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신입 플레이어(6)
그날 이후, 신입 플레이어들에게 하는 무기술 교육에 더욱 정성을 다해서 진행하게 되었다.
'가르침 또한 하나의 배움이었어.'
그동안 내가 모르고 지나갔던 부분이었다.
"그만."
내 한마디에 신입들이 일사불란하게 복장을 점검하고 내 앞으로 모여들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안우진님!"
"오늘도 지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입들이 고개를 숙이고 각자 들었던 무기들을 보관함에 넣은 뒤 체력 단련실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뒤에서 열심히 무언가를 필기하고 있던 아세리안이 다가왔다.
"오늘도 고생 많으셨어요."
"예."
"오늘 신입분들 눈빛 보셨어요? 안우진님을 향해 존경의 눈빛이 뿜뿜 하던데요?"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동안 나는 신입들을 귀찮은 짐덩이처럼 바라봤었다.
누군가를 위해 내 시간 쪼개가며 교육한다는 것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훈련할 시간도 부족한 판에.
그렇게 심드렁한 채로 있다 보니, 신입들은 나를 더욱 어려워하게 되었고.
그런데 어제의 일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교육을 진행할수록 내가 배우는 것도 무척 많았지.'
초심.
기초 부분부터 다시 시작하기에, 내가 잊고 있었던 초심을 되찾을 수 있었고, 누군가에게 알려주려면 내가 그 부분을 완벽하게 숙지한 상태에서 진행되어야 하므로 무심코 그냥 지나갔던 부분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신입들의 교육에 더욱 열과 성을 다하게 되었고, 덕분에 신입들이 날 어려워하던 기색도 차츰 사라져가고 있었다.
"자-, 저희도 얼른 밥 먹으러 가요!"
"예."
아세리안과 함께 식당으로 들어서자 이세연이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후.
나는 살짝 내가 앉을 테이블을 곁눈질했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그곳엔 다른 사람들보다 음식 높이가 두 배 정도 높은 내 식판이 존재했다.
점심보다 양이 더 늘었네.
내가 얼마나 먹을 수 있나 시험하는 건가······?
나는 어지간하면 음식을 남기지 않는데······. 이건 쉽지 않아 보였다.
"헤에- 안우진님은 좋겠네요, 많이 드실 수 있어서."
아세리안이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쿡쿡 하고 웃었다.
"······식사나 하죠."
결국 나는 그날도 꾸역꾸역 식판 위에 있는 음식들을 다 해치우는 데 성공했다.
일주일 후.
팜에 새로 생긴 대련장에서 나는 네 명의 신입 플레이어들과 검을 든 채 대치하고 있었다.
"후우우우, 후우우."
거친 숨소리와 함께 긴장하고 있는 신입들과 달리, 나는 무척 평온했다.
상대는 이제 막 검을 잡은 병아리들.
저들을 상대로 내가 긴장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이긴 했다.
'어떻게 이겨줄까.'
그래, 이번 기회에 자기들이 얼마나 약한지를 깨닫게 해주는 것도 좋은 동기부여가 될 것이다.
한번 제대로 내 실력을 보여줘야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듯한 시선에 고개를 돌리자 아세리안이 보였다.
그녀를 바라보자 '살살해요. 살살' 이라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너무 온실 속의 화초로 키우는 것도 좋진 않은데.'
내심 고민했지만 나는 원래 생각했던 대로 가기로 했다.
나는 가르치는 입장이다.
한마디로 저들에게 신뢰를 줘야 한다는 뜻.
그런데 아세리안의 말처럼 살살하게 되면 저들이 날 굳게 믿고 따라오려 할까?
아마 조금만 의심스러운 상황이 생겨도 쉽게 믿음이 떨어져 나갈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제대로 하려고 했다.
바닥을 향했던 검을 들어 올리자 또다시 뜨거운 눈초리가 느껴졌다.
'뭐야.'
그녀는 중지와 검지로 자신의 눈을 가리키더니, 이어서 나를 향하게 만들었다.
―지켜보고 있다. 살살 안 하기만 해 봐.
분명 단순한 손짓일 뿐이었는데, 그녀가 그렇게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쯧.'
어쩔 수 없지.
아무래도 내 진짜 실력을 보여주는 것은 이후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오늘은 그냥 대충 검이나 받아주며 실전 감각이나 익히게 만들어야지.
"하앗!"
내가 혀를 차며 검을 까딱하자, 네 명의 플레이어들이 동시에 내게 달려들었다.
휘익!
날아드는 검을 피하며 적당히 검을 찔러 주었다.
누가 봐도 막을 수 있게끔 방패 근처로.
그런데······.
푸슉!
"······."
검이 날아오는 상황임에도 나도 모르게 아세리안의 눈치부터 먼저 살폈다.
하지만 우려와 다르게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 정도는 허용한다 이거지.'
검에 찔렸던 신입은 부위가 어깨 쪽이라서 그런지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고작 이걸 피하지 못해서야.
쯧.
'어쩔 수 없네.'
애초에 실전이 처음인 상황.
일단 막아내고, 방패를 찌르자.
누가 들으면 어처구니가 없는 소리겠지만, 하는 수 없었다.
신입들과 나 사이의 실력 차이가 너무 컸다.
나는 그때부터 한참 동안 날아오는 검을 막아내고, 방패 쪽으로만 공격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
"허억, 허억, 고생하셨습니다."
"예."
신입들이 바닥에 쓰러진 채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반면에 나는 땀 한 방울도 안 흘린 상황.
뭐, 이해는 한다.
검 끝이 서로에게 겨눠진 채 싸운다는 것은 정신력 소모가 무척 크니까.
그리고 정신력의 소모는 체력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첫 실전에 몸이 굳어 있던 신입들의 체력이 금방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검을 갈무리하고 대련장을 빠져나가려는데 아세리안이 쫄래쫄래 쫓아왔다.
"고생 많으셨어요, 안우진님!"
"예, 뭐."
솔직히 준비운동 격도 되지 않았기에 좀 머쓱했지만.
그렇게 대련장을 나서려는데 아세리안이 나를 잡았다.
"잠깐 둘이서 대화 좀 할 수 있을까요?"
"······?"
왜인지 모르게 아세리안의 표정이 심각했다.
무슨 일 있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세리안이 휴식의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팜에는 딱히 그녀의 집무실이라고 할만한 공간이 없기에 어쩔 수 없었다.
"무슨 일입니까?"
"저기······ 오퍼가 들어왔는데요."
그녀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치켜떴다.
드디어.
기다리던 오퍼가 왔다.
어느덧 블러드나이트176이 끝난 지 2주째.
슬슬 오퍼가 들어올 때가 되지 않았나, 싶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마침 오퍼가 왔다니 무척 반가웠다.
"언제죠?"
"블러드나이트 179요······."
블러드나이트 179라······.
잠깐.
179?
"그럼 바로 이번 주 아닙니까?"
"네······. 원래 뛰기로 했던 플레이어가 있었는데, 사정이 있어 불참하게 되었나 봐요."
경기장에 들어가면 모든 상처가 회복된다.
즉, 부상은 아니라는 것.
그렇다면······.
'죽었다는 뜻이지.'
뭐, 팜 내에서 싸우는 경우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뭔가 걸리는 게 있었다.
뭔가 미묘한 아세리안의 표정.
경기가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러는 것은 아닐 테고.
"또 뭐가 있습니까?"
"네. 그······ 스토리 미션이에요."
스토리 미션이라.
그렇다면 쉽지 않긴 하지.
그제야 그녀의 표정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스토리 미션은 단순히 강하다고 깰 수 있는 미션이 아니었다.
다양한 미션이 제시되는 만큼, 실력보다는 다양한 경험이 중요했다.
나도 1회차 때 스토리 미션을 한 번 밖에 경험해보지 못했다.
나는 하위리그 후반기부터 맹인인 상태로 싸웠어야 했으니까.
아군과 적군을 식별하기 어려워 개인 PvP 경기 말고는 뛰어본 게 없었다.
'지금 내 스텟이 몇이지.'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하위리그]
[근력 : 29] [민첩 : 35 [체력 : 38]
[정신 : 89] [지력 : 14] [마력 : 0]
[각성 능력 : <초감각> <고급살기> <특급마나운용> <고급창술> <상급검술> <상급단검술> <상급투척술> <중급박투술> <하급치료술> <상급궁술> <하급검방술>]
[보유 스킬(0/5) : 없음]
[업적 특전 : 없음] [차원 특전 : 없음] [종족 특전 : 없음]
그 사이 스텟을 많이 올리지 못했다.
신입들 교육도 해야 했고, 스텟이 높아져서 상승 폭이 줄어든 것도 있었다.
음.
좀 애매한데.
'스토리 미션을 뛰기엔 스텟이 너무 낮아.'
기본적인 난이도란 게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경기를 포기하긴 무척 아쉬웠다.
현재 내 기본급은 3,500 포인트.
포인트가 올라갈수록 경기에 출전하는 빈도가 줄어든다.
3,500 포인트면 그렇게 높은 수준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낮지도 않은 정도.
그래서 이대로 포기하기엔 무척 아쉬웠다.
'참가하는 쪽으로 하자.'
내가 수락하려고 입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코메인 이벤트에요."
움찔.
"······오퍼 들어온 게 코메인 이벤트였습니까?"
"네······."
하아.
미치겠네.
도대체 게임 메이커는 이제 고작 두 경기를 뛴 플레이어한테 왜 코메인 이벤트 오퍼를 넣은 거지?
코메인 이벤트는 메인 이벤트의 바로 밑 단계에 존재하는 경기다.
즉, 컨텐더 혹은 그에 준하는 이들이나 받게 되는 오퍼라는 것.
코메인 이벤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곧장 메인 이벤트로 올라간다.
그리고 그 말은.
'상위리그로 승급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지.'
하아.
머리가 아팠다.
상위리그.
물론 가고 싶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이미 상위리그를 경험해 본 입장으로서, 적어도 어느 정도 준비를 갖춘 뒤에 가고 싶었다.
지금 스텟으로는?
'택도 없지.'
단숨에 찢겨 죽을 걸?
하위리그에서 최강으로 군림하는 컨텐더들이 상위리그로 올라가는 순간 최약자가 된다.
그만큼 하위리그와 상위리그 사이엔 벽이라고 부를 만한 격차가 존재했다.
"저는······ 이번 경기에 출전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사실 오퍼가 온 것도 말씀드릴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래도 말씀드리는 게 맞는 것 같아서 이렇게 알려드리는 거예요."
"······말씀이라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네. 그래도 오늘 저녁까진 답변을 주기로 했어요. 그쪽도 좀 급한 모양이에요."
나는 아세리안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조금······.
걸을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코메인 이벤트라······.
거기다가 스토리 미션.
난이도는 정말 토 나올 정도일 것이다.
'어떻게 할까.'
사실 내 스텟이 조금만 더 높았다면 이런 고민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내 스텟은 하위리그 평균 정도 수준.
특전을 켜야 하위리그 상위급으로 올라가는 정도다.
최상위권에 위치한 코메인 이벤터들에 비하면 조금 모자란 수준.
'그래도 내가 더 잘 싸울 자신은 있지만.'
확률의 문제였다.
일반 오퍼 경기에 출전하여 개고생을 하고 온 게 고작 2주 전.
그때 느꼈다.
아직은 하위리그에서 더 굴러야 한다고.
그런데도 내가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건.
'뛰고 싶다.'
경기를 뛰고 싶다며 빠르게 요동치는 내 심장 때문일 것이다.
"고민이 많으신가 보네요."
한참 동안 공터를 서성이고 있는데 아세리안이 다가왔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더니 살포시 웃었다.
"경기에 출전하세요."
"······방금 전까진 부정적이지 않으셨습니까?"
"하지만 온몸으로 표현하고 계시잖아요. 경기에 뛰고 싶다고. 지금 출전하지 않을 이유를 찾고 계신 것 아닌가요?"
경기를 뛰지 않을 이유를 찾고 있다라······.
맞네.
정말로 그러고 있었다.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다.
고작 두 경기를 뛰었을 뿐인데 받은 코메인 이벤트.
욕심이 났다.
아마 이번에 오퍼를 거절하면 당분간 코메인 이벤트 오퍼가 오진 않을 터.
또한 승리한다면 보너스도 엄청날 것이고, 고생은 많이 하겠지만 분명 그 안에서 무언가 배워나오는 게 있을 테니까.
'그래, 뛰자.'
내가 언제는 남들보다 높은 스텟으로 경기에 출전했던가?
1회차 때의 난, 항상 최약자였다.
'하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았지.'
그때의 그 무모한 도전을 이어가던 플레이어는 어디 가고, 어느새 겁쟁이가 되었을까.
마음을 다잡은 나는 아세리안을 바라봤다.
"그 경기. 뛰겠습니다."
"그러실 줄 알았어요. 분명 이번에도 멋진 활약을 하고 돌아오실 거예요."
그러자 아세리안이 말갛게 웃었다.
그렇게 나는, 블러드나이트 179 코메인 이벤트에 출전하게 되었다.
띠링!
[경기 : 하위리그-블러드나이트179의 코메인 이벤트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유형 : 요인 구출(스토리 미션)]
[게임명 : 빛의 이면]
[맵 : 아덴마하(중)]
[관객 수 : 25,274 명]
[미션 : 빛의 교단 어딘가에 억류되어 있을 제물을 구출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성물을 파괴하세요.]
[승리 조건1 : 악마 소환 의식에 사용될 제물을 구출하라―하얀빛이 흘러나옵니다.]
[승리 조건2 : 악마 소환 의식에 사용될 성물을 파괴하라―자색빛이 흘러나옵니다.]
[악마 소환 의식은 앞으로 48시간 후에 시작될 예정입니다. 제한 시간을 넘길 시 미션은 자동으로 실패 처리 됩니다.]
[제물을 구출하여 세이프티 존까지 무사히 데려오세요. 세이프티 존은 초록색 빛이 흘러나옵니다.]
['제물'은 빛의 교단 어딘가에 억류되어 있습니다.]
['성물'은 빛의 교단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난이도가 너무 높으므로 미션 성공 시 전원 생존합니다.(부활)]
[난이도가 너무 높으므로 상태창을 이용한 메시지 전송이 가능합니다.]
[미션 성공 시 x 5 의 보너스 포인트를 기본급으로 지급합니다.]
[성물 파괴까지 제한 시간 : 48:00:00]
[3초 후 경기가 시작합니다.]
아덴마하.
맵의 선정이 좋았다.
하얀 가면을 업그레이드 시킬, 가면의 파편이 존재하는 맵이었으니까.
이번 미션, 반드시 이긴다.
그리고 가면의 파편도 챙긴다.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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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빛의 이면(1)
[2초 후 경기가 시작합니다.]
작은 방 안.
나를 포함해서 총 열 명의 플레이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기사 하나, 검객 둘, 창술사 하나, 전사 하나, 암살자 하나, 궁수 하나. 나머지 둘은 마법사인가?'
코메인 이벤트에 출전하는 플레이어들답게, 모두들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중 한 명은 특히 강해 보였다.
[1초 후 경기가 시작합니다.]
다행히 이번 경기는 단체 미션.
이들과 싸울 이유가 없으므로, 참가한 플레이어가 강할수록 경기에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적어도 폭탄은 없어 보이네.'
그런 의미에서 팀운은 나쁘지 않다고 볼 수 있었다.
[경기 시작!]
경기 시작 콜이 뜸과 동시에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내가 특히 강하다고 눈여겨보고 있던 기사였다.
"내 닉네임은 케일. 기사이고, 총 17전을 치렀다. 컨텐더의 자격을 부여받았지. 이번 경기는 단체 스토리 미션. 단합이 무척 중요하다. 그래서 이 경기를 지휘할 대장을 뽑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귀하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묵직한 저음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힘이 담겨 있었다.
"찬성."
"찬성합니다."
"나도 찬성."
아직 하위리그이긴 하지만, 모두들 여러 차례 경기를 치러온 베테랑들. 상황 판단이 빨랐다. 모두가 동의하자 그때부터 대장 선출이 시작되었다.
"각자 닉네임과 특기, 전적을 말해다오."
케일의 말에 한 명씩 돌아가며 자기소개가 시작됐다.
"닉네임은 슈우사쿠. 16전을 치렀다. 침투 및 암살이 특기."
단검을 들고 있던 암살자가 말했다.
"고건무. 11전을 치렀습니다. 정찰 및 저격이 특기입니다."
활을 들고 있던 사내가 말했다.
"전 브란트입니다. 12전 동안 살아남았고, 싸우는 것 외로는 특별히 잘하는 게 없군요."
대검을 들고 있던 남자가 말했다.
"게빈이오. 마찬가지로 12전을 치렀고, 다대일 전투, 호위 전문이요."
롱소드를 들고 있던 중년인이 말했다.
"위일정 입니다. 14전을 살아남았고, 특기는 일대일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창을 쥐고 있던 남성이 말했다.
"도로시예요. 9전을 싸웠고, 불꽃 마법을 특히 잘 다뤄요."
완드를 들고 있던 여인이 말했다.
"껄껄, 난 이든 호크. 이번이 12번째 경기로군. 왠지 즐거운 경기가 될 것 같구먼. 안 싸우는 것 빼고 다 잘한다네."
거대한 도끼를 들고 있던 바이킹이 말했다.
"엘론드라고 해요. 8전을 싸웠고, 정령 마법이 특기랍니다."
로브를 입고 있는 여성의 머리 위로 하급 정령 하나가 뿅, 하고 나타났다.
나머지 한 명이 정령사였군.
이 정도면 파티로는 정말 완벽한 조합이라고 할 수 있었다.
드디어 돌고 돌아 내 차례가 되었다.
"렌입니다. 2전을 치렀고, 특기는 정보 수집, 요인 호위, 암살, 다대일전투 입니다."
내 말에 곁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탄성을 터트렸다.
"고작 2전 만에 코메인 이벤트를 뛴다고? 네임드인가?"
"아, 렌이라는 닉네임 들어봤어요. 얼마 전에 붉은 깃발전에서 최초 업적을 세운 플레이어잖아요."
"오오, 네임드는 처음 보는군. 안 그래도 우리 트레이너엔젤도 저자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긴 했지."
내게로 모여드는 시선들.
무언가 오해가 있는 듯 싶었다.
내 출신 성계가 지구라는 것을 알면 표정이 돌변하겠지.
지구엔 네임드가 없으니까.
'굳이 얘기하진 말아야겠군.'
기사, 케일도 구성원에 만족한 듯 흡족한 미소를 피웠다.
"내 특기는 지휘, 통솔, 전술 운용이다. 모두들 지휘통솔론을 배운 적이 없는 것 같은데, 혹시 내가 이 경기의 지휘를 맡아도 되겠는가?"
케일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베스트라고 할 수 있었다.
존재하는 이들 중 유일하게 컨텐더이고, 경험도 가장 많다.
물론 1회차를 경험한 나만큼은 아니지만, 애초에 나는 하위리그 후반기부터 맹인이 되었던 몸.
개인 PvP 말고는 그다지 경험이 없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단체전이나 스토리 미션을 뛰기엔 제약이 너무 많았으니까.
"그럼 지금부터 내가 이 파티의 파티장을 맡겠다. 그대들의 특기에 맞춰 한 명씩 임무를 부여할 테니 잘 따라주도록."
