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얗게 물든 공간에서 레이가 소녀를 내려보았다.
길게 찢어진 레이의 입꼬리에서 실소가 흘렀다.
"지랄 말고 준비돼 있는 물건이나 내놔."
"어라, 나 거짓말하는 거 아닌데~?"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소녀의 머리채를 움켜쥔 레이가 얼굴을 더욱 가깝게 들이댔다.
웃음기가 어렸던 표정이 급격히 굳어진다.
"난 네놈들의 세상에 애착이 없어."
콜라도 없고 스마트폰도 없고 쓸만한 오락거리도 없다.
기술 수준이 지구보다 못하거나, 부분적으로 뛰어난 기술이 있다 해도 대중화되지 않았다.
허나 그런 사회 인프라적인 측면을 집어치우더라도.
"이해도 안 되는 글자가 힘을 발하고 너 같은 정신병자가 넘쳐 나는 이 세상이... 날 억지로 끌고 와 여기까지 몰아붙인 이 빌어먹을 세상이..."
레이의 두 손이 소녀의 목을 붙잡았다.
거친 감정이 휘몰아치며 손아귀에 힘을 불어넣었다.
"증오스럽다고."
가끔.
어쩌면 자주.
손에 닿는 모든 걸 짓이겨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리곤 했다.
세상을 구원하라는 초월자의 요청 따위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부수면 부쉈지, 이 빌어먹을 세상을 위해 손가락 하나 까닥이고 싶지 않았다.
한 여자의 사랑과 헌신이 결국 레이의 마음을 움직였지만.
레이는 여전히, 몇몇 사람에게 정을 느낄지언정 이 세계를 증오하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구질구질하게 오래 살 생각 없어."
벽 끝까지 소녀를 몰아붙인 레이가 얼굴에 핏발이 설 만큼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목이 뒤틀리기 시작한 소녀와 이마를 맞댄 레이가 이를 갈아냈다.
"그러니까 준비해둔 걸 전부 내게 내놔."
"으크크크큭..."
소녀의 입가에서 거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뿌득!
레이의 손아귀가 소녀의 목을 완전히 꺾어버리는 순간.
소녀의 형상이 흐릿해지며 레이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쿵-!
새하얀 천장에 쩍쩍 금이 갔다.
벽이 통째로 무너지며, 빛으로 이루어진 새하얀 띠가 모습을 드러냈다.
흐릿해진 소녀가 두 팔을 활짝 펼쳤다.
"좋아, 네게 줄게."
반경 1 m가 넘어서는 새하얀 띠가 레이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회전하기 시작했다.
"내 영혼 조각을 정제해 창조한, 오직 공간검의 코어를 컨트롤하기 위해 조율된 서클이야."
끼기기기기긱!!
레이를 주위로 회전하던 새하얀 띠가 점점 더 압축된다.
레이는 심장이 짓눌러지는 압박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흐릿하게 번져가는 소녀가 손을 흔들었다.
"준비해둔 모든 안배를 네게 줄 테니..."
트드드득!!
레이를 가두었던 공간이 조각조각 깨져 나감과 동시에.
소녀의 마지막 목소리가 잔향처럼 울렸다.
"가렴. 가서, 네가 원하는 바를 이루렴."
*
콰앙!!
무너졌던 절벽 일부가 굉음과 함께 바스러졌다.
차게 식은 공기가 퍼져 나가며 레이가 절벽 속에서 걸어 나왔다.
뿌득뿌득
발에 얼음 조각이 밟힌다.
레이는 덤덤하게 오른손에 쥐었던 검을 납검하려다, 먼지가 걷히기 시작하자 서서히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파괴되고 내려앉은 협곡이 보인다.
사방에 핏물이 낭자했고, 여기저기 익숙한 얼굴이 쓰러져 있었다.
레이는 거칠게 뛰는 심장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로필렌."
깊게 잠긴 목소리가 레이에게서 흘러나왔다.
"사람들 수습해."
죽진 않았으나 출혈이 심한 자들이 많았다.
옷자락으로 압박하다 안 되면 마법으로 상처 부위를 얼리든 지지든 해서라도 지혈해야 했다.
로필렌이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 알겠습니다."
"..."
로필렌을 지나친 레이는 이미 뽑아냈던 검에 검기를 두르며, 왼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우웅!
심장 속의 코어가 날뛰기 시작한다.
심장 밖을 회전하던 서클이 요동치는 코어를 단단히 옥죄었다.
코어를 옥죈 반발 탓에 서클의 마나가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티디딕!
레이가 발을 디딘 지면이 얼어붙기 시작한다.
그 광경을 바라본 마우스가 헛웃음을 토했다.
"웬 미친놈이..."
두 자루의 검. 서클. 휘몰아치는 한기.
레이가 누구의 흉내를 내고 있는지는 명확했다.
제국 역사에 저런 미친놈이 한둘이었을까.
하르시아가 이루었던 경지에 닿겠다고 설쳤던 자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들은 하르시아를 모방해 심장 주변에 서클을 만들었다가, 엑스퍼트 너머의 경지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공간검처럼 아주 예외적인 검술을 제외하면.
코어와 서클의 공존은 극심한 비효율을 초래한다.
이제는 동네 꼬마도 알고 있는 사실인데, 레이는 심장에 서클을 두르고 있었다.
'그 나이에 검기를 다룰 수 있는 재능을 타고났으면서... 치기에 빠져 미래를 망쳤군.'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겉으로 보기에 썩 그럴싸하다는 건 인정해야 했다.
레이의 자세는 제국에도 형태만 남아있는 하르시아 류 공간검의 검식과 완벽히 일치했다.
그리고 하르시아 류 공간검의 검식은 당연히 제국 최고 기밀이었다.
그걸 레이는 완벽히 재현하고 있었다.
"..."
마우스의 표정이 급격히 굳었다.
동시에 레이가 양손의 검을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검이 한 바퀴 돌 때마다 검에 맺혔던 검기가 점멸한다.
검기가, 점멸한다.
마우스는 가려움을 느꼈다.
자꾸만 피부를 타고 오르는 스산함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마우스는 말도 안 되는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 억지로 숨을 크게 쉬었다.
그 찰나.
콰앙!!!
협곡 위쪽이 터져나갔다.
마법사들이 대기하던 공간이었다.
무엇에 당한 거지?
무심코 공격을 당한 위치로 고개를 돌렸던 마우스가, 곧장 허리를 비틀었다.
한참 떨어져 있던 레이가 삽시간에 코앞까지 다가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콰각!!!!!
검기와 검강의 충돌.
검기를 제아무리 압축했다 해도 검강과 맞부딪치면 박살 나기 마련인데, 레이는 한 발자국 물러나는 것으로 충격을 해소했다.
빙글
레이의 검이 다시 제자리서 한 바퀴 돈다.
검기가 점멸한다.
찰나간 갈등한 마우스는.
결국 제 직감을 따라 후방에 검을 휘둘렀다.
콰앙!!
허공을 가르고 내리꽂힌 검기를 마우스는 간발의 차로 요격할 수 있었다.
그 찰나 레이의 신형이 제자리서 증발했다.
파가각!!
레이의 검이 삽시간에 목젖을 파고들었다.
마우스가 공격을 쳐내자 레이는 검을 한 바퀴 빙글 돌리고는 양 손의 검을 교차해서 내려 벴다.
그 모든 과정이 찰나였으며, 허공은 또다시 찢어지고 있었다.
[경배하라.]
흘러 넘겼던 로필렌의 목소리가 마우스의 귓가를 울린다.
[제국 역사의 정점이 귀환하셨다.]
"너는...!!"
콰아앙!!!
"대체 누구냐?!!"
간신히 레이의 검격을 상쇄시킨 마우스가 코어를 폭주시키다시피 쥐어짰다.
사방으로 마나가 퍼져 나가며 지면이 움푹 패였다.
마우스가 익힌 분해검의 성질은 저주와 닮아 있었다.
물질 간의 결합을 약화시켜 구조를 붕괴시킨다.
찌직!
마우스의 마나에 휩쓸린 레이의 피부가 거칠게 갈라지기 시작했다.
레이가 개의치 않고 앞으로 전진하려는 찰나 검기의 폭풍이 마우스를 덮쳤다.
콰가각!!
마우스는 어렵지 않게 공격을 막아냈지만 그 사이 허큘러스가 레이의 몸을 둘러쌌다.
간신히 마나를 짜낸 세리아가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꿇었다.
마우스가 분노하며 세리아에게 검강을 쏘아내려는 순간.
사방의 공간이 갈라졌다.
마우스는 공포가 목구멍을 잠식함을 느꼈다.
사방에서 검기가 쏟아진다.
카가가가각!!
미친듯이 검을 휘둘렀지만 검기를 전부 방어할 수는 없었다.
황실이 제공한 최상위 등급의 갑주가 간신히 마우스를 지켰다.
공간검의 사용자에겐 거리도 시간도 그 무엇도 내주면 안 됐다.
이를 깨달은 마우스가 곧장 레이에게 달려들었다.
파가각!!
검격이 부딪친다.
마우스는 레이를 노려보았다.
제국의 허가를 받지 않은 공간검의 사용자다.
그 존재 자체가 반역이었다.
협상의 여지가 있는가?
아니, 이미 서로 선을 넘었다.
그러니 여기서 죽여야 했다.
더 성장하기 전에 죽일 마지막 기회였다.
츠즈즉!!
마우스가 평생 쌓아왔던 마나가 미친 듯이 흘러나왔다.
물질을 분해하는 힘이 폭주하며 서로에게 피해를 입히기 시작했다.
착용하고 있는 갑주의 방호력은 마우스가 더 뛰어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해지는 건 레이였다.
허나 그것도 마우스가 충분한 시간을 견딜 수 있을 때 이야기였다.
파가가가각!!
허공이 계속해서 갈라진다.
찬란히 빛나는 검기가 사각에서 짓쳐든다.
몇 번이나 검기에 피격당한 갑주가 버티질 못하고 깨져나간다.
우물거리던 마우스의 입가가 이윽고 히죽이기 시작했다.
제국 검술의 정점, 하르시아 류 공간검.
수백 년 전 제국의 적들이 맞닥트려야 했던 공포가 무엇이었는지.
마우스는 드디어 통감할 수 있었다.
'그러니 더더욱...'
죽여야 했다.
얼마 남지 않은 이성적인 사고가 그리 판단했다.
제국의 배신자가 공간검을 유출해 저 아이를 가르쳤다면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레이와 제국은 결단코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가 없다.
마우스는 이미 과거에 망각했던 사명감을 떠올렸다.
"으아아아아!!"
마우스가 비명에 가까운 고함과 함께 두 자루의 검을 좌우로 교차시켰다.
레이가 마우스의 공격을 막아내는 순간 허공이 찢어졌다.
떨어져 내리는 도약 검기를 마우스는 몸으로 받아냈다.
콰각!!
갑주의 방어 기능이 완전히 정지되며 마우스의 등허리를 뒤덮었던 가죽이 모조리 터져나갔다.
고통을 참기 위해 악 다문 마우스의 입가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마우스는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레이를 마주 봤다.
마우스가 레이보다 앞서는 것.
힘, 체격, 그리고 검과 갑주의 재질.
뿌드드득!!
마우스가 검을 맞댄 레이를 아래로 찍어 눌렀다.
검강이 서린 검에 몸을 들이밀면서까지 레이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온 힘을 다했다.
남은 모든 마나를 검강에 쏟아 넣는다.
레이의 검기는 마우스의 검강을 충분히 버텨낼 수 있었지만, 무기는 아니었다.
끼기긱!
휘몰아치는 검강과 검기에 의해 계속해서 혹사당했던 검 한 자루가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다.
레이의 눈동자가 자기 오른 손에 쥔 검으로 돌아갔다.
검에 본래부터 새겨져 있던 균열이 번져나가며 급격히 강도가 떨어졌다.
마우스가 괴성을 지르며 마지막 힘을 짜냈다.
"크아아!!"
까각!!
검이 부러진다.
힘이 가득 들어갔던 마우스의 일격이 레이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마우스는 레이를 양단하리라 자신하진 못했지만, 적어도 치명상은 입힐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 찰나.
허공이 갈라지며 빛이 흘러나왔다.
마우스는 그 정체가 도약 검기인줄 알았으나, 이내 예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파스스!
갈라진 공간 사이로 아공간에 숨어 있던 은백색의 검 한 자루가 모습을 드러낸다.
검신에는 괴이한 형태의 문자로 문장이 하나 새겨져 있었다.
마우스는 그 문장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문장의 뜻은 알고 있었다.
"제국에게..."
영광을.
초대 황제로부터 전해내려 왔으며, 하르시아가 사용하다 유실됐다는 제국의 신검, '모로스'.
휘몰아치는 섬광이 마우스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재회 (2)
77화
제국의 신검, 모로스.
용언이 깃들었다 전해지는 이 병기는 주인이 전달한 에너지를 종류를 가리지 않고 증폭시킨다.
촤악!!
레이의 팔이 채찍처럼 휘둘러진다.
동시에 모로스를 타고 흐른 검기가 불꽃처럼 거칠게 타올랐다.
카가각!!
서로의 검이 격돌하는 순간.
검강이 흐트러진 마우스의 검이 산산이 조각났다.
마우스가 그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지면이 찰흙처럼 뭉개지며 마우스의 몸을 받아냈다.
콰앙!!
"크헉...!"
절벽까지 밀려나서야 움직임을 멈춘 마우스가 각혈했다.
마우스의 상체는 부서진 검 조각에 의해 온통 짓이겨져 있었다.
당장 상처를 틀어막고 포션과 신성력을 때려부어도 살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중상이었다.
전투가 끝났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세리아가 레이에게 다가와 포션을 내밀었다.
레이가 사양하지 않고 포션을 받았다.
"감사해요."
여전히 오버드라이브는 성장이 끝나지 않은 아이의 몸으로 사용하기엔 부하가 너무 컸다.
뒤늦게 찾아오는 강렬한 뻐근함 탓에 레이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레이가 몸에다 대충 포션을 찍어 바르며 세리아를 마주봤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세리아가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짧게 혀를 찬 레이가 절반 정도 남은 포션을 찰랑이며 물었다.
"고모, 혹시 포션이 충분히 남아있나요?"
"응."
세리아는 미궁에서의 경험 탓에 포션 같은 소모품을 가득 챙겨다니는 편이었다.
평소에는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지만 이런 때에 큰 도움이 됐다.
"포션 좀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눠주실 수 있을까요?"
"알겠어."
고개를 끄덕인 세리아가 로필렌이 부상자를 끌어모은 곳으로 몸을 돌렸다.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뒷모습이 꽤 위태로워 보였다.
지긋이 입술을 씹은 레이가 허공에 다시 모로스를 수납했다.
짜증어린 시선이 널브러져 있는 마우스를 향한다.
"아프텔."
츠즉!
아프텔이 펼친 차단막이 레이와 마우스를 둘러쌌다.
마우스가 피가 줄줄 새는 가슴을 움켜쥔 채 입을 열었다.
"넌... 대체 누구야?"
"환생한 하르시아다, 쌥새끼야."
"하하. 날 저 멍청한 마법쟁이랑 똑같이 취급하는군."
아무리 고강한 검술을 익혔다고 해도 세월이 채워주는 노련함까지 모방할 수는 없다.
"네 검은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날카롭고 대담했지만... 아직은 어설펐어."
레이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듀에이트 쯤 되면 상대의 검술 수준이 어떤지는 검을 몇 번 맞대는 것만으로 쉽사리 파악할 수 있다.
레이는 농담 삼아 제국을 상대로 사기를 치네 마네 떠들었다만.
정말 제국을 속여 넘기고자 한다면 검술을 최소 수십 년은 더 수련해야 했다.
마우스는 점점 더 가빠져 오는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뭐, 그렇다 해도... 네가 그분의 적통한 계승자임은 분명하겠지."
레이는 하르시아의 모든 것을 온전히 전수받았다.
레이는 공간검의 계승자이자 모로스의 주인이었다.
허나 제국은 레이를 인정하지 않을 터다.
제국에게 있어 레이는 그저 도둑놈일 뿐이었다.
제국의 신검을 황가의 피가 흐르지 않은 자가 쥔다는 것은 그 자체로 불경이었다.
"너도... 앞으로 고생 좀 하겠어."
"잡담은 그만하지. 우리를 습격한 이유나 말해."
"하..."
마우스는 잠시 세타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혹시라도 우리가 역으로 사냥당하는 신세가 되면, 어떻게 해야 돼?
전부 황태자가 시킨 일이라고 외치고 자결해.
"큭큭큭..."
마우스가 실소와 함께 핏물을 게워냈다.
"대단한 이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 그저... 너희는 재수가 없었을 뿐이야."
윗분들의 정쟁에 휘말려 죄 없이 목이 떨어진 아랫것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레이의 일행은 그저 재수 없게 천재지변을 맞닥트렸을 뿐이다.
마우스가 핏물에 가득 절여진 가슴을 쓰다듬었다.
"나는 어제까진 운이 좋았어."
그리고 오늘, 운이 다했다.
그게 마우스가 이 자리에서 죽는 이유였다.
잠시 눈을 찌푸렸던 마우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완전히... 의외의 결과이긴 하나... 그림은 나쁘지 않군."
황태자가 독단으로 특임대를 움직인 탓에 로얄가드 급 전력 둘이 희생됐다.
귀족들의 반발만 살 쓸모도 없는 작전을 펼치다가 말이다.
황제가 황태자를 쳐낼 명분으로 충분한 사건이었다.
"쯧."
눈이 반쯤 풀린 마우스가 투덜댔다.
"알슈테인 가에만 좋은 일을 해주었어..."
설마 레이가 황실 특임대 최고 전력 중 하나인 마우스를 제 손으로 죽였다고 떳떳이 밝히겠는가.
레이가 정체와 실력을 숨긴다면 결국 그 위업은 세리아에게 온전히 돌아간다.
로얄가드와 황실 특임대 흑색 요원이면 제국이 키워낸 최정예 전력이다.
기사들 중에서 이들과 정면에서 견줄 자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헌데 세리아가 황실이 보낸 그래듀에이트 둘을 동시에 격살했다고 알려진다면.
세리아의 위명이 하늘을 찌름과 동시에 황실의 권위가 땅으로 고꾸라질 터다.
그에 더해 알슈테인 가는 황실이 세리아를 명분도 없이 공격했다며 막대한 보상을 요구할 게 뻔했다.
"황실의 출혈이... 꽤 크겠는데."
황태자야 완벽히 쳐낼 수 있겠다만 황제도 손해가 꽤 막심할 터다.
곤란해할 황제를 떠올린 마우스의 입꼬리가 빙긋 올라갔다.
"오늘 일로... 황태자가 자리에서 내려올 거야."
"..."
"만약 오늘 일을 침묵에 붙이고 빠르게 황태자 측과 접선하면... 그래, 썩 괜찮은 기회를 잡을 수도 있겠다만..."
그건 폭풍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어가는 짓이다.
어지간한 뒷배와 정치적 감각이 없이는 폭풍에 휩쓸리다 머리가 잘릴 게 분명했다.
"도박을 할 게 아니라면 발을 빼는 걸 추천하지. 특히 너는... 숨길 게 많아 보이는데 말이야."
"발을 빼고 싶다고 뺄 수 있나?"
"그냥... 여길 벗어나서 오늘 일을 여기저기 크게 떠들고 다녀. 그럼 소식을 들은 높으신 분들이 서로를 알아서 물고 뜯으실 테니."
한동안 폭풍이 불어 닥칠 터다.
그 사이에 끼여 우왕좌왕하다 패가망신하는 자들의 숫자도 꽤 되겠지.
"하지만 네가 모시는 아가씨는... 제국 변방 가문의 사람이잖아. 고개만 잘 숙이고 있으면 중앙 정부에서 몰아치는 피바람도 손쉽게 지나칠 수 있겠지."
필립스 백작은 중앙 귀족들과 연줄을 거의 만들어 놓지 않았다.
그렇기에 특정 파벌에 속해있지도 않았고, 누군가의 이목을 끌 힘도 없었다.
오시리스 가라면 조금 이야기가 다르지만, 적어도 필립스 가가 황실의 권력 구도 변동 탓에 돌을 맞을 확률은 극히 낮았다.
"알슈테인 가는?"
"걱정할 곳을 걱정해. 이번 일 덕택에 알슈테인 가는 황실을 아주 잔뜩 뜯어먹을 수 있을 테니까."
"그건 그렇겠군."
레이는 손가락을 툭툭 튕겼다.
황실 권력 구조에 지각 변동이 인다.
어쭙잖게 참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레이가 이 세계의 미래를 알고 있다 해도 굉장히 조심스레 접근해야 하는 판이었다.
허나 레이는 황제와 황태자, 그리고 다른 황자들 간의 불화가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마우스의 말마따나 눈 감고 도박할 생각이 아니면 한 걸음 떨어져 상황이 진정되길 기다리는 게 현명했다.
레이가 생각을 정리해가는 사이.
마우스가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하나 더... 충고하지."
"...?"
"하르시아 류 공간검은 실전됐지만... 그 형태는 아직 제국에 남아있어. 남에게 함부로 그 검식을 드러냈다간 골치 아파질 거야."
"참고하도록 하지."
