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리메르는 대련장 위에서 마주 선 라온과 삼왕자를 보고 히죽 웃었다. 두 사람의 대련이 기대되어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물론 보상도.'
대련 이후에 오웬에게 얻을 내기 보상의 기대는 덤이었다.
그는 라온이 진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즐거워 보이는군."
타르탄 공작이 표정 없이 다가와 옆에 섰다.
"즐겁지. 어린 재능들이 전력으로 부딪치는 걸 보는 게 즐겁지 않을 리 있나."
"미친 검귀가 많이도 변했군."
"너 같은 망나니도 때깔 좋은 공작이 되었는데, 나라고 그대로겠냐."
리메르가 타르탄 공작을 보며 피식 웃었다.
"어제 왕자님께 다가온 것도 전부 이 대련을 위해서였겠지?"
"물론."
"대체 무슨 생각이냐. 너답지 않게 왜 그런 거추장스러운 짓을 하는 거지?"
타르탄 공작이 몸을 돌리며 강렬한 압박을 보내왔다. 허튼 수작을 부리면 당장에 검을 내리칠 기세였다.
"저 녀석들이 성장할 기회잖냐. 오마라면 모를까. 다른 육황의 아이들과 싸울 일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
리메르는 타르탄을 돌아보지 않으며 대답했다. 가벼운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진중함이 가득했다.
"…진심이냐?"
"그래."
"농담인 줄 알았는데 정말 변했군."
타르탄은 쩝 입맛을 다시며 대련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 대련에 나선 수련 기사들은 전부 오웬에서 밀어주는 아이들이다. 그들과 비슷한 수준이라니, 꽤 수준이 높군."
"당연하지. 누가 키웠는데."
"흥, 잘난 척은. 그런데 저 아이…."
그가 대련장에서 손목과 발목을 돌리며 몸을 푸는 라온을 가리켰다.
"아니, 저 괴물은 뭐냐. 존재감이 흐릿해서 나도 놓칠 뻔했다. 검술과 보법의 연계가 수련생 수준이 아니야."
"역시 뱁새눈은 아니네."
리메르가 낄낄 웃으며 반대편에서 여유를 부리는 삼왕자를 가리켰다.
"그런데 알고 있으면서 왜 경고를 하지 않은 거지? 삼왕자는 라온이 버리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만."
"저분은 오웬 왕국의 미래가 되실 분이지만 아직 패배를 모르신다. 안전한 곳에서 당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타르탄이 라온의 무력을 파악하고도 삼왕자에게 언질을 주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다.
그는 삼왕자에게 패배를 알려주어 한층 더 높이 올라가길 바랐다.
"다만 삼왕자님은 강하다. 저 천재 검사라도 쉽게 꺾지는 못할 거다."
"글쎄…."
리메르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감에 찬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 생각은 좀 많이 달라."
"고집은 변하지 않았군"
"그럼 내기 하나만 더 할까?"
"또?"
타르탄이 인상을 찌푸렸다.
"내기 한번 더럽게 좋아하는군."
"그럼 간단한 술 내기로."
"좋다. 그런데 어떤 내기를 하겠다는…."
리메르가 손가락 다섯 개를 들어 올렸다.
"라온이 너희들의 희망을 다섯 합 안에 끝낼 거야."
"개소리! 저 녀석이 강하다는 건 인정하지만 다섯 합은 무리다!"
타르탄이 눈을 부라리며 주먹을 쥐었다.
"그럼 내기하자고. 콜?"
"좋다! 얼마든지 받아주마."
"역시 화끈하네."
리메르가 키득 웃으며 손을 비볐다.
'오랜만에 공짜 술 좀 먹겠는데.'
* * *
"흠."
오웬 왕국의 삼왕자 그리어 드 오웬은 바로 앞에 있는 라온이 아니라, 대련장 아래에 있는 루난과 마르타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싸울 맛 나겠어.'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저 둘 그리고 세툰과 호각의 승부를 보였던 청발의 남자에게만 관심이 갔다.
바면 마주 선 방계에겐 조그마한 관심도 없었다. 얼굴은 기깔나게 잘 생겼지만, 그뿐이다. 느껴지는 무력이 너무 평범했다.
'최대한 빨리 끝내야겠어.'
앞에 있는 방계에겐 오러를 사용하는 것도 아까웠다. 육체의 힘만으로 가볍게 꺾은 뒤 다음 대련에서 전력을 발휘하기로 마음먹었다.
"준비가 끝났으면 대련을 시작하겠습니다."
리메르가 앞으로 다가와 손을 들어 올렸다.
"마지막 대련. 시작!"
"흐읍!"
그가 손을 내리자마자 그리어가 검을 뽑았다.
터엉!
땅을 박차고 라온의 정면으로 돌진했다. 검을 내리쳐 단번에 끝내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
눈앞에 있던 라온이 찰나의 순간 사라졌다.
'어, 어디에…흡!'
라온을 찾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우측에서 살벌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검!'
그리어는 검에서 이는 바람을 느끼고 급히 고개를 숙였다.
후웅!
라온의 수련검이 머리칼을 스치는 오싹함에 소름이 돋아올랐다.
"치잇!"
그리어가 몸을 회전시키며 오른쪽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후웅!
라온의 위치를 계산한 정확한 검격. 하지만 이번에도 라온은 그 자리에 없었다.
스스윽.
놈은 뱀이 땅을 기는 듯한 소리와 함께 좌측으로 이동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뭐, 저런!'
그리어가 이를 악물었다. 재빠르게 왕국 보법을 밟아 라온의 뒤를 쫓았다.
"흐아압!"
물러서는 라온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강대한 기운이 담긴 검이 대지를 향해 쏟아졌다.
'끝났어!'
피할 공간을 막아선 뒤 내리친 공격이다. 도망칠 공간은 없었다.
"어?"
다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라온과 눈을 마주쳤다. 조금의 동요도 없이 정지된 눈을 본 순간 등골 사이로 소름이 돋아올랐다.
터엉!
라온의 몸이 갈대처럼 휘며 앞으로 나아가고, 검이 반월을 그리며 회전했다.
그의 검과 함께 세상이 돌아갔다.
뭔지 모를 상황에 입만 벌리고 있을 때 등에서 강렬한 충격이 느껴졌다.
"커헉!"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이, 이게 무슨…."
지끈거리는 머리를 들어 올렸다. 라온이 자신보다 한참 위에 서 있었다.
그리어는 그제야 본인이 대련장 밖에 떨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끄으윽…아!"
삼왕자는 등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참으며 고개를 들어 올리다가 굳어버렸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라온의 붉은 눈. 그걸 본 순간 이 땅의 절대자 글렌 지그하르트가 떠올랐다.
'저, 저놈이야.'
삼왕자는 마른침을 삼키며 손을 떨었다.
'진짜는 저놈이었어!'
* * *
"이것 참."
리메르가 웃음을 참듯이 입을 가리며 타르탄을 보았다.
"어쩌나? 다섯 합도 아니고, 두 합만에 대련이 끝나버렸네."
"...."
타르탄은 대답하지 않았다. 쓰러진 삼왕자가 아니라, 라온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그만이 아니다. 이 연무장에 있는 모두가 경악한 눈으로 라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
타르탄은 한참 뒤에서야 헛바람을 뱉으며 허리를 폈다.
"저건 뭐냐. 무슨 보법을 저렇게 부드럽게 밟는 거지? 검술 역시 완벽한 타이밍에 들어갔어. 내가 본 게 전부가 아니었다니."
타르탄의 시선은 여전히 라온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가 보여준 보법과 검술은 수련생의 그것을 이미 벗어나 있었다.
강력한 무력이 아니라, 그 순간에 맞는 적절한 움직임으로 삼왕자를 꺾었다는 게 더 경악스러웠다.
라온이라는 아이는 가진 실력 이상의 것을 발휘할 수 있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라온이 이길 거라고."
"그건 나도 알고 있었다. 삼왕자께서 제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저렇게 쉽게 질지는 몰랐지만…."
"술집 예약해 놓을 테니까. 저녁에 보자고, 나 비싼 술만 먹는 거 알지?"
"쯧!"
"자, 잠깐!"
타르탄이 혀를 차고 고개를 돌리려 할 때 삼왕자가 버둥거리며 일어섰다.
"아, 아직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는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고 다시 대련장으로 올라갔다.
"와, 왕자님!"
"호오."
타르탄은 당황한 눈빛으로 삼왕자에게 다가갔고, 리메르는 턱을 긁적이며 흥미로워하는 미소를 지었다.
"이러시면 안…."
"공작. 난 아직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소!"
삼왕자는 말리려던 타르탄을 제치고 앞으로 나왔다.
"본래의 힘을 처음부터 썼다면…."
"아, 시벌! 존나게 찌질하네!"
마르타가 대련장에 발을 걸치며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왕자라는 놈이 승패도 인정 못 하고 왜 그렇게 비벼대. 꼭 어떤 놈을 보는 것처럼."
그녀는 고개를 돌려 가만히 있던 버렌을 내려보았다.
"윽…."
버렌은 했던 일이 있었기에 입술을 깨물고 인상을 구겼다.
"넌…."
"어이, 왕자 나리. 내가 지금 최대한 좋은 말만 해주고 있거든. 쌍욕 박기 전에 짐 싸서 꺼져."
마르타는 뒤에서 버렌이 노려보건 말건 신경 쓰지 않고 삼왕자를 조롱했다.
"말을 함부로 놀리지 마라. 이분이 누구신 줄 알고…."
"그쪽이 오웬의 왕위 계승자면 나도 지그하르트의 직계야. 꿇릴 게 없거든."
마르타는 타르탄 공작의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만!"
리메르가 대련장 위로 올라가 손을 펼쳐서 두 사람의 얼굴을 가렸다.
"대련이 끝나긴 했지만, 당사자들이 어떤지는 이야기되지 않았으니, 물어보자고. 라온."
"예."
계속 가만히 있던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할래? 네가 당사자니까 직접 결정해."
라온은 천천히 몸을 돌리며 턱을 틀었다.
"교관님이 이번 대련에 내기가 있다고 하셨죠. 승부는 났고 더 싸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끄윽…."
삼왕자가 말아쥔 주먹을 바르르 떨었다.
"왕자님. 그만하고 가시…."
"패한 건 인정한다!"
타르탄 공작이 말리는 손을 뿌리치고 삼왕자가 앞으로 나왔다.
"난 네 역량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싸우기 전부터 무시했다. 민망하고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어. 하지만 이대로 떠난다면 평생 후회하게 될 것만 같다. 한 번만 다시 싸워다오!"
삼왕자가 검을 내려놓고 고개를 직각으로 숙였다.
"와, 왕자님!"
타르탄 공작이 다가가 일으키려 했지만, 왕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음…."
라온은 삼왕자의 푸른 눈을 통해 그의 진심을 느꼈다.
'고개를 숙이다니.'
오웬 왕국의 삼왕자. 그것도 타르탄 공작의 호위를 받는 왕자라면 지지 세력이 단단하다는 뜻이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고개를 숙이고 대놓고 사과를 할 줄은 몰랐다.
"야. 삼왕자고 자시고. 추한 짓 그만하고 꺼…."
"마르타."
"칫."
라온의 부름에 마르타가 혀를 차고 뒤로 물러났다.
"음…."
타르탄 공작은 그 모습을 보고 침음성을 삼켰다.
'그저 무력만이 아니라니….'
자신에게도 덤비려 들었던 저 직계 여아를 말 한마디로 물러서게 했다. 저 라온이라는 아이를 잘못 보고 있던 건 삼왕자만이 아니었다.
"좋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대련장 뒤로 물러섰다.
"다만 이게 마지막입니다."
"무, 물론이오!"
삼왕자는 더 이상 말을 놓지 않았다. 무인으로서 존중하겠다는 뜻 같았다.
"준비된다면 말씀해주십시오."
리메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대련장 위로 올라왔다.
"으음…."
삼왕자는 갑옷 안에서 사자 모양의 목걸이를 꺼내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내 무언가를 결정한 듯 이를 악물고 목걸이를 그대로 뜯어버렸다.
우우우웅!
그의 중심에서 막강한 풍압이 치솟으며 그의 기세가 거의 두 배 가까이 부풀었다. 단순히 오러만이 아니라, 단련된 육체의 기운마저 느껴졌다.
"저런 기운을 숨기고 있었다고?"
"허!"
버렌과 마르타는 삼왕자에게서 뿜어진 막강한 기세에 눈썹을 찡그렸다.
"사, 삼왕자님! 그건…."
"힘을 숨기고 있을 때가 아니오. 저자와 전력을 다해서 싸우고 싶소."
삼왕자는 이 사이로 바람을 흘리며 검을 들어 올렸다. 방심 따위 없이 처음부터 전력을 다한다는 의지를 표정으로 보여주었다.
-상대가 힘을 숨기는 것도 모르다니, 멍청한 놈이로다.
'그래도 이길 수 있어.'
-오러의 양이 너보다 훨씬 많고, 육체의 완성도도 저쪽이 위인데 이길 수 있다고?
'그럼 내기라도 할까?'
라온이 턱을 까딱였다.
-하! 물론이다! 얼마든지 받아주마.
라스가 코웃음과 동시에 내기 메시지가 올라왔다.
[<분노>가 내기를 제안합니다.]
조건 : 오웬 왕국의 삼왕자 그리어 드 오웬에게 승리.
성공시 : 모든 능력치 +4
실패시 : <분노>의 감정 10포인트 생성.
'받아들인다.'
메시지가 뜨자마자 내기를 받아들였다.
'호구가 또 왔군.'
지그하르트 도박장의 호구가 리메르라면 라온의 호구는 라스였다.
나오려는 미소를 참고 검을 뽑았다. 처음부터 삼왕자가 힘을 숨기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승리의 의지를 세우고, 숨겨둔 힘을 개방한 삼왕자와 싸우면 수련에 도움이 될 거 같아서 두 번째 도전을 받아들인 건데, 예상과 달리 호구 한 마리가 붙었다.
"그럼 가겠소."
삼왕자가 끌어 올린 힘을 다리에 집중하여 진각을 밟았다. 대련장 한 축을 무너뜨리며 맹수처럼 돌진해왔다.
"이번엔 싸울 맛 좀 나겠군."
얻을 게 있으니까.
라온이 앞으로 나아가며 휘돌린 검을 내리쳤다.
콰아아아앙!
하늘처럼 푸른 오러에 휩싸인 삼왕자의 검과 붉은 불꽃을 두른 라온의 검이 격돌했다.
44화
끼이이잉!
라온과 삼왕자의 기운이 정면에서 부딪치며 서로의 검이 비명을 내질렀다.
찌지지잉!
발목에서부터 올라온 힘이 라온의 전완근에 담겼다. 바위를 업은 듯한 묵직함이 검면에서 폭발했다.
"끄읍!"
검을 쥔 삼왕자의 양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이런 미친!'
한 번의 패배를 통해 라온이 강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정면에서도 압도할 무력을 가졌을 줄은 몰랐다.
"크어어어!"
삼왕자는 이를 악문 채 기합을 내질렀다. 여기서 밀리면 죽는다는 각오로 끝까지 검을 내질렀다.
콰아아앙!
수련검과 수련검이 비껴나가며 라온이 좌측으로 삼왕자가 우측으로 밀려났다.
"윽!"
삼왕자가 왼발을 축으로 몸을 돌려 자세를 잡았다. 빠르고 정립된 움직임. 어떤 공격이라도 받아낼 기세였다.
하지만 상대는 그의 예측을 벗어났다.
투웅!
라온은 가람보법을 밟아 자세를 다잡으며 이동을 함께했다. 미끄러지듯 움직여 삼왕자의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크윽!"
삼왕자도 제 실력을 발휘했기에 이전보다 반응 속도가 빨라졌다. 뒤로 물러서며 검을 내질렀다.
치이잉!
라온은 검면을 틀어 손목을 노린 삼왕자의 검을 밀어냈다.
"아직이야!"
삼왕자의 검이 살아 있는 뱀처럼 휘어지며 손목이 아닌 가슴을 향해 쏘아졌다. 그의 눈동자에 승리에 대한 갈망이 담겼다.
캬앙!
라온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수련검에 역회전을 걸어 삼왕자의 검에 담긴 회전을 풀어버렸다.
"크흡!"
삼왕자가 신음을 흘리며 뒤로 밀려났다.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턱을 떨었다.
"어, 어떻게…."
"한번 경험해 봤거든."
라온이 삼왕자의 뒤에 보이는 버렌을 흘낏 보았다. 녀석과 싸울 때처럼 검에 담긴 있는 회전을 지워버렸을 뿐이었다.
"괴물인지, 천재인지…."
삼왕자가 입술을 깨물며 자세를 낮췄다. 검을 양손으로 잡고 사선으로 틀었다. 계속 보았던 자세지만, 이전과는 다른 기세가 풍겨 나왔다.
'페레스 검술.'
오웬 왕국의 미래만이 익힌다는 세 가지 왕국 검술 중 하나 페레스 검술이었다.
수백 년 전 대륙제일검사 페레스가 남긴 검술로 하늘의 흐름을 담아 공격과 방어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상승의 무학이었다.
"하압!"
삼왕자가 단단한 기합을 내지르며 발을 굴렀다. 질풍처럼 달려와 검을 올려 친다.
터엉!
라온은 삼왕자의 검에 맞서지 않고 가람보법을 운용했다. 바람에 휘날리는 나뭇가지처럼 검을 스쳐 지나갔다.
삼왕자가 올라간 검을 내리치며 따라붙었다. 오러의 운용이 정심해 속도가 빠르면서도 균형이 무너지지 않았다.
캬앙!
라온은 연성검법으로 삼왕자의 검을 튕겨내면서 뒤로 물러섰다.
"이젠 놓치지 않는다!"
삼왕자는 추적을 늦추지 않으며 더 완성도 높은 페레스 검술을 펼쳐냈다. 하늘을 담았다는 뜻대로 검날에 웅장하면서도 현묘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나쁘지 않군.'
라온은 이마 위로 스쳐 지나가는 삼왕자의 검을 느끼며 픽 웃었다.
'아까와는 달라.'
이전에 싸웠을 때와는 무력도 의지도 달라졌다.
'역시 명문 왕국인가….'
괜히 육황의 한 축인 오웬 왕국에서 인정을 받는 자가 아니었다. 저 어린 나이에 싸움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고 있었다.
언젠가 오웬 왕국과 싸울 가능성도 있다. 그날을 위해서 왕국의 상급 검술을 눈에 익혀둘 생각이었는데 제대로 공부가 되고 있었다.
거기다 삼왕자는 싸우면서 계속 생각을 하고 움직임을 조절한다. 재밌는 상대였다.
쩌엉!
라온이 목을 노리고 휘어진 삼왕자의 검을 격하게 쳐냈다. 날카로운 검격. 하지만 파악은 이미 끝났다.
불의 고리를 운용하면서 싸웠기 때문에 그의 검술을 파악하기 어렵지 않았다. 삼왕자가 펼친 검술은 모두 자신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였다.
