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아이작은 알림음에 눈을 떴다.
몸을 일으켜 세우자 이상하리만치 몸이 가볍게 느껴졌다. 주변을 둘러보자 시야 가득 바다가 들어왔다.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해안가 어딘가였다.
어디선가 지독한 악취가 풍겨 왔다.
"음...."
아이작은 악취가 풍겨 오는 방향을 보고 얕게 신음했다.
익사자 왕의 거대한 사체가 썩어 가고 있었다.
마치 해변에 좌초된 고래처럼 몸뚱이를 뉜 익사자 왕은 새하얀 살갗을 드러낸 채 맹렬한 시취(屍臭)를 풍겼다.
한때 천사였던 존재의 비참한 모습에 아이작은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익사자 왕을 죽인 것은 사실상 아이작이고, 아이작 또한 익사자 왕에게 죽을 뻔했다. 이름 없는 혼돈이 아니었다면 반드시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익사자 왕에게 마지막 일격을 꽂아 넣은 순간, 그가 스스로 자살하듯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승부는 장담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아문달라스와 이야기를 해 보니 그의 입장이 이해가 안 될 것도 아니었다.
아이작은 익사자 왕의 사체에 다가가 촉수를 꽂아 넣었다.
'하다못해 무가치하게 썩어갈 몸은 아니지.'
천사는 쉽게 죽지 않지만, 죽는다 해도 저주받지 않는 한 이렇게 추한 모습으로 남지 않는다. 하지만 익사자 왕은 사후세계와 단절되었기에 육신을 정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몸 안에 파고든 촉수가 익사자 왕의 육신을 포식하기 시작했다. 이미 곳곳이 썩고 부패한 상태였지만, 촉수에게는 문제가 될 일이 아니었다. 아쉽게도 사체에는 천사 특유의 신성력이 대부분 증발해 고기 이상의 가치는 없었다.
['부패한 천사의 독(S)' 특전을 습득하였습니다.]
[소화될 때까지 축복이 유지됩니다.]
하지만 그 몸 안쪽에서 아이작은 무언가를 발견했다.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마치 작은 진주와도 같은 것이었다. 아이작은 그것이 익사자 왕의 정수임을 알아보았다.
[어두운 성찬례가 발동합니다.]
순간 촉수가 폭발적으로 그 정수를 주변으로 성장하며 단단하게 감쌌다. 그리곤 마치 아이작에게 물어보기라도 하듯 정수를 물어뜯기 전에 잠시 멈춰서 대기했다. 아이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촉수는 그것을 가루 한 톨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 단숨에 움켜쥐어 으스러뜨렸다.
부그르르르....
아이작의 눈앞에서 익사자 왕의 사체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상당한 양의 신앙이 그의 몸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익사자 왕의 몸을 포식하는 것으로 그의 제례를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익숙한 알림음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익사자 왕(EX-)'를 포식하였습니다.]
['죽은 신의 내장' 특전으로 섭취 효율이 상승합니다.]
[촉수의 강도가 영구적으로 강해집니다.]
[촉수의 길이가 영구적으로 길어집니다.]
[촉수의 가닥 수가 영구적으로 증가합니다.]
[소화될 때까지 축복이 유지됩니다.]
아이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정말 분위기 깨는군."
['익사자 왕 토벌'에 대한 혼돈의 포상이 주어졌습니다.]
[다음 세 가지 포상 중 한 가지를 고르세요.]
아이작이 감상에 젖거나 말거나, 이름 없는 혼돈은 충실하게 그에게 포상을 제안했다. 이미 익사자 왕을 포식한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보상을 얻은 셈이지만, 그렇다고 이름 없는 혼돈의 보상이 반갑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지금 당장 힘을 강화하는 것보다 궁금한 것들이 더 많았다.
그는 보상안을 선택하는 대신 왼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름 없는 혼돈."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나를 여기로 왜 끌고 온 거야? 아니, 그래. 이기라고 데려왔겠지. 그러니까 내 말은... 누구로부터 이겨서, 어떤 결과를 내기를 바라는 거야?"
멸망을 원하는 자들에게 멸망을 주고 자신은 화려하게 자살한 신.
아이작은 대체 그가 원하는 바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아이작은 이름 없는 혼돈의 목표가 무엇이든간에 자신의 목표, 빛의 법전 성기사가 되어 잘 먹고 잘살겠다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달려왔다.
그렇다면 단지 원하는 자에게 원하는 것을 주려는 것뿐인가?
하지만 아이작은 자신의 의지가 무엇이든 간에, 신들의 의지가 그것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는 깨달았다.
앞으로 1년, 여명군이 시작되는 시기로부터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진다.
빛의 법전이 소금 사막을 만들어 버린 것과 비견되는, 아니, 거의 모든 신앙들이 뒤엉켜 아귀다툼을 벌일만한 무언가가.
그 전쟁터에서 소금 의회와 붉은 성배는 승기의 끄트머리라도 잡기 위해 아이작 같은 존재에게조차 손을 내민 것이다.
그렇다면 이름 없는 혼돈은 무엇을 원하기에 아이작을 선택했는가?
신을 무엇을 위해 인간에게 손을 내밀었나?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다음 세 가지 포상 중 한 가지를 고르세요.]
하지만 이름 없는 혼돈은 답변 대신 뻔뻔하게 포상을 제안할 뿐이었다.
아이작은 실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름 없는 혼돈이 저 '당신을 주시합니다' 외에 다른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놈은 끝까지 저렇게 아이작과 거리감을 두고 있었다.
아이작으로서는 늘 해 왔던 협박을 다시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원하는 게 뭐든, 나는 정신 나간 선택지를 고를 생각 따윈 없어."
아이작은 아문달라스가 보여 준 300년 전의 풍경을 보았다. 우르반수스에서 넘쳐흐르는 그 검은 물결을 보았다.
그것들은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촉수와 곤충, 벌레, 기형적인 괴물들로 넘쳐나는 물결이었다. 아이작은 그것이 도저히 이름 없는 혼돈과 무관하다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아니, 사실 그것들이 무엇인지 보고 바로 깨달았다.
그것은 과거에 이름 없는 혼돈을 섬기면서 종말을 바라던 자들의 사후세계다.
언제든 범람할 기회를 노리면서 아이작을 배신자라고 부르짖고, 그에게 압력을 불어넣어 미완의 종말을 다시 시작하려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의지가 이름 없는 혼돈과 일치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결국 아이작은 당장 이름 없는 혼돈에게 답변을 추궁할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제안받은 세 가지 포상안을 확인했다.
[기어드는 혼돈(S) / 제물을 바쳐서 혼돈의 권속에 속하는 신수를 소환할 수 있습니다. 제물의 질에 따라 신수의 등급이 결정됩니다.]
[경계의 낫(A) / 촉수의 단면을 톱날처럼 만들어 닿는 모든 것을 뜯어먹습니다.]
[세상에 드리운 그림자(A) / 촉수를 저 너머의 색채로 감싸 보이지 않게 하거나, 그림자 속에 숨길 수 있습니다.]
아이작은 잠시 생각하다가 주저 없이 세상에 드리운 그림자를 선택했다.
'S급인 기어드는 혼돈도 매력적이지만....'
아이작은 사후세계에서 본 그 괴물들을 떠올렸다. 물론 아이작이 이때까지 소환한 벌레나 촉수 중 말을 안 듣는 놈들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이번에 소환하는 놈들도 당연히 그럴 것이다. 게다가 제대로 된 신수는 블러드나이트나 아궁이 짐승처럼 강력하고 쓸모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물며 이름 없는 혼돈의 권속으로 묘사되는 괴물들은 얼마나 강력할 것인가.
그러나 아이작은 그것 때문에 오히려 거리를 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문달라스의 경고가 떠오른 것이다.
이름 없는 혼돈의 힘에 과하게 기댈수록 사후세계가 그를 잠식할 것이라고.
'적어도 능력이 강해지는 것에 맞춰서 나 자신도 강해져야만 해.'
이름 없는 혼돈은 포상에 후한 편이다. 어쩌면 나중에라도 얻을 수 있고, 필요하다면 의식을 통해서라도 소환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촉수를 그림자 속에 숨기거나 감쌀 수 있다는 것은 정체를 숨겨야 하는 아이작 입장에서는 강력한 장점이었다. 그 기능성만으로는 S급을 넘어 EX급이라도 붙여주고 싶어질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촉수의 공격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되지 않아 경계의 낫은 선택하지 않았다.
보상으로 세상에 드리운 그림자를 선택하자 아이작의 눈빛이 한층 더 깊은 보랏빛으로 빛났다.
'그러고 보니 새로운 특전을 얻은 게 있었지.'
[부패한 천사의 독(S)]
[보기 드문 천사의 시독(屍毒). 강력한 재생력과 신성성, 죽음의 기운, 저주가 결합된 강력한 독. 신성을 가진 존재에게 특히 더 강력한 효과를 보입니다.]
익사자 왕의 썩어 가는 사체를 포식하면서 얻은 특전이었다. 소화가 될 때까지만 유지되는 특전이었지만 이 정도면 아주 강력한 무기였다. 특히나 천사나 신수와 같은 신성을 가진 존재에게 통하는 독은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익사자 왕, 너....'
아이작은 괜히 찡한 기분을 한 번 더 느꼈다.
'정말 아낌없이 주는 녀석이구나.'
익사자 왕이 들으면 어처구니없어하겠지만 알뜰살뜰하게 잘 써주면 우르반수스에서도 고마워하리라고 생각했다.
126화. 오래된 미래 (2)
'일단 여기가 어딘지부터 알아봐야겠군.'
아이작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사자 왕이 사후세계로 가는 '문'이 되었던 탓에 돌아올 때에도 그의 몸을 기준으로 좌표가 설정된 것 같았다. 익사자 왕의 사체가 해류를 타고 이리저리 표류하다가 해변에 좌초되어 썩어 가던 중 아이작이 돌아온 것이다.
바다 한가운데로 돌아왔다면 상당히 곤란했을 테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지금도 난처한 상황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공기가 차고, 파도가 거칠다.
식생을 보아하니 북쪽에서 주로 자라는 키가 큰 침엽수들이 많이 보였다. 다행히 아직 아이작이 출발한 노르덴 항 인근의 북해를 벗어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운 좋으면 다시 노르덴 항 주변의 해안으로 돌아온 거고, 재수 없으면 엘릴이나 세상의 화로가 있는 킬마르 인근일 수도 있겠군.'
둘 다 백제국에 속한 신앙들이니 죽일 놈 살릴 놈 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오랜 시간 잡혀있을 수도 있었다. 우르반수스의 정체를 알고 나니 그런 식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작은 각지에 흩어져 자신만의 임무를 진행하고 있는 권속들을 향해, 의지를 집중해 쏘아 보냈다.
붉은 성배와 관련된 일을 진행하고 있던 헤사벨이, 고대신의 은거지를 찾는 임무를 맡은 지힐렛이, 이사크레아 영지를 경영하고 있던 카일이 각각 빠르게 반응을 보내왔다.
가장 먼저 의지를 보내온 것은 헤사벨이었다.
'돌아오셨군요!'
'그래. 그런데 아직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다. 내 위치가 가늠이 되나?'
'북쪽이라는 것 외에는 잘 모르겠습니다.'
헤사벨은 부르면 즉시 달려올 듯한 충성심을 보이긴 했지만, 그녀는 도움이 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애당초 생선이나 배를 탄다는 개념 자체를 낯설어하는 완벽한 내륙 국가 사람이다. 아이작은 헤사벨에게 소금 의회에 자신이 있는 방향을 수색하라는 메시지를 보내달라고 했다. 하지만 헤사벨은 의외의 답을 내놓았다.
'그럴 필요 없을 겁니다.'
'왜? 이 기회에 나를 이 바다에 아예 담가버리려고?'
'예? 무슨 말씀을... 소금 의회는 이미 아이작 님을 수색 중입니다. 아이작 님이 돌아오셨으니 이미 계신 곳을 향해 가고 있을 겁니다.'
아이작은 그러니까 소금 의회가 자신을 어떻게 찾느냐고 말하려다가 문득 오른손에 무언가를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너무 꽉 쥐고 있어서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물건이었다.
'...!'
그것은 사공, 아니, 우르반수스의 익사자 왕이 아이작에게 마지막에 넘겨준 물건이었다.