도움이 되는 충고였다.
수백 년 전 실전된 검술이라기에, 레이는 안이하게 하르시아의 검식을 사용하곤 했다.
허나 제국이 공간검을 전수하는데 실패했다고 해도 그 검식까지 소실했을 가능성은 적었다.
'듣고 보니 아찔하군.'
다른 검식을 하나 더 익히거나 두 번째 검을 뽑는 걸 최대한 지양해야 할 것 같았다.
하르시아 류 공간검이 지닌 검식의 특수함은 대개 두 번째 검을 뽑았을 때 훨씬 명확해졌다.
"크윽...!"
까각!
할 말을 모두 마친 마우스가 검집을 지팡이 삼아 일어나려 했다.
허나 지면을 잔뜩 적신 출혈 탓인지 도저히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앞으로 철퍽 쓰러진 마우스가 얼굴에 흙을 가득 묻힌 채 킥킥거렸다.
"선 채로 죽었다는 영웅 좀 따라 해 보려 했는데 잘 안 되네. 세타가 봤으면 비웃었겠어."
벌레처럼 꾸물거린 마우스가 간신히 몸을 뒤집었다.
애국심과 사명감을 지니고 제국의 어둠이 되기로 맹세했다.
허나 오랜 헌신 끝에 마음에 품었던 각오는 먼지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언젠가부터 마우스는 사람을 죽이는데 아무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죽음이 자글자글한 노인도 이제 막 태어난 갓난아기도 명령에 따라 기계적으로 목을 베었다.
그 깊고깊은 업보의 끝이 바로 이곳이었다.
"이 정도면... 호상이군."
나는 좀 더 고통스럽고 끔찍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게 아닌가, 그런 후회를 담아 마우스는 하늘로 손을 뻗었다.
환히 빛나는 태양이 마우스를 맞이해주고 있었다.
마우스가 마지막 힘을 짜내 중얼거렸다.
"제국에게..."
영광을.
툭
마우스의 눈동자가 생기를 잃었다.
마우스가 누워있던 지면은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프텔이 펼친 차단막이 해제됐다.
냉담하게 등을 돌린 레이는 일행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가까워지는 레이를 보고 로필렌이 무릎을 꿇고 오열했다.
"으흑! 어흐흐크흐흑!"
레이가 곧장 눈살을 찌푸렸다.
"표정 관리해."
"네, 넵!"
"말투 고치고."
"..."
조용해진 로필렌을 지나친 레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일행들 중 가장 큰 부상을 입은 자는 아벤시오였는데, 검강을 정면에서 막아낸 탓인지 팔이 하나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
물론 남은 팔다리도 멀쩡한 건 아니었다.
기사의 강건한 육체와 로필렌의 무식한 지혈, 그리고 세리아가 때려 부은 포션 덕분에 간신히 명줄을 붙들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플로리아가 정신을 차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플로리아 님."
"네? 넵!"
기합이 바짝 든 플로리아를 보며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 올린 레이가 말을 이었다.
"알레시아 님, 아벤시오, 고모. 이 세 사람 플랑 위에 태우고 도시로 돌아가요."
말도 죽고 마차도 박살났다.
현재 가장 빠른 이동 수단이 플로리아와 계약한 중급 바람 정령인 플랑이었다.
"도시로 가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지금 습격을 사방에 알려요. 그 뒤에 이쪽으로 사람 보내고요."
습격에 실패했음을 알아챈 주동자들이, 혹은 이 명분 없는 습격이 정치적 공작이었음을 알아챈 무리들이 어떻게 움직일지 이 자리에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때문에 더더욱 빠르게 공론화를 해야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세리아가 레이를 잡아끌었다.
"같이 가. 레이."
"괜찮아요, 고모. 여기 있는 사람들 지켜야죠. 그리고... 만약 후속 부대가 있으면 명줄을 끊어 놔야 하고요."
사람도 사람이지만, 레이는 협곡 사이에 널린 습격의 증거가 인멸 당하게 방치할 생각은 없었다.
서클과 아프텔의 존재 덕분에 원거리 탐색 또한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되었다.
레이 혼자 남아도 이 공간을 지키기엔 충분했다.
레이의 강경한 태도를 보고 세리아는 결국 팔을 놓아주었다.
플로리아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고개를 숙였다.
"빠,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쟤는 또 왜 저러냐.
혀를 끌끌 찬 레이가 멀어지는 바람 정령을 지켜봤다.
"후우..."
협곡 사이에 휘몰아치는 바람을 맞으며 레이가 한숨을 토했다.
갑자기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당혹스럽기는 레이도 매한가지였다.
주변을 살피던 레이가 문득 부서진 마차에 시선을 주었다.
애들 선물이 저기에 다 담겨 있었다.
"아, 시발."
저기 있는 게 얼마짜리인데.
순간 정신이 번쩍인 레이가 황급히 마차로 달려가 짐칸을 헤집었다.
일단 천으로 둘둘 싸서 목제 상자에 담아 짐칸 밑에 따로 분리해 두었던 목걸이와 제플린의 검은 무사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죄다 작살났거나 지면을 굴러 엉망진창이었다.
"환장하겠네. 남은 돈 탈탈 털어서 산건데."
이 사태를 어찌할까 고민하던 레이가 쓰러진 마우스를 향해 몸을 돌렸다.
"어디... 백금화라도 하나 나오면..."
무릎을 꿇고 앉은 레이가 주섬주섬 마우스의 품을 뒤지기 시작했다.
재회 (3)
78화
글리비아스는 규모 있는 도시인 만큼 행정을 담당하는 청사를 따로 두고 있었다.
지역 영주의 가신, 상위 계층으로 이루어진 행정관, 황제가 파견한 지방관 등이 오늘도 청사에서 해결해야 할 사안을 두고 논의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다들 서로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열심히 목소리를 높였으나, 갑작스레 들려온 굉음에 전부 묻혀버렸다.
콰앙!!
청사의 정문이 통째로 박살 났다.
위병들이 우르르 정문으로 달려갔지만 침입자가 팔을 한 번 흔들자 단번에 나가떨어졌다.
결국 청사에 머물던 기사가 직접 검을 뽑았다.
모두의 얼굴에 안도가 내려앉았으나, 극히 찰나였다.
뻐억!
기사가 병사와 마찬가지로 나가떨어졌다.
정문을 쑥대밭으로 만든 침입자가 건물 안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던 관리들에게 손을 까닥였다.
그 의미가 명백했기에, 가장 짬 떨어지는 행정관이 밖으로 나와 덜덜 떨며 물었다.
"누구시기에 이리 행패를 부리는 겁니까?"
"세리아 알슈테인."
"세리아 알슈... 네?!"
익숙한 상대의 이름에 행정관이 눈을 크게 뜨고 세리아를 살폈다.
전쟁터에서 뒹굴기라도 한 것처럼 몰골이 처참했다.
그제야 행정관은 세리아가 무식하게 정문을 뚫고 들어온 이유를 약간이나마 이해했다.
어딘가에서 전투가 벌어졌던 거다.
"대, 대체 무슨 일입니까...?"
"연락 넣어. 알슈테인 가에. 지금 당장."
세리아의 안광이 시퍼렇게 번쩍였다.
알슈테인 가는 물론 근방에 있는 모든 지역에 습격 사실을 전해야 했다.
브릿지, 역마, 아티펙트 등.
세리아는 무력시위를 통해 글리비아스가 가용할 수 있는 모든 통신 수단을 동원시켰다.
*
갑작스러운 귀족 습격 사건이 발생한 지 며칠이 지났다.
알슈테인 가가 가장 먼저 소식을 전해 듣고 움직였다. 세리아가 직접 공격받았기에 반응은 꽤 격렬했다.
다른 귀족들 또한 하나둘 소식을 전해 듣고 이번 사건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했다.
당장도 시끄러웠고, 앞으로 더욱 시끄러워질 예정이었다.
레이가 로필렌이 공손히 따라준 차를 마시며 중얼거렸다.
"내 할 일은 다 한 거 같고..."
레이는 그제까지 습격받았던 협곡을 배회하며 혹여 수작을 부리는 자가 없는지 살폈다.
현재는 습격지 주변을 글리비아스, 알슈테인 가, 그리고 근방의 몇몇 영주가 지원한 병력들이 모여 철저히 통제 중이었다.
앞으로 며칠 안에 습격자들의 신원을 밝혀내기 위한 조사가 들어갈 것이다.
"황태자라..."
황태자가 이번 일로 직위를 박탈당할 것이라고 습격자는 말했다.
1황자가 황태자 직위를 박탈당하면 그다음 순서는 2황자였다.
로필렌은 2황자를 유능하나 잔혹하다고 평했다.
"뭐, 내 알 바는 아니지."
저들끼리 치고받는 동안 얌전히 고개 숙이고 있으면 될 따름이었다.
레이는 이번 습격을 주도했다고 여겨지는 황실에 별 감정이 없었다.
습격자의 말을 믿는다면, 황실 권력 구조가 변하는 시기에 재수 없이 휘말려 피해를 봤다는 소리인데... 뭐,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가까운 사람이 크게 상했다면 이야기가 좀 달랐겠지만.
필립스 백작가 측 사람들은 다들 무사한 편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레이가 로필렌과 함께 글리비아스 중심에 위치한 치료소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치료소에 도착하자 신관과 치료사가 가볍게 예의를 표했다.
세리아를 제외하곤, 이번 습격에서 부상당한 인원들이 전부 이곳에 있었다.
레이는 가장 먼저 아벤시오를 찾아갔다.
며칠 동안 혼수상태였던 아벤시오는 어제 정신을 차렸다.
어찌저찌 목숨을 붙여 놓긴 했지만, 빈말로도 상태가 좋지는 못했다.
"살아는 계시는군요."
"끄응..."
앓는 소리를 낸 아벤시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아가씨들은 무사하신가?"
"그 질문만 세 번째군요. 두 분 다 무사하십니다."
레이가 품에서 포션을 꺼내 뚜껑을 땄다.
"고모께 얻은 겁나 비싼 포션이니 뱉지 말고 드세요."
"음..."
누워서 포션을 받아마신 아벤시오가 불편한 숨을 몰아쉬었다.
"거기서 어떻게 살아 나왔는지 모르겠군..."
"제 대단하신 고모님 덕분 아니겠습니까."
그리 말하며 레이는 아벤시오를 위아래로 살폈다.
팔은 통째로 날아갔고 다리도 박살 나서 오랜 재활이 필요해 보였다.
신성력의 존재 덕분에 권력과 금전만 있으면 결손된 부위도 복구는 가능했으나, 그 수준의 치료는 어지간한 고위 귀족도 받기 힘들었다.
이러나 저러나 앞으로 제대로 된 기사 노릇은 무리였다.
"한동안 힘드시겠습니다."
"...받아들여야지. 기사로서 의무를 다하다 입은 부상이니."
"혹시 가문에서 박대받으시면 필립스 백작가로 오십시오. 은인으로 모시겠습니다."
"종자 놈 주제에 뭐라도 되는 것처럼 얘기하는구나."
피식 웃은 아벤시오가 다시 고개를 뉘었다.
레이는 아벤시오의 휴식을 방해 않고 다음 병실로 향했다.
알레시아가 펜리르를 타고 제자리서 빙글빙글 돌다가 깜짝 놀라 침대로 몸을 던졌다.
레이가 동행했던 치료사를 향해 떫은 얼굴로 물었다.
"쟤는... 아니, 알레시아 님은 왜 저리 멀쩡해요?"
"상처가 얕기도 했고, 두꺼운 피하지방이 충격을 흡수해주어 장기가 대부분 무사했습니다. 때문에 회복이 빠르신 것 같습니다."
"그거 지금 살쪄서 살았다는 소리죠?"
대화를 듣던 알레시아가 레이를 보며 히죽였다.
내가 이럴 줄 알고 살을 찌웠다는, 그런 되도 않는 의미가 담긴 웃음에 레이가 주먹을 들어 올렸다.
알레시아가 눈치 빠르게 이불을 파고들었다.
'뭐, 무사하다니 됐다.'
작게 코웃음 친 레이가 병실을 돌며 인사를 전한 후 마지막으로 플로리아를 찾았다.
병실에 홀로 들어온 레이를 보고 플로리아가 곧장 몸을 일으켰다.
"아, 안녕하세요!"
기강이 아주 바짝 잡혀있었다.
평소에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내비쳤던 여유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었다.
레이는 내심 머리가 아팠다.
'볼 건 다 봤군.'
협곡에서의 전투를 지켜본 플로리아가 정확히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레이는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플로리아는 계약 각인에 묶여 있기도 했으니 남에서 함부로 입을 놀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표정 푸세요, 플로리아 님. 누가 잡아먹는답니까."
"으, 응. 그, 그럴까?"
눈치껏 말투를 고친 플로리아가 어렵사리 인사했다.
"그, 고, 고마워. 구해줘서. 또 은혜를 입었네."
"예, 뭐. 근데 오시리스 백작가에서 새로 들어온 소식 있나요?"
"아버지가 사람을 보내준다고 하셨는데, 아직 자세히는 모르겠어."
"그렇군요."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이 개입한 정황이 드러난 후 오시리스 백작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는 모르겠다만, 레이가 참견할 부분은 아니었다.
"몸조리 잘하고 계세요."
잘게 떨리는 플로리아의 머리를 툭툭 두드려준 레이가 치료소를 나왔다.
로필렌이 곧장 뒤에 따라붙었다.
"숙소로 바로 돌아갈 거야?"
"아니요. 애들 선물할 물건 좀 다시 사려고요."
레이가 주머니를 짤랑였다.
협곡에서 습격자들의 품을 모조리 뒤진 덕분에 백금화를 꽤 많이 건질 수 있었다.
이름만 금화지 불순물이 대부분인 제국 금화와 다르게, 백금화는 확실히 가치가 높은 화폐였다.
레이는 얼마 전 샀던 필기구를 재차 구매한 후 로필렌에게 떠넘겼다.
로필렌은 무거운 짐 탓에 뒤뚱거리며 걸으면서도 흡족한 얼굴로 레이의 뒤를 따랐다.
다음은 대장간이었다.
대장장이는 검을 몇 자루나 부러뜨린 레이의 얼굴을 기억했는지, 레이를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레이는 개의치 않고 전시된 검을 들어 퉁퉁 튕겼다.
'이제야 좀 공간검을 공간검답게 다룰 수 있게 되긴 했는데...'
완벽하진 않지만, 도약 검기가 떨어져 내릴 시간과 위치를 자의적으로 조정할 수 있게 되었다.
리실로테 레코드 안에서 얻은 깨달음과 심장에 생성된 서클 덕분이었다.
서클을 얻음으로써 코어에도 더 많은 마나를 축적할 수 있게 됐다.
허나 이건 양날의 검에 가까웠다.
코어의 마나가 증가할수록 서클의 압박이 거세지고, 이는 심장에 강한 부하가 걸림을 뜻했다.
'얼마나 버틸는지.'
초월자가 찝어준 육체이니만큼 허무하게 훅 가진 않을 테지만 장수하기 그른 건 틀림 없었다.
레이는 괜히 세리아가 준 고가의 포션을 한 병 더 입에 털어놓고는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마나가 회전하기 시작하자 검신이 뚝 부러진다.
대장장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벗겨 먹으려 안 할 테니 검 좀 그만 부러뜨리쇼."
"세 자루."
레이가 백금화가 담긴 주머니를 넘겼다.
동전을 확인한 대장장이가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레이는 대장장이가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코어를 관조했다.
심장에 걸리는 부하를 제외하고도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코어의 성능을 완전히 활용하려면 서클의 도움이 있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코어와 반발한 서클의 마나가 사방에 휘몰아쳤다.
이게 바로 하르시아가 항상 한기를 발산하고 다녔던 이유다.
'내가 다음 경지를 개척해도, 검강을 발현하려면 서클의 보조가 필수일 테고...'
검강을 발현하는 순간 주변이 얼어붙는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내보이기엔 아무래도 제한이 있었다.
한기를 끌고 다니는 그래듀에이트가 누구를 연상시킬지는 뻔했으니까.
'성능은 확실한데 써먹기가 영 쉽지 않네.'
이럴거면 아예 황자로 환생시키든가.
툴툴댄 레이가 대장장이에게서 검을 챙겨 몸을 돌렸다.
'일단 백작령으로 돌아가자.'
얼마 안 가 필립스 백작이 파견한 호위 병력이 이곳에 도착할 터다.
병력이 도착하는 대로, 레이는 알레시아와 백작령으로 귀환할 생각이었다.
조사에 협조하라니 뭐니 붙잡는 이들은 많겠지만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폭풍이 불어닥친다.
미래를 훤히 꿰고 있지 않은 이상 폭풍에 휩쓸리지 않게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게 제일이었다.
'고모가 좀 걱정되지만...'
세리아의 신분과 입장상 이번 사태에 발을 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습격을 당한 피해자이며 알슈테인 가가 뒤를 바쳐주고 있으니 잘 대처하리라 믿었다.
잠시 하늘을 바라본 레이가 피식 웃었다.
"그립다...라."
지금 느끼는 감정이 썩 달갑지는 않았다.
이 빌어먹을 세상에 정을 붙여가는 것 같아 껄끄럽기까지 했다.
그래도.
"엄마랑 애들 보고 싶네."
슬슬 집이 그리웠다.
*
지미는 레이가 마탑으로 떠나는 날 매튜와 함께 축배를 들었다.
그토록 골머리를 썩혔던 놈이 떠났으니 한동안은 행복하게 슬로우 라이프를 만끽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허나 필립스 영지엔 레이가 떠넘겨 놓은 아이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레이가 사라진 탓에 보육원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한동안은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지미와 매튜가 발로 뛴 덕분에 며칠 안에 보육원은 안정을 되찾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영 우울감을 벗어나지 못하고 축 처져 있는 아이가 몇 있었다.
카렌이 특히나 심각했는데, 레이가 떠난 후부터 햇빛을 못 본 꽃처럼 생기를 잃고 쭈그러들더니 계속해서 비실거렸다.
밥을 먹다가도 훌쩍이고 잠을 자다가도 훌쩍인다.
계속해서 말라가는 카렌을 보며 지미는 불안에 떨었다.
이대로면 몇 달 뒤 복귀한 레이에게 애들 관리를 어떻게 했냐며 한 소리 들을 게 뻔했다.
'제발 밥 좀 똑바로 먹어!!!'
지미는 비어가는 머리카락을 붙잡으며 속으로 외쳤다.
그나마 레이가 돌아올 날짜가 다가오자 단단히 굳었던 카렌의 표정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생글생글 웃는 날이 많아진 카렌은 목이 빠져라 레이가 돌아오는 날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레이가 돌아온다 약속했던 당일이 되었을 때.
카렌은 나름 열심히 차려입고서 레이를 마중 나갔다.
허나 하루 종일을 기다려도 레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필립스 백작에게 불려 간 지미는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 들었다.
"습격...을 당해요?"
"나도 정확한 상황은 파악하지 못했네."
백작이 답답해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레이가 작성해 보낸 편지의 내용에 따르면 일행이 습격을 당했는데 다들 목숨엔 지장이 없다고 한다.
이걸 나쁘게 해석하면 간신히 목숨만 붙어있다는 소리도 됐다.
백작은 당장에라도 습격이 벌어졌다는 곳으로 기사들을 대동하고 달려가고 싶었지만.
레이는 편지에 강한 어조로 경고하고 있었다. 경거망동하지 마시라고.
레이가 대놓고 무례를 범할 때는 항상 이유가 있었다.
백작은 상황을 조사할 사람과 추가 호위를 파견하는 등 최소한의 조치만 취하고 자리를 지키기로 했다.
"복귀 일정이 보름 정도 늦어질 것 같다고 하네."
"그... 알겠습니다."
지미 또한 궁금한 게 많았지만 백작의 표정이 워낙 안 좋아 보여 말을 아꼈다.
그래도 보름 정도야 크게 긴 시간은 아니었다. 지미는 그리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레이의 복귀가 늦춰진 후.
카렌은, 레이가 황실 마탑으로 출발했던 영주성 앞에 앉아 이틀이 넘도록 꼼짝을 않고 있었다.
소식을 들은 지미가 기겁하며 영주성으로 달려갔다.
"카렌!"
"...?"
수척한 얼굴로 마차가 떠났던 길을 바라보고 있던 카렌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다가오는 지미를 확인한 카렌은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흐윽! 흑! 레이가 안 와요... 흐윽! 우리 같이 레이 데리러 가요... 흐에에엥..."
"그 녀석 금방 돌아온다니까 조금만 기다려보자. 마차에 문제가 생겨서 잠깐 늦어진다고 하더라."
지미가 카렌을 끌어안아 달래주었다.
지미의 품에서 훌쩍이던 카렌이 뚝뚝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언제 오는데요?"
지미는 최대한 조심한답시고 어린 애들 달래주는 용어를 카렌에게 써먹었다.
"열 밤만 자고 나면 올 거야."
"흐윽...! 흐아아아아앙!!!"
카렌이 오열하기 시작했다.
지미는 한 발 늦게 자기가 단어 선택을 대단히 잘못했음을 알아챘다.
열 밤만 자고 나면 돌아오겠다는 부모 말을 믿고 집에서 배를 곯았던 고아들이 얼마나 많던가.