쩡! 쩌저정!
라온은 더 이상 보법을 밟지 않았다. 다 다리로 대지를 누르며 삼왕자의 검술을 모조리 받아냈다.
"허…."
"미친!"
삼왕자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지고, 타르탄 공작이 입을 떡 벌렸다.
"후욱…."
삼왕자가 긴 숨을 뱉어내며 한발 물러섰다. 어깨를 펴며 검을 다잡았다.
"아직이오. 마지막 한 수가 남았어."
그 말과 함께 검을 들어 올렸다. 하늘을 받치는 상단의 자세. 그대로 땅을 박찼다.
'비기인가.'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상급 검술에는 그 이름값을 할 비기들이 있었다. 아무래도 삼왕자는 페레스 검술의 비기를 사용하려는 것 같았다.
후우웅!
삼왕자의 전신에서 퍼진 기류가 몸을 압박해왔다. 상대의 회피를 막고, 정면에서 검을 내리치는 돌진형 검술이었다.
'받아주지.'
라온이 검을 좌측으로 젖혔다. 검술 구경은 할 만큼 했으니 끝낼 시간이다.
만화공 일화.
회축.
검 끝에서 피어난 새빨간 불꽃이 톱니처럼 회전하며 대련장의 열기를 갈랐다.
"하아압!"
삼왕자는 라온의 검에서 솟구친 불꽃을 보고도 물러나지 않았다. 본인의 오러와 검을 믿는 것이다.
치이이잉!
가늘게 치솟은 불꽃이 삼왕자의 오러를 가른다.
"허!"
갈라지는 푸른 오러 사이로 삼왕자의 쩍 벌어진 눈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는 괜히 오웬 왕국의 삼왕자가 아니었다.
마지막 오러를 끌어올려 갈라진 오러를 메꿨다.
"소용없어."
라온이 단호한 목소리와 함께 수련검을 끝까지 베어냈다.
"아직이다! 내 검은…어?"
삼왕자가 턱을 떨며 내리치던 검을 멈춰 세웠다.
아니, 멈춰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의 검은 이미 부러졌으니까.
라온의 회축은 삼왕자의 오러만이 아니라, 그의 수련검까지 베어버렸다.
"허…."
삼왕자가 털썩 주저앉았다. 멍한 눈으로 부러진 검을 바라본다.
"히, 힘과 속도는 내가 유리했는데…."
"보법을 밟고 물러난다고 하여 무조건 힘이 밀려서는 아닙니다. 기회를 잡기 위해서 일부러 물러나기도 하죠."
"…확실히 느꼈소."
삼왕자가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그는 부러진 검을 챙기고, 갑옷과 머리를 정돈한 뒤 다시 라온의 앞에 섰다.
"고맙소. 두 번째 대련을 받아준 덕분에 많은 것을 느꼈소. 세상이 넓다는 말은 진실이었군."
그 말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왕자라고 생각될 정도로 정중한 몸짓이었다.
"저도 많이 배웠습니다."
라온도 삼왕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처음에 무시해서 미안하오. 이 못난 놈이 보는 눈이 없었다고 생각해주시오."
"괜찮습니다."
"몇 살이오?"
"14살입니다."
"하, 나보다 어린 검사에게 검으로도, 인성으로도 졌구려."
삼왕자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의 원래 성격이 드러나는 얼굴이었다.
"당신이라면 괜찮을 것 같소."
그는 갑옷 안쪽에 손을 넣어 푸른빛으로 반짝이는 사자가 그려진 패를 꺼냈다. 뒤에는 그리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받아주시오."
"이건…."
"오웬의 삼왕자. 그리어 드 오웬이 그 어떠한 부탁이라도 들어주겠다는 증거요."
"네?"
라온이 눈을 부릅떴다. 삼왕자가 넘겨준 건 왕자를 상징하는 패로 그의 말대로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 물건이었다.
"이걸 왜 제게…."
"패했지만 정신은 오히려 시원해졌소. 이런 적은 처음이야. 뭔가를 깨달은 듯한 기분이오."
삼왕자는 그 대가에 비하면 저 패는 싼 거라고 중얼거렸다.
"음…."
라온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패를 받아들였다.
"당신과는 훗날 다시 만나겠지. 그때도 지금처럼 내 위에 있어 주길 바라오. 따라잡는 재미가 있을 것 같소."
삼왕자는 구김 없이 웃었다. 대련장에서 내려와 리메르의 앞에 섰다.
"리메르 교관. 우리가 패했소. 내기는 이야기한 대로 이루어질 거요."
"알겠습니다."
리메르는 여전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타르탄 공작."
"예."
"돌아갑시다. 당장에 해야 할 일이 생각났소."
"예!"
삼왕자와 타르탄 공작은 수련 기사들을 이끌고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흥! 끝까지 잰 척하네. 짜증나게!"
마르타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무너진 대련장을 걷어찼다.
"있어 보이는 척이라…."
라온은 사라지는 삼왕자의 등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삼왕자의 눈에 어지러움은 없었다.
'아닐 거야.'
그는 변했고, 변할 것이다. 버렌과 마르타가 그랬듯이.
'그리고….'
라온이 손에 들린 패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저 수련을 위해 대련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이런 물건을 받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신기하네.'
대가도 없이 암살만 하던 전생을 겪어서 그런지 이런 갑작스러운 대가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무슨 의도로, 왜 줬는지 모르겠다. 다만 나쁜 의미가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이번 삶도 생각한 대로 돌아가지는 않는군.'
* * *
삼왕자는 그 길로 알현실을 찾아갔다. 예정보다 빠르게 돌아가겠다고 전했을 때 알현실 문이 열리고 수석 집사 로엔이 걸어 나왔다.
"가주님께서 들어오라 하십니다."
"…알겠소."
삼왕자는 침을 꼴깍 삼키고서 로엔을 따라 알현실로 들어갔다.
"흡…."
처음 보았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듯한 글렌의 눈을 마주한 순간 숨이 턱 막혀왔다.
"눈빛이 변했군."
한쪽 무릎을 꿇으려 할 때 글렌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렸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부끄럽지만 전 스스로를 최고라 생각했습니다. 오웬 왕국만이 아니라, 다른 육황의 재능들과 부딪쳐도 꺾을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삼왕자는 가라앉은 눈빛을 세우며 말을 이었다.
"그건 이곳 지그하르트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연무장을 돌아보았지만, 마음에 차는 수련생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건 5 연무장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 세 명의 강자가 있었지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삼왕자가 라온에게 얻어맞았던 오른 손목을 문질렀다.
"그곳에는 제가 파악조차 못 한 강자가 있었습니다. 라온 지그하르트. 저보다 어린 수련생의 무력을 무시했다가 일방적으로 패했습니다. 억지로 우겨서 치렀던 두 번째 대련 역시 패했습니다."
"흐음."
글렌의 반응에 삼왕자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알현실의 분위기가 살짝 부드러워진 듯한 기분이었다.
뭐랄까? 더 해보라는 것처럼. 어서 말해보라는 것처럼.
"음, 전 육황 중 세 곳을 돌아보았고, 대련도 해보았지만 라온 같은 수련생은 보지 못했습니다. 무력, 인성, 정신 모든 것이 이미 완성된 무인을 보는 듯했습니다. 그런 아이에게 패했기 때문인지 기분이 나쁘긴커녕 오히려 깨우친 기분이었습니다."
삼왕자는 말을 이어갈수록 알현실 분위기가 봄처럼 따스해졌다.
"저보다 어리지만 배울 점이 많은 검사였습니다."
"그런가?"
"예. 그래서 지금 당장 돌아가려는 겁니다. 그 아이를 보고 깨달은 점을 당장 체화시키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알겠다. 현왕에게 편지는 잘 받아보았다고 전해주도록."
"감사합니다."
삼왕자는 글렌에게 예를 갖춘 인사를 건넨 뒤 알현실을 벗어났다.
"…흡."
둘이 남은 알현실에서 웃음을 참든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로엔이 글렌을 보며 입을 막고 있었다.
"왜 웃는 게냐."
"가주님이 미소를 짓고 계신 모습을 보니, 자연스레 웃음이 나왔습니다."
"미소?"
글렌이 손을 가져다가 입매를 만져보고서 인상을 찌푸렸다.
"오웬 왕국의 삼왕자가 라온 도련님의 이름을 말했을 때부터 미소를 짓고 계셨습니다. 손자가 타국의 왕자에게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으셨던 모양입니다."
"…착각이다."
글렌은 괜한 헛기침을 하며 왼 주먹으로 턱을 괴었다.
"흐흡."
"웃지 마라."
"옙!"
로엔이 더 크게 웃음을 흘렸지만, 글렌의 말에 아예 입을 다물어버렸다.
"요즘 리메르랑 붙어 다니더니, 그놈의 병이 옮았군."
글렌은 한숨을 내쉬고서 눈을 감아버렸고, 로엔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떠날 줄 몰랐다.
* * *
"삼왕자님. 떠날 준비를 마쳤습니다."
삼왕자가 가주전을 나왔을 때 타르탄 공작이 다가왔다.
"수고하셨소. 인사는 드렸으니, 바로 돌아가도 될 거 같소."
"알겠습니다. 모두 열을 맞춰라."
"예!"
타르탄 공작의 말에 기사와 수련 기사들이 그의 뒤로 붙었다.
"가자."
"음…."
삼왕자가 가장 앞에서 걸어갔고, 타르탄 공작은 그 옆에 붙어 입맛을 다셨다.
"무슨 할 말 있소?"
"그 라온이라는 수련생과 대련을 할 때 말입니다. 감춰둔 힘을 개방하고, 페레스 검술까지 사용했던 건 조금 과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힘은 적당히 숨기는 게…."
"나도 알고 있소. 확실히 과했지."
"예. 페레스 검술은 왕국의 최상급 검술. 공개해서 좋을 게 없습니다. 거기다 신패를 내놓으시다니 너무 과한…."
"그건 아니오."
타르탄 공작의 말이 삼왕자의 손에 의해 막혔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내게 호의를 베풀었소. 이쪽이 무시로 시작했지만, 예의로 대해주었지."
"음…."
"나도 그에게 예의를 차렸을 뿐이오. 거기다 그 친구 역시 비기라고 할 법한 검술을 보였잖소."
"…그건 그렇습니다."
"그리고 신패를 준 건 투자요."
"투자라고 하신다면?"
타르탄 공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어린 나이에 그런 무력과 인성, 정신력이면 방계라고 해도 대륙 전체에 이름을 날릴 거물이 될 거요. 그런 이와 친분을 만들어 둔다면 훗날 내게 도움이 될 가능성도 있지 않겠소."
"그렇군요. 그 순간에 거기까지 보시다니, 대단하십니다."
"가슴과 혀에 칼을 달고 사는 왕국에서 자랐는데, 그 정도 계산도 못 하면 죽어야지."
삼왕자는 픽 웃고서 먼저 앞으로 나아갔다.
"흠…."
타르탄 공작이 턱을 긁적였다. 조금 전 삼왕자의 옆에 있을 때와 달리 표정엔 냉정함만이 가득했다.
'확실히 달라지셨군.'
이곳에 오기 전 삼왕자의 기질에 어린 자만심은 아예 사라졌다. 지금 그의 눈빛에서 새어나오는 건 발전을 위한 열의였다.
"정말 술이라도 사야겠는데?"
타르탄 공작은 옆에 보이는 5 연무장을 보며 픽 웃었다.
"나중에 만난다면 말이야. 그리고…."
그는 연무장 내부에 있을 라온을 생각하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궁금하군. 다음에 다시 만났을 때 그가 어떤 괴물이 되어 있을지도.'
45화
오웬 왕국의 사절단이 떠난 이후에도 수련생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서서 라온의 뒷모습만 지켜보았다.
매일매일 라온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강한 건 알고 있었지만, 항상 물처럼 부드럽게만 움직여서 저렇게 빠르게 움직이고, 강한 검격을 쏟아낼 줄은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어, 어어…."
"저렇게 강했다고?"
"어, 어째 점점 차이가 벌어지는…."
수련생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단상 위에서 시원한 손뼉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수고했다."
리메르가 단상 위에 걸터앉은 채로 씩 웃었다.
"갑작스러운 대련에도 최선을 다해줘서 고맙다."
"아닙니다!"
"오웬 왕국의 수련 기사와 대련할 기회를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련생들은 오히려 대련하게 해줘서 고맙다고 고개를 숙였다.
"그럼 다행이고."
리메르는 씩 웃으며 허공에서 발장구를 쳤다. 평소보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뭐, 다 끝났으니까. 몇 가지 말해줘야지. 일단 오늘 너희와 붙었던 오웬의 수련 기사들 있지? 걔들 단순한 수련 기사가 아니다."
"네?"
"그럼 어떤…."
그가 잠시 말을 멈추자, 수련생들이 침을 꼴깍 삼켰다.
"그 녀석들 오웬 왕국이 각 잡고 키우는 정예들이야. 그대로 성장한다면 근위기사나, 은기사가 될 인재들이지."
"헉!"
"근위기사와 은기사!"
"어쩐지 너무 강했어…."
수련생들이 입을 쩍 벌어졌다.
정예 중의 정예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바로 오웬 왕국의 근위기사단과 은기사단이다.
근위기사는 왕성에서 국왕을 지키는 방패. 은기사는 왕국을 위협하는 적을 베는 칼.
두 기사단은 오웬왕국의 최정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수련생들은 그런 곳에 들어갈 것이 확실시되는 수련 기사들과 비슷하게 싸웠다는 것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아이들과 비슷하게 싸웠다는 건 충분히 칭찬받을 일이다. 모두 자기 자신에게 박수!"
"이야야야!"
"와아아아!"
"우리가 이겼다!"
수련생들은 양손을 들어 올리며 환호를 터트렸다.
"흐흠!"
"수석 교관님."
리메르가 기분 좋게 환호성을 즐기고 있을 때 중앙에서 손 하나가 올라왔다. 버렌이 비틀거리면서 일어서 있었다.
"그들과 다시 싸워볼 수 있습니까?"
버렌의 표정은 바로 앞에 적이 있는 것처럼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누가 보면 진 줄 알겠네."
"이기지 못했으면 진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드는 자세야."
리메르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너와 붙었던 수련 기사는 미래의 근위기사 단장이라고 했었다. 네가 계속 발전해나가면 만나기 싫어도 만나게 되겠지. 물론 그때는 수련 기사가 아니라, 기사일 테지. 그러면…."
"전 검사가 되어야겠군요."
버렌의 녹색 눈동자에서 아지랑이가 피어났다.
"잘 알고 있네."
"하나만 더."
"뭐지?"
"저와 붙은 수련 기사가 미래의 근위기사 단장이라면 삼왕자는 뭡니까? 왕족 수준의 검술이 아니었습니다."
버렌의 질문은 타당했다. 아무리 15살이라고 해도 삼왕자의 무력은 기이할 정도로 강했다.
"삼왕자는 미래의 왕국제일검이라고 하더군."
"헉!"
"와…."
리메르의 답변과 동시에 연무장에 침묵이 찾아왔다. 수련생들은 부릅뜬 눈으로 라온을 돌아보았다.
훗날 왕국제일검이 될 거라 칭해지는 자를 가볍게 꺾어버린 라온은 대체 무슨 괴물이냐는 표정이었다.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 평소보다 체력을 많이 썼으니, 돌아가서 쉬도록."
리메르는 다시 손뼉을 치고 단상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수련생들의 눈동자에는 라온에 대한 놀라움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 * *
라온은 경악이 어린 수련생들의 눈빛을 뒤로하고 가장 먼저 연무장을 떠났다.
평소라면 돌아가라고 해도 남아서 훈련을 하겠지만, 지금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빠르게 숙소로 향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바닥에 앉아서 꽃팔찌를 툭툭 두드렸다.
화아아아!
팔찌에서 푸른색 냉기가 꽃봉오리처럼 피어났다. 다만 냉기는 분노에 찬 듯 바르르 떨었다.
-빌어먹을! 어떻게 그런 힘을 가지고 너한테 질 수가 있는 거냐! 왕족이라 믿었건만 멍청하고 하등하도다!
라스가 방 전체를 서늘한 냉기로 채우며 이를 갈았다.
-본왕이 그놈이었다면 너는 지금 얼음덩어리가 되어 갈기갈기 찢어졌을 거다. 가진 힘도 이용 못 하는 주제에 왕자? 한심하기 짝이 없어!
라스는 본인이 마계의 왕이다 보니 왕자에게 친근감을 느꼈던 것 같다. 내기에 진 게 굉장히 분했는지 분노와 수다가 동시에 터졌다.
-본왕이 마계에 있을 당시 더 적은 마나로도 큰 적을 손쉽게 제압했다. 나중에 군주 대 군주 대결에서는….
"아, 네. 거기까지."
라온이 팔찌를 치자, 라스의 말이 끊겼다.
'저건 무조건 끊어야 해.'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라는 말이 나오면 일단 끊고 봐야 한다. 저걸 들어줬다간 내일 아침에나 보상을 받을 거다.
"떠드는 건 나중에 하시고 내기 보상이나 주시지?"
-이건 사기다. 그놈이 가진 힘도 이용 못 할 줄 몰랐다.
사실 삼왕자는 잘 싸웠다. 만화공이 오러의 양과 상관없는 무지막지한 위력을 발휘했을 뿐.
"그래서 안 주려고? 마계의 군주나 되셔서?"
-본왕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인간인 줄 아느냐. 말한 건 지킨다. 그게 사기라도!
[<분노>와의 내기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승리 보상이 지급됩니다.]
[모든 능력치가 4포인트 상승합니다.]
능력치가 올랐다는 메시지가 떠오름과 동시에 감전된 듯 전신이 잘게 떨렸다.
"후우우우."
육체와 정신이 단번에 성장하는 이 희열은 매번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을 만큼 황홀했다. 이 보상을 위해서라면 어떤 임무라도 할 수 있었다.
꾸욱.
주먹을 꽉 쥐어보았다. 능력치 4포인트가 한 번에 오르니, 악력과 근육의 탄력에서도 확연한 차이가 느껴졌다.
<상태창>
이름 : 라온 지그하르트.
칭호 : 최초의 승리
상태 : 혹한의 저주(여섯 가닥)
특성 : 분노, 불의 고리(4성), 수속성 저항력(4성), 설화의 감각(2성) 만화공(2성), 혹한의 냉기(2성), 화속성 저항력(2성).
근력 : 47
민첩성 : 47
체력 : 48
기력 : 36
감각 : 58
이번 보상만이 아니라, 계속 수련한 덕분에 능력치가 많이 상승해 있었다. 높아진 수치 때문에 상태창만 봐도 뿌듯함이 밀려왔다.
-쯧.
라스는 보이지도 않는 상태창을 쭉 살피며 짧게 혀를 찼다.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은 눈빛이다.
-좋냐?
'좋아.'
라온이 고민도 없이 즉답했다.
