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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초신성(2)

[경기 시작!]

시작 콜이 울림과 동시에 나와 빅터는 약속이라도 했다는 듯이 서로를 향해 다가갔다.

'그사이 장비 업그레이드가 많이 됐네.'

처음 만났을 때 봤던 빛바랜 검은 온데간데없고, 윤기가 가득한 검과 제법 좋은 품질의 가죽 갑옷을 착용하고 있었다.

경험 많은 중년 용병 같은 모습에서, 돈이 많은 중년 용병 같은 모습으로 변했달까.

"허허, 우리가 인연이긴 인연인가 보구만. 잘 지냈는가?"

제법 거리가 가까워지자 빅터가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대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빅터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2주 만이군요."

"자네가 아르웬을 죽였다는 소식에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네. 설마하니 그 아르웬을 죽일 줄 몰랐군."

"아는 사람이었습니까."

"아, 같은 팜에 있던 녀석이 하도 많이 얘기해줘서 말이야. 그 친구가 알프헤임 출신이거든. 껄껄."

빅터가 유쾌하게 웃었다.

뭐야.

한 번이라도 싸워본 줄 알았네.

하긴, 싸워봤다면 빅터가 살아있었을 리 없다.

그녀는 정말 괴물이었으니까.

"그래서 무척 아쉽다네. 경기 후반에 한 번 붙어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그런데 다행히도 그녀를 상대했던 자네를 다시 만났군. 이번 기회에 아쉬움을 털어낼 수 있겠어."

빅터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뭘까, 저 근거 없는 자신감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창을 고쳐 잡았다.

더 이상 빅터와 잡담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내 머릿속엔 녀석을 죽일 생각으로만 가득한 상태.

그럼에도 곧장 달려들어 창을 휘두르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녀석이 여유 부리는 모습을 보고 싶었으니까.

'그 모습, 언제까지 가나 두고 보자고.'

여기서 나는 빅터라는 싹을 아예 잘근잘근 밟아버릴 생각이었다.

그가 여유를 부릴수록, 패배 후의 아픔이 클 것이다.

'가서 이불킥을 하게 만들어주지.'

"쯧. 여전히 까칠하구만. 좋아, 그럼 한 번 놀아볼까?"

내가 창을 고쳐 쥐는 모습에 빅터가 혀를 차며 검을 들어 올렸다.

나는 처음부터 엄청난 마나를 끌어올려 창에 담았다.

콰직- 콰지직-

이 싸움.

길게 끌고 갈 생각이 없었다.

'단숨에 부숴버리자.'

마음을 먹은 나는 빅터를 향해 달려들었다.

챙! 콰직-

빅터 또한 웃음기를 뺀 얼굴로 내 창을 받아냈다.

아니, 받아내려고 했다.

"헉!"

전력을 다해 휘두른 창은 빅터의 검을 가볍게 밀어냈다.

거기에 뇌전까지 담겨져 있어 빅터가 몸을 움찔, 떨었다.

단 한 번 공격을 주고받은 것만으로도 녀석과 나의 실력 차가 드러났다.

챙! 챙! 챙! 챙! 챙!

한번 승기를 잡은 나는 엄청난 속도로 빅터를 몰아붙였다.

녀석은 단순히 검을 잘 다루는 것을 넘어, 싸울 줄 아는 녀석이다.

시간을 줘 봐야 변수만 생겨날 뿐.

내가 정신없이 몰아붙이자, 빅터는 어떻게든 나를 떼어놓기 위해 무리하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견고했던 빅터에게 빈틈이 생겨났다.

서걱-

"끅!"

그리고 난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허무하게 잘려 나가는 빅터의 오른팔.

빅터가 급하게 왼손을 뻗어 그의 허리춤에 달린 시미터를 꺼내 들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왼손 또한 잘라 주었다.

서걱-

소름끼치는 피륙음과 함께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빅터의 양 팔.

"이, 이게······."

빅터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전에 만났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실력 차가 벌어진 것이다.

녀석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이미 한번 겨뤄봤기에 서로의 실력을 대충 알고 있던 상태.

하지만 빅터는 상식선에서 보일 수 있는 성장을 보여주었지만, 나는 회귀를 하지 않는 한 보일 수 없는 급성장을 이뤄냈다.

초등학생 때의 라이벌이 중학교 리그에 참가해서 프로급의 실력을 보여준 거나 마찬가지랄까.

"이, 이렇게 격차가 많이 날 리가······."

빅터가 양팔이 잘려 나간 채 무릎을 꿇었다.

압도적인 내 실력에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완벽하게 전의를 상실한 모습.

"다음에 다시 만나면 반드시 죽여드리겠습니다."

나는 그 말을 끝으로 빅터의 목에 창을 휘둘렀다.

[6경기 9라운드가 종료되었습니다.]

['렌' 승리!]

[잠시 후 10라운드가 시작됩니다. 준비하십시오.]

빅터의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들이 붉은 꽃가루처럼 사방으로 흩날렸다.

이걸로 붉은 깃발전의 빚은 갚았다.

그리고 더 이상 하위 리그의 컨텐더 중에는 내 상대가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했다.

이제 10라운드를 치를 차례.

명색이 16강인 만큼, 네임드를 만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상관없어.'

비록 아르웬과 싸울 때처럼 피의 강화 30% 뻥튀기를 받진 못하지만.

그래도 나는 이길 자신이 있었다.

[6경기 11라운드를 시작합니다.]

[렌 vs 겐조]

[3초 후 경기가 시작됩니다.]

10라운드의 상대였던 낭인족을 격파하고 11라운드에 올라오자 제법 유명한 플레이어를 만났다.

검은색 닌자복을 입고, 복면을 쓴 채 곡도를 쥐고 있는 암살자 플레이어.

'말하기 무섭게 네임드가 나오는군.'

녀석은 나카츠쿠니 출신의 네임드, 겐조였다.

[2초 후 경기가 시작됩니다.]

암살자답게 은신 후 암습을 필승 전략으로 사용하며, 검술 수준이 뛰어나고, 암기도 잘 다룬다.

특이사항으로 짧은 순간 분신술을 사용할 줄 알고, 때에 따라선 연막탄도 사용한다.

'아세리안의 분석표에 그렇게 적혀 있었지.'

그녀가 건네준 분석표를 떠올리자, 새삼 아세리안이 고마웠다.

[1초 후 경기가 시작됩니다.]

네임드들은 단 한 번 공격을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승패가 갈리는 초인들의 싸움.

그렇기에 미리 상대방의 정보를 알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승률이 크게 오를 것이다.

'악마의 눈.'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겐조]

[성향 : 중용]

[근력 : 41(+?)] [민첩 : 87(+?)] [체력 : 51(+?)]

[정신 : 77(+?)] [지력 : 22(+?)] [마력 : 63(+?)]

[각성 능력 : <고급은신술 > <고급암기술 > <최상급검술 > <상급단검술 > <최상급마나운용 > <최상급살기 > <고급투척술 > <상급치료술 >]

네임드답게 무려 고급에 이른 능력이 세 가지나 됐다.

심지어 각성 능력에 고급 은신술이 들어가 있었다.

원래는 스킬로 배워야 하지만, 생전부터 은신술이 뛰어난 플레이어들은 각성 능력에 은신술이 들어가 있었다.

[경기 시작!]

경기 시작 콜과 동시에 겐조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400미터 가까이 떨어져 있었기에 녀석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원형 경기장의 중심부로 걸음을 옮기자, 미세한 잡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모든 신경 감각을 증폭시켜주는 초감각이 있는데도 아주 작게 들릴 정도였다.

'확실히 은신 실력이 뛰어나네.'

사락- 사락-

암살자 플레이어들은 공격 패턴이 단순하다.

은신 후 암습.

거의 원 패턴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데도 네임드가 됐다는 건 그 뻔한 패턴을 아무도 공략하지 못했다는 거지.'

사락- 사락-

나는 눈을 감고 숨을 꾹, 참았다.

고요한 상태로 집중했다.

그러자 흐릿했던 상대방의 위치가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했다.

녀석의 위치는······.

'어딜!'

챙!

나는 급하게 뒤로 돌아 빈 허공을 향해 창을 휘둘렀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어둠 끝자락에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온몸을 나처럼 칠흑 같은 검은색으로 둘러싼 겐조가 그곳에 있었다.

내가 녀석의 암습을 막아내자 겐조의 눈썹이 씰룩했다.

'절대 안 놓친다.'

겐조가 다시 어둠 속으로 몸을 날리려는 순간 뇌전을 머금은 내 창이 녀석의 도주로를 잘랐다.

그리고 시작된 난투.

챙! 채앵! 챙! 스겅-

콰직- 콰직-

암살자답게, 참을성과 정신력이 대단했다.

빅터마저도 움찔하게 했던 뇌전 공격이 녀석에겐 전혀 통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데미지는 계속 쌓이고 있겠지.'

지금쯤 곡도를 쥔 팔이 저릿저릿할 것이다.

하지만 녀석의 암습을 막아내고 전면전을 펼치고 있음에도 쉽지 않았다.

검술 실력은 빅터보다도 떨어지지만.

쐐애애액!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날아오는 저 암기 공격이 문제였다.

'그래, 도망가라.'

사각에서 날아오는 암기를 피하느라 공격이 끊긴 사이, 겐조가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다시 어떻게든 어둠 속에 몸을 숨기려는 것이다.

녀석의 민첩이 87이나 되다 보니, 거리가 순식간에 벌어졌다.

골목길 쪽으로 향하더니 모퉁이를 도는 겐조.

나는 포기하지 않고 녀석을 쫓아갔다.

그리고 모퉁이를 도는 순간이었다.

휘익-

침묵 속에서 겐조의 검이 나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녀석에게 창을 휘둘렀다.

그때였다.

나를 향해 쇄도하던 겐조의 검.

그런데 마지막 순간 겐조의 몸이 두 개로 나뉘어졌다.

두 명의 겐조가 사각을 점하며 내게 검을 휘둘렀다.

'분신술이군.'

솔직히 언제쯤 쓸까 기다리고 있었다.

녀석에겐 최후의 한 수일 테니까.

나도 녀석에게 숨겨두었던 한 수를 꺼냈다.

'침묵의 망토.'

순간적으로 은신을 쓰면서 몸을 틀었다.

침묵의 망토는 공격 판정을 받는 순간 은신이 풀리지만 상관없었다.

사라진 건 아주 찰나의 순간이지만, 겐조는 내 움직임을 놓쳤을 것이다.

'역시.'

그러자 지금껏 평정심을 잃지 않았던 겐조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아르웬에겐 단 한 번도 통하지 않았지만, 침묵의 망토는 명색이 1티어 스킬.

상위 리그의 높은 넘버링 경기까지 가도 사용하는 사람이 있을까 말까 하는 고급 스킬이었다.

그리고 초근접 거리에서 아주 잠깐이라도 내 모습을 놓친 순간,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나는 분신까지 두 명의 겐조가 펼치는 공격을 피하며 빠르게 창을 휘둘렀다.

푹-

손끝으로 갈비뼈를 꿰뚫는 느낌이 전해졌다.

이젠 네임드들도 내 상대가 되지 않았다.

띠링!

[현재 생존자 수 : 4 명]

[6경기 11라운드가 종료되었습니다.]

['렌' 승리!]

[잠시 후 12라운드가 시작됩니다. 준비하십시오.]

* * *

└아니 씨바, 명색이 네임드라는 새끼가 고작 지구 출신한테 지냐? 아, 네임드라는 이름이 아깝다. 병신 새끼, 나가 뒤져라.

└엌ㅋㅋㅋㅋ 나카츠쿠니에 포인트를 얼마나 걸었길래 그렇게 화남?

└ㅋㅋㅋㅋㅋㅋㅋ 저새낀 렌이 아르웬 죽이는 것도 안봤나 봄. 무림의 네임드 서문창을 아르웬이 갖고 놀았는뎈ㅋㅋㅋ 그런 아르웬도 렌한테 목 따임 ㅅㄱ

└존나 이해가 안되긴 하네. 어떻게 지구에서 저런 녀석이 나온 거지? 거긴 칼 들고 싸우는 시대가 끝난지 이미 오래잖아?

└렌의 거품도 곧 끝임. 아르웬은 우연찮게 이긴거고, 렌 다음 상대는 같은 알프헤임 출신의 네임드임. 거기서 갈기갈기 찢기고 울면서 빌듯 ㅋㅋㅋㅋ

* * *

후.

'별로 어렵지 않았는데 지치는 건 어쩔 수 없네.'

그렇게 힘겨운 싸움은 아니었지만, 겐조의 움직임이 너무 빨랐다.

또한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암기도 문제였다.

그래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한 채 녀석의 공격을 막아내야 했다.

초감각 덕분에 내가 상성 면에서 겐조보다 더 우위에 있었기에 이길 수 있긴 했지만.

그게 아니었으면 녀석과의 승부가 더욱 길어졌으리라.

'이번 상대는 누구지.'

[6경기 12라운드를 시작합니다.]

[렌 vs 소호]

[3초 후 경기가 시작됩니다.]

메시지 창을 본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 위로 솟아오른 귀.

엉덩이 쪽에서 씰룩거리고 있는 꼬리.

이빨에 나 있는 날카로운 송곳니까지.

[2초 후 경기가 시작됩니다.]

'수인족의 최강자.'

호인족이었다.

제길.

가장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녀석이 걸렸다.

[1초 후 경기가 시작됩니다.]

이름은 소호.

호인족답게 엄청난 피지컬로 찍어 누르는 타입.

은신에도 일가견이 있으며, 감각이 뛰어나 상대하기가 까다로울 것.

딱히 약점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음.

이기려면 더 높은 스텟으로 찍어 누르는 방법뿐.

아세리안이 건네준 분석표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경기 시작!]

소호가 나를 향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알프헤임 출신. 또 같은 이종족이었기에 아르웬과 일면식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즉, 나에게 이를 갈고 있을 거라는 것.

'악마의 눈.'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소호]

[성향 : 호전]

[근력 : 78(+?)] [민첩 : 81(+?)] [체력 : 64(+?)]

[정신 : 66(+?)] [지력 : 4(+?)] [마력 : 69(+?)]

[각성 능력 : <고급박투술 > <사냥본능 > <고급살기 > <상급마나운용 > <하급치료술 >]

[종족 특전 : 수인족의 왕]

역시 뛰어난 근력과 민첩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만났던 호인족은 다 그랬다.

종족 특전 덕분인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떤 특전을 받길래 저렇게 강한 걸까?

"아르웬님을 영원한 안식에 보내드렸다지! 나와도 한번 겨뤄보자!"

거대한 포효를 내지르는 소호.

'쯧.'

호전적이라는 성향 답게 녀석은 저 멀리서부터 나를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나도 옆구리에 창을 끼고 녀석을 겨눈 채 빠르게 돌진했다.

아세리안이 소호를 쓰러트리는 방법은 더 높은 스텟으로 찍어누르는 수밖에 없다고 했지만, 그것 말고도 한 가지 방법이 더 있었다.

그건 바로 소모전을 펼치는 것.

쾅!

소호의 앞 손과 내 창이 부딪히자 훅! 하는 느낌과 함께 내 몸이 뒤로 튕겨져 나갔다.

순간적으로 모든 장기가 입으로 튀어나오는 느낌이었다.

'엄청 단단하네.'

소호의 양손에는 어느새 20센티미터 정도의 거대한 손톱이 세워져 있었다.

근데 손톱은 전기가 안 통하나?

쐐액!

내가 뒤로 밀려난 사이 소호가 다시 달려들어 내게 손톱을 휘둘렀다.

'후. 영리하게 싸워야 해.'

작은 것을 내주고, 큰 것을 취해 이득을 보며 장기전으로 끌고 가야 한다.

그래서 놈에게 조금씩 손해를 강요해야 이 녀석을 쓰러트릴 수 있다.

챙! 콰직! 채챙! 챙!

나는 일단 방어에 전념했다.

녀석을 단숨에 쓰러트리려는 욕심은 버린다.

일단 최대한 조금씩 갉아 먹으면서······.

띠링!

[<벽력 >이 발동됩니다.]

'벽력!'

마침 성계 대항전을 진행하면서 단 한 번도 터지지 않았던 벽력이 발동되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소호에게 창을 휘둘렀다.

꽈아아아아아아앙!

하지만 내 창은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바닥에 거대한 구덩이가 생기며 사방으로 뇌전이 퍼져나갔다.

'피했어?'

순간 뒷목이 쭈뼛하며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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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초신성(3)

'도대체 어떻게?'

모든 움직임엔 리듬이란 게 존재한다.

그건 격렬하게 싸우는 동안에도 마찬가지.

하지만 벽력은 그 리듬을 깨부수고 들어간다.

엇박자로 들어오는 공격이라는 것.

그렇기에 이걸 피할 수 있는 존재가, 적어도 하위 리그에서는 없을 줄 알았다.

나라고 해도 피하기 어려울 것 같았으니까.

'보고 피한 건 아니야.'

당황하는 소호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녀석은 벽력이 터지기 직전, 뭐에 씌인 사람처럼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아무래도 육감이 발달하는 사냥본능 덕분에 무언가 위험하다는 것을 느끼고 피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야. 만약 보고 피한 거였다면, 애초에 상대조차 되지 않았겠지.'

그랬다면 싸우나 마나일 것이다.

날 가지고 노는 수준의 실력자란 뜻일 테니까.

"후. 안타깝구나, 인간. 그게 네가 가진 최후의 한 수인 모양인 것 같은데. 아르웬님도 그걸로 쓰러트렸고."

"······."

"이 세상에선 감히 넘어설 수 없는 종족의 격이란 게 있는 것이다. 앞으로는 호인족들을 만나면 눈도 마주치지 못하게 만들어주마."

소호가 우드득- 우드득- 주먹에서 뼛소리를 내더니 내게 달려들었다.

다시 시작된 격렬한 싸움.

'최후의 한 수라······.'

나는 단 한 번도 벽력을 최후의 한 수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보유하고 있는 스킬 가운데 하나이긴 하지만, 언제 발동될지도 모르는, 0.1%의 확률에 의존할 정도로 미련하지 않았다.

애초에 녀석을 쓰러트리는데 벽력은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

'침묵의 망토.'

나는 순간적으로 어둠 속에 녹아들며 녀석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킁- 킁-

하지만 침묵의 망토는 녀석에게 통하지 않았다.

"거기냐!"

녀석이 냄새를 맡더니 곧장 내가 있는 방향으로 날카로운 손톱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쯧.'

침묵의 망토는 소리를 차단시켜줄 뿐, 냄새까지 없애주진 않는다.

한마디로 녀석처럼 수인족들에겐 통하지 않는다는 것.

'개 쓰레기 같은 스킬.'

인정해야 했다.

침묵의 망토는 내가 고른 스킬 중 가장 쓰레기였다.

나는 이를 갈며 침묵의 망토를 해제했다.

성계 대항전이 끝나면 더 좋은 스킬이 없나 찾아봐야 겠다.

"잡스러운 기술이나 쓰는구나!"

은신을 해제하자 소호가 크게 포효하며 손톱을 휘둘렀다.

챙!

내 창에 깃든 뇌전과 녀석의 손톱에 담긴 마력이 부딪힐 때마다 작은 빛무리를 만들며 사라졌다.

그 빛무리들로 인해 깜깜한 대로가 순간적으로 환해질 정도였다.

뇌신도 통하지 않는 것 같고.

침묵의 망토 스킬은 꽝.

마력 상쇄는 소호의 손톱이 워낙 단단해서 녀석의 마력을 부숴도 생채기 하나 남지 않는다.

결국 녀석에게 통하는 스킬이 존재하지 않았다.

'짐승처럼 달려드는 것도 문제야.'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녀석이다 보니, 공격해 들어오는 방법도 무척 다양했다.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극도의 긴장감에 온몸의 신경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1회차 때 언제나 나보다 강한 존재들과 싸워왔지 않았던가.

그때도 지금처럼 마땅한 스킬이 없었지만, 결국 살아남았었다.

피지컬로 안 된다면, 테크닉으로 찍어 누른다.

'다시 침착하게.'

엄청난 속도로 쇄도해 오는 소호의 손톱.

나는 녀석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에 집중했다.

'빈틈!'

한동안 뒷걸음질을 치며 소호의 공격을 막는 사이, 좁은 틈이 보였다.

평소라면 쳐다도 보지 않았을 만큼 작은 틈이었다.

너무 작은 틈이라 그다지 큰 데미지를 넣을 수 없기 때문에.

하지만 나는 소호와의 싸움을 소모전으로 끌고 가려고 마음먹은 상황.