보육원 아이들에게 있어 열 밤 자고 돌아온다는 건 평생 볼 일 없다는 소리와 마찬가지였다.
"흐윽!! 레이 안 돌아온데요? 그런 거예요?"
"카, 카렌...! 그런 뜻이 아니고...!"
카렌을 어르고 달래며 지미는 머리가 지끈거림을 느꼈다.
보육원 아이들 대다수가 버림받은 경험이 있는 아이들이다.
또다시 버려질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슴 한편에 안고 살고 있었다.
그 탓일까.
레이가 약속했던 복귀 날짜에 나타나지 않자, 그동안 멀쩡했던 아이들도 불안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빨리 좀 돌아와라, 이 새끼야!!'
지미는 결국 그토록 눈앞에서 사라지길 바랐던 레이를 다시 찾아야 했다.
재회 (4)
79화
협곡에서 부상을 입었던 젠킨슨이 거동이 가능할 만큼 회복됐을 때쯤.
필립스 백작이 파견한 디디에가 병사들과 함께 글리비아스에 도착했다.
디디에는 어수선한 도시의 분위기를 느끼고 눈치껏 말을 아꼈다.
필립스 백작가 사람들은 디디에가 도착하자마자 도시를 떠나기 위해 움직였다.
도시에서 머물며 습격 사건을 조사하는데 협조하라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전부 무시했다.
많은 이들이, 필립스 백작가가 겁이 많고 힘이 없어 습격을 받고도 꼬리를 말고 도망친다고 떠들었다.
모욕적인 언사였으나 그쪽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디디에가 도착한 후 이틀 만에 필립스 백작가 사람들은 글리비아스를 떠났다.
글리비아스에서 벗어나기 전에 레이는 세리아와 작별 인사를 나눴다.
"고모, 몸조심 하세요."
"응. 레이도. 몸조심해."
"분위기 이상하다 싶으면 조카 보겠다는 핑계 대고 필립스 백작령으로 오세요. 거기서 일 잠잠해질 때까지 시간 좀 보내다 돌아가시면 되잖아요."
"알았어. 레이, 꼭 챙겨 먹어? 라푸마."
"흐흐. 그건 무조건 먹어야죠."
서클도 생겼으니 라푸마 같은 마나가 함유된 약재 또한 섭취할 수 있게 되었다.
레이는 두 번째 삶에서 수명 따윈 신경 안 썼으나 윗공기는 한 번 맡아보고 싶었다.
세리아가 레이의 볼에 연거푸 입을 맞춘 후 레이를 놓아주었다.
오시리스 가 사람들과도 간단히 작별 인사를 마친 레이가 마차에 올라탔다.
알슈테인 가에서 좋은 마차를 빌려준 덕분에 여행길이 한결 편해졌다.
다행히, 필립스 백작가로 귀환하는 동안 더 이상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이동한지 며칠이 지나 익숙한 풍경이 보이기 시작하자 다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백작령에 거의 도달했을 때쯤 마차에서 내린 알레시아가 펜리르 위에 올라타고 싱글벙글 웃었다.
정령 자랑할 생각에 벌써부터 신이 난 듯했다.
레이 또한 펜리르를 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모너클인 알레시아는 중급 정령 두셋으로 셀로미어 용량이 가득 찼다.
때문에 굳이 더 정령을 족칠 필요가 없었지만, 백작령엔 루나가 있었다.
루나의 마법적 재능이라면 셀로미어 용량 또한 광활할 게 분명했다.
'고위 정령 하나만 뽑아보자.'
정령을 족쳐서 친구를 불러오게 하고, 불려 온 친구를 또 족쳐서 친구의 친구를 불러오게 하다 보면.
언젠가는 한 번쯤 고위 정령도 낚아낼 수 있을 것이다.
루나가 고위 정령과 계약만 맺을 수 있다면 웬만해선 어디 가서 다칠까 봐 걱정 안 해도 됐다.
정령 가챠 돌릴 생각에 신이 난 레이의 입꼬리가 쭉 찢어지자 펜리르는 괜히 불안감에 빠져 몸을 떨었다.
슬슬 시야 끝에 영주성이 보인다.
모두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데, 저 멀리서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묶은 소녀가 뜀박질로 다가왔다.
레이가 곧장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원래도 붉었던 눈동자를 더더욱 붉게 물들인 카렌이, 확 달려들어 레이를 끌어안았다.
콰악!
"안 오는 줄 알았잖흐에에엥..."
카렌이 팔다리로 레이를 바짝 조인 채 울음을 터뜨렸다.
앞이 전혀 안 보였던 레이가 카렌을 조금씩 돌려 등으로 옮겼다.
간신히 시야를 확보한 레이가 어깨에 뚝뚝 떨어지는 카렌의 눈물을 느끼며 혀를 찼다.
"내가 안 오긴 왜 안 와. 여기가 내 집인데. 당연히 돌아와야지."
"흐아앙...! 흐윽!"
카렌이 훌쩍이며 레이의 귀를 우물우물 씹어대기 시작했다.
옛날 생각이 난 레이가 피식거리며 카렌을 달래다가,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 마탑으로 떠나기 전보다 카렌의 몸무게가 가벼워져 있었다.
살이 포동포동 오른 알레시아만큼은 아니더라도 성장기이니만큼 더 묵직해졌어야 정상이다.
마침 카렌을 쫓아 달려오는 지미가 레이의 시야에 걸렸다.
레이는 애들 관리를 어떻게 한 거냐고 한소리 하려다가, 지미의 몰골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마탑으로 떠나기 전보다 한참 수척해진 지미가 퀭한 얼굴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망할놈, 드디어 돌아왔구나."
"아니... 안색이 왜 그래요? 그동안 잘 못 지냈어요? 나 없다고 엄청 좋아했잖아요?"
"레이, 잘 들어."
레이의 어깨를 붙잡은 지미가 피로가 가득한 목소리로 당부했다.
"앞으로 몇 달 이상 나가 있을 거면, 카렌도 무조건 데려가. 난 절대 못 돌봐준다."
"어, 음... 고려해 볼게요."
레이가 질겅질겅 씹히는 귀를 느끼며 고개를 끄덕이는 시늉을 했다.
카렌과 지미를 마차에 태운 채 좀 더 움직이자, 영주성 근처에 마중 나온 사람들이 가득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마차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다가, 알레시아가 탄 펜리르를 보고 깜짝 놀라길 반복했다.
레이는 마음 같아선 마주 손을 흔들어주고 싶었지만 일에도 순서가 있었다.
필립스 백작을 먼저 찾아뵈어야 했다.
레이는 등에 붙어 있던 카렌을 지미에게 맡겼다.
덜컹!
영주성 울타리 안으로 들어선 마차가 정지했다.
알레시아가 영주성 안뜰에 나와 있는 필립스 백작을 향해 한걸음에 달려갔다.
"아빠! 다녀왔어요!"
경망스러운 행동이었으나, 오랜만에 딸의 얼굴을 본 백작이 웃음꽃을 피우며 알레시아를 안아 들었다가 표정을 굳혔다.
무거웠다.
손아귀에 힘을 주니 빵빵히 올라온 알레시아의 뱃살이 느껴졌다.
딸의 식습관에 참견할 필요성을 느낀 백작이 알레시아를 내려놓고는 다른 이들의 인사를 받았다.
기사들에 이어 로필렌 또한 자신의 신분을 소개하며 백작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백작은 로필렌에게 환영의 뜻을 밝힌 후 레이를 돌아보았다.
"고생이 참 많았네."
"아닙니다."
"그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더군. 먼저 가서 인사를 나누고 오게."
"백작님, 어찌 그런..."
"그냥 다녀오게."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백작에게 보고를 올려야 할 사안이 산더미만큼 쌓여 있었다.
이에 대해 하나하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몇 시간도 모자랐다.
백작은 이를 감안해, 레이에게 마중 나온 이들과 우선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레이는 깊게 고개를 숙이곤 물러났다.
레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백작이 흐뭇하게 웃었다.
알레시아가 정령을 얻은 것.
황실 마탑 교수를 영입한 것.
그리고 습격을 이겨내고 무사히 귀환한 것.
그 공로가 대부분 누구의 것인지, 편지에 적혀 있지 않았다 해도 백작은 모를 수가 없었다.
"흠... 다들 무사하니 다행일세."
레이가 사라지고 나서 백작이 젠킨슨의 어깨를 가볍게 쳐주었다.
영지로 귀환한 이들 중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자는 없었다.
백작은 아직까지 습격자에 관한 정보를 얻지 못했으나, 모두가 무사한 것을 보고 내심 큰 사건은 아니었구나 싶었다.
"젠킨슨 경, 습격자의 정체에 관해 혹시 추측 가는 바가 있나?"
"..."
젠킨슨이 평소답지 않게 입을 우물거렸다.
백작은 이번 습격이 혹여 사교도나 흑마법사, 혹은 타국의 소행인가 싶어 젠킨슨을 재촉했다.
"젠킨슨 경, 답해보게. 정확하지 않은 정보라도 좋네."
디디에 또한 의문 어린 얼굴로 젠킨슨을 바라봤다.
주변을 한 번 둘러본 젠킨슨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로얄...가드였습니다."
"..."
얼을 타며 눈을 깜박인 백작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
"잠시만, 젠킨슨 경. 지, 지금 뭐라고...?"
"황실에서 이번 습격을 주도했습니다. 습격자 중 로얄가드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백작은 순간 눈앞이 핑 돌았다.
*
레이가 영주성을 나오자 곧장 카렌이 몸에 달라붙었다.
레이는 귀를 질겅질겅 씹히며 벨라와 포옹했다.
레이를 따뜻하게 안아준 벨라가 화장기가 번진 눈으로 레이의 몸을 훑었다.
"다친 곳은 없니?"
"멀쩡해, 엄마. 중간에 잠깐 문제가 생기긴 했는데 별일 아니었어."
"다행이네. 난 먼저 들어갈 테니 이따 집에서 보자."
해가 중천이었다. 벨라는 꽤 졸려 보였다.
레이는 벨라를 위해서 산 약재가 몇 개 떠올랐지만, 그냥 집에 가서 건네는 게 낫겠다 싶었다.
벨라 말고도 마을 사람들, 보육원 관계자, 그리고 보육원 아이들 여럿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한 명 한 명 인사를 나눈 레이가 요하나를 향해 눈을 돌렸다.
요하나는 친구들에게 억지로 붙들려 나온 것처럼 레이와 한참 떨어진 채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가만히 요하나를 바라보던 레이가 목을 가다듬었다.
"내가 잘못했어요~ 흐에에에에엥~"
어설픈 가성으로 누군가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레이를 향해 요하나의 고개가 삐거덕거리며 돌아갔다.
레이가 계속해서 아가리를 놀렸다.
"그러니까 떠나지 마요~ 호에에에엥~"
앞뒤 정황을 아는 누군가의 웃음이 터짐과 동시에 요하나의 발차기가 날아들었다.
그 찰나 카렌을 내려놓은 레이가 허공에서 요하나를 붙잡았다.
요하나가 몸부림을 치며 반항했지만 레이는 요하나를 꽉 붙든 채 영주성 울타리로 끌고 갔다.
영주성 울타리 근처엔 미리 마차에서 내려놓은 레이의 짐이 쌓여 있었다.
요하나를 풀어준 레이는 요하나의 주먹을 맞아가며 검이 보관된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열자, 두 자루의 검이 서로 교차하는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검을 꺼낸 레이가 기분 좋게 웃으며 요하나를 끌어당겼다.
요하나는 갑자기 레이에게 허리를 붙잡히자 깜짝 놀라 격하게 몸부림쳤다.
레이가 검집을 고정하기 위한 허리띠를 요하나에게 둘러주며 중얼거렸다.
"잠깐 그대로 있어봐."
이쯤되니 요하나도 레이가 무엇을 하려는 지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었다.
요하나의 몸부림이 슬그머니 잦아들었다.
레이가 요하나에게 허리띠를 단단히 묶어준 후 제플린이 제작한 검을 허리띠에 매달았다.
검의 위치를 세심하게 조정한 레이가 한 발 물러섰다.
"자, 한 번 뽑아봐."
망설이던 요하나가 마지 못해 검자루로 손을 가져갔다.
스륵-
선명한 예기를 드러내는 은색 검신이, 내리쬐는 태양 아래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 입에서 작게 탄성이 터졌다.
"우아..."
제플린이 제작한 검의 가치를 정확히 알아볼 수 있는 자는 이 자리에 없었지만.
요하나에게 쥐어진 검이, 이런 시골구석에서 쉽사리 구경하기 힘든 고급품이란 사실은 뿜어져 나오는 예기를 보고 누구나 직감할 수 있었다.
검을 뽑아낸 요하나가 자꾸만 벌어지려는 입을 막기 위해 얼굴에 힘을 주었다.
괴상한 표정으로 어깨를 떠는 요하나를 보고 레이가 입꼬리를 올렸다.
'너무 비싼 검이라서 괜히 문제 안 생기게 검집은 바꿔 끼워야 하겠다만...'
처음 건넬 때만큼은 완벽한 상태로 쥐여 주고 싶었다.
"으흡... 으흐..."
요하나는 어떻게든 표정을 굳히려 발악했지만 자꾸만 입꼬리가 파도쳤다.
제자리서 끅끅거리던 요하나가 슬그머니 레이의 눈치를 살폈다.
고맙다는 말은 하고싶은데 입이 잘 안 떨어지는 모양새였다.
레이가 요하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잘 어울리네."
"..."
요하나의 뺨에 붉은 빛이 일었다.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렌에게 레이가 손짓했다.
"카렌도 일로 와봐."
카렌은 레이에게 다가가며 미리 실망할 준비를 했다.
카렌은 레이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모든 아이들에게 따뜻하지만, 아이들이 내놓는 성과에 따라 그 보상에 확실한 차등을 두는 게 레이였다.
카렌은 요하나에 비해 여러모로 모자랐다.
요하나처럼 좋은 검을 받진 못할 것이다.
허나 레이에게 선물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기쁜 일이라고, 카렌은 그리 되뇌이며 레이 앞에 섰다.
짐을 뒤적여본 레이가 새로운 상자를 꺼냈다,
상자의 크기가 손바닥만 했다.
"...?"
저 작은 상자에 날붙이가 들었으리라곤 도저히 상상되지 않았다.
당황해서 눈을 깜빡이는 카렌을 향해 레이가 상자를 열었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작은 보석이 박힌 목걸이가, 검은 상자 속에서 홀로 반짝이고 있었다.
성장 (1)
80화
데런에게 있어 레이는 믿음직한 형이자 훌륭한 스승이었다.
평소에도 데런은 레이를 보육원의 기둥이자 리더로 여겼지만.
레이가 알레시아를 따라 황실 마탑으로 떠난 후에야 그 영향력이 얼마나 거대했는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보육원에선 각기 다른 개성과 상처를 지닌 아이들이 단체 생활을 하다 보니 당연히 이런저런 갈등이 생겼다.
그 모든 갈등에 어른들이 개입해 일일이 조율해줄 수는 없었다.
그런 때에 항상 의지가 된 건 레이였다.
레이는 아이들 간의 갈등을 힘으로 억압하기보단 원활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성격적인 결함이 있는 아이라도, 스스로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곁에 두고 끈기 있게 지켜봤다.
선을 넘는다 싶으면 날을 잡고 죽어라 쥐어 패긴 했지만 그런 경우는 생각보다 몇 없었다.
레이는 아이들 앞에서 항상 완벽하려 했고, 대개 완벽했다.
도리어 너무 완벽했기에, 데런은 종종 레이를 무감정한 사람이라 느끼고는 했다.
그리고 레이는, 보육원의 가장 강력한 무력이었다.
어른들조차 조심하는 레이를 보고 데런을 비롯한 아이들은 경외와 함께 큰 안정감을 느꼈다.
그런 레이가 보육원에서 사라졌다.
보육원의 아이들은 개울가에 혼자 놓인 심정이었다.
하루 이틀은 자유를 만끽하며 물을 첨벙댔지만 얼마 안 가 나를 지켜주는 보호자가 사라졌음을 깨닫고 불안해했다.
카렌이 특히 우울감에 빠져 지냈으나, 상태가 안 좋았던 건 요하나도 마찬가지였다.
레이가 없는 동안 요하나의 눈은 항상 거멓게 죽어있었다.
요하나는 잡생각을 떨치고 싶었는지 레이가 떠나고서 한동안 검술 훈련만 지독하게 반복했다.
레이가 돌아올 때쯤 되어서야 표정이 다양해졌지만, 레이의 귀환이 늦어진다는 소식을 접하고 하루 동안 방에 박혀 나오지 않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레이가 귀환한다는 날짜가 다시 다가왔다.
데런은 알고 있었다.
요하나가, 영주성에서 일하는 메이드 누나에게 받은 작은 향수병을 오늘 아침 내내 만지작거리고 있었음을.
향수를 뿌려볼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자존심 때문에 내려놓는 모습을.
데런은 두 눈으로 직접 봤다.
요하나는 레이의 마중을 나와서도 손 한 번 흔들지 않고 틱틱댔다.
데런은 미움받을 짓만 골라 하는 요하나가 참 답답하게 느껴졌다.
허나 레이는, 뻗대는 요하나를 타박하긴커녕 우아하고 아름다운 검을 요하나에게 선물해주었다.
좋아 죽으려는 요하나를 보고 데런은 훈훈한 웃음을 흘리면서도 약간의 쓰라림을 느꼈다.
요하나 만큼 좋은 검을 받지는 못하리라는 실망감.
인기 많은 여자아이들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는 레이를 향한 질투.
두 감정이 혼합되어 가슴을 울렸다.
뭐, 입맛이 조금 쓰긴 했지만, 데런은 여전히 레이를 동경하며 존경하고 있었다.
그때 레이가 카렌을 불렀다.
데런을 비롯해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 대부분이 레이가 적당히 고급스러운 검 한 자루를 카렌에게 선물할 줄 알았다.
헌데 레이가 새롭게 꺼낸 상자는 크기가 고작 손바닥만 했다.
레이가 카렌을 마주 보고 상자를 열었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작은 보석이 박힌 목걸이가, 검은 상자 속에서 홀로 반짝이고 있었다.
"어윽...?"
카렌이 괴상한 탄성을 내었다.
너무도 예상치 못한 선물의 정체에 완전히 생각이 정지한 것처럼 보였다.
이런 시골 바닥에선 어지간하면 평생 구경하기도 힘든 아름다운 목걸이였다.
모두의 시선이 목걸이에 박힌 황금색으로 빛나는 보석에 집중됐다.
오직 데런만이 요하나의 표정을 황급히 살폈다.
방금까지 히죽이던 요하나의 입꼬리가 얼음장처럼 굳어져 있었다.
차르륵!
레이가 상자에서 조심스레 목걸이를 꺼내 펼쳐 보였다.
내리쬐는 햇빛 아래 아름답게 반짝이는 목걸이를 마주한 카렌의 두 눈동자가 덜덜 떨렸다.
레이가 카렌에게 한발 다가선다.
데런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저 새끼 지금 설마...?"
불길한 예상은 빗나가질 않았다.
레이는 흐트러진 카렌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더니, 두 손을 카렌의 새하얀 목덜미 뒤로 뻗어 목걸이를 대신 걸어주었다.
톡!
목걸이의 잠금장치가 채워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카렌은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금속의 어색한 차가움을 느꼈다.
카렌의 피부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으으..."
귀까지 빨갛게 물들인 카렌이 차마 레이를 마주 보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레이는 거의 녹아내릴 듯한 표정을 한 카렌을 살펴보곤 흡족하게 웃었다.
저물어 가는 석양을 떼다 놓은 듯한 카렌의 머리카락과 황금색으로 빛나는 보석이 아주 잘 어울렸다.
"예쁘네."
레이의 그 한마디에 카렌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온 몸이 너무 달궈진 탓에 머리 위에서 연기가 펑펑 올라오는 듯했다.
데런이 속으로 외쳤다.
'미친놈아 제발 좀...!'
분명 흐뭇한 광경이었다.
허나 자리에 모인 이들은 대부분 누군가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아직 겨울이 멀었음에도 공기가 차가웠다.
뚜두둑!
허리띠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요하나의 허리춤에 매어져 있던 제플린의 검이 검집 째로 뜯겨져 나왔다.
레이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카렌과는 완전히 반대의 이유로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요하나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상황을 이해 못 하고 눈을 깜박이는 레이를 향해 요하나가 제플린의 검을 검집 째로 휘둘렀다.
뻐억!!
"아악!!"
팔뚝으로 요하나의 일격을 막아낸 레이가 비명을 질렀다.
상당히 강맹한 내려치기였다. 못 본 새 요하나의 실력이 꽤 늘어 있었다.
레이는 잠깐 흡족한 감정이 들었지만, 연거푸 휘둘러지는 요하나의 공격 탓에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뻑!! 뻑!! 뻑!!
"아악! 왁!! 으악!!"
레이는 영문도 모른 채 요하나의 공격을 계속해서 몸으로 막아냈다.
이를 갈아내며 레이를 수십 번 후려친 요하나가 눈시울을 붉게 물들였다.
"이딴 거...!! 필요 없어...!!"
콰악!!