케일이 한명 한명 역할을 부여했다.
제한 시간은 48시간.
우리는 그중 24시간 동안 미션 수행 전 준비단계를 갖기로 했다.
암살자인 슈우사쿠는 빛의 교단이 점령한 아덴마하 영주성 내부 침입로 조사를, 궁수인 고건무는 영주성 내부에서 제물을 호위해 세이프티 존까지 갈 수 있는 탈출로를 조사하기로 했다.
아덴마하가 있는 티르너노그는 마법이 극도로 발달한 성계.
그래서 마법사인 도로시가 슈우사쿠와 함께 움직이며 마법 함정이 있는지 체크하기로 했고, 감시 때문에 이동하기 어려운 부분을 정령사인 엘론드가 정령으로 확인한다.
검객인 게빈이 근접 전투에 취약한 고건무를 따라가서 호위한다.
나와 브란트, 이든 호크, 위일정은 아덴마하를 돌아다니며 쓸만한 정보를 모아오기로 했다.
"모두 지시받은 내용을 철저하게 수행해 주었으면 한다. 24시간 후, 이곳에서 다시 모이겠다. 중간중간 상태창을 통해 보고하도록."
케일이 각자에게 임무 분담을 해주자 열 명의 플레이어들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미션을 위해 들어와 있는 몸.
친목 도모 따윈 필요가 없었다.
밖으로 나오자 허름한 주택가가 보였다.
스타팅 포인트는 아덴마하 외곽의 빈민가.
나는 일단 이곳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거리에 사람이 별로 없군.'
동이 튼지 제법 됐는데도 길거리는 무척 한산했다.
길바닥에는 쓰레기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고, 간간이 빛의 교단 소속인 듯한 병사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만날 때마다 근처 한적한 골목에 몸을 숨기며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나오길 반복한 끝에 아덴마하를 한 바퀴 도는 데 성공했다.
[성물 파괴까지 제한 시간 : 41:55:12]
경기가 시작된 지 어느덧 6시간이 흘렀다.
'생각보다 넓네. 가면 조각을 찾으러 다닐 시간은 안 되겠는데.'
티르너노그 성계를 배경으로 경기를 많이 뛰어보긴 했지만, 아덴마하는 처음이었다.
회귀 전, 라이언의 트레이너 엔젤이 올린 저격 글에는 가면 조각이 아덴마하 동쪽 숲 어딘가에 있다고 했다.
마침 제물을 호위해서 가야 하는 세이프티 존의 위치도 아덴마하 동쪽 숲 끝 방향.
아무래도 가면 조각을 찾는 것은 제물을 무사히 구출해낸 이후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지금은 일단 미션이 먼저니까.
중간 보고를 위해 상태창을 열자 그사이 여러 개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슈우사쿠 : 영주성 도착. A-1구역 이동 중.
―도로시 : A-1 구역 3번째 복도에 알람 마법 체크.
―도로시 : A-2 구역 1번째 복도에 알람 마법 체크.
―도로시 : A-2 구역 2번째, 3번째 복도에 알람 마법 체크.
―슈우사쿠 : A-2 구역이 병력은 별로 없지만 알람 마법이 많음. 침입로보단 탈출로로 적당해 보임.
―케일 : 고건무는 A-2 구역으로 이동하여 탈출로로 적당한지 체크하라.
―고건무 : 옙. A-2 구역으로 이동합니다.
메시지 창에는 침입조와 탈출조의 메시지만 가득했다. 정보 수집조에선 아무런 내용도 올리지 못한 상황.
'정보라는 게 어떤 관점으로 접근하냐에 따라 쓸모 있는 것도 쓸모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니까.'
그저 하염없이 아덴마하를 돌아다니고 있을 게 뻔했다.
―렌 : 중간 보고. 아덴마하는 가로 8킬로미터, 세로 5킬로미터의 타원형 모양. 길거리엔 사람이 없고, 곳곳에 경비병들이 깔려 있음. 한 바퀴를 도는 동안 만난 경비병의 숫자는 317명. 거수자 외엔 검문을 따로 하지 않음. 동서남북에 성문이 하나씩 존재하고, 각 성문마다 기사 하나와 경비병 열 명이 지키고 있음. 골목길이 무척 많은데, 막다른 골목이 별로 없어 탈출에 용이.
지금까지 모아놓은 정보를 올리자 곧바로 답장이 왔다.
―케일 : 수고 많았다. 조금만 더 고생하도록.
케일의 답장을 본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정보는 필수였다.
하지만 다른 정보 수집조원들에게 쓸만한 정보를 기대하긴 어려운 상황.
결국 내가 더 고생하는 수밖에 없었다.
[성물 파괴까지 제한 시간 : 30:15:17]
밤이 되자 제법 쌀쌀했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거의 확보했다.
그렇기에 나는 현재 아덴마하에서 그나마 사람이 많은 술집 지붕에 숨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제길. 도대체 왕국은 뭘 하고 있는 거지? 아덴마하가 점령된 지 2주나 흘렀는데 아무런 소식도 없다니."
"쉿, 목소리를 낮추게. 누가 들을 수도 있으니."
"들으라면 들으라지. 악을 멸하기 위해 빛의 교단이 어쩔 수 없이 아덴마하를 점령했다고? 웃기지도 않는군. 툭하면 이단이라며 무고한 사람들이나 죽여대는 저들이 어찌 선을 부르짖는단 말인가."
"자네, 너무 흥분했군. 제발 침착하게. 최근에 그런 식으로 얘기하다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끌려갔는지 알지 않은가. 어제는 로즈 스트리트에 사는 루시아도 끌려갔다고 하더군."
"아니, 그 아이가 어째서? 그 아이는 인세에 태어난 천사라고 해도 믿을 만큼 착한 아이지 않은가!"
"그게······."
'쯧.'
귀를 기울여 봤지만 딱히 쓸만한 내용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빛의 교단에 대한 사람들의 반감이 심하다는 것 정도.
차라리 술집보단 순찰을 돌고 있는 경비병들이 나누는 대화에 귀 기울이는 것이 나을 듯 싶었다.
―슈우사쿠 : C-7 구역 체크 중. 알람 마법이 하나밖에 없고 경비병이 일곱. 기습으로 시작한다면 침입로로 가장 좋을 듯. 특이사항으로 갑자기 경계가 심해졌음.
―케일 : 알겠다. 혹시 고건무와 게빈을 보았는가? 둘의 연락이 2시간째 오지 않고 있다. 혹시 억류된 건 아닌지 체크 바란다.
―도로시 : 알겠어요.
―고건무 : 아, 죄송합니다. 제법 괜찮은 탈출로를 찾아서 조사하다 보니 그만 연락이 늦었습니다.
―케일 : 괜찮다. 새로운 탈출로는 어디지?
―고건무 : B-2 구역입니다. 바로 옆에 사람들이 자주 지나다니지 않는 샛길이 있었는데, 그곳으로 빠져나오면 곧장 영주성의 후문입니다.
―케일 : 좋군. 수고했다. 혹시 모르니 조금 더 고생하도록.
―고건무 : 옛.
여전히 메시지 창에서는 침입조와 탈출조만 활발한 상황.
나는 '술집에서 얻은 정보 없음.' 이라고만 간략하게 남긴 채 경비병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곧 있으면 자정이 넘어가게 된다.
여기서 마저 쓸만한 정보를 얻지 못하면, 더 이상 정보 수집을 하는 의미가 없을 수도 있었다.
'뭐라도 건졌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경비병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메인 스트리트 근처에 숨어들었지만, 역시 경비병들에게서도 그다지 쓸만한 내용을 얻지 못했다.
"이봐, 코비. 그 소식 들었나? 오늘 아침에 에밋이 네가 찜해놨다던 년이랑 한바탕 즐기고 왔다더군."
"뭐? 호엘룬이랑? 어떻게?"
"평소에 에밋이랑 안면이 있던 마법사님이 마법을 걸어 주셨다나 봐. 그년 남편이랑 완전히 똑같은 모습으로 변했다던데? 이래서 흑마법이 좋다니까."
"흐흐, 나도 해 달라고 해봐야겠다."
쓰잘때기 없는 잡담뿐.
'결국 꽝이군.'
어느새 주어졌던 24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한참 동안 그들의 대화를 엿듣던 나는 한숨을 내쉬며 스타팅 포인트로 이동하기 위해 몸을 폈다.
그때였다.
"아 참, 오늘 오후에 교단에서 성녀님이 오셨다더라고. 그래서 사제님들이 당분간은 영주성 근처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하셨어. 특히, 붉은 머리에 새하얀 로브를 입고 있는 여인을 만나면 주의하라고 하더군. 교단의 성물을 들고 오셔서 영주성 근처로 오는 놈들은 이유를 불문하고 제물로 삼겠다고 으름장을 놓더라니까?"
'성물!'
나는 서둘러 메시지 창을 열었다.
―렌 : 오늘 오후에 성녀가 성물을 가지고 영주성으로 들어갔다고 함. 특징은 붉은 머리에 새하얀 로브. 성녀의 위치를 파악할 것.
―케일 : 정말 귀중한 정보로군. 슈우사쿠, 성녀의 위치도 파악해줄 수 있나?
―슈우사쿠 : 이미 파악 완료함. 제물이 있을 것으로 파악되는 지하 감옥으로 갔다가 이후 영주성 내부 연회장으로 이동하여 여전히 나오지 않고 있음.
―케일 : 알겠다. 계속 수고해 주도록.
다행히 침입조 쪽에서도 제물의 위치를 알아낸 상황.
거기에 방금 전 성물의 위치까지 파악했으니 미션을 수행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모두 달성했다고 할 수 있었다.
[성물 파괴까지 제한 시간 : 24:35:42]
덕분에 안가로 향하는 내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모두 고생 많았다. 덕분에 성물과 제물의 위치도 파악했고, 대략적인 침입 루트와 탈출 루트도 정할 수 있었다. 작전 설명 이후 12시간 남을 때까지······."
8명이 모여 있는 작은 방. 케일이 우리에게 앞으로의 일정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향수 냄새가 훅, 밀려 들어왔다.
고건무와 게빈이 있는 방향이었다.
'처음 만났을 땐 이런 향기가 안 났는데.'
쯧.
그 사이 여자랑 뒹굴고 왔나 보군.
"이후 휴식을 가진 뒤, 제한 시간이 12시간 남은 시점에 작전을 실행할 테니 그렇게 알고 있도록."
"예."
"우리는 2개 조로 나뉘어 영주성으로 침입한다. 나와 도로시, 게빈, 고건무, 렌이 성물 파괴조. 그리고 슈우사쿠와 브란트, 엘론드, 위일정, 이든 호크가 제물 구출조다. 제물 구출조의 조장은 슈우사쿠가 맡는다."
슈우사쿠가 역수로 쥐고 있던 단검을 살짝 들어 보였다.
케일이 슈우사쿠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이쪽, C-7 구역으로 동시에 침입하여 C-4 구역에 있는 갈림길에서 제물 구출조는 지하 감옥으로, 우리 성물 파괴조는 내부 연회장 쪽으로 이동한다."
"알겠습니다."
"성물의 위치는 높은 확률로 내부 연회장에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제물의 위치가 지하 감옥에 있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그곳에 있을 것으로 추정될 뿐. 때문에 슈우사쿠, 그대의 역할이 무척 중요하다."
케일의 말에 슈우사쿠가 입을 열었다.
"최선을 다하지."
"그곳으로 이동함에 있어 예상되는 어려움은?"
케일의 물음에 입을 연 것은 정령사, 엘론드였다.
"생각보다 그곳에 병력이 별로 없었어요. 저희가 그 앞을 확인했을 땐 사지가 잘린 두 명의 남성이 기절한 채 질질 끌려가는 모습만 확인했을 뿐, 이상할 정도로 그 앞을 지키는 병사가 없어요."
그녀의 대답에 케일이 팔짱을 꼈다.
"충분히 함정일 가능성이 농후하군. 하지만 그렇다고 확인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마침 성녀가 그곳을 다녀갔다고 하니, 가능성은 충분하다. 일단 지하 감옥으로 갔다가 제물을 확보하지 못하면 우리와 합류하는 것으로 한다."
케일의 말에 슈우사쿠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B-2구역 옆에 있는 샛길로 탈출한다. 거기로 나가면 곧바로 영주성의 후문이 나오는데, 이후 곧장 북문으로 달려서 빠져나갈 것이다."
"동문이 아니구요?"
도로시의 질문에 케일이 지도 한쪽을 짚었다.
"거리상으론 동문이 세이프티 존에 더 가깝지만, 고건무가 조사해보니 그곳은 경사가 있는 언덕길이라고 한다. 근데 북문으로 넘어가면 계속 평지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빠르게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케일이 펼쳤던 지도를 돌돌 말아 가슴팍에 넣었다.
"대충 작전은 다 설명했으니 앞으로 12시간 동안 휴식 시간을 갖겠다. 12시간 뒤면 해가 내려앉을 것이다. 그때 작전을 실행한다."
"알겠습니다."
다른 인원들이 대답과 함께 방의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작전 실행 전,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 두려는 것 같았다.
나는 스타팅 포인트로 배정된 방을 나섰다.
이곳은 너무 좁아서 10명이 모두 쉬기엔 적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침 미리 봐뒀던 곳이 있기에 그곳으로 향해서 편하게 몸을 뉘었을 때였다.
'고건무랑, 게빈?'
나 말고도 스타팅 포인트에서 나온 사람이 있었다.
둘은 딱 달라붙어서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 얘기를 주고받더니 이내 빠른 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했다.
거리가 멀어서 무슨 대화 내용이었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오늘 처음 본 사이일 텐데 그사이 친해졌나.'
스멀스멀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미션으로 이런 맵이 나오면 두 눈이 뒤집힌 채 여자를 탐하는 놈들이 제법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곧 작전인데 설마 또 여자를 품으러 가는 건 아니겠지?
부디 그 정도로 생각이 없진 않길.
그런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미션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물 파괴까지 제한 시간 : 11:59:37]
구름에 가려 달빛조차 존재하지 않는 깜깜한 밤이 되었다.
스타팅 포인트에서 빠져나온 우리는 미리 봐두었던 골목을 통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 영주성 바로 입구까지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검은색 로브로 갑옷을 가린 케일이 입을 열었다.
"모두들."
그는 한명 한명 눈을 마주치더니 주먹으로 자신의 심장을 두 번 두드렸다.
"시작하자."
케일의 말을 시작으로 우리는 빠르게 영주성으로 내달렸다.
진정한 미션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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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빛의 이면(2)
거대한 대저택.
내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근처를 비추고 있었다.
그 밖의 영역은 온전한 어둠.
우리는 그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최대한 조용하게 이동했다.
침투 목적은 요인 암살이 아닌, 성물 파괴와 요인 구출.
최대한 은밀하게 침입해야 한다.
그래야 탈출할 때 조금이나마 수월해질 테니까.
―케일 : 이제부턴 상태창으로만 대화한다. 작은 소음에도 발각될 우려가 있으니. 슈우사쿠, 갈림길 전까지 그대가 척후를 선다.
―슈우사쿠 : 알겠다.
케일의 말에 슈우사쿠가 조금씩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내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암살자의 기본 스킬인 은신을 사용한 것이다.
감시의 눈을 피해 담벼락을 넘은 우리는 조용히 대저택의 세 번째 입구로 향했다.
입구까지 중간지점 정도 왔을 때였다.
전방에서 세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슈우사쿠 : 전방 30미터에 경비병 셋. 우회는 어려울 듯. 조용히 죽이면 나무 뒤에 시체를 숨길 수 있을 것 같다.
―케일 : 슈우사쿠가 가운데와 우측 경비병을 암살하고, 그 타이밍에 맞춰 고건무가 왼쪽 경비병을 저격한다.
―슈우사쿠 : 확인.
자세를 낮추고 거의 기어가듯이 다가가는 슈우사쿠.
그렇게 경비병들과 세 걸음 정도 남았을 때였다.
'앤 뭐 하는 거야?'
고건무가 뒤에서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할 뿐, 활시위를 걸지 않고 있었다.
내가 어깨를 톡, 건드렸으나 그는 왜 그러냐는 눈빛만 보내올 뿐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쯧.'
하는 수 없이 나는 가슴에 채워진 가죽 벨트에서 비수 하나를 꺼내 손에 쥐었다.
그리고 슈우사쿠처럼 자세를 낮춘 채 경비병들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케일 : 렌, 뭐 하는 거지?
케일이 상태창으로 물어봤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곧 있으면 슈우사쿠가 가운데 경비병부터 암살을 시작할 것이다.
그 타이밍에 맞추려면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야 했다.
거리가 15미터까지 좁혀지자 나는 속으로 숫자를 셌다.
'셋. 둘. 하나.'
그리고 망설임 없이 손에 쥔 비수를 던졌다.
푹-
"무슨? 컥······."
갑작스러운 슈우사쿠의 등장에 경비병들이 경계를 하려는 찰나.
띠링!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가운데와 오른쪽 경비병의 목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왼쪽에 서 있던 경비병이 크게 소리를 치려다가 목에 비수가 박힌 채 뒤로 꼬꾸라졌다.
후.
다행히 타이밍을 맞출 수 있었군.
그제서야 케일은 고건무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슈우사쿠가 시체들을 질질 끌어 나무 뒤에 숨기는 사이, 케일이 고건무를 불렀다.
―케일 : 고건무. 지금 뭐 하는 거지? 내가 분명 왼쪽 경비병을 저격하라고 했을 텐데.
"······."
―케일 : 고건무. 이봐.
"······."
"고건무."
"예?"
"왜 상태 메시지를 안 보는 거지? 내가 분명 몇 번이나 지시를 내리지 않았나?"
케일이 작게 으르렁거리자 고건무가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아, 죄송합니다······."
"이번 미션은 서로의 손발이 잘 맞는 게 중요하다는 걸 모르는가? 도대체 정신이 어디에 팔려 있는 거지?"
케일의 꾸짖음에도 고건무는 이렇다 할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뭔가 수상한데.'
저렇게 어리버리한 놈이 11전이나 살아남았을리 없다.
분명 뭐가 있는 것 같은데······.
"한시가 급하니 이만하겠다. 정신 똑바로 차리도록."
"옛."
"그리고 렌. 고맙다. 그대 덕분에 처음부터 계획이 어그러지지 않을 수 있었다."
케일의 인사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넘어가긴 찝찝해.'
케일은 그냥 넘길 생각인 것 같지만, 나는 이대로 진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고건무의 곁으로 갔다.
―렌 : 고건무.
"예, 부르셨습니까?"
내 부름에 고건무가 답했다.
'쯧. 괜한 걱정이었나.'
"아닙니다. 어려운 미션인 만큼 조금 더 집중했으면 좋겠습니다."
"아, 예. 정말 죄송합니다."
한바탕 작은 소동이 끝나고 다시 진행된 저택의 침입.
이후로는 큰 어려움 없이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케일이 고건무에게 지시를 내리지 않고, 대신 나에게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케일 : 한 번에 두 개 던질 수도 있는가?
―렌 : 가능합니다.
―케일 : 그럼 슈우사쿠가 왼쪽 두 명을, 렌이 오른쪽 두 명을 맡는다.
어쩔 수 없다.
