쐐애애액!

거대한 마력을 품은 화살이 머리 위를 스치며 굉음을 토해냈다.

[베난디 대전사]

그리고 나타난 베난디 하나.

놈의 머리 위에 뜬 이름을 보고 강현이 미소를 지었다.

"네가 보스냐?"

다른 베난디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장대한 체격.

게다가 들고 있는 활 또한 범상치 않아 보였다.

"하아악!"

"시간 없으니까 빨리 덤벼!"

놈은 나름 무력에 자신이 있는 것 같았다.

도망치며 활을 쏘는 일반적인 베난디들과 달리 직접 검을 뽑고 강현에게 달든 것이다.

"하악!"

복부를 향해 빠르게 찔러오는 검.

-푸슉!

강현은 놈의 검을 피하지 않고 일부러 맞아주었다.

"내가 좀 많이 바빠서 말이야."

검에 꿰뚫린 채로 강현이 미소를 지었다.

"카아악!"

"어허, 가만히 있어!"

무언가 잘못된 것을 눈치 챈 놈이 도망치려 했지만, 강현이 놈의 머리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마력폭발."

-펑!

"마력폭발."

-퍼엉!

몇 번이나 머리에서 폭발이 일어나자 놈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화려했던 등장과 달리 허무한 죽음이었다.

"아이템은 내가 잘 쓸게."

-푹!

태연하게 자신의 배에서 검을 뽑아낸 강현이 다시 움직였다.

양 손은 완전히 걸레짝이 되어 뼈가 보였으나, 금세 치료될 것이 분명했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보스라도 시시한 놈이라서 다행이야."

애초에 '베난디의 숲'이 C등급인 것은 베난디의 본신의 무력 때문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바로 놈들의 전략과 전술.

숲이라는 무대에서 극대화된 기동력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작전들은 던전의 난이도를 몇 배나 상승시켰던 것이다.

"얼른 마무리하고 좀 쉬자!"

**

"와아아아!"

"끝났어! 살았다고!"

마지막 몬스터가 쓰러졌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미친 듯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을 만끽할 여유는 없었다.

"주목해 주십시오!"

앞으로 나선 한세연이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먼저 빠르게 전리품을 수거하고, 분배는 던전을 클리어 한 뒤에 나누겠습니다. 불길이 이곳까지 덮치기 전에 끝내야 합니다."

합리적인 그녀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럼 우선 보스의…."

말을 하던 한세연이 갑자기 말을 멈추고는 땅을 바라봤다.

"지진..?"

땅이 진동하고 있었다.

동시에 희미한 소음이 들려왔다.

"무슨 소리 안 들려?"

"잠시만, 이거 무슨 소리야?"

소란은 순식간에 그 덩치를 불렸다.

-두두두두두

희미했던 소음은 순식간에 수백의 기마대가 달리는 것 같은 굉음으로 변했다.

"저게 뭐야...?"

"몬스터, 몬스터 군단이다!"

소란의 정체는 바로 몬스터.

그것도 수천은 될 법한 어마어마한 숫자의 몬스터 군단이었다.

"도와줘!"

"으아아아!"

몬스터들의 발소리와 함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저거 화룡 길드 아냐?"

점차 가까워지는 몬스터 무리의 선두에는 사건의 발단인 화룡 길드가 있었다.

"박호연 개새끼... 네놈 짓인 줄 알았다."

한명도가 씹어 내뱉듯이 말했다.

"이제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당장 빠져나가야 해. 어서 코어를 부숴!"

점차 가까워지는 몬스터 무리에 능력자들은 완전히 패닉에 빠졌다.

"으아아!"

그중 한 남자가 괴성을 지르며 코어를 부수기 위해 달려들었다.

-턱.

코어를 내려치려는 남자의 손을 강현과 한세연이 동시에 붙잡았다.

"지금 뭐하는 짓입니까."

"그걸 몰라서 물어!? 당장 코어를 부수고 나가야 한다고!"

남자의 말에 한세연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지금 코어를 부수면 저 몬스터들이 전부 어디로 갈 것 같습니까?"

한세연이 싸늘하게 말했지만 이미 남자는 완전히 눈이 뒤집혀 있었다.

"그딴 거 알게 뭐야. 여기서 전부 죽고 싶어?!"

"나도 죽기 싫으니까 징징대지 마. 새꺄!"

-퍽!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던 남자는 강현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고 나서야 잠잠해졌다.

"당장 코어를 부숴야 해!"

"나와, 나오라고!"

그 모습을 보고도 이미 패닉에 빠진 사람들은 미친 듯이 코어로 몰려들었다.

"조용!"

한세연의 외침과 동시에 단군 길드가 움직였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단군은 순식간에 코어의 주위를 둘러쌌다.

-스릉.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검을 빼들었다.

"뭣들 하는 거야?!"

"지금 우리한테 검을 든 거야? 전부 죽고 싶어 환장했냐고!"

