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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0화. 격변의 물결(8) >

'좋지 않은데.'

나는 티 나지 않도록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카엘이 왜 성계 대항전을 열고자 하는 지, 그 취지와 이유는 이해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한참 전부터 성계 대항전에 대한 이해득실 계산을 모두 끝낸 상황.

'그때도 간신히 거절했는데, 이제 와서 이걸 승낙할 이유가 없지.'

잠시 생각을 정리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미카엘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먼 길 와주셨는데, 긍정적인 답변을 드리지 못해 유감입니다."

숙일 땐 확실하게 숙여야 한다.

어차피 협상은 이걸로 끝.

더 이상 무의미하게 기 싸움을 할 필요가 없었다.

'최대한 좋게 거절해서 미카엘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것만큼은 피해야 해.'

지금은 부드럽게 이 자리를 마무리하는 것에 집중해야 했다.

라파엘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얼마나 고생했던가.

물론 이제는 내 인지도가 어마어마하게 오르면서 오퍼를 가지고 장난을 치진 못하겠지만, 고위 리그로 승급하는 걸 최대한 늦추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결국 피해를 입게 되는 건 내가 될 테고.

'그럼에도 시비를 건다면, 상대해 주겠지만.'

그러자 내가 판을 엎었다는 걸 눈치챈 아세리안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쿠키가 입에 안 맞으신가 보네요. 제가 다른 쿠키를 준비해 드릴게요. 방금 전에 인사 나눈 4급 주천사 포르도엘이 쿠키를 굉장히 잘 굽거든요."

이 상태로 계속되어봤자 좋을 게 없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하지만 미카엘은 여전히 미소 지으며 날 바라볼 뿐이었다.

"원래 식당 메뉴에 없는 걸 주문할 때는 음식 가격이 비싸지기 마련이죠. 그러니 없는 메뉴라고 손님을 쫓아내는 것보단, 적어도 가격을 들어보고 결정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미카엘이 웃으며 말했다.

'흠.'

순간 아세리안이 해준 얘기가 떠올랐다.

―미카엘님은 언제나 정면 돌파를 하시는 분이에요. 절대 잔꾀를 부리지 않아요. 그러면서도 계속 결과를 만들어 내신다는 점에서 무척 무서운 분이랄까요?

'이런 뜻이었군.'

한마디로 내가 혹할 만한 조건을 준비해 왔으니, 일단 들어나 보라는 뜻.

나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밑지는 게 많은 장사라, 가격도 듣기 전에 제가 우는소리를 했군요. 실례했습니다."

아마 미카엘도 내가 이전에 냈던 성명서를 확인했을 것이다.

나를 설득하기 위해선 내가 어떤 부분에서 부담을 느끼고, 무엇 때문에 불참을 선언했는지에 대해 체크하는 게 필수였으니까.

'그러면 들어볼 가치가 있지.'

나는 차분하게 앉아, 이어질 미카엘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자 손가락 세 개를 펼치는 미카엘.

그녀가 곧장 한 개를 접으며 입을 열었다.

"지구 성계의 우승 메리트가 전혀 없다는 것에 공감합니다. 그래서 지구 성계에 한하여 새로운 특전을 부여하는 것이 아닌, 지금 가지고 있는 최강의 성계 특전을 업그레이드 시켜 주겠습니다."

말을 마친 미카엘이 또 한 개의 손가락을 접었다.

"기존에 성계 대항전을 기획하던 라파엘 팀과 얘기가 됐던 대로, 플레이어 렌이 보유하고 있는 스킬 중 세 개를 성계 대항전에서만 일시적으로 업그레이드 시켜 주겠습니다. 이건 플레이어 렌에게만 부여되는 것이며, 다른 지구 출신 플레이어들에겐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손가락을 접었다.

"성계 대항전에서 펼쳐질 다섯 개의 경기 중, 집단전으로 치러지는 경기가 없음을, 제 신성을 걸고 약속합니다."

말을 마친 미카엘이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는 여유롭게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

순간 무거운 침묵이 접객실을 눌렀다.

'자신감이 넘친 이유가 있었어.'

머릿속이 복잡했다.

성계 대항전을 뛸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파격적인 조건에 나도 모르게 생각이 많아진 것이다.

'일단 차분하게 정리해 보자.'

잠시 뜸을 들인 나는 미카엘을 향해 입을 열었다.

"손님을 앞두고 이런 말씀 드리기 그렇지만, 혹시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미카엘이 아세리안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향이 무척 좋군요. 저는 티타임을 즐기지 않지만, 이렇게 좋은 차라면 충분히 시간을 내서 즐길 가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입에 맞으시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혹여나 손님 대접을 소홀히 했다고 얘기가 날까 염려스러웠답니다. 아, 참. 중간계 관리 위원회도 그대로 관리하신다고 들었어요. 요즘 무척 바쁘실 텐데······."

'나이스, 아세리안.'

때마침 아세리안이 화제를 전환하며 미카엘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덕분에 차 한 잔 마실 시간을 번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머리를 굴렸다.

내가 성계 대항전을 거절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로, 수적 열세를 딛고 우승할 확률이 무척 낮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로, 설사 그 확률을 뚫고 우승한다고 해도 메리트가 전혀 없다는 것.

그런데 미카엘은 지금, 그 두 개를 모두 없애주겠다고 한 것이다.

'나쁘지 않은데?'

플래티넘 등급 스킬 세 개, 그리고 집단전 없음.

이 두 가지 조건이 지구의 우승 확률을 대폭 늘려주었다.

지금도 최상위 랭커 중 한 명인데, 플래티넘 등급 스킬 세 개가 추가된다?

'상위 리그에서 내 창을 받아내는 사람이 없을 거야.'

아예 내 기량 자체가 달라질 것이다.

누구도 쉽게 날 상대할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된다면 성계 단위로 부딪히는 경우가 없다는 가정하에, 내가 꿀릴 이유가 없었다.

'최강의 성계 특전을 업그레이드 시켜주는 것도 마찬가지지.'

하위 리그처럼 도박사들이 예측한 비율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이거야말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확률도 제법 되니까 충분히 시도해볼 만 해졌다고 볼 수 있었다.

생각을 정리하고 고개를 들자, 여유롭게 나를 바라보고 있던 미카엘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에선 아무런 감정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쉽지 않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차를 음미 중인 미카엘.

그녀에게서 숨길 수 없는 당당함이 느껴졌다.

'노회한 정치인 같군.'

미카엘은 내가 받아들일 것임을 확신하고 있던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성계 대항전의 향방이 걸린 자리에서 저렇게 여유로울 리 없었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어.'

"조건이 한 개만 더 추가된다면 당장이라도 계산서에 올려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

내 말에 지금까지 조용히 앉아 있던 파사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조건만 해도 과한데, 내 욕심이 지나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카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차를 홀짝였다.

별다른 말이 없는 걸 보니, 한번 들어나 보겠다는 뜻인 것 같았다.

그에 용기를 얻은 내가 입을 열었다.

"만약 지구가 우승하고, 제가 MVP를 따내면 승급샷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

접객실에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거칠어진 파사엘의 숨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반면에 입가의 미소가 더 진해진 미카엘.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쯧. 무리였나.'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지.

탁―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미카엘이 차를 모두 비운 뒤,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아세리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팀을 창립한 지 얼마나 되셨죠?"

"이제 2년 조금 넘었습니다."

"2년이라······. 팀 투지는 고작 2년 만에 고위 플레이어를 품게 되겠군요."

"······!"

미카엘의 말에 나는 눈을 치켜떴다.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실상 승낙한다는 것과 다름없는 대답이었으니까.

"팀에 소속된 플레이어들이 열심히 해주고, 콜로세움을 운영하는 많은 분들이 저희 팀을 예쁘게 봐주신 덕분이죠."

미카엘의 말에 아세리안이 겸양을 떨며 말했다.

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수락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사실, 미카엘이 많이 양보해준 거나 다름이 없었다.

앞서 언급한 세 개만 해도, 남들이 들으면 과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다행히 미카엘이 기분 상해 하지 않고 받아들여 준 덕분에 이 협상이 성사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저야말로. 메뉴에 없는 걸 계산서에 올려줘서 고맙군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미는 미카엘.

나는 그녀의 손을 공손히 맞잡았다.

차갑고, 딱딱하다.

무인武人의 손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해서 성계 대항전에 대한 출전이 확정되었다.

―빅 뉴스! 상위 리그 성계 대항전이 다시 열린다!

―공식 오피셜 등장! 열두 성계가 모두 참가하는 성계 대항전!

―새로운 상위 게임 메이커, "성계 대항전을 시작으로 상위 리그 정상화"

―2주 후에 열리는 상위 성계 대항전. 모두들 축제를 즐길 준비 되었는가?

└상위 리그 재오픈까지 시간 좀 걸릴 거라고 했는데 ㄷㄷ 불과 두 달 만에 다시 열리는 거 아님? 운영이 될려나?

└와ㅋㅋㅋㅋ 추진력 미쳤네 ㅋㅋㅋㅋㅋㅋ

└오오 쿠 훌린 vs 렌 다시 기대해도 되는 거야? 응? 응?

└공식 오피셜 떴음. 렌 참가 확정! 이번에야말로 진짜 성계 대항전 열듯 ㅋㅋㅋ

└안 그래도 수준 떨어지는 하위 리그만 보느라 지루했는데 개이득!

└이번에도 같잖은 이유로 물거품 되면 진짜 불 지르러 간다 ㅡㅡ

공식 오피셜이 등장하자마자 커뮤니티가 들끓었다.

상위 리그부터 초월 리그까지 운영이 멈춘 상태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하위 리그를 보던 신들이 열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 인해 또다시 플레이어 분석부터 시작해서 어느 성계가 우승할 것인지에 관한 게시글들로 도배되었다.

"형. 이번에는 저도 같이 참가하네요, 헤헤."

오피셜을 보고 집무실로 찾아온 주창범이 활짝 웃었다.

하위 리그 때는 상위 천 명 안에 들지 못해서 참가하지 못했었던 주창범.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게, 잔뜩 기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같이 경기를 뛰겠군요."

"맞아요. 여왕개미 잡을 때죠? 벌써 2년이 다 되어 가네요. 그래서 그런가 성계 대항전이 너무 기대돼요."

주창범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지났네.'

회귀한 이후 앞만 보고 달려오다 보니, 시간이 흐르는 걸 느낄 때마다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었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후우. 감상에 빠질 필요 없지.'

나는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냈다.

성계 대항전은 2주 뒤에 열린다.

이번에도 내 목표는 우승.

'반드시 해내야 해.'

특전 뿐만 아니라 고위 리그 승급까지 걸려 있다 보니, 무척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아, 참. 이거 받으세요."

나는 인벤토리에서 오래된 서적 한 권을 꺼내 주창범에게 건넸다.

"이건······?"

이전에 마교의 서고에서 얻은 플래티넘 등급 스킬, 극한심결이었다.

"주창범씨한테 주려고 구해둔 스킬인데, 주는 걸 깜빡하고 있었네요. 성계 대항전에서도 잘해봅시다."

사실은 내가 사용하려고 했던 스킬이었다.

플래티넘 등급이 애 이름도 아니고, 누군가한테 줄 만큼 내가 널널한 상황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주창범에게 준 이유는 하나였다.

'미카엘에게 받은 어드밴티지를 최대한으로 활용하려면 1티어 등급 스킬을 익혀야 해.'

세 개의 스킬을 플래티넘 등급으로 업그레이드 해준다고 했다.

하지만 현재 내게 존재하는 1티어 등급의 스킬은 단 두 개.

마침 얼마 전에 몽환의 달빛을 얻으며 스킬 슬롯을 추가로 얻었으니, 거기에는 정신 계통의 스킬을 채워 넣을 생각이었다.

가면 때문에 더 이상 이성을 잃을 순 없었으니까.

플래티넘 등급의 스킬이라면 구하기 어려울 테지만, 1티어 등급 정도라면 잘 맞는 스킬을 충분히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나랑 궁합이 안 맞는 스킬이기도 하고.'

내가 사용하는 것보다, 얼음 속성 위주로 가지고 있는 주창범에게 더 잘 맞을 거다.

"헉. 형, 이거 스킬 옵션이 왜 이래요?"

스킬의 정보를 확인한 주창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플래티넘 등급 스킬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이겠지.'

그림자 표식을 처음 받을 때 내가 보였던 반응과 비슷했다.

"지금 갖고 있는 1티어 스킬들보다 더 고위 스킬이거든요."

내 말에 주창범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그런 게 있었군요. 중개 거래소에선 한 번도 못 본 거 같은데."

"하위 리그나 상위 리그 수준에선 보기 어려운 스킬입니다. 금액으로 따지면 5천만 골드 정도 할 테니까요."

"헉! 형, 그렇게 비싼 스킬을······ 제게 주셔도 괜찮은 거예요?"

숨을 들이켜는 주창범.

말끝이 떨리는 게, 무척 놀란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나는 피식 웃었다.

"제가 전에 그러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 누구보다, 주창범씨에게 거는 기대가 큽니다. 상위 리그에서 만족하실 건 아니겠죠."

"아······ 물론이죠. 전 어떻게든 초월 리그까지 올라가고 말 거예요."

굳게 다짐하듯 말하는 주창범.

나는 녀석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같이 갑시다. 고위 리그까지."

건물을 높게 쌓기 위해선 기둥이 튼튼해야 한다.

지금 내가 투자한 모든 것들이 언젠가.

'어떻게든 초월 리그로 올라가고 말겠어.'

단단한 기둥이 되어 나를 받쳐줄 것이다.

"네, 형. 악착같이 올라갈게요."

주창범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손을 공손히 맞잡았다.

< 160화. 격변의 물결(8) > 끝

< 161화. 격변의 물결(9) >

며칠 후.

기다리던 알림창이 등장했다.

[성계 대항전 '지구'의 참가 멤버로 선정되었습니다.]

[참가 멤버는 각 성계의 상위 100 명까지 입니다.]

[성계 대항전은 총 5개의 경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최종 우승 시 <차원 특전>을 획득합니다.]

[성계 대항전의 아레나에서는 사망하더라도 부활합니다.]

[1인당 총 5개의 경기에 참가할 수 있으며, 참가 인원 제한은 없습니다.]

[차원 특전은 도박사들이 예상한 비율에 따라 효과가 달라집니다.]

―황혼의 깃발 쟁탈전

―상위 리그 최강자

―흑막의 미로

―악마 사냥

―공성전

[상위 리그 성계 대항전에 참가하시겠습니까?]

[Yes / No]

눈앞에 뜬 성계 대항전의 초대장.

'나쁘지 않긴 한데······.'

게임명을 체크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미카엘이 호언장담했던 것과 달리, 약간 우려스러운 게임이 두 개나 보였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황혼의 깃발 쟁탈전.

개인전 형식으로 진행이 되겠지만, 결국 최후의 1인이 깃발을 가지고 있으면 성계가 승리하는 개념일 것이다.

그렇다면 성계 단위로 모여서 깃발을 지키려고 할 건 불을 보듯 뻔한 상황.

집단전처럼 흘러갈 가능성이 높았다.

'공성전도 문제지.'

성을 혼자서 공략할 리 만무하니, 이것 또한 성계 단위로 뭉쳐서 진행될 것이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지구 입장에선 두 경기나 손해 보게 될 것이고.

'흐음.'

하지만 분명 미카엘이 분명 집단전으로 치러지는 경기가 없음을, 신성을 걸고 약속했다.

―신성을 걸고 하는 약속은 의심할 필요도 없어요. 절대 어길 수 없는 맹약이거든요.

―만약 어기면 어떻게 됩니까?

―가진 신성을 모두 잃고 사망하게 돼요. 아버지와 하는 약속이랑 마찬가지니까 말장난도 통하지 않죠.

이후 아세리안에게 물으니, 절대 어길 수 없는 약속이라고 했다.

그렇다는 건.

'미션의 룰을 통해 충분히 제어가 가능하다는 거겠지.'

직접 만나본 미카엘은 절대 멍청하지 않았다.

적어도 자기가 뱉은 말은 책임질 수 있을 것이다.

띠링!

[상위 리그 성계 대항전 초대장을 수락하셨습니다.]

[성계 대항전은 앞으로 2주 후, 하이블러드나이트 140 경기를 대신해서 열리게 됩니다.]

그렇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Yes를 눌렀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앞으로 2주.'

남은 시간 동안 실전 감각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한 번의 대충돌이 있어서 그런지, 마계가 잠잠해요. 그 덕에 상위 리그와 고위 리그, 초월 리그가 열리지 않는데도 긴급 미션이 떨어지지 않은 거죠."

최근, 우리 팀에 다양한 능력자들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가장 첫 번째로 포르도엘.

"덕분에 천계는 요즘 굉장히 조용한 편이에요. 타락했을지언정 오대천사 중 한 명이었던 라파엘님이 서거했으니, 추모의 분위기도 강하구요."

아세리안이 천계의 정보통이라고 칭했던 것처럼, 그녀는 내가 천계의 분위기에 대해 물어보자 기다렸다는 듯 얘기하기 시작했다.

"최근 주신회 분위기도 심상치 않대요. 의장을 맡고 있는 환웅님과, 이전 의장이었던 오딘님이 사사건건 부딪치고 계신 모양이에요."

팜을 어슬렁거리며 사용인들과 장난치는 모습만 봐 왔기에 내심 아세리안이 왜 포르도엘을 안 굴리나 싶었는데, 놔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포르도엘이 돌아다니면서 정보를 구해 오는 수집원의 역할을 맡는 거였어.'

새삼 포르도엘이 다르게 보였달까.

그리고 두 번째로, 중개 거래소 체크를 맡고 있는 사용인, 클로에.