요하나는 레이를 향해 검을 던져 버렸다.
그대로 등을 돌린 요하나가 눈을 비비며 발이 닿는 대로 뛰었다.
멀어져가는 요하나의 소맷자락이 금세 젖어들었다.
그때까지도 카렌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자기 세계에 푹 빠져 있어 외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레이가 지면에 엉덩이를 붙인 채 지끈거리는 팔목을 매만졌다.
"쟤는 갑자기 나한테 왜 저러는...?"
레이가 주변을 살폈다.
마중을 나왔던 모두가 힐난이 잔뜩 서린 눈빛을 레이에게 쏘아 보내고 있었다.
특히나 데런의 눈빛이 강렬했는데, 거의 눈으로 욕을 하는 수준이었다.
"?"
레이가 혼란에 빠진 채 일단 아가리를 닫았다.
대체 무엇을 잘못했는가 고민하고 있는데 누군가 옆구리를 툭툭 쳤다.
루나였다.
루나가 두 손을 뻗은 채 레이를 빤히 바라봤다.
"...나도 선물 줘요."
"..."
달라니까 줘야지.
레이가 다시 짐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짐을 뒤적이면서, 레이는 강렬한 불안이 목구멍을 타고 오르는 것을 느꼈다.
레이의 손에 황실 마탑에서 받아온 마법서가 잡혔다.
협곡에서 습격을 당했을 때 마법서가 지면을 구른 탓에 상태가 꽤 꼬질꼬질했다.
마법서를 꺼낸 레이가 마법서 겉면을 툭툭 털어내며 추하게 중얼거렸다.
"아이고, 여기 왜 흙이 묻어있냐..."
"..."
루나가 꼬질꼬질한 마법서를 받아들곤 말없이 레이를 쳐다봤다.
레이가 눈치를 보다 두 팔을 올려 방어자세를 취했다.
루나는 사양 않고 마법서로 레이를 후려쳤다.
퍽! 퍽!
마법서를 휘두르는 루나의 손에는 힘이 전혀 실려있지 않았다.
레이는 가드를 올린 팔은 하나도 아프지 않았지만 마음이 많이 아팠다.
우리 착한 루나에게 이토록 격렬한 반응을 이끌어낸 자가 누구인가?
바로 레이 자신이었다.
충분히 분풀이를 한 루나가 책을 내려놓고는 요하나가 버리고 간 검을 주워들었다.
"...이거, 요하나 가져다줄게요."
"어, 응... 고마워."
루나는 낑낑거리며 검을 집어 들고는 자리를 떠났다.
카렌은 여전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온몸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레이는 황망한 얼굴로 제자리에 앉아 있다가, 마중을 나왔던 다른 보육원 아이들과 눈이 마주쳤다.
"...너희들 선물은 이따가 줄게."
"네, 뭐..."
다들 세상 한심한 놈을 바라보는 눈으로 레이를 응시하곤 몸을 돌렸다.
모든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던 지미가 한 마디 했다.
"너 병신이냐?"
"...나름 반성 중이에요."
레이는 자신의 실책을 인정해야 했다.
이번에 선물을 살 때 아무래도 좀... 애정캐한테 룩딸하고 성능캐한테 장비 맞추는 감성으로 물건을 고르긴 했다.
요하나가 평소에 검술 훈련에 열성이기도 했고, 루나 또한 워낙 책을 좋아했던 탓에 별 문제 없을 줄 알았는데, 어째 제대로 점수가 까인 듯 했다.
"끄응..."
지미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선 레이가 옷을 털었다.
디디에가 정색하고 안뜰에 나와 있는 걸 보니 빨리 필립스 백작에게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지미, 카렌 좀 잘 부탁할게요."
"그래."
지미가 카렌을 돌아봤다.
아직까지 카렌은 제정신이 아닌 듯 했다.
"뭐... 걱정 마라."
사실 레이가 카렌에게 값비싼 장신구를 선물해준 게 그다지 마음에 들진 않았다.
괜히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골치 아팠으니까.
그래도 카렌이 평소 보육원을 위해 나름의 헌신을 해왔다는 것을 알기에 지미는 굳이 불만을 표하지는 않았다.
*
레이가 디디에와 함께 영주성 집무실로 들어섰다.
백작은 레이의 몰골을 보고 조금 당황했다.
잠깐 못 본 새에 얼굴에 멍이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이...? 누구와 싸웠나?"
"아, 별 거 아닙니다. 환영인사가 살짝 격했던 탓에..."
백작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곤 본제를 꺼냈다.
사실 지금 레이의 얼굴에 멍이 들고 안 들고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협곡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음..."
생각을 정리한 레이는 로얄가드와 전투 과정만을 제외하고 알고 있는 대부분의 정보를 백작에게 전했다.
레이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백작이 한 손으로 이마를 꾹 눌렀다.
품위를 중요시하는 백작이 저리 반응할 정도면 어지간히 충격적이란 뜻이었다.
"운이... 나빠군."
운이 나빴다. 백작은 거기서 말을 멈췄다.
제국의 귀족된 자로서 함부로 황실을 비난하기도 어려웠고, 권력의 생태라는 걸 아는 입장에서 황실의 판단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레이가 혹시나 싶어 한 마디 덧붙였다.
"황태자 위와 이번 습격이 관련되었다는 건 어디까지나 추측에 가깝습니다."
"시간이 지나봐야 정확한 답을 얻을 수 있겠지."
백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영지로 바로 귀환하겠다는 그대의 판단이 옳았네. 변방의 귀족은 중앙의 일에 아예 엮이지 않는 게 제일이지. 근데 대체... 어떻게 무사한 건가?"
로얄가드, 혹은 로얄가드 급 무인이 두 명이나 습격에 동원됐다는 건 젠킨슨 또한 증언했다.
로얄가드라면 기사라는 카테고리 안에서는 마스터 급을 제외하면 거의 최강에 가깝다.
레이가 머쓱해하며 입을 열었다.
"제가 한 명을 붙들고 늘어지는 사이 고모가 다른 한 명을 처리했습니다. 정말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어떻게든 해냈네요."
"..."
백작이 말 없이 열셋 먹은 소년을 쳐다봤다.
로얄가드를 상대로 정면에서 버텼다는 개소리를 지껄이는데 그걸 부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백작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몇 번이고 이야기했지만,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하게. 최대한 지원해주겠네."
"알겠습니다."
"중앙이 안정될 때까지 목을 움츠리고 있어야겠군. 그대는 어찌할 건가? 혹시 다른 곳에 볼일이 있나?"
"아니요. 저야 뭐 마법사님도 모셔왔으니..."
곁에 있던 로필렌에게 눈길을 준 레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한동안 애들 가르치는 데 집중해야죠. 그전에 먼저 화해해야겠지만..."
요하나에게 얻어맞은 곳들이 욱신거린다.
레이는 마른 세수를 하고서 백작에게 부탁했다.
"알레시아 님께 협조를 받고 싶은 일이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대 원하는 대로 하게."
백작이 시원하게 허락했다.
성장 (2)
81화
다음 날.
레이가 잘게 간 라푸마를 찻잔에 넣은 뒤 끓인 물과 함께 휘휘 저었다.
라푸마와 섞인 물이 산뜻한 녹색을 띠기 시작한다.
물 위로 번져 나오는 은은한 빛 무리를 확인한 레이가 찻잔에 입을 댔다.
맹맹한 단맛이 혀에 가득 퍼졌다.
썩 마음에 드는 맛은 아니었으나 레이는 불평 없이 삼켰다.
'효능이 괜찮으면 좋겠는데...'
일단 세리아가 준 걸 먹어보고 효능이 있다 싶으면 백작을 쪼아서라도 잔뜩 구비해볼 생각이었다.
"그래서..."
레이가 고개를 들어 지미와 매튜를 마주 봤다.
"별일 없었나요?"
그래도 몇 달 만에 만났다고, 둘의 얼굴이 썩 반갑게 느껴졌다.
지미가 툴툴대며 먼저 입을 열었다.
"카렌이 널 얼마나 찾아댔는지는 아냐? 다른 애들도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난리도 아니었다."
지미는 한참 동안 레이가 없는 동안 아이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워했는지 떠들었다.
듣던 매튜가 말을 덧붙였다.
"새로 들어온 녀석들이라면 몰라도, 지금 있는 애들 대부분은 네 손을 너무 탔다. 그 애들에게 있어 너는 부모와 크게 다를 게 없어. 제대로 책임을 질 거라면, 애들 머리가 좀 굵을 때까지는 곁에 있어줘라."
"알겠어요."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날이 갈수록 보육원을 향한 지원이 많아진 덕분에 이제 와선 레이가 없어도 보육원이 잘 돌아갔지만.
초창기 보육원은 그야말로 하나부터 열까지 레이가 직접 챙겨야 했다.
그 시절 보육원에 발을 들인 아이들한테는 레이가 보육원이었고 보육원이 레이였다.
레이가 과거를 되새기며 찻잔에 남은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찻잔을 내려놓는 레이를 향해 지미가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근데 오늘 길에 습격받았다며? 산적이라도 만난 거냐?"
"하하..."
잠시 생각을 정리한 레이가 협곡에서 있었던 일을 대략적으로 설명해주었다.
이야기를 전부 들은 지미가 눈을 질끈 감았다.
"네놈은 어째 가는 곳마다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냐?"
"제가 원래 운이 좀 많이 안 좋은 편이어서요."
'그렇지 않으면 친구 대신 다른 세상에 끌려오지도 않았겠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어넘기는 레이를 보고 지미가 질린 얼굴을 했다.
"근데 로얄가드를 상대로 너 혼자 시간을 끌었다고?"
"시간을 끈 게 아니라 제가 죽였습니다."
"...?"
지미와 매튜가 멍청하게 눈을 깜박였다.
레이는 곧장 서클을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지미와 매튜에게 공유한 비밀이 워낙 많았다.
이제 와서 서클 같은 걸 숨긴다고 해도 전혀 이득이 없었다.
'차라리 명확히 인식시켜 주는 게 낫지.'
당신들이 눈앞에 두고 있는 아이가 대체 어떤 존재인가를.
트드득!
마나가 요동친다.
찻잔을 넘어, 탁자가 얼어붙어 나가기 시작했다.
금세 벽면까지 번진 성에를 보고 지미와 매튜가 입을 쩍 벌렸다.
레이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설명을 덧붙였다.
"성취가 좀 있었어요. 하르시아의 발자취를 좇아가다 보니 공간검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알겠더라고요."
매튜가 식은땀이 가득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레이, 혹시나 해서 말한다만...."
"무슨 말인지 알아요. 제국에게 쫓길 게 아니면 밖으로 내보일 성취는 아니죠. 하지만 알고는 있으라고요. 당신들이 투자했던 아이가, 대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한 마디로 나 이렇게 잘났으니 앞으로도 잘 좀 하자란 의미였다.
지미는 괜히 헛기침을 하며 탁자에 서린 얼음막을 매만졌다.
"그, 앞으로도 여기서, 필립스 백작령에서 머물 거냐?"
"방금 말했잖아요. 당연히 그래야죠. 애들 좀 클 때까지는."
필립스 백작령.
분명 작은 물이긴 하다.
허나 인재를 성장시키기 위한 준비는 전부 갖춰져 있었다.
백작은 보육원에 호의적이었고, 지원도 빵빵했으며, 아이들을 가르칠 고급 전력도 확보했다.
아이들이 성인이 된다면 큰 물도 체험시켜줘야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1~2년만 바짝 가르치면... 슬슬 조합을 맞춰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가챠. 승급. 성장.
그 다음은 역시나.
'루나랑 요하나를 주축으로 구성을 갖추면 괜찮을 것 같긴 해...?'
덱짜기였다.
*
하루 종일 카렌의 얼굴엔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레이가 보육원으로 돌아온 데다, 레이에게 아름다운 목걸이까지 선물로 받았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목걸이의 체인이 들썩이며 피부를 간지럽힌다.
그때마다 카렌의 머릿속엔 온갖 망상이 꽃폈다가 수그러들길 반복했다.
비록 레이가, 연애 감정으로 목걸이를 선물한 게 아님을 모르진 않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은 기대'까지 떨쳐내긴 어려웠다.
물론 카렌은 나름 자중하기 위해 노력했다.
보육원 아이들 중 장신구를 받은 건 카렌 하나였다.
아무래도 볼멘소리가 나오기 쉬웠다.
더군다나 요하나가 이번 일로 제대로 삐쳐버렸다.
카렌은 절대 목걸이를 밖으로 내보이지 않고 옷으로 가리고 다녔다.
예쁜 목걸이를 자랑하고 싶다는 욕구를 억누르고 그런 판단을 내린 것은 카렌이 나름 정신적으로 성숙했다는 방증이었다.
요하나는 어제 이후 말이 없었다.
여전히 카렌과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잠을 잤지만 대화 한 마디 없었다.
카렌은 그런 요하나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었지만, 솔직히 지금 같은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또 다시 식사 시간이 됐다.
카렌은 요하나와 마주 앉아 차디찬 분위기 속에서 빵을 입에 넣었다.
팔이 움직이자 어깨 근육도 같이 움직이며 목걸이를 옆으로 밀었다.
피부에 느껴지는 목걸이의 자극에 카렌의 얼굴이 바보처럼 풀렸다가 다시 굳어졌다.
요하나는 그 하나하나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짜증났지만 화를 풀 곳을 찾지 못하고 수저를 강하게 씹었다.
그때 레이가 식당에 나타났다.
콰앙!
레이의 모습을 보자마자 식탁을 내려친 요하나가 씩씩거리며 식당을 나갔다.
레이는 멀어지는 요하나의 뒷모습을 보며 앓는 소리를 냈다.
쟤를 어떻게 달래야 하나 꽤 막막한 심정이었다.
카렌과 비슷한 장신구를 하나 사서 선물한다 해도 화만 돋울 것 같았고, 교육적인 측면에서 좋은 방법도 아니었다.
'일단 좀 지켜보자...'
평소 요하나가 하는 짓이 귀엽긴 했다만 다루기는 가장 힘들었다.
일관성 있게 틱틱 대는 아이였던 만큼 더 주의했어야 한다고, 레이는 뒤늦게 반성했다.
"으음, 루나."
레이가 요하나와 같은 식탁에 앉았던 루나에게 다가갔다.
"식사 끝내고 시간 좀 괜찮을까?"
"...지금도 괜찮아요."
본래 식사를 적게 하는 루나는 배를 어느 정도 채운 것처럼 보였다.
레이는 사양 않고 루나를 이끌었다.
"가자. 널 가르쳐줄 선생님이 새로 오셨어."
*
시그니 산맥 초입에서 대기하고 있던 로필렌이 몸을 바짝 긴장시켰다.
저 너머에서 레이가 루나와 알레시아를 데리고 다가오고 있었다.
미리 목을 가다듬은 로필렌이 루나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 네가 dinareu san..."
레이가 곧장 로필렌의 입을 틀어막고 목을 반쯤 비틀었다.
그 상태로 로필렌을 숲 속으로 끌고 간 레이가, 루나와 충분히 거리가 벌어지자 로필렌을 놓아주곤 작게 속삭였다.
"지금 뭐라고 말하려 했어...?!"
"네, 네?"
로필렌이 당황해서 어물거렸다.
"저, 저 아이의 이름이 'dinareu san rejeondeurigoa' 아니었습니까?"
드물긴 하지만 이름 사이에 폰, 오브, 압 같은 지역 특유의 전치사를 삽입하는 경우가 있다.
마찬가지로 드물긴 했으나 미들네임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고 말이다.
때문에 로필렌은 레이가 소개해주겠다는 아이의 이름이 'dinareu san rejeondeurigoa' 인줄 알았다.
마법사였던 로필렌조차, 설마 레이가 '디나르에서 수집한 레전드리 등급의 고아'란 뜻으로 루나를 그리 칭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레이가 앓는 소리를 냈다.
"쟤 이름은 루나야. 알겠어?"
"예, 알겠습니다. 그럼 dinareu san rejeondeurigoa는 무슨 의미..."
"그건 잊어."
레이가 눈을 번뜩이며 강요하자 로필렌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레이와 로필렌이 자리로 되돌아왔다.
루나는 묘하게 초점이 어긋난 눈으로 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가 괜히 헛기침을 하는 사이 로필렌이 루나의 손을 가볍게 맞잡았다.
"안녕, 루나? 나는 로필렌이라고 한단다. 레이에게 네 마법 수업을 부탁받고 필립스 백작령으로 오게 되었어. 잘 부탁한단다."
로필렌의 입가에 따뜻한 웃음이 걸렸다.
루나는 잠깐 고민하다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잘 부탁할게요."
인사가 끝나자 레이가 숲 속 공터를 가리켰다.
"루나, 로필렌 선생님께 마법 좀 보여 드려."
"보여 드려도... 돼요?"
이미 마법, 그러니까 서클을 함부로 선보였다가 크게 데인 적이 있던 루나다.
루나의 실수로 인해 레이는 심각한 부상을 입어가며 전투를 치러야 했다.
걱정스러운 눈을 한 루나의 머리카락을 레이가 장난스레 헤집었다.
"걱정 마. 이분은 신뢰할 수 있으니까."
로필렌은 레이가 아는 마법사 중엔 그나마 믿어봄직한 마법사였다.
루나가 고개를 끄덕이곤 숲 속 공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레이가 로필렌에게 속삭였다.
"불 끌 준비해."
"예."
사실 로필렌은 아직까지 헷갈렸다.
루나라는 아이가 정말 대마법사의 재능을 타고났는지, 아니면 레이의 호들갑이었는지 말이다.
레이, 그러니까 하르시아는 본격적으로 마법을 배우고 활용한 인물은 아니다.
로필렌이 생각하기에, 하르시아가 루나의 마법적 재능을 오판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뭐, 보면 알 수 있겠지.'
주변의 마나가 요동친다.
루나의 서클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습을, 드러냈다.
체내에서 심장 주위를 회전해야 할 서클이 타인의 시야에 잡혔다는 말이다.
로필렌은 순간 숨이 턱 막혔다.
'...?'
뭐지?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저 거대한 원형의 띠가, 지금 서클이라는 건가?
"말도 안..."
츠즉!
거대한 서클에 빛이 한 번 점멸했다.
직후 숲속에 있던 공터가 삽시간에 불꽃과 함께 터져나갔다.
콰앙!!
"..."
로필렌은 잠깐 할 말을 잃었다.
방금 루나가 행했던 마법은, 굳이 정의하자면 '점화'였다.
그 간단한 마법이 거대한 서클과 공명하여 저만한 위력을 낸 것이다.
"다비드가 저 아이의 심장을 뽑겠다고 설치기에 내가 직접 목을 베었다."
로필렌의 눈동자가 레이에게로 돌아갔다.
"로커스트 또한 저 아이를 탐내기에 온몸을 난도질해 죽였다."
레이가 로필렌에게 물었다.
"넌 어찌할 것이냐?"
로필렌은 무릎을 꿇으려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고 선 채로 답했다.
"저는... 힘이 아니라 지식을 탐하는 자입니다."
심장을 뽑아 아티펙트로 가공해 서클과 마나를 늘린다고 로필렌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절 믿어주십시오."
"믿어보도록 하지."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폭음이 잦아들고 후끈한 공기가 숲을 달군다.
로필렌이 마법으로 잔불을 꺼트렸다.
루나가 로필렌이 보여주는 마법을 흥미롭게 바라봤다.
레이의 눈치를 쓸쩍 본 로필렌이 루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단... 내 제자가 되기 위해선 계약 각인을 맺어야 해. 괜찮겠니?"
루나는 레이가 말 없이 지켜보는 걸 확인하더니,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내 인도에 따르렴."
로필렌이 루나와 계약 각인을 체결했다.
레이가 권능을 사용해 혹시 계약 각인에 불순한 내용이 포함되진 않았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로필렌은 레이를 앞에 두고 헛수작을 부리지는 않았다.
무사히 계약 각인을 마친 로필렌이 잠시 어색해하며 물었다.
"이제 나와 너는 사제관계가 되었단다. 잘 부탁해."
"...네, 잘 부탁드려요."
"으음... 돌아가서 바로 첫수업을 시작할까?"
"그 전에."
레이가 끼어들었다.
"루나, 너도 정령이랑 계약 좀 맺어보자."
세상엔 루나의 재능을 탐할 자가 너무나도 많았다.
로필렌조차, 언제까지 얌전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루나, 너를 보호해줄, 너에게 헌신할, 오직 너만의 아군이 필요해."
레이는, 드물게 안쓰러운 눈을 하고 루나를 바라봤다.
미리 이야기를 들었던 알레시아가 펜리르와 피닉스를 실체화 시켰다.
"펜리르! 피닉스! 친구를 데려와 줄 수 있겠는가?"
[...]
[...]
평소에 말을 잘 듣던 펜리르와 피닉스는 알레시아의 부탁에 괜히 딴청을 피웠다.
당황한 알레시아가 레이에게 중얼거렸다.
"레이... 나의 정령들이 친구들을 불러오는 걸 내켜하지 않는 것 같구나."
레이가 떫은 표정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아이, 씻팔."
검에서 검기가 솟구친다.
"공간검 맛 좀 볼래?"
좆 같은 인간 새끼.
펜리르와 피닉스가 눈으로 욕을 하고 몸을 감췄다.
