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이는 꽤 떨어진 거리에서 훈련을 받는 아이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훈련에 동행해도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카렌이나 요하나가 하루종일 가까이 오지 말라고 소리를 질러댈 게 뻔했다.
유사시 신호탄을 터뜨렸을 때 달려갈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하던 레이가 문뜩 고개를 들었다.
꽤 강력한 마나의 기류가 느껴졌다.
'루나가 마법 쓰려나 보네.'
레이는 마나의 기류가 휘몰아치는 곳으로 안력을 집중했다.
여전히 잘 보이진 않았지만, 전투의 소음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마물이랑 싸우나?'
덩치를 보니 롱테일처럼 보였다.
레이는 육포를 까먹으며 싸움이 결착 나길 기다렸다.
10분이 좀 넘었나 싶었을 때, 마나의 기류가 급격히 강렬해졌다.
"오, 드디어 캐스팅 끝났나?"
무슨 마법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기세가 매우 강력했다.
레이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앞의 산을 올려다봤다.
촤악!!
붉은 열선이 마물과 나무들 따위를 증발시키고 뻗어나왔다.
"오오...?"
감탄하려던 레이가 의문을 품었다.
'열선이 왜 저렇게 가깝게 느껴지는...?'
초고열의 열선이 앙상한 나무에 가려졌던 레이를 향해 내리꽂힌다.
레이가 양손의 검을 뽑아내며 새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악!!!!"
촤아아아아아악!!!!!!!
*
루비하 왕국의 레인저, 브랜딜은 산봉우리 위에서 시그니 산맥을 지켜보고 있었다.
풍경은 어제와 다르지 않게 온통 새하얬지만, 그렇기에 붉은 선으로 양단된 산이 더더욱 눈에 띄었다.
"고위 마법사...?"
무슨 마법을 갈겨놨는지는 몰라도 아티펙트 도움 없이 저만한 화력을 내려면 고위 마법사는 되어야 했다.
"곤란한데..."
저 산은 제국령 안쪽에 위치해 있다.
평소라면 산 하나를 불태웠다고 해도 조심히 접근했을 터다.
하지만 시기가 안 좋았다.
제국 고위 귀족이 이쪽 루트로 망명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상관에게 들은 지 며칠도 지났지 않았다.
"정찰 정도는... 해봐야겠군."
브랜딜이 차가운 숨을 길게 내뱉었다.
차디찬 겨울 산맥에서 일을 크게 벌이기 싫은 건 왕국이 자랑하는 레인저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실전 (4)
88화
"아그그그그극..."
레이가 앓는 소리를 내며 녹아내리는 암석 줄기를 피해 옆으로 기었다.
공간검을 활용해 열선을 옆으로 안 비켜 냈으면 정말로 죽을 뻔했다.
"무슨 위력이 이러냐..."
시그니 산맥이 마나가 넘쳐 흐르는 장소라 마법의 위력이 한 층 더 강화되긴 했겠지만.
그를 감안해도 도저히 2서클이 내보일 만한 화력은 아니었다.
"갑주 좀 맞춰야겠다..."
이런 광범위 열에너지 공격을 검으로 막아내는 건 정말 비효율적인 짓거리였다.
레이는 반쯤 녹아내린 검을 던져 버리고 땅을 기어가 아직 녹지 않은 눈에 몸을 파묻었다.
레이 주변에서 연기가 풀풀 올라온다.
입에 한 움큼 눈을 베어 문 레이가, 몸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움직임을 멈췄다.
들끓었던 몸의 체온이 내려가며 정신이 알딸딸해졌다.
"으어어..."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슬슬 일어나보려고 팔다리를 움찔거리는데 생소한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저건 뭐야? 사람인가?"
"사람 맞습니다아...!"
레이가 손을 위로 들어 흔들었다.
짐은 홀랑 증발했고 옷도 반쯤 탔다.
이대로도 귀환은 가능하겠지만, 육포나 목포라도 한두 개 얻어가면 굉장히 도움이 될 것이다.
레이가 희망찬 상상에 빠진 사이.
가죽 갑옷을 입은 레인저가 성큼성큼 걸어와 레이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어 들어 올렸다.
"제국민이냐?"
"네네, 제국민 맞습니다."
레이는 상대가 레인저인 것을 알아보고 최대한 해맑게 웃었다.
레인저가 레이의 몰골을 찬찬히 살피더니 뒤로 던져 버렸다.
"포박해."
다른 레인저들이 달려들어 레이의 손발을 묶기 시작했다.
레이가 당황해서 바둥거렸다.
"여, 여기 제국령 아닙니까?! 제국민에게 이러셔도 되는 겁니까?!"
레이의 항변과 관계없이 레인저들을 금세 레이를 손가락도 함부로 못 움직이도록 묶어버렸다.
눈알을 굴리는 레이의 목에 단검이 겨누어진다.
심문의 시간이었다.
*
루나는 마법을 발현한 후 얼마 버티지 못하고 제자리서 휘청였다.
체력이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강력한 마법을 발현한 탓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젠킨슨이 얼른 루나를 붙잡았다.
디디에가 다가와 젠킨슨에게 속삭였다.
"젠킨슨 경, 훈련은 마무리 짓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루나가 펼친 마법의 규모가 예상을 훨씬 벗어나 있었다.
레인저를 비롯해 시그니 산맥에 머물고 있는 존재들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아이들까지 데려온 상황에서 훈련을 조금 더 하겠다고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젠킨슨과 디디에가 복귀로 가닥을 잡는 사이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맞은편 산을 내려봤다.
"산이 녹았어..."
"마법 엄청 대단해요!"
"마법사들은 다 이런 마법 막 쏠 수 있는 거예요?"
해맑은 물음에 젠킨슨이 자기 이마를 붙잡았다.
"모든 마법사가 루나처럼 대단했으면 진작 세상이 두 쪽 났을 거다."
고개를 저은 젠킨슨이 디디에와 함께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훈련은 여기까지 하고 그만 복귀한다."
아이들이 작게 환호했다.
집 나와서 개고생 하는 걸 좋아하는 아이들은 거의 없었다.
젠킨슨은 탈진한 루나를 업어 들었다.
빠르게 움직인다 해도 복귀까지 이틀은 걸리는 거리였다.
디디에가 앞에 서고 젠킨슨이 뒤를 경계하며 헥헥 대는 아이들을 이끌고 산맥을 타고 움직였다.
나름대로 빨리 움직인다고 움직였고, 이동 흔적을 지우려고도 노력했다.
허나 상대가 나빴다.
레인저들은 기사와 아이들의 흔적을 쉽사리 발견하고 추격했다.
다음 날,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
경계 근무를 서던 디디에가 칼자루에 손을 올렸다.
아이들 곁에서 쪽잠을 자던 젠킨슨 또한 빠르게 눈을 떴다.
사박!
가까이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디디에가 낭패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발소리를 눈치채지 못했다.
기사를 상대로 이 정도까지 기척을 은폐할 수 있는 존재는 몇 없었다.
디디에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안녕하시오!! 무슨 일로 찾아오셨소?"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산을 울리자 아이들도 하나둘 잠이 깼다.
레인저들이 암흑 속에서 걸어 나왔다.
디디에와 젠킨슨이 곧장 검기를 발현했다.
푸르게 빛나는 섬광이 어둠을 잠깐 몰아낸다.
"이곳은 제국령이오. 그대들의 임무는 알고 있으나, 그리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면 이쪽도 곤란하오."
"..."
레인저들이 침묵 속에서 거리를 더 좁혔다.
젠킨슨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느껴지는 레인저들의 숫자만 열을 넘었다.
레인저가 기사에 비해 평균적인 무력은 좀 떨어진다지만 여긴 그들의 홈그라운드였다.
기사 하나가 레인저 둘을 맡기도 벅찼다.
'레인저가 이렇게 대규모로 움직인다고?'
레인저의 분대는 통상 3~4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정도면 한 소대 이상이 투입되었다는 건데, 거기다 분위기도 좋지 않았다.
'루나의 마법 때문인가? 그걸 감안해도 지나치게 과민한 반응인데?'
츠즈즈즉!
레인저 측에서도 몇 명이 검기를 발현한다.
계속되어 악화되는 분위기에 요하나를 시작으로 아이들도 긴장 가득한 얼굴로 무기를 뽑아들었다.
젠킨슨이 앓는 소리를 삼켰다.
충돌을 최대한 피해야 했지만, 만약 충돌한다면 '그놈'이 무조건 필요했다.
'이놈은 언제까지 지켜만 보고 있으려는 거야?'
"마스터!"
마침 종자 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에 레이라면 치를 떨던 젠킨슨이지만, 이번만은 반갑게 화답했다.
"레이!"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눈을 돌렸다.
포박 당한 레이가 밧줄에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
너무나 예상치 못한 광경에 얼을 탄 젠킨슨이 뒷목을 잡았다.
"도와주러 온 거... 아니었냐?"
"붙잡혀서 끌려온 건데요?"
"..."
젠킨슨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레이의 몰골을 살피니 반 쯤 태워 먹은 옷부터 산발이 된 머리까지 아주 엉망이었다.
"레인저에게 당한 거냐?"
"아뇨, 마른 하늘에 벼락을 맞아서."
마른 하늘에 벼락을 맞아?
머리를 굴려본 젠킨슨이 이내 어떤 일이 벌어졌었는지 알아챘다.
마법.
루나의 마법에 뒤따라오던 레이가 당한 거다.
"으끄끄끅..."
젠킨슨이 숨 넘어가는 소리로 낄낄대기 시작했다.
심히 꼴 받게 하는 젠킨슨의 웃음소리에 레이가 미간을 와락 구겼다.
"이런 씨...!"
신경질을 내려는 레이의 등을 레인저 중 하나가 곧장 걷어찼다.
퍼억!
"으윽!"
"닥쳐라. 사담이나 나누라고 데려온 게 아니다."
"끄으응...?"
아픈 흉내를 내던 레이가 긴장을 바짝 끌어올렸다.
강대한 존재가 현현하려고 하는 것이 느껴진다.
레이가 고개를 쳐들었다.
차디 찬 얼굴로 손아귀를 말아 쥔 루나와 눈이 마주쳤다.
레이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정령 꺼내지 마...!'
레이에 이어 디디에도 거세진 바람을 확인하고 다급히 루나의 어깨를 잡았다.
"지금은 안 된다...!"
"..."
디디에의 속삭임에 루나가 손아귀에 힘을 풀었다.
거세졌던 겨울 바람이 다시 가라앉는다.
레이와 디디에가 동시에 힘 빠지는 소리를 냈다.
한편 젠킨슨은, 검을 지면에 내려놓고 레인저에게 몇 걸음 다가섰다.
시푸른 칼날이 목 가까이 다가왔지만 젠킨슨은 크게 긴장한 얼굴이 아니었다.
"레인저들이 우리에게 이렇게까지 날을 세울 필요는 없잖소? 대체 왜 이러시오?"
"시그니 산맥에는 무슨 볼일이지?"
뒤에 서 있던 레인저 중 하나가 물었다.
젠킨슨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아이들에게 생존 훈련을 시키기 위해 좀 깊게 들어왔소. 보면 알 수 있잖소?"
젠킨슨 뒤에 서 있는 아이들은 한눈에 봐도 다들 쪼끄만한 애들이었다.
레인저가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갔다.
"마법사는 어디 있지? 대규모 마법을 펼친 이유가 뭐야?"
"아, 그거 말인데..."
젠킨슨이 레이의 눈치를 살폈다.
레인저들은 이미 레이의 심문을 끝냈을 터다.
젠킨슨도 눈치껏 입을 맞추어야 했다.
"...이번에 백작님께서 새로 고용한 마법사가 실험해볼 마법이 있다고 우리와 동행했소."
"..."
"근데 실험을 마치고 혼자 휙 떠나버려서 말일세. 우리도 괜히 그쪽 눈치가 보여 백작령으로 복귀하고 있었소."
"거짓말 마라. 너희를 제외한 다른 사람의 흔적은 찾지 못했다."
"마법의 흔적을 보았다면 그분이 보통 마법사가 아님은 눈치챘을 텐데. 레인저의 추적술이 뛰어나다는 것은 알지만 만능은 아니잖소?"
우회해서 말했지만 결국 레인저들이 마법사의 흔적을 놓쳤다는 소리였다.
질문을 해왔던 레인저가 자기 혼자 중얼거렸다.
"...마법사의 행동이 이해가 안 가는군."
왜 굳이 혹을 달고 시그니 산맥을 올라 마법 하나를 갈기고 홀로 귀환했단 말인가?
젠킨슨이 허허 웃으며 답했다.
"마법사들이 괴짜 짓 하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잖소?"
"..."
젠킨슨의 말은 정론이라면 정론이었다.
만약 마법사가 어떤 수작을 벌이려고 했다고 해도, 기사들과 아이들에게 정보를 공유했을 가능성은 낮았다.
레이의 증언과 젠킨슨의 증언이 대략 일치하기도 했기에 딱히 더 따지고 들 내용이 없었다.
젠킨슨이 두 손을 들어 올린 채 물었다.
"이제 보내주시면 안 되겠소?"
"..."
레인저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냥 보내준다? 큰 문제는 안 될 터다.
레인저들의 반응이 좀 과민했다고 떠들 수는 있겠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허나 보내주지 않는다고 해도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레인저들은 뒷처리의 프로였다.
또한 오랜 산악 생활 탓에 그 성정과 손속이 거칠어진 자들이 다수였다.
어떤 레인저의 시선은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요하나의 검을 향했고, 어떤 레인저의 시선은 덜 여물었으나 생생한 소녀의 여체를 훑었다.
입을 삐죽인 레이가 준비했던 대사를 꺼냈다.
"마스터, 제거할까요?"
"넌 좀 닥치고 있어 봐."
젠킨슨이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레인저와 무력 충돌은 이기든 지든 정말 달갑지 않은 선택이었다.
*
정돈되지 않은 흙바닥을 말 두 필이 거칠게 질주했다.
말들은 덩치가 좋고 갈기에는 윤기가 가시지 않았으나, 혹사 탓인지 금방이라도 거품을 물 것처럼 바들댔다.
"휴식이 필요합니다."
낡은 갑옷을 대충 덧대 입은 남자가 말했다.
차림새만 보면 소일거리를 받아 살아가는 사냥꾼이나 용병처럼 보였다.
낡은 갑옷을 입은 남자를 향해,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사내가 쏘아붙였다.
"휴식? 대체 어디서? 안전한 곳이 어디 있다고?"
"...곧 산맥을 넘어가야 합니다. 체력을 비축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여관보다는 창관이 나을 듯합니다. 추적을 조금 늦춰줄 겁니다. 다만..."
낡은 갑옷의 남자가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의심을 덜기 위해선 여자를 품은 게 좋으실 겁니다."
"..."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낡은 갑옷의 남자는 외면했다.
얼마 안 가 둘은 필립스 백작령에 도착했다.
낡은 갑옷의 남자는 주민들에게 물어 가장 인기 좋은 창관을 찾아갔다.
남들 눈에 그 둘은 여자에 굶은 실력 좋은 용병처럼 보였다.
사내와 낡은 갑옷의 남자가 그럴 듯한 간판이 걸린 창관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라일락의 저녁은 표면상으로는 식당인지라 여자를 사기 위한 손님 몇 명이 1층에서 가벼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지미 패밀리에 속한 잡스가 사내와 낡은 갑옷의 남자를 보고 눈을 빛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물 빼러 왔나?
뭐 그런 가벼운 인사를 건네려던 차.
뒤에 서 있던 벨라가 잡스의 등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서 원을 두 번 그렸다.
조심해야 할 상대라는 신호였다.
눈썰미가 좋고, 세간에 고급품으로 취급되는 옷감을 접할 기회가 잦았었던 벨라는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남자의 낡은 갑옷 사이로 드러난 내의의 옷감이 대단한 고급품이라는 것을 말이다.
악취미를 지닌 귀족 나리가 창관을 들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연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게 없는 상대였다.
잡스는 눈치껏 필요 없는 이야기를 배제하고 딱딱하게 상대를 응대했다.
라일락의 저녁 건물에 붙어있는 작은 마구간이 말 두 마리로 꽉 찼다.
사내와 남자는 말 없이 가벼운 식사를 마쳤다.
윗층으로 올라가는 사내와 낡은 갑옷의 남자에게 잡스가 물었다.
"마음에 드시는 여인이 있으신지...?"
"알아서 올려보네."
"알겠습니다."
손님이 사라진 후 여자들 사이에서 눈치 싸움이 벌어졌다.
상대가 멀리 마실 나온 귀족이라도 된다면 팁을 좀 더 받을 순 있겠지만, 트러블이 발생했을 때 제지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라일락의 저녁은 필립스 백작령에선 가장 유명하다고 하나, 결국 평민들이 이용하는 창관이다.
귀족이 굳이 이곳을 찾아왔다면, 못 볼 꼴을 볼 확률이 꽤 높았다.
벨라가 한숨을 쉰 후 먼저 나섰다.
"왼쪽 방의 분은 내가 모실게."
"어... 잘 부탁해."
잡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벨라가 치장을 단정히 한 후,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던 사내가 들어간 방문을 두들겼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달칵!
벨라가 고개를 낮춘 채 방 안에 들어섰다.
방 안에는 침대와 함께 목욕을 위한 통에 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목욕을 도와드릴...?"
쫘악!!
벨라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바닥에 엎어졌다.
손에 든 바구니가 엎어지며 접대를 위해 준비해왔던 물건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뺨이 화끈거렸다.
벨라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사내가 머리채를 잡아 침대 위에 던졌다.
"아윽!"
"이 빌어먹을 천한 것이...!"
사내가 벨라 위에 올라탔다.
억쎈 손길이 벨라의 목을 조른다.
컥컥 대는 벨라를 향해 사내가 이를 갈았다.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내가 누구인지 아느냔 말이다...! 어딜 감히...!"
사내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불만스러운 듯 흉포한 감정을 토해내면서도 아랫도리를 세우고 있었다.
벨라는 계속 컥컥대면서 눈앞의 사내를 바라봤다.
흐릿해진 시야 너머로 붉게 빛나는 눈빛이 세로로 길게 찢어져 있는 모습이 비쳤다.
길고 힘겨운 밤이 될 것이다.
벨라는 각오를 다진 후 두 다리로 사내의 허리를 휘감았다.
용주골 (1)
89화
사방을 포위한 레인저들의 기세가 날카로워졌다.
젠킨슨이 뒤로 한발 물러서며 턱에 힘을 주었다.
정말 골치가 더럽게 아팠다.
당장 레인저들과 정면으로 맞붙으면 이길 수야 있다.
허나 싸움에서 이긴다 해도 레인저의 원한을 샀다가는 굉장히 곤란해진다.
레인저가 작정하고 시그니 산맥을 넘나들며 필립스 백작령을 괴롭히기 시작하면 답이 없다.
마물이라도 몰아서 백작령에 있는 마을로 돌진하게 유도하면 피해가 무지막지하게 커질 터다.
레인저라면 테러 행위를 자행할 때 쉽게 증거를 남기지도 않을 거고, 필립스 백작가가 어렵사리 증거를 모아 황실에 탄원한다 해도 황제가 제대로 관심을 가져줄까 의문이었다.
그렇기에 젠킨슨은 지금 상황을 최대한 무력 충돌 없이 끝내고 싶었다.
일단 전투가 발생하면 이겨도 무조건 손해였다.
레이 또한 그 사실을 알기에 괜히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레인저들에게 잡혀 왔었다.
허나 돌아가는 꼴을 보니 아무래도 한바탕 해야 할 것 같았다.
'이름만 레인저지 다들 양아치구만.'
정예병을 모은 특수부대라 하면 냉정하고 기계적으로 임무를 수행할 것만 같은 이미지였으나, 현실은 아니었다.
'하긴 전생에서도 최강의 특수부대란 놈들이 카누잉 같은 시체 능욕은 기본에 온갖 전쟁 범죄엔 다 엮여 있었으니...'
지구만 해도 그 꼴인데 이쪽 세계라고 다를 리가 없다.
눈 내린 산맥에서 활동하며 스트레스를 쌓아 가던 레인저들은 이번 기회에 여러 갈증을 풀어낼 생각인 것 같았다.
레이는 무던하게 전투를 준비했다.
충돌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하되, 일단 맞붙으면 무조건 전멸시켜야 했다.
'기사 둘에 루나까지 있으면 애들은 확실히 지킬 수 있을 것 같고...'
포박을 찢고 일어나 옆에 놈 칼부터 뺏어볼까.
그리 결론 내리고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혀를 차는 소리가 새롭게 들렸다.
"에헤잇, 분위기가 왜 이래?"
브랜딜이 어둠 속에서 손바닥을 짝짝 마주치며 걸어나왔다.
적막한 산속에서 박수 소리가 길게 메아리쳤다.
"좋게 좋게 가자고, 좋게 좋게. 이러나 저러나 이웃 사이잖아."
넉살 좋게 입을 놀리던 브랜딜이 젠킨슨을 보고 잠깐 놀란 얼굴을 했다.
"오우...! 아는 얼굴이군. 이름이... 젠킨슨이라 했었나?"
"오랜만이오, 브랜딜."
"아, 정말로 오랜만이지."
브랜딜이 손을 내밀었다.
젠킨슨이 쓰게 웃으며 브랜딜의 손을 맞잡았다.
젠킨슨은 서임을 받고 얼마 안 되어 시그니 산맥에 훈련을 나갔다가 브랜딜과 만났었다.
기 싸움을 하다 이름을 교환하고 헤어진 기억이 아직 뇌리에 남아 있었다.
그때는 둘 다 신참이었는데, 이제는 완숙한 기사와 레인저였다.
브랜딜이 젠킨슨의 어깨를 잡아 끌어당겼다.
"애들 훈련 때문에 왔다고?"
"그렇소."
"이동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던데. 그 실력에 뭘 가르치겠다고?"
"끄응."
젠킨슨이 앓는 소리를 냈다.
브랜딜이 기운 내라는 듯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젠킨슨, 자세한 건 말 못 해주지만, 요즘 우리가 좀 분위기가 안 좋아. 민감하다고."
"알겠소, 알겠다고. 주의하겠소."
"그래. 한동안은 신경 좀 써줘. 괜히 부딪치면 피곤하잖아? 그냥 이쪽에 얼씬거리지 마."
"충고 고맙소."
"오늘 일도 남한테 떠벌리고 다니지는 말고."
"브랜딜."
젠킨슨이 어깨동무를 풀고 물러서며 말을 이었다.
"확언하지. 우리는 레인저와 마찰을 빚을 생각이 전혀 없어. 황도는 멀고, 시그니 산맥은 코앞이거든."
썩 솔직한 답변에 브랜딜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아, 그럼 이쯤에서 끝내지. 그쪽은 가던 길 가고, 우리도 돌아가자고."
터덜터덜 물러나는 브랜딜을 향해 다른 레인저가 하나 다가왔다.
"중대장님, 재고해주십시오. 지금 저들을 그냥 보내는 건..."
"이봐, 괜히 일 키우지 말자고. 산을 하나 박살 낸 고위 마법사가 다시 돌아오기라도 하면 어쩔 거야?"
"..."
브랜딜의 확고한 주장에 레인저가 입을 다물었다.