고건무는 케일의 지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단 한 번의 실수만으로도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케일이 고건무에게 더 이상 지시를 내리지 않는 것도 이해가 됐다.
'나도 차라리 그게 마음이 편할 것 같고.'
내가 파티장을 맡았다면 고건무 같은 플레이어는 미션 수행에서 아예 제외시켰을 것이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플레이어의 존재는 다른 사람들까지 긴장하게 만드는 법이니까.
있으면 분명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겠지만, 크게 보면 전체적으론 마이너스였다.
―슈우사쿠 : 여기서부턴 앞에 경비병들이 빽빽하게 지키고 있어서 몰래 돌파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케일 : 고생했다. 지금부턴 강행 돌파하겠다. 신호를 주면 모두 전속력으로 이동한다. 지금부턴 시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명심하도록. 게빈, 그대가 후방 척후를 선다.
―게빈 : 알겠소.
케일이 한 손을 들었다가 앞으로 내렸다.
이동하라는 신호.
그때부터 우리는 은밀함을 버리고 신속하게 이동을 시작했다.
"침입자다! 침입자가 발생했······ 컥!"
경비병들이 우릴 발견하고 고함을 치며 막아보려 했지만, 슈우사쿠와 내 검에 반항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목이 잘렸다.
경비병의 외침에 저택 곳곳에서 병사들의 군화와 갑주 소리가 들려왔지만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대저택의 한가운데까지 조용히 들어온 몸.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으니까.
민첩이 높은 슈우사쿠와 하얀 가면 덕분에 체력 걱정을 덜 수 있는 내가 앞장서서 길을 열었고, 그 뒤를 케일과 위일정, 이든 호크가 따라왔다.
마법사 라인인 엘론드와 도로시는 가운데에, 그리고 그 뒤쪽을 브란트와 고건무, 게빈이 에워싼 채 이동했다.
"한 번에 죽이지 못한 놈들은 무시하고 그냥 가라! 뒤에서 처리하겠다!"
케일의 외침에 나와 슈우사쿠는 돌파에만 집중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자 T자 모양의 복도가 나왔다.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지하 감옥이, 그리고 오른쪽으로 가면 내부 연회장이 나온다.
이제 조별로 나뉘어야 할 시간.
나와 눈이 마주친 슈우사쿠가 고개를 끄덕인 채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잘 부탁한다."
"무운을 빌죠."
슈우사쿠의 뒤를 위일정, 이든 호크, 엘론드, 브란트가 따라갔다.
나 또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며 복도를 내달렸다.
이제부터는 나 혼자 앞장을 설 차례.
내 스텟이 슈우사쿠보다 낮아서 돌파력은 형편없지만, 그래도 내가 앞장을 서는 게 맞았다.
성물 파괴조는 나와 케일, 도로시, 게빈, 고건무.
파티장인 케일은 전체적인 지휘를 해야 하고, 원거리 딜러인 고건무나 마법사인 도로시가 앞장을 설 수도 없다.
또 다른 검객인 게빈이 맡거나, 내가 맡거나.
둘 중 하나인데 감각이 뛰어난 내가 앞장을 서는 게 미션을 성공적으로 끝낼 확률이 높았다.
'어차피 죽어도 미션만 완수하면 되니까.'
나는 이전과 동일한 방법으로 한 번에 죽지 않은 경비병들은 무시한 채 돌파에만 집중했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경비병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덕분에 내부 연회장에 성물이 존재한다는 확신이 점점 강해졌다.
그때 전방에서 마나의 유동이 느껴졌다.
"앞에 마법사! 셋!"
"고건무! 마법사들을 최우선으로 저격하라!"
"옛."
케일의 지시에 고건무가 경비병들 뒤에 있는 마법사들을 향해 속사를 시작했다.
나는 최전방에서 병사들을 뚫는 것에 집중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검을 휘두를 때였다.
'왜 아직도 마나의 유동이 느껴져?'
젠장.
고건무가 저격에 실패한 건가?
"케일! 마법이 날아옵니다!"
"이쪽은 내가 방패로 막겠다! 그대는 피하는 것에 집중하라!"
그때 앞에서 각종 마법이 날아오는 게 보였다.
'피하는 것에 집중하라고?'
이 좁은 복도에서?
앞은 경비병들이 가로막고 있고, 뒤에서는 따라오던 케일이 자세를 낮춘 채 방패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젠장.
대체 어디로 피하라는 거야?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뚫고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역천자 칭호 적용.'
띠링!
[<신화업적:역천자>을 적용합니다.]
[칭호의 효과로 모든 스텟이 + 20% 상승합니다.]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하위리그]
[근력 : 35(+6)] [민첩 : 42(+7) [체력 : 46(+8)]
[정신 : 107(+18)] [지력 : 17(+3)] [마력 : 0]
[각성 능력 : <초감각> <고급살기> <특급마나운용> <고급창술> <상급검술> <상급단검술> <상급투척술> <중급박투술> <하급치료술> <상급궁술> <하급검방술>]
[보유 스킬(0/5) : 없음]
[업적 특전 : 모든 스텟 + 20%] [차원 특전 : 없음] [종족 특전 : 없음]
[남은 체력 : 78%]
몸에서 힘이 샘솟는다.
나는 빨라진 몸으로 순식간에 경비병들을 뚫어내기 시작했다.
"막아!"
"젠장, 갑자기 빨라졌어."
"이 괴물 놈!"
검을 겨눈 채 싸운다는 것은, 단 한 번의 공격만으로도 상대를 무력화 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를 무력화 시키는 데엔 속도가 조금 빨라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콰과과과광!
그 사이 뒤쪽에서 마법이 떨어지며 엄청난 폭발음을 만들어 냈다.
다행히 나한테까지 영향을 미치는 마법은 없었다.
'됐어.'
순식간에 막혀있던 경비병들을 뚫어낸 나는 마법사들을 향해 돌진했다.
"제, 제길!"
마법을 영창하고 있던 마법사들은 내가 순식간에 다가오자 짧은 욕지거리를 내뱉은 채 목이 꿰뚫려 쓰러졌다.
"잘했다, 렌!"
그때부터 돌파가 훨씬 수월해졌다.
창 대신 검을 들고와서 천만 다행이었다.
이렇게 좁은 복도에서 창을 썼다면 돌파하는 데 한계가 있었을 테니까.
―슈우사쿠 : 지하 감옥 입구에 거의 도착했다.
그때 슈우사쿠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벌써?'
수많은 경비병들에 가로막혀 이제 내부 연회장까지 절반 정도 남은 우리에 비하면 실로 압도적인 속도였다.
―케일 : 경비가 너무 허술한 게 마음에 걸린다. 함정이라고 단정하고 내부로 진입하도록.
―슈우사쿠 : 확인. 내부로 진입하겠다.
내 생각에도 함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그곳 외에는 제물이 어디 있을지 예측되는 곳이 없다는 것.
결국 제물 구출조는 함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지하 감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케일이 함정이라는 것을 단정하고 들어가라고 했으니, 혹시 함정이더라도 슈우사쿠가 잘 헤쳐 나가길 기대하는 수밖에.
"렌, 혹시 속도를 더 내줄 수 있나? 아무래도 우리가 성물을 빠르게 파괴하고 제물 구출조와 합류해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케일의 말에 나는 남은 체력을 확인했다.
그동안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체력은 70%대 후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경비병들을 처치하며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 정도라면 체력 안배를 하지 않고 움직여도 될 것 같았다.
"더 빠르게 가겠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무아지경으로 검을 휘두르며 경비병들 사이를 누볐다.
100미터 달리기를 하듯 엄청난 속도.
덕분에 체력이 빠르게 깎여 나갔지만, 우리는 금세 내부 연회장 앞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성물 파괴까지 제한 시간 : 11:17:02]
"고생했다! 덕분에 빠르게 올 수 있었다."
케일이 내 어깨를 두드린 후 조원들을 돌아보았다.
"이곳 주위에만 경비병들이 깔려있었던 만큼 내부에도 적들이 제법 많을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성물의 파괴. 불필요한 싸움을 최대한 줄이고 성물만 파괴한 뒤 바로 빠져나간다."
케일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슈우사쿠 : 지하 감옥 진입 완료. 현재까지 제물은 확인하지 못했음.
슈우사쿠의 메시지가 도착함과 동시에 케일이 내부 연회장의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그의 뒤로 우리도 일사불란하게 내부로 진입했다.
그때였다.
우뚝.
순간 몸을 멈칫했다.
연회장 안에는 수많은 사제, 마법사, 성기사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연회장의 가운데에 그려져 있는 육망성의 마법진.
그 위에는 빨간 머리에 하얀 로브를 입고 있는 사람이 두 명 있었는데, 둘 모두에게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책을 들고 있는 여인에게선 자색빛이.
그리고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는 여인에게선 하얀색 빛이.
'제물이······ 여기에 있어?'
빠르게 상황 파악을 한 케일이 메시지를 날렸다.
―케일 : 내부 연회장에서 제물과 성물을 모두 확인하였다. 바로 이쪽으로 복귀하도록.
―슈우사쿠 : 알겠다. 그런데 왜 고건······.
하지만 슈우사쿠의 대답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콰아아아아앙!
어디선가 엄청난 굉음이 들려왔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그리고 연속으로 이어지는 다섯 개의 콜.
[플레이어 '슈우사쿠' 가 사망했습니다.]
[플레이어 '브란트' 가 사망했습니다.]
[플레이어 '엘론드' 가 사망했습니다.]
[플레이어 '위일정' 이 사망했습니다.]
[플레이어 '이든 호크' 가 사망했습니다.]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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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빛의 이면(3)
남은 시간을 힐끗 살펴보니 11시간 14분이 찍혀 있었다.
제대로 미션이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반이나 죽었다.
'역시 함정이었어.'
문제는 제물 구출조가 함정임을 인지하고 갔는데도 모두 죽었다는 거다.
그들의 전력이 성물 파괴조와 큰 차이가 없는데도.
만약 이곳에도 그런 함정이 존재한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군.'
사제와 마법사들은 우리가 들어올 때부터 마법진을 향해 영창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대규모 마나의 유동이 느껴졌지만 우릴 향한 공격 마법을 준비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언제 어떤 방식으로 갑자기 마법 공격이 들어올지 모른다.
일단 수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곧장 자리를 피해야 한다.
'그래도 이곳에 성물과 제물이 함께 있어서 다행이야.'
만약 제물이 이곳에 없었다면, 우리는 몰려드는 경비병들을 뚫으며 제물이 어디 있는지 찾아다녀야 했을 것이다.
"침입자다!"
"교단의 의식을 방해하려는 저 이단들을 죽여라!"
우리의 등장에 내부에 있던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있던 성기사들이 검을 뽑은 채 우리에게 달려왔다.
다행히 케일이 금세 정신을 차리고 우리에게 지시를 내렸다.
"게빈! 그대가 고건무와 도로시를 지킨다."
"알겠소."
"렌! 그대가 제물이 있는 곳까지 뚫고 들어가서 제물을 구출하라!"
"알겠습니다."
"고건무는 나를 엄호, 도로시는 광역 마법을 준비한다."
"옛."
"알겠어요."
"나는 성물을 파괴하겠다. 서둘러!"
케일의 지시에 우리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회장 한가운데에는 빨간 머리에 하얀 로브를 쓴 두 명의 여인이 있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둘이 완벽하게 똑같이 생겼다는 것.
'어떻게 저기까지 가지?'
내부에 있는 성기사의 숫자는 대략 4, 50 명.
뚫고 들어가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 정면으로 뚫고 들어가는 것은 보류.
차라리 외곽으로 최대한 돌아서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마침 케일이 놈들의 시선을 끌어주고 있기도 하고.'
케일은 전략이고 뭐고 일단 한가운데로 뚫고 들어가고 있었다.
기사 출신이라서 그런가, 나아가는데 거침이 없었다.
물론 그가 당당하게 정면 돌파를 선택할 수 있었던 이유엔 그의 실력이 뒷받침 되어 주었기 때문인 것도 있을 것이다.
케일의 검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성기사가 한 명씩 쓰러졌고, 그의 방패는 무척 견고해서 성기사들의 공격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뒤쪽에 있는 도로시와 고건무를 노리고 달려들던 성기사들도 이내 방향을 바꿔 케일에게 몰려들었다.
'빈틈!'
나는 재빨리 연회장의 외곽 쪽으로 빠져나와 크게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
외곽에는 주로 사제와 마법사들이 몰려 있었다.
"어딜!"
내가 그들을 향해 달려가자 케일에게 몰리던 성기사들이 급하게 방향을 틀어 내게 달려들었다.
'충분히 파고들 수 있어.'
무거운 중갑을 입은 채 쿵쾅거리며 달려오는 성기사들.
그들이 속도는 빠를지 모르지만, 무거운 중갑으로 인해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은 굼뜰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나는 얇은 가죽 갑옷 위에 로브만 걸친 상태. 무게중심의 이동이 그들보다 훨씬 수월하다.
나는 지그재그로 녀석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러자 나를 잡기 위해 움직이던 성기사들이 역동작에 걸리며 빈틈이 생겨났다.
"안 돼!"
내가 그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가자 성기사들이 절규하며 급히 쫓아오기 시작했다.
마법사들과 사제들은 내가 가까이 다가가고 있음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주문을 영창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피의 향연이 시작되었다.
서걱-
칼질 한 번에 마법사 두 명의 목이 떨어졌다.
"젠장, 저놈부터 죽여! 아니, 이 병신들아! 다 같은 방향으로 가면 어떻게 해? 몇 명은 저 쥐새끼가 향하는 방향의 사제님들을 지키러 가야 할 거 아냐!"
성기사 한 명이 악다구니를 쓰며 나를 쫓아왔고, 내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오던 다른 성기사들은 넓게 퍼지기 시작했다.
나를 몰아서 사냥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잘 모르는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내가 이런 몰이사냥이라면 이골이 나 있다는 거지.'
바로 얼마 전에 12시간 동안 몰이를 당했던 적이 있었으니까.
초감각으로 인해 섬세하고 넓어진 시야 덕분에 급박한 와중에도 내가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을 찾을 수 있었다.
서걱-
그 사이 몇 명 더 목을 베어주고.
"이놈! 신을 모시는 사제를 그렇게 죽여대다니. 빛의 진노가 두렵지 않은 게냐!"
"그쪽으로 빠져나간다! 어서 거리를 좁혀! 젠장!"
마법사나 사제들은 육망성 마법진을 향해 영창을 하고 있으므로 사실상 전투 불가 상태다.
그들의 숫자를 아무리 줄여도, 당장 우리가 싸워야 할 성기사의 숫자는 그대로.
하지만 나는 집요하게 마법사나 사제들만 죽이면서 돌아다녔다.
내 행동은 내게 몰려드는 성기사의 숫자를 더욱 늘어나게 만들었고.
덕분에 그들의 진형이 완전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엄청 세네.'
케일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돌아다니며 성기사들을 각개격파하고 있었다.
이미 바닥에 쓰러져 있는 성기사의 숫자만 스물이 넘을 정도.
나는 사제와 마법사들을 죽이러 다니기 여념이 없었고, 도로시는 여전히 영창 중.
고건무는······.
팅!
마침 성기사의 플레이트메일을 튕겨 나가는 화살.
'쯧.'
중갑을 입은 성기사들에겐 통하지 않고 있었다.
그럼 마법사나 사제들이라도 좀 줄여 주지.
'상황 판단 하고는.'
여하튼 말하자면 케일 혼자 20명이 넘는 성기사들을 쓰러트렸다는 뜻이었다.
'슬슬 제물을 구해야겠어.'
이 정도면 충분히 육망성 내부로 파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하얀색 빛이 흘러나오는 여인 쪽으로 방향을 틀자 성기사들이 외쳤다.
"어차피 녀석의 목적은 성녀님과 제물이다! 모두들 가운데로 모여!"
아주 살짝 방향을 틀었을 뿐인데 제법 눈치가 빠르군.
하지만 상관없다.
왜냐하면 내가 더 빠를 테니까.
"안전하게 구해줄 테니 얌전히 있어."
"꺅!"
순식간에 도착한 나는 제물을 어깨에 들쳐메고 다시 외곽 쪽으로 달렸다. 로브 너머로 잘게 떨리고 있는 그녀의 몸이 느껴졌다.
"젠장! 녀석이 제물을 탈취했다! 어서 잡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나를 쫓는 성기사를 뒤로하고 나는 주위를 살피며 전황을 확인했다.
이미 절반 가까이 되는 성기사들이 쓰러져 있었고, 케일도 성물까지 거리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
더 이상의 도주는 의미가 없었다.
이제부터는 적들의 숫자를 줄여야 할 때.
나는 제물을 연회장 구석에 내려놓고, 그 앞을 막아섰다.
그러자 눈에 불을 켠 채 달려드는 성기사들.
"이 쥐새끼 같은 놈. 죽어!"
챙!
연회장의 구석진 곳이기에 공간이 좁다.
덕분에 한 번에 두 명 이상의 성기사들을 상대하지 않아도 됐다.
'이제부턴 버티기만 하면 돼.'
지금도 케일이 종횡무진하며 적들을 쓰러트리고 있는 상황.
그런데 갑자기 상황이 급변했다.
"제길! 제물을 빼앗겼소! 모두들 캐스팅을 멈추고, 적부터 상대하시오!"
단상 위에서 영창을 하고 있던 사제의 외침에 모든 마법사와 사제들이 캐스팅을 멈춘 것이다.
끈 떨어진 인형처럼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사제와 마법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야 멈추다니, 상황 판단이 느리네.'
성기사들은 여전히 스물 이상 살아있는 상태.
여기서 마법사와 사제들까지 가세를 한다?
전황은 순식간에 우리에게 불리해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우리도 마법사가 있거든.'
심지어 그 마법사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마법을 쓰지 않은 채 영창만 했다.
엄청난 대단위 마법이 펼쳐질 거라는 뜻.
나를 향해 검을 휘두르는 성기사들 사이로 도로시를 힐끗 봤다.
그녀의 영창이 어느덧 마무리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녀의 마법 주문.
[폭렬하는 붉은 꽃잎!]
도로시의 손에서 작은 구체 하나가 빠르게 중앙으로 향하더니 이내 바닥에 팍, 하고 떨어졌다.
순간 엄청난 열기와 함께 불꽃이 화르륵 퍼져나갔다.
갑작스러운 마법 공격에 연회장 내부에 있던 적들이 움찔했다.
"별것 아니군. 그대로 계속 공격하라!"
마법이 퍼지는 걸 본 성기사 하나가 외쳤다.
뜨겁긴 하지만 그렇게 위력적인 마법은 아니었기에.
다른 성기사들도 잠시 곁눈질로 마법의 위력을 가늠하더니 이내 다시 등을 돌려 검을 휘둘러왔다.
그때였다.
[퍼져라!]
이어지는 도로시의 손짓에 퍼져가던 불꽃이 강하게 회전하며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아름다운 빨간 꽃잎이 바람에 날려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끄아아악!"
"살려줘어!"
"보호막! 으아아아!"
하지만 그 위력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마법은, 순식간에 화염 토네이도가 되어 범위 안에 있던 적들을 집어삼키더니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허······.'
그동안 수많은 마법을 봐왔던 나로서도 놀라움을 숨기지 못할 정도의 위력.
