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이단을 선실 안으로 데려가십시오!"
익사자 왕의 선언이 끝나자마자 아이작이 강하게 외쳤다. 하지만 의식을 잃은 상태인 에이단을 보호하고 있던 옌코스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작과 익사자 왕이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익사자 왕은 변명조차 하지 않고 오히려 대놓고 배교를 선언했다.
옌코스는 아이작의 말들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일부러 의견이 분열될 가능성이 있도록 모호한 표현을 내놓은 것이었다고?'
실제로 그들이 이곳에서 익사자 왕을 만났을 때 들은 말들은 느리게나마 통역해 봤을 때 의미가 와전될 여지가 없는 직관적인 표현들이었다.
그때 히야니스가 옌코스의 어깨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히야니스는 초조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해류가 배들을 통째로 옮기고 있습니다. 벌써 육지에서 한참 떨어진 바다 한복판입니다.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는 겁니다!"
"도망가지 못하게? 왜...."
옌코스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중얼거리다가 아이작이 했던 말을 상기했다. 익사자 왕은 교단을 삼키기 위해, 일부러 자신에게 반대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숙청'한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는 익사자 왕에게 찬성하든 반대하든, 소금 의회 의원 절반 이상이 모여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소금 의회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뜻이다.
히야니스가 발악하듯 외쳤다.
"전투를 준비해야 합니다, 옌코스 의장!"
인신 공양을 하고 익사자 왕을 새로운 신으로 받들 것이냐, 아니면 감히 배교를 저지른 타락한 천사 익사자 왕을 처단할 것이냐.
어느 쪽이든 옌코스에게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일이었다.
그녀가 애당초 인신 공양을 소극적으로 찬성했던 것은 오직 현상 유지를 위해서였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선택을 내리지 못 하고 있었다.
익사자 왕을 잃는다는 것은, 신이 완전히 떠나는 것은 물론 그들 곁에 남은 유일한 천사를 잃는다는 뜻이었다.
히야니스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옌코스를 붙잡아 끌어당기려고 했다. 하지만 옌코스는 그의 손길을 뿌리치며 커틀라스를 뽑아 들었다.
그녀의 흔들리는 칼끝이 히야니스에게로 향했다.
"당장 물러나라, 히야니스. 아직 의식이 진행 중이니까."
***
아이작은 배 다른 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신경 쓰지 못했다. 다른데 일일이 신경 쓰면서 싸우기엔 익사자 왕은 너무나 거대한 적이었다. 오랜 시간 방치되고 잠들어 전성기보다는 약해졌다고 해도, 그는 태풍을 불러내는 권능만으로도 강력한 힘을 보여 주고 있었다.
게다가 그에게 특화된 바다라는 전장.
아이작은 배 위에서 균형을 잡고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저항할 생각인가, 성배기사?]
익사자 왕은 촉수를 휘둘러대는 대신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직 바닥이 단단해서 착각하는 것이라면, 심해에 처박은 다음 폐에서 공기를 다 빼낸 후 대화해도 좋겠군.]
익사자 왕이 거대한 촉수 하나를 들어 올려 배를 쪼갤 듯이 내려쳤다.
루앗딘 열쇠에서 거세게 불타오른 불길이 촉수와 맞부딪쳤다.
115화. 익사자 왕 (2)
콰아아아아!
익사자 왕의 촉수와 맞부딪친 루앗딘 열쇠에서 열기가 맹렬하게 피어올랐다. 아이작이 아끼던 신성력을 집어넣어 강화시킨 덕분이었다.
주변에서 지켜보는 모두의 시선에 경악과 놀라움이 담겼다. 그들 모두 익사자 왕이 촉수를 휘두를 때만 해도 바다에 빠질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사실 그것은 아이작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아이작은 이것은 자신이 강해진 것보다, 익사자 왕이 봐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놀랍군.]
콰드드드드... 루앗딘 열쇠에서 피어오른 열기가 촉수를 하얗게 익히고, 체내 수분을 들끓게 하는데도 익사자 왕의 말투는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그저 아이작을 차분하게 짓누를 뿐이었다.
이미 아이작의 발아래 갑판은 부서져 깨지기 직전이었다.
"심해에 처박고 대화하겠다더니, 배를 침몰시키기는 싫은 모양이지?"
[하하, 내 신도들을 해칠 이유는 없지 않겠나.]
익사자 왕은 자신의 배교에 소금 의회 신도들이 찬성할 것이라 확신하는 듯했다.
아이작은 그제야 주변 선원들이 꼼짝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부터 익사자 왕을 없애 버리겠다는 각오로 온 자들마저 이 상태다. 히야니스도 정작 익사자 왕을 만나면 자기들 편 절반 이상은 적이 될 것이라고 했으니 진작 각오했어야 마땅한 일이었다.
심지어 에이단을 보호하고 있어야 할 옌코스마저도 히야니스를 향해 칼을 뽑아 든 것이 보였다.
[유리한 상황이 아니라는 건 알겠지. 너는 대체 누굴 위해 싸우는 거냐?]
아이작은 루앗딘 열쇠를 꽉 움켜쥐었다.
익사자 왕의 거대한 촉수들이 쉴 새 없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저 거체를 보았을 때만 해도 저런 것과 싸우려고 한 히야니스가 돌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자신이 그 짓을 하게 생겼다.
소금 의회 대다수가 익사자 왕의 의견에 찬성한다면, 아이작은 누굴 위해 싸우고 있단 말인가.
아이작은 역시 괜히 끼어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눈 딱 감고 있을 걸 그랬나?'
하지만 생각해보면 폭로를 시작한 것은 히야니스였다. 히야니스가 진실을 폭로한 시점에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흘러간 것이다.
애초에 아이작은 익사자 왕의 공격에 반응한 것뿐이었다.
'나를? 그러고 보니 왜 나를 잡아두려고 했던 거지?'
익사자 왕은 촉수를 거두었다가 다시 강하게 횡으로 휘둘렀다. 이번에는 맞부딪치는 대신 회피했다. 익사자 왕이 배를 완전히 침몰시키려 들지 않는다면 피할 방법은 많았다.
하지만 익사자 왕은 쥐새끼 잡기에 크게 신경 쓰고 싶지 않은 듯했다.
[성배기사를 잡아라.]
거역할 수 없는 강력한 명령에 아이작의 동선에 끼어있던 선원 몇 명이 주춤거리며 움직였다. 아이작은 금방이라도 벨 듯이 검을 들었지만 결국 휘두르진 않았다. 그들의 의욕 없는 움직임 정도는 간단한 체술만으로도 쓰러뜨릴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아이작의 머리는 팽팽 돌아갔다.
'나를 잡으려고 한다. 내가 인신 공양을 방해해서? 아니야. 정작 제물인 에이단은 신경도 쓰고 있지 않아.'
원래 달우물 의식에 지원할 예정이었던 에이단은 이미 옌코스의 수중에 있었다. 만약 인신 공양을 하려는 것이라면 지금 그대로 사용하면 될 일이었다.
'그렇다면 목적이... 나라고?'
아이작은 당혹스러운 가능성에 발을 잘못 내디뎠다. 출렁이는 배와 미끄러운 갑판 탓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가 주춤한 순간, 익사자 왕의 촉수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날아들었다. 아이작은 타격을 감수하고 맞부딪칠 것을 각오했다.
그때, 갑판 한쪽의 선실 문이 벌컥 열렸다.
순간 익사자 왕의 촉수가 경련하듯 튕겨 올라갔다.
"이게 무슨 빌어먹을 난장판이야?!"
화를 내며 튀어나온 것은 다름 아닌 후안 주교였다.
***
"배가 대체 왜 이렇게 흔들리는 거냐?! 침몰이라도 하는 거냐?"
후안 주교는 의식이 벌어지는 동안 술에 잔뜩 취해 잠들어 있기라도 하려 했던 건지 멀리서도 술 냄새가 풀풀 풍겨왔다. 하지만 태풍이 몰아닥치고 촉수가 배를 두들겨 패는 상황에선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의 사제복에는 격렬한 뱃멀미의 흔적이 적나라하게 남아있었다. 신성한 주교용 사제복이 구토로 더러워진 모습을 보면서 아이작은 안타까움을 느꼈지만, 지금만큼 후안이 반가운 적이 없었다.
그는 다급히 후안 곁으로 달려가 옆에 숨었다.
"뭐, 뭐야. 이사크레아 경? 무슨 일인가?"
"역시 주교님! 당신의 권위가 필요한 때입니다!"
"무, 무슨 소리냐? 아니, 잠깐만, 이게 뭔...."
뒤늦게 배 위의 참상을 본 후안은 말을 잇지 못했다.
배는 촉수에 칭칭 감겨있고 돛대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박살 나고 부서진 잔해 사이에 황망한 얼굴의 선원들이 서 있었다.
그는 뒤늦게서야 아득한 위쪽에서 자신들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얼굴을 발견했다.
[예상외의 손님이 한 명 더 있었군.]
익사자 왕은 생각지도 못한 거물, 빛의 법전 주교의 등장에 당황한 듯했다.
물론 그의 당혹감은 후안이 두려워서라기보단 생리적인 것이었다.
자신들의 신이 소금 사막 아래 매장당하던 기억이 선명한 익사자 왕은 다른 소금 의회 신도들보다 빛의 법전에 대한 경계심과 두려움이 강했다.
그 두려움을 눈치챈 아이작은 후안 주교를 방패 삼아 뒤에 섰다.
후안이 거품을 물면서 기절할까 걱정했지만, 그는 오히려 날카로운 목소리로 아이작에게 속삭였다.
"이게 무슨 난리냐? 무슨 이교도 의식을 진행한다더니 다 틀어지기라도 한 거냐?"
"익사자 왕이 인신 공양을 요구했습니다."
"인신 공양?!"
후안의 목소리는 과하게 컸다. 그는 되려 익사자 왕을 향해 사납게 노려보았다. 신앙심의 발로인지, 아니면 아직 남아있는 술기운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익사자 왕은 일단 공격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둘을 응시했다. 주교가 발휘할 수도 있는 기적을 경계하는 듯했다.
'천사를 소환할 수 있는 것이 주교급부터던가?'
천국에 속한 짐승들, 신수를 소환하는 것은 사제나 이단심문관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주교급부터는 천사를 소환할 수 있는 권능이 있었다.
물론 그 소환 요청을 천사가 받아들일지 말지는 온전히 천사의 몫이었다. 그리고 이런 기적은 구구절절한 사연과 특별한 의식과 시기가 맞지 않으면 성공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천사의 변덕이 우연히 맞아떨어지면 기도문 한방에 즉흥적으로 출현할 수도 있었다. 그것은 익사자 왕이 절대로 바라지 않는 상황일 터였다.
'제발 후안이 기적을 발휘 못 한다는 걸 들키지 말아야 할 텐데.'
다행히 후안은 그렇게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인신 공양이라는 단어에 분노하는 것도 잠시, 그는 대양 한가운데서 성기사 한 명과 함께 이교도들에게 둘러싸여 천사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현실을 알아차렸다.
"익사자 왕! 그대의 기나긴 기다림은 무릇 빛의 법전 신도들에게도 모범이 되는 숭고한 신앙심의 발로였거늘, 어찌하여 타락한 길을 걷는 것이오!"
그는 엎드려 싹싹 비는 대신 훈계조로 천사를 꾸짖었다.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즉흥 연기에 아이작은 속으로 감탄했다.
어떻게 기적 하나 발휘 못 하면서 이렇게 뻔뻔하지? 역시 주교 짬밥은 허투루 먹는 것이 아니다....
"루앗딘께서도 그대의 신앙심에 탄복하여 소금 사막을 녹이고 잃어버린 성전(聖殿)을 돌려줄 날을 가늠하고 계셨소! 다시는 거짓을 입에 담지 않겠다던 맹약을 잊은 것이오?"
후안은 일부러 빛의 법전에서 가장 오래된 명천사이자 시조 격 되는 루앗딘을 언급했다. 또 소금 사막 아래 갇히고 싶지 않으면 적당히 자중하라는 협박 섞인 경고였다. 물론 루앗딘은 후안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관심조차 없을 확률이 높았지만.
하지만 아이작은 익사자 왕이 후안의 협박에 굴복하리라는 기대 따윈 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익사자 왕은 너무 멀리 왔고, 너무 오래 기다렸다.
배가 점점 거칠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파도가 더 높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는 난간을 붙들지 않고는 서 있기 힘들 정도였다. 침묵하는 익사자 왕의 태도와는 다르게, 감정이 더욱 격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안 되겠습니다. 주교님. 일단 몸을...."
아이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굉음과 함께 배가 크게 흔들렸다.
익사자 왕이 분노를 참지 못한 듯 촉수로 바다를 내려친 것이다. 거의 90도로 꺾인 배는 침몰할 듯이 휘청거렸지만 가까스로 가라앉는 것은 면했다. 대신 선원들 몇 명이 비명을 지르며 바다에 빠졌다.
'아무래도 주교의 등장이 역효과인 것 같군.'
다행히 후안은 아이작 덕분에 바다에 빠지는 것은 면했다.
"미안, 미안하네. 아무래도 나는 도움이 안 되겠군...."
후안은 창백한 표정으로 난간에 매달려 숨을 헐떡였다. 아이작은 씁쓸한 얼굴을 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후안은 자신을 보호할 기적을 하나 보여 주지 못했다. 익사자 왕도 이 정도면 눈치챌 수밖에 없을 것이다.
[늙은이는 빠져있어라. 엉뚱한 희생자를 만들고 싶지는 않으니!]
익사자 왕은 다시 한번 격하게 배를 흔들었다. 이제 그는 뒤가 없다는 듯, 오히려 배 한 척쯤은 희생시킬 수 있다는 듯 배를 촉수로 쥐어짜기 시작했다.
이대로 산산이 조각나면 그대로 바다에 빠질 판이었다.
그때 아이작은 히야니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히야니스는 난간에 매달려 있었지만, 여전히 눈빛이 형형하게 산 채로 익사자 왕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이작은 애당초 그가 익사자 왕을 잡으러 왔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는 여전히 포기한 눈빛이 아니었다.
아이작은 이를 악물다가, 이내 바다 위로 뛰어들었다.
***
쿠르르르르... 물거품들이 온몸을 휘감았다.
아이작은 시커먼 심해 아래에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하얀 손들을 보았다.
어인들이었다.
바다 밑에서 익사자 왕의 명령을 기다리며 수천 명의 어인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이작을 보자마자 민첩하게 밑으로 끌어당기려 했다. 그러나 아이작이 루앗딘 열쇠를 꺼내 휘두르자 거품 섞인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아이작의 몸이 튕겨지듯 물 밖으로 올라왔다.
물 밖으로 나온 아이작은 갑판 위에 있는 히야니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파도의 교리 축복을 걸어 준 것이었다. 아이작이 배를 보호하기 위해 뛰어내렸다는 것을 알아본 그는 미안함과 감사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감사와는 별개로 이제 아이작은 맨몸으로 익사자 왕과 맞서야 할 처지였다.
배라는 유일한 방어 수단을 잃은 아이작을 향해 익사자 왕이 촉수를 휘둘렀다. 아이작은 파도의 교리를 이용해 거친 파도 속에서 파도타기를 하며 미끄러지듯 달렸다.
그러나 그것은 어인들이 익사자 왕이 만들어낸 해류에서 탈출하려 했던 것만큼이나 의미 없는 시도였다. 아이작은 자신이 타고 오르려던 파도가, 애당초 익사자 왕의 거대한 촉수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렇다 할 방법도 없이, 아이작은 그대로 수면 아래로 처박혔다.
소용돌이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자 수상 보행의 기적이고 뭐고 아이작은 속절없이 심해 밑바닥으로 끌려 들어갔다. 다행히 그에겐 심해인 장군을 포식하고 얻은 수중 호흡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현기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깊은 바다에 들어오고서야 익사자 왕의 전신을 볼 수 있었다.
바다 위에서도 거대하다고 느꼈던 몸이지만, 시커먼 물 밑에서 보게 된 그의 전신은 그 자체로 압도당할 지경이었다.
[네 이야기에서 틀린 부분이 있다.]
익사자 왕은 촉수를 뻗어 아이작을 소중하게 감싸듯이 둘러싸며 속삭였다.
[나는 정말로 달우물 의식을 할 생각이었다. 소금 의회에서 합당한 자를 데려온다면 말이지. 인신 공양은 어디까지나 내게 있어 최후의 수단이었다. 하지만 너를 만나는 순간 깨달았지.]
익사자 왕은 낮은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소금 의회의 아이들은 우르반수스에서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육신은 순수하게 그 세계의 압력에 짓이겨질 거야. 허락받지 않은 것들을 감히 용납하지 않는 세계니까.]
사후세계에 산 육신을 가지고도 살아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은 그에 맞춰 단련되거나, 신의 초대를 받아 육신이 개조되거나, 애당초 거기에 맞게 태어난 존재들뿐이다.
이를테면 천사와 인간의 혼혈인 네필림이라던가.
[하지만 너를 본 순간 모든 계획이 달라졌다.]
계획?
[불사 교단의 해골들은 칼센이 아홉 번째 신앙이 되면 소금 사막을 깨뜨려주겠다고 약속했지. 그러나 그 약속은 깨졌다. 이제 그는 없다! 하지만, 하지만!]
익사자 왕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아이작을 거대한 눈으로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너라면 내가 신성으로 도약하는데 충분한 제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자리에서 신성을 획득하여 비어있는 아홉 번째 권좌에 도전하겠다! 그리하여 천년의 기다림을 마침내 끝낼 것이다!]
그의 말투에는 희열마저 느껴졌다.
[내가 원하는 제물은 너다, 아이작!]
"...."
아이작은 자신의 심장 아래서 싸늘하게 불타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이 '익사자 왕'을 처단하길 원합니다.]
[혼돈의 포상이 당신을 기다립니다.]
116화. 익사자 왕 (3)
익사자 왕의 거체에 압도당했던 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익사자 왕은 자신의 포효에 겁먹으리라 예상했던 아이작이 이전과 다른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자 의아함을 느꼈다.
