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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4화. 격변의 물결(2) >

"좋은 아침."

"괜찮으세요?"

다음 날 아침.

숙소를 나서자마자 마주친 카이로시아의 물음에 나는 피식 웃었다.

괜찮냐고?

'쥐가 고양이 생각해주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내가 그녀에게 묻고 싶은 말이었다.

그녀가 날 걱정할 수준은 아니었으니까.

"나쁘지 않아. 넌?"

"저야 뭐, 푹 쉬었으니까요. 배고프실 텐데 어서 아침 식사부터 하세요."

"······?"

얼른 식당으로 가라며 등을 미는 카이로시아.

'언제부터 내 식사를 챙겼다고?'

고개를 갸웃한 나는 카이로시아를 뒤로하고, 숙소를 빠져나가기 위해 건물 입구로 향했다.

"안우진님!"

"아, 이세연님. 좋은 아침입니다."

"식사 안 하시려구요?"

"예. 아세리안님 먼저 만나 뵙고 먹겠습니다."

"아······. 그래도 식사부터 하고 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

'뭐지?'

오늘따라 다들 이상한데?

카이로시아라면 모를까, 이세연은 내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뭘 하든 그녀가 내게 맞춰줬달까.

그래서 식사부터 하고 가라는 이세연의 권유에 나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3일 만에 깨어나신 거잖아요. 배가 많이 고프실 텐데······."

'뭐라고?'

"······3일 만에요?"

나는 서둘러 상태창을 열었다.

그러자 오른쪽 하단에 하이블러드나이트 136 ― 4 라고 쓰여 있는 게 보였다.

'뭐야?'

콜로세움에 소속된 플레이어들에겐 달력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몇 번째 리그가 열리는지를 기준으로 현재 날짜를 가늠했는데, 하이블러드나이트 136이라면 원래 성계 대항전이 열리기로 했던 날이고, 4라는 글씨는 4일 남았다는 뜻이다.

코드 제로 미션이 하이블러드나이트 136 ― 7이었으니, 한마디로 내가 잠든 지 3일이 지났다는 것.

'어쩐지 아침에 일어났을 때 상쾌하더라니.'

잠들기 직전 느꼈던 피로감에 비해 몸이 가볍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설마 3일을 내리 잠들었을 줄이야.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좀 급한 일이라서요. 다녀와서 먹을 테니, 제가 평소 먹던 자리 위에 올려주세요."

"알겠습니다."

이세연은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다시 아세리안의 집무실로 향하는 길.

나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블라디미르 가면 없이 초월 리그까지 갈 수 있을까?

'쉽지 않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마지막에 봤던 초월 리그 플레이어들의 수준을 생각하면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도 될 것이다.

현재의 나를 이루는 근간이 블라디미르 가면이었으니까.

스킬, 스타일, 아이템 등등 모든 게 가면을 중심으로 세팅되어 있다.

'가면을 안 쓰면 사용할 수 없는 스킬들도 존재하지.'

당장 뇌룡의 포효 2차 각성 스킬인 뇌신 강림만 해도 가면이 없으면 사용할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체력 소모 10배.

그걸 감당하기 위해선 체력 회복은 필수 조건이었다.

'가면을 써도 체력이 간당간당한 데.'

1킬당 체력 1퍼센트 회복이라는, 극강의 효율을 자랑하는데도 체력에 허덕일 정도.

다른 스킬 혹은 아이템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피의 강화로 인한 스텟 상승도 무시할 수 없지.'

무려 30프로다.

현재 내가 끌어낼 수 있는 최대치의 스텟으로 계산했을 때, 피의 강화가 없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스텟의 총합이 무려 251 포인트나 깎여나갔다.

'피의 흡수를 통해 장기적으로 상승할 스텟도 사라질 테고.'

이번 코드 제로 미션에서 내가 얻은 기초 스텟은 지력을 제외하고, 137포인트.

지금까지 내가 해온 노력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엄청난 스텟 상승률이었다.

'앞으론 악마의 눈으로 스텟을 체크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거기다 능력만 봤을 땐, 피의 각성도 빼놓을 수 없다.

가지고 있는 능력 중 한 가지를 랜덤으로 강화시켜 줬으니까.

'결국 어떻게든 계속 가져가야 해.'

가면이 없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내가 잃을 게 너무 많았다.

뭐, 내가 가진 유일한 신화 등급 아이템이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걸지도.

'후우. 아세리안에게 좋은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문제는 이대로 가면을 계속 사용하기엔 리스크가 너무 크다는 거다.

'정신이 너무 많이 깎였어.'

오늘 아침, 침대에서 눈을 뜨고 상태창을 확인했을 때 깜짝 놀랐다.

99스텟이었던 정신이 78포인트까지 하락해 있었던 것이다.

'골치 아프군.'

거기다 이성을 잃고 날뛴 게 벌써 두 번째다.

록탄 성에서 한번, 그리고 니플헤임의 입구에서 한번.

록탄 성에서야 괜찮았지만, 니플헤임 입구에서 정신을 차렸을 땐 가슴이 서늘했었다.

자칫 잘못하면 죽을 뻔했을 정도로.

'뾰족한 방법이 없으면, 어쩔 수 없지.'

나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만약 아세리안에게 방법이 없다면, 가면을 판매하는 수밖에.

아무리 가면의 효과가 좋다고 하더라도, 하나뿐인 목숨을 담보로 사용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똑똑―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아세리안의 집무실 앞에 도착한 나는 문을 두드렸다.

"아세리안님, 안우진입니다."

"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손을 깍지 낀 채 앉아 있는 아세리안과.

'내가 올 줄 알고 있었어?'

테이블 위에 놓인 두 개의 찻잔이 보였다.

* * *

―콜로세움. 이대로 몰락하나? 중추가 되어야 할 상위 플레이어들의 부재.

―경기 한 번에 고위 리그의 20%, 상위 리그의 60%가 사라졌다.

―초월 리그 사망자 0명. 관객들, "자신들의 희생을 피하고자 상위 리그와 고위 리그에 희생을 강요한 것 아닌가." 초월 리그에 눈총.

―전문가들, "상위 리그 붕괴는 현실화. 당분간 리그 진행은 어려울 것." 입 모아.

집무실 의자에 앉아 커뮤니티를 확인한 미카엘이 피식 웃었다.

그녀 너머로, 어마어마한 숫자의 천사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카서디엘, 파사엘."

"예, 미카엘님."

미카엘의 부름에, 집무실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던 일곱 쌍의 날개를 가진 천사와 여덟 쌍의 날개를 가진 천사가 다가왔다.

"오늘부터 내가 상위 리그 관리를 맡게 되었다."

"그럼 중간계 관리 위원회는 다른 치천사님이 맡으시는 겁니까?"

2급 지천사 파사엘의 물음에 미카엘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둘 다 맡는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과중한 업무량에 몸이 상하실까 저어됩니다만."

"날 보좌해줄 그대들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겠는가. 앞으로도 날 도와주겠지?"

"물론입니다."

"네!"

미카엘의 물음에 파사엘과 카서디엘이 고개를 숙였다.

짝!

그 모습에 미카엘이 손뼉을 쳤다.

"좋아. 그럼 앞으로 카서디엘이 상위 리그 업무를, 파사엘은 지금처럼 중간계 관리를 맡는다. 한동안 정신없이 바쁠 것이다. 각오하도록."

"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오전에 체크해야 할 게 있었는데, 카서디엘이 없으니까 제가 좀 처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파사엘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물러나자, 미카엘이 카서디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현재 상위 리그는 개박살 났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지. 그대가 앞으로 고생 좀 할 것이다."

"괜찮습니다. 대신 실무를 처리해 줄 천사들을 더 보충해 주시겠죠?"

미카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안 그래도 아버지께서 300명 가량의 천사들을 추가로 보내주기로 하셨다."

"그럼 괜찮겠네요. 한번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뭐부터 할까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카서디엘.

그녀가 메모할 수첩과 필기구를 꺼내며 물었다.

"목표는 상위 리그 정상화다."

"그럼 당장 다음 주에 열릴 하이블러드나이트 137부터 정상화하실 계획이십니까?"

카서디엘의 물음에 미카엘이 고개를 저었다.

"쉽지 않겠지. 리그 소속 플레이어 리스트도 업데이트해야 하고, 경기가 치러질 아레나도 만들어야 하고."

"맞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전 게임 메이커인 라파엘이 진행하던 이벤트부터 시작한다."

"라파엘님이 진행하던 이벤트······?"

수첩에 미카엘의 말을 받아 적던 카서디엘이 말끝을 흐렸다.

타락한 라파엘이 마지막으로 진행하던 이벤트라면, 한 가지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설마 상위 리그 성계 대항전을······?"

카서디엘이 혹시나 하고 되물었지만, 미카엘이 확답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말씀 중 죄송하지만, 재고해보심이 어떨까요? 상위 리그 성계 대항전을 열기엔 지금 분위기가 너무 좋지 않습니다."

평소와 다르게, 카서디엘이 강하게 반대했다.

'쉽진 않겠지.'

미카엘도 카서디엘이 이런 식으로 반응할 거라고 예상했다.

오대천사 중 한 명이 타락했고, 결국 척살당했다.

거기다 엄청난 숫자의 플레이어들이 피를 흘렸고, 그동안 미카엘도 돌아다니며 배신자들을 숙청하고 다녔다.

오죽했으면 신들이 천계에서 피비린내가 난다고 할 정도.

하지만 미카엘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열어야 한다. 천계를 뒤흔들 만큼 커다란 이슈가 있었고, 전체적으로 우울한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았느냐."

"······."

"다운된 분위기를 반전시키기엔 축제만 한 게 없을 것이다."

미카엘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 * *

아세리안의 집무실.

내가 그녀의 맞은편에 앉자마자, 아세리안이 내 허를 찌르고 들어왔다.

"가면 때문에 오신 거죠?"

예상하지 못한 전개에 몸이 흠칫했다.

'알고 있었군.'

경기 중에 내가 이상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그걸 가지고 가면 때문이라고 하기엔 유추할 만한 정보가 부족할 것이다.

하지만 아세리안의 목소리엔 확신이 담겨 있었다.

한마디로, 이 가면에 대해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뜻.

"이 가면이 뭔지······ 알고 계셨습니까?"

내 물음에 아세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는 몰라요. 다만, 안우진님을 만나고 바로 다음 날이었나? 그때부터 가면을 쓰셨죠?"

"맞습니다."

"사실 그때도 가면에서 섬뜩한 마기가 조금씩 느껴지길래 뭔가 있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그랬군.'

―멋진 가면이네요. 새로 장만하신 건가요?

어쩐지 가면을 쓰기 시작한 첫날, 아세리안이 빤히 바라본다 싶더라니.

하지만 그 뒤로 별 얘기 없길래 모르는 줄 알았는데, 아세리안이 알면서도 그냥 넘어가 준 모양이었다.

"후우. 맞습니다. 이 가면 때문인 게."

"무슨 가면인지 여쭤봐도 되나요?"

아세리안의 물음에 나는 검지로 테이블을 툭, 툭 두드렸다.

'괜찮을까?'

