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급성장(3)
순간 발걸음을 뚝, 멈췄다.
뭐라고?
나는 서둘러 인벤토리에서 블랙 허브의 정보를 확인했다.
[<약초:블랙 허브>]
[티르너노그 성계에서만 나는 약초. 엘릭서에 들어가는 핵심 재료이다. 희귀해서 구하기가 무척 어렵다.]
[등급 : 고귀]
어디에 사용하는지 정보가 표시되어 있다.
등급도 희귀에서 한 단계 올라, 고귀 등급.
"하······ 하하······."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오늘은 블러드나이트 183의 경기가 있는 날.
오늘 스토리 미션에서 플레이어들이 이 정보를 획득하면서 관객들이 알게 된 모양이다.
이렇게 절묘한 타이밍에 갱신이 되다니.
나는 숙소에 가는 것도 미룬 채, 그 자리에서 곧장 중개 거래소로 들어갔다.
[<약초:블랙 허브>]
[티르너노그 성계에서만 나는 약초. 엘릭서에 들어가는 핵심 재료이다. 희귀해서 구하기가 무척 어렵다.]
[등급 : 고귀]
[판매가 : 130 G]
[현재 중개 거래소에 올라와 있지 않은 상품입니다.]
방금 전에 내가 구매했던 상태 그대로였다.
나는 시험 삼아 블랙 허브 1개를 2만 골드에 등록해 보았다.
띠링!
[중개 거래소에 등록했던 물품이 판매되었습니다.]
[<약초:블랙 허브> ― 20,000 G]
기다렸다는 듯이 판매되는 블랙 허브.
나는 양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어.
이제 더 이상 스텟이 낮은 문제로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
압도적인 템빨과 스킬빨로 부족한 스텟을 차고도 넘치게 채워줄 테니까.
[<약초:블랙 허브> ― 707 개]
남은 블랙 허브는 707개.
나는 블랙 허브를 한 번에 다 올리지 않고 한 개씩 중개 거래소에 던졌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중개 거래소에 등록했던 물품이 판매되었습니다.]
[<약초:블랙 허브> ― 23,000 G]
[<약초:블랙 허브> ― 25,000 G]
[<약초:블랙 허브> ― 27,000 G]
[<약초:블랙 허브> ― 30,000 G]
점점 높은 가격에 팔리는 블랙 허브.
지난 몇 달간 중개 거래소에 있는 물량을 내가 거의 싹쓸이하다시피 했더니, 시장에 남아 있는 물량이 없는 모양이었다.
가격을 점차 높여나갔음에도 올리는 족족 팔려나갔다.
하지만 그 상승도 딱 5만 골드 까지였다.
거기서 더 높이니까 더 이상 팔려나가지 않았다.
'조급해하지 말자.'
[보유 골드 : 1,352,070 G]
이미 39개를 판매하며 135만 골드나 번 상황이었다.
그러니 굳이 오늘 하루 만에 다 팔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오늘 번 골드 만으로도 당장 필요한 것들은 모두 구입할 수 있을 테니까.
내가 버티면 블랙 허브가 계속해서 높은 가격이 형성될 것이다.
띠링! 띠링! 띠링!
[<약초:블랙 허브>를 50,000 G에 등록했습니다.]
오늘은 일단 3개 정도만 더 등록해 놔야지.
자는 사이에 팔릴 수도 있고.
판매 등록을 완료한 나는 서둘러 내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곧장 장비들을 풀어 협탁 위에 올려놓고 침대 위에 털썩 누웠다.
이제부터는 쇼핑 시간.
[<단검:카린의 저주>]
[비극의 여인, 카린이 자살할 때 쓴 단검이다. 원혼이 얽매여 강한 저주가 걸려있다.]
[착용 시 모든 스텟이 - 25% 하락합니다.]
[등급 : 전설]
[판매가 : 270,000 G]
[<반지:배신의 눈물>]
[대마법사 레이나가 전쟁에 나서는 바람난 남편을 위해 제작한 마법 장신구. 대상이 죽기를 바라는 강한 저주가 걸려있다.]
[착용 시 모든 스텟이 -10% 하락합니다.]
[등급 : 고귀]
[판매가 : 190,000 G]
[<목걸이:피의 속삭임>]
[아크리치 조로 아스터가 착용하던 목걸이. 오랜 시간 동안 착용하면서 주인의 능력 일부가 깃들어 있다.]
[언데드가 착용 시 모든 스텟이 +15% 상승합니다.]
[언데드가 아닌 존재가 착용 시 모든 스텟이 -15% 하락합니다.]
[등급 : 고귀]
[판매가 : 200,000 G]
내가 평소에 눈여겨보고 있던 아이템들이었다.
이전에 봤을 때와 비교했을 때 가격 변동은 없었다.
나는 그 아이템들을 모두 구입했다.
[<단검:카린의 저주>을 270,000 G 에 구입하셨습니다.]
[<반지:배신의 눈물>을 190,000 G 에 구입하셨습니다.]
[<목걸이:피의 속삭임>을 200,000 G 에 구입하셨습니다.]
내 손 위에 나타난 단검과 반지, 목걸이.
1회차에서는 그저 먼 발치에서 바라만 볼 수 있던 아이템들이었다.
등급이 무려 전설과 고귀.
지금이야 20만 골드에서 30만 골드면 살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100만 골드를 상회하게 된다.
1회차의 내가 구입하기엔 너무나 고가의 아이템이었다.
'아직 69만 골드 남았네.'
나는 남은 골드를 모두 써서 거래소에 올라와 있는 저주 아이템들을 사들였다.
오늘 벌었던 135만 골드가 순식간에 바닥났지만 크게 상관없었다.
어차피 계속해서 골드 수급이 될 테니까.
'내일이 기대되는군.'
"안우진님. 오늘 오전 체력 훈련 스케줄이 좀 이상한데요? 어제보다 강도가 훨씬 낮아졌어요."
내가 짜 놓은 스케줄 표를 본 아세리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 오늘부턴 좀 특별한 방법으로 훈련할 거라 그렇습니다."
"특별한 방법이요?"
"네. 가서 보시면 압니다."
나는 무척 궁금하다는 아세리안을 뒤로하고 식당을 나섰다.
평소와 같은 스트레칭 시간.
식사를 마친 신입들이 하나둘씩 체력 단련실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스트레칭이 끝나고, 이어서 체력 단련 시간이 되었다.
나는 어제 샀던 저주 아이템들을 인벤토리에서 꺼내 바닥에 쏟았다.
팔찌, 반지, 장갑, 검 등등 종류가 무척 다양했다.
"나와서 종류별로 하나씩 가져가시죠."
"넵."
제이스와 지그, 루치아노, 주창범 순으로 나와서 내가 꺼낸 아이템들을 하나씩 가져갔다.
"오늘부터는 스텟 단련을 할 때 반드시 그 아이템들을 끼고 할 겁니다."
"스텟이 하락하는 아이템들인데요?"
루치아노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스텟이 높아질수록 상승하는 데 필요한 노력이 증가합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근데 아이템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스텟을 낮추면, 그 낮아진 상태에서 스텟이 오르기 시작하죠."
"그 말씀은······?"
"네. 스텟이 100이더라도, 아이템으로 30을 하락시킨 상태에서 훈련을 진행하면 스텟이 70일 때처럼 상승합니다. 즉, 낮아진 만큼 효율이 증가한다는 거죠. 그리고 아이템을 해제해도 상승한 수치만큼 그대로 남습니다."
"오오!"
내 말에 신입들이 탄성을 질렀다.
특히 아세리안은 화들짝 놀라며 신입들에게 다가가 아이템 정보를 확인했다.
'놀랍겠지.'
사실 이건 나만 알고 있는 방법이 아니다.
지금도 알게 모르게 몇몇 팀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훈련을 한다.
다만, 정보 공유를 하지 않을 뿐이지.
'그래서 가격이 낮게 형성되어 있는 거기도 하고.'
어차피 훈련할 때만 착용하는 아이템들이다 보니, 그렇게 많이 구비해둘 필요가 없기도 했다.
내가 싹 쓸어버린 이유야 뭐, 신입들 전부 경기에 출전하기 때문에 사버린 것이고.
"우와. 다 착용하면 무려 30%나 하락시켜 주네요? 포인트를 엄청 많이 쓰셨겠는데요, 괜찮으시겠어요?"
아이템 정보를 확인한 아세리안이 내게 다가왔다. 그사이 중개 거래소에서 가격까지 확인한 모양이었다.
"예. 제가 아세리안님께 6경기에 출전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만들어 준다고 했으니까요. 남들보다 효율적인 훈련법에 장비의 도움까지 받으면 훨씬 빠르게 성장할 수 있겠죠."
"아······ 이런 건 제가 준비했어야 한 건데. 제가 포인트가 별로 없어서······."
"정 미안하시면 커뮤니티에 의뢰 하나만 올려주세요. 발리노르 성계의 안타레스에서 미션을 수행하는 플레이어들이 있다면 황궁 안에 있는 마력의 호수에서 물 좀 퍼오는 서브 미션을 걸어달라고요. 가격은 리터 당 500골드로요."
"아, 그 정도야 간단하죠! 바로 올려둘게요!"
내 말에 아세리안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슬슬 훈련을 시작해볼까.
나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저주 아이템들을 착용했다.
띠링!
[<단검:카린의 저주>를 착용했습니다.]
[장비의 효과로 모든 스텟이 -25% 하락합니다.]
[<반지:배신의 눈물>를 착용했습니다.]
[장비의 효과로 모든 스텟이 -10% 하락합니다.]
[<목걸이:피의 속삭임>를 착용했습니다.]
[장비의 효과로 모든 스텟이 -15% 하락합니다.]
[근력 : 17(-17)] [민첩 : 20(-20)] [체력 : 22(-22)]
[정신 : 45(-45)] [지력 : 7(-7)] [마력 : 0]
장비로 인해 낮아진 스텟은 총 50%.
신입들에게 준 30% 하락 세트보다 훨씬 좋은 아이템들이었다.
순식간에 스텟들이 20 언저리로 떨어졌다.
덕분에 정신 스텟도 낮아지긴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효율이 엄청나게 올라갈 것이다.
"자, 훈련 시작!"
아세리안의 외침과 동시에 우리는 체력 훈련을 시작했다.
"후욱! 후욱!"
어느 정도 움직이자 아이템의 효과가 바로 나타났다.
띠링!
[체력이 30% 미만으로 떨어졌습니다. 스텟의 상승률이 증가합니다.]
[체력 스텟이 1 증가합니다.]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스텟이 미친 듯이 상승하는 구간까지 도달하며 스텟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됐어. 이 방법이면 신입들을 6경기에 뛸 수 있는 수준까지 끌어올리고, 나도 포인트로 올리지 못했던 부족한 스텟들을 채울 수 있을 거야.'
순식간에 체력 단련실이 우리가 내뿜는 열기로 인해 후끈해졌다.
띠링!
결국 그날, 나는 오랜만에 하루 동안 체력 스텟을 2 포인트나 올릴 수 있었다.
훈련을 끝내고 내 방으로 돌아온 나는 습관처럼 중개 거래소부터 열었다.
[보유 골드 : 3,952,070 G]
오늘은 블랙 허브를 개당 5만 골드씩 79개나 판매할 수 있었다.
다시 넉넉해진 골드.
훈련을 위해 필요한 아이템들은 다 구입했으니 이제 스킬과 장비들을 맞출 차례였다.
미리 생각해 둔 것들이 있었지만, 나는 올라온 아이템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목록을 내렸다.
내가 모르는 사이 좋은 스킬이나 아이템들이 새로 등록되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띠링! 띠링!
[<스킬북:뇌신>]
[패시브]
[마력에 뇌전의 기운이 흐릅니다.]
[뇌전의 힘은 상대에게 파고들어 조금씩 상처를 남깁니다.]
[<스킬북:뇌신>을 1,850,000 G 에 구입하셨습니다.]
[<스킬북:침묵의 망토>]
[액티브]
[고위 은신 스킬입니다.]
[시전자의 모습을 넘어 소리까지 새어 나가지 않게 막습니다.]
[10초 당 마력 스텟 1 포인트 소모]
[재사용 대기 시간 : 없음]
[스킬 유지 시간 : 없음]
[<스킬북:침묵의 망토>을 2,000,000 G 에 구입하셨습니다.]
'특별한 건 없네.'
하지만 내가 미리 골라둔 것들을 제외하곤 딱히 살만한 것이 없었다.
거의 1티어급 스킬 2개를 얻었으니까, 이걸로 오늘 쇼핑은 끝.
이만 잠자리에 들기 위해 중개 거래소를 닫으려고 할 때였다.
'어?'
그 순간 새로운 아이템이 중개 거래소에 등록이 되어 있었다.
[<스킬북:천둥의 숨결>]
이건 뭐지?
처음 들어보는 스킬인데.
이름에서부터 호기심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마침 뇌신 스킬을 구입했으니까, 전기 계열의 스킬이면 효율성이 높을지도.
그런 생각으로 아이템을 클릭해 보았다.
[<스킬북:천둥의 숨결>]
[액티브]
[사용하면 체력 소모를 2배로 늘리는 대신 근력과 민첩 스텟을 15% 상승시킵니다.]
[<천둥의 숨결> 스킬이 유지되는 동안 <벽력> 능력을 각성합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 : 없음]
[스킬 유지 시간 : 없음]
[판매가 : 3,700,000 G]
아이템 정보를 보는 순간 손가락이 움찔했다.
뭐야, 이 스킬?
'엄청 좋잖아.'
무려 근력과 민첩 스텟을 15%나 상승시켜주는 스킬이었다.
체력이 2배로 소모된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것도 나와 상성이 좋았다.
어차피 난 가면을 통해 체력을 계속 회복시킬 수 있으니까.
'370만 골드라······.'
포인트로 환산한다면 무려 37만 포인트짜리 스킬이었다.
세 경기를 뛴 내가 현재 62,800 포인트를 가지고 있으니, 이런 식으로 6번을 더 모아야 살 수 있을 만큼 엄청난 금액.
당장이라도 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긴 한데.
370만 골드는 조금 비싼 느낌이었다.
'어떡할까······.'
분명 나와 시너지가 무척 잘 맞는 스킬이었다.
가면의 존재 덕분에 애초에 스킬과 아이템은 나보다 강한 상대와의 싸움에 초점을 맞추려고 했던 상황.
그런 의미에서 근력과 민첩 스텟 +15%는 내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방향과 딱 부합했다.
'그리고 예상보다 많은 블랙 허브의 물량을 모으면서 더 많은 골드를 벌었긴 한데.'
현재 남아 있는 돈은 10만 골드.
무려 360만 골드나 부족한 상황.
한참을 고민한 나는 답을 내렸다.
그래, 사자.
나는 곧바로 중개 거래소에 90개의 블랙 허브를 올렸다.
가격은 4만 골드.
띠링! 띠링! 띠링! 띠링!
전보다 1만 골드나 싸게 올린 덕분인지 블랙 허브는 올린 지 5분도 되지 않아 다 팔려나갔다.
그리고는 곧장 천둥의 숨결을 찾아 클릭했다.
띠링!
[<스킬북:천둥의 숨결>을 3,700,000 G 에 구입하셨습니다.]
후.
예상에 없던 과소비를 하긴 했는데.
왠지 엄청난 스킬을 얻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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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급성장(4)
다음 날 아침.
나는 스트레칭을 끝내자마자 대련장으로 향했다.
'어디, 한번 시험해 볼까.'
띠링!
[<천둥의 숨결>을 사용합니다.]
[체력 소모가 2배로 빨라지는 대신, 근력과 민첩이 +15% 상승합니다.]
[<벽력> 능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벽력>]
[공격 시 0.1%의 확률로 벽력이 치며 근력이 +50% 상승합니다.]
[이동 시 0.1%의 확률로 벽력이 치며 민첩이 +50% 상승합니다.]
천둥의 숨결을 키자 온몸에 힘이 흘러넘쳤다.
마치 특전을 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근데 벽력? 이건 뭐지?'
솔직히 상태창의 설명만 봤을 땐 직관적으로 와닿는 게 없었다.
0.1%의 확률로 벽력이 치며 근력 혹은 민첩이 50% 상승한다고?
'어차피 움직이면서 스킬을 시험해 볼 생각이었으니까 저것도 한번 해봐야겠네.'
나는 허수아비를 가상의 적이라고 생각하면서 공격해 들어갔다.
푹! 푹! 팍! 팍! 팍!
하지만 한참을 휘둘러도 벽력은 터지지 않았다.
"헉, 허억, 헉, 헉."
순식간에 온몸이 땀에 젖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체력 소모가 너무 빨랐다.
'하긴 0.1%면 1천 번 휘둘러야 한 번 터진다는 건데, 쉽게 터질 리가 없지.'
단순히 찌르기 1천 번을 수련하는 것만 해도 몇 시간이 걸린다.
결국 하루종일 천둥의 숨결을 켜고 있어도 몇 번 터지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벽력이란 능력이 그렇게 매력적이진 않은 것 같았다.
'쯧, 근력이랑 민첩 15% 상승하는 걸로 만족해야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마지막으로 몇 번 더 휘두르고 들어가려고 마음먹었을 때였다.