그때 해안가 한쪽에 배 한 척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그 배 한 척을 필두로 해안가를 따라 샅샅이 수색하던 배들이 줄줄이 연이어 따라 들어왔다. 아이작은 선수에 매달리다시피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아이작과 눈이 마주친 에이단이 반색하며 손을 흔들었다.
***
아이작이 있던 섬은 북부 스반바르 군도의 무인도였다. 스반바르 군도는 세상의 화로 교단의 영향을 받는 아를 부족 동맹의 세력권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 털 날리는 짐승들이 탄 순찰선이나 경비대와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소금 의회가 교묘하게 숨어다니며 아이작을 찾아다닌 덕분이었다.
익사자 왕이 죽던 그 순간, 소금 의회의 사제들은 일제히 모두 사후세계와 연결되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신성의 기운과 확신, 그리고 그 존재에 대한 신성함을 느꼈다고.
그 뒤로 그들은 48일에 걸쳐 아이작을 찾아다녔다고 했다.
48일.
그게 아이작이 사후세계에 잠깐 발붙인 동안 현실에서 흐른 시간이었다. 아이작은 이 어마어마한 시간 낭비에 깊은 분노를 느꼈지만, 어차피 촉수 괴물의 폭주 여파로 한동안 앓아누웠을 것을 생각하자 화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들이 아이작이 돌아오자마자 단번에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특별한 성물 덕분이었다.
"그러니까... 이걸 가지고 날 찾아냈다는 거군."
"예. 맞습니다!"
에이단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익사자 왕의 사체 주변에서 아이작 님이 돌아오실 것이라 생각해 주변에서 대기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시취가 심각하고 아를 동맹의 경비대와 마주치면 곤란해서 숨어 있었죠. 그러던 와중 이 성물이 반응하며 움직이는 걸 보고 바로 돌아온 겁니다!"
에이단이 손에 든 것은 아이작이 만들어 준 적 있는 성물, '표류자의 고향'이었다.
[표류자의 고향(희귀)]
[병 안에 바닷물을 담으면 배 모형의 선수(船首)가 늘 바닷물을 담았던 그 장소를 향한다.]
정말 보잘것없는 성물이라 생각했는데 그 성물은 기묘하게도 아이작을 향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아이작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표류자의 고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에이단은 설명을 시작했다.
"의식을 잃은 사이, 저 또한 우르반수스 안에 빨려들었던 것 같습니다. 의도치 않게 생환 의식을 치른 것이지요."
"생환 의식을 치렀다고? 그러면...."
"예. 저 역시 우르반수스 안에서의 기억이 없습니다만, 깨어났을 때 사제로서의 기적이 허용되었더군요. 제대로 된 절차를 거친 것은 아니나.... 하야니스 선장이나 옌코스 의장은 달우물 의식을 준비할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저승에 발을 담갔다 뺐다는 점에서 에이단은 사제로서의 의식을 치른 셈이다.
이건 예상치 못한 이득이긴 했다. 아이작을 믿고 따르는 에이단이 단순히 상인이나 고고학자를 넘어서 사제의 지위까지 얻은 것이니까. 심지어 보통의 사제보다 기적의 힘도 훨씬 더 강하다는 것 같았다.
"그런데 우르반수스에서 돌아오고 나니, 표류자의 고향이 이상하게 변했더군요. 물은 하얗게 탁해졌고, 배는 한 곳을 가리키지 못하고 기울어진 채 하늘 방향으로 빙글빙글 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딱 방향을 가리키더군요. 그래서 그 방향을 따라왔더니, 아이작 님이 계셨던 겁니다!"
아이작은 에이단이 든 성물을 살펴보았다. 그 안의 물 색깔은 아이작이 보았던 소금 사막에 찰랑거리던 것과 닮아 있었다.
"이건 사후세계의 물이다."
"예?!"
에이단이 기겁하면서 성물을 떨어뜨릴 뻔했지만, 가까스로 부여잡았다. 그는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처럼 그것을 소중하게 감싸고 들여다보았다. 천년 가까이 단절되어있던 사후세계를 증명하는 물건이다. 절대로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아이작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익사자 왕이 준 표류자의 고향도 들어 올렸다. 거기에도 같은 물이 담겨 있었다. 아이작은 아문달라스의 말이 떠올랐다.
'증거를 함께 보내겠다고 하더니 소박한 걸로 보냈군.'
하지만 아이작은 소박하다며 소홀히 넘기지 않았다. 성물은 그 자체의 기능보다 거기 담긴 역사와 사건이 더 극적인 효과를 만들어 낼 때가 있었다.
아이작이 가진 가장 귀중한 성물인 '분열 예식'은 단순한 단검이었지만, 엘릴의 심장을 뽑은 뒤로 천사도 찢어 버리는 주술 도구가 되었다.
무엇보다 사후세계의 물이 담긴 성물이 평범하리라고 생각하긴 어려웠다.
"일단 당장 이걸 어떻게 써야 할지는 모르겠다. 아문달라스가 나를 꿈꾸는 자로 계시할 증거로 내려보내겠다고 했으니 어딘가에 쓸모는 있겠지. 일단 이 섬부터 빠져나가고...."
그때 아이작은 에이단이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보았다.
"아니, 잠깐, 그 전에 아문달라스? 그건 누굽니까? 알려지지 않은 천사입니까? 그리고 꿈꾸는 자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자세히 좀 말해 주십시오! 아이작 님!"
***
아이작은 귀찮게 매달리는 에이단을 떼어내고 선실로 들어왔다.
에이단에게 설명 못 해 줄 것도 없겠지만, 나중에 히야니스나 옌코스 같은 의회 선장들을 만나면 같은 설명을 반복해야 할 것이라는 예감을 강하게 느꼈다. 어차피 아이작은 귀환하기 전에 노르덴 항에 다시 들러야 했다.
"펜과 종이 좀 가져다주게."
아이작은 잔심부름을 맡은 선원에게 종이와 펜을 받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소금 의회 사제들은 그들의 학구적인 탐구심 때문이든, 혹은 목마른 신앙심 대문이든 아이작에게 우르반수스가 어떤 곳인지에 대해 물어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호기심과는 별개로, 아이작 역시 자신의 기억을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우르반수스는 이렇든 저렇든 앞으로 나와 깊게 연관될 것이다.'
아이작은 우르반수스의 풍경을 생각나는 대로 그려서 기록하기 시작했다.
소금 사막은 우르반수스에서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우선은 가장 먼저 눈에 띈 구조물, 피라미드였다.
너무 거대해서 비현실적으로까지 느껴지던 피라미드.
그것은 우르반수스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으레 그렇듯이, 물리적 실체로 존재한다기보다 어떤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이 옳아 보였다.
어쩌면 그 피라미드 자체가 우르반수스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피라미드 부분 부분에 존재하던 눈에 띄는 장소들이 각 신앙들의 사후세계라고 봐도 되겠지.'
아이작은 피라미드 곳곳에 눈에 띄었던 기이한 공간들을 떠올렸다. 그때에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각 신앙들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벽체를 타고 흐르는 붉은 강은 붉은 성배에서 흘러넘치는 피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불이 타오르는 균열은 세상의 화로, 깨진 조각들이 질서를 이루는 공간은 엘릴, 이런 식으로.
당연히 피라미드 하부의 소금 사막은 소금 의회의 사후세계이리라.
소금 사막은 그 위에 서 있을 때에는 아주 거대해 보였지만, 막상 피라미드를 내려다보는 시점이 되자 손톱만큼이나 작았다. 아이작은 그 외에도 피라미드에서 몇 가지 눈에 띄는 부분들을 체크했지만, 이게 구체적으로 어떤 신앙들을 뜻하는지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다만 최상단의 태양이 빛의 법전을 상징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바로 그 '질서'가 주변을 침식하는 검은 무리들을 물리치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이 검은 무리는 불사 교단인가?'
하지만 아이작은 곧 스스로 부정했다. 불사 교단의 사후세계는 우르반수스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후세계를 지상으로 끌어내렸으니까.
'그러면... 이름 없는 혼돈일 가능성이 높겠군'
문득 아문달라스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우르반수스에는 아홉 신앙의 사후세계만 존재한다고 했지.'
여덟이 아닌 아홉이다.
그렇다면 우르반수스 어딘가에는 이름 없는 혼돈의 사후세계도 있다는 뜻이다.
이미 300년 전에 전멸해 버린, 그 신도 전체가 몰려 있는 사후세계가 우르반수스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 아이작은 피라미드 어디서도 그럴만한 장소를 떠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마지막으로 본 우르반수스의 풍경 속에서, 내키진 않지만 추측되는 장소가 바로 떠올랐다.
피라미드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에서 침식하던 무리들.
주변을 침식하던 그 검은 무리들이 바로 300년 전 자살한 이름 없는 혼돈의 사후세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복잡해진 아이작은 일어서서 자신이 그린 그림을 내려다보았다. 사후세계의 지도라고도 볼 수 있는 이 그림이 얼마나 큰 가치를 가질지는 확신하지 못했지만, 추상적인 세계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게 큰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당장 선명하게 만들어야 할 것은 아이작의 앞길이었다.
'내 목적은 여명군에서 활약해 성지를 탈환하여 큰 공을 세우는 것이다.'
그리하여 공로를 인정받고 찬사받으며 잘 먹고 잘사는 것.
이렇다 할 것도 없이 깔끔한 목표다.
하지만 그것을 둘러싼 이해관계는 그렇지 않아 보였다. 빛의 법전은 성지를 탈환하려 하고, 불사 교단은 성지를 지키고자 한다.
다른 군소신앙들은 이합집산에 따라 그걸 협력하거나 방해하지만, 결국 성지의 주인이 누가 되느냐에 많은 결과가 바뀐다.
신앙들이 아이작의 목적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말은 성지 때문에 어떤 중요한 일이 일어난다는 거지.'
그 결과가 게임과 완전히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하긴 어려웠다. 아이작은 여러 번 게임의 엔딩을 보았지만, 게임은 엔딩 이후 세계가 어떻게 변했는지 보여 주지는 않았으니까.
결국 성지를 차지하는 것이 우르반수스의 어떤 우위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아이작은 머리가 복잡해지기 전에 다시 정리했다.
그는 누굴 섬기자고 이 세계에 온 것이 아니다.
이름 없는 혼돈이고, 빛의 법전이고, 불사교단이고, 어쩌고... 이득이 되면 취하고, 방해가 된다면 치울 뿐이었다.
그는 머릿속에서 복잡한 관계들을 하나둘 지웠다.
모든 권력, 천사, 신앙, 시간, 그리고 관념들을 지웠다.
그의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만 남았다.
이 세계에서 끝까지 살아남는다.
'모두의 목적이 분명하다면, 내가 이용해 먹기도 쉽다는 뜻이겠군?'
즉, 그의 목적은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다.
127화. 오래된 미래 (3)
"아이작 님!"
아이작이 탄 배가 노른덴 항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이 어떻게 전파된 건지 몰라도, 히야니스와 옌코스가 탄 배가 접근해 왔다. 둘은 다른 누구보다 빠르게 에이단의 배 위에 올라타 아이작의 귀환을 환영했다.
"무사하셨군요!"
"다친 곳 없이 멀쩡하시니 다행입니다. 항구에서 환영 행사를 준비 중입니다. 조속히...."
"환영 행사는 안 돼."
아이작은 정색하면서 거절했다.
그는 이러거나 저러거나 빛의 법전의 성기사다. 소금 의회의 문제를 자애와 봉사의 마음으로 해결해준 것은 좋다. 대가로 소금 의회가 아이작 앞에 납작 엎드리게 된 것도 좋다.
하지만 의식에 휘말려 사후세계를 갔다 오고 '꿈꾸는 자'니 뭐니 하는 걸로 지정된 것이 대놓고 드러나는 일은 곤란했다.
'안 그래도 이단심문관들이 내 허물을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는데.'
아이작을 감시해야 할 이솔데는 보고를 하겠다며 이사크레아 영지를 떠난 이후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가 보고를 잘해서 이단심문청이 앞으로 감시를 할 필요도 없다고 판단했다면 좋겠지만, 그럴 확률은 낮아 보였다. 오히려 아이작에게 '포섭'된 이솔데를 다른 곳으로 전출 보냈을 확률이 높아 보였다.
아이작은 여전히 조심해야 했다.
그는 당장 자신이 우르반수스에 들어갔다 나온 것을 이 세 사람만 알아도 소금 의회를 복속시키기에는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일단 이야기를 좀 해봅시다."
