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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to 83

제73화

약 석 달 뒤.

총경연이 코앞에 다가왔을 때.

크리스가 번뜩 눈을 떴다.

그는 잠시 눈을 깜빡거렸다.

'얼마나 지난 거지?'

지난 석 달간.

크리스는 규칙적인 시간을 보냈다.

여러 마공과 흑마법을 배웠고, 성의 경지를 높이는 동시에 남는 시간에는 흑강기를 연구했다.

꾸준한 수련 덕에 3성 중(中)에 이르렀고, 여러 흑마법과 마공들의 성취도 일취월장하였다.

고작 석 달도 안 되는 시간 만에 3성 중에 이르다니. 정확히는 중에서도 끝에 도달해 있었다. 3성 상에 오르기 직전의 단계.

그야말로 미친 속도였지만, 막상 흑강기의 실마리는 쉽게 잡히지 않아 답답해하던 중이었다.

깨달음의 순간이 왔다.

어떤 전조도 없이.

그리고 무아지경에 빠졌고, 지금에서야 눈을 뜬 거다.

'이틀 정도 지난 건가?'

잠깐 눈을 감은 것 같은데, 이틀이나 지나 있다니.

정확히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저 끝없이 무언가를 쫓았던 기억만 났다.

도무지 잡히지 않는 끈.

그리고 '의지'로 끈을 잡아채는 순간 번뜩 정신을 차렸다.

크리스는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가볍게 마기를 둘러보았다.

'이건?'

크리스는 놀란 얼굴을 했다.

3성 상(上)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예상보다도 훌쩍 빠른 성취.

더구나 더욱 중요한 일이 있었다.

크리스는 본능적으로 손을 펼쳤다.

흑검이 펼쳐졌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크리스가 흑검을 바라보았고.

화악!

육안으로 봤을 때 큰 변화는 없었다.

여전히 흑검이었다.

하지만 크리스는 알 수 있었다.

흑검에 의지가 담겼음을.

이제 그의 흑검은 단순한 물리적인 성질을 벗어나, 그의 의지를 세상에 발현하는 무기가 된 것이다.

'그래도 마구 쓰기에는 무리가 있군. 의지가 담기니 마기 소모가 커. 위력은 실제 5성 마인이 쓰는 흑강기와 비교하면… 절반 정도의 힘인가.'

흑강기의 절반이라니.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아직 3성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마인의 힘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이 강력한 힘.

'그리고 흑강기만 다룰 수 있게 된 게 아니야.'

순간적으로, 크리스의 체질이 변하였다.

어둠의 기운이 사라지고 청명한 빛의 기운이 몸에 돌았다.

그리고.

파앗!

흑강기와 동일한 경지의 힘인 빛의 오러가 크리스의 손에서 넘실거렸다!

'오러 블레이드'를 쓸 수 있게 된 거다.

'성휘의 경지로서 5성 진(眞)이 된 건가.'

5성이 되었다는 건 아니다.

아직 4성의 경지이지만, 4성의 한계를 넘어 어렴풋이나마 오러를 다룰 수 있을 때 '진'이란 경지로 표현한다.

5성이지만 어렴풋이 '의념'을 다룰 수 있다면 6성 진, 이런 식.

군대 계급에서 유래한 용어로 아직 정식 진급은 못 했지만, 해당 직책을 맡았을 때 백부장 진(眞)이란 식으로 표현하는데, 거기서 따온 거다.

즉, 아직 4성의 굴레를 뛰어넘지는 못했지만, 5성에 발을 걸치게 되었다고 보면 된다.

연합의 경지로도 한층 강해진 거다.

'다행히 시간은 딱 맞추었군.'

크리스는 달력을 보았다.

총경연까지 일주일. 아슬아슬하게 시간이 있었다.

"마리? 있어?"

[도련님?]

쓰윽 벽을 뚫고 나타난 마리가 우뚝 멈추었다.

[뭔가 콩닥콩닥 왓따 더 멋있어지신 것 같은?]

본능적으로 크리스가 강해진 것을 느낀 거다.

"이틀간 별일 없었어?"

[큰일은 없었습니다. 아… 1공녀 유리안에 대해 조사해 보았습니다.]

크리스는 그 말에 눈빛을 빛냈다.

1공녀는 가장 위험한 경쟁자.

중요한 내용이었다.

"유리안 공녀에게 무슨 특별한 과거가 있었어?"

악마 계약자들은 특별한 사연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고통스럽고, 지독히 절망적인 사연을.

악마들이 탐내는 건 찬란히 빛나다가 끔찍한 일을 겪고 절망에 빠진 영혼들이니까.

상처 입어 갈기갈기 찢어진 영혼이 비참히 울부짖을 때, 악마들은 기꺼이 자신의 '축복'을 내어준다.

만약, 유리안도 그런 경우라면 분명 과거에 눈에 띄는 사연을 겪은 적이 있을 거다.

그런데.

[특별한 일은… 전혀 없었다고 하던데요?]

"흠?"

[유리안 공녀는… 랑함 후작과 전 부인 사이에 막내딸로 태어나… 풍족한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고 합니다. 어떤 고통스러운 일을 겪거나 한 적은… 전혀 없었다고 하더군요.]

곱게 자란 귀공녀.

그게 마리가 조사한 유리안 공녀의 과거의 전부였다.

"그래?"

크리스는 의외란 얼굴을 하였다.

'악마와 계약할 만한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그냥 탐욕으로 악마와 계약한 건가?'

그렇다면, 크게 걱정할 거는 없었다. 악마와 탐욕으로 계약한 이들은 힘의 한계가 명확하니까.

하지만 왠지 그건 아닐 것 같았다.

직감이었다.

'…분명 무언가 있을 거야. 가문의 사람들이 모르는.'

더 시간을 들여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마리가 한 가지 뜻밖의 이야기를 하였다.

[아…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어떤?"

[유리안 공녀의 성격이 갑자기 한순간 변했다고 합니다.]

마리는 청순하게 예쁜 자신의 얼굴을 갸웃거렸다.

[한 5년 전…? 며칠간 열병을 앓고 나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원래 유리안 공녀는… 아래 사람에게 굉장히 잔혹하기로 유명한 안하무인의 악녀였는데, 그때를 기점으로 완전히 달라졌다고 합니다. 완전히 철이 들어 따뜻한 성품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크리스는 눈을 끔뻑거렸다.

이상한 이야기였다.

열병을 앓고 나서 성격이 바뀌다니?

'일단, 유리안 공녀는 조금 더 지켜봐야겠어.'

크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뭔가 명확히 판단을 내리기에는 아직은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그래, 수고했어."

[왓따…?]

"그래, 왓따."

마리는 청순한 미소를 지으며 배시시 하였고, 크리스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부탁할 일이 하나 더 있어. 루돌프 상단에 루이나… 아니, 루비드 상단주를 찾아 내가 쓴 편지를 전해줄래?"

일전, 유물 탐사 때 돈을 뜯어낸 상단이었다.

[혹시… 무슨 일로?]

"아아. 상단에 따로 부탁할 게 있어서."

크리스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용건이야 뻔했다.

또 돈을 뜯어내는 것.

'내가 계획한 일을 하려면 또 큰돈이 필요해서.'

크리스는 힐끗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택 너머. 그러니까 노가주의 별채가 있는 곳.

그렇다.

크리스는 이번 총경연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 노가주를 이용할 계획이었다.

* ? ?* ? ?*

며칠 뒤.

노가주의 별채.

메리안과 노르디언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크리스티앙, 그놈은 무얼 하고 있느냐?"

메리안은 놀란 마음을 숨겼다.

지난 석 달간.

노르디언은 잊을 만하면 크리스티앙의 행적을 물었다.

이전 어떤 공자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관심.

"특별한 변화는 없습니다. 가문의 교사들에게 흑마법과 마공을 배워 익히고 있습니다."

"…그렇군. 프레시아 그 아이는 여전하고?"

"네, 자신의 권력을 사용해 크리스티앙을 고립시키고 있습니다."

노가주는 혀를 찼다.

못마땅함이 얼핏 보였다.

치졸한 수를 쓰는 프레시아를 향한?

아니, 부당한 대우를 받음에도 군말 없이 납작 엎드려 있는 크리스티앙에게다.

노르디언이 크리스티앙에게 기대하던 건 이런 모습이 아니다.

"내가 너무 과한 기대를 한 것인지도 모르겠군. 이렇게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는 모습이라니. 사자 새끼인 줄 알았는데, 쭉정이인지도 모르겠어."

과한 박한 평가.

그런데 옆에서 사이먼이 불쑥 끼어들었다.

"무력한 게 아닐 수도 있지요."

"그러면?"

"발톱을 갈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크리스티앙, 그 아이가?"

"네, 그 성질 나쁜 도련님이 이렇게까지 조용하다면, 무언가 노리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노르디언은 지그시 인상을 찌푸렸다.

"피쟁이 너, 뭔가 더 아는 게 있구나."

사이먼은 씨익 미소만 지었다.

"그냥, 무언가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 말입니다. 우리 뱀파이어들은 상대의 침묵을 더욱 경계하거든요."

노가주는 혀를 끌끌 찼다.

다행히 노기가 풀어지는 것 같자, 메리안이 조심스럽게 하나의 상자를 내밀었다.

"그건 무엇이냐?"

"크리스티앙이 가주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내게? 선물을?"

"…네, 지난 가르침에 대한 감사의 답례로 손자로서 드리는 선물이라고 하더군요."

어제.

크리스티앙이 몰래 메리안을 찾아와 노가주에게 선물 박스를 전해달라고 했다.

'…역효과가 아닐까 걱정인데.'

메리안은 괜히 자신이 조마조마한 심정이 들었다.

노르디언이 선물 상자를 보고 당장에라도 버럭 화를 낼 것 같았다.

"쓸데없는 짓을…."

역시나 반응이 좋지 않다.

메리안은 크리스티앙이 더 찍히기 전에 급히 선물 박스를 거두었다.

"이건 다시 돌려보내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도록 제가 단단히 교육을…."

"아니, 되었다."

"…네?"

"주라고."

메리안은 얼떨떨하게 선물 박스를 내밀었다.

노가주는 여전히 잔뜩 인상을 찌푸린 모습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강해지라고 했더니, 쓸데없는 짓을.'

하지만 노가주가 선물을 받기로 한 건,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상자에 쓰여 있는 하나의 문구.

-분명 만족하실 선물이라 확신합니다.

노가주는 실소했다.

'당돌하기 그지없는.'

저 어이없는 문구에 선물을 받기로 한 거다.

과연, 어떤 선물인지 확인이나 해보자는 마음.

열어보니 초콜릿이었다.

"…웬?"

"…가주님께서 초콜릿을 좋아하신다는 이야기에 직접 준비했다고 합니다."

노르디언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메리안은 진땀이 뻘뻘 났다.

'젠장, 크리스티앙 천둥벌거숭이 놈은 왜 이딴 짓을.'

임무 실패를 보고할 때보다 더 불안했다.

노르디언이 마기로 초콜릿을 불태우고 크리스티앙을 불러내 경을 칠 것만 같았다.

천만다행으로 노르디언은 마기를 일으키지 않았다.

- 분명 만족하실 선물이라 확신합니다.

이 문구 때문이었다.

'고작 초콜릿 따위에 내가 만족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고.'

물론, 노르디언이 초콜릿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천상의 맛을 가진 초콜릿이라도 노르디언이 이 선물을 만족할 일은 없었다.

그가 크리스티앙에게 바라는 건 이따위 게 아니니까.

그런데 그걸 모를 아이가 아닐 텐데, 왜 이런 짓을 한 걸까?

화가 나면서도, 그 영악한 놈이 도대체 무슨 황당한 생각으로 이런 짓을 벌인 건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매섭게 초콜릿을 노려보더니 손가락을 들어 입에 집어넣었다.

정말로 단순히 맛난 초콜릿에 불과한 거라면 단단히 혼을 내야겠다는 생각과 더불어.

부드러운 촉감이 혀에 닿는 순간.

고급진 감각이 미각을 타고 올라갔다.

최고의 파티시에가 극강의 솜씨를 발휘한 듯한 맛.

하지만 노르디언은 인상을 찌푸렸다.

'직접 만든 거라고? 공자가 되어서 이딴 요리나 하고 있었던 건가.'

실망스러움과 함께 꿀꺽 초콜릿을 삼킨 순간이었다.

상상하지도 못한 반전이 일어났다.

화악!

노르디언의 시야가 변하였다.

'…환술?'

별채의 광경이 아니었다.

드넓은 평야.

우뚝 솟은 암흑 마가 본성의 모습.

그곳에 한 인물이 서 있었다.

제74화

'저건?'

노르디언의 젊었을 적 모습이었다.

암흑 마가를 향해 쇄도하는 적들에 맞서는 모습.

그리고 승리하는 모습.

암흑 마가의 마인들이 함께 함성?

그와 더불어 번영하는 암흑 마가의 모습.

마도 제국의 하늘 높이 올라 펄럭이는 배런가의 기(旗).

그가 일평생 추구했던 암흑 마가의 영광을 표현한 환술이었다.

"!!"

짧은 환상이 끝나고 노르디언이 번뜩 눈을 떴다.

"…가주님?"

메리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많이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그 아이가 가주님의 취향대로 투박하면서, 고급스러운 초콜릿을 만들겠다고 했을 때, 제가 제대로 교육했어야 했는데."

"…아니다."

"네?"

"훌륭했다."

메리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노가주가 큭큭 웃음을 흘렸다.

'이런 당돌한 놈.'

무려 초콜릿에 환술을 섞었다.

고작 3성이 선보일 실력이 아니었다.

크리스티앙은 자신이 놀고 있었던 게 아니란 메시지를 보낸 거다.

거기에 환술의 내용은 어떤가?

'내 마음을 꿰뚫어 보았어.'

암흑 마가의 강철의 힘.

거친 투박함.

또한, 초콜릿의 화려한 맛은 암흑 마가의 번영을 상징한다.

노르디언이 일평생 바라온 바를 환술과 초콜릿의 맛을 조합해 표현해낸 거다.

거기에.

'고얀 놈. 그런 마지막 장면이라니.'

최후의 장면에서 노르디언은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이제는 철인이 되어 가족애 따위 잊은 지 오래이지만, 노르디언도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따뜻한 품으로 자식들을 안아줄 때가 그에게도 있었다.

'손자로서 주는 선물이니 좋게 여겨달라는 건가.'

역시나 당돌한 메시지.

'…그러고 보니, 자식들이나 손자들에게 이런 선물을 받은 건 처음이군.'

인제 와서 가족애가 그리워졌다는 건 절대 아니지만, 그래도 싫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이번에는 다소 가벼운 마음으로 초콜릿을 하나 더 먹었다.

처음 1회에만 펼쳐지도록 설정한 것인지 환술은 펼쳐지지 않았다.

보다 본연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대단한 맛이긴 하군. 지금껏 내가 먹었던 어떤 것보다 훌륭한 맛이야. 이런 걸 만들 시간에 마기를 한 번이라도 더 다듬을 것이지.'

가볍게 투덜거리는 순간이었다.

노르디언이 우뚝 굳었다.

희미하게.

기이한 감각이 느껴졌던 거다.

청량감이었다.

생명력을 자극하는.

"가주님?"

"…이걸 크리스티앙이 만들었다고 했느냐?"

"네, 맞습니다."

노르디언은 침묵하였다.

'…이건 분명 의선 명가의 활성단(活性丹) 아닌가. 수명을 연장해 준다는.'

제조의 까다로움과 재료의 희소성으로 극히 적은 숫자만 존재한다는 의선 명가의 비약.

한 알에 들어가는 재료비만 300만 루페가 넘는다고 알려진 극상의 비약이었다.

'…아니, 달라.'

의선 명가의 활성단은 폭발적인 생기의 확장이 특징이었다.

반면, 이 초콜릿의 효과는 굉장히 은은했다.

집중하지 않으면 느끼지 못할 정도로.

하지만 그래서 도리어 노르디언에게 맞았다.

노르디언은 이미 생명력이 한계에 이른 상태. 깨진 생명력의 그릇을 역천의 비술로 억지로 붙들고 있는 상태다.

따라서 과한 생명력의 활성화는 독이 될 뿐이었다.

이런 은은한 스며듦이 훨씬 노르디언의 상태에 도움이 되었다.

노가주는 그제야 크리스티앙이 준 초콜릿이 50조각 이상으로 잘게 나누어져 있음을 깨달았다.

기간을 두어 나누어 복용하라는 것이리라.

'도대체 크리스티앙은 어떻게 이런 약을?'

노가주가 인상을 찌푸리는 순간이었다.

"저… 가주님. 크리스티앙의 편지입니다."

"편지?"

"네."

만약, 선물을 받고 노르디언의 반응이 나쁘지 않으면 이 편지를 건네주라고 했다.

정중한 필체로 쓰인 내용들.

-혹여나 제 선물에 기분이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손자로서 가주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제 나름대로 비장의 비기를 사용해 선물을 준비하였으니, 너그럽게 여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 가주님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정진 중입니다. 총경연 때 반드시 성과를 보여 손자로서 가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겠습니다.

