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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라온이 천천히 눈을 떴다. 단전에 확실하게 뿌리를 내린 뜨거운 기운에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드디어.'

라스의 거센 방해를 뚫고, 만화공의 오러를 만들었다. 그것도 예상보다 훨씬 크고, 정심한 오러의 덩어리를.

'만화공이 전부가 아니지.'

용암을 둥글게 뭉쳐놓은 듯한 만화공의 오러 옆에 북해의 빙하를 건져 올린 것 같은 냉기가 모여 있었다.

숯가마의 열기를 이용해서 라스의 냉기를 밀어냈을 때 만들어진 우연의 산물이었다.

'이게 이렇게 전화위복이 되나?'

만화공 오러의 크기는 예상보다 2배 이상 컸고, 그 옆에 냉기의 오러까지 생성되었다.

목숨을 걸고, 지독한 고통을 버틴 대가가 상상을 훌쩍 뛰어넘어 돌아왔다.

"후우우."

라온은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보았다.

[<만화공>을 습득하셨습니다.]

[특성 <만화공(1성)>이 생성됩니다.]

[<만화공>이 강렬한 열기를 받아 2성에 도달했습니다.]

[<만화공(2성)>의 효과로 특성<화속성 저항력(2성)>이 생성됩니다.]

만화공이 만들어지자마자 2성에 올랐다는 메시지였다.

'이럴 줄 알았어.'

단전에 안착된 만화공의 기운이 예상보다 훨씬 커서 단번에 2성의 성취에 올랐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바로 꽃을 피워낼 수 있겠네.'

만화공이 2성에 올랐을 때부터 사용할 수 있는 일화(一花)이자 일화(一火). 그 능력을 바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대감에 미소를 지을 때 두 번째 메시지가 올라왔다.

[<혹한의 저주>의 냉기 두 가닥이 녹아내립니다.]

[체질 <저질 체력>이 사라집니다.]

[녹아내린 냉기가 응집되어 특성 <혹한의 냉기>가 생성되었습니다.]

[<분노>의 막강한 냉기를 받아 <혹안의 냉기가 2성에 도달했습니다.]

"오."

탄성이 절로 나왔다.

혹한의 저주 두 가닥이 녹아내리고, 저질 체력이 사라졌다는 메시지였다.

이것만으로 대단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그 아래였다.

마나 회로의 냉기가 뭉쳐 혹한의 냉기라는 특성이 생겼다는 메시지. 만화공의 오러 옆에 있는 냉기의 오러가 바로 이 혹한의 냉기였다.

'냉기라….'

사실 마나 회로의 냉기를 배출하지 않고, 받아들이려고 한 건 수속성 저항력을 높이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생각도 하지 않은 혹한의 냉기라는 보상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당황스러웠다.

아직 내용을 다 파악하지도 않았는데, 세 번째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위기 상황에서 <분노>가 펼친 방해를 이겨내셨습니다.]

[극한의 정신력을 보여준 대가로 모든 능력치가 3포인트 상승합니다.]

메시지가 떠오름과 동시에 능력치가 올라갔다. 팽창한 뒤 수축한 육체와 정신에 다시 한번 뜨거운 희열이 찾아왔다.

'꿈인가.'

그저 만화공을 익히려고 했을 뿐인데, 만화공 2성, 냉기 2성에 능력치까지 상승했다.

라스의 방해 덕분에 몇 년 동안 수련해야 할 경지를 단번에 이루었다.

-이런 빌어먹을!

메시지를 끄며 미소를 지을 때 라스에게서 억눌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네놈은 무엇이냐! 어떻게 그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거냐고!

평소 근엄한 척하는 말투도 사라졌다. 라스는 말 그대로 분노가 폭발한 상태였다.

'나한텐 안 된다고 했잖아. 뭘 해도 소용없어.'

라온은 허세를 부리며 손을 저었다.

-말이 안 돼! 이건 말이 안 된다고!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도 이런 굴욕은 없었다.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이제 포기해라.'

여유로운 척하고 있지만, 아까는 정말 죽는 줄 알았다. 3달 동안 숯가마를 돌아다니며 주변의 기운을 읽어 둔 덕분에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조심해야겠어.'

오늘로 확실해졌다. 조금 친해졌다고 해도 라스는 분명한 적이다. 놈에게는 절대 약점과 비밀을 들켜서는 안 된다.

"괘, 괜찮으냐?"

라스가 부르르 떨고 있을 때 발칸이 다가왔다. 그의 눈동자가 튀어 나갈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라온이 몸을 일으켰다. 능력치가 오르고, 두 종류의 오러가 생성되자 몸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그럼 얻은 게냐?"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발칸의 입술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예. 덕분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전에 생성된 오러 덕분에 무얼 해도 힘이 넘쳤다.

"그래서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가마가 무너졌네요."

라온이 무너진 숯가마를 가리켰다. 저 단단한 숯가마가 저리 붕괴된 건 자신의 탓이었다.

"괜찮다."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일 때 발칸이 어깨를 툭 치고서 가마로 다가갔다.

"문제가 없으면 그걸 되었다. 숯가마 따위야 다시 만들면 그만… 음?"

픽 웃으며 무너진 숯가마를 살피던 발칸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이건…."

그가 무너진 숯가마를 뒤적이다가 아궁이 근처에서 금빛으로 반짝이는 숯 세 개를 집게로 들어 올렸다.

'뭐지?'

백탄, 흑탄은 봐왔지만, 저렇게 금색으로 빛나는 숯은 처음 보았다.

"아!"

생각났다. 처음 만났을 때 발칸은 백탄과 흑탄이 아닌 금탄을 만든다고 했었다. 저 황금빛을 보니, 저게 바로 금탄인 것 같다.

"기연은 네게만 있었던 게 아니었던 것 같군."

"아."

"이게 금탄이다. 백탄보다 강한 열기를 가졌고, 흑탄보다 지속력이 좋은 장인의 숯."

발칸이 금색 열기를 뿜어내는 숯을 강철판 위에 내려놓았다.

"10년 넘게 이 숯을 만들고자 했는데, 이렇게 성공하다니. 인생이란 정말 모를 일이로군."

그는 황홀한 얼굴로 금탄을 바라보았다.

"네 덕분이다. 고맙구나."

"저는 딱히 한 일이 없습니다."

"네가 연공을 할 때마다 가마의 불꽃이 요동을 쳤고, 네 호흡에 불길에 생명이 돋아났다. 난 평생 망치만 들어 온 무지렁이지만 네가 무엇을 했는지는 알 수 있어. 이건 네 덕분이다."

딱히 한 게 없다고 말을 하려 할 때 발칸의 말이 이어졌다.

"네 목표는 무엇이지?"

"목표?"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왜 묻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진중한 눈빛을 보자 대답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목표라….'

연공을 하며 다짐했듯이 길의 끝에 있는 건 당연히 데루스에 대한 복수다. 하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실비아다. 그녀가 행복하게 지내기를 원했다.

그걸 위해선….

흉악할 정도의 강함보다는 어떤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 절대 쓰러지지 않는 강함이 필요했다.

불의 이미지를 잡을 때처럼 꺼지지 않는 불꽃과 같은 맥락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어떤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 검사가 되고 싶습니다."

"꺾이지 않는다? 애송이의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니군."

발칸은 피식 웃었다. 비웃음이라기보다는 기꺼운 웃음 같았다.

"라온 지그하르트."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발칸 나름의 인정인 것 같았다.

"네가 개인 검을 가지려면 몇 년이 남았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3년에서 5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지그하르트 무인이 보급용 검이 아니라, 자신의 검을 가지기 위해선 기초 수련을 끝내고, 검사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대략 3년에서 5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그렇군."

발칸은 그 정도라면 버틸만하겠어라고 중얼거렸다.

"꺾이지 않는 마음을 세웠을 때 날 찾아와라. 이 녀석들은 그날을 위해 아껴두고 있으마."

발칸은 강철판 위의 금탄을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검을 만들어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은퇴하신 거 아니었습니까?"

"은퇴 번복은 꽤 흔한 일이지."

그가 빙긋 미소 지었다. 처음 보았을 때 피로와 허탈함으로 가득했던 주름살에 생기가 차오르는 것 같았다.

"죽지 마라."

발칸이 가볍게 손을 흔들고서 산을 내려갔다. 3개월간 얼굴을 마주한 것 치고는 너무 가벼운 인사였지만, 그답기도 했다.

"음."

햇발을 등지는 발칸의 등은 처음 본 것보다 30년은 젊어 보였다.

'어쨌든 잘 됐군.'

라온이 손을 펼치자, 뱀의 혓바닥처럼 새빨간 불꽃이 타올랐다. 만화공의 오러였다.

처음부터 2성에 오른 덕분에 제어할 필요도 없었다. 만화공의 불길은 완벽하게 자신의 의지를 따르고 있었다.

화아아.

주먹을 움켜쥐자 불길은 사라지고, 가는 열기만이 남았다.

'이번에는…음?'

혹한의 냉기를 끌어 올리려고 할 때 우측 나무 위에서 아주 미세한 기척이 느껴졌다.

산새나 작은 산 동물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작은 기척이지만, 라온은 그게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이제 나오시죠."

라온이 나무 위롤 보며 손바닥을 탁탁 털었다. 시선을 고정하고 있자, 아무것도 없었던 나무 위에서 리메르가 원숭이처럼 떨어져 내렸다.

"에, 알고 있었어?"

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에 알았습니다."

"쯧, 역시 그랬나? 불을 보고 깜짝 놀라서."

리메르가 짧게 혀를 찼다. 그의 녹색 눈동자엔 확연한 놀라움이 남아 있었다.

"계속 보고 계셨습니까?"

"아니, 오늘이 처음인데."

그는 웃고 있었지만, 평소 같은 여유로움은 없었다. 거짓말을 들킨 아이의 표정이다.

'하긴 당연한가.'

리메르는 수련생을 여기에 맡겨두고 내팽개칠 정도로 모진 사람이 아니었다. 지난 3달간 꾸준히 지켜보았던 모양이다.

"감사합니다."

라온이 고개를 숙였다.

"아니라니까. 참."

리메르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눈을 돌렸다.

'특이해.'

감사하다니까 오히려 좋아하지 않고, 민망해한다. 이 엘프도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좀 늦었지만, 오러가 생겼네.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딱히 늦었다고 생각은 안 하지만요."

라온이 손가락 위로 붉은 불길을 펼쳐냈다. 그 모습을 본 리메르가 얼굴을 찡그렸다.

"오러를 만들자마자 사용하다니."

그는 질린 듯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평범한 거 아닙니까?"

"오러를 익히자마자 사용하는 놈은 처음 보는데?"

리메르는 보통 일주일에서 한 달은 지난 후에 오러를 능숙하게 사용한다고 중얼거렸다.

"이제 내려가라. 수련 시간에 늦기 전에 도착해야지."

리메르는 라온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서 미소 지었다.

"교관님은 안 가십니까?"

"난 저거 정리하고 가려고."

폭삭 내려앉은 숯가마를 가리켰다. 불길은 사라졌지만, 아직 열기는 남아 있었다.

"저도 돕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리메르는 고개를 젓고서 몸을 돌리려는 라온을 붙잡았다.

"난 교관이니까 지각해도 괜찮지만, 수련생이 지각하면 안 되지."

"...."

라온이 그게 뭔 개소립니까? 라는 표정이 되었지만, 리메르는 손부채질을 하며 무시했다.

"어쨌든 내가 다 처리하고 갈 테니까. 내려가라."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한 번 더 고개를 숙인 뒤 산을 내려갔다.

"후."

리메르는 라온이 내려간 걸 확인한 뒤 숯가마를 보았다. 발칸이 처음부터 불이 번지지 않게 만들어서 저걸 건드릴 필요는 없었다.

이곳에 남은 이유는 저 가마 때문이 아니었다.

"이제 나오시죠."

라온이 자신을 부를 때처럼 위를 올려다보며 그 남자를 불렀다.

허공이 소리 없이 출렁이더니, 흑색 장포를 두른 금발의 노인이 내려왔다. 글렌 지그하르트였다.

"구경은 잘하셨는지요?"

"...."

글렌은 말없이 무너진 숯가마와 라온이 앉아 있던 자리를 살펴보았다.

"손주가 걱정되어서 매일매일 찾아오셨는데, 이제 마음이 좀 놓이시겠네요."

"그런 적 없다."

그는 고개를 젓고서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우우웅!

글렌의 손짓에 따라 무너진 가마의 잔해가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쿠구구구!

잔해들이 장미 넝쿨처럼 동그랗게 꼬여 압축되더니, 그대로 지워져 버렸다.

바닥이 시꺼멓게 탄 자국만 아니라면 이곳에 가마가 있었다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정도. 어마어마한 오러 운용 능력이었다.

"숯가마 내부의 열기를 먹어 치운 덕분인지 오러의 양과 순도가 장난이 아닙니다. 거기다 안착시킨 오러를 바로 운용했죠. 역시 대단한 재능입니다."

"그게 전부가 아니다."

글렌은 라온이 내려간 산의 오솔길을 내려보며 눈을 내리감았다.

"녀석은 자신에게 주어진 굴레마저 제 것으로 만들었다."

* * *

지그하르트 남쪽엔 불빛이 꺼지지 않는 마을이 있다. 야장들의 도시. 대장장이들이 밤낮으로 망치를 두드리는 미르탄 마을이다.

마을의 가장 안쪽엔 공처럼 둥그런 형태의 공방이 있다. 10년 넘게 불이 들어오지 않았던 그 대장간에 불이 들어왔다.

"뭐야! 전 촌장의 공방에 불이 들어왔어!"

"촌장이. 아니 전 촌장이 돌아왔다!"

"돌아왔다니? 은퇴했잖아!"

"그 영감 고향으로 돌아간 거 아니었어?"

일하던 대장장이, 잠을 자던 대장장이, 출장을 가려던 대장장이까지. 모두가 전 촌장의 공방으로 몰려갔다.

그리고 물었다. 왜 돌아왔는지를.

"약속을 했다."

미르탄 마을의 전 촌장이자, 대장장이의 전설이 된 발칸이 대장간의 먼지를 털어냈다.

"그날이 올 때까지 몸을 만들어 둬야 해."

그는 망치를 들고, 불을 지피며 시원하게 웃었다.

"진천검을 뛰어넘을 검을 만들어야 하니까."

32화

연무장으로 향하는 라온의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도 경쾌했다. 기분 탓이 아니다. 바람을 탄 것처럼 몸 자체가 가벼워졌다.

'오러 덕분이지.'

능력치가 오르고, 체질이 바뀐 것도 있겠지만 가장 큰 차이는 오러다.

오러는 마나의 응집체. 그 존재만으로 인간의 육체 능력을 상승시킨다.

지금 자신의 단전에는 그 오러 2개가 뭉쳐 있었으니, 평소보다 몸이 가볍고 활력 넘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만이 아니야.'

더 감각이 더 세밀해졌다.

바람의 흐름, 풀잎을 뛰노는 산짐승의 발걸음 그리고 산 아래를 지키는 검사들의 기척까지. 주변의 모든 게 손에 잡힐 듯이 느껴졌다.

"흐음."

라온이 입맛을 다셨다.

'시험해보고 싶은데.'

실전에서 힘을 발휘하려면 지금의 내가 어느 정도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오늘 수련이 끝나면 다시 산에 가봐야겠어.'

이전에 리메르가 바람을 알게 해준 북망산의 공터에서 시험을 해보면 될 것 같다.

-크아아!

기대감에 미소를 지으며 연무장으로 걸어갈 때 라스가 악 소리를 질렀다.

-제기랄!

녀석은 지금까지도 흉폭한 냉기와 분노를 뿜어내고 있었다. 물론 힘이 빠져서 조금도 위협적이진 않았다.

-어떻게 그 순간에 가마를 보았단 말이냐!

'그러게. 운이 좋았어.'

-웃기지 마라! 네놈이 끌어당긴 걸 모를 줄 알았던 거냐!

라스가 바드득 이를 갈았다.

'이 괴물 같은 놈!'

라온 지그하르트에게 냉기와 정신공격을 막는 능력이 있다는 건 예상했다.

'뭐가 있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

금세 놈의 육체와 영혼을 먹어 치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래왔으니까.

'하지만 아니었어.'

놈은 달랐다.

처음부터 인간의 정신이 가장 약해지는 시기. 연공의 극에 이르러 정신의 방벽이 가장 낮아진 무아지경 상태를 노렸다.

그동안 모아놓은 분노의 감정과 냉기를 모조리 폭발시켰음에도 라온의 정신은 무너지지 않았다.

극한의 정신력으로 버티다가 가마의 열기를 이용해서 자신을 밀어내 버렸다.

그 완벽한 계획이 무너진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어디서 이런 놈이….'

산전수전 다 겪은 마족들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저 어린놈이 아무렇지도 않게 참아냈다.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이 없었다.

꿀꺽.

라스가 마른침을 삼켰다. 평생 저 꼬마의 팔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절대 그럴 수는 없어.'

이를 악물었다. 이전에도, 오늘도 실패했지만 이렇게 계속 퍼줄 수는 없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좋아하지 마라. 본왕은 아직 시작도 안 했으니까.

"그래. 열심히 해."

라온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연무장을 발걸음을 옮겼다. 저 무덤덤한 반응. 보면 볼수록 짜증이 나는 놈이다.

-귓구멍 씻고 들어라. 본왕은 포기라는 걸 모르는 마족이다. 네놈의 육체를 집어삼켜서 주변의 인간들을 모조리 죽여 버….

"힘내라."

-으아아악!

라온의 담백한 대답에 라스는 결국 두 번째로 폭발했다.

* * *

루난은 연무장 중앙에 서서 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오지?'

최근 라온의 상태는 수련생 모두가 알 수 있을 정도로 좋지 않았고, 그 이유도 알고 있었다.

오러.

라온보다 연공을 늦게 시작한 아이들도 모두 오러를 만들었지만, 그는 7개월이 지난 지금도 오러를 안착시키지 못했다.

5 연무장에서 오러를 습득하지 못한 건 라온뿐이었다.

버렌을 꺾은 뒤 그를 수석으로 인정하던 아이들도 생각을 달리했다. 마르타나 버렌 혹은 자신에게 수석의 자리가 가길 원했다.

'도와주고 싶어.'

라온에겐 큰 도움을 받았다. 옆에서 수련하면서 더 높은 성취를 이뤘고, 그에게서 풍기는 시원한 향기에 훈련할 때 항상 기분이 좋았다.

'엄마도 말했으니까.'

엄마는 고마운 사람에게 보답하라고 했었다. 그래서 가장 좋아하는 구슬 아이스크림을 다시 가져왔다.

지난번에는 마지막 남은 하나를 줬지만, 이번에는 3개나 남아 있었다. 이걸 먹고 기운을 차려줬으면 좋겠다.

달칵.

루난이 구슬 아이스크림이 든 상자를 매만지고 있을 때 연무장 문이 열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라온이 들어왔다.

탁탁.

쪼르르 달려가서 라온의 앞에 섰다. 이제 붙는 게 익숙해졌는지 라온은 별반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부스럭.

그런 그에게 가지고 있던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힘내."

루난은 얼떨결에 상자를 받은 라온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음?'

평소처럼 다섯 걸음 거리로 떨어지려고 할 때 라온에게서 풍기던 시원한 향기가 더 진하게 느껴졌다.

