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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 *

한편 동굴 밖에선 끊임없이 울리는 굉음과 흔들리는 지축 탓에 혼비백산했다.

오죽하면 저들이 설치한 진천뢰가 터진 줄 알았다.

그만큼 화산이 폭발한 것처럼 태산이 진동했다.

"대체 이게 무슨...."

붉은 복면인들은 서로를 살피며 눈으로 의견을 물었다. 하나 그 나물에 그 밥. 서로 본다고 뭐가 있겠는가.

그저 적아린이 지시한 대로 두 시진을 기다렸다가 입구만 봉쇄하면 끝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준비해라!"

누군가의 외침에 복면인들이 각자 설치한 진천뢰로 가서 화섭자(火攝子)에 불을 붙였다.

이내 신호만을 기다리고 있던 그때.

"멈추어라!"

저벅, 저벅.

동굴 안에서 걸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복면인들이 스릉! 칼을 뽑아 들고, 경계하던 순간.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흑발에 흑의. 흑창을 가진 매혹적인 여인.

창귀신 적아린이다!

복면인들은 일시에 칼을 거두고 고개를 숙였다.

어깨 위로 연기처럼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걸 봐선 한껏 젖었던 모양.

하나 완전히 밖으로 나왔을 땐, 물기 하나 없는 상태였다. 마치 안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즐거웠어."

그러곤 씨익 웃으며 흘깃 뒤를 살핀 뒤, 미련 없이 걸어 나갔다.

"묻어라."

콰과과과광!

이어 진천뢰가 터지며 폭발하는 출입구.

그렇게 동굴은 자취를 감추었다.

영원히.

* * *

머릿속에 이명이 울리고, 시야는 흐릿했다.

죽은 건가? 아니, 아직. 하지만 죽어가고 있는 건 확실했다.

적아린의 기공파에 휩쓸렸고, 그 순간 천마기에 불사독마공까지 모든 공력을 끌어 올려 방호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피투성이가 된 채 속절없이 추락.

다행히 그 끝이 단단한 바닥이 아니라 폭포수가 고인 물이었던 터라 운이 따르는가 싶었지만....

'정말 심연이었구나!'

하필 들어선 물속이 그 끝을 짐작하기도 어려울 만큼 깊었다.

물론 헤엄쳐서 나오면 된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그마저 불가능했다.

이유는 세 가지.

첫째. 빌어먹을 적아린에게 당한 상처가 위중했다. 내공은 고갈 났고, 육신은 만신창이.

둘째. 여기 묻기라도 하려는 것인지, 수면 위로 거대한 암석들이 유성처럼 쉴 새 없이 떨어져 내렸다.

이 상태로 올라간다면 저 돌무더기에 맞아 죽을 가능성이 십중팔구다.

하지만 일 할의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올라갈 수 없는 진짜 이유는 마지막 셋째.

몸이 의지와 상관없이 밑바닥으로 맹렬히 가라앉고 있기 때문이었다.

[쿠오오오오오-!]

저 심연 밑바닥에서 뱀인지, 용인지 알 수 없는 거대한 괴수가 아가리를 떡 벌린 채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있었으니.

'정말... 교룡이 나타나면 어쩌자는 거냐?!'

213.

#빛줄기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었다.

위에선 커다란 암석들이 유성우처럼 떨어지고, 밑에선 교룡처럼 생긴 괴물이 아가리를 떡 벌린 채 빨아들이고 있다니.

게다가 용머리라고는 해도 전설 속의 상서로움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우둘투둘 나 있는 섬찟한 이빨에 뱀같이 무서운 눈만 봐도 그냥 굶주린 이무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대화는커녕 누가 봐도 잡아먹겠다는 기세.

하지만 피할 방법은 없었다.

급류에 휩쓸리듯 육신은 속절없이 가라앉았고, 점점 숨은 가빠왔다.

'이렇게 죽는 건가.'

막막함에 지난날을 떠올렸다.

사실 삶에 큰 미련은 없다고 생각했다.

첩자로 사는 동안 수없이 각오했었고, 어두운 삶의 이면엔 환멸과 죄의식이 가득했으니.

솔직히 첩자 이전도 되돌아볼 만큼 썩 좋은 인생이 아니었다.

고아인데 가난했고, 살려면 각주의 손을 잡아야 했다.

'굶지는 않을 테다. 나와 함께 가겠느냐?'

그때부터 시작된 수년간의 고된 훈련.

하지만 진짜는 마교에 들어서고 난 후부터였다.

'죽여라!'

돈 한 푼에 어제까지 웃고 떠들던 이들까지 물어 죽이는 들개들. 그 안에 자신을 지우고, 녹아들어야만 했다.

14살의 나이였다.

많은 이를 해하였고, 많은 이의 원한을 샀다.

수년이 흐르자 피 냄새는 살냄새보다도 익숙해졌다. 그리고 방첩대에 들어갔다. 그곳이라고 크게 다를 건 없었다.

'네 돈은 내가 가져간다.'

그저 나름의 악인을 규정하고, 그들을 벌하면서 제 삶을 위로하였을 뿐.

하나 그래봤자 이미 피와 거짓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임무는 기다려도 오지 않았고, 모든 게 무의미했다.

별다른 감흥조차도 없었다. 당장 죽어도 그러려니 했을 거다.

분명히 그랬다.

임무를 하달받기 전까지는.

'보좌 장이서입니다.'

처음엔 그저 임무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장이수라.... 처음 듣는데?'

칠공자 마오. 천재라고 떠드는 멍청이. 그 녀석을 만난 후부터 어딘가 이상해졌다.

'너야말로 나 잡으려면 각오하는 게 좋을걸? 교주님도 포기한 놈이 나거든.'

'배울게. 배우면 되잖아. 한다고. 아니, 무슨 대단한 절세 신공이라도 가르쳐 주고 죽든가! 대답해. 대답하라고, 장이서!'

'천재 귀환-!'

대상에게 없어야 할 감정이 생겼고.

'사나이 용태. 앞으로 보좌님을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용태와 메기가 불쑥 들어왔고.

'과평이오.... 살려줘서 고맙소, 형님.'

'잘 부탁드립니다. 아신입니다.'

철마적이라는 든든한 동료들과.

'너의 뒤에는 언제나 내가 있을 것이다.'

구유라는 버팀목을 얻었다.

'이제부턴 내가 네 가족이자 일평생 조건 없는 우군이 되어줄 것이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꾸나, 이서야.'

독산각에서 일평생 없던 가족이 생겼으며.

'내가 원래 수컷들은 절대 내 방, 안 보여주는데 특별히 우리 장 형이니까 초대하는 거라고.'

'다음 술은 내가 사지.'

소오와 사해령이라는 벗도 사귀었다.

'주인님.... 몸이 많이 안 좋으신 거군요?

'나도 하겠네. 호형호제.'

'장 보좌 건드리지 마-!'

맹목적으로 지지해 주는 홍란과 지대호. 맹휘라는 우군까지.

고작 임무 하나를 받았을 뿐인데, 삶이 너무도 변해버렸다.

인생에 없던 인연이 가득해져 버린 것.

그저 임무일 뿐이었는데.

첩자로서 이용해야 할 대상들일 뿐인데.

'왜 자꾸 어른거리는 거냐.'

아무래도 사상이 불순해진 것 같다.

돌아가고 싶다.

집으로. 그들에게로.

이대로 죽고 싶지는 않다.

이제야 해야 할 일들이 생겼다.

소교주도 만들어야 하고, 혈교한테 받은 빚도 갚아야 한다.

지금 이렇게 죽어버리는 건....

'하여튼 보좌라는 자식이!'

주객도전이잖아!

정신을 번쩍 차리고, 눈을 부릅떴다.

이대로 죽을 순 없다. 집중하자. 아직 끝이 아니다.

할 수 있는 딱 한 가지가 남았다.

그건 바로....

남천능가경(南天楞伽經).

달마 조사께서 남긴 불가해의 심법에 모든 것을 걸어보는 거다.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숨이 붙어 있는 한은 포기하지 않겠다!

[쿠오오오오오-!]

어느새 더 가까워진 교룡!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자.'

달마는 누구인가.

저 머나먼 남쪽 천축국의 왕자이자, 중원으로 넘어와 처음으로 심법과 좌선 수행을 알렸던 분이다.

끝내 밝히지 않은 심법의 이름이 남천능가경인 이유도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을 그리워했기 때문.

또한 중생들을 위해 수많은 선행과 가르침을 내리기도 했다. 그런 분이 절대 마공을 만들었을 리 없다.

그러니까 이건 애초에 해석이 잘못된 것이다.

예전에 생사신의가 점혈법을 가르칠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혈과 맥은 믿음과 수련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다. 중원에 십사경맥이 있다면, 서장엔 중맥이 있고. 천축국에는 통맥(通脈)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통맥.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단 일곱 개의 혈로 이뤄져 있으며, 그들은 이를 두고 차크라라고 부른다고.

그러니까 만일 남천이 천축국을 뜻하는 말이라면 이는 분명 통맥에 맞춰 쓰였을 공산이 크다.

[심연 끝의 규룡(?龍)이 빛을 찾아 오르는구나.]

심연의 끝은 회음인 옥문(玉門).

[기나긴 여정에 성년이 되고, 새끼를 품으니. 배가 불러 가슴으로 낳았노라.]

생식기는 지궁(地宮). 복부는 태양궁(太陽宮). 가슴은 심궁(心宮).

[노년에 다다라 숨이 차고, 눈이 멀어 길을 잃었을 때. 비로소 뜻이 닿아 빛을 마주하니, 그곳이 하늘이었도다.]

숨구멍은 혼문(魂門). 두 눈은 천궁(天宮).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늘로 향하는 백회혈인 천문(天門).

이거다. 이것이 바로 구결의 진의인 거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물살을 가로지르며 가부좌를 틀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우선 양기부터 불러 모아야 한다. 호흡이 불가하니 오직 의념으로만 해야 한다. 조화술을 펼치고, 그저 자연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거다.

우우웅!

잠시 후 조금씩 몸 안으로 기운이 스며들었다. 불안감은 버린다. 오직 기운에만 집중한다.

뜨거운 양기가 서서히 몸 안에 쌓인다.

본래라면 단전에 모아 선회한 후에 움직여야 옳겠으나 그랬다가는 천마기에게 잡아먹히고 말 것이다.

그러니 곧장 회음혈로 간다. 애초에 중원의 무공과는 궤가 다른 것. 단전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회음혈에 기를 쌓고, 이어서 음부에 해당하는 관원혈. 복부인 신궐혈. 가슴은 중앙의 전중혈이 아닌 좌측 심장이 있는 심수혈. 나아가 후골(喉骨)이 있는 염천혈과 미간의 인당혈.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인 백회혈!

애써 가슴을 진정시키고, 미간까지 채운 양기를 서서히 머리 위로 올려보냈다.

그런데 그 순간!

[퀴아아아아아-!]

컥! 뇌리를 강타하는 혈마귀의 포효와 함께 숨이 턱 막히고, 기혈이 들끓었다.

그러곤 피거품을 토해내며 목구멍으로 쉴 새 없이 물이 넘어오기 시작했다.

'어, 어째서...?'

실패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마지막 순간, 내면의 혈마귀가 훼방을 놓은 것이다.

'설마 날 죽이려고?'

그랬다간 기생하는 저도 죽게 될 텐데. 같이 죽겠다는 건가? 대체 왜.

하나 의문에 대한 답을 알기도 전에 숨이 턱 막혀오고, 정신은 혼미해졌다.

[쿠오오오오오!]

거기다 이젠 교룡의 입아귀 말고는 다른 게 보이지도 않았다.

그만큼 코앞까지 가까워졌다는 얘기.