심해는 인간에게 친절하지 않다.
과거 어부에 불과했던 시절을 잊어버린 익사자 왕에게, 대부분의 인간의 눈이란 숨통에 물이 들어차 고통스러운 눈, 이미 썩어 부유하는 자의 흐리멍텅한 눈, 망망대해를 표류하다 자신을 보고 그저 자비를 갈구하는 경외감 섞인 눈이 전부였다.
하지만 아이작은 그중 어떤 눈으로도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생소한 눈빛에 익사자는 오히려 감정을 읽지 못해 당혹감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당혹감을 느꼈다는 사실에 분노를 느꼈다.
익사자 왕의 지시를 받고 복수심에 불타는 어인들이 빠르게 다가왔다.
물 위에서 일방적으로 그들을 도륙하던 때와 달리 이제 아이작은 물속에 갇힌 몸이었다.
물속에서 아이작은 무슨 수를 써도 그들보다 빠를 수 없었다.
수십 개의 하얀 손들이 아이작을 갈기갈기 찢기 위해 들이닥쳤다.
아이작은 곧바로 루앗딘 열쇠를 꺼내 들었다.
그걸 본 어인들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냈다. 그 들끓는 열기에 화상을 입은 어인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계속해. 저놈은 열기를 피워올리지 못한다.]
루앗딘 열쇠의 열기를 피워올렸다간 아이작의 몸도 끓어오르는 바닷물 속에 익어버릴 터였다. 수증기 정도의 열기는 막을 수 있어도 끓는 물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어인들은 그 말을 듣고 다시 아이작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이작은 그 말대로 루앗딘 열쇠를 뽑아 들었지만 열기를 끌어올리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씩 웃으며 몸을 튕겼다.
아이작의 몸이 순식간에 어인들의 코앞으로 들이닥쳤다. 순간적으로 물거품이 생길 정도였다. 포식 효과 때문이었지만 예상보다 훨씬 빠른 움직임에 어인들은 그의 움직임을 놓치고 말았다.
콰득. 검날이 뼈를 부수고 살갗을 갈랐다.
가슴을 찔린 어인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지만, 창날들이 어인의 몸을 관통하면서 그마저도 멎었다. 다른 어인들이 내지른 창이었다.
어인들은 자신의 편이 찔리는 것도 아랑곳 않고 공격을 펼쳤으나, 아이작은 자신이 처음 찌른 어인을 교묘하게 가림막 삼아 공격을 회피했다.
'이상하군.'
익사자 왕은 아이작의 움직임을 지켜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처음에는 발악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봐도 물에 빠진 사람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아무리 단련된 자라도 물에 빠지면 당황하기 마련이다. 특히 아이작처럼 단련된 기사는 더더욱 그랬다. 검술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검술은 팔만 휘두른다고 되는 게 아니라 발의 움직임과 단단히 디딜 지반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역시나 아이작은 검술을 사용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놀라울 정도로 잘 버티고 있었다.
설령 대단한 평정심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을 잘 다스린다 하더라도, 이 정도 격한 움직임과 상황에 빠졌으면 조금이라도 초조함을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이작은 그렇지 않았다.
지금쯤 숨도 못 쉬고 있어야 하는데 저 여유 있는 움직임은 뭐란 말인가?
'그저 익사할 때를 기다리는 버티기에 불과하다!'
퉁. 그때 익사자 왕은 어인이 가까스로 제대로 찔러넣은 창이 갑옷에 미끄러져 빗나가는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저 갑옷이 문제인가?'
아이작이 입고 있는 갑옷에서는 상당한 기적의 기운이 느껴졌다.
뭔가 억눌리고 비틀린 기이한 기운이었지만, 흘려넘기기는 힘든 힘이었다.
아이작 역시 사방에서 내지르는 창날을 전부 피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는 교묘하게 창날이 틈새를 찌르지는 못하게끔 교묘하게 회피하며 흘려넘겼다.
'안 되겠군.'
익사자 왕은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고 촉수를 뻗었다.
익사자 왕의 촉수는 그리 빨라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은 덩치 때문에 일어나는 착시다. 가까이 있던 아이작은 촉수가 가까이 오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리는 파괴력을 느꼈다.
아이작의 온 사방에서 촉수가 순식간에 덮쳐 왔다. 예상할 수도, 알더라도 피할 수 없는 거대한 촉수가 들이닥치자 어인들 몇몇마저 휘말려 산산조각 났다.
빠져나갈 틈 따위는 없었다.
그 순간 아이작의 몸이 흐릿한 핏빛 형상으로 바뀌었다.
'무슨?'
익사자 왕의 촉수가 허무하게 물살을 갈랐다.
핏빛 형상은 빠르게 소용돌이에 뒤섞여 흩어졌다가 멀지 않은 곳에서 다시 아이작의 형상으로 다시 나타났다. 익사자 왕은 아이작이 처음으로 기적을 발휘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기적? 아니, 빛의 법전에 저런 기적이 있던가?'
빛의 법전은 소금 의회보다 오래된 신앙이다. 익사자 왕은 빛의 법전에 저런 기적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익사자 왕의 거대한 촉수가 몇 번 더 허무하게 바닷물 속을 갈랐다. 하지만 그때마다 매번 아이작은 핏빛 형상으로 모습을 바꾸며 촉수를 회피했다. 그러나 익사자 왕 또한 아이작이 몇 번이나 회피하긴 해도, 물 밖으로 나가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몸의 형태를 바꾸기는 해도 소용돌이에 휩쓸려 다시 심해로 처박히는 것이다.
'피비린내? 이건 확실히 빛의 법전의 기적이 아니다.'
익사자 왕의 후각은 상어만큼이나 민감했다. 그는 아이작이 형상을 바꿀 때마다 혈향이 짙어지는 것을 느꼈다.
익사자 왕은 이제 아이작이 빛의 법전의 성기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추정을 했다. 생각해 보면 아이작은 어인들을 상대할 때에도 빛의 법전의 기적을 쓰지 않았다.
파도의 교리를 빌려 쓰고, 오직 루앗딘 열쇠를 들고 휘둘렀을 뿐이었다.
[이놈, 너 뭐 하는 놈이냐!]
당연히 아이작에게는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익사자 왕은 아이작이 순순히 제물이 될 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
'역시 못 알아보는군.'
아이작은 익사자 왕의 당혹감을 보면서 예상대로라고 느꼈다.
헤사벨은 소금 의회에 관해 거의 알지 못했다.
왈라이카 공국이 내륙국인데다 두 신앙 사이에 별다른 교차점이 없기 때문이다.
익사자 왕이라고 다를 리 없었다. 게다가 익사자 왕은 외부 세계의 변화에 둔감한 편이다.
사실 붉은 성배는 익사자 왕이 잠든 이후에 나타난 신앙이니 잘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법이다.
반면, 아이작은 익사자 왕에 대해서 아주 잘 알았다.
'제물로 삼아? 네가, 나를?'
아이작은 실소했다.
익사자 왕이 자신을 제물로 삼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아이작이 느낀 감정은 분노도, 공포도 아니었다.
그 감정을 정확히 표현하자면 '같잖음'이었다.
아이작은 익사자 왕을 처음 봤을 때 순수한 경외감을 느꼈다. 게임에서 본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천지 차이였으니까.
히야니스가 저런 존재를 상대하겠다고 말했을 때에는 우습다고까지 느꼈다.
어차피 익사자 왕과 싸울 일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즉, 아이작은 익사자 왕과 싸울 전략을 세우지 않았다.
정확히는, 처음부터 전략 따위는 세울 필요도 없었다.
싸우기로 마음먹은 순간 아이작의 머릿속에는 자신이 가진 능력과 역량, 도구, 장비, 지원들을 고려해서 익사자 왕을 공략할 수십 가지 방법들이 떠올랐으니까.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붉은 살점의 선지자와 싸울 때보다 쉽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자신이 패배할 가능성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익사자 왕을 게임 속에서 수십 번 공략해 보았다.
지금 아이작이 가진 역량으로는 지려야 질 수 없는 조건이었다.
쿠르르르르.
익사자 왕은 아이작을 잡는 것이 맨손으로 물을 잡으려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깨닫고 전략을 바꿨다. 그가 무슨 기적을 발휘하는지는 몰라도 몸을 액체나 기체의 형태로 바꾸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물의 흐름을 조종하면 그만이었다.
물속에서 둥근 수류(水流)가 형성되며 붉은 탄원으로 형성된 아이작을 가두기 시작했다. 익사자 왕은 거대한 입을 벌려 물을 빨아들였다. 통째로 먹어 치우려는 생각이었다.
어인들도 그 생각을 깨달은 듯 그 물살에 휘말리지 않게 허우적대며 벗어나기 시작했다.
둥근 수류는 이내 익사자 왕의 거대한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수천 개의 이빨들이 날카롭게 바글거리며 아이작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이작은 그 흐름에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 대신, 오히려 단숨에 익사자 왕을 향해 물살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익사자 왕 입장에서는 파리가 달려드는 것만큼 어이없는 행동이었다.
달려들어서 뭘 어쩔 건가, 칼이라도 휘두를 건가? 설령 몸 안에서 루앗딘 열쇠의 열기를 끌어올리더라도 그에게는 소용없었다.
고작 성물에 담긴 기적 따위, 기적 그 자체인 천사와 비견할 수 없었다.
[...어리석은 놈!]
익사자 왕은 아이작을 입 안에 넣자마자 바로 나가지 못하게 다물어버렸다.
그대로 수천 개의 이빨로 아이작을 씹어 삼키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씹어 삼켜 버리면 한 끼 식사도 되지 않는다. 정당한 제례 의식을 통해 자신의 희생양으로 삼아야 했다.
하지만 이미 입 안에 들어온 이상 아이작도 저항할 방법이라곤 없을 터였다.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면 제물로 만들 생각이었다.
꿈틀.
익사자 왕은 기분 나쁜 이물감을 느꼈다. 입 안에서 칼이라도 휘두르는 건가 하기에는 비교도 안 되는 끔찍한 느낌이었다. 이내 그의 입 안에서 피가 번져 나왔다.
'이게 무슨...?'
익사자 왕은 섬세한 기적을 발휘하지는 못하는 대신 그 강대한 육신 자체가 기적이다. 그의 촉수는 무한대로 자라나고, 재생력에는 끝이 없다.
칼 몇 번 휘두른다고 통증을 느낄 육신이 아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익사자 왕은 아이작의 몸이 다소 상하더라도 팔다리 정도는 끊어 놓기로 했다.
그러나 그가 입안을 굴려 아이작을 씹으려 한 순간, 익사자 왕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역한 느낌에 아이작을 뱉어 버리고 말았다.
시커먼 핏물 속에서 아이작의 기묘한 실루엣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 실루엣은 아이작보다 훨씬 컸다.
그제야 익사자 왕은 자신의 입 안이 온통 뜯겨나간 것처럼 벗겨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작의 기묘한 실루엣은 바로 익사자 왕 바로 자신의 살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익사자 왕'을 일부 포식하였습니다.]
['죽은 신의 내장' 특전으로 섭취 효율이 상승합니다.]
'이 정도만 먹어도 포식 특전이 주어지는군.'
아이작은 기분 좋은 소리에 미소 지었다. 원래 일부 포식 정도로는 특전이 주어지지 않는다. 심장이나 핵심적인 부위, 혹은 아주 많은 살점을 먹어야 포식 특전이 주어졌는데, 천사라서 그런지 일부만으로도 특전이 전해졌다.
[촉수의 길이가 대폭 상승합니다.]
[촉수의 재생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소화될 때까지 축복이 유지됩니다.]
'대충 다 먹어 치우면 무슨 특전을 줄지 예상이 되는군.'
지금은 일시적이지만 많이 먹으면 촉수의 능력이 영구적으로 대폭 강화될 것이 분명했다. 아이작은 사방에 퍼진 핏물 속에서 어인들이 다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아이작은 더 이상 정체를 숨기지 않았다.
그는 거리낌 없이 왼손에서 뻗어 나온 촉수를 휘둘렀다.
길게 뻗어 나온 촉수가 사방 10m에 있던 어인들을 단숨에 이빨로 물어뜯고 찢어발겼다. 어인들은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일방적인 대량 살육에 경악하며 물러났다.
아이작은 찢겨 나간 어인들을 촉수로 다시 먹어 치우며 배를 불렸다.
물속이라서 검술을 펼칠 수 없었던 불리한 환경은 촉수가 나온 순간 다시 일방적인 도살장으로 바뀌었다.
[너는....]
익사자 왕은 그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아이작은 그를 보고 비웃으며, 다시 빠르게 달려들었다.
피 맛을 본 짐승이 달려드는 듯한 모습에 익사자 왕은 불쾌함을 느꼈다. 하지만 아이작이 다가오면서, 그의 촉수가 두 가닥, 세 가닥으로 나뉘기 시작하는 것을 본 순간 그는 더 이상 불쾌함을 느끼지 않았다.
심장을 저미는 듯한 섬뜩함이 그의 본능을 장악했다.
여덟 갈래로 갈라진 아이작의 촉수가 사나운 뱀처럼 그의 살점을 물어뜯기 위해 달려들었다.
117화. 익사자 왕 (4)
위기라는 본능이 이성을 장악한 순간, 익사자 왕은 천사로서의 위엄 대신 동물로서의 보호 본능을 발동하고 말았다.
쿠르르르르!
달려오던 아이작의 코앞으로 시커먼 먹물이 뿜어져 나왔다. 입에 닿는 것은 뭐든 다 물어뜯을 기세로 쏘아져 오던 아이작은 눈 앞을 가리는 먹물에 방향을 잃고 휘청였다.
익사자 왕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촉수를 휘둘렀다.
콰아아아아!
아이작은 정신없이 세계가 뒤집어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엄청나게 빠른 수류가 그의 몸을 휘저어대고 있었다. 익사자 왕의 거대한 촉수 주변으로 빠른 소용돌이가 휘감겨 있었다. 아이작의 몸은 거기에 휩쓸려 버린 것이다.
붉은 탄원을 사용해 흘려보내려는 시도도 의미가 없었다.
[고작 상처 좀 입혔다고 감히 신의 권능을 부여받은 자에게 대적하려 드느냐!]
익사자 왕은 지독한 자존심의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먹물을 뿜는 방법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지난 천년 동안 회피하거나 방어할 일 따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마땅한 기적과 권능이 없는 대신 강한 육신과 무한에 가까운 재생력이 있었다.
아이작이 입 안에 들어와서 뜯어간 살점 따위는 몇 초 걸리지 않아서 재생시켰을 정도였다. 아이작이 그깟 얄팍한 촉수로 자신의 다리에 흔적을 조금 남겨 봤자, 아무런 타격도 안 될 것이 분명했다.
'무슨 수작을 부렸기에...!'
하지만 그는 반사적으로 그 촉수를 맞아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고 움직였다.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익사자 왕은 자신이 나약해졌다고 생각하는 대신, 아이작이 뭔가 수작을 부렸다고 의심했다.
그만큼이나 아이작의 힘은 이질적이었다.
촉수가 순식간에 아이작을 옥죄었다.
금방이라도 그를 으깨 터뜨릴 것 같은 강한 힘이 사방에서 전해져왔다.
우득거리며 뼈마디 몇 개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 뭐 하는 놈이냐! 어떻게 그 기적을 쓸 수 있는 거지? 어떻게 훔쳐 온 기적이냐?]
익사자 왕은 아이작이 이름 없는 혼돈의 신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네필림이니 기적을 훔쳤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온몸의 뼈가 부러지는 와중에도 익사자 왕을 향한 비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아이작이 그를 향해 뭐라고 뻐끔거렸다.
익사자 왕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뭔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뭔가 일어나고 있었다.
'가엾은 놈, 지능마저 문어 수준으로 떨어졌구나....'
익사자 왕은 문득 들려온 소리에 흠칫 몸을 떨었다. 아이작이 말한 건가 했지만 물속에서 그가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익사자 왕은 급히 주변에 다른 누군가 있는지 기척을 감지해보았다.
물속에 있는 것은 아이작과 자신, 그리고 어인들 뿐이었다.
'문어는 포식자에게 쫓기면 먹물을 내뿜고, 그래도 붙잡힐 것 같으면 다리를 자르고 도망가지. 그래도 다리를 자르고 도망치지 않은 게 다행이구나?'
'이게 무슨?'
누군가 소곤소곤 그의 머릿속에 대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 목소리는 묘하게 달콤하고 동시에 폐부를 저미는 듯 날카로워서 무시하기가 어려웠다. 익사자 왕은 자신이 뿜어낸 시커먼 먹물로 가득한 바다 저편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 같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해한다. 오랜 시간 심해에 처박혀 대화도 못 하고 신의 목소리도 듣지 못하고 있노라면 존재 자체에 의문을 품기 마련이지.'
[닥쳐... 닥쳐라!]
'사실 이미 짐승과도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나? 천년이다. 너는 지금 천년 동안 신의 말씀도 듣지 못하고 우르반수스의 풍경도 들여다보지 못했지.'
부르르르르!
익사자 왕은 거칠게 촉수로 사방을 휘저었다. 스치기만 해도 어인들의 사지가 찢겨나갈 정도로 거센 물살이 바다를 휩쓸었다. 심해에서 끌려 올라온 흙먼지와 핏물이 그의 시야를 더욱 어둡게 만들었다.
어둠 속에서 속삭이는 목소리는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들려왔다.
'네가 조바심을 느낀 것도 당연하구나. 무엇보다 너 스스로 네가 짐승 수준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을 테니.'
목소리는 아플 정도로 그의 두려운 부분을 찌르고 있었다. 마치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말하는 것처럼.
'오오, 심해에 처박힌 천사야. 두려웠느냐? 한때 위대했던 천사가 그저 전설 속의 괴물로 전락하는 것이? 그래서 반역하고 야만의 신이라도 되려 한 것이냐?'
[닥치라...!]