노르디언은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이리저리 썼지만, 크리스티앙의 편지는 몇 가지 의도를 담고 있었다.

첫째, '비장의 비기'라는 단어.

-이 약은 제 비기입니다. 그러니 비밀을 캐묻지 말아 주십시오.

그리고 더욱 중요한 말.

-총경연 때 반드시 성과를 보이겠습니다.

노르디언은 선물의 대가로 크리스티앙이 바라는 바를 알아들었다.

"크리스티앙이 이 선물을 손자로서 준 선물이라고 했느냐?"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할아비로서 답례하는 게 마땅하겠구나."

"가주님?"

메리안과 사이먼이 놀란 얼굴을 하였다.

답례라면, 크리스티앙을 도와주겠다는 의미다.

하지만 노가주는 일절 가문의 일에 끼어들지 않기로 선언했는데?

"클클, 그 아이의 손을 들어주겠다는 게 아니다. 내가 가문의 일에 끼어들 수는 없으니까. 무엇보다 내가 그 아이를 도우면 그 아이의 성장에 방해가 될 테니, 그럴 수 없지."

"그러면?"

"말하지 않았느냐? 가주가 아닌, 할아비로서 답례하겠다고."

노가주가 어딘지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번 총경연을 나도 관전하겠다."

"!!"

"할아비로서 손주들이 얼마나 잘 자랐는지 한번 확인해보는 것도 좋겠지."

크리스티앙이 편지에 쓴 의도.

노가주 보고 총경연에 나와 자신의 모습을 지켜봐 달라는 거였다.

노르디언은 할아비로서 그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거고.

그렇게.

가문을 발칵 뒤집을 결정이 내려졌다.

* ? ?* ? ?*

쨍그랑!

프레시아는 찻잔을 떨어뜨렸다.

"뭐라고? 가주님께서 직접 참석하신다고?"

상상도 못 했던 일.

프레시아는 손톱을 질끈 깨물었다.

'갑자기 그 늙은 괴물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녀는 노가주를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의 남편, 랑함 후작이 가주의 자리에 오르는 걸 막은 인물이니까.

하지만 노가주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노르디언이 손가락만 하나 까닥해도 그녀가 지금껏 이룬 모든 것은 한 번에 무너질 수도 있었다.

'아니야. 마냥 나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프레시아가 눈빛을 가라앉혔다.

'도리어 가주의 면전에서 크리스티앙을 짓밟고, 마이삭의 훌륭한 모습을 선보일 기회야.'

차라리 잘됐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는 이번 총경연 때를 대비하여 철저한 준비를 하였다.

마이삭을 부각하고, 크리스티앙을 몰락하게 할.

노가주 앞에서 마이삭은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리라.

크리스티앙을 희생양 삼아.

* ? ?* ? ?*

총경연 날이 다가왔다.

장소는 저택의 대연무장이었다.

수없는 마인이 북적이고 있었다.

가문의 원로, 중진들은 물론 평범한 마인들까지 가득 모여 있는 상황. 이 정도면 본가의 마인 대부분이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노가주 노르디언 때문이었다.

'가주님께서 직접 관전하시다니.'

'이런 기회가 아니면 가주님을 언제 또 뵐 수 있을지 몰라.'

노르디언은 암흑 마가 마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

그러니 노르디언이 행차한다는 소식에 이런 인파가 모여든 거다.

그리고 이건 크리스가 의도한 바대로이기도 했다.

'노가주가 내 의도를 알아차려 주어서 다행이네.'

크리스는 남몰래 씨익 웃음을 지었다.

'이왕 놀라운 모습을 선보일 거, 관중들이 많이 있어야지.'

지금 이곳에 모인 이 중 크리스티앙을 주목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크리스는 확신했다.

오늘 총경연이 끝난 후,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잊지 못하게 될 거라는 것을.

"…왔군. 빌어먹을 놈."

그때, 마이삭이 크리스에게 다가오더니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각오하여라. 넌 오늘 가주님 앞에서 최악의 모욕을 당하게 될 테니까. 이미 모든 준비를 끝내 놓았으니…."

"시끄러워. 마마보이 주제에."

"…뭐?"

"결국, 엄마 손 빌려서 수작을 부려 놓았다는 거잖아. 그게 뭐 자랑이라고 입 냄새 나게 떠드는지 모르겠네. 마마보이라서 부끄러운지도 모르는 건가?"

"너…!!"

"우리 내기할래?"

"…뭐?"

"이번 총경연 때 망신을 당하는 게 둘 중 누구인지 말이야. 만약, 마마보이, 네가 이기면 순순히 가문을 떠나주지. 단, 네가 지면."

크리스는 입꼬리를 최대한 재수 없게 들어 올렸다.

"네가 날 형님으로 모시는 거야. 아니, 너 같은 머저리를 동생으로 삼는 건 나도 싫군. 네가 지면 내 하인이 되는 걸로 하지. 그렇지 않아도 인간 하인이 필요했는데, 특별히 부려 먹어주지. 너 같은 머저리도 청소 정도는 할 수 있을 테니까. 어때?"

마이삭의 주먹이 분노로 부르르 떨렸다.

"너… 반드시 죽여주마."

눈빛으로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면, 크리스의 몸은 열 갈래, 스무 갈래 이상으로 찢어졌을 거다.

그만큼 마이삭의 눈빛이 흉험하게 빛났다.

크리스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였고, 마이삭은 이를 바득 갈고는 사라졌다.

그러자 새로운 음성이 또 들렸다.

"너 말투 싸가지 없어."

쥬피엔이었다.

그녀가 인형 같은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잘했어."

"잘해?"

"응, 저놈 재수 없어."

쥬피엔은 저 멀리서 성질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주변에 버럭 화를 내며 해코지하는 중인 마이삭을 보며 인상을 지그시 찌푸렸다.

그러더니 뜻밖의 말을 하였다.

"마이삭과 싸우는 데 내가 도와줄까?"

크리스는 의아한 얼굴을 하였다.

"…네가 날? 왜? 너 나 싫어하는 것 아니었어?"

쥬피엔은 다시 눈썹을 찡그렸다.

"네가 괜히 다른 놈한테 당하는 게 싫을 뿐이야. 넌 내가 쓰러뜨려야 하니까."

"아, 그래? 그런데 날 쓰러뜨리겠다는 바람은 평생 무리일 것 같은데?"

이미 크리스는 쥬피엔의 경지를 뛰어넘었다.

'아니, 그게 아닌가?'

크리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석 달간.

쥬피엔도 놀고 있었던 건 아닌 것 같다.

이전에 비해 훌쩍 기세가 성장해 있었다.

원래 쥬피엔의 경지는 3성 상이다.

그런데 거기서 훌쩍 성장해 4성을 목전에 두고 있는 게 느껴졌다.

"너 재수 없어. 어쨌든 조심하고, 각오해. 넌 내가 짓뭉개줄 테니까."

쥬피엔은 그렇게 걱정인지, 악담인지 모를 이야기를 하고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저 멀리서 1공녀 유리안이 크리스를 보더니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마치 정말로 반가워하기라도 하는 듯한 모습.

'1공녀는 도무지 속을 모르겠군.'

크리스는 묘한 얼굴을 하였다.

저런 태도가 거짓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무수히 많은 인간 군상을 겪어봐 상대의 모습이 가식인지, 아닌지를 직관적으로 꿰뚫어볼 수 있었다.

하지만 유리안은 모르겠다.

가식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욱 헷갈렸다.

저 따뜻해 보이는 모습이 가면이 아니라, 진심이라고?

'어쨌든 모일 사람은 다 모인 건가. 2공자 에쉬드는 아직 나한테 당한 코어의 내상을 치료하지 못했을 거고, 1공자는 이번에도 나타나지 않는군.'

1공자 광인 셰라드.

가문에 돌아왔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지금껏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다.

'1공자도 한번 확인해봐야 하는데.'

1공자 셰라드에 대해서는 아는 게 전혀 없었다.

어둠의 수다쟁이도 1공자 셰라드에 대해서는 몰랐다.

- 암흑 마가에 광인이라 불리는 미친 공자가 있었는데, 나도 자세히 몰라. 혼란이 일어나기 전에 가출해서 행방불명되었거든.

그 이야기처럼 무시해도 되는 놈인지, 아니면 경계해야 하는 놈인지 알아야 했다.

'총경연이 끝나면 한번 직접 찾아가 봐야겠어.'

그때, 높은 외침이 들렸다.

"가주님의 행차이십니다!"

"!!"

제75화

대연무장에 모여 있던 이들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저 멀리서 허리가 굽은 노인이 등장했다.

비쩍 마른 쇠약한 몸이지만 단신으로 이 자리의 모두를 압도할 힘을 지닌 자.

노가주 노르디언이었다.

* ? ?* ? ?*

장내가 고요해졌다.

노가주는 어떤 기세도 내뿜지 않았건만, 마치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는 위압감이 연무장 전체를 짓눌렀다.

마인들은 침 한 번 꿀꺽하는 소리도 못 내었다.

딱, 딱.

노가주가 짚는 지팡이 소리만이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클클, 뭘 그리 다들 긴장하고 있느냐. 이 늙은이는 그저 손주들이 얼마나 잘 자랐나, 구경이나 하러 온 것이거늘."

하지만 그럼에도 단 한 명도 자리에 다시 앉는 이는 없었다.

"가주님."

랑함 후작이 단상에서 다급히 내려와 노가주 앞에 무릎을 꿇었다.

노가주는 무릎 꿇은 아들을 잠시 속마음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굽어보더니 말했다.

"일어나시오, 후작. 이 늙은이는 이미 전권을 후작에게 맡겼거늘 이리 이 늙은이를 어려워하실 필요 없소이다. 이래서야 이 늙은이를 대신해 암흑 마가를 제대로 이끌 수 있겠소?"

크리스는 번뜩 눈을 크게 떴다.

뼈가 있는 말이었다.

'노가주는 랑함 후작을 싫어해.'

랑함 후작이 가주의 위(位)에 오르지 못한 건, 노가주의 뜻 때문이었다.

노가주가 그런 결정을 한 이유는 간단했다.

랑함 후작이 8성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랑함 후작의 경지는 7성 상.

10년이나 벽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상 한계에 도달한 거다.

그래서 노가주는 랑함 후작에게 가주 위를 물려주지 않고, 대를 건너 승계하겠다고 천명하였다.

'이해 못 할 결정은 아니지. 마도 12 명문가의 가주 중 8성에 이르지 못한 이는 아무도 없으니까.'

그래서인지, 서로 간 바라보는 시선이 싸늘했다.

노르디언의 입장에서 랑함 후작은 자신의 기대를 저버린 아들이었고.

반대로 랑함 후작 입장에서 노르디언은 오랜 자신의 꿈을 꺾은 상대였으니까.

"이만 일어서시오, 후작."

"…네, 알겠습니다."

"저기 아이들도 그만 앉으라고 명하시고."

"…네, 모두 자리에 앉거라!"

소란이 정리되었고, 노르디언은 가주의 자리가 아닌, 원로들의 자리에 앉았다.

자신은 철저히 관전만 하겠다는 뜻.

후작 부인 프레시아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늙은 괴물이 끼어들면 곤란할 뻔했는데, 다행이야.'

경연의 내용은 매번 제각각이었는데, 암흑 마가의 내정을 책임지는 그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그녀는 마이삭에게 가장 유리한 분야로 경연의 주제를 정했다.

파괴 흑마법.

마이삭의 최고 장기인 분야였다.

'특히 크리스티앙 놈은 지난 3개월간 파괴 흑마법에서 어떤 성취도 얻지 못했으니까.'

크리스티앙에게 파괴 흑마법을 가르친 교사는 파괴 마가 출신인 그녀의 심복이라, 어떤 가르침도 내리지 않았다.

'파괴 흑마법뿐이 아니야. 다른 부주제들도 크리스티앙 놈이 제대로 성취를 얻지 못한 분야 위주로 정했으니, 놈은 가주님 앞에서 최악의 망신을 당하게 될 거야.'

그렇게 프레시아가 입꼬리를 들어 올리는 순간.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후작, 이번 경연의 방식은 어떠하오?"

노가주가 물었고.

"파괴 흑마법을 비롯한 여러 주제를 공자들이 시연하는 식으로 이루어질 겁니다."

"흐음."

노가주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더니,

"연합 놈들 같은 방식이군. 그딴 광대놀음 같은 방식으로 어떻게 제대로 실력을 보겠다는 건지."

"!!"

"아, 뭐라고 하는 건 아니오. 난 그저 관전하러 온 것에 불과하니. 후작도 후작 나름의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이런 방식을 선택한 것일 테니. 이 늙은이의 눈치 보지 말고 그대로 진행하시오."

장내가 조용해졌다.

저런 말을 듣고 어떻게 그대로 진행한단 말인가?

프레시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의 꽉 쥔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이 빌어먹을 늙은이가. 왜 쓸데없는 참견을.'

한편, 크리스는 속으로 놀란 얼굴을 했다.

'혹시 날 생각해 끼어드신 건가? 설마.'

프레시아가 정한 방식대로 경연을 진행하면, 아무래도 크리스가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가 아무리 천재라도 10년 넘게 파괴 흑마법 등을 익힌 마이삭보다 숙련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

잠시의 침묵 후, 랑함 후작이 입을 열었다.

"경연의 방식을 바꾸겠습니다."

"흐음?"

"제가 생각을 잘못했습니다. 시연이 아닌, 공자들 간의 결투로 진행하겠습니다. 공자들의 실제 성취를 확인할 방법으로 결투만 한 게 없을 테니까요."

노가주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모로 랑함 후작이 못마땅하다는 반응.

랑함 후작은 딱딱히 굳은 얼굴로 대기하고 있는 공자, 공녀들에게 말했다.

"결투 상대는 각각 1공녀 유리안 대 3공자 마이삭. 그리고 2공녀 쥬피엔 대 4공자 크리스티앙으로 한다. 가문의 모두가 지켜보는 자리이니 승패를 떠나, 모두 최선을 다하도록."

실력에 따른 결투 배치였다.

비교적 나이 차가 크지 않은 유리안과 마이삭을 붙게 하고.

쥬피엔과 크리스티앙이 결투하는 게 수준에 맞으니까.

하지만 프레시아와 마이삭은 안색이 하얘졌다.

'안 돼!'

1공녀 유리안과 3공자 마이삭은 실력 차이가 명백하다. 절대 마이삭이 이길 수 없었다.

망신만 당할 게 분명할 터.

이건 그들이 바라던 그림이 아니었다.

하지만 뭐라고 항변할 수도 없었다.

노가주가 직접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제길, 저 늙은이는 도대체 왜.'

프레시아는 이를 바득 갈았다.

그런데 뜻밖의 외침이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이의 있습니다!"

"!!"

크리스티앙이었다!

"…이의라니. 무슨 말이지?"

랑함 후작이 싸늘하게 물었다.

크리스티앙은 씨익 웃으며 힐끗 노가주 쪽을 바라보았다.

마침 노르디언도 크리스티앙을 보고 있었다.

거리를 격해,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

자신을 바라보는 노가주의 눈빛에 담긴 흥미를 보니, 크리스티앙은 노가주가 자신에게 어떤 걸 바라고 있는지 읽을 수 있었다.

"결투 상대를 바꾸었으면 합니다."

"뭐?"

"절 마이삭 공자와 결투하도록 해주십시오."

"!!"

장내가 술렁였다.

마이삭과 크리스티앙은 실력 차가 현격하다.

4성과 3성의 차이이니까.

하지만 크리스티앙은 당돌한 음성으로 말했다.

"물론 제가 부족한 것은 압니다. 그래도, 마인이라면 무릇 자기보다 강한 상대에게 도전할 줄 알아야 하는 법 아닙니까?"

'이건 노가주가 내게 내린 시험이야.' 크리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노가주는 단순히 크리스를 배려해 참견한 게 아니었다.

도리어 반대.

크리스에게 더욱 어려운 과제를 내려준 거다.

마이삭을 결투에서 이겨보라고.

단순히 경연 시연에서 우위를 보이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

하지만 크리스는 노가주의 의도에 따랐다.

크리스도 같은 걸 바랐으니까.

그는 이번 경연 때 마이삭을 자신의 앞에 처절히 무릎 꿇릴 것이다.

"너…."

랑함 후작이 인상을 찌푸리는 순간.

"저 아이의 말대로 하도록 하시오."

"!!"

노가주의 말이었다.

착각일까?

어딘지 흡족함이 깃든 듯한 음성.

"저 아이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 않소? 마인이라면, 응당 자신보다 강한 이에게도 도전할 투지도 가지고 있어야지."

"!!"

그런 노가주의 말에 장내의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노가주가 저런 식으로 남을 좋게 이야기하는 건 거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노가주의 표정이 변하였다.

"단, 주제넘은 도전을 한 책임은 본인이 감당해야겠지. 크리스티앙, 네놈은 무리한 도전을 한 대가를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느냐?"

준엄한 물음.

마인들의 결투는 연합 쪽과 다르다.

치명적인 부상을 입거나,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많았다.

"물론입니다, 가주님. 무엇보다."

크리스는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누가 무릎 꿇게 될지는 지켜봐야 알 일이니까요."

"!!"