죽음이 임박한 것이다.

'안 돼. 이대로 끝낼 순 없다!'

저 머리끝에 서린 빛줄기라도 붙잡아 악착같이 살아 나가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만...!

'잠깐. 빛줄기?'

일순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분명 아까 석양이 사라지고, 어둠이 짙게 자리했다. 지금은 태양이 없는 밤이라는 얘기. 한데도 빛이 서려 있다.

그것도 은빛의 아름다운 빛줄기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빛을 쫓던 교룡은 태양이 사라지면 등천을 멈추었을까.'

달마는 좌선 수행을 무엇보다도 중시했던 정파의 조사.

그렇게 생각해 보면 내기의 움직임은 곧 수행이고, 수행은 곧 멈추어서는 안 될 보리심(菩提心-깨달음을 얻으려는 염원)이다.

그런데 빛이 사라졌다고 이를 멈춘다니. 어불성설이 아닌가.

그렇다면....

다시 위를 바라보자 역시나 은색의 빛줄기가 선명히 보인다.

'달빛이다. 빛은 태양에만 있던 것이 아니야!'

그랬다.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태양과 달이 서로 손짓하며 밤낮으로 내려앉으니 교룡 또한 멈춰 설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교룡이 쫓는 빛은 양기가 아니라 음기도 함께여야만 한다.

혈마귀가 포효를 내지른 건 날 죽이기 위함이 아니라, 같이 살고자 했던 것.

양기만 백회혈까지 끌어 올렸다간, 남천능가경을 온전히 터득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게 될 테니.

그러니까.

'음양의 기운을 하나로 모아 천축국의 차크라를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남천능가경의 비결인 거다!'

조화술을 펼치자 음양의 기운이 동시에 몰려들었다.

원래라면 이는 절대 섞일 수 없는 고유의 힘.

하지만 음양일원의 단계에 오르면 얘기가 달라진다.

두 개의 기운은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면서도 본래 하나였던 것처럼 태극을 이루며 회음혈에 안착했다.

꽈아아앙!

그러자 폭음과 함께 혈(穴)이 넓어지고, 이내 붉은 광채가 쏟아졌다. 앞서 양기만으로 시도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기운!

그리고 다시 시작된 거침없는 운기.

꽈과과광!

몸 안에서 빛줄기가 연달아 폭발했다.

적(赤), 주(朱), 황(黃), 녹(綠), 청(靑), 남(藍), 자(紫).

일곱 개의 혈(穴)은 무지개처럼 비상한 광채를 뿜어냈고, 백회혈을 마지막으로 빛이 하나로 이어지는 순간.

꽈아아앙-!

또 한 번 내면에 폭발이 일었다.

그리고....

장이서의 육신에서 영롱하고도 청명한 기운이 무지갯빛으로 심연을 가득 채웠다.

천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이곳 곤륜산 심연에서 장이서가 남천능가경(南天楞伽經)을 터득한 것이다.

이는 보리달마의 원류심법이 부활하는 숭고하고도 기념적인 순간이었다.

'다... 끝난 건가?'

폭발이 지난 후 조급했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평온해졌다. 죽기 직전까지 막혔던 숨도 숲속에 누운 것처럼 상쾌했다.

이어 육신 밖으로 뿜어지던 광채는 사그라들고, 심장부인 심궁의 녹광(綠光)과 목젖에 해당하는 혼문의 청광(靑光)만이 미약하게 기운을 뿜어냈다.

그리고....

[쿠오오오오오오-!]

발아래를 내려 살피니, 더는 빨려오지 않는 장이서한테 잔뜩 화가 난 교룡이 수포를 뿜어내고 있었다.

한데 왜일까.

그 어떤 두려움도 조바심도 일지 않았다.

그때 깨달았다.

남천능가경은 비단 공력의 힘만이 아니라, 일곱 개의 영역에서 각기 고유한 힘을 지닌다는 것을.

목에 위치한 혼문은 자연의 기운으로 숨을 쉴 수 있게 해주었고, 여전히 강렬한 기운을 발산하는 심궁은 공포와 사심에 대항할 수 있는 항마력(降魔力)을 품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를 깨닫게 된 건, 정말 우연이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낼수록 심궁의 힘도 강해졌고, 이에 반응하듯.

[퀴아아아아아!]

머릿속에선 끝없이 괴로워하는 마귀의 괴성이 울렸던 것.

지금도 마찬가지.

발아래 교룡을 보며 강한 마음을 품자 혈마귀는 더 거세게 비명을 토했다.

그렇다. 한마디로 심궁의 힘은 지지 않겠다는 불굴의 의지가 커질수록 더 거세지며, 그와 함께 항마의 힘 역시 비례하듯 강해지는 거였다.

남천능가경을 통해 혈마귀를 상대할 힘의 단초를 얻은 것이다.

물론 그의 처지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긴 했다.

소리까지 질러서 죽을 뻔한 걸 기껏 살려줬더니, 목에다 칼을 겨눈 격.

하나 어쩌겠는가.

어차피 사이좋게 갈 팔자도 아닌 것을.

그러니까.

[여기서 같이 죽기 싫으면, 그 힘 내놔.]

[퀴아아아아아아아-!]

머릿속에 고막이 터져 나갈 듯한 노호가 울렸다.

그리고 그 순간.

콰직!

교룡의 아가리가 그대로 장이서를 집어삼켰다.

설마 이대로 끝인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잠시 후, 교룡의 얼굴이 체한 것처럼 시퍼렇게 질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울퉁불퉁 부풀어 오르는 머리.

『천마신공(天魔神功) 혈마귀(血魔鬼) 강림(降臨)』

콰콰과과광!

교룡의 육신이 머리부터 꼬리까지 붉은빛과 함께 차례로 터져나간다!

그리고 그 끝엔....

[퀴아아아아아아!]

꽈아아앙!

심연의 바닥까지 다 깨부숴 버리는 절대마귀(?對魔鬼)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214.

#장이서의 약점

콸콸콸콸콸-!

절벽 중턱. 커다란 구멍에서 폭포수가 용의 숨결처럼 거칠게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그 사이 거뭇한 신형 하나가 불순물처럼 끼어 멋대가리 없게 툭 뱉어졌다.

"아아아아악!"

첨벙! 물거품이 터지고, 잠시 후 그 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죽은 것처럼 대(大)자로 엎드려 수면 위로 떠오른 사내.

장이서다.

"푸악!"

잠깐 정신을 잃었던 건지, 발버둥 치며 먹은 물을 토해내고서야 겨우 숨을 돌렸다.

"산 건가...."

물 위에 둥둥 뜬 채 멍하니 밤하늘을 바라보자 달과 별이 반짝인다.

그제야 심연에서 살아 나왔다는 게 실감이 난다.

"설마 그대로 기절해 버릴 줄이야."

생각해 보면 간담이 서늘했다. 끝없이 샘솟는 자신감에 무작정 혈마귀한테 힘을 달라고 말했고, 성공까지 했지만....

감당 불가의 힘이 순식간에 솟구치면서 바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건 곤륜산맥의 교룡도, 심연도. 모두 혈마귀의 분노에 미천한 희생물로 전락해 버렸다는 것.

"두 번 썼다간 살아남는 자가 없겠구나."

저 안에 혼자 갇혀 있던 게 얼마나 다행인지. 다수가 모인 곳에서 썼다면 피아 없이 혈겁을 일으킬 뻔했다.

실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힘.

고개를 떨궈 육신을 내려다보자 심궁과 혼문의 기운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있었고, 혈마귀 역시 쥐 죽은 듯 잠잠했다.

그런 힘을 발휘했다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을 정도.

"아무리 달마께서 남기신 거라지만.... 정말 불가해의 심법이다."

보통은 운기를 통해 공력을 쌓고, 그게 일정 단계에 올라야 대성에 이르는 것이 일반적.

한데 심궁의 힘은 의기를 보였을 때 더 강해졌고, 혼문은 심연 속에서 숨 쉬지 못할 때 기운이 발동했다.

이건 마치 각기 다른 일곱 개의 소단전(小丹田)이라도 생겨난 기분.

상식적인 선에서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다.

심지어 나머지는 무슨 힘을 가졌는지,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직 제대로 확인도 못 했다.

물론 예상가는 것도 있긴 했다.

'세 번째 구멍이... 막혔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단전에 전혀 알 수 없는 새로운 기운이 쌓여 있었다.

정명함이 느껴지는 찬란한 황금색 내기.

남천능가경 중 세 번째 복부에 해당하는 태양궁의 힘이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 미약하지만 자리를 잡고 있던 것.

"정말 엄청나구나. 이것이 달마 조사의 기운."

몸 안에서 처음으로 느껴지는 정도의 기운에 뿌듯함과 희열감이 동시에 들어찼다.

특히 천마기와는 상극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내공을 쌓는 데엔 오랜 시일이 걸리겠지만, 그래도 더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근데 이건 뭐지?"

들뜬 마음을 다잡고 부르르 떨리던 손을 펼쳤다. 그러자 손바닥에 웬 은은한 금빛 기운을 내뿜는 구슬이 들려 있었다.

음양의 힘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게 보통 구슬이 아니다.

"설마... 교룡의 내단(內丹)이라도 되는 건가?"

수백, 수천 년을 살아 온 영물들에겐 영험한 힘이 축적된 구슬이 있다는 얘기를 듣긴 했다만.

"설마 이걸 갖고 나올 줄이야."

이젠 안 믿을 수도 없다. 혈마귀도 생각과 감정이 있다는 것을. 입꼬리가 씨익 말아 올려졌다.

"정말 천지신명이 도왔구나."

이것이라면 당장 부족한 남천능가경의 내공도 끝까지 채울 수 있을 듯했다.

대체 몇 번의 기연을 마주한 것인지.

너무 많은 일이 한 번에 닥치니 이젠 조금 무섭기까지 하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하기에 이런 천운이 잇따른단 말인가.

"일단 나가자."

물 위를 둥둥 떠다니며, 한가롭게 감상에 젖어 있을 순 없는 일.

조용히 헤엄쳐 뭍으로 올라섰다.

기감을 곤두세워 주변을 살피자 주변엔 아무도 없는 듯했다. 인피면구를 뜯어내곤 얕게 숨을 뱉었다.

그러곤 근처 적당한 곳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밤하늘을 보며 약속했다.

"다른 건 몰라도, 살아 있는 동안 혈교 새끼들은 반드시 막겠습니다."

만일 하늘이 준 기회라면, 그건 필히 혈교를 잡아 족치라는 계시다.

'창귀신 적아린. 넌 내가 기억했다.'

그러니 어렵게 살아난 만큼 갚을 건 제대로 갚아주리라.

반드시.

우선, 취할 건 취하고 말이다.

* * *

- 일소궁 흑화원.

대공자 천무기의 방에 의원이 다녀갔다.

잔병 하나 없는 주옥같은 신체를 갖고 태어난 그가 처음으로 침을 맞았다.

병명은 울화병.

"장이서, 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새끼!"

이미 그가 그린 그림들은 찢겨나간 지 오래고, 식음을 전폐해 몰골은 피폐했다.

그만큼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사해령이 백인장의 인을 받은 것도, 천무기가 보화고의 열쇠를 얻어낸 것도. 하다못해 마오 따위가 만마분총에 들어설 수 있게 된 것도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님께서 한 번도 날 쳐다보지 않으셨다. 내가 돌아 나가는 그 순간까지 단 한 번도!"

천마 진우광에게 선택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용납이 되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자신이 소교주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은. 아니, 항상 무시만 했던 막내가 진짜 지존이 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은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원흉은 단 하나.

"장이서.... 그놈을 죽여야겠다."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버린 장이서였다.

