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사실, 사이먼은 크리스티앙을 구할 의무가 없었다.
이번에 따라온 것도 변덕에 의한 것이었을 뿐이니까.
그는 그저 노르디언에게 충성을 바칠 뿐, 암흑 마가의 누구도 도와줄 의무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크리스티앙 공자님이 죽으면, 무료할 것 같다는 말이지.'
사이먼은 입술로 혀를 핥았다.
혈검 마가를 떠난 후, 그는 메말라 비틀어진 삶을 살고 있었다.
이미 죽어버린 영혼이라서일까? 어떤 일에도 흥미가 가지 않는 무료한 삶.
그런 사이먼이 최근 유일하게 흥미를 느끼는 게 크리스티앙이었다.
크리스티앙에게 그런 흥미를 느끼는 건 비단 사이먼뿐이 아니다.
크리스티앙은 가문의 누구에게도 냉랭하던 메리안도, 심지어 노가주까지도 매료시킨 상태다.
'노가주께서도 말은 차갑게 하시지만, 크리스티앙 공자를 은근히 깊게 신경 쓰고 계시고.'
고민 끝에 사이먼은 결정했다.
"가보죠. 부디 우리 크리스티앙 공자님이 17층의 보스와 만나지 않았기를 바라면서."
사이먼이 싱긋 말했다.
"17층의 보스, 거미 여왕 타란툴라와 마주할 시 우리 모두는 죽은 목숨일 테니 말입니다."
* ? ?* ? ?*
그때, 크리스.
밑에 층에 남겨진 이들이 자신을 위해 어떤 삽질(?) 같은 결정을 내렸는지 상상도 못 한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역시, 악마의 영압.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군.'
하지만.
크리스는 눈빛을 빛냈다.
'다행히 버틸 만은 해. 예상대로야.'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영압(靈壓)은 일반적인 위압감과는 전혀 종류가 달랐다.
바로 영혼의 격에 따른 차이에 의한 압력이었다.
필멸자라면, 누구라도 이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하지만 크리스는 달랐다.
'나는 일반 필멸자가 아니니까.'
그때, '악마'가 그 사실을 언급했다.
[신기한 존재로구나. 완성되지 않은 필멸자가 '반마(半魔)'의 격을 지니고 있다니.]
크리스는 성흑을 10할 흡수하며 영혼의 격이 올라가 있는 상태이다.
그러니, 악마의 영혼이 주는 압력에서도 괜찮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금부터 잘해야 해.'
크리스는 속으로 숨을 들이켰다.
그의 힘으로 저 악마를 상대하는 건 당연히 무리였다.
특히, 저 악마는 무려 4계의 일좌였다.
참고로, 악마들은 격에 따라 위계가 나뉜다.
1, 2계의 대악마들은 실재하기보다는 세상을 이루는 관념이나 법칙과도 같은 존재들이라, 사실상 놈은 실존하는 악마 중에서는 최고위 격의 악마였다.
능력 대부분이 봉인된 상태임에도 무려 9성급 마왕과 동일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위대한 존재.
그러니, 놈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면 '계략'을 써야 했다.
정확히는.
'사기를 쳐야 해. 놈이 아이템을 내놓도록.'
악마에게 사기!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한 치라도 삐끗 잘못하는 순간, 그의 영혼은 산산이 조각나 끔찍한 고통 속에서 소멸하리라.
'하지만 가능성이 있어. 난 놈의 약점을 알고 있으니까.'
크리스는 표정을 굳혔다.
두근, 긴장으로 심장이 뛰었지만 무시하고 강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리석구나. 내 정체를 알아보지 못하다니."
[…뭐?]
"난 너와 같은 게헨나 4계(界)의 일좌의 화신. 같은 격의 존재도 알아보지 못하다니. 봉인되어 눈까지 먼 것이냐."
[!!]
놈이 거센 기세로 으르렁거렸다.
[감히. 그딴 황당한 말을 내가 믿을 것으로 생각하는 거냐?]
"그러면? 위대한 권능이 아니라면, 이런 필멸자의 육신이 반마의 격을 입는 게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냐?"
말도 안 되는 사기!
하지만 크리스는 놈이 자신의 거짓말을 꿰뚫어보지 못할 것임을 확신했다.
'놈은 지금 지각이 완전히 봉인되어 있는 상태야.'
인간과 비유하자면, 놈은 오감이 모조리 봉인된 것은 물론 영적인 육감, 주술적 감각, 등이 모조리 차단된 상태였다.
절대 그의 본질을 꿰뚫어보지 못한다.
크리스는 놈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 이야기를 하였다.
"'유희하는 자'의 음모에 당해 이런 비참한 꼴이 되어놓고, 혜안을 모조리 잃기까지 했군."
[!!]
"한때 삼계를 공포에 떨게 하던 '별을 살해하는 자'가 이렇게까지 추락하다니. 안타깝군."
유희하는 자.
별을 살해하는 자.
놈의 과거를 아는 악마나 성좌가 아니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이명들이었다.
'물론, 나는 예외이지.'
용사 일행이 놈을 쓰러뜨린 후, 놈은 이런 비통한 외침을 토했다.
- 삼계를 떨게 하던 나, '별을 살해하는 자'가 이런 처지가 되다니! 간악한 음모로 날 이런 꼴로 만든 '유희하는 자'여! 언젠가 네놈을 나락에 떨어뜨리리라!
덕분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놈이 크리스의 속사정을 알 리가 만무했다.
[말도 안 되는… 4계의 격이 필멸자의 하찮은 육신을 입는 짓을 할 리가 없다!]
강하게 부정하였지만, 크리스는 이미 놈이 자신의 말에 어느 정도 넘어갔음을 눈치챘다.
"간악한 성좌 놈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내가 이런 하찮은 몸을 입은 건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무엇이지?]
"바로, 네놈의 수준에 맞추기 위해서."
크리스는 입술을 삐딱하게 올렸다.
"병신같이 봉인되어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꼴인 네놈을 능멸하는 데는 이딴 하찮은 몸으로도 충분하지 않겠는가?"
[!!]
놈이 분노했다.
공간 전체가 마치 무너질 듯 일렁였다.
봉인된 상태임에도 단지 분노한 것만으로도 이 정도의 힘을 보이다니.
크리스의 몸이 본능적으로 덜덜 떨리려 하였다.
의지와 상관없는 신체의 반사적 반응.
크리스는 다급히 의선 명가의 비기를 사용해 자신의 신체 반응을 조절하고는 더욱 놈을 자극하는 말을 하였다.
"고작 이딴 걸 힘자랑이라고 하다니. 하찮고 가엽구나."
[!!]
"내 진체(眞體)가 강림하면 발 하나만 들어도 네놈의 영혼을 짓밟는 것은 일도 아니거늘. 어디서 감히 같잖은 힘자랑을 하는 것이지? 마지막 경고이니, 내 자비를 시험하지 말아라."
효과가 있는 것일까?
놈은 힘을 거두었다.
여전히 분노한 기색인 듯했지만, 이전처럼 겉으로 드러내지 못했다.
[네놈이 진정 4계의 일좌라면, 왜 온 것이냐? 정확한 용건을 말하여라.]
"유희 때문이다."
[…뭐?]
"무료한 억겁의 세월 동안, 지루함을 달랠 장난감을 찾다가 네놈의 존재를 떠올렸다."
의외로 통할 핑계였다.
무료함은 악마들의 행동 이유의 가장 큰 원천이니까.
악마들이 인간의 영혼을 거두고, 세상에 혈겁을 일으키는 건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단순히 그게 '재밌기' 때문이었다.
"네놈에게 하나의 내기를 제안하겠다. 만약, 나와 내기를 하여 네가 승리한다면, 네 봉인을 풀어주도록 노력해보마."
[!!]
놈이 동요했다.
[그게 무슨…? 암천 3계의 의지에 반하겠다는 거냐?]
크리스는 그 말에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암천(暗天).
게헨나와 천계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이 지하 정원은 성좌와 악마가 합작하여 만든 것이란 뜻이었다. 그것도 3계 이상의 지극히 높은 존재가.
"그래서 말하지 않았느냐? 노력해 보겠다고. 확답은 못 한다. 단,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마."
[…큭큭. 날 능멸하려 하는군. 어차피 불가능한 일을.]
"싫다면, 하지 말도록 하여라. 어차피 내가 아쉬울 것은 없으니까."
놈의 이야기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크리스가 뭔 수로 놈의 봉인을 풀어준다는 말인가?
심지어 내건 보증도 사기였다.
'필멸자인 내 '이름'을 걸어봤자 별다른 의미도 없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크리스는 놈이 자신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까마득한 억겁의 시간 동안 처음으로 다가온 유일한 희망이었으니까.
그게 설사 거짓말이라도 놈은 쉽게 뿌리치지 못할 거다.
과연.
[…네놈이 이기면 뭘 해줘야 하는 거지?]
"간단하다. 네 스스로 소멸하도록."
[!!]
"어차피 소멸해도 금방 다시 부활하지 않는가? 네놈에게 손해 볼 것은 없을 텐데?"
그렇다.
놀랍게도 이 지하 정원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마물들이 리셋되었다.
방문자가 각 층의 보스들을 소멸시켜도 곧 똑같이 출현하는 이유였다.
수련을 위해 방문하는 입장에서는 편하고 좋은 일이지만, 막상 이 지하 정원에 갇힌 마물들에게는 죽음으로도 탈출할 수 없는 끔찍한 지옥과도 같은 곳.
[…왜 이런 내기를 제안하는 거지? 어차피 이런 일을 해봤자 네게 이득이 될 것은 전혀 없을 텐데.]
"말하지 않았느냐?"
27층을 클리어해 최초 클리어 보상 아이템을 얻는 게 목적인 건 당연히 절대로 밝혀서는 안 된다.
대신, 크리스는 악마에 어울리는 답변을 하였다.
"재밌으니까."
[!!]
"한때 삼계를 떨쳐 울리던 네놈이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참혹하게 몸부림치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어서다. 나와 같은 격의 악마의 비참한 모습은 어떤 유희보다 달콤할 테니까."
두근. 두근.
심장이 뛰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제 놈이 받아들이냐, 마냐였다.
'만약, 놈이 받아들이지 않고 힘을 사용하면 끝이야. 곧바로 튀어야 해.'
튈 방책은 준비해 놓았다.
바로 공간의 가위.
앞서 말했듯 원래 공간의 가위로 탈출을 도모하는 건 불가능하다. 높은 확률로 공간의 미아가 되어 죽음을 맞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가능했다.
''전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까지는 아공간의 변수가 잠잠할 거야.'
공간 이동도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도 50% 미만의 확률이겠지만.'
크리스는 초조한 마음을 숨기며 놈의 결정을 기다렸고.
[…좋다. 네놈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좋았어!' 놈의 입에서 씁쓸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네놈이 그저 날 능멸하려는 거라고 해도, 나에게는 어떤 선택 사항도 없겠지.]
아마.
놈은 크리스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눈치챈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또한 자신의 비참한 운명이라고 여기고 순응한 듯했다.
[그러면, 어떤 내기를 할 거지? 설마 하찮은 인간 놈들처럼 종목을 정해 시합이라도 하자는 건 아니겠지?]
"그건, 당연히 아니다. 간단히 하지."
크리스는 입술을 삐딱하게 들어 올렸다.
"내 '진명'을 말해봐라."
[!!]
"기회는 얼마든지 주지. 내 진명을 밝히면 너의 승리이다."
놈은 잠시 침묵했다.
[이해할 수 없는 내기이군. 네놈이 4계의 일좌가 맞는다면, 내가 모르는 이가 아닐 터. 그런데 진명을 맞혀 보라고?]
4계는 게헨나에서도 상위의 계.
악마의 숫자도 많지 않다.
만약, 놈이 자신이 아는 모든 악마의 진명을 모조리 언급하면 그걸로 내기는 끝이다.
크리스가 4계의 악마가 아니었음이 밝혀지고 내기는 무효로 돌아갈 거다.
하지만.
'이런 내기를 제안한 이유가 있지.'
크리스가 짠 계략… 아니, 사기의 하이라이트였다.
"넌 절대 내 진명을 맞히지 못할 거다."
[큭큭.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군. 좋다. 시작해보지.]
놈은 하나하나 자신이 아는 4계의 일좌들의 진명을 말하기 시작했다.
크리스는 매번 고개를 저었다.
머지않아.
놈이 모든 4계 악마들의 진명을 말하였고, 크리스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저었다.
제85화
"틀렸다. 아니야."
[…아니라고? 4계의 지각이 변동되지 않는 한, 새롭게 일좌가 된 이는 없을 텐데?]
놈이 낮은 음성을 내었다.
[역시, 네놈은 4계의 일좌가 아니었구나. 감히 나를 능멸하다니.]
싸늘한, 영혼을 에이는 기세가 흘러나왔다.
당장에라도 크리스의 육신을 산산이 토막 낼 것만 같은 기세.
쩌릿 위기감이 올라왔지만, 크리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아니, 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진실이라고? 웃기는구나. 이미 모든 4계의 진명을 말했거늘.]
"아닐 텐데? 네가 이야기하지 않은 이름이 하나 있지 않나?"
[무슨. 이미 모든 진명을 언급하였거늘.]
"글쎄, 잘 생각해보는 게 좋을 거다. 과연, 모든 진명을 언급한 게 맞는지. 네가 언급하지 않은 이름이 분명 하나 있을 거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순간, 놈이 멈칫하였다.
떠오른 거다.
어떤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건지.
"이제 알겠나? 네가 뭘 놓친 건지."
크리스가 저벅 걸음을 옮겼다.
놈을 향해서.
놈과 가까워질수록, 크리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형언할 수 없는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믿을 수 없게도 마치 아까 놈이 뿜어내었던 영압과 같은 위압감이었다.
그 영혼의 압력을 느낀 놈의 음성이 파르르 떨렸다.
[어, 어떻게… 이건? 이 느낌은…?]
"그래, 맞다."
크리스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화악, 거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놈에게 익숙한.
절대로 착각할 수 없는 기운.
바로 '놈'의 기운이었다.
"내 진명은 '이스타로트'. 네놈의 진체이다. 이 가짜야."
놈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놈의 영혼이 갑자기 미친 듯 요동쳤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그런…! 거짓말. 마, 말도 안 돼. 으아아아아아아!!!!!!]
비명과 함께 산산이 허무에 흩어지기 시작한 거다.
끔찍한.
이해할 수 없는 광경.
크리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통했어.'
이런 일이 일어난 이유는 간단했다.
놈이 사실 진체가 아닌, 가짜, 클론이었기 때문이다.
놈뿐이 아니다. 이곳 지하 정원의 상위급 보스들은 모두 현실에 존재했던 누군가의 클론체였다.
'자신의 존재에 의문을 품는 순간 곧바로 소멸하여 '리셋'하게 되어 있지.'
이걸 알게 된 건 용사 일행과 28층을 도전할 때였다.
28층의 보스는 세상의 진리를 꿰뚫어보는 혜안을 지닌 초고위 지성체였고, 황당하게도 자신의 존재에 끝없이 의문을 품으며 소멸과 재생을 반복하고 있었다.
'끔찍한 장면이었지.'
크리스는 새삼 이 지하 정원을 만든 존재들에게 소름이 끼쳤다.
게헨나와 천계에서도 최상위 계(界)에 존재하는 초월의 격들.
그들은 어째서 이런 기이한 미궁을 만든 것일까?
'어쨌든 걱정했는데, 도박이 통했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크리스가 이런 연기를 한 건, 놈에게 자신의 존재에 의문을 품게 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굉장히 위험한 도박이었다.
하나의 도구가 없었다면 그도 감히 이런 일을 꾸미지 못했을 거다.
'성좌의 휘장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지.'
일전, 극독 마가와의 유물 탐사 때 빼돌린 성유물이었다!
성좌의 휘장은 '은닉의 휘장'이란 이명으로도 불렸다.
즉, 위장 기능을 지닌 유물이었다.
'성좌의 휘장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상대의 본질을 흉내 낼 수 있는 거지.'
위장 마법처럼 외양과 기세를 닮게 하는 게 아니었다.
영혼의 본질 자체를 일시적으로 상대와 똑 닮게 변화시키는 거다.
물론, 놈이 완전한 상태였다면 성좌의 휘장을 써도 속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지각이 봉인되었고, 크리스가 밑밥을 깔아 연기해둔 덕에 속아 넘어가게 되었다.
그때, 낯선 음성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유적에 속한 무(無)속성 정령의 음성이었다.
[27층을 '최초' 클리어하였습니다!]
[지하 정원 명예의 전당에 당신이 이름과 업적, 이명(異名)이 기록됩니다!]
허공에 촤르륵 문자가 떠올랐다.
명예의 전당에 기록될 내용이었다.
크리스티앙 반 배런 카자르
업적 : 27층 최초 개척
이명 : '악마를 희롱한 자'.
크리스는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이명이 거창한데.'
나쁘지 않았다.
이 내용이 밖으로 퍼지면, 암흑 마가는 물론 남방 마도국 전체가 발칵 뒤집히리라.
그리고 크리스가 기다리던 음성이 들렸다.
[당신에게 최초 클리어 업적 보너스가 주어집니다!]