순간 익사자 왕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단숨에 자신의 촉수 중 하나를 물어뜯어 끊어 버렸다. 맹렬한 통증이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그제야 물속에 섞여 있던 자신의 먹물 외에도 기이하게 일렁이는 이상한 색채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체불명의 목소리는 그 색채 속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설마 이것도?'
익사자 왕은 자신이 환청에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천사를 홀릴 정도로 강력한 환청이라는 사실에 익사자 왕은 경악하며 아이작을 내려다보았다.
어느새 그의 촉수를 끊어 내고 풀려나온 아이작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띤 채 입 모양 만으로 말하고 있었다.
늦었어.
쩍. 순간 뭔가 익사자 왕의 몸을 강하게 옥죄기 시작했다.
온몸에 붉은 실금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서야 익사자 왕은 자신이 뭘 놓쳤는지 깨달았다.
그의 시선이 위쪽, 수면으로 향했다.
***
히야니스는 떠오르기 시작한 핏빛 실루엣을 보면서 비로소 소리쳤다.
"낚았다!"
옌코스는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히야니스가 저지르고 있는 일, 그리고 옌코스가 방관하고 있는 일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불경이었다. 하지만 천사의 반역을 가만히 지켜보고 찬동하는 것도 불경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둘 중 어떤 게 더 큰 죄고, 더 큰 여파를 가져올지 알 수 없었다.
"소금 의회의 성물로 소금 의회의 천사를 사로잡다니!"
"신께서도 이해해주실 겁니다!"
소금 의회의 성물, '어부왕의 그물'.
목표로 한 것은 무엇이든 사로잡을 수 있는 이 성물은 소금 의회 성물들 가운데 가장 귀하게 여겨지는 것 중 하나이자, 히야니스가 익사자 왕을 처치하기 위해 가져온 것이었다.
심지어 익사자 왕과도 인연이 있는 성물이었는데, 익사자 왕이 아직 '어부왕'이라고 불리던 당시, 그의 익사체를 끌어올린 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바닷속에서 익사한 그는 익사자 왕이라는 명천사로 되살아났다.
그랬던 성물이 이제는 그를 제압하기 위해 산채로 끌어올리고 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성배기사님은? 성배기사님은 무사하신 것 같나?"
옌코스가 초조하게 수면을 들여다보았지만 아이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깊이 가라앉았는지 익사자 왕도 떠오르려면 한참 기다려야 할 정도였다. 사실 이만한 시간이 지났다면 살아있기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었다.
"기적을 바라는 수밖에요."
히야니스는 어부왕의 그물 끝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어부왕의 그물은 정말 그물이 아닌, 나무로 된 묵주 형태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묵주 마디마디에는 형체도 없고 크기도 가늠하기 힘든 거대한 투망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투망은 익사자 왕의 거대한 육신조차도 바다 위로 끌어올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어부왕의 그물은 대상을 끌어올리기만 할 뿐, 해치지는 못한다.
그다음부터 익사자 왕을 상대하는 것은 온전히 소금 의회의 몫이 될 것이다.
익사자 왕의 분노와 직면해야 하는 것이다.
그물이 올라올수록 그 사실을 선명하게 깨달으며, 옌코스는 간절히 기도했다.
"제대로 준비했길 바란다."
"뭐, 우리야 최선을 다했지요. 당신들이 문제지."
"우리도 최선의 준비를 다하긴 했지. 익사자 왕을 상대할 무기들은 아니었지만."
옌코스의 함대에는 히야니스의 함대를 상대할 무기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 역시 만만치 않은 무장이었다.
히야니스는 씩 웃으며 그녀를 곁눈질했다.
"갑자기 왜 마음을 바꿨습니까?"
히야니스는 아이작이 빠지자마자 바로 어부왕의 그물을 가져와 의식을 시작했다. 옌코스는 그 모습을 보았지만 적극적으로 제지하지는 않았다.
지금이라도 칼을 휘둘러 히야니스의 목이라도 따버리면 제지할 수 있을 테지만, 그러지도 않았다.
결국 그녀는 히야니스의 천사 사냥에 동조한 셈이었다. 옌코스의 함대 또한 그녀의 결정을 따를 테니까.
옌코스는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빌어먹을, 그러면 어떻게 해?! '어찌 됐든 신의 부활을 기다리면서 최대한 버틴다'가 우리 의회 지침이었는데 저 빌어먹을 문어 새끼가 일방적으로 결정해버렸잖아!"
에이단을 인질로 잡은 것 또한 뭐가 뭔지 모르는 상황에서 엉겁결에 상황 유지를 위해 벌인 일에 가까웠다. 소금 의회 신도는 소금 의회의 천사를 일단 믿는 게 당연했으니까.
하지만 빛의 법전 주교를 공격하고 성배기사를 바다에 빠뜨린 시점에서 중립은 존재할 수 없었다. 그녀는 '상황 유지'를 포기하고 기존에 결정된 의회의 결정 사항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만약 여기서 익사자 왕이 패배한다면, 그의 패배 원인은 '일방적인 소통방식'이 될 것이다. 그가 차분하게 소금 의회를 설득했다면 감히 천사의 의견을 거절할 의원들은 없을 테니까.
"올라온다!"
부글거리며 바다 거품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히야니스는 그물에 낚여 올라오는 익사자 왕의 신체를 보면서, 신성 모독이라 판단될 수 있는 한마디를 외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지 못했다.
"월척이다!"
***
콰아아아아아....
바닷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폭포수처럼 울려 퍼졌다. 몸에 품고 있던 물이 흘러내릴 뿐인데도 강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 같았다. 익사자 왕의 거체가 올라온 것만으로도 배들이 휘청거리면서 가랑잎처럼 흔들거렸다.
예상보다 거대한 익사자 왕의 거체에 히야니스를 비롯한 선원들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 모두 익사자 왕의 몸 일부만을 봐 왔을 뿐, 수면 아래 얼마나 거대한 몸이 있을지는 상상만 해 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예상을 초월하는 몸에 그들 모두 본능적인 공포감을 느꼈다.
그 사이 아이작은 수면 밖으로 물을 박차고 올라왔다. 소용돌이가 사라지자 물 밖으로 탈출하는 것은 쉬웠다.
"성배기사님!"
그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것을 본 히야니스가 반색하며 소리쳤다. 익사하고도 남을 정도의 시간이었음에도 아이작은 상대적으로 멀쩡해 보였다. 그는 오히려 손짓을 보내며 히야니스에게 자기 일에 집중하라는 지시를 보냈다.
상대는 천사였다. 한눈팔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아이작은 저런 거체를 드러내고도 여전히 몸 일부가 물에 잠겨있는 익사자 왕을 보고 어처구니없는 기분을 느꼈다.
'이 수십 척의 배들을 다 합쳐도 익사자 왕보다 작을 거 같은데.'
저 거대한 몸이 허공에 매달린 것만으로도 충분히 장관이었다.
아이작은 새삼 히야니스의 계획이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익사자 왕도 비슷하게 느끼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익사자 왕은 당연히 이 성물을 주의하고 있었다. 히야니스가 어부왕의 그물을 가져왔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그를 먼저 제거하려고 했던 것인데, 상황이 꼬이고 갑자기 전투가 벌어지면서 아이작에게 먼저 신경 쓰다가 잊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저 불편할 뿐이었다.
그의 촉수가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그물 속에 촉수 상당수가 뒤엉켜 있었으나 뼈가 없는 유연한 몸에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후우우우웅!
그물 밖으로 빠져나온 촉수가 수면을 긁었다. 바다가 갈라지는 듯한 파도가 일어나면서 주위에 있던 배 한 척을 그대로 뒤집어 버렸다. 선원들이 비명 지르며 뛰어내렸다.
압도적인 위력에 히야니스는 몸을 경직시켰다.
[당장 이걸 풀어라, 사제.]
이것은 경고였다. 바다를 가를 것이 아니라 배를 내려쳤으면 단숨에 배에 있던 선원들 전부가 전멸했을 테니까.
하지만 히야니스는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포경 작살 준비!"
118화. 익사자 왕 (5)
어부왕의 그물로 끌어올린 다음, 포경 장비들을 동원해 익사자 왕을 사냥한다.
이게 히야니스가 세운 불경하면서도 투박한 전략이었다.
어부왕의 그물까지는 그럴듯하다 생각했지만, 기껏 동원한다는 것이 포경 장비라는 것에 익사자 왕은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했다.
고작 고래잡이용 작살 몇 개 정도로 천사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하지만 그것은 익사자 왕의 착각이었다.
포경 산업, 일명 고래잡이는 지난 천년 이래 익사자 왕이 상상도 못할 정도로 발달했다.
"발사!"
배들이 각도를 잡기 무섭게 발리스타에 매달려 있던 포경 작살들이 일제히 익사자 왕을 향해 날아갔다. 어부왕의 그물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저 커다란 덩치를 맞추지 못하는 것이 더 어려웠다.
쾅, 쾅쾅!
익사자 왕은 자신의 몸통을 단숨에 후벼파는 거대한 작살들을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거의 닻만 한 작살들이 몸에 꽂히고 있었다.
과거 포경이라 함은 해안으로 고래 떼를 몰고 가서 작살을 던지거나 좌초하게 만드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 작살들은 아예 고래를 끝장내고 그대로 항구까지 끌고 가기 위한 장비들이었다.
익사자 왕은 그 모습을 보면서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천년에 걸쳐 심해 속에 처박혀 말조차도 섞지 않고 짐승 수준으로 쇠락해 갔다. 하지만 그동안 신도들은 자기 나름대로 그들을 비호하는 기적이 없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전을 거듭해 왔던 것이다.
"있는 대로 다 쑤셔 박아!"
소금 의회 선원들은 눈을 질끈 감고 작살을 쏘았다. 익사자 왕은 피하거나 촉수를 휘둘러 막아 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맞기만 했다. 처참하게 피 흘리는 익사자 왕을 보면서 울면서 작살을 쏘는 선원들도 있었다.
그들 모두 신이 떠난 뒤 여전히 이 세계에 남아 소금 의회를 지키는 천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 왔다. 물론 익사자 왕은 그 대부분의 시간을 심해에 잠든 채로 보냈지만, 그런 존재가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소금 의회 신도들은 신과 자신들을 잇는 끈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끈을 자기 손으로 끊고 있었다.
"1함대 작업 끝났습니다!"
"2함대 종료!"
작살 작업이 끝났다는 알림들이 연달아 이어지자 히야니스는 다음 수순을 지시했다.
"작살 박았으면, 1함대부터 즉시 대열에서 이탈한다!"
배들이 일제히 대열을 빠져나와 움직이기 시작했다. 원래의 포경이라면 항구로 끌고 가기 위한 작업이 될 테지만, 이 함대의 이탈에는 방향성이 없었다.
아니, 온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작살에 꽂혀있는 익사자 왕을 산산이 찢어 놓기 위한 작업이었다.
빠아아아아! 작살에 매달린 밧줄이 맹렬한 진동음을 냈다. 포경선들은 돛과 노를 총동원해 익사자 왕을 자기들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퍽, 퍼퍽.
처참한 소리와 함께 익사자 왕의 살점이 찢겨 나가기 시작했다. 작살과 함께 거대한 상처를 남기고 튀어나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부왕의 그물에 뒤엉켜 살점이 통째로 끌려 나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익사자 왕은 산채로 분해되고 있었다.
[그렇군.]
익사자 왕은 찢겨져 나가는 자신의 몸을 보면서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능지처참을 당하는 당사자라고는 믿을 수 없는 말투였다.
[이게 의회의 결정이군.]
익사자 왕은 소금 의회가 만들어지기 전, 소금 교단으로 불리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신으로부터 단절되어 남겨진 그들은 신의 의지 없이 자신들끼리 결정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대신 그들은 모두가 책임을 공유하기 위해 의회를 만들었다.
신도들 모두의 의지로 결정한 일이라면 신의 의지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면서.
때문에 익사자 왕도 소금 의회의 결정을 존중해 왔다.
그리고 지금 소금 의회가 그의 사형을 결정하고 집행하고 있었다.
배교자에게 합당한 결론이었다.
[그렇다면....]
***
아이작은 산산이 찢기는 익사자 왕의 처참한 모습을 지켜보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히야니스는 이미 승부가 결정 났다고 본 듯했다. 하지만 아이작의 생각은 달랐다.
'이걸로 익사자 왕이 끝장난다면 좋겠지만....'
익사자 왕의 재생력은 무한에 가깝다. 지금 저 풍경이 끔찍해 보일지 몰라도, 그가 마음먹고 반항하기 시작한다면 함대 절반은 즉시 바닷속에 처박혀도 이상하지 않았다.
만약 여기서 익사자 왕이 죽는다면 그것은 익사자 왕 스스로가 포기했기 때문이다. 의회의 결정을 존중하고, 자신의 죄를 깨달으면서 죗값을 뉘우치기 위해서 말이다.
사실 그것도 아이작이 고려한 공략법 중 하나였다.
하지만 아이작은 그럴 가능성을 낮게 보았다.
그때 아이작은 익사자 왕의 몸이 꿈틀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드드득, 드드드드득.
어부왕의 그물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아이작이 곧바로 외쳤다.
"밧줄 다 끊어!"
배의 이탈을 독려하면서 맹렬하게 돛줄을 잡아당기던 히야니스는 아이작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들었어도 아이작의 말에 바로 반응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갑자기 익사자 왕을 풀어주라는 지시를 들어주기는 어려웠으니까.
아이작은 길게 생각할 것 없이 바로 수면을 박차며 가장 가까이 있던 밧줄들을 끊었다. 팡.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밧줄들이 끊어져 나가며 채찍처럼 수면을 긁었다. 갑자기 자유로워진 배들이 튕겨 나가듯 앞으로 쏘아지며 선원들이 나동그라졌다.
몇몇 배들이 전복될 듯 휘청거리는 것을 본 히야니스는 아이작이 밧줄을 끊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아이작을 나무라기 위해 뭐라 하려던 순간, 익사자 왕이 허공에서 몸을 맹렬하게 뒤틀었다.
펑. 소금 의회의 가장 귀중한 성물 중 하나인 어부왕의 그물이 산산이 찢어지며 배 수십 척이 일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키는 굉음이었다.
그 커다란 배들이 마치 낙엽처럼 가볍게 흩날리고 있었다. 말이 안 나오는 정적도 잠시, 수십여 척의 배들은 단 한 순간에 허공과 바다에서 뒤엉키며 박살 나고 흩어졌다.
콰두두두두두!
공포스러운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 단단한 배마저도 유리잔처럼 산산조각 나는 상황 속에서 피와 살점으로 이루어진 사람의 몸이 견딜 재간 따위는 없었다.
곤죽이 된 잔해들과 피, 살점 따위가 뒤섞여 빗물과 함께 쏟아져 내렸다.
아이작이 줄을 끊었거나, 이미 닻이 뽑혀있던 배, 운 좋게 상태가 안 좋아서 밧줄이 끊어진 배들만이 살아남았다. 히야니스가 탄 용맹한 연어호는 바로 그 운 좋은 배 중 하나였다.
하지만 히야니스는 결코 운이 좋다고 말할 수 없었다.
살아남은 사람은 뜬 눈으로 지옥을 봐야 했으니까.
철퍽철퍽. 갑판 위로 형상을 알아보기 힘든 사람의 파편들과 부서진 배들이 쏟아져 내렸다. 커다란 돛대가 제대로 꽂혀 버린 배 한 척은 기울어지다가 기어코 침몰했다.
히야니스는 귀가 먹먹했다.
아까 익사자 왕이 배들을 모조리 날려 버렸을 때 귀가 멀어 버린 것 같았다.
혹은 정신이 나갔거나.
"...야니스!"
나는 어쩌자고 천사를 상대하려고 한 거지? 근방에 있던 성배기사가 단신으로 천사를 추방했다는 소문 때문에 천사를 얕봤나? 정말 성물과 포경 장비들만 있으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교단이 천년 전 해상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천사가 그렇게 우스웠나?
"히야니스!"
전멸.
히야니스의 머릿속에 그 두 글자가 스쳐 지나갔다. 소금 의회가 가진 가장 크고 비싼 배들이 거의 다 여기에 몰려왔다. 게다가 선장을 비롯한 그 희귀한 사제들까지.
그 모든 자산들이 무가치하게 바닷속에 처박힐 것이다.
그들의 죽음을 전해 줄 사람조차 남지 않고.
그리고 이 비극을 유도한 사람은 바로 히야니스 본인이었다.
"히야니스, 정신 차려!"
뻑! 히야니스의 뺨이 돌아갔다.
그제야 히야니스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옌코스가 피범벅이 된 채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히야니스가 정신을 못 차렸다고 생각한 듯 한 번 더 후려갈겼다.
"됐습니다. 정신 차렸습니다. 그만 때리세요. 이빨 나갔습니다."
"정신 들어? 그래서 다음은 어떻게 할 건데? 다음 전략 정도는 있겠지?"
옌코스는 충격적인 풍경에 놀라지도 않은 듯 다음 전략을 물었다. 문득 히야니스는 그녀가 고고학에 능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남들보다 훨씬 더 익사자 왕에 대해 해박하다. 익사자 왕을 상대하게 된다면 결국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제야 히야니스는 옌코스가 그렇게 익사자 왕과 대적하기를 거부하던 이유를 이해했다. 그리고 익사자 왕과 대적하기로 했을 때 다른 사람보다 몇 배는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했으리라는 것도.
하지만 히야니스는 울 것 같았다.
"다음 전략은 없습니다."
"없다고? 천사를 상대하면서 이게 전부라고?"
"예."
있긴 있었다.
하지만 이 참상을 본 순간 두 번째, 세 번째 계획 따위는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지 물고기 밥과 바다 쓰레기를 늘릴 뿐이다.
저 압도적인 힘의 천사를 상대로는 그가 준비한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었다.
옌코스는 말없이 히야니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에는 책망도 원망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담담하게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시선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 기도하는 수밖에 없겠군."
