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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RIMENTE

T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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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opsis

Chapter 11

서장

1화

격노한 하늘이 입을 쩍 벌렸다.

휘몰아치는 폭우가 골짜기의 음영을 그윽하게 물들였다. 엄청난 양의 빗물이 쏟아짐에도 골짜기를 가득 채운 독무는 흩어지지 않았다.

어두운 하늘을 보던 독마, 당군명이 뇌까렸다.

"이제 그날이 선명히 기억난다."

도움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버림받았던 그날.

적에게 잡힌다는 공포보다 이복형제들에게 버려졌다는 좌절이 엄습했던 그날.

하염없이 쏟아지는 빗물만이 곁을 지켜줬는데 그저 차갑고 막막했다. 천하에 홀로 남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던 그 순간은 참으로 비참했다.

"내가 너희에게 납치당할 때도 이런 날씨였지."

당군명은 턱을 천천히 꺾어 시선을 내렸다.

산처럼 수없이 쌓인 시신 사이로 진득한 핏물이 질척거렸다. 마지막까지 고통에 몸부림친 듯 편히 눈을 감고 죽은 시신이 단 한 구도 없었다.

땅바닥에 고인 선혈이 가죽신을 붉게 물들였으나 당군명은 서슴없이 발을 옮겼다.

"이제 너희 둘만 남았군. 좌사. 우사."

당군명을 가로막은 신마천의 좌사, 우사가 차례로 입을 열었다.

"네놈 덕분에 제법 놀랐다. 오기조원을 이루면 혈성정뇌대법의 세뇌가 깨진다는 것을 처음 알았으니까."

"애초에 독마가 드문 사례이지. 대법으로 기억을 잃고 정신이 불안정한데 상승의 경지를 밟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좌우사자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당군명이 타고난 자질이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는 것을.

누가 알았을까. 그저 실험체에 불과했던 하잘 것 없던 아이가 신마천의 상층부까지 도달하리라고.

피로 전신을 적신 당군명을 위아래로 훑던 우사가 물었다.

"그런데 독마. 어차피 당가에 남았다면 모진 대우를 받다가 죽었을 터. 오히려 우리에게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닌가?"

당군명의 눈이 포악한 살기로 번들거렸다.

"과거의 처지가 어떠한들 내가 감당할 몫이었다. 네놈들이 관여할 바가 아니었어."

당군명의 전신에서 불길한 색의 안개가 새어 나왔다.

이를 본 좌우사자의 얼굴에 긴장의 색이 번졌다.

'아홉 가지의 색. 오기조원을 이루며 성취가 올랐나 보군.'

아홉 빛깔으로 얼룩진 독무가 비구름처럼 부풀어 올랐다.

효월독유마공(淆月毒幽魔功).

영화굉독무(英華浤毒霧).

독마의 성명절기 중 하나였다.

치이익!

바위, 흙, 시신, 병장기.

독무에 닿는 모든 것이 매캐한 연기를 흘려내며 녹아들었다. 독무는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영역을 넓혀갔다.

지금의 당군명은 걸어 다니는 재앙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이를 멀쩡히 버텨내는 존재는 호신강기를 극성으로 운용하는 좌우사자가 유일했다.

하지만 해약을 미리 복용했음에도 몸을 최대한 사려야 했다.

"네놈이 독문무공을 믿고 설치는구나. 무려 오백이 넘는 인원을 죽였으니 슬슬 힘이 모자랄 것이다."

"독마. 우리 덕분에 새로운 마공을 창안했지. 이 은혜를 이렇게 갚을 셈인가. 은혜를 두 배로 갚는다는 당가의 핏줄이?"

당군명의 입술이 사납게 비틀렸다.

미친놈들이.

사람을 납치해서 삶을 송두리째 비틀고 망쳐버린 주제에 염치가 없었다. 과연 도리를 모르는 마귀들이었다.

'내가 저런 놈들과 똑같이 살아왔단 말이지.'

당군명은 자신이 당했던 대법을 떠올렸다.

기억 소거, 정신 개조로 세뇌를 거는 사술.

혈성정뇌대법(血盛征腦大法).

납치 당한 당군명은 대법에 의해 독마의 삶을 강요받았다.

초월경에 도달한 덕분에 혈성정뇌대법이 깨지지 않았다면, 평생을 신마천의 꼭두각시로 살아야 했을 터.

어쩌면 자신의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죽었을지도 몰랐다.

사천당가 칠공자에서 독마가 된 삶의 굴절을 곱씹자 소맷자락이 요동쳤다.

'사천당가 칠공자, 당군명.'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금 되새긴 당군명의 눈꺼풀에서 살기가 삐져나왔다.

"두 늙은이, 네놈들도 슬슬 녹여주겠다."

녹빛 기파를 두른 당군명의 소맷자락이 거칠게 나부끼는 찰나.

쿠웅.

하늘을 가득 채웠던 독무가 통째로 찌부러지며 소멸했다. 그 공백을 칠흑의 마기가 탐욕스레 집어삼켰다.

하늘로 향하는 당군명의 눈에 진녹빛의 스산한 불길이 번졌다.

"신마천주(神魔天主)...!"

우중충한 하늘의 끝자락.

강호의 서쪽을 짓밟은 재해가 강림했다.

신마천주의 시선이 닿자 대기가 천근의 무게를 지닌 듯이 전신을 짓눌렀다.

그럼에도 당군명은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절대 허리를 굽히지 않겠다는 듯이.

"지존을 뵙습니다!"

당군명이 당장 출수해도 상관없다는 듯, 좌우사자는 무방비 상태로 무릎을 꿇었다.

[독마. 네가 타고난 대종사의 자질. 높게 산다.]

벼락처럼 내리 꽂히는 초월적인 목소리.

땅바닥이 위태롭게 꿀렁이고 귀를 먹먹하게 하던 빗소리도 단숨에 묻혔다.

독무로 가득 찼던 골짜기가 어느새 신마천주의 존재감으로 대신 채워졌다.

[새로운 가문을 세워서 본좌를 받들라. 그리하면 당씨의 후사를 잇는 것을 허하겠다.]

좌우사자의 호흡이 살짝 흐트러졌다.

신마천의 지존이 자비를 베푼 전례는 한 번도 없었기에.

'천주께서 진심이시구나.'

'독마의 자질이라면 그럴 만 하다.'

유일무이한 신마천주의 제안.

그럼에도 당군명의 삐뚤어진 입술에는 싸늘한 독기가 맺힐 뿐이었다.

"기억을 되찾으니 알겠다. 나는 단 한 번도 스스로 선택할 기회가 없었음을."

사천당가의 당군명도.

신마천의 독마도.

서로 다른 곳에서 다른 이름으로 불렸으나 이리저리 끌려 다니던 것은 똑같았다.

자신의 의지가 투영되지 않은 삶.

그야말로 부평초와 같은 삶이었다.

"내 삶을 농락한 원한. 지금 이 자리에서 청산하겠다."

당군명은 스스로의 의지로 결정을 내렸다.

비록 그 순간이 삶의 마지막, 찰나에 불과할지라도.

"마지막 선택은 내가 한다."

당군명의 입꼬리가 서서히 호선을 그렸다.

신마천의 마인들에게 납치 당한 이후, 처음 내비치는 웃음이었다.

쩌적!

당군명의 단전에서 뼈와 살을 억지로 뜯어내는 듯한 섬뜩한 파열음이 울렸다.

단전의 중심에 자리한 효월독유마공의 정수, 독정(毒精)이 깨지는 소리였다.

'단 한 수에 모든 것을 쏟아낸다.'

효월독유마공. 파정(破精).

독정을 깨트림으로써 지금까지 축적된 독기를 단번에 터트리는 동귀어진의 한 수.

목숨을 대가로 삼아서 한시적으로 본래의 무위를 초월할 수 있는 절기였다.

"큭."

파정을 펼쳐낸 것과 동시에 칠공에서 피가 쏟아졌다. 일거에 폭주하는 광대한 독기를 몸이 감당하지 못했다.

몸속에 용암이 출렁이는 듯한 격통이 전신을 덮쳤다.

화악!

당군명이 양팔을 좌우로 뻗자 소맷자락이 확 젖혀졌다.

전신에서 발산된 기파가 커다란 원을 그리며 치솟자 골짜기를 후려치던 폭우가 멈췄다.

정확히는 쏟아지던 빗방울이 모조리 허공에 고정되었다. 시간이 멈춘 듯이.

당군명의 손짓에 따라 가늘고 날카롭게 변하는 빗방울.

암기의 형태로 변모한 빗방울들이 수백 가지의 혼탁한 빛깔로 물들었다.

독정의 극독을 모조리 머금어낸 빗방울의 빗방울이 일제히 요동치더니 신마천주를 향해 겨누어졌다.

"네놈의 하늘을 꽃비로 가득 채워주마."

아직 미완성인 절기였으나 신마천주에게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한 수.

당군명의 두 손바닥이 뒤집히자 대기의 흐름이 급변했다.

촤아아!

독기가 가득 실린 빗방울이 일제히 치솟고 수백 갈래의 독무가 용솟음치며 먹구름을 찢어발겼다.

신마천주가 군림하는 하늘이 순식간에 혼탁한 빛깔로 물들었다.

하늘의 중심에 고고히 서있던 신마천주의 발끝이 비틀어졌다.

[무엄한.]

쿠우웅!

하늘이 진동하며 막대한 크기의 장력이 떨어져 내렸다. 어찌나 거대한지 밤하늘의 한 귀퉁이가 떨어지는 듯했다.

쩌저저정!

하늘을 일그러트리는 무채색 파문과 함께 굉음이 끝없이 골짜기를 뒤흔들었다.

목숨을 내던진 최후의 절초임에도 신마천주의 한 수를 꺾기는 힘들었다.

"크흐흐!"

칠공으로 피를 쏟아내는 와중에도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정말로 미쳐버린 걸까.

모르겠다.

스스로 미친 건가 싶다가도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주 즐거웠기에.

'마지막 선택은 오롯이 나의 의지다. 이것이 진정으로 살아간다는 건가.'

당군명은 살짝 기울어졌던 손을 다시 높게 들었다.

심신이 포기를 종용했으나 멈추지 않았다. 양손이 찢기고 혈맥이 터져나감에도 저 새까만 하늘을 끝까지 노려봤다.

구우웅!

막대한 반탄력에 땅이 몇 번이고 움푹 가라앉았는 지반.

그럼에도 당군명은 버텨냈다.

독심(毒心)을 떠올리면서.

"이 원한, 혼백에 새겨서라도 네놈을 녹여버리겠다."

