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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으로 정암각에 들어서는 것을 허락 받은 용혜는 당군명의 안내를 받았다.

"이곳이오. 이미 가주전에서 허락 받았으니 혼자 올라도 상관없을 것이오."

"아쉽네요. 같이 올라가서 보면 좋을 것 같은데."

"칠영각의 숙소도 하윤이 청소 중이니, 불편함은 없을 것이오."

정암각 주변의 가솔들은 점차 걸음을 멈추고 용혜를 바라봤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용혜는 그저 서 있는 것 만으로도 화려한 존재감을 자랑했으니.

"저 미인은 도대체..."

"곤륜파에서 왔다는군. 도명이 용혜라고 했던가?"

"뭣이? 청해제일미?"

가솔들은 용혜와 대화를 나누는 당군명을 부러운 듯 바라봤다.

"청해제일미가 본가에 왔다고?"

"도인이라 하기에는 엄청 화사한 미모로군."

어디서 소문이라도 도는 것인지, 주변으로 가솔들이 끝없이 몰려들었다. 용혜는 뿌듯한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게 보통의 반응이죠. 소협이 너무 무덤덤한 거예요. 다른 사내들은 말이라도 한 번 걸어보려고 애쓰는데."

혀를 찬 당군명은 한심하다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당군명의 서늘한 눈빛을 마주하고 나서야 가솔들은 빠르게 흩어졌다.

"그럼, 소협. 나중에 봐요."

"어서 들어가시오."

그렇게 정암각에 들어선 용혜는 사흘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한창 몰입한 상태겠지.'

창밖에 떠오른 달을 바라보던 당군명은 천천히 고개를 틀었다.

"나와라."

방구석 그림자 속에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당한 수준의 은신이었으나 당군명의 기감을 속이기에는 한참 멀었다.

"처음 뵙습니다. 당문소라고 합니다."

공손히 예를 갖춘 당문소의 몸은 빼빼 말라 있었는데, 평소에 햇빛을 잘 보지 못하는지 피부가 새하얀 편이었다.

"그렇군. 네가 노야가 말했던 자인가."

"예. 망영각주에 대한 정보 수집이 끝난 김에 직접 인사를 올리고자 찾아뵙습니다."

당율의 소개로 수의방과 망영각주에 대한 정보 수집을 맡았고, 앞으로 당군명의 정보망을 책임질 인물이기도 했다.

당문소는 공손히 서책을 내밀었다.

"대공자와 망영각주가 엮였다는 증좌를 모은 것입니다."

"망영각의 정보를 통해 이득을 많이 봤군. 반대로 다른 경쟁자들은 간접적으로 피해를 봤고."

당문소는 서책을 읽는 당군명을 보며 덧붙였다.

"워낙 뒤처리가 잘 되어 있어서 정확히 겨냥하지 않았다면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런가."

"예. 칠공자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시작조차 힘들었을 겁니다."

당군명은 서책을 덮으며 물었다.

"이 정도면 망영각주를 끌어내릴 수 있나."

"가능합니다. 하지만 추천하지는 않습니다."

"어째서."

"드러난 비수는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도리어 역으로 이용할 수 있지요."

원하는 대답을 들은 당군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쉽지만, 양쪽에서 정확한 판세를 가늠해야 우리가 이득을 취할 수 있다."

"자신 있습니다. 맡겨주십시오."

"그렇게 하도록 하지."

예를 갖춘 당문소는 당군명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칠공자."

"무엇이지?"

"제가 임무를 충실히 해낸다면 훗날, 자리 하나를 마련해주십시오."

당군명은 흥미로운 듯 바라봤다.

"망영각주의 자리를 원하나?"

"아닙니다. 노야를 세암각주에 임명해주십시오."

당문소는 자신이 아닌 명철예장 당율을 먼저 챙기고 있었다.

"세암각주는 마땅히 당가 최고의 야장이 차지해야 합니다."

당군명은 당문소의 말에 동의했다.

당율은 사천 제일의 야장. 하지만 방계라는 신분의 한계 때문에 요직을 차지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당군명도 이번에 새롭게 얻은 암기의 대량 제작을 맡기면서 의사를 물었으나, 당율은 세암각주의 자리에 욕심이 없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당군명이 너무나 단호하게 거절하자 당문소는 슬며시 주먹을 쥐었다.

'혹시 칠공자는 다른 공자들처럼 방계를 버림패로 여기는 게 아닐까.'

내심 각오를 다진 당문소가 따져 물으려 할 때, 당군명이 먼저 입을 열었다.

"노야는 다른 자리로 준비할 것이다. 더욱 중요한 자리로."

"더욱 중요한 자리 말입니까?"

"너도 이야기를 들었을 텐데?"

잠시 생각하던 당문소의 얼굴이 붉어졌다.

당율은 방계의 구심점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가문 내의 요직에 앉게 된다면 당연히 방계를 위한 영향력을 뽐낼 수 있는 자리여야만 했다.

'가문의 새로운 학관!'

당문소는 잠시나마 당군명을 의심했던 자신을 자책했다.

쿵!

당문소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칠공자. 섣불리 공자를 의심했습니다. 처분을 내리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당군명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의 달을 바라봤다.

"정보를 다루는 자는 마땅히 그리해야겠지. 계속 의심해라. 그게 너의 또 다른 임무다."

"명심하겠습니다. 칠공자."

당문소는 다시금 머리를 조아렸다. 바닥에 닿는 당문소의 이마는 참으로 뜨거웠다.

당군명을 진심으로 따르고자 하는 의지에서 나오는 열기였다.

"앞으로 음지에서 벌어지는 일은 모두 제가 도맡겠습니다. 칠공자께서는 대외적인 일에만 집중해 주십시오."

당군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너에게 직접 내리는 첫 임무가 되겠군."

당군명은 이번 외유에서 겪은 두 가지 암살을 설명하곤 적명전귀의 봉투, 용혜의 손에 죽은 살수들의 소지품을 내밀었다.

"이 두 가지 암살의 배후. 찾아와라."

당문소는 당군명이 내민 물건들을 상세히 살폈다. 첫 번째 경우는 상당히 쉬울 듯 했으나, 두 번째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였다.

소지품이라고 해봐야 암기와 독, 의복과 신발이 전부였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물건들이었지만, 이 안에서 단서를 찾아내야 했다.

사람의 손을 탄 물건은 사소한 것이든 흔적이 남는 법이니.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당문소는 지극히 예를 갖추고 그림자 사이로 사라졌다.

****

당군명은 가주전으로 향했다. 가주의 호출이 떨어진 까닭이었다.

다만,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가문 내에 있는 모든 공자를 호출했다는 것이었다.

"들어가시지요."

가주전으로 들어서자 당일세, 당무이, 삼공자 당삼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모두 모였나."

창밖을 바라보던 당천경은 등을 돌려 자식들을 눈에 담았다. 지극히 건조한 눈. 피가 섞인 자식들을 본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차가웠다.

다른 공자들은 시선을 내리 깔았으나, 오직 당군명만이 정면으로 맞섰다. 이러니 자연스레 당천경의 시선도 당군명에게서 멈춰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당군명을 응시하던 당천경은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수의방이 본가의 품에서 벗어났다."

삼부인 백연재의 친가, 수의방(修醫幇).

지금까지 혼약으로 묶여있었으나 백연재의 유폐와 사공자, 육공자의 죽음으로 유명무실해진 상황이었다.

거기에 검은파래말벌의 독을 구하여 암살을 도운 정황이 드러났으니, 두 세력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수의방은 영월궁과 접촉하려고 한다."

공자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사천성의 대문파.

오사천의 영월궁(詠月宮).

영월궁은 사천당가가 터를 잡은 성도를 집어삼키기 위해서 두 눈을 부릅뜨는 중이다.

이런 마당에 수의방을 통해서 정보가 흘러간다면 사천당가는 위기를 맞이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본가의 독도 수의방을 통해 어느 정도 대처가 가능하겠지.'

사천당가를 손에 넣은 다음에 상대해야 할 대적이 바로 영월궁.

사천성을 평정하기 위해서 반드시 넘어야 할 난적인데, 이런 식으로 영월궁의 전력을 늘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너희들의 생각을 말해봐라. 수의방을 어찌해야겠나."

그 누구도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잘못 입을 열었다가 지금껏 쌓아온 것이 무너질 수도 있었다.

다른 공자들의 눈이 잘게 흔들릴 때, 오직 당군명의 눈은 확신으로 가득 찼다.

'일어난 시기는 다르지만, 전생에도 수의방과 충돌이 일어났다.'

전생과 시기가 달라진 이유는 자신에 의해 삼부인과 그 자식들이 모조리 죽어버린 탓일 터.

하지만 시기는 달라도 과정은 똑같았다. 전생에서는 지금과 똑같은 흐름이 대공자에 의해 일어났으니.

생각을 정리한 당군명은 확신했다.

'이것이 정답이다.'

전생의 가주가 했던 선택.

만약 자신이 가주였다면 했을 선택.

이 두 가지 선택이 동일하기에 당군명은 자신했다.

사천당가라면 이렇게 행동해야 마땅하다고.

당군명은 다른 공자들을 제치고 한 발짝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저벅!

무거운 침묵 때문일까. 가벼운 한 걸음임에도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다른 공자들은 물론이고 당천경의 시선도 당군명을 향했다.

"수의방은 멸문해야 합니다."

한 점 망설임 없는 목소리가 집무실을 가득 채우며 울려 퍼졌다.

이독제독(以毒制毒) (1)

30화

집무실에 침묵이 흘렀다.

다른 공자들은 당군명에게 눈빛과 표정으로 말했다.

미쳤냐고.

반면에 당천경은 몸을 살짝 틀었다.

"이유는?"

"사천당가는 원한을 잊지 않는다."

당군명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이어졌다.

"사천당가는 원한을 열 배로 갚는다."

이를 끝으로 당군명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당천경을 똑바로 바라봤다. 다른 이유가 또 필요하냐는 듯이.

수의방을 쳐야 하는 실리적인 명분, 전략적인 명분, 대국적인 명분을 들자면 얼마든지 들 수 있었다.

하지만 당천경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었고, 또한 이 명분을 모르는 공자는 이 자리에 없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뻔한 질문을 하는 걸까.

'가주님은 이미 방침을 세웠다. 질문의 의도는 선택의 방향성을 보기 위함이겠지.'

가주로서 가문을 움직이는 선택의 방향성.

이를 증명하듯 당천경은 말없이 시선을 돌려 다른 공자들을 바라봤다. 그 냉엄한 시선을 견디지 못한 공자들은 저마다 의견을 꺼냈다.

강압(强壓), 회유(懷柔), 이간(離間).

"그리고 멸문(滅門)인가."

공자들의 네 가지 선택을 뇌까리던 당천경은 공자들을 바라봤다.

"수의방의 이탈은 본가에 있어서 상당한 걸림돌이다. 각자의 선택에 따라 이번 사안을 해결하라."

"...!"

공자들이 눈을 부릅떴다. 모두의 얼굴이 일그러질 때, 오직 칠공자만이 가주와 똑같은 무표정을 지었다.

감히 반문은 허락되지 않았다. 공자들은 그대로 가주전에서 나와야 했다.

대공자와 이공자는 당군명을 한 번씩 노려보곤 급히 발을 옮겼다. 각기 '강압'과 '회유'라는 선택을 했으니, 그에 맞춰 대책을 준비해야 할 터.

여유롭게 당군명에게 접근한 것은 당삼전이 유일했다.

"너, 못 본 사이에 정말 많이 변했구나?"

"너는 몰골을 보니 여전하군. 아직도 골방에 틀어박혀서 독 제조에 열중하는 건가?"

다른 공자들이 기회가 될 때마다 만독각에 독을 제출하는 것과 달리, 당삼전은 단 한 번도 제출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삼전이 만든 독이 외부에 드러날 때마다 가문 내에서는 파문이 일었다.