히야니스는 울면서 옌코스의 시선을 따라갔다. 옌코스는 하늘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바다 위, 한 사람을 향해 있었다.
대답 없는 신 대신 그들을 구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
아이작은 함선들이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처참한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 광경은 이제 소금 의회와 익사자 왕의 관계를 상징하는 것 같았다.
익사자 왕은 이때까지 소금 의회가 미묘한 입장을 보이고 소극적으로 저항하더라도 관대하게 기다려 주고 용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치열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소금 의회 선원이 한 명도 죽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는 처참하고 잔인한 방식으로 관계의 끝을 선언했다.
그 말은 이제 익사자 왕이 소금 의회의 천사가 아니며, 심해의 괴물이 되었음을 뜻했다.
물론 소금 의회의 신은 그를 타천사로 만들 수도 벌을 줄 수도 없겠지만.
어부왕의 그물은 찢어진 상태로도 익사자 왕을 붙잡기 위해 마지막 남은 기적을 쥐어짰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익사자 왕은 흘러내리듯 다시 바다로 돌아왔다.
바다는 익사자 왕과 선원들의 피로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그의 몸은 구멍 나고, 찢어지고, 토막 나고, 난도질당한 상태였다. 그러나 바닷물이 스며들기 무섭게 마치 구멍 난 자리를 메우듯 상처가 치료되었다.
익사자 왕의 군청색 눈동자가 희번덕거리며 아이작을 향했다.
[이 풍경에는 네 책임도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성배기사.]
"까고 있네."
아이작은 쥐톨 만큼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히야니스를 향해 손짓을 보냈다. 소금 의회의 사기는 바닥났을 테고, 공격할 수단도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유일하게 기대했던 어부왕의 그물마저 박살 난 상태라면 그들이 여기 없는 편이 나았다.
소금 의회의 배들은 머뭇거렸지만 결국 천천히 미끄러지듯 멀어지기 시작했다. 익사자 왕도 소금 의회가 물러나는 것까지 쫓아가서 박살 내진 않았다. 아니면 그들이 물러나더라도 곧 쫓아가서 전부 침몰시킬 자신이 있다고 믿는 것이거나.
[왜 나를 막는 거냐. 내가 고대신이 되려는 것 같아서? 아니, 고대신이라는 표현도 우습군. 빛의 법전이 고개를 들기 전까지만 해도 고대신들은 그냥 이 세상의 신들이었다!]
익사자 왕은 부글거리며 분노를 드러냈다.
[그들은 수천 수만 년간 이 땅을 지배했던, 신이자 질서 그 자체였다! 루앗딘이 만들어 낸 빛의 시대는 고작 천년밖에 안 된다!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뿐인데!]
"천년이 걸려서 겨우 여기까지 왔지."
아이작은 루앗딘 열쇠를 꺼내 들며 중얼거렸다.
"영지 하나를 먹어 보니까 알겠더라고. 사실 지금도 미개해 죽겠다고 생각 중이야. 눈만 뜨면 이 무식하고 모자란 광신도 놈들을 어떻게 정신 차리게 만드나 하고 푸념하지."
익사자 왕은 갑자기 시작된 아이작의 넋두리를 가만히 들었다.
"그나마 이 새끼들이 사람을 제물로 안 바치고, 각자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원하고 있으며, 자기들 도덕 기준에서 착하게 살아야 천국에 간다는 생각 정도는 있다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
아이작은 루앗딘 열쇠를 다시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피와 비 때문에 칼이 미끄러웠다. 눈도 제대로 뜨기 힘들었다.
다 잘 먹고 잘살자고 하는 일인데 왜 이렇게 되는 건지.
하지만 이게 바로 아이작이 마음 편하게 잘 먹고 잘살기 위해 하는 일이었다.
아이작이 이름 없는 혼돈의 속내를 알기 전까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고대신이 수천 수만 년을 지배해왔다고 그때로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니라... 수천 수만 년에 천년을 더해 겨우 지금 수준으로 진보한 거다. 너는 그런 미개한 시대로 돌아가겠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그런 꼴을 눈 뜨고 못 보겠다."
그는 빛과 질서를 원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루앗딘 열쇠에서 붉은 열기가 다시 피어올랐다.
119화. 익사자 왕 (6)
"빛이시여, 제발 제 앞길에 드리워진 그늘을 거둬주시고...."
갑판 아래 선실에 틀어박힌 후안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기도하는 것이 전부였다.
아까 배 수십 척이 하늘로 치솟으면서 산산이 부서지던 참상이 잊히지 않았다. 귀를 먹먹하게 만들던 굉음과 허공에서 난파당하는 배들, 흩날리던 사람들의 조각들이 눈만 감으면 떠오를 듯 선했다.
후안은 이미 천사가 발휘할 수 있는 힘 앞에 압도당한 상태였다.
무력감.
이 거대한 존재 앞에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그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에게도 기적이 다시 주어진다면, 신의 도움이 있다면 어떤 형태로든 아이작을 지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돈 세는 재주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벌벌 떨면서 지금 이 곤경에서 벗어나길 기도하는 것 외에는.
'어째서?'
입으로는 기도문을 읊고 있지만, 속으로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기도에서 대답을 들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 이제 그는 간절히 염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불합리한 비극에 항의하고 있었다.
'어째서 제게 이런 시련을 내리십니까?'
신은 응당 인간에게 극복 가능한 시련만을 내린다. 하지만 후안은 자신이 살아남은 것이 그저 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이 거대한 폭력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까.
그 시련에 맞서기 위해 선택받은 존재가 아니라면.
후안은 불현듯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았다. 여전히 짙은 구름이 낀 하늘에선 폭풍우가 치고 있었고, 그 아래 익사자 왕은 조금도 멀어지지 않은 것처럼 거대했다.
후안은 눈물 가득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의아함을 느꼈다.
출렁이는 파도 사이로 촛불처럼 가늘게 타오르는 불꽃을 발견한 것이다.
'설마?'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갑판으로 향했다. 문 앞을 지키던 풀 죽은 모습의 어린 사제가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용맹한 연어 호는 익사자 왕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충분히 다행이었지만, 후안은 이 자리에 마땅히 있어야 할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
분명 아까 바다 밖으로 나왔던 아이작이 없었다.
"이사크레아 경은?"
뚫어지게 바다 저편을 바라보고 있던 히야니스가 고개를 돌렸다.
"아이작 이사크레아 경은 어디 있나?"
히야니스는 말없이 바다 저편을 가리켰다.
폭풍우 한가운데, 익사자 왕의 거대한 몸 아래 초라하게 타오르는 불꽃이 보였다.
후안은 그 모습을 뚫어지라 지켜보았다.
"아이작."
그가 쇳소리 나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성배기사."
***
익사자 왕은 아이작의 선언을 듣고 한참 말이 없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익사자 왕이 자신에게 설득당했을 것이라는 기대 따위는 하지 않았다.
천사는 이미 생전의 힘과 믿음, 업적을 신에게 인정받은 존재인 만큼, 말로 설득한다는 것이 애초부터 무리다. 그저 아이작은 자신이 왜 이 고생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다독이듯 알려 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익사자 왕은 의외의 말을 내뱉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아이작은 자신의 말에 동조하는 익사자 왕을 보면서 놀랐다. 천사가 생각을 바꾸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익사자 왕은 이미 격렬한 변화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아이작의 말은 오히려 그가 천 년간 지켜온 법칙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동조에도 불구하고 아이작을 향해 촉수를 내뻗었다.
말과 행동이 달랐지만 아이작은 당황하지 않고 빠르게 파도 위를 내달렸다.
콰드드득, 쩍.
충돌하기 직전, 아이작은 몸을 빠르게 허공으로 튕기면서 왼손을 익사자 왕의 다리에 꽂아 넣었다. 엄청난 공기 압력이 아이작을 짓눌렀다.
아이작은 그대로 튕겨 나가는 대신 다리에 매달려 내부로 촉수를 깊이 꽂아 넣었다,
순간 머리 위로 닥쳐온 촉수에 아이작은 급히 빠져나와야 했다.
[기생충처럼 굴지 말고 칼을 뽑아라. 아이작.]
익사자 왕은 이번에도 아이작이 자신의 살점 일부를 포식한 것을 눈치채고 중얼거렸다. 지상에서 살았다면 모기 같다고 했을 테지만, 그는 이미 그런 추억을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뭐, 사실 크게 다르지도 않아."
푸우웃! 익사자 왕은 이제 체면 따위 가리지 않고 먹물을 뿜었다. 시커먼 안개처럼 분사된 먹물이 아이작의 시야를 순식간에 가렸다. 단순히 가리는 수준을 넘어서 아이작의 몸 전체를 먹물이 뒤덮자, 아이작은 아예 앞이 보이지 않았다.
먹물 안개 속에서 찢어지는 파공음이 들려왔다. 아이작은 그의 몸을 단숨에 박살 낼 수 있는 촉수들이 달려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슬슬 충분하겠군.'
아이작은 온몸에 감각을 날카롭게 곤두세웠다. 순간 어두운 먹물 속에서 익사자 왕의 몸과 다리의 움직임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들어왔다.
지금 바로 아래에서 솟구치는 다리가 진짜라는 것도.
파아아앙! 아이작이 몸을 뒤로 튕긴 순간 바닷물이 터지면서 익사자 왕의 다리가 튀어나왔다.
익사자 왕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작이 날랜 동작을 몇 번 보여 주긴 했지만 이번 만큼은 예상 밖의 움직임이었다.
놀라움은 그 뒤로도 이어졌다.
아이작은 한 치 앞도 보기 힘든 어둠 속에서도 마치 익사자 왕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있는 것처럼 빠르게 반응했다. 그뿐만 아니라 다리와 다리의 움직임이 서로를 방해하게끔 교묘하게 동선을 꼬면서 움직였다.
익사자 왕은 그런 아이작의 동선에 묘한 초조함을 느끼며 다그쳤다.
[네가 질서를 관철시키고 싶다면, 그 추악한 촉수를 치우고 칼을 뽑으라고!]
'지도 촉수를 휘두르고 있으면서... 하지만 역시 느려졌어.'
아이작은 익사자 왕이 건재한 척하지만, 그것은 외형만 그럴 뿐 실제로는 온전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소금 의회의 공격에 당한 것뿐만 아니라 어부왕의 그물을 강제로 파괴한 것이 그에게 큰 타격을 준 것이 분명했다.
어부왕의 그물은 익사자 왕 본인에서 비롯한 유물이다. 그것을 스스로 부순 것은 자신의 근본을 부수는 자해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작이 이때까지 차곡차곡 안배해 온 준비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아이작은 익사자 왕의 움직임에서 빈틈을 파악했다.
그의 키 높이만큼 넘실거리는 파도 사이, 위협적으로 수면을 스치는 촉수들 틈새에서 아이작은 파고들 간격을 발견했다.
익사자 왕의 유일한 약점, 군청색으로 빛나는 여덟 개의 눈으로 다가갈 틈새였다.
아이작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익사자 왕은 그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혀를 찼다.
[조바심을 느끼는 것은 네 놈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지.]
그 순간, 아이작이 향하던 동선 앞으로 거대한 수류가 생겨났다. 어쨌든 해수면을 박차면서 달릴 수밖에 없는 아이작을 끌어들이는 함정이었다.
그 빈틈은 익사자 왕이 일부러 열어놓은 간격이었다. 아이작이 어떻게 자신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피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가 천사가 아닌 이상 체력이 무한할 리가 없다.
소금 의회의 배들이 조금이라도 더 멀어지기 전에 끝장을 보려 할 게 뻔했기 때문에, 일부러 아이작에게 빈틈을 열어준 것이다.
맨손으로 벌레를 잡는 것보다는 가둬 놓고 잡는 것이 훨씬 편하니까.
[끝까지 칼을 안 뽑고 기생충처럼 굴겠다면, 기생충처럼 대우해주는 수밖에.]
익사자 왕은 거대한 입을 벌리고 아이작을 빨아들일 준비를 했다. 동시에 촉수들이 아이작을 단숨에 후려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아이작은 오히려 더 빠르게 파고들었다.
'무슨?'
익사자 왕의 촉수는 허무하게 수면을 때렸다. 동시에, 그는 기묘하게 세상의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뒤늦게 자신의 몸 상태를 들여다보고 경악했다.
몸 곳곳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명체들이 가득했다.
아이작이 이때까지 익사자 왕의 몸 안에 심어놓았던 저 너머의 기생충들이었다.
[저 너머의 기생충 / 촉수에 닿은 상대의 살갗 아래 짧은 수명을 가진 기생충을 낳습니다. 기생충에 감염된 대상은 지속적인 고통을 입습니다.]
기생충들은 숙주의 능력을 따라 빠르고 강하게 성장한다. 고대신의 사체에서 자라난 지힐렛은 가장 유능한 부하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익사자 왕의 몸 안에는 그런 기생충들이 잔뜩 자라고 있었다.
이미 몸 안에 기생충을 가득 품은 거대한 덩치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잠든 채 보내는 익사자 왕이 몸 안의 기생충까지 일일이 신경 쓸 일 따윈 없으니까.
아이작은 이때까지 놈들이 보내는 기척을 통해 익사자 왕의 움직임을 예측했다. 그뿐만 아니라 종이 한 장 차이로 빗나가게끔 통제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놈들은 일시적으로 익사자 왕의 시신경 일부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익사자 왕이 만든 함정은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 초대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이작은 익사자 왕이 만들어놓은 수류를 타고 너무나도 손쉽게 그의 미간까지 접근했다.
그가 미처 대응하기 전에, 아이작의 왼손에서 튀어나온 촉수가 단숨에 익사자 왕의 군청색 눈을 관통했다. 익사자 왕의 분노 어린 고함 속에서, 그의 머리 위에 착지한 아이작이 중얼거렸다.
"다신 기생충을 비웃지 말도록."
***
"저게 대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고함이 바다 위에 울려 퍼지자 돛이 파르르 떨려왔다. 선원들은 두려움 섞인 눈으로 바다 저편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저 먼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들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검은 먹물 안개 속에서 익사자 왕의 거대한 몸 위로 종횡무진하는 선명한 주홍 불빛이 아이작이라고 추정할 뿐이었다. 그들은 숨죽여 전투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터져 나온 익사자 왕의 분노에 찬 고함에 자신도 모르게 떨면서 기도를 올렸다.
"과장이 아니었군."
옌코스의 중얼거림에 히야니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선원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소문은 흔히 과장되기 마련이지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위업은 현실이었다.
배 수십 척을 박살 낸 익사자 왕이 단 한 사람을 제압하지 못하고 소리 지르고 있었다.
'그 옛날의 엘릴이나 저랬을까. 대체 어떻게 저런....'
반면, 후안은 그 모습도 제대로 지켜보지 못하고 숨을 헐떡였다.
후안이 느끼는 감상 또한 소금 의회 신도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빛의 법전이 내린 권능과 기적을 믿고, 아이작이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퇴치했다는 것 역시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의미 자체보다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용할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결과 결국 장사치의 논리를 아이작에게 들이댄 것이다.
'빛의 법전이시여, 제가 무슨 짓을 한 겁니까?'
후안은 수치스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저 고결한 성배기사에게 돈이나 영지, 권력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그저 숭고한 빛의 질서를 이 땅에 바로 세우는 것만이 중요할 뿐. 오히려 영지를 준 것은 저 성배기사, 아니, 성자의 발목에 족쇄를 채운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후안은 자신이 아이작 앞에서 얼마나 천박해 보였을지 생각하며 흐느꼈다.
자신이 기적을 빼앗긴 것도, 이런 수치를 당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아!"
그때, 고개를 떨구고 있던 후안의 귓가에 선원들의 안타까운 탄성이 들려왔다. 후안은 고개를 들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았다.
바다 너머, 거대한 촉수에 사로잡힌 루앗딘 열쇠가 희미하게 빛을 잃어가는 것이 보였다.
***
아이작은 익사자 왕의 몸에 촉수를 꽂아 넣은 채 그 성스러운 육체와 영혼을 탐식하기 시작했다. 천사의 육체답게 격한 전투로 소모되었던 공복감이 해소되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익사자 왕의 핵을 노려 포식하려던 순간, 그는 뭔가 기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퍼퍼퍼퍽! 경고성 섞인 알림이 들린 순간, 아이작은 익사자 왕의 몸 안에 있던 기생충들이 싸그리 터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몸 안에 있던 기생충을 단 한 순간에 힘을 집중한 걸로 모조리 전멸시킨 것이다.
"미친...."
황급히 손을 떼고 다시 전투를 준비하려 했지만, 익사자 왕은 눈을 일그러뜨리고 아이작의 손을 움켜쥐었다. 익사자 왕에게는 눈꺼풀 힘만으로도 아이작의 손을 구속할 힘이 있었다.
그 사이 거대한 촉수들이 아이작을 향해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네가 정말 천사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
아이작은 익사자 왕에게서 느껴지는 거대한 힘에 경악했다.
약해졌다고 생각한 것은 그의 착각이었다.
익사자 왕은 그저 계속 힘 대부분을 아껴 왔을 뿐이었다. 놈은 신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다. 때문에 그는 아이작과 싸우면서 힘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비축해 둬야 했다.
이제 그는 비축했던 힘마저 쓰기로 한 것이다.
[신앙을 가진 자는 기적을 일으키지. 네가 칼을 썼다면, 계속 숭고한 성배기사인 척 위선을 떨었다면 결과가 달랐을지도 모르겠군.]
익사자 왕은 아이작의 몸을 촉수로 단숨에 휘감았다. 이번에는 죽지 않게 배려하는 움직임 따위는 없었다. 거대한 배를 단숨에 한 줌으로 으깨버리는 완력이 아이작을 휘감았다.
아이작의 오른손에 쥐어져 있던 루앗딘 열쇠의 열기가 희미해지다 이내 스러지고 말았다.
우드드득.
힘을 준 지 얼마 되지 않아 섬뜩한 소리가 촉수 안에서 울려 퍼졌다.
