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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피의 여명(2)

나는 본능적으로 나무를 박찼다.

콰과과광!

뒤이어 울리는 폭음.

잘게 쪼개진 나무 파편들이 요란하게 내 몸을 때렸다.

'젠장.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그런 생각이 내 머릿속을 뒤흔들었지만, 나는 일단 숲의 중심부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일단 어떻게 해서든 아르웬을 떼어놔야 한다.

그때 내 등 뒤로 빠르게 날아오는 뾰족한 물체가 느껴졌다.

뾰족한 물체는 싸늘한 냉기를 머금고 있었다.

'정령 마법!'

어쩐지 마나의 유동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싶었다.

기존의 마법은 마나를 가공해서 발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나가 가공되는 게 느껴지지만, 정령 마법은 순수한 자연의 마나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발동되더라도 느끼기가 쉽지 않았다.

콰광! 콰과과광! 콰광!

내가 피한 얼음 마법들이 바닥에 닿으며 요란한 소리와 함께 터져나갔다.

평평했던 흙바닥이 순식간에 난자되며 깊은 구덩이 여러 개가 만들어졌다.

'그나마 다행이야.'

시력을 제외한 초감각과 마력장은 눈으로 보지 않아도 어떤 공격이 날아오는지 알 수 있었다.

거기에 시력까지 추가되니 공간 자체를 읽을 수 있는 느낌이었다.

덕분에 마법을 피하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물론 공격은 꿈도 못 꾸겠지만.'

서둘러 맵의 중심부까지 향해야 한다.

그곳에는 여전히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있을 터.

그들 사이로 섞여들어 가서 아르웬의 타깃을 다른 플레이어들에게로 돌려야 한다.

'가능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야.'

악마의 눈으로 확인한 그녀의 육체 스텟은 코메인 이벤트에 참가한 플레이어들의 평균 수준.

반면에 특전과 천둥의 숨결까지 켠 내 민첩은 70.

그리고 체력은 67이었다.

이 정도면 중심부까지 어떻게든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짜 개사기네.'

현재 아르웬이 소환한 정령은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최상급 물의 정령일 것이다.

아무런 영창도 없이 고위급 마법을 계속 날릴 수 있다니.

저 정도의 고위 정령사를 만난 건 처음이었는데, 보면 볼수록 사기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저렇게 마법을 난사한다면 애초에 다가갈 수가 없다.

결국 마력이 다 떨어질 때까지 도망 다니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나마 맵이라도 넓어서 다행이야.'

좁은 맵이었다면 얼마 가지 못해서 도망갈 공간을 모두 차단당한 채 마법 폭격을 당했을 것이다.

챙! 콰광! 챙! 챙! 챙!

천둥의 숨결로 인해 체력이 빠르게 줄어들었지만, 신경 쓰지 않은 채 전속력으로 달리다 보니 어느새 숲의 중심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무가 잘리고, 곳곳에 구덩이가 파인 숲속에서 엄청난 숫자의 플레이어들이 싸우고 있는 게 보였다.

'됐어. 이제 저들 사이에 숨어서 은신으로 빠져나가면 돼.'

나는 서둘러 어지러이 엉켜있는 플레이어들 사이로 몸을 날렸다.

그러자 나를 발견한 플레이어들이 흠칫 놀랐다.

"뭐, 뭐야!"

"네임드다!"

아니, 날 쫓아오는 아르웬을 보고 놀란 거였군.

플레이어들이 흠칫하며 뒷걸음질 치는 사이로 숨어든 나는 곧장 침묵의 망토 스킬을 사용했다.

그리고 다시 숲의 중심부를 빠져나가기 위해 방향을 틀었다.

쐐애애애애액!

순식간에 생성되어 날아오는 얼음 마법들.

'뭐야!'

물의 최상급 정령이 날린 수십 발의 얼음 화살 마법은 정확하게 나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콰과과과과과광!

나는 은신을 풀고 땅을 박찬 덕분에 가까스로 마법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고개를 틀어 아르웬을 보니, 그녀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도대체 왜!'

나는 곧장 몸을 일으켜 다시 전속력으로 도망쳤다.

고개를 돌려 힐끗 보니, 아르웬이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나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순간 내가 그녀의 타깃으로 고정될 만한 일이 있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씨발. 그딴 게 어딨어.'

애초에 오늘 처음 본 사이다.

내가 그녀의 닉네임을 알고 있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1회차의 기억 때문.

내가 그녀에게 미운털이 박힐 이유가 없었다.

'젠장. 일단 거리를 최대한 벌리자.'

천둥의 숨결까지 켜면 내 민첩이 아르웬보다 6 포인트 높다.

결국 더 빨리 도망쳐서 그녀를 떼어놓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띠링!

[<벽력>이 발동됩니다.]

꽈아아아아아아앙!

마침 벽력이 발동되며 순간적으로 민첩 스텟이 급상승했다.

내가 박찼던 바닥에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기며 전류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덕분에 은신하며 플레이어들 사이로 녹아드느라 줄어들었던 거리를 다시 늘릴 수 있었다.

[남은 체력 : 61%]

천둥의 숨결 때문에 체력은 빠르게 떨어지는 중.

하지만 천둥의 숨결을 끌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그녀를 떼어놓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면으로 최대한 체력을 흡수할 수밖에 없어.'

마침 피의 강화 능력 덕분에 체력을 흡수하면서 스텟도 조금이나마 올릴 수 있다.

나는 주변에 플레이어들이 밀집해 있는 방향으로 빠르게 내달렸다.

[현재 생존자 수 : 3,397 명]

[킬 수 현황]

[1위. '렌' 30킬]

[2위. '빅터' 29킬]

[3위. '아이젠' 18킬]

[4위. '아론' 17킬]

[5위. '아르웬' 16킬]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66:57:03]

어느새 태양이 중천에 걸려 있었다.

아르웬에게서 도망치기 시작한 지 어느덧 3시간째.

그녀는 여전히 날 죽이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다.

'씨발.'

그래서 짜증나는 마음에 창을 힘껏 휘둘렀다.

"윽!"

띠링!

[플레이어 '석춘배' 를 처치했습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8/30)]

[3분 이내에 다른 생명체를 처치하지 못하면 상승분이 초기화됩니다.]

[남은 체력 : 47%]

이게 지금 뭐 하는 짓거리인지 모르겠다.

다른 플레이어를 죽여야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이라니.

나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플레이어도 아니고, 미션을 위해서도 아니다.

그저 살려면 어쩔 수 없이 플레이어들을 죽여야 했다.

'안 그럼 체력이 다 떨어져서 내가 죽게 될 테니까.'

그래도 다행인 점이라면 아르웬과의 거리가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현재 내 민첩은 피의 강화로 인해 상승한 8%까지 포함하여 74 포인트.

덕분에 50미터에서 현재는 100미터까지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이 정도 거리 차이가 나니까 더 이상 정령 마법은 안 날아오네.'

하긴, 이 정도 거리에서 마법이 날아오면 내가 각도를 조금 트는 것만으로도 모두 피할 수 있을 테니까.

"헉, 허억, 헉, 헉."

나는 또다시 플레이어들을 찾아 나섰다.

웬만하면 3분 안에 처치하고 싶었다.

그래야 스텍을 계속해서 쌓아 올릴 수 있다.

고개를 돌려 힐끗 아르웬을 바라보니, 그녀 또한 제법 지친 기색이었다.

그녀의 체력 스텟은 58.

내 체력이 67이고, 천둥의 숨결로 체력이 50% 빠르게 깎여나갈 테니 아르웬의 체력 스텟이 대략 70% 정도 높은 셈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14명의 플레이어를 죽이며 14%의 체력을 추가로 회복한 상황.

그걸 감안하면 그녀의 체력도 60% 안팎으로 남았을 것이다.

'이대로 4시간 정도만 더 버티면 돼.'

물론 그 전에 거리가 충분히 벌어져서 그녀를 떨어뜨리는 게 더 베스트겠지만.

띠링!

그렇게 한참을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콜이 울렸다.

뭐지? 울릴 이유가 없는데.

[6급 능천사能天使 '시노엘'이 서브 미션을 걸었습니다.]

―아르웬과 일대일로 싸우기.

[보상 : 2,000 P]

'서브 미션이 온 거였군.'

미션의 내용을 본 나는 미련 없이 시스템 창을 닫았다.

잠깐만.

'시노엘?'

팀 성장에서 만난 천사잖아?

순간 어처구니가 없었다.

물론 내가 싸움을 회피한 채 도망 다니고 있기에 답답함을 느끼는 신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저 녀석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니면 죽을까 라며 호기심을 갖는 신이 더욱 많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이른 시기에 서브 미션이 내려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내가 죽길 바라니까 저런 서브 미션을 내렸다는 뜻이겠지.'

이제 와서 내가 죽길 바란다라.

갖지 못하는 장난감, 차라리 부숴버리겠다는 꼬인 심리인 게 분명했다.

'무시하자.'

나는 서브 미션을 무시한 채 계속해서 도망 다니는 것에 집중했다.

[현재 생존자 수 : 3,003 명]

[킬 수 현황]

[1위. '렌' 58킬]

[2위. '빅터' 37킬]

[3위. '아이젠' 25킬]

[4위. '아론' 21킬]

[5위. '아르웬' 17킬]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63:02:44]

어느새 석양이 하루의 마지막 빛을 뿌리며 지평선에 걸쳐 있었다.

이젠 아르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허억, 허억, 허억, 허억."

내 남은 체력은 23%.

한계치에 다다르기 직전에서야 아르웬을 떨쳐놓을 수 있었다.

'저 미친년.'

결국 아르웬은 끝까지 나만 쫓아왔었다.

그 사이 그녀가 죽인 플레이어라고 해봤자, 네임드임을 못 알아보고 겁 없이 달려든 부나방 한 마리뿐.

그녀와 반대로, 난 58킬이나 했다.

2위인 빅터와는 무려 21킬 차이.

'씨발. 살려면 어쩔 수 없었으니까.'

이렇게 절박한 심정으로 플레이어들을 찾아다닌 건 처음이었다.

나는 그녀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안심하지 않고 한참을 더 도망친 다음에야 거대한 나무에 등을 붙였다.

[<물약:회복의 손길>을 꺼냈습니다.]

[<물약:회복의 손길>]

[강력한 회복의 효과가 깃들어 있는 물약이다. 복용하면 체력이 빠르게 회복된다.]

[단, 마신 이후에 휴식 시간을 갖지 않으면 회복이 되지 않는다.]

[등급 : 희귀]

그리고는 인벤토리에서 곧장 물약을 꺼내 마셨다.

무려 5천 골드짜리 고급 포션이었다.

"이제야 좀 살겠네."

조금 있으면 깜깜한 밤이 찾아온다.

온종일 뛰어다닌 플레이어들은 모두 휴식 시간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밤에만 활동하는 플레이어들이 움직이기 시작하겠지.

가령, 암살자 같은.

'최대한 빨리 체력을 회복시켜야 해.'

여기서 체력이 더 떨어지면 곤란하다.

회복 포션을 마신 나는 곧장 나무 위로 올라갔다.

나뭇가지 하나에 몸을 의지한 채 쉬어야 하므로 불편하겠지만, 내 몸을 숨기기엔 이만한 공간이 또 없다.

나뭇잎들이 날 숨겨줄 테니까.

띠링!

[그믐달이 떴습니다.]

[<로브:달의 메아리> 가 달의 힘을 빌려와 모든 스텟이 3% 상승합니다.]

밤이 찾아오자 로브의 효과 덕분에 모든 스텟이 3% 상승했다.

'이런 식이구나.'

하늘을 보니 그믐달이 보였다.

지구와는 달리 파란색을 띠고 있는 달이.

다음 날 아침, 휴식을 넉넉하게 취한 나는 육포 몇 조각으로 간단하게 끼니를 때운 후 나무에서 내려왔다.

다행히 간밤에는 아무 일도 존재하지 않았다.

암살자들이 몇 명 지나가긴 했지만, 그때마다 침묵의 망토를 쓰니까 날 찾지 못한 것이다.

'아르웬만 조심하자.'

이제 아레나에 남아있는 네임드는 딱 한 명 뿐이다.

다른 한 명은 어제 아르웬 손에 죽었으니까.

결국 이 아레나 안에서 그녀를 제외하고 일대일로 날 압도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제 하루 동안 타의에 의해 맵을 한 바퀴 돌면서 충분히 검증했다.

'내가 살아있다는 게 그 증거지.'

어제 하루 동안 내가 죽인 플레이어의 숫자는 58명.

그중 단 한 명이라도 내가 감당하기 버거운 상대가 있었다면 난 아르웬의 정령 마법에 죽었을 것이다.

'아르웬만 조심하자. 아르웬만.'

다행히 아르웬은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주변에선 마법이 난무하며 폭음이 울릴 테니까.

나는 바다를 등지고 숲의 중심부를 향해 걸었다.

지금 상황에선 오히려 중심부가 안전할 수도 있다.

'아르웬 때문에 모두가 숲의 중심부를 벗어나고 있었어.'

피식자는 포식자의 위치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포식자는 또다시 피식자를 따라 이동한다.

결국 어제와 달리, 오늘은 중심부가 한산할 것이다.

중심부에 가까워질수록 내 생각이 맞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역시 별로 없네.'

어차피 킬 수는 넉넉한 상황.

굳이 아득바득 플레이어들을 죽이러 다닐 필요 없었다.

이번 경기의 내 최우선 과제는 생존.

잔챙이들을 죽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사락- 사라락-

그때 누군가의 옷자락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내 마력장에 한 명이 포착됐다.

검을 들고 있는 걸 봐서는 아르웬은 아니었다.

'좋아. 사냥하자.'

판단을 마친 나는 침묵의 망토 스킬을 쓰고 빠르게 검객을 향해 다가갔다.

암습이라는 효율적인 수단이 있는데 굳이 무기를 맞댈 필요는 없었다.

하늘을 감싼 나뭇잎 덕분에 아침이 밝아오고 있음에도 주위가 제법 어둑어둑했다.

근처까지 다가가자 사냥감의 모습이 확실하게 보였다.

악마의 눈으로 확인해 보니 스텟은 평균보다 조금 낮았다.

"휴우. 다행이군. 역시 이쪽이 사람이 별로 없을 줄 알았어."

검객은 혼잣말하며 검을 내려놓은 채 나무에 기대앉으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자세를 낮추고 최대한 은밀하게 녀석을 향해 다가갔다.

제법 가까워졌음에도 빼곡한 나무들이 나를 숨겨 준 덕분에 녀석은 날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렇게 녀석과의 거리가 5미터 정도 남았을 때였다.

'지금!'

나는 호랑이가 먹잇감을 낚아채듯, 순간적으로 도약하여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헉!"

녀석이 헛바람을 일으키며 바닥에 내려놓은 검을 허둥지둥 집어 들었다.

하지만 걸터앉은 자세 때문에 내 창을 막아내진 못할 것이다.

그렇게 녀석의 가슴에 창을 꽂아 넣으려 할 때였다.

'뭐, 뭐야!'