사실 장이서는 기회를 주었고, 이를 걷어찬 건 그다.

하나 그런 건강한 생각이 가능하면, 어디 그게 마교의 대공자라 할 수 있겠는가.

"그놈을 죽이고 칠소궁도 갈가리 찢어놓을 것이다!"

대번에 포효를 내질렀다.

"하오나, 대공자님. 지금 교주님께서 눈여겨보는 칠소궁을 건드린다는 건 폭약을 터트리는 것과도 같은 일입니다."

보다 못한 유령마군이 호소했다. 하지만 이날을 위해 준비한 비장의 수가 있었으니.

"대공자님, 오셨습니다."

장지문이 열리고, 수하가 소식을 고했다. 이에 천무기의 입이 길게 올라섰다.

"마침 왔구나."

그리고 드르륵! 연달아 복도의 장지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안으로 들어섰다.

멀리서 봐도 냉혹함이 느껴지는 살수의 기운.

장이서처럼 일개 조장 출신이자, 지금은 천마의 넷째 아들.

사공자 살영도제(殺影刀帝) 한!

그가 나타났다. 장이서에 대한 조사를 마치고서.

"어찌 되었느냐. 놈의 약점은 찾아내었느냐?"

대공자가 염원을 담아 묻는다. 이에 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이서가 천산을 빠져나간 것 같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천무기와 유령마군의 눈이 부릅떠진다.

그리고 한은 나지막이 마저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외세와 내통한 듯합니다."

"그럼 놈이... 정말 첩자라도 된단 말이냐?!"

당황해 있던 천무기의 광대가 서서히 올라섰다.

"하....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장이서의 복귀에 비상이 걸리는 순간이었다.

* * *

- 월하촌 취선루.

"오호호호호!"

취선루에 듣기 싫은 웃음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새하얀 매처럼 옷에 깃털이 가득하고, 이마에 녹색 보석이 크게 박혀 있는 중년 여인.

"전부 제 발로 나가거라. 죄다 첩자로 끌려 나가고 싶지 않으면."

비룡당주 묘채경.

그녀가 불시에 당도했다.

"흐, 흐이이익!"

한순간에 취선루는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손님들은 부리나케 빠져나갔다.

"흥."

그녀는 엉망이 된 자리들을 흘깃 살피고는 코웃음 치며 걸음을 옮겼다.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이에 소식을 듣고 다급히 내려온 홍란이 주변을 살피고 큰 소리로 외치자, 그녀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너 지금 내게 한 말이니?"

"예. 대체 무슨 일로 이러시는 겁니까."

"오호호호! 이런 미친년을 보았나. 한낱 기녀 주제에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비룡당주 아니십니까."

"그걸 아는 년이 까불어? 네년 기둥서방이 장이서가 확실하구나. 겁도 없이 까부는 게 똑같아."

"용건이 무엇입니까."

"몰랐느냐? 장이서가 멋대로 천산을 빠져나갔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첩자라고 스스로 시인한 셈이지. 왜. 까부는 건 가르쳐줘도, 그건 안 가르쳐 주더냐? 믿을 것이라고는 기둥서방밖에 없는 년이. 뭣들 하느냐?! 당장 이년을 끌고 가거라!"

예! 취홍란을 향해 비룡당 무사들이 몰려든다. 그야말로 막무가내. 한데 바로 그때.

"그 여인이 믿을 게 왜 장이서뿐이지?"

사박, 사박.

눈 위를 걸어 내려오듯 실로 차갑고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모두의 귓가에 스몄다.

"또 어떤 년이!"

비룡당주가 미간을 찌푸리며 뒤돌아 욕지거리를 내뱉는 찰나.

"헉!"

여기 있어선 안 될 여인이 눈에 담겼다.

"그리고 장이서는 저 여인의 기둥서방이 아니라 벗이다. 아직은."

"사, 삼공녀님이 여길 왜...?"

"내가 내 사람 만나는데. 그 이유까지 당주한테 말해야 하나?"

"내 사람이라니요. 설마 저 기생년을 말씀하시는... 흣!"

비룡당주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스륵. 사해령이 귀신처럼 잔상을 남기며 한 걸음을 앞으로 디뎠다.

그러자.

"커헉!"

"큭!"

취홍란을 감싸던 비룡당의 정예들이 한순간에 와당탕! 나가떨어졌다.

칼도 안 뽑았거늘, 다섯이 일시에 당했다.

이건 당주고 뭐고 떼로 덤벼도 승산이 없는 싸움.

"한 번 더 함부로 입을 놀리면 그땐 칼을 뽑을 것이다."

더 까불면 네 머리가 바닥에 떨어진다는 얘기.

'그새 더 강해졌구나!'

꼴깍. 묘채경이 마른침을 삼켰다.

스스스스.

그러자 스며들 듯 사방에 무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월광십귀...!"

그리고 바로 등 뒤에 두 자루 소도를 들이밀며 나타난 은발의 고수도 있었다. 나락이다.

"장 보좌는 여기 없고, 저 여인도 아무 관련 없으니 조용히 돌아가라."

직급상으로 치자면 당주는 2급귀. 나락은 3급귀다. 한 단계 아래.

하나 그의 언사는 거침없이 하대를 쳤다. 그리고 이를 들은 비룡당주 역시 파르르 떨기만 할 뿐,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당연한 일.

지금이야 스스로 보좌가 되었지만, 그의 전직이 무엇인가.

전장에서 가장 포악했고, 강하다는 전대의 광룡당주다. 감히 까불 군번이 아니라는 얘기.

"...돌아간다."

휙! 비룡당주가 이빨을 부서질 듯 물고는 몸을 돌렸다.

한데....

"왜 안 비키는 것이냐?"

나락이 여전히 길을 막아선 채 소도를 겨누고 서 있다. 그러곤 옆으로 고갯짓했다. 뒤를 보라는 얘기.

이에 몸을 돌리자 나란히 서 있는 사해령과 취홍란이 보였다.

갈 길 가더라도 인사는 하고 가라는 뜻.

'이런 쳐 죽일....'

묘채경은 파르르 속눈썹을 떨고는 허리를 숙였다.

"소인의 무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포권을 취하는 묘채경.

사해령이 고개를 까딱이자 그제야 몸을 돌려 밖으로 나섰다.

"쓸모없는 것들!"

괜히 애꿎은 수하들에게 신경질은 기본. 그리고 남겨진 두 여인은.

"아무래도 장이서에게 또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로구나. 얼굴이나 보러 왔더니....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냐."

"그러게요...."

얼굴에 근심이 가득 서리기 시작했다.

남이 아닌 님을 향한 걱정으로.

215.

#드디어 잡혔구나!

- 천산 인근 어해촌.

한편 취선루가 발칵 뒤집힌 그 시각.

정작 당사자인 장이서는 흑립을 눌러쓴 채 한가로이 객잔에 앉아 바다처럼 넓은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홍란이나 사해령이 봤다면 두 눈에서 불을 뿜었을 일.

물론 이를 알 리 없는 장이서는 태연하게 술까지 시켰다.

"주인장. 여기 백주 한 병 주시오."

이어 서역에서 발행된 둥그런 은화 두 개를 비스듬히 상위에 겹쳐 올리자.

"...."

다가온 주인장은 말없이 이를 챙기고, 백주 하나를 툭 내려놓았다. 안주도 없다. 술값치고는 너무 과하다.

평소 장이서라면 학을 뗐을 텐데, 이번엔 표정에 기대감이 가득했다. 바쁜 와중에도 이곳을 찾은 이유이기도 했다.

정확히는 술이 아니라 마개로 쓰인 돌돌 말린 검은 천.

중원의 최근 소식을 송송 뚫린 점자로 알 수 있는 정보지였다.

'왕야가 죽고 능가경이 나타났다. 윤이와 제갈소미가 무사히 암각으로 복귀했다면 분명 뭔가 소식이 있을 거다.'

장이서는 천을 꺼내 펼치곤, 이를 검결지로 슥 쓸어내렸다. 그러곤 표정이 일변했다.

소식이 있다. 있긴 한데....

'전부 능가경 얘기잖아!'

一. 달마께서 남기신 원류심법은 역근세수경(易筋洗隨經)이 아닌 능가경이었다.

二. 소림을 대표해 남승께서 직접 조사에 나섰다.

三. 사도련과 황실에서도 예의 주시 중.

이건 예상보다도 사태가 훨씬 더 컸다. 물론 워낙 큰 사안이라 이해는 간다만....

'이건 과해. 사도련까지 움직일 정도면 강호 전체가 알게 되었다는 건데. 누가 일부러 퍼트린 게 아니고서야....'

게다가 마지막 네 번째 내용이 심히 거슬렸다.

四. 누군가 왕야를 해하고 능가경을 빼앗아 달아났다.

능가경은 제갈소미와 장이윤이 우연히 얻은 것을 자신이 이어받은 것.

한데 내용만 보면 제가 왕야를 해한 대역죄인이다.

이걸 암각에서 퍼트렸을 리는 없는 일.

'혈교에서 퍼트린 거다. 게다가 제갈소미는 능가경이 원류심법인 것도 알지 못했다.'

그걸 아는 건 자신과 왕야. 그리고 왕야를 해한 혈교뿐이었다.

또한 암각이 직접 움직였음에도 소문이 이렇게 났다는 건, 중원에 미치는 그들의 영향력이 상상 그 이상이라는 방증.

"음...."

중원의 암울한 현실에 절로 침음이 뱉어졌다. 그나마 능가경을 태워버린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도대체 그들은 어디까지 퍼져 있는 것일까. 잔잔한 강물마저 이제는 폭풍 전야처럼 느껴졌다. 언제고 혈교의 손에 이 모든 평화가 아스라이 사라질 것만 같은 기분.

절대 그리 둘 수는 없다.

그들에게 다가서고자 처음부터 하나씩 생각을 되짚었다.

'천악수라는 자신을 흉신팔주의 초대 팔흉이었다고 했다. 그 말인즉슨 그의 뒤를 제자인 사도철이 이었다는 것. 왜지?'

별거 아니라 생각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장이서는 의문을 품었다.

보통 자리를 물려준다는 건 퇴임을 하거나, 죽었을 때 일어나는 일.

하지만 천악수라는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사도철과 사호정은 어린 나이에 도라옥으로 들어간 죄인이었다. 덕분에 흔치 않은 일이지만, 출옥이 예정되어 있었지.'

그렇다면 유추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

도라옥과는 별개로 밖에서 활동할 존재가 필요했다는 것.

누구를 위해? 답은 간단했다.

'혈교.... 천악수라는 마교에서 돌아선 배교자다. 어쩌면 그의 임무 중 하나는 저와 같은 또 다른 배교자를 만들어내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또르르. 백주를 따르며 장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생각이 물꼬를 트자 그다음은 일사천리.

'적아린은 가면도 쓰지 않고 당당히 용모를 드러냈다. 자신이 혈교라는 것에 자부심마저 느껴지기도 했다. 반면 흉신팔주는 가면을 쓰고, 이를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왜?'

두 개의 신분을 지녔으니까.

'사도철이 팔흉이라면 광의는 칠흉. 그리고 그 또한 마교 출신이었으나 혈교로 넘어간 배교자다.'

종합하자면 흉신팔주는 처음부터 혈교가 아닌. 후에 혈교로 넘어간 자들일 공산이 컸다.

그것도 고위직에 몸담은 첩자!

게다가.

'사도철은 광의가 만든 미혼산을 직접 거래하면서도 그를 구하지 않았다. 광의 또한 그를 염두하고 한 짓 같지는 않았다. 이는 곧 같은 흉신팔주이면서 서로의 정체는 아예 몰랐다는 얘기.'