***
아이작은 소금 의회의 사제들에게 우르반수스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소금 사막과 사공, 몰락도시 미르미아, 그곳에서 만난 아문달라스, 우르반수스의 실체.
그 안에서 천국과 지옥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는 구체적으로 확인하지 못했으나, 개념적으로는 무한한 공간이니 불가능할 것도 없어 보였다.
그들이 관심을 보인 대상은 역시 소금 의회의 천사로 추정되는 아문달라스였다.
"아문달라스? 아문달라스가 누구지?"
소금 의회는 수많은 기록이 소실된 만큼, 당연히 천사들에 대한 기록도 사라진 상태였다. 소통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사후세계에 대한 기록은 하나하나가 귀중했다.
"루앗딘을 배에 태우지 않기로 결정한 선장이라고 하더군."
아이작의 대답에 선장들이 다시 뒤집어졌다. 소금 의회 입장에서는 지금의 몰락을 만들어 낸 대역적이나 다름없는 인물인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여전히 명천사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신의 명령을 따라 행동했을 뿐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착잡해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들이 겪고 있는 고난은 신이 스스로 판 무덤이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아문달라스 따위가 아니었다.
"성배기사님을... 꿈꾸는 자로 지정하겠다구요?"
옌코스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오직 에이단만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금 사막에 갇힌 봉인을 깨뜨리고 신을 깨울 존재. 사실상 두 번째 선지자나 다름없는 위치를 이단의 신앙인 중에서 뽑는 셈이다.
아이작은 그들이 의심하거나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하면 아문달라스의 욕을 거하게 쏟아 놓을 생각이었다. '의심할 수 없는 증거'를 함께 보내겠다고 해놓고 설득할 책임을 자신에게 떠넘긴 셈이니까.
"충격적이군요. 하지만...."
"으음, 뭐. 전례가 없는 일은 아니지요."
생각보다 그들은 침착하게 받아들였다. 그들은 단순히 광신적인 신앙인이 아니라 역사와 고문학에 해박한 고고학자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무수한 신앙의 역사 속에 아이작 같은 '예외'가 얼마나 많았는지 알고 있었다.
옌코스는 아이작에게 은근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아문달라스가 증거도 없이 보내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그녀의 관심은 아이작이 정말 '꿈꾸는 자'인지 의심하는 것보다 가지고 왔을지도 모르는 증거로 향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번에 파괴당한 어부왕의 그물을 넘어서는 보물 중의 보물이 될지도 모르니까.
"실망할지도 모르겠는데."
아이작은 옌코스 앞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성물, '표류자의 고향'을 꺼내 들었다.
안에는 소금기 가득한 하얀 바닷물이 찰랑거릴 뿐이지만, 그 정체는 사후세계의 물이다. 옌코스는 조심스럽게 표류자의 고향을 받아 들었다.
"에이단도 같은 걸 가지고 있다."
두 표류자의 고향은 선수가 서로를 향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 이 바닷물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 둘뿐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어딜 가든 서로를 찾을 수 있는 표식이 될 수도 있겠지만, 사람을 찾거나 위치를 가늠하는 기적은 이미 많았다.
선지자를 증명하는 표식이라기에는 다소 소박했다.
옌코스는 두 표류자의 고향을 들여다보다가 무언가 기적을 발동시켰다. 어떤 기적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잠시 뒤 옌코스가 곧 사색이 되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어? 이거...."
"왜? 사실 뭔가 대단한 기적이라도 있나?"
"아뇨. 이건... 평범한 바닷물입니다."
"...."
아이작의 침묵에 옌코스는 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아뇨. 바로 그 평범한 바닷물인 게 문제입니다! 저는, 그러니까, 지금 발동한 기적은 이게 얼마나 오래됐는지 간단한 연도를 측정할 수 있는 기적인데, 이게 그러니까...."
"천 년 전 물건이라도 되나?"
"아뇨."
옌코스는 멍한 표정으로 답했다.
"지금으로부터 3년 뒤, 소금 사막을 채운 바닷물입니다."
***
3년 뒤, 그러니까 미래의 물체가 왔다는 것은 이 물이 사후세계의 물이라는 것보다 충격적이었다. 애매한 예언보다는 확실하게 증명하는 물체니까.
심지어 그들이 염원하는, 지금은 메말라 버린 소금 사막을 채운 바닷물이다.
물론 그게 정말로 신을 깨운 증거가 될 수 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정말 아문달라스가 정말로 우르반수스를 통해 시간대를 넘나들어 물을 퍼온 것이라면?
이 바닷물만큼 아이작이 선지자라는 명확한 증거도 없다.
결국 옌코스와 히야니스, 에이단은 의심할 여지 없이 아이작을 믿기로 한 것 같았다.
증거가 되는 표류자의 고향 또한 소금 의회 소속인 에이단이 하나, 아이작이 하나씩 보관하기로 했다.
이것은 소금 의회가 두고두고 아이작에게 목을 맬 수밖에 없는 매개가 될 것이다.
'꽤나 인상적인 방법으로 증거를 넘겨주었군.'
'표류자의 고향'은 그럴듯한 힘을 가진 성물이나 예언보다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신이 언제 돌아오느냐'는 질문에 '3년 안으로 돌아온다'는 답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물론 아이작 입장에서는 아문달라스가 정말 미래의 일을 알고 있는가, 라는 궁금증이 남았다.
'뭐, 사기를 쳤든 진짜든... 어쨌든 내가 이걸 진짜로 만들어야 한다는 거군.'
아이작은 표류자의 고향을 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소금 의회를 우호적으로 만든다는 목표를 넘어서 아예 복속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당분간 이 결탁은 비밀로 해야 했다.
소금 의회와 친하게 지내는 것 정도는 상관없다. 하지만 부르는 자를 깨우니 마니 하면 빛의 법전에서 불쾌해하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닐 것이다.
소금 사막을 만든 것은 다름 아닌 '그 루앗딘'인데, 다시 소금 사막을 바닷물로 채운다는 말은 그의 업적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후안 주교도 이 일에 연루됐잖아? 그 뒤 어떻게 됐는지 물어보는 걸 깜빡했군.'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노르덴 항이나 가까운 항구에 내려 줬을 것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이후 소금 의회 전체가 아이작을 찾아다녔을 테니 주교 한 명이 어떻게 됐는지를 물어봤자 이들도 알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아이작은 익사자 왕을 끝장내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 그에게 광휘의 날개가 생긴 것은 분명 후안 주교의 작품이 분명했다. 그가 아니었으면 촉수 괴물 상태로 익사자 왕을 먹어 치웠을지도 모른다.
'그건 고맙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나 덕분에 기적이 되살아난 거 아닌가?'
아이작은 기적이 되살아난 후안 주교가 자신을 어떻게 대우할지 배은망덕한 기대를 가졌다. 안 그래도 후계자니 뭐니 하면서 키워 줄 생각이었던 것 같으니, 이젠 아예 양자로 들이겠다고 나설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때 아이작의 눈에 육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노르덴 항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육지에 반가워하려던 찰나, 아이작은 항구에 크고 작은 배 사이에 유달리 낯선 배가 정박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소금 의회의 배는 빠르고 폭이 좁은 유형의 배가 많다. 하지만 정박되어 있는 배는 군선(軍船)이었다. 위에는 제국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로 아래에는 낯익은 깃발 하나가 또 휘날리고 있었다.
'저 깃발을 어디서 봤더라?'
태양을 등지고 있는 사자 문장.
아이작은 불현듯 저 문장을 어디서 봤는지 떠올렸다. 이솔데가 수도원에서 앓아누웠을 때 발견했던 문장이었다. 아이작은 그제야 배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브란트 공작가의 배가 왜 저기에?'
갑작스러운 군선의 출현에 당황했지만 소금 의회의 선원들은 노련하게 대처했다. 그들은 조업을 진행하는 척, 혹은 평범하게 귀항하는 척하며 브란트 공작가의 배를 포위했다. 소금 의회의 다재다능한 선원들은 대개 상인이나 어부로 활동하지만, 필요할 때에는 해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에이단을 시켜 그런 움직임을 저지했다.
"쓸데없는 오해 살 일 없게 하라고 해라."
아이작은 브란트 공작가가 갑자기 왜 여기에 나타났는지 추측하면서도 딱히 다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빛의 법전도 내가 다시 돌아온 것을 안 건가?'
자의식 과잉이라고 불러도 할 말이 없지만, 브란트 공작 같은 거물이 갑자기 군선까지 끌고 나타날 다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군선은 에이단의 배에 비해 턱을 치켜들어야 할 정도로 높았다. 이미 갑판 위에는 적지 않은 병사들이 늘어서서 갑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이작은 일부러 자신의 얼굴을 잘 볼 수 있도록 고개를 들었다.
그때 기사처럼 보이는 누군가가 허겁지겁 난간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실례합니다! 혹시 아이작 이사크레아 경이십니까?"
"맞다."
아이작의 대답이 들리기 무섭게 갑판 위에서 소란이 벌어졌다. 급하게 누굴 불러오라느니, 뭘 준비하라느니 하는 외침도 터져 나왔다. 한참을 허둥대는 소란 속에서, 아이작을 내려다보던 기사가 서둘러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이작 님! 송구스럽지만 노르덴 항에는 가지 못하실 것 같습니다!"
***
아이작은 브란트 공작가의 군선 위에 발을 내디뎠다.
다행히 기사의 말은 '더는 지나갈 수 없다' 라든가 '두 번 다시 땅에 발을 못 디딜 거다' 따위의 의미가 아니라, 정중하게 배에 초대한다는 의미였다.
"어휘력을 조금 키워야겠군."
기사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아무 말도 못 했다. 당혹스러워서 말이 헛나올 수도 있긴 하지만, 까딱 잘못하면 항구의 배들이 죄다 해적선으로 변할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아이작은 기사의 안내를 받아 귀빈실로 향했다. 거기에는 이미 한 사람이 아이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작은 이미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귀빈실에 있는 거물을 본 순간 마음을 다잡지 않을 수 없었다.
"아... 갑작스러운 초대였는데 응해 줘서 고맙습니다. 이사크레아 경."
디트리히 브란트 공작.
발트제메르 황제의 사촌이자 내전의 일등 공신. 동시에 빛의 법전 교단에서 가장 신실한 신앙인임을 거액의 후원금으로 증명하는 신도.
황실 다음으로 가장 부유하고 큰 영토를 다스리는 거물 중의 거물이 아이작 눈앞에 있었다.
이단심문관인 이솔데의 아버지이기도 했지만, 그거야 뭐 아무래도 상관없는 거고.
"빛께서 당신의 앞길을 쭉 비춰주시길. 디트리히 브란트 공작님이시군요."
첫인상은 제국에서 황제와 교황 다음가는 거물인 것치고는 꽤나 수수한 인상이라는 점이었다. 교황은 머리에 후광이 있고, 황제는 보란 듯이 뿔이 나 있지만, 그걸 감안해도 디트리히 브란트는 굉장히 수수한 인상이었다.
"오, 저희가 언제 뵌 적 있습니까?"
"가장 신실한 신도이심을 모두가 아는데 제가 모르겠습니까?"
게임 속에서도 꽤나 중요하게 출연하니 모를 수가 없다. 디트리히 브란트는 여명군에서도 준 최고사령관에 속하는 역할을 맡는다.
아이작은 그보다 디트리히가 자신을 알아본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공작님이야말로 저를 아시는 게 놀랍군요. 어떻게 제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후안 주교님이십니까? 아니면 리옹 후작님? 소문을 들으신 거라면 실망시켜 드릴까 걱정스럽군요."
"아아, 별 건 아니고."
아이작은 사회적인 미소를 지으며 겸손한 모습을 보이려 했다.
하지만 다음 디트리히의 대답에 그 표정은 깨지고 말았다.
"제 딸이 굉장히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꼭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128화. 브란트 공작가의 고민 (1)
"사랑스럽...?"
아이작의 떨떠름한 표정에 디트리히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농담입니다. 정말로 그렇게 말하진 않았습니다."
아이작은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나 하는 표정으로 디트리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하는 말들을 들어보면 아비 된 자의 마음으로 딸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다 알 수 있지요. 꼭 직접적인 단어를 쓰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이단심문관님께서 저에 대해 뭐라고 말했습니까?"
이솔데가 뭐라고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디트리히가 아이작을 평범한 성기사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님은 분명했다.