-그리 좋아할 필요 없다. 네가 아무리 강해진다고 해도 결국 본왕의 빙의체에 불과하니까. 본왕이 이루지 못한 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녀석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중얼거리며 냉기를 뿜어냈다.
"아, 그래."
피부 위로 서리가 내릴 정도로 온도가 내려갔지만, 수속성 저항력 때문에 차갑지도 않았다.
"열심히 해봐."
가볍게 어깨를 털어 라스를 밀어내고 일어섰다.
-본왕을 무시하지 마라. 100년이 걸려서라도 네놈의 육체를 차지할 터이니.
'네.'
-끄아아악!
라온은 라스의 냉기가 화산처럼 폭발하기 시작했을 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무시라고?
무시를 할 리가 있겠는가.
라스는 적이다. 그것도 가장 위험한 적.
매일 불의 고리를 연성하고, 육체와 정신을 단련하는 이유가 놈에게 몸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다.
여유 있는 척하지만, 방심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허무한 죽음은 한 번이면 충분하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복수하기 위해서 더 강해져야 한다.
라온은 숙소를 나와 모두가 떠난 연무장으로 돌아가 밤새 검을 휘둘렀다.
* * *
라온이 오웬 왕국의 삼왕자와 대련을 한 지 세 달이 지났다.
차기 왕국제일검이라는 삼왕자를 가볍게 꺾었지만, 라온은 승리 따위는 이미 지난 일이라는 듯 수련에만 몰두했다.
수련생들은 요즘 라온에게 수련 귀신이니, 수련 천재니 하는 별명까지 붙였다. 물론 뒤에서만 부르지만.
"이제 검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네."
"저 인간 더 강해진 거 같지 않냐? 뭔가 검술도 보법도 더 자연스러워졌어."
"더 강해진 거 같은 게 아니라, 강해졌겠지."
"질린다. 질려."
방계 수련생들은 홀린 듯이 수련에 몰두하는 라온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조금은 따라잡았다고 생각했는데 턱도 없겠어."
"그러게. 이쪽도 신발 밑창이 헤지도록 수련했는데…."
수련생들은 오웬 왕국과의 대련이 아니라, 라온이 마르타를 꺾었을 때부터 감격해서 수련 시간을 많이 늘렸다.
열심히 수련했으니, 라온과의 실력 차이가 조금은 줄어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실력 차이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압도적인 차이만 벌어졌다.
"이거는 그니까…."
"재능 차이지."
"그래. 가지고 태어난 재능이 달라. 노력해도 안 되면 어쩔 수 없…."
"고작 신발 하나 헤졌다고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다고 생각하는 거냐?"
"응?"
각진 목소리에 수련생들이 뒤를 돌았다.
"헉!"
"어어…."
"버, 버렌 님!"
버렌이 팔짱을 낀 채로 입매를 비틀고 있었다.
"재능이라는 멋진 단어 하나로 상대를 높이면 참 편하지. 최선을 다 해도 안 된다고 나 자신을 합리화시킬 수 있거든. 그런데 말이야."
그는 수련생들을 스쳐 지나가며 말을 이었다.
"그건 신발 한 개가 아니라 열 개 정도는 뜯어먹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아."
그 말은 수련생이 아니라, 과거의 자신에게. 라온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모르고 그를 질투했던 과거의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마, 맞습니다."
"죄송…."
"내게 죄송할 건 없다. 너희들의 인생이니까."
버렌은 수련생들의 뒤에 있던 수련검을 챙겨서 연무장 중앙으로 행했다.
"버렌 도련님. 조금 부드러워지신 거 같지 않냐?"
"예전이라면 아예 무시했을 텐데…."
"야. 온다. 입 다 물어!"
"흡!"
수련생들은 좌측에서 걸어오는 마르타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턱.
마르타는 수련검을 꺼낸 뒤 어깨에 걸쳤다. 어깨에 닿을 듯한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연무장으로 가다가 멈춰 섰다.
"저놈이 부드러워졌다고?"
그녀는 수련생들에게 노골적으로 한심한 눈빛을 보냈다.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인데 부드러워졌다니, 너희들 눈깔은 썩은 오크만도 못하네."
마르타는 비웃음을 흘리고서 검을 휘돌리며 연무장으로 걸어갔다.
라온과 루난은 쉬지도 않고 몸을 움직였고, 버렌과 마르타는 그 둘에 지지 않겠다는 듯 강력한 기세를 일으키며 검을 내리쳤다.
"어우, 숨 막혀."
수련생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5 연무장엔 괴물이 산다. 그것도 4마리나….
"그래. 그렇지만."
수련생 중 한 명이 본인의 수련화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실력을 늘리기엔 여기만 한 곳이 없지 않냐."
"음, 그건 그렇지."
"맞아."
다른 수련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5 연무장에 온 뒤로 실력이 느는 속도가 훨씬 빨라진 건 확실했다.
"우리도 가자."
수련생들은 짧은 휴식을 끝내고 수련검을 쥔 채 연무장으로 들어갔다.
"좋구만."
리메르는 그들의 뒤편에 있는 나무에 걸터앉아 빙긋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기둥들이 잘 버텨주니, 알아서들 따라가잖아."
연무장 중앙에서 검을 휘두르는 라온, 버렌, 루난, 마르타를 차례로 보았다. 색이 다른 네 아이가 전력으로 달려가니, 뒤에 있는 아이들이 그 길을 자연스럽게 따라갔다.
저 넷은 교관 이상으로 아이들의 실력 발전에 큰 역할을 해주었다.
"흐음."
리메르는 나무에 걸터앉은 채 손가락으로 붉은 머리를 빙글 돌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실전을 시켜봐도 되겠어."
46화
라온이 전방으로 쇄도해 검을 내리그었다. 붉게 타오른 칼날이 저녁 공기를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찌지직!
대기를 가르고도 남은 오러의 잔향이 짐승의 발톱처럼 연무장을 긁어냈다.
연성검술과 가람보법의 마지막 초식을 합친 돌진형 검술이었다.
'나쁘지 않네.'
라온이 검을 휘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위력이 좋고, 속도가 빨라 보고도 막기 힘든 검술이었다.
'물론 그게 전부가 아니지만.'
이 초식은 등 뒤에 숨겨둔 칼처럼 언제, 어느 때라도 펼칠 수 있는 기습형이다.
아직 암살자의 기질이 남아 있는지, 기습을 염두에 두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흥흥.
뒤에서 들린 콧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루난이 맹한 눈으로 자신의 검을 보고 있었다.
다란 그 맹한 눈동자의 아랫부분이 살짝 반짝인다. 기대감이 어린 표정. 검술을 알려달라는 것 같았다.
"흡!"
루난은 따라 하려는 듯 땅을 박차고 허공에 검을 내질렀다.
속도도, 위력도, 기습의 묘도 없이 자세뿐이다. 다만 워낙에 능력과 재능이 뛰어난 녀석이다 보니 웬만해선 막기 힘들 초식이 되었다.
"맞아?"
루난은 몇 번 더 검을 휘두른 뒤 고개를 살짝 꺾고 이게 맞냐고 물어왔다.
"그렇게 하지 말고 일단 다리부터…."
저대로라면 대련하다가 사람을 죽일지도 몰라서 자세만 살짝 봐주었다.
후우웅!
루난의 자세를 어느 정도 잡아줬을 때 연무장 담장 위로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리메르였다.
그는 정시에 도착하면 문을 걷어차며 들어오고, 늦으면 담벼락을 넘어온다.
즉, 지금은 훈련 종료 시간이 조금 지나갔다는 뜻이다.
"음!"
리메르는 단상 위에 걸터앉아 수련생들을 내려보았다.
"교관님. 10분 늦으셨습니다."
"오늘 훈련 수고했다."
그는 버렌의 지적을 못 들은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10분이면 검을 만 번 휘두를 수 있는 시간입니다."
"에이, 그건 아니지! 윽!"
버렌의 어이없는 말에 대답한 리메르가 인상을 찡그렸다. 당했다는 표정이었다.
"커흠, 어쨌든 오늘 전해줄 소식은 두 가지. 첫 번째는 6 연무장에 관한 이야기다."
"6 연무장이요?"
"거길 갑자기 왜?"
"여기서 떨어진 녀석들이 간 곳이잖아요."
수련생들은 떨어진 녀석들이 간 연무장을 왜 말하냐며 고개를 흔들었다.
"오웬 왕국 사절단이 6 연무장을 무시하고 5 연무장에만 대련을 신청해서 자존심이 상한 것 같더군. 우리를 따라잡기 위해서 피나도록 수련한다고 한다."
리메르는 6 연무장의 수련생들이 대견하다며 씩 웃었다.
"부상 때문에 낙오되었던 직계와 방계도 새로 들어갔고, 힘든 수련만 골라서 진행 중이라고 하니, 방심해선 안 된다. 그 아이들에게 따라잡히지 않도록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해라."
"예."
"에에…."
"뭐, 따라잡힐 수 있어야 말이지."
수련생들이 입을 삐죽하게 내밀었다. 이미 한참 차이가 나는데, 뭐하러 대비하냐는 듯한 반응이었다.
"훗."
리메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두 번째 소식을 전했다.
"다음 주에 아주 특별한 훈련을 할 생각이다."
"어, 어떤 겁니까?"
벌써 겁을 집어먹은 도리안이 어깨를 달달 떨었다.
"특별한 훈련이라."
"뭐지? 뭘 할 게 남았나?"
리메르가 워낙에 별난 일을 벌인 적이 많았기 때문에 도리안만이 아니라, 수련생 모두가 불안해했다.
"그거야 비밀이지."
"아…."
"교관님. 어떤 훈련인지 미리 말씀을 해주셔야 그에 따른 대비를 하지 않겠습니까."
버렌이 손을 들어 올리며 정론을 말했지만 리메르에겐 당연히 통하지 않았다.
"알려주면 재미없잖냐. 열심히 수련하면 뭐가 되었든 해낼 수 있어."
"음…."
맞는 말이긴 해서 버렌이 입을 삐죽이며 손을 내렸다.
"그래도 힌트를 하나 주자면…."
리메르가 손가락을 펴며 웃었다. 평소처럼 가볍거나 경쾌한 웃음이 아닌, 진한 투지가 비치는 미소였다.
"실전이다."
"실전이요?"
"갑자기?"
대련이 아니라, 실전이라고 말하니 수련생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갑자기가 아니라, 이제 할 때도 됐지. 준비한다고 했으니 확실하게 말해주마."
리메르의 입매를 맴돌았던 능글맞음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진지함 그 이상의 섬뜩함이 미소에 어렸다.
"이번에는 피를 볼 각오를 하는 게 좋을 거야."
* * *
리메르는 훈련을 끝낸 뒤 가문을 나와 서쪽 외곽 유흥 거리로 향했다.
유흥 거리는 검사들과 사용인들이 휴식을 위해 찾는 곳으로 다양한 상점과 식당, 주점이 있는 곳이었다.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거리를 걷다가 동쪽 끝 목련이라는 이름의 주점으로 들어갔다.
단아한 이름과 달리 주점은 낡았고, 너저분했다. 자리는 만석에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에 귀청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리메르는 그 난잡한 분위기를 즐기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우측에 홀로 앉아 있는 중년인에게 다가갔다.
"빨리 왔네."
그가 중년인의 앞자리에 앉으며 씩 웃었다.
"마법사들은 남는 게 시간이니까요."
검은색 로브를 입은 채로 책을 읽던 중년인이 고개를 까딱였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리메르 님."
"술친구. 잘 지냈어?"
"저야 뭐 잘 놀고, 먹고 있습니다."
"부탑주가 되더니 아주 여유롭네?"
"허허, 여유가 넘치는 건 리메르 님 아니십니까. 월급 도둑이라는 말이 누구 때문에 생겨났는데."
중년인이 책을 덮으며 픽 웃었다.
"요즘엔 좀 바쁘다 보니, 너랑 술만 마시던 시절이 그립다."
"수련생들에게 시간을 많이 쓰신다고 들었습니다. 정성을 다해서 돌보신다고."
"그 정도는 아니고."
깊은 친분이 있는지 두 사람의 대화는 벨벳처럼 매끄러웠다.
"베르빈. 넌 요즘 뭐해?"
"리메르 님이 술자리에 나오시질 않으니, 책 읽는 낙으로 살고 있죠."
베르빈이라고 불린 남자가 손에 든 책을 흔들었다.
"마탑에서 할 일이라고는 연구와 책 읽는 것뿐이니까요."
"하긴."
리메르가 베르빈의 손에 들린 마법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표정을 보니 단순히 술이나 마시자는 건 아닌 것 같고."
"술이 좀 당기기도 했고, 부탁이 있어서."
"부탁이요?"
"우리 애들 실력이 꽤 올라와서 몬스터와 실전을 시켜보려고."
"음, 그거라면 정식 요청하셔도 될 텐데요."
베르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련생들에게 몬스터와 대전을 시켜주는 건 정식 커리큘럼 중 하나다. 이렇게 찾아와 부탁할 필요 없었다.
"거기에 몇 가지 추가를 해보고 싶어."
"추가라고 하신다면?"
"우리 애들이 좀 강해서 그냥 몬스터는 별로 도움이 안 돼."
"아, 오웬 왕국의 수련 기사들을 때려눕혔다고 들었습니다."
"뭐, 그렇지."
리메르가 콧대를 들어 올리며 히죽거렸다. 오랜 친구에게 제자들의 칭찬을 들으니, 술에 취한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수련생들과 대련을 할 몬스터들을 강화시키고 싶어. 소드 비기너 상급 수준으로."
"가능합니다. 몇 년 전에 입탑 한 녀석의 전문 분야가 몬스터 소환과 운용이거든요. 지렁이를 용처럼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 그게 된다고?"
"농담인데요."
"아, 넌 진짜…."
"지렁이를 용처럼 만들 수는 없지만, 오크를 비기너 상급으로 만드는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물론 다수는 안 되고, 한 번에 한 마리씩만."
베르빈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중얼거렸다.
"고마워 그리고 하나만 더."
"뭐죠?"
"몬스터가 인간처럼 보이도록 환상 마법을 걸 수도 있지?"
"그것도 쉬운 일이죠. 아직 익스퍼트도 되지 않은 아이들이니까. 환상 마법이 걸린 아티펙트 하나만 있으면 가능합니다."
"잘됐네. 그럼 그것도 그렇게 해줘."
리메르가 손가락을 튕기고, 테이블 위에 놓인 맥주를 단번에 들이켰다.
"그런데 강화와 환상을 동시에 사용하면 수련생들이 이겨내기 힘든 시련 아닐까요?"
베르빈이 술잔을 매만지며 눈매를 좁혔다.
"육체 능력이 강화된 오크와 싸우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칠 텐데, 놈들이 인간의 모습으로 보인다면 검을 제대로 휘두르지 못할 겁니다."
"캬아아! 이 맛에 살지!"
리메르는 테이블에 맥주잔을 쾅 내려놓으며 탄성을 흘렸다.
"뭐라고 했어?"
"수련생들이 이기기 힘들 거라고 했습니다. 몬스터 강화야 그렇다 치겠지만, 인간의 모습으로 보이는 몬스터를 죽이는 건 어린아이들에게 어려운 일이니까요."
"괜찮아. 우리 애들은 어린아이가 아니라, 검사니까. 그리고…."
리메르가 씩 웃었다. 진녹색 눈동자에 기대감과 즐거움이 어우러졌다.
"그 녀석들 강해. 몸도 마음도."
* * *
마법등이 5 연무장에 내려앉은 어둠을 걷어냈다.
대부분의 수련생들이 본가로 돌아갔지만, 아직 남아서 검을 휘두르는 아이들도 있었다.
루난 슬리온도 그중 하나였다. 연무장에 남아 라온이 보여주었던 찌르기를 연습했다.
파앙!
루난이 자세를 낮추고 검을 내질렀다. 빠르고, 강맹한 검격이 허공을 꿰뚫었지만, 이 느낌이 아니었다.
'잘 안 돼.'
라온의 찌르기는 강하다기보다는 부드럽고 여유로웠다. 너무 자연스러워 찌르기가 온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몇 번을 해봐도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는지 잘 모르겠다.
실내 수련장 쪽을 바라보았다. 라온은 지금 근력 단련을 하는 중이다.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몇 번 더 해보자.'
루난은 새롭게 자세를 잡고 허공으로 검을 찔렀다. 자세를 바꿔보았지만, 검세는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다시.'
칼날이 공기를 꿰뚫는 소리가 살짝 변했다. 속도와 위력은 조금 줄었지만, 검 끝에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조금 됐어.'
루난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검을 고쳐 잡았다. 계속해서 같은 자세를 반복하며 검을 내질렀다.
그녀는 동쪽에서 떠오른 달이 손가락 두 마리 위로 올라가고 나서야 손을 멈췄다.
"후우."
루난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조금은 됐어.'
라온을 따라잡으려면 멀었지만, 연성검술의 마지막 초식은 확실히 변했다. 위력과 속도가 줄어들었지만, 연계와 부드러움은 훨씬 나아졌다.
"음."
루난이 다시 실내 단련장을 보았다. 불은 여전히 켜져 있고, 라온과 버렌, 마르타가 기합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할 때 엄마의 말이 생각났다.
-구슬 아이스크림 사놓을 테니까. 주말에 빨리 오렴.
'가야지.'
루난이 바로 수련검을 집어넣었다. 모자란 부분은 다음 주에 물어보기로 하고 연무장을 나왔다.
시녀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빨리 돌아가기 위해서 연무장 외곽으로 달려가려 할 때였다. 어둑한 골목에서 한 남자의 그림자가 비쳤다.
"루난."
무시하고 가려고 할 때 그림자가 한 발 걸어 나오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
루난이 우뚝 멈췄다. 항상 맹했던 그녀의 눈동자가 파도를 맞은 듯 흔들렸다.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짧게 자른 은발과 진한 보라색 눈동자. 루난과 비슷한 외모의 미청년이었다.
"오…빠?"
"오랜만이구나."
루난이 입술을 떨며 한발 물러섰고, 남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세 걸음 다가왔다.
시리아 슬리온.
루난의 오빠이자, 슬리온 가문의 역대급 천재라 불리며 대륙십이성에 이름을 올려놓은 남자였다.
"아…."
다만 오랜만에 시리아를 본 루난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오빠가 아니라, 강대한 적을 마주한 것처럼.
"루난. 내가 그런 얼굴 하지 말라고 했지?"
시리아가 빙긋 웃었다. 미소는 여유롭고, 말투는 부드럽다.
하지만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본 사람은 무언가 섬뜩함을 느끼게 될 거다. 입매와 달리 눈은 조금도 웃지 않고 있었으니까.
"으…."
루난이 이빨을 딱딱 부딪치고 고개를 숙였다. 흔들리는 감정을 억지로 가라앉혔는지 떨리던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가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그래. 그래야지."
시리아가 미소를 유지한 채 다가와 루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리메르의 훈련이 괜찮나 보네. 생각보다 강해졌어."