항상 개인 PvP만 뛰었던 나로서는, 긴 시간 제대로 마음먹고 영창해서 펼쳐진 마법을 사실상 처음 봤다.
개인 PvP에서 만나는 마법사들은 대개 정통 마법사라기보단, 전투 마법사에 가까웠으니까.
'만약 내가 저 범위 안에 있었다면?'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아마 살아남지 못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이곳까지 범위가 미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그랬다면 제물을 지키지 못했을 테니까.
물론 제물이 있는데 그 위에 마법을 뿌릴 만큼, 도로시가 멍청하진 않았겠지만.
"으으······."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미리 보호 마법을 펼친 몇 명의 사제와 마법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마법에 의해 잿더미가 된 상태였다.
애초에 두 발로 서 있는 사람 자체가 몇 명 되지 않았다.
'케일은?'
다행히 케일은 성기사들의 시체를 쌓아두고, 방패 뒤에 숨은 채 마력을 펼쳐놓고 있었던 덕분인지 갑옷이 검게 그을린 것을 제외하곤 멀쩡해 보였다.
나는 서둘러 성물의 위치부터 확인했다.
아쉽게도 붉은 머리에 하얀색 로브를 쓰고 있는 여인은 보호 마법 아래에서 성물과 함께 무사한 상태였다.
'아마 저 여인이 이 교단의 진짜 성녀겠지.'
전황이 불리해지자, 성녀가 성기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성물을 들고 이곳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케일! 성물부터!"
내 외침에 케일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성녀를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그사이 나는 제물의 손을 잡고 게빈 일행과 합류했다.
케일이 성물만 되찾으면 이 안의 상황도 거의 끝나가는 상황.
이제 탈출로를 이용해 벗어날 생각을 해야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가가고 있는데, 고건무가 케일 쪽 방향을 응시하더니 순간 움찔했다.
'뭐지?'
고개를 돌려보니 케일이 이미 성기사들을 모조리 죽이고, 마침 성녀의 목을 베고 있었다.
정말······ 압도적인 무위였다.
케일은 목이 떨어져 나간 시체를 치우고, 그 아래에서 성물을 챙겼다.
"도로시, 이쪽으로!"
내부에 더 이상 적은 존재하지 않는 상황.
도로시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케일에게 다가갔다.
"이 성물을 마법으로 없애라."
"네."
케일의 말에 도로시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나는 제물을 데리고 연회장 바깥의 복도를 살폈다.
그러자 엄청난 숫자의 적들이 연회장 쪽으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중 몇명은 이미 코 앞에 도착해 있었다.
고건무도 그 소리를 들은 것인지, 케일을 향해 입을 열었다.
"대장! 적들이 오니 일단 피한 다음에 성물을 파괴하는 걸로 하시죠!"
"아니. 아무리 급해도 성물을 먼저 처리한 다음에 움직이는 게 맞다. 도로시, 서둘러 다오."
도로시가 영창을 시작하고, 케일은 한숨 돌릴 겸 방패를 바닥에 내린 채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올렸다.
나는 내부 연회장 안으로 들어오려는 세 명의 병사를 가볍게 죽였다.
그때였다.
고건무가 화살통에서 화살을 꺼내고 있었다.
알게모르게 녀석이 신경 쓰였기 때문에 미리 알아차릴 수 있었던 행동.
내부의 적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다.
화살을 꺼낼 이유가 없었다.
'이 새끼!'
고건무가 화살을 시위에 걸지도 않았지만 내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검을 뽑아 든 채 고건무에게 달려들었다.
뿌드득-
그 사이 활시위에 화살을 걸고 있는 고건무.
겨냥하는 목표물은.
영창을 하고 있던 도로시.
[사그라드는 연홍 눈물!]
'안 돼!'
서걱-
나는 곧바로 고건무의 목을 쳐버렸다.
띠링!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날아가는 세 발의 화살.
피웅!
푹! 푹! 푹!
내 귓가로 소름끼치는 세 번의 피륙음.
띠링!
[플레이어 '도로시'가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들려오는 도로시의 사망 콜.
'아······ 젠장.'
피를 뿌리며 목이 잘려 쓰러지는 고건무.
녀석의 목이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뭐지?'
알 수 없는 불안감.
하얀 가면의 체력 회복 콜이 뜬 것만 봐도 고건무가 죽었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고건무의 사망 콜이 뜨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씨발. 고건무가 아니라는 뜻이잖아.'
나는 서둘러 굴러떨어진 고건무의 머리를 들었다.
그곳엔, 전혀 다른 사람의 얼굴이 있었다.
'미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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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빛의 이면(4)
나는 고건무였던 얼굴을 내팽개치고 한쪽에서 병사들을 상대하고 있던 게빈에게 다가갔다.
내가 멱살을 우악스럽게 잡아당기자 그는 무척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그에게서 향수 냄새가 확 풍겼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분명 당신이 고건무랑 계속 함께 있었을 텐데."
"그, 그게······."
말을 더듬으며 끝까지 잇지 못하는 게빈.
나는 그의 목에 검을 들이밀었다.
"빨리 말해."
"아, 아까 휴식 시간이 주어졌을 때 그와 헤어졌소. 그가 오랜만에 이런 곳에 왔으면 여자도 푸, 품어 봐야 하지 않겠냐고······."
하.
씨발.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플레이어가 아니면 상태창을 볼 수 없을 텐데.
'고건무는 분명 내 상태창을 읽고 대답했어.'
그럼 저 시체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렌 : 이걸 못 보면 넌 죽는다.
"이봐. 내가 지금 상태창에 뭐라고 적었어."
"그······ 못 보면 죽는다고······."
후.
내 말에 게빈이 대답했지만, 이젠 이것 또한 신뢰할 수가 없다.
이미 고건무라는 선례가 남아있었기에.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젠장.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일단 병사들 좀 막고 있어 봐."
나는 게빈의 멱살을 풀어주고 제물을 바라보았다.
"이봐. 당신, 원래부터 그 얼굴이었어?"
"네? 저, 저요? 저는 교단이랑 무관한, 평범한 사람이에요. 진짜예요!"
갑작스레 자신을 쳐다보자 제물이 움찔 몸을 떨었다.
"원래 그 얼굴이었냐고. 시간 없어. 빨리 대답해."
지금도 실시간으로 내부 연회장을 향해 병력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상황이 더럽게 꼬여있다 보니 마음이 급했다.
"제, 제 얼굴이 어떤데요······?"
제물은 자기 손으로 얼굴을 더듬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젠장.
나는 품속에서 작은 손거울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사각 지역의 적을 볼 때 사용하는 손거울이었다.
내게 받은 거울로 얼굴을 들여다본 제물은 이내 경악했다.
"내, 내 얼굴이······ 왜······."
하.
딱 보니까 그녀의 본래 얼굴이 아닌 것 같아 심란한 모습이었다.
그녀의 행동에 경비병들이 대화하던 모습이 생각났다.
―평소에 에밋이랑 안면이 있던 마법사님이 마법을 걸어 주셨다나 봐. 그년 남편이랑 완전히 똑같은 모습으로 변했다던데? 이래서 흑마법이 좋다니까.
젠장.
모습이 변한다더니, 이런 뜻이었어.
이건 거의 도플갱어나 마찬가지잖아?
고건무가 뭔가 수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설마 아예 다른 사람이었을 줄이야.
이런 상황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더욱 당황스러웠다.
어쩐지 전원 생존에, 메시지 교환까지 하게 해준다는 특전까지 주더라니.
'그럼 진짜 고건무는 어디에 있는 거지?'
그리고 만약 중간에 적들에게 잡혀 억류당한 거라면, 왜 아무런 메시지도 보내지 못한 거지?
잡아놓고 고문을 한 거라면 메시지를 통해 구조요청을 할 수 있었을 텐데.
가짜 고건무는 어떻게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던 거고.
현재로선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에 집중할 수밖에.
나는 제물의 손을 잡고 도로시를 향해 달려갔다.
또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
이제부터 그녀를 내 곁에서 떼어놓지 않을 생각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도로시는 화살에 뒤통수가 관통한 채 쓰러져 있었다.
누가 봐도 즉사.
"크윽."
설상가상으로 케일의 허벅지에도 화살이 한 발 박혀 있었다.
이 화살은 또 뭐야?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고건무가 도로시를 향해 쏜 화살을 몸으로 막아내려다 그중 한발이 허벅지에 박혔다."
그의 말에 고개를 돌리자 바닥에 쓰러져 있는 방패와 불에 타고 있는 성물의 모습이 보였다.
띠링!
[승리조건 2 : 악마 소환 의식에 사용될 성물을 파괴하라(완료)]
[이제부터 제한 시간이 사라집니다.]
[제물을 세이프티 존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면 미션이 완료됩니다.]
다행히 도로시가 죽기 직전 마법을 시전한 상태였다.
성물 파괴는 완료.
이제 도주만 하면 된다.
'골치 아프네.'
그런데 문제는 파티장인 케일이 다리를 다쳤다는 것이다.
그를 데리고 가는 것은 무리.
기동력에 큰 손실이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케일을 버리고 가는 수밖에.
'젠장.'
그렇게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무거운 입을 열 때였다.
그런 내 표정을 읽은 건지 케일이 내게 지도를 건네며 말했다.
"렌. 이제부터 그대가 파티장이다. 당장 게빈과 함께 탈출로를 이용해 제물을 데리고 빠져나가라."
"케일 님은······."
"난 이곳에 남아서 최대한 시간을 끌겠다. 어차피 미션 완수만 되면 모두 부활하게 되니까, 그대는 어떻게든 미션을 완수할 생각만 하거라."
내가 그에게 잔인한 말을 하지 않을 수 있도록 케일이 나를 배려해 주었다.
남의 손에 자신의 목숨을 맡기기 껄끄러웠을 텐데.
다행히 케일이 합리적인 판단을 해주었다.
나는 그에게 감사함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예."
내부 연회장을 향해 몰려드는 적들의 숫자가 점점 많아져 갔다.
게빈 혼자서 막는 것은 더 이상 무리.
'이곳에서 더 이상 허비할 시간이 없어.'
사실상 이제 남은 인원은 나와 게빈 뿐.
둘이서 어떻게든 제물을 데리고 세이프티 존까지 향해야 한다.
'진짜 짜증 나네.'
도무지 어떻게 가짜 고건무가 상태창을 읽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로 인해 나는 게빈 조차도 믿을 수가 없는 상황.
사실, 고건무와 달리 게빈에게는 수상한 점이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고건무와 함께 붙어 다녔기에 그를 믿을 수가 없는 상황일 뿐.
그 이유 하나가 너무나도 컸다.
'어쩔 수 없어. 이제부터 살얼음판을 걷는다는 마음가짐으로 진행할 수밖에.'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케일이 잠깐이나마 시간을 벌어줄 것이란 점.
그사이 못해도 이 저택 정도는 빠져나가야 했다.
"게빈! 내가 오른쪽!"
나는 제물의 손을 잡은 채 연회장의 입구로 빠져나갔다. 내가 가세하자 점점 쌓여가던 병사들의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띠링!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한동안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더니 입구에 모여든 병사들을 모두 죽일 수 있었다.
"게빈, 이제부터 제가 리딩합니다. B-2 구역으로!"
"알겠네."
입구를 뚫어놓은 지금이 기회였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게빈이 내부 연회장을 나서는 사이, 나는 케일을 바라보았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피우며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한다, 렌."
"최선을 다하죠."
나 또한 그에게 고개를 한번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제물에게 손을 뻗어 그녀를 어깨에 들쳐멨다.
"꺅!"
"얌전히 있어. 여기서 빠져나가면 내려 줄 테니까."
외간 남자에게 몸을 맡기는 게 어색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젠장. 왠지 창을 써야 할 것 같은데.'
게빈과 나, 둘이서 세이프티 존까지 향해야 하는 상황이다.
순식간에 난이도가 수직 상승.
하지만 나는 창을 꺼낼 수 없었다.
한 팔로는 그녀를 들고 있어야 하니까.
창을 한 팔로 사용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다고 제물을 내려놓을 순 없어.'
그녀의 걸음걸이로는 우리를 따라올 수 없을 테니까.
"저기에 마지막 잔당들이 있다! 잡아라!"
"놈! 거기 서라!"
제물을 들고 내부 연회장을 빠져나오자, 복도 끝에서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그들의 반대편, B-2 구역 쪽을 향해 달렸다.
등 뒤로, 발을 질질 끌면서 나오는 케일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여길 지나려면 나부터 쓰러트려야 할 것이다."
케일의 묵직한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다리를 다쳤기에 전처럼 엄청난 무위를 보여주진 못하겠지만 어느 정도 시간을 끌어줄 순 있을 것이다.
'최대한 오래 버텨 주길.'
미로와 같이 꼬여있는 복도를 내달리자, 곧 앞쪽에서도 병사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씨발.
끝이 없네.
"놈들이 뚫고 지나가지 못하도록 막아라!"
"방패병이 앞쪽에서 방패를 들고 벽을 만들어라!"
케일 쪽에서 몰려오는 숫자보다는 확연히 적었지만, 그것도 무시하지 못할 수준.
"게빈!"
"지금부턴 내가 뚫고 가지!"
게빈이 순간적으로 바닥을 박차며 나아가더니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와, 뭐야?'
게빈의 검이 화려하게 춤을 출 때마다 두세 명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지금까지 조용해서 잘 몰랐는데 엄청난 실력.
"놈들은 고작 두 명뿐이다! 물러서지 마라! 그럼 막을 수 있다!"
병사들의 지휘관인듯한 자가 병사들을 독려했지만,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게빈이 뿜어내는 살기가 복도를 잠식하며 병사들이 조금씩 뒷걸음질 치고 있었으니까.
찌릿찌릿.
살기가 얼마나 진득한지, 뒤에 있는 나도 저릿저릿할 정도였다.
병사들이 차츰 물러서기 시작하자 꽉 막혔던 복도에 조금씩 틈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물러서지 마라! 빛께서 우릴 인도, 컥!"
게빈은 그 비좁은 틈을 놓치지 않고 순식간에 병사들을 뚫어내더니 이내 적 지휘관의 목까지 쳐버렸다.
'됐어. 이 정도면 창을 쓰지 않아도 가능성이 있어.'
뒤쪽은 케일이 막아주고 있어서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앞쪽은 이 복도만 나서면 곧 B-2 구역의 출구가 나온다.
출구를 통해 저택을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큰 고비는 넘긴 셈.
한 팔로 거의 40에서 50킬로그램 가량 나가는 여인을 든 채 움직이다 보니 체력소모가 무척 컸는데, 그것 또한 크게 우려할 필요가 없었다.
띠링!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부족한 체력은 게빈이 흘리고 간 병사들을 죽여서 회복하면 되니까.
오히려 지금 상황에선 병사들이 다가와 주는 게 나에겐 더 이득인 상황이었다.
"힘들지 않소? 교대해 줄 수 있소만."
게빈이 빠르게 내달리는 중에도 뒤를 힐끗 보며 말했다.
"괜찮습니······."
"놈들이 저기 있다! 막아!"
젠장.
대답할 시간도 없네.
"체력이 대단하시오."
병사들의 외침을 무시한 게빈이 감탄하더니 다시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지금 상황에선 내가 제물을 들고 다니는 게 맞았다.
괜히 게빈이 제물을 들고 다니다가 체력이 빠지면 전력 공백이 생기니까.
현재 남은 인원은 나와 게빈, 달랑 둘 뿐.
여기서 케일 급의 강자인 게빈이 빠진다면 너무나 뼈 아픈 손실이다.
'결국 체력을 계속 회복시킬 수 있는 내가 들고 다닐 수밖에.'
게빈이 앞에서 길을 뚫고, 내가 남은 병력을 처리하며 달리길 한참.
어느새 복도 두 개만 건너면 B-2 구역의 출구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점점 몰려드는 병력이 많아지고 있어.'
심지어 우릴 막아서는 병력도 경비병에서 정예병 급으로 수준이 조금씩 올라가고 있었다.
"후우. 스읍. 후우."
호흡이 제법 거칠어진 게빈.
움직임 또한 조금씩 느려지고 있었다.
오면서 정신없을 정도로 적들이 몰아친 탓이었다.
"게빈, 이제부터 교대하죠!"
나는 조금씩 속도를 올려 게빈을 추월했다.
그러자 게빈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제물을 내게 맡기시오!"
"내 이름은 제물이 아니라 루시아인데······."
그리고 이어지는 제물의 조그마한 목소리.
나는 제물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한 채 게빈에겐 손을 내저었다.
평범한 상황이라면 게빈에게 제물, 그래 루시아. 얘를 맡기는 게 현명한 방법이다.
하지만 나는 가면을 통해 체력을 회복할 수 있는 상황.
오히려 그에게 잠시라도 쉴 시간을 주는 게 더 낫다.
그가 체력을 회복해야 전력의 손실이 일어나지 않으니까.
"그러다가 제물이 눈먼 칼에 맞기라도 하면 어찌하려고!"
게빈이 내게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적들의 지휘관이 대신 해주었다.
"놈의 품에 안겨 있는 제물에게는 절대 검을 휘두르지 마라! 절대! 절대 안 된다!"
적 지휘관의 반응으로 보아 다른 사람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무언가가 루시아에게 있는 것 같았다.
덕분에 길을 뚫고 나가는 게 더욱 수월해졌다.
내가 다가갈 때마다 병사들이 움찔하며 공격을 주저했기 때문이다.
"젠장! 조심하시오! 우리의 목숨도 달려 있으니! 특히 눈먼 칼을!"
그럼에도 걱정이 되는지 게빈이 두 번, 세 번 내게 당부했다.
걱정 붙들어 매라고.
공격에 망설이는 적을 상대론.
한쪽 팔밖에 쓰지 못해도 이 정도는 충분하니까.
띠링! 띠링! 띠링!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빠르게 병사들을 정리한 나는 곧바로 방향을 틀어 B-2 구역에 있는 출구로 나가려 할 때였다.
깜깜한 복도.
'왜 여기만 불이 꺼져 있는 거지?'
그런 생각이 들 때였다.
복도 너머로 무언가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평범한 상황인데 평범하지 않은 무언가가 끼어들어가 있어 거슬리는 느낌.
"헉, 왜 안 가고 멈췄소? 뒤쪽에서 병사들이 오고 있소. 어서 서둘러야······."
"쉿."
나는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며 게빈에게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했다.
―얼마나 더 대기해야 하는가.
―조금만 더 기다려. 곧 이쪽으로 올 테니까.
그리고 들려오는 아주 작은 말소리.
뭐지? 우리 탈출로를 어떻게 알고 적들이 숨어 있······.
'아.'
순간 내 머릿속이 번쩍했다.
당장 정신없이 싸우며 제물을 데리고 탈출할 것만 생각하다 보니.
까맣게 잊고 있었다.
탈출로를.
고건무가 짰었지.
아무리 급박하다고 이런 간단한 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을 줄이야.
'고건무, 이 개새끼.'
나는 이를 빠득 갈았다.
그때 게빈이 입을 열었다.
"A-2 구역으로 나가는 건 어떻소? 여기서 복도 하나만 건너면 되오만."
'거기다!'
마침 슈우사쿠가 탈출로로 적당하지 않겠냐고 했던 곳이었다.