아이작에게는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그럭저럭 성취를 이룬 성배기사로서 제국의 이인자를 대면하는 것은 해볼 만한 일이지만, 딸을 둔 아빠를 상대하는 것은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디트리히는 이솔데가 뭐라고 말했는지 말해 주는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아, 지금은 이단심문관이 아닙니다."
"예? 설마 그만뒀습니까?"
이사크레아 영지에서 이솔데는 아이작을 감시하겠다고 선언했었다. 하지만 그 선언이 무색하게도 그녀가 영지를 떠난 뒤로는 연락이 없었다.
그런데 설마 이단심문관을 그만뒀을 줄이야.
"이단심문청에서 무기한 정직 처분을 받고 자택 근신 중입니다. 부끄러운 일이지요."
"무기한 정직...."
사실상 쫓겨난 것이나 다름없다. 조금 주변을 살피지 않는 성격이긴 해도 무능한 사람은 아니다. 대체 쫓겨날 이유가....
'...사실 짚이는 부분이 너무 많군.'
애초부터 이단심문청에서 애물단지처럼 다뤄지던 아가씨다. 사실상 이단심문관이 숙청이나 암살, 정화 작업에 더 많이 투입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녀의 지위에 비해 걸맞지 않은 자리였다. 덕분에 그녀는 손을 더럽히는 일 없을 법한 현장만 돌았다.
게다가 속내에는 등하맹인 같은 단어를 입에 담을 정도로 열성 개혁파였다. 언제 구실을 잡혀 쫓겨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한번 맞춰보시겠습니까?"
디트리히는 오히려 아이작에게 되물었다. 딸 문제를 가지고 장난을 치자는 것이 아니라 간단한 테스트라는 것을 아이작은 알아보았다.
잘나가는 성배기사의 역량을 알아보자는 것이다.
혼돈의 눈을 쓰면 간단한 일이겠지만 그럴 필요도 못 느꼈다.
"이단 혐의입니까? 붉은 성배 클럽 관련해서 엮인 모양이군요."
디트리히는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아이작의 생각대로 시험 삼아 제시한 문제였지만 이렇게 빨리, 그것도 정확히 어떤 이단에 대한 문제인지까지 짚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일단 이단심문청은 내부 결속이 견고한 조직이다. 아무리 눈엣가시라고 해도 합당한 이유 없이 공작가 딸을 쫓아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런 문제가 아니고서야 브란트 공작님이 직접 이곳까지 오실 리가 없겠지요."
바로 디트리히 브란트가 여기에 있다는 것 자체가 단서였다.
아이작은 지난 몇 주간 세상에서 사라져 있었고, 그의 행적이 마지막으로 남은 장소는 바로 이곳, 노르덴 항이었다. 그런 곳에서 천하의 디트리히 브란트가 언제부터였는지 모를 시간을 하염없이 기다린 것이다.
"영애님은 원래 저를 감시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단심문청으로 복귀한 뒤 소식이 끊어졌지요. 아마 내사 결과가 이단심문청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얽힌 사건이니 그쪽으로 엮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단심문청이 이솔데에게 누명을 씌워서 쫓아내려고 한 건지는 알 수 없다. 놈들은 그런 짓에 능숙하고, 사실 그러라고 있는 조직이기도 하다. 허나 진실이야 어쨌건 그런 혐의가 씌워졌다는 것만으로도 이단심문관으로서는 치명적이다.
왜 교단 제일 후원자의 딸에게 그런 짓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녀가 이단심문관이기 때문이다. 교단의 제일 더러운 부분을 들여다보는 조직이니까.
이솔데가 평범한 사제였다면 견제보다는 오히려 둥기둥기 띄워줬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공작님은 제가 이솔데 브란트의 무고를 증명하고 누명을 벗겨주길 바라셔서 찾아오신 것 같군요. 제 생각이 맞습니까?"
디트리히 브란트는 놀랍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 만족감이 스쳤다.
다만 아이작이 걸리는 점은 디트리히의 표정이었다. 딸이 위기에 처한 아버지치고는 너무 여유로웠다. 아이작은 자신이 놓친 게 있나 생각했다.
"거의 정확합니다. 이사크레아 경."
"제가 놓친 부분이 있을까요?"
디트리히는 주변을 살피고 자세를 신중하게 잡았다. 귀빈실에는 그들뿐이었기에 그가 하는 행동은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그저 지금 하는 말이 비밀이며, 밖으로 새 나가지 않게 해달라는 태도.
"사실 이솔데는 무고하지 않습니다."
"예?"
"그 아이는 현재 이단이 맞습니다. 이사크레아 경."
***
디트리히의 이야기는 당혹스러웠다.
이단심문청으로 복귀한 뒤, 이솔데는 아이작이 무고하며 훌륭한 성배기사라는 보고를 올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단심문청 동부지부장 일리야 도테는 이솔데가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금단의 지식에 노출된 것으로 보인다'는 결론을 내리고 근신 처분을 내렸다. 기한은 이단 징후를 완전히 벗을 때까지.
이솔데는 분노했고 강력한 항의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단심문청을 상대로 싸울 수는 없었다.
사실, 이단의 징후가 있음에도 근신 처분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엄청나게 관대하게 다뤄지고 있다는 것은 명백했다.
물론 그 처분에는 브란트 공작가가 제국에서 교단에 가장 많은 후원금을 지불하고 있다는 점이 한몫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솔데는 이단 혐의라는 치명적 상처를 안고도 고작 자택 근신이라는 가벼운 징계 결과만 안은 채 공작가로 돌아왔다.
"그건 정말로 가벼운 처분이었소. 왜냐면... 이솔데는 정말로 이단이었거든."
디트리히는 입가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이솔데 양이 과격한 발언을 하던 것은 알고 있지만, 이단이라고 불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만...."
"교단의 윗대가리들이 죄다 깨부숴야 할 꽉 막힌 돌대가리들에 녹인 촛농 같은 눈깔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까? 그 정도라면 나도 이단이라고 말하진 않았을 겁니다. 그 정도는 그냥 불만 토로지요."
"...어, 그렇게까지 말하진 않았습니다만, 음."
이솔데의 그 성정은 아무래도 아버지에게서 옮아 온 것 같다.
디트리히 브란트도 교단에 불만이 많아 보였다. 아무리 자신에 대해 들었다 해도 성기사 앞에서 저런 소리를 하다니.
그러면서도 교단의 가장 큰 후원자라니.
'지독한 신앙인이거나, 대단한 야심가거나. 둘 중 하나군. '
어느 쪽이든 보이는 것보다 위험한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나도 처음 이단심문청에서 근신 처분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교단의 견제라고 생각했지. 그 애도 억울하다면서 분개했었고.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그 애는 명백히 정상이 아니었소."
"정상이 아니라면... 누가 봐도 분명한 이단의 표식이 있었다는 거군요."
그런데도 이단심문청에서 무사히 브란트 영지로 돌려보냈다니. 이건 정말로 브란트 공작가의 딸이라서 그렇다는 것으로밖에 해석되지 않았다.
일단 그쪽으로 보낼 테니까 그쪽 집에서 알아서 처리하라는.
하지만 여전히 디트리히는 곤혹스러울지언정 걱정스러운 모습은 아니었다.
"어떤 문제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순간 디트리히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까지 보여 주던 여유가 단숨에 사라지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아이작은 놀랐지만, 디트리히는 빠르게 그 표정을 지웠다.
하지만 여전히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죄송합니다. 솔직히 저는 아직도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 상황 자체가 잘 이해가 되지도 않기도 하구요."
"그래도 자세히 설명해 주실수록 저도 대응하기 쉬울 것 같습니다."
"그게... 이단심문청 말로는 붉은 성배 클럽에서 그 애가 어떤 종류의 '축복'을 받은 것 같다고 하더군요."
***
디트리히가 요구하는 바는 단순했다.
아이작이 브란트 영지를 방문해 이단의 축복이 걸린 이솔데를 '정화'해 주는 것.
정화 기적이라면 교단에 훨씬 더 유능한 사람들이 많을 텐데 디트리히는 아이작을 고집했다. 아마도 이솔데가 걸린 축복 때문인 것 같았다. 어떤 종류인지는 알 수 없으나 디트리히는 그것이 언급되거나 드러나는 것을 꺼려 했다.
마치 단순히 유명한 성배기사를 만나러 온 것처럼 시종일관 태연한 태도를 연기하고 있을 정도로.
아이작은 그대로 배를 타고 브란트 영지로 향했다.
다만 소금 의회의 배들은 그대로 노르덴 항으로 돌아가는 대신 동행을 요구했다. 사실상 호위를 빙자한 포위나 다름없었지만, 디트리히는 담담히 받아들였다.
"이사크레아 경이 저들에게 큰 호의를 베풀었다고 들었습니다. 이단으로부터 저런 존경을 받기도 쉽지 않은데, 듣던 대로 성배기사에게는 놀라운 매력이 있는 듯하군요."
"과찬입니다."
아이작은 자기네 천사를 죽인 것도 호의에 포함되나? 하고 생각하긴 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받아들였다. 실제론 단순히 호의를 베푼 사람을 넘어 선지자 취급이었지만 이건 당장 비밀로 해야 할 일이었다.
어쨌든 덕분에 아이작은 기를 세울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애당초 아이작과 디트리히가 가진 권력의 차이를 비교하면 태양과 반딧불만큼이나 초라했다.
사실 브란트 공작 가문이 직간접적으로 다스리는 영지는 거의 게르토니아 제국 본토의 1/5쯤 된다. 그중 디트리히가 직접 다스리는 영지 크기만도 어마어마했다.
말이 영주지 사실상 제국 안에서도 비교할 대상이 없는 대귀족 중의 대귀족이었다.
이미 거느린 파벌의 귀족들의 면면만 비교해 봐도 아이작과는 비교도 안 되는 수준이다. 심지어 현 황제를 옹립한 공신에, 딸을 교단에 투신시킨 친 교단적 면까지.
'그냥 먼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는데....'
하지만 가까이서 본 디트리히는 그냥 딸바보 아버지였다.
브란트 영지로 가는 동안, 힘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아이작은 디트리히와 금방 친해졌다.
아이작의 매력 영향도 있겠지만, 디트리히 브란트 자체가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는 타입의 호인 같았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이솔데의 판단도 그에게 영향을 준 것 같았다.
문제는 그 태도가 성배기사를 대하는 건지 사윗감을 대하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모호했다는 점이었다.
당연히 아이작은 그것을 착각하지 않았다.
브란트 공작가는 제국의 정치판도를 뒤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리고 그 가문의 외동딸인 이솔데는 그 자체로 정치적 존재다. 아이작이 아무리 잘나가는 성배기사라 해도 그렇다.
'이솔데가 나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니 이상한 놈팡이가 꼬인 건 아닌가 확인하는 거겠지.'
물론 이솔데가 보이는 호의도 어디까지나 이성으로서가 아닌 존경할 만한 성배기사로서, 라고 아이작은 예상했다. 그렇게나 공을 들였는데 어느 정도 호의를 갖는 것은 당연하다. 덕분에 디트리히도 자신을 호의적으로 생각해 준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거의 다 도착했군요. 이곳이 제가 사는 집인 루주베르크입니다."
디트리히는 깎아지르는 절벽을 옆에 낀 항구 도시에 들어서며 말했다. 절벽 위에는 '집'이라기에는 다소 과한, 붉은 바위산을 그대로 깎아서 만든 거대한 성채가 있었다. 가파른 절벽 위에 지어진 성채는 장엄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배는 항구에 대지 않았다. 대신 절벽 인근에 있는 해안가에 정박하고, 그곳에서 보트로 갈아탔다. 그리고 해안에서 미리 대기 중이던 기사들과 합류해 곧바로 루주베르크 성으로 향했다.
그 와중에 아이작은 로브로 온몸을 가린 채 코까지 후드를 내려쓴 채로 이동해야 했다. 심지어 그들을 이곳까지 데려다준 군선은 항구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먼바다로 떠났다. 선원들이 항구에 들르는 것조차 방지하기 위함으로 보였다.
소금 의회의 선박들은 그렇게까지 하진 않았지만 디트리히의 부탁으로 며칠 동안만 입항을 자제해 달라고 부탁받았다.