그가 허리를 숙여서 루난과 눈을 마주쳤다.
그 순간 시리아의 얼굴에서 가면이 떨어져 나갔다. 표정은 썩은 나무처럼 굳어졌고, 눈동자에서 색이 사라졌다. 감정이 마모된 괴물을 보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전장에 나간다던가, 목숨을 건 대련을 하는 건 아니겠지?"
목소리도 변한다. 생명을 말려 죽이는 사막의 삭풍처럼 지독하리만큼 건조한 음성이다.
"아아…."
루난의 어깨가 덜덜 떨렸다. 손을 부여잡고 뒷걸음질 쳤다.
"흠, 조금 풀렸나? 다시 각인시켜줘야겠는데."
시리아가 코트의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의 손에 눈이 동그란 다람쥐가 한 마리 잡혀 나왔다.
"네가 옛날에 키우던 다람쥐 이름이 루비였었지?"
"오, 오빠?"
루난이 뒷걸음질을 멈췄다. 다람쥐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이제 기억날 거야. 루비가 어떻게 죽었는지. 네가 왜 피를 무서워하게 됐는지."
"자, 잠깐!"
시리아는 멈춰버린 눈으로 웃으며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퍼엉 소리와 함께 다람쥐가 잡혀 있던 그의 손에는 한 줌 핏물만 남았다.
"아아아악!"
루난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지만, 시리아가 설치한 기막 때문에 누구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루난."
시리아가 주저앉은 루난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귓가에 입을 대고 생기 없는 목소리를 속삭였다.
"넌 내 거다. 정해진 날이 올 때까지. 위험한 일도, 어려운 일도 하지 마."
"아…."
"내가 원할 때까지는 그저 숨만…."
콰앙!
시리아가 루난에게 세뇌의 말을 새기려고 할 때 골목의 굉음이 울렸다.
바닥이 뭉개지며 솟구친 모래 먼지를 가르고 금발의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붉은 눈동자로 시리아를 틀어보았다.
"너 뭐냐."
47화
라온은 실내 단련장에서 근력과 민첩성 훈련을 끝낸 뒤 실외 훈련장으로 나왔다.
'없네.'
밖에서 검을 내지르는 소리가 계속 들려서 루난이 있는 줄 알았는데, 보이지 않았다. 웬일로 먼저 집에 간 것 같다.
'있을 땐 귀찮은데, 없으니까 조금 아쉽군.'
루난은 항상 훈련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고개를 꾸벅이는 인사를 하고 돌아간다.
평소에는 별 느낌 없었는데, 그 인사를 못 받으니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게 아쉽다니, 세뇌라도 당한 건가.'
라온은 피식 웃으며 연무장을 나왔다. 안에 아직 버렌과 마르타가 있으니, 평소처럼 마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한심한 놈.
'뭐?'
-지금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닐 텐데?
'무슨 말이지?'
-....
라스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입을 다물고 서쪽만 보고 있었다.
'뭐지?'
라온이 라스가 보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가 느껴지지는 않지만, 기분이 미묘했다.
'혹시 모르니까.'
불의 고리를 회전시키며 만화공의 오러를 끌어 올렸다. 설화의 감각까지 발동시켜 기감을 넓게 퍼뜨렸다.
티익!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기감에 무언가가 잡혔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뜻은.
'누군가가 기막을 썼다는 거지.'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오러를 이용해서 소리와 기척을 차단했다는 의미다.
'가야겠지.'
평소라면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라스의 반응 때문에 가봐야 할 것 같았다.
언제라도 발을 뺄 수 있도록 그림자 보법을 사용해서 완벽하게 기척을 죽이고 기막이 설치된 곳으로 달렸다.
가문의 경계 검사들도 보이지 않는 어둑한 골목 안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그중 한 명은 루난이었고, 반대편에는 키가 큰 남자가 있었다.
'쟤가 왜 저기에 있지? 그리고 저 표정은….'
집에 돌아간 줄 알았던 루난이 두 손을 꼭 잡고 있었다. 평소와 비슷한 표정이지만, 눈동자가 겁에 질려 있는 것 같았다.
반대편의 남자를 보았다.
실비아와 같은 은발에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미남자가 등에 대검을 매고 있었다.
'시리아 슬리온.'
전생에서도 들었던 이름이다.
슬리온 가문의 천재이자, 차기 대륙십천이 될 거라 예상되는 열두 명의 괴물. 대륙십이성에 이름을 올린 남자.
'그런데 왜 겁을 먹고 있지?'
루난은 오빠를 보았음에도 웃거나, 반가워하지 않고 맹수를 만난 토끼처럼 겁을 먹고 있었다.
시리온이 루난에게 뭐라 말하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품에서 귀여운 다람쥐 한 마리를 꺼내서 루난에게 내밀었다.
그리고는, 루난이 손을 내밀 때 다람쥐를 터트려버렸다.
아아아악!
기막 때문에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루난이 비명을 지른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시리온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건조한 표정으로 루난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막아야 해.'
뭔지는 잘 모르지만, 저 말이 계속되면 안 된다는 예감이 들었다.
라온이 만화공의 오러를 가득 담아 진각을 밟았다.
콰앙!
바닥이 뭉개지며 굉음이 터졌다. 시리아가 루난에게 떨어지며 인상을 찌푸리는 게 보였다.
"너 뭐냐?"
라온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루난의 앞에 섰다. 고개를 비딱하게 틀며 시리아를 노려보았다.
"뭔데 루난을 괴롭히고 있지?"
누구인지 모르는 척해야 해.
시리아와 루난이 가족이라는 걸 안는 상태라면 끼어들 수가 없다. 남의 가족이니까.
하지만 모른 척한다면 끼어들 여지가 생긴다.
"남의 이름을 물으려면 먼저 본인의 이름을 밝히는 게 순서 아닌가?"
시리아가 여유롭게 웃었다.
"이런 골목에서 기막을 설치한 놈이 할 말은 아니지. 도둑놈이냐?"
"음…."
라온의 조롱에 시리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뭐랄까. 연기를 하는 것 같았다. 진짜 당황하거나 화난 게 아니라, 화난 연기를 하는 느낌.
'이런 놈이 어떤 인간인지 알지.'
전생의 자신을 죽였던 데루스 로베르트. 시리아에게서 그놈과 같은 악취가 풍겼다.
"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하지만 난 도둑도, 남도 아니고 그 아이의 오빠거든."
시리아가 라온의 뒤에 있는 루난을 가리켰다.
"...."
라온은 시리아의 시선을 막고, 루난을 슬쩍 보았다. 멍한 표정이지만 평소의 멍함이 아니라, 심한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작은 어깨가 안쓰러울 정도로 떨렸다.
"겁을 집어먹은 것 같은데요? 정말 오빠가 맞습니까?"
"아, 오랜만에 봐서 장난을 좀 쳤더니 저러라고."
"다람쥐를 손에 쥐고 터트리는 게 장난입니까?"
"아, 이거 진짜 아니야. 장난감일 뿐이야."
시리아가 손을 휘돌리자, 그의 손과 바닥에 깔린 핏물들이 재가 되어 흩날렸다. 오러로 핏물과 살덩이를 모조리 녹여버린 것이다.
"내가 진짜 다람쥐를 죽일 리가 있겠어?"
그의 전신에서 섬뜩한 기세가 피어난다. 죽음의 악취. 데루스에게 죽기 전에 느꼈던 그 향과 비슷했다.
-건방지도다. 인간 따위가 감히 본왕의 빙의체에 협박을 해?
라온은 답을 하지 않고, 기세를 끌어 올렸다. 라스의 말대로 저건 협박이다. 네놈도 이렇게 죽일 수 있으니 물러나라는 경고.
하지만 이 자리에 그냥 온 건 아니었다.
"라온! 너 이 자식 가문의 기물을 부순 거냐!"
연무장에 있던 버렌이 튀어나왔고, 경계를 서는 검사들도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멀리서 수련을 방해했다는 마르타의 욕설도 들려왔다.
"라온. 라온 지그하르트였구나. 어쩐지."
시리아의 눈동자가 먹물을 바른 구슬처럼 껌껌해졌다. 감정이 마모된 듯한 눈빛에 머리털이 쭈뼛 섰다.
"근데 정말 오해야. 복구하자마자 장기 임무를 받아서 동생에게 간식을 주려고 왔을 뿐이니까."
그는 품에서 직사각형 상자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형태와 무늬는 조금 달랐지만, 구슬 아이스크림 상자였다.
"루난."
시리아의 눈동자가 또 한 번 변했다. 사랑스러운 동생을 바라보는 오빠는 눈빛이다.
"아주 좋은 친구를 뒀네.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도록 해."
"으응."
"오빠가 장난이 심해서 미안해. 건강하게 지내. 다음에 보자."
그는 손을 흔들고 그대로 사라졌다. 흡사 바람으로 화한 것처럼.
"설마 저 남자 대륙십이성 시리아 슬리온이야?"
버렌이 시리아가 있던 곳을 보고 헉 소리를 뱉었다.
"분위기가 다르네. 괜히 십이성이 아니야."
"그래. 다르더군."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재이자, 영웅이라 불리는 그가 저런 미친놈일 줄은 몰랐다.
"루난."
뒤를 돌아 루난을 보았다. 평소와 같은 표정이지만, 눈동자가 흔들린다. 아직도 겁을 먹은 것 같았다.
"가자. 바래다줄게."
시리아가 임무를 받았다고 했으니, 가문에는 없을 거다.
"…응."
루난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다.
"무슨 일이 있는 거냐?"
버렌이 구슬 아이스크림 상자를 들고 다가왔다.
"별일 없었어."
라온은 상자를 대신 받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냐."
버렌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라. 같은 수련생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도와주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 먼저 골목을 떠났다.
'진짜 많이 컸네.'
버렌은 보는 사람이 뿌듯해질 정도로 달라졌다.
-그래도 본왕은 저놈의 눈깔이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고맙다.'
-뭐?
'네 덕분에 루난을 구할 수 있었어. 정말 구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커험! 저 아이는 본왕의 아이스크림 소녀가 아니더냐. 문제가 생기면 아이스크림을 못 먹을 것 같아서 말해줬을 뿐이다.
'그니까 그게 고맙다고.'
-그럼 저 아이스크림 좀 달라고 하면….
'그 말만 아니어도 널 다시 볼 뻔했는데.'
라온이 손바닥으로 라스를 쳐냈다. 정말 상황 파악을 못 하는 군주놈이다.
"가자."
"응."
루난을 슬리온 가문의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라온은 루난의 옆에서 걸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의 가족. 더군다나 정확한 상황도 모르는데 어설픈 위로를 해봐야 도움이 되지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루난의 걸음이 느려지면 느려진 대로, 멈추면 멈추는 대로 그저 조용히, 발을 맞춰서 그녀의 옆을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슬리온 가문의 마차와 시녀들이 보였다.
라온은 루난이 마차에 탈 때까지 지켜보다가 손에 든 아이스크림 상자를 넘겨주었다.
"고마워."
루난은 예전에 들뜬 음성으로 했던 단어를 침울한 목소리로 말한 뒤 떠났다.
* * *
루난이 가문의 저택에 도착하자, 로칸 슬리온이 마중을 나왔다.
"루난! 훈련하느라 수고했다."
"응."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에서 내렸다.
"네 오빠는 봤니? 직접 선물을 주고 간다고 했었는데."
"…응."
루난은 심호흡을 한 뒤 손에 든 아이스크림 상자를 보여주었다. 평소처럼 멍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네가 가장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네. 그 녀석 임무와 수련으로 바쁜 와중에도 꼭 너는 생각하더라."
로칸이 내 선물은 없다고 중얼거리며 껄껄 웃었다.
루난이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모든 사실을 밝힐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지켜온 것들이 무너질 것 같았다.
"…나 쉴게."
할 말을 목구멍에 가두고, 천천히 저택의 계단을 올랐다.
"그래. 피곤할 텐데, 푹 쉬어라."
"응."
로칸은 어서 들어가라는 듯 손짓했다. 루난은 고개를 끄덕이고 2층으로 올라갔다.
"하아."
방에 들어간 루난이 깊은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입술을 꾹 깨물며 아이스크림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가장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었지만, 손이 가지 않았다. 오빠의 얼굴만 생각났다.
'또 왔어. 그대로야.'
시리아 슬리온이 처음부터 저런 건 아니었다.
두 번째 임무에서 혼자 살아서 돌아온 이후 사람이 바뀐 것처럼 저렇게 변해버렸다. 그것도 내게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예의 바르고, 친절한 천재 검사였지만, 자신에게만큼은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집착의 괴물이 되었다.
'루비….'
그가 말했던 루비는 어렸을 때 근처 나무에 살던 빨간 눈동자의 다람쥐다.
친해지게 되어 루비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매일 함께 놀았었는데, 어느 날 루비가 손등을 할퀴었다.
임신 중이라 스트레스 때문에 아주 작은 상처를 입혔을 뿐인데, 시리아는 그걸 보고 루비와 근처에 있던 다람쥐들을 모조리 잡아 눈앞에서 터트려버렸다.
그리고 말했다.
넌 내 거라고. 다치면 안 된다고. 숨만 쉬고 살아가라고.
이걸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말하면 가문도 박살 낼 거라고. 너만 살리고 모조리 불태워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그날 이후 루난은 입을 다물었다.
혹시라도 다른 누군가가 피해를 입을 수도 있어서 사람도, 동물도 가까이하지 않고, 말수도 극단적으로 줄였다.
그렇게 홀로 살다가 똑같은 외톨이를. 아니, 나 보다도 더 외롭고 괴로울 것 같은 소년을 만났다.
라온.
처음엔 빨리 성장하는 방법과 좋지 않은 체질과 체력으로 어떻게 버티는지가 궁금했을 뿐이다.
그냥 호기심. 그의 성장이 조금 궁금해서 다가갔을 뿐이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라온이 어떤 사람인지. 얼마나 노력하고, 얼마나 힘든 시간을 버텼는지를.
노력으로 다른 사람의 시선까지 바꾸는 그 아이의 모습에 나도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고, 변하기 시작했다.
라온과 5 연무장의 수련생들 덕분에 시리아에 대한 두려움이 잊혀지고 있었는데, 오늘로 그 공포가 되살아났다.
루난은 상자 안에 담긴 아이스크림 전부 녹을 때까지 그저 지켜만 보았다.
"나만."
무릎 사이로 고개를 숙인 채 물기 있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만 참으면 돼. 괜찮아."
아무래도 다시는 아이스크림을 먹지 못할 것 같다.
* * *
라온이 루난을 데려다준 뒤 숙소로 돌아갈 때 라스가 팔찌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그놈 정말 인간이었냐?
'뭐?'
-아이스크림 소녀의 오빠라는 놈 말이다.
'아, 이상한 놈이긴 하지.'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리아는 분명 친근하고 부드러운 분위기의 남자였지만, 어둠을 마주한 듯한 섬뜩함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특히 협박할 때 그의 눈빛은 말라버린 풀처럼 생기가 빠져 있었다. 보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할 정도.
다만 연기 하나는 잘했다. 만약 다람쥐를 터트리고, 루난을 협박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자신조차 속아 넘어갔을 거다.
'데루스 같은 미친놈이야.'
시리아는 인간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자신처럼 교육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딘가 망가진 인간 같았다.
'그래도 장기 임무라고 했으니, 한동안은 안 오겠지.'
-그놈이 아이스크림 소녀의 오빠인 이상 문제는 계속 생길 거다.
'그건 그렇지.'
시리아가 가문에 몇 년 후에 온다고 해도 루난과 가족이니 계속 만나게 될 수밖에 없다.
아니, 계속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건조한 눈빛에 담긴 건 분명 집착이었으니까.
-몸을 넘겨라. 그놈만 죽이고 돌려주마.
'어?'
-본왕은 은혜는 2배로 원수는 10배로 갚는다. 그 아이가 구슬 아이스크림이라는 신세계를 보여주었으니,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다.
'웃기고 있네.'
라온이 피식 웃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진심이다!
'진심이라고 해도 그건 안 돼.'
-왜지?
'놈은 루난에게 트라우마를 걸었어. 네가 죽여도 그건 풀리지 않지. 오히려 더 옥죄일 수도 있고. 이런 경우는 스스로 일어서야 해. 그리고….'
라온이 손가락으로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놈을 죽이는 건 나도 할 수 있어.'
루난은 전생과 현생의 삶을 통틀어 처음으로 자신을 배려해준 타인이다.
큰 도움을 받았으니, 시리아를 죽여주는 정도는 해줄 수 있다.
-네가 제대로 미쳤구나. 그놈은 네가 100명이 있어도 이길 수 없다. 이미 경지에 오른 놈이다.
라스가 개소리하지 말라며 인상을 찌그러뜨렸다.
'확실히 강하긴 해.'
-그걸 알고 있으면서 무슨 헛소리냐.
'그렇다고 목에 칼이 안 들어가는 건 아니니까.'
라온이 검집을 두드리며 서늘한 기운을 피워냈다.
"사람을 죽이는 방법은 한 가지가 아니야."
48화
지그하르트는 검사 위주의 가문이지만, 여러 필요성에 의해서 독립적인 마탑을 운용하고 있었다.
마탑 마법사들의 대우는 상당히 좋은 편이었지만, 주체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검사들에게 무시를 당하는 경우가 잦았다.
마탑에 속한 5서클 마법사 제이크 역시 그런 점을 아쉬워했다.
급여, 자유시간, 연구비 모두 상급의 직장이지만, 검사들에게 무시를 받거나, 이 집단의 주요 라인이 아니라는 게 답답했다.
그런 그는 처음으로 지그하르트의 주역 중 주역인 카룬 지그하르트가 기거하는 중무전에 초대되었다.
꿀꺽.
제이크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카룬 지그하르트가 가공할 위압감을 뿜어내며 자신을 굽어보고 있었다. 저절로 목이 떨려왔다.
'날 대체 왜 부른 거지?'
카룬과 자신의 지위는 하늘과 땅 차이였고, 자그마한 관계도 없었다. 그가 왜 자신을 호출했는지 이해가질 않았다.
"다음 주에 5 연무장의 실전 훈련 지원을 나간다고 하던데."
"아, 예! 그렇습니다."
제이크가 떨리는 목으로 고개를 숙였다. 부탑주 베르빈의 지시로 5 연무장에 실전 훈련 지원을 나가기로 되어 있었다.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자네를 불렀네."
"부탁…."
카룬은 지그하르트의 실세 중 한 명이다. 그의 부탁을 들어준다면 장래에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마, 말씀하십시오."
제이크가 말을 살짝 더듬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번 실전 훈련. 아이들을 상대로 오크를 소환한다지?"
"그렇습니다."
"그 오크 말이야. 강화시킬 수 있나?"
"그건 이미 5 연무장의 수석 교관에게 부탁받았습니다. 수련생들의 무력이 뛰어나서 일반 오크로는 훈련이 되지 않는다더군요."