킁킁.

잘못 느낀 게 아니다. 가슴이 떨릴 정도로 청량한 향기였다.

루난은 두 눈을 빛내며 평소보다 한 발자국 더 라온에게 다가갔다.

* * *

'또 왜 이래?'

라온이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기분 좋게 하산해서 왔는데, 루난이 평소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에서 흥흥거리며 냄새를 맡고 있었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루난에게 받은 상자를 보았다. 구슬 아이스크림이 담겨 있던 그 상자였다.

열어보니, 하얀 냉기가 피어나며 색이 다른 구슬 아이스크림 3개가 놓여 있었다.

-헉! 구슬 아이스크림이 아니더냐!

라스에게서 기대감이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먹으라고?"

"응."

흥흥거리던 루난이 눈을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부터 저 아이를 본왕의 아이스크림 소녀로 인정한다. 라온. 다 먹어라! 본왕은 다른 맛도 느껴보고 싶도다. 일단 중앙에 있는 검은색부터….

'좀 가라.'

상자에서 검은색 아이스크림을 하나 꺼내서 입에 넣었다. 시원하면서도 달콤한 초콜릿이 입안에서 팔랑였다. 음식으로 행복을 느끼는 게 이런 건가 싶을 정도로 달콤했다.

-미쳤도다! 시원함이 입안을 적시고, 그 위로 달콤한 초콜릿이 리본처럼 혀끝을 감싸는구나. 황홀한 맛이야!

라스는 평론가라도 된 거처럼 아이스크림의 맛을 세세하면서도 매끄럽게 설명했다.

-더, 더 먹어라! 이번엔 저 빨간색을….

"헤…."

루난은 먹고 싶었던지 살짝 침을 흘리며 입맛을 다셨다.

"잘 먹었어."

라온은 아이스크림 2개가 남은 상자를 루난에게 돌려주었다.

"더 안 먹어?"

루난은 멍한 눈으로 되돌아온 상자를 바라보았다.

"충분해. 고마워."

-충분하긴 무슨! 본왕은 아직 배고프다! 다 먹어!

'얘 먹고 싶어 하는 거 안 보이냐? 나잇값 좀 해.'

라온은 난동을 부리는 라스를 손바닥으로 짓눌러버렸다.

"그럼 기운 났어?"

"응? 아…."

라온은 자신과 상자를 번갈아 쳐다보는 루난을 보며 픽 웃었다.

'역시.'

먹고 싶어 하는 표정을 보니 확실해졌다. 루난은 기운을 차리라고 이 아이스크림을 건네준 거다.

표정 변화가 적고, 말수도 적지만, 루난은 선하고 다정한 아이였다.

"기운 났어. 고마워."

"응!"

루난은 작게 웃으며 상자를 받았다. 보물을 찾은 탐험가처럼 소중하게 품에 안았다.

"근데."

"응?"

"아냐."

루난은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점은 평소보다 거리가 가까웠고, 흥흥거리며 냄새 맡는 횟수가 좀 많이 늘어났다.

'정말 모르겠다니까.'

라온은 어깨를 으쓱이고서 뒤처리를 하고 올 리메르를 기다렸다.

* * *

"한 달 뒤에 좀 특별한 걸 해보려고 한다."

수련 시간에 10분이나 늦게 나타난 리메르가 히죽 웃었다.

"교관님 오늘도 지각하셨습니다. 10분이면 검을 100번 넘게 휘두를 수 있는 시간인데."

버렌이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들어 올렸다.

"아, 미안. 준비가 좀 필요했거든."

리메르는 익숙한 손짓으로 사과를 한 뒤 말을 이었다. 말은 미안이라고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다. 그저 웃는다.

"으음."

버렌은 마음에 들지 않은 표정이 역력했지만, 손은 내렸다.

"너희도 즐거울 거야. 오랜만에 훈련다운 게 왔으니까."

리메르는 입꼬리를 빙글 말아 올리며 뒤를 가리켰다. 뒤쪽 연무장에 원형으로 금이 그어져 있었다.

"7개월 동안 기초를 쌓고, 연공을 계속했으니 달궈볼 때가 되었지. 한 달 뒤에 대련을 실시한다."

"우오오!"

"드디어!"

"대련!"

아이들이 포효와 같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동안 반복해서 단련해온 오러와 검술을 시험해볼 기회가 왔으니, 기뻐하는 건 당연했다.

찌그러졌던 버렌의 인상도 펴졌고, 마르타는 서늘한 미소를 피워냈다. 루난의 맹한 표정은 그대로였다.

"대련의 승패는 너희들의 졸업 점수에 들어가서 순위를 매기게 될 거다. 한 달간 열심히 준비하는 게 좋을 거야."

"잠시만요."

여유롭게 웃고 있던 마르타가 리메르를 불렀다.

"아직도 오러를 만들지 못한 뒤떨어지는 친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름을 칭하지 않았지만, 모두 라온을 바라보았다.

라온은 수련생들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리메르의 입만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그 친구도 오러를 만들었다고 하더라고."

"네? 대체 언제…."

"어젠가? 오늘인가?"

"아, 그래요?"

마르타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검은 눈동자가 진흙에 묻힌 흑진주처럼 번들거렸다.

"드디어 기회가 왔네. 너무 길어서 지루해 죽을 뻔했는데."

그녀가 다가오며 미소를 지었다. 비웃음과 거만함이 어우러진 웃음이었다.

"예전에 했던 말 기억하지. 난 나보다 약한 놈의 지시는 듣지 않는다고. 이 정도면 참을 만큼 참아줬다고 생각해. 이번에 끝을 내자. 넌…."

"마르타 지그하르트. 물러나라."

라온이 나서기도 전에 버렌이 옆으로 끼어들었다.

"오러를 습득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은 녀석과 한 달 뒤에 대련하겠다니, 네겐 검사의 명예도 없는 건가."

"하! 명예?"

마르타가 입꼬리를 길게 꼬아 올렸다. 노골적인 비웃음을 그리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가문에서 귀하게 크신 분은 명예가 밥 먹여주는지 아시나 보네."

"마르타."

"명예라는 것도 그에 걸맞은 사람에게나 보여주는 거야. 저기 뒤떨어지는 녀석들도 한 달 만에 오러를 익혔지만, 우리 수석께선 반년이 넘게 걸렸어."

그녀는 린덴 오러 연공법을 익히고 있는 추천생들을 가리켰다.

"상급 이상의 연공법이라고 해도 7개월 만에 오러를 만들었다는 건 저놈에겐 재능이 없다는 뜻이야. 같이 판별식을 치렀으니, 네가 가장 잘 알지 않아?"

"으음…."

버렌이 인상을 찌푸리다가 입매를 내렸다.

'확실히….'

자신도 최상급의 오러 연공법을 2주일 만에 익혔었다. 아무리 대단한 연공법이라고 해도 1성을 습득하는데 반년 넘게 걸린 건 문제가 있었다.

"저 녀석에게 검술이나, 권법 재능이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뿐이야. 오러에 재능이 없다면 아무 의미도 없어."

"으음."

"맞는 말이긴 하지"

"이름난 무인 중에 오러가 약한 사람은 없으니까."

마르타의 말에 동의하듯 수련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교관님이 갑자기 대련하겠다는 것도 수석을 바꾸고 싶어서 아닌가요?"

"글쎄?"

리메르는 눈썹과 어깨를 동시에 으쓱였다.

"라온 지그하르트. 네 능력치고는 수석 자리에 오래 앉아 있었잖아. 널 따르는 아이도 없…. 아니. 몇 명뿐이니, 이제 그 자리를 내놓을 때가 된 것 같은데?"

마르타는 라온의 뒤에 있는 도리안과 몇몇 수련생들을 힐끔 보고서 픽 웃었다.

"전에 말이 나왔던 대로 대련에서 이긴 사람이 수석 수련생의 자리를 갖는 걸로…."

"싫다."

라온은 마르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을 고개를 저었다.

"뭐?"

"넌 돈도 없이 도박판에 앉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내가 수석의 자리를 건다면 너도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꺼내."

"너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여기에 네 편은…."

"겁나?"

라온이 턱을 살짝 틀며 미소 지었다. 마르타가 보여준 것보다도 더 진한 비웃음이었다.

"겁? 지금 나한테 한 말이야? 하! 좋아. 네 마지막이 될 도발 정도는 받아주지."

마르타가 피식 웃었다. 검은 눈동자에 짜증을 휘감으며 품에 있던 작은 목갑을 꺼내 놓았다.

"아버지께서 내어주신 영약 구화단이야. 대련에서 네가 이긴다면 이걸 주지."

구화단은 아홉 가지 약초를 모아 만든 영약으로 육체와 오러를 강화해주는 효과가 있었다.

'라스. 지금이 내가 예전에 말한 순간이다.'

-그게 무슨 말이지?

'마르타에게 뽑아먹을 게 생길 거라고 했지? 그게 지금이라고.'

마르타에게 저 영약이 있다는 건 수다쟁이 도리안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구화단이면 적당하지.'

라온이 구화단이 든 목갑과 도발에 넘어간 마르타를 보며 가는 미소를 지었다.

무조건 이기는 내기의 상품으로 말이야.

33화

한 달 후 대련장을 시행하겠다는 리메르의 선언 이후 아이들은 미래의 상대를 상상하며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누구와 싸우더라도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해서 검술을 다듬고, 오러를 연공했다.

하지만 평소와 다르지 않은 수련생도 있었다.

라온과 마르타. 이미 상대가 정해진 두 사람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라온은 평소처럼 새벽부터 밤까지 전력을 다해서 수련했고, 마르타는 수련생 중 최강자답게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각자가 전력을 다해 수련하는 한 달이 훌쩍 지나가 대련 날 아침이 밝았다.

1년 가까이 단련해 온 무력을 증명하고, 교관들에게 좋은 점수를 받을 기회였기 때문에 수련생들의 얼굴에는 흥분과 긴장이 가득했다.

반면 마르타는 그런 것 따윈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한쪽을 바라보며 웃었다.

'이제야 갚아줄 수 있겠네.'

7개월 전 라온에게 반격을 당해서 얻어맞았던 팔뚝을 움켜쥐었다.

'처음이었지.'

이곳에 오기 전 뒷골목에서도 또래에게 맞은 적은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 당한 망신이라 지금도 잊히지 않았다.

그날의 굴욕을 갚아 줄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8개월 만에 드디어 그날이 찾아왔다.

'오늘로 끝이야.'

라온 지그하르트가 오러를 익힌 시간은 한 달밖에 되지 않았고, 자신은 3년이 넘었다. 사실상 의미 없는 대련이었다.

비겁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재능이 없는 놈을 언제까지고 기다려주는 것도 시간 낭비다.

'나는 할 일이 있어.'

라온 같은 얇은 벽에 막혀 있을 때가 아니다. 최대한 빨리 강해져서 구할 사람이 있다.

우우웅!

마르타는 손아귀에서 솟구치는 황색의 오러를 움켜쥐며 입매를 굳게 다물었다.

* * *

라온은 임시로 만든 대련장 우측에 앉아서 상태창을 확인했다.

<상태창>

이름 : 라온 지그하르트.

칭호 : 최초의 승리.

상태 : 혹한의 저주(여섯 가닥), 운동능력 저하, 마나 감응력 저하.

특성 : 분노, 불의 고리(3성), 수속성 저항력(3성), 설화의 감각(1성), 만화공(2성), 혹한의 냉기(2성), 화속성 저항력(2성)

근력 : 35

민첩성 : 36

체력 : 35

기력 : 26

감각 : 50

특성의 개수도 많이 늘어났지만, 그동안 한계를 넘어서는 수련을 통해 능력치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괜찮네.'

라온은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상태창의 수치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 주목!"

상태창을 껐을 때 리메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대련장 바닥을 전부 확인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의 전투를 보는 건 직접 대련하는 것만큼이나 도움이 된다. 다른 수련생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며 대련에서 어떻게 움직일지 미리 계획을 세우도록."

"예!"

"그럼 첫 번째 버렌 지그하르트. 도리안."

"네!"

"헉!"

버렌은 당당하게 일어서서 대련장으로 들어갔지만, 도리안은 게걸음을 걸으며 바들바들 떨었다.

"저, 저기 교관님?"

"뭐지?"

"기권합니다!"

도리안은 힘차게 손을 들어 올리며 기권을 외쳤다.

"...."

그 절박한 목소리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물론 뭐 저런 놈이 다 있냐라는 눈빛이었다.

"아직 시작도 안 했다만?"

리메르가 당황한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모, 몸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어제부터 몸살과 오한이 와서. 콜록!"

도리안은 어색한 마른기침을 하며 입술을 떨었다.

"어우, 진짭니다."

배에 달린 주머니에서 얼음주머니를 꺼내 머리에 얹었다. 준비성 하나는 정말 철저한 놈이다.

-한심하도다. 본왕의 부하라면 당장에 목을 베었을 것이야!

'예상대로긴 한데.'

도리안이 저렇게 나올 건 알고 있었다. 평소 녀석의 성격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도리안. 그래도 한 번은 싸워봐. 패하더라도 배우는 바가 있을 거다. 다치기 전에 말릴 테니, 걱정하지 말고."

"그, 그럼 사람이라도 바꿔주시면… 흡!"

도리안은 고개를 들어 올리다가 버렌과 눈을 마주치고서 찔끔 몸을 떨었다.

"네가 밖에서 어떤 신분이었든. 지금은 지그하르트의 수련생이다. 지그하르트의 명예를 떨어뜨린다면 지금 이곳에서 목을 베어주마."

버렌의 목소리는 아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살벌했다.

"허억!"

도리안이 입을 떡 벌리고서 리메르의 뒤로 몸을 숨겼다.

"도리안. 말 그대로 대련일 뿐이다. 무섭게 여기지 말고, 지금까지 네가 해온 걸 보여준다고 생각해."

"아, 알겠어요."

리메르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도리안의 떨림이 살짝이나마 가셨다.

"버렌. 너도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명예도 좋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들은 세상에 많으니까."

"...."

버렌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좀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기세를 풀었다.

"음…."

라온은 버렌과 도리안 사이에서 웃고 있는 리메르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잘 통하네.'

그의 조언은 양쪽 모두에게 적절하게 먹혀들었다. 매일 놀기만 하는 것 같아도 수련생들을 잘 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저게 스승이라는 건가.'

전생에서 암살자로 사육될 때 저런 일이 있었다면 교관은 도리안과 버렌의 목을 둘 다 베어버렸을 거다.

저렇게 달래주고,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드는 게 진짜 스승인 것 같다.

"그럼 준비."

리메르 덕분에 정리가 끝났고, 버렌과 도리안이 마주 섰다.

"시작!"

시작 소리와 동시에 버렌이 달려가 검을 내질렀다.

오러를 운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전의 대결 때와는 차원이 다른 속도였다.

"히이익!"

도리안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틀었다. 덕분에 버렌의 검은 종이 한 장 차이로 허공을 찔렀다.

"도망치지 마라!"

버렌은 인상을 찌푸리며 검을 내리쳤고, 도리안은 수련검을 휘적거리며 발만 놀렸다.

"우아악!"

버렌이 휘두르는 검이 다섯 번이 넘어갔지만, 도리안은 끝까지 도망만 다녔다.

"언제까지 도망만 칠 거냐."

버렌이 눈매를 좁히며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좁혀드는 거리. 숨겨둔 실력을 발휘한 것이다.

"우허헉!"

도리안이 급하게 몸을 빼려 했지만, 늦었다. 버렌의 수련검은 이미 그의 허리에 닿아 있었다.

뻐어억!

강렬한 소리와 함께 도리안의 몸이 우측으로 튕겨 나갔다.

"어우욱, 하, 항복! 항복합니다!"

도리안은 허리를 부여잡고, 버둥거리며 항복이라 소리쳤다.

'역시 몸이 유연하군.'

라온은 바닥에 누운 도리안을 보며 피식 웃었다. 녀석의 재능은 나쁘지 않다. 특히 오러 운용 속도와 발 빠르기는 직계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버렌의 실력을 감당하기엔 한참 무리였지만.

"버렌. 넌 아직 감정을 조절 못 하고 있다. 제대로 상대했다면 다섯 합 안에 검이 닿았을 거다."

"…맞습니다."

버렌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서 물러났다.

"도리안. 넌 왜 자꾸 도망만 치는 거야. 할 수 있다니까. 도망치지 않고 맞서서 싸웠으면 더 오래 버틸 수 있었어."

"죄, 죄송합니다. 근데 무, 무서워서…."

"무서울 수는 있지만 여기서 극복하지 못하면 실전에선 서 있을 수도 없다. 검사가 되기 위해선 그 공포를 이겨내야 해."

도리안은 버렌과 달리 한참 동안 잔소리를 듣다가 돌아갔다.

"다음 루난이랑 크레인."

"네."

"예!"

루난과 방계 크레인이 대련장으로 걸어갔다.

크레인은 꽤 힘 있는 방계의 아이로 예전에 자신에게 덤볐던 버렌의 졸자 중 하나다. 실력은 괜찮지만, 루난의 상대는 되지 않는다.

"시작."

리메르가 손을 아래로 내리자마자, 루난과 크레인이 앞으로 뛰어들었다.

"흐압!"

선공은 크레인이다. 이를 악문 채 좌측으로 젖혀둔 수련검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

루난은 평소의 표정을 유지하며 하얀 냉기가 뿜어지는 검을 올려 쳤다.

떠엉!

쇳덩이가 찌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크레인의 검이 떨어져나와 잘 다져진 대련장의 땅에 박혔다.

루난은 뒤늦게 검을 내지르고서도 크레인을 검을 쳐내버린 것이다.

"끄윽…."

크레인이 손을 바르르 떨며 뒷걸음질 쳤다.

"거기까지."

리메르는 턱을 긁적이며 대련장으로 나왔다.

"크레인. 긴장을 너무 많이 했다. 손목과 손아귀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갔어. 검을 잡을 땐 여유를 주어야 한다."

"죄, 죄송합니다."

"그리고 루난. 후발선공의 묘리는 좋았지만, 검 끝까지 오러가 담기지 못했다."

"네."

루난은 담백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였다.

"수고했어. 그럼 다음…."

* * *

대련 훈련은 해질녘까지 계속되었고, 남은 사람은 두 명이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마르타 지그하르트. 앞으로."

"기다리다 늙어 죽는지 알았네"

마르타의 검은 눈동자가 흥분으로 번들거렸다. 반면 라온은 덤덤한 눈으로 마르타와 마주 섰다.

"8개월이면 나치고는 많이 참았지. 이제 끝을 내자고."

"내기 하나만 더 걸까?"

라온은 이를 드러내는 마르타에게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뭐?"

"패한 사람이 승자. 즉, 수석의 말에 복종하는 게 어때?"

"복종이라. 너 같은 둔재의 복종 따윈 필요 없지만, 상관없겠지."

마르타는 가늘어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진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늘의 마지막 대련이네. 모두 잘 봐두도록. 그럼…."

리메르가 알기 힘든 미소를 지으며 손을 올렸다.

"시작!"

리메르의 손이 내려가자마자 마르타가 땅을 박찼다. 터엉 소리와 함께 그녀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후웅!

내려치는 마르타의 수련검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캬앙!

검과 검이 맞부딪치며 튀어나온 불똥이 허공으로 흩날렸다.

"왜 오러를 사용하지 않았나 궁금해?"