능력자들은 계속 소리쳤지만, 차마 단군 길드에게 덤벼들지는 못했다.

"여러분! 지금 저걸 막을 건 우리뿐입니다."

그들을 바라보며 한세연이 목청을 높였다.

"저걸 어떻게 막는다는 말입니까?!"

"당장 코어를 부수라고!"

"이렇게 개죽음당하기는 싫어..."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황이다.

그런데 저런 엄청난 규모의 몬스터 군단을 막아서는 것은 완벽한 자살행위였다.

"지금 코어를 부수면 저 몬스터들도 전부 함께 포탈을 타고 탈출할 겁니다!"

"..."

"저기 있는 엄청난 수의 몬스터들이 도시로 풀려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침착한 한세연의 설명에 능력자들의 기세가 조금 수그러들었다.

"그렇다고 모두 여기서 죽을 순 없지 않습니까?"

"막아낼 수 있습니다."

"..."

"놈들도 살기 위해서 불길로부터 도망치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놈들이 이곳을 지나치는 순간. 그 짧은 순간만 견디면 됩니다."

한세연의 말에도 사람들의 얼굴에 가득 찬 절망은 걷힐 줄 몰랐다.

"저걸 어떻게 막아서라는 거예요!"

"맞아. 저걸 막아서면 여기서 몇 명이나 살아남을 것 같습니까?!"

"그건..."

솔직히 한세연도 알고 있었다.

저들은 몬스터 군세를 견디기 힘들다는 것을.

자신과 단군 길드원들은 충분히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저 몬스터 군세의 아래 짓밟히고 깔려 죽는다.

"거봐! 나는 이렇게 죽기 싫다고!"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만 같은 분위기.

누군가는 나서야 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한명도나 최동우도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입을 꾹 닫고 있을 뿐이었다.

"후우..."

한숨을 내쉰 강현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전부 닥쳐!"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징징거리는 것도 정도여야지. 쫑알쫑알 듣기 싫어 죽겠네."

"뭐야!?"

강현의 말에 사람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내가 막는다."

"뭐...?"

"내가 막는다고."

"..."

"그러니까 전부 닥치고 뒤로 빠져."

**

코어를 중심으로 약 100여 명의 능력자들이 모여 있었다.

"젠장... 전부 죽을 거야. 이건 미친 짓이라고!"

"저 강현이란 놈 말만 듣고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지금이라도 코어를 부숴야 해! 어차피 놈이 막아 줄 거라면서?"

말을 하는 사람들의 눈빛은 불안으로 쉴 새 없이 떨리고 있었다.

"거기 아저씨. 조용히 좀 하죠."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남자의 고개가 돌아갔다.

"뭐야!?"

"조용히 하라고요."

"..."

그리고 마주한 안유성의 살벌한 눈빛에 금세 잠잠해졌다.

"어떻게 하려는 겁니까..."

신성아가 걱정이 가득 담긴 얼굴로 강현을 바라봤다.

"크에에에!"

엄청난 숫자의 몬스터 앞에 홀로 서있는 강현은 당장이라도 짓밟힐 것 같았다.

**

"할 수 있다. 강현아. 할 수 있어..."

강현은 언젠가 했던 말버릇처럼, 끊임없이 '할 수 있다'를 되뇌었다.

자신이 죽는 건 상관없었다.

그러나 절대 실패해서는 안 됐다.

자신이 뚫리면 뒤에 있는 100명이 위험했고, 그 100명마저 뚫리면 수천, 수만이 위험했다.

"후우..."

우르그의 거대 망치를 손에 쥔 강현이 깊게 숨을 들이셨다.

현재 온갖 버프를 독식한 강현은 능력치가 1.5배가량 뻥튀기된 상태.

거기에 '거인의 힘'과 '웨인의 비기'를 사용하자 넘쳐흐르는 힘에 몸이 터질 것만 같았다.

"크으윽..."

감당할 수 없는 힘에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통증에 익숙한 강현조차 신음이 새어 나올 정도의 격통이었다.

-두두두두두

"캬아아아!"

땅을 울리며 엄청난 기세로 달려오는 몬스터.

그들과의 거리는 이제는 100미터도 남지 않았다.

"와라."

최악(最惡).

저마다 자신이 생각하는 최악이 존재한다.

명예의 추락.

신체의 장애.

가족의 죽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떠올리는 최악은 정해져 있다.

바로 자신의 죽음이다.

"하아..."

하지만 강현은 아니었다.

"나는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

몬스터를 마주한 강현이 씨익 웃었다.

"그러니까."

-두두두두...

"쪽팔리게, 찝찝하게 살아갈 바엔..."

-두두두두두두두!

"떳떳하게 죽는다."

완전히 코앞까지 다가온 몬스터들.

빌게인의 장검을 든 강현은 '광전사'를 사용했다.

단숨에 모든 스텟이 80까지 치솟고, 마치 전능한 신이라도 된 것 같은 힘이 느껴졌다.

"으아아아아!"