"아, 그 정도가 아니야. 아예 이기지 못할 정도로 강화시킬 수 있냐는 말일세."
'이기지 못할 정도로?'
제이크가 마른침을 삼켰다.
'노리는 아이가 있는 건가?'
카룬은 5 연무장의 아이 중 하나를 죽이거나, 다치게 할 생각인 것 같았다.
"가능합니다! 노리는 수련생이 누구인지 말씀해주시면…."
"노린다? 자네 말이 이상하군."
카룬의 차가운 목소리가 넓고 높은 중무전을 아릿하게 울렸다.
"아, 죄, 죄송합니다. 가끔 제 마력이 어긋나서 주의가 필요한데, 어떤 수련생에게 신경을 쓰면 좋겠습니까?"
"음, 라온일세."
자신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카룬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 지그하르트…."
제이크가 눈을 빛냈다. 라온은 카룬의 아들인 버렌을 꺾은 적이 있다. 이제야 카룬의 의도가 이해되었다.
'라온을 노리고 있었어.'
그는 얼마 전 오웬 왕국 삼왕자를 꺾어 수련생 중 제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카룬이 노리는 사람은 라온 지그하르트가 확실했다.
"아무리 훈련이라고 해도 실전 연습을 하다 보면 부상을 입는 경우는 흔한 편이지. 아주 가끔은 영구적인 부상이 있을 수도 있고."
"맞습니다. 저도 몇 번 보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괜찮은 몬스터 하나를 구해놓았네."
카룬이 손가락을 튕기자, 우측에 있던 집사가 2m가 넘는 오크 한 마리를 앞으로 끌고 왔다.
꿀꺽.
제이크가 마른침을 삼켰다. 수많은 오크를 다뤄보았기에 알 수 있다. 앞의 오크는 평범해 보이지만 비범의 격에 오른 놈이다.
"돌란 산맥에서 데리고 온 오크일세."
"돌란 산맥…."
돌란 산맥은 강한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험지다. 그곳에서 살아온 오크라면 일반적인 오크와 강함의 격이 달랐다.
"그 아이에게 험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이 오크를 내보내서 잘 챙겨주길 바라겠네."
카룬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챙겨주라 말하지만, 저 오크를 이용해서 영구적인 부상을 입히라는 말이었다.
"아, 혹시라도 오크가 문제를 일으킨다면 뒷말이 나오지 않도록 바로 처리하게. 이번 일을 잘 끝낸다면 훗날 자네를 마탑의 부탑주로 추천하도록 하지."
"가, 감사합니다!"
"그럼 가보도록."
"예! 무조건 따르겠습니다."
제이크는 코가 땅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꾸벅였다. 세이빙 몬스터 마법으로 돌란 산맥의 오크를 저장한 뒤 카룬의 방을 떠났다.
"오는 길에 본 사람은 없겠지?"
카룬이 오크를 데리고 왔던 집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안쪽으로 돌아왔으니, 저 마법사가 이곳에 온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눈치가 빠른 놈이야. 이번 일을 잘 처리하면 밀어주도록 해."
"부탑주까지 올려줍니까?"
"그럴 리가 있나. 놈이 아쉬워서 간이고 쓸개고 빼주려 할 정도로만."
"알겠습니다."
집사가 빙그레 웃었다. 고개를 조아리고서 문밖으로 나갔다.
"라온 지그하르트…."
카룬이 라온의 이름을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놈은 자신의 아들인 버렌을 이기고, 마르타를 꺾고, 오웬의 미래라는 삼왕자마저 무릎 꿇렸다.
중무전주이자, 전마대주인 자신의 입장에서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그놈의 움직임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건 가주인 아버지의 시선이 조금씩 라온에게 향한다는 것이다.
가주가 되는 데 위협이 되지는 않겠지만, 거슬리는 건 빨리 치워버리는 게 정답이다.
'더 크기 전에 처리해버리는 게 좋겠지.'
그게 지금까지 이곳에서 성장해온 방식이고, 이 차가운 대지에서 배웠던 방법이었다.
* * *
라온은 연무장에서 야간 훈련을 끝낸 뒤 별관으로 돌아왔다. 늦은 시간이라 조용히 복도를 지나갈 때 실비아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라온!"
문이 벽을 침과 동시에 눈에 새빨간 불을 켠 실비아가 튀어나왔다.
"윽!"
"엄마를 보고 윽? 으으으윽?"
"아니, 그게…."
"오늘 엄마랑 정원 산책하기로 약속했어? 안 했어?"
"아!"
라온이 입을 떡 벌렸다.
'까먹었다.'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수련에 정신이 팔려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까먹었구만! 까먹었어!"
"그게 아니라."
"아니기는! 3일 동안 네가 깨어있는 얼굴을 보는 게 이번이 처음이야!"
실비아가 성큼성큼 다가와 손을 들었다.
"어, 엄마?"
라온이 인상을 찡그리며 물러섰다.
"내가 왜 산책 약속을 하자고 했게?"
"응?"
"훈련도 좋지만, 쉬는 것도 중요해. 휴식은 훈련의 일환이거든."
실비아가 부드럽게 웃으며 라온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연무장에서 매일 같이 단련하고 있으니까. 이곳에 와서는 좀 쉬어. 반나절만이라도."
"아, 응."
라온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어쩔 줄을 모르겠어.'
실비아도, 헬렌도, 시녀들도 싫은 게 아니다.
정말 싫었다면 진즉에 도망갔겠지.
태어났을 때부터 만난 저들에게 애정이 점점 커지는 게 무서워서 억지로 거리를 두는 중이었다.
"다친 곳은 없지?"
"올 때마다 그 말을 하네."
"아들의 목표가 검사인데 당연히 물어봐야지!"
그녀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얼굴과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괜찮다고 대답해도 무시하고 확인이 끝난 뒤에야 놓아주었다.
"다친 곳 없다고 했잖아. 난 그럼 들어…."
"아직이야."
실비아는 고개를 젓고서 라온을 꼭 끌어안았다.
"땀냄새 나는데."
훈련 후 씻지 않고 바로 왔기 때문에 상태가 말이 아니었지만, 실비아는 떨어지지 않았다.
"전혀 안 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음…."
"오랜만에 아들 안아보니까 좋네. 얼마나 컸는지도 알 수 있고."
실비아는 한참 동안 자신을 안고 있다가 놓아주었다. 그녀의 눈빛은 기껍다는 듯 별처럼 반짝였다.
"밥은 먹었어?"
"당연히 먹고 왔지."
"훈련하느라 수고했어. 가서 쉬렴."
실비아는 오랜만에 아들을 안아봐서 꿀잠을 자겠다고 중얼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라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방으로 돌아가려 할 때 복도 끝에 서 있던 헬렌과 눈이 마주쳤다.
"도련님. 물 받아놓을 테니, 씻고 쉬세요."
그녀는 빙그레 웃고서 옆으로 귀신처럼 사라졌다.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에 웃음이 흘렀다.
"하아…."
이곳에만 오면 제 능력도, 감정도 통제가 되질 않았다. 그렇다고 싫지도 않으니 애매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라온은 훈련을 했던 것보다 더한 피로를 느끼며 방으로 들어갔다.
"아, 피곤해…."
의자에 앉아 잠시 쉬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도련님. 목욕물을 받아놓았습니다."
헬렌이라고 생각했지만, 주디엘의 머리가 쑥 들어왔다.
"알겠어."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서려 할 때 주디엘이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왔다.
"중무전에 관한 일입니다."
"중무전?"
중무전은 카룬 지그하르트의 성이자, 주디엘을 이곳에 보낸 곳이었다.
"말해."
라온이 다시 자리에 앉으며 붉은 눈을 빛냈다.
"예."
주디엘이 라온의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왕과 신하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중무전에서 라온 도련님이 별관에 돌아온다면 일거수일투족을 모조리 파악해서 보고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무언가 술수를 부리고 있다는 뜻이겠군."
"그런 것 같습니다."
"…실전인가."
라온이 오늘 리메르가 말해주었던 단어를 읊었다.
"실전이라면…."
"리메르 교관이 다음 주에 실전 훈련을 한다고 했었다. 아무래도 그 훈련에 손을 쓰려는 것 같군."
"아!"
주디엘이 번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 보니 수련생들의 실전이라 하면 몬스터와 결투를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나도 들었어."
오늘 훈련을 끝낼 때 도리안이 몬스터와 결투를 할 것 같다고 비명을 지른 게 기억났다.
"그럼 몬스터에 손을 쓰거나 몬스터를 다룰 마법사에게 손을 쓰거나 혹은…."
라온이 눈을 내리감으며 말을 이었다.
"그 둘 다일 수도 있겠군."
* * *
다음 주 월요일.
제이크는 원래 약속된 시간보다 한 시간 빨리 5 연무장으로 향했다.
'잘해야 해.'
이 망할 대지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줄을 잘 타야 한다.
지금까지는 썩어 문드러진 줄도 떨어지지 않았었는데, 이번에 내려온 건 단단한 줄 정도가 아니라, 하늘 끝까지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였다.
미래를 위해서 어떻게 해서든 라온에게 큰 부상을 입혀야 한다. 그래야 카룬 지그하르트의 눈에 들 수 있다.
'뒷일은 생각할 필요도 없어.'
라온 지그하르트의 뒷배경은 없다시피하고, 카룬은 차기 가주가 될지도 모르는 남자다. 누구를 위해 움직여야 할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후…."
제이크는 숨을 고르고서 5연무장의 문을 열었다. 얇은 모래 먼지 뒤로 검을 수련하는 수련생들이 보였다.
아직 훈련 시작 시간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연무장 외곽으로 걸어가 수련생들을 지켜보았다.
'저 아이가 버렌, 옆이 마르타인가.'
제이크는 이전에 들었던 인상착의를 통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주요 수련생들을 파악했다.
'저쪽이 슬리온 가의 막내 루난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시선이 연무장 우측에서 검을 내리치는 금발의 아이에게 향했다.
'저 녀석이 라온인가? 잘 생기긴 기가 막히게 잘 생겼군.'
발을 휘돌리고 검을 내지르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미안하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다. 죽이지는 않으마.'
제이크는 입술을 깨문 채로 라온에게 아주 자그마한 살의를 일으켰다. 자신도 모르게 일어난 미약한 기세. 감각이 좋은 검사나, 야생동물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얕았다.
하지만.
한 명은 반응했다.
검에 온 정신을 집중하던 라온의 두 눈동자가 제이크를 향했다.
"으헉!"
제이크가 기겁하며 벽에 등을 부딪치고 주저앉았다. 라온의 붉은 눈을 본 순간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끄윽…."
발가벗은 채 맹수 앞에 선 듯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저, 저놈 뭐야….'
49화
'무, 무슨 어린놈의 눈깔이….'
제이크가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몸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손가락 하나 움직여지지 않았다. 어쩔 줄 몰라할 때 경박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마탑에서 오셨죠? 이야, 일찍 오셨네요."
발걸음만큼이나 가벼운 목소리에 굳어 있던 고개가 움직였다. 붉은 머리 엘프가 웃고 있었다.
"리, 리메르 수석 교관?"
"맞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훈련 전에 드릴 말씀이 있거든요."
리메르가 팔을 툭툭 치며 수석 교관실을 가리켰다.
"으음, 알겠습니다."
대답하며 다시 라온이 있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별 관심 없다는 듯 다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후…."
제이크는 가뿜 숨을 뱉어내고서 몸을 일으켰다. 조금만 더 늦었다가 바지에 오줌을 지릴 뻔했다.
"몸이 안 좋으신가요?"
"아, 아닙니다. 가시죠."
"넵!"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리메르를 따라 수석 교관실로 들어갔다. 방은 그의 깔끔한 얼굴과 달리 지저분해 앉을 곳도 없었다.
"앉으세요."
"앉을 자리가 없습니다만…."
"아, 그렇긴 하네."
리메르는 가볍게 웃고서 흔들의자에서 일어섰다.
"뭐, 오래 걸리는 건 아니니까. 이대로 하죠. 수련생들이 상대할 오크에게 강화 마법을 걸어주셔야 하는 건 알고 계시죠?"
"물론입니다."
"제 가르침이 워낙에 탁월해서 수련생들의 무력이 나이대를 뛰어넘었습니다. 평범한 오크로는 훈련조차 되지 않을 거예요."
"어…."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자랑에 머리가 멍해졌다.
"제가 아이들의 무력 수위를 알려드릴 테니, 그 정도에 따라 몬스터에게 강화 마법을 걸어주세요. 가능하시죠?"
"그리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제 주 전공이 몬스터 소환과 운용이니까요."
"하긴 베르빈 부탑주님도 마법사님 칭찬을 하시더라구요."
"아…."
리메르가 부탑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제이크의 표정이 아리송하게 비틀렸다.
"하나만 더 몬스터를 인간으로 보이게 하는 환상 마법은…."
"아, 그건 이걸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제이크가 오른손을 들어 올려 중지에 낀 반지를 보여주었다.
"부탑주께서 내어주신 환상계열 아티팩트입니다. 이 반지를 이용한다면 수련생들에게 환상을 거는 것도 간단합니다."
"오, 딱이네요."
리메르는 마음에 들었다는 듯 휘파람을 불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잘 되면 나중에 부탑주님과 함께 술 한 잔 사죠."
그는 그 말을 하고서 교관 교관실을 나가버렸다.
'일이 편해지겠어.'
리메르는 몬스터에 관한 일을 모두 자신에게 맡겼다. 이대로라면 그 오크를 소환해서 라온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일도, 핑계를 대며 도망치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다.
"그놈…."
제이크가 조금 전에 보았던 라온을 떠올렸다. 처음엔 알지도 못하는 아이에게 부상을 입혀야 한다는 생각에 약간 미안했지만, 이젠 아니다.
자신에게 망신을 준 그 망할 꼬마에게 더 심한 부상 새겨줄 것이다.
빠득.
제이크는 어금니를 꾹 깨물고서 교관실을 나섰다.
* * *
라온은 리메르를 따라 교관실로 향하는 중년 마법사를 보고 눈빛을 가라앉혔다.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지만, 저 마법사에게서 살의가 느껴졌다. 죽인다기보다는 건드린다는 기세. 자신이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감지하지 못했을 거다.
-그 나이에 원한도 많군. 대체 무얼 하고 살았던 거냐.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는 모든 마족이 본왕을 경배하기만….
'시끄러.'
라온은 비웃음을 흘리는 라스를 발로 밀어냈다.
'저놈인가 보네.'
주디엘이 말해주었던 카룬이 준비한 술수가 바로 저 마법사인 것 같았다.
-본인의 기세조차 제대로 숨기지 못하다니, 새끼 고양이만도 못한 놈이다.
'새끼 고양이는 귀엽기라도 하지. 저런 놈은 쓸 곳도 없어.'
라온은 교관실을 보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몬스터를 강화시키겠지.'
저 마법사는 카룬의 지시를 받아 자신과 상대할 몬스터를 특별할 정도로 강화시킬 게 분명했다.
'나를 죽이던가 혹은 심각한 부상을 입히려 들 테고.'
너무 한심한 계획이라 웃음만 나온다. 아들에 비해 과분한 아버지였다.
'한심해.'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리다가 연무장에 들어오던 루난과 눈을 마주쳤다. 이틀 만에 본 루난의 눈빛은 평소와 같았다. 왜인지 모르게 가슴이 쓰렸다.
"아빠가 오늘 훈련은 몬스터와의 전투라고 했어."
그녀는 그때의 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지 바로 오늘 훈련에 대해 말했다.
"그래?"
"응."
루난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억지로 평상시를 연기하는 게 분명했지만, 본인이 그 일을 잊으려 하는 것 같아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훈련 준비를 하겠다며 휴게실로 들어갔다.
-한마디도 안 하는 거냐?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리고 가족의 일이니까.'
나 자신의 감정도 잘 모르는데 상대 가족에 관한 조언을 어떻게 하겠는가.
다만 시리아가 루난에게 무슨 수를 썼는지는 알고 있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해결할 수 있다.
"도, 도련님. 그거 아십니까?"
씁쓸한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 도리안이 불안한 듯 배를 만지며 다가왔다.
"뭘?"
"오늘 실전 훈련. 다, 단순히 몬스터와 싸우는 게 아닙니다."
"그럼?"
"몬스터를 죽여야 한다고 합니다! 진짜 피를 봐야한다구요! 어, 어떻게 하죠?"
그는 손톱을 딱딱 깨물며 눈동자를 두르륵 굴렸다.
"피를 본다라…."
"예에! 숨통을 끊는 게 훈련 목표래요! 진짜 미쳤어요!"
"잘됐네."
"에에엑!"
라온은 비명을 지르는 도리안을 뒤로하고 루난이 들어간 휴게실을 보았다.
저주를 한 번 풀어볼까.
* * *
"자, 주목!"
교관실에 들어갔던 리메르가 어느새 단상 위에 올라와 있었다. 그는 시원하게 손뼉을 쳐 모두의 시선을 모았다.
"오늘 실전 훈련을 할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었지?"
"예!"
수련생들이 연무장 중앙으로 모이며 대답했다. 기대감이 꽉 차오른 표정들이었다.
"이제 내 말에 신뢰가 좀 생긴 모양이네. 눈빛이 반짝반짝해."
리메르의 농담에 수련생들이 킥킥 웃었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이젠 수련생들도 리메르의 진심을 어느 정도는 알게 된 것 같았다.
"힌트 그리고 몇몇 교관이 정보를 퍼트린 덕분에 대부분 알고 있겠지만 설명은 해야겠지. 오늘 훈련은 몬스터와의 실전 전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장난기가 어려 있던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연무장의 분위기 자체가 무거워졌다.
"몬스터의 도끼엔 자비가 없다. 너희끼리 혹은 수련 기사와 대련할 때와 달리 절대 멈추지 않아. 방심하지도, 긴장하지도 마라. 평소와 같이 차분한 마음으로 전투에 임하도록."
"예!"
수련생들이 주먹을 말아쥐며 연무장이 떠나가라 소리쳤다.
"이분이 오늘 우리 수련을 도와주실 마탑의 마법사 제이크 님이다. 인사드려라."
"잘 부탁드립니다!"
"저,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제이크가 마주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눈을 돌려 라온을 찾았다.
'지금은 괜찮은데?'
아까 심장을 조였던 그 기이한 눈빛은 보이지 않았다. 길에서 만나면 그냥 지나칠 정도로 평범한 눈이었다.
'하지만….'
아까의 그 기세가 착각일 리가 없다. 카룬이 노리고 있는 걸 보면 분명 저 아이에게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
"그럼 마법사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제이크는 손을 흔드는 리메르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단상 앞으로 나갔다.
"서먼 몬스터."
제이크가 영창을 외운 뒤 지팡이로 땅을 찍자, 연무장 바닥에 마법진이 그려졌다. 원을 그리며 생성된 푸른 문자 위로 녹색의 빛이 솟구쳤다.
우우웅!