'좋았어!' 27층 클리어는 지금껏 누구도 해내지 못한 업적이었다.
물론, 마왕급의 존재면 27층을 정석으로 클리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왕급의 존재가 되면 어깨에 짊어진 책임이 많아 이런 위험한 도전을 함부로 할 수가 없어 미개척으로 남아 있었던 거다.
파앗!
드디어 크리스가 바라던 보상이 내려왔다.
작은 목함이었다.
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열어보니 익숙한 모양의 반지가 들어 있었다.
다섯 개의 원형 문양이 새겨진 탁한 회색빛 반지. 원형 문양 중 하나에서 희미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뱀파이어릭 링.'
무려 최상급 유물이었다.
수많은 유물 중 최상위로 꼽는 유물.
'지금도 강력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위력이 강해지는 성장형 유물이야.'
용사 일행의 9성급 대마법사 라냐가 가장 아끼던 유물이니 그 성능은 의심할 바가 없었다.
'특히 내게 딱 맞는 물건이야.'
이 유물의 성능을 최대로 활용할 수 있는 건 대마법사 라냐보다도 도리어 크리스였다.
아직 개방 1단계에 불과할 뿐이지만, 이 유물을 쓰면 크리스는 순간적으로 힘을 최대 3할 이상 증폭시킬 수 있었다.
2단계까지 개방을 이루면 5할 이상 증폭도 가능할 거고.
이후로도, 추가 개방을 할 때마다 또 다른 능력들이 있는 대단한 유물이었다.
'비장의 한 수가 될 거야.'
크리스는 순간 1공자 셰라드를 떠올렸다.
과연, 그를 죽일 수 있을지.
'아직은 무리야. 그래도 머지않았어.'
조금 더 성장하고.
뱀파이어릭 링의 추가 개방을 이루면 그때는 셰라드의 목을 칠 수 있을 거다.
'반드시 죽이겠어.'
크리스는 무거운 눈빛으로 다짐했다.
어쨌든 이제 슬슬 돌아갈 때였다.
너무 시간을 끌면 소멸하였던 악마가 리셋하여 되살아날 거다.
'전이로 돌아가야 하니, 열쇠 먼저 찾고.'
27층 열쇠의 위치는 용사 일행과 탐사할 때 찾아봐 이미 알고 있었다.
루이나에게 줄 적당한 보물 하나를 챙긴 후, 전이를 발동하려는 순간이었다.
'음? 이거 뭐야?'
27층의 열쇠는 최상층의 열쇠답게 추가 기능이 있었다.
전이를 발동할 때 아래층들의 상황을 살필 수 있는 기능이었는데, 크리스는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쟤네들은 왜 저기서 난리를 치고 있어?"
쥬피엔, 마리사, 카슈미르.
거기에 사이먼까지.
17층의 보스 거미 여왕 타란툴라와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심지어 모두 목이 떨어지기 일보 직전의 위급한 상태였다.
* ? ?* ? ?*
"조심하십시오!!"
콰아앙!!
카슈미르의 외침과 함께 거대한 폭발이 주변을 휩쓸었다.
이미 엉망으로 흐트러진 행색의 쥬피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네 마법 요란해."
"죄, 죄송합니다."
"죄송해하지 말고 잘 막기나 해."
거미 여왕이 낳은 새끼 거미들이 끝도 없이 몰려들고 있었다.
말이 '새끼'이지, 하나하나가 망아지만 한 크기였다.
지닌 힘 자체는 1마급 마수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숫자가 수백, 수천… 아니, 무한대이면 이야기가 달랐다.
죽여도 죽여도 끝없이 새로운 새끼 거미가 나타났다.
더구나 더욱 큰 문제.
새끼 거미들의 어미, 거미 여왕이었다.
허리 위 상반신은 인간과 비슷하게 생겼다.
심지어 얼굴은 고혹적인 여인의 것과 닮았다.
하지만 하반신 아래는 완전한 괴물의 것이었다.
집채만큼 커다랗고 흉측한 몸체가 연결되어 있었다.
수십 쌍에 달하는 다리가 커다란 장창처럼 꿈틀거렸다.
6마급 마수.
거미 여왕 타란툴라의 위용이었다.
"이런, 곤란하군요. 수지가 안 맞는다고 생각은 하긴 했지만."
핏!
사이먼의 어깨에서 핏줄기가 튀어 올랐다.
거미 여왕이 내뿜은 실에 상처를 입은 거다.
"이렇게 손해인 일이었을 줄이야."
크리스티앙을 구하러 왔는데, 크리스티앙은 온데간데없고, 거미 여왕과 혈투만 벌이게 되었다.
사이먼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새끼 거미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우우웅!
새끼 거미들의 얼굴이 부풀어 오르더니 풍선이 터지듯 터져 나갔다.
상대의 체내에 깃든 피를 이용해 폭발을 일으키는 혈종술, '피의 폭발'이었다.
수백에 달하는 새끼 거미들이 한 번에 몰살하며 순간 정적이 흘렀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다시 꾸역, 꾸역 새끼 거미들이 출몰했다.
거기에 '의념'의 실을 뻗으며 기회를 노리는 거미 여왕까지.
사이먼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짜증 나는군. 이게 웬 사서 고생인지.'
이대로라면 모두 몰살이다.
'하나 방법이 있긴 하지만.'
사이먼은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채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이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쥬피엔, 마리사, 카슈미르.
세 명문가의 새끼들.
'저들을 피의 제물로 바치면 거미 여왕쯤이야 가뿐할 텐데.'
혈종술은 흑마법도, 마공도 아니다.
'기술(奇術)'이다.
어떤 특정한 형태도 없이 피를 이용해 다양한 현상을 구현하는 기이한 술법.
따라서 다른 흑마법이나 백마법에는 없는 다양한 술법들이 존재했다.
그중 사이먼이 가장 장기로 펼치는 건 '피의 인신 공양'.
다른 이의 피를 자신을 위한 제물로 바쳐 힘을 증폭하는 거다.
'모두 고귀한 피를 이었으니, 효과도 좋겠지.'
꿀꺽.
갑작스럽게 치밀어 오르는 미칠 듯한 흡혈 충동.
당장 저 새끼들의 목을 물어뜯고 싶다는 유혹이 들었다.
거리낌 따위는 없었다.
원래도 사이먼은 타인의 생명을 벌레처럼 취급하는 말종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러면 크리스티앙 공자님과 적이 되겠지.'
사이먼은 지그시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이들을 죽여도 크리스티앙은 모를 거다.
하지만 과연 계속 모를까?
지나가는 가벼운 단서 하나만으로 모든 걸 유추할 재지를 지닌 그 미친 도련님이?
'물론, 크리스티앙 공자님과 적이 되어도 상관은 없긴 하지만. 아니, 그건 그것 나름대로 재미있을 것 같긴 하군.'
크리스티앙이 자신을 죽이려 드는 상상을 한 사이먼은 쿡쿡 웃음을 흘렸다.
그것도 매우 흥미로울 것 같긴 했다.
하지만.
"우리 이드린느한테 소개해 주어야 할 수도 있는데, 그건 조금 곤란하겠지."
파앗!
사이먼이 손을 휘두르자 피의 비가 내렸다.
피에 맞은 새끼 거미들의 몸이 치직 타오르며 처참하게 죽음을 맞았다.
"세 분. 제 이야기가 들립니까?"
세 명은 귀를 쫑긋했다.
"이대로라면 몰살입니다. 물론, 저야 살아날 방법이 있지만 세 분께서는 반드시 죽게 될 겁니다."
결국, 최악의 상황이 오면, 사이먼은 이들의 목숨을 제물로 사용할 거다.
"그러니 작전을 짜겠습니다. 쥬피엔 공녀님과 마리사 공녀님은 새끼 거미들을 제압해 주십시오."
제86화
쥬피엔과 마리사는 고개를 굳게 끄덕였다.
"그리고… 카슈미르 공자님이 중요한데, 저 거미 여왕의 외갑을 뚫을 수 있겠습니까? 외갑을 뚫기만 하면 나머지는 제가 의념기(意念技)로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의념.
'강기'가 의지를 현실로 발현한 것이라면, '의념'은 의지로 법칙에 극한에 달하는 힘을 발현하는 것을 뜻한다.
문제는 사이먼이 사용하려는 의념기는 발동 조건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번 경우에는 거미 여왕의 외갑을 뚫어야 했다.
'과연 카슈미르 공자가 해낼 수 있을지는.'
사이먼은 눈을 가늘게 떴다.
솔직히 어려웠다.
카슈미르 공자의 경지는 4성 중(中).
절대로 낮지 않은 성취였지만, 상대가 너무 강했다.
"어려운 건 압니다. 하지만 반드시 해내야 합니다. 살아남고 싶다면요."
"…알겠습니다."
카슈미르가 딱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파앗!
카슈미르가 앞으로 돌진했다.
원거리에서 파괴 흑마법을 펼쳐봤자 거미 실을 이용한 방어에 막히니 근거리에서 강력한 마법을 터트릴 계획인 거다.
새끼 거미들이 카슈미르를 막기 위해 몰려들었고, 쥬피엔과 마리사가 카슈미르를 엄호했다.
이윽고.
근거리에 도착한 카슈미르가 손을 펼쳤다.
거미 여왕이 수없는 발을 움직여 그를 공격했지만, 피하며 마법을 발동시켰다.
참고로, 카슈미르는 하급 마인에서부터 올라간 이라 근거리 전투에도 익숙했다.
고오오오.
강렬히 몰아치는 마기의 소용돌이.
파괴 마가 4성의 경지.
형질 변환.
바람의 소용돌이에 얼음의 기운이 깃든다. 닿은 모든 걸 부식시키는 저주의 얼음이었다.
그가 사용 가능한 술법 중 가장 강력한 관통력을 지닌 흑마법.
'러스티드 혼!'
얼음과도 같은 바람의 창날이 쇄도했다.
이윽고 외갑이 꿰뚫리려는 순간.
거미 여왕이 분노한 포효를 내었다.
파창창!!!
수없는 거미의 실이 외갑 위로 피어올랐다.
파괴의 창은 더는 나아가지 못하고 허무하게 부러졌다.
'아.'
퍼억!
거미 여왕의 발이 카슈미르를 후려쳤다.
다급히 몸을 틀어 목숨을 잃는 건 피했지만, 중상이었다.
'역시 안 되는군.'
사이먼은 혀를 찼다.
예상은 했지만, 무리였다.
'차라리 크리스티앙 공자님이었다면, 가능했을지도.'
말도 안 되는 생각.
크리스의 경지는 아직 4성에도 이르지 못했다. 저 거미 여왕에게 타격을 주는 게 가능할 리가.
하지만 사이먼은 늘 미친 일을 해내는 크리스티앙이라면, 이번에도 또 놀라운 일을 해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파라락!
상황이 급변했다.
거미 여왕이 거칠게 울부짖음을 내뱉으며 손을 뻗은 거다.
거미 실이 허공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거미 여왕의 의념기, 무한의 절망.'
저 실은 단순한 물리적 성질의 실이 아니었다.
거미 여왕의 의지가 담겨 무한히 확장하고, 닿는 모든 걸 분쇄하는 의념의 실이었다.
'곤란하군. 곤란해. 수지가 이렇게 맞지 않는다니.'
사이먼이 찌익 송곳니로 자신의 손목을 물어뜯었다.
동맥이 뜯기며 피가 분수처럼 솟았다.
허공으로 떠오른 핏방울들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더니, 기화되어 미세한 입자로 나뉘어 사방으로 퍼졌다.
그러자 피의 입자에 닿은 거미 실이 우뚝 멈추어 섰다.
'얼마 못 버티겠군. 이제는 정말 결정해야겠어.'
사이먼은 스산한 눈빛을 하였다.
크리스티앙이 오지 않는 한.
아니, 사실 와도 무리였다.
사이먼의 눈에 지쳐 숨을 몰아쉬고 있는 쥬피엔, 마리사, 카슈미르 세 명이 들어왔다.
세 명 중 최소 두 명은 제물로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이 정도면 할 만큼은 한 것 같으니까.'
결정을 내린 사이먼이 먼저 카슈미르의 목을 뜯으려고 작정한 순간이었다.
생각지 않은 음성이 들려왔다.
"…지금 다들 뭐 하고 계신 겁니까?"
"!!"
모두의 눈이 커졌다.
시선을 돌리니, 얄밉게 잘생긴 소년이 그들을 한심하다는 듯 보고 있었다.
"…왜 다들 여기서 난리 치고 계신 건지."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르는 말을 처하면서.
* ? ?* ? ?*
'널 구하려고 온 거잖아!'
모두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크리스도 황당하긴 마찬가지였다.
'아니, 난 전혀 위험하지 않았는데, 왜 시키지도 않은 이런 삽질을.'
덕분에 고생만 하게 생겼다.
'어쩔 수 없지. 못 본 척할 수도 없고. 도와줘야지.'
저들이 들으면 또다시 울컥할.
얄밉기 그지없는 생각이었다.
크리스는 저벅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괜찮으십니까? 총집사께서 고생하셨군요."
사이먼이 입술을 씰룩했다.
"아직까지는 괜찮습니다만. 보시다시피 상황이 좋지 않군요. 그러니, 공자님께서 저들 세 명 중 누구 한 명을 죽일지 선택하십시오."
"네?"
"세 명 중 한 명은 죽여 제물로 바쳐야 할 것 같으니 말입니다. 원래는 최소 두 명은 바쳐야 했겠지만… 공자님께서 오셨으니, 한 명 정도로 어떻게 해 보겠습니다."
소름 끼치는 이야기.
상대가 버젓이 듣고 있는데 제물로 바치겠다고 이야기를 하다니.
하지만 사이먼은 원래도 일반적인 도덕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였다.
'크리스티앙 공자가 싫어할까 봐 지금까지 참았던 거니까. 이제 동의를 받고 죽이는 거니, 척을 지게 될 거라는 걱정도 할 필요 없겠지.'
사이먼은 곧 있을 흡혈이 기대되어 입술을 핥았다.
크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네?"
"저 거미 여왕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총집사께서 지금처럼 붙들어 주고만 있으시면요."
그 말에 사이먼은 당황한 얼굴을 하였다.
"공자님? 거미 여왕은 6마급 마수입니다. 아무리 공자님이 대단하셔도…."
물론, 아까 잠깐 생각하긴 했었다.
크리스티앙이면 혹시 또 미친 기적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다.
사이먼이 바랐던 기적은 크리스티앙이 '틈'을 만들어주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거미 여왕을 직접 처치하겠다고?
"압니다. 제 수준으로는 무리이지요. 그러니 부탁하는 겁니다. 잠시만. 딱 몇 초 정도만 지금처럼 거미 여왕의 움직임을 붙들어 주십시오."
크리스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거미 여왕의 목을 자르겠습니다."
"...."
사이먼은 침묵했다.
불가능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빈말하는 게 아니야.'
크리스의 흑적빛 눈동자는 어떤 일말의 의심도 품지 않고 있었다.
강하게 빛나는 확신.
사이먼은 자신도 모르게 쿡쿡 웃음을 흘렸다.
'재밌군. 재밌어. 역시 미친 도련님이야.'
애초에.
크리스티앙의 저런 미친 면 때문에 그를 구하려 이런 고생을 자처했던 것 아닌가?
"알겠습니다. 단, 반드시 해내야 합니다."
사이먼이 송곳니를 빛내며 웃었다.
"실패해 죽으면 열위종으로 되살려 이드린느에게 노리개로 보내버릴 테니까요."
크리스는 침묵했다.
좀비처럼 이성 없이 움직이는 최하위 뱀파이어를 뜻한다.
'…농담해도 이따위 끔찍한 농담을. 아니, 사이먼이면 실제로 하고도 남지. 반드시 성공해야겠군.'
저벅, 발걸음을 옮기는데 그를 붙드는 손길이 있었다.
"아, 안 됩니다, 공자! 차라리 제 목숨을 저 뱀파이어에게 바치겠습니다!"
카슈미르였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이런 일이…!! 모든 책임을 지고 제가 죽는 게…!!"
카슈미르는 죄책감에 참혹한 얼굴이었다.
크리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음, 사실 다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긴 한데.'
애초에 처음 열쇠를 발동해 전이를 일으킨 것 자체가 크리스가 한 짓이었다.
가만히 놔두었으면 카슈미르는 죄책감에 열쇠를 발동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쨌든.
'이건 또 기회이지.'
"카슈미르 공자, 고개를 드십시오."
"사실, 함정에 빠지고 배신감을 느끼긴 했지만, 그래도 절 위해 이렇게 위험을 감수하신 것을 보고 공자의 뜻이 아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공자의 잘못을 용서하겠습니다."
카슈미르의 잘못인 척, 용서해주기!
카슈미르의 반응은 당연히 극적이었다.
"아… 아… 크리스티앙 공자, 당신은 어찌 이리…."
카슈미르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감동을 넘어 왈칵 마음이 무너진 모습.
"!!"
크리스는 씨익 웃었다.
"그러면 절 믿고 지켜봐 주십시오."
크리스는 앞으로 저벅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또 방해가 있었다.
이번엔 마리사였다.
"바보 같은 짓 하지 마. 네가 아무리 잘났어도 거미 여왕은 무리야."
크리스는 잠시 마리사를 보았다.