브랜딜이 다시 한 번 명령했다.
"자자, 이만 제국령을 벗어난다. 거기 묶여 있는 친구는 좀 풀어주고."
레인저들이 암흑 속으로 하나둘 모습을 감췄다.
뒤늦게 풀려난 레이가 기지개를 피고는 산발이 된 머리를 정돈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젠킨슨이 레이의 몰골을 보고 피식 댔다.
"천벌 받았구나."
"마스터, 첫 마디가 그거예요? 종자가 어디 다치진 않았는지 먼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입 놀리는 거 보니 멀쩡한 거 같구나."
"아이고, 검 남는 거나 한 자루 주세요."
젠킨슨이 예비용 검을 한 자루 던져주었다.
레이는 허리춤에 검집을 묶고선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인 곳으로 다가갔다.
카렌이 헤벌쭉한 얼굴로 손을 흔들려다가, 곧장 정색했다.
카렌은 다급하게 자기가 무슨 꼴을 하고 있는지 떠올렸다.
얼굴엔 시커먼 진흙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고, 몸을 씻지 못한지는 며칠이 지났다.
새된 비명이 튀어나왔다.
"가, 가까이 오지 마!!"
"아니... 왜?"
"그, 어, 어쨌든 가까이 오지 마!"
레이가 피식거렸다.
저리 기겁하니 괜히 더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시룬데? 가까이 갈 건데?"
"오지 말라고오-!"
카렌이 레이가 다가오는 만큼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레이가 혀를 차는 시늉을 하며 카렌을 설득했다.
"카렌, 며칠 못 씻어서 겨드랑이에서 시큼한 냄새가 나는 것 정도는 신경 쓰지 않아도..."
"오지 말라고 했잖아아!!"
퍽!!
결국 돌맹이가 날아왔다.
카렌이 귀를 빨갛게 물들인 채 손에 잡히는 대로 돌맹이를 던져 댔다.
레이가 가드를 올린 채 소리쳤다.
"알겠어! 알았다고! 안 붙을 테니까 돌 좀 그만 던져!"
그 광경을 보며 요하나는 칼자루를 잡은 손에서 힘을 뺐다.
레이가 더 다가왔다면, 그도 모자라 머리카락이라도 만지려고 했다면 진짜로 검을 휘둘렀을지도 몰랐다.
결국 레이는 아이들과 거리를 유지한 채 시그니 산맥을 이동했다.
열심히 행군한 결과 다음날 오전쯤에 필립스 백작령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 왔다!!!"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계획보다 조금 짧아지긴 했지만, 어쨌든 힘든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성취감과 함께 피로가 몰려왔다.
이제 군장을 정비하고 목욕을 마친 후 보육원으로 귀환하면 됐다.
레이는 신나서 재잘재잘 떠드는 아이들을 바라보다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과일장수 잭이 깜짝 놀란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레이! 드디어 돌아왔구나!"
"...잭, 무슨 일 있었어요?"
"바로 교회에 가봐야 할 것 같다."
"...?"
눈을 깜박이는 레이를 향해 잭이 그제 있었던 사건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들은 레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
잘 발달한 도시의 경우 치료소가 별개로 존재했지만.
크기가 작고 인구가 적은 지역에선 신성 교단의 교회가 치료소의 역할을 겸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필립스 백작령의 교단 또한 교회 내부에 침상을 갖춰 치료소의 역할을 겸임하고 있었다.
"아니..."
그리고 지금, 레이가 교회에 마련된 환자용 침상 옆에서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꼴을 보고 벨라가 깔깔 웃었다.
"우리 아들, 표정이 왜 그래?"
"아니 엄마..."
레이가 자기 얼굴을 쓸어내렸다.
장소가 교회인데다 혹시나 환자에게 감염의 위험이 있을까봐 다급하게 씻고 온 탓에 차림새는 깨끗했다.
허나 레이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구겨져 있었다.
"엄마는 지금 웃음이 나와?"
벨라의 얼굴엔 피멍이 잔뜩 들어 있었다.
길게 뻗은 아름다웠던 목에는 강하게 졸린 자국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고 말이다.
팔 다리에 묶여 있는 붕대는 덤이었다.
"아오... 돌아버리겠네."
"왜 그리 심각하니? 일하다 보면 진상도 좀 만날 수 있는 거지. 어디 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유난 떨지 마."
"..."
레이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매춘업을 하다 보면 진상 만날 확률이 높긴 했다.
손님 중 태반이 술 한 잔 걸친 상태이다 보니 특히 그랬다.
주먹 한두 대 얻어맞는 경우야 충분히 있었다.
허나 레이가 본 벨라의 상처들은, 손찌검 한두 번이 만들어낼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그러게 빨리 은퇴 좀 하시라니까."
"원래 일 그만둘 때쯤 되면 사고도 한 번씩 터지고 하는 거야. 나쁜 운을 훨훨 털고 새로 시작하는 거지. 아무 일도 없었다면 그게 더 불안했을걸?"
벨라는 액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레이가 콧잔등을 꾹꾹 누르며 손을 휘저었다.
"됐고... 완전히 나으실 때까지 휴식이나 충분히 취하세요."
"여기 계속 있으려면 헌금을 많이 내야 하지 않니?"
"엄마, 제발 돈 걱정 좀 하지 마. 돈 같은 거 얼마든지 마련할 수 있으니까."
레이의 표정이 썩어들어가자 벨라가 두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알았어, 아들. 한 2~3주 머물렀다 돌아갈게. 엄마 심심하니까 간간이 찾아오렴."
"매일 들를 테니 걱정하지 마."
"엄마 집에 없어도 밥 잘 챙겨 먹어야 돼?"
"걱정 마셔."
레이가 세상 피곤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한 번 더 벨라의 목덜미를 살폈다.
목울대를 움푹 파고든 검붉은 멍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그만 가 볼게. 잘 쉬고 있어."
인사를 건넨 레이가 교회 밖으로 나왔다.
지미 패밀리의 간부, 아르노가 교회에서부터 레이의 뒤를 따라 걸으며 입을 열었다.
"운이 나빴어."
아르노는 사건이 벌어진 당시 현장에 있진 않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전부 전해 들었다.
이번 일은 정말 운이 나빠서 발생한 사고였다.
갑자기 귀족 나으리처럼 보이는 작자들이 창관에 들러 문제를 일으킬 줄 누가 알았겠는가.
뭐, 벨라에게 폭력을 행사한 놈이 사실 귀족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들을 귀족이라 판단한 것도 벨라였고 그들을 접대하겠다고 나선 것도 벨라였으니, 결국 벨라가 책임질 일이었다.
"그래도 이만한 게 다행이지. 어디 못 쓸 정도로 크게 상한 건 아니잖아. 벨라도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날 거야. 하하."
아르노는 나름 위로한답시고 그딴 말을 지껄이며 짧게 웃었다.
직후 시야가 점멸했다.
"...?"
감각이 엉망이었다.
아르노는 한참을 꿈틀거리다 자기가 땅에 엎어져 있음을 깨달았다.
뒤늦게 신음 소리가 입술을 빠져나온다.
"끄, 끄윽...?"
혀에서 비린 맛이 느껴진다.
왼쪽 뺨 전체가 타오르는 것처럼 화끈거린다.
근육이 놀란 탓인지 목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르노는 그제야 자신이 따귀를 얻어맞았다는 걸 알아챘다.
레이가 쓰러진 아르노의 목을 지그시 눌러 밟았다.
"크억! 컥!"
"지금 웃음이 나오지?"
낮게 깔리다 못해 금속을 긁어내는 듯한 목소리가 아르노의 귓가를 울렸다.
호흡이 막힌 아르노가 레이의 다리를 붙잡고 바둥거렸다.
이대로 목을 분질러 버릴까.
레이는 그런 충동을 뒤로 미루며 아르노의 턱을 붙잡았다.
"어디 한번 계속 쳐웃어봐."
뚜둑!
레이의 엄지에 걸린 아르노의 이빨이 하나 부러진다.
아르노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저항하려다, 레이의 메마른 눈동자를 보고 움직임을 멈췄다.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여기서 조금만 더 레이의 심기를 거슬렀다간, 진짜로 죽을 수 있다는 걸.
레이는 아르노를, 사람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너희들은 귀족은 무섭고 나는 만만하지?"
"크억.... 큭...!"
"잘 들어. 두 시간 줄 테니..."
공허한 레이의 눈동자가 푸르스름하게 물든다.
그와 동시에 강렬한 마나의 기류가 땅을 헤집어 대기 시작했다.
차디찬 바람이 살을 에워싼다.
"그날 라일락의 저녁에서 근무했던 연놈들 전부 집합시켜."
"크으... 크억...!"
아르노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가 한 마디 덧붙였다.
"늦지 마. 오래 안 기다릴 거야."
한놈이라도 미적거리거나 내빼면, 턱을 모조리 뽑아버릴 생각이었다.
용주골 (2)
90화
콰앙!!!!
아르노의 이빨이 부러지고 두 시간 뒤.
라일락의 저녁 1층에 있던 탁자가 벽을 파고들었다.
굉음과 함께 벽이 내려앉고 탁자가 바스러졌다.
아르노에게 불려왔던 잡스의 눈동자가 바들바들 떨렸다.
지금 산산조각이 난 탁자는 4인용 탁자로, 평범한 인간이 홀로 집어 던질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허나 레이의 손에 잡힌 탁자는 몇 미터를 날아가 벽을 때려 부쉈다.
잡스는 눈앞의 소년이 기사의 종자임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제야 똑바로 인식했다.
평범한 사람은 우습게 반으로 찢어 죽일 수 있는 초인. 그게 레이였다.
"레, 레이..."
당황해서 물러나는 잡스의 다리를 레이가 경고 없이 걷어찼다.
뻐억!!
정강이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잡스의 몸이 옆으로 회전한다.
레이는 바닥을 향하는 잡스의 머리끄덩이를 붙잡아 억지로 들어 올렸다.
다리가 부러진 고통 탓에 잡스가 비명을 지르려 했다.
허나 그보다 빨리, 레이가 잡스의 뺨을 후려쳤다.
쫘악!! 쫘악!! 쫘악!!
레이의 팔이 기계적으로 돌아갔다.
피와 이빨이 잡스로부터 후두둑 떨어져 나왔다.
레이는 잡스의 목이 옆으로 돌아가지 않게 머리끄덩이를 붙잡은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었다.
잡스의 팔다리가 얼마 못 가 축 쳐졌다.
레이가 반쯤 기절한 잡스를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곤 옆을 돌아보았다.
레이의 옆에는 조직원들이 도열해서 고개를 숙인 채 두 팔을 등에 붙이고 있었다.
레이가 자기 미간을 꾹 눌렀다.
"니들이 화대를 나눠 받는 이유가 뭐야?"
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레이가 다시 물었다.
"니들 같은 양아치 새끼들한테 돈 쥐여주는 이유가 뭐냐고."
여전히 침묵이 일었다.
레이가 옆에 있던 탁자를 붙잡았다.
나무로 된 탁자의 모서리가 레이의 악력에 단숨에 뜯겨나갔다.
담담했던 레이의 눈동자에 거친 파문이 인다.
"야 이 새끼들아."
부글거리는 분노가 목소리에 뒤섞여 터져 나온다.
"돈을 쳐 받았으면 밥값을 해야 할 것 아니야!!!!"
짐승을 닮은 살기가 공간을 잠식한다.
자리에 선 모두가 벌벌 떨기 시작한다.
그꼴을 본 레이가 헛웃음을 토해내며 조직원들 앞에 섰다.
"내 어머니가 그리될 때까지 니들은 뭘 했어?"
"그... 그..."
"어머니 목이 졸리는 소리를 빤히 듣고도, 귀족 눈 밖에 날까봐 아무것도 안 했지?"
뻐억!!!
레이가 가장 가까이 서 있는 조직원의 명치 아래를 가격했다.
허공에 붕 떴던 조직원이 뒤에 있던 탁자와 함께 바닥을 뒹굴었다.
"꺼어억...! 컥!!"
조직원은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지 가슴을 붙잡고 각혈하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이는 또 다른 조직원의 턱을 붙잡았다.
"귀족은 무섭고, 나는 만만하게 보였지?"
턱을 으스러트릴 듯이 강하게 쥔 레이가 그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비명이 터지고, 아랫니가 박살 난 조직원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야, 지금 내가 묻잖아."
레이가 아직 멀쩡히 서 있는 조직원들을 돌아봤다.
"내가 만만하게 보였냐고."
모두가 레이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재차 분노가 터져 나왔다.
"대답을 해!! 이 새끼들아!!!"
탁자 하나를 더 날려 먹은 레이가 바닥에 굴러다니는 술병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이 시발년들아."
까앙!!
레이가 던진 술병이 여자들이 서 있던 방향의 벽과 충돌해 산산이 조각났다.
부서진 유리조각이 사방에 튀었다.
유리조각에 살갗을 베인 여자들이 비명을 질렀지만 얼마 안 가 입을 다물었다.
가장 크게 비명을 지른 여자의 얼굴을 레이가 벽면에 처박았기 때문이다.
"내 어머니가 니들 뒤치다꺼리할 순번이냐?"
레이는 말을 하면서도 두통이 올라와 콧잔등을 강하게 쥐었다.
벨라의 얼굴과 목을 가득 뒤덮었던 멍 자국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도저히 납득이 안 갔다.
벨라가 자진해서 '그 방'에 들어가려 했다고 해도, 눈앞의 양아치들이 대가리가 달렸다면 무조건 벨라를 막았어야 했다.
"진짜 이 개좆같은 연놈들이... 내가 허구한 날 헤실헤실 웃으며 니들 잡일이나 도와주고 있으니까 세상 우습게 보이지?"
스릉!
레이가 검을 뽑아들었다.
거친 감정이 마나를 진동시켜 시푸른 섬광을 발하게 만든다.
레이가 이를 갈아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우리 구역이야. 젠트리든 귀족이든... 그 어떤 새끼든 우리 허락 없이는 백작령 안에서 까불어댈 수는 없어. 근데 지미 패밀리에 발을 걸쳤다는 새끼들이..."
레이의 검에서 검기가 폭발적으로 뻗어나왔다.
"내 어머니가 그 꼴이 될 때까지 방치해놔!!!"
카가가가각!!!
레이가 허공에 검을 휘둘렀다.
길게 뻗어나온 검기가 천장을 갈라낸다.
천장 일부가 붕괴되며 위층에 있던 침대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간신히 정신을 차려 바닥을 기던 잡스가 머리 위를 덮치는 침대를 보고 경악했다.
꼼짝 없이 죽었구나 생각했던 순간.
어느새 나타난 지미가 잡스의 다리를 붙잡아 당겼다.
콰앙!!
침대가 잡스 바로 위에 떨어졌다.
지미가 미간을 좁히며 소리쳤다.
"다들 여기서 나가! 팔다리 멀쩡한 놈은 못 움직이는 사람 챙겨서 빨리 꺼져!"
지미의 명령에, 창관 안에 있던 사람들이 레이의 눈치를 급히 살폈다.
괴물에 가까운 레이의 무력을 코앞에서 경험했던 터라 지미의 말만 믿고 발을 뗄 수가 없었다.
허나 다행히도, 레이는 지미가 나타난 직후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침묵을 지켰다.
지미의 재촉에 조직원과 매춘부들이 허겁지겁 밖으로 빠져나갔다.
건물 안이 텅 비자 레이가 뒤늦게 한숨을 쉬었다.
지미는 백작령과 자작령을 아우르는 '지미 패밀리'의 수장이다.
레이가 그리 만들었고, 그렇기에 더더욱 지미의 '권위'를 지켜줘야 했다.
남들의 눈앞에서 대놓고 항명할 수는 없었다.
지미가 레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화는 좀 풀렸냐?"
"글쎄요."
레이는 그나마 멀쩡히 남아 있는 의자를 끌어와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레이의 미간은 여전히 깊게 구겨져 있었다.
지미가 난감한 얼굴로 턱을 매만졌다.
"벨라 일은 미안하게 됐어."
"아뇨, 뭐... 알고는 있었어요."
그래, 알고는 있었다.
무식하고 못 배운 놈들일수록 오냐오냐 해주면 사람 쉽게 보고 기어오른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저 개잡놈들이 주제 파악 못 하고 나 우습게 보는 거, 모르진 않았어요."
기강을 잡을 거였으면 진작 주기적으로 자근자근 밟아주어야 했다.
그럼에도 레이는, 이 홍등가에서 만큼은 웬만하면 '벨라의 아들' 역할에 충실했다.
레이는 벨라의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을 되도록 침범하고 싶지가 않았다.
벨라를 한 인격체로서 존중하고 사랑했기 때문이다.
"하아... 어쨌든 오늘 일은..."
마른 세수를 한 레이가 지미를 마주 봤다.
"화풀이도 화풀이고... 엄마도 슬슬 이런 일은 그만두려고 마음을 잡았으니까... 그래서 더 거칠게 반응했어요."
레이는 더는 벨라가 누군가에게 무시당하는 꼴을 보기 싫었다.
만약 벨라가 별일 없이 은퇴했다면.
패밀리의 조직원들이나 창관의 고객들은 길거리에서 벨라를 마주쳤을 때 생각 없이 저급한 농담을 툭툭 던지곤 했을 터다.
은퇴한 매춘부 따위, 정말 만만한 상대였으니까.
그래서 이번에 작정하고 손을 썼다.
남들의 기억에 똑바로 각인되도록.
어쭙잖은 새끼들이 벨라를 함부로 무시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진상한테 쫄아서 여자 방치하는 일도 더는 있어선 안 되잖아요. 패밀리 기강이랑 위계도 바로 잡을 겸 화 좀 냈어요."
"잘했어. 그리고 벨라 일은 정말 미안해."
"엄마 그렇게 만든 놈, 누구인지 알아냈어요?"
"나한테 보고도 늦게 들어온 데다, 그놈들이 창관에서 일을 벌인 당일 아침에 말을 타고 빠르게 백작령을 벗어나서 쫓지 못했어. 네가 원한다면 사람을 풀어서..."
"됐어요. 하지 마세요."
레이가 손을 휘저었다.
필립스 백작령 내에서라면 상대가 귀족이든 뭐든 수월하게 대처할 수 있겠지만, 백작령 밖이라면 다르다.
범인 찾겠답시고 일 크게 벌여봤자 사건의 당사자인 벨라만 곤란해질 확률이 높았다.
"덮고 넘어갑시다."
"...괜찮겠냐?"
"괜찮아야죠."
레이가 머리를 쓸어올렸다.
벨라가 바라지도 않는 복수 때문에 벨라를 위험에 빠트리는 건 병신 짓이었다.
허나 만약에라도, 이번 사건의 범인이 다시 필립스 백작령을 들린다면.
그때는 반드시 찢어 죽여버릴 생각이었다.
레이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만 나가요. 여기 금방 무너질 것 같은데."
"...그러게. 아예 다시 지어야겠네."
돈 나갈 곳이 또 생겼군.
지미가 고개를 슬며시 저었다.
*
라일락의 저녁을 깔끔히 부숴 먹고 하루가 지났다.
레이는 이런저런 볼일을 보다 해가 완전히 지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어차피 집에 아무도 없는지라, 늦게 돌아왔다고 잔소리할 사람은 없었다.
덜컥!
레이가 현관을 열고 집 안으로 한 발자국 들어섰다.
그 순간.
검기에 휩싸인 검이 레이의 목덜미에 닿았다.
철컥!
아직 열려 있던 문이 다른 이의 손에 닫혔다.
레이가 집 안을 훑어봤다.
목에 검을 겨눈 불청객을 제외하고도,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두 명 더 있었다.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브랜딜이 손을 살짝 흔들었다.
"허락받지 않고 들어와서 미안해. 근데... 우리 구면이지? 시그니 산맥에서 봤잖아."
".."
레이는 침묵한 채 브랜딜을 살폈다.
브랜딜의 호흡은 꽤나 거칠어져 있었다.
집안에서 피 냄새가 풍기는 걸 보니 상처를 입은 듯했다.
레이의 시선을 느낀 브랜딜이 겸연쩍은 얼굴을 했다.
"해치려고 찾아온 게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한테 문제가 조금 생겼는데, 잠깐 재정비만 하고 떠날게."
"..."
레이가 자기 목을 겨누고 있는 검기가 서린 검을 향해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엄지와 검지의 피부가 검기와 맞닿아 찢어져 나간다.
레이는 개의치 않고 손가락을 검신에 접촉시켜 마나를 흘려 넣었다.
한 자루의 검에 두 명의 마나가 뒤섞이며 충돌했다.
까앙!!
검의 중앙이 부러져 나갔다.
레이에게 검을 겨눴던 레인저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브랜딜과, 브랜딜 곁에 있던 레인저가 레이를 향해 검을 뽑아들었다.
레이가 부러진 검신을 들어 보이며 퉁명스레 물었다.
"여기서 나랑 싸우려고? 감당 가능해?"
"..."
방금 전 퍼포먼스를 봤을 때 레이는 최소 엑스퍼트였다.
절대 조용히 처리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여기서 전투를 벌였다가 제삼자에게 들키면 레인저들은 필립스 백작령을 벗어나기 대단히 힘들어졌다.
브랜딜이 한숨을 쉬며 검을 내려놓았다.
"산맥에서는 실력을 숨겼었구나."
"실력을 내보일 필요가 없었을 뿐이지."
레이가 주방으로 걸어가 보존 식품 몇 개를 꺼내 브랜딜 앞으로 던졌다.
"이름이 브랜딜이라고 했나? 시그니 산맥에서의 트러블을 원만히 해결해준 빚이 있으니, 선심 좀 써주도록 하지."
"...오, 예상보다 굉장히 호의적인데?"
"재정비하고 한 시간 안에 떠나. 경고하겠는데, 백작령에서 사람 해치면 내가 직접 쫓아가서 죽여버릴 거야."
"새겨두도록 할게."
브랜딜을 비롯한 레인저가 주섬주섬 보존식을 챙기기 시작하자 레이가 말을 덧붙였다.
"그거 공짜는 아니야."
"원하는 거라도?"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 꼴로 여기까지 기어들어왔는지 전부 불어."
"흠..."
정보를 내놓으라는 반협박에 브랜딜이 침음을 흘렸다.
"어리다고 얕봤는데 만만치가 않네."
용주골 (3)
91화
브랜딜은 필립스 백작령을 나름 가까운 이웃처럼 여기고 있었다.
신입 레인저들은 필립스 백작령도 제국의 일부라며 맹목적으로 적대하곤 했지만, 강제로 학습된 적대감은 시간이 흐를수록 옅어지는 법이었다.
브랜딜은 때때로 소소한 연민까지 백작령에게 느끼고는 했다.
'제국 중추 세력에게 제대로 지원도 받지 못하면서 이쪽 눈치도 봐야 하는 처지니.'
물론 이제까지 레인저가 필립스 백작령에서 무력 충돌을 일으킨 적은 없었다.
레인저의 남하는 곧 루비하 왕국과 제국의 전면전을 뜻한다.
레인저 창설 이후 그 지경이 될 때까지 루비하 왕국과 제국의 갈등이 고조된 적은 없었다.
다만 레인저들이 작정하고 필립스 백작령을 괴롭히고자 한다면, 방법이야 많았다.