엄청난 마나 유동과 함께 사방에서 수많은 얼음 화살이 형성되었다.

숫자는······.

'씨발. 마력장으로도 읽어내질 못하다니.'

너무 많아서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얼음 화살은 내가 도망칠 수 있는 64방위의 진퇴로를 모두 점한 채 날아들었다.

이 정도의 압도적인 마법을 펼칠 수 있는 존재는.

'아르웬!'

그녀가 나를 잡기 위해 덫을 놓은 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피하는 것은 불가능. 데미지라도 줄여야 해!'

나는 천둥의 숨결을 켜는 동시에 마법 범위의 최외곽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바닥을 박찼다.

꽈아아아아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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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피의 여명(3)

세상엔 숙명이란 걸 가지고 태어나는 존재들이 있다.

그들은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는 대신에, 그 숙명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하이엘프.

모든 엘프들의 정점에 서 있는 존재.

단 다섯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엘프들의 수호자.

아르웬 세레스피로도 그런 숙명을 지고 태어났다.

"아르웬, 내 딸아. 넌 우리 엘프들의 보물이다."

그리고 아르웬은 그런 하이엘프들 중에서도 더 특별한 존재였다.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다니!"

"무려 5천 년 만에 등장한 정령왕의 계약자!"

모든 엘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연 친화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래서 정령들은 엘프들에게 떼어놓을래야 떼어놓을 수 없는 영혼의 동반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령왕이란 존재는 아무나 소환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중간계의 조율자라 불리는 드래곤과 비견되는 초월적인 존재였으니까.

"보거라, 아르웬. 참 신기하지 않니? 이 세상은 저마다 균형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단다. 우리 엘프들 역시 자연에 속한 일부분임을 잊어선 안 된단다."

"느껴보렴. 바람의 시원함을, 불의 포근함을, 물의 깨끗함을, 땅의 단단함을. 이곳이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소중한 집이란다."

고요하면서도 생기가 넘치는 엘프들의 세계.

생명의 어머니, 거대한 세계수는 엘프들에게 보금자리와 먹을 것을, 그늘을, 마실 것을 아낌없이 나눠주었다.

아르웬은 그 헌신에 감사해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내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평화로운 숲속에 전운의 불꽃이 불어닥쳤다.

황폐해져 가는 인간들의 땅.

그들은 식량이 부족해지자, 풍요로운 엘프의 땅을 노리고 쳐들어왔다.

"바람의 정령이여! 나와의 계약에 따라 저들에게 바람의 매서움을 보여주세요!"

"물러서지 마라! 방패병! 마법에 대비하라! 엘프들의 숫자는 기껏해야 10만. 우리가 이길 수 있다! 집에서 굶주리고 있는 처자식들을 생각하라!"

그렇게 시작된 10년간의 전쟁.

대다수의 인간들은 엘프보다 약했지만, 극소수의 강한 인간들이 문제였다.

그들은 번쩍거리는 검을 휘두르며 엘프들을 휩쓸었다.

"아르웬, 내 딸아. 네가 저 인간들을 상대해주어야겠구나. 너에게 너무 큰 짐을 맡겨 미안하다."

"아니에요, 아버지. 저에게 맡겨주세요."

그렇게 갓 200살, 엘프들의 나이 기준으로는 막 성인이 된 아르웬이었지만, 그녀는 전쟁 속 가장 치열한 곳에 몸을 던졌다.

그녀를 막을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타고난 정령 친화력 덕분에 그녀는 최상급 정령도 우습게 소환할 수 있었으니까.

"마녀다!"

"정령왕의 화신이 나타났다. 모두 퇴각하라!"

전선의 가장 치열한 곳에 참전한 그녀는 강해 보이는 인간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죽였다.

그녀에게 찍힌 강한 인간은 그 어느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럼에도 전쟁은 인간들에게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동반자로서 참전한 호인족 왕의 딸이 죽었다고 하는구나······."

"하이엘프인 가엔님 마저 인간들의 검에······."

"숲이, 숲이 불타고 있습니다! 숲이!"

"인간들이 세계수 코앞까지 다가왔습니다!"

엘프뿐만이 아니라 숲에서 함께 공존해오던 호인족, 드워프, 낭인족, 묘인족까지 모두 인간들에게 맞서 싸웠으나 전쟁의 화마는 모두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아르웬의 얼굴에서는 표정이란 것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결국.

10년간의 대전쟁, 그 마지막에는 결국 아르웬밖에 남지 않았다.

"후후, 정령왕을 불러내길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그런 초월적인 존재를 불러내는 대엔 많은 마나가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지."

"정령왕의 화신도 마나가 없으니까 별거 아니군. 그 포동포동한 엉덩이를 흔들며 재롱을 부린다면 살려줄 수도 있는데. 어때, 재롱 한번 부려 볼 텐가?"

하지만 불행하게도, 인간들은 여전히 너무 많았다.

대전쟁의 끝은 결국, 엘프들의 패배였다.

마구잡이로 베여지는 나무들. 불타는 숲. 피비린내로 가득한 연못. 그리고 그 위를 밟고 지나가는 더러운 인간들.

'다시 태어난다면, 너희 인간들을 반드시 깡그리 죽여버리고 말겠어.'

아르웬은 남은 마나를 끌어모아 최하급 바람의 정령을 소환했다.

그리고 살아생전의 마지막 마법을 시전했다.

서걱-

바람의 칼날이 아르웬의 목을 깔끔하게 갈랐다.

살아남아 인간들에게 치욕을 당하느니,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게 치열한 전쟁에서 일생의 마지막을 보낸 아르웬은 원한에 사무치며 안식에 들었다.

하지만.

[콜로세움의 챔피언이 되면 소원을 한 가지 이루어드립니다.]

[콜로세움에 입장하시겠습니까?]

그녀에게 아직 기회가 남아 있었다.

그렇게 들어온 콜로세움.

그 안에는 그녀가 증오해 마지않는 인간들로 득실거렸다.

하지만 강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10년 대전쟁의 여파 때문인지 아르웬은 본능적으로 강한 인간들만 찾았다.

새로운 팀에 적응하며 맞이하게 된 첫 경기.

아르웬은 최상급 물의 정령을 소환해 아레나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을 난도질해버렸다.

[최초의 업적!]

[콜로세움에서 피의 잠식전이 시작된 이래 최초로 혼자서 모든 플레이어들을 죽였습니다.]

['퍼포먼스 오브 더 블러드' 보너스로 7,000 P를 지급받았습니다. (팀 '절망' 수수료 3,000 P 차감)]

['파이트 오브 더 블러드' 보너스로 7,000 P를 지급받았습니다. (팀 '절망' 수수료 3,000 P 차감)]

[플레이어 '아르웬' 에게 컨텐더(도전자)의 자격을 부여합니다.]

그 압도적인 강함을 인정받은 아르웬은 고작 한 경기 만에 컨텐더의 자격을 획득했다.

그리고 맞이하게 된 두 번째 경기.

―네임드 vs 네임드! 블러드나이트 200에서 격돌한다!

강한 인간이 출전한다는 소식에 그녀는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네임드라고 불리는 인간부터 찾아 나섰다.

하지만 막상 마주친 강한 인간은 무척 실망스러웠다.

"미, 미친! 캐스팅도 없이!"

인간은 고작 단 한 번의 격돌만으로도 전의를 상실한 채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녀보다 훨씬 빠르고, 훨씬 강했지만 그뿐이었다.

강한 인간이라고 불리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지금까지 만났던 강한 인간들은 눈빛만으로도 찌르르 울리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으니까.

아르웬은 그다지 큰 힘을 들이지도 않은 채 도망치는 강한 인간을 잡아 죽일 수 있었다.

'더 강한 인간이 필요해.'

약한 인간을 아무리 많이 죽여도 그녀의 마음 깊숙한 곳에 스며든 증오는 씻겨지지 않았다.

오직 강한 인간을 죽일 때에만 그 증오가 조금씩 사라졌다.

그래서 또 다른 강한 인간을 찾기 위해 발걸음을 돌리려 할 때였다.

강한 인간을 죽인 자리에 또 다른 인간이 하나 숨어있었다.

'특이한 마나의 파장이네.'

선천적으로 타고난 마나 감응력 덕분에 이상함을 눈치챌 수 있었다.

코까지 내려오는 이상한 가면을 쓴 채 특이한 마나의 파장을 가지고 있는 사내.

잃었던 흥미가 다시 새록새록 솟아났다.

특이한 마나를 가지고 있다는 건 강한 인간일 가능성이 컸으니까.

거기다가 쓰고 있는 가면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분명 강한 인간일 것이다.

하지만 사내는 아르웬의 기대를 배반했다.

'도망쳐?'

그녀에게 덤빌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전력으로 도망치기 시작한 것이다.

'약한 인간이었어.'

그런 사내의 모습에 아르웬은 상대를 약한 인간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리고는 최상급 물의 정령으로 사내에게 마법을 난사했다.

사내를 빠르게 죽이고 다시 강한 인간을 찾아 나서야 한다.

그때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발생했다.

'피해?'

사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마법들을 피한 것이다.

아르웬은 다시 한번 마법들을 뿌렸다.

콰광! 콰과과광! 콰광! 쾅!

하지만 마법은 이번에도 사내를 스쳐 지나가기만 할 뿐이었다.

호기심이 생긴 그녀는 사내를 빠르게 쫓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인간들이 그녀에게서 도주를 시도했다.

그리고 아르웬은 단 한 번도 도망치는 인간을 놓친 적이 없었다.

'강한······ 인간······?'

아르웬은 고개를 갸웃했다.

사내가 마법들을 피하는 모습을 보니까 강한 인간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아리송하달까.

하지만 이어지는 모습에서 아르웬은 사내가 강한 인간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크아악!"

"이놈! 윽!"

길을 막아서는 플레이어들을 단숨에 찢어버리며 돌파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내는 처음 상대했던 강한 인간보다 훨씬 센 것 같았다.

'강한 인간이 맞았어.'

아르웬은 몸이 달아올랐다.

어서 사내를 죽여 증오를 조금이나마 씻고 싶었다.

그래서 더욱더 강한 마법들을 쏘아대며 사내를 쫓았다.

'저 인간은 어떻게 정령 마법을 잘 피하는 걸까.'

하지만 사내와의 거리는 멀어지면 멀어졌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령 마법은 분명 감지하기가 힘들 텐데.

그렇게 7시간을 쫓았지만, 사내를 잡지 못했다.

결국 아르웬은 최하급 물의 정령을 불러 사내를 먼발치에서 감시하게끔 하고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체력을 완벽히 회복한 아르웬은 사내를 죽이기 위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어제와 같은 방식으론 안 돼.'

결정적인 한 수를 준비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최하급 물의 정령이 전해준 정보를 통해 사내가 이동하는 방향을 알아낸 아르웬은 삥 돌아서 사내를 앞질러 갔다.

이동해 보니 숲의 중심부였다.

'오늘에야말로.'

아르웬은 최상급 물의 정령을 불러 미리 마법을 시전했다.

그리고 그 마법들을 곳곳에 숨긴 채 사내가 다가오길 기다렸다.

그런데 사내를 잡기 위해 놨던 덫에 엉뚱한 인간이 들어왔다.

무척 약해 보이는 인간이었다.

아르웬은 약한 인간이 덫을 빠져나가길 기다렸지만, 약한 인간은 나갈 생각을 하지 않은 채 나무에 기대 쉬기 시작했다.

'죽여버릴까.'

순간 빠르게 약한 인간을 죽여 땅의 정령으로 묻어버릴까 생각했지만, 하필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강한 인간이 덫에 거의 다 도착한 것이다.

그래서 아르웬은 일단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다행히 강한 인간은 덫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됐어.'

아르웬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얼마 만에 지어보는 미소인지 몰랐다.

강한 인간이 약한 인간을 먹잇감으로 삼은 채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헉!"

충분히 다가왔다고 생각한 강한 인간이 약한 인간을 죽이려고 도약했다.

'엘레스트라.'

그와 동시에 아르웬이 최상급 물의 정령을 불렀다.

그걸 신호로 숨겨두었던 수많은 얼음 화살들이 사내를 향해 쏘아졌다.

사내가 피하고자 몸을 날렸지만 소용없었다.

그럴 줄 알고 일부러 광범위하게 범위를 설정해 뒀으니까.

그때였다.

꽈아아아아아아앙!

사내 주변으로 강한 뇌전이 퍼져나가더니, 순간 이동을 한 것처럼 마법의 범위를 벗어났다.

'저건 뭘까.'

그 광경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아르웬은 본능적으로 사내를 뒤쫓았다.

거리가 벌어지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젠장!"

아르웬이 쫓아오는 걸 본 사내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엘레스트라, 바닥을 얼음으로 얼려 줘.'

뒤따라오는 최상급 물의 정령이 사내가 진행하는 방향으로 얼음 구체를 쏘았다.

얼음 구체는 흙바닥에 닿더니 싸늘한 냉기로 퍼지며 바닥에 빙판을 만들었다.

'이 틈에 따라잡자.'

아르웬이 속도를 올렸다.

그때였다.

사내가 당연히 빙판에 미끌려 넘어질 줄 알았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빙판을 건너기 시작했다.

사내의 발바닥이 은은하게 빛났다.

'와, 마나로 성질 변환을 시킨거야?'

사내는 아르웬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고수였다.

그러자 아르웬의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어서 죽이고 싶어. 저 강한 인간은 죽이면 어떤 느낌이 들까?'

일단 자신을 고생시켰던 저 허벅지를 자르면서 시작하고 싶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사내와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결국 그날도 아르웬은 사내를 잡지 못했다.

포기한 척한 다음 다시 몰래 다가가 기습했는데도.

'아, 빨리 죽이고 싶은데!'

아르웬이 온몸을 배배 꼬았다.

자꾸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으니 안달이 났다.

[현재 생존자 수 : 1,824 명]

[킬 수 현황]

[1위. '렌' 157킬]

[2위. '빅터' 61킬]

[3위. '아이젠' 48킬]

[4위. '아론' 40킬]

[5위. '한소호' 39킬]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23:33:42]

남은 시간은 23시간.

이제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강한 인간은 잡힐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마법을 날려도, 바닥에 빙판을 깔아도, 얼음의 벽을 쌓아놔도 모두 소용이 없었다.

'어떻게 해야 죽일 수 있을까.'

한참을 고민해 봤지만,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다.

죽이고 싶은데.

잡히기만 하면 죽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르웬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기습도 못 해.'

강한 인간은 그녀와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지지 않았다.

지금도 아르웬이 휴식을 취하는 곳에서 불과 100미터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몇 번 기습한 이후로 곁에서 아예 그녀의 움직임을 하나부터 열까지 확인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아르웬은 100미터 밖에서 쉬고 있는 강한 인간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강한 인간도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허공에서 마주친 눈빛.

그의 눈빛은 보는 것만으로도 몸을 찌르르 떨리게 했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죽이고 싶게 만드는 인간은.

그때 정찰을 나갔던 최하급 물의 정령, 운디네가 날아오더니 아르웬에게 속삭였다.

운디네의 귓속말을 듣는 아르웬의 눈빛이 반짝였다.