그렇기에 그 작은 틈은 내게 너무나도 맛있는 먹잇감이었다.

서걱-

"흥."

빈틈을 찌르고 들어간 덕분에 소호의 어깨에 옅은 자상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소호는 아무런 감흥도 없다는 듯이 날카로운 손톱을 휘둘러 댔다.

그러자 드러나는 또 다른 빈틈.

서걱-

이번엔 소호의 오른쪽 옆구리에 옅은 상처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쥐새끼 같은 놈! 잘도 도망 다니는 구나!"

이번에도 소호는 이런 상처쯤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오히려 과감하게 움직였다.

거리를 좁혀 어떻게든 내 품속으로 파고들겠다는 생각인 것 같았다.

'그럼 나야 고맙지.'

푹- 푹- 푹-

나는 이전보다 확연히 많아진 틈새로 계속해서 창을 휘둘렀다.

소호의 몸에 조금씩, 옅은 자상들이 늘어가기 시작했다.

작은 상처들에서 흘러나오는 한두 방울의 피들이 어느새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많아졌다.

이대로 계속 싸우게 된다면 녀석은 과다출혈로 사망할 것이다.

"······!"

녀석도 그걸 깨달은 것인지 더는 무모하게 돌진해 오지 않았다.

나처럼 방어에 치중하며 기회를 엿보기 시작한 것.

그러자 싸움의 양상이 무척 단조로워졌다.

'후우.'

나는 숨을 돌리며 녀석의 빈틈을 훑었다.

더 이상 찌르고 들어갈 만한 공간이 보이지 않는 상황.

이제부터는 나도 손해를 감수하며 싸워야 한다.

물론 지금 상태에서 버티기만 해도 내가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체력의 문제만 없다면.

[남은 체력 : 42%]

천둥의 숨결로 인해 체력 소모가 무척 심했다.

아마 녀석이 과다출혈로 쓰러지기 전에 내가 먼저 지칠 것이다.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어떻게든 녀석에게 더 큰 피해를 강요해야 해.'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대충 털어내고, 이번엔 내가 먼저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챙! 채챙!

다시 시작된 지루한 공방전.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녀석에게 의도적으로 빈틈을 노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크게 위협적이지 않을 만한 곳들로.

"놈!"

그러자 먹잇감을 낚아채는 것처럼 소호가 공간을 찌르며 내게 파고들었다.

내가 의도적으로 만들어준 공간을 이용해서.

우리의 몸이 순간적으로 한번 겹쳤다 떨어졌다.

삭-

순간 왼쪽 옆구리에서 화끈한 느낌이 전해졌다.

힐끗 살펴보니 살덩이가 뭉텅이로 찢겨나가 있었다.

띠링!

[신체 일부가 크게 훼손되어 체력이 대폭 하락합니다.]

[남은 체력 : 33%]

'괜찮아. 장기는 안 다쳤어.'

나는 곧장 소호를 살폈다.

녀석의 가슴에는 사선으로 커다란 자상이 남아 있었다.

베인 가슴에서 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이득 봤어.'

무게추가 확실하게 내 쪽으로 기울었다.

저 상처라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투쟁이란 것을 아는 녀석인 줄 알았더니! 이 겁쟁이 자식!"

소호가 다시 내게 달려들었다.

자신의 상처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꼈는지 무척 조급해진 모습이었다.

"네가 진정 전사라면 내게 맞서 싸워라!"

소호가 광분하여 소리쳤다.

하지만 나는 녀석이 뭐라고 하든 깔끔하게 무시했다.

'살아남은 자가 강한 거다.'

나는 그 이치를 너무나 뼈저리게 알고 있었으니까.

한 가지 불안한 점이 있다면.

'부디 그때까지 체력이 버텨주길.'

* * *

└아 ㅅㅂ 눈 버렸네. 존나 지루함 ㅡㅡ

└ㅇㅈ 기대 엄청 많이 했는데 렌 저 ㅂㅅ이 재미없게 경기하네.

└ㅋㅋㅋㅋㅋㅋㅋㅋ 하여튼 하위 리그만 보러 다니는 하층민 새끼들은 보는 눈이 없어요. 너넨 저 고도의 심리전이 안보임? ㅋㅋㅋ

└솔직히 난 손에 땀을 쥐고 보는 중. 저 렌이라는 애는 롱런하겠네. 무식하게 피지컬로 찍어 누르는 방식으로는 상위 리그 올라오자마자 3초 컷임.

└진짜 이해가 안 되네. 어떻게 저런 애가 지구에서 나왔지? 저건 한두 번 싸워서 할 수 있는 수준의 플레이가 아닌데?

└관람료가 없어서 하위 리그나 보는 찌끄레기들에게 내가 친히 설명해줄게. 렌이 애초에 스텟에서 심하게 밀리는 것 같으니까 바로 방어 위주로 플레이하지? 그러면서 조금씩 데미지 쌓다가 소호가 그걸 깨닫고 플레이 스타일이 변하자마자 렌이 그에 맞카운터 치면서 대응함. 소호가 작은 것을 내주면서 큰 걸 취하려고 하니까 그거 안 먹고 더 작은 거 찾아 찌르면서 영리하게 싸운 것임. 이건 진짜 칭찬할 수밖에 없네.

└ㅋㅋㅋㅋ 냅두셈. 어차피 못알아 쳐먹음. 쟤들처럼 치고받고 싸우는 거나 좋아하면 뭐 하러 경기함? 그냥 스텟 높은 애들만 뽑아서 상위 리그에 올리면 되는걸 ㅋㅋㅋㅋ

└근데 체력이 좀 부족해 보이는 게 하자네 ㅋㅋ 그것만 보완하면 좋을듯.

* * *

소호의 생명력은 무척 끈질겼다.

피를 철철 흘리기 시작한 지 10분째.

녀석은 움직임이 조금 느려졌을 뿐, 여전히 내게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끝이다.

"이 하등한 종족 주제에. 감히!"

"헉, 허억, 헉, 헉."

전보다 더 매섭고 과격해진 공격들.

이제는 아예 방어를 포기한 채 어떻게든 일격으로 날 죽이겠다고 마음먹은 것 같았다.

[남은 체력 : 18%]

남은 체력이 얼마 되지 않아 눈앞이 가물가물하고 팔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던 상황.

그래서 내심 쫓기는 마음이었는데, 다급한 소호의 모습에 나는 적잖이 안심되었다.

'저 녀석도 한계구나.'

이제부터는 정신력의 싸움이다.

녀석이 과다출혈로 먼저 죽거나, 아니면 내 체력이 떨어져서 온몸이 난자당해 죽거나.

'어떻게든 버틴다.'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때였다.

소호가 얼굴과 심장 등 중요 부위만을 막은 채 나를 향해 짓쳐들어왔다.

'빈틈!'

나는 훤히 드러난 소호의 복부에 창을 찔러 넣었다.

푹!

뇌전을 머금은 내 창이 소호의 배를 관통했다.

하지만 소호는 복부가 꿰뚫린 채로 계속해서 나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동귀어진?'

위기 의식을 느낀 녀석이 최후의 한 수를 꺼낸 것이다.

"나 혼자 죽을까 보냐!"

마력을 머금은 소호의 손톱이 내 미간을 향해 쇄도했다.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지만, 내 창은 소호의 복부에 꽂혀 움직이지 않았다.

'시발!'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꽈앙!

소호의 손톱이 내가 서 있던 자리의 대로를 갈랐다.

아슬아슬하게 녀석의 공격을 피한 나는 곧장 인벤토리에서 여유분으로 준비해 두었던 창을 꺼내 녀석을 향해 겨눴다.

"내······ 내가······ 이런 버러지같은 녀석에게 질리가······ 쿨럭, 쿨럭."

온몸이 피범벅이 된 채 비틀거리며 내게 다가오는 소호.

녀석이 입에서 피를 한 움큼 쏟아냈다.

"다음에 만나면 절대······."

털썩-

소호가 말을 끝마치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졌다.

'이겼다.'

순간 집중력이 뚝, 끊기며 다리가 풀렸다.

"헉, 허억, 헉, 헉."

나는 그대로 땅바닥에 철퍼덕 앉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상성 면에서 나와 최악의 상대였는데도 이겼다.

내가.

결국 해냈다.

띠링!

[현재 생존자 수 : 2 명]

[6경기 12라운드가 종료되었습니다.]

['렌' 승리!]

[잠시 후 결승전이 시작됩니다. 준비하십시오.]

드디어 결승전.

지구가 1승을 챙길 때까지 마지막 관문만이 남은 셈이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 한 명.

어떻게든 이긴다.

[모든 상태를 100%로 회복합니다.]

[6경기 결승전이 시작합니다.]

[렌 vs 고명]

[3초 후 경기가 시작됩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요동치던 심장이 순식간에 원래의 박동을 되찾았다.

산소가 부족해 핑- 돌던 정신도 뚜렷해지며, 상대의 모습이 보였다.

'저 녀석이 내 마지막 상대.'

비단으로 된 도복이 흩날리고, 쥐고 있던 검은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2초 후 경기가 시작됩니다.]

소매에는 매화꽃이 수놓아져 있고 한눈에 봐도 엄청나게 잘생긴 미남자.

'고명.'

무림에서 자랑하는 구파일방 중 화산파의 직계 제자.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사용.

현란한 검술 사이사이에 마력으로 이루어진 매화 꽃잎이 흩날림. 피하기 쉽지 않을 것.

[1초 후 경기가 시작됩니다.]

스텟은 하위 리그 탑3. 아마 소호보다 높을 것.

정통파답게 기초가 훌륭하고, 수비가 탄탄.

방어 후 빈틈을 찾아내면 그때부터 몰아치는 스타일.

딱히 이렇다 할 약점이 없음.

'아세리안이 준 분석표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지.'

결승전답게 엄청난 강자와 마주쳤다.

[경기 시작!]

하지만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내가 상성이 너무 좋았으니까.

'악마의 눈.'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고명]

[성향 : 선]

[근력 : 79(+?)] [민첩 : 82(+?)] [체력 : 69(+?)]

[정신 : 71(+?)] [지력 : 19(+?)] [마력 : 78(+?)]

[각성 능력 : <고급검술 > <최상급마나운용 > <최상급살기 > <최상급박투술 > <중급치료술 >]

[업적 특전 : 신검합일]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탁 뜨일 만큼 엄청난 스텟.

당장 상위 리그 플레이어들과 비교해 봐도 꿀릴 게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고명의 스텟에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이번 경기는 내가 유리해.'

상성이란 게 참 애매했다.

내가 겨우 이긴 소호가 고명과 붙었다면, 십중팔구 고명에게 졌을 것이다.

소호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자신보다 스텟이 높은 상대에게는 크게 위협적이지 않으니까.

'하지만 난 다르지.'

소호에겐 침묵의 망토도, 뇌신도, 마력 상쇄도 소용없었지만, 고명은 아니다.

녀석에겐 침묵의 망토를 간파할 뛰어난 코도, 뇌전을 막아낼 단단한 손톱도 없다.

뛰어난 검술 실력.

그것 하나뿐.

'내가 왜 다양한 무기들을 손에 쥐려고 하는지 보여주겠어.'

나는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침묵의 망토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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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초신성(4)

└와ㅏㅏ 진짜 결국 결승전까지 왔넼ㅋㅋㅋ 솔직히 아르웬 이긴 거 뽀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러다가 진짜 지구가 1승 챙기겠는데? 이거 모른닼ㅋㅋㅋㅋㅋㅋ

└ㄴㄴ 솔직히 여기가 한계일듯. 소호야 본능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녀석이니까 영리하게 풀어갈 수 있긴 했는데, 고명한텐 그런 방법 안 통함.

└ㅇㅇ 사실상 근접 물리계열로만 놓고 봤을 때 렌보다 고명이 한 수 위라고 평가받음.

└그래도 지구에서 저런 녀석이 나왔다니, 진짜 대단한 건 인정 ㅇㅇ!

└안돼 ㅠㅠㅠㅠ 렌아 힘내! 제발 지구 역배 터지는 기적을 보여줘!!!!!

└앜ㅋㅋㅋㅋ 지구에 태운 새끼 ㅋㅋㅋ 존나 털리고 시무룩해 있다가 렌이 지구 출신이라고 하자마자 등장하는 거 실화냐ㅋㅋ

└야, 꿈 깨 ㅋㅋㅋ 설마 쟤 하나 있다고 지구가 우승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 * *

옅은 달빛이 원형 경기장을 비췄다.

고명은 달빛 아래에서 자세를 낮춘 채 언제 어디서 들어올지 모르는 암습을 대비하고 있었다.

녀석의 얼굴에서 숨길 수 없는 자신감이 배어 나왔다.

이런 암습을 수도 없이 겪어봤기에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거겠지.

'암습으로 끝내긴 어려울 것 같고.'

아무래도 큰 그림을 그려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고명의 뒤편에서 천천히 녀석을 향해 다가갔다.

한 걸음.

두 걸음.

'지금!'

벼락처럼 쏘아지는 찌르기.

후욱!

하지만 내 공격은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고명이 마지막 순간에 자세를 낮추며 찌르기를 피한 것이다.

녀석이 잠시 뒤로 물러서더니 입을 열었다.

"거기 계셨구료."

"······."

"소인은 화산파의 고명이라고 하오. 최근 위명을 떨치고 있는 렌 소협께 한 수 배우겠소."

고명이 검을 역수로 쥐더니 가볍게 들어올리는 중국식 인사, 지검례를 취했다.

나는 무시한 채 곧장 녀석을 향해 창을 휘둘렀지만, 고명이 뒤로 빠지며 피하는 바람에 그저 허공만을 가를 뿐이었다.

휙! 휙! 휙!

"예의를 모르는 무뢰배셨구료. 이 몸이 예의를 알려주겠소."

말을 마친 고명이 검을 찌르며 들어왔다.

쾌, 변, 환의 묘리가 들어있는 화산파의 검술.

단순한 찌르기임에도 변화가 다양해 무척 화려하게 느껴졌다.

나는 창에 마력을 담아 녀석의 검을 막는 데 집중했다.

챙! 콰지직-

"암경!"

내 창과 녀석의 검이 부딪히자, 고명이 화들짝 놀라며 나와 거리를 벌렸다.

뇌전의 힘이 녀석의 내부로 침투한 것이다.

'이게 당연한 반응이지.'

솔직히 소호가 너무 말도 안 되는 거였다.

1 티어급 스킬이 모조리 통하지 않았으니.

하지만 고명 역시 네임드는 네임드.

빅터와 다르게 고명은 뇌전으로 인해 움찔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저 놀랍다는 반응이었을 뿐이었다.

'일단 뇌전으로 최대한 데미지를 쌓자.'

이번에는 내가 먼저 고명에게 달려들었다.

콰직- 콰지직-

휙! 휙! 챙!

이전보다 고명의 움직임이 한층 더 예민해졌다.

내 공격을 막아내지 않고 최대한 피하는 방향으로 변한 것이다.

그렇다고 아예 피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필요에 따라 막으며 빠르게 내 품속으로 파고들려고 했다.

'거리를 내주는 건 절대 안 돼.'

나는 그때마다 뒤로 물러서며 녀석이 찌르고 들어오는 공간을 잘라냈다.

계속해서 공간을 차단하자, 고명이 뒤로 물러서며 나와 거리를 뒀다.

"정말 대단한 실력이시오. 지금까지 만난 지구인들과는 딴 판이구려. 나도 본격적으로 가겠소!"

다시 현란하게 움직이는 고명의 검.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부터 본 게임이군.'

그의 검에서 마력이 뿜어져 나오며 수많은 매화가 흩날리기 시작한 것이다.

보기에는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매화 꽃잎 하나하나에 마력이 깃들어 있어 닿는 순간 예리한 검에 베인 것처럼 난자당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까.

[마력 상쇄율 : 50%]

콰지직! 콰직!

내 창이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뇌전이 뿜어져 나오며 흩날리던 꽃잎들을 소멸시켰다.

그것도, 너무나 쉽게.

그러자 고명이 눈을 크게 치켜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녀석이 처음으로 당황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어이가 없겠지.

내가 생각해도 마력 상쇄는 말도 안 되는 스킬이었다.

마력으로 이루어져 있기만 하다면 뭐든 절반의 힘으로 벨 수 있었으니까.

"제길!"

내가 순식간에 매화들을 없애버리고 고명을 향해 창을 휘두르자, 그가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고명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매화와 검술의 연계기를 나는 완벽하게 막아냈다.

그런 상황에서 내 창과 맞닿기만 해도 데미지가 쌓이니,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내가 쫓아다니고, 고명이 피하는 상황이 연출됐다.

실력은 나와 호각. 거기다 스텟도 나보다 훨씬 높은 고명이 내게 쩔쩔매기 시작한 것이다.

└와 뭐냐 고명이 일방적으로 밀리는데?

└쟤 수비가 진짜 좋다. 간격 뺏는 거랑 공간 자르는 거 보니까 창술의 정석을 보는 것 같음.

└ㅋㅋㅋㅋ 고명쉨. 전기 물리치료 받고 화들짝 놀라는 거 봐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뭐하냐ㅡㅡ 진짜 그 스텟 갖고 지면 뒤진다. 고명 개새끼야.

└이제 보니까 가지고 있는 스킬들이 다 보통이 아니네. 쟤는 지금까지 번 포인트로 다 스킬에 때려 박은 건가?

└그거지이이이! 렌 우승 가즈아아!

'나한테서 못 도망가.'

나는 뒷걸음질 치는 고명을 놓치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창을 휘두르며 그에게 달라붙었다.

애초에 그의 공격이 내 수비를 뚫어내지 못하면서 승부는 결정 난 셈이었다.

고명도 이대로는 나를 뿌리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내 창을 맞받아치며 나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챙!

콰지직!

"끅!"

그로 인해 뇌전으로 데미지를 많이 입히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고명과의 거리가 벌어졌다.

그러자 내 창의 거리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 고명이 등을 돌려 달아나려고 했다.

시간을 끌면서 다른 전략을 구상하려고 하는 것이다.

'엄청 빠르네.'

어떻게든 쫓아가기 위해 고명을 쫓아갔지만, 고명과의 민첩 스텟이 너무 많이 차이 났다.

순식간에 고명과의 거리가 30미터까지 벌어졌다.

'그래 봤자야.'

나는 곧바로 인벤토리를 열어 활로 스왑했다.

핑! 핑!

"헉!"

내가 곧장 화살을 쏴대기 시작하자 고명이 크게 당황해하며 화살을 피하기 위해 지그재그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다는 건.

'거리가 또 좁혀진다는 뜻이지.'

띠링!

[<벽력 >이 발동됩니다.]

꽈아아아아아아앙!

마침 벽력이 터지며 내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폭발했다.

바닥을 박차는 발길에 땅이 벼락 맞은 것처럼 뒤집혔다.

조금씩 멀어져 가던 고명의 뒤를 순식간에 따라잡은 나는 다시 창으로 스왑했다.

챙! 콰지지직!

또다시 시작된 뇌전 공격.

아마 고명은 도망가면서 내 공격을 막으랴, 뇌전의 통증을 버티랴 정신이 없을 것이다.

'생각할 시간을 주면 안 돼.'

굳이 변수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헉, 허억, 헉."

고명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녀석의 움직임이 조금씩 느려졌다.

데미지가 쌓이다 보니, 체력 소모가 무척 심한 것이다.

결국 고명은 도망치는 걸 포기한 채 몸을 빙글 돌리며 내게 검을 겨누었다.

"내가 이대로 질 것 같으냐!"

악을 지르며 달려드는 고명.

수많은 매화 꽃잎들이 피어나며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내 창의 간격을 뚫고 들어오는 것도, 도망치는 것도 실패한 상황.

최후의 발악을 시작한 것이다.

'잘 가라.'

나도 남아 있는 마나를 최대한 끌어 올렸다.

콰지지직! 콰지직!

온몸에서 사방으로 뇌전이 뻗쳐 나왔다.

그리고 고명과 최후의 일격을 나누려는 순간!

'침묵의 망토.'

나는 은신을 쓰면서 몸을 틀었다.

내 공격 판정에 곧장 은신이 풀려났지만 상관없었다.

고명에겐 내 몸이 깜빡거리는 형광등의 빛처럼 사라졌다가 다시 등장한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

그 사라진 찰나의 순간 동안 나는 고명의 검을 피했고, 크게 휘둘러진 내 창은.

서걱!

깔끔하게 고명의 가슴을 가르며 녀석을 두 동강 내 버렸다.

'이겼다.'

"크윽······ 컥, 커헉."

고명이 잘린 몸뚱아리로 잠시 버둥거리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6경기 결승전이 종료되었습니다.]