그렇기에 당군명 이전에는 당삼전의 제조 실력이 제일 뛰어나다는 소리가 제법 들리곤 했다.

"이야..."

기름진 머리를 벅벅 긁던 당삼전은 히죽 웃었다.

"어릴 때는 너한테 종종 내가 만든 독을 시험해봤는데 말이야. 그때 참 재밌지 않았어?"

당삼전은 독을 만들면 동물 대신에 당군명을 중독시키며 반응을 살폈다.

당삼전은 '독 만들기 놀이'라고 칭했으나, 어린 당군명에게는 절대 놀이가 아니었다.

옆에서 당삼전을 보조하는 가솔들이 아니었다면 몇 번이고 사경을 헤맸을 터였다.

"그래. 그랬던 때가 있었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 당군명의 웃음이 점차 짙어졌다. 당삼전도 환하게 웃더니 소매 안에서 옥병을 한 움큼 꺼냈다.

"이거랑 이거. 그리고 이것도. 너한테 써보고 싶은 독이 참 많았는데... 네가 버티지 못할 것 같아서 참았단 말이지."

장난감을 부숴버리면 곤란하니까.

당삼전은 홀로 중얼거리다가 당군명을 위아래로 훑으며 고개를 비틀었다.

"그런데 지금은... 뭔가 버틸 것 같네?"

"나도 기대하고 있다. 원래 놀이는 같이 해야 재밌는 법이지."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을까. 당삼전의 눈이 아주 천천히 휘어졌다. 가라앉은 눈꺼풀 사이로 불길한 빛이 아른거렸다.

"조만간 같이 놀 기회가 올 거야."

당삼전은 진득한 웃음을 흘리더니 등을 돌렸다. 당군명은 천천히 뒷짐을 졌다.

"그때는 네놈이 독을 먹어야 하는 역할을 맡아야겠지만 말이야."

원래 놀이는 역할을 번갈아 가면서 해야 재밌는 법이니.

****

수의방(修醫幇).

규모는 중소문파 수준이었으나, 수의방을 낮게 보는 이는 없었다.

흔히 미친 의원들의 문파라 불리는 사파.

백(百)이라는 성을 똑같이 사용하지만, 피가 섞인 혈족이 아니었다. 그저 똑같은 이상을 추구하는 자들이 모인 곳.

이들은 무공이 아닌 약물, 시술, 대법을 통해 무위를 끌어올리는 의술을 갈고 닦아왔다. 낮은 경지에 머물거나, 벽을 만난 무인들에게는 너무나 달콤한 선택지였다.

실제로 정체된 무위를 높이기 위해 스스로 찾아와서 몸을 맡기는 무인들이 제법 많았다.

그 덕분에 수의방에서는 무공 증진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거기에 수의방주도 약하지는 않다.'

의술과 무공을 모두 갖춘 수의방주 덕분에 수의방은 사천성에서도 손꼽히는 숫자의 빈객을 보유 중이었다. 모두가 수의방의 의술을 탐하니 다루기도 쉬울 터.

"칠공자. 송구하지만, 광풍대의 전력만으로 수의방 멸문은 힘들 것입니다."

당문소의 의견에 당군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다른 공자들의 도움을 빌려야 하지 않겠나."

"한시적으로 동맹을 맺자는 말씀이십니까?"

당군명은 냉소를 흘렸다. 이미 전생에 자신을 버렸던 놈들이다. 그런 이들과 다시 손을 잡는 것만큼 멍청한 짓이 있을까.

"이대로 가능하겠나."

당문소는 당군명이 건네준 서신을 조심스레 살폈다.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에 잠기더니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공자님께서 생각하신 것인지요?"

"맞다."

"말씀하신 도움이 이런 의미였군요. 이건 마치 이독제독(以毒制毒)과 비슷합니다."

당문소는 서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번 일은 나에 대한 검증이로구나.'

당문소는 광풍대 전원이 칠공자에게 검증 받았던 사실을 상기했다. 이제는 자신의 차례였다.

"섬세한 조율이 필요하겠으나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좋다. 음지의 일은 너에게 맡기기로 했으니, 그대로 일임하겠다."

예를 갖추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당문소는 잠시 멈칫거렸다.

"공자님.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뭐지?"

"만약 이 계책이 불가능하다면 또 다른 방법이 있으신지요?"

당군명은 천천히 입술을 비틀었다.

"우리는 무림(武林)에서 살고 있다. 당연히 무(武)로써 해결하겠지."

당문소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당군명의 웃음에서는 조금도 허세를 찾아볼 수 없었다. 진심으로 수의방을 멸문할 자신이 있는 것이었다.

'내 쓰임을 증명하려면 반드시 해내야겠군.'

당분간은 잠을 자기는 글렀다. 당문소는 살짝 빠른 걸음으로 그림자에 녹아들었다.

'일단 망영각주를 이용해서...'

당문소는 종종걸음으로 나아가면서 상세한 계획을 짜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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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자. 망영각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창극대주가 전달한 서신을 읽던 당일세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정보가 맞았어. 지금 둘째가 수의방 소방주와 접촉했다는군."

서신에 따르면 당무이는 묵정대를 대동했고, 소방주는 다수의 빈객을 데려왔다.

하지만 서로를 못 믿는 건지, 약속 장소의 외곽에는 양측의 추가 병력이 숨어 있다고 했다.

"둘째가 수의방의 숫자를 줄여주었구나. 고맙게도."

망영각주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시기적절한 순간을 찾지 못했을 터였다.

그 덕분에 수의방이 전력이 줄어들었고, 회담으로 인해 경계가 느슨해진 때를 정확히 노릴 수 있었다.

'역시 망영각주를 제일 먼저 포섭한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수의방을 회유하기 위해 회담 약속을 잡은 당무이를 생각하면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창극대주. 준비는?"

"명령하시면 곧장 움직일 수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당일세는 휘영청 떠오른 달을 보더니 소리쳤다.

"수의방주가 있는 영의각으로 직진한다. 과감한 무력 시위로 수의방주를 무릎 꿇려야 한다!"

"예. 대공자!"

당일세의 고갯짓에 창극대가 일제히 은신을 풀어내며 허공으로 치솟았다.

콰아앙!

기세 좋게 수의방의 정문을 부순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창극대를 기다리는 것은 이미 전투 태세를 갖춘 수많은 빈객이었다.

거기다 곳곳에 꽂힌 횃불에서는 누런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당가의 독을 어느 정도는 막아낼 수 있는 수의방의 황종연(黃綜煙)이었다.

"당가 놈들이다!"

"쳐라!"

이미 전투를 대비하여 약물과 대법을 받은 빈객들이 병장기를 뽑아 들었고, 그 중심에서 수의방주가 소리쳤다.

"목을 하나 가져온다면 두 번의 시술을 무상으로 해주겠소!"

방주의 선언에 빈객들은 앞다투어 몸을 날렸다.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이용해 정문으로 들어 닥친 창극대를 둘러쌌다.

챙! 채애앵!

창극대의 후위에 있던 당일세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이놈들이 어찌 우리의 기습을 알고 대비를?"

당일세는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어디선가 정보가 샜다!'

수의방의 장내에는 황종연의 연기가 가득했으니 암기를 중심으로 대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터덕!

하지만 창극대가 던진 암기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피부에 얕게 박힐 뿐이었다. 마치 멧돼지나 호랑이의 두꺼운 가죽과 같았다.

거기다 기름을 여러 번 먹인 피풍의를 온몸에 두르고 있으니 뚫기가 더욱 힘들었다.

"이놈들! 시술로 피부와 근육을..."

"이 정도면 암기에 묻힌 독도 제대로 들지 않습니다!"

그 뿐인가. 약물과 대법으로 일시적으로 무위를 끌어올리거나, 고통을 느끼지 않는 빈객의 수도 상당했다.

수의방의 의술을 등에 업은 빈객들의 병장기에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대공자에게 저놈들을 접근시키지 마라!"

"이조, 삼조! 대형을 갖춰!"

창극대는 암기와 독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 상황에서도 밀리지 않고 약간의 우세를 점했다.

하지만 본래의 계획처럼 곧장 수의방의 중심에 있는 영의각까지 도달한다는 목표는 이루기 요원해 보였다.

대공자와 창극대가 수의방의 함정에 빠져서 고군분투 중일 때.

수의방 근처의 기루에서는 당무이와 소방주의 대화가 긴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영월궁은 수의방을 이용하고 버릴 속셈이오. 정확히는 본가를 정리한 다음이겠지."

"하지만 사천당가는 원한을 잊지 않잖소? 수의방은 분명히 당가에게 적대적인 행동을 취했는데 이는 어찌할 것이오?"

"본인이 가주가 된다면 없던 일로 할 것이오.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오."

고민하는 소방주의 옆으로 빈객 하나가 다가와 귓속말로 속삭였다. 이를 들은 소방주의 눈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뱀 같은 당가 놈들. 어쩐지 대화를 하자는 게 이상하다더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오?"

"수의방에 대공자의 병력이 들이닥쳤다. 나를 이곳으로 부른 것은 우리의 전력을 분산시키려는 의도였군?"

소방주는 곧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내공을 끌어올렸다.

"잠깐!"

당무이가 다급하게 소리쳤으나 소방주는 말을 듣지 않았다. 소방주의 명령에 빈객들은 곧장 살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

"곧 대공자가 물러날 것으로 보입니다."

"소방주와 이공자의 충돌로 기루 일대에 소란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연이어 올라오는 보고를 듣던 당군명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당문소가 일을 매끄럽게 해냈군."

당군명은 정보를 이용하여 수의방, 대공자, 이공자를 서로 엮어내는 계책을 제시했다.

그리고 당문소는 이를 직접 보완하여 적절한 시기로 일을 꾸며내는 것에 성공했다.

'간단해 보일지 몰라도 조금이라도 때가 틀어지면 물거품이 되는 계책이었다. 섬세하게 정보의 흐름을 잘 조율했군.'

고개를 끄덕인 당군명은 광풍대를 바라봤다.

"대공자가 함정을 몸으로 받아줬고, 이공자는 전력을 분산시켜줬다. 다들 확실히 제 역할을 했군."

자신이 억지로 쥐여준 역할이었지만.

당군명은 고개를 돌려 언덕 너머를 바라봤다. 가까스로 창극대가 퇴각했고, 수의방은 전장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제 막 전투가 끝난 탓인지 수의방에는 아직도 열기가 가득했다.

그렇게 일식경이 흘렀을 때, 한껏 달아오른 수의방의 기세가 꺾인 것이 보였다.

이를 확인한 당군명은 입을 열었다.

"광풍대."

당무건은 조용히 주먹을 쥐었고, 당인은 슬며시 매서운 눈빛을 터트렸다.

"출진."

숲 속의 그늘에 몸을 숨기던 진녹빛 장포가 우수수 나타나기 시작했다.

장포의 오른쪽 어깨에는 광풍(洸風)이라는 두 글자가 큼지막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수의방을 향해 거센 바람이 불어 닥치기 시작했다.

이독제독(以毒制毒) (2)

31화

대공자와 창극대가 완전히 퇴각했음을 확인한 수의방은 마음 놓고 장내를 정리했다.

"해독과 치료가 필요한 자는 여기로 오시오!"

"제길. 미리 대비까지 했는데 저항이 거세더군. 지독한 당가 놈들."

"그래도 덕분에 시술을 받을 수 있게 되었소. 재물이 떨어져서 어쩌나 싶었는데."

빈객들이 시신과 잔해를 치우고, 부상자들은 수의방의 의원들이 나서서 치료했다. 그믐달이 하늘 꼭대기에 걸린 야밤이었으나 다들 분주하게 움직였다.

당장 내일 아침에도 여러 시술을 진행해야 했으니, 일정에 지장을 주지 않으려면 지금 정리를 끝내야 했다.