"현재 중개 거래소에 등록되어 있는 정신 계열 스킬은 총 171개 입니다."

"음. 제가 전에 스킬을 등급별로 나누는 표 드렸죠? 거기서 1티어 등급에 해당하는 건 몇 개입니까."

"명경지수, 전념, 정신의 벽. 이렇게 세 개 있습니다."

현재 나는 피의 각성에 대한 부작용 때문에 정신 계열 스킬이 필요한 상황.

아무래도 매일같이 중개 거래소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혹시 알고 있는 게 있을까 싶어 물어봤는데 결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그걸 다 기억하고 있는 겁니까?"

내 물음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몰라서 각 종류별 아이템과 스킬들을 따로 분류해두고 있었습니다. 여신님께서 지시하셨거든요."

솔직히 제법 감탄했다.

'아세리안이 생각보다 일을 잘하는데?'

물론 지시한 대로 그걸 착착착 분류하고 머릿속에 집어넣은 클로에도 대단하지만, 사소한 디테일들까지 알아서 잡아 준 아세리안 또한 만만치 않았다.

"추천해줘서 고맙습니다. 요즘 생활은 어떻습니까?"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손깍지를 낀 채 물었다.

전에 약속한 대로, 클로에에게 두 명의 사용인을 추가로 붙여주었다.

새로 붙은 사용인들이 2교대로 근무를 서고, 클로에가 그들을 관리 감독하게 한 것이다.

그 덕분인지, 최근 그녀에게선 이전의 꾀죄죄한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배려해주신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클로에가 쑥스럽다는 듯 배시시 웃었다.

"다행이군요. 필요한 일이 있으면 또 부르겠습니다. 가서 일 보세요."

"네!"

집무실을 나서는 클로에를 뒤로하고, 나는 중개 거래소를 열었다.

'한 번 볼까.'

그리고는 그녀가 찝어준 세 개의 스킬을 찾았다.

[<스킬북:명경지수 >]

[패시브]

[어떤 상황에서도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게 도와주는 스킬입니다.]

[정신 스텟이 +10% 상승합니다.]

[자신의 정신 수치에 비례하여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기운을 상쇄 시킵니다.]

[정신 10 스텟 당 3%의 기운 상쇄]

[최대 30%까지 상쇄 시킵니다.]

[판매가 : 1,120,000 G]

[<스킬북:전념 >]

[패시브]

[집중력이 크게 상승합니다.]

[정신 스텟이 +30% 상승합니다.]

[판매가 : 1,090,000 G]

[<스킬북:정신의 벽>]

[패시브]

[자신의 정신 수치에 비례하여 정신 계열 공격을 상쇄 시킵니다.]

[정신 스텟이 +20% 상승합니다.]

[정신 10 스텟 당 5%의 공격 상쇄]

[최대 50%까지 상쇄 시킵니다.]

[판매가 : 1,780,000 G]

스킬의 설명을 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에가 추천해준 스킬들 모두, 나쁘지 않았다.

정신 계열 스킬들이다 보니 금액도 그렇게 비싸지 않았고.

'단순히 정신 스텟을 올려주는 건 전념이 제일 좋네.'

정신 스텟이 많이 상승하는 순서대로 나열하자면 <전념 >, <정신의 벽>, <명경지수 > 순이었다.

하지만 나는 세 개의 스킬 중 <정신의 벽>을 리스트에서 제외시켰다.

내겐 어차피 대천사의 눈물이라는 아이템이 존재하기 때문에 정신 계열 공격 옵션은 쓸모가 없었다.

'마기의 오염에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고.'

그렇다면 두 개의 스킬밖에 남지 않는 상황.

나는 <명경지수 > 쪽이 더 끌렸다.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기운을 상쇄 시킨다는 건, 마기에도 효과가 있지 않을까?'

마기 또한 마력이나 신성력처럼 하나의 기운일 테니까.

가능성은 충분했다.

'아세리안한테 물어봐야겠군.'

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아세리안의 집무실로 향했다.

"안우진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들어오세요!"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문을 열고 들어가니, 막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거는 아세리안의 모습이 보였다.

"외부 일정이 있어서요.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중개 거래소에 올라와 있는 명경지수라는 스킬 한 번만 봐주시겠습니까?"

"네, 잠시만요."

내 부탁에 아세리안이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내가 어떤 스킬을 봐 달라고 부탁했을까, 흥미 어린 눈빛이었다.

"······!"

그러던 아세리안이 눈을 크게 치켜떴다.

나에게는 무척 긍정적인 반응이나 마찬가지.

"어떻습니까?"

한 줄기 기대를 갖고 물었지만, 아세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뿅! 하고 그녀의 손 위에 스킬북 한 개가 생겨날 뿐.

그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자, 아세리안이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스킬북을 내밀었다.

"······?"

"이게 제 대답이에요."

띠링!

[<스킬북:명경지수 >를 얻었습니다.]

"아······. 그럼 마기의 오염에 효과가 있는 겁니까?"

"네, 맞아요. 이게 있으면 부작용이 한결 줄어들 거예요."

그녀의 말에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긴가민가했는데, 그녀가 확답을 내려준 것이다.

기쁜 소식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여기요."

아세리안이 스킬북과 함께 귀걸이 한 개를 건넸다.

"다 만들어졌군요."

"네, 맞아요. 여기 보이죠? 이걸 귀에 뚫고, 뒤쪽 나사를 채우면 아무리 격렬하게 움직여도 떨어지지 않도록 제가 부탁했어요."

"세심하게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세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숙였다.

'타이밍이 좋군.'

띠링!

[<추가 스킬 슬롯><스킬:명경지수 >를 채워 넣었습니다.]

[해당 스킬은 달빛 아래에서만 활성화 됩니다.]

부작용을 줄일 수 있는 스킬도 찾았고, 핵심 아이템이라고 할 수 있는 대천사의 눈물도 때마침 완성됐다.

이제 남은 건.

'실전 감각만 끌어올리면 돼.'

내가 계획한 대로 딱딱 흘러가는 느낌.

뭔가 예감이 좋았다.

―열두 성계, 모든 플레이어들이 초대장을 수락했다! 남은 건 즐기는 것 뿐.

―상위 게임 메이커, "상위 리그 정도라면 최강의 성계를 논할 만 하다."

―D-day 3. 역대급 이벤트에 모든 신과 천사들의 이목이 쏠리다.

└하.. 이게 뭐라고 안도의 한숨이 나오냐 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ㄹㅇ 이번에도 불발 나는 거 아닌가 조마조마했음ㅋㅋㅋ

└무림 가즈아아아아악!

└고 쿠 훌린 고! 미드가르드 가잣!!

└ㅅㅂ 시간 ㅈㄴ 안 가네ㅡㅡ 개인적으로 상위 리그 최강자가 누구일지 궁금ㅋㅋㅋㅋ

└1.몽연 2.쿠 훌린 3.을지문덕 4.렌 5.주소월 본다.

└이번에도 지구에 전 재산 배팅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미친놈 스틱스강 온도 체크해줌 ㅎ2

성계 대항전이 다가올수록 조용하던 천계가 들끓었다.

그사이 나는 이번에 성계 대항전에 출전하는 플레이어들과 함께 대련장에서 살다시피 하고 있었다.

나를 제외하고, 팀 투지에서 성계 대항전에 출전하는 플레이어는 두 명.

"뭐야, 왜 더 강해졌어!"

"후우. 악이 형 고생 많았어요. 앞으로 어디 가면 팀 투지 넘버5라고 소개하고 다니세요."

"야, 다시 해!"

새로 얻은 플래티넘 등급 스킬인 극한심결의 숙련도를 올리기 위해 대련 중인 주창범과.

"얏!"

"아직도 하체가 흔들려요! 아무리 세게 뻗어도 하체가 흔들리면 정확히 때릴 수 없어요!"

그리고 당소소와 박투술을 훈련 중인 카이로시아였다.

'카이로시아가 뽑힌 건 좀 의외인데.'

코드 제로 전에서 고위 마법을 뻥뻥 때려대며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그녀는 아직 정식으로 상위 리그 경기를 뛴 적이 한 번도 없는 신입생이나 마찬가지.

그런데도 탐리엘 성계 상위 100명 안에 들어간 것이다.

물론 주창범이 더 늦게 올라오긴 했지만, 그래봤자 지구는 세 명 뿐.

누가 됐든 상위 리그만 올라오면 뽑힐 수밖에 없었다.

'게임 메이커라고 해서 스텟을 볼 수 있는 건 아닌가 본데?'

단순 스텟만 봤을 때, 카이로시아는 평균 이하의 수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뽑혔다는 건, 단순히 인상 깊은 100명을 선정했다는 거나 마찬가지.

'차라리 잘 됐어.'

성계 대항전은 죽더라도 부활한다.

그렇기에 리스크 없이 상위 플레이어들과의 전투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안우진님, 준비됐습니다."

무장을 한 채 내게 다가오는 지그.

그의 등 뒤로 루치아노와 제이스, 고건하, 수호의 모습이 보였다.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고맙긴요. 안우진님께 받은 걸 생각하면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지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할까요."

"예!"

그렇게 시작된, 내 실전 감각을 끌어올리기 위한 대련.

한동안 팀 투지의 특수중력대련장이 들썩거렸다.

그리고, 그날이 왔다.

우우우우우우웅―

옅은 충격파와 함께, 세 개의 게이트가 생성되었다.

"세 분 모두,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길 바랄게요."

"안우진님! 이번에 아세리안님이 지구에 거액을 베팅했대요, 헤헤. 화이팅!"

"멋진 활약을 기대하겠다. 잘 다녀오거라."

공터에 모인 수많은 플레이어들 사이로, 아세리안과 두 천사가 우릴 배웅해 주었다.

'또 지구에 베팅했다라······.'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는 게이트로 향했다.

"······."

고개를 돌리자 나를 바라보고 있는 주창범과 카이로시아.

나는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우우우우우우웅―

그리고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띠링!

[대기실에 입장했습니다.]

[성계 대항전은 총 5경기가 치러지며, 가장 많은 승리를 차지한 1개의 성계에 차원 특전이 주어집니다.]

[차원 특전은 도박사들이 예측한 우승 확률에 따라 보상이 달라집니다.]

[공동 1위일 경우, 해당 성계에 한하여 추가 게임이 펼쳐집니다.]

오랜만에 보는 새하얀 공간이 날 맞아주었다.

< 161화. 격변의 물결(9) > 끝

< 162화. 절망의 편린(1) >

5평 크기의 대기실.

텅 빈 방 한쪽에 푹신푹신해 보이는 소파가 혼자 덩그러니 놓여져 있었다.

'대기실은 변한 게 없네.'

하위 리그 때와 똑같은 모습.

대기실을 한번 둘러본 나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띠링!

[플레이어 '렌' 님께 <성계 대항전 특전>이 도착했습니다.]

[<성계 대항전 특전>]

[성계 대항전 진행 중에 한해서, 플레이어 '렌'이 보유 중인 스킬 중 세 개를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시킵니다.]

[특전을 적용시킬 스킬을 선택해주세요.]

[1. 마력 상쇄]

[2. 명경지수]

[3. 뇌신雷身]

그와 동시에 등장한 알림창.

그걸 보자 입꼬리가 살살 올라갔다.

기다리던 특전이었는데, 입장하자마자 바로 나온 것이다.

'고민할 필요도 없지.'

알림창을 한번 슥- 훑은 나는 1, 2, 3번을 차례로 눌렀다.

어차피 선택지랄 게 존재하지 않기에, 내 손길엔 아무런 망설임도 들어있지 않았다.

띠링! 띠링! 띠링!

[<스킬:마력 상쇄><스킬:마력 갑옷>으로 강화되었습니다.]

[<스킬:명경지수 ><스킬:열반 >으로 강화되었습니다.]

[<스킬:뇌신 ><스킬:뇌정 >으로 강화되었습니다.]

'후우. 플래티넘 등급만 여섯 개라니.'

묘한 희열감이 온몸을 잠식했다.

지금 가지고 있는 뇌룡의 포효와 그림자 표식, 천뢰십보 모두 어마어마한 옵션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스킬들은 얼마나 대단할까?

얼마나 기상천외한 능력들을 가지고 있을까?

부푼 마음을 안고, 서둘러 옵션들을 체크했다.

[<스킬:마력 갑옷>]

[패시브]

[자신의 마력 수치에 비례하여 마력이 깃든 공격을 방어합니다.]

[마력 10 스텟 당 5%의 마력 방어]

[최대 50%까지 방어할 수 있습니다.]

[방어한 마력의 10%는 상대방에게 '반사'합니다.]

스킬 설명을 확인한 나는 눈을 치켜떴다.

마력 갑옷으로 업그레이드되면서 달린 옵션은 딱 하나 뿐.

하지만 그 하나가 너무 대단했다.

'데미지를 반사시킨다고?'

주창범과의 대련에서 나를 쩔쩔매게 한 능력이 있다면 단연 반사 데미지다.

장기전으로 끌고 가는 것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렸으니까.

녀석이 뿜어대는 한기와, 내가 가지고 있는 뇌전이 동시에 나한테 향할 때의 그 기분이란.

'굉장히 찌릿찌릿했지.'

주창범이 가지고 있던 반사 데미지는 고작 1%.

그런데 마력 갑옷은 무려 10%나 반사한다.

'장기전으로 끌고 가면 무조건 유리하게 풀어갈 수 있어.'

그 효용을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스킬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스킬:열반 >]

[패시브]

[어떤 상황에서도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게 도와주는 스킬입니다.]

[정신 스텟이 +30% 상승합니다.]

[자신의 정신 수치에 비례하여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기운을 상쇄 시킵니다.]

[정신 10 스텟 당 9%의 기운 상쇄]

[최대 90%까지 상쇄 시킵니다.]

'이것도 나쁘지 않아.'

열반 스킬은 마력 갑옷처럼 특별한 옵션이 추가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기존에 10% 상승이었던 정신이 30%로 더 올랐고, 영향을 미치는 기운의 상쇄도 30%에서 90%로 상승했다.

한마디로, 마기의 오염이 10분의 1로 감소한다는 것.

말이 90%지, 뇌신 강림을 썼을 때 내가 체력에 허덕이던 걸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옵션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 정도라면 피의 각성을 발동시켜볼 만 하겠는데?'

가면의 부작용에 대한 걱정을 한시름 놔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킬:뇌정雷精 >]

[패시브]

[마력에 아주 강한 뇌전의 기운이 흐릅니다.]

[뇌전의 힘은 상대에게 파고들어 조금씩 상처를 남깁니다.]

"······?"

앞선 두 개의 스킬과 다르게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고작 이게 끝이라고?

정말?

순간 잘못 본 줄 알았다.

업그레이드된 뇌정에서 달라진 건 딱 하나.

뇌전의 기운에서 아주 강한 뇌전의 기운으로.

딱 네 글자 더 추가되었을 뿐이었다.

'뭔가 숨겨진 게 더 있나?'

잠시나마 그런 생각이 들었을 정도.

'후우. 일단 판단 보류.'

가볍게 한숨을 내쉰 나는 상태창을 닫았다.

아무래도 직접 경기에 들어가서 사용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띠링!

[예측한 우승 확률을 공개합니다.]

[무림 : 10.8%] [미드가르드 : 10.5%] [졸본 : 10.3%] [나카츠쿠니 : 9.5%]

[알프헤임 : 9.2%] [웨스테로스 : 8.9%] [바빌론 : 8.6%] [발리노르 : 8.2%]

[하이퍼보리아 : 7.7%] [티르너노그 : 7.3%] [탐리엘 : 7.2%] [지구 : 1.8%]

[지구의 경우 확률이 1.8%로, 우승 시 기존에 가지고 있던 차원 특전이 모든 스텟 +17%로 업그레이드 됩니다.]

[우승 성계와 상관없이, 가장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준 한 명의 MVP 에게는 고유 스킬 1개가 랜덤으로 주어집니다.]

메시지를 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승 시 모든 스텟 +17%.

한마디로, 지구에 걸린 보상은 모든 스텟 +7%.

전체적으로 하위 리그 성계 대항전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다른 게 있다면 딱 한 가지.

'이번에는 우승 성계에 상관없이 MVP를 뽑네.'

보상만 보자면 차원 특전보다 MVP로 받는 스킬이 훨씬 크다.

그렇기에 승패에 연연하지 않고, MVP만을 노리는 플레이어들도 꽤 존재할 것 같았다.

'나야 더 좋지.'

우승에 관심 없는 플레이어들이 많아질수록, 지구가 우승할 확률도 높아질 테니까.

그나저나.

'생각보다 지구에 배팅한 신들이 많은 모양인데?'

지구의 우승을 찍은 관객의 숫자는 1.8%.

물론 여전히 다른 성계들보다 한참 낮은 수치지만, 0.1%였던 하위 리그 때와 비교하자면, 18배나 높아진 셈이었다.

지구엔 고작 세 명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 이름값이 많이 오른 모양이군.'

주창범이나 룬이라는 플레이어는 상위 리그의 신입생들.

결국 나 하나만 바라보고 지구에 베팅한 신들이 제법 많다는 뜻이었다.

띠링!

[성계 대항전 경기 일정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1경기. 흑막의 미로(개인 PvP)]

[2경기. 공성전(단체 PvP)]

[3경기. 악마 사냥(개인 PvM)]

[4경기. 상위 리그 최강자(개인 PvP)]

[5경기. 황혼의 깃발 쟁탈전(개인 PvP)]

[잠시 후 1경기, 흑막의 미로가 시작됩니다.]

[준비하십시오.]

알림창과 함께 대기실 한쪽 벽에 하얗게 빛나는 문이 생겼다.

'후우. 시작해볼까.'