"바로 그쪽으로 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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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빛의 이면(5)
그렇게 A-2 구역의 출구로 나가기 위해 모퉁이를 돌 때였다.
"저기 있다! 코빈, 어서 이곳에 침입자들이 있음을 알리고 와라!"
A-2 구역 방향에서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뛰어오며 어느 정도 숨을 고른 덕분인지, 게빈의 검이 다시 힘차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막아! 버티기만 하라고! 버티기만 해도 우리가 유리하다!"
30명이 넘는 병사들이 앞을 막아섰지만, 게빈의 칼질 한 번에 두세 명씩 목이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실시간으로 계속해서 병사들이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버티기만 해라! 굳이 녀석들을 죽이려 하지 않아도 된다!"
그 사이 성기사들까지 조금씩 합류하기 시작했다.
녀석들은 중갑을 착용하고 있어서 좁은 곳에선 뚫기 힘든데.
젠장. 이제부터 내가 뚫어야겠어.
그런 마음으로 앞으로 나서려 할 때였다.
'마나의 유동?'
기사들의 뒤에서 마나의 유동이 느껴졌다.
씨발.
'마법사!'
마법사들이 영창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설마 진짜 마법을 쏘려고?
제물도 있는데?
'진짜로 마법이 떨어지면 루시아를 지켜내기 힘들어.'
최대한 빠르게 뚫고 나가야 한다.
다행히 게빈이 기사들로 이뤄진 벽을 어느 정도 뚫어내고 있었다.
조금만 더 하면 마법사에게 닿을 수 있다.
마침 어느 정도 마법사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게빈! 내가 앞장설······."
[그림자 잠식!]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뭐지?
분명 전투 중이었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완전한 침묵.
그때였다.
―빛이 강할수록 어둠도 진해지리라.
어디선가 이상한 이명이 들려왔다.
―어둠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안식처. 힘을 빼고 모든 것을 어둠에 맡기거라.
그 이명은 점점 더 커져갔다.
하.
'정신 계통 마법이었군.'
그나마 다행이었다.
물리 계열 마법이 떨어졌으면 루시아는 무사하지 못했을 테니까.
어둠만이 존재하는 공간에 누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얀색 로브를 입은 채 완드를 들고 있는 모습.
방금 전, 마법을 영창 하던 그 마법사였다.
그는 뚜벅뚜벅 걸어오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부터 그대는 어둠과 한 몸이다. 이제 편안히 쉬어도 된다. 그대를 억누르고 있던 모든 것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으니.
하.
웃기고 있네.
나는 피식 웃으며 그에게 다가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정신 계열 마법?
너 번지수 잘못 골랐어.
[정신 : 107(+18)]
내가 손을 맞잡자마자 어둠 속에 스며들어있던 마법사의 몸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내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다.
검을 맞대는 소리. 피륙을 찢는 소리. 괴성과 고함.
그것들이 차츰 들려왔다.
'다시 돌아왔군.'
시간은 전혀 흐르지 않은 것 같았다.
내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전 모습 그대로였다.
그때였다.
내 머릿속에 또 다른 정신이 느껴졌다.
'이건······ 마법사의 자아?'
처음 느껴보는 기묘한 감각이었다.
마치 내가 움직일 수 있는 팔다리가 하나 더 늘어난 느낌.
하지만 그 느낌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내 머릿속에 엄청난 양의 정보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한 것이다.
'크윽.'
정말 엄청난 정보의 양이었다.
'이건······?'
아덴마하를 점령하는 빛의 교단의 모습.
루시아를 납치하는 모습.
그녀의 몸에 악마를 빙의시키기 위해 준비하는 모습까지.
'저 마법사의 기억이었어!'
마법사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선 채 실 끊어진 인형처럼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마법사의 기억을 받아들이자 지금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루시아를 죽이지 못했던 거군.'
굳이 엄청난 숫자의 제물을 바치지 않더라도 악마를 불러낼 수 있는, 신이 내려준 생명의 정수. 그게 루시아의 몸이었다.
'잠깐, 이 정보는······?'
그리고 마법사의 기억에서 고건무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할 때였다.
순간 내 머리가 쪼개지는 느낌이 들었다.
'크윽!'
어느새 게빈의 검이 마법사의 목을 자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내게 밀려 들어오던 정보가 뚝, 하고 끊겼다.
젠장.
잘하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는데.
"렌! 뭐 하고 있소! 어서 오지 않고!"
마법사까지 죽인 채 앞서 달리던 게빈이 나를 향해 소리쳤다.
그래.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지금 우리는 사방으로 적들에게 둘러싸인 상황.
나는 서둘러 게빈의 뒤를 쫓았다.
미처 처리하지 못한 녀석들을 죽여 체력을 회복하며.
띠링! 띠링!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다수를 상대로 한다면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싸울 수 있다는 것.
하얀 가면의 능력은 진짜 언제 봐도 사기급 능력이었다.
덕분에 저택을 들어온 이후 한 번도 쉬지 못했는데도 여전히 체력이 70% 가까이 남아있었다.
"으읍."
그나저나 얜 왜 이렇게 꼼지락거려?
제물, 루시아가 자꾸 버둥거렸다.
그녀가 한번 움직일 때마다 몸의 균형이 조금씩 어긋나고 있었다.
"왜 그래?"
"으읍, 속이 안 좋아요."
젠장.
내가 그녀를 안은 채로 계속 뛰어다니다 보니, 멀미를 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까 그녀의 얼굴이 제법 창백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상태를 봐가며 움직일 순 없는 상황.
"그렇게 괴로우면 기절시켜 줄게."
"아, 아니에요. 최대한 버텨, 으읍."
솔직히 내 몸에 토를 해도 상관없긴 한데.
문제는 토를 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렇게 데려갈 거니까.
"어쩔 수 없지. 잠깐 자고 있으라고."
"아, 아니요. 괜찮아요. 어어, 괜찮다니까요오! 앗!"
루시아의 목을 손날로 가볍게 내리치자, 그녀가 축 늘어졌다.
무척 과격한 방법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컨디션을 신경 써가며 움직이기엔, 상황이 너무 급박했으니까.
나는 축 늘어진 그녀를 들쳐멘 채 빠르게 이동했다.
"헉, 헉. 출구일세."
"조금만 더 고생하시죠."
게빈이 빠르게 뚫어준 덕분에 A-2 구역의 출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케일 : 어디까지 갔지?
―렌 : 현재 저택 출구. 곧 있으면 영주성 밖으로 나갈 수 있을 듯.
―케일 : 알겠다.
케일에게서 여전히 메시지가 오는 걸 보니, 그도 아직까진 잘 버티고 있는 듯 싶었다.
저택을 나오자 쌀쌀한 밤공기가 우릴 맞이했다.
그런데 게빈이 오른쪽으로 틀지 않고, 계속해서 직진하기 시작했다.
"게빈! 그쪽 말고. 동쪽 성문으로!"
북쪽 성문으로 빠져나가는 것 역시 고건무가 짰던 탈출 루트.
지금으로선 이유야 어찌 됐든 배제해야 할 루트였다.
"헉, 허억, 헉, 헉."
게빈의 숨소리가 무척 거칠었다.
빠르게 저택에서 벗어나는 것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체력 배분에 실패한 것 같았다.
"다시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저택의 바깥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
모두 케일이 있는 내부 연회장으로 몰려 들어간 것 같았다.
덕분에 우리는 더 이상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영주성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조용하네.'
아덴마하의 밤은 무척 고요했다.
길거리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게빈의 숨소리만이 골목골목 퍼져나갈 뿐이었다.
'다행이야.'
피범벅이 된 채 무기를 든 두 명의 괴한이 길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면 누구라도 소리를 질러댔을 테니까.
그렇게 달려가길 5분 여.
"저놈들이다! 잡아라!"
골목을 나서려는데 아덴마하를 순찰하고 있던 병사들이 우릴 발견하곤 소리쳤다.
피웅! 파바바바박!
"저쪽에서 신호용 폭죽이 터졌습니다!"
"그래? 모두 그쪽으로 이동한다!"
폭죽이 터지자 고요함에 잠겨있던 아덴마하가 삽시간에 시끌벅적해졌다.
"게빈, 이쪽으로!"
정보를 모을 겸 아덴마하를 돌아다녔던 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거미줄처럼 엉켜있는 골목길이지만, 나는 어느 쪽이 막다른 골목인지 체크해 둔 상태였다.
초감각으로 병사들의 소리가 들리는 골목을 배제하며 돌아다니길 한참.
덕분에 전투를 최소한으로 줄인 채 아덴마하의 외곽까지 나올 수 있었다.
골목길을 빠져나오자 잘 닦인 대로변이 나왔다.
그 너머로 동쪽 성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앞에서 성문을 지키고 있는 적의 숫자는 기사 하나와 병사 열 명.
"내가 성기사! 게빈이 병사들을!"
"맡겨주시게!"
그사이 다시 숨을 고른 게빈이 힘차게 대답했다.
나와 게빈은 각자 상대할 적들을 나누고 성문을 향해 빠르게 돌진했다.
마침 우리를 발견한 적들이 우왕좌왕하며 무기를 꺼내고 있었다.
"이봐! 성문을 닫아! 나머지는 침착하게! 우리가 막아낼 수, 컥!"
성기사가 병사들을 독려하며 검을 뽑아 들었지만, 나는 단숨에 녀석의 목을 날려버리곤 그대로 닫히려는 성문 밖을 빠져나갔다.
게빈 또한 순식간에 병사들을 처리하고 내 뒤를 따라왔다.
성문을 빠져나오자 잘 닦여 있는 길 끝에 산이 하나 보였다.
그리고 그 산의 정상 부근에서는 초록색 커튼이 처져 있는 것처럼 빛나고 있는 세이프티 존의 모습이 보였다.
"수문장이 당했다!"
"화살! 화살을 쏴라!"
슈욱! 파바박-
우리가 밖으로 빠져나오자 성벽 위에 있던 병사들이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젠장! 화살을 조심하시오!"
게빈이 소리를 질렀다.
나는 나대로 화살을 쏘는 궁수들에게 놀랐다.
설마 화살이 날아올 줄이야.
'루시아의 존재 때문에 화살을 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다행히 우리가 빠르게 사정거리를 벗어난 덕분에 화살 공격은 무사히 피할 수 있었다.
피웅! 파바바박-
또다시 신호용 폭죽이 하늘에서 반짝거렸지만 나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두 번째 큰 관문을 벗어났다.
이제 이대로 세이프티 존까지 가기만 하면 끝.
―렌 : 아덴마하 탈출 완료. 세이프티 존으로 이동 중.
나는 우선 케일에게 현재 위치를 얘기해 주었다.
우릴 위해 미끼를 자처하며 시간을 끌고 있는 중.
적어도 우리가 현재 어디이고, 어떤 상황인지 정도는 알려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케일에게서도 곧바로 답장이 왔다.
―케일 : 다행이군. 조금만 더······ 고생해주게.
하지만 케일과의 메시지는 그게 마지막이었다.
띠링!
[플레이어 '케일' 이 사망했습니다.]
순간 한숨이 나왔다.
결국 열 명 중 남은 사람은 나와 게빈.
단 둘뿐.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코메인 이벤트 스토리 미션 치고는 난이도가 그렇게 높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둘밖에 남지 않았다.
'씨발. 모습을 바꾼 채 우리 사이로 스며들 줄이야.'
혹시 모른다.
슈우사쿠 조에서도 누군가가 모습을 바꾼 채 숨어들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슈우사쿠 조가 왜 그렇게 허무하게 전멸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약 성물을 파괴하지 않고 고건무가 계속 플레이어인 척 우리 곁에 숨어 있었더라면.
'상상만으로도 오싹하군.'
그런 생각을 하면서 10분쯤 달리자 어느새 산의 입구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저 멀리서 아덴마하를 빠져나오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지만 거리가 충분히 벌어져서 우릴 따라잡진 못할 것 같았다.
"조금만 더 힘내시죠. 다 왔습니다."
"헉, 헉. 괜찮소. 근데 체력이 무척 대단하군. 헉, 헉. 숨도 안 헐떡일 줄이야. 잠시 숨 좀 돌리고 가도 되겠소?"
"그럼 저라도 먼저······."
게빈의 말에 나라도 먼저 세이프티 존으로 가겠다고 말하려 할 때였다.
순간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 멀리서.
타다다다다-
수없이 많은 말들이 엄청난 굉음을 내며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으니까.
씨발.
이런 조그만한 성에 기사단까지 있다고?
게빈 또한 그 모습을 보더니 작게 읊조렸다.
"젠장. 아무래도 이렇게 쉬고 있을 시간이 없겠군. 어서 갑시다."
나는 축 늘어진 루시아를 들쳐메고 빠르게 산 위를 오르기 시작했다.
경사가 얼마 안 되지만, 그래도 오르막길이라고 생각보다 속도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산의 중턱쯤 도착했을 때였다.
그 사이 적 기마대 또한 산의 초입에 다다랐다.
'젠장. 곧 따라잡히겠는데.'
경사가 그다지 가파르지 않다 보니, 말의 속도는 별로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우리와의 거리가 빠르게 좁혀질 거란 뜻.
'어쩔 수 없지.'
나는 게빈이 따라오든 따라오지 못하든, 상관하지 않고 더욱 속도를 올렸다.
세이프티 존까지는 직선거리로 대략 2킬로미터.
오르막길이라고 하더라도, 15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헉, 헉, 헉, 헉."
다행히 게빈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지만 용케 꾸역꾸역 잘 따라오고 있었다.
그렇게 산의 중턱에 다다랐을 때였다.
'분지?'
능선을 넘어오니, 움푹 들어간 지형이 보였다.
그리고 세이프티 존의 포탈은 분지에 있는 숲속 너머, 다시 경사가 시작되는 산 위에 있었고.
"일단 숲 안으로!"
게빈에게 소리친 나는 빠르게 숲속으로 질주했다.
나무가 빼곡하게 솟아있고, 바닥에는 뿌리들이 얼키설키 펼쳐져 있었다.
기마대의 속도를 조금이나마 줄여줄 거야.
그런 생각으로 숲 안에 발걸음을 내디뎠을 때였다.
푹-
순간 발이 땅속으로 쭈욱 빠졌다.
나도 모르게 무게중심을 잃고 쓰러지며 루시아를 놓칠 뻔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발을 빼보려고 했지만 쉽게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계속해서 나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마치 지옥의 무저갱처럼.
그제서야 나는 이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늪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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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빛의 이면(6)
나는 서둘러 발을 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겉보기엔 그냥 흙바닥인데, 발을 대는 순간 순식간에 밑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니, 이런 곳에 늪지대가 펼쳐져 있다니?"
게빈 또한 놀라며 발을 살살 가져다 대보고 있었다.
나무가 빼곡하기에 당연히 단단한 흙바닥일 줄 알았는데.
'어떡하지?'
나는 몇 걸음 물러서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분지 전체가 숲으로 이루어져 있고, 숲을 건너서 산 위로 더 올라가야 세이프티 존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서둘러 바닥에 지도를 펼쳤다.
세이프티 존이 있는 산은 숲과 연결된 봉우리를 지나야 한다.
한마디로 숲을 건너야 올라갈 수 있다는 뜻.
'젠장. 숲은 안 될 것 같은데.'
하지만 어디에 늪지가 형성되어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문제였다.
그렇다고 그냥 강행 돌파 한다?
개죽음 당하기 십상이었다.
그건 늪의 무서움을 몰라서 할 수 있는 얘기.
지금이라도 다시 분지 아래로 내려가야 하나?
"어떻소? 지나갈 수 있겠소?"
게빈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다시 내려가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와서?"
"물론 쉽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늪지를 통과할 순 없으니까요. 다시 내려가는 게 그나마 확률이 조금 더 높을 겁니다."
"제길. 어쩔 수 없군."
게빈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라고 속상하지 않겠냐마는, 어찌 됐든 현재로선 내가 이 파티의 책임자.
조금이나마 가능성이 보이는 길로 일단은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심란함을 느낄 시간마저 내겐 사치였으니까.
그렇게 다시 분지를 내려갈 채비를 할 때였다.
"미모사 산이네요?"
어느새 깨어난 제물, 아니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이곳에 대해서 좀 아나?"
나는 일말의 기대감을 갖고 그녀에게 물었다.
"당연히 잘 알죠. 아덴마하 바로 앞에 있는 산인데. 어릴 때 이곳에 와서 자주 놀고 그랬어요."
"앞에 늪지대가 있던데?"
"아, 분지 밑으로 수맥이 흐르거든요. 최근에 비가 많이 오기도 했고. 그래서 늪과 웅덩이가 형성되어 있어서 보이는 건 흙바닥인데 잘못 밟으면 소리 없이 빨려 들어갈 수 있어요. 그래도 지나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에요."
그녀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지나갈 방법이 있어?"
"네. 바위로 된 지형이 숲을 관통하고 있거든요. 거기로 가면 충분히 지나갈 수 있어요. 무릎까지 발이 빠지긴 하겠지만."
그녀의 말에 나는 양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다.
이 숲만 통과할 수만 있다면 세이프티 존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미션을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다.
"미안하지만, 바로 안내 좀 해줘야겠어."
"네, 저 좀 내려주시겠어요?"
나는 곧바로 그녀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자세히 보니 그녀의 신발 한 짝이 없어져 맨발이 훤히 드러난 상태였다.
아마 도주 도중에 떨어져 나간 것 같았다.
"어차피 숲을 가로지르려면 신발도 다 버리게 될 테니까."
그녀는 남은 신발 한 짝도 바닥에 내팽개치더니 맨발인 채로 숲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게빈!"
"그래, 어서 갑시다."
나와 게빈은 그녀의 뒤를 쫄래쫄래 쫓아갔다.
푹- 푹-
숲 안으로 발을 내딛자마자 발이 푹푹 빠져 들어갔다.
하지만 아까처럼 끝을 모르고 끌려 들어가진 않았다.
그녀의 말대로 딱 무릎 정도의 높이까지.
"어떻게 알고 바위 지형을 찾아가는 거지?"
"저기 이끼 같은 거 보이시죠?"
그녀가 늪을 천천히 건너면서 한 손가락으로 나무 곁에 세워져 있는 바위를 가리켰다.
바위를 자세히 살펴보니 초록색으로 덮여 있었다.
"보이긴 하는데 왜?"
"저게 바위에서만 자라는 이끼거든요. 바닥을 잘 보시면 저런 이끼들이 보일 거예요. 거기가 암맥이 흐르는 지형이에요."
그녀의 말에 나는 탄성을 터트렸다.
이건 정말 값진 정보였다.
또 언제 어떤 미션에서 고요한 늪지대를 만날지 모르는 상황.
이 경험은 분명 그때 가서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다.
"정말, 다시 봐도 신기하기 그지없군. 분명 흙바닥인데, 밟아보면 진흙에 물웅덩이 같은 느낌이라니."
게빈도 신기한 듯 작게 읊조렸다.
그렇게 그녀의 뒤를 따라 10분쯤 걷고 있을 때였다.
타그닥-타그닥-타그닥-
숲 밖에서 무수히 많은 말발굽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기사단이 어느새 분지 위로 올라온 것이다.
녀석들이 혹시 늪을 건너는 방법을 알고 있으면 어쩌지?
그런 걱정은 이어지는 루시아의 말에 말끔히 사라졌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못 따라 올 거예요."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걸 어떻게 알지?"