저벅!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유난히 커다란 발소리가 들려왔다. 정문에 가까이 있던 의원이나 빈객들은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뒷짐을 지고 수의방을 향해 걸어오는 한 소년. 찰랑이는 녹빛 소맷자락이 소년의 출신을 과시했다.

어둠과 횃불의 그림자에 반쯤 녹아든 녹사의는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범상치 않은 분위기에 대다수가 입을 다물었다. 소년이 문턱을 넘기 직전까지 오고 나서야 빈객 중의 한명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

"누구냐."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소년의 기묘한 미소를 본 수의방은 깨달았다.

상황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당가인가?"

"조심하시오. 영 기분이 좋지 않군."

의원들과 빈객들은 신중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서도 앞으로 나서길 주저하지 않았는데, 앞서 대공자와 창극대를 격퇴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시술 덕분에 당가의 암기와 독이 제대로 힘쓰지 못했다.'

'원래라면 도망쳐야 상책인데, 가진 재물을 모두 털어서 시술 받은 보람이 있군.'

점차 정문 쪽으로 모여드는 이들의 눈에는 자신감이 선명히 일렁거렸다.

이를 본 당군명은 천천히 뒷짐을 졌다.

"들어라."

내공이 섞인 낭랑한 음성이 수의방의 어둠을 밀어냈다. 음성에 실린 내공이 상당함을 깨달은 몇몇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모두의 시선을 단숨에 휘어 잡은 당군명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오늘 수의방은 멸문한다."

휘잉!

갑자기 수의방에 휘몰아치는 강풍. 주변을 밝혀두었던 횃불이 모조리 꺼지면서 당군명의 모습도 홀연히 사라졌다.

마치 귀신과 같이 한순간에 사라진 당군명. 그와 동시에 장대비가 쏟아지는 듯한 파공음이 연달아 터졌다.

촤아아!

그 직후, 사방에서 비명이 터졌다.

"끄아악! 내 눈!"

"암기! 우모침이다! 잠깐! 이놈들 암기는 깊게 박히잖아!"

"젠장. 누가 어서 횃불을 밝혀!"

시술과 대법을 통해 더는 암기를 무서워하지 않던 빈객들이 저마다 당혹성을 터트렸다.

앞서 상대한 창극대와 달리 이번에 날아오는 암기는 피부를 정확히 꿰뚫고 속살로 파고들었다.

수의방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광풍대는 이미 세 방향의 담장을 넘어섰다. 암용보를 밟으며 이동하는 광풍대는 아주 고요히 불어 닥쳤다.

"끅."

"이놈들이?"

"횃불을 버려! 도리어 표적이 된다! 몸으로 버티는 거다!"

광풍대는 횃불을 밝히기 위해 무리에서 떨어지거나, 다른 곳에서 횃불을 가져오는 빈객들을 우선으로 요격했다.

쉬이익!

끝자락에 기이한 와류를 품은 암기가 거세게 회전했다. 빈객의 피부와 근육이 암기에 실린 기파에 휘감기며 찢겨나갔다.

설령 암기가 깊게 박히지 않아도 충분했다. 암기에 묻은 독이 빈객들의 몸을 빠르게 붕괴시켰다.

수의방이 준비한 독과 암기의 대책 중 제대로 통하는 것이 없었다. 사방에서 쇄도하는 온갖 암기에 고슴도치가 되어버린 빈객들이 하나둘 땅을 뒹굴었다.

'통한다!'

'역시 칠공자!'

광풍대는 수의방으로 향하기 전에 당군명에게 새로운 가르침과 독을 받았다. 수의방의 시술과 대법을 파훼할 수 있는 암기 기교와 새로운 독.

그 덕분에 광풍대는 창극대와 달리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다들 내공은 충분하겠지.

-물론입니다. 만원심법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아슬아슬 했을 겁니다.

이번에 광풍대가 새롭게 익힌 암기 기교는 상당한 내공을 소모하는 것. 그렇기에 조장들은 조원들의 상황을 수시로 점검했다.

전음으로 서로를 확인한 광풍대는 내공으로 소맷자락을 떨게 하여 옅은 바람을 일으켰다. 그와 함께 하독되는 독분이 달려드는 빈객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억! 갑자기 배가..."

"독? 사천당가가 다른 독을 가져왔다!"

중독되어 몸이 휘청거리는 빈객의 뒤통수에 참격이 내리 꽂혔다.

서걱!

어둠 속에 들려오는 절삭음.

푸하학!

뒤이어 무언가 쏟아지는 소리가 주위를 경계하는 빈객들의 공포를 자극했다.

전각의 그림자에 녹아든 당인은 양손에 작은 낫을 들고 있었다. 이미 여럿을 베었는지 어두운 와중에도 붉은 얼룩이 비쳤다.

'칠공자의 말씀이 맞았다.'

채찍 대신에 두 자루의 낫을 사용해보라는 칠공자의 조언. 처음에는 갑작스러웠으나 며칠 수련을 해보니 너무나 손에 잘 맞았다.

병장기를 바꾼 것 만으로도 무위가 상승했기에 당군명에 대한 존경심과 신뢰가 절로 끓어올랐다.

'낫을 다루는 무공까지 직접 창안해주시다니... 칠공자는 보면 볼 수록 굉장하군.'

당인은 수의방을 상대로 새로운 겸법(鎌法)을 마음껏 펼쳐 보였다.

촤르륵!

당인이 쇠사슬이 연결된 낫을 던져 저 멀리 있는 빈객의 등을 찍어버리는 사이, 반대쪽에서 굉음이 터졌다.

콰앙!

광풍대가 어둠 속에서 적의 수를 은밀하게 착실하게 줄여나가는 사이, 유일하게 정면에서 맞서는 이가 있었다.

"내가! 광풍대주 당무건이다!"

우렁찬 고함과 함께 뻗어나간 주먹은 앞을 가로막던 의원의 가슴을 망치처럼 으깨버렸다.

"끄헉!"

가슴이 뭉개진 의원은 그대로 일어나지 못했다. 주먹 자체의 위력도 대단했으나 권갑에 묻힌 독이 빈객의 몸을 갉아 먹었다.

"한꺼번에 덮쳐!"

"이 멧돼지 같은 놈이!"

삼면에서 의원들이 달려들었으나, 당무건은 팔을 크게 휘두르며 쌍장을 내질렀다. 직후에 나풀거리는 소맷자락 사이로 독분이 흩뿌려졌다.

"젠장. 어느새?"

"해독... 해독을..."

병장기를 몇 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알아서 쓰러지는 의원들. 그 모습에 당무건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하!"

수의방을 상대하기 위해 칠공자가 직접 제조한 독이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은 영강수다!'

광풍대에서 영강수로 가장 높은 성취를 이루어낸 보람이 있었다. 그 덕분에 타고난 장점을 온전히 살릴 수 있으니, 보이지 않는 족쇄를 풀어낸 느낌이었다.

쾅!

일권을 내지른 당무건은 확신했다. 칠공자의 곁을 지킨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질 수 있으리라고.

점차 광풍대가 일으키는 바람이 수의방 전역을 뒤덮기 시작했다.

****

광풍대가 정문을 제외한 세 방향으로 몰아칠 때, 당군명은 홀로 정문을 돌파했다.

쐐액!

손이 흔들릴 때마다 사방에서 묵직한 파공음이 터졌다. 손끝에 들린 것이 한없이 가벼운 대침임에도.

대침(大針).

길고 굵은 바늘로 자체의 살상력보다는 중독시킨다는 목적이 강한 암기.

하지만 당군명이 손을 두 번 쓰는 경우는 없었다.

미간, 혹은 목젖.

당군명에게 달려들던 빈객들의 몸에는 어느새 대침이 박혔다. 아주 정확한 위치에.

당군명이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최소 서넛의 목숨이 꺼졌다.

"도망쳐!"

"젠장. 표융검객도 당했어!"

"방금 그놈들이랑 암기의 수준이 완전히 다르잖아!"

당군명은 걸음을 옮기면서 대침을 날릴 뿐인데, 빈객들은 이를 막기는커녕,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부풀린 근육도, 질기고 단단하게 만든 피부도, 당군명의 대침 앞에서는 평등하게 꿰뚫렸다. 독을 쓸 필요도, 내공을 대침에 주입하지도 않았다.

'용린폭풍비에 입문했을 뿐인데, 확실히 다르다.'

당군명의 손끝에는 용린폭풍비의 무리가 실려있을 뿐이다.

물고기 비늘 모양의 암기를 사용하지 않았기에 온전한 위력이 나오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용린폭풍비는 수의방의 의술을 정면에서 찍어 눌렀다.

'지금도 이 정도의 위력인데, 만약 온전히 용린폭풍비를 대성한다면...'

-용린폭풍비를 대성한다면 어린(魚鱗)은 능히 용린(龍鱗)으로 거듭나리라.

비급의 말미에 적힌 글귀를 떠올린 당군명의 눈이 반짝였다. 그 글귀는 전혀 과장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용린폭풍비는 능히 절세의 무학이라 할만 했다.

'용린폭풍비를 중심으로 독마와 사천당가의 암기 무학을 집대성 해야겠군.'

한 줄기 영감이 스쳐 지나간 당군명의 손끝에 힘이 실렸다.

쩌어엉!

등 뒤를 덮치려던 빈객의 검을 깨부순 것과 동시에 이마를 꿰뚫어버렸다. 그러고도 힘이 남았는지 대침은 그대로 뻗어나가 기둥에 깊게 박혀 들었다.

사방에 시체가 수북하게 쌓였을 즈음 당군명은 수의방주의 거처, 영의각에 도달했다. 영의각 앞을 지키는 수의방주의 모습은 기괴했다.

혈도 곳곳에는 못과 같은 기이한 침이 박혀있었고, 한껏 부풀어 오른 근육은 불에 달궈진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

방금까지도 어떤 약물을 마시고 있었는지, 방주의 양손에는 탕약이 담긴 그릇이 들려있었다.

"도망치지 않고 있었군."

방주는 들고 있던 그릇을 내던지며 살기를 내뿜었다. 몸에 약효가 돌고 있는지, 점차 호흡이 길어지고 기파가 강성해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당가의 핏덩이를 상대로 내가 등을 보일 것 같더냐."

"그게 아니라 지금껏 발전시켜 온 의술을 버리고 도망칠 수 없었겠지."

방주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린 놈이 내 속을 정확히 들여다봤구나.'

영의각에는 지금까지 수의방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가면서 쌓아온 의술이 비급으로 남아있었다.

이것을 잃는다면 설령 어찌 살아남는다 해도 의미가 없었다.

"네놈은 누구냐."

"당군명."

"사천당가 칠공자?"

방주는 헛웃음을 터트리더니 손을 휘저었다.

"쯧. 적당히 하고 물러나라. 곧 있으면 이공자와 만남을 끝낸 소방주와 빈객들이 돌아온다."

"그럴 일은 없다."

"뭣이?"

당군명의 입술이 천천히 치켜세워졌다.

"소방주는 이공자와 한참 전투 중이다. 내가 수의방의 상황을 알려줬다."

멈칫거린 방주가 잠시 고민하더니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설마... 대공자가 정확히 본방의 틈을 파고들 수 있던 것도, 우리에게 대공자의 습격 시기를 정확히 알려준 것도 네놈의 짓이냐?"

당군명은 대꾸하지 않았으나, 방주는 그 음험한 웃음에서 곧장 깨달았다. 대공자, 이공자, 그리고 수의방까지 칠공자의 손에 놀아났음을.

'영월궁에서 보내준 정보인 줄 알았는데, 설마 저 핏덩이의 장난질이었을 줄이야.'

당군명은 여유롭게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수의방주. 생각보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군."

스릉!

당군명의 손끝에서 서늘한 빛이 들렸다.

한철 유엽비도, 한엽(寒葉)이었다.