마이삭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는 노가주의 앞이라 뭐라고 이야기도 못 하고 바득 이만 갈았다.

노르디언은 클클 웃음을 흘리고는 말했다.

"여전히 입만 살았구나. 과연, 기세등등한 게 입술뿐인지 아닌지 지켜보겠다. 후작, 그러면 결투를 진행토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유리안 공녀, 쥬피엔 공녀. 앞으로 나오도록."

첫 결투는 두 공녀였다.

뜻밖에 유리안의 주 무기는 활이었다.

그것도 백발백중 명궁의 실력.

'진짜 엘프 같네.'

크리스는 팔짱을 끼며 둘의 결투를 견식했다.

단순히 활을 잘 쏴서 비슷하다고 여기는 게 아니었다.

엘프들은 활을 쏠 때 특유의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유리안의 활 쏘는 자세가 그 습관과 동일한 건 아니었지만, 미세하게 겹치는 게 있었다.

그래서인지, 활을 쏘는 모습이 엘프들과 자꾸만 겹쳐 보였다. 풍기는 분위기도 그렇고.

'다크 엘프, 흑요(黑妖)의 궁술을 보고 배운 건가?'

워낙 실력 차이가 커서인지, 둘의 결투는 일방적인 양상으로 흘러갔다.

유리안은 다양한 흑마법으로 쥬피엔을 견제하며 활로 승기를 잡아갔다.

하지만 의외로 모두의 눈을 사로잡은 건 유리안이 아닌, 쥬피엔 쪽이었다.

"…지지 않아."

검을 휘둘러 화살을 막아내던 쥬피엔은 돌연, 검을 멈추어 섰다.

이대로 가다간 농락만 당하다가 패할 것이란 걸 직감한 거다.

쥬피엔은 방어를 도외시하고 그대로 유리안을 향해 쇄도했다.

"소용없어."

퍼억!

유리안이 쏜 화살이 쥬피엔의 어깨를 꿰뚫었다.

쥬피엔의 작은 몸이 벼락을 맞은 듯 흔들렸다.

그래도, 쥬피엔은 이를 악물고는 멈추지 않았다.

유리안은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이만 포기해, 동생. 동생에게 승산은 없어."

퍼억! 퍼억!

작은 몸에 계속해서 화살이 박혔다.

온화한 인상과 다르게 유리안도 마인은 마인인지 손을 멈추지 않았다.

심장, 목, 인중 등 치명적인 급소에 쉴 새 없이 화살이 날아들었다.

쥬피엔은 목숨이 위험한 부위에 날아드는 화살만 피하면서 유리안에게 다가갔다.

피에 완전히 젖어 덜덜 떨리는 몸으로.

숨을 몰아쉬며.

그럼에도 생생히 빛나는 눈빛으로.

이윽고 둘의 거리가 좁혀졌다.

쥬피엔이 주륵 피를 흘리며 읊조렸다.

"난… 지지 않아. 아버지의 명예를 걸고."

그녀의 아버지는 연합 놈들과의 싸움에서 전사한 명예로운 마인이었다.

쥬피엔은 그런 아버지의 이름을 잇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파앗!

쥬피엔의 비전 절기인 분열하는 검이 펼쳐졌다.

이전과 똑같은 열여섯 자루의 검이었다.

하지만 달랐다.

각각의 검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 환상과 자아를 분리해봐.

지난 석 달 동안 쥬피엔은 크리스가 건넨 단서에 매달렸고, 새로운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환술 4성의 경지에 근접하게 된 거다.

환술 4성은 환상이 스스로 자아를 가진 듯 생생하게 움직이는 경지.

열여섯 자루의 분열하는 검이 하나하나 마치 다른 검사가 휘두른 듯 실제 검격처럼 날아들었다.

"쥬피엔 공녀의 경지가 언제 저렇게?"

"저건 일반적인 3성의 수준이 아니지 않은가?"

제76화

"언제 4성의 벽에 도달한 거지?"

마인들이 놀라 웅성거릴 때, 유리안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활시위를 쭈욱 당겼다.

어떤 화살도 쥐지 않고, 빈손으로.

시위를 잡은 손에 흑검이 피어올랐다.

흑검을 이용한 무형시였다.

이어서, 흑검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4성의 경지인 '흑검 변환'이 펼쳐졌다.

흑검이 열여섯 갈래로 나뉘었고, 열여섯 갈래의 무형시가 허공으로 쏘아져 나갔다.

단 한 자루의 분열하는 검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명중시키는 유리안의 흑검들.

산산이 사라지는 자신의 검을 본 쥬피엔의 눈이 커졌다.

"미안, 동생."

유리안이 낮게 속삭였다.

누구도 듣지 못하게.

"지면 안 되는 건, 동생만이 아니라서."

허공으로 흩어지는 뜻 모를 이야기.

유리안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고, 탈진의 저주에 당한 쥬피엔의 몸이 스르르 무너졌다.

결투의 끝이었다.

와아!!

치료사들이 쥬피엔을 데려가자 마인들이 환호하였다.

뛰어난 실력을 보여준 유리안이나, 실력 이상의 투지를 선보인 쥬피엔이나 환호를 듣기 마땅했으니까.

다만, 크리스는 그들의 결투를 속 편히 여길 수가 없었다.

유리안 때문이었다.

'마지막에 보인 수. 4성의 실력이 아니야.'

확실했다.

유리안은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

'최소 5성 이상이 분명해. 더욱 경계해야겠어.'

크리스는 무겁게 생각했다.

유리안과는 반드시 충돌하게 될 테니, 대비해야 했다.

어쨌든, 그건 나중의 일.

"크리스티앙, 마이삭. 올라오도록."

드디어 크리스의 차례였다.

장내가 고요해졌다.

마인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마이삭과 크리스티앙이 반목하는 건 암흑 마가에서 유명한 사실.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팽팽한 긴장감이 연무장에 흘렀다.

하지만 크리스티앙의 승리를 예상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아니, 전혀 없었다.

당연했다.

'너무 무모했어. 아무리 크리스티앙 공자가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4성인 마이삭 공자께 도전하다니.'

크리스티앙이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음은 이제 많은 이가 안다.

하지만 그래도 무리였다.

조금 더 웅크렸어야 했다, 라는 게 마인들의 평이었다.

큰 사달이 일어날 거라고 예상하는 이도 많았다.

'마인 간의 결투는 상대의 목숨을 거두어도 되는 생사투. 마이삭 공자의 잔혹한 손속을 생각하면, 크리스티앙 공자는 이 자리에서 죽거나 불구가 될 가능성이 높아.'

지나친 걱정이 아니었다.

마이삭이 맹수처럼 크리스티앙에게 으르렁거렸다.

"이번만큼은 네게 고맙구나. 감히 주제도 모르고 이딴 도전을 해주다니. 마음 편히 네놈을 병신으로 만들 수 있겠어."

크리스는 피식하였다.

"그래? 누가 병신이 될지는 지켜봐야겠지. 그런데 너, 엄마한테 허락은 받고 올라온 거니? 너 다치면 너희 엄마 어떻게 해? 너희 엄마 우시는 것 아니야?"

"이놈!"

콰앙!!

크리스 앞의 공기가 거세게 폭발하였다.

파괴 흑마법 '압축 폭발'이었다.

일시적으로 공기가 사라지며 생긴 음압에 거세게 광풍이 몰아치며 크리스의 몸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죽여주마!!"

현란하게 이어지는 파괴 흑마법들.

진득한 살의를 담은 어둠의 화염이 크리스티앙을 휩쓸었다.

크리스티앙은 몸을 움직여 피하려 하였으나, 보이지 않는 밧줄이 크리스의 몸을 붙들어 속박했다.

"저, 저?!"

"위험?!"

파괴 흑마법은 연합의 원소 마법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연합 쪽의 원소 마법은 자연의 힘을 그대로 이용한다.

하지만 파괴 흑마법에는 저주의 원리가 같이 깃들게 된다.

방금 마이삭이 펼친 화염 파괴 흑마법, '화형대(火刑臺)'는 강력한 주박 효과가 포함되어 있어 회피할 수가 없었다.

마치 말뚝에 박힌 꼴이 되어 끔찍이 타오르는 불길에 고통받아야 하는 흑마법.

화르륵!

화염이 완전히 크리스티앙의 신형을 뒤덮었고, 크리스티앙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마이삭이 통쾌한 미소를 지었다.

"고작 이따위 실력으로 건방을 떨다니. 이대로 불구로 만들어 차라리 죽음을 갈구하는 꼴로 만들어주마."

파지직.

마이삭의 손에서 이번엔 전격이 피어올랐다.

단순히 뇌전의 성격을 넘어 닿는 물질을 절단해버릴 강력한 절삭력을 지닌 뇌전의 창이 마이삭의 손에 쥐어졌다.

"하압!"

파지지직!

전격의 창이 거칠게 크리스티앙에게 쇄도했다.

서걱!

크리스티앙의 양발이 잘려 나갔다. 전격이 잘린 양 단면을 완전히 지져버리며 짓뭉개버린 것은 덤이다.

의선 명가의 치료사라도 데려오지 않는 한 다시 붙이지 못할 거다.

"아직 멀었다. 이번에는 양팔을 잘게 썰어주마."

마치 개미의 팔, 다리를 뜯는 아이처럼 마이삭이 잔혹하게 눈빛을 빛냈다.

마이삭의 손에 파괴의 바람이 모여들었다.

'칼날 회오리'.

회전하는 바람의 칼날로 상대의 육신을 잘게 도륙하는 파괴 흑마법이었다.

전투 용도보다는 고문용으로 흔히 사용하는 흑마법. 심지어 고통 증폭의 저주조차 깃들어 있는 악취미적인 흑마법이었다.

곧이어 울려 퍼질 크리스티앙 놈의 비명을 생각하며, 마이삭이 입꼬리를 들어 올리고 있을 때였다.

귓가에 속삭임이 들려왔다.

"신났네. 좋아?"

"...!!"

마이삭은 눈을 부릅떴다.

'무슨?'

절대 들려서는 안 될 음성.

하지만 마이삭은 생각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퍼억!!

망치에 맞은 듯 머리가 뒤로 튕겨나갔다.

마기에 휩싸인 크리스의 주먹이 그대로 안면을 직격한 거다.

콧잔등이 단번에 내려앉으며 피가 주륵 흘렀다.

"4성이나 되어서 허접한 환술에 속아 희희낙락하다니. 멍청한 놈."

크리스가 비릿하게 말했다.

"얻어맞을 준비는 됐지? 아프다고 울지는 마라? 엄마가 속상할 테니."

그리고.

지옥이 펼쳐졌다.

* ? ?* ? ?*

연무장에 죽을 듯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퍼억! 퍽!! 퍽!!

일방적인 폭행이 펼쳐지고 있었다.

크리스티앙이 마이삭을 말 그대로 개 패듯 패고 있었다.

마이삭은 비명을 질렀다.

"이놈? 크아아악! 감히?! 으아아악!"

"시끄러워. 뭐 이렇게 엄살이 심해?"

퍼억! 퍼억!

마이삭의 얼굴은 이미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주저앉은 콧잔등은 물론 광대뼈도 내려앉고, 이빨도 성한 게 얼마 없었다.

"어, 어떻게?"

"말도 안 돼?"

마인들이 웅성거렸다.

실력은 마이삭이 앞선다.

그건 분명했다.

마이삭이 펼치는 흑마법은 4성의 경지에 부족함이 없으니까. 크리스티앙은 아무리 높게 봐도 3성의 경지였다.

하지만 밀리는 건 마이삭이었다.

그것도 상대도 되지 않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어느 정도 경륜이 있는 중견 마인들은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했다.

'크리스티앙 공자님이 마이삭 공자님의 약점을 완벽히 파악해 파고들었어.'

'그래서 마이삭 공자님께서 전혀 맥을 못 추는 거야.'

마이삭의 약점.

간단했다.

능력이 파괴 흑마법에 치우쳤다는 거다.

모친의 영향을 받아 다른 분야의 공부는 소홀히 한 탓.

심지어, 암흑 마가의 정체성인 암흑 마기와 마검술까지도 열심히 익히지 않았다.

그래서 마이삭은 암흑 마가의 공자이면서도 도리어 파괴 마가의 흑마법사와 다름없는 특성을 지니게 된 거다.

'흑마법사를 상대하는 방법이야 간단하지. 근거리에서 무자비하게 두드려 패면 돼. 흑마법을 펼칠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크리스는 열심히 주먹을 휘두르며 생각했다.

피가 튀며 비명이 울렸다.

'이놈이 제대로 된 흑마법사인 것도 아니고.'

마이삭이 완벽한 흑마법사라면 도리어 이렇게까지 일방적으로는 당하지 않았을 거다.

흑마법사들은 적이 근거리에 접근하는 걸 대응하기 위한 대비책을 철저히 마련해 두니까.

하지만 마이삭은 전혀 그런 대비책이 없었다.

무엇보다, 마이삭은 제대로 된 실전 경험이 부족했다.

'엄마 치마폭에 싸여 있으니, 결투도 자신의 눈치를 보는 놈들하고만 형식적으로 했겠지. 위험을 겪을 일도 없었을 거고.'

그 결과는 이러했다.

퍼억!

일방적인 폭행.

"커, 커억. 이, 이놈."

퍼억!

마이삭이 뭔가를 하려고 할 때마다 크리스티앙의 주먹이 작렬했다.

일방적인 결투.

마인 간의 결투는 한쪽이 완벽히 전투 불능이 되거나, 패배를 인정해야만 끝나는데, 결투가 이어지고 있는 거지 이 정도면 승부가 난 거나 다름없었다.

'…그나저나 이놈이 이렇게 형편없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크리스티앙은 고민에 빠졌다.

원래 그는 이번 경연을 통해 자신의 뛰어남을 모두에게 보여줄 계획이었다.

그런데 마이삭이 너무 형편없어 자신의 뛰어남이 부각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결국, 크리스는 주먹질을 멈추었다.

"...??"

무자비한 폭행이 멈추자 마이삭은 눈을 끔뻑거렸다.

크리스티앙은 어깨를 으쓱했다.

"네 엄마가 보고 있는데, 너무 두들겨 패기만 한 것 같아 미안해서 기회를 주려고."

"…뭐?"

"보여? 네 엄마 지금 울고 있는 것. 엄마가 저렇게 슬퍼하고 있는데, 너도 병신같이 당하고만 있지 말고 조금 분발해보지?"

"이놈…!!"

마이삭이 이를 바드득 갈았다.

"반드시… 반드시… 죽여주마!"

화르르륵.

거친 마기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암흑 마기가 아니다.

파괴 마가의 적색 마기.

마이삭은 품에 손을 집어넣더니, 쌍두 불사조 모양의 마도구를 꺼냈다.

파괴 마가의 직계 일족들이 사용하는 적색 마기 증폭구였다!

"저, 저…?!"

지켜보던 이들이 당황한 음성을 토했다.

결투를 떠나, 이 자리는 경연장이다.

암흑 마가의 공자들이 자신의 성취를 뽐내는 자리.

그런데 파괴 마가의 마도구를 사용하다니?

절대 용납될 행위가 아니었지만, 이미 마이삭은 앞뒤를 가릴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죽어라!!"

화아아아악!!!!

짙은 어둠이 강림했다.

파삭. 파삭.

어둠에 닿은 연무장의 돌바닥이 거센 압력에 짓눌린 것처럼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5성 파괴 흑마법, '파괴의 진혼곡'이었다.

"무슨?!"

그 광경을 본 연무장의 마인들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떻게 마이삭 공자가 5성 파괴 흑마법을?"

"본인의 힘이 아니야! 마도구의 힘을 빌렸어!"

마이삭이 꺼낸 마도구는 단순히 적색 마기를 증폭하는 걸 넘어, 5성 파괴 흑마법을 내재하고 있었던 거다.

"저건 경연의 규칙에 맞지 않아. 막아야 해!"

마인들이 웅성거렸다.

노가주의 옆에 있던 메리안이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이삭이 선을 넘었군요. 제가 나서겠습니다."

그런데.

"아니, 있어 보아라."

"가주님? 하지만?"

메리안이 눈을 크게 떴다.

5성 흑마법은 '흑강기'와 비등한 힘을 지닌다.

물론, 이번 경우에는 마도구로 억지로 펼친 거니 5성 흑마법사가 제대로 펼치는 위력에는 비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저 마법을 피해 없이 막으려면 최소 흑강기에 준하는 힘이 필요할 거다.

"저놈의 눈빛을 보아라."

"!!"

자신에게 다가오는 파멸의 어둠을 보는 크리스티앙은 놀랍게도 강렬히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두렵지 않다는 듯.

아니, 맞서 이기겠다는 듯.

"최악의 경우, 내가 나서겠다. 그러니 있어 보아라. 무엇보다, 궁금하지 않느냐?"

노가주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저 당돌한 놈이 이번에는 어떤 황당한 모습을 보일지?"

제77화

메리안은 우뚝 멈추었다.

노르디언의 말대로였다.

그녀도 궁금했다.

크리스티앙이 이번에는 어떤 기적을 일으킬지.

화아아악!!

닿는 모든 걸 분쇄하는 거센 어둠이 크리스티앙을 덮치려는 순간.