마르타는 검을 밀어붙이며 히죽 웃었다.

"먼저 검술로 붙어보자고, 그 뒤에 오러가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알게 해줄 테니까!"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는 순간 검술이 급격하게 변화했다. 속도와 힘만이 아니라, 궤도마저 현묘해졌다.

캬앙!

라온이 마르타의 수련검을 쳐내며 눈매를 좁혔다.

'모르는 검술이군.'

빠르고, 강하면서도 현묘하다. 직계 교육을 받을 때 배운 고급 검술인 것 같았다.

'강하긴 하지만.'

완벽하지 않은 검술. 차라리 모두가 아는 연성검을 펼치는 게 더 나았을 거다.

컁! 캬아앙!

라온은 연성검의 다섯 초식을 연거푸 펼쳐 마르타의 검술을 막아냈다.

"전부 막아?"

새로운 검술을 수십 번 내치고도 자신의 방어를 뚫어내지 못하자 마르타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모든 검술은 다섯 가지 형태에서 시작한다. 그것만 알고 있다면 막아내는 건 어렵지 않아."

마르타가 내지른 검을 쳐내고 근접하여 주먹을 내질렀다.

후우웅!

그녀는 우측으로 보법을 밟아, 주먹을 피해냈다. 빈틈을 노리듯 허리를 향해 검을 후려쳤다.

캬아앙!

라온은 검을 사선으로 세워 공격을 흘려낸 뒤 마르타를 밀어붙였다.

"역시."

마르타가 검을 휘돌리며 뒤로 물러섰다.

"인정하지. 넌 재능이 있어. 다만 그건 검술 하나일 뿐이야. 오러가 약한 반쪽짜리 무인이 갈 길은 이미 정해져 있어!"

그녀의 주변으로 황색 기류가 피어났다. 대지 속성 오러에 연무장이 잘게 흔들렸다.

쿠우웅!

마르타가 발을 굴렀다. 땅이 파여나가며 그녀의 수련검이 대기를 꿰뚫었다.

"흡!"

쏟아져 내리는 황색 기운을 향해 검을 들어 올렸다.

콰아앙!

검을 막아내는 것만으로 다리가 휘청였다. 아까와 같은 돌진이었지만, 그 속도도 위력도 차원이 달라졌다.

"오, 막았네?"

뭉툭한 칼날 사이로 보이는 마르타의 눈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이제 좀 알겠지? 제대로 된 오러가 담긴 검이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그녀는 손목과 허벅지를 떨고 있는 라온을 보며 턱을 치켜올렸다.

"오러는 검술 이상으로 재능을 타지. 7개월 만에 콩알만 한 오러를 만든 네 재능으로 검사는 무리야."

마르타가 내려치는 검의 위력과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검격을 막아낼 때마다 몸 전체가 휘청였다.

"지금 이 오러도 내 전력이 아니야. 마지막 기회를 주지. 지금 항복해. 다음에는 뼈를 분질러 줄 테니까."

"말 참 많네."

라온이 우측으로 칼을 내리쳤다. 쾅 소리와 함께 마르타가 밀려 나갔다.

"마지막 배려를 걷어차다니, 진짜 멍청하네."

마르타가 음성이 북풍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말끝마다 재능. 재능. 이 집안의 인간들은 귀찮을 정도로 재능을 좋아한다니까."

라온이 코웃음을 쳤다.

'재능은 물론 중요하지.'

하지만 재능 이상으로 무인의 기질이 중요하다. 아무리 강한 무학을 익히고, 뛰어난 재능을 가졌어도 인간이 약하다면 아무 소용도 없다.

"재능이 없는 네겐 시끄럽게만 들리겠지만 난 재능 소리를 들을 때마다 즐거워."

마르타의 입꼬리가 풀잎처럼 올라갔다.

"그러니 확실하게 보여줄게. 진짜 재능이 무엇인지를!"

그녀의 몸에서 피어나던 갈색 기운이 진해졌다. 날카롭게 갈린 바위 그 자체가 떨어져 내리는 듯했다.

"난 반대로 보여주지."

재능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걸.

라온의 눈에 황혼이 비치고, 시퍼런 검날에 새빨간 불꽃 한 송이가 피어났다.

만화공 일화(萬火功 一火)

첫 번째이자, 하나의 불꽃.

지그하르트의 전설이 천년의 세월을 넘어 라온의 검 끝에서 타올랐다.

34화

마르타 지그하르트는 자존심이 강하다.

전 기수에서 낙제한 이유도 실력 부족이 아니라, 자존심을 건드린 직계 두 놈을 반 죽여놓았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 여러 귀찮은 일들이 생겼기 때문에 5 연무장에선 적당히 넘기려고 했지만, 신경을 건드리는 놈이 하나 있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아이 같지 않은 그 꼬맹이가 계속 거슬렸다.

당장 싸우자고 하고 싶었지만, 리메르의 말대로 오러조차 익히지 않은 녀석을 때리는 건 추한 짓이라 참았다.

그래서 라온이 오러를 익혔다고 들었을 때 다른 누구보다도 기뻐했다. 이전의 굴욕을 갚아줄 수 있으니까.

그렇게 대련이 시작되었고, 라온과 검을 맞댔다.

놈의 검술 재능은 실전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처음 본 검술을 상대하면서도 거의 완벽한 방어를 선보였다.

하지만 타이탄의 오러를 운용한 순간부터 라온은 종이 인형처럼 가볍게 밀려났다.

예상대로였다.

오러의 크기와 정심함이 하늘과 땅 차이였으니까.

모든 상황은 마르타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원한다면 당장에라도 라온의 뼈를 부술 수 있을 정도.

그걸 알고 있을 텐데, 라온의 눈빛은 죽지 않았다.

얼마든지 와라!

라고 도발을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 누구 손에 목덜미가 잡혀 있는지도 모르는 멍청한 토끼를 보는 듯했다.

한심한 놈.

마르타는 이죽거리며 검을 내리쳤다. 더 강한 오러와 힘을 담았다.

쿵!

대련장에 작은 울림이 있었다.

하지만 놈은 버텼다.

연속으로 검을 내리쳐도 쓰러지지 않았다.

짜증이 났다.

재능이 바닥인 주제에 위를 향하려는 모습에 속이 끓어 올랐다.

'날 원망하지 마라.'

사지가 부러져도 어쩔 수 없다. 마르타는 더 강렬한 오러를 끌어 올린 뒤 검을 앞으로 겨누었다.

강석의 자세.

날카로운 바위의 기세로 라온의 방어를 뚫어버릴 생각이었다.

땅을 박차려는 그때.

라온의 칼날의 끝에 붉은색 꽃이 타올랐다.

작디작은 불꽃.

하지만 무엇보다 새빨갛고 아름다운 불길을 본 순간 등골 사이로 오싹한 소름이 돋아올랐다.

'저게 뭐야.'

섬뜩하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아니야!'

마르타가 이를 악물었다. 잠깐이지만 라온 따위에게 겁을 먹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기 싫었다.

우우웅!

수련검의 뭉툭한 칼날에 모아둔 타이탄 오러를 그대로 내리쳤다.

화르륵!

그 순간 라온이 한 발을 걸었다. 그의 수련검에서 타오르던 작은 불꽃이 하나의 선을 창출했다.

좌에서 우로 그어지는 붉은빛의 선. 그 선에 닿은 타이탄의 오러가 녹아내렸다.

그리고.

뿌득!

단단하기 그지없는 수련검이 반으로 쪼개져 허공을 노닐었다.

터억!

부러진 칼날이 연무장에 박히는 소리가 마르타의 귓속을 후볐다.

"아…."

마르타는 넋이 나간 눈으로 반쪽 반 검을 바라보았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술과 손을 동시에 떨었다.

"그게 네가 말한 재능인가?"

라온 지그하르트가 차가운 눈빛을 발한다. 검 끝에서 타오르던 불꽃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미숙한 칼질 한번 버텨내지 못하는 재능이라. 그 정도라면 의미 없다고 봐도 되겠어."

"너, 너…."

마르타 지그하르트는 평소와 달리 어떠한 대꾸도 하지 못했다. 반으로 쪼개진 검처럼 고개를 숙였다.

* * *

"뭐, 뭐야! 방금 뭐가 어떻게 돌아간 거야!"

"타, 타이탄 오러를 두른 수련검이 일검에 잘렸어."

"미, 미친…."

라온은 앞뒤로 쏘아지는 수련생들의 시선을 느꼈다. 당황, 불신, 경악. 숨 쉬는 것도 잊은 것 같았다.

"허…."

그건 앞에 있는 리메르도 마찬가지였다. 긴 귀를 더 뾰족하게 세운 채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일검에 마르타의 검을 베는 건 그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던 모양이다.

'하긴 나도 놀랐으니.'

만화공의 첫 번째 단계 일화의 위력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제대로 조절하지 못했다면 마르타마저 베어버렸을 정도.

'2성이 이 정도라면….'

3성 이후의 위력이 어떨지 기대되어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으으…."

아래에서 들려온 신음에 시선을 내렸다. 마르타의 검은 눈동자가 뻘겋게 타오르고 있었다.

'저대로는 인정 안 하겠군.'

굴복한 표정이 아니다. 검이 잘리는 걸 제대로 보지도 못했으니, 패배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

"인정 못 해."

마르타의 입에서 예상했던 그 단어가 그대로 흘러나왔다. 그녀는 갈라진 검을 내던지고 주먹을 말아쥐었다.

고오오오!

타이탄 오러가 그녀의 육신을 감싸며 깨지지 않는 바위 같은 기세를 만들어 냈다.

"그럴 줄 알았어."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련검을 내려놓았다.

"네 입에서 졌다는 말이 나오도록 만들어주지."

"그런 일은 없어!"

마르타가 땅을 박찼다. 이번에는 정면이 아니라, 좌측으로 돌진해온다. 딱딱한 움직임이지만, 빠르면서 묵직했다.

"으하합!"

순식간에 접근해 기합과 함께 주먹을 찔러왔다.

터엉!

라온이 팔꿈치로 주먹을 내리찍었다. 무지막지한 충격에 마르타의 몸이 뒤틀렸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끝까지 주먹을 쏟아냈다.

뻐억!

손아귀로 원을 그렸다. 주먹을 부드럽게 막아낸 뒤 발로 마르타의 복부를 후려쳤다.

"끄흡!"

정타가 들어갔음에도 마르타는 약한 신음만 흘릴 뿐 물러서지 않았다. 단단한 오러에 어울리는 두터운 정신력이었다.

"아, 아직이야!"

마르타가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뻗어냈다. 명가의 무학은 이 순간에도 빛을 발하는지 당황한 와중에도 제대로 된 투로를 그렸다.

'그래도 그 정도론 무리지.'

빠르고, 정확한 투로에 강력한 오러가 담겼지만, 그뿐. 단련은 한참 부족했다.

뻐억!

이마를 향해 쏘아져 온 주먹을 피하고, 손날을 세워 마르타의 허리를 후려쳤다.

"끄흡!"

타이탄의 오러를 뚫고 들어간 충격에 마르타의 입에서 침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잠시 몸을 움찔거렸다가 더 빠르게 반격을 해왔다. 단아한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흉폭함이다.

'맷집 하나는 좋군.'

성인 검사도 쓰러질 주먹을 연속으로 얻어맞고도 반격이라니, 정신력과 육체 내구성은 수련생의 수준이 아니다.

"흐아압!"

마르타가 발을 굴렀다. 대련장의 바닥에 깔린 모래들이 들썩 일어나 잠시 시야를 가렸다. 기척을 파악하기도 전에 우측에서 주먹을 쏟아졌다.

콰앙!

투석기의 바위 같은 주먹이다. 팔뚝으로 막을 때마다 전신이 흔들렸다.

"으아아!"

마르타는 간신히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호흡을 멈추고 무수한 주먹을 뻗어냈다.

뻐억!

순식간에 스무 번의 주먹을 내지른 마르타가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멈췄을 때 라온의 주먹이 그녀의 복부를 강타했다.

"꺼헉!"

마르타가 배를 부여잡고 뒷걸음질 쳤다. 눈동자에 불신이 가득 깔려 있었다.

"선언한 말과 달리 주먹도 별론데."

라온은 마르타의 주먹을 막아낸 팔과 손목을 가볍게 털어냈다.

"어, 어떻게…."

"잘."

당황하는 마르타를 조롱하며 손목을 돌렸다.

'만화공은 방어도 뛰어나군.'

꺼지지 않는 불길을 이미지로 삼은 덕분인지 만화공의 오러는 공격만이 아니라 방어에도 효율적이었다.

"후우욱…."

마르타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말아 쥔 주먹으로 타이탄 오러가 응집되기 시작했다.

고오오!

오러를 한곳에 모으는 일점이라는 기예. 저 나이에 벌써 저걸 사용하다니, 역시 뛰어난 자질이다.

더 이상 얼굴에 흥분도 보이지 않았다. 분노 가득했던 눈빛에 정광이 돌아왔다.

"인정하마. 네놈은 강해."

마르타의 주먹에 모여든 기운이 제대로 된 형태를 갖췄다. 소드 유저 수준에 올라왔다는 뜻이다.

"이걸 넘어선다면 패배를 인정한다!"

마르타가 먹이를 본 곰처럼 내달렸다. 산 정상에서 바위가 굴러떨어지는 듯한 묵직함.

"후우."

라온이 가는 한숨을 뱉어냈다. 진각을 밟으며 주먹을 내질렀다.

발목에서부터 시작된 회전이 대퇴근을 넘어 허리에 도달한 순간 내지르는 주먹에 폭발력이 담겼다.

콰아앙!

만화공의 불꽃이 깃든 주먹이 갈색 오러의 무더기를 깨뜨리고, 마르타의 팔을 뒤틀었다.

"아…."

타이탄 오러가 갈가리 쪼개지며 눈에 핏발이 선 마르타의 얼굴이 보였다.

화아아악!

권격의 후폭풍에 휩쓸린 그녀는 폭풍을 맞은 갈대처럼 휘청이며 튕겨 나갔다.

"으…."

마르타는 목을 바르르 떨다가 눈을 감고 뒤로 넘어갔다. 기절한 상태에서도 말아 쥔 주먹은 끝까지 풀지 않았다.

'정신력 하나는 대단하군.'

곧 15살이 되는 아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정신력이다. 실력과 재능 이상으로 놀라웠다.

"허억!"

"어…."

"아, 압도적이잖아."

"말이 안 돼. 어떻게 마르타 님을…."

마르타를 따르던 수련생도, 반대의 위치에 섰던 수련생들도 놀라 입을 다물질 못했다.

"라온 지그하르트…."

버렌은 말아 쥔 주먹을 바르르 떨며 라온을 노려보았다.

"...."

루난은 평소처럼 뚱한 표정이었지만, 흥분했는지 뻐끔거리는 입에서 냉기가 흘러나왔다.

"어이구…."

리메르는 잠시 멍하니 섰다가 바로 쓰러진 마르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달려갔다.

"쯧, 잔소리를 퍼부어야 하는데 기절이라니."

리메르는 마르타의 상태를 확인하고서 길게 혀를 찼다.

"오늘은 이걸로 끝이다. 모두 돌아가서 오늘 무엇이 더 모자랐는지 생각해보도록."

"아, 예."

"그럼 라온을 제외하고 모두 해산."

"전 왜…."

"줄 것도 있고, 하지 않은 잔소리가 남았으니까."

그는 씩 웃고서, 연무장의 벽을 넘어 의무실로 달려갔다.

"라온 지그하르트."

라온이 리메르가 뛰어넘은 벽을 멍하게 보고 있을 때 버렌이 다가왔다.

"난 네 녀석이 따라올 거라 예상했다."

그는 감탄한 것 같기도, 기대하는 것 같기도 한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난 마르타와 다르다. 네가 토끼처럼 앞서가도 포기하지 않고, 거북이처럼 느리게 가도 방심하지 않는다. 훗날 치러질 졸업시험에서 가진 모든 것을 걸고 널 꺾겠다."

버렌은 그 말을 남기고, 연무장을 떠났다. 시원해 보이는 표정이다.

'확실히 변했군.'

이전처럼 아집과 질시로 가득한 버렌은 없었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자만심을 버리고 자신감을 채웠다.

툭툭.

뒤에서 누군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돌아보니, 루난이 보라색 눈동자를 말똥거리고 있었다.

꾸벅.

그녀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잘했다는 것 같았다. 구슬 아이스크림이 든 상자를 꼭 껴안은 채 종종걸음으로 연무장을 떠났다.

"나 참."

라온이 어하고 입을 벌렸다. 저 녀석은 뭘 하고 싶은 건지 여전히 뭔지 모르겠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의자가 있는 단상 옆으로 걸어갔다.

의자에 걸터앉아 리메르를 기다리고 있을 때 단상 위에 있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리메르가 낮잠을 잘 때 베개 용도로 쓰던 책이다. 펼쳐보았다.

"어?"

내용을 살핀 라온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이건….'

베게 용도로 가지고 다니는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책 안에는 수련생들의 장점과 단점. 그리고 개선할 방법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첫 페이지에 적힌 버렌의 내용을 읽어보았다.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지만, 자만심이 과함. 수련생 신분이 된 이후 많은 변화를 이룸. 자신의 부족함이 정신적인 부분이라는 걸 깨닫고 명상에 시간을 쓰고 있음. 우아하면서도 체계적인 검술을 사용하고 본인도 이를 중요시….'

수련생을 자세히 보지 않았다면 적기 힘든 내용이다. 그런데 이런 글이 하나가 아니라, 수련생의 숫자대로 있었다.

'나는….'

라온이 본인의 내용을 보았다.

'검술과 권법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고, 마나에도 뛰어난 감각이 있지만, 오러 연공법의 습득에 애를 먹고 있음. 속성에 관한 교육이 필요함. 불을 느끼게 할 방법을 찾는 게….'

자신에 관한 내용도 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리메르 교관….'

리메르가 항상 뺀질거리면서 노는 줄만 알았는데, 실제로는 모든 것을 세세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라온은 가슴을 따뜻하게 채우는 뭔지 모를 감정을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지만 썩 나쁘지 않았다.

-의외로군.

'그렇지?'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여전히 건방지고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라스는 자신의 몸을 먹어 치우는 걸 실패한 이후 세상을 더 염세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지상에서 뾰족귀와 난쟁이가 건너온 적이 있었다. 까부는 놈들을 모조리 얼려서….

'말 진짜 많네.'

라온이 꽃팔찌를 툭 치자, 라스가 입을 다물었다. 점점 말이 많아져서 감당이 안 된다.

-끄윽, 본왕은 과묵의 대명사다. 마계의 군주 중에서도 말 없기로 제일이었는데, 말이 많다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말이 많다는 건….

'어우.'

다시 팔찌를 쳐서 입을 다물게 했을 때 리메르가 벽을 넘어 돌아왔다.

도둑도 아니고 왜 맨날 문 놔두고 저렇게 들어오는 건지 모르겠다.

"라온."

리메르가 웃으며 다가왔다, 그의 표정엔 여전히 놀람이 담겨 있었다.

"오러를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훌륭한 운용이었다. 다만 일부러 맞아주던가, 검을 버리는 건 할 필요 없는 행동이었어."

리메르가 웃으며 어깨를 툭 쳤다.

"다만 그건 교관으로서의 의견이고, 나라는 개인으로서는 만족스러운 한 판이었다. 진짜 수석이 된 걸 축하한다. 이제 이건 네 거다."