성장 (3)
82화
펜리르와 피닉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중급 정령 두 마리를 데려왔다.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정령들은 루나를 보더니 퍽 호의적인 태도로 주변을 맴돌았다.
그 광경을 보고 알레시아가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정령들이 사람을 차별하는구나아..."
모너클인 알레시아와 네추럴인 루나를 대하는 정령들의 태도는 크게 차이 났다.
알레시아가 축 늘어진 채 입술을 삐죽 내밀자 펜리르가 다가와 위로하듯 뺨을 핥아주었다.
피닉스가 '애쓴다 병신아' 쯤 되는 표정으로 펜리르를 지켜봤다.
한편 새로 나타난 정령들이 주변을 계속 맴돌자, 루나는 로필렌의 도움을 받아 계약 조건을 정령들에게 제시했다.
[...]
극악하기 짝이 없는 계약 조건에 살랑거리던 정령들의 꼬리가 바짝 세워졌다.
당장 화를 내도 이상하지 않았으나, 정령들은 차분하게 고개를 저은 후 작게 그릉거리며 계약 조건의 조율을 주장했다.
상당히 신사적인 응대였다.
루나가 어찌할까 싶어 고개를 돌리니, 레이가 험악하게 표정을 구기며 검을 뽑아내고 있었다.
'정령이... 계약 거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항거였다.
곧장 검이 휘둘러졌다.
[깨갱, 깽깽!!]
[빼애애액!!]
한바탕 정령들의 비명이 몰아친 후.
중급 정령 두 마리는 바닥을 기어가며 루나와 노예 계약에 가까운 계약 각인을 체결했다.
알레시아가 루나에게 다가와 친한 척을 했다.
"너도 이제 나와 같은 정령사가 되었구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령을 다루는데 궁금한 것이 생기면 영주성으로 부담 없이 찾아오거라! 요령을 알려줄 테니!"
알레시아는 숙련된 정령사라도 된 것 마냥 목에 힘을 주었다.
레이는 가볍게 웃으며 알레시아의 자랑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다 예를 갖춰 허리를 숙였다.
"알레시아 님, 오늘은 정말 감사했어요. 해야 할 일도 마쳤으니, 영주성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알겠도다. 그럼 루나, 다음에 보자꾸나!"
레이는 알레시아를 영주성까지 데려다 준 후, 다시 숲 속 공터로 돌아왔다.
본격적인 정령과의 계약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몸을 푸는 레이를 향해 로필렌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 아이 정도의 정령 친화력이라면... 강압을 동반하지 않아도 유리한 계약을 성사시킬 수 있을 거야. 굳이 극단적인 조건을 걸어야겠어?"
"그럼요. 정령은 루나에게 완벽히 속박되어야 해요."
레이가 목을 옆으로 당기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까 말했잖아요. 온전히 그녀만을 위한, 절대 배신하지 못할 아군이 필요하다고."
로필렌은 레이의 말을 이해했다.
허나 정령과의 노예 계약이 정령사에게 있어서도 꽤 비효율적인 선택임은 달라지지 않았다.
로필렌이 나름의 절충안을 내놓았다.
"고위 정령 이상의 존재를 계약 각인으로 속박하려면 어마어마한 용량의 셀로미어가 필요해. 상급 정령 몇 마리를 휘하로 두고, 고위 정령과는 일반적인 계약을 맺어보는 게 어떨까?"
"음... 고려해볼게요."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고위 정령을 낚는 게 가능한가부터 확인해봐야 했다.
레이가 새롭게 계약을 맺은 정령들 앞에 섰다.
"잘 듣도록. 정령 친구들."
레이의 검에서 검기가 불쑥 솟구쳤다.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나는 두 정령을 향해 레이가 입꼬리를 길게 찢었다.
"둘 중 더 높은 등급의 정령을 낚아오는 녀석은, 노예 계약을 파기해 주겠다. 기회는 단 한 번이다. 이 기회 놓치면, 수십 년은 노예처럼 묶여 사는 거야."
정령들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반드시 옆에 놈보다 더 높은 등급의 정령을 데려와야 했다.
삽시간에 모습을 감추는 정령들을 보고, 로필렌은 가슴 깊이 감탄했다.
과연 역사에 새겨진 대영웅이었다. 사람과 짐승 다루는 솜씨가 정말 만만치 않았다.
시간이 꽤 흘러, 사라졌던 정령 두 마리가 팔아치울 친구를 데리고 나타났다.
"흠..."
새롭게 나타난 정령은 둘 다 중상급이었다.
레이가 흡족하게 웃으며 검을 휘둘렀다. 정령들의 괴상한 비명이 재차 숲 속을 울렸다.
그렇게 루나는 수월하게 네 마리의 정령과 계약을 맺었다.
레이는 약속대로, 약간이나마 힘이 더 강력한 중상급 정령을 데려온 놈을 노예 계약에서 풀어주었다.
"자, 그럼..."
레이가 바닥을 기고 있는 중상급 정령들을 쳐다봤다.
써먹을 레퍼토리는 동일했다.
"둘 중 한 놈만 노예 계약을 파기해 주겠다."
그 짓을 3번 반복하니 루나의 곁에는 중급 정령 하나, 중상급 정령 둘, 상급 정령 둘이 남게 되었다.
레이가 잠시 제자리에 서서 숨을 골랐다.
상급 정령 쯤 되니 드잡이질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격 자체가 아래 등급과 완전히 다르다는 고위 정령 쯤 되면 본체를 완벽히 제압할 수 있을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뭐, 이 정도만 해도 루나 몸 지키는 데는 충분할 것 같고...'
굳이 고위 정령과의 노예 계약에 집착할 필요가 없어 보이긴 했다.
그래도 얼굴은 한 번 보자는 마음으로, 레이가 정령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 중에 나는 고위 정령을 낚아올 자신이 있다, 손들어."
상급 정령 하나가 냉큼 머리를 치켜들었다.
레이가 말했다.
"출발."
래이가 명령을 내리고 루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곧장 상급 정령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레이는 루나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 후 정령과의 만남에 방해되지 않도록 거리를 벌렸다.
'고위 정령이라...'
로커스트와의 일전이 떠올랐다.
최고위 암흑 정령의 위력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했다.
더군다나 그날의 모습이 최고위 암흑 정령의 전력은 아니었을 것이다.
계약 내용에 따라 이끌어낼 수 있는 정령의 힘이 한정되어 있으니까.
'오늘은 고위 정령 얼굴까지만 보고 끝내자. 가벼운 계약을 맺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고.'
과유불급이라 했다.
루나는 아직 어린 소녀였고, 하루아침에 필요 이상의 거대한 힘을 쥐여주는 것도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다양한 용도로 활용 가능한 셀로미어를 굳이 꽉꽉 채워 놓을 필요도 없었고 말이다.
쐐애애애애애액!!
흡사 태풍이 찾아온 것처럼 강풍이 불어닥쳤다.
나무가 휘청이며 뿌리가 박혔던 지면까지 같이 요동친다.
레이가 검을 땅에 박아넣고 로필렌이 마법으로 몸을 지탱했다.
오직 루나만이, 태풍의 눈에 들어선 것처럼 차분하게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레이가 앓는 소리를 냈다.
'임시 실체화로 이 정도 위력이라...'
확실히 지금까지의 정령들과 수준이 달랐다.
마침내 고위 정령, '칼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얼굴과 등허리를 뒤덮은 갈기, 고릴라와 유사한 체형, 좌우로 쭉 뻗어 나온 날개, 그리고 바람처럼 매끄러운 피부.
신장만 수 m에 이르는 고위 바람 정령이 거대한 얼굴을 루나에게 들이댔다.
[...]
탐색하듯 루나를 훑어본 칼가가, 입꼬리처럼 보이는 주름을 길게 찢었다.
칼가는 눈앞의 어린 마법사가 엄청난 재능을 타고났으나 아직 개화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서클을 늘리지도 못한 애송이 주제에 고위 정령과의 계약을 시도하다니.
칼가는 어린 마법사의 오만이 참으로 유쾌했다.
쿠웅!
칼가가 앞발을 내디뎠다.
고위 정령인 칼가는 임시 실체화를 한 상태에서도 꽤 강력한 물리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강맹한 바람이 몰아치며 루나를 옥죈다.
폐로 들어갈 공기까지 바람에 뒤섞여 휘몰아친 탓에 루나가 숨을 쉬지 못하고 컥컥 댔다.
명백한 겁박이었다. 내가 원하는 계약 조건을 따르라는.
"이런..."
로필렌이 인상을 썼다.
고위 정령이 저렇게 나올 수도 있다는 걸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너무 극단적이었다.
어찌 보면 루나라는 존재가 아직까지는 우습고 하찮은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방증이었다.
"저 멍청하고 무지한 미물이 제 무덤을 파는구나."
로필렌이 조소했다.
레이가 허공에 손을 뻗고 있었다.
흔들리는 지면 위로 한기가 번지기 시작한다.
"하여튼 마법사고 정령이고..."
믿을 새끼가 하나 없다.
레이는 저런 개새끼들은 어설픈 계약으로 묶어둘 생각을 싹 버렸다.
레이나 칼가나 하는 짓이 비슷하긴 했다만, 그렇기에 더더욱 레이는 짜증과 혐오를 느꼈다.
본디 내로남불과 동족혐오는 인류의 오래된 특성이었다.
끼긱!
아공간에서 제국의 신검이 모습을 드러낸다.
모로스를 손에 쥔 레이가 코어를 세차게 회전시켰다.
검기 두 줄기가 동시에 압축되며 나선 형태로 모로스를 휘감았다.
고작 두 줄기의 검기를 활용한 어설픈 검강 흉내였으나, 모로스가 그 힘을 증폭시킨다.
모로스에서 터져 나오는 섬광을 보며 로필렌이 무의식적으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아..."
황홀한 웃음을 머금은 로필렌을 뒤로 하고 레이가 지면을 박찼다.
어마어마한 가속과 함께 레이가 삽시간에 칼가의 측면을 지나쳤다.
쫘아악!!!
칼가의 날갯죽지가 하나가 그대로 찢어져 나갔다.
뇌리를 강타하는 고통에 칼가가 괴성을 지르며 실체화를 해제하려 했다.
칼가의 주변이 통째로 흐릿해진다.
레이는 사방에 한기를 흩뿌리며 흐릿해지는 공간에 억지로 몸을 끼워 넣었다.
실체화를 풀어가던 칼가가 중첩된 공간에 발을 들이는 레이를 보고 경악했다가, 이내 분노를 터뜨렸다.
이 중첩된 공간 속에선 칼가 또한 전력을 다할 수 있었다.
[크르르륵!!!]
바람의 칼날이 사방에서 날아든다.
레이는 바람의 칼날을 받아내다 문득 인상을 썼다.
흐름을 만들어내는 바람 정령의 권능이 몸을 침범한다.
마나가 덧씌워지지 않은 피부가 점점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까다롭긴 하군."
칼가가 발하는 공격도 굉장히 위협적이었지만, 레이를 가장 곤란케 한 건 휘몰아치는 바람 탓에 지면에 발을 디딜 수 없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근력이 좋아도 허공을 박차는 것만으론 추진력을 제대로 얻을 수 없다.
레이가 혀를 차며 모로스를 한 바퀴 돌렸다.
중첩된 공간을 헤집으며 쏘아진 도약 검기가 칼가의 등허리를 후려쳤다.
콰가각!!!
[키에엑!!]
레이는 재차 모로스를 빙글 돌려냄과 동시에 심장의 서클을 역회전시켰다.
코어를 제어하기 위해 조율된 서클이라 마법 발현에 적합하진 않았다만, '점화' 정도의 간단한 마법은 사용할 수 있었다.
콰앙!!
레이의 후방에서 화염이 터져 나왔다.
레이는 그 후폭풍을 활용해 곧장 칼가를 향해 쇄도했다.
칼가가 대응하려는 순간 허공을 찢고 도약 검기가 떨어져 내린다.
콰가각!!
도약 검기가 칼가의 다리 하나를 박살 냈다.
레이는 고통 탓에 정신을 못 차리는 칼가의 갈기를 붙잡았다.
모로스를 나선형으로 타고 오른 두 자락의 검기가 거칠게 공명하며 휘둘러진다.
촤악!!!
레이가 하나 남은 칼가의 날개를 베었다.
칼가가 힘을 잃고 지면으로 추락했다.
콰아앙!!
칼가는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뒷발로 지면을 디디고 섰다.
여기서 더 밀려나면 중첩된 공간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리 되면 실체화를 풀고 도망가는 것도 어려워졌다.
[키에엑!!]
칼가가 바로 옆에 추락한 레이를 향해 앞발을 휘두른다.
인간의 주먹질을 어설프게 모방한 것 같았지만, 거기엔 고위 정령의 권능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레이는 곧장 관절 사이에 마나를 집약시켰다.
관절 사이의 마나가 터져나가며, 신체가 극한까지 가속된다.
콰앙!!!!
칼가의 앞발이 휘둘러졌을 때, 레이는 이미 칼가의 품 안에 있었다.
검기에 휩싸인 모로스가 칼가의 오른쪽 가슴을 파고든다.
칼가는 지독한 고통과 함께 균형을 잃었다.
콰가가강!!!
칼가의 거대한 몸뚱이가 산맥을 구른다.
칼가는 중접된 공간에서 벗어나고도 수십 그루의 나무를 쓰러뜨린 후 움직임을 멈췄다.
레이는 칼가가 도망갈 수 없도록 칼가의 위에서 모로스를 겨눈 채 숨을 몰아쉬었다.
저 너머에서 루나가 허겁지겁 뛰어온다.
칼가 앞에 도착한 루나가 거칠어진 호흡을 주체 못하며 레이를 올려봤다.
레이가 루나를 향해 맑게 웃었다.
"얘랑도 계약해볼래?"
그리 말하는 레이의 몸뚱이에선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자상만 다섯 군데에, 등에는 화상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레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맑게 웃고 있었다.
루나는 가슴 한편이 쓰라렸으나, 티를 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해볼게요."
성장 (4)
83화
루나는 성공적으로 고위 정령과 계약 각인을 체결했다.
최종적으로 루나는 중급 정령 하나, 중상급 정령 둘, 상급 정령 하나, 고위 정령 하나를 아래에 두게 되었다.
어지간한 그래듀에이트나 고위 마법사와 비견해도 모자람 없는 전력이었다.
레이가 약간 떨떠름한 얼굴로 턱을 매만졌다.
"어, 음..."
계약한 정령들을 일렬로 세워 놓으니 그 위세가 생각보다 대단했다.
루나는 고위 정령과 계약 각인을 맺어 놓고도 셀로미어에 여유가 꽤 있는 듯했다.
레이가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두 눈을 마주했다.
"루나, 똑똑한 너라면 잘 알고 있겠지만."
"..."
"네게 귀속된 정령들의 힘은 강대하고 치명적이야. 함부로 남발해서는 안 돼."
"...알겠어요. 조심할게요."
"그래, 착하다."
피식 웃은 레이가 정령들을 돌아보았다.
정령이 다섯이나 되긴 하는데 죄다 바람 정령이었다.
'기회가 되면 종류별로 하나씩 루나와 계약시켜봐야겠어.'
정령들은 보통 다른 계열의 정령을 다루는 마법사와 계약을 맺기 싫어했지만.
정령들의 호불호에 대해 레이는 정말이지 관심이 없었다.
[크르륵...!]
고위 정령 칼가가 정신을 좀 차렸는지 레이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레이가 비웃음을 흘렸다.
"어이, 정령 5호기. 눈 안 깔아?"
[내 이름은 5호기가 아니라 '칼가'다. 빌어먹을 하르시아의...]
"루나, 저놈 사람 말 좀 못 하게 해."
"...알겠어요."
[크르르륵!]
루나의 명령에 따라 소통이 막힌 칼가가 레이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정령이 인간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가는 순전히 개체 차이였다.
중급 정령 중에도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는 개체가 있고, 최고위 정령 중에도 인간과 언어적 소통이 불가능한 개체가 있다.
칼가의 경우 꽤 유창하게 인간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지만, 레이는 칼가가 입을 놀리게 둘 생각이 없었다.
'저놈 아가리 방치해봤자 골치 아픈 일만 늘어나지.'
몇 번 더 입을 뻐끔거리던 칼가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거친 기세를 뿜어냈다.
레이가 낄낄 웃으며 검을 뽑으려는데, 그보다 앞서 루나가 정령들을 움직였다.
콰가가각!!
루나와 계약한 상급 이하의 정령들이 칼가를 할퀴어 대기 시작했다.
고위 정령을 공격해야 하는 상급 이하의 정령들이나 아랫것들에게 몰매를 맞아야 하는 칼가나 둘 다 죽을 맛이었다.
결국 기가 눌린 칼가가 고개를 다시 지면에 처박았다.
나름의 항복 표시였다.
레이가 칼가의 뺨을 툭툭 쳤다.
"앞으로 잘하자?"
[...]
칼가는 더는 기 싸움을 하지 않고 레이와 눈을 피했다.
로필렌은 그 광경을 보며 기함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좋은 재능을 타고난 정령사라 해도 단기간에 강력한 정령들과 유리한 계약을 맺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허나 루나는 레이의 도움을 받아 하루도 안 되어 고위 정령사라 불릴 만한 힘을 얻었다.
더군다나 아직 셀로미어에 여유가 충분하다고 한다.
'저기에 마법까지 본격적으로 배우면...'
얼마 안 가 로커스트와 비견되는, 혹은 그 이상의 전력을 지닌 마법사가 탄생할 것이다.
물론 지능이 따라주지 않으면 아무리 고성능의 서클을 지녔다고 해도 마법을 제대로 익힐 수 없다.
허나 레이는 분명, 루나가 굉장히 독보적인 지능을 지니고 있다고 평했다.
'어쩌면 정말...'
리실로테를 넘어서는 대마법사의 탄생을, 지켜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로필렌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짓누르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숨을 헐떡이는 로필렌을 향해 레이가 루나를 데려왔다.
"로필렌 님."
"?"
"그만 돌아갑시다. 돌아가는 길에 루나에게 정령 다룰 때 주의해야 할 것들 좀 설명해 주세요."
"어, 응. 알겠어."
"아, 그 전에..."
레이가 상의를 탈의했다.
살갗에 눌어붙었던 천이 떨어지며 화상을 입은 부위에서 진물이 흘러내렸다.
레이가 세리아에게 받아왔던 포션 뚜껑을 따서 로필렌에게 내밀었다.
"이것 좀 상처에 뿌려주실래요?"
로필렌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는 한 걸음 떨어져서 레이의 타들어 간 살가죽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벌써 몇 번째일까.
흉측한 상처를 입은 레이의 등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던 적이.
루나의 기억 속에서 레이는, 온몸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언제나 언제나 안심하라는 듯 환히 웃어주고 있었다.
더는 그 웃음을, 루나는 보고 싶지 않았다.
*
요하나는 며칠째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불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허리춤에서 흔들리는 은색 검의 무게를 느낄 때마다 요하나는 속을 헤집는 짜증과 자괴감에 탓에 도저히 진정할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선 레이가 선물한 은색 검을 거들떠도 안 보고 싶었다.
허나 요하나가 은색 검을 아무 데나 던져둘 때마다 루나가 매번 낑낑거리며 검을 들고 찾아왔다.
요하나는 그런 루나의 강요 아닌 강요 탓에 하는 수 없이 은색 검을 메고 다녔다.
요하나는 정말로 정말로 은색 검이 싫었다.
여자들은 아무도 요하나가 선물 받은 은색 검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은색 검을 보고 눈을 빛내는 건 전부 남정네들뿐이었다.
그리고 눈을 빛내는 남정네엔, 기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 오오...! 오오오옥...!!"
아이들의 검술 수련을 돕기 위해 보육원에 들렀던 피코르가 입을 쩍 벌린 채 되다 만 탄성을 토해냈다.
"이게 진품이라고...?!"
피코르가 컥컥 숨을 몰아쉬며 동행한 젠킨슨에게 물었다.
젠킨슨은 피코르의 반응을 백번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실 마탑에서 레이가 제플린 님께 직접 구매한 거다."
"오옥...!! 오오옥...!!"
이리 격한 반응을 보인 건 피코르 하나만이 아니었다.
평소 진중하고 엄격하기 짝이 없던 기사들이 피코르의 이야기를 듣고 우르르 보육원으로 달려왔다.
요하나의 검을 본 기사들은 하나같이 침을 질질 흘리며 탐욕을 감추지 못했다.
그 과묵한 디디에조차 털썩 무릎을 꿇으며 탄성을 질렀다.
"내가 살아생전 제플린의 X 시리즈를 두 눈으로 보게 되다니...!!"
요하나에게 검을 빌려 손에 쥔 디디에의 눈동자가 탁하게 풀렸다.
"세상에...!! 진짜 X 시리즈야...!!"
기사도를 중시하며 사치를 멀리했던 디디에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계속되는 기사들의 꼴불견에 요하나는 점점 더 당황하기 시작했다.
레이가 좋은 검을 선물해주었다. 그건 알고 있었다.
허나 요하나는, 레이가 선물해준 검의 가치가 기껏해야 애들한테나 조금 비싼 정도일 줄 알았다.