푹! 푹! 팍!
띠링!
[<벽력>이 발동됩니다.]
꽈아아아아아아앙!
가볍게 휘두른 공격에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훈련용 허수아비가 터져 나갔다.
지금까지 수백, 수천 번을 때려도 모양을 유지하고 있던 허수아비였다.
"······."
엄청난 위력에 할 말을 잃을 정도.
가까이 다가가 보니, 허수아비는 반토막이 난 채 일부가 새까맣게 타 있었다.
마치 벼락을 맞은 듯한 모습이었다.
"하. 하하······ 하하······."
나도 모르게 실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현재 내 근력은 34.
거기에 특전을 키고, 천둥의 숨결 효과를 받은 다음 벽력까지 터지면 70이 넘는다.
내 기본 근력의 2배를 넘는 셈이다.
'만약 내가 상대였다면 이 공격을 받아낼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모든 움직임에는 리듬이란 게 존재한다.
그런데 그 리듬을 깨고 갑자기 이런 공격이 들어온다면 도저히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이거 진짜······ 대박이다.'
물론 0.1%라는 극악의 확률이고, 언제 터질지도 모르지만, 한번 터진다면 거의 확실하게 상대를 쓰러트릴 수 있는 능력인 것이다.
벌컥!
"안우진님! 혹시 여기서 무슨 소리 못 들으셨, 어? 이 허수아비 왜 이래요?"
아세리안이 단련실로 들어오더니 박살이 난 허수아비를 발견하곤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아, 제가 부쉈······."
"이거 비싼 건데! 잘 부러지지 말라고 마법 처리까지 돼 있는 건데! 얘네들 혹시, 싸구려를 판매한 거 아냐?"
허리 부분이 절단된 허수아비 앞에서 아세리안이 씩씩거렸다.
순간 나도 모르게 말을 바꿨다.
"······긴 한데, 아무래도 싸구려 같군요. 산 지 얼마 안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죠? 에잇, 당장 가서 새 걸로 바꿔 달라고 해야겠어요."
아세리안이 부서진 허수아비들을 쓸어 담더니 뿅! 하고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지자 내 등으로 한줄기 식은땀이 흘렀다.
'앞으로 허수아비를 때릴 때는 천둥의 숨결을 끄고 해야겠군.'
경기가 잡히고, 훈련에 몰두하다 보니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저주 아이템 덕분에 나와 신입들의 스텟은 빠르게 상승했다.
"하앗!"
현재 대련장 위에서는 루치아노와 지그가 대련 중이었다.
이전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빠르고 정확해진 움직임.
이 정도면 미션을 진행하더라도 어느 정도 제 몫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훈련과 실전은 차원이 다르지만.'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였다.
이번 미션에서 내 역할은 신입들이 안전하게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돕는 것.
'단체 PvM 미션이라······. 진짜 오랜만에 뛰네.'
눈을 잃기 전에 뛰었던 게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그만!"
내 외침에 서로에게 무기를 겨눈 채 치열하게 싸우고 있던 루치아노와 지그가 움직임을 멈췄다.
"헉, 헉. 고생 많으셨소."
"허억, 헉. 지그 형님이야말로."
둘이 서로에게 예의를 표한 뒤 대련장을 내려왔다.
다음 차례는 나와 주창범, 제이스.
나 혼자서 주창범과 제이스를 상대하는 것이다.
"잘 부탁드립니다, 우진 형님."
"잘 부탁드립니다, 안우진님."
"예."
주창범과 제이스가 나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뒤 빠르게 달려들었다.
검과 방패의 주창범. 그리고 뒤에서 대검을 휘두르는 제이스.
주창범이 앞에서 내 공격을 막고, 견제하는 동안 제이스가 유효타를 넣는 전략인 것 같았다.
'이제 좀 빡세게 해볼까.'
"오늘부턴 실전처럼 가겠습니다."
그동안은 최대한 피를 보지 않는 선에서 상대해 줬는데, 이제 슬슬 녀석들에게 제대로 해줄 때가 된 것 같았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통증 앞에서는 머리가 하얗게 변할 테니까.
지금 미리 피를 봐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요즘 실력이 빠르게 상승했다고 기고만장해진 것도 있는 것 같고.
이럴 때 한번 휘어잡아줘야 한다.
'마침 무기도 좋지.'
오늘 내 무기는 창.
내가 제일 자신 있어 하는 무기다.
이거라면 녀석들의 생명을 위협하지 않으면서도 곳곳에 구멍을 내줄 수 있을 것이다.
"제이스 형님!"
"알겠다!"
주창범이 방패를 앞세운 채 내게 달라붙으며 공간을 자르는 사이 제이스가 대검을 휘둘러왔다.
흐읍!
나는 창대로 방패를 옆으로 쳐낸 뒤 창을 빙글 돌려 주창범의 허벅지를 찌르고 창면으로 목을 쳤다.
허벅지가 찔려 무게 중심이 무너진 주창범은 목을 얻어맞고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리고 뒤이어 쇄도하는 제이스의 손목을 찌르고 그의 품으로 파고들어 옆구리를 무릎으로 찍었다.
"크윽!"
대검을 떨어트리며 통증에 뒷걸음질 치는 제이스.
제대로 하니까 아예 상대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너무나 당연한 거다.
다만, 이후 제이스의 행동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 하십니까."
"예······?"
내 차가운 목소리에 제이스가 몸을 움찔 떨었다.
"아직 상대가 눈앞에 있는데, 왜 그렇게 눈을 멀뚱멀뚱 뜨고 계신 거죠."
"그······ 손목을 찔려서 대검을 들 수가 없어서······."
"분명 그 전에 글라디우스 다루는 걸 훈련하지 않으셨나요. 기절한 주창범의 글라디우스라도 쥐고 싸우셔야죠."
"······."
"여러분은 앞으로 1주일 뒤에 콜로세움에 입장하게 됩니다. 거기서도 이러실 겁니까?"
"아······ 아닙니다."
"앞으로 1주일간은 실전과 같은 훈련을 할 겁니다. 콜로세움은 단 한 순간의 망설임만으로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곳입니다. 가서 죽고 싶지 않으면, 제 말을 명심하세요."
제이스에게 말을 마친 나는 루치아노와 지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루치아노와 지그는 내 시선이 닿자 몸을 움찔 떨었다.
"올라오시죠."
"······예."
루치아노와 지그가 비장한 표정으로 대련장을 올랐다.
좋아.
다시 보기 좋은 표정이 됐다.
'절대 자만하거나 안주해선 안 돼.'
특히 저들의 실력에서는 더더욱.
제이스에게 일침을 놨던 내 모습에서 느껴지는 게 있어서였는지, 루치아노와 지그는 죽기 살기로 내게 덤벼들었다.
뭐 그래봤자 주창범이나 제이스와 마찬가지로 단 한 번의 공격도 제대로 버텨내지 못했지만, 기세가 확연하게 달라졌다.
내가 얼마나 강하든 상관하지 않고 어떻게든 내 몸에 구멍을 내겠다는 일념이 느껴진 것이다.
'좋아. 이 정도면 아레나에 들어가더라도 얼타진 않겠군.'
쓰러진 지그와 루치아노를 뒤로하고 나는 창을 갈무리했다.
"그럼 이곳에서 치료 다 하고, 휴식의 방에서 1시간 보낸 뒤에 오늘 일과를 마무리하겠습니다."
결과물에 만족하며 쓰러진 신입들을 놔둔 채 대련장을 나설 때였다.
"아, 안우진님."
마침 대련장 안으로 들어오던 아세리안과 마주쳤다.
"예."
"그, 전에 부탁하셨던 거 있잖아요? 마력의 호수에서 물을 퍼달라고······."
"연락이 왔습니까?"
"네. 오늘 열렸던 블러드나이트 186의 4경기가 안타레스에서 열렸거든요. 그래서 제가 서브 미션을 걸어서 물을 퍼오게 했어요."
오.
나는 아세리안에게 감탄했다.
커뮤니티에 글을 남기는 것을 넘어, 내 말을 기억해 둔 채 자기가 직접 경기를 모니터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직접 서브 미션을 거셨으면 포인트 소비가 제법 심하셨을 텐데······."
"그래도 안우진님이 처음으로 부탁하신 일이잖아요. 안우진님이 저주 아이템을 사신 거에 비하면 얼마 들지도 않았는걸요. 아마 150리터 정도 될 거예요. 숙소 앞에 놔뒀어요."
"아, 감사합니다."
숙소 앞으로 가자 오크 나무통 3개가 놓여져 있었다.
한 개당 50리터씩 들어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들고 서둘러 내 방에 딸린 샤워실로 향했다.
콸콸콸-
그리고 오크 나무통 뚜껑을 열어 욕조에 내용물을 모두 쏟아부었다.
'후. 이렇게 딱 좋은 타이밍에 마력의 호숫물도 얻다니. 이번 미션은 왠지 예감이 좋은데.'
호숫물을 다 부은 나는 중개 거래소로 들어갔다.
[<소모품:유니콘의 뿔>]
[성스러운 유니콘의 뿔이다. 맑고 정순한 마력이 담겨져 있다. 무척 단단해서 가공하기가 쉽지 않다.]
[등급 : 고귀]
[<소모품:유니콘의 뿔>을 100,000 G 에 구입하셨습니다.]
내 손 위에 나타난 길이 40센티미터 정도의 길다란 유니콘의 뿔.
나는 그걸 욕조 속에 넣었다.
그러자 엄청 단단했던 유니콘의 뿔이 흐물흐물해지더니, 이내 마력의 호숫물에 녹아 없어졌다.
맑고 투명했던 호숫물이 연한 청록색 빛깔을 띠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하나 더 해도 되겠는데.'
나는 유니콘의 뿔을 하나 더 구매해서 욕조에 담갔다.
그러자 더욱 진해진 청록색 빛깔.
그걸 확인한 나는 장비를 모두 벗고 욕조로 들어갔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마력 스텟이 1 증가합니다.]
[마력 스텟이 1 증가합니다.]
[마력 스텟이 1 증가합니다.]
[마력 스텟이 1 증가······.]
[마력 스텟이 ······.]
그러자 미친 듯이 오르기 시작하는 마력 스텟.
순식간에 10을 넘어 20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정말 다행이야.'
내심 이번 경기를 출전하기 전에는 구하지 못할 줄 알았다.
그런데 딱 1주일 전에 구할 수 있을 줄이야.
나는 편하게 누우며 욕조에 몸을 맡겼다.
청량한 기운이 내 몸속으로 빠르게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마력 : 22]
어느새 마력 스텟은 22나 상승했다.
하지만 여전히 멈추지 않고 오르고 있었다.
'이걸로 마력 스텟은 해결이네.'
물론 스텟을 더 올리려면 새로운 마력의 호숫물이 필요하지만, 그건 아세리안에게 계속 구해달라고 하면 되고, 유니콘의 뿔도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는 골드가 있었다.
그사이 장비도 얼추 맞췄고, 1티어짜리 스킬도 세 개나 얻은 상태.
거기다가 신입들의 실력도 빠르게 늘고 있었다.
이렇게 계획대로 딱딱 진행됐던 게 얼마 만이었을까.
'회귀하고는 처음인 거 같네.'
내가 해야 할 준비는 모두 끝냈다.
이제 경기장 안에서 더욱 성장한 내 실력을 증명하는 것뿐.
나는 욕조 안으로 더욱 몸을 밀어 넣었다.
그렇게 1주일이 흘렀다.
"다녀오겠습니다."
"네. 꼭 승리할 필요는 없으니, 부디 건강하게만 다녀오세요."
"다녀오겠습니다, 여신님!"
"네. 안우진님 말씀 잘 듣고, 다치지 말고 조심하세요."
아세리안의 배웅을 받은 나와 신입들이 게이트를 넘었다.
띠링!
[경기 : 하위리그-블러드나이트187의 제 6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유형 : 보스 몬스터 처치(단체 PvM)]
[게임명 : 지하에서의 혈투]
[맵 : 데스 벨리(대)]
[관객 수 : 28,274 명]
[승리 조건 : 여왕개미 마수를 가장 먼저 처치한 파티]
[여왕 개미 마수는 개미굴의 정중앙에 위치해 있습니다.]
[단체 PvM 미션은 승리한 파티에 한해서 모두 부활합니다.]
[현재 생존한 파티 수 : 20 개]
[보너스 포인트 조건이 있습니다.]
[많은 개미 마수를 죽일수록 보너스가 상승합니다!]
[많은 상대 파티를 전멸시킬수록 보너스가 상승합니다!]
[개미 킬 수 현황 ― 없음]
[파티 킬 수 현황 ― 없음]
[3초 후 경기가 시작합니다.]
이번 경기의 미션은 여왕개미 마수 처치.
개미 마수는 약한 대신 엄청나게 많은 숫자를 자랑한다.
'미션도 행운이 따르네.'
그렇기 때문에 신입들의 첫 상대로도 나쁘지 않았다.
물론 숫자를 잘 조절할 수 있어야겠지만.
"제이스."
"네?"
내 부름에 제이스가 상태창을 보다가 움찔 떨었다.
"지그, 루치아노, 주창범."
나는 한 명씩 부르며 그들과 눈을 마주쳤다.
"예."
"넵."
"네, 형님."
"이제 여러분이 지금까지 흘린 땀들을 증명할 시간입니다. 한번 잘해 보죠."
"넵,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내 말에 신입들이 결의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 출발합시다."
나는 창을 으스러지도록 쥐었다.
이번 경기에서.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보여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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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급성장(5)
'역천자 칭호 적용.'
띠링!
[<신화업적:역천자>을 적용합니다.]
[칭호의 효과로 모든 스텟이 + 20% 상승합니다.]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하위리그]
[근력 : 51(+8)(+4)] [민첩 :57(+9)(+3)] [체력 : 65(+10)(+5)]
[정신 : 111(+18)(+2)] [지력 : 19(+3)(+2)] [마력 : 48(+7)(+5)]
[각성 능력 : <초감각> <고급살기> <특급마나운용> <고급창술> <최상급검술> <상급단검술> <상급투척술> <중급박투술> <하급치료술> <상급궁술> <하급검방술>]
[보유 스킬(3/5) : <침묵의 망토> <뇌신> <천둥의 숨결>]
[업적 특전 : 모든 스텟 + 20%] [차원 특전 : 없음] [종족 특전 : 없음]
[남은 체력 : 100%]
확정 증가 스텟 아이템 옵션이 달린 장비들까지 착용했더니 특전을 키면 근민체가 50을 넘어섰다.
빛의 이면전과 비교하면 비약적으로 성장한 스텟들.
지금까지 저주 아이템을 착용한 채로 훈련한 덕분이었다.
"개미 마수들은 약한 대신 군집 생활을 합니다. 상대하기가 까다로운 편이죠. 그래서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는 진형이 무척 중요합니다. 주창범?"
"예, 형님."
"당신이 리더를 맡고, 전투를 지휘하세요. 어떻게 싸울 건지. 저는 여러분이 위험하다고 판단되지 않으면 전투에 끼지 않을 겁니다. 제가 개미 마수들을 몇 마리씩 끌고 올 테니 그때까지 상의하고 계세요."
"알겠습니다."
깜깜한 개미굴 안.
동굴 형태인데도 개미굴 내부는 제법 넓었다.
충분히 창을 휘두를 수 있을 만큼.
개미 마수의 사이즈가 제법 크기 때문인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안쪽으로 들어가자 굴 형태가 끝나고 거대한 광장 같은 것이 나타났다.
광장에는 또다시 여러 개의 굴이 나 있었고, 50마리 정도의 개미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완전 미로 형태네.'
끌고 오기 까다롭겠는데.
한 마리를 유인하려는 순간 대규모 어글이 끌릴 것 같았다.
'쯧. 어쩔 수 없군.'
나는 인벤토리에서 활을 꺼내 근처를 돌아다니고 있는 개미 마수를 향해 쐈다.
핑! 푹-
정확하게 개미의 가슴에 박히는 화살.
그런데 단단한 외골격 때문인지 킬 콜은 뜨지 않았다.
"키에에에엑!"
내가 쏜 화살에 10마리 정도의 개미들이 나를 발견하곤 달려들었다.
'첫 실전이니까 두 마리 정도가 적당하겠지?'
나는 곧바로 신입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지 않고 빠른 속도로 기어 오는 개미들을 향해 창을 휘둘렀다.
띠링!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
그러자 순식간에 8마리의 개미 마수들이 쓸려나갔다.
두 마리만 남은 걸 확인한 나는 녀석들을 살살 유인하며 신입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주창범! 두 마리 갑니다! 준비!"
개미 마수들이 기어 오는 속도가 제법 빨라서 스타팅 포인트까지 금방 올 수 있었다.
"제가 앞에서 뒤로 못 가게 막을게요! 대열 잘 맞추고!"
주창범이 방패를 들어 올리곤 나를 쫓아오던 개미들 앞을 막아섰다.
"키에에에엑!"
그렇게 시작된 전투.
고작 두 마리였지만 신입들은 처음부터 고전했다.
개미 마수가 뒤로 넘어가지 못하게 막아서는 주창범의 움직임을 피해서 공격을 찔러넣어야 했는데, 그게 익숙하지 않아 공격에 버벅댄 탓이었다.