"사실 지금 이사크레아 경이 제 영지에 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다소 난처한 상황이 생길 수 있습니다. 어차피 숨기려 해도 며칠 안으로는 소문이 날 테니, 그 며칠 동안만이라도 보안을 유지했으면 합니다."
"소금 의회의 보안은 꽤 철저한 편입니다만."
그 말에 디트리히는 아이작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사크레아 경. 제가 당신이 돌아올 것이라는 걸 어떻게 믿고 노르덴 항에서 기다렸는지 아십니까?"
그건 아이작도 궁금했던 점이었다. 아이작은 사후세계에서 돌아온 것은 직후에서야 에이단만이 알았을 뿐이고, 그들은 소문이 퍼질 틈도 없이 바로 노르덴 항으로 돌아오고 있었으니까.
"노르덴 항에서 소금 의회 사제 중 하나를 매수해서 당신에 대한 정보를 알아냈기 때문입니다. 칼과 금 앞에 완벽한 보안이라는 건 없습니다."
아이작은 그 점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감했다.
애초에 정중하게 부탁하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브란트 공작이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을 생각하면 굳이 원한을 사지 않는 쪽이 순탄한 인생에 도움이 되리라.
다행히 소금 의회의 선장들은 이해해 주었다.
아이작은 마치 비밀작전이라도 수행하는 느낌으로 이솔데를 만나러 나아갔다.
129화. 브란트 공작가의 고민 (2)
"여기가 그... 유서 깊은 성이군요."
아이작은 붉은 성채에 발을 딛으며 감명 깊게 중얼거렸다.
루주베르크는 붉은 산이라는 뜻이었다. 보통 이런 대귀족의 성채는 가문 명을 따와서 새로 이름을 짓는 경우가 흔했지만 루주베르크는 그러기 어려울 정도로 유서 깊은 곳이었다.
"그냥 엘릴이 살던 성이라고 해도 됩니다. 다들 아는 이야기인걸요."
아이작이 일부러 '그' 엘릴이 다스리던 영지라는 것을 일부러 피했지만, 디트리히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빛의 법전이 한참 대제국을 건설하며 영향력을 퍼뜨리던 시절, 루주베르크는 살아 있는 몸으로 천사가 되는 것을 허락받았을 정도로 수많은 업적을 쌓았던 엘릴이 하사받은 중심 도시였다.
이후 자신의 딸인 무희에게 물려주었던 이 성은 이후 무수한 사람의 손을 거쳐 이제 브란트 공작가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어떤 의미에선 제국 수도인 울텐하임보다도 역사 깊은 곳이었다.
하지만 아이작에게는 그런 유명한 역사적 장소에서 여운에 젖을 틈도 없었다.
디트리히는 아이작을 데리고 곧장 루주베르크 깊은 곳으로 향했다. 가면 갈수록 디트리히는 여유를 잃었는지 점점 발걸음이 빨라졌다. 결국 마지막에는 반쯤 뛰고 있을 정도였다. 배 위에서는 시종일관 보이던 미소가 완전히 사라지자 아이작은 상황이 그렇게 심각한가 생각했다.
경비가 삼엄한 문을 몇 번이나 지나, 작은 정원이 딸린 탑 앞에 도착했다. 좁고 왜소한 탑 앞에는 꽤 이상해 보이는, 약간 어색한 광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여자들이 모여서 탑 앞을 지키고 있었다.
하녀라기에는 어딘가 기품 있는 모습에 복장도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디트리히가 와도 딱히 격식을 차리지 않는 걸 보아 아마도 친척, 혹은 지인들 같았다.
이상한 건 그녀들 모두 칼이나 창, 활 따위를 쥐고 있다는 점이었다. 쥐고 있는 모습을 볼 때 딱히 능숙해 보이지도 않았다.
디트리히는 신경 쓰지 않고 바로 여자들 앞으로 다가갔다.
"이솔데는?"
"스스로의 상태가 어떤지 들으시고는 다소 의기소침해지셨습니다만, 건강하십니다. 식사도 잘하고 계시구요."
디트리히는 난처한 얼굴로 탑을 올려다보았다. 탑 위쪽 창가에 실루엣이 어슬렁거렸다.
이솔데가 분명했다.
"알겠다. 잠시 물러나 있도록."
여자들은 시키는 대로 무거운 무기를 끌며 자리에서 벗어났다. 디트리히는 주변을 살핀 뒤 아이작에게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이사크레아 경 혼자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점점 상황이 이상하게 느껴지는군요."
"이솔데에게 어떤 종류의 '축복'이 걸렸는지 물어보신 적 있지요. 이제야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하는지 암시조차 하지 않았던 내용이었다.
디트리히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아마 일종의 '매혹' 효과로 추측됩니다."
"...매혹이요?"
"정확한 교리는 잘 모릅니다. 듣자 하니 붉은 성배 클럽에는 '사랑의 묘약'이라고 불리는 성물이나 비슷한 종류의 기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마도 그 비슷한 기적이 이솔데에게 걸린 것으로 추측됩니다. 반하는 게 아니라, 반하게 하는 쪽으로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강해진다더군요."
아이작은 아연실색했다.
그 역시도 붉은 성배 클럽을 플레이해 본 적 있으니 어떤 기적인지 잘 알고 있었다.
워낙 비주류에 속하고 전투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쓰레기 스킬로 분류됐지만, 무수한 전설이나 전승에 언급되는 기적이기도 했다.
누군가를 매혹하거나 정신적으로 조종하는 것은 붉은 성배의 특기였으니까.
"언제부터 걸려 있었던 겁니까?"
"대략 석 달 정도 됐습니다. 그동안 정화할 방법을 찾고 있었는데, 사안이 사안이라 대놓고 드러내기도 어렵고 저주가 아닌 축복이라 오히려 까다롭다고 하더군요."
어떤 종류의 축복은 저주와 구분하기 힘들다.
아름다움은 그중 하나에 해당된다.
"원래는 남자만 주의하면 된다고 판단하고 하녀들에게만 시중을 들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음, 점점 축복이 심각해지더니 나중에는 하녀도 방문을 금지해야 할 지경이 되더군요."
"...문제가 생겼습니까?"
"이솔데 그 아이가 어지간한 기사는 꺾을 실력을 가지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아이작은 왜 탑 앞을 평생 칼 한 자루 쥐어본 적 없을 것 같은 여자들이 지키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호기심 때문에라도 남자가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기도 했고, 설령 누군가 들어가는 일이 있더라도 이솔데 스스로 제압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으리라.
'왜 이단심문청에서 허겁지겁 이솔데를 브란트 영지로 쫓아냈는지 알 것 같군.'
브란트 공작가를 향한 견제인가 생각했는데, 이단심문청도 살기 위한 발버둥이었던 것이다.
만약 이솔데의 신변에 문제라도 생겼다간 목이 달아나는 것은 한두 명이 아니었을 테니까. 저주, 아니 축복이 더 강해지기 전에 허겁지겁 본가로 보냈으리라.
결국 디트리히는 방법을 찾다 찾다 안 되어서 아이작을 찾아 나선 것이었다.
문제는, 왜 자신인가였다.
"잠깐, 그러면 저도 방문하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음, 일단 저도 조사 중에 알아본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디트리히는 조심스럽게 탑 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일단 이 축복인지 뭔지는 천사가 건 것으로 추정됩니다. 단순히 사제가 건 것으로 이 정도 위력은 발휘하기 힘들다더군요."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의심하고 있겠군요."
"딸아이가 가장 최근에 천사와 관련 있는 장소를 방문한 일은 그곳밖에 없으니 그렇게 의심하고 있긴 하지요. 따라서 바로 그 천사를 추방한 성배기사야말로 적격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탕녀의 매혹을 물리치고 사악한 저주를 물리친 성배기사.
이 또한 동화에 나올법한 이야기다. 어쩌면 디트리히는 아이작에게 그런 것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작으로서는 난감할 뿐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없습니까?"
"으음, 이런 축복의 경우 해제할 방법으로 전승되는 게 하나 있더군요."
"해제할 방법?"
"축복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겁니다."
디트리히는 이마를 감싸 쥔 채 중얼거렸다. 아이작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디트리히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사랑의 묘약과 관련된 전승에 나오는 전통적인 구절은,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지면 축복도 자연스럽게 해제된다는 겁니다."
그제야 아이작은 이곳까지 오는 동안 디트리히가 왜 그렇게 정중하면서도 사윗감 간 보는 듯한 태도로 그를 대했는지 알게 되었다.
***
아이작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두컴컴한 계단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디트리히는 일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듣기로는 남자들은 흘러나오는 냄새조차 견디기 어려울 정도라고 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약간 달짝지근한 냄새는 나지만 아직 잘 모르겠군.'
아이작은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라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계단 위쪽에 서 있는 시커먼 실루엣을 보고 기절할 뻔했다.
어둠 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은 머리가 희끗한 중년의 귀부인이었다.
그녀는 손에 칼과 방패를 들고 있었다. 밖에 있던 여자들처럼 이솔데의 경호를 서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까 그 여자들과 달리 검을 쥔 자세가 제대로 잡혀있었다.
"성배기사님이십니까?"
고저차 없는 귀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작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작은 문득 그녀가 서 있는 위치가 상당히 전략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작이 칼을 휘두르면 벽에 부딪치거나 시야가 제한되지만, 귀부인이 서 있는 장소는 발디딤이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칼 휘두르기에도 편한 장소였다.
'검을 수련한 적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전 경험이 있는 사람이군. 호위기사인가?'
귀부인은 한참 아이작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뭔가 잘못됐나 생각했지만, 조용히 기다리자 그녀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충혈되지도 않고, 상스러운 말도 안 하고, 미쳐서 달려들지도 않는군요. 확인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따라오십시오."
"아, 예."
귀부인이 움직이자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귀부인은 발목에 쇠사슬을 감고 있었다. 그녀 스스로도 혹시 모를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걸어놓은 제약인 듯했다. 열쇠도 아마 그녀 손에 없을 것이다.
제법 계단을 오르고 귀부인이 멈춰 설 무렵, 쇠사슬도 팽팽해졌다.
그녀는 검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그 애는 저 안에 있습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애?'
아이작은 어두울 때에는 몰랐지만 귀부인의 얼굴이 이솔데와 제법 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작부인이십니까?"
귀부인은 초췌한 얼굴로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아아, 제 소개도 하지 않았군요. 한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자서. 저는 프리야 브란트입니다. 애엄마죠."
소박한 소개였지만 공작부인이었다.
공작부인이 발에 쇠사슬까지 감고 좁은 탑 안에서 밤새가며 경비를 서는 모습에 아이작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결국 제국을 주름잡는 이인자의 가문이라 해도 한 사람의 엄마 아빠라고 해야 할까.
그때 프리야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명성 높은 성배기사이시니 무례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 믿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하지만, 정말 만약에 어쩔 수 없는 경우라면, 그 애가 심한 모욕을 받지 않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이작은 이 부부가 딸을 귀하게 키워서 그런가 걱정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솔데가 이대로 이 정신 나간 축복에 시달리며 살게 둘 수는 없으니 해제하긴 해야겠지만, 그 과정에서 아이작도 떨떠름한 일을 벌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애초에 조건이 완성되려면 사랑하는 사람이랑 맺어져야 한다며? 이솔데가 내게 그 정도의 호감을 보인 적은 없는데.'
"걱정 마십시오."
하지만 아이작이 할 수 있는 말은 걱정 많은 부모를 안심시키는 것뿐이었다.
아이작은 이미 이 축복을 해제할 방법을 알고 있었다.
어렵지도 않은 방법이었다.
***
문을 열고 들어서자 달콤한 향기가 더욱 강해졌다.
아이작은 약간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끼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좁은 방이었지만 이솔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단심문관님?"
아이작이 부르자 어디선가 인기척이 들려왔다. 기둥에 숨겨진 커튼 뒤쪽에서 이솔데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는 전에 비해 퍽 의기소침해진 모습이었다.
"...성배기사님?"
반가움, 놀라움, 걱정, 희망, 초조, 불안...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눈빛이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아이작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제야 이솔데를 본 남자들이 어떤 충동을 느꼈는지 알 수 있었다.
'이게 사랑의 묘약인지 뭔지 그 효과군.'
이솔데가 가진 모든 매력이 극대화되어서 몰아닥치는 느낌이었다.
이건 거부할 수 있는 종류의 감각이 아니었다. 전에도 예쁘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그와는 비교도 안 되는 매력이었다.