'앗, 정말 좋은 방법인데?'

왠지 내일은 강한 인간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잡히기만 하면.

마구 예뻐해 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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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피의 여명(4)

그녀가 펼쳐둔 덫에서 빠져나온 이후로도 나는 한참을 도망다녀야 했다.

'미친년.'

진짜 미친년인 게 틀림없다.

그게 아니라면 아르웬의 행동이 설명되지 않았다.

'설마 이틀 내내 나만 쫓아다닐 줄이야.'

미션이고 뭐고 안중에도 없다는 모습이었다.

아마 오늘도 나만 쫓아다니겠지.

나는 살면서 처음 당해본 스토킹에 진저리를 쳤다.

'도대체 나만 따라다니는 이유가 뭐야!'

그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아르웬에게 무슨 잘못을 했다고.

'미친년인 게 분명해.'

심지어 갈수록 더 무서워졌다.

처음에는 무표정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표정이 기괴해져 가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며 뺨을 씰룩이고, 때때로 침까지 흘리기도 했다.

애초에 버거운 상대였는데, 미친년인 것까지 알게 된 이상 더욱더 상종을 하고 싶지 않았다.

'씨발. 어떡하지?'

간간이 침묵의 망토를 써서 그녀를 떼어놓으려 했지만, 그마저도 통하지 않는 상황.

처음엔 제법 넓다고 생각했던 맵이, 이제는 숨 막힐 정도로 비좁게 느껴졌다.

미션이고 뭐고 빨리 팜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락- 사락-

아 저 미친년.

또 움직이네.

그녀가 일어나는 모습에 나는 곧장 창부터 챙겨 들었다.

다시 도망다녀야 할 시간이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아, 얘네는 또 시작이네.'

[6급 능천사能天使 '시노엘'이 서브 미션을 걸었습니다.]

―아르웬과 일대일로 싸우기.

[보상 : 2,000 P]

[중급신 '팔라스'님이 서브 미션을 걸었습니다.]

―아르웬에게 도망치지 않기.

[보상 : 5,000 P]

[고신 '페르페스'님이 서브 미션을 걸었습니다.]

―아르웬이랑 좀 싸워 봐라, 이 쫄보 새끼야.

그러고도 네가 남자냐. 고추 떼라 이 자식아.

[보상 : 10,000 P]

[하급신 '벤테시키메'님이 서브 미션을 걸었습니다.]

[대신 '헤카테'님이 서브 미션을 ······.]

[중급신 '메노이티오스'님이 ······.]

무수히 쏟아지는 서브 미션들.

조건은 딱 하나였다.

아르웬과 싸울 것.

심플하기 그지없는 서브 미션.

다만, 그 보상은 전혀 심플하지 않았다.

'싸우는 것만으로도 5만 포인트를 벌 수 있는 날이 오다니.'

합치면 무려 4만 9천 포인트나 되었다.

정말 어마어마한 포인트.

종료 시간이 다가올수록 서브 미션을 회수할 줄 알았는데, 내 예상과 다르게 점점 쌓여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서브 미션들을 무시했다.

'씨발, 조의금도 아니고.'

싸우는 순간 갈기갈기 찢겨 죽을 것이다.

아니, 그냥 죽여주면 차라리 감사할지도 모른다.

저 미친년에게 잡히면 무슨 짓을 당할지 몰라서 두려웠다.

'데스 라인 근처로 가야겠어.'

지난 이틀 동안 아르웬을 피해 달리면서 플레이어들이 몰리는 공간의 패턴을 알게 되었다.

일단 플레이어들이 몰리는 곳으로 향해야 한다.

그래서 피의 강화 스텍을 쌓아 단숨에 거리를 벌려야 했다.

아르웬 덕분에 악마의 눈을 사용하는 게 익숙해져, 스텟이 낮은 녀석들 위주로 죽이고 다닐 수 있게 됐다.

이제는 플레이어들이 몰리는 곳으로 가는 게 유리하다.

'스텟이 높은 녀석들은 뚫고 지나가는 것에 집중하면 돼.'

콰광! 쾅! 콰과광! 쾅!

얼음으로 만들어진 대포알들이 날아오며 흙바닥을 거칠게 파헤쳤다.

이젠 나를 직접 맞추는 대신, 내가 향하는 길목을 끊어버릴 생각인 것 같았다.

'이 정도는 예상했어.'

나는 순간적으로 마나를 다리에 집중시킨 후 근처 나무를 향해 달렸다.

그리고는 높게 솟아오른 나무 위로 순식간에 뛰어올랐다.

내 마나 운용은 무려 특급.

초감각을 배우고, 마력장을 통해 사물을 느끼다 보니 섬세한 마나 컨트롤이 가능했다.

'길이 없으면 다른 길을 찾으면 되지.'

나무 꼭대기까지 오른 나는 곧장 나뭇가지를 박차곤 이 나무에서 저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며 아르웬이 만들어 놓은 구덩이들을 넘어 맵의 외곽을 향해 내달렸다.

챙! 채챙! 챙! 챙!

'역시!'

내가 예상한 대로 외곽으로 나오자 싸우고 있는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보였다.

"씨발! 미친년 놈들이 여길 또!"

"피해! 정신 나간 커플이 온다!"

플레이어들이 나와 아르웬을 보자마자 싸움을 멈추더니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르웬을 꼬리에 매단 채 맵 구석구석을 쏘다니고 있다 보니, 나 또한 미친놈으로 몰리고 있었다.

'하, 씨발······.'

순간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꾹 참은 채 마나가 깃든 창을 휘둘렀다.

콰지지직! 콰직! 콰직!

강렬한 마나가 담긴 창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플레이어 '로우리타' 를 처치했습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4/30)]

[3분 이내에 다른 생명체를 처치하지 못하면 상승분이 초기화됩니다.]

그렇게 마지막 도주가 시작되었다.

[현재 생존자 수 : 572 명]

[킬 수 현황]

[1위. '렌' 379킬]

[2위. '빅터' 144킬]

[3위. '피넛' 101킬]

[4위. '한소호' 98킬]

[5위. '판석' 77킬]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00:43:37]

[남은 체력 : 97%]

"허억, 헉, 허억, 허억."

'저 독한 년.'

아르웬이 거칠게 숨을 내쉬면서 나를 쫓아왔다.

반면에 나는 아주 평온한 상태였다.

플레이어들을 사냥하며 체력을 계속해서 회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이밍 좋게 벽력이 터져줘서 다행이었어.'

살아남은 플레이어의 숫자는 572명.

경기 시작할 때보다 90% 가량 줄어든 숫자였는데, 이상하게 시간이 지날수록 플레이어들을 마주치기가 쉬웠다.

'막판에 녀석들도 킬 수를 끌어올리려고 했나 보군.'

덕분에 나 또한 여유롭게 도망치고 다닐 수 있었다.

푹!

"끄윽!"

띠링!

[플레이어 '키리사메' 를 처치했습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26/30)]

[3분 이내에 다른 생명체를 처치하지 못하면 상승분이 초기화됩니다.]

무려 26 스텍이나 쌓을 수 있었으니까.

쾅! 콰광! 콰과광! 쾅!

무시무시한 얼음 마법들이 밤하늘을 수놓으며 떨어져 내렸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내 눈에는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마법에 의해 파이고, 쓰러진 나무들을 여유롭게 피하며 맵의 외곽을 크게 돌았다.

이제 앞으로 40분 정도면 저 미친년과의 술래잡기도 끝나는 상황.

그래서 몸이 더 가볍게 느껴졌다.

"흐읍!"

서걱-

띠링! 띠링!

나는 어둠 속에서 몰래 숨어 있는 플레이어들을 죽이며 계속해서 스텍을 쌓았다.

그렇게 밤공기를 맞아가며 플레이어들을 사냥하고 다닐 때였다.

"으으, 씨발. 죽어라! 커헉!"

띠링!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30/30)]

[<피의 강화> 로 올릴 수 있는 스텟을 끝까지 채웠습니다.]

[<피의 강화>로 상승한 스텟이 30분간 유지됩니다.]

'오, 이런 특전이 숨어 있었네.'

무려 30분간 더 이상 플레이어를 죽이지 않아도 상승한 스텟이 유지되는 특전이었다.

나는 힐끗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33분.'

30% 상승이 해제 돼도 3분밖에 남지 않는다.

그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런 곳에서 압도적인 강자를 만나 도망친 지 71시간째.

결국 나는 살아남았다.

쾅! 콰과광! 쾅! 쾅!

'저 미친년은 포기할 생각이 없나 보네.'

그럼에도 아르웬은 나를 잡을 생각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남은 시간 내내 달리는 수밖에.

어차피 이쪽으로 돌아 좁은 협곡을 지나면 아르웬과의 거리를 다시 벌릴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숲의 모퉁이를 돌 때였다.

'뭐야!'

저 멀리 얼음으로 된 방벽이 보였다.

도대체 저게 뭐지?

아니, 왜 이런 곳에 얼음으로 된 방벽이 있는 거지?

순간 어떤 생각이 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어제 나를 가로막겠다고 만든 얼음 방벽!'

놀랍게도 얼음 방벽은 초가을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24시간 동안 녹지 않은 채 서 있었다.

빙벽이 정확히 내가 지나가야 할 길을 막고 있는 상황.

'분명 다른 얼음 마법들은 녹아 없어졌는데, 왜 저것만 녹지 않고 남아 있는 거야.'

나는 이를 빠득 갈았다.

어쩐지 아르웬이 마지막에 와서 마법을 난사한다 싶었다.

그녀는 날 여기로 몰아넣기 위해 마법을 쏟아부은 거였다.

'괜찮아. 침착하자.'

예상치 못한 얼음 방벽에 당황하긴 했지만,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나는 서둘러 방향을 틀었다.

그때였다.

쾅! 콰과광! 쾅! 쾅! 쾅! 콰광!

무수히 많은 얼음 마법들이 지면을 때리며 내 앞길을 막았다.

'젠장.'

90도 틀어 이동하는 것이다 보니, 그녀와의 거리가 순식간에 30미터 안쪽으로 줄어들었다.

이대로 내가 계속 나아갈수록 그 거리는 더 빠르게 줄어들겠지.

이래서는 억지로 빠져나가려고 하다가 온몸에 얼음 화살이 꽂힐 것이다.

'씨발, 어떡하지?'

등 뒤로는 데스 라인이 쳐져 있고, 내가 가려던 방향엔 10미터짜리 거대한 얼음 방벽이 세워져 있는 상황.

뛰어넘는 것은 기각.

내가 점프하는 순간 얼음 마법들이 쇄도할 텐데, 공중에서는 그 마법들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얼음 방벽의 두께는 2미터 정도.

어제도 시도해봤지만, 단숨에 뚫고 지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마디로 나는 복싱 경기장의 코너에 몰린 셈이었다.

"허억, 허억, 허억."

아르웬이 무표정한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에 뺨 쪽만 빨갛게 상기된 모습이었다.

뾰족한 귀가 씰룩거렸다.

"안녕. 드디어 잡았네."

"······."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몰라. 그러니까 날 기쁘게 해줘야 해?"

"······."

"좀 더 긴 시간 즐기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시간이 별로 없네. 일단 그 두 다리부터 자르고 다시 얘기하자."

아르웬은 만나자마자 미친 소리부터 하기 시작했다.

그녀를 노려보며 나는 곧장 상황부터 정리했다.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아르웬이 가로막고 있는 방향.'

단 하나뿐.

한마디로 그녀를 뚫고 지나가야 한다.

어쩔 수 없어.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남은 체력 : 91%]

다행히 내 컨디션은 최고에 가깝다. 반면에 아르웬은 지쳐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모습이었다.

거기에 마침 피의 강화 특전까지 켜져 내 모든 스텟이 65%나 상승한 상황.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살아남을 수도 있었다.

'서브 미션 일괄 수락.'

띠링!

[서브 미션을 수락하였습니다.]

―내용 : 아르웬과 일대일로 싸우기

[보상 : 88,000 P]

그사이 서브 미션의 보상도 크게 올라 있었다.

살아남기만 하면 나는 일단 9만에 가까운 포인트를 벌 수 있다.

'어떻게든 쓰러트려 주겠어.'

생각을 마친 나는 곧장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콰지직- 콰직-

쏴아아아아아-

순간 공기 중으로 엄청난 양의 물방울이 흩날렸다.

마치 소나기가 쏟아지는 느낌.

물방울 하나하나에 마나가 담겨있어 닿기만 해도 데미지를 입을 것 같았다.

'미친, 이걸 어떻게 피해?'

나는 곧바로 몸을 뒤로 뺐다.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과광!

엄청난 폭발과 함께 비산하는 돌 부스러기, 작은 나뭇가지들이 내 몸을 두들겼다.

그 틈에 나는 침묵의 망토를 쓴 채 몸을 숨겼다.

하지만 곧바로 날아오는 물 화살에 나는 은신을 풀어야 했다.

'도대체 어떻게 아는 거지?'

침묵의 망토는 은신류 최고위 스킬.

명실상부한 1티어 스킬이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은신을 시도해보는 건, 어떤 상황이나 이유에서 침묵의 망토를 알아차릴 수 있는 건지 찾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녀가 어떤 방법으로 침묵의 망토를 간파할 수 있는 건지 찾아내지 못 했다.

은신을 푼 나는 어떻게든 아르웬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발버둥 쳤다.

'일단 거리를 좁혀야 하는데······!'

쏴아아아아아아아-

이번에는 내 앞에 얇은 얼음 방벽이 생겨났다. 이 정도면 뚫고 들어갈 수 있다.

쾅!

마나를 실은 창으로 전력을 다해 찌르자 폭발음과 함께 얼음 방벽이 생겼다.

그 틈으로 들어가려던 난 곧장 고개를 숙여야 했다.

'헉!'

뚫고 나가는 타이밍에 맞춰 날아온 거대한 얼음 대포알.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온 얼음 마법은 내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가며 뒤에 있는 흙바닥을 때렸다.

콰광!

미사일에 맞은 것처럼 터져나가는 흙바닥.

'제길. 다가갈 방법이 없어.'

캐스팅도, 시동어도 없이 날아오는 마법들.

심지어 무슨 마법이 발현될지 미리 예측할 수도 없었다.

거기다가 곳곳에 얼음 방벽을 세우며 날 압박했다.

나는 계속해서 구석으로 밀려 들어가고 있었다.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00:07:22]

10분도 안 남았는데.

나는 인정하기로 했다.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도, 남은 시간을 버티는 것도 불가능해.'

저 7분이란 시간이면 피할 곳도 없는 구석 끄트머리까지 밀린 채 마법에 난자당할 것이다.

더 구석으로 몰리기 전에 빠져나가야 했다.

그렇다면.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수밖에.

'기회는 단 한번뿐이야.'

실패하면 난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다.

나는 식은땀을 닦으며 창을 고쳐잡았다.

그러자 아르웬이 무표정한 얼굴로 한 손을 내게 내밀었다.

쐐에에에에에엑!

그 손짓에 맞춰 뾰족한 얼음 화살들이 내게 쇄도했다.

'한 번만. 한 번만.'