여기저기 해지고 다친, 잔뜩 고생한 모습.
'…얘는 왜 날 구해주러 온 거지.'
카슈미르야 원체 본성이 착하니 그렇다고 쳐도 다른 이들은 모두 뜻밖이었다.
"그런데 왜 왔어? 구해주러 와달라고 한 적 없는데."
"…뭐? 이…!!"
마리사의 얼굴이 바락 붉어졌다.
이번 만남 처음부터 쌓였던 울분이 터지려는 찰나.
크리스가 툭 하고 말했다.
"뭐, 어쨌든 고마워."
"...."
마리사가 입을 우뚝 다물었다.
울분으로 화악 달아올랐던 얼굴이 사르르 가라앉았고, 이번엔 다른 의미로 얼굴빛이 변하였다.
"차, 착각하지 마. 난 여전히 너를…."
"응, 알아. 나 싫다는 거지? 나도 다시 약혼 이야기를 꺼낼 생각은 전혀 없으니 걱정하지 말고."
"...."
"새끼 거미들이 걸리적거리지 않게 독으로 엄호나 해줘."
"…그래."
마리사가 처음과 다르게 싸늘하게 답했다.
마지막 쥬피엔.
그녀는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내며 뚱하니 말했다.
"나한테는 고마워할 필요 없어."
"응, 안 고마워."
"…너 싸가지 없어."
"이제 알았어?"
"너 언젠가 내가 반드시 짓뭉개줄 거야."
쥬피엔은 격전 중에 반 토막 난 검을 꺼내 들었다.
"갈 거지? 같이 가."
"왜?"
"말했잖아. 널 쓰러뜨릴 사람은 나라고. 그러니 이런 곳에서 죽게 놔둘 수는 없지."
크리스는 쿡쿡 웃었다.
왜일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든지."
저벅, 발걸음을 옮겼다.
마기가 끓어올랐다.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파앗!
크리스의 몸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조심!!"
카슈미르가 깜짝 놀라 외쳤다.
하지만 크리스는 멈추지 않았다.
'충분해. 할 수 있어.'
이전의 크리스였다면.
절대로 이렇게 자신 있게 나서지 못했을 거다.
아무리 사이먼이 거미 여왕의 움직임을 멈춘다고 해도 크리스의 원래 힘으로는 거미 여왕의 외갑을 베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라.'
손에 낀 회색빛 반지, 뱀파이어릭 링 때문이었다.
반지의 움푹 파인 원에서 희미한 회색빛이 돌았고, 크리스의 움직임이 변하였다.
그러니까.
빠르고, 강해졌다.
거미의 실이 날아들었지만, 전혀 닿지 못했다.
'크리스티앙 공자의 움직임이 저렇게 좋았나?'
사이먼은 놀라 생각했다.
마지막에 봤을 때와 확연히 달랐다.
경지가 더 올라간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마치 일시적으로 힘을 증가시키는 약이라도 먹은 듯, 체력, 근력, 마기가 증폭한 느낌이었다.
'어떻게? 아무리 천재라도 단기간에 기초 능력을 증폭시키는 건 불가능한데?'
정확히는 기초 능력이 올라간 게 아니었다.
뱀파이어릭 링의 효능은 고작 기초 능력을 올려주는 게 아니었다.
제87화
크리스티앙의 장기는 그가 천재란 점이었다.
단순히 성취가 빠른 점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크리스티앙은 같은 능력을 지니고도 활용하는 응용력이 달랐다. 범인의 몇 배에 달하는 효율을 내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훨씬 열세인 체력, 근력, 민첩성, 마기 등을 가지고도 효율적으로 움직여 자신보다 강한 이들에게 승리를 거두는 거다.
하지만 단점도 있었다.
바로, 이룬 경지에 비해 기초 능력치가 다소 떨어진다는 점이다.
어쩔 수 없는 점이었다.
이런 기초 능력치를 기르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물론, 그는 이런 면에서도 천부적인 자질을 지니고 있어서 남들보다 훨씬 적은 시간으로도 압도적으로 빠르게 능력치를 올릴 수 있지만, 아무래도 아쉬운 점이 있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크리스티앙이 보이는 모습은 그런 부족한 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훨씬 뛰어났다.
3성 상임에도, 4성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은 움직임.
사이먼은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마기를 사용해 신체 능력치를 증폭시키고 있어. 하지만 저렇게 무리해서 증폭해서는 금방 한계가 올 텐데? 왜 저런 어리석은 행동을?'
크리스도 무리한 신체 능력 증폭은 금물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하지만 그는 거리끼지 않았다.
뱀파이어릭 링의 능력 덕분이었다.
'이 유물의 이명은 변환의 링.'
이름 때문에 흡혈 기능의 유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전혀 아니었다.
이 유물의 성능은 바로 외부의 기운을 흡수해 착용자에게 맞는 기운으로 전환시켜 주는 것이었다.
'유물의 개방을 이룰수록 흡수할 수 있는 기운의 종류, 효율이 늘어나지.'
아직, 1단계.
어처구니없게 흡수할 수 있는 기운의 종류가 '신체 내부'의 기운으로 국한된다.
영약 등이라도 먹지 않는 한 무용지물.
대마법사 라냐는 3단계 개방까지 이룬 다음에야 실전에서 이 유물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크리스는 달랐다.
크리스는 흡수할 수 있는 내부의 기운이 있었으니까.
바로, 이중 코어에 숨겨둔 연합 쪽의 광휘의 마나였다.
우웅.
뱀파이어릭 링이 보이지 않게 진동했다.
크리스의 이너 코어(inner core)에 깃든 광휘의 마나가 뱀파이어릭 링에 흘러들었고, 그 광휘의 마나는 암흑 마기로 변환되어 크리스의 아우터 코어(outer core)에 송치되었다.
'이 정도면 코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마기야.'
크리스는 끝없이 마기의 코어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사이먼의 생각대로 크리스의 기본 능력치는 부족하다.
특히 체력, 근력 등 기본 신체 능력치가 그러했다.
하지만 '마기'와 '마나'도 그럴까?
마기와 마나를 각각 따로 놓고 보면 그렇다.
크리스의 마도의 마기는 3성 상의 경지에 비해 살짝 적었고, 연합의 마나는 5성 진이란 경지에 비해서 많이 부족했다.
하지만 그 둘을 합칠 수 있다면?
부족함은 사라진다.
오히려 기준보다 차고 넘친다.
'물론 이것도 한계가 있지만.'
일단 효율.
뱀파이어릭 링으로 흡수한 기운은 30%만 전환된다.
이 수치는 유물의 추가 개방을 이룰수록 올라간다.
그리고 시간.
무리해서 외부의 기운을 끌어들이는 거라 일시적으로 코어에 과부하가 걸리게 된다. 따라서 이 상태를 오래 유지할 수는 없었다.
훗날 성취가 올라가 코어의 내구력이 올라갈수록 이 한계는 점점 극복할 수 있으리라.
'지금은 1~2분 정도가 한계인가.'
충분했다.
파앗!
크리스의 검이 새끼 거미들을 베었다.
처리하지 못한 건, 뒤를 따라온 쥬피엔과 마리사가 해결했다.
순식간에 거미 여왕의 밑에 도착했고, 크리스가 외쳤다.
"지금 부탁합니다!"
사이먼이 의념기를 발동했다.
피의 포획.
아까처럼 사이먼의 팔에서 피의 분수가 솟았고, 기화해 입자로 변한 피가 거미 여왕의 움직임을 붙들었다.
거미 여왕은 입을 쩍 벌린 상태로 완벽하게 멈추었다.
마비도, 주박도 아니었다.
법칙을 넘어 완벽하게 '정지'한 거다.
놀라운 일.
하지만 강력한 만큼 한계가 있었다.
"오래는 안 됩니다. 단번에 처리하십시오."
기회는 단 몇 초.
그 안에 거미 여왕을 죽이지 못하면, 끝이다. 도리어 크리스가 죽임당할 거다.
하지만 할 수 있었다.
파앗!
흑검이 치솟았다.
그리고 흑검에 담기는 의지.
의지를 담은 흑검이 거미 여왕의 목을 쳤다.
쩌억!
놀랍게도 거미 여왕의 목은 실선이 갔을 뿐 멀쩡했다.
의지를 담은 크리스의 흑검이 흑강기의 절반 정도의 위력을 지니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믿을 수 없는 내구력이었다.
사이먼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역시! 지금에라도 물러서십시오!"
아직은 물러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크리스는 몸을 빼지 않았다.
'할 수 있어.'
우웅.
뱀파이어릭 링이 다시 울었다.
이너 코어에 깃든 광휘의 마나가 암흑 마기로 전환되며 아우터 코어에 차올랐다.
'더, 더.'
크리스는 이를 악물었다.
무리한 전환으로 마기를 담는 아우터 코어가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아우터 코어가 한계에 이를 때까지. 마치 댐이 무너지기 직전에 이를 때까지, 마기를 담았고.
이윽고, 버티지 못한 아우터 코어가 균열을 일으키기 직전의 찰나.
흑검을 다시 움직였다.
파아아아앗!!!!
코어에 터질 듯 담겼던 마기가 흑검의 형태로 폭사하였다.
그 광경을 본 사이먼을 비롯한 이들은 눈을 찢어질 듯 크게 떴다.
'저건 흑검 변환?!'
4성의 경지.
단순히 흑검을 발현하는 것을 넘어 흑검을 여러 형태로 변환시켜 응용하는 단계.
'벌써 4성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3성 상이 된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아니, 그건 아니었다.
아직 크리스의 경지는 3성 상이었다.
그저 이건 '의지'의 발현이었다.
'의지를 흑검에 실을 수 있다면 흑검에 한계 이상의 마기를 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해.'
의지는 한계가 정해지지 않은 무한한 힘이다.
그러니, 그 의지를 버팀목 삼아 흑검에 한계 이상의 마기를 싣는다.
그게 지금 크리스가 해내고 있는 일이었다.
물론, 남들이 들으면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냐고, 멍멍이 소리 하지 말라고 이야기할 일.
'몰라. 그냥 되는 거 어떻게 해?'
크리스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강하게 기합을 내었고.
베려는 '의지'가 그의 검에 담겼다.
한계 이상의 마기.
마치 강기와도 같은 강대한 의지.
그 결과,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쩌적.
거미 여왕의 목이 갈라지더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크리스는 바닥에 쓰러졌다.
"쿨럭, 커억!"
무리한 마기와 의지를 담은 대가로 흑검은 산산이 흩어져 사라졌고, 크리스는 내상을 입어 왈칵 피를 토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끝났어.'
목 아래만 남은 거미 여왕의 몸체가 부르르 떨리더니, 산산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거미 여왕뿐이 아니었다. 새끼 거미들도 마찬가지로 사라졌다.
층을 클리어한 거다!
한편, 사이먼은 크리스가 방금 해냈던 광경을 보며 경악한 얼굴을 했다.
'방금, 그것. 도대체 뭐였지?'
마리사, 쥬피엔, 카슈미르는 경지가 낮아 그저 크리스가 흑검 변환 비슷한 것을 해냈다고만 여기는 듯했지만, 사이먼은 아니었다.
그는 정확히 크리스가 해낸 일을 꿰뚫어 보았다.
저건 흑검 변화 따위가 아니다.
'흑검에 의지를 싣고, 그 의지에 다시 마기를 담아 증폭시켰어. 하지만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어떻게?'
강기를 다루는 이들은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건 강기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강기는 의지를 구현한 힘이니까.
일개 마기의 덩어리일 뿐인 흑검으로 어떻게 저런 일을 해냈단 말인가?
크리스가 저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단 하나.
그가 미친 재능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아니, 저걸 단순히 재능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건가.'
사이먼은 침을 꿀꺽 삼켰다.
크리스티앙이 천재인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전율이 일었다.
재능의 한계가 없는 듯했다.
'노가주님이 이 광경을 봤으면, 과연 어떤 얼굴을 하셨을지.'
사이먼은 확신했다.
이번 자신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고.
크리스티앙이 있는 한, 앞으로도 지루할 일은 없을 것 같다고.
그리고 궁금증이 치밀어 올랐다.
과연, 저 미친 재능의 천재가 앞으로 어떤 기적을 이루게 될지.
사이먼은 홀린 듯 크리스를 향해 걸어갔다.
"괜찮으십니까, 공자님?"
"아, 네."
"하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크리스는 의아한 얼굴을 하였다.
"제게 혈종술을 배우지 않으시겠습니까?"
"!!"
크리스는 놀란 얼굴을 했다.
'사이먼이 왜?'
혈종술은 뱀파이어들 사이에서만 전해져 내려오는 비전 술법이었다.
어지간해서는 외부인에게 전수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암흑 마가에서도 사이먼이 혈종술을 가르쳐준 이는 1공자 셰라드밖에 없었다.
"어째서입니까?"
"그냥… 별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변덕입니다."
사이먼이 싱긋 웃었다.
"공자님이 강해질수록 재밌을 것 같아서요."
"...."
"그리고 공자님의 재능이면, 셰라드 공자와도 좋은 경쟁 상대가 될 것 같기도 하고요."
크리스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
사이먼에게 혈종술을 배우면 아무래도 셰라드와 얽힐 일이 많아질 거다.
하지만 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야. 더 강해져야 해.'
그는 암흑 마기의 소유자다.
그것도 순도 100%의.
다양한 마기의 힘을 익힐수록 더더욱 강해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 혈종술은 원래부터 탐내던 힘이었으니까.'
저주, 환술, 파괴, 마련 등등처럼 외부에 어느 정도 비기가 공개되어 있는 비술들과 다르게 혈종술은 이런 기회가 아니면 접할 수가 없었다.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좋군요. 앞으로 기대하겠습니다."
사이먼이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들어 올리는 순간이었다.
허공에서 유적에 속한 무속성 정령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17층을 클리어하였습니다!]
[최초 업적이 아닙니다!]
[클리어 보상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예상한 대로의 음성이었다.
원래 클리어 보상은 최초 개척자에게만 주어지니까.
그런데.
[대단한 업적을 이룬 도전자가 있음을 확인합니다!]
[도전자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은 업적을 달성했음을 확인합니다!]
[도전자의 이름과 업적, 이명이 명예의 전당에 기록됩니다!]
'음?' 뜻밖의 내용이었다.
허공에 무속성 정령이 연출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크리스티앙 반 배런 카자르
업적 : 8층 초과 업적
이명 : '계란으로 바위를 깬 자'.
크리스가 원래 도전 가능한 수준은 9층 정도였다.
그런데 무려 8단계 위의 보스를 척살했으니 명예의 전당에 기록된 거다.
'나 혼자의 힘만으로 한 건 아닌데. 뭐, 나쁠 건 없겠지.'
명성이야 높을수록 좋았다.
특히 27층 악마를 소멸시킨 건 정확한 사정을 밖에 떠들기 어려우니, 거미 여왕의 목을 벤 일로 명성을 높이면 좋으리라.
'그나저나 이제 가서 쉬고 싶다. 술! 술! 술! 한 잔만 딱 안 될까?'
고리타분한 암흑 마가의 영역 밖이니 술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슬그머니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또 정령음이 울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불가능한 기적을 두 가지나 이룬 도전자의 업적을 비경(?境)이 공유합니다!]
['유리 호수'에 도전자의 업적이 전달됩니다!]
"...??"
사이먼을 비롯한 이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듣는 지명이었다.
하지만 단 한 명 알아듣는 이가 있었다.
크리스였다.
'잠깐, 유리 호수가 여기서 왜 나와?'
그는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는 유리 호수가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었다.
'연합의 '예언자'가 머무는 은신처잖아.'
연합을 지탱하는 일곱 명의 9성 초인, 칠존(七尊).
예언자는 그중 한 명이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저긴 검술 명가의 비밀 장소잖아.'
제88화
연합 제일 명가.
검술 명가 마이어가.
그곳에 크리스의 이름이 전달된 거다.
참고로, 검술 명가는 용사 에반의 가문이기도 했다.
* ? ?* ? ?*
마도 제국은 대륙의 정중앙에 자리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중북부였다.
마도 제국의 서쪽에는 '신성 제국'이.
남쪽에는 '골드 크로스'가.
동쪽에는 '카른 제국'이 있었다.
그렇게 연합의 거대 세 개 세력이 지형적으로 마도 제국을 포위하듯 감싸고 있는 형태였다.
마도 제국에서 저 멀리 떨어진 남동쪽.
'골드 크로스'와 '카른 제국'의 사이에 울창한 숲이 있었다.
검술 명가 마이어가의 개인 숲이었다.
외부인의 출입은 일절 차단된 금지.
그곳에 묵직한 인상의 중년 남자가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8성 경지에 이른 초인이자, 검술 명가의 부가주.
연합 내에서도 손에 꼽는 강자이자 고귀한 신분이었지만, 남자의 얼굴은 딱딱히 굳어 있었다.
마치 상대하기 어려운 이를 만나러 가듯.
당연했다.
그가 만나려는 이는 '예언자'였으니까.
마도 제국의 위협에서 연합을 지탱하는 위대한 기둥 중 하나.
숲 깊숙이 들어가자 놀라운 광경이 나타났다.
푸른빛이 일절 없이 유리처럼 투명하게 빛나는 호수.