네필림이 가진 매력이 군중의 눈길을 잡아끄는 리더의 매력이라면, 붉은 성배가 만들어 낸 축복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 상상하게 만드는 폭력적인 매력이었다.
들어오기 전에 가졌던 자신감과 달리, 아이작은 이 축복을 이겨낼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작이 대답이 없자 이솔데의 얼굴에 불안감이 스쳤다.
아이작은 크게 심호흡했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그 순간, 아이작은 단숨에 달려들어 준비했던 칼로 이솔데의 명치를 찔렀다. 이솔데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있다가 이내 눈을 뒤집으며 주저앉았다.
이솔데가 쓰러지자 아이작은 아까보다 상대적으로 머리가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여전히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이작은 서둘러 창문을 열고 의지를 쏘아 보냈다.
'헤사벨.'
그러자 창문 쇠창살 사이로 붉은 안개가 기다렸다는 듯 스며들어왔다. 이내 붉은 안개는 헤사벨의 형태를 갖추고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이작 님!"
130화. 브란트 공작가의 고민 (3)
아이작이 헤사벨이 근처에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루주베르크에 도착할 무렵에서였다.
아이작은 언젠가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을 예상했다. 그래서 자신이 노르덴 항으로 가 있는 동안 헤사벨에게 붉은 살점의 선지자에 대해 조사하고 대비책을 마련해 두도록 했다.
그런 그녀가 이곳에 벌써 도착해 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또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부린 수작인가?"
"예에, 뭐 그렇지요. 아무래도 살점까지 뜯기고 추방당한 여파가 작지 않은지라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는 못하고 이런 수작질을 부리는 것 같네요."
그녀는 이솔데를 보자마자 기겁하며 물러났다.
"우와, 이거... 엄청 진하게 숙성됐네요. 감금된 거 아니면 이렇게 되기도 힘든데. 아니, 사실상 감금된 거 맞구나."
"숙성?"
"보통 이 정도가 되기 전에 남자든 여자든 사랑의 결실을...."
"아니, 그 얘기는 됐어.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왜 이런 짓을 했지? 아니, 지금은 그게 급한 게 아니군. 해주할 방법은 알고 있나?"
이솔데의 명치를 찌른 단검은 붉은 성배의 EX급 성물, 분열 예식이었다.
천사도 찢는 단검이지만 평범한 사람을 상대로는 식칼만도 못한 이 단검은, 이솔데의 살갗도 뚫지 못하고 살짝 상처 입혔을 뿐이었다.
하지만 붉은 성배의 저주든 축복이든, 이를 건드리기 위한 의식의 촉매로서는 최상급이었다. 그리고 그 의식을 도울 사람은 왈라이카 왕국의 3대 가문 중 하나인 굴마르 공작가의 후계자다.
상대가 천사라 해도 해제 못 할 이유가 없었다.
헤사벨은 이솔데의 상태를 살펴보다가 입을 열었다.
"간단하고 뒤끝 없는 방법과 어렵고 고달픈 방법이 있는데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보통 이런 경우 어렵고 고달픈 방법이 해결책이 되던데. 간단한 쪽부터 말해 봐."
헤사벨은 실실 웃었다.
"사실 밑에서 공작이 했던 이야기가 맞아요. 이 아가씨에게 걸린 건 '갈애(渴愛)의 교리'라고 불리는 기적이에요. 보통 촉매를 섭취해 작용하기 때문에 사랑의 묘약이라고도 불리죠. 다만, 이야기와 달리 기적이 걸린 쪽이 사랑받는 입장이 되지만."
"그래서?"
"해결책도 간단하죠. 다른 사람과 이어지는 것."
아이작이 얼굴을 감싸 쥐는 사이 헤사벨은 설명을 이어갔다.
"다만 이야기와 달리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무나 상관없긴 해요. 애당초 그런 목적으로 사용되는 기적이고. 하지만 여기 공작은 딸을 '아무나'랑 이어주고 싶은 생각은 없나 봐요. 당사자가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으면 후다닥 처리한 다음 어디 파묻어버리는 편이 깔끔할 텐데, 아이작 님을 굳이 공들여 모셔온 걸 보면 어디 파묻힐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
아이작은 헤사벨의 말을 끊었다.
"어렵고, 복잡하고, 고달픈 방법이나 말해봐."
"축복에 걸린 당사자의 심상세계에 침입해 기적과 승부를 벌이는 거죠. 이 정도 강력한 축복은 스스로를 보호하는 성질이 있으니까."
헤사벨은 모처럼 진지하게 말했다.
"다시 말해, 붉은 살점의 선지자와 다시 싸워야 할 수도 있어요. 아이작 님,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리건대 이쪽은 함정일 가능성이 농후해요.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왜 굳이 저도 아니고 이 아가씨에게 축복을 걸었겠어요?"
악마 들린 사람을 엑소시즘 하는 것쯤으로 생각했던 아이작은 의외로 쉽지 않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축복 자체가 사람을 매개로 한 부비트랩 같은 것이라면.
하지만 아이작은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오히려 쉬운 길 쪽이 함정일 가능성이 높겠지. 심상세계에 침입할 방법을 준비해."
헤사벨은 투덜거리면서도 의식을 치를 준비를 했다.
무려 천사가 건 축복이었기에 원래라면 준비가 많이 필요했겠지만, 분열 예식 하나만 있으면 모든 조건을 생략할 수 있다.
헤사벨도 의식 수행자로서 최고의 기량을 가지고 있다. 문제가 생길 여지는 거의 없었다.
'나만 똑바로 정신을 차리면 말이지.'
잠깐 한눈을 팔면 흐트러진 이솔데의 모습에서 야릇한 상상이 떠오를 지경이었다. 이전에 역병에 걸린 몸을 간호할 때에도 이런 감정이 안 들었는데, 기적이란 것이 처음으로 겁날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다른 남자들은 무슨 짐승처럼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던데 그 정도는 아닌 것 같군. 이것도 이름 없는 혼돈의 영향인가?'
뭔가 특정한 방향으로 감정이 쏠리거나 의식이 무너질 것 같을 때면 상태창의 알림음이 들리면서 그의 의식을 바로잡아 주었다. 자신이 이 매료의 축복에 저항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일 수 있었다.
문득 듣기로는 여자도 주의해야 할 정도라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하지만 헤사벨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너는 괜찮나?"
"예? 아, 뭐. 저는 천사의 과실도 이겨 냈는데요, 뭘."
헤사벨은 실실 웃으며 답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내밀었던 그 살점을 천사의 과실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그때 느꼈던 유혹에 비해 지금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는 걸 보니, 아이작은 그녀가 얼마나 큰 유혹을 이겼는지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때 거울 시녀가 욕망을 제어하는 것을 도와주긴 했지만.'
그제야 아이작은 또 다른 천사를 떠올렸다.
도와주겠다면서 동맹을 제안해 놓고도 맹랑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게으른 존재.
거울 시녀에게 밥값을 요구할 시간이었다.
***
헤사벨이 의식을 준비하는 사이, 아이작은 다른 방으로 거울을 모조리 다 가져왔다. 사방이 거울에 둘러싸인 방에 서 있자 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것 외에 거울 시녀를 불러낼 방법을 알 수 없었다.
"네가 날 지켜보고 있다는 거 다 안다."
아이작은 거울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지금 이 사태도 너와 무관하지 않겠지. 할 말이 있으면 지금 나와서 이야기해."
그러자 거울 너머에 있던 아이작의 상이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다른 거울에 비치는 아이작의 상들도 제각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손톱을 다듬기 시작하고, 누군가는 의자에 앉아 몸을 느긋하게 뉘기도 했다.
똑바로 정면을 주시한 채 아이작을 바라보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우리 성배기사 나으리께서는 또 무슨 일로 이렇게 배배 꼬이셨을까?"
"모르는 척하지 마. 네 놈들이 저지른 일을 수습하러 온 거니까."
음모와 암살이 주특기인 붉은 성배 클럽에서는 천사들끼리도 모르는 계획을 서로 벌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결국 붉은 성배의 계획 아래 굴러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녀의 의지를 대변한다 여겨지는 거울 시녀가 이 사태를 모르고 있을 리가 없다.
예상대로 거울 시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솔데 브라트. 아름답고, 능력 있고, 야심도 있고, 배경도 좋은 아가씨지. 왜?"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그녀에게 갈애의 교리인가 뭔가를 걸었나?"
"그 이상이지."
거울 시녀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아이작 본인의 얼굴이었기 때문에 그 동작은 대단히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살점 일부를 먹였다. 덕분에 끊임없이 주변에서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지."
아이작은 말문이 막혔다.
단순히 축복 이상이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또다시 자신의 힘 일부를 잃을 것을 감수하고 이런 일을 벌인 것이다.
"왜 그렇게까지?"
"안 할 이유가 있나?"
오히려 거울 시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솔데 브란트는 브란트 공작가의 외동딸이다. 그녀를 쟁취하는 남자는 제국을 지참금으로 가지게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지. 그녀를 조종할 수 있다면 헨드락 영지 따위보다 백배는 가치 있는 투자야."
"헛소리 집어치워. 이솔데는 붉은 성배 클럽의 신도가 아니야. 조종하는 건 불가능할 텐데? 단순히 엿 먹이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수작이잖아."
그 말에 거울 시녀는 소리 내어 웃었다.
"맞아. 그 말대로다.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지."
거울 시녀는 팔짱을 낀 채 미소 지었다.
"하지만 아이작, 네가 분노할 이유를 모르겠군. 지금 이 상황에 네가 불리할 게 있나?"
"뭐?"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너를 엿 먹이기 위해 이솔데에게 살점을 먹인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그게 그녀 혼자 생각하고 진행한 계획일 것 같나? 내가 유도한 거다. 약속한 대로 네게 선물을 주기 위해서."
아이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선물이라고?
"말한 대로 이솔데는 배경 좋고 아름다운 아가씨야. 그리고 너는 떠오르는 영웅이자 성배기사지. 둘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될 수 있어. 그럼 거부할 이유가 대체 뭐지?"
아이작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러니까 이솔데를 아이작에게 '선물'하기 위해 이 수작질을 부렸다는 뜻이다.
심지어 정신을 잠깐 빼놓고 들으면 그럴싸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이대로 아이작이 이솔데를 취하고, 순서가 조금 바뀌긴 했지만 공작 부부의 인정을 받고, 사태를 잘 수습하기까지 하면 그가 원했던 완벽한 '성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붉은 성배가 권력을 취해 왔던 방식이었다.
"네 말대로 우리는 이솔데를 조종할 수 없다. 하지만 브란트 공작 가문은 강력한 가문이지. 그리고 너와 우리는 동맹이다. 그럼 네가 공작 가문을 움켜쥐게 되면 곧 우리 힘이 강해지는 것이기도 한데, 쌍방 모두 이득 아닌가?"
순간 아이작은 정면의 거울을 발로 차버렸다. 거울이 산산조각 나면서 흩어졌다.
딴청을 부리고 있던 거울들이 일제히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아이작은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를 내며 중얼거렸다.
"나를 너희 따위와 동급으로 보지 마라."
***
거울 시녀는 잠시 말하지 않고 아이작이 분노를 가라앉히길 기다렸다. 부서진 파편 속에서 파편 수만큼 많은 아이작들이 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작이 더 이상 분노를 드러내지 않자 입을 열었다.
"공감 능력이 부족한 듯한 태도를 보였다면 미안하구나. 평소 말투로 보아 너는 이런 식의 논리를 좋아할 줄 알았다."
"...."
"그럼 이렇게 말해보지. 이솔데 브란트는 네게 마음이 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는, 너도 이솔데에게 마음이 없잖아 있어."
"개소리...."
"네가 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애착이 가는 장기말 정도로 보고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이솔데만큼은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이 분명해. 나는 연애 전문가다. 적어도 너보다는."
아이작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할 말이 잃었지만, 거울 시녀는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이 덜떨어지는 남녀 한 쌍이 죽어도 제대로 이어질 것 같지 않았단 말이다. '맺어지지 않으면 벗어날 수 없는 저주'가 걸리지 않는 이상 말이야."
"헛소리 집어치워라. 내가 이솔데를 어떻게 생각하든 네가 알 바 아니야. 그럴 마음도 그럴 생각도 없어. 더군다나 이런 상황에서는 더더욱."
아이작의 완고한 거부에 거울 시녀는 한숨을 내뱉었다.
"너의 그 거부감은 비정상적이다. 알고 있지?"