['렌' 우승!]

[6경기는 지구에서 승리를 가져갑니다.]

[축하합니다!]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1회차 때.

어떻게든 소원을 이루고 싶지만, 재능이 부족해 도망 다니던 삶부터.

회귀하고 나서 치렀던 여러 경기들.

끝끝내 이 자리에 서기까지.

결국 내 가능성을 증명해 보였다.

'초월 리그.'

절대 닿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영역에.

어떻게든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기실로 이동합니다.]

[30분 후 7경기가 시작됩니다. 준비해 주세요.]

* * *

[6경기. 지구 승!]

[현재 순위]

[1위 : 발리노르 / 1승]

[1위 : 알프헤임 / 1승]

[1위 : 졸본 / 1승]

[1위 : 웨스테로스 / 1승]

[1위 : 무림 / 1승]

[1위 : 지구 / 1승]

대기실로 돌아온 나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육체는 100퍼센트 회복되었지만, 정신적 피로도가 상당했다.

'그래도 1승을 챙겨서 다행이야.'

사실 일대일 대전에서 승리를 챙길 확률은 50프로 정도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피의 강화의 스텍을 쌓을 수도 없고, 오로지 실력 대 실력으로 맞붙는 경기.

상대보다 약하다면 변수를 만들어 경기를 뒤집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해냈지.'

더 이상 내가 약하지 않다는 것은 충분히 증명했다.

하위 리그의 최강자.

그 타이틀을 결국 내가 거머쥐었으니까.

'뭐, 그래봤자 상위 리그에 올라가면 더한 강자들이 득실댈 테지만.'

나는 머리도 식힐 겸 커뮤니티를 열었다.

커뮤니티엔 결승전이 끝난 지 5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수많은 게시글들이 올라와 있었다.

아세리안 때부터 느낀 거지만 신들과 우리의 시간 개념이란 게 많이 다른 모양이다.

―지구에서 나타난 초신성!

―압도적으로 강한 무기를 가진 소호와 고명. 결국 다수의 무기를 쥔 렌에게 무릎을 꿇다.

―우승 확률 0.1% 성계의 폭풍 질주!

└ㅋㅋㅋ 아무것도 못 하게 손발 잘라놓고 조금씩 조여들어가는 거 봄? 와 진짜 쟤는 싸움이 아니라 사냥을 하는듯 ㅋㅋㅋ

└와ㅏㅏㅏㅏㅏㅏㅏㅏㅏ 이걸 진짜 지구가 가져가넼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렌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데······?

└시발 ㅋㅋㅋ 고명쉨 결국 물리치료 받다가 뻗었누..ㅠ

└쟤 스킬들이 왜 이렇게 좋음? 스킬 설명 한번 보고 싶은데 쟤가 갖고 있는 스킬들 아시는 분?

└고명이 이길거라고, 결승전에 렌이 올라와서 무림 씹이득이라고 했던 놈들 다 어디갔냨ㅋㅋㅋㅋㅋㅋ

└와 기어코 이걸 지구가 가져가네;; 저 정도면 역대 네임드 탑 텐 안에 들어가겠는데?

└뭐래 ㅋㅋ 아무리 그래도 탑 텐은 씹 애바지 ㅋㅋㅋㅋ 적당히 빨아라

└ㅇㅇ 지구에서 저런 녀석이 나온 게 놀라울 뿐이지, 사실 그렇게 특별한 수준은 아님 ㅎ

└렌니뮤ㅠㅠㅠㅠㅠㅠ 믿었다구!! 나머지도 전승 가자! 역배 초초초초대박 가자아아!!

└하 시발;; 나도 버리는 셈 치고 지구에 천 포인트만 걸어볼껄.

게시글에는 이미 엄청난 숫자의 댓글이 달리고 있었다.

하긴, 무려 100만 명이 넘는 신들이 보고 있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걸지도.

네임드로서의 데뷔전은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그리고 일대일 최강이라는 타이틀도 획득했다.

'아직 한참 멀었어.'

하지만 이제 겨우 6경기가 끝났을 뿐.

나는 들끓어 오르려는 마음을 차분하게 진정시켰다.

내가 원했던 것은 저따위 쓸모없는 타이틀이 아니다.

'차원 특전.'

모든 스텟을 10퍼센트나 증가시켜주는 차원 특전.

그걸 반드시 우리가 가져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나머지 네 경기에서도 승리를 가져와야겠지.'

마침 다음 경기는 내가 가장 자신있어하는 경기.

7경기에서 꼭 승리를 챙긴다.

[지금부터 7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7경기 : 생존 미션(개인 PvP)]

[게임명 : 지옥에서 생존하기]

[승리 조건 : 끝까지 살아남는 최후의 1인]

[맵 : 지옥]

[관객 수 : 1,180,072 명]

[현재 생존자 수 : 5,837 명]

[참가 현황]

[알프헤임 : 722 명] [발리노르 : 627 명] [웨스테로스 : 614 명] [무림 : 543 명]

[티르너노그 : 497 명] [바빌론 : 477 명] [미드가르드 : 462 명] [탐리엘 : 444 명]

[졸본 : 422 명] [나카츠쿠니 : 419 명] [하이퍼보리아 : 416 명] [지구 : 194 명]

[7경기 참가 플레이어 분들께서는 입장해 주십시오.]

경기장 안에 들어오자 무시무시한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온 세상이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순간 어마어마한 추위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띠링!

[니플헤임에 입장하셨습니다.]

[<달의 메아리> 가 외부 온도를 차단합니다.]

알림창이 울림과 동시에 느껴졌던 추위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입에서 뿜어져 나오던 새하얀 김도 사라졌다.

지옥, 니플헤임.

이곳이 7경기의 아레나였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무스펠하임으로 들어가지.'

극한의 얼음 세계 니플헤임과 정반대의, 엄청난 열기로 가득한 불꽃의 세계.

극과 극을 오가는 온도를 버텨내는 것.

그게 이 경기의 관건이었다.

'전 경기는 스킬빨로 가져갔으니까, 이번 경기는 템빨로 가져가야지.'

물론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 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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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지옥(1)

[7경기. 지옥에서 생존하기]

[경기 시작!]

[03:00:00 이후 맵이 바뀝니다.]

[현재 생존자 수 : 5,837 명]

'상상했던 것보다 더 최악이네.'

지옥은 상위 리그에서도 코메인 이벤트 이상의 경기에서나 나오는 맵이다.

그렇기에 지옥을 직접 겪어보는 건 나도 처음이었다.

왜 과학 기술이 발전한 지구가 아직도 남극을 정복할 수 없었는지 알 것 같았다.

애초에 생명체가 살라고 만들어놓은 땅이 아닌 것이다.

니플헤임 또한 마찬가지였다.

'북방의 얼음 왕국은 명함도 내밀지 못하겠군.'

1회차 때 그나마 비슷한 맵을 겪어본 적이 있었지만, 전제 조건이 잘못됐다.

그곳은 그나마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맵.

'여긴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야.'

물론 니플헤임의 추위를 버텨내는 녀석들이 많을 것이다.

이곳까지 올라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존의 물리 법칙에서 벗어난 초인들.

거기에 마력까지 쓸 수 있으니까, 방한용품이 없더라도 잠깐은 버텨낼 확률이 높겠지.

'뭐, 니플헤임에서만 경기가 진행된다면, 이라는 전제가 붙긴 하지만.'

문제는 맵이 니플헤임과 무스펠하임을 번갈아 가며 등장한다는 것이다.

정확하진 않지만 니플헤임의 체감 온도는 영하 60도 정도.

아주 잠깐 느꼈을 뿐인데,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정말 살을 에는 듯한 추위였다.

그런데 추위에 겨우 적응했더니, 갑자기 맵이 어마어마한 열기로 가득한 무스펠하임으로 변한다?

볼 것도 없다.

극심한 온도 변화에 모두들 죽어 나갈 것이다.

'아마도 저 시간이 지나면······ 어?'

[02:49:57 이후 맵이 바뀝니다.]

[현재 생존자 수 : 5,397 명]

7경기가 시작된 지 10분.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벌써 500명 가까이 줄어들어 있었다.

'미친 사망률이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이번 기회에 니플헤임이 어떤 식으로 되어 있는지 제대로 파악해 둘 계획이었다.

상위 리그에 올라가면 언젠가 만나게 될 맵이니까.

슈우우우우우욱!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정도의 강풍.

로브가 당장이라도 터져 나갈 듯이 펄럭였다.

엄청난 눈보라에 눈을 뜨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황.

'쯧. 정찰하는 것도 만만치 않겠어.'

달의 메아리가 외부 온도를 차단해주고 있는데도 한 걸음 내딛기가 무척 힘들었다.

흩날리는 눈발 때문에 한 치 앞도 보이지가 않아서 다른 플레이어들도 곤욕을 치르고 있을 것이다.

'천둥의 숨결 해제.'

나는 곧장 천둥의 숨결부터 껐다.

모두들 극한의 추위에서 생존하려고 발버둥 치고 있을 게 뻔했다.

그런 상황에서 굳이 체력 소모가 큰 천둥의 숨결을 켜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사냥을 시작해 볼까.'

나는 일단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마력장으로 전방 100미터 정도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지옥의 마수들을 풀어놓진 않았을 거야.'

지옥은 엄연히 상위 리그에서도 최상위권 플레이어들이 뛰는 맵이다.

이런 혹한의 땅을 살아가는 마수들?

당연히 어마어마하게 강하겠지.

그런 마수들을 하위 리그의 경기에서 내보낼 가능성은 많지 않을 것이다.

상대조차 되지 않을 테니까.

'1회차에서도 급변하는 날씨에 적응하는 게 관건이랬어.'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다.

저 앞에 있는 존재가 플레이어라는 것.

나는 서둘러 적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푹- 푹- 푹-

무릎까지 쌓인 눈 때문에 발이 푹푹 빠져들었다.

'플레이어가 맞았군.'

상대는 두꺼운 가죽 털옷을 입은 채 주변에 있는 눈덩이들을 모아 추위를 피하기 위한 조그만한 굴 같은 것을 만들고 있었다.

북극의 에스키모들이 사는 이글루 같은 느낌이었다.

잠시 후면 맵이 무스펠하임으로 바뀐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무척 쓸데없는 짓이었다.

슈우우우우욱!

굳이 침묵의 망토를 쓸 필요는 없었다.

내가 바로 뒤까지 다가갔음에도 녀석은 나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칼바람에 흩날리는 눈송이들이 놈의 오감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푹!

덕분에 나는 손쉽게 녀석의 뒤로 다가가 목에 창을 꽂아 넣을 수 있었다.

띠링!

[플레이어 '그릴스' 를 처치했습니다.]

녀석의 피가 흩뿌려지며 새하얗던 공간이 빨갛게 물들어갔다.

너무나 손쉬운 사냥이었다.

'생각보다 맵이 별로 넓지 않은 모양인데.'

곳곳에서 또 다른 플레이어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이런 환경에서라면 녀석들을 죽이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 않을 터.

'사냥감들이 많네.'

나는 녀석들을 향해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00:37:22 이후 맵이 바뀝니다.]

[현재 생존자 수 : 4,021 명]

그 뒤로 나는 한참 동안 플레이어들을 사냥하며 돌아다녔다.

몇 명을 죽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100명을 넘게 죽인 뒤로는 숫자 세는 걸 포기했다.

어차피 많이 죽인다고 해서 보너스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보다 생존율이 높아.'

초반 15분에 500명이나 사망한 걸 생각해 보면, 그 이후의 2시간은 거의 줄어들지 않은 거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맵이 무스펠하임으로 바뀌는 순간 엄청난 속도로 줄어들 것이다.

* * *

팀 '불굴'의 주인, 루디악.

그는 성계 대항전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오, 이번 경기에서도 렌이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고 있군요.

―정말 대단하네요. 환경에 따라 네임드들도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픽픽 쓰러지는 일이 다반사지 않습니까? 반면에 렌은 기복이 별로 없어 보이는군요.

―보면 볼수록 놀라운 플레이어 입니다. 다른 네임드들에 비해 스텟이 좀 낮지만, 그 약점을 보완하는 수많은 능력들을 가지고 있네요. 네, 말씀드리는 순간 렌이 가르시아를 처치하며 127킬 째를 이어갑니다.

'좋았어!'

렌의 활약상에 루디악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현재 팀 '불굴'은 당장이라도 파산하기 직전이었다.

몇 주 전에 치러졌던 하이블러드나이트 91 경기에서 팀의 주축인 상위 리그 플레이어들이 모조리 죽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미쳤지.'

도대체 왜 그랬을까.

팀 내에서 고위 리그 승급샷을 받은 플레이어가 나온 상황.

원래대로라면 아직 부족하기에, 조금 더 성장시켜서 고위 리그에 도전했어야 했다.

하지만 욕심이 문제였다.

'고위 리그 플레이어를 배출한 팀.'

그 타이틀을 너무나 갖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포인트 대출까지 받아 가며 그들에게 엄청난 고가의 장비들을 쥐어 아레나로 내몰았다.

결과는 대실패.

팀의 주축 플레이어들을 잃음과 동시에 엄청난 포인트의 빚까지 지게 되면서 파산 직전까지 온 것이다.

'제발······! 내가 뭐든 할 테니, 제발 우승만 시켜줘!'

그런 루디악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많지 않았다.

성계 대항전에서 얼마 안 되는 포인트를 지구에 배팅해 대박을 노리거나, 파산하거나.

어차피 우승하지 못하더라도 손해 볼 것은 없었다.

어차피 최악의 상황이란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헛된 꿈이었나.'

하지만 지구는 5경기까지 내리 죽을 쑤며 너무나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기대를 접고 앞으로 벌어질 암울한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검과 정령 마법의 대결. 그러나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별과 별의 싸움. 그 안에서 새로운 별이 탄생하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더니. 어어?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아르웬을 꺾으며 화려하게 비상하던 플레이어, 렌.

온갖 게시글에서 그가 어디 출신인지 궁금해했으나, 5경기까지 모습이 보이지 않기에 상위 리그로 올라갔나 했는데.

[지구]

그런 네임드가 6경기에서 처음 모습을 보였는데, 그의 머리 위에 지구라고 쓰여 있었으니까.

아무도 기대하지 않던 지구의 우승.

무려 1,000배라는 배당률.

그 0.1%의 확률을 뚫고, 자신에게 대박을 안겨줄 플레이어.

루디악이 렌을 필사적으로 응원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렌이 티르너노그의 네임드 중 한 명인 빌라드를 처치합니다!

―파죽지세의 렌! 누가 렌보고 운이 좋아 이 자리까지 오를 수 있다고 했나요! 눈알을 뽑아 미미르의 샘에서 씻겨주고 싶네요!

마침 대마법사라고 불리던 티르너노그의 빌라드를 렌이 죽이고 있었다.

온몸에서 빨간색 뇌전이 흘러나오고, 플레이어들을 학살할 때마다 붉은 안개가 그의 몸으로 흡수된다.

그 시각적 효과는 렌을 더욱 특별해 보이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강함.

―사실 렌은 이미 한차례 자신의 실력을 증명했습니다. 바로 일대일 최강자 전에서 말이죠. 그럼에도 그의 실력을 의심하는 분들이 많았는데, 이번 경기에서 증명이 되었네요.

―물론 GOAT 언급까지는 조금 조심스럽습니다. 제 생각엔 아마 10경기에서 치러지는 역대 네임드들과의 전투에서도 렌의 분신이 포함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콜로세움이 시작된 지 이제 4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동안 하위 리그를 거쳐 갔던 수많은 네임드들이 존재하기 때문이죠. 뭐, 게임 메이커는 아직 몇 명의 네임드가 출전한다고 확정짓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그가 현재 하위 리그의 최강자라는 건 부정하기 어려워 보이는군요. 렌은 이제 누가 뭐라고 해도 하위 리그의 최강자가 확실합니······ 어어, 말씀드리는 순간 하이엘프, 가엔이 렌을 향해 움직이는군요!

―저 최상급 정령은 원래 아르웬이 데리고 다니던 녀석이군요. 아르웬이 죽으면서 가엔과 계약한 모양입니다.

―가엔 뿐만 아니라 일곱 명의 엘프가 추가로 렌이 있는 곳으로 향합니다! 정령의 힘 덕분인지 움직임이 무척 가볍네요! 렌의 위기!

순간 루디악의 몸이 움찔했다.

해설자들의 말대로 가엔과 일곱 명의 엘프가 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안 돼!'

저들이 친목 도모를 위해 렌에게 다가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필시 아르웬을 죽인 것에 대한 앙갚음을 하기 위한 것이 분명했다.

엘프는 원래 동족 간의 유대감이 끈끈했으니까.

거기다 아르웬은 엘프들의 수호자였던 인물.

분명 렌에게 피의 복수를 할 것이다.

'저 최상급 정령이 꾸민 일이야.'

저들이 향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렌은 주위에 있는 다른 플레이어들을 사냥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루디악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여기서 1승을 챙겨야 우승할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이후의 경기는 지구 출신인 렌에게 쉽지 않을 것이다.

8경기와 9경기 모두 개인 PvP를 표방하고 있지만, 결국 성계 단위로 단합할 거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

'제발······!'

그렇기에 루디악은 부디 렌이 이 위기를 무사히 헤쳐 나가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 * *

"끅!"

나는 단말마를 내뱉으며 쓰러진 녀석의 몸통을 밟고 창을 뽑아냈다.

거의 세 시간 가까이 있었더니 어느 정도 니플헤임에 적응된 것 같았다.

더 이상 몰아치는 눈보라가 거슬리지 않는달까.

진행 과정도 순조롭고, 사냥도 수월하게 잘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 찜찜했다.

'뭐지?'

어디선가 익숙한 느낌이 났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자면 아르웬에게서 도망 다닐 때 느꼈던 미묘한 감각이랄까.

마치 누군가 날 쳐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

슈우우우우우!

물론 그 시선은 날아오는 삭풍에 의해 금방 지워졌지만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사냥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주변을 경계했다.

'내 예상이 맞았어.'

때마침 내 마력장에 걸려드는 8명의 플레이어.

녀석들은 정확히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것도 사방에서 둘러싼 채.

'복수인가.'

귀 모양이 인간보다 더 긴 것으로 판단해 보건데, 엘프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날 향해 달려오는 이유는 단 하나뿐.

바로 아르웬의 복수를 하는 것.

'다른 상황에서라면 조금 곤란할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피식 웃었다.

오히려 저들이 지금 이 순간, 내게 다가오는 것에 감사했다.

더 빨랐다면 조금 곤란해질 수도 있었을 테니까.

쐐애애애액!

공기를 가르며 무언가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고드름 모양의 뾰족한 얼음 마법들이었다.

콰직! 콰지지직!

나는 피하지 않은 채 뇌전을 머금은 창을 휘둘렀다.

마력 상쇄를 얻은 이후, 굳이 마법 공격들을 피하지 않고 있었다.

콰지지지직!

사방으로 튀어 나가는 뇌전에 닿은 마법들이 공기중에서 녹아 분해되며, 작은 물방울이 되어 흩뿌려졌다.

그것들은 얼음에서 녹자마자 곧바로 작은 얼음 알갱이로 굳어지며 내 몸을 두드렸다.

'아무래도 칼을 갈았나 본데.'

눈보라를 헤치며 나타난 엘프들의 눈엔 독기로 가득 차 있었다.

순식간에 여덟 명의 엘프들에게 둘러싸인 상황.

어느 방향으로 가더라도 빠져나가기 쉽지 않을 것이지만, 나는 여유가 가득했다.

왜냐하면.

[00:00:04 이후 맵이 바뀝니다.]

잠시 후에 이 세상엔 지옥의 겁화가 불어닥칠 테니까.

추위를 막아내기 위해 입은 털옷들은 잠시 후 그들을 옥죄는 족쇄가 될 것이다.

'거기서도 너희가 멀쩡한지 한번 보자고.'

나는 녀석들을 향해 피식 웃어 보였다.

띠링!

[무스펠하임에 입장하셨습니다.]

순간 내 몸이 훅! 하는 느낌과 함께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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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지옥(2)

온 세상이 뜨겁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네 개의 산이 동서남북으로 하나씩 있었는데, 네 군데에서 모두 용암이 흘러나오고, 퀴퀴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순간적으로 엄청난 열기가 확! 불어닥쳤다.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여기가 불꽃의 세계.'

하지만 그 괴로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띠링!

[<달의 메아리> 가 외부 온도를 차단합니다.]

달의 메아리가 곧바로 뜨거운 열기를 차단시켜 주었다.

'이제야 좀 숨을 쉴 수 있겠네.'