오히려 개미 마수들보다 신입들의 공격에 주창범이 위험해질 정도였다.
'어쩔 수 없지.'
팜에서 훈련할 때의 모습과 비교하면 정말 형편없는 수준.
하지만 나는 인내심을 갖기로 했다.
첫 실전이라는 부담과 긴장 때문에 몸이 굳어서 그런 거지, 조금만 익숙해지면 훨씬 좋은 모습을 보여줄 테니까.
"허억, 허억, 헉, 헉."
겨우겨우 두 마리의 개미를 처치했을 뿐인데 신입들이 격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지쳤다기보단, 숨 쉬는 것도 잊을 정도로 긴장했던 것이다.
주창범은 방패를 쥔 손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첫 살생일 테니까 정신적인 부담이 무척 큰 것 같았다.
하지만 정신력이 높은 녀석인 만큼, 잘 이겨낼 것이다.
'그렇지 못한다면, 도태될 뿐이지.'
"다음 녀석들을 데려오도록 하죠."
나는 녀석들을 뒤로하고 광장으로 향했다.
그 뒤로 나는 신입들에게 데려가는 개미들의 숫자를 차츰 늘려갔다.
그런 식으로 열 번 정도 실전을 거치자 녀석들의 움직임이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형! 한 마리 뒤로 흘렸어요!"
"내게 맡겨!"
"제이스 형! 왼쪽 녀석부터!"
"오케이!"
"어어, 루치아노 형! 한 마리 도망가요!"
"내가 처리할게."
한번 손발이 맞기 시작하자 녀석들이 상대할 수 있는 개미 마수의 숫자가 점점 늘어났다.
현재 내가 데리고 온 개미 마수의 숫자는 일곱 마리.
두 마리에도 쩔쩔맸었는데, 이제는 일곱 마리도 우습게 상대하고 있었다.
주창범이 마지막 남은 개미 마수에게 검을 찔러넣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번 전투도 끝.
나는 다가가 신입들을 치하했다.
"제법이네요. 이제 열 마리도 상대할 수 있겠군요."
내 칭찬에 숨을 고르던 주창범이 씨익 웃었다.
"다 형님이 사준 장비들 덕분이죠."
주창범이 보물이라도 되는 양 방패를 소중하게 쓰다듬었다.
그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내 장비를 맞추는 날, 녀석들에게도 새 장비를 사 줬다.
물론 가격이 저렴한 확정 증가 스텟 아이템들로.
아직 스텟이 낮은 상태라 굳이 비싼 퍼센트 증가 스텟 아이템들을 맞출 필요가 없었다.
물론 내가 골드를 아무리 많이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녀석들에게 그 비싼 장비들을 맞춰줄 리 없지만.
"이제 한 자리에서 사냥하는 걸 넘어, 직접 움직이면서 녀석들을 상대할 겁니다. 슬슬 여왕개미 마수가 있는 곳까지 가야 하니까요. 마음 단단히 먹는 게 좋을 겁니다."
"옛! 준비됐습니다!"
내 말에 신입들이 힘차게 외쳤다.
아직까진 순조로운 진행.
이 경기를 통해서 녀석들은 엄청난 성장을 하게 될 것이다.
* * *
카마키리는 불만이 한가득이었다.
메인 이벤트를 뛰어야 할 컨텐더인 자신보고 이런 햇병아리들 실전 교육이나 시켜주고 오라니.
"저······ 카마키리님. 어떻게 할까요?"
신입 중 한 명이 쭈뼛대며 다가왔다. 순간 열이 확 받쳤다.
"내가 일일이 떠먹여 주기까지 해야 하나? 어차피 경험 쌓으러 온 거 아냐. 그니까 대충 개미 몇 마리 붙잡고 사냥이나 해."
카마키리는 신입에게 그렇게 쏘아붙이곤 혼자서 개미굴 내부로 들어갔다.
저들이 죽든 말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여왕개미만 죽이면 다 부활할 테니까.
애초에 녀석들의 뒤치다꺼리를 할 생각도 없었고.
'오랜만에 나왔으니까 좀 놀다가 들어가야겠네.'
이런 경기에 자기를 위협할 만한 강자가 존재할 리 없을 터.
카마키리는 은신 스킬을 쓴 채 개미굴 내부를 돌아다녔다.
그렇게 광장까지 빠져나와 다른 굴로 들어갈 때였다.
"로니아, 한 마리 속박 걸어줘!"
"네, 오빠!"
"한슨! 조금 더 뒤로 물러서!"
다른 팀에서 출전한 파티가 사냥하는 소리가 들렸다.
'안 그래도 짜증났는데, 저새끼들한테 화풀이나 해야겠다.'
그런 생각으로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걸어갈 때였다.
순간 카마키리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개미 마수들 몰이해서 던져볼까?'
갑자기 늘어난 개미 마수들에 당황하겠지?
원망 가득한 표정으로 개미들에게 뜯겨 죽는 것도 완전 웃길 거 같은데.
그 모습들을 떠올리자 왠지 재미있을 것 같았다.
마음을 먹은 카마키리는 곧장 은신을 풀었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개미 마수들이 카마키리를 발견하곤 괴성을 질러댔다.
"키에에에에엑!"
"키에엑!"
타다다다다다닥!
길이 2미터의 개미 마수들이 작은 다리를 움직이며 카마키리에게 달려들었다.
"후후, 열심히 따라와라. 곧 푸짐한 먹잇감들을 선물해줄 테니까."
카마키리는 개미 마수들을 뒤에 달고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달렸다.
그러자 굴 안쪽에서 10마리 정도의 개미와 사투를 벌이는 다섯 명의 플레이어들이 보였다.
"저, 저!"
그중 가장 선두에 서 있던 검객이 카마키리를 발견하곤 무어라 소리를 치려다 뒤에서 따라오는 개미 마수 무리를 보곤 얼어붙었다.
"잘 가라, 버러지들아."
카마키리는 한번 씨익 웃어주고는 그들을 지나쳐 스타팅 포인트까지 빠르게 달린 후 은신 스킬을 사용했다.
그러자 카마키리를 쫓아오던 개미들이 고개를 돌려 사냥하고 있던 파티를 향해 달려들었다.
"꺄아아아악!"
"뒤로! 최대한 빨리 뒤로 빠······ 으악!"
"사, 살려줘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더니, 얼마 버티지 못하고 개미 마수들의 턱에 찢겨나가는 플레이어들.
그 모습을 보며 카마키리는 재미있다는 듯 키득키득 웃었다.
"이거 진짜 재미있는데? 푸흡. 다른 파티들도 이런 식으로 죽여야겠다."
신이 난 카마키리는 서둘러 다른 굴로 향했다.
그의 발걸음은 숨겨둔 보물찾기를 하는 아이처럼 가벼웠다.
미로처럼 꼬여 있는 개미굴을 한참 동안 돌아다녔더니, 이내 또 다른 파티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근처에 제법 많은 개미 마수 시체들이 쌓여 있는 걸 보니 실력이 괜찮은 모양이었다.
'이번엔 더 많이 데리고 가야겠네.'
카마키리는 곧장 동굴을 빠져나가 광장을 한 바퀴 돌았다.
그러자 수많은 개미 마수들이 또다시 카마키리를 쫓기 시작했다.
'이번 녀석들은 얼마나 버티는지 한번 볼까.'
거의 50마리에 이르는 개미들을 데리고 또 다른 파티에게 다가가자, 그 모습을 본 상대 파티의 파티장이 소리를 질렀다.
"몹 몰이꾼이다! 뒤로 빠져! 데바! 방패를 꺼내서 나와 함께 길을 막는다! 나머지는 뒤에서 한 마리씩 공격해!"
이런 종류의 미션에 자주 참가해 본 파티장 같았다.
파티장은 당황하지도 않고 파티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녀석이 그렇게 나올수록 카마키리의 웃음이 진해졌다.
'그래, 건드리면 열심히 꿈틀거려줘야 밟는 맛이 있지.'
"노옴! 이런 쓰레기 짓이나 하고 다니다니!"
파티를 지나쳐 가려고 하자 플레이어들이 카마키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카마키리는 녀석들의 검을 피한 뒤 한번 씩, 웃어주고는 녀석들을 지나쳐 은신 스킬을 사용했다.
"키에에에엑!"
"당황하지 마! 개미들이 넘어가지 못하게 막을 테니, 뒤쪽에서 한 마리씩 차분하게 상대한다!"
순식간에 전멸했던 녀석들과 다르게 이번 파티는 제법 끈질기게 버티고 있었다.
아니, 개미 마수의 숫자가 천천히 줄어드는 걸 보니 아무래도 성공적으로 막아낼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웃음기 가득했던 카마키리의 얼굴이 짜게 식었다.
'막아내는 건 재미 없는데.'
카마키리는 자세를 낮추고 플레이어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막아낼 것 같다? 그럼 막지 못하게 만들어주면 되는 것이었다.
'어떤 녀석의 몸에 구멍을 내줄까나.'
카마키리는 손에 쥔 단검을 혓바닥으로 한번 쓸면서 개미들을 막아내고 있는 파티장을 향해 다가갔다.
파티장은 개미들을 흘리지 않도록 방패를 열심히 휘두르고 있었다.
'너, 당첨!'
파티장의 바로 뒤까지 다가간 카마키리가 단검을 찔러 넣었다.
"크윽!"
부위는 허벅지. 치명상을 입을 만한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하체가 무너지자 파티장이 순식간에 개미들에게 밀려 쓰러진 것이다.
파티장이 쓰러지자 그 구멍으로 마치 둑이 터진 강물처럼 개미들이 안쪽으로 밀려 들어왔다.
개미 마수들에게 둘러싸인 플레이어들은 순식간에 팔다리가 잘리고, 살아있는 채로 개미들에게 뜯기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이 개새끼! 야이 쓰레기같은 새끼야! 개 좆같, 컥!"
팔다리를 모두 뜯기고 산 채로 개미들에게 먹히던 파티장이 고래고래 악을 쓰다가 이내 아무 형체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졌다.
고인 피 웅덩이만이 그곳에 누군가 있었음을 알려줄 뿐이었다.
"아하하하, 이거 진짜 최곤데? 푸하하학."
한참 동안 배를 잡고 낄낄대며 웃던 카마키리가 이내 다음 먹잇감을 찾아 나섰다.
또 다른 파티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어서 보고 싶었다.
그렇게 광장으로 나와 여기저기 굴들을 돌아다니며 다른 파티를 찾아다닐 때였다.
굴을 빠져나와 또 다른 광장으로 향하자 개미들의 괴성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빙고.'
슬금슬금 다가가서 보니 네 명의 플레이어가 10마리 정도의 개미들과 싸우고 있었다.
특이한 건 창을 들고 있는 한 명의 플레이어는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다는 거였다.
'이번 녀석들도 좀 하네?'
그래도 방금 전에 죽였던 파티와 다르게, 이번 파티는 광장 한가운데에 있었다. 탁 트여있는 공간 때문에 개미들에게 둘러싸이기만 해도 순식간에 다 죽을 것이다.
카마키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개미 마수들이 많이 모여있을 만한 곳을 찾았다.
또 다른 굴로 들어가 한동안 걷다 보니 또 다른 광장이 나타났다.
그 광장에서는 100마리가 넘는 개미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흐흐흐, 나를 따르라 개미들아!"
카마키리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새로 찾았던 파티를 향해 달렸다.
그렇게 5분쯤 달리자 널찍한 광장에서 여전히 사냥 중인 파티의 모습이 보였다.
그때 자신과 눈을 마주친 방패를 들고 있던 플레이어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헉!"
100마리 가까이 되는 개미 마수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에 질릴 만큼 끔찍한 광경일 것이다.
'잘 가라, 낄낄.'
광장까지 나온 카마키리는 곧장 은신하며 근처 굴로 피해서 구경을 시작했다.
순식간에 넓은 광장이 몰려온 개미 마수들로 인해 가득 찼다.
그때였다.
"끼에에에엑!"
"끼에엑!"
팔짱을 끼고 있던 창술사가 창을 휘두르자 몰려오던 개미들이 순식간에 떼죽음을 당하기 시작했다.
'뭐, 뭐야!'
그야말로 압도적인 강함이었다.
창술사가 창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네, 다섯 마리의 개미들이 두 동강 나며 죽었다.
꽈아아아앙!
그러더니 갑자기 벼락이 치며 또 열 마리 가까운 개미들이 죽어 나갔다.
그가 창을 휘두를 때마다 벼락이 쳤고, 붉은 안개가 생기더니 그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모습은 죽음을 몰고 다니는 사신 같은 모습이었다.
순간 카마키리의 등줄기가 오싹했다.
'네임드!'
창술사는 자신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고수였던 것이다.
100마리나 됐던 개미들이 싸늘한 시체로 변하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젠장. 저런 녀석이 이런 경기엔 왜 들어온 거지?'
아마 자신처럼 신입들의 경험을 시켜주기 위해 들어왔을 것이다.
도망치는 카마키리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왠지 건드려선 안 되는 존재를 건드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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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급성장(6)
신입들이 어느 정도 개미 마수들을 상대하는 패턴을 깨닫자 사냥 속도가 빨라졌다.
주창범이 전방에서 방패를 든 채 버티고, 바로 뒤에서 검을 든 지그가 주창범을 보조한다.
제이스와 루치아노는 리치가 긴 대검과 창으로 제일 뒤에서 개미들을 공격한다.
얼핏 보면 간단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쉽지 않은 전술이었다.
'제법이란 말이야.'
개미들을 막아내기 위해 주창범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상황.
그 사이에서 주창범이 미처 막아내지 못하는 개미들을 지그가 사전에 막아줘야 했고, 맨 뒤에서 공격을 넣는 루치아노와 제이스는 그 둘을 피해 가며 개미 마수들에게 공격을 넣어야 했다.
그런데도 녀석들은 광장에 나올 때까지 실수 한번 하지 않은 채로 개미 마수들을 모두 처치할 수 있었다.
"형님, 여기서부터는 개미 마수들이 제법 많이 밀집해 있는데요?"
"신중하게 개미들을 끌고 와 보세요. 녀석들은 순찰을 위해 계속 움직이고 있으니까, 타이밍만 잘 맞추면 소수의 개미들만 끌고 올 수 있을 겁니다."
그러자 주창범이 침을 꼴깍, 삼켰다.
광장에는 얼핏 봐도 50마리 정도의 개미 마수들이 몰려 있었다.
한 번만 실수해도 파티가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상황.
그런 부담감 때문인지 나아가는 주창범의 발걸음이 무척 신중했다.
"키에에엑!"
'오, 제법인데.'
살금살금 광장 밖으로 나가던 주창범은 개미 마수들이 서로 거리를 벌리는 타이밍에 맞춰 여덟 마리 정도의 개미 마수들만 끌고 오는 데 성공했다.
이 정도면 오늘 경기를 온전히 녀석들에게만 맡겨도 될 것 같았다.
소수의 개미들만 끌고 오는 것에 성공한 주창범도 자신감을 얻은 것인지 이후에도 계속해서 열 마리 내외의 개미 마수들만 끌고 왔다.
그렇게 광장 안에 있는 대부분의 개미 마수들을 처치했을 때였다.
사락- 사락-
어디선가 들려오는 이질적인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누군가 우릴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것 같았다.
'암살자?'
나는 신입들이 사냥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척하며 곁눈질로 주위를 살폈다.
그러자 광장에 나 있는 동굴 중 하나에서 한 플레이어가 자세를 낮춘 채 우리를 살펴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녀석은 금세 사라졌지만, 나는 곤두세웠던 감각을 풀지 않았다.
'아마 정찰을 위해 나선 녀석이겠지.'
신입들이 사냥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가 부딪혀도 될 상대인지, 부딪히면 안 될 상대인지 가늠하고 갔을 거다.
그리고 십중팔구, 녀석은 부딪혀도 될 상대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제법 잘 싸우곤 있지만, 그래도 신입들의 움직임에는 어색함이 조금씩 묻어나 있었으니까.
"주창범. 잠시 후 다른 파티와 싸우게 될 수도 있습니다."
"지그형 뒤쪽, 예? 다른 파티요?"
"어어, 창범아! 한 마리 흘린다!"
그러자 주창범이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다른 파티와 싸운다는 말에 마음이 다급해지다 보니 실수를 한 것이다.
"일단 사냥하는 것에 집중하세요. 다른 파티를 상대하는 건 저 혼자 할 테니. 여러분은 아직 다른 플레이어들과 검을 주고받을 수준이 아닙니다."
"아, 네!"
이어지는 내 말에 주창범이 다시 사냥에 집중했다.
'마침 잘됐네.'
안 그래도 새로 얻은 스킬들을 사용해보고 싶었던 상황이었다.
개미들 상대로 쓰기엔 솔직히 너무 약해서 사용할 기회가 없었는데, 플레이어들이라면 딱 좋은 연습 상대가 되어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적들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타다다닥-
'온다.'
누군가 빠르게 광장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발소리가 가벼운 걸 보니, 스텟이 제법 높은 녀석이었다.
그런데 이어지는 소리는 나를 오싹하게 만들었다.
타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닥!
무수히 이어지는 발소리들.
엄청난 숫자의 개미들이 광장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오십, 아니 백 단위가 넘는 것 같았다.