"너희들 논리가 이상한 거야. 난교파티나 즐기는 흡혈귀 식인종들아."
"그래. 네가 끝까지 싫다면 이 상황을 해결할 다른 방법을 알려주지."
거울 시녀는 다른 방법에 대해 조언해 주기로 했지만, 그녀라고 간단 간편하게 이 상황을 한 방에 해결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녀가 아이작에게 은혜를 베풀었다는 느낌을 주어야 했다.
"이솔데가 살점을 흡수하게 해라."
"...천사의 살점을?"
아이작은 거울 시녀가 개수작을 부리는 게 아닌가 하며 의심했다.
이전에 헤사벨에게 붉은 살점을 먹여서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뻔히 알고 있는데, 같은 짓을 이솔데에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거울 시녀는 코웃음치며 말을 이어갔다.
"완전히 제거하지 말고 약화시키라는 뜻이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의 사념은 제거하고 힘만 남도록. 그렇게 하면 이솔데 스스로가 살점의 힘을 흡수할 거다. 그러면 또 이런 '개수작'에 휩쓸리지 않도록 내성이 생기겠지."
"그것뿐인가?"
"뭐, 미용 효과가 좀 있긴 하겠지. 재생력 강화나 힘이 생기는 건 덤이고. 하지만 붉은 성배에 대한 믿음이 티끌만큼도 없는 상태니 딱히 우리가 영향력을 미치지는 못할 거다."
아이작은 거울 시녀의 조언이 또 다른 수작질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또 수작을 벌여서 그녀에게 좋을 게 없었다.
거울 시녀는 어쨌든 아이작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했으니까.
"그럼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또 힘을 잃겠군. 그건 상관없나?"
"분노하기야 하겠지. 그렇다고 어쩌겠어?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어차피 두고두고 씹기 좋게 나눠서 네게 줄 선물이다. 붉은 성배의 계획에 있어선 소모품에 불과하지."
순간 거울 시녀는 똑바로 아이작을 응시하면서 속삭였다.
"그만큼이나 무희께서는 너를 좋게 보고 계신다, 성배기사. 그러니 부디 우리 관계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으면 해."
아이작은 그 말이 기묘하게 느껴졌다.
원래 신들은 이름 없는 혼돈을 꺼려야 하지 않나? 물론 그에게 호감을 보이는 신이나 천사는 붉은 성배가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이 상황이 줄곧 이어지자 자신이 아는 것과 괴리감을 느꼈다.
"붉은 성배는 혼돈을 싫어하는 게 아닌가?"
"정확히는 좋아할 이유가 없었지. 그것이 남겨온 역사를 돌이켜보면."
거울 시녀는 눈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너라면 구분을 지을 수 있을 것 같군."
131화. 브란트 공작가의 고민 (4)
아이작이 방 밖으로 나가자 헤사벨이 서 있었다.
헤사벨의 표정이 미묘한 것을 본 아이작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들었냐?"
"으음, 거울 시녀와 대화 나누신 것 말씀이시죠? 거울 시녀께서 하신 말씀은 못 들었습니다만, 그래도 아이작님이 온 방안을 쩌렁쩌렁 울리게 말씀하신 건 들었습니다. 그래도 그것만으로도 무슨 내용이었을지는 유추가 되네요."
아이작은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서? 너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자, 아이작 님. 저도 어쨌든 붉은 성배 클럽의 열성 신도였다구요? 거기서 이런 기적은 음모 축에도 못 들어요. 부부 금슬을 개선하려고 쓰는 경우도 있다니까요."
"그 퇴폐적인 식인종들이 기적을 뭘 어떻게 써먹든 신경 안 써. 의식은 준비됐나?"
헤사벨은 입술을 빼쭉이면서도 별말은 이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이 거울 시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이솔데를 얻게 되면 브란트 공작가를 확실히 같은 편으로 만들 수 있다.
즉, 현재 아이작이 가진 문제의 대부분을 해결할 수 있다.
이단심문관 한 명을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심지어 이솔데가 아이작에게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닌데다, 디트리히 브란트도 아이작을 좋게 보고 있다. 그러면 문제가 될 게 없는 거 아닌가?
그렇다. 문제는 없다. 이솔데 쪽에게는.
문제는 아이작에게 있다.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고, 애를 낳고, 키우라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일이다.
이 세계에서 잘 먹고 잘사는 금빛 같은 미래를 그릴 때에도, 옆에 누군가 평생 같이할 사람이 있으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자신이 다스리는 영지에서 많은 주민들이 번성하고, 밀밭이 들판을 가득 물들이는 모습은 상상할 수 있어도 자신을 향해 웃는 아이나 사랑하는 누군가 따위는 그려보지도 않았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 있어선 안 될 일이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아이작은 주춤거리다가 벽을 짚었다.
헤사벨이 이상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너의 그 거부감은 비정상적이다. 알고 있지?'
거울 시녀가 한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고, 아이를 낳고, 키운다면.
'정말로 이 세계에 과몰입해버릴지도 몰라....'
세계와 거리감 두기.
그것은 아이작이 이 말도 안 되는 세계에 빙의한 뒤에도 정신줄을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였다.
죽은 쥐를 먹고, 사람을 베고, 고대신과 마주치고도 정신을 유지하고, 사후세계에 들락거리고 치명적인 매혹의 기적조차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 세계와 거리감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름 없는 혼돈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바로 저 메시지.
저 메시지 덕분에 아이작은 이 세계를 진짜 세계가 아니라 게임인 것처럼 즐길 수 있었다.
평생 빙의한 상태로 즐길 수 있는 게임. 그 정도가 딱 좋다.
만약 지금 사는 이 세계가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라면, 아이작은 지금까지 한 일과 해야 할 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세계와 거리감을 두는 한 자신은 사람이 아니라 캐릭터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럴 일 따위는 없어.'
아이작은 그런 멍청한 일 따윈 일어날 리 없다고 생각했다.
***
헤사벨은 피를 뽑아 간단하게 그린 원 위에 이솔데를 눕혔다.
아이작은 원 안에서 이솔데의 머리맡에 무릎 꿇고 앉아서 의식을 기다렸다. 여전히 이솔데에게 걸린 갈애의 교리가 그를 쉬지 않고 현혹했지만 지끈거리는 두통을 제외하면 참을 만했다.
"시작해."
헤사벨은 분열 예식을 들고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천사가 직접 건 축복, 그것도 살점의 일부를 나눠준 축복에 간섭하는 것이기에 원래대로라면 복잡한 준비를 해야 했다. 하지만 분열 예식은 그 모든 과정을 생략했다.
헤사벨은 분열 예식으로 원을 따라 긋기 시작했다. 그 선을 따라 바닥의 붉은 피가 허공으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뿌린 피보다 많은 피가 서서히 장막을 이루면서 아이작과 헤사벨을 둘러싸고, 이내 둘은 넘실거리는 피의 장막 안에 갇혔다.
'들어왔습니다.'
방울이 터지듯, 장막이 순식간에 흘러내려 사라졌다. 아이작은 붉은색 돌로 만들어진 성채의 복도에 있었다. 성채는 정상적으로 있을 수 없는 기하학적인 구조로 꼬여 있었고, 진작에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형태의 건축물로 보였다.
'루주베르크인가?'
아이작이 기억하는 구조와 형태는 완전히 달랐지만, 전체적인 분위기와 건축 양식은 루주베르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루주베르크를 배경으로 꿈을 꾼다면 이런 모습이 될 것 같았다. 이곳은 이솔데의 고향이자 집이니, 이곳을 배경으로 꿈꾼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이작은 이솔데를 찾아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하인처럼 보이는 자들이 자주 눈에 띄었지만 말을 걸지는 않았다. 그들 모두가 얼굴이 안개처럼 흩날리고 있어서 대화가 통할 것 같지 않았다.
복도는 복잡했지만 하나로 쭉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헤맬 일은 없었다. 그러다 아이작은 걸어가는 방향에서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다.
얇은 차양막 너머로, 이솔데가 칼춤을 추고 있었다.
평소 온몸을 꽉 싸맨 이단심문관 복장을 하고 있던 것과 달리, 지금은 반쯤 헐벗은 모습이었다. 그나마 걸치고 있는 것도 옷으로서 기능을 제대로 못 하고 있었다.
흥얼거리는 콧노래 소리가 향기만큼이나 달콤했다.
아이작은 잠시 멈춰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뇌쇄적인 육신의 춤사위는 이성을 아득하게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보는 모든 이들을 사로잡는 매혹적인 광경이었다.
'저게 갈애의 교리가 형상화된 형태인가?'
이솔데가 절대로 입을 리가 없는 복장이었기에 악취미적이라고만 느껴졌다. 이내 이솔데의 춤사위가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침착함을 되찾고 루앗딘 열쇠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 순간 손에 잡힌 감촉이 낯설었다.
그가 허리춤에 찬 칼은 루앗딘 열쇠가 아니었다.
그의 허리엔 두 자루의 곡도와 한 자루의 검, 세 자루의 단검이 걸려 있었다.
단검집 하나는 비어 있었는데, 아이작은 그 자리를 비운 단검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점점 느려지던 이솔데의 칼춤이 완전히 멈췄다. 꽤 격한 춤이었음에도 그녀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무희와 대장군을 비유하고 싶었던 건가?"
아이작은 이솔데, 아니, 붉은 살점의 선지자를 향해 말했다. 정확히는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남긴 사념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다가왔다. 칼춤을 추던 손에 들고 있는 단검은 다름 아닌 분열 예식이었다.
아이작의 허리춤에서 유일하게 비어 있는 단검.
"나쁘지 않은 비유 아닌가, 성배기사?"
명백히 붉은 살점의 선지자의 의지를 담고 있는 이솔데가 입을 열었다.
"루주베르크는 대장군 엘릴의 영지였지. 그래서 이솔데는 소녀 시절 루주베르크에 얽힌 무시무시한 전설과 신화를 들으며 자랐다. 친척 언니들은 이솔데에게 엘릴을 유혹하는 무희에 관한 야릇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지."
엘릴이 그 이름 대신 대장군이나 패왕으로 불리듯, 붉은 성배의 다른 별명은 무희다. 지금 이 풍경은 루주베르크의 과거 모습을 담고 있었다.
혹시 우르반수스인가 했는데, 역시 이솔데의 기억을 기반으로 한 꿈에 가까운 공간 같았다.
"대장군과 무희의 관계를 이솔데와 나로 비유하고 싶은 건가?"
"엘릴은 온 세상을 손에 쥐었다. 천사조차도 그의 무위 앞에 대적하지 못했고. 살아있는 자들 중에는 대적할 자가 없었고, 육신을 가진 채로 천사가 되고 마침내 세계 최고의 미녀를 손에 넣었지. 야망 있는 자라면 다들 선망하는 위치일 텐데?"
"그 미녀가 자기 친딸이고, 그 대가로 빛의 법전에 반역해야 했다는 걸 생각하면 그냥 미친놈인데."
물론 엘릴 분파가 일어난 표면상의 이유는 빛의 법전 교단의 부패와 고대 신앙과의 전쟁에서 보인 '비겁한 행동'이 이유였다. 엘릴 교단은 명예를 지키기 위해 갈라서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빛의 법전 교단은 엘릴이 자기 딸과 재혼하려고 갈라섰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700년 전 일이다. 그땐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었어. 붉은 성배께서도 엘릴을 사랑하셨고."
바로 그 무희를 섬기는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부정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보란 듯이 과시하며 아이작에게 드러냈다.
"물론 이 여자는 붉은 성배께 비견될 정도의 미인은 아니다. 세상 모든 존재가 붉은 성배와 비교하면 루비와 진드기 체액을 비교하는 꼴이긴 해. 하지만 풍부한 지참금과 군대, 그리고 권력이...."
"하아아아아아...."
아이작은 붉은 살점의 선지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말이 끊긴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찡그린 채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할 말은 그게 전부냐? 엘릴과 무희가 어떻게 끝났는지 생각하면 그렇게 비유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아이작은 지긋지긋한 요구와 압박에 한탄을 쏟아냈다.
"아니, 그리고 여기 놈들은 왜 이렇게 상식이 없지? 사람 불러놓고 '자, 지금부터 둘이 뽀뽀하십시오' 하면 '내가 예 알겠습니다'하면서 할 것 같냐?"