아니, 힘이 끓어 넘치다 못해 당장이라도 전신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씨바아! 좋아!"

마치 속에 벌레가 돌아다니는 것처럼 피부가 꿈틀거렸다.

옴 몸의 장기들이 미쳐 날뛰는 짐승처럼 요동쳤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고통의 한계를 넘어서는 감각에 강현이 비명을 내질렀다.

-부웅!

양손으로 힘겹게 휘두르던 우르그의 망치가 나뭇가지처럼 가벼웠다.

"들어와! 시발놈들아!"

"캬아아아!"

마침내 몬스터 무리와 강현과 격돌했다.

52화 신성아의 하루(1)

52. 신성아의 하루(1)

-콰앙, 쾅!

계속해서 땅이 울렸다.

정면을 바라보는 한시환의 손은 저도 모르게 떨리고 있었다.

"인간이 맞기는 한 건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한시환. 그의 앞에는 평생 다시 보기 힘들 진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크에에엑!"

-콰앙!

수백 킬로그램은 될 법한 거대한 쇠망치. 그 망치를 가볍게 휘두르는 강현은 학살자였다.

강현이 만들어내는 학살 앞에서 몬스터들은 홍수처럼 갈라졌다.

인간을 도륙하는 그들은 이 순간 자신에게 죽음이 도래하지 않기만을 바라는, 그저 약자일 뿐이었다.

-두두두두두!

단 3분.

몬스터 무리가 코어를 지나가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그 사이에 강현의 주위에는 수백구는 될 법한 시체들이 늘어져 있었다.

"강현 님!"

마침내 모든 몬스터가 코어를 지나치고, 신성아가 다급히 강현에게 달려갔다.

"괜찮으십니까?!"

"당연하지."

우르그의 거대 망치를 인벤토리에 넣은 강현이 해맑게 웃었다.

"이제 10초 정도 남았으려나?"

"예?"

"나 쓰러지면 업어서 좀 데리고 나가줘."

강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신성아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으, 으윽..!"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쓰러지는 강현을 보고 신성아가 다급히 그를 안아 들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신성아는 신음을 내뱉는 강현을 조심스럽게 등에 둘러업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어..."

"그리고 정말 대단하십니다."

"내가 좀, 대단하지... 크큭! 쿨럭!"

신성아의 말에 실낱같은 목소리로 낄낄거리던 강현이 피를 토해냈다.

신성아의 등이 강현의 피로 축축하게 젖어갔다.

"미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

"불길이 이곳을 덮치기 전에 서둘러 나가도록 하죠."

강현이 코어에 도착하고, 한세연이 대표로 코어를 제거했다.

이곳에는 엄청난 규모의 몬스터 사체, 아이템, 마정석들이 흩어져 있었지만 그런 것을 챙길 때가 아니었다.

이제 불길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건은 신태길 팀장한테 확실하게 뜯어내야겠어...'

던전을 벗어나며 강현은 꼭 이번 일에 대한 보상을 아주 크게 받으리라 다짐했다.

-화악!

던전 밖으로 나오자 밝은 해가 보였다.

"나왔다!"

"던전을 클리어했어. 어서 찍어!"

"사람이 왜 이렇게 없어? 저게 끝이야?"

던전 입구에서 대기 중이던 기자들이 밖으로 나온 이들을 보고 호들갑을 떨었다.

마침내 모든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자 한명도가 박호연을 찾아갔다.

"이런 개새끼야!"

"으헉!"

잔뜩 흥분한 한명도가 박호연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딴 짓을 저지른 거야?!"

"나,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그걸 변명이라 해?! 강현이 아니었으면 전부 몰살될 뻔했어!"

한명도의 구타가 쉴 새 없이 이어졌지만 아무도 나서서 말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심지어 화룡 길드의 부길드장 조차 그 장면을 보고 외면했다.

"잠시, 잠시만. 나 좀 내려줘..."

"예? 하지만…."

"괜찮으니까 내려줘."

강현의 부탁에 신성아가 그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놨다.

서있는 것조차 힘겨워 보이는 강현은 천천히 박호연에게 걸어갔다.

"야."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아이템 가져와 개새야..."

**

-달그락, 달그락...

간단한 아침 식사를 끝낸 신성아는 곧바로 설거지를 했다.

"..."

혼자 살고 있는 그녀의 집은 항상 고요하다.

밖은 떠오른 해로 환했지만, 커튼을 친 실내는 어두웠다.

그 어둠 속에서 불도 켜지 않고 설거지를 마친 신성아가 거실에 걸린 사진을 바라봤다.

"..."

사진 속에는 노쇠해 보이는 중년 남성이 뚱한 표정으로 그녀와 함께 서있었다.

"다녀올게요."

사진 속 남성은 전 양궁 국가 대표였던 그녀의 아버지였다.

팀에서 에이스로 통했던 아버지는 사실상 메달은 확정이라 할 정도로 뛰어난 선수였다.