크리스가 검을 꺼내 들었다.

검날을 감싸는 흑검.

완벽한 형태를 이룬, 3성 상의 경지에 해당하는 흑검이었지만, 다가오는 어둠에 맞서기에는 한없이 미약하고 초라한 힘.

그때, 크리스의 흑검이 변하였다.

형태는 그대로다.

그의 의지가 흑검에 담겼다.

다가오는 어둠을 가르려는 의지.

의지는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는다.

오로지 강기로만 구현 가능한 그 기적의 힘이 크리스의 흑검에 담겼다.

그리고.

파아아앗!!!

크리스의 흑검이 '파괴의 진혼곡'을 위아래로 갈랐다.

모든 걸 파괴하는 파멸의 어둠이 양 갈래로 나뉘어 산산이 흩어졌다.

"!!"

연무장의 모두가 경악하여 벌떡 일어났다.

절대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난 거다.

'마, 말도 안 돼!'

'5성 파괴 흑마법을 막을 수 있는 건 흑강기뿐인데? 어떻게 흑검으로?'

일부.

5성을 뛰어넘어 6성 이상의 경지에 오른 이들.

'마스터'라 불리는 이들만이 크리스가 해낸 일을 알아봤다.

'흑검에 의지를 싣다니?'

'…말도 안 되는?'

마도학의 상식상 불가능한.

성(成)의 체계를 송두리째 뒤집는 미친 일을 해낸 거다.

모두의 경악 어린 시선을 받으며 크리스티앙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기 소모량이 막대해서 힘들었다.

"너… 너…."

마이삭이 덜덜 떨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게 보였다.

크리스티앙은 피식 비웃음을 지어 보여주었다.

"멍청한 놈."

퍼어억!

마지막 일격과 함께 마이삭은 기절해 쓰러졌다.

연무장이 숨 막힐 듯한 고요에 가라앉았다.

그 어떤 이도 한 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그만큼 크리스티앙이 보여준 모습에 충격을 받은 거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단 하나도 경악스럽지 않은 게 없었다.

크리스티앙을 바라보는 모두의 머릿속에 하나의 단어가 떠올랐다.

'천재.'

'…아니, 고작 그런 수준이 아니야.'

마인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껏 천재라 불리던 이들은 많았다.

명가의 후손들은 모두 빼어난 핏줄을 타고나니,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가 얼마나 많았겠는가?

하지만 크리스티앙은 고작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역대 어떤 천재도 크리스티앙이 보여준 모습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할 거다.

그야말로 악마적인 재능.

앞으로 천재란 단어는 오로지 크리스티앙을 위해서만 사용해야만 할 것 같았다.

"경연은 여기서 끝내겠다."

노가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평을 내릴 때였다.

노르디언은 유리안과 막사에서 치료받는 쥬피엔 쪽을 바라보았다.

"둘은 특별히 나무랄 게 없었다. 앞으로 더욱 정진하여라."

"감사합니다, 가주님."

유리안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다음에는 마이삭 차례.

노가주는 하얀 얼굴을 하고 있는 프레시아를 바라보았다.

"후작 부인은 마이삭의 교육에 대해 신경을 쓰는 게 좋겠구려."

"!!"

"우리 암흑 마가는 어떤 힘을 쓰든 제약을 두지 않지만, 저래서야 차라리 파괴 마가로 가는 게 저 아이의 미래를 위해 좋겠소이다."

프레시아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최악의 혹평이었다.

"차, 차후 명심하겠습니다."

프레시아가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고개를 숙였지만, 노가주는 더는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마이삭과 그녀에게 어떤 흥미도 없다는 것처럼.

대신, 노르디언은 크리스티앙을 보았다.

"그리고… 크리스티앙, 너는."

평은 길지 않았다.

"훌륭했다."

"!!"

"힘들게 직접 발걸음 한 보람이 있구나."

연무장의 모두가 다시금 눈을 찢어질 듯 크게 떴다.

지금껏 누구도.

당대의 공자들뿐 아니라, 랑함 후작을 비롯한 윗세대들도 듣지 못한 극찬이었다.

크리스티앙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도 기대해 주십시오. 가주님께서 더욱 기뻐하실 만한 모습을 보여드릴 테니."

노르디언은 클클 웃고는 등을 돌려 사라졌고, 총경연이 막을 내렸다.

그리고.

거센 후폭풍이 암흑 마가를 발칵 뒤집었다.

크리스티앙이 암흑 마가 후계 구도의 새로운 핵심으로 떠오르게 되는 순간이었다.

* ? ?* ? ?*

그날 이후, 많은 게 변했다.

일단, 인식.

크리스티앙은 더는 미운 오리 같은 못난이 공자가 아니게 되었다.

당당한 후계 후보가 되었다.

그를 방계 출신이라고 무시하는 이는 깨끗이 사라졌다.

-미친 재능.

사람들은 크리스가 보여준 재능을 보며, 그가 어쩌면 후계 승계에서 기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물론, 아직 가능성에 불과한 이야기일 뿐이다.

이번에 못난 모습을 보여준 3공자 마이삭은 차치하고서라도, 2공자 에쉬드와 1공녀 유리안은 만만한 이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희박한 확률이라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만약, 정말로 크리스티앙이 '대공자'가 되는 날이 오기라도 하면, 그를 무시했던 이들은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특히 노가주님이 크리스티앙 공자를 좋게 여기신 게 분명해.'

'일단, 선이라도 대놓는 게 좋겠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여러 마인들이 크리스티앙을 찾아왔다.

"공자님, 뒤늦게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여기 약소하지만, 공자 취임을 기념하는 선물을 같이 가져왔습니다."

"저희 아렌 백작가에서도 공자님께 드리는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저희 라안 남작가에서도…."

크리스는 속으로 실소하였다.

이렇게 하루아침에 대우가 달라지다니.

'역시, 마인들이나 연합 쪽이나 사람 살아가는 꼴은 비슷하구먼.'

웃음이 절로 나왔지만, 군말 없이 선물을 받았다.

그러니까, 상징적인 행동인 것이다.

그들의 마음을 받아들이겠다는.

"성의에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보여주신 마음 꼭 기억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손님들이 돌아가자 마리가 꼬리를 살랑이며 다가왔다.

[오호호… 도련님… 역시 왓따이시군요… 벌써 이리 많은 이들을 거느리게 되다니…]

"거느려? 천만에."

크리스는 딱 잘라 고개를 저었다.

"내가 흔들리면, 단번에 등을 돌릴 놈들이야."

착각하면 안 된다.

그의 위세가 높아지니 눈치를 살피는 것일 뿐, 그의 사람이 된 건 절대로 아니었다.

'저들 중 대다수는 다른 공자들에게도 비슷하게 선을 대고 있겠지. 이제 슬슬 내 사람을 만들어야 해.'

오로지 그에게만 충성을 바치는, 그의 세력이 필요했다.

누구를 휘하에 들일지는 어느 정도 생각한 바가 있긴 했다.

'이제 슬슬 찾아올 때가 되었는데.'

그때, 마침 그의 거처를 누군가 두드렸다.

끼익, 문이 열렸고.

크리스가 기다리던 이가 나타났다.

"오랜만이군요, 도련님. 아니, 이제는 공자라고 불러야 하겠군요."

고혹적인 외모.

하지만 전신에 흐르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기세.

"일전 이야기한 대로 공자님께 충성을 바치러 찾아왔습니다."

카자르 백작가에서 만났던, 검은 숲 기사단의 부단장이자 4성 상의 마인 멜린이 그에게 무릎을 꿇었다.

"앞으로 저와 실컷 싸워 주신다고 하신 약속은 지켜주실 것이지요?"

무언가 위험한 시선을 보내면서.

* ? ?* ? ?*

멜린이 크리스티앙에게 충성을 바쳤다!

암흑 마가가 다시 한차례 웅성거렸다.

"멜린이면, 카자르 백작가에 파견 갔던 그년이잖아?"

"그 미친년이?"

멜린은 나름대로 유명한 마인이었다.

일단, 4성 상의 경지.

조만간 5성에 올라 전투 부대의 대장급이 될 게 확실한 실력자였다.

하지만 멜린이 가장 유명한 건 성격이었다.

마인 중에서도 특히나 싸움을 좋아하는 투견의 성질.

"카자르 백작가에 파견 갔던 것도 동료를 중상 입혀 징계로 간 것 아니었어?"

"그런데 그 미친년이 크리스티앙 공자님을 섬기기로 했다고?"

"원래 멜린은 공자 따위 아무도 섬기지 않겠다고 떠들어 댔잖아? 크리스티앙 공자님은 무슨 수를 쓰신 거지?"

사람들의 놀람이 가시기 전에, 또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크리스티앙을 섬기기로 한 이가 멜린뿐이 아니었던 거다.

방계 삼가(三家)의 하나, 티라민 백작가가 크리스티앙을 지지하기로 선포하였다!

고작 방계 가문이 지지해봤자? 라고 할 일이 아니었다.

방계 삼가는 암흑 마가의 삼지창이라 불리며 암흑 마가를 밑에서 단단히 지탱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카자르 백작가야 원래 크리스티앙의 편이었을 거고, 티라민 백작가마저 손을 들면, 방계 삼가 중 두 개의 가문이 크리스티앙을 지지하게 되는 것이다.

절대 작은 일이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찾아뵈었습니다, 공자."

"…네."

크리스티앙은 살짝 놀란 눈을 하고 마주 선 상대를 바라보았다.

곰처럼 커다란 거구가 서 있었다.

티라민 백작가의 장남이자, 후계 케이슨이었다.

"우리 티라민 백작가는 일전 약속했던 대로 공자를 지지하기로 하였습니다."

"…솔직히 뜻밖이군요. 약속하긴 했지만, 이리 전격적으로 결정을 내려 주시다니."

과거, 흑단 사냥 때 크리스와 티라민 백작은 약속을 했다.

크리스가 공자로서 자격을 증명해내면, 크리스의 깃발 아래 서겠다고.

하지만 어떤 구속력도 없는 약속일 뿐이었는데?

"아버지, 티라민 백작님의 뜻입니다."

케이슨이 말했다.

"그간, 아버지께서는 공자의 행적을 면밀하게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충분히 믿고 베팅할 만하다고."

"그렇군요. 말씀 알겠습니다. 티라민 백작가에서 내리신 결정,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강한 의지가 담긴 대답에 케이슨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단, 우리 측도 하나 조건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사람 한 명을 책임져 주십시오."

"…네?"

케이슨이 밖으로 외쳤다.

"너도 들어와라!"

문이 열리더니 쭈뼛쭈뼛, 한 소년이 들어왔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호오?"

크리스가 의외란 얼굴을 하였다.

"알로스 동생?"

흑단 사냥 때부터 성흑식 때까지.

여러모로 인연이 얽혔던 티라민 백작가의 막내, 알로스였다.

"누, 누가 동생이라는 거냐?!"

알로스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케이슨이 퍼억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감히! 앞으로 네가 모실 공자님이시다!"

"하, 하지만…."

"허어!"

쌓인 게 많은지 알로스는 눈물을 글썽했다.

"책임져 달라는 게 알로스, 이놈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이놈은 성흑식 때 성흑을 전혀 얻지 못해 앞날이 캄캄한 상황입니다."

그때, 크리스와 함께 성흑식에 참석했던 이들은 모두 단 한 톨의 성흑도 얻지 못했다.

"아, 그렇다고 공자님을 원망하는 건 아니고요. 그저, 이놈을 맡아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크리스는 티라민 백작가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나와 함께하며, 알로스가 공을 세우길 바라는군.'

성흑을 얻지 못한 암흑 마가의 핏줄은 절대로 출세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라도 기회를 얻길 바라는 거다.

'문제는 별달리 도움이 될 녀석이 아니란 건데.'

크리스는 잠시 비뚜름하게 알로스를 바라보았다.

'재능은 나름대로 있는 놈이긴 하지만.'

알로스는 멸망의 시대 때, 나름대로 이름을 떨치긴 했다.

5성 마인으로까지 성장했던 (기억이 있다.

'열심히 굴리면 그럭저럭 쓸 만하게 만들 수 있을지도.'

"알겠습니다. 단, 저도 조건이 있습니다. 알로스가 절 스승으로 모시도록 해주십시오."

제78화

"스승이요?"

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책임질 것 제대로 져야겠지요. 알로스의 부족한 부분을 제가 지도해 마인 구실 할 수 있도록 만들겠습니다."

"뭐, 이 미친놈이…?! 너 마련술을 배운 지 반년도 안 되지 않았…?! 크악?!"

알로스가 버럭 외치다가 케이슨이 휘두르는 주먹에 뒤통수를 맞고 끙끙거렸다.

"마인 구실하게 만든다는 말은 진실이겠지요?"

"물론입니다. 이래 뵈어도 제가 천재라 사람 굴리는 것… 아니, 가르치는 것도 잘합니다."

빈말은 아니었다.

크리스는 뭐든 잘해 교육에도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과거, 그의 교육(?)을 받은 이들은 하나같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속도로 성장하고는 했다.

'다들 극악으로 힘들어해서 문제였지만.'

케이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공자를 믿겠습니다. 알로스, 앞으로 크리스티앙 공자님을 스승으로 모시거라."

"하, 하지만…!!"

"어서!"

알로스는 눈물을 그렁거리며 크리스티앙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 앞으로 스승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래,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동생. 그냥 나는 동생의 성취를 도와주고 싶은 것일 뿐이니까."

"도, 동생이 아니라…! 내가 너… 아니, 공자님보다 나이가 많다고…!"

퍼억!

다시 형에게 얻어맞은 알로스.

"오냐오냐 자라서 이놈이 버릇이 없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괜찮습니다. 버릇은 제가 확실히 고쳐놓을 테니, 안심하십시오."

"그러면 믿고 가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이윽고 케이슨이 사라진 후 알로스가 독기가 반쯤 섞인 눈빛으로 크리스를 보았다.

고분고분 따를 것 같지는 않은 눈빛.

"이해했지? 앞으로 내 말 잘 따라야 하는 것."

"…도대체 무슨 짓을 시키려고?"

"무슨 짓? 별것 없는데?"

크리스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청소 먼저 할래?"

"…뭐?"

"제자가 스승의 집을 청소하는 건 당연한 거잖아."

크리스는 여전히 창고 같은 자신의 거처를 가리켰다.

유령들이 청소해주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심령 현상으로 청소하는 것이다 보니 디테일이 떨어졌다.

"다 쓸고 닦아."

"...."

"단, 마기를 사용해서."

그렇게 크리스에게 드디어 제자 겸 인간 시종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 ? ?* ? ?*

"미친놈아, 절대 안 해!!"

알로스는 그렇게 반항했지만, 크리스와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눈 후 크리스의 말을 따르게 되었다.

'너무 싫어하지 말라고. 다 나름대로 생각하는 게 있어서 시키는 거니까.'

티라민 백작가는 마수를 다루는 마련술의 가문.

솔직히 알로스의 마련술은 또래치고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하지만 마기를 다루는 기본기가 너무 떨어지는 게 알로스의 문제였다.

청소는 굉장히 복잡한 행동.

마기를 이용해 그런 복잡한 행동을 하다 보면, 기본기도 탄탄하게 다져질 거다.

'이래 뵈어도 과거 나름대로 참스승 소리도 많이 들었다고.'

크리스는 본능적으로 모든 현상의 문제를 꿰뚫어볼 수 있었다.

그건 상대방의 성취를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부분이 문제인지, 왜 벽을 넘지 못하고 있는지, 어떻게 하는 것이 성취를 얻는 데 효과적인지를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가르침을 받은 이들은 다들 빠른 성과를 얻었다.

'용사 일행도 나를 만나고 나서 다들 성취가 일취월장했지.'

물론, 용사 일행이 이룬 경지는 크리스와 비교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크리스의 미친 직관은 성취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았다.

자신이 닿아보지 못했던 경지라도 어떤 게 문제인지 본능적으로 캐치했다.

크리스는 지나가듯 툭툭 그들에게 조언을 건넸고, 시의적절하게 던져진 조언을 들을 때마다 그들은 벼락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혼자였다면, 까마득한 좌절과 도전이 필요했을 것을, 크리스의 조언 덕에 마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것처럼 벽을 넘을 수 있었던 거다.

크리스의 도움을 받은 건, 알로스뿐이 아니었다.

- 존경하는 킹 엠페러 마제스티 형님께. 말씀해주신 대로 저주의 악의를 심화하는데….

테른이 보낸 편지였다.

둘은 서로 종종 편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애틋한 형제애?

개뿔.

- 재능이 모자라면, 노력이라도 똑똑하게 해야지. 내가 말한 대로 노력해봐라.

크리스는 테른이 얼른 성장해 자신의 호구… 아니, 조력자가 되길 바랐다.

그래서 종종 구박 반, 조언 반이 섞인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

크리스의 그런 애정(?) 덕에 테른은 쑥쑥 성장하고 있었다.

'벌써 잿빛 저주술이 3성 직전에 도달했다고? 예상보다 빠른데. 하긴, 이전 삶 때도 테른은 저주술이 꽤 높은 경지에 이르렀었지. 이놈 혹시 저주 분야에 특화한 '적성자(適性者)'인가?'