나는 얼음 화살들을 쳐내거나 피하면서 기회를 엿봤다.

그때였다.

'저기다!'

아르웬이 내게 공격 마법을 쏟아내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그녀에게 도달할 수 있는 작은 틈이 보였다.

물론 그 틈은 내가 지나갈 수도 없을 정도로 작았지만 상관없었다.

'한쪽 팔 쯤이야 얼마든지 주마.'

나는 순간적으로 그 작은 틈을 향해 몸을 쐈다.

푸슉-!

소름 끼치는 피륙음과 함께 터져나가는 내 왼팔.

하지만 덕분에 그녀가 펼쳐 둔 촘촘한 그물 같은 마법들 사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대로 그녀의 목을 꿰뚫는다.

한쪽 팔이 없어도 찌르기는 가능하니까······!

'씨발.'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아르웬이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이 틈을 파고들 거라고 알고 있었어.'

그와 동시에 나를 향해 날아오는 무수한 얼음 칼날들이 보였다.

내가 그녀의 목을 창으로 꿰뚫는 것보다 먼저 내 온몸이 난도질 당할 것 같았다.

띠링!

[<벽력>이 발동됩니다.]

'벽력!'

순간적으로 전기 스파크가 튀며 내 몸이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엄청난 가속을 얻은 나는 쇄도하는 얼음 칼날을 지나치며 그녀의 목을 향해 창을 찔러 넣었다.

아르웬이 눈을 크게 치켜뜨는 게 보였다.

그리고.

서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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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피의 여명(5)

내 창이 아르웬의 목을 베었다.

'얕아!'

하지만 아르웬이 마지막에 몸을 트는 바람에 목을 얕게 베었을 뿐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치명상이긴 했다.

"······!"

아르웬이 무척 놀란 표정으로 목 부분을 감쌌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지 컥컥, 거리며 비틀거렸다.

그사이 나는 구석에서 벗어나 바깥쪽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몸을 빙글 돌리며 창을 아르웬에게 던지고 인벤토리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한쪽 팔밖에 남지 않은 이상 창은 필요가 없었다.

쾅!

뇌전을 머금은 창이 아르웬 앞에 형성된 얼음 보호막과 부딪히며 폭발음을 만들어 냈다.

띠링!

[신체 일부가 크게 훼손되며 체력이 대폭 하락합니다.]

[남은 체력 : 42%]

내가 그렸던 상황은 아니었지만, 일단 최악은 벗어났다.

더 넓은 공간. 이제 어떤 마법이 쏟아지든 적어도 피할 수는 있게 된 셈이었다.

그렇다고 위기를 벗어난 건 아니지만.

띠링!

[<피의 강화> 효과가 종료됩니다.]

피의 강화로 인한 30% 상승은 끝.

온몸에 흘러넘쳤던 힘도 스르르 사라졌다.

저 멀리서 동이 트고 있는 게 보였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3분.

이 시간을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

'도망치는 건 어려워.'

한쪽 팔이 없는 상태에서 전속력으로 달리면 균형이 맞지 않아 금방 넘어지고 말 것이다.

최대한 수비적으로 대응하는 수밖에.

콰직- 콰지직- 콰직-

마나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끌어 올렸다.

그러자 뇌전이 내 온몸을 감싸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몸 곳곳에서 스파크가 터졌다.

하지만 곧장 공격해 들어올 거라는 내 예상과 다르게 아르웬은 여전히 목 부분을 감싼 채 비틀거리고 있었다.

목 끝에서 배어 나오는 피들이 뚝, 뚝 떨어지며 그녀의 새하얀 로브를 붉게 물들였다.

털썩-

갑자기 쓰러지는 아르웬.

'기도 부분이 베였구나!'

순간적으로 상황 판단을 한 나는 아르웬을 향해 달려들었다.

쩌저저저적-

그러자 그녀의 뒤에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서 있던 최상급 물의 정령이 나를 가로막더니 얼음으로 된 방어막을 만들어 자신과 아르웬을 빙 감쌌다.

나를 이곳으로 몰아넣느라 마나를 흥청망청 썼으니, 당연한 거였다.

녀석은 공격을 포기한 채 어떻게든 주인이 죽는 것만큼은 막겠다는 모습이었다.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00:02:17]

'무슨 일이 있어도 죽여야 해!'

[이름 : 아르웬 세레스피로]

[성향 : 절대 선]

아르웬의 성향은 절대 선.

저건 선함의 척도를 나타낸다기 보단 아르웬 본인이 정한 선함이라는 기준을 무조건 행하는 성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선이라는 가치를 지키는 일이라고 깨달았기 때문에 날 죽이러 쫓아다녔겠지.

마치 광신도 처럼.

그렇기에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면 날 죽이려는 행위가 반복될 것이다.

이후에 또다시 만나면 어떤 결과가 펼쳐질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반드시 그녀를 죽여야 했다.

챙! 챙! 챙! 챙! 챙!

하지만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얼음 방어막은 생채기만 남을 뿐, 꿈쩍을 하지 않았다.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00:01:22]

'씨발. 제발 좀!'

챙!

'깨져라!'

챙! 챙!

나는 미친 듯이 방어막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씨발. 하필 한쪽 팔이 없어서 제대로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이럴 땐 창이 최곤데, 그렇다고 한 손으로 창을 휘두를 순 없는 노릇.

나는 무호흡으로 방어막을 계속해서 난도질했다.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00:00:33]

'안 돼!'

다 이긴 경기에서.

이렇게 맥없이 상대를 놓아줘야 한다고?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나는 30초밖에 남지 않았지만 포기하지 않은 채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그때였다.

띠링!

[<벽력>이 발동됩니다.]

꽈아아아아아아앙!

순간적으로 빛이 번쩍! 하더니 얼음으로 된 방어막이 산산조각 났다.

터져나가는 얼음 조각들이 나를 때리며 여기저기에 상처를 만들었다.

'드디어!'

방어막이 깨지자 진이 빠져 보이는 최상급 물의 정령이 보였다.

방어막을 유지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한 것 같았다.

그 모습에 나는 망설임 없이 방어막 안으로 뛰어들었다.

우우웅-

그러자 최상급 물의 정령이 나를 바라보더니 울상을 지으며 두 손을 모았다.

자기 주인을 죽이지 말아 달라는 뜻.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00:00:09]

나는 잠시동안 녀석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쩍-!

아르웬의 목이 바닥을 뒹굴며 사방에 피를 뿌려댔다.

[플레이어 '아르웬' 을 처치했습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1/30)]

[3분 이내에 다른 생명체를 처치하지 못하면 상승분이 초기화됩니다.]

'내가 이겼어.'

나는 쥐고 있던 검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얼마나 힘을 주고 휘둘렀는지, 내 손바닥에서 옅은 핏물이 흘러나왔다.

아르웬이라는 어마어마한 네임드를.

내가 죽였다.

우우우웅-

최상급 물의 정령은 나를 매서운 눈길로 노려보더니 이내 서서히 사라져갔다.

'내가 살려둘 줄 알았냐?'

그 모습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게 걸림돌이 될 존재는.

절대 살려두지 않는다.

띠링!

[경기가 종료되었습니다.]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00:00:00]

때마침 울리는 경기 종료 콜.

72시간이란 짧으면서도 길었던 경기가 막을 내렸다.

순간 몸에 힘이 쭈욱 빠졌다.

어둠이 실시간으로 사라지며 새벽의 여명이 나와 죽은 아르웬을 비췄다.

띠링!

[경기 종료 시점까지 생존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렌' 승리!]

[기본급 x 1 의 승리 수당이 지급됩니다.]

[킬 수에 따른 보너스를 책정합니다.]

[1위. '렌' 388킬]

[2위. '빅터' 146킬]

[3위. '피넛' 102킬]

[4위. '한소호' 101킬]

[5위. '타리' 79킬]

[킬 수 ― 388 킬]

[놀라운 업적!]

[압도적인 킬 수를 기록하셨습니다!]

[추가 보너스를 받습니다.]

[388 킬을 달성하셨기 때문에 기본급 x 3의 보너스를 지급받게 됩니다.]

[압도적으로 킬 수 1위를 달성하셨기 때문에 20,000 P 보너스를 추가로 지급받게 됩니다.]

'진짜 엄청나게 죽여대긴 했구나.'

2위인 빅터와 거의 3배 가까이 차이 나는 킬 수였다.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동안 3위부터 5위까지는 순위가 모두 바뀌어 있었다.

[하위리그-블러드나이트200 의 코메인 이벤트 경기를 종료합니다.]

[파이트 머니로 93,100 P 를 지급받았습니다. (팀 '투지' 수수료 39,900 P 차감)]

[기본급 +5,000 P / 승리 수당 +5,000 P / 추가 보너스 +35,000 P / 서브 미션 수당 +88,000 P / 수수료 -39,900 P]

엄청난 포인트에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수수료를 떼고도 9만 3천 포인트라니?

이전까지 내가 보유하고 있던 포인트가 8만 6천 포인트.

그 모든 걸 다 합쳐도 이번 한 경기의 수익만 못 했다.

'시노엘, 고맙다.'

시노엘을 시작으로 이어진 서브 미션 릴레이.

덕분에 엄청난 잭팟이 터졌다.

[다음 경기부터는 기본급을 10,000 P 로 책정합니다.]

[소속된 팀의 팜으로 이동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풀숲에 어울리지 않는 피비린내.

녹고 있는 얼음 방벽.

그 위를 비추는 새벽의 여명.

그 모든 것들을 뒤로한 채 날 감싸는 하얀 빛에 몸을 맡겼다.

집에 돌아갈 시간이었다.

쑤와아아앙!

게이트가 열리며 한 걸음 내딛자 날 기다리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아세리안, 주창범, 루치아노, 지그, 제이스, 이세연, 새로 들어온 16명의 신입과 3명의 사용인들까지.

모두들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내 등장에 활짝 웃던 주창범이 순간 멈칫하더니 멍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아니, 잘려 나간 내 팔 부분을 바라보았다.

"혀, 형······ 팔이······."

"아, 이거. 경기장 안에서 잘려 나갔네요."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어차피 다 낫게 되니까.

샤라라라라-

때마침 어디선가 나타난 수많은 가루들이 내 왼팔 쪽으로 몰려들었다.

모여든 가루들은 이내 터져나갔던 내 왼팔을 만들며 사라졌다.

띠링!

[모든 상태를 100%로 회복합니다.]

나는 새로 생겨난 왼팔을 꼼꼼하게 움직여 보았다.

부드러운 움직임. 아무것도 걸리는 것이 없었다.

음.

잘 만들어졌네.

그제야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를 반겨주었다.

"이번 경기도 고생 많으셨어요, 형!"

"살아서 돌아오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안우진님."

나는 그들의 환대에 살짝 미소 짓는 걸로 화답하곤, 새로 생겨난 팔을 한번 털어본 뒤 아세리안을 향해 다가갔다.

'뭐야?'

분명 게이트를 통과할 때만 해도 창백한 얼굴로 손톱을 깨물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팔이 생겨나는 잠깐의 사이에 아세리안은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더니 방긋 웃었다.

"어서오세요, 안우진님. 오늘도 고생 많으셨어요. 이번 경기도 잘 봤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차분한 음성.

'내가 잘못 본 건가?'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사인방, 특히 루치아노가 아세리안을 보며 입을 벌리고 있는 걸로 보아 내가 잘못 본 건 아닌 것 같았다.

"아, 예. 이번 경기는 쉽지 않았네요."

"저도 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런 엄청난 괴물이 하위 리그에 들어온 줄도 몰랐거든요. 아, 이럴 게 아니라 일단 식당으로 가요. 파티 준비를 해뒀거든요."

날 잡아끄는 아세리안을 따라 식당으로 향하자 익숙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이건······.

"삼겹살이네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음식이었으니까.

내가 지구 출신이란 걸 알고 있는 아세리안이 나를 배려해서 이세연에게 지구에서 파티할 때 먹는 음식으로 지시한 것 같았다.

"형? 삼겹살을 어떻게 아세요?"

내 혼잣말을 들었는지, 주창범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 저도 지구 출신이니까요. 주창범씨와 같은 한국의."

"네에? 형 한국인이셨어요?"

"뭐라고? 안우진님이 지구 출신이시라고?"

주창범이 경악하며 입을 벌렸고, 다른 사인방들도 놀란 표정이었다.

그중 루치아노가 특히 놀라 보였다.

"혹시 콜로세움에 들어오기 전에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아, 저도 상인이었습니다. 루치아노님과 같은."

"······."

순간 시끌벅적하고 활기차야 할 파티에 침묵이 감돌았다.

내가 지구 출신이라는 것, 거기다 비전투 직종에 있었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커다란 파장을 만들어 냈다.

음.

관객들에겐 몰라도, 같은 팀의 플레이어들에게는 숨길 생각이 없었는데.

단지 그들과 훈련 외적의 대화를 나눌 자리가 없었을 뿐.

이상하게 넉살 좋은 주창범마저도 내 과거사를 물어보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나도 굳이 먼저 나서서 얘기하지 않았던 거고.

"형, 그러면 형도 콜로세움에 들어와서 처음 창을 잡아보신 거예요?"

"네. 저도 여러분처럼 여기서 하나부터 열까지 다 배운 겁니다."

그러자 모두들 선망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 대충 어떤 느낌일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이 한마디를 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여러분도 지금처럼 포기하지 않고 단련하면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 산 증인이 여기 있지 않습니까?"

"오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절대 포기하지 않을게요!"

내 한마디에 모두들 눈에서 불꽃이 이글거렸다.

사실 노력만으로 해낼 수 없는 일이란 게 존재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나 또한 포기하지 않았기에 회귀해서 다시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으니까.

'나쁘지 않네.'

신뢰의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아세리안.

그리고 새로운 다짐을 되새기는 사인방과 신입 플레이어들.

그렇게 시작된 삼겹살 파티에서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띠링!

['퍼포먼스 오브 더 블러드' 보너스로 7,000 P를 지급받았습니다. (팀 '투지' 수수료 3,000 P 차감)]

['파이트 오브 더 블러드' 보너스로 7,000 P를 지급받았습니다. (팀 '투지' 수수료 3,000 P 차감)]

거기에 퍼오블과 파오블 선정까지.

여러모로 기분 좋은 일들만 가득한 밤이었다.

파티가 끝난 후.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운 나는 오랜만에 커뮤니티를 열었다.

이번 경기는 솔직히 반응이 궁금했으니까.

그렇게 커뮤니티에 들어가 올라온 글들을 보았다.

'뭐, 뭐야?'

―검과 정령 마법의 대결. 그러나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별과 별의 싸움. 그 안에서 새로운 별이 탄생하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더니. 어어?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무수히 많은 게시글들.

거의 폭주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그 글들은 모두 한 사람에 관한 얘기였다.

바로 '렌'.

즉, 내 얘기들이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렌 보고 듣보잡이라고 했던 놈들 다 어디 갔냐.

└윗 댓글 내려주세요. 모두 창피해서 수치사 하셨답니다.

└진짜 미쳤다. 이번 경기는 퍼오블이랑 파오블 모두 가져가도 할 말이 없더라.