소파에서 일어난 나는 가볍게 몸을 풀었다.

그리고는 차분하게 숨을 내쉰 후, 대기실을 나섰다.

띠링!

[지금부터 1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1경기 : 서바이벌(개인 PvP)]

[게임명 : 흑막의 미로]

[맵 : 적벽의 미로(중)]

[관객 수 : 8,794,177 명]

[승리 조건 : 최후의 1인 생존자]

[붉은 결계를 넘어서는 순간 자동으로 탈락 처리됩니다.]

[해당 경기에는 룰이 숨겨져 있습니다.]

[현재 생존자 수 : 1,103 명]

[3초 후 경기가 시작합니다.]

경기장 안으로 들어오니, 온 사방에 넝쿨로 치렁치렁 뒤덮인 붉은 돌담이 세워져 있었다.

높이는 5미터 정도.

뻥 뚫린 회색빛 하늘 사이에 붉은 막 같은 게 느껴졌다.

'데스 라인인가 본데.'

아무래도 이 정도 높이의 벽 쯤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설 수 있다 보니, 그걸 방지하기 위한 모양.

[2초 후 경기가 시작합니다.]

[Tip. 이번 경기에서는 <지도 >를 활성화 시킬 수 있습니다.]

고개를 들자 내 머리 위에 <72 > 라고 쓰여 있는 게 보였다.

'이게 뭐지?'

하위 리그에선 어느 성계인지 적혀 있었는데 지금은 숫자만 덜렁 있을 뿐이었다.

거기다 내 몸을 감싸고 있는 미세한 막도 느껴졌다.

몸을 움직여 보니, 따로 내 움직임을 제약하진 않았다.

그저 내 몸을 감싸고만 있을 뿐.

'뭔가 되게 복잡한데?'

평범한 서바이벌 전투인 줄 알았는데, 숨겨진 룰들이 제법 많은 것 같았다.

[1초 후 경기가 시작합니다.]

[Tip. 시간이 지날수록 데스 라인이 좁아집니다. 틈틈이 <지도 >를 잘 확인하세요.]

나는 돌담으로 다가가 손으로 툭툭 쳐 보았다.

'여기도 결계가 처져있는 것 같은데.'

건드릴 때마다 미세한 마력의 유동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벽을 뚫고 그 너머로 이동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결계 같았다.

[경기 시작!]

파바바바바밧! 스르릉! 찰그락―

시작 콜과 동시에 벽 너머에서 무수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맵을 볼 수 있다고 그랬지?

나는 어딘가로 이동하는 대신, 가장 먼저 맵부터 활성화 시켰다.

그러자 정사각형 모양의 미로 위로 어지럽게 꼬여있는 길들과, 색깔 별로 나눠져 있는 49개 구역이 보였다.

'미로는 그냥 맵의 일환일 뿐인가 보네.'

하긴, 이번 경기는 서바이벌.

미로를 탈출할 필요가 없으니, 맵을 제공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내가 있는 곳이······.'

맵의 한 구석에 초록색깔 점이 보였다.

딱 하나 뿐이니, 아마 내 현재 위치일 것이다.

'일단 외곽으로 빠져야겠군.'

현재 내 위치는 30구역.

이런 서바이벌 미션에선 필연적으로 중심부에 가장 많은 플레이어들이 몰린다.

그렇기에 생존을 위해선 미로 외곽을 돌아다니는 게 나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미로를 따라 43구역 방향으로 향했다.

[<666 ><창 >으로 <802 >를 처치했습니다.]

[<1 ><검 >으로 <87 >을 처치했습니다.]

[<703 ><마법 >으로 <54 >를 처치했습니다.]

[<100 ><검 >으로 <982 >를 처치······.]

'이건 또 뭐야?'

상태창 좌측 하단에 처음 보는 알림창이 떴다.

대충 몇 번이 누구를 무엇으로 죽였다는 건데, 그걸 본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런 시스템을 집어넣은 거지?'

굳이 플레이어의 닉네임이 아닌, 번호로 표현할 필요가 있나?

그런 의문과 함께 43구역으로 향할 때였다.

파바밧―

'누가 이쪽으로 오고 있어.'

발소리를 들은 나는 곧장 창을 고쳐잡았다.

미로 형태다 보니, 이곳은 쭉 뻗은 일자 형 통로밖에 없다.

적과 마주치는 순간 따로 도망칠 수 있는 공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콰과과과과과과광!

미로 어딘가에서 터지는 굉음을 뒤로하고, 나는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ㄱ'자형 코너를 돌며 만나게 된 적.

"······?"

"······?"

서로 죽여야 하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순간 상대와 나, 둘 다 눈을 치켜떴다.

'뭐야.'

적의 모습이 얼굴, 팔, 다리 할 것 없이 온통 새까맣게 보였다.

붉은 노을 아래로 보이는 것은 오로지 눈동자와 무기 뿐.

마치 추리 만화에서 등장하는 범인처럼 검은 막 같은 게 가려져 있는 모습이었다.

'이거였군.'

잠깐 의아해하던 나는 이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차렸다.

집단전은 없음을 호언장담하던 미카엘.

성계 대신 쓰여져 있는 숫자.

그리고 눈동자 말고는 새까맣게 보이는 적.

'아예 누가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 서바이벌을 펼치는 거였어.'

제공된 정보는 딱 세 개 뿐이다.

상대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 숫자, 그리고 무기.

팀플레이를 하기 위해선 제공된 최소한의 정보를 통해, 상대방이 누군지 파악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쁘지 않은데?'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에게 없는 무기가, 나에겐 하나 더 존재했으니까.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루시보덴]

[성향 : 중용]

[근력 : 185(+?)] [민첩 : 191(+?)] [체력 : 171(+?)]

[정신 : 94(+?)] [지력 : 41(+?)] [마력 : 157(+?)]

[각성 능력 : <특급검술 > <특급살기 > <특급마나운용 > <고급박투술 > <상급치료술 >]

[업적 특전 : 발리노르의 검귀劍鬼]

바로 악마의 눈이라는 무기가.

'이 정도면 충분히 상대할 만 하겠어.'

나는 곧장 인벤토리에 벽력섬전을 집어넣으며, 오랜만에 사슬낫을 꺼내 들었다.

현재 내 근민체는 피의 강화 특전이 발동되지 않았음에도 261, 329, 203.

직전에 펼쳐진 코드 제로에서 스텟이 크게 오른 덕분에, 저 정도 상대 쯤은 스텟만으로도 압도할 자신이 있었다.

'굳이 내가 몇 번인지 알려줄 필요가 없지.'

좌측 하단에서는 끊임없이 킬 로그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 중에선 눈에 띄는 숫자 몇 개가 존재했는데, 대표적으로 1번과 666번, 그리고 44번.

아마 녀석들이 상위 리그 최상위 랭커들일 것이다.

'다른 녀석들도 킬 로그를 계속 체크하고 있을 게 분명해.'

숫자와 무기를 통해 누가 몇 번인지 대충 예상하고 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다른 무기들을 사용함으로서 혼동을 주려는 생각이었다.

물론 위험한 순간이 오게 되면 곧바로 창을 꺼내 들겠지만.

후욱― 후욱―

나는 사슬낫을 돌리며 눈앞의 적, 루시보덴을 주시했다.

"하. 사슬낫이라······."

그러자 웃음기 섞인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만난 것에 대해 굉장히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이유 또한 대충 짐작이 됐다.

'아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겠지.'

최상위 랭커 중에서 사슬낫을 사용하는 플레이어는 없으니까.

녀석의 여유로운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사냥을 시작해볼까.'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검붉은 뇌전이 사방을 잠식해 들어갔다.

< 162화. 절망의 편린(1) > 끝

< 163화. 절망의 편린(2) >

"무, 무슨······!"

뇌전이 뿜어져 나오는 소리에 몸을 잘게 떠는 루시보덴.

녀석에게서 변조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나쁘지 않은데?'

주위를 살펴보자 내 몸을 덮고 있는 흑막이, 뇌전까지 감싸고 있는 게 보였다.

한마디로 이 뇌전까지 상대에겐 그저 까맣게 보인다는 것.

아마 녀석은 검은 안개가 내 주변에서 두둥실 떠다니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러다 보니, 뇌전의 굉음이 더 위협적으로 다가올 테고.

"후우. 후우."

한 걸음씩 천천히 거리를 좁히는 루시보덴.

녀석의 발걸음에서 긴장감이 가득 배어 나왔다.

내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으니 탐색전을 벌이려는 모양.

'그렇겐 안 되지.'

나는 그대로 빙글빙글 돌리고 있던 사슬낫을 날렸다.

녀석과 달리 난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상황.

굳이 시간을 질질 끌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상대가 탐색전을 펼치며 뜸 들이는 그 잠깐의 순간을 이용해야 한다.

후욱! 후욱! 쐐애애애애액! 챙!

"끄아아악!"

사슬낫이 검과 부딪히자, 녀석이 몸을 움찔 떨었다.

'제법 찌릿찌릿할 거야.'

주창범이나 모용악은 내 뇌전을 보고 마치 몸에 벼락이 관통하는 느낌이라고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뇌신 스킬이 플래티넘 등급으로 업그레이드 되며 훨씬 더 강력해졌다.

심지어 뇌정에는 '아주 강한 뇌전'이 깃든다는 설명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동안 스킬이 업그레이드 되면서 보였던 위용을 생각하면, 저 뇌전은 아마 평범하지 않을 것이다.

'대충 이전보다 2배 이상은 강해졌겠지.'

챙! 콰지직! 챙! 콰지지지직!

사슬낫을 회수한 나는 다시 녀석에게 무아지경으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미, 미친······!"

사슬낫을 막아낼 때마다 녀석의 몸이 과장되게 떨렸다.

고기 타는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지금쯤 통증 때문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을 것이다.

파바바바밧!

그때, 이대로는 답이 없다고 판단한 루시보덴이 빠르게 질주했다.

'어딜!'

나와의 거리를 좁혀, 어떻게든 검을 휘두르려는 속셈.

나는 그대로 몸을 뒤로 빼며 계속해서 사슬낫을 휘둘렀다.

어차피 내 민첩이 훨씬 높은 데다가, 사슬낫이라는 무기의 특성상 등을 돌려 달아나면서도 공격을 휘두를 수 있다.

"으윽!"

그렇기에 녀석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일방적으로 내게 처맞을 뿐.

챙! 쨍그랑!

"크윽, 씨발······."

고통을 참지 못한 루시보덴이 결국 검을 놓쳤다.

'잘 가라.'

서걱!

그걸로 이 싸움은 끝이었다.

띠링!

[<72 ><사슬낫 >으로 <851 >을 처치했습니다.]

사슬낫이 한번 춤을 추자, 녀석의 머리가 허공을 날았다.

붉은 선혈이 사방을 적시고, 녀석의 몸을 감싸고 있던 검은색 막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그리고 등장하는 녀석의 얼굴.

'이놈이었어?'

코드 제로 경기에서 본 적 있는 녀석이었다.

당시 나랑 같이 전방에서 적 지상군을 죽이던 돌격대 중 한 명이었으니까.

'후우.'

하늘을 올려다보자, 주변을 옅게 비추던 붉은 노을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손을 내려다보자, 여전히 내 몸을 감싸고 있는 흑막이 느껴졌다.

'나쁘지 않은데?'

플래티넘 등급 스킬만 여섯 개.

스텟도 남들보다 높은 데다가, 악마의 눈을 통해 정보의 우위도 가져갈 수 있다.

거기다 우려했던, 성계 단위로 똘똘 뭉치는 일도 존재할 수가 없다.

이거야말로······.

'내가 기다리던 맵이지.'

경기장 외곽으로 나서는 내 마음속에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이 정도라면 이번 경기.

'충분해.'

지구가 가져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꽈과과과광! 콰아아아아앙! 꽈광! 꽝! 꽈과과광!

'저긴 여전히 징하게 싸우는군.'

중심부에서 수많은 플레이어들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마법 폭격으로 인한 폭발음이 귀를 찔렀다.

저 멀리, 검은 무언가가 솟구치고 있었다.

'모두들 중심부로 모이고 있는 모양인데.'

원래 이런 서바이벌에서 외곽으로 향하는 건 기본이다.

적을 덜 만날수록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걸 이 자리에 모인 플레이어들이 모를 리가 없다.

그럼에도 중심부로 향한다는 건.

'MVP를 노리고 있는 거겠지.'

어차피 죽어도 부활하니까 리스크도 덜하고, 차원 특전보다 MVP로 받게 될 보상이 훨씬 크다.

덕분에 평소라면 보일 수 없는 플레이들이 연출되고 있는 것 같았다.

'운이 좋네.'

반면에 나는 지구의 우승과 MVP를 동시에 노리는 상황.

굳이 저 사이에 껴서 실력을 뽐내고 있을 필요가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 당장은 필요 없다.

결국 마지막엔 나도 중심부로 향할 것이다.

'마지막까지 살아남는다는 것만으로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아껴뒀던 한 방을 터트려, 저 스포트라이트를 모두 가져올 것이다.

└와 씨 ㅋㅋㅋㅋㅋㅋㅋ 이거 개 재밌는데? 이런 경기도 나쁘지 않은듯 ㅋㅋㅋㅋㅋ

└ㅇㅈㅇㅈ 처음에는 누가 누군지 몰라서 뭔 게임이 이러냐 싶었는데, 몇 번이 누구인지 예측하는 거 ㅈㄴ 꿀잼 ㅋㅋㅋㅋ

└666번 창 개 잘 쓰네 ㅋㅋㅋㅋ 딱 보니 쿠 훌린 아니면 렌인듯. 상위 리그에서 저 정도 수준의 창술사는 그 둘 뿐임 ㅋㅋ

└1번 누구냐? 제발 을지문덕이라고 해줘 ㅠㅠ 졸본 가즈아아아아!

└44번은 딱 보자마자 알겠음 ㅋㅋㅋㅋ 주소월 ㅎ2

└완벽한 개인전이라 이런 경기에선 최상위 랭커가 많은 쪽에서 이길 수밖에 없음 ㅎㅎ 그런 의미에서 무림 가볍게 첫 승 챙기고 가자.

└어휴 ㅂㅅ들. 어차피 몽연 미만 잡임;

└근데 72번 누구임? 상위 리그에서 사슬낫 쓰는 애는 처음 보는 거 같은데?

챙! 콰지직! 챙! 채챙! 콰지지직!

움찔!

"큭······. 레······."

서걱!

내 검이 소름 끼치는 피륙음을 남기며 적의 목을 갈랐다.

[<72 ><검 >으로 <581 >을 처치했습니다.]

[경기 진행 시간 : 01:38:55]

[현재 생존자 수 : 827 명]

그러자 목을 감싼 채 고꾸라지는 581번.

녀석의 얼굴에 허망하다는 표정이 한가득 배어 나왔다.

뇌전 데미지로 인해, 마지막 순간 내가 누구인지 알아챈 것 같았다.

'후우.'

다양한 무기로 적들을 도륙하며 이동한 지 어느덧 1시간 반째.

그사이 나는 30구역에서 44구역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띠링!

[<스킬:뇌룡의 포효>를 비활성화 합니다.]

적을 죽인 나는 곧바로 뇌룡의 포효를 해제시켰다.

후반에 모아놨던 한 방을 터트릴 것이기에 체력 안배가 중요한 상황.

비전투 상황에서 굳이 뇌룡의 포효를 켜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가면으로 체력을 회복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니까.

'아직도 800명이 넘게 남았네.'

상태창을 힐끗 살핀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꽈아아아아앙! 꽈과과광! 꽈아아아아앙!

중심부에선 여전히 폭음이 끊이질 않았다.

확실히 상위 리그의 랭커들만 모아놓다 보니, 저런 격전지 속에서도 사망자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미로의 최외곽인 43구역으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파바바바바바바바밧!

누군가 내가 있는 방향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후우.'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털어냈다.

발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다.

녀석의 스텟이 무척 높다는걸.

미로의 'ㄱ'자 통로를 꺾은 나는, 이내 발소리의 주인과 마주할 수 있었다.

"호오."

머리 위에 쓰여진 <100 >이라는 숫자.

지금까지 만났던 상대와 마찬가지로 흑막에 감싸인 플레이어.

검을 들고 있던 녀석이 눈을 빛냈다.

"킬 로그를 통해 활약상은 잘 봤다. 다양한 무기를 활용하더군. 나를 상대론 무슨 무기를 사용할 거지? 그 채찍인가?"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아시카가 요시미츠]

[성향 : 호전]

[근력 : 178(+?)] [민첩 : 181(+?)] [체력 : 174(+?)]

[정신 : 99(+?)] [지력 : 38(+?)] [마력 : 186(+?)]

[각성 능력 : <일검살 > <대장군 > <특급마나운용 > <고급박투술 > <하급치료술 >]

[업적 특전 : 초신속]

'역시 최상위 랭커였어.'

마주친 상대는 나카츠쿠니 성계 출신의 네임드.

아시카가 요시미츠였다.

'근데 스텟이 왜 이렇게 낮아?'

특이한 점이 있다면, 최상위 랭커 중 한 명임에도 불구하고 녀석의 스텟이 생각보다 높지 않다는 것.

저런 스텟으로 최상위 랭커 자리를 차지할 수 없을 테니, 아마 체력이나 마력의 이유로 활성화시키지 않은 스킬들이 있는 것 같았다.

당장 나만 해도 체력 소모를 이유로 뇌룡의 포효를 발동시키지 않았으니까.

"제법 잘 싸우는 것 같다만, 여기까지다. 운이 좋지 않았다고 생각해라."

녀석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딱 봐도 나를 개무시하고 있었다.

'운이 좋지 않았다라······.'

