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 EV 선포하다(2) >
작은 버섯구름이 도심의 블록 하나를 날려버렸다.
전차부대와 하늘을 날던 헬기부대는 폭발에 휘말려 박살이 났고, 주위 건물들도 엉망이 되었다.
"무슨 일이야!"
반파된 막사 밖에서 전황을 살피던 브라운 중장은 건물 위로 피어오르는 버섯구름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미친…. 브라질 놈들이 전술핵이라도 쓴 거야?"
"방사능 수치는 변함없습니다!"
부하의 말에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전위 부대는 어떻게 되었어! 확인해봐!"
"전부 연락 두절입니다!"
"당장 확인해봐! 본대도 속도를 올리라고 해! 도대체 무슨 일이야?"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참모들과 장교들은 어제 몰살당했고, 임시로 만든 막사에 있는 병사들은 허둥거릴 뿐이었다.
"제길!"
엿 같은 상황을 확인한 중장은 막사 앞에 대기해 놓은 지휘 장갑차에 올라탔다.
아무래도 본대와 같이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출발해! 사령부도 본대와 같이 움직인다."
그의 말에 막사에 있던 지휘부 병사들이 급하게 짐을 쌌다.
통신병들이 차량에 올라타자, 지휘 장갑차는 바로 출발했다.
어차피, 각성자들 때문에 안전한 후방이 없어져 버렸다.
어제도 각성자들로 이루어진 특수부대에 본진 깊숙이 있던 화약고와 사령부 막사가 날아갔다.
그때 참모들도 한꺼번에 쓸려나갔다. 잠시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면 그도 죽은 목숨이었다.
"우리 쪽 각성자들도 이런 데 쓸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미국 쪽 각성자들은 몇몇 각성자들을 제외하고는 전부 명령을 따르는 로봇에 불과했다.
전부, 뇌수술 때문이었다.
"각성자들이 위험하기는 해도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지...."
그동안 전쟁을 치르면서 문득 떠오르던 생각에 그는 쓰게 웃었다.
워싱턴과 본토에 있을 때는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아무래도 미국과 멀어지자 사람이 약해지는 것 같았다.
"차라리 모두 항복해 주었으면 좋을 텐데. 대륙이 하나가 되면 금방괴물도 정리될 테고, 그 뒤에 각성자들을 원래대로 돌려놓으면 그만인데."
그래도 아직 그는 미국 정부의 말을 믿고 있었다.
이곳저곳에 모순이 있었지만, 그와 국민 모두는 이미 정부의 행동에 동참해 있었다.
자기 세뇌라도 하지 않는다면 버티기 어려웠다.
그의 중얼거림에도 옆에 앉아 있는 각성자는 표정 없이 앞만 바라볼 뿐이었다.
부우우웅.
그가 탄 지휘 장갑차가 야자수가 우거진 길을 돌자, 전진하는 본대의 모습이 보였다.
도로와 인도, 공원과 골목을 메우며 군대가 진격하고 있었다.
드드드득.
백 대가 넘는 전차와 장갑차, 거리를 덮은 수천의 보병과 각성자들.
그리고, 뒤를 따르는 공병부대와 도하 장비들.
헬기부대와 선발대는 전멸했지만, 상파울루를 포위한 미육군 중부 사령부 주력부대는 멀쩡했다.
강을 건널 도하 장비를 준비하느라 진격이 멈췄을 뿐이었다.
사령관은 도하를 하기 위해 모든 병력을 집중시켰다.
아쉽게도 화약고가 파괴돼서 오랜 작전을 하기는 무리였지만, 남아있는 적을 무찌르기는 충분했다.
중부 사령관은 무전기로 선두에 있는 연대장에게 연락했다.
"전위 부대 현장 확인은 되었나?"
[먼저 보낸 드론들은 도중에 파괴되었습니다. 바로 각성자들을 보냈습니다. 확인만 하고 돌아오라고 했으니 금방 정보를 가져올 것입니다.]
"드론이 파괴되었다라..."
확실히 저 강에 뭔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보낸 각성자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한 명의 각성자가 진격하는 미군 중부 사령부 본대를 방문했다.
쾅!
첫 신호는 기갑 여단 선두에 선 전차로부터였다.
폭음과 함께 전차 포탑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적입니다!
-주변을 살펴!
-상대를 찾을 수 없습니다!
-레이다에 비행물체 확인! 미사일과는 궤적이 다릅니다!
지휘 차량의 무전기에서 현장의 대화가 쏟아져 들어왔다.
-또 날아옵니다!
쾅! 쾅!
또 한 대의 전차가 폭발했고, 다른 전차는 그자리에 멈춰버렸다.
"무슨 공격이야! 당장 확인해!"
-아, 미친…. 전차에 나무가 박혀 있습니다. 야자수입니다.
어이없는 보고에 차 안은 조용해졌다.
"나무가 날아와서 전차의 장갑을 뚫는다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괴물과 여러 번 싸웠던 브라운 중장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야기였다.
손톱과 팔로 장갑을 자르거나 부수는 괴물은 본 적이 있었지만, 평범한 나무를 날려 전차 장갑을 뚫는 괴물은 본 적이 없었다.
"새로운 괴물인가?"
그런 괴물이 없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런 괴물이 왜 미군을 공격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적일 뿐이었다.
"어서 찾아! 선발대를 공격한 적일 가능성이 크다!"
중장의 말에 드론과 무인 항공기들이 하늘로 치솟았고, 선두의 각성자들이 앞으로 내달렸다.
하지만, 각성자들은 나무가 쏘아진 곳에 도착하지도 못했다.
퍽! 퍽! 퍽!
흐릿한 잔상과 함께 달리던 각성자들이 차례로 쓰러졌다.
각성자들은 대응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고장난 인형처럼 달리다가 고꾸라질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했지만, 쓰러진 각성자들은 목이 꺾어지고, 심장에 구멍이 나 있었다.
사람의 눈, 아니 각성자의 눈으로도 어떻게 된 것인지 파악이 안 될 정도였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곳에는 돌연변이 괴물들을 촬영하기 위한 고속 촬영용 드론들이 있었다.
"적…. 적은 각성자입니다!"
드론의 화면을 확인한 병사가 질린 얼굴로 사령관에게 보고했다.
초당 900프레임으로 찍어대는 카메라로도 적의 모습은 각성자들을 죽일 때만 찍혀 있었다.
화면을 확인한 장군이 무전기에 대고 소리쳤다.
"전 부대에게 알린다! 각성자가 접근 중이다. 높은 등급의 각성자다. 모두 주의해라!"
사령관은 그 화면을 보고 오히려 안도할 수 있었다.
"다행이군."
그는 대장급 이상의 괴물이 나타난 것일까 봐 걱정했었다.
하지만, 적은 각성자였다. 아무리 강한 각성자라도 사람이라면 군대의 무기로 충분히 잡을 수 있었다.
그동안 미국 안에서 각성자들을 잡을 때도 확인했고, 지금 전쟁 중에도 확인했었다.
새로 등장한 각성자는 수천 년 쌓아온 인간의 화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피해가 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선발대를 날려버린 그 폭발이 걱정되긴 했지만, 특성으로 만든 폭발이라면 쿨타임이 클 게 분명했다. 또 사용하기 전에 죽여버리면 그만이었다.
"서둘러. 생포는 생각하지 말고 화력을 집중해!"
사령관이 다시 지시를 내렸지만, 엉뚱한 통신이 들려올 뿐이었다.
쾅! 쾅! 콰광!
-적 , 적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제압 사격을 해!
-이미 진영 내에 들어왔습니다!
-기갑 여단 2대대 전차 파괴되었습니다!
-젠장! 2대대에 퍼부어!
통신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콰과과과과광!
여단장의 명령에 다른 전차 대대의 포격이 아군 부대에 쏟아졌다.
-적 확인해!
-안보입니다! 확인할 수 없습니다!
-아, 하늘에…. 하늘에 있습니다!
통신을 듣고 사령관은 급하게 방탄 창을 열었다.
열린 창밖으로 맑은 상파울루 하늘이 보였고, 그 하늘 중앙에 점 하나가 떠 있었다.
망원경으로 확인하니 그 점은 한 손에 커다란 검을 든 남자였다.
타타타탕!
하늘을 향해 총격이 이어졌지만, 반투명한 막이 그 모든 총알을 막아내는 것이 보였다.
평범한 소총의 총알부터 장갑차의 기관포까지.
남자는 묵묵히 총알을 받아내며 거대한 검을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검이 폭발했다.
콰아아앙!
파편이 총알같이 지상으로 쏟아졌다.
총알에 맞아 부서진 것이 아니었다. 고의로 부순 게 분명했다.
망원경으로 지켜보던 사령관은 이해할 수 없었다.
검 파편 정도로 뭘 할 수 있는지. 그래 봐야 클레이모어의 화력과 다를 게 없었다.
콰과과과과광.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쏟아진 파편들이 엄청난 폭발을 일으킨 것이다.
검 파편이 쏟아진 거리 일대가 폭발에 뒤덮였다.
-탈, 탈출해!
-크아아악.
-후퇴,후퇴!
-적이 너무 강하다. 지원을 바란다!
-적은 하나야! 잡기만 하면 돼 ! 총알이 안 되면 전차포 직격으로 잡으면 돼!
비명을 지르는 병사와 후퇴를 외치는 장교, 그리고, 적을 노리는 군인들.
장군이 무전기를 잡았다.
"적을 최고 등급 돌연변이 괴물로 지정한다. 모두 각성자로 생각하지 말고 적을 상대해라!"
이미 여단 하나가 반신불수가 되어 버렸다.
지금 진격 중인 여단은 다섯 개.
거의 2개 사단 병력이 한 각성자에게 휘둘리고 있었다.
"괴물이야."
"역시, 정부 말이 맞았어."
"저런 괴물이 나오다니. 역시 각성자는 다 죽여야 해."
통신병들이 화면을 보며 중얼거렸다. 중장도 지금 만큼은 그들의 말에 동의했다.
혼자서 사단 병력과 싸우는 인간이라니. 그런 존재는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었다.
*
상파울루 함락을 위해 출발한 미군 중부 사령부 전투 여단들은 남미 연합군이 아닌 한 각성자와 싸웠다.
그들은 상대를 각성자로 보지 않고, 최고 등급의 괴물로 판단하고 전투를 이어갔다.
전차들이 나서서 철갑탄을 날리고, 거리를 덮는 화망과, 일대 전체에 퍼붓는 광범위한 포격까지.
할 수 있는 한 모든 일을 다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공격은 소용이 없었다.
총알은 물론, 광범위한 포격도 각성자의 방어막을 뚫을 수 없었다.
전차포의 포탄은 각성자의 속도를 쫓을 수 없었다. 포탄은 각성자의 잔상만을 따라갔을 뿐이었다. 직격 되지 않는 한 그 어떤 포탄도 각성자의 방어막을 뚫을 수 없었다.
운이 좋게 철갑탄 하나가 적을 맞추었지만, 그 포탄은 어이없게도 그가 들고 있던 대검에 반으로 갈라져 버렸다.
모든 공격이 무효로 돌아가는 동안, 미군은 차례로 붕괴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검의 파편은 융단 폭격과 다를 바가 없었고, 건물과 엄폐물 뒤에 숨어봤자, 그가 휘두르는 검을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사령관이 생각했던 선발대를 죽인 특성. 아니 레일건의 쿨타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쿠웅!
레일건이 다시 불을 뿜자 여단 하나가 또 증발해 버렸고, 결국,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중부 사령부 전체가 붕괴했다.
지휘 체계는 사라지고 병사들은 후퇴했다. 전차와 장갑차를 버려두고, 그들은 맨몸으로 달아났다.
불타는 거리, 버려진 전차와 차량들.
그 사이에 멈춰선 지휘 장갑차에서 사령관이 내려섰다.
그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부대를 부순 각성자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온몸에 그을음이 가득 묻어있는 검은 머리의 동양 남자.
괴물처럼 생기지 않았고, 외계인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젊은 남자였다.
하지만, 그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이 맞나?"
이토록 강한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 어떤 괴물보다 강한 인간이라니.
브라운 중장의 말에 경훈은 반문했다.
"미국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가 맞나?"
중장은 경훈의 말에 인상을 썼다. 마음에 안 드는 질문이었다.
어차피 서로 적일 뿐이었다. 중장은 다시 물었다.
"왜 날 안 죽였지?"
괴물처럼 그를 가지고 놀 수도 있었고, 복수랍시고 계속 고통을 주기 위해 남겨 놓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미국 정부에 할 말이 있어서일까?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정답이 아니었다.
잠시 뒤, 강 건너에서 남미 연합군의 병사들이 넘어왔다.
그들은 바로 브라운 중장을 체포했다.
경훈이 그를 남긴 것은 높은 계급의 포로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필요한 정보는 남미 사람들이 찾아낼 것이다.
병사들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중장을 데려갔고, 그들과 같이 온 소냐도 딱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모두 케이, 아니 경훈 혼자서 한 건가요?"
소냐의 말에 경훈이 북쪽을 바라보았다.
"포탈을 통해서 EV 각성자들이 넘어올 겁니다. EV 섬에 있는 모든 무기도 미국을 향하게 될 겁니다."
이제 미국과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유라시아 연합도 도울 겁니다. 그들과 함께 적을 몰아내세요."
"경훈 씨는요?"
"전 미국으로 들어갈 생각입니다."
이제 미국과의 전면전이었다. 적의 핵무기를 봉인해야 했다.
239화. < 제임스(1) >
미군의 패배는 바로 백악관에 전해졌다.
미육군 중부 사령부 산하 2개 사단의 전멸에 가까운 패배.
남미 전쟁을 지휘하는 통합 사령부는 물론, 백악관도 큰 충격에 빠졌다.
본토로 돌아온 덕분에 규모는 축소되었지만, 중부 사령부는 원래는 아프리카와 페르시아 서남아시아까지 책임지고 있던 부대였다.
그런 강력한 부대가 몇 시간 만에 무너져내린 것이다.
백악관 지하 상황실.
전보다 몇 겹으로 보강된 상황실에도 어두운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급하게 소집된 국가안전보장회의 (NSC) 맴버들의 표정은 모두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CIA 국장의 표정도 다를 바 없었다. 다만 그는 말이 없는 다른 사람과 달랐다.
국장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통령에게 외쳤다.
"미국에 큰 위협입니다. 당장 전술핵이라도 날려야 합니다!"
차가운 얼굴로 외치는 모습은 무척이나 어색하고 무서웠다. 지금 그의 얼굴은 CIA 내에서 이름 높은 얼음 국장 버드의 본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CIA 국장의 표정에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통령도, 같이 자리하고 있던 위원들도 충격으로 놀란 상태였다.
하지만, 핵이라는 말에 대통령은 고개를 저을수 있었다.
"핵이라니. 그럴 수는 없소. 괴물들에게도 안 날린 핵인데. 사람에게 쓸 수는 없지."
"무슨 소리입니까! 괴물들이야 효과가 작아서 그렇지. 사람에게는 충분히 위력을 발휘합니다!"
국장이 다시 한번 외쳤지만,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도 그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핵은 최악의 경우에만 쓸 수 있는 겁니다. 핵을 쓴 뒤에 여파는 생각도 않는 겁니까?"
"인터넷에 올라온 EV 선전포고를 보셨습니까? EV 뒤에는 유라시아 연합이 있습니다. 유라시아 연합은 핵을 가진 나라가 셋이나 됩니다! 괜히 핵을 썼다가 핵전쟁이 나면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상파울루에는 천만이나 되는 비각성자가 살고 있습니다. 거기다 핵이라니요. 미쳤습니까!"
사람들이 모두 나서서 국장을 비난했다.
국장은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는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국장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잠시 흥분했습니다."
"하아. EV 각성자들이라니. 솔직히 저도 핵이라도 쓰고 싶군요."
대통령은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각성자들만 있다면 허락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핵은 정말 최후의 수단입니다. 핵으로 공격받거나 미국 본토가 위험하지 않은 한 사용하지 않을 겁니다."
각성자에 대한 혐오는 그대로였지만, 그렇다고 핵을 쓸 수는 없었다.
대통령은 보고서를 보며 머리를 짚었다.
급하게 올라온 살아남은 부대의 보고서가 책상 위에 흩어져 있었다.
보고서는 모두 말도 안 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거기다 항상 등장하는 각성자.
"EV가 준비한 각성자일까요?"
"..."
버드 국장이 대답해야 하는 질문이었지만, 그는 아직 손으로 얼굴을 덮고 있었다. 충격이 남아있었던 모양이었다.
안보 보좌관이 속으로 혀를 차고는 대신 대답했다.
"집행자들과 특수 작전팀, 그리고 숨겨진 각성자들일겁니다. EV에는 예상보다 많은 숫자의 각성자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만주의 전투를 치르면서 남미까지 관여하다니. EV는 미국이 포기한 [2개 동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이어서 국무부 장관이 안보 보좌관의 말을 받았다.
"아니면, 만주 전투가 일종의 페이크일수도 있습니다. 예전에 괴수를 잡았던가, 아니면 그런 괴수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대신 모종의 수로 유라시아의 각성자들이 남미까지 왔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별로 호응을 얻지 못했다. 대통령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같은 때에 아시아에서 브라질까지 미국 모르게 이동할 수 있다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미국처럼 스텔스 마나 엔진 헬기라도 만들었던가, 가십거리로 떠드는 공간 이동 기계가 등장했다면 모를까,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국무부 장관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바로 사과했다.
대통령은 한숨을 내뱉었다.
어쨌거나 잘 수행되던 작전이 갑작스럽게 주저앉아버렸다.
국민들이 잘 따라와서 망정이지, 다른 때였으면 당장 반전 운동이라도 벌일 게 분명했다.
"언론을 잘 틀어막고, 어떤 놈들인지 확인해봐요."
"...알겠습니다."
다행히 버드 국장은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그는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통령이 다시 보고서를 살펴보았다.
"예상과 다르군요. 괴물이 아니라 인간을 상대로 그런 위력을 보이다니. 우린 EV 무력을 잘못 파악했어요."
그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한 각성자 협회 정도로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을 상대로도 이런 무력을 보여줄 줄은 몰랐다.
이 정도면 EV는 웬만한 강대국 이상의 무력이 있는 셈이었다.
"보고로는 괴물 같은 각성자 한 명이 벌인 일이라는 이야기도 있던데…."
비서실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지만, 그의 말은 곧 부정되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같은 복장 때문에 그렇게 보였을 겁니다."
"EV의 각성자 부대는 같은 형태의 검은 군복을 입는다고 합니다. 각성자가 움직이는 속도라면 병사들은 옷밖에 알아보지 못했을 겁니다."
국무부 장관과 버드 국장이 비슷한 대답을 했다.
"그래서, 이제는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우선,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후퇴 중인 부대를 재정비하려고 합니다. 서쪽으로 진군 중인 부대도 잠시 멈추고, 후방에 있던 병력을 올려서 병력을 강화할...."
대통령의 질문에 합참의장이 준비한 설명을 시작했다.
"몸이 안 좋아서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중간에 버드 국장이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비웠지만, 그를 막는 사람은 없었다.
상황실을 나온 버드는 무표정한 얼굴로 혀를 찼다.
일이 꼬여버렸다. 분명 EV는 만주에 묶여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브라질에 나타났는지 그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전술핵 정도는 쓸 수 있잖아. 쓸모없는 인간들 같으니라고."
그는 소리 없이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버드는 점점 인간의 감정에 익숙해지는 것 같았다.
"대통령을 먹어치워야 했는데. 아쉽군."
핵배낭을 대통령이 들고 있으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대통령이나 반대하는 인간들을 모두 죽여서 해결된다면 당장 죽여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가 대통령이 지닌 핵배낭이 가동되어 핵무기들이 모두 발사될지도 몰랐다.
방사능으로 모두 뒤덮인 지구는 그나 동료들도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러시아 대통령도 살해당했다는데. 어떻게 핵무기 발사를 피했는지 모르겠군."
물론, 미국 핵배낭이 러시아 핵배낭과 방식이 같으리라는 보장이 없었지만, 그는 그 정보라도 얻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지금은 가능한 방법을 써야 했다.
그는 백악관을 나와 승용차에 올라탔다.
"공항으로. 맨해튼으로 간다."
CIA 국장이 탄 고급 승용차가 백악관 정문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인간이 볼 수 없는 먼 거리에서 차가 나오는 것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건물 옥상에 서서 백악관을 바라보고 있는 동양 남자. 경훈이었다.