└얘가 진짜 개쩌는 이유가 강한 것도 강한 건데 전략을 잘 짰음. 도망 다니는 척하면서 다른 애들 다 죽여서 킬 수 1위 먹어놓고 막판에 가서 싸움. 안 그랬음 양패구상 나서 둘 다 초반에 떨어졌을듯.

└막판에 봄? 아르웬 목 떨어져 나가던거 ㅋㅋㅋㅋ 엘프년 물고 빨던 새끼들 화들짝 놀랐을듯 ㅋㅋㅋ

댓글도 모두 내 얘기들 뿐.

피의 여명전은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활약과 그로 인해 조금씩 이름을 알리려던 내 노력이 무색하리만큼 단번에 나를 스타 플레이어로 만들어버렸다.

이게 바로 네임드전의 파급 효과인 모양이었다.

'이건 또 뭐야?'

└렌이 돌아다니면서 먹은 킬 수가 388킬임. 그중 두 번 이상 창을 휘둘러야 했던 애들이 다섯 명밖에 없었음. 한마디로 383명은 원샷 원킬이었다는 건데, 무려 98% 확률임. 지금까지 어떤 생명체도 이 정도로 압도적인 성공률을 보여준 적이 없었음. 이건 단순히 잘 싸우는 걸 넘어서 호인족 같은 사냥 본능이 렌에게도 있다는 거임.

└얜 네임드가 확실! 단지 감추고 있을 뿐.

└근데 우리 팀 애들한테 렌 특징 설명해주고 물어봐도 다들 모른다고 함. 도대체 쟤는 어디 성계 출신일까?

└아ㅏㅏㅏㅏㅏ 궁금해 뒤지겠네. 누가 아는 사람 있으면 속 시원하게 좀 알려줘 봐라. 팀 투지 가지고 있는 애가 누구지?

└얼마 전에 좌천사座天使에서 하급신으로 승급한 아세리안.

2회차를 살아가고 있는데도 처음 알았다.

신들이 천사에서 승급하는 거구나.

천사였을 시절의 아세리안을 상상하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엄청 꼼꼼하고 열정이 넘치는 A급 천사여서 담당 신의 이쁨을 듬뿍 받았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다들 내가 어디 출신인지 궁금한 모양이네.'

그러자 성계 대항전이 더더욱 기다려졌다.

그때 가서 내가 지구 출신이란 게 알려진다면.

그땐 과연 어떤 반응들을 보일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엄청난 이슈를 불러 모을 것이다.

'지구에서 탄생한 첫 네임드.'

그리고 그 이슈는 나를 한층 더 유명하게 만들겠지.

그렇게 되는 순간 기본급이 무시무시하게 상승할 것이다.

최약체 성계, 지구.

그리고 성계 대항전.

거기서 내가 어느 성계 사람인지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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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성계 대항전(1)

블러드나이트 200이 끝난 다음 날 아침.

띠링!

[성계 대항전 '지구'의 참가 멤버로 선정되었습니다.]

[참가 멤버는 각 성계의 상위 1천 명까지 입니다.]

[성계 대항전은 총 10개의 경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최종 우승 시 '차원 특전'을 획득합니다.]

[성계 대항전의 아레나에서는 사망하더라도 부활합니다.]

[1인당 총 5개의 경기에 참가할 수 있으며, 참가 인원 제한은 없습니다.]

[차원 특전은 도박사들이 예상한 비율에 따라 효과가 달라집니다.]

―사냥 실력은 내가 최고(개인 PvM)

―팀웍이 생명이다(단체 PvP)

―스피드 레이스(개인 PvP)

―레이드 보스 사냥하기(집단 PvM)

―스토리 미션(개인 PvP)

―성계 집단 대항전(집단 PvP)

―일대일 최강자(개인 PvP)

―지옥에서 생존하기(개인 PvP)

―스토리 미션(단체 PvP)

―역대 네임드들과의 전투(집단 PvP)

[5개의 경기를 선택해 주세요. 24시간 안에 선택하지 않으면 랜덤으로 결정됩니다.]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데 메시지창이 떴다.

그리고 나열되는 10개의 항목들.

다행히 내가 가장 마음졸이던 부분은 그대로였다.

'1인당 경기 5개까지 참가 가능.'

그렇다는 건 한 경기당 지구에서만 대략 500명이 출전한다는 뜻.

이 조항이 없었으면 지구는 죽었다 깨도 우승하지 못한다.

내가 어떻게 1경기 정도는 승리로 이끌 수 있겠지만, 나머지 9개 경기에서는 승리가 안 나올 것이기에.

물론 나처럼 다른 성계의 네임드들도 여러 경기에 참여하기 때문에 쉽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불가능한 것과 어려운 것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경기당 참가 인원이 어마어마하겠군.'

성계가 12개니까, 무려 1만 2천 명이 출전해 겨루는 초대형 경기였다.

고개를 돌려 4인방을 보니, 모두들 몸을 푸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메시지 창이 뜬 것은 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즉, 팀 투지에서는 나 혼자만 참가한다는 것.

'주창범은 선정될 줄 알았는데 의외네.'

지구는 뛰어난 실력을 가진 플레이어의 숫자가 워낙 적다 보니 주창범 정도면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직 부족했나보다.

한마디로 주창범보다 강한 플레이어가 1천 명이나 된다는 뜻이었다.

'쯧. 더 굴려야겠군.'

경기 항목은 1회차와 동일했다.

아, 물론 나 또한 1회차 때 성계 대항전에 참가하지 못했다.

상위 1천 명 안에 들지 못했으니까.

그래도 워낙 초대형 이벤트였다 보니, 커뮤니티를 통해 어떤 경기가 펼쳐졌고,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개인 PvP 위주로 뛰어야 해.'

그래야 그나마 확률이 높았다.

지구 출신의 플레이어들과 단체 PvP를 뛰면 내가 메꿔야 할 전력의 공백이 너무 클 테니까.

어쩔 수 없이 개인 PvP 위주로 뛸 수밖에 없었다.

나는 미리 생각해 뒀던 것처럼 일대일 최강자, 지옥에서 생존하기, 스피드 레이스, 사냥 실력은 내가 최고, 역대 네임드들과의 전투를 선택했다.

'내 수준은······ 서문창보단 조금 높고, 아르웬에겐 조금 부족했지.'

하지만 미리 이것저것 준비해 둔다면 가능성은 충분했다.

[경기 선택이 완료되었습니다.]

[성계 대항전은 앞으로 2주 후, 블러드나이트 202 경기를 대신해서 열리게 됩니다.]

나는 메시지 창을 닫고 커뮤니티로 접속했다.

플레이어들에게 공지가 나간 동시에 이런저런 정보들이 풀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커뮤니티에 들어가니, 내 예상대로 엄청난 숫자의 게시글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하위 리그, 총 10경기로 구성된 성계 대항전 열린다!

―콜로세움 최초! 성계 단위의 대규모 이벤트!

―오직 하위 리그에서만 가능한 이벤트. 성계 대항전이란?

일일이 게시글들을 눌러 확인해 봤지만, 딱히 특별한 내용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1회차 때와 변함없는 성계 대항전이 펼쳐진다는 것이다.

'다행히 나비효과가 성계 대항전까지 바꾸진 않았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댓글을 확인했다.

신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와;; 성계 대항전이라니 ㄷㄷ 대체 몇 명이 참가하는 경기임?

└하위 리그에 소속된 애들 숫자만 해도 몇억 명 되지 않나? 현실적으로 얘네가 한 번에 뛸 수 있는 맵이 존재하긴 함?

└ㄴㄴ위에 보니까 성계마다 상위 1~1,000명까지만 뽑아서 경기 치른다고 함.

└항상 무림이 최강이라고 입 털던 새끼들 이번 기회에 수준 차이 보여줄 수 있을듯 ㅇㅇ 웨스테로스 가자!

└각 성계 상위 1,000명까지면 네임드랑 컨텐더 몇 명 보유하고 있는지가 중요함 ㅋㅋ 그런 의미에서 알프헤임이 가장 유리할듯.

신들은 저마다 어떤 성계가 가장 강한지 갑론을박을 펼치고 있었다.

'1회차에서는 결국 무림이 우승했지.'

갓 콜로세움에 들어온 신입이라고 할지라도 고수가 아닌 자가 없다는 무림.

그들은 두터운 뎁스 덕분에 성계 대항전을 우승으로 이끌며 모든 스텟 +3 이라는 차원 특전을 얻어낼 수 있었다.

덕분에 안 그래도 강한 무림인들이 상위 리그, 고위 리그 할 것 없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차원 특전은 반드시 우리가 얻어내야 해.'

단순히 내가 강해지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안 그래도 강한 무림이나 알프헤임, 웨스테로스가 차원 특전까지 획득하게 된다면 호랑이가 날개를 다는 격이 될 것이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1회차 때 지구의 순위는 12위.

한마디로 꼴찌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다를 것이다.

'반드시 이긴다.'

지구엔 내가 있으니까.

오후 훈련이 끝나고 저녁 시간.

식사를 마친 나는 곧바로 아세리안의 집무실로 향했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던 아세리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쩐 일이세요, 안우진님?"

"전에 아이템 목록 정리해두고 계셨죠? 혹시 그것 좀 볼 수 있을까 싶어서 왔습니다."

"거기엔 안우진님이 지금 착용하고 계신 것보다 더 나은 아이템이 없을 텐데요?"

아세리안은 의아해하면서도 엄청난 높이로 쌓여 있는 서류 더미들 사이에서 끈으로 깔끔하게 묶어 둔 서류 뭉치 하나를 꺼냈다.

아세리안이 건넨 서류는 못 해도 500페이지는 넘어 보였다.

'대체 어떻게 한 번에 찾아내는 거지?'

나는 아세리안에게 서류 뭉치를 받으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내 키만큼 쌓여 있는 탑이 8개.

아세리안은 그중에서 내가 원했던 서류만 콕 찝어 꺼내는 신기를 보여주었다.

"이번 기회에 상황별로 착용할 수 있는 아이템 세트를 만들어 두려고요. 뭐 예를 들어서 민첩이라던가······."

"293페이지부터 298페이지까지 민첩만 올라가는 아이템들이 있을 거예요."

"근력이라던가······."

"근력만 올라가는 건 112페이지부터 116페이지까지."

"아니면 근력과 민첩이 올라가는 거라던가······."

"그건 417페이지!"

"······."

바로바로 대답하는 아세리안의 모습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 많은 서류들 사이에서 그걸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 거지?

거의 슈퍼컴퓨터에 필적하는 정보 처리 능력.

엄청난 능력의 일면을 엿봐서일까, 생글생글 웃고 있는 아세리안이 오늘따라 유독 대단해 보였다.

"······잘 보겠습니다."

"네에. 저는 그럼 저녁 좀 먹고 올게요. 아, 다른 서류들도 마음껏 보셔도 돼요. 편하게 계세요."

아세리안이 자리를 비운 사이, 아세리안이 찍어준 페이지를 보며 필요한 아이템들을 정리했다.

내게 필요한 건 확정 증가 스텟 아이템.

그것도 근력 올인, 민첩 올인, 그리고 근력과 민첩만 올려주는 아이템 들이다.

'평소라면 지력을 제외하고 모든 스텟을 골고루 올려주는 아이템들을 착용하겠지만.'

이미 어떤 미션이 나올지 알고 있는 상황.

미션에 따라 가장 필요한 스텟들만 올려주는 아이템들을 착용하면 효율이 좋을 것이다.

'정리 진짜 깔끔하게 잘 해놨네.'

서류엔 장비 종류와 효과 별로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정리되어 있었다.

덕분에 아이템 고르는 데 1시간 이상 소요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20분 만에 끝낼 수 있었다.

'다른 것들도 좀 볼까.'

어차피 아세리안도 마음껏 보라고 했겠다, 또 어떤 유용한 정보들이 있을지 궁금했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류 더미들을 하나씩 꺼내 읽어보았다.

지형별 생존 방법, 스킬의 시너지, 무기에 따른 상대 방법, 각 성계 별 스타일의 특징 등등 알아두면 콜로세움 안에서 무척 유용할 만한 것들이 많았다.

'대체 이걸 언제 다 정리해 둔 거지?'

이 정도의 디테일이라면 경기를 직접 보고 아세리안이 직접 하나하나 분석했다는 뜻이었다.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을 텐데······.

"원하는 아이템은 다 찾으셨나요?"

마침 저녁 식사를 끝낸 아세리안이 집무실로 돌아왔다.

"네, 덕분에. 근데 이걸 언제 다 정리해두신 겁니까?"

"아, 남는 시간에 틈틈이 경기들을 보면서 만들었어요. 실전은 안우진님이 그 틀을 다 잡아주셨으니까, 전 이론적인 부분에서 플레이어들을 교육하려구요."

와.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왜 1회차에는 팀 투지라는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거지?

이렇게 유능한 신이 관리하고 있는데?

'이론에 실력까지 겸비하면 분명 생존율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갈 거야.'

다만 내가 지금까지 이론적인 부분을 챙기지 못했던 이유는 딱 하나였다.

이론적인 부분을 가르치기 위해선 내가 겪은 것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놔야 한다.

직접 종이에 쓰면서 중구난방으로 흩어진 정보들을 분류해야 한다는 뜻.

문제는 그걸 정리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들여 이론적인 부분들을 하나하나 정립하기엔 내 시간이 너무 소중했다.

"언제부터 교육에 들어가실 수 있습니까?"

"내용은 괜찮나요?"

"괜찮다마다요. 아마 앞으로 들어오는 신입들의 생존율이 크게 올라갈 겁니다."

"다행이네요. 아직 분석할 게 좀 남아서 몇 주 정도는 더 있어야 교육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내 대답에 아세리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경기를 분석하면서도 이게 도움이 될지 스스로가 확신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정말 새로 들어온 신입들이나 사인방뿐만 아니라, 내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교육을 시작하신다면 저도 듣고 싶습니다."

"오, 정말요? 헤헤, 드디어 저도 안우진님께 트레이닝을 해드릴 수 있는 날이 왔군요!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완전 예쁘게 정리해 드릴 테니까!"

아세리안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몇 주 정도라······.

아마 성계 대항전이 끝난 이후에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벌써부터 아세리안의 이론 교육을 받을 날이 기다려졌다.

아세리안의 집무실을 빠져나와 방으로 돌아온 나는 침대에 털썩 누웠다.

오늘 일과는 끝.

지금부터는 자유 시간이다.

나는 시스템 창을 열어 중개 거래소로 들어갔다.

[보유 골드 : 11,253,070 G]

현재 보유 골드는 1,100만.

이 골드로 또다시 스펙업을 할 생각이었다.

아르웬과 싸우며 느낀 점은 마법 계열에 대한 내 방어력이 무척 취약하다는 것.

그래서 마법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스킬이나 아이템을 구입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한참을 둘러봐도 내가 원하는 종류의 스킬이나 아이템은 보이지 않았다.

'쓸만한 게 없네.'

스텟을 올려주는 스킬이나 아이템들 뿐.