고위 악마가 쓰던 아이템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녀한테 솔직하게 얘기해도 될지 망설여졌다.

마교의 서고에서, 마공이라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무공 서적들이 스킬북으로 판정받지 못했었다.

나는 그 이유를 악마화 때문이 아닐까 예상하고 있었고.

'마교 교주인 천세운이 스스로 악마화가 진행됐다고 그랬으니까.'

거기다 중개 거래소를 아무리 뒤져봐도, 악마가 쓰던 아이템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천계에서 그 부분에 굉장히 예민하다는 뜻.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뚜렷한 방법이 없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솔직하게 얘기하는 수밖에 없겠군.'

작게 한숨을 내쉰 나는 입을 열었다.

"고위 악마, 블라디미르가 사용하던 가면이라고 하더군요."

"······!"

내 말에 아세리안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눈을 동그랗게 뜬 게, 엄청나게 놀란 모양.

"그, 그게······ 블라디미르 가면이었나요?"

아세리안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괜히 얘기했나?'

예상보다 훨씬 더 격렬한 반응이었다.

여신인 그녀가 저렇게 놀랄 정도면, 확실히 평범한 가면은 아니었던 것이다.

"예."

"세상에······."

"유명한 악마입니까?"

내 말에 아세리안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전쟁 때 죽은 마계 칠 군주 중 한 명이에요. 그랬군요······ 블라디미르가 사용하던 가면이라······."

"마계 칠 군주면 천계로 쳤을 땐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존재입니까?"

"음······. 열두 주신님들과 비슷한 위치일 거예요."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쓰던 가면이라고?'

아세리안의 대답에 오히려 내가 깜짝 놀랐다.

고위 악마라는 말에서 대충 예상했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존재가 쓰던 가면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유명한 존재가 쓰던 가면인데 왜 아무도 못 알아보는 겁니까?"

지금껏 이 가면을 알아본 존재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

당장 경기만 들어가도, 엄청난 숫자의 신들과 천사들이 관람한다.

바로 이전 경기인 코드 제로만 해도 관객 숫자가 800만에 달했었고.

그렇게 많은 신들이 관람하는데도, 커뮤니티엔 가면을 언급한 존재가 단 한 명도 없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 가면 자체에 인식 방해 마법이 걸려있는 것 같아요. 저도 외관만 봤을 때는 블라디미르가 쓰던 가면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거든요. 그냥 꺼림직한 느낌이 난다는 것 뿐."

"······."

"아마 다른 분들이 가면을 직접 본다고 하더라도, 안우진님이 쓰고 계신 게 블라디미르의 가면이라고 생각하는 분은 없을 거예요."

'그나마 다행이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세리안의 말대로라면, 적어도 악귀가 그려진 가면을 보고 블라디미르의 가면이라고 떠올릴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마계 칠 군주 중 한 명이 쓰던 가면이었다고?'

어쩐지 효과가 정말 괴랄할 정도다 싶더라니.

'미친 옵션이 달린 이유가 있었어.'

같은 등급의 아이템이라도 어느 정도의 효과 차이는 분명 존재한다.

블라디미르는 동급 아이템 중 최상위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엄청난 옵션을 보유하고 있었다.

당장 준신화일 때의 가면과, 이번에 얻은 몽환의 달빛만 비교해봐도 넘어설 수 없는 제법 커다란 벽이 있었으니까.

'후우.'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가면에 문제가 있습니다."

< 154화. 격변의 물결(2) > 끝

< 155화. 격변의 물결(3) >

"가면에 문제가 있습니다."

나는 아세리안에게 가면에 대해서 다 털어놨다.

"팀 투지에 들어온 첫날 밤, 중개 거래소에서 이 가면을 구입했습니다."

언제 어떤 경로로 이 가면을 구하게 되었고.

"빛의 이면전, 중개 거래소, 에덴, 록탄 성에서 조각을 얻을 수 있었죠."

일반 등급이었던 가면을 어떻게 신화 등급까지 올렸으며.

"피의 회복, 피의 흡수, 피의 강화, 악마의 눈, 피의 각성. 이렇게 다섯 가지 능력이 존재합니다."

가면에 무슨 옵션이 있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화 등급으로 상승한 뒤로 목소리가 들려오더군요. 게다가 이성을 잃고 두 차례나 폭주했습니다."

하나도 빠지지 않고 꼼꼼히.

아세리안은 옵션을 들을 땐 놀라워했다가, 부작용 부분을 들을 땐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후우. 과연 마계 칠 군주가 쓰던 가면이라고 할 만 하네요. 옵션이 다섯 개나 달려 있는데, 하나하나가 웬만한 전설 등급 아이템 못지않군요."

설명을 끝까지 들은 아세리안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골치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꾹, 꾹 눌렀다.

'제발.'

나는 그녀가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잠자코 기다렸다.

부디, 해결 방법이 있기를 기대하면서.

한동안 고민하던 아세리안이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

"저기······."

"예."

"그 정도의 아이템을 두고 이런 말씀 드리기 그렇지만······. 그 가면을 더 이상 안 쓰실 순 없는 거죠?"

'젠장.'

그녀의 말에, 내가 가지고 있던 일말의 기대감이 산산조각났다.

내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되는 가면의 성능을 얘기했던 건, 이만큼 좋은 아이템이니까 방법이 있으면 알려달라는 뜻에서였다.

그걸 아세리안도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가면을 사용하지 마라'는 것.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나.'

아무래도 그녀라고 해서 뾰족한 방법은 없는 모양이었다.

중개 거래소에서 정신 계열과 관련된 스킬을 찾아보는 수밖에.

"물론 쉽지 않으시겠죠. 하지만 그 가면을 계속 사용하다간 안우진님이 타락하실 수도 있어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세리안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타락이요?"

플레이어들도 타락을 할 수가 있나?

'그런 얘기는 못 들어본 거 같은데?'

"안우진님은 지금 마기에 오염되신 상태예요. 무려 마계 칠 군주가 사용하던 아이템이잖아요. 거기다 신화 등급이고. 이대로 계속되면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어요."

"플레이어도 타락합니까?"

내 물음에 아세리안이 무슨 그런 당연한 걸 묻냐는 듯이 눈을 치켜떴다.

"그럼요. 전에 발리노르 성계의 에덴이었나? 거기서 라키아라는 흑기사를 다시 만나셨죠?"

라키아는 내가 빛의 이면에서 만났던 흑기사의 이름이다.

게빈의 모습을 하고 나를 끝까지 괴롭혔던.

"예. 악마가 되어 있더군요."

"마기에 오염된 사람들이 죽으면 보통 마계로 가요. 물론 콜로세움에 있는 플레이어들이라고 해서 마계에 가지 않는다는 건 아니에요. 천사들도 오염돼서 타락하는 마당에."

그녀의 말을 들어보니, 내가 너무 고정 관념에 갇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지. 천사들도 타락하는데, 우리가 뭐라고.'

아무래도 이곳이 사후 세계라는 개념이기 때문에, 한 번 들어오면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을 무의식중에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플레이어가 타락하면 어떻게 됩니까?"

내 물음에 아세리안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곧장 무스펠하임 어딘가로 쫓겨날 거예요. 천계를 감싸고 있는 아버지의 신성력은 타락한 자를 허락하지 않거든요. 그리고 곧장 추격대가 편성되겠죠."

그녀의 말에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그 말은 즉, 만약 타락했다면 내가 죽였던 타락 천사들처럼, 나도 플레이어들을 피해 마계로 도망쳐야 한다는 뜻이었으니까.

'큰일 날 뻔했어.'

등에 한줄기 식은땀이 흘렀다.

만약 아세리안이 마기에 오염됐다고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계속해서 가면을 사용했겠지.'

그랬다면 나는 초월 리그에 가보지도 못한 채, 추격대에게 쫓겨 죽을 뻔한 것이다.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야.'

아세리안의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플레이어들도 타락이 가능하다는 것.

그나저나.

"제가 마기에 오염됐다고요?"

"네. 심한 건 아니고, 10프로 정도요."

"그게 보이십니까?"

"네. 코드 제로 경기를 전후로 안우진님의 피부 색깔이 약간 까맣게 변했거든요."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로브 아래로 드러난 맨피부를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피부 색깔이 달라진 것 같지 않았다.

그러자 아세리안이 픽- 하고 웃었다.

"저는 권능으로 볼 수 있는 거예요. 악마의 눈 덕분에 거짓말을 하면 빨간빛이 흘러나온다고 하셨죠? 제가 볼 수 있는 것도 그런 개념으로 이해하시면 돼요."

한마디로 권능을 가지고 있어야만 볼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오염되는 걸 볼 수 있으면 천사들은 왜 타락하는 거지?'

그런 증세가 있는 천사들을 미리 걸러내면 긴급 미션이 발동될 이유가 없지 않나?

'골치 아프네.'

뭔가 아세리안과 얘기를 나눌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져 가는 기분이었다.

이럴 때는.

'까놓고 물어봐야겠군.'

이번 기회에 마기의 오염에 대해 확실하게 이해하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근데 오염되는 게 보이면 천사들 타락도 막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아세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 볼 수 있는 존재가 거의 없어요. 저는 아버지께 치유에 관한 권능을 부여받아서 볼 수 있는 거구요. 아버지와 저를 제외하고 천계에서 그걸 볼 수 있는 분은 아마 미카엘님 밖에 안 계실 거예요."

"······왜 팀을 운영하십니까?"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아세리안을 타락 천사 거르는 데에 사용하지 않는 거지?'

천계 전체에서 마기를 볼 수 있는 존재가 단 세 명 뿐이다.

그중에 한 명은 초월자고, 다른 한 명은 이젠 네 명밖에 남지 않은 대천사.

고위 존재들인 그 둘을 차치하고서라도, 아세리안이 남는다.

그렇다면 아세리안이 돌아다니며 마기에 오염된 천사들을 걸러내기만 해도, 천계 입장에서는 엄청난 이득일 수밖에 없었다.

"왜 오염된 천사들을 걸러내지 않냐는 거죠?"

"예."

아세리안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린 백금발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았다.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원래 천사 시절에만 해도 제가 담당하던 업무는 마기로 오염된 천사들을 걸러내는 일이었거든요."

"예."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께서 제게 하급신으로의 승급과, 팀 창단을 권유하셨어요. 그것 때문에 당시 제 직속상관이었던 라파엘님도 어리둥절해하셨죠."

"반발하는 신들은 없었습니까?"

내 물음에 아세리안이 살포시 미소 지었다.

"아버지는 모든 이 위에 홀로 계시는 분이에요. 그분의 결정엔 항상 무언가 이유가 있죠. 그래서 신이나 천사들은 감히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 않아요."

그녀에게서 초월자에 대한 뿌리 깊은 신뢰가 느껴졌다.

'흠.'

그녀의 설명을 들었음에도,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아세리안을 풀어줬을까?

누가 봐도 그녀가 타락 천사를 거르는 게 천계에 유리한데.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세리안이 활짝 웃었다.

"그때 아버지께서 저를 프리로 놔주신 덕분에, 저는 이렇게 안우진님과 만날 수 있었네요."

"······그렇게 생각하니, 저도 그 아버지란 분께 감사를 드리고 싶군요."