"빛의 교단이 아덴마하를 점령한 건 얼마 안 됐거든요. 그들은 아마 여기가 늪지대란 것도 모를걸요?"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는 듯, 곧이어 말의 울음소리와 함께 추격대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히히힝!"
"윽! 모, 모두 정지! 모두 정지! 앞에 늪지대가 있다! 뒤로 물러서라!"
"룬 경! 제 손을! 이봐, 밧줄 가져와! 손이 안 닿는다!"
녀석들의 외침이 고요한 숲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다행이네.'
녀석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이곳을 지나오진 못할 것 같았다.
아니, 지나오더라도 상관없었다.
방법을 알더라도 어차피 늪지대 안에선 빠르게 쫓아오지 못할 테니까.
"이봐, 제물. 혹시 저 산 위에도 늪지대가 있는가?"
게빈의 물음에 루시아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하긴, 분명 이름까지 알려줬는데도 제물이라고 부르는 건 듣는 사람 입장에서 기분이 나쁠 수밖에.
"아뇨. 여기가 끝이에요."
하지만 그녀는 기분 나쁜 것을 티 내지 않고 게빈에게 상냥한 목소리로 알려줬다.
"오호, 그럼 여기만 지나면 되겠군. 어서 갑세."
우리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뒤쪽에서 요란하게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쫓아오던 기사단이 쏜 신호용 폭죽이었다.
그 소리를 끝으로 숲속에 침묵이 웅크렸다.
고요한 숲속.
늪지대라서 동물이 살기엔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간간이 들려오는 새소리만이 숲속을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자 숲이 끝나는 부분이 나왔다.
"후. 이제 좀 살겠군. 잘못 디디는 순간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땅이라니. 살 떨려 죽는 줄 알았다네."
늪지대를 빠져나오자 게빈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남은 건 마지막 산봉우리뿐.
저기만 지나면 세이프티 존으로 들어갈 수 있다.
"루시아, 맨발로 걸을 수 있겠어? 발 아프면 업어주고."
"아, 네. 괜찮아요. 걸을 만 해요."
"아프면 바로 얘기해. 업어줄 테니까."
내 말에 루시아가 방긋 웃었다.
멀미로 인해 창백해졌던 그녀의 얼굴도 어느새 혈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렇게 세이프티 존을 향해 다시 산을 올라가고 있을 때였다.
찰그락- 찰그락- 찰그락-
갑옷의 연결부에서 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소리의 진원지는 산 위.
젠장.
적들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늪지대가 없는, 산 반대쪽에서 돌아온 병력이군.'
아마 북문으로 나갔다면 상대했어야 할 병력들일 것이다.
우릴 쫓아왔던 기사단의 신호용 폭죽을 보고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던 모양.
내가 갑자기 자세를 낮추자 게빈과 루시아가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는가?"
"적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숫자는 대략 40 정도."
"뭐라고? 난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곧 들릴 겁니다. 땅이 크게 울리는 걸 보니 중갑을 착용한 성기사들 같습니다. 일단 근처에 숨어 있다가 저들이 지나가면 다시 움직이는 걸로 하죠."
내 말에 게빈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떻소? 내가 미끼를 자청하겠소. 제물이 입고 있는 하얀 로브에 나뭇잎들을 채워 넣으면 멀리서도 충분히 속아 넘기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 사이에 그대는 제물을 데리고 우회하시오."
"그렇게 해주실 수 있습니까?"
나는 게빈의 말에 반색했다. 사실상 현재로선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게빈이 믿음직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잖소. 잠깐이라면 내 충분히 시간을 벌어줄 수 있을 것이야."
게빈의 말에 루시아가 곧장 입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하얀 로브엔 늪지대를 건너며 군데군데 진흙이 묻어 있었다.
나는 곧장 하얀 로브를 바닥에 펼쳤다. 그리고 나뭇잎들을 잔뜩 모아 집어넣고, 밑단과 소매, 모자 부분을 묶었다.
그걸 게빈이 받아서 어깨에 걸치자 어설프지만 사람의 형상이 나왔다.
멀리서라면 충분히 속아 넘기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디, 목적지까지 제물을 안전하게 데려가 주시오."
"건투를 빌겠습니다."
나는 게빈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용병 같은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의외로 부드러운 손이었다.
"루시아, 우린 이쪽으로."
게빈이 하얀 로브를 짊어진 채 바닥을 박차고 달려 나가는 모습을 본 나는 루시아의 손을 잡고 산의 오른쪽 방향으로 돌기 시작했다.
잠시 후 "제물이다!" 라는 고함 소리와 함께 하늘에 폭죽이 터졌다.
'시작했군.'
잘게 떨리는 루시아의 손.
나는 그녀의 손을 꼬옥 쥔 채 소리가 멀어지길 기다렸다.
'지금!'
"가자."
적들의 기척이 조금씩 멀어지자 나는 곧바로 루시아를 들쳐메고 산 위를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게빈이 시간을 벌어줬을 때 최대한 빨리 세이프티 존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전속력으로 산 위를 박차오를 때였다.
'벌써 들통났나!'
멀어져가던 소리가 다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젠장.
아직 절반 정도밖에 못 올랐는데.
'지금이라도 주변 나무에 숨어야 하나?'
"저깄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하필 딱 그 타이밍에 적들에게 발각되었다.
성기사들은 넓게 포진한 채 우리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피웅! 파바바박!
또다시 폭죽이 하늘에서 터지며 굉음을 만들었다.
안 되겠어.
이대로는 녀석들에게 둘러싸이고 만다.
적당한 곳에서 녀석들을 상대하고 난 다음에······.
'동굴!'
그때 바위로 되어있는 절벽 끄트머리에 동굴이 있는 게 보였다.
동굴은 꽤 깊었는데,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공간이 좁아지는 구조였다.
혼자서 다수를 상대하기에 저만큼 좋은 구조는 없을 것이다.
물론 공간이 너무 좁아서 창을 꺼내 들 순 없겠지만.
나는 방향을 틀어 동굴 쪽으로 향했다.
이곳이라면 둘러싸이지 않고 일대일로 싸울 수 있다.
"안쪽으로 최대한 들어가 있어."
"네, 안 다치게 조심하세요!"
나는 동굴 입구에 루시아를 내려놓은 채 검을 빼 들자 곧장 성기사들이 들이치기 시작했다.
"이 녀석이 마지막 놈이다!"
"죽여!"
나를 향해 날아오는 세 개의 검.
나는 차분하게 뒤로 빠지며 검이 한 번에 몰리지 않도록 하면서 상대해 나갔다.
"강자다! 각개격파 당하지 않도록 차분하게 상대해!"
확실히 성기사급 정도 되니까 방어가 좋았다.
깡!
검들을 쳐내고 빈틈이 보여 바로 검을 찔러넣었지만, 중갑을 뚫지 못한 채 검이 튕겨져 나왔다.
제길.
좁은 공간은 둘러싸이지 않게 해주었지만, 대신 앞뒤로밖에 움직일 수 없다.
그러다 보니 공격해 들어갈 만한 루트가 너무 단조로운 게 문제였다.
'그래도 놈들에게 둘러싸여 한꺼번에 상대하는 것보단 훨씬 나아.'
나는 차분하게 녀석들의 공격을 막아내며 빈틈이 생기길 기다렸다.
어쩔 수 없이 장기전으로 가야 할 수밖에 없었다.
'니들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고.'
나는 검자루를 으스러지도록 부여잡았다.
죽여도 죽여도 끝없이 밀려드는 성기사들.
검술의 기초도 탄탄하고, 중갑까지 착용하고 있어서 한명 한명 처리하는 데 너무 오래 걸렸다.
덕분에 내 체력도 빠르게 깎여 나갔다.
띠링!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남은 체력 : 28%]
"저 새끼는 지치지도 않나!"
"괴물 같은 자식."
"됐어, 조금만 더 밀어붙여! 놈도 이제 한계다!"
얼마 남지 않은 성기사들이 외쳤다.
이제 남은 성기사는 셋.
조금만 더 고생하면 된다.
"허억, 허억, 헉, 허억."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이얏!"
숨 고를 새도 없이 세 명의 성기사들이 동시에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슬쩍 뒤로 빠지면서 검을 쳐내고, 벨트에 있던 비수를 꺼내 던졌다.
너무 한 패턴으로만 공격해 나가다 보니, 녀석들이 익숙해져 있는 상황.
변화를 줄 필요가 있었다.
"이따위 허접한 공격, 컥!"
날아오는 비수에 시선이 빼앗긴 사이, 한 놈의 목을 꿰뚫어 주었다.
이제 둘.
지금부터는 문제가 없었다.
"이놈이!"
공간이 부족해서 움직일 수 없기에 앞뒤로만 이동했던 거지.
사각-
공간이 나는 순간 공격 패턴은 더욱 다양해질 테니까.
철퍼덕.
측면으로 파고들며 순식간에 한 놈의 목을 베어버린 나는 곧바로 남은 한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셋이서도 상대가 되지 않았는데, 혼자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젠······ 장······."
띠링!
남은 한 놈까지 목을 베어버리자, 동굴이 침묵에 잠겼다.
"허억, 헉, 헉, 헉."
싸우는 소리가 잦아들자 안쪽에 숨어 있던 루시아가 밖으로 나왔다.
"괜찮으세요?"
"어. 잠, 허억, 잠깐만."
나는 잠시 검을 내팽개친 채 무릎에 양손을 대고 숨을 골랐다.
더 이상 적이 없긴 하지만, 당장 언제 어디서 또 나타날지 모르는 일.
최대한 빠르게 숨을 골라놔야 한다.
그렇게 5분 정도 쉬자 가빴던 숨이 천천히 진정되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갈, 응?"
"왜 그러세요?"
"잠깐만."
루시아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서려고 했는데 동굴 안에서 보라색 빛이 흘러나오는 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격렬하게 움직이고, 또 싸움이 끝났을 땐 가쁜 숨을 몰아쉬느라 미처 알지 못했는데 가면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혹시?
나는 서둘러 동굴의 안쪽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러자 미세했던 보라색 빛이 점점 진해지더니, 이내 조그만한 면 같은 게 보이기 시작했다.
가운데가 뻥 뚫린 채 부서진 어떤 조각 같은 모양이었다.
이거다!
'아이템 확인.'
띠링!
[<소모 아이템:가면의 파편(보라)>]
[어떤 가면의 일부가 떨어져 나온 파편. 어떤 가면인지는 알 수 없다. 오랜 시간 동안 착용하면서 주인의 능력 일부가 깃들어 있다.]
[가면의 원본이 있으면 합성이 가능한 아이템입니다.]
[등급 : 알 수 없음]
아이템 정보를 확인한 나는 떨리는 손으로 주워들었다.
시간이 부족해서 찾지 못할 줄 알았는데.
이런 곳에 있었을 줄이야.
나는 서둘러 가면의 파편을 하얀 가면에 가져다 댔다.
'아이템 합성.'
띠링!
[<가면:하얀가면>과 <소모 아이템:가면의 파편(보라)>를 합성하시겠습니까?]
[한번 합성하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Yes(선택) / No]
띠링!
[<가면:하얀가면>과 <소모 아이템:가면의 파편(보라)>를 합성을 성공했습니다!]
[<가면:블라디미르의 가면>을 획득합니다!]
[<가면:블라디미르의 가면>]
[악마, 블라디미르가 착용하던 가면이다. 오랜 시간 동안 착용하면서 주인의 능력 일부가 깃들어 있다.]
[착용 시 <피의 회복>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착용 시 <악마의 눈>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피의 회복> ― 생명체를 처치할 때마다 체력이 1% 회복된다.]
[<악마의 눈> ― 대상의 상태창을 일부 엿볼 수 있다. 상대의 거짓말을 알아챌 수 있다. 밤에도 대낮처럼 환하게 볼 수 있다.]
[등급 : 희귀]
알림창과 함께 손에 있던 가면의 파편이 하얀 가면 속으로 스르르 흡수되는 게 느껴졌다.
후. 됐어.
'악마의 눈이라.'
상태창을 일부 엿볼 수 있다니.
이건 정말 대단한 능력이었다.
이제 아덴마하에서 내가 얻을 것은 모두 얻었다.
남은 것은 루시아를 세이프티 존으로 데려가는 일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어떤 능력이 추가됐는지 확인하는 건 팜에 돌아가서 해도 늦지 않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우선.
나는 서둘러 루시아의 손을 잡고 동굴의 입구로 향했다.
그때였다.
"헉, 헉. 렌! 무사해서 다행이오! 내가 미끼인 것을 알아챈 성기사들이 그쪽으로 몰려가서 걱정을 많이 했소."
동굴 앞에서 게빈이 숨을 헐떡이며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자 루시아가 게빈을 반갑게 맞이했다.
"무사하셨군요."
"나에겐 그리 많은 성기사들이 달라붙지 않아서. 그나저나, 그대가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오."
게빈이 활짝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뭐지?'
왜 게빈에게서 붉은색 빛이 나는 거지?
'악마의 눈.'
띠링!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레기아 리트리베헨 폰 칼리스타]
[성향 : 절대 악]
[근력 : 49] [민첩 : 48] [체력 : 42]
[정신 : 35] [지력 : 16] [마력 : 41] [신성력 : 33]
[각성 능력 : <상급검술> <상급살기> <중급마나운용> <상급마상술> <하급박투술> <하급치료술> <고급고문술>]
'이, 이게 뭐야.'
나는 떨리는 눈으로 게빈, 아니 레기아라는 녀석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시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소?"
레기아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시발.'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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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빛의 이면(7)
상태창을 보는 순간 몸이 움찔 떨렸다.
"왜 그러세요?"
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검을 들자 루시아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아냐."
하지만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그녀에게 대답했다.
내가 알아차렸다는 걸 들키진 않았겠지?
이대로 모르는 척 다가가서 기습 공격을 넣어야 하는데.
'가면을 끼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표정을 가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감정을 숨기는 데에 큰 도움이 될 테니까.
하지만 기습 공격을 하려던 내 계획은 시작부터 틀어질 수밖에 없었다.
게빈, 아니 레기아의 표정이 기괴하게 뒤틀리고 있었으니까.
"들켰군."
레기아의 목소리가 걸걸했던 중년 용병의 목소리에서 순식간에 청년의 목소리로 바뀌었다.
지금까지 지쳐 보였던 것도 연기인 듯, 구부정하던 자세도 바르게 폈다.
그러자 루시아가 헉, 하며 숨을 들이켜는 소리와 함께 뒷걸음질을 쳤다.
"후후, 감정을 숨기는 게 어설퍼. 연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지."
내가 알아차렸다는 것을 안 레기아가 지금껏 얼굴에 쓰고 있던 가식을 벗어던졌다.
그러더니 품속에서 조그만한 병 같은 것을 꺼내 그 안에 든 액체를 손목에 톡, 톡 떨어트렸다.
내가 녀석에게서 계속 맡아왔던, 향수 냄새였다.
'여자를 안고 와서 저 향수 냄새가 나는 게 아니었어.'
"후우, 미적 감각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녀석을 흉내 내느라 힘들었군. 도대체 천한 것들은 이런 식으로 어떻게 사나 몰라?"
레기아는 향수를 손목과 목에 비비더니 이내 손가락을 탁, 하고 튕겼다.
그러자 중년 용병의 얼굴이 서서히 사라지고, 처음 보는 이십 대 중반 정도의 청년이 나타났다.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잘생긴 미남자였다.
"줄곧 우리를 속이고 있었군."
"하하, 그래 맞아. 내 완벽한 연기였지. 케일이란 녀석만 치우면 될 줄 알았는데, 너도 제법 잘 싸우지 뭐야? 그래서 체력이 빠지는 순간을 기다려 기습을 하려 했는데, 내가 너무 신중했군. 아까 그 정신 지배 마법으로 안 건가?"
"······."
"서둘러 죽인다고 죽였는데, 하필. 거기서 그 마법사의 정신이 네게 먹힐 게 뭐람. 하여튼 맘에 안 든다니까? 고건무를 연기하는 녀석도 그렇고. 이래서 천한 것들이랑 일을 할 수가 없어요, 일을 할 수가."
레기아가 자기 몸에 묻은 먼지들을 탁, 탁! 소리 나게 털었다.
저 여유.
그리고 미리 악마의 눈을 통해 확인한 녀석의 스텟.
지쳐서 쓰러지기 직전인 내 몸 상태까지.
현재 상황은 녀석이 나를 앞에 두고서도 여유를 부릴 만 했다.
"상태창으로 메시지는 어떻게 보낸 거지?"
당장 칼부림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순간이지만, 녀석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콜로세움에 참가한, 플레이어들에게만 허락된 힘.
고건무와 녀석이 상태창을 이용할 수 있었던 탓에 녀석들이 가짜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니까.
1회차와는 다르게 앞으로는 다양한 미션 경기들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이젠 두 눈이 있으니까.
이후에 또다시 스토리 미션을 진행할 때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 거란 법이 없으니, 녀석을 통해 확실히 알아두고 싶었다.
"하하하, 곧 죽을 녀석이 그게 궁금한가? 뭐 알려주는 거야 어려울 것 없지. 흑마법은 인간의 영혼을 타락시키는 힘. 그중 정신 계통 마법에 특출나지. 특히 살아있는 제물을 바쳐서 시전하는 흑마법은 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할 정도야. 제물로 바쳐지는 인간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불가능에 가까운 일들도 해낼 수 있지. 가령, 상대방의 정신과 연결되어, 종속시킨다든가 하는 것처럼 말야."
"······."
"너도 그림자 잠식이란 마법을 겪어봐서 알 텐데? 그걸 통해 다른 인격체를 조종할 수 있지. 마음먹는 것 하나만으로도. 처음 녀석들의 정신을 차지했을 땐 좀 놀랐어. 콜로세움이라······ 사후 세계엔 그런 곳이 있군. 아주 좋은 정보야."
사실 몰랐다.
그때는 마법이 유지되는 시간이 워낙 짧았으니까.
다른 인격체의 정신을 지배할 수 있다니.
'진짜 개 사기네.'
마법에 대한 무지가 불러온 결과였다.
1회차의 난, 거의 개인 PvP 경기만 출전했으니까.
전투 마법사들이나 상대해 본 경험으로 마법에 대한 개념에 접근하려고 하다 보니 생긴 오류였다.
'돌아가면 마법에 대해서도 공부해 둬야겠어.'
거의 개인 PvP 밖에 뛸 수 없었던 1회차와는 다르게, 2회차엔 앞으로 이런저런 경기들에 많이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후 마법사들을 상대해야 할 일들이 많아진다는 뜻.
적어도 마법의 메커니즘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가능한지 정도는 알아둬야 했다.
물론 일단 이 경기를 성공적으로 끝내는 게 먼저지만.
"잡설이 너무 많았군.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서 체력을 회복시키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이만 끝내자고."
레기아가 손목으로 검을 휙휙 돌리며 다가왔다.
젠장. 하다못해 창이라도 쓸 수 있게 동굴 밖으로라도 나가서 상대했어야 하는데.
침착하자.
스텟도 녀석이 위고, 체력도 부족하지만 내가 질 정도는 아니다.
뒤에서 녀석이 싸우는 모습을 보며 그의 검술을 지켜봐 왔으니까.