그는 방탄복이 아닌, 평범한 가죽 재킷과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역시, 저 백악관을 날려버리면 안 된다는 거지."
-네, 핵배낭이 파괴된 뒤, 30분 안에 해제 코드가 입력되지 않으면 미국 전역과 잠수함에 실린 핵미사일이 지정된 곳으로 날아갑니다.
미국을 적으로 규정한 이상 경훈은 거리낄 것이 없었다.
미국에 핵이 없었다면 이미 백악관은 레일건의 먹이가 되었을 것이다.
-유라시아 연합. 특히 러시아의 발표가 나왔습니다. 당장은 미국도 핵을 사용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래도 서둘러야 해. 미국이 이렇게까지 각성자들을 싫어할 줄은 예상 못 했어. 이건 도플갱어 따위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니."
-알겠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핵배낭과 달라서 해제 코드가 필요합니다.
다행히 그와 이브는 같은 핵배낭을 가지고 있었다.
멸망한 세상에서 가져온 핵배낭. 이미 핵배낭은 분석이 끝나 있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어려움이 늘어나 버렸다.
확인한 내용에 따르면 핵배낭은 단순한 바꿔치기도, 땅속에 숨기는 것도, 강제로 빼앗는 것으로도 봉인할 수가 없었다.
상황이 발생하면 해제 코드를 입력하지 않는 한 무조건 미사일은 발사되었다.
"우선 해제 코드를 가진 사람을 찾아야겠군."
-미국은 정보 폐쇄가 심해서 도움이 필요합니다.
EV의 해킹 실력을 잘 아는 미국은 모든 시스템을 폐쇄형으로 전환했다.
잘못하면 정부 기관마다 돌아다니면서 컴퓨터를 연결해야 할 판이었다.
다행히 미국에는 아직 경훈과 EV의 동료가 남아있었다.
경훈이 전화를 걸었다.
뚜....
하지만, 제임스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
그날 저녁.
헬기 편으로 뉴욕에 날아온 버드 국장은 바로 맨해튼 지하로 내려왔다.
대격변 이후 간간이 등장한 괴물들의 습격으로 폐쇄된 지하철역.
철문으로 완전히 폐쇄된 뒤에 이곳은 CIA가 관리하고 있었다.
입구는 바리케이트와 함께 경찰이 지키고 있었지만, 내부는 CIA 직원들이 지키고 있었다.
모두 수술로 세뇌된 각성자들.
그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통과시키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각성자가 그를 한번 살피더니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역시, 특화된 각성자만 모아놓은 보람이 있었다. 이 안이라면 그 대단하다는 EV의 집행자라도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게 분명했다.
그는 계속 아래로 내려갔다.
계단을 지나 지하 광장과 그 아래 승강장까지.
역이 폐쇄되어 이제 이 철로에는 전철이 다니지 않고 있었다. 맨허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무척 불편해졌지만, 지금 정부에 뭐라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승강장 가운데로 걸어갔다.
승강장 중앙에 이상한 것이 있었다.
꿀럭. 꿀럭.
꿈틀거리는 거대한 살덩이.
마치, 거대한 사람의 뇌처럼 보이는 덩어리가 승강장을 메우고 있었다.
[또 무슨 일이냐! 왜 날 찾아온 건가!]
덩어리에서 이미지가 마구 뿜어져 나왔다. 분노와 절망, 체념이 가득한 이미지였다.
도플갱어는 말없이 뇌만 남은 몬스터를 바라보았다.
지배자에 잡혀, 뇌만 뽑혀 나온 괴물.
뇌만 남은 채로 죽지도 못하고 이렇게 계속 봉사해야 하는 괴물.
"네가 불쌍해 보이다니, 정말 인간에 가까워진 것 같군."
[웃기지 마라! 반 쪼가리 쓰레기가.]
"뭐, 욕은 인간에게도 신나게 먹고 있어서…."
[무슨 일로 온 건가! 날 비웃으려고 온 건가!]
군주로 올라가기 직전 꼬꾸라진 꼴을 보니 비웃기 딱 좋기는 했다. 하지만, 도플갱어가 찾아온 이유는 그것이 아니었다.
"일을 좀 더 해 줬으면 해."
[말도 안 된다! 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 나라의 반이나 되는 인간들에게 이미지를 보내고 있는데!]
"그래서, 그가 널 죽이지 않고 이쪽으로 데려와 써먹는 거지."
[감히!]
"거기다, 각성자에게는 아무 소용없는 능력이잖아. 덕분에 귀찮게 수술까지 해야 했고."
뇌만 남은 괴물은 미국 동부 전체에 이미지를 퍼트리고 있었다.
각성자에 대한 분노와 혐오의 이미지를.
물론,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자기 생각인 것으로 여겨졌고, 이미지를 받지 않은 각성자들은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지 알지 못했다.
"워싱턴에 집중해줘. 아니 백악관에 이미지를 퍼부어. 각성자 뿐만 아니라 적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핵 정도는 사용할 수 있게."
[안된다. 그가 내린 명령은 그것이 아니었다. 네가 한 말을 따를 이유가 없다.]
"아니, 지금 하는 것도 내가 요청한 거잖아."
[그가 내린 명령이었다.]
버드는 인간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지배당한 자의 소심한 저항이 분명했다.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때, 괴물과 도플갱어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승강장 구석에서 지켜보는 남자가 있었다.
지저분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는 버드 국장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CIA 국장이 뉴욕 지하에 괴물을 숨겨놓고 있다니. 이거라면 정부를 뒤집어 놓을 수 있어."
각성자 이상으로 괴물을 혐호하는 미국인들이었다.
어떻게 괴물을 잡아둔 지 모르겠지만, 이 비밀을 퍼트리면 나라가 뒤집힐 것이다.
그는 촬영하던 휴대폰을 품에 넣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다른 신분증은 필요 없었다. 버드 국장의 얼굴이면 나가는 것도 문제없었다.
제임스. 전 EV 미주 지사장은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탈출할 시간이었다.
240화. < 제임스(2) >
어둑한 불이 깜빡이는 통로.
저벅, 저벅.
발소리를 울리며 사람이 모습을 보이자, 어둠 속에서 사람이 나타났다.
통로를 지키던 각성자였다.
각성자는 나타난 사람을 살펴보았다.
날카로운 인상의 무표정한 남자. CIA 국장이었다.
이곳을 지날 수 있는 단 한 명의 외부인.
각성자는 국장의 얼굴을 확인한 뒤, 그의 옷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국장은 걸 맞지 않은 낡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
각성자는 다시 한번 얼굴을 확인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남은 국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잘못하다간 걸릴 뻔했다.
그는 낡은 코트를 벗어 구석에 던져 넣었다. 그나마 안의 옷은 멀쩡했다.
그는 계단을 올라가 지하철역 밖으로 나갔다.
"볼일은 다 보셨습니까?"
입구를 지키던 경찰들이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했지만, 그는 무뚝뚝한 얼굴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아, 차는 저쪽에…."
주차장과 다른 방향으로 가는 그를 향해 경찰이 소리를 쳤지만, 그는 손을 좌우로 흔들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냥 둬. 뭔 일 있겠지. CIA 높으신 양반이니 알아서 하지겠지."
"그런가. 혹시나 잘 보이면 특채라도 되지 않을까 했는데…."
"행여나."
동료 경찰의 말에 다른 경찰이 입맛을 다셨다.
지하철역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국장의 얼굴이 변해갔다.
평범한 얼굴로, 그리고 지나가면 기억나지 않은 얼굴로.
국장의 얼굴을 버린 제임스는 맨해튼의 뒷골목으로 잠겨 들었다.
쾅!
그때였다.
지하철역을 박차고 나온 사람이 있었다.
방금 떠난 국장과 똑같은 얼굴을 한 사람이었다.
"어떻게...."
경찰들은 황당한 표정으로 방금 국장이 사라진 방향과 새로 나타난 국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새로 나타난 국장은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어디로 갔지?"
신분을 확인해야 할지, 총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경찰들을 향해 국장이 소리쳤다.
"저, 저쪽으로 갔습니다."
기세에 눌린 경찰이 먼저 나온 국장이 사라진 방향을 가리켰다.
수많은 건물로 미로처럼 되어버린 맨해튼 뒷골목. 침입자는 보이지도 않았다.
버드 국장은 입술을 씰룩였다.
"병신같은 패배자 같으니라고!"
뇌밖에 안 남은 패배자 놈은 침입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침입자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중요한 일을 먼저 해야 한다는 서약의 틈을 이용한 것이다.
종이 되었으면 그냥 따르면 될 것이지, 끝까지 저항하는 꼴이라니.
덕분에 시간도 낭비하고 침입자도 빠져나가 버렸다.
다행히 이곳에 온 목표는 이루었지만, 쥐새끼가 빠져나가서야 말이 안 되었다.
"내 얼굴을 흉내낸 각성자라 이거지."
이야기는 놈을 놓아준 각성자들에게 들었다.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인간이 그의 뒤를 따라왔다가 먼저 올라갔다는 이야기.
똑같은 얼굴을 한 사람이 또 들어왔는데 그냥 통과시켜준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이야기였지만, 뇌수술한 각성자에게는 명령이 우선이었다.
그는 경찰들을 확인하고 혀를 찼다. 그가 들어갈 때 보았던 경찰과 달랐다.
놈은 경찰이 교대한 것을 확인하고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근처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다는 건가."
들어갈 방법을 찾는 중에 그가 들어간 것을 본 모양이었다.
"타이밍이 나빴군."
버드 국장은 혀를 찼다.
그가 알기로 다른 사람의 얼굴을 흉내는 특성을 가진 각성자는 한사람밖에 없었다.
과거, EV 미주 지부장이자 대변인 역할을 한 각성자이자, 지금은 해적 방송으로 사람들을 선동하는 테러리스트.
처음에는 인식을 저하하는 특성만 쓰다가 어느 순간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는 특성까지 쓰게 된 각성자.
그는 CIA와 FBI의 일급 체포 대상자였다.
더구나 그가 본 것은 절대 들켜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찾았습니다."
역 출입구 아래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어두운 표정의 남자. 지하에서 지키던 각성자였다.
그의 손에는 낡은 코트가 들려있었다. 제임스가 버리고 간 코트였다.
"눈썰미 좋은 게 도움이 되는군."
그는 전화를 걸어 주차장에서 기다리는 부하들을 불렀다.
CIA 요원들과 각성자들이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그는 코트를 한 각성자에게 던져 주었다.
"냄새를 기억해. 제임스가 입었던 옷이다. 지금부터 그 냄새를 추적한다. 절대 놓쳐서는 안 돼."
일급 체포 대상자라는 이야기에 요원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FBI에도 연락해. 모을 수 있는 모든 인원을 모아서 맨해튼을 뒤진다. 냄새를 맡았으니 놓치면 알아서 해.
"알겠습니다!"
선두에 선 각성자를 따라 요원들과 다른 각성자들이 달려갔다.
총을 빼 들고 달리는 요원들과 각성자의 모습에 시민들은 분분히 자리를 피했다.
버드도 같이 추적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워싱턴으로 가봐야 했다.
대통령이 새로운 명령을 내리는 자리에 참여해야 했다.
*
오랜 시간 뉴욕 지하에서 뿜어져 나온 이미지가 점점 줄어들었다.
각성자에 대한 분노와 혐오. 오랜 시간 미국 시민 전부를 세뇌하던 이미지였다.
이미지가 점점 줄어들었지만, 아쉽게도 사람들은 바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미지가 줄어들었다고, 바로 세뇌가 풀리는 것이 아니었다.
각성자에 대한 혐오는 이미 대부분의 국민 속에 자기 생각으로 굳어 있었다.
각성자에 대한 혐오가 사라지고 원래대로 돌아오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전국으로 퍼지던 이미지가 줄어드는 대신, 워싱턴 한 곳으로 새로운 이미지가 퍼부어졌다.
지금 미군과 싸우고 있는 적을 증오하라는 이미지였다.
전보다 몇 배나 강해진 이미지는 워싱턴에 있는 일반인과 정부 관리. 그리고 대통령에게 쏟아졌다.
백악관 집무실에 있던 미국 대통령은 갑작스러운 두통에 이마를 눌렀다.
머릿속으로 무언가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끄으응."
그는 급하게 두통약을 먹었지만, 두통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젠장! 왜 또 두통이!"
고통이 심해지자 그는 벌컥 화를 냈다.
그는 화가 났다.
그는 각성자들 때문에 화가 났다.
미군을 공격한 각성자 때문에 화가 났다.
미군을 막은 남미 연합군 때문에 화가 났다.
미군에게 저항한 남미 사람들 때문에 화가 났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고통은 사라졌다. 하지만, 분노는 사라지지 않았다.
"잘못했어. 다시 회의를 소집해야겠어."
미합중국을 공격한 적이었다. 그런 적을 너무 무르게 대했었다.
"따끔한 맛을 보여주면 빠르게 항복하겠지."
사용할 무기가 있는데, 아까운 미국 젊은이들을 희생시킬 이유가 없었다.
그는 바로 전화를 들었다.
"국가 안전 보장 회의를 다시 소집해! 당장!"
"알, 알겠습니다."
조금 아픈 것 같은 비서의 대답이 들려왔다. 하지만, 대통령은 그것까지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맛을 보여줄 거면, 다른 적에게도 보여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는 책상 옆에 놓은 지구본을 바라보았다.
아시아 동쪽 끝에 매달려있는 반도국.
유라시아 연합에서 홀로 핵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나라가 눈에 들어왔다.
그가 대한민국을 보는 사이, 연락을 받은 각료들이 백악관으로 향했다.
급하게 나오느라 그들의 복장은 각양각색이었지만, 그들의 표정은 똑같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적에 대한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
어두운 밤.
컹! 컹! 컹!
조용해야 할 맨해튼 뒷골목이 무척이나 시끄러웠다.
야간 통행 금지가 시행된 뒤로 밤의 맨해튼은 어둠 이상으로 조용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통행 금지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시끄러운 개 소리와 사람들의 고함, 그리고 흔들리는 헤드라이트와 손전등의 불빛은 맨해튼 뒷골목을 나이트클럽으로 바꾸어 놓았다.
"쫓아! 놓치지 마!"
"무조건 확인해! 동료도 상관도 믿지 마! 무조건 신분을 확인해!"
컹! 컹! 컹!
그리고, 시끄러운 소리는 한곳으로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헉, 헉, 헉."
그곳에는 얼굴을 알아보기 힘든 한 남자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는 바로 제임스였다.
"이렇게 빨리 들킬 줄 몰랐는데…."
적어도 은거지까지는 갈 수 있을 줄 알았었다. 그곳에서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을 생각이었는데…. 은거지까지 반도 오지 못하고 말았다.
"저쪽도 필사적이군."
전 EV 지부장이라는 위치도 문제였지만, 그보다는 해적 방송으로 너무 정부의 심기를 긁어놓은 것 같았다.
방송으로 각성자에 대한 분노는 돌리지 못했지만, 잘못된 전쟁과 자유의 억압은 사람들에게 충분한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지금 미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위와 데모는 그가 하는 방송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물론, 방송만으로 데모를 돕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숨어 지내는 각성자들과 연계해서 데모도 돕고, 정부의 비밀도 찾아다녔다.
그 와중에 그의 특성이 대부분 드러나기도 했지만, 그 덕분에 지금처럼 특종을 얻을 수 있었다.
"일이 끝나면 기자나 해볼까?"
의외로 이쪽 일도 적성에 맞았다.
"뭐, 꿈일 뿐이겠지만."
아무래도 오늘 이 자리를 벗어나기는 무리였다.
주변은 이미 FBI로 둘러쳐져 있었고, 각성자들과 CIA 요원들이 그를 추적하고 있었다.
개는 물론, 개 이상의 특성이 있는 추적 각성자가 그를 추적하고 있으니 벗어나기는 무리였다.
"벗어나기는커녕, 외통수야."
제대로 몰이에 당해버렸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사방이 막힌 막다른 곳이었다.
전투 각성자라면 벽을 타고 올라가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체력이 그리 올라가지 않은 특수 각성자였다.
2차 각성을 한 덕분에 다른 사람의 모습을 흉내 낼 수 있게 되었지만, 인간 이상의 괴력을 발휘하는 것은 무리였다.
바보 같은 짓을 한 자신을 향해 한숨을 내쉰 그는 품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그래도 알리고 죽어야겠지."
잠복하느라 꺼놓은 전화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지하철역을 빠져나왔을 때 미리 켜놓는 건데.
"뭐 상관없으려나."
그는 전원을 켜고, 지정된 번호를 눌렀다. 이브에게 직접 연결되는 번호였다.
물론, 이브가 받을 때는 많지 않았지만, 이곳에 음성을 남겨두면 그가 나중에라도 듣게 될 것이었다.
"너무 미루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할 일이 많은 사람이었다. 뉴욕 지하에 있는 괴물 때문에 바로 움직여주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뚜루루루루....
전화벨이 울리고,
컹! 컹! 컹!
골목 너머에서 불빛과 함께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둘러 줘."
다행히 전화는 바로 연결되었다. 다행히 자동 응답기가 아니었다.
-제임스! 당….
"제임스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빨리 이야기하겠습니다. 뉴욕 맨해튼 포트 해밀턴 파크웨이 역 지하에 뇌를 닮은 괴물이 있습니다. CIA 국장이 괴물을 숨겨두고 있습니다. 실험하려는 건지 다른 무슨 일을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습니다."
전화기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지만, 제임스는 그 말을 무시하고 빠르게 설명했다.
시간이 없었다. 벌써 각성자들과 사람들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급하게 설명한 뒤에 그는 겨우 전화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이브가 아닌 것을 알 수 있었다.
"케이입니까?"
-경훈이라고 부르세요.
경훈의 말에 제임스는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나설 생각이군요. 오래 걸렸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랐겠지만, 제임스는 경훈이 EV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EV의 돈의 흐름과 지시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제임스만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쉽게도 그걸 못 보게 되겠군요."
골목을 달려오는 각성자들과 요원들은 완전 무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생포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제임스는 전화기를 든 채로 양손을 들어 올렸다.
할 이야기가 많았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볼 생각이었다.
아쉽게도 시간을 버는 것은 무리였다. 걸음을 멈춘 요원들이 소총을 그에게 겨누었다.
각성자들이 무기를 들었고, 요원들은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렸다.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뒤에 남겨진 사람들을 부탁합니다."
그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과거의 기억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전화기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거절합니다. 사람들은 당신이 책임지십시오.
뜻밖의 대답에 제임스가 눈을 떴다.
그리고, 그는 위를 쳐다보는 각성자와 요원들을 보게 되었다.
그도 위를 올려보았다.
슈아아아악!
하늘에서 사람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니, 내리꽂히고 있었다.
각성자와 요원들이 있는 바로 우ᅵ.
요원들이 놀라 하늘로 총을 쏘았다.
타타타탕!
하지만, 총알은 허무하게 튕겨 나갈 뿐이었다.
다음 순간, 그가 바닥에 충돌했다.
쾅!
엄청난 소리와 함께 바닥이 움푹 파였다. 각성자들와 요원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요원들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고, 각성자들도 튕겨 나간 자리에서 비비적거릴 뿐이었다.
사람들을 날려버린 경훈이 몸을 돌렸다.
"왜, 전화기를 꺼놓았습니까? 제임스를 찾느라고 맨해튼 건물마다 다 뛰어다녔습니다."
다리가 풀린 제임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241화. < 도플갱어가 원하는 것(1) >
경훈이 제임스와 만난 밤은 뉴욕의 FBI와 CIA에게는 악몽 같은 밤이었다.
수십의 각성자와 CIA 요원이 죽고, 다친 FBI 요원들도 부지기수였다.
더구나 그런 피해를 보면서 포위망은 뚫려버렸다.
다른 대단한 전투 각성자가 타겟을 도와준 것은 알아냈지만, 얼굴 확인이 안 되는 타겟은 물론 도와준 자의 신원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살아남은 사람 중에 제대로 얼굴을 본 사람도 없었고, 곳곳에 놓은 CCTV는 그 시간대에 망가져 버렸다.
워싱턴에 도착한 CIA 국장은 차가운 목소리로 군대 투입을 지시했지만, 그도 명령을 받은 요원도 잡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못했다.