무스펠하임은 단순히 뜨거운 걸 넘어, 그냥 서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고통을 선사했다.

"헉!"

"으으윽!"

그에 대한 방증으로 날 습격하려던 8명의 엘프들이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중 몇 명은 허우적거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극심한 온도 변화에 쇼크가 온 것이다.

그들의 뒤에 있던 물의 정령들도 모두 역소환 된 상태.

나는 곧장 창을 휘둘러 한 명씩 죽여대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서걱-

띠링!

[플레이어 '우디스' 를 처치했습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30/30)]

[<피의 강화> 로 올릴 수 있는 스텟을 끝까지 채웠습니다.]

[<피의 강화>로 상승한 스텟이 30분간 유지됩니다.]

드디어 피의 강화 특전이 켜졌다.

니플헤임에서는 눈보라로 인해 적들과 마주치기가 어려워서 3분 안에 한 명씩 죽이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래서 스텍이 계속 20대 초에서 초기화됐었는데, 나를 죽이기 위해 모여든 엘프들 덕분에 단숨에 스텍 30을 찍은 것이다.

그렇게 일곱 명을 죽이고, 나머지 한 명을 죽이려 할 때였다.

"샐라임!"

적들 중 유일하게 털옷을 입지 않고 있던 엘프가 온몸에서 불꽃이 흘러나오는 불의 정령을 소환했다.

사람의 형태를 한 정령이 등장하자마자 엘프의 몸을 불꽃으로 감쌌다.

'상급 불의 정령?'

눈앞의 엘프는 아무래도 네임드인 모양이다.

상급 정령은 아무나 소환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마법사로 따지자면, 마도사 급은 되어야 가능할지도.

물론 아르웬은 최상급 정령을 소환하긴 했지만, 하위 리그에서 최상급 정령을 소환하는 그녀가 비정상적인 거였다.

그녀가 날 쫓아다니며 마력과 체력을 한계치까지 소진하지 않았다면 그녀를 쓰러트리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악마의 눈.'

띠링!

[이름 : 가엔 로제스트]

[성향 : 질서 선]

[근력 : 51(+?)] [민첩 : 67(+?)] [체력 : 62(+?)]

[정신 : 76(+?)] [지력 : 81(+?)] [마력 : 106(+?)] [정령 : 92(+?)]

[각성 능력 : <고급정령술 > <고급마나운용 > <상급마법술 > <상급박투술 > <최상급치료술 >]

[종족 특전 : 하이엘프의 피]

'이 자식도 하이엘프구나.'

하이엘프라는 존재가 몇 명 안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근데 하위 리그에 두 명이나 존재한다고?

아무래도 최근에 엘프들이 대량으로 죽는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쩐지 엘프가 많더라니.'

나는 창을 고쳐 잡았다.

하이엘프라고 해도 상관없다.

[마력 상쇄율 : 50%]

아르웬과의 전투 때의 날 생각한다면 큰코다칠 테니까.

나는 곧장 가엔을 향해 짓쳐들어갔다.

화르륵! 화륵!

그러자 날아오는 화염 구체들.

하지만 난 굳이 마법들을 피하지 않았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직!

창에서 찌릿찌릿 흘러나오는 뇌전들이 화염 구체를 순식간에 없애버렸으니까.

"······!"

창을 한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단숨에 마법들을 부숴버리자 눈을 치켜뜨는 가엔.

그녀가 바닥을 박차며 뒤로 물러서고, 그녀가 있던 자리엔 화염으로 이루어진 벽이 생성되어 내 앞을 가로막았다.

고작 이런 걸로는.

'날 막을 수 없을걸.'

창으로 벽을 내리치자 화염이 갈라지며 길이 생겨났다.

그 너머에서 다른 마법을 준비하던 가엔이 그 모습을 보더니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어, 어떻게······!"

온몸에서 뇌전이 흘러나와 주변을 잠식해 들어갔다.

[마력 : 114(+5)(+26)]

피의 강화가 풀 스텍을 찍으면서 내 마력은 110을 넘어선 상황.

마력 상쇄는 50%가 한계지만, 내 마력이 높아지면서 상쇄율의 절대 폭이 커졌다.

한마디로 마법사나 정령사들에겐 재앙이나 다름없는 존재라는 것.

'앞으로 또 언제 어디서 날 습격하려 들지 몰라.'

이번 기회에 그 싹을 아예 뿌리째 뽑아 버려야겠다.

화아아아아악!

화륵! 화르륵!

"이익!"

가엔이 나를 향해 마법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날 이길 수 없다는 걸 알려주지.'

나는 가엔을 향해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콰지지지지지직!

날아오는 마법들을 모조리 찢어버리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가엔이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아······ 악마······."

이 정도의 격 차이는 처음 느껴봤겠지.

가엔도 그걸 느꼈는지 등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를 여유롭게 쫓으며 인벤토리를 열어 활을 꺼내 들었다.

이제부터 공포를 심어줄 시간이었다.

* * *

└와 존나 멋있닼ㅋㅋㅋㅋㅋ 하위 리그에서 렌이 인기 많은 이유를 알겠음. 몸에서 빨간 뇌전이 튀어나오고 애들 죽일 때마다 붉은 안개가 흡수되고 ㅋㅋㅋ 개쩌넼ㅋㅋㅋ

└ㅋㅋㅋㅋ가엔 그냥 압도당하는뎈ㅋㅋㅋ 엘프년 화들짝 놀라는 것 보소 ㅋㅋㅋ 아··· 악마!

└쟤가 진짜 아르웬한테 쩔쩔맸다고? 가엔을 그냥 가지고 노는 수준인데?

└뭐얔ㅋㅋㅋㅋ 화살 쏘다가 갑자기 사슬낫 꺼내길래 읭? 했는데 겁나 잘쓰넼ㅋㅋㅋㅋ 쟤는 도대체 저런 무기들을 어떻게 다룰 줄 아는거임? 저거 숙련도 올리기 빡셀텐데??

└매 경기 볼때마다 놀라게 만드네ㅎㅎ;; 이 정도면 하위 리그 승급전은 그냥 프리패스겠는데?

└가엔 존나 약하네ㅡㅡ 저런 년을 믿고 알프헤임에 배팅한 내가 병신이였네 시발.

└솔직히 가엔이 약한 게 아니라 렌이 넘사벽으로 센듯 ㅋㅋㅋㅋ

* * *

나는 거리에 따라 활을 쏘거나 암기를 던지면서 가엔을 몰아붙였다.

그녀가 어떻게든 날 떼어놓기 위해 용암이 흐르는 곳까지 갔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불의 정령한테 받은 가호는 뜨거운 열기로 인한 데미지를 감소시켜주는 수준.

반면에 난 외부 온도를 아예 차단해 버리는 상태이기에 체력적으로나, 속도 측면에서나 게임이 되지 않는달까.

[02:37:18 이후 맵이 바뀝니다.]

[현재 생존자 수 : 902 명]

무스펠하임으로 넘어온 지 어느덧 23분째.

그사이 생존자의 숫자는 3천 명 넘게 줄어들어 있었다.

피의 강화 특전도 8분밖에 남지 않은 상황.

'슬슬 끝내야겠군.'

나는 활을 집어넣고, 인벤토리에서 사슬낫을 꺼냈다.

휙- 휙- 휙- 휙-

사슬낫을 잡고 빙빙 돌리던 나는 타이밍을 보다가 가엔에게 날렸다.

목표는 다리.

베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

다리를 휘감아 넘어뜨린다면 그걸로 충분.

푹!

'오, 제대로 맞았네.'

사슬낫이 정확하게 가엔의 정강이를 파고들었다.

"악!"

그와 동시에 바닥을 뒹구는 가엔.

통증이 상당한지 눈물을 흘리며 몸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화르르르륵-

내가 그녀를 향해 달려들자 상급 불의 정령이 막아섰지만.

'너도 마력체잖아?'

마력으로 이루어진 이상 마력 상쇄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쐐액!

창을 한 번 내리치는 것만으로도 상급 불의 정령은 제 모습을 유지하지 못한 채 역소환 됐다.

"으아······."

남은 건 이제 가엔 뿐.

'더럽게 어려 보이네.'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외모.

일관된 무표정이었던 아르웬과 다르게, 가엔은 표정이 무척 풍부해 보였다.

얼굴에서 감정이 다 드러난달까.

서걱-

"꺄아아아악!"

나는 일단 도망가지 못하도록 가엔의 두 다리를 잘라냈다.

그리고는 그녀의 청록색 머리칼을 우악스럽게 휘어잡고 들어 올렸다.

가엔이 내 손을 뿌리치기 위해 양손으로 내 팔을 벅벅 긁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으으······."

눈이 마주치자 눈물을 흘리며 벌벌 떠는 가엔.

나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똑똑히 기억해 둬라."

"······?"

"다음에 또 만나면 두 다리로는 끝나지 않을 거니까."

"······!"

그러자 가엔이 몸을 움찔 떨며 내 눈을 피했다.

이걸로 됐다.

들어 올렸던 머리칼을 놓아주자 가엔이 바닥에 철퍼덕 쓰러졌다.

그러더니 내게서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멀어지기 위해 바닥에서 바둥거렸다.

잠시 가엔을 응시하던 나는.

서걱-

엉금엉금 양팔로 바닥을 기어 내게 도망치려는 가엔의 목을 깔끔하게 갈랐다.

잘려 나간 목 부분에서 엄청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후."

뭐랄까.

온몸에 가엔의 피를 한가득 뒤집어썼음에도.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7경기 '지옥에서 생존하기' 가 종료되었습니다.]

[최후의 생존자 : '렌']

[7경기는 지구에서 승리를 가져갑니다.]

[축하합니다!]

무스펠하임에서 플레이어들을 학살하고 다닌 나는 결국 승리를 챙길 수 있었다.

벌써 2승째.

나는 그 여세를 몰아 8경기에 출전했다.

스피드 레이스.

스타팅 포인트에서 결승 지점까지 최대한 빨리 통과하는 경기였다.

그리고.

[8경기. 웨스테로스 승!]

[현재 순위]

[1위 : 지구 / 2승]

[1위 : 웨스테로스 / 2승]

[2위 : 발리노르 / 1승]

[2위 : 알프헤임 / 1승]

[2위 : 졸본 / 1승]

[2위 : 무림 / 1승]

8경기는 웨스테로스가 가져갔다.

'아, 짜증 나네.'

지구를 제외한 11개의 성계에서 모두 나를 견제했기 때문이다.

마치 담합이라도 한 듯 모두들 날 악착같이 막아서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현상이 벌어지자, 지구인들도 어떻게든 날 도와주기 위해 분발했지만, 애초에 참가한 플레이어의 숫자가 너무 적었다.

그런 데다가 다른 성계의 플레이어들이 날 죽이는 것보다, 내 발을 묶어두는 것에 중점을 두고 달려들다 보니, 막아서는 플레이어들을 뚫고 나갈 수가 없었다.

피의 강화 특전까지 활성화 시키며 고군분투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는 결승 지점의 반도 가지 못한 채 웨스테로스에게 승리를 빼앗겨야 했다.

'견제가 있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그렇게 격렬할 줄이야.

나는 심호흡을 하며 답답한 마음을 최대한 가라앉혔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묻어두고, 다음 경기를 준비해야 한다.

잠시 후면 9경기가 시작될 테니까.

└이번 경기에서 렌의 약점이 드러났넼ㅋㅋㅋㅋㅋ

└약점은 무슨 약점 ㅡㅡ 물량으로 막아선 거 못 뚫고 간게 약점임? 다들 렌을 견제하기 바쁘더만. 비겁하지도 않나?

└무슨소리임. 원래 강자를 견제하는 건 당연한 거임. 다만 그 견제를 조금이나마 완화시켜줄 애들이 지구에 없다는 게 렌의 약점이란 거지.

└9경기도 8경기처럼 다들 렌을 견제하기 바쁠텐데··· 지구에 걸었던 놈 불쌍해서 어쩌누 ㅠㅠ 7경기를 지구가 가져갈 때만 해도 행복 회로 겁나 돌리던뎈ㅋㅋㅋ

└내 생각엔 9경기도 별 활약 못하고 찌그러질듯. 다들 렌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알았으니까 일단 렌부터 조지고 시작할 거 같은데.

커뮤니티에서 댓글을 본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경기는 다를 것이다.

똑같은 수에 두 번이나 당하지 않을 거니까.

[지금부터 9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9경기 : 사냥 미션(개인 PvM)]

[게임명 : 사냥 실력은 내가 최고]

[승리 조건 : 가장 많은 숫자의 몬스터를 처치한 1인]

[맵 : 블랙 오크 숲]

[관객 수 : 1,169,189 명]

[현재 생존자 수 : 5,014 명]

[참가 현황]

[졸본 : 592 명] [웨스테로스 : 537 명] [알프헤임 : 522 명] [발리노르 : 511 명]

[무림 : 493 명] [바빌론 : 402 명] [미드가르드 : 399 명] [티르너노그 : 391 명]

[탐리엘 : 378 명] [하이퍼보리아 : 329 명] [나카츠쿠니 : 302 명] [지구 : 173 명]

[9경기 참가 플레이어 분들께서는 입장해 주십시오.]

9경기는 어떻게든 가져가야 한다.

만약 이번 경기도 다른 성계에게 뺏기면 지구가 우승하는 데 필요한 승 수를 계산하기 골치 아파질 것이다.

이번 경기에서도 온갖 플레이어들이 날 막아설 거라는 것은 자명한 일.

'날 붙잡고 늘어지지도 못하게 해야겠어.'

나는 포탈을 타고 경기장으로 들어갔다.

띠링!

[블랙 오크 숲에 입장하셨습니다.]

눈앞에 나타난 거대한 숲.

참가자가 5천 명이 넘다 보니, 맵의 크기도 무시무시할 정도로 큰 것 같았다.

사냥감은 하위 종족인 블랙 오크.

플레이어 한 명당 열 마리씩만 잡아도 무려 5만 마리다.

'그럼 이 블랙 오크 숲에는 적어도 몇십만 마리가 있겠군.'

몇십만 마리나 살고 있다는 건 이 숲이 서울 정도의 크기는 된다는 뜻.

나무 곳곳엔 블랙 오크의 영역임을 나타내는 도끼 자국들이 보였다.

이곳을 경계로, 안쪽으로 들어가면 블랙 오크들이 사는 부락이 나온다.

[9경기. 사냥 실력은 내가 최고]

[경기 시작!]

[킬 수 현황 ― 없음]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12:00:00]

나는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블랙 오크의 영역 내부를 향해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이번 경기에서 내가 쓸 전략은 무척 심플했다.

아무도 따라오지 못하도록 아예 블랙 오크의 서식지 중심부까지 향하는 것.

'다른 사람들은 따라올 엄두도 못 내겠지.'

블랙 오크는 군집 생활을 한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많은 숫자가 모여서 살아간다.

그렇기에 블랙 오크를 토벌할 땐 외곽에서부터 조금씩 처리해 들어가는 방법을 사용한다.

만약 나처럼 곧장 중심부로 침투한다면?

'수십만 마리의 블랙 오크한테 둘러싸여서 싸우다가 체력이 떨어져 죽겠지.'

하지만 나에겐 해당되지 않는 일이다.

가면, 블라디미르의 유희가 체력을 끊임없이 회복시켜 줄 테니까.

'여기서 압도적인 킬 수로 승리를 가져가겠어.'

영역으로 들어서자마자 내게 꽂히는 수많은 플레이어의 시선들.

난 그 모든 것들을 무시한 채 최대한 중심부로 들어가는 것에 집중했다.

내부로 들어갈수록 내게 꽂히는 시선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때부턴 모두 블랙 오크들의 것이었다.

콰지지지지지지직!

"취이익! 인간!"

"취익! 침입자다!"

서걱!

나는 녀석들을 죽이기보단, 뚫고 지나가는 것에 집중했다.

그렇게 20분쯤 달렸을 때였다.

"취이이이익! 전사의 땅에 침입자가 발생했다! 취익!"

"취이익!"

"취이이이이익!"

"취이이익! 침입자를 죽여라!"

더 이상 블랙 오크들을 무시한 채 중심부를 향할 수 없게 되었다.

수백 마리의 블랙 오크들이 날 가로막았으니까.

숲의 외곽에서 대충 10킬로미터 정도 안쪽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천둥의 숨결 적용.'

사냥을.

슬슬 시작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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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Greatest Of All Time(1)

블랙 오크는 일반 오크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다.

검은색 피부와 어마어마한 근육질의 몸.

입 밖으로 튀어나온 뾰족한 송곳니.

무게가 제법 나가 보이는 거대한 도끼와 글레이브까지.

하위 넘버링 플레이어들이 상대하기엔 무척 강한 종족이었다.

'내겐 아니지만.'

천둥의 숨결을 켠 나는 달려가는 속도 그대로 블랙 오크들과 충돌했다.

콰지지지지직!

사냥의 시작이었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나는 단숨에 블랙 오크들을 찢어버리며 길을 뚫기 시작했다.

관건은 녀석들에게 둘러싸이지 않는 것.

뒤를 내주지 않기 위해선 계속해서 창을 휘두르며 돌파해 나가야 한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

킬 콜이 쉴 새 없이 울렸다.

생각보다 길을 뚫는 게 어렵지 않았다.

블랙 오크들은 힘이 무척 세지만, 공격 패턴은 무척 단조로운 편이었다.

'가죽이 좀 질기긴 하네.'

뇌신을 배우고, 창에 뇌전을 담을 수 있게 되면서 무언가를 베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뇌전의 엄청난 열기가, 질긴 가죽을 연하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블랙 오크들을 벨 때는 뚝, 뚝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 느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피의 강화 스텍이 쌓이며 근력이 증가하자, 단숨에 베어버리는 게 가능해진 것이다.

"취이익! 전사들이여! 힘을 내라! 취익!"

"침입자를, 취익! 죽여라!"

창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블랙 오크가 서너 마리씩 쓰러졌다.

그런데도 숫자가 줄어들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중심부까지 뚫고 가야겠어.'

내 사냥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다.

띠링!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30/30)]

[<피의 강화> 로 올릴 수 있는 스텟을 끝까지 채웠습니다.]

[<피의 강화>로 상승한 스텟이 30분간 유지됩니다.]

블랙 오크들과 전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피의 강화 특전이 켜졌다.

내 창이 더욱 예리하고, 강렬해졌다.

띠링!

[<벽력 >이 발동됩니다.]

창에 깃든 뇌전이 너무 밝아서 순간적으로 온 세상이 어둡게 보였다.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에너지.

그 상태로 창을 힘껏 내려치자 충격파를 발산하며 뇌전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앙!

엄청난 굉음이 터지며 단숨에 열 마리 가까이 되는 블랙 오크가 몸이 터져 죽었다.

현재 내 체력은 100%.

소모되는 속도보다 차오르는 속도가 더 빨라서 체력 걱정은 아예 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 몇 킬째지.'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11:33:48]

[킬 수 현황]

[1위. '고명' 193킬]

[2위. '고예천' 190킬]

[3위. '가엔' 189킬]

[4위. '루딘' 188킬]

[5위. '미구르드' 186킬]

[6위. '엔키두' ······.]

[317위. '렌' 42킬]

'벌써 많이들 잡았군.'

나보다 몇 배는 많은 킬 수.

심지어 1위인 고명은 나보다 151마리나 더 사냥했다.

성계 단위로 몰아주기를 받고 있는 것이다.

몰아주기?

그것도 경기를 이기기 위한 전략 중 하나다.

'이 정도는 예상했지.'

벌써 9경기째.

여기서 1승을 얻느냐 못 얻느냐가 우승을 좌지우지하는 상황.

모든 성계들이 이를 악물고 달려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고.'

나는 창을 더욱 힘껏 휘둘렀다.

* * *

9경기에 출전한 고명은 가장 먼저 블랙 오크 영역의 외곽을 돌며 무림인들을 찾아다녔다.

이전에 이미 한 차례 블랙 오크를 상대해 본 적이 있는 고명으로서는 어떻게 해야 빠르게 사냥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군집 생활을 하는 블랙 오크를 사냥하려면 팀을 짜서 움직이는 게 효율이 좋아.'

493명이나 출전한 덕분에 무림인들을 찾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고 소협."

"오,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오랜만이군."

무림에서 활동할 때 인연이 있었던, 정파 후기지수들을 마주친 것이다.

"당 소저, 팽 소협. 오랜만에 뵙습니다. 소창. 오랜만이군. 어딜 가고 있던 겐가?"

"이 경기가 가장 많이 사냥한 사람의 성계에서 승리를 가져가지 않는가. 그래서 무림인들을 모아 한 명에게 몰아줄 생각이었지. 그래서 말인데, 우리가 자네에게 킬 수를 몰아줄까 하는데."