"후우."
나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 행동을 신호로 레기아가 내게 달려들었다.
휙!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는 롱 소드.
나는 살짝 뒤로 물러서며 레기아의 공격을 받아냈다.
'이상할 정도로 기교가 많이 들어있었어.'
검이 보통 그 주인의 성향을 닮아간다지만, 레기아는 유독 비슷했다.
오히려 게빈의 모습일 때 그의 검술을 보면서 의아했을 정도.
숱한 실전을 치르며 갈고닦아 왔을 검술에 화려한 기교?
'전쟁 나가는 용병이 명품 신발을 신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말이지.'
그것만큼 어울리지 않는 것이 또 없었다.
그런데 레기아의 본 모습을 보고 나자 이해가 됐다.
과할 정도로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는 느낌.
'외모에 대해 결벽증이라도 있는 것 같네.'
"호오, 체력도 얼마 남지 않았을 텐데 제법이구나. 어디 이것도 막아보아라!"
레기아의 검이 수많은 잔상을 남기며 날아왔다.
마치 공작새가 자신을 뽐내기 위해 깃털을 화려하게 핀 듯한 모습.
챙! 차앙! 차앙! 차아앙! 챙!
나는 레기아의 공격을 완벽에 가깝게 막아냈다.
"스읍, 후우. 스읍, 후우."
아무리 화려한 검술이라고 해도 그 안에서 공격할 수 있는 포인트는 정해져 있는 법이다.
그것만 미리 알고 있다면 막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간혹 그것까지 숨기는 녀석들도 존재하긴 하지만.'
그 정도의 고수는 하위리그에서 만나기 쉽지 않다.
빅터 정도의 고수라면 모를까.
챙! 챙! 채앵!
자신의 공격이 번번이 막히자 레기아의 공격이 점점 거칠어져 갔다.
"크윽, 어째서! 어째서 모두 막아낼 수 있는 거지?"
자존심이 상했는지, 무척 화가 난 모습.
'너 정도 수준의 검객은 상위리그에서 숱하게 상대했었지.'
이런 유형의 검객들을 많이 만나봤기에, 레기아가 어떤 유형의 인간인지 알 수 있었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아름답게만 가꿔진 녀석들.'
당장 내 체력이 부족하고 스텟이 밀리기 때문에 레기아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테크닉에서도 내가 우위고, 경험에서도 내가 앞선다.
한마디로 내 체력이 충분했거나, 스텟이 조금만 높았다면 단숨에 제압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
"이익! 내가 너 같은 천것에게 질 것 같으냐!"
광분한 레기아가 힘으로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현재 나는 체력이 부족한 상태.
힘 대 힘으로 맞상대해서는 가망이 없었다.
오히려 녀석이 스텟을 믿고 밀고 들어올수록 나는 기술적으로 승부해야 한다.
'얼추 밑밥은 깔아뒀어.'
레기아 같은 스타일의 상대는 사실 상대하기가 무척 쉽다.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미끼만 던져도 잘 딸려 들어오니까.
레기아의 동작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공격 하나하나에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
'시작해볼까?'
가슴에 착용한 가죽 벨트를 슬쩍 풀었다.
그리고 레기아의 검에 내 검을 살짝 가져다 댔다.
채앵!
그러자 압도적인 힘에 내 검이 튕겨 날아갔다.
"끝이다!"
내 가슴을 향해 정직하게 날아오는 레기아의 검.
나는 가죽 벨트에서 비수를 하나 꺼내 손에 쥐었다.
그리고 날아오는 레기아의 검을 향해 가죽 벨트를 휘둘렀다.
전날 빅터에게 당했던 기술을 따라 한 것이다.
팍!
예상하지 못했던 벨트 공격에 레기아가 손에서 검을 놓쳤다.
그러자 녀석이 눈을 크게 치켜떴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다.
푹!
미리 쥐고 있던 비수로 레기아의 목을 찔렀다.
내게 체중을 한껏 실어 달려들고 있던 녀석은 그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컥······ 커헉······."
목을 부여잡은 채 털썩, 무릎을 꿇는 레기아.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눈동자의 초점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띠링!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허억, 허억, 허억, 헉."
순간 다리가 휘청했다.
레기아를 죽이고 나자 긴장이 풀리려 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허억, 가, 헉, 가자, 허억."
나는 루시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조금 쉬다 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루시아가 만류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세이프티 존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황.
내 체력이 얼마 없긴 하지만, 시간을 주면 적들이 또 몰려올 수도 있었다.
'10분, 20분 쉰다고 체력이 금세 회복될 것도 아니고.'
반대로 적들에겐 내가 쉬느라 허비할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을 것이다.
당장 쓰러져 숨을 돌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나는 루시아를 데리고 곧바로 움직였다.
'부디 세이프티 존 근처에 적들이 없어야 할 텐데.'
방금 전 몰려왔던 성기사들이 세이프티 존을 지키고 있던 녀석들.
그렇다면 정황상 그 근처에는 적이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에도 나아가는 발걸음이 무척 조심스러웠다.
안심할 만 하다 싶으면 자꾸 무슨 사건이 터지다 보니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으니까.
'후, 다행이다.'
하늘 위로 높게 솟아있는 초록색 빛의 장막.
그 근처까지 다가갔지만 느껴지는 기척이 없었다.
덕분에 나는 안심하고 산을 오를 수 있었다.
'겨우 도착했군.'
세이프티 존은 웬 동굴 앞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여기, 헉, 여기로, 들어가, 허억."
내가 동굴 안을 가리키자 루시아가 맨발 걸음으로 총총 움직였다.
그런데 곧바로 들어가지 않고 세이프티 존 바로 앞에서 몸을 빙글 돌더니 내게 고개를 숙였다.
"저······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녀의 인사에 나는 손을 들어 가볍게 화답해 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세이프티 존 안으로 한걸음 들어갈 때였다.
띠링!
[승리 조건1 : 악마 소환 의식에 사용될 제물을 구출하라―하얀빛이 흘러나옵니다.]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승리 조건2 : 악마 소환 의식에 사용될 성물을 파괴하라―자색빛이 흘러나옵니다.]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스토리 미션 <빛의 이면> 경기가 종료되었습니다.]
귓가로 들려오는 경기 종료 콜.
그 음성을 듣고서야 나는 온몸에 가득했던 긴장을 풀 수 있었다.
'끝났다······.'
[기본급 x 5 의 승리 수당이 지급됩니다.]
[공헌도에 따른 보너스를 책정합니다.]
[공헌도]
[렌 : 33%] [케일 : 20%] [도로시 : 13%] [슈우사쿠 : 10%] [엘론드 : 8%]
[이든 호크 : 4%] [위일정 : 4%] [브란트 : 4%] [고건무 : 2%] [게빈 : 2%]
33%.
생각보다 엄청 높게 나온 수치였다.
말하자면 혼자서 3인분을 했다는 뜻이었으니까.
2위인 케일과 3위인 도로시의 공헌도를 합쳐야 33%가 나오니, 혼자서 엄청나게 뛰어다닌 셈이었다.
띠링!
[스토리 미션의 공헌도 1위를 기록했습니다.]
[공헌도 1위를 달성하셨기 때문에 10,000 포인트의 보너스를 지급받게 됩니다.]
[공헌도 1위를 달성하셨기 때문에 추가로 x 2 의 포인트의 보너스를 지급받게 됩니다.]
[하위리그-블러드나이트 179 의 코메인 이벤트 경기를 종료합니다.]
띠링!
[파이트 머니로 28,700 P 를 지급받았습니다. (팀 '투지' 수수료 12,300 P 차감)]
[기본급 +3,500 P / 승리 수당 +17,500 P / 추가 보너스 +20,000 P / 수수료 -12,300 P]
[다음 경기부터는 기본급을 4,500 P 로 책정합니다.]
[소속된 팀의 팜으로 이동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띠링!
[모든 상태를 100%로 회복합니다.]
몸을 감싼 하얀 빛이 사라지자, 날 기다리고 있는 한 명의 여신과 다섯 명의 사람이 보였다.
아세리안은 두 손을 가슴께에 모은 채 서 있었고, 신입들과 이세연은 내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안우진님!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들을 보자 이번 경기가 무사히 끝났다는 게 실감이 났다.
내 앞에 다가와 고생했다며 조잘거리는 신입들을 가르며 아세리안이 다가왔다.
"고생 많으셨어요, 안우진님. 정말 멋졌답니다."
아세리안이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활짝 웃으며 말했다.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마치 집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다녀왔습니다."
그날 저녁.
내가 경기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미리 파티를 준비해두라고 지시했던 아세리안 덕분에 곧장 파티를 시작할 수 있었다.
띠링!
[하위리그-블러드나이트 179 경기가 모두 끝났습니다.]
[경기에 참가하신 모든 플레이어 분들, 진심으로 수고 많으셨습니다.]
메시지는 그걸로 끝이었다.
퍼오블과 파오블을 하나도 수상하지 못했다는 것.
"아, 너무 아쉬워요. 퍼오블과 파오블 보너스 둘 다 메인 이벤트 경기를 뛰었던 플레이어들에게 돌아갔어요."
아세리안이 상태창을 보다가 시무룩해졌다.
뭐,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비록 퍼오블과 파오블 보너스에는 하나도 선정되지 않았지만.
집에 돌아온 것처럼 편안한 느낌.
이 느낌이 너무 좋았다.
이렇게 앉아서 즐겁게 파티를 즐길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아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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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급성장(1)
다음 날 아침.
나는 꼼꼼하게 스트레칭을 하며 빛의 이면 경기를 복기하고 있었다.
이번 경기에서 내가 느낀 것은 내 실력에 대한 한계였다.
'특전과 초감각, 그리고 경험. 거기다 테크닉까지.'
이 정도면 굳이 포인트를 써서 스텟을 올리지 않아도 충분히 하위리그를 넘어설 수 있을 줄 알았으니까.
'그래도 정말 다행이야.'
1주일 뒤에 블랙 허브의 정보가 풀린다.
블랙 허브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는 순간 고급 아이템들과 스킬들로 도배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특전과 초감각, 경험, 테크닉에 이어 아이템과 스킬까지 갖추게 되는 셈이니, 이 정도면 스텟의 빈자리를 어느 정도 메워줄 수 있을 것이다.
스텟을 엄청 빨리 올릴 수 있게 될 거기도 하고.
'매물이 더 올라왔나 볼까?'
나는 시스템 창에서 <중개 거래소>로 입장했다.
[<약초:블랙 허브>]
[티르너노그 성계에서만 나는 약초. 아직 어디에 사용해야 하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등급 : 희귀]
[판매가 : 70 G]
그 사이 블랙 허브의 가격이 제법 올랐다.
이전에 내가 샀던 30골드보다 2배 이상 올라간 금액.
아무래도 기존에 내가 한번 물량을 쓸어 담으면서 시세가 조금 올라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망설이지 않고 중개소에 올라와 있는 블랙 허브를 모두 쓸어 담았다.
띠링!
[<약초:블랙 허브>를 70 G 에 구입하셨습니다.]
[<약초:블랙 허브>를 70 G 에 구입하셨습니다.]
[<약초:블랙 허브>를 70 G 에 구입하셨습니다.]
[<약초:블랙 허브>를 70 G 에······.]
이번에 구입한 블랙 허브는 총 142개.
이전에 구입해 두었던 것까지 합치면 총 373개의 블랙 허브를 가지고 있었다.
단순하게 한 개당 1만 골드에 판매한다고 가정했을 때 무려 373만 골드.
포인트로 환전해야 했다면 무려 37만 포인트나 써야 했을 만큼 거금이었다.
블랙 허브를 구입한 나는 미련 없이 중개 거래소를 닫았다.
이제 블랙 허브 코인이 떡상하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안녕하십니까, 안우진님."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하는 사이, 신입 플레이어들이 체력 단련실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예."
나는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며 묵묵히 스트레칭을 할 뿐이었다.
'아, 참. 이것도 써 봐야지.'
경기 종료 직전, 가면에 파편 조각을 합성시키면서 얻은 '악마의 눈.'
하얀 가면은 블라디미르의 가면으로 성장한 이후 하얀 바탕 위에 보라색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자세히 생각해 볼 시간이 없었는데, 이번 기회에 활용법을 좀 알아둬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악마의 눈을 한명 한명에게 사용해 보았다.
띠링!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제이스]
[성향 : 선]
[근력 : 11] [민첩 : 9] [체력 : 13]
[정신 : 15] [지력 : 4] [마력 : 0]
[각성 능력 : <하급검술> <하급박투술>]
농부 출신이었던 제이스.
들어온 지 3주밖에 안 된 것 치고는 스텟이 나쁘지 않았다.
초기 스텟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이 정도면 준수한 수준.
[이름 : 지그]
[성향 : 선]
[근력 : 12] [민첩 : 12] [체력 : 12]
[정신 : 14] [지력 : 5] [마력 : 0]
[각성 능력 : <하급검술> <하급박투술>]
두 번째로 대장장이 출신이었던 지그.
의외로 근력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능력치의 밸런스가 좋았다.
잘 가르치면 제 몫은 해줄 수 있을지도.
[이름 : 루치아노]
[성향 : 중용]
[근력 : 9] [민첩 : 14] [체력 : 12]
[정신 : 19] [지력 : 14] [마력 : 0]
[각성 능력 : <하급검술> <하급박투술>]
세 번째는 상인 출신이라는 루치아노.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스텟은 정신과 지력.
상인 출신이라 그런가 정신 계열 스텟이 높았다.
마법을 배워보는 걸 권하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상황이 여의치가 않았다.
가장 큰 문제인 마법을 알려줄 사람이 없으니까.
일단 추후 루치아노의 노선은 아세리안과 상의를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이름 : 주창범]
[성향 : 선]
[근력 : 15] [민첩 : 14] [체력 : 17]
[정신 : 23] [지력 : 8] [마력 : 0]
[각성 능력 : <하급검술> <하급검방술> <하급박투술>]
마지막으로 아이돌 가수 출신이라던 주창범.
녀석의 스텟을 보자마자 눈이 번쩍 떠졌다.
전체적인 스텟이 너무나 훌륭했기 때문이다.
다른 세 사람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
심지어 이미 하급 검방술까지 각성한 상태였다.
'기본적으로 몸을 쓸 줄 알고, 센스가 있나 본데.'
심지어 정신력도 높았다.
이대로만 성장해 나간다면 상위리그까지는 무난히 올라갈 수 있을 정도.
'1회차에서는 본 적 없는 녀석이긴 한데.'
잘만 키우면 팀에 많은 포인트를 벌어다 줄 것 같았다.
'악마의 눈이 있으니까 이런 부분이 좋네.'
초기 스텟은 얼마인지 알 수 없지만, 지금부터라도 기간별로 성장세를 정리해놓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하면 더욱 효율적으로 녀석들의 스텟을 상승시킬 수 있을 테니까.
정리해둔 기록이 쌓이면 쌓일수록, 더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
일주일 후.
나는 새롭게 지어진 레벨 3의 대련장에서 신입들을 상대로 대련을 하고 있었다.
[대련장 Lv. 3 에서는 대련이 끝나면 상처가 모두 회복됩니다.]
검과 방패를 든 채 나를 압박하고 있는 네 명의 신입들.
"방패로 일단 공간을 잘라!"
"그냥 밀어붙이다간 어느 순간 배때기에 구멍이 뚫릴 수도 있다고! 침착해!"
자는 시간과 먹는 시간을 제외하곤 계속 훈련만 시켰더니 고작 일주일 사이에 녀석들의 실력이 제법 늘었다.
이제는 공간을 활용하고, 다리를 쓸 줄 알며, 들고 있는 무기의 특성을 이해하여 공격할 수 있는 수준.
이 상태로 몇 주만 더 단련한다면 검과 방패는 졸업해도 될 것 같았다.
'뭐 그래봤자 아직 걸음마 뗀 수준이지만.'
신입들이 네 개의 방패를 벽처럼 쌓은 채 나를 조금씩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내 발을 못 쓰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상대해야 할지 감이 좀 잡힌 모양이네.'
좋은 생각이긴 하지만, 내겐 통하지 않는다.
나는 순간적으로 지그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속사포처럼 날아오는 검에 지그가 주춤한 사이, 나머지 세 명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지그가 뒷걸음질 치며 만들어진 좁은 공간을 통해 순식간에 구석을 빠져나간 뒤였다.
"안 돼! 어떻게 구석까지 밀어 넣었는데!"
"형들 침착해요! 안우진님이 급하게 빠져나온 건 그만큼 구석이 위험했다는 뜻이니까. 다시 구석으로 밀어 넣을 수만 있다면 우리가 이길 수도 있어요!"
세 명의 신입들이 절규하는 사이, 지구 출신인 주창범이 큰 소리로 외쳤다.
'저 녀석, 진짜 제법인데?'
순간적으로 상황 판단을 하고, 다른 신입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하고 있었다. 전형적인 한 파티 리더의 표본.
물론 구석으로 몰린다고 해서 내가 지거나 하는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허억, 허억, 으······ 죽겠다."
"제길.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지다니······."
한참 동안 녀석들을 놀아주자, 결국 제풀에 못 이겨 모두들 지쳐 쓰러졌다.
반면에 나는 호흡도 안정적이고, 땀도 흘리지 않은 상황.
그러자 곁에 서서 대련을 구경하고 있던 아세리안이 내게 다가왔다.
"오늘도 고생 많으셨어요. 또 바로 훈련하실 거예요?"
"네. 별로 힘들지도 않은데요."
나는 아세리안에게 신입들의 뒤처리를 맡긴 채 대련장 구석에 설치되어 있는 허수아비를 향했다.
요 며칠 나는 검술에 매진하고 있었다.
뭔가 잡힐랑 말랑 하는 감각 때문이었다.
실마리는 빛의 이면에서 겨뤘던 레기아와의 대결이었다.
'빅터는 아마 최상급 검술. 그리고 레기아는 상급 검술이었지.'
그 둘의 검술은 스타일도 다르고 수준도 다르다.
그런데 둘의 검술을 떠올리는 순간 최상급과 상급을 가르는 경계선 같은 것이 얼추 보이는 것 같았다.
기교와 화려함으로 가득했던 레기아의 검술.
깔끔하고 간결하면서 효율적이던 빅터의 검술.
'도대체 뭘까. 빅터에겐 있으면서 레기아에겐 없던 것이.'
감이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았다.
후우-
다시 한번 떠올려 보자.
나는 검을 허공에 겨눈 채 가상의 레기아를 그려냈다.
변초와 허초가 엄청나게 섞여 있어서 화려하면서도 어디로 들어올지 모르는 레기아의 검술.
'그런데도 난 레기아의 검이 향할 곳을 알 수 있었단 말이지.'
한번 상대해 봤던 녀석이고,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를 뻔히 알고 있기 때문에 고작 세 수만에 가상의 레기아를 쓰러트릴 수 있었다.
후우-
이번엔 빅터를 떠올렸다.
불필요한 동작들을 모두 제거한 채 극한의 효율과 빠르기만을 추구했던 빅터의 검술.
화려하지도 않고, 복잡하지도 않지만 그의 공격은 매섭고, 막는 데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난 빅터의 검이 어디로 향할지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지? 왜 한쪽은 숨기려고 했는데 보인 거고, 왜 다른 한쪽은 숨기지 않았는데도 보이지 않은 거지?'
