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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20.

#처형의 날

드높은 비룡당 전각.

그 앞에 놓인 널따란 공터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웅성거림은 그침 없이 흘러나오고, 모두가 고개를 들어 한 곳으로 시선을 꽂았다.

이 장(6m) 높이까지 나무를 교차로 쌓아 올린 평평한 처형대(處刑臺).

그 위, 양 끝 기둥에 포승줄로 묶여 십(十)자로 결박당한 채 서 있는 사내.

그의 이름은 장이서.

오늘 열리는 처형식의 주인공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래."

"첩자 혐의로 공개 처형을 한다더구먼."

사실 소문을 듣고 몰려온 이들은 대부분 처형대 위에 선 이가 누군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범람하는 이야기의 홍수 속에 그를 알게 되는 건 그리 오래 걸릴 일은 아니었다.

"칠소궁이면 요즘 제일 유명한 곳 아닌가. 한데 보좌께서 대체 왜...."

"대공자님이 직접 형을 집행하신다던데. 뭐 뻔한 일 아니겠는가."

"정쟁(政爭)이구먼."

일각에선 안타깝다며 혀를 차기도 했다. 최근 칠소궁의 활약을 익히 잘 알기 때문.

이 정도 견제와 모략은 마교에서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그저 저 처형대 위의 사내가 그 희생양이 된 것일 뿐.

"한데 어째 곧 죽을 양반의 눈빛이 저리 차분한 거여."

"그러게...."

물론 아직 진짜 정쟁은 시작도 안 했지만 말이다.

"대공자께서 오셨다-!"

그리고 그때, 인파 사이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듣기 좋게 울렸다.

동시에 웅성거림은 뚝 끊기고, 일시에 시선이 뒤의 남문으로 돌아섰다.

이내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좌우로 갈라지는 군중.

그들이다.

실상 다음 세대 천마전을 이끌어갈 자들.

흑색 일련의 무복을 입고 웅장하게 걸어오는 일소궁 흑화위다.

그 중심엔 대공자 천무기와 유령마군 환사. 그리고 사공자 한이 있었다.

"오셨습니까, 대공자님."

그리고 이에 대조되듯 백색 도포를 휘날리며 비룡당주 묘채경과 최정예 당원들이 마중했다.

이리 한데 묶이니 흘러나오는 기세가 한낱 신도들이 담기엔 숨이 멎을 수준.

웅성거림은 온데간데없고 숨소리마저 사라졌다.

"흐음...."

그리고 대공자는 걸음을 멈추고 좌중을 훑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유령마군이 안광을 번뜩이며 대신 물었다.

"이들은 다 무엇이냐. 허한 적이 없는데 누가 부른 거지?"

"그것이...."

묘채경은 진땀을 흘렸다.

당연했다.

오늘의 군중은 대공자의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그렇다고 묘채경이 생각한 것도 아니다.

'장담하죠. 당주께서 손해 보시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이 모든 건 전부 처형대 위에서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 저 미친놈.

장이서의 계획이었다.

*

*

*

"뭘 하면 되는 것이냐."

묘채경과 장이서가 손을 잡은 그날.

장이서는 이렇게 말했다.

"우선 판부터 바꿔야겠습니다."

"음?"

"우리가 그의 판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 판에 오도록 만드는 겁니다."

"처형식을 말하는 것이로구나."

장이서에겐 몇 번이나 물을 먹었지만, 묘채경 역시 이면공작엔 일가견이 있는 자.

척하면 척이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네가 뭘 꾸미든 집행을 막을 순 없을 거다. 네 말대로 권위를 생각하면 어떻게 해서든 널 죽이려고 할 테니."

"누가 막는다고 했습니까."

"그럼 뭘 하겠다는 것이냐."

"그 반대입니다. 판을 키우시죠."

"키우다니."

"공개 처형으로 바꾸십시오. 군중들을 불러 모아 참관하게 하는 겁니다."

"제정신이냐? 보는 이들이 있으면 본보기로 더더욱 널 죽이려고 날뛸 것이다."

"그러라고 하는 겁니다."

이 새끼가...? 그럼 나는. 네놈이 이대로 죽으면 나는?! 어이가 없어서 눈을 아래위로 부라리자 장이서가 시원스레 답했다.

"대공자께서 시작한 싸움입니다. 끝을 보기 전까진 누구도 물러서게 하지 않을 겁니다."

물러서게 하지 않을 거라니. 설마 대공자가 내뺄까 봐, 판을 키우겠다는 것인가?

이건 뭐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인가.

아니, 그래. 그렇다고 치자.

"그럼 그다음은?"

그 후는 무엇이란 말인가.

장이서는 이에 씨익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밟아야죠. 다시는 못 기어오르도록."

그때 묘채경은 오소소 소름을 느끼며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놈은 미친놈이라는 것을.

그리고....

절대 적으로 만들면 안 되는 미친개라는 것을.

*

*

*

"왜 대답을 못 하는 것이냐! 당장 고하지 못할까?!"

유령마군의 살기 어린 엄포에 묘채경은 눈을 번쩍 뜨며 회상에서 깨어났다.

'근데 이 붕대 새끼가 3급귀 보좌 주제에 감히 당주인 내게 말끝마다 하대를....'

정신을 차리니까 갑자기 유령마군이 졸로 보인다.

원래 직급은 둘째치고 그의 명성이나 인품을 알기에 한 수 접고 대우를 해줬는데.

같은 보좌인 장이서하고 비교가 되어서인지. 아니면 곧 장이서한테 물 먹을 놈이라 생각했기 때문인지.

묘하게 만만해 보인다.

아마 정확하진 않으나 이거 하나는 확실했다.

'장이서 저 새끼 때문에 나도 미쳐 가는구나.'

"당주. 말 잘해야 할 것이다."

알겠다, 이 붕대 새끼야! 묘채경은 눈을 부릅떴다가 금세 갈음하곤 대공자에게 직접 보고를 올렸다.

"얼마 전 도라옥 사건도 있고 하여 신도들의 민심이 흉흉합니다."

"감히-!"

도라옥 사건은 대공자 앞에선 꺼내면 안 되는 금기 사항.

이를 입에 올리자 유령마군이 격분했다. 하나 대공자는 됐다는 듯 손을 들어 올려 제지했다.

지금은 보는 눈도, 듣는 귀도 많다.

"계속하거라."

살벌한 저음으로 명하자 묘채경이 침을 꼴깍 삼키곤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속삭였다.

"오호호호! 그런 의미에서.... 이번 일은 본교의 간부 중 하나가 첩자로 드러난 사건. 공개 처형으로 일을 키우면 신도들의 마음도 달래고, 또 그분께 인정받을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분. 절대 지존인 천마를 뜻함이다. 그의 인정이란 천무기한테는 사막의 단비 같은 것.

"원치 않으시면 지금이라도 돌려보낼까요?"

"되었다. 신도들도 알아야 할 권리가 있겠지. 구경꾼이 많아야 저놈도 심심치 않을 테고."

"오호호호,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자리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묘채경이 슬쩍 유령마군을 보곤 코웃음 치며 앞서 걸어갔다.

'저년이...!'

유령마군의 눈이 시뻘게진다. 하나 분위기상 지금은 따라야 할 때.

애꿎은 주먹만 부르르 털고 뒤를 따랐다.

안내된 자리는 정확히 처형대로부터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거기엔 대공자를 위한 의자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는데 자리에 앉자 장이서와 보기 좋게 정면으로 대면한다.

이윽고 눈이 마주치는 두 사람.

드디어 그들이 만났다.

집행자와 배교자가 되어.

"오랜만이로구나."

"잘 지내셨습니까."

그저 서로 바라본 것뿐인데도 형용할 수 없는 분위기가 휘몰아쳤다.

마치 흑룡과 미친개가 서로를 향해 울부짖는 것처럼.

"저 하나 잡겠다고 일을 크게도 벌리셨습니다."

"후후후, 본교에 쥐새끼처럼 숨어 있는 첩자를 발본색원하는 일인데, 이 정도는 벌여야 하지 않겠느냐."

"제 주변인들까지 볼모로 잡고 말입니까?"

"그게 뭐 어때서."

대공자는 희열에 찬 웃음을 지으며 당당히 말했다.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첩자와 얽힌 순간부터 형벌은 피해 갈 수 없는 것이다. 그게 누구든."

이는 마오도, 칠무위도 조사에서 예외로 두지 않겠다는 뜻.

"하지만 모든 건 제가 첩자여야만 성립될 수 있는 이야기일 겁니다."

"당연하지. 하지만 허락도 없이 천산을 나갔다 붙잡혀 온 네가 무슨 말을 더 하겠느냐."

"이야기를 못 들으신 겁니까, 아니면 듣고 싶지가 않으신 겁니까. 전 분명 사공자께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천산 밖으로 나갔다 온 건...."

"아아, 혈교를 쫓았다는 것 말이냐."

대공자가 말을 자르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눈을 번쩍 치켜뜬 뒤 말했다.

"증거 있느냐?"

"무슨 증거 말입니까."

"네놈이 혈교를 쫓았다는 증거 말이다. 있다면 이 자리에서 증명해 보거라. 그럼 믿어주지. 하나 그게 아니라면...."

대공자가 손을 들어 올리자.

스릉! 흑화위가 일시에 검을 뽑아 들었다.

"오늘 이 자리가 네 마지막이 될 거다."

그가 손을 떨구는 순간, 단박에 날아올라 이 자리에서 목을 베겠다는 뜻.

'확실히 다르구나.'

장이서는 간담이 서늘했다.

상대는 고도로 훈련된 일백의 무사들과 초절정 고수인 사공자와 유령마군. 그리고 대공자 천무기다.

싸워서 이길 가능성은 전무한 일.

순식간에 팽팽하던 기 싸움에서 속절없이 밀린다.

'혈마귀를 꺼내면 달라질 수 있을까.'

그럴지도. 그러나 혈마귀는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양날의 검.

머릿속에서 최후의 최후까지 미뤄두는 게 옳다. 그리고 지금 당장 꺼내야 하는 최선책은....

"그리하죠."

"뭐?"

"증명하겠습니다. 제가 첩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 자리에서 대공자가 준비한 모든 수를 깨부숴 버리는 것이다.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장이서의 눈에서 하늘빛 광채가 뿜어졌다.

목숨을 건 승부가 시작되었다.

*

'증명을 하겠다고?!'

대공자는 장이서의 돌발적인 발언에 자못 당황했다.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이더냐.'

자신이 한 제안은 그냥 억지를 부린 것. 오자마자 바로 감옥에 처박힌 그가 갑자기 무슨 수로 증거를 내밀겠는가.

그저 명분을 쥐고 가고자 던진 말에 불과했다.

한데 대뜸 증명을 하겠다니.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바로 코웃음을 치며 응수했다.

"네놈이 무슨 수로 증명을 한다는 것이냐. 또한 네놈의 말을 어찌 믿고."

"대공자께서 일부러 절 노린 게 아니라면, 안 들을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뭐...?"

"직접 증명을 하라고 하셨고, 전 알겠다고 응한 것입니다. 듣고 판단해 주시지요."

건방진 놈. 마음 같아선 목부터 쳐버리고 싶지만, 은근히 주변이 신경이 쓰였다.

장이서의 말에 곳곳에서 웅성거림이 빗발쳤기 때문. 여기서 듣지도 않고 형을 집행한다면 누가 봐도 이상한 상황.

"좋다. 어디 지껄여 보거라. 단, 빠르게 해야 할 것이다. 난 첩자 따위에게 그리 너그럽지 않으니."

결국 대공자는 피식 웃으며 한발을 물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순간을 면피하고자 임기응변으로 내뱉은 말이 분명하기 때문.

한데.

"지금 이 안에."

도저히 상상도 못 할 말이 뱉어졌다.

"도라옥의 죄인들이 천산을 활보하게 한 자가 있습니다."

웅성웅성! 군중들이 발작하듯 소란을 일으킨다. 유령마군은 기함했고, 사공자는 두 눈이 부릅떠졌다.

'미친개, 네가 기어코....'

더 미쳐버렸구나. 탄식이 뱉어졌다.

최근 마을들이 불타오르고, 수많은 이가 죽임을 당했다. 이에 신도들의 분노는 극에 다다른 상태.

한데 그 원흉이 이 안에 있다니.

사실이든 아니든, 잔잔하던 바다에 거대한 해일이 일어난 건 분명했다.

"누구요! 그게 누굽니까!"

"대공자님, 명명백백히 밝혀주시옵소서!"

그리고 이는 대공자에 대한 압박으로 몰려들었다.

이에 일소궁의 전력에 한없이 밀리던 장이서의 기세가 군중의 힘을 통해 되살아난다.

흑룡의 기세는 움츠러들고, 미친개가 반격의 포효를 내지르기 시작한 것.

"대공자님...."

유령마군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주변을 경계했다. 그리고 도끼눈으로 먼발치의 비룡당주를 찍었다.

"저년이 괜히 쓸데없는 짓을 벌이는 바람에...."

하나 대공자는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건 당주의 문제가 아니다."

"예?"