평소 친분이 있던 악소창의 말에 고명은 반색했다.

"오, 자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군. 이번 경기는 어떻게든 우리가 가져가야 하네. 내 최선을 다해 보지."

세 사람 모두 무림에서 고수로 유명했기에, 고명은 곧장 악소창의 제의를 수락했다.

그렇게 시작된 블랙 오크 사냥.

"취익!"

서걱-

"여기 칼만 꽂으면 죽을 녀석이 세 마리 있어요!"

"감사하오, 당 소저. 덕분에 빠르게 킬 수를 올릴 수 있었소."

고명이 킬 수 현황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현재 자신의 순위는 1위.

2위와 별로 차이가 안 나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합류하는 무림인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으니까.

새로 합류한 이들도 모두 자신에게 킬 수를 몰아주기로 한 상황.

이번 경기는 큰 이변이 없다면 무림이 승리를 가져갈 것이다.

'그 녀석은 이번 경기에서도 견제를 당하고 있나 보군.'

고명이 가장 경계했던 렌의 순위는 317위.

30분 동안 고작 42킬 밖에 하지 못했다.

그래서 더욱 자신감이 생겼다.

"조금 더 속도를 내야겠군요. 졸본 네임드 녀석의 사냥 숫자가 빠르게 늘고 있습니다."

고명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좀 익숙해졌으니 안쪽으로 들어가도 될 것 같소."

네 사람은 그때부터 숲의 중심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으로 갈수록 블랙 오크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지만, 큰 어려움은 없었다.

매화가 흩날리고, 비수가 날아들고, 대도와 창이 한 번 춤을 출 때마다 그 많던 블랙 오크들이 금세 바닥에 쓰러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사냥을 하고 있을 때였다.

"고 소협, 순위창 좀 보세요."

당소유의 말에 고명이 순위창을 열었다.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10:27:52]

[킬 수 현황]

[1위. '고명' 656킬]

[2위. '고예천' 638킬]

[3위. '루딘' 624킬]

[4위. '엔키두' 615킬]

[5위. '가엔' 611킬]

[6위. '렌' 601킬]

[7위. '미구르드' ······.]

'언제······!'

순위표의 한참 밑에 있던 렌이 어느새 6위까지 치고 올라와 있었다.

자신이 463킬을 하는 동안, 렌은 무려 559킬이나 추가한 것이다.

'렌.'

일대일 결승전에서 자신에게 벽을 느끼게 한 자.

분명 자신이 더 강하고, 더 빠른데도 어떻게 손을 써 볼 방법이 없었다.

그를 생각하자 검을 쥔 고명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무래도 속도를 더 올려야겠습니다. 이대로는 이번 경기도 지구에게 뺏기고 말 겁니다."

고명 일행은 그때부터 더욱 치열하게 사냥을 했다.

처음에 열 마리 정도로 시작했다면, 이젠 스무 마리, 아니 서른 마리씩 몰아서 잡은 것이다.

덕분에 고명의 킬 수도 빠르게 증가했지만, 문제가 있었다.

"고 소협! 너무 빨라요!"

"이봐, 고명! 침착하게. 벌써 세 시간째 쉬지도 못하고 사냥하지 않았나. 여기서 무리하게 사냥을 지속하다간 모두가 위험해지고 말 걸세."

한 번에 상대하는 블랙 오크의 숫자가 늘어난 만큼 체력이 빠르게 소모된 것이다.

결국 악소창과 당소유의 만류로 휴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08:41:17]

[킬 수 현황]

[1위. '고명' 1,628킬]

[2위. '고예천' 1,467킬]

[3위. '렌' 1,461킬]

[4위. '가엔' 1,450킬]

[5위. '엔키두' 615킬]

[6위. '미구르드' ······.]

당소유, 팽무진, 악소창 등 다른 무림인들이 분발해준 덕분에 킬 수 1위를 굳힌 고명.

그럼에도 렌과의 킬 수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빠르게 올라가는 렌의 킬 수가 고명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자네, 계속 신경 쓰고 있군. 어차피 우리가 쉬는 것처럼 녀석에게도 휴식 시간이 필요할 걸세. 그러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말게."

고명의 눈이 순위 창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자 악소창이 그를 말렸다.

"자네 말이 맞아. 내가 너무 과민 반응이었군."

고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순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킬 수가 빠르게 증가하지 않는 걸 보니, 자신들처럼 휴식을 취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녀석도 슬슬 체력이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고명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다른 랭커들의 사냥 속도가 느려진 것에 반해, 렌은 여전히 빠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결국 1시간쯤 지나자 렌이 고명의 킬 수를 역전하며 1위를 탈환했다.

"저 녀석은 쉬지도 않는가? 어찌 저리 빨리······."

악소창의 중얼거림에 고명은 마음을 굳혔다.

8경기처럼 이번 경기도 다른 성계에서 녀석을 견제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크게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우리가 녀석을 처리해야 할 것 같았다.

"날뛰는 교룡을 멈춰 세우려면 머리를 잘라야 하는 법. 녀석을 죽이러 가세."

"음······ 이 팽 모는 소협의 의견에 찬성이오."

"계속 이렇게 끌려다닐 순 없겠죠. 저도 찬성이에요."

다행히 팽무진과 당소유는 자신의 의견을 동조해 주었다.

그러자 악소창도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면 녀석을 죽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겠지. 그런데 이 넓은 숲에서 어떻게 녀석을 찾는단 말인가?"

악소창의 질문에 대답한 건 당소유였다.

"주위의 견제를 받지 않으면서 빠르게 사냥할 수 있는 곳은 한 군데밖에 없어요. 바로 숲의 중심부죠."

"하지만 소저, 중심부엔 저 괴이한 생명체들이 우글거릴 것이오. 혼자서 그곳으로 가는 건 자살행위란 말이오. 설마 녀석이 중심부로 갔겠소?"

"우리처럼 팀을 짰다면요? 지구인들이 아무리 약하다 해도, 그들도 뭉치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어요? 어차피 렌이라는 분이 길을 뚫을 테니 나머지는 뒤만 막아주면 될 텐데요."

당소유의 말에 고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에도 렌은 중심부에 있을 것 같네. 아무리 사냥 속도가 빨라도, 사냥감이 없으면 무용지물 아니겠나. 모두들 동의했으니, 바로 그쪽으로 이동합세."

그때부터 고명을 선두로 하는 숲의 중심부 침투가 시작됐다.

내부로 들어갈수록 블랙 오크의 숫자가 많아 뚫기가 힘들었는데,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막아서는 몹의 숫자가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06:13:05]

[킬 수 현황]

[1위. '렌' 4,864킬]

[2위. '고명' 3,876킬]

[3위. '가엔' 3,458킬]

[4위. '고예천' 3,304킬]

[5위. '엔키두' 2,987킬]

그리고 렌과의 킬 수는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벌어졌다.

그 압도적인 속도에 고명은 전율했다.

저 엄청난 킬 수의 대부분을 단 한 명이 해내고 있는 것이기에.

'반드시 녀석이 사냥을 못 하게 막아야 해······!'

길을 막아서는 블랙 오크의 숫자가 줄어든 덕분에, 고명 일행은 금세 숲의 중심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숲의 중심부는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분지 형태였다.

그래서 경사 아래로 내려가 렌을 찾으려 할 때였다.

"······!"

"······!"

"······!"

"······!"

경사 아래를 내려다본 고명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곳엔 온 세상이 새까맣게 보일 정도로 어마어마한 숫자의 블랙 오크들이 득실대고 있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엄청난 숫자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때였다.

꽈아아아아앙!

바글바글한 블랙 오크들 사이에서 한순간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벼락이 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쿠과과과과광!

그리고 덮쳐오는 충격파.

중심부에서 누군가가 대규모 블랙 오크 군단과 싸우고 있었다.

'렌······!'

그것도 혼자.

"······."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한번 창을 휘두를 때마다 벼락이 치고, 붉은 안개들이 끊임없이 렌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그건 마치.

'정말 녀석이 악마라도 된단 말인가······?'

인세에 등장한 악마와 같은 모습이었다.

* * *

[<피의 강화>로 상승한 스텟이 30분간 유지됩니다.]

[<피의 강화>로 상승한 스텟이 30분간 유지됩니다.]

[<피의 강화>로 상승한 스텟이 30분간 유지됩니다.]

[<피의 강화>로 상승한 스텟이 30분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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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Greatest Of All Time(2)

콰지지지직!

서걱!

창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두세 마리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바닥에 쓰러진 블랙 오크의 사체를 뛰어넘으며 나는 쉬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갔다.

철퍽- 철퍽-

블랙 오크들이 흘린 피로 인해 곳곳에 피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침입자가 너무 강하다! 취익!"

"취이이익! 전사들이여! 취익! 물러서지 마라! 취이이이익!"

거의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운 전투였는데도 블랙 오크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래서 오크를 보고 전투 종족이라고 일컫는 모양이었다.

어떻게든 내 창의 간격 안쪽으로 들어오려고 기를 쓰고 달려들었다.

자신이 들고 있는 도끼를 던지는 녀석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난 가볍게 도끼를 피하며 빈손이 된 블랙 오크를 베어 넘겼다.

쿵! 쾅! 쿵! 쾅!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거대한 코뿔소를 타고 있는 블랙 오크가 등장했다.

다른 블랙 오크들보다 더 커다란 녀석이었다.

'전사장인 모양이군.'

"취익! 췩췩! 취이이익!"

녀석이 포효를 지르며 도끼를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블랙 오크들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지휘를 하고 있어!'

나는 곧장 전사장이 있는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렇게 돌파하는 중에 녀석들이 전술적 움직임을 취한다면, 곤란한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으니까.

대장을 먼저 죽여야 한다.

띠링!

[<벽력 >이 발동됩니다.]

꽈아아아아앙!

벽력이 터지며 수많은 블랙 오크들의 몸이 터져 나갔다.

블랙 오크의 붉은 피가 흩뿌려지고, 잘려 나간 팔다리들이 바닥을 뒹굴었다.

내가 전사장에게 가는 것을 막고 있던 블랙 오크들이 단번에 반으로 갈라졌다.

고기 타는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나와 눈이 마주친 전사장.

"취이익! 인간! 우리 위대한 전사의 후예들을 대표하여 내가 네놈의 목을 베어주마! 췩!"

녀석이 크게 고함을 지르며, 코뿔소를 타고 내게 돌진해 왔다.

거대한 코뿔소 위에서 도끼를 들고 달려오는 모습은 무척 위압적이었다.

나는 곧장 마나를 끌어올렸다.

콰지지지지지지직!

'단숨에 벤다.'

쿵! 쾅! 쿵! 쾅!

코뿔소의 육중한 다리가 바닥을 박찰 때마다 땅이 울렸다.

엄청난 무게에서 오는 위압감이 상당했다.

"취이이이이이이익!"

전사장이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는 순간!

서걱-

콰지지지지지지직!

쿵! 쾅! 쿵! 쾅! 쿠우우웅!

코뿔소가 나를 지나쳐,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바닥에 쿵! 하고 쓰러졌다.

돌아보니 코뿔소와 전사장이 세로로 두 동강 난 채 죽어 있었다.

'됐어.'

둘러싸이기 전에 전사장을 처치했다.

이제 다시 돌파를 위해 바쁘게 움직여야 할 시간.

"취이이익! 인간! 감히 전사장님을!"

"취이이이이익! 네놈의 피로 전사장님의 넋을 위로할 것이다! 췩췩!"

나는 달려오는 블랙 오크들에게 창을 휘두르며 진영을 반으로 가르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띠링!

[<벽력 >이 발동됩니다.]

꽈아아아아앙!

또다시 벽력이 터지며 엄청난 빛줄기가 하늘 위로 뻗어나갔다.

이걸로 벌써 스무 번째.

'왜 이렇게 벽력이 잘 터지지?'

평소보다 압도적으로 확률이 높아졌다.

원래 하루에 세 번 터질까 말까였는데.

'이상해.'

어쩌다 운이 좋은 날 네 번, 아니 정말 운이 좋아 다섯 번까지 터질 수는 있다고 쳐도, 스무 번은 운으로 설명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었다.

현재 내 킬 수는 6천 킬 정도.

콰지지지지지직!

"취익!"

"취이이익!"

서걱!

피의 강화 특전이 켜진 이후, 대충 한 번 창을 휘두를 때마다 죽어 나가는 블랙 오크의 숫자는 두세 마리 정도였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2천 번쯤 휘둘렀다는 건데, 이동하는 중에 벽력이 터진 것까지 감안해도 일곱 번 혹은 여덟 번 정도만 터져야 했다.

'혹시?'

[<벽력 >]

[공격 시 0.1%의 확률로 벽력이 치며 근력이 +50% 상승합니다.]

[이동 시 0.1%의 확률로 벽력이 치며 민첩이 +50% 상승합니다.]

이거 확률이 한 번 공격할 때마다 카운트되는 게 아닌 건가?

그게 아니라 '한 개체당 한 번의 공격' 이었다면?

그렇다면 이 상황을 설명할 수가 있었다.

쐐애애액!

콰지지지지직!

내가 휘두른 건 한 번이지만, 공격 범위 안에 들어와 있는 블랙 오크의 숫자는 대략 네 다섯마리 정도 됐다.

내 창을 막아내는 블랙 오크들도 있었으니까.

그렇게 따지니까 벽력이 스무 번이나 터진 게 이해가 됐다.

'하. 이거 진짜 다대일 싸움에 특화 되어 있었네.'

창을 휘두르는 내 팔에 힘이 들어갔다.

벽력은 내게 어마어마한 보너스와 같은 스킬.

엄청 희박한 확률로 발동되지만, 몇 배나 발동 확률을 높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겐 큰 힘이 될 것이다.

'이제 다대일 전투에서는 딱히 보완할 게 없는 것 같은데.'

이제 내게 남은 약점은 강자와의 일대일 전투뿐.

물론 그마저도 지금처럼 흘러간다면 얼마 남지 않았다.

성계 특전으로 부족한 스텟을 채우고, 스킬과 아이템으로 더 다양한 무기들을 손에 쥐는 순간 일대일 전투에서도 엄청난 두각을 드러낼 것이다.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04:52:38]

[킬 수 현황]

[1위. '렌' 6,190킬]

[2위. '고명' 4,381킬]

[3위. '가엔' 3,992킬]

[4위. '고예천' 3,918킬]

[5위. '엔키두' 3,388킬]

둘러싸이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돌파하며 창을 휘두르길 7시간째.

어느새 2위인 고명과 엄청나게 벌어져 있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이렇게 몰이사냥을 하는 것과 그냥 사냥하는 것의 효율이 같을 리 없으니까.

거기다가 난 쉬지도 않고 계속 사냥했으니, 아무리 무림인들이 몹을 고명에게 몰아줬다고 해도 내 킬 수를 따라올 수 없을 것이다.

'1만 킬 정도 해놓고 빠져야겠군.'

이대로라면 9경기는 내가 가져갈 수 있다.

콰지지지지직!

생각을 정리하며 창을 휘두르다 보니, 어느새 중심부의 반대편까지 나와 있었다.

나는 등을 돌리며 대규모 블랙 오크 군단을 다시 반으로 가르기 시작했다.

"취이이익! 제발 죽어라!"

"취이익! 취익!"

블랙 오크들이 날 어떻게든 죽이기 위해 거대한 도끼며, 글레이브를 방방 휘둘렀지만, 애초에 창 안쪽의 간격까지 들어오는 녀석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압도적인 살육의 현장일 뿐.

창을 마구 휘두르며 길을 뚫고 있는데, 분지 위쪽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숲의 외곽 부분에 있는 블랙 오크들까지 분지 내부로 대규모 어글이 끌린 상황.

그래서 블랙 오크를 사냥하기 위해 숲의 중심부까지 플레이어들이 하나둘씩 도착하고 있는 것이다.

'들어올 테면 와 봐.'

하지만 난 굳이 녀석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저 플레이어들은 분지 아래로 내려오지 못할 것임을 알기에.

괜히 잘못 달려들었다가 이 전투에 휩쓸리면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체력이 다 떨어지는 순간 모두 죽은 목숨이 될 테니까.

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때 하늘 위에서 여러 개의 마법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광범위 원소 마법이었다.

콰과과과광! 콰과광! 쾅! 콰과과광!

마법에 의해 블랙 오크들이 터져 나가고, 포탄에 맞은 것처럼 땅이 뒤흔들렸다.

'저렇게 멀리서 마법을 쏜다고?'

내게도 온갖 마법이 날아들었는데, 다행히 멀리서 날렸기 때문인지 정확도는 형편없었다.

조금만 이동해도 다 피할 수 있는 수준.

콰과과광! 쾅! 콰과광!

"취이이익! 다른 침입자들이 왔다! 취익! 침입자들을 처단하라!"

"취이이이이익!"

갑작스러운 대규모 마법 공습으로, 일부 블랙 오크들이 분지 위를 오르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나게 많은 숫자였지만.

그 모습에 위에서 마법을 날리던 플레이어들이 혼비백산해서 도망가기 시작했다.

'차라리 잘 됐어.'

덕분에 빼곡하게 몰려 있었던 블랙 오크들 사이에 빈 공간이 조금씩 생겨났다.

돌파가 더 쉬워진 것이다.

난 그 틈을 파고들며 창을 휘둘렀다.

띠링!

[<벽력 >이 발동됩니다.]

꽈아아아아아앙아앙!

벽력에 땅이 터져 나가고, 뇌전이 사방을 휩쓸었다.

나는 사냥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 * *

└혼자 무쌍 찍네······.

└지렸다;; 혼자서 8천 킬을 하는 녀석을 어떻게 이기누;;

└저게 어떻게 가능함? 딱 보니까 체력을 회복하는 어떤 스킬이 있는 모양인데, 그렇다고 해도 9시간 넘게 쉬지 않고 창을 휘두를 수가 있음?

└저 번개 터지는 스킬이 더 문제임. 쿨타임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는데, 저런 스킬이 하위 리그에 존재한다는 것부터가 언밸런스였음.

└ㅋㅋㅋㅋㅋㅋㅋㅋ 그 많던 댓글들 다 어디갔냐. 다시 나와봐라 ㅋㅋㅋㅋㅋ 렌 이번 경기에서도 줘 털릴거라더닠ㅋㅋㅋㅋㅋ

└렌님ㅠㅠㅠㅠ 진짜 이번 성계 대항전 우승만 시켜주신다면 제가 앞으로 지구 출신만 키우겠습니다 ㅠㅠㅠㅠㅠ

└ㅋㅋㅋㅋㅋ미친새낔ㅋㅋㅋ 배당금 때문에 팀을 똥으로 만들엌ㅋㅋㅋ

└ㅋㅋㅋㅋ 진짜 여기 다 병신들밖에 없넼ㅋㅋㅋㅋㅋㅋ

* * *

한동안 마법을 쏟아내고, 도망치고, 쏟아내고, 도망치던 플레이어들이 대거 분지 아래로 몰려 내려오기 시작했다.

경기 종료까지 2시간 남은 시점이었다.

분지 위로 모여들던 플레이어의 숫자가 어느 정도 쌓여서 이제는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이미 늦었어.'

녀석들이 남은 시간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이미 대세를 바꿀 수 없을 만큼 격차가 벌어졌으니까.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01:59:12]

[킬 수 현황]

[1위. '렌' 11,971킬]

[2위. '가엔' 5,862킬]

[3위. '고예천' 4,711킬]

[4위. '고명' 4,704킬]

[5위. '엔키두' 4,527킬]

2위였던 고명은 어느새 4위까지 추락한 상황.

가엔이 언덕 위에서 광역 마법을 터트려 킬 수를 빠르게 올린 것이다.

그녀는 의외로 내게 마법을 쏟아내는 것보다, 블랙 오크들을 죽이는 것에 열중하고 있었다.

내게 향한 마법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남은 시간 동안 아무리 열심히 사냥한다고 해도, 내 킬 수를 따라잡을 순 없을 것이다.

내 체력과 다르게, 그녀의 마나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슬슬 빠져나가야겠어.'

마침 블랙 오크 군단 진영을 반으로 가르며 거의 중심부까지 들어왔으니 이대로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에 집중하기만 하면 됐다.

"취익!"

콰지지지지직!

블랙 오크의 피로 온몸이 범벅된 상태라 무척 끈적거렸다.

'10시간 가까이 사냥했더니 정신적으로 좀 피곤하네.'

[정신 : 138(+46)]

생각보다 정신력의 소모가 너무 컸다.