현재와 미래, 과거가 교차한다는 검술 명가의 비경 '유리 호수'였다.
예언자는 이곳에 은거해 있었다.
[왔느냐?]
"네,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허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부가주는 고개를 공손히 숙였다.
예언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예언자는 천견(淺見)을 통해 늘 미래를 살피고 있기 때문에 남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드물었다.
[흉조가 있어서 불렀다.]
"!!"
흉조라니.
부가주가 무거운 안색을 하였다.
[곧 마도 제국으로부터 커다란 재앙이 닥칠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오래전부터 다가올 재앙을 예언하였다.
하지만 누구도 그 예언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평화가 너무 길었던 탓이다.
다들 나태함에 빠져 있었다.
'이미 마도 제국의 힘은 연합을 뛰어넘은 지 오래야.'
마도 제국이 끝없이 내부에서 힘을 기르고 있을 동안, 연합은 흥청망청 쇠락하고 있었다.
마도 제국이 서로 나뉘어 싸우고 있기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세상은 진즉 마인들의 손에 떨어졌을 거다.
[보다 구체적인 미래를 엿볼 수 있었다. 마도 제국의 어떤 이가 세상의 파멸을 도래하게 하는지. '위대한 암흑'이 어디의 존재인지.]
원래 예언자는 사왕성을 지목했다.
사왕성으로부터 겁화의 불길이 일어날 거라고.
그런데 얼마 전… 약 1년 안 되는 시간 전부터 예언이 뒤바뀌었다.
사왕성으로부터 재앙이 시작되는 건 맞았다.
하지만 세상을 진정으로 멸망하게 할 이는 다른 이였다.
바로, '위대한 암흑'.
예언자의 '천견'에 따르면, 훗날 이 세상은 '위대한 암흑'의 손에 멸망하게 된다.
"'위대한 암흑'은 어디의 존재입니까?"
[암흑 마가다.]
"!!"
부가주는 놀란 눈을 했다.
뜻밖의 지목이었다.
"하지만 암흑 마가라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곳 아니었습니까?"
노가주 노르디언을 제외하고는 별달리 신경 쓸 만한 이가 없었다.
내부에서부터 천천히 쇠락해가는 가문. 그게 암흑 마가에 대한 연합의 평이었다.
[확실하다. '위대한 암흑'은 암흑 마가의 인물이야. 머지않은 미래에 암흑 마가에서 새로운 마왕이 될 이다.]
부가주는 다시 놀랐다.
"암흑 마가에서 새로운 마왕이 나올 거란 말씀입니까?"
근 100년 동안 암흑 마가는 새로운 마왕을 배출한 적이 없었다.
'도대체 누가?'
부가주는 생각을 더듬었다.
가주 노르디언? 요주의 경계 대상이긴 했다.
하지만 수명이 이미 거의 다했다.
'그러면 가주 대리인 랑함 후작이나 방계 삼가의 으뜸인 슈펜 후작?'
노가주를 제외하면 암흑 마가의 최강자들이었다.
하지만 둘 모두 마왕이 될 재목과는 거리가 있었다.
'다음 대의 공자들? 하지만 모두 너무 어리지 않은가.'
예언자는 '머지않은' 미래에 마왕이 될 이라고 하였다.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혹시 누구인지까지는 엿보지 못하셨습니까?"
[이 이상의 정보는 엿보지 못했다. 마치, 내 관측을 위대한 누군가 방해라도 하듯.]
"방해라니."
부가주의 얼굴이 무거워졌다.
미래를 엿보고 있는 천견을 인위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이는 한 종류였다.
성좌나 악마.
그 말은 예언자가 지목한 '위대한 어둠'을 천계와 게헨나에서도 주목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단, 단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입니까?"
[유리 호수로 하나의 신호가 왔다. 크리스티앙 반 배런 카자르란 인물의 정보였다.]
부가주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배런'은 암흑 마가의 이름이다.
단, 크리스티앙이란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 얼마 전 공자가 된 아이라고 했던가? 원래 망나니였다가 개과천선했다는.'
부가주는 어렴풋이 지나가듯 들었던 보고를 떠올렸다.
'골드 크로스의 저주받은 왕자의 이름과 비슷해 기억하고 있었지.'
저주받은 왕자.
누구보다도 고귀한 핏줄을 이어받은 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혈통들이 합쳐져 잉태한 씨앗.
하지만 태어나기 전부터 악마의 씨앗이라는 죄목을 뒤집어쓰고 온갖 박해를 받은 불운의 왕자였다.
'결국, 얼마 전 사망했지. 그러고 보니 묘하군. 크리스티앙 반 배런 카자르가 변한 시점이 저주받은 왕자가 갑자기 사망한 시점과 일치해. 뭐, 우연이겠지만.'
어쨌든, 세상의 온갖 정세를 샅샅이 수집하는 부가주이니 크리스티앙의 이름을 들어보았지, 연합의 다른 이들은 누구도 모를 이름이었다.
[남방 마도국의 비경 지하 정원에서 대단한 업적을 세웠다더구나. 나이와 성취로는 불가능한.]
"그 말씀은 그자가 '위대한 암흑'일 거라는 말씀입니까? 하지만 너무 어리지 않습니까? 이제 갓 열여섯 살 정도 된 아이라고 하던데."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미성년 아이.
예언자는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확실하지는 않다. 이건 유리 호수로 보내온 정보에 따른 추측일 뿐이니. 그렇게 나이가 어리면 아닐 가능성이 높겠구나.]
'위대한 암흑'에 대해 확실한 건 단 두 가지.
암흑 마가의 인물이라는 것.
그리고 머지않은 미래, 그러니까 짧으면 5년, 길어도 10년 안에는 마왕이 될 거라는 것이다.
[그래도 크리스티앙이란 어둠의 종자를 한번 확인해보는 게 좋을 것 같구나. 느낌이 좋지 않아.]
부가주는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예언자와의 만남을 마친 부가주는 유리 호수를 빠져나와 고민에 잠겼다.
'곤란하군. 크리스티앙 반 배런 카자르라.'
부가주는 예언자의 추측과 다르게 크리스티앙이 예언의 주인공일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판단했다.
너무 어렸으니까.
'성취도 얼마 전 3성이 되었다고 했지. 천재라고 하였지만, 그래도 마왕이 되는 건 무리야.'
멀고 먼 미래.
그러니까 수십 년이 지난 후라면 모르겠다.
하지만 예언자가 말한 머지않은 미래에는 절대로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조사를 안 할 수도 없고.'
예언자가 당부한 거니, 확인은 해야 했다.
문제는 이 임무가 지극히 위험하다는 거다.
'무려 암흑 마가의 공자야.'
비록 새로운 초강자들이 등장하지 않아 쇠락하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지만, 그렇다고 암흑 마가의 세력이 약한 건 절대로 아니었다.
암흑 마가는 연합의 어지간한 왕국 몇 개는 합친 것 정도의 막강한 전력을 지니고 있었다.
'임무를 맡은 이는 십중팔구 목숨을 잃게 될 게 분명해.'
가능성도 낮은 일에 가문의 전력을 낭비하자니, 고민이 되었다.
'과연, 누구를 보내야?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있으면서도, 죽어도 상관없는 이가….'
금방 적임자가 떠올랐다.
뛰어나지만.
차라리 죽어 없어지는 게 검술 명가를 위해 나은 인물이 한 명 있었다.
"그 아이를 불러오도록."
수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곧 한 명의 인물이 등장했다.
다부진 인상의 미청년이었다.
하지만 죽은 듯 가라앉아 있는 눈동자가 눈에 띄었다.
"부르셨습니까, 숙부님."
"그래, 너에게 시킬 명령이 있어서 불렀다."
"무엇이든 명하십시오. 저는 가문의 '그림자'일 뿐이니."
자조 섞인 음성.
말처럼 남자는 검술 명가의 그림자였다.
절대 양지에 나올 수 없는, 검술 명가의 더러운 일을 처리하는 자들.
남자의 원래 혈통은 절대로 그림자와 어울리지 않았지만, 하늘이 내린 잔인한 운명은 남자를 비극으로 이끌었다.
"크리스티앙 반 배런 카자르란 인물을 조사하여라."
"배런…이면, 암흑 마가입니까?"
죽을 자리인 것을 안 걸까?
남자는 잠시 침묵했다.
부가주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부연 설명을 하였다.
"예언자께서 명령하신 중요한 임무이다. 세상에 도래할 멸망을 막기 위한 일이야."
"…그렇습니까?"
"그래."
부가주는 짧게 말할 수 있는 선에서 예언자와의 대화를 말해주었다.
장차 '위대한 어둠'이란 존재가 세상을 멸망시킬 거라고. 크리스티앙이란 아이가 그 '위대한 어둠'일 가능성이 있다고.
"그러니, 만약 가능하다면 척살해라."
"...."
이유야 어쨌든 암흑 마가의 인물을 척살하라니.
가서 죽으라는 이야기와 같았지만, 남자는 체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그래. 지금 바로 출발하도록."
부가주와 헤어진 이후, 남자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리도록 차가운 달빛이 눈을 찔렀다.
'내 삶도 여기서 끝이군. 그나마 세상을 위하는 의미 있는 일에 목숨을 바쳐서 다행인 건가.'
남자는 씁쓸히 생각했다.
그렇게 남자.
검술 명가의 그림자 '에반 드 마이어'는 암흑 마가로 떠났다.
훗날 용사라 불리게 될 이였다.
* ? ?* ? ?*
한편, 그때 공자 회담에 참여했던 크리스 일행은 큰 곤경에 빠져 있었다.
"우웩!"
"우욱!"
다들 변소 통을 붙잡고 구토를 하고 있었다.
쥬피엔, 마리사, 카슈미르 모두.
구토를 일으키는 세균 독에라도 당한 듯한 모습이었다.
멀쩡한 이는 단 한 명, 크리스뿐이었다.
'…그렇게 술을 처먹으니 당연한 꼴이지.'
크리스는 황당한 얼굴을 하였다.
그러니까,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원래 크리스는 곧바로 암흑 마가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다른 일행들이 우물쭈물하였다.
- 저… 이대로 헤어지는 겁니까. 크리스티앙 공자님께 제대로 감사의 인사도 하지 못했는데.
- 흥, 너와 이대로 헤어지는 게 아쉬운 게 아니라, 그저 제대로 공자 회담을 못 한 것 같아 임무를 다하려는 것일 뿐이야.
- 난 가도 되는데.
그러니까 2차… 뒤풀이 회식을 바란 거다!
'…무슨 꿈과 희망의 마도 랜드도 아니고, 뭔 놈의 뒤풀이야.'
하지만 이들의 의견도 일리가 있긴 했다.
공자 회담은 원칙적으로 친목을 다지는 자리이니까. 회담 때 마음이 통할 경우 뒤풀이를 하기도 하였다.
"알겠습니다. 하죠, 뒤풀이."
그렇게 크리스도 동의했다.
사실, 흑심이 있었다.
'이 기회에 나도 술을 먹는 거야! 맥주, 위스키, 와인! 다 죽었어! 취해 멍멍이가 될 때까지 마셔주겠어!'
하지만 개뿔.
제89화
이번에도 크리스의 손에 들린 건 진저에일이었다.
- 죄송하지만, 저희 가게는 미성년에게 술을 팔지 않습니다.
고지식한 건 파괴 마가 영역의 술집도 마찬가지.
다른 이들도 난색을 표했다.
- 공자? 술은 조금 이릅니다.
- 훗. 아직 애기네.
- 누나라고 불러봐.
'빌어먹을 마도 놈들. 무슨 놈의 마인이 정직하고 고지식하기가 연합 놈들보다 더해!'
그렇게 크리스를 빼놓고 흥청망청 술을 마셨고, 그 결과는 이거였다.
다들 술독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렇게 종류별로 퍼마시더니. 꼴좋다.'
명가의 귀한 자제들답게 마시는 술도 하나같이 최고급 술이었다. 이전 삶 때 꼭 먹어보고 싶었던 술들이 자신의 앞에서 남의 배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만 구경한 크리스는 심기가 좋지 않았다.
심지어 취한 인물 중에는 사이먼도 있었다.
사이먼은 해장으로 소의 피를 마시러 가겠다며 사라진 상태다.
해장에는 소 피가 최고라나?
'다들 잘들 한다.'
크리스는 입술을 씰룩거리며 카슈미르에게 다가갔다.
이제 곧 헤어질 테니, 용무를 마쳐야 했다.
"카슈미르 공자."
"크, 크리스티앙 공자… 추태를 부려 죄송… 우웁."
크리스티앙은 눈썹이 찌푸려지는 것을 참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여기 술독에 좋은 약입니다. 드셔 보십시오."
"아아, 이런 것까지. 공자께서는 어찌 그리 따듯하신 겁니까. 이 카슈미르. 이번에 공자께 입은 은혜,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숙취에 시달리는 폐인의 모습으로 그리 말해봤자, 별달리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부러워서 밉게 보이는 거 아니다. 정말로.
'제길, 나도 숙취에 시달리고 싶다. 생강 싫어.'
크리스는 속마음을 삼키고는 말했다.
"…그리고 또 드릴 게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의선 명가의 화선단(火扇團)입니다."
"!!"
카슈미르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애타게 바라던 약이었다.
극심한 음기에 생명력이 고갈되어 가고 있는 그의 어머니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약.
"어, 어떻게 이 약을…?"
"일전에 경매장에서 우연히 구했던 약입니다. 딱히 쓸 만한 일이 없어 가지고만 있었는데, 어제 술자리에서 카슈미르 공자의 사정을 듣고 드리는 겁니다."
경매장에서 구하긴 했다.
루이나가 구해온 재료로 만든 거니까.
"고, 공자님…."
카슈미르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의 눈동자에 물기가 차올랐다.
'세상에 어떻게 저런 분이 있단 말인가?'
처음 만난 순간부터 크리스티앙에게 끝없이 은혜를 입고만 있었다.
자신은 그를 죽이려고 했는데 말이다.
"저, 저는… 공자님께 이 물건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크리스티앙이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공짜는 아닙니다. 아무리 우리가 친구가 되었다고 해도 이런 비싼 물건을 대가 없이 드릴 수는 없지요."
"그, 그렇지요! 바라는 게 있다면,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제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
카슈미르가 허겁지겁 답했다.
그런데.
"살아남으십시오."
"!!"
크리스티앙이 묵직한 눈빛으로 카슈미르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스스로에게 어떤 큰 고난이 닥칠지는 짐작하고 계실 겁니다."
크리스는 안다.
카슈미르가 어떤 일들을 겪을지.
"공자께 다른 건 바라지 않겠습니다. 그저 어떤 일을 겪더라도 무너지지만 마십시오. 버티고 살아남아, 훗날 공자를 핍박했던 놈들에게 한 방 먹여 주십시오. 그게 제가 바라는 겁니다."
"...."
카슈미르는 입을 다물었다.
느껴졌다.
진심으로 자신을 위하는 크리스의 마음이.
왈칵 흔들리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카슈미르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공자님이 베푼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진심이었다.
이 순간, 카슈미르는 다짐했다.
훗날, 크리스티앙에게 자신의 목숨이라도 바치겠다고.
그렇게 카슈미르는 크리스에게 완전히 자신의 마음을 바쳤다.
다음엔 마리사였다.
"넌… 음. 술은 좀 깼어? 어제 일 기억나? 주사가 심하던데."
마리사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기억났다.
그녀는 어제 만취해서… 엉엉 울면서 크리스티앙에게 온갖 악담과 욕을 퍼부었다.
- 이, 나쁜 놈아! 나쁜 놈! 죽일 놈!!
크리스는 팔짱을 꼈다.
'…마리사는 아직도 이 몸에 유감이 많군.'
욕 말고도 기타 뭐라, 뭐라고 마리사가 떠들기는 했는데 완전히 횡설수설하는 술 취한 꼬부랑 언어라 욕 외에는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자, 여기 술 깨는 약."
"…고마워."
마리사는 평소와 다르게 얌전히 약을 받았다.
"…어제는 미안해. 취해서."
"네가 나 싫어하는 건 어제오늘 일도 아닌데, 뭘 새삼스럽게."
"...."
마리사가 입술을 씰룩했다.
하지만 뭐라고 이야기는 안 하고 고개를 돌렸다.
"더 할 말 있어?"
"응, 몸조심하라고."
"…갑자기 무슨 말이야?"
"극독 마가에 널 죽이려는 이가 있는 것 같으니까 알고 있어."
마리사의 얼굴이 굳었다.
"지하 정원에서 있었던 일. 극독 마가도 연관이 있을 거야."
아마 이번 일은 프레시아 후작 부인이 파괴 마가에 사주한 것일 거다.
목표는 크리스티앙의 목숨.
하지만 단순히 그럴까?
'극독 마가의 용인이 없었다면, 파괴 마가도 선뜻 나서지 못했겠지.'
극독 마가 쪽에서도 마리사가 죽길 바랐던 거다.
"…알고 있어. 그딴 것."
마리사가 차분히 답했다.
"날 죽이려는 이가 너무 많아 특정도 할 수 없을 정도인걸. 새삼스럽지도 않아."
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괴 마가나, 극독 마가나 사정이 복잡한 건 명가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신경 써줘서 고마워."