그리고 곧장 처형대 위를 손가락질하며 읊조렸다.

"저놈이다. 저놈이 판을 바꾸려 꾸민 것이다."

실로 격정에 찬 눈빛으로.

221.

#묘채경의 결단

대공자는 대번에 장이서의 수를 간파했다.

모이면 자제력을 잃고 선동되는 군중의 특성을 이용해 본질을 훼손하려는 것.

"비룡당주를 그새 설득하다니. 난 놈은 난 놈이로구나."

대공자의 시선이 흘깃 비룡당주에게 향했다. 속을 꿰뚫는 눈빛에 그녀는 침을 꼴깍 삼키곤 휙 고개를 돌렸다.

'젠장. 제대로 찍혔구나.'

하나 어쩌겠는가. 이미 벌어진 일.

그리고 계획은 성공했다. 절대다수가 장이서의 처형이 아닌 그의 대답을 바라고 있으니.

하지만.

"전부 내보내거라."

상대는 대공자 천무기.

이 정도에 흔들릴 거라 생각했다면 크나큰 오산이다.

"존명!"

흑화위가 바깥으로 휙 몸을 돌리곤, 군중을 향해 칼끝을 들이밀었다.

"아, 아니! 이게 무슨...!"

"대공자님! 어찌하여 저희에게 이러시는 겁니까."

"저희도 알아야 할 권리가...!"

"닥치고 나가거라. 죽고 싶지 않으면."

그야말로 경악스러운 일. 하나 유령마군과 흑화위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반원으로 대형을 짜 군중을 바깥으로 밀어냈다.

판을 흔들자, 거들떠보지도 않고 이를 엎어버린 것. 이를 보던 장이서도 허탈함에 고개를 저었다.

'정파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민심을 이따위로 짓밟다니. 정녕 마교의 대공자답구나.'

군중은 남문까지 몰리고, 휑해진 공터에 대공자는 피식 웃으며 일어섰다.

"아쉽구나. 어렵게 짜낸 비책이었을 텐데, 써보지도 못하고 사라졌으니."

"민심을 쉽게 보지 마십시오. 앞으로 저들이 대공자님을 어찌 볼 것 같으십니까."

"두려워하겠지. 허튼소리를 지껄였다간 그 목이 달아날 테니."

가관이다. 그에게 부끄러움은 정녕 없는 것인가.

"그게 장차 천산을 책임지고 이끌어야 할 대공자께서 하실 말씀입니까?"

"대공자이니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게 무슨...."

"그리고 그게 바로 권력이라는 것이지. 네놈이 아무리 진실을 부르짖고, 수없이 설득하려고 해도 그저 우물 속 아우성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임을 깨닫게 해주는 것 말이다."

장이서의 눈빛이 차갑게 식는다.

새삼 다시 깨달았다. 이자는 절대 소교주가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을.

만일 그가 자리에 오른다면 무림엔 반드시 크나큰 화가 잇따를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꺾어놔야 한다.

"...틀렸습니다."

그가 중얼거렸다.

"뭐?"

"짓눌러 얻어내는 권력은 결코 오래갈 수 없습니다. 상대가 저항하는 순간 그 힘을 잃으며, 그 뒤엔 모든 권위를 잃는 겁니다."

"하하하하! 감히 누가 내게 저항을 한단 말이냐. 한낱 신도들 따위가 무얼 할 수 있다고."

"정말 그리 생각하십니까."

그때였다. 장이서의 입꼬리가 말아 올라갔다. 시선은 저 멀리 뒤편을 향했다.

이에 대공자가 흠칫 놀라며 휙 몸을 돌리는 순간.

"가아아아알-!"

우렁찬 일갈이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육장로...?"

육장로 마의 사마균.

그리고 머리며, 눈썹이며 털 한 가닥 없는 무모(無毛)한 고수들.

파두망량 엽굉과 독산각의 의원들이 나타났다!

"공개 처형이라기에 참관하러 나왔더니, 나더러 돌아가라? 감히 나더러?! 이 무슨 무례인 게야!"

마의가 눈을 부라리며 유령마군에게 엄포를 터트렸다.

갑작스러운 장로의 등장에 대공자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하나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길을 열어라. 베이고 싶지 않다면."

두 자루의 칼을 차고 우아하게 사박사박 걸어오는 천상의 미녀.

"사해령...."

삼공녀 사해령. 그리고 나락과 월광십귀가 나타났다. 도대체 저들이 왜....

"야. 거, 말로 해서 뭐 하냐? 그냥 밀어버리면 되지. 하여튼 겉도 시커먼 것들이 속내는 더 까매요. 조 보좌, 뭐 해? 밀어."

사자 머리 호남자의 명에 일백의 괴인들이 머리부터 들이민다.

"밀어라."

"키키키키!"

거침없이 흑화위를 향해 밀고 들어가는 조양악과 백괴단이다!

그들까지 이곳에 당도했다.

마의와 사해령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도대체 무한성은 왜.

너무 뜬금없는 등장에 사해령도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여긴 왜 온 거죠?"

"왜긴. 참관하러 왔지. 근데 장이서 저 새끼 실제로 보니까 더 떨리네? 와, 이거 뭐지."

뭐긴. 미친 거지. 사해령이 인상을 쓰곤 먼발치 장이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두근, 두근, 두근.

그리고 미친 건 나도 마찬가지고.

"도대체 네놈들이 여길 어떻게...."

천무기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전개에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흑화위는 조금씩 뒤로 밀려나고, 군중들은 다시 공터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사이 고명한 이들이 여럿 더 자리했다.

그중 하나가 마가칠객의 수장 번천검객.

"일장로가... 보낸 것인가?!"

그건 아니다. 명확히 말하면 번천검객은 스스로 왔다. 그것도 일장로를 설득까지 해가면서.

'장이서가 이번에 살아 나오지 못한다면 칠소궁과의 관계도 여기까지다.'

'죽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죽지 않도록 살려야 합니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장이서를 소천마로 알고 있는 그로서는 오히려 지금 상황이 농간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일.

'최대한 잘 보여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산다.'

오해에서 비롯한 일이지만, 이미 충복을 맹세한 그에겐 이건 잘 보일 기회.

외에도 호룡당주 지대호와 금룡당주 만금수도 있었다.

두 사람은 죽립 아래로 눈을 마주치곤 서로 놀라며 안부를 물었다.

"지 당주께서 여긴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많이 다치셨었다던데."

크하아앙!

"아픈 게 대수인가. 장 보좌와 호형호제를 바라면서, 아우 될 자의 죽음을 모른 체 할 수는 없지. 그러는 만 당주는?"

"허허, 이런 우연이. 저도 장 보좌에게 크게 투자해 놓은 게 있어서요."

자신의 목숨과 미래라는 아주 큰 투자 말이다.

그 밖에도 나름 한가락 하는 자들이 여럿 들어차 있었다.

이들의 합류에 군중은 힘을 얻어 금세 원래의 자리를 되찾았다.

다시 죽어가던 장이서의 기세는 불씨처럼 살아났다. 그것도 전보다 훨씬 더 큰 산불로.

반면 대공자와 흑화위는 비좁게 엉켜 진땀을 흘렸다.

묘채경은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장이서와 흘깃 눈을 마주했다.

'하여튼 영악한 놈. 집행을 방해하면 배교 행위지만, 참관은 아무 상관이 없지. 공개 처형의 숨은 참뜻은 바로 이거다. 졸지에 대공자는 신도들을 내쫓으려다 호되게 당한 것이고.'

그렇다. 이것이 바로 장이서가 준비한 두 번째 수.

천무기의 엄포를 무용지물로 만들고, 군중을 자신의 힘으로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도라옥의 죄인들이 천산을 활보하게 만든 자가 누굽니까!"

"당장 저분을 풀어주십시오!"

들불처럼 번진 군중들의 외침이 하늘을 관통했다.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고성.

'너 때문에 이 형이 늙어 죽겠구나!'

물론 마의와 독산각처럼 상황 안 따지고 사생결단의 자세로 참석한 이들도 있긴 했지만, 그들만으로는 절대 이룰 수 없는 기세였다.

"이것들이...."

수세에 몰린 대공자는 살광이 가득 담긴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장이서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짓눌러 얻어내는 권력은 결코 오래갈 수 없습니다. 상대가 저항하는 순간 그 힘을 잃으며, 그 뒤엔 모든 권위를 잃는 겁니다.'

한낱 신도들이 자신을 노려보며 소리치고 있다. 권위가 낙엽처럼 땅바닥에 떨어진 거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르고, 두 눈은 이성을 잃고 흔들렸다.

"장이서, 네놈이...."

그의 농락에 또다시 휘말렸다는 사실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죄인들이 천산을 유린하는 사이, 본교의 전력 대부분은 서문에 발이 묶여 있었습니다. 바로 대공자께서 그리 명하셨지요."

심지어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실책으로 상황을 몰아가고 있지 않은가.

격앙되는 분위기.

저를 향한 따가운 시선.

"그리고 전 그런 대공자께 분명히 서신을 보냈습니다. 도라옥의 배후에 혈교가 있고, 그들이 지금 천산을 활보하고 있다고."

웅성거림이 극에 달하고, 천무기의 몸에선 핏기가 사라졌다.

곧이어 자욱하게 살기가 깔린다.

콰과과과과!

도포 자락이 펄럭이고,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당장이라도 출수할 기세.

이를 본 사공자가 당황하며 속삭였다.

"진정하셔야 합니다. 지금은 우선 상황을 현명히 넘기시고...."

"집행하거라."

한데 그때. 믿기 어려운 판결이 떨어졌다.

사공자의 눈이 넋을 잃고, 소란에 제대로 듣지 못한 유령마군은 고개를 휙 돌렸다.

잠시 시간이 멎은 듯한 기분.

그리고 이를 깨트리듯 천무기가 악에 받친 목소리로 커다랗게 외쳤다.

"저 첩자 놈을 당장 처형하거라-!"

이럴 수가. 여론을 뒤집고 사형 선고가 떨어졌다. 군중들은 경악에 빠졌다. 수뇌들도, 유령마군도. 심지어 사공자마저 당황했다.

누군가는 이를 실책이라 말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무리수였노라 평할 것이었다.

그만큼 이건 최악의 수였다. 권력을 앞세워 스스로 켕기는 게 있음을 만천하에 드러낸 꼴.

하나 그는 차기 교주로 거론되는 천마신교의 절대자이자, 장이서의 형을 집행하는 재판관.

어떤 결정이든 그의 명이 떨어진 이상....

"쳐라!"

그것이 곧 교리다.

파파팟!

흑화위들이 잘 벼른 검을 사선으로 떨구고, 경공을 펼쳐 날아올랐다.

"이서야-!"

이에 마의가 처형대로 뛰쳐나가려는 순간, 휘감은 붕대 위에 흑색 피풍의를 걸친 사내가 길을 막아섰다.

유령마군 환사다.

"형을 집행하는 일. 설령 장로라 할지라도 이를 방해하면 배교로 간주할 것이다."

"네놈 눈에는 이게 정당한 판결로 보이느냐! 다치고 싶지 않다면 비키거라!"

"기어코 배교를 저지르겠다는 것인가."

"배교고 나발이고 나와-!"

살벌해지는 분위기. 유령마군이 흘깃 뒤의 수하들을 살피며 말했다.

"내가 육장로를 맡을 테니, 저놈의 목을 취하거라!"

"존명."

연달아 처형대로 날아오르는 흑화위들. 마의가 매섭게 탁! 뱀 지팡이를 바닥에 꽂았다.

긴 대화는 필요 없다.

"장로들의 실력이 궁금하긴 했지."

"오냐, 저승 가서 실컷 자랑하거라."

파파팟!

마의와 유령마군의 거침없는 접전이 시작됐다.

"미치겠네!"

한편 묘채경은 발을 동동 굴렀다.

장이서의 계획에 자신이 우려했던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

'그래. 네놈 말대로 다 된다고 치자. 한데 대공자가 그래도 기어코 널 죽이려고 한다면? 잘 알지 않으냐. 그가 집행을 맡은 이상, 그의 말이 곧 법이라는 것을.'

'그렇게 되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겠죠.'

'있긴 한 것이냐?'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이런 미친놈!'

그게 무슨 방법인가. 그냥 막 가겠다는 거지.

하나 돌이켜 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이젠 확실히 노선을 정해야 할 시간.

이제라도 장이서를 죽이든가, 아니면 하늘을 믿어 보든가.

그 선택은....

"장이서, 이 새끼야-!"

그녀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장이서를 향해 비수를 내던졌다.

피이잉!

파공음을 터트리고 칼날이 궤도를 그리며 쇄도했다!

222.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설마 장이서를 죽이겠다는 건가.

아니, 다르다.

비수는 장이서가 아니라 툭! 장이서의 오른손을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포승줄을 갈랐다.

묘채경이 끝내 그를 택한 것이다!

그리고 뒤늦게 도착한 흑화위의 검이 장이서의 머리 위에서 일도양단의 기세로 새하얀 광망을 번뜩였다.

서걱!

바닥에 착지한 흑화위가 베었다는 촉감에 화색을 그리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한데 그 순간.