덕분에 그녀를 만났으니까.

앞일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타락할 가능성이 존재했다는 건 분명한 사실.

아세리안과 만나지 않았다면, 비극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었다.

"오염됐다는 마기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내 물음에 아세리안이 방긋 웃었다.

"에헴! 제가 이래 봬도 치유와 새로운 시작을 관장하던 천사였거든요? 안우진님께 오염된 마기쯤이야 얼마든지 제가 없애 드릴 수 있어요."

어깨를 으쓱하는 아세리안.

'다행이야.'

단언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그럼 가면에 있는 마기도 정화시키실 수 있습니까?"

내 말에 아세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해요. 애초에 마기 덕분에 그런 옵션이 유지되는 걸 텐데, 정화하면 옵션이 모두 다 사라지지 않을까요?"

"음. 그렇군요."

'이건 뭐, 가면을 쓰지 말라는 거나 다름이 없군.'

아무래도 블라디미르 가면을 팔아야 할 것 같았다.

이런 리스크를 짊어진 채, 계속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마지막에 얻은 조각만 아니었으면.'

계속 사용할 수 있었을 텐데.

"물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에요."

이어지는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떤?"

"피의 각성을 쓰면 정신 스텟이 깎인다고 하셨죠?"

"맞습니다."

"그럼 정신과 관련해서 가면이 무언가 영향을 끼친다는 거예요. 그니까 정신 스텟을 계속 올리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부작용 없이 사용하실 수 있지 않을까요?"

'정신 스텟을 계속 올리다 보면이라······.'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정신력이 강해지면 이성을 잃을 확률도 낮아질 거고.

다만.

'문제가 있지.'

"정신 스텟은 99포인트 이상 안 오르던데요?"

정신 스텟이 99포인트를 찍은 뒤로는 오르지 않는다는 것.

포인트 상점에 들어갔더니, 정신 스텟을 구입할 수 있는 버튼이 아예 사라져 있었다.

"정신 영역이 차원과 연결되어 있어서 그래요. 고위 리그로 올라가시면 정신 스텟의 리미트가 풀릴 거예요."

'고위 리그라······.'

한마디로 고위 리그에 올라갈 때까진 계속해서 이런 일이 벌어질 거란 뜻이었다.

'결국 당장 쓸 수 있는 방법은 없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가면을 벗어야 하나.

"음, 혹시 이 방법은 어때요?"

"어떤······?"

"지금까지 부작용은 피의 각성이 발동될 때만 있으셨던 거죠?"

"예."

"3분 동안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면 포인트가 초기화되구요."

"맞습니다."

"그럼 피의 각성이 발동되지 않도록 100포인트가 되기 전에 계속해서 초기화시키시면 되지 않을까요?"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턱을 문질렀다.

'흠.'

말이야 쉽지, 전장에서 그게 가능할 리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제시한 게 유일한 방법이란 것도 분명한 사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시스템 창을 열었다.

[정신 스텟을 구매하시겠습니까?]

[정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8,000 P 를 소모하셨습니다.]

[정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8,000 P 를 소모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보유하고 있는 포인트를 모두 사용해, 정신 스텟을 99포인트까지 상승시켰다.

'일단은 고위 리그로 올라갈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보는 수밖에.'

정신력에 걸린 리미트가 해제되면 가면의 부작용이 줄어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날 이후, 팀 투지는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당소소, 앤드류, 에드워드, 새뮤얼, 추이봉. 잘 다녀오거라. 건투를 빌겠다."

"다녀오겠습니다, 피넛엘님."

"멋진 활약을 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코드 제로 이후 정지되어있던 하위 리그가 정상적으로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 인해 수많은 팀 투지 소속 플레이어들이 경기장을 들락거렸다.

'상위 리그가 개박살 난 것 때문이겠지.'

코드 제로에서 너무나 많은 상위 플레이어들이 죽은 상황.

그 탓에 상위 리그는 언제 열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경기가 기약 없이 밀리고 있었다.

현재로선 상위 리그를 살릴 수 있는 해결 방법은 딱 하나였다.

'제법 많은 숫자의 하위 플레이어들이 승급하겠군.'

하위 리그의 플레이어들로 상위 리그를 채우는 것.

'타이밍이 너무 좋은데?'

죽은 상위 플레이어들이 워낙 많다 보니, 승급할 플레이어들의 숫자도 무척 많을 것이다.

당장 우리 팀만 해도 주창범과 4인방, 모용악, 고건하까지 6명이나 됐으니까.

아니.

'잘하면 그 밑에 있는 플레이어들도 승급할 수 있어.'

진입 장벽이 얼마나 낮춰졌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3기수에서 승급하는 플레이어들도 제법 나올 수도 있었다.

당소소나, 수호같이 새로 들어온 준네임드 급 이상 플레이어들도 가능성 있고.

"바로 다음 차례 준비한다! 수호, 프랑수아, 피에르, 사쿠라, 홍진위!"

"준비 됐다······습니다."

"저도 준비 완료했습니다."

팀 투지는 하위 리그에서 명문으로 꼽히는 팀.

그로 인해 오퍼가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아주 좋아.'

덕분에 아세리안과 피넛엘, 포르도엘은 요즘 오퍼 정리하랴, 팀원들 관리하랴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나는.

'다들 깜짝 놀랄걸?'

직접 출전하는 경기가 아닌데도, 무척 기대됐다.

드디어 스킬북을 뿌린 결실을 맺게 될 테니까.

'무려 10억 골드.'

장담하건대, 하위 리그가 격변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 * *

"후우. 겨우 도착했군요."

거대한 대문 앞에 도착한 열 명의 플레이어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승리 조건 : 천마신교를 재건하려는 마교의 소교주를 처치하라.]

[게임명 : 삭초제근削草除根]

[남은 소교주 수 : 2 명]

[Tip!]

[맵이 제공되지 않으니, 정파 무림인들과 협력해서 소교주를 추살하세요.]

"정말 불친절한 성계네요. 말만 걸려고 해도 칼부터 꺼내 드니."

한 플레이어가 투덜거렸다.

이런 초대형 성계를 수색하려면, 각 성계 원주민들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은 필수.

하지만 지금껏 마주친 무림인들은 말을 걸어도 일단 경계부터 하기 일쑤였다.

"팀 운도 완전 꽝이에요. 어떻게 우리 중에 무림인이 한 명도 없을 수가 있죠?"

"무림인이 한 명만 있었더라면 큰 도움이 됐을 텐데······."

그러자 파티장이 나서서 파티원들을 진정시켰다.

"일단 침착하시죠. 그래도 결국 정파 무림인들의 본거지에 도착하지 않았습니까."

"여기서도 문제예요. 문 두드리면 일단 칼부터 뽑아 들겠죠."

"제게 방법이 있으니, 일단 진정하세요."

"앗, 파티장님. 방법이 있으세요?"

"예. 저희 팀에 대단한 분이 계시거든요. 그분이 알려주신 방법으로 한번 시도해 보겠습니다."

파티장이 활을 고쳐 멘 채 무림맹의 대문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대문을 지키고 있던 두 명의 무림인이 검 자루를 쥐고선 파티장을 경계했다.

"저는 무림맹 수문 무사 곽준입니다. 어디서 오신 분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수문 무사의 물음에 파티장이 어색하게나마 포권하며 입을 열었다.

"저는 청룡문에서 온 고건하라고 합니다."

―모두들 잘 들으세요. 만약 무림 성계에서 미션을 수행하게 된다면 청룡문에서 나왔다고 소개하세요. 그럼 경계를 풀 겁니다.

고건하는 안우진이 말한 대로, 청룡문에서 왔다고 소개했다.

< 155화. 격변의 물결(3) > 끝

< 156화. 격변의 물결(4) >

"청룡문!"

"대, 대협의 존성대명이 고 건자, 하자 되신다고 하셨습니까?"

고건하의 소개에 대문을 지키고 있던 무림인들이 눈을 치켜떴다.

'왜 그러지?'

예상외의 반응에 고건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습니다."

"오, 이럴 수가!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바로 접객실로 모시겠습니다!"

"청룡문의 고건하 문주님께서 행차하셨다!"

두 무림인이 허리가 부러지도록 고개를 숙이더니, 곧장 내부를 향해 소리쳤다.

"천하제일창 고건하 대협?"

"고 문주님께서 오셨다고?"

그러자 한바탕 난리가 났다.

수많은 무림인들이 대문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뭐, 뭐야?'

예상치 못한 반응에 고건하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천하제일창? 문주?'

고건하는 무림 성계에 처음 와봤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들은 자신을 잘 아는 것처럼 보였다.

'안우진님이 미리 내 소개를 해주신 건가?'

분명 안우진이 그러긴 했다.

―모두들 잘 들으세요. 만약 무림 성계에서 미션을 수행하게 된다면 청룡문에서 나왔다고 소개하세요. 그럼 경계를 풀 겁니다.

경계를 풀 거라고.

'이건 경계를 푸는 정도가 아닌데?'

"팔왕문의 장로, 묵갈홍이라고 합니다! 천하에 명성이 자자하신 고 대협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산동악가의 악종헌입니다! 멸문지화의 위기에 놓인 가문을 구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화산파 일대제자 허학이라고······. 어어! 미, 밀지 마시오!"

"나도! 나도 고 문주님께 인사를······!"

고건하와 어떻게든 대화 한 번 해보기 위해 무림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순식간에 서로 밀고 밀치는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이, 이거······ 괜찮은······ 거겠지?'

고건하의 등에서 한 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가 원한 건 무림인들의 경계를 풀 수 있는 적당한 신분이었지, 이 정도로 격렬한 반응을 기대한 게 아니었다.

"모두 물러서시오! 길을 트지 않으면 엄벌에 처할 것이오!"

그때, 몰려든 무림인들을 가르며 다가오는 중년인이 있었다.

제법 질이 좋은 비단옷을 입고 있는 게, 한눈에 보기에도 신분이 높아보이는 인물이었다.

그의 외침에 무림인들이 두 갈래로 나눠서고, 그 사이로 한달음에 다가온 중년인이 주먹을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접객당주 이소천이라고 합니다. 귀하신 분께서 방문해 주셨는데, 미처 나와보지 못한 것에 사죄드립니다."

"아, 아닙니다."

과할 정도의 사과에 오히려 고건하가 당황할 정도.

"어서 들어가시지요. 소인이 직접 문주님을 모시겠습니다."

"아······.. 제가 일행들이 있는데······."

고건하가 땀을 삐질 흘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

"······."

그러자 입을 떡하니 벌린 채 눈동자를 굴리고 있는 파티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마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당사자인 고건하도 당혹스러웠으니까.

"고 문주님의 일행분들 역시 무림맹의 귀빈이십니다. 송 조장. 어서 달려가 아홉 분의 귀빈이 추가로 계신다고 전하시게."

"옛, 당주님!"

파티원들을 힐끗 살핀 접객당주가 곁에 있던 수문 무사에게 말했다.

생소한 복장에다가, 무림인들과 생김새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접객당주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런 과한 대우를 받을 때마다 고건하의 마음속에 스멀스멀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뭔가 오해가 있는 걸 수도 있는 상황.