브랜딜이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이웃 사이니까 얘기해주는 거야. 공감대도 있고. 우리나 너희나 여기저기 눈치 보기 바쁘잖아?"
필립스 백작령 밖으로 정보가 새나가면 재미없을 거란 협박이었다.
레이가 실소했다.
"너희들이랑 척질 생각 없으니까 겁박은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레이의 확언에 브랜딜이 작게 웃었다.
"그 기사에 그 종자네. 뭐, 좋아. 최근에 제국의 고위 귀족이 이쪽 루트를 통해 루비하 왕국으로 망명을 시도하려 했어. 우리는 제국의 고위 귀족을 추적자로부터 보호하라는 임무를 하달받았고."
"...그래서 시그니 산맥에서 우리를 마주쳤을 때 민감하게 반응했군."
"그 말이 맞아."
레이가 서랍에서 깨끗한 붕대를 꺼내 브랜딜에게 던졌다.
"제국의 고위 귀족이라는 놈, 정확한 정체가 뭐야?"
"정보를 너무 싼값에 거저먹으려 하는데."
"대답해."
"실망시켜 미안하지만, 우리도 몰라. 상대가 정말 제국의 귀족이 맞는지도 알 수 없어. 원래 현장 뛰는 애들한테 필요 이상의 정보를 제공하진 않거든. 물론 최고 기밀이라 알아도 말은 못 해줘."
"그렇군."
레이는 굳어 더 캐묻지 않은 채 넘어갔다.
레인저는 왕국에서 심혈을 기울여 양성한 특수 부대다.
어설픈 회유와 고문으로 정보를 얻어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굳이 날을 세워가며 어설픈 기 싸움을 할 필요는 없었다.
"보아하니 추적자랑 한 판 붙은 모양인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
레이가 이번엔 서랍 깊숙한 곳에 보관되어 있던 육포 더미를 꺼내 던졌다.
육포를 잡아챈 브랜딜이 실소를 터뜨렸다.
"간식 받아먹은 애완견이 된 기분인데?"
"대답해. 아니면 이것도 기밀이라서 답 못 해주나?"
"으음... 네 추측 대로, 제국 측의 추적자랑 제대로 붙었어."
"...왕국이 자랑하는 레인저의 명성이 허명이었나? 홈그라운드에서 붙어놓고 부상을 입은 채 여기까지 기어들어 와?"
레이는 브랜딜의 이야기가 거짓말이 아닐까 의심됐다.
차라리 레인저 간의 내분이 발생해 브랜딜이 상처를 입고 제국령으로 도망쳤다는 게 말이 됐다.
눈살을 찌푸린 레이에게 브랜딜이 설명을 덧붙였다.
"제국 측이 보낸 추적자들의 무위가 예상을 크게 벗어나 있었어."
"...?"
"추적자 중 그래듀에이트만 최소 다섯이었어. '최소'. 내게 들어온 보고만 그 숫자였으니, 더 있었을걸?"
"..."
개소리.
거짓말 그만하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브랜딜의 이야기가 아주 허황된 건 아니었다.
최근 황실 권력 구도에 격변이 일었다.
2황자의 잔인한 손속을 두려워한 제국의 고위 귀족이 망명을 선택했을 가능성도 분명 존재했다.
망명을 택한 귀족이 제국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물이라면 황실 또한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제국이라 해도...'
그래듀에이트를 분대 단위로 파견했다는 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니다.
제국이 보낸 추적자들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요인 확보? 혹은 요인 사살?'
확보를 우선하되 여의치 않으면 사살하라. 아마 그쯤 아니었을까.
레이는 홀로 자문자답하다가 다시 브랜딜을 마주 봤다.
도저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작전 결과가 어떻게 됐지? 너희가 망명을 시도한 귀족을 확보한 건가?"
"..."
브랜딜의 옆에 있던 레인저가 대놓고 살기를 내뿜었다.
이런 곳에서 떠벌리기엔 너무 귀한 정보라는 걸, 레이도 모르지는 않았다.
허나 시그니 산맥에서의 전투가 어떻게 결말을 맺었는지 알아야 필립스 백작령도 처세를 바로 할 수 있었다.
만약 루비하 왕국이 망명을 시도한 귀족을 성공적으로 확보했다면 제국은 2차 추격대를 보내거나, 경우에 따라선 일이 더 커질 수 있었다.
"대답해."
"이봐."
브랜딜이 레이를 향해 허리를 조금 기울였다.
"너무 기어오른다 생각하지 않아? 이 정도에 만족하는 게 어때?"
"불순한 의도로 물어본 건 아니야."
레이가 허리춤에서 검을 풀었다.
레이가 몸에 지니고 있던 마지막 무기였다.
레이는 거침없이 허리춤의 검을 레인저를 향해 던졌다.
촤악!!
검집이 땅에 쓸리며 거친 소리를 낸다.
레이가 비무장이 된 채 레인저들 사이에 섰다.
"필립스 백작령은 와일드호그 사이에 낀 토끼 신세지. 어떻게 몸을 사려야 무사할 수 있을지, 그게 궁금했을 뿐이야."
"...거 참 담대한 친구네."
레이가 아무리 엑스퍼트라 해도, 비무장 상태로는 결코 레인저에게 저항할 수 없다.
허나 레이는 검 한 자루 없이 레인저 셋 사이로 걸어들어왔다.
브랜딜은 찰나 간 고민했다.
이대로 레이를 깔끔하게 베어버린 후 여기를 떠날까, 하고.
허나 나이 어린 종자의 패기가 꽤 마음에 들었으며, 레이의 심정 또한 충분히 이해됐기에 브랜딜은 검을 뽑지 않았다.
"우리가 실패했어."
"..."
"제국의 추적자들이 피해를 감수하고 레인저들을 뚫고 들어와 요인의 허리를 양단했어."
"추적자가 요인을 사살하는데 망설임은 전혀 없었나?"
"없더라고. 깔끔하게 일 마치고 퇴각하더라."
처음부터 무조건 사살 명령이 내려졌거나, 생포를 우선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했다는 의미다.
"그 시점에서 우리 임무는 추적자를 쫓아 섬멸하는 것으로 바뀌었어. 그 이후로는 보다시피야. 뒤를 쫓다가 반격당해 부상을 입었고, 본진으로 복귀하기엔 거리가 멀어 여길 잠깐 들렸어."
"말해줘서 고맙군."
레이가 복잡한 얼굴을 했다.
제국이 성공적으로 요인을 사살했다면 일단은 시그니 산맥에서 2차 충돌이 발생할 확률은 거의 사라졌다.
문제는 임무를 실패한 레인저들이 보복 조치라며 이쪽으로 검을 겨누는 경우인데...
"복수하겠다고 엄한 우리를 들쑤시진 말았으면 좋겠는데."
"하하하. 너 확실히 머리 돌아가는 게 빠르구나. 그래... 불안해 할만 해. 화풀이할 상대는 필요한 법이니까."
브랜딜이 허리와 다리의 상처를 붕대로 동여맨 후 손으로 꾹꾹 눌러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국과의 갈등이 지나치게 고조되는 건 위에서도 원하지 않을 거야. 나도 아랫것들이 돌발 행동을 하지 않게 신경 좀 쓸게."
"빈말이 아니었으면 좋겠군."
레이가 현관 손잡이를 붙잡아 돌리며 말을 덧붙였다.
"빨리 재정비해서 떠나. 사람 해치지 말고."
"육포 잘 먹을게.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보자고."
"평생 볼일 없었으면 좋겠군."
달칵!
현관문이 닫히고,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
"중대장님..."
"왜, 쓸데없이 정보를 너무 많이 누설한 것 같아?"
필립스 백작령에서 벗어나, 시그니 산맥을 넘어가던 브랜딜이 옆을 돌아보았다.
브랜딜과 10년을 넘게 시그니 산맥을 지켰던 레인저, 모리와 머록.
둘다 표정이 안 좋았지만, 모리는 특히 대놓고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너무 과하셨습니다."
모리는 자존심이 상해 있었다.
브랜딜이 작전 정보를 누설해서 불만인 게 아니라, 굽히고 들어가지 않아도 될 자리에 굽히고 들어간 게 불만이었다.
"제국민에게 기밀 사항을 공휴한 것, 나중에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남의 귀에 들어가면 문제가 크게 되겠지. 너희들이 위에 일러바치기라도 하면 바로 목이 달아날 거야."
"그럼 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보험이야, 보험."
"..."
모리가 곧장 침묵했다.
브랜딜은 또다시 위험한 이야기를 입에 담고 있었다.
"모리, 너도 알고 있잖아. 우리는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대지만, 제국을 함부로 적대해선 안 돼. 체급 차이가 얼마나 나는데?"
제국이 대륙을 평정하지 못해서 안 하는 게 아니었다.
루비하 왕국은 제국을 견제하되 적대해선 안 됐다.
때문에 이번 일은 선을 넘었다.
제국이 로얄가드 급을 대거 동원했다.
대규모 전쟁에서라면 모를까, 후방 지원도 제대로 안 되는 특수 임무에 그래듀에이트를 분대 단위로 동원 가능한 세력은 제국에서도 황실 말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황실이 이렇게 격분할 사안이라면, 루비하 왕국도 훨씬 신중했어야 했다.
"하아, 단장 바뀐 뒤로 분위기 뒤숭숭하더니 지금 우리 꼴을 봐. 제국이랑 진짜 전쟁이라도 하자고? 그게 무슨 미친 짓이야?"
"..."
"요인 보호에 실패했으면 거기서 그만 포기해야지. 추적 섬멸 명령을 내려? 정신 나간 새끼 아니야?"
"..."
"단장이란 놈이 강경파랍시고 헛짓거리만 골라 하는데... 그러니 저쪽에 미리 신뢰 좀 사 놓자는 거야."
저쪽이라면 필립스 백작령이다.
모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망명이라도 하시려고요?"
"그건 아니고. 왕국과 제국 간 갈등이 거세지면 저쪽도 쫄리기는 마찬가지니까, 혹시 도움을 받을 일이 생길지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미리 끈 좀 만들어 놓자는 거지."
"그 깡촌 놈들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모리, 아까 그 종자 놈이 머록의 검을 부러뜨리는 걸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침묵하던 머록이 입을 열었다.
"외견이 믿기지 않을 만큼 강맹한 마나의 기류였습니다."
"봐봐, 종자 놈이 벌써 엑스퍼트야. 저 백작령 기사들도 죄다 만만치가 않아. 난 젠킨슨 걔 처음 만났을 때 놀랐다니까."
"후우..."
한숨을 푹 쉰 모리가 한 마디 덧붙였다.
"중대장님 마음은 알겠습니다. ...저한테 뒤통수 안 맞게 조심하십쇼."
"안 그래도 요즘 불안불안 하더라."
브랜딜이 반쯤 진심을 담아 답하며 사람 좋게 웃었다.
*
레이는 브랜딜과의 대화 후에 곧장 영주성을 찾아갔다.
브랜딜 일행 말고도 다른 레인저가 백작령에 숨어들었을 수 있었다.
모든 레인저가 브랜딜처럼 융통성이 있지는 않을 터다.
레이의 보고를 받은 백작은 기사들을 비롯해 레이, 지미, 매튜의 의견을 수렴해 신중하게 움직였다.
함부로 병력을 움직였다가 숨어 있던 레인저들이 날뛰면 더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때문에 루나와 알레시아의 바람 정령이 정찰에 동원됐다.
바람 정령은 정찰에 있어 굉장한 전술적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정령의 활약 덕분에 브랜딜 일행을 제외하고도 레인저 세 명을 더 발견할 수 있었다.
레인저 두 명은 위치가 발각된 후 당연히 저항하려 했다.
허나 기사들은 미리 챙겨놨던 군장을 건네주며 차분히 레인저를 설득했다.
설득 내용은 간단했다. '우린 너희와 적대하고 싶지 않다. 물자를 지원해줄 테니 조용히 떠나라.'
레인저 둘은 조금 떫은 얼굴로 군장을 받아든 후 시그니 산맥으로 떠났다.
남은 레인저 하나가 문제였는데, 발견 당시 이미 은신을 위해 백작령 주민 셋을 죽인 후였다.
"선을 넘었군."
디디에가 레인저의 턱을 붙잡아 부수었다.
사방을 포위한 기사들이 차례차례 레인저의 관절에 검을 박아넣고 비틀었다.
기사들의 검에 검기가 피어오르는 일은 없었다.
검기는, 사람을 너무 쉽게 죽게 만들었다.
기사들은 레인저를 세심하게 찢어발긴 후 검에 묻은 피를 털었다.
"목을 효수했어야 하는데."
안타깝지만, 대놓고 레인저를 죽였다고 광고할 수는 없었다.
기사들은 살해당한 일가족의 시신을 뒤로한 채, 레인저가 은신했던 집에서 걸어나왔다.
레이가 그 광경을 지켜보며 고민했다.
'이번에 죽었다는 귀족이... 엄마에게 해를 끼친 그놈인가?'
앞뒤 정황을 보면 그럭저럭 아귀가 맞긴 했다.
뭐, 시체를 들고 와 벨라에게 확인받지 않는 이상 확신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었다.
그래도 벨라에게 해를 끼쳤던 잡놈이 죽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이제 레인저만 날뛰지 않으면 좋겠는데...'
시간이, 흘러갔다.
한동안 필립스 백작령 전체가 긴장된 시간을 보냈다.
기사와 병사들의 경계 근무 시간과 강도가 가파르게 치솟았고, 레이는 보육원 아이들의 행동반경을 크게 줄였다.
허나 다행히, 그날부터 두 달하고 보름이 지나서도 필립스 백작령에 특별한 사건 사고가 발생하진 않았다.
다들 조금씩 마음을 놓으려던 차에.
폭탄이 터졌다.
"엄마, 뭐라고?"
레이가 눈을 부릅뜬 채, 혹시 자기가 잘못 들었나 싶어 벨라에게 되물었다.
벨라가 귀 아래를 긁적이며 겸연쩍은 얼굴로 답했다.
"요즘... 달거리가 안 오네? 속도 좀 메스껍고..."
"아 시발 엄마!! 지금 제정신이야?!"
"아들! 엄마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책임 (1)
92화
나태한 황태자. 황실의 망나니.
불경한 자들은 카리우스를 그리 칭하고는 했다.
카리우스는 실제로도 망나니라고 소문이 났으나 그러한 평판은 상당히 왜곡된 것이었다.
황태자의 직위를 가진 자가 작정하고 망나니 짓을 했을 때.
그 여파가 얼마나 커다랄지는 겪어보지 않은 자는 몰랐다.
카리우스는 망나니 흉내만 냈지, 실제로는 황제의 손아귀 안에 얌전히 잡혀 있는 편이었다.
황제가 잡아챌 수 있는 목줄을 카리우스는 언제나 목에 두르고 있었다.
카리우스는 이를 나름의 처세라고 생각했다.
황제의 눈 밖에만 크게 나지 않은 채 자리를 지키면, 알아서 권력이 결집될 것이라 여겼다.
크게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다들 황태자란 직위를 지닌 카리우스에게 줄을 대기 위해 열성이었으니 말이다.
카리우스가 생각하기에, 서자는 아예 경쟁할 상대가 아니었고 2황자는 그 성정이 난폭하여 지금 같은 평화로운 시기에 어울리는 자가 아니었다.
허나 카리우스는 크게 착각했다.
카리우스의 가장 큰 결점은 성격이 아닌 '무능'이었다.
눈치 보기만 즐겨하는 카리우스를 보고 황제는 판단했다.
카리우스가 황제의 자리에 앉으면 황권이 크게 약화될 것이라고 말이다.
오랜 고민 끝에 황제가 카리우스를 버렸다.
황제의 함정에 말려든 카리우스는 황태자 직위를 반납해야 했다.
2황자는 카리우스를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그건 모두가 알았다.
권력의 냉정함 앞에, 카리우스와 가까웠던 자들이 하나둘 떠나가거나 숙청당하기 시작했다.
카리우스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황제도, 형제도, 권력에 아부하던 귀족들도 모두가 등을 돌렸다.
카리우스는 죽음을 직감했다.
권력에서 밀려나고도 천수를 누린 황족이야 다수 존재했지만, 상대가 2황자였다.
그냥 황족도 아닌, 한때 황태자 직위를 지녔던 카리우스를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공포에 빠진 카리우스에게 혹할 만한 제안이 찾아왔다.
루비하 왕국으로의 망명.
목숨을 건질 마지막 기회였다.
카리우스는 루비하 왕국으로 망명한 후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살아가기 위해 노력할 생각이었다.
상심한 카리우스에게 더는 대담한 욕심이 남아있지 않았다.
허나 추적자가 따라 붙었다.
한둘도 아니었으며, 로얄 가드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카리우스는 황제에게 격분했다.
나는 당신의 아들인데, 내가 당신에게 얼마나 충성했는데, 이렇게 쓰레기 치우듯 치워버릴 수 있냐고, 수도 없이 되뇌었다.
결국 국경을 넘는 것은 성공했지만 추적자에게 따라 잡혔다.
가로 막는 레인저들은 뚫어낸 추적자들이 마침내 카리우스에게 검을 겨눴다.
기억의 마지막에서, 카리우스는 자기 허리가 양단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분하고, 억울하고... 죽음이 두렵구나.
공포에 질린 카리우스는 하늘로 손을 뻗은 채 의식을 잃었다.
그게 마지막 기억이 되었어야 할 터인데.
[탐욕.]
언젠가부터, 칠흑 속에서 무언가의 목소리가 뇌리를 울렸다.
[모든 생물이 지닌, 그 무엇보다 우선되는 강렬한 탐욕. 삶을 향한 갈망.]
시야가 갈라지며 괴기한 풍경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때문에 그분은 탐욕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불멸이라 불리니.]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풍경 속에서 사방을 가득 메운 끈적한 무언가가 몸을 뒤덮는다.
[제국의 진정한 주인이여, 그분의 힘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소서.]
치지지직!
멈춘 심장 속에서, 코어를 대체하는 드래곤 하트의 조각이 홀로 박동하며 검게 물들었다.
핏기가 가신 손아귀가 천천히 움직여 주먹을 말아 쥔다.
길게 찢어진 붉은 동공이 빛을 되찾았다.
"그 배반자 놈들을 전부 죽여버릴 것이다."
*
"아으...!"
레이가 자기 머리를 쥐어 싸맸다.
혈압이 급격히 높아져 눈앞이 번쩍였다.
근래 벨라의 행동이 영 이상하긴 했었다.
벨라는 라일락의 저녁에서 폭행을 당한 후 약 한 달간 교회에서 머물렀다.
그때까지는 별 문제 없었다.
교회에 잔뜩 실려 온 지미 패밀리를 보고 레이를 가볍게 질책하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벨라는 한 달 동안 무사히 상처를 회복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집으로 돌아온 벨라는 '정리할 일이 남았다'며 다시 라일락의 저녁으로 출근했다.
레이가 라일락의 저녁을 무너뜨린 탓에 벨라가 출근한 곳은 간판을 바꿔 단 옆 건물이었다.
레이는 이때 무슨 일이 있겠구나 감을 잡긴 했다.
허나 일단은, 벨라를 지켜봤다.
벨라는 라일락의 저녁에 재출근하고 한 달 후에 은퇴했다.
벨라가 은퇴하는 날 간소하게나마 파티도 열렸다. 일종의 송별식이었다.
그로부터 보름 뒤가 바로 오늘이다.
벨라의 폭탄 선언에 레이는 괴상한 신음을 연거푸 내뱉고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자기 뺨을 쫙쫙 몰아쳤다.
"엄마, 임신했어?"
"글...쎄?"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벨라를 보고 레이가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애비가 누군데?"
"...최근 받았던 손님 중에 있지 않을까? 조심한다고 조심했는데 피임구에 문제가 있었나봐."
"엄마, 솔직히 말해."
레이의 이빨이 부드득 갈렸다.
"그때 그 새끼지?"
"..."
무언의 긍정에 레이가 재차 폭발했다.
"아니 시발 엄마!!! 진짜 제정신이야?!!"
"아들!! 엄마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말버릇이고 나발이고!! 아오!!"
레이가 두 손으로 탁자를 강하게 내려치려다 간신히 팔에서 힘을 뺐다.
임신한 벨라를 앞에 두고 물건을 쾅쾅 부숴댈 수는 없었다.
"으그그그그그그그그극...!!!!!"
레이가 앓는 소리를 길게 빼며 최대한 벨라의 입장에서 상황을 이해해보려 노력했다.
몸을 팔다 쓰레기의 폭행에 노출되는 것? 간간이 있는 일이다.
물론 벨라의 경우 아예 폭행에 방치당하긴 했지만, 어디 병신된 곳 없고 무사히 회복했으니 객관적으로는 대단한 사고라 평하기 힘들었다.
매춘부가 피임에 실패해 아이를 가지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었다.
지미 패밀리가 백작령을 완전히 장악한 후엔 창관의 관리가 많이 섬세해져 그런 일이 크게 줄었지만, 과거에는 이래저래 개판이었다.
안전하게 낙태할 돈도 없는 매춘부는 낳은 지 얼마 안 된 자기 아기를 길거리에 유기하곤 했다.
레이가 보육원으로 주워 온 갓난아기 상당수는 그러한 케이스였다.
"끄으으응..."
뭐, 어쨌든 간에.
벨라 입장에서 이번 일이 레이가 느끼는 것 만큼 심각하게 다가오지 않을 수 있다는 건 둘째 치고.
이 세계에서도 아이를 지우는 건 당연히 가능했다. 빠르면 빠를수록 건강에 좋았고 말이다.
허나 벨라는 한 달 동안 몸을 회복하고, 알리바이라도 만들 생각이었는지 한 달 동안 다시 창관에 나가고, 그로부터 보름이 지난 뒤에야 임신 사실을 처음 알렸다.
레이의 한숨이 길어졌다.
벨라가 혈육에게 보이는 애정과 헌신. 그리고 레이가 벨라에게서 뺏어간, 그녀의 소망.
레이는 알 수 있었다. 벨라는 아이를 지울 생각이 전혀 없었다.
레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엄마... 하필 낳아도 그 개망나니 아이를 낳아서 길러야겠어?"
"아빠가 누구든 아이한테 무슨 잘못이 있겠니."
잠시 침묵한 벨라가 썩 들뜬 얼굴로 뒷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기왕이면 평민 씨앗보단 귀족 씨앗이 좋지 않을까?"
레이가 초롱초롱한 벨라의 눈빛을 보고 뒷목을 붙잡았다.
'진정하자, 진정.'
이쪽 세계 사고관을 생각하면 벨라가 저리 반응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신분제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귀족에 대한 환상은 어린 시절부터 학습된 것이었고, 천민이나 평민이 귀족을 동경하는 건 당연했다.
레이가 자포자기해 중얼거렸다.
"그래, 시발. 기왕 씨를 받을 거면 구하기 힘든 로얄 시드가 낫지."
노말 가챠보다는 확률업 가챠다 이 말이야.
영혼 털린 얼굴을 한 레이를 향해 벨라가 웃음꽃을 피우며 배를 쓰다듬었다.
"아들일까? 딸일까?"
"엄마는 뭐가 좋은데?"