"그런데 왜 그런 선택을 했지?"

"무슨 소리냐."

"왜 사천당가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냐는 말이다."

당군명의 전신에서 진녹빛 기파가 사납게 휘몰아쳤다.

"주제를 알아야지."

영의각의 터에 사천당가 칠공자의 존재감이 가득 채워졌다.

이독제독(以毒制毒) (3)

32화

마지막 남은 탕약을 입에 부어 넣은 수의방주는 웃음을 터트렸다.

"경험이 미천한 핏덩이라 그런가... 내가 탕약 먹는 것을 막았어야지."

당군명은 도리어 조소를 머금었다.

"그걸 먹는다고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원 없이 마시도록."

수의방주는 열불이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곤 낭아봉(狼牙棒)으로 손을 뻗었다. 낭아봉에 빼곡하게 박힌 가시에는 정체 모를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본방의 의술을 통해 나는 경지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수의방주의 고양된 함성에는 자신감과 희열이 가득했다. 장내를 뒤덮은 혼탁한 기파에 당군명의 품 넓은 소맷자락이 서서히 펄럭였다.

'수의방주의 경지는 절정의 극.'

하지만 지금 피부로 와 닿는 느낌은 초절정고수에 비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수의방주. 그렇게 추한 모습으로 변한 대가가 겨우 이 정도인가?"

"네놈은 사지를 끊어서 약물을 시험하는 용도로 써주마."

콰가각!

돌바닥을 박살내며 솟구치는 낭아봉이 당군명의 옆구리에 꽂혔다. 하지만 낭아봉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격할 따름이었다.

방주는 급히 등을 돌렸으나 후방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허공에 떠 있는 당군명의 소맷자락이 나비처럼 우아하게 펄럭였다. 곧장 수직으로 내리 꽂히는 발바닥이 방주의 정수리를 찍어 눌렀다.

콰아앙!

"단단하니 짓밟는 재미가 있군."

"이 노오옴!"

땅이 움푹 파일 정도의 충격이 머리에 가해졌을 터인데 방주는 멀쩡히 일어나 당군명을 향해 쏘아졌다.

연달아 자신의 공세를 흘려내는 당군명의 움직임에 방주의 눈이 잘게 떨렸다.

'이놈, 도대체 어떻게?'

지금 자신의 육신과 움직임은 초절정고수에 비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고작 저 핏덩이가 감당해낼 수준이 아니었다.

'애초에 저놈의 보신경은 처음 본다.'

걸을 때마다 기묘한 녹빛 기파가 운무처럼 일렁였다. 걸음은 산바람처럼 표홀하고 몸놀림은 안개처럼 은은했다.

거기에 특유의 자유분방함 속에서 현묘한 이치가 슬그머니 춤췄다.

벌써 낭아봉을 수십 번이나 휘둘렀으나 닿기는커녕 스치지도 못했다. 상대는 처음과 똑같이 뒷짐을 지고 있음에도.

"이놈! 정체가 대체 뭐... 끄아악!"

방주의 고함은 끝에서 비명으로 변했다. 방주는 급히 자신의 몸을 살폈다.

이미 약물을 통해 부풀렸던 근육이 한층 더 커지고 있었다. 거기에 색도 붉어지는 것을 넘어서 아예 새까매졌다.

근육 다발이 하나하나 녹아드는 듯한 고통에 방주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끄허헉!"

"근육을 활성화하는 재료로 웅황(雄黃), 양의(㔀旖), 종당(樅爣), 개형(愷蘅)을 주로 사용했더군."

당군명이 수의방에서 만드는 약물의 방문을 정확히 알자 방주의 눈이 확대되었다.

"네놈. 설마..."

"그래서 홍무(紅繆)와 진삼(畛蔘)을 이용해 독을 만들어봤다."

그제야 방주는 깨달았다. 아마 당군명이 만든 독은 그 자체로는 별다른 살상력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수의방의 약물과 만나면 극독으로 변모하는 것이 분명했다.

대침을 꺼낸 당군명은 손을 가볍게 튕겼다. 내공이나 그 어떤 무리도 담아내지 않고 그냥 쏘아낸 것이었다. 그럼에도 방주의 몸에 너무나 쉽게 박혀 들었다.

"으허헉!"

대침이 박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의방주의 몸이 다시금 허물어졌다.

전신의 피부가 누렇게 물들며 발진이 일어났다. 전신에 수많은 벌레가 기어 다니는 간지러움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쿵쿵!

박동이 귀에 들릴 정도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대로 점점 빠르게 뛰었다가 터질 것처럼 위협적으로 속도가 빨라졌다.

수의방주는 피를 한 사발이나 쏟아내며 중얼거렸다.

"대체 어느 틈에 독을...? 절대 틈을 주지 않았는데."

당군명의 입가에 냉소가 피어올랐다.

"도대체 언제부터 내가 독을 쓰지 않았다고 착각하던 거지?"

추출의 공능을 이용해 손끝으로 독을 기화시키고, 명하유룡인의 기파에 독기를 꾸준히 실어냈다.

약물과 시술로 쌓은 불안정한 무(武)인 탓일까. 수의방주는 단순히 힘의 크기로 따지자면 적명전귀를 능가했으나, 전체적인 무위는 훨씬 하찮았다.

마치 괴력을 타고난 어린아이를 상대하는 기분이랄까.

"너의 무(武)는 깊지 않다. 그저 살이 찌듯 양옆으로 비대하다."

당군명은 새까만 옥병을 꺼내 들었다. 다른 옥병과는 문양이 고급진 게 안에 든 내용물이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너는 운이 좋아. 이 독을 처음 겪게 되었으니 영광으로 알도록."

당군명은 아주 느긋하게 옥병의 마개를 열었다. 마개가 열리자 옥병의 끝이 기묘하게 출렁거렸다. 불길이 일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자, 얼마나 튼튼한 몸을 만들었는지 확인해 볼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수의방주는 목청껏 소리치며 애원해야 했다.

제발 죽여달라고.

****

수의방에는 바람이 부는 스산한 소리를 제외하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수의각을 중심으로 그림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장을 정리한 광풍대였다.

"칠공자! 모조리 멸절했습니다!"

"도망친 자는?"

"없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당군명은 반대쪽으로 시선을 틀었다. 유난히 가벼운 발소리가 많이 들렸으나 태연했다.

당인이 이끌던 광풍대원들은 수십여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저 아이들인가?"

"예. 뇌옥에서 모두 구출했습니다. 이 아이들은 어찌할까요?"

당군명의 시선이 닿자 광풍대와 함께 온 아이들은 시선을 피하거나 몸을 움츠렸다.

'대충 사십여 명인가.'

자처해서 몸을 내주거나, 재물을 가지고 찾아온 무림인들에게는 어느 정도 안정성이 확보된 약물과 시술을 해줘야 했다.

그렇다면 수의방은 그 안정성은 어디서 확인할까. 당군명은 아이들을 보며 전생에 온갖 실험을 당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당가타에 맡길 것이다. 제대로 된 치료가 필요하겠지."

장내에 모인 광풍대는 당군명의 앞에 있는 시신을 바라봤다. 시신이라기보다는 불에 타버린 나무 토막을 보는 것 같았다.

"칠공자. 저것이 혹시..."

당인의 물음에 당군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의방주다. 별거 없더군."

여유롭게 고개를 젓던 당군명의 모습에 광풍대는 눈을 반짝였다.

수의방주는 절정의 극에 올라선 것으로 알려진 인물.

특히 수의방 비전의 약물을 복용하여 압도적인 내공을 지녔고, 각종 시술과 대법까지 펼쳐낸다면 능히 초고수를 상대할 수 있다는 평이 대다수였다.

'칠공자의 전력을 볼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실력을 얼마나 감추신 건지 알 수가 없군.'

당무건과 당인은 최악의 경우 합공도 염두에 두고 전투에 임했다. 그런데 칠공자는 홀로 수의방주를 격살했다. 아무런 부상도 없이.

광풍대는 당군명에게 다시금 경외감을 느꼈다. 칠공자를 따르기로 한 결정이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음이 체감 되는 순간이었다.

"모든 서책을 꺼내와라."

광풍대는 영의각에 비치된 백여 권의 서책을 모조리 꺼내왔다. 당군명은 그중에서 서책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좌측은 순수한 의술.

우측은 수의방 비전의 약물과 시술, 대법에 관한 것들이었다.

당군명은 우측에 있는 것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향후 신마천이 노릴 물건. 없애버리는 것이 맞다.'

전생의 신마천은 이 서책들을 가로채서 온갖 기괴한 대법과 마공을 만들어냈다.

그 덕분에 신마천은 강호 서쪽을 쓸어버리는 대계를 삼 년이나 앞당길 수 있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당군명은 신마천에서 온갖 독과 마공의 실험체가 되어야 했던 전생을 떠올렸다. 그토록 혐오했던 자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강해질 생각은 없었다.

더는 그들과 똑같은 마귀(魔鬼)가 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잡스러운 것에 기대지 않아도 사천당가를 강하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당군명의 등을 든든하게 지키던 당무건의 고개가 뒤쪽으로 홱 돌아갔다.

"칠공자를 지켜라!"

갑작스러운 당무건의 외침에도 광풍대는 기민하게 움직였다. 이미 이곳으로 몰려드는 기척을 느낀 까닭이었다.

"감히 본방을...!"

당무이와 맞붙었다가 뒤늦게 돌아온 소방주와 그 일당들은 폐허가 된 수의방의 전경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꽤나 치열한 격전을 겪었는지 소방주 일행의 상태도 정상은 아니었다. 당군명은 등을 돌리지 않고 여전히 서책들을 바라봤다.

"전부 죽여라."

"예! 칠공자!"

광풍대가 일제히 소방주 일행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차오르는 만원심법의 기파가 거센 돌풍을 일으켰다.

동이 틀 무렵.

수의방은 멸문했다.

****

청성산(靑城山)

빽빽한 산림이 산등성이를 타고 길게 늘어지니 푸른 성곽과 같았다. 장엄히 다가오는 산세의 고요함은 청성천하유(靑城天下幽)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았다.

"사형. 수의방이 멸문했다는 말이 사실일까요?"

"그럴 것이다. 여러 방면으로 목격이 많았으니까."

수의방이 멸문했다는 소문은 청성파에도 닿고 있었다.

"그놈들이 아이들에게 약물과 시술을 시험하는 줄은 몰랐습니다. 진즉에 본파가 나섰어야 했는데..."

"으음."

사제의 말을 듣던 청진은 침음을 흘렸다. 수의방은 청성산에서 멀지 않았다. 그런데도 간악한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으니 분명히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건..."

"잠깐."

청진은 산문으로 이어지는 계단 아래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럴 수가. 이 거리에 올 때까지 기척을 눈치채지 못하다니.'

조각과 같은 미형의 외모. 짙은 녹빛의 장포가 얼핏 칙칙하게 비칠 법한데, 소년의 외모가 화사하게 만들어냈다.

성별을 가리지 않고 사람의 눈길을 꼬여내는 기이한 매력이 있었다.

하지만 청진은 소년의 외모에 감탄할 겨를이 없었다. 직접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여전히 소년의 기척을 제대로 잡아내지 못하는 까닭이었다.

청진은 어느새 촉촉해진 손을 허리춤으로 뻗어 조심스레 검파에 얹었다.

서늘한 침묵이 이어지는 찰나, 당군명이 먼저 포권을 취하며 얼어붙은 대기를 옅게 만들었다.

"사천당가 칠공자 당군명이오."

청진의 눈이 커졌다.

'수의방을 멸문시켰다는...!'

청진은 빠르게 신색을 되찾곤 정중히 물었다.

"청성파 이대제자 청진이라고 합니다. 도우께서 청성산을 오르신 연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당군명은 손으로 봉우리 아래쪽을 가리켰다. 청진이 눈을 돌려 보니 당가의 무인들이 제각기 커다란 짐을 들고 올라서는 중이었다.