체력이 계속해서 100%를 유지하기 때문에, 그렇게 심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정신 스텟이 어마어마하게 높았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정신적으로 탈진할 뻔했다.

숨을 한 번 들이쉴 때마다 역한 피비린내가 코끝을 찔렀다.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서 쉬고 싶었다.

"블랙 오크보단 렌부터! 녀석이 사냥 못 하게 최대한 방해해야 한다!"

언덕 위에서 웨스테로스인들을 끌고 내려오던 녀석이 검 끝으로 날 가리키며 소리쳤다.

다른 성계 플레이어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냥보단 날 견제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쓸데없는 짓을.'

나는 90도로 방향을 틀어 플레이어들이 다가오는 방향의 반대편을 가르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블랙오크들이 순식간에 빈틈을 메우며, 나와 다른 성계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쿠션이 되어 주었다.

그러다 보니, 날 쫓아오려던 녀석들이 블랙 오크들에 의해 길이 막힌 상황.

간혹 블랙 오크들 사이를 뚫고 내 뒤를 쫓아오는 놈들도 있었지만, 크게 위협이 되진 않았다.

내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고, 얼마 못 가 블랙 오크들에게 가로막혀 버린 것이다.

엄청난 돌파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날 쫓아올 수 없었다.

"젠장! 추격 중지! 블랙 오크부터 상대한다!"

결국 눈에 불을 켠 채 날 쫓아오던 각 성계의 네임드들이 추격 중지 명령을 내렸다.

날 잡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10경기에도 날 견제하려나?'

이번 경기에서 승리를 챙기지 못한다면 사실상 웨스테로스를 제외하고는 우승이 물 건너 간 상황.

그렇다면 더 이상 나를 향한 맹목적인 견제가 줄어들 가능성이 컸다.

웨스테로스보단 최약체 성계인 지구가 우승을 챙기는 게 더 나을 테니까.

'그게 아니어도 지구가 우승하겠지만.'

콰지지지지직!

나는 앞을 가로막고 있는 블랙 오크 다섯 마리를 죽이는 걸 끝으로 침묵의 망토를 사용하며 숲의 중심부를 빠져나갔다.

"밀어붙여! 숫자는 우리가 더 많아!"

"목숨은 붙여 놔! 고명님이 마무리하셔야 하니까!"

그와 동시에 뒤쪽에서 엄청난 괴성이 터지며 병장기가 부딪히기 시작했다.

'하, 진 빠지네.'

체력은 계속해서 회복되었기에 상관없었지만, 정신적으로 크게 지친 상태였다.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단신으로 몇만 마리가 밀집해 있는 진영을 뚫고 들어간다는 것은, 정신력을 무척 많이 소모하는 일이었다.

아무리 블랙 오크가 약하다곤 하지만, 그들이 휘두르는 도끼 한 번이면 내 몸이 쪼개지는 것은 마찬가지니까.

'10경기 시작하기 전까지 좀 쉬자.'

[9경기 '사냥 실력은 내가 최고' 가 종료되었습니다.]

[킬 수 현황]

[1위. '렌' 11,999킬]

[2위. '가엔' 9,999킬]

[3위. '고예천' 8,831킬]

[4위. '고명' 8,024킬]

[5위. '미구르드' 7,942킬]

[킬 수 1위 : '렌']

[9경기는 지구에서 승리를 가져갑니다.]

[축하합니다!]

[현재 순위]

[1위 : 지구 / 3승]

[2위 : 웨스테로스 / 2승]

[3위 : 발리노르 / 1승]

[3위 : 알프헤임 / 1승]

[3위 : 졸본 / 1승]

[3위 : 무림 / 1승]

내가 전장에서 이탈한 이후에도 다른 플레이어들은 사냥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내 킬 수를 따라잡진 못했다.

이걸로 3승.

10경기까지 승리를 챙기면, 지구는 어마어마한 성계 특전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

'10경기는 역대 네임드들과의 전투.'

그러려면 거기서 최대한 많은 네임드들을 죽여야 한다.

[지금부터 10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10경기 : 이벤트 대전(집단 PvP)]

[게임명 : 역대 네임드들과의 전투]

[승리 조건 : 가장 많은 네임드를 처치한 성계]

[킬 수가 동률일 경우 살아남은 플레이어의 숫자가 많은 성계가 승리를 가져갑니다.]

[맵 : 피와 명예의 아레나(중)]

[관객 수 : 1,049,782 명]

[현재 생존자 수 : 8,505 명]

방 한쪽의 벽에서 하얀빛이 새어 나오며 포탈이 열렸다.

충분히 휴식을 취한 덕분에 정신도 말끔해졌고, 육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참가 현황]

[하이퍼보리아 : 828 명] [바빌론 : 807 명] [미드가르드 : 791 명] [티르너노그 : 761 명] 

[알프헤임 : 749 명] [나카츠쿠니 : 726 명] [탐리엘 : 717 명] [무림 : 710 명] 

[웨스테로스 : 640 명] [발리노르 : 629 명] [졸본 : 581 명] [지구 : 566 명] 

[10경기 참가 플레이어 분들께서는 입장해 주십시오.]

전체적으로 10경기에 참가 신청한 플레이어의 숫자가 많았다.

모두들 역대 네임드들과의 전투를 경험해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다행히 가장 경계해야 하는 웨스테로스는 640명뿐.

'마지막 경기.'

10경기는 부담이 좀 덜했다.

우리가 승리를 챙기지 못해도 괜찮으니까.

웨스테로스가 승리하지 못하게만 막아서면 된다.

'승리하는 것보다, 특정 성계가 승리하지 못하게 만드는 게 훨씬 쉬워.'

이번 경기는 다른 성계들의 압박이 많이 줄어들 터.

승리를 챙길 수 없다면 웨스테로스한테 깽판이라도 칠 것이다.

'진짜 깽판이 뭔지 보여주지.'

나는 각오를 불태우며 포탈을 향해 걸어갔다.

이제 유종의 미를 거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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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Greatest Of All Time(3)

아레나로 입장하니 엄청난 크기의 원형 돔 경기장이 보였다.

천장만 해도 50미터는 훌쩍 넘는 크기였다.

10경기의 참가 인원은 8,505명.

그런데도 경기장이 휑해 보일 정도였다.

툭- 툭-

'이건······ 결계군.'

내 주위에 직경 1미터짜리 결계가 만들어져 있었다.

경기 시작 전까지 각자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주위를 살펴보니, 다양한 성계의 플레이어들이 결계에 갇혀 있었다.

움찔!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녀석들은 흠칫, 몸을 떨었다.

'시작하자마자 집중 공격을 받겠는데.'

띠링!

[지금부터 10경기, 역대 네임드들과의 전투를 시작하겠습니다.]

[역대 네임드는 가장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하위 리그를 통과한 10인과 일대일 최강자전의 우승자 렌까지 총 11인 입니다.]

'뭐라고? 내 분신도?'

1회차에선 원래 10명 뿐이었는데.

일대일 최강자전 우승자인 내 분신까지 포함 시킨다고?

어째서 갑자기 미래가 바뀐 거지?

[네임드 11인의 스텟은 참가자의 평균으로 적용됩니다.]

[참가한 8,505명의 평균 스텟을 계산합니다.]

[근력 : 65] [민첩 : 68] [체력 : 65]

[정신 : 54] [지력 : 42] [마력 : 53]

이어지는 설명을 들은 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1회차 때보다 평균 스텟이 훨씬 낮아.'

나라는 존재의 나비효과 때문인지 평균 스텟이 대폭 깎여 있었다.

그렇게 되면 네임드 공략의 난이도가 하락하기 때문에 내 분신까지 집어넣은 것 같았다.

나는 차분하게 눈을 감은 채 경기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어차피 눈을 감아도 상태창은 보이기 때문에 상관없었다.

'어마어마한 괴물들만 등장하겠지.'

가령, 현재 초월 리그에서 활동 중인 무림의 '무당신검' 같은.

그들이 생전에 가지고 있던 능력들을 생각해 본다면, 스텟이라도 낮아야 게임의 밸런스가 맞을 것이다.

콜로세움에 들어오기 전부터 엄청난 스텟과 스킬을 가지고 있던 녀석들이니까.

아무리 참가자가 8,500명이나 된다고 하지만, 아르웬 수준의 네임드 11명이면 상대하기 힘들 것이다.

[비프로스트가 생성됩니다!]

알림창과 함께 경기장의 가운데 부분에서 거대한 마법진이 생겨났다.

마법진은 서서히 밝아지더니, 이내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사방으로 빛을 뿜어댔다.

그 빛이 최고조에 달하는 순간!

쏴아아아아아아아아-

빛이 사라지며, 동그랗게 서 있는 11명의 네임드가 등장했다.

그 안에는 내 분신의 모습도 보였다.

'나와의 전투라. 제법 기대되는데.'

[3초 후 경기가 시작됩니다.]

이번 경기에서 제법 얻는 것이 많을 것이다.

일단 내 움직임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흔치 않은 기회였으니까.

내 분신이 움직이는 모습을 눈여겨보면서 보완할 점이나, 고쳐야 할 부분을 잘 찾아봐야겠다.

[2초 후 경기가 시작됩니다.]

웨스테로스가 10경기의 승리를 챙기지 못하면 지구는 자동으로 우승이 확정된다.

그래서 나는 웨스테로스 플레이어들 위주로 죽이고 다닐 생각이었다.

네임드와 맞붙는 건 최대한 지양한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일대일로 저들과 맞붙어 이긴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막타로 뺏길 우려도 있었고.

[1초 후 경기가 시작됩니다.]

참가자가 8,505명이나 되는 만큼, 네임드 분신들도 결국 후반에 가서는 지칠 게 분명했다.

분신들의 체력이 떨어진 이후에 사냥을 해도 충분할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마지막 경기를 치를 시간이다.

[경기 시작!]

"렌이다! 렌부터 죽여!"

"웨스테로스 출신은 모두 이쪽으로!"

"렌 말고 웨스테로스 출신부터 죽여! 웨스테로스부터!"

결계가 사라지자마자 플레이어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웨스테로스의 한 플레이어가 날 가리키며 먼저 죽이자고 선동을 해댔지만, 듣는 플레이어 반, 듣지 않는 플레이어 반이었다.

오히려 웨스테로스를 죽이려는 무리까지 있었다.

"씨발! 렌부터 죽여야지! 지구가 우승하면 저 괴물이 더 강해진다고!"

"웨스테로스가 우승하는 것보다 지구가 우승하는 게 더 낫다! 모두 웨스테로스부터 죽여라!"

'오호라. 이러면 얘기가 다르지.'

아무래도 두 개의 파벌로 나뉜 것 같았다.

지구가 우승했으면 하는 무리와 차라리 웨스테로스가 우승하길 바라는 무리.

'이번 경기는 깽판을 놓는 걸로 충분하겠어.'

나는 곧바로 날 죽이자고 선동했던 웨스테로스인에게 달려들었다.

"렌부터 죽이자고! 왜 다들······!"

서걱-!

병신같은 새끼.

전 경기랑 상황이 같은 줄 알아?

챙! 채챙! 콰과광!

내가 녀석을 죽이는 사이, 다른 플레이어들은 서로 엉겨 붙으며 난전이 펼쳐졌다.

'개판이네.'

무기가 무기끼리 뒤엉키고, 저도 모르게 아군을 찌르는 등 난리도 아니었다.

슬쩍 뒤로 빠지며 초반의 뒤엉킴을 피한 나는 마나를 끌어올렸다.

'일단 피의 강화 특전부터 켜볼까.'

그리고는 플레이어들이 뒤엉켜 있는 곳으로 뛰어들었다.

콰지지지지지직!

"레, 렌!"

"피해!"

날 알아본 플레이어들이 무기를 거두며 서로 떨어지려고 했다.

'이미 늦었어.'

서걱!

[플레이어 '루타' 를 처치했습니다.]

[플레이어 '와타마' 를 처치했습니다.]

[플레이어 '안드레스' 를 처치했습니다.]

[플레이어 '베넷' 을 처치······.]

나는 웨스테로스 플레이어들 위주로 창을 휘둘렀다.

내게 무기를 휘두르는 게 아니라면 다른 성계 플레이어들은 굳이 죽이지 않았다.

그럴 시간에 웨스테로스인들을 한 명이라도 더 죽여야 했기 때문이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앙!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엄청난 굉음과 함께 빛줄기가 하늘로 솟구쳤다.

벽력이 터질 때 나오는 임팩트였다.

'이렇게 보니까 무시무시하긴 하네.'

내 분신이 근처에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만나기 전에 서둘러 피의 강화 특전을 켜야 한다.

다행히 이곳에 엉켜 있는 플레이어의 숫자가 많아, 30스텍을 채우는 건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콰지지지지지지직!

"여기 렌이 있다!"

"렌 냅두고 웨스테로스를 죽이라고!"

그때 엉뚱한 곳에서 플레이어들이 소리치며 내가 있음을 알렸다.

아마 벽력을 보고 내 분신을 나라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이건 생각도 못 했는데?'

덕분에 날 죽이고자 하는 플레이어들이 대거 내 분신이 있는 방향으로 몰려갔다.

"아, 아냐! 이쪽이 진짜······!"

내 근처에 있던 웨스테로스의 플레이어들이 뒤늦게 이쪽에 있는 내가 진짜임을 알리려고 했지만, 그 전에 내 창에 목이 달아났다.

[현재 생존자 수 : 7,702 명]

[킬 수 현황 ― 없음]

경기가 시작된 지 20분 밖에 안 됐는데, 벌써 800명이나 죽었다.

초반부터 곳곳에서 난전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죽은 네임드는 0명.

아마 저 숫자도 꽤 오랫동안 유지될 것이다.

'네임드를 죽이려고 하면 다른 성계가 견제할 테니까.'

나는 내 할일이나 하면 된다.

콰과과광! 콰과광! 쾅! 콰과광!

경기장 한쪽에서 엄청난 충격파가 뿜어져 나왔다.

또 다른 쪽에서는 하늘에서 화살 비가 쏟아졌다.

모두 네임드의 분신들이 펼치는 위용이었다.

'무시무시하네.'

분명 스텟이 큰 폭으로 깎였을 텐데도 역대 탑 10 네임드들 답게, 그 위력이 엄청났다.

아마 대부분 생전에 지니고 있던 능력들이겠지.

'이런 녀석들이 고위, 초월 리그에 올라가는 거군.'

그런 생각을 하며 웨스테로스의 플레이어들을 학살하고 있을 때였다.

쐐애애애액!

'헉!'

날아온 화살에 기겁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화살은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불행히도 그게 끝이 아니었다.

쐐애애애애애액!

거의 동시에 날아오는 일곱 개의 화살.

화살들은 막아내기 곤란한 곳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젠장!'

나는 곧장 몸부터 날렸다.

파바바바바박!

그와 동시에 내가 서 있던 자리에 꽂히는 화살들.

싸우고 있는 플레이어들 근처로 몸을 날린 덕분인지 이어지는 후속타는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보니, 내가 엄폐물로 삼았던 플레이어들의 몸에 다섯 발의 화살이 박혀 있었다.

'도대체 누가!'

화살이 날아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경기장의 외벽에 살짝 파여 있는 턱 위에서 화살을 쏘고 있는 분신의 모습이 보였다.

띠링!

[<악마의 눈>이 '고주몽(분신)'의 <신궁의 눈>을 방어합니다.]

순간 나는 화들짝 놀라 녀석을 쳐다보았다.

고주몽이라는 네임드도 하위 리그일 때 상태창을 엿볼 수 있는 스킬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저 분신 녀석도 저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거겠지.

나와 눈이 마주친 분신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활시위를 당겼다.

'악마의 눈.'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고주몽(분신)]

[성향 : 중용]

[근력 : 75(+?)] [민첩 : 78(+?)] [체력 : 75(+?)]

[정신 : 64(+?)] [지력 : 52(+?)] [마력 : 63(+?)]

[각성 능력 : <신궁 > <패왕 > <특급살기 > <특급보법 > <특급마나운용 > <특급기마궁술 > <고급박투술 >]

[업적 특전 : 신궁]

'시발.'

더럽게 세네.

분명 스텟이 대폭 깎였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준수한 스텟을 가지고 있었다.

나처럼 스텟이 오르는 특전과 아이템을 착용하고 있는 거겠지.

고주몽의 분신은 네임드 답게 이 난전 속에서도 누구를 먼저 죽여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나라도 일단 강자부터 죽이고 다녔을 테니까.

'무시하자.'

파바바바바박!

나는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며 서둘러 녀석과 거리를 벌렸다.

다행히 녀석은 굳이 날 쫓아오거나 하진 않았다.

"이쪽에 렌이 있다!"

"렌부터 죽여!"

다만 플레이어들이 날 알아보고 몰려드는 게 문제였지만.

콰지지지지직!

나는 녀석들을 죽이기보다 돌파하는 데 중점을 두고 창을 휘둘렀다.

띠링! 띠링! 띠링!

'조금만 더 버티면 돼.'

피의 강화 특전이 켜질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서걱! 서걱! 서걱!

띠링!

[플레이어 '로터스' 를 처치했습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30/30)]

[<피의 강화> 로 올릴 수 있는 스텟을 끝까지 채웠습니다.]

[<피의 강화>로 상승한 스텟이 30분간 유지됩니다.]

'드디어!'

피의 강화 스텍을 끝까지 채웠다.

[근력 : 81(+5)(+30)] [민첩 :91(+5)(+34)] [체력 : 89(+5)(+28)]

[정신 : 138(+46)] [지력 : 21(+7)] [마력 : 114(+5)(+36)]

업적과 천둥의 숨결, 피의 강화 특전으로 인해 근력과 민첩은 65%가 상승했고, 체력과 정신, 지력, 마력은 50% 상승했다.

스텟으로는 깡패나 다름없는 수준.

이제 3분 안에 죽여야 한다는 페널티도 없겠다, 나는 마음 놓고 웨스테로스인들을 학살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렌! 나와 다시 한번 승부를 보자!"

나와 6경기 준결승전에서 만났던 소호, 그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이번에는 같은 수법에 당하지 않는다!"

녀석이 손톱을 꺼내며 내게 달려들었다.

'하, 언젠가 한번 밟아줘야겠다 싶었지.'

마침 잘 됐다.

지금 막 피의 강화 특전이 켜진 상황.

나는 녀석에게 창을 휘둘렀다.

채애앵!

그러자 한참이나 밀려나는 소호.

녀석의 표정은 경악으로 가득했다.

"이······ 이게······?"

놀랍겠지.

전에 싸울 땐 피의 강화를 전혀 써먹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난 지금 소호를 상대했던 때보다 30%나 스텟이 상승한 상황.

스텟이 낮을 때도 녀석을 이겼는데, 지금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압도적인 수준 차이를 보여주지.'

나는 단숨에 소호에게 달려들어 창을 휘둘렀다.

챙!

"고양이 새끼가."

챙!

"누구 앞이라고."

챙!

"자꾸 발톱을 세우는 거냐."

채애애앵!

내가 창으로 내려칠 때마다 조금씩 금이 가던 소호의 손톱이 네 번째 공격에서 깨져나갔다.

그야말로 격이 다른 강함이었다.

"으, 으으······."

그러자 소호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스텟으로 압도했더니 녀석은 감히 달려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소호는 본능에 충실한 호인족.

나라는 존재감이 가슴 깊이 각인되었을 것이다.

다음에 만나면 나와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겠지.

서걱!

나는 그대로 벌벌 떨고 있는 소호의 목을 베어버렸다.

녀석의 머리가 두려움에 떨던 모습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이걸로 성계 대항전에서 갚아야 할 빚은 모두 갚았어.'

소호를 죽인 나는 킬 수 현황을 힐끗 살폈다.

[현재 생존자 수 : 4,988 명]

[킬 수 현황]

[1위. '웨스테로스' 2킬]

'미친!'

아직 초반인데 어떻게?

순간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100명 가까이 되는 웨스테로스 플레이어들을 죽였는데도 2킬이나 먹은 것이다.

다른 성계가 잡던 네임드 분신을 웨스테로스가 막타로 뺏은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특정 성계가 웨스테로스에게 킬을 몰아주고 있거나.

'아냐. 몰아주고 있을 확률은 거의 없어.'

웨스테로스가 우승하는 것보단 지구가 우승하는 게 다른 성계들 입장에선 훨씬 나을 테니까.

어쨌거나, 이 상태라면 웨스테로스고 자시고 나도 네임드 사냥에 뛰어들어야 한다.

아무리 웨스테로스의 씨를 말려도, 그전에 킬 수 1위를 확정 지어 버린다면 소용없는 짓이 될 테니까.

'타이밍은 나쁘지 않아.'