동시에, 익사자 왕은 또 한 번 소리를 내질렀다.
이번에는 승리의 포효도, 분노의 고함도 아니었다.
그것은 고통에 찬 비명이었다.
120화. 익사자 왕 (7)
우득, 우드드드득.
끔찍한 소리가 촉수 안쪽에서 연달아 터져 나왔다. 익사자 왕은 생전 느껴 본 적 없는 고통에 신음하며 촉수를 다시 펼치려 했지만, 펼쳐지지 않았다. 마치 다리 안쪽에서 무언가 강력한 것이 촉수를 역으로 움켜쥐고 있는 것 같았다.
[뭐냐? 이게 대체 무슨....]
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아이작이 갑옷째로 으깨지는 소리가 아니라, 자신의 근육과 살점이 조각나고 찢어지는 소리였다.
그가 산채로 씹어 먹히는 소리였다.
익사자 왕은 그제야 자신을 짐승처럼 움직이게 만들었던 그 본능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는 절대로 자신의 의지로 아이작, 아니, 이 정체 모를 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미련 없이 다리를 잘라 버렸다. 그의 수족 가운데 가장 많은 힘이 담겨 있는 다리였지만 고민할 여지가 없었다.
다리를 자르자마자 통증이 덮쳐 왔지만, 산채로 씹히고 삼켜지는 고통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것은 비정상적인 고통이었다.
익사자 왕은 수많은 전투와 고난을 겪어 왔다. 이보다 심한 상처는 몇 번이나 입었다. 하지만 이 고통은 그가 단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고통이었다.
그가 잘라 낸 다리는 꿈틀거리며 점점 안쪽으로 압착되어 갔다. 마치 거대한 다리가 작은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모습에 익사자 왕은 숨도 쉬지 못했다. 그것이 가만히 있는 동안 공격한다는 선택지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마침내 다리가 살점 한 조각 남기지 않고 사라졌을 때, 그 안에서 드러난 것은 익사자 왕이 생각도 못한 것이었다.
'...조개? 아니, 말미잘?'
처음 봤을 때에는 껍질을 쓴 말미잘을 떠올렸다.
아이작의 갑옷 아래 관절마다 촉수들이 가득 피어오르고 있었다. 지금까지 싸우던 아이작의 갑옷이었기에 그것이 '아이작이었던 것'이라는 것만 유추할 뿐, 그것이 대체 무엇인지는 익사자 왕의 기나긴 생애에서 얻은 지식으로도 알 수 없었다.
촉수들은 조개관자 같은 빨판으로 갑옷들을 이어 붙이며, 어색하게 사람인 척하고 있었다. 그리고 손에는 여전히 불 꺼진 루앗딘 열쇠를 들고 있었다.
그것의 투구가 삐걱거리며 익사자 왕에게로 향했다.
그것은 몇 번 어색하게 휘청거리다가 금방 자신의 형태에 적응된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만 그것의 움직임은 말미잘이 처음으로 사지를 가지고 보행하는 법을 익힌 것만큼이나 기괴했다.
우스운 동작이었으나, 익사자 왕은 차마 그것과 맞서지 못하고 물러나기 시작했다.
익사자 왕은 문득 아이작이 그리워졌다.
이윽고 아이작의 껍질을 뒤집어쓴 괴물은 바다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익사자 왕은 저것이 과연 달린다고 표현해도 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보다는 몸의 순서를 바꾼다고 해야 할 것 같았다.
머리가 앞장서고, 그 위치에 팔 또는 다리로 보이는 것을 내딛는가 하면, 몸통이 뒤따르고, 다시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팔이 나타나 수면을 밟았다. 관절이 없는 익사자 왕조차도 이런 기괴한 움직임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악의의 방향은 분명했기 때문에 익사자 왕은 함부로 나서지 못했다. 대신 그는 수류를 이용해 아이작을 밀어내는 동시에 자신의 몸을 뒤로 물렸다. 다행히 촉수 괴물은 아이작의 갑옷 안에 갇힌 것처럼 인간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녀석은 이대로는 익사자 왕을 잡을 수 없다고 판단한 듯, 루앗딘 열쇠를 휘둘렀다. 그 동작에는 아무런 형식도, 열기도 없었다.
말 그대로 마구잡이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익사자 왕은 그 안에서 섬뜩한 살기를 느꼈다.
아이작의 팔이 순간적으로 거의 수십 미터 가까이 늘어났다. 말도 안 되는 변화에 익사자 왕은 경악했지만 대비할 틈조차 없었다.
퍼버버버벅!
총 여덟 곳. 그의 몸 전체에 붉은 상흔이 순식간에 새겨졌다.
'강해. 아니, 그뿐만 아니라....'
익사자 왕은 그 공격을 눈으로 쫓지도 못했다. 심지어 상처 하나하나가 무시할 수 없는 치명상이었다. 그가 무한한 재생력과 거대한 몸을 가지지 않은 천사가 아니었다면 이미 지금 단면을 따라 조각조각 났을 것이다.
심지어 상처는 날카롭게 베인 게 아니라 짐승 무리가 물어뜯은 것처럼 거칠게 패여 있어서 재생조차 쉽지 않았다. 그 단면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독과 병균들이 득시글거리며 재생을 방해했다.
[너는 대체... 뭐냐, 아이작?]
익사자 왕은 혼란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아이작이 앞에 나설 때만 해도 그는 분명 숭고해 보였다. 모두를 보내고 자신을 단둘이서 맞서는 상황에서조차도 겁먹지 않고 당당한 내면을 드러내는 모습에서 익사자 왕은 자신이 작아지는 것조차 느꼈다.
하지만 지금 저 모습은 무엇인가.
그 고결하던 모습 아래, 저런 괴물이 숨어 있었나?
[그게 너의 질서를 비호하는 신이냐, 아이작?]
익사자 왕은 자조하는 중얼거림을 내뱉었다.
***
한편, 아이작은 묘한 기분으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음... 몽유병 같은 기분이군.'
익사자 왕의 촉수에 휘감겼을 때만 해도 실수했다고 생각했다. 사실 익사자 왕을 게임 속에서 여러 번 잡긴 했지만, 패배한 적이 더 많았다. 자신은 있었지만 충분히 대비하지 못했으니 져도 이상하진 않았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작은 자신이 여기서 끝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에게는 위기의 상황이 되면 튀어나오는 촉수 괴물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촉수 괴물이 얼마나 만능인지는 알 수 없다.
사람을 상대로는 충분히 강하지만 익사자 왕 같은 천사를 상대로는 맥도 못 추릴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익사자 왕이 자기 팔을 희생하면서까지 물러나는 걸 보니 힘이 통하는 것도 같았다.
'울스텐이 잘한 건가? 아직 잘 모르겠는데.'
그 와중에 갑옷은 쪼개지거나 촉수가 무분별하게 폭주하지 않는 봉인구 역할을 맡고 있었다. 화로 장인의 손길을 탄 갑옷은 평상시에도 이미 훌륭한 갑옷이지만, 이런 '유사시' 상황이 되면 촉수를 통제할 수 있었다.
아이작의 실수로 주변 모든 사람들을 다 잡아먹는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다소 개선의 여지는 있겠지만 뭐... 이 정도로 만족해야겠지.'
몸이 촉수 괴물로 변해도 사람의 형태를 유지하긴 한다는 점에서 이미 울스텐에게 박수를 보내야 할 것이다. 역시 라이칸스로프를 위한 갑옷도 만드는 세상의 화로 대장장이다웠다.
'하지만 설마 상급 검술까지 쓸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촉수 괴물이 루앗딘 열쇠를 들고 익사자 왕을 공격한 기술은 분명 아이작 자신의 상급 검술인 '여덟 갈래'였다.
촉수 괴물 주제에 검술을 쓴다는 것이 놀라웠지만, 생각해보면 애초부터 아이작은 촉수의 움직임을 염두에 두고 검술을 만들었다.
그 말은 어쩌면, 애초에 아이작의 검술은 촉수 괴물로 변했을 때에 최적화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그나저나 이거 언제 끝나는 거지?'
원래 이런 '폭주 상태'는 주변에 있는 위협적인 대상을 완전히 다 포식해야 끝났다. 그렇다면 익사자 왕을 완전히 다 포식해야 끝이 날 텐데, 그게 언제가 될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완전히 촉수에게 맡겨 둔 상태로 끝내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익사자 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
"주교님! 뭔가 좀 해보십시오!"
바다 너머에서 일어나는 광경은 소금 의회 신도들 눈에도 들어왔다. 다만 그들은 아이작이 익사자 왕의 촉수에 사로잡혔으며, 루앗딘 열쇠가 빛을 잃었다는 것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 선명했기 때문에 그들은 침착함을 잃었다. 심지어 아무 것도 못하던 후안에게까지 매달릴 만큼.
하지만 갑갑한 것은 후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도 눈물을 흘릴 만큼 지금 이 상황이 답답하고 절망적이었다.
'이 시련은 성배기사가 극복할 수 있도록 마련된 신의 안배가 아니었단 말인가?'
처음에는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아이작이 또 한 번 이단의 천사를 베고 그 숭고한 목적을 드높일 것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사로잡혀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주교님, 제발 뭔가 좀 해보란 말입니다! 빛의 법전께서는 성배기사님을 버리신 겁니까?"
'네 놈들 천사니까 네놈들이 알아서 해봐라!'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소금 의회의 신을 소금 사막 아래 매장한 것은 빛의 법전이다.
빛의 법전의 사제인 후안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잔인할뿐더러 무책임한 말이었다.
'아이작이 이 시련을 통과하기 위해 온 것도 아니라면, 나는 대체 여기에 왜 왔단 말인가?'
후안은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이 시련에서 무슨 역할을 맡고 있단 말인가? 무의미한 비난을 받는 역할? 아무것도 못하는 절망감을 느끼기 위해서? 성배기사라는 걸출한 영웅 하나를 눈앞에서 희생시켜 자신을 꾸짖고자 함은 아닐 것이다.
그 순간 찌르는 듯한 깨달음이 자신을 찾아왔다.
'이 시련은 나를 위해 마련된 것이다.'
후안은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배는 폭풍 한가운데였지만, 빛이 들었다면 가장 잘 들었을 자리를 찾아 자리 잡고, 언제 꺼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로자리오를 손에 움켜쥐었다.
바다 저편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익사자 왕이 그 거대한 촉수를 휘둘러 바다를 긁고 있었다. 그 촉수 아래 아이작이 어떤 끔찍한 일을 겪고 있을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실로 신화적인 풍경에 후안은 두려움에 사로잡힐까 눈을 질끈 감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빛이시여, 제발 제 눈을 가린 어둠을 거둬주소서."
아주 오래전, 잊고 있던 빛의 숭고함과 질서의 아름다움이 떠올랐다.
아직 풋내나는 사제였던 시절, 기적을 위한 기적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기적을 청원하던 시절을. 아직 순수했던 시절에 밝히던 촛불의 아름다움을.
"당신의 진리가 없는 세상은 어둠과 공포로 가득하나이다. 제발 당신의 우리에서 벗어났던 자식이 돌아올 수 있게 길을 밝혀주소서. 당신의 여린 촛불이 바닷바람에 꺼지지 않게 도와주소서...."
작은 기도 소리가 낭송되던 어느 순간, 바다 너머에서 여명의 불빛이 반짝였다.
***
문득 아이작은 자신을 향해 신앙심이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다른 신도들보다 몇 배는 농도 짙고 신실한 신앙심. 간절한 염원이 담긴 기도가 자신에게 부여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신앙심은 선명한 물리적 형태를 담아 기적으로 발현되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이 기적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광휘의 날개?'
아이작의 등 뒤에 빛으로 이루어진 날개가 하나둘 돋아나기 시작했다. 평범한 사제들은 절대로 발동할 수 없는 기적. 평범한 인간조차도 약한 천사에 비견될만한 힘과 권능을 갖게 된다는 막강한 기적의 힘이 그의 몸에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도합 네 장의 날개가 아이작의 등 뒤에서 돋아났다.
'설마?'
이런 기적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주교급 이상뿐이다.
아이작은 신앙심이 이미 멀리 떨어진 소금 의회 상단의 배에서 흘러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담겼다.
"뭐야, 하면 되잖아. 영감."
그 압도적인 기적의 힘이 몸을 장악하자 촉수는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아이작은 몸이 회복되기 무섭게 몸과 이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에 반응하듯 구름 위에서 꿈틀대던 심연의 손아귀도 기척을 감추었다.
바다를 내딛으려던 아이작은 자신의 몸이 이미 수면으로부터 약간 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움직이려고 노력할 필요 없이, 광휘의 날개는 이미 자연스럽게 그를 떠받치고 있었다. 다시 뜨겁게 타오르는 루앗딘 열쇠의 열기가 빗방울이 떨어지기도 전에 증발시켰다.
그리고 그 모습을 익사자 왕도 보고 있었다.
아이작이 앞으로 가겠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광휘의 날개가 그의 몸을 밀어냈다.
루앗딘 열쇠의 칼끝이 익사자 왕에게 향해 화살처럼 날아갔다.
칼끝은 너무나도 쉽게, 익사자 왕의 미간을 관통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뭐?'
이번에야말로 겨우 대등한 싸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이작은 흠칫했다. 설마 이번에도 끌어들이기 위한 속임수였나 생각했지만, 이번에 입힌 상처는 확실하게 치명상이었다. 특히나 광휘의 날개로 인해 루앗딘 열쇠 또한 강화되면서 그 열기와 불꽃이 두 배 이상 커진 상태였다.
아이작은 문득 루앗딘 열쇠를 보면서 익사자 왕이 묘하게 칼에 집착하던 것을 떠올렸다.
'이 칼에 무언가 의미가 있었나?'
군청색 눈동자마저 하얗게 익어가는 열기 속에서, 익사자 왕은 간절히 기다려 왔던 순간을 받아들였다.
그는 마치 아이작을 향해 경배하듯 촉수를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나를 문으로 삼아... 달우물 의식을 거행한다.]
121화. 우르반수스 (1)
'칼을 쓰라고 한 게... 이것 때문이었나?'
루앗딘 열쇠.
익사자 왕은 계속해서 아이작에게 칼을 쓰라며 집착하고 있었다. 문득 아이작은 자신이 든 칼이 '루앗딘 열쇠'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칼은 내부와 외부를 여는 열쇠다.
익사자 왕은 아이작을 문 너머로 보내려고 했던 것이다.
쩌어어어억.
루앗딘 열쇠가 꽂힌 자리의 상처가 크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내 그 안에서 진홍색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루앗딘 열쇠가 사실상 익사자 왕의 몸을 실시간으로 익혀 버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피는 익사자 왕의 것이 아닐 것이다.
그 너머, 어딘가에서 흘러넘쳐 오는 것이었다.
'설마.'
아이작은 익사자 왕이 천 년 동안 단 한 번도 달우물 의식을 거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것이 매장된 신을 부르기 위한 사실상 유일한 방법임에도.
물론 신의 허락 없이 사후세계에 들어서는 것은 무단침입에 가깝다. 때문에 익사자 왕은 통행자를 안전하게 보낼 방법이 필요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몸을 제물 삼아 문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단 한 번밖에 할 수 없는 데다, 천 년이나 망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아이작. 너를 시험한 것에 대해 사과한다.]
루앗딘 열쇠가 익사자 왕에게 남긴 상처는 그의 몸을 더욱 길게 찢으며 벌렸다. 그러나 익사자 왕은 꺼져가는 물거품처럼 쇠약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너를 나의 신 앞에 내려놓기 전에... 네가 그저 혼돈의 노리개가 아니라는 것을 믿을 용기가 필요했다는 사실을 알아다오.]
'용기? 얼어 죽을 용기....'
아이작은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상처에서 쏟아져 나오는 정체불명의 압력으로 입조차 열기 힘들었다.
[너는 이 세계가 수만 년에 천년을 더해 지금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지.]
아이작은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익사자 왕은 그냥 무시했다고 생각했던 그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그걸 넘어서 아이작을 문 너머로 보내는 이유가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 세계의 영속성을 나처럼 너 또한 바랄 것이라고 믿는다.]
익사자 왕은 흐느끼는 것인지 애원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소금 의회의 구원이나 보호를 당부하는 것도 아닌, 엉뚱한 말이었다. 그것이 무슨 의미냐고 묻기도 전에 상처에서 쏟아져 나오는 피가 거대한 폭포수가 되어 아이작을 덮쳤다.
핏물로 바다가 보라색 와인빛으로 젖어 갔다. 주변의 어인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기묘한 찬송가를 불렀다.
루앗딘 열쇠가 피워 올린 열기가 바닷물을 증발시키면서, 아이작의 몸 곳곳에 소금 결정이 맺혔다.
상처는 크게 벌어져서 익사자 왕의 몸을 완전히 절반으로 쪼개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처보다 거대한 풍경이 그 너머에 있었다.
***
찰박.
아이작은 아득히 새하얀 풍경 속에서 눈을 떴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선혈에 와인빛으로 물들던 바다, 하늘이 무너질 듯 몰아닥치던 폭풍우와 거친 풍랑은 이제 보이지도 않았다.
눈이 멀 것 같은 새하얀 지평선이 아득하게 멀리 펼쳐질 뿐이었다.
지평선 너머로 크기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피라미드가 보였다. 언뜻 보기에도 너무나 거대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피라미드 위에는 마치 꼭대기에 걸린 듯한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피라미드의 형태는 기묘했다. 어딘가에는 붉은 강이 흐르기도 하고, 어딘가에는 부서진 파편들이 둥둥 떠 있기도 했다. 갈라진 틈새 사이로 맹렬한 불꽃이 피어오르기도 했다.
'여기가... 소금 의회의 천국인가?'
아이작은 자신의 팔다리가 다 달려 있고 갑옷과 칼까지 다 제대로 있는 것을 보고 달우물 의식이 성공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하기사 천사가 스스로의 몸을 바쳐 신중하게 거행한 의식이다. 실패할 리가 없다.