나는 인벤토리를 열어, 벽력섬전을 꺼내 들었다.

지금까지 다양한 무기를 이용해 적을 죽여온 상황.

한 번쯤 창을 꺼내 들어도 다른 플레이어들이 이상함을 느끼진 못할 것이다.

띠링!

[<뇌룡의 포효>를 활성화 합니다.]

[근력 스텟과 민첩 스텟이 +25% 상승합니다.]

'누가 운이 안 좋았는지 한번 보자고.'

그리고는 녀석에게 곧장 달려들었다.

"이번엔 창인가? 재밌겠군."

그러자 여유롭게 거리를 좁히며 마력이 깃든 검을 휘두르는 아시카가.

채앵! 콰지지지직!

"흡!"

뇌전에다가, 마력 갑옷으로 인해 반사된 데미지까지 받게 된 녀석이 몸을 흠칫 떨었다.

예상하지 못한 데미지가 들어오자 당황한 것 같았다.

아마 지금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겠지.

'별거 아니군.'

황급히 뒤로 물러서는 아시카가.

챙! 콰직! 챙! 콰지지직!

나는 곧장 녀석에게 따라붙으며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었다.

지금 잡은 이 승기를 절대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쐐애애애애애애액!

'뭐지?'

녀석의 몸 곳곳에서 검은 안개가 뭉실뭉실 떠다녔다.

아시카가가 휘두른 검에서 뿜어져 나온 한 줄기 검은 초승달이 나를 향해 쇄도했다.

채앵!

그 공격을 막아내자, 한 줄기 바람이 내 이마를 스쳐 지나갔다.

불꽃처럼 뜨겁지도, 그렇다고 싸늘한 냉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는 건.

'바람 속성인 모양이군.'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아시카가 요시미츠]

[근력 : 223(+?)] [민첩 : 307(+?)] [체력 : 252(+?)]

[정신 : 129(+?)] [지력 : 49(+?)] [마력 : 242(+?)]

악마의 눈으로 녀석을 다시 확인하자, 최소 30% 이상 오른 스텟이 보였다.

내 예상대로, 지금까지 스킬을 발동시키지 않고 있었다는 뜻.

바람 속성 스킬을 가지고 있는 것 답게, 녀석의 민첩 스텟이 크게 상승해 있었다.

"후우. 들은 것과 다르게 음흉한 구석이 있었군. 설마하니 최상위 랭커인 걸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녀석이 한숨을 내쉬며 검을 들어 올렸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녀석에게서 긴장이란 게 느껴졌다.

반면에 나는.

'왜 이렇게 약해?'

내가 지금까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최상위 랭커 중 한 명이라길래 적어도 천세운 정도의 수준은 될 줄 알았는데, 막상 만나본 아시카가는 그보다 한참 떨어지는 수준이었다.

"다시 한번 놀아보자!"

아시카가가 검을 하늘로 치켜세운 채 빠르게 쇄도해 들어왔다.

딱 봐도 내려치기를 하겠다는 모습.

나는 돌진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외곽을 돌며, 녀석의 공격에 대비했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전투.

챙! 콰지직! 싸아아! 챙! 채챙! 콰직! 쐐애액!

검과 창이 부딪힐 때마다 칼날 같은 바람과 뇌전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

짧게 끊어지는 녀석의 호흡.

흑막에 가려진 녀석에게서 당황이라는 감정이 느껴졌다.

자신의 본실력을 발휘했는데도 여전히 밀린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모양.

띠링!

[<벽력 >이 발동됩니다.]

창날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콰지지지지지직!

강하게 응축된 뇌전의 기운이 주변의 소리를 집어삼켰다.

황급하게 뒤로 빠지는 아시카가.

곧장 섬전을 사용해 녀석의 코앞으로 이동한 나는.

"······!"

'너야말로 운이 안 좋았다고 생각해라.'

그대로 녀석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띠링!

[<72 ><창 >으로 <100 >을 처치했습니다.]

그리고 뜨는 킬 콜.

'후우.'

묘한 기분이었다.

'최상위 랭커가 이렇게 쉽다고?'

물론 객관적으로만 봤을 땐 절대 약한 전력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껏 만나온 상위 플레이어들 중에선 손에 꼽을 만큼 대단한 스텟과 기량을 가지고 있었달까.

달라진 게 있다면.

'내가 너무 강해진 거였어.'

사실, 피의 각성은 내게 커다란 고민거리를 안겨 주었지만, 그에 대한 반대급부도 존재했다.

스텟이 어마어마하게 오르면서, 내 기초 스텟이 상위 넘버링 수준으로 올라서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에서 스킬 슬롯을 플래티넘 등급으로 가득 채웠으니, 어지간한 수준으로는 나를 감당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후우.'

나는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염원만 하던 고위 리그가.

'드디어.'

어느새 성큼 다가와 있었다.

└??????????????????????????????

└내가 지금 본 거 실화임? 뭐임?

└혹시 72번이랑 100번이랑 싸우는 거 보신 분?

└왜. 뭔데. 나도 얘기해 줘. 무슨 일인데?

└72번이 100번 가지고 놀다가 죽였는데, 100번이 아시카가였음.

└????????????????????????

└72번이면 걔 아니냐? 사슬낫 쓰다가 검 쓰다가 활 쓰다가 하던 애?

└맞음 ㅇㅇ 채찍 쓰다가 아시카가 상대할 땐 창 꺼내서 죽임.

└아 시발 ㅡㅡ 아시카가 ㅂㅅ새끼저런새끼를믿고나카츠쿠니에베팅한내가병신이다. 나가 뒤져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시카가 거품이었누ㅋㅋㅋㅋ

└72번 도대체 누구임? 아니 어느 성계임??? 아시는 분 공유점ㅠ

└ㅋㅋㅋㅋ 나카츠쿠니에 전 재산 베팅한 놈들 화들짝 놀라는 거 보소 ㅋㅋㅋㅋ

아시카가를 죽인 나는 43구역 방향으로 향했다.

띠링!

[상현달이 떴습니다.]

[<로브:달의 메아리> 가 달의 힘을 빌려와 모든 스텟이 3% 상승합니다.]

[<목걸이:몽환의 달빛> 이 달의 힘을 빌려와 모든 스텟이 10% 상승합니다.]

'어?'

눈앞에 등장한 알림창을 본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왜 추가 스킬 슬롯은 발동하지 않는 거지?

내가 설명을 잘못 봤나?

나는 서둘러 몽환의 달빛의 아이템 설명을 확인했다.

[<목걸이:몽환의 달빛>]

[영면에 빠진 달의 여신이 착용하던 목걸이. 달빛의 힘을 빌려 쓸 수 있다. 주인이 죽으면서 능력 일부가 봉인되어 있는 상태다.]

[달의 크기에 비례하여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최대 15%]

[달빛 아래에 있으면 1분당 체력이 1%씩 회복된다.]

[달빛 아래에 있으면 1분당 마력이 1%씩 회복된다.]

[착용 시 스킬 슬롯이 한 개 추가된다. 단, 달빛 아래에서만 추가된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

[등급 : 준신화]

아이템에는 분명 달빛 아래에 있으면······.

'설마?'

나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깜깜한 밤하늘.

뜬 지 얼마 안 됐는지, 달은 보이지 않았다.

'달빛 아래에 있으면이라······.'

아마 달이 뜨긴 했는데, 5미터 붉은 돌담에 가려져 있는 것 같았다.

한마디로, 현재 나는 달빛 아래에 있지 않다는 것.

'생각보다 발동 조건이 까다로운데.'

아마, 달빛을 직접 받게 되는 순간 추가 슬롯이 발동되는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지.'

새로 얻은 스킬인 열반을 발동시켜보고 싶었는데, 조금 더 기다리는 수밖에.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해서 이동할 때였다.

파바바바바밧!

'또 적이군.'

들려오는 발소리에 나는 숨을 죽인 채 조용히 단검을 꺼내 들었다.

잠시 기다리자, 'ㄴ'자 통로의 코너를 도는 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완드를 들고 있는 걸 보니, 마법사인 모양.

머리 위에는 <99 >라는 숫자가 쓰여있었다.

'한 번에 죽여야 돼.'

나는 자세를 낮춘 채 살금살금 적을 향해 이동했다.

[불빛!]

적 마법사가 시전한 마법에, 순간 좁은 일자 형 공간이 환한 빛에 잠식되었다.

"······!"

"······!"

그리고 마주친 눈동자.

'젠장.'

그 찰나의 순간, 나는 망설이지 않고 적에게 달려들었다.

당황할 필요 없다.

마법을 영창하기 전에, 단번에 목을 꿰뚫으면······."

"어? 안······. 삐―님?"

"······?"

변조된 목소리.

보이는 거라곤 검은 실루엣과 눈동자 뿐.

하지만 나는 순간 몸을 멈칫했다.

내가 쥔 단검이 상대의 목젖 앞에서 멈춰 섰다.

익숙한 향기가 났다.

'설마.'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삐―삐이―?"

뭐야?

분명 카이로시아 이름을 불렀는데 왜 이래?

< 163화. 절망의 편린(2) > 끝

< 164화. 절망의 편린(3) >

[이름 : 카이로시아 아타나신느 폰 퀘이사]

[근력 : 76(+?)] [민첩 : 89(+?)] [체력 : 88(+?)]

[정신 : 101(+?)] [지력 : 188(+?)] [마력 : 197(+?)]

[각성 능력 : <천재 > <원소통달 > <대마도사 > <마나의 사랑을 받는 자> <고속영창 > <최상급치료술 > <마력관통 > <최상급박투술 > <상급검술 >]

악마의 눈으로 이름을 확인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 날 뻔했군.'

하마터면 무방비 상태의 그녀를 죽일 뻔한 것이다.

그건 그렇고.

'얜 무슨 생각으로 방어도 안 한 거야?'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카이로시아는 내가 단검을 겨눈 채 달려들었는데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 내가 그녀의 향기를 알아채지 못했더라면, 분명 그대로 죽었겠지.

제법 많은 시간 대련을 한 덕분에 카이로시아의 실력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네. 저 삐― 맞아요."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카이로시아.

삐처리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카이로시아는 내가 그녀의 이름을 언급했다는 걸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나인 걸 안 거지?'

나야 뭐 냄새라든가, 악마의 눈으로 확인하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그녀는 나처럼 감각이 뛰어나지도, 그렇다고 상대를 체크하는 스킬을 가진 것도 아닌 상황.

그런데도 날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엔 확신이 가득했었다.

"어떻게 날 알아본 거야?"

내 물음에 카이로시아가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그냥······."

"······."

"눈동자만 봤는데도 삐―님인 걸 알 수 있었어요."

"······?"

'이게 도대체 뭔 말이야?'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단검을 품속에 갈무리했다.

한마디로 자기도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모르겠다는 뜻.

간혹 본인이 의식하기도 전에 무언가를 알아차리는 경우가 있긴 했으니, 굳이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무사했네."

"당연하죠. 저 은근히 세거든요? 오는 길에 벌써 세 명이나 죽였어요."

허리에 양손을 올린 채 으쓱하는 카이로시아.

'하긴.'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코앞에서 무기를 휘두르며 전투를 펼치는 근접 물리 계열과 다르게, 마법 계열은 스텟의 차이가, 꼭 강함을 뜻하는 척도가 되는 건 아니었다.

주문도 영창해야 하고, 각 상황마다 어떤 마법을 쓰느냐에 따라서 효율 차이가 극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혹, 하위 넘버링 마법사가 상위 넘버링 마법사를 쓰러트리는 일도 존재했다.

'내가 카이로시아라는 마법사를 너무 우습게 생각했군.'

거기다 그녀는 고속영창, 원소통달 같은 다양한 각성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내가 혹독하게 굴린 덕분에 수비도 무척 좋아진 상황.

잠시 고민해 보니, 그녀를 쉽게 죽일 수 있는 플레이어는 별로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자만하지 말고. 중심부 쪽으로도 가지 마. 어지간하면 어그로를 끌 수 있는 마법은 지양하고."

나는 습관적으로 그녀에게 잔소리를 했다.

"알겠어요."

"후우, 그래. 그럼 수고."

그리고는 등을 돌려, 43구역으로 향하려고 했다.

"저기······."

"왜?"

"혹시 저랑 같이 다니지 않으실래요?"

"······."

한마디로 팀 플레이를 하자는 건데······.

'괜찮을까?'

카이로시아의 제안에 잠시 고민한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주창범이라면 모를까, 그녀와 함께 다니는 건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면 적이나 마찬가지지.'

최종적으로 둘이 살아남게 되면, 결국 서로에게 검을 겨눠야 한다.

또한 이 정도로 익명성에 공을 들인 미션에서 팀플레이를 한다?

'관객들에게 외면받을 수도 있어.'

MVP 경쟁에서 크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관객들은 반칙하는 플레이어를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미안."

그렇기에 나는 단호하게 얘기했다.

굳이 여지를 줘봤자 서로에게 곤란할 것이다.

"음······. 네, 알겠어요. 무운을 빌게요."

평소 냉기가 풀풀 날리던 것과 달리, 카이로시아가 잔뜩 실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그걸로 대화는 끝.

우린 서로 반대 방향으로 헤어졌다.

나는 43구역 방향으로.

그리고 카이로시아는 30구역 방향으로.

[경기 진행 시간 : 01:59:12]

[현재 생존자 수 : 699 명]

서걱!

43구역에 도착한 나는 36구역 방향으로 이동하며 플레이어들을 사냥했다.

'이제 좀 긴장을 풀어도 되겠군.'

최외곽이다 보니, 생각보다 플레이어의 숫자가 많지 않았다.

여기서 시간을 죽이다가, 4시간 쯤 남았을 때 중심부로 이동하면 적당한 타이밍에 MVP 경쟁을 노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때였다.

띠링!

[지금부터 1시간 후 새로운 데스 라인이 펼쳐집니다.]

[모든 플레이어 분들은 지도를 확인해 주세요.]

'뭐라고?'

새롭게 뜬 알림창을 본 나는 곧장 지도를 펼쳤다.

그러자 이전까진 보이지 않던 붉은 실선이 곳곳에 칠해져 있었다.

데스 라인으로 설정된 구역은 총 24개.

49개로 나눠진 구역의 최외곽이 전부 데스 라인으로 설정되는 것 같았다.

'맵이 점점 작아지나 본데.'

아마 딱 한 번만 맵이 줄어들진 않을 것이다.

최종적으로 단 한 명이 남아야 경기가 끝나는 상황.

플레이어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에 비례해서, 맵도 점점 작아질 게 분명했다.

관객들 입장에선 이 넓은 맵을 수색하고 돌아다니는 것만큼 지루한 것도 없을 테니까.

'어쩔 수 없군.'

잠시 혀를 찬 나는 곧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1시간 뒤라고는 하지만, 언제 어떤 상황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는 노릇.

미리 데스 라인을 피해 30구역으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1 ><검 >으로 <666 >을 처치했습니다.]

[<731 ><활 >으로 <1 >을 처치했습니다.]

[<56 ><곡도 ><17 >을 처치했습니다.]

[<1,002 ><마법 >으로 <547 >을 처치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뭐야?'

킬 로그를 확인한 나는 눈을 치켜떴다.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던 몇 개의 넘버가 죽었다는 콜이 올라와 있었다.

1번이라던가, 666이라던가, 547이라던가.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는데?'

중심부로 몰려든 최상위 랭커들이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다가 죽은 모양이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ㅈㄴ웃기넼ㅋㅋㅋ 쿠 훌린이랑 몽연이랑 싸우다가 나란히 죽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 547번이 을지문덕이었어???? 지금까지 72번인 줄 알았는데..?

└아 씨발 개 병신새끼ㅡㅡ 저런 새끼를 믿고 베팅한 내가 잘못이지 하.. 좀 안전하게 플레이하지, 왜 중심부에서 나대다가 쳐 죽고 ㅈㄹ이야ㅡㅡ

└윗 댓 / ㄱㅊㄱㅊ 몽연이 죽었지만 아직 무림엔 주소월이랑 예천화가 남았음. 침착해 형.

└닥쳐 ㅂㅅ아. 난 쿠 훌린 죽어서 빡친 거니까.

└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드가르드에 걸었어, 형? 그러게 랭커가 세 명이나 있는 무림에 걸지~ㅋㅋㅋ 여긴 몽연 죽어도 주소월이랑 예천화가 있다구 ㅋ

└쿠 훌린 욕하지 마라. 최상위 랭커라는 타이틀 달고 외곽에 숨어다니는 것보다 쿠 훌린처럼 화끈하게 불태우는 게 더 낫다ㅋㅋ

└ㅋㅋㅋㅋㄹㅇ 몽연도 존나 멋있긴 하더라. 개 상남자 ㅋㅋㅋㅋㅋ

└MVP는 몽연 아니면 쿠 훌린, 을지문덕. 이 셋 중 하나라고 봄 ㅋㅋㅋㅋ

└그럼 지금 누구누구 남은 거지? 일단 몽연, 을지문덕, 쿠 훌린 죽었고. 어? 지금 카시아랑 랜슬롯, 앤키두도 죽음 ㅋㅋㅋㅋㅋ

└아시카가도 죽었음. 72번한테 ㅎ

└보자.. 남은 게.. 일단 44는 주소월이고.

└시르카, 예천화, 헥토르, 렌. 최상위 랭커는 이렇게 다섯 명 남았지.

└형이 딱 말해 준다. 44번 주소월, 56번 시르카, 72번 렌, 707번 예천화, 1,004번 헥토르다. 반박 시 내 말이 맞다.