그러나 경기 직전에 일어난 사고로 인해 그는 올림픽에 출전조차 할 수 없었다.

"..."

사진 아래 즐비한 트로피들을 한차례 훑은 그녀가 발을 돌려 현관문을 열었다.

-철컥

그녀의 집은 꽤나 외진 곳에 위치한 허름한 단독 주택이었다.

길드 사무실까지는 매일 먼 거리를 이동해야 했지만 아직 이사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가난에 허덕이던 전과 달리 돈은 과분할 정도로 벌고 있음에도, 어째서인지 이 집을 떠날 수 없었다.

'제대로 된 추억조차 없는 곳인데...'

어째서 떠나지 못하는지 그녀 자신도 의문이었지만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떠나겠지.'

-부릉! 부릉!

바이크에 우렁찬 배기음과 함께 그녀가 스로틀을 힘차게 당겼다.

순식간에 주위의 풍경이 뒤로 밀려나며 거센 바람이 느껴졌다.

"꺄아악!"

"미친 거 아니야?"

목숨이 경각에 달릴 만한 아슬아슬한 묘기들.

가끔 그것에 놀란 행인의 욕설이 들려오기도 했다.

'상쾌해...'

그녀도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끼이익!

그렇게 멈출 줄 모르고 달리던 그녀가 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딸랑딸랑.

"어서오세요~"

외진 곳에 위치한 이곳은 젊은 사장이 혼자 운영하는 차분한 분위기의 카페였다.

신성아는 가끔 여유가 있을 때마다 이곳을 찾아왔다.

오늘도 강현이 병원에 입원 중이기에 오랜만에 이곳을 들릴 여유가 있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사장은 30대 중반에 짧은 단발이 잘 어울리는 '김설아'라는 이름의 여성이었다.

신성아는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그녀의 웃음에 반해 이 카페를 자주 찾았다.

"주문은 늘 먹던 걸로 드릴까요?"

사근사근한 김설아의 말에 신성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잔잔하게 흐르는 재즈 음악.

금세 따뜻한 커피 한잔이 신성아의 앞에 놓였다.

"카페 모카 한잔 나왔습니다~"

신성아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잔잔한 음악과 향긋한 커피.

별것 아닌 일상이었지만 힘겨운 던전을 헤쳐 나온 직후라 그런지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다.

-강현. 모두를 구해낸 영웅!

-단군의 한세연. 강현에게 감사한다.

-강현의 배데스(BadAss) 길드 가입 희망자 수백 명을 넘어서...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에 접속하자 온 세상이 강현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누군가는 '너무 과장된 것이다.' 혹은 '과하게 언론에서 추앙한다' 라고 비판했지만, 그건 그 현장에 있지 않았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이 정도 반응은 오히려 강현의 활약에 비하면 한참이나 부족한 것이었다.

"하아..."

강현이 모두의 앞에 서서 홀로 몬스터를 막아선 그 순간.

신성아의 가슴은 미칠 듯이 뛰었고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이성에게서 오는 두근거림은 아니었다.

존경. 부러움. 질투.

알 수 없는 다양한 감정들이 담겨있는 아주 미묘한 것이었다.

-도대체 던전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임? 전부다 강현 찬양하기 바쁘네.

-일단 화룡 길드는 이제 끝인듯

-이번에 워낙 피해가 커서 10위권 길드 순위 많이 바뀔지도 모르겠다

-ㅇㅇ 수호자 길드는 무조건 내려가겠고 화룡도 아슬아슬 할 듯.

-요즘 뜨는 정진 길드 올라갈 것 같은데?

공략대 중 절반이 넘게 죽는 엄청난 사태가 벌어져 버렸다.

그마저도 강현이 아니었으면 모두 몰살됐을 거란 말에 사람들의 의문은 커져만 갔다.

-다 닥쳐. 찌끄레기들아. 한세연 누님이 짱이시다. 강현 좀 컸다고 사방에 다 비빌려하네. X만한게.

스크롤을 내리며 댓글을 확인하던 신성아가 멈춰 섰다.

-멀쩡히 한세연 누님 보고 싶으면 조심해라. 눈깔 파버리기 전에.

신성아의 답글을 달자 곧바로 다시 답이 달렸다.

-지랄하네 시발. 어쩔건데? 뭐 눈깔을 파? ㅈㄴ허세는.

꽉 쥔 그녀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자식이..."

분노가 담긴 주먹이 탁자를 박살내기 직전,

-따릉따릉

카페 문이 열리며 울리는 종소리에 신성아가 정신을 차렸다.

"어서오세요..."

평소처럼 인사를 하던 김설아가 순간 멈칫했다.

"돈은 잘 벌고 계시는가~?"

말투에서 묻어나는 저렴함.

온몸을 건들거리고, 침을 찍찍 뱉으며 등장한 남자 셋이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자신들이 매우 불량한 양아치임을 강조하고 싶어 하는 것만 같았다.

"그게 아직..."

"이자 줄 돈은 모으셨어?"