그들의 생각처럼, 경훈과 제임스는 제임스가 만들어놓은 아지트에 들려 목욕과 옷을 갈아입은 뒤, 맨해튼 해변에 있는 고급 주택가로 와 있었다.
몇 년 전 경훈이 준비해놓은 저택은 아직도 잘 관리되고 있었다.
경훈은 비밀 문을 열고 저택 지하로 향했다.
부우우우웅.
경훈이 스위치를 켜자,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모니터들이 다시 생명을 얻었다.
벽을 가득 메운 모니터들과 안락하고 고급스러운 실내.
제임스는 방안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게 진짜 영화에서 보던 비밀 기지지."
그는 조금 전에 거쳐왔던 그의 뒷골목 아지트가 생각났다.
"앞으로 여길 쓰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괜한 위험을 들일 수는 없죠. 저도 지낼 곳은 많습니다."
경훈의 말에 제임스가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전에 만들었던 네트워크는 살아있습니다.]
이브의 말과 함께 모니터들에 사람들이 사진과 이력이 계속 지나갔다.
잠시 뒤, 계속 지나가던 화면들이 멈추었다. 총 여덟 명의 신상명세가 화면에 나타났다.
[가지고 있는 휴대폰에 명단을 전송했습니다.]
이브의 말에 제임스가 휴대폰을 확인했다. 메일이 하나 들어와 있었다.
"이 명단에 있는 사람들의 소재를 알아내면 되는 겁니까?"
[네, 핵가방 해제 코드를 가졌을 것으로 예상하는 사람들의 명단입니다. 2년 전을 끝으로 갱신이 멈춰서 현재 위치를 알 수가 없습니다.]
제임스가 우울한 얼굴로 명단을 살펴보았다.
"....결국, 미국을 상대로 칼을 뽑을 생각이군요."
제임스의 말에 경훈이 대답했다.
"내 오판으로 마르셀로가 죽었습니다."
놀란 제임스가 경훈을 쳐다보았다. 경훈은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칼은 벌써 뽑았습니다. 이미 EV는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EV의 선전포고는 경훈의 선전포고와 같았다.
제임스는 담담한 경훈의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경훈의 얼굴에는 마르셀로를 잃은 슬픔과 분노가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대신 복수의 결단만이 보일 뿐이었다.
제임스는 눈을 감았다.
"하기 힘들다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른 방법을 찾아도 됩니다."
"....그럼, 더 피해는 심해지겠죠."
제임스가 눈을 뜨고 경훈을 바라보았다.
"대통령, 아니 정부 각료와 군 수뇌부만으로 끝낼 수 없겠습니까?"
경훈은 고개를 저었다.
한번 실수로 족했다. 각성자들을 수술로 로봇처럼 만드는 나라를 그냥 놓아둘 수는 없었다.
"휴.... 그렇다면, 제발 희생을 최소한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다들 광기에 휘둘렸을 뿐입니다."
경훈의 거절에도 차마 그는 부탁받은 일을 거부할 수 없었다.
적어도 핵전쟁은 막아야 했다. 그리고, 이 나라도 원래대로 돌려야 했다.
나중에 매국노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고 해도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휴대폰을 넣고, 경훈에게 인사를 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확인하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경호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여기는 저들이 찾던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이제 통행 금지도 풀릴 때니 문제없습니다."
벌써 오랫동안 숨어다녔던 제임스였다. 냄새도 지웠고, 추적하던 각성자와 개들도 더는 살아있지 않았다.
어제 같은 일이 아니라면,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는 바로 저택을 빠져나왔다.
"아, 괴물 이야기를 못 했네."
걸음을 멈추었던 제임스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뉴욕 지하에 괴물이 살고 있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괴물 따위가 아니었다.
멀리, 뉴욕만 너머로 아침 해가 올라오고 있었다.
새벽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전보다 표정이 좋아 보였다.
서둘러야 했다. 그는 낡은 코트 깃을 세우고 걸음을 재촉했다.
*
같은 시각 백악관.
한밤중에 소집되어 새벽부터 시작된 회의는 아침까지 이어졌다.
버드 CIA 국장은 뉴욕에서 오느라, 회의 중간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불만이 없어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전부터 그가 주장한 대로 회의가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통합 사령부는 전술핵 사용 목표를 정해 주십시오. 핵무기 발사 코드를 보내드리겠습니다."
미국의 핵무기 사용 권한은 대통령만이 가지고 있었다. 백악관에서 보낸 발사 코드를 입력하면 그 핵무기는 사용이 가능해지는 것이었다.
"단, 이번 전술핵 사용은 전부 남미 작전에 한해서입니다."
대통령의 말에 국가안전보장회의 구성원들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드디어 2차대전 이후로 미국이 다시 핵 사용을 승인한 것이다.
아쉽게도 CIA 국장은 국가안전보장회의의 정식 참가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버드 국장은 회의가 진행되는 것을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전처럼 딱딱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에 핵을 사용하는 건이 있습니다."
남미 전선에 전술핵을 사용하는 것은 금방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전략핵을 서울에 투하하는 건 때문에 이렇게 회의가 길어지고 있었다.
"연맹이라 러시아가 가만히 안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도 본토에 떨어지지 않았는데 미사일을 쏠려고요."
"러시아만 있는 게 아닙니다. 만주도, 북한도 있습니다. 그들이 반격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위험합니다."
"전 괜찮다고 봅니다. 자국에 날아온 것도 아니잖습니다. EV에 협력하는 나라에 본보기를 보여야 합니다. 지금 저 나라들이 미국을 협박하는 것을 보십시오. 가만히 있다가는 미국에 등을 돌릴지도 모릅니다."
과거 한국이 미국의 동맹국이었다는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고 있었다. 민간인의 죽음에 대해서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단지 미국에 위협이 될지에 대한 이야기밖에 없었다.
어제 회의와는 완전히 달라진 회의였다.
버드 국장은 건성으로 회의를 듣고 있었다.
어차피 지금 회의는 그의 관심 밖이었다. 이미 그가 원하는 것은 이루어졌다.
한국에 핵을 떨구던, 떨구지 않든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핵전쟁 때문이라도 한국을 공격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남미로 내려갔던 미군이 계속 공격해 나가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괜한 패배로 후퇴하면 곤란했다.
미국이 아메리카 대륙을 다 점령해 놓으면 훨씬 더 편해지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본토에 최대한 군인을 줄여놓아야 했다.
미군의 위치와 규모는 어느 정도 파악이 끝나 있었다. 이렇게 멀리 산산이 흩어놓으면 하나하나 박살 내기가 훨씬 쉬웠다.
더구나, 지금 진행하는 일을 위해서도 최대한 군대를 빼놓는 것이 중요했다.
버드 국장, 아니 도플갱어 버드는 미소 띤 얼굴로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이제 곧, 사령부에서 공격 목표가 날아오게 되면 다시 진군이 시작될 것이었다.
여러 군데 목표가 지목되겠지만, 상파울루는 절대로 빠질 수가 없었다.
전술핵으로 날뛰었다는 EV 각성자들을 모두 죽이게 된다면 자신들이 이차원의 지구를 지배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버드는 하늘을 날아가는 핵미사일을 상상하며 해가 떠오르는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
제임스가 혼자 떠난 뒤, 경훈은 맨해튼의 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포트해밀턴 파크웨이 지하철역.
어젯밤 제임스가 전화로 외쳤던 괴물이 있는 역이었다.
"할 일이 없어서 온 것치고는 꽤 찌릿한데."
멀찌감치 서서 지하철역을 바라보는 경훈의 얼굴이 심각해져 있었다.
날카로운 마나가 저 지하철역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뉴욕에는 대장급 괴물이 없었잖아?"
-대장급입니까?
"느낌이 묘하긴 한데, 대장급 이상일지도 몰라."
-아쉽지만 위성으로는 지하 깊숙한 곳까지 파악하기는 무리입니다. 지하에 사는 몬스터들 중에 놓친 몬스터도 꽤 있을 겁니다.
"결국, 기계만으로는 무리인가."
나지막이 혀를 찬 경훈이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인상이 흐려 보이는 선글라스를 쓴 그는 지하철역에 채 다가가기 전에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정지. 더 가까이 다가오면 발포하겠다. 거기서 신분증을 꺼내라."
어제의 사건으로 역을 지키는 경찰이 스와트팀으로 바뀌어 있었다.
경찰들이 나란히 그에게 총을 겨누자, 경훈이 도로를 발로 툭툭 찼다.
-전부 쓰러뜨리고 들어가실 겁니까?
이브의 말에 경훈이 고개를 저었다.
어제라면 그랬을지도 몰랐지만, 제임스의 말에 생각이 바뀌었다.
귀찮게 죽일 이유가 없었다.
그는 발을 박찼다. 경훈의 모습이 사라졌다.
"공, 공격해! 적이다!"
역을 지키던 팀장이 소리쳤지만, 팀원 중 누구도 방아쇠를 당기는 사람이 없었다.
목표가 보이질 않았다. 어디에도 선글라스를 쓴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당장 수색해!"
사이렌이 울리고, 다시 경찰들이 뛰어다니기 시작했지만, 이미 경훈은 역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파파팍!
그는 마치 허공을 달리는 것처럼 계단 아래로 쏘아졌다.
중간에 그를 가로막는 각성자들이 있었지만, 경훈의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무기를 꺼낼 필요도 없었다. 그의 주먹에 각성자들은 방어막이 박살 나며 목숨이 끊어졌다.
위협이 되지 않는 자들은 손쓸 필요도 없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은 봐줄 이유가 없었다.
몇 분도 되지 않아 경훈은 지하철 제일 아래, 승강장에 도착했다.
그는 승강장 중앙에서 꿈틀거리는 살덩어리를 보게 되었다.
"이게 뭐야."
경훈은 황당한 얼굴로 괴물을 바라보았다.
혹시나 군주일지도 몰라, 한껏 긴장했었는데 막상 나온 것은 물컹거리는 뇌를 닮은 살덩이였다.
-처음 보는 형태의 몬스터입니다. 어떤 특성이 있을지 모릅니다. 주의해주십시오!
살덩어리를 노려보던 경훈은 이브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이 괴물은 뭔가 잘못되어 있었다.
그리고, 특성을 주의할 필요도 없었다.
"특성은 뭔지 알겠어."
그는 괴물에게서부터 퍼져나가는 이미지를 느낄 수 있었다. 멀리 퍼지는 강력한 이미지들.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 접근해서야 그도 겨우 알 수 있는 이미지들이었다.
마나를 지닌 자들을 비켜나가는 이상한 이미지. 경훈이 아니었으면 각성자는 코앞에서도 알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때, 한 가닥 이미지가 경훈의 머리 속을 울렸다. 괴물은 정상적인 이미지도 가능한 모양이었다.
궁금증, 의문, 의심.
인간의 말로 한다면 한마디 말로 대체할 수 있는 이미지였다.
[넌, 뭐지?]
위험은 없어 보였다. 경훈은 이미지에 대답했다.
"난 인간, 각성자다."
당혹, 황당, 경악. 환호 [말도 안돼! 인간이 어떻게!]
괴물은 경훈의 능력을 꿰뚫어 본 모양이었다.
[너 같은 인간이 있다니! 나에게 육체만 있다면 너를 가만히 두지 않을 텐데!]
억울한 이미지가 경훈에게 계속 날아왔다.
육체가 없어서 상대할 수 없는 아픔이,
패배해서 뇌만 남은 사연과 이곳에서 도플갱어의 명령에 따라 인간을 세뇌한 것까지,
모든 억울한 사연이 이미지가 되어 경훈에게 쏟아졌다.
경훈이 황당한 표정으로 괴물을 바라보았다.
괴물은 엉뚱한 방법으로 자신의 비밀을 경훈에게 모두 알려주었다.
왜 이 괴물이 이런 짓을 하는지도 날아든 이미지로 알 수 있었다.
"죽여달라는 거군."
서약 때문에 주인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지만, 이 괴물은 죽음을 갈구하고 있었다.
경훈은 아공간에서 대검을 꺼내 들었다.
[크윽. 억울하다. 내가 힘만 있다면!]
만들어진 분노와 함께 기쁨이 흘러들어왔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지만, 대답하기 어렵겠지."
거기다 시간이 없었다. 날아온 이미지대로라면 한시라도 빨리 괴물을 죽여야 했다.
괴물의 뇌에서도 이상한 촉수가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아마도 괴물의 공격인 모양이었다.
경훈은 촉수를 피해 검을 찔러넣었다.
뇌만 남아서였을까. 고통에 찬 이미지는 없었다.
경훈은 검에 마나를 밀어넣었다.
검에 균열이 생기고,
콰아아앙!
괴물 안에서 검이 폭발했다.
그 순간, 괴물이 마지막 이미지를 경훈에게 날렸다.
죽는 순간, 종속에서 벗어난 것일까.
[고맙다. 너의 일족은 지지 않기를.]
마지막 감사와 함께 괴물의 몸이 터져나갔다.
파아악!
살덩이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순간, 사방으로 퍼져나가던 이미지가 모두 사라졌다.
경훈이 손잡이만 남은 검을 던졌다.
이어, 경훈이 손을 뻗었다.
은빛 구멍이 피 묻은 승장강 위에 펼쳐졌다.
워싱턴으로 향하는 차원문이었다.
차원 문에 몸을 던지는 경훈은 험상궂게 웃고 있었다.
"CIA국장이 도플갱어라고?"
괴물이 전해준 이미지에는 국장의 정체도 들어있었다.
경훈의 음성이 차원문 속으로 사라지고, 피바다가 된 승강장은 다시 침묵에 잠겼다.
242화. < 도플갱어가 원하는 것(2) >
한순간이었다.
회의실이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인상을 쓰며 떠들던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다물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었고, 뭔가 생각하는 사람.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전화기를 들고 명령을 내리던 참모총장도 말을 멈추었고, 두통으로 인상을 쓰던 대통령도 표정이 바뀌었다.
"이, 이게 무슨."
"맙소사. 우리가 무슨 짓을 하려던 거지?"
곧이어 사람들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참모총장이 전화기를 든 채로 대통령을 쳐다보았다. 대통령이 참모총장에서 급하게 명령했다.
"당장 공격 취소해!"
"공격 취소! 핵 미사일 발사 중지! 모두 중단해!"
대통령의 지시에 참모총장이 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다행히 핵미사일 발사 시퀀즈 도중이었다. 발사는 취소되었고, 사람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은 귀신을 본 것 같은 얼굴들이었다.
"우연은 아니겠죠?"
"세뇌같은 건가? 설마 각성자의 특성?"
"각성자가 핵미사일을 쏘게 세뇌를 뿌렸다고? 차라리 괴물들이 세뇌를 시켰다는 게 맞을 듯한데...."
말을 하다 말고, 각료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럴듯한 말이었다.
"그럼, 지금은 괜찮아졌지만, 또 당할 수도 있는 거잖습니까?"
"이런 건 막을 수도 없을 텐데요...."
회의실 안에는 다른 의미의 공포가 다시 맴돌았다.
"누가 했는지 확정 지을 수는 없지만, 일종의 정신 공격이 분명합니다. 정신 특성을 가진 각성자를 찾아야 합니다."
국방부 장관의 말에 리퍼드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국방부와 버드 국장은 바로 각성자를..... 버드 국장은 어디 있지?"
대통령의 말에 각료들은 모두 회의실을 확인했다. 어디에도 CIA 국장은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 화장실을 가신다고 방을 나가셨습니다."
문을 지키던 경비의 말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충격을 받아서 토하러 갔을지도 몰랐다.
각료들은 방을 떠난 국장을 기다리면서 다시 회의를 진행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회의는 더욱더 심각해졌다.
시간이 지났지만, 버드 국장은 회의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이미 차를 타고 백악관을 나서는 중이었다.
"뉴욕에 문제가 생겼다. 만약을 대비해서 모든 연락을 끊기로 한다.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 다시 연락하겠다. 모스크바는 동족인 네게 맡기겠다."
그는 처음 러시아에 위성 전화를 건 뒤에 다른 여러 곳에 지시를 내렸다.
"더는 캠프에서 지시가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각 작업장은 최대한 빨리 완성하도록."
영국과 홍콩, 그리고, 엘도라도 국립공원까지.
지시를 마친 그는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확인은 되었나?"
조수석에서 요원이 급하게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아직 확인하고 있습니다. 경찰들이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거부해서 요원들이 달려가는 중입니다.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내부를 확인하고자 안으로 들어갔던 경찰이 안을 지키던 각성자에게 죽어 나온 뒤, 역으로 들어가려는 경찰은 없었다. 그것이 스와트 팀이라고 해도.
으득.
버드 국장이 이를 갈았다. 요원이 백미러로 국장을 훔쳐보고 고개를 푹 숙였다.
요원은 국장이 저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처음 보았다. 아무래도 일이 크게 잘못된 모양이었다.
버드는 인간의 쓰레기 같은 행동에 짜증이 났다.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다니.
회의실이 조용해지는 순간, 버드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인간들의 표정에서 그는 뉴욕 지하에 있는 패배자의 뇌가 일을 멈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계속된 이미지로 심층 심리에 남겨진 각성자에 대한 혐오와 달리, 지금 세뇌는 이미지가 끊어지면 바로 효력을 잃을 게 분명했다.
그는 미사일 발사를 중단시키는 순간 바로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뉴욕에 가서 확인해 봐야 했다. 패배자건 뇌만 남은 쓰레기건, 같은 주인의 종이었다.
만약을 대비한 연락도 끝내 놓았다.
그가 탄 차는 금세 앤드류 공군기지에 도착했다.
공항에는 미리 연락받은 헬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탄 차는 검문소를 통과해 헬기가 대기하고 있는 활주로로 향했다.
끼익.
차가 멈추고, 국장이 차에서 내렸다.
투투투투.
헬기가 계단을 내리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승무원이 평상시처럼 계단 앞까지 나와 있었다.
그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가 채 헬기에 도착하기 전에 뭔가가 머리 위를 지나갔다.
슈아아악!
공기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였다.
쿵.
그리고, 헬기에서 충돌음이 들려왔다.
헬기 옆에 서 있던 승무원이 놀라 소리나는 곳을 돌아보았다.
버드 국장도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프로펠러 아래에 뭔가 꽂혀있었다.
"검?"
엔진이 있는 곳에 검 자루가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말도 안되는 생각이었지만, 방금 검이 날아와서 박힌 것 같았다.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
쾅!
칼이 박힌 엔진이 터져나가며 헬기가 화염에 휩싸였다. 승무원도 화염에 빨려들었고, 버드 국장도 뒤로 바닥을 굴렀다.
투타타타타.
돌고 있던 프로펠러가 튕겨 나갔다. 프로펠러는 버드 위를 지나, 뒤에 있던 차를 덮쳤다.
국장의 차가 갈가리 찢겨 나갔다.
국장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도 화염이 덮치기는 했지만, 방어막 덕분에 몸은 멀쩡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테러에 정신이 없었다.
위이이잉!
싸이렌이 울리고, 격납고와 막사 쪽이 시끄러워졌다.
곧, 병사들이 도우러 올 게 분명했다.
하지만, 버드는 방금 본 검이 생각났다.
"각성자 테러인가?"
검을 던져 헬기를 박살낼 정도의 각성자라면 평범한 군인들이 상대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자신은 힘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안 되었다.
그는 재빨리 주위를 확인했다. 적을 빨리 찾아야 했다. 잘못하다간 군인들까지 모두 죽여야 할지도 몰랐다.
다행히, 테러범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버드 국장은 박살난 차를 살피는 한 남자를 볼 수 있었다.
검은 머리의 동양인, 그는 온몸에 피를 덕지덕지 묻히고 있었다.
어디에선가 한바탕 테러를 벌이고 온 듯한 몰골이었다.
버드는 슬쩍 몸속의 마나를 움직였다. 자신이 마나를 쓸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눈치채기 전에 끝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차를 살피던 남자가 하는 말에 행동을 멈추고 말았다.
"도플갱어는 없군. 국장 하나뿐인가."
차를 살피던 남자가 몸을 돌렸다.
아직 젊어 보이는 남자였다. 조금은 피곤해 보이는 남자.
하지만, 그는 지금 기세를 감추지 않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줄기줄기 마나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하마터면 늦을 뻔했어. 이브 덕에 겨우 따라잡을 수 있었어."
워싱턴으로 날아온 뒤, 사람들이 이성을 찾은 것을 확인한 경훈은 바로 CIA 국장을 찾았다.