아이작은 역사상 산 육신을 가지고 사후세계에 도달한 극소수의 인간이 된 것이다.
바닥에 얕게 고인 물 아래에는 하얀 소금 알갱이들이 바닥을 메우고 있었다. 아이작은 거대한 염전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종교 이름이 소금 의회라지만 천국까지 염전일 필요는 없지 않나... 하고 아이작이 생각하던 중, 머리 위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스륵.
아이작은 자신의 키보다 약간 높은 곳에서 접근 중인 작은 나룻배를 발견했다. 그 위에서 뱃사공인 듯한, 약간 마르고 신경질적인 인상의 남자가 아이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마에는 커다란 상처가 나 있었는데 그게 제법 흉악해 보였다.
그는 별다른 말도 없이 배를 자연스럽게 아래쪽으로 몰더니, 가까이 붙였다.
"타라."
"내가 누군 줄 알고?"
사공은 뚱한 표정으로 아이작을 노려보았다.
"아이작 이사크레아."
솔직히 그 유명한 '저세상으로 가는 배'가 떠오르지 않았으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아이작은 이미 바로 그 저세상에 도착한 상태였다. 심지어 저 사공은 천사일 확률이 아주 높았다.
이러나저러나 지금보다 더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는 없었다.
"지금 거기보다는 배 안이 안전할 테니 타라. 지체할 시간이 없으니."
아이작은 그 말에 넙죽 배 위로 올라갔다.
사후세계에는 신수며 천사며 어쩌면 귀신 같은 것들까지, 별로 반갑지 않은 것들이 드글거린다. 소금 의회 신도도 아닌 아이작은 그것들과 불필요하게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부터 소금 의회의 천사들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러고 보니 네필림인 건 둘째치고, 이름 없는 혼돈의 권속이라는 것까지 들키면 곤란할 거 같은데.'
들키게 된다면 절대 환대받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배 위에 올라탄 참이었다. 아이작은 이다음 어떻게 되든 지금은 운과 임기응변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사공이 긴 노를 저어 땅을 툭 밀치자, 배는 중력이 없는 것처럼 허공으로 떠올랐다. 아이작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더 높은 곳에서 이 염전을 볼 수 있었다.
주변에는 광활한 소금 사막뿐, 아무것도 없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데 왜 위험한 거죠?"
"그것도 모르나? 당신네 선지자가 여기 무슨 짓을 했는지도 잊었나?"
아이작은 무슨 말인가 하는 표정으로 사공을 바라보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거기 반나절만 있어도 수분을 다 뺏기고 바싹 마른 소금 기둥이 될 거다. 그러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내리던가."
당연히 아이작은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사공의 말에서 뭔가 익숙한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 루앗딘이 바다를 소금 사막으로 만든 이야기를 하는 건가?'
생각해보니 지금 이곳도 염전이라기보다는 소금 사막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루앗딘이 소금 사막을 만든 것은 현실에서의 일이다.
자신은 사후세계에 온 것이 아니었나?
아이작이 복잡한 생각에 빠진 사이, 배는 빠르게 움직였다. 주변에 배경이랄 게 없어서 실감하지 못했지만, 말도 안 되게 빠른 속도였다.
"다 왔다. 내릴 준비 해라."
아이작은 퍼뜩 고개를 들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소금 사막과 진짜 사막이 접한 중간에 대단히 어울리지 않는 도시가 있었다. 거대한 항구였다.
수백 척의 배가 드나들 수 있을 법한 거대한 항구였지만, 그 앞은 새하얀 소금 사막뿐이었다. 왜 생뚱맞게 사막에 항구를 지어 놨나 했지만, 아이작은 부두로 보이는 조형물 사이사이에 튀어나온 것들을 보고 무슨 일인지 깨달았다.
항구 주변 사이사이에 돛대나 배의 선체 일부가 묘비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가라앉다 말고 그대로 소금에 파묻혀 버린 듯한 모습에서 아이작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선원들도 빠져나올 틈이 없었을 것이다. 바다가 순식간에 소금으로 변해 버리면서 그대로 부두 일대가 배들의 매장지로 변해 버린 것이다.
툭. 사공의 나룻배가 부두 바닥에 닿았다.
아이작은 어색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은 황량했다. 항구 도시가 말라붙어 버렸으니 주민들도 먹고 살길이 막막해졌을 것이다. 많은 주민들이 떠났고, 남은 주민 몇몇도 초췌한 안색으로 주변을 배회할 뿐이었다.
너무 현실적이다.
아이작은 아까부터 드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여긴 사후세계가 아닙니까?"
아이작은 결국 자신보다 먼저 앞서가던 사공에게 물었다.
"맞다."
"그럼 여긴 소금 의회의 지옥입니까?"
사공은 아이작을 빤히 바라보았다.
"우르반수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군. 사후세계에 어떤 사람들이 오는지 모르나?"
"죽은 사람들이 오는 곳 아닙니까?"
"그렇다. 죽은 사람들. 흘러간 시간들이지. 우르반수스는 누적된 모든 과거다. 지나간 시간. 죽은 시간. 지층을 이룬 과거. 죽은 자들은 그 찰나의 틈새에 끼워 넣어질 뿐."
아이작은 사공이 한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문득 에이단이 사후세계에 대해 설명해 줬던 말이 떠올랐다. 사후세계는 모든 문화, 도덕, 예절, 규범 등을 총망라한 공간이라고.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비슷한 말로 기억한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풍경과 사공이 해준 말을 되새겨 보자, 그 정확한 의미가 비로소 와닿았다.
지금 눈앞의 풍경은 정말로 있었던 순간이다.
루앗딘이 소금 의회를 매장해 버리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있었던 일.
아이작은 그 시간의 기억에 도착한 것이다.
***
사공이 안내해 도착한 곳은 소금 사막에 거의 파묻힌 배였다. 기울어진 갑판 아래로 들어가자 소금이 절반쯤 들어차 있었다. 아무래도 침몰 도중에 소금이 굳어 버린 듯했다.
덕분에 아이작은 허리를 반쯤 숙이고 걸어야 했다.
사공이 안내한 곳은 선장실이었다.
문을 열자 몸이 반쯤 파묻힌 늙은 여자가 보였다.
"아... 손님이 오셨군."
늙은 여자는 아이작이 들어오자마자 눈빛을 번뜩였다.
초췌한 안색에도 불구하고 기이한 빛깔로 번뜩이는 안광을 보자마자 아이작은 그녀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후세계에 평범한 인간이 있기야 할까 싶지마는, 그녀에게서는 특히나 말도 안 되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익사자 왕을 압도하는 힘이었다.
"앉아서 맞이하는 것을 용서하시오, 아이작 이사크레아. 지금 내 꼴이 이래 놔서."
아이작은 상대방이 자신의 이름을 아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사공도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지 않던가. 달우물 의식이 이들에게 필요한 지식을 전달한 것이 분명했다.
"앉아 계신 줄도 몰랐습니다."
아이작은 무릎의 힘이 풀릴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고 벽을 짚으며 말했다.
"...혹시 당신이 소금 의회의 신이십니까?"
늙은 여자는 소리 내어 웃었다. 호쾌한 웃음소리에 아이작은 자신이 섣불리 판단했다고 생각했다.
"그럴 리가. 나를 그렇게 대단하게 봐 줘서 고맙군. 하지만 너무 크게 말하지는 마시오. 부르는 자께서는 너무 쇠약해져서 의심이 많아지셨으니."
'부르는 자'는 쉽게 호명되지 않는 소금 의회의 신의 명칭이다. 특히나 소금 사막 아래 매장된 뒤로는 신도들조차 조롱처럼 여겨 거의 언급하지 않는 명칭이었다.
늙은 여자는 자신의 허리 아래, 뿌리처럼 자리 잡은 몸통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아문달라스. 루앗딘을 배에 태우지 않기로 결정했던 선장이지. 지금 소금 의회를 이 꼴로 만든 장본인이자, 가라앉는 배에 남은 선장이오."
***
사공은 자신을 아문달라스 선장이라고 밝힌 여자와 아이작을 내버려 두고 나갔다.
단순히 선장이라고만 말했지만, 아이작은 그녀가 명천사임을 확신했다.
'역시 루앗딘을 배신하고 배에 태우지 않았던 것은 단순히 욕심 많은 선장들의 독단이 아니라... 신이 개입한 결과였나?'
그렇다면 이야기의 앞뒤가 많이 바뀌게 된다.
신이 단순히 금 몇 푼을 착취하기 위해 그런 짓을 저질렀을 리는 없으므로.
결국 설화는 인간의 욕심에 관한 이야기에서 당대 강력했던 신과 새롭게 떠오른 신의 대립으로 바뀐다. 한 종교의 몰락과 다른 한 종교의 부흥에 대한.
"역시 부르는 자는 빛의 법전을 견제하기 위해 루앗딘을 배에 태우지 않은 모양이군요?"
"그렇소. 루앗딘을 안전하게 데려다줬더니 빛의 법전이 너무 강대하게 번창했거든. 그것이 부르는 자께서 보시기에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거부하셨소. 하지만 알다시피 결과는 더 최악이 되고 만 데다, 돌이킬 기회조차 잃었지."
아이작은 아문달라스의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아? 돌이킬 기회?
'루앗딘을 태웠을 때의 미래를 예지했다는 뜻인가? 그 선택을 부정한 결과가 지금 소금 의회의 꼴이고?'
마치 예지나 회귀를 암시하는 듯한 말이었기에, 아이작의 머릿속에 그런 의문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 의문을 눈치챈 듯 아문달라스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했다.
"흠, 전해 들은 그대로군. 우르반수스에 대해 전혀 모르는 눈치인데, 기억을 잃어버린 건가? 아니면 모르는 채로 내버려 두는 게 낫다고 생각하신 건가?"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잃어버린 기억도 없고, 아예 들은 바가 없는데요."
아이작은 그렇게 말했다가 에이단이 한 말을 떠올렸다.
"제 지인은 우르반수스가 사람을 지배하는 집단무의식 비슷한 것이라고 했습니다만, 지금 이곳의 풍경은... 과거의 어떤 시간선에 온 것 같은 풍경이군요."
아문달라스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친구는 정확하게 말해줬소. 하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하려면... 역시 이 방법이 좋겠지."
그녀는 손톱으로 끼적끼적 소금이 말라붙은 바닥을 긁어 선을 긋기 시작했다. 파도에 출렁이는 배와 작열하는 태양의 모습이었다. 낙서 같은 그림체였음에도 금방이라도 움직일 듯한 생생한 생동감이 느껴졌다.
아이작이 그 그림을 뚫어져라 보던 사이, 아문달라스가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당신은 배 위에 있소."
순간 아이작은 배 위에 서 있었다.
'무슨?'
눈이 아플 정도로 태양이 내리쬐는 날씨였다.
아이작은 햇볕을 가리려다가 자신이 원래 입고 있던 갑옷이 아니라 꽤 오래된, 그리스나 이집트 느낌의 복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의 곁에는 수백 척의 배들이 도열해서 한 방향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이작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배들이 향한 방향, 항구로 향했다.
새파란 바다 건너 항구에 서 있는 무언가가 보였다.
온몸이 불길로 활활 타오르는 창백한 표정의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그 남자를 본 순간, 아이작은 단번에 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하나를 떠올렸다.
'등대지기 루앗딘.'
122화. 우르반수스 (2)
등대지기 루앗딘.
지금 빛의 법전을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신앙으로 만든 인물이자 여전히 강력한 권세를 떨치고 있는 명천사. 그가 눈앞에 있었다.
루앗딘 주변에는 그를 추종하는 세력인지 난민인지 알 수 없는 인파들이 바글바글 서서 배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피워올리고 있는 불꽃은 주변의 키 큰 나무들만큼이나 높게 타오르고 있었지만, 열기가 없다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의 주변에 난민들이 바글바글했기 때문이었다.
"저기 약간 화가 난 남자 한 명이 있소."
그때 아문달라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작은 어느새 바로 옆에 아문달라스가 서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다만 그녀는 소금에 파묻혀 있지도, 염분으로 몸이 깡마르지도 않은, 그을린 구릿빛 피부를 가진 노련한 베테랑 해군 장교의 모습이었다.
"왜 저 남자가 화가 났는지 맞춰 보시겠소?"
반면 아이작은 계급이 낮은 듯한 수병의 행색을 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자신의 손에 쥔 창 자루를 어색하게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당신이 루앗딘과 저 난민들을 태워주기로 해놓고서 안 태워줬기 때문에?"
"그렇소. 저자는 이미 많은 금을 지불했거든. 인제 와서 다른 배를 구할 수도 없지. 게다가 뒤에서는 저들을 노리는 악당들이 잔뜩 쫓아오고 있고."
아문달라스는 팔짱을 낀 채 루앗딘을 마주 보았다. 자신의 교단을 망가뜨린 숙적을 이토록 생생하게 보면서도 그녀는 별 비틀린 반응 없이 상쾌한 모습이었다.
마치 비극이 일어난 그날처럼.
루앗딘은 하늘을 응시하더니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난민들도 다 같이 무릎 꿇거나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했다.
배 위의 수병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다 같이 비웃거나 코웃음 쳤다.
'이 시대에는 기적이 일반적이지 않았던 모양이지?'
아이작의 시대에 주교가 아니라 사제라도 저렇게 기도만 올리고 있었다면, 병사들은 발작하면서 활시위를 당기거나 우리 사제는 지금 기적도 안 쓰고 뭐 하냐고 다그치고 있었을 것이다.
하물며 저런 뚜렷한 성체를 가진 사람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절망에나 빠지지 않으면 다행이지.
하지만 이 수병들의 모습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르는 것만 같은 태도였다.
불현듯, 루앗딘은 단검을 꺼내 자신의 손바닥에 상처를 냈다. 순간 그의 몸에서 불꽃이 맹렬한 기세로 빠져나왔다.
그것을 본 아이작과 수병들은 숨을 멈췄다.
이글거리며 솟아오른 불꽃은 순식간에 항구 도시 위에 자리를 잡고 태양이 되었다.
아이작은 그 열기와 광채에 순간적으로 눈이 멀어 버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태양을 코앞에서 본다면 이런 느낌일까? 피부가 새빨갛게 익으면서 온몸이 오그라들었다. 아이작만 이런 고통을 느끼는 게 아닌 듯 주변 모두가 비명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갑자기 모든 고통이 멎었다.
태양이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아이작은 아문달라스가 아이작의 감각을 차단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이작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이 참상을 똑바로 보게 하기 위해서다.
아문달라스가 손을 들어 물로 된 막을 펼쳤다. 그러나 그마저도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다가 말라버렸다. 다들 그늘을 찾아 달아나기 바빴고, 그마저도 눈이 멀어 버린 선원들은 도망조차 갈 수 없었다.
사방이 지옥이었다.
그리고 그 지옥은 불 속에서 화형당하는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하고 길고 잔인했다.
불타 죽기에는 애매하게 약하고, 살아남기에는 너무 뜨거웠다. 내리쬐는 열기에 바다가 부글거리며 끓어올랐다. 기름을 싣고 있던 배가 폭발하며 사방에 기름 비를 흩뿌렸다.
이 정도면 난민들에게도 해가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빛은 오로지 바다만을 향했다.
얼마나 광량이 차이가 나는지 같은 태양을 머리에 이고도 루앗딘과 그 주변이 그늘진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보시오, 아이작. 진리와 질서를 가지고 이 땅에 나타난 선지자가 만들어낸 역사적인 첫 번째 대학살 현장이니."
아이작은 그 참상이 끔찍하긴 했지만, 솔직히 그러면 약속을 지키지 그랬느냐고 따지고 싶었다. 결국 이 참상은 소금 의회가 계약을 지키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었으니까.
아문달라스는 이번에도 아이작의 속내를 안다는 듯 웃었다.
"애당초 당신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벌어진 일 아니냐... 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테이프를 감듯 시간이 마치 빠르게 흘렀다.
어느새 주변은 아이작이 익히 아는 풍경이 되었다. 원래 번창한 항구도시였던 이곳은 배들은 모조리 침몰하거나 소금 사막 아래 매장되고, 죽은 도시가 되었다.
루앗딘은 그대로 말라붙은 소금 사막을 걸어서 횡단해 바다 너머 땅으로 향했다.
지금의 게르토니아 제국이 있는 땅으로.
아문달라스는 소금 사막을 건너가는 루앗딘의 불꽃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후로 루앗딘은 빛의 법전 신앙을 저 바다 너머에 퍼뜨리고 많은 제왕들과 황제의 보호를 받으며 대제국을 키워나갔소. 그 역사적인 등장에 소금 사막의 일화는 반드시 회자되곤 하지."
그녀는 메마른 소금 사막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사실 우리는 그때 약속을 지켰소."
***
"약속을 지켰었다니요? 저 불바다가 약속이었단 말입니까?"
"아니, 루앗딘을 배에 태웠었다는 말이지. 우리는 '원래' 루앗딘과 그의 난민들을 배에 태워다줬소. 그것이 진짜 역사요. 그런데 그 결과가 부르는 자께서 보시기에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
그녀는 손가락을 들어 올리려다가 힘없이 떨어뜨렸다.
"아쉽지만 이건 '보여줄 수' 없겠군. 이제는 지워진 역사라서."
아이작은 그게 무슨 말인가 하며 아문달라스를 바라보았다.
아문달라스는 아이작을 보면서 좀 더 설명해야겠다고 느낀 건지 말을 이었다.
"루앗딘이 우리의 성역이자 항구 도시, 미아르마에 도착했을 때 우리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그를 태우거나, 무시하거나. 우리는 루앗딘을 배에 태워서 바다 너머로 보내줬지. 그랬더니 어떻게 됐을 것 같나?"
"뭐... 잘됐겠지요."
지금 루앗딘이 보여 준 묘기를 보아하니 소금 사막을 만드는 기적이 있건 없건 굉장한 교단을 만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심지어 그는 여전히 명성을 떨치는 최고의 명천사 아닌가. 루앗딘 하나만으로도 어지간한 신앙에 비견될는지도 모른다.