간혹 방어막 마법이 내장되어 있는 마법 무구들이 존재했지만, 그건 원거리 딜러들을 위한 용이었다.

격렬하게 움직이는 근접 물리 계열에게 방어막은 쓸모가 없었다.

그때였다.

'어? 이건 뭐지?'

[<스킬북:마력 상쇄>]

[패시브]

[자신의 마력 수치에 비례하여 마력이 깃든 공격을 상쇄 시킵니다.]

[마력 10 스텟 당 5%의 마력 상쇄]

[최대 50%까지 상쇄 시킵니다.]

[판매가 : 2,800,000 G]

자신의 마력 수치만큼······ 마력이 깃든 공격을 상쇄?

마력을 무시한다는 건가?

그렇다는 건······.

마력 수치가 100이라면 무려 절반이나 데미지를 줄여준다는 것이다.

'사자.'

나는 망설임 없이 구입을 눌렀다.

띠링!

[<스킬북:마력 상쇄> 를 2,800,000 G 에 구입하셨습니다.]

[<소모품:유니콘의 뿔>을 100,000 G 에 구입하셨습니다.]

[<소모품:유니콘의 뿔>을 100,000 G 에 구입하셨습니다.]

[<소모품:유니콘의 뿔>을 100,000 G 에 구입하셨습니다.]

그리고 마력 상쇄를 구입하면서 유니콘의 뿔들도 사들였다.

내 손 위에 생겨난 한 권의 스킬북과 세 개의 뿔.

나는 가장 먼저 스킬북부터 찢었다.

띠링!

[스킬:마력 상쇄> 를 배웠습니다.]

[마력 상쇄율 : 25%]

현재 특전을 켜지 않은 순수 마력은 51.

특전에 피의 강화를 풀 스텍까지 찍으면 76이 나온다.

무려 35%나 막아낼 수 있다는 뜻.

거기에.

'이 유니콘의 뿔을 모두 쓰면 얼추 100은 넘겠지.'

그럼 50%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사실, 50%가 얼마나 높은 수치인지는 감이 잘 오지 않았다.

어차피 웬만한 마법은 데미지가 반으로 줄어들어도 몸이 터져나갈만큼 위력이 강력하다.

그래서 이 50%가 내게 도움이 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달까.

그렇다고 팀 내에 마법사가 한 명도 없는 상태에서 시험해볼 수 있는 것도 아닌 상황.

'어쩔 수 없이 아레나에 들어가서 확인해 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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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성계 대항전(2)

그날 이후 커뮤니티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어느 성계가 가장 강한 성계인가.

오랫동안 모두가 궁금해 왔던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단순히 고위 리그나 상위 리그에 몇 명의 플레이어가 있는가, 라는 것으로 강한 성계를 가려왔다지만, 모두가 판단했을 때 수긍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성계 대항전은 어느 성계가 가장 강한 성계인지 객관적으로 가려낼 수 있다.

그렇기에 성계 대항전이 시작되지 않았는데도, 신들의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커뮤니티엔 성계 대항전에 관한 내용밖에 없을 정도였다.

―블러드나이트 202 대신 성계 대항전 실시!

―아무도 죽지 않는 성계 대항전. 모두에게 축제가 될 것이다.

―관건은 각 성계 별 네임드의 숫자. 현재로서는 알프헤임이 가장 유력!

└알프헤임이 가장 유리하긴 하네. 가엔, 레오, 소호까지. 네임드가 가장 많음.

└성계 당 1천 명씩, 총 12,000명이나 참가하는데 네임드만으로 승부의 향방이 갈리진 않을 것임. 그럼 평균 전력이 가장 높은 무림이 더 유리함 ㅇㅇ

└그렇게 치면 웨스테로스나 졸본은 평균 전력이 약하냐? 평균 전력은 솔직히 삐까삐까임. 결국 네임드가 몇 명이냐가 향방을 가를 수밖에 없음.

└ㅂㅅ들. 무림도 네임드 3명이나 됨. 악소창, 고명, 렌. 무림이 꿀릴 게 없음.

└렌이 거기에 왜 들어가냐 병신앜ㅋㅋㅋ 걘 웨스테로스 출신이라고.

└응, 아니야. 렌은 졸본 출신임. 걔 활 쏘는 거라던가 검 다루는 스타일이 졸본 특유의 티가 남. 졸본 출신임.

그사이 신들 사이에서 나는 무림 출신이 됐다가, 졸본 출신이 됐다가, 웨스테로스가 되는 등 여기저기 팔려 나가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내가 지구 출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 광경을 보며 나는 그저 피식 웃었다.

아니, 오히려 기대가 됐다.

'최약체 성계에서 등장한 최초의 네임드.'

그 파장은 적지 않을 것이다.

나는 커뮤니티를 닫고 아세리안이 건네준 서류 뭉치들을 꺼내 읽었다.

이번 성계 대항전에서 내가 주의해야 할 각 성계의 네임드들에 관한 분석 자료들이었다.

움직임에 따른 예상 스텟, 사용하는 스킬의 종류, 쓰는 무기 등등 경기를 관람해야 알 수 있는 정보들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정리되어 있었다.

'도대체 이런 자료들을 어떻게 모으는 거야?'

아이템 정리에, 공략에, 플레이어 분석까지.

이건 뭐, 정보 수집의 끝판왕이었다.

아세리안이 건네준 자료에는 죽은 아르웬도 들어 있었다.

'내가 만약 이걸 먼저 보고 아르웬과 싸웠다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도 아르웬을 상대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물 속성은 방어에 특화 되어 있는 정령 마법.

공격을 넣지 못하게 하면서 저번처럼 구석에 박아버리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어떤 부분을 조심해야 하고,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 미리 알고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상대하는 게 훨씬 더 수월하지 않았을까.

'마법뿐만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분석 자료도 틈틈이 시간 내서 읽어놔야겠어.'

2회차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개선해야 할 부분이 무척 많았다.

아니,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아세리안이 채워주는 부분이 많았달까.

"형, 이번에 성계 대항전에 출전하시죠?"

휴식의 방에서 누워 분석 자료들을 보고 있는데 체력 훈련을 끝내고 함께 쉬고 있던 주창범이 물었다.

"예. 지구 대표로 출전하게 됐습니다."

"커뮤니티 보니까 다들 형을 다른 성계 출신으로 알던데요. 지구는 아예 얘기조차 안나오더라구요. 그리고 다들 지구가 꼴찌 할 거라고 하던데요?"

주창범이 눈썹을 찡그렸다.

음.

내가 렌인 걸 알고 있었구나.

뭐, 지금쯤이면 알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난번, 아르웬과 치렀던 경기가 워낙 크게 회자됐어야지.

"예. 그동안 지구 출신이 이렇다 할 성과를 못 내서 그런 것 같네요."

"그래도 지구엔 형이 있으니까 우승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자 곁에서 함께 누워 있던 루치아노와 지그, 제이스도 동조했다.

"맞아. 안우진 님이라면 분명 우승하실 수도 있지. 지구가 꼴찌라는 것도 안우진님이 지구 출신이란 걸 몰라서 그런 것 아냐?"

"전에 한쪽 팔을 잘라버린 상대가 당장 상위 리그로 올라가도 이상하지 않을 녀석이라고 하더만. 그런 녀석과도 싸우신 분인데 충분히 가능하지."

"그때 왼팔을 자른 상대는 안우진님께 목이 베였대. 그 녀석이 하위 리그에서 가장 강할 거라고 예상되는 다섯 명 중 한 명이라던데?"

어······ 음······ 뭐.

어느 정도는 사실이긴 한데······.

사인방은 커뮤니티에서 후기를 읽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근데 거기에 분명 내가 죽도록 도망치다가 겨우 죽였다는 말도 있었을 텐데, 그건 안 봤나?

"솔직히 형이 누군가한테 진다는 게 상상이 안 돼요. 이번 성계 대항전에서 지구에도 형 같은 분들이 있다는 걸 신들에게 똑똑히 보여주세요."

강한 신뢰가 담긴 눈빛.

주창범의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보죠."

훈련과 분석, 그리고 아이템 세팅을 하다 보니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덧 성계 대항전 당일.

"형, 이번에 가서 다 조져버려요. 화이팅!"

"안우진님, 좋은 결과 기다리겠습니다!"

"오늘도 맛있는 음식 준비해둘게요. 조심히 다녀오세요."

나는 사인방과 이세연의 배웅을 받으며 아세리안과 함께 공터로 나왔다.

'오늘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네.'

평소 날 배웅할 때와 달리, 오늘은 아세리안의 표정에 생기가 가득했다.

성계 대항전은 참가자가 사망하더라도 모두 부활시켜준다.

그래서 죽음의 위협이 존재하지 않기에 아세리안도 불안해하지 않는 것 같았다.

쑤아아아앙-

타이밍 좋게 때마침 공터에 게이트가 열리며 옅은 충격파가 퍼져나갔다.

그 충격파에 휘날리는 머리를 정리하며 아세리안이 입을 열었다.

"안우진님. 그거 아세요? 성계 대항전에는 돈을 걸고 우승 성계를 맞히는 배팅 시스템이 있다는 거?"

"네. 커뮤니티에서 얼핏 본 거 같네요."

"지구가 우승하면 배당이 1대 1,000이더라구요. 헤헤, 참고로 전 지구에 걸었어요."

"아, 지구가 우승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와야겠군요."

그러자 아세리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뭐지?

이 대답이 아닌가?

"그럴 땐 가슴을 탕탕 치며 제 덕에 부자 되시겠네요, 라고 하셔야죠!"

아세리안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부자 되게 해드리죠, 여신님.

나는 속으로 대답하며 활짝 웃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아세리안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나는 게이트 안으로 들어왔다.

온통 새하얀 공간.

크기는······ 5평 정도?

작고 아담한 방이 나를 반겼다.

방 한쪽에는 푹신푹신해 보이는 소파가 놓여져 있었고, 그 맞은편엔 벽을 가득 메운 홀로그램 창이 보였다.

이건 마치.

'대기실 같네.'

권투나 UFC를 나가기 전에 선수들에게 배정되는 대기실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소파에 털썩 앉았다.

띠링!

[대기실에 입장했습니다.]

[성계 대항전은 총 10경기가 치러지며, 가장 많은 승리를 차지한 1개의 성계에 차원 특전이 주어집니다.]

[차원 특전은 도박사들이 예측한 우승 확률에 따라 보상이 달라집니다.]

[알프헤임 : 16.7%] [무림 : 15.9%] [웨스테로스 : 15.8%] [발리노르 : 14.1%]

[졸본 : 7.3%] [나카츠쿠니 : 6.9%] [바빌론 : 6.5%] [티르너노그 : 6.1%]

[탐리엘 : 3.8%] [하이퍼보리아 : 3.5%] [미드가르드 : 3.3%] [지구 : 0.1%]

[지구의 경우 확률이 0.1%로, 우승 시 모든 스텟 + 10%의 차원 특전을 획득합니다.]

[해당 성계를 우승으로 이끈 MVP 에게는 고유 스킬 1개가 랜덤으로 주어집니다.]

메시지를 읽고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모든 스텟 10% 상승?

신화급 특전이 20% 상승이었는데?

저걸 한 개 성계 전체에 뿌린다고?

'무조건 이겨야 해.'

보상을 보는 순간 의욕이 불타올랐다.

다른 성계에 특전을 뺏기지 않는 걸 넘어, 날 한층 더 도약할 수 있게 만들어 줄 것이다.

업적 특전만 해도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던가.

거기에 성계 특전 10퍼센트를 더한다면 하위 리그에서 내가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루는 셈이었다.

[성계 대항전 경기 일정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1경기. 스토리 미션(개인 PvP)]

[2경기. 팀웍이 생명이다(단체 PvP)]

[3경기. 레이드 보스 사냥하기(집단 PvM)]

[4경기. 스토리 미션(단체 PvP)]

[5경기. 성계 집단 대항전(집단 PvP)]

[6경기. 일대일 최강자(개인 PvP)]

[7경기. 지옥에서 생존하기(개인 PvP)]

[8경기. 스피드 레이스(개인 PvP)]

[9경기. 사냥 실력은 내가 최고(개인 PvM)]

[10경기. 역대 네임드들과의 전투(집단 PvP)]

'나쁘지 않네.'

메시지 창에 뜬 경기 일정을 본 나는 소파에 편안하게 몸을 기댔다.

우연인지 내 경기는 6경기부터 10경기까지.

가장 마지막 순서로 등장하는 것이다.

'계산하기 더 쉽겠어.'

다른 성계들이 가져간 승리를 계산하면 내가 뛰는 다섯 경기 동안 몇 개의 승리를 가져가야 하는지 계산하기 편할 것이다.

어차피 지구는 1경기부터 5경기까지 내리 죽을 쑬 것이기에.

띠링!

[지금부터 성계 대항전을 시작하겠습니다.]

[1경기 : 스토리 미션(개인 PvP)]

[게임명 : 요정의 알]

[승리 조건 : 가장 먼저 요정의 알을 구하는 자]

[맵 : 사자의 땅(대)]

[관객 수 : 942,701 명]

[현재 생존자 수 : 6,666 명]

[참가 현황]

[지구 : 842 명] [바빌론 : 569 명] [미드가르드 : 561 명] [하이퍼보리아 : 558 명]

[티르너노그 : 557 명] [탐리엘 : 547 명] [졸본 : 533 명] [나카츠쿠니 : 531 명]

[알프헤임 : 499 명] [무림 : 491 명] [웨스테로스 : 490 명] [발리노르 : 488 명]

'와, 관객 숫자가 94만 명이나 된다고?'

압도적인 관객 숫자에 깜짝 놀랐다.

이전에 치러졌던 네임드 전보다 20배나 많은 숫자였다.

'확실히 성계 대항전이 초대형 이벤트이긴 한가 보네.'

상위 리그에서도 관객 숫자가 94만 명이나 되는 경기는 없었다.

아마 고위 리그나 가야 그 정도 될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고위 리그급의 경기를 뛰고 있는 셈이네.'

저 많은 숫자의 신들에게 눈도장을 확실하게만 찍을 수 있다면.

네임드를 넘어 스타 플레이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일단 지구가 우승하게 만들어야 해.'

가장 베스트는 탑4, 즉 무림, 알프하임, 웨스테로스, 발리노르가 승리를 한 개씩 나눠 먹는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남은 다섯 경기에서 내가 세 경기만 승리를 따내도 우승할 확률이 높아진다.

'어떻게 흘러가는지 한번 볼까.'

나는 커뮤니티를 열어 신들의 댓글을 확인했다.

└오오 시작한다.

└발리노르 잘해라. 진짜 뒤지기 싫으면.

└씨발 10만 포인트나 태웠더니 개쫄린다 ㅋㅋㅋㅋ 무림 잘해라 제바류ㅠㅠ

아직까지는 쓸데없는 댓글들 뿐.

하지만 10분 정도가 흐르자 분위기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와 지구 애들 800명 넘게 출전했는데 아주 녹아내리넼ㅋㅋㅋㅋㅋ

└쟤 누구임?

└안돼!!! 지구 이새끼들. 제발 기적을 보여줘 ㅠ 초대박 역배 가즈아!