다행히 이브의 해킹 덕분에, 그는 교통 CCTV에서 국장이 탄 차를 확인할 수 있었고, 열심히 달려와 헬기가 떠나기 전에 도플갱어를 막아선 것이다.
"넌, 뭐냐. 도플갱어라니 무슨 소리지?"
국장의 말에 경훈은 피식 웃었다.
"신기하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기 어려울 정도야. 다른 도플갱어하고는 다르군."
딱딱하게 굳어지는 국장을 보며 경훈이 말을 이었다.
"뇌만 남겨놓고 죽지도 못하게 해놓고 비밀이 유지될 거라 믿었으면 바보라고 해주지."
경훈의 말에 버드의 표정이 사라졌다.
"네가 범인인가?"
"이미지를 멈춘 게 나라면 맞아. 이제야, 도플갱어 답네. 더 확인해볼 필요는 없겠어. 어차피 도플갱어를 고문할수 있는 것도 아니고."
확인은 끝났다.
좀 더 정보를 얻어내고 싶었지만, 도플갱어에게서 정보를 얻어내기는 무리였다.
솔직히 정보가 아니더라도 그냥 죽이기는 아까웠다.
하지만, 버드는 달랐다.
"넌 내가 고문해봐야겠어. 뭘 더 알고 있는지 알아야겠어."
국장이 안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손잡이에 보석이 반짝이는 권총. 아이템 권총이었다.
"꽤 실력이 좋은 각성자 같지만, 이 총은 피할 수 없을 거다."
하지만, 그가 꺼낸 총에 경훈의 눈이 반짝였다.
"설마, 저쪽 세상 물건인 건가?"
"뭐?"
경훈의 말에 국장이 놀란 순간, 경훈이 움직였다.
타타타타타.
동시에 권총이 불을 뿜었다. 기관총을 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경훈이 있던 활주로가 터져나갔다. 권총의 화력이 아니었다.
하지만, 권총은 경훈을 맞추지조차 못했다.
"컥!"
경훈의 손이 도플갱어의 가슴을 꿰뚫었다. 방어막은 소용도 없었다.
한 번에 죽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감정대로 해서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죽음은 죽음으로.
경훈이 아는 가장 좋은 복수였다.
"넌, 넌 누구냐."
도플갱어답다고 할까? 심장이 날아간 뒤에도 버드는 입을 열었다.
경훈이 도플갱어의 귀에 속삭였다.
"EV의 주인이자, 차원이동자다. 너희 일족과는 자주 만나는군."
경훈의 말에 도플갱어의 눈이 커졌다. 무척이나 놀란 얼굴이었다.
도플갱어답지 않은 표정에 경훈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미 도플갱어는 숨이 멈춘 뒤였다.
경훈은 쓰러진 도플갱어를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시체가 된 도플갱어였지만, 써먹을 데가 있었다.
그리고, 권총을 집었다. 예상대로 저쪽 세상의 아이템이었다.
"호, 이거 괜찮은데? 버틸 수 있을까?"
아름다운 문양과 멋지게 만들어진 디자인, 장인의 솜씨였다.
잘하면 그의 마나를 버틸 수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는 바로 몸을 날렸고, 잠시 뒤, 군인들이 활주로에 도착했을 때 경훈을 본 사람은 없었다.
그곳에는 불타는 헬기와 프로펠러에 갈린 자동차만 남았을 뿐이었다.
공군기지에서 벌어진 테러는 가득이나 정신없었던 백악관을 뒤집어놓았다.
경비가 강화되고, 모든 작전은 중지되었다.
*
그날 밤, 백악관 집무실.
홀로, 집무실에 남아 있던 리퍼드 대통령에게 뜻밖의 손님이 방문했다.
은신 망토를 두른 각성자. 경훈이었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경훈은 집무실 소파에 앉아 미국 대통령을 바라보았다.
황당한 얼굴로 경훈을 바라보던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각성자인가?"
리퍼드의 얼굴에 혐오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대통령은 억지로 표정을 풀었다.
대통령이 먼저 경고했다.
"우선 미리 말해두어야겠군. 웬만하면 나에게 손을 안 대는 편이 좋을 걸세. 시기가 안 좋아서 핵가방이 가동될 수도 있어."
정신없는 하루였다. 해제 코드를 입력해야 하는 사람들이 입력을 안 할 수도 있었다.
대통령의 말에 경훈이 스마트폰을 꺼내 명단을 보여주었다.
"명단에 있는 사람들이 있는 곳을 다 확인해 놓았습니다."
스마트폰 화면에는 몇 개의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
워싱턴에 도착한 뒤, 열심히 해킹한 이브 덕분에 겨우 특정해 낼 수 있었던 해제 코드 명단이었다.
제임스도 발 빠르게 움직여 주었다. 하루 만에 명단에 있는 사람들의 위치를 모두 알아낸 것이다.
경훈의 말에 대통령의 표정이 변했다.
"어디서 온 사람인가. 러시아?"
"러시아도 지원하고 있긴 하지만…. 전 EV에서 왔습니다."
대통령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그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젠장, 내 감정도 믿기 어렵다니."
그는 입술을 깨물면서 감정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경훈은 대통령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남, 남미에 이어, CIA 국장, 이번에는 백악관에 테러인가? 대통령 하나 죽였다고 절대 미국이 무너지지는 않아."
대통령의 말에 경훈이 고개를 저었다.
"대통령 하나만이 아니라 각료 모두를 제거하고 통합 사령부를 무너뜨리면 가능합니다."
이브가 보장한 내용이었다.
경훈의 말에 리퍼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미군 중부 사령부를 쓸어버린 EV 부대가 생각난 것이다.
그런 각성자 부대라면 막을 도리가 없었다.
"하, 하지만, 그렇게 쉽게는...."
이제, 대통령의 음성은 다른 의미로 떨리기 시작했다.
"쉽지는 않겠죠. 핵은 막을 수 있지만, 곳곳에서 반란도 일어날 거고, 미국은 거의 내전 상태가 되겠죠."
대통령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래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각성자에 대한 반감이 사라지지 않는 미국이라면 그냥 내전 상태로 놓아두는 편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죠."
경훈의 생각은 지하철 역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달라지지 않았다.
경훈은 힐끗 탁자에 놓인 스마트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제임스가 보낸 주소에는 아무런 말이 더 담겨있지 않았다.
그는 경훈에게 모두 맡긴 것이다.
"그런데, 각성자 혐오는 괴물이 만든 세뇌였더군요."
경훈은 아공간에서 시체를 꺼냈다.
털썩.
CIA 국장의 시체가 바닥에 던져졌다.
시체를 본 대통령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버드? 그런데, 이건 사람이 아닌데?"
피부의 색도 구멍 뚫린 내부도 사람과는 달랐다.
딱딱하게 굳어진 놀란 표정 만이 버드 국장인 것을 알려주었다.
"도플갱어라고 합니다. 인간 속에 잠입하는 괴물이지요. 한국에도 하나 나타났었습니다."
유라시아 연합의 지도자들에게는 미리 알려주었지만, 언제, 어디에 도플갱어가 잠입해 있을지 몰라, 다른 나라 지도자들에게는 알려줄 수가 없었다.
물론, 유라시아 지도자들도 믿지 못하고, 감추기 급급했지만.
경훈은 뉴욕의 괴물에게서 들은 내용을 대통령에게 설명했다.
"정말, 각성자 혐오가 세뇌였었나?"
낮의 일 이후로 의문을 가지게 된 대통령이었지만, 경훈의 입에서 듣는 것은 전혀 달랐다.
"괴물을 처리했지만, 이미 자리 잡아서 없어지지 않는 세뇌라니...."
이야기를 들었지만, 혐오감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대통령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성과 감정 사이에서 두통만 늘어났다.
"없앨 수는 없는 건가?"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사라지겠죠. 아마 남미 파견군 중에는 혐오감이 많이 사라진 사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눈앞에 앉아 있는 각성자가 가만히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지금 그는 EV와 자신을 동일시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직감할 수 있었다. 이자가 EV의 실세이자 대표였다.
분노와 혐오, 걱정과 안타까움이 섞인 대통령의 얼굴을 바라보던 경훈이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세뇌에 놀아난 꼭두각시일 뿐이었다.
경훈은 자신이 나온 쪽을 바라보았다.
어둠속에서 망토를 쓴 작은 사람이 걸어나왔다.
"망토 벗어도 되죠?"
"그래."
경훈의 말에 나온 사람이 망토를 벗었다.
치유의 여신이 망토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다희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날 밤. 워싱턴에 있는 사람들은 백악관에서 떠오르는 환한 빛을 보았다.
마음이 평안해지는 빛. 모두의 마음속에서 각성자에 대한 분노가 씻겨 내려갔다.
***
워싱턴은 밤이었지만, 그 시간 모스크바는 해가 떠오르는 아침이었다.
그때까지 책상에 놓인 휴대폰을 바라보던 남자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마지막 연락 이후 다시 전화가 오지 않았다.
그는 휴대폰을 들었다.
빠직.
그의 손안에서 휴대폰이 부서졌다.
이제 혼자 해나가야 했다.
그는 옷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갔다. 거리는 축하 행사 준비로 온통 시끄러웠다.
아직, 전쟁 중이었지만, 민심을 돌리려면 축하 행사가 제일이었다.
승전 행사에 맞춰서 일을 벌이려면 준비할 게 많았다. 대통령도 참석하고, EV 각성자들도 온다는 데 제대로 된 환영 행사를 해야 했다.
그는 행사장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243화. < 도플갱어가 원하는 것(3) >
[오늘, 미합중국 리퍼드 대통령은 미군의 철수를 공식적으로 명령했습니다.]
전쟁이 끝났다는 미국발 기사는 전 세계를 강타했다.
서로 왕래는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지만, 아직 위성과 광케이블은 유지되고 있었다. 미국에서 발송한 기사는 세계 여러 나라를 놀라게 했다.
[그동안 미국인들 사이에 퍼져있던 각성자에 대한 혐오는 괴물들이 만든 세뇌였다는 것이 미국 정부의 발표입니다. 미국 동부 지역부터 세뇌를 풀기 위한 작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작업은 한국 각성자 다희의….]
더구나, 그 기사 안에는 더욱 놀라운 내용이 들어 있었다.
미국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가 전국에 걸친 괴물의 세뇌 때문이라니, 괴물들이 나타나기 전이라면 아무도 안 믿을 말이었다.
사람들의 의심을 살 것 같아, EV와 경훈의 도움은 발표에 넣지도 못했지만, 한국인 각성자인 다희가 치료해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발표를 믿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외국은 물론, 미국 내에서도.
특히, 아직 각성자 혐오가 남아 있는 사람들은 총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곳곳에 시위와 폭동이 이어졌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조용하던 미국 내 괴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군대의 철수는 더욱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군대 안에서도 혼란이 적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세뇌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고국이 위험하다는 소리에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미군이 빠르게 남미를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사과도 없이 떠나가는 미군을 보고도 남겨진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떠나는 미군들에게 남아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제 그들은 군대와 각성자가 모두 사라진 땅에서 괴물들을 막아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
리우데자네이루.
다른 도시들처럼 미군에 점령당했던 브라질 도시도 다시 해방되었다.
와아아아아아!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행진하는 군인과 각성자들을 환영했다.
거리 위로 흰 종이가 뿌려졌고, 여자들이 튀어나와 군인들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그 사이를 각성자들과 남미 연합군이 걸어갔다.
승전 행진이었지만, 군인과 각성자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각성자만이 아니네요. 환영하는 사람들도 표정도 좋지 않네요."
바실리의 말에 소냐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복잡한 표정을 짓는 사람이 더 많았다.
억지로 웃는 얼굴 뒤에 두려움이 숨어 있었다.
생명을 걸고 싸우던 각성자들과 달리, 저들은 먼저 백기를 내걸고 미군에 항복했었다.
민간인이라 어쩔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각성자와 군인들이 보기에는 배반자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려면 오래 걸릴 것 같아."
소냐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도 맘에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은 어쩔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그런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었다. 마르셀로와 수많은 사람의 희생으로 지켜낸 곳이었다.
그리고, 도움을 주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 앞에서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없었다.
포탈을 타고 온, 바실리를 비롯한 EV 각성자들이 같이 이동하고 있었다.
넓은 남미 대륙에 비하면 얼마 안 되는 숫자였지만, 각성자 수가 부족한 지금 상황에서는 고마울 뿐이었다.
바실리가 길가에 버려진 장갑차를 보았다. 장갑차에는 미군의 별 마크가 남아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에요. 미군하고 싸울 줄 알았는데...."
괴물과 싸우기도 쉽지 않았지만, 인간과 싸우는 것은 그 이상으로 힘든 일이었다.
"근데, 도대체 어떻게 해결한 걸까요? 싸워서 될 일은 아니었을 텐데…."
뜬금없이 미군이 철수한다는 말보다 더 황당했던 것은, 그 일을 해결한 게 경훈이라는 점이었다.
공식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제 경훈은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한 일을 숨기지 않았다.
바실리도 경훈과 함께 싸워온 만큼 경훈의 실력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 일은 무력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바실리의 말에 소냐는 얼마 전 일을 떠올렸다.
홀로 군대를 부숴버린 남자. 그리고, 그가 남긴 말.
그는 EV의 집행자가 아니라, EV 그 자체라는 이야기.
"힘만큼, 다른 것도 대단한 거겠지."
지금 경훈은 다희와 함께 미국을 순회하고 있었다.
가득이나 혼란한 미국이었다.
테러와 폭동, 그리고 괴물의 출현이 수시로 벌어지는 지금, 경훈보다 다희의 경호원으로 적합한 사람은 없었다.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사이, 행사는 끝이 났다.
크아아아앙!
팔 벌린 그리스도상이 있는 산 쪽에서 괴물의 괴성이 들려온 것이다.
"꺄아악!"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건물 안으로 도망쳤다.
병사들은 총을 장전했고, 각성자들은 창과 검을 잡았다.
"미군 대신 이제는 괴물인 건가요?"
소냐는 커다란 구원자의 조각상을 보며 중얼거렸다. 수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아직도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괴물인 쪽이 좋죠. 저희가 해결하겠습니다."
바실리가 헤드셋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특수 작전 팀 이동한다!"
그의 말에 팀원들이 앞으로 달려왔다.
검은 방탄복을 입은 EV 정예 각성자들이 그의 옆에 모여들었다.
두두두두두.
특수 작전 2팀, 속칭 바실리 팀은 어느새 날아온 헬기를 타고, 산으로 날아갔다.
소냐가 날아가는 헬기를 바라보았다.
아직 구원은 내려오지 않았지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사람들이 있었다.
마르셀로의 희생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소냐가 마나를 담아 힘껏 소리쳤다.
"행사는 여기서 끝냅니다! 바로, 작전에 돌입합니다. 괴물들을 정리하고 사람들을 구합시다!"
"네!"
도시 전체에 각성자와 군인들의 대답이 울려 퍼졌다.
***
모스크바에서도 승전 행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다만, 리우데자네이루와 달리, 모스크바의 행사는 더 즐겁고 밝은 분위기였다.
시베리아 남쪽에서 올라오던 괴물들은 다싱안링산맥에 있던 군주가 죽은 뒤에는 지리멸렬하게 물러나고 있었다.
흑해 쪽으로 북상하려던 군주 괴물도 이란에서 죽었고, 유럽을 휩쓸고 있는 괴물들도 아직 동유럽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북쪽의 괴물들이 아직 러시아를 괴롭히고 있었지만, 이 괴물들은 전에도 감당해 본 적이 있었다.
아직 싸움이 끝나지는 않았지만, 러시아는 충분히 기뻐할 만했다.
그리고, 각성자들과 유라시아 연합군이 모스크바를 들르는데 환영 행사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주의 싸움을 끝내고 유럽을 돕기 위해 이동하는 군대였다.
아직, 괴물들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모두 도망가기 바쁠 뿐이었다. 그곳에는 많은 군인과 각성자가 필요 없었다.
치이이익.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모스크바역에 멈춰 섰다.
기차가 멈춰선 승강장에는 수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차가 멈춰서자, 많은 병사와 각성자가 기차에서 내렸다.
모두, 만주에서 온 유라시아 연합군이었다.
기차 앞쪽 칸에서도 각성자가 내려섰다.
모두 움직이는 문양이 새겨진 검은 방탄복을 입은 여성 각성자. EV 특수 작전팀이었다.
맨 앞에서 기다리던 중년인이 앞으로 걸어나와 각성자를 품에 안았다.
"어서 와라."
비코프 대통령의 말에 로잘리아가 미소를 지었다.
"다녀 왔어요."
찰칵, 찰칵, 찰칵,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대통령과 그의 딸인 국민 영웅의 포옹. 이런 광경을 기자들이 놓칠 리가 없었다.
"설마, 촬영용 인사는 아니겠죠?"
포옹 뒤에 로잘리아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하하하."
로잘리아의 말에 비코프 대통령은 웃음을 터트렸다.
나날이 밝아지는 로잘리아였다. 위험한 일을 하겠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그의 딸은 스스로 멋진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비코프 대통령은 딸과 함께 걸어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항상 보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바실리는?"
"남미로 갔어요."
로잘리아의 말에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러시아의 대통령인 만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고 있었다.
"군대하고 싸울까 봐 걱정했는데, 뒷수습만 해도 된대요. 정말 다행이에요."
"그래. 정말 다행이야."
딸의 말에 대답하는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그도 근래 벌어진 일에 진땀을 뺐다. 미국과 싸우겠다는 EV, 아니 경훈의 선포 때문이었다.
EV와 동맹을 맺은 덕분에 러시아는 미국에 핵으로 협박을 해야 했었다.
유라시아 연합과 러시아 국민들은 속이 시원했겠지만, 그는 핵전쟁이 벌어질까 봐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다행히 좋게 끝났지만, 이제는 또 케이, 아니 경훈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걱정이 되었다.
자신의 정체를 밝힌 이상, EV의 방향이 어디로 흐를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딸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케이는 어때?"
"그분이야 정말 대단하죠."
케이에 관해 묻자 로잘리아의 눈은 존경으로 반짝였다. 시간이 지났지만, 로잘리아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대통령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사람을 잘못 보지는 않은 것 같았다.
"아, 맞다. 좀 있다가 다른 집행자분들도 소개해줄게요."
"다른 집행자들?"
그도 새로 나타난 집행자를 알고 있었다. 헬멧을 쓰고 다니는 기관총을 갈겨대는 카우보이라고 불리는 각성자.
하지만, 그는 혼자였었다.
'새로 또 집행자가 나왔다고?'
경훈 말대로면 숨겨진 집행부가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처음 보는 각성자들이 계속 튀어나오고 있었다.
아직도 경훈과 EV에는 비밀이 많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팀원들하고 같이 있어요. 행사가 끝나고 소개해 드릴게요."
로잘리아는 러시아의 국민 영웅이자, 보물인 탓에 앞에 나서야 했지만, 다른 EV 각성자들은 대중 앞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 좋았다.
더구나, 집행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로잘리아가 대통령과 사람들을 이끌고 역에서 사라진 뒤, 그녀가 내렸던 칸에서 사람들이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여성들의 비율이 높긴 했지만, 평범한 군복을 입은 병사들이었다.
병사들 앞에 안내원으로 나온 공무원이 다가갔다.
"버스를 준비했습니다. 쉬실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이들은 모두 EV 특수 작전 팀의 각성자들이었다.
승전 행진을 하는 다른 군인과 각성자들과 달리 EV 특수 작전팀은 그동안 휴가를 받은 셈이었다.
모두 즐거운 얼굴로 러시아 인을 따라갔고,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는 남자가 있었다.
"운이 좋군. 집행자도 따라왔어."
그는 병사들 사이에 보이는 헬멧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무표정한 얼굴에 입술만 그린 듯 올라간 모습이 무척이나 괴기해 보였다.
"대통령이 곧 출발하실 겁니다."
"알았네. 바로 가지."
그는 부하의 말에 걸음을 옮겼다.
몸을 돌리던 그는 아직 역에서 나가지 못한 다른 병사와 눈이 마주쳤다.
의문 섞인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병사였다.
복장과 얼굴을 보니, 한국 각성자인 듯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병사를 스쳐 지나갔다.
어차피 딱딱한 얼굴 덕분에 이상한 시선을 받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중요한 일을 앞에 두고 있는데, 자잘한 것을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
러시아 인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영철은 그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러시아인을 노려보았다.