순간 이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몹 몰이!'
기분이 짜게 식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상대를 쓰러트려야 하는 게 콜로세움이라고는 하지만.
'이 개새끼. 넌 죽었어.'
몹 몰이라는 건 당하는 입장에선 무척 열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동굴에서 조금씩 커지던 발소리는 잠시 후 엄청난 개미 떼를 토해냈다.
"헉!"
그 모습을 발견한 주창범이 숨을 들이켰다.
창을 으스러지도록 쥐고 있는데, 마침 몹 몰이를 해왔던 암살자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녀석은 나를 바라보며 한번 씩- 웃더니, 광장에 도착하자마자 은신을 쓰고서는 근처에 있던 개미굴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원래의 목표를 잃어버린 개미 떼들은 근처에 있던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띠링!
[<천둥의 숨결>을 사용합니다.]
[체력 소모가 2배로 빨라지는 대신, 근력과 민첩이 +15% 상승합니다.]
[<벽력> 능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후. 일단 개미 떼부터 먼저 처리하자.'
녀석을 죽이는 건 그 뒤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키에에에에엑!"
"뒤로 물러서 있어!"
나는 신입들에게 그렇게 외치곤 개미들을 향해 마나가 깃든 창을 크게 휘둘렀다.
어차피 특전과 천둥의 숨결로 스텟이 뻥튀기된 상황.
한 번에 다수의 약한 적들을 죽이기에 창만 한 무기가 또 없었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
[<피의 회복> 능력으로 ······.]
한 번에 쓸려나가는 개미 마수들.
전기 스파크가 파직! 하고 튀며 주변 개미 마수들이 일순간 경직됐다.
마나에 뇌전의 힘이 깃든다는 뇌신 스킬의 효과였다.
"키에에에에엑!"
개미 마수들이 끝도 없이 달려들었지만 내 털끝 하나 건들지 못했다.
창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네다섯 마리의 개미 마수들이 외골격 째로 터져나가며 투명한 진액을 흩뿌렸다.
죽은 개미 마수들의 사체에서 붉은 안개가 나오더니 내게 빨려 들어왔다.
덕분에 몹 몰이를 당한 지 3분도 되지 않았는데, 살아남아 있는 개미 떼의 숫자는 열을 넘지 않았다.
어서 이 녀석들을 다 죽이고 몹 몰이를 했던 개새끼를 족치러 가야 한다.
띠링!
[<벽력>이 발동됩니다.]
꽈아아아아아아앙!
그때 벽력이 터지며 전류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전류는 이내 사방에 작은 빛무리를 남기더니 서서히 사라져갔다.
뇌전의 마나를 창에 담은 상태에서 벽력이 터지면 일어나는 현상 같았다.
가면 덕분에 붉은 안개도 그렇고, 뇌신과 벽력으로 인한 광역 뇌전까지.
한 번에 많은 숫자의 생명을 죽였더니 생각보다 시각적 효과가 쏠쏠했다.
"우와······ 개멋있다."
"우리 같은 녀석들 백 명이 몰려와도 안우진님 털끝 하나 못 건드리겠는데."
감탄하는 신입들을 뒤로하고 나는 마지막 남은 한 마리의 개미에게 창을 휘둘렀다.
"키엑!"
털썩-
후.
스킬빨에 템빨.
거기에 창까지 드니까 100마리의 개미 마수를 죽이는데 3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형, 형! 우와. 진짜 대박! 지금까지 우릴 상대할 때 보여줬던 건 본래의 10분의 1도 안 되는 거였네요!"
주창범이 감탄하며 내게 다가왔다. 하지만 내 눈을 보더니 흠칫, 하며 걸음을 멈췄다.
"사냥하고 있어요. 전 개미들 몰아온 녀석 죽이고 올 테니까."
"아, 넵······."
나는 신입들을 뒤로한 채 빠른 속도로 광장을 빠져나갔다.
암살자는 내가 싸우는 모습을 감상하느라 마지막 개미가 쓰러진 후 자리를 떴다.
아직 천둥의 숨결을 끄지 않았으니, 조금만 있으면 녀석의 뒤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내 예상대로 5분 정도 달리자 암살자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놓칠 줄 알아?'
나는 인벤토리에 창을 집어넣으며, 활을 꺼내 들었다.
무기를 스왑하는 과정이 마치 하나의 동작인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리고는 달리는 채로 화살 한 발을 시위에 걸어 당겼다.
뿌드드득-
붉은 깃발전을 치르며 뼈저리게 느낀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핑!
궁수에게 쫓기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게 없다는 것.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화살이 도주하던 암살자의 근처에 박혔다.
전속력으로 달리면서 쏘다 보니 정확도가 크게 낮아진 상황.
하지만 상관없었다.
'화살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맞을 때까지 쏘면 된다.
내가 화살을 날리기 시작하자 암살자의 속도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고개를 틀어 날아오는 화살을 확인하면서 뛰다 보니 속도가 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 틈에 녀석과의 거리를 빠르게 좁혀갔다.
"젠장!"
나와의 거리가 실시간으로 좁혀들어가자, 녀석이 욕지거리를 뱉으며 방향을 확 꺾었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모습이 흐릿흐릿해졌다.
은신 스킬을 쓴 것이다.
'악마의 눈이 진짜 개사기 스킬이구나.'
하지만 내 눈에는 암살자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어둠 속에서도 대낮처럼 보인다는 것.
말하자면 암살자는 환한 대낮에 내 앞에서 은신 스킬을 쓴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핑! 핑! 핑! 핑! 핑!
"이런 미친!"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녀석을 향해 화살을 쏘자 녀석이 또다시 욕설을 내뱉으며 은신을 풀었다.
움직임을 보니 스텟이 제법 높은 것 같았다.
거의 컨텐더 수준.
하긴, 그러니까 저렇게 도망치고 있는 거겠지.
'싸우지 않고도 나와의 수준 차이를 확실하게 느꼈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녀석을 절대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녀석이 뭘 하든, 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조금씩 거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하자 녀석이 개미 마수들 사이로 향했다.
녀석과 나 사이에 개미 마수들이라는 완충 지대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그럼 나야 좋지.'
천둥의 숨결을 켜고 있는 상황이라 체력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는 상황.
나는 다시 창으로 무기를 스왑하며 개미 마수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띠링!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
[<피의 회복> 능력으로 ······.]
체력이 빠르게 차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녀석과의 거리는 늘어나긴커녕 오히려 조금씩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차피 창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개미 마수 세 마리에서 네 마리가 한 번에 죽었기에, 완충 지대의 역할을 전혀 해주지 못한 것이다.
띠링!
[<벽력>이 발동됩니다.]
꽈아아아아아아앙!
그 사이 벽력이 또 한 번 터지며 잠시나마 내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빨라졌다.
남들이 보기엔 내가 단거리 순간 이동을 했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이동 중에 처음으로 벽력이 터진 것이다.
"저 괴물 같은 새끼!"
암살자 플레이어가 고개를 돌려 내 모습을 확인하더니 경악했다.
녀석과의 거리는 이제 10미터 안쪽.
아마 30초 안으로 녀석의 뒤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녀석은 도망가는 것을 포기하고, 방향을 바꿔 내게 달려들었다.
"죽어!"
내게 쇄도하며 두 개의 단검을 휘두르는 암살자.
그렇게 우리의 몸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서걱-!
살을 찢는 피륙음과 함께 암살자의 자세가 그대로 무너졌다.
내 창에 가슴을 크게 베인 것이다.
"크윽······ 씨발. 씨발. 씨바아알! 내가 이런 곳에서 죽는다고? 어떻게······ 어떻게 컨텐더까지 됐는데······."
창을 쥔 채 다가가자 녀석은 무릎을 꿇은 채 악을 썼다. 그러더니 이내 실성한 사람처럼 크게 웃기 시작했다.
"큭큭큭. 이봐. 나는 팀 '절망' 소속이라구. 날 죽이면 우리 팀의 네임드가 너한테 복수하러······."
서걱-!
나는 녀석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은 채 목을 잘라버렸다.
들을 가치도 없는 말이었으니까.
띠링!
[플레이어 '카마키리' 를 처치했습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녀석의 목이 데굴데굴 구르며 엄청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죽여놓고 보니 낯이 익은 닉네임이었다.
1회차 였던가.
상위리그에서 만난 적이 있는 플레이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한테 죽었던 플레이어였다.
'그땐 겨우겨우 이길 수 있었던 거 같은데.'
지금은 녀석 정도 수준의 플레이어 열 명과 싸워도 우습게 이길 수 있는 수준.
애초에 나한테 부족한 게 스텟이었는데, 아이템과 천둥의 숨결로 내 스텟이 크게 오른 상황이었다.
덕분에 더 이상 내게 부족한 부분이랄 게 없었다.
빛의 이면을 뛸 때와 비교하면 엄청난 성장이 있었달까.
'여기가 여왕 개미굴 입구인가 본데.'
카마키리를 쫓다 보니 어느새 개미굴의 중심부까지 와 있었다.
녀석을 쫓으며 개미 마수들을 쓸어버렸더니, 더 이상 개미 마수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신입들이 있는 곳부터 이곳까지 뻥 뚫린 상태라는 것.
'마침 잘됐네.'
나는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이제 신입들을 데리고 여왕 개미를 사냥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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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급성장(7)
다시 신입들이 있던 광장으로 향하자 초조하게 날 기다리고 있는 녀석들의 모습이 보였다.
"형! 무사하셨군요! 방금 전에 저희한테 개미 떼를 유인해 왔던 놈은 잡으셨어요?"
피에 젖은 내 모습에 움찔하던 주창범이 이내 활짝 웃으며 나를 반겼다.
"예. 죽였습니다."
"정말 다행이네요."
"그건 그렇고, 바로 움직이죠. 녀석을 죽이다 보니 여왕 개미굴 입구까지 개미들을 싹 쓸어놨습니다. 늦었다간 다른 파티에게 뺏길 수도 있습니다."
"넵!"
우리는 여왕 개미굴 입구를 향해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20분 정도 바쁘게 움직였더니, 금세 여왕 개미굴 입구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다행히 아직 아무도 안 온 모양이네.'
워낙 여기저기 개미들의 사체가 널려있어서 치우지 않고는 여왕 개미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상태였다.
한참을 살펴봤지만, 사체를 옮긴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신입들과 함께 여왕 개미굴로 들어가다가 입구에서 발걸음을 뚝, 멈췄다.
"······?"
"전 들어가지 않을 겁니다. 여왕 개미를 처치하는 것은 오롯이 여러분의 몫입니다."
"네?"
내 말에 신입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안쪽의 상황은 지금까지 여러분이 상대했던 개미 마수들과는 차원이 다를 겁니다. 더 강한 개체인 개미 호위병들도 있을 거고, 운이 나쁘면 왕자 개미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니 들어가서 신중하게 고민하고, 생각한 다음 여왕 개미까지 처치하고 오세요."
"저희가 할 수 있을까요?"
주창범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다.
아니,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높은 확률로 호위병들에게 둘러싸여 죽겠지.'
설혹, 호위병을 다 처치한다고 해도 여왕 개미까지 죽이는 건 정말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도 녀석들만 보내는 이유가 있었다.
조건이 너무 좋았으니까.
여왕 개미굴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는 딱 1개뿐.
이 경기에 내가 모르는 네임드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 그 앞을 내가 지키고 있는 상태에선 어느 누구도 들어가지 못한다.
혹시 네임드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먼저 여왕 개미를 죽여버리면 된다.
그러니까 녀석들이 여왕 개미를 처치하지 못하고 전멸한다고 해도 내가 미션을 클리어할 수 있다.
'한 번쯤 죽음을 경험해 보는 것만으로도 크게 성장할 수 있어.'
녀석들만의 힘으로 미션을 클리어하면 클리어하는 대로 배우는 게 있을 것이고, 클리어하지 못하더라도 배우는 게 많을 것이다.
이렇게 안정적으로 좋은 경험을 시켜줄 수 있는 조건이 흔치 않은 상황.
나로서는 녀석들을 사지로 밀어 넣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딱 하나만 명심하세요.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할 것. 그것만 명심한다면 아예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닐 겁니다. 지금까지 열심히 해오지 않았습니까. 가서 여러분의 노력을 증명하고 오세요."
내 말에 신입들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여왕 개미굴로 천천히 진입하기 시작했다.
'나도 이제 내가 할 일을 해야겠군.'
그때 어떤 파티가 개미굴 대광장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녀석들의 목표는 여왕 개미.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은 신입들이 여왕 개미를 처치하거나, 혹은 전멸할 때까지 이 안으로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
대광장으로 들어오던 파티는 나를 발견하더니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잠깐. 저 앞에 누가 서 있는데?"
"어떤 파티가 이미 여왕 개미굴 안으로 진입했나 보군. 서두르자."
검사 세 명에 궁수 하나, 마법사 하나로 이루어진 파티였다.
PvM 미션을 수행하기에 딱 좋은 조합.
"로라! 저 녀석을 처치하고 굴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캐스팅을 준비해! 고태민, 너는 혹시 안에 마법사가 있다면 1순위로 제거하라!"
적들은 곧장 여왕 개미굴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모습.
물론 그 안에는 자신들의 실력이 기저에 깔려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20개의 파티 중 가장 먼저 여왕 개미굴에 도착했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녀석들의 실력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으니.
'상대를 잘못 만났다고 생각해라.'
나는 곧장 천둥의 숨결을 켜고 쇄도하는 녀석들을 향해 창을 휘둘렀다.
콰지지직!
"꾸엑!"
"끄아아악!"
뇌신 스킬로 인해 전기 스파크가 튀며 다섯 명 중 네 명이 단숨에 두 동강이 났다.
검객 한 명이 간신히 내 공격을 막아냈지만, 뒤로 한참을 튕겨져 나갔다.
하지만 녀석의 상태도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바닥에 쓰러진 채 계속해서 피를 토하고 있었다.
띠링!
[플레이어 '로라' 를 처치했습니다.]
[플레이어 '고태민' 을 처치했······.]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네 명의 사체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사방에 흩뿌려졌다.
"미, 미친······. 쿨럭, 쿨럭. 어디서 이런 괴물이······."
검객은 허망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심장에 창을 찔러넣었다.
띠링!
순식간에 생겨난 다섯 구의 시체들.
이 시체들이 쌓이다 보면 이 안으로 함부로 접근하려 하는 플레이어들의 숫자가 줄어들 것이다.
―키에에에엑!
마침 내가 첫 번째로 도착한 파티를 정리하는 사이, 신입들도 사냥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개미 마수들의 괴성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사실, 신입들이 결국 공략에 실패해서 죽는 게 더 많은 교훈을 남길 것이다.
하지만 나는 녀석들이 사냥에 성공하길, 마음속으로 빌었다.
신입들이 여왕 개미굴로 진입한 지 어느덧 3시간째.
여전히 내부에서는 끊임없이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태창으로 데스 콜이 뜨지 않는 걸 보니, 모두들 무사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쓰러진 상대에게 창을 찔러넣었다.
"크헉!"
띠링!
나도 어느새 4 파티 째 전멸시킨 상태였다.
'뇌신이랑 천둥의 숨결이 시너지가 좋네.'
1티어 급 스킬은 그야말로 사기에 가까웠다.
어느 정도 강해질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손쉽게 다른 파티를 압도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지금 내 수준은 당장 코메인 이벤트를 뛰어도 학살하고 다닐 수 있을 정도였다.
"모, 모두 정지!"
그사이 새로운 파티가 중앙 광장에 진입하다 내 모습을 발견하곤 발걸음을 멈췄다.
두 동강이 난 채 죽어있는 수십 구의 시체들.
그 사이에서 피범벅이 된 채 홀로 서 있는 나.
그 모습을 본 녀석들은 숨죽인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
"······."
잠깐의 정적.
나는 굳이 녀석들에게 먼저 달려들지 않았다.
아무리 콜로세움이 서로 죽고 죽이는 전장이라지만, 전의를 상실한 적들을 베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건 피에 굶주린 사이코패스들이나 하는 짓이다.
"호, 혹시 우리를 죽이지 않으실 건가요?"
내가 따로 적의를 보이지 않자 새로온 파티에서 마법 모자를 쓰고 있던 여성이 내게 물었다.
나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안으로 들어오려 하지만 않는다면."
내 대답에 녀석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살았다. 어차피 들어가지도 못할 거, 우리 여기 한쪽에 앉아서 쉬죠."
여자 마법사의 말에 남은 파티원들이 내 눈치를 보며 살금살금 자리를 옮겼다.
광장 한쪽 구석이었다.
나를 상대해서 쓰러트리진 못할 것 같긴 하지만, 혹시 모를 기회가 생겼을 때 내부로 진입하겠다는 생각인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을 굳이 건들지 않았다.
그 뒤로 세 개의 파티가 더 도착했다.
그중 내게 달려들었던 한 파티는 싸늘한 시체가 되었고, 나머지 두 파티는······.
―네임드 맞는 것 같지?
―네. 그래도 먼저 덤비지만 않으면 죽이진 않나 봐요.
―다행이다. 가끔 싸이코 같은 새끼들도 있잖아. 그에 비하면 저 정도는 천사지 뭐. 에잇, 그나저나 이번 경기는 공쳤네.