이러다가 나중에 잘못되면 뒷수습을 감당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었다.

"자,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접객당주의 안내를 받아 무림맹의 내부로 들어온 고건하.

'이거 진짜 괜찮은 걸까.'

무림맹 안에는 무수히 많은 전각들이 존재했다.

"이곳이 수호전입니다. 맹주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그 사이사이로 깔끔하게 정돈된 연무장들이 있었고, 간간이 보이는 연못들엔 비단잉어들이 힘차게 헤엄치고 있었다.

"여긴 무림맹과 역사를 함께한······."

접객당주는 고건하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열과 성의를 다해 설명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고건하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안우진님께서 알려주신 거니까 괜찮겠지······?'

예상하지 못한 상황들이 계속해서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거대한 전각 옆에 딸린 고급스러운 건물로 들어갈 때였다.

"이노오오오오오옴!"

거대한 전각 쪽에서 거대한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무슨!'

고개를 돌려 보니, 한 노인이 검 끝을 겨눈 채 고건하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진득한 살기에 머리가 쭈뼛할 정도.

'피해야 해.'

고건하는 본능적으로 스킬을 사용하며 뒤로 빠져나갔다.

그는 궁수.

검객이 달려드는 공격을 막기 보다, 피하는 것에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미친!'

하지만 노인의 검 끝은 여전히 고건하를 노리며 날아오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바뀐 위치로 경로를 수정한 것이다.

'피하는 건 불가능해.'

고건하는 들고 있던 활을 들어 올리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화살을 쏘기엔 너무 가깝고,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단검을 빼 들기에도 시간이 촉박한 상황.

급한 대로 일단 활을 이용해 검을 막아내려고 한 것이다.

채애애애애앵!

"크윽······! 쿨럭, 쿨럭."

일격에 뒤로 튕겨 나간 고건하가 피를 토했다.

그가 들고 있던 활이 두 동강으로 잘려 나갔다.

'모용악보다 훨씬 강해.'

생각보다 노인과의 수준 차이가 너무 컸다.

"비상 상황. 모두 전투 준비."

"로네님은 파티장님부터!"

갑작스러운 상황에, 파티원들이 무기를 꺼내 들며 곧장 전투 대형을 만들었다.

"맹주님!"

"이게 무슨!"

갑작스러운 상황에, 고건하 일행을 뒤따라오던 무림인들이 경악했다.

"놈들을 포박하시오! 감히 고건하 문주를 사칭하다니!"

"뭐야, 사칭범이었어?"

"고 문주님은 창을 쓰신다고 들었는데, 어쩐지 활을 들고 있더라니!"

"놈들의 사지를 잘라 죽입시다! 무림맹을 능멸한 본보기로 보여, 맹의 법도를 바로 세워야 하오!"

스릉― 스르릉―

맹주의 외침에 모두들 검을 빼 들었다.

무시무시한 살기가 고건하와 파티원들을 향해 쏟아졌다.

"······."

"······."

그나마 다행인 건, 파티원들이 동요하지 않은 채 전투태세를 갖췄다는 것.

모두들 상위 리그를 노리는 컨텐더들로 구성된 파티답게, 지금 이 순간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침착하자.'

그 덕분에 시간을 벌게 된 고건하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뭔가 잘못됐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어디서부터 꼬인 거지?'

두 가지 의문이 있었다.

청룡문이라고만 소개했는데도, 자신을 문주로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을 사칭범이라고 얘기한다는 것.

그때 고건하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한 가지 기억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고건하님? 고건하님! 고건하님 맞죠?

당소소가 처음 들어왔을 때 안우진을 향해 고건하라고 불렀다.

그리고 안우진은 직전 경기를 무림 성계에서 수행했다.

'젠장.'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을 이어가자, 한 가지 결론이 나왔다.

'안우진님이 무림 성계에서 내 이름을 팔아먹으셨군.'

그제야 고건하는 이 상황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알 수 있었다.

"잠시만요, 쿨럭.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난 고건하가 노인을 향해 말했다.

하지만 노인의 눈에는 이미 불신으로 가득한 상태였다.

"오해애? 네 놈들이 고건하 문주를 사칭했다는 걸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알거늘! 아직도 그 세 치 혀를 믿고 우릴 기만할 셈인가!"

"정말입니다. 사실, 저는 고건하의 동생 모용악······."

모용악의 이름을 입에 담자, 한층 더 싸늘하게 변하는 노인의 눈빛.

그걸 본 고건하가 급히 말을 바꿨다.

"······과도 친분이 있는 주창범이라고 합니다."

말을 하면서도 고건하는 생각했다.

'아마 믿지 않겠지.'

애초에 거짓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모를까, 이미 저들에겐 불신이 자리 잡은 상태다.

아마 자신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했다간 고건하 때문에 파티원들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

어떻게든 이 꼬인 매듭을 풀어야만 했다.

'내 이름을 내 이름이라고 소개할 수가 없다니.'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고건하가 이를 빠득 갈았다.

하지만 고건하의 예상과 다르게, 노인에게서 의외의 반응이 흘러나왔다.

"흠. 고 문주가 죽은 모용악과 친분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 허나 그것만으로는 고 문주의 동생이라는 걸 증명할 수 없다. 기회를 줄 테니 다른 증거가 있다면 내놓아라."

노인이 노기를 억누르며 더 확실한 증거를 요구한 것이다.

'도대체 왜?'

이곳에서 대체 뭔 짓을 했는진 모르지만, 노인이 안우진을 굉장히 어려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혹시 자신이 진짜로 안우진의 동생일까 봐 말할 기회를 준다는 뜻이었으니까.

고건하는 재빨리 안우진의 외형을 설명했다.

"고······건하 형님은 악귀가 그려진 가면을 쓰고 다닙니다. 자유자재로 벼락을 다루고요. 혹시 싸울 때 간간이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지 않습니까? 가끔 눈 부신 빛이 뿜어져 나오기도 하고요."

고건하가 안우진의 외형에 대해 설명했지만, 노인은 여전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걸론 부족하다. 다른 증거를 내놓거라."

'다른 증거? 여기서 더 얘기할 만한 게 없는데······.'

노인의 말에 고건하는 곤란했다.

안우진과 어느덧 1년 가까이 함께 생활하고 있지만,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안우진은 이상할 정도로, 본인에 대한 얘기를 남에게 털어놓지 않았······.

'아!'

순간 고건하의 뇌리에, 당소소가 처음 팜에 들어왔을 때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절절하던 당소소의 눈빛.

그리고 그녀를 조금 어려워하는 안우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둘 사이에 미묘한 분위기가 흐른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남녀 사이에 흐르는 그 어색함은 보통.

"고······건하 형님께서는 죽은 당소소님을 그리워 하시더군요."

사랑이라는 감정과 연결된다.

"당소소······?"

그리고 당소소는 죽어서 콜로세움에 들어왔다.

"예. 만약 자신이 청혼을 받아들였다면, 혹시 당소소님이 여전히 살아계시지 않을까 하는 후회 속에서 살아가고 계십니다."

그 제한된 사실을 가지고, 고건하는 거짓말을 했다.

청혼을 남들 다 보는 앞에서 하진 않을 테니까, 저들은 이 말의 진위 여부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청혼을 했는지, 안 했는지 내가 알게 뭐람.'

고건하는 말을 하면서도 슬쩍 노인의 눈치를 살폈다.

'됐어.'

다행히 노인은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그럼 왜 고건하라는 이름을 사용한 겐가."

고건하가 노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안······형님이 고건하라는 이름을 대면 도와줄 거라고 그랬습니다. 하지만 이런 소동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고 문주는 현재 어디에 있는가?"

노인의 물음에 고건하가 고개를 저었다.

"은거 중이십니다. 당신의 업보라면서 평생 당소소님을 그리워하며 심산유곡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노인의 얼굴엔 깊은 회한이 담겨 있었다.

한동안 두 눈을 감은 채 눈두덩이를 꾸욱 꾸욱 누르던 노인이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

갑자기 노인의 곁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한 중년인이 고건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파티원들이 무기를 빼든 채 경계하고 있음에도, 중년인은 전혀 걱정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당세민이라고 합니다. 죽은 소소가 제 조카 되지요."

고건하의 코앞까지 다가온 중년인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 예."

갑작스러운 상황 전개에 고건하가 떨떠름해하면서도 얼른 고개를 숙였다.

"고건하 대협께서 제 조카를 그리 생각하고 계셨다니, 이 당 모는 감격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주창범 소협이라고 하셨지요? 고 문주님과 성이 다르신데, 혹시 의형제를 맺으신 겁니까?"

"맞습니다."

당세민의 물음에 고건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건하 문주님의 의제시라면 당문과는 남이 아닙니다. 무림맹에 방문해 주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당세민이 고건하의 두 손을 꼬옥 잡았다.

그 모습에 맹주라고 불린 노인이 검을 갈무리하며 입을 열었다.

"귀한 손님께 실례를 했소. 제대로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고 무작정 검부터 휘두른 걸 사과드리오."

고개를 숙이는 노인의 모습에 고건하도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이리 오해가 풀린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고개를 숙인 고건하가 남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살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다짐했다.

팜에서 봅시다······. 안우진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존나 웃기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시발 ㅋㅋㅋㅋㅋㅋ 고건하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싶었는데 렌이 썼던 이름 아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게 같은 팀에 있는 플레이어 닉네임이었구낰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뭐임?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씨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보면서 빵 터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 렌이 상위 리그 단독 미션에서 무림 성계 나왔었는데 그때 당시 자기 이름을 고건하라고 소개하고 다녔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씨발 ㅋㅋㅋㅋㅋㅋ 경기 보다가 뿜었넼ㅋㅋㅋㅋㅋ 존나 웃기넼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 *

팀 투지 팜의 공터.

"모두들 고생 많았습니다."

나는 게이트에서 빠져나오는 다섯 명의 플레이어들을 반겨 주었다.

"앗, 안우진님!"

"다녀왔습니다!"

원래는 아세리안과 피넛엘, 포르도엘이 하는 일이었지만, 최근 바쁜 그녀들을 대신해 내가 나와 있는 것이다.

목숨 걸고 경기를 뛰고 오는 플레이어들에게, 누군가 한 명은 나와서 맞이해주는 게 예의였으니까.

'이제 메인 이벤트만 남았군.'

오늘만 벌써 100명이 넘게 출전한 상황.

다행히 아직까진 한 명을 제외하곤 모두들 무사히 복귀했다.

덕분에 플레잉 코치로 들어오는 포인트가 쏠쏠했고.

"여러분을 위해 파티를 준비했으니, 모두들 씻고 1시간 안에 식당으로 오시면 됩니다."

"넵!"

"오늘은 진탕 취할 때까지 마실 겁니다!"

복귀한 플레이어들이 활기차게 외쳤다.

'오늘도 나쁘지 않겠어.'

원래 경기 당일엔 팜에 우울한 분위기가 퍼진다.

경기에 들어가면 사망자가 나올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면 동고동락한 동료들이 죽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러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경기가 끝나는 날엔 파티를 여는 것이고.

'그런데 우리 팀은 조금 다르지.'

팀 투지의 생존율은 현재까지 95%가 넘는다.