"아니요..."

"지금 나랑 장난쳐?!"

남자들이 안상을 구기고는 카운터를 쿵쿵 내려쳤다.

기가 죽은 김설아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갔다.

"밀린 이자는 언제 줄 건데?"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이달 지나면 벌써 이자만 1억이야. 이럴 거면 그냥 가게 넘기라고! 이딴 구멍가게 팔아도 돈 못 갚을 지경이 되기 전에!"

"예? 원금이 8000만 원인데 어떻게 이자가..."

"그거야 계약서 보면 나오는 이야기고! 그래서 언제 갚을 건데?"

"그게..."

사슴 같은 김설아의 눈망울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양아치들은 그 모습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이 낄낄거렸다.

"아니면 저번에 말해준 그건 어때? 응? 잘 생각해봐. 한번 올 때마다 그달 이자는 없는 셈 쳐주겠다니까?"

심사숙고한 끝에 양아치들이 폐기물이라는 판단을 마친 신성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아가씨는 뭐야? 손님인가?"

"팔다리 쭉쭉 뻗고 얼굴이 반반한 것이 먹을 만하겠습니다. 형님. 흐헤헤헤."

양아치들은 신성아가 눈앞에 있는데도 오히려 듣기를 원하는 것처럼 큰 소리로 떠들어 댔다.

"계좌번호 불러."

"뭐?"

"계좌번호 부르라고."

갑작스러운 말에 양치기들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계좌 부르면 어떡할 건데? 네가 빚 대신 갚을 거야?! 1억 8천이라고!"

"줄 테니까 빨리 부르라고. 이 진딧물 같은 새끼야."

강현과 함께 다니면서 꽤나 입이 험해진 신성아였다.

"지, 진딧물?! 이게 죽고 싶나, 너 뭐하는 년이야?!"

"배데스 길드의 신성아다."

말을 함과 동시에 신성아가 멋들어지게 가죽 재킷을 집어던졌다.

-파라락!

공중에 떠오른 재킷 뒤쪽에 불타는 듯한 글씨로 써진 'Badass'가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뭐야...?"

"형님. 미친년 같습니다. 그냥 피하시죠."

"닥쳐!"

옆에서 치근대는 부하를 밀쳐낸 형님이 고민에 휩싸였다.

그도 능력자인지라 배데스에 대해 모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배데스면 강현이 있는 곳인데, 설마 진짜인가? 하지만 배데스는 분명 길드원이 3명밖에 없다고...'

고민하던 형님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배데스 길드라 해도 어차피 강현 빼면 쭉정이들이잖아?'

요즘은 불법 업계에서도 능력자가 아니면 취급을 해주지 않는다.

그 세계만큼 주먹이 중요한 곳도 없기 때문이다.

해서 삼인방 중 대장 역할을 하는 형님도 당연히 능력자였고, 레벨도 무려 31이나 됐다.

이 정도면 조직에서 최상위에 속하는 레벨이었다.

'아무리 배데스라도 우리 셋이서 한 번에 덤비면 어쩌지 못할 거야.'

마침내 계산을 끝낸 형님이 당당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네가 배데스면 어쩔 건데?"

"계좌나 불러."

"싫다면?"

저열한 미소를 짓고 있는 형님.

그를 본 신성아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정의의 힘을 보여주지."

"크하하하! 얘들아 정의의 힘이란다!"

"흐헤헤! 지가 무슨 포스레인저야 수리수리 오형제야 뭐야?!"

"쿠헬헬헬 완전…. 쿠헉!"

배를 잡고 웃던 남자의 배에 통굽 부츠가 틀어박혔다.

충격에 바닥에 고꾸라진 남자가 켈록거리며 숨을 헐떡였다.

"이년이 감히 쳤어?!"

"조져!"

신성아의 근접 전투 능력은 사실 비슷한 레벨에 비해 상당히 떨어지는 편이었다.

항상 은밀하게 이동하고 활을 이용해 멀리서 적을 공격하는 그녀였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도 강현과 함께 다니며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다.

"하압!"

시원하게 뻗어나가는 다리.

깔끔한 올려 차기가 남자의 턱에 적중했다.

그 충격에 남자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고,

-콰직

그대로 천장에 머리가 틀어박혔다.

"이제 너만 남았다."

평소 강현이 자주 짓는 썩소를 지어준 신성아. 그녀가 도발적인 표정으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이익...!"

그 모습을 본 형님이 인벤토리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분명히 말해두는데 이건 정당방위야. 지옥에서 징징거리지 마라!"

형님이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좁은 실내가 순식간에 엉망진창으로 박살났다.

"이제 상황 파악이 좀 되나? 어?! 아까처럼 계속 지껄여 봐!"

기세를 잡았다 생각한 형님은 더욱 속도를 높여 마구잡이 검법을 휘둘렀다.

"역시 배데스도 별 거 아니…."

그때였다.

계속해서 검을 피하기만 하던 신성아가 갑자기 형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자, 잠깐 뭐야?!"