그는 품에 챙겨놓았던 목갑을 건네주었다. 마르타가 맡겨두었던 영약이었다.

"감사합니다."

라온은 영약을 받으며 리메르에게 고개를 숙였다.

"너희끼리 내기한 거니, 나한테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아뇨. 감사합니다."

이건 영약에 대한 감사가 아니다. 지금까지 수련을 지켜봐 주고, 여러 조언을 해준 것에 대한 감사다.

그는 지각하고, 농땡이를 부릴지언정, 필요할 땐 확신한 교육을 해주었다.

실제로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도 만화공을 익히지 못했을 수도 있다.

전생에선 스승이 아니라, 사육사만을 겪어 봤기에 리메르라는 사람은 감사를 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하여튼."

리메르는 픽 웃었다. 그저 기껍다는 얼굴로 모두를 바라보았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잠깐만."

그는 검지와 중지를 모아서 손을 까딱였다.

"말했잖아 나와 갈 곳이 있다고."

"갈 곳이요?"

"가주전 알현실."

리메르가 씩 웃으며 손가락으로 서쪽을 가리켰다.

"가주께서 널 호출하셨다."

35화

"저를요?"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대련이 끝나자마자 호출이라니,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아, 정확하게 말하자면 수석 수련생을 데리고 오라 하셨지."

리메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수석 수련생이라.'

그 뜻은 누구라도 수석이기만 하면 된다는 의미였다. 아무래도 글렌은 이번 대련에서 마르타가 이기리라 생각한 것 같다.

'웃기는 일이로군.'

버렌에 이어 마르타까지. 글렌이 기대했던 수석 후보를 차례로 깨부순 것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호출 이유는 뭐죠?"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냐."

리메르가 입을 빼죽 내밀고 고개를 저었다. 저 표정을 보니, 이유를 알고 있는 게 분명했지만, 알려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언제 가야 합니까?"

라온은 주머니를 꽉 채운 목갑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지금 당장."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고서 몸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그러고 가려고? 옷도 안 갈아입어?"

"네."

"너 가주님 안 무섭냐?"

"잡아먹으려고 부르는 것도 아닐 텐데, 무서워할 필요는 없죠."

글렌의 그 차가운 눈빛이 거북한 건 사실이지만,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역시 넌 재밌다니까."

리메르가 낄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라온의 어깨를 툭툭 쳤다.

"가자."

"예."

라온은 리메르의 뒤를 따라서 가주전 알현실로 향했다.

"정말 마르타 님이 졌다고?"

"저렇게 작은 아이에게…."

"믿을 수가 없군."

"나이도, 나이지만 재능이 다를 텐데."

"운이다. 운일 수밖에 없어!"

지나가면서 만나는 사람들은 신기하거나, 놀란 눈빛으로 라온을 힐끔거렸다.

"네가 마르타를 꺾은 사실이 벌써 퍼진 모양인데."

리메르가 슬쩍 뒤를 돌아보며 능글맞게 웃었다.

"그게 벌써요?"

"지그하르트는 폐쇄적인 가문이니까."

그는 외부에 폐쇄적이니, 내부의 소문은 바람처럼 퍼질 수밖에 없다고 중얼거렸다.

"거기다 마르타는 같은 직계를 꺾을 정도로 뛰어나잖냐. 그런 아이를 정면에서 이겼으니 소문이 퍼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렇군요."

"그러니 주의해야 해. 올라가는 것만큼 아래로 추락하는 것도 빠르거든."

리메르는 그렇게 말하며 엄지손가락으로 본인을 가리켰다. 단전이 망가진 뒤 추락했던 본인의 모습을 말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축하한다. 이건 좋은 일이니까. 즐겨."

그는 휘파람을 불면서 가주전으로 들어갔다.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었는지, 무인들은 막지 않고 길을 비켜주었다.

"가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1층의 대복도를 지나 알현실 앞에 서자, 글렌의 집사 로엔이 방긋 웃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덜컹.

심장이 멎을 듯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철문이 갈라지고, 하늘을 뚫을 듯한 장대한 기운이 문밖으로 퍼져 나왔다.

라온이 왼쪽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 정도였던가….'

오러를 익히니 글렌의 기세가 더 거대하게 느껴진다. 끝을 알 수 없는 막강한 기파에 손 떨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인간 따위가….

라스 역시 글렌의 기운에 짓눌린 것처럼 목소리가 떨렸다.

"오러가 있으니, 제대로 느껴지지?"

리메르는 이마 위로 땀 한 방울을 흘리며 웃었다.

"저게 우리들의 왕이다."

그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음…."

마른침을 삼키고, 그를 따라갔다. 걸어갈수록 글렌의 기세가 강해진다. 막대한 기파에 어깨가 짓눌리는 것 같았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라온은 리메르와 같은 선상에 서서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그제야 글렌의 기파가 줄어들었다.

찰나의 순간에 기세를 조절한다. 하늘에 닿은 무력. 데루스조차 따라가지 못할 것 같았다.

"일어나라."

명령과도 같은 말에 라온의 목이 자동으로 올라갔다. 글렌의 붉은 눈을 마주하자, 주변의 모든 것이 흐릿해졌다. 정말이지 압도적인 존재감이다.

"호출하신 수석 수련생을 데리고 왔습니다."

"...."

글렌은 리메르의 말에도 대답하지 않고,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기도 혹은 평온해 보이기도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도 읽히지 않았다.

"만화공을 습득했나."

"예."

"얼마나 걸렸지?"

"7개월 정도 걸렸습니다."

"느리군."

그는 턱을 살짝 틀었다. 한심해하는 것 같았다.

"오러를 일으켜보아라."

글렌의 지시에 라온을 리메르를 보았다. 가주 앞에서 오러를 꺼내도 되냐고 눈빛으로 물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라면 안 되지만, 본인이 하라고 말씀하시잖냐."

"알겠습니다."

라온이 일어서서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화르륵!

죽어가던 잔불이 일어서는 듯한 소리와 함께 새빨간 불꽃이 피어났다. 만화공 일화. 하나이자, 첫 번째 불꽃이 타올랐다.

"그게 만화공의 첫 번째인가."

진흙 밑바닥에 가라앉은 듯한 글렌의 눈동자에 작은 흔들림이 있었다.

"넌 무엇을 추구하며 그 오러를 피워냈지?"

"꺼지지도 꺾이지도 않는 불입니다."

"꺼지지 않는다?"

"바람이 불어도, 비가 내려도 절대 꺼지지 않는 불꽃을 그렸습니다."

글렌은 입을 꾹 다문 채로 라온의 손아귀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착각일 수도 있지만, 조금 감격한 것처럼 보였다.

"괜찮구나."

"예?"

그에게서 생각지도 않았던 칭찬이 들려왔다. 잘못 들었나 싶어서 귀를 만져보았다.

"화속성 검사나, 마법사는 최고의 화력을 자랑하지만, 그만큼 지속력과 방어력이 약하다. 꺼지지 않는 불꽃이라면 너 하기에 따라 그 약점을 극복할 수도 있겠지. 어떻게 사용할지를 잘 궁리해보도록."

"…알겠습니다."

라온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글렌이 갑자기 저런 조언을 해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판별식에서 해주지 못했던 말을 지금 해줬을 뿐이니까."

"아…."

뭔지 알겠다. 글렌은 예전 판별식에서 자신에게만 조언을 해주지 않았었다. 그때의 말하지 못한 조언을 지금 해준다는 것 같았다.

'신기한 성격이네.'

글렌은 빙하를 깎아 인간으로 조각한 듯 차갑지만, 챙겨줄 건 챙겨준다.

겉으로는 챙겨주지만, 속으로는 인간을 물건처럼 사용하는 데루스와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이제 널 부른 이유를 말하겠다."

글렌이 턱을 괴며 라온을 굽어보았다.

"내년쯤 너희들에게 임무를 내리겠다."

"임무라고 하셨습니까?"

"임시 수련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너희들이 수련을 시작한 지 1년이 한참 넘었다. 전부 오러를 습득해 소드 비기너가 되었으니, 밖으로 나가봐도 괜찮겠지."

"음…."

"너희가 어리다고 생각하나? 전투에 나이는 상관없다. 검사는 검을 들 수 있다면 언제, 어느 때라도 싸워야 한다."

'그게 아니라, 늦었다고 생각한 건데?'

전생에선 14살이 아니라, 8살에 암살 임무를 받았었다. 지금 나이라면 빠른 게 아니라, 느린 편이다.

"너만이 아니라, 수련생 모두 단단히 준비하라 일러두어라. 어떤 때, 어떤 상황에서도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그만 나가보도록."

글렌은 눈을 내리감고 손을 저었다. 라온은 다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뒤 알현실을 나갔다.

"임무를 할 때가 되긴 했지."

리메르가 깍지 낀 손으로 뒷머리를 잡으며 히죽 웃었다.

"저희가 수행할 임무는 뭡니까?"

"아직 정하지 않았어. 몬스터 토벌, 요인 호위, 던전 탐사, 산적 소탕. 무엇이 나올지 모르니, 가주님의 말씀대로 모든 상황에 대비할 수 있게 준비해야 할 거야."

"교관님도 같이 가시는 거 아닙니까?"

"가긴 가지만, 내 임무와 너희의 임무는 달라. 교관의 목적은 너희들의 보호니까.

"알겠습니다."

"엥?"

리메르는 자신이 당황할 줄 알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임무는 당연히 스스로 하는 거지.'

8살에 임무를 받았을 때도 지원 따위는 없었다. 유사시에 보호해 줄 교관이라니, 얼마나 사치인가.

'지그하르트는 내 생각보다 유순한 곳이네.'

라온은 역으로 당황한 리메르를 뒤로 하고 웃는 얼굴로 가주전을 나섰다.

* * *

라온이 별관으로 떠난 뒤 리메르는 다시 알현실로 들어갔다.

"기분 좋아 보이십니다?"

리메르는 단상 위에 선 글렌을 보며 빙긋 웃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다."

"에이, 그런 거치고는 입꼬리가 2mm 정도 올라가 있잖습니까."

"헛소리 그만하고, 마르타의 상태나 말해라."

"타박상이 심하지만, 요양하면 나을 상처입니다. 문제는 정신적인 충격이죠."

"그 정도도 극복하지 못한다면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달 이유가 없지."

글렌은 8살에 입양된 마르타에게도 예외 없이 지그하르트의 정신을 말했다.

"라온이 불의 이미지를 그릴 때 네가 도움을 준 건가?"

"저도 나름 스승이니까요. 다만 선택한 건 라온입니다. 전 여러 개의 길이 있다는 것만 알려줬을 뿐입니다."

리메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기대하던 초대 가주의 오러를 보신 소감은 어떠신가요?"

"적혀 있던 그대로였다. 화염으로 이루어진 꽃을 보는 듯 아름답더군. 그 위력 역시 크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고."

"네. 4년 넘게 쌓은 마르타의 타이탄 오러를 아예 부숴버렸죠. 말이 되지 않는 위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색이 황금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색은 불꽃의 위력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거다. 그 아이가 앞으로도 제대로 된 길을 걸을 수 있게 지도해주어라."

"역시 가주님은 그 아이를 특별하게 생각하시는군요."

"...."

글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로 손을 저었다. 귀찮으니, 나가라는 뜻이었다.

"그럼 아이들의 임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건 내 소관이 아니라, 총관부에서 알아서 할 일이다. 넌 그런 것에 신경 쓰지 말고, 아이들이 어떠한 임무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강건하게 키우도록."

"옙! 아이들이 나태해지지 않도록 확실하게 교육하겠습니다."

"너나 잘하라는 말밖에 나오질 않는군."

글렌이 리메르의 당당한 표정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게 반면교사라는 거죠."

리메르는 지지 않고 씩 웃었다.

* * *

"음?"

주디엘은 정원 앞을 손질하다가 뒤에서 들린 걸음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헉, 라, 라온 도련님!"

라온이 자신을 지그시 내려보고 있었다. 그와 눈을 마주친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오셨습니까!"

일어서며 그의 모습을 살폈다. 옷에 먼지가 많이 묻었지만, 다친 곳은 전혀 없어 보였다.

'설마 이긴 거야? 그 마르타를?'

한 달 전부터 나온 이야기니, 오늘 라온이 마르타 지그하르트와 대련을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길 줄은. 그것도 저렇게 멀쩡하게 이길 줄은 생각해보지 못했다.

"대련에서 이기신 겁니까?"

"어떨 거 같아?"

라온이 빙긋 웃었다.

"아…."

승리를 말하는 웃음을 보자 그날 밤이 생각났다. 호수 위로 떠오른 붉은 눈. 그건 공포의 현신이라 칭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 이 괴물이 고작 천재에게 질 리 없지.'

다시 깨닫게 되었다. 라온 지그하르트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조만간 중무전에서 다시 연락이 올 거다. 나를 더 확실하게 조사하라고."

"그, 그렇겠죠."

"네가 알아서 적은 뒤 나한테 가져와라."

"알겠습니다."

그는 소름이 돋아오르는 미소를 지으며 별관으로 들어갔다. 주디엘은 식은땀이 등 뒤를 적시는 걸 느끼며 손에 쥔 잡초들을 떨어뜨렸다.

"천재를 꺾는 괴물…."

* * *

"라온!"

라온은 별관에 들어가자마자, 옷을 걸치던 실비아와 마주쳤다.

"어디 가려고?"

"어딜 가긴! 집에 돌아온다고 한 날인데, 오질 않아서 찾으려고 한 거지!"

실비아가 땅을 박차고 달려왔다. 웬만한 검사들보다 빨라 보였다.

"괜찮아? 다친 곳은?"

그녀의 눈동자는 떨어지는 낙엽처럼 좌우로 쉴새 없이 움직였다.

"안 다쳤어."

"어후…."

실비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만 라온의 몸을 살피는 눈동자는 멈추지 않았다.

"대련이 취소된 거야?"

"아니. 이겼어."

"그런데 다친 곳이 없다고?"

"안 맞았으니까."

"하, 한 대도 맞지 않고 이겼다고?"

"응."

"지, 진짜요?"

헬렌이 들고 있던 실비아의 겉옷을 떨어뜨렸다.

마르타의 재능이 직계와도 비슷하다는 건 모두 아는 정보였기 때문에 저들이 저렇게 당황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아, 안 다쳤으면 일단 밥부터 먹자! 헬렌. 바로 식사를 준비해줘!"

"괜찮아."

"응? 저녁 안 먹었잖아."

"오늘은 할 일이 있거든."

라온은 주머니에서 영약이 든 목갑을 만지며 고개를 저었다.

또 한 번 강해질 시간이었다.

36화

라온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커튼을 치고 방문을 잠갔다. 들어오지 말라고 말해놓았지만, 혹시나 하는 대비였다.

"라스."

그는 손목에 걸린 얼음꽃 팔찌를 툭툭 쳐서 라스를 불렀다.

-버러지 인간 주제에 본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그럴 거면 이름을 알려주지 말던가."

-네놈이 본왕의 빙의를 견뎌낼 줄은 몰랐으니까!

라스는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먹어 치우기 전 마지막 배려로 본인의 위대한 이름을 알려준다고 중얼거렸다.

"위대한 이름은 모르겠고, 이번에도 방해할 생각이냐?"

-본왕은 마계의 군주로서 한 번 입에 담은 말은 지킨다. 앞으로 네놈이 연공을 하는 동안 건드리는 일은 없다.

"하긴 그동안 모아두었던 힘을 다 쏟아부었을 테니."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스는 한 달 전 만화공을 익힐 때 전력을 다해 공격을 해왔었다. 그때 소모한 힘을 벌써 회복했을 리 없다.

-멍청한 놈! 분노의 기운은 언제라도 꺼낼 수 있다. 그저 군주로서 내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서….

"아, 됐어."

-이 콩알만 한 놈이 정말!

말을 끊자, 라스가 부들부들 떨며 냉기를 내뿜었다.

"아쉽네. 또 능력치를 올릴 기회였는데."

-크으으….

라스는 이를 바득 갈았다. 화가 폭발하기 직전인지 냉기의 불꽃 사이로 서리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라온이 바르르 떠는 라스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이놈 앞에서는 방심할 수가 없지.'

라스는 동료가 아니라 적이다. 놈의 앞에서는 연공 중이든, 수련 중이든 방심해선 안 된다. 항상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자, 그럼."

주머니에서 구화단이 든 목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가을 산에서 맡을 법한 마른 수풀의 향이 진하게 풍겨 나왔다.

냄새 좋네.

약향이 방에 퍼지는 것만으로도 약효가 뛰어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후."

라온은 천천히 숨을 내쉬고, 구화단을 입에 넣었다. 씁쓸하면서도 진한 약향이 입안 전체를 휘감았다.

'씹어서 먹으라고 했었지.'

리메르의 조언대로 구화단을 씹어서 삼키자, 목구멍에서 탁하고 풀어졌다.

후우우우.

구화단에 담겨 있던 진하디진한 기운이 굴뚝의 연기처럼 전신의 마나 회로로 퍼져나갔다.

눈을 감고 앉아서 불의 고리를 회전시키고, 만화공을 운용했다.

구화단의 기운이 전신을 휘돌며 근육을 팽창시켰다. 단전이 찌릿거리며 확장되고, 마나에 대한 감각이 극한으로 치솟았다.

화아악!

숯가마에서 데운 것처럼 뜨겁게 달아오른 기운이 마나 회로를 질주했다.

화아아!

마나 회로 내부에서 녹아내린 순수한 냉기는 만화공이 닦아 놓은 길을 따라 전신을 휘돌았다.

'불의 고리를 먼저 운용하길 잘했군.'

불의 고리가 마나 회로 내부의 냉기와 노폐물들을 깔끔하게 닦아내고, 만화공의 기운이 그 길을 빛살처럼 내달려 영약의 낭비를 줄였다.

두 연공법은 꼭 하나처럼 서로의 장점은 극대화하고, 단점은 상쇄시켰다.

우우웅!

구화단의 마나가 모조리 녹아내리며 불의 고리와 육체 그리고 단전이 붉은 선으로 이어진다.

라온은 끝없이 이어지는 마나의 흐름을 느끼며 점점 더 깊은 연공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 * *

떠오른 해가 다시 서산 아래에 걸려 노을이 비칠 때 라온이 두 눈을 떴다.

[네 번째 <불의 고리>가 생성되었습니다.]

[<불의 고리>가 4성의 경지에 올랐습니다.]

[<불의 고리(4성)>가 육체와 영혼의 격을 상승시킵니다.]

[<불의 고리(4성)>의 효과로 근력, 민첩성, 체력이 상승합니다.]

[<불의 고리(4성)>의 효과로 기력, 정신력, 감각이 상승합니다.]

라온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메시지가 아니라도 심장을 세차게 휘도는 네 번째 고리를 느낄 수 있었다.

[체질<운동능력 저하>가 사라집니다.]

[체질<마나감응력 저하>가 사라집니다.]

[<수속성 저항력>이 4성에 올랐습니다.]

[<설화의 감각>이 2성에 올랐습니다.]

불의 고리가 4성에 오른 게 전부가 아니었다. <수속성 저항력>과 <설화의 감각>의 성취도 올라갔다.

'대단하네.'

중급 영약 하나를 먹은 것치고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물론 영약 하나 때문은 아니다.