"무슨 일인데?"
정규가 다가와서 물었다.
영철은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잠겨 있었다.
"아는 사람이야?"
"글쎄요. 처음 본 사람이긴 한데...."
"근데 왜 그래. 다들 기다리고 있어."
설연과 한국 각성자들이 앞쪽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유럽 파견군 소속의 한국 각성자들이었다.
영철은 설연을 보고 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아무리 마음속을 보지 않는다고 해도, 텔레파시 각성자라는 것을 안 이상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그 말을 남기고 영철은 땅을 박찼다. 그는 러시아인이 사라진 방향으로 달려갔다.
"아, 잠깐만!"
정규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무지 감당이 안 되는 각성자였다.
그 때문에 그도 이곳까지 오게 되었고, 유럽까지 가게 되었다. 아무래도 근래 인생이 꼬인 모양이었다.
한숨을 쉬는 정규 옆에 설연이 다가왔다.
"따라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중요한 일이 분명해요."
거리도 멀고, 강하게 마음을 닫은 덕분에 제대로 알지는 못했지만, 어렴풋이 느낄 수는 있었다.
정규가 느끼기에는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었다.
"갈수록 태산이네."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쉰 정규는 영철이 사라진 곳으로 달려갔다.
244화. < 도플갱어가 원하는 것(4) >
거리에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기차에서 내린 병사들과 각성자들은 행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다시 싸움터로 나가야 하는 병사와 각성자들은 귀찮기만 한 행사였지만, 행사 뒤에 있을 잠깐의 휴가를 생각하며 모두 힘을 냈다.
건물 사이로 만국기가 펼쳐졌고, 건물의 창마다 유라시아 연합 각국의 깃발이 흔들렸다.
조금은 어수선하고, 활기찬 거리를 중형차들이 지나갔다.
대통령과 각료들을 태운, 크렘린궁으로 향하는 차들이었다.
어수선한 도로 사정 때문에 차들은 그리 빨리 달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 차들을 멀리서 따르는 사람이 있었다.
영철이 건물 지붕을 달리며 차들을 쫓고 있었다. 그는 겨우 자동차가 보일 정도로 먼 거리에서 행렬을 쫓고 있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뛰어넘던 그는 급하게 난간 뒤로 몸을 숙였다.
휘익.
그가 숙인 난간 위로 레이저 포인터가 지나갔다.
"감시가 만만찮네."
영철이 난간 뒤에 기댄 채로 혀를 찼다.
역시 강대국 러시아였다. 곳곳에 저격총과 중화기를 든 요원들이 숨어 있었다.
이렇게 멀리서 쫓고 있는데도 들킬 뻔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내가 웬 오지랖인지…. 그냥 돌아갈까?"
한국도 아니고 러시아 문제였다. 백 프로 확실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위험하게 쫓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면 넌지시 경고만 줘도 그만이었다. 물론 믿지도 않겠지만.
"잘하면 그 대통령 딸 같은 영웅이나 스타가 될 수도 있을 것 같긴 한데...."
혼자서 정체를 밝히고, 러시아의 위기를 구해준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너무 긍정적인 생각이긴 했지만, 나쁘지 않은 생각 같았다.
"쩝, 하는 데까지만 하자. 한국에서 잘나가기 어렵다면 러시아도 괜찮을 테니까."
그는 자신에게 좋게 포장을 한 뒤에 다시 달려나갔다. 너무 늦으면 놓칠지도 몰랐다.
그가 다시 건물을 타고 넘기 시작하자, 그를 따라서 도로 위로 작은 균열이 계속 생겨났다.
대부분 차는 크렘린궁으로 들어갔지만, 궁을 지나쳐서 계속 움직이는 차도 있었다.
다행히 영철이 따르는 차는 크렘린궁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차는 북쪽으로 올라갔다.
크렘린궁에서 멀어지자 경비도 약해졌고, 영철은 차에 좀 더 접근할 수가 있었다.
차는 크렘린궁에서 북동쪽으로 4블록 떨어진 공원 북쪽 건물 주차장에 멈춰 섰다.
영철도 건물 벽을 타고 내려와 공원의 나무 위로 올라갔다.
"루반카 공원?"
러시아 어 아래, 한국어로 표기된 공원 이름을 확인한 영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들었던 이름이었다.
"루반카면 KGB 본부가 있는 곳이잖아?"
나무 아래, 땅속에서 질문에 대한 답이 들려왔다.
영철이 눈을 가늘게 뜨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스르르르.
나무 옆, 땅이 밀려나면서 정규가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막무가내로 빠져나오면 어떻게 해! 정식대로라면 지금 탈영한 거야!"
정규의 말에도 영철의 눈은 바뀌지 않았다.
"뭔 그런 눈으로 봐. 데려가려고 온 거야. 다들 기다리고 있어."
이어진 말에도 영철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한번, 두 번 정도라면 우연도, 동행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반복적으로 따라다닌다면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지금은 부대 밖. 필요하다면 무력을 쓸수도 있었다.
영철의 손가락이 조금씩 허리로 내려가자, 정규는 한숨을 내쉬며 두 손을 번쩍 들었다.
"항복. 꼬리가 길면 밟힌다니까.... 내가 무슨 첩자도 아니고, 더는 못해."
영철이 황당한 얼굴로 정규를 바라보자, 정규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난 너를 감시하라고 진혁 협회장이 보낸 감시자야. 갑작스러운 각성, 이상하리만치 능수능란한 마나 사용, 그리고, 너무 빠른 성장 때문에 협회장은 널 의심할 수밖에 없었어."
덕분에 내가 이 고생이고.
정규가 이어서 투덜거렸지만, 영철은 뒷말은 관심도 없었다.
"EV에서 보낸 게 아니었습니까?"
"EV가 왜? EV에 아는 사람이 라도 있어?"
정규의 말에 영철이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정규가 일행이 된 것은 EV 사람들을 보기 전, 협회장과 만난 뒤였다. 정규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제길.'
영철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단지 한국 협회의 의심을 사서 감시자가 붙은 거라니.
인상을 쓰고 있는 영철을 올려다보던 정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감시자라는 것을 숨겨야 했지만, 그가 봐도 이제는 한계였다.
딱 봐도 덤벼들 것처럼 보였다. 실력 좋은 각성자와 이런 곳에서 싸우는 것은 절대 사양이었다.
'뭐, 이제 감시는 설연이 하기로 한 거니까. 내 일은 밝혀도 되겠지. 솔직히 이 정도까지 숨겨왔으면 된 거지. 일반인에게 이런 일 시킨 진혁 협회장이 잘못한 거야.'
더구나 들킨 것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뭐, 비밀은 있어 보이지만, 욕심이 많을 뿐 악당이나 스파이처럼 보이지도 않고.'
실력이 좋은 만큼 욕심도 많고, 잘난 체도 하고 싶어 하는 꽤나 평범한 각성자였다.
"어쨌거나 속여서 미안. 아무튼, 이제 돌아가야 할 것 같은데."
뻔뻔스러운 정규의 말에 영철은 입가를 씰룩였다.
화를 내고 싶었지만, 화를 낼 상황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자신이 보기에도 의심받기에, 충분한 상황.
그동안의 행동으로 의심은 많이 풀어졌겠고, 정규의 모습을 보니 그리 나쁜 결과는 아닌 것 같았다.
"돌아가서 봅시다."
영철이 마지막으로 경고를 남겼지만,
"알았어. 내가 거하게 쏠게."
정규는 이번에도 딴소리로 넘겨버렸다.
속으로 혀를 찬 영철은 다시 목표가 탄 차를 확인해보았다.
목표가 보이지 않았다. 정규와 말하는 사이에 건물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래서야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차가 서 있는 건물도 공원과 이름이 같았다.
영철은 그제야 생각이 났다. 전생에 들었던 이름이었다.
"루반카라."
러시아의 연방 보안국. KGB의 후속인 FSB 본부 건물이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보안국 소속이었나?"
"누구? 조금 전 주차장에 멈춘 차에 탄 사람?"
정규의 말에 영철이 고개를 돌렸다.
"아는 사람입니까?"
"그럼 알지. 유명하기도 하고 협회 일 때문에 멀리서 보기도 했고."
정규가 위를 보며 생각을 더듬었다.
"예르게이라는 이름이었나? 비코프 대통령이 정권을 잡을 때 크게 도움을 줘서 엄청나게 승진한 남자잖아. 지금은 KGB 부위원장일걸?"
정규의 말에 영철이 표정을 굳혔다.
예상보다 훨씬 거물이었다. 함부로 폭로할 상대가 아니었다.
정확히 확인하고 증거를 잡아야 했다.
"그럼, 이제 돌아...."
"좀 더 있어야겠습니다."
"뭐라고?"
"중요한 일입니다."
"설마 나도?"
정규의 물음에 영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거물이라면 혼자서 정체를 밝히기는 어려웠다. 땅 특성을 가진 실력 좋은 각성자는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정규를 뒤로하고 영철은 루반카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이 세상에 떨어진 뒤에 꿈꿔왔던 순간이 온 것인지도 몰랐다.
세상을 구하고 영웅이 되는 순간. 세상이 아니라면 적어도 러시아의 영웅은 가능해 보였다.
***
같은 시각. 크렘린 궁.
외부인을 들이지 않은 대통령의 개인 서재에 대통령의 딸과 함께 뜻밖의 손님이 와 있었다.
손님은 실내에서도 헬멧을 쓰고 있는 각성자와 아직 어려 보이는 소녀. 그리고, 귀여운 강아지였다.
대통령은 소개를 받고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러시아 대통령의 개인 서재에서도 헬멧을 쓰고 있는 매너없는 집행자는 그렇다 쳐도, 아직 어려 보이는 소녀와 강아지도 집행자라니.
소개받은 소녀는 로잘리아가 처음 집을 뛰쳐나갔을 때보다도 어려 보였고, 강아지는.... 그냥 강아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괴물이 날뛰는 이상한 세상이었다. 대통령은 어떻게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이 강아지는 애완동물, 아니 로잘리아의 코니같은 건가?"
대통령은 강아지도 초능력을 가진 괴물로 억지로 믿어보기로 했다.
"아뇨. 베일리는 펫이 아닙니다. 저와 셰인의 동료입니다. 이쪽 말대로라면 네 번째 집행자입니다."
멍!
똑 부러지는 소녀의 대답과 함께 강아지가 등에서 날개를 빼냈다.
대통령의 예상대로 평범한 동물이 아니었다.
펄럭.
강아지는 날개를 퍼덕여, 소녀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귀여워!"
그 모습을 보고 로잘리아가 눈을 반짝였다.
비코프 대통령은 자신도 모르게 내민 손을 슬쩍 뒤로 감추었다.
로잘리아 말대로였다. 날개를 꺼낸 강아지는 엄청 귀여웠다.
하지만, 귀엽다고 경훈이 집행자로 세울 리가 없었다.
대통령이 고개를 젓는 사이, 서재 문이 조용히 열렸다.
그리고, 문을 통해 커다란 은빛 늑대가 들어왔다.
코니.
로잘리의 펫이자 크렘린궁을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단 하나의 동물, 아니 괴물이었다.
안으로 들어온 늑대를 보고 대통령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군주급이라는 괴수들이 나와 빛이 바래긴 했지만, 코니도 상당히 강한 괴물이었다.
딸의 늑대와 비교를 해보면 어느 정도 실력을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대통령이 딸에 귀에 작게 속삭이자, 딸은 화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아, 아니, 싸움을 붙이겠다는 게 아니고."
대통령이 급하게 손을 저었지만, 딸의 대답은 그의 생각과 전혀 달랐다.
"저것 봐요! 싸움이 될 리가 없잖아요!"
은빛 늑대는 평상시와 달랐다.
늠름한 자세로 걸어 다니던 전과 달리, 늑대는 고개를 푹 숙이고, 꼬리도 아래로 늘어뜨린 채로 걸어오고 있었다.
대통령은 이어진 늑대의 행동에 입을 벌리고 말았다.
은빛 늑대는 소녀 앞에 가서 납죽 엎드렸다.
늑대와 달리, 소녀 어깨에 앉아 있는 강아지는 머리를 하늘로 치켜세우고 있었다.
펄럭.
강아지는 다시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올라, 늑대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앞발로 늑대 머리를 콩콩 내리쳤다.
"이것 봐요. 싸움이 다 뭐에요."
로잘리아는 울상이 되었다.
"베일리! 그만두지 못해!"
멍!
이어, 소녀가 버럭 화를 내자 강아지가 쪼르르 헬멧을 쓴 남자 뒤에 숨었고,
"베일리가 장난이 심합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헬멧을 쓴 남자가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대통령이 한숨을 내쉬었다.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었다.
다행히, 그 뒤의 대화는 평범하게 이어졌다.
집행자들은 과거에 관한 이야기는 회피했고, 강아지는 마치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지만, 그런 것을 제외하면 나름 즐거운 시간이었다.
잠시 뒤, 집행자들과 로잘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셰인하고 이사벨, 모스크바 구경시켜주고 올게요."
"사람들이 알아보면 어떻게 하려고."
"케이한테 선글라스 받았어요. 절대 못 알아봐요."
로잘리아가 선글라스를 꺼내 쓰자, 그녀의 모습이 묘하게 달라져 보였다.
소녀는 선글라스를 부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대통령은 벌써 나가려는 딸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제 행사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그도 행사에 참여해야 했다.
*
로잘리아와 이사벨 일행이 사람들 몰래 크렘린 궁을 떠난 그 시간.
루반카를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예르게이 부국장이었다. 그는 홀로 차를 탔다.
부우웅.
차가 출발하자, 공원 나무 그늘에 숨어있던 영철이 입을 열었다.
"우리도 가죠."
영철의 말에 정규가 입을 댓 발로 내밀었다.
"내 인생이 왜 이 모양이냐. 아무래도 난 호구인가 봐. 이제는 공짜 손님까지 태우는 꼴이라니."
한껏 투덜거린 그는 땅을 향해 마나를 뿜었다.
바닥이 물렁거리기 시작했고, 정규와 영철이 땅속으로 가라앉았다.
쩌저적.
도로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공원에서 출발한 균열은 질주하는 부국장의 차를 쫓아 계속 이어졌다.
한참을 달려간 차는 한 공장 단지로 들어갔다.
경비가 삼엄한 공장. 얼마 전에 만들어진, KGB의 비밀 공장이었다.
차에서 내린 부국장은 삼엄한 경비를 지나 중앙의 커다란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의 모습과 다르게 공장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무표정한 경비들만 자리하고 있었고, 요원 하나가 부국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공장은 텅 비어 있는 대신, 바닥에 복잡하고 커다란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문양 중앙에는 묘하게 생긴 다각형 기계가 보였다.
"준비는?"
"지시하신 대로 마무리했습니다. 기계 준비도 끝났고, 마나석도 장착되었습니다."
부국장의 물음에 요원이 바로 대답했다.
"좋아, 수고했어."
"감사합니다. 그럼, 철수할까요?"
"아니."
부국장은 그대로 팔을 내질렀다.
푹.
팔이 요원의 배를 뚫고 들어갔다.
털썩.
요원의 몸이 쓰러지고, 부국장이 경비들에게 지시했다.
"치워."
경비가 다가와 요원의 몸을 번쩍 들어 옮겼다.
한 손으로 사람을 나르는 경비의 표정은 마치 로봇 같았다.
부국장, 아니 도플갱어는 무표정한 얼굴로 공장 안에 펼쳐진 마나진을 바라보았다.
바닥에 그려진 문양은 포탈의 문양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도플갱어는 무표정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시간이 맞았다.
미국 일이 어그러져 걱정했지만, 다행히 소환진들은 무사했다.
군주를 맞이하기 위한 소환진.
이제 군주의 전승 행사를 시작할 때였다.
245화. < 영웅(1) >
모스크바 거리가 온통 러시아와 유라시아 연합의 깃발로 뒤덮였다.
정부는 며칠 전부터 비축된 물자를 풀었고, 사람들은 거리를 행진하는 병사와 각성자들을 향해 환호했다.
러시아 병사들은 절도 있게 거리를 행진했고, 뒤를 따르는 다른 나라 병사들도 최대한 제식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각성자들은 마치 올림픽에 나온 선수들처럼 사람들을 보고 여유롭게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병사들은 물론, 각성자들에게도 환호를 보냈다.
이 퍼레이드는 만주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고, 유럽으로 떠나는 병사들을 환송하는 행진이었다.
그동안의 홍보와 노력 덕분에 유라시아 연합의 각성자들은 사람들에게 이미지가 나쁘지 않았다.
절도 있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각성자들도 열심히 싸우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선두의 병사들은 벌써 붉은 광장 앞을 지나가기 시작했다.
수만 명이 모인 붉은 광장 앞에는 비코프 대통령과 각료들이 서서 병사들의 사열을 받고 있었다.
"우와."
구경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사벨은 절로 감탄사를 토해냈다.
"각성자가 정말 많아요. 거기다 군인들도, 무기도 엄청난 숫자에요. 이렇게 많으니 몬스터들과 싸워서 나라와 문명을 지켜낸 거군요."
이사벨의 말에 셰인은 헬멧을 흔들었다.
사회 경험이라는 이유로 진샤웨이에게 서울 곳곳을 끌려다니는 동안에도 이렇게 감탄한 적이 없었던 이사벨이었다.
놀이공원에서도, 쇼핑몰에서도, 영화나 뮤지컬 공연에서도,
그런 그녀가 이곳에서는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이브가 알게 되면 교육이 잘못되었다고 뭐라고 할 게 분명했다.
옆에서 같이 행진을 보고 있는 로잘리아는 조금 아쉬운 표정이었다.
모스크바에 소개해줄 멋진 곳이 많이 있는데, 집행자들은 그런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헬멧 위에 올라가 있는 강아지는 이 퍼레이드마저 재미가 없는 모양이었다.
베일리는 헬멧 위에 엎드린 채로 크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마저 귀여워, 로잘리아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코니도 아이 때는 귀여웠는데...."
은빛 늑대는 이제 덩치가 커져서 이런 곳에 데리고 나올 수조차 없었다. 정말 멋있어졌지만, 차마 귀엽다고 말하긴 어려웠다.
그때였다.
뚝.
한참 입맛을 다시던 강아지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었다.
베일리가 헬멧 위에서 일어나 한쪽을 바라보았다.
크르르르릉.
강아지가 몸을 낮추고 낮게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얘가 갑자기 왜 그러는 거죠?"
로잘리아의 말에 이사벨이 대답했다.
"마나가 모이고 있어요."
그녀도 베일리가 보는 방향을 보고 있었다.
멀리, 건물 너머에서 마나가 모여들고 있었다.
경훈에게 배운 이사벨만이 겨우 알 수 있는 움직임이었지만, 그 규모가 작지 않았다.
***
마나가 모여들고 있는 공장 단지는 겉으로 보기에는 전과 다르지 않았다.
경비를 서고 있는 군인들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이상한 빛이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진동이 심해지는데…. 기계를 돌리나?"
하지만, 공장 단지 밖, 울타리 뒤에 숨어있던 정규는 건물 안에서 흘러나오는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영철은 정규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계라니, 잘못 안 걸까?
"그런데, 부국장은 왜 쫓는 거야? 나도 도우려면 이유를 알아야잖아."
이미, 한참을 도와주긴 했지만,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
영철은 잠시 말이 없었다.
"말할 수 없는 건가?"
"...믿을지 모르겠지만, 부국장이라는 자는 사람이 아닙니다."
"엥? 무슨 소리야?"
"몬스터, 아니 괴물입니다. 사람 모습을 흉내 내는 괴물."
마지막 멸망 때, 한국군과 각성자가 지리멸렬하게 물러난 가장 큰 이유이자, 충청도에 펼쳐졌던 방어 라인을 내부에서 무너뜨린 몬스터.
마지막에 가서야 겨우 적을 알게 되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정말 이쪽 세상에서는 다시 보게 될 줄을 몰랐었다.
정규는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협회장이 언뜻 지나가면서 비슷한 이야기를 한 것 같았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그냥 흘려버렸었다.
"설마, 그런 괴물이 있을 리가…."
비슷한 이야기를 또 듣게 되었지만, 정규는 믿을 수가 없었다.
사람 속에 숨어있는 괴물. 더구나, 유명인으로 변한 괴물이라니.
그게 사실이면 누굴 믿으란 말인가.
사회가 멀쩡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걸 아는 거야?"