콰아아아앙!

당군명의 마지막 말은 땅이 뒤집히는 굉음에 허무히 흩어졌다.

'처음부터 오직 나의 선택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면!'

당군명은 이 원통함을 혼백에 확실히 새겨 넣었다. 점차 새까매지는 시야에 희미한 무지갯빛이 피어올랐다.

'빛?'

신비로운 빛을 거머쥐고 싶다고 생각하자 의식이 조금씩 희미해졌다.

당군명은 마음 속에 새겨진 원한을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절대 잊지 않도록.

'온전한 내 삶을 살 수 있다면... 내 선택은...!'

간절히 원하는 당군명의 몸이 무지개빛으로 뒤덮였다.

마음에 새기는 원한 (1)

2화

"크윽!"

당군명은 신음과 함께 눈을 떴다. 살짝 움직였음에도 시큰한 격통이 엄습했다.

'살아남은 건가? 어떻게?'

동귀어진의 한 수, 파정을 펼쳤는데 어찌 살아남았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공자님! 몸은 괜찮으세요?"

고개를 돌리자 침상 옆에 딱 달라붙어서 눈물을 글썽거리는 여인이 보였다.

"네가 왜 여기에..."

"공자님?"

"멈춰라!"

당군명은 뻗어오는 여인의 손을 단호하게 쳐냈다. 본래라면 눈앞의 여인이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을 리 없었기에.

시비, 하윤.

어머니를 대신하여 어렸던 자신을 돌봐준 시비.

말이 시비일 뿐, 누님과 같은 존재였다.

'하윤이 살아있을 리가 없다. 환술? 대법의 세뇌에 당한 건가?'

급히 이불을 박차려던 당군명의 이마에 포근한 온기가 내려앉았다. 하윤의 부드러운 손이었다.

"진정하세요. 이곳에는 저와 공자님뿐이니까."

하윤의 몽글한 향과 체온이 당군명의 심장을 진정시켰다.

'정말 살아있는 하윤이다.'

아무리 신마천의 마공과 대법이 뛰어나다고 해도 이런 것까지 흉내 낼 수는 없으리라.

하윤은 싱긋 웃으며 이마에서 손을 뗐다.

"근래에 들어서 다른 공자님들의 괴롭힘이 너무 심해지네요. 확실하지도 않은 말을 그렇게 맹신하다니..."

당군명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무슨 말이지?"

"기억 안 나세요? 장로원주께서 공자님의 자질이 이복형제 중에 가장 뛰어나다고 칭찬하셨잖아요."

당군명의 입술이 일자로 잠겼다.

그래. 기억났다.

조부가 지나가듯 내던진 한마디에 이복형제들의 눈에 칼날이 세워졌다.

평소에는 심심풀이 삼아 괴롭혔다면, 그 이후로는 노골적으로, 악의적으로 무공 수련을 방해했다.

조부가 인정한 자질이 개화하지 못하도록.

또 다른 후계 후보가 나타나지 않도록.

'그래서 납치 당하기 전까지는 성취가 지지부진했었지.'

기억을 떠올린 당군명의 턱이 살짝 올라갔다.

어째서 과거의 일이 재현되는 걸까.

'설마 내가 과거로 회귀한 건가?'

믿기지 않는 일이었으나 눈앞의 현실을 보면 납득해야 했다.

"공자님이 수련을 거의 안 하시는데도 괴롭힘이 끊이질 않네요. 제가 가주님께 말씀드릴까요?"

당군명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가주님은 당연히 알고 계실 거다."

"설마요. 가주님이 아무리 냉정하시다지만..."

"본가는 강자존을 따르지. 나는 약해서 당한 것 뿐이다."

하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도 알아요. 본가는 정사지간의 문파니까요. 그런데 공자님. 말투가 갑자기 딱딱해지셨어요. 아직 몸이 많이 안 좋으세요?"

"그런가?"

당군명은 입술을 비틀었다. 살짝 웃는 것만으로도 한껏 부어오른 얼굴이 따가웠으나 상관없었다.

'강자존. 내가 위에 있는 놈들을 얼마든지 찍어 눌러도 된다는 거다.'

소심하고 유약했던 당군명은 이제 없다.

마도에서 발버둥 쳤던 독마만이 남았을 뿐.

'이번에는 그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는 삶을 살겠다.'

어린 시절로 회귀한 덕분일까. 선명해지는 기억 사이로 전생에는 묻지 못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어머니의 일을 반드시 물어봐야겠다.'

당군명이 듣고 싶은 대답.

오직 아버지한테만 들을 수 있을 터.

그 대답에 따라 앞으로의 행보가 결정되리라.

"공자님?"

"아버지를 뵈어야겠다."

"네? 지금요?"

곧장 의복을 챙겨 입는 당군명을 보는 하윤의 눈이 커졌다.

'가주님을 멀리서 보는 것조차 꺼리시던 분인데?'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당군명은 가주를 극히 무서워했다. 오죽하면 가주라는 단어가 나오기만 해도 몸을 흠칫거릴 정도였다.

그런데 먼저 가주전에 찾아간다니?

당군명의 갑작스러운 변화가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공자님! 잠시만요!"

뒤늦게 하윤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칠영각에서 나온 당군명은 곧장 가주전으로 향했다.

****

사천당가 가주전.

가주의 친아들이 직접 발걸음 했음에도 가주전의 대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가주 직속 친위대, 암경대의 무인은 무뚝뚝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두 시진은 더 기다리셔야 합니다. 일단 칠영각으로 돌아가시지요."

당군명은 알고 있었다. 시간에 맞춰서 다시 방문해도 굳게 닫힌 저 문은 열리지 않는다.

"기다린다."

당군명의 단호한 대답. 치켜세워진 눈빛에서는 희미한 독기까지 어려있었다.

'칠공자가 이런 눈을 할 수도 있었나.'

칠공자는 워낙 소심하고 유약하여 아랫사람에게도 제대로 말을 붙이지 못했다.

그만큼 심지가 약하기에 다른 공자들의 괴롭힘에 수련도 못 하는 것일 터.

'무언가 바뀐 것 같군.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

처음 보는 칠공자의 또렷한 눈빛에 암경대 무인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

휘잉!

칼날과 같은 겨울 바람이 옷깃을 파고듦에도 당군명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 시진을 넘기기 직전.

안쪽에서 전음을 받은 암경대 무인이 옆으로 비켜섰다.

"가주님께서 들라고 하십니다."

당군명은 암경대가 지키는 문 다섯 개를 넘고 나서야 집무실에 도달할 수 있었다.

뒷짐을 지고 창밖을 바라보는 중년인.

건장한 등에서는 한기가 나풀거렸다.

눈 덮인 성벽과 같은 압박감이 발끝을 희롱함에도 당군명은 걸음을 내디뎠다.

천문암왕(千雯暗王). 당천경.

독마의 경험 덕분인지 전생에서는 느끼지 못한 막대한 존재감이 뼈저리게 다가왔다.

당군명은 내색하지 않고 겸허히 예를 갖췄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발걸음과 목소리가 바뀌었군."

천천히 등을 돌리는 가주, 당천경.

차가운 한철을 박아 넣은 듯한 냉엄한 눈빛 때문일까. 굳게 다물어진 입술과 날렵한 턱선이 더욱 날카롭게 다가왔다.

당천경의 건조한 시선이 전신을 후벼팠음에도 당군명은 아무렇지 않았다.

"눈빛도 변했군. 마치 다른 사람처럼."

"예. 이제 이렇게 살아보고자 합니다."

멍과 붓기가 가득한 막내아들의 얼굴을 봤음에도 당천경은 무심히 물을 뿐이었다.

"용무는?"

당군명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이 질문 자체로도 가주의 권위에 반기를 드는 것일 수도 있기에.

하지만 반드시 들어야만 했다. 가슴에 대검처럼 박힌 일이었으니.

"어머니의 독살. 왜 조용히 묻으셨습니까."

당천경의 건조한 목소리가 내리 깔렸다.

"그것이 본가에 있어서 최선이었다."

당군명의 눈꺼풀이 살짝 가라앉았다.

"어머니를 버리고 사천당가를 선택하셨군요."

"강자존. 이 원칙에 누구도 예외는 없다. 그 사람도, 너도, 나도."

부자간의 거리는 겨우 열 걸음 간격이었으나 훨씬 멀게 느껴졌다.

냉소를 흘리던 당군명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각골혜의, 각심구한. 저도 이를 실천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겠습니다.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도록."

각골혜의(刻骨惠義).

은혜는 뼈에 새겨서 보은하고.

각심구한(刻心仇恨).

원한은 독심(毒心)에 새겨서 복수한다.

당천경은 당군명이 사천당가의 첫 번째 가칙을 언급한 속뜻을 꿰뚫어 봤다.

"복수를 위해 가주가 되겠다는 것이냐."

당군명은 당천경의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

"가주가 되면 모든 원한을 풀어낼 수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가문 내의 원한 뿐인가.

신마천과 신마천주도 복수의 시야에 넣었다.

'신마천과 신마천주를 단신으로 상대하는 것은 무리다. 이번 생에서는 내가 당가를 이용해주지.'

복수를 위한 가주 승계.

사천당가를 집어삼키는 것이 신마천주에게 향하는 첫걸음이 되리라.

당군명의 대답과 동시에 설원이 기울어지는 듯한 압력이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

완전히 달라진 막내아들을 보는 당천경의 눈은 번들거리는 얼음과 같았다.

"좋다. 그 또한 강자존이다."

당천경은 뒷짐을 풀고 두 팔을 늘어뜨렸다. 품이 넓은 소매가 휘장처럼 내리 앉으며 위엄을 과시했다.

"나는 언제나 이곳에 있다."

가주의 축객령이었다.

****

옷자락을 펄럭이며 멀어지는 당군명을 보던 암경대가 하나둘 입을 열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군요."

"눈빛만 보자면 범상치 않아. 어지간한 또래보다 나을듯한데."

미약한 기대를 품은 대원이 있는 반면에, 회의적인 시선으로 보는 자도 많았다.

"다른 공자들과 달리 외척의 지원도 없으니 한계가 분명해."

"애초에 다른 공자들의 괴롭힘이 아니더라도 천성이 순해서 무공을 꺼리지 않았던가. 이제 와서 뭘 할 수 있을지..."

암경대는 궁금해졌다. 칠공자가 며칠 새에 본래 모습으로 돌아올지, 아니면 본가의 고정된 흐름에 역변을 가할지.

당군명은 칠영각으로 돌아가지 않고 북쪽으로 향했다.

"칠공자. 곧 해가 저뭅니다. 가솔들과 함께 오르시지요."