└ㅋㅋㅋㅋㅋ 병신새끼 아무리 1000배율이래도 지구에 태우냨ㅋㅋㅋ

└애초에 첫 번째 관문에서 700명 넘게 떨어진 거 같은뎈ㅋㅋ 저거도 대단하다면 대단하다. 저런 새끼들한테 배팅한 새끼도 대단하곸ㅋㅋㅋ

└스틱스 강물 요즘 차가울텐데ㅋㅋㅋㅋ

아무래도 지구 플레이어들이 대거 떨어진 모양.

신들은 지구에 배팅한 댓글을 조리돌림하며 놀리기 바빴다.

쯧.

조금만 기다려.

'내가 어떻게든 신생 역전 시켜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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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성계 대항전(3)

1경기는 결국 발리노르 성계가 가져갔다.

지구는 뭐.

정말 어처구니없게도 1관문에서 대부분 떨어진 모양이었다.

'지구에는 최상급 플레이어의 숫자가 너무 적어.'

지구 출신은 하위 리그에서 압도적인 숫자를 자랑하지만, 소수의 정예가 없는 상황.

아무래도 콜로세움에 들어와서 검이나 도같은 것들을 처음 잡아본 사람이 많을 테니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시간이 해결해주는 수밖에.

띠링!

[1경기. 발리노르 승!]

[현재 순위]

[1위 : 발리노르 / 1승]

[-]

[지금부터 2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2경기 : 5대5 파티 전투(단체 PvP)]

[게임명 : 팀웍이 생명이다]

[승리 조건 :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는 1개 팀]

[맵 : 원형 미로 투기장(대)]

[관객 수 : 943,978 명]

[현재 생존자 수 : 6,225 명]

[참가 현황]

[지구 : 810 명] [미드가르드 : 550 명] [바빌론 : 505 명] [티르너노그 : 500 명]

[탐리엘 : 495 명] [하이퍼보리아 : 490 명] [졸본 : 490 명] [나카츠쿠니 : 485 명]

[알프헤임 : 480 명] [발리노르 : 475 명] [웨스테로스 : 475 명] [무림 : 470 명]

그리고 시작된 두 번째 경기.

1경기와 동일하게 2경기에서도 지구에서 참가한 플레이어의 숫자가 다른 성계들보다 훨씬 많았다.

스토리 미션이나 단체 PvP 전투는 개개인의 기량이 떨어져도 충분히 가능성 있으니까.

지구 출신의 플레이어들이 현명한 선택을 한 것이다.

문제는.

└와, 씨. 가엔 정령 마법 개사기네ㅋㅋㅋㅋ 근데 가엔보다 아르웬이 더 강하다고 평가받지 않았냐. 렌은 아르웬을 어떻게 상대했누.

└애초에 미로처럼 좁은 공간에서 고위 마법이 터지면 렌도 방법 없음 ㅋㅋㅋㅋ

└가엔 말고 저 호인족도 겁나 세네. 쟤가 조슈카인가 걘가?

└ㅇㅇ 맞음. 알프헤임의 또 다른 네임드. 조슈카가 앞에서 찢고 뒤에서 가엔이 마법 터트리니까 할 수 있는 게 없네.

다른 성계의 플레이어들이 너무 강하다는 것.

아무리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하더라도, 압도적인 실력의 차이를 메울 순 없다.

결국 이번에도 지구의 플레이어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와 씨. 다른 성계 네임드들도 녹아내리네. 좁은 공간에선 역시 길 막고 마법 때려 박는 게 최고인듯.

└저렇게 때려 박으면 마나 금방 없어지지 않음?

└응, 바빌론 때려잡을 때까진 남아 있어~ 돌아가.

└ㅋㅋㅋㅋㅋ 시발 개짜증나넼ㅋ

댓글로 대략적인 경기 내용을 봤을 뿐이지만 가슴 한켠이 서늘했다.

사실, 직접 경기를 뛰진 않았지만 대충 어떤 상황이 펼쳐졌을지는 예측이 됐다.

미로니까 좁은 골목으로 되어 있었을 거고, 그 반대편에선 가엔이라는 정령사가 마법으로 폭격을 하는 상황.

어떻게든 뚫고 들어가 가엔을 죽이고 싶어도, 전방에서 알프헤임의 또 다른 네임드인 호인족이 길을 막아 접근할 수도 없게 만들었을 것이다.

'나라고 해도 별다른 방법이 없겠는데. 단거리 순간이동 마법이라도 배워야 하나?'

한참을 궁리했지만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나 또한 이런 상황을 언제고 만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렇게 아무런 방법을 취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미리미리 준비해둬야 한다.

물론 성계 대항전이야 죽어도 부활한다고 하지만.

└아즈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

└아 이걸 지네ㅡㅡ 무림 새끼들 네임드 딱지 다 떼라.

└알프헤임 코인 떡상합니다. 꽉 잡으세요!!

└저 조합을 막을 방법이 없네 ㅋㅋㅋ 나도 팜에서 애들 저런 방법으로 육성시켜야겠다.

[2경기. 알프헤임 승!]

[현재 순위]

[1위 : 발리노르 / 1승]

[1위 : 알프헤임 / 1승]

결국 2경기는 가엔과 조슈카라는 네임드들의 활약으로 알프헤임이 가져갔다.

지금까지는 무척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발리노르와 알프헤임이 1승씩 나눠 먹은 상황.

[지금부터 3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3경기 : 성계 단위 레이드(집단 PvM)]

[게임명 : 레이드 보스 사냥하기]

[승리 조건 : 가장 빨리 레이드 보스를 사냥하는 성계]

[맵 : 고대룡의 무덤(대)]

[관객 수 : 951,447 명]

[현재 생존자 수 : 7,244 명]

[참가 현황]

[졸본 : 984 명] [지구 : 783 명] [나카츠쿠니 : 713 명] [티르너노그 : 611 명]

[탐리엘 : 601 명] [바빌론 : 570 명] [웨스테로스 : 529 명] [미드가르드 : 514 명]

[무림 : 511 명] [하이퍼보리아 : 480 명] [발리노르 : 477 명] [알프헤임 : 471 명]

3경기는 레이드 보스 사냥하기.

'와. 졸본에서는 거의 다 출전했네.'

궁수가 많은 졸본 특성상 레이드 보스 사냥을 선호하는 건 당연했다.

그리고 지구 출신은 1경기부터 3경기까지 모두 700명이 넘게 출전했다.

개인 기량이 떨어지기에 스토리 미션이나 단체전에서 어떻게든 성과를 내려고 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와 씨 ㅋㅋㅋ 궁수 몇백 명이 쏘니까 리치가 아무것도 못하넼ㅋㅋㅋㅋ

└졸본 지금 몇 분 만에 깬 거임? 4분? 5분?

└(과도한 욕설로 인해 삭제된 댓글입니다.)

└정확하게 4분 57초 만에 사냥 성공함. 여기서 졸본이 승리를 가져가네.

└(과도한 욕설로 인해 삭제된 댓글입니다.)

└무림 이 개새끼들. 똑바로 안 하냐? 진짜 뒤지고 싶냐? 너네 우승 못하면 너네 죽고 나 죽는 거야.

└(과도한 욕설로 인해 삭제된 댓글입니다.)

결과는 압도적인 화력으로 밀어붙인 졸본에 밀려 승리를 챙기지 못했다.

아니, 지구는 레이드 보스를 잡지도 못했다.

└ㅋㅋㅋㅋ 지구 애들 뭐함? 코미디 찍음?

└ㅋㅋㅋㅋㅋㅋㅋ 깨라고 만들어 둔 레이드 보스도 못 잡고 전멸하넼ㅋㅋㅋ 내가 이래서 극장에 코미디 보러 안감ㅋㅋㅋ

└다른 성계는 다 10분 안쪽으로 레이드 보스 잡았는데, 지구 전멸한 거 실화냐? 쟤네는 그냥 앞으로 성계 대항전에 부르지 마라;; 눈물겨워서 못 봐주겠다.

└아까 지구에 걸었다는 흑우 어디감?

└스틱스 강 온도 몇 도인지 체크하러 가셨답니다.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에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레이드 보스로 리치가 나왔다고 하니, 이해는 할 수 있었다.

리치는 다수의 약한 적들에게 절대적인 강함을 보여주는 언데드다.

시체를 언데드로 부활시키기 때문에 전투가 지속될수록 많은 피해를 강요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름 지구의 최정예로 뽑혔다는 플레이어들인데······.'

내 예상보다 다른 성계와의 격차가 무척 심했다.

그리고 그럴수록 차원 특전에 대한 갈망이 커져갔다.

물론 지구의 다른 플레이어들이 아무런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

'아니, 오히려 좋아.'

애초에 내가 없는 경기에서 지구가 승리를 가져올 거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현재까지 발리노르와 알프헤임, 졸본이 한 경기씩 가져간 상황.

1회차의 우승자인 무림이 아직까지 한 경기도 가져가지 못했다.

그렇다는 건 4경기나 5경기를 무림이 가져갈 확률이 높았다.

'5경기까지 한 성계씩 승리를 나눠 먹으면, 나머지 경기에서 내가 세 경기만 가져와도 우승할 확률이 높아.'

가장 베스트는 4경기와 5경기를 무림과 웨스테로스가 한 경기씩 가져가는 것이다.

[3경기. 졸본 승!]

[지금부터 4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4경기 : 스토리 미션(단체 PvP)]

[게임명 : 빛의 수호]

[승리 조건 : 호위 대상을 가장 먼저 세이프티 존에 데려다주는 1개 팀]

[맵 : 라스그리드(대)]

[관객 수 : 987,011 명]

[현재 생존자 수 : 6,721 명]

[참가 현황]

[지구 : 832 명] [나카츠쿠니 : 683 명] [미드가르드 : 622 명] [탐리엘 : 604 명]

[바빌론 : 577 명] [하이퍼보리아 : 555 명] [티르너노그 : 512 명] [무림 : 499 명]

[웨스테로스 : 483 명] [발리노르 : 482 명] [알프헤임 : 473 명] [졸본 : 399 명]

4경기는 팀 단위 스토리 미션.

이번에도 지구에서 참전하는 플레이어들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나는 슬슬 소파에서 일어나 몸을 풀기 시작했다.

조금만 있으면 6경기.

드디어 내가 출전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근데 4경기까지 렌은 한 번도 안 나왔네. 슬슬 나올 때 된 거 같은데.

└알고 보니까 이미 상위 리그로 올라간 거 아님?

└ㄴㄴ 저번에 아르웬이랑 싸우던 경기 승급샷 아니었음.

└아앀ㅋㅋ 어느 성계인지 궁금해 죽겠는데. 빨랑 좀 나와라.

댓글 창에서는 관객들이 내가 어서 등장하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지구 플레이어로 등장하면 정말 드라마틱한 연출이 나오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어서 경기에 출전하고 싶었다.

└엌ㅋㅋㅋㅋ 이런 식으로 승리 후보가 나가떨어지넼ㅋㅋㅋ

└가자 웨스테로스! 너만 믿고 있었다구!

└아 ㅁㅊ 가엔 진짜 뭐하냐ㅡㅡ 시발 호위 대상을 죽이는 ㅂㅅ이 어딨음?

└아 ㅋㅋㅋㅋ 왜 화를 내고 그래 ㅋㅋ 원래 광역 마법이 다 그런거짘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진짜 오늘 코미디 많이 보네 ㅋㅋㅋ

└ㅋㅋㅋㅋㅋ 아르웬도 정상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가엔 쟤도 느낌이 약간 삐리하다?ㅋㅋㅋㅋ

[4경기. 웨스테로스 승!]

바닥에 앉은 채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데 순식간에 댓글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1등을 하고 있던 가엔이 광역 마법을 잘못 떨구는 바람에 승리를 뺏긴 것 같았다.

나로서는 아주 좋은 상황이었다.

덕분에 아직까지 네 개의 성계가 1승씩 챙긴 상황.

내가 출전하는 남은 다섯 경기에서 잘하면 3승만 챙겨도 지구가 우승할 확률이 높아졌다.

나는 그때부터 커뮤니티를 끄고 명상을 시작했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죽음의 위협이 없는 경기일지라도, 최선을 다해야 하기에.

눈을 감은 채 내 호흡에 집중하다 보니 긴장, 기대, 불안 등등 온갖 감정들로 점철된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고요해진 세상 속에서.

눈을 떴다.

띠링!

[5경기. 무림 승!]

[현재 순위]

[1위 : 발리노르 / 1승]

[1위 : 알프헤임 / 1승]

[1위 : 졸본 / 1승]

[1위 : 웨스테로스 / 1승]

[1위 : 무림 / 1승]

[지금부터 6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6경기 : 일대일 대전(개인 PvP)]

[게임명 : 일대일 최강자]

[승리 조건 : 토너먼트 우승자]

[맵 : 시가지 타입의 원형 경기장(소)]

[관객 수 : 1,001,072 명]

[현재 생존자 수 : 6,304 명]

[참가 현황]

[무림 : 833 명] [발리노르 : 711 명] [알프헤임 : 684 명] [웨스테로스 : 632 명]

[미드가르드 : 501 명] [바빌론 : 493 명] [탐리엘 : 484 명] [티르너노그 : 471 명]

[하이퍼보리아 : 444 명] [나카츠쿠니 : 441 명] [졸본 : 399 명] [지구 : 211 명]

[6경기 참가 플레이어 분들께서는 입장해 주십시오.]

알림창과 함께 대기실 한쪽 벽에 하얗게 빛나는 문이 생겨났다.

새롭게 구한 창을 쥐고 문을 넘어서자 폐허가 된 구조물들로 빽빽한 원형 경기장이 보였다.

[지구]

내 머리 위에는 지구라는 글씨가 둥둥 떠 있었다.

참가하는 플레이어가 워낙 많은 데다가, 같은 팀 출신이 아니기에 팀킬을 할 수도 있어서 이렇게 표시가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띠링! 띠링! 띠링! 띠링!

[관객들이 당신의 성계를 보고 놀랍니다.]

[관객들이 당신의 성계를 보고 오류가 아닌지 의심합니다.]

[관객들이 당신의 성계를 보고 경악합니다.]

오랜만에 뜨는 관객들의 상태창.

이건 대다수의 관객들이 비슷한 감정일 때 나타난다.

뭐, 많이 놀라긴 했나 보네.

나는 피식 웃으며 경기장을 둘러보았다.

* * *

└?????????????????????

└???? 뭐야? 지금 내가 보고 있는거 실화임????????

└???????????????????????????

└뭐냐? 이거 시스템 오류 아님? 지구같은 좆밥 성계에서 렌이 나올 수 있음?

└쟤가 진짜로 지구 출신이라고???????

└???????

└와 미쳤다 씨발. 방금 소름 돋았다.

└렌이··· 지구????

└?????????????????????

└쟤가 왜 저기서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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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초신성(1)

직경 400미터의 원형 경기장.

옅은 달빛 사이로 보이는 경기장은 작은 도시를 옮겨온 듯한 모습이었다.

[보름달이 떴습니다.]