"아니?!"

그의 눈에 담긴 건 두 동강 난 장이서가 아니라, 완전히 속박에서 벗어난 그의 일격이었다.

퍽!

"크아악!"

다시 처형대 아래로 떨어져 나가는 흑화위. 하지만 이제 시작이다.

"쳐라!"

연달아 도착한 흑화위가 사방에서 칼을 그었다.

번천검객을 이겼다는 소문은 들었으나 그래봤자 낭설일 뿐.

저들 눈에는 고작해야 방첩대 출신의 나부랭이였다. 누가 봐도 뻔한 결말.

한데....

"카악!"

"컥!"

처형대 위는 모두의 예상을 깨부쉈다. 비명과 함께 우수수 나가떨어지는 흑색 무복들.

그 끝에 남은 건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칠공자 보좌 장이서.

이제는 그의 실력이 허명이 아님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계속 보고만 계실 겁니까?"

장이서가 조롱하듯이 말했다.

"멍청한 것들...!"

이에 대공자 천무기는 이를 갈며 처형대 주변을 살폈다. 추락해 쓰러진 흑화위만 열댓 명.

"끄아아!"

그리고 방금 둘이 더 늘었다.

이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장이서, 힘을 숨기고 있었구나.'

그러지 않고서야 일류부터 절정 고수까지 있는 흑화위의 합격을 저리 쉽게 쓰러트릴 수 없다.

더구나 유령마군은 마의와 대치 중이고, 사공자는....

"번천검객?!"

놀랍게도 마가칠객의 수장인 그가 앞을 막고 있었다.

"감히 후계인 내 앞을 막겠다는 건가?"

"죄송합니다."

아무리 후계여도 소천마보다 높을 수는 없기에.

"하...."

결국 대공자는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현장에 탄식을 뱉었다.

이건 이겨도 이긴 게 아니다.

흑화위는 한낱 보좌 하나를 어쩌지 못해 쩔쩔매고 있고, 유령마군과 사공자는 발이 묶인 채 이를 관망했다.

이대로 끝난다면 일소궁의 위상은 바닥으로 추락하고, 한낱 보좌 하나에 쩔쩔맸던 순간만을 기억할 거였다.

그렇다. 이대로 끝난다면 말이다.

하나....

"내가 누군지 잊은 모양이구나."

그는 흑화마제 대공자 천무기.

천산 제일의 후계이자 장차 만마를 이끌어갈 자.

"상대해 주마."

콰아아아앙!

두 눈에서 시커먼 광채가 뿜어지고, 굉음과 함께 엄청난 마(魔)의 기운이 용솟음쳤다.

이는 오래전 혈교와 마교가 하나였던 시절, 고명한 대마두가 말년에 창안한 마공.

익히다 백에 백이 죽는다는 파천흑마공(破天黑魔功)이었다.

그만큼 익히기가 까다롭고, 위험하여 수련이 금지된 마공이었지만 대공자는 만마분총에서 이를 얻어냈고 익히는 데 성공했다.

그 위력은 감히 여타 무공들과는 비교 불가.

척!

그리고 그 실력을 증명하듯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처형대 위에 나타났다.

"이, 이서야-!"

"한눈팔 여력이 없을 텐데?"

"크학!"

화들짝 놀란 마의의 고개가 돌아가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유령마군의 장력이 거침없이 가슴팍을 강타했다.

"장로님!"

이에 달려온 지대호와 만금수가 유령마군을 막아섰다.

"당주들까지.... 아주 미쳐 돌아가는구나. 오냐. 다 죽여주마!"

엽굉을 비롯한 독산각의 의생들은 흑화위와 접전 중이고, 번천검객도 사공자와 대치 중.

사해령과 무한성이 있지만, 교리를 어기기엔 부담이 컸는지 그저 입술만 질끈 문 채 서 있었다.

장이서를 도와줄 이가 전무한 상황.

"네놈의 목숨은 내가 직접 거두어주마."

"그리 쉽게 당하진 않을 겁니다."

결국 집행자와 배교자라는 이름 아래 두 사람의 대결이 성사되었다.

'확실히 강하구나.'

장이서는 그의 기파를 감지했다. 과거라면 제대로 보지 못했을 것도 초절정을 목전에 두자 선명하게 보였다.

그의 몸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사정없이 뻗쳐 나오는 모습을.

뭣 모르고 덤볐다간 저 마기에 사로잡혀 영문도 모른 채 죽게 될 것이다.

'이길 수 있을까.'

아니. 냉정히 고개가 저어졌다.

상대는 초절정 고수. 솔직히 이길 상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과거라면 단 일 초식에 목이 뎅강 떨어져 나갔을 테지만, 세 번째 천공을 막고 남천능가경까지 익힌 지금이라면.

마교에서 손꼽히는 고수인 대공자 천무기에게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까.

호승심이 샘솟고, 긴장감이 고조됐다. 하지만 방심하진 않았다. 그의 모든 행동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천무기가 허리춤의 검파로 손을 가져간다. 하나 뽑지는 않는다. 오히려 숨을 골랐다.

발도술이다. 단 일격으로 끝내겠다는 것. 그의 손아귀에 검은 아지랑이가 모여든다.

바람마저 베어낼 것 같은 첨예한 기운. 단번에 깨달았다.

극강(極强)의 쾌(快).

이를 눈으로 좇으면 그땐 늦는다는 것을.

기파를 읽어야 했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저 아지랑이의 뿌리에 거친 파동이 일 때.

바로 지금!

『남천능가경(南天楞伽經) 천마기(天魔氣)』

수아아악!

눈앞에 검은 광망이 번뜩였다. 이에 장이서도 칠흑이 되어 옆으로 몸을 날렸다.

천마의 기운을 남천능가경으로 극대화한 것!

"피해...?"

그러자 장이서가 서 있던 자리를 반원의 검기가 가르고 지나갔다.

이는 갈수록 커져 십여 보를 지났을 땐 집채만 해졌다.

정면에서 받았다면 절대 막아낼 수 없는 수준의 검력(劍力).

하지만 그보다 더 힘든 건 이를 피해내는 거였다. 그걸 장이서가 해냈다.

"장이서... 그새 더 강해졌구나."

가슴 졸이며 지켜보던 사해령은 마른침을 삼켰다.

무한성은 너무 놀라 입을 벌린 채 그대로 굳었다. 옆에선 조양악이 단평했다.

"대공자의 검을 피해내다니. 확실히 대단하긴 하군요."

그제야 뒤늦게 정신을 차린 무한성이 헛웃음을 뱉으며 답했다.

"저게 고작 대단한 수준으로 보여? 조 보좌는 절대 장이서랑 싸우지 마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뭘 물어. 붙으면 무조건 진다는 거지."

조양악의 얼굴이 빨개졌다. 이게 무슨 의문의 일패(一敗)인가. 물론 장이서가 평판보다 강한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저 절명수입니다."

"좋아. 그럼 방금 천무기가 펼친 일검에 몇 번의 합이 오갔을 거 같아?"

"예?"

"여섯 합."

이게 뭔 개소리인가. 일검의 뜻이 하나라서 일검인데 무슨 여섯 합. 그럼 육검이지.

"검보다 먼저 대공자의 몸에서 파천흑마공의 아지랑이 다섯 줄기가 뻗쳐 나갔고, 장이서는 그걸 다 피해낸 후에 빠져나간 거다. 그러니 도합 여섯 합."

"마, 말도 안 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걸 해내는 경지가 바로 초절정 경지이고, 장이서는 그걸 피해냈으니 최소한 그에 준한다는 것이겠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지금 저놈에게서 뻗쳐 나오는 이 위압감. 이 정도로 강렬한 느낌은 아버님 외에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이는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는 모두가 느끼는 공통된 감정이기도 했다.

하나 답을 알아내기엔 너무도 큰 난제.

다시 대결에 몰입했다.

수아악!

천무기가 검을 그으면, 장이서는 이를 피해내고 심지어 반격까지 가했다.

속절없이 밀리는 건 장이서가 분명했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한낱 방첩대 조장 출신인 그가 천하의 대공자에게 맞서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대공자님...."

유령마군만 보더라도 이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알 수 있는데, 그는 한눈파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싸움을 멈춘 채 넋을 놓고 있었다.

'대공자께서 치부를 감추려고 보좌를 죽이려고 한 것도 모자라, 실력에서도 크게 앞서지 못했다는 것이 퍼지면....'

이는 지금껏 쌓아온 업적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그리고 천무기 또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앞서고 있는 상황임에도 얼굴은 전군을 잃은 패장의 기색이 가득했다.

"감히... 감히 네놈이-!"

웅웅웅-!

격분하다 못해 마침내 파천흑마공의 모든 힘을 끌어 올린 천무기.

육신이 다 가려질 만큼 검은 아지랑이가 일시에 쏘아진다.

장이서도 더는 피할 수 없다고 느꼈는지, 마지막 수를 준비했다.

『남천능가경(南天楞伽經) 천마기(天魔氣) 뇌전법(雷轉法) 조화술(造化術)』

손바닥에서 음기와 양기가 분리되고, 파지직! 한순간에 검은 뇌력이 맹렬히 선회하며 구체를 만든다.

여기에 영롱한 황금빛이 스미며 세상 가장 어둡고 위압적인 구체로 변모한다.

현재 그가 펼칠 수 있는 최강의 절초.

진 축뢰환(眞 築雷丸)이다!

"죽여주마-!"

콰과과과광!

연달아 터지는 폭음과 함께 검은 광채와 풍압이 사방으로 발산했다.

"으억!"

군중들이 추풍낙엽처럼 날아가고, 대부분 수뇌들도 터져 나오는 격렬한 파동에 뒤로 밀려났다.

그리고 다시 앞을 살폈을 땐.

무너져내린 처형대와 뭉게뭉게 피어오른 흙먼지만이 가득했다.

어느새 장내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지고, 잠시 후 결과가 드러났다.

"아...."

우뚝 서 있는 천무기. 그리고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장이서.

싸움은 끝났다.

과정은 놀랐으나 모두가 예상한 결말.

"커헉!"

장이서는 패했고, 천무기는 이겼다.

'힘을... 끝까지 쓰지 못했다.'

장이서는 각혈하며 낭패감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축뢰환을 만들어내는 것까진 성공했으나 오래지 않아 몸이 버티질 못하고 터져버렸다.

'초절정 경지에만 올랐어도....'

낭패감에 이어 쓰라린 패배감이 스몄다.

창귀신 적아린에 이어 사공자 한. 그리고 대공자 천무기까지. 연달아 세 번의 패배를 겪은 것.

물론 그와는 달리 지켜보던 이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네놈은 대체...."

특히 천무기의 충격은 가장 컸다.

처음엔 그저 입만 산 놈인 줄 알았고, 그 후엔 숨겨둔 실력이 있는 정도로 알았고, 그리고 지금은....

'위험하다. 한낱 들개 출신인 녀석이 내게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했다.'

그도 알았다. 장이서의 힘이 꺼지지 않았다면 패하는 건 자신이었다는 것을.

이로 인한 두려움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패배에 대한 공포가 아니었다. 한낱 보좌 따위로 여긴 장이서에게 패한다는 것에 대한 공황이었다.

'없애야 한다. 반드시.'

심장이 덜컥 내려앉고, 눈빛은 빙해처럼 차가워졌다.

고오오오오-!

그리고 또다시 검은 아지랑이가 치솟아 올랐다. 파천흑마공이다.

기세는 여전히 매서웠고, 육신에는 여유가 넘쳤다.

반면 장이서는 절망한 것처럼 인상을 찌푸린 채 하늘만을 살폈다.

누가 봐도 뒤바꿀 수 없는 결말.

"이제 준비한 모든 수가 다 떨어졌나 보구나."

천무기의 입에 비소가 서렸다.

"인정하마. 네놈에겐 보좌의 자리도 부족하다. 시간만 더 있었다면 더 높이 날아올랐을 거다."

듣는 이들이 모두 제 귀를 의심했다. 봤을 때도 놀라긴 했으나, 대공자가 저리 인정할 정도라니.

"하지만 여기까지. 너는 오늘 여기서 죽어줘야겠다. 네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저 내가 본교의 권력이기에. 그런 내가 너를 너무 일찍이 알아보았기에. 그래서 죽는 것이다."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검은 아지랑이가 손끝을 지나 칼끝으로 번진다. 이윽고 은빛이 검은 먹물에 담긴 듯 짙은 어둠이 되었다.

한 줄의 검기를 넘어 칼과 하나가 되는 검강(劍?)을 다루는 힘.

파천흑강검(破天黑?劍)이다.

본래 극마의 경지에 올라야 다룰 수 있는 힘이지만, 그의 마공이 일시적으로 이를 구현한 것.

쉽게 말해 장이서가 감히 막아낼 수 없다는 얘기.

"유언이 있느냐?"

천무기가 검을 들어 올린 채 마지막 물음을 던졌다. 한데 장이서는 여전히 하늘만을 살피며 외쳤다.

"계속 보고만 계실 겁니까!"

뭐라는 거지? 분명 아까도 똑같이 물었다. 천무기는 그게 자신에게 한 말인 줄 알았다.