천천히 빛이 사라지고, 거대한 인영 하나가 나타났다.
2m가 넘는 신장, 부풀어 오른 근육, 입 밖으로 튀어나온 뻐드렁니와 녹색 피부까지.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위험한 몬스터 오크였다.
"크르르륵!"
"흡!"
"으억!"
오크가 손에 든 도끼를 들어 올리며 이를 갈았다. 갑작스럽게 치솟은 야생의 살기와 노린내에 수련생들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지금은 제 통제하에 있으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이크가 손가락을 빙글 돌리자, 오크가 그 방향대로 몸을 돌렸다.
"오늘 여러분들이 상대할 몬스터가 바로 이 오크입니다."
"역시 오크였어!"
"드디어 실전인가…."
"후우."
수련생들은 긴장과 흥분이 반반씩 섞인 얼굴로 제이크를 올려보았다.
"교관님이 말씀하셨듯이 오크라고 방심을 해선 안 됩니다. 제가 멈출 수 없는 순간이 있기에 항상 집중력을 유지해주세요. 그리고…."
제이크가 오른손에 착용한 반지로 오크를 가리켰다.
우웅.
오크를 휘감고 있던 마법진이 덩굴처럼 꼬이며 찬란한 오색 빛을 뿜어내자, 오크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튀어나온 뻐드렁니가 쑥 들어가고, 녹색 피부가 허옇게 타올랐다. 몇 초 지나기도 전에 오크는 갈색 머리칼에 도끼를 든 평범한 중년 남자가 되어 있었다.
"사, 사람?"
"뭐야 이거!"
"왜 갑자기 사람이…."
"여러분들은 그냥 오크가 아니라, 마법으로 인간의 모습이 된 오크를 상대하셔야 합니다."
제이크는 사람처럼 보이게 된 오크의 도끼를 움직여 수련생들을 겨누었다.
"허억!"
"으윽!"
"저, 저건 그냥 사람이잖아!"
수련생들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깜짝 놀라 넋이 나간 얼굴로 사람이 된 오크를 바라보았다.
"내가 하나만 더 말하지."
리메르가 제이크의 앞으로 나오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오늘 전투는 그저 오크를 꺾거나, 무력화시키는 게 다가 아니다. 저놈의 목을 베어야 끝난다."
그는 올린 손가락으로 인간의 모습을 한 오크를 가리켰다.
"아…."
"그, 그런…."
수련생들은 당황하여 서로 눈치만 보고 나서지 못했다.
"마법사에게 잡힌 오크는 대부분 사람을 죽였던 놈들이다. 자비를 베풀 필요 없으니, 전력을 다해 싸워 이겨라."
리메르는 평소와 달리 무거운 음성을 흘리며 뒤로 물러섰다.
'도리안의 정보가 정확했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훈련이야.'
대부분의 검사는 사람과의 첫 실전에서 검을 끝까지 내리치지 못한다.
실제로 뛰어난 무력을 갖추고도 첫 실전을 넘지 못해 죽는 비운의 천재들도 많았다.
오늘 전투는 그런 허무한 죽음에 대비하기 위해서 단순히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훗날 사람과의 실전을 대비하기 위한 이중훈련이었다.
'그리고….'
라온이 옆에 붙어 있는 루난을 보았다. 목을 베어야 한다는 말에 그녀의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이 녀석의 저주를 풀기에 딱 좋아.'
리메르는 몰랐겠지만, 이 훈련 덕분에 루난의 뇌리에 심어진 시리아의 세뇌를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저 버러지 마법사는 신경도 쓰지 않는 거냐?
'당연히.'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끽해봐야 어디서 구해온 조금 사나운 오크를 강화시켜서 덤빌 게 뻔하다. 긴장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루난의 머리에 박힌 피의 공포를 제거하는 거다.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싸울 분은…."
"제가 하겠습니다."
제이크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버렌이 손을 들어 올렸다.
"아시죠? 중무전주의 아들입니다. 오크의 육체 능력을 많이 강화시켜주세요."
"알겠습니다."
제이크가 리메르의 말을 들으며 입맛을 다셨다. 이번 일을 준 사람의 아들인데 모를 리가 없었다.
"룹 어질리티, 룹 스트렝스."
민첩성과 근력 강화 주문을 외우자, 오크의 주변으로 푸른빛이 노닐었다. 놈의 노란 눈빛이 더 흉악한 기세를 띄었다.
"가라."
제이크가 손가락을 앞으로 뻗자, 중년인의 외모를 한 오크가 묵직한 걸음 소리와 함께 앞으로 걸어갔다.
꾸우욱.
버렌은 주먹을 몇 번 쥐었다가 편 후 이전에 보급받은 진검을 뽑았다. 제이크를 보며 준비됐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제이크가 손가락을 튕기자, 오크의 몸 주변을 휘감고 있던 문자들이 사라졌다.
"끄어어어!"
오크가 괴성을 터뜨리며 땅을 박찼다. 짐승처럼 내달려 버렌의 머리를 향해 도끼를 내리쳤다.
"다 보인다."
버렌이 오러를 운용하며 검을 들어 올렸다.
쩌어엉!
녹슨 도끼와 잘 닦인 검이 맞부딪치며 뻘건 불똥이 튀어 올랐다.
"크흡!"
버렌이 눈을 치켜떴다. 검을 쥔 손이 삐걱거리듯 흔들렸다.
'이 무게는 뭐….'
오크를 본 적도 상대한 적도 없었지만, 지금의 자신이라면 가볍게 벨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크의 도끼에 담긴 무게는 쉽게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이전에 싸웠던 오웬 왕국의 수련 기사에 비해 조금도 모자르지 않았다.
"흐아압!"
버렌이 손목을 강하게 돌려 오크의 도끼를 튕겨냈다.
"크르륵!"
오크는 두 발자국 밀려났지만, 더 빠른 속도로 다시 돌진해왔다. 샛노랗게 달아오른 눈. 버렌을 찢어 죽이겠다는 기세로 가득했다.
뒤에 있는 수련생들이 그 살기에 깜짝 놀랐지만, 버렌은 위축되지 않았다.
"감히!"
오히려 분노를 일으키며 검을 내리그었다.
쩡! 쩌저정!
오크가 생사대적을 만난 것처럼 도끼를 내리그었을 때 버렌의 검이 놈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피익!
오크의 어깨와 허벅지에서 빨간 핏물이 치솟았다.
"크아아아!"
하지만 더 격한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든다. 이젠 숫제 짐승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끝내주마!"
버렌이 오크의 아래로 짓쳐 들어 검을 올려 쳤다.
치이잉!
도끼를 밀어내며 오크의 목을 베려던 찰나 버렌의 검이 우측으로 틀어졌다. 오크의 목이 아닌 팔뚝이 반 가까이 찢어졌다.
"으음…."
끝낼 수 있음에도 끝내지 못한 버렌이 입술을 깨물었다.
"크어어!"
오크는 어깨와 팔꿈치가 크게 찢어졌어도 황소처럼 밀고 들어왔다. 힘은 빠졌지만 기세는 줄지 않았다.
촤아악!
버렌은 보법을 밟아 느려진 오크의 뒤로 짓쳐 들었다. 검을 횡으로 그어 오크의 목을 노리려는 찰나 그의 검이 다시 한번 우뚝 멈췄다.
"젠장!"
버렌이 욕을 내뱉으며 물러섰다. 검끝이 겁에 질린 듯 떨렸다.
"버렌."
단상 위에 누워 전투를 지켜보고 있던 리메르가 몸을 일으켰다.
"널 죽이려는 게 인간이 아니라, 몬스터라는 걸 알면서도 못 베겠지?"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는 듯 그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네가 선해서 그렇다. 저 몬스터가 인간으로 보이다 보니 검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겠지. 다만…."
리메르가 이를 가는 오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아까 말했듯이 저 오크는 이미 인간의 피를 맛본 놈이다. 마법사들이 데리고 있는 대부분의 몬스터는 인간을 죽여본 놈들이지."
"맞습니다."
제이크가 그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죽이지 못해도 괜찮다. 이건 연습일 뿐이니까. 하지만 전장에 나가서 손이 멈춰버린다면 네가 죽이지 못한 검사나, 몬스터가 네 동료를 죽이게 될 거다."
"윽…."
버렌은 오크의 도끼를 튕겨내며 리메르의 담담한 조언을 귀담아들었다.
"그리고 네 목표를 잡으려면 여기서 멈출 수 없잖아?"
그 말에 버렌의 고개가 라온을 향했다. 붉은 눈과 마주친 그의 검 위로 처음보다 짙어진 오러가 치솟았다.
"크아아아!"
"어딜!"
오크의 도끼가 수직으로 떨어질 때 버렌이 굽혔던 무릎을 펴며 공간을 꿰뚫었다.
"흐아압!"
기합과 함께 그의 검이 반원을 그렸다.
촤악!
하늘에 붉은 선이 그어지며 오크의 머리가 떨어지고, 놈의 몸이 무너졌다. 생이 끊어지자, 인간처럼 보이던 놈의 외형이 원래의 오크로 돌아왔다.
"허억! 허억!"
버렌은 검을 땅에 박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다만 그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본인이 만들어낸 시체를 끝까지 쳐다보았다.
"잘했다."
리메르가 빙긋 웃었고, 버렌은 그를 잠시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치고 처음으로 인상을 쓰지 않은 순간이었다.
"...."
버렌은 마지막으로 라온을 힐끔 쳐다보고서 자리로 돌아갔다.
딱!
제이크가 손가락을 튕기자, 오크의 시체가 사라졌다. 다만 연무장 바닥을 적신 핏물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자, 그럼 다음은…."
"나!"
마르타가 자신감으로 넘치는 손짓과 함께 일어섰다. 오크를 향해 다가가는 발걸음에도 머뭇거림이 없었다.
"흠…."
라온은 마르타의 당당한 등에서 돌려 루난을 보았다.
"으…."
마르타와 정반대로 루난은 바닥에 흥건한 피를 보며 입술을 떨고 있었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라온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루난은 예전부터 피를 보는 일을 극도로 자제해왔다.
수련생과 대련을 할 때도, 수련 기사와 대련을 할 때도 상처를 입히지 않고 틈을 노려 제압만 했었다.
그때는 별생각 안 했는데, 지금 보니 그녀는 피가 무서워서 그런 전투방식을 했던 것 같다.
'역시 피였어.'
시리아 슬리온은 루난에게 피를 보여주며 공포를 새겼다. 다람쥐를 터트려 죽였던 건 그 트라우마를 되살리기 위해서였을 거다.
라온의 붉은 눈 위로 서늘한 한기가 가라앉았다.
'시리아 슬리온.'
네가 루난에게 건 저주는 내가 풀겠다.
50화
"저 건방진 녀석은 다른 수련생보다 더 강하게 부탁합니다."
리메르가 당당하게 나선 마르타를 가리켰다.
"알겠습니다."
제이크가 고개를 끄덕이고 오크를 소환했다. 버렌과 싸웠던 오크보다 크고 흉폭해 보이는 오크였다.
"룹 스트렝스, 룹 어질리티…."
제이크는 버렌 때보다 조금 더 많은 마력을 사용해서 몬스터의 근력과 민첩성을 올리고 통제를 풀었다.
"크아아아아!"
오크가 포효를 터트리고 황소처럼 달려들었다.
"괴물 따위가!"
마르타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땅을 박찼다. 달려드는 오크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크오오오!"
오크 역시 지지 않는 속도로 대검을 휘둘렀다.
쾅!
검과 검이 폭발을 일으키듯 부딪쳤지만 오크와 마르타는 밀려나지도 물러서지도 않았다.
땅에 다리를 박아놓은 듯 근접거리에서 서로의 목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쾅! 콰아앙!
바위가 깨져나가는 듯한 굉음과 함께 검과 검이 수없이 부딪쳤다.
"크아아아아!"
마르타는 타이탄의 오러를 끝까지 끌어올리며 허리를 틀었다.
"크르륵!"
오크가 내리친 대검을 어깨의 강철로 튕겨내며 검을 그었다.
쩌억!
단호한 일격. 마르타의 검은 단숨에 틈을 파고들어 오크의 목을 통째로 베어버렸다.
"후욱."
그녀는 바닥에 가라앉은 오크의 시체를 노려보다가 허리를 펴며 숨을 내뱉었다.
"저런 거 하나 잡는데, 하루를 다 쓰네. 어디 가서 나랑 같은 출신이라고 말하고 다니지 마. 수준 떨어지니까."
"큭."
마르타가 들어가면서 흘린 말에 버렌이 입을 꾹 다물었다. 눈앞에서 힘으로 오크를 뚫어버리고, 단숨에 숨통을 끊는 모습을 보았으니, 할 말이 없었다.
"마르타."
라온이 뒤쪽으로 걸어가는 마르타를 불렀다.
"훈련이 끝나면 어깨를 치료하러 가라.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다."
"...."
마르타는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수석으로서 충고는 했으니, 이후는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다. 고개를 돌렸다.
딱!
제이크의 손짓에 오크의 시체가 사라졌지만, 뻘건 핏물이 바닥에 새겨지고, 노린내가 연무장으로 퍼져나갔다.
"으…."
루난의 떨림이 점점 심해진다. 분홍빛 입술이 파랗게 질려갔다.
-뭐 저주를 푼다면 왜 가만히 있는 거지?
'때가 아니니까.'
깊은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해서는 곪을 대로 곪아 썩게 놔둬야 한다. 그래야 깨끗하게 상처를 지울 수 있다.
라온은 3번째로 오크를 소환하는 제이크를 보며 손가락을 툭툭 두드렸다.
아직 부푼 물집을 터트릴 때가 아니었다.
* * *
수련생과 몬스터와의 목숨을 건 혈투는 계속되었다.
버렌과 마르타가 포문을 잘 열어준 덕분에 수련생들은 긴장하여 떨지언정 겁을 먹고 도망치지는 않았다.
오래 걸리기는 했어도 결국 수련생 모두가 머리나 심장 혹은 혈투를 벌여서라도 오크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라온은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는 연무장을 보았다. 도리안이 비명을 지르며 보법을 밟고 있었다.
"크아아아!"
오크가 괴성을 지르며 따라갔지만, 도리안의 발이 워낙에 빨라 잡지 못했다.
"흐압!"
도리안이 무섭다고 외치며 검을 내질렀다. 오크의 목이 아닌 허리가 뭉텅 베여나갔다.
"히익!"
"우어억!"
상처를 입은 오크보다 도리안이 더 놀라 펄쩍 뛰고 도망쳤다. 약이 오른 오크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든다.
"저게 뭐냐?"
"어, 언제 끝나?"
"벌써 30분째야. 30분째."
"체력이랑 발 하나는 좋네."
"이제 라온이랑 루난만 남았잖아. 둘은 더 빨리 끝내겠지."
수련생들은 한숨을 내쉬며 도리안과 오크의 추격전을 지켜보았다.
라온은 도리안의 발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배짱만 조금 더 있다면….'
도리안은 발도 빠르고, 검도 날카로웠지만, 겁이 너무 많았다. 저 겁쟁이 기질만 줄인다면 마르타, 루난, 버렌 바로 뒤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 거다.
바스슥.
모래가 바스러지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루난이 손톱에 피가 나도록 바닥의 모래를 움켜쥐고 있었다.
"으으…."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고, 입술은 하도 씹어서 상처투성이에, 손발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고 있었다.
무서운 정도가 아니라, 공포에 질린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단상 위에 있는 리메르가 눈매를 좁히고 루난을 본다. 돌려보내야 하는지 고민하는 중일 거다.
'그래서는 안 되지.'
지금이 고이고 고인 물집을 터트릴 가장 좋은 순간이었으니까.
라온이 일어서서 루난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떨림이 조금이지만 잦아들었다.
"무섭지?"
"...."
루난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대답하지도 않았다.
"처음 검을 든 수련생도, 수백 번 전장에 섰던 노련한 검사도 피는 무서울 수밖에 없어."
조금이지만 루난의 턱이 돌아갔다.
"나도 마찬가지야. 지금 싸우고 있는 도리안도. 싸웠던 사람들도 모두 무서워하고 있지."
"정…말?"
루난에게서 말라비틀어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하지만 더 무서운 게 뭔지 알아?"
그녀가 모른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겁에 질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거."
라온의 눈빛이 섬뜩하게 번들거렸다. 라온 지그하르트가 아니라, 암살자 라온의 기질이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무서워서, 겁을 먹어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기만 한다면 변하는 건 없어. 어떤 일도 해결되지 않아."
사실 두렵다.
지금의 안락한 삶에 만족하여 데루스 로베르트에 대한 복수심이 식을까 봐 겁이 난다.
또한 두렵다.
나의 복수가, 나의 행동이 실비아와 별관의 시녀들에게 좋지 않은 결과로 돌아올까 봐 무섭다.
무섭고, 두렵지만 둘 다 포기할 생각은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데루스에게 복수를 하고, 실비아와 시녀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것이다.
라온은 다시 다짐하며 루난에게 고개를 돌렸다.
"네게도 그런 게 있겠지."
왼손 엄지손가락을 이빨로 씹어 상처를 냈다.
툭.
엄지손가락에 맺힌 빨간 핏방울이 바닥에 떨어지자, 루난이 뒤로 물러나며 이빨을 떨었다.
"아아…."
"도망가지 마. 지금이 아니라면 극복할 수 없어."
"라, 라온. 라온!"
"피는 무섭지. 하지만."
라온은 눕다시피 물러선 루난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그녀의 하얀 손등을 빨갛게 물들였다.
"또 아무것도 아니야. 피는 네게 어떠한 해도 입히지 않아."
"어?"
루난은 손등에 흘러내리는 핏방울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피가 아프지도, 슬프지도, 무겁지도 않다는 걸 알고 당황한 표정이었다.
"네 오빠가 네게 무엇을 했는지 정확히는 몰라. 하지만 네가 무서워하면 할수록 그 남자의 그림자는 네게 깊게 드리울 거야."
"아…."
루난의 손 떨림이 확실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무섭다고 도망만 쳐서는 평생 끌려다닐 수밖에 없어. 루난 슬리온. 너를. 그리고 네 가족을 지킬 수 있는 건 너뿐이야."
라온은 진심으로 조언했다. 루난의 모습은 전생의 데루스에게 끌려다니던 자신의 모습 같았으니까.
"으아아아! 죽겠네!"
간신히 오크의 심장을 가르고 돌아온 도리안이 풀썩 주저앉았다.
"진짜 겨우 이겼어요. 죽을 뻔했습다. 크흑!"
녀석이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중얼거렸다.
"너 다람쥐 있냐?"
라온이 일어서며 도리안을 보았다.
"다람쥐요? 저라고 다 있는 게 아닙니다. 어? 있네."
도리안은 이게 왜 있어?라고 중얼거리며 배 주머니에서 나무로 만든 다람쥐 조각을 꺼냈다. 빨간 눈이 인상적인 귀여운 다람쥐였다.
"받아."