슬슬 분신들의 체력이 떨어지고 있을 시기였다.

거기다 나는 현재 피의 강화로 누구보다 압도적인 스텟을 보유하고 있는 상황.

지금부터 킬 수를 올려도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소수의 네임드를 사냥하기에 특화되어 있달까.

네임드 분신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쾅! 콰과과광!

엄청난 충격파가 터져 나오는 곳들.

거기에 네임드 분신들이 있을 것이다.

'일단 제일 먼저······.'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뇌전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엄청난 충격파가 덮쳐왔다.

마침 내 분신이 근처에 있는 것 같았다.

가장 먼저 내 분신부터 죽일 것이다.

같은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있다면 하드웨어가 더 좋은 쪽이 유리할 거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할 테니까.

콰지지지지직-

"으윽, 앞뒤로 렌이!"

"젠장! 괴물 같은 자식!"

나를 가로막는 플레이어들을 죽이며 뇌전이 터져 나가는 방향으로 향했다.

그러자 붉은 안개를 흡수하며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내 분신의 모습이 보였다.

플레이어들을 향해 창을 휘두르던 분신이 순간 뚝, 멈추며 고개를 돌렸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최대한 빨리 죽이고 다른 분신을······.'

잠깐만.

모든 분신에게 평균 스텟이 적용된다면······.

내 분신은 오히려 기본 스텟이 올랐겠는데?

그것도 한참?

"······!"

순간 뒷목이 쭈뼛했다.

'악마의 눈.'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안우진(분신)]

[성향 : 중용]

[근력 : 112(+?)] [민첩 : 117(+?)] [체력 : 103(+?)]

[정신 : 86(+?)] [지력 : 68(+?)] [마력 : 85(+?)]

[각성 능력 : <초감각 > <고급살기 > <특급마나운용 > <고급창술 > <최상급검술 > <최상급단검술 > <최상급투척술 > <중급박투술 > <중급치료술 > <최상급궁술 > <상급검방술 > <중급채찍술 > <중급둔기술 > <상급극술 > <상급도술 >]

[업적 특전 : 역천자]

녀석의 스텟을 보는 순간 나는 작게 읊조렸다.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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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Greatest Of All Time(4)

나는 곧장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저 정도 스텟이면 아르웬도 압살할 수 있는 수준.

거기다 나처럼 사기적인 스킬과 아이템들로 무장하고 있는 상태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녀석이 아니었다.

쐐애애애액!

'미친!'

그러자 분신 녀석이 날 쫓아오며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내 플레이 스타일이 그대로 기록된 녀석이라 그런지, 인벤토리에 들어있는 아이템까지 똑같은 모양이었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녀석의 다음 패턴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살을 피하느라 속도가 느려지면······.'

휘익! 챙!

내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슬낫이 날아들었다.

마력장과 들려오는 소리로 사슬낫이 날아오는 방향을 알 수 있었기에 가까스로 몸을 틀어 피할 수 있었다.

'아, 씨발.'

하지만 피했다고 좋아할 게 아니었다.

사슬낫을 피하고자 몸을 트는 사이.

콰지지지지지지직!

분신 녀석이 내 등 뒤에 도달해 있었으니까.

콰아앙!

뇌전을 머금은 녀석의 창이 바닥을 찍으며 작은 폭발음을 만들어냈다.

'고명이 이런 기분이었겠군.'

절대 도망칠 수 없을 것 같은 절망감.

어떻게 손을 써 볼 방법이 없는 막막함.

나 자신에게 쫓기는 기분이란.

참 엿 같았다.

'씨발. 누가 이기나 해 보자고.'

나는 도망치는 것을 포기한 채 등을 돌려 분신에게 창을 휘둘렀다.

그러자 녀석도 몸에서 뇌전을 피우며 창을 맞받아쳤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직!

채애앵!

'무슨 힘이!'

순간 뒤로 튕겨져 나갈 뻔했다.

근력에서 무려 30이나 차이가 나다 보니, 반발력이 어마어마했다.

찌릿!

'윽!'

그와 동시에 온몸이 감전된 것처럼 움찔했다.

손바닥을 타고 뇌전의 힘이 침투한 것이다.

'젠장. 안 그래도 최악의 상황인데 뇌전까지······!'

같은 뇌신 스킬을 보유하고 있어서 뇌전 데미지는 안 들어올 줄 알았는데.

마력 상쇄 덕분에 50%나 줄어든 건데도 이 정도 데미지면······.

'어?'

잠깐만.

'이 새끼······ 평균 스텟 보정 받아서 마력이 100 안 넘잖아?'

현재 녀석의 마력은 85.

반면에 내 마력은.

[마력 : 114(+5)(+26)]

순간 머리가 번쩍했다.

녀석도 나처럼 뇌전의 데미지를 받았을 터.

아니, 나보다 더 큰 데미지를 입었을 것이다.

마력이 높아서 뇌전의 데미지 절댓값이 내가 더 크고, 녀석은 마력 상쇄도 40%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

'뇌전으로 최대한 데미지를 쌓는다.'

챙! 채챙! 챙! 채채챙!

관건은 최대한 버티는 것.

'제발 벽력이 발동되지 않아야 할 텐데.'

문제는 무작정 버티는 것도 답이 없다는 것이다.

언제 녀석이 벽력을 터트릴지 모르니까.

내가 먼저 발동될 수도 있지만, 녀석에게 치명타를 입히긴 힘들 것이다.

"렌이 네임드를 사냥한다!"

"네임드를 못 죽이게 해야 해!"

"아니, 그쪽 렌 말고 이쪽 렌을 죽여!"

그때 주위에 있던 스무 명 정도의 플레이어들이 내 분신과 싸우는 모습을 보고선 달려들었다.

모두들 무림 출신.

녀석들은 나와 분신에게 동시에 무기를 휘둘렀다.

'차라리 잘 됐어.'

나는 분신과 떨어지며 달려드는 플레이어들을 상대했다.

아니, 돌파하기 시작했다.

'이 괴물이랑 싸울 바에야.'

도망칠 수 있을 때 도망쳐야 한다.

양손이 저릿저릿한 상태였으니까.

녀석의 엄청난 근력에서 오는 반발력만으로도 참기 힘든 수준인데, 한번 닿을 때마다 뇌전까지 내 몸을 파고드니 창을 잡고 있는 것도 힘들었다.

"렌이 도망친다! 녀석을······."

"아니, 분신부터 먼저 죽여!"

"이 개자식. 죽, 으아악!"

뒤쪽에서 플레이어들이 학살당하는 소리가 들렸다.

녀석들이 시간을 끌어주고 있는 사이에 최대한 빨리 도망쳐야 한다.

'후, 다행이야.'

나는 한참을 내달리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날 쫓아오거나 하진 않았다.

'젠장. 저거 못 죽일 거 같은데.'

내 분신도 죽일 때마다 체력이 회복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저런 스펙까지 갖추고 있다면?

혼자서 플레이어들을 다 죽여버릴지도 모른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었어.'

내 분신이 제대로 날뛰기 전에 최대한 많은 네임드 분신들을 사냥해야 한다.

푸슉! 푹! 푹! 푸슉! 서걱!

그때 근처에서 플레이어들을 학살하는 다른 네임드 분신의 모습이 보였다.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아킬레우스(분신)]

[성향 : 호전]

[근력 : 65] [민첩 : 108(+?)] [체력 : 65]

[정신 : 54] [지력 : 42] [마력 : 53]

[각성 능력 : <신속의 검> <대영웅 > <특급살기 > <특급마나운용 > <특급검방술 > <고급박투술 > <최상급궁술 >]

하지만 난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아킬레우스는 분명 빠르고 강하지만, 밸런스가 무너진 상태였으니까.

'플레이 스타일을 체력이 뒤받쳐주지 못하는군.'

아킬레우스의 분신은 빠른 속도를 이용해 공격을 막기보다 피하면서 반격을 넣고 있었다.

저런 스타일은 상대를 간결하고 빠르게 죽일 수 있지만, 체력 소모가 무척 심할 것이다.

본체였으면 이런 문제가 없었겠지만, 지금 녀석은 평균 스텟 보정으로 페널티를 짊어진 상태.

'저런 육체로는 오래 못 가.'

그에 대한 방증으로 아킬레우스 분신은 무척 지쳐 보였다.

그리고 저런 식으로 플레이어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에서 체력이 떨어진 상황이라면······.

"레, 렌이다!"

"막타 못 치게 막아!"

"절대 뺏겨선 안 돼!"

녀석을 죽이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콰지지지지지직!

나는 막아서는 플레이어들을 유유히 피하며 아킬레우스의 분신에게 창을 휘둘렀다.

녀석이 날 발견하곤 검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그게 녀석의 패착이었다.

서걱!

녀석의 근력으로는 내 창을 막아낼 수 없었으니까.

애초에 그 높은 민첩으로 내 창을 피했어야지, 막으려고 하면 안 됐다.

'체력이 부족해서 못 움직였겠지.'

띠링!

[@!#[email&#160;protected]

# '아킬레우스(분신)' 을 처치했습니다.]

녀석을 죽이자 킬 콜이 나왔다.

그런데 피의 회복이 켜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분신을 생명체라고 인식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근데 저 앞에 깨진 건 뭐지?'

플레이어라고 적혀 있던 부분인데.

"저 개자식! 우리가 다 잡아놨더니!"

"웨스테로스랑 아주 쌍으로 지랄을 하는구나, 이 개새끼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저 녀석부터 죽여!"

막타를 쳐서 킬을 먹었더니, 주위에 있던 발리노르의 플레이어들이 내게 달려들었다.

[현재 생존자 수 : 2,593 명]

[킬 수 현황]

[1위. '웨스테로스' 2킬]

[2위. '무림' 1킬]

[2위. '알프하임' 1킬]

[2위. '지구' 1킬]

다행히 웨스테로스의 킬 수는 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안심해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녀석들도 이 경기에 사활을 걸고 있을 테니까.

이제 네임드의 분신은 6명밖에 남지 않은 상황.

'여기서 놀아줄 시간이 없어.'

나는 곧장 창을 휘두르며 플레이어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여기서 웨스테로스가 승리를 챙기면 지구와 공동 1등이 된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1회차에는 10경기를 끝으로 성계 대항전이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아마 지구와 웨스테로스, 둘이서 11경기를 치르겠지.'

결국 우승 성계는 가려야 하니까.

그렇게 되면 변수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웨스테로스가 승리하는 것 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했다.

'다음 녀석은······.'

꽈아아아아아아앙!

네임드를 찾고 있는데 빛줄기가 천장까지 솟구쳤다.

벽력이 터진 것이다.

'내 분신은 패스.'

온갖 특전을 떡칠한 덕분에 아마 분신들 중에서 스텟도 가장 높을 것이다.

잡으라고 냅둬도 못 잡는다, 저건.

그때 저 멀리서 한 자루의 대검을 사방으로 휘두르는 분신이 보였다.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시구르드(분신)]

[성향 : 냉정]

[근력 : 85(+?)] [민첩 : 88(+?)] [체력 : 65]

[정신 : 54] [지력 : 42] [마력 : 53]

[각성 능력 : <용살검 > <특급살기 > <특급마나운용 > <특급검방술 > <고급박투술 > <최상급궁술 >]

녀석이 대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플레이어 네다섯 명씩 죽어 나가고 있었다.

'웨스테로스!'

마침 시구르드의 분신을 레이드하고 있던 녀석들은 웨스테로스 출신들.

저 분신만큼은 어떻게든 내가 뺏어야 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저 거대한 대검을 휘두르느라 시구르드 분신의 체력 소모가 심해 보였으니까.

이 상태라면 얼마 못 가 웨스테로스인들이 시구르드의 분신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저건 뺏기 쉽지 않겠는데!'

하필 웨스테로스의 네임드까지 모조리 껴 있는 상황.

하지만 여기서 1킬을 더 내준다면 이번 경기는 웨스테로스가 가져갈 가능성이 컸다.

어떻게든 저 분신을 내가 죽여야 한다.

콰지지지지지직!

나는 200명 가까이 되는 웨스테로스 플레이어들 사이에 뛰어들었다.

"렌!"

"막타 못 치게 막아야 돼!"

"우리가 녀석을 막을 테니 나머지는 분신을 잡는 데 집중해!"

그러자 50명 정도가 방향을 틀어 날 막아섰다.

'악마의 눈.'

경계해야 할 녀석은······ 세 명.

소호보다 약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것도 50명이 우르르 몰려오고 있는 상황에선.

'일단은 시선을 끌어야 해.'

꼭 플레이어들을 죽이지 않아도 된다.

적어도 시구르드의 분신이 받는 압력만이라도 줄여야 한다.

콰지지지지지직!

'일단 돌파부터.'

나는 뇌전을 머금은 창을 힘껏 휘둘렀다.

채앵! 챙! 챙!

"노옴!"

하지만 녀석들도 내 계획을 눈치챘다는 듯, 날 죽이는 것보다 저지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젠장. 이럴 땐 왜 벽력이 안 터지는 거야.'

이럴 때 벽력이 터지면 이런 저지선 쯤은 우습게 날려버릴 수 있는데.

평소에는 잘만 터졌으면서, 오늘따라 잠잠했다.

분신은 꽤 여러 번 터진 것 같은데.

"분신 녀석이 지쳐간다! 조금만 더!"

"렌을 막고 있을 때 빨리 죽여야 돼!"

창을 휘두르며 힐끗 보니, 웨스테로스 플레이어들 사이를 종횡무진 누비던 시구르드 분신의 움직임이 많이 느려져 있었다.

압도적인 기세도 사라졌고, 이제는 플레이어들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에 급급해 보였다.

'씨발.'

어떻게 하지?

차라리 지금이라도 다른 네임드 분신을 죽이러 가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순간 뇌리를 스치고 가는 생각이 있었다.

'이판사판이야.'

나는 돌파하는 걸 멈추고 몸을 돌려, 왔던 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녀석이 도망간다!"

"모두 정지! 따라가지마! 일단 네임드 분신부터 먼저 처치한다!"

제발.

여기 근처에 있어라.

제발.

콰지지지지지지지직!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뇌전이 뿜어져 나오는 게 보였다.

'찾았다.'

내 분신은 근처에서 무림인들을 상대로 무쌍을 찍고 있었다.

여포의 화신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나는 곧장 활을 꺼내 녀석을 향해 쏘기 시작했다.

핑! 챙!

날아간 화살이 내 분신의 창에 허무하게 막혔지만, 녀석의 시선을 끄는 데엔 성공.

'제발 좀 따라와라.'

핑! 핑! 핑! 핑! 핑!

내가 끈질기게 화살을 쏘자, 무시한 채 무림인들에게 창을 휘두르던 녀석이 결국 내가 있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내 분신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내게 달려들었다.

'빨리······!'

시구르드 분신이 죽기 전에 어서 이 괴물을 데려가야 한다.

내 분신의 근력과 민첩이면 웨스테로스가 펼친 저지선 쯤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뚫어낼 것이다.

챙! 채채챙! 챙! 챙!

다행히 웨스테로스 레이드 근처까지 다가가자, 여전히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대검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한 명씩 죽어 나가고 있었다.

아직 시구르드의 분신을 죽이지 못한 것이다.

'다행이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웨스테로스인들에게 돌진했다.

그사이 내 분신도 어느새 내게 바짝 붙어있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창의 간격 안에 들어갈 것 같았다.

평소라면 욕지거리를 내뱉었겠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녀석이 다시 온다! 준비!"

"크하하하! 멍청한 자식. 아직도 여길 뚫을 수 있을······."

'침묵의 망토.'

녀석들에게 다다를 때쯤, 침묵의 망토를 쓴 나는 곧장 옆으로 몸을 날렸다.

공격 판정이 되면서 은신이 바로 풀렸지만 상관없었다.

콰지지지지지지직!

잠깐의 순간, 내 분신이 나를 놓치는 바람에 웨스테로스의 저지선과 부딪히고 있었으니까.

'됐어.'

"윽, 뭐야! 렌 분신인데?"

"으악!"

내 분신이 플레이어들 사이를 누비며 닥치는 대로 창을 휘둘렀다.

한번 창이 번쩍! 할 때마다 두세 명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이번 경기에서 만큼은 내 분신이 여포나 마찬가지였다.

웨스테로스는 순식간에 진영이 붕괴되며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됐어, 이 틈에!'

나도 곧장 녀석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여, 여기에 진짜가······!"

서걱!

뒤늦게 날 알아본 플레이어들이 소리치려 했지만, 이미 진영이 붕괴된 이상 날 막아낼 수 없었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앙!

근처에서 눈부실 정도의 빛이 생겨나더니, 엄청난 충격파가 나를 덮쳤다.

내 분신은 벌써 오늘만 해도 세 번, 아니 네 번의 벽력이 터지고 있었다.

그로 인해 녀석들의 시선이 내 분신에게 향했고.

서걱!

그 틈에 나는 최대한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덕분에 시구르드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할 때였다.

챙! 챙! 채챙! 챙! 챙! 채앵!

웨스테로스의 플레이어들과 싸우다가 체력이 다 빠졌는지 대검을 놓치는 시구르드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웨스테로스인들의 공격.

'안 돼!'

나는 급한 마음에 시구르드에게 창을 던졌다.

뇌전을 머금은 창이 한줄기 섬광이 되어 날아갔다.

푹! 푹!

분신을 레이드하던 플레이어의 검과 내 창이 동시에 시구르드의 가슴에 박혔다.

'제발!'

왜 죽였다는 판정이 안 뜨는 거지?

설마 놓쳤나?

띠링!

[@!#[email&#160;protected]

# '시구르드(분신)' 을 처치했습니다.]

'됐어!'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1회차까지 통틀어 내가 여태껏 뺏어 먹어봤던 막타 중에 제일 짜릿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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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Greatest Of All Time(5)

└아니 미친 새끼가 그걸 킬딸하네ㅡㅡ

└저걸 뺏겨? 나가 뒤져라 그냥 ㅂㅅ들 머리는 뭐하러 들고 다니냐?

└(과도한 욕설로 인해 삭제된 댓글입니다.)

└ㅋㅋㅋㅋㅋ 댓글 개꿀잼. 팝콘 먹으면서 보는 중임다.

└초반에는 렌 욕 존나 했는뎈ㅋㅋㅋ 무림은 이제 우승 못할거 아니까 편-안.

└(과도한 욕설로 인해 삭제된 댓글입니다.)

└그거지!!! 지구 우승 가즈아!! 우승만 하면 형이 진짜 해달라는거 다해줄게 진짜 앞으로 지구 애들만 키운다 그니까 제발 우승 가자!!

└야이 개X끼야 기분 좋냐? 기분 좋아? 시발 저따위 킬딸이나 하고 다니는 새끼 똥꼬나 핥으면서 평생 살아라.

└(과도한 욕설로 인해 삭제된 댓글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도대체 뭐라고 하길래 계속 삭제되는거얔ㅋㅋㅋㅋ

―아, 하위 리그 경기를 보면서 감탄한 적이 별로 없는데, 오늘 여러 번 감탄하게 되네요.

―네, 저도 그렇습니다. 사실 초반에 지구인들을 규합해 네임드를 사냥하지 않고, 웨스테로스의 플레이어들 위주로 죽이고 다니기에 이번 경기의 승리를 포기한 줄 알았습니다만.

―그게 사실은 엄청나게 효율적인 플레이였던 거죠. 네임드 분신들의 스텟이 아무리 낮아졌다고 해도 초반부터 쉽게 죽일 순 없을 거라는 걸 예측하고 가장 경계해야 할 웨스테로스 플레이어들부터 죽이러 다닌 거였죠.

―네, 그러더니 분신들의 체력이 어느 정도 떨어지자마자 귀신처럼 알아채고 네임드들을 사냥하러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벌써 2킬째!

―특히 시구르드의 분신을 죽이던 순간이 가장 소름 돋았습니다. 자기 혼자선 뚫지 못할 거라는 걸 단숨에 계산해내곤 곧장 다른 방법을 찾아 나섰죠. 그 결과로 자기의 분신을 유인해 결국 킬까지 가져갔습니다. 저런 직관력은 수많은 경험이 뒷받침되지 않는 이상 가지기 어려운데요. 도대체 어떤 식으로 훈련해야 저런 결과물이······.

* * *

시구르드의 분신을 죽였다는 알림창을 본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번 경기의 가장 큰 난관을 넘어선 것이다.

이걸로 웨스테로스와 지구의 킬 수가 동률을 이루었다.

"이 개자식이!"

지금까지 열심히 레이드하던 보스를 뺏긴 탓인지 웨스테로스인들이 눈에 불을 켠 채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여유분으로 준비해 두었던 창부터 꺼내 들었다.