"아무래도 딸이 좋지. 아들 키워보니까 재미가 없더라."
"제가 어머니 속을 대차게 썩였어야 새로 낳겠다는 생각을 안 하셨을 텐데 말입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레이는 뭐라도 때려 부수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며 이를 악물었다.
그래, 앞으로 몇 달 뒤면 벨라의 아이가 태어날 거다.
벨라의 아이라는 건, 레이의 동생이란 뜻이었다.
"으그그그그극...!!!"
동생, 동생이라니!
호적으로 따지면 친동생이고 혈연 관계로 따져도 사촌 동생이다.
그건 상관 없지만, 동생 애비란 작자가 씹어먹을 개새끼라는 걸 상기하니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작게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레이를 바라보던 벨라가, 조금 불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괜찮겠지? 낳아도?"
"하아, 엄마."
머리를 벅벅 긁어낸 레이가 잠깐 생각을 정리했다.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동생 애비일 가능성이 있는 작자가 무슨 결말을 맞았는지는 벨라에게 알려주어야 할 것 같았다.
레이는 '망명을 시도하다 죽은 고위 귀족'에 대해 벨라에게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를 전부 들은 벨라가 자기 팔목을 움켜쥔 채 중얼거렸다.
"내 아이... 위험할까?"
벨라는 벌써부터, 자기 자신이 아닌 뱃속의 아이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 답답한 모습을 보고 레이가 입술을 강하게 짓씹었다.
아직 레이가 환생한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의 기억이, 자꾸만 떠올라 뇌리를 헤집는다.
'걱정 마렴. 안심해도 된단다.'
입술에서 피가 터진다. 레이의 입속에서 비릿한 혈향이 넘쳐 흘렀다.
'오늘부터 내 아들하자.'
"후우..."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쉰 레이가 입을 열었다.
"걱정 안 해도 돼, 엄마. 엄마는 아들이 지킬 거야."
그러니, 당신이 원한다면.
"내 동생도, 내가 지켜야지."
"아들..."
퍽 감동한듯한 벨라를 앞에 두고 레이가 손을 휘저었다.
"아, 근데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 사람이 태어날 때 머리 위에 '귀족'이라고 찍혀나오는 것도 아니고."
씨를 뿌린 귀족 가문에 먼저 찾아가 따지고 들지 않는 이상 벨라가 아이를 낳든 말든 신경 쓸 자는 없을 것이다.
물론 만약을 대비해, 괜한 의심을 받는 건 피하는 게 좋았다.
벨라가 굳이 한 달을 더 창관을 왔다갔다한 것도 추후 핑계를 대기 위한 목적이었다.
허나 레이가 생각하기에 그 정도로는 조금 부족했다.
기왕 할 거면 확실하게 남의 눈을 속이는 게 좋았다.
레이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엄마, 이건 어때?"
*
"으으음..."
사무실로 찾아온 레이가 눈을 살짝 찌푸린 채 침음을 흘렸다.
아무리 양심이 맨들맨들 해 남의 뒤통수를 심심찮게 쳐 온 레이라지만 이번만큼은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의 고민 끝에 레이가 자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운을 뗐다.
"지미, 매튜."
"...?"
지미와 매튜가 세상 떫은 얼굴로 레이를 쳐다봤다.
저렇게 뜸을 들이는 꼴을 보니 괜히 마음만 더 불안해졌다.
슬금슬금 도망갈 준비를 하는 둘을 향해 레이가 어렵사리 본제를 꺼냈다.
"혹시 '쾌락 없는 책임'이란 말 들어본 적 있나요?"
지미의 줄어 들어가던 머리카락이 천장을 향해 쭈뼛 섰다.
책임 (2)
93화
지미의 줄어가던 머리카락이 천장을 향해 쭈뼛 섰다.
'쾌락 없는 책임'이란 말의 정확한 뜻은 모르지만, 지미의 단련된 육감은 굉장히 기민하게 불길함을 감지했다.
하지만 현역 시절에도 눈치 하나만큼은 매튜가 지미보다 몇 단계 뛰어났다.
매튜는 직감적으로 이대로 있다가는 좆된다는 걸 깨달았다.
망설임은 없었다.
매튜가 곧장 창문을 향해 몸을 던졌다.
쨍그랑!!
창문을 깨고 3층 아래로 몸을 던진 매튜가 땅을 한 바퀴 굴렀다.
등에 유리조각이 몇 개 박혔지만 지금 그딴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매튜가 다급히 달려나가 골목 사이로 몸을 감췄다.
"..."
그 광경을 전부 지켜본 지미가 뒤늦게 레이와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슬금슬금 발을 옮긴 지미는 간신히 사무실 문앞에 도착했다.
지미가 곧장 사무실 밖으로 몸을 던지려던 순간.
쩌적!
갑자기 생겨난 얼음이 지미의 왼쪽 발을 바닥에 묶었다.
도주에 실패한 지미가 결국 미간을 와락 구기며 짜증을 토해냈다.
"아니 또 왜?! 이번엔 대체 무슨 일인데?!!"
"진정하고 여기 앉아봐요."
레이가 지미를 반쯤 강제로 끌고 와 의자에 앉혔다.
툴툴대는 지미를 향해 레이는 솔직하게 상황을 밝혔다.
"엄마가 아이를 가졌어요. 정황상 사고 치고 도망간 귀족놈 아이인 것 같아요."
"?!"
상상도 못한 폭탄 발언이었다.
벙 쪘던 지미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
"뭐? 아이를 가져? 임신했다고? 그것도 귀족의 아이를?"
"네. 그래서 남들 눈을 속이기 위해... '부친 역할'을 해줄 사람이 하나 필요할 것 같아요."
"..."
지미가 제자리서 얼어붙었다.
잠깐의 침묵 후.
지미가 달달 떨리는 손가락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켰다.
레이가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엄지를 들어 올렸다.
"해줄 거죠?"
"해주긴 뭘 해줘 이 시발놈아!!!!!"
지미가 괴성을 지르며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크아아악!! 내가 미쳤냐?! 안 돼!! 못 해줘!! 당장 내 앞에서 꺼져 이 악마야!!"
분노가 가득 서린 검격이 레이를 향해 휘둘러졌다.
레이는 휘몰아치는 지미의 공격을 피하다가 결국 칼날을 맨손으로 붙잡았다.
"지미, 잠깐만 내 얘기 좀 들어줘요."
"닥쳐!! 닥치라고!!"
"지미, 나는 벨라에게 빚을 졌어요."
레이의 눈가에 슬픔이 깃들었다.
*
이 빌어먹을 세계에 환생한 후.
나는 한동안 생물학적 애미 애비가 교접하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살아야 했다.
헉헉 앙앙 퍽퍽.
참으로 좆같은 경험이었다.
반쯤 강제로 귀가 열려 있던 탓에 나는 좋으나 싫으나 생물학적 애미애비의 대화로부터 여러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생물학적 애미에겐 언니가 한 명 존재했다.
생물학적 애미의 언니의 이름은 벨라. 내게는 이모 되는 사람이다.
벨라와 생물학적 애미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었다고 한다.
벨라는 험한 세상에서 동생을 지키며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창관에 발을 들였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테지만, 굶어 죽는 것보단 나으리라 생각했을 터다.
사회에서 터부시 되는 일임에도 벨라는 싫은 기색을 내비치지 않고 많이 노력했다고 한다.
덕분에 벨라는 창관에서 빠르게 자리를 잡아 괜찮은 수익을 얻게 됐다.
벨라는 비록 자기 자신은 창관에서 몸을 버렸을지언정, 동생은 귀하게 키우려 노력했다.
벨라의 노력 덕분에 내 생물학적 애미는 그럭저럭 모자람 없이 자라날 수 있었다고 한다.
내 생물학적 애미는 그럭저럭 얼굴이 반반했고, 그 덕분에 나름 괜찮은 남자를 꾀어 인연을 맺는 데 성공했다.
허나, 내 빌어먹을 생물학적 애미는 천성이 방탕하고 문란했으며 개념이 없었다.
벨라의 희생이 무색하게, 그년은 가정을 꾸리고도 옛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불륜을 저질렀다.
그년은 심지어 생물학적 애비와 함께 벨라의 뒷담을 하며 경멸의 감정을 내비치곤 했다.
어떻게 돈을 받고 다리를 벌릴 수 있냐며, 자기 언니와 자기 언니가 지닌 직업을 향해 역겨움을 드러냈다.
나는 가만히 누워 생물학적 애미를 몇 번이고 비웃었다.
천박하고 미천한 창부는 벨라가 아니라 바로 네년이다.
내가 두 다리로 일어설 수 있게 된다면 가장 먼저 네년부터 찢어 죽여버릴 것이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리 다짐했으나, 나는 패륜을 저지를 기회를 얻지 못했다.
담대한 불륜 행각이 계속되던 와중.
어느날 호적상 아버지가 평소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생물학적 애미애비는 서로를 핥아대는데 정신이 팔려 호적상 아버지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호적상 아버지를 두 눈으로 보고도 침묵했다.
호적상 아버지의 인기척이 가까워졌지만 남녀의 달뜬 신음 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추후 알게 된 사실이다만.
그날 호적상 아버지가 집에 일찍 돌아왔던 이유는 자기 여동생의 전사 통지서를 받았기 때문이라 한다.
기사의 종자가 되어 미궁에 들어갔던 자기 여동생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호적상 아버지는 덜덜 떨며 집으로 돌아왔다.
허나 생물학적 애미애비는 그것도 모른 채 평소처럼 몸을 섞으며 내 호적상 아버지를 모욕하는 말을 입에 담았다.
나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맺혔다.
시야 끝에서 호적상 아버지가 도끼를 들고 다가온다.
호적상 아버지가 휘두른 도끼는, 가장 먼저 생물학적 애비의 대가리를 반으로 갈랐다.
생물학적 애미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도끼질은 계속됐다.
아 시발.
속이 시원하네.
박수라도 힘차게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팔에 힘이 붙지 않아 불가능했지만 말이다.
비명 끝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정당한 심판을 끝낸 호적상 아버지는 미적미적 다가와 날 내려다봤다.
이제는 호적상 아버지도 내가 자기 자식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호적상 아버지가 당장 내 머리를 도끼로 내려찍는다 해도, 나는 호적상 아버지를 결코 원망하거나 힐난하지 않았을 것이다.
호적상 아버지는 갈등하듯 한참을 더 나를 바라봤다.
길고 긴 대치 끝에 질린 내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갓난 아이의 한숨은 옹알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빠아..."
"...."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날 나의 한숨이, 호적상 아버지의 선택에 영향을 끼쳤는지 말이다.
호적상 아버지는 결국 도끼를 휘두르지 않고 내게서 등을 돌렸다.
가족을 전부 잃었다고 판단한 호적상 아버지는, 그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적막이 찾아온 공간 속에 피비린내가 자욱했다.
나는 악의가 가슴 속을 달구는 것을 느끼며 그저 인내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호적상 아버지와 연락이 끊긴 것을 걱정한 지인이 직접 집으로 찾아왔다.
아버지의 지인은 집안 꼴을 보고 구역질부터 했다.
그 다음부터 일이 좀 복잡해졌다.
보호자를 잃은 나는 언제 뒈져도 이상하지 않을 처지였다.
그때 소식을 듣고 달려온 벨라가 가장 먼저 나서서 나를 챙겼다.
동생을 잃은 그녀는 참 많이 울었다. 갑자기 벌어진 비극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럼에도 벨라는,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았다.
머리가 쪼개질 때까지 철이 들지 못했던 자기 동생도.
자기 동생과 불륜을 저지른 내 생물학적 애비도.
자기 동생의 머리를 쪼갠 내 호적상 아버지도.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그저 많이 슬퍼했다.
슬픔을 꾸역꾸역 마음속에 쑤셔 넣은 벨라는 일단 나를 거두기 위해 노력했다. 허나 그조차도 쉽지 않았다.
내 생물학적 애비 말인데, 신분이 하필 젠트리였다.
생물학적 애비가 속했던 귀족가는 평소 생물학적 애비를 신경도 안 쓰고 방치하다가, 막상 살인 사건이 터지자 목에 힘을 잔뜩 주고 벨라를 찾아왔다.
그들을 벨라에게 호적상 아버지의 연좌제를 물어 나의 목을 베야 한다고 주장했다.
벨라가 나를 내어주길 거부하자, 막대한 배상금을 대신 지불하라고 강요했다.
이 사건을 들은 필립스 백작이 벨라를 불쌍히 여기고 적정한 타협안을 대신 제시해주었다.
필립스 백작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벨라는 그때까지 창관에서 일하며 모아두었던 모든 재화를 배상금으로 지불해야 했다.
당시 내가 느낀 감정은, 비참함이었다.
나는 그때 갓난아기였기에, 벨라는 남에게 숨겨왔던 비밀스러운 소망을 나에게 털어놓고는 했다.
벨라는 가정을 가지길 원했다. 자기 배로 낳은 사랑스러운 아이가 차근차근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길 바랐다.
벨라는 자기 동생이 좋은 혼처를 얻어 독립한 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매춘부인 벨라가 정상적인 가정을 가질 수는 없었다.
돈 많은 자의 첩으로 들어가거나, 그도 아니면 열심히 모은 재화로 기둥서방을 구해야 했다.
허나 그때 벨라는 젊고 아름다웠기에, 어쩌면 생각보다 좋은 남자를 붙잡아 소망을 이루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존재가 벨라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빈털털이가 된 채 아이까지 맡게 된 벨라는 결국 창관을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벨라에게 짐덩이였다.
그녀의 소망을 부순, 빌어먹을 종양 덩어리였다.
그럼에도 벨라는 아직 걷지도 못하는 갓난아기인 나에게 자주 환히 웃어주었다.
"우리 둘다 운명이 기구하구나."
벨라가 작디 작은 내 손에 자기 손가락을 쥐여주며 말했다.
"하지만 걱정 말렴. 안심해도 된단다."
그날 보여주었던 벨라의 따뜻한 미소가...
"오늘부터... 내 아들하자. 오늘부터 네가 내 아들이야."
식어가던 나의 영혼을 달구었다.
"아들, 고마워. 아들 덕분에 엄마가 소원 이뤘네?"
나는 그날.
힘이 들어가지 않는 갓난아기의 손아귀로 벨라의 손가락을 움켜쥐며 맹세했다.
그래, 오직 당신을 위해.
이 빌어먹을 세상의 멸망을 막아보겠다고.
*
"크흡...! 흡...!"
이야기를 듣고 질질 짜는 지미를 바라보며 레이가 턱을 괴었다.
대체 저런 감수성과 멘탈로 용병 생활을 어떻게 견뎠는지 의아했다.
하긴 타고난 성정이 저러니 필립스 백작령으로 내려와 보육원 차릴 생각을 했을 터다.
"지미, 근데 내 말을 믿어요?"
레이가 뒷목을 긁적이며 물었다.
레이는 자기가 '갓난아기 때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고 고백했다.
갓난아기 때 벨라가 자기 앞에서 남몰래 입에 담았던 소망을 이뤄주고 싶다고 지미에게 이야기했다.
말을 하면서도 믿어줄까 의문이었는데, 지미는 도리어 의아한 얼굴로 레이에게 되물었다.
"9살 때 검기를 발현한 미친놈이 갓난아기 때 기억 좀 가지고 있다고 이상할 게 뭐 있어?"
"...그건 그렇네요."
납득한 레이가 헛기침을 했다.
"흠, 지미... 강요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부탁할게요. 남의 의심을 사는 일은 최대한 피하고 싶어요. 누군가 이름이라도 빌려주면 좋겠는데, 믿을 사람이 지미나 매튜 정도밖에 없어요."
"나한테 뭘 원하는데?"
"그... 술 먹고 엄마랑 한 번 잤다고... 증언해주면..."
어색하게 중얼거리는 레이를 향해 지미가 호통쳤다.
"됐어! 할 거면 제대로 해!"
"...네?"
"어차피 지금은 마음 가는 여자도 없었어. 벨라 뱃속의 아이, 내 아이라고 밝히고 아예 식을 올리자고."
"진심이에요?"
"나한테 나중에 짝 생겼을 때, 그때 이혼하든가 해. 그럼 되잖아?"
"..."
지미의 제안에 레이가 퍽 감동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처음 보는 레이의 표정을 보고 지미가 실소를 터뜨렸다.
"왜, 고마워 죽겠냐?"
입을 우물거린 레이가 망설이다 물었다.
"...오늘부터 아빠라고 불러도 될까요?"
"크아악!!"
지미가 각혈했다.
책임 (3)
94화
맙소사, 아빠라니!
내가 저 악마 같은 새끼의 애비라니!
"크아악!"
따져 보니 벨라와 표면적으로라도 연을 맺는다는 건 레이를 슬하에 두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제야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지미가 뒤늦게 각혈하며 레이를 노려봤다.
"닥쳐!! 내가 왜 네놈 애비야?!"
"엄마 남편이면 제 아빠죠."
"한 번만 더 날 아빠라고 부르면, 절대 안 도와줄 줄 알아!!"
몸을 부들부들 떨며 분노를 드러내는 지미를 보고 레이가 슬픈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닥치라고 했지!!"
레이에게 아빠 소리를 들을 때마다 지미는 등허리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지미에게 있어 레이는 악마와 비견되는 비열한 인성을 지닌 이해 불가의 존재였다.
그런 놈이 내 자식이라고? 본능적인 거부감이 몸을 덮쳤다.
물론, 레이를 슬하에 들임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도 분명 존재했다.
레이는 그 점을 지미에게 상기시켜보려고 옛날에 던졌던 공수표를 다시 던졌다.
"아빠, 아빠 아들이 누구?"
"크아아악!!"
눈이 반쯤 돌아간 지미가 비명을 질렀다.
결국 레이도 설득을 포기하고 입을 다물었다.
*
필립스 백작령에 소문 하나가 빠르게 번져나갔다.
지미가 술 한잔하며 험한 일을 겪은 벨라를 위로해주다가 하룻밤 눈이 맞았는데, 그만 애가 들어섰다.
그런 자극적인 소문이 필립스 백작령을 뜨겁게 달구었다.
혹자는 지미가 자기 '실수'를 결코 인정하지 않으리라 장담했다.
지미가 뭐가 아쉽다고 창부와의 실수를 인정한단 말인가.
허나 지미는 벨라가 자기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남들에게 알리고 식을 올릴 준비를 했다.
지미의 결단에 많은 사람들이 입을 쩍 벌렸다가, 레이를 떠올리곤 상황을 납득했다.
"레이 눈치 보여서 저러는구만?"
벨라의 아들은 스콰이어였으니까, 스콰이어와 연결된 기사들의 눈치가 보였다고 하면 대충 말이 됐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가설이 나돌았지만, '벨라가 지미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식에 의구심을 품는 자들은 거의 없었다.
결혼식은 최대한 빠르고 간소하게 진행될 계획이었다.
허나 두 지역을 아우르는 암흑가의 지배자, 지미의 결혼식이다.
본인이 싫다고 해도 판이 커지는 건 불가피했다.
결국 결혼식 당일날 꽤 많은 수의 하객이 교회로 몰려들었다.
결혼식까지 약 두 시간 정도 남았을 때.
벨라는 교회의 대기실에서 자기가 입고 있는 드레스를 어색한 손길로 매만졌다.
이런 화려한 드레스를 교회에서 입을 일이 생기리라곤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다.
더러운 과거가 있었기에, 누군가와 결혼을 한다고 해도 이리 거창하게 식을 올릴 수 있으리라곤, 망상으로라도 꿈꿔보지 못했다.
"그..."
맞은편에서 턱을 괴고 있는 지미를 향해, 벨라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괜찮...겠어요?"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지미는 자기 암시에 가까운 말을 중얼거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우리가 가정을 차려서 평생 동안 오순도순 얼굴 보고 살자는 건 아니잖아? 이건 그냥 위장일 뿐이야."
만약에라도 벨라가 낳은 아이가 남들의 의심을 사지 않도록, 부친이 누구인가 정확하게 명시해두는 과정일 뿐이었다.
"나는 악랄한 갱단의 수장이야. 가정에 충실해 봤자 얼마나 충실하겠어?"
"..."
"그냥 몇 달 남편 흉내 좀 내다가 밖으로 나돌아도 아무도 의심 안 해. 혹시 다른 여자 생기면 당신한테 돈이나 쥐여주고 이혼하면 되는 거고."
지미가 습관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으려다 손을 말아쥐었다.
안 그래도 머리숱이 적어지는 데 자꾸 자극하면 안 됐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당신 뱃속 아이를 위해 잠깐 연기한다고 생각해."
"...고마워요."
벨라로서는 전할 감정이 그것밖에 없었다.
지미는 가볍게 말했지만, 오래 굴러먹은 창부와 식을 올린다는 건 굉장히 불명예스러운 일이었다.
창부가 품고 있는 아이가 자기 아이가 아니라면 더더욱 말도 안 되는 짓거리였고 말이다.
지미는 벨라와 연을 맺으며 보이지 않는 많은 것을 포기했다.
굳이 계산기를 두드리자면 '레이'가 발행한 공수표의 전망이 밝긴 했다만,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보상이었다.
미안한 감정을 감추지 못하는 벨라를 향해 지미가 자기 뺨을 툭툭 두드렸다.
"그냥 좀 웃어. 누가 보면 내가 억지로 잡아온 줄 알겠어."
"푸흡..."
벨라가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노크 소리가 방을 울렸다.
지미가 나서서 문을 열어주니 매튜와 함께 카렌, 요하나, 루나가 고개를 쏙쏙쏙 내밀었다.
"무슨 일이냐?"
"그... 결혼 축하드려요!"
"그래, 고맙구나."
"선물 전해드리고 싶어서 왔어요."
보아하니 선물을 들고 헤매고 있던 아이들을 매튜가 데려온 모양이었다.
지미가 피식 웃으며 문을 완전히 열어주었다.
아이들이 포장된 상자를 들고 쪼르르 벨라에게 다가갔다.
"경사 맞으심을 축하드려요! 화목한 가정 이루시길 기원할게요!"
어디서 듣고 외운 듯한 문구를 열심을 읊는 카렌을 보고 벨라가 활짝 웃었다.
"이렇게 와 줘서 너무 고마워."
"이거 저희가 같이 준비한 선물이에요!"
"정말?"
이런 경사스러운 날 받은 선물은 자리에서 곧장 풀어보는 게 예의였다.
벨라가 상자를 열자 고급 식기 세트가 반짝이는 조명 아래 드러났다.
예상보다도 한참 값비싼 선물에 벨라가 깜짝 놀랐다.
"어머!"
벨라의 반응에 카렌이 흡족한 얼굴을 했고, 요하나는 살짝 불편한 얼굴을 했다.
평소 카렌은 레이에게 도움 되는 물건을 선물하고 싶다며 용돈을 받는 대로 모아놓았다.
정작 괜찮은 물건을 찾지 못해 돈만 잔뜩 쌓여갔는데, 이번에 탈탈 털어넣었다.
그에 반해 요하나는 용돈을 받는 대로 쓰는 타입이라, 벨라의 선물을 사는데 들어간 예산은 대부분 카렌과 루나의 것이었다.
그런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벨라는 연신 탄성을 터뜨리며 아이들을 안아주었다.
"너무 너무 고마워. 소중히 아껴 쓸게."