도리안에게 받은 다람쥐 조각을 루난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다람쥐를 받았다.
"조언은 여기까지. 마지막은 검으로 말해줄게."
라온은 그 말을 끝으로 연무장으로 걸어갔다.
* * *
-네놈 답지 않게 나서는군.
라스는 주제도 모른다고 중얼거리며 코웃음을 쳤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스의 말대로 답지않게 나서버렸다.
물론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을 배려해준 타인이라는 건 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내 전생이 생각나니까.
데루스 로베르트에게 세뇌를 당했던 전생의 모습이 지금의 루난과 겹쳐 보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손이 가고, 말이 나왔다.
'그래도 이게 마지막이야.'
말로 하는 설명은 끝났다. 이젠 검이다. 이걸로 그녀가 피의 세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거기까지다.
-멍청하긴. 네놈이나 걱정해라. 다른 버러지들처럼 제대로 손을 뻗지 못할 게 뻔히 보이니까.
'음?'
라스의 말을 듣자, 좋은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그럼 내기 하나 할까?'
-내기?
'그래. 네가 아주 유리한 걸로.'
-무엇이냐.
'내가 오크를 한 번에 베지 못하면 네 분노를 받을게. 딱 일검으로.'
-일검? 진심이냐?
'물론.'
-책에서 본 조언 좀 했다고, 살생이 우습게 보이는 모양이군.
라스가 키득 웃으며 팔찌를 진동시켰다.
-좋다. 단 일검이다. 두 번의 휘두름은 네 패배다.
녀석이 웃음이 그치며 내기 메시지가 떠올랐다.
[<분노>가 세 번째 내기를 제안합니다.]
조건 : 일검으로 강화된 오크의 목을 베기.
성공시 : 모든 능력치 +2, 랜덤 특성.
실패시 : <분노>의 감정 10포인트 생성.
'받아들인다.'
자신의 전생이 암살자라는 걸 모르는 라스라면 이 내기를 받아들일 거라 예상했다.
'호구가 또 왔네.'
라온이 라스에게 보이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연무장으로 올라갔다.
"오, 네가 마지막이 아니네?"
리메르가 휘파람을 불었다. 재밌다는 듯 일렁이는 눈빛. 루난에게 했던 말을 전부 들었던 게 분명했다.
"저 녀석이 여기서 가장 강합니다. 가진 몬스터 중에 가장 강한 오크를 꺼내 주세요."
"알겠습니다."
제이크가 입매를 꾹 다물었다. 뭔가 결정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주문을 외웠다.
우우웅!
바닥에 푸른 마법진의 파도가 일어나며 새로운 오크가 나왔다. 이전의 오크들과 비슷한 체형이지만, 근육이 더 도드라졌고, 몸 전체에 상처가 가득했다.
"크르르!"
마법진 때문에 몸을 움직이지 못하면서도 본능적인 사나움을 그대로 드러냈다.
우우우웅!
녹색과 붉은색 푸른색 마법진이 오크의 상체를 뒤덮었다. 오크의 기세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갔다.
치잉!
제이크가 손목을 뻗자, 오크의 모습이 거친 외모의 남성으로 변했다.
"대련을 준비하십시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왼 손목을 가볍게 돌리고, 오른 손목을 풀려고 할 때였다.
치이잉!
제이크의 마법진이 유리장처럼 깨지고, 오크가 튀어 나갔다.
"크아아아아!"
악을 내지르며 돌진해 피가 덕지덕지 붙은 도끼를 내리쳐왔다. 속도와 힘이 다른 오크와 전혀 다른 경지에 올라 있었다.
"뭐, 뭐!"
"막아!"
"이런!"
모두가 당황했지만, 라온의 눈빛은 더 깊게 가라앉았다.
'알고 있었으니까.'
제이크의 들뜬 눈을 본 순간 이런 상황이 올 거라는 건 예상했다.
스르릉.
라온이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칼날 위로 한 송이 꽃이 피어났다. 노을빛을 받은 황금색 꽃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만화공 일화.
화령.
꽃잎이 휘날리며 대기를 가른다.
노을 아래. 또 하나의 노을이 그어지며 오크의 움직임이 멎는다.
"끄르륵…."
오크는 들어 올린 도끼를 채 휘두르지도 못하고, 목이 떨어져 내렸다.
푸칵!
겹쳐지는 황금빛 노을 아래 새빨간 핏물이 치솟고, 오크의 육중한 육체가 가라앉았다.
잔인할 정도의 아름다움. 대륙 제일의 화가가 붓을 꺾어 버릴 정도의 장관이었다.
오크를 막기 위해 달려가던 교관들, 당황하여 몸을 일으킨 수련생들도, 오크를 조종하던 제이크도 모두 말을 잃었다.
고오오오!
라온은 전생의 격을 끌어 올려 제이크를 짓눌렀다. 살인으로 업을 쌓은 암살자의 기세에 제이크가 목을 움켜쥐고 주저앉았다.
"끄르륵."
그의 눈이 까뒤집어졌다. 더 하고 싶었지만, 아직 뒤에 루난이 남았다. 적당히 겁을 준 뒤 기세를 꺼뜨렸다.
후웅.
라온이 핏물이 어린 검날을 털어내고, 뒤를 돌았다.
"크윽!"
"망할…."
버렌은 바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갈았고, 마르타는 눈매를 좁힌 채로 입술을 비틀었다. 둘 다 굉장히 분한 듯한 표정이다.
"어어."
"와아…."
수련생들은 벌레가 들어가도 될 정도로 입을 쩍 벌렸다. 파도를 맞은 듯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미, 미쳤네."
"저게 대체 무슨 검이야?"
"이, 일격…."
교관들 역시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멍하니 서 있었다.
그 모두를 살핀 뒤 가장 뒤에 있는 루난을 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더 이상 어둠에 잠겨 있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제 네 차례야.
* * *
루난은 연무장에 올라가는 라온을 보며 다람쥐 조각을 꼭 끌어안았다.
'다 알고 있던 건가?'
라온에게도 피해가 갈 수 있어서 일부러 말을 아꼈다. 아무 일도 아닌 척 눈을 풀었다. 그러면 괜찮아졌다. 그냥 넘어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을 걸어주었다.
담담한 라온의 목소리가 심장을 꽉 조이고 있던 어떤 손아귀를 천천히 풀어내는 것 같았다.
피에 흐르는 손을 내밀었을 때는 무서웠다. 당장에 도망치고 싶었다.
'그런데….'
그 손을 잡았을 때 그 피가 손등을 적셨을 때 무섭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그저 잔불 같은 따스함만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피 자체는 무서운 게 아니라는 걸. 심장을 묶고 있던 검은 그림자가 조금 더 옅어진 기분이었다.
루난은 호흡을 고르고 연무장에 선 라온을 보았다. 작은 등이지만, 왜인지 모르게 누구보다 넓어 보였다.
우웅!
긴장한 채로 그 등을 지켜보고 있을 때 갑자기 오크의 마법진이 사라졌다.
"크어어어!"
오크가 흉폭한 괴성을 지르며 라온에게 달려들었다.
"아, 안 돼!"
턱을 떨며 일어섰을 때 라온이 검을 뽑았다.
은색의 검날 위로 황금빛 꽃이 피어난다. 찬란한 아름다움을 빛내는 꽃이 노을을 따라 그대로 그어졌다.
두 개의 노을이 하나로 겹쳐진 순간 오크의 목에서 피 분수가 뿜어졌다.
아름답다.
어렸을 때부터 무섭고, 두려웠던 피가, 절대 그렇게 보일 수 없는 핏방울이 허공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라온이 검을 털어내고 고개를 돌렸다. 눈빛이 말한다. 이제 네 차례라고.
"응."
루난이 일어섰다. 그녀의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51화
제이크는 대련장으로 올라오는 라온을 보며 혀로 입술을 축였다.
'드디어.'
지겹고 지겨운 시간이 지나고 오늘 이곳에 온 가장 중요한 순간이 찾아왔다.
우우웅.
옆에 있는 리메르에게 들키지 않도록 심장에 걸린 마나 서클을 천천히 회전시켰다.
'마법 속에 마법을 숨겨야 해.'
오크가 라온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만들 수 있도록 마법을 중첩해서 걸어야 했다.
"마법사님."
속으로 몇 가지 마법의 영창을 준비할 때 리메르가 다가왔다.
"저 녀석이 여기서 가장 강합니다. 가진 몬스터 중에 가장 강한 오크를 꺼내 주세요."
"알겠습니다."
제이크가 입술을 축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군.'
대놓고 강화시키라고 하니, 숨겨둔 마법을 사용하기 훨씬 편해졌다. 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으며 주문을 외웠다.
"서먼 몬스터."
제이크가 손을 들어 올리며 카룬에게 받았던 둘란 산맥의 오크를 소환했다.
쿠구구궁!
땅이 진동하며 그려진 마법진 속에서 지금까지 중 가장 커다란 오크가 솟구쳤다.
입에서 튀어나온 이빨은 귓볼에 닿았고, 근육은 부풀은 상태에서도 탄력 넘쳤으며, 눈빛은 인간을 씹어먹을 정도로 흉폭했다.
"크아아아!"
오크의 포효에 수련생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굳었다.
"오, 꽤 강해 보이는 오크군요."
리메르는 별다른 걸 알아보지 못하고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강화 마법을 걸겠습니다."
"아, 그러세요."
"스트렝스, 인듀어리티."
제이크는 육체 강화 마법을 걸면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버커서 마법을 오크의 몸에 심었다.
버서커 마법은 대상의 육체 능력을 1.5배 이상으로 상승시킨다. 거기다 저 오크는 둘란 산맥에서 살아온 오크. 일개 수련생이 상대할 수준이 아니었다.
저 흉폭한 놈이라면 교관이 나서기 전에 라온의 팔뚝 하나는 잘라버릴 수 있을 거다.
제이크는 손목을 뻗어 오크를 인간으로 모습으로 보이도록 만든 뒤 고개를 끄덕였다.
"대련을 준비하십시오."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풀기 시작한 순간 오크의 몸에 심어두었던 버서커 마법을 발동시켰다.
"쿠어어어!"
버서커 마법이 발동하자, 오크의 근육이 부풀어 오르며 놈을 막고 있던 마법진이 와장창 깨져나갔다.
"크아아아!"
오크는 당연하게도 가장 가까이에 있는 라온을 향해 괴성을 지르며 돌진했다.
콰앙!
오크가 풍선처럼 부푼 대둔근으로 땅을 박차고 내달렸다. 극한의 살의. 앞에 있는 라온을 단숨에 죽이겠다는 기세로 가득했다.
'됐어!'
라온은 아직 검을 뽑지도 못했다. 오크의 살의에 꽉 짓눌린 상태. 최소한 팔 한 짝은 무조건 날아간다.
제이크가 희열이 가득한 눈빛으로 오크가 라온에게 검을 내리치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였다.
화륵!
붉은 선이 아니. 노을을 받은 황금빛 선이 어둑한 허공을 갈랐다.
"끄륵…."
오크의 몸이 굳어버리고, 놈의 목이 땅으로 툭 떨어졌다.
"뭐, 뭐야!"
뭐냐고!
둘란 산맥의 오크. 그것도 온갖 강화 주문을 다 걸고, 모든 능력을 1.5배 강화시키는 버서커 주문까지 터트렸다.
라온은 그런 괴물을 단 일검으로 베어버렸다. 망설임도, 두려움도, 어리숙함도 없었다. 이미 경지에 오른 검사라도 된 듯 완벽한 일검이었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지만,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고오오오!
무너지는 오크의 몸뚱아리 뒤로 라온 지그하르트와 눈을 마주쳤다. 새빨갛게 타오르는 두 눈동자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어억!"
제이크가 자신도 모르게 뒤로 자빠져 목을 움켜쥐었다. 어린 수련생이 피워올리는 기세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몸속의 폐가 사라진 기분이었다.
'괴, 괴물….'
그가 주저앉은 채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바지에 오줌을 지리기 직전 지독한 살기가 그쳤다.
"아아…."
살기는 사라졌지만, 공포는 그대로였다. 제이크가 손을 덜덜 떨고 있을 때 리메르가 옆으로 다가왔다.
"마법사님이 많이 피곤하신가 보네. 하긴 하루종일 몬스터를 소환하셨으니까."
리메르는 히죽 웃으며 제이크를 일으켰다.
"그래도 이제 한 명이 남았거든요. 아주 의욕이 가득하니까. 한 번만 더 힘내 주세요."
리메르의 손가락이 연무장 앞에 선 루난을 가리켰다.
"아, 아, 알겠습니다."
제이크가 턱을 바르르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 지그하르트의 눈빛만 받지 않는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가쁜 호흡을 조절하며 마지막 소환을 준비했다.
* * *
"루난. 괜찮니? 할 수 있겠어?"
"네."
리메르 물음에 루난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연무장으로 올라갔다.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지만, 그녀의 눈빛은 이전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공포가 보이지 않는 보라색 눈동자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준비해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제이크가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 오크를 소환했다. 괜히 중급의 마법사가 아닌지 겁에 질린 상태에서도 강화 마법은 제대로 걸었다.
"그럼 시, 시작하겠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인간의 모습으로 보이는 환상을 건 뒤 오크를 억제하던 마법진을 풀었다.
"크아아아!"
오크가 돌진함과 동시에 루난이 검을 뽑았다.
치이잉!
옅은 푸른 기운과 함께 허공에 은빛 안개가 차올랐다.
"크오오오!"
피부를 얼리는 서리가 퍼졌지만, 오크의 발을 잡지는 못했다. 놈은 서리에 뒤덮인 채로 돌진해왔다.
"음."
루난이 입을 살짝 내밀며 보법을 밟았다. 좌우로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오크의 도끼를 피했다.
"키아아!"
오크는 피부가 얼어붙고 있음에도 물러나지 않았다. 동귀어진의 각오로 계속 도끼를 휘둘렀다.
"으음."
루난은 쉽사리 검을 뻗어내지 못하고 도끼를 피해만 다녔다. 그래도 그녀의 검에서 퍼지는 서리는 계속되어 오크는 이미 반 이상 얼어붙은 상태였다.
쯧.
라온은 도망치듯 물러서서 서리만 내뿜는 루난을 보며 혀를 찼다.
'아직 해결이 안 된 건가.'
루난은 연무장에 올라간 이후 한 번도 검을 날리지 못했다. 그저 도망치며 오크를 얼리기만 할 뿐이었다.
'너무 착해.'
루난이 시리아의 세뇌에 걸린 이유는 간단하다.
착하니까.
어린 나이에 죽음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에 피를 두려워하고, 오크에게 상처를 입히지 못하는 거다.
살기 위해 누구라도 죽이던 전생의 자신과는 결이 달랐다.
루난은 차가운 외모와 눈빛 때문에 도도하다고 오해를 받지만, 정반대의 성격을 가졌다.
'그게 검술 자체에서 배어나지.'
그녀가 대련에서 칼날에 냉기를 담지 않고, 대기 중에 서리를 뿌리는 건 상대가 다치지 않게 제압하기 위함이었다.
이 5 연무장에서 가장 마음이 여리고 착한 사람은 루난이었다. 시리아는 그 착한 아이의 심장에 사슬을 감아 이용한 거였고,
'루난.'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단련장에서 루난이 먼저 다가왔던 건 훈련 방법을 따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홀로 있던 자신을 안쓰럽게 생각해서 일지도 모른다.
"루난님!"
"그냥 베어버려요!"
"루난!"
교관과 수련생들이 루난의 이름을 외쳤지만, 그녀는 오크의 도끼만 막아낼 뿐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못하고 도망만 다녔다.
"으…."
서리를 뿌리느라 오러를 많이 사용했는지 루난의 움직임이 점차 느려진다. 반대로 오크는 몸 대부분이 얼어붙었음에도 더 사나워진 눈빛으로 도끼를 휘둘렀다.
"후."
라온은 입맛을 다시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대로 오크를 얼려 죽여서는 안 된다. 직접 끝을 봐야 시리아가 건 세뇌가 풀린다.
"루난!"
그 누구의 부름에도 답하지 않던 루난의 고개가 처음으로 돌아갔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말하며 웃자, 흔들리던 루난의 눈빛이 우뚝 멈췄다. 보라색 눈동자가 누구도 밟지 않은 설원처럼 진한 은빛을 뿜어냈다.
라온은 그녀의 눈동자에 어려 있던 어둠이 먼지처럼 흩어지는 걸 느꼈다.
"캬아아!"
오크가 멈춘 루난의 머리 위로 도끼를 내리찍은 순간 허공에 은빛 궤적이 치솟았다.
빠드득!
은빛으로 번쩍이는 칼날이 도끼 자루를 가르고, 오크의 심장을 꿰뚫었다.
"끄어어…."
오크의 광기 어린 눈빛이 촛불처럼 훅 꺼지고 놈이 뒤로 넘어갔다.
피이익!
미처 얼어붙지 않은 오크의 심장에서 더운 핏물이 솟구쳤다. 루난의 손은 오크의 피로 젖었지만, 표정은 덤덤했다.
그녀가 뒤를 돌아 자신을 보았다. 어떠냐는 듯 고개를 끄덕이길래 마주 끄덕여주었다.
-벗어났다.
'그래.'
라온이 픽 웃었다. 지금 루난의 표정에 두려움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개운한 것처럼 시원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테지만, 시리아의 어둠은 확실하게 걷어냈다. 놈이 만들어낸 세뇌는 더 이상 루난을 잠식하지 못한다.
'그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지.'
전생의 삶 대부분을 세뇌에 당한 채 살아왔기 때문에 그건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우어어…."
"뭐, 뭐냐?"
"라온이 무슨 말을 했길래 갑자기 저렇게 변해?"
"무, 무셔."
수련생들은 일검에 오크를 얼려버린 루난의 능력과 그녀를 그렇게 만든 라온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버렌이나, 마르타도 놀랐는지 떨리는 눈동자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대,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신 겁니까?"
도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가왔다.
"별말 안 했어."
라온은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본인이 알아서 한 거야."
적당한 답변을 던져주고, 단상 위를 보았다. 눈을 마주친 제이크가 헉 소리를 내고 뒷걸음질 쳤다.
'자, 그러면.'
이번에는 저놈에게 공포를 심을 차례다. 다시는 건드릴 생각도 못 하도록.
고오오오!
다시 가늘고도 예리한 기세를 단상 위로 보내려고 할 때 리메르가 끼어들었다.
"몸 상태가 안 좋으신가 보네요. 이만 끝내죠."
리메르는 히죽 웃으며 제이크를 일으켜 세웠다.
"쯧."
라온이 혀를 차며 살의를 흩어버렸다.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제이크의 영혼까지 공포를 심지 못했다. 저 정도라도 다시 덤비거나, 허튼 생각을 하진 않겠지만, 오줌 지리는 꼴을 보지 못한 게 아쉬웠다.
"전부 수고 많았다."
리메르는 제이크를 부축한 채로 씩 웃었다.