마리사가 작게 말했고, 크리스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마차로 가니, 핼쑥한 안색의 쥬피엔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한테는 술 깨는 약 안 줘?"
"우리 경쟁자잖아. 그런데 너한테 약을 왜 줘?"
"너 마음에 안 들어."
"자, 대신, 방금 오다 주운 사탕."
쥬피엔은 찌릿 크리스티앙을 노려보더니 사탕을 우물 깨물고는 눈을 크게 떴다.
술이 확 깨었던 거다.
크리스는 피식하고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이제 암흑 마가로 돌아갈 차례였다.
'카슈미르가 과연 잘 이겨낼지.'
크리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더는 자신이 개입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과거처럼 최악으로 처참하게 무너지지는 않을 거로 생각했다.
'그나저나, 카슈미르 말고도 신경 써야 할 놈이 있는데.'
크리스는 속으로 이름을 말했다.
'용사 에반 놈.'
한창 검술 명가에서 박대받고 있을 때였다.
문제는 머지않은 미래에 에반에게 커다란 사달이 일어난다는 거다.
'간신히 목숨은 건지지만. 거의 폐인 직전의 신세가 되어 엄청나게 고생하지.'
그 일만 아니었다면, 에반은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을 거다.
'개입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검술 명가는 너무 멀어. 그림자로 음지에서 활동하고 있을 테니 만나기도 어려울 거고.'
문제는 또 있었다.
'지금은 에반이 한창 개차반인 시절 아니었나?'
미래의 에반은 용사답게 공명정대 강직한 성격이었다.
물론, 그런 성격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연기인 부분이 많았고, 실제 깊은 속마음은 은근 까칠한 편이었지만, 최소한 겉으로 남들에게 보이는 성격은 용사의 이름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이 시기의 에반은 세상만사 모든 게 삐딱한 삐뚤어진 상태라고 했다.
쉽게 자신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을 거다.
- 크리스, 너 같은 친구가 있었다면 그때 내 곁에 있었다면, 나도 조금은 덜 힘들었을 텐데.
에반이 술에 취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긴 하지만.
글쎄.
크리스는 회의적이었다.
지금 에반은 자신이 어떤 말을 해주어도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그만큼 상황이 좋지 않으니까.
'그래도 미래를 위해 개입할 수 있으면 개입하는 게 좋을 텐데. 한 번 도움을 받으면, 평생 잊지 않을 스타일이기도 하고.'
에반 또한 충견 같은 면모가 있었다. 절대로 은혜를 잊지 않는.
카슈미르와는 조금 스타일이 다르긴 하지만.
'카슈미르가 말 잘 따르는 순한 충견 같다면, 에반은… 음. 여러모로 만만치 않은 더 부담스러운 스타일이지. 충견은 충견이지만, 까칠한 충견?'
크리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반의 일은 어쩔 수 없을 것 같았다. 도와주고 싶어도 개입할 방법이 없었다.
지금은 암흑 마가에서 있을 일에 집중해야 했다.
크리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돌아가면 많은 게 변해 있겠군.'
크리스의 예상대로였다.
마차를 타고, 게이트를 통해 암흑 마가로 돌아가니 난리가 나 있었다.
모두가 크리스티앙의 이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의 위상이 수직 상승해 있었다.
* ? ?* ? ? *
지하 정원은 남방 마도국 전체에 유명한 유적이다.
수련에 열정적인 마인이라면, 다들 한 번쯤 방문해본 곳.
그래서 크리스티앙이 이번에 해낸 일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다들 알고 있었다.
"거미 여왕의 목을 쳤다고? 어떻게? 크리스티앙 공자님은 아직 3성의 경지 아니신가? 사이먼 총집사님이 처리한 것 아닌가?"
"그건 아니라고 해. 사이먼 총집사님께서 말하길 본인은 조력만 했을 뿐, 거미 여왕을 소멸시킨 건 크리스티앙 공자님이 맞다고 하더군."
"허, 참. 믿을 수가 없군."
"그뿐이 아니야. 개척자가 되다니? 27층을 혼자 클리어했다는 것 아닌가? 도대체 '악마를 희롱한 자'란 이명은 뭐지?"
"중간에 사고가 생겨 27층으로 이동했다고 해. 그곳에서 악마의 시험을 받아 시험을 통과했다고 하더군."
자세한 사정을 말할 수 없으니, 크리스는 27층의 이야기를 대충 이런 식으로 둘러대었다.
이야기를 들은 이들은 다들 경악한 얼굴을 하였다.
"악마의 시험을?! 그게 가능한 일인가? 악마와 마주하면 정신을 유지할 수도 없을 텐데?"
"크리스티앙 공자님이 보통 분은 아니지 않은가?"
"하긴…."
암흑 마가의 마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등장부터 지금까지.
늘 불가능한 기적과 더불어 어마어마한 파란을 일으키고 있는 크리스티앙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악마의 시험을 통과하다니. 도대체 어떤 시험이었기에?"
"그건 악마와의 맹약으로 말할 수 없다는군. 분명한 건, 27층을 클리어하는 것만큼 어려운 시험이었을 거야."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 정도의 극악한 시험이 아니면, 27층을 개척한 것으로 인정받지 못했을 테니까.
"도대체 크리스티앙 공자님은?"
다들 불가해한 괴물을 보듯 크리스티앙 쪽을 바라보았다.
순간,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
'정말, 후계 승계에 이변이 일어나기라도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여전히 크리스티앙은 모든 후계 사이에서 가장 뒤처져 있다.
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이런 생각을 하는 이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크리스티앙을 눈여겨 지켜봐야겠다고.
한편, 크리스는 그런 마인들의 시선에 씨익 미소를 지었다.
'반응 좋네. 프레시아 후작 부인이 수작을 부려준 덕에 최고의 기회를 얻었어.'
제90화
만약, 프레시아가 아니었다면, 뱀파이어릭 링을 얻지도, 카슈미르의 마음을 얻지도 못했을 거고, 마인들의 주목을 받기도 어려웠을 거다.
결과적으로 최고의 선물을 받은 격.
'답례로 효도 선물이라도 드려야 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네. 나름대로 큰어머니이니.'
프레시아가 들으면 속이 터질 이야기를 태평하게 하면서 유유자적 걷고 있을 때였다.
그를 막아서는 이가 있었다.
"…이봐."
마마보이 마이삭이었다.
그가 잔뜩 찡그린 얼굴로 흉흉하게 크리스티앙을 노려보았다.
"기고만장하지 말아라. 조만간 직접 네놈의 목을 베어 개들의 밥으로 던져줄 테니까."
거친 협박.
하지만 크리스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면박이라도 주었겠지만, 그냥 물끄러미 마이삭을 바라만 보았을 뿐이었다.
'이놈, 왜 이렇게 만만해 보이지?'
물론, 크리스티앙은 마이삭을 이전에도 만만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엔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전혀 위협이 느껴지지 않아. 마치… 나보다 약한 놈을 보는 것 같은.'
뜻밖의 이야기.
마이삭은 4성이다.
객관적인 능력치만 보면 3성인 크리스보다도 우위에 있었다.
잔뜩 살기를 끌어올리고 있으니, 뭐라도 위협이 느껴져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그러니까.
가소로웠다.
마치, 자신보다 약자가 귀엽게 날을 세우고 있는 걸 보는 것처럼.
한편, 마이삭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크리스를 보는데, 단단한 벽을 마주한 것 같았다.
협박하고 있는데, 도리어 크리스티앙에게 위협이 느껴졌다. 마치 맹수의 눈빛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둘이 그런 느낌을 받는 이유는 간단했다.
'나, 강해졌구나.'
지하 정원에서의 경험 때문이었다.
크리스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미 벽을 넘을 자격을 얻었어. 남은 건 수습하는 것일 뿐.'
크리스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 4성의 경지에 발을 들인 거다!
다만, 워낙 급격한 성취라 불균형이 생겨 아직 3성의 굴레에 머무르고 있을 뿐이었다.
'대충 불균형을 수습만 하면 되겠군. 그러면 바로 4성에 도달하겠어.'
3성이 된 지 6개월도 되지 않았는데, 4성에 오르게 되었다니.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천재를 초라하게 만들 미친 속도였지만, 크리스티앙은 별다른 감흥 없이 마이삭을 향해 입을 열었다.
"비켜."
"!!"
마이삭은 놀랍게도 주춤 뒷걸음쳤다.
기세에 밀린 거다.
본능적으로 느낀 것일 수도 있었다.
이제 크리스티앙이 자신의 위라는 것을.
"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크리스가 딱딱하게 얼어 있는 마이삭을 삐뚜름하게 바라보았다.
"앞으로 또 귀찮게 하면, 그때는 죽인다."
"...!!"
싸늘한 눈빛이 마이삭의 심장을 꿰뚫었다.
"명심해."
진심이었다.
프레시아가 그를 함정에 빠뜨려 죽이려고 했을 때부터, 이미 선을 넘긴 상태다.
크리스티앙은 적당한 때에 기회를 봐서 마이삭을 죽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차피 살려두어 봤자, 두고두고 후환이 될 놈이야.'
크리스의 진심을 느낀 걸까.
마이삭은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침만 꿀꺽 삼켰다.
크리스는 마이삭을 놔두고 거처에 돌아왔다.
[오호호… 도련님 오셨사옵니까? 소녀, 도련님이 오시기만을 간절히 기다렸사옵니다. 왓따하신 소식 들었습니다.]
"응, 반가워."
[그러면, 처녀의 피 주스 한 잔?]
"그것보다 주변을 다 치워줄래? 앞으로 며칠간 아무도 오지 못하게 해줘."
[??]
크리스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할 일이 있어서."
다시 강해질 차례였다.
* ? ?* ? ?*
한편, 마이삭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와장창 가구를 박살 내었다.
"빌어먹을!! 제기랄!!! 건방진 놈!! 반드시 죽여주마!!!"
자신이 그딴 놈에게 위협을 느꼈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고 성을 내고 있는 거다.
시종들은 오돌오돌 떨 뿐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이런 날 잘못 걸리면 송장을 치우게 되니까.
과연, 마이삭은 눈빛을 희번덕거리며 분을 풀 희생양을 찾았다.
시종들이 덜덜 떨고 있을 때.
차가운 음성이 들렸다.
"이게 무슨 짓거리냐?"
"어머니!"
프레시아가 인상을 찌푸리더니 손을 들었다.
짜악!
마이삭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시종들이 숨을 들이켜고는 부리나케 밖으로 사라졌다.
"어, 어머니."
"못난 놈. 이리도 형편없는 모습이라니."
마이삭이 고개를 숙였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프레시아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녀도 안다.
자신의 아들이 부족하다는 것을.
하지만 프레시아는 여전히 마이삭을 붙든 끈을 놓지 못했다.
그녀에게 남은 희망은 마이삭밖에 없었으니까.
"너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암귀대(暗鬼隊)를 붙여주마. 앞으로 넌 공석이 된 암귀대의 임시 대주가 될 거다."
"!!"
"암귀대를 이끌고 공을 세워라."
마이삭은 눈을 크게 떴다.
암흑 마가의 최정예 전투 부대였다.
공작, 테러, 암살 등의 특수 임무에 특화한.
그런 암귀대를 이끌 수 있다면, 수많은 공을 세울 수 있으리라.
"가, 감사합니다. 반드시 그에 맞는 공을 세우겠습니다."
프레시아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일은 프레시아도 굉장히 무리해야만 했다.
남편, 랑함 후작에게 빌어 마이삭에게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무릎까지 꿇었다.
그러고도 정식 대주 자리를 주는 것까지는 무리여서, '임시' 대주 자리밖에 얻지 못했다.
차후, 마이삭이 걸맞은 공을 세워야 정식 대주로 승격할 수 있을 거다.
"공을 세우는 것 말고도, 네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무엇입니까?"
"크리스티앙 놈의 목."
"!!"
프레시아가 싸늘하게 눈빛을 빛냈다.
"임무 도중 암귀대의 힘을 빌려 크리스티앙을 죽여라. 기회는 내가 만들어주마."
* ? ?* ? ?*
크리스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4성의 벽을 넘고 있었다.
의외로 시간이 걸리고 있었다.
그가 일부러 어려운 길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벽을 넘는 건 이전에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어.'
4성, '흑검 변환'.
단순히 흑검을 구현해내는 것을 넘어, 자유자재로 형태를 변환해 응용할 수 있는 경지.
크리스는 솔직히 우스웠다.
'그게 뭐가 어렵다고.'
범재들은.
아니, 천재라 불리는 이들조차 흑검을 현실에 구현하기 위해 여러 기법을 써야만 한다.
기둥 역할을 하는 핵을 세우고, 마공 구결에 따라 마기의 움직임을 유지하고, 심지어 마법진의 도움을 받기도 하는 등.
그런 방법이 편법인 건 아니다.
원래, 3성의 마인들이 흑검을 구현할 때는 그런 방법들을 사용하는 게 교과서적인 정석이다.
4성에 오르는 게 어려운 건, 이런 기법들을 사용하지 않고도 흑검을 구현할 수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
비교도 할 수 없는 난이도였다.
따라서 4성은 마인들이 처음 마주하는 진정한 벽이다.
3성까지는 부단히 노력만 한다면 닿을 수 있었다. 정해진 규칙대로 따르기만 하면 언젠가는 흑검을 구현해낼 수 있으니까.
하지만 4성부터는 노력만으로는 안 됐다.
타고난 재능이 필요했다.
일평생을 바쳐도 해내지 못하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하지만 크리스는 달랐다.
크리스는 처음 흑검을 구현할 때부터 어떤 기법의 도움도 받지 않았다.
그저 타고난 감각으로, 손발을 다루듯 흑검을 사용했다.
그러니 4성의 경지, 흑검 변환도 쉬울 수밖에 없었다.
하고자 한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벽을 뛰어넘고 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부족해. 고작 흑검을 변환해서 무슨 큰 의미가 있다고?'
흑검 변환의 경지에 오르면, 수많은 응용의 수를 낼 수 있게 되지만, 결국 흑검은 흑검일 뿐이었다.
성에 차지 않았다.
'흑검의 한계를 뛰어넘을 방법은 없을까?'
사실 이미 크리스는 흑검의 한계를 넘은 상태긴 했다.
의지를 담은 그의 흑검은 다른 흑검과는 궤를 달리하는 위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여기서 위력을 더 올리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변화라면? 흑검 변환에도 한계가 있어. 그 한계를 무너뜨릴 수는 없을까?'
흑검 변환이라고 표현하지만, 무한히 어떤 형태로든 변환시킬 수 있는 건 아니다.
흑검 방패.
흑검 투창.
흑검 운무.
흑검 편환(編環).
흑검 투염.
등등.
여러 정해진 형태가 있었다.
꼭 그런 한계를 두어야 할까?
원래는 안 된다.
흑검 변환이라고 마음대로 진흙 주무르듯 변형시킬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정해진 규칙에 따라야 한다.
하지만.
'그때, 거미 여왕의 목을 칠 때.'
크리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당시를 반추했다.
한계 이상의 무한한 마기가 깃들었던 흑검.
이는 흑검 변환이 아니다.
그저 크리스의 미친 재능으로 만들어 낸 괴이(怪異)였을 뿐이다.
그러나.
'다르지 않아.'
크리스가 검을 들었다.
파앗!
검이 분열하였다.
쥬피엔이 펼쳤던 분열하는 검을 따라 한 거다.
그저 몇 차례 견식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의 숙련도는 쥬피엔과 비교해 떨어지지 않았다.
불공정한 재능.
심지어 크리스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더, 더.'
열여섯, 서른둘, 육십사.
크리스의 심상 속에서 검이 무한하게 분열하였다.
어떤 실체도 없는 심상 속 환영.
그 무한한 심상의 검 속에서 그는 의지를 움직였다.
그의 의지가 심상 속 검에 깃들었다.
그 의지에 마기가 담겼고, 무한한 검이 모두 실체가 되어 쇄도했다.
세상을 가득 메우는 무한의 검.
"!!"
크리스는 번뜩 눈을 떴다.
'방금 그 심상.'
뭐라고 해야 할까?
고작 흑검 변환 따위가 아니다.
그것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무언가였다.
하지만 이 또한 흑검 변환이었다.
거미 여왕의 목을 벨 때 크리스가 해냈던 게 흑검 변환과 다르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그걸 깨달은 순간, 크리스는 자신이 4성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파앗!
그의 손에서 검은 방패가 피어올랐다.
흑검 방패였다.
하지만 일반적인 흑검 방패와는 달랐다.
그의 방패는 곧바로 기다란 창으로 변환하였고, 다시 채찍 같은 편환으로 변환하였다.
다른 이들이 보면 경악할 장면이었다.
원래 흑검 변환을 구현 후 형태를 다르게 변환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방패, 투창, 편환 등등 각각의 흑검 변화마다 구현하기 위한 구결과 기법이 있어 충돌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각각의 변환은 전혀 공통점이 없는 다른 형태라 원칙적으로 변환 자체가 불가능했다.
다른 형태의 변환을 쓰려면 새롭게 구현해내야 하는 게 당연했지만.
'되는데?'
크리스는 요리조리 변신 장난감을 다루듯 흑검을 변환시켜 보았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무한한 흑검 변환을 해낼 수 있게 된 거다!