헌데 항상 으리으리한 갑주를 입고 다니는 기사들마저, 레이가 선물한 검을 보고 충격을 받아 픽픽 쓰러져 갔다.
'연기... 하는 건가? 레이랑 짜고서?'
요하나는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다.
허나 요하나는 얼마 못 가 자기 추측이 틀렸음을 인정해야 했다.
항시 백작의 곁을 지키던 모하메드마저 소식을 듣고 보육원으로 달려온 것이다.
"제플린의 X 시리즈가 여기 있다고...?!"
"아버지!! 이리 와보십시오!!"
헐레벌떡 디디에에게 다가간 모하메드가 매끄럽게 뻗어 나온 은색 검신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조심스레 은색 검을 손에 쥔 모하메드가 요하나에게 비굴한 태도로 부탁했다.
"요, 요하나, 네 검에, 딱 한 번만 검강을 덧씌워봐도 되겠니...?"
"...괜찮아요."
요하나의 허락이 떨어지자 모하메드가 검을 하늘 높이 들었다.
검신을 타고 흘러들어 간 마나가 삽시간에 압축되어 검강을 생성한다.
모하메드는 전율했다.
검강이 이토록 부드럽고 신속하게 발현될 수 있음을 오늘 처음 깨달았다.
찬란히 빛나는 검강을 보며 기사들이 홀린 듯이 박수를 쳤다.
"오오오...!!"
"우오오오...!!"
"과연 명품은 이름값을 하는군...!!"
저들만의 세계에 빠져 벗어나지 못하는 기사들을 향해 요하나가 어렵사리 물었다.
"그거... 많이 비싼 검이에요...?"
"맙소사!! 많이 비싼 검이냐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내뱉고 자빠졌...?!"
호통을 치는 피코르의 뒤통수를 젠킨슨이 가볍게 갈겼다.
피코르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목을 가다듬었다.
"큼, 제플린이라는 이름 높은 장인이자 마법사가 제작한 검이란다. 특히 X 등급은 물량이 거의 없어서 부르는 게 값이지."
요하나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
제플린이니 X 등급이니 기사들이 떠들어봤자 그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요하나는 잘 와닿지 않았다.
"그래서... 얼마나 비싼 검인데요?"
1,000 골드? 아님 5,000 골드?
요하나는 나름대로 굉장한 숫자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불안한 듯 손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기사들이 서로 시선을 나눈 후 요하나와 거리를 좁혔다.
검의 가격이 밖으로 새나가 봤자 전혀 좋을 게 없었다.
"요하나..."
모하메드가 요하나의 허리춤에 검을 꽂아 넣으며 손가락을 입에 붙였다.
"남에게는 비밀로 해야 한다. 레이가 네게 선물한 건 정말 가치 높은 보검이야. 이 검을 구매하려면 적어도..."
모하메드가 잠시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2~30만 골드 정도 필요했나?"
"경매에 나오면 4~50만 골드는 우습게 넘어간다고 들었습니다."
"귀족들 간의 자존심 싸움이 붙어 100만 골드에 낙찰된 적도 있다고 하더군요."
"...?"
요하나가 공황 상태에 빠졌다.
20만? 100만? 그럼 0이 대체 몇 개 붙는 거지?
1골드면 한 끼를 때울 수 있는 빵만 10개를 구매할 수 있다.
자기 옆구리에 달린 검을 팔면 빵 10,000,000 개를 구매할 수 있단 소리다.
"...?"
요하나의 눈이 팽글팽글 돌기 시작했다.
젠킨슨이 정신을 못차리는 요하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아이에게 맡기기엔 너무나도 귀한 물건이나..."
젠킨슨은 연이어 요하나의 허리춤에서 은색 검을 검집 째로 뽑아냈다.
"네가 지닌 찬란한 재능에 비하면 초라한 물건이기도 하다."
스릉!
찬란히 빛나는 은색 검신이 뽑혀 나온다.
젠킨슨은 레이가 준비했던 평범한 검집에 은색 검을 납검한 후 다시 요하나의 허리에 동여매 주었다.
"요하나."
"네, 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요하나를 보고 젠킨슨이 따뜻하게 웃었다.
"레이 그놈이 눈치 없는 짓을 하긴 했다. 아주 고약한 짓을 했지."
한참 때의 소녀에게 아무리 좋은 검을 선물해봤자 값싼 장신구보다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말이다..."
젠킨슨은 오랜 시간 레이를 지켜봤다.
그의 헌신을, 그의 노력을, 그의 고통을 지켜봤다.
불가해의 재능을 타고나서도 남을 위해 스스로의 삶을 태우길 마다 않는, 레이의 뒷모습을 오랜 시간 지켜봤다.
"단언컨데... 너희가 평생을 살아가도..."
인간이란 본디 호의에 빠르게 익숙해지는 생물이다.
허나 젠킨슨은, 아이들이 이것만은 알아주었으면 했다.
"그 녀석만큼 너희를 아끼고 사랑해준 존재를 만날 수는 없을 거다."
부모조차 버린 너희를.
세상의 악의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던 너희를.
레이는 제 살을 깎아가며 거두었다.
"그러니까 레이와 얼른 화해했으면 좋겠구나."
젠킨슨의 진심이 담긴 목소리에, 요하나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성장 (5)
84화
레이는 백작령으로 귀환한 후 계속해서 바쁜 시간을 보냈다.
어수선해진 보육원 분위기를 바로잡고 아이들의 성장을 점검하는데 시간이 꽤 깨졌다.
평소처럼 바쁜 하루를 보낸 레이가 조금 늦은 시간에 집으로 돌아왔다.
"...?"
레이가 살짝 인상을 구겼다.
오늘은 벨라가 일을 쉬는 날이었는데, 집 안에서 사람 간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엄마, 손님 왔어?"
레이가 별생각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카렌과 시선이 딱 맞았다.
카렌의 목에서 황금색 보석이 박힌 목걸이가 찰랑였다.
카렌은 레이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곧장 뛰어와서 레이의 품에 안겼다.
"레이 왔다!"
"...너가 왜 내 집에서 나오냐?"
벨라가 주방에서 나오며 레이의 의문에 답해주었다.
"내가 좀 머물다 가라고 했어."
"...엄마가?"
"그래. 밥은 먹었니?"
"어... 먹고 오긴 했어."
"그럼 사과 좀 깎아 올 테니 그거나 좀 먹어."
이야기를 듣던 카렌이 냉큼 손을 들었다.
"제가 깎아올게요!"
부엌에서 칼 다루는 법도 나름 열심히 배워놨던 카렌이다.
자신만만한 카렌의 태도에 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맡겨볼까?"
카렌이 레이에게서 떨어져 얼른 주방으로 향했다.
레이가 의아한 얼굴로 벨라를 쳐다봤다.
집에 손님을 들이는 경우야 간간이 있었지만, 벨라는 언제나 해가 저물기 전에 손님을 집 밖으로 내보내고는 했다.
"웬일이야, 엄마?"
"으음..."
졸음을 참듯이 미간을 찌푸린 벨라가, 얼마 못 가 쿡쿡 웃기 시작했다.
"목걸이 예쁘더라."
"...?"
"네가 선물한 목걸이라며?"
"그...렇지?"
벨라의 웃음소리가 한 층 커졌다.
"오늘 아침에 집으로 오다가 카렌을 만났어."
카렌은 우연히 벨라를 마주친 것처럼 행동했지만, 벨라는 한참 전부터 카렌이 '라일락의 저녁'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카렌은 벨라와 함께 길을 걸으며 눈치를 보더니 얼마 안 가 목걸이를 꺼내 보이며 레이가 선물해준 목걸이라고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했다.
"워낙 값비싼 물건이라 남들에겐 함부로 내보이지도 못하고, 또래 아이들에게 자랑해봤자 불화만 생기니, 자랑할 사람을 찾다 찾다 결국 나를 찾아온 것 아니겠니. 그래서 마음껏 자랑해보라고 집에 데려왔다."
집으로 돌아온 벨라는 잠도 못 자고 카렌과 몇 시간이나 레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렌은 레이가 누구보다 똑똑하고, 강하고, 상냥한 사람이라 말했다.
그래서 너무너무 좋아한다고, 얼굴을 붉히며 덧붙였다.
벨라는 자기 아들을 이토록 좋아해 주는 아이가 있다는 것이 참 즐거웠다.
"아들 키워봤자 소용없다더니. 엄마한테는 못 생긴 약재나 몇 개 던져주고는 귀여운 여자애한테 저리 예쁜 목걸이를 사줘?"
"아니 엄마, 뭔 열셋 먹은 애한테 질투를 하고 그래?"
벨라가 깔깔 웃으며 되물었다.
"그래서, 며느리야?"
"하하, 글쎄."
레이가 의자에 등을 붙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머리 좀 더 굵어지고 나면 다른 남자한테 홀딱 반해 도망갈지 어떻게 알고."
"어머, 이 주변에 우리 아들보다 잘난 남자가 있었던가?"
"그리 따지면 황도를 뒤져도 없긴 해?"
능청스러운 대답에 벨라가 재차 웃음을 터뜨렸다.
레이는 벨라를 바라보며 작게 한숨 쉬었다.
'며느리라...'
레이는 딱히 누군가와 인연을 맺을 생각이 없었다.
이 빌어먹을 세계에 정도 붙지 않았고, 그보다 살림 차려봤자 좋은 꼴을 볼 것 같지 않았다.
골골 거리다 일찍 뒤질 남편을 어느 여자가 좋아하겠는가.
'...좋아하려나?'
전생에 인터넷 좀 구경하다 보면 남편 좀 빨리 뒈지라고 고사 지내는 글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레이가 실소를 흘리고 있자니 카렌이 주방에서 예쁘게 깎은 사과를 접시에 가득 담아 가져왔다.
조심스레 사과 접시를 내려놓은 카렌이 눈치를 보다가 레이 옆으로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레이가 카렌의 목덜미를 바라봤다.
오랜만에 옷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목걸이가 불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예쁘네.'
확실히 예쁜 목걸이였다.
이쪽 세계의 장신구 치고 디자인이 점잖은 편이라 더욱 마음에 들었다.
레이가 사과를 한 조각 씹어 먹은 후, 불쑥 입을 열었다.
"카렌."
"으, 응...?"
한껏 긴장한 카렌을 향해 레이는 덤덤하게 말했다.
"열심히 해. 기회가 될 때, 공부도 열심히 하고, 검술도 열심히 배우고, 친구들도 많이 사귀어 놔."
"어... 응? 알겠어!"
카렌이 파닥파닥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는 말없이 사과를 다시 집어먹었다.
슬슬 카렌의 눈높이를 따라잡고 있었다.
편식하지 말고 이것저것 열심히 먹어야 했다.
*
로필렌이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루나를 보고 지긋이 입술을 씹었다.
루나에게 본격적으로 마법 교육을 시작한 후, 로필렌은 식은땀을 흘리는 날이 많아졌다.
루나를 마주하고 있자면 자꾸만 속이 거북해지고 심장이 빠르게 뛴다.
로필렌은 처음에 자신이 루나의 재능을 질투하고 있다 생각했다.
아니었다.
로필렌은 루나의 재능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모든 마법사는 처음에 하나의 서클을 지닌다.
그리고 심장을 회전하는 하나의 서클을 분열시켜 고리의 개수를 늘려간다.
서클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고차원의 마나 연산이 가능해지고, 이에 따라 더욱 강력한 마법을 발현할 수 있게 된다.
마법의 분류도 서클을 기준으로 이루어진다.
예컨데, '6서클 마법'이라 함은 최소 여섯 개의 서클이 있어야 발현 가능한 마법을 가리킨다.
서클을 무한정 늘릴 수는 없다.
분열된 서클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활용하기 위해선 제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지닌 마법사라 해도 오랜 세월이 걸렸으며, 서클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그에 따른 부담이 거대해졌다.
인간이 닿을 수 있는 끝자락이라 여겨지는 9서클.
그 지고한 경지에 오른 대마법사의 숫자가 한 손에 꼽히는 이유였다.
'하지만 이 아이는...'
루나는, 서클의 성능이 평범한 마법사에 비해 월등히 뛰어났다.
하나의 서클만으로, 2서클에 해당하는 마법을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을 만큼 말이다.
이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특혜였다.
'그게 끝이 아니야.'
리실로테가 남긴 유산들.
황실 마탑보다도 패러다임이 앞서 있는 괴이한 수학 지식들.
그리고 불가해한 수준의 이해력과 계산력.
루나는 그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로필렌은 확신했다.
루나가 3서클만 되어도, 충분한 시간과 지원이 갖춰지면, 제한적이나마 대마법조차 구현할 수 있으리라고.
'이 아이는 괴물이 될 거야...'
루나가 그 재능을 완전히 개화한다면, 설령 전성기의 하르시아라 해도 맞상대가 될까 의문이었다.
로필렌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항거할 수 없는 재앙의 씨앗을 제 손으로 꽃 피우고 있다는 사실이.
로필렌을 자꾸만 두렵게 만들었다.
로필렌은 다분히 충동적으로 물었다.
"루나, 너는... 꿈이 뭐니?"
루나가 무엇을 갈망하든, 세상은 그녀를 막아 세울 수 없을 터다.
로필렌은 쾅쾅 뛰는 가슴을 짓누르며 루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루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착한 마법사요."
"...?"
로필렌이 눈을 깜박이다 다시 물었다.
"꿈이 뭐라고?"
"착한 마법사요."
로필렌이 잠깐 고민했다.
착하다는 형용사가 마법사란 명사 앞에 올 수 있는 단어였나?
고개를 갸웃거린 로필렌이 미심쩍은 얼굴로 되물었다.
"어... 왜?"
"..."
루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검게 변한 시야를 언젠가의 풍경이 뒤덮는다.
루나는 남기고자 하는 기억을 잊지 않고 저장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루나는 아직도, 그날들의 기억을 밤마다 돌려보곤 했다.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
혹은 일백의 암흑 정령이 숲을 뒤덮었던 날.
한 소년이, 터져 나간 관절 사이에서 피를 질질 흘리며 비틀대면서도.
두려움에 떨며 울고 있는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주던 광경을.
소녀는 소년을 향해 어째서 나를 구하려고 애 쓰냐고 물었다.
그때 소년은 낄낄 웃으며 답했다.
너는 착한 아이니까.
착하고 훌륭한 마법사가 될 테니까.
그러니까 나중에, 너한테 떡고물 좀 얻어먹으려고 그랬다고.
뒷말이 거짓말인 것은 소녀 또한 알고 있다.
소년은 다만, 소녀가 착하고 훌륭한 마법사가 되길 바랐다.
그러니까 루나는 착한 마법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노력하다보면, 언젠가는 훌륭한 마법사도 될 수 있겠지.
때문에 루나의 꿈은 착하고 훌륭한 마법사였다.
단지 그뿐이었다.
루나가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저는 착하고 훌륭한 마법사가 될 거예요."
소녀의 광기 어린 맹목을, 로필렌은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었다.
"과연..."
로필렌이 실소했다.
과연, 눈앞의 아이는 타고난 마법사였다.
맹목은, 마법사의 가장 우선 되는 자질이었다.
"부디 그 꿈이 이루어지길 바랄게."
자리에서 일어선 로필렌이 책상을 치웠다.
루나가 추후 어떤 존재로 발아하든 그건 레이, 그러니까 하르시아가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로필렌은 그저 맡은 소임을 다하면 되었다.
"루나, 네가 레이에게 받은 아공간 좌표값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알려줄게."
로필렌은 이미 리실로테 레코드가 무엇인지 레이에게 전해 들었다.
로필렌은 오늘 루나에게 리실로테 레코드에 접속하는 방법을 알려줄 생각이었다.
처음엔 너무 이르지 않나 싶었지만, 루나의 재능이라면 '극한'을 경험한다 해도 압도당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원리는 간단해. 결계를 활용해 아공간에 새겨진 정보를 눈앞에 구현하는 거야."
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공간에 정보를 새기기가 어렵지, 간단한 결계의 생성과 유지쯤은 서클 한두 개로도 해낼 수 있었다.
루나는 로필렌의 인도에 따라 결계를 펼쳤다.
로필렌이 루나의 결계를 점검한 후 한 발 떨어졌다.
"자, 레이가 준 좌표로 접속해보렴."
후욱!
루나의 시야가 일변 했다.
"...?"
루나가 자기 몸을 내려보았다.
미리 들었던 것과 달리, 육체의 감각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루나는 의아해하며 주변을 살폈다.
반짝이는 검은 공간이 시야에 가득 찼다.
루나가 서 있는 곳은, 별이 흐르는 우주 한가운데였다.
"안뇽~ 반가워."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루나가 고개를 돌렸다.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소녀가 허공을 딛고 있었다.
"아! 대답은 하지 마. 나는 사념 덩어리나 프로그래밍 된 데이터가 아니라 녹화된 영상에 가깝거든. 의사소통은 불가능하니 그냥 입 다물고 듣기만 하면 돼."
루나의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본 소녀가 말을 이었다.
"부디 하르시아의 계승자가 제대로 된 녀석을 골랐길 바랄게. 내가 줄 수 있는 건 멍청이에겐 아무 가치 없는 것들이거든. 하지만... 네가 정녕 나의 후계에 적합하다면..."
삑!
검은 공간 사이로 행성 하나가 붉게 점멸한다.
대지와 바다를 지닌, 루나가 얼굴을 아는 모든 사람이 살아가는 그 행성을 중심으로.
삽시간에 수많은 숫자들이 우주를 뒤덮기 시작한다.
삑!삑!삑!삑!삑!삑!
소행성, 위성, 행성, 그리고 불타는 거성들.
그 모든 것들의 위치와 궤도가 숫자로 변해 우주를 뒤덮는다.
"오벨리스크에서 수백 년을 넘게 관측하고 분석해 제작한 우주 지도야. 부디 네 재능이 충분하길 바랄게. 이건 이용하기에 따라..."
루나와 눈을 마주한 소녀의 입가가 황홀하게 일그러졌다.
"도시를, 나라를, 대륙을, 지면 위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삶을 파멸시킬 수 있는..."
별의 힘이니까.
실전 (1)
85화
레이는 오랜만에 디나르에 들렸다.
지미 보육원 디나르 지부는 애초에 레이의 영향력이 적어 레이가 없는 기간 동안 큰 혼란은 없었다.
레이는 피에트로와 약속을 잡고 가디 자작가의 영주성에 들렀다.
응접실에서 피에트로를 기다리고 있자니 리파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오랜만에 뵙네요."
언제나처럼 눈웃음을 흘린 리파가 다과 접시를 내려놓고 나가려는데 레이가 리파를 붙잡았다.
"아, 선물 가져왔어."
"선물요?"
"응."
리파도 나름 레어 등급 고아였다.
레이는 따로 챙겨두었던 필기구 세트가 포장된 상자를 건넸다.
"한 번 열어 봐."
"...!"
상자를 연 리파는 테두리가 금으로 장식된 필기구 세트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도저히 신분이 천한 사람에게 줄 만한 선물은 아니었다.
"제가 이런 걸 어떻게 받아요...!"
"어떻게 받긴 뭘 어떻게 받아. 그냥 받아서 잘 쓰면 되지."
"제가 한 게 뭘 있다고 이런 걸...!"
"네가 피에트로 님 보좌하느라 고생하는 건 영주성 사람들은 다 알고 있지 않아? 부담 가지지 말고 그냥 받아."
레이의 설득에도 리파는 거듭 선물을 사양했다.
레이가 한숨을 쉬며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리파, 내가 이 이야기는 안 하려고 했는데..."
"...?"
"네 아버지, 칼 말이야. 돌아가시기 전에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어."
레이가 창밖을 바라보며 잠시 과거를 회상했다.
"혹시 자기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홀로 남을 딸을 부디 챙겨달라고."
"...!"
리파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헉 소리를 냈다.
레이가 준비했던 선물을 직접 리파의 손에 쥐여주며 따뜻하게 웃었다.
"리파, 난 홀로 훌륭하게 성장한 네가 자랑스러워. 칼도 분명, 자랑스러워 했을 거야. 그러니까 이런 걸로 부담 가질 필요 없어."
리파가 눈시울을 붉히며 레이의 선물을 가슴에 안았다.
"고마워요."
"그래, 그만 나가 봐. 그건 잘 쓰고. 혹시 도둑맞으면 이야기해. 범인은 꼭 찾아서 족쳐줄 테니까."
리파가 고개를 끄덕이고 응접실을 나갔다.
리파가 나가고 얼마 안 돼 피에트로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레이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정정해 보이시니 다행입니다."
"자네는 키가 조금 큰 것 같군."
레이와 피에트로는 반갑게 손을 맞잡은 후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잘한 잡담도 많았지만, 아무래도 울트와 티티에 연관된 화제를 빼놓을 수는 없었다.
피에트로는 울트가 여전히 밖으로 돌고 있다고 말했다.
울트와의 연락책이 말하길, 울트의 겉모습은 많이 피폐해져 있었다고 했다.
"씁..."
레이가 눈살을 찌푸리며 작게 혀를 찼다.
울트와 티티가 도달할 최악의 결말은 레이가 막아냈다.
허나 여기서 무언가를 더 해야 하는가에 대해 레이는 꽤 막막했다.
티티의 소멸을 막아야 하는가?