그만큼 죽는 플레이어가 적다는 뜻.

그러다 보니 다른 팀에 비해 우울한 분위기가 비교적 덜 형성되는 편이었다.

'무사히 돌아와야 할 텐데.'

나는 공터를 서성이며, 마지막 남은 한 명의 플레이어를 기다렸다.

"우진이 형. 기다리느라 힘드시죠?"

"고생 많으십니다."

메인 이벤트 종료 시간이 다가올수록 플레이어들이 한 명 한 명 공터로 나오기 시작했다.

주창범, 모용악, 제이스, 루치아노, 지그 등등.

현재 경기를 뛰고 있는 고건하와 친한 플레이어들이었다.

"괜찮습니다. 저보다 경기를 뛰고 있는 고건하님이 더 힘드시겠죠."

나는 상태창 우측 하단에 있는 현재 시각을 힐끗 살피며 말했다.

그때였다.

우우우우우웅―

"오오, 왔다!"

"휴우. 무사히 돌아왔군."

게이트가 열리자, 기다리던 팀원들이 반색했다.

서로가 티는 안 냈지만, 경기에 참가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모두들 불안감을 안고 살아간다.

웃으면서 보낸 친구를, 동료를.

어느 날 갑자기 볼 수 없다는 것.

그것만큼 괴로운 게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쉽게 마음을 주지 않으려는 것이고.

"후우. 다녀왔습니다."

"고생 많았어요, 건하 형!"

"수고했다. 결국 그 비천한 실력으로 오늘도 잘 버텼군."

게이트에서 고건하가 모습을 드러내자, 팀원들이 다가가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하지만 고건하는 그들의 말에 대꾸해주는 대신 나를 향해 찌릿, 하고 노려보았다.

'왜 저러지?'

뜬금없는 상황에 내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고건하가 입을 열었다.

"무림에 다녀왔습니다."

"······."

"제 이름을 밝혔더니, 저를 향해 칼을 빼 들더군요. 고. 건. 하. 라는 대단한 무인의 이름을 사칭했다고요."

"······!"

< 156화. 격변의 물결(4) > 끝

< 157화. 격변의 물결(5) >

치이이이이익―

공터에 세팅된 어마어마한 숫자의 테이블들 사이로, 고기 굽는 소리가 팜에 가득 울려 퍼졌다.

열두 개의 성계에서 모인 플레이어들이 오순도순 모여 삼겹살을 굽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이렇게 먹는 것도 괜찮은데?'

현재 팀 투지에 소속되어 있는 플레이어의 숫자는 5,014명.

숫자가 많아지다 보니, 더 이상 한 개의 식당으로는 플레이어들과 사용인들을 수용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몇 개 식당에 나뉘어서 파티를 하자니, 일반 식사 때와 다를 게 없을 거고.

그래서 아세리안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이렇게 공터에 테이블을 펼쳐두고 먹게 되었다.

'간간이 이런 자리를 갖는 것도 좋겠어.'

멀쩡한 식당을 놔두고 공터에 새롭게 세팅하는 것도 일이긴 하지만, 어차피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범인의 경지를 뛰어넘은 상황.

이 정도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덕분에 안우진님과 술 한잔 하는 날도 오는군요."

고건하의 말에 나는 머쓱했다.

지금 나는 고건하, 주창범, 모용악, 루치아노, 제이스, 지그, 거기다 최근 고분고분해진 수호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평소에 음주를 좋아하지 않는 내가 이들과 함께 술을 마시는 이유는 하나였다.

고건하의 화를 풀어주기 위해서.

'충분히 화날 만 한 상황이니까.'

고건하의 닉네임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전에 어떻게 된 일인지 제대로 된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당소소의 문제가 엮여 있다 보니 함부로 얘기하는 것이 꺼려졌기 때문이다.

그 탓에 고건하의 목숨이 위험해질 뻔한 상황.

지금 이 순간엔, 입이 열 개라도 고건하에게 할 말이 없었다.

"······알고 보니까 무림맹 내부에서 안우진님을 직접 본 사람이 별로 없더라구요. 그래서 나중에야 무림맹주 진초풍인가? 그분이 제게 달려들어서 검을 휘두르더군요."

"······."

"그때 정말 난처했습니다. 저를 믿고 따라와 준 파티원들까지 위험해진 순간이었으니까요. 저는 분명 제 이름을 댔는데, 사칭한다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더라구요."

"푸하하하하하!"

"아, 진짜 웃겨."

고건하의 말에 함께 앉아 있던 팀원들이 배를 잡고 박장대소했다.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아서 귀를 쫑긋하던 아세리안과 두 천사, 카이로시아, 당소소까지 풋! 하고 웃을 정도였다.

'쯧.'

할 말이 궁한 나는 그저 잔에 들어 있는 술을 들이켰다.

"아, 진짜 오랜만에 웃었네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건하 형?"

"뭘 어떻게 해. 살려고 대충 막 질렀지. 나 사실 고건하가 아니라 주창범이다. 원래 모용악이라고 그랬는데, 맹주라는 노인의 눈빛이 확 달라지더라고."

고건하의 말에 모용악이 피식 웃었다.

"생전에 맹주님께 한 번 인사드린 적 있었거든. 아무래도 내 얼굴을 알고 계시다 보니, 네가 또 거짓말하는 게 아닌가 싶으셨을 거다. 그래서 어떻게 됐지? 그렇게 쉽게 넘어가실 분이 아닌데."

"증거를 더 대라고 하는데, 사실 우리 중에 안우진님을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냐. 그래서 그냥 대충 둘러댔지."

"뭐라고 그랬는데?"

"안우진님은 당소소님을 그리워하며 심산유곡에 은거했다. 나는 그런 안우진님을 대신해서 남은 마교의 잔당들을 죽이러 왔다고."

이어지는 고건하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뭐라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안 그래도 당소소랑 어색한 사이인데, 저런 얘기를 했다니.

'하.'

나는 곧바로 옆 테이블을 곁눈질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아세리안과 카이로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고, 당소소는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옆에선 포르도엘이 턱을 받친 채 개구쟁이처럼 웃었고, 피넛엘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다리를 꼰 채 와인을 음미했다.

순간 흐르는 싸늘한 정적.

"······."

바로 옆 테이블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챈 고건하 일당이 입을 콱! 다물었다.

"푸하하하!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대요? 응? 뭐야, 다들 안 웃겨? 나만 웃긴가? 푸흐흐흡."

그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제이스가 혼자서 큰 소리로 웃자, 주창범과 모용악, 지그가 서둘러 무언의 눈빛을 보냈다.

'아, 제발 형 쫌!'

'이렇게 둔한 녀석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남았지?'

'이 병신아. 제발 분위기 파악 좀 해라.'

마치 그들의 속마음이 들리는 듯 했다.

"하. 하. 하. 진짜 재밌네요."

"큼. 큼."

카이로시아가 싸늘한 냉기를 풍기며 말하자, 그제야 분위기를 파악한 제이스가 슬며시 꼬리를 만 채 술을 들이켰다.

"······."

방금 전까지 시끌벅적하던 술자리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때였다.

"안우진님. 그 가면은 왜 안 벗으시는 거예요?"

당소소 옆에서 지금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미소 짓던 포르도엘이 물었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화제를 전환한 것이다.

그러자 어색한 분위기를 탈출하고 싶었던 사람들이 앞다투어 내게 물었다.

"맞아요, 형. 그 가면 벗으시는 거 한 번도 못 봤어요."

"저도 처음엔 무슨 컨셉인가 싶었습니다."

'가면이라······.'

한동안 가면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었다.

더 이상 가면을 사용하지 못하면, 이전과 같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걱정은 정신 스텟을 올리는 순간 눈 녹듯이 사라졌다.

'정신 스텟이 낮아지면서 내 멘탈이 약해졌던 거였어.'

다시 한번 정신 스텟의 중요성을 깨달았달까.

뭐, 어쨌든.

"무기를 제외한 모든 장비를 평소에도 착용하는 습관이 있거든요."

나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포르도엘에게 말했다.

"그래요? 그럼 얼굴 보여주기 싫어서 그런 건 아니네요? 그럼 가면 한 번만 벗어주세요!"

그러자 눈을 빛내는 포르도엘.

"오오, 저도 안우진님 얼굴이 궁금합니다."

"보여주세요!"

다른 사람들도 포르도엘처럼 눈을 반짝였다.

특히 당소소와 카이로시아의 눈동자에선 불꽃이 이글이글 거리는 듯 했다.

하지만 내 대답은.

"싫습니다."

"어어? 왜요! 그냥 습관처럼 쓰시는 거라면서요!"

내 대답에 포르도엘이 따지듯 물었다.

장난기도 많고, 호기심도 강한 포르도엘.

이전이라면 그녀의 페이스에 말렸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녀의 입을 다물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중개 거래소."

"······."

딱 한 마디면 된다.

10억에 스킬북을 판매하고 아세리안에게 어마어마하게 털렸던 탓인지, 포르도엘은 저 단어만 나오면 몸을 흠칫 떨었다.

"······자, 자. 술 마십시다, 술."

"앗, 형. 잔이 비셨네요. 제가 따라 드릴게요, 헤헤."

내가 거북해한다는 걸 눈치챈 루치아노가 다시 화제를 전환했고, 주창범이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단숨에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그때였다.

"전 안우진님 맨얼굴 아는데."

꺼져가던 불씨에 아세리안이 다시 불을 지폈다.

"아, 여신님께선 우진이형 얼굴 보셨어요?"

주창범의 물음에 아세리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네. 처음 팀에 들어오셨을 땐 가면을 안 쓰고 계셨거든요."

"우진이형 어떻게 생겼어요?"

꿀꺽―

주창범의 물음에 침을 삼키는 카이로시아와 당소소.

그런 두 사람을 한 번 곁눈질한 아세리안이 활짝 웃었다.

"비밀이에요."

"······."

여기저기서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당소소나 카이로시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내심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게 뭐라고.'

그 모습에 나도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차피 앞으로도 벗을 생각이 없기에, 이들이 내 얼굴을 알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내 얼굴을 궁금해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던 중 예상치 못한 곳에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잘 생겼더군."

"······?"

지금까지 대화에 끼지 않은 채 와인을 음미하던 피넛엘이 입을 연 것이다.

"피넛엘, 네가 안우진님 얼굴을 어떻게 알아?"

포르도엘의 물음에 피넛엘이 와인잔을 내려놓았다.

"랜덤 뽑기로 뽑은 게 나거든."

아세리안의 고개가 확! 돌아갔다.

"뭐? 정말?"

"네."

"안우진님 처음 들어왔을 때는 어땠어? 혹시 막 어리버리하거나······. 그, 그러니까······."

아세리안이 횡설수설했다.

제법 흥분한 듯한 모습.

피넛엘이 무표정한 얼굴로 아세리안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더니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비밀입니다."

그러자 아세리안과 카이로시아, 당소소가 벙찐 표정을 지었다.

'별걸 다 궁금해하네.'

그 모습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내 옆에 앉아 있던 지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승자가 나왔군."

밤이 깊어 가고, 파티는 계속되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친 나는 집무실 의자에 앉아, 커뮤니티를 열었다.