"괜찮다."

당군명은 가솔의 제안을 거절하고 홀로 걸음을 옮겼다.

사천당가 북쪽 대문을 넘으면 곧장 산을 오를 수 있었다. 그 산에는 예로부터 당가의 선조들이 묻혀서 당산(唐山)이라 불렸다.

당군명은 당산의 흙을 이불 삼아 잠든 어머니를 찾아갔다. 양지에 묻힌 다른 가솔들과 달리 어머니는 그림자가 드리우는 차가운 땅에 묻혀야만 했다.

'어머니.'

당군명은 어머니의 묘소를 살피더니 차디찬 겨울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번 생은 어머니와 저를 위한 선택을 할 겁니다. 전생에는 선택할 수조차 없었으니 말입니다.'

-내 아들. 당가의 사람들은 모두가 독심(毒心)을 품지만, 너만은 온심(溫心)을 품어주렴.

아주 어릴 적, 어머니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랐다.

하지만 당군명은 나직이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저도 독심을 품어야겠습니다.'

당군명의 눈매에 점차 날이 섰다. 당산의 겨울 바람도 눈에 서린 한기에 비할 바는 되지 못했다.

'내가 당한 원한. 열 배로 돌려주겠다.'

혈성정뇌대법이 깨지면서 되찾은 기억이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

막내였던 자신을 미끼로 내던지고 저들끼리 도망치던 이복형제들의 뒷모습이 아른거렸다.

-여기 남아서 시간을 벌어라. 독이나 암기, 네놈의 몸이라도 던지란 말이다!

-천한 핏줄. 이렇게라도 효용을 보여.

-너 같은 것과 절반이라도 같은 피가 흐르는 것이 역겨웠는데 좋은 자리가 마련되었군.

그 덕분에 신마천에 납치되어 독마가 되어야만 했다. 마음에 새겨야 할 원한은 신마천에만 있지 않았다.

'보고 싶군. 나를 버린 핏줄들의 얼굴이.'

그들은 모를 것이다.

보잘것없던 막내가 독마의 무공과 손속으로 가문을 휩쓸 생각이라는 것을.

힘에는 힘.

전생에는 약자였으나 현생에서는 강자로서 사천당가의 꼭대기에 오를 셈이었다.

"어머니. 가주가 된 다음에 따뜻한 곳으로 옮겨드리겠습니다."

당군명은 묘소 앞에 꽃 한 송이를 내려놓았다.

어머니께서 좋아하셨던 부용화였다.

****

칠영각으로 돌아온 당군명은 곧장 하윤을 찾았다.

"하윤."

"네. 공자님. 약을 발라 드릴까요? 에휴. 멍이 가라앉질 않네요."

"아니. 만독각으로 가서 독을 구해와라."

예상치 못한 말에 하윤이 눈을 껌벅거렸다.

"네? 갑자기 독이요?"

당군명은 옥패를 건네주었다. 사천당가 칠공자를 상징하는 옥패였다.

"이 옥패를 내밀면 흔쾌히 내어줄 거다. 내가 원하는 독들은 그리 귀한 것이 아니니까."

당군명이 적어준 종이를 보던 하윤이 깜짝 놀랐다.

"이 많은 독을 어디다 쓰시게요? 직접 드시려는 것은 아니죠?"

하윤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심약한 당군명이 괴롭힘에 지쳐서 그릇된 선택을 할까 염려스러웠다.

이를 놓치지 않은 당군명이 입꼬리를 날카롭게 세웠다.

"혹여나 다른 사람한테 쓰는 것은 걱정 안 되고?"

하윤의 눈썹이 잘게 꿈틀거렸다.

"공자님이 후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절대 피할 수 없는 일이에요. 다만, 얼마든지 독을 써도 좋으니 역으로 당하지만 마세요."

딱딱해진 하윤의 목소리에 당군명은 도리어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너도 있었지."

"네?"

사천당가는 약자였던 자신과 어머니를 배척하고 모질게 대했으나, 하윤처럼 곁을 지켜주는 가솔들도 분명히 있었다.

당군명은 문득 깨달았다. 이 삭막한 가문에 자신의 온심(溫心)이 향해야 할 대상도 있음을.

'전생에 받은 은혜. 이번 생에 갚겠다.'

은혜는 두 배로. 원한은 열 배로.

이것저것 청산해야 할 은원이 많이 떠오름에도 웃음이 흘러나왔다. 전생에는 이런 선택조차도 허락되지 않았었으니.

당군명이 웃기만 하자 하윤은 어쩔 수 없이 만독각으로 향했다.

홀로 남은 당군명은 슬며시 주먹을 쥐었다.

'전생에 완성하지 못한 독문무공을 이번에는 완성하는 거다.'

신마천주도 인정한 대종사의 자질.

이번에는 사천당가에서 꽃 피울 생각이었다.

다시금 하늘에 꽃비를 내릴 수 있도록.

"일단 형제부터 죽이고 시작한다."

피가 절반만 섞인 다른 형제들은 자신을 죽이는 것에 망설임이 없을 터.

후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복수를 해내기 위해서는, 강해져야만 했다.

결심한 당군명은 곧장 몸을 일으켰다.

다른 이복형제들을 잡아먹기 위한 첫 걸음을 옮겨야 할 때였다.

마음에 새기는 원한 (2)

3화

당군명은 침상에서 일어나 몸을 살폈다.

손이 참으로 작고 연했다. 독과 암기로 인해 흉해진 독마의 손과 완전히 달랐다.

동경으로 얼굴을 살피던 눈이 스산해졌다.

'내 어릴 적의 얼굴이... 맞군.'

어찌나 두들겨 맞았는지 붓기와 멍이 가득했다. 그 탓에 이목구비를 제대로 확인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전생에 어떤 괴롭힘을 당했는지 선명히 되새길 수 있었다.

당군명이 동경을 내려놓을 때, 하윤이 목함을 들고 들어왔다.

"공자님. 말씀하신 독, 전부 구해왔어요."

하윤은 독이 들어있는 목함과 함께 받았던 옥패도 함께 내려놓았다.

"수고했다. 운기조식을 할 테니 나가라."

"무슨 일이 생기면 부르세요. 공자님."

하윤은 곧장 가부좌를 트는 당군명을 뿌듯한 눈으로 바라봤다.

'이렇게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신 것은 참 오랜만이네.'

막상 며칠 전까지만 해도 무공 수련은 엄두도 내지 못했고, 밖에 나서는 것조차 두려워 했다.

온종일 침상에 누워서 몸을 웅크리는 뒷모습을 볼 때마다 속이 쓰라렸다.

그랬던 칠공자가 이렇게 생기가 가득한 눈을 반짝이니 괜히 눈물이 나려 했다.

하윤이 밖으로 나가자 당군명은 본격적으로 내부를 관조했다.

'삼원심법(三元心法).'

가주, 소가주만이 익힐 수 있는 삼원신공(三元神功)에서 파생되어 직계만 익힐 수 있는 무학.

제법 괜찮은 심법이었으나 당군명의 눈에는 차지 않았다.

효월독유마공(淆月毒幽魔功).

전생의 독마가 독(毒)으로써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창안한 독문무공.

신마천의 모든 독공을 집대성하여 신마천주조차 인정했다.

당군명은 이번 생에서도 이 무공을 익혀 전생에서 닿지 못한 경지에 다시금 도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공을 그대로 익힐 수는 없고.'

아무리 사천당가라 해도 마공을 익힐 수는 없었다. 마기를 풍기는 순간, 사방에서 암기와 독이 날아올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효월독유마공에 버금가는 심법을 창안할 수는 없는 노릇.

당군명은 입문용으로 익힐 무공을 짜내기 시작했다.

'일단 축기 구결은 삼원심법에서 가져오고 운기 경로도 기해혈, 천지혈, 유중혈을 중심으로 새롭게 짠다.'

효월독유마공에서 마기(魔氣)의 축기 구결과 운기 경로를 과감히 버렸다. 그로 인한 공백은 삼원심법으로 채울 셈이었다.

앉은 자리에서 심법을 재정립하는 것은 천하에 손꼽는 고수에게도 힘든 일.

그럼에도 당군명은 순식간에 구결과 무리를 새로운 흐름으로 엮어냈다.

신마천주도 탐했던 대종사의 자질이 독마의 삶을 토대로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중이었다.

'이 정도면 쓸만하겠군. 나머지는 당가의 무학을 익히면서 계속 다듬으면 된다.'

효월독유마공과 삼원심법을 중심으로 엮어낸 새로운 심법.

효월삼원공(淆月三元功).

새로운 시작이었으나 당군명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전생에는 마공만 파고들었지만...'

지금은 여러 무공을 접할 수 있었다. 그것도 강호에서 손꼽히는 독문(毒門)인 사천당가의 무학이라면 더할 나위 없었다.

당군명은 효월삼원공으로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삼원심법을 기반으로 한 덕분인지 단전의 내공과 충돌하지 않고 부드럽게 융화했다.

우웅!

효월삼원공을 통해서 전신 혈맥으로 퍼지는 내공. 열두 번의 순환을 끝마치자 단전에 아주 조그마한 덩어리가 뭉쳐졌다.

당군명은 이를 독정(毒精)이라 불렀다.

전생 독마의 근간, 이번 생도 마찬가지였다.

'성공이군. 효월삼원공에 입문했다.'

단전에 독정을 빚어내는 것.

효월삼원공의 첫 단계, 즉 일성(一成)의 성취를 얻었다.

이 독정이야말로 마도 독공의 정화.

사천당가에도 독정을 빚어낼 수 있는 무학은 없었다. 이로서 사천당가의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이점을 얻었다.

'슬슬 시작해볼까.'

효월삼원공은 성취가 오를 때마다 새로운 공능을 발아한다.

대성하여 모든 공능을 얻으면 자연스레 만독불침(萬毒不侵)과 독인지경(毒人之境)을 이룩할 수 있도록.

당군명은 내공을 전신으로 퍼트려서 새롭게 얻은 공능을 펼쳐냈다.

독을 집어삼켜 내공을 키우는 공능.

포식(飽食).

'전신에 탁기가 아주 많이 쌓였군.'

당군명의 입꼬리에 만족스러운 호선이 걸렸다. 보통은 혈맥에 쌓인 노폐물, 즉 탁기를 내공으로 태워버리거나 배출한다.

하지만 당군명에게는 일종의 영약이나 다름없었다.

'탁기도 결국 몸의 균형을 그르치는 독.'

효월삼원공의 내공이 전신 혈맥을 질주했다. 쌓였던 탁기가 점차 녹아들며 독정에 흡수되었다.