혹은 타락할 운명을 타고났던 울트를 죽여야 하는가?
그게 아니면, 그저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되겠는가?
'편안히 소멸한 티티를 보고 단념한 울트가 자기 자리를 찾아갈 수도 있겠지만...'
어떤 선택지를 골라야 할지, 특정 선택지를 골랐다면 어떤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아, 빌어먹을."
이런 상황에 부닥칠 때마다 마음속에 응축됐던 분노가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티티 건이든, 황위 계승 건이든.
미래도 모르고 정보도 부족하니 사안이 조금만 거대해져도 함부로 간섭하기가 힘들었다.
당장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을 피하겠다며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있지만.
어쩌면, 당장 틀어막아야 할 어떤 사태를 방치하고 있는 꼴일지도 몰랐다.
'황위 계승... 1황자와 2황자...'
돌아가는 상황을 봤을 때 1황자가 황태자 직위를 잃고 2황자가 그 자리를 대신할 확률이 높았다.
2황자는 유능하나 잔혹하다.
2황자가 권력을 얻지 못하도록 막았어야 했나? 1황자가 홀로 날뛰도록 방치하면 안 됐나?
모르겠다.
지금 고민해봤자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야만 무엇이 정답이었는지 알 수 있을 터다.
'뭐... 그래도 여기가 변방이니 다행이지.'
황태자가 바뀌든 황제가 바뀌든 당장은 괜찮을 터다.
레이는 그리 생각했다.
*
레이는 피에트로와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고 영주성 밖으로 나왔다.
영주성 밖으로 나와 마을을 걸으니, 아침부터 자신을 쫓아오던 인기척이 여전히 느껴짐을 알 수 있었다.
레이가 실소를 터뜨렸다.
처음엔 인내심을 가지고 먼저 말을 걸어오길 기다렸지만, 상대는 디나르까지 쫓아와서도 접근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래서는 며칠이고 그림자를 붙이고 다녀야 할 판이었다.
레이는 골목을 도는 척 하며 슬쩍 몸을 숨겼다.
뒤따라오던 인영이 골목 사이로 고개를 내밀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없어...?'
요하나가 눈을 깜박인다.
그 순간 레이가 불쑥 나타나 뒤에서 요하나를 들어 올렸다.
"우왓!"
하늘로 휙 떠오른 요하나의 몸이 레이의 어깨 위에 안착 안착했다.
목마를 탄 모양새가 된 요하나가 기겁을 했다.
"내, 내려 줘!! 내려 줘!!"
요하나는 자기 허벅지 안쪽이 남의 살갗에 맞닿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다.
더군나다 디나르까지 따라오느라 몸에 땀이 꽤 찼다.
요하나는 진심으로 레이의 머리를 퍽퍽 내려치기 시작했다.
레이는 좀 버텨보려다가, 머리가 쪼개질 것 같자 얼른 요하나를 내려놨다.
"아이고야..."
얼얼한 정수리를 비비며 레이가 물었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졸졸 쫓아왔어?"
"..."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요하나가 허리에 매달린 검을 만지작거렸다.
원래는 레이에게 고맙다는 감정을 전할 생각이었다.
그 어떤 연결 고리도 없던 우리를 거두고, 지키고, 그리고 과분한 '무기'까지 선물해주어서 고맙다고.
그리 이야기할 생각이었는데...
"흑... 흐윽...!"
입밖으로 나오는 것은 그저 울먹임 뿐이었다.
레이가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요, 요하나...? 왜 그래?"
"으으...! 흑...!"
요하나는 울음을 참아보려는 듯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허나 얼마 못 가 땅에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씨이...! 나도 목걸이 받고 싶었단 말이야...! 흐윽...!"
주체하지 못한 서러움이 눈물로 변해 줄줄 흘러나온다.
요하나가 결국 엉엉 울기 시작했다.
"검 같은 거 필요 없단 말이야...!!"
요하나도 알고는 있다.
지금 이러는 게 철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레이는 요하나가 감히 상상키도 힘든 가치를 지닌 검을 선물해주었다.
기사들조차 요하나의 검을 보며 탐욕을 쉽게 숨기지 못했다.
다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요하나는, 비록 싸구려일지언정 예쁜 장신구를 선물 받고 싶었다.
"나 열심히 했잖아아..."
요하나는 무술에 있어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재능을 타고 났다.
허나 요하나가 검술이 좋아서 기사들의 교육을 열심히 따른 것은 아니었다.
나날이 늘어가는 검술 실력에 나름의 성취감은 느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요하나는 검술을 익힐수록 손발에 늘어나는 굳은살이 싫었다.
썩어가는 마물의 내장에 얼굴을 집어넣는 훈련이나, 며칠을 굶어가며 산을 기어오르는 훈련도 싫었다.
모두가 요하나를 천재라 추켜세워주었지만.
요하나는 결국 멋진 기사님보다 예쁜 공주님을 꿈꾸는 평범한 소녀였다.
그럼에도 요하나가 검을 놓지 않은 것은, 어떤 대단한 목적이나 각오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였다.
친구, 선생님, 기사.
그리고 레이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을 뿐이었다.
"나 열심히 했잖아...! 열심히 했는데 나는 왜 목걸이 안 주는데...! 흐아앙...!"
요하나는 레이가 자기 마음을 몰라주는 것이 너무나 서러웠다.
그래서 도저히 '고맙다'는 말 한 마디가 하기 힘들었다.
레이가 펑펑 우는 요하나를 가만히 지켜봤다.
사춘기 소녀다운 번민과 앙탈과 고집이 썩 귀엽게 느껴졌다.
레이는 요하나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허나 레이의 입꼬리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요하나."
"흐윽...?"
"너는 더 열심히 해야 해."
레이가 마른 눈으로 요하나를 마주 봤다.
그 차디 찬 시선에 요하나가 잠시 울음을 그쳤다.
"요하나, 너는 더 열심히 해서, 더 빠르게 강해져야 해."
눈물과 콧물로 범벅된 요하나의 얼굴을 소매로 닦아주며, 레이는 턱에 힘을 주었다.
리실로테가 만든 미궁에서 데어터 쪼가리가 지껄였던 내용들.
하르시아의 코어, 심장을 대체하는 장기, 불임과 내장 파열 등의 극심한 부작용, 그리고 죽음.
상황의 여의치 않으면, 결국 레이도 선택을 해야 할 터다.
그러니, 그렇게 되기 전에.
"열심히 노력해서, 날 빠르게 뛰어넘어야 해."
내가 널 더 몰아붙이지 않을 수 있도록.
혹은.
내가 너희에게 끔찍한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너는 반드시, 빠른 시간 안에 날 뛰어넘어야 한다.
"난 너희의 곁을 평생 지켜줄 수 없으니까."
요하나는 차갑게 굳은 레이의 시선에서, 잠시잠깐 슬픔이란 감정을 느꼈다.
훌쩍이던 요하나가 레이의 손을 억지로 떼어냈다.
"멋대로 만지지 마...!"
잠시 망설인 요하나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허락 받고 만져...요."
"아이고~!"
레이가 요하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자연스레 한탄이 이어졌다.
"우리 요하나가 어쩌다 이리 컸을까. 옛날엔 우리 요하나 만큼 솔직한 애가 없었는데."
"...!"
요하나는 레이의 품에서 몇 번 바둥거리다 이내 몸에서 힘을 뺐다.
꽤 오랜 시간, 요하나는 빨갛게 충혈된 눈가를 레이의 어깨 위에 비볐다.
"...우리 두고 멀리 가지 마."
요하나가 불쑥 말했다.
너희의 곁을 평생 지켜줄 수 없다는 말이 자꾸만 마음에 남았다.
레이가 요하나를 고쳐 안으며 킥킥 웃었다.
"그건 힘들고..."
이 거지 같은 세계를 구하겠답시고 까불다 보면 장거리를 이동해야 할 일도 생길 것이다.
제트기 같은 것도 없는 세상인지라 조금만 거리가 멀어져도 왕복하는데 시간이 보름 이상 깨졌다.
"정 내 옆에 붙어 있고 싶으면, 너희가 날 따라다닐 수 있을 만큼 강해져야지."
전력도 안 되는 꼬맹이들을 데려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요하나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레이는 치사해."
*
보육원으로 돌아온 요하나가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같은 방에서 생활하는 카렌이 목걸이의 보석을 보며 히죽이다 말고 황급히 목걸이를 옷 속으로 집어넣었다.
어색하게 웃는 카렌을 향해, 요하나가 성큼성큼 다가와 손을 뻗었다.
짤랑!
요하나가 카렌의 목걸이를 밖으로 보이게 빼냈다.
요하나는 아름답게 세공된 목걸이를 살피다가 입을 삐죽이며 툴툴 댔다.
"나 계속 열심히 할 거야."
검술도 열심히 배우고, 신체도 열심히 단련해서 싫으나 좋으나 레이 곁에 있을 거다.
"그리고 다음엔 나도 목걸이 받을래."
마치 선전포고처럼 느껴지는 요하나의 박력에, 잠시 당황했던 카렌이 배시시 웃어주며 요하나를 끌어안았다.
"알겠어. 요하나라면 이것보다 훨씬 좋은 목걸이를 받을 수 있을 거야."
카렌은, 요하나의 재능이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것도, 레이가 재능 있는 자를 사랑한다는 것도, 전부 알고 있었다.
'나는 요하나를 따라잡지 못해.'
시간이 지날 수록 격차가 벌어질 것이다.
요하나가 레이 곁에 서 있을 때, 자신은 레이의 그림자도 밟지 못하고 버려질 지도 몰랐다.
그렇다 해도 카렌은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우리 같이 열심히 하자."
"...응."
친구의 미소를 보며 요하나도 어쩔 수 없이 표정을 풀었다.
카렌이 요하나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저녁 먹으러 가자."
뜀박질을 하는 카렌의 목에서 목걸이의 체인이 짤랑였다.
사춘기의 아이들은 이리저리 흔들리며 방황하고, 또한 레이가 가리킨 하늘을 바라보며 성장해 간다.
그렇게 다음 해 봄이 찾아오기 전에.
요하나는 처음으로 검기를 발현했다.
실전 (2)
86화
해가 지나 레이는 14살이 되었다.
허나 아직 겨울이 다 지나가지 않아 날씨가 꽤 쌀쌀했다.
그나마 땔감으로 쓸 목재가 충분한 지역이라는 게 영주민들에겐 다행이었다.
레이는 계속해서 필립스 백작에게 황자와 관련된 소식을 전해 들었다.
최근에 1황자가 황태자 위에서 축출되고 2황자가 권력을 잡아가고 있다는 정보를 듣게 됐다.
2황자는 성격이 냉정하고 잔혹하여, 한바탕 피바람이 몰아치진 않을까 걱정하는 세력들이 많다 했다.
'뭐, 고모는 괜찮다고 하시니...'
알슈테인 가는 저번 습격 사건을 황실에게 따지고 들어 쏠쏠하게 재미를 봤다고 한다.
2황자가 황태자가 된다고 해도 황실이 실책을 저지른 건 변하지 않는다.
알슈테인 가가 선만 남지 않으면, 황실에게 이것저것 더 뜯어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 와중 세리아의 위명은 하늘 높게 치솟고 있었다.
로얄가드 두 명을 동시에 상대해 승리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많은 이들이 이를 진실로 여기고 있었다.
'과장이 섞였다고 해도 위명이 높아져서 나쁠 건 없지...'
처신에 주의를 좀 해야겠지만 말이다.
레이는 마지막으로 봤던 세리아의 모습을 떠올리며 수저를 들었다.
늦은 아침이다. 벨라가 차려준 식사에서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레이가 평소와 같은 인사를 건네 후 포크로 계란을 푹 찍었다.
맞은 편에 앉은 벨라가 레이를 바라보다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는 다다음 달쯤 은퇴하련다."
"그래?"
레이는 내심 기뻐하면서도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은퇴하고 뭐 할 거야?"
"글쎄."
벨라가 한숨 쉬었다.
모아 놓은 돈만 해도 먹고 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레이에게 들어가는 돈도 없다시피 했고 말이다.
다만 집구석에서 가만히 늙어가며 죽음을 기다리는 것도 사람으로서 행복한 일은 아니었다.
벨라는 이런저런 소일거리를 찾아봤으나 크게 마음 가는 일이 없었다.
"아이나 키우고 싶은데..."
"지금 나 키우고 있잖아?"
레이가 의아한 얼굴로 자기를 가리켰다.
벨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들은 키우는 재미가 너무 없어."
가만히 내버려 둬도 혼자 알아서 잘 날아다니니 지켜보는 부모 입장에서 좀 키우고 가르치는 맛이 떨어지긴 했다.
레이는 착잡한 감정을 숨긴 채 마주 웃었다.
벨라가 본래 가졌던 염원이 무엇이었는지 아는 처지에서, 죄책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벨라는 레이의 속마음을 알지 못한 채 흐뭇하게 아들을 바라봤다.
보육원에서의 봉사 활동은 어떠냐는 이야기가 나오던 차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똑똑!
레이가 먼저 일어서서 잠겨 있던 문을 열었다.
젠킨슨이 굳을 얼굴로 문 앞에 서 있었다.
"오, 마스터. 여기까진 웬일이에요?"
레이의 말을 듣고 벨라가 황급히 다가와 무릎을 낮췄다.
"안녕하세요, 젠킨슨 경."
"안녕하시오."
젠킨슨은 나름대로 예를 갖춰 벨라의 인사에 답했다.
신분 격차만 따지면 까마득했으나, 벨라가 레이의 의모인 이상 감히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벨라는 인사를 올린 후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었다.
레이가 젠킨슨을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무슨 일이신데요?"
"요하나가..."
"사고라도 쳤어요?"
"처음으로 검기를 발현하는 데 성공했다."
"...?"
레이가 장난스레 웃다 말고 얼굴을 굳혔다.
*
오전부터 영주성이 꽤나 떠들썩했다.
요하나는 젠킨슨의 수업 도중 검기를 발현했고, 젠킨슨은 곧장 요하나를 영주성으로 데려갔다.
시간이 비었던 기사들은 소식을 듣고 죄다 영주성으로 몰려왔다.
백작은 요하나를 영주성 안뜰로 데려가 기사와 알레시아까지 지켜보는 가운데 검기를 시범해보게 했다.
요하나는 집중 끝에 재차 검기를 발현하는데 성공했다.
모두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요하나는 사람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으며 해맑게 웃다가, 저 멀리서 다가오는 레이와 젠킨슨을 발견했다.
"그... 한 번 더 해볼게요."
요하나가 눈을 감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압축된 마나가 검을 타고 흐르며 점점 더 밝게 빛난다.
이윽고 섬광이 된 마나의 기류가 강렬한 예기를 발생시켰다.
완벽하진 않으나, 명백한 검기였다.
호흡을 고른 요하나가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콰앙!!
쏘아진 검기가 10 m가량 떨어져 있던 나무 표적을 두들겼다.
비록 어설픈 검기인지라 나무 표적조차 완전히 부수지 못했지만, 요하나의 나이가 이제 열넷인 걸 감안하면 정말 믿기 힘든 성과였다.
젠킨슨이 심란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레이에게 물었다.
"너 대체 애들한테 뭘 먹이고 키웠길래 저런 녀석이 자꾸 나오냐?"
"...그러게요?"
레이도 슬슬 헷갈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초월자에게 부여받은 권능이 고아 가챠 확률업은 아니었을까?
이쯤 되니 개소리도 진지하게 고민되기 시작했다.
젠킨슨이 투덜댔다.
"저 아이가 검을 일찍 배운 것도 아니잖느냐."
젠킨슨 말마따나, 기사들이 요하나의 재능을 알아보고 전폭적인 지원을 해준 것은 기껏해야 5년 내외였다.
14살에 엑스퍼트도 굉장한 성과인데, 더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으로 가르쳤다면 엑스퍼트에 오르는 시기가 더 빨라졌을 것이다.
'운이 정말 좋았다면... 하르시아와 같은 나이에 엑스퍼트에 올랐을 수도 있겠어.'
물론 요하나가 하르시아와 비견되는 재능을 지녔다는 뜻은 아니다.
하르시아는 요하나보다 훨씬 나쁜 상황에서 엑스퍼트의 경지를 개척했다.
황제의 자손이었던 하르시아는 의식주 측면에선 요하나와 비교도 되지 않는 호사를 누렸을 테지만, 그는 서자였다.
보는 눈이 많아, 검술을 배우긴커녕 황제의 허락 없이 함부로 검조차 쥐기 힘든 위치였단 뜻이다.
그럼에도 역대 최연소의 나이에 엑스퍼트의 경지에 올랐다.
'뭐, 어쨌든...'
요하나가 정말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음은 틀림없었다.
요하나는 모두의 찬사를 받는 와중에도 레이의 눈치를 살폈다.
차마 먼저 앵기지는 못하고, 레이가 빨리 다가와 칭찬해주길 기다리는 모양새였다.
레이가 요하나에게 다가가려 한 순간.
알레시아가 레이를 붙잡았다.
"으음, 나의 기사여."
알레시아는 근래 체중 조절에 성공하여 자신감이 붙은 상태였는데, 어째 지금 목소리는 크게 풀이 죽어 있었다.
알레시아가 고민 끝에 말을 이었다.
"첩을 들여도 세 명까지는 눈감아주도록 하마..."
레이가 실소를 터뜨렸다.
알레시아가 입꼬리를 아래로 떨어트린 채 투덜댔다.
"다들 너무하는구나..!"
신분은 천한 주제에 왜 이렇게들 잘났는지 모르겠다.
루나는 웬 집채 만한 정령과 계약을 맺어 데리고 다녔고, 요하나는 열넷에 엑스퍼트의 경지에 올랐으며, 카렌은 입고 있는 옷은 꾀죄죄한 주제에 그 미모만은 아름답게 빛났다.
알레시아로서는 뒷목을 잡을 일이었다.
"나의 기사여."
알레시아가 몇 달 전보다 조금 높아진 레이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나는 관대하니 내가 준 돈으로 첩에게 값비싼 장신구를 사주어도 용서하도록 하마."
레이는 최대한 웃음을 참아가며 대꾸했다.
"기왕 인심 쓰는 거, 여섯 명까지 늘려주시는 게 어때요?"
"첩을 여섯이나 들이겠다는 것이냐...?!"
"요일마다 다른 여인의 마중을 받는 게 제 꿈이었던 지라."
"나의 기사는 변태로구나...!"
곧 죽어도 '나의 기사'는 버리지 못하는 알레시아였다.
레이가 낄낄거리며 손을 휘저었다.
"농담입니다, 아가씨. 어쨌든 애들이랑은 친하게 지내세요. 언젠가는 도움받을 일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첩들과 친하게 지내라니, 나의 기사는 잔혹하구나아..."
"첩 이야기는 그만하고요."
레이는 요하나가 삐치기 전에 얼른 다가가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요하나는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 틱틱거리면서도 레이의 손길은 쳐내지 않았다.
다음 날 요하나는 디디에의 종자로 들어가게 되었다.
엑스퍼트의 경지에 오른 이상 아무래도 소속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다.
디디에는 종자로 들이게 된 요하나를 보고 뿌듯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젠킨슨이 떫은 얼굴로 한숨을 푹 쉬었다.
"저 녀석은 종자 복이 터졌군."
요하나처럼 재능 넘치고 귀엽고 부지런한 종자를 대체 어디서 구하겠는가.
젠킨슨은 바로 옆에 서 있는 자기 종자를 돌아보았다.
'돌겠군.'
이걸 종자라고 데리고 다녔나 싶어 자괴감이 휘몰아쳤다.
한편 레이 또한 디디에가 요하나의 뺨을 찰싹 소리만 나게 가볍게 치는 장면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어차피 오래 얼굴 보고 지낼 거 저렇게 훈훈하게 계약을 마무리하면 얼마나 좋은가?
헌데 자기 마스터란 작자는 거칠게 무두질한 장갑까지 직첩 챙겨오는 잔혹함과 찌질함을 보였다.
'하여튼 속이 좁아서는.'
젠킨슨과 레이는 서로를 마주 보고 눈으로 욕을 했다.
그렇게 요하나가 스콰이어가 되고 얼마 안 가.
루나가 2서클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루나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2서클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미래의 대마법사라 추앙받는 천재 중엔 본격적으로 서클을 수련하기 시작한 후 두 달도 안 되어 2서클에 오른 자도 있었다.
허나 루나의 서클은, 평범한 서클이 아니었다.
이를 명확히 아는 자는 루나 본인과 로필렌 정도였다.
물론 레이와 백작가 기사들도, 루나가 서클의 숫자에 비해 훨씬 강력한 마법을 사용할 줄 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레이는 로필렌에게 마법 수업을 충실히 이행한 보상으로 리실로테 레코드의 백도어 좌표 중 하나를 공유해주었다.
로필렌은 희희낙락거리며 레이를 향해 몇 번이고 이마를 지면에 박았다.
로필렌이 리실로테 레코드를 구경한다고 일주일 동안 휴가를 신청해 골방에 박힌 사이.
레이는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고민에 잠겼다.
'루나가 마법을 제대로 사용하는 걸 좀 보고 싶은데...'
마법도 제대로 배우지 않은 1서클일 때도 '점화' 마법으로 숲 일대를 불태웠던 루나다.