└????? 56번이 왜 시르카임 ㅋㅋㅋㅋㅋㅋㅋ 딱 봐도 1004번이 시르카구만 ㅋㅋㅋ

└아 스킬 임팩트도 안 보이고, 까맣게만 돼 있으니까 예상하기가 어렵네;

└72번이 예천화라는 거에 내 왼쪽 손목 건다. 참고로 현재 내 여자친구다.

한동안 23구역으로 향하며 플레이어들을 학살하고 있을 때였다.

챙! 채챙! 쐐애애애애액! 콰과과과과광!

"이걸 피하다니 제법이군요. 모두들 수준이 높아서 놀아볼 만 하겠어요, 후후."

"젠장! 괴물 같은 자식!"

"어어어! 잠깐 타임! 타임! 일단 저년부터 죽이고 싸웁시다!"

"타임은 개뿔! 어차피 개인전인데 한 놈이라도 더 잡아먹고 죽어야지!"

미로 한쪽에서 대규모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제법 많이 모였네.'

갑작스럽게 데스 라인이 펼쳐지다 보니, 외곽에서 빠져나오던 플레이어들과 원래부터 23구역을 어슬렁거리던 플레이어들이 맞부딪힌 모양이었다.

'슬슬 창을 써야겠군.'

생존자 숫자가 많이 줄어든 데다가, 랭커라고 할 만한 플레이어도 많이 죽은 상황.

나는 인벤토리에서 창을 꺼내 들고,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향했다.

띠링!

[달빛의 힘으로 인해 <몽환의 달빛> 능력이 활성화 됩니다.]

[1분당 체력과 마력이 1%씩 회복됩니다.]

[<스킬:열반 >이 활성화 됩니다.]

[정신 스텟이 +30% 상승합니다.]

[정신 이상 기운 상쇄율 : 90%]

때마침 붉은 돌담 너머로 환한 달빛이 나를 비추었다.

정신 스텟이 상승하며, 옅게 감돌던 긴장감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후우.'

나쁘지 않은 기분.

'바로 가볼까.'

나는 곧바로 코너를 돌아, 전투가 펼쳐지는 곳으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챙! 채챙! 쐐애애애액!

"윽!"

"나를 더 재미있게 해줄 사람 없나요?"

그리고 보게 된, 아슬아슬하게 전투를 이어 나가는 7명의 플레이어들.

난전을 펼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쓰러져 있는 시체가 하나도 없었다.

확실히 상위 리그 탑 클래스들만 모아둔 것 답게 수준 높은 전투였달까.

띠링!

[<스킬:뇌룡의 포효>가 활성화 됩니다.]

[근력과 민첩 스텟이 +25% 상승합니다.]

'딱히 주의해야 할 녀석은 없······.'

악마의 눈으로 한 명 한 명 살펴보던 나는 순간 멍하니 입을 벌렸다.

"······."

챙! 채챙! 챙! 쐐애애애애애액!

각종 병기로 도배하고 있는 플레이어들.

그들 너머로 익숙해 보이는 녀석이 한 명 있었다.

<44 >

'하.'

뭐랄까.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너무나 익숙한 움직임이었다.

후욱!

팔랑팔랑 부채를 휘두르자, 검은 초승달 모양의 강기剛氣가 뿜어져 나온다.

"으윽! 쥐새끼처럼 잘도 도망다니는군!"

휘익! 휘익!

다른 플레이어들이 어떻게든 검을 휘두르기 위해 돌진했지만, 허공을 가르는 소리만 들려올 뿐.

44번의 움직임은 마치 바람과 같았다.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자유롭고, 종잡을 수가 없다.

그렇기에, 다른 플레이어들은 44번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꼭 다시 한번 만나고 싶었지.'

문득, 1회차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한계에 직면해, 좌절에 빠져있던 나날들.

두 눈을 바치고, 초감각을 얻어 상위 리그에 입성했던 기억.

그리고 또다시 직면하게 된 고위 리그의 벽.

―어디에 숨었나요? 이런 날씨에 숨바꼭질이라니, 좋지 않네요.

―그나저나 대단하네요. 상위 리그 네임드 플레이어들도 나를 상대로는 얼마 버티지 못했는데, 설마 두 눈도 보이지 않는 분이 이렇게 오래 버틸 줄이야.

―정말 터프한 분이시군요. 깜짝 놀랐네요. 싸움을 좋아하시는 분 같은데, 아마 저승에 가서도 싸우실 일이 많으실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가져갈 때 잃어버리지 말라고 가슴에 박아드리는 거니까 고. 맙. 게. 생각하세요.

그 절망스럽던 순간에 마주쳤던, 한 명의 플레이어.

그리고 그때 느꼈던 무력감까지.

'정말 기분 더러웠지.'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주소월]

[성향 : 무정無情]

[근력 : 231(+?)] [민첩 : 308(+?)] [체력 : 257(+?)]

[정신 : 141(+?)] [지력 : 71(+?)] [마력 : 229(+?)]

[각성 능력 : <풍술사 > <청풍백화공淸風白花功 > <명인 > <특급마나운용 > <고급박투술 > <상급치료술 >]

[업적 특전 : 고귀한 혈통]

"젠장, 또 한 명이 추가됐군."

"72번이면 이런저런 무기 쓰던 녀석인데!"

"혹시 저 녀석도 네임드는 아니겠지?"

격렬하게 싸우는 플레이어들을 뒤로하고 나는 주소월에게 터벅터벅 걸어갔다.

'후후.'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런 미로에서 꿈에 그리던 상대를 만나다니.

왠지, 그때 부채로 맞았던 부위가 욱씬욱씬 거리는 느낌이었다.

'운이 좋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높은 스텟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지금 상태로도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었으니까.

'1회차 때와는 완전히 달라졌지.'

이제는 내가 그녀에게 절망을 선사할 때였다.

마침 플래티넘 등급 스킬 여섯 개 모두 활성화 된 상황.

싸아아아아아아아―

내 몸에서 스멀스멀 살기가 뻗어 나왔다.

이렇게 넓은 맵에서,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다니.

'한번 놀아보자고.'

아무리 생각해도 운이 정말 좋았다.

< 164화. 절망의 편린(3) > 끝

< 165화. 절망의 편린(4) >

머리 위에 <44 >란 숫자를 달고 사방으로 돌아다니는 주소월.

그녀는 콜로세움이 너무 좋았다.

'시원해.'

스스로를 바람이라 생각했다.

바람은 자유로워야지, 어딘가에 속박되는 순간 생기를 잃는다.

그렇기에 주소월은 콜로세움에 들어왔을 때 비로소 자신의 삶이 즐겁다고 느꼈다.

답답하던 황궁에 비하면 이곳은 매 순간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려주었으니까.

'그땐 정말 따분했지.'

황녀라는 신분은 그녀에게 족쇄나 마찬가지였다.

자유로이 밖을 돌아다닐 수 없다.

안에서도 누군가 항상 따라붙었다.

자신은 그저, 궁 내부에 핀 아름다운 꽃 한 송이일 뿐.

'조금 더 돌아다녀 봐야겠네.'

주소월이 익힌 무공은 궁 생활의 지루함에 못 이겨 돌아다니다가, 황궁 서고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된 청풍백화공.

내공으로 바람을 칼처럼 사용하는 그 신묘함 덕분에, 칼과 마법이 난무하는 콜로세움 안에서도 그녀를 위협하는 존재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어디 재미있는 상대가 없을까?'

칼끝이 자신에게 향하고 있다는 긴장감.

온갖 공격들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외줄 타기를 하던 그 짜릿함.

그리고 자신을 위협하던 고수를 죽이면서 느꼈던 희열감.

그 모든 것들이 오히려 주소월에게 '살아있다'는 감각을 선사했다.

그 기분에 취한 주소월은 장난스레 귀밑머리를 간질이는 한 줄기 산들바람처럼, 플레이어들을 톡, 톡 건드리고 다녔다.

'흐응, 심심해.'

하지만, 그녀는 근래 다시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강해질수록, 그런 느낌을 주는 고수가 현저히 줄어들었으니까.

후욱! 쐐애애애액!

부채를 휘두르자, 내공이 깃든 바람의 칼날이 사방을 휘저었다.

"커헉······!"

"젠장······. 이런 개사기 기술이······."

[<44 ><부채 ><908 >을 처치했습니다.]

[<44 ><부채 ><497 >을 처치했습니다.]

그 공격을 막아내지 못한 플레이어들이 난도질 되어 허물어 내렸다.

이제는 그저 무의미한 학살일 뿐.

'좀 강한 녀석 어디 없을까?'

자신을 긴장하게 하는 강자.

그런 존재와 다시 한번 싸워보고 싶었다.

가령, 긴급 미션 당시 마주쳤던 쿠 훌린이라든가, 현재 상위 리그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는 몽연, 을지문덕 같은.

그런 생각을 하며 미로를 어슬렁거리고 있을 때였다.

챙! 채챙! 챙! 챙! 챙!

'여기 제법 많네?'

장난감을 발견한 고양이처럼, 주소월은 곧장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향했다.

싸우고 있는 플레이어의 숫자는 다섯.

검, 일본도, 단검, 창 등등 다양한 무기를 들고 있었다.

'재밌겠는데?'

보이는 거라곤 머리 위에 있는 숫자, 들고 있는 무기 뿐.

그러나 주소월은 설레는 마음으로 플레이어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숫자가 제법 되는 만큼, 이들 중 그녀의 심장을 뛰게 해줄 플레이어가 존재할지도 몰랐으니까.

"모두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네요?"

그녀의 등장에 난전을 펼치고 있던 플레이어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44번이면······."

"젠장, 랭커잖아!"

익명성이 보장된 경기지만, 간혹 그녀를 알아보는 녀석들이 있었다.

킬 로그도 나오는 데다가, 그녀처럼 특이한 무기를 사용할 경우엔 몇 번이 누구인지 대략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맞아요, 제가 삐―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지금 뭘 해야 하는지도 알겠죠?"

주소월이 활짝 웃으며 부채를 휘둘렀다.

닉네임을 언급하면 삐― 처리가 되지만, 모두 알아들었을 것이다.

쐐애애애애액! 콰과과과과과광!

주소월이 춤을 출 때마다, 사방으로 바람의 칼날이 뻗어나갔다.

"오러······?"

"강기!"

각 성계 상위 100명만 모아둔 경기답게, 플레이어들은 여유롭게 그녀의 공격을 막아냈다.

"이걸 피하다니 제법이군요. 모두들 수준이 높아서 놀아볼 만 하겠어요, 후후."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이곳에 있는 누구도 그녀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이라는 걸.

그러나 주소월은 기대를 잃지 않았다.

다섯 명을 동시에 상대한다면, 조금이라도 긴장감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젠장! 괴물 같은 자식!"

"어어어! 잠깐 타임! 타임! 일단 저년부터 죽이고 싸웁시다!"

"타임은 개뿔! 어차피 개인전인데 한 놈이라도 더 잡아먹고 죽어야지!"

하지만 이후 벌어진 상황은 예상 밖이었다.

한 명의 포식자 앞에서 똘똘 뭉쳐 대항할 거라고 생각했던 플레이어들이, 여전히 난전을 펼치고 있었다.

'이게 뭐야?'

물론 그녀에게 달려들어 무기를 휘두르는 플레이어도 있었지만, 주소월은 아무 감흥 없다는 듯 피할 뿐이었다.

온 힘을 다해 덤벼도 부족할 판에, 등 뒤를 경계하며 휘두르는 공격에 당할 정도로 그녀는 약하지 않았으니까.

'흐응. 이벤트 전이라 그런가? 다들 목숨이 아깝지 않나 보네.'

주소월은 실망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도 그녀를 즐겁게 해줄 플레이어는 존재하지 않는 모양.

"젠장, 또 한 명이 추가됐군."

그들이 싸우고 있는 'ㄹ'자 형태 미로에 새로운 플레이어들이 계속해 등장했지만, 그들 또한 이전에 있던 플레이어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저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울 뿐.

'재미없어.'

흥미를 잃은 그녀가 부채를 들어, 단숨에 플레이어들을 죽이려 할 때였다.

"72번이면 이런저런 무기 쓰던 녀석인데!"

"혹시 저 녀석도 네임드는 아니겠지?"

저어기, 미로 끝 귀퉁이 한쪽에서 누군가가 뚜벅뚜벅 걸어 나오고 있었다.

새로 등장한 플레이어의 넘버는 72번.

또다시 추가된 플레이어를 본 사람들이 욕지거리를 내뱉었고, 주소월은.

'다 죽이고 중심부 쪽으로 가봐야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모인 잔챙이들과 똑같을 게 분명했······.

'어?'

순간 주소월은 흠칫했다.

"······!"

"······!"

"······!"

싸아아아아아아아아―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다가오는 72번.

녀석에게서 진득진득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미, 미친. 또 랭커인가······!"

"씨발 이런 외곽에 왜 랭커가 두 명이나 있는 건데!"

72번이 발산하는 존재감에 플레이어들이 당황했다.

하지만 주소월은.

'킥!'

속으로 웃을 뿐이었다.

저렇게 요란하게 등장했는데, 막상 상대해보니 별거 아니면 무척 웃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일단 등장은 합격.'

보통 이런 서바이벌 경기에서는 살기를 뿜어대지 않는다.

자칫 잘못했다간 모든 플레이어들의 타깃이 될 수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기대감이 몽실몽실 피어올랐다.

저렇게까지 자신감이 넘치는데, 어느 정도는 재밌게 해주지 않을까?

"아주 터프한 분이 오셨군요?"

주소월이 활짝 웃었다.

초점 없던 그녀의 눈에 사르르 생기가 돋았다.

보이는 거라곤 자신을 노려보는 눈동자와 손에 든 창 뿐.

'흐응.'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좋았다.

지루함에 메마른 상태에서, 잠시나마 갈증을 해소할 정도는 될 것 같았다.

"절 진짜 즐겁게 해줘야 할 거예요. 안 그러면······."

주소월이 쥐고 있던 부채를 촤라락-! 폈다.

"제발 죽여달라고 애원하게 만들어드릴 거니까."

그리곤 72번의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 부채를 가볍게 휘둘렀다.

'어디 실력 좀 볼까?'

만약 기대치에 못 미치면 아주 악랄하게 괴롭힐 생각이었기에, 단번에 죽어버리면 곤란했다.

챙! 콰지지직!

'나쁘지 않은데?'

기대어린 표정의 주소월이 미소 지었다.

대부분의 평범한 플레이어들은 그녀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도 쩔쩔매기 일쑤.

그런데 72번은 강기가 깃든 바람을 찢으며 그녀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마치 이 정도 공격 쯤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재미있는 장난감을 찾았어.'

주소월이 눈을 빛냈다.

심장이 두근두근 거렸다.

기분 좋은 긴장감에 그녀의 몸이 얕게 떨렸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낀 것이다.

후웅! 후웅!

주소월이 부채를 휘두르자 네 개의 초승달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갔다.

'이 정도 공격도 막아······어?'

뭐야?

당연히 막아낼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움직임이 너무 좋았다.

72번이 주변 플레이어들의 공격까지 피하며 단숨에 거리를 좁혀 들어왔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섬뜩한 소리가 귀를 때렸다.

72번이 뻗은 창날이 어느새 그녀의 턱 끝으로 향하고 있었다.

'오히려 좋아.'

엄습해오는 불안감, 혹시나 하는 초조함.

그 덕분에 지금 순간만큼은 잡생각이 들지 않았다.

'놀아볼까?'

의외의 상황에 주소월은 서둘러 강기가 깃든 부채를 휘둘렀다.

창날을 쳐내고, 그대로 파고들어 복부에 발차기를 꽂아주면······.

챙! 콰지직!

"악!"

주소월은 진심으로 당황했다.

72번의 창을 막아내는 순간,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벼락이 관통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슴 속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72번의 공격.

'모, 몸이 말을 안 들어.'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충격에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저 공격을 어떻게든 막아야 하는데······.

그 순간, 아바마마가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바람이 자유로울 수 있는 건, 그걸 구속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지. 자유롭고 싶느냐? 무엇이든 깨부술 수 있는 힘이 없다면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주소월이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멈출 순 없어.'

그녀의 목을 꿰뚫기 위해 날아드는 창날.

72번의 주변에 퍼지는 검은 연기.

주변에서 여전히 싸움을 벌이고 있는 플레이어들까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모든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읍!'

혀를 콱! 깨물자, 비릿한 혈향이 퍼졌다.

그제야 움직이는 그녀의 몸.

주소월은 바닥을 박차며 뒤로 빠져나갔다.

서걱!

섬찟한 피륙음과 동시에, 목이 불에 데인 것처럼 화끈거렸다.

순간 소름이 돋았지만, 그녀는 본능적으로 스킬을 사용했다.

'일단 거리를 벌려야 해.'

띠링!

[<순보 > 스킬을 사용했습니다.]

순보를 이용해, 단숨에 1미터 뒤로 순간 이동한 그녀는 입술을 짓이겼다.

'너무 얕봤어.'

상대는 주변에 있던 어중이떠중이들과 달리, 진짜 고수였다.

처음부터 자신의 강점을 살리기 위해, 견제하며 원거리 전투를 펼쳤어야 했는데, 허무하게 거리를 내주다 보니 이런 상황이 연출됐던 것.

"하아, 하아."

'생각보다 훨씬 강한데?'

너무 놀란 탓에 호흡이 뒤엉켰다.

일단 지금부터라도 상대를 견제해가며 조금씩 거리를 벌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부터 진짜 바람을······.'

그런 생각을 하며 부채를 휘두르려 할 때였다.

꽈광!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져 있던 72번이, 어느새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마치 내리치는 한줄기 벼락처럼.

"······!"

주소월이 눈을 크게 치켜떴다.

"이 개자식들이!"

"우린 안중에도 없다는 거냐!"

하지만 이곳엔 그녀와 72번만 있는 게 아니었다.