어제 열린 블러드나이트 274에서 팀원들이 대거 출전했었기에,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뭐야?'

커뮤니티에 들어간 나는 눈을 치켜떴다.

└미친ㅋㅋㅋㅋㅋㅋ 팀 투지는 도대체 뭐 하는 곳임?

└저게 가능한 건가? 참가하는 애들마다 급성장했네 ㄷㄷ

└내가 말했자낰ㅋㅋㅋㅋㅋㅋ 팀 투지에 육성의 신 있음!

└그래봤자 하위 리그용 아님? 팀 투지에 고위 플레이어 있음? 초월 플레이어 있음? 끽 해봐야 상위 플레이어 꼴랑 두 명밖에 없는데 뭔 명문 팀 드립임ㅡㅡ

└윗댓 / 팀 투지한테 소속 플레이어 깡그리 죽었냐? ㅋㅋㅋ 쟤는 가는 곳마다 악플 달고 있네 ㅋㅋㅋㅋㅋ

└곧 있으면 저렇게 까는 것도 끝임 ㅋㅋ 지금 추세면 팀 투지 소속 애들 상위 리그로 대거 넘어갈듯 ㅋㅋㅋㅋ

└하위 리그 한정 명문 팀? 응 이제 상위 리그에서도 명문 팀 될 거야~

└심지어 곧 있으면 고위 플레이어도 나올 기세임 ㄷㄷ 성장률 개 미쳤음ㅋㅋㅋㅋㅋㅋㅋ

└이번에 보니까 카이로시아라는 애도 장난 아니던데? 잘만 다듬으면 상위 리그도 씹어먹을듯ㅋㅋ

'난리가 났네.'

반응이 상상 이상이었다.

이전에도 우리 팀의 육성법을 궁금해하긴 했지만, 그래봤자 하위 리그에서나 통하는 방법이라고 깎아내리는 신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거의 대다수 신들이 상위 리그에서도 통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당연한 거지.'

무려 10억 골드 만큼의 스킬북.

그걸 뿌렸으니, 팀원들이 하위 리그에서 활약하는 건 불을 보듯 뻔할 수밖에 없었다.

―하위 리그를 씹어 먹고 있다! 플레이어 얘기냐고? 아니! 팀 투지가!

―승리, 승리. 승리! 나오는 모든 경기에서 승리를 챙겨가고 있는 팀 투지!

―블러드나이트 271, 272, 273 모든 경기를 독식하고 있는 팀 투지. 하위 리그에 거대한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하위 리그, 상위 리그 할 것 없이 모든 커뮤니티에 팀 투지라는 이름이 도배되었다.

현재 하위 리그를 제외한 나머지 리그는 열리지 않고 있는 상황.

평소 하위 리그를 거들떠보지 않는 신들도 경기를 보고 싶으면 어쩔 수 없이 하위 리그 경기를 관람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어딜 가나 우리 팀의 얘기로 가득했고.

'하위 게임 메이커는 대박이 났겠군.'

고건하에게 들으니, 관객 수가 몇백만 명이나 됐다고 한다.

덕분에 팀 투지의 이름이 천계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나야 좋지.'

상황이 너무 좋았다.

팀 투지엔 하위 리그 랭커들이 득실거렸으니까.

원래대로라면 한참 뒤에나 노려볼 수 있을 수준의 플레이어들도, 이번 기회에 상위 리그의 문턱을 두드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임? 어쩌다 걸린 네임드도 아니고, 한 개 팀 소속 애들 거의 다 하위 리그를 씹어먹고 있다는데?

└어디 명문 팀인가 보지ㅋ

└ㄴㄴ 팀 투지라는데, 들어본 적 있음? 생존율도 하위 리그 역대 1위이고, 승률도 역대 1위라고 함. 그것도 2위랑 큰 폭으로 차이 나는.

└생존율이 그렇게 높은데 왜 유명한 애들이 없음? 난 처음 들어보는 팀인데?

└만들어진 지 2년도 안 된 신생팀이라고 함. 이번에 코드 제로에서 활약한 렌, 카이로시아가 투지 소속임.

└2년????? 2년 만에 렌이나 카이로시아를 배출할 수가 있다고????

그 덕에 오늘 아침, 아세리안의 얼굴엔 웃음꽃이 펴 있었다.

아마 나보다 일찍 일어나서 커뮤니티 반응을 살핀 모양이었다.

'뼈대는 만들어졌어.'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인지도를 얻게 되었다.

이제는 거짓말 조금 더 보태서, 팀 투지를 모르는 신이 없을 정도.

팀원들이 상위 리그로 올라오는 순간, 지금 깔아두었던 초석이 빛을 발휘할 것이다.

'팀원들한테도 좋은 일이지.'

팀 투지의 이름값이 상승할수록, 팀원들의 파이트머니도 가파르게 오를 테니까.

그로 인해 내게 들어오는 포인트도 늘어날 거고.

'이번 달에만 10만 포인트가 넘었네.'

그때였다.

벌컥!

"아, 안우진님!"

사용인 클로에가 숨을 헐떡이며 집무실로 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중개 거래소에 신화 등급 아이템이 등장했어요!"

'뭐라고?'

< 157화. 격변의 물결(5) > 끝

< 158화. 격변의 물결(6) >

"미카엘님. 전에 지시하셨던 플레이어 명단 업데이트와, 라파엘 팀이 만들어 둔 아레나 체크를 끝마쳤습니다."

카서디엘의 보고에, 바쁘게 서류를 넘기고 있던 미카엘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카엘은 아무리 바쁜 상황이라도 언제나 눈을 맞추며 얘기했다.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정말 멋진 분이야.'

상대방을 존중하기 때문에 저런 행동이 나오는 거겠지.

그런 모습 때문에 카서디엘은 미카엘을 무척 존경했다.

"아레나 상태는 어떠한가."

"보존율 71퍼센트, 경미한 손상이 있는 곳이 19퍼센트, 완파된 곳이 10퍼센트 입니다. 다시 복구하는 데 2주 정도 소요될 것으로 보이며, 복구에 드는 금액은 4,700만 포인트 정도로 견적이 나왔습니다."

카서디엘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이는 미카엘.

"할 일이 많았을 텐데, 무척 빨리 끝냈구나. 정말 수고 많았다."

그녀가 치하하자, 카서디엘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따로 더 지시하실 사항이 있으십니까?"

"음. 그 정도면 충분하다. 앞으로 한 달 뒤에 여는 걸 목표로 할 테니, 너무 무리하지 말도록."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아,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이전에 플레이어 렌이 성계 대항전에 불참 선언을 했는데요. 그 부분은 어떻게 진행하면 될까요?"

카서디엘이 생각했을 때, 이번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열리기 위해선 플레이어 렌의 협조가 필수였다.

당장 이전에 상위 리그를 진행하던 라파엘 팀만 봐도, 결국 렌이 불참 선언을 하는 바람에 열심히 준비한 성계 대항전이 시작도 못 해보고 박살 났으니까.

'쉽게 마음을 돌려줄 것 같지 않은데.'

내심 불안했지만, 카서디엘은 티 내지 않은 채 차분하게 기다렸다.

자신이 알고 있는 걸 미카엘님이 모르실 리 없다.

이럴 땐 그저, 믿고 기다릴 뿐.

"그 문제는 내가 직접 처리하겠다."

"방법이 있으십니까?"

카서디엘의 물음에 미카엘이 고개를 저었다.

"정면 돌파를 할 생각이다."

미카엘이 살짝 고개를 들어 허공을 응시했다.

무언가를 결심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미카엘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 * *

"중개 거래소에 신화 등급 아이템이 등장했어요!"

'뭐라고?'

클로에의 말에, 나는 하던 걸 멈추고 곧장 중개 거래소로 들어갔다.

마음이 급했다.

신화 등급이 중개 거래소에 등장한 건 처음이었으니까.

'제발 빨리.'

그녀가 말하는 아이템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들어가자마자 제일 상단에, 한 아이템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얼마야?'

나는 당황하며 금액을 확인했다.

띠링!

[<보석:대천사의 눈물>을 100,000,000 G에 구입하시겠습니까?]

[Yes / No]

'1억······골드?'

가격을 확인한 나는 눈을 치켜떴다.

보석 주제에 1억 골드나 한다고?

대체 뭐길래?

'제발 팔리지 마라.'

당장이라도 구입 버튼을 누르고 싶었다.

정보를 확인하는 사이, 누가 먼저 아이템을 채갈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이템을 사는데 정보를 체크하지 않고 살 수도 없는 노릇.

'1억 골드를 가지고 도박을 할 순 없지.'

나는 서둘러 아이템 정보를 확인했다.

[<보석:대천사의 눈물>]

[다섯 명 밖에 없는 대천사가 흘린 눈물이다. 일생에 한 번, 죽기 직전에 흘린 것만 효과가 있기 때문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고귀하다.]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소유자에게 엄청난 행운이 찾아옵니다.]

[정신 계열 공격을 완전히 무시합니다.]

[정신 스텟이 +40% 상승합니다.]

[<갱생更生 > 능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갱생 >]

[사용 시 손상된 육체를 100% 회복시킵니다.]

[뇌, 심장이 파괴되거나, 목이 잘렸을 경우엔 회복되지 않습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 : 168시간(1주일)]

[등급 : 신화]

[판매가 : 100,000,000 G]

아이템의 설명을 본 나는 눈을 치켜떴다.

과연 신화 등급의 아이템이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어마어마한 옵션.

'이건 반드시 사야 해.'

마음이 급했다.

이건 굳이 계산기를 두들겨 볼 필요도 없었다.

'육체가 100퍼센트 회복된다니······!'

갱생 능력 하나만으로도 1억 골드의 값어치는 충분했다.

여벌의 목숨을 하나 더 들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일 테니까.

'제발!'

나는 곧바로 구입 버튼을 눌렀다.

띠링!

[<보석:대천사의 눈물>을 100,000,000 G 에 구입하셨습니다.]

'됐어!'

손바닥에 생겨난 1캐럿 다이아몬드 크기 정도의 투명한 보석.

그걸 본 나는 속으로 쾌재를 질렀다.

1억 골드?

'이런 아이템이 고작?'

만약 2억 골드에 올라와 있어도 구입했을 것이다.

"괜찮은······ 아이템이었나요?"

내가 대천사의 눈물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곁에서 두 손을 모은 채 공손히 서 있던 클로에가 물었다.

'괜찮냐고?'

이건 고작 그 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 아이템이 아니다.

'대박이야.'

갱생 능력 하나만으로도 무척 좋은 아이템이었지만, 대천사의 눈물에는 3개의 옵션이 더 들어 있었다.

가장 첫 번째로, 행운 상승.

"······."

이건 뭔지 잘 모르겠다.

뭐 말 그대로, 운이 좀 좋아지는 능력이겠지.

그리고 두 번째로, 정신 스텟 40% 상승.

안 그래도 정신 스텟을 올려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이것 또한 어마어마하게 좋은 옵션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신 계열 공격 완전 면역.'

이게 내가 대천사의 눈물에서 가장 눈여겨보고 있던 옵션이었다.

'잘하면 피의 각성이 발동해도 이성을 잃지 않을 수도 있어.'