1년 가까이 전력을 다해서 수련해오며 쌓인 노력이 영약으로 인해 터졌을 뿐이다.

라온이 어깨를 돌리며 일어섰다. 단전은 뜨겁고 서늘한 기운으로 가득 찼고, 몸은 바람을 탄 풀잎처럼 가벼웠다.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몸 상태가 완벽했다. 지금이라면 육체 능력만으로 오러를 사용한 마르타를 가볍게 깨부술 수 있을 것 같았다.

화아악!

상태창을 불러오려 할 때 팔찌에 있던 라스가 푸른 불꽃과 함께 치솟았다.

-4성?

'음?'

-4성의 수속성 저항려어어역?

라스의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려왔다. 녀석은 <불의 고리>의 내용은 보지 못하고, 마지막 떠오른 수속성 저항력만 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은 몰랐지.'

라스는 메시지는 볼 수 있지만, 상태창은 볼 수 없다. 수속성 저항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어 깜짝 놀란 것 같았다.

-이 얍실한 놈! 4성의 수속성 저항력을 가지고 본왕을 속였던 거냐!

"물어본 적도 없잖아."

-으윽!

라스가 시퍼런 눈빛을 번쩍였다.

-저항력이 있을 줄은 알았지만 4성. 그것도 성장형일 줄이야. 이 추잡한 놈!

"수속성 저항력이 있다고 추잡하다니…."

라온이 헛웃음을 흘렸다.

'수속성 저항력으로 저 난리를 치는 걸 보니, <불의 고리>에 대해서 알게 된다면 발광을 하겠군.'

육체와 영혼의 격을 올려주는 <불의 고리>나 환생에 대해 알게 되면 라스가 기절하는 꼴을 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말했잖아. 넌 날 못 이긴다고.'

-닥쳐라. 본왕이 원래의 힘을 발휘한다면 네놈 따위는 가볍게 얼음덩이로 만들 수 있다.

'근데 못하잖아.'

-입을 열 때마다 화를 돋우는구나!

라스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냉기의 불길을 터트리며 돌진해왔다.

화아아아!

찰나의 순간 입술을 시퍼렇게 만들 정도의 냉기가 전신에 회오리쳤다.

"음."

라스도 성장했는지 냉기와 감정의 자극이 이전보다 강해졌다.

'하지만.'

<불의 고리>와 수속성 저항력은 그 이상으로 성장했다. 자연스럽게 회전하는 네 개의 고리 앞에서 라스의 분노는 애교일 뿐이었다.

콰아아아아!

전신에 내리꽂히는 푸른 냉기를 꾹 참고 있으니, 메시지가 떠올랐다.

[<분노>의 공격을 버텨냈습니다.]

[<체력> 능력치가 상승했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라스는 몬스터 같은 괴성을 지르고 나서 라온의 몸에서 빠져나왔다.

-팔다리가 다 잘린 것 같도다. 방법이 없어! 방법이!

놈은 이제 여유 있는 척을 그만두고 악을 내질렀다.

"그래서 말했잖아. 넌 안 된다고."

-본왕의 능력은 냉기만이 아니다.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인 분노를 끌어 올리는 게 진정한 능력이지.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도 분노를 건드려 자폭시킨 마족이 수만 마리….

"근데 그것도 나한테 안 통하잖아."

-끄어어억!

라스의 푸른 불꽃이 뻘게지기 시작했다. 폭발하기 직전의 상태였지만 능력치를 주기는 싫은지 다시 달려들지는 않았다.

"이제 좀 조용하네."

라온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상태창을 켰다.

<상태창>

이름 : 라온 지그하르트.

칭호 : 최초의 승리

상태 : 혹한의 저주(여섯 가닥)

특성 : 분노, 불의 고리(4성), 수속성 저항력(4성), 설화의 감각(2성) 만화공(2성), 혹한의 냉기(2성), 화속성 저항력(2성).

근력 : 40

민첩성 : 41

체력 : 41

기력 : 29

감각 : 53

상태에 닻처럼 박혀있던 운동능력 저하와 마나 감응력 저하가 사라진 게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참을 수 없는 미소가 지어졌다.

몸이 날아갈 것처럼 가볍고 마나가 모공으로 들어오는 듯한 감각이 괜히 느껴지는 게 아니었다.

'능력치도 많이 올랐고.'

모든 능력치가 두 단계 이상 상승했다. 지금 육체 능력과 감각은 정규 검사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것이다.

'수속성 저항력도 큰 수확이고.'

수속성 저항력이 4성으로 올랐으니, 앞으로는 4서클 수준의 마법도 어렵지 않게 견딜 수 있다.

이 저항력은 검사를 상대할 때보다 마법사나, 주술사와 싸울 때 큰 도움이 될 거다.

'얻은 게 많네.'

구화단이 좋은 영약이라고는 하지만 그 이상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냉소적인 자신이 미소를 지우지 못할 정도로.

'몸만 좀 풀어볼까.'

변화한 몸과 오러를 확인해보고 싶어 방문을 열었다.

"헉!"

"어!"

문 앞에 서 있던 실비아와 헬렌이 깜짝 놀라서 뒤로 황급히 물러섰다.

"뭐해?"

"아, 아니. 연공을 한다기에 호법을…."

"저도 마찬가집니다."

두 사람의 눈동자는 살짝 충혈되어 있었다. 밤새 숨소리도 내지 않고 여기서 자신을 지켜준 것 같았다.

기감을 뿌려보니, 창밖에 다른 시녀들도 있었다.

"음…."

라온이 눈을 내리감았다. 만화공을 운용했을 때보다 더한 따스함이 심장을 달궜다.

잠시나마 마나 회로의 냉기가 지워진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고마워."

두 사람과 밖에 있는 시녀들에게 고맙고도 미안하여 고개를 숙였다.

"흐윽!"

"마님!"

"헤, 헬렌. 어쩌지?"

실비아가 눈물을 글썽이며 옆으로 픽 쓰러졌다.

"우리 아들 너무 잘 컸잖아!"

"그러게요! 전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마님!"

"헬렌!"

두 사람이 부둥켜안고 훌쩍였다.

'이게 제일 힘들어.'

라스의 정신 공격이나 마나 회로의 냉기, 글렌 지그하르트의 압박보다 실비아와 헬렌을 대하는 게 제일 버거웠다.

"후우…."

라온은 두 사람이 얼싸안을 때 빠른 걸음으로 별관을 나섰다.

* * *

라온은 이틀 동안 변화한 몸에 적응을 끝냈다.

육체와 감각은 상태창에서 본 것보다 많이 차이가 있었다.

처음 검술을 펼쳤을 땐 내 몸이 아닌 줄 알았다. 같은 검술을 펼쳐도 위력과 속도가 차원이 달라졌으니까.

그렇게 큰 차이가 난 이유는 간단하다.

체질의 변화.

체질에 적혀있던 운동능력 저하와 마나 감응력 저하가 사라지자 몸 상태가 최고조로 올라갔다.

생각을 한 그대로 몸이 움직이고, 모래같이 잘았던 마나가 구슬처럼 크게 느껴졌다.

'이것도 하나의 토대지.'

강해진 무력 이상으로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는 토대를 세운 것 같아 뿌듯했다.

그래서 휴일 마지막 날인 오늘은 휴식 삼아 정원의 화단에 나와 꽃을 손보고 있었다.

-멍청한 놈. 흙을 속을 때는 먼저 아래에서 퍼야 한다. 영양이 있는 흙이 잘 섞이도록 모종삽이 아니라 손으로 만져야 하느니라.

라스는 어울리지 않게도 꽃과 나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덕분에 가져온 책을 펼쳐볼 필요도 없이 화단을 정리할 수 있었다.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얼음꽃으로 화단을 가득 메운 적이 있었다. 화단을 본 마족들은 경배하듯이 꽃에 고개를 숙였지. 그건 본왕에 대한 칭송이자, 경외….

"하아."

저 주절거림만 없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라스는 말이 정말 더럽게 많았다. 특히 '본왕이 마계에 있었을 때.'로 시작하면 최소 10분 동안은 말이 멈추질 않는다.

매일 마계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젠 가본 적도 없는 마계가 친숙해질 지경이다.

-그게 아니다! 꽃잎은 섬세하게 다뤄야 한다. 못하겠으면 일단 얼려!

"알겠다고."

라온이 인상을 찌푸리고 손가락을 까딱였다. 마나를 다루듯 아주 조심스럽게 꽃을 심자, 라스의 잔소리가 그쳤다.

우측의 화단을 모두 정리하고, 좌측의 화단을 보려고 할 때였다.

"음?"

별관 입구에서 가느다란 인영이 걸어온다. 긴 머리카락이 단발로 변했지만, 모를 수가 없는 사람이다.

마르타 지그하르트.

이틀 전 패배했던 마르타가 인상을 잔뜩 쓴 채 다가왔다.

"시비라도 걸러 왔나?"

라온이 흙 묻은 손을 탁탁 털고 일어섰다.

그럼 환영인데.

37화

자주색 노을이 번져가는 저녁 하늘 아래. 마르타가 입을 꾹 다문 채 서 있었다.

시야가 깜깜한 어둠으로 물들 때까지 석상이 되어 있던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져서는 안 됐는데."

마르타가 주먹을 말아쥐었다. 얼마나 힘을 줬는지 핏줄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엄마를 찾을 때까지는 그 누구에게도 져선 안 됐는데…."

목표를 이룰 때까지는 절대 패배하지 않기로 다짐했건만, 져버렸다. 그것도 너무나 추하게.

억지로 마음을 비틀고, 욕을 달고 살고, 사람들과 거리를 둔 보람도 없이 그야말로 발려버렸다.

"빌어먹을!"

양아버지인 데니어 지그하르트는 자신의 재능을 보고, 지그하르트에 입양했다.

그런데 방계이자, 나이도 한 살 어린 라온 지그하르트에게 져버렸으니, 아버지가 어떤 조치를 할지 예상되질 않았다.

데니어는 부드러운 사람이었지만, 그 모든 게 연기일 가능성도 있다. 최악의 경우 쫓겨날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안 돼. 그건 절대 안 돼.'

그렇게 되면 엄마를 찾을 마지막 희망이 사라진다. 바지를 붙잡아서라도 매달려야 했다.

"후우…."

"아가씨."

극도로 긴장한 마르타는 집사인 카멜의 부름에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데니어 님의 편지입니다."

데니어 지그하르트가 편지를 보냈다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마르타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파도처럼 출렁였다.

"여기 있습니다."

마르타는 마른침을 삼키고 편지를 펼쳤다.

[마르타. 첫 번째 패배를 축하한다. 한 번 졌다고 네 이름에 패배자 딱지가 붙는 건 아니니, 너무 신경 쓰지 말 거라. 다만 왜 졌는지, 어떻게 졌는지를 수없이 생각해라. 그 반성이 훗날 네 성장의 밑거름이 되어줄 테니까. 직접 가서 위로해주고 싶지만, 임무가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구나. 가지 못해 미안하다.]

질책도, 조롱도 없었다. 진심으로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가 보낸 편지였다.

[네 친엄마의 흔적은 계속 수색 중이다. 내가 포기하지 않았으니, 너도 포기하지 말거라.]

마르타가 떨리는 손으로 편지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지갑을 확인하듯 주머니를 꾹 눌렀다.

"하아…."

부서졌던 마음의 조각을 다시 모아주는 듯한 편지였다. 특히 마지막 글귀 때문에 어깨를 짓눌렀던 우울함과 불안함이 모두 가셨다.

"아버지께 명심하겠다고 전해드려. 정말. 정말로 감사하다고도."

"알겠습니다."

카멜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가씨."

"응?"

"라온 도련님과 내기에서 건 복종에 대한 게 신경 쓰이신다면 별관을 압박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직계의 힘을 이용한다면 조용히 처리할 수…."

"아니. 하지 마."

마르타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흑진주 같은 눈동자는 이전과 달리 선명한 빛을 발했다.

"진 건 진 거야. 그것도 처참하게 졌지."

라온에게 패배한 이유는 누구보다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방심해서가 아니야. 그냥 졌어.'

라온은 그 뻘건 오러를 사용하여 자신의 검을 베어버렸다. 검사가 검을 잃었으니, 사실 승부는 거기서 끝이었다.

하지만 녀석은 똑같이 검을 버리고 주먹으로 두 번째 승부를 내주었다.

그렇게 싸워준 사람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다면 아버지가 더 실망하실 게 분명했다.

"멍청한 약속을 했더라도 일단은 지키는 게 지그하르트다운 모습이겠지. 아버지도 그렇게 말씀하실 거야."

"물론입니다. 데니어 님이라면 분명 그리 말씀하셨을 겁니다."

"딸인 내가 그분을 망신시킬 수 없어."

"그럼요."

카멜은 대견하다는 듯 입매를 크게 올리며 웃었다.

"카멜. 칼 있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줘봐."

"여기 있습니다."

마르타는 카멜이 준 얇은 단검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검집에서 꺼냈다.

파악!

마음을 정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서 흑단 같은 머리카락의 중간을 단호하게 베어버렸다.

"아, 아가씨!"

"괜찮아. 멍청하고 추잡했던 과거를 떠나보내는 것뿐이니까."

마르타는 잘라낸 머리카락을 바람에 흘려보내며 미소 지었다. 그녀의 웃음이 눈송이처럼 반짝거렸다.

"허…."

카멜은 이런 장면은 생각지도 못했는지 헛바람을 흘렸다.

"내일 오전 직계 수련 취소해줘."

"예? 취소가 어려운 건 아니지만, 무엇을 하시려고…."

"갈 곳이 있어."

마르타는 그렇게 말하고 저택으로 들어갔다.

카멜은 저택에 들어가는 마르타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인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마르타는 휴가 마지막 날 새벽 훈련만 마치고 바로 저택을 나왔다.

아침도 안 먹고 어딜 가냐는 카멜과 시녀들을 따돌리고 홀로 서쪽 별관으로 향했다.

상당히 멀었지만 길이 잘 닦여있어서 별관을 찾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서쪽으로 계속 걷고 있으니, 작은 정원에 둘러싸인 아담한 집이 보였다.

'저기 사는 건가.'

마르타가 눈매를 좁혔다. 본관의 건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고 초라했다.

다만 자신이 입양되기 전 집은 저 별관보다 훨씬 작았기 때문에 별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정원으로 걸어갔다.

'누가 있네.'

금발 소년 하나가 화단에 쪼그려 앉아 흙을 파고 꽃을 심고 있었다.

'어?'

마르타가 눈을 부릅떴다.

'라온 지그하르트?'

시종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꽃을 심고 있는 녀석은 자신에게 처음 패배를 안겨 준 라온 지그하르트였다.

라온도 자신을 발견했는지 손을 탁탁 털고 일어섰다.

"무슨 일이지?"

"...."

마르타는 대답하지 않고, 라온이 가꾼 화단 앞에 섰다. 금방 물을 줘서 그런지 꽃들이 건강하고 생생해 보였다.

'이 녀석이 이런 취미가 있었나?'

아이답지 않은 녀석이라 생각했는데, 이건 또 아이다워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할까.'

오늘 마르타가 라온을 찾아온 이유는 간단하다.

재대결.

아버지의 말을 듣고 패배에 대해 생각해봤지만 어떻게 졌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걸 모르니, 실력 차이가 어느 정도였는지, 그걸 메울 방법은 없었는지도 알 수가 없다.

즉, 반성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재대결이 필요했다.

머리에 열이 오르지 않은 상태에서 라온과 싸워 실력 차이를 알고 싶었다.

"후우…."

마르타는 탁한 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었다. 호수처럼 잔잔한 라온의 눈을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너와 다시 붙어보고 싶다."

"아직도 패배를 인정 안 한 건 좀 추한데."

"아니. 내가 발린 걸 인정하지 않는 게 아니야. 다만 어떻게 당했는지를 몰라. 그걸 알고 싶어서 찾아왔어."

"...."

라온의 눈동자가 짧게 반짝였다. 의외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럼 대가는?"

"뭐?"

"패자가 승자에게 도전을 하려면 뭐 하나는 들고 와야 하지 않나?"

"지랄! 싸우는데 꼭 대가가 필요한 건 아니잖아!"

"난 필요해."

"윽…."

마르타가 가는 신음을 흘렸다.

'이런 점이야.'

절대 손해를 보지 않는 이런 점 때문에 라온이 아이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없어? 없으면 곤란한데."

라온은 싸울 생각이 없어진 듯 팔짱을 꼈다.

"으음…."

어떻게 할까. 입술을 깨물며 라온을 보다가 그 아래에 있는 꽃을 보았다.

'살짝만 밟을까.'

이런 시간에 화단을 가꾸는 걸 보면 꽃을 아끼는 게 분명했다. 조금 건드려서 자극하면 덤벼들지도 모른다.

"어울리지 않게 꽃을 좋아하나 보네."

마르타가 화단 쪽으로 슬쩍 발을 움직였다.

"별로."

예상과 달리 라온은 모종삽을 툭툭 치며 고개를 저었다.

"뭐?"

"꽃 안 좋아한다고, 왜 좋아하는지도 모르겠고. 어머니 때문에 조금 다듬어줬을 뿐이야."

"...."

화단의 꽃을 밟으려던 마르타가 우뚝 멈췄다.

"왜? 안 밟아?"

라온은 이쪽의 의도를 알고 있었는지 옅게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빌어먹을."

마르타가 욕을 내뱉으며 발을 뺐다. 꽃을 좋아하는 어머니를 위해 화단을 가꿨다는 소리에 꽃을 밟을 마음이 사라졌다.

"젠장."

혀를 차고 등을 돌리려 할 때 별관의 문이 열리고 긴 금발을 뒤로 묶은 미모의 여성이 달려 나왔다.

"라온!"

"어?"

얼음장처럼 냉정했던 라온의 눈빛에 당황이 비쳤다.

"어, 엄마."

"안 보인다 했는데, 화단을 가꿔주고 있었구나. 그런데 이 친구는 누구니?"

여성의 눈빛에 호기심이 어렸다.

'이 사람이 실비아 지그하르트인가.'

사랑하는 남자를 찾아 가문을 떠난 뒤 아이를 살리기 위해 돌아온 가문의 망신이자, 폐급이라 불리는 여자.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일까.

마르타에겐 폐급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 용기를 낸 어머니로만 보였다.

"치, 친구도 아니고, 아무도 아니야. 내가 정리할 테니 들어가."

라온이 드물게도 말을 더듬었다.

"이 친구도 예쁘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아! 네가 마르타구나!"

실비아는 손뼉을 치며 활짝 웃었다.

"...."

마르타는 말없이 고개를 꾸벅였다.

"라온하고 대련했다고 들었는데, 다친 곳은 없니?"

그리운 엄마의 눈빛과 같았기에 알 수 있다. 실비아의 장밋빛 눈동자는 정말 자신의 몸을 걱정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실비아가 옅게 웃었다.

"데니어 오라버니가 재능이 뛰어난 아이를 데리고 왔다고 들었는데, 그게 다가 아니었어."

그녀는 자신의 이곳저곳을 살피고 정말 예쁘다고, 너무 예쁘다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이니?"

"잠깐 전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다 끝났으니 가볼게요."

마르타가 다시 고개를 꾸벅이고 돌아가려 할 때였다.

꼬르르륵.

새벽 수련 후 아침을 굶었던 대가가 찾아왔다.

"아…."