답답함에 타는 목을 술로 적셨다. 알면 알수록 그들이 더 멀게만 느껴진다.

하나 해야 할 일은 더더욱 명확해졌다.

'흉신팔주부터 찾아내야 한다. 놈들이 버젓이 숨어 있는 한 천하는 끝없이 놀아나게 될 테니.'

탁!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객잔에서 나와 흑립을 눌러쓰고 향한 곳은 어해촌에서 반 시진 정도 천산에 올라야 나오는 곳이었다.

얼핏 동굴 입구로 보이는 데를 암석이 우뚝 막아선 곳.

수풀이 우거진 데다 딱히 발길도 없어 대부분은 이런 곳이 있는지도 모르지만, 방첩대 사이에선 제법 익숙했다.

이곳이 마교로 들어서는 쥐구멍이었으니.

드르르륵!

이 각(30분)쯤 기다리자 암석에 발이 달린 것처럼 조금씩 옆으로 밀리더니, 동굴이 열렸다.

"늦었다, 조장."

그리고 안쪽에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흑거."

방첩대에 있을 때 같은 조에서 함께 일했던 검은 거인, 흑거였다.

적당한 대가만 주면 일 처리가 일품인 녀석. 지금은 그가 삼조를 맡고 있었다.

천산 밖을 오갈 수 있도록 그에게 미리 도움을 청했던 것.

피식 웃으며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일정이 조금 꼬였다. 별일 없...."

"미안하다, 조장."

털썩.

"흑거!"

어둠 속 커다란 인형이 앞으로 고꾸라진다. 달려가 몸을 살피자 맨발에 전신은 상처투성이고, 그가 온 길이 피로 얼룩져 있었다.

'함정?!'

그리고 장이서가 문제를 느낀 그 순간.

쉬익!

등 뒤에서 날렵하고도 뾰족한 살기가 기감을 강타했다.

암습이다!

곧장 몸을 비틀어 피해내자 푸푸푹! 바닥에 세 개의 암기가 연달아 박힌다.

다급히 바닥의 돌 하나를 움켜쥐고 일어나자.

쐐애애애액!

측면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음과 함께 일각이 쇄도했다.

콰직!

이를 돌덩이로 쳐 내자 가루가 되어 흩날리고, 장이서는 곧장 각법으로 반격에 나섰다.

팡!

하나 애꿎은 공기만 터져나간다. 상대는 이미 사라진 뒤.

'고수...!'

그때 다시 뒤에서 기습이 이어졌다.

파파파팍!

그리고 어둠 속에서 펼쳐지는 육탄전.

양상은 처음과 비슷했다.

상대는 사방을 점유하며 기습을 가했고, 장이서는 이를 귀신처럼 막아내며 반격에 나섰다.

그리고 수십 합 끝에 서로의 권과 장이 동시에 서로를 강타했다.

퍽!

"큭...!"

"음...."

일시에 침음을 뱉으며 뒤로 물러선 두 사람. 그제야 장이서는 처음으로 상대를 마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도사견...?!"

방첩대에 미친개가 있다면, 살혼대에는 도사견이 있다.

마교 내 이쪽 계열에서 두 사람을 두고 전설처럼 내려오는 말이다.

그만큼 각자 영역에서 출중했기 때문.

게다가 공동으로 진행했던 임무도 여러 번 있었던 터라 한때는 서로 경쟁과 협력을 벌이기도 했었다.

물론 지금은 세월이 흘러 신분이 달라졌지만.

"아직도 날 그렇게 부르는 건 너밖에 없을 거다, 미친개."

서늘한 안색에 지극히 차가워 보이는 인상. 짙은 어둠이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자.

"그렇겠지. 이젠 잘나신 사공자가 되셨으니."

살영도제(殺影刀帝) 한.

바로 그였다.

장이서는 쓰러져 있는 흑거를 한 번 살피곤 차가운 눈매로 물었다.

"대공자의 지시인가?"

공대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대공자의 사람인 건 이미 공공연한 일.

칼 꽂은 상대에게 예까지 갖출 만큼 호구가 아니다.

"말은 바로 해야지. 멋대로 천산을 빠져나간 건 너다."

"아니. 나가기 전엔 몰랐는데 이젠 확실히 알겠다. 마가에서 돌아온 후부터 꼭 살쾡이가 몰래 훔쳐보는 거 같더라니. 그게 너였어. 어둡고 서늘한 게 딱 너거든. 애초에 날 노렸던 거지."

"...."

도사견. 아니 사공자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의 말을 딱히 부정하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

'확실히 예전의 미친개가 아니다.'

그는 아주 오래전 장이서의 가치를 알아본 몇 안 되는 자.

해서 그가 보좌가 된 것이나, 과거 무수한 재물을 쌓아뒀다는 정황이나, 번번이 대공자를 물 먹인 것이나.

어느 것 하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왜?

그럴 만한 머리와 배짱을 가진 녀석이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신적인 영역.

'먼발치 인파에 숨어 관찰할 때만 해도 설마 했었다. 한데 미친개는 진짜 내 기척을 느꼈던 거다.'

이건 단순히 눈치가 빠르다고 가능한 게 아니었다.

은신술에 있어선 교내에서 살혼대주, 방첩대주, 비룡당주와 더불어 네 손가락에 꼽히는 게 그다.

더구나....

고개를 떨궈 손목을 바라보자 뼈가 욱신거렸다.

'전력을 다한 건 아니지만, 수십 합 동안 나와 동수를 펼쳤다. 과거라면 모를까, 대체 어떻게....'

이게 제일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었다.

과거에도 자신이 더 강했지만, 그래도 그땐 제가 갓 절정에 이른 초입이었으니 변수와 임기응변을 고려하면 일류였던 그와 비등하다고 말해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살영도제. 무려 천마에게 제(帝)자의 별호를 하사받은 초절정 고수로 다시 태어나지 않았는가.

"하나 묻지."

스릉! 침묵 끝에 한이 허리춤에서 횡도(橫刀)를 꺼냈다.

천마에게 받은 신물 귀살도(鬼殺刀)다.

"한낱 조장이었던 네가 무슨 수로 이리 강해진 거지?"

하! 장이서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숨을 뱉었다.

"그 얘기를 조장이었던 너한테 들으니까 너무 어이가 없는데?"

"나와 같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난 천마께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어, 나도 마찬가지. 호위까지 서주더라.

물론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일. 게다가 그때보다 훨씬 더 강해진 것도 맞다.

장이서는 내색하지 않았으나 굳이 지금의 경지를 논하자면 절정 끝자락.

거기에 남천능가경의 숨겨진 신력(神力)과 뇌전법. 그리고 혈마귀라는 잠력까지 고려하면 그의 끝은 이제 측정 불가였다.

"되었다. 어차피 네 정체가 무엇이든 이번엔 살아 나갈 수 없을 거다."

사공자가 소리 없는 걸음을 내디딘다. 장이서도 걸음을 물리며 답했다.

"감당할 수 있겠어?"

실로 오만방자한 말. 하지만 사공자는 장이서를 안다.

미친개가 하는 말을 우습게 보다 사지가 물려 나간 놈이 어디 한둘이던가.

하나.

"칠소궁이 알을 깨고 날아올랐다곤 해도, 대공자님 앞에선 새장 안의 소조(小鳥)일 뿐. 헛된 기대는 버려라."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럼 뒷조사 처음부터 다시 하는 게 좋을 거야. 제대로 알아낸 게 하나도 없는 거니까."

"짖어도 소용없다. 이번엔 그 누가 와도 널 빼내 주지 못할 것이니."

"과연 그럴까?"

"얌전히 따라라. 그게 아니면...."

흠칫! 뒷걸음질 치던 장이서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러자 새하얀 도포에 황금색으로 비(飛)자가 쓰인 무사들이 진을 치고 서 있는 것이 먼발치 눈에 담겼다.

"비룡당?!"

그리고 그들 사이를 가르며 기분 나쁜 웃음을 터트리며 다가오는 여인.

"오호호호호! 드디어 잡혔구나!"

"묘채경...."

비룡당주 묘채경.

그녀가 나타났다.

216.

#충격적인 소식

"칠공자 보좌 장이서. 널 교리에 따라 본교를 배반하고 외부와 결탁한 혐의로 압송하겠다."

비룡당주의 선포가 떨어졌다.

"헛소리! 누가 누구와 결탁을...!"

"호호호! 그래, 그리 쉬이 인정하면 어디 그게 첩자겠느냐. 눈앞에 증거를 밀든, 목구녕에 칼을 밀든. 죽어서도 부인하는 것이 첩자인 것을.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고 있겠지?"

"미친...."

"가서도 어디 한번 그렇게 떠들어 보거라. 아주 재밌어질 테니. 뭣들 하느냐? 포박하지 않고!"

비룡당의 정예 무사들이 날아들 듯 몰려와 사방을 포위했다.

이거였나.

"미친개, 옛정에 충고 하나 하지. 얌전히 가라. 내 손으로 널 베고 싶진 않으니."

"도사견 다 죽었네. 애완견 다 됐어."

"악감정은 없다. 그저 대세를 따를 뿐."

사공자가 쥔 칼에서 첨예한 살기가 뿜어진다. 지금까지는 예행. 여차하면 제대로 상대해 주겠다는 뜻.

'지랄맞네.'

욕지거리가 절로 나올 만큼 상황이 좋지 않다.

물론 혈마귀의 힘을 쓴다면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죄를 시인하고 사태만 더 키우는 격.

장이서는 장고 끝에 결국 두 손을 머리 뒤로 들었다. 뒤에서 당원들이 달려온다.

이를 흘깃 보곤 사공자에게 조용히 말했다.

"나도 충고 하나 할까? 네가 잡은 그 줄. 대세 아니고 패세(敗勢)야. 살고 싶으면 놓는 게 좋을 거다. 내 말 명심해."

"...."

이어 다가온 당원들이 장이서를 거칠게 포박하곤 강제로 무릎을 털썩 꿇렸다.

"오호호호! 그래도 생각은 있구나. 도망치면 바로 즉살해 버리려고 했는데."

"당주. 제가 했던 말 기억합니까?"

"뭘 말이냐."

"분명히 말씀드렸을 텐데요. 아무 생각도 하지 마시라고."

짝! 묘채경의 손찌검에 장이서의 고개가 휙 돌아가고, 입가에 피가 주룩 흐른다.

"건방진 새끼. 곧 죽어도 입은 살았구나. 어디 가서도 그리 기세등등한지 보자."

"후회하실 겁니다."

"끌고 가라!"

장이서는 픽 웃고는 떠밀리듯 끌려 나갔다. 사공자는 칼을 집어넣곤 그런 장이서의 뒤를 무심히 흘겼다.

천산으로 돌아온 지 불과 일각도 채 안 된 시간.

장이서가 붙잡혔다.

그것도 첩자라는 누명 아닌 누명을 쓴 채.

* * *

- 일소궁 흑화원.

유령마군이 다급한 걸음으로 줄줄이 열린 장지문을 지나쳤다. 그리고 가장 안쪽에 위치한 방 앞에 다다라 들뜬 숨을 갈음하곤 들어섰다.

그러자 대공자의 입에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도 들지 말라 하였거늘...."

그는 엎드려 누운 채로 여인들의 안마를 받고 있었는데, 이때는 오직 그만의 시간이다.

"송구합니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하나 유령마군이 설마 그걸 모를까. 그만큼 다급했다.

대공자는 얕게 숨을 뱉고는 여인들을 손짓으로 물렸다. 일어선 그가 옷을 걸치며 말했다.

"무슨 일이냐."

별거 아니면 손가락 두어 개쯤은 각오해야 한다는 어투. 하나 이어진 말에 언제 그랬냐는 듯 반색했다.