이성을 잃는 것도 정신에 이상이 생기는 문제였으니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한마디로, 내 예상이 맞다면 블라디미르 가면을 리스크 없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것.

'클로에가 대단한 아이템을 발견해 줬어.'

기분이 좋아진 나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큰 도움이 됐습니다. 알려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휴우. 정말 다행이에요."

클로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으로 발견한 게 쓸모없는 아이템일까 봐 내심 마음을 졸인 모양이었다.

"고생 많았습니다. 아, 앞으로 두 명의 사용인을 추가로 붙여주겠습니다."

"······두 명이요?"

클로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클로에님 혼자서 하기엔 힘드실 테니까요."

나는 클로에를 위아래로 훑었다.

홀쭉해진 얼굴, 생기를 잃은 듯한 눈동자, 잔뜩 헝클어진 머리칼.

딱 보기에도 굉장히 초췌해 보였다.

'고생 많았나 본데.'

사실, 중개 거래소를 계속 들여다보고 있는 건 굉장히 피곤한 일이다.

하루 종일 쳐다보고 있기에 눈도 뻑뻑해지고, 본인이 착용할 아이템을 둘러보는 게 아니라서 무척 지루한 작업일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24시간 내내 올라오는 매물을 체크해야 하기에, 자다가도 중간중간 확인해야 하고.

'쉽지 않은 일이지.'

거기다 그녀는 어제, 파티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중개 거래소를 들여다 봐야하기 때문에, 파티를 즐길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가 지금까지 사용인을 더 붙여주지 않은 이유는 딱 하나였다.

'클로에가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었으니까.'

하지만 오늘부로, 그녀의 위상이 달라졌다.

'대천사의 눈물을 알려준 것 만으로도 클로에는 할 몫을 다 했어.'

그래서 이제부터 그녀를 챙겨줄 생각이었다.

정말 확실하게.

"아, 아니에요. 저 혼자서 할 수 있어요."

클로에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아무래도 내가 그녀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이럴 땐 정확하게 설명해주는 게 낫다.

"클로에님."

"네······."

"이건 대천사의 눈물을 찾아주신 것에 대한 포상입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그리고 오늘부터 1주일간 휴가를 드리겠습니다. 지금 당장 짐 챙겨서 숙소로 들어가 쉬세요. 중개 거래소도 볼 필요 없습니다."

"그럼 중개 거래소는 누가 체크를······."

클로에의 걱정에 나는 피식 웃었다.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마시고 어서 들어가 쉬세요. 이세연님께는 제가 따로 말해 둘 테니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뭐든 만들어달라고 하시구요."

중개 거래소를 체크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지금 팜에 있는 사용인 중 아무나 한 명 골라서 시키면 충분할 것이다.

"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더 감사하죠. 푹 쉬고 오세요."

연신 고개를 숙이는 클로에.

이대로는 감사 인사만 하루 종일 할 것 같아, 나는 그녀의 등을 떠밀어 숙소로 보냈다.

그리고는 다시 의자에 앉아, 잠시 인벤토리에 넣어둔 대천사의 눈물을 꺼내 들었다.

띠링!

[<보석:대천사의 눈물>에 의해 행운이 대폭 상승합니다.]

[<보석:대천사의 눈물>에 의해 정신 스텟이 40% 상승합니다.]

'이걸 어떻게 하지?'

조금 커다란 모래알 수준의 크기.

들고 다니기엔 너무 작았다.

잃어버릴 가능성도 크고.

'1억 골드 짜리인데, 절대 안 되지.'

그렇다고 인벤토리에 넣고 다닐 수도 없다.

그러면 효과를 전혀 받지 못할 테니까.

한동안 검지로 테이블을 두드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이대로는 사용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 상황.

'귀걸이로 만들어달라고 해야겠군.'

아무래도 2차 가공이 필요할 것 같았다.

"아뇨."

아세리안의 입에서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너무 단호해서 나도 모르게 당황할 정도였다.

"전혀 가능성 없습니까?"

"네. 마기에 오염되는 건 정신 계열 공격이 아니거든요. 지금 겪고 있는 부작용에 아무런 효과가 없을 거예요."

'쯧.'

똑 부러지는 대답에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심 기대했는데 헛다리를 짚은 모양.

아무래도 다른 방법을 강구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정신 스텟이 40프로나 올라간다는 부분은 굉장히 고무적이네요. 이전보다 부작용이 훨씬 낮아질 거예요."

"그렇긴 하죠."

현재 내 정신 스텟은 99 포인트.

거기에 각종 특전들을 모두 적용하면 최대 178포인트까지 올라간다.

그런데 여기서 40프로를 더하면?

'218포인트.'

무려 40포인트나 오르는 셈이었다.

이 정도라면 전처럼 이성을 잃고 날뛸 확률이 크게 하락할 것이다.

그리고 아세리안의 말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저는 오히려 이 행운 상승이란 부분이 예사롭지 않아요."

예상하지 못한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예사롭지 않다는 거지?'

"그냥 운이 조금 더 좋아지는 수준 아닙니까?"

"바꿔말하면 안우진님이 행하는 모든 부분에서 이전보다 더 나은 결과값이 나온다는 뜻이기도 하죠."

'아.'

그녀의 대답에서 내가 지금까지 뭘 놓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행운은 근력이나 정신처럼 스텟으로 표현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별로 중요한 옵션은 아니겠거니 무시하고 있었는데, 자세히 생각해 보니까 이상했다.

지금까지 스텟 외적인 부분에 영향을 미치는 아이템들이 있었던가?

"이전에도 대천사의 눈물을 본 적 있으십니까?"

"아뇨. 지금까지 죽은 치천사의 숫자가 셋 밖에 안 되거든요. 이번에 죽은 라파엘님을 포함해서요. 거기다 설명을 보면 죽기 직전에 눈물을 흘려야만 얻을 수 있다는 건데, 전투 중에 눈물을 흘리는 경우도 흔치 않구요."

아세리안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셋이라······.'

한마디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대천사의 눈물은 많아 봐야 세 개, 적으면 지금 우리의 눈앞에 있는 게 유일하다는 것.

"아무튼 제 생각에는 이 행운 옵션을 가장 주의 깊게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를 듣고 보니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확률이 들어가는 모든 부분에서 영향을 미칠 테니까.

"이걸 귀걸이로 세공해달라는 거죠?"

아세리안이 테이블 위에 있는 대천사의 눈물을 챙기며 물었다.

"맞습니다."

내가 그녀에게 부탁한 건, 공방 컨셉으로 운영되는 팀에 대천사의 눈물로 귀걸이를 만들어달라는 의뢰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팀 투지에선 세공 능력을 갖고 있는 플레이어나 사용인이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보통 수제로 만들 일이 있다면 다양한 컨셉으로 운영되는 팀들에게 의뢰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대표적으로 이전에 내가 있던 팀 성장처럼 공장 컨셉으로 운영되는 팀, 그리고 다양한 약초를 이용해 물약을 생산하는 팀, 검이나 판금 방어구를 만드는 대장간 컨셉의 팀 등등.

다양한 컨셉을 가진 팀들이 존재한다.

다만, 그곳은 커뮤니티에 글을 남길 수 있는 신들만이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아세리안의 도움을 받는 것이고.

"잘 부탁드립니다."

아세리안이 예쁘게 웃었다.

"걱정 마세요. 기왕 착용하실 거, 디자인도 예쁘게 해달라고 할게요. 아, 참. 내 정신 좀 봐. 드릴 말씀이 있었는데."

"무슨······?"

"새로운 상위 게임 메이커님께 연락이 왔어요."

< 158화. 격변의 물결(6) > 끝

< 159화. 격변의 물결(7) >

"새로운 상위 게임 메이커님께 연락이 왔어요."

"새로운 상위 게임 메이커······?"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오퍼라도 들어온 건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퍼가 아니고선 게임 메이커에게 연락이 올 이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현재 상위 리그는 엄청난 피해로 인해 잠정 중단된 상황.

나는 혹시나 해서 그녀에게 물었다.

"오퍼입니까?"

그러자 내 예상대로 아세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다만, 이어지는 그녀의 말은 뜻밖이었다.

"아뇨. 오퍼는 아니고, 일정을 조율해 가까운 시일 내에 직접 팜에 방문하시겠다는 연락이었어요. 안우진님을 직접 만나고 싶다고 하더라구요."

"······?"

날 만나기 위해······ 팜에 방문을 한다고?

'게임 메이커가 직접?'

도대체 왜?

"방문하는 이유에 대한 언급은 없었습니까?"

아세리안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물어봤죠. 저도 이런 일이 처음이라 굉장히 당혹스러웠거든요. 주변의 시선 때문에라도, 게임 메이커가 특정 팜에 직접 방문하는 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니까요."

"그렇긴 하죠."

"그런데 방문 이유에 대해선 만나서 얘기해주겠다는 말 뿐이었어요."

"흠."

나는 의자에 기대앉아서 팔짱을 꼈다.

'뭔가 찝찝한데.'

사실, 내 입장에선 새로운 게임 메이커와의 만남이 달가울 수가 없었다.

전임자였던 라파엘과 큰 트러블이 있었으니까.

가재는 게 편이라고, 날 안 좋게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혹시 다른 팜들도 방문했습니까? 새로 취임했으니까 인사차 돌아다니는 걸 수도 있지 않습니까."

"포르도엘에게 확인해 보니 그런 소식은 없었어요. 걔 인맥이 엄청 넓어서, 그 아이가 확인하면 웬만한 천계 소식을 다 들을 수 있거든요."

"아하."

잠시 포르도엘을 떠올린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애교와 장난기가 많은 포르도엘의 성격상, 친구가 많을 것 같긴 했다.

다만 아세리안이 저렇게까지 얘기하는 걸 보니, 내 생각보다 그녀의 발이 엄청 넓은 모양이었다.

'앞으로 천계의 소식 좀 모아달라고 부탁해야겠군.'

그나저나.

'도대체 왜 온다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방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내게 뭔가 원하는 게 있는 거겠지.'

그러니까 주변의 눈초리까지 감수해가며 방문하려고 하는 거고.

'차라리 잘 됐어.'

안 그래도 나 역시 게임 메이커에게 원하는 게 있었다.

언제까지 상위 리그가 중단될지 알 수 없는 데다가, 고위 리그에 올라가 정신의 리미트를 해제해야 하는 상황.

조건만 잘 맞으면 빠르게 고위 리그로 올라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일단 그러기 위해선 가장 먼저.

'나도 미리 준비하는 수밖에.'

그렇다면 지금 당장 내가 해야 할 것은 명확했다.

"새로운 상위 게임 메이커에 대해서 설명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새로운 상위 게임 메이커에 대해, 조금이라도 정보를 모으는 것.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위태롭지 않을 거라고 했다.

미리 준비해두면 예상치 못한 일격을 맞아도, 카운터를 꽂아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우우우우우웅―

"오오, 게이트가 열린다!"

"우와아아아아아!"

짝짝짝짝짝짝짝―

공터에 모인 5천 명의 팀원들이 기립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게이트 안에서 세 명의 플레이어가 환하게 웃으며 나오고 있었다.

"상위 리그 승급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올라왔군.'