4성 상의 경지도 불가능한 일.
'뭐, 그래도 성취 자체는 4성 하(下)이지만.'
그 밖에 뜻밖의 성취가 있었다.
'연합의 경지인 성휘로서 완전한 5성에 도달했어.'
크리스는 손을 뻗었다.
파앗!
완벽한 오러 블레이드가 뿜어져 나왔다.
원래, 그는 5성에 발만 걸치고 있는 진(眞)의 단계였는데, 얼떨결에 완벽한 5성이 된 거다.
5성 하(下)의 경지.
'엘더 나이츠' 클래스가 된 거다.
'아까 그 심상 속 무한의 검 덕분에 연합의 경지도 올라간 건가.'
제91화
크리스는 아쉬움을 느꼈다.
'아까, 그 무한의 검은… 당장은 구현하기 어렵겠지.'
만약, 그 심상의 절반의 절반이라도 구현할 수 있다면 그는 훨씬 강력해질 수 있을 거다.
'더, 더 강해져야 해.'
이미 미친 속도로 강해지고 있지만, 크리스는 늘 초조함을 느꼈다.
앞으로 상대할 적들을 생각하면 지금보다 훨씬 강해져야 했다.
그때, 밖에서 마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죄송한데… 잠시 시간이 괜찮겠습니까?]
"응? 무슨 일이야?"
밖에 나가 보니, 멜린과 알로스가 서 있었다.
알로스는 그간 멜린의 지도를 받으며 잔뜩 고생하였는지,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멜린은 여전했는데, 크리스의 모습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강해지셨군요. 역시, 제가 섬기기로 한 분."
그녀의 눈빛이 위험하게 빛났다.
당장에라도 한판 붙어보고 싶다는 얼굴이라, 크리스는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였다.
"그래, 무슨 일이지?"
"드릴 보고가 있습니다. 마이삭 공자가 암귀대의 대주가 되었습니다."
크리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암귀대?"
"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한 건지 임시 직책이긴 하지만, 정식 대주가 된 거나 다름없죠."
편애를 받는 직계 혈통이 강력한 전투 부대의 간부가 되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문제는 암귀대라는 점이었다.
'왜 하필?'
만약, 단순히 공을 세우기 위한 것이라면 더 적합한 부대가 많았다.
하지만 암귀대는 음지에서 활동하는 특수 부대였다.
'무슨 다른 의도가 있을 텐데. 설마?'
멜린이 같은 생각인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공자님을 노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함께 작전을 수행하다가 암귀대의 힘을 빌려 공자님을 치려는 것이지요."
진실에 부합하는 추측이었다.
암귀대의 능력이면, 쥐도 새도 모르게 흔적을 남기지 않고 크리스티앙을 죽여 없애는 게 가능할 테니까.
"암귀대는 우리 암흑 마가의 전투 부대 중에도 손에 꼽는 전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분간 몸을 사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암흑 마가의 마인 부대는 두 종류로 나뉜다.
첫째, 대규모 기사단.
숫자도 많고 전력의 주축을 이룬다.
둘째, 목적에 따라 나뉜 소규모 전투 부대들.
암귀대는 그런 전투 부대 중 최정예로 꼽히었다.
'일개 '전투 부대'임에도 소속 마인 전원이 3성 이상이라고 하지. 4성 마인도 다수 있고. 그나마 대주는 얼마 전 임무 중 큰 부상을 당해 은퇴했다고 하지만.'
참고로, 원래 암귀대의 대주는 5성의 마인이었다.
마이삭은 부상으로 일선에서 물러선 대주의 후임으로 임명된 거다.
'그나저나, 이 정도면 연합 쪽에서는 왕국 안에서도 손꼽는 기사단 수준인데. 기사단도 아닌, 일개 전투대가 이런 전력을 지니고 있다니.'
크리스는 혀를 내둘렀다.
새삼 마도 제국의 어마어마한 저력이 느껴졌다.
'어쨌든 아무리 내가 4성에 올랐다고 해도 암귀대와 싸워 이기는 건 불가능해.'
하지만.
크리스는 눈빛을 가라앉혔다.
'성휘의 힘을 쓰면 어떨까?'
이제 그는 성휘로서 5성에 이르렀다.
5성부터는 '엘더 클래스'라 불리며 어딜 가나 진정한 강자로 예우받는다.
'5성의 경지인 대주가 있으면, 연합의 힘을 써도 어렵겠지만, 다행히 원래의 대주는 부상으로 물러난 상태야. 그러면, 상대 가능할 수도 있어.'
물론 그렇게 만만하게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대주가 빠졌다고 해도, 나머지 암귀대의 전력도 만만한 게 아니었으니까.
최소가 3성.
4성도 수두룩하다.
부대주는 5성에 바짝 다가선 4성 상(上)의 마인.
이들을 혼자 상대하는 건 아무리 크리스가 성휘로서 5성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쉽지 않은 일.
하지만 그럼에도.
'이길 수 있어.'
이유?
간단했다.
그는 천재이니까.
살짝 밀리는 수준 정도라면 절대 질 리가 없었다.
'도리어 마이삭 놈을 처리할 기회야.'
그렇지 않아도 크리스는 마이삭을 제거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상대측에서 기회를 만들어주면 감사한 일이었다.
'기다리고 있으면 연락이 오겠군.'
과연.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크리스티앙 공자님, 후작 부인께서 부르십니다."
"무슨 일이지?"
"공자님을 비롯한 후계분들께 임무를 내릴 게 있다고 합니다."
"임무?"
시종이 고개를 숙이며 말하였다.
"네, 검술 명가의 그림자가 본가의 영역에 잠입한 것을 포착했다고 합니다. 후계분들께 그 그림자를 추적해 생포하는 임무를 맡긴다고 합니다."
* ? ?* ? ?*
'날 노린 임무야.'
크리스는 곧바로 눈치챘다.
아니라면, 후계들에게 이런 임무를 내릴 이유가 없었다.
그림자를 쫓다 외진 곳에 들어갔을 때 자신을 치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그런데 검술 명가의 그림자가 왜 암흑 마가의 영역에 들어온 거지?'
보통 검술 명가의 그림자들은 연합 내에서 활동하지, 마도 제국의 영역 안까지 들어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검술 명가라는 상징성상, 섣불리 마도 제국의 영역을 침범했다가 큰 문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잘됐어. 암귀대와 마이삭 놈을 처리하고 검술 명가의 그림자 놈에게 덮어씌우면 될 테니.'
마침, 그가 가장 능숙하게 사용하는 검법도 검술 명가의 검법이었으니 딱이었다.
"준비 끝났습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 둘만으로도 괜찮겠습니까? 제가 친분이 있는 다른 동료들을 불러올까요?"
"그, 그렇습니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이번 임무는 다시 생각해 보심이? 아, 아, 제가 겁나서 그러는 게 아니라, 공자님의 안위가 염려되어 그러는 겁니다!"
멜린과 알로스가 각각 말했다.
암귀대가 크리스티앙을 노리는 게 맞다면 위험한 게 사실이었으니까.
심지어, 쥬피엔도 불쑥 찾아오더니 이런 말을 하였다.
참고로, 에쉬드는 부상 때문에, 유리안은 다른 임무 때문에 빠져서 후계 중 마이삭, 쥬피엔, 크리스만 이번 임무에 참여하기로 했다.
"우리 쪽에 탑승시켜 줄게."
"응?"
"같이 얹혀서 다닐 수 있게 해주겠다고."
도와주겠다는 뜻이었다.
쥬피엔 측과 함께하면 암귀대도 섣불리 나서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다 괜찮아. 필요 없어. 대신, 다들 하나만 부탁해도 돼?"
"??"
크리스는 의아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이들에게 씨익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작전의 시작이었다.
* ? ?* ? ?*
파앗!
크리스는 홀로 숲을 갈랐다.
암귀대가 노리고 있는데, 혼자 움직이다니?
'멜린과 쥬피엔들을 이용해 암귀대의 움직임을 교란하기로 했으니까.'
크리스가 부탁한 건 간단했다.
시간을 끌어줄 것.
교란 방법은 여러 마도구 등을 썼다.
암귀대가 표적의 추적에 주로 사용하는 마기 패턴을 쫓는 도구를 역이용해 다른 방향으로 향하게 한 거다.
'내가 직접 개조한 교란 마도구이니, 적지 않게 헤매겠지.'
그 안에 크리스는 검술 명가의 그림자를 붙잡을 계획이었다.
'일단 남들보다 내가 먼저 그림자를 생포해야 해.'
그림자를 잡아 남들이 모르는 곳에 숨겨놓는다.
그리고 자신을 찾아온 암귀대와 마이삭을 처리한 후 그림자의 소행으로 덮어씌운다.
마지막으로 크리스가 그림자를 처리해 최종 공로자가 될 계획이었다.
'마이삭 놈도 처리하고, 공도 얻을 수 있는 일석이조의 계획이지.'
암귀대와 마이삭을 죽인 그림자를 처리한 게 되는 거니 커다란 공을 세우는 격.
'뭐, 그림자는 애초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는 상대이니까.'
그림자는 검술 명가의 어두운 측면의 일들을 처리하는 이들이다.
연합의 부류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온갖 죄악들을 저지른다.
'그런데 에반 놈은 지금 뭐 하고 있지? 한창 그림자로 활동하고 있을 때인데.'
용사 에반을 떠올리자, 크리스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최근에 했던 개고생이 떠오르며 괜히 울컥한 거다.
'원래 이 고생도 내가 아니라, 에반 놈이 해야 할 고생인데. 왜 내가 회귀를 해서는. 다시 만나면 일단 한 대 때려주겠어.'
물론, 그가 회귀한 것에 에반의 잘못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유 따위야 필요 없다.
그냥 에반이 잘못했다.
한 대 때려줄 거다.
'그나저나 이쪽 방향인가? 은신이 굉장히 정석적이군.'
크리스는 잠시 멈춰 수풀이 꺾인 방향을 보았다.
꺾인 방향만 보면 동북부 쪽이었지만, 아니었다.
그림자들이 쓰는 전형적인 추적 교란책이었다.
거기에 몇 가지 더 교란책이 추가되어 있었지만, 크리스가 훤히 아는 방법이었다.
'이 교란책들을 종합해 답을 내리면, 동남쪽으로 가면 되겠군. 그나저나, 별로 유능한 그림자는 아닌 것 같네. 하긴, 그러니 그림자 주제에 이렇게 발각되어 쫓기는 처지가 되지.'
생각해보면, 참 황당한 그림자다.
정보를 들으니, 암흑 마가의 영역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발각되었다고 한다.
'무슨 놈의 그림자가 이리 띨빵해? 사실 그림자 아닌 것 아니야?'
뭐, 어쨌든 중요한 건 아니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크리스는 속도를 늦추었다.
'피?'
놈이 흘린 건지, 점점이 떨어져 있는 피가 보였다.
'추적당하는 중 입은 상처인가?'
피가 굳은 정도를 봤을 때, 멀지 않았다.
근처였다.
'어디?'
파앗!
그 순간, 섬뜩한 일이 일어났다.
나무를 가르고 찬란한 빛의 검이 쏟아진 거다.
흑검에 상응하는 성휘의 검.
'마나 블레이드'였다!
"!!"
크리스는 휙 목을 뒤로 꺾었다.
아슬아슬하게 검이 스쳐 지나갔다.
'사해일섬(死海一閃)?'
검술 명가의 비기였다!
그것도 보통의 숙련도가 아니었다.
'그림자가 이런 숙련도라니?'
물론, 그림자들 중에도 강자는 많다.
하지만 보통 은신, 암습 등에 특화되어 있지, 정면 대결은 약했다.
그래서 크리스도 어느 정도 만만하게 생각했던 거고.
그런데 방금 한 수는 검술 명가의 정식 기사가 펼친 듯한 한 수였다.
바짝 경계심이 피어올랐다.
'이놈 강해. 어쩌면 나보다도.'
크리스는 다급히 손을 움직였다.
파창!
크리스의 검이 다급히 상대의 검을 쳐냈다. 욱씬, 손이 떨렸다.
'최소 4성 중 이상이야.'
가장 큰 문제는 놈이 정면 싸움에 익숙한 것 같다는 점이었다.
파고드는 검이 굉장히 저돌적이었다.
파괴적인 강검의 연속!
'무슨 놈의 그림자가?'
크리스는 이를 악물었다.
한 번 허를 찔리니 계속 밀리고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의지가 담긴 흑검은 사용하기 어려워.'
무리하게 힘을 끌어 올리려다가 도리어 허점을 잡혀 목이 잘리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만큼 한 치의 여유도 없는 상황.
'분위기를 반전시켜야 해.'
크리스는 살짝 몸을 틀었다.
페이크였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절대 속지 않을 수 없는.
과연, 상대는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파앗!
크리스의 틈을 노리고 마나 블레이드가 떨어졌다.
환하게 빛나는 검이 팔을 자르기 직전.
'지금!'
미리 준비한 흑마법들이 펼쳐졌다.
진창의 저주.
착란의 저주.
동시에 중압의 안개.
간단한 2성 흑마법들이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균형을 흐트러트리기 충분한 효과.
특히 동시에 연쇄적으로 터져 반응하기 어려운 한 수였고, 과연 상대는 일순 비틀거렸다.
'지금!'
흑검 변환.
투염(鬪炎).
파앗!
놈의 다리 앞에서 흑검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어떤 전조도 없이 돌발적으로 피어난 불꽃. 남몰래 허공에 마기를 띄워놓아 시간 차로 발화한 것으로, 크리스니까 가능한 묘기였다.
이대로 다리를 잘라 제압하려고 하였는데.
"!!"
크리스는 눈을 부릅떴다.
놈이 생각지도 않은 행동을 하였다.
제92화
도리어 앞으로 다리를 내밀더니, 그대로 투염에 다리를 밀어 넣은 거다!
정확히는 무릎을 보호하는 보호대를 밀어 넣었다.
쩌정!
보호대가 잘려 나가며, 놈의 다리에서 피가 튀어 올랐다. 하지만 경상이었다.
'미친.'
크리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만약, 놈이 피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막으려 했다면 놈은 반드시 다리가 잘렸을 거다.
하지만 놈은 그 찰나의 순간에 막거나 피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리를 밀어 넣은 거다.
투염이 발화점에서 가장 위력이 약하다는 성질을 간파하고는.
'이놈, 보통의 그림자가 아니야.'
크리스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의 윤곽을 바꾸는 아티팩트 면구를 써서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놈도 천재야.'
물론, 놈이 크리스만 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천재의 부류 중에서는 가장 꼭대기에 있을 만한 재능이 분명했다.
그 말은 일반적인 다른 4성보다 훨씬 어려운 상대라는 거다.
크리스가 자신의 능력 이상의 실력을 발휘하듯, 아마 놈도 마찬가지일 거다.
'곤란해. 연합의 힘을 쓰기도 어렵고.'
크리스의 계획상 놈의 시체에 연합의 힘을 쓴 흔적이 남으면 안 된다.
놈이 마이삭 등을 죽인 것으로 하고, 크리스는 그런 놈을 처단해 공을 세울 계획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군. 원래는 깔끔한 계획을 위해 생포 먼저 하려고 했는데, 무리야. 이 자리에서 죽여야겠어.'
크리스가 그림자를 생포 먼저하고 나중에 제거하려 했던 이유는 시간적 선후 관계 때문이었다.
마이삭 등이 죽으면, 시체를 조사할 거다.
그런데 그림자 놈이 마이삭 등보다 먼저 죽은 것으로 판명되면 의혹의 여지가 생길 수 있으니, 제거는 뒤로 미루려고 했던 거지만.
'어쩔 수 없어. 죽이지 않고 제압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크리스는 눈빛을 가라앉혔다.
변한 기운을 느낀 걸까?
놈의 분위기도 가라앉았다.
잠시,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았고.
놈이 검을 내질렀다.
파앗!
이번에도 정직한 강검.
정직하기에 도리어 상대하기 까다로운 공격이었다.
'빈틈을 노릴 수가 없어. 아니, 빈틈 자체가 없어.'
크리스는 혀를 내둘렀다.
상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완벽한 검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단련한 걸까?
단 일검이지만, 상대가 쌓아온 피나는 고련의 흔적이 느껴졌다.
거기에 크리스가 인정할 정도의 재능.
어려운 상대다.
마이삭 따위의 애송이와는 비교조차 미안한.
하지만.
'나만큼은 아니야.'
크리스가 움직였다.
코어에 힘을 주고,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마치, 상대가 하는 것처럼.
똑같은 강검.
그리고.
크리스의 흑검에 의지가 담겼다.
"!!"
상식을 뛰어넘는 강력한 흑검의 위력을 느끼고 놈의 눈이 당황으로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쩌엉!!
하지만 놀랍게도 놈은 크리스의 검을 막아냈다.
찰나의 순간 놀라운 곡예를 부려 흑검의 위력을 흘려내는 데 성공한 거다.
'거참, 반대로 당해보니 어이가 없네. 흘릴 거로 예상하기는 했지만, 이걸 진짜로 해내?'
크리스는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애초에 흘려낼 것을 가정했으니까.
의지가 담긴 흑검을 흘려내느라 놈의 자세에 생긴 미세한 빈틈을 바라보았다.