[현재 생존자 수 : 1,472 명]

[킬 수 현황]

[1위. '웨스테로스' 2킬]

[1위. '지구' 2킬]

[2위. '무림' 1킬]

[2위. '알프하임' 1킬]

남은 플레이어의 숫자는 1,472명.

현재 이곳에 있는 웨스테로스인은 150명 정도였다.

그렇다는 건 여기 있는 웨스테로스인이 거의 전부라는 것.

'아예 여기서 변수를 지워버려야겠어.'

마침 상황도 나쁘지 않았다.

콰지지지지지지직!

한쪽에서 내 분신이 웨스테로스인들을 학살하고 있는 상황.

거기다 웨스테로스 녀석들은 시구르드를 상대하느라 많이 지쳐 보였다.

이렇게 된 거 이 자리에서 웨스테로스인들을 모두 죽여야겠다.

'어차피 분신도 아직 5명이나 남았고.'

마음을 먹은 나는 곧장 뇌전을 뿌리며 창을 휘둘렀다.

서걱!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잘려 나간 팔과 목이 허공을 날았다.

이런 기회가 흔치 않기 때문에 전력을 다해 창을 휘둘렀다.

그 누구도 내 창의 범위 안쪽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일방적인 살육의 현장.

그럼에도 웨스테로스인들은 끈질기게 덤벼들었다.

"이 개새끼!"

동시에 날아드는 세 개의 검.

세 명의 검객이 내게 달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검들은 내게 닿지 않았다.

챙! 채챙! 서걱!

띠링!

[<피의 강화> 유지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피의 강화> 로 상승한 스텟이 초기화 됩니다.]

검객들을 베는 걸 마지막으로 온몸에서 흘러넘쳤던 힘이 급격하게 사라져갔다.

내 움직임이 순식간에 느려졌다.

콰지지지지지직!

챙! 채챙! 챙! 챙!

원래대로라면 죽었어야 할 녀석들이 내 창을 막아내기 시작했다.

그걸 본 웨스테로스인들이 소리쳤다.

"녀석이 지쳤다! 이대로 밀어붙여!"

'쯧. 벌써 30분이 다 됐군.'

나는 곧장 공격 스타일을 바꿨다.

저돌적으로 녀석들 사이를 파고들며 되는대로 죽여대던 방식에서 한 명씩 차분하게 죽이는 방식으로 바꾼 것이다.

그러자 이전보다 죽이는 속도는 확연하게 줄어들었지만, 다시 피의 강화 스텍이 쌓이기 시작했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1/30)]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2/30)]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3/30)]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

그리고 실시간으로 내 몸도 점점 빨라져 갔다.

그 모습을 본 웨스테로스인들이 경악했다.

"미친! 다시 강해진다!"

"저 자식은 대체······!"

띠링!

[<벽력 >이 발동됩니다.]

꽈아아아아아아앙!

순간 어마어마한 뇌전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충격파가 발산됐다.

벽력의 범위에 있던 다섯 명의 플레이어들이 온몸이 터져 죽어 나갔다.

오늘의 첫 벽력이었다.

"제······ 젠장······. 10경기를 우리가 챙길 수도 있었는데······."

서걱!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28/30)]

체념한 채 작게 읊조리는 플레이어의 목을 베는 걸 마지막으로 나는 웨스테로스인 사냥을 끝냈다.

주위를 둘러보니, 200명 가까이 됐던 웨스테로스인들이 어느새 30명도 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심지어 그 30명도 내 분신에게 도륙당하고 있는 상황.

아마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저들이 시선을 끌어주고 있는 사이 어서 자리를 떠야겠다.

'이걸로 잠재적 경쟁자 처리는 끝났고.'

이제 다른 네임드 분신들을 사냥하러 갈 시간이었다.

[현재 생존자 수 : 851 명]

[킬 수 현황]

[1위. '웨스테로스' 2킬]

[1위. '지구' 2킬]

[1위. '무림' 2킬]

[2위. '알프하임' 1킬]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킬만 추가하면 된다.

그러면 적어도 웨스테로스와 동률이 될 경우의 수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다.

나는 곧장 남아있는 네임드 분신들을 찾아 나섰다.

―아, 살아남은 웨스테로스 성계 플레이어의 숫자가 몇 명 되어 보이지 않습니다. 앗, 마침 렌의 분신이 죽인 웨스테로스 플레이어가 마지막 생존자였다더군요.

―렌이 웨스테로스의 킬을 뺏는 걸 넘어, 아예 뿌리째 뽑기로 작정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걸로 지구의 우승이 한 층 더 가까워졌습니다.

챙! 채챙! 채애앵! 챙! 챙!

마침 근처에서 또 다른 네임드 분신을 레이드하고 있는 플레이어들의 모습이 보였다.

나카츠쿠니인들이었다.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길가메쉬(분신)]

[성향 : 개척]

[근력 : 77(+?)] [민첩 : 80(+?)] [체력 : 78(+?)]

[정신 : 66(+?)] [지력 : 54(+?)] [마력 : 65(+?)]

[각성 능력 : <특급검방술 > <특급검술 > <특급살기 > <특급마나운용 > <특급박투술 >]

[특전 : 반신半神의 혈통]

'얘네는 가장 상성 안 좋은 애를 골랐네.'

중갑에 방패를 들고 있는 길가메쉬의 분신에게 암살자 계열과 근접 물리계열이 대다수인 나카츠쿠니는 상성이 좋지 않았다.

두꺼운 중갑과 방패 때문에 분신에게 유효타를 먹이기 쉽지 않달까.

심지어 스텟의 밸런스도 분신들 중에서는 가장 좋다 보니, 나카츠쿠니인들이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서걱!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29/30)]

나는 곧바로 나카츠쿠니인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150명이나 됐지만, 거의 대다수가 피를 흘리고 있는 상태.

한마디로 체력이 거의 다 빠져있다는 것이다.

광역 공격이 장점인 내게, 이들은 너무나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었다.

띠링!

[플레이어 '하치무라 루이' 를 처치했습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30/30)]

[<피의 강화> 로 올릴 수 있는 스텟을 끝까지 채웠습니다.]

[<피의 강화>로 상승한 스텟이 30분간 유지됩니다.]

마침 피의 강화 특전도 다시 켜진 상황.

그때부터 대학살이 펼쳐졌다.

콰지지지지지직!

"끄악!"

"으아아악!"

"저 괴물 자식이 또!"

단번에 엄청난 피가 흩뿌려지며, 고기 타는 냄새가 났다.

그 누구도 내 창을 막아내지 못했다.

―렌이 다음 네임드 분신 사냥에 돌입합니다. 그리고 곧 사냥에 성공할 것 같습니다.

―길가메쉬의 분신을 죽이는 순간 이번 경기의 결과에 상관없이 지구 성계의 우승이 확정됩니다. 예, 여러분. 최약체 성계라며 온갖 멸시와 조롱을 받던 지구가······ 결승선에 한 걸음 걸쳤습니다.

―이런 날을 경험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지구가······ 지구가 우승이라니······!

단숨에 나카츠쿠니 플레이어들을 찢어버린 나는 길가메쉬와의 전투에 돌입했다.

챙! 콰지지지직!

길가메쉬는 전형적인 기사 타입.

두꺼운 중갑과 방패로 공격을 막고, 맞받아치며 싸우는 스타일이다.

복싱으로 치자면 인파이터랄까.

이런 스타일은 크게 두 가지의 공략법이 존재했다.

아킬레우스처럼 미친 듯이 빠르게 움직이면서 데미지를 쌓아가며 장기전을 펼치던가.

'아니면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누르던가.'

그리고 내 선택은 후자였다.

쾅!

내 창이 녀석의 방패에 부딪히며 둔탁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자 길가메쉬의 분신이 눈을 크게 치켜떴다.

내 창에 담긴 힘이 지금까지 상대했던 녀석들이랑 차원이 달랐던 것이다.

'그런데 난 근력만 높은 게 아니거든.'

쾅! 쾅! 쾅! 쾅! 쾅! 쾅!

콰지지지지지직!

나는 엄청난 속도로 방패를 내려쳤다.

한번 내리칠 때마다 방패가 조금씩 구겨졌다.

―렌이 길가메쉬의 분신을 궁지로 몰아넣습니다!

―길가메쉬가속수무책으로당합니다오이럴수가곧있으면지구가!우승을!

―아아, 침착하세요. 너무 흥분하셨습니다.

―지금침착하게생겼습니까? 지구가······ 0.1% 확률이었던 지구가······!

지이이이이잉!

녀석이 급하게 방패에 마력을 불어 넣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마력 상쇄 덕분에 단숨에 녀석의 마력을 찢으며 방패를 때린 것이다.

'어딜!'

그러자 녀석이 내 품에 파고들어 롱 소드를 휘두르려 했지만, 그것 마저도 난 허용하지 않았다.

곧바로 뒤로 빠지며 계속해서 창을 휘둘렀다.

나보다 느린데, 리치에서도 차이가 심한 상황.

그렇다면?

'뒤지게 맞아야지.'

쾅! 쾅! 쾅! 쾅! 쾅! 쾅! 쨍!

한참을 두들기자, 결국 방패가 박살이 나며 녀석의 왼팔이 잘려 나갔다.

그리고 방패가 사라진 이상 녀석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서걱!

띠링!

[@!#[email&#160;protected]

# '길가메쉬(분신)' 을 처치했습니다.]

길가메쉬의 분신이 정수리부터 세로로 쪼개지며 엄청난 양의 피를 쏟아냈다.

'하.'

이걸로······.

지구의 우승은 확정이다.

―결국 지구가 우승을 확정 짓습니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이 사건은 앞으로 콜로세움에 엄청난 지각 변동을 남길 겁니다.

―예? 갑자기요? 방금 전까지 그렇게 흥분하셨던 분 맞습니까?

―보상을 잊으셨습니까? 확률에 따라 차원 특전의 규모가 달라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무려 0.1%의 확률을 뚫고 지구가 우승한 겁니다. 아직 지구가 얻을 정확한 보상 내용이 풀리진 않았습니다만, 아마 엄청난 차원 특전을 얻게 될 겁니다.

―오······ 하위 리그 전체 인구의 30%를 차지하는 지구 플레이어들의 전력이 전체적으로 상승한다는 말씀이시군요.

―예. 그렇게 숫자가 많은 만큼, 앞으로 지구인 플레이어들의 활약도 더욱 많아지겠지요!

[현재 생존자 수 : 82 명]

[킬 수 현황]

[1위. '지구' 3킬]

[2위. '웨스테로스' 2킬]

[2위. '무림' 2킬]

[3위. '알프하임' 1킬]

[3위. '졸본' 1킬]

[3위. '바빌론' 1킬]

남은 플레이어의 숫자는 82명.

그리고 분신은 한 명밖에 남지 않았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앙!

조금 떨어진 곳에서 빛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뒤이어 날아온 충격파가 내 머리를 흩날렸다.

'내 분신.'

―묘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렌의 분신이 가장 먼저 사냥당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가장 오래 버텼네요.

―음······ 모든 분신들이 참가자들의 평균 스텟으로 조정되면서 오히려 스텟이 깎이지 않았습니까?

―네, 그렇지요. 모두들 원래 실력의 절반 정도밖에 나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렌의 분신은 오히려 스텟이 오른 것 같은데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럼 렌의 스텟이 참가자들의 평균보다 낮았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러기엔 지금 분신의 움직임이 어마어마한데요?

―그렇긴 합니다만, 이럴 땐 렌과 분신의 스텟을 비교해야죠. 근데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분신의 근력이나 속도가 더 뛰어난 것 같습니다.

―예? 그럴 리가······.

나는 빛줄기가 뻗어져 나온 방향으로 이동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내 분신을 죽일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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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Greatest Of All Time(6)

[현재 생존자 수 : 38 명]

내 분신이 있는 곳으로 향하자, 각양각색의 성계 플레이어들이 내 분신을 레이드 하고 있었다.

그중에 웨스테로스 출신은 존재하지 않았다.

서로 견제하면서 싸우는 게 아닌, 레이드 형식의 잘 짜여진 구성.

아무래도 이대로는 내 분신을 죽일 수 없다는 걸 깨달은 플레이어들이 전략적 동맹을 맺은 것 같았다.

'게임이 안 되네.'

남은 생존자 거의 전부가 내 분신 하나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으나, 격차가 너무 심했다.

전투가 아닌, 학살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

"씨발! 탱커가 고작 두 번의 공격을 못 막는다고?"

"너무 빨라요! 일단 다리부터 묶어야 해요!"

"그건 나도 아는데! 돌파를 막을 수가 없어!"

내 분신은 뭉쳐 있는 플레이어들을 요리조리 뚫고 들어가 한 명씩 차근차근 죽여가고 있었다.

이대로는 얼마 못 가 전멸할 것이다.

'피의 강화 특전이 끝난 이후에 싸우면 좋은데.'

현재 나와 분신은 스텟 총합으로 계산하면 37 포인트 차이가 난다.

하지만 양쪽 다 피의 강화 특전이 꺼진다면 15까지 줄어든다.

특전이 꺼진다는 것만으로도 녀석과의 격차를 크게 메울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녀석의 특전이 언제 꺼질지 모른다는 거지.'

만약 피의 강화 특전이 방금 전에 켜진 거라면?

지금부터 30분 동안 녀석을 피해 도망 다닐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현재 내 피의 강화 특전의 남은 시간은 18분 27초.

녀석이 나보다 더 많은 시간이 남아 있다면, 18분 후에 스텟의 차이는 아득할 정도로 벌어진다.

'도망 다니는 건 패스.'

숨어있을 수도 없다.

이렇게 뻥 뚫려 있는 경기장에서, 녀석의 초감각을 피할 수 있을 만한 은신 실력이 안 된다.

결국 리스크를 최대한 줄이려면.

'18분 안에 승부를 봐야 해.'

마음을 정리한 나는 분신이 싸우고 있는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렌이다!"

"잠깐! 우린 분신을 죽일 생각인 거지, 당신한텐 검을 휘두를 생각이 없······!"

서걱!

그리고 플레이어들부터 죽이기 시작했다.

몇몇 플레이어들이 내게 적의가 없음을 알렸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모두 죽였다.

녀석의 몸에서 붉은빛이 흘러나왔으니까.

'거짓말이 아니었어도 죽였겠지만.'

네임드가 아닌 한, 녀석들은 걸어 다니는 체력 포션일 뿐이었다.

분신에게 잡아먹힐 바에야, 내가 죽이고 체력을 회복시키는 게 나았다.

콰지지지지지지직!

"젠장, 녀석의 분신이라도 죽여보고 싶었는데······."

서걱!

작게 읊조리는 낭인족을 끝으로 경기장에 침묵이 감돌았다.

[현재 생존자 수 : 1 명]

[킬 수 현황]

[1위. '지구' 3킬]

[2위. '웨스테로스' 2킬]

[2위. '무림' 2킬]

[3위. '알프하임' 1킬]

[3위. '졸본' 1킬]

[3위. '바빌론' 1킬]

남은 생존자 수 1.

남은 네임드 분신의 숫자도 1.

결국 녀석과 나, 단둘만 남았다.

―묘한 상황이 연출됐네요. 결국 마지막까지 생존한 한 명의 플레이어와 한 명의 네임드 분신은 렌 혼자뿐입니다.

―사실 전 네임드 분신 중에서는 렌이 가장 먼저 죽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이번 성계 대항전에서 엄청난 활약을 선보이긴 했지만, 역대 네임드들과 비교하자면 아직 좀 부족한 감이 있다고 봤거든요.

―저 또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막상 까보니 결과는 전혀 달랐죠.

―예. 그 어떤 역대 네임드도 결국 렌만큼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GOAT 경쟁에, 렌 또한 이름을 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요.

콰지지지직-

내 분신의 몸에서 붉은색 뇌전이 피어올랐다.

검은색 로브로 온몸을 꽁꽁 두른 채, 악귀 가면을 쓰고 있는 모습은 무척 기괴해 보였다.

잠시간의 소강상태.

'벽력만 안 터졌으면 좋겠는데.'

현재 내가 녀석보다 우위에 있는 능력은 정신과 마력뿐.

최대한 뇌전을 이용해 녀석에게 데미지를 쌓아가면서 공략해야 하지만, 중간에 터지는 벽력만큼은 내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이런 상황을 정말 싫어하지만.'

부디 안 터지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스강!

그때 내 분신이 엄청난 속도로 창을 찌르며 들어왔다.

'맞대결만큼은 피해야 해!'

나는 빠르게 뒤로 빠지며 창을 옆으로 쳐내려고 했다.

그러자 녀석이 찔러 들어오던 창의 궤도가 빠르게 바뀌며 내게 힘싸움을 유도했다.

'어딜!'

나 또한 빠르게 창의 궤적을 바꾸며 맞섰다.

챙!

콰지지지지직!

창과 창이 맞부딪히자, 나와 분신의 뇌전이 주변을 휩쓸었다.

순간적으로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휙! 휘익! 휙휙!

녀석의 창이 급소만을 노리며 뱀처럼 휘어 들어왔다.

'젠장. 내가 데미지를 쌓을 시간을 주지 않겠다?'

녀석은 지금 피지컬의 우위를 이용해 내가 맞대결을 펼치지 않으면 안 되게끔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계속 이런 상황이 연출된다면 위험할 수 있었다.

데미지를 쌓기 전에 내가 먼저 나가떨어질 것이다.

챙!

"크윽!"

어쩔 수 없이 막아내다 보니, 내 몸이 계속해서 뒤로 밀렸다.

양손이 저릿저릿했다.

창을 붙잡고 있는 손아귀가 터져 나갈 것 같았다.

그때였다.

'빈틈!'

쉴 틈 없이 몰아붙이던 녀석이 마무리를 할 생각이었는지 창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다 보니, 철벽처럼 내 창을 막아내던 녀석의 방어막에 균열이 생겨났다.

나는 곧장 자세를 낮추며 녀석의 품으로 뛰어 들어가려 했다.

잠깐.

갑자기 빈틈이 생겨난다고?

이렇게 절묘한 순간에?

'함정!'

나는 곧장 몸을 멈춰 세웠다.

후우웅!

그러자 내 눈앞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녀석의 창이 보였다.

젠장.

날 유혹하고 있던 거구나.

'곤란한데.'

이렇게 된 이상 앞으로 녀석의 빈틈이 보여도 찌르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게 의도적으로 노출한 건지, 우연히 생겨난 건지 판단할 수가 없으니까.

챙! 채채챙!

내가 녀석의 노림수를 간파하자, 분신의 창이 노골적으로 싸우자며 달려들었다.

그 모습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고명이 이런 기분이었겠군.'

어떻게 녀석을 공략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스텟이라도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밀리지 않았을 텐데.

'일단 기회를 만들어낼 생각부터 하자.'

나는 곧바로 분신에게 창을 맞찔러 들어갔다.

녀석의 공격을 최대한 흘려내며 뇌전으로 데미지를 쌓아가려던 전략에서 정면 대결로 스타일을 바꾼 것이다.

지금까지 녀석이 실수하길 기다리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면, 이제는 내가 힘으로 찢어가며 기회를 만들어낼 것이다.

'씨발.'

그러자 분신도 내 바뀐 스타일에 맞춰 움직임이 변화했다.

이제는 오히려 녀석이 내 창을 흘려내기 시작한 것이다.

힘으로 찢으며 기회를 만들어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도록 애초에 차단해 버리려는 의도였다.

'어디, 언제까지 따라올 수 있나 보자고.'

나도 곧바로 녀석의 움직임에 맞춰 스타일을 바꿔 나갔다.

* * *

└뭐야? 왜 분신의 움직임이 렌보다 빨라? 진짜로 렌은 평균 스텟도 안되는 거야?

└우와. 진짜 미쳤땈ㅋㅋㅋㅋㅋㅋㅋㅋ 그 짧은 순간에 도대체 몇 번이나 움직임을 바꾼 거임?

└서로 계속해서 상대 스타일에 역카운터를 치네 ㅋㅋㅋ 진짜 개쩐다···

└와··· 내가 지금 하위 리그를 보고 있는게 맞아?? 나 지금 소름 돋았음;; 이렇게 수준 높은 경기를 보게 될 줄이야..

└진짜 조오온나 기대된다. 얘 빨리 상위 리그로 올려보내. 진행 시켜, 어서!

└스텟 차이가 제법 나 보이네. 도대체 렌의 원래 스텟이 얼마나 낮았던 거임? 도대체 뭔 짓을 했길래 스텟이 저렇게 뻥튀기될 수 있는 거지? 여기서 성계 특전까지 받으면 훨씬 더 강해지는거아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