"수의방의 건으로 청성파 장문인을 뵙고 싶소."

청성파 장문인은 일개 후기지수가 원한다고 볼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하지만 청진은 직감했다. 눈앞의 소년이 일개 후기지수가 아님을.

거기에 용건도 청성파가 그냥 넘기기에는 가벼운 사안이 아니었다. 잠시 고민하던 청진은 옆에 있던 사제에게 말했다.

"산문을 열어라."

청진이 극진히 예를 갖추자 당군명도 고개를 숙여 화답하곤, 산문을 넘었다.

소식이 전해지자 당군명은 곧장 청성파 장문인과 독대할 수 있었다.

주화입마 (1)

33화

"청성파 장문인을 뵙습니다."

"문현이라고 하네. 청성산을 오르느라 고생했네."

청성파 장문인, 문현은 손수 차를 끓여 당군명에게 내어주었다.

"당가주께서는 무탈하신가?"

"예. 여전하십니다."

"당가주의 유엽비도가 얼마나 날카로워졌을지 궁금하군."

청령검공(靑靈劍公).

문현의 별호를 떠올린 당군명은 탁자 위로 아스라이 번져오는 존재감을 느꼈다.

얼핏 엉성한 듯 보였으나, 크게 보면 얼기설기 얽힌 광대함이 엿보였다. 조용히, 풍성하게 공간을 채워내는 흐름이 산문에서 봤던 버드나무와 같았다.

'이런 절세고수도...'

전생에 사천성의 절세고수들을 모조리 멸절해버린 신마천주의 무위가 자연스레 상기됐다.

당군명의 바짓자락에 살짝 주름이 질 때, 문현이 찻잔을 기울였다.

"수의방에 대한 일로 본파를 찾았다고 들었네."

"맞습니다."

"감사를 표해야겠지. 본파가 영월궁에 이목이 집중되었다곤 하나 이런 극악무도한 일을 눈치채지 못했으니 말이야."

문현이 도호를 외며 예를 표하자 당군명도 포권을 하며 말을 이었다.

"수의방과 관련하여 도움을 요청하고자 합니다."

"어떤 도움인가?"

"본가의 가솔들이 수의방의 서책들을 가져오는 중입니다. 그중, 사이한 이치가 담긴 서책들은 불태우고, 순수히 의술에 관련된 것은 본가에서 취하고자 합니다."

문현은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본파에게 허락 받을 일은 아닌 듯하네만?"

"청성파에서 서책의 분류와 소거에 참관하고 공증을 서주셨으면 합니다."

문현은 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곧장 당군명의 의도를 꿰뚫어 본 것이었다.

'쓸데없는 분란을 만들기 싫은 것이로구나.'

수의방의 의술이라면 탐낼 곳은 차고 넘쳤다. 그렇다고 모두 불태웠다는 당가의 말을 쉽게 믿지도 않을 터.

의혹을 짊어진 이상, 사천당가는 언제든 귀찮은 일에 휘말릴 확률이 높았다.

그렇기에 청성파의 공증이 필요한 것이리라.

"사천당가는 정말 취할 생각이 없는가."

"본가가 독과 암기, 강자존이라는 가풍 때문에 정사지간으로 분류되지만 온전한 사파는 아닙니다."

문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인에게 사천당가는 원한을 절대 잊지 않는 악독한 이들이었으나, 양민에게는 의술(醫術)과 야술(冶術)을 선의로 베푸는 자들이었다.

이런 점을 다른 문파도 인정하기에 정파만 참여하는 사천지회에도 사천당가를 초대하는 것이리라.

"자네의 부탁이 본파의 체면을 세워주는군."

상황과 여건이 어찌 되었든, 청성파가 수의방의 악행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분명한 오점이었다.

하지만 당군명에 의해 이런 식으로나마 수의방의 일에 발을 걸쳤으니 최소한의 면은 살린 셈이었다.

문현은 당군명의 덤덤한 표정을 보고 눈치챘다. 눈앞의 후기지수는 여기까지 염두에 두고 제안했다는 것을.

"본파는 오늘 자네가 해준 제안을 절대 잊지 않을 걸세."

청성파가 이번 제안을 은(恩)으로 여긴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말학 후배의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포권을 하며 깊이 고개를 숙인 당군명의 입술이 살짝 비틀어졌다.

'이것으로 수의방으로 얻어낼 수 있는 최대의 이득을 얻었다.'

청성파를 내세워 쓸데없는 분란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과 동시에 청성파 장문인의 호감을 얻어냈다. 이는 훗날의 행보에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당군명이 그려내는 그림에서 아미와 청성의 조력은 반드시 필요했다. 오늘의 대담은 그 첫걸음이 되리라.

대담을 마친 당군명이 밖으로 나가고, 전각에 혼자 남은 문현은 짧은 숨을 내쉬었다.

"당군명이라..."

보통의 후기지수와 다르게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심계도 대단했으나, 지닌 기도가 범상치 않았다.

'당가주가 자식 복이 있구나. 막내가 여의주를 품은 이무기라니.'

문현은 확신했다.

사천당가에 천문암왕의 뒤를 잇는 새로운 용이 똬리를 트리라고.

"이번 사천지회에서 사천제일후기의 명성을 되찾아오려 했건만."

현재는 아미파 이대제자 수설이 사천제일의 후기지수라 불렸으나, 청성파도 가만히 있을 생각이 없었다. 청진이라는 기재가 있었으니.

청진을 직접 몇 수 가르쳤기에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으나, 당군명을 보고 생각이 바뀌고 말았다.

만약 당군명이 사천지회에 등장하는 그날, 사천제일후기의 주인이 바뀔 터였다.

"하긴 한 치 앞의 상황도 모르는 것이 강호이긴 하지."

문현은 전각 밖에서 광풍대를 지휘하는 당군명을 바라봤다.

****

사천당가 남쪽 대문이 활짝 열렸다.

선두에는 당군명이 뒷짐을 진 채 걸음을 옮겼고, 광풍대가 호종했다. 그런 뒤로는 서책이 가득 쌓인 수레가 따라왔다.

"칠공자께서 돌아오셨다!"

"저 수레가 수의방의 의서들인가."

"창의각에서 좋아하겠는걸."

가솔들은 이미 수의방은 물론이고 청성파에서 있던 일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 청성파에서 공증 문서와 함께 감사 서신을 보내온 까닭이었다.

아미파에 이어서 청성파까지.

사천성을 대표하는 대문파에게 연달아 감사 서신을 받아낸 당군명의 위상은 어느새 대공자와 이공자에 필적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당하게 공을 세우고 등장하는 당군명과 광풍대를 보기 위해 가솔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다른 공자들이 모두 칠공자에게 당했다던데..."

"칠공자도 보통이 아니야. 다른 공자들께서도 이제 긴장하셔야 할 거야."

가솔들은 처참한 모습으로 돌아왔던 대공자와 이공자를 떠올렸다. 각기 치열한 혈전을 벌였으나 얻은 것은 하나도 없었기에 더욱 형편 없이 보였다.

반면에 칠공자와 광풍대는 어떠한가. 사천당가의 대로를 위풍당당하게 가로지르는 모습은 눈길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칠공자가 단기간에 이렇게 달라지셨을 줄이야.'

'더구나 방계의 마음까지 사로잡았으니... 후계 경쟁의 구도가 바뀌고 있다!'

당군명을 바라보는 가솔들의 눈에는 선망과 놀람이 한가득 섞여 있었다.

가솔들이 저마다 손뼉을 치면서 환호성을 터트리던 와중, 날카로운 고함이 즐거운 분위기를 뚝 끊어냈다.

"당군명!"

내공이 가득 실린 목소리에는 분노가 불길처럼 넘쳐흘렀다.

대공자 당일세와 창극대.

이공자 당무이와 묵정대.

절대 양립하지 않을 것 같던 두 세력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접근 중이었다.

그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당군명과 광풍대에 가깝게 붙어있던 가솔들이 점차 거리를 벌렸다.

"막내야. 재밌는 짓을 벌였더구나?"

"잡것이 제법 머리를 굴렸어!"

얼굴이 시뻘게져서 빠르게 걸어오는 두 사람을 보던 당군명의 입술이 짙게 뒤틀렸다.

"너희들이 내 뜻대로 충실히 움직여준 덕분에 이번 일은 제법 편했다."

두 공자의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당군명은 천천히 오른손을 뻗었다.

"지금이라도 본 공자의 밑으로 들어와라. 그리한다면 너희도 조금은 쓸 만한 말이 되겠지."

당군명의 제안에 두 공자의 두 눈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막내야... 네놈이 감히?"

"이번에는 아예 다리를 뽑아주마!"

당장이라도 달려들려는 듯 당무이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는 찰나.

당군명의 녹사의가 거칠게 펄럭였다. 순식간에 일대의 대기를 뒤덮은 효월삼원공의 기파.

"큭!"

"이... 무슨!"

당일세와 당무이는 자신들의 기파를 홀로 압도해내는 당군명을 보고 기겁했다. 놀란 것은 창극대와 묵정대 뿐만 아니라 주변의 가솔들도 마찬가지였다.

'칠공자의 무위가 이 정도였나? 두 공자를 동시에 압도할 정도로 강하다니!'

'아직 실력을 숨기고 있었어!'

'칠공자가 정녕...'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진 가운데, 광풍대만이 자랑스러운 눈으로 당군명의 뒷모습을 눈에 담아냈다.

"하찮군."

당군명이 손을 뻗으려고 할 때, 세 공자의 한가운데로 그림자가 솟구쳤다.

땅에 솟아 오르듯 갑자기 나타난 암경대주는 등장과 동시에 일대의 기파를 풀어헤쳤다.

두 공자가 움찔거렸으나, 암경대주의 시선은 오직 당군명에게 향할 뿐이었다.

"칠공자. 가주님의 전언이 있습니다."

당군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암경대주는 품속에서 서신을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칠공자의 정암각 칠층 출입을 허용한다. 또한, 나머지 공자들은 각 전각의 반년 치 예산을 칠영각으로 전달하라."

곧장 반응을 보인 것은 당군명이 아닌 두 공자였다.

"가주님이 그런 명령을 내리셨단 말이지..."

"크아아악! 저놈한테 당한 것으로 모자라 재물까지 바치라고?"

암경대주는 두 공자를 무시하고 담벼락의 그림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삼공자께서도 확실히 들으셨겠지요?"

암경대주의 시선을 따라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 기척을 미리 알고 있던 당군명만이 암경대주를 훑고 있을 뿐이었다.

"후... 어이가 없네?"

전각의 그림자에서 은신하던 당삼전까지 모습을 드러내자 암경대주는 서신을 곱게 접어 갈무리했다.

"그럼."

암경대주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과연 암경대주인가.'

암경대주의 몸놀림을 정확히 본 것은 이 자리에서 당군명 뿐이었다.

"막내. 이번 빚은 제대로 기억하마."

"잡것 답게 제법 설쳤으나 다음은 어림도 없다!"

암경대주의 등장을 의식한 당일세와 당무이가 물러나는 사이, 당삼전은 당군명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입가에는 흐릿한 미소가 있었으나 눈가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네놈이지?"

"무슨 말이냐."

"수의방과 영월궁 사이에 이간을 시도하던 수하들이 역으로 쓸려 나갔어. 누군가 정보를 영월궁에 흘린 거지."

당군명은 턱을 까딱였다.

"그런 일이 있었나? 몰랐군."

"이게 어디서 발뺌을..."

"아니, 진심이다."

당삼전을 보는 당군명의 조소가 너무나 선명했다. 이를 본 당삼전의 호흡이 거칠어지는 것을 넘어 뚝뚝 끊기기 시작했다.

"그런 잡스러운 일은 일일이 기억하지 않아서."