이번에는 정규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영철을 바라보았다.
영철이 각성한 이후 정규가 제일 오래 그를 지켜봤었다. 그런 정보를 정규가 알 리가 없었다.
이쪽 세상에도 그런 정보가 돌고 있다는 것에 영철도 놀랐다.
정규의 질문에 영철이 입을 열었다.
"전 이 괴물들에게서 멸망한 차원에서 넘어왔습니다. 그곳에서 사람으로 변신하는 괴물을 보았습니다."
"뭐?"
영철의 말에 정규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마치 미친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농담입니다. 사람이 아니라고 느낀 것은 제 특성 때문입니다."
"놀랐잖아! 맞다. 특성이 없었지."
정규가 표정을 풀며 고개를 끄덕였다. 특성이라면 말이 되었다.
하지만, 앞의 설명이 옳은 대답이었다.
과거에 보았던 괴물과 똑같은 기묘한 표정과 분위기. 그래서 영철은 아직 확신하지 못했다.
"전부 미친 소리인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
투덜거리는 정규의 말을 들으며 영철은 생각했다.
'역시, 안 믿네.'
혹시나 하고 떠보았지만, 역시 믿지 않았다. 차원을 넘어온 것은 앞으로도 혼자만 아는 비밀로 해야할 것 같았다.
생각을 정리한 영철이 공장을 살폈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안으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았다.
CCTV는 보이지 않았고, 경비들만이 중앙 건물을 지키고 있었다. 경비들을 확인한 영철이 눈살을 찌푸렸다.
"경비들이 좀 이상합니다. 각성자처럼 보이는데, 표정이 마치 로봇 같네요."
한참을 지켜보았지만, 경비들은 말도 하지 않고 표정도 변하지 않았다.
몬스터처럼 보이지도 않았지만, 평범한 각성자같지도 않았다.
"설마.... 범죄자들인가?"
영철의 말에 경비들을 확인한 정규가 표정을 굳혔다.
"러시아에서 각성자 범죄자들을 미국 군대 각성자들처럼 수술한다는 소문이 있긴 했는데…."
하지만, 그 이야기는 유언비어에 가까운 소문일 뿐이었다.
"러시아가 미국하고 무슨 연결이 있어서 그런 짓을 하느냐고 다들 안 믿었었지."
도플갱어들끼리 연결이 되어 있었지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정규가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소문들이 전부 사실은 아니겠지?"
진샤웨이와 혜린이 연적이라는 소문. 새로운 집행자의 헬멧 속에는 금발의 초미남이 들어있다는 소문 등등.
세상에는 믿고 싶지 않은 소문이 가득했다.
"소문이 사실인지는 확인해보면 되겠죠."
영철이 검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아니, 그냥 덤비려고? 잘못하다가는 국제문제가 돼!"
정규가 말렸지만, 영철은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주변에서 느껴지는 오싹한 감각. 큰일이 벌어지기 전에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그는 쇠 울타리를 타고 넘으며 정규에게 말했다.
"잘못돼서 도망치게 되면 부탁합니다."
"왜 데려왔나 했더니, 결국, 이것 때문이었느냐!"
결국, 땅 특성의 정규는 탈출용 보험으로 데려온 것이었다.
영철이 울타리를 넘어 달려가자, 경비들이 바로 움직였다.
경고도 없었다.
투다다다다!
기관총이 불을 뿜었고, 경비들이 무기를 들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영철은 멈추지 않았다.
팅! 팅! 팅!
총알이 방어막에 튕겨 나갔다. 벌써 두 번이나 등급이 올랐다. 평범한 총알은 그의 방어막을 뚫지 못했다.
이어서 경비들이 달려왔지만, 경비들은 그의 바로 앞에서 크게 휘청거렸다.
"젠장, 정말 꼬였다니까!"
영철의 뒤를 따라 울타리를 넘은 정규가 바닥에 손을 대고 투덜거렸다.
영철이 미소를 지으며 검을 찔러넣었다.
등급이 오른 영철에게 평범한 각성자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가슴이 뚫리고, 팔이 잘려나갔다.
하지만, 경비들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경비들은 피를 흘리며 무기를 휘두를 뿐이었다.
"정말 세뇌된 거야?"
정규의 놀란 음성을 들으며 영철이 다시 검을 휘둘렀다.
혹시나 해서 여지를 남겨주었지만, 이렇게 되면 봐줄 이유가 없었다.
캉! 캉!
영철의 검에 상대의 무기가 튕겨 나갔고, 바로 경비들이 바닥에 쓰러졌다. 바닥에 피가 퍼져나갔다.
"죽인 건 아니겠지?"
뒤에서 정규가 떠들어댔지만, 영철은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건물로 다가갈수록 심장이 점점 두근거렸다.
"도대체 뭐야. 기분이 왜 이래?"
정규도 영철과 비슷한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
영철은 가로막는 경비를 모두 베어버리고 공장 문 앞에 도착했다.
안에서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철문은 잠겨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영철가 검을 휘둘렀다.
서걱!
경첩이 잘려나가고, 문이 넘어갔다.
쿵.
영철이 검을 앞세우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방해자인가? 신기하군. 이렇게 타이밍을 맞추는 것은 인간들이 보는 영화에서나 나올 일인줄 알았는데…."
반대쪽에 서 있던 KGB 부국장이 안으로 들어온 영철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영철은 그를 보지 않았다. 목표가 그였지만, 지금은 그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게 도대체 뭐냐!"
공장 내부 가득 그려진 문양 중앙에 검은 구멍이 생겨나 있었다. 구멍은 점점 커지고 있었고, 구명 안에서 무언가 강대한 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뭐긴, 러시아의 군주. 러시아를 멸망시킨 모크스바의 악몽이지."
예브게이 부국장, 아니 도플갱어는 무표정한 얼굴로 웃었다.
영철의 추적은 잘못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었고, 괴물의 정체를 밝힌 이 순간, 러시아의 위기가 찾아왔다.
"뭐, 뭐야? 이거 망한 거 아냐?"
뒤를 따라온 정규가 안을 들여다보고 신음을 흘렸다.
쿵!
구멍에서 거대한 손이 올라왔다.
영철의 추적은 훌륭했지만, 감당해야 할 적이 너무 강했다.
그 순간.
지구를 돌던 마나 탐지 위성은 모스크바에 나타난 거대한 마나를 탐지했다.
"모스크바에 분홍색 점이 나타났습니다! 군주급입니다!"
버진 아일랜드. EV 섬의 통제실에서도 고함이 터져 나왔다.
"말도 안 돼! 거긴 노란 점도 없었잖아요. 기계 고장 아닙니까?"
"우선 보고하고 확인해! 모스크바에는 천만이 넘게 살고 있어!"
"아, 맞다. 지금 거기 퍼레이드 중이라는데…."
"보고했습니다!"
그 소식은 미국에 있는 이브에게 전해졌다.
시카고 중심가에서 은은한 빛이 퍼져 나갔다.
피켓을 들고 항의하던 사람들은 모두 피켓을 던져버렸고, 경찰도, 폭도도 모두 얼빠진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다희가 지친 얼굴로 경훈을 쳐다보았지만, 경훈은 평소와 달랐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멀리 서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246화. < 영웅(2) >
부우우우웅.
검은 구멍이 점점 커졌다. 공장 바닥을 가득 채운 문양을 채우고 더 넘어설 것 같았다.
구멍이 넓어지자, 괴물의 손 하나가 더 튀어나왔다.
푸학!
커다란 두 손이 구멍의 양옆을 잡고 밀어내기 시작했다.
기기기기깅!
땅이 울리고, 공장 벽이 휘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플갱어가 몸을 돌리더니, 공장 밖으로 나가버렸다.
"젠장!"
그 모습을 보고 영철이 이를 갈았다.
떠나는 놈을 따라가야 했지만, 구멍에서 튀어나오는 몬스터를 놓고 갈 수도 없었다.
팔만 나왔는데도 몸이 떨리는 괴물이었다.
이곳은 천만이 넘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였다. 이런 괴물이 풀려나면 이 도시는 지옥이 될 게 분명했다.
"당장 알려요!"
그는 정규를 향해 소리쳤다.
"연락하는 중이야!"
이미 정규가 위성 전화를 꺼내 들고 협회장에게 연락하고 있었다.
"젠장, 왜 이렇게 계속 통화 중이야!"
정규가 버럭 성질을 내며 다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상대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
-거기 어디예요!
전화기에서 설연의 고함이 들려왔다.
평상시라면 우선 변명을 해야겠지만, 이번에는 정규도 같이 소리쳤다.
"협회장님에게 전해! 당장 사람들 피신, 아니, 퍼레이드 중단시키고! 모스크바 동북쪽 공장 단지로 각성자, 병사, 아무튼, 싸울 수 있는 사람 모두 보내!"
정규의 외침에도 설연은 딴소리를 했다.
-설마, 정규씨 거기 있는 거예요?
"거기라니. 무슨 소리야! 빨리 협회장에게 전하라니까!"
-지금 여기 난리예요! 퍼레이드도 중단되었고, 전시 상황 돌입했어요!
위이이이잉!
설연의 말과 동시에 사이렌 소리가 도시 전체에 퍼져나갔다.
전화를 걸던 정규는 영철에게 소리쳤다.
"이미 비상이 떨어졌대! 빨리 물러나자고! 우리 상대가 아니야!"
하지만, 영철은 정규의 말을 듣지 못했다. 그는 떨리는 검을 움켜쥐고, 넓어지는 구멍만 노려봤다.
그는 구멍을 보고 바로 알 수 있었다.
저 구멍이 어디로 뚫려있는지, 그리고, 구멍을 빠져나오려는 놈이 어디서 온 것인지.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전생에 살았던 세상의 기운과 너무 비슷했다. 그때보다 더 어둡고 음습했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저 구멍은 전생의 그가 살았던 세상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토할 것 같았다.
지옥에서 도망쳐 나왔는데, 지옥의 괴물들이 계속 그를 따라오고 있었다.
크아아아앙!
검은 구멍 안에서 지옥에서 올라오는 괴물의 음성이 들려왔고, 악마의 손은 구멍을 계속 넓혀갔다.
팡!
그때 손 하나가 그의 등을 내려쳤다.
"당장 물러나요!"
정규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였다.
정신을 차린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뒤에는 정규와 함께 다른 사람들이 서 있었다.
전에 보았던 헬멧을 쓴 집행자, 그리고, 10대로 보이는 소녀.
그리고, 강아지.
마나의 움직임을 보고, 건물 위를 달려 이곳까지 달려온 집행자 일행이었다.
그들은 군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고 있었지만, 손에는 무기가 들려있었다.
철컥.
기관총을 장전하며 셰인이 입을 열었다.
[수고했습니다. 여긴 우리가 맡을 테니, 빨리 부대에 합류하세요.]
때맞춰 나타난 집행자에 정규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와 영철은 집행자와 같이 온 소녀와 강아지를 보고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위기 상황에 소녀와 강아지라니?
그렇지만, 정규가 뭐라 말하기 전에 그런 의문은 바로 사라졌다.
소녀가 창을 내밀자 창에서 강한 빛이 흐르기 시작했고, 강아지의 몸이 점점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 새로 온 집행자가 있다더니. 설마?"
정규는 협회장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영철은 멍한 표정으로 빛나는 창을 바라보았다.
전생에 그도 이룩하지 못한 빛이 그곳에 있었다.
A등급, 혹은 마나 운용이 극에 다른 B등급 각성자가 뿜어내는 빛.
전생에 그도 B등급에 올라서긴 했지만, 저런 빛은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가 보는 사이, 소녀는 창을 들고 구멍을 노려보았다.
공장 안은 검은 구멍이 가득했다. 구멍에 덮여 원래 있던 문양은 더는 보이지 않았다.
"군주급 맞죠? 경훈 아저씨가 군주급은 아직 못 넘어온다고 하셨잖아요!"
하지만, 지금 넘어오는 괴물은 군주급 몬스터가 분명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냥 둘 수는 없었다.
"베일리!"
이사벨이 소리치자, 변신을 끝낸 베일리가 입을 벌렸다.
날개 달린 사자의 입에서 불길이 뿜어졌다.
콰과과과과!
불길은 검은 구멍을 뒤덮고, 튀어나온 괴물의 손을 불태웠다.
이어, 이사벨이 몸을 날려, 괴물의 손을 내려찍었다.
쩍.
방어막이 갈라지고,
투다다다다.
갈라진 틈에 기관총이 쏟아졌다.
크아아앙!
피가 튀고, 괴물이 괴성을 질렀다.
하지만, 피는 바로 멈추었고, 구멍 안에서 엄청난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구멍이 훨씬 빠르게 커졌다.
콰앙!
구멍은 공장의 기둥들을 잘라버렸고, 공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피해!]
일행은 모두 무너지는 공장을 뛰쳐나왔다.
쿠구구궁.
공장이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먼저 빠져나왔던 정규와 영철이 셰인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시간 벌이도 안되는군."
무너진 공장 잔해가 마구 출렁거렸다. 괴물도 차원문도 멀쩡했다.
"빨리 피해!"
셰인이 아직도 안 떠난 두 사람에게 소리쳤다.
다른 괴물이라면 도와달라고 했을지 모르겠지만, 군주급이라면 도움은커녕 짐만 될 뿐이었다.
어차피 셰인과 이사벨도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경훈의 차원 이동 시간이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벌 수 있을 뿐이었다.
무너진 건물 아래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는 정규까지 느낄 정도였다.
정규가 영철을 다시 재촉했고, 영철이 결국 몸을 돌렸다.
영철은 얼마 전 군주급 몬스터와 싸울 때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운이 좋아서 그때는 등급이 올랐었지만, 지금 자신이 저런 괴물과 싸우는 것은 무리였다.
저번에도 남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남았었다. 이번에도 그런 운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영철과 정규는 공장 단지를 빠져나와 붉은 광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거리는 벌써 텅 비어 있었다.
위이이이잉!
사이렌이 울리는 거리는 방치된 차들만 남아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사람들은 이미 건물 지하나 방공호로 대피한 것이다.
그때, 텅 빈 길을 달리던 영철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아니, 또 왜?"
덩달아 걸음을 멈춘 정규가 영철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특성으로 지금 움직이는 차를 추적할 수 있죠?"
"뭐?"
"근방의 차는 전부 멈춰 있을 겁니다. 그럼 움직이는 차를 추적할 수 있지 않나요?"
군대와 각성자들이 모여 있는 붉은 광장이나, 행진하던 도로는 지금도 시끄럽겠지만, 이 주변은 버려진 도시처럼 조용했다.
정규의 땅 특성이라면, 공장을 빠져나와 홀로 달리는 차를 느낄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인간 모습을 한 몬스터가 차를 타고 떠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직 멀리 가지 않았을 테니, 추적이 가능할 겁니다."
"아직도냐!"
영철의 말에 정규가 입을 딱 벌렸다.
"제시간에 부대에 합류할지 알 수도 없고, 합류해봤자, 싸움에 도움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차라리 도망친 몬스터를 쫓는 편이 더 좋습니다."
얼빠진 얼굴로 영철을 보던 정규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보니 영철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거기다, 지금 그는 홀로 달리고 있는 차의 진동을 느끼고 있었다. 추적이 가능했다.
"젠장, 이렇게 된 바에야 갈 데까지 가보자고!"
정규가 허공에 대고 화를 버럭 낸 뒤에 진동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영철이 굳은 얼굴로 정규의 뒤를 따라 달렸다.
그는 몬스터를 놓칠 수 없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 도망친 몬스터를 잡게 되면, 러시아의 영웅이 될 수도, 인기도, 돈도 얻을 수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 영철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 않았다.
그의 귀에는 전생에 죽은 군인과 동료 목소리가 맴돌고 있었다.
잘못된 작전과 지휘부의 혼란 때문에 죽은 수많은 사람들.
모두 저 인간을 흉내 내는 몬스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몬스터가 지금 지옥에서 괴물들을 불러오고 있었다.
다른 세상에서 새 인생을 시작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아직도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영철은 몬스터를 놓칠 수 없었다.
콰아앙!
달려가는 두 사람 뒤에서 큰 폭음이 들려왔다.
무너진 건물 파편이 사방으로 날아갔고, 거대한 괴성이 들려왔다.
쿠우우우우우우!
괴물이 차원을 넘은 것이다.
*
투투투투.
시끄러운 로터 소리를 뚫고 괴성이 창을 때렸다.
드드드득.
창이 흔들리자, 겁에 질린 카메라맨이 소리쳤다.
"돌아가야 합니다! 위험해요! 모스크바 전체에 경보가 떨어졌습니다!"
조종사도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리나는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붉은 광장에서 진행하는 메인 촬영도 빼앗겼는데, 하늘이 내린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마침 행사 때문에 모스크바에 각성자들과 군대가 모여 있었다.
모스크바 전체에 경보를 내릴만한 괴물이 나타났지만, 저 대부대를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녀가 모스크바를 배경으로 군대와 각성자들이 강력한 괴물을 쓰러뜨리는 장면을 화면에 담게 된다면,
빼앗긴 메인 촬영은 물론, 메인 뉴스 아나운서 자리까지 가능할 수도 있었다.
그 와중에 도시의 피해도 심해지겠지만, 심하면 심할수록 그녀의 주가는 더 올라갈 게 분명했다.
이런 장면을 찍지 않는다면 NTV 방송의 이리나가 아니었다.
더구나, 방송국의 허락도 떨어졌다.
-네 미친 짓을 부장님이 승인하셨어! 10초 뒤에 생방송 시작이야! 준비해!
PD의 목소리가 헤드셋에서 들려왔다.
"들었죠? 지금 하늘에 떠 있는 방송국 헬기는 우리밖에 없어요! 빨리 준비해요!"
이리나의 말에 카메라맨도 조종사도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리나는 그들의 표정을 외면했다.
-4, 3, 2, 1, 0
헤드셋에서 들리는 카운트 다운이 끝나자, 이리나는 카메라를 보고 입을 열었다.
"지금 여기는 모스크바 상공입니다. 갑작스러운 괴물의 등장에 승전 행사가 멈추고, 시민들은 모두 안전한 실내로 빠르게 대피를 마쳤습니다."
불만은 많았지만, 카메라맨도 프로였다.
그녀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카메라는 그녀를 지나 창밖의 지상을 훑기 시작했다.
텅 빈 거리, 버려진 차.
하지만, 멀리 붉은 광장 쪽으로 카메라를 돌리니, 군대와 각성자들이 진형을 갖추는 것이 보였다.
역시 실전에 단련된 군대였다. 벌써 전투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보십시요! 우리 러시아 군과 유라시아 연합의 군대는 벌써 적을 분쇄할 준비를 끝낸 것 같습니다!"
지상의 부대는 이제 진형을 갖추었지만, 전투 헬기들은 벌써 적을 향해 출발했다.
전투 헬기 여러 대가 빌딩 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전투기를 함부로 쓸 수 없는 지금, 전투 헬기가 하늘의 지배자였다.
"빨리 쫓아요!"
전투 헬기들이 날아가는 방향에 괴물이 있을 게 분명했다.
전투 헬기를 쫓을수록 헬기는 점점 붉은 광장에서 멀어져갔다.
홀로 길을 달리는 차가 잠시 보이기도 했지만, 텅빈 거리는 계속 이어졌고, 잠시 뒤, 헬기는 괴성이 들린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콰아아앙!
그곳은 벌써 여러 채 건물이 무너지고, 먼지가 가득 피어오르고 있었다.
"맙소사. 건물들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한두 건물이 아닙니다."
예상보다 훨씬 큰 피해였다. 모스크바 전역에 경보를 내릴 정도의 괴물이 분명했다.
"도대체, 저 먼지 속에는 어떤 괴물이 있기에.... 아, 먼지 속에서 괴물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먼지가 가라앉으며 괴물의 모습이 드러났다.
247화. < 영웅(3) >
신나게 떠들던 이리나가 말을 멈추었다.
"....맙소사. 저게 뭐야."
먼지 속에서 비늘로 덮인 녹색 피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콰앙!
굵고 거대한 꼬리가 남아 있는 건물을 부쉈다.
크아아앙!
도마뱀처럼 생긴 머리가 하늘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10층 건물보다 큰 괴물이었다.
엎으려 있었다면 거대한 도마뱀 괴물처럼 보였을지도 몰랐겠지만, 저 괴물은 두 발로 서 있었다.
"리자드 맨?"