한데 지금 보니 아닌 거 같다.

갑자기 드는 오한에 천무기의 고개가 서서히 올라갔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두두두두!

지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발걸음 소리였다. 그것도 한둘이 아닌 불특정 다수!

대공자를 비롯해 모두가 당황하며 근원지인 남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장이서어어어어어-!"

고막이 터질 것처럼 쩌렁쩌렁한 음색이 만천하에 울려 퍼졌다.

"설마...!"

대공자 천무기의 눈에 경악이 물드는 그 순간.

"장이서 건드리면 내 손에 죽는다-!"

입구에서 붉은 머리의 미공자가 포효와 함께 나타났다!

마오오오오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제창하는 붉은 무복의 칠무위!

칠소궁이다. 그들이 당도한 것이다.

과거의 보잘것없던 때와는 차원이 다른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만마분총에 있어야 할 너희가 어떻게... 설마?!"

그의 고개가 다시 천천히 하늘로 향했다.

그리고 털썩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렇게 되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겠죠.'

'있긴 한 것이냐?'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그건 천운 따위가 아니었다.

저 하늘 위에서 허공을 밟으며 차분히 걸어 내려오는 백발의 지존.

만마를 내려볼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

대공자의 권력을 무참히 짓밟을 수 있는 절대자.

"천마지존 만마앙복!"

천마 진우광.

바로 그였다.

223.

#못다 한 포상

천마의 등장은 확실히 달랐다.

기라성 같은 고수들과 수많은 군중의 기세에도 멈추지 않던 싸움이 한순간에 끝을 고했다.

그저 나타났을 뿐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인정해야 했다.

이곳에서 그는 신(神)이라는 것을.

또한 한 사람의 존재 자체가 완성된 권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너무도 거대해 아무리 고개를 쳐들어도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고, 압도적인 존재감에 모두가 그를 숨죽이며 따를 수밖에 없는 그런 권력 말이다.

아, 물론 예외가 있기는 했다.

눈치 없이 제게로 열심히 꾸물거리며 기어 오는 덩치 큰 녀석. 마오다.

"야, 장이서 괜찮냐?"

"일단은요. 만마분총에 가셨다더니. 여긴 어떻게 온 겁니까."

"네가 이러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안 와. 하여튼 빠져가지고."

피식 웃었다. 칠공자와 이런 실없는 대화를 주고받는 게 즐겁게 느껴지는 날이 올 줄이야.

"잘 지내셨습니까?"

"어. 너 기다리다 돌부처 되는 줄 알았다."

마교에서 부처는 무슨.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말하자면 깁니다."

설명하기도 복잡하고. 당연하지만 길게 말할 상황도 아니었다.

"아버님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천무기는 당혹감을 숨긴 채 차분히 물었다. 시기적절했다. 모두가 궁금해하고 있었으니. 한데....

"어떻게 알았느냐."

천마에게선 대답이 아니라 역으로 물음이 던져졌다. 당연히 천무기에게 한 말은 아니었다.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그다. 장이서.

"장이서, 뭐 해. 아버님이 묻잖아. 얼른 대답해."

마오가 얼굴이 대신 새빨개진 채 옆에서 재촉한다. 모두의 의아한 시선이 닿는다. 하지만 장이서는 요지부동이다. 표정 하나 변함이 없다.

할 말이 없어서는 아니다.

당연히 천마가 위에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나한텐 혈마귀가 있으니까.'

말마따나 처형대에서 혈마귀가 폭주라도 해버리면 천산에 피바람 부는 건 일도 아닌 일.

다른 이들은 몰라도 천마는 그걸 안다.

그러니 뇌옥왕 때처럼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예상은 적중했다.

문제는....

"설마 알지도 못하면서 날 부른 것이냐."

천마의 두 번째 물음.

곳곳이 술렁인다.

'지금 천마는 날 시험하고 있다.'

그렇다. 장이서는 직감했다.

지금 그가 자신과 천무기의 대결에 판정을 내리려고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생각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장이서. 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넌 첫째에게 분명 처형당했을 것이다. 그건 곧 너의 패배를 뜻하지.'

진우광은 구름 위에서 처음부터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판결을 내렸다.

천무기가 이겼고, 장이서는 패했다.

물론 둘을 똑같이 저울에 올리기엔 불공정한 측면은 있었다.

장이서는 들개 출신의 보좌. 반면 천무기는 날 때부터 벌모세수(伐毛洗髓)를 비롯해 온갖 혜택은 다 받고 자란 천운아.

더구나 오늘은 장이서의 처형식이고, 심판자가 천무기다.

불리한 조건, 불리한 상황.

애초에 이 상황에서 승부를 판가름한다는 게 어불성설.

하나 어디 천마가 그런 걸 신경이나 쓰는가.

세상은 원래 절벽이고, 끝까지 기어오르는 자만이 살아남는 것이다.

공평? 그런 건 세상에 없다.

물론 큰 기대는 없었다. 다만 장이서는 자신의 사제. 촌수로 따지자면 가장 가까운 존재다. 바꿔 말해 천마에 가장 근접했다는 뜻.

하여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었다. 과연 장이서의 자질은 어느 정도인지.

일전에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어수룩하게 당하지는 않을 터.

그저 감흥도 없이 죽어간다면 하수(下手)이고, 한 번이라도 놀라게 하면 상수(上手)였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장이서는 몇 차례나 감탄하게 만들었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처형당하는 주제에 도리어 판을 짜고, 전세를 역전시켰다. 또한 모두 앞에서 실력을 드러내 존재감도 키웠다.

여기에 자신을 불러내기까지 했으니 그야말로 최상(最上)이다.

그래서 온 것이다.

비록 패하였으니 상을 줄 수는 없어도, 그 기특함에 구해줄 수는 있으니.

한데 뒤늦게 나온 답이 가관이었다.

"이미 아시지 않습니까."

장이서는 패자답지 않게 당당했고, 오히려 왜 이제야 왔냐는 듯 퉁명스러웠다.

그게 너무 황당해 천마가 헛웃음을 뱉고는 되물었다.

"내가 알고 있다?"

"예."

심해처럼 깊은 천마의 눈이 장이서를 지그시 살폈다.

허언인가.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설마 자신과 사형제 사이임을 독마가 친절히 알려준 것인가. 고개가 저어진다. 그럴 리가.

그렇다면....

장이서의 심장부로 시선이 쏠렸다. 그러곤 눈매가 번뜩였다.

'혈마귀의 봉인이 풀렸구나!'

자신이 기운을 불어넣어 봉하였으니 모를 수가 없는 일.

대체 어떻게.

하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봉인을 깨고도 멀쩡하다는 건.... 혈마귀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천마의 입꼬리가 시원하게 말려 올라갔다. 만일 그런 것이라면 많은 게 달라진다.

자신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장이서는 혈마귀를 깨웠을 것이고 그럼 끝까지 서 있는 건 천무기가 아니었을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살기 위해 날 부른 것이 아니라, 이들을 살리기 위해 날 부른 것이었구나!'

천마의 심연 같은 동공에 깨달음의 폭풍이 범람했다.

자신이 장이서에 대해 한참 잘못 알았다는 사실을 늦게나마 깨우친 것이다.

'너는 애초에 한계가 정해진 것이 아니었구나. 한계를 부수기 위해 한계를 지니고 있던 것이다.'

이제야 알겠다. 그리고 그 차이는 수많은 생각을 변화시켰다.

진우광은 처음으로 전율을 느꼈다.

예전에 천무기가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아버님, 천마가 되기 위한 자질이 무엇입니까.'

타고난 근골? 걸음마부터 다져진 단전? 모두를 아우르는 포용력? 그도 아니면 수많은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잔혹함?

물론 그것들도 중요한 것이 맞다.

하지만 진짜는 그게 아니었다.

일곱이나 되는 후계를 두었음에도 누구에게도 찾지 못했던 단 하나의 자질.

바로 자신이 당대의 천마가 될 수 있었던 제일 큰 이유.

'세상은 원래 불리한 절벽. 천마는 그러한 순리를 역행하는 존재.'

역천(逆天).

바로 역천의 자질을 가져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장이서는 처음부터 그걸 가지고 있는 녀석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랬다.

구규지체라는 천형을 가졌으나 상황을 꿰뚫는 머리와 앞을 내다보는 혜안을 지녔고.

비록 들개로 나고 자랐으나 모두를 아우르는 기세와 굽히지 않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몸에 맞지 않은 혈마귀를 얻었으나, 그마저도 저리 잘 지니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바로 역천의 자질.

바로 천마의 조건이었다.

'네가 나의 사제이기에 옆에 두어야 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너를 옆에 두었어야 했다.'

천마의 눈에 짙은 야욕이 들어찼다.

이는 집착이었다.

천하제일인의 집착.

앞으로 이 파장이 장이서의 앞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감히 상상도 안 되는 일.

"아버님, 소자 신교를 위협하는 첩자를 처형 중이었습니다. 부디 그 일을 속히 마무리 지을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상념 중에 천무기가 당찬 걸음으로 다가와 허리를 숙이며 허락을 구했다. 그러곤 흘깃 눈동자를 움직여 장이서에게 살기를 내뿜기도 했다.

'네놈만은 오늘 반드시 죽일 것이다.'

이에 장이서도 내심 긴장한 눈으로 천마를 살폈다. 지금으로선 믿을 게 오직 그뿐이니.

모두가 숨조차 제대로 못 쉴 만큼 긴장감이 고조된다.

판결이 끝났으면 그에 따른 상벌도 확실해야 하는 법.

이윽고 천마의 입이 열렸다.

"그리하거라."

이럴 수가! 천마의 허락이 떨어졌다. 장이서를 처형하라는 무자비한 허락이!

한순간에 희비가 엇갈렸다.

"감사합니다!"

천무기와 일소궁의 입꼬리는 귀에 걸렸고, 장이서를 비롯한 수많은 이의 얼굴엔 잿빛 그늘이 서렸다.

이어 천무기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하나 그보다 먼저."

천마의 무거운 입이 다시 열렸다.

"지난번 다하지 못한 포상을 마저 해야겠다."

웅성웅성. 포상이라니. 의문 섞인 미약한 소란이 일었다. 천무기도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건 이미 다 끝난 일 아닙니까."

"아직 하나가 남았다."

천마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돌린다.

"장이서."

말도 안 돼! 왜 또 그의 이름이 나오는가. 천무기는 퍼레진 얼굴로 사색이 된 채 소리쳤다.

"장이서는 고작해야 막내의 보좌일 뿐입니다. 이미 막내와 칠소궁이 포상을 받았는데 어찌 또 내리신단 말입니까."

"천악수라를 없앤 것을 고작이라 말하는 것이냐."

천마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천무기는 이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누가 누구를 죽여?

"장이서는 도라옥의 반란을 가장 먼저 파악한 것도 모자라 직접 천악수라를 없앴다. 이보다 더 큰 공이 있느냐."

천마의 말에 군중들이 열광을 터트리며 연호했다.

"천마지존 만마앙복-!"

"천마지존 만마앙복-!"

이것이다. 이것이 바로 올바른 판결인 것이다. 다짜고짜 죽이라고 윽박지르는 것이 아니라.

"하오나 장이서는 첩자이옵니다, 아버님! 그런 놈을 어찌...."

하나 여기서 물러서면 천무기도 끝이다. 장이서만은 반드시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물러서지 않고 대립했다.

그리고 그건 오늘의 가장 멍청한 선택이었다.

"광명사자도, 장로들도, 당주들도. 그리고 너도. 아무도 하지 못한 일을 그럼 첩자가 해냈다는 말이구나."

"그, 그것이...."

"첩자보다 못한 것들이라면... 죽어야지."

솨아아아아-!

염라보다도 무서운 천마의 살기가 뿜어졌다. 천무기의 몸에선 비에 젖은 것처럼 구슬땀이 뻘뻘 흘러내렸다.

털썩. 자연스레 꿇리는 무릎.

그뿐만이 아니다.

유령마군, 사공자를 비롯한 일소궁 전체가 그랬다.

호흡이 가빠지고, 어지럽고 메스꺼웠다.

마치 사신의 낫이 목에 얹어진 기분.

'죽는다. 무조건 죽는다.'

천무기는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혔다. 반면 천마는 입꼬리를 올리며 다정히 물었다.

"말해 보거라. 그런 것이냐."

"아닙니다. 아닙니다, 아버님. 흑.... 장이서는 첩자가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냐."

"장이서는... 천산을 구한 영웅입니다...."

"한데 그런 자를 네가 모함하려 하였구나."

"소자가...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 아무래도 지금의 그 자리가 네게는 부담이 되었나 보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아버님!"

"궁으로 돌아가 있거라."

"아...!"

천마의 잔혹한 통보가 떨어졌다.

천무기는 전 재산을 다 잃은 농부처럼 세상 가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천마는 군중들을 둘러보곤 다시금 장이서를 바라보았다.

장이서는 그런 천마의 시선에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정말 생각도 못 했다.

자신을 구해준 것도 모자라 선물까지 주려고 하다니.