원래 크리스의 능력으로는 노릴 수 없는 작고 작은 빈틈.
우웅!
손가락에 낀 뱀파이어릭 링이 울었다.
원래는 마이삭 등을 상대할 때 광휘의 마나를 써야 하니 아껴두었던 한 수였지만, 가릴 때가 아니었다.
광휘의 마나가 암흑 마기로 전환되었고, 그대로 사지에 퍼트렸다.
일순간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신체 능력.
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놈은 또다시 놀라운 반응을 하였다.
방어는 불가능하다고 직감하고는 도리어 치명적인 반격을 한 거다.
놈의 검이 불쑥 크리스의 목을 향해 튀어나왔다.
후발선제.
뒤늦은 반격이고, 순간적인 신체 속도로 크리스가 훨씬 빨랐지만, 상대의 몸에 먼저 도착하는 건 놈의 검이다.
놈의 검에 대한 이해도가 아득히 높기에 가능한 절묘한 한 수였다.
피하지 않으면, 목이 꿰뚫리는 상황.
하지만 도리어 크리스는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
피하지 않고 놈의 가슴을 향해 검을 내찔렀다.
놈이 의아한 눈빛을 하였다.
크리스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한 거다.
놈이 더욱 검에 힘을 주었다.
한층 강력히 가속하는 놈의 검.
끝을 보겠다는 듯 찬란히 빛나는 마나 블레이드.
그야말로 죽은 바다를 가르는 찬란한 일검이었다(死海一閃).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났다.
파앗!
놈의 마나 블레이드가 갑자기 일시적으로 흐트러졌다!
"?!"
이런 일이 일어난 건 당연히 크리스의 수작.
'사해일섬이 가속하는 순간의 맹점을 노렸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
물론, 크리스가 검술 명가의 비기 사해일섬의 맹점을 아는 건 당연했다.
용사 에반이 쓰는 모습을 숱하게 봤으니까. 하지만 그 맹점은 쉽게 건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누군가 이렇게 쉽게 무력화할 수 있다면, 애초에 검술 명가의 비기라고 불리지도 못했을 거다.
이런 일이 가능한 건 늘 그렇듯 크리스였기 때문.
'미리 놈이 사해일섬을 가속할 걸 예상하고, 그에 맞춰 손을 써놨어.'
정확히는 수 싸움을 벌여 일부러 놈이 사해일섬을 쓰도록 유도했다.
처음 의지가 담긴 흑검을 펼친 것도.
뱀파이어릭 링을 써서 놈을 궁지에 몬 것도, 이런 상황을 연출한 거다.
그중 절정은 허공에서 터트린 미세한 흑검 변환.
어떤 살상력도 없이 미약하지만, 순간적으로 마나 블레이드의 흐름을 끊어버렸다.
크리스이니까 가능한 미친 짓.
크리스가 다른 천재와 궤가 다른 괴물임을 입증해주는 일련의 한 수였다.
"!!"
놈이 다급히 검을 회수하였다.
파앗!
마나 블레이드가 방패처럼 놈의 가슴 앞에 떠올랐다.
성휘 4성 경지, '마나 변환'이었지만.
"소용없어."
쩌억.
의지가 담긴 크리스의 흑검이 놈의 마나 방패를 갈랐고.
푸욱!
그대로 가슴을 꿰뚫었다.
놈이 한차례 몸을 떨더니, 왈칵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후우.'
크리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쉽지 않았어.'
이기긴 했지만, 대단한 놈이었다.
최근 급성장을 하지 않았다면, 승리하지 못했을 거다.
'도대체 어떤 놈이지? 그림자 중에 이런 놈이 있다니? 에반 같은 놈이잖아.'
순간, 크리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뒤늦게 떠오른 생각.
'자, 잠깐. 아니겠지. 그럴 리가.'
크리스는 떨리는 손으로 놈의 면구 아티팩트를 벗겼다.
그리고.
시체처럼 굳었다.
"아, 아니. 농담이지?"
눈에 확 들어오는 다부진 인상.
마치 영웅담의 주인공같이 조각을 다듬은 듯한 얼굴.
익숙한 얼굴이었다.
용사 에반이었다.
* ? ?* ? ?*
"뭐, 뭐야? 그럴 리가? 아니지? 왜? 이놈이 여기에?"
크리스는 그답지 않게 횡설수설했다.
회귀 후 가장 당황스러운 상황.
"검술 명가 놈이니 에반 놈이랑 비슷한 얼굴인 형제인 것…일 리가 없잖아!"
크리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놈은 에반이 맞았다.
확실했다.
'으아아! 에반 놈이 왜 암흑 마가에 온 거야?! 용사가 되기 전에는 한 번도 마도 제국에 온 적 없다며?!'
크리스가 에반을 알아보지 못한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일단, 아까 싸움이 너무 급박해 이런저런 것을 따지며 생각할 여유가 없었고, 무엇보다 에반은 그림자 시절 마도 제국에 온 적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전혀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했다.
또, 가장 큰 이유는 검술의 형태.
크리스가 처음 에반을 만나 용사 일행이 된 건 멸망의 시대 후반부였다.
이미 에반이 8성 '절대경(絶對境)'에 도달한 이후.
그때 에반의 검과 방금 에반의 검은 강직하다는 것 말고는 공통점이라고는 전혀 없으니 알아볼 수가 없었다.
'어쨌든 살려야 해!'
천만다행으로 아직 에반은 살아 있었다.
생명력 질긴 용사답게 검이 관통당할 때 몸을 비틀어 심장을 피한 거다.
'하지만 곧 죽을 거야. 오래 버티지 못해.'
크리스는 다급히 주머니에서 단환 하나를 꺼냈다.
혹시나 하는 위기가 오면 본인이 복용하려고 만들어 두었던 의선 명가의 구급 단환, '반사단(反死團)'이었다.
재빨리 입에 밀어 넣은 후 마법을 써 식도 쪽으로 들어가게 했다.
'젠장, 이걸로는 턱도 없어.'
죽음에 반한다는 명칭답게 강력한 구급 능력을 가진 단환이었지만, 너무 부상이 심각했다.
크리스는 이를 악물고는 손을 뻗었다.
혈맥에 흐르는 기운이 변하였고, 이너 코어의 광휘의 마나가 전면으로 나섰다.
파아앗!!
찬란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의선 기공.
의선 명가의 제자들을 성자로 만들어준 힘.
극독 마가의 후암 공작에게 의선 명가의 비책 중편을 받은 이후 크리스는 의선 기공을 남몰래 익혀오고 있었다.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의선 기공이 반사단과 함께 시너지 작용을 하면서 에반의 숨결이 한결 안정되는 게 보였다.
하지만 크리스의 얼굴은 좋아지지 않았다.
'임시방편일 뿐이야. 이대로라면, 에반은 죽어.'
과거, 대륙 최고의 명의 수준의 의술 지식을 지녔던 그답게 크리스는 에반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런 응급처치만으로는 소용없어. 이송해서 제대로 된 치료를 해야 해.'
문제는 시간이었다.
어딘가로 옮기기는커녕, 당장 몇 분도 버티지 못할 상황이었다.
그때, 에반이 왈칵 다시 피를 토하더니, 파르르 몸을 경련했다.
다급히 맥을 짚으니 희미했다.
심장이 멈추어가고 있는 거다.
'안 돼! 어떻게든 살려야 해!'
크리스는 눈이 컴컴해졌다.
원래 그는 자신이 마도 제국을 안에서 제패할 동안, 용사를 이용해 연합의 진영을 재정비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용사가 죽으면, 그가 세운 계획은 크게 망가진다.
'연합 쪽도 강해져야 전쟁이 일어나는 걸 막을 수 있어.'
그리고 그런 이유를 떠나.
크리스는 이를 악물었다.
- 내가 아닌 크리스, 네가 용사가 돼야 했는데.
늘.
속 터지게 답답한 놈이었지만.
다시 만나면 이유도 없이 한 대 때려 주겠다고 다짐했지만.
이놈은 자신의 동료였다.
절대 이렇게 죽는 꼴은 보지 못한다.
'난 아직 네놈을 제대로 때려주지 못했다고! 어서 일어나서 나랑 함께 고생해!!'
파아아아앗!!!!
터질 듯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이너 코어의 마나가 순식간에 고갈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소용없었다.
다시 맥이 돌아오긴 했지만, 잠깐의 효과일 뿐이었다. 곧 다시 안 좋아질 거다.
'어떻게 하지?'
크리스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방법을 생각해내.'
하지만 크리스는 알고 있었다.
지금 의선 기공이 효과가 없는 이유는 간단했다.
에반의 상태가 이미 한계를 넘었기 때문이다.
지금 크리스가 하고 있는 행동은 이미 촛불이 꺼진 생명을 억지로 붙들고 있는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의선 기공이라도 이미 죽음에 다다른 이를 살릴 수는 없으니.'
"제길!"
크리스는 울분에 차 바닥을 쾅 쳤다.
주륵 피가 흘렀지만, 아픔을 느낄 수도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자신의 주먹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본 순간.
크리스의 머리에 번개 같은 깨달음이 떠올랐다.
'의선 기공으로는 죽음에 다다른 이를 살리는 건 불가능해. 하지만.'
크리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흑마법으로는 가능해!'
제93화
애초에 흑마법에는 죽은 이를 다루는 종류가 많았다.
대표적인 게 사령술.
그 밖에 크리스가 자주 쓰는 저주술에도 생명을 다루는 흑마법이 있었다.
'문제는 아직은 다 사용 불가능한 종류라는 건데. 아니야. 생각해봐. 분명 내가 사용 가능한 종류가 있을 거야.'
크리스는 자신이 사용 가능한 흑마법의 종류를 촤르륵 모두 떠올렸다.
하지만 없었다.
그가 사용 가능한 어떤 흑마법도 이 상황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번뜩 떠오르는 하나의 음성.
- 죽으면 열위종으로 되살려 이드린느에게 노리개로 보내 버리겠습니다.
지금 상황과 전혀 상관없는 사이먼이 했던 이야기.
하지만 크리스는 단서를 잡아냈다.
'방법이 있어! 혈종술을 써서 에반을 내 노예로 만들면 돼!'
혈종술 중에는 죽은 상대를 자신의 노예로 만드는 종류가 있었다.
사이먼이 말한 '하등한 피의 각인'.
그렇게 만들어진 노예는 열위종이라고 불리며, 이지가 없이 주인을 따르게 된다.
'물론 에반을 이지가 없는 노예로 만들면 안 되지만, 괜찮아. 술식을 변형하면 돼.'
열위종이 된 노예가 죽었는데도 살아 움직일 수 있는 건, 주인의 생명력을 전달받기 때문이다.
그러니 크리스는 술식 중에 '상대를 노예로 만들고', '생명력을 전달'해 주는 부분만 추출해 사용할 생각이었다.
'다행히 피의 각인은 한 번 본 적 있어.'
사이먼이 시범 삼아 보여주었다.
'피의 각인'은 혈종술의 근간을 이루는 술법 중 하나이니, 가장 먼저 배경지식 삼아 가르쳐준 거다.
물론, 그냥 한 번 봤다는 것일 뿐이다.
제대로 연습해본 적은 없다.
아니, 애초에 크리스가 혈종술을 배운 건 지하 정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잠깐뿐이었다.
그런데 피의 각인을 사용하는 걸 넘어 개량하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괜찮아. 할 수 있어.'
되든, 안 되든 무조건 해내야 했다.
파앗!
크리스의 몸에서 마기가 끓어올랐다.
그의 심상 속에 사이먼이 보여주었던 술식이 촤르륵 펼쳐졌다.
크리스의 머리가 순식간에 술식의 구조를 파헤쳤다.
나누고 분석하고, 자르고, 재조합하고.
당연히 쉽지 않았다.
술식은 무수한 경우의 수의 합.
필요한 부분만 추출한다는 건, 그 모든 경우의 수를 완벽하게 분석해내 새로운 합을 도출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 분야의 대가가 아니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
하지만 크리스는 할 수 있었다.
크리스니까.
'무수한 수를 계산해봐야 한다면, 해결책은 간단해. 그 무한한 경우의 수를 하나하나 일일이 다 계산해보면 돼.'
찰나의 순간.
그의 심상 속에서 무수히 많은 계산이 이루어졌다.
수천, 수만, 아니, 그 이상.
셀 수 없는 경우가 그의 머릿속에서 계산되었다.
고작 눈 한 번 깜짝할 사이에.
크리스가 그 분야에 정통하지 않아도 즉석으로 술식을 분석할 수 있는 비결.
'됐어!'
크리스는 재빨리 자신의 손에서 뚝뚝 흐르는 피를 에반의 입에 떨어뜨렸다.
꿀꺽, 반사적으로 에반이 그의 피를 마셨다.
그와 동시에 크리스는 술식을 발현했다.
'하등한 피의 각인'.
아니다.
이건 크리스가 창안한 새로운 혈종술이었다.
파앗!
죽음에 이르기 직전, 상대의 생명을 붙들고 자신의 노예로 만드는 각인이 에반의 심장에 새겨졌다.
에반의 동의는 필요하지 않았다.
원래 '하등한 피의 각인'은 상대의 동의로 이루어지는 술식이 아니었으니까.
'제대로 술식이 발현됐어.'
크리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에반의 심장에 이어진 각인으로 자신의 생명력을 나누어 주었다.
우웅!
크리스의 생명력을 전달받은 에반의 안색이 아까와는 비교가 되지 않게 안정되었다.
고비를 넘긴 거다!
'다행이야. 어쩌다 보니 에반 놈을 노예로 만들긴 했지만… 이거야 내 혈종술의 수준이 낮아 시간 지나면 자연히 옅어질 테니….'
당연히 그는 에반을 진짜 노예로 만들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그의 혈종술은 미약하기 그지없어 오래 각인을 유지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일시적인 계약일 뿐이었는데.
'음? 잠깐? 저거 왜 그래?'
크리스는 순간 멈칫했다.
'…왜 이렇게 각인의 농도가 강해?'
크리스는 눈을 끔뻑거렸다.
원래라면 굉장히 희미한, 자세히 봐도 알아보기 힘든 옅은 각인이 새겨졌어야 했다.
그게 딱 크리스의 혈종술 수준이었으니까.
그런데 에반의 심장에 새겨진 각인은 옅기는커녕, 강렬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제대로 새겨진 '영구 각인'처럼.
'도대체 왜? 설마?'
이유를 짐작한 크리스의 눈이 커졌다.
첫째 이유, 마기의 종류.
그의 마기는 암흑 마기였다. 순도 100%의.
그러니, 도리어 뱀파이어들의 혈색 마기보다도 혈종술에 맞는 적성을 지니고 있는 거다.
어설픈 숙련도로 발현했음에도 예상보다도 훨씬 강력한 효과를 나타낼 정도로.
둘째 이유, 이게 훨씬 중요했는데, 그의 영혼의 격 때문이었다.
'난 반마의 격. 그러니, 상대를 복속시키는 능력이 훨씬 강하게 작용한 거야.'
뱀파이어가 인간을 권속으로 만들 수 있는 건, 그들의 영혼의 격이 미세하게 인간보다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크리스가 지닌 영혼의 격은 반마의 격이니 뱀파이어들 따위보다 비교도 할 수 없게 높다.
따라서, 술식의 어설픔과 상관없이 상대를 완벽하게 굴복시키는 영구 각인이 새겨져 버린 거다.
'…어쩌지?'
크리스는 꿀꺽 침을 삼켰다.
용사를 노예로 만들다니.
예상치 못한 사고였다.
'으아아! 오늘 진짜 왜 그래?!'
오래간만에 머리를 쥐어뜯었지만, 일단은 방법이 없었다.
'…각인을 풀 방법은 나중에 찾고. 일단, 이놈을 살려야 해.'
간신히 숨을 붙여놓기는 했지만, 딱 숨만 붙여놓았을 뿐, 끝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치료도 해야 했고, 무엇보다.
'…암흑 마가의 영역에서 이놈을 살려 내보내야 해. 하지만 어떻게?'
어마어마한 난이도.
에반은 검술 명가의 그림자 신분이니 암흑 마가의 마인들이 보면 살려두려고 할 리가 없었다.
고문 끝에 교수형이냐, 참수형이냐, 화형이냐, 정도의 선택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데리고 탈출할 수도 없고.'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절체절명의 상황.
그때, 허리에 찬 수정구에서 신호가 왔다.
마이삭 놈이 크리스가 있는 쪽으로 온다는 신호였다.
'…에반 놈 때문에 마이삭이랑 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어쩔 수 없이 마이삭을 처리하는 건, 다음으로 미루어야 할 것 같았다.
'마이삭을 처리할 기회야 어차피 많을 테니.'
그런데 크리스의 머릿속에 절묘한 생각이 퍼뜩 떠올렸다.
'잠깐. 마이삭 놈을 이용하면, 에반 놈을 탈출시키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한 가지.
에반을 밖으로 빼돌릴 방법이 있었다.
마이삭의 목숨을 바쳐서.
'쉽지는 않겠지만, 해야 해.'
크리스는 허공에 신호탄을 터트렸다.
일단 에반을 데리고 암흑 마가로 돌아가기로 한 거다. 탈출시키기 전 먼저 제대로 된 치료를 하기 위해서다.