"너...!"

한껏 붉어진 얼굴로 무언가 말을 내뱉으려던 당삼전이 돌연 피를 토했다.

"커헉!"

그대로 쓰러져 몸을 파르르 떠는 당삼전의 기파가 어지럽게 요동쳤다.

"헛? 설마?"

"주화입마! 삼공자가 주화입마에 드셨다."

"어서 조치를!"

당삼전을 따르는 가솔들이 급히 달려들어서 일부 혈도를 점하곤 창의각으로 몸을 날렸다. 그 모습을 보며 당군명은 헛웃음을 흘렸다.

"겨우 이 정도로 주화입마에 걸리다니. 정말 대단하군."

당군명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칠영각으로 걸음을 옮겼다.

****

당군명은 칠영각에 도착하자마자 불안한 얼굴로 뛰어오는 하윤을 볼 수 있었다.

"하윤. 무슨 일이냐."

"공자님! 큰일 났어요. 용혜 소저가 이상해요!"

눈살을 찌푸린 당군명은 육층의 흔적을 떠올렸다. 수많은 이들의 주화입마를 일으켰다는 이야기가 불현듯 떠올랐다.

"가보자."

칠영각에 있는 용혜의 거처로 가보니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옥빛으로 물든 머리칼은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다.

"용혜 소저."

당군명의 부름에도 용혜는 고개를 살짝 뒤로 틀어낼 뿐이었다.

"당 소협..."

어쩔 수 없이 당군명이 용혜의 앞으로 갔다. 용혜의 흐리멍텅한 눈을 본 당군명의 눈이 가늘어졌다.

눈빛이 탁하고 동공이 끝없이 흔들린다. 두 다리는 간헐적으로 움찔거리길 반복했다.

무아지경이 아닌 주화입마의 전조. 뒤이어 새어 나오는 용혜의 한 마디가 당군명의 생각에 확신을 주었다.

"어떻게 걷는지 잊어버린 거 같아요."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는 용혜의 웃음은 참으로 애달파 보였다.

주화입마 (2)

34화

당군명은 깜짝 놀란 하윤을 돌려보낸 다음, 용혜를 부축하여 그 자리에 앉혔다.

"용혜 소저. 마음을 차분하게 하시오."

"아..."

옅은 탄성을 흘리는 용혜의 기파는 한껏 뒤엉켜있었다. 절대 풀 수 없는 실타래처럼.

'전생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던 것으로 아는데.'

전생의 용혜는 사천당가에 제법 오랜 기간을 머물렀으나,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돌아가야만 했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주화입마에 빠지지는 않았었다.

'내가 변수가 된 건가.'

전생과 다른 점이라곤 당군명이 최초로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 이 사실이 용혜의 마음을 자극한 것일지도 몰랐다.

용혜는 여전히 두 다리를 움직이려는 듯 멍한 눈으로 다리를 꼼지락거렸다.

당군명의 눈이 가라앉았다. 용혜의 자질이라면 언젠가 주화입마를 극복할 것이다. 물론 제법 긴 세월을 감내해야겠지만.

'너무 늦어.'

미래에 절세고수가 되는 용혜.

멸마를 업으로 삼은 대문파, 곤륜파.

신마천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용혜와 곤륜파의 조력이 반드시 필요했다. 고민하던 당군명은 결심했다.

"소저. 내가 주화입마의 극복에 도움을 줘도 되겠소?"

용혜는 멍하니 당군명을 바라볼 뿐이었다. 당군명은 손을 살짝 흔들었다. 소맷자락에서 흩뿌려진 독분이 용혜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소저는 지금 감각이 너무 예민해져 있소. 깨달음을 받아들이기 위해 백회혈이 너무 과열된 탓이지. 영각독으로 이를 강제로 가라앉힐 것이오."

당군명은 용혜를 천천히 일으킨 다음, 두 손을 맞잡고 마주 섰다. 당군명이 손을 잡은 채로 뒷걸음질 치자 용혜는 자연스레 이를 따라와야 했다.

"지금 내가 걷는 걸음이 육층 흔적에 있던 걸음이오."

"아."

당군명은 천천히 용혜를 인도했다. 중간중간 쓰러질 뻔한 적도 많았으나 당군명은 용혜의 손을 절대 놓지 않았다.

"승유검신의 발걸음에 소저가 익힌 곤륜파의 보신경이 깃들었을 터. 떠올리시오. 소저의 걸음을."

당군명은 자신이 얻은 깨달음을 직접 건네주지는 않았다. 남의 깨달음을 받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스스로 궁구하고 깨달아야 주화입마를 벗어날 수 있으리라.

당군명은 조금씩 등을 떠미는 것 뿐이었다. 호흡이 전혀 맞지 않고 삐걱거렸으나, 당군명은 용혜와 함께 발을 뻗었다.

천천히, 빠르게, 유유하게, 자유롭게.

당군명은 걸음에 다양한 변화를 주며 용혜가 몸으로 느낄 수 있게 했다. 그 모습은 두 남녀가 손을 맞잡고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느새 하늘 높은 곳에 있던 해가 저물고 어두워진 하늘에는 은빛 휘장이 내려왔다.

거의 하루 내내 당군명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던 용혜가 처음으로 먼저 발을 디뎠다.

그저 단순한 한 걸음이었으나, 함께 움직이고 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당군명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이렇게나 빨리?'

눈빛을 보면 아직 주화입마에 빠진 듯 보였으나, 지금까지의 걸음을 통해 용혜가 얻은 것이 분명히 있는 듯 보였다.

벌써 극복의 기미를 보이는 용혜의 자질은 확실히 놀라웠다.

느리게나마 걸음을 연달아 뻗어내는 용혜의 모습에 당군명은 더욱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앞으로의 행보에 용혜의 조력은 크나큰 힘이 되리라고.

달빛이 용혜의 눈동자를 밝히는 순간, 용혜의 입술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태청보(太淸步)."

움직이는 나무토막처럼 딱딱 끊어졌던 용혜의 발놀림에 생기가 맴돌기 시작했다.

"비룡보(飛龍步)."

용혜는 점차 걸음에 묘리를 실어내면서 무공의 이름을 뇌까렸다. 이에 당군명도 암영보, 어용보를 밟아내며 호흡을 맞췄다.

'그래. 이렇게 섞을 수도 있었나.'

승유검신의 발놀림을 유지하면서 합을 맞춰야 하다 보니 자연스레 다른 보법의 묘리가 녹아들었다.

이미 명하유룡인을 창안하면서 수많은 길을 찾아냈으나 아직 발견하지 못한 길이 또 있었다.

어느새 당군명은 새로운 사색에 빠져들며 저도 모르게 보법을 밟는 지경에 이르렀다.

두 남녀는 보법을 연달아 풀어내며 달빛 사이를 아스라이 거닐었다.

서로가 합을 주고받으며 흐름을 이어가는 사이, 어느새 난잡하게 얽혀 있던 용혜의 기파가 조금씩 풀어졌다.

우웅!

효월삼원공(淆月三元功).

삼청심법(三淸心法).

두 심법의 기파가 조금씩 맞물렸다. 용혜의 옥빛 동공에 선명한 빛이 차올랐다. 저 하늘의 달빛보다 더욱 찬연하고 맑은 빛깔이었다.

달빛을 머금은 듯한 영롱한 목소리가 당군명의 귀에 울렸다.

"당 소협."

손을 맞잡고 처음으로 용혜가 당군명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용혜의 짙은 눈꼬리가 한껏 휘어졌고, 당군명도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두 남녀는 맞잡던 손을 놓았다. 하지만 흐름과 합이 끊기지는 않았다.

서로를 마주 보며 보신경을 펼쳐내는 두 남녀는 한껏 어우러져 연무장을 가득 채웠다.

용혜는 마침내 승유검신이 창안했다는 보법, 신법, 경공을 연달아 펼쳐냈다. 걷는 법을 잊었던 용혜는 도리어 이전보다 뛰어난 성취의 보신경을 선보였다.

보법, 용미초풍보(龍尾招風步).

신법, 용유황운(龍遊滉雲).

경공, 옥명비룡휘(玉鳴飛龍徽).

당군명도 육층의 흔적에서 발아한 깨달음으로 보법, 신법, 경공을 하나로 엮어낸 무공을 펼쳐냈다.

명하유룡인(冥霞幽龍湮).

당군명은 육층 흔적의 심득을 걸음에 담아냈고, 용혜는 합을 맞추면서 승유검신의 무학에 조금씩 자신만의 심득을 구체화했다.

이제 용혜가 주화입마를 떨쳐내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런 풍경이었을까.'

당군명은 문득 떠올렸다. 초대 가주와 승유검신이 보신경을 겨루던 모습이 지금과 매우 흡사하리라고.

시대를 뛰어넘어 후대가 선대의 대결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음유한 진녹빛.

명료한 청옥빛.

두 가지 빛깔의 기파가 하나의 색으로 어우러져 연무장을 가득 채울 때.

두 남녀는 비로소 춤사위의 끝을 맺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두 남녀는 동시에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에 들었다.

'상당히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다.'

승유검신이 직접 창안한 보법, 신법, 경공과 이를 용혜가 자신만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심득을 녹여내는 모습은 새로운 영감을 주었다.

'내공 운용을 좀 더 길고 유장하게... 족삼음경(足三陰經)에서 족삼양경(足三陽經)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끊기지 않도록.'

당군명은 다리에서 이어지는 혈맥의 흐름을 상기하며 명하유룡인의 세세한 운기 경로를 가다듬었다. 이것만으로도 상당한 변화가 생겼음을 깨달았다.

굳이 따지자면 이성(二成)에 머물렀던 명하유룡인의 성취가 단숨에 오성(五成)으로 뛰어오른 것 같았다.

새로 얻은 심득을 갈무리하고 눈을 뜬 당군명은 코를 간지럽히는 청아한 향기를 맡았다. 눈앞에는 옥빛의 머리칼이 찰랑거렸다.

먼저 운기조식을 마친 용혜가 몸을 가까이 한 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당군명이 운기조식을 마치자 용혜는 당군명의 손에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뭐 하는 것이오?"

"방금까지는 독 때문에 손을 잡아도 온기가 제대로 느껴지지 않던데요?"

당군명이 슬쩍 손을 빼려 하자 용혜가 냉큼 붙잡았다. 결국 당군명은 고개를 들어 용혜와 눈을 맞출 수 밖에 없었다.

"당 소협. 구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나도 이번에 성취를 얻었으니 고마워 할 필요 없소."

무덤덤한 말에 과실과 같은 입술이 살짝 휘어지며 어여쁜 호선을 그렸다.

"언젠가 저도 당 소협을 구해줄게요."

당군명도 입꼬리를 희미하게 말아 올렸다.

"그것은 사양하지 않겠소."

그 웃음을 본 당군명은 확신했다.

전생처럼 신룡무후와 곤륜파가 홀로 고군분투하다가 스러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

솨아아!

거칠게 불어 닥치는 기파에 등불이 꺼지고 방안의 집기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당삼전이 순간의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인해 주화입마에 빠진 이후, 벌써 몇 달의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창의각의 전폭적인 관리로 간신히 숨만 붙어있던 당삼전의 몸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바람을 등진 불꽃처럼 위태롭게 들썩이던 기파가 점차 갈무리되었다.

"흐억!"

운기조식을 마친 당삼전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흐흐... 성공... 성공이야!"

스스로 독에 중독되어 삼원심법의 고착된 내공 흐름을 바꾸는 시도.

평소라면 절대 사용하지 않을 미친 방법이었으나 잃을 것이 없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주화입마를 이겨내고야 말았다.

그뿐인가. 이전과 다른 정순한 내공이 전신 혈맥이 흐르는 것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삼원심법이 팔성에 올랐어! 크하하!"

주화입마의 역경을 이겨낸 덕분일까. 사 년 넘게 정체되었던 삼원심법의 성취가 올랐다.