카메라맨이 중얼거렸지만, 이리나는 그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저건 도마뱀 인간이 아니라 도마뱀 거인이었다.
그 순간, 전투 헬기들이 공격을 시작했다.
슈우우웅.
미사일이 날아가고, 기관포가 불을 뿜었다.
콰아아앙!
EV가 지원해준 문양이 그려진 미사일이었고, 마나석으로 가동되는 기관포였다.
각성자가 직접 사용하는 아이템은 아니었지만, 현재 일반 병기 중에서는 괴물에게 제일 효과적인 무기들이었다.
콰아아앙!
엄청난 폭발이 괴물을 감쌌다.
화염이 솟구치고, 괴물의 방어막이 출렁거렸지만, 아쉽게도 이 괴물의 방어막은 이런 무기에 깨지기에는 너무 튼튼했다.
번쩍.
다음 순간, 화염 속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붉은빛은 출렁이며 하늘을 가로질렀다. 마치 빛으로 이루어진 채찍 같았다.
채찍은 공격하는 전투 헬기들을 스쳐 지나갔고,
서걱. 서걱.
헬기들은 채찍이 지나간 자리가 그대로 잘려나갔다.
콰아아앙!
잘려나간 헬기들이 하늘에서 폭발했다.
"젠장!"
그 순간, 조종사의 욕설이 들리고, 방송국 헬기가 급하게 방향을 바꾸었다.
"꺄악!"
추락하듯이 움직이는 헬기 안에서 이리나는 헬기를 향해 날아오는 붉은 빛을 볼 수 있었다.
저 빛나는 채찍의 다음 목표는 방송국 헬기였다.
이리나는 공포에 질려버렸고, 실시간으로 그 장면을 보고 있던 러시아 국민들도 집에서 비명을 질렀다.
그 순간,
꽈지지직.
괴물 앞 공간이 잘려나갔다. 날아오던 채찍이 그대로 잘려나갔다.
괴물이 입을 벌리고 비명을 질렀다. 괴물의 입에서 잘린 혀가 피를 뿜고 있었다.
서걱.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괴물이 서 있는 공간이 계속 잘려나가기 시작했다.
공간에 금이 그어졌다. 그리고, 그 금은 괴물의 몸에도 상처를 냈다.
피가 솟구치고, 괴물이 계속 비명을 질렀다.
"맙소사! 우.. 우리 안 죽은 거죠?"
이리나가 놀라 소리쳤지만, 카메라맨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카메라맨은 화면에 들어온 뜻밖의 장면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중이었다.
전투 헬기들이 모두 추락한 뒤에도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이 있었다.
믿기지 않았지만, 그것은 사자였다.
날개 달린 사자가 괴물에 바짝 붙어서 날고 있었다.
거기다, 사자의 등에는 소녀가 한 손에 창을 쥔 채로 앉아 있었다.
파직!
소녀가 창으로 가리키는 순간, 괴물의 주변 공간에 금이 생겨나고 있었다.
괴물을 공격하는 공간을 가르는 선들은 저 소녀가 만든 게 분명했다.
날개 달린 사자를 탄 소녀가 거대한 괴물과 싸우는 광경이라니.
신화에서나 볼만한 일이 모스크바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
소녀가 싸우는 장면이 가정은 물론 빌딩 전광판에서도 나오고 있었다.
텅 빈 거리를 달려가던 영철은 전광판을 보고 그만 걸음을 멈출뻔했다.
헬멧을 쓴 집행자를 보고도 놀랐지만, 전광판 영상은 믿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하늘을 나는 펫을 부리며 저런 무시무시한 공격을 퍼붓는 각성자가 저렇게 어린 소녀라니.
군주급 괴물을 쓰러뜨린 그 각성자도 그렇지만, 이쪽 세상은 강한 각성자가 많았다.
이런 각성자가 전생에도 몇 명만 남아 있었어도, 그렇게 쉽게 패망하지는 않았을 텐데.
갑자기 높은 등급의 각성자들이 그렇게 갑자기 사라지지 않았더라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지도 몰랐다.
사라진 각성자들을 떠올리던 영철이 눈썹을 찡그렸다.
뭔가,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바보 같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떠올린 자신을 비웃은 뒤, 그는 다시 달리는 데 집중했다.
그때였다. 앞에서 달리던 정규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행이야. 차가 멈췄어. 좀 더 갔었으면 놓쳤을지도 몰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거리가 시끄러웠다.
차들은 지나가지 않았지만, 군인들이 그들과 반대로 달려가고 있었다.
부르르릉.
건물 너머로 전차와 장갑차가 지나가는 소리도 들려왔다.
어느새 두 사람은 붉은 광장 근처까지 온 것이다.
다행히 이 길은 군대 진격로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까딱했다가는 다른 소리에 묻혀 차 소리를 놓칠 뻔했다.
두 사람은 곧 차가 멈춰 서 있는 건물 앞에 도착했다.
붉은 광장 근처에 있는 오래된 바로크 양식 건물. 문화재급으로 오래된 건물이었지만, 주변 건물과 그리 다르지 않은 평범한 건물이었다.
"여기에는 왜 온 거지? 여기 사는 건가?"
건물 앞에 선 두 사람은 알지 못했지만, 이 건물은 KGB가 안가로 쓰고 있었다.
영철은 바로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고 정규가 뒤에서 혀를 찼다.
"이거, 그냥 들어가도 될지 모르겠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안 들어갈 수도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저 괴물하고 싸우는 것보다는 낫겠지."
멀리서 폭음이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싸움이 이어지고 있었다.
정규도 영철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1층은 비어 있었다.
로비를 지나 계단에 다가가니, 영철이 계단 앞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래야. 지하실에서 진동이 느껴지고 있어."
정규의 말에 영철이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영철의 뒤를 따르며 정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하실에서 느껴지는 진동은 뭔가 이상했다.
그것은 기계 진동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짐승이 발을 구르는 것 같기도 했다.
어쨌거나 불안하게 느껴지는 진동이었다.
영철은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층마다 한걸음에 뛰어내렸다.
지하 3층. 평범한 건물치고 조금 깊은 지하실이었다.
철문이 가로막고 있었지만, 마나가 실린 검이 철문을 잘라내었다.
쿵.
잘린 철문이 넘어지고, 영철이 안으로 들어갔다.
지하실 중앙에는 인간의 탈을 쓴 몬스터가 서 있었다.
아쉽게도 부국장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좀 전에 보았던 각성자들과 같은 무표정한 각성자들이 지하실 안에 있었다.
세뇌된 각성자 범죄자들.
6명이 부국장을 호위하듯이 서 있었다.
부국장의 앞에는 문양이 새겨진 기계가 놓여 있었다.
기계는 평범한 소형 마나석 발전기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평범한 마나석 발전기가 아니었다.
은은한 빛을 뿌려야 하는 문양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조용하게 전기를 만들어야 할 발전기는 아무 배선도 연결되지 않은 상태로 마구 떨고 있었다.
영철은 저게 어떤 현상인지 알고 있었다.
"마나석 폭주?"
"어? 마나석 폭주를 알아? 신기하군."
영철의 말에 부국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플갱어의 얼굴은 발전기의 문양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얼굴뿐이 아니었다. 손도 팔도, 모든 몸이 붉게 변해 있었다.
"여기까지 따라온 것도 신기한데, 폭주까지 알고 있다니. 이 세계에서 마나석을 폭주시키는 것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기술 아니었나?"
몸 전체가 붉게 변한 도플갱어는 영철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도플갱어의 몸이 붉게 변해 있는 것은 몬스터의 마나석, 핵이 폭주상태에 돌입했기 때문이었다.
도플갱어는 자신의 핵을 폭주시켜 발전기의 마나석을 폭주시킨 것이다.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폭주였지만, 지배자의 명령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도플갱어가 발전기에 올려놓았던 손을 내려놓았다. 더이상 마나를 연결해 놓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알고 있었던 부국장은 무척이나 여유 있어 보였지만, 영철은 그렇지 못했다.
놈의 앞에 있는 기계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영철이 한 걸음 다가가자, 호위하고 있던 각성자들이 앞으로 나섰다.
이곳에 있는 각성자들은 공장에 있던 각성자들보다 강해 보였다. 홀로 돌파하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폭주시키는 데 시간이 걸리는 바람에 배치해 놓은 인형들이다. 뭐, 실제로 별로 쓸모가 없었지만, 마지막을 가는 길동무로는 나쁘지가 않을 거다."
부국장은 무표정한 얼굴로 국어책을 읽듯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도플갱어는 자신이 지금 말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너무 외로운 인간을 복제한 모양이었다. 죽을 때가 되자, 그 인간처럼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하지만, 도플갱어는 튀어나오는 말을 막지 않았다. 폭주가 시작된 이상, 이제 멈출 수 없었다.
"발전기를 조금 개조했다. 이 기계 안에는 중급 마나석 10개가 폭주 중이지. 전술핵 이상의 위력일거야."
그의 말과 함께 문양의 빛이 더욱 밝아졌다. 지하실 전체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 세계의 인간들은 다른 세계의 인간들보다 훨씬 강했다. 벌써 인도와 만주에서 군주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번에 모스크바에 소환한 군주는 저쪽 세상에서 러시아를 무너뜨린 강대한 군주였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도플갱어는 인간의 주력군을 직접 끝장낼 생각이었다.
마나석 폭주로 모스크바 중심가와 함께 유라시아 연합군을 날려버리고, 나머지는 소환된 군주가 처리한다면, 러시아는 마지막이었다.
나머지는 대군주들이 마무리 질 테니, 지배자의 명령은 충실하게 이루어진 셈이었다.
깊은 곳에서 생명과 진화의 욕망이 다시 꿈틀거렸지만, 서약은 거부할 수 없었다.
도플갱어는 미소를 지었다.
인간처럼 미소짓는 괴물을 보고 영철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끝까지 따라왔는데, 외통수에 걸려버렸다.
아무리 발이 빨라도, 마나석 10개가 동시에 폭주하는 것에서 달아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미 폭주해버린 마나석을 되돌릴 수도 없었다.
도무지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 어이없이 괴물의 자폭에 휘말려 목숨을 잃게 되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결말이었다.
그때였다. 정규가 영철에게 물었다.
"갑자기 뭐야? 저거 폭탄 맞아?"
정규의 물음에 영철의 머리에서 한가지 생각이 번뜩였다. 정규는 땅 특성을 가진 각성자였다.
"폭탄입니다. 핵무기 이상으로 위험한 폭탄. 당장 막아야 합니다."
"제길. 정말, 늑대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꼴이잖아!"
그는 바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날 지켜!"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정규는 자신이 할 일을 알고 있었다.
땅을 짚은 정규의 팔에서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목표는 지하실 가운데 놓인 발전기.
쑤욱.
발전기가 땅 아래로 푹 꺼져버렸다.
"땅 특성?"
도플갱어는 어떻게 된 일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땅 특성을 가진 각성자가 아니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지금도 각성자 하나가 바닥에 손을 짚고 비 오듯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땅에 마나를 불어넣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폭주하는 마나석을 품은 발전기도 계속 아래로 가라앉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핵폭탄만큼 강한 폭탄이라도 땅속 깊숙이 묻어버리면 무용지물이었다.
더 묻히기 전에 멈춰야 했다. 도플갱어가 소리쳤다.
"당장 둘 다 죽여!"
각성자들이 두 사람을 향해 몸을 날렸다. 도플갱어도 그 뒤를 따랐다.
각성자들이 앞을 가득 메우며 달려오고 있었다.
영철은 검을 들고 정규 앞에 섰다.
영철은 피식 웃고 말았다.
정말, 러시아와 세상이 위험해진 순간에 그가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군주급 괴수와 싸우는 것도 아니었고, 강한 각성자가 옆에 있지도 않았다.
이 순간, 온전히 그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꿈꾸던 순간이 찾아왔지만, 명예도, 돈도, 인기도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적과 싸우다 죽어간 동료가, 세상을 구하기 위해 달려간 각성자들이 떠올랐을 뿐이었다.
영철은 지금에서야 자신이 왜 세상을 구하고 싶어 했는지 알게 되었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뛰어다닌 한 각성자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를 존경했고, 그처럼 되고 싶었다.
그 생각은 전쟁 중에 모두 잊어버렸지만, 알고 보니 하나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렇군. 그래서였어.'
그는 자신이 왜 이 세계에 불려왔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적들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영철은 달려드는 각성자들을 향해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248화. < 영웅(4) >
"마나가 부족해요. 몬스터가 회복이 너무 빨라요!"
-뒤로 빠져! 어차피 죽이긴 힘들어!
"알겠어요!"
"베일리!"
크앙!
베일리가 불길을 뿜은 뒤, 날개를 펄럭이며 뒤로 물러났다.
번쩍.
불길을 뚫고, 베일리가 있던 곳에 빛나는 채찍이 스쳐 지나갔다.
서걱.
베일리는 피해냈지만, 근처에 있던 건물이 다시 잘려나갔다.
쿠구구궁.
잘려나간 건물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사람들은 이미 대피해 있었지만, 지하 방공호도 안전할지는 알 수 없었다.
괴수의 몸에서 쏟아지던 피가 점점 줄어들었다. 도마뱀 거인의 상처가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잘린 혀도 벌써 복구되었다.
역시 등급의 벽은 높았다.
차원을 가르는 그녀의 기술도 군주급 괴수를 쓰러뜨리기는 부족했다.
빛나는 채찍, 아니 괴수의 혀가 물러서는 베일리를 쫓아 뻗어 나갔다.
투다다다다!
기관총 소리가 들려오더니, 베일리를 쫓던 혀가 총알을 맞고 튕겨 나갔다.
크앙!
괴수가 화가 났는지, 총소리가 들려온 건물을 들이받았다.
쿠앙!
괴수에 받혀서 건물이 기울어지는 동안, 가는 줄 하나가 옆 건물을 향해 쏘아졌다.
줄이 옆 건물에 박혔고, 헬멧을 쓴 남자가 거미줄에 매달린 거미처럼 옆 건물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사벨이 귀에 손을 올리며 소리쳤다.
"괜찮아요?"
-만만찮은데? 까닥하다가는 건물에 묻히겠어.
잡음과 함께 셰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훈 아저씨는 아직이에요?"
-위험하면 물러나요. 특성 활성화까지 5분 남았습니다.
이브의 목소리가 헤드셋에서 들려왔다.
위성을 통해 미국에 있는 이브의 음성이 들려온 것이다.
이브 말대로 피하려면 피할 수 있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여기서 물러나게 되면 도시의 피해가 얼마나 심해질지 알 수 없었다.
괴수는 처음 등장한 공장 단지 주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와 셰인이 괴물의 주위를 돌며 한곳에 발을 묶은 덕분에 이 정도 피해에서 멈춘 것이다.
하지만, 계속 셋이서 버티기는 어려워 보였다.
무기를 사용하는 셰인은 덜했지만, 베일리와 이사벨은 벌써 마나 부족으로 허덕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투다다다다다!
콰과광!
괴물의 몸에 총알과 폭탄, 불덩어리와 건물 파편들이 날아들었다.
-저희 도착했습니다!
헤드셋에 로잘리아의 음성이 들려왔다. EV 각성자들이 도착한 것이다.
-저희도 지원하겠습니다. 군부대도 곧 합류할 겁니다.
이어, 진혁 한국 협회장의 음성도 들렸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각성자들이 먼저 도착한 것이다.
-어쩔 수 없군요.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예상 시간 4분. 그동안 괴수를 최대한 막아주세요.
모두의 귀에 이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괴수의 혀를 조심! 혀가 무엇이라도 잘라내는 채찍입니다! 접근하지 마십시오!
이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셰인의 고함이 터져 나왔고,
-지연 작전입니다. 시야와 움직임을 막는 데 집중해요!
-우리는 외곽에서 지원한다! 집행자와 EV 각성자들을 방해하지 않게 조심하도록!
로잘리아와 진혁의 음성이 통신망을 울렸다.
이미 군주급 괴물과 상대해 본 경험이 있던 EV 작전팀은 로잘리아의 지시에 따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진혁은 연합의 각성자들을 지휘해서 EV 작전팀과 집행자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괴수의 눈에 화염이 집중되었고, 각 관절과 상처에 온갖 공격이 퍼부어졌다.
하늘을 날고 있는 이사벨은 그사이 마나 포션을 들이키고, 다시 공격에 나섰다.
이사벨은 힘이 절로 났다.
크앙!
불꽃과 화염. 총알과 폭탄이 괴물을 때렸다.
괴물이 휘두른 채찍은 염력에 붙잡혀 튕겨 나가고, 괴물은 쏟아지는 공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아쉽게도 그녀의 공격과 달리 상처를 주고 있지 않았지만,
그녀는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힘을 모아 괴물과 싸우다니.
어렸을 때도 사람들이 괴물들을 피해 도망 다닌 것만 본 그녀에게, 지금 전투는 아름답게 보일 정도로 멋진 광경이었다.
이들에게 도움이 되어야 했다.
"베일리!"
이사벨의 외침에 베일리가 다시 방향을 바꾸었다.
다시금 괴수에게 다가가는 사자 위에서 이사벨이 창을 뻗었다.
포션 덕분에 다시 쌓이고 있던 마나가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쩌적.
다시금 공간이 갈라지고, 괴물의 비늘이 잘려나갔다.
크아아아앙!
-저건 또 뭡니까!
-새 집행자 능력입니다! 모두 주의해주세요!
-미친! 또 어디서 이런 각성자가 나온 겁니까?
-뛰어난 각성자가 나오면 좋은 거잖아!
-좋아서 그러는 겁니다!
EV 각성자들은 물론, 연합 각성자의 통신망이 시끄러워졌다.
그것은 방송을 보고 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대단합니다! 각성자들이 거대한 괴수를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수많은 공격에 괴수가 휘청이고 있습니다! 러시아 각성자들의 활약이 대단합니다. 지금, 로잘리아 각성자와 그녀의 은빛 늑대가 무너지는 건물에서 각성자들을 구해 점프했습니다."
괴수의 공격에 죽을 뻔했으면서도 방송국 헬기는 전투 현장을 피하지 않았다.
헬기 조종사와 카메라맨은 피하고 싶었지만, 이리나와 방송국 PD가 못하게 막아선 것이다.
-세기의 특종이야! 사장, 아니 회장님 지시야! 죽는 한이 있어도 다 찍어야 해! 지금 시청률이 얼마인지 알아? 지금 유라시아 연합 전체가 우리 방송을 특종으로 때리고 있어!
전보다 두 배 이상 거리를 벌리긴 했지만, 방송국 헬기에서는 계속 전투를 중계하고 있었다.
이리나는 러시아 각성자들과 국민 영웅인 로잘리아에게 초점을 맞추고 싶었지만, 사자를 타고 하늘을 나는 소녀에게서 눈을 떼기는 쉽지 않았다.
"앗, 위험! 피했습니다! 와! 또 공격입니다. 괴수의 허리에서 피가 뿜어집니다! 이럴 수가! 상처들이 또 아물고 있습니다."
사자가 급강하로 날아오는 채찍을 피하고, 날뛰는 괴수에 붙어 홀로 상처를 주는 소녀의 모습은 방송을 보는 모두의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다.
방송을 보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화려한 각성자들의 공격에 환호했지만, 곧 상황이 처음 보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 점점 공격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마나가 부족한 걸까요?"
"괴물의 상처는 전부 저 소녀가 만든 것 같습니다. 다른 공격은 괴수의 방어벽을 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날뛰던 괴수가 다른 모습을 보였다.
"아, 괴수가 정신을 차린 것 같습니다. 괴수가 이동합니다!"
쿵.
한자리에서 날뛰던 괴수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사벨을 잡기 위해 휘두르던 혀도 확실하게 주변의 건물을 부수기 시작했다.
쾅! 쾅! 쾅!
-후퇴! 물러서!
-마나 떨어졌습니다! 후퇴합니다!
-막아! 움직이지 못하게 해!
-젠장, 효과 없다는 거 눈치챘어!
정면에서 공격하던 각성자들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물러서기 바빴고, 다른 각성자들과 집행자들은 괴수를 멈추기 우I해 정신없이 공격했다.
"괴물이 붉은 광장을 향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피해가 커지고 있습니다! 지원이 필요해 보입니다!"
그때, 붉은 광장 쪽에서 전차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 다행입니다. 군대가 접근 중입니다! 러시아군이 오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모스크바 시내에 포격을 때릴 수는 없었다.