자연스레 혈맥이 점차 깨끗해지고 넓어졌다.

마치 고수에게 벌모세수를 받은 것처럼.

'좋아. 운기조식의 효율이 달라졌다.'

아직 효월삼원공의 성취가 낮아 모든 탁기를 녹이지는 못했으나, 이것만으로도 커다란 도움이 됐다.

내공이 늘어난 것은 물론이고 독정의 크기도 미세하게나마 커졌으니.

"후."

눈을 뜬 당군명은 목함에 있는 첫 번째 옥병을 꺼내서 확인했다.

적낭산(赤浪散).

피부에 닿으면 붉게 쪼그라들면서 작열감과 함께 누런 진물이 흘러나오게 하는 독.

당군명은 적낭산을 시작으로 아홉 개의 독을 꼼꼼히 확인했다.

눈앞의 독들은 대체로 독성이 약했다. 하지만 효월삼원공의 성취를 높이고 독정을 키우기 위한 첫 계단으로 적당했다.

"이번 생에도 독을 엄청 먹겠군."

당군명은 적낭산을 입에 털어 넣곤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우웅!

효월삼원공에 짓눌린 적낭산은 점차 분해되어 독정의 크기를 키우는 데 일조했다.

적낭산을 완전히 포식한 당군명은 곧장 두 번째 독도 복용했다.

모든 독을 포식할 때까지 이 과정이 반복되었으나, 독을 잡아먹는 속도는 점차 빨라졌다.

마침내, 아홉 번째 독까지 완전히 갈무리했음에도 당군명은 운기조식을 멈추지 않았다.

'이대로 성취를 끌어올린다.'

전생이었다면 곧장 이성에 오를 수 없을 터. 하지만 지금은 전생의 삶과 심득이 있었다. 충분히 두 번째 단계, 이성(二成)에 도전할 만했다.

단전에 자리한 독정을 중심으로 효월삼원공의 내공이 맹렬히 회전했다.

솨아아!

전신의 탁기, 아홉 종류의 독을 모조리 집어삼킨 독정이 더욱 농밀해졌다.

효월삼원공의 성취가 이성(二成)으로 올랐다는 증거.

'마도와 당가의 장점을 모두 취해야 한다.'

독공의 수준은 마도가 더욱 높았으나 암기 무학은 당가가 한 수 위였다. 이러니 전생, 그리고 현생에 익힐 무공들을 하나의 무도(武道)로 엮어내야만 했다.

'그래야만 독과 암기의 정점에 도달할 수 있겠지.'

그리고...

그 끝에는 신마천과 신마천주가 있으리라.

"후우."

모든 독을 흡수한 당군명의 눈이 진녹빛으로 형형하게 빛났다.

사천당가의 정상에서 군림하기 위한 첫걸음을 밟게 되었다.

****

당군명은 십여 일이 지나고 나서야 칠영각 밖으로 나섰다.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는데 신형이 앞으로 쭉쭉 뻗어나갔다. 사천당가 기본 보법인 암영보(暗影步)를 입맛대로 고쳐낸 것.

'음? 방금 칠공자의 발놀림이?'

'이상하다. 분명 무공을 거의 익히지 않았을 텐데.'

옆을 지나던 가솔들은 확연히 달라진 당군명에 눈을 떼지 못했다.

눈길을 끌 정도로 가벼운 발걸음은 그렇다 치고 눈빛이 예전과 완전히 달랐다.

과거에는 눈이 흐리멍텅하고 시선이 땅을 향했다면, 지금은 또렷한 안광을 발했다.

사소한 변화였으나 사람 자체가 완전히 달라진 것처럼 보였다.

거침없이 대로를 가로지르던 당군명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전생에는 드나들 일이 거의 없었지."

당군명은 눈앞의 전각을 바라봤다.

정암각(靜暗閣).

사천당가의 비급을 보관하는 전각.

무공 성취, 공적에 따라 오를 수 있는 층이 달라지는데, 이는 직계라 해도 따로 혜택이 없었다. 오로지 본신의 능력만으로 올라서야만 했다.

사천당가의 강자존을 제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신마천의 마공은 모두 머릿속에 있다. 이제 사천당가의 무공만 얻어낸다면...'

당군명은 무공의 갈래에 구애 받지 않고 필요한 무리와 심득만 골라내어 새로운 무공을 만들 셈이었다.

오롯이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할 수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전생에서는 이루지 못했던 원한을 갚기 위해서.

'이번에는 당군명으로 살면서 전생의 독마를 뛰어넘는 거다.'

정암각으로 들어서려던 당군명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마침 정암각 밖으로 나오는 이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일행의 주인공으로 보이는 소년이 당당히 걷고 있었다.

소년의 얼굴을 본 당군명이 반가운 듯 웃었다.

살짝 비틀어진 입술은 옅은 냉기로 번들거렸다.

"당손육."

사천당가 육공자, 당손육.

회귀 직전의 당군명을 두들겨 팬 장본인.

당손육은 누가 감히 자신의 이름을 부르나 싶어서 고개를 돌렸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설마 네놈이 나를 부른 거냐?"

"당손육이라는 이름이 네놈 말고 또 있던가."

당손육이 의아한 듯 턱을 갸웃거렸다.

"원래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녀석이... 미친 거냐?"

"더는 웅크릴 필요가 없어서 말이다."

당군명이 뒷짐을 진 채 조소를 흘리자 당손육의 눈이 묘해졌다.

"오늘따라 비천한 주제에 고개를 빳빳이 들던 네놈의 모친과 닮았구나."

당군명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으나, 당손육은 깨닫지 못했다.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당군명을 조롱하기 바빴다.

"웃어? 이 모자란 것이 저번에 머리를 잘못 맞았나 보군."

주변의 사내들도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육공자의 손속이 매섭기는 했지요."

"어찌 보면 칠공자도 대단합니다. 저 같으면 부끄러워서 나오지 못했을 겁니다."

당손육에게 아부하던 사내들은 슬쩍 당군명을 쳐다보다가 흠칫거렸다.

'무슨 눈빛이...'

'칠공자가 원래 이런 분위기였나.'

미소와 함께 일렁였던 진녹빛의 안광. 동공 안에 녹빛의 독사가 꿈틀거리는 듯한 섬뜩함이 목뒤를 스쳤다.

어느 순간, 동조하던 사내들이 입을 꾹 다물자 당손육의 미간이 서서히 좁아졌다.

"내가 분명 정암각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번에는 단순히 매타작으로 끝나지 않을 거야."

"그 방정 맞은 입. 녹여주마."

당손육이 허리춤의 요대를 한 손으로 잡으며 걸어왔다.

당군명은 뒷짐을 지는 척, 오른손을 슬쩍 허리 뒤로 숨겼다.

당손육의 기도를 슬쩍 읽어내던 당군명은 낮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적당하군."

효월삼원공 이성(二成)의 공능을 시험해 보기에.

당군명이 뒤로 숨긴 오른손 검지 끝에 아주 작은 물방울이 맺혔다.

참으로 불길한 진녹색. 혹여나 닿으면 위험할 것 같은 빛깔이었다.

마음에 새기는 원한 (3)

4화

이성(二成)의 공능은 추출(抽出).

독정에 쌓은 독을 모공으로 배출하는 공능.

독이 없거나 하독의 은밀함을 요할 때 아주 유용했다.

바로 지금처럼.

'당가에서 알면 경악하겠군.'

당가는 심법을 통해 독의 내성을 높이고, 손과 도구에 기반한 섬세한 기교를 용독술로 발전시켜 왔다.

반면 마도는 독을 몸에 품어서 부작용을 감내하는 대신, 내공과 독을 결합하여 살상력을 증대하는 방향으로 무학이 뻗어나갔다.

이렇듯 같은 독공(毒功)이라도 전혀 다른 방향을 추구하니 사천당가의 무공도 반드시 취해야만 했다.

촤악!

당군명이 손가락 끝으로 독을 추출하는 찰나.

당손육의 양쪽 소맷자락이 거칠게 나부꼈다.

"건방지게 내 앞에서 오른팔로 뒷짐을 져? 오른팔을 부러뜨려주마."

추영수(追影手)를 펼쳐내는 당손육의 손이 날카롭게 구부러졌다. 그림자처럼 길게 늘어지는 수영(手影)이 당군명의 어깨를 움켜쥐려 했다.

"응?"

당손육은 심히 당황스러웠다. 기세 좋게 뻗어낸 손에는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허무하게 허공을 가를 뿐.

당군명이 뒷짐을 진 자세 그대로 발만 비틀어 피해낸 것이었다.

'그저 운이겠지.'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던 당손육의 눈이 확대되었다. 어느새 눈앞으로 당군명의 손바닥이 급격히 커지고 있었다.

"이익!"

당혹스러움을 감출 틈도 없이 급히 허리를 뒤틀어야 했다. 야속하게도 뱀처럼 교묘히 휘어지는 손바닥은 더욱 가까워졌다.

짜아악!

당손육의 얼굴이 옆으로 틀어지며 피가 섞인 침이 튀어나왔다.

"추영수는 이렇게 펼치는 거다."

"너! 감히!"

당군명을 죽일 듯 노려보던 당손육의 눈이 잘게 떨렸다.

"끄으윽."

당손육은 오른쪽 뺨을 부여잡으며 신음을 흘렸다. 뺨을 중심으로 화상을 입은 것처럼 작열감이 올라왔다.

'뭐야. 진물까지 나온다고? 설마... 적낭산?'

증상으로 독을 유추한 당손육은 눈을 찌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원인은 당군명의 오른손인데, 정작 당군명은 멀쩡해 보였다.

더구나 독으로 인한 증상이 너무나 빠르게 일어났다. 기이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너.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야."

당손육은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다.

대체 어떤 방법으로 적낭산을 하독했는지 알 수 없었다.

당군명은 눈매를 가느스름하게 좁힐 뿐이었다. 비웃음이었다.

"이 천한 놈이!"

발끈한 당손육은 뺨에 올라오는 고통을 무시하고 달려들었다. 흥분하여 잔뜩 내공을 끌어올리자 손바닥에 녹빛이 맴돌았다.

"삼원장법인가. 조잡하군."

당군명은 어깨에 회전을 실어서 가볍게 피해냈다. 타점을 잃은 당손육의 손바닥은 애꿎은 소나무를 후려칠 뿐이었다.

터엉!

장력에 의해 소나무가 흔들리자 머리 위로 솔잎이 우수수 쏟아졌다. 가벼운 발놀림으로 거리를 벌린 당군명은 솔잎을 잡아챘다.

"이거 괜찮군."