주변의 플레이어들이 달려들며 무기를 휘두른 것이다.

챙! 콰지지지직! 서걱! 서걱!

[<72 ><창 >으로 <1,094 >를 처치했습니다.]

[<72 ><창 >으로 <683 >을 처치했습니다.]

창이 번뜩이자, 두 개의 목이 허공을 날았다.

순식간에 주변을 도륙하는 창날에 심장이 철렁했다.

'뭐, 뭐야. 어떻게 저런 움직임이 가능한 거지?'

잠깐이나마 시간을 번 덕분에 목이 꿰뚫리는 걸 피한 주소월이, 서둘러 플레이어들 사이로 숨어들었다.

그녀는 정신이 없었다.

'이 정도로 강한 녀석이 상위 리그에 존재한다고?'

지금 이 순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더라도, 아마 쉽지 않았을 것이다.

"뭐, 뭐야! 설마 72번이 쿠 훌······!"

"씨, 씨발······."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어둠이 내려앉은 미로에 한 줄기 빛기둥이 솟아올랐다.

72번이 휘두른 단 한 번의 공격에 남아있던 플레이어 세 명의 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지금 상태론 절대 상대할 수 없어.'

빠르게 판단을 내린 주소월이 내공을 끌어올렸다.

더는 길을 막아줄 플레이어가 없는 이상,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딱 하나 뿐이었다.

띠링!

[<스킬:폭풍화우暴風花雨 >를 발동합니다.]

바로 그녀의 비기秘技를 사용하는 것.

그녀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양의 마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마나들은 뭉실뭉실 솟아오르더니 그녀의 주위로 몰려든 바람을 강하게 회전시켰다.

콰과과과과과과과광!

강기를 머금은 아홉 줄기의 회오리가 주변을 난도질하며 커져갔다.

'이 기술이라면.'

아무리 고수라고 해도, 그래봤자 상위 플레이어.

이 공격이라면 충분히 72번을 떼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훗."

그때 72번이 실소를 내뱉더니, 그대로 폭풍화우를 향해 창을 휘둘렀다.

카가가가가가가강!

회오리와 창이 부딪히자 쇠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찢겨져 나가는 회오리들.

그 바람 중 일부가 그녀에게 날아들었다.

서걱! 서걱! 서걱!

"······!"

다리가 풀린 주소월이 털썩 주저앉았다.

'말도 안 돼.'

움직임이 너무 빨라 거리를 벌릴 수가 없다.

바람처럼 순간 이동하는 스킬을 사용하면, 점멸하는 빛처럼 따라붙는다.

맞상대하면 한줄기 벼락이 그녀의 내부를 난도질하고, 비기마저 가볍게 찢어버린다.

'뭔가 잘못됐어. 이럴 리가 없는데······.'

믿어지지가 않았다.

최상위 랭커를 논할 때 주소월의 닉네임은 절대로 빠지지 않는다.

그런 자신을 이렇게까지 압도하는 존재가 있다고?

순간 그녀의 뇌리에 여러 닉네임이 스쳐 지나갔다.

쿠 훌린, 몽연, 을지문덕, 예천화 등등.

하지만 주소월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아니야.'

그 누구도 그녀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지 못했다.

심지어 쿠 훌린과는 직접 만나보기까지 했지만, 자신보다 조금 더 강할 순 있어도 질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눈앞의 72번은.

'절대 이길 수 없어······.'

주소월의 몸이 벌벌 떨렸다.

마음속에서 무력함이 피어올랐다.

이게 말로만 듣던.

절망이라는 감정이겠지.

'아······.'

72번과 시선을 마주친 주소월이 움찔했다.

그의 눈동자에서, 강한 살기가 느껴졌다.

그녀라는 바람이 절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을 만난 느낌이었다.

'도대체 왜······. 나는 자유로이 날갯짓하는 한 줄기 바람이 아니었던가.'

푹!

그 순간, 그녀의 심장을 싸늘한 창날이 꿰뚫었다.

< 165화. 절망의 편린(4) > 끝

< 166화. 절망의 편린(5) >

[<72 ><창 >으로 <44 >를 처치했습니다.]

[경기 진행 시간 : 04:42:31]

[현재 생존자 수 : 333명]

푸슈우우우욱―

심장에 박힌 창을 뽑아내자, 공기 빠지는 소리와 함께 피가 솟구쳤다.

'결국, 여기까지 왔군.'

죽은 44번을 내려다보던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1회차 시절, 내게 절망을 안겨주었던 부채 여인, 주소월.

이번에는 그녀가 두려움에 떨며 내 손에 죽은 것이다.

100퍼센트 제 실력을 발휘한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피의 강화 특전이랑 뇌신 강림까지 켰으면 아예 상대도 안 되겠는데.'

무림의 네임드, 최상위 랭커.

1회차 땐 고위 리그까지 올라갔던 플레이어.

이번 생에는 그녀가 무슨 짓을 하든, 날 뛰어넘을 순 없을 것이다.

'후우.'

나는 창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등을 돌렸다.

'이걸로 빚은 갚았어.'

사실 나는 그녀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다.

1회차 때 그녀의 손에 죽긴 했지만,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오히려 그때 그녀를 만나서 지금의 상황이 펼쳐진 걸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도 내가 그녀를 꼭 한번 다시 만나길 염원했던 건.

'1회차의 내게 이야기해주고 싶었지.'

나 이렇게 변했다고.

이만큼 강해졌다고.

그런 이야기들을, 주소월을 통해 말해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1회차와 2회차를 가르는 경계선이 바로 주소월이었으니까.

'정말 많이 강해졌어.'

문득 1회차 때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재능이라곤 쥐뿔도 없었기에, 독기 하나만 가지고 아득바득 버텼고.

'정말 청승맞은 삶이었지.'

포식자의 눈을 피해 언제나 어둠 속에 숨어 살아야만 했다.

그런데 지금은?

'더 이상 불안에 떨 필요 없어.'

1회차 때와는 정반대의 모습.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더는 1회차의 나한테 얽매이지 말자.'

과거에 꼬인 매듭은 청산했다.

이젠 앞만 보고 달려가는 일만 남았다.

물론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초월 리그는 여전히 까마득하다.

'전에는 그저 막연히 높은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만나본 초월 플레이어는 아예 격이 달랐다.

지금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겠지.

그래도 1회차 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충분히 올라갈 수 있어.'

그때는 무슨 노력을 해도 닿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걷다 보면 언젠가 닿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띠링!

[지금부터 1시간 후 새로운 데스 라인이 펼쳐집니다.]

[모든 플레이어분들은 지도를 확인해 주세요.]

알림창을 본 나는 지도를 열었다.

이번에도 역시, 가장 외곽 지역 16곳에 빨간색이 칠해져 있었다.

총 49개 구역 중 남은 건 이제 9구역뿐.

'슬슬 스포트라이트를 가져와 볼까.'

나는 중심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와 72번 뭐냐? 쟤, 렌 아님? 주소월을 그냥 가지고 노네 ㄷㄷ

└ㄷㄷㄷㄷㄷㄷㄷ 나 지금까지 주소월 경기 쭉 챙겨봤는데, 저렇게 아무것도 못 하고 죽는 거 첨봄 ㄷㄷ

└애초에 주소월이 죽은 거 자체가 처음 아니냐? ㅋㅋㅋㅋ

└주소월 거품설 ㅎ2

└아 씨발 저거 렌이 스킬 업그레이드 특전 받아서 그런 거잖아ㅡㅡ 개사기 아님? 애초에 개인전에서 저런 특전 준다는 거 자체가 대놓고 지구 밀어주겠다는 뜻 아니냐고ㅡㅡ

└ㅋㅋㅋㅋ 진정해 형ㅋ 여기서 렌이 최상위 랭커 중에 한 명인 거 모르는 신이 어딨어 ㅋㅋ 그 상태로 특전 받은 거 다 알고 있는데도 1.8% 나온 거 아냐? ㅋㅋ

└ㅇㅇ 개인전이라곤 해도 다른 성계는 100명인데, 지구는 렌 죽으면 끝임 ㅋㅋ 다른 애들이 렌 집중적으로 견제하면 지구 1승 하기도 힘들걸?

└맞지 맞지. 관건은 렌이 견제를 받고도 씹어먹냐 못 먹냐의 문제임

└반대로 생각해보면 주소월한테 특전 3개 주는 대신, 무림에서 혼자 출전하는 거나 마찬가지지 ㅋㅋㅋㅋ 그럼 무림 찍을 흑우 업제?

└근데 저 정도로 쉽게 죽인 거면, 애초에 업그레이드 안 받아도 주소월 가지고 노는 거 아님? ㅋㅋㅋㅋ

└ㅇㅈㅇㅈ 지금 보니까 렌이 원래부터 주소월보다 강했을듯ㅋㅋ

중심부 쪽으로 향하자, 드문드문 보이던 플레이어의 숫자가 확 늘어나기 시작했다.

'잘하면 피의 강화 특전을 발동시킬 수 있겠는데?'

[<피의 강화> ― 생명체를 처치할 때마다 모든 스텟이 일시적으로 1% 상승한다. 3분 이내에 다른 생명체를 처치하지 못하면 스텟 상승이 초기화되며, 최대 30%까지 상승한다.]

지금까지 내가 가장 높게 쌓은 스텍은 8 포인트.

맵이 워낙 넓은데다가 플레이어들의 수준도 높다 보니, 30 포인트까지 쌓기가 무척 어려웠다.

3분 이내에 다른 플레이어를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던 것이다.

'중심부는 인구 밀도가 좀 더 높겠지.'

지금은 맵의 크기가 처음보다 82%나 줄어든 상황.

아직 300명이나 남아있으니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이 개 같은 새끼가 감히 킬딸을!"

"하, 뺏기는 놈이 등신이지."

"죽여버리겠다!"

캉! 카강! 챙! 서걱! 서걱! 챙! 카강!

[들이치는 격류의 메아리!]

꽈과과과과광!

미로의 귀퉁이를 돌자, 난전을 펼치고 있는 세 명의 플레이어가 보였다.

그리고 바로 벽 너머로, 또 다른 무리가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헉, 72번이다!"

"랭커!"

내 등장에 뒤엉켜 있던 플레이어들이 떨어졌다.

딱 서로를 견제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힘을 합쳐 내게 협공을 할 수 있는 정도의 거리.

경험에 의해, 날 먼저 상대하기로 암묵적 합의를 본 모양이었다.

'시작해 볼까.'

콰지지지지지지지직!

창을 고쳐 잡은 나는 곧장 세 명의 플레이어에게 돌진했다.

세 명이 아니라 백 명이라도 상관없었다.

내가 여섯 개의 플래티넘 등급 스킬을 보유하고 있다는 걸 떠나서.

서걱! 서걱! 서걱!

[<72 ><창 >으로 <402 >를 처치했습니다.]

[<72 ><창 >으로 <894 >를 처치했습니다.]

[<72 ><창 >으로 <516 >을 처치했습니다.]

스텟 차이가 너무 극심했으니까.

지금 상태로는 고위 플레이어와 싸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지금까지 3 포인트.'

세 명의 플레이어를 모두 죽인 나는 곧장 귀퉁이를 돌며 'ㄹ'자 형태의 미로를 주파했다.

"헉!"

"무슨!"

갑작스러운 내 등장에 정신없이 싸우던 플레이어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코너를 돌 때마다 적게는 세 명에서, 많게는 일곱 명의 플레이어들이 싸우고 있었는데, 그중에서 내 창을 받아내는 플레이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띠링! 띠링! 띠링!

[<피의 회복> 능력으로 체력이 1% 회복됩니다.]

[<피의 각성>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14/100)]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14/30)]

[3분 이내에 다른 생명체를 처치하지 못하면 상승분이 초기화됩니다.]

[남은 체력 : 68%]

수직상승하는 피의 강화 스텍.

'이거지.'

시간이 지날수록 내 움직임이 조금씩 빨라졌다.

현재 내 근력과 민첩의 기초 스텟 합계는 357포인트.

한 명을 죽일 때마다 1%씩 상승하니, 3.5포인트가 오르는 셈이었다.

"씨발, 저런 새끼를 어떻게 상대하라고······."

"미친! 점점 빨라지고 있잖아!"

"탑 랭커랑 격차가 이렇게 많이 난다니······."

그 어마어마한 상승률에, 나를 상대하던 플레이어들이 경악했다.

띠링!

[<피의 각성>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30/100)]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30/30)]

[<피의 강화>로 상승한 스텟이 30분간 유지됩니다.]

'일단 피의 강화 특전은 켜졌고.'

알림창을 힐끗 본 나는 바쁘게 미로를 돌아다녔다.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지거나, 싸우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 쪽으로 길을 잡았다.

'100포인트까지 어떻게든 채워야 하는데.'

예상보다 스킬 추가 슬롯을 활성화하는데 제약이 많은 상황.

이번 경기에 피의 각성까지 발동시켜 볼 생각이었다.

새로 얻은 열반 스킬을 시험해 봐야 했으니까.

초반에 랭커들이 많이 죽으면서 날 위협할 만한 존재도 없는 데다가, 어차피 성계 대항전에선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

그렇기에 피의 각성을 시험해 보기에 딱 좋은 무대라고 할 수 있었다.

띠링!

[3분이 지나, 피의 각성 포인트가 초기화됩니다.]

'쯧.'

하지만 이내 피의 각성 스텍이 초기화됐다.

한참을 달리며 사냥감을 찾았지만, 뭉쳐 있던 녀석들을 모조리 죽이고 난 뒤로 더 이상 플레이어를 마주치지 못한 것이다.

남은 생존자는 200명뿐인데 아홉 구역에 나눠져 있다 보니, 생각보다 스텍 쌓기가 쉽지 않았다.

'아까운데.'

저 멀리서 대규모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스텍을 계속해서 이어갈 수 있었는데.

'어쩔 수 없지.'

일단 이번 경기에서 피의 각성을 발동시키는 건 보류.

여전히 200명이 남아있지만, 실시간으로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

나 혼자 절반을 죽이면 충분히 가능하긴 한데, 문제는 이 경기가 서로 죽고 죽이는 서바이벌이라는 것.

이번 경기에서는 1승을 챙겨오는 것에 집중해야 할 것 같았다.

'여기가 중심부.'

되도록 플레이어가 많이 몰린 곳으로 이동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25구역에 도달했다.

1경기, 흑막의 미로 최중심부.

'이래서 대규모 전투가 계속 이뤄졌던 거군.'

25구역은 다른 구역과 달리, 하나의 거대한 광장이었다.

거기다 중심부엔 높이 1미터 정도의 커다란 단상이 존재했다.

마치 하나의 무대가 설치되어 있는 것 같았다.

'제법 잘 만들었는데?'

내심 감탄했다.

MVP를 따로 뽑겠다는 부분에서 뭔가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연출적으로도 이렇게 준비해놓았을 줄이야.

'랭커들이 중심부에서 미쳐 날뛸 만했네.'

이렇게까지 멍석을 깔아주는데,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는 존재라면 누구라도 쉽게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뭐, 이제부턴.

'내 자리가 되겠지만.'

"씨발, 도대체가 끝이 없네!"

"72번이면 44번 죽인 녀석이잖아?"

앞을 막아서는 플레이어들에게 창을 휘두르며, 단상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달빛에 반사된 창날이 한 번 번뜩일 때마다 두세 명의 머리가 허공을 날았다.

[<72 ><창 >으로 <1,101 >을 처치했습니다.]

[<72 ><창 >으로 <980 >을 처치했습니다.]

[<72 ><창 >으로 <1,039 >를 처치했습니다.]

현재 단상 위에서 싸우고 있는 플레이어의 숫자는 여덟 명.

그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녀석은 56번이었다.

"자격이 없는 자들은 내려가라."

"흥! 누구의 검이 더 날카로운지는 대봐야 아는 법!"

"자고로 분수를 모르는 놈들 치고 장수하는 놈을 본 적이 없지."

녀석이 반달처럼 휜 곡도를 휘두를 때마다 주변 플레이어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스텟이 제법 높아 보이는데.'

[상대방의 능력치를 확인합니다.]

[이름 : 시르카 게일코타 프라사드]

[성향 : 냉혹]

[근력 : 257(+?)] [민첩 : 249(+?)] [체력 : 240(+?)]

[정신 : 136(+?)] [지력 : 84(+?)] [마력 : 244(+?)]

상태창을 확인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움직임이 제법 좋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발리노르 성계의 랭커였던 것이다.

주변 플레이어들의 스텟까지 모조리 체크한 나는 단상 위로 뛰어 올라갔다.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지지직!

그리고는 닥치는 대로 창을 휘두르며, 플레이어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헉, 미친!"

"새로운 랭커······ 커헉!"

서걱! 서걱! 서걱!

시르카와 주변 플레이어들 간의 팽팽하던 싸움이 내 등장으로 인해 단숨에 무너졌다.

흑막이 벗겨진 채 바닥에 쓰러진 일곱 시체.

단상 위에 남은 존재는 단 둘뿐.

[경기 진행 시간 : 05:00:01]

[현재 생존자 수 : 154명]

[지금부터 1시간 후 새로운 데스 라인이 펼쳐집니다.]

[모든 플레이어분들은 지도를 확인해 주세요.]

"······44번의 킬 로그를 봤을 때부터 알긴 했지만, 정말 제법이군."

시르카의 호흡이 짧게 끊어졌다.

이전과 달리 무척 긴장한 것 같았다.

반면에 난.

'섬전.'

꽈광! 챙! 콰지지지지직!

"······!"

녀석의 코앞으로 순간 이동해 창을 내리치자, 시르카가 움찔 떨었다.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시르카보다 주소월이 더 강하다는 것을.