"비룡당에서 장이서를 추포하였다는 급보이옵니다."

"...!"

"무단으로 천산을 이탈했다가 돌아오는 현장에서 잡았다고 합니다."

"하하하하!"

대공자의 입가가 길게 찢어졌다. 묵은 체증이 한 번에 내려가는 기분.

"이런 멍청한 놈을 보았나. 제 알아서 무덤을 파는구나."

"비룡당주가 직접 심문에 나서 모든 죄를 실토하게 만들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야지. 막내는?"

"아직 천마전에서 나오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만마분총에 들어간 것 같사옵니다."

"건방진 것들.... 이번 일로 모든 것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을 것이다."

빼앗긴 천마의 관심도, 그리고 자신의 자존심도. 모두 말이다.

"당주에게 전하거라. 뒤는 내가 봐줄 테니 아무 걱정 말고 놈을 제대로 심문하라고. 또한 놈을 돕는 자가 있다면, 모두 첩자로 간주해 없애버리라고 말이다."

"존명!"

유령마군이 부복하며 상답하곤, 밖으로 나섰다. 홀로 남은 대공자는 들뜬 기분을 숨기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네놈이 혼자선 얼마나 보잘것없고 무력한 존재인지. 그 안에서 철저히 깨닫게 해주마. 그리고 반성하거라. 감히 사냥개 주제에 내 손길을 거부하고 날 물어 젖힌 것을. 후후... 하하하하!"

*

장이서가 첩자 혐의로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불과 하루도 안 된 사이, 그의 충격적인 소식은 마교 수뇌부들 사이에 급속도로 퍼졌다.

아직 신도들한테 이름이 오르내릴 정도는 아니라 세간은 잠잠했지만, 난다 긴다 하는 이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만큼 수뇌부 사이에선 장이서의 존재감이 컸기 때문.

특히 그가 이번 도라옥의 반란을 조기 진압한 칠소궁의 실세이기에 논란은 더욱 컸다.

하나 허가 없이 천산 밖으로 나갔다가 붙잡힌 정황이 너무나 명확했고, 외부와 결탁했다는 소문까지 나돌면서 누구든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장이서도 여기가 끝인가 보군."

"이 정도까지 말한다는 건 누가 엮이든 같이 묻을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칠장로인 양요와 양유는 동시에 고개를 저으며 비평을 내놓았다.

장이서에게 진짜 죄가 있고 없고는 중요치 않았다. 대세를 읽은 것이다.

이번엔 그가 반드시 죽으리라는 것을.

"어디 가십니까, 오공녀님."

"배, 백부!"

"지난번처럼 육공자께 가서 알릴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십시오."

"딱 걸렸네.... 헤헤."

삼장로 쪽에선 다시 폐관에 들어간 맹휘를 찾아가던 맹원원이 저지되었고, 일장로는 번천검객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장이서가 이번에 살아나오지 못한다면 칠소궁과의 관계도 여기까지다."

말인즉슨 알아서 생존하라는 뜻. 이는 이공자 측도 마찬가지였다.

"하.... 선물이라도 보내 친해져 보려 했더니. 미뤄야겠네?"

심지어 처음부터 끝까지 우호적이던 삼소궁마저 낙담했다.

"이번엔 대공자 측에서 만반의 준비를 한 것 같습니다. 아쉽지만... 이번엔 그냥 지켜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장이서...."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상황.

그리고 그 여파는 장이서 주변을 향해 몰아쳤다.

*

- 월하촌 취선루.

"샅샅이 뒤져라!"

취선루에 들이닥친 비룡당의 무사들.

"올라가시면 안 됩니다!"

대비하듯 백색 무복의 여인들이 이를 막아섰지만.

서걱!

"꺄아아악!"

이미 적들은 기호지세.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르며 올라섰다.

와장창! 그때부터는 엉망진창이었다. 집기가 부서지고, 술상이 엎어지며, 바닥엔 누군지도 모를 이들의 피가 낭자했다.

비룡당은 거침이 없었고, 조금이라도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은 닥치는 대로 수집했다.

"루주를 지켜야 한다!"

"막아라!"

콰직! 급기야 금남의 영역인 마지막 루주의 방까지 쳐들어온 그들.

문은 부서지고, 홍란은 자리에 앉아 침중한 얼굴로 비룡당을 맞이했다.

"이번엔 삼공녀께서도 널 지켜주지 못할 것이다. 뒤져라!"

와지끈! 방 안을 부수는 흑색 소음이 가득히 퍼진다.

홍란은 눈을 질끈 감았고, 그녀의 수하들은 이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

취선루가 무너지고 있을 시각. 다른 곳들도 마찬가지였다.

"혀, 형님! 큰일 났지 말... 크억!"

"메, 메기야-!"

흑룡공방이 운영 중이던 목공소와 대장간은 무너져내렸고, 소오의 불문객잔은....

"본교의 교칙에 따라 오늘부로 이곳의 영업을 금한다."

"와.... 아니, 진짜로? 갑자기?!"

한순간에 권리마저 잃고 볼모로 붙잡혔다.

그야말로 풍비박산이었다.

* * *

비룡당 지하 고문실.

천무기는 묘채경에게 뒤를 봐줄 테니 마음껏 심문하라고 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오호호호호! 내가 드디어 네놈을 여기 앉히는구나."

장이서를 심문하는 이 순간이 곧 그녀의 숙원 사업이었으니.

"음...."

장이서는 벽에 박힌 철갑(鐵匣)에 대(大)자로 사지가 묶인 채 주변을 살폈다.

안에는 익숙한 형구(刑具-고문 도구)들이 가득했다. 수갑에 인두는 기본이고, 벽에는 칼부터 쇠침이 박힌 몽둥이까지 종류별로 전시되어 있기도 했다.

"어떠하냐. 예부터 추포는 방첩대가 더 나아도, 고문은 비룡당이 한 수 위라는 말이 있지."

자랑이냐! 묘채경은 가운데 의자에 다릴 꼬고 앉아 고상하게 제 턱을 쓸었다. 대조적으로 팔자 주름엔 고약한 심보가 그득하다.

오늘 아주 끝을 보겠다는 것.

"나중에 제가 아무 죄가 없는 거로 밝혀지면 어떻게 감당하려고 이러십니까."

"오호호호!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보구나. 네놈은 허가도 없이 천산을 이탈했다가 몰래 돌아오는 그 순간에 잡혀 온 것이다. 여기에 다른 증거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

솔직히 그건 맞는 말. 역지사지로 방첩대 시절 당주가 똑같은 이유로 붙잡혔다면, 장이서는 사돈에 팔촌까지 엮어 줄줄이 지옥행 마차를 태워줬을 거다.

재산까지 탈탈 털어내는 건 덤. 아무튼 그만큼 중죄라는 얘기.

"되었다.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거라. 그냥 입 꾹 다물고 버티거라. 너무 쉽게 말하면 재미가 없지 않으냐. 여봐라!"

그녀가 목청껏 외치자 뒤편의 어둠 속에서 초로기의 노인이 앞으로 나섰다.

칼 하나 못 들 것처럼 깡마른 몸에 눈빛은 사이하기 그지없다. 옷은 당복(黨服)을 입지 않고, 백정처럼 굳은 피가 가득한 앞치마를 둘렀다.

저자는....

"소개하마. 너도 들어는 봤을 것이다. 비룡당의 자랑이자 최고 고문자(拷問者)인 형 선생이다."

형 선생. 들어본 적이 있다.

본명은 알 수 없고, 형구를 귀신처럼 다룬다고 하여 형 선생이라고 불렀다.

한마디로 고문술의 최강자.

"클클. 방첩대의 미친개라니.... 이리 귀한 먹잇감을 마련해 주신 당주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호호! 형 선생. 입이 아주 무거운 친구이니 잘 만져주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형 선생이 뒷짐을 진 채 다가섰다.

"반갑네. 형 선생일세."

"장이서다."

이놈 봐라. 형 선생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과거라면 4급귀인 자신을 쳐다도 못 볼 놈이 건방지게. 하나 여기서 화내는 건 애송이나 하는 짓.

"패기가 좋구먼. 뭐, 피차 다 아는 사이끼리 시간 낭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같은 생각이야."

"클클, 잘 되었군. 그럼 딱 한 번만 물음세. 신중히 고민하고 답하게. 기회는 한 번이니. 자네가... 첩자가 맞는가?"

고민할 게 뭐 있나.

"전혀."

픽 웃으며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할 거 해보라는 얘기.

그러자 형 선생이 입꼬리를 내리며 말했다.

"남들은 이곳을 두려워하지만, 사실 이곳만큼 인간사에 도움이 되는 곳도 없다네. 왜인지 아는가?"

"모르겠는데."

"여기선 모두가 후회를 하기 때문일세. 생각해 보게. 인간에게 후회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너무 오래 고문만 해서 그런가? 당신도 제정신은 아니군."

"클클,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아니지! 나 같은 자가 없었다면 세상은 절대 지금처럼 발전하지 못했을 걸세. 그릇된 걸 옳다고 믿으며 살아갔을 것이고, 계속 같은 실수를 답습했겠지. 왜? 후회가 없으니까."

"궤변 잘 들었고. 그래서?"

"후회하게 해주겠네."

형 선생이 방긋 웃으며 품에서 침통 하나를 꺼냈다.

217.

#여긴 그런 곳이니까

묘채경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형 선생이 꺼낸 침통은 얼핏 보면 의술용 침처럼 보이지만, 지금의 명성을 있게 해준 형구였다.

"구독침(九毒針)일세. 총 아홉 개로 이루어져 꽂힐 때마다 차라리 사지를 잘라달라고 비명을 지르곤 하지."

들어는 봤다. 누구든 입을 열 수밖에 없어 구개침(口開針)으로도 불린다고.

"클클, 표정을 보니 잘 알고 있구먼. 다음 질문은 다 꽂고 하도록 하지. 부디 오래 버텨주길 바라네."

"후회할 텐데."

"후회는 자네가 하는 거고. 꼭 어린놈들의 건방짐은 날 흥분케 하지. 기대하게."

형 선생이 통에서 거침없이 대침을 꺼냈다. 그리고 묘채경은 이를 보며 조소를 퍼부었다.

"오호호호! 장이서. 드디어 네놈의 고통에 찬 비명을 들을 수 있겠구나."

이 얼마나 기다려 온 순간이던가. 가슴이 다 웅장해진다. 이윽고 형 선생의 첫 번째 침이 발등에 톡 꽂혔다.

"오호호! 빌어라. 어디 제발 살려달라고 빌어보란 말이다!"

한데.

"음?!"

묘채경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장이서의 표정이 너무나 평온했기 때문.

당연했다.

'청목독(靑木毒)이군. 죽을 일은 없지만 고통은 극심한 편이지.'

만독불침인 그에게 통할 리가 없으니. 이건 그냥 모기 물린 것보다도 못한 수준.

"형 선생, 어떻게 된 거요?"

일순 당황했던 형 선생이 금세 표정을 풀고는 웃으며 말했다.

"클클, 역시 미친개로군요. 이리 잘 참아내는 것을 보니. 아마 속으로는 울고 있을 겁니다."

응, 전혀 아니야.

"하지만 구개침의 악랄함은 갈수록 그 고통이 배가 된다는 것! 핫!"

형 선생이 기합을 터트리며 두 번째 침을 꽂았다.

"속으로 얼마나 괴로워할지 훤히 보이는구나! 어떠냐? 네 발을 잘라내고 싶으냐?"

"아니, 난...."

"어림없다! 핫!"

말은 끝까지 듣지도 않은 채 푸푸푸푹! 동시에 네 개의 침을 꽂았다.

하나 그래봤자 초지일관. 장이서는 하품까지 해 보였다.