―그래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시죠. 어차피 저런 녀석들은 금방 상위리그로 올라가잖습니까.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며 나를 흘깃흘깃 쳐다보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기 무료했던 나는 녀석들의 말을 엿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때, 또 다른 파티 하나가 대광장에 도착했다.
―앗, 또 다른 파티 왔다. 쟤넨 어떻게 할까?
―저랑 내기하시죠. 전 안 덤벼든다에 천 골드.
―야야, 내가 거기에 걸래.
―제가 이미 먼저 했잖습니까. 그러니까 파티장님은 덤벼든다에 천 골드에요.
"뭐야, 이 병신들은. 소풍이라도 나왔나?"
"아무래도 입구에서 가로막고 있는 새끼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하여튼 쫄보 새끼들."
새로온 파티는 쌓여있는 플레이어들의 시체를 보고서도 내게 덤벼들었다.
'쯧.'
콜로세움에는 생각보다 자기 목숨 귀한 줄 모르는 녀석들이 너무 많았다.
나는 또다시 천둥의 숨결을 켜고, 녀석들에게 창을 휘둘렀다.
띠링!
[<벽력>이 발동됩니다.]
꽈아아아아아아앙!
마침 대광장에서 입구 막기를 한 뒤로 첫 벽력이 터졌다.
엄청난 위력에 내 창을 정면으로 받아내려 했던 플레이어는 상반신이 통째로 사라진 채 쓰러졌고, 나머지 녀석들도 무사하진 못했다.
살아남은 녀석들은 처참하게 죽은 동료의 시체를 보며 벌벌 떨었다.
"큭······ 이건, 대체?"
"사, 살려주세요. 다신 안 덤빌게요. 제발······."
나는 바닥에 쓰러진 채 꿈틀거리는 플레이어들을 하나하나 죽였다.
물론 살려달라고 빌던 녀석도.
'아예 덤비지 않는다면 모를까.'
한 번이라도 내게 이빨을 들이민 녀석은 살려두지 않는다.
―야, 방금 봤어? 무슨 번개가 치는 것 같았는데?
―와 씨, 아까 전에 상대했던 파티한테 본 실력을 다 보여준 게 아니었나 본데요.
―미친. 도대체 어느 성계의 네임드야? 저 정도면 거의 무림에서 대문파 장로급 아니야?
―확실한 건 무림은 아니에요. 걔네들은 로브 입는 거 질색하잖아요. 저 가면만 보면 미드가르드나 하이퍼보리아일 것 같은데요?
―그건 그렇고 천 골드, 알지?
―네? 건다고 대답 안 하셨잖아요!
벽력의 위력에 주변에서 쉬고 있던 파티들이 모두 놀란 모양이었다.
나도 한 번씩 발동될 때마다 깜짝깜짝 놀랄 정도였으니, 저들의 반응이 이해됐다.
'그나저나 제법 오래 걸리네.'
생각보다 신입들이 호위병 개미 마수들을 상대로 잘 버티고 있는 듯 했다.
여전히 여왕 개미굴 내부에서는 싸우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무려 세 시간 가까이 쉬지 않고 싸우는 중인 것이다.
'이 경기로 실전의 경험이랑 몬스터를 상대로 하는 싸움엔 익숙해졌을 테니, 앞으로는 플레이어들을 상대로 싸우는 법을 집중적으로 교육시켜야겠군.'
물론 PvM 경기만 전문적으로 출전하는 플레이어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PvM 경기 안에서도 플레이어들과 싸우는 것은 똑같다.
오늘 경기만 해도 단체 PvM 미션이지만, 개미 마수보다 플레이어들과 싸운 게 더 많았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여왕 개미굴 내부에서 들리던 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죽었군.'
씁쓸했다.
죽음을 통해서 더 많은 것을 배울 거라고 생각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녀석들이 여왕 개미 마수 사냥에 성공하길 바라고 있었으니까.
그때였다.
띠링!
[여왕 개미 마수를 처치했습니다!]
[경기가 종료되었습니다.]
[팀 '투지' 승리!]
[기본급 x 1 의 승리 수당이 지급됩니다.]
[팀 '투지' 파티의 사망자는 모두 부활합니다.]
[사망한 파티원이 없습니다. 보너스로 1,000 P 를 지급합니다.]
상태창에 경기 종료 콜이 떴다.
순간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진짜로?
녀석들이 여왕 개미 마수를 처치하는 데 성공했다고?
도대체 어떻게?
[개미 마수 킬 수에 따른 보너스를 책정합니다.]
[개미 킬 수 현황 ― 1위. 팀 '투지' 427킬]
[개미 킬 수 1위 보너스로 3,000 P 를 지급합니다.]
[파티 킬 수 현황 ― 1위. 팀 '투지' 26킬]
[파티 킬 수 1위 보너스로 3,000 P 를 지급합니다.]
[모두 생존한 상태로 개미 킬 수 1위, 파티 킬 수 1위를 달성하였으므로 x 2 의 추가 보너스를 지급받게 됩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신입들의 실력이 더 뛰어났던 모양이었다.
순간 나는 긴장을 풀며 피식 웃었다.
왜 나 혼자만 급성장했다고 생각했을까.
저들도 나와 함께 훈련을 진행해 왔는데.
'우리 팀 자체가 급성장했음을 증명하는 경기였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수확이었다.
띠링!
[하위리그-블러드나이트187 의 6경기를 종료합니다.]
[파이트 머니로 16,100 P 를 지급받았습니다. (팀 '투지' 수수료 6,900 P 차감)]
[기본급 +4,500 P / 승리 수당 +4,500 P / 추가 보너스 +14,000 P / 수수료 -6,900 P]
[다음 경기부터는 기본급을 5,000 P 로 책정합니다.]
[소속된 팀의 팜으로 이동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하얀빛이 나를 감싸더니, 이내 익숙했던 풍경이 보였다.
그 앞에서 아세리안과 이세연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아세리안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활짝 웃었다.
그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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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안정화(1)
경기 종료 후 시작된 파티 타임.
오랜만에 마시는 술 때문인지 모두들 웃고 떠들며 파티를 즐겼다.
이세연에게 아레나에서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주는 주창범.
여왕 개미굴에서 네가 잘했네, 누가 잘했네 라며 웃고 떠들고 있는 제이스와 루치아노, 지그.
나는 아세리안의 맞은편에 앉아 술을 홀짝거리며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나쁘지 않군.'
현재 팜에서는 금주령이 내려진 상태.
적어도 신입들이 팜에 제대로 녹아들 때까진 금주령을 시행하는 게 어떠냐는 내 말에 아세리안이 내린 것이었다.
물론 앞으로도 쭉 금주령을 하진 않을 거다.
'술만큼 스트레스를 해소하기에 적당한 것도 없으니까.'
문제는 술이 들어가면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다는 것.
그래서 신입들이 콜로세움에 적응할 때까지만이라도 금주령을 유지할 예정이었다.
내가 멍하니 앉아서 녀석들을 바라보고 있자 아세리안이 입을 열었다.
"감사해요, 안우진님."
"뭘 말씀이십니까?"
"신입들을 안전하게 경험시켜주고 와주셔서요. 딱 제가 원했던 최고의 그림이었어요."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들고 있던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건 그렇고, 녀석들이 대체 여왕 개미를 어떻게 잡은 겁니까?"
"아, 밖에 계셔서 못 보셨죠? 모두들 각자 위치에서 엄청 잘 해줬어요. 사실 위험한 순간이 무척 많았는데, 그때마다 주창범씨가 대처를 정말 잘했죠."
아세리안이 여왕 개미굴 내부에서 있었던 일을 내게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뭐, 요약하자면 주창범이 리딩을 잘해서 내부에 있던 호위병 개미 마수를 각개격파 했고, 덕분에 여왕 개미 마수까지 처치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제법이네요."
"그렇죠? 이게 다 안우진님이 잘 가르치신 덕분이죠. 그래서 말인데요······."
아세리안이 양팔을 테이블 위에 올리며 목소리를 줄였다.
"슬슬 다음 신입 플레이어들을 받는 건 어떨까요?"
새로운 신입들을 받는다라······.
지금쯤이면 이런 말을 할 줄 알았다.
신입 플레이어의 첫 경기 생존율은 3% 내외.
그런 의미에서 주창범과 루치아노, 제이스, 지그는 큰 관문 하나를 넘어선 셈이었다.
그런 모습에 자신감을 얻은 아세리안이 신규 뽑기를 하려는 것은 자명한 일.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알아서 하실 문제겠지만, 제 생각엔 아직 이르군요."
"왜요? 딱 적당한 타이밍 아닌가요?"
"아직 신입들에게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이제 걸음마를 뗀 수준이랄까요. 이런 상황에서 또 다른 신입들이 들어오면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이 만들어질 겁니다."
"아······."
"적어도 개인 PvP 경기를 한 번 더 치르고 난 다음에 다시 고민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아세리안이 곰곰이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아직 다른 사람을 가르칠 정도는 아니라는 거군요. 그럼 신입들을 추가로 받는 건 보류해 둘게요."
내 의견에 순순히 수긍하는 아세리안.
그녀의 대답에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역시 팜 내부의 일을 도맡아 하길 잘했어.'
현재 아세리안은 내게 많은 걸 의지하고 있는 상태다.
그로 인해 시간을 조금 뺏기긴 했지만, 덕분에 아세리안은 내 의견을 거의 다 받아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내게 딱 맞는 팜이 되어가고 있달까.
그렇게 파티가 한창 무르익을 때였다.
띠링!
[하위리그-블러드나이트187 경기가 모두 끝났습니다.]
[과반수 이상의 관객들이 당신을 '퍼포먼스 오브 더 블러드'로 선정하셨습니다!]
['퍼포먼스 오브 더 블러드' 보너스로 7,000 P를 지급받았습니다. (팀 '투지' 수수료 3,000 P 차감)]
[플레이어 '렌' 에게 컨텐더(도전자)의 자격을 부여합니다.]
블러드나이트 187의 모든 경기가 끝났다는 알림과 함께 퍼오블에 선정됐다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그런데 평소와 다른 메시지가 하나 더 있었다.
내가 컨텐더 자격을 획득했다는 것이었다.
'벌써 얻었군.'
회귀한 지 4개월 째.
어느새 나는 상위리그와 가까워져 있었다.
물론 아직 자의로 갈 생각은 없지만.
"우와! 진짜 축하드려요, 안우진님. 이제 4경기 뛰었을 뿐인데 벌써 컨텐더라니!"
아세리안도 그 메시지를 봤는지 내게 축하 인사를 건네왔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안우진님!"
"축하드려요, 형!"
그리고 이어지는 축하 세례.
그 속에서 나는 가면 아래 고요하게 웃음 지었다.
그날 이후, 팜의 많은 것들이 변했다.
먼저 숙소를 레벨 2에서 레벨 3으로 업그레이드했다.
방도 더 넓어지고, 시설이 한결 좋아졌다.
덕분에 그동안은 존재하지 않던 아세리안의 집무실도 생겼다.
그다음은 대련장이었다.
기존의 대련장 레벨은 3.
상처가 생겨도 빠르게 아무는 수준이었다.
그걸 내 강력한 건의로 레벨 5까지 끌어올렸다.
이제는 팔다리쯤은 잘려도 재생이 되는 수준.
그로 인해 신입들이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아프면 상대가 기다려 준다고 하던가요?"
"고작 이 정도에 패닉에 빠지다니. 그래 놓고 뭐? 어서 다음 경기가 잡혔으면 좋겠다고? 장담하죠. 개인 PvP에 나가는 순간 군침이 도는 먹잇감이 될 겁니다."
"그동안 해왔던 노력에 창피하지 않습니까? 이미 한번 죽어 이곳에 왔으면서 뭐가 더 두려운 겁니까?"
나는 신입들을 혹독하게 몰아붙였다.
지하에서의 혈투전은 엄밀히 말하면 내 버스를 탄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도 여왕 개미를 잡았다는 것 때문에 슬슬 자신감이 붙은 모양인데, 좋지 않았다.
'자신감이 붙는 건 좋지만, 현실 자각이 더 중요해.'
신입들이 본인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매일같이 다양한 무기로 신입들의 팔다리를 자르고, 심하면 허리까지 두 동강을 냈다.
오죽했으면 아세리안이 '제발 살살 좀 해요. 이러다 다들 죽어 나가겠어요.' 라고 날 말릴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신입들을 몰아붙였다.
현재 나는 각종 저주 아이템을 두르고 신입들을 상대하고 있는 상태.
반면에 신입들은 아레나에서처럼 풀템을 착용한 채 나와 대련하고 있었다.
대련할 때 만큼은 나보다 스텟이 높다는 것.
거기다가 나는 스킬도 쓰지 않고 순수하게 실력으로만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예 상대가 되지 않는 수준이야.'
이전에 대련할 때는 봐준다는 느낌이 강했다. 애초에 내가 스텟이 훨씬 높으니 당연히 못 받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오히려 신입들이 더 오랫동안 날 상대로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저주 아이템으로 스텟을 낮추고 상대해 보니까, 녀석들이 얼마나 부족한지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스텟이 내가 더 낮은데도 한 번의 공격을 못 막아?'
이젠 녀석들이 혼자 아레나에 들어가도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계산 미스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녀석들을 더욱 혹독하게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다.
죽지 않길 바랐으니.
물론 채찍만 든 것은 아니었다.
"안우진님. 이번에 추가로 마력의 호숫물을 구했어요."
"오, 감사합니다."
내게 매일같이 죽기 직전까지 구르다 보니 녀석들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던 상황.
나는 하루걸러 한 명 꼴로 녀석들을 내 방으로 불러 유니콘의 뿔을 흡수하게 했다.
유니콘의 뿔 가격을 보여주면서.
"지그님. 제가 지그님께 많은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비싼 뿔도 아무렇지 않게 턱턱 내놓을 수 있는 거죠."
"아······ 감사합니다. 전 그런 줄도 모르고······.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채찍을 들다가 유니콘의 뿔이라는 당근을 내밀며 따로 살살 달랬더니, 다음 날이면 눈에서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
그렇게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흐르자, 녀석들은 개미 마수들을 상대하던 때와 몰라볼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챙! 채챙! 챙! 쾅!
"제법!"
"누가 할 소리를!"
현재 대련장 위에 올라가 있는 사람은 제이스와 루치아노.
둘은 서로 철천지원수 지간처럼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대련을 시작한 지 어느덧 10분째.
둘 다 서로의 공격은 허용하지 않으면서, 절묘한 곳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내게 잘근잘근 밟히면서 굴렀던 한 달.
녀석들은 어엿한 한 명의 전사로 성장해 있었다.
띠링!
[팀 '투지'의 주인, 아세리안 님께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제 방으로 좀 와주세요!
때마침 도착한 아세리안의 호출.
그동안의 성과도 보고할 겸 아세리안의 집무실로 향했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집무실로 들어서자 내 키 높이만큼 세워져 있는 서류 더미들 사이에서 아세리안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아, 잠시 앞에 앉아 계세요. 이세연에게 차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해 놨으니까."
"······."
그 말을 끝으로 그녀의 펜이 종이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자기 말로는 그동안 콜로세움의 경기들을 보면서 분석하고 정리한 자료들, 그리고 나와 생활하며 얻은 정보들과 팁, 육성법 등등을 써놓은 것들이라고 했는데.
그 분량을 보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일기형식으로 쭉 풀어놓지 않고서야 저 정도 분량이 나올 수가 있나?'
그런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슬쩍 맨 위에 있는 종이를 살펴봤는데, 나름 표와 그래프를 만들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걸 확인하자 나는 더욱 궁금했다.
저렇게 깔끔하게 정리해 뒀는데도 양이 이렇게나 많다고?
똑똑-
"네, 들어오세요! 아 거기에 두시면 돼요. 수고했어요."
"네, 여신님."
나는 이세연이 놓고 간 차를 마시며 그녀가 하는 일들을 지켜봤다.
그녀가 고개를 든 건 차를 절반쯤 마셨을 때였다.
"아, 죄송해요. 급하게 정리해 둘 것들이 좀 있어서."
"······뭔데 그렇게 쓸 게 많으십니까?"
"이거요? 신입들에게 추천해줄 만한 스킬들이랑 장비들을 체크해서 정리해뒀거든요. 적당한 가격에 최고의 효율을 뽑을 수 있는 가성비 스킬들을 찾느라 고생 좀 했죠."
그녀의 대답에 나는 무심코 입을 벌렸다.
정말 열정 하나는 대단하네.
그걸 하나하나 보면서 정리해 두고 있었다고?
아무래도 신입들이 저렇게 급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엔 내 몫만 존재했던 게 아니었던 것 같다.
저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아세리안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뭐 때문에 부르셨습니까?"
"아,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요. 이번에 신입들한테 오퍼가 들어왔거든요."
아세리안이 내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거기엔 블러드나이트 195의 4경기와 5경기의 오퍼가 쓰여 있었다.
'지명 오퍼는 아니군.'
그저 4경기와 5경기에 각각 2명씩 티오를 주겠다는 간단한 내용.
미션은 개인 PvP고, 각각 200명과 500명이 참가하는 중형급 경기였다.