바늘 모양의 솔잎. 대침(大針) 대신에 사용하기에 제격이었다.

당군명은 손가락 끝으로 추출한 독을 묻힌 채로 손목을 튕겼다. 옅은 파공음과 함께 손끝에서 흐릿한 실선이 그려졌다.

투두둑!

"아악!"

바람을 갈라낸 솔잎이 당손육의 어깨와 팔뚝, 가슴팍에 박혔다. 상당한 힘이 실렸는지 살갗을 파고든 솔잎이 거세게 진동했다.

비무를 지켜보던 가솔들은 헛숨을 들이켰다.

"허! 솔잎으로?"

"칠공자가 언제 저런 수준의 암기 기교를 펼칠 수 있게 된 거지?"

아무리 내공을 가득 실었다고 한들, 뒷받침해주는 기교가 없다면 솔잎으로 피륙을 꿰뚫기는 힘들었다. 무공을 단련하는 무인의 단단하고 질긴 피부라면 더더욱.

가솔들은 당군명이 연달아 보여주는 무위에 눈을 떼지 못했다.

"큭!"

당장 몸에 박힌 솔잎을 뽑으려던 당손육은 머리를 휘청였다.

'어?'

머리가 핑 돌고 오른팔은 마비가 된 듯 저릿했다. 그런 와중에 내공은 조금씩 흩어졌다.

'산공독에... 오른팔의 마비 증상은 영각독?'

이리저리 비틀거리던 당손육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세세히 관찰하던 당군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효과는 확실하군."

당손육은 효월삼원공으로 포식한 독에 중독되었다.

거기에 효월삼원공의 내공로 독의 중독을 가속화하고 삼원심법의 내성을 억눌렀다. 이러니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밖에.

"너... 어떻게?"

당손육은 아직도 자신이 어떻게 중독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당군명의 손 움직임을 놓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더욱 당혹스러웠다.

타악!

암영보를 밟은 당군명은 어느새 당손육의 뒤에 자리했다. 그러곤 왼팔을 잡아 올렸다.

"오른팔은 영각독 때문에 덜 아플 테지."

당군명의 의도를 깨달은 당손육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멈춰! 이러고도 네가 무사할 줄..."

당손육은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당군명의 손이 목젖에 닿은 탓이었다.

은밀하고도 오싹한 느낌이 마치 뱀이 올라선 듯했다.

"조용히. 목을 꺾어버리고 싶잖나."

당군명은 당손육의 왼팔을 뒤로 돌려버렸다.

뿌드득!

당손육은 기괴하게 꺾인 자신의 왼팔을 보곤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악! 내 팔! 죽여버릴 거야! 이 천한 놈이!"

당손육은 죽을 힘을 다해 바둥거렸으나 당군명의 악력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입을 녹여주겠다고 했지."

당군명은 손으로 당손육의 입을 틀어막은 채 적낭산의 독을 배출했다.

"으브브븝!"

입술과 그 주변에 잔뜩 번진 적낭산. 얼굴에 화상을 입은 듯이 붉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입이 타드는 고통에 당손육은 제대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억눌린 신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쾅!

당군명은 몸을 들썩거리는 당손육의 머리를 찍어 밟았다.

바닥에 머리가 처박힌 당손육은 손발을 꿈틀거릴 뿐,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피가 묻었군. 더럽게."

당군명이 밑창을 질질 끌자 바닥에 핏자국이 묻어나왔다.

"육공자!"

순식간에 패배해버린 당손육.

비무를 관전하던 사내들이 경악하여 뛰어왔다.

"머리에서 피가!"

"팔과 머리가 흔들리지 않게 조심히! 그리고 독도 여럿 중독되신 것 같다."

"도대체 어떻게... 하독하는 것을 전혀 못 봤는데?"

사내들은 다급하게 당손육을 어디론가 옮겼다.

이를 보던 당군명은 느긋하게 오른손으로 뒷짐을 졌다.

'오늘은 인사에 불과하다. 한 번에 끝내기는 너무 아쉽지 않나.'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렸으나 당군명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당하게 옷자락을 펄럭이는 모습에서 이전의 유약하고 소심했던 모습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당군명이 정암각으로 들어가자 가솔들이 기다린 듯 말을 쏟아냈다.

"칠공자가 육공자를 꺾다니?"

"칠공자는 무공 수련을 거의 못 했는데?"

"그보다 하독하는 것을 본 사람 있나? 육공자가 다종의 독에 중독되신 것 같은데 말이 되는 일인가?"

가솔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며 복기하면 할수록 당군명이 보여낸 무위에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의 패배는 그저 단순하지 않았다. 사천당가는 따로 후계 경쟁이 없었다.

강자존의 원칙에 따라 태어날 때부터 경쟁을 벌이니 삶 자체가 후계 경쟁이었다.

오직 한 사람이 살아남거나.

독보적인 강자가 다른 핏줄들을 굴복시키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닌 이상, 후계 경쟁은 끝없이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 당손육의 패배는 잔잔했던 후계 경쟁의 구도를 뒤흔드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손육의 패배 소식은 단숨에 사천당가 곳곳에 퍼져갔다.

****

정암각의 일층을 책임지는 사서, 일사서(一司書)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칠공자는 일 층만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알고 있다."

당군명은 대충 대꾸하곤 안쪽으로 들어갔다.

'본격적으로 수련할 생각인가? 이제야 다른 형제들의 괴롭힘을 이겨낼 독기를 품었는지.'

'첫 시작은 독? 아니면 암기?'

당손육을 철저하게 짓밟았기 때문일까.

본래라면 관심조차 주지 않을 가솔들이 당군명의 행보에 주목했다. 하지만 당군명의 목적은 정암각의 비급이 아니었다.

'일단 다른 것보다도 그걸 먼저 얻어야겠지.'

당군명은 일층의 그 어떤 책장에도 눈을 두지 않고 빠르게 지나쳤다.

멈춘 곳은 이층으로 향하는 계단이었다.

"칠공자께서는 이층에 오를 자격이 없습니다."

당연하게도 계단은 이층의 사서가 지키고 있었다.

당군명은 그 모습을 보며 여유롭게 뒷짐을 졌다.

"이층의 시험에 도전하겠다."

워낙 조용했기에 당군명의 낭랑한 목소리가 일층 전역에 확실히 퍼져나갔다.

일층에 들어오자마자 이층에 도전한다는 말에 가솔들은 서책에서 눈을 떼고 당군명을 바라봤다.

이층의 사서, 이사서(二司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시험에 도전하여 실패했을 경우, 다음 도전은 한 달 뒤에 가능합니다. 신중하게 도전하십시오."

"쓸데없는 걱정이다. 곧장 삼층에도 도전할 테니까."

잠시 고민하던 이사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은 간단합니다. 향이 모두 타기 전에 여섯 개의 독을 전부 맞추시면 됩니다."

이사서는 짧은 향 하나를 탁자 옆에 두더니 불을 붙였다. 향의 길이를 보니 대충 일다경보다 더 짧은 시간 내에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그냥 향이 아니군. 수면향인가.'

제한 시간을 알리는 것과 동시에 정신을 흩어놓으려는 용도로 보였다.

하지만 수면향은 조금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체내에 들어오는 족족 효월삼원공에 사로잡혀 독정에 흡수되는 중이었다.

'독에 대한 공부가 충분하거나, 어느 정도 기민한 오성이 받쳐줘야 한다. 칠공자가 둘 중 하나라도 해당이 될까?'

칠공자가 어떤 방법으로 독들을 판별해낼지 관심을 기울이던 이사서는 깜짝 놀랐다.

"칠공자!"

이사서가 말릴 틈도 없이 당군명은 옥병에 담긴 독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상문독이군."

"예?"

상문독(桑紊毒).

뿅나무의 열매와 나무껍질은 보통 약재로 쓰이지만, 잔털이 많이 난 흰 나뭇가지를 빻아서 배합하면 어지러움과 두드러기를 일으킨다.

전생에 효월독유마공을 익히면서 수많은 독을 먹어본 당군명에게 상문독 정도는 가뿐했다.

"어찌?"

이사서는 침음을 흘렸다. 당군명이 이런 무식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도 놀라웠으나, 단번에 독을 들이키고도 멀쩡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 의외였다.

'아무래도 삼원심법 덕분에 버티는 듯한데, 무공 수련을 못 했던 것이 아니었나?'

이사서가 홀로 추측하는 사이, 당군명은 다른 독도 연달아 시원하게 들이켰다.

비워지는 독병의 수가 늘어날수록 이사서의 눈이 덩달아 점점 확대되었다.

"도대체... 말도 안되는..."

시험이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방향으로 진행되자 이사서는 저도 모르게 당혹성을 터트렸다.

"허."

"저거 말려야 되는 거 아닌가?"

황당하고 놀라운 것은 멀찍이 구경하던 다른 가솔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와중에 독병을 잡아채는 당군명의 손짓에는 거침이 없었다.

"칠공자...?"

당군명을 부르는 이사서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기연 독식 (1)

5화

당군명은 여섯 번째 옥병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마지막은 이형산(利荊散). 맛이 씁쓸한데 톡톡 튀는 향이 코를 뻥 뚫리게 하는군."

"음... 맞습니다. 여섯 개의 독을 모두 맞추셨습니다. 이층으로 올라가셔도 좋습니다."

시험이 순식간에 끝나버리자 가솔들은 깜짝 놀랐다.

"내가 대체 뭘 본 거지."

"이 정도면 일곱 공자 중에 제일 빠른 거 아닌가요?"

"아니야. 당가 역사상 제일 빠를 수도."

정통적인 판별 방법이 아닌 독을 복용하면서 알아내는 파격적인 방식.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 당군명의 행보에 가솔들은 눈을 떼지 못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소년이 자신들이 알고 있는 칠공자인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시험의 수준이 너무 낮군. 좀 더 공을 들여야겠어."

이사서는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했다.

'내가 두 번째 층을 맡은 이후로 이렇게 시험이 빨리 끝난 적은 없다.'

고개를 숙인 이사서는 아직도 끄트머리를 태우고 있는 향을 바라봤다. 시험은 절대 쉽지 아니었다. 그만큼 칠공자가 보여준 능력이 상식을 넘어섰을 뿐.

'칠공자가 능력을 숨기고 있던 걸까.'

생각이 많아진 이사서는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칠공자. 여섯 개의 독을 연달아 복용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당군명은 처음과 달리 엉망으로 풀어진 이사서의 표정을 보곤 여유롭게 뒷짐을 졌다.

"혹시 남는 독은 더 없나?"

"..."