전투 배치로 전환한 연합군은 뒤에 포병을 남겨두고, 전차와 장갑차를 앞세워 괴수가 있는 곳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물론, 평범한 군대로는 군주급 괴물과의 전투에 도움이 되질 않지만, 일반인의 선입관은 아직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방송을 보던 사람들도, 헬기의 기자도 기뻐했지만,
그 순간, 모스크바에 있는 모든 사람은 뜻밖의 진동을 느끼게 되었다.
쿠우우우웅!
대단한 지진이었다.
드드드드.
헬기의 창문이 흔들렸다.
도로가 출렁이고 건물이 휘청였다.
괴수가 움직임을 멈췄을 정도였다.
진격하던 군부대도 움직임을 멈추었고, 동시에 붉은 광장 근처의 건물들이 차례로 무너져 내렸다.
쿵, 쿠쿵, 쿠쿠쿵.
수십 채의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은 헬기에서도 보일 정도였다.
뜬금없는 지진, 마치 땅속에서 폭탄이라도 터진듯한 진동이었다.
모두가 놀라 멈춘 그 순간.
빛나는 탄환이 하늘을 갈랐다.
슈우우욱!
그 탄환은 이사벨이 갈라놓은 허리의 상처를 뚫고 들어갔다.
콰아앙!
탄환, 폭주한 마나석이 괴물의 몸속에서 폭발했다.
괴물의 허리가 터져나갔다.
크아아아앙!
-이사벨. 네 특성 더 쓸 수 있어?
이어폰에서 경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사벨이 고개를 돌렸다.
멀리, 연기를 뿜는 레일건을 잡고, 이쪽으로 달려오는 경훈의 모습이 보였다.
다행히 시간이 된 모양이었다.
이사벨이 창을 꾹 쥐었다. 희미한 빛이 창에 어렸다. 포션을 먹은 덕분에 마나가 차오르고 있었다.
아슬아슬했지만, 가능해 보였다.
"네! 가능해요!"
-좋아! 나하고 같이 공격한다! 셰인! 로잘리아! 진혁! 모두 지원해줘요!
-오케이!
-네!
-알았어!
레일건을 아공간에 집어넣고, 경훈이 양손에 대검을 꺼내 들었다.
허리를 부여잡은 도마뱀 거인을 향해 공격이 쏟아졌다.
각종 특성과 능력, 마나를 실은 총알과 마나 폭탄. 그리고, 사정거리가 되는 전차와 장갑차에서 쏘는 포탄까지.
일순간 괴물의 몸이 공격으로 뒤덮였다.
크아아아아앙!
그리고, 경훈과 베일리를 탄 이사벨이 화염에 뒤덮인 괴수를 향해 뛰어들었다.
***
지하실은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먼지가 가득했다.
"콜록, 콜록."
정규는 먼지를 들이마시고 기침을 터트렸다.
"지옥에 온 건 아니겠지?"
그는 마나를 흘려 먼지를 가라앉히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은 엉망이었다.
마지막 순간, 벽을 보강해 지하실이 무너지는 것을 막았지만, 천장이 반쯤 무너져 내렸고, 바닥도 울퉁불퉁 엉망이었다.
하지만, 정규는 안도했다. 지옥은 아니었다.
솔직히 지하실이 무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마나가 고갈될 정도로 기계를 파묻었지만, 막상 마나석이 폭발했을 때는 죽을 거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살아남다니.
"역시 난 악운에 강한가 봐."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지만, 매번 살아남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정규는 주변을 살폈다. 영철을 찾아야 했다.
엉망이 된 지하실 곳곳에는 시체들이 뒹굴고 있었다.
정규와 영철을 공격했던 각성자들이었다.
그들 몸에는 검상이 가득했다. 모두 영철이 남긴 상처들이었다.
각성자 대부분이 죽은 이유는 폭발이 아니라 영철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과 싸우느라 영철도 피투성이가 되는 것을 뒤에서 지켜봐야 했지만, 분명 마지막 순간까지 영철은 살아있었다.
컥.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영철은 살아있었다.
무너진 벽 뒤에 영철의 모습이 보였다. 손에 있던 검은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영철은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붉게 달아오른 손에 목이 잡힌 채 덜렁거리고 있었다.
영철의 목을 쥔 자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도플갱어였다.
도플갱어의 몸에도 상처가 여러 개 나 있었지만, 인간과 달리 그는 충분히 움직일 수 있었다.
쿵.
멀리서 폭음이 들린 것 같았다.
도플갱어는 폭음을 듣고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하. 이곳은 미친 차원이야! 말도 안 돼!"
도플갱어가 무표정한 얼굴로 웃음을 터트리자 영철의 몸이 출렁거렸다.
"하하하, 또 잡혔다고? 군주들을 죽인 각성자들은 남미에 있는 것 아니었나? 설마, 이 차원 각성자들은 군주 둘을 동시에 잡을 수 있는 건가?"
마나가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도플갱어는 소환한 군주가 죽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국어책을 읽듯이 중얼거리던 도플갱어가 영철의 뒤를 바라보았다.
도플갱어의 눈이 정규와 마주쳤다.
"하지만, 네놈들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끝나지는 않았겠지."
마나석 폭발이 제대로 이루어졌다면, 모스크바의 삼 분의 일은 날아갔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마나가 실린 폭발은 군주의 방어막 외에 모든 방어막을 박살 냈을 것이다.
그럼 각성자도 군대도 모두 끝장이 났을 테고, 계획대로 군주는 모스크바를, 러시아를 멸망시켰을 텐데....
이 모든 것이 쓰레기 같은 두 인간 때문이라니.
도플갱어는 지금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얼음을 옷 속에 넣어 체온을 낮추고, 필요에 따라 다른 사람을 뒤집어쓰기까지 해서 인간들을 속여왔는데, 어떻게 그의 정체를 알아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궁금하지만, 이제 소용없는 일이겠지."
폭주도 막바지였다. 어차피 자신과 함께 죽을 인간들이었다.
땅 특성을 가진 각성자도 마나 고갈 상태였고, 목을 잡은 각성자도 폭주해 버려서 맛이 간 상황이었다.
그가 폭주하지 않았으면 이때까지 버텨냈을 리가 없었다.
폭주했던 각성자가 어떻게 될지 궁금했지만, 아쉽게도 확인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이 인간은 죽어가고 있었다.
도플갱어는 목을 잡았던 인간을 던져버렸다.
콰당!
날아오는 인간을 받아내긴 했지만, 둘 다 바닥에 나뒹굴었다.
"자, 이제 죽음의 시간이다."
도플갱어는 팔을 활짝 폈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온 붉은 빛이 무너진 지하실을 가득 메웠다.
"젠장, 내 악운!"
정규가 버럭 소리를 질렀고,
그 소리에 영철이 눈을 떴다.
정신이 몽롱했다. 점점 몸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는 흐린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붉은빛이 가득했다.
붉은빛 가운데, 팔을 펼친 악마가 있었다.
'죽었나?'
잠시 떠올랐던 생각은 이어진 광경에 사라지고 말았다.
붉은빛을 뚫고, 반투명한 인간들이 천장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어른과 소녀.
그들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는 천사처럼 보였다.
하지만, 천장에서 나온 두 사람은 바로 또렷해져서 붉은빛을 가렸고, 소녀 그림자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나 고갈이군.'
뜬금없는 생각이 이어지는 순간.
붉은빛을 가리던 큰 그림자가 검을 찔렀다.
파직!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고,
악마의 넋두리가 웅웅 울렸다.
"폭주한 마나석을 막아낼 수 있는 거였나?"
"마나를 볼 수 있다면. 잘라낼 수도 있지."
이어진 대답에 영철은 묻어두었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언젠가 마나를 보게 된다면 나처럼 할 수 있을 거야.]
낙담한 그의 어깨를 두들겨주고 떠난 남자.
그의 목표이자 희망이었던 남자의 등이 눈앞에 있었다.
249화. < 영웅 (5) >
괴수가 쓰러졌다.
싸움에 참여했던 각성자들은 쏟아져 들어오는 마나에 무척 놀랐다. 등급이 올라간 각성자들도 나올 정도였다.
각성자들은 기뻐했다.
마나를 얻지는 못했지만, 병사들도, 방공호에서 방송을 듣던 모스크바 시민들도, 방송으로 지켜보던 사람들 모두가 환호성을 토해냈다.
엄청난 크기의 괴물이었다.
헬기들을 한 번에 박살 내고, 주변 건물을 무너뜨렸을 때는 재앙이 닥칠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런 괴물을 쓰러뜨리는 것을 화면에서나마 직접 보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마지막까지 화면을 남긴 방송국 헬기에 탄 사람들은 기쁨으로 소리를 질렀고, 방송국은 역사상 최고의 시청률에 입을 딱 벌렸다.
환호성이 한바탕 지나간 뒤에 사람들은 모두 마지막에 나타나 괴수를 쓰러뜨린 남자를 떠올리게 되었다.
환호가 올라오던 인터넷 게시판도 남자에 관한 이야기로 게시판이 도배되었다.
ㄴ마지막에 나타난 남자 누구죠? 저 각성자 아는 사람 있어요?
ㄴ처음 봄.
ㄴ각성자가 저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거였어? 저건 마치 영화에 나오는 히어로 같잖아.
ㄴ특성 아냐? 여자 각성자가 만든 상처에 검을 찔러넣었을 뿐이잖아.
ㄴ찔러넣는다고 그게 저렇게 터져나갈 리가 없잖아! 다른 각성자들 공격은 먹히지도 않더만!
ㄴ특성 같지는 않던데요? 커다란 검을 쾅쾅 터트리더니, 나중에는 멋진 검 꺼내서 전부 갈아버렸잖아요.
ㄴ특성이든, 뭐든 저런 대단한 각성자 소문은 들어보지 못했는데.
ㄴ헬멧맨처럼 EV 집행자 아냐? 각성자들 사이에서는 EV 집행자 유명해.
ㄴ암튼 모두 대단하고 열심히들 싸웠어. 그동안 각성자들 미워한 거 사과함.
ㄴ아니, 남자는 됐고, 허공에 금 쫙쫙 만드는 여자 각성자 정보 없어? 내가 팬 일호다!
ㄴ팬클럽 바로 생길 듯해요.
ㄴ근데 어려 보이던데. 서양인이 저 정도면 아직 10대 아냐?
ㄴ그럼 더 좋고!
ㄴ경찰 아저씨! 여기 범죄자가 있어요!
다른 이야기도 섞여 있었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는 날개 달린 사자를 타고 하늘을 나는 소녀와 마지막에 등장해 괴물을 터트려버린 남자 이야기였다.
이야기는 인터넷 만이 아니었다. 방송을 본 가족과 친구들. 노인과 아이들까지 모두에게 소식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경훈의 얼굴을 아는 사람들은 방송을 보고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저기, 경훈씨 맞지?"
"....맙소사, 저런 괴물하고 싸워왔던 거였어요?"
방송을 지켜보던 진샤웨이와 류이링이 경훈을 알아보고 놀라워했고,
같이 있던 오마르는 경훈의 손에 부서져 나간 검들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제대로 된 무기를 만들어야 했다.
이브와 SG전자의 기술자들과 함께 멋진 레일건을 만들어주긴 했지만, 경훈은 제대로 된 검이 필요했다.
벌떡.
오마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공방으로 향했다. 쉴 때가 아니었다.
경훈이 각성하기 전에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화면에 나온 사람이 경훈이라는 것을 믿지 못했고, 그 뒤에 알던 사람들도 경훈의 실력을 알고 무척이나 놀랐다.
각국 정상도 마찬가지였다.
러시아, 만주 독립국, 북한의 지도자들은 모두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고,
한국 대통령도 방송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그의 말을 따른 게 정말 잘한 일이었다.
"괴물이군요."
각료 하나가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귀금속 회사의 대표가 EV 집행자라는 사실에 놀란 게 얼마 전이었다.
그 뒤에 그가 EV의 실질적인 지배자라는 이야기를 듣고,
오늘 그의 제대로 된 실력을 보게 되었다.
대통령 침실에 숨어들고, 전함 위에서 적의 미사일을 막은 것은 지금 보는 장면에 비하면 별 게 아니었다.
"EV의 지배자에 저런 힘이라니...."
회의실에 있는 각료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방송을 보는 보통 사람들은 마냥 기뻐할 수 있겠지만, 그들은 그럴 수 없었다.
저 정도 권력과 힘이라면 절대왕정의 황제 이상이었다. 신화에 나오는 고대 왕국을 다스리는 영웅과 다를 바 없었다.
"미국 대신 EV인가...."
세계적인 위기였지만, 그 와중에 일류국가로 성장한 한국이었다.
하지만, 한국이 이렇게 성장한 것도, 세계적인 위기에서 무사한 것도, EV 덕분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왜 EV가 한국을 보호해 준 것인지 이제는 잘 알게 되었다.
EV와 계속 협력해야 할 각료들이었다. 저런 초인과 어떻게 일을 해나가야 할지 막막할 수밖에 없었다.
각료들을 보고 대통령이 혀를 찼다.
어차피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과 달리 대통령은 상대를 재단하기를 예전에 포기했었다.
지금 대통령의 고민은 각료들과 달랐다.
"이제는 숨기지 않겠다는 거겠지?"
새로운 국정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EV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방송을 차단할 수 있었을 텐데 막지 않았습니다."
EV의 해킹 능력은 정평이 나 있었다. 도대체 그걸 하는 사람은 또 누군지. 대통령의 한숨은 깊어졌다.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지금이야 영웅으로 받아들일 겁니다."
나중에, 괴물과 싸움이 끝난 뒤, 혹은 세상이 안정을 찾은 뒤에는 달라지겠지만, 지금은 모두 그에 감탄하고 찬양할 게 분명했다.
"그럼, 우리도 같은 모습을 보여줘야겠지. 축하 전문을 발표하도록."
"알겠습니다."
대통령은 지친 얼굴을 쓰다듬었다.
나중에, 사람들의 반응이 달라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괜히 지금, 황금알을 낳는 거위 배를 가를 필요는 없었다.
문득, 침실에서 본 헬멧 맨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대통령은 고개를 저었다.
이건, 공포심 때문에 결정한 것이 아니었다. 냉정한 국가 원수의 결정이었다.
*
이번 일로 세상은 온통 떠들썩했지만, 이곳 지하실은 그리 시끄럽지 않았다.
털썩.
도플갱어가 쓰러지고, 정규는 급하게 영철을 확인했다.
눈을 뜨고 있긴 했지만, 숨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너무 상처가 심했다. 배의 상처 안으로 내장이 보이고 있었고, 목과 온몸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규는 꿍쳐두었던 포션을 꺼내 영철의 입에 부었다.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니던 엄청 비싼 치료 포션이었지만, 영철에게 먹이는 것이 아깝지 않았다.
꿀꺽.
많이 새어 나왔지만, 그래도 일부는 목을 넘어갔다.
흘러나오던 피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역시 JK POTION의 최상급 포션이었다. 확실히 비싼 값을 했다.
[다행입니다. 생명은 지장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이브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경훈과 이사벨이 두 사람 앞에 와 있었다.
그녀의 말에 정규와 이사벨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경훈은 굳은 얼굴로 영철을 보고 있었다.
멍하니 경훈을 바라보는 영철의 얼굴은 붉은 실핏줄이 가득했다.
영철의 피부는 아직도 울긋불긋했고, 몸 전체가 조금씩 경련하고 있었다.
"폭주한 겁니까?"
경훈의 말에 이사벨이 눈을 크게 떴다.
그녀도 얼마 전 특성을 폭주시킨 적이 있었다.
그 덕분에 차원문을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정말 위험했던 순간이었다.
영철 대신에 정규가 입을 열었다.
"폭주인지 모르겠지만, 위험한 순간에 갑자기 강해지긴 했습니다."
각성자들의 공격에 영철은 자신의 몸을 지키기도 쉽지 않았다.
거기다, 각성자들이 영철을 공격하는 동안, 도플갱어가 정규를 덮쳤다.
그때, 갑자기 영철이 강해지면서 각성자들을 물리치고, 도플갱어를 막아섰다.
지금까지 정규는 영철의 등급이 오른 거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특성을 폭주시킨다고 싸움을 잘하게 되는 것은 아닌데.... 전투 특성인가?"
이사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특성은 아까 사람이 아닌 존재를 알아차리는 거라고 했는데...."
정규는 공장에서 도플갱어를 알아낼 때 말고는 영철이 특성을 쓰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때, 이브의 놀란 음성이 들려왔다.
[설마, 폭주라면.... 아, 주인님은 마나가 보이시죠?]
마나석이 없는 인간들의 특성 폭주는 괴물들과 다른 결과를 낳았다.
운이 좋으면 이사벨처럼 특성이 강화되기도 하고, 어떨 때는 마나 고갈처럼 한동안 특성을 사용할 수 없게 되기도 했다.
그리고, 마나를 잃는 경우도, 특성을 잃는 일도 있었다.
영철의 경우는 운이 좋지를 못했다.
경훈은 볼 수 있었다.
영철의 몸에서 마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스스로 마나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영철의 몸속에 있던 모든 마나가 그의 몸을 버리고 떠나고 있었다.
멍하니 경훈을 바라보던 영철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아, 그, 그렇게 된 거였어. 왜, 몸을 움직이는 게 힘든지…. 이제야 알았어."
떠듬거리는 영철의 음성은 무척이나 작았다.
피는 멈추고 상처는 빠르게 치유되고 있었지만, 영철의 음성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영철이 경훈을 보며 물었다.
"마, 마나가 사라지고 있는 거죠?"
영철의 말에 경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소리야. 마나가 사라진다니. 등급이 떨어진다는 소리야?"
문득, 떠오른 생각에 정규가 물어보았지만, 대답은 다른 사람이 해주었다.
[특성과 마나를 잃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일반인이 된다는 말이죠.]
"이런, 그럼 큰일이잖아."
정규는 깜짝 놀랐다.
각성자가 힘을 잃다니, 옆에서 영철을 보아온 정규로서는 이만저만 걱정되는 일이 아니었다.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내가 책임지고 찾아볼게. 넌 러시아를 구한 영웅이야."
정규의 말에 영철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도 이 세상에서 좋은 사람을 만난 모양이었다.
영철이 입을 열었다.
"특성을 말하기 전, 제가 전에 한 말 기억합니까? 멸망한 세상에서 왔다는 말."
"그 농담은 갑자기 왜?"
영철이 다시 경훈을 바라보았다.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말. 농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제 특성입니다."
영철의 말에 경훈이 표정을 굳혔다.
"그게 무슨 말이지?"
경훈의 물음에 영철은 고개를 저었다.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마나가 사라지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대답하는 대신, 영철은 전생의 이름을 경훈에게 알려주었다.
"내 이름은 혁준입니다."
"네 이름은 영철이잖아. 갑자기 왜 그래."
그는 정규를 보며 말했다.
"고마웠습니다. 미안하지만, 내가 사라진 뒤에 영철을 부탁합니다. 막 써먹었으니, 그래도 뭔가 남겨줬으면 합니다."
정규는 영철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두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경훈은 뭔가 알아차린 것 같았다.
"설마, 빙의?"
머리에서 빠져나가는 마나의 모습과 그의 말이 한가지 추측을 하게 했다.
경훈의 말에 영철, 아니 혁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마나를 보게 되면 알 수 있는 거군요."
상대의 말에 경훈은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괴물? 생존자? 하지만, 저 마나는 어디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죽은 뒤에 이런 경험을 하다니…. 혹시 이건 마지막 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무척 행복한 꿈이네요."
말소리가 이제 거의 들리지 않게 되었다.
이제, 그의 몸에는 마나가 거의 남지 않았다.
"만나서 기뻤습니다. 오랜 시간 당신을 만나기를 바랬습니다...."
더는 그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의 입만이 조용히 움직였다.
[나의 영웅. 차원 이동자여.]
마나가 모두 사라졌다.
영철에 머물던 혼도 떠나갔다.
영철의 표정이 바뀌었다.
냉정하고 지친 표정이 아니라, 조금은 어리숙하고 평범한 보통 사람의 표정이 그의 얼굴에 나타났다.
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여긴 어디죠?"
영철은 얼굴을 찌푸렸다.
"악, 아파! 이게 뭐야!"
넋을 놓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그는 상처를 움켜잡았다.
영철은 이제 마나를 잃고 평범한 사람이 되었다.
250화. < 반격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