내용을 다 숙지한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안우진님 생각은 어떠세요? 신입들을 거기에 출전시켜도 괜찮을까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195면 앞으로 3주 남았군요. 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현재 신입들은 중급 무기술을 각성한 상태였다.
스텟은 주창범이 평균 30대 중반, 나머지 셋이 30대 초반.
거기다가 매일같이 나와 대련을 하며 눈에서 독기가 줄줄 흐르는 상태였다.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알겠어요. 그럼 모두 출전시키는 걸로 할게요. 남은 3주간도 잘 부탁드립니다."
아세리안의 부탁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3주 후.
우리는 블러드나이트 195의 4경기에 들어간 지그와 제이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태창을 통해 경기를 보느라 정신이 없는 아세리안.
안절부절못하며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이세연.
그리고 초조한 걸 티 내지 않고 있는 두 명의 신입.
"주창범, 루치아노."
"네, 형님."
"네, 안우진님."
"떨립니까?"
내 물음에 루치아노와 주창범이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둘의 어깨를 꽈악 잡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포식자임을 깨닫는 경기가 될 겁니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면서 다시 돌아오게 되겠죠. 저희는 파티 준비나 하고 있을 테니, 잘 다녀오세요."
나는 그 둘에게 일부러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가면 때문에 내 웃음이 정확하게 보이진 않겠지만, 그래도 내가 평소와 다르게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것이다.
그러자 주창범과 루치아노도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쑤와아아앙!
그때 공터에 옅은 충격파가 터지며 게이트가 열렸다.
그곳에서는 피범벅이 된 채 나오는 두 사람이 있었다.
지그와 제이스였다.
"다녀왔습니다!"
"고생 많았어요. 정말 멋졌답니다. 우리, 조금만 있다가 파티해요."
아세리안이 제이스와 지그를 치하하고는 주창범과 루치아노에게 고개를 돌렸다.
"파티는 7인분을 준비할 거예요. 가서 여러분을, 그리고 팀 투지를 증명하고 오세요."
"옛!"
"알겠습니다!"
확신에 찬 아세리안의 말에 주창범과 루치아노가 힘차게 대답했다.
그러더니 방금 막 경기에 돌아와 피범벅이 된 제이스, 지그를 한 번씩 껴안아 주고는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침묵이 찾아온 공터.
나는 아세리안을 바라봤다.
'지금까지 이런 기분으로 날 기다리고 있었겠구나.'
눈이 보이지 않았던 나는, 다른 플레이어들과 어울릴 수 없었다.
툭 하면 눈 병신이니, 뭐니 하면서 시비 걸기 바빴고, 상위리그에 올라가서는 날 직접적으로 괴롭히진 않았지만 무시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아레나에 들어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게 처음이었다.
말로는 너희들이 최고다, 가서 다 찢고 와라, 이런 식으로 얘기했지만 내 마음속에는 초조하고 불안한 감정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내가 직접 가르치고 키운 녀석들이니까.'
콜로세움 안에서 웬만하면 정을 주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녀석들에겐 애착이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초조함을 숨기며 기다리길 1시간.
쑤와아아앙!
게이트가 열리며 주창범과 루치아노가 나왔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는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고생 많았습니다."
팜에 들어온 신입들이 신입 딱지를 떼고 진정한 플레이어로 각성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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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안정화(2)
블러드나이트 195 경기 이후, 나는 신입들의 교육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더 이상 내가 가르칠 것은 없었다.
이제는 본인들이 스스로 무기를 휘두르고, 몸을 굴리며 깨달음을 얻어야 할 때였다.
"앞으로 저희 교육을 안 하신다고요?"
"예. 저에게 배울 것들은 모두 배웠습니다."
"아직 저희는 형님과 비교도 하지 못할 만큼 약한데요?"
"저와 지금까지 했던 것들은 모두 큰 틀을 만들기 위한 훈련이었습니다. 이제 큰 틀이 만들어졌으니, 그 안을 채워 넣는 건 오롯이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내 말에 사인방이 무척 당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하루아침에 내가 교육을 끝낼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
주창범이 앞으로 나섰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어요. 그래도 막히는 게 있으면 여쭤봐도 되죠?"
"물론입니다. 그리고 경기가 잡히면 제가 따로 붙어서 도와주기도 할 겁니다. 그러니까 아예 끝이라기보단, 필요에 따라 서로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 그런 관계라고 보면 되겠군요. 그리고 어차피 서로 간에 대련은 계속해서 진행할 겁니다."
대련은 무조건 필수였다.
그래야 스스로에게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 체크하고, 보완해 나갈 수 있으니까.
나 또한 새로운 무기들을 단련하며 신입 사인방을 상대로 실전 경험을 해 볼 수 있으니 얻는 게 많았고.
"그리고 앞으로 당분간은 여러분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겁니다. 새로운 신입이 들어올 거거든요."
신입들이 블러드나이트 195 경기에서 무사히 돌아온 날, 아세리안에게 말했다.
이제 새로운 신입들을 받아도 될 것 같다고.
그러니까 아마 오늘 아니면 내일쯤에 새로운 신입들이 대거 들어올 것이다.
"신입이 들어온다고요? 그럼 우리 이제 막내에서 벗어날 수 있겠네요!"
주창범이 환하게 웃으며 좋아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을 가르쳤던 것처럼, 여러분도 새로 들어오는 신입들을 가르치게 될 겁니다."
"오오!"
"마구마구 예뻐해 줘야지."
다른 사인방들도 새로운 신입이 들어온다는 것에 무척 들떠 보였다.
글쎄.
꼭 좋은 것만은 아닐 텐데.
"미리 말씀드리죠. 절대 쉽지 않을 겁니다. 누군가를 관리한다는 것은. 평소보다 스트레스도 많이 받을 거고,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는 압박감도 짓누를 겁니다. 서로 간에 가르친 신입들을 비교하며 필요 이상의 경쟁의식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합니다. 그 과정에서 여러분이 배우는 게 제법 많을 겁니다."
나는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했다.
그러자 잔뜩 흥분했던 사인방의 기분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내 진심이 느껴진 것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 나와 여러분이 곧, 이곳 팀 투지의 초석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 초석은 제법 기틀을 잡았습니다. 지금부터 들어오는 신입들은 앞으로 초석 위에 세워지는 기둥이 될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최선을 다해 주세요. 내가 여러분을 가르쳤던 것처럼."
"알겠습니다."
"예, 형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사인방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모습에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앞으로 사건 사고가 자주 생기겠지만.
분명한 건, 이전보다 팜이 훨씬 더 활기 넘치고, 커질 거란 것이었다.
팜에 새로운 가족이 들어왔다.
총 19명.
16명은 신입 플레이어였고, 3명은 사용인이었다.
플레이어 숫자가 늘어나는 만큼 사용인의 증가도 필수였다.
이세연 혼자서는 21명의 인원을 감당할 수 없을테니까.
"자, 모두 쭈욱! 쭈욱! 스트레칭은 무척 중요합니다! 이건 단순히 몸을 푸는 작업이 아니에요. 여러분이 강해지려면 무조건 해야 하는 훈련입니다, 훈련! 집중하세요!"
이전보다 훨씬 더 커진 체력 단련실.
네 개의 그룹이 각자의 자리에서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훈련을 시작했다.
"스읍, 후우. 스읍, 후우."
저주 아이템을 주렁주렁 단 채 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보니, 내가 들고 있는 바벨의 무게는 고작 320킬로그램.
그런데도 불구하고 새로 들어온 신입들은 나를 동경의 눈초리로 엿보고 있었다.
'도대체 뭐라고 설명한 거야.'
그 눈빛은 이어지는 대련 시간에 더욱더 진해졌다.
이후 대련 훈련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시범도 보일 겸 나와 사인방이 4 대 1 로 대련을 펼친 것이다.
스윽-
나는 날아오는 루치아노의 창을 피하며 채찍을 휘둘렀다.
텅!
채찍 끝에 달린 동그란 추가 주창범의 방패에 부딪히며 거친 쇳소리를 만들어 냈다.
'후우. 쉽지 않은데.'
현재 사인방이 쓰는 작전은 개미 마수들을 사냥할 때 잡은 진형이었다.
앞에서 주창범이 내 공격을 막아내고, 그 빈틈을 지그가 찌르고 들어오며, 그 뒤에서 루치아노와 제이스가 대검과 창을 휘두르는 식이었다.
오늘 내 무기는 유성추.
엄청난 속도와 예측할 수 없는 공격 방향, 긴 리치가 특징인 무기였다.
직접 사용해 보니 장점이 무척 많았다.
'문제는 숙련도를 올리기가 무척 어렵다는 거지.'
신입들을 상대하며 벌써 한 달 넘게 사용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중급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초감각이 있는데도.
'일단 주창범부터 치워야 해.'
앞에서 방패를 내민 채 내 공격을 막아내고 있는 주창범이 가장 문제였다.
예측하기 쉽지 않을 텐데도, 거의 완벽에 가깝게 내 공격들을 막아내고 있었으니까.
그와 반대로 나머지 세 명은 아직 유성추의 궤적에 익숙해지지 않은 상황.
주창범만 무너트릴 수 있다면, 나머지 세 명을 쓰러트리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체를 공략하자.'
나는 머리 위에서 크게 돌리고 있던 유성추를 주창범의 안면부로 쏘아 보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들리는 방패.
'지금!'
순간적으로 날아가는 채찍의 끝부분을 살짝 잡아당겨 유성추의 궤적을 틀었다.
그러자 유성추가 뱀처럼 휘며 떨어지더니 주창범의 발목을 강타했다.
"끄악!"
무게 중심을 잃은 채 쓰러지는 주창범.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폭풍처럼 유성추를 휘둘렀다.
텅! 텅! 텅! 텅! 텅!
방패가 사라지자 유성추가 물 만난 물고기마냥 펄떡거리며 남은 삼인방을 두드려댔다.
결국 지그와 루치아노, 제이스는 내게 변변한 공격 한번 시도해보지도 못한 채 주창범과 함께 바닥을 뒹굴어야 했다.
'후우.'
녀석들의 수준이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상대도 되지 않던 녀석들인데, 요즘 부쩍 애를 먹고 있었다.
물론 저주 아이템을 착용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크, 크흑. 고, 고생하셨습니다, 형님."
"오늘도 대련에 감사드립니다."
사인방이 쓰러져 피를 흘리면서도 내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한번 끄덕여 주는 것으로 대련장을 나섰다.
―봤어? 혼자서 네 명을 그냥 압도해 버리네. 지그님이 괜히 조심하라고 한 게 아니었구나.
―심지어 유성추는 연습 중인 무기라고 하시더라. 연습한 지 한 달도 안 됐대.
―아, 그건 나도 들었어. 창을 들면 자기들은 단 한 번의 공격도 막아내지 못할 거라고 하시던데.
―아무튼 조심하자고. 괜히 심기를 잘못 건드리면 웃으면서 팔다리를 잘라버린다니까.
등 뒤로 새로 들어온 신입들이 귓속말을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근데 마지막에 나눈 대화에는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미친놈들. 도대체 날 뭐라고 설명하고 다니는 거야.'
단련장을 나온 나는 아세리안의 집무실로 향했다.
"어서오세요, 안우진님.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예. 늦어서 죄송합니다."
대련 중에 아세리안의 호출이 도착했던 상태.
그래서 평소보다 더 급하게 대련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던 것도 있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아세리안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거기엔 큰 글씨로 첫 줄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블러드나이트 200 코메인 이벤트 '렌' 참가 제안서
'내 지명 오퍼.'
나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테이블 위에 종이를 올려놨다.
드디어 들어왔구나.
블러드나이트 187 이후 어느새 2달이란 시간이 흐른 상황.
티는 안 냈지만, 그동안 알게 모르게 경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설레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 나는 단숨에 종이를 읽어 내려갔다.
일단 가장 중요했던 부분, 승급샷 경기는 아니었다.
그리고······.
"참여 인원이······ 5천 명?"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천 명만 참가해도 대형 경기로 분류되는데, 5천 명이 참여한다고?
"깜짝 놀라셨죠? 저도 보는 순간 얘네가 숫자를 잘못 썼나 의심했을 정도였다니까요. 근데 안우진님이 놀라는 표정은 또 처음 보네요. 후후."
"그럼 이 5천 명이 진짜입니까? PvM도 아니고, 개인 PvP인데?"
"네. 듣기로는 조만간 하위리그에서 초대형 이벤트가 열릴 거라고 하더라구요. 뭐, 하위리그의 관객 수를 어떻게든 늘려보겠다고 게임 메이커가 발악하는 거죠. 그거 때문에 관심을 끌기 위해서 초대형 경기를 기획했다고 하네요."
아세리안의 말을 듣고서야 나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었다.
'정말 오래 기다렸어.'
하위리그에 소속된 모든 플레이어들이 뛰는 경기.
성계 대항전이 곧 열린다는 뜻이었다.
성계 대항전은 소속 팀과 무관하게 각 성계별로 모여 대항전을 펼치는 경기였다.
그리고 내가 상위리그에 늦게 올라가려고 발버둥 쳤던 이유였기도 했다.
'성계 대항전에서 반드시 성계 특전을 얻어야 해.'
아이러니하게도 성계 대항전은 하위리그에서만 열린다.
그 이유는 무척 간단했다.
'상위리그 이상 올라가면 지구 출신이 없으니까.'
지구 출신이 무시당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네임드가 없는 성계.
열두 성계 중 최약체 성계.
그게 지구에 대한 평가였다.
물론 2회차에는 다를 것이다.
"초대형 경기라 고민이 많으시죠? 시간 좀 드릴까요?"
"시간······? 아."
내가 종이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 있자 아세리안이 착각한 것 같았다.
나는 종이를 내려놓으며 아세리안을 바라보았다.
"이 경기, 뛰겠습니다."
블러드나이트 179 이후, 나는 급성장을 이뤄낸 상태.
참여 인원이 5천 명이라고 해서 내가 쫄 것도 없었다.
"알겠어요. 앞으로 4주 남았으니까, 그동안 저도 최선을 다해 볼게요."
"저도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그럼."
나는 아세리안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다시 대련장으로 향하려 할 때였다.
"형!"
주창범이 대련장에서 나를 부르며 급히 뛰어오고 있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불안감이 치솟았다.
주창범이 팜 안에서 저렇게 다급해 보이는 경우를 본 적이 없었기에.
'신입들 사이에서 무슨 일이라도 터졌나?'
"무슨 일입니까?"
"중개 거래소에 어떤 가면이 올라와서요. 형이 전에 혹시 가면의 파편 같은 거 올라오면 얘기해달라고 하셨잖아요."
하지만 주창범의 얘기는 내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가면!'
나는 서둘러 중개 거래소를 열었다.
어디 있는 거야.
설마 그사이에 팔린 건 아니겠지?
물론 가면의 파편이라고 해서 꼭 블라디미르 가면에 합성할 수 있는 아이템인 건 아니다.
하지만 가면의 파편이라는 것 자체가 애초에 보기 어려운 아이템인 만큼,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빠르게 중개 거래소를 내리다 보니 주창범이 얘기했던 가면의 파편이 보였다.
[<소모 아이템:가면의 파편(빨강)>]
[어떤 가면의 일부가 떨어져 나온 파편. 어떤 가면인지는 알 수 없다. 오랜 시간 동안 착용하면서 주인의 능력 일부가 깃들어 있다.]
[가면의 원본이 있으면 합성이 가능한 아이템입니다.]
[등급 : 알 수 없음]
[판매가 : 5,000 G]
'내가 찾던 게 맞아!'
파편의 정보를 보는 순간 나는 곧장 구매 탭을 클릭했다.
[<소모 아이템:가면의 파편(빨강)>을 5,000 G 에 구입하셨습니다.]
내 손바닥 위에 나타난 빨간색 바탕의 가면.
그걸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피어났다.
설마 중개 거래소에서 가면의 파편을 얻게 될 줄이야.
심지어 가격도 5천 골드밖에 하지 않았다. 그냥 잡템인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이게 형이 찾던 게 맞나요?"
"아, 예.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제가 열심히 찾던 아이템이 맞네요."
생각해 보니 가면을 구입한다고 주창범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내가 감사를 표하자 주창범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뭔가 쑥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아니에요, 형. 형이 저에게 얼마나 많은 걸 해주셨는데. 근데 그 가면 조각을 형님 가면에 덮어씌우는 거예요? 가면에 문양이 하나씩 추가 돼가는 것 같던데."
"예, 맞습니다. 한번 볼래요?"
"오, 그래도 돼요?"
"안 될 것도 없죠."
나는 빨간 가면의 파편을 블라디미르 가면에 가져다 댔다.
띠링!
[<가면:블라디미르의 가면>과 <소모 아이템:가면의 파편(빨강)>을 합성하시겠습니까?]
[한번 합성하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Yes(선택) / No]
띠링!
[<가면:블라디미르의 가면>과 <소모 아이템:가면의 파편(빨강)>을 합성을 성공했습니다!]
[<가면:블라디미르의 유희>를 획득합니다!]
[<가면:블라디미르의 유희>]
[고위 악마, 블라디미르가 착용하던 가면이다. 오랜 시간 동안 착용하면서 주인의 능력 일부가 깃들어 있다.]