오늘은 주창범과 모용악, 지그의 승급전이 있는 날이었다.

그리고 공터에 열린 게이트에서 방금 막 세 명의 플레이어가 빠져나왔다.

세 명 모두 승급에 성공한 것이다.

'이걸로 다섯 명 째.'

나는 고개를 돌려, 공터에 모인 팀원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와, 결국 2기수 선배님들 사이에서도 상위 플레이어가 나오다니!"

"심지어 주창범님이나 지그님은 처음 들어왔을 때 우리처럼 평범한 플레이어였다지?"

"지금처럼만 하면 우리도 언젠가 올라갈 수 있어!"

모두들 눈빛이 초롱초롱한 게, '나도 언젠가는······.' 이라는 감정이 담겨있는 것 같았다.

'드디어 분위기가 형성됐어.'

그 모습에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팀 투지에서 상위 플레이는 단 두 명.

나랑 카이로시아 뿐이었다.

'그때는 오르지 못할 나무처럼 바라봤지.'

한 명은 혼자서 성계 대항전을 우승시킨 괴물이고, 또 한 명은 애초부터 기초 스텟이 세 자리를 넘는 초대형 네임드.

그러다 보니 상위 리그에 대한 인식이, 범접할 수 없는 존재들만이 올라갈 수 있는 곳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이제부턴 다를 거야.'

하지만 주창범과 지그가 승급을 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카이로시아나 모용악과는 달리, 주창범과 지그는 아주 평범한 기초 스텟으로 시작한 플레이어들이다.

팀원들도 그걸 알고 있고.

'노력하면 상위 리그로 올라올 수 있다는 선례가 생겼어.'

선례는 무척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도달하지 못한 길을 걷는 것과, 누군가가 지나간 길을 걷는 건 차원이 달랐으니까.

그 사소한 인식의 전환으로도 많은 것이 달라진다.

'다들 더 열심히 훈련하겠군.'

이젠 오르지 못할 나무가 낮아진 것처럼 보일 것이다.

"다녀왔습니다, 여신님. 포르도엘님. 피넛엘님."

모두에게 축하를 받으며 다가온 세 사람이 아세리안과 두 천사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기분이 좋은지, 얼굴이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정말 고생 많았어요. 무척 멋있었답니다."

아세리안이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헤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코흘리개들이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멋진 플레이어들이 됐네요. 세 분 모두 고생 많았어요!"

포르도엘이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말했다.

"모두들 수고했다. 경기를 직접 보니, 더 이상 흠잡을 곳이 없더구나."

피넛엘이 옅은 미소를 피우며 말했다.

훈훈한 덕담을 주고받은 세 사람이, 이번엔 나한테 다가왔다.

"다녀왔어요, 형!"

"드디어 안우진님이 계신 곳까지 따라왔군요. 금세 또 멀어지겠지만 말입니다."

"쉽지 않은 경기였는데, 안우진님 얼굴에 먹칠하기 싫어서 이 악물고 뛰고 왔습니다."

주창범과 모용악, 지그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마치 세 살짜리 어린애가 '어서 칭찬해 줘!' 라며 눈을 빛내고 있는 것 같았다.

'훗.'

세 사람에게 해줄 말이 무척 많았다.

이제부터 더 힘들어질 거다.

하위 리그와는 달리 상위 리그엔 괴물들이 우글우글거린다.

마의 구간에 도달하면 더 이상 스텟도 오르지 않는다, 등등.

"고생 많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걸 가슴속에 담아둔 채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런 얘기들은 이후에도 언제든지 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저들에게 해줄 말은 딱 하나 뿐이었다.

"환영합니다. 초인들의 세계에 온 걸."

이곳은, 쉽게 도달할 수 없는 곳이었으니까.

저들에게 굳이 힘들다고 얘기해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

주창범과 모용악, 지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 칭찬에 자기들도 모르게 울컥한 것 같았다.

아마 처음 팜에 들어왔을 때부터, 힘든 훈련을 견디고 이 자리에 서기까지의 과정들이 스쳐 지나갔겠지.

1회차의 내가 그랬으니까.

"자, 이제 모두 파티 준비합시다!"

아세리안이 상황을 정리하고자 외쳤다.

"넵!"

플레이어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공터에다가 테이블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위 리그에서의 건승을 위하여!"

또 한 번의 성대한 파티가 열렸다.

"후우."

공터에 나와 있던 포르도엘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제법 긴장이 되는지 평소와 달리 안색이 굳어 있었다.

항상 웃는 낯이다 보니, 그 모습이 더욱 어색하게 느껴졌다.

"······."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피넛엘.

카리스마 가득한 평소와 달리, 오늘따라 볼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뭐랄까, 스타를 기다리는 소녀 팬 같은 모습이었다.

'그나마 아세리안이 가장 낫군.'

그 둘 사이에서 경건한 얼굴로 서 있는 아세리안.

우리는 현재, 새로운 상위 게임 메이커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잠시 후.

우우우우우우웅―

잔잔한 파동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우리가 서 있는 공터에 열두 개의 게이트가 생성되었다.

'왔군.'

철그락― 찰그락―

각 게이트에서 일곱 명의 천사들이 빠져나왔다.

무장을 한 그녀들의 갑옷 이음쇠가 부딪치며,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섯 쌍의 날개부터, 여덟 쌍의 날개까지.

"······?"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아홉 쌍의 날개를 가진 천사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는데, 여덟 쌍의 날개를 가진 천사가 아세리안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맞이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2급 지천사 파사엘입니다."

"상급신 아세리안이에요."

"4급 주천사 포르도엘입니다."

"6급 능천사 피넛엘입니다."

아세리안과 두 천사들도 정중하게 인사했다.

"곧 도착하실 거니, 예를 부탁드립니다."

말을 마친 지천사 파사엘이, 함께 온 천사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천사들이 영창을 시작했다.

[황혼에 잠겨, 붉은 피 머리 위로 싸늘한 밤이 내려앉노라]

눈을 감은 채 읊조리는 여든네 명의 천사들.

[울부짖는 악귀들의 비명이 세상을 가득 채우니]

둥그렇게 선 천사들의 중심부에 기하학 문양의 마법진이 그려졌다.

[한 줄기 새벽 소성이 흘러 내려와 ]

순간 팔뚝에 닭살이 돋았다.

천사들의 목소리에 맞춰, 공기 중의 마력이 격렬하게 들끓고 있었다.

[가득 채운 비명을 예리한 검으로 가르고]

그와 동시에 마법진이 빛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따스한 웃음이 부드러이 노래하니]

"······!"

천사들의 영창이 조금씩 커져가고, 그에 맞춰 마법진의 빛이 사방을 잠식했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

그리고.

[수호자의 빛이 세상을 밝게 비추노라]

우우우우우우우웅!

한 줄기 파동이 퍼져나갔다.

생성된 게이트 안에서 누군가 발을 뻗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그 순간, 아세리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다섯 대천사 중 가장 고귀한 존재이자.

열 쌍의 날개를 가진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빛의 수호자. 그리고.

가슴 한켠이 서늘했다.

'강해.'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그녀에게서 흘러나왔다.

내가 감히 쳐다보기도 힘들 정도로.

―가장 날카로운 천계의 검이라고 불려요.

도도한 신성력이 팜을 가득 메웠다.

―대천사 미카엘. 이번에 새로 상위 게임 메이커에 부임하신 분의 존함이에요.

위로 땋아 올린 금빛 머리칼.

순백의 갑옷과, 그 뒤로 펼쳐진 열 쌍의 날개.

사파이어 같은 눈동자에, 강인한 눈매.

'이 천사가······.'

모든 천사들의 정점.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나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라는 걸.

등에 한줄기 식은땀이 흘렀다.

"팜에 방문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미카엘님. 팀 투지의 주인 아세리안입니다."

"상급신 아세리안을 보좌하는 4급 주천사 포르도엘입니다."

"6급 능천사 피넛엘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세리안과 두 천사가 치마 춤을 잡은 채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1급 치천사 미카엘입니다. 환영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에 화답하듯, 예를 갖춰 인사한 미카엘.

고개를 든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

순간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벼락이 관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숨이 막혔다.

'침착하자.'

마치 발가벗겨진 상태로, 맹수의 앞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대로군요. 플레이어 렌이."

그때, 미카엘의 입에서 존댓말이 흘러나왔다.

'존댓말?'

예상외의 모습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존댓말을 한다고 해서, 저자세로 보이는 건 아니었다.

다만, 날 존중해주고 있다는 게 느껴질 뿐.

"렌입니다."

나는 미카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간략한 소개에 순간 여든네 쌍의 눈빛이 찌릿! 하며 내게 꽂혀 들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협상의 시작은 기세 싸움이지.'

미카엘도 내게 뭔가 원하는 게 있어서 방문했을 것이고, 나 또한 그녀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녀가 먼저 내게 수 싸움을 벌였다.

다른 천사들처럼 그냥 게이트로 넘어오면 될 걸, 요란하게 영창까지 해가며 등장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내 기를 죽이고 시작하려는 의도였겠지.'

굳이 저자세를 취해, 상대에게 끌려갈 필요가 없었다.

난 아세리안의 소유니까, 미카엘도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이고.

한동안 날 빤히 바라보던 미카엘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묘한 가면을 쓰고 계시는군요."

"······가면의 디자인이 제법 멋있긴 하죠. 칭찬 감사합니다."

내 말에 미카엘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손님이 오셨는데 제가 계속 세워두고 있었네요. 존귀하신 분께서 방문해 주신다고 하기에, 차와 다과를 준비해 놨습니다."

그러자 아세리안이 앞으로 나서며, 공터 한쪽에 지어진 고급스러운 건물을 공손히 가리켰다.

미카엘이 온다고 하기에 이번에 새롭게 지은 접객실이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향하게 된 접객실.

내부로 들어온 존재는 딱 네 명 뿐이었다.

아세리안과 나, 미카엘, 그리고 처음에 인사를 나눴던 파사엘이라는 2급 지천사.

아세리안과 내가 앉고, 맞은편에 미카엘과 파사엘이 앉았다.

"무림, 안휘 성에서 구할 수 있는 순향차巡香茶라고 해요. 머리를 맑게 해주는 효과가 있어요."

"향기가 굉장히 좋군요."

접객실에 준비된 차를 한 모금 음미한 미카엘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제가 돌아가실 때 챙겨 드릴게요."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한동안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그때였다.

"바쁘실 테니, 이만 용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플레이어 렌?"

미카엘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예, 미카엘님."

"저희는 상위 리그 성계 대항전을 다시 준비 중에 있습니다."

미카엘의 말에 순간 흠칫했다.

'뭐라고?'

성계 대항전?

상위 리그도 열지 못하는 상황인데?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성계 대항전이라······. 하긴, 초대형 이벤트를 시작으로 다시 상위 리그를 오픈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분위기 반전도 될 테고.'

막상 생각해보니, 미카엘의 입장에선 지금 상황을 타개할 만한 도구로 성계 대항전만 한 게 없을 것이다.

'젠장.'

물론 나한테는 좋은 소식이 아니지만.

< 159화. 격변의 물결(7) > 끝

< 160화. 격변의 물결(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