"어, 어떻게? 이게 왜...."

형 선생의 이마에 진땀이 흐른다. 반면 묘채경은 세상 무서운 기세로 읊조렸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 그것이...."

그가 뭘 알겠는가. 장이서가 얕게 숨을 뱉고는 대신 답해주었다.

"뭘 물으십니까. 형 선생은 제가 매수한 사람인데."

"어디서 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형 선생이 비명을 질렀다. 이에 장이서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눈으로 말했다.

내가 후회할 거라고 했지.

그리고 바로 다시 말을 이었다.

"미리 독을 빼두라 해뒀지요."

"그, 그럴 리 없습니다!"

"못 믿겠으면 당주께서도 직접 받아보시든지요. 돈 몇 푼에 쉽게 움직이는 사람이던데. 비룡당의 자랑이래서 기대했는데, 참 쉽습니다. 그렇죠?"

묘채경의 얼굴이 복잡미묘하게 일그러진다. 솔직히 말이 안 된다. 형 선생을 저 몰래 만날 시간이 어디 있었다고.

하지만 상대는 장이서.

이죽거리는 저 면상만 봐도 뭔 꿍꿍이를 꾸밀지 알 수 없는 놈이다.

"가져와."

결국 묘채경은 형 선생한테 차갑게 말을 뱉었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속지 마십시오!"

"가져오라는 말 안 들려-!"

새소리 같은 고함에 형 선생이 울상을 짓고는 장이서의 몸에서 침 하나를 뽑았다.

이에 묘채경은 장이서를 죽일 듯 노려보며 소매를 걷고 옆으로 팔을 쭉 뻗었다.

"놔."

"어, 어찌... 흑.... 믿어주십시오, 당주님."

형 선생이 무릎을 털썩 꿇었다.

"놔-!"

하지만 묘채경의 날짐승 같은 기세에 결국 눈을 질끈 감고 침을 뾰족이 세웠다.

그리고 푹! 혈을 찌르는 순간.

"키햐아아아아아악-!"

고라니가 승천했다.

"하하하하!"

장이서의 박장대소가 터지고, 비룡당주는 연이은 비명과 함께 침을 뽑아 던졌다.

얼마나 아픈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형 선생도 울고, 장이서도 울었다.

그리고 장이서는 간신히 눈물 맺힌 웃음을 삼키곤 말했다.

"비룡당의 자랑을 그리 못 믿으셔서야. 보기 좋습니다."

"너 이 새끼...."

묘채경은 머릿속이 완전히 헝클어졌다.

분명 팔이 잘려 나가는 고통이었다. 이는 분명 구독침은 멀쩡하다는 얘기.

한데....

"너는 왜 멀쩡한 것이냐?!"

"모르셔도 됩니다. 그리고 쓸데없는 시간 낭비는 그만하시죠."

딱딱딱. 깊은 떨림에 묘채경의 어금니가 연달아 부딪쳐 소리를 낸다. 이는 두려움으로 인한 떨림이 아니었다. 분노였다.

"장이서어어어어어-!"

쐐애애액!

묘채경이 자리를 박차고 날카로운 손톱을 장이서의 목 끝에 멈춰 세웠다.

주르륵.

빨간 핏물이 흘러내린다. 여기서 한 치만 더 들어가도 죽는다.

하나 장이서의 눈빛과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가웠고, 섬찟했다.

"후회할 짓 하지 마십시오."

"닥쳐라-! 네놈은 무단으로 천산 밖으로 나간 중죄를 저질렀다. 여기서 시체가 되어 나가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중죄를 저지른 적 없습니다."

"천산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하나, 천마전의 허락을 받거나. 둘, 1급귀가 동행했을 때뿐이다. 한데도 죄가 없다?!"

"하나가 더 있지 않습니까."

"뭐?"

"셋, 전시 상황에 본교의 적을 불가피하게 뒤쫓아야 할 경우."

쿵! 그녀의 가슴에 큰 돌덩이가 떨어졌다. 장이서의 말대로 그런 조항이 있다.

하지만 그건 위급한 전시 상황에서나 통용될 일.

그녀가 당장 목구멍을 뚫어버릴 것처럼 살벌한 기세로 말했다.

"어디서 개수작을 부리는 것이냐? 본교에 그런 상황은...."

"도라옥의 잔당을 쫓았습니다."

"뭐?!"

비룡당주의 두 눈이 크게 흔들렸다. 얼굴은 붉게 상기 됐고, 숨은 가빠졌다.

"이번 도라옥의 반란 사태를 저희 칠소궁이 해결했다는 건 이미 들으셨을 겁니다. 본교의 전력이 서문에 몰려 있었고, 하필 그때 놈들이 천산을 유린했습니다. 마치 공조자들이 있는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전 일부러 놈들을 풀어주고 몰래 추격해 뒤를 밟은 겁니다."

"공조자들을... 찾기 위해?"

장이서가 웃는다. 묘채경은 혼란으로 가득해졌다. 아무리 성질머리가 개차반이라지만, 그래도 당주 직을 십 년 가까이 유지한 여자다.

어지간한 일머리로는 꿈도 못 꿀 일.

'정말인가?'

모르겠다. 보통 거짓을 말하는 상대는 눈, 코, 입. 심지어 눈썹에 솜털까지도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장이서는 달랐다.

이 음흉한 자식의 속내는 자신이 읽어낼 수준이 아니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일갈했다.

"거짓말을 잘도 지껄이는구나! 이미 네놈이 외부와 결탁했다는 제보가 있다."

"제보? 누굽니까."

"흥, 왜. 켕기는 거라도 있는 것이냐?"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판단을 잘하셔야 할 겁니다. 본래 음모가 난무하는 곳 아닙니까."

"그래서 뭐. 그 덕에 네놈을 죽일 수 있다면 나야 좋은 일이지."

"대신 후에 일어날 모든 책임을 당주께서 지실 수도 있겠지요."

"...!"

"참, 제가 쫓던 자들이 혈교인 건 아십니까?"

가다듬은 정신이 바로 가출했다. 입은 떡 벌어지고, 비틀거릴 만큼 뒤통수가 찌릿했다.

"도라옥은 혈교의 잔당이었습니다. 이는 교주님도 이미 알고 계신 일. 그런 그들을 쫓고 돌아온 제가 공교롭게도 첩자가 되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묘채경이 부르르 떤다. 전혀 몰랐던 사실이다. 혈교라는 얘기는 공식 석상에서 일언반구도 없었기 때문.

"대공자께서도 말씀 안 해주셨나 봅니다. 그분도 알고 계셨을 텐데."

"...!"

묘채경의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그럼 대공자가 날 이 녀석을 잡는 칼로 쓰고 버리려 했다는 것인가. 장이서를 첩자로 모함해 죽인 죄를 덮어씌우려고?!'

부정할 수 없는 일. 심지어 서문의 총책임자는 대공자였다. 그리고 제게 제보를 한 것도 대공자다.

이건... 너무 소름 끼치는 일 아닌가!

"제가 말씀드렸죠. 아무 생각도 하지 마시라고."

"나는...."

"다시 묻죠. 지금 이 상황.... 책임지실 수 있겠습니까?"

"그, 그것이...."

"비룡당주-!"

"히이익!"

묘채경이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끝났다.

이건 누가 봐도 승패가 명확한 상황.

"풀어."

장이서가 형 선생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러자 그가 바들바들 떨면서 다가와 침을 뽑고, 철갑을 풀어준다.

묘채경은 넋 나간 얼굴로 이를 지켜보기만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덜컥! 문이 열렸다.

"거기까지."

어둠보다 어둠이 더 잘 어울리는 자.

창백한 인상의 사공자 한이다.

"대공자께서 뒤를 봐준다고 얘기했을 텐데."

"그, 그것이...."

묘채경이 말을 더듬자 사공자는 쳐다도 보기 싫다는 듯 형 선생에게 말했다.

"당주를 데리고 나가라."

"예."

밖으로 나가는 두 사람.

끼익! 문이 닫히고, 방 안엔 미친개와 도사견만이 남겨졌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둘 다 옛 티를 벗었다고 생각했거늘. 이리 오랜만에 함께 있으니 둘 다 맹수의 향이 짙게 뿜어진다.

"그 입은 여전하군. 비룡당주를 말로 물러서게 할 자는 미친개 너밖에 없을 거다."

장이서는 앞의 빈 의자를 드륵 끌어당겨 앉고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나서지 그랬어."

"설마 그렇게 빠져나갈 줄은 몰랐다."

"그럼 어떻게 나갈 줄 알았는데. 다 죽이고 나갈 줄 알았냐?"

여기서 살아 나간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거 아닌가? 사공자는 이해할 수 없는 대화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하나 별로 놀랍지는 않았다. 쉽게 당할 놈이면 미친개가 아니니.

"넌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다."

"잡아둘 명분은 있고?"

"충분히."

"이보세요, 사공자 나으리. 밖에서 얘기 못 들으셨습니까? 내가 밖에 나갔다 온 건 모두 혈교를 쫓기 위해...."

그때였다.

"취선루의 루주가 모용세가의 여식이더군."

"뭐...?"

사공자의 입에서 차분하지만, 비수 같은 말이 날아들었다.

"억울하게 붙잡혀 온 모양이야. 열심히 살았어. 의심 갈 만한 일도 하지 않았고. 하지만 잘 알 거다. 그런 과거가 있다면 첩자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니라는 걸."

"야."

"흑룡공방을 운영 중인 용태. 호룡당 출신에 인맥이 꽤 넓더군. 불문객잔의 소오. 정보상이라 그런가 수상한 점도 한둘이 아니지. 더 하길 바라나?"

"야!"

"칠소궁이 있는 월하촌도 예외가 될 순 없다. 도라옥도 혈교였던 마당에 마을 하나쯤이야."

"도사견-!"

격분한 채 벌떡 일어섰다. 그러곤 살기등등한 기세를 뿜어냈다.

하나 사공자는 눈썹 한 올 흔들리지 않은 채 평온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네가 나가는 순간, 수많은 이가 대신 이곳에 오게 될 거다. 그래도 괜찮은가?"

"그렇게 쉽게 될 거 같아?"

"막아보려고 해도 소용없다. 도와줄 자는 아무도 없을 테니. 칠소궁은 만마분총에 들어섰고, 다른 후계들과 장로들. 그리고 오룡당과 대주들까지. 아무도 널 돕지 않을 거다."

"이리 치졸하게 나오겠다고."

"여긴 그런 곳이니까."

그래?

"너... 이런 놈이었냐?"

218.

#두 개의 기운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오랜 인연이고, 짧은 인연이다.

하지만 과거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믿음이라는 게 있었다.

적어도 이 녀석이라면. 최소한 선은 넘지 않으리라. 같은 편일 땐 등을 맡겨도 되리라. 그런 믿음 말이다.

한데 지금은....

"미친개. 네가 혼자서 뭘 할 수 있지? 아무것도. 넌 아무도 구하지 못할 거다."

"추하다. 그렇게 대공자한테 잘 보이고 싶냐? 왜. 광명사자 자리라도 내준대?"

"...며칠 안에 대공자께서 오실 거다. 그날이 네 처형식이다. 그러니 빌어라. 살려달라고. 충성을 다하겠다고. 쉽게 믿진 않으시겠지만, 네 능력이라면 설득할 수 있겠지."

"지금 그걸 말이라고...!"

"그게 너와 네 주변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내 말 명심해라. 네가 여기서 나가는 순간 다른 이들이 죽는다는 것을."

"야! 도사견! 사공자-!"

쾅! 사공자는 말을 마치곤 그대로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사지를 속박한 철쇄는 풀렸지만, 그보다 더 강한 족쇄를 남겨두고서.