당삼전은 감히 확신했다. 대공자나 이공자도 아직 팔성(八成)의 성취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라고.

삼원심법이 팔성에 올랐으니 어지간한 독은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사라질 터.

"이렇게 되면 승산이 있지. 그것도 너무 많이."

홀로 광소를 터트리던 당삼전은 탁자 위에 있던 시약과 독물을 모조리 치워버리곤 종이와 붓을 찾았다.

그렇게 당삼전은 한 장의 서신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

당군명의 서탁에는 다양한 종류의 탕약기와 그릇, 시약이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그리고 그 구석에는 독도비록이 펼쳐져 있었다.

"이제 마지막인가."

당군명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당군명은 작은 찻잔에 담긴 새빨간 액체를 원양과(鴛陽果), 다금청린사(觰金靑鱗蛇), 당귀(當歸), 경허각(鯨噓角)으로 배합한 시약에 떨어뜨렸다.

화르륵!

시약과 액체가 만난 순간, 그릇 위로 새빨간 불기둥이 치솟았다. 어찌나 화력이 센지 시약이 담긴 그릇마저도 순식간에 새까맣게 타버렸다.

당군명은 불길이 크게 번지기 전에 장력을 일으켜 잠재웠다.

"드디어 복원... 아니, 발전시켰다."

당가팔독, 염호루(炎濩淚).

실전된 극독 중의 하나가 당군명의 손에 의해서 다시금 탄생했다.

'독도비록과 정암각의 기록에 따르면 기존의 염호루는 화력이 대단한 대신, 보관이 극히 어려웠다. 특수 제작한 한철 옥병이 필요한 정도였지.'

하지만 지금 당군명의 손에 들린 옥병은 한철이 아닌 평범한 옥병이었다. 염호루의 기존 화력을 유지한 채, 독액의 안정성을 끌어올리는 것에 성공한 까닭이었다.

'한영독이 커다란 도움이 됐군.'

당군명은 한영독을 비롯한 염살전의 독을 무수히 떠올렸다. 제각기 만들어내는 것보다 당가의 독과 여러 방면으로 배합할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어쩌면 기존의 당가팔독을 뛰어넘는 극독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된다면 진정으로 초대 가주를 뛰어넘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염호루의 연구를 마친 당군명이 방안에서 나오자 하윤이 서신 하나를 건네줬다.

"공자님. 삼영각에서 서신이 왔어요."

"삼영각?"

그 자리에서 서신을 뜯어본 당군명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당군명은 서신의 마지막 글귀를 소리 내어 읽었다.

"삼공자 당삼전은 칠공자 당군명에게 독극을 신청하는 바이다."

그 말을 들은 하윤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독극이요?"

독극(毒戟).

앉은 자리에서 오직 독과 해약, 개인이 쌓아 올린 내성으로만 벌이는 사천당가만의 생사결.

수많은 가솔이 보는 앞에서 능력을 부각할 수 있기에 후계 경쟁에서 한두 번은 반드시 벌어지곤 했다.

"알아서 목을 내미는군."

칠공자가 삼공자의 독극 도전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가문 내에 퍼지기 시작했다.

독극(毒戟) (1)

35화

사천당가의 대연무장에는 독극을 위한 자리가 준비되었다. 그 주위로 수많은 가솔이 자리를 차지하고 독극의 시작을 기다렸다.

"독극은 참으로 오래간만이로군."

"삼공자와 칠공자의 독극이라... 이런 독극이 성사되리라 누가 생각했을까."

무대를 바라보는 가솔들은 감회가 새로웠다. 그토록 유약했던 칠공자가 후계 경쟁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을 줄은 몰랐다.

단순히 버텨낸 것도 아니고 어느새 다른 공자들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약진을 거듭하는 칠공자의 행보는 가솔들의 가장 큰 관심사 중의 하나였다.

"듣자 하니 칠공자의 독 제조 실력이 뛰어나서 만독각의 신임도 얻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모를 일이야. 삼공자의 독도 무시무시하지 않나. 만독각주가 관심을 가졌을 정도이니."

삼공자는 다른 공자들과 달리 만독각의 심사를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간혹 삼공자가 직접 제조한 독이 공개될 때마다 본가에 파문을 일으켰다.

저들끼리 의견을 주고받던 가솔들의 입이 서서히 멈췄다. 어느 순간, 대연무장에 마련된 상석에 암경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뒤이어 암경대주의 호종을 받으며 당천경이 상석으로 향하는 계단에 올랐다.

계단을 천천히 한 걸음씩 오를 때마다 당천경의 품 넓은 소맷자락이 고요히 나부꼈다.

그저 계단을 오르는 모습이었으나 대연무장에 모인 모두가 그 장중함에 시선을 빼앗겼다.

등장만으로 활기가 넘치던 대연무장의 대기가 변했다. 푸르른 초원에서 삭막한 광야로 뒤바뀐듯했다.

당천경이 태사의에 앉자 뒤이어 중진들이 옆자리를 채웠다.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던 가솔들은 하나둘 힘 빠진 호흡을 내뱉었다.

이번 독극의 심판을 맡을 만독각주 당세훈도 중앙의 무대에 자리하자 당천경은 손을 뻗었다.

"독극을 벌일 자들은 앞으로 나서라."

당군명과 당삼전은 중앙에 석탁을 두고 마주 앉았다.

"두 공자께서는 이번 독극에 사용할 독약 세 병, 해약 한 병을 꺼내주십시오."

당세훈의 안내에 따라 두 공자는 각기 준비해온 독과 해약을 석탁 위에 올려두었다.

"이번 독극의 규칙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두 공자는 상대의 독을 번갈아 가면서 마신다. 심법의 내성으로 버텨내되, 힘들다 싶으면 단 한 번 해약을 먹는 것이 가능하다.

"만약 두 분이 세 가지 독을 모두 버텨냈다면 해약 사용 유무, 증상 진척도를 근거로 승패를 가를 것입니다. 동의하십니까."

삼공자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고, 당군명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두 공자는 동시에 서로의 첫 번째 독을 내밀었다.

"산공독이야. 물론 내가 좀 개량해서 혈맥이 찢어지는 느낌이 들 걸?"

"뇌유독이다. 신경을 자극하면서 사지를 마비시키고, 그 부위에 저릿거리는 격통이 엄습할 거다."

공자들의 설명을 들은 가솔들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주시했다.

"산공독이라... 삼공자는 정석적으로 가시는군. 역시 독극은 심법의 내성을 최대한 흩어놓는 게 핵심이지."

"칠공자는 처음부터 직접 개발한 독을 꺼내셨나. 과연 어느 정도일지 궁금한데."

당삼전은 삼원심법의 내공을 전신 혈맥에 가득 채우곤 뇌유독이 든 옥병을 단숨에 들이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곧장 몸에 반응이 왔다. 당삼전은 덜덜 떨리는 손을 간신히 움직여 옥병을 내려놓았다.

'크. 마치 벼락에 맞은 것 같네. 제법 잘 만들기는 했어.'

사지의 끝이 점차 마비되면서 그 부위에는 아주 작은 번개가 요동치는 듯한 격통이 밀려 들었다.

당삼전은 운기를 통해 뇌유독을 한쪽 혈도에 밀어 넣고 억누르는 것에 몰두했다.

'얼추 됐다. 당군명은 어떠려나?'

일다경이 지났을 때, 당삼전은 눈을 떴다. 당군명은 이미 독을 억눌렀는지, 조소를 내보였다.

"너무 느리군. 나머지 독을 감당할 수 있겠나?"

"너야말로 조심해야 할걸? 어릴 때처럼 거품 물고 기절하지 않으려면 말이야."

당삼전은 여유롭게 답했으나, 미간에 살짝 굴곡이 생겼다. 진지하게 독극에 임하는 자신과 달리 당군명은 여유가 넘쳐 흘렀다.

이러니 더욱 보고 싶어졌다. 자신의 독에 더는 버티지 못하고 해약을 갈구하는 애처로운 모습을.

'산공독을 먹었으니 이제부터가 진짜야.'

당삼전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두 번째 독을 내밀었다.

"우리 외가에서 구해준 흑진정주의 독으로 만든 흑주독이야. 외가의 지원이 없는 너는 절대 만들 수 없는 독이지."

설명을 듣던 가솔들은 경악했다.

"흑진정주! 남만에서도 극히 드물게 발견된다는 독거미의 독을 얻었단 말인가?"

"몇 달 전에 마운표국이 남만에서 돌아왔다더니 그때 구했나 보군."

"칠공자가 흑진정주에 비견되는 독을 가져왔을지..."

흑진정주(黑縝楨蛛).

남만의 광나무에서 드물게 발견되는 검은 거미.

크기는 어린아이의 손바닥보다 작았으나 지닌 독은 몇 방울로 작은 호수의 생물을 모조리 몰살시킬 정도로 독했다.

'응?'

당삼전은 눈을 의심했다. 흑진정주라는 말을 듣자 당군명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 같았다. 그 뿐인가. 당장이라도 마시고 싶다는 듯, 흑주독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착각이겠지.'

그 사이, 당군명도 두 번째 독을 내밀었다.

"한중독이다. 염살전의 한영독에서 영감을 얻었지. 네놈의 독과 달리 영류(擰絫), 한사(寒砂), 정강(諪鱇)만 있으면 제조할 수 있다."

당군명이 아미산에서 한영독을 홀로 해독한 것은 모두가 알았다. 당연히 한영독의 위험성도 알고 있기에, 가솔들은 새롭게 만들어냈다는 한중독에 관심을 가졌다.

"한영독은 분명 일급에 해당하는 독이었지. 칠공자의 한중독은 어떨지 궁금하군."

"독의 재료도 구하기가 어려운 편은 아닙니다. 만독각의 인정을 받았다더니. 과연..."

가솔들은 대체로 한영독에 관심을 두었다. 제법 흔한 약재를 통해 어느 정도의 위력을 낼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가솔들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듣던 당삼전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한중독을 삼켰다.

'그따위 잡스러운 재료로 만든 독이 얼마나 대단해 봐야...'

당삼전은 다급하게 눈을 찔끔 감았다. 뇌유독을 억누르느라 내공이 갈라진 탓인지 곧장 반응이 왔다.

하반신이 설원에 빠진 것처럼 으슬으슬 추워지더니, 뼈를 시리게 하는 한기가 전신으로 조금씩 올라왔다.

'억눌러야...'

당삼전은 전신이 덜덜 떨렸으나, 이를 악물고 운기에 임해야 했다.

'이런 하필...'

독 때문에 몸이 차가워진 탓일까. 갑자기 엉덩이 쪽에서 신호가 왔다.

'절대 안돼. 안돼!'

독극 도중에 측간에 간다면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삼전은 엉덩이에 잔뜩 힘을 주며 버텨냈다.

'팔성의 성취에 오르지 못했다면...'

간신히 한중독을 억누르고 식은땀을 닦던 당삼전의 눈이 커졌다. 당군명이 아주 평온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당삼전은 혹시나 싶어서 옥병을 내려다봤다. 마개가 열려 있는 것을 보니 흑주독을 마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어떻게?"

"맛있게 잘 먹었다."

"뭐? 맛있었다고?"

지금 독을 억누르느라 잘못 들은 걸까.

황망하게 묻는 당삼전의 옆으로 당세훈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삼공자.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해약을 드시거나, 패배를 인정하시지요."

입술을 꽉 깨물던 당삼전은 당군명의 비틀어진 입술을 보곤 고개를 저었다.

"다음... 진행하세요. 만독각주."

"삼공자의 뜻이 그러시다면야."

당삼전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옥병을 내밀었다.

"실전된 당가팔독, 견혼수(牽魂水)를 복원 하는 도중에 탄생한 독, 혼성수야. 내가 지금까지 쌓아온 공부의 총화지!"