단전에 있는 독정은 아직도 만족하지 못하고 수많은 독을 탐했다. 눈을 껌벅거리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던 이사서는 여분의 독도 모조리 내놓아야 했다.

타악!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

정암각 이층에서 비급을 탐독하던 가솔들은 깜짝 놀랐다. 계단으로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인물이 나타난 까닭이었다.

작은 옥병 여러 개를 손에 쥔 채 나타난 당군명. 칠공자가 정암각 이층에 얼굴을 보이는 것이 참으로 낯설었다.

'응? 칠공자?'

'설마 시험을 통과했단 말인가.'

'배울 의지도, 가르쳐줄 가솔도 없어서 독에는 문외한일 텐데?'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으나 당군명은 아무렇지 않게 책장을 가로질렀다. 원하는 것은 삼층에 있으니.

'삼공자가 발견한 정암각의 기연.'

우연히 발견한 기연을 가문에 내놓은 삼공자는 커다란 공적을 쌓았다. 하지만 당군명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번 생에는 내가 독식한다.'

당군명은 삼층으로 향하는 계단 앞에 멈춰 섰다. 삼층의 입구를 지키던 삼사서(三司書)의 눈이 가늘어졌다.

'곧장 삼층으로 오다니... 윗층을 오르는 것이 목적인가.'

삼사서의 예감은 적중했다.

"도전하겠다."

"좋습니다. 다만 시험에 불통하실 경우, 석 달 동안 도전하실 수 없습니다."

당군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왼쪽 발끝을 측면으로 살짝 틀어낸 삼사서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추영수의 세 초식을 암영보만으로 피해내시면 됩니다."

"그렇군. 와라."

삼사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뒷짐을 지고 고개를 까딱이는 모습이 제법 건방졌다.

도발이 목적이라면 성공이었다. 내공을 평소보다 살짝 더 끌어올렸으니.

"음?"

이 사실을 이층에 있던 모두가 깨달았다. 다른 가솔들이 시험을 치르는 것을 몇 번이고 겪었다. 당연히 파공음만으로도 평소와 다름을 인지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당군명은 처음과 똑같은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솨악!

허공을 날렵하게 갈라내는 손끝이 세 갈래로 갈라졌다. 다섯 번의 변화가 있었으나 당군명은 정확히 삼사서의 손끝을 직시했다.

'무릎과 발목. 뻔히 보이는군.'

당군명은 미끄러지듯 발을 유연히 뻗어내다가 발목을 비틀었다. 추영수의 공세에 몸을 날리는 듯하다가 갑자기 흐릿해지는 신형.

파파팡!

허공을 격하는 파공음이 유난히 오싹하게 들려왔다. 삼사서는 손끝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허무함에 눈을 부릅떴다.

'놓쳤다.'

깜짝 놀란 삼사서가 급히 양손을 회수하려고 할 때. 측면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기어 올라왔다.

"초식을 회피하고 반격에 성공했다면 이것도 통과로 치는 건가?"

삼사서는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당군명의 손가락이 오른쪽 복부의 복결혈을 깊게 찌르고 있었다. 왼손은 여전히 허리 뒤에 뒷짐을 진 채였다.

'내가 칠공자의 움직임을 놓치다니. 아니, 암영보의 발놀림도 뭔가 달랐다.'

수많은 가솔을 상대로 암영보의 성취를 평가했다. 하지만 이런 발놀림은 처음 봤다.

마치 기존의 암영보에 다른 무리를 덧댄 것처럼.

충격에 빠진 삼사서가 말을 잇지 못하자 당군명이 다시금 물었다.

"그래서 대답은?"

"본래 추영수와 암영보의 성취가 육성을 넘으면 합격하는 시험입니다. 칠공자께서는 반격까지 하셨으니 당연히 이보다 높겠지요."

삼사서는 천천히 손을 거두고 옆으로 물러섰다.

당군명은 당연하다는 듯 계단을 올랐다. 건조한 눈빛과 뒷짐을 진 자세가 사뭇 잘 어울렸다. 아직 나이가 어린 소년에 불과함에도.

삼사서를 비롯한 가솔들은 삼층에 올라서는 당군명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

삼층은 일층, 이층과 사뭇 달랐다.

아래층은 오로지 비급만 있었다면 삼층에는 비급은 물론이고, 수많은 암기와 독물의 표본이 존재했다.

'정암각 삼층. 이곳에 올라야 어엿한 당가의 가솔로 인정받는다.'

삼층에 있는 가솔들은 모두 녹빛 장포를 걸쳤다. 오직 당군명만이 검은색 무복을 입고 있었다.

가슴에 붉은 물방울이 수놓아진 녹빛 장포. 녹사의(綠蛇衣).

이 사천당가의 상징은 정암각 삼층에 오른 뒤에야 몸에 걸칠 자격이 주어졌다.

당군명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아래층과 달리 삼층에 있는 가솔들은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았다. 여러 감각을 통해 당군명이 올라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당군명은 삼층 안쪽에 있는 사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응시했다. 어딘가 긴장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사사서(四司書)의 모습이 보였다.

당군명은 도도하게 발걸음을 틀었다.

'굳이 사층에 오를 필요는 없다.'

우선시해야 할 것은 삼층에 숨겨진 기연.

다른 가솔들이 자신이 과연 몇 층까지 올라갈지 주목하는 것이 뻔히 보였다. 하지만 당군명은 그 기대에 부응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후후. 나는 운도 좋지. 초대 가주님의 안배가 있다는 전설이 사실일 줄이야.

한껏 기세등등하여 떠벌리던 삼공자의 모습을 떠올린 당군명은 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책장을 지나쳐서 계속 안쪽으로 들어갔다. 삼층의 제일 안쪽에는 여러 독물의 조각상이 있었다.

그저 생생하게 만들어진 조각상에 불과했기에 이곳을 찾는 발길은 뜸했다.

수십 개의 조각상을 천천히 둘러보던 당군명의 발이 멈췄다.

"여기 있군."

어지간한 어린아이보다 커다란 지네 조각상. 푸르스름한 껍질과 수십 개의 다리가 마치 살아있는 듯 아주 생생했다.

청각유공(靑角楡蚣).

느릅나무 주변에서 서식하는데 머리와 등껍질에 다섯 개의 뿔이 자라는 특징이 있다.

'그런데 이 조각상의 뿔은 여덟 개다.'

당군명은 본래 뿔이 없어야 할 위치에 난 세 개의 뿔을 힘껏 눌렀다. 그러자 자연스레 세 개의 뿔이 안으로 들어갔다.

청각유공 조각상의 뿔이 다섯 개가 되자 조각상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숨겨진 계단이 드러났다.

'아주 정교한 기관이군. 숨겨진 탓에 관리도 안 되었을 텐데.'

당군명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수십 개의 책장이 당군명을 완벽히 가려주고 있었다.

거기다 삼층에 있는 가솔들의 기감이 상당할진대 숨겨진 기관이 작동하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아무도 모른다면 더욱 좋다.'

당군명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자 야명주로 환하게 밝혀진 석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방 정도로 그리 넓지는 않았으나 무언가를 보관하기에는 충분했다.

당군명은 주변을 살피면서 깨달았다.

'환기가 되고 있군. 기관에 의해서 석실의 환경이 유지되는 건가.'

석실 안에는 밀봉된 목함 세 개가 있었다.

첫 번째 목함을 열어본 당군명은 감탄을 흘렸다.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았지만 목함에서 흘러나오는 푸른 빛이 절로 입을 벌리게 했다.

첫 번째 목함 안에는 한 권의 비급, 열두 자루의 비도가 있었다.

"유엽비도."

버드나무의 잎을 닮은 비도.

열두 자루가 한 쌍을 이루는데 사천당가의 무인이라면 기본적으로 다루는 암기였다.

유엽비도의 날과 손잡이는 옅은 푸른빛을 흘렸고 얼음을 만진 듯 한기가 느껴졌다. 한철(寒鐵)로 만들어진 것이 분명했다.

'한철을 재료로 이렇게 가볍고 낭창거리는 칼날을 제련할 수 있다니.'

절세의 경지에 오른 야장이 아니라면 만들 엄두도 내지 못할 터. 암기를 쓰는 무인이라면 누구나 탐낼 보물이었다.

평생을 사용해도 좋을 병장기를 얻는 것은 쉽지 않은 일. 곧 수많은 종류의 암기를 다루겠으나 이만한 암기를 찾기는 거의 불가능할 터였다.

"한엽이라 부르면 되겠어."

당군명은 한철 유엽비도에 한엽(寒葉)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앞으로 자주 사용할 애병이 될 테니.

한엽을 허리춤에 갈무리한 당군명은 밑에 있던 비급을 꺼내 들었다.

예엽기법(銳葉技法).

유엽비도를 다루는 기교가 적힌 비급.

'초대 가주가 말년에 남긴 심득. 전생에서는 정암각 팔층에 비치되었지.'

그만큼 상승의 무리가 담겼으니 어지간한 공부로는 입문조차 제대로 힘들 터.

하지만 당군명은 달랐다. 오기조원을 이루었던 전생이 있으니 충분히 익힐 자신이 있었다.

'예엽기법으로 부족한 암기 기교를 채워 넣는다.'

전생의 독마도 암기를 제법 다뤘으나 당가주를 비롯한 장로원의 노괴들에 비하면 손색이 있던 편.

정암각 팔층에 오를 만한 상승의 무리를 독식할 수 있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이점이었다.

당군명의 눈이 두 번째 목함으로 향했다.

"내가 원하는 건 여기 있겠지."

끼익!

두 번째 목함을 열어서 내용물을 확인한 당군명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내용물을 온전히 보관하기 위해 특수하게 제작된 옥병이 보였다.

'이 기연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복수를 시작하는 거다.'

당군명은 이복형제들의 얼굴을 차례대로 떠올렸다.

먼저 자신의 위에 있는 여섯 공자들을 제치고 소가주 위계를 차지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신마천주를 향한 복수를 시작할 수 있으리라.

당군명은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옥병의 밀봉을 뜯어냈다.

그 순간, 단전의 효월삼원공이 꿈틀거리며 반응을 보였다.

기연 독식 (2)

6화

옥병에 들어있는 두 종류의 분말.

모두 독이었다.

옥병과 분말의 상태를 세세하게 살피던 당군명은 감탄을 흘렸다.

'아무리 꼼꼼하게 밀봉해도 긴 세월을 버티기는 힘들다. 그런데 이렇게 멀쩡히 보존하다니.'

초대 가주의 수완에 감탄한 당군명 옥병 옆에 있는 서책을 꺼내 들었다.

"여기 있는 독들의 방문인가."