지금은 화력이 얼마나 상승했는지, 또한 대인전에서 충분한 대처법을 익혔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루나."
"...?"
"날 적이라고 생각하고 한 번 마법으로 공격해볼래?"
루나가 곧장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건 못 해요."
칼같은 거절에 잠깐 얼을 탄 레이가 옆에 있던 젠킨슨을 가리켰다.
"그럼 젠킨슨 경은 공격할 수 있어?"
"...그건 할 수 있어요."
"그럼 젠킨슨 경에게 가장 자신 있는 마법을 전력으로 펼쳐 볼래?"
이야기를 듣던 젠킨슨이 기겁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니... 루나도 이제 실전 감각을 길러야 하잖아요. 결투 상대 좀 해주시면 안 돼요?"
"거절한다. 다른 상대를 찾아봐라."
"마스터, 쫄았어요?"
젠킨슨이 뒷목을 잡으며 이를 갈았다.
"쟤가 평범한 2서클이냐? 봐주면서 쟤를 상대하다간 내 목이 날아갈 거다."
루나를 기습해서 단칼에 목을 날린다면 모를까.
젠킨슨은 루나의 화력을 견뎌내면서 손발을 맞춰줄 자신은 없었다.
젠킨슨의 거절에 레이가 웃는 얼굴로 손을 저었다.
"에이. 걱정 마요, 마스터. 안 죽어요 안 죽어."
"확신하냐?"
"에이, 확신하죠."
"정말 확신하냐?"
"엠창이라도 찍을까요?"
"이런 미친놈이."
결국 젠킨슨이 무사할지는 자신할 수 없단 소리였다.
격분한 젠킨슨이 칼을 뽑아 레이에게 휘둘렀다.
레이는 약 5분간의 결투 끝에 젠킨슨을 제압한 후 덤덤하게 물었다.
"그럼 마스터, 이번 동계 훈련은 좀 깊숙이 들어가 보는 게 어떻겠어요?"
"더 깊숙이라면..."
"길면 한 열흘 정도 잡고 진행하는 거죠."
필립스 백작령 옆에는 시그니 산맥이 있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훈련을 진행하기에 아주 적합한 장소였다.
물론 깊이 들어갈수록 위험해지기에, 기사들은 보육원 아이들을 데리고 합동 훈련을 진행하면서도 보통은 산맥 외곽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근데 이제는 애들 머리도 좀 컸잖아요? 더 깊이 들어가도 괜찮지 않을까요?"
"네 말이 틀리지는 않지만, 많이 위험할 수 있다."
마물도 마물이었고, 시그니 산맥의 너머에 존재하는 루비하 왕국의 레인저들과 마주칠 가능성도 아주 작게나마 존재했다.
물론 루비하 왕국의 레인저들과 적대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들이 설치해 놓은 마물용 함정에 빠져 부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레이가 몇 미터 떨어져 있는 루나를 확인하곤 젠킨슨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저도 뒤에 따라갈게요. 애들 몰래."
"끄응."
이러나저러나 레이는 믿음직한 전력이었다.
또한 아이들의 실력을 발전시키기 위해선 어느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 했다.
젠킨슨이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기사들과 논의해 보마."
실전 (3)
87화
루비하 왕국에서 제국으로 통하는 경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가장 짧은 경로는 시그니 산맥을 가로지르는 것이다.
마물들이 잔뜩 살아가는 험지를 가로지르는 건 대단히 힘겨운 일이다.
때문에 루비하와 제국의 교역은 대부분 동쪽으로 크게 도는 육로, 혹은 서쪽으로 도는 항로를 사용하곤 했다.
오시리스 백작령의 경우 영지 끝자락에 존재하는 항구 덕분에 교역을 중개하며 꽤 짭짤한 이익을 남기는 중이었다.
일반적인 상단은 시그니 산맥을 가로지르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가능하다 해도 호위에 들어가는 병력을 생각하면 정말 수지 타산이 안 맞는 짓거리였다.
대규모 군사 활동 또한 불가능하긴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루비하 왕국은 엑스퍼트 급이나, 그에 근접한 무력을 지닌 이들로 레인저 부대를 편성했다.
레인저란 단어는 본래 국경 지역을 순찰하며 위험을 조기에 보고하는 병사들을 가리키곤 했지만.
루비하 왕국의 레인저는 제국과의 갈등 상황에 대비한 침투 부대 성격이 강했다.
만약 제국과 전쟁이라도 벌어진다면, 레인저들은 곧장 산맥을 넘어 남하해 교란 작전을 펼쳐 제국에게 피해를 입힐 것이다.
제국도 이를 인지하고는 있었으나 관심이 없었다.
소수의 레인저들이 남하해봤자 추가 보급도 없는 상태에선 활동 범위에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무리하게 제국 안쪽으로 파고든다면, 고립되어 전멸할 게 뻔했다.
제국이야 변방 땅덩어리를 조금 포기하고 동쪽 육로로 대규모 병력을 진군시키면 됐다.
정 레인저가 껄끄럽다면 시그니 산맥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해 틀어막는 것도 가능은 했다만.
그건 정말 비효율적인 짓거리였다.
때문에 제국에게 있어, 루비하 왕국이 레인저를 육성하는 것은 귀여운 앙탈에 지나지 않았다.
이게 바로 필립스 백작령과 가디 자작령이 국경과 인접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가치 없는 변방으로 취급되며 제대로 된 지원을 못 받는 이유였다.
"오해는 하지 마라. 레인저가 제국민에게 적대적인 것은 아니다. 이유 없이 제국의 심기를 거슬러 봤자 좋을 게 없으니 말이다."
젠킨슨이 예전에 한 번 했던 설명을 반복하며 아이들을 둘러봤다.
동계 훈련을 위해 시그니 산맥에 오른 지도 사흘이 지났다.
루나, 요하나, 카렌, 데런, 이안 등 나름의 성과를 내고 있는 보육원 아이들 열 명이 이번 동계 훈련에 참가했다.
젠킨슨과 디디에가 아이들의 인솔을 맡았다.
아이들은 사람 냄새를 가리기 위해 얼굴에 진흙을 펴 바른 채 방금 파낸 구덩이 속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카렌은 추위를 덜 느끼기 위해 무릎을 가슴팍으로 끌어당겼다.
"레인저들은 강해요?"
카렌의 물음에 젠킨슨이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험지에서의 작전 수행 능력은 기사들보다 뛰어난 편이지."
열약한 환경 아래 보급 없이 오랜 기간 생존하며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선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사냥, 추적, 위장, 냄새 지우기, 방향 잡기, 숙식 해결, 등등.
레인저는 이러한 분야에 있어 평범한 기사들을 많이 앞서 있었다.
"레인저가 아니라 기사라 해도... 최적의 상황에서 싸울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보급이 끊기거나 부대와 낙오되는 상황은 언제나 있을 수 있지. 그런 때를 대비하여 지금과 같은 훈련을 진행하는 거다."
젠킨슨은 아이들 앞에서 무게를 잡으면서도 내심 부끄러움을 삼켰다.
필립스 가의 기사들은 그 역할이 영지 방어에 치중된 탓에 험지에서의 생존 훈련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제 와서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생존 훈련을 시키려다 보니 도리어 기사들이 헤매고는 했다.
결국 지미나 매튜 같은 실전 경험이 풍부한 용병 출신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
'레이 그놈이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고 맨날 떠들어 대니...'
어린 놈이 그런 말을 하는 게 우스울 때도 있었지만, 일단은 정론이었다.
"힘들다 불평하지 말고, 오늘 경험을 잘 기억해 두어라."
카렌이 시커먼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힘든 것도 힘든 거였고, 몸을 제대로 닦지 못한 지 사흘이 지났다.
용변 같은 것도 마음대로 못 보고 매번 흔적을 지우기 위해 애써야 했고 말이다.
한 이틀 정도는 찝찝해 죽을 것 같았지만, 사흘쯤 되니 어느 정도 적응이 됐다.
"레인저를 만날 수 있을까요?"
"운이 좀 나쁘다면."
"...정말요? 여긴 제국령이잖아요?"
"레인저가 국경을 넘어 정찰이나 사냥을 나오는 경우도 간간이 있다. 나도 과거에 두 번 마주쳤지. 걱정할 건 없다. 기 싸움 잠깐 하고 손 흔들고 헤어지면 된다."
어차피 마물의 땅인 시그니 산맥이다.
국경을 조금 넘어왔다고 칼부림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조금 사이 나쁜 이웃이라 생각해라."
그리 말하며 젠킨슨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휴식을 취했으니, 다시 움직여야 했다.
아이들 중 체격과 체력이 가장 떨어지는 루나가 반쯤 넋이 나간 채 숨을 헥헥 몰아쉬었다.
카렌이 루나의 짐까지 대신 들어주며 루나를 일으켰다.
"루나, 힘내자!"
"...응."
평소에도 몸을 거의 안 움직이는 루나였다.
지금과 같은 강행군은 역시나 감당하기 힘들었다.
젠킨슨이 가볍게 핀잔했다.
"아무리 대단한 마법사라 해도 기초적인 체력은 길러야 한다."
"...네."
비실대는 루나를 카렌이 밀어주며 나아가길 잠시.
앞서 걷던 디디에가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자, 이걸 한 번 살펴 보거라."
쓰러진 나무들, 거대한 발자국, 그리고 무언가가 눈 위에 길게 끌린 자국.
"롱테일이 지나간 흔적일 거다."
롱테일은 도마뱀의 머리, 거대한 상체와 짧은 뒷다리, 그리고 길고 두꺼운 꼬리를 지닌 마물이다.
롱테일의 특징이라면 느림, 단단함, 괴력을 뽑을 수 있다.
직접 사냥을 하기보단 다른 마물의 사냥감을 뺏어 먹는 습성을 지니고 있었다.
"추적해봐라."
"..."
아이들은 긴장을 끌어올린 채 주변을 경계하며 롱테일의 흔적을 추적해갔다.
롱테일이 워낙 거체인데다 흔적이 가까운 곳으로 이어져 있어 아이들은 금방 롱테일을 찾아낼 수 있었다.
롱테일을 찾아낸 아이들이 허리를 숙이고 숨소리를 낮게 가다듬었다.
아이들이 있는 곳보다 조금 낮은 지대에서 롱테일은 다른 마물이 사냥한 듯한 동물을 뜯어먹고 있었다.
젠킨슨과 디디에가 서로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롱테일은 단단하고 느렸기에, 루나의 화력을 시험해보기도 좋은 상대였고 돌발 상황에서 기사들이 대처하기도 쉬웠다.
"루나, 네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마법을 준비해봐라."
"...준비하는데 30분 정도 걸려요."
"알겠다."
젠킨슨과 디디에는 퍽 흥미로운 시선으로 루나를 바라봤다.
롱테일 또한 다른 마물과 같이 마나에 관한 감각이 굉장히 예민하다.
과연 루나가 마법을 캐스팅하는 과정에서 롱테일을 상대로 얼마나 오랫동안 마나의 흐름을 숨길 수 있을 것인가?
그 또한 이번 테스트에서 확인해 볼 사안이었다.
우웅-!
방대한 마나가 루나로부터 발산됐다가 곧장 서클로 회수됐다.
빛을 발하는 서클이, 가시광선을 왜곡하는 결계에 갇혀 존재를 숨긴다.
차르르륵!
한정된 공간 안에서만 마나가 휘몰아친다.
루나는 로필렌에게서, 서클을 은폐하고 마나의 기류를 안쪽으로 끌어모으는 방법을 가장 먼저 집중적으로 배웠다.
그 성과가 지금 드러난다.
루나가 만들어낸 결계 안은 태풍과 같았지만, 그 외부는 고요함을 유지했다.
두 개로 분열된 서클 위에 수십 개의 룬어가 겹쳐 적혔다가 지워지길 반복한다.
모두가 경이로운 시선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젠킨슨과 디디에는 루나가 무슨 마법을 발현하려는 지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그 위력이 결코 만만치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제 중요한 건 루나가 현재의 은폐를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느냐다.
마법이 완성되어 갈수록 마나의 집합체가 더욱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는다.
마침내, 롱테일이 반응한다.
"카악?"
"15분. 나쁘지 않군."
손가락을 까닥이며 시간을 재던 젠킨슨이 흡족해했다.
마법을 절반 이상 완성하고 나서야 마물이 반응했다.
어지간히 재능 있는 마법사가 아니라면 마법의 발현을 시도하자마자 마물에게 들켰을 터다.
"자, 마법사를 보호해라."
젠킨슨의 명령에 아이들이 비장한 얼굴로 검과 방패를 들었다.
위협적인 마나의 기류를 감지한 롱테일이 쿵쿵 지면을 내딛으며 다가오기 시작한다.
속도는 느렸지만 그 거대한 덩치 탓에 압박감이 장난 아니었다.
침묵 속에서, 카렌이 먼저 첫발을 내디뎠다.
"가자!!"
"..."
아이들이 카렌을 따라 이를 악 문 채 대형을 갖췄다.
아이들의 목적은 루나가 마법을 완성할 때까지 롱테일의 시선을 끄는 것.
헌데 체급이 말도 안 되게 차이 나는 마물 앞에 직접 서니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그 찰나 롱테일이 몸을 빙글 돌렸다.
쫘아아아아악!!!
바람 찢어지는 굉음과 함께 두꺼운 꼬리가 휘둘러졌다.
데런이 무심코 방패를 들어 올리자 카렌이 칼자루로 데런의 방패를 찍어 눌렀다.
"막지 말고 피해!!"
콰앙!!!
롱테일의 꼬리가 마른 나무 몇 개를 부수고 지나갔다.
몸을 던져 간신히 공격 반경에서 벗어난 아이들이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방패로 막을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허나 피하지 못할 만큼 빠르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기사들은 이를 알기에 아이들을 롱테일과 맞붙게 했다.
롱테일의 공격을 몇 번 피하다 보면 거대한 마물과의 전투가 빠르게 익숙해질 터다.
팔에 들린 방패는 혹시나 즉사하지 말라고 쥐여준 거였다.
"일단 회피에 집중하며 주의를 끌어!!"
카렌은 꽤 그럴듯하게 아이들을 이끌었다.
요하나는 물론이고 데런이나 이안보다도 운동 신경이 떨어지는 카렌이었지만 평소 누구보다 열심히 수업을 들은 성과가 지금 발휘됐다.
콰앙!! 콰앙!!
롱테일은 주위에서 알짱거리는 아이들을 노리고 계속해서 꼬리를 휘둘렀다.
허나 유의미한 피해는 주지 못했다.
아이들은 자기 생각보다도 빠르게 롱테일의 공격에 익숙해졌다.
롱테일은 확실히 인간을 한참 뛰어넘는 괴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느렸다.
적응이 되니 슬슬 까부는 애들이 생겼다.
몇 번이나 여유롭게 롱테일의 공격을 피한 이안이, 롱테일의 두껍고 단단한 각질에 검을 휘둘렀다.
캉!!
씨알도 안 먹혔다.
그래도 상대를 농락하는 듯한 재미가 있어, 이안은 웃음꽃을 피우며 연거푸 검을 휘둘렀다.
허나 이안은 신중하지 못했다.
아직 시그니 산맥은 눈으로 덮여 있었다. 눈 아래에 어떤 장애물이 있을지는 밟기 전까지 모르는 법이다.
뚜둑!!
"어...?!"
지면을 내디뎠다.
그리 생각했는데, 눈을 파고든 발이 나무뿌리에 걸렸다.
균형을 잃은 이안이 휘청이는 사이 롱테일이 날카로운 각질이 삐죽삐죽 박혀 있는 앞발을 철퇴처럼 휘둘렀다.
이안은 순간 몸이 굳었다.
그 찰나 카렌이 이안의 목덜미를 잡아 뒤로 당겼다.
콰앙!!
"우앗!!"
"우악!!"
롱테일의 앞발이 아무것도 없는 지면을 내리친다.
간신이 살아난 이안이 헉헉 대면서 검과 방패를 다시 주워들었다.
카렌은 아직 밟지 않은 땅을 밟을 때 무게중심을 함부로 옮기지 않도록 주의하며, 시야를 넓혀 아이들을 살폈다.
누구보다 가르침을 충실히 이행하는 카렌을 보고 디디에와 젠킨슨이 흐뭇하게 웃었다.
그 순간 롱테일이 꼬리를 지면에 강하게 때려박으며 루나가 서 있는 방향을 직시했다.
불길한 마나의 기류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주변에서 깔짝대는 날파리를 상대할 때가 아니었다.
쿵! 쿵! 쿵!
롱테일이 덩치를 믿고 전진하기 시작한다.
아이들 중에 롱테일의 돌진을 제지할 수 있는 실력자는 없었다. 요하나를 제외하면 말이다.
"흡!"
요하나가 숨을 들이쉰 후 지면을 가볍게 박찼다.
정면에서 다가오는 요하나를 향해 롱테일이 앞발을 내려찍었다.
요하나가 살짝 몸을 뒤로 뺀다. 거칠게 뻗어나온 각질 조각이 요하나의 코앞을 아슬아슬하게 지나쳤다.
쿠웅!!
땅이 울린다.
땅의 울림조차 반동 삼아 몸을 띄우는데 보탠 요하나가 롱테일의 등허리에 올라탔다.
롱테일은 머리 위에서 인간의 기척을 느끼고 신경질적으로 몸을 회전시켰다.
요하나가 롱테일의 머리가 다가오는 방향을 향해 뛰어내리며 검을 휘둘렀다.
푸른 검기가 검신에 맺힌다.
촤악!!
"카아아아악!!
검기를 향해 대가리를 들이댄 꼴이 된 롱테일이 비명을 내질렀다.
상처가 깊진 않았으나, 6개의 눈 중 하나를 잃었다.
롱테일의 주의가 요하나에게 옮겨간다.
요하나가 시간을 끄는 사이, 루나의 마법이 완성됐다.
"...이제, 쓸 수 있어요."
"모두 물러나라!!"
젠킨슨의 호통에 아이들이 우르르 루나의 뒤로 뛰어갔다.
롱테일이 쿵쿵 거리며 쫓아왔지만 여전히 그 속도가 느렸다.
아이들이 전부 물러나자마자 젠킨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실력 좀 보자."
까각!
마나의 기류를 은폐하던 모든 결계가 벗겨졌다.
그 찰나 강력한 열풍이 주변으로 터져나왔다.
루나와 가장 가까이에 서 있던 젠킨슨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눈밭을 굴렀다.
쿠당탕!!
"?!"
젠킨슨은 자세를 바로 할 생각도 못 한 채 눈을 부릅떴다.
루나를 둘러 싼 반경 3 m의 서클이 룬어로 가득 채워져 빛을 발하고 있었다.
사방을 잠식하던 모든 열에너지가 한 점으로 집약된다.
루나 발밑에 쌓여 있던 새하얀 눈이 삽시간에 증발했다.
점으로부터 시작한 붉은 섬광이 마나를 잡아먹으며 크기를 불린다.
젠킨슨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레드 레이(Red Ray)...?"
그럴 리가.
레드 레이는 4서클 혼합 마법이다.
2서클 마법사가 고작 30분 투자해서 발현할 수 있는 마법이 아니란 말이다.
더군다나.
아무리 4서클 마법이라 해도 저따위로 거대한 열에너지를 구체 형태로 압축시켜 머금지는 못했다.
루나가 뒷걸음질 치는 롱테일을 향해 마법을 겨누었다.
찰나 간 주변에 몰아치던 바람이 멎는다.
직후.
롱테일을 향해 직경만 3 m에 이르는 초고열의 열선이 방사됐다.
쫘아아아아아아아악!!!!!!!!!
롱테일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초고열의 열선에 닿는 순간 형체가 뭉개지며 허공으로 증발했다.
롱테일을 소멸시킨 붉은 빛줄기가 맞은편 산의 산기슭에 닿는다.
루나는 생전 처음 손에 쥔 막대한 에너지를 끝까지 제어하지 못하고 팔을 하늘로 치켜 들었다.
붉은 빛줄기가 산을 타고 오르다 하늘로 치솟는다.
화아아아악!!
어마어마한 열풍이 재차 주변을 강타했다.
젠킨슨과 디디에는 아이들을 몸으로 덮은 채 마나의 흐름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수십 초가 지나서야 바람이 잔잔해졌다.
젠킨슨은 억지로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서 루나의 곁에 섰다.
레드 레이.
4서클 마법이 만들어낸 초고열의 열선은 직경만 3 m에 이르렀고, 실제로는 직경 10 m 안의 모든 물체를 불태웠다.
맞은편의 산이 보인다.
맞은편 산에는 방금까지 눈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
맞은편 산의 정상에서부터 산기슭까지 일직선으로, 용암처럼 변한 암석들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산의 좌우에는 여전히 눈이 가득 쌓여 있어, 그 풍경이 더욱 괴이하게 느껴졌다.
언뜻 보았을 때는 흡사 산이 좌우로 갈라진 것만 같았다.
젠킨슨은 한참이나 입을 벌리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
"레이 그 개자식이..."
레이가 루나의 마법 좀 맞아달라고 했을 때 허락했다간 황천길을 건널 뻔했다.
젠킨슨은 진심을 담아 중얼거렸다.
"천벌 받을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