-꽈악

중요한 부위에서 느껴지는 압력에 형님이 저도 모르게 검을 떨어뜨렸다.

"뭐하는 거냐고!?"

"너한테 필요 없는 걸 제거해줄 예정이다."

"자, 잠시만!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이거 놓고 이야기해! 으으..!"

식은땀을 흘리는 형님을 보며 신성아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라."

"뭐..?"

"진딧물은 처녀 생식이 가능하다."

"미, 미친년! 으아아아아!"

53화 신성아의 하루(2)

53. 신성아의 하루(2)

"죄송합니다. 피해 보상은 꼭 해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도와주신 건데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보상을 한다는 말에 김설아가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그래도 최소한 저로 인해 부서진 것들 정도는 배상하고 싶습니다. 그래야 제가 다음에도 편하게 올 수 있으니까요."

"정말 괜찮은데..."

계속되는 신성아의 요청에 김설아가 마지못해 계좌번호를 알려 주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형님 3인조를 질질 끌고 신성아가 카페를 벗어났다.

"휴우... 힘들었다."

평소 조용한 성격의 김설아는 갑자기 들이닥친 사건들에 완전히 진이 빠졌다.

-띠링!

"뭐지? 문자인가?"

갑자기 들리는 알람에 김설아가 핸드폰을 확인했다.

"입금 문자네? 으헤엑?!"

핸드폰을 확인하던 김설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녀가 덜덜 떨리는 손을 붙잡고 겨우 다시 핸드폰을 확인했다.

"뭐, 뭐야? 일십백천만, 십만, 백만, 천만... 억? 이, 이억?!"

신성아로부터 무려 2억 원이나 되는 거금이 입금되었던 것이다.

김설아는 다급히 신성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객님은 현재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

"어떡하지? 이런 돈을 그냥 받을 수는 없어."

고민하던 그녀가 문자를 보냈다.

-금액을 잘못 보내신 것 같아요. 2,000만 원도 많은데 2억이나 보내셨어요. 답장 주세요.

-제대로 입금된 겁니다.

-잘 모르는 분에게 이런 돈을 받을 수는 없어요.

-이제부터 알아 가면 되느…

문자를 작성하던 신성아가 고개를 저으며 삭제했다.

-괜찮습니다. 다음에 맛있는 커피 한잔이면 됩니다. 카페를 오래도록 운영하셨으면 좋겠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답장을 받은 신성아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수고하세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무려 2억이라는 거금을 주었다.

남들이 들으면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만한 행동. 하지만 신성아는 어째서인지 기분이 좋았다.

"돈은 이미 충분할 만큼 가지고 있으니까... 이거면 됐어."

항상 자신을 못다 이룬 꿈의 대리자 정도로만 여기던 아버지.

정이라고는 일절 주지 않았지만 그는 유일한 가족이었다.

그 가족마저도 죽고 혼자가 되었을 때.

그녀를 찾아온 것은 안식이 아닌 지독한 외로움이었다.

그랬던 그녀를 유일하게 위로했던 카페.

몇 년 동안 그곳에서 받았던 위로와 추억을 생각하면 그녀는 2억이 아니라 더 큰돈이라도 쏟아부었을 것이다.

"후훗."

괜스레 터져 나오는 웃음을 삼킨 신성아가 힘차게 바이크에 올라탔다.

**

평화로운 오후.

안유성은 사무실에 앉아서 단검을 집어던지고 있었다.

-파악!

점수판 정 중앙에 정확하게 꽂힌 단검이 부르르 떨렸다.

"형은 언제 일어나려나."

"워낙 회복력이 좋으신 분이니 금방 나으실 겁니다."

뉴스를 보던 신성아가 대답을 하고는 무심하게 단검을 집어던졌다.

-슈우욱! 파악!

그녀의 손을 떠난 단검은 정확히 안유성의 단검을 쳐내며 그 자리에 꽂혔다.

"오오, 누나 제법인데요?"

"별거 아닙니다."

한쪽 입꼬리를 올린 신성아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따르르릉!

"예? 예! 배데스 길드 맞습니다."

"길드장님은 현재 공석…."

"지금은 길드원 안 받아요!"

"몇 번을 이야기합니까? 지금 길드가…"

여유로운 둘과 달리 사무실 한쪽에서는 정신없이 바쁜 업무가 계속되고 있었다.

하루 종일 전화기와 씨름을 하는 한재문이 둘을 표독스럽게 노려봤다.

'나쁜 새끼들... 좀 도와주면 어디 덧나나?!'

이번 공략 이후 길드에 온갖 문의들이 넘쳐났다.

단순 광고부터 후원, 가입신청, 던전 공략 요청까지.

한재문은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하며 업무를 봤지만 일이 해결되기는커녕 점점 쌓여만 가는 느낌이었다.

"여어, 나 없는 동안 잘 있었냐?"

"강현 님!"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바닥을 뒹굴고 있던 신성아가 벌떡 일어났다.