"그래. 결과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소. 대제국을 세우고, 수많은 권속 국가들을 빛의 법전 이름으로 물들였지. 우리 교단은 그 대가로 우르반수스에 입성하여 아홉 신앙이 되는 복을 누렸지만, 상대적으로 세력에 눌려 쇠퇴하는 길을 걸었소."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적어도 지금 아문달라스가 말하는 과거에는 소금 사막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신과 신도들의 소통도 원활했을 테고, 천사들도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부르는 자께서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소. 그리고 나를 비롯해 많은 천사들 또한, 그때 루앗딘을 배에 태우지 말고 죽게 내버려 뒀어야 했다고 생각했소."
"설마 시간을 되돌리기라도 한다는 겁니까?"
"아니? 무슨 엉뚱한 소리요. 소설을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오?"
"...."
"시간을 돌리는 게 아니라 역사를 수정하는 거요."
"...그게 뭐가 다른 거죠?"
아문달라스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렇게 설명해보지. 당신이 길을 걷다가 땅에 떨어진 칼 한 자루를 발견했소. 하지만 당신은 도둑으로 몰릴 것을 걱정해서 그냥 두고 떠났소."
"예."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길에서 강도를 만나 하필 땅에 떨어져 있던 그 칼을 맞아 죽어버렸지. 칼을 주웠다면 살았을지도 모르는데."
"인생에는 선택의 기로라는 게 있지요. 그런데요?"
"그런데 당신은 이미 죽어버렸지. 그건 되돌릴 수 없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오. 여기까지는 현실적으로 일어난 '사실'이오."
그녀는 아이작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하지만 당신의 남겨진 가족들은 다르겠지? 그들은 여행길에는 자신의 몸을 지킬 칼 한 자루를 챙기자는 다짐 정도는 할지도 모르오. 그런데, 어떤 누군가가 경비대장이라고 쳐봅시다. 경비대장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칼을 차고 다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지. 결국 그는 일어난 '사실'을 조금 수정하기로 했소."
"일어난 일을 수정하다뇨?"
"당신이 '칼이 없어서 죽은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원한을 샀다'는 소문을 퍼뜨린 거요. 당신의 명예는 실추되겠지만, '칼을 맞을 만해서 맞았다'라는 믿음이 퍼지면 사람들은 안심하고 칼을 차고 돌아다니는 일도 줄어들겠지."
"그러면 유족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당연하지. 경비대장이나 유족, 둘 중 하나가 '당신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가지고 싸우겠지. 진실과 상관없이 이기는 사람이 '역사'를 결정할 테고. 이해가 되오? '역사'와 '사실'은 별개요."
아이작은 그제야 아문달라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그게... 소금 의회에 일어난 일입니까?"
"그렇소. '사실' 루앗딘은 소금 사막을 만들지 않았지. 하지만 소금 의회는 그 '역사'를 개정하려다가 패배하고, 더 끔찍한 꼴에 처하게 된 거요."
아문달라스는 거기서 말을 멈추고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제 우르반수스가 지나간 시간 그 자체라는 것이 이해가 되시오?"
아이작은 이해했다.
에이단은 우르반수스가 집단무의식 같은 것이라고 했다. 숟가락을 드는 법조차 우르반수스에서 학습되는 것이라고.
하지만 신들과 천사가 어느 날 우르반수스에서 '숟가락이라는 것은 사실 없다'고 결정하면 숟가락은 갑자기 정체불명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사실'은 바꿀 필요가 없소. '역사'만 바꾸면 '현재'는 그게 진실이라고 믿고 사람들의 인식과 세계 또한 변화하오. 지금 소금 의회 신도들이 거짓된 역사를 믿고 거짓말을 못 하게 된 것처럼."
세상에는 여러 갈래의 시간이 흐른다.
그 시간은 씨실과 날실처럼 엮이다가 겹쳐질 때 현재라는 하나로 정리된다.
만약 그 역사를 용납할 수 없는 신이 있다면 기적이나 천사 등을 통해 '개정'하려 한다. 하지만 그 요구가 다른 신과 충돌할 경우, 신들은 전쟁이나 협상을 통해 역사의 방향을 결정한다.
그렇게 역사가 개정되면, 처음부터 우리는 그런 세상에서 살았던 것처럼 살게 된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런 게 가능한 것이 우르반수스인 것이다.
사후세계.
죽은 사람, 세계, 지식, 시간이 모이는 장소, 우르반수스.
그리고 바로 그 개정된 역사 중 하나가 소금 사막 사건이었던 것이다.
소금 의회와 빛의 법전이 벌인 우르반수스의 전쟁.
"그러면 다른 신앙들도 사후세계가 있겠군요."
"전부는 아니오. 오직 아홉 신앙만."
아문달라스는 웃으며 말했다.
"고대신들에게는 사후세계가 없소. 빛의 법전이 어떻게 그 강대한 고대신들을 물리치고 지금 저 자리에 설 수 있었을 것 같소?"
고대 신앙에는 사후세계가 없다.
우르반수스는 오직 아홉 신앙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고대신들은 그저 현세에서 숭배받으며 힘을 베풀고 권세를 누릴 뿐이다.
아이작은 한때 대제국을 만들기도 했던 고대신들이 어떻게 신흥세력에 불과한 아홉 신앙에 몰락하고 패배했는지 이제 알 수 있었다.
고대 신앙은 '사후세계'라는 발명품을 들고 온 아홉 신앙을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가장 먼저 우르반수스에 입성한 빛의 법전을 필두로, 다른 신앙들이 나타나거나 합류하면서 사후세계를 갖지 못한 고대신들은 몰락하고 저열한 짐승으로 추락했다. 그들이 한때나마 가진 신성은 여전히 강했지만 아홉 신앙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왜 '아홉 신앙'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소. 나도 그저 '원래 그랬다'라는 것 외에는 알지 못하니까. 안다면 빛의 법전 쪽에서 알겠지."
아이작은 단순히 사후세계라고 생각했던 우르반수스가 얼마나 복잡하고 위험한 세계인지 깨달았다.
신들이 현재보다 사후세계에 불과한 이곳에 더 많은 신경과 힘을 쏟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현재에서 아무리 승리하더라도 역사에서 패배하면 어떻게 개변당할지 모르니까.
"사람들은 사후세계를 '과거에 죽은 이들이 모이는 곳' 정도로만 생각하지만...."
아문달라스는 어딘가 메마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원래 현재는 과거에 지배당하는 법이지."
***
아이작은 아문달라스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설명해 주신 것에 대해서는 정말 감사합니다만...."
하지만 아이작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하나 있었다.
어째서 아문달라스는 이 모든 것을 자신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것인가? 따지고 보면 아문달라스에게 자신은 불청객에 불과하다.
익사자 왕이 아이작을 이곳까지 보내기는 했지만, 아이작은 소금 의회의 천사를 죽이고 속에 의도를 알 수 없는 혼돈을 품은 수상쩍은 자.
그럼에도 아문달라스는 친절하게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다.
"왜 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시는 겁니까?"
혹시 새로운 역사 개변을 위해 협조해 달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아이작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루앗딘을 처치해 달라든가 하는 요구라면 가능한지는 둘째치고 그 결과 현실에 무슨 일이 생길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 말에 아문달라스는 깔깔대며 웃었다.
"왜냐면 애초에 당신이 이 설명을 듣기 위해 우르반수스에 왔기 때문이오."
"예?"
곧 이어진 아문달라스의 말에 아이작의 몸이 경직되었다.
"혼돈이 왜 당신을 선택했다고 생각하시오?"
123화. 우르반수스 (3)
"...저를 선택한 이유 말씀이십니까?"
이름 없는 혼돈을 언급했다는 사실에 아이작은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이미 어느 정도 예견했던 상황이었다. 익사자 왕을 통해 자신에 대한 정보가 이미 전달된 듯했으니, 아문달라스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가 궁금한 것은 자신이 이름 없는 혼돈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이렇게 친절하게 구냐는 것.
'이름 없는 혼돈은 다른 신들에게 미움받는 게 아니었나?'
어쩌면 아이작 개인에 대한 호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떤 사정이 있든 간에 아문달라스가 자신에게 호의적으로 대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고, 그에 따라 원하는 것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소. 물론 당신은 뛰어난 재능이 있지. 머리도 제법 굴릴 줄 알고. 하지만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선택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지. 당신도 이제 우르반수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테니 짚이는 바가 있을 것이오."
아이작은 이름 없는 혼돈을 처음 만났던 때를 생각해보았다.
그는 네임리스 카오스의 플레이 가능한 여덟 신앙을 모두 클리어한 후, 이름 없는 혼돈이라는 새로운 히든 신앙을 선택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아이작이 이름 없는 혼돈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이름 없는 혼돈이 그를 선택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차, 아이작은 우르반수스에 대해 어떤 익숙한 개념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우르반수스라는 개념은 조금... 게임 같지 않나?'
이를테면 '네임리스 카오스'라던가.
게임 네임리스 카오스는 지금으로부터 아주 약간 미래 시점의 이야기를 다룬다.
주인공은 신앙을 선택하고, 해당 신앙의 승리를 위해 질주한다.
그 안에는 플레이어들의 숫자만큼의 세계가 있다. 아이작은 플레이어중 한 명으로서 승리하기 위해 몇백 번을 죽어 가며 재시작하고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승리를 쟁취하기란 아주 어렵지만, 어떤 신앙이 승리하느냐에 따라 세계는 크게 바뀐다.
하지만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아이작은 언제든 다시 게임을 재시작할 수 있었다.
아이작은 게임 '네임리스 카오스'가 기묘하게도 우르반수스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나를 권속으로 끌어들인 건가?'
게임 내 컨트롤을 잘하는 사람은 아이작보다 많을 것이다. 스피드런을 해서 최단기간 클리어한 사람도 수두룩했다.
최적화된 공략을 잘 짜서 플레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작이 그들에 비해 이룬 업적은 한가지.
모든 신앙을 플레이하고 성공해 봤다는 것.
하지만 곧 아이작은 스스로의 생각을 부정했다.
'...그냥 우연이겠지.'
역사를 개변한다, 시간을 되돌린다, 게임을 재시작한다 같은 개념은 얼마든지 있는 개념이다.
우르반수스가 역사를 뒤집어씌울 수 있는 세계라면 게임과 개념이 겹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이런 추측은 할 수 있었다.
만약 우르반수스가 네임리스 카오스라면.
혹은 그와 비슷한 개념이라면.
앞으로 어떤 변화가 닥쳐오든, 아이작은 우르반수스에 가장 잘 적응하는 사람일 것이라는 점이었다.
***
"짚이는 점이 떠오른 모양이군."
아문달라스는 자못 즐겁다는 듯 말했다.
"...제가 승리할 것 같아서 거기에 올라타고 싶다는 겁니까?"
"비슷하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뭔지, 그대도 알고 있지 않소?"
소금 의회가 원하는 것.
네임리스 카오스에서 표현된 소금 의회 승리 조건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작의 목적과 상충되지 않았다.
"소금 사막을 깨부수고 부르는 자를 깨우는 것."
"그렇소. 우리는 언젠가 나타날 그 존재를 '꿈꾸는 자'라고 불러왔지...."
단순히 소금 사막을 파헤치는 것만으로 부르는 자를 깨울 수 있었다면 진작에 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금 사막 아래 매장된 신은 외부에서 깨울 수 없다. 부르는 자를 깨우기 위해서는 함께 꿈꾸는 자만이 가능하다... 라는 것이 소금 의회의 교리 해석이었다. 이중 '함께 꿈꾸는 자'는 우르반수스에 대한 은유였다.
하지만 소금 의회 중 누구도 살아서 우르반수스에 발을 딛지 못했다.
아이작을 대리인으로 보내기 전까지는.
"만약 당신이 우리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있다면... 소금 의회에 당신이 '꿈꾸는 자'가 맞다는 계시를 내리도록 하겠소."
아이작은 생각지도 못한 아문달라스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저 말은 아이작을 거의 제 2의 선지자, 혹은 구원자로 신탁을 내리겠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이미 다른 교단의 성기사인 데다, 다른 신앙을 가진 외부인인데도.
아이작이 기대했던 '소금 의회의 전폭적인 지지' 수준을 넘어서, 완전히 휘하에 거느리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게... 가능합니까? 지금 소금 의회는 사후세계와 단절되어 있는 걸로 아는데요."
"당신 손에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들려 보내면 되지. 걱정 마시오."
"...제가 다른 신앙인인데도 말입니까?"
아이작의 말에 아문달라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솔직히 말하지. 우리도 지금 이 상황이 달갑지는 않소. 외부자에게 우리의 운명을 맡기는 것이 어찌 즐겁겠소이까. 하지만 익사자 왕이 스스로의 목숨을 바쳐 그대를 보낸 데에는 다 이유가 있소."
아문달라스는 아이작 앞에 손가락을 세우며 갈증 나는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혼돈은 언제나 변화를 불러오기 때문이오. 언제나."
그녀는 씩 웃었다. 송곳니가 날카롭게 빛났다.
"변화가 달갑지 않은 것들도 있겠지. 하지만 약자는 언제나 변화를 갈망하거든. 아마 우리 말고도 혼돈의 개입을 바라는 자들이 있을 거요. 이미 그대의 정체를 알아보고 접근한 자도 있지 않았소?"
아이작은 단박에 붉은 성배 클럽의 거울 시녀를 떠올렸지만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굳이 자신이 가진 패를 보여 줄 필요는 없었다. 아직 아문달라스의 정확한 정체를 확인하지도 않았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소금 의회의 전폭적인 협력 외에?"
"그건 그냥 부차적인 것이지요. 애당초 저는 소금 의회에 답변을 얻기 위해 친해지려고 했던 겁니다."
아문달라스의 입가가 씰룩였다.
"좋소. 저승까지 와서 물어볼 정도라면 보통 질문이 아니겠군. 궁금한 게 뭐요?"
아이작은 에이단을 통해 소금 의회와 접선을 만들 때부터 사실상 이 순간을 고대해 왔다.
그 나름대로 답을 찾아보고, 조사도 진행해 봤지만, 관련된 역사는 집요하게 삭제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이작은 지금에서야 그것이 인위적인 수준을 넘어섰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우르반수스가 개입해서 관련된 역사를 지워 버린 것이리라.
"300년 전, 백사병이 창궐할 당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아이작은 아홉 신앙들이 집요하게 지워버린 역사의 편린에 대해 물었다.
"이름 없는 혼돈은 왜 자신의 신도들을 다 죽여버리고 자살한 겁니까?"
아문달라스는 표정 없이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 질문을 할 줄 알았다는 듯 놀라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아이작은 그녀의 침묵에 초조함을 느끼고 답변을 재촉했다.
"말씀해 주시죠. 백사병에 관한 기록의 삭제는 인위적인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오늘 우르반수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니 설명이 되는군요."
루앗딘을 배에 태웠느냐 안 태웠느냐, 그 사실만으로도 어떤 고대 제국의 흥망이 갈라지고 한 신앙이 몰락 직전까지 갔다.
그것이 우르반수스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름 없는 혼돈에게 벌어진 일 또한 우르반수스에서 무언가를 결정하고 특정 역사를 지웠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만약 모른다면 답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도...."
"아니, 답변 못할 것은 아니오. 다만 질문을 이해하지 못해서 망설였소."
아문달라스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혼돈. 이름 없는 혼돈. 그래. 지금은 그렇게 불리는 모양이구려. 하기사, 그 존재는 항상 수천의 이름을 가져서 명명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었지.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은, 흠. 이름 없는 혼돈이 신도들을 다 죽여버리고 자살했다고 하셨소?"
"아닙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나는 비록 여기 못 박혀있는 몸이지만 역사는 계속 흘러들어오오. 이름 없는 혼돈은 자살하지 않았소. 그건...."
아문달라스는 다시 또 생각하려는 듯하다가 복잡하다는 듯 손가락을 휘저었다.
"이건 지워진 역사가 아니니 직접 보시오."
***
아이작의 눈앞에 어떤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바다 끝에서 산맥 끝까지, 끝 모를 대절벽에서 아득해지는 들판의 풍경까지, 샛노란 사막에서 하늘까지 나무가 닿는 삼림까지. 아이작은 그 모든 것을 달렸다. 그는 영광된 원과 퍼져가는 빛을 형상화한 빛살, 빛의 법전 깃발을 들고 들판을 질주하는 한 성기사였다.
온 세상에 빛의 법전의 영광과 질서가 가득했다.
"300년 전 풍경이오."
그의 바로 옆에 아문달라스가 종자 차림을 하고 따라오며 말했다. 언덕 위에서 아이작은 하늘 높이 떠오른 태양 아래 펼쳐진 세계를 보았다.
빛의 법전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빛의 법전의 권세가 최절정에 달하던 때지. 반역자 엘릴과 불순한 세상의 화로는 바다 건너 섬으로 쫓겨났고, 비천한 오크 무리 올칸 규율은 세상의 변방으로 도망쳤고, 붉은 성배는 뒷골목과 사창가에 숨었소. 바야흐로 빛의 시대라 할 만하지."
이 시기에는 아직 불사 교단이 없는 것 같았다. 알려진 세상과 '중심'이라고 할만한 모든 땅들은 빛의 법전 지배 아래 들어와 있었다.
아이작은 이 화창한 번영 속에서 이름 없는 혼돈이 어떻게 그 재앙을 퍼뜨렸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름 없는 혼돈의 신도들은 어디 있습니까?"
"안 보이시오?"
아이작은 아문달라스의 목소리에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밟고 있는 언덕이 흙으로 된 언덕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얕은 언덕을 이룰 만큼 쌓인 시쳇더미였다. 그리고 그 시체 언덕 주변으로 계속해서 새로운 시체가 실려 와 쌓이고 있었다.
학살당한 것인가 했지만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아문달라스는 개미 떼처럼 시체를 짊어지고 오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마을에 역병이 돌았소. 마을 주민들은 빛의 법전 사제들에게 구원을 청했지. 하지만 사제들은 기적을 거부했소."