* * *

한편 장이서의 앞날에 먹구름이 잔뜩 서리고 있을 그 시각.

독마 양대헌은 천산에서도 가장 높고 험한 봉우리이자, 사시사철 폭설이 내린다는 만년설봉에 올라 있었다.

길은 비탈지고, 새하얀 눈에 한 치 앞도 제대로 보기 힘든 수준이었지만 그의 행보엔 거침이 없었다.

이곳을 찾은 이유는 단 하나.

'내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분명 이 근방일 거다. 이곳 어딘가에 만년설삼(萬年雪蔘)이 있다.'

만년설삼! 영험한 기운으로 무려 1갑자의 내공을 증진해 준다는 전설의 영약이다.

이를 찾기 위해 직접 위험천만한 설봉을 오른 것이다.

오직 장이서만을 위해.

'구규지체를 치료하려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독과 약은 한 끗 차이.

독마는 잘 알고 있었다. 어설픈 영약으로는 어차피 천마기에게 잡아 먹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만년설삼은 달랐다. 독보적인 양기가 분명 도움이 되어 줄 것이리라.

'조금만 기다리거라. 무슨 일이 있어도 널 혈마귀에게 먹히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니.'

얼마나 장이서를 위하는지 그 진심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리고 그와는 조금 방식이 다르지만, 똑같이 머릿속이 장이서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찬 전설적인 존재가 하나 더 있었다.

"첩자?"

천마전 정상. 드넓은 호수를 내려다보던 그가 스륵 몸을 돌렸다.

백발의 미공자.

만마의 신, 천마 진우광이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마교의 일백마성과 수뇌부의 목숨을 관장하는 저승사자 우사 흑야가 공손히 서 있었다.

"장이서는 무단으로 천산을 이탈하였고, 외세와 결탁했다는 제보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여 일공자가 이를 직접 심판하고자 권한 위임을 요청하였고, 지금은 비룡당으로 향하였습니다."

마침내 그의 소식이 이곳 정상까지 다다른 것.

그리고 이는.

"교주님...?"

하하하하하! 실로 오랜만에 천마 진우광에게 커다란 웃음을 선사하였다.

장이서가 첩자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이번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이냐.'

절벽 위를 기어오를 장이서의 모습이 너무나 기대되기에.

그래서 웃었다.

"어찌할까요."

"주거라. 첫째에게도 이번 일을 만회할 기회는 주어야지."

다만, 만일 이번에 장이서에게 패한다면 그 대가는 엄중할 것이다. 반면 이긴 자에겐 크나큰 포상이 따를 것이고.

독마가 자식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절벽을 오르는 자라면, 천마는 절벽 밑으로 밀어버린 뒤 스스로 올라오길 지켜보는 자.

그것이 바로 천마 진우광이었다.

* * *

저로 인해 천산이 들썩이고 있을 무렵.

정작 장이서는 차분히 명상에 빠져 있었다.

감옥은 고요했고 시간은 기약 없이 흘렀다.

시기에 맞진 않으나 남천능가경을 익히자마자 떠나온 장이서에겐 놓치기 아까운 시간.

곧장 내기를 운기했다.

웅웅웅! 전보다도 훨씬 더 깊고 영험한 공명음. 이내 단전에서 삼 층 석탑처럼 층층이 쌓인 내기가 강물처럼 일렁인다.

첫 층은 심해처럼 어둡고 사나우며, 둘째 층은 녹아내릴 듯 끈적하고 교활하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는 태양이 비춘 듯 영롱하니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녀석들이다.

'싸우지만 마라.'

장이서는 모두가 서운하지 않게 하나씩 내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내기에 따라 몸 밖으로 흘러 나가는 기파도 달라졌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분위기도 바뀌었다.

천마신공에선 위압감이 풍겼고, 불사독마공에서는 음산함을 넘어 사악함까지 느껴졌다. 그리고 남천능가경을 펼칠 때는 대종사의 정대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흔한 경우는 절대 아니었다. 지대호가 봤다면 두 눈을 비비며 불신했을 거고, 마의가 봤다면 주화입마 전조 증상이라며 호들갑을 떨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한 몸에 여러 개의 심법을 동시에 다룬다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장이서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문득 더 큰 욕심이 들었다.

'심법들을 진짜 동시에 다뤄볼 순 없는 걸까.'

말 그대로 두 개 이상의 기운을 한 번에 운기하는 것. 굳이 답을 내리자면 장이서도 이미 알고 있었다.

'안 돼. 미친 짓이야.'

단전은 세상에서 가장 얇은 도자기다. 그중 구규지체는 이미 아홉 개의 구멍이 뚫린 심히 불안정한 그릇.

여기에 두 개의 기운을 동시에 운용한다는 건 그야말로 자살 행위와 다를 게 없었다.

두 개의 기운이 어딘가에서 충돌하는 순간, 커다란 충격의 울림이 있을 것이고 그럼 원점인 단전에도 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죽거나 불구가 되기 십상.

하지만 장이서는 생각에 한계를 두지 않았다. 애초에 구멍 뚫린 단전을 지니고 태어난 몸. 일반적인 기준으로 살아왔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일.

남천능가경은 천축국의 차크라를 이용하는 신비의 무공. 기경팔맥을 선회하는 중원의 심법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그럼 동시에 운용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해보자.'

정신을 가다듬고, 먼저 천마신공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깊고 어두운 기운이 전신에 그득히 깔린다.

장이서는 이를 유지하며 남천능가경의 황금빛 기운에 주목했다.

사실 사람이 한 번에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한다는 것 자체가 초인적인 집중력과 두뇌를 요한다.

하지만 오성과 오감만 놓고 보면 이미 장이서는 한계를 넘어 정점에 올라선 자.

거침없이 남천능가경을 운기했다. 그러자 출렁이던 황금빛 물결이 세 번째 구멍을 타고 나가 단전을 감싸듯 위성처럼 선회한다.

영롱하고도 황홀한 기운.

장이서는 점점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남천능가경의 일곱 가지 힘 중 세 번째인 태양궁은 얼핏 보면 여타 내공과 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기경팔맥을 통하지 않고 하단전 안을 지속적으로 맴도는 것이 특징이다.'

쉽게 말해 특정 부위에 내기를 보내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단전에서 원천적인 힘을 강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태양궁의 요결이었다.

그리고 이 상태에서 함께 운용하는 천마신공은....

'이, 이건!'

고오오오오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느낌을 선사했다.

강해졌다는 게 아니었다. 내기의 양도 그대로고, 속도도 뇌전법을 펼친 것처럼 완류에서 격류로 전환된 것이 아니었다.

단지....

'깊이가 다르다.'

지금까지도 분명 어두웠지만, 남천능가경을 함께 운용했을 때와 비교하면 낮과 밤의 차이만큼 그 깊이가 달랐다.

위압감은 천하를 호령할 만큼 거세졌고, 육신을 휘감은 짙은 어둠은 감옥 안을 오히려 밝아 보이게 했다.

쉽게 말해 대성(大成)도 하기 전에 이미 완성된 천마신공이 몸 안에 흐르는 기분.

'이것이 진짜 천마신공이었구나.'

장이서는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자신이 익혔던 건 반쪽짜리도 되지 못했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지금이라면....

'천마의 절초를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건 추측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웠다.

몸 안에서 찌릿찌릿 느껴지는 이 힘이라면, 분명 천마신공을 기반으로 한 초식들을 펼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천마기의 양이 턱없이 부족해 기껏해야 몇 번에 불과하겠지만, 진우광에게 구명절초를 배울 수만 있다면....

'헛! 미쳤구나. 지금 누구한테 뭘 배우겠다는 거냐!'

일순 정신이 번쩍 들고, 몸 안을 휘돌던 기운이 한순간에 단전으로 빨려 들어갔다.

너무 심취한 나머지 욕심도 과해졌다.

하지만 이미 달마 조사의 남천능가경에 천마신공을 얹은 것부터가 불경죄.

'갈수록 정도와는 거리가 멀어지는구나.'

이쯤 되니 장이서도 이젠 반쯤은 포기했다.

어쨌든 남천능가경 중 세 번째인 태양궁의 힘에 대해서 조금은 알게 된 시간이었다.

그 자체로도 원천진기를 강하게 해주지만, 다른 심법과 함께 운용할 때 그 빛을 발하는 것.

문득 과거 칠각대승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달마 조사께선 그저 상대를 보기만 해도 심법의 구결을 깨우치셨고, 그 순간 곧바로 대성에 이르셨다. 그러니 무신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저 전설로만 내려오는 과장된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정말 사실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태양궁의 힘이 방금 익힌 심법도 완성형으로 바꾸어줬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심법의 구결을 바로 알아냈다는 것 역시 남천능가경의 다른 힘에서 비롯된 신능(神能)일지도 몰랐다.

'후.... 갈 길이 멀구나.'

하지만 아쉬움은 없었다.

만독불침에 이르는 불사독마공이나 천마귀를 잉태하는 천마신공. 그리고 일곱 가지의 신능을 발휘하는 남천능가경과 음양의 조화를 이루어 뇌력을 발산하는 뇌전법까지.

분명 하나하나가 제겐 과분한 신공들. 이를 한 번에 깨우치고, 모든 걸 이해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게다가 지금은 그것보다 절기의 부재가 더욱 컸다.

'절대 심법을 두르고 철쇄장과 백뢰만 던지고 있는 꼴이니. 기껏해야 쓸만한 절초는 뇌전법과 조화술을 이용한 축뢰환 정도.'

아무리 명검이라도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면 식칼보다 못한 일.

지닌 기운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창귀신 적아린. 그녀에게 빚을 갚아주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건 그거고....'

끼이익! 녹슨 철문이 열리는 소음과 함께 귀가 쫑긋 세워졌다.

그리고 서서히 눈을 뜨자 어울리지 않는 옷에 백색 깃털이 달린 여인이 눈에 담겼다.

비룡당주 묘채경. 그녀였다.

어젯밤 그리 질질 끌려 나가더니 하루를 못 견디고 비웃으러 다시 찾아온 것.

"용케 안 도망가고 남아 있었구나. 오호호호...?"

그런데 멸시 섞인 비소는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장이서와 눈을 마주친 순간, 덜컥 숨이 멎을 뻔했기 때문.

이는 그의 눈에서 태양의 금빛부터 푸른 산록의 빛깔과 지독한 칠흑의 광채가 연달아 뿜어진 탓이었다.

'무, 무슨 기운이 이리 황홀하면서도 음침하고 무섭단 말이냐.'

말은 모순적이지만, 정확했다.

남천능가경부터 불사독마공. 그리고 천마신공을 오랫동안 운기한 후에 나타난 현상.

하나하나가 너무도 고결하니 처음 본 그녀로선 기겁할 수밖에.

219.

#항복 선언

'쓸데없는 걸 보였군.'

장이서는 놀란 그녀를 보고 앞으로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강호에서 제힘을 쉬이 드러내는 건 하수나 하는 일.

설마 세 개의 기운이 이리 오랫동안 잔존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이득이었다.

묘채경의 기가 꺾여 쓸데없는 소모전은 줄일 수 있었으니.

"들어오십시오."

"어? 어. 그러려고 했다."

누가 보면 네 집인 줄 알겠구나. 놀란 가슴을 애써 다독이며 안으로 들어서는 묘채경.

갈수록 그의 체취가 더 강하게 느껴진다. 마치 뱀 앞의 쥐가 된 기분.

골려주러 왔다가 괜히 입장만 뻘쭘해졌다.

쓸데없이 주변을 살피면서 힐긋힐긋 곁눈질로 장이서를 살폈다.

그러면서 놀란 마음은 더 키웠다.

'이놈이 원래 이리 컸던가...?'