"내가 고작 하루 없었다고 다들 이렇게 퍼져있는 거야?"

"평소에도 이러고 있었는데요."

"조금 자의식 과잉이 아니신가 싶습니다."

"이것들이..."

분명 조금 전까지 진심으로 강현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막상 강현을 보자 어째서인지 시비부터 걸고 싶어 지는 둘이었다.

"어쨌거나 별일 없었지?"

"예. 길드는 조용합니다."

신성아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으, 어..."

사무실 구석에 있던 한재문이 무언가를 말할 것처럼 입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전혀 조용하지 않다고!'

그러나 그 외침은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가슴속을 맴돌았다.

"이거 받아."

"이게 뭡니까?"

"선물."

강현이 인벤토리에서 처음 보는 활을 꺼내 신성아에게 건넸다.

얼떨결에 활을 받아 든 신성아가 정보를 확인했다.

이름 : 베난디 대전사의 활

등급 : C

내구도 : 98 / 100

설명 : 사냥꾼들의 종족 베난디의 대전사가 사용하던 활. 가볍고 편안하게 사용이 가능하고, 높은 탄성을 가지고 있다.

능력 : 마력 화살

*마력 화살 – 중력에 영향을 적게 받는 마력화살을 날린다.

아이템 정보를 확인한 신성아가 환하게 웃었다.

"이거 저 주시는 겁니까?"

"그럼 누굴 주겠어. 던전 클리어 도중에 몰래 챙겨 온 거니까 잘 써."

"감사합니다."

신성아는 튜토리얼을 3단계까지 통과했었다.

그것만 해도 꽤나 높은 수준이었지만 아쉬움이 있던 것은 사실이다.

특히 6단계 클리어 시 지급받는 B등급 무기가 없다는 것은 그녀에게 큰 고민이었다.

그런데 이제 괜찮은 무기를 받았으니 무거운 짐 하나를 던 것이다.

"화살이 없어도 마력으로 대체가 가능하다는 점이 좋군요."

"그렇지. 내가 한번 써봤는데 명중률이 엄청 좋더라고. 다만 마력소모가 꽤 심하니까 미리 잘 확인해둬."

"예."

아이템을 건넨 강현이 이번엔 자신의 상태창을 열었다.

▫이름 : 강현

▫칭호 : 튜토리얼 졸업자 외 3개

▫레벨 : 57

▫상세 능력치 :

·근력 28 (+4)(+2)

·순발력 26 (+3)

·체력 29 (+3)(+2)

·마력 30 (+3)(+4)

·추가 스텟 : -

▫고유 능력 : 부활

▫능력 : 중급 검술(D), 하급 방패술(E), 최하급 석궁술(F), 하급 체술(E), 최하급 둔기술(F), 마력감지(E), 독 내성(F)

▫스킬 : 분노의 사자후(C), 상급 육체 재생(A), 일도양단(D), 거인의 힘(B), 마력폭발(D), 웨인의 비기(D), 엔트리아의 외피(D)

"확실히 마력이 많이 올랐네."

그동안 레벨이 오른 족족 투자한 보람이 있었다.

"엔트리아의 외피도 등급이 올랐고..."

계속해서 상태창을 살피던 강현의 눈이 '독 내성'에 멈췄다.

독 내성(F)

능력 : 독에 대한 면역력을 강화한다.

설명 : 어떠한 종류의 독이든 관계없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이 감소한다.

사실 독은 그리 자주 사용되는 무기는 아니다.

능력자 건 몬스터 건 지금까지 독을 이용해 공격했다는 정보는 거의 없었다.

'그래도 대비 차원에서 가지고 있는 건 좋은 일이지. 게다가 이걸로 내성 능력의 존재를 알았다는 게 큰 수확이야.'

분명 내성 능력이 독에만 한정되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강현은 독 이외에 다른 내성 능력을 익힐 수만 있다면 앞으로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신태길 팀장한테 한번 알아봐 달라해야겠어."

"예?"

"아니야. 그나저나 이제 한동안 일은 없는 거지?"

강현의 물음에 한재문을 제외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문이는 왜 이렇게 바빠 보여? 무슨 일 있나?"

"이번 공략 이후에 길드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으음, 그래?"

분명 길드의 유명세가 최고조에 이른 지금이 길드를 키울 적기이기는 했다.

그러나 강현은 아직 길드의 규모를 키울 생각이 없었다.

'언젠가는 나도 거대한 길드를 만들기는 하겠지만...'

지금은 본신의 성장에 좀 더 집중해야 할 때다.

애초에 던전 공략을 위해 즉흥적으로 만들었던 길드로 인해 주객전도가 일어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일단 다 거절해. 당장은 생각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바쁜 한재문을 대신해 신성아가 대답했다.

"그나저나 이제 뭘 해야 하지?"

강현이 앞으로의 일에 대해 고민했다.

"일단 당장 떠오르는 건 액세서리를 구하는 건데..."