그것도 가장 큰 포상을.

이를 지켜보던 군중들도 상황을 눈치채고 점점 기대감과 흥분에 고조되기 시작했다.

맹휘와 사해령에겐 십인장과 백인장을 내렸고, 무한성에겐 보화고의 열쇠를 하사했다.

그리고 마오와 칠소궁한테는 만마분총의 입장을 허가했다.

그렇다면 가장 큰 공을 세운 장이서에게는 대체 무엇을 주려는 것인가.

이윽고 천마의 입이 활짝 열렸다.

"장이서를... 부교주 위에 명한다."

천산의 권력 구도에 지각변동이 일기 시작했다!

224.

#좋아할 일이 아니다

- 무림맹 호북지부 암각.

천산이 장이서로 인해 들썩일 그 시각.

암각에서도 그에 대한 대화가 한창이었다.

"다시 말해보거라. 능가경을 가져간 자가... 정녕 103호라는 말이더냐?!"

무림맹에서 이제 막 복귀한 제갈상은 혼란스러운 속내를 감추지 못했다.

노왕야를 시해하고 원류심법을 훔쳐 달아난 자를 찾기 위해 무림맹엔 특급 비상이 걸렸다.

한데 그자가 103호였다니!

"예. 하지만 그가 노왕야를 살해했다는 건 아니에요."

"그럼...."

"혈교. 그들이 한 짓입니다."

"...!"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제갈상은 정신이 아찔했다. 그리고 제갈소미는 빠르게 자신이 겪은 일을 설명해 나갔다.

103호를 만나러 가는 길에 능가경을 주웠고, 이내 천리미향이 뿌려진 걸 깨닫고 103호가 스스로 혈교의 미끼가 되었다는 것까지.

제갈상은 갈수록 놀란 표정이 굳어지고, 입술은 굳게 다물어졌다.

만일 모든 말이 다 사실이라면 노왕야의 죽음은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는 얘기.

"103호는 손속이 잔혹했으나 정의롭고, 희생을 아는 자였어요. 그가 아니었으면 저와 선유 소협은 살아 있지 못했을 겁니다."

그랬을 거다. 선유는 103호의 동생. 그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불구덩이라도 뛰어들었을 것.

제갈소미에게 같이 보낸 것이 신의 한 수였다.

"혈교는 마교에도 수십 년간 숨어 있었다고 했어요. 분명 무림맹에도 암수가 뻗쳐 있을 거예요."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 제갈상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 일을 누가 더 알고 있느냐."

"저하고 선유 소협뿐이에요. 누구도 믿을 수 없어 각주님이 오실 때까지 함구했습니다."

"앞으로도 반드시 함구해야 할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 된다."

충격적인 이야기. 혈교에 대한 일을 묻으라는 것인가.

"예."

한데 제갈소미마저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당연했다. 이는 혈교를 묵인하겠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 반대.

이제부터는 그 누구도 믿지 말고, 더 신중하고 은밀하게 파나가야 한다는 뜻.

확증도 없이 들쑤셨다간 오히려 서로를 믿지 못하고 자중지란에 빠지게 될 게 자명했으니.

'실로 험난한 날이 되겠구나.'

제갈상은 씁쓸함이 차올랐다.

이제야 알겠다. 천기가 왜 이리도 탁했었는지.

이는 마교가 아니라 혈교가 문제였던 것이다.

"103호도 능가경을 보았느냐?"

"예. 하지만 훑어본 게 다였어요. 당연히 원류심법인 건 알지 못했을 거고요. 그 자리에서 해독하는 건 저도 쉽지 않았으니까요."

과연 그럴까. 제갈상이 쓴웃음을 삼켰다.

'그 아이는 그 자리에서 모두 읽어냈을 것이다. 그리고 범상치 않은 물건임도 깨달았겠지.'

하지만 더 긴 말은 하지 않았다.

모두에게 추앙받는 원로들마저 혀를 내둘렀던 괴물이 바로 103호다.

그에 대한 일화를 늘어놔 봤자 허탈함만 늘어날 뿐.

어쨌든 천만다행이다.

가치가 크다는 걸 알았을 테니 무슨 수를 써서든 능가경을 사수했을 터.

혈교로서는 아주 끔찍한 변수를 맞이하게 된 셈이었다.

'후후, 그 아이라면 상대가 혈교라도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제갈상의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자욱이 번졌다.

'103호.... 네가 무림을 위해 수고를 해주어야겠구나. 부디 능가경을 끝까지 지켜다오.'

이용만 하는 현실에 늘 그렇듯 미안한 마음이 짓쳐 든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것이 있었으니, 103호는 이미 능가경을 지켜내다 못해 제 것으로 만든 지 오래라는 것.

또한 점점 함부로 다룰 수 없는 거물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장이서가 끔찍한 변수인 건 얘나 쟤나 마찬가지라는 얘기.

"지금부터 우리 암각은 혈교의 진상을 파헤칠 것이다. 험난한 길이 될 것이다. 갈 수 있겠느냐?!"

제갈상의 결의 섞인 물음에 제갈소미는 웅장해지는 가슴을 느끼며 힘차게 답했다.

"예!"

"좋다! 이제부터 은밀히 103호의 행방을 추적하거라. 반드시 선유와 함께 움직이거라. 그 아이가 널 지켜줄 것이니."

제갈소미가 힘 있게 포권을 취한 뒤 밖으로 나섰다.

오늘도 천하를 위해 애쓰는 암각이었다.

* * *

- 마해산 비룡당.

모두가 숨이 멎은 채 얼어붙었다.

장이서가 부교주라니.

"마, 말도 안 돼...."

천무기는 털썩 주저앉은 채 아예 넋이 나갔다.

"자, 장이서가 뭐를 해?!"

"으음...."

"지금 나만 잘못 들은 게야? 부, 부교주라니."

마오와 구유. 그리고 마의 역시도 놀라기는 마찬가지.

아니, 누가 놀라지 않겠는가.

'장이서가 부교주라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묘채경은 아예 눈이 튀어나올 뻔했고.

'역시 소천마가 맞았구나! 이제부터 제대로 본격적인 후계 구도를 밝히시는 거다.'

당연하다는 듯 환호하는 번천검객도 있었다. 하지만 생각의 종착지는 모두 동일했다.

'본교에 대파란(大波瀾)이 일겠구나.'

지금까지의 권력 구도에 새로운 변화가 들이닥친 것.

"부교주는 천마전으로 오거라."

그렇게 천마는 혼란만을 남겨둔 채 하늘 높이 비상했다.

"천마지존 만마앙복!"

"천마지존 만마앙복!"

처형식은 끝이 났다.

'첩자인 내가... 부교주라고?!'

경악이라는 여운만을 남겨 둔 채.

*

천마가 떠나가고 장이서는 서둘러 처형장을 빠져나왔다.

가는 길은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시끄러웠다.

"장이서, 그거 할 거야? 부교주."

당연히 주제는 천마가 남기고 간 선물 아닌 선물이었다.

마오는 가는 내내 아기 새처럼 들러붙어 쫑알쫑알 떠들었다.

"부교주 하지 마."

"왜요."

"나보다 높아지는 거잖아.... 그건 싫어...."

"앱니까? 그리고 그딴 독재자 같은 소리 수줍게 하지 마십시오."

"이 정도면 신분 상승이 아니라 신분 환생이잖아!"

마오의 말대로였다. 그야말로 다시 태어난 수준.

이대로면 장로고, 당주고 간에 장이서에게 고개를 조아려야 하고, 후계들도 소교주가 아닌 이상 그에게 예를 갖추어야 했다.

명실상부 마교의 이인자가 된다는 것.

"으아아악! 배 아파! 왜 네가 더 올라가는 건데!"

"말 또 이상하게 하시네."

"너 솔직히 말해. 처음부터 이러려고 나한테 접근한 거지. 어?"

그랬으면 너한테 갔겠냐. 집게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꾸욱 눌렀다. 그러자 마오가 갑자기 심각한 고민에 빠지는가 싶더니 툭 말을 뱉었다.

"아니다. 너 그냥 부교주 해!"

"또 왜요."

"부교주 하면서 내 보좌도 같이 해. 그럼 네 주인은 나니까 내가 더 높은 거야."

"무슨 그딴 논리가...."

"우하하하! 내 보좌는 오늘부터 부교주다!"

마오가 신난다고 달려 나간다. 이럴 땐 참 부럽다. 쟤의 순박함이.

"그래도 무사해서 다행이군."

"어쨌든 첩자 누명은 벗었으니 다행인 게지."

고개를 돌리자 구유와 마의가 다가선다. 표정들을 보니 십년감수한 것처럼 아직도 놀란 기색이 남아 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 죄송합니다, 형님."

둘에게 사과를 건네자 구유는 대답 대신 어깨를 툭 두드렸고, 마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답했다.

"나보다 엽굉 저놈이 얼마나 날뛰던지. 당장 구하러 가야 한다고 직접 노까지 저었다."

마의가 흘깃 후방을 살핀다. 칠무위 옆에 의생들과 함께 걸어오는 부각주 엽굉이 보였다.

모두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만일 천마가 나타나 중재하지 않았다면 참형을 면치 못했을 일이었다.

첩자를 도와 일소궁과 칼을 겨눈 것이니.

한 마디로 목숨 걸고 저를 지켰다는 것. 마음이 저릿하지 않을 수 없다.

"한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그러고 보니 그새 더 강해진 것도 같고."

절정 끝자락에 오르면 가끔 자신도 모르게 기운이 흘러넘쳐 새어 나올 때가 있다.

방금이 그랬다. 순간 화가 차올라 주체하질 못했다. 두 사람은 그걸 바로 간파했고.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장이서는 내기를 갈무리하곤 그답게 두루뭉술 답했다.

"그래. 무사하면 되었다."

두 사람도 이젠 하루 이틀 일이 아닌 터라 그러려니 했다.

"그보다 앞으로가 걱정이구나."

마의의 얼굴에 깊은 시름이 담겼다. 당장 눈앞에 닥친 문제 때문.

바로 부교주라는 자리였다.

장이서는 폭탄 같은 발언을 던졌다.

"천마께 명을 거두어 달라 청할 생각입니다."

두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심인가? 진심이다.

"부교주 자리를 거절하겠다는 건가? 어째서."

구유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묻는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를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잘 생각했다."

하지만 마의는 의외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이에 구유가 다시 물었다.

"부교주가 되면 좋은 것 아닌가?"

좋지. 하지만 해선 안 될 이유가 있다.

마오를 소교주로 만들어야 해서? 아니, 오히려 그건 보좌 때보다도 더 쉬울 거다.

이에 대한 답은 장이서 대신 풍채 좋은 두 사람에게서 흘러나왔다.

함께 와준 호룡당주 지대호와 금룡당주 만금수였다.

"아무리 허기가 져도 아무거나 먹으면 탈이 나는 법이지."

"맞습니다. 하물며 나보다 훨씬 더 큰 떡이라면... 먹기도 전에 깔려 죽는 법이지요."

두 사람의 말대로였다. 장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부언했다.

"냉정히 말하자면 좋아할 일은 아니야. 아니, 역으로 아주 위험한 상황이지."

"...!"

부교주가 무엇인가.

말 그대로 교주가 없으면 교주. 명실상부 마교의 이인자라는 얘기다.

심지어 진우광이 단 한 번도 내준 적 없던 공석. 쉽게 말해 부교주 없이도 잘 돌아가고 있었다.

한데 고작해야 이립도 안 되고, 초절정도 못 넘긴 장이서가 마교 부교주에 앉는다면?

'가차 없이 칼부림이 벌어질 거다.'

그리고 그건 조금 전 처형장에서 이미 벌어질 뻔했었다.

천마가 무책임하게 날아가 버린 뒤, 어색하고 무거운 침묵 속에 유령마군이 읊조렸다.

'감히....'

그러곤 억눌렀던 살기를 폭발시키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 대상은 장이서. 뼛속까지 마인인 그에게 뒷일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장로로서 명한다. 당장 해산하라! 해산!'

그때 마의가 노련하게 대처하고, 지대호와 만금수. 그리고 번천검객이 나서지 않았다면 무조건 칼부림이 벌어졌을 거다.

'사해령하고 이공자 표정도 평소랑 달랐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뚫어지게 쳐다보던 그 눈빛. 생각만 해도 등골이 서늘했다.

"그런 것이었나."

구유가 이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정쟁이었다.

"이대로 부교주가 된다면 앞으로 수많은 이가 널 노릴 것이야. 장로들도 가만히 두고 보진 않겠지."

마의의 말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맞는 말이다.

본래 위계질서가 확실할수록 변화를 반기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마교는 권력 구도가 확실했다.

당주들과 장로들은 내실을 다졌고, 후계들은 소교주 자리를 놓고 경쟁했다.

예상외 범주가 그리 크지 않다는 얘기.

하지만 장이서라는 부교주가 나타나는 순간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장이서는 당주와 장로들의 소사에 관여할 권한이 생기고, 후계들에겐 비슷한 또래의 장이서가 걸림돌처럼 느껴지게 될 거였다.

존재 자체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일.