'별거 아니군.'

더욱이 난 주소월을 피의 강화 특전이 활성화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압도했다.

시르카 쯤이야.

서걱!

가볍게 찍어 누를 수 있었다.

[<72 ><창 >으로 <56 >을 처치했습니다.]

'슬슬 경기가 끝나겠는데.'

지도를 힐끗 살피자, 25구역을 제외한 모든 구역이 붉게 칠해져 있었다.

남은 플레이어의 숫자는 149명.

구역이 하나 밖에 남지 않은 탓인지 생존자의 숫자가 실시간으로 쭉쭉 낮아졌다.

생존해 있는 녀석들이 모두 이곳으로 몰려올 테니, 이제 피날레를 장식할 때였다.

"젠장! 일단 저 녀석부터 먼저 죽이고 승부를 봅시다! 지금 상태로는 저 녀석이 승리를 챙길 거요!"

"찬성."

"나도 찬성!"

근처에 있는 모든 플레이어들을 학살을 하고 다니자, 남은 생존자들이 똘똘 뭉쳐 대항하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서걱!

'쓸데없는 짓이지.'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뇌전을 뿌려대며 한 명씩 죽여나갔다.

그리고.

"큭······ 겨우겨우 지금까지 버텼는데······."

띠링!

[경기 진행 시간 : 06:28:56]

[현재 생존자 수 : 1명]

[1경기 <흑막의 미로> 경기가 종료되었습니다.]

['지구' 승리!]

[1경기는 지구에서 승리를 가져갑니다.]

[축하합니다!]

은은하게 비추는 달빛 아래에 단 한 명만이 남았다.

< 166화. 절망의 편린(5) > 끝

< 167화. 증명의 서(1) >

―이변의 연속이네요! 72번이 100번에 이어, 44번까지 잡아냅니다!

―와······. 말문이 막힐 정도입니다. 100번인 아시카가와 44번 주소월이 절대 약한 상대가 아니거든요? 그런데도 너무나 쉽게 죽였어요.

―여러 무기를 섞어서 쓰긴 했지만, 결국 아시카가와 주소월 둘 다 창으로 쓰러트렸습니다. 현재 상위 리그에서 가장 강한 창술사라고 하면 단 두 명뿐이죠. 쿠 훌린과 렌. 그런데 쿠 훌린은 이미 죽었으니, 렌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볼 수 있겠는데요.

상위 리그를 지켜보던 루디악은 경악했다.

해설자들의 설명과 같이, 루디악 또한 72번이 렌이라고 확신했다.

렌의 광팬을 자처하며 하위 리그부터 한 경기도 빠짐없이 챙겨봤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등 뒤에 눈이 달린 것처럼 움직이고, 다양한 무기와 여러 스타일을 구사하며, 각종 유틸리티 스킬을 가지고 있는 건 렌밖에 없었으니까.

'저게 가능하다고?'

그래서 더 의문이었다.

하위 리그를 씹어먹긴 했지만, 그래봤자 승급한 지 이제 고작 1년 5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은 상황.

그 짧은 시간 동안 성장해서 상위 리그 최상위 랭커가 됐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후우······.'

내부에서 두 가지 상반된 기분이 부딪쳤다.

첫 번째로, 기쁨.

소속 플레이어인 룬도 지구인이기에, 이번 성계 대항전에서도 당연히 지구에 베팅한 루디악.

렌이 활약할수록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배당금이 어마어마했으니까.

거기다 그는 커뮤니티에서 유명할 정도로 렌의 광팬이기도 했고.

두 번째로는.

'허탈하군.'

루디악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룬도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빠르게 강해졌다.

굳이 스킬을 밀어주지 않아도, 상위 리그까진 충분히 올라왔을 정도로 전투 센스도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고위 리그도 충분히 노려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우리 팀의 희망이 되어줄 거라고 믿었지.'

고위 리그에 도전했다가 한 차례 팀의 주축 플레이어들을 모두 날려 먹은 루디악.

그렇기에 굉장히 보수적으로 예측한 건데도, 그런 결론이 나올 정도로 룬은 무척 뛰어났다.

그래서 너무 기뻤다.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팀 '불굴'에서도 렌 못지않은 강자가 나타났다는 뜻이었으니까.

거기다 루디악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성장하고 있었기에, 언젠간 렌을 뛰어넘을 수도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아예 상대가 안 되겠군.'

―아, 경기 끝났습니다. 72번이 56번 시르카와 707번 예천화까지 쓰러트리고 상위 리그 성계 대항전 1경기를 가져갑니다!

―이제 흑막이 걷히네요. 예상한 대로 지구 성계의 렌이었습니다.

―결국 중앙을 차지한 렌을, 그 누구도 밀어내지 못했네요!

최후의 생존자가 되어, 성계 대항전 1경기를 승리한 렌.

그는 룬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엄청나게 강해져 있었다.

이제는 비교하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나도 저런 플레이어를 가지고 싶어.'

애초에 재능에서부터 차원이 달랐다.

룬이 몇만 명 중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수준이라면, 렌은 백만 명 중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괴물이었다.

―이번 경기 어떻게 보셨습니까?

―네에, 처음 72번이 외곽으로 향할 때만 해도 너무 몸을 사리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는 말씀이시죠?

―예, 맞습니다. 마지막에 증명했지요. 초반에 폭발적으로 올라오던 쿠 훌린과 을지문덕, 몽연의 닉네임이 어느새 쏙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어··· 생각해 보니 그렇군요. 지금은 온통 렌의 이야기뿐입니다.

―굉장히 똑똑해요. 언제 힘을 터트려야 자신에게 가장 유리할지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렌 같은 플레이어를 만들어 보고 싶은데.'

욕심이 났다.

그가 보기에 렌은, 지금처럼만 성장해 준다면 충분히 초월 리그도 노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다른 방법을 찾아 봐야겠군.'

검지로 테이블을 톡, 톡 두드리던 루디악은, 해설자들의 말을 뒤로하고 팜으로 향했다.

팀 '투지'.

렌을 배출해 냈으며, 소속 플레이어 대부분이 이름을 날리고 있는 팀이다.

한두 명이 아닌, 팀 전체가 미친 활약하고 있었다.

즉, 무언가 특별한 훈련법이 있다는 뜻.

'더 좋은 육성법을 찾아야 해.'

팜으로 향하는 루디악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 * *

'후우, 나쁘지 않았어.'

대기실로 돌아온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피의 각성 부작용에 대해선 시험해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유의미한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경기였다.

이제 적어도 가면이 없다고 해서 밀릴 수준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으니까.

남은 건 딱 하나였다.

바로 피의 각성을 테스트해보는 것.

'다시 한번 피의 흡수가 각성하면 좋을 텐데.'

단 한 번의 발동만으로도 기초 스텟이 어마어마하게 상승했다.

그런데 부작용 없이 두 번, 세 번을 사용할 수 있다면?

대규모 학살을 자행할 수 있는 미션에 떨어진다면?

'기초 스텟이 200을 넘어설지도.'

그렇게 되면 고위 리그에서도 금세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띠링!

[10분 후 2경기 <공성전 >이 시작됩니다.]

알림을 본 나는, 소파에 털썩 앉아 상태창을 오픈했다.

잠시 머리도 식힐 겸 커뮤니티에 들어가 반응을 확인할 생각이었다.

'나쁘지 않네.'

커뮤니티로 들어가자, 온통 내 닉네임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매우 긍정적인 반응.

MVP라는 게 결국 가장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플레이어에게 수여하는 거니까, 지금 이 상태로만 계속 흘러간다면 충분히 내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한 가지 문제가 있긴 했지만.

'다음 경기부턴 쉽지 않겠어.'

다른 플레이어들도 커뮤니티를 통해 정보를 모으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내 닉네임이 퍼진 이상, 2경기부턴 어떻게든 견제가 들어올 거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사실.

아마 1경기처럼 수월하게 진행되진 않을 것이다.

하위 리그 성계 대항전같이, 성계 단위로 날 막아서는 장면이 나올 수도 있고.

'뭐, 상관없지.'

하지만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걸 감안해서 스킬 3개를 업그레이드해달라고 한 거니까.

어떤 식으로 견제가 들어오든, 결국 우승은 지구 차지가 될 것이다.

'후우.'

눈을 감은 채 크게 숨을 내쉬었다.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한동안 차분히 호흡에 집중했다.

그렇게 10분이란 시간이 흐른 후.

띠링!

[잠시 후 2경기, <공성전 >이 시작됩니다.]

[준비하십시오.]

나는 두 눈을 뜨고 빛이 흘러나오는 문으로 향했다.

이제.

'다시 한번 놀아볼까.'

2경기를 치를 시간이었다.

띠링!

[<무스펠하임 >에 입장하셨습니다.]

[<달의 메아리>가 외부 온도를 차단합니다.]

화륵! 화르륵!

불꽃이 넘실거리고, 뜨거운 열기가 코끝을 찌른다.

경기장 안으로 들어오니,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는 황야가 나를 맞아주었다.

모래로 뒤덮인 넓은 사막.

저 멀리, 끓어오르는 열기 너머에 홀로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성.

'나쁘지 않네.'

주위를 둘러보자, 1경기처럼 온통 흑막으로 둘러싸인 1,102명의 플레이어가 보였다.

1경기처럼 모두 익명으로 진행되는 모양이었다.

내 머리 위에 쓰여 있는 넘버는 5번.

이전 경기와 다른 숫자니까, 초반에는 견제 걱정 없이 움직일 수 있다.

띠링!

[지금부터 2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2경기 : 공성전(단체 PVP)]

[게임명 : 불꽃의 나라]

[맵 : 마계 아타신 거점(대)]

[관객 수 : 9,074,682명]

[승리 조건 : <각 성계 공헌도 합계 n>으로 공헌도가 가장 높은 성계]

[공헌도 점수를 공개합니다.]

[하급 악마 : 100점 / 중급 악마 : 500점 / 상급 악마 : 1,000점]

[성문 : 100,000점 / 마기魔氣포탑 : 50,000점 / 마성석 : 0점]

[마계의 거점, 아타신의 마성석을 부수면 경기가 종료됩니다.]

[마성석은 지상 5층짜리 탑에 있습니다.]

[성문, 마기포탑은 딜량에 따라 공헌도를 분배합니다.]

[현재 생존 플레이어 수 : 1,103명]

[3초 후 경기가 시작합니다.]

'뭐야?'

미션창을 본 나는 눈을 치켜떴다.

승리 조건에 나와 있는 성계 공헌도 합계 / n.

한마디로 공헌도의 평균치가 가장 높은 성계에게 승리를 주겠다는 뜻이었다.

'이번 경기는 너무 불리한데.'

지구 성계 플레이어의 숫자는 셋.

그중에 두 명은 이제 막 상위 리그에 올라온 새내기들이다.

하위 넘버링과 상위 넘버링의 스텟 차이를 고려하면, 애초에 평균치에서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다른 성계들은 모두, 상위 넘버링에서도 가장 강한 100명만 뽑아 놓았으니까.

'미친 듯이 뛰어다녀야겠군.'

[2초 후 경기가 시작합니다.]

마성석의 공헌도는 0점.

즉, 이번 경기에서 마성석의 역할은 게임을 끝내는 클로저의 역할이다.

자신의 성계가 1위를 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 때만 부술 수 있다.

'이번에도 심리전을 펼치라는 거군.'

1위 성계는 마성석을 부수려 할 것이고, 나머지 성계는 그걸 방해할 게 뻔한 상황.

승리를 차지하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고결한 수정이 나오려나?'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만약 나온다면 승패고 뭐고 일단 마성석으로 뛰겠지만, 이벤트전이라 안 나올 것이다.

[1초 후 경기가 시작합니다.]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냥해야 해.'

중급 악마의 공헌도 포인트는 500점.

하급 악마보다 5배나 높다.

그런데 하급 악마보다 죽이기 5배 어렵냐면, 그것도 아니다.

'나한텐 거기서 거기지.'

그렇기에 중급 악마들 위주로 노리고 다니면 효율적으로 공헌도 수급이 가능할 것이다.

[경기 시작!]

경기 시작 콜이 울렸다.

모두들 아타신 거점으로 이동하기 위해 발걸음을 떼었다.

그때였다.

"삐― 성계! 삐― 성계! 젠장! 이것도 막혀 있다니!"

한 플레이어가 성계 단위로 뭉치기 위해 시도했으나, 삐처리되며 실패했다.

띠링!

[경고! 경고!]

[특정 성계를 언급해, 집단전으로 플레이하는 것은 룰에 위배됩니다!]

[성계 언급을 멈춰주세요!]

그 모습을 본 97번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해 봐요! '나'랑, '카'드, '츠'지 않을래요, '쿠'······."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떻게든 띄어 얘기해서 '나카츠쿠니'라는 단어를 뱉으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빠아아아아악!

[<97 >이 스트레스로 인해 자살했습니다.]

97번의 머리가 수박 터지듯 박살 났다.

"······!"

뇌수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긴장감으로 고조되던 전장에, 싸늘한 침묵이 내리깔렸다.

'멍청하긴.'

그 모습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저렇게 극단적인 방법으로 응징할 줄은 몰랐지만, 대충 어떤 방식으로든 제재가 들어올 거라는 걸 예상했기 때문이다.

흑막으로 외형을 가렸고, 닉네임이나 성계도 언급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거기다 따로 넘버까지 부여하며 익명성을 중요시한 상황.

'게임 메이커가 가만 놔둘 리가 없지.'

그런 경기에서 저런 식으로 룰을 피해 가려고 한다?

개인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스킬이나 능력이 아닌, 편법은 응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냥 방치했다간 게임의 룰이고 뭐고 남아나지 않을 테니까.

할 거면 티 안 나게 해야 한다.

원래 심판이 알아차리지 못한 반칙은, 반칙이 아닌 법이다.

"······."

그 광경을 본 플레이어들이 입을 콱! 다문 채 개인적으로 이동을 하기 시작했다.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 아타신 거점을 1킬로미터 남겨뒀을 때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은데?'

눈앞의 거대한 성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거점이면 마계의 본진이나 마찬가지인 거 아닌가?'

커뮤니티를 통해 성城에도 등급이 있다는 걸 알아냈다.

가장 작은 게 루에타같은 요새급.

그리고 두 번째로 록탄 같은 성城급.

마지막으로 거점據點급.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타신 거점이 록탄 성보다 훨씬 거대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본 아타신 거점은 록탄 성과 비슷한 크기.

'이벤트 전이라 그냥 비슷하게 구현해 둔 건가 보군.'

여러 가지 근거가 있었다.

첫 번째로, 무스헬하임은 어딜 가든 몬스터들로 우글우글거린다.

그런데 아타신 거점까지 오는 동안 몬스터를 한 마리도 만나지 못했다는 것.

'여기에만 몬스터가 존재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두 번째로, 무스펠하임의 뜨거운 열기에서 뭔가 이질감이 느껴졌다.

원래는 열기 사이에 코를 찌르는 퀴퀴한 유황 냄새도 나고, 화산재 같은 것들도 뒤섞여있다.

'그런 것들 때문에 다들 괴로워했었는데.'

여기가 죽음의 성계라고 불리는 데에는 그런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저 뜨거운 열기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인위적으로 누군가가 구현해 둔 것 같았달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계가 없어.'

아타신 거점은 공중전을 방어할 수 있는 얇은 막이 존재하지 않았다.

중간계와 다르게, 이곳은 천사와 악마들이 싸우는 곳.

지상군 뿐만 아니라 공중전에도 대비해야 한다.

그런 이유로 루에타 요새라든가, 록탄 성엔 하늘을 뒤덮는 결계가 존재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전략 요충지라고 할 수 있는 거점에 결계가 없다?

'날개가 없는 상위 플레이어들 뿐이라 굳이 구현해 두지 않았다는 거지.'

날개가 달린 존재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것.

그런게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았다.

뭐, 그런 것들 말고도 실제로 무스펠하임에서 성계 대항전이 열렸으면 악마들이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을 테고.

'생각보다 쉽게 끝나겠는데?'

평소라면 성문을 부수지 않는 한 들어갈 수 없겠지만, 아타신 거점은 결계가 없어서 성벽을 타고 침투하는 게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30미터 성벽 쯤이야, 여기 있는 플레이어들 수준이라면 얼마든지 넘을 수 있을 테니까.

[성화聖花의 꽃잎이여, 붉은 피 머리 위에······.]

[새벽 폭풍 아래 흩어지는 별의 눈물이······.]

[도도滔滔하게 흘러와 고요한 입맞춤을 남기는······.]

사정거리에 들어왔다고 판단한 마법사들이 영창을 시작했다.

파바바바바바밧!

완급 조절을 하며 체력 소모를 최소화하던 근접 계열 플레이어들의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후우.'

인벤토리에서 검과 방패를 꺼내든 나는, 주변에서 들리는 영창 소리에 맞춰 성문 쪽으로 달려갔다.

'시작해볼까.'

그때부터 공성전이 시작되었다.

[새빨간 보석의 눈물!]

[폭루유성爆淚流星!]

[들이치는 격류의 메아리!]

[거인의 발걸음!]

성문을 향해 날아드는 수십 개의 마법들.

콰과과과과과과과과과광!

쏴아아아아아아아아―!

마법이 성문을 두들기고, 모래 먼지를 동반한 엄청난 충격파가 우리를 훑고 지나갔다.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땅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뭐야?'

순간 나는 눈을 의심했다.

모래 먼지가 사라진 아타신 거점의 성문이 건재했기 때문이다.

생채기도 남지 않은 듯한 모습.

'성문으로 침투하는 건 안 되겠군.'

나는 곧장 방향을 틀어, 성벽 쪽으로 향했다.

"같이 성벽 타실 분!"