한참 동안 가상의 빅터와 검을 나누며 그 이유를 생각했다.
왜지?
왜일까.
도대체 왜······.
가상의 빅터가 내 목을 향해 검을 꽂아 넣으려 할 때였다.
'아!'
순간 나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빅터도 숨기는 게 있었어.'
레기아와 빅터가 휘두르는 검의 근본적인 차이를 깨달았다.
레기아는 자신의 검을 숨기는 대신, 의지를 숨기지 않았다.
반면에 빅터는 검을 숨기지 않는 대신, 자신의 의지를 숨겼다.
그 사소한 차이가 그 둘 사이를 가르고 있었던 것이다.
'의지를 숨긴다. 의지를 숨긴다.'
나는 가상의 빅터에게 검을 휘둘렀다.
대신, 어디로 휘두르겠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저, 검이 이끄는 대로.
검이 향하는 대로 찔러 넣을 뿐이었다.
한번 창을 통해 이뤄냈던 경지였기에, 그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내 검이 가상의 빅터를 향했다.
그리고.
'푹-'
마치 검이 박히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띠링!
[<최상급검술>을 각성하셨습니다.]
결국.
내가 목표로 했던 최상급 검술을 달성할 수 있었다.
'해냈어.'
상급과 최상급을 가르는 벽은 기술적인 부분이 아니었다.
검을 쥐고 있는 검객의 의지.
그 사소한 차이가 상급과 최상급이라는 무시하지 못할 격차를 벌려놓은 것이었다.
"후후······."
나도 모르게 기분 좋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분명 검술의 경지가 오른 것인데.
이상하게도 특급 창술에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오늘은 생각보다 훈련이 빨리 끝나셨네요?"
이세연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상급 검술도 달성했겠다, 오랜만에 1시간 일찍 훈련을 끝내고 식당으로 나왔다.
오늘은 블러드나이트 180이 열리는 날이다.
물론 신이 아닌 이상 내가 그 경기를 관람할 순 없지만, 계속해서 기다려왔던 경기였다.
오늘을 기점으로 나는 훨씬 더 강해질 것이다.
'블랙 허브를 팔고 나서 스킬 세팅부터 해야겠어.'
바로, 블랙 허브의 정보가 풀리는 날이었으니까.
"맛있게 드세요."
나는 이세연이 차려 준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서둘러 식사를 끝내고 중개 거래소에 들어가서 블랙 허브를 판매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런데 이세연이 부엌으로 돌아가지 않고 내 맞은편 의자를 꺼내 앉았다.
평소 아세리안이 앉던 자리였다.
'할 말이라도 있나?'
하지만 이세연은 자리에 앉은 채 내가 먹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원래대로라면 1시간 후부터 저녁 식사 시간이니까, 잠시 쉬는 건가?
나는 이세연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식사에 열중했다.
"잘 먹었습니다."
"앗, 벌써 다 드셨네요. 부족하시면 더 드릴까요?"
이세연은 당장이라도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 음식을 더 퍼올 기세였다.
"아뇨, 괜찮습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식당을 나섰다.
[현재 시각 : 17:57:23]
어느새 블러드나이트 180의 3경기가 끝날 시간이었다.
내 방 침대에 털썩, 하고 앉은 나는 중개 거래소를 열었다.
그 사이 블랙 허브가 8개 더 올라와 있었다.
가격은 100골드.
아직 정보가 풀리지 않은 것이다.
나는 서둘러 8개의 블랙 허브를 모두 구입했다.
지금 이 블랙 허브를 판매한 녀석들은 오늘 경기가 끝난 후 땅을 치고 후회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중개 거래소에 올라와 있는 아이템 목록들을 훑었다.
'몇 경기쯤 정보가 풀리는질 모르니까 답답하네.'
나는 아이템 목록들을 훑으면서도 틈만 나면 블랙 허브의 가격을 확인했다.
마치 가상화폐 거래소를 확인하는 느낌.
그렇게 아이템들을 보며 침대에서 뒹굴거리다 보니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1시간, 2시간.
시간이 흐를 때마다 내 마음속에 가득했던 기대감은 사라지고, 조금씩 불안감이 차올랐다.
그렇게.
[현재 시각 01:03:44]
블러드나이트 180이 끝날 시간이 되었다.
[<약초:블랙 허브>]
[티르너노그 성계에서만 나는 약초. 아직 어디에 사용해야 하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등급 : 희귀]
[판매가 : 110 G]
[현재 중개 거래소에 올라와 있지 않은 상품입니다.]
그리고, 블랙 허브의 가격은 전혀 변동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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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급성장(2)
어째서지?
왜 블랙 허브의 가격이 그대로인 거지?
순간 내가 블랙 허브의 정보가 풀리는 시기를 착각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블러드나이트 180 경기에서 블랙 허브의 정보가 풀리는 게 맞아.'
그럼 어째서 블랙 허브의 정보가 갱신되지 않는 거지?
한참을 고민해보자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되었다.
'내가 문제였어.'
내가 회귀함으로써 미래가 달라진 것이다.
1회차와 전혀 다른 팜에서 시작했고,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는 나란 존재가 미래를 바꾼 게 틀림없었다.
'나비 효과.'
나로 인해 죽지 않았어야 할 녀석들이 죽었고, 보너스를 받았어야 할 녀석들이 받지 못했으며, 졌어야 할 경기를 이기고······.
이런 식으로 나열해 나가면 아마 무수히 많은 미래들이 바뀌었을 것이다.
고작 세 경기 뛰었을 뿐인데.
'차라리 잘 됐어.'
당장 블랙 허브의 가격이 급등하지 않은 건 아쉽지만, 그렇다고 꼭 그게 안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블랙 허브가 엘릭서의 재료로 들어간다는 사실 만큼은 변하지 않으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최대한 많은 물량을 모아놓으면 된다.
'그리고 내가 가진 물량이 많아지면 블랙 허브의 시세를 내 의지대로 조종할 수 있어.'
기존에 1만 골드씩 팔리던 것을 두세 배, 아니 다섯 배까지 올릴 수 있을지도.
그렇게 된다면 내가 사려고 했던 것보다 더 좋은 스킬과 아이템들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당장 블랙 허브의 가격이 오르지 않는 게 별로 실망스럽지 않았다.
변한 건 없다.
난 여전히 특전과 초감각, 그리고 테크닉에 경험까지 가지고 있다.
그저 평소와 같이 묵묵하게 훈련하면서 기다리면 된다.
1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나는 대련장에서 신입들과 대련을 하고 있었다.
최근에 신입들의 실력이 빠르게 늘고 있다 보니, 다양한 무기를 경험시켜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래서 어제는 활, 그저께는 창, 그리고 그 전날은 검을 사용했었다.
오늘 내 무기는 단검이었다.
제이스와 지그, 루치아노를 쓰러트리고 주창범만 남은 상황.
챙! 쨍그랑-
"헉, 헉, 졌습니다."
내가 주창범의 검을 쳐내며 가볍게 품 안으로 파고들어 목에 단검을 겨누자 주창범이 항복했다.
후-
네 명과 연달아 싸우고 나니까 숨이 조금 가빠졌다.
처음 네 명을 동시에 상대했을 때, 숨소리 하나 바뀌지 않았던 것에 비하면 정말 장족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글라디우스와 방패는 이만 졸업해도 되겠군요."
내 말에 바닥에 쓰러진 채 숨을 고르던 신입들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게 정말입니까?"
"예.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내 말에 신입들은 얼굴이 상기된 채 서로를 얼싸안았다.
내게서 듣는 첫 칭찬이다 보니 감회가 남다른 모양이었다.
물론 여전히 부족한 게 많았다.
비교하자면 내 첫 경기였던 더미전에서 더미들을 학살하러 나왔던 플레이어들 정도의 수준이랄까.
아마 검을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상대를 만나면 몇 번 반항하지도 못하고 죽을 것이다.
'뭐, 상관없지.'
애초에 내가 검과 방패로 기대했던 수준이 딱 그 정도였으니까.
적어도 반항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죽진 않는 수준.
그것만으로도 사망률을 크게 낮춰줄 것이다.
'그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 볼까.'
이제부턴 검과 방패가 아닌, 저들에게 맞는 무기를 찾을 시간이다.
"각자 여기에서 원하는 무기를 하나씩 골라보세요."
나는 대련장 한편에 걸려 있는 각종 무기들을 가리켰다.
아세리안이 미리 준비해둔, 공산품처럼 대량으로 만들어져 나온 무기들이었다.
길이와 두께에 따라 분류되는 각종 검들과 도, 창, 활 등등 없는 것을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하여튼 성격 하나는 참 꼼꼼하다.
신입들은 무기들을 만져보고, 휘둘러 보기도 하며 신중하게 고르기 시작했다.
"저기, 안우진님. 혹시 이번에 고르면 다른 무기로 못 바꾸나요?"
주창범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원한다면 언제든지 바꿔도 됩니다. 어차피 단번에 자기에게 맞는 무기를 찾기란 쉽지 않을 테니까요."
그제야 신입들은 각자 무기를 하나씩 쥐어서 내 앞으로 왔다.
나는 가장 먼저 대검을 고른 제이스에게 물었다.
"투핸디드 소드를 고른 이유가 뭡니까?"
"예? 그, 그게······."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어떤 관점으로 골랐는지 궁금해서 그런 거니까요."
"아, 예. 저는 힘이 세고 체력이 좋아서요. 이런 큼직큼직한 무기들이랑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어서 골랐습니다."
제이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스텟만 보자면 충분히 잘 어울릴만한 무기이긴 했다.
나는 그 옆에 서 있는 지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지그님은 왜 롱 소드를 골랐습니까?"
"검이 가장 범용적이고 보편적이어서 골랐습니다."
무난한 대답.
효율성보다 안정적인 걸 택한 모양이었다.
나는 루치아노를 바라보았다.
그는 창을 들고 있었다.
"왜 창을 골랐죠?"
"리치가 길고, 다른 무기들보다 숙련도가 빨리 오른다고 들어서 골랐습니다."
오, 그나마 좀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다.
상인 출신이라더니, 제법 생각이란 걸 할 줄 알았다.
물론 내가 창술사라서 더 긍정적으로 보는 것도 있을 것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주창범을 봤다.
그는 글라디우스와 방패, 그대로 들고 있었다.
"주창범님은 무기를 안 골랐습니까?"
"전 그대로 이걸 들려고 합니다."
"이유가 뭐죠?"
"공수 밸런스가 좋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제 발이 빠른 편이라서 안정적으로 상대에게 파고들기도 좋고, 거리만 좁히면 유효타를 넣기에도 수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아직 제 수준이 낮은데 다른 무기들을 배우는 것도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대로 들고 있었습니다."
오.
녀석의 말에 나는 감탄했다.
싸울 때도 봤지만, 제법 센스가 있는 녀석이었다.
박투술과 다르게 냉병기를 이용한 싸움에선 단 한 번의 유효타만으로도 상대를 쓰러트릴 수 있다.
그래서 공격보다 방어가 압도적으로 중요하다.
한 번만 방어에 실패해도 치명적인 결과를 낳게 되니까.
주창범이 잘 싸우는 건 몰라도, 아마 이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게 될 것이다.
"좋습니다. 오늘부터 각자 고른 무기로 훈련을 진행할 겁니다."
서로가 다른 무기를 손에 쥔 상태였지만, 교육을 하는 데에는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어차피 기초를 다지고 실전과 같은 대련으로 숙련도를 올린다는, 큰 틀 안에서 함께 움직일 테니까.
나는 신입들에게 각자 고른 무기로 글라디우스를 수련하던 때와 똑같이 찌르기와 내려치기, 베기를 각각 1분에 한 번씩 휘두르라고 지시했다.
아, 주창범만 빼고.
"주창범씨는 남으세요."
"네?"
"저분들과 다르게 주창범씨는 오늘 오전에도 기초 단련을 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죠."
나는 주창범을 데리고 대련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검과 방패를 들었다.
"무기를 운용하는 데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그 무기의 기본을 단련하는 거죠."
나는 가상의 적에게 방패를 내밀며 검을 찔러 넣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두 번째가 그 무기를 응용하는 겁니다."
"응용이요?"
"예. 지금까진 찌르기와 내려치기, 베기만 했죠. 하지만 글라디우스로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말고도 무궁무진합니다. 검면으로 친다던가, 던진다던가, 공간이 안 나오는 상태에서 검자루로 망치 내리치듯 찍는다던가. 하다못해 검자루를 잡을 때 손의 위치만 달라져도 변칙적인 공격을 할 수 있죠."
"아······."
"방패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 공격을 방어해 내는 것을 넘어, 잡는 방법에 따라 내려찍을 수도 있고, 밀 수도 있고, 던질 수도 있고, 상대의 시야를 방해하는 역할도 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주창범씨는 글라디우스와 방패를 응용하는 법을 배울 겁니다. 물론 기초 훈련은 매일 따로 진행하셔야 합니다. 그걸 소홀히 할 경우 다음 단계는 없습니다."
그러자 주창범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거란 생각에 설레는 듯 했다.
"그럼 어떤 식으로 배우나요?"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오, 그게 뭐죠?"
"저와 겨루면서 직접 배우는 겁니다."
"네? 그게 무슨······."
"원래 직접 당해보는 게 가장 빠른 법입니다. 그럼 갑니다."
나는 주창범의 대답을 듣지 않고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날부터 한동안 대련장에서 주창범의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2주 후.
신입들의 스텟과 실력은 빠르게 늘어갔다.
새로운 무기를 선택했던 제이스와 지그, 루치아노는 이미 한번 글라디우스와 방패로 단련했던 덕분인지, 새로운 무기들의 기초를 빠르게 잡아나갔다.
초급 단계를 넘어 중급 단계의 수련을 시작한 주창범은 말할 것도 없고.
'근데 왜 경기가 안 잡히지?'
보통 신입들이 들어오면 1달에서 2달 안에 경기가 잡힌다.
신입들이 들어온 시기는 블러드나이트 177이 열리던 주.
그때부터 6주의 시간이 흘렀다.
슬슬 경기가 잡힐 때가 됐는데.
나는 아침 식사 시간에 아세리안에게 물어보았다.
"오퍼 들어온 거 없습니까?"
"네, 경기 끝나신 지 한 달밖에 안 지났잖아요. 거기다 코메인 이벤트였구. 원래 기본급 높아질수록 경기가 잘 안잡혀요."
"아뇨. 저 말고, 신입들이요."
"아······ 네."
뭐지?
내 질문에 아세리안이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왜 그러십니까?"
"휴우. 사실 있어요. 근데 내보내기가 좀 애매한 경기가 들어와서요."
"뭐가 애매합니까?"
"그게, 블러드나이트 187의 6경기 오퍼가 들어왔거든요."
"6경기요?"
아세리안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들어온 신입들에게 제법 높은 넘버링의 언더카드 경기 오퍼를 넣는다고?
보통 신입들은 1경기에서 4경기 사이에 출전한다.
아, 물론 1경기부터 2경기까지는 더미전이지만, 더미로 출전시키는 게 아니고 그 상대팀으로 출전한다는 뜻이다.
근데 6경기면 내가 얼마 전에 뛰었던 붉은 깃발전보다 딱 한 단계 낮은 넘버링.
그런 곳에 신입들을 내보낸다고?
'다 죽이겠다는 뜻이지.'
근데 뭔가 이상하다.
게임 메이커가 그렇게 허술하게 오퍼를 낼 리가 없는데.
"희한하군요. 신입들한테 6경기 오퍼가 올 리 없는데."
"네. 아, 안우진님 까지 포함해서요. 5인 단체 PvM 미션."
이어지는 아세리안의 말을 듣고서야 나는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고민할 만도 하군.'
5인 단체 PvM 경기.
한마디로 5명이 몬스터를 사냥하는 미션이다. 어떤 몬스터가 나오고, 어떤 룰일지는 들어가 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나와 신입들의 격차가 너무 크다는 것.
내가 뛰기엔 쉽고, 신입들이 뛰기엔 어려운 미션이 나올 테니까.
'아세리안이 굳이 오퍼가 들어왔다고 얘기도 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어.'
신입들에게 경기를 뛰게 하려는 목적은 경험이다.
하지만 난이도가 너무 높으면 그저 내 버스를 받으며 편하게 다녀올 가능성이 크다.
아니면 높은 난이도에 모조리 죽거나.
나도 배우는 게 별로 없을 거고, 신입들도 배우는 게 별로 없을 터.
나는 포크를 내려놓은 채 검지로 테이블을 톡, 톡 두드렸다.
"그 오퍼. 받는 건 어떻습니까."
"네? 진심이세요?"
"결국 문제는 신입들의 수준에서는 뛰기 너무 어려운 미션이라는 거 아닙니까. 블러드나이트 187까지 남은 시간은 1달. 그사이에 최대한 실력을 끌어올려 보죠."
"그게 가능할까요?"
"속성으로 가르치면 됩니다. 어차피 6경기가 아니었어도 경기가 잡히면 몇 주간 속성으로 가르칠 생각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단체 팀 미션이면 승리하는 팀은 죽은 사람도 다 부활시켜주지 않습니까. 어떻게든 이겨보죠."
"음······ 알겠어요."
그렇게 나와 신입들은 4주 후, 블러드나이트 187 경기에 참가하는 걸로 확정되었다.
"······그렇게 해서 앞으로 4주 후에 블러드나이트 187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오오, 드디어."
"더 열심히 훈련해야겠네요!"
내 말에 신입들은 잔뜩 흥분한 모습이었다.
저들의 목적도 결국 초월리그의 챔피언이다.
그걸 위해 지금까지 고된 훈련을 감내해 온 것이고.
그렇기에 경기가 잡혔다는 말에 모두들 부푼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얘기했다시피, 난이도가 제법 높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훈련의 강도가 더 세질 건데, 미리 말씀드리죠. 엄청 힘들고, 괴로울 겁니다."
"상관 없습니다. 오히려 더 빠르게 강해질 수 있을 테니까요!"
주창범이 크게 소리쳤다.
나머지 세 명의 표정도 주창범과 다르지 않았다.
'좋네.'
1회차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분위기.
아세리안에게 신입 플레이어들을 받자고 말하길 잘한 것 같았다.
그날 저녁.
[현재 시각 21:01:47]
"하나만 더! 하나만!"
"끄으으으윽."
평소라면 훈련을 끝내고 각자의 방에 들어가서 쉴 시간인데도, 체력 단련실에는 후끈한 열기로 가득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기존에 아침, 점심, 저녁으로 세 번 했던 훈련에서 밤 훈련까지 추가한 것이다.
"자,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
내 외침에 신입들이 신음소리를 내며 바닥에 철퍼덕 누웠다.
"자, 자. 다들 어서 일어나시죠. 분명 휴식의 방에서 1시간 휴식을 취하는 것까지가 오늘 일정이라고 했을 텐데요."
그러자 신입들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더니 좀비처럼 비척거리며 휴식의 방을 향했다.
휴. 이것으로 오늘 내 일정도 끝났다.
나는 습관처럼 중개 거래소로 들어가 물량을 쓸어 담았다.
'이만 쉬어야겠군.'
그렇게 내 숙소를 향해 돌아갈 때였다.
띠링!
[블랙 허브의 정보가 갱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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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급성장(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