[착용 시 <피의 회복>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착용 시 <악마의 눈>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착용 시 <피의 강화>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피의 회복> ― 생명체를 처치할 때마다 체력이 1% 회복된다.]
[<악마의 눈> ― 대상의 상태창을 일부 엿볼 수 있다. 상대의 거짓말을 알아챌 수 있다. 밤에도 대낮처럼 환하게 볼 수 있다.]
[<피의 강화> ― 생명체를 처치할 때마다 모든 스텟이 일시적으로 1% 상승한다. 3분 이내에 다른 생명체를 처치하지 못하면 스텟 상승이 초기화되며, 최대 30%까지 상승한다.]
[등급 : 전설]
알림창과 함께 손에 있던 파편이 블라디미르 가면 속으로 스르르 흡수되었다.
그런데 상태창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미친.'
한 명 죽일 때마다 1%씩, 최대 30% 상승?
아이템 정보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이건 완전 밸런스 파괴 아이템인데?
도대체 블라디미르라는 자식은 살면서 얼마나 많이 레이드를 당했길래 이런 괴랄한 능력들을 가지고 있던 거야?
등급도 희귀에서 곧바로 전설이 되었다.
고귀를 건너뛴 것이다.
"하. 하하······."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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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안정화(3)
"와, 형. 가면에 붉은색 선들이 생겨났어요. 이제는 음······ 악귀 가면처럼 보이는데요?"
주창범의 말에 나는 품속에서 손거울을 꺼내 가면을 비췄다.
밋밋한 하얀색 바탕의 가면이 보라색과 붉은색 선들이 어우러져 주창범의 말대로 악귀처럼 보였다.
음.
가면의 등급이 전설로 올라간 건 좋은데, 점점 더 요란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돌아다니면 온갖 시선들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쯧.'
그건 좀 부담스러운데.
가면의 성능이 끝판왕이라 착용하지 않을 수도 없고.
'상태창.'
띠링!
[이름 : 안우진(닉네임 : 렌)] [소속 : Team 투지]
[리그 : 하위리그]
[근력 : 47(+4)] [민첩 :51(+3)] [체력 : 57(+5)]
[정신 : 94(+2)] [지력 : 16(+2)] [마력 : 43(+5)]
[각성 능력 : <초감각> <고급살기> <특급마나운용> <고급창술> <최상급검술> <상급단검술> <상급투척술> <중급박투술> <하급치료술> <상급궁술> <중급검방술> <중급채찍술> <중급둔기술> <상급극술> <상급도술>]
[보유 스킬(3/5) : <침묵의 망토> <뇌신> <천둥의 숨결>]
[업적 특전 : 없음] [차원 특전 : 없음] [종족 특전 : 없음]
현재 내 근력은 장비로 인한 상승을 제외하고 43이다.
거기에 특전과 천둥의 숨결을 켜고, 피의 강화를 끝까지 중첩시키면 65%의 스텟이 상승한다.
단숨에 근력 스텟이 28 포인트나 상승하는 것이다.
회귀 전 내 근력 스텟이 68이었다는 걸 생각해본다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수치였다.
'이 정도면 네임드를 제외하곤 하위리그에서 날 상대할 수 있는 플레이어가 없겠는데?'
4주 후에 잡힌 초대형 코메인 이벤트.
그날이 기다려졌다.
띠링! 띠링!
자려고 막 침대에 누웠을 때 나타난 두 개의 콜.
나는 상태창을 클릭해 보았다.
[팀 '투지'의 주인, 아세리안 님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코메인 이벤트 200 관련 기사에요. 확인해 보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네임드 vs 네임드! 블러드나이트 200에서 격돌한다!
아세리안이 보낸 메시지.
그 밑에는 링크가 달려 있었다.
나는 링크를 눌러 기사를 읽어보았다.
'별다른 내용은 없네.'
사실 기사라기보단 찌라시에 가까운 내용이었다.
그저 블러드나이트 200에서 네임드 두 명과 컨텐더들이 대거 출격한다는 것과, 네임드 중 한 명이 엘프로 알려져 있고, 또 다른 하나는 무림의 대문파 출신이라는 것뿐이었다.
그 밑으로 출전을 확정지은 플레이어 중에 눈여겨봐야 할 닉네임을 나열해 두었는데, 그사이에 내 닉네임도 들어있었다.
└하위리그에 남아있는 네임드라고 해봤자 몇 명 안 되지 않나. 엘프는 대충 알 거 같은데, 대문파 출신이라는 넘은 좀 궁금하네.
└엘프 닉네임 공유점.
└ㅇㄹㅇ 아닐까.
└아, 이 경기 좀 기대된다. 그동안 하위리그에 들어오는 네임드들이 별로 없어서 싸우는 거 별로 못 봤는데, 이거 꼭 봐야지.
└누가 이길 거 같냐. 난 무림 대문파 출신에 한 표 건다.
댓글에는 네임드들이 과연 누구일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동안 제법 이름을 날렸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네임드들한테는 아직 안 되는 모양이었다.
아, 물론 댓글에 내 닉네임도 간간이 언급되고 있었다.
└와 렌도 나오네. 쟤가 진짜 힘숨찐임. 볼 때마다 ㅈㄴ 강해져 있음. 개미들 학살하던 모습은 걍 네임드 그 자체더라. 오히려 쟤가 위에 언급된 네임드보다 더 셀 수도 있음.
└응, 아니야. 돌아가.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놈을 빨고 있네 ㅋㅋㅋㅋ
└에이, 네임드는 아니지. 쟤를 알고 있는 플레이어들이 없던데. 네임드면 이름만 대도 같은 성계 출신 애들은 다 알지.
└렌인가 쟤는 진짜 어디 성계 출신일지 좀 궁금하다. 사용하는 무기도 검에 활에 창에 단검에 별의별 걸 다 쓰던데. 이상하게 정보가 안 풀리네.
└무림 출신이라고ㅡㅡ 복장이야 안에 들어와서 갈아 끼우면 되잖아. 다들 눈이 삐꾸임? 쟤 움직임 못 봄? 보니까 마법에 대해 잘 모르는 거 같던데 백 타 무림 출신임.
└윗댓이야 말로 눈이 삐었네. 무림 애들이 닉네임을 저런 식으로 짓는다고? 지나가던 코볼트가 웃겠다. 걔네는 보통 자기 별호로 짓잖아.
└머리 까만 거 보니까 무림, 지구, 나카츠쿠니 아니면 졸본인데. 지구는 제외하고, 나카츠쿠니랑 졸본도 특유의 스타일이 있으니 제외하면 무림만 남음. 무림 맞을 듯 ㅇㅇ
'역시 지구일 거라고 생각하는 신은 아무도 없네.'
나와 관련된 댓글을 읽으며 피식 웃었다.
뭐, 너무나 당연한 얘기였다.
1회차 때 당시 상위 리그에 있던 지구 출신 플레이어는 나까지 포함해서 넷.
그 위로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그 정도로 이름을 날린 플레이어들이 없는 곳이다 보니, 아예 배제해 버리는 것도 이해가 됐다.
어차피 플레이어들이야 커뮤니티를 읽을 수만 있고, 직접 무언가를 남기진 못하니 내 정보가 풀릴 일도 없을 것이다.
'애초에 사인방이 내 닉네임이나 알까.'
같이 경기를 한 번 뛰긴 했지만, 그렇다고 내 닉네임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나야 처치할 때마다 닉네임이 뜨니까 얘가 누구구나, 라고 아는 거지, 악마의 눈이 없으면 죽이지 않은 녀석들의 닉네임까지 알 방법이 없었다.
'개미 학살전에서도 별다른 단서는 없었을 테고.'
물론 지하에서의 혈투전을 함께 참가하긴 했지만 킬 수 현황에는 투지라는 팀명만 올라와 있었을 뿐, 내 닉네임은 찾아볼 수 없었다.
녀석들에게도 굳이 내 닉네임을 알려주지 않았고, 팜에서는 안우진이라고만 불린다.
그래서 사인방이 내 닉네임을 모를 가능성이 높았다.
'아, 알 수도 있겠네.'
우리가 뛰었던 경기의 후기에서 내 닉네임이 나와있었을 테니까.
가면이란 존재는 내 닉네임을 유추하기에 충분한 단서였다.
뭐, 알아도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아세리안이 저들을 다른 팀으로 이적시키지 않는 이상 정보가 퍼질 일은 없다.
나는 커뮤니티를 닫고 눈을 감았다.
콜로세움에 들어온 지 6개월째.
1회차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해진 나는 어느새 네임드들과 비견되고 있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사이 나는 더 많은 성장을 이뤄냈다.
일단 1 티어급 아이템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로브:달의 메아리>]
[달의 정기를 받은 특별한 천으로 제작한 로브. 달빛의 힘을 빌려 쓸 수 있다.]
[달의 크기에 비례하여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최대 5%]
[외부 온도를 차단합니다.]
[절대 찢어지지 않습니다.]
[등급 : 전설]
무려 전설 등급의 로브.
칠흑 같은 검은색인 건 같지만, 밤이 되면 등에 초승달 문양이 나타났다.
보름달이 떴을 때란 전제조건이 있지만, 모든 스텟을 무려 5%나 상승시켜주는 아이템이었다.
"이번에도 보란 듯이 멋있게 이기고 오시겠죠?"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공터에는 나와 아세리안, 단둘 뿐이었다.
오늘은 내가 블러드나이트 200에 참가하는 날.
팜 내부에 인원이 많아지다 보니, 사인방에게는 내가 일부러 나오지 말라고 했다.
정신이 사나울 것 같았으니까.
"어때요?"
내가 한동안 팜 내부를 둘러보고 있자 아세리안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뭘 말씀이십니까?"
"팜이요. 처음엔 공터밖에 없었잖아요."
"많이 커졌네요. 그리고 조금씩 안정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게 다 안우진님 덕분에 이룰 수 있던 것들이에요."
아세리안이 확신을 담아 말했다.
그런데 나는 그녀의 말이 무척 의외였다.
아세리안이 내게 의지를 많이 하고, 신답지 않게 뭔가를 배우는 것에 주저하지 않지만, 어쨌든 그녀는 여신이라는 지고의 존재다.
물론 이곳의 신이라는 존재들이 성경에 나오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사람처럼 생각하고 사람처럼 감정을 느끼며 사람처럼 행동한다지만 어찌 됐든 신은 신.
우리보다 훨씬 높은 차원의 존재들인 것이다.
그런 존재가 내 덕분이라며 나를 추켜세우고 있었다.
'진심이군.'
악마의 눈이 여신인 그녀에게 통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도 미동조차 없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아세리안이 말을 이었다.
"팜이 더 커지면, 제가 안우진님께 멋진 창 한 자루를 선물해 드릴게요. 그러니까. 절대 죽지 마세요. 죽으면 땅을 치고 후회할 정도로 멋진 창일 테니까."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뭐랄까.
더 나은 훈련 환경을 위해 그녀를 도와준 것뿐이었는데.
애초에 그런 의도로 그녀를 도와준 게 아니었는데.
그래서 더 머쓱하고, 겸연쩍었다.
"알겠습니다. 꼭 살아 돌아오도록 하죠."
붉은 깃발전 이후, 아세리안이 내게 죽지 말라고 한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이해가 됐다.
나 또한 사인방을 초조하게 기다렸으니까.
띠링
[하위리그-블러드나이트200 8경기가 끝났습니다.]
[잠시 후 코메인 이벤트 경기가 시작되오니,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때마침 알림창과 함께 공터에 게이트가 형성되었다.
나는 터벅터벅, 천천히 게이트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게이트를 앞두고 아세리안에게 말했다.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검은색 로브를 펄럭이며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띠링!
[모든 상태를 100%로 회복합니다.]
게이트를 통과하자 빽빽하게 솟아있는 나무들이 보였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높은 경사가 있지 않은 걸 보니, 대규모 숲지인 모양이었다.
저 멀리, 지평선 너머로 해가 뜨고 있었다.
곧 있으면 아침이 찾아올 것이다.
띠링!
[경기 : 하위리그-블러드나이트200의 코메인 이벤트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유형 : 개인 서바이벌(개인 PvP)]
[게임명 : 피의 여명]
[맵 : 에덴 대초원(중)]
[관객 수 : 47,274 명]
나는 주위로 마력장을 펼쳤다.
느껴지는 사람의 숫자는 셋.
검객이 한 명, 궁수가 한 명, 그리고 도끼를 든······ 어?
'관객이 4만 7천 명?'
관객의 숫자를 보는 순간 나는 두 눈을 의심했다.
이게 네임드전의 파급 효과인가.
평소보다 관객이 3만 명 가까이 늘어나 있었다.
'좋아.'
이번 경기에서 멋진 활약을 보여준다면, 기본급이 수직상승할 것이다.
현재 내 기본급은 5천 포인트.
여기서 최대한 기본급을 끌어올려야 한다.
띠링!
[승리 조건 : 경기 종료 시점에서 생존해 있는 자]
[대초원을 넘어서는 순간 자동으로 탈락 처리됩니다.]
[탈락 처리가 되면 사망합니다.]
[현재 생존자 수 : 5,000 명]
[보너스 포인트 조건이 있습니다.]
[많은 플레이어를 죽일수록 보너스가 상승합니다!]
[킬 수 현황 ― 없음]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72:00:00]
[3초 후 경기가 시작합니다.]
생각보다 심플한 룰.
하지만 그 내용은 절대 간단하지 않았다.
준컨텐더급 이상의 플레이어 5천 명이 3일간 서로를 죽여야 하는 데스 매치.
관건은 강자를 피하고, 체력 안배를 잘 해나가는 것이다.
[2초 후 경기가 시작합니다.]
현재 내 주위에 느껴지는 플레이어의 숫자는 셋.
아무도 없었던 붉은 깃발전과 다르게 인구 밀도가 제법 된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는 건 정신없이 싸워야 할 일들로 가득하다는 것.
[1초 후 경기가 시작합니다.]
사실 언젠가는 이런 미션을 받게 될 줄 알았다.
그렇다고 해도 5천 명이나 가둬놓고 갈아버리다니.
게임 메이커가 이후에 펼쳐질 성계 대항전을 제법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경기 시작!]
상태창이 경기 시작을 알려왔다.
나는 시작하자마자 먼저 특전부터 켰다.
'역천자 칭호 적용.'
띠링!
[<신화업적:역천자>를 적용합니다.]
[칭호의 효과로 모든 스텟이 + 20% 상승합니다.]
이런 경기는 초반이 제일 중요하다.
높은 인구 밀도 덕분에 곳곳에서 대규모 전투가 펼쳐질 테니까.
첫날만 버티면 은밀한 곳에 숨어서 체력을 회복할 시간이 있을 것이다.
'결국 그 전까지는 끊임없이 싸워야겠지만.'
나는 창을 들고 가장 먼저 궁수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검객이나 도끼를 들고 있는 플레이어와 먼저 만났다간 궁수에게 저격을 당할 수 있으니까.
'후우.'
조용하게 걸음을 옮기자 제법 높은 나무 위에 올라 은밀하게 주변을 정찰하고 있는 궁수의 모습이 보였다.
녀석이 나무에서 내려오는 순간을 노린다.
나는 바닥에 엎드려 무릎까지 올라와 있는 풀들 사이로 몸을 숨긴 채 천천히 궁수가 오른 나무로 접근했다.
다행히 내가 절반 가까이 거리를 좁힐 때까지 궁수는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읍.'
나무 밑으로 내려오는 궁수.
나는 숨을 들이쉬고, 꾹 참았다.
그리고 녀석이 흙바닥에 한 발을 디디는 순간.
"흐읍!"
나는 몸을 일으키며 궁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뭐, 뭐야!"
그러자 궁수가 허둥대며 다시 나무 위로 오르려고 했다.
하지만 녀석이 간과하고 있는 게 있었다.
그건 바로.
푹!
띠링!
[플레이어 '고담연' 을 처치했습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1/30)]
[3분 이내에 다른 생명체를 처치하지 못하면 상승분이 초기화됩니다.]
내 무기가 창이라는 것.
녀석이 아무리 빠르게 나무 위를 올라타도, 창의 긴 리치를 피할 수 없다.
궁수를 죽인 나는 빠르게 이동했다.
여러 명이 뒤엉켜 싸우고 있기 전에 최대한 한 명씩 정리해 나가야 한다.
나무 사이를 스쳐 지나가며 빠르게 달리다 보니 도끼를 들고 있는 거한의 모습이 보였다.
'악마의 눈.'
띠링!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카스바드]
[성향 : 중용]
[근력 : 60] [민첩 : 51] [체력 : 54]
[정신 : 49] [지력 : 9] [마력 : 28]
[각성 능력 : <최상급도끼술> <상급살기> <중급마나운용> <중급박투술> <하급치료술> <중급 투척술>]
거한, 카스바드의 능력치를 확인한 나는 망설이지 않고 천둥의 숨결부터 켰다.
그리고 녀석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딜!"
갑작스러운 내 등장에도 카스바드는 당황하지 않고 거대한 도끼를 들어 올렸다.
녀석의 수준은 최상급도끼술.
전에 만났던 빅터에 필적하는 실력이었다.
하지만 녀석은 내 상대가 되지 않았다.