당가팔독을 언급하자 가솔들은 물론이고 당세훈을 비롯한 가문의 중진들도 유별난 관심을 보였다. 반면에 당군명의 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당가팔독이라..."

당군명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혼성수를 한번에 들이켰다.

당군명의 목젖이 껄떡거리는 것을 보고 당세훈은 물론이고 당삼전도 긴장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눈을 감았던 당군명의 눈이 반개할 때, 진녹빛 안광이 거세게 출렁였다.

"이런 건 견혼수의 절반도 따라가지 못한다. 아예 복원의 방향을 잘못 잡았군."

"뭐?"

당군명은 당삼전의 반응을 무시한 채 마지막 옥병을 내밀었다.

"염호루. 또 다른 설명이 필요한가?"

당군명의 선명한 목소리가 대연무장을 가득 채웠다. 실전된 당가팔독의 이름을 정확히 언급하는 당군명을 바라보는 가솔들의 눈에 기대와 혼란이 섞였다.

"당삼전. 그 상태에서 이 극독을 마시면 최소 폐인이고 죽을 수도 있다. 자신 있나?"

마지막 옥병을 멍하니 바라보던 당삼전은 이를 악물었다.

"염호루? 허세도 정도껏 부려야지. 네놈이 무슨 재주로 염호루를 복원해?"

당삼전은 먼저 준비한 해약을 털어 넣었다. 뇌유독과 한중독의 독기가 어느정도 가라앉는다고 느낀 순간, 뒤이어 염호루가 담긴 옥병도 기울였다.

염호루가 목을 넘어간 순간.

"끄아아아악!"

당삼전의 비명이 대연무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마치 꿀렁이는 화염을 삼키는 듯한 격통이 식도를 타고 올라왔다. 몸속에 불덩이가 내려앉은 듯했는데, 그 불덩이가 전신혈맥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당삼전은 입으로 피를 왈칵 쏟으며 뒤로 거꾸라졌다. 그와 동시에 당삼전의 바지 뒤쪽이 짙게 물들었다.

"삼공자!"

고약한 냄새가 단숨에 코를 찔렀으나, 당세훈은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삼공자의 전신에서 수분이 빠져나간 마냥, 피부가 쪼그라들며 쩍쩍 갈라졌다. 마른 나무토막을 보는 것 같았는데, 칠공에서는 희뿌연 증기가 흘러나왔다.

'염호루에 당했을 때의 증상! 서책에서 본 증상과 똑같다!'

당세훈은 속으로 경악하면서도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만독각에서 미리 준비한 네 가지 해약을 모조리 당삼전의 입 안에 넣었다. 그렇다고 염호루를 해독할 수는 없겠으나, 최소한 연명은 가능케 해주리라.

어느새 다가온 창의각주 당수인이 급히 침을 꺼내 들었다.

"미쳐버리겠군! 해약을 그리 먹였건만, 독이 벌써 대부분의 혈맥으로 번졌어!"

"일단 협백, 유문, 견우, 이렇게 세 혈도를 막아주게! 시간을 벌어야 해!"

서로 빠르게 의견을 교환하며 손을 놀리는 만독각주와 창의각주는 진땀을 흘렸다.

응급처치를 마친 삼공자가 창의각으로 실려갔으나 가솔들의 신경은 당군명에게 쏠려있었다.

당삼전이 마지막에 보인 모습은 구전으로만 들었던 염호루와 흡사했다. 독극 내내 침묵으로 일관하던 당천경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칠공자. 염호루를 온전히 복원했다고 할 수 있나?"

"아닙니다. 복원을 넘어서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염호루가 개선된 점을 말하자 가솔들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보였다. 실전된 당가팔독을 복원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력, 재물, 시간이 소비되었던가.

그런데 갑자기 칠공자가 염호루를 복원하고 이를 발전시켰다고 하니 믿기는 힘든 것이 당연했다.

"칠공자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당군명도 그 방법이 무엇인지 아는 듯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바로 가주님이 드셔 보시는 겁니다."

무덤덤한 말에 중진들을 비롯한 가솔들이 경악했다.

아비에게 극독을 권하는 아들이라니?

하지만 당천경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먹어야 하는 독이 당가팔독임에도 당천경의 눈은 여전히 무미건조했다.

"가져오라. 본 가주가 직접 확인하겠다."

당천경의 짧은 대답이 대연무장에 무거운 침묵을 자아냈다. 옆에 있던 몇몇 중진이 깜짝 놀라 엉덩이를 들썩였으나, 당천경의 눈빛은 확고했다.

당군명은 염호루가 든 옥병을 들고 상석으로 향하는 계단에 올라섰다. 당천경의 눈앞으로 염호루가 든 옥병이 내밀어졌다.

당천경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옥병으로 손을 뻗었다.

독극(毒戟) (2)

36화

염호루의 옥병을 살피던 당천경은 나직이 뇌까렸다.

"확실히 한철 옥병이 아니군."

이런 경우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칠공자의 말대로 염호루의 발전을 이루었거나, 아니면 제대로 된 복원이 아니던가.

사방에 있는 가솔들이 잔뜩 긴장했지만, 정작 당천경은 무표정한 얼굴로 염호루를 한입에 집어 삼켰다.

"헉!"

이 광경을 본 몇몇 가솔은 저도 모르게 경악을 터트렸다. 당천경은 태사의에 턱을 괸 자세 그대로 눈을 감았다.

암경대가 당천경을 둘러싸고 호법을 서는 가운데, 주변의 대기가 점차 후끈해졌다.

'염호루의 양기가 발산되고 있다.'

이 때 만큼은 당군명도 순수하게 감탄했다.

발전된 염호루는 분명히 절세고수에게도 통하는 극독. 아무리 삼원신공(三元神功)을 통해 막대한 내성을 지녔더라도 가볍게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당천경은 앉은 자리에서 염호루의 독성을 조금씩 해소해냈다. 초대 가주 이후로 제일 만독불침에 가깝다고 평가에 걸맞은 내성이었다.

내성 뿐인가. 독에 적응하고 저항하는 온갖 방법과 대법을 익혔을 뿐더러, 가주로서 수많은 독을 다루어본 기교가 삼원신공을 최적의 흐름으로 인도했다.

'신마천주가 가주님을 사천제일인으로 치부했던 이유가 있었군.'

사천성에는 천문암왕 외에도 세 명의 절세고수가 더 있었건만, 신마천주는 찰나의 고민도 없이 당가주를 첫 번째로 꼽았다.

후웅!

당천경을 중심으로 가공할 열기를 품은 기파가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기파를 쬔 가솔들은 조용히 탄성을 흘렸다. 기파가 잠시 얼굴을 스쳐 지나갔을 뿐임에도, 숨이 턱 막히고 피부가 건조해졌다.

'이게 염호루의 열기?'

'정말 엄청나구나.'

가솔들은 염호루를 겪어보지 않았음에도 가공할 독성을 간접적으로나마 겪을 수 있었다. 염호루에 대한 놀람이 더해질 수록 가솔들의 시선은 점차 당군명에게 향했다.

세 번에 걸쳐서 염호루의 열기가 방출되었다. 그 열기가 어찌나 지독한지 단향목으로 만든 태사의에 그을음이 졌다.

천천히 눈을 뜬 당천경은 암경대주에게 물었다.

"시간은?"

"일식경이 지났습니다."

"일식경. 생각보다 느렸군."

잠시 생각에 잠겼던 당천경은 태사의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주변의 가솔들도 일제히 일어나서 예를 갖췄다.

당천경의 말을 기다리는 가솔들의 얼굴은 열렬한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칠공자가 염호루의 복원 및 발전을 해냈음을 인정한다."

실전된 당가팔독 중의 하나, 염호루의 복원과 발전.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일이다. 가솔들이 멍하니 당군명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 당무건이 두 주먹을 번쩍 들며 우렁찬 함성을 터트렸다.

"와아아아!"

당무건의 타고난 목청은 홀로 대연무장을 울리기 충분했다. 광풍대도 따라서 환호성을 터트렸고, 다른 가솔들도 목청껏 소리를 내질렀다.

빠득!

단 한 명의 입에서만 이빨이 갈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정말 당가팔독을 복원했다고? 저놈이 대체 어찌?"

당일세의 손에 들려있던 술잔에 금이 갔다. 처음에는 그저 기분 좋은 자리였다. 삼공자와 칠공자가 알아서 치고받는 좋은 구경을 하면 그만이니.

'당삼전. 독에 그렇게 시간을 쏟아부어 놓고 이렇게 허무하게 지다니. 한심한 놈.'

오로지 독에 대한 대결이니, 제법 팽팽한 흐름이 이어질 것이라 예상했다. 만독각도 똑같이 판단했으니 오판이 아니었다.

그런데 당군명이 이렇게 압도적으로 승리를 거둘 줄이야. 거기서 그쳤다면 차라리 좋았을 것이다.

"염호루..."

도대체 언제부터 준비한 걸까.

당일세는 그야말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경쟁 상대로 신경도 쓰지 않던 하찮은 핏줄이 어느새 자신의 턱밑까지 쫓아왔다.

당일세는 손이 떨리는 것을 확인하자 눈을 좁혔다. 슬쩍 손에 힘을 줬음에도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쾅!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굉음에 당일세는 고개를 틀었다. 당무이가 분을 참지 못한 듯, 앉고 있던 의자의 팔걸이를 때려 부셨다.

이를 잠시 바라보던 당일세는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이야. 셋째도 이리 허무하게 나가떨어졌다. 막내에게 판을 깔아주느니 차라리 우리가 먼저 힘을 합치는 것이 어떠냐."

당무이의 표정은 한층 더 일그러졌다.

"하! 무엇을 믿고 형님이랑 손을 잡겠소? 언제 등 뒤를 찔릴지 모르는데 말이오."

"내가 너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구나."

"쯧!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시오."

다리를 신경질적으로 떨어대던 당무이는 더 이상 못 참겠는지, 자리를 박차고 대연무장을 이탈해버렸다.

당무이의 뒤통수를 노려보던 당일세는 다시 당군명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막내야... 너를 어찌 해야 할까."

어느새 이 자리의 주인공이 된 당군명을 비추는 동공에 희미한 살기가 꿈틀거렸다.

"당군명! 당군명!"

"칠공자! 정말 대단하십니다!"

칠공자와 당군명이라는 이름이 끝없이 호명되는 가운데, 당세훈은 눈물을 주륵 흘렸다.

'칠공자께서 정녕...'

실전된 당가팔독의 복원은 역대 만독각주들의 사명이었다.

실제로 당세훈도 전대 만독각주의 유지를 이어서 실전된 당가팔독, 신선폐(神仙廢)의 복원을 진행 중이었다.

그런데 칠공자가 만독각보다 먼저, 그것도 복원의 갈피조차 제대로 잡지 못했던 염호루의 복원을 해냈다.

'너무나 감격스럽고 고맙구나.'

눈물을 왈칵 쏟아내던 당세훈은 자신을 보며 입꼬리를 올리는 당군명을 바라봤다.

'만독각은 마땅히 당가팔독을 복원한 칠공자를 지지해야 한다.'

당세훈은 허리를 숙이며 공손히 포권을 취했고, 당군명은 묵례로 화답했다.

당군명은 천천히 등을 돌렸다. 그러자 가솔들이 환호성을 멈추고 당군명의 말을 기다렸다.

"다음 복원 대상은..."

당군명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실전된 당가팔독의 간혼수다."

잠시의 침묵 뒤에 다시금 대연무장이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삼공자가 만들어낸 독을 가볍게 이겨내고, 염호루를 복원해낸 칠공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당연히 신뢰가 갈 수 밖에 없었다.

삼공자의 독극 패배와 위중한 상태는 가솔들의 머릿속에서 단숨에 잊혀졌다.

그만큼 당군명이 가솔들에게 남긴 인상은 강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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