똑같은 재료를 사용하더라도 배합 분량과 제조 방법, 시간, 환경에 따라 결과물이 천차만별이었다.

그렇기에 제조 과정을 기록한 방문(方文)은 또 다른 무공비급이나 마찬가지였다.

방문을 빠르게 훑은 당군명은 확신했다.

"팔독 중 두 개. 제대로 찾았다."

당가팔독(唐家八毒).

초월경, 혹은 절대경의 고수에게는 독이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편견을 깨트린 여덟 가지의 극독. 그중 다섯 종류가 초대 가주의 손에 의해서 탄생했다.

옥병에 들어있는 분말은 두 가지 극독의 원형이 되는 독이었다.

'지금은 네 종류가 실전되었으니...'

당가팔독이라는 명성이 유명무실해진 상황에 극독을 복원할 수 있는 단서를 얻었다.

이것만으로도 다른 이복형제들이 지금까지 쌓아온 공적을 뛰어넘을 수 있을 터.

이복형제들에 대한 복수와 동시에 사천당가에 대한 영향력을 넓혀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과 조직을 동시에 손에 쥐어야만 했다.

'만독각을 내 품으로 끌어들일 때도 아주 큰 도움이 되겠지.'

다음 목표를 상기하던 당군명은 분말의 분량을 정확히 절반으로 나눴다. 절반은 옥병에 넣어뒀고 나머지 절반은 미리 준비한 옥병에 따로 보관했다.

한엽과 독을 갈무리한 당군명은 세 번째 목함을 열었다. 세 번째 목함에는 특정 위치를 그린 종이가 들어있었다.

'두 번째 안배를 얻을 수 있는 단서.'

어찌 보면 이 석실에서 가장 중요한 물건.

당군명은 종이를 곱게 접어 조심스레 갈무리했다.

"나가자."

마지막 계단을 밟고 올라서자 무게를 감지한 기관이 작동되었다. 양쪽으로 갈라졌던 조각상이 다시 합쳐지며 계단이 감쪽같이 감춰졌다.

'안배는 다 챙겼지만 혹시 모르지.'

전생처럼 술에 취한 삼공자가 석실을 발견할지도 모르는 일.

당군명은 허리춤의 한엽을 뽑아 들었다. 기관을 작동시키는 장치인 세 개의 뿔을 아예 잘라버리고 그 부위를 매끈하게 만들었다.

그 누구도 석실을 찾을 수 없도록.

적당히 삼층을 둘러보던 당군명은 유유히 정암각을 빠져나왔다. 삼층의 그 누구도 초대 가주의 안배가 발견된 사실을 알지 못했다.

****

당손육이 쓰러진 다음 날.

"손육이 크게 다쳤습니다!"

가주전에서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왼팔은 몇 달의 요양이 필요하고 얼굴은 커다란 흉이 졌습니다. 최악의 경우 발음이 샐 수도 있답니다! 그런데도 그냥 두고 보실 생각이십니까?"

육공자와 사공자의 모친이자 당천경의 세 번째 부인, 백연재가 고성을 터트렸다.

창밖을 바라보던 당천경이 대꾸 없이 뒷짐을 지자 백연재가 움찔하여 고개를 숙였다.

"몹시 화가 나서 실수했습니다. 감히 가주전에서 목소리를 높이다니..."

"알았다면 됐소. 그런데."

당천경의 무미건조한 시선이 백연재를 덮쳤다.

"본가가 강자존을 추구함을 잊었소? 그대의 방문으로 육공자는 패배보다 더한 치욕을 겪은 것이오."

"하오나..."

무어라 변명하려 했던 백연재는 입술을 깨물어야만 했다. 당천경의 시선 끝에서 냉기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까닭이었다.

"가시오."

"예. 부군."

백연재는 꼬리를 말고 물러나야 했다. 가주전 밖으로 나왔음에도 마치 얼음물에 빠진 듯 손발이 오들거렸다.

'나를 이리 대하다니...'

당천경이 예전부터 냉담했으나 자식이 저리 심하게 다쳤는데 이리 매정하게 굴지는 몰랐다. 가주전까지 직접 찾아가서 부탁한 것이 처음인데도.

자신을 이렇게 홀대하는 것은 사공자와 육공자의 외가인 수의방(修醫幇)를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천경의 삭막한 표정을 떠올린 백연재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옮겼다.

'불쌍한 내 아들.'

왼팔과 얼굴 코밑을 붕대로 칭칭 감은 채 정신을 잃은 당손육. 왼팔은 시간이 지나면 낫겠으나 얼굴은 어찌나 상처가 심한지 입을 제대로 벌리지도 못했다.

"하아."

아들의 처참한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천것의 핏줄이...'

백연재의 두 눈에 살기가 번들거렸다.

칠공자 당군명.

당손육을 무슨 수로 이리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가만히 둘 생각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서 그 곱상한 얼굴에 칼자국을 무수히 새겨주고 싶었다.

"당군명..."

저주하듯 이름을 짓씹듯 내뱉던 백연재의 몸이 우뚝 굳었다. 방금까지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찢어 죽였던 상대가 멀쩡히 걸어오는 중이었다.

"셋째 어머니를 뵙습니다."

"어머니? 가증스러운 것."

백연재는 당군명을 향해 거침없이 발을 옮기더니 곧장 손을 들었다. 힘껏 뺨을 후려치려 했으나, 당군명의 손에 손쉽게 가로막혔다.

백연재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감히 내 손을 막아?"

"감히? 고작 당신이 뭐라고."

백연재의 눈꺼풀이 들썩이며 당혹스러움을 흘려냈다.

자신을 보기만 하면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어깨를 움츠렸던 보잘것없는 아이.

그런데 지금은 보란 듯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고 있었다.

손목을 부러뜨릴 듯, 점차 강해지는 악력에 백연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네놈이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당군명이 손을 거칠게 뿌리치자 백연재가 휘청이며 뒤로 밀려났다.

그 모습을 일별한 당군명의 입술에 냉소가 맺혔다.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습니다. 기대하십시오."

"천한 것이... 드디어 미쳤구나."

당군명은 가볍게 무시한 채 갈 길을 갔다.

백연재는 선명한 손자국이 남은 손목을 부여잡으며 멀어지는 당군명을 노려봤다.

한참을 서 있고 난 후에야 마음이 진정된 백연재는 이를 갈았다.

"독을 먹어서 정암각의 시험을 통과했다고? 그럼 독을 실컷 먹여주마."

시간과 비용이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었다. 오직 초대 가주만이 이루었다는 만독불침이 아니라면 언젠가는 몸이 망가지고 죽어갈 테니.

결정을 내린 백연재는 곧장 거처로 돌아갔다.

****

"공자님! 이거 보세요!"

하윤은 총형각에서 보내온 녹빛 장포, 녹사의를 꺼내더니 당군명의 몸에 대보았다.

"공자님도 어엿한 사천당가의 가솔로 인정받은 거예요."

"그런가."

정작 당사자인 당군명은 무덤덤하게 반응했으나 하윤은 제 일처럼 기뻐하며 방방 뛰었다.

육공자와 정암각의 일이 있고 겨우 사흘이 지났으나 당군명의 위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예전에는 물렁한, 소심, 심약 등의 단어가 따라다녔고 당가의 핏줄이 아닌 것 같다는 말도 종종 흘러나왔다.

지금은 기존의 부정적인 인상이 완전히 사라졌다.

'다른 가솔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도 바뀌었어. 공자님 덕분에.'

예전에는 가볍고 쉽게 대했다면, 지금은 사소한 언행에서도 조심스러움이 느껴졌다.

당군명의 뒤바뀐 위상이 영향을 끼치는 것이리라. 마치 후광처럼.

하윤의 미소에서는 숨길 수 없는 뿌듯함이 차올랐다.

"공자님."

하윤이 당군명을 안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허공을 휘저었다.

당군명이 슬쩍 암영보를 밟아 피한 탓이었다.

하윤은 입술을 삐죽였으나 배시시 웃었다.

"공자님. 언제 이렇게 수련한 거예요? 저도 모르게 감쪽같이."

"그렇게 됐다."

"정말 다행이에요."

하윤이 갑자기 눈물을 글썽거리자 당군명도 눈을 꿈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뭐가 다행이야."

"저는 공자님이 다 놓고 주저앉은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혼자 일어나 계셨으니 너무 대견해서요."

말을 이어가면서 하윤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당군명은 한숨을 흘리더니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아줬다.

"됐다. 이제 걱정하지 마라."

"훗. 공자님에게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네요."

하윤이 웃으며 나가자 당군명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등을 돌렸다.

탁자 위에는 두 개의 옥병이 놓여있었다. 당군명은 초대 가주의 옥병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전생의 삼공자는 공적을 쌓고 영약을 받는 것에 그쳤지.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

공적과 영약은 앞으로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얻을 수 있었다. 이보다 중요한 사실은 아무도 모르는 자신만의 무기가 늘어났다는 것.

"실전된 당가팔독을 복원한 소가주 후보."

당가의 독을 총괄하는 만독각도 해내지 못한 일을 단신으로 해낸다?

이 성과에 딸려올 파장은 어마어마할 터. 여기에 아직 찾지 못한 초대 가주의 안배가 더 있으니 가능성과 가치가 더욱 무궁무진했다.

'이복형제들에 대한 복수를 모두 이룰 때, 자연스레 소가주가 되겠지.'

당군명은 가주와 똑같은 길을 걸을 셈이었다.

형제들을 모두 제 손으로 처치하고 소가주의 위계를 차지하는 혈로(血路)를.

사천당가의 후계 경쟁은 고독(蠱毒)을 만드는 과정과 비슷했다.

한 항아리에 수많은 독물을 집어넣고 서로를 잡아먹게 만든다. 그렇게 남은 제일 강한 독물이 고독이 되는 것이었다.

후계 경쟁이 벌어질 때마다 제 살 깎아 먹기 식으로 무수한 희생이 생겼으나, 사천당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탄생한 강력한 가주는 언제나 후계 경쟁 시절 이상으로 가문을 키워냈다.

당군명은 고민했다.

제일 먼저 어떤 공자를 집어삼킬지.

'복수의 첫 대상은 당연히 그 녀석이 적당하겠군.'

생각을 정리한 당군명은 가부좌를 틀었다.

"먹어볼까."

당군명은 연구를 위해 따로 남겨놓은 분량을 제외하곤 모조리 입에 털어 넣었다.

전신 혈맥에 퍼지는 두 종류의 독에 반응한 효월삼원공이 내공을 거세게 퍼올렸다.