비록 위장이라고 해도 이리 축복 받는 결혼식을 경험할 수 있음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벨라의 입가에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미소가 맺혔다.
한편.
지미는 잠깐 자리를 옮겨 매튜를 상대하고 있었다.
매튜가 지미의 검은 코트를 정돈해주며 웃음을 참기 위해 애썼다.
"큽... 옷이 참 잘 어울...크흡! 어울리는 것 같아, 대장."
"시발 너 지금 놀리려고 왔냐?"
"크읍... 차라리 내가... 큽! 대장 대신... 큽! 이 자리에 있어야 했는데."
"이거 미친놈 아니야?"
지미가 다짜고짜 주먹을 휘둘렀다.
매튜는 지미의 주먹을 가만히 맞아주다, 복부를 가격하던 주먹이 얼굴을 향하기 시작하자 그제야 팔을 들어 올렸다.
"아우! 대장, 이 좋은 날에 얼굴 상하게 하면 안 되지."
"내 얼굴이 중요하지, 네 얼굴이 중요하냐?"
이 빌어먹을 배신자 새끼.
그날 날 버리고 그렇게 도망쳐 버리다니.
지미의 주먹질에 분노가 깃들었다.
결국 인중에 정타를 허용한 매튜가 얼굴을 감싸 쥐고 앓다가, 재차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대장, 큰 결심 했네."
"그래, 큰 결심 했지."
"뭐어..."
주변을 둘러본 매튜가 지미와 가까이 붙은 채 작게 속삭였다.
"레이 그놈이 은혜를 모르는 녀석은 아니니까... 나중에 잘해줄 거야."
"안 그래도 이자까지 쳐서 단단히 받아낼 생각이다."
"내가 대장 존경하는 거 알지?"
"존경은 개뿔."
혀를 찬 지미가 복장을 정돈한 채 다시 대기실로 돌아왔다.
식이 시작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아 마음을 가다듬는데,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의 얼굴을 확인한 지미와 벨라가 황급히 무릎을 낮추려 했다.
알레시아가 곧장 말렸다.
"그러지 말거라. 드레스가 더러워질 수 있으니, 오늘은 특별히 무례를 용서해주겠다."
"알레시아 님을 뵙습니다. 여, 여긴 어떻게...?"
"필립스 백작님께서 두 사람에게 결혼을 축하한다고 전해 달라 하셨다."
알레시아가 백작을 '필립스 백작님'이라 칭했다는 건 백작이 공적으로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남겼음을 뜻했다.
알레시아가 벙찐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빠와 내가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음을 양해해다오."
귀족이 평민 결혼식에 참석한다는 건 통상적으로 있을 수가 없었다.
알레시아가 식 전에 잠깐 얼굴을 내민 것만 해도 상식에 많이 벗어난 일이었다.
"그래도 선물을 준비했으니 기뻐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젠킨슨이 다가와 작은 상자 두 개를 지미와 벨라에게 건넸다.
상자 속에는 남성용과 여성용의 브로치가 각각 담겨 있었다.
브로치의 중앙엔 행운을 상징하는 초록색 보석이 반짝이고 있었다.
'끄응...'
지미는 앓는 소리를 삼켰다.
백작의 호의는 대단한 영광이었지만 괜히 일이 커지는 것 같아 마냥 좋아할 수가 없었다.
일단 감사를 표한 지미가 브로치를 바로 착용했다.
벨라의 조금 허전해 보이던 어깨 아래에도 아름다운 브로치가 새롭게 자리했다.
지미는 복잡한 생각을 일단 뒤로 밀었다.
당장은 그저, 많은 이들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음을 기뻐하기로 했다.
그날 지미와 벨라는 연을 맺었다.
다분히 남의 눈을 속이기 위한 형식상의 결혼이었지만, 벨라의 입가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
로얄가드는 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들은 1황자 카리우스를 베었지만, 레인저들의 거센 저항 탓에 시체를 회수하는 데 실패했다.
말인즉슨 드래곤 하트의 파편을 회수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황족의 코어 역할을 하는 드래곤 하트의 파편은 반드시 회수되어야 한다.
로얄가드는 전력을 정비한 후 시그니 산맥을 초토화시켜서라도 반드시 드래곤 하트의 파편만은 회수하려 할 것이다.
때문에 카리우스는, 위협을 피하려면 당장 시그니 산맥을 벗어나야 했다.
카리우스가 루비하 왕국 깊숙이 몸을 숨긴다면 제국도 일단은 루비하 왕국과 외교적인 해결이 가능한가 물색할 것이다.
허나 카리우스는 시그니 산맥을 떠나지 않았다.
얼마 안 가, 로얄가드가 다시 찾아올 것이다.
카리우스는 그들을 단죄하고, 자신의 건재함을 알릴 생각이었다.
"배반자들의 죄를 내 손으로 직접 물을 것이다."
복수를 다짐하는 카리우스의 곁에서 루비하 왕국의 제2특수작전단, 속칭 '레인저'의 단장 아르투르가 입꼬리를 올렸다.
오랜 기다림 끝에, 탐욕의 악마가 다시 세상을 향해 속삭이기 시작했다.
바위처럼 웅크리고 있던 타라니스 가가, 작디 작은 탐욕의 속삭임을 듣고 은밀하게 발아했다.
탐욕. 그가 관장하는 권능은 불멸.
타라니스 가는 탐욕의 권능을 온전히 하사받길 바랐다.
그리하기 위해선, 탐욕의 악마를 이 세상에 더욱 가까이 불러들여야 했다.
탐욕의 악마를 불러들일 수 있는 건 오직 거대한 목소리뿐이다.
공포에 빠져 울부짖는, 끔찍한 죽음에 저항하고자 하는, 생을 원하는 목소리.
전쟁.
전쟁이 필요했다.
때문에 1황자의 망명을 부추겼고, 죽어가는 1황자에게 몇 존재하지 않는 '유물'을 사용해 탐욕의 힘을 받아들이게 했다.
준비가 하나둘 갖춰져 간다.
늙어가는 루비하 왕국의 국왕을 은밀히 회유하는 것도 성공을 앞두고 있었다.
카리우스가 제국의 추적자와 다시 맞닥트렸을 때.
전쟁의 신호탄이 터진다.
곧 제국의 추적자들이 시그니 산맥으로 짓쳐들어올 것이다.
제국에 대단한 혼란이 발생해, 행정이 마비라도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
"지금 뭐라고 했나?"
필립스 백작이 예의를 차리는 것도 잊고 당혹스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플로리아는 필립스 백작의 반응을 이해하며 또박또박 끊어서 다시 말했다.
"1황자가 루비하 왕국으로 망명을 시도하다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2황자께서 암습을 당해 승하하셨습니다."
의심 (1)
95화
플로리아가 필립스 백작령에 들렀다.
플로리아와 함께 온 마차엔 오시리스 백작이 보낸 선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으나, 플로리아의 문제를 해결해준 것에 대한 성의의 표시였다.
플로리아는 필립스 백작과의 면담을 끝내고 레이를 불러들여 함께 정원을 거닐었다.
수풀 뒤에 숨은 알레시아가 두 사람을 훔쳐보며 귀를 쫑긋거렸다.
레이와 플로리아의 입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지만, 목소리가 작았던 탓인지 대화의 내용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으으, 불안하구나아..."
불안하다, 불안해.
플로리아가 자꾸만 레이에게 은근히 꼬리를 치는 것 같다.
알레시아는 이 사태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레이의 신의를 믿지만, 필립스 백작령보다 몇 배는 거대한 오시리스 백작령을 생각하니 영 등 뒤가 불안해졌다.
"카렌, 잘 듣거라."
"?"
레이를 찾으러 왔다가 알레시아에게 붙들린 카렌이 눈을 깜박였다.
알레시아가 카렌을 자기 옆으로 바짝 당기며 속닥였다.
"우린 서로 양립 가능한 존재이니라."
"??"
거창한 알레시아의 선언에 카렌의 머리 위에 두 번째 물음표가 떠올랐다.
알레시아가 답답하다는 얼굴로 카렌을 타박했다.
"본처가 동의해주면 첩은 얼마든지 들일 수 있느니라. 나는 마음이 넓으니 첩 몇 명 정도는 너그럽게 용인해줄 것이다. 물론 여섯은 좀 많은 것 같지만 말이다아..."
나의 기사는 보기보다 호색한이로구나.
불만스럽게 투덜거린 알레시아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플로리아는 아니 된다. 플로리아는 나와 같은 귀족이니라."
귀족을 첩으로 들이는 건 금기시되는 일이었고, 본처 자리는 통상 하나였다.
말인즉슨 귀족인 알레시아와 귀족인 플로리아는 레이를 사이에 두고 양립 가능한 존재가 아니란 소리였다.
만약 플로리아에게 레이를 뺏겼다간 레이는 오시리스 백작령으로 훅 떠나가 버릴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힘을 합쳐 플로리아를 견제해야 하느니라!"
알레시아의 말을 얼추 알아들은 카렌이 잠깐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럼... 저는 플로리아 님 편에 붙을래요. 제 생각에는 플로리아 님이 이길 것 같아요."
"...!"
알레시아가 벼락 맞은 표정으로 카렌을 쳐다봤다.
예상도 못 해본 뒤통수 선언에 알레시아가 큰 충격을 받은 채 카렌의 팔을 붙잡아 흔들었다.
"너무하는구나! 그동안 너희들에게 잘해주지 않았더냐!"
당장 카렌의 품속에서 반짝이는 목걸이도 자금의 출처를 따지자면 알레시아였다.
그 외에도 이것저것, 아무튼 지미 보육원에 들어간 영지 예산만 해도 적지 않았다.
알레시아가 연거푸 배신감을 토로하자 카렌이 결국 마음을 돌렸다.
"알았어요. 알레시아 님 편에 붙을게요."
"고맙구나!"
알레시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당장 카렌이 옆에 있다 해도 무슨 수작을 부릴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마음이 든든했다.
*
알레시아의 예상과는 다르게 플로리아와 레이의 분위기는 그다지 화기애애하지 못했다.
플로리아는 레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한 탓에, 꽤 오랫동안 입을 우물거리며 정원을 거닐어야 했다.
결국 레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필립스 백작령에 오셨어요?"
"음, 그러니까..."
플로리아는 바람 정령을 활용해 목소리가 외부로 새나가지 않게 방비하며 답했다.
"성의를 보이려고 찾아왔어."
첫 마디가 끝나니 긴장이 좀 풀렸다.
목을 가볍게 가다듬은 플로리아가 말을 이었다.
"내가 큰 도움을 받았잖니? 아버지께서 그에 대한 성의를 표할 겸, 이웃 영주와 친목을 다진다는 의미를 곁들여 선물과 함께 나를 보내셨어. 원래는 마차가 두 대는 더 따라올 예정이었는데... 이번 일로 손해를 크게 보시는 바람에 말이야."
"이번 일이라면?"
"1황자가 사망했어."
원래 필립스 백작 외에는 발설하면 안 되는 정보였지만 플로리아는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레이의 이면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 굳이 대단치도 않은 정보를 숨겨가며 점수를 잃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레이는 1황자의 사망 소식을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1황자가 황제의 눈 밖에 났음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 놀랄 게 없었다.
"결국 그렇게 됐나 보네요."
"필립스 백작령에는... 별일 없었나봐?"
"무슨 말씀이시죠?"
"1황자가 루비하 왕국으로 망명을 시도하다 추살당했어."
"...!"
순간 레이의 발걸음이 멈췄다.
플로리아는 마침 정원의 꽃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레이가 뒤처졌음을 깨닫지 못했다.
레이가 빠르게 표정을 수습하고 플로리아에게 따라붙었다.
"추살당했다고요?"
"그래. 정확하진 않지만... 1황자가 필립스 백작령을 가로질러 시그니 산맥으로 향했다는 정보를 얻었어. 근데 별일 없었다니 다행이야."
"..."
레이의 눈동자가 섬뜩한 빛을 발하며 진동했다.
시그니 산맥을 넘어 도망가려 한 제국의 고위 귀족.
그 고위 귀족을 처단하기 위해 그래듀에이트 급을 대거 동원한 제국.
근데, 망명을 시도한 고위 귀족의 정체가... 다른 누구도 아닌 1황자였다고?
"이런 시발."
레이가 저도 모르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플로리아는 눈치껏 욕설을 못 들은 척하고 넘겼다.
레이가 콧잔등을 쥐어짜며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엉망이 된 머릿속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벨라가 품고 있는 아이.
사실 그 아이의 생물학적 애비가 누구인지 따위는 레이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 아이의 부친은 지미가 될 예정이었으니까.
하지만, 아이가 황실의 핏줄을 타고났다면.
만약 그렇다면...
"흐읍, 후우..."
제자리서 멈춘 레이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지금 여기 홀로 서 있는 게 아니었다.
레이는 억지로 머릿속의 혼란을 가라앉혔다.
플로리아와의 대화를 처음부터 다시 상기한 레이가 표정을 고친 채 물었다.
"1황자가 숙청 당했는데 오시리스 백작님이 크게 손해를 보셨다고요?"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오시리스 백작은 2황자 쪽에 줄을 댈 생각이었을 테니까.
플로리아가 부채를 펼쳐 멋쩍어하는 표정을 가렸다.
"2황자님께서 암습을 당해 돌아가셨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1황자야 권력을 잃고 숙청된거니 어떻게 죽어도 이해할만했다.
허나 2황자를 상대라면 어쭙잖은 암습으로는 생채기도 입힐 수 없었다.
"대체 누가 2황자를 해친 거예요?"
"잘 몰라. 현시점에서 거기까지 알아낼 만큼 강한 정보력과 영향력을 지닌 가문은 몇 안 될 거야."
"떠도는 소문이라도 알려줄 수 있나요?"
"...몇몇 귀족들은 포이보스 님이 벌인 일이라고 확신한다고 해."
포이보스. 황제가 둔 유일한 서자의 이름이다.
"황실이 생각보다 조용하다는 게 그 증거래. 만약 제국의 귀족이나 타국의 세작이 2황자를 암습했다면 황실이 지금보다 훨씬 격렬한 움직임을 보였을 거래."
"아니, 고작 황실의 서자가 2황자를 어떻게 해쳐요?"
"다들 똑같은 의문을 품었어. 그러다 보니 소문에 이런저런 살이 붙어서 귀족 사이에 떠돌더라고."
제국의 검성이 알 수 없는 이유로 포이보스에게 붙었다.
제국의 특임대에 속한 누군가가 토사구팽을 걱정해 포이보스에게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는 대가로 정보를 팔았다.
1황자와 가깝던 세력이 살아남기 위해, 혹은 복수를 단행하기 위해 포이보스를 지원했다.
소문은 참 많았다. 사실인지 확인할 수가 없어서 그렇지.
온갖 소문을 늘어놓던 플로리아가 괜히 혼자 흥분했나 싶어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헛기침을 했다.
"어쨌든... 2황자께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아버지도 크게 손해만 보셨어."
아직 제국에는 황제의 서자를 비롯해 황족이 여럿 남아있다.
허나 누가 황제의 자리를 잇게 될지는 혼돈 속이었다. 2황자가 죽은 이상 다들 정통성이 고만고만한 편이었다.
그 개판을 눈앞에 두고, 오시리스 백작은 다행히도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오판하지 않았다.
도박판에 판돈을 올리지 않고 손해를 감수하고 발을 뺐다.
이야기를 전부 들은 레이가 침음을 삼키며 어려운 질문을 했다.
"누가 제위를 이을 것 같나요?"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플로리아의 부채가 탁 접혔다.
"황제 폐하께서 편을 들어주는 자가 다음 황제가 될 것이라 하셨어."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디디에가 굳은 얼굴로 레이의 앞길을 막았기 때문이다.
*
필립스 백작은 몇 년째 눈에 보이지 않는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레이가 더해진 지미 패밀리는 단순 깡패 집단이라 부를 수 없었다.
그들은 시기만 잘 노리면 백작령을 통째로 전복시킬 수 있는 강력한 무장세력이었다.
그럼에도 필립스 백작은 지미 패밀리를 크게 억압하지 않았다.
그건 객관적으로 대단히 위험한 판단이었다.
영지 안에 영주의 사병보다 더 강력한 무장 세력이 똬리를 튼 꼴을 묵인하고 있다?
다른 귀족이 알았으면 미친 새끼라 손가락질했을 터다.
때문에 필립스 백작은 최소한의 방비 차원에서 지미와 매튜의 과거를 면밀히 조사했으며, 지금도 계속해서 둘을 감시하고 있었다.
이런 조치를 지미와 매튜 또한 모르지 않았지만 백작의 판단이 지극히 합리적이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백작은 오랜 조사 끝에 깨달았다.
지미는 신의가 있는 용병이었고, 유흥을 멀리할 만큼 소탈하고 무욕적이었으며, 야망은 좀 있었지만 그보다 훨씬 정이 많았다.
지미는 믿음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선인이었다.
그런 지미가, 과연 술을 먹고 실수를 할 인간일까?
벨라의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 백작이 처음 품었던 의구심이었다.
허나 사람이 살다 보면 한 번쯤은 실수할 수 있다.
지미는 단 한 번의 실수를 외면하지 않고 곧장 책임을 졌다.
그 또한 지미다웠기에, 백작은 처음 품었던 의구심을 마음속에서 지워낼 수 있었다.
하지만 1황자가 필립스 백작령을 지나쳤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한기가 전신을 타고 흘렀다.
한 번 터져 나온 의심은 삽시간에 크기를 불렸다.
퍼즐이 하나하나 맞춰지며 말도 안 되는 가설이 머릿속에 세워진다.
아니다. 아니어야만 한다.
백작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그때, 레이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
"..."
서로의 시선을 마주 본 둘은 직감적으로... '진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허나 다짜고짜 칼을 뽑기에는 둘은 주고받은 것이 너무 많았다.
레이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백작이 한참을 찻잔을 바라보다 마른 입술을 열었다.
"그대 모친이 새로운 연을 맺었음을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대 모친이 겪었던 안타까운 사건 말인데."
"..."
"혹시 행패를 부렸다는 귀족의 신원을... 확인했나?"
"확인 못 했습니다."
레이가 힘을 주어 말했다.
"그 행패를 부렸다는 자가 정말 귀족일지, 젠트리일지, 그도 아니면 낭인이 허세를 부린 것인지... 무엇하나 알 수 없습니다."
그래, 여전히 불확실하다.
벨라를 폭행한 자의 정체도 불확실했고, 벨라가 품은 아이가 정말 그날의 폭행범의 아이일지도 불확실했다.
모든 게 불확실했다.
허나 하나는 확실했다.
1황자의 피가 필립스 백작령에 남아있는 것만큼은, 결코 용인될 수 없었다.
필립스 백작의 목소리가 거칠게 갈라졌다.
"그대에겐 참 많은 은혜를 입었네."
"아닙니다, 백작님. 제가 입은 은혜가 훨씬 귀했습니다."
"영주성 안에 분만실이 있네. 산모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준비가 갖춰져 있으며, 본래는 필립스 가의 일원들만 이용할 수 있는 곳이네. 때가 되었을 때 영주성 안의 분만실을 그대의 모친이 이용할 수 있게 배려해주겠네. 괜찮은가?"
필립스 백작과 레이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스산한 침묵이 흐른 끝에, 레이가 고개를 숙였다.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의심 (2)
96화
레이는 지미와 벨라의 신혼집에 들렀다.
위장을 하자면 제대로 하자는 의도로 마련한 신혼집이었는데, 덕분에 레이는 요즘 집에서 혼자 지내고 있었다.
벨라가 지미와 레이 앞에 찻잔을 하나씩 내려놓은 후 알아서 자리를 피해주었다.
지미가 레이를 향해 찻잔을 들어 보였다.
"이거 애들한테 선물 받은 잔이야."
"애들 누구요?"
"카렌이랑 요하나랑 루나랑 용돈 모아서 샀다던데."
"카렌 돈으로 샀겠죠."
레이가 차를 한 모금 삼키며 중얼거렸다.
용돈 따박따박 모아놓는 아이라곤 셋 중 카렌밖에 없었다.
요하나야 항상 용돈을 탈탈 털어 썼고, 루나 또한 교회에서 책을 빌릴 때 대여료를 내느라 모아둔 돈이 넉넉하진 않았을 것이다.
"...잠은 같이 자요?"
레이가 침실을 바라보며 실없는 소리를 하자 지미가 눈가를 구겼다.
"인마, 여기 침실만 두 개 더 있어."
워낙 큰 집이라 딸린 방이 많았다.
괜히 관리하기만 힘들다고 투덜거린 지미가 찻잔을 옆으로 치우며 한숨을 쉬었다.
"또 뭐가 불만인데 여기까지 찾아와서 인상을 구기고 있어?"
레이의 얼굴에 억지로 드러났던 웃음기가 싹 빠졌다.
레이가 자기 미간을 지그시 눌렀다.
1황자와 관련된 이야기는 되도록 함구하고 싶었지만, 지미에게만은 그래서는 안 됐다.
"1황자가 사망했어요."
"오, 이런. 귀족 나으리들이 골치 좀 아프시겠구나."
지미의 반응은 태평했다.
변방을 살아가는 평민에게 있어 나라님이 누가 되느냐는 대단한 관심사가 되지 못했다. 대개의 경우에는 말이다.
"1황자가 죽기 전 루비하 왕국으로 망명을 시도하기 위해 필립스 백작령을 가로질렀다고 해요."
"그래, 망명을... 지금 뭐라고 했어?"
별 생각 없이 레이의 이야기에 호응하던 지미가 눈을 부릅떴다.
"필립스 백작령을 가로질렀다고? 1황자가?"
"네."
"..."
지미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렸다.
레이가 왜 갑자기 사람을 앉혀 놓고 이딴 이야기를 하는 지, 지미는 모를 수가 없었다.
지미는 입을 반쯤 벌린 채 방황하다, 간신히 한 마디를 쥐어짜 냈다.
"이, 이, 이건 우리끼리 상의할 문제가 아니야."
"백작님도 아세요. 백작님과는 일단... 엄마 뱃속의 아이가 누구의 피를 이었는지 불확실하니 아이가 나올 때까지 지켜보기로 했어요."
"그, 그거 다행이네. 아... 이런 맙소사."
지미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사안이 자신의 손을 떠났음에 대해 안도했다.
레이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지미를 바라보다 세상 멍청한 질문을 했다.
"엄마의 아이가 황가의 핏줄이면 어떻게 해야 하죠?"
"죽여야지!!"
반사적으로 소리를 지른 지미가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레이를 마주 봤다.
레이는 얼핏 덤덤해 보였다.
허나 오랜 시간 레이를 보아왔던 지미는 뭐라 형용하기 힘든 섬찟함을 느꼈다.
지미가 잔뜩 낮춘 목소리로 레이에게 사정했다.
"레이, 이상한 생각하지 마. 만약 아이가 황가의 핏줄이라면 벨라를 위해서라도 무조건 죽여야 해. 벨라도 이해해줄 거야."
"맞아요. 엄마도 이해해주시겠죠."
벨라는 결코 고집만 쎈 어리석은 여자가 아니었다.
네가 낳은 아이가 모두를 죽일 재앙 덩어리라고, 그렇게 주변 사람들이 설득하면 충분히 이해해줄 것이다.