그럼 아무런 세력도, 힘도 없는 장이서는 어찌 되겠는가.

'뜯어 먹히든가, 이용만 당하다 사라지게 되겠지.'

그랬다. 이것이 바로 부교주라는 자리가 마냥 좋을 수 없는 이유였다.

지금도 마의와 독산각. 그리고 지대호와 만금수가 동행하는 이유가 장이서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갑자기 누군가 암습을 해올지도 모르니까.

"크하하하! 그래도 잠시라도 우리 장 보좌가 크게 출세한 거 아닙니까. 경하드립니다, 부교주님."

지대호가 능청스레 포권을 취하며 장난을 쳤다. 이에 만금수도 껄껄 웃으며 포권을 취했다.

"이 상황에 농담들이 나옵니까."

장이서도 픽 실소를 짓자 모두가 사이 좋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쨌든 지금이라도 천마에게 가서 바로 잡으면 되는 일이다. 그저 한 가지 불안한 것은....

'천마가 떠나면서 웃던 모습이 꼭 지난날 내게 숙제를 내리던 모습 같았다.'

유희를 즐기는 듯한 그런 악랄한 모습 말이다.

'설마 아니겠지....'

머릿속에 잡념을 떨쳐내고 말했다.

"가죠. 천마전으로."

천마를 빨리 만나야겠다.

장이서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먼발치 앞서 나갔던 마오는 웃던 얼굴을 지우고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하늘만을 바라보았다.

결의를 다진 사람처럼.

225.

#천마의 시험?

한편 휑해진 비룡당에는 아직도 여운이 남은 두 사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삼공녀 사해령과 이공자 무한성이다.

"셋째야. 봤냐?"

"...뭘요."

"나 진짜 장 보좌. 아니 부교주 좋아하는... 크악!"

사해령이 무한성의 발등을 짓밟곤 몸을 돌렸다. 미친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하지만 그에게 고마운 것도 있긴 했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으니.

'장이서. 이젠 내가 널 잡아야 할 이유가 너무 많구나. 능력도, 자리도. 그리고....'

두근, 두근.

문득 내려다본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아직 봄이었다.

* * *

장이서 일행은 어느새 천마전에 다다랐다. 우려했던 습격은 없었다.

하긴 함께 온 이들을 생각하면 왔다가도 발길을 돌릴 거다.

"광명사자를 뵙습니다!"

입구에는 좌사와 우사가 동시에 마중했다.

"허락받지 못한 자들은."

"그만 돌아가게."

이 이상은 장로와 당주라 할지라도 허락 없이 들어설 수는 없었다.

결국 동행한 이들은 아쉽지만 작별을 고했다.

"조심히 다녀오너라. 절대 지존께 고집부리지 말고."

"예, 형님."

마의의 인사를 끝으로 천마전의 문이 열렸다.

장이서와 마오. 그리고 칠무위가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이들의 동행도 여기까지.

"칠공자님께선 절 따라오시지요."

좌사와 우사가 안내역을 달리하듯 다른 길목에 섰다.

"아니, 좌사 잠깐만! 만마분총엔 장이서도...."

"이젠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좌사의 무심하기 짝이 없는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해석하자면 장이서는 더 이상 네 보좌가 아니라는 얘기.

"장이서...."

마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래도 충격을 받은 모양. 왜 아니겠는가. 그리 보좌와 부교주를 동시에 하라고 떠들던 녀석인데.

얕게 숨을 뱉고는 달래주려 입을 열었다.

"칠공자님, 별거 아닙니다. 일단 먼저 가서 수련하고 계십시오. 그럼 제가 일을 마치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마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 새끼 왜 이래.

"나도 다 알거든?!"

"칠공자님...?"

이 자식, 울어?

"오는 길엔... 그냥 떼 써 본 거야, 자식아. 내가 바보냐? 너 부교주하면 보좌는 못 하는 거잖아."

"아니...."

당연하긴 한데.... 솔직히 진짜 모르는 줄 알았지.

"와, 씨. 어렵다! 너 진짜 뭐냐. 너 하나 보내는 게 이렇게 힘들다고?"

마오가 코를 찡그리며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야, 장이서. 너 나 교주 만들어준다고 했지."

그건 반역이고. 교주 아니고 소교주.

"어디에 있든 그 약속 잊지 마라. 알겠어?"

마오가 등을 휙 돌렸다. 그러곤 목이 꽉 막힌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부교주 해. 보내줄게. 너 그럴 자격 있어."

장이서가 헛숨을 삼켰다. 이 녀석이 이렇게 컸었나. 싫으면서 떠나보낼 줄도 알고.

오는 내내 얼마나 많은 시름을 했을지. 혼자 애태웠을 그 모습을 생각하니 괜스레 웃음도 서렸다. 격세지감도 느껴지고.

"너 처음 만났을 때부터 위로 올라가고 싶다고 맨날 노래를 불렀잖아. 권력에 미친놈처럼."

야, 그건 그냥 둘러댄 말인 거고. 그리고 언제 맨날 그랬냐. 딱 두 번 그랬다! 황당해서 반박하려는 찰나.

"맞소, 형님.... 형님 아니면 누가 그런 자리를 맡겠소. 가는 게 맞지...."

"과평."

「제대로 소임을 다하지 못해 늘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감사했습니다.」

"아신."

두 사람까지 떨리는 목소리로 부언했다. 나머지 칠무위도 고개를 푹 숙인다.

"너희들...."

근데 꼭 이렇게 울면서 보내야 하는 거냐. 어깨 흔들리는 거 다 보인다. 누가 보면 죽으러 가는 줄 알겠어.

"구유."

장이서는 얕게 숨을 뱉고는 유일하게 절 보는 그를 불렀다.

그리고 모두에게 들으란 듯이 말했다.

"가서 제대로 수련받고 와. 대충은 없다. 돌아오면 전부 다 확인할 거야."

"음?"

"먼저 집에 가 있겠다고. 우리 집. 칠소궁."

장이서가 픽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떨리던 모두의 어깨가 일시에 석상처럼 굳어졌다.

"어. 어?!"

그리고 말뜻을 이해한 마오가 몸을 돌렸다. 얼굴엔 눈물과 콧물이 가득하다.

"그나마 믿을 게 얼굴뿐인데, 그게 뭡니까. 가기 전에 씻고 가십시오."

"자, 장이서.... 장이서어어어어어!"

마오가 달려든다. 아니, 과평과 아신. 그리고 칠무위 모두가 달려들었다.

"흐어어어엉!"

이것들이 더럽게! 덩치 큰 것들이 울면서 우르르 몰려드니 이건 뭐 끔찍한 악몽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말릴 마음은 안 든다.

결국 장이서는 헛웃음을 뱉고는 두 손을 들었다.

그리고 절 끌어안은 마오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만마분총에 가는 건 자주 오는 기회 아닙니다. 어떤 무공을 얻게 될지도 모르고요. 정신 단단히 차리십시오."

"진짜 어디 안 가는 거 맞지? 부교주 안 할 거지?"

녀석. 나이만 먹었지. 애다, 애야. 그리고 첩자가 부교주까지 하면 되겠냐.

"예. 교주님과 잘 이야기하고 먼저 가 있겠습니다."

"응."

인사를 마친 두 사람. 그렇게 서로 웃으며 각자의 길 앞에 섰다.

좌사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혀를 차며 마오와 칠무위를 만마분총으로 안내했다.

"장이서! 칠소궁에서 모이는 거다! 약속이야!"

마오는 가면서도 내내 뒤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장이서는 그 모습을 기억에 고이 담았다.

그리고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을 때 우사가 말했다.

"가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투는 딱딱하나 묵묵히 기다리며 배려해 준 것. 장이서는 이에 감사함을 담아 등 뒤에 포권을 취했다.

우사는 우뚝 멈춰 서선 흘깃 보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내게 고마워할 것 없다. 시간을 준 건 교주님이시니."

그런가. 하긴 천마전 안에 있는 한 그의 기감을 피해 갈 순 없겠지.

천마가 묵인했기에 우사와 좌사도 시간을 내어준 것일 테다. 하지만 고마운 건 고마운 것.

"그래도 감사합니다."

장이서가 다시금 인사를 건네자 우사는 또 걸음을 멈추곤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얕게 숨을 뱉으며, 원래 성정상 묻지 않았을 말을 꺼냈다.

"교주님의 명을 따르지 않을 셈이냐."

그답지 않은 참견. 그만큼 장이서가 마음에 든 탓일 거다.

"예. 제가 앉기엔 너무 큰 자리입니다."

장이서는 거짓 없이 뜻을 밝혔다. 이에 우사는 한참을 묵묵히 걷다가 다 와 갈 때쯤 다시 말을 꺼냈다.

"지존께선 아무에게나 시험을 내리지 않으신다. 가능성이 보이는 자에게만 기회를 주시지. 또한 자리란 무릇 거절한다고 끝이 나는 것도 아닐 거다. 그러니 현명히 생각하고 판단해라."

장이서의 눈매가 좁혀졌다. 그러곤 멈추어 선 채 그를 바라봤다. 하나 우사는 더 할 말이 없는지 흘깃 옆으로 눈짓했다.

방이었다.

온갖 문양이 화려하게 인각된 커다란 석문이 가로막은 천마의 방.

"무운을 빌지."

끼이이이익!

석문이 열리고, 화로 사이에 펼쳐진 길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리고 그 끝에는....

"왔느냐."

천마 진우광.

그가 있었다.

*

끼이이익, 쿵!

장이서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 두꺼운 석문이 닫혔다.

손을 댄 자는 없었다. 그런데도 열렸고, 이번엔 닫혔다.

원리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천마의 허락이 떨어졌느냐, 아니냐만이 중요할 뿐.

"오거라."

천마의 명에 장이서가 걸음을 떼었다.

분명 그리 멀지 않은 거리임에도 태사의까지 가는 시간은 매우 길게 느껴졌다.

다섯 걸음마다 놓인 두 개의 화로가 유난히 더 밝게 불타는 듯했고, 그 사이에 놓인 가운데 길은 절벽 위의 외줄 같았다.

그리고 열두 걸음을 지났을 때였다.

'뭐야...?'

장이서는 처음으로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갈수록 두 발은 무거워지고, 이마에선 식은땀이 뻘뻘 흘렀다. 단순한 심리적 압박이 아니었다.

태사의에 올라앉은 천마 진우광.

그에게서 그림자처럼 퍼져나온 마기가 제 몸을 짓누르고 있는 거였다.

'대체 왜?'

오라고 해놓고, 오는 길을 막다니. 이 무슨 해괴한 짓인가.

당혹감을 비치며 그를 바라보자 웃고 있는 안광에서 지독한 살기까지 쏟아져 나왔다.

'큭...?!'

이내 쿵쾅거리는 심장과 함께 휘청이는 몸. 휙 고개를 떨구고 파르르 떨었다.

'인간이 아니다. 신이다.'

천 년을 굶은 이무기의 살기가 이러할까. 심지어 곤륜산 심연에 있던 교룡보다도 더 거칠었고 포악했다.

쳐다만 봐도 잡아 먹히는 기분.

장이서는 그 순간 직감했다.

'날 시험하고 있는 거구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왠지 제 자격을 시험하려고 하는 듯했다.

마치 목전까지 도달해야만 대화에 응하겠다는 것처럼.

'침착하자.'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피했던 고개를 다시 천마에게로 향했다.

쿵! 심장을 쪼그라트리듯 강한 압박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장이서는 그럴수록 더욱 눈매를 단호히 했다.

우우웅!

그러자 가슴팍에서 미약하지만 푸른 들판의 녹색 기운이 샘솟았다.

남천능가경 심궁의 힘!

이는 상대와 마주하고, 이를 이겨내려고 할 때 비로소 빛을 발하는 것.

잠시 후 흐르던 땀은 사라지고, 흔들리던 장이서의 두 다리는 다시 걸음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이를 본 천마는....

'이것이 역천의 자질을 타고난 너의 의지인 것이더냐. 사형인 내게 오려는 너의 의지 말이다.'

진심으로 감격했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분명 장이서는 그사이 한계를 뚫고 더 강해졌다.

지금도 살기를 이겨낸 채 걸어오고 있지 않은가. 장로들도, 대공자도 이겨내지 못한 자신의 살기를 말이다.

내색은 안 했지만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한계가 명확해 외면했으나, 이제는 시인해야 했다.

'넌 나와 가장 닮은 아이다.'

그 어떤 자식보다도 자신을 닮았다는 것을. 진정한 역천의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것을.

정상에 우두커니 서서 벼랑에 매달린 자들을 무심히 내려보고 살아온 나날이었다.

그 누구도 저의 자리엔 다다를 수 없다고 생각했고,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한데 이리 빛나는 존재가 있을 줄이야.

생전 처음 가족애란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먼지처럼 미세했지만.

하여 다시금 다짐했다.

'너는 독마 옆에 있어야 할 아이가 아니다. 반드시 내 옆에 있어야 할 아이다. 내가 널 올려주마.'

장이서는 시험이라고 거창하게 생각했지만, 사실 진우광은 반반이었다.