가끔 그런 존재들이 있다.

다른 부분은 모두 영 신통치 않은데, 특정 분야에 한정해 미친 성취를 보이는 이들.

재능이 뛰어난 것과는 조금 달랐다.

'축복'의 영역에 가까웠다.

크리스는 테른의 질문에 답을 적은 후 한마디를 덧붙였다.

- 형을 부르는 호칭을 편지에 적을 때는 조금 더 존경의 마음을 담아 적어라.

참고로, 킹 어쩌구 마제스티 호칭은 크리스가 이렇게 부르지 않으면 가르침을 내리지 않겠다고 하여 울며 겨자 먹기로 쓰는 거였다.

그렇게 시간이 정신없이 지났다.

바쁘지만, 팽팽한 긴장 없이 여유가 있는 시간.

살짝 나른해지려고 할 때, 마치 유리가 산산이 깨지는 듯한 균열이 일어났다.

"네가 크리스티앙이니?"

프레시아 후작 부인이 용무가 있다고 하여 저택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쨍하게 내리쬐는 햇볕을 즐기며 기분 좋게 걸음을 걷고 있을 때.

생각지도 않은 음성이 들렸다.

'…이 목소리는?'

크리스의 등줄기에 소름이 쫘악 올라왔다.

처음 듣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니,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음색.

남자치고는 높은 고음의.

장난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광기가 뒤섞인 독특한 음성.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그놈'의 목소리가 여기서 갑자기 들릴 리가.'

마치 트라우마와도 같은 기억들이 화악 떠오르며 두근, 심장이 뛰었다.

크리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느낌이 착각이길 바라며.

하지만.

"반가워. 난 네 첫 번째 형 셰라드라고 해."

나무 위에 앉아 있는 유리처럼 아름다운 미청년의 얼굴을 본 순간, 크리스의 눈앞이 컴컴하게 변했다.

인류 최악의 미치광이.

용사 일행의 천적.

멸망의 시대의 끔찍한 악몽이자, 열 번째 마왕이 되었던 '혈영마단주'가 크리스를 향해 환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 ?*

혈영마단(血影魔團).

미치광이들이 모인 집단이다.

원래는 무언가 세상을 바꾸겠다는 포부가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저 사이코들의 살육 집단이 되었다.

마도 제국에서도 추살령이 내려진 범죄 집단.

다행히 아직까지는 그저 그런 미치광이 범죄 집단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을 뿐이었지만, 멸망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혈영마단은 양 세력의 구도를 흔들 정도로 성장한다.

단주 때문이었다.

미치광이 중에서도 압도적인 미치광이.

오로지 살인만을 즐기는 살육광.

그게 혈영마단주였다.

놈은 마도 제국과 연합을 구분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테러 및 살인을 자행했다.

혼란의 시대에 맞추어 수없는 인간 말종이 놈 아래 모여들었고, 혈영마단이 지나간 곳은 인세의 지옥으로 변하였다.

한 가지 다행인 게 있다면, 놈이 아무나 마구잡이로 학살을 저지르지는 않았다는 거다.

강한 이들을 주로 노렸다.

놈은 살인에서 쾌락을 느끼는 미치광이.

그중 강한 이들에게 더더욱 맹렬한 살인 욕구를 느꼈다. 강한 이들을 죽일 때 더욱 강렬한 쾌락을 느낀다고 했다.

특히 놈이 유별나게 집착했던 상대는 용사 에반.

놈 때문에 용사 일행은 셀 수도 없는 죽음의 위기를 겪어야 했다.

크리스와 각별한 사이였던 어둠의 수다쟁이를 죽게 한 것도 혈영마단주였다.

'놈이 왜 여기에?'

혈영마단주의 정체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았었다.

늘 혈영마단을 상징하는 핏빛 가면을 쓰고 다녔기 때문이다.

최후의 순간, 용사의 검에 죽음을 맞을 때 가면이 쪼개지며 얼핏 얼굴을 본 게 전부였다.

지금껏 저지른 살육을 상상할 수도 없게 아름답던 얼굴.

그때 봤던 얼굴과 똑같은 얼굴이 싱긋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놈이 암흑 마가 출신이었다니.'

쿵, 쿵.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머리에 열기가 모여들어, 하얗게 질렸다.

분노인지, 살의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아득함이 뇌리를 사로잡았다.

"흐음? 왜 그렇게 얼었어? 우리 오늘 처음 보는 사이 아닌가?"

혈영마단주… 아니, 1공자 셰라드가 풀쩍 나무에서 뛰어내리더니 크리스의 코앞에서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면, 내게 뭐 할 말이라도 있니?"

"!!"

순간, 크리스의 이성이 뚝 하고 끊겼다.

'죽여야 해. 반드시.'

놈 때문에 죽어가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지옥으로 변한 처참한 광경 속에서 비명을 지르던 사람들.

그리고.

어둠의 수다쟁이가 죽음을 맞이하며 지어 보이던 마지막 미소.

앞뒤 더 따질 수가 없었다.

당장 놈의 목을 쳐야겠다는 살의가 머릿속을 지배했다.

콰득, 이를 악물며 마기를 끌어 올리려는 순간.

"흐음, 너."

셰라드와 크리스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가늘게 뜬 핏빛 눈동자가 크리스를 가만히 주시하였고.

"!!"

크리스는 마치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충격을 받았다.

손이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얼어붙은 것처럼.

그 이유는 간단했다.

'…강해. 지금의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싸움이 벌어지면, 순식간에 결판이 날 게 분명했다.

크리스는 죽을 거다.

둘 사이에는 그만큼 큰 격차가 있었다.

"새로운 동생이 생겼다고 해서 찾아와 봤는데, 너무 질색하는 것 같네. 그렇다고 이렇게 다짜고짜 적의를 드러내면."

셰라드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널 죽여야 하잖니, 동생아. 가문 내에서는 가급적 조용히 있고 싶은데 말이야."

"...."

크리스는 꽉 이를 악물었다.

숨이 거칠어졌다.

자신이 죽더라도 가리지 않고, 목을 치고 싶은 살의가 아득히 차올랐다.

'안 돼. 참아야 해. 지금은 때가 아니야.'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

일단, 혈영마단주의 정체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소득이었다.

조금 더 강해지고, 놈이 암흑 마가를 떠나기 전에 죽이면 된다.

"흐음. 그나저나."

셰라드가 나른하게 말했다.

"워낙 소문이 떠들썩하길래 얼마나 대단할지 두근거렸는데, 생각보다 별건 없는 것 같네. '기대' 이하야."

"!!"

기대.

살인 욕구를 뜻한다.

과거, 놈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라 크리스의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 크리스라고 했나? 아쉽네. 네가 제대로 검술이나 마법을 익혔다면, 내가 가장 탐내는 상대는 에반이 아니라, 네가 되었을 거야. 네 팔다리를 조금씩 토막 내가며 천천히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즐겼을 텐데.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

크리스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억지로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제79화

상종도 하고 싶지 않은 놈이었지만, 반드시 해줘야 할 말이 있었다.

"내가 기대 이하라고? 그건 네 눈이 삐어서 그런 거고. 미치광이 놈아."

"...!!"

"너 같은 미치광이 말종 놈은 죽어 사라지는 게 세상을 위한 길이니, 언젠가 반드시 네놈의 목을 쳐주마."

갑작스러운 폭언에 셰라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흐음."

셰라드의 입가에 머물러 있던 미소가 사라졌고, 싸늘한 기운이 내려앉았다.

쿵, 쿵.

과거의 일들이 떠오르며 심장이 뛰었지만, 크리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도리어 더욱 강렬한 적의를 담아 놈을 노려보았다. 마치, 정말로 언젠가 놈의 목을 치고 말겠다는 의지를 담아서.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고,

"하하하! 그래, 취소. 너, 나름대로 흥미롭구나."

셰라드가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아직 내 관심을 뺏기에는 모자라. 조금 더 분발해봐."

파앗!

한 방울의 피와 함께 셰라드의 몸이 사라졌다.

혈종술이었다.

셰라드, 혈영마단주는 암흑 마가 출신임에도 암흑 마기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혈종술을 익혔다.

피를 갈망하는 셰라드의 성정에 딱 어울리는 마공.

저 멀리 나무 위에 다시 나타난 셰라드가 진득하게 미소를 지었다.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

이윽고 셰라드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 크리스는 바득 이를 갈았다.

그리고.

콰앙!

거칠게 나무를 후려쳤다.

'제길. 빌어먹을!'

눈앞에서 과거 동료의 원수를 보고도 손끝 하나 까닥하지 못했다.

비참한 무력감이 치밀어 올랐다.

'더 강해져야 해.'

하지만 더 빠른 속도로 강해지는 건 무리였다.

이미 크리스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속도로 강해지고 있었으니까.

회귀 후 1년도 안 되었는데, 4성에 바싹 다가가고 있는 상태.

역사상 그보다 빠른 속도로 강해진 이는 누구도 없을 거다.

'무리하면 이것보다 더 빠르게 성의 경지를 올리는 것도 가능하긴 해. 하지만 그러면 나중에 문제가 생길 공산이 높아.'

성의 경지가 올라갈수록 밑의 기초가 중요해진다.

훗날을 생각하면 필요한 기초를 다지는 건 필수여서, 크리스도 경지를 올리는 데 최소한의 시간은 필요했다.

'그래도 1년. 무슨 수를 써서라도 1년 안에 놈을 죽여야 해.'

아직, 놈에게서 악마의 잔향이 느껴지지 않았다.

악마와 계약하기 전이란 뜻.

만약, 놈이 악마와 계약하여 '식귀(食鬼)' 축복을 내려받으면, 그때는 정말 끔찍한 재앙이 된다.

그 전에 목을 쳐야만 했다.

방법을 내야 했다.

'1년 안에 놈을 죽이려면, 내 힘을 증폭시켜줄 도구가 필요해.'

아티팩트나 유물을 뜻한다.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강자들은 모두 자신만의 도구를 사용해 힘을 증폭시킨다.

'부러진 성검 그루나데가 있긴 하지만, 너무 제약이 많아. 손상되어 성좌의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도구를 얻어야 해.'

문제는 이런 아티팩트나 유물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란 거다.

얼마 전 성좌의 휘장을 얻긴 했지만, 불행히도 전투용 유물이 아니었다.

경매장을 운영하는 루이나의 상단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진짜배기'는 경매 따위에 오르지 않는다.

'암흑 마가가 보관하고 있는 아티팩트, 유물도 있겠지만, 내게 내어주지는 않을 거야. 그러면 방법은 하나야.'

크리스는 눈빛을 가라앉혔다.

'유적을 탐사해야 해. 어느 유적에 필요한 아티팩트, 유물이 있는지는 알고 있으니까. 유적에 갈 방법을 고민해보자.'

그때, 시종이 다가왔다.

"공자님, 후작 부인께서 기다리십니다."

"아, 금방 가겠네."

원래 그는 후작 부인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숨을 들이켜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후작 부인의 집무실로 향했다.

"왔느냐? 늦었구나."

프레시아가 차분한 어조로 그를 맞았다.

일전 경연 때문에 충격이 컸던 건지, 부쩍 수척해진 얼굴이었다.

'좋은 의도로 부른 것 같지는 않군.'

크리스는 속으로 조소했다.

프레시아의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이전보다도 훨씬 강렬한 적의가 느껴졌다.

마치 살의와 같은 적의였다. 당장에라도 크리스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은 마음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십니까?"

"공자 회동 때문에 불렀다. 무슨 모임인지, 알고 있느냐?"

알고 있었다.

'새롭게 공자, 공녀가 된 이들끼리 친목 모임을 갖는 자리라고 했나?'

대상은 남방 마도국의 세 명문가.

3년에 한 번씩 있으며, 그 3년 안에 새롭게 공자, 공녀가 된 이들이 같은 기수로 묶여 친목을 다지게 된다고 한다.

'말이 친목이지, 치고받는 쟁투의 자리야.'

모임 장소가 위험천만한 마경으로 선정되는 건 기본.

중간 순서로 대놓고 '경합'이 있었다.

모임에 참석한 공자, 공녀들은 자신 가문의 자존심을 놓고 경쟁을 벌이게 된다.

'나름대로 중요한 자리이긴 하군. 내 이름을 암흑 마가 밖으로 떨칠 기회야.'

명성은 그에게 힘이 된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최대한 높은 명성을 쌓아야 했다.

이번 모임도 좋은 기회가 되리라.

'그런데 고작 이 내용을 알려주려고 부른 건가?'

부집사를 통해 전해도 충분한 이야기다.

고개를 갸웃하는데, 프레시아가 본색을 드러냈다.

"회동 장소는 각 가문이 번갈아 정한다. 이번에는 우리 암흑 마가가 정할 차례이지. 베스엔 대공가 영지의 '지하 정원 7층'으로 정했으니 그렇게 알아라."

"!!"

크리스의 안색이 굳었다.

유명한 유적이었다.

파괴 마가 베스엔 대공가의 영역에 있는 유적으로, 언제, 누가 건축했는지 모르는 신비한 곳.

총 몇 층까지 있는지도 모르며, 밑으로 내려갈수록 위험천만한 마물과 던전이 나타난다.

'원래 공자 회동은 위험한 곳에서 개최되는 게 보통이니 지하 정원도 크게 이상한 장소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지 않아도, 지하 정원은 공자 회담의 단골 장소였다.

'층'만 잘 선정하면 공자들의 수준에 맞는 적절한 위험도를 고를 수 있으니까.

하지만.

'…하필 7층이라니, 이상하군.'

크리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위험해서?

아니다, 도리어 안전해서다.

'7층이면 내게 전혀 위협이 되는 수준이 아니야.'

지하 정원은 현재 26층까지 개척되어 있다.

신기한 건, 딱 성의 경지에 맞추어 층이 나누어져 있다는 거다.

1~3층까지는 1성의 마인들이 감당할 만한 수준으로.

4~6층까지는 2성의 마인들의 수준으로.

7~9층까지는 3성의 마인들의 수준으로.

이런 식으로 3개의 층마다 각각 하나의 성의 수준에 맞추어 난이도가 준비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수련의 정원이라고 불리기도 하지. 남방 마도국의 마인들이 수련 삼아 들르는 곳이기도 하고.'

계산상 7층은 3성 하(下)급의 마인들 수준의 마수가 나타나게 되어 있다.

만약, 크리스를 해칠 꿍꿍이였다면, 전혀 맞지 않은 배치.

'뭔가 속셈이 있을 텐데.'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물었다.

"혹시 저 말고 누가 참석하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 암흑 마가에서는 너와 쥬피엔 공녀가, 극독 마가에서는 마리사 공녀가, 파괴 마가에서는 카슈미르 공자가 참석할 거다."

"!!"

크리스는 흠칫하였다.

과거 이 몸의 약혼녀였던 마리사 때문이 아니다.

파괴 마가 측 참석자 이름 때문이었다.

'저항자 카슈미르.'

멸망의 시대 때 유명한 이름이었다.

훗날 7성 마인이 되며, 마도 제국 내에서 사혈의 마왕에 맞서는 레지스탕스 세력의 간부였다.

'마인들이라고 사혈의 마왕의 뜻에 모두 따랐던 건 아니니까.'

사혈의 마왕은 무자비한 살육을 벌이며 인세를 지옥으로 만든다.

하지만 암흑 마가를 보면 알겠지만, 마인들이라고 모두 그런 살육을 즐기는 게 아니었다.

아니, 대다수의 마인은 힘과 패도를 추구할 뿐, 그런 악을 즐기지 않는다.

반발하는 이가 나오는 게 당연했다.

카슈미르는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카슈미르가 파괴 마가의 공자 출신이었던가? 젊었을 적에 가문에서 버림받았다고만 들었… 아.'

크리스의 머릿속에서 순간 퍼즐이 맞추어졌다.

참석자의 명단을 보니 알 수 있었다.

카슈미르.

마리사.

쥬피엔.

크리스티앙.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가문 내에서 비주류인 이들이었다.

죽어 사라지길 바라는 이가 많은.

거기에 애매한 '7층'이라는 선정.

'층째로 참석자 모두를 몰살시킬 계획인 거야.'

지금 시점에는 아무도 모르고 있지만.

지하 정원에는 한 가지 비밀이 있었다.

크리스가 회귀자여서 알고 있는 비밀.

그 비밀을 이용하면, 이번 공자 회담에 참석하는 이들 모두를 한꺼번에 몰살시키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그 짐작처럼, 프레시아의 눈동자는 희번득 빛나고 있었다.

크리스가 죽을 거라고 확신하는 눈빛.

크리스의 짐작이 맞는다는 증거였다.

피하는 게 옳지만.

"알겠습니다. 지하 정원 7층. 그렇게 알고 준비하겠습니다."

"!!"

원래라면 누구도 살아날 수 없는 함정이지만, 크리스는 단 하나 살아날 길을 알고 있었다.

오로지 크리스니까 가능한 방법.

아니, 도리어.

크리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건 기회야. 그것도 어마어마한. 지하 정원의 최상급 유물을 얻을 기회가 이렇게 찾아오다니.'