생명력을 전달해 목숨을 부지하게 하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문제는 암흑 마가에 에반을 데리고 가면 치료고 나발이고 고문 먼저 하겠다고 달려들 마인이 수두룩할 거라는 건데.'
생각할수록 첩첩산중 난관이라, 크리스는 울컥 화가 나서 쓰러진 에반을 쏘아보았다.
'이 망할 놈은 왜 하필 암흑 마가로 기어들어 와서. 나중에 깨어나면 제대로 한 방 때려주마.'
그렇게.
팔자 아닌, 용사 살리기 작전이 시작되었다.
* ? ?* ? ?*
크리스는 마이삭의 암귀대와 충돌하지 않고 암흑 마가로 복귀했다.
어깨에 짐짝처럼 에반을 들쳐메고.
"이번에도 크리스티앙 공자님이 공을 세우셨군."
"대단해. 암귀대가 나섰는데, 먼저 공을 세우다니."
"그런데 그림자는 왜 살려서 데려온 거지?"
"고문하러 데려온 것 아니겠나? 검술 명가의 그림자면 여러 비밀 정보를 많이 알고 있을 테니."
"흐흐, 재밌겠군. 간만에 연합 놈이 처형당하는 장면을 보겠어."
크리스는 그런 마인들의 시선에 침을 꿀꺽 삼켰다.
다들 무슨 다친 사슴을 보는 하이에나 같은 눈초리였다.
'안 그래도 암흑 마가는 검술 명가에 대한 감정이 안 좋으니.'
그중 최고는 단연코 노가주 노르디언이었다.
노르디언은 검술 명가를 싫어하다 못해, 혐오했다.
오죽하면, 검술 명가의 인물을 만나면 모두 쳐 죽이라는 명령을 한때 내렸을까.
에반이 암흑 마가에서 몸성히 살아 나갈 가능성은 전혀 없었지만.
'해내야 해.'
방법은 하나.
쿠웅.
크리스는 에반을 본가의 광장에 던졌다.
남들 보란 듯 일부러 거칠게.
하찮은 벌레를 다루듯.
에반이 고통에 움찔거리는 게 보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 널 살리려고 하는 거니, 이해해 달라고.'
"보고드릴 게 있으니, 가주님께 연락을 넣어주도록."
"네, 하지만 공자님? 랑함 후작 각하가 아닌, 가주님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그렇다."
다들 의아한 얼굴을 했다.
노가주가 가문의 일에 일절 나서지 않는 것을 알면서?
"이놈이 아주 중요한 전리품이기 때문이다. 가주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크리스는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이놈의 이름은 에반. 검술 명가의 전대 가주, 연합제일검 검제(劍帝)의 아들이다."
* ? ?* ? ?*
검제.
9성의 초인이자, 연합 제일의 강자'였다'.
과거형인 이유는 사망했기 때문이다.
'너무 빨리 죽었지.'
에반이 채 성장하기 전에 사망했고, 그로 인해 에반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에반이 가주직을 이을 적통 후계자가 아니었다면 괜찮았을 거다.
하지만 에반은 전대 가주가 직접 정한 차기 가주였고, 이는 가주직을 노리는 검술 명가의 사자들이 보기에 눈엣가시인 일이었다.
결국, 가문 어른들의 수작에 에반은 커다란 중죄를 덮어쓰고 그림자가 되는 신세가 되었다.
'생각해보면 참 어이없는 일이야. 연합을 지탱하던 거인의 아들을 권력욕 때문에 그딴 비참한 꼴로 만들다니.'
크리스는 실소했다.
'하긴, 억울한 건 이전 삶 나도 마찬가지였지. 어머니와 나는 어떤 죄도 없는데 악마의 주구로 몰렸으니까. 그것도 아버지란 작자 때문에.'
연합이 지금 얼마나 썩어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들이었다.
어쨌든, '검제'는 암흑 마가와도 연이 있었다.
정확히는 노가주 노르디언과 연이 있었다.
과거, 노가주 노르디언은 검제에게 패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커다란 치욕을 당했다는 거다.
검제는 마인을 사람 취급하는 이가 아니었고, 패배한 노르디언에게 극심한 모욕을 주었다고 한다.
'덕분에 노가주 노르디언은 검술 명가의 이름만 들어도 이를 간다고.'
그런데 검제의 아들을 전리품으로 데려왔으니, 노가주의 반응은 어떨까?
그래도, 숙적의 아들이니 존중해 주라고 할까?
절대로.
노르디언이 차갑게 말했다.
"당장 목을 자르고, 사지를 잘라 검술 명가에 보내라. 검제 놈의 묘지 옆에 묻게 하면 되겠지. 아들이 팔다리, 목이 잘려 찾아온 걸 보면, 검제, 그 친구가 하늘에서 좋아하겠어."
"...."
제94화
검제를 향한 앙심이 가득한 음성.
노가주가 이번엔 다소 누그러진 눈길로 크리스티앙을 쳐다보았다.
"크리스티앙, 너는 잘했다. 훌륭한 공을 세웠어. 이 일은 내가 따로 포상토록 하마."
"…혹시, 제가 바라는 걸 포상으로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바라는 것? 말하여 보아라."
크리스는 잠시 숨을 들이켰다.
'여기서 잘해야 해.'
에반 놈의 목숨이 지금 한순간에 달려 있다.
"검제의 아들 놈의 목을 베는 걸 보류해 주십시오."
"뭐?"
노가주의 눈초리가 싸늘해졌다.
"왜냐? 쓸데없는 인정을 베풀려는 거냐?"
실망감이 섞인 음성.
마인이 적에게 괜한 인정을 가지는 건 금물이니까.
하지만 크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연합의 가증스러운 놈들에게 인정을 왜 베풉니까. 그저, 저는 놈의 목을 베는 건 너무 자비스러운 처사라고 생각해 청하는 겁니다."
"흐음? 그러면? 네 생각은 어떻지?"
"놈을 제게 전리품으로 주십시오."
"!!"
크리스는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누가 봐도 사악한 느낌으로 보이게.
"검제의 아들 놈을 제 노예로 굴복시켜 수족처럼 부리면, 가증스러운 연합 놈들에게 최고의 복수가 되지 않겠습니까?"
* ? ?* ? ?*
노가주는 크리스티앙의 청을 받아들였다.
크게 웃기까지 했다.
- 크하하!! 그래, 네 말이 맞다. 고작 목을 치는 건 너무 싱겁지. 그런데.
노가주가 은근히 말했다.
- 과연 가능하겠느냐? 놈이 검제의 아들이라면 만만하지 않을 텐데?
크리스는 딱 잘라 답했다.
- 고분고분하면 도리어 재미가 없겠지요.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봐 주십시오. 검제의 아들이 제 앞에 무릎 꿇는 모습을 보게 될 테니까요.
- 그래, 기대하마. 단.
노가주가 심장을 꿰뚫는 듯 섬뜩한 눈빛으로 말하였다.
- 실패한다면, 네가 직접 검제의 아들 놈의 목을 쳐라. 알겠느냐?
- …명심하겠습니다.
크리스는 우울한 눈빛으로 노가주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으아아! 무슨 놈의 조련은 조련이야!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냐고!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이 망할 놈의 용사 놈!'
에반을 향한 울분이 치솟아 올랐다.
크리스는 팍팍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된 이상, 용사 놈을 내 수족으로 만들 수밖에.'
노르디언에게 말한 것처럼 노예로 만들겠다는 건 아니었다.
크리스가 이번 기회에 바라는 건, 용사가 자신의 편이 되어 그의 계획을 도와주는 동료가 되는 것.
'문제는 에반 놈의 마음을 어떻게 얻냐는 건데.'
대화?
통할 리가 없었다.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해도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칼을 날리지만 않아도 다행이겠지.'
어마어마한 난이도.
방법을 고민하고 있는데, 시종이 다급한 얼굴로 뛰어왔다.
"고, 공자님! 큰일입니다! 검술 명가의 그림자 놈이…!!"
"…무슨 일이지? 혹시 상태가 악화하기라도 한 건?"
"그건 아닙니다. 공자님의 명대로 집중 치료를 한 덕에 놈의 상태는 많이 호전된 상태입니다."
"그런데?"
크리스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좋아졌는데, 무슨 문제란 말인가?
"혹시 감옥에서 날뛰기라도 하나? 어지간하면 그냥 내버려 두도록."
그런데.
"소, 소란스럽게 굴지는 않고 있습니다."
"뭐가 문제인 거지?"
"그, 그… 놈의 태도가 이상해서. 그러니까… 무릎을 꿇고 있는데."
"...??"
시종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상황을 잘 설명하지 못했다.
"하, 한번 직접 와서 봐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크리스는 아리송한 얼굴로 감옥을 찾아갔다.
그리고.
보게 되었다.
'미친.'
욕이 나오는 광경을.
"…오셨군요."
용사 에반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누가 강제로 시킨 게 아니다.
스스로.
마치 극진한 예를 취하는 것처럼.
정확히는 자신의 주인을 모시는 권속의 모습처럼.
굴복한 노예처럼.
고개를 조아렸다.
"나의 주인이시여."
* ? ?* ? ?*
검제의 아들이 크리스티앙에게 무릎을 꿇었다!
이 소식이 암흑 마가를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하, 크리스티앙 공자님이 대단하긴 하시군. 어떻게 놈을 굴복시킨 거지?"
"놈이 쓰러졌을 때 피의 각인을 새겨 두셨다고 하더군. 과연, 대단해. 혈종술을 배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고 하셨는데."
"그런데 하등한 피의 각인이라 하지 않았나? 이지를 가진 이를 복종시키는 룬은 포함되어 있지 않을 텐데?"
"몰라. 술식을 또 이상한 방식으로 개량했겠지. 크리스티앙 공자님이 그러시는 게 어디 한두 번인가? 놈에게 영혼의 각인이 새겨져 있는 건 확실하니 맞을 걸세."
마인들은 다시금 크리스티앙에게 감탄했다.
하지만 크리스티앙은 마음 편히 그 칭찬을 들을 수가 없었다.
'진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미친 용사 놈의 새끼가.'
크리스는 욕설을 삼키고는 자신의 옆에서 부복하고 있는 에반을 바라보았다.
순수한 눈빛으로 되묻는 에반.
"무슨 일입니까, 주인님?"
"…아니다."
"무슨 일이라도 좋으니 명령해 주십시오."
"...."
크리스는 거북한 얼굴을 하였다.
이전 동료이자, 용사가 될 이를 노예로 삼게 되어서 불편한 얼굴?
아니다.
'…너 이거 연기잖아.'
그렇다.
크리스가 새긴 '하등한 피의 각인'에는 '충성'과 '복종의 룬'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애초에 죽어서 이지를 잃은 이를 강제로 조종하는 원리라 그런 고등하고 복잡한 술식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놈은 온전한 이지를 가지고 있음에도 크리스의 명령에 따르고 있었다.
연기였다.
'살아남으려고 하는 연기겠지. 내 노예가 되면, 바로 처형당하지 않을 거라 계산하고.'
아니, 단순히 그런 게 아니었다.
크리스는 언뜻언뜻 에반 놈의 눈가에 스쳐 지나가는 서늘한 살기를 놓치지 않았다.
'기회를 봐서 날 죽이려는 걸지도.'
크리스는 확인해 보기로 하였다.
마침, 스테이크를 썰고 있던 나이프를 실수인 척 에반의 발밑에 떨어뜨렸다.
쨍그랑!
"주워."
"!!"
찰나의 순간.
에반이 나이프를 바라보았다.
햇살을 받아 섬뜩하게 번뜩이는 나이프의 날.
날카롭게 버려져 누군가의 목줄을 끊기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는 도구.
에반의 실력이면 말할 것도 없었다.
눈 한 번 깜빡할 순간이면, 저 나이프는 크리스의 목에 도달해 있으리라.
'과연?'
에반이 천천히 무릎을 꿇었고.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찰나의 멈칫함 끝에 손을 움직였다.
"…여기 있습니다."
크리스는 한숨을 삼켰다.
방금 꿈틀거린 손가락.
상대에게 기습을 날릴지 고민할 할 때 취하던 에반의 예전 버릇과 완벽히 일치했다.
지금 에반은 크리스의 목을 칠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미치겠군. 이걸 밝힐 수도 없고.'
크리스는 뒷골이 지끈거렸다.
밝히면 에반은 죽는다.
모른 척해야 하지만, 에반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게 문제다.
일전 싸움에서 알 수 있듯 에반도 천부적인 감각의 소유자다.
아무리 크리스라도 아차, 방심하는 순간 목이 떨어질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난 사실 네 편이라고 털어놓을 수도 없고.'
밑도 끝도 없이 그렇게 말해봤자, 의심스럽기만 할 뿐 믿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을 거다.
'에반 놈이 심안을 각성한 상태라면 모를까. 아직일 테니.'
에반이 훗날 성좌에게 받게 되는 축복 중 하나였다.
심안만 각성한 상태면 상대의 진심을 꿰뚫어볼 수가 있어서 크리스의 진심을 쉽게 알아보겠지만, 지금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심안은커녕.'
크리스는 에반의 눈빛을 바라보았다.
용사 시절 때와 다르게 시커멓게 가라앉아 있는 눈빛. 마치 죽은 시체의 것처럼.
지금 에반의 마음속도 똑같으리라.
크리스는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에반 놈은 날 죽이고 같이 죽으려는 작정인 건가. 어차피 살아 있어봤자 어떤 희망도 없으니.'
과거, 에반이 술에 취했을 때 지나가듯 하던 말이 떠올랐다.
- 난 그 시절이 정말 힘들었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한 적도 많았지.
크리스는 눈썹을 찡그렸다.
확실했다!
'이 빌어먹을 놈이.'
크리스는 결정했다.
에반을 어떻게 할지.
'일단 정신 먼저 차리게 해야 해.'
정신을 차리게 할 방법은 불행히도 하나였다.
극약 처방이 필요했다.
"지금 그 눈초리는 뭐지?"
"네?"
짜악!!
에반의 뺨이 돌아갔다.
"노예가 됐음에도 아직 영혼에 남겨진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건가?"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에반이 허겁지겁 무릎을 꿇었다.
크리스는 최대한 오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잘못했으니, 벌을 내려야겠지. 멜린."
"네, 공자."
"이놈을 감옥으로 끌고 가 굶기도록. 다시는 건방진 모습을 보일 생각을 못 하도록."
멜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크리스답지 않은 처사라고 생각한 듯했지만, 별다른 의문을 표하지 않고 에반을 끌고 갔다.
* ? ?* ? ?*
며칠 후.
크리스는 감옥을 찾아갔다.
에반은 쇠사슬에 매달려 있었다.
죽을 부상을 당하고 살아난 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굶고, 쇠사슬에 매달려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매질은 누가 한 거야. 시킨 적 없는데. 그나저나 눈빛은… 여전하군.'
시커먼.
텅 빈 동공이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괜찮은가?"
"…괜찮습니다."
한발 늦게 나온 대답.
"제 잘못에 가르침을 내려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음성에 은은히 섞인 살기.
아니다.
저건 크리스를 향한 분노가 아니었다.
바로 자신을 이런 처지로 만든 이들을 향한 분노.
그리고 스스로를 향한 절망.
에반은 지금도 크리스를 죽이고, 자신도 따라 죽으려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크리스는 한숨을 내쉰 후 말했다.
"화나는가?"
"네? 아닙니다."
"아니라고?"
크리스가 가만히 에반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속마음을 꿰뚫어 보듯.
"거짓은 용납지 않아. 솔직히 말하도록."
"...."
"화나지 않는가? 아니, 다시 묻지."
크리스는 질문을 바꾸었다.
"널 이런 처지로 만든 이들에게 화나지 않느냐는 말이다."
순간, 에반의 눈동자에 희미한 빛이 번뜩였다.
섬뜩한 살의.
얼핏 스쳐 지나간 작은 빛이었지만, 분명했다.
"…무슨 말입니까?"
"몰라서 묻는 건가?"
"...."
"내게 굴복했다고 하면서, 가슴속 분노는 여전하군. 아니면."
크리스는 비웃는 것 같은 얼굴을 하였다.
"애초에 굴복한 적이 없었던 건가."
"!!"
에반이 숨을 들이켰다.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크리스의 눈빛을 마주하고는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지?"
"글쎄, 처음부터?"
"…눈치챘으면서 왜 살려둔 거지?"
에반이 이를 바득 갈았다.
"내 우스운 모습을 보며 속으로 능멸했던 건가?"
크리스는 어깨를 으쓱하였다.
"아니, 그런 저열한 이유는 아니야."
"그러면?"
"네가 죽지 않기를 바랐으니까."
"!!"
에반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였다.
"무슨 개소리를."
"진짜야. 그러니까, 음."
크리스는 말을 고민했다.
'여기서 최선은 에반의 마음을 얻는 거지만, 무리겠지.'
어설프게 진심을 보여봐야 역효과이기만 할 거다.
'으으. 에반 놈이 심안만 각성했어도 내 진심을 믿게 하는 건 어려울 게 없는데. 어쩔 수 없지.'
에반이 납득할 수 있게.
그러면서, 자신의 말에 따르게 만들어야 했다.
그 방법은 하나.
에반의 분노를 자극하는 것.
"너같이 쓸 만한 노예는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