마르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뒤돌아서 달려가려고 할 때 따스한 무언가가 손목을 잡았다.

실비아였다.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손을 까딱였다.

"밥 먹고 가렴."

마르타는 왜인지 모르게, 그 가는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 * *

이게 뭐지?

라온은 식탁 앞에 마주 앉은 마르타를 보고 눈매를 좁혔다.

'도통 모르겠네.'

실비아가 배꼽시계가 울린 마르타에게 밥을 먹고 가라고 한 건 이해할 수 있다. 워낙에 착한 사람이니까.

그렇지만 저 광녀가 실비아에게 끌려와 식탁에 앉고, 조신하게 음식을 기다리는 모습은 생각도 못 한 장면이다.

머리카락을 자르더니, 성깔도 같이 잘린 게 아닌가 싶다.

"라온이 고기 스튜를 좋아하거든. 그래서 우리 식탁에는 스튜 하나는 꼭 있어."

"아, 네."

실비아는 뭐가 그리 기쁜지 방실방실 웃었고, 마르타는 부끄러운 것처럼 고개를 숙인 채 대답만 했다.

-저 계집 지금 뭐 하는 거냐? 원래 저런 성격이 아니지 않느냐.

'나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어.'

지그하르트 가문에서 태어난 이후 이렇게까지 의외의 상황이 벌어진 건 처음이었다.

곧 식사가 나왔다. 스튜와 소고기구이 그리고 채소와 데운 빵이었다.

"라온보다 한 살이 많지?"

"네."

"훈련할 때 어려운 건 없니?"

"별로 없어요."

실비아는 식사하면서 마르타에게 말을 걸었고, 마르타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질문에 곧잘 답을 해주었다.

'허….'

라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쟤 진짜 왜 저래?'

마르타는 남이 말을 걸면 일단 욕부터 나오는 인간이다. 저렇게 호의적인 모습을 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음…."

라온은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른 채 스튜를 꿀떡 넘겼다.

"우리가 요리는 정말 잘하는데, 고기 질이 본관에 비해 좀 떨어져. 체하지 않게 꼭꼭 씹어 먹으렴."

"...."

실비아의 조언에 포크를 쥔 마르타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발작을 일으킬지도 몰라서 막을 준비를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후 다시 고기를 찍어 먹었다.

사람의 감정은 잘 모르지만, 그녀의 손에서 뭔지 모를 서글픔과 그리움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잘 먹었어요."

그렇게 어색한 식사가 끝나고 마르타가 일어섰다.

"맛은 어땠니?"

"맛있었어요."

"다행이네. 앞으로는 라온과 친하게 지내주렴."

실비아는 문 앞에서 마르타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네."

마르타는 의외로 정상적인 대답을 하고 별관을 떠났다.

'진짜 뭐지?'

시비를 걸러 왔던 게 분명한데, 갑자기 저런 태도를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뭐 잘못 먹은 건가?

'그럴지도.'

인간의 감정이란 정말 어려운 것 같다.

* * *

마르타는 별관을 나오자마자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렇지 않았다간 바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닮았다.

얼굴도, 머리 색도, 입은 옷도, 목소리도 달랐지만, 장미색 눈빛이 실종된 엄마와 너무도 닮았다.

그래서 그녀가 손목을 잡았을 때 뿌리치질 못했다.

라온은 날 미쳤다고 생각했겠지.

녀석의 눈빛이 그렇게 흔들리는 건 처음 보았다.

늦게라도 나갈까 고민했지만, 밥을 먹고 나가길 잘했다. 실비아의 다정한 눈빛과 목소리 그리고.

꼭꼭 씹어 먹으라는 엄마가 가장 많이 했던 잔소리를 들었을 땐 정말 엄마와 함께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더욱더 엄마를 찾고 싶었다.

'백혈교. 이 개새끼들.'

엄마를 납치해 간 놈들은 오마 중 하나 백혈교다. 그 광신도들을 모조리 죽여서라도 엄마를 찾아낼 것이다.

마르타는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본관으로 돌아갔다.

"아가씨 어딜 다녀오신…어? 혹시 우셨습니까?"

문 앞을 쓸고 있던 카멜이 눈을 부릅떴다.

"뭔 소리야! 울기는 누가 울어!"

마르타가 눈가를 훔치며 고개를 저었다. 빠르게 문을 열고 저택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카멜. 혹시 질 좋은 소고기 좀 구해줄 수 있어?"

"소고기요? 그거야 얼마든지 가능하죠. 그런데 어디에 쓰시려는 겁니까?"

"쓸데가 있으니까. 구해서 내 방 앞에 놔줘!"

마르타는 대답을 하자마자 문을 닫고 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훗."

카멜은 그 모습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지금 모습이 훨씬 보기 좋다는 걸 아실까 모르겠군."

* * *

다음날.

라온은 새벽 연공을 끝내자마자 연무장으로 향했다. 평소처럼 도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제 찾아온 마르타 때문에 머리가 복잡했지만, 그냥 개꿈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가볍게 몸을 푼 뒤 연성검 수련을 시작했다. 해가 떠오르며 아이들이 하나둘씩 연무장으로 들어왔다.

수련생들의 잡담 소리를 들으며 검을 휘두르고 있을 때 갑자기 모든 소리가 확 꺼졌다.

고개를 돌리니, 활짝 열린 연무장으로 마르타가 걸어왔다.

단발로 자른 머리 때문인지 수련생들이 입을 떡 벌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라온 지그하르트."

마르타가 자신의 앞에 멈춰 섰다.

"흘러간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지. 그동안 시비를 걸었던 걸 어설픈 사과로 퉁 치진 않겠다."

그녀의 눈빛은 어제보다도 더 잔잔했다. 멈춰 있는 호수를 보는 것 같았다.

"대신 약속은 지킨다."

"약속?"

"대련을 하기 전에 했던 패자가 승자의 말에 복종한다는 약속."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서 뒤를 돌았다. 눈을 보니, 완벽하게 패배를 받아들인 것 같았다.

'생각보다 더 큰데….'

그 짧은 시간에 변했다니, 그녀 역시 보통 그릇이 아니었다. 다만 어제 왜 밥을 먹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왜 길을 막고 지랄이야. 꺼져!"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마르타가 앞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도리안을 걷어찼다.

"아욱! 죄, 죄송합니다."

"쯧."

그녀는 혀를 차고서 평소의 자리로 돌아갔다.

라온이 픽 웃었다. 아무래도 변한 건 자신에 대한 태도뿐인 것 같았다.

'여긴 전부 특이한 녀석들 뿐이라니까.'

38화

새해가 밝았다.

14살이 된 라온의 생활은 한 단어로 정리할 수 있다. 수련. 가장 먼저 연무장에 도착해서 가장 늦게 돌아가는 수련 귀신의 생활을 계속 이어갔다.

루난의 눈은 여전히 맹했지만, 검술의 예리함과 수속성 오러의 서늘함은 비할 수 없이 깊어졌다.

정신적으로 크게 성장한 버렌은 많은 수련생의 마음을 확실하게 휘어잡았고, 수석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서 밤낮으로 절치부심 검을 휘둘렀다.

마르타는 첫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서 휴식조차 마다하고 검을 휘두르고, 오러를 연공했다.

다만 가뜩이나 더러웠던 성격이 더 난폭해져 이젠 그녀에게 가까이 오려는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딱 한 명. 라온 앞에서는 달랐다.

교관의 말도 제대로 듣지 않는 마르타가 라온의 말이라면 입을 다물고 그대로 따랐다. 옆에서 보면 충실한 하인처럼 보일 정도.

수련생들은 저 태도가 내기의 약속이라는 걸 알아서 며칠 안 가리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마르타는 새해가 밝아도 라온의 말을 충실하게 따랐다.

모두가 당황했다.

입이 걸고, 성격이 더러운 마르타가 라온과의 약속을 지킬 줄은 몰랐으니까.

그렇게 라온은 마지막 방해꾼마저 굴복시켜 5 연무장 수련생 모두의 인정을 받았다.

* * *

"집합."

라온의 부름에 연무장 이곳저곳에서 몸을 풀던 수련생들이 동시에 그를 보았다.

"쯥."

"응."

버렌이 살짝 혀를 차고서 라온의 앞에 섰고, 루난은 주인을 본 강아지처럼 쪼르르 달려왔다.

"...."

마르타는 살벌한 눈빛을 번쩍였지만, 별말 없이 두 사람의 옆에 섰다.

연무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루난과 버렌, 마르타가 라온의 지시대로 움직이니, 다른 수련생들은 당연히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왜 모이라고 했지?"

버렌이 고개를 틀어 텅 빈 단상을 보았다.

"오늘 오전은 개인 수련이잖아."

"아니. 오늘은 정규 훈련이다."

"그런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는데."

"수석 교관님이 전하는 걸 깜빡했다고 하시더군."

라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리메르는 어제저녁에 갑자기 찾아와서 오전에 수련생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모아놓아 지시했었다.

"하여튼 그 남자는…."

버렌이 이를 갈았다. 여전히 리메르를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어찌 됐든. 오늘은 정규 수련이니 여기서 대기하도록. 몸만 가볍게 풀어."

"에이."

"까마귀고기를 삶아 먹었나. 뭘 매일 까먹지?"

"술 먹고 노느라 그랬을걸. 어제 술집에 있었다던데."

"하루이틀이냐. 그냥 준비나 하자."

수련생들은 작게 툴툴거렸지만 라온의 지시를 따라 연무장 중앙에서 가볍게 몸을 풀었다.

잠시 후 수련 시간이 5분 정도 지났을 때 연무장의 문이 끼익 열리고, 교관들이 들어왔다.

"하아암."

맨 뒤에 있던 리메르는 손으로 다 가리지 못할 정도로 큰 하품을 하며 단상 위로 올라갔다.

"지각입니다. 교관님"

버렌이 손을 들고 외쳤다.

"에, 오늘은 원래 자율 수련이지만, 우리 교관이 너희들을 위해서 준비를 하다가 늦었으니, 딱히 지각은 아니지."

"그거랑 이건 상관이 없…."

"자, 늦은 만큼 바로 수련을 시작하자!"

리메르가 버렌의 말을 무시하고 손을 흔들었다.

뒤에서 버렌이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지나도 저 둘의 관계는 변하질 않았다.

"오늘 너희들의 개인 수련 시간을 뺏은 건 다름이 아니라, 검사에게 가장 중요한 걸 전수해주기 위해서다."

"거, 검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

"그게 뭐지?"

"새로운 검술?"

"검술 비기?"

"연공법?"

기대감이 어린 수련생들의 눈이 별빛처럼 반짝였다.

"흐음!"

리메르는 그 눈빛을 한참 동안 즐기다가 아이들의 목소리가 가라앉았을 때 천천히 입을 뗐다.

"바로 보법이다."

"엑?"

"보법이요?"

"그게 왜 검사에게 가장 중요하다는 거야…."

"어휴, 이럴 줄 알았어."

보법이라는 소리에 수련생들은 실망 어린 표정으로 발을 굴렀다.

'역시 보법이었군.'

하지만 라온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법이란 걷는 법.

검술이나 권법을 펼칠 때 더 공격적이거나, 더 방어적 혹은 더 빠르게 움직이기 위해서 만든 체계적인 걸음이다.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어.'

권법과 검술에 익숙해졌고, 오러도 적당히 만들었으니, 보법을 배울 시기가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부터 중급 수준의 검술을 익힌 녀석은 꽤 되지만, 보법을 제대로 익힌 경우는 거의 없더라고."

"음…."

"그건 그렇죠."

수련생들은 반박하지 못하고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버렌과 루난, 마르타 역시 입을 다물었다.

"너희들의 목표가 검사이니, 검술이 중요한 건 맞다. 하지만!"

리메르는 씩 웃으며 단상 위에서 뛰어내렸다. 촛불을 끈 듯 그의 몸이 훅 사라졌다.

"그 검술을 더 날카롭고 빠르게 만들어주고, 훗날 목숨까지 구해주는 건 보법. 즉, 발놀림이다."

그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앞에서 사라졌던 리메르가 맨 뒤에서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헉!"

"어, 언제…."

"뭐지?"

수련생들이 입을 떡 벌렸다. 리메르가 바람 소리 하나 없이 뒤에서 나타난 모습에 혀가 절로 튀어나왔다.

"너희는 대련을 하며 홀로 수련할 때와 상대에게 검을 휘두를 때의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건…."

"맞아.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지."

"검도 궤도대로 흐르지 않았고."

수련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모두는 대련을 겪으며 실전과 수련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전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검술 이상으로 보법을 단련해야 한다. 난 일대일 대련에서 가장 중요한 무학은 검술도, 오러도 아닌 보법이라 생각해. 가주님도 그 의견에 동의하셨지."

"가, 가주님이?"

"헉!"

"그분이 그러셨다면…."

수련생들이 입을 떡 벌렸다. 가장 존경하는 글렌이 보법이 중요하다고 했다고 하니, 리메르가 말할 때와는 무게감이 달랐다.

"보법…."

버렌이 척추를 똑바로 세웠다.

'그래. 그때 보법이 있었다면….'

자신의 장점은 예리함과 정확성 그리고 속도다. 라온과 대련을 할 때도 기본 발놀림이 아니라, 제대로 된 보법을 운용했다면 그렇게 맥없이 패배하진 않았을 거다.

"과연…."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에 버렌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르타가 주먹을 말아쥔 채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녀 역시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똑같군.'

조용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마르타는 겉이 아닌 가슴 속에 라온을 꺾겠다는 열의를 태우고 있었다.

"보법은 강물의 흐름을 담은 가람보법부터 시작한다."

리메르가 강가의 자갈밭을 걷듯 가볍게 다리를 튕기자, 그의 몸이 단상 위로 펄쩍 올라섰다.

"음…."

그는 보법을 시연할 것처럼 자세를 잡다가 귀찮네라고 중얼거리며 드러누웠다.

"숙련된 조교 앞으로."

리메르가 손벽을 치자 뒤에 있던 교관이 앞으로 나와서 가람보법의 자세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뚜둑.

버렌이 주먹을 말아쥐었다. 보법을 확실하게 익혀서 언젠가 저 게으른 교관의 콧대를 눌러버리겠다고 다짐하며 가람보법의 자세를 확실하게 눈에 익혔다.

* * *

가람보법의 형은 12개뿐이었고, 자세 역시 간단해서 시범을 보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기본이로군.'

라온은 불의 고리를 회전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가람보법의 형태와 자세, 흐름까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처음 보는 보법이지만, 기본자세에 충실했고, 흐름이 부드러워 어디에도 끼워 넣을 수 있는 보법이었다.

"교관들이 돌아다니며 자세를 잡아줄 테니, 일단 보고 느꼈던 대로 보법을 펼쳐보아라."

"예!"

수련생들은 연무장에 넓게 펴져서 가람보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다만 라온은 움직이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로 불의 고리를 휘돌리며 교관이 보여주었던 가람보법을 머릿속에서 재생했다.

'방어 6에 공격 4.'

가람보법은 기본 보법답게 공격과 수비의 비율이 비슷했다. 방어 쪽이 조금 더 높지만, 큰 차이는 없었다.

'연계가 장점인 보법이야.'

가람보법의 특징은 보법이 강물처럼 부드럽게 흐른다는 점이다. 짜 맞춘 듯한 딱딱함보다 조금 흐트러지더라도 쭉 연결되는 흐름이 중요하다.

"후…."

라온이 들뜬 숨을 뱉으며 눈을 떴다. 열린 시야 사이로 가람보법의 모든 것이 보이고 있었다.

턱.

먼저 오른발을 뻗었다.

잘 다져진 연무장 바닥을 짓누르는 감각을 즐기며 왼발을 따라 붙였다.

양쪽 발이 부드럽게 교차하며 가람보법의 첫 번째 형 유화가 펼쳐졌다.

투웅!

바닥을 가볍게 스치며 몸을 우측으로 회전시켰다. 적의 공격을 회피하고, 검을 내지르는 두 번째 형 개류가 연무장 모래를 울렸다.

교관이 보여주었던 자세보다 더욱 완성에 가까운 모습.

치잉!

라온은 어깨 위로 흘러가는 쾌감을 즐기며 미소를 피워냈다. 그의 발은 태어났을 때부터 가람보법을 알고 있던 것처럼 그 유연한 흐름을 그대로 재연했다.

* * *

"흐아아암!"

리메르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하고서 눈을 꿈뻑였다.

"졸리구만."

며칠 동안 수련생들에게 적합한 보법을 찾고 보완하느라, 잠을 못 잤더니, 온몸이 나른했다.

'나도 늙긴 늙었나 보네.'

픽 웃으며 단상 아래를 내려보았다.

가운데 선 라온은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었다. 교관의 보법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좋은 방법이긴 하지….'

심상 속에서 무학을 그려보는 건 분명 좋은 수련법이다. 다만 그건 어느 정도 실력이 무르익었을 이후여야 한다.

방금 보법을 배웠기 때문에 지금은 머리에 그리기보다 몸을 움직일 때였다.

'나중에 똥폼 잡지 말라고 해야겠네.'

리메르는 놀릴 게 생겼다고 중얼거리고 버렌 쪽을 보았다.

'꽤 잘하는군.'

버렌은 이전에 보법을 익힌 경험이 있는지 가람보법의 형태를 거의 그대로 따라 했다. 진의는 없지만, 자세는 얼마 안 가 완성할 수 있을 것 같다.

'저쪽도 마찬가지고.'

마르타 역시 보법을 한참 동안 익힌 사람처럼 가뿐하게 발을 내뻗고 몸을 회전시켰다. 버렌보다 더 나은 자세였다.

"하."

리메르가 버렌과 마르타의 보법을 보고 웃음을 흘렸다.

'라온을 생각하고 있군.'

두 사람은 보법을 배우는 와중에도 라온과 대련했을 때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까 일대일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게 보법이라고 말했던 게 제대로 먹혀든 것 같았다.

'그리고….'

우측에서 가람보법을 연습하는 루난을 보았다. 그녀의 움직임은 앞선 두 명과는 달랐다.

상대를 두기보다는 보조하는 듯한 움직임. 루난이 도와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뻔히 보였다.

리메르는 그 뒤로도 수련생 모두를 살펴보고, 말해줘야 할 장점과 단점을 기억해두었다.

'재밌다니까.'

아직 어리고 순수하기 때문일까. 수련생들이 훈련하는 걸 지켜만 보아도 각자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으아아."

리메르는 겨울잠에서 깨어난 곰처럼 길게 기지개를 피며 일어섰다.

번뜩.

수련생들에게 기억해두었던 지적을 하려고 할 때 석상처럼 서 있던 라온이 두 눈을 뜨고 발을 뒤로 뺐다.

'아….'

선명한 붉은 눈 그리고 학처럼 뻗어간 발에 오싹 소름이 돋아올랐다.

라온이 발이 천천히 전진한다. 가람보법의 첫 번째 유화가 강물의 흐름을 담아 연무장 바닥을 흘러갔다.

터엉!

그가 두 번째 자세를 취한다. 불길처럼 전진하며 몸을 펼치는 모습에서 시퍼런 칼날이 비치는 듯했다.

"허!"

리메르가 헛웃음을 흘렸다.

'저 녀석….'

라온의 유화는 자신이 직접 보법을 전수해준 교관보다 더 완성에 가까워 있었다.