"기적을 거부했다고요?"
"병마에 시달리는 것은 이단의 증거이기 때문이오. 사제들은 마을 사람들이 역병신을 섬겼다고 생각했지. 헛소리라고 생각하오? 만약 이단이 아니라면 죽어서 천국으로 가 빛의 법전을 섬기게 될 텐데 무엇이 문제겠소?"
이윽고 시체가 충분히 쌓이자 사람들은 기름을 뿌리고 시쳇더미에 불을 붙였다. 이미 시체 언덕 위까지 기름을 뿌려둔 건지 불은 빠르게 번졌다. 문득 아이작은 다가오는 불길 사이로 아기를 안은 주민을 발견했다.
아기는 자지러지게 울고 있었다.
그 순간 아기를 안고 있던 주민이 아기를 불길 속에 집어 던졌다.
자신도 모르게 튀어 나가려 했지만, 다음 순간 아이작은 다른 곳에 있었다. 이번에는 번화한 도심의 시장이었다.
아이작은 아문달라스를 노려보았다. 상인 모습을 한 아문달라스는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 아기도 역병에 걸렸습니까?"
"아니오. 건강한 아기였지."
"그러면 뭐가 문제인...."
"하지만 역병에 걸릴 수도 있잖소. 역병에 걸렸다는 것은 이단이라는 뜻이오. 그럼 천국에 못 가지. 순수한 아기인 채 죽어야 천국에 갈 수 있잖소."
아이작은 기괴한 논리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문달라스는 앞으로 걸어갔다. 시장은 번화하고 상인들은 활기찼다. 하지만 아이작은 아까처럼 들판을 보던 것처럼 평화로운 시선으로 시장을 볼 수 없었다.
시장 사이사이 골목에는 빈민들이 구걸하고 있었고, 종교적 상징을 온몸에 문신처럼 박은 남자가 연신 뭔가를 중얼거렸다. 시장 중심에서는 주교 인증이 박힌 면벌부가 경매에 올라 판매되고 있었다.
아이작은 뭔가 어지러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제가 물어본 건 이게 아닐 텐데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다고 하지 않았소?"
"그래요. 단 하나의 체제가 압도적으로 권력을 차지하면 경직되고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하지요. 300년 전 빛의 법전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거고."
아이작은 짜증스럽다는 듯 아문달라스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하지만 결국 과거의 일입니다. 지금도 교단이 깨끗하다고는 말하지 못 하겠지만, 옛날 일인데 딱히 상관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국 혼돈의 신도들은 어디 있고, 또 이름 없는 혼돈은 그들을 다 죽인 겁니까?"
그 말에 아문달라스는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까지 당신이 본 사람들 전부가 혼돈의 신도들이었소."
124화. 우르반수스 (4)
아이작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역병 치료를 거부하던 사제들, 자식이 천국에 가지 못할까 봐 갓난아기를 불 속에 던지던 농부, 면벌부를 팔던 상인, 구걸하는 빈민들... 그들이 전부 어떻게 이름 없는 혼돈의 신도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어느새 아이작은 아문달라스와 함께 수도원을 거닐고 있었다.
아문달라스는 조용한 수도원 복도를 걷다가 아이작을 향해 손짓했다. 그녀가 가리키는 손끝에 조용히 무언가를 속삭이는 경건한 모습의 수도사들이 보였다.
아문달라스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해설해 주듯 말해 주었다.
"정확히는 세상의 종말을 바라는 자들이오."
"...종말을 바라는 자들?"
시대를 막론하고 세상의 종말을 부르짖는 광신도들은 늘 있었다. 그들은 종말이 코앞까지 닥쳐왔으니 당장 그 종말을 대비해야 한다고 부르짖곤 한다.
"그런데 세상이 망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어떤 자들일 것 같소? 가난뱅이? 사회에 불만이 많은 자들? 핍박받는 자들? 뭐, 그들도 멸망을 원하기는 하겠지."
아문달라스는 시장의 풍경을 다시 보여 주며 말했다.
"하지만 의외로 저런 강대하고 신앙심 깊은 자들도 세상의 종말을 원한다오. 자신들이 이룩한 영광이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공포에 빠져 있느니, '그 뒤로 그들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를 원하는 거지."
수도사들은 어떤 이름을 속삭였다. 아이작의 귀엔 그 이름이 마치 지워진 것처럼 먹먹하게 들렸다.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것이 이름 없는 혼돈의 원래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문득 소름이 돋았다.
백사병은 이름 없는 혼돈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발병한다.
저들은 죽을 것이다.
아문달라스는 수도사들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들은 빛의 법전이 '세상을 완전히 정복'함으로써 자신의 대에 이 영광된 왕국을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그들은 이 아름다운 작품이 깨지는 것을 원치 않소. 그리고 혹여라도 죄를 더 짓기 전에 천국에 가고 싶어하지."
"설마, 그래서."
"설마가 아니라 당연한 거요. 빛의 법전은 영원한 왕국이 천국에 있다고 말하지. 그에 비하면 언제 죄를 지을지 모르는 이승은 불안하고 불편할 뿐. 권력자들과 사제, 부자들도 마찬가지요. 그들은 이 '태평성대'를 이루는 데 일조했으니 천국에 갈 자격이 있다고 믿었지. 그래서 많은 왕과 귀족. 사제, 부자들이 '끝'이 다가오길 바랐소. 가난한 자들은 가난한 자들대로 이 압제와 고통이 끝나기를 바랐고."
아문달라스는 다시 손을 휘저어 장소를 옮겼다. 이번에 그녀가 찾아간 장소는 드넓게 펼쳐진 사막이었다. 피라미드 형태의 제단이 보였다.
아이작은 그것을 본 순간 눈앞에 떠오른 어떤 한 장면에 대한 기시감에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아이작의 반응을 본 아문달라스는 표정 없이 중얼거렸다.
"이곳에서 있었던 사건의 기억에 침식된 적이 있는 모양이오?"
아이작은 자신이 꾼 악몽과 노란 옷을 입은 남자가 이 피라미드 제단 위에서 펼쳤던 의식을 다시 떠올렸다.
"...그건 정말 있었던 일인 모양이군요."
"그렇소. 아까 본 자들 중에서는 유달리 종말을 간절히 바라던 자들이 있었소. 그들은 얌전히 종말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직접 불러들이기로 했지. 그들은 그렇게 자신들 사이에서 퍼지던 신앙, 혼돈의 힘을 끌어내기 시작했소."
아이작의 머릿속에 다시 번개같이 그 섬뜩한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기울어지고 일그러지는 세상과 사람의 가죽을 관문 삼아 기어 나오는 괴물들, 산더미처럼 바쳐지는 인간의 시체들. 제정신으로 볼 수 없는 풍경들.
"...혼돈이 원래 그런 신앙입니까?"
"아니. 그럴 리가. 하지만 내가 이전에 말했듯이, 세상 모든 것은 우르반수스의 영향을 받지. 혼돈의 신도들은 간절하게 세상의 멸망과 이 질서의 끝을 바랐소. 그렇다면 그 기적의 형태 또한 정상적일 수가 없지."
그 결과가 촉수 괴물들과 무너지는 세상의 풍경이다.
아이작은 자신이 발휘하는 기적들이 왜 다 이 모양인지 깨달았다.
그것들은 과거 종말을 바라던 자들이 남긴 흔적이다.
아이작에게 여전히 영향을 미치는 우르반수스의 흔적인 셈이다.
"그러던 와중 한 사람이... 이 전대미문의 의식을 준비했지."
아이작은 바로 노란 옷을 입은 남자를 떠올렸다. 늘 사후세계에서 간절한 집착으로 아이작을 응시하는 남자. 아이작은 그가 끊임없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으며, 언젠가 그와 마주치게 될 것임을 확신했다.
"그게 누굽니까?"
"모르오. 그의 이름 또한 함께 지워졌으니까. 안다 해도 함부로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군. 지금 이곳 또한 우르반수스니까."
이 우르반수스 어딘가에도 바로 그 노란 옷을 입은 남자가 있다. 아문달라스는 그것을 경고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잠시 말이 없다가 미련이 남은 것처럼 입을 열었다.
"그렇다 해도 이런 미친 사이비 종교 따위가 널리 퍼질 리가 없을 텐데요."
"그렇소. 그렇게 많이 퍼지진 않았지."
아문달라스는 아이작의 예상을 비웃듯 말했다.
"대략 당시 세계 인구의 1/3 정도에게만 퍼졌소."
그 수치에 아이작은 입을 다물었다.
전 세계 인구의 1/3을 지워 버린 백사병.
아이작은 이름 없는 혼돈이 백사병을 퍼뜨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단지 세상의 멸망을 꿈꾸던 미친놈들의 계획이 성공한 것뿐이다.
하지만 그 멸망은 세상이 아닌 그들의 죽음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충격도 잠시, 아이작은 문득 이런 터무니 없는 기적을 신도 한 명의 힘으로 해낼 수 있을 리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신의 도움 없이는.
"혼돈도 이 모든 것에 동의한 겁니까?"
"그럴 것이오. 노란 옷을 입은 남자가 전대미문의 천재 주술사라 하더라도 그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오. 그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죽여버린다는 것은."
"왜 그런 짓을?"
"모르겠군. 신들은 수많은 미스터리를 만들지. 하지만 백사병만큼은 다른 신들조차 이해하지 못할 거요."
결국 다시 원점이다.
백사병을 만든 것은 이름 없는 혼돈이 아니지만, 결국 거기에 동의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름 없는 혼돈은 대체 왜 백사병으로 자신의 교단을 몰살시키는 데 동의한 걸까.
'결국 신도 우르반수스의 압력엔 견디지 못했던 건가?'
***
어느새 아이작은 다시 소금 사막의 배 갑판 아래로 돌아와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답변이 됐는지 모르겠소. 아이작."
그녀는 피곤한 모습으로 몸을 소금 바닥에 뉘며 말했다.
"백사병은 혼돈의 신도들이 원했던 결과물이오. 빛의 법전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든, 괴로운 현생을 벗어나 천국으로 가기 위해서든, 바라는 결과는 찾아왔소. 이름 없는 혼돈이 왜 그것에 동의했는지 알 수 없을 뿐."
그것만큼은 신의 의지다.
그저 흘러들어오는 정보밖에 볼 수 없는 아문달라스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작은 아문달라스가 최대한 성의껏 대답해 주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충분히 답변이 되었습니다."
그런 아이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문달라스는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경고했다.
"다만 한 가지를 당부하고 싶소."
아문달라스는 손톱으로 바닥을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강한 신성력을 사용한다는 것은, 그만큼 신과 거리가 가까워진다는 뜻이오. 사후세계와의 경계가 얇아지고 있다는 뜻이지. 우르반수스가 당신을 물들일 수도 있다는 뜻이오."
"...예전에 지인에게 들은 적 있습니다."
에이단도 비슷한 뉘앙스로 말한 적 있었다. 기적의 힘이 강해질수록 개인의 자유 의지는 사라지고 신앙인으로서의 집단의지가 자신을 장악할 수가 있다고.
"그때 저는 '그 정도는 어떤 집단을 들어가도 일어나는 일 아니냐'고 대답했었지요."
"그렇소. 우르반수스고 뭐고 다 집어치우면 평범하게 동조압력이라고 부르는 것이오. 원래 집단은 이질감을 견디지 못하니까."
그러나 아문달라스는 눈을 번뜩이고 아이작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탁월하오. 기이할 정도로 이질적이지. 당신 한 명에게 수천 년, 수억 명 단위의 압력이 전해질 거요. 당장은 크게 강하지 않으니까 우르반수스의 압력이 강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혼돈의 힘을 빌려서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더 위험할 거요."
아이작은 잠시 대답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아문달라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무엇을 걱정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아이작이 안전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름 없는 혼돈의 힘 덕분이다. 하지만 그 힘에 완전히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느끼고 있었다.
정체를 숨겨야 한다는 것뿐만이 아니다.
이유 없이 주어진 힘인 만큼, 이유 없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이름 없는 혼돈이라서가 아니라 다른 신앙이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온전한 내 힘이 아니니까.'
아이작은 이름 없는 혼돈에 대해 생각했다.
이름 없는 혼돈이 호의적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호의를 쉽게 거둘 것 같지도 않다. 솔직히, 아이작은 이름 없는 혼돈을 믿고 목숨을 거는 짓도 많이 했다. 사실 누구보다 믿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사후세계... 우르반수스는 다르다.
아이작은 이제 자신이 가진 촉수와 기적들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았다.
멸망을 간절히 바라던 자들.
그리고 노란 옷을 입은 남자.
이름 없는 혼돈이 백사병으로 전 세계 인구의 1/3을 죽여 버렸다는 뜻은, 세계의 1/3이 아이작을 향해 압력을 가할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이질적인 사후세계가 아이작을 향해 '자신들과 같으라'고 압력을 넣는다면, 과연 그가 버틸 수 있을까?
아문달라스는 그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걱정하는 바는 잘 알겠습니다."
"알아주니 고맙소."
"별일 없을 테니까 그냥 안심하라... 라고 하기에는 심각한 이야기로군요. 일단 제게도 도움이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다시 한번 고맙다고 해야겠군요."
아이작은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는 아직까지 자신의 의지가 다른 의지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현상은 느낀 적 없었다. 하지만 아문달라스가 말하는 현상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자각조차 할 수 없는 형태로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아문달라스는 아이작을 보면서 씩 웃었다.
"신중한 모습이 마음에 드오. 익사자 왕은 가치 없는 희생을 한 게 아닌 듯하군."
문득 아이작은 익사자 왕에게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을지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그 전투는 아이작의 진심을 알아내기 위한 그의 절박한 발악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당신은 제가 올 줄 알고 있었습니까?"
달우물 의식을 통해 전달받은 정보 이상으로, 아문달라스는 아이작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녀는 분명 무언가를 많이 알고 있다.
아이작은 그것이 궁금했지만, 아문달라스는 입술을 가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전부 다 밝힐 수 없소. 특히 당신에 대한 것은 언급하는 순간 원치 않는 것들이 몰려올 수 있으니."
그녀는 웃으며 속삭였다.
"하지만 당신이 놈들과 달리 이 세계의 영속성을 바란다는 것을 믿소."
아문달라스의 말에 아이작은 익사자 왕이 그를 이 세계에 보내기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이 세계의 영속성을 나처럼 너 또한 바랄 것이라고 믿는다.'
"그게 무슨 뜻...."
"자. 돌아갈 시간이오. 이미 너무 많은 비밀을 누설했군. 나는 이쪽에서 한동안 고생할 테니, 당신은 그쪽에서 열심히 고생하시구려."
아문달라스는 그렇게 말하더니, 아이작의 어깨를 가볍게 툭 밀쳤다.
다음 순간 아이작의 시야가 바뀌었다.
125화. 오래된 미래 (1)
아이작은 어느새 사공의 나룻배에 타고 있었다.
사공은 아이작이 배에 탄 것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땅을 노로 탁 밀어제쳤다. 순식간에 나룻배가 쏘아져 가듯이 하늘로 치솟았다. 엄청난 속도에 아이작은 짓눌리듯이 나자빠졌다. 손 아래 땅이 놀랄 만큼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아이작은 화를 내려다가 단호한 사공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사공은 그냥 배를 모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노를 젓고 있었다.
몰락한 항구 도시, 미르미아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아득할 만큼 광활한 새하얀 소금 사막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미르미아가 손톱만 하게 보인 순간, 그 아득한 소금 사막마저 왜소하게 만들 정도의 검은 물결이 보였다. 그 광활하게 펼쳐진 검은 바다에 비하면 소금 사막은 겨우 잉크 한 방울 떨어뜨린 듯한 정도 같았다.
그리고 아이작이 처음 우르반수스에 왔을 때 발견했던 거대한 피라미드가 보였다. 피라미드의 아래로 소금 사막을 제외한 모든 곳이 시커먼 물결로 가득했다. 피라미드 주변은 태양의 빛을 감당할 수 없는지 쫓겨나듯 물러났지만 소금 사막 주변은 연신 물결에 침범당했다.
"꽉 잡으시오."
그때 나룻배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
아이작은 검은 물결이 자신을 향해서도 닥쳐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세히 보자, 검은 물결이 액체가 아닌 어떤 거대한 무리의 군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이작은 저 군집이 어딘가 촉수의 움직임을 닮았다는 생각을 버리기 어려웠다. 사공이 노를 더 빨리 저어도 그 검은 물결은 따돌리기 어려워 보였다.
'이거 잡히는 거 아니야?'
아이작은 루앗딘 열쇠를 빼 들었다. 사후세계에서 뭔가와 싸운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로 최악의 선택이지만, 저게 나룻배에 닥쳐온다면 별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저것이 아이작이 생각하는 그것이라면 더더욱.
그 순간, 맹렬하게 쫓아오던 검은 무리들이 연기를 피워올리며 뒤로 물러났다. 아득히 먼 거리였는데도 비명이 들려왔다.
사공이 몰던 나룻배가 태양의 열기가 닿는 영역까지 도달한 것이다. 이제 나룻배는 불타오르는 검은 무리들을 뒤로 하고 바로 그 피라미드의 태양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미르미아를 말려 버린 가혹한 태양과는 다른, 자상한 불꽃이었다.
마침내 사공이 탄 배는 그 불꽃 속으로 뛰어들었다.
"고맙다. 아이작."
모든 것이 아득해지는 빛 속에서 사공이 갑자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이작은 갑자기 자상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사공을 보고 당황해 돌아보았다. 사공의 얼굴에는 피곤하지만 어딘가 후련한, 고된 노동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려는 사람의 표정이 담겨 있었다.
순간 아이작은 사공의 정체가 누군지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뭔가를 말하기 전에, 그는 아이작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며 중얼거렸다.
"짧은 시간이지만 너를 보호하는 걸로 내 임무를 마무리 지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사공의 군청색 눈이 아스라이 빛나는 햇살 속에 희미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