지금까지 먹은 독에 비하면 독성이 매우 강하여 위험했으나 감내할만했다.

포식에 성공하면 높은 성취가 따를 것이니.

'독의 내성을 올리는 삼원심법의 구결 덕분에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그뿐인가. 당군명에게는 전생의 경험과 심득이 있었다.

쓰는 칼이 살짝 무디다고 한들, 이 정도 독에 당할 리가 없었다.

'일단 명치의 잔중혈을 중심으로 일곱의 혈도를 틀어막는다.'

독이 뻗어나갈 길을 모조리 차단하곤 오른쪽 가슴 위의 기사혈로 내공을 우회했다.

독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려고 요동쳤으나 효월삼원공이 끈질기게 붙잡았다.

'천천히. 균형을 유지하며 독을 갉아먹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효월삼원공의 내공은 조금씩 불어났고, 독을 포식하는 속도는 점차 빨라졌다.

운기조식이 정점에 달했을 때.

효월삼원공의 움직임이 변모했다.

포식으로 불린 내공을 이용해 막혔던 몇몇 혈도를 뚫어낸 것.

우웅!

당군명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도가 달라졌다.

어깨 위로 내려앉는 진녹빛 일렁임. 산들바람처럼 출렁이는 기파가 점차 눈에 보일 정도로 선명해졌다.

'할 수 있다.'

몇 개의 계단을 껑충 뛰어넘어 곧장 절정의 경지를 밟으려는 징조였다.

독살(毒殺) (1)

7화

효월삼원공과 극독의 기나긴 힘겨루기.

삼원심법의 구결, 독마의 내공 운용이 없었다면 오히려 범람하는 극독에 죽었을 터.

하지만 당군명은 결국 주도권을 손에 쥐었다.

극독은 약해지고 내공은 강해졌다. 종래에는 혈도를 막지 않아도 남은 독을 제압해 집어삼킬 정도였다.

우웅!

극독을 모조리 갈무리한 독정의 크기가 부풀었다.

효월삼원공의 성취가 이성(二成)에서 사성(四成)으로 가파르게 치솟았다.

'성공이군.'

높아진 성취로 인해 전생의 심득을 조금 더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한결 정순해진 내공으로 탁기를 조금씩 녹이니 내공 수발도 더욱 빨라졌다.

그 순간, 당군명의 내부에서 울림이 터졌다.

두웅!

독마의 심득과 효월삼원공의 성취가 어우러지자 무인으로서의 심상이 온전히 구축되었다.

운기 중이었던 당군명은 의식이 깊은 곳으로 빠져듦을 느꼈다.

"이곳이..."

어느새 당군명은 칠영각이 아닌 낯선 곳에 서 있었다. 갑작스러운 일임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전생에 겪었기에.

"이번 생에 빚어낸 나의 심상."

전생 독마의 심상은 혈성정뇌대법의 영향 탓인지 질척거리는 검은 진흙과 검붉은 안개만이 가득한 기괴한 공간이었다.

당군명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의 심상을 눈에 담아냈다.

"황량하군."

전생만큼은 아니었으나 당군명의 심상도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하지만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곳에는 복수에 필요한 것들만 채워질 예정이었으니.

"아직 한참 멀었어."

종종 강호의 호사가들은 심상을 그릇이라 칭하곤 했다.

삼류에서 일류가 그릇을 빚어내는 경지라면 절정은 빚어낸 그릇을 깨달음과 경험으로 채워내는 경지이다.

온전한 심상을 구축하고 발을 디뎠다는 것은 절정의 경지에 올랐다는 의미.

하지만 당군명의 표정은 그저 덤덤했다.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원하는 바를 이루려면 매우 부족했다.

심상을 확인한 당군명은 눈을 감았다.

이제 현실로 돌아갈 때였다.

"후우..."

운기조식을 마치고 눈을 뜬 당군명은 곧장 허리춤에서 한엽을 꺼냈다.

내공을 주입하자 녹빛 검기가 매끈하게 칼날을 둘러쌌다. 단순한 내공 주입을 넘어서 정련된 검기를 뽑아내는 것이 바로 절정을 밟았다는 증거.

당군명은 검기를 씌운 한엽을 탁자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치이익!

검기가 직접 닿지 않고 그저 가까워졌을 뿐이다. 그런데도 탁자의 모서리가 흐물거리며 녹아내렸다.

당군명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효월삼원공의 삼성과 사성에 올랐을 때 얻는 공능은 내성(耐性)과 독성(毒性).

삼성의 공능, 내성은 독에 대한 저항력을 끌어올리고.

사성의 공능, 독성은 내공에 독정의 독이 스며드는 것, 즉 독기(毒氣)를 얻은 셈이다.

"이제야 제대로 된 독공에 입문했다고 할 수 있지."

잠시 바깥쪽을 바라보던 당군명은 한엽 대신에 평범한 유엽비도를 허리춤에 차고 밖을 나섰다.

"쥐새끼들이 많군."

****

칠공자의 거처, 칠영각을 눈에 담던 암경대원의 눈이 반짝였다.

주시 대상인 칠공자가 밖에 나온 까닭이었다. 요대에 유엽비도를 채운 채로.

'지금까지는 칠영각에서 수련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이제 숨길 필요가 없어졌다는 건가.'

육공자가 다른 공자들에 비해 무공이 낮다곤 하나 만만히 볼 수준은 아니었다.

그런 육공자를 쉽사리 제압했으니 칠공자의 무공 성취도 보통이 아닐 터.

암경대원은 만약을 대비하여 기척과 호흡을 지워냈다.

뒤이어 암하영공(暗鏬影功)을 펼쳐내자 완전히 지붕 그림자에 녹아들었다. 그렇게 존재감을 철저히 감추곤 유엽비도를 들고 있는 당군명을 주시했다.

콰악!

당군명의 손끝에서 은빛 실선이 시원하게 뻗어나갔다.

그와 동시에 멀리 있던 목각인형에서 파열음이 터졌다. 유엽비도에 실린 힘이 어찌나 막강한지 목각인형이 거세게 떨릴 정도였다.

'비섬의 성취가...'

비섬(飛閃).

사천당가 암기 무학의 기본 초식.

이에 담긴 무리는 아주 단순하고 명료했다.

그저 빠르고 강하게.

연마한 기교에 따라 위력이 천차만별이기에 비섬의 성취만으로도 암기를 다루는 수준을 가늠할 수 있었다.

'내공을 싣지 않은 듯한데 순수한 기교만으로 유엽비도의 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게 박혔다.'

위력도 위력이지만 속도도 놀라웠다. 암경대로서 고절한 안법을 익힌 자신도 간신히 궤적을 따라갔으니.

암경대원은 깨달았다. 암경대에서 상정한 칠공자의 무위를 수정해야 한다는 것을.

'일류의 완숙을 이룬 경지. 근 일 년 내에 일류의 극, 혹은 절정에 오를 수도 있다.'

유엽비도를 수련하는 당군명의 모습을 볼수록 감탄이 흘러나왔다. 이 정도 경지에 오를 때까지 가문을 속이고 힘을 키워왔다는 뜻이 아닌가.

보아하니 칠공자가 품은 독심(毒心)도 심상치 않아 보였다.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후계 구도에 커다란 변화가 일겠어.'

반 시진 정도 수련을 지켜보던 암경대원은 아주 은밀하게 칠영각을 빠져나갔다.

당군명은 조금씩 멀어지는 기척을 확인하곤 유엽비도를 내렸다.

"은신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닌데 말이야. 어설퍼."

운기조식을 끝냈을 때부터 칠영각을 주시하는 시선들을 눈치챘었다. 그럼에도 보란 듯이 수련하는 모습을 보였다.

'암경대 한 명 외에도 두 명이 더 있었지.'

아마도 다른 공자들이 보낸 끄나풀일 터. 정확히 누가 보냈는지는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저들에게 자신의 무공 수위를 확실하게 기만했다는 것이다.

당군명의 기감이 다시금 칠영각 전역을 훑고 지나갔다.

지금까지 자신을 훔쳐보던 음흉한 시선들이 사라짐을 확인하자 당군명의 소맷자락이 거칠게 나부꼈다.

쐐앵! 쾅!

기울어지는 당군명의 손목 각도가 바뀌자 이전과 전혀 다른 파공음이 터졌다.

은빛 섬광을 꼬리처럼 흔들며 쏘아진 유엽비도가 목각인형을 단숨에 꿰뚫고 뒤쪽의 바닥에 깊게 박혔다.

당연하다는 듯 손목을 가볍게 튕긴 당군명은 여섯 자루의 유엽비도를 꺼내 들었다.

방금은 그저 보여주기 위한 몸풀기, 지금부터 진짜 수련이었다.

초대 가주의 안배, 예엽기법을 손짓에 녹여내기 위한.

유엽비도를 쥔 채 교차하는 양손. 세 갈래의 직선과 곡선이 제각기 허공을 가르더니 목각인형의 코앞에서 저들끼리 충돌했다.

채채챙!

실수가 아니었다. 각기 다른 힘이 실린 유엽비도의 충돌에 여섯 개의 궤적이 일제히 뒤바뀌었다. 하늘거리며 떨어지던 잎이 산들바람에 이리저리 뒤엉키는 것처럼.

"이것이 난엽(亂葉)."

예엽기법의 첫 번째 기교를 첫 시도에 성공했으나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가문의 어지간한 중견 고수도 단번에 성공하기 힘든 초식을 완벽히 선보였음에도.

'충돌 직후의 변화가 다소 경직됐다. 내공 조율을 좀 더 세밀하게...'

다시금 유엽비도를 꺼내든 당군명의 눈이 한껏 가라앉았다.

파앗!

좀 더 절제된 움직임을 보이는 소맷자락. 목각인형을 둘러싼 유엽비도의 궤적이 교묘히 겹치는 순간.

채채챙!

한 번의 충돌이 아닌 여러 번의 충돌이 일어나면서 유엽비도의 궤적이 세 번이나 변화했다. 유엽비도가 다양한 각도로 쇄도하자 목각인형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철에 버금가는 강도를 지녔다는 철목(鐵木)으로 만든 것임에도 당군명의 유엽비도 앞에서는 한낱 종잇장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식이군."

두 번째 시도 만에 만족스레 초식을 펼쳐낸 당군명은 확신할 수 있었다.

과연 사천당가의 암기 무학은 천하제일이라 할만했다.

'전생에서의 부족한 점을 이번 생에서 채워 넣는다.'

머릿속에 이미 완벽하게 들어온 예엽기법의 무리를 떠올린 당군명은 확신했다.

분명히 전생의 독마를 넘어설 수 있으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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