강현이 착용하는 '빌게인의 장검'과 '로날드의 갑옷'은 모두 튜토리얼에서 얻은 B등급 장비로, 지금까지는 부족함 없이 사용하는 중이다.

그러나 액세서리 같은 경우 '강인한 정신의 반지'와 '고블린 대주술사의 반지' 외에 나머지는 그저 근력과 체력을 각각 2씩 올려주는 평범한 반지를 착용하고 있을 뿐이었다.

"C등급 이상의 액세서리가 있으면 훨씬 더 강해질 거야."

일반적으로 착용 가능한 액세서리 개수는 총 4개.

강인한 정신의 반지와 고블린 대주술사의 반지를 뺄 이유는 없으니 2개의 액세서리만 더 구하면 된다.

"좋은 액세서리 구할 곳 없나?"

"던전을 돌다 보면 나오지 않겠습니까?"

"아냐. 무작정 돌아다녀서는 가능성이 희박해."

지금까지 강현이 모은 액세서리만 해도 백 개가 훨씬 넘어갔다.

대부분 장물이긴 했지만 이제 그 주인들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에 딱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강현이 쓸 만한 액세서리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렇게 모아도 쓸 만한 게 없다니 너무한 거 아냐?"

"..."

"후우... 어쩌지?"

강현이 한창 고민을 이어가던 때였다.

-띵동

사무실의 인터폰이 울렸다.

"누구야? 오늘 올 사람 있어?"

"없습니다.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신성아가 인터폰을 들어 올렸다.

"누구십니까?"

-한시환입니다! 문 좀 열어 주십시오!

"강현 님. 한시환이라는 남자입니다. 누군지 아십니까?"

"몰라."

강현은 그런 이름을 생전 처음 들어본다는 표정을 지었다.

"죄송하지만 모르는 분께는 문을 열어드릴 수 없습니다."

-아, 아니! 잠시…!

한시환은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신성아가 인터폰을 끄는 것이 한발 빨랐다.

-띵동

연결이 끊기기 무섭게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십니까?"

-한시ㅎ…

이름을 말하기도 전에 신성아가 연결을 종료했다.

-띵동!

"누구십니까?"

-잠시만! 잠시만요! 제발!

"말씀하십시오."

-저 수호자 길드의 한시환입니다. 신성아 씨. 저 모르십니까?

"모릅니다."

신성아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강현 님. 수호자 길드의 한시환이라고 합니다. 누군지 아십니까?"

"몰라."

전화 너머로 들리는 대화에 한시환은 미칠 지경이었다.

'이 정신 나간 것들은 뭐야?!'

아무리 비중이 적었다고 해도 자신은 수호자 길드의 대표로서 공략에 참여했다.

특히나 강현과는 꽤나 오래 대화까지 나누기까지 했다.

"그런데 기억조차 하지 못하다니..."

자괴감에 빠진 한시환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응?"

그때였다. 이대로 돌아가야 하나 고민하던 도중 문이 열렸다.

문을 연 남자는 작은 키에 왜소한 체구. 바로 한재문이었다.

"죄송합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재문아 모르는 사람한테 문 열어주고 그러면 안 돼."

멀리서 강현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한시환은 애써 무시하고 발을 들였다.

"이게 뭐야..."

한재문의 안내를 따라 들어간 길드 사무실은 한시환의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었다.

집기들은 중구난방으로 흩어져 있고 쓰레기통에는 수십 개는 될 법한 맥주 캔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압권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수많은 무기들이었다.

단순한 단검류부터 메이스, 화살까지 종류를 가리지 않고 흉기들이 널려 있었다.

"아, 얼굴 보니 알겠네. 그 수호자 길드 부길드장이셨나?"

"예. 맞습니다."

멍하니 서있는 한시환을 향해 강현이 다가왔다.

"그래서 무슨 볼일이에요? 이런 누추한 곳까지."

"저... 그게..."

사실 한시환은 몇몇 길드원들을 데리고 배데스 길드에 들어오려고 했었다.

그러나 길드 사무실에 들어온 지 1분도 지나지 않아, 자신의 판단이 맞는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띵동

그때 사무실 초인종이 다시 울렸다.

"또 누구야!?"

"모르겠습니다."

"오늘 무슨 날인가. 열어봐."

"예."

신성아가 문을 열자 낯선 얼굴이 보였다.

"강현님! 도와주십시오!"

다급히 안으로 들어온 남자는 꽤나 위급해 보였다.

곳곳에 상처를 입어 피를 흘리는 모습이 당장 병원에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아... 조영구 씨?"

"조동원입니다."

"크흠! 죄송합니다. 그 해선 길드에 부길드장이셨죠?"

"맞습니다!"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도와달라니."

강현의 질문에 조동원이 바닥에 쿵 소리가 나도록 무릎을 찧었다.

"강현님. 제발 저희 길드를, 제 형님을 살려주십시오!"

54화 전조(1)

54. 전조(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