지금까지는 분명 3급귀 보좌라는 직책이 장이서에게 안 맞는 옷이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그 생각은 지금도 동일했다. 하지만 뜻이 달랐다.

'어째서 놈에게 대종사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냐.'

지금 풍기는 기세만 놓고 보면 장로의 직책도 부족해 보였다. 이 정도면 천마의 후계라고 해도 믿을....

'그게 말이 되느냐!'

스스로 생각하고도 말도 안 되는 일. 고개를 휘휘 저으며 날려버렸다.

설마 어젯밤 느낀 패배감과 수치심의 기억이 만들어낸 착각인가.

'그럴 리가 없지 않으냐! 이리 생생하게 느껴지는데!'

당연히 아니다. 그녀가 누구인가. 비룡당주 묘채경이다.

이 정도도 가늠 못 하면 옷 벗어야 한다.

이건 그냥 장이서가 예전과는 차원이 다르게 강해졌다는 얘기.

"뭘 그렇게 보십니까?"

장이서가 퉁명스레 묻자 묘채경은 화들짝 놀라며 횡설수설했다.

"보기는 뭘 봤다는 것이냐! 안에 먼지가 이리 많아서야!"

먼지 없는 감옥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

"목소리 낮추십시오. 울립니다."

"흥, 곧 죽을 놈이 까탈스럽기는...."

말은 그리하지만, 목소리가 조금씩 줄어든다. 이에 장이서는 픽 웃음을 흘렸다.

어쨌든 그녀의 방문은 장이서 입장에선 반가운 일이었다.

'비룡당주는 대공자의 장기말일 뿐이다. 이용만 당하고 후환이 생기면 모든 책임을 대신 져줄 장기말.'

그리고 미안하지만, 장이서에게도 지금은 대신 움직여 줄 장기말이 필요했다.

기왕이면 잘 나는 하얀 매.

물론 길들이는 게 먼저겠지만 말이다.

"볼모들은 안전하답니까."

장이서의 물음에 묘채경은 또 한 번 크게 놀랐다. 이번엔 아까와 같은 당황이 아니라 감탄으로.

'이 새끼는 눈에도 발이 달렸나. 대체 무슨 재주로 제 주변이 당한 걸 알아낸 거지?'

방금 그의 주변인들을 모두 붙잡았단 보고를 듣자마자 냉큼 달려온 것이기 때문.

"어떻게 안 것이냐?"

사실 오래 고민할 것도 없었다. 자신에겐 악재가 그녀에겐 희재. 그러니 저리 웃으며 뛰어온 것일 터.

"너무 염려는 말아라. 아직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으니. 네놈만 죽어주면 다 풀려날 것이다."

"아직도 제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십니까?"

"흥, 또 수작을 부리려는 것이냐?"

그녀가 코웃음을 치며 툭. 바닥에 서신 한 장을 던졌다.

"네놈의 방에서 나온 것이다."

장이서가 이를 들고 펴보자 간결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이달 그믐. 청해호(靑海湖). 12호 접선 요청.]

그리고 밑에는 무림맹의 직인이 꽝 찍혀 있다.

"이게 뭡니까."

"증거 아니냐. 네놈이 무림맹과 결탁했다는 확실한 증거."

"하하."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할 말을 잊었다. 청해호가 얼마나 큰지 알고 하는 말인가. 그리고 12호 아니고 103호다.

물론 이렇게 말해줄 수는 없고.

"조작된 증거 아닙니까. 어느 누가 밀서를 제 방에 둔 답니까? 설마 이거로 절 엮으려는 건 아니시죠. 그럼 너무 실망인데."

"흥, 아무리 네놈이 밉다 해도 간부는 간부. 그런 허접한 증거로 네 목을 쳤다가 나중에 내가 무슨 봉변을 당할 줄 알고?"

확실히 묘채경이 간사하기는 해도 머리는 굴러간다.

알고도 대공자에게 멍청히 당하진 않겠다는 얘기. 어제 장이서를 풀어주려고 했던 이유도 일맥상통했다.

"그럼 다른 증거라도 나온 겁니까?"

"당연하지. 내가 설마 믿는 구석도 없이 널 비웃으러 왔겠느냐?"

묘채경이 씨익 웃으며 이어갔다.

"네놈이 방첩대에 재직 중일 때 무고한 이들을 첩자로 몰아 살해하고, 막대한 재물을 탈취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

"고미산 중턱에 있는 허름한 네 집. 그 안에 재물과 함께 그때 써먹던 무림맹 직인을 숨겨두었다지? 오호호!"

천마고다. 그곳을 알아낸 거다.

*

- 고미산 중턱.

"이곳인가?"

절벽 어귀에 쓰러져가는 폐가 앞.

까악, 까악.

까마귀 말고는 아무도 살지 않을 것 같은 곳.

"이 안에 장이서가 쓰던 무림맹 직인과 모아둔 재물이 있다. 반드시 찾아내라!"

"예-!"

비룡당이 장이서의 본집에 들이닥쳤다.

*

장이서는 멍해진 얼굴로 제 턱을 쓰다듬었다.

천마고에 숨겨놓은 재물은 천하가 들썩일 수준. 더구나 그 안에는 분명 무림맹의 인장도 있다.

밝혀진다면 결코 피해 갈 수 없는 명백한 증거.

"오호호호! 표정을 보니 너도 사람이긴 한 모양이구나. 이리 애타 하는 걸 보니."

"확실히 준비를 많이 하신 모양입니다. 제가 천산 밖으로 나간 것도 알아내고, 본집까지 찾아내시다니."

"억울하니? 그러게 까불지 말았어야지!"

묘채경은 소리를 빽 지르면서 찌릿찌릿한 감정을 느꼈다. 무너졌던 자신감이 회복되는 기분.

"처음엔 나도 긴가민가했는데 이제 확실히 알겠다. 네놈이 날 또 기만했던 것이야! 넌 첩자가 맞다. 그것도 무림맹과 결탁한 첩자!"

입술을 꾹 다물자, 묘채경은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 얌전히 죽을 준비나 하고 있거라. 소식이 닿는 대로 다시 널 추궁하러 올 것이니. 그땐... 이리 말로 끝나진 않을 것이다."

쾅!

그녀가 눈을 희번덕거리고는 밖으로 나갔다. 거센 철창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린다.

"흠...."

혼자 남겨진 장이서는 고심에 잠겼다.

"어떻게 알아낸 거지?"

자신이 천산 밖으로 나간 것도, 집 안에 재물을 숨겨둔 것도. 이를 아는 건 전부 흑거뿐이다.

당연히 그가 불었으니 알아냈을 거다.

그걸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궁금한 건 대체 왜 흑거가 저들의 조사 대상에 올랐냐는 거였다.

아무리 사공자의 감시가 철저했다고 해도 천산 밖으로 나간 것까진 알아채지 못했을 텐데.

천마고도 마찬가지. 흑거가 굳이 묻지도 않은 말까지 뱉었을 리는 없다. 결국 뭔가를 알고 물었다는 얘기.

"대공자는 아니다. 그보다 날 더 잘 아는 자가 뒤에서 제보하고 있는 거다. 대체 누가."

물론 뭐가 됐든 바뀌는 건 없다.

왜냐하면....

쾅! 시간이 좀 흐르자 다시금 문이 벌컥 열리고, 그녀가 씩씩대며 들이닥쳤다.

"장이서어어어어어!"

미쳐버릴 것처럼 소리를 빽 지르면서.

당연했다.

"증거는, 찾으셨습니까?"

천마고는 이제 세상에 없으니까.

장이서가 재회의 인사를 건넸다.

세상 가장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

천마고가 사라진 건, 엄밀히 말하면 사공자 덕분이었다.

사부의 정체를 안 순간부터 생각한 일이기도 했고, 마가에서 월하촌으로 돌아왔을 때 누군가 따라붙은 낌새를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가 있는 동안 몇 가지 일 좀 처리해줘. 어렵진 않을 거야.'

해서 바로 홍란에게 재물을 옮기고, 입구를 무너트리라고 말해뒀었다.

"어디로 빼돌린 것이냐!"

"무얼 말입니까."

"네놈이 약탈해간 재물과 무림맹의 인장 말이다!"

"이리 발끈하시는 걸 보니 결국 아무것도 찾지 못하셨나 봅니다."

"이 새끼가...!"

"당연히 못 찾죠. 전 그런 적이 없으니까요."

"...!"

묘채경은 절망했고, 장이서는 웃었다.

한순간에 승패가 뒤집혔다. 이제 본론을 얘기할 시간.

"다시 원점이군요. 묻겠습니다. 증거도 없는데 여전히 절 죽음으로 내몰 생각입니까?"

"닥쳐라...."

"후에 일이 잘못되면 당주께서도 모든 책임을 지셔야 할 겁니다. 아마 모든 걸 잃고 죽게 되시겠지요. 아주 비참한 말로일 겁니다."

"닥치라고 하였다-!"

묘채경의 날카로운 손톱이 궤적을 그리며 쇄도한다. 하지만 장이서의 몸에 닿기 직전.

"...!"

우뚝!

그녀는 석상처럼 굳어졌다. 장이서의 무심한 눈빛을 보고 직감한 것이다. 지금 들어가봤자 뚫을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이놈... 빈틈이 없다!'

심지어 그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금빛의 내기는 절대 닿을 수 없는 성역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지난번 목에 상처를 낸 건 이놈이 봐줬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이 새끼 도대체 뭘 하고 다닌 것이야?!'

절로 침이 꼴깍 삼켜지고, 들어 올린 어색한 손은 바들바들 떨렸다.

마냥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녀 역시 초절정을 바라보는 절세 고수.

다만 장이서의 말이 곱씹을수록 다 맞기 때문이었다.

이대로면 모든 책임은 자신이 뒤집어쓰게 될 것이다.

결국 대공자 좋은 일만 시키는 꼴.

"...빌어먹을 새끼. 내 앞에서 당장 꺼지거라."

항복 선언. 결국 그녀가 백기를 들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세 번을 패했다.

이 정도면 인정해야 했다. 장이서가 제 머리 위에 있음을.

한데....

"하하하!"

장이서는 웃음을 터트리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뭐 하는 것이냐? 가라니까?!"

"당주. 이게 저와 당주의 싸움으로 보이십니까."

"뭐...?"

"이건 저와 대공자의 싸움입니다. 당주께선 그저 그 사이에 들어와 계신 것뿐이고요."

"...!"

"당주가 끝내고 싶다고 끝낼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묘채경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이에 장이서는 멈추지 않고 일침을 내뱉었다.

"그리고 대공자는 증거가 있든 없든 절대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겁니다."

"증거도 없는데 어째서 그런 무모한 짓을!"

"권위."

이곳이 어디인가. 마교다. 힘을 숭상하고, 권력을 숭배하는 사교도 집단. 한데 만일 대공자가 여기서 멈추면 어찌 되겠는가.

보좌 하나 제대로 처리 못 했다는 흠집이 생기는 거다. 그럼 위상이 흔들리고, 그의 아성에 구멍이 뚫린다.

권위에 금이 가는 것이다.

하여 그는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총력을 다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건 장이서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벗어나면 주변 사람들이 다치고, 가만히 있다간 내가 죽게 될 거다. 그러니 나 역시 목숨을 걸고 부딪치는 수밖에.'

결단을 내리듯 단호히 말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대공자의 모든 책임을 떠안고 함께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비룡당주답게 살길 하나 열어두시겠습니까."

"너...!"

"장담하죠. 당주께서 손해 보시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묘채경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서렸다.

오늘따라 장이서가 유독 더 커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

"뭘 하면 되는 것이냐."

두 사람의 은밀한 거래가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처형의 날이 밝았다.

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