과거 기억상, 반드시 얻어야 하는 유물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지하 정원'에 있었지만, 힘이 부족해 감히 얻으러 갈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원래는 한참이나 뒤에야 도전 가능했겠지만, 이번 '함정'을 잘 이용하면 어쩌면 유물을 얻을 기회를 가질 수도 있을지 몰랐다.

'덤으로 어마어마한 명성을 얻을 수도 있고. 잘하면 '개척자'가 될 수도 있어.'

지하 정원은 아직 탐사가 끝나지 않은 유적이었다.

새로운 업적을 이룬 이들을 '개척자'로 칭하며, 지하 정원 명예의 전당에 따로 기록한다.

지하 정원은 남방 마도국의 마인들 사이에서는 마도의 성지와도 같은 곳.

그런 곳에 이름을 남기는 건 대단한 명예였다.

그의 이름은 암흑 마가를 넘어 널리 퍼지게 될 거다.

"참석하겠다고?"

"네, 그렇지 않아도 지하 정원에는 한번 가보고 싶었습니다.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심에 숙모께 감사드립니다."

크리스의 적극적인 태도가 거슬렸던 걸까? 프레시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함정을 눈치챈 건 아니겠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프레시아가 준비한 계략은 파괴 마가가 지하 정원을 조사하다가 얼마 전 알아낸 비밀을 이용한 함정이었다.

놈이 그 비밀을 알고 있을 리가 없었고, 설사 안다고 해도 일단 발을 들이면 절대 살아 돌아올 수 없었다.

"공자 회담은 본가의 명예가 걸린 일이니, 반드시 철저히 준비하도록 하여라."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하나 부탁을 해도 되겠습니까?"

"부탁? 뭐지?"

"돈 좀 주십시오."

"…뭐?"

크리스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얼마 전 경연에서 마이삭 놈을 열심히 두드려 패느라 지쳐서요. 쉴 겸 출발하기 전에 성에서 진탕 놀고 올 테니, 종잣돈 좀 주십시오."

함정에서 살아날 준비를 해야 했다.

돈이 필요했다.

제80화

후작 부인은 돈을 주었다.

크리스가 나간 후, 온갖 가구가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렸지만, 알 바 아니었다.

'저딴 성질머리니 아들이 그따위로 자라지. 남에게 해코지할 시간에 아들이나 제대로 교육하지.'

크리스는 혀를 찼다.

어쨌든 그는 돈을 들고 루이나가 운영하는 루돌프 상단의 도박장을 찾아갔다.

'돈은 루이나에게 뜯어도 되지만, 매번 날로 뜯으면 미안하니까. 이번엔 제대로 돈을 지불하자.'

난 참 착해.

이런 생각을 하며 크리스는 도박에 열중했다.

이번에는 진지하게 하였다.

돈을 벌어야 하니까.

그러니까, 작정하고 털어먹었다.

"5연속 짝수!!"

"아니, 또 저런 패가 나오다니?! 0.000078%의 확률인데?!"

"말도 안 돼! 이게 몇 연승이야?!"

"저거 사기 아니야?!"

"사기라니! 저분이 누구인데! 암흑 마가의 새로운 신성, 크리스티앙 공자님 아니신가?!"

도박장에 찾아온 사람들이 경악하여 외쳤다.

크리스 앞에 돈이 수북하게 쌓였다.

크리스는 휘파람을 불었다.

'사기 맞는데? 사기가 아니면 도박으로 이렇게 털어먹는 건 불가능하잖아.'

하지만 안 걸리면 장땡이었다.

사색이 된 도박장의 관리인들이 어떻게든 크리스의 수법을 찾아내려 애썼지만, 한때 연합의 도박왕조차 털어먹었던 크리스의 사기 수법을 파악하는 건 무리였다.

그렇게 얼마나 털어먹은 다음일까?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그만하십시오."

어딘지 질린 듯한 음성.

이 도박장의 주인, 루이나가 등장했다.

* ? ?* ? ?*

루이나는 크리스를 데리고 도박장에 딸린 호텔 방으로 올라갔다.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루이나는 남장 변장을 풀고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음성으로 말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입니까?"

"무슨 짓이긴? 도박한 건데?"

"도박으로 300만 루페나 뜯어냈다고요? 도박왕도 양심상 이딴 짓은 안 할 겁니다!"

"돈이 필요해서. 매번 너한테 신세 지기 미안해서 이번엔 정당히 내가 번 돈으로 지불하려고 했지."

"…그게 무슨 미친… 돈을 지불한다면서 내 도박장을 털어먹으면 어떻게 합니까?!"

루이나가 빼액 외쳤다.

처음 만났을 때 비해 부쩍 거칠어진 말투.

그간 크리스한테 뜯긴 돈들 때문이었다.

'노가주한테 바친다고 500만 루페에 달하는 영약들을 뜯어간 게 얼마 전이면서!'

루이나는 씩씩거렸다.

하지만 화를 낼 때가 아니었다.

"잠깐, 그러면 이번에도 또 절 뜯어먹으려고 왔다고요?"

"뜯어먹는 게 아니라, 이번에는 정당히 돈을 지불할 거라니까. 여기 300만 루페 줄 테니 필요한 물품 좀 구해줄래?"

"크아아! 그거 제 도박장에서 뜯은 돈 아닙니까?! 이 나쁜 공자님아!"

결국, 또 한 푼도 들이지 않고 또 루이나의 보물들을 가져가겠다는 거였다.

"배 째! 안 해!! 마도 제국과 연합 간에 전쟁이 벌어지든, 말든!"

루이나가 배를 내밀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나름대로 대단한 미모를 뽐내던 차분한 인상의 여인이었는데, 짧은 시간 만에 저렇게 망가진 것을 보니 그간 뜯긴 게 억울하긴 했던 것 같다.

'뭐, 단기간에 많이 털어먹긴 했지. 그래 봤자 내가 이전 삶에서 루이나한테 당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저래 보여도 루이나도 절대 정직한 상인은 아니었다.

애초에 정직한 상인이 경매장을 운영하고 있을 리가.

루이나도 상대가 만만하면, 코를 훌러덩 베어가는 훌륭한 악덕 상인이었다. 크리스도 이전 삶에서 몇 번이나 당했다.

물론, 크리스가 당시 털린 돈은 지금 루이나가 털리는 금액들에 비하면 소액이지만, 당시 크리스는 전 재산이 털렸다. 그러니, 자신이 당한 피해가 훨씬 크다고 크리스는 당당하게 생각했다.

'어쨌든 루이나는 목숨보다 돈을 소중하게 여기는 돈벌레.'

돈벌레니까.

그녀는 늘 그의 호구가 될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는 또 그녀가 혹할 미끼를 던졌다.

"내가 갈 곳이 지하 정원인데?"

"!!"

루이나가 우뚝 멈추어 섰다.

갑자기 그녀의 말투가 변하였다.

사근사근하고 공손하고 친절하게.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공자님?"

"글쎄, 난 나쁜 공자라 대답하기가 싫은데."

"오호호. 농담도. 눈이 멀 듯 잘생기고 멋지고 훌륭하신 우리 위대한 마제스티 크리스티앙 공자님께 감히 누가 그딴 망발을 했을까요. 몹쓸 입이네요. 에잇."

루이나는 손으로 찰싹 자신의 입술을 때렸다.

크리스는 쿡쿡 웃었다.

"지하 정원에 갈 거라고. 너희 상단에도 도움이 될 거래라고 생각했는데, 싫다면 어쩔 수 없군. 난 다른 곳을 찾아가보지."

"아니, 아니! 잠깐, 스톱! 기다려 주십시오!"

지하 정원은 여러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수련자들 사이에서는 수련의 정원으로, 그리고 탐험가들 사이에서는 '보물 정원'으로 불렸다.

그만큼 수없는 보물과 유물, 아티팩트가 잠들어 있었다.

'이미 대부분 발굴되긴 했지만, 종종 새로운 보물, 아티팩트와 유물이 출몰하기도 하지. 모두 하나같이 대단한 소장 가치를 지닌 물건들이야. 문제는 외부인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란 거지만.'

지하 정원에서 나오는 물건들은 모두 파괴 마가가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다.

혹시 방문자들이 우연히 보물을 발견해 얻더라도 모두 파괴 마가에게 넘겨주어야만 했다.

옷을 뒤지는 수준을 넘어 완전히 발가벗긴 후 고위 흑마법으로 신체 내부까지 다 뒤지기 때문에 빼돌리는 건 불가능.

만약 보물을 빼돌리려는 시도가 발각되면, 즉결 처형당하게 되지만, 크리스의 경우는 달랐다.

'난 얼마든지 보물을 빼돌리는 게 가능해. 암흑 마가의 공자인 날 발가벗겨 확인해 보지는 못할 테니까.'

그러니, 루이나가 저렇게 몸 달아 하는 거다.

지하 정원의 보물을 얻는 건 보물 수집가들의 염원 중 하나이니까.

"오호호. 어떤 물건이 필요하십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루돌프 상단과 디어 상단 모두를 뒤져서라도 마련하겠습니다."

"공짜로 받아갈 생각은 없는데. 돈 낼 거야."

"300만 루페? 괜찮습니다. 지하 정원의 보물만 같이 나누어 주신다면 충분합니다."

"아니, 그래도 받는 게 좋을걸? 이번에 필요한 건 조금 비싼 물건이라서."

"...."

루이나의 웃음기가 사라졌다.

지금껏 그녀를 뜯어가며 이런 이야기는 한 번도 한 적 없는 크리스였다.

'도대체 이번엔 뭘 뜯어가려고?'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호, 혹시 방어구나 마검 같은 게 필요한 거면 대여는 안 될까요?"

"그런 물건이 아니야."

"…도대체 어떤 게 필요하길래?"

크리스가 툭 한마디 하였다.

"공간의 가위."

"…네?"

"아, 이렇게 말하면 모르나? 대마법사 레닌의 가위."

"...."

루이나는 우뚝 입을 다물었다.

안다.

크리스가 말하는 게 뭘 뜻하는지.

하지만.

"…그거 천만 루페가 넘는 물건이지 않습니까?!"

루이나가 다시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렇다.

크리스는 지금 인간이 만든 아티팩트 중 가장 최상위의, 유물에 준하는 능력을 가진 물건을 요구한 거다.

* ? ?* ? ?*

아티팩트와 유물의 차이는 간단했다.

인간이 만들면 아티팩트.

성좌나 악마가 만들면 유물.

성능 차이도 당연히 명확했다.

유물 중 최하급이라도 최상급의 아티팩트를 압도하는 성능을 지니고 있었다.

유물이 출몰하면 괜히 세력끼리 전쟁이 벌어지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간혹 드물게 인간이 만든 아티팩트 중에서도 유물에 비교할 만한 능력을 가진 물건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레닌의 가위'였다.

'유명한 물건이지. 어마어마한 성능을 가지고 있으면서… 막상 쓸데없기로.'

뜻밖의 이야기.

그 말 그대로였다.

레닌의 가위는 무려 공간을 절단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공간을 잘라 이동할 수 있었다.

마치 '게이트'처럼 사용할 수 있는 거다.

9성 상(上)에 이르렀던 전설적인 대마법사가 만든 물건답게 어마어마한 능력.

하지만 막상 실용성은 없었다.

공간 좌표 계산의 어려움 때문이었다.

'장거리 이동을 위한 공간 좌표 계산은 인간의 머리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성취의 문제가 아니었다.

인간의 한계였다.

장거리 공간 이동은 아공간을 통하는데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수없이 출현했다가 사라져 대마법사든, 뭐든 인간의 머리로 계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자력으로 장거리 공간 이동이 가능한 극소수의 대마법사들이 있긴 하지만, 좌표 계산을 보조해주는 도구를 써야만 가능하지.'

레닌의 가위에는 그런 계산 보조 기능이 없었다.

그냥 덩그러니 공간을 자르는 기능만 있을 뿐이었다.

사용자가 무한한 변수를 직접 계산해야 원하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데, 공간 분야를 전문으로 공부한 대마법사가 아닌 한,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공간 계열의 대마법사는 이런 물건이 필요 없을 거고.

그러니, 어마어마한 성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쓸모없는 물건인 것이다.

"너무 아쉬워하지 말라고. 어차피 가지고 있어 봤자 사가는 사람도 없잖아? 헐값으로 누가 사가도 감사해야 할 판인데, 이렇게라도 내가 써주는 걸 감사하게 여기라고. 대신, 지하 정원에서 좋은 보물 하나 가져올게."

루이나는 입을 뻐금거렸다.

속이 터지는 얼굴.

하지만 크리스의 말도 마냥 틀린 건 아니었다.

어차피 가지고 있어 봤자, 창고에 썩을 물건일 뿐이었으니, 이렇게라도 크리스와 거래하는 용도로 쓰는 게 이득이었지만.

자꾸만 손해 보는 느낌이 드는 건, 그녀가 돈벌레여서일까, 아니면 단순히 크리스티앙이 얄미워서일까?

'으아아. 내가 저걸 얼마에 샀는데! 내 천만 루페!'

루이나는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300만 루페라도 주십시오."

어차피 그 300만 루페도 자신의 도박장에서 뜯어간 것이긴 하지만, 이거라도 받아야 억울한 마음이 덜할 것 같았다.

그래도, 뭐. 엄밀히 말해 루이나가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니었다.

지하 정원의 보물을 얻을 기회는 절대 쉽게 오는 게 아니었으니까.

이번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 거다.

무엇보다 지하 정원의 보물은 가치가 어마어마해 잘만 하면, 투자금 이상으로 훨씬 초대박이 날 수도 있었다.

이후, 크리스는 루이나가 필요한 물품들을 준비할 동안 띵까띵까 놀면서 시간을 보냈다.

'요즘 너무 열심히 지냈어. 사람이 쉴 때는 쉬어야지! 그런데 난 언제 술을 마실 수 있는 거야! 생강 싫어!'

한 손에 들린 진저에일을 보며 크리스는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공자가 되었어도 진저에일 신세는 여전했다.

이윽고 준비가 끝났고.

"…꼭 보물 가져와야 합니다. 그냥 보물 말고, 좋은 보물. 아니, 비싼 보물이어야 합니다! 만약 보물을 가져오지 못한다면 진짜로 손해배상 청구하겠습니다! 암흑 마가고, 뭐고 없습니다!"

계속 구시렁거리는 루이나를 보며 크리스는 피식하였다.

"그래, 기다리도록. 아, 하나 할 말이 있는데. 골드 크로스 쪽이랑도 거래하겠지?"

"…그거야 당연히 그렇습니다만?"

루이나의 두 상단 중 디어 상단은 연합을 배경으로 활약한다.

"그러면 앞으로 골드 크로스의 동태를 잘 살펴보도록. 특히 법국(法國) 쪽을."

"…법국이면, 얼마 전 '저주받은 왕자'가 사망해 떠들썩했던 곳? 설마, 그 말씀은?"

제81화

"그래, 소요가 있을 거다. 어쩌면, 너희 상단에 기회가 될 수도 있겠지."

루이나는 눈을 크게 떴다.

지금, 크리스는 암흑 마가의 내부 정부를 통해 알아낸 기밀을 그녀에게 흘려준 거다!

'사실, 회귀 전 알게 된 지식이지만.'

곧 골드 크로스에서 커다란 참사가 발생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대륙을 뒤흔들게 될 참사.

크리스는 그 참사에 개입할 계획이었다.

'그러려면 골드 크로스 내에서 조력을 줄 이가 필요하니까. 미리 루이나가 준비해놓게 하면 좋겠지.'

"잘만 하면, 네 상단도 큰 이득을 볼 수 있을 거다."

루이나는 크게 감동한 얼굴을 하였다.

"오호호. 역시, 전 공자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이 루이나! 공자님의 수족이 되기로 한 게 이번 생의 가장 훌륭한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방금만 해도 손해배상 하라고 하지 않았나?"

"어머? 누가 그레이트하신 공자님께 그딴 망발을 했을까요? 제가 미쳤었나 봐요. 또 못된 입을 벌줘야겠네요. 에잇, 에잇."

찰싹, 찰싹.

또 주책맞은 모습을 보이는 루이나를 보며 크리스는 쿡쿡 웃음을 삼켰다.

'나중에 막상 일이 벌어져 휘말리면 저런 말을 하지는 못할 텐데.'

루이나는 커다란 고생을 하게 될 거다.

그냥 고생 정도가 아니라, 어마어마한 개고생.

하지만 결과적으로 큰 이득을 볼 일은 맞았으니, 크리스는 모른 척하였다.

"골드 크로스에서 네가 어떻게 행동하면 될지는 나중에 따로 연락하지. 그러면 가보마."

"오호호, 조심히 가십시오! 충성 충성 충성입니다!"

그렇게 저택으로 돌아오니.

뜻밖의 인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출발할 준비는 되셨습니까?"

창백한.

아름답지만, 어딘지 소름 끼치는 미남자.

총집사 사이먼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예를 올렸다.

"지하 정원까지 제가 모시기로 하였습니다, 공자님."

* ? ?* ? ?*

서로 간의 세력 과시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공자 회담은 수행원을 최소로 하는 게 관례였다.

알로스의 수련을 멜린에게 맡긴 후, 조촐히 출발했다.