"솔직히 쉬운 훈련이 아니었는데, 모두 내 생각 이상으로 잘해주었어."
그가 모두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오늘의 경험은 실전에 나갔을 때 큰 도움이 될 거다. 일단 검을 들었다면 절대 망설이지 마. 너희들의 망설임이 동료의 죽음으로 이어질 테니까. 알겠나?"
"예에!"
수련생들이 등을 곧게 세우고 우렁차게 대답했다.
"소리도 좋고. 이제 정말 임무에 나가도 되겠는데."
"오!"
"이, 임무요?"
"정말입니까?"
임무라는 말에 아이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래. 이제 천천히 준비해봐야지. 그럼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다. 마지막으로 오늘 수고해주신 제이크 마법사님께 박수!"
"감사합니다!"
리메르는 수련생들의 박수 소리를 들으며 제이크를 데리고 연무장을 나갔다.
* * *
"끄으…."
제이크는 리메르에게 부축받은 채로 5연무장을 떠났다. 혼자 움직이고 싶었지만, 라온의 살기에 충격을 받아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너무 무리하셨나 보네요."
리메르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자신을 부드럽게 부축해서 마탑으로 데리고 갔다.
"하아…."
계속해서 시원한 바람을 좀 쐬니 정신이 조금씩 돌아왔다.
"이, 이제 괜찮습니다. 여기서부턴 혼자 가겠습니다."
제이크는 전투부대가 훈련하는 3연무장 근처에서 멈췄다. 오늘 실패를 보고하기 위해 중무전에 가야 했다.
"아,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리메르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제이크를 옆에 있는 의자에 앉혔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제이크는 앉은 채로 리메르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 때 무언가가 변했음을 깨달았다.
조금 전 옷이 펄럭일 정도로 강하게 불던 바람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말 그대로 바람이 사라졌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소름이 돋아 오를 정도로 지독한 살기가 피어났다.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기이한 힘이 일어나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곳에 그가 있었다.
몇십 년 전 글렌 지그하르트의 옆에서 광기를 폭발시켰다는 괴물. 지그하르트의 광검이 샛노란 눈으로 자신의 굽어보고 있었다.
"아, 아…."
목구멍이 꽉 조여지고, 코피가 저절로 터졌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무, 무너졌다고 들었는데….'
지그하르트의 광검은 단전이 망가져 폐인이 되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아니다. 그 괴물은 약해졌을지언정 사라지지 않았다.
"가서 전해라."
리메르의 서늘한 목소리에 이빨이 덜덜 떨렸다.
"가주님의 아들이고 뭐고, 우리 애들 건드렸다간 모가지 따버린다고."
바람은 조금도 불지 않았는데, 뺨에서 피가 터지고, 팔의 피부가 쩍쩍 갈라졌다. 살기만으로 몸이 베어지고 있었다.
"으어억!"
이 남자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 어디까지 가는지 그저 지켜본 것이었다.
"아, 아…."
심장이 멈춘 것 같았다. 공포심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콰아아아아!
리메르가 밟고 있는 대지에서 짙은 녹풍이 치솟았다.
"헉!"
제이크는 격한 바람에 눈을 감으며 자신의 끝을 생각했다. 하지만 통증은 없었다.
다시 불어오는 바람에 슬쩍 눈을 뜨니, 리메르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남긴 살의는 허공에 남아 있었다.
"허억! 스, 스승이고, 제자고 다 괴물, 괴물들이야…."
제이크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 코, 입에서 물을 줄줄 흘렸다. 눈동자는 정신이 나간 인간처럼 좌우로 수없이 흔들렸다.
"으어어!"
라온의 아쉬움과 달리 제이크의 영혼에는 공포가 깊고도 짙게 박혔다.
52화
루난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연무장을 정리하는 라온을 바라보았다.
'힘들었어.'
라온의 조언을 들었어도 오크에게 칼이 나가질 않았다. 인간이 아니라, 몬스터라는 걸 알고 있어도 손이 움직이질 않았다.
'토할 거 같았어.'
바닥에 깔린 피를 밟을 때마다 오빠가 보고 있는 것처럼 팔다리가 떨리고, 속이 울렁거렸다.
직접 공격할 수가 없어서 오러 소모가 심해도 계속 서리만 뿜어낼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서 뭐라 외치고, 소리 지른다는 건 알았지만, 그것도 들리지 않았다.
시야가 점점 어둠으로 차올랐다. 청각만이 아니라, 시각도 깜깜해져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간신히 버티고 있을 때였다.
루난!
라온의 선명한 목소리가 주변을 꽉 채운 어둠을 뚫어냈다.
오크가 달려오고 있음에도 바로 고개를 돌려 라온을 보았다.
미소를 지은 라온과 눈이 마주치자, 파도처럼 혼란스러운 감정과 감각이 잠잠해졌다.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가 말하는 '괜찮다'를 들으니 눈앞에 차올라 있던 어둠이 완전히 사라졌다.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던 오빠의 기억도 흐릿해졌다.
그래. 괜찮아. 라고 중얼거리자 추를 단 것처럼 무거웠던 팔이 자유롭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크가 도끼를 내려치려는 순간 응축시킨 기운을 내질렀다.
도끼 자루가 잘리고, 오크의 심장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젠 겁나지 않았다.
오크에게서 뿜어진 핏물이 손등을 적셨다. 라온의 말대로였다. 피가 닿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캬아아앙!
그걸 깨달은 순간 온몸을 휘감고 있던 두꺼운 쇠사슬이 으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핏물과 그림자에 어려 있던 오빠의 얼굴도 완전히 사라졌다. 어둑했던 세상이 다시 빛으로 차오른 기분이었다.
"대련장 바닥을 뜯어서 우측 창고로 옮겨! 또 써야 하니, 조심히 들고! 아, 이 양아치 교관은 정리 안 하고 또 어디로 도망간 거야!"
앞에서 들린 버렌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는 방계 수련생들에게 지시를 내리며 연무장 정리를 하고 있었다.
'변했네.'
버렌과는 어렸을 때부터 자주 만났었다. 항상 건방졌고, 자신만 알던 아이라 관심조차 주지 않았는데, 지금의 그에게선 한 톨의 거만함도 찾을 수 없었다.
그 변화를 이뤄낸 사람은 버렌 본인이 아니라, 라온이었다. 그는 라온에게 패한 이후로 저렇게 각을 맞춘 것 같은 검사가 되었다.
'나도 마찬가지지.'
라온을 만난 덕분에 걸어 잠갔던 마음이 열렸고, 다시 사람과의 관계를 쌓을 수 있었다.
매일매일이 즐거운 시간이었고, 오늘이 그 변화의 정점이었다.
라온의 조언과 괜찮다는 말 덕분에 이젠 오빠의 목소리가 들리지도, 오빠의 그림자가 보이지도 않았다.
머리에 박혀 있던 무언가가 빠진 듯 자유로운 기분이었다.
루난이 라온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고 해야지. 정말 고맙다고.'
엄마에게 들었던 대로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할 때였다.
* * *
어둠에 가라앉은 중무전. 갈기갈기 찢어진 로브를 입은 제이크가 무릎을 꿇었다.
"시, 실패했습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고개를 조아렸다.
"실패? 리메르가 관여한 건가?"
카룬이 인상을 찌푸리며 무릎 꿇은 제이크를 굽어보았다.
"아, 아닙니다."
제이크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눈동자가 탁했고, 턱이 풀려 침을 흘리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실패를 했다는 거냐."
"라, 라온 지그하르트는 모든 강화 마법에 광폭화까지 건 그 오크를 단 일검으로 베어버렸습니다.
"주둥이에서 나온다고 다 말이 아니다. 지금 그걸 믿으라고 지껄이는 거냐."
카룬이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듯한 음성을 흘렸다.
"정말입니다! 그, 그놈의 검에서 피어난 불꽃이 오크의 목을 그대로 갈라버렸습니다!"
"불꽃?"
"예! 노을을 받아 금색으로 번쩍이던 불꽃에 오크는 아무것도 못 하고 목을 내주었습니다. 거기다가…."
제이크는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5 연무장에 가서 보았던 것들을 모조리 털어놓았다.
"리메르는 저희의 생각을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저를 배, 배웅해주면서 수련생들을 건드리면 죽여버린다고 해, 했습니다."
그는 흥미를 보이는 카룬에게 리메르의 경고까지 말해주었다.
"역시 그놈 때문이었군."
카룬이 콧방귀를 뀌며 픽 웃었다.
'썩어도 준치라는 건가.'
이전에 만난 리메르의 육체와 정신의 균형은 무너져 있었다. 워낙에 게으르고 제멋대로 하는 놈이라 술수를 부려도 눈치채지 못하리라 생각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괘, 괜찮겠습니까? 리메르의 입에서 전주님의 이름도 나왔는데…."
"상관없다. 그 벌레가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으니까."
카룬은 손을 저었다. 이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리메르 따위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잡초와 다를 바가 없었다.
"돌아가라. 나중에 다시 부르지."
"아,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제이크는 고개를 연속으로 조아리고서 방을 나갔다.
"일검에 그 오크와 무기를 동시에 갈랐다면 놈은 상급 연공법을 익혔다고 봐도 이상하지 않겠군."
"예전에 첩자가 가져온 정보에서도 굉장히 강한 마나의 파동을 일으킨다고 했었습니다."
"첩자라면 별관에 있는?"
"예."
"쓸만하군."
"그녀가 가져온 정보 중에 잘못된 부분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카룬의 집사가 눈을 내리감으며 대답했다.
"그 녀석에게 조금 더 지원해주도록. 앞으로는 리메르의 행적도 조사하도록. 그리고…."
카룬은 말을 마치고, 제이크가 나간 문을 보며 손가락으로 목을 그었다.
"저놈은 처리해라. 눈치가 빨라서 입을 열 놈이고, 이미 리메르의 살기에 먹혔어."
"예."
집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라온 지그하르트 그리고 리메르."
자신의 위치에서 보면 견제할 필요 없는 먼지에 불과한 놈들이지만, 이상하게 자꾸 눈에 거슬렸다.
"둘 다 한 번에 처리해버리는 게 좋겠군."
카룬의 서늘한 눈빛에 중무전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 * *
마르타는 연무장의 외곽에 세워진 나무에 등을 기댔다. 시선의 끝에는 연무장을 정리하는 라온이 걸려 있었다.
쯧.
혀를 차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저놈 대체 뭐야.'
어떻게 그렇게 단호하게 검을 그을 수가 있지?
오늘 훈련이 몬스터를, 그것도 사람의 모습으로 보이는 몬스터를 죽이는 훈련이라는 걸 알고 주먹을 움켜쥐었었다.
이번만큼은 라온 지그하르트보다 뛰어난 모습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상대로 버렌이나 다른 수련생들은 몬스터에게 제대로 검을 날리지 못했다. 리메르나 교관의 도움을 받고 나서야 몬스터를 벨 수 있었다.
하지만 마르타는 달랐다.
몬스터에게 틈이 생겨난 순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목에 검을 박아넣었다.
그녀가 남들과 다른 건 당연한 일이다.
'해봤으니까.'
지그하르트에 오기 전.
엄마를 찾기 위해서 홀로 백혈교에 잠입했을 때 교도 놈들에게 검을 찔러넣었었다.
그 경험 덕분에 인간의 모습을 한 몬스터에게 검을 내리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 그놈은 어떻게….'
라온은 자신과 다르다.
안전한 담벼락 안에서 태어났고,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곱게 자란 도련님 중 도련님이다.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놈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인간의 모습으로 보이는 오크의 목을 갈랐다. 그것도 자신보다 빠르고 강하게.
솔직히 순간 멍해질 정도로 아름답기까지 했다.
'믿을 수 없었어.'
두 눈으로 본 게 정말 현실인지 아직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망할…."
마르타가 주먹으로 등을 기댄 나무를 후려쳤다.
'이건 이겼어야 했는데.'
라온에게 대련으로 졌고, 그의 명령을 듣겠다고 했지만 마음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언젠가 녀석을 무릎 꿇릴 각오로 죽어라 수련했는데, 무조건 이길 거라 여겼던 부분에서 패했다는 생각에 이가 바드득 갈렸다.
다만 그 와중에 마음에 작은 울림이 일어났다.
그건 동질감. 라온과 자신이 비슷한 구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감정이었다.
아무래도 라온는 생각했던 대로 그저 곱게만 자란 아이가 아닌 것 같았다. 저렇게 독한 마음을 먹게 된 계기가 있을 거다.
"음?"
라온의 과거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흥."
마르타는 라온의 담담한 눈을 바라보다가 콧방귀를 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대로 연무장을 떠났다.
딱딱했던 마르타의 걸음걸이가 조금은 부드러워졌지만, 그녀 본인도 알지 못했다.
* * *
라온이 연무장 정리를 끝내고, 실내 단련장으로 가려 할 때 루난이 다가왔다.
"라온."
그녀가 보라색 눈을 빛내며 고개를 꾸벅였다.
"고마워."
"별거 아니야."
고개를 저었다. 도와준 건 사실이지만, 큰 역할은 그녀 본인이 했다. 감사의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고마워."
"그 정도는 아니라니까."
"고마워."
"정말 별거…."
"고마워."
"하, 알겠어."
"응."
졌다는 듯 손을 저었다. 그제야 루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괜찮은 거지?"
라온이 루난의 눈과 손을 살폈다. 시리아의 세뇌가 풀린 것 같긴 하지만 혹시 몰라 물어보았다.
"응."
루난이 옅게 웃었다. 구김 없는 미소. 일단은 잘 풀린 모양이다.
"만약 네 오빠가 또 힘들게 하면 말해. 도와줄 수 있는 건 도와줄게."
"괜찮아."
루난이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저었다.
"내가 해야 해."
눈동자가 반짝인다. 상처 입었던 마음이 아물며 더 단단해진 것 같다.
"그래."
라온이 웃었다. 루난은 다시 고맙다고 말한 후 연무장을 떠났다.
-아이스크림 소녀를 도와주지 않는 게냐.
'본인이 하겠다고 하잖아. 원래 남의 가족 일에는 끼는 게 아니야.'
-흠, 본왕이 볼 때 아이스크림 소녀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다.
'그럼 도움을 청하겠지. 만약 청하지 않더라도….'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깊게 가라앉은 눈빛에서 붉은빛이 번뜩였다.
'해결하는 방법은 있으니까.'
* * *
루난은 숙소로 돌아와서 라온에게 받은 다람쥐 조각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음."
잠시 고민을 하다가 침대 밑에 넣어둔 구슬 아이스크림 상자를 꺼냈다. 오빠가 준 게 아니라, 엄마가 사두셨던 아이스크림이다.
화아아.
뚜껑을 열자, 차디찬 냉기가 흘러나와 훈련에 지친 얼굴을 식혀주었다.
앞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보기만 해도 오빠가 생각날 테니까.
하지만 라온이 머리와 심장을 묶고 있던 오빠의 그림자를 지워주었다.
더 이상 오빠는 무섭지 않았고, 아이스크림도 밉지 않았다.
'아니야.'
다만 루난은 아이스크림에 손을 데지 않고 다시 뚜껑을 닫았다.
'내일 먹어야지.'
내일 라온과 함께 먹기로 하며 아이스크림 상자를 침대 밑에 밀어 넣었다.
루난은 테이블 위에 놓아둔 빨간 눈동자의 다람쥐를 보며 가는 미소를 지었다.
* * *
라온은 어디론가 사라진 리메르 대신 연무장 정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화아아!
땀에 젖은 훈련복을 벗고 있을 때 조용하던 라스가 불쑥 튀어나왔다.
-아까는 말하지 않았다만.
라스가 냉기로 이루어진 불꽃 속에서 서늘한 눈빛을 뿜어냈다.
-너 인간을 죽여보았군.
"뭐?"
-네놈에겐 아직 그 허접한 마법사의 환상을 깨뜨릴 능력이 없다. 아무리 오크라는 걸 알고 있어도 보이기는 인간이었지. 그걸 단호하게 베는 건 실전도 치르지 않은 애송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쉽던데."
라온이 손을 흔들어 눈앞으로 다가온 라스를 밀어냈다.
-뭐?
"감각 수치가 높다 보니, 그놈이 인간이 아니라는 게 피부에 와닿았거든. 몬스터를 베는 정도야 어렵지 않지."
-가. 감각?
"그래. 마법으로 외모는 속일 수 있지만, 기질은 감추지 못하니까."
-끄응, 감각….
담담한 표정으로 연기를 하자, 라스가 신음을 흘렸다. 완벽하게 속아 넘어갔다.
'전생이든, 불의 고리든 알려줄 순 없지.'
적인 분명한 라스에겐 자그마한 정보도 줄 수 없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살생에 망설임이 없다니, 네놈 정체가 대체 뭐냐. 그 나이에 어떻게 그런 정신력을 가질 수 있는 거지?
라스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중얼거렸다. 비상식적으로 무력이 강해지는 것보다 처음부터 강한 정신력을 가진 걸 놀라워하는 것 같았다.
"알아서 뭐 하려고."
-크으, 정말이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단 하나도 없는 놈이로다.
"너 마음에 들려고 여기 있는 거 아니야."
라온이 라스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네가 말할 때마다 추우니까. 입 좀 다물고, 내기 보상이나 내놔."
-이건 사기다. 네놈이 그렇게 독한 인간일 줄은 몰랐다.
"내기를 먼저 하자고 한 건 내가 아니라 너잖아. 왕이라는 놈이 또 찌질해진다."
-찌, 찌질….
라스는 태어나 처음으로 찌질이라는 단어를 들었는지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이걸로 3연승인가? 마계의 군주도 별거 아니네."
-닥치거라! 본왕이 본체의 힘만…."
"그놈의 본체. 본체. 언제 찾을 건데. 그리고 이건 본체 능력과는 아무 상관도 없어."
-끄으윽…."
라스의 푸른 냉기가 크게 출렁이고, 입에서는 거품을 무는 소리가 들려왔다. 패배의 충격에 농락까지 당하니,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았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사기다. 사기!
녀석이 마지막 발악을 하려 할 때 눈앞으로 메시지가 올라왔다.
[<분노>와의 내기에서 승리하셨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2포인트 상승합니다.]
[분노에게 세 번째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연승의 효과로 추가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근력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민첩성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기력 1포인트 상승합니다.]
"허!"
라온이 헛웃음을 흘렸다. 근력과 민첩성이 한 번에 오르며 근육이 출렁이는 감각에 희열이 느껴졌다.
-인간 따위에게 3번이나….
라스는 말도 안 된다고 중얼거리며 메시지를 얼려버릴 듯이 냉기를 뿜어냈다.
"아직 남았잖아."
-끄으윽!
라온은 짜증을 일으키는 라스를 옆으로 밀어버리고 다음에 뜰 메시지를 기다렸다.
[내기의 두 번째 보상으로 <분노>가 가진 특성이 생성됩니다.]
[특성이 결정되었습니다.]
[당신에게 특성 <블리딩 커스>가 생성되었습니다.]
5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