"근데 말이죠, 지미."
레이의 입꼬리 하나가 천천히 올라갔다.
"자기 동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몸을 판 여자가... 자기 동생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평생 동안 모아왔던 재화와 평생 동안 바라왔던 소망을 희생한 여자가... 스스로 배 아파 낳은 아이를 잃고도 남은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
지미가 레이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조소를 머금고 있는 레이의 눈동자는, 그저 삭막해 보였다.
레이는 의아했다.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삶에 대체..."
벨라가 죽지 못해 살아가는 세계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죠?"
"레이...!!"
지미는 레이의 눈동자 속에서 맹목을 보았다.
레이가 두 번째 삶을 제대로 살아가겠다고 결심한 심리적 기반은 '벨라'였다.
기반이 무너지면, 그 위에 쌓인 것들은 전부 의미를 잃는다.
지미가 탁자를 내려쳤다.
"레이...! 대체 어쩌려고 그래?!"
"엄마의 아이가 황가의 핏줄이라면... 백작님께 아이의 존재를 허락받지 못한다면..."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곳을 떠날 거예요."
멀리 멀리 떠나 신분을 고치고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살아갈 것이다.
그런 의미의 선언에 지미가 레이의 손을 붙잡았다.
"레이, 네가 이룬 모든 것들이 이곳에 있어. 네가 이룬 모든 것들이, 바로 여기 필립스 백작령에 있다고!"
지미의 필사적인 설득에 레이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것들은."
마른 침이 레이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버릴 수 있는 종류의 것들이에요."
"레이!!!"
지미는 복받치는 감정을 참기 힘들었다.
레이, 네게 벨라가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널 세상의 전부처럼 여기는 아이들도 있다고, 그리 외치고 싶었다.
허나 여전히 차갑게 굳어 있는 레이의 표정을 보자 더 이상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선 레이가 문고리를 잡았다가, 잠깐 지미를 돌아봤다.
"만약 일이 안 좋게 풀린다고 해도, 언젠가는 돌아올게요. 그 말을 하고 싶었어요. 지미와의 약속을 지켜야죠."
"..."
지미는 말 없이 자기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어느 때보다 둔중한 통증이 지미의 머릿속을 울렸다.
*
신성력. 신의 축복을 받아 변형된 마나의 일종.
이름 그대로 신성한 힘을 지닌 신성력은 모든 부상과 질병에 대처 가능한 기적처럼 여겨지고는 했다.
허나 그건 거짓이었다.
예컨데 신성력으로는 선천적인 기형을 해결할 수 없었으며, 노화와 같은 자연의 이치 또한 되돌릴 수 없었다.
커다란 자상을 입었을 때도 출혈을 막지 못하면 신성력을 아무리 쏟아붓는다 해도 과다출혈로 절명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세상에는 '치료사'라는 직업이 존재했다.
치료사는 인체 구조에 해박했으며 약재나 물리적인 수술을 통해 환자를 치료했다.
신성력을 다루는 성직자 중에서도 치료사의 지식을 익힌 자들이 몇몇 존재했지만, 비교적 소수였다.
이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신성력으로 치료 불가한 질병을 '신의 징벌' 혹은 '신의 저주'라 여기고는 했다.
선천적 질병을 가진 사람들을 악마에게 혼을 판 인간이라며 학살한 역사조차 존재할 정도였다.
때문에 선천적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치료사 또한 인식이 그리 좋은 직업이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루비하 왕국의 타라니스 가문은 상당히 독특한 가풍을 지니고 있었다.
타라니스 가문은 오랜 가문 역사 속에 뛰어난 마법사를 몇몇 배출했으며, 치료사의 학문인 의학에도 깊은 관심과 조예를 가지고 있었다.
위세는 대단치 않으나 나름의 명성을 지니고 있던 타라니스 가는 최근 급격하게 성장했다.
노환 때문에 고생하는 국왕의 시름을 의학적 지식을 활용해 크게 완화시켜주었기 때문이다.
국왕을 등에 업고 중앙정계에 진출한 타라니스 가문은 결국 레인저의 단장 자리에 자기 가문의 사람을 꽂는 데 성공했다.
그 자가 바로 아르투르였다.
연줄로 들어온 인물인데다 마법사인 아르투르는 처음부터 레인저들의 환대를 받지 못했다.
허나 까라면 까야 되는 게 군사조직이다.
브랜딜도 투덜거리긴 했지만 아르투르의 명령을 되도록 충실히 따랐다.
그러다가 1황자의 망명 사건이 터졌다.
1황자의 망명을 종용하고 도우라 명령한 건 루비하 왕국의 국왕이었다.
국왕이 제국의 1황자를 확보하려 했던 이유는 브랜딜도 대충 짐작이 갔다.
콧대 높은 제국도 엿 먹일 수 있었으며, 제국의 1황자쯤 되면 정치적 수단으로 써먹을 곳도 많았다.
제국을 지나치게 자극할 수 있다는 게 위험했지만 말이다.
허나 결국 레인저들은 1황자를 보호하는 데 실패했다.
여기서 일이 끝났어야 했다.
허나 아르투르는 제국의 추적자들을 섬멸하라고 레인저들에게 지시했다.
제국과 지나치게 각을 세우는 모양새라서 브랜딜은 적당히 부상을 입고 전장에서 이탈했다.
연줄로 꽂힌 인사가 너무 설친다 싶었는데, 진짜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1황자가 부활했다.
'그게... 회복 가능한 상처였나?'
브랜딜은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1황자의 내장조각이 흩날리는 꼴을 지켜봤다.
허리가 완전히 양단된 건 아니지만 그만한 부상이면 거의 즉사에 가까울 것이라 예상했다.
아르투르가 타라니스 가문의 사람이라 해도, 성녀라도 나타나 신성력을 쏟아부어 주지 않은 이상 절대 1황자를 살릴 수는 없으리라 여겼다.
헌데 몇달 뒤 1황자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다시 레인저들에게 얼굴을 보였다.
기적.
기적이었다.
뭐, 1황자가 대단히 운이 좋았나 보지.
브랜딜은 스스로를 대충 납득시키려 했다.
어차피 1황자가 시그니 산맥을 넘어 왕국 중심부로 향하면 레인저들도 더는 1황자를 마주할 일이 없었으니까.
허나 부활한 1황자는 자기 정체를 숨기려 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시그니 산맥을 떠나려 하지도 않았다.
"배반자들이 다시 찾아올 것이다. 내가 직접 배반자들을 징벌하겠다."
그딴 개소리를 지껄이며 말이다.
죽다 살아나서 머리가 돌아버렸나?
왕국은 저 미친놈을 방치하려는 건가? 레인저 보고 저 미친놈을 대신해서 칼을 맞으라는 건가? 아니 애초에, 1황자는 어떻게 부활한 거지?
정말로, 회복 가능한 상처가 맞았나?
브랜딜은 뒤늦게 레인저들 중 1황자가 부상을 입었던 순간을 가까이서 지켜봤던 자들을 찾았다.
허나 1황자를 가까이서 호위했던 레인저들 대부분은 사망하거나 큰 부상을 입고 이리저리 전출되어 버렸다.
'회복 가능한 상처가 아니었어.'
브랜딜은 자기 눈을 믿기로 했다.
내장이 대부분 날아갔다. 그건 즉사에 가까운 부상이었다.
헌데 황태자는 살아났다.
제국의 황족은 무시무시한 회복력이라도 지니고 있단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언데드.'
브랜딜의 머릿속에 어처구니 없는 가정 하나가 스쳤다.
수백 년전 신화 속에 적힌 악몽들.
악마의 권능을 받아 되살아난 자들.
너무도 지나친 비약에, 브랜딜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산맥에 박혀있으니 이상한 망상만 느네."
브랜딜은 터덜터덜 산맥을 걸었다.
1황자는 복수를 천명하고 있었고, 왕국의 윗선에선 아직 새로운 명령이 하달되지 않았다.
브랜딜이, 아르투르와 함께 산맥의 풍경을 지켜보고 있던 카리우스에게 소리 높여 물었다.
"제국과 전쟁이라도 벌이고 싶은 겁니까?"
"..."
카리우스가 등을 돌려 브랜딜을 바라봤다.
좀처럼 제국의 추적자가 찾아오지 않자 카리우스는 짜증이 나 있었다.
"지금 뭐라고 했지?"
"제국과 전쟁이라도 벌이고 싶으시냐고 물었습니다, 1황자님."
"우문이군. 나는 제국의 황태자다. 나를 적대하고 배반한 그것들은, 제국이 아닌 반역자들이다."
"아이고, 정신이 나가셨군."
브랜딜의 노골적인 모욕에 아르투르가 격분했다.
"브랜딜!! 너야말로 제정신이냐?! 이게 대체 무슨 무례냐?!"
브랜딜이 어깨를 으쓱이며 혀를 끌끌 찼다.
"뭐 어쩌라고요? 내가 제국민도 아닌데, 제국에서 쫓겨난 제국 귀족한테 뭐 대단한 예의라도 지켜야 합니까?"
"브랜딜!!!!"
분노하는 아르투르의 앞을 카리우스 막아섰다.
"날카롭기만 해야할 도구가 말이 많군. 생각도 많고."
"제가 도구인 건 맞지만, 제국이 아닌 루비하 왕국의 도구이지요. 도구의 머리로 가만히 생각해봤는데..."
쿵! 쿵!
브랜딜은 귀를 활짝 열었다.
카리우스의 가슴 속에서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린다.
저것이 과연 사람의 심장일까. 아니면 사람의 심장을 흉내내는 다른 무언가일까.
뭐, 꺼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그냥 땅에 영원히 눕는 게 왕국에게 이로울 것 같아."
카리우스가 악마와 손을 잡았든 잡지 않았든.
아르투르가, 타라니스 가문이, 혹은 루비하 왕국이 1황자를 어떻게 사용할 생각이든.
이대로 가다간 1황자 때문에 제국과 마찰이 더욱 극심해질 게 확실했다.
잘못하다 전쟁이라도 터지면 수천 수만 혹은 그 이상의 병사가 죽는다.
때문에 브랜딜은 결심을 세웠다.
촤악!!
검기가 서린 브랜딜의 검이 기습적으로 휘둘러졌다.
브랜딜은 이 일격으로 카리우스의 목을 벨 수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카앙!!
그 순간.
웬 녹슨 검이 카리우스의 품에서 튀어 나왔다.
건드리기만 해도 부러질 것 처럼 생긴 녹슨 검이 브랜딜의 검기를 막아선다.
츠즈즈즈즈즉!
카리우스의 드래곤 하트의 파편에 악마의 권능이 뒤섞인다.
심장에서 쏟아져 나온 불길한 화염이 녹슨 검에 깃든다.
그에 응답하듯, 녹슨 검에 녹아있던 누군가의 기억이 카리우스에게 역류했다.
카리우스의 입꼬리가 비틀린다.
몇 번 잡아보지도 못한 검이 익숙하게 손에 감긴다.
언제나 난해하게만 느껴졌던 고급 검술의 궤적이 자연스레 이해된다.
"너도 날 우습게 봤군."
탐욕을 관장하는 악마의 사도가 붉은 눈을 번쩍였다.
연기 (1)
97화
불꽃인지 검기인지 구분 안 가는 괴상한 빛 무리가 카리우스의 낡은 검을 감쌌다.
브랜딜은 화끈거리는 열기를 안면으로 느끼며 맞닿은 검을 비스듬히 세웠다.
카리우스는 황태자 직위를 지녔던 황족이다.
숨겨둔 비장의 수 한두 개 정도는 가지고 있어도 이상할 것 없었다.
허나 브랜딜은 여전히 카리우스의 목을 벨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브랜딜이 아는 카리우스는 결코 검법에 통달한 무사가 아니었다.
기기긱!!
브랜딜의 검이 카리우스의 검을 타고 흐른다.
브랜딜은 카리우스가 어설프게 검에 힘을 불어넣는 순간을 노려 치명상을 입힐 계획이었다.
허나 카리우스는 손아귀에 힘을 뺀 채 불쑥 한 걸음 더 거리를 좁혔다.
카리우스와의 간격이 확 좁아지자 브랜딜이 당황해서 검을 휘둘렀다.
카카카각!!!
코앞에서 서로의 검격이 번쩍인다.
이 거리에선 상대가 휘두르는 검의 궤적마저 제대로 시야에 담을 수 없다.
오랜 기간 검을 숙달한 검사만이 지근거리에서의 수 싸움이 가능하다.
브랜딜은 카리우스가 스스로 무너지길 기다렸다.
허나 시간이 지날수록 수세에 몰린 건 브랜딜이었다.
카리우스의 검술 실력을 낮잡아 본 브랜딜은 크게 당황했다.
박자가 꼬인 브랜딜이 허리를 찔러오는 카리우스의 공격을 흘려내기 위해 한발 물러섰다.
그 순간.
카리우스의 비어있던 손이 브랜딜의 멱살을 잡아챘다.
촤악!!
브랜딜이 간신히 팔뚝으로 카리우스의 공격을 흘려냈다.
뒤로 물러선 브랜딜이 거칠게 호흡을 몰아쉬었다.
옷을 얇게 입고 와 멱살 잡힌 부근의 천이 쉽사리 찢어져 나간 게 다행이었다.
두꺼운 가죽 갑옷이라도 둘렀다면 카리우스의 손아귀에 붙잡혀 배를 꿰뚫릴 뻔했다.
"큭...!"
브랜딜이 뒤늦게 검상을 입은 팔뚝이 미친듯이 화끈거림을 인식했다.
눈을 아래로 내리리 검붉은 불길이 검상을 따라 피부를 태우고 있었다.
브랜딜은 황급히 흙을 움켜쥐어 팔뚝에 붙은 불길을 덮었다.
화르륵!
검붉은 불길이 흙 사이를 빠져나와 더욱 강렬하게 타오른다.
흙을 움켜쥐었던 손의 장갑에도 불이 번졌다.
꺼지지 않는 불길.
그 괴이함을 눈치챈 브랜딜이 곧장 장갑을 벗어 던진 후 자기 팔에 검을 휘둘렀다.
가죽과 근육 일부가 베어져 나가며 땅에 떨어졌다.
"..."
브랜딜이 팔에서 피를 줄줄 쏟아내며 카리우스를 바라봤다.
카리우스는 제자리에 서서 오만한 시선으로 브랜딜을 내려보고 있었다.
그 자신감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이제야 약간이나마 이해됐다.
만만하게만 보였던 카리우스가 갑자기 아득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암살은 실패했다.
브랜딜은 곧장 등을 돌려 도주를 시작했다.
암살의 실패를 예상하지 못했기에 지금의 도주는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아르투르가 산맥이 통째로 울릴 만큼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제국의 첩자다!!! 잡아!!!"
곧장 레인저들이 브랜딜의 뒤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브랜딜 또한 오랜 경험과 훌륭한 실력으로 무장된 레인저였으나 이곳은 레인저들의 본진이었다.
브랜딜은 얼마 못 가 레인저들에게 포위당했다.
길목을 가로막은 레인저들이 우르르 검을 뽑아 브랜딜에게 달려들었다.
그 순간 모리와 머록이 다른 레인저들의 허리를 붙잡고 지면을 굴렀다.
"젠장!!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겁니까?!"
모리가 지면을 구르며 불평했다.
모리와 머록에게 방해받은 레인저들은 쉽사리 두 사람에게 무기를 휘두르지 못했다.
만약 모리와 머록이 먼저 무기를 휘둘렀으면 대처가 달랐겠지만, 둘은 비무장 상태였다.
평소 안면을 트고 지내던 동료에게 가감 없이 손을 쓰는 건 레인저들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브랜딜은 그 틈을 타 다시 도주를 시작했다.
브랜딜은 레인저들을 피해 산맥을 넘어가며 자신에게 되물었다.
'도망쳐서 뭘 하겠다고 이렇게 가슴을 쥐어짜며 달리는 거지?'
브랜딜은 죽음을 각오했었다.
그러니까, 1황자 암살을 성공한 다음 말이다.
브랜딜은 군법에 따라 처형을 당할 수도 있음을 알고도 일을 벌였다.
이번 일에 목숨을 걸었던 이유는 이것저것 있었지만, 아무래도 산맥 생활이 너무 지겨워진 탓이 컸다.
수십 년을 산맥에서 보내다보면 약간의 정신병 쯤은 누구나 찾아오는 법이다.
근데 암살에 실패했다. 그다음을 생각해두지 않아 무작정 도주했다. 이제 어떡하지?
머리가 복잡해질수록 스스로 잘라낸 상처가 욱신거렸다.
브랜딜의 발은 언젠가 한 번 밟았던 길을 다시 밟으며 계속 움직였다.
시간이 흘러,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마침내 브랜딜은 몇 달 전에 꽤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아이의 집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브랜딜은 허탈한 심정을 내비치며 멋대로 문을 열었다.
끼이익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아이의 모습이 브랜딜의 눈동자에 들어왔다.
밤하늘을 지켜보던 레이가, 고개를 그대로 둔 채 중얼거렸다.
"그때 너무 좋게좋게 보내줬나? 자기 집 안방처럼 기어들어 오는군."
"..."
브랜딜은 잠깐 고민했다.
내가 여기서 더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1황자가 정말 악마의 하수인일까?'
확신할 수 없다.
브랜딜은 그저 '굉장히 이상한 정황' 몇 개를 확인했을 뿐이다.
어쩌면 1황자는 그저 타고난 회복력이 많이 뛰어난, 억울하게 쫒겨난 황족일지도 몰랐다.
다만 1황자는, 그 존재 자체가 제국과 왕국 간의 갈등을, 혹은 제국과 왕국의 내분을 야기하는 트리거였다.
그가 어떤 사람이든 이쯤에서 퇴장해주는 게 모두에게 이로웠다.
브랜딜은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망명을 시도했던 고위 귀족이 부활했어."
"...?"
레이의 고개가 브랜딜을 향해 돌아갔다.
몇달 전보다 훨씬 거칠어진 눈빛을 보고 브랜딜은 무심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믿기지 않겠지만..."
"부활했다는 고위 귀족이 1황자 카리우스를 말하는 건가?"
"어, 음. 소문이 벌써 여기까지 퍼졌어?"
깡촌의 일개 스콰이어가 1황자에 관한 정보를 꿰고 있으리라곤 예상 못 했던 브랜딜이 괜히 헛기침을 했다.
"설명하기 편하겠네. 이봐, 잘 들어. 이건 전부 악마의 농간이야."
브랜딜은 다짜고짜 그리 주장했다.
"1황자는 즉사해야할 부상을 입었어. 내장이 다 터져 나갔다고. 척추에 하반신이 간신히 매달려 대롱거렸다니까? 근데 두 달도 안 돼서 멀쩡하게 모습을 드러냈어. 이해해? 악마와 계약한 게 분명해."
"..."
"살아 돌아온 그놈은 배반자들에게 복수하고 제국을 되찾겠다고 헛소리를 떠들어 대고 있어. 왕국은 탁상공론에 빠져 1황자의 처분을 자꾸만 미루고 있지. 나는 1황자를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했어. 그놈은... 악마의 힘을 사용해 내 기습을 막아냈어."
브랜딜은 되는 대로 '악마'란 단어를 가져다 붙이며, 팔을 묶은 붕대를 풀어냈다.
거칠게 도려내진 흉측한 상처가 훤히 드러났다.
"꺼지지 않는 불꽃. 그건 분명 악마의 힘이었어. 이걸 봐. 살짝 베였을 뿐인데, 그 불이 옮겨붙은 탓에 팔을 통째로 잘라낼 뻔했어. 악마가 1황자를 이용해 제국과 왕국이 충돌하는 걸 부추기고 있는 거야. 전쟁이 터지면 가장 먼저 피해를 입는 게 누구일 것 같아? 바로 너희야."
레인저들이 활개를 치기 시작하면 필립스 백작령은 존속될 수 없다.
전쟁이 터지는 순간 필립스 백작과 영주민들은 영지 전체를 버리고 피난을 가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이 사실을 네 주인에게, 제국의 추적자들에게 전달해."
브랜딜은 자기가 지금 되는 대로 지껄인 말들을 제국 측이 순진하게 믿어주리라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허나 1황자의 생존을 알아챈 제국이 신중하게 움직인다면, 그리고 '악마'에 대해 조금이라도 경계한다면 상황을 좀 더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으리라고, 그리 바랐다.
스릉!
몇 마디 덧붙이려던 브랜딜이 입을 다문 채 검을 뽑아들었다.
추적자들이 따라붙었다. 브랜딜은 더는 도망칠 곳도, 도망칠 기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봐, 여길 빠져나가. 1황자의 암살을 시도한 탓에 난 지금 제국의 첩자로 오해받고 있어. 내가 추적자들을 막을 테니, 넌 가서 내가 한 말을 네 주인에게 전해."
콰앙!!
브랜딜이 말을 끝마치자마자 현관과 창문이 박살났다.
레인저 하나가 현관을 지나쳐 브랜딜과 격돌했다.
동시에, 레인저 셋이 깨진 창문을 통해 집안으로 돌입했다.
창문을 뛰어넘은 레인저들은 브랜딜을 포위하기 위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레인저 중 한 명의 돌격 경로에 레이가 서 있었다.
레인저는 '제국의 첩자'와 접촉한 레이를 제거 대상으로 판단했다.
검기가 서린 검이 레이에게 휘둘러지는 광경을 보고 브랜딜이 이를 악물었다.
'안 돼...!!'
브랜딜에게 있어 레이는 유일하게 남은 메신저였다.
레이가 나이에 비해 성취가 드높기는 했지만, 상대는 노련한 레인저였다.
정면에서 맞붙으면 레이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
반드시 레이를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나가게 해야 한다.
브랜딜이 억지로 몸을 틀어 레이에게 향하려는 순간.
레이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다가오는 레인저를 돌아보았다.
"너희들에겐 우리가 어지간히 우습게 보이나 봐."
레이의 허리춤에서 튀어나온 검에서 강렬한 검기가 치솟는다.
"여기는 필립스 백작령이다."
카각!!!!
서로를 향한 검격이 부딪친다.
다음 순간, 레인저의 손아귀가 찢어져 나갔다.
검을 놓친 레인저가 당황해서 움직임을 멈춘 찰나.
레이가 검을 내리그었다.
"네놈들이 허락 없이 칼을 뽑아도 될 장소가 아니란 뜻이다."
촤악!!!
레이의 검격이 레인저를 반으로 갈랐다.
브랜딜에게 향하려던 레인저 둘이 발걸음을 멈춘다.
눈빛을 주고 받은 레인저 둘은 레이를 향한 합공을 준비했다.
레이의 우측을 점한 레인저가 먼저 바닥을 박차며 검을 휘둘렀다.
카가가각!!
레인저는 힘 싸움을 피한 채 화려하게 검을 놀렸다.
찬란히 빛나는 검기 탓에 시야가 온통 반짝일 지경이었다.
그때 레이의 좌측을 점했던 레인저가 사각을 파고들었다.
카각!!
레이는 어렵지 않게 두 번째 레인저의 검을 막아냈다.
허나 두 번째 레인저의 진짜 공격은 훨씬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퓩!
레인저의 팔뚝 아래서 길고 얇은 독침 하나가 쏘아졌다.