어디까지 올 수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 반. 그리고 사제를 놀리고 싶은 마음 반.

한데 이제 보니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내게 오려는 네 의지를 보여다오.'

장이서가 알았다면 소름이 끼쳤겠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천마가 뜻을 품었고, 그럼 된 거였다.

화아아아악!

화르륵 불타던 화로들이 유령이 지나간 것처럼 차례로 훅훅 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길목에 있던 장이서까지 다다랐을 땐.

"커헉!"

그가 각혈하며 그대로 털썩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장이서의 동공이 지진이 인 것처럼 흔들렸다.

'미, 미친....'

226.

#독대

이건 그냥 살기가 아니었다. 의지만으로 상대를 다치게 만드는 경지. 의기상인(意氣傷人)이었다.

아예 대놓고 죽으라고 고사 지내는 수준.

더구나 독마와 비교하면 그 수준은 차원이 달랐다.

독마의 것은 지독한 살기가 오장육부까지 서서히 멎게 만드는 느낌이었다면, 천마는 기파를 마주한 순간 전신을 수만 대 때려 맞은 거 같았다.

그래서 음양일원을 펼쳐도 의미가 없었다. 이미 극심한 고통에 숨이 안 쉬어졌기 때문. 오죽하면 얼굴에 핏발까지 곤두섰다.

하나 이대로 멈출 수는 없는 일.

'혼...문을... 연다.'

결국 두 번째 남천능가경을 발동시켰다.

우우웅!

목에서 청색의 빛이 휘몰아치고, 피부로 자연의 호흡을 시작했다.

그러자 얼굴색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다.

다시 죽을힘을 다해 걸음을 떼었다.

"하하하!"

이에 천마는 희열에 젖어 웃음을 터트렸다.

'정녕 너는 내 사제로구나. 장하다.'

'재밌냐. 그럼 실컷 봐라. 미친놈.'

동상이몽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결국 간신히 기고 기어 그의 앞에 다다랐다는 것이다.

이내 한 맺힌 듯 큰 소리로 외쳤다.

"천마지존 만마앙복! 신 장이서. 분부를 받잡고 도착했습니다!"

고개 들고 눈을 치켜뜨는 장이서. 흥미롭게 웃으며 이를 내려다보는 천마 진우광.

드디어 사형제의 독대가 이루어졌다.

진우광이 퇴폐적인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하였다."

x발? 순간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방금까지 절 죽이려 해놓고, 다정한 어투로 고생했다니.

정녕 마의 종주. 마교의 신이다.

"...감사합니다."

하나 어쩌겠는가. 힘없는 놈이 숙여야지. 언짢은 표정을 숨기려 고개를 떨구려고 했다. 한데 천마가 손가락을 위로 까딱이자 턱이 무언가에 막힌 것처럼 내려가질 않는다.

"숙일 것 없다. 넌 나를 볼 자격이 있으니."

볼 자격은 있고, 안 볼 자격은 없는 거냐?! 멱 잡고 따지고 싶지만, 그럴 형편이 아니다.

천마와 마주 보는 건 심궁의 힘으로도 쉽지 않았다. 불 꺼진 방에서 혼자 백발의 마귀를 마주 보는 느낌.

결국 고개 숙이는 건 포기하고 빠르게 본론부터 던졌다.

"소인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허한다."

"공로를 인정해 주신 건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하나 소인이 한 일은 기절해 있던 것뿐입니다. 천악수라를 없앤 게 제가 아님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독마까지 셋만 아는 비밀.

혈마귀에 대한 이야기다.

천마도 이 얘기가 나올 줄은 예상 못 했는지 웃음을 거두고 답했다.

"독마가 죽다 살아나더니 입이 가벼워진 모양이구나. 어디까지 들은 것이냐."

"혈교의 힘을 제 천마귀가 흡수했고, 그 덕에 천악수라를 죽였다는 것까지 들었습니다."

"그것뿐이냐."

진우광의 눈에서 칠흑빛 광채가 뿜어졌다. 심장이 멎을 뻔했다.

'부교주고 뭐고 살 떨려서 못 있겠구나. 도대체 어찌 인간이 이렇게 강할 수 있는 거냐.'

과거 경지가 일류에 불과할 때가 차라리 더 나았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그때는 천마의 진정한 힘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저 거대한 어둠처럼만 생각했다.

한데 제법 머리가 크니 알겠다. 그 어둠이 사실은 발끝이었다는 것을.

그런 그의 옆에서 첩자 주제에 부교주로 지내라니. 매일 죽여달라고 고사를 지내는 일.

이를 악물고 답했다.

"들은 건 그것뿐입니다."

"그럼 되었다."

진우광이 다시 다정한 미소를 짓는다. 확실히 알겠다. 이 인간은 미친 마귀다. 까딱하면 다 찢어 죽일 희대의 대마귀(大魔鬼).

"이리 얘기하는 건 바라는 게 있어서겠지. 말해보거라."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부교주는 제겐 과분한 자리입니다."

"네 말대로면 과분한 것이 그것만은 아닐 텐데."

진우광이 비수 같은 말을 던졌다. 역시나 혈마귀 이야기다. 보좌가 무려 10갑자에 육박하는 위험천만한 괴물을 품고 있는 건 가당키나 하냐는 얘기.

하지만....

"제가 다룰 수 있습니다."

천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장이서가 혈마귀의 폭주를 막아선 건 확인한 바다.

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 건 앞서도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죽었다 깨어나도 그의 수준으로는 불가능한 얘기였기 때문.

"무슨 수로."

"그건...."

달마 조사의 심법을 익혔으니까. 근데 그 말을 천마 앞에서 어찌 하겠는가.

"혈마귀에게 잡아 먹힐 만큼 나약하지 않습니다."

장이서는 진땀을 흘렸다. 제가 뱉어놓고도 참 볼품없는 이유였기 때문. 그딴 낭만이 통할 상대인가.

"하하하하!"

한데 천마의 반응이 의외로 호의적이다.

"그래. 너라면 그럴 수도 있지."

"예...?"

"하지만 견뎌내는 것과 다루는 건 다른 이야기다. 넌 혈마귀를 직접 본 적이 있느냐?"

당연히 본 적이 있다. 내면의 세계에서 그를 마주했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천마가 다정히 대화를 이어갔다.

"그럼 지금도 볼 수 있겠느냐?"

"아뇨. 그건 아닙니다."

"혈마귀는 또 다른 너의 자아이자 내면. 네가 직접 마주할 때 비로소 다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순간 뇌리에 광망이 펼쳐지는 듯했다. 뭔가 알 듯, 말 듯 한 기분.

천마는 이를 흡족하게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이에 장이서는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또 말려들었구나. 정신 차리자. 지금 중한 건 이게 아니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본론을 꺼냈다.

"하나 부교주 자리는 다릅니다. 이를 수행하기엔 아직 전 많은 것이 부족합니다."

진우광이 제 턱을 받치곤 고개를 끄덕인다. 그 부분은 인정한다는 뜻.

"확실히 많이 부족하긴 하지."

가르칠 것도, 해줘야 할 것도 아직 너무 많으니.

우선 그 낡은 옷차림도 마음에 들지 않고, 어딘가 숨으려는 음침한 표정도 별로다.

천마가 골똘히 생각에 잠기자, 장이서는 드디어 기회가 왔다 싶었는지 호기롭게 외쳤다.

"그러니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본교의 모두가 절 노릴 것입니다. 이미 자객들이 마해산 주변에 악어 떼처럼 도사리고 있을 것이고요."

"두려운 것이냐."

"이렇게 죽고 싶진 않습니다."

"내게 올 의지를 가진 네가 고작 부교주 자리 하나는 감당이 어렵다는 것이냐."

"어찌 보셨는진 몰라도 바람 앞의 촛불처럼 미약하게 연명해 온 목숨입니다."

"보기에도 그리 보인다."

그래서 어떻게 널 더 험지로 밀어 넣어야 강해질지 고민 중이지만.

"그리 보셨다면 좀 살려주십시오!"

천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생각이었다. 더는 나약하게 살게 둘 마음이 없었다.

그건 자신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독마는 뒤에 숨긴 채 감싸주려 한 모양이지만, 자신은 다르다.

그 어떤 역경도 당당히 이겨낼 수 있도록. 절벽 위에서 밀고 또 밀어 강하게 만들어줄 참이었다.

진정한 자신의 사제로 거듭날 수 있도록.

'자격이 부족한 거라면 자격을 만들면 될 일. 이제부터 너의 업적을 쌓게 해주마.'

천마가 결단을 내리곤 빙긋 웃음을 지었다.

'웃으니까 더 무섭군.'

이에 장이서는 알 수 없는 섬찟함을 느꼈지만, 애써 마주 웃었다.

그리고....

"좋다. 그리 원한다면."

마침내 허락이 떨어졌다. 장이서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감사합니다!"

"대신,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게 무엇입니까."

다시 눈매가 좁혀진다.

"중원에 나가 물건 하나를 가져오거라."

중원이라니. 생각지 못한 명령에 곧장 물음을 이었다.

"무슨 물건을 말입니까."

"능가경."

"...!"

장이서의 골이 뎅 울렸다. 갑자기 그게 여기서 왜 나오는가.

"중원에 달마의 심법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었다. 전부터 궁금했다. 과연 달마가 나보다 더 강한 존재인지. 네가 직접 가서 확인하고 가져오거라."

중원의 소식이 여기까지 들려왔구나. 하지만 한발 늦었다. 그건 이미 불태우고, 제 머리에만 남겨뒀으니.

그리고 그게 돌아가야 할 곳은 소림이지, 마교가 아니다.

"하오나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일이고...."

"청해에 있다더구나."

"예?"

"뭘 그리 놀라느냐."

안 놀라게 생겼나.

"아니, 그게 왜 청해에...."

"이미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혈교구나. 정신이 얼얼했다. 원본을 없앴다고 끝난 게 아니었다. 이놈들이 또다시 역겨운 수작을 부리고 있는 거다.

대체 무얼 노리고.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하다.

'놈들을 막아야 한다!'

정신이 번쩍 들고, 침을 꼴깍 삼켰다. 이에 천마가 거절할 수 없는 미끼까지 덧붙였다.

"능가경을 가지고 오면, 네가 원하는 소원 하나를 들어주마. 그게 무엇이든."

"...!"

순간 제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천마가 소원을 들어준다니. 천산에서는 그가 곧 천지신명이다.

못 해줄 게 없다는 얘기.

바꿔 말하자면.

'마오를 소교주로 만들 수 있다. 그럼 첩자로서의 내 임무도 끝이다....'

분명 바라 마지않던 일.

한데 후련해야 할 가슴은 갑갑하고, 해방감을 느껴야 할 머릿속은 허망했다.

기뻐해야 하는데. 그게 맞는데. 왜 기쁘지가 않은 거지?

덜컥 심장이 뛰고, 머릿속이 멍해졌다.

하나 금세 이를 지워냈다. 무슨 생각이든 더 가면 안 될 것 같은 느낌.

"하나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물어라."

"능가경을 손에 넣으신다면.... 이를 익히실 겁니까."

"감히 나더러 정파의 무공을 익히라는 것이냐?"

"그럼 무엇 때문에...."

"수준을 보기 위함이다."

수준이라. 참으로 광오한 말이다. 누가 감히 달마 조사의 무공을 그리 내려다보며 말할 수 있겠는가.

천마니까 가능한 일.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무리 그라도 쉽지 않을 것이다.

천마신공 못지않게 남천능가경 또한 상상을 초월하는 신공이니.

"달마의 수준.... 그거면 되는 겁니까?"

"무슨 뜻이냐."

천마의 눈매가 좁혀진다. 이에 장이서는 고개를 젓고는 납작 엎드린 채 외쳤다.

"지존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러자 천마가 다시 다정히 웃으며 답했다.

"그래야지."

툭. 이어 그가 패 하나를 던졌다. 받아 살피자 화려한 불꽃의 문양이 그려진 황금빛 신패.

"이게 뭡니까...?"

"지니고 있거라."

뭔데, 이게. 장이서가 떨떠름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나 그냥 그런 흔한 신패는 결코 아니었다.

이름은 천마신패(天魔信牌).

천마를 대신하는 최강의 신패.

바꿔 말하자면 천산의 이인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한무영의 명으로 독마에게 건넸던 것이기도 하고.

'부교주란 자리는 네가 거절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준다고 가져지는 것도 아니겠지만.'

천마가 씨익 웃으며 명했다.

"내 임무를 받고 가는 자가 그 꼴로 다니게 둘 순 없지. 우사에게 일러둘 테니 채비를 갖춘 뒤 중원으로 떠나거라."

"바로 말입니까?"

"그럼 나와 있을 생각이었더냐."

미치지 않고서야 장이서가 그럴 리가 있겠는가.

단지 중원으로 가라는 말에 싱숭생숭했다.

게다가 이번에 가면 언제 돌아오게 될지도 모를 일.

장이서는 장고 끝에 입을 열었다.

"제게 이틀의 말미를 주십시오. 다녀올 곳이 있습니다."

자신이 이대로 또 사라진다면 홍란과 소오. 그리고 용태와 아이들이 다시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일. 그렇게 둘 순 없다.