다그닥, 마차가 달렸다.

지하 정원은 꽤 먼 거리에 있어 그럭저럭 시간이 걸리는 여행이 될 예정이었다.

'파괴 마가 위치는 남방 마도국의 서쪽이지.'

남방 마도국을 지도로 보면 이러했다.

동쪽에 암흑 마가.

중앙에 극독 마가.

서쪽에 파괴 마가.

이렇게 삼색기처럼 되어 있었는데,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파괴 마가 오른편으로 거대한 산맥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파괴 마가는 산맥 서편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고, 극독 마가와 암흑 마가가 중앙과 동쪽에서 영역 다툼을 벌이는 상황이었다.

'일단 파괴 마가의 영역으로 통하는 게이트를 이용해야지. 얼마나 걸리려나.'

게이트까지 가는 데는 마차로 이동해야 했다.

'그나저나 불편하네.'

마차 안에는 사이먼과 크리스만 있었다.

쥬피엔 공녀도 같은 일행이었지만, 마차에 타는 걸 거절했다.

- 넌 왜 안 타?

- 체력 단련해야 해.

- …그래.

쥬피엔은 경공을 사용하며 마차를 따라오고 있었다.

몇 시간이나 쉬지 않고.

지난 경합 때 보여준 모습도 그렇지만, 쥬피엔은 의외로 대단한 노력파인 것 같았다.

덕분에 크리스는 사이먼과 단둘이 있는 상황이었다.

'처음 만남 이후로 딱히 내게 나쁜 짓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불편하단 말이지. 사혈의 마왕과 비슷한 얼굴과 마주 앉아 있는 건.'

하지만 사이먼은 반대의 생각인지 자꾸 싱긋싱긋 웃으며 크리스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지 않아도 공자님을 모시고 싶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되어 기쁘군요."

"절 왜 모시고 싶습니까?"

"그야, 공자님이 흥미로우니까요?"

크리스는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딱히 좋은 의미의 흥미는 아닐 거다.

지금에야 얌전히 지내고 있지만, 사이먼도 과거 어마어마한 악명을 지닌 인물이었으니까.

'혈검 마가를 떠날 때 죽인 친족이 몇 명이라고 했지?'

뱀파이어 일족은 피를 갈구하는 종족이니 기본적으로 잔혹한 성정을 지니고 있다.

사이먼은 그중에서도 위험한 인물이었고.

'그래도 마냥 꺼려야 할 상대는 아니지.'

이유야 어쨌든, 사이먼은 그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이 기회에 사혈의 마왕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문제는 어떤 식으로 캐보냐는 건데.'

고민하는데, 사이먼이 뜻밖의 말을 하였다.

"제게 뭔가 묻고 싶은 게 있으신 눈치이군요. 말씀해 보십시오. 배런가의 기밀에 관한 게 아니면 뭐든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생각지 않은 제안.

크리스는 거부하지 않았다.

"혹시 혈검 마가의 대공녀 이드린느 백작에 대해 들을 수 있습니까?"

사혈의 마왕의 현재 명칭이었다.

두근.

크리스의 심장이 뛰었다.

'막상 사혈의 마왕의 신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어.'

어쩌면 사혈의 마왕과 맞설 때 도움이 될 뜻밖의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사이먼은 크리스의 물음이 의외인 듯했다.

"흐음? 우리 이드린느에게 관심이 있으셨나요?"

"…마도 12 명문가의 다섯 신성(新星) 중 하나이니까요."

마도 12 명문가의 수많은 공자, 공녀 중 가장 뛰어나다고 일컬어지는 다섯 명을 따로 오신성(五新星)이라고 부른다.

단순히 유망한 루키 수준을 넘어, 나이를 초월해 진정한 강자의 반열에 오른 이들.

"언젠가 그녀를 꺾는 게 제 목표라 묻는 겁니다."

진심이었다.

그의 여정은 결국 사혈의 마왕을 죽이기 전까지 끝나지 않을 테니까.

"하긴. 우리 이드린느가 유명하긴 하지요. 정확히 어떤 게 궁금한 겁니까?"

"전부 다. 무엇이든지요."

"으음."

사이먼은 기억을 더듬는지 잠시 고민하는 얼굴을 하였다.

순간, 복잡한 기운이 그의 표정을 스쳐 지나갔고.

"귀엽고 예쁜 아이입니다."

"…네?"

크리스는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지금, 뭐라고?

"저와 다르게 착한 아이이기도 하고요. 저 같은 말종과 한배를 타고났다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사랑스러운 동생이지요."

"...."

크리스는 거북한 얼굴을 하였다.

그가 지금껏 살면서 들은 소리 중 가장 황당한 멍멍이 소리였다.

"농담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흠? 정말입니다. '피의 소공녀'로 소문이 안 좋긴 하지만, 서로 죽고 죽이는 사왕성의 분위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지,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아요. 지금도 종종 저한테 잘 지내는지 걱정하며 연락하는걸요?"

"…종종 연락한다고요?"

"네, 얼마 전에도 편지 왔습니다."

들을수록 가관인 이야기.

사이먼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공자님과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는군요. 종족이 달라 나이 차이가 있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비슷한 연배시기도 하고. 공자님 정도면 이드린느의 짝으로 괜찮을 것 같은데 관심 있으시면 중매라도 서 드릴까요?"

"쿨럭!"

크리스는 사레에 들려 헛기침을 하였다.

'미친.'

사혈의 마왕과 결혼이라니. 상상만 해도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하지 마십시오."

"흐음, 진담인데."

"하.지. 마.십.시.오."

크리스는 단호히 말했고, 사이먼은 아쉽다는 듯 혀를 차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나저나 의외이군.'

사혈의 마왕이 착하다니.

워낙 황당해 믿기 어려운 개소리들이었지만, 그냥 흘려들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둘 중 하나겠지. 악마와 계약 이후 성정이 바뀌었거나, 아니면 본인의 끔찍한 본성을 완전히 감출 정도로 위선적이거나.'

어느 쪽이든 다 가능성은 있었다.

혈겁을 일으킨 악마 계약자 중 적지 않은 수가 원래는 빛나는 영혼의 소유자였으니까.

'그렇다고 동정의 여지가 있다는 건 절대 아니지만.'

뒷사정이 어쨌든, 악마 계약자들이 벌이는 끔찍한 죄악들은 용납 가능한 게 아니었다.

다만, 크리스는 사혈의 마왕의 배경을 조사할 필요는 있다고 여겼다.

사혈의 마왕을 뒤흔들 의외의 약점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둘째, 주목할 정보.

사이먼과 사혈의 마왕… 아니, 혈검 마가의 대공녀 이드린느는 현재 시점까지 사이가 나쁘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상해. 둘의 사이가 나쁘지 않으면, 총집사 사이먼은 왜 그런 죽음을 맞는 거지?'

크리스는 사이먼이 어떻게 죽음을 맞는지 알고 있었다.

'총집사 사이먼은 사혈의 마왕의 손에 죽임을 당해.'

그냥 죽음도 아니었다.

사혈의 마왕은 사이먼의 팔다리를 하나하나 직접 토막 내며 끔찍한 고통을 주며 죽인다.

어찌나 잔혹한 처형이었는지, 연합 쪽에도 널리 퍼진 유명한 이야기였다.

'뭔가 모르고 있는 사실이 더 있어.'

크리스는 인상을 지그시 찌푸렸다.

* ? ?* ? ?*

그때, 남방 마도국의 서쪽 끝.

깎아지른 절벽 위에 자리한 거대한 성.

파괴 마가 베스엔 대공가였다.

거인의 몸처럼 하늘 높이 솟은 성 그늘 밑으로 절벽 아래에 여러 건물이 놓여 있었다.

성안에 머물지 못하는 하급 마인들의 거처였다.

그중 유별나게 초라해 보이는 건물.

강풍이라도 불면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낡고 해진 건물에 강인한 인상의 미남자가 발걸음 하였다.

"어머니."

"…카슈미르."

미남자의 정체는 파괴 마가의 공자인 카슈미르였다.

그런데 공자인데 이런 허름한 거처에 어머니가 머물고 있다니?

이유가 있었다.

그는 서자였다.

그것도 미천한 핏줄에서 태어난.

그의 아비는 파괴 마가의 직계로 하룻밤 장난으로 몸종인 그의 어머니를 안았고, 곧바로 쫓아냈다.

이후, 카슈미르는 일반 마인으로 파괴 마가에 입성하였고, 눈부신 재능을 보여 공자의 자격을 얻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직계의 견제에 어떤 미래도 없는 이름뿐인 공자.

심지어 그는 병든 어머니를 치료할 약도 구하지 못하고 있는 처지였다.

'의선 명가의 약만 구할 수 있다면, 어머니를 치료할 수 있을 텐데.'

카슈미르는 참혹한 얼굴을 하였다.

파괴 마가의 힘이면 얼마든지 의선 명가의 약을 구할 수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앞뒤 버리고 연합으로 떠날 수도 없었다.

수백 년째 본거지를 들키지 않고 은둔하고 있는 의선 명가를 찾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고, 그가 파괴 마가를 벗어나는 순간 직계 핏줄이 보낸 암살자가 그의 어머니를 살해할 거다.

"여기 약을 구해 왔습니다."

그저 증상을 완화해주는 약이었다.

"괜찮단다. 난 신경 쓰지 않아도… 쿨럭. 쿨럭."

어머니의 기침에 섞여 나오는 핏물에 카슈미르의 얼굴이 무거워졌다.

'이대로라면 어머니는 오래 버티지 못해. 어떻게든 의선 명가의 약을 구해야 해.'

그때, 밖에서 날카로운 기세가 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카슈미르의 얼굴이 굳었다.

밖으로 나오니 오만한 인상의 남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파괴 마가의 대공자 슈와르였다.

"형님."

"형님? 누가 네 형님이지?"

짜악!

슈와르가 카슈미르의 뺨을 날렸다.

한 번도 아니었다.

짜악! 짜악!

카슈미르의 입술이 터졌다.

피할 생각도, 방어할 생각도 못 했다.

그게 카슈미르의 처지였으니까.

때리고 짓밟으면 그대로 감내해야 하는, 이름뿐인 공자.

제82화

"주제도 모르는 더러운 놈."

"…죄송합니다."

"곧 있을 공자 회담과 관련해서 네게 시킬 일이 있어서 찾아왔다."

"…무슨 일입니까?"

카슈미르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어쩔 수 없이 참석하긴 하지만, 별달리 관심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열쇠'를 내어줄 테니, 공자 회담이 시작하면 적당한 때에 '전이(轉移)'를 발동하도록."

"!!"

카슈미르는 놀란 얼굴을 했다.

'열쇠'와 '전이'.

얼마 전, 지하 정원에서 발견된 비밀이었다.

"하, 하지만? 그러면 참석자들 모두 죽음을 맞게 될 겁니다."

대공자 슈와르는 인상을 찌푸렸다.

퍼억!

마기에 휩싸인 주먹이 카슈미르의 얼굴을 후려쳤다. 왈칵 피가 터져 나왔다.

"누가 네게 짖으라고 했지?"

"…죄송합니다."

"그냥 하라는 건 아니다. 일을 제대로 해내면 네 어미를 치료할 의선 명가의 약을 구해주도록 하지."

"!!"

카슈미르의 몸이 벼락 맞은 듯 떨렸다.

그가 간절히 바라던 것.

"하지만 명심해라. 만약 실패할 경우, 그나마 네 어미의 목숨을 연명해주던 약도 공급을 끊을 테니, 반드시 성공하도록."

"…네, 명심하겠습니다."

대공자는 사라졌고, 홀로 남은 카슈미르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렇게.

공자 회담이 시작되었다.

* ? ?* ? ?*

지하 정원은 파괴 마가 영역의 외곽에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도 오랜만이네.'

크리스는 화려한 정원의 자태에 휘파람을 불었다.

가운데 있는 정자를 통해 지하로 내려가면 본격적인 유적의 시작이었다.

'용사 일행과 한번 와봤었지. 그때는 전란에 휘말려 지금과 같이 외관이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었지만.'

사혈의 마왕에 맞설 아이템을 얻기 위해 도전했다.

결과적으로 성공적이었다.

용사 일행은 모두 각자 자신에게 맞는 최상급 아티팩트와 유물을 구했다.

크리스가 이번에 얻으려는 물건도 그중 하나였다.

그때, 맞은편에서 두 명의 인물이 다가왔다.

한 명은 극독 마가의 마리사.

그녀가 크리스를 보더니, 흥 코웃음을 쳤다.

"오랜만이야. 딱히 반가운 건 아니지만."

"어, 그래."

크리스는 대충 무성의하게 답하고는 다른 쪽을 돌아보았다.

왜인지 마리사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지만, 크리스는 그녀에게 관심을 주지 못했다.

다른 이에게 온 정신이 쏠렸던 탓이다.

붉은 머리칼을 지닌 무거운 낯빛의 미남자.

"그쪽은?"

"파괴 마가의 카슈미르 반 베스엔 루푸스라고 합니다. 늦은 나이에 공자가 되어 뒤늦게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카슈미르가 깍듯하게 답했다.

크리스는 새삼스러운 얼굴로 카슈미르를 살폈다.

'저항자 카슈미르.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이번에 얻어야 할 건 유물뿐이 아니었다.

카슈미르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 했다.

'카슈미르와는 이전 삶 때도 안면이 있었지.'

카슈미르는 마인 주제에 연합인보다도 정의로운 마인이었다.

용사 일행도 몇 번이나 카슈미르의 조력을 받았을 정도.

재능도 출중하니 인연을 맺어두면 훗날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카슈미르 같은 스타일은 이득을 주고받는 계약관계보다는 마음을 얻는 게 좋은데.'

다행히, 크리스는 카슈미르의 마음을 공략할 방법을 알고 있었다.

'과거 술자리도 몇 번 가졌을 정도니까.'

카슈미르는 모르고 있겠지만, 크리스는 카슈미르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카슈미르가 현재 파괴 마가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조만간 어떤 아픔을 겪게 되는지.

그가 어떤 성격인지, 어떤 면에 약한지도 전부다.

그것에 맞춰, 크리스는 깍듯이 입을 열었다.

"전 배런 공작가의 크리스티앙 반 배런 카자르라고 합니다. 명성 높은 카슈미르 공자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카슈미르는 당황했다.

"제가 명성 높다니 당치 않습니다."

"공자님께서 '신성 제국' 놈들을 상대로 세운 공들을 들었습니다. 같은 마인으로서 속이 시원하더군요."

참고로, 극독 마가와 암흑 마가가 '골드 크로스'와 '사왕성'을 적대하고 있다면 파괴 마가는 '신성 제국'과 맞서고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전… 그저 운이 좋았던 것일 뿐입니다."

카슈미르는 커다란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어쩔 줄 몰라 했고, 크리스는 속으로 쿡쿡 웃었다.

'과거랑 똑같군.'

숫기 없는 충견 같은 스타일.

그게 카슈미르의 성격이었다.

자신감이 없고 주눅 들어 있지만, 누군가 자신을 인정해주면 진심을 연다.

크리스는 더욱더 노골적으로 카슈미르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운이라니요. 신성 제국의 광신대를 무찌르셔 놓고 겸손이 지나치시군요."

크리스는 은근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특히 카슈미르 공자님께서는 저와 같은 방계 출신이라 많은 귀감이 되었습니다."

카슈미르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제가 크리스티앙 공자님과 같다니. 당치 않습니다."

카슈미르의 성은 '반 베스엔 루푸스'다.

'반(van)'은 방계의 이들이 가지는 미들네임.

거기에 루푸스는 어머니의 성을 딴 거다. 혈통으로서 어떤 가치도 없는.

반면, 크리스티앙은 똑같은 방계여도 암흑 마가의 세 개의 기둥 중 하나의 장남이었다.

혈통상 비교조차 어려웠지만.

"혈통이 뭐가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마인에게 중요한 건 힘과 세운 공이지요. 그런 면에서 카슈미르 공자님께서는 제 존경을 받기에 충분하십니다."

"...."

카슈미르는 입을 다물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무도 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었다.

- 주제 파악도 못 하는 더러운 놈.

- 제깟 놈이 꿈틀거려 봤자지. 공자가 되었다고 착각하지 말아라. 넌 우리가 쓰다 버릴 도구일 뿐이니까.

가문의 사람들에게 숱하게 들었던 이야기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카슈미르의 가슴속이 왈칵 치밀어 올랐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크리스는 씨익 웃었다.

그는 카슈미르의 마음을 완전히 뒤흔들기로 하였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서로 형제처럼 지내는 것은 어떻습니까?"

"형제요? 어찌?"

"원래 이 공자 회담은 서로 친목을 다지는 자리 아닙니까? 우리는 같은 기수이니, 형제처럼 지내면 남방 마도국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겠지요."

하지만 카슈미르는 주저하며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어찌? 이런 얼굴이었다.

"그러면 이건 어떻습니까? 내기를 하는 겁니다. 먼저 7층에 도착하는 이를 늦게 도착한 이가 형님으로 모시는 것으로요."

"…지는 이가 이기는 이를 형으로요?"