그 뒤로 라온은 가람 보법의 열두 가지 형태를 물 흐르듯이 펼쳐냈다. 조금의 실수도, 부족함도 없이 완벽에 가까운 자세였다.

"어…."

"뭐, 뭐야."

수련생들 그리고 교관까지 모조리 멈춰서서 라온의 보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심상으로 보법을 익혔다고?"

리메르의 눈동자가 바르르 떨렸다. 전신으로 오싹한 소름이 돋아올랐다.

'저 괴물의 끝은 대체 어디야….'

39화

"후욱."

라온은 가람 보법의 열두 가지 형태를 모조리 펼쳐낸 뒤 이 사이로 옅은 숨을 뱉어냈다.

'괜찮은데?'

머릿속에서 그렸던 보법의 자세와 흐름대로 몸이 움직였다.

타인의 입장에서 나 자신을 관조한 듯한 기분.

앞으로 무학을 수련할 때 불의 고리를 이용하여 먼저 그 흐름을 확실하게 파악한 뒤 몸을 움직이는 방식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음?"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보법 수련을 하느라 한창 시끄러워야 할 연무장이 도서관처럼 조용했다.

라온은 이상한 시선을 느끼며 뒤를 돌았다.

"미친…."

"뭐, 뭐야…."

버렌과 마르타는 입을 떡 벌린 채 반쯤 넋이 나가 있었고, 루난은 주먹 쥔 손을 흔들었다. 입 모양을 보니 알려줘라고 말하고 있었다.

세 사람만이 아니다. 연무장에 있는 수련생들과 교관 모두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져 있었다.

"왜들…."

"라온."

라온은 놀람이 담긴 부름에 다시 뒤를 돌았다. 단상 위에 누워있던 리메르가 어느새 내려와 앞에 서 있었다.

"너 가람보법을 알고 있었던 거냐?"

그의 녹색 눈동자가 하프 현을 튕긴 듯 가늘게 떨렸다. 확연한 놀람이었다.

"아뇨. 처음 보았습니다."

전생에 익힌 그림자 보법과 흐름이 비슷할 뿐 가람보법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리메르의 말엔 많은 것이 생략되어 있었지만, 표정 덕분에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가 갔다.

"뭐라고 해야 할까."

라온이 입술을 긁적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흐름이 읽히더군요."

"흐름이 읽혀?"

"네. 교관님이 보법을 보여줄 때 전 자세와 순서가 아니라, 그 흐름을 보았습니다."

가람보법은 전생에 익혔던 그림자 보법과 흐름이 비슷했다. 덕분에 어렵지 않게 그 요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나무가 아니라, 숲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니 보법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이더군요."

"하, 나참."

리메르는 할 말을 잃었는지 머리를 부여잡으며 감탄사만 터트렸다.

"못해도 일주일은 버틸 줄 알았는데."

그는 어렵게 찾은 보법이 이렇게 쉽게 뚫릴 줄 몰랐다고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야. 죄송할 건 없지. 그저 놀랐을 뿐이다."

"음…."

라온이 들리지 않게 입맛을 다셨다.

'너무 빨랐나?'

보법을 본 순간 느낀 흐름에 희열을 느껴서 그걸 그대로 재연했을 뿐인데 저렇게 놀랄 줄은 몰랐다.

'하긴 전생에도 보법 하나는 자신 있었으니까.'

암살자로 살았던 전생에서 무력 자체는 마스터가 아니었지만, 보법만큼은 마스터에게도 밀리지 않았다.

-고작 저런 걸음에 놀라다니, 인간들은 참으로 한심하도다.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만든 얼음꽃 걸음은 한 번 내딛는 것만으로 한 산과 바다를 얼린….

'아, 예.'

갑자기 튀어나와 지 자랑을 하는 라스를 툭 쳐냈다.

"커험."

리메르는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뒷짐을 지고 뒤를 돌았다.

"확실히 처음치고는 잘하긴 했는데, 아직 자세는 부족하다. 흐름은 괜찮으니 각각의 형태를 신경을 쓰도록. 질문은 나 말고 교관들에게 해."

"알겠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뒤를 돌았다. 확실히 처음 펼쳐보았기 때문에 부족한 부분이 꽤 느껴졌다.

"헉!"

"저, 저걸 가르치라고?"

"나보다 잘하는 거 같은데…."

교관들은 눈썹이 볼까지 내려올 정도로 울상을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 * *

마르타는 가람 보법의 수련을 끝낸 뒤 집사 카멜과 함께 연무장을 떠났다.

"그 보법 괜찮아 보이더군요."

카멜은 턱을 긁적이며 미소를 지었다.

"주인님의 보법을 전수받기 전까지 기초를 닦기에 적당합니다. 제대로 익혀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알겠어."

마르타는 본관으로 걸어가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 혹시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그녀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낀 카멜이 그녀의 바로 옆에 붙었다.

"후…."

침묵을 유지하던 마르타가 콧등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까 그 보법 습득 난이도는 어느 정도지?"

"흐음, 기초 보법은 분명하지만, 흐름이 꽤 난해해서 익히기 쉬운 수준은 아닙니다."

카멜이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가씨는 보법에도 재능이 있으시니, 사흘 정도면 흐름을 파악하실 수 있을 겁니다."

"사흘? 시발…."

마르타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

"그럼 수련생이 그 보법을 한 번에 익혀낼 수도 있을까?"

"경지에 오른 무인들은 보자마자 따라 하겠지만, 수련생은 불가능합니다. 보법에 대한 이론, 지식, 경험도 전무하고, 무학의 두께 자체가 얇으니까요."

"그걸 해낸 녀석이 있어."

"네? 그게 무슨…."

카멜이 눈을 부릅떴다.

'그게 된다고?'

가람 보법이 아무리 기초적인 걸음을 담고 있는 보법이라고 해도 담긴 무학의 흐름은 정심하다.

그걸 바로 익히는 수련생이라니, 태어났을 때부터 보법을 익힌 괴물이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

마르타의 얼굴을 보았다. 아직도 놀람이 사라지지 않은 표정.

그 모습을 보자 머릿속으로 한 수련생의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그 수련생이 라온 님입니까?"

"그 미친놈 아니면 누가 있겠어."

"뭐, 그런…."

카멜은 욕이 튀어나오려는 걸 입을 막아서 간신히 참아냈다.

"상황을 설명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보법 시범이 끝난 뒤 모두 연습을 시작했을 때 그 녀석은 혼자 눈을 감고 가만히 있다가 수련 시간이 끝나기 직전에 눈을 떴지. 그 이후에…."

마르타는 연무장에서 보았던 그 놀라운 모습을 카멜에게 모두 말해주었다.

"허…."

카멜이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정신 나갔군.'

눈을 감고 한참 동안 가만히 있었다는 건 머릿속으로 가람보법을 익혔다는 뜻이다.

'그 나이에 심상을 운용할 줄 알다니….'

그저 재능이 약간 뛰어나다고만 생각했다. 별관에 다시 빛이 드리울 정도.

하지만 아니다.

라온 지그하르트는 본관의 빛을 별관에 이을 수 있는 다리가 될 괴물이었다.

'바로 보고를 드려야겠어.'

이건 굉장히 중요한 정보였다. 마르타를 본관에 데려다준 후 바로 데니어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야 할 것 같다.

"음?"

걷다 보니 옆에 마르타가 보이지 않았다. 돌아보니, 고개를 숙인 채로 뒤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쯧. 너무 무신경했군.'

마르타가 라온에게 패한 뒤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너무 무신경했던 것 같다.

"아가씨. 라온 님과 아가씨의 재능은 결이 다릅니다. 누가 높고 낮고가 아니라…."

위로의 말을 건네던 카밀은 고개를 들어 올린 마르타와 눈을 마주치고 입을 다물었다.

'저 눈.'

마르타의 눈빛은 패배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도전자.

앞서가는 자의 등을 뜯어 먹을 짐승이자, 도전자의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건 그녀를 처음 만났던 백혈교의 지부에서의 눈빛과 같았다.

"다행이야."

마르타가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날 이긴 놈이 가짜가 아니라서."

단아한 외모에서 피어난 살벌한 미소에 소름이 돋아올랐다.

'잘못 생각했군.'

카멜이 마른침을 삼켰다. 마르타는 라온과의 재능 차이에 실망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보다 강하고 재능 넘치는 라온을 꺾을 생각에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마르타는 걱정해 줄 필요도, 생각해 줄 필요도 없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아가씨."

카멜이 고개를 숙였고, 마르타는 그를 스쳐 지나갔다.

작지만 당당한 등과 자신감으로 뻗어나가는 걸음을 보자, 그녀의 미래가 그려졌다.

가장 높은 옥좌 위에서 세상을 굽어보는 무서울 정도로 아름다운 검사의 모습이.

* * *

"…그렇게 됐다니까요. 그 나이에 머릿속으로 보법을 익힌다는 게 말이 됩니까? 가주님의 손자는 천재가 분명해요!"

리메르는 매번 글렌과 만났던 북망산의 호랑이 바위를 보며 히죽 웃었다.

"네가 라온의 집사라도 되느냐. 만날 때마다 그 아이의 이야기만 하는군."

바위 위에서 엄숙함을 자아내는 목소리가 쏟아지며 글렌의 무표정한 얼굴이 드러났다.

"전 가주님의 궁금증을 풀어드리는 것뿐 인데요."

리메르는 글렌의 차가운 분위기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손자가 심상으로 보법을 익혔는데, 놀랍지 않으십니까?"

"진짜 심상은 아닐 거다. 심상으로 무학을 익히려면 최소 익스퍼트 최상급은 되어야 하니까."

글렌이 가볍게 손을 저었다. 다만 입꼬리가 가늘게 떨리는 건 감추지 못했다.

"녀석이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았다는 말대로 보법의 흐름을 읽었겠지. 가람보법은 흐름이 중심이 되는 보법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대단한 거 아닙니까? 그런 녀석이 어디 있겠어요!"

"...."

글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뒷짐을 진 채로 산 아래의 본관을 지켜만 보았다.

"기쁘신가 보네요. 역시 말씀드리러 오길 잘했어."

리메르는 눈동자를 힐끔 돌려 글렌의 표정을 살피고서 미소를 지었다.

"시끄럽다. 말할 다 했으면 그만 내려가라. 매번 말하지만 다른 아이들도 신경 쓰고."

"저 못 믿으십니까. 저 광검입니다. 광검. 알아서 잘하고 있다구요."

"다 죽어가는 놈이 광검은 무슨."

글렌이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지만, 리메르는 내려가지 않고 호랑이 바위에 등을 기댔다.

"음, 본관 쪽 사용인들이 평소보다 좀 바쁘네요. 무슨 준비 하십니까?"

리메르는 본관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준비가 아니라, 찾아오는 녀석들이 있다."

"찾아오는 녀석들이요?"

"며칠 뒤에 오웬 왕국의 사절단이 오기로 되어 있다."

"오웬 왕국의 사절단…."

리메르가 눈매를 좁혔다. 오웬은 대륙 중앙에 위치한 왕국으로 지그하르트와 함께 육황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어쩐지."

지그하르트와 친분을 유지하는 세력은 거의 없다. 손님이 온다고 하기에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나마 친분이 있는 오웬 왕국이었다.

"사절단 대표는 누굽니까?"

"삼왕자라고 하더군. 실제로는 타르탄 공작이겠지만."

"오호, 그 미친놈이 결국 공작이 됐군요."

타르탄 공작이라는 말을 들은 리메르의 입가에 살벌한 미소가 지어졌다.

"어? 잠깐! 카르텐의 삼왕자면 아직 어리지 않습니까? 라온이나, 버렌 나이일 텐데…."

"그것까지는 관심이 없어서 모르겠군."

"그렇군요."

리메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절단으로 오웬 국왕이 오지 않는 이상 글렌이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언제 보여도 당당할 수 있도록 수련생들에게 정돈된 자세를 유지하라고 지시해라."

"예? 저희도요?"

"3왕자와 함께 왕국의 수련 기사들이 함께 오는데, 검사와 수련생들의 훈련 모습을 참관하고 싶다고 하더군."

"그걸 허락하셨습니까?"

"당연하다."

글렌의 붉고 짙은 시선이 리메르를 향했다.

"보여준다고 약해지면 지그하르트의 검이 아니다. 우린 숨지도, 도망치지도 않는다."

"…그 말 오랜만에 듣네요."

리메르는 예전에 매일같이 들었는데라고 중얼거리며 조금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궁금증을 풀었으면 내려가라. 수석 교관이라는 놈이 언제까지 연무장을 비우는 거냐."

글렌이 입매를 내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옙!"

리메르는 경례를 하듯이 손을 올리고서 허리를 굽혔다. 등을 돌리고 내려가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흐음…."

그는 멀리 보이는 5 연무장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3왕자와 수련 기사라….'

오웬 왕국의 사절단에 라온의 또래들이 있다고 하니, 아주 좋은 생각이 번뜩였다.

리메르는 고개를 돌려 글렌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그 표정. 또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군."

글렌이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콧등을 찡그렸다.

"아뇨. 이상하진 않을 겁니다."

리메르는 더욱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린 지그하르트의 새싹들에게 도움이 될 일이니까요."

40화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새하얀 눈발 사이로 은빛의 선이 흘러간다. 갑옷을 입은 기사들의 행군이었다.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곰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거대한 덩치의 중년 기사가 바로 옆에서 걷고 있는 소년을 내려보았다.

"아직은 괜찮소. 다만 예상보다 눈발이 거세 수련 기사들이 버거운 것 같소."

왕자라 불린 소년이 뒤를 돌았다. 담담한 표정의 왕자와 달리 수련 기사들은 티가 날 정도로 지쳐있었다.

"지그하르트까진 아직 멀었소?"

"폭설이 점점 거세지는 걸 보니, 거의 도착한 것 같군요."

"거의 도착했다니, 그럼 지그하르트의 검사들은 매일같이 이런 눈발을 견딘단 말이오?"

"그건 아닙니다."

중년 기사가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그하르트로 가면 갈수록 날씨가 사나워지지만…."

그의 입을 떼기 무섭게 쏟아지던 눈덩이가 그치고, 회색 구름 뒤에 숨었던 태양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지그하르트 내부의 날씨는 청아하기 그지없습니다. 물론 기온 자체는 더 내려가지만요."

"허…."

왕자는 헛바람을 흘리며 하늘을 올려보았다. 끝을 모르고 쏟아지던 눈 폭풍이 꿈이라 생각될 정도로 하늘이 맑았다.

"우와!"

"누, 눈이 단번에 그쳤어."

다른 사람들도 깜짝 놀라 입을 떡 벌렸다.

"타르탄 공작. 이 날씨는 대체…."

"마법 같지만, 마법이 아닙니다. 이런 괴이한 자연환경 때문에 지그하르트를 천혜의 요새라고 말하는 겁니다."

타르탄 공작이라 불린 중년 기사가 빙긋 웃으며 전방에 보이는 거대한 성벽을 가리켰다.

"물론 이런 지그하르트도 뚫린 적이 있지만요."

"음…."

왕자는 그게 언제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에서도 기다리고 있으니, 일단은 들어가시죠."

타르탄 공작이 지그하르트의 성벽 아래에 서 있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거인이 드나들어도 될 정도로 거대한 철문 앞에 붉은색 코트를 두른 검사들이 날카로운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겠소."

왕자는 고개를 짧게 끄덕이고 지그하르트의 문지기들이 서 있는 철문으로 향했다.

* * *

라온은 점심 식사를 마치고 다시 연무장으로 돌아가다가 멈춰 섰다.

'뭐지?'

정문 방향에서 많은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갑옷과 갑옷이 부딪치는 소리. 평소 지그하르트에선 들기 힘든 금속음이었다.

잠시 후 외총관 일리운이 모습을 드러냈고, 은빛 갑옷을 두른 기사들이 그 뒤를 따라갔다.

'오웬 왕국….'

은빛 갑옷의 왼쪽에 사자 머리가 그려져 있었다. 오웬 왕국의 문양이었다.

다른 수련생들이나 검사들도 멈춰서서 오웬 왕국의 기사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오웬 왕국의 사절단이네요."

도리안이 옆으로 다가오며 낮은 휘파람을 불었다.

"사절단?"

"며칠 전부터 오웬 왕국의 사절단이 도착한다고 하다고 가문 구석구석 청소했었잖아요. 모르셨나요?"

"몰랐어. 그런데 사절단이라고 하기엔 규모가 좀 작은데."

라온이 기사들 뒤에 있는 체구가 작은 아이들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아, 저들은 오웬 왕국의 3왕자와 함께 온 수련 기사들이에요. 경험을 늘리기 위해서 함께 왔겠죠."

"아는 것도 많군."

"이미 소문이 돌았으니까요. 다들 아는 표정이잖아요."

"그렇긴 하네."

모르는 사람은 수련에 빠져 있던 자신과 평소엔 그저 멍한 루난 뿐인 것 같았다.

라온이 왕국 사절단을 쭉 살펴보았다.

'꽤 강하네.'

같은 육황임을 증명하듯 수련 기사들의 무력은 5연무장의 수련생들과 비슷할 정도였다.

'강하던 말던 나랑은 상관없지만…음?'

연무장으로 가기 위해 고개를 돌리다가 수련 기사 중 가장 앞에 선 자와 눈을 마주쳤다.

하늘을 담은 듯한 푸른 눈에 굳건한 기세가 담겨 있었다.

'나이답지 않은 무력이군.'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알았다. 저 수련 기사가 저 중에서 가장 강하다는 걸.

'그렇지만.'

그건 10대 수준에서의 평가일 뿐. 자신의 눈에 차기에는 한참 멀었다.

예상대로 푸른 눈의 아이는 자신의 기운을 읽지 못하고 잠시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저런 거에 신경 쓸 시간은 없지.'

보법과 검법의 완성도를 높이느라 바쁘다. 왕국 사절단과는 부딪칠 일이 없으니 잠시 본 것으로 족했다.

라온은 머릿속에 보법의 흐름만을 생각하며 연무장으로 걸어갔다.

* * *

'뭐야 이건….'

오웬 왕국의 삼왕자. 그리어 드 오웬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척추가 곤두서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위를 향할수록 숨통이 조여왔다.

그 모든 것은 저 위에 앉은 남자 때문이다.

북패왕 글렌 지그하르트. 대륙 최강의 검사라는 남자의 눈빛을 받는 것만으로 손발에 힘이 빠졌다.

"오느라 수고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옆에서 들린 타르탄 공작의 목소리 덕분에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선왕의 어린 시절이라 해도 믿을 법하구나. 그가 아끼는 이유를 알겠어."

자신의 얼굴을 본 글렌 지그하르트가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가, 감사드립니다."

입안에 침이 말라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자그마한 기세도 피우지 않았는데 저런 존재감이라니, 왕국 제일검을 마주했을 때도 느끼지 못한 경험이었다.

"저, 전하께서 전해주신 서신이 있습니다."

삼왕자는 품에서 금색의 봉투를 꺼냈다. 휘청이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줘서 일어섰다.

"끄읍…."

그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단상으로 다가가 글렌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흠."

그 모습에 글렌의 눈동자에 작은 이채가 발했지만 금세 사라졌다.

"자네들이 요구했던 대로 수련생들의 훈련을 참관할 수 있도록 조치했네."

글렌이 편지를 옆에 놓으며 느릿하게 입을 뗐다.

"저녁 연회를 준비했으니, 오늘은 편히 쉬고 내일부터 돌아보도록 하라."