"좋다. 다녀오거라."

"감사합니다!"

장이서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천마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가다 말고 돌아보며 말했다.

"참. 한 가지 더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무엇이냐."

"승자에겐 자비롭고, 패자에겐 냉혹한 곳이 본교의 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장이서가 사악한 미소를 씨익 지으며 말했다.

"포상이 있으면 처벌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순리대로 해주십시오."

하하하! 천마의 웃음소리가 길게 울렸다.

227.

#천산을 떠나다

늦은 밤.

장이서는 칠소궁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놀랍게도 우사 흑야가 동행했다. 천마가 그를 배려해 준 것.

덕분에 오는 길은 순탄했다.

"...."

둘 사이에 대화는 거의 없었다. 원래 흑야는 과묵한 편이었고, 말하는 것보단 묵묵히 상대를 관찰하는 데 더 익숙했다.

그런 그가 본 장이서는 정말 또다시 그의 의심병을 불러일으켰다.

눈빛은 죽어 있고, 짙은 어둠이 느껴졌기 때문. 마치 본교에 아무런 미련이 없는 사람처럼 말이다.

부교주 자리를 거절한 것도 실로 이상하지 않은가.

끼이이이익!

하지만 칠소궁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그게 얼마나 쓸데없는 속단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죽어 있던 눈빛은 이 순간을 위해 그래왔던 것처럼 총명해졌고, 생기가 가득해졌으니.

"밖에서 기다리지."

흑야는 희미하게 웃고는 문밖에 대기했다.

그리고 장이서가 칠소궁 안으로 걸음을 들이자.

"장 보좌님...."

누구보다 든든한 내 편, 홍란.

"흐어어엉, 형님!"

"죽는 줄 알았지 말입니다!"

이제 왈패의 티를 조금 벗어낸 용태와 메기.

"장형, 출세했다며!"

속물이지만, 그래도 벗 소오.

그리고....

"끌끌, 스승님. 이서가 왔습니다."

"왔느냐."

마의 형님과 독마 사숙까지.

그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미리 보내놓은 전서구 하나에 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그들의 기다림에 감사했고, 또 무사함에 기뻤다.

"저 왔습니다."

그리고 장이서는 식구들과 오랜 대화를 나누었다.

서로 비룡당에 붙잡혔던 이야기부터 어떻게 풀려나오게 됐는지. 또 뭘 먹었고, 어떻게 밤잠을 견뎠는지.

그렇게 평범하진 않지만, 소박할 수는 있는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물론 이번 사태의 결말도 빠져선 안 될 얘기.

"근데 대공자가 가만히 있을까요?"

홍란의 걱정 어린 물음에 장이서는 픽 웃고는 염려 놓으라는 듯 편히 답했다.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을 거다. 앞으로 일 년간은."

왜냐하면 지금쯤 광명좌사 백야가 도착했을 테니까.

*

*

*

- 천가(千家) 신월당(神月堂).

후사를 위한 작당 모의 중이던 대공자 천무기와 사공자 한. 그리고 이장로 천오산은 눈이 부릅떠졌다.

새하얀 의복의 손님이 귀신처럼 방 안에 불쑥 나타났기 때문.

"과, 광명좌사?!"

"문도 안 열렸는데 대체 어디로...."

그게 중하겠는가. 이게 중하지. 좌사가 교지(敎旨)를 길게 쫙 펼치며 말했다.

"교주님의 명을 전하러 왔다. 일소궁을 일 년간 봉문하고 근신에 처한다."

"그게 무슨...!"

"이를 어기면 참할 것이고, 도와도 참할 것이다."

"어떻게...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난 대공자다. 소교주가 될 대공자란 말이다-!"

천무기가 벌떡 일어나 고함을 질렀다.

하나 어쩌라는 건지.

본교에서 패배자는 유구무언이어야 하는 법.

"분명히 전하였습니다. 따르기 싫다면 그리하셔도 됩니다. 다만 그땐 제가 다시 찾아올 겁니다. 교지가 아니라 구도(歐刀-죄인의 목을 베는 칼)를 들고서."

좌사는 무섭게 할 말을 뱉고는 다시 귀신처럼 사라졌다.

사공자는 문득 장이서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네가 잡은 그 줄. 대세 아니고 패세(敗勢)야. 내 말 명심해.'

그것도 아주 얄밉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고 앞을 바라보자 대공자는 넋을 잃은 채 주저앉아 있었다.

"장이서... 장이서어어어어어어-!"

그리운 임의 이름만을 사무치게 부르며.

*

*

*

"하하하!"

우중충한 천가와 달리 칠소궁은 새벽녘까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래도 대공자는 그 정도로 끝난 걸 천만다행으로 알아야 할 게다. 스승님께서 미리 아셨다면...."

마의가 슬쩍 독마를 살피자 근엄하게 차를 삼키며 나직이 답했다.

"지금 알았다고 달라질 것 없다."

이해하면 너무 무서운 이야기지만, 다들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일행은 한참을 웃고 떠들었다.

그리고 하나둘씩 돌아가고, 어느새 여명이 떠오를 무렵.

마침내 장이서는 떠날 준비를 마쳤다.

"천마의 명인 것이냐."

옷깃을 여미고, 별관을 나와 뒤를 돌아보자 이젠 예전의 멋을 되찾은 독마가 서 있다.

여전히 마르긴 했으나, 병환 때문이 아니라 날카로운 그만의 멋으로 느껴진다.

"그런 게 아니고서야 밖에 광명우사까지 데리고 올 이유는 없겠지."

"알고 계셨습니까?"

"저리 큰 그림자가 대나무숲을 전부 드리우는데 모를 수가 있겠느냐."

솨아아아아!

그의 말에 장원 밖의 대나무 숲을 살폈다. 장이서 눈엔 보이지 않으나, 독마는 보였다.

해가 떠오르고 있음에도 어둡기만 한 숲의 전경이.

우사의 성명절기인 암영귀혼공 여파다.

아마 지금쯤 숲속 어딘가 대나무 위에서 기다리고 있을 터.

반대로 우사가 느끼기엔 이곳 칠소궁에 지독한 독무가 퍼져 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입신지경에 오른 괴물들의 시선.

한데 그리 잘 알면서도 서로 인사조차 안 하는 걸 보면 사이가 썩 좋진 않은 모양이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장이서의 대답에 독마는 더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두 눈엔 걱정을 담고 있음에도 그랬다. 무한한 믿음. 아마 그런 것일 거다.

"걱정하실 일 없도록 늘 조심하고 또 조심하겠습니다."

장이서는 고마운 마음에 다가가 독마의 두 손을 꼭 붙잡았다. 그러자 더 고맙고 미안해질 말을 꺼낸다.

"이곳의 아이들은 걱정하지 말거라. 나와 마의가 지켜줄 것이니."

"사숙...."

"네 사람이라면, 내 사람이기도 하다. 교주가 널 지켜주는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뿐이구나."

"...!"

장이서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에게서 죄책감이 묻어나는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

하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받거라."

그는 품에서 금빛으로 곱게 포장된 환약을 꺼내 건넸다.

"이게... 뭡니까?"

"만년설삼으로 만든 영단이다. 다룰 심법도 같이 찾아서 줘야 하겠지만, 시간이 없었구나. 필요한 순간이 온다면 주저 없이 쓰거라. 도움이 될 게다."

"아...."

장이서의 입에서 탄식이 뱉어졌다. 가슴 속에 뭉클함이 크게 일었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감사...합니다."

"가족끼리는 그런 인사 하는 거 아니다."

가족. 그렇구나. 이건 가족이구나. 아낌없이 모든 걸 줄 수 있는 존재. 말하지 않아도 내 편이 되어주는 존재.

장이서는 또 한 번 가족의 마음을 느꼈다.

'마오를 소교주로 만들고 나면... 이 또한 끝나는 것인가?'

또다시 알 수 없는 기이한 감정이 용솟음친다.

하지만 사숙 앞에서 이를 드러내고 싶진 않았다. 그저 진심 어린 미소만을 가득 피웠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힘차게 인사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사숙."

독마의 사나운 팔자 주름이 지워지고 다정한 미소가 서렸다.

*

장이서는 그렇게 이틀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밤이 되어 천마전으로 돌아왔다.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무사히 올 수 있었습니다."

함께 해준 흑야에게는 따로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부교주 위를 거절한 것에 후회는 없는 것이냐."

"전혀 없습니다."

신기한 놈. 우사는 보이지 않게 피식 웃고는 무심한 듯 몸을 돌리며 말했다.

"네가 거절했다고 끝난 것은 아니다. 천가를 비롯한 장로들은 이제 널 다르게 주시할 것이다. 수많은 시험이 따르겠지. 그러니 돌아올 때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와야 할 거다. 본교는 그런 곳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저 방 안에 지존께서 네게 내리신 것이 있으니 채비하고 알현하거라."

방을 가리키고 무심히 떠나가는 흑야를 보며 장이서는 훈훈한 웃음을 짓고는 끝까지 포권을 올렸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텅 빈 방 안 한가운데. 장식대 위에 가지런히 접힌 옷가지와 장식품이 놓여 있었다.

짙은 흑색이라 크게 호화스러움은 없었으나 옷깃엔 화려한 문양이 들어가 근사한 멋을 자아냈다.

신까지 갈아 신자 어느새 자리엔 기존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장이서가 나타났다.

아무리 옷이 날개라지만, 단순히 옷 때문만은 아니었다.

풀어진 머리칼에 총명함과 고수의 기운이 갈무리된 눈빛.

모르는 이가 보더라도 허리를 굽신거릴 자태였다. 오히려 지금까지 감춰져 있던 게 신기할 지경.

과거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환골탈태다.

그렇게 장이서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천마가 기다리는 정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중원으로 떠난다는 게 사실 아직도 잘 실감이 나진 않았다.

천산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14년.

언제고 다시 돌아갈 날을 꿈꾸었고, 수많은 모습을 상상했었다.

금의환향하는 문관. 상처뿐인 무장. 황금마차를 탄 거부. 외롭고 쓸쓸한 이방인.

한데 천마의 밀명을 받고 가는 처지라니.

하지만 가야 할 이유는 그게 아니더라도 충분했다.

'혈교. 너희가 뭘 꾸미고 있든 철저히 부숴주마.'

그러니까.

"왔느냐."

떠나는 거다.

"신 장이서. 지존의 명을 받아 청해로 가 능가경을 회수해 오겠습니다!"

달 밝은 어느 날.

장이서가 천산을 떠났다.

천마의 밀명을 받고서.

* * *

- 일소궁 흑화원.

불꽃의 문양이 그려진 일소궁의 문짝마다 새하얀 종이가 비스듬히 붙었다.

얼핏 보면 춘첩자처럼 보이지만 적힌 글귀는 입춘대길, 건양다경이 아니라 일벌봉문(一罰封門), 이벌즉참(二罰卽斬)이다.

쉽게 말해 일 년간 쥐 죽은 듯이 얌전히 지내면 봉문으로 끝나지만, 더 까불면 그 목부터 잘라버리겠다는 뜻.

실로 잔혹하고 치욕스러운 글귀가 아닐 수 없다.

물론 매일 같이 이 앞을 지나는 이공자 무한성에게는 실로 만족스러운 문장이었다.

"크하하하하! 일벌봉문 이벌즉참이라. 야, 이거 나 같으면 쪽팔려서 접시 물에 코 박고 죽겠는데. 안 그래, 조 보좌?"

"후후,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원래 내가 여기만 오면 체한 거 같았거든? 근데 이젠 너무 기분이 좋아. 이젠 안 오면 서운해. 하하하!"

담장은 낮은 건지, 그들의 목소리가 큰 건지. 자존심이 하늘에 닿은 천무기는 매일을 분노에 부르르 떨어야 했다.

심지어.

"이딴 걸 먹으라고 가져온 것이냐!"

챙그랑! 내던진 수저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차려진 상에 올라온 건 그야말로 풀떼기뿐.

그나마 그의 것이 좀 더 많았다. 그 앞에 이 열로 길게 마주 앉은 흑화위의 앞에는 그보다 반도 안 되는 양의 음식이 올라가 있었다.

곳간이 동났으니 별수 있겠는가. 주는 대로 먹어야지.

천마가 내린 엄벌은 그런 것이었다.

찬란했던 지난날이 무색하게도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벌레처럼 구차하게 숨만 쉬고 있어야 하는 것.

"장이서 이 쳐 죽일 놈! 내 반드시 네놈을 죽여 없앨 것이다. 반드시!"

대공자의 진심 어린 노호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누가 그랬던가.

죄를 뉘우치기 전까지 벌은 끝난 게 아니라고.

"커흑!"

"꺼어억...."

쿵! 식사를 하던 흑화위 무사들이 거품을 물고 상 위에 머리 박고 쓰러진다.

지금까지는 어디까지나 천마가 내린 엄벌.

"무, 무슨...!"

이제부턴 독마의 차례다.

"으아아아아아악!"

천무기의 비명이 오래. 아주 길게 울려 퍼지는 어느 날이었다.

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