"네, 카슈미르 공자님의 나이가 저보다 조금 많긴 하지만 형, 동생 하는 데 나이는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카슈미르는 다른 의미로 침묵했다.

카슈미르의 나이는 이십 대 중반이다.

미천한 출신으로 뒤늦게 공자가 되어 다른 참석자들에 비해 나이가 많다.

열다섯, 아니, 얼마 전에야 열여섯이 된 크리스를 형으로 모시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나이.

크리스는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물론, 자신 없으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카슈미르 공자님과 승부를 겨루어볼 기회라 생각했는데, 아쉽군요."

"…하겠습니다."

주눅 들어 있지만, 카슈미르도 마인은 마인.

승부욕을 자극하는데, 넘어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러면, 지금 바로 시작하지요. 7층에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이기는 것입니다."

파앗, 크리스티앙이 곧바로 아래로 뛰어들었다.

카슈미르도 승부를 제대로 겨루어 보기로 한 것인지, 진지한 얼굴로 밑으로 뛰어들었다.

"...."

"...."

그리고 휑하니 남겨진 두 소녀.

마리사와 쥬피엔.

둘은 어색하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왜, 너도 나랑 언니, 동생 하자고 하게?"

쥬피엔이 뚱하니 말했다.

"…됐거든요?"

"응, 다행이네. 그건 싫었는데."

"나도 싫었거든요? 근데, 왜 자꾸 반말해? 나이도 비슷하면서."

"존댓말 해줘?"

"…아니, 됐어. 필요 없어."

마리사는 흥,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공자 회담이 시작한 이후.

정확히는 크리스티앙의 얼굴을 본 이후.

다 짜증이 났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이상하게.

마리사가 인상을 찌푸리는 순간, 쥬피엔이 그녀를 불렀다.

"잠깐."

"…왜?"

"생각해보니 너 마음에 안 들어서."

"…뭐?"

"너 계속 크리스티앙 노려봤잖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쭈욱."

"…뭐?"

"크리스티앙에게 도전하려는 것 아니야?"

"...."

마리사는 입을 다물었다.

이게 갑자기 무슨 황당한 멍멍이 소리인가?

쥬피엔이 삐딱하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크리스티앙을 짓밟을 사람은 나야. 그러니, 헛된 마음이 있으면 포기해."

마리사는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포기하지 않으면?"

"포기하게 해줄게."

"…무슨 같잖은. 그렇지 않아도 짜증 나는데."

둘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어차피 공자 회담 때 서로 싸우는 건 잘못이 아니었다. 대놓고 '경합' 순서가 있었으니까.

파앗!

독이 피어올랐고, 검광이 번뜩였다.

그렇게 때아닌 결투가 벌어졌다.

* ? ?* ? ?*

그렇게 일행은 우여곡절 끝에 7층에 도착했다.

'쟤네들은 왜 싸운 거야?'

크리스는 마리사와 쥬피엔을 향해 황당한 눈빛을 보냈다.

잔뜩 흐트러진 게 서로 한바탕한 눈치였다.

'누가 시비라도 걸었나. 둘 다 성격이 더러우니. 뭐, 애들은 크면서 자라는 거니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지금 신경 써야 할 건 카슈미르이니까.

"무승부였지만, 좋은 겨룸이었습니다, 카슈미르 공자."

"…아닙니다. 공자님의 도움에 감사합니다."

카슈미르는 크게 감동한 얼굴이었다.

이유가 있었다.

중간에 크리스가 함정에 빠진 카슈미르를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목숨이 위험한 함정이었다.

'지하 정원은 낮은 단계의 층이어도 중간중간 치명적인 함정이 숨어 있으니까.'

물론, 높은 경지의 마인이 그런 치명적인 함정에 빠져 위험에 처하는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크리스는 일부러 몰래 카슈미르를 치명적인 함정에 빠지도록 유인했다.

왜?

도와주어 은혜를 입히려고.

병 주고 약 준 격이지만, 저 주변머리 없는 카슈미르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크리스를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으로 여긴 것이다.

'흐흐. 이 정도면 거의 넘어왔군.'

이제 쐐기를 박아 쾅쾅 도장을 찍을 차례였다.

"…도움을 받았으니, 이 승부는 제 패배로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크리스티앙 공자를 형님으로…."

"아니, 됐습니다."

"크리스티앙 공자?"

"설마 제가 진심으로 그런 제안을 했겠습니까? 그저 카슈미르 공자님과 친해지고 싶어서 한 제안일 뿐입니다."

크리스티앙이 짐짓 대범하게 말하였다.

"그러니 형, 동생 말고 서로 친구로 하도록 하지요."

"!!"

카슈미르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친구.

그는 살면서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 모두에게 배척받는 존재였으니까.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이런 이야기를 들은 거다.

가슴이 흔들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죄송합니다. 전 감히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카슈미르가 무겁게 답했다.

'난 오늘 이들을 모두 죽음으로 내몰아야 해.'

품 안에 든 '열쇠'가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다.

제83화

이제 슬슬, 그는 열쇠를 발동해야 했다.

'하지만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카슈미르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해야만 했다. 어머니를 위해서.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어머니가 죽는다.

그러나 자신을 향해 씨익 미소를 짓고 있는 크리스티앙을 보니 도저히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선뜻 먼저 다가와 난생처음으로 자신을 인정해준 이.

어떻게 저런 이를 자신의 손으로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떤 쪽도 선택할 수 없어 미칠 듯한 갈등에 가슴이 바짝 말라갈 때였다.

돌연 크리스티앙이 인상을 찌푸렸다.

"잠깐, 이건? 뭔가 이상한?"

"네?"

"모두 조심하십시오!"

"!!"

갑자기 이변이 일어났다.

지하 정원 7층의 천장이 갑자기 요동을 치기 시작한 거다.

공간이 일그러지며, 마치 소용돌이가 일듯.

카슈미르가 눈을 크게 떴다.

'이건 전이 현상?! 갑자기 어째서?'

전이.

얼마 전 발견된 지하 정원의 비밀이었다.

해당 층의 열쇠가 있으면, 연결된 층으로 곧바로 대상을 이동시킬 수 있었다.

문제는 7층과 연결된 층이 17층이란 거다.

최소 6성급 마인은 되어야 생존 가능한 층.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는 환경이었다.

전이가 발동되면 모두 죽게 될 거다.

'어째서 내가 열쇠를 발동시키지도 않았는데, 전이 현상이? 누군가 외부에서 열쇠를 작동시켰어!'

카슈미르는 하나의 사실을 깨닫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대공자 슈와르.

아마, 그가 모종의 방법으로 열쇠를 작동시킨 게 분명했다.

"모두 피해야!!"

하지만 늦었다.

파아아아앗!!

커다란 빛이 그들에게 내려오기 시작했다.

피할 수 없는 상황.

그때, 또 다른 이변이 발생했다.

"모두 마기를 끌어 올려!!"

크리스의 외침이었다.

그와 동시에.

콰아아아앙!!

거센 폭발이 다른 이들 앞에서 터졌다.

갑작스러운 폭발에 풍압이 그들의 몸을 휩쓸었고, 그들은 밖으로 튕겨 나갔다.

바닥에 쓰러진 채 카슈미르는 떨리는 몸으로 고개를 들었다.

'크리스티앙 공자가 우리를 살렸어?'

시의적절하게 터진 흑마법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전이에 휩쓸렸을 거다.

'그러면 크리스티앙 공자는?'

저 안쪽.

크리스티앙이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 안…."

자신을 보는 카슈미르의 시선을 느낀 걸까?

크리스티앙이 씨익 미소를 지었고.

파아앗!

전이가 발동하였다.

"안 돼!!"

크리스티앙은 그렇게 사라졌다.

모두를 놔두고.

* ? ?* ? ?*

어둠 속.

크리스는 눈을 감았다.

익숙한 느낌이었다.

'처음이 아니니까. 용사 일행과 왔을 때도 이렇게 전이의 방식으로 이동했었지.'

당시에는 지하 정원에서 층간 전이가 가능하다는 게 특별한 비밀이 아니었다.

지금은 7층을 비롯한 소수의 층에만 열쇠가 발견되어 있지만, 그때는 대다수 층에 열쇠가 확보되어 있어 층간 공략에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크리스티앙은 힐끗 눈을 떴다.

- 안 돼!!

- 크리스티앙!!!!

아공간 너머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죽기라도 한 듯 다급한 외침.

크리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카슈미르는 그렇다고 쳐도, 쥬피엔과 마리사는 왜 저래? 둘 다 날 싫어하는 것 아니었나? 그렇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는데.'

사실, 지금 이 상황은 그가 의도한 자작극이었다.

카슈미르가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길래, 잘못하면 열쇠를 발동시키지 않고 고해성사라도 할 기세여서, 크리스가 몰래 직접 열쇠를 발동시켜 버렸다.

'일전, 용사 일행과 함께 와서 어떻게 열쇠를 작동시키는지는 알고 있었지.'

어쨌든, 크리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칠흑의 어둠이 그의 옆을 빛처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이대로 이동하면 17층으로 이동하는 건가?'

크리스는 자신을 둘러싼 아공간을 바라보았다.

오로지 어둠뿐인 공간.

'지하 정원의 전이는 게이트와 비슷한 원리야.'

공간 이동은 원리 자체는 간단했다.

공간의 뒷면을 뚫어 아공간으로 이동한 후, 아공간에서 원하는 장소의 뒷면을 다시 뚫어 현실 공간으로 나온다.

문제는 중간 통로 역할을 하는 아공간이었다.

아공간에는 예상치 못한 변수가 무한하게 출현하기에 도저히 술식으로는 계산할 수가 없었다.

게이트가 하는 역할은 바로 그 아공간의 변수를 없애주는 것.

지금 이 지하 정원의 '전이'도 마찬가지였다.

원래라면 아공간에 발을 들인 순간 온갖 예상치 못한 변수가 나타났어야 했지만, 고요한 우주에 온 듯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 말의 뜻은 이러했다.

'이 물건을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지.'

크리스는 품에서 준비해둔 물건을 꺼냈다.

대마법사 레닌이 만든 공간의 가위.

원래라면, 아공간의 변수로 사용 불가능한 애물단지이지만 지금은 달랐다.

'열쇠'가 발동한 '전이'가 아공간의 변수를 차단해주고 있으니까.

이 가위를 이용해 원하는 장소로 공간을 절단해 이동할 수 있는 거다.

'물론 이것도 좌표를 잘못 계산하면 공간의 미아가 되어서 어마어마한 연산을 필요로 할 테지만.'

요구하는 연산력은 대마법사도 버거울 정도.

하지만 크리스에게는 간단했다.

그의 천재성은 연산력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되니까.

단순한 연산력이라면 그를 능가할 이는 이 세상에 누구도 없을 거다.

'지금!'

크리스가 가위를 휘둘렀다.

까마득한 연산을 토대로 정확한 좌표가 설정되었다.

드러난 찰나의 틈.

크리스는 주저하지 않고 몸을 날렸다.

공간을 뛰어넘는 충격에 잠시 시야가 컴컴해졌고, 곧 차가운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공간 이동에 성공한 거다!

'원하는 곳으로 제대로 왔나?'

답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싸늘한.

항거할 수 없는 위압감이 그를 짓눌렀다.

일전, 노가주와 만났을 때 느꼈던 위압감과는 달랐다.

영압(靈壓).

존재의 격이 다른 이가 직접 영혼을 발로 짓뭉개는 듯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영혼이 공포에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억지로 무시하고 간신히 고개를 들자, 보였다.

쇠사슬에 전신이 묶인.

수천수만 개는 될 듯한 성스러운 못이 전신을 가득 관통해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하게 구속되어 있는 '존재'를.

크리스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저 '존재'의 정체를 속으로 읊조렸다.

'게헨나 4계(界)의 악마.'

그렇다.

이곳은 지하 정원의 27층.

9성의 마왕(魔王)급 마인들을 위해 마련된 층이었다.

* ? ?* ? ?*

한편, 그때 7층.

남겨진 이들은 황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마리사가 시체처럼 하얀 안색을 하였다.

난데없이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크리스가 사라졌다.

크리스가 만약 그들을 밀어내지 않았다면, 그들도 똑같은 꼴이 되었을 거다.

'크리스는 어떻게 된 거지? 설마 죽은 건?'

쿵쿵, 마리사의 심장이 뛰었다.

그녀의 의식이 아득하게 질렸다.

그때, 쥬피엔이 돌발 행동을 하였다.

차앙!

검을 꺼내더니 카슈미르의 목을 겨눈 거다.

"쥬피엔 공녀? 무슨?"

"이놈 짓이야."

"!!"

쥬피엔이 차갑게 내뱉었다.

"7층에 온 뒤, 이놈. 계속 수상한 기색이었어. 말해. 무슨 짓을 벌인 거지?"

마리사의 얼굴도 표독해졌다.

파앗!

그녀의 손에서 독기가 끓어올랐다.

고문용 독이었다.

"정말인가요, 카슈미르 공자? 답하지 않으면 당신은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어서 온 혈관과 신경,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 속에서 끝없는 고통을 맞게 될 겁니다."

카슈미르는 여전히 황망한 얼굴이었다.

쥬피엔의 검이 자신의 목을 파고들어 피가 흘러도, 독기가 피부를 통해 파고들기 시작해도 저항하지 않았다.

"…크리스티앙 공자님을 구하기에는 이미 늦었습니다."

"무슨 말이야?"

"…죄송합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카슈미르는 참혹히 고개를 숙이고는 모든 전모를 밝혔다.

이야기를 들은 쥬피엔과 마리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크리스티앙 공자님이 아니었다면, 우리도 똑같이 죽은 목숨이었을 겁니다. 하, 나는 그런 분을 죽게 하다니."

쥬피엔이 인상을 찌푸리더니.

짜악!

있는 힘껏 카슈미르의 뺨을 후려쳤다.

화악, 카슈미르의 뺨이 달아올랐다.

"시끄러워, 찌질하게."

"...."

"크리스티앙은 아직 죽지 않았어. 확실해."

확신에 찬 쥬피엔의 말에 마리사와 카슈미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난 크리스티앙, 그놈처럼 비열하고 재수 없고 약삭빠른 놈을 지금껏 본 적이 없어. 그러니, 아무리 17층이라도 어떻게든 생존해 있을 거야."

근거 없는.

하지만 묘하게 설득력 있는 의견이었다.

크리스티앙, 그 재수 없는 놈이 이렇게 쉽게 죽을 리가 없다는 건 마리사도 동감이었으니까.

'아니, 어떻게든 살아 있어야 해. 이렇게 허무하게 죽으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어. 무덤에 독을 뿌려주겠어.'

마리사는 이를 바득 갈았다.

쥬피엔이 말했다.

"그러면 다시 문을 열어."

"네, 하지만? 17층에 가면 당신들도 모두 죽을 겁니다."

하지만 쥬피엔은 강경하게 말했다.

"재수 없는 놈이지만, 그래도 놈은 나와 같은 가문의 피를 이은 동생이야. 이대로 죽게 놔둘 수는 없어."

"…나도 가겠어요."

마리사도 반사적으로 말했다.

사실,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다.

카슈미르가 말한 대로 17층은 그들의 수준으로 감당할 수 없는 곳. 발을 들이면 살아남지 못할 거다.

하지만.

'이대로 크리스티앙이 죽으면 기분이 더러울 거야. 참지 못할 정도로.'

무엇보다, 이전 사건 때도.

그리고 이번에도.

크리스티앙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이런 은혜를 입고도 모른 척하면 어찌 당당한 마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마리사는 자신의 결정을 합리화했다.

"난…."

카슈미르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가슴이 들끓어 올랐다.

그도 크리스티앙을 구하러 가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이 이곳에서 돌아가지 못하면 그의 어머니는 죽음을 맞을 거다.

'제길, 나는 왜 이따위란 말인가.'

짧은 시간이었지만, 크리스가 자신에게 건넸던 말들이 떠올랐다.

자신을 진정으로 인정해준 이.

처음으로 자신을 친구라 불러준 이.

'빌어먹을.'

결국, 카슈미르도 결정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후회할 수도 있지만.

카슈미르는 이번만큼은 자신의 가슴이 이끄는 대로 따르기로 하였다.

그런데 생각지 않은 음성이 그들을 말렸다.

"잠깐. 세 분만 가시는 건 현명하지 못한 행동 같군요."

"총집사!"

쥬피엔이 놀란 얼굴을 했다.

창백한 인상의 뱀파이어 미남, 사이먼이 어느새 그들 뒤에 나타나 있었다.

"흐음. 곤란하군요. 무언가 일이 있을 거라 예상하긴 했지만. 설마 이런 일일 줄은. 17층이면, 저에게도 만만한 곳이 아닌데."

사이먼은 곤란한 얼굴을 했다.

그의 경지는 6성 하(下)였다.

반면, 17층은 6성 중에서도 '의념'을 완숙하게 다룰 수 있는 수준에 이른 중(中)의 경지의 마인들이 도전하는 곳.

따라서 분명 17층에서는 의념을 완벽하게 다루는 상대가 나타날 거다.

사이먼으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상대.

'어쩐담. 이건 수지가 안 맞는 것 같은데.'

사이먼은 눈을 가늘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