"가주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나중에 보도록 하지."

"예."

삼왕자는 뒤로 세 걸음 물러선 후 허리를 숙인 후 일어섰다.

"공작은…."

"저는 가주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먼저 쉬고 계십시오."

타르탄 공작이 옅게 웃으며 눈을 내리감았다.

"알겠소."

삼왕자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알현실을 떠났다.

"재능이 뛰어난 아이로군. 왕위보다 검좌에 오르는 게 빠르겠어."

잠시간의 침묵 후 글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역시 한눈에 파악하시는군요. 삼왕자께선 차기 왕국 제일검이라 불리고 계십니다."

"확실히 보기 드문 재능이야."

"재능만이 아니라, 의지도 굳건합니다. 로베르트 검술을 견식하기 위해 남쪽에도 가셨었죠."

타르탄 공작은 삼왕자가 나간 문을 바라보며 기껍다는 듯 웃었다.

"흐음."

글렌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재능과 노력 그리고 의지라….'

삼왕자의 눈만 봐도 그가 어떤 재능을 가졌고,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보였다.

어린 나이에 많은 경험을 쌓고, 노력해왔을 것이다. 다만 글렌은 그보다 더한 녀석을 알고 있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라온이 해온 노력과 의지를 알고 있으니, 삼왕자의 대단함이 그리 눈에 차지 않았다.

"왕자를 자랑하러 오진 않았을 테니, 본론으로 들어가지."

글렌의 손에 들린 편지가 화르륵 소리와 함께 타올랐다.

"보지도 않고 태워버리시는군요."

편지가 타버렸음에도 타르탄 공작의 표정은 별반 변화가 없었다.

"그 남자가 중요한 편지를 애송이에게 맡겼을 리 없으니까."

"역시."

타르탄 공작은 삼왕자를 자랑할 때와 달리 진중한 기세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오웬 왕국의 국왕 레크로스 알버른 드 오웬 2세의 말씀을 전합니다."

고개를 들어 올리는 그의 눈빛에 엄숙함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다섯 개의 어둠(五魔)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 * *

투웅!

라온의 오른발이 물살을 가르는 연어처럼 부드럽게 전진한다.

그 뒤를 이어 왼발이 따라붙는다. 하체의 움직임에 수풀을 누비는 사슴처럼 유려했다.

빠르지 않지만 부드럽고, 강하지 않지만 표홀하다.

그가 펼치는 가람보법의 12가지 형은 바람을 탄 나뭇잎처럼 경쾌한 자유로움이 담겨 있었다.

쿵!

라온은 땅을 울리는 진각을 끝으로 가람보법의 수련을 끝냈다.

"후욱…."

들뜬 숨을 뱉어내며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보고 있군.'

뒤를 돌아보자, 자신의 보법 훈련을 보고 있던 수련생들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가람보법을 배운 첫날 이후 수련생들은 교관이 아니라, 자신을 보며 보법을 수련해왔다.

그건 버렌이나, 루난, 마르타도 예외가 아니었다.

"음!"

"흥."

눈을 마주친 버렌과 마르타는 콧방귀를 뀌며 몸을 돌렸다.

"응."

물론 루난은 뭐 어쩔 거냐는 듯 눈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와서 보법을 펼쳤다. 가르쳐 달라는 뜻이었다.

"하여튼."

라온은 고개를 젓고서 루난의 보법에서 부족한 부분을 지적해주었다.

"도련님. 저도 좀 봐주실 수 있나요?"

도리안이 배 주머니를 살살 긁으며 다가와 보법을 보여주었다.

"일단 넌 자세가 높다. 조금 더 낮추고…."

그에게 문제점을 말해줄 때 연무장의 문이 열리고 리메르가 들어왔다.

'웬일이지?'

라온이 리메르의 종종걸음을 보며 콧등을 찡그렸다. 휴식 시간에 찾아온 건 또 처음이었다.

"오늘 오웬 왕국의 사절단이 온 건 전부 알고 있지?"

"알고 있습니다."

버렌이 앞으로 나오며 대답했다. 그 역시 휴식 시간에 찾아온 리메르가 놀라운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 저녁에 사절단을 위한 연회를 연다고 한다. 수련 기사들도 있어서 또래인 너희도 참여 가능하다고 하더군."

"오!"

"연회요?"

오웬 왕국의 기사들을 보고, 수련 기사들과 친분을 쌓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수련생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런데!"

리메르가 쓱 고개를 저었다.

"너희는 아직도 가람보법도 제대로 습득하지 못했잖아. 나라면 창피해서 그런데 못가지. 암!"

"윽!"

"그, 그건…."

수련생들은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입술을 깨물었다.

"어? 설마 가려고 한 거야? 수련할 게 많이 남았는데? 검술도, 보법도 완성 못 했는데?"

그가 얼굴을 쭉 내밀고, 수련생들을 놀리듯이 훑어보았다.

"제, 젠장!"

"후우…."

수련생들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고개를 축 내렸다.

"여기서 갈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인데."

리메르의 시선이 라온에게 향했다.

"넌 어떻게 할 거지?"

"관심 없습니다."

라온은 고개를 젓고, 수련검을 챙겼다. 가람보법은 거의 완벽해졌지만 검술과의 조화시키려면 아직 멀었다.

지금은 연회에 가서 인맥을 쌓을 때가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수련할 시기였다.

"좋은 자세야."

리메르가 빙긋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 만족이 담긴 웃음이다.

"뭐, 정 가고 싶으면 보내는 줄 텐데, 가고 싶은 사람?"

그는 라온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로 수련생들을 쭉 둘러보았다.

제일 강한 라온도 수련을 하겠다고 남았는데, 너희들이 가려는 거냐는 듯한 모습이다.

"흥!"

"…없습니다."

마르타와 버렌이 고개를 돌리고 수련을 위해 뒤로 물러섰다.

"...."

루난은 처음부터 리메르의 말을 듣고 있지 않고, 보법만 밟고 있었다.

"그럼 계속 수련하도록. 강해지면 연회에 참석할 기회는 수없이 많을 거야! 난 그럼 간다."

리메르는 수련생들을 놀리듯이 손을 휘젓고서 연무장을 떠났다.

"음…."

라온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뺨을 긁적였다. 평소 리메르의 성격상 연회 정도는 보내줄 만한데, 막은 게 조금 이상했다.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 * *

격렬한 폭설 대신 찬란한 조명이 쏟아져 내리는 지그하르트 본관 연회장.

오웬 왕국의 삼왕자 그리어 드 오웬은 입맛을 다시며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피곤하군.'

몇 시간 째 지그하르트의 인사들과 대화를 하다 보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역시 이런 자리는 불편하다 그냥 검이나 휘두르고 싶었다.

이렇게 좋아하지도 않는 분위기와 장소에 온 이유는 국왕의 명령 때문만은 아니었다.

지그하르트의 검.

그리고 그 검을 연마하는 검사들을 보기 위해서였다.

"후우."

삼왕자가 테이블에 놓인 음료를 단번에 들이켜고서 인상을 찡그렸다.

'확실히 대단한 무인들이야.'

지그하르트 검사들이 가진 기파는 고고하고, 강렬했다. 오웬 왕국의 기사들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는 무력에 가슴이 뛸 정도.

'하지만.'

정작 보려고 했던 지그하르트의 어린 검사들의 무력은 실망 그 자체였다.

다른 가문이나, 왕국이라면 분명 뛰어난 인재라 불릴 만한 아이들이지만, 육황의 수련생이라기엔 모자람이 보였다.

'로베르트에도 미치지 못하겠어.'

지그하르트에 오기 전에 갔었던 남방의 주인 로베르트 가문의 어린 검사들이 더 뛰어났던 것 같다.

"내일 돌아볼 필요도 없겠군."

글렌이 수련생들의 훈련을 참관할 수 있게 배려해줬지만, 저 정도면 딱히 찾아갈 이유가 없었다.

"실망스러우신 모양이군요."

"헉!"

뒤에서 들린 가벼운 목소리에 황급히 몸을 돌렸다.

"에, 엘프?"

붉은 머리에 진녹색 눈동자를 가진 엘프가 뒷짐을 진 채로 빙긋 웃고 있었다.

"진짜를 보여드릴까요?"

41화

"진짜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삼왕자는 마른침을 삼키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갑자기 나타난 엘프의 정체와 의도를 알 수 없으니, 일단 거리를 두었다.

"그리 겁먹으실 필요 없습니다."

"겁먹지 않았소."

붉은 머리 엘프를 올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질문에 먼저 답하시오. 진짜라는 게 무엇이오."

"그건…."

"잠깐."

엘프가 대답하려 할 때 타르탄 공작이 바닥에서 솟구쳤다. 흡사 조명에 비친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듯했다.

"지그하르트의 광검. 네가 여기엔 무슨 일이지?"

"헉!"

그리어는 타르탄 공작이 뱉은 칭호를 듣고 눈을 부릅떴다.

'지그하르트의 광검이라면!'

이제야 저 엘프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광속의 검을 휘둘렀다는 글렌 지그하르트의 심복 중 하나였다.

'근데 이 자가 왜 나를….'

부상 때문에 은퇴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모르겠다.

"아아, 그렇게 견제할 필요 없어."

리메르는 싸울 생각이 없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네놈이 미친 짓을 하는 걸 봤던 게 한두 번이 아닌데 마음을 놓을 수가 있나."

"보시다시피 많이 달라졌거든."

"흠…."

타르탄 공작은 기세를 거두지 않은 채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왕자님. 이 미친 엘프가 무슨 말을 했습니까?"

"진짜를 보고 싶냐고 했소."

"진짜? 그게 무슨 말이지?"

"음, 여기서 말하기는 좀 그렇게 됐는데?"

리메르가 팔을 펼치며 주변을 가리켰다. 어느새 연회는 조용해졌고, 모두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내가 불청객이 맞긴 하거든."

그는 주변에서 쏘아지는 시선을 웃음으로 흘려넘기며 몸을 돌렸다.

"오웬의 왕자님."

출구로 향하던 리메르가 멈춰서서 다시 뒤를 돌았다.

"진짜를 보고 싶다면 내일 훈련 참관을 할 때 5 연무장에 가보고 싶다고 하세요."

그는 그 말만 남기고 그대로 연회장 밖으로 나갔다.

스스로 불청객이라 말한 리메르가 사라지자, 연회장에 다시 음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리어의 머릿속에서 울리는 건 리메르가 말했던 마지막 말뿐이었다.

'5연무장에 진짜가 있다고?'

* * *

"흐흐흥!"

"음."

라온은 리메르의 콧노래를 들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왜 저러는 거지?'

다른 교관에게 지시를 내린 뒤 드러누워 낮잠을 자고 있어야 할 리메르가 웬일로 두 눈을 번쩍 뜨고 직접 수련을 지시했다. 뭔지 모를 불안감이 들었다.

"저 인간 왜 저래?"

"그러게요."

"뭐 잘못 먹었나?"

"어제 도박장에서 돈이라도 땄나 봅니다."

버렌과 다른 수련생들도 검을 휘두르면서 리메르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수석 교관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겁이 많은 주제에 호기심도 많은 도리안이 리메르 옆으로 다가갔다.

"손님이 올 거거든."

'손님?'

귀찮은 걸 제일 싫어하는 리메르가 손님을 기다린다니, 더욱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냥 수련이나 하자.'

워낙에 특이한 엘프라 행동이나, 생각이 예측이 안 된다. 수련에 집중하는 게 정답이다.

라온은 단전에서 뜨겁게 달아오른 오러를 끌어 올리며 오른발을 뻗었다.

쿵!

대지를 부수는 듯한 진각 소리를 시작으로 가람보법과 연성검법을 동시에 펼쳐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뻗어나가는 보법 사이로 날카로운 검광이 솟구쳤다.

촤아악!

방어적인 보법과 공격적인 검술이 어우러졌지만 둘 다 흐름과 연계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부조화는 느껴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하나의 무학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이제 익숙해진 수련생들의 시선을 등으로 받으며 검술과 보법을 끝까지 펼쳐냈다.

"후욱."

검술과 보법을 연달아 펼쳐낸 라온이 숨을 뱉어내며 검을 내렸다.

'아직 모자라.'

검술과 보법 그리고 오러의 운용을 동시에 하니, 조금씩 어긋나는 부분이 있었다.

실전에서 제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다시."

한 번 더 연습하려고 할 때였다. 연무장 정문 쪽에서 다수의 기척이 느껴졌다.

"음?"

"뭐지?"

라온보다 한발 늦게 교관들이 반응하고 그 뒤에 수련생들이 검을 멈췄다.

모두의 시선이 연무장 문을 향하고 있을 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가봐."

"예."

리메르는 미소를 유지한 채 교관에게 턱짓했다. 중앙에 서 있던 교관이 연무장의 문을 열었다.

"총관부의 게스만입니다."

정복을 입은 깔끔한 인상의 청년이 얼굴을 내밀었고, 그 뒤에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우르르 대기하고 있었다.

"오웬 왕국의 사절단분들이 5 연무장의 훈련을 참관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갑작스러운 건 알지만 가능하겠습니까?"

"들어와요. 손님은 언제나 환영이야."

리메르는 순식간에 문 앞으로 다가가 문을 활짝 열었다.

"가, 감사합니다. 들어오시죠."

게스만이 고개를 숙였다. 이마 위로 흐르는 땀을 닦으며 오웬 왕국의 사절단을 연무장 안으로 이끌었다.

"허."

라온이 수련검을 허리춤에 꽂아 넣으며 헛웃음을 흘렸다.

'손님은 환영?'

리메르는 같은 가문의 검사들에게도 훈련 내용을 보여주지 않는다. 손님을 환영한다니 개소리도 저런 개소리가 없다.

주변을 돌아보니 다른 수련생들도 놀라서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오웬 왕국의 사절단들이 귀한 시간을 내서 이곳에 와주셨다. 지그하르트 수련생들이 어떤 무학을 익혔는지 보여주도록."

문 앞에 있던 리메르는 갑자기 단상 위에 나타났다. 바람을 넘어 귀신같은 움직임이었다.

"갑자기 저러면 뭘 어쩌라는 건데."

"으음…."

"뭐, 하던 대로 하면 되겠지."

수련생들은 옆에서 쏘아지는 오웬 왕국 사절단의 시선에 고장 난 인형처럼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정신 차려라!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게 제 실력을 발휘해!"

버렌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나은 움직임을 보이면서 수련생들을 이끌었다.

'제대로 먹혔군.'

지그하르트에 죽고 못 사는 녀석답게 지금 무엇을 보여줘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광대는 사양이야."

마르타는 콧방귀를 끼고서 팔짱을 꼈다. 적을 마주친 듯 강렬한 기세를 피워내며 오웬 왕국의 사절단을 대놓고 노려보았다. 덤비려면 덤비라는 표정이다.

'이쪽도 변하지 않았네.'

마르타는 자신에게만 유해졌을 뿐 여전히 입이 험했고, 사나운 기세를 내뿜었다.

루난은 처음부터 저쪽에 관심이 없었다.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지금까지 보법을 밟고 검을 휘둘렀다.

'어떻게 보면 저 녀석이 최강일지도 모르겠어.'

이렇게 난잡한 분위기에서 집중력이 끊기지 않는다는 건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재능이었다.

라온이 오웬 왕국의 사절단을 차례로 훑었다. 이전에 눈을 마주친 푸른 눈의 수련 기사가 버렌, 마르타, 루난을 차례를 살피고 있었다.

입이 살짝 벌어진 걸 보니, 세 사람의 무력에 꽤 놀란 것 같았다.

'역시 난 알아보지 못하는군.'

그 셋은 파악했어도 자신의 무력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럼."

라온이 옅게 웃으며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수련검을 뽑았다.

'나도 시작해볼까.'

가람보법이나, 연성검술 모두 형과 자세는 간단하기 그지없다.

보인다고 해도 약해지지 않는 것이 두 무학의 장점이니, 관찰당해도 문제는 없었다.

후웅!

라온은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자연스럽게 검과 보법의 흐름에 녹아들었다.

* * *

삼왕자 그리어 드 오웬은 5 연무장에 오기 전에 두 곳을 들렸다.

첫 번째는 이미 검사의 칭호를 받은 자들이 수련하는 2 연무장이었다.

'대단했지.'

2 연무장의 검사들은 지그하르트라는 위대한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무력을 갖췄다.

검세, 기세, 육체, 정신 모두 오웬 왕국의 기사들과 비교해도 전혀 모자라지 않은 강자들이었다.

'다만 수련생들이 있는 6 연무장은 실망스러웠어.'

6 연무장 수련생들의 재능은 확실히 뛰어났지만, 단련 자체가 부족했다.

원래 대련을 청하려고 했지만, 그 결과가 뻔히 보여서 그만두었다.

'그때 생각났지.'

그냥 돌아가려고 할 때 리메르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진짜를 보고 싶냐는 그 말이.

그래서 다른 곳으로 안내하려는 총관부의 사무관에게 부탁했다. 5 연무장을 보고 싶다고.

그는 당황한 얼굴이었지만,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5 연무장에 데려다주었다.

사실 별 기대는 없었다.

5 연무장이라고 6 연무장과 별다를 게 있겠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건 크나큰 착각이었다.

연무장에 들어온 순간 깨달았다. 여긴 다르다는 걸.

수련생들의 재능과 단련 정도가 6연무장과는 차원이 달랐다.

'진짜는 바로 이곳이었어.'

리메르의 말대로 이곳이 진짜였다. 5 연무장 수련생들의 무력은 수련 기사에게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특히 청발의 소년과 은발 소녀의 무력은 다른 이들보다 한 단계 위에 있었다.

그리고 이쪽을 노려보는 흑발의 미소녀 역시 압도적인 기세를 가지고 있었다.

저 셋 모두 현재의 자신이나 수련 기상 중 최강이라는 세툰에 필적할 정도의 무력을 가졌다.

"확실히 이쪽이 진짜였군요."

타르탄 공작이 수련생들을 바라보며 눈매를 좁혔다.

"그런 것 같소."

"다만 몇몇을 빼면 재능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단련의 차이죠."

"음…."

그리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5 연무장은 공기 자체가 달랐다. 수련생들이 피와 땀이 맺혀 있는 열의의 냄새가 났다.

"특히 저 세 명이 엄청나군요."

수련 기사 세툰의 눈이 호승심으로 반짝였다. 그 역시 자신이 파악했던 세 명의 강자를 보고 있었다.

"한번 싸워보고 싶습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삼왕자와 세툰은 5 연무장에서 최강이라 생각되는 세 명의 남녀를 보고 입맛을 다셨다.

"어떠십니까? 제 말대로 진짜는 여기 있죠?"

뒤에서 시원한 바람이 담긴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음?"

뒤를 돌아보니, 리메르가 어제 보여준 미소를 그대로 지은 채 서 있었다.

"확실히. 그런 말을 한 이유를 알겠소."

그리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근질근질하신 거 같은데. 우리 애들과 대련 한번 어떻겠습니까."

"이게 목적이었소?"

"육황의 재능들과 안전하게 부딪칠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요. 그쪽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리메르는 검에 정신을 집중한 수련생들을 가리켰다.

"음…."

그리어가 고개를 돌려 타르탄 공작을 보았다. 실제 리더는 그였기에 허가가 필요했다.

"괜찮겠죠."

타르탄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싸늘한 눈으