[<로브:달의 메아리> 가 달의 힘을 빌려와 모든 스텟이 5% 상승합니다.]

가운데 깔려있는 대로를 기준으로 양옆에 폐허가 된 다양한 층의 건물들이 즐비해 있었는데, 모두 빈 건물이다 보니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흘렀다.

오래된 석회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저 녀석이 내 1라운드 상대군.'

내가 서 있는 대로의 맞은편, 그곳에는 한 명의 플레이어가 서 있었다.

띠링!

[6경기 1라운드를 시작합니다.]

[렌 vs 하옥정]

[3초 후 경기가 시작됩니다.]

첫 번째 상대는 빛바랜 검을 쥔 중년인이었다.

회색 무복을 갖춰 입고 있었는데, 머리 위에는 [무림]이라는 글씨가 둥둥 떠 있었다.

[2초 후 경기가 시작됩니다.]

'업적 특전 적용. 천둥의 숨결.'

경기가 시작되기 전, 일단 특전과 스킬부터 켰다.

어차피 라운드가 끝날 때마다 상태가 초기화될 것이기에 체력의 소모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거기다 마침 보름달까지 떠서 달의 메아리가 모든 스텟을 5% 올려준 상황.

[1초 후 경기가 시작됩니다.]

성계 대항전을 준비하며 근력과 민첩만 상승하는 아이템들로 떡칠한 덕분에 현재 내 근력과 민첩은 모두 70을 넘긴 상태였다.

한마디로 내가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능력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

'첫 경기가 제일 중요해.'

대부분의 신들은 내가 지구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렌이라는 플레이어의 가치를 깎아내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지금쯤 댓글 창에는 아르웬을 죽인 것도 운이었다는 둥, 거품이 가득하다는 둥 헛소리나 지껄이고 있을 것이다.

'이번 경기에서 모두들 입을 닥치게 만들어 줘야지.'

[경기 시작!]

경기 시작 콜이 뜨는 동시에 내 앞을 가로막고 있던 하얀 장막이 사라졌다.

나는 곧바로 상대와의 거리를 좁히며 악마의 눈을 사용했다.

띠링!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하옥정]

[성향 : 중용]

[근력 : 66(+?)] [민첩 : 64(+?)] [체력 : 64(+?)]

[정신 : 52(+?)] [지력 : 13(+?)] [마력 : 59(+?)]

[각성 능력 : <상급검술> <상급살기> <중급마나운용> <중급박투술> <중급단검술> <하급치료술>]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한 나는 눈을 치켜떴다.

첫 상대부터 생각보다 스텟이 높았기 때문이다.

굳이 따지자면 붉은 깃발전에서 만난 케일 정도의 수준.

하지만 나는 내 상태창을 바라본 후 피식 웃으며 녀석을 향해 다가갔다.

'상관없어.'

어차피 특전에 스킬빨, 템빨까지 갖춘 덕분에 내 스텟이 더 높으니까.

상대는 내 성계를 확인하곤 고개를 갸웃했다.

"요즘 하위 리그를 떨쳐 울린다던 분이 설마 지구 출신일 줄은 몰랐군. 본인은 낭인 하옥정이라고 하오."

하옥정이 내게 주먹을 내밀고 한 손으로 감싸는, 이른바 포권이란 것을 해왔다.

"······."

나는 굳이 그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어차피 죽일 녀석인데 뭐 하러 인사를 나눌까?

그저 창을 쥔 채 녀석을 향해 다가갈 뿐이었다.

"하하, 듣던 대로 과묵한 분이시오. 하긴, 이런 자리에서 통성명이라니 쓸데없는 일이긴 하군. 그럼, 가르침을 바라겠소."

하옥정이 검을 뽑아 들었다.

'단숨에 부숴버리자.'

그걸 신호로 나 또한 하옥정에게 달려들었다.

챙!

콰직- 콰지직-

마나를 머금은 창이 하옥정의 검과 부딪히며 사방으로 전류를 뿜어댔다.

"끅!"

전류에 감전된 하옥정이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 떨며 경직 상태에 빠졌다.

단 한 번의 격돌에 녀석이 크게 밀려 나갔다.

'격이 다른 강함.'

난 그걸 모두에게 보여줄 생각이었다.

"이······ 이건 대체······."

하옥정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검을 통해 전해진 내 힘이 워낙 강하다 보니 팔이 저려 검을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했다.

아니, 검을 쥐고 있는 것도 힘겨워 보였다.

당황한 채 뒷걸음질 치기 급급한 모습.

'끝내자.'

나는 창자루의 끄트머리 부분을 잡은 채 크게 휘둘렀다.

챙! 콰직! 콰지직!

그러자 내 창을 막아내려던 하옥정의 검이 한쪽으로 튕겨져 나갔다.

"미, 미친!"

녀석이 검을 놓친 이상 싸움은 거기까지였다.

검을 잃은 채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하옥정의 가슴에 창을 찔러 넣었다.

푹-

띠링!

[플레이어 '하옥정' 을 처치했습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1/30)]

[3분 이내에 다른 생명체를 처치하지 못하면 상승분이 초기화됩니다.]

제법 높은 스텟을 가지고 있는 하옥정을 단숨에 죽였다.

마음먹고 싸우니까 케일 급의 강자를 쓰러트리는 데 단 3초밖에 걸리지 않은 것이다.

'이걸로 내가 지구 출신이라 거품이라는 놈들이 모두 닥치고 있겠지.'

애초에 실력부터 비교가 안 되는 상대였다.

거기에 좋은 스킬과 아이템들로 무장한 이상, 내 공격을 버텨낼 수 있는 녀석은 하위 리그에 몇 명 안 될 것이다.

[6경기 1라운드가 종료되었습니다.]

['렌' 승리!]

[잠시 후 2라운드가 시작됩니다. 준비하십시오.]

승리라는 메시지 창과 동시에 하얀빛이 모여들더니 나를 머금었다.

빛에 몸을 맡기자 순간적으로 훅! 하는 느낌과 함께 내 몸이 다른 공간으로 전송되었다.

그리고 등장하는 1라운드와 똑같은 크기의 원형 투기장.

심지어 안에 등장하는 건물의 모습도 똑같았다.

[모든 상태를 100%로 회복합니다.]

[6경기 2라운드를 시작합니다.]

[렌 vs 고주성]

[3초 후 경기가 시작됩니다.]

'정신없이 싸우게 되겠군.'

알림창은 잠깐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카운트 다운을 시작했다.

뭐, 이해는 한다.

무려 6,304명이 참가하는 토너먼트 경기.

서둘러 경기를 진행해야 관객들도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2초 후 경기가 시작됩니다.]

2라운드의 내 상대는 졸본 출신으로 보이는 궁수.

녀석은 짧은 단궁을 쥔 채 화살통에서 화살을 꺼내고 있었다.

'이번 경기는 상성이 좋네.'

[1초 후 경기가 시작됩니다.]

미로처럼 엉켜있는 골목길에 각종 폐건물들이 널려있다 보니, 몸을 숨기기에 딱이었다.

현재 저 고주성이라는 궁수는 머리가 아플 것이다.

내가 폐건물 사이에 숨어있다가 갑자기 기습해 오면 거리를 벌릴 방법이 없을 테니까.

[경기 시작!]

시작 콜과 동시에 나는 건물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쐐애애액!

그와 동시에 나를 스쳐 지나가는 한 발의 화살.

너무 작아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애깃살이었다.

'이런 일대일 경기가 아니라 평범한 서바이벌 경기였으면 쉽지 않았겠는데.'

몰래 숨어서 아무도 모르게 애깃살로 저격해오면 알아채기가 까다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아니다.

대로 주변에 있는 골목길로 숨어든 나는 곧장 침묵의 망토 스킬을 사용했다.

띠링!

[<스킬:침묵의 망토>를 사용하셨습니다.]

[10초 당 마력 스텟 1 포인트를 소모합니다.]

그리고는 곧장 고주성이 있던 방향을 향해 움직였다.

사락- 사락-

녀석의 스타팅 포인트와 어느 정도 거리를 좁히자 들려오는 발소리.

폐건물 안으로 숨어들었는지 발소리에서 약간의 울림이 전해졌다.

발소리는 들리지만, 마력장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거리가 제법 있는 것 같았다.

'그래봤자 찾는 건 시간 문제야.'

나는 골목길 사이사이를 빠르게 오가며 녀석이 숨어들었을 공간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자 1시 방향에서 녀석의 움직임이 마력장에 포착됐다.

위치는 2층 건물로 둘러싸인 채 혼자만 빼곡 나와 있는 3층 건물의 방안.

'제법 까다로운 곳이네.'

주변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기에 나를 찾기도 수월할 테고, 혹시 내가 먼저 녀석을 찾아내더라도 주변의 2층 건물 옥상을 통해 도망칠 수 있다.

궁수로서 그나마 나에게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위치.

하지만 녀석이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내가 은신 스킬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모르겠지.'

그에 대한 방증으로, 내가 고주성이 있는 건물의 입구에 다다를 때까지 녀석은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녀석이 잠복해 있는 3층에 도착하자, 고주성은 여전히 고개만 빼꼼 내민 채 나를 찾기 위해 여념이 없었다.

'게임 끝났어.'

나는 고주성을 향해 곧장 달려들었다.

"어, 언제!"

공격 판정으로 인해 은신이 풀리자, 그제야 내 기척을 읽은 고주성이 내 창을 피하며 바로 옆에 있는 2층 건물의 옥상으로 몸을 날렸다.

고주성이 몸을 빙글 돌리며 공중에 떠 있는 잠깐의 체공시간 동안 화살 한 발을 시위에 걸더니 나를 향해 겨눴다.

'내가 놓칠 줄 알고?'

나는 곧장 창에 마나를 담아 녀석에게 던졌다.

피웅!

그와 동시에 녀석의 화살이 내 이마를 향해 날아왔다.

쐐애애액!

나는 고개를 틀어 녀석의 화살을 가볍게 피했고, 녀석은.

푹! 털썩-

공중에 떠 있는 상태 그대로 가슴에 창이 박힌 채 2층 건물 옥상에 떨어졌다.

띠링!

[플레이어 '고주성' 을 처치했습니다.]

순간 고기 타들어 가는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뇌전의 힘이 녀석의 가슴을 관통한 채 살갗을 태운 것이다.

나는 녀석이 쓰러진 2층 건물 옥상으로 뛰어 내렸다.

그리고 녀석의 시체를 발로 밀며 꼬챙이처럼 박힌 창을 뽑아 들었다.

[6경기 2라운드가 종료되었습니다.]

['렌' 승리!]

[잠시 후 3라운드가 시작됩니다. 준비하십시오.]

그와 동시에 등장하는 메시지 창.

또다시 하얀빛이 나를 감싸기 시작했다.

'확실히 일대일 경기에 출전 신청을 할 만큼 전체적으로 수준이 높네.'

하지만 난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그들보다 내가 더 강할 테니까.

[6경기 8라운드를 시작합니다.]

[렌 vs 브룩스]

이후로도 나는 낭인족, 바이킹, 엘프, 무림인 등등 수많은 플레이어들을 상대해야 했다.

하지만 내 앞을 가로막을 수 있는 녀석은 존재하지 않았다.

고작 해봐야 내 창을 몇 번 막아내는 수준뿐.

그렇게 7라운드까지 치르자 어느새 참가자는 백 명 이하로 줄어들었다.

'확실히 탑 100부터는 수준이 다르네.'

[작열하는 불꽃의 춤!]

사방에서 도깨비불 같은 마법들이 내게 쏟아졌다.

미처 창으로 막아내지 못한 몇 개의 도깨비불이 내 몸을 때렸다.

화륵!

하지만 내가 입은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달의 메아리가 도깨비불에 살짝 그을린 정도.

[마력 상쇄율 : 50%]

'와, 이거 엄청 좋은데?'

데미지를 무려 절반이나 줄여주는 스킬이지만 사실 그 효용에 대해선 반신반의였다.

데미지가 줄어들든 말든, 어차피 마법에 직격하면 몸이 터져 나가는 것은 똑같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내가 간과한 부분이 있었다.

마법 상쇄가 아닌, 마력 상쇄.

고작 한 글자 차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확연하게 달랐다.

'단순히 데미지가 줄어드는 게 아니라, 나와 간섭하는 마력을 절반으로 줄여준다는 거였어.'

한마디로 마법이 날아올 때, 내가 창에 마력을 담아 휘두르면 절반의 힘만으로도 막아낼 수 있다는 뜻.

직접 겪어보고 나서야 이 스킬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마력 상쇄 스킬에 놀란 것은 나 뿐만이 아니었다.

"씨발! 왜 마법이 안 통하는데!"

8라운드의 내 상대인 브룩스가 검을 휘두르며 발악했다.

녀석은 마법과 검을 동시에 다루는, 즉 전투 마법사였다.

그리고 일대일 경기에서 탑 100 안에 들 수 있을 만큼 검술 실력이 뛰어났다.

하지만 검을 아무리 잘 다뤄도 마법사는 마법사.

결국 검은 보조할 뿐이고, 주공은 마법이란 것이다.

[은은한 물의 장막!]

내가 마법에 맞고도 멀쩡하게 다가가자 브룩스가 급하게 방어 마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나는 피식 웃으며 창을 휘둘렀다.

서걱-

그러자 브룩스 앞에 생겨난 방어막이 허무할 정도로 쉽게 찢겨나가며 브룩스의 가슴을 갈랐다.

"씨, 씨발. 이건 사기야······."

마력 상쇄율 50%.

브룩스에겐 미안하지만, 그건 방어 마법에도 통용되는 얘기였다.

띠링!

[현재 생존자 수 : 32 명]

[6경기 8라운드가 종료되었습니다.]

['렌' 승리!]

[잠시 후 9라운드가 시작됩니다. 준비하십시오.]

어느새 남은 숫자는 32명.

분명 처음 시작할 때 6,304명이었는데, 어떻게 딱 2의 제곱에 맞는 숫자가 나왔는지는 의문이었다.

중간에 부전승으로 올라온 녀석들도 있었나?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앞으로 5번만 이기면.

지구가 6경기의 승리를 챙길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빛무리에 몸을 맡길 때였다.

후욱! 하는 느낌이 끝나며 나는 9라운드의 경기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상대의 모습을 확인한 나는 눈을 치켜떴다.

맞은편에는 내가 생각지 못한 상대가 서 있었다.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빅터]

[성향 : 선]

[근력 : 64(+?)] [민첩 : 70(+?)] [체력 : 65(+?)]

[정신 : 72(+?)] [지력 : 18(+?)] [마력 : 71(+?)]

[각성 능력 : <고급검술> <고급박투술> <최상급단검술> <최상급마나운용> <최상급살기> <상급마상술> <상급검방술> <상급투척술> <중급치료술>]

'빅터!'

녀석이 나를 바라보며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드디어 만났네.'

나도 반가운 마음을 담아 빅터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너무나 죽여버리고 싶은 상대였으니까.

붉은 깃발전에서 당한 수모를.

되돌려 줄 기회가 찾아왔다.

'다시는 개기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짓밟아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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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초신성(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