엑스퍼트 급 무인은 갑옷을 갖춰입지 않고는 몸의 방어력을 항상 끌어올리는 게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레인저가 사용하는 독침은 루비하 왕국에서 가장 치명적인 마비독이 발라져 있는, 가장 날카로운 암기였다.
일단 피부를 조금만 뚫고 들어가도 곧장 독이 퍼진다.
레인저는 갑옷도 입지 못한 레이가 이 은밀한 일격에 속절없이 목숨을 내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때.
허공이 갈라졌다.
팅-!
갈라진 공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은백색의 검 한 자루가 독침을 가볍게 튕겨냈다.
레이의 손에 제국의 신검, 모로스가 쥐어진다.
모로스를 타고 흐른 검기가 폭발적으로 증폭되며 일순 섬광이 되었다.
모로스가 횡으로 휘둘러진다.
촤아악!!!
레인저 둘의 허리가 동시에 양단됐다.
쏟아져 나오는 핏물을 찰박이며 레이가 발걸음을 옮겼다.
그 위압적인 광경에 브랜딜과 검을 마주대고 있던 레인저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레이는 상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레이의 자그마한 육체가 레인저를 향해 삽시간에 쏘아졌다.
모로스에 의해 증폭된 공간검의 검기를, 기사보다도 방호력이 떨어지는 무장을 선호하는 레인저가 막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촤악!!
레인저의 목이 검과 함께 양단됐다.
떨어져 나간 목이 바닥을 구르기 전에 레이는 모로스를 빙글 돌렸다.
콰앙!!!
집밖에서 굉음이 터졌다.
외부에서 작전 상황을 관찰하던 레인저가 허공을 찢고 떨어져 내린 도약 검기에 폭사했다.
"..."
전투가 끝나고 내려앉은 적막은 브랜딜의 숨을 턱턱 막히게 했다.
자기가 지금 무엇을 본 것인지, 머리로 바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레이가 허공의 틈으로 모로스를 다시 수납한 후 질퍽이는 바닥을 걸어 브랜딜에게 다가갔다.
브랜딜은 레이가 다가오는 만큼 뒤로 물러났다. 그건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결국 벽에 등이 닿았다.
브랜딜은 검 자루를 붙은 손아귀에 힘을 주다가, 이내 포기했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지만, 상대의 수준은 명백하게, 엑스퍼트 급을 크게 벗어나 있었다.
"브랜딜."
레이의 부름에 브랜딜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레이가 브랜딜의 칼집을 가리켰다.
"여긴 필립스 백작령이다."
백작령 안에서 칼 함부로 뽑지 말란 소리였다.
브랜딜이 눈치껏 납검했다.
레이는 깨진 창문 너머로 잠깐 밤하늘을 바라보다 브랜딜에게 눈을 돌렸다.
벨라와의 추억이 깃든 장소가 더럽혀졌음은 굉장히 불쾌했으나, 지금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부활했다는 1황자, 대역일 가능성은 없나?"
"...똑 닮은 사람일 수는 있어."
"풀어서 설명해."
"만약 다른 누군가가 1황자로 분장했으면 내가 알아봤을 거야. 그런 쪽으론 나도 조예가 있으니까. 환상 마법 등으로 외모를 속였다면 내게 공격받았을 때 본모습이 드러났어야 해. 결계라도 따로 치지 않는 이상 쉽게 해제되니까."
그러니 우연찮게 똑 닮은 사람을 왕국이 고용한 것이 아니라면.
"1황자 본인이 맞아."
"..."
잠깐 침묵한 레이가 발을 옮겼다.
"따라 나와. 따라오면서 시그니 산맥에서 벌어졌던 일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연기 (2)
98화
레이가 짜증이 서린 눈빛으로 브랜딜을 바라봤다.
안 그래도 요즘 생각 복잡한데 갑자기 찾아와 헛소리를 늘어놓으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일단 칼부터 집어넣어."
레이가 주의를 주자 브랜딜은 고집을 부리지 않고 바로 납검했다.
레이는 깨진 창문 너머로 밤하늘을 바라보다 한숨을 길게 쉬었다.
벨라와의 추억이 깃든 장소가 더럽혀졌음은 굉장히 불쾌했으나, 지금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부활했다는 1황자, 대역일 가능성은 없나?"
"...똑 닮은 사람일 수는 있어."
"풀어서 설명해."
"만약 다른 누군가가 1황자로 분장했으면 내가 알아봤을 거야. 그런 쪽으론 나도 조예가 있으니까. 환상 마법 등으로 외모를 속였다면 내게 공격받았을 때 본모습이 드러났어야 해. 결계라도 따로 치지 않는 이상 환상 마법은 쉽게 해제되니까."
그러니 우연찮게 똑 닮은 사람을 왕국이 고용한 것이 아니라면.
"1황자 본인이 맞아."
"..."
날카로운 눈빛으로 브랜딜을 훑은 레이가 발을 옮겼다.
"따라나와. 따라오면서 시그니 산맥에서 벌어졌던 일을 더 자세히 설명해."
*
브랜딜은 레이가 원하는 정보를 차근차근 늘어놓았다.
제공한 정보의 대부분이 1황자와 관련된 것이었다.
레이가 브랜딜의 이야기를 들으며 계속해서 혼잣말을 이어간 탓에, 브랜딜은 레이가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태가 아닌가 의문을 품었다.
허나 레이는 허공에다 혼잣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브랜딜의 주장이 신뢰할만한가?"
[단정 짓기 어렵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아프텔이 답했다.
[설령 '시기'가 다가왔다고 해도, 악마와 무지한 이가 기도만 읊는다고 악마와 닿지는 못합니다. 저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조력자와 매개체가 존재할 확률이 높습니다. 다만...]
"다만, 뭐?"
[저자의 말에 따르면, 1황자가 얻어낸 건 단순한 '축복'이 아닙니다. 제아무리 대단한 악마의 축복을 받아들여도 검술처럼 숙달이 필요한 분야의 급격한 발전을 이루는 건 불가능합니다. '경험'의 동화는... 사도의 특권입니다.]
"...?"
악마, 혹은 악신의 사도.
그 이름이 지닌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단일 개체로 대규모 전장의 판도조차 뒤엎을 수 있는 강대한 재앙들.
쉽사리 툭툭 튀어나올 존재가 아니었다.
"사도라는 게 악마가 내키는 대로 뽑아낼 수 있는 존재였나?"
[아닙니다. 하나의 악마가 동시기에 탄생시킬 수 있는 사도는 기껏해야 하나에서 둘입니다.]
"일단 확인하겠는데, 사도는 얼마나 강하지?"
[개체마다 격차가 천차만별인지라 단언하기 힘듭니다.]
"악마의 종류에 따라 사도의 강함이 달라지나?"
[로필렌 님의 연구에 의하면, 어떤 악마에게 선택받았느냐는 권능의 형태에 영향을 끼칠 뿐입니다. 사도의 강함은 사도로 선택된 존재가 본래 내재하고 있던 재능의 크기와 직접적으로 비례합니다.]
"..."
레이의 눈가가 가늘게 좁혀졌다.
악마, 혹은 악신. 그들은 절대성을 지닌 초월자처럼 여겨졌으나, 직접 소통이 가능한 존재가 아니었다.
악마의 추종자든 적대자든, 하찮은 필멸자에게 악마의 의도라는 건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1황자가 정말 사도로 개화했다면...'
1황자의 숨겨진 재능이 그토록 뛰어났던 것일까? 악마가 사도로 선택할 만큼?
'그게 아니라면... 뭐가 그리 급했지? 설마...'
[정말 사도가 발아했다면 빠른 제거가 필요합니다.]
레이가 아프텔을 돌아보았다.
아프텔은 덤덤히 자기주장을 이어갔다.
[더 성장하기 전에 죽여야 합니다.]
"...그래. 설령 1황자가 사도가 아니라 해도 제거해야지."
2황자가 죽었다. 왕국으로 망명한 1황자는 악마의 조력으로 부활해 제국을 되찾겠다고 벼르고 있다. 제국에 남은 황족들은 정통성이 많이 떨어진다.
이대로는 감당할 수 없는 혼란과 함께 대규모 충돌이 발생할 확률이 지극히 높았다.
1황자는, 존재 자체가 세상에 있어 종양 덩어리와 다르지 않았다.
쾅! 쾅!
레이가 지미와 벨라의 신혼집 문을 두드렸다.
지미가 잠이 덜 깬 얼굴로 문을 열어주었다.
"레이?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레인저 쪽에서 내분이 발생한 것 같아요. 백작령까지 내려와서 난리를 치네요. 엄마 데리고 영주성으로 가서 백작님께 영지 경계를 강화하라고 말씀 좀 전해주겠어요?"
"아이고."
지미는 말귀를 빠르게 알아들었다.
일단 고개부터 끄덕인 지미가 레이에게 물었다.
"너도 영주성으로 가냐?"
"저는 할 일이 하나 생겨서."
"일단 알겠어. 몸조심 해라."
"네, 엄마 좀 잘 부탁할게요."
지미에게 감사를 전한 레이는 계속해서 길을 걸으며 브랜딜에게 물었다.
"황태자가 로얄가드를 기다린다고?"
"맞아. 제국의 배반자들에게 자기 건재함을 알려야겠다나 뭐라나."
"레인저들도 악마를 숭배하는 건가?"
"이봐, 그건 절대 아니야. 우리 모두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어. 스스로가 레인저임을 자랑스러워 하지. 첩자 한두 놈이 숨어들었을 수는 있겠지만, 레인저는 절대 악마를 숭배하지 않아."
"..."
"생각해보니 단장 놈이 무지하게 수상하긴 하네. 근데 지금 어딜 가는 거야?"
레이는 답하지 않고 마을과 동떨어져 있는 저택으로 향했다.
브랜딜은 레이의 뒤를 따라가다가 끈적한 무언가가 피부를 훑고 감을 느꼈다.
결계였다.
침입자에 반응한 로필렌이 경계 어린 기색으로 모습을 드러냈다가 레이를 발견하곤 긴장을 풀었다.
"레이, 무슨 일로 찾아왔니?"
"네가 도와야 할 일이 생겼다."
레이의 강경한 말투에 로필렌이 곧장 무릎을 꿇었다.
"하명하십시오."
"1황자가 악마의 하수인이 되어 부활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은 로필렌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하실 건지요?"
"외부에 알려지기 전에 우리가 로얄가드로 위장해서 1황자에게 접근한다. 의혹이 사실로 확인되면 그 자리에서 제거한다."
"알겠습니다."
"얼굴 가리고, 환영 마법으로 그럴듯하게 위장해. 가능한가?"
"가능은 합니다. 하지만 환영 마법은 전투라도 벌어지면 쉽게 해제됩니다."
"그럼 너는 전투에 참여하지 말고 뒤에서 머릿수 맞추며 적당히 분위기나 잡아."
레이가 로필렌의 자택으로 들어가 검고 두꺼운 로브를 몸에 걸쳤다.
헐렁한 모자가 머리를 덮으며 얼굴 전체에 칠흑 같은 그림자를 지게 했다.
로브의 사이즈가 몇 치수 큰 탓에 끄트머리가 땅에 질질 끌렸으나, 그게 오히려 묘한 위압을 자아냈다.
로필렌이 자책 얼굴로 조심스레 레이에게 물었다.
"제가 무언가 더 도와드릴 게 있을까요?"
"...1황자 만나면 아가리 좀 그럴듯하게 털어봐."
"그거야 맡겨주십시오. 자신 있습니다."
로필렌의 입가에 웃음기가 어렸다.
일련의 대화를 지켜본 브랜딜이 격양된 목소리로 외쳤다.
"이봐! 지금 단둘이서 레인저들의 본거지를 습격하겠다는 거야?"
"너까지 셋이야. 그리고 네 말이 진실이라면..."
레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우리가 레인저 모두를 상대해야 할 필요는 없겠지."
*
백작령의 경계가 삼엄해지기 전에 레이의 일행은 시그니 산맥으로 진입했다.
브랜딜이 길잡이가 되어준 덕분에 험난한 산맥을 짧은 시간 만에 주파할 수 있었다.
시그니 산맥 초입을 지나친 후에는 고의로 흔적을 숨기지 않았다.
때문에 레인저들은 레이의 일행을 손쉽게 발견하고 추적했다.
레이의 일행이 제국령을 벗어나자마자 사방에서 나타난 레인저들이 퇴로를 차단했다.
레인저 중 하나가 명령했다.
"제압해. 저항하면 죽여도 된다."
레인저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로필렌이 곧장 실드를 생성해 자신과 브랜딜을 보호했다.
홀로 실드의 범위에서 벗어난 레이를 레인저들이 우선해서 공격했다.
촤악!!
가장 먼저 레이에게 도달한 레인저가 명치를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레이는 몸을 틀어 가볍게 기습을 피하고는 무릎으로 레인저의 턱을 올려 찍었다.
직후 관절기를 걸어 상대의 검을 강탈한 레이가 검기를 발현했다.
레인저들이 레이의 사방을 점한 채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파가각!!
레이가 검을 크게 휘둘러 전후좌우에서 행해지는 공격을 한꺼번에 쳐냈다.
레인저들은 예상치 못한 강력한 반동 탓에 4명 중 3명이 검을 놓쳤다.
레이는 눈앞에서 휘청이는 레인저의 다리부터 걷어찼다.
다리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레인저가 옆으로 픽 쓰러졌다.
직후 레이는 뒤에서 행해지는 찌르기를 어깨 아래로 흘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팔꿈치로 상대의 얼굴을 찍었다.
코뼈가 뭉개지는 소리와 함께 레인저가 땅을 굴렀다.
"그쯤 하지?"
입을 연 건 로필렌이었다.
"우리는 1황자의 사체를 돌려받기 위해 찾아왔다."
모두가 움직임을 멈췄다.
레인저들은 자존심이 퍽 상한 얼굴로 로필렌을 쳐다봤다.
로필렌은 단 두 마디를 던졌을 뿐이지만 레인저들은 알아서 상황을 해석했다.
레이는 레인저 여럿의 합공을 어렵지 않게 압도했다. 그것도 적당히 봐주면서 말이다.
저런 실력자가 갑자기 찾아온데다, 옆에는 제국의 첩자라 의심되는 브랜딜도 끼어 있고, 황태자의 사체까지 운운한다.
자연스레 상대가 제국의 정예 부대, 예컨대 로얄가드 정도에 속한 인물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단 하나 이상한 건 브랜딜에게 안내를 받아놓고 1황자가 살아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는 점인데, 브랜딜이 고의로 정보를 누락했다면 이해하지 못할 상황은 아니었다.
로필렌은 푸른 색 로브를 흩날리며 레인저들에게 오만함을 드러냈다.
"제국을 완전히 적대하려 하는가? 그게 아니라면 검을 내려놓아라."
"..."
"네놈들이 순순히 사체를 내놓지는 않겠지. 관대하신 폐하께서 루비하 왕국에 협상을 제안하시었다. 곧 폐하의 전언이 왕국에 전해질 거다."
"협상...?"
"그래. 우리는 협상에 앞서 사체의 상태를 살피라는 폐하의 명을 받고 왔다. 1황자의 사체가 시그니 산맥에서 반출되지 않은 것은 이미 확인했다. 너희들의 상급자를 만나야겠다."
레인저들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로필렌의 요구가 아니라 해도, 부활한 1황자는 제국의 추적자들이 다시 찾아왔을 때 그들을 자기 앞으로 인도하라고 떠들었다.
레인저의 단장인 아르투르 또한 1황자의 말을 따르라고 강요했다.
현장을 지휘하던 레인저가 검을 꽂아넣었다.
"따라와라."
*
"하하하..."
레인저들의 보고를 들은 카리우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협상? 폐하께서 내 시체를 되찾기 위해 왕국과 협상을 진행하려 하신다고?"
그럴 리가.
현 황제나 2황자나 그리 유들유들한 성격이 아니었다.
"협상하는 척 방심시키고 내 사체의 위치만 확인되면 병력을 보내 이곳을 쓸어버리겠지."
한참을 더 낄낄거린 카리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면 이조차도 양동이거나. 날 찾아왔던 두 놈에게 레인저들의 시선이 쏠린 사이 로얄가드들이 우르르 시그니 산맥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
깜짝 놀라는 레인저를 향해 카리우스가 손을 가볍게 저었다.
"뭐, 상관없겠지. 나의 건재함을 알리기만 하면 될 뿐이니."
카리우스가 막사를 걸어나왔다.
산맥을 걸어 내려가는 카리우스의 발걸음에는 자신감과, 분노와, 탐욕과, 기대가 잔뜩 서려 있었다.
자신이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는 모습을 확인한 로얄가드들의 반응이 너무나 궁금했다.
"손수 네놈들의 팔다리를 찢어내며 적합한 징벌을 가할 것이다."
저 아래서, 로브를 뒤집어 쓴 '배반자'들이 레인저들에게 둘러싸인 채 올라온다.
배반자들을 향해 마주 다가가는 카리우스의 발걸음이 갈수록 뜨거워졌다.
검붉은 불길이 일어나며 카리우스의 주변을 잠식하기 시작한다.
난데 없이 일어난 불길에 모두의 시선이 카리우스에게 집중됐다.
배반자들 또한, 카리우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로브의 그림자에 숨겨진 두 쌍의 시선을 마주 본 카리우스의 입꼬리가 유쾌하게 찢어졌다.
"제국의 배반자들아, 내 시체를 찾으러 왔나?"
배반자들은 침묵한 채 자리에서 가만히 굳어 버렸다.
카리우스의 유쾌한 웃음이 산맥을 쩌렁쩌렁 울렸다.
"이런! 놀랐나 보군? 내가 멀쩡히 살아 있어서?"
한참을 웃던 카리우스가 표정을 딱딱하게 굳었다.
가슴 속을 가득 메운 분노와 탐욕이 검붉은 불길이 되어 새어나온다.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어라, 제국의 배반자들아. 나의 건재함을 알려야 하니, 한두 놈은 숨을 붙여서 보내줄 것이다."
카리우스를 둘러싼 검붉은 불길은 오랜 훈련으로 단련된 레인저들조차 감당하기 힘든 위압감을 발했다.
저 검붉은 불길은, 인간이 지닌 근원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모두가 말을 잃는다.
전능감에 취한 카리우스가 광소를 토해내려는 순간.
누군가가 한발 앞서 실소를 터뜨렸다.
"크크크크크크큭..."
"...?"
모두의 시선이 실소를 터뜨린 로필렌에게 돌아갔다.
로필렌은 거리낌 없이 카리우스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카리우스와 가까워질수록 로브 아래 드러난 입술이 더욱 길쭉하게 찢어졌다.
"제국의 변절자야, 그 부질 없는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악마의 하수인이 되었느냐? 추하고 어리석구나."
"...네년이 미쳤구나."
화르르륵!!!
만물을 탐욕스럽게 태우는 화염이 카리우스의 분노에 응해 로필렌을 향해 번져나갔다.
그 이질적인 불길의 접근에 로필렌은 잠깐 공포에 질렸으나, 이내 평온을 되찾고 웃음을 머금었다.
등 뒤로부터.
"1황자 카리우스."
차디찬 냉기가 번져 나온다.
"네놈은 숭배할 대상을 잘못 골랐다."
카리우스의 시선이 천천히 레이에게로 옮겨간다.
레이는 차분하게 카리우스의 붉은 눈동자를 응시했다.
어쩌면, 그날 밤 벨라가 마주했을 그 눈동자를, 레이는 머릿속에 새겨넣었다.
그래, 어차피 내 손으로 너를 죽일 거라면.
오로지 네 절망을 위해.
네가 가장 바라지 않을 파멸의 형태를 연기하겠다.
레이의 곁에 선 로필렌이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변절자야, 제국 역사의 정점을 맞이하라."
연기 (3)
99화
카리우스는 로필렌의 오만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카리우스는 단지 분노했으며, 되도록 빠르게 로필렌이란 존재를 지워버리려 했다.
"내가 여전히 우습게 보이나 보군."
한놈 정도는 먼저 태워버려야 태도가 바뀔 터다.
검붉은 불길이 지면 위에서 파도쳤다.
불길은 스스로가 의지를 지닌 듯 거센 열기로 이루어진 손아귀를 뻗어 로필렌을 움켜쥐려 했다.
악마의 권능을 마주한 로필렌은 두려움을 잊기 위해 허리를 더욱 꼿꼿이 세웠다.
허세를 부리는 로필렌을 레이가 지나쳤다.
레이의 눈가에 핏물이 맺힌다.
카리우스로부터 뻗어나온 기이한 권능이 검붉은 불길과 뒤섞여 날뛰는 모습이 흐릿하게 시야에 잡힌다.
권능을 하사받은 사도.
카리우스의 본질을 간파한 레이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코어가 휘몰아침과 동시에 서클이 회전하며 심장을 옥죈다.
코어와 서클로부터 번져 나온 마나가 냉기로 변해 주변을 잠식했다.
시야 가득 덮쳐오는 검붉은 불길 위로 서리가 낀다.
치지직-!
검붉은 불길에 뒤섞여 있던 괴이한 권능이 레이의 마나에 맞닿자 억지로 괴리된다.
만물을 불태우는 불길은 레이에게 도달하지 못하고 결국 차게 식었다.
후욱!!
갑작스러운 온도 변화 탓에 연기가 자욱하게 퍼진다.
예상치 못했던 광경에 카리우스가 실소를 터뜨렸다.
과연 제국이 보낸 자객들. 아주 맥없이 목을 내주지는 않는다.
탐욕을 관장하는 악마의 권능조차 잠시 중화시킬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수단을 상대는 가지고 있는 듯했다.
허나 상관없었다.
지금 지면을 불태우는 불길은 카리우스가 건낸 환영인사일 뿐이었다.
카리우스가 녹슨 검을 옆으로 뻗었다.
사방에 번졌던 검붉은 불길이 삽시간에 응축되어 녹슨 검을 타고 흘렀다.
카리우스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쿠웅-!
둔중한 소음이 레이의 귓가를 울리기도 전에 시야를 가렸던 연기가 좌우로 갈라진다.
무지막지한 가속과 함께 레이에게 도달한 카리우스가 까마득한 열기를 토해내는 녹슨 검을 휘둘렀다.
촤아악!!!
전능감에 취한 카리우스는 이 일격으로 상대를 두 동강 낼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레이는, 얼굴 가죽이 녹아내릴 것만 같은 강렬한 열기를 앞에 두고 레인저에게 강탈했던 검 두 자루를 뽑아냈다.
세로로 그어지는 검붉은 선을 향해, 레이의 검이 교차한다.
쩌억!!!!!!
강대한 두 힘이 충돌한다.
카리우스와 레이를 중심으로 열기와 냉기가 마구잡이로 뒤섞여 휘몰아쳤다.
체격에서 밀린 레이가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세 걸음 뒤로 물러섰다.
고작 그뿐이었다.
카리우스의 전력을 다한 일격은, 레이를 고작 세 걸음 물러서게 했을 뿐이었다.
그제야 카리우스의 눈에 당혹감이 인다.
레이는 카리우스의 세로로 갈라진 눈동자를 마주 봤다.
벨라의 삶을 일그러뜨린 그 눈동자는, 이제 아이들이 살아갈 터전인 필립스 백작령을 파괴하려 하고 있었다.