이 역사적인 근친충 커플의 결말은 무희가 엘릴의 심장을 뽑아 버리는 걸로 끝난다.
살아있는 몸으로 천사가 되는 걸 넘어 무신(武神)의 반열에 올랐던 엘릴은 마침내 죽어서 진정한 신이 된다. 무희 또한 엘릴의 심장을 통해 붉은 성배로 각성했다.
이 피비린내 나는 결말을 해피 엔딩이라고 하긴 어려워 보였다.
"아니지, 생각해 보니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일단 이솔데랑 엮어놓은 다음 내 심장을 뽑아버리겠다는 복선이냐?"
그러나 붉은 살점의 선지자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부부관계란 게 원래 좀 복잡하지."
"그게 변명의 전부라면 그냥 여기서 죽어라."
거울 시녀나 헤사벨에게서 비슷한 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좀 더 이야기를 들어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아이작은 더 이상 인내심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손에 쥔 칼을 뽑아 들었다.
위협에 반응하듯, 주변에서 핏덩어리로 이루어진 병사들이 하나둘 벽돌 사이로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
아이작은 축복을 어떻게 약화시켜야 할지 이미 헤사벨에게 들은 상태였다.
붉은 살점이 나름대로 저항하긴 했지만, 제한된 힘과 한계를 가진 상태였기에 아이작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핏덩어리 사병들은 순식간에 찢어발겨지고 피투성이가 된 전당 한가운데 이솔데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녀는 붉은 살점의 사념체라 하더라도 이솔데의 육신 이상의 능력을 갖고 있진 못했다.
쩍. 루앗딘 열쇠가 단숨에 이솔데의 가슴을 갈랐다.
진짜가 아닌 꿈에 불과한 공간이고, 단지 붉은 살점의 힘을 약하게 만들기 위한 과정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이작은 기분이 더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갈라진 상처를 중심으로 껍질이 벗겨지듯 이솔데의 가죽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이솔데가 나타났다. 그녀는 자는 듯 깨어있는 듯 흐릿한 표정이었다.
이내 루주베르크의 성벽들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붉은 살점의 축복이 약해지면서 의식도 끝나기 시작한 것이다.
"아...."
그때 이솔데가 멍하니 손을 뻗었다.
아이작의 얼굴을 매만지던 이솔데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나의 천사."
"...오랜만에 듣는 별명이군요. 이단심문관님."
132화. 브란트 공작가의 고민 (5)
아이작의 뺨을 더듬던 이솔데가 눈을 번쩍 떴다. 그제야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이 꿈이나 심상세계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허겁지겁 몸을 일으켜 세웠다.
심상세계에서와 달리 이솔데는 당연히 간편한 실내복 차림이었다. 하지만 의식의 여파인지, 아니면 축복의 기운이 여전히 남아 있는 건지 심상세계에서 봤던 야릇한 차림이 아른거렸다.
아이작은 이솔데를 흉내 낸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교태를 보일 때보다 이솔데 본인이 당황하는 모습에서 더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아이작은 침착한 척 애쓰며 함께 일어났다.
이솔데의 눈이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일시적으로 갈애의 교리를 억눌러둔 상태입니다만,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했습니다. 워낙 긴 시간이 지나 뿌리가 깊이 박힌 데다, 부작용 없이 제거하려면 다소 시간이 걸릴 것 같군요."
"물론 훨씬 더 간편하고 빠르게 제거할 방법이 있긴 하지만요."
헤사벨이 옆에서 쓸데없이 덧붙이는 말에 아이작이 쏘아보았다.
이솔데는 여전히 아직 상황이 이해가 안 가는 듯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허겁지겁 자신의 배를 만졌다. 아까 아이작이 분열 예식으로 찔렀던 자리였다.
"분열 예식으로 찌른 자리입니다. 기적으로 이루어진 존재에게는 치명적이지만 평범한 산 것에게는 그냥 평범한 단검이죠. 갈애의 교리가 워낙에 강해진 상태라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치료해두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칼라일 성해포(A)]
[상처에 닿을 경우 해당 부위의 출혈과 부상을 즉시 치유하지만, 피를 소모한다.]
아이작이 이솔데의 상처를 치료하면서 쓴 성물이었다.
그가 가진 재생력 자체가 워낙에 뛰어나 쓸 일이 거의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을 치료할 때에는 유용했다.
이솔데는 '갈애의 교리가 강해진 상태라서 어쩔 수 없었다'라는 게 무슨 말인지 깨달은 듯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아, 그러니까, 그... 저한테... 그런?"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이작은 이런 걸 설명해야 하는 과정 자체가 피곤했다. 하지만 그녀가 불필요한 오해를 끌어안고 살지 않게 하려면 몇 번이라도 설명해야 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에 이솔데의 표정이 미묘해졌으나, 아이작은 그녀에게 설명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말씀드렸다시피 갈애의 교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축복을 건 당사자도 천사인지라 보통 독한 게 아니구요. 당분간은 같은 과정을 반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음, 아, 붉은 성배 클럽의 의식을 치르겠다는 말씀이시군요."
이솔데는 이단심문관답게 바닥에 그려진 핏빛 문양과 헤사벨을 보고 이 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차린 듯했다.
빛의 법전에도 축복이나 저주를 몰아내는 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단의 신앙인만큼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큰 부작용 없이 몰아내려면 같은 붉은 성배 클럽의 기적이라야 했다.
"예. 헤사벨이 도와줄 겁니다. 갈애의 교리를 완전히 걷어내기 전까지는 외부 출입도 자제하는 편이 좋겠지요."
"어, 그러면 성배기사님은...."
"아, 지금은 갈애의 교리가 잦아든 상태입니다. 아마도 축복이 걸린 첫날 정도의 위력이겠군요. 이 정도는 문제없습니다."
이 정도 위력으로는 다른 남자들이 이상한 망상이나 하는 정도다. 아까 전 폭력적으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그 매력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힘도 커지겠지만 지금은 부모님 정도는 다시 만나 뵈어도 문제가 없을 겁니다."
그 말에 이솔데는 눈을 크게 떴다가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눈가에 물기가 일렁였다.
이솔데 역시 밖에서 고생하는 공작 부부의 상황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작은 괜히 복잡한 기분에 휩싸이고 싶지 않아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고, 나갈 채비를 했다.
밖에 문에 바싹 붙어 기다리고 있을 프리야와 쉬지 않고 정원을 서성이고 있을 디트리히에게 상황을 다시 설명해야 할 차례였다.
'애초에 이런 상황에서 이솔데와 뭘 하라고? 뻔히 바깥 사정을 아는데 잘도 의욕이 생기겠군.'
장인 장모가 문밖에서 기다리는 상황에서 하룻밤을 보내라니, 과연 난교파티를 즐기는 식인종이나 할법 한 발상이다.
아이작은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가 밖으로 나가려 했을 때 이솔데가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맙... 고마워요. 또 저를 구해주셨군요."
이솔데의 젖은 목소리에 아이작은 그냥 평범하게 겸양을 표하려다가, 머리를 거칠게 긁고 말했다.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이단심문관님. 애당초 이 상황은 저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이솔데는 젖은 눈으로 물끄러미 아이작을 바라보았다. 아이작은 그 눈물 때문에 가슴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쪽도 저를 몇 번이나 구해줬죠. 제 비밀도 지켜주셨고. 그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거 압니다."
뭔가 멋진 말을 하면 좋겠지만, 아이작에게 그런 어휘력은 없었다. 그저 솔직하게 말할 뿐이었다.
"그러니까 피차 몇 번 구해줬느니 그런 건 세지 맙시다. 보니까 우리는 앞으로도 서로 신세 질 일이 많아 보이니까요."
***
"고맙습니다. 이건... 큰 빚을 졌군요."
브란트 공작 부부는 오랜만에 이솔데와 해후를 마치고 아이작을 다시 만났다. 갈애의 교리가 약해진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존재하는 것은 분명했기 때문에 이솔데와 오래 마주하는 것은 좋을 것이 없었다.
디트리히는 한결 편해진 얼굴로 말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성배기사님 정도라면 저희 애와 맺어지더라도 문제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 중이었구요. 하지만 결국 다른 방법을 찾아냈군요. 여기에 실망해야 할지 기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애인이 따로 있으십니까?"
디트리히는 이솔데의 상태를 보고 여유를 찾은 건지 농담까지 했다.
표정이 제법 진지하기는 하였으나, 아무튼 농담이기를 바랐다.
"없습니다. 이솔데 양에게는 문제가 없고, 제가 부족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지요."
애당초 갈애의 교리에 걸린 상태라면 본인 스스로의 매력은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 무조건적으로 끌리게 될 테니까.
"뭐, 아름다운 남녀가 하룻밤 정도 보내는 것은 문제없지 않습니까?"
"...농담 맞죠?"
"네, 농담입니다. 그래도 저는 딱히 자식들에게 환상을 품고 있진 않습니다. 제가 지금 아내를 만나서 처음 관계를 맺었던 것이 이솔데보다 네 살은 더 어린...."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프리야 브란트가 디트리히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디트리히는 입을 다물었다.
제국에서 제일가는 권력가의 인간적인 모습이 보기 좋기는 했지만, 그에게 전달해야 할 이야기가 많이 있었다.
"공작님. 말씀드렸다시피 갈애의 교리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시간을 들여 쇠약해지게 만든 다음, 그 안에 있는 붉은 살점을 이솔데 양에게 흡수시킬 예정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붉은 성배의 기적에 내성이 생기겠지요."
붉은 살점을 흡수시킨다는 말에 디트리히의 표정이 흔들렸다. 독실한 신도라면 절대로 그런 부정한 것 따위 가까이할 수 없다는 말을 늘어놓았겠지만, 역시나 그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단순히 상황 해결을 넘어 예방까지 해 주겠다는데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뭐든 성배기사님 뜻대로 해주십시오. 이솔데도 그러길 바랄 겁니다."
프리야가 담담히 대답했다. 디트리히보다 훨씬 진중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가진 그녀는 가문에서 기강을 잡는 역할인 듯했다.
"좋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며칠간 같은 의식을 반복할 건데, 두 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뭐든 말씀하십시오."
"이솔데 브란트의 혼약을 추진하는 연회를 열어주십시오."
정적이 흘러갔다. 프리야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디트리히는 세상이 무너지는 표정이 되었다. 아이작은 자신의 설명이 부족했다고 느끼고 서둘러 설명을 덧붙였다.
"아니, 혼약에 관한 것은 소문이면 충분합니다. 공녀님 정절을 건드릴 일은 없습니다. 공녀님은 제가 알기로 슬슬 혼기가 찬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맞습니까?"
"음, 그렇긴 하지요."
이 시대 사람들은 대부분 스무 살을 넘기기 전에 결혼한다. 스무 살을 넘기면 이미 혼기를 꽉 채웠다고 보는 편이다. 더군다나 브란트 공작가 같은 대귀족 가문은 정략결혼을 하니, 줄 선 신랑감들이 많을 것이다.
"이솔데 양이 루주베르크로 돌아온 것은 이미 소문이 났을 겁니다. 교단에서 일하던 브란트 가의 외동딸이 혼기가 꽉 찬 때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미 이것만으로도 많은 소문이 돌겠지요. 불필요한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연회를 열어서 '정말 결혼을 위해서 돌아온 것처럼' 만들어줘야 합니다."
"흐음,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거기까지 생각해주시다니 생각이 깊으시군요."
"사실 목적은 따로 있습니다. 이솔데 양에게 살점을 먹인 자를 찾아내야 합니다."
이솔데는 붉은 살점을 먹었다.
붉은 살점의 선지자가 아무리 날고 기며 용하더라도, 살덩어리가 자발적으로 입 안으로 기어들어 가지는 않는다. 현혹했든 협박했든, 붉은 성배 클럽에 협조하는 자가 있다는 뜻이다.
일단 범인 자체는 이단심문청 안에 있을 확률이 높겠지만, 상대가 붉은 성배 클럽인 이상 첩자가 얼마나 더 많이 있을지는 상상도 하기 어려웠다.
"이솔데 양에게 살점을 먹인 자라면, 이 상황에서 연회를 연다는 소문에 분명히 반응할 겁니다. 이솔데 양을 모욕하려 들건, 상태를 확인하려 들건, 반드시 찾아오겠지요."
첩자가 줄어드는 것을 거울 시녀는 별로 좋아하지 않겠지만 어쩌겠는가.
애시당초 아이작이 동의한 적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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