"좋소! 같이 갑시다!"

나 이외에도 성벽으로 향하는 플레이어들이 있었다.

괜히 성문으로 잘못 다가갔다간 마법사들의 폭격에 두들겨 맞을 수도 있었기에, 차라리 성벽을 타고 올라가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때였다.

꽝! 꽈광! 꽝!

아타신 거점의 성벽 위에 존재하는 포탑들이 불을 뿜었다.

"으아아악!"

"내, 내 다리! 내 다리가!"

강하게 응축된 마기 탄환이 지상을 두들겼다.

폭발에 의해 살점이 날아다니고, 다리가 잘린 플레이어들이 비명을 질렀다.

'이 정도쯤이야.'

초감각을 통해, 날아오는 탄환들의 목표점을 체크한 나는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성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주위에 둘러져 있는 해자垓子를 넘어, 성벽으로 점프하려고 할 때였다.

'뭐야!'

순간 흠칫했다.

태양 빛에 성벽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뭐가 발라져 있다는 건데.'

"어어! 뭐, 뭐야!"

"안 돼애애애!"

"끄아아아아아아악!"

해자를 뛰어넘으며 성벽에 달라붙던 플레이어들이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해자에 빠져 허우적대는 플레이어들의 몸에서 치이익―소리가 났다.

'산성독!'

등골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 167화. 증명의 서(1) > 끝

< 168화. 증명의 서(2) >

꽈아아아아아앙!

방패를 내밀어, 날아드는 마탄魔彈을 막은 나는 곧장 뒤로 빠져나갔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군.'

루에타 요새, 그리고 록탄 성.

두 곳에서의 경험을 통해, 이번 아타신 거점의 공성전도 비슷하게 흘러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 오산.

'여긴 진짜로 방어를 목적으로 만든 구조물이었어.'

성城이란 건, 적의 공격을 보다 원활하게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건물들의 총집합체.

루에타 요새나, 록탄 성은 마성석을 지키기 위한 갑옷 같은 느낌이었다면, 아타신 거점은 정말로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성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곤란한데.'

방패 뒤에 몸을 숨긴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다른 요새들과 달리, 하늘을 덮고 있는 결계가 없어서 만만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짜 방어 요새 개념의 공성전은 모든 생을 통틀어 이번이 처음인 상황.

왜 공성전을 진행하려면 최소 세 배 이상의 전력이 필요하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슈우우우욱! 빠아악!

"끄아아아악!"

내 곁에 있던 플레이어 하나가 발리스타의 화살에 맞아, 살점이 통째로 날아갔다.

대포에 맞았다고 봐도 될 정도로 무시무시한 위력.

'침착하자.'

바닥을 박찬 나는 화살의 사정거리 뒤로 후퇴했다.

일단 상황을 정리해야 한다.

현재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저 높은 성벽을 넘을 수 없다는 것.

적들은 성벽에 숨어 마음껏 공격을 퍼붓고, 우리는 막기 급급하다.

이대로 가다간 피해가 누적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성벽을 넘을 방법을 찾아야 해.'

꽈과과과과과과과과광!

"퉤, 퉤! 씨발, 화살도 피해야 하는데 먼지까지 지랄이네, 지랄이야!"

아군 마법사들의 폭격이 성문을 두들기자,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성문은 아직까지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공헌도 순위]

[1위. '탐리엘' 14,700점]

[2위. '졸본' 12,900점]

[3위. '웨스테로스' 11,100점]

[4위. '하이퍼보리아' 10,000점]

[5위. '발리노르' 9,600점]

[현재 생존 플레이어 수 : 897명]

"젠장! 저 새끼들은 성벽을 도대체 어떻게 올라간 거지?"

"하급 악마들뿐이라 올라가기만 하면 공헌도 꿀 빨 수 있는데!"

성벽 위를 살펴보니, 몇몇 플레이어들이 하급 악마들 사이를 휘젓고 다녔다.

점프나 이동 관련 스킬을 가지고 있는 일부 플레이어가 성벽 위로 오르는 데 성공한 모양.

꽝! 꽈광! 꽝꽈과광!

후드드드득―

중간중간 아군 마법사의 마법이 성벽 위로 흩뿌려졌다.

'어?'

순간 나는 눈을 치켜떴다.

생채기도 남지 않은 성문과 달리, 마법에 맞은 성벽 곳곳이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저기라면.'

마기 포탄을 피하기 위해 분주하게 돌아다니던 나는 마법이 떨어지는 곳을 주시했다.

성벽 위로는 계속해서 마법이 떨어지고 있었다.

성문 대신, 하급 악마들을 죽여서 공헌도를 얻으려는 거겠지.

'하급 악마들이 많이 모여있는 곳.'

서둘러 성벽 위를 스캔했다.

내가 마법사라면 한 번에 많이 죽일 수 있는 곳을 노릴 테니까.

그곳에 집중적으로 마법이 떨어지면, 파고들 틈이 보일 것이다.

현재 하급 악마들이 가장 많이 몰려 있는 곳은.

'저쪽이군.'

꽈아아아아아앙!

"이런 미친!"

"발리스타에 이젠 투석기까지 쓴다고?"

"성벽만 넘어가면 다 족쳐주겠어!"

투석기가 쏜 바위를 피한 나는 성문의 왼쪽을 향해 내달렸다.

악마들의 공격에 분노한 주변 플레이어들이 눈에 불을 켠 채 나를 앞질러 갔다.

'다들 공성전 경험이 많나 보네.'

전체적인 수준이 높다 보니, 지금 상황에서 어디를 노려야 하는지 감각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꽈아아앙!

마탄에 맞은 한 플레이어의 상반신이 통째로 사라졌다.

적들은 성벽에 막혀 무방비 상태에 놓인 플레이어들에게 마음껏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푹! 푹! 푹! 푹! 푹! 푹! 푹!

곁에 있던 한 플레이어가 악마들이 쏜 화살에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졌다.

그때였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앙!

날아온 마법 세 방에 성벽을 쌓은 벽돌이 무더기로 무너져 내렸다.

'나이스 타이밍.'

"성벽이 무너졌다!"

"다 뒈졌어, 이 개 같은 악마 새끼들!"

그러자 성문에 막혀 기회를 노리고 있던 플레이어들이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갔다.

"못 들어오게 막아!"

"모두 이곳을 지원하라!"

침투하는 플레이어들과, 못 들어오게 막는 하급 악마들.

순식간에 난전이 펼쳐졌다.

'생각보다 너무 조금 죽었는데?'

좁은 입구 탓에, 앞에서 뚫어주길 기다리게 된 나는 주변을 살펴보며 감탄했다.

일방적인 공세를 당한 상황임에도, 생존한 플레이어의 숫자가 무척 많았다.

"씨발, 비켜! 내가 먼저 들어갈 거야!"

"밀지 마! 밀지 말라고!"

"빨리빨리 안 뚫고 뭐 하고 있소!"

한 번에 엄청난 숫자의 플레이어들이 몰리며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나는 이리저리 떠밀리는 와중에도 주변 전황을 살폈다.

'시가전까지도 염두에 둬야겠군.'

내부에 가득한 건물들.

가운데 우뚝 솟은 첨탑.

성벽 위에선 플레이어들과 악마들이 뒤엉켜 정신없이 싸우고 있다.

성벽 너머엔 하급 악마들이 득실거렸다.

'중급은 없네.'

다행히 날개가 달린 악마는 보이지 않았다.

"뚫었다! 얼른 들어가! 얼른!"

"이 빌어먹을 새끼들. 목 닦고 기다려라, 반격 시작이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시작해 볼까.'

띠링!

[<스킬:뇌정 >을 해제합니다.]

[<스킬:천뢰십보 >를 해제합니다.]

무너진 성벽의 틈을 통해 아타신 거점에 들어온 나는 가장 먼저 뇌정과 천뢰십보 스킬부터 껐다.

'내가 렌이라는 걸 최대한 숨겨야 해.'

뇌전雷電은 내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는 스킬.

누군가가 나를 알아볼 수도 있었다.

이런 난전 상황에서,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누군가가 등을 노리면 치명적일 테니까.

자칫 잘못하면 팀킬이 들어올 수도 있어서 신중하게 움직여야 한다.

어차피 성벽을 수비하고 있는 적들은 하급 악마뿐.

뇌전이 없어도 충분할 것이다.

"죽어라, 천계의 개!"

달려드는 악마의 공격을 방패로 막은 후, 검을 찔러넣은 나는 곧장 적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마기 포탑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적들과 뒤섞여 있어야만 했다.

'방패가 난전에선 깡패긴 하네.'

띠링!

[<피의 각성>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30/100)]

[<피의 강화> 능력으로 모든 스텟이 1% 상승합니다. (30/30)]

[<피의 강화>로 상승한 스텟이 30분간 유지됩니다.]

적의 공격을 방패로 막는다.

그리고 빈틈을 향해 검을 찌른다.

이 간결한 행동만으로도 하급 악마들은 픽픽 쓰러져 나갔다.

푹! 푹! 푹!

"끄윽!"

내 일격을 막아내는 녀석이 없을 정도.

그렇게 무아지경으로 적들을 학살하던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너무 거슬려.'

어느새 피의 각성 스택이 92포인트까지 쌓인 상황.

열반이 활성화되지 않은 상태라서, 피의 각성은 발동시키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뒤로 빠져서, 3분을 버텨 스텍을 초기화해야만 한다.

띠링!

[<1,004 ><마기 포탑>을 파괴했습니다.]

"별것도 아닌 것들이!"

"죽어! 죽어!"

플레이어들 사이로 스며든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급 악마들뿐이라서 그런지, 전황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이벤트전이긴 한가 보네.'

저 멀리, 첨탑 위에서 대기하고 있는 중급 악마들이 보였다.

녀석들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채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아마 1페이즈, 2페이즈 이런 식으로 물량이 쏟아져 나오는 거겠지.

'안 그러면 공략 자체가 불가능했을 거야.'

중간중간 중급 악마 한 마리씩만 껴 있어도 이런 학살 장면은 연출될 수가 없었다.

약자들만 모아놓고 싸우는 것과, 소수의 강자가 섞여 있는 건 차원이 달랐으니까.

아니, 오히려 플레이어들이 밀렸을지도.

띠링!

[3분이 지나, 피의 각성 포인트가 초기화됩니다.]

눈앞에 뜬 알림창을 본 나는 다시 악마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젠장! 내가 거의 다 죽이고 있었는데!"

"킬딸 하지 마!"

그리고는 몰려드는 악마들을 죽이며 공헌도를 쌓아나갔다.

└와;; 진짜 박진감 개쩐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새로운 상위 게임 메이커가 일을 잘하는데? 센스가 있음 ㅋㅋㅋㅋ 오랜만에 제대로 된 공성전 보는 느낌임 ㅋㅋㅋㅋ

└뭔 소리냐? 원래 아타신 거점에 다 있는 것들인데ㅋㅋㅋ

└그걸 몰라서 물음? 아타신 거점 실제로 옮겨오면 쟤네 10초 컷인데 밸런스 조절을 잘했다는 뜻이잖아 ㅡㅡ

└지금 성벽 위에서 학살하고 다니는 97번 누구냐? 난 몽연 아니면 을지문덕인 거 같음 ㄷㄷ

└지구 때문에 순위 예측하기가 까다롭네; 다른 곳은 그냥 총 포인트만 계산하면 되는데 ㅅㅂ

└지구 공헌도에서 나누기 3 곱하기 100 하셈. 그러면 순위 구할 수 있음.

└그걸 누가 몰라서 묻냐? 그냥 보기만 하면 되는 걸 일일이 계산하고 있어야 하니까 빡친다는 거지ㅡㅡ 암튼 지구는 12위네. 렌 있어도 별수 없나 봄 ㅋㅋㅋㅋㅋㅋ

└윗댓이 알려주고 나서 순위 구한 거 보니, 몰라서 물은 거 같은데? ㅋㅋㅋㅋ 합리적 의심 ㅇㅈ?

└근데 렌은 도대체 몇 번임? 창 들고 다니는 애들 다 스캔했는데 보이질 않냐?

└ㅋㅋㅋㅋㅋ 니가 렌이면 견제 들어올 거 뻔한데 창 들고 다니겠음? 생각이란 걸 좀 하고 살아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렌 몇 번이냐고 ㅡㅡ

하급 악마들 사이를 파고들어 학살한다.

그렇게 92킬에서 93킬 가량 먹은 뒤에 빠져나와 스텍을 초기화시킨다.

그리고 다시 악마들을 죽이며 공헌도를 얻는다.

그런 식으로 서너 번가량 했더니, 어느새 성벽 근처엔 멀쩡히 서 있는 하급 악마들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내가 렌이라고 의심하지 않는군.'

그렇게 치고 빠지고를 반복하자, 의외의 소득이 있었다.

본의 아니게 완급 조절을 하게 되면서, 다른 플레이어들의 눈에 띄지 않게 된 것이다.

모두들 공헌도 사냥을 하기 바쁠 뿐이었다.

띠링!

[<98 ><성문 >을 파괴했습니다.]

"어어! 이놈은 내 거요!"

"네 거 내 거가 어딨어! 먼저 죽이는 게 임자지!"

"죽일 놈 없으면 안으로 들어가요. 시가지에서 꽤 나올 것 같은데?"

얼마 남지 않은 하급 악마들을 가지고 티격태격하는 플레이어들.

'여기에서 더 사냥하는 건 의미가 없겠어.'

그들을 뒤로하고, 나는 각종 건물들이 즐비한 도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시가지 쪽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공헌도 순위]

[1위. '탐리엘' 179,800점]

[2위. '졸본' 173,200점]

[3위. '미드가르드' 168,800점]

[4위. '발리노르' 160,500점]

[5위. '웨스테로스' 153,100점]

[6위. '알프하임' 150,000점]

[현재 생존 플레이어 수 : 873명]

"어어······!"

한 플레이어가 중심부를 보며 앓는 소리를 냈다.

"······?"

고개를 돌려 보니 10층 정도 되는 중앙 첨탑 꼭대기에서 중급 악마들이 뛰어내리고 있었다.

펄럭―! 펄럭―!

"모두 돌격! 거점 내부로 들어온 광대 새끼들을 모조리 소탕하라!"

"와아아아아아!"

동시다발적으로 날개를 편 녀석들이 빠르게 쇄도해 들어왔고, 근처 건물에선 하급 악마들이 뿜어져 나왔다.

'두 번째 페이즈.'

사실 지금까진 성벽을 뚫고 들어오는 게 힘들었을 뿐이지, 내부로 들어오고 나선 고생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오히려 학살극에 가까웠다면 모를까.

그런 의미에서.

'후우. 고생 좀 하겠는데.'

진짜 전투는 이제부터라고 할 수 있었다.

긴 한숨을 내쉰 나는 검과 방패를 고쳐잡았다.

"젠장! 까마귀 새끼들 온다!"

"남은 악마들 빨리 끝내!"

"씨발, 어쩐지 너무 무난하게 흘러간다 싶더라니."

주변 플레이어들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어질 전투가 쉽지 않겠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아마 제법 많은 사상자가 나오겠지.

'나야 좋지만.'

"천계의 개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노라!"

어느새 코앞까지 도착한 2차 공격대.

"중급 악마가 500점이라고 그랬지?"

"씨발! 또 막타 치는 새끼는 내 손에 뒈진다!"

챙! 채챙! 챙! 챙! 챙!

서걱! 서걱!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던 성문 입구가 다시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되도록 중급 악마들 위주로 죽여야겠어.'

나는 덤벼드는 하급 악마들과 바닥에 놓인 시체를 피해 다니며 날갯짓하는 녀석들에게 검을 찔러넣었다.

그때였다.

띠링!

[<팀킬 >이 감지되었습니다.]

[경고! 경고! 경고! 경고!]

[<팀킬 >을 하는 플레이어는 곧바로 실격 처리가 됩니다.]

'어?'

눈앞에 뜬 알림창을 본 나는 눈을 치켜떴다.

몇몇 플레이어들이 팀킬을 시도한 모양.

이 경기에서 팀킬이 나올 만한 경우의 수는 딱 하나였다.

'진짜로? 이렇게까지 해준다고?'

킬딸을 하고 다니는 플레이어에 대한 응징.

혹은 타 성계에 대한 견제.

그 대상은 현재 1위를 하고 있는 탐리엘일 가능성이 높았다.

거긴 마법사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성계니까.

'이러면 계획이 다르지.'

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인벤토리에서 창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스킬:천뢰십보 >를 활성화합니다.]

[<스킬:뇌정 >을 활성화합니다.]

[<스킬:뇌룡의 포효>를 활성화합니다.]

[<스킬:뇌룡의 포효><스킬:뇌신 강림>으로 각성합니다.]

지금까지 꺼 두었던 스킬들을 발동시켰다.

주변 플레이어들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었다.

팀킬이 안된다면, 내가 망설일 이유는 없으니까.

제대로 한바탕 휘저어 줄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창:벽력섬전 > <스킬:뇌신 강림> <스킬:천뢰십보 > <스킬:뇌정 >에 깃든 뇌전의 기운이 하나로 합쳐집니다.]

[<스킬:뇌정 ><스킬:폭뢰(爆雷) >로 각성합니다!]

눈앞에 뜬 알림창.

'뭐?'

순간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뇌정이······ 각성했다고?

'갑자기?'

나는 차분하게 머리를 굴렸다.

뇌정 스킬은 플래티넘 등급이잖아?

'근데 거기서 더 각성하면······. 어?'

어······?

어???????????????????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다이아몬드!'

그 순간, 하늘에서 한 줄기 벼락이 내리쳤다.

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 168화. 증명의 서(2) > 끝

< 169화. 증명의 서(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