레이의 가슴 속에 흐드러진 증오가 이내 모멸로 환원되어 입가에 담긴다.
"카리우스, 너는 제국의 수치다."
"...!"
카리우스의 미간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너무나 노골적인 업신여김에 카리우스는 고함조차 내지르지 못할 만큼 분개했다.
뿌드득!!
카리우스가 있는 대로 기운을 끌어올려 레이를 찍어 눌렀다.
레이는 힘 싸움에 응하지 않고 카리우스의 검을 흘려내며 역습을 준비했다.
카리우스는 손쉽게 레이의 의도를 읽어냈다.
역습의 기회를 잡은 건 레이가 아닌 카리우스였다.
촤악!!
카리우스가 한 박자 빠르게 레이가 역습할 검로를 차단하며 검을 찔러 넣었다.
분명 그리 할 계획이었다.
헌데, 레이의 신체가 일순 말도 안 되는 속도로 가속했다.
오버드라이브.
관절 내의 마나가 폭발하며 레이의 신체가 채찍처럼 휘둘러진다.
쩌엉!!!!
"커억!!"
간신히 레이의 일격을 막아낸 카리우스가 꼴사납게 지면을 굴렀다.
레이는 곧장 카리우스를 쫓아 가서 검을 휘두르려다 급하게 방어 자세를 취했다.
콰앙!!
하늘에서 마법사가 발현한 벼락이 내리친다.
동시에 레인저 한 부대가 사방에서 짓쳐들어오며 검기를 쏘아냈다.
레이가 중얼거렸다.
"아프텔."
레이의 팔찌가 발광하며 실드를 머리 위에 생성한다.
잠시 벼락에서 벗어난 레이가 양손에 쥐어진 검을 느릿하게 회전시켰다.
검에 맺힌 검기가 점멸하는 걸 보고도, 레인저들 중 누구도 위협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 탓에 허공이 찢어지며 도약 검기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레인저들은 멍청하게 중얼거려야 했다.
"이게 무슨...?"
콰아앙!!!!!
굉음과 함께 사방에서 육편이 터져 나왔다.
코앞이나 사각에서 떨어져 내린 도약 검기에 대응 가능했던 레인저들은 극소수였다.
살아남은 레인저라 해도 사지가 멀쩡하진 않았다.
"공간...검?"
눈이 달렸다면 모를 수가 없었다.
수백 년전 영웅이 사용했다는 전설적인 검술.
영웅의 죽음과 함께 실전되었다는 전설적인 검술이 그 어떤 징조도 없이 너무나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냈다.
고도로 훈련받은 정예 병력이라 평가받던 레인저들이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쳤다.
현실감 없는 광경을 앞에 두고, 전능감에 취했던 카리우스조차 당혹에 찌든 얼굴로 몸을 허우적거렸다.
그 우스운 꼴을 보며 레이가 비릿하게 웃었다.
"황가의 축복 받은 혈통에 악마의 권능까지 받아들인 결과가 고작 그것이더냐?"
아프텔의 보조에 의해 변조된 레이의 목소리가 전장을 울렸다.
"황제에게 버림받은 이유를 알만하구나."
"네, 네놈이 감히...!!!"
카리우스의 흰자에 핏발이 줄기줄기 선다.
평생 동안 쌓아왔던 열등감에서 비롯된 분노가 탐욕이 내린 권능의 영향 아래 증폭된다.
실전되었다는 공간검을 황실이 언제 어떻게 복구하였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하르시아가 살아 돌아온 게 아니라면 저건 그저 황실의 사냥개 중 하나일 뿐이었다.
두려워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고, 분노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황실의 사냥개가 감히 나를 능멸해?!!!"
카리우스가 탐욕의 악마로부터 내려받은 권능을 줄기줄기 뽑아내며 레이에게 달려들었다.
녹슨 검이 휘둘러지는 궤적을 따라 검붉은 재가 휘날린다.
카리우스로부터 터져 나오는 열기가 강맹해질 수록 레이의 코어가 거칠게 회전했다.
검붉게 타들어 가는 땅에 서리가 쏟아진다.
쩌억!!!!!!
서로의 검격이 충돌한다.
카리우스는 녹슨 검으로부터 전해진 경험과 지식을 통해 온갖 고강한 검술을 이해하고 숙달했다.
만약 카리우스의 재능이 충분했다면, 카리우스는 인간이 닿을 수 있는 극한의 직전에 발을 들일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허나 카리우스가 지닌 재능이 뒤떨어졌기에, 카리우스는 여전히 달인이라 불리기에도 부족했다.
카리우스의 검술 실력은, 명백히 레이보다도 떨어졌다.
"으아아아!!!"
카리우스는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렀다.
검격 한 번에 지면이 통째로 뒤집히고 만물이 타올랐다.
허나 카리우스의 불길은, 레이에게만은 닿지 못했다.
레이의 검이 빙글빙글 돈다.
도약 검기가 허공을 찢고 떨어져 내려 카리우스의 살갗을 갈라냈다.
허나 카리우스는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았다.
길게 찢어져 나간 살가죽에서 핏물이 배어 나오기도 전에 새살이 돋아나 상처를 덮었다.
수십 개의 자상을 허용했으나 카리우스는 여전히 건재했다.
그 이치를 벗어난 괴이를 앞에 두고, 레이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자기 몸에 자리 잡은 악마의 권능을 제대로 사용도 못 하고 허덕이는 카리우스의 모습이 그리 우스울 수가 없었다.
"정말로 이해가 안 가는군, 악마야. 왜 이런 머저리를 사도로 선택했지?"
"...!"
카리우스의 눈동자에 세찬 격동이 일었다.
레이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카리우스의 열등감을 계속해서 짓쑤시고 있었다.
턱을 찢어버릴 거다. 턱을 찢어서, 저 시건방진 아가리를 다시는 놀리지 못하게 할 거다.
카리우스는 온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모순적이게도 카리우스는 레이에게 인정받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허나 레이의 시선은 이미 카리우스를 떠나 저 너머를 향해 있었다.
"단순한 축복만으로도 이 머저리를 소생시켜 혼란을 야기할 수 있었을 텐데... 대체 어째서 이 머저리에게 과분한 힘을 내렸지?"
그건, 레이의 순수한 의문이었다.
"사도란 본디 네놈들이 지닌 비장의 카드이자, 오랜 선별과 인내 끝에 택하는 존재가 아니었나? 무엇이 그리 급했지? 무엇이 네놈에게 이런 '악수'를 두게 만들었지?"
고민을 이어가던 레이가 탄성을 내질렀다.
"아! 혹시..."
현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가설 하나.
"네놈이 사도로 삼기 위해 눈여겨보았던 '씨앗'을..."
레이의 입꼬리가 옆으로 길게 찢어졌다.
"내가 낚아채기라도 했나?"
가만히 방치당했으면 분명 세상을 저주했을 수많은 씨앗들.
그리고 레이의 품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은 그 수많은 씨앗들.
그중 가장 찬란히 빛나는 씨앗을...
"그걸 되찾고자 이리 무리수를 두었나?"
부디, 부디 그랬으면 좋겠군.
레이의 조소 가득한 중얼거림이 카리우스의 심장을 헤집었다.
모멸을 참지 못한 카리우스가 광분하며 괴성을 질렀다.
"한눈팔지 말고 나를 보아라!!!!! 나를 무시하지 말란 말이다!!!!!!!"
츠즈즉!!!
볼품 없이 녹슬었던 카리우스의 검에서 자줏빛 섬광이 세차게 점멸한다.
탐욕의 힘을 받아들인 사도가 완전히 개화하며 '사령검'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불멸을 야기하는 탐욕의 권능이 박동하는 드래곤 하트를 완전히 침식했다.
자줏빛 불꽃이 피어오름과 동시에, 카리우스가 지면을 내리밟으며 레이에게 검을 휘둘렀다.
필멸자가 감당하지 못할 강대한 에너지의 파도가 레이를 덮쳤다.
콰가가가가가가각!!!!!
공격을 막아낸 레이의 신체가 삽시간에 백 미터가 넘게 밀려났다.
간신히 검을 놓치지 않은 레이가 턱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켰다.
허나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에 레이에게 달라붙은 카리우스가 연거푸 검을 휘둘렀다.
완벽히 각성한 사도가 자아내는 폭력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더는 레이를 보호하던 냉기가 자줏빛 불길을 막아내지 못했다.
레이의 몸을 싸매고 있는 검은 로브가 타들어 감과 동시에 레이의 발아래 핏물이 질척하게 찍혀 나오다 증발했다.
승기를 잡은 카리우스가 발광했다.
"나는 제국의 황태자다!!"
빠드드득!!!
레이의 육체보다 앞서 레이가 레인저에게 강탈했던 두 자루의 검이 먼저 바스러져 나간다.
카리우스가 레이를 거칠게 찍어누르며 연거푸 부르짖었다.
"내가!! 제국의 황태자다!! 내가!! 제국의 올바른 주인이란 말이다!!!"
"뭐 어쩌라는 거냐."
레이의 코어가 심장을 짓이길 것처럼 회전한다.
무기를 잃은 레이의 손아귀가 허공을 붙잡는다.
그 찰나.
은백색의 검 한 자루가 갈라진 공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다.
카리우스의 시선이 무심코 은백색의 검으로 향했다.
아주 잠깐, 추억이라 부를 수 있는 기억이 떠오른다.
언젠가 황실에서 보았던 초상화에서, 한 남자가 저 검을 들고 전장을 지키고 서 있었다.
은백색의 검에 적힌 문구가 카리우스의 시야에 들어온다.
허나 카리우스가 은백색의 검에 적혀 있는 문구를 채 읽어내리기도 전에.
수십 가닥의 검기가 솟구치며 은백색의 검을 중심으로 서로를 옭아맸다.
찬란히 빛나는 검강 너머로 서로의 시선이 마주친다.
"나는, 제국의 심판자이자..."
레이는 카리우스를 증오했다.
때문에, 오직 카리우스의 절망을 위해.
거짓을 연기했다.
"제국 역사의 정점이다."
연기 (4)
100화
모로스를 휘감은 검강으로부터 찬란한 빛 무리가 쏟아져 나온다.
수십 개의 검기가 서로의 반발을 이겨내고 뒤엉키며 공간의 일그러짐을 야기했다.
자줏빛 불길조차 레이의 검강과 맞닿는 순간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산산이 조각났다.
일순 카리우스의 시야가 새하얗게 물든다.
카리우스를 덮친 건, 멸망을 이겨냈다고 구전되는 신화 속 섬광이었다.
쿠웅---!!
"..."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카리우스는 귓가를 울리는 이명을 느끼며 지면을 더듬거렸다.
여기저기 손발을 뻗어본 카리우스는 시야가 회복되고 나서야 자신이 구덩이 사이에 처박혀 있음을 알아챘다.
한참을 떨어진 곳에서 레이가 오연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뒤늦게 카리우스는 자신이 까마득한 거리를 튕겨져나가 비탈에 틀어박혔음을 깨달았다.
"크윽...!!"
카리우스가 구덩이에서 기어 나오며 주변을 살폈다.
레인저들이 근방에 진을 친 채 대기하고 있었다.
카리우스가 명령했다.
"나를 도와라...!! 당장 저놈을 공격해...!!"
비탈에 틀어박혔던 충격을 해소할 시간을 벌어야 했다.
그러나 카리우스의 명령에도 레인저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도저히 인간이라 생각되지 않는 두 존재의 충돌에 위압되어 발이 떨어지지 않은 것일까?
아니었다.
그들은 레인저였고, 분명 전장에서 목숨을 걸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이었다.
허나 레인저들은 침묵했다.
카리우스가 연거푸 외쳤다.
"무엇하는 거야...!! 나를 도우라 하잖아!! 빨리 움직여!!"
"..."
레인저들의 노골적인 적의가 카리우스를 향한다.
레인저들의 시선이 뻥 뚫려 있는 카리우스의 허리춤을 훑었다.
카리우스의 명치 아래로, 내장의 태반이 날아가 있었다.
도저히 인간이 생존할 수 없는 부상이었다.
허나 카리우스는 스스로 제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카리우스의 몸으로 부터 혈액 대신 검은 진액이 흘러나와 내장이 사라진 구멍을 메우기 시작한다.
인간이라곤 도저히 여길 수 없는 그 괴이한 광경을 보며, 레인저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악마의 수하..."
결코 공존할 수 없는, 인류의 파멸을 바라는 존재들.
설령 국왕의 명이 내려온다 해도 카리우스의 정체를 확인한 이상 카리우스를 위해서 목숨을 걸 수는 없었다.
점점 짙어지는 레인저들의 적대적인 기세에 카리우스가 아빨을 뿌드득 갈아냈다.
흘러넘치는 카리우스의 분노가 레인저들에게 번진다.
"이 잡것들이...!!"
촤아악!!
자줏빛 불길이 너울지며 레인저들을 차례차례 휩쓸었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오자 레인저들이 황급히 카리우스와 거리를 벌렸다.
악마의 권능이 결합된 드래곤 하트에서 발현되는 불길은, 도저히 정면에서 상대할 수 있는 종류의 힘이 아니었다.
"나를 무시하지 마라..."
사령검이 허공을 날아 다시 카리우스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갔다.
"내게 충성하란 말이다!!!!"
콰가가각!!!
쓰러진 레인저들을 향해 카리우스가 자줏빛 축복을 내리꽂았다.
죽음을 맞이했던 레인저들의 육체가 다시 꾸물거리기 시작했다.
탐욕의 악마로부터 비롯된 불멸의 권능을 나눠 받은 레인저들의 육체가 카리우스에게 종속된다.
되살아난 레인저들이 괴상한 신음과 함께 몸을 일으키더니, 자줏빛 안광을 터뜨리며 레이를 향해 돌진했다.
레이의 곁에서 전장을 지켜보던 아프텔이 격렬히 반응했다.
[네크로맨서...!!]
탐욕의 악마로부터 태어난 불멸에 가까운 존재이자, 가장 껄끄럽고도 불길한 권능을 구사했던 최악의 사도.
600년 전 등장해 어마어마한 재앙을 일으켰던 사령군주의 후계가, 눈앞에 있었다.
[여기서 반드시 제거해야...?!]
목소리를 높이려던 아프텔이 뒤늦게 레이를 돌아보았다.
팔찌를 통해 감지되는 레이의 맥박이 이리저리 날뛰어 대고 있었다.
미친듯이 박동 주기를 높였던 심장이 갑작스레 움직임을 멈추기를 반복한다.
심장이 부하를 버텨내지 못한다.
아직 제대로 성장조차 끝마치지 못한 심장이, 폭발적으로 회전하는 코어와 서클 사이에 짓눌려 제 기능을 상실해갔다.
흐려져 가는 시야를 느끼며 레이가 중얼거렸다.
"아프텔, 심장에 전기 충격. 아주 짧게."
[마스터!]
"어서."
[...!]
파득!!
전격이 무방비해진 심장을 꿰뚫는다.
전류가 흐르며 잠시 정지했던 심장이 본래의 박동을 되찾는다.
레이가 흐트러졌던 초점을 간신히 맞춘 순간.
자줏빛에 휩싸인 레인저의 시체가 코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정말이지..."
환생하고 못 볼 꼴을 너무 많이 보는군.
촤악!!!!
세로로 휘둘러진 모로스에 의해 레인저의 시체가 양단됐다.
본디 네크로맨서가 되살린 망자는 손가락 하나만 남아서도 꿈틀거리며 적의를 드러냈으나, 공간검이 시체에 깃든 네크로맨서의 힘을 괴리시키며 망자에게 침묵을 선물했다.
짓쳐들어오는 되살아난 망자들을 향해 레이가 걸음을 옮겼다.
네크로맨서의 힘을 공유 받은 망자들은 생전보다 더욱 강력한 힘을 발했다.
허나 모로스를 휘감은 검강의 파괴력을 이겨내기엔, 그 존재가 너무나 미약했다.
콰가가가각!!!
레이는 너무도 쉽사리 카리우스에게 예속된 종들을 베어냈다.
하르시아를 흉내내며 하르시아처럼 검을 휘두르는 레이를 보고 카리우스가 격분했다.
"날 기만하지 마라!!!"
지면을 내리밟은 카리우스가 삽시간에 레이에게 접근해 사령검을 휘둘렀다.
다시 한 번 서로의 검격이 맞닿는다.
콰앙!!!!
"네놈은 가짜다!!! 진짜일 리 없어!!!"
네놈이 하르시아일 리 없다.
그저 하르시아의 흉내를 내는 가짜일 뿐이다.
"날 기만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
자줏빛 불길을 머금은 사령검이 잔상을 남기며 레이의 목을 향해 휘둘러졌다.
레이가 모로스를 고쳐 잡으며 허리에 들러붙은 레인저의 시체를 발로 짓이겼다.
레이는 물러설 필요를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레이로부터 재현된 하르시아의 신화는, 멸망을 형상화했다고 여겨지던 악마의 사도를 수십은 베었던 기적 그 자체였다.
촤아아악!!!
다시 한번 카리우스의 신체에 긴 자상이 새겨진다.
바스러진 내장이 갈라진 가죽 사이로 터져 나오며 지면을 적셨다.
로브 아래로 드러난 레이의 입꼬리가 비틀려져 올라갔다.
"굉장히 실망스럽군."
멸시가 가득 어린 목소리가 거듭해서 카리우스의 귓가를 괴롭혔다.
"내가 베었던 수십의 사도 중에서, 네가 가장 하찮구나, 카리우스."
"...닥쳐, 닥치라고!!!!!"
삽시간에 상처를 복구한 카리우스가 괴성을 지르며 레이에게 돌진했다.
되살아난 망자들 또한 계속해서 레이를 해치기 위해 날붙이를 휘둘렀다.
레이가 손아귀에 힘을 불어넣었다.
모로스 위로 서린 검강의 빛 무리가 반원을 그렸다.
촤아아아아악!!
레이를 둘러쌌던 모든 것이 무너진다.
일방적인 전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레이의 검격은 몇 번이고 카리우스의 몸뚱이를 부수었다.
허나 카리우스는 끝없이 다시 일어나 레이에게 손을 뻗었다.
아프텔이 조언했다.
[탐욕의 사도는 다른 사도에 비해서도 특히나 끈질긴 존재입니다. 힘과 권능의 주체가 되는 코어를 수십 번은 부수어야 합니다.]
레이는 이미 카리우스의 드래곤 하트를 몇 번이나 부수었다.
계속해서 검을 휘두른다면 언젠가는 카리우스도 죽음을 피할 수 없을 터다.
허나 아프텔은 레이의 육체가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마나가 고갈되어 갔고 근육이 지나치게 혹사됐으며 심장은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
그를 방증하듯, 레이의 검격이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다.
난도질을 당하던 카리우스가 압박이 약해짐을 느끼고 반쯤 잘려나간 얼굴로 웃음을 토해냈다.
재생된 카리우스의 눈동자가 검강에 휩싸인 모로스를 직시한다.
탐욕이 가슴을 잠식한다.
카리우스가 레이의 팔목을 붙들고 소리쳤다.
"내놔!!"
제국의 신검, 모로스.
그건 천한 자가 감히 탐할 물건이 아니었다.
"그건 제국의!! 오직 나를 위한 신검이다!! 당장 내놔!!"
카리우스의 손아귀가 로브를 파고들어 레이의 목을 움켜쥔다.
자주빛 불길이 카리우스로부터 옮겨붙어 레이의 살갗을 태우기 시작했다.
카리우스는 레이에게 고통과 공포를 선사하고 싶었다.
만물을 불태우는 자줏빛 불꽃은 인간이 견뎌내기엔 지나치게 끔찍했다.
허나 레이의 입꼬리엔, 여전히 멸시 어린 조소만이 선명하게 맺혀 있었다.
"이 검이 네 것이라고?"
촤악!!
기이한 궤적을 그린 모로스가 카리우스의 팔다리를 잘라냈다.
인간에겐 즉사에 가까운 치명상이었지만, 카리우스는 잘려나간 팔다리조차 몇 초 안에 복구했다.
레이는 카리우스의 팔다리가 복구되기 전 모로스를 휘감았던 검강을 거두었다.
은백색 검신이 온전히 드러난 모로스가 카리우스의 심장을 뚫고 드래곤 하트를 파고든다.
레이가 카리우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어디 가져가 봐."
푸욱!!
모로스에 의해 드래곤 하트가 양단됐다.
허나 카리우스는 여전히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사도로 각성하며 권능을 행사하는 주체가 된 카리우스는 부서진 드래곤 하트조차 단숨에 수복할 수 있었다.
나는 불멸이다.
카리우스가 그리 고함치려는 순간 레이가 모로스를 손에서 놓았다.
갑자기 무기를 버린다고?
레이의 의도를 파악 못 한 카리우스가 자기 가슴을 내려다봤다.
그 순간.
불길이 뻥 뚫린 가슴에서부터 타올랐다.
화르륵!
주인이 전달한 에너지를 종류를 가리지 않고 증폭시키는 신검, 모로스.
레이에 의해 강제로 카리우스를 주인으로 인식한 모로스가 드래곤 하트에 가득한 에너지를 급격히 증폭시킨다.
자신감이 가득 어렸던 카리우스의 표정에 금이 갔다.
카리우스는 사도로 각성하며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새롭게 얻었다.
허나 선천적인 재능이 부족하여 악마로부터 부여받은 힘을 쪼개고 쪼개서 사용해야 했다.
감당하기 버거운 힘은 강제로 안정시켜 드래곤 하트에 압축해 놓았다.
헌데, 모로스가 드래곤 하트에 압축된 막대한 에너지를 억지로 증폭시킨다.
터져 나오는 힘이 제어가 되지 않는다.
당장 드래곤 하트를 관통한 모로스를 뽑아내야 한다.
허나 모로스를 뽑아내기 위해 필요한 두 팔이 수복될 때마다 레이가 재차 손아귀로 카리우스의 두 팔을 뜯어냈다.
카리우스가 가슴에서부터 치솟기 시작하는 어마어마한 열기를 느끼고 괴성을 토해내려 했다.
그 찰나.
레이가 카리우스의 턱을 움켜잡았다.
"이 빌어 처먹을 머저리 새끼야."
레이는 카리우스가 속든 말든 끝까지 하르시아를 연기하려 했다.
허나 흘러넘치는 증오가 결국 레이가 뒤집어 쓴 가면을 벗겨냈다.
레이가 마지막으로 짜낸 목소리는, 증오와 멸시와 함께 약간의 울먹임이 섞여있었다.
"네놈이 자랑하는 그 고귀하고 좆 같은 혈통답게, 하다 못해 뒈질 때라도 좀 고상함을 갖춰봐."
"...!!!!!"
카리우스의 턱이 바들바들 떨렸다.
카리우스는 무언가를 지껄이기 위해 미친 듯이 발악했다.
하지만 레이는, 마지막 순간까지 카리우스의 턱을 붙잡은 손아귀를 풀어주지 않았다.
카리우스의 유언 따위 귀에 담을 가치가 없었다.
마침내.
드래곤 하트가 산산이 쪼개지며 폭주한 화염이 터져 나왔다.
콰아아아아앙!!!!!!!!!
동생 (1)
10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