"네 놈을 이번 경기 시작의 제물로 바치, 끄억!"
내 창과 도끼가 닿는 순간 녀석이 움찔했다.
마나에 뇌전의 기운이 깃든, 뇌신의 효과 때문이었다.
내 창과 닿을 때마다 녀석에겐 짜릿짜릿한 전기충격이 가해지고 있을 것이다.
"잡, 끄윽, 잡스러운 기술을!"
후웅! 후웅!
거대한 도끼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들었지만 나는 슬쩍 뒤로 빠지며 가볍게 피했다.
그리고 창을 슬쩍 가져다 대며 녀석에게 전기충격을 주었다.
움찔하는 카스바드.
나는 그 작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띠링!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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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피의 여명(1)
[플레이어 '카스바드' 를 처치했습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1/30)]
[3분 이내에 다른 생명체를 처치하지 못하면 상승분이 초기화됩니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뇌전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내게는 아무런 타격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광역 데미지가 제법 될 것 같았다.
'체력을 효율적으로 써야 해.'
나는 카스바드를 죽인 후 천둥의 숨결부터 껐다.
타다다다닥-
그때 누군가 이쪽으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벽력의 굉음을 듣고 오는 것이었다.
잠시 후 검을 든 채 무복을 입고 있는 청년이 나타났다.
'악마의 눈.'
녀석의 이름은 어우동. 스텟은 나보다 낮고, 검술도 상급 수준.
상대의 능력치를 확인하니 굳이 천둥의 숨결을 킬 필요는 없어 보였다.
나는 달려오는 상대에게 곧장 창을 맞찌르며 들어갔다.
"어딜!"
녀석이 기세 좋게 내 창을 받아내려 했지만.
서걱!
잘린 목이 땅바닥을 굴렀다.
띠링!
[플레이어 '어우동' 을 처치했습니다.]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2/30)]
[3분 이내에 다른 생명체를 처치하지 못하면 상승분이 초기화됩니다.]
적의 스텟을 파악할 수 있다는 건 커다란 메리트였다.
스텟에 따라 나도 싸우는 방법을 달리할 수 있으니까.
한마디로 최대한 효율적으로 싸울 수가 있었다.
'지피지기 백전불태란 게 이런 뜻이었군.'
상태창 덕분에 내 스텟을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 상황.
거기에 상대의 스텟까지 파악할 수 있으니까 나에게 위태로운 상황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악마의 눈으로 보고 나보다 강한 상대라면, 피해 버리면 그만이기에.
'일단 최대한 외곽으로 나가자.'
빠져나가면 탈락 처리되는 데스 라인을 체크하는 게 가장 먼저였다.
위급한 순간, 생로라고 생각했던 곳이 알고 보니 데스 라인이라면 무척 곤란한 상황이 펼쳐질 것이다.
꽝! 꽈과광! 꽝! 꽝!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어딘가에서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부서진 나무 파편들이 공중으로 비산하는 게 보였다.
엄청난 위력. 마법이 아닌 이상 보일 수 없는 위용이었다.
그것도 고위 마법으로.
'이런 곳에서 고위 마법을 사용한다고?'
고위 마법을 사용하려면 영창 시간이란 게 필요하다.
하지만 상대가 그걸 기다려줄 리 만무.
그래서 이런 개인 PvP 경기에서는 고위 마법을 거의 볼 수가 없었다.
'일단 저쪽은 피해야겠군.'
굉음으로 인해 엄청난 어그로가 끌렸을 것이다.
지금은 사냥보다 맵부터 체크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렇게 이동하길 30분.
덤벼드는 상대를 죽여가며 걷다 보니 웬 절벽이 나왔다.
'여기까지네.'
그 너머론 낭떠러지가 존재했다.
그리고 절벽 너머론 드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현재 생존자 수 : 4,302 명]
[킬 수 현황]
[1위. '서문창' 17킬]
[2위. '빅터' 14킬]
[3위. '렌' 11킬]
[4위. '아이젠' 10킬]
[5위. '아르웬' 10킬]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71:24:07]
시작한 지 30분.
어느새 전체 참가 인원 7분의 1 정도가 줄어 있었다.
엄청난 사망률이었다.
그런데 순위에 낯익은 닉네임이 보였다.
'빅터!'
붉은 깃발전 마지막에 나와 싸웠던 녀석이었다.
녀석은 코메인 이벤트에서도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싸워보고 싶긴 한데.'
나는 그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급성장을 이뤄낸 상황.
다시 싸우면 녀석을 확실하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72시간 동안 펼쳐지는 서바이벌 경기 특성상, 강자와의 싸움은 최대한 피하는 게 유리하다.
만약 싸워야 한다면 제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가 가장 좋다.
'그때는 체력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테니까.'
데스 라인도 파악했겠다, 나는 아레나의 중심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쐐에에에에엑!
멀리서 날아오는 한 발의 화살.
나는 고개를 틀어 여유롭게 화살을 피했다.
저 멀리서 궁수 하나가 나를 향해 화살을 겨누고 있었다.
'마침 궁수를 상대하기 얼마나 수월해졌는지 체크하고 싶었는데.'
나는 곧장 궁수를 향해 내달렸다.
그러자 궁수가 화살 세 발을 빠르게 쏜 후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너만 활을 쏠 수 있는 건 아니거든.'
나는 곧장 활로 스왑하곤 달아나는 녀석을 향해 화살을 쏘아댔다.
"미친!"
그러자 녀석이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결국 도망가는 걸 포기한 녀석은 나무 사이로 몸을 숨기고, 자리를 잡은 채 내게 연거푸 화살을 쏘았다.
팅! 팅! 팅! 팅! 팅!
내게 쇄도하는 다섯 발의 화살.
나는 또다시 창으로 스왑하며 화살을 막아내고, 녀석과의 거리를 좁히는 것에 주력했다.
화살을 쏘면 창으로 바꿔 거리를 좁히고, 도망가면 활로 바꿔 화살을 쏜다.
그러자 녀석과의 거리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하, 씨발······."
결국 내가 코앞까지 다가가자 녀석은 자조 섞인 욕설을 내뱉었다.
띠링!
[플레이어 '고예건해' 를 처치했습니다.]
'이전보다 궁수를 잡는 게 훨씬 쉬워졌네.'
도망가는 상대의 등에 화살을 꽂아 넣을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궁수들과 거리를 좁히기가 한결 쉬워졌다.
물론 상위리그에 올라가면 이보다 훨씬 어려울 것이다.
각종 스킬들로 도배를 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하위리그에서 만나는 녀석들은 포인트의 한계 때문에 그다지 좋은 스킬들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기껏 해봐야 화살에 마나를 담아 쏠 수 있는 스킬이라던가, 기본 은신 정도.
[현재 생존자 수 : 4,011 명]
'슬슬 서둘러야겠어.'
남은 플레이어 수를 확인한 나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빠르게 플레이어의 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이때 나도 최대한 많은 플레이어를 사냥해 둬야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강자들만 남게 될 거야.'
이미 경기를 시작했을 때보다 인구 밀도가 팍 낮아진 상황이었다.
숲속을 돌아다니고 있는데도 플레이어를 마주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아레나의 어딘가에 대거 몰려있다는 뜻이지.'
그곳은 아레나의 중심부일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 20분 정도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맞은 편에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
가죽 갑옷을 입고 벨트에는 각종 비수들이 꽂혀 있다.
허리춤에는 길이가 짧고 초승달처럼 휘어져 있는 검, 시미터가 매달려 있고, 손에는 롱 소드를 들고 있었다.
'악마의 눈.'
띠링!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빅터]
[성향 : 선]
[근력 : 61] [민첩 : 67] [체력 : 62]
[정신 : 69] [지력 : 15] [마력 : 68]
[각성 능력 : <고급검술> <고급박투술> <최상급단검술> <최상급마나운용> <최상급살기> <상급마상술> <상급검방술> <상급투척술> <중급치료술>]
녀석의 스텟과 각성 능력을 본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고급 검술이라니.
상위리그에서도 가지고 있기 힘든 경지인데.
오랜만에 만난 빅터는 나 못지않게 성장해 있었다.
"껄껄, 오랜만일세.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우리가 인연이긴 한가 보군."
빅터도 나를 알아보았는지 방긋 웃으며 인사했다.
'하필 초반부터······!'
내가 녀석과 싸워보고 싶어 했던 것처럼 녀석도 나를 만나길 고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될 터.
극 초반에 이 정도의 강자와 싸우는 건 리스크가 너무 컸다.
"오랜만이군요."
"호오, 그 가면이 아니었다면 그대를 알아보지 못할 뻔했어. 그사이 기운이 더욱 날카로워졌구먼."
"당신이야말로."
빅터가 뚜벅뚜벅, 나를 향해 걸어왔다.
나는 창을 꽉 쥔 채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자 빅터가 손에 쥔 검을 검집에 갈무리했다.
'뭐지?'
나와 싸울 의향이 없다는 뜻이었다.
"워워, 진정하게. 지금 싸우는 건 우리 서로에게 좋지 못하네."
의외의 반응이었다.
당장이라도 앞뒤 재지 않은 채 내게 달려들 줄 알았는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 뒤쪽에는 무시무시한 네임드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다네. 그년은 강한 존재만 보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데, 우리가 싸우기 시작하면 필시 이쪽으로 날아올걸세. 한마디로 우리가 호랑이를 등진 채 먹이를 갖고 싸우는 하이에나 같은 꼴이 될 거라는 거지."
네임드라······.
그제야 빅터가 왜 당장 달려들지 않는지 알 수 있었다.
나와 빅터의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겠지.
그런 와중에 네임드까지 마주치게 된다면 서로가 곤란할 것이다.
나는 빅터에게 겨눴던 창을 내렸다.
그러자 빅터가 피식 웃었다.
"잘 생각했네. 역시, 그대는 전체적인 줄기를 볼 줄 아는군. 그럼 건투를 빌겠네."
그 말을 끝으로 빅터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나를 배려해서인지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한 나는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중심부에 가장 많은 플레이어들이 몰려있겠지만, 그들도 네임드를 피해 외곽으로 빠져나올 것이다.
네임드 때문에 중심부로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
기왕 이렇게 된 거 나는 중심부에서 외곽으로 도망 나오는 그 먹잇감들을 노릴 생각이었다.
챙! 채챙! 칭! 챙!
중심부를 따라 돌기 시작하자 얼마 후 싸우고 있는 한 무더기의 플레이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숫자는 일곱.
악마의 눈을 통해 스텟을 확인해 보니, 모두 평범한 수준이었다.
한마디로, 내겐 그저 먹잇감에 불과하다는 뜻.
'천둥의 숨결.'
나는 곧바로 스킬을 켜고 녀석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지럽게 뒤엉켜 있는 녀석들을 최대한 빠르게 처리하고 이동한다.
"이 개 같은 자식이!"
내가 창을 겨눈 채 다가오자 싸우고 있던 플레이어들 중 일부가 목표를 바꿔 나에게 검을 휘둘렀다.
나는 여유롭게 녀석들의 공격을 피하면서 창을 휘둘렀다.
찌리리릿!
뇌전을 머금은 내 창을 단 한 번이라도 막아내는 녀석은 존재하지 않았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끄아악!"
"컥······제, 젠장."
순식간에 네 명을 처리하자 남은 세 명이 눈을 굴리더니 이내 방향을 바꿔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도 내가 뻗는 죽음의 손길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천둥의 숨결에 피의 강화로 4%가 중첩되었더니 현재 내 민첩은 73.
어지간한 상위리그 플레이어만큼 빠른 속도였다.
내가 따라가자 도망가던 플레이어가 뒤를 힐끗 바라보더니 외쳤다.
"씨발. 네임드를 피해서 나왔더니!"
그리고 그게 그 플레이어의 마지막 말이었다.
서걱-
남은 플레이어는 셋.
'한 놈은 포기해야겠네.'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도망치는 상대를 모두 죽이는 건 노력 대비 효용이 좋지 않을 것이다.
곧장 활로 무기를 스왑한 나는 녀석들을 따라다니며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 명이 결국 뒤통수에 화살이 박힌 채 죽었고, 남은 한 명은 화살을 피하려다가 속도가 느려져서 창에 썰려 죽었다.
[현재 생존자 수 : 3,702 명]
[킬 수 현황]
[1위. '서문창' 31킬]
[2위. '빅터' 21킬]
[3위. '렌' 18킬]
[4위. '아르웬' 14킬]
[5위. '아이젠' 13킬]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 : 70:08:54]
여전히 내 킬 수는 3위.
1위의 킬 수와 두 배 정도 차이가 났다.
'저 녀석이 네임드.'
그리고 다른 한 명의 네임드가 아마 4위에 있는 아르웬일 것이다.
서문창은 처음 들어보는 닉네임이었지만, 아르웬은 낯이 익었다.
즉, 1회차 상위리그에서도 제법 이름을 날렸다는 뜻이었다.
'만나본 적은 없지만.'
그렇게 다시 중심부의 외곽을 돌 때였다.
콰과과광! 쾅! 쾅! 콰광!
근처에서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땅이 떨어 울렸다.
슈아아아아악!
잠시 후 엄청난 충격파가 나를 덮쳤다.
내 로브가 터져나갈 듯이 펄럭거렸다.
'씨발.'
하위 리그에서 이 정도의 충격파를 발산하는 마법을 사용했다고?
심지어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폭음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마치 미사일 폭격이 지상을 두들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일단 여기를 벗어나야겠어.'
나는 더 외곽으로 나가기 위해 서둘러 발걸음을 돌렸다.
그때였다.
쾅! 콰광! 콰과과광!
굉음이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마력장에 두 명의 플레이어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네임드들끼리 싸우고 있는 거였어.'
순간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주변에 있는 거대한 나무 위로 올랐다.
그리고 곧장 스킬을 사용했다.
'침묵의 망토!'
띠링!
[<침묵의 망토> 스킬을 사용합니다.]
침묵의 망토는 은신류 고위 스킬.
명실상부한 1 티어급 스킬이다.
아무리 네임드라고 해도 내가 숨어있다는 것을 눈치채긴 어려울 것이다.
잠시 후 두 명의 플레이어가 보이기 시작했다.
무복을 입은 중년의 검객과 엘프였다.
나는 중년의 검객에게 악마의 눈을 사용했다.
[이름 : 서문창]
[성향 : 중용]
[근력 : 73(+?)] [민첩 : 79(+?)] [체력 : 73(+?)]
[정신 : 66(+?)] [지력 : 19(+?)] [마력 : 81(+?)]
[각성 능력 : <고급검술> <고급살기> <최상급마나운용> <최상급박투술> <하급치료술>]
당장 상위 리그로 올라가도 이상할 게 없는 스텟.
무림 출신답게 마력이 엄청나게 높았다.
다만 녀석과 싸워도 내가 질 것 같진 않았다.
나는 또 다른 네임드, 엘프에게 악마의 눈을 사용했다.
그때였다.
"크악!"
짙은 갈색 무복을 입은 중년인, 서문창이 어떤 마법에 의해 양다리가 잘려 바닥을 뒹굴었다.
"이, 이게······."
순간적으로 서문창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정령 마법이란 게 애초에 마나의 유동이 잘 느껴지지 않으니까.
어디서 마법이 날아오는지도 모르는 채 다리가 베어졌을 것이다.
서문창이 다시 급하게 일어서려고 했지만.
서걱-
날아온 무언가에 목이 잘리더니 바닥에 픽- 하고 쓰러졌다.
엄청난 스텟을 가진, 네임드치고는 너무 허무한 죽음이었다.
그와 동시에 서문창의 시체 앞으로 엘프가 부드럽게 착지했다.
그녀는 폭포수처럼 흘러내린 청녹색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그녀의 등 뒤로 2미터 크기의 흐릿흐릿한 정령 모습이 보였다.
'씨, 씨발······.'
그 모습을 본 뒤에야 나는 엘프의 능력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름 : 아르웬 세레스피로]
[성향 : 절대 선]
[근력 : 49(+?)] [민첩 : 64(+?)] [체력 : 58(+?)]
[정신 : 81(+?)] [지력 : 86(+?)] [마력 : 111(+?)] [정령 : 108(+?)]
[각성 능력 : <특급정령술> <특급마나운용> <최상급마법술> <상급박투술> <최상급치료술>]
[종족 특전 : 하이엘프의 피]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뭐지?
내가 보고 있는 게 진짜인가?
숫자를 혹시 잘못 읽었나?
마력이 111······ 정령이 108······?
왜 하위 리그에······ 이런 녀석이 있는 거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진짜······ 진짜 죽을 수도 있어······.'
애초에 서문창이 상대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100이 넘어가는 스텟이 무려 두 개씩이나 됐으니까.
저 정도 스텟은 상위 리그 상급 넘버링 경기나 돼야 만날 수 있는 수치.
회귀한 후 처음으로 내가 항거할 수 없는 존재를 만난 것 같았다.
아르웬은 콜로세움에 들어오기 전부터 원래 성계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였을 것이다.
나는 숨소리도 죽인 채 그녀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전신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하지만 나는 잠시 후 뒷목이 쭈뼛해졌다.
'뭐······!'
심장이 철렁했다.
파란색 보석 안에 담긴 두 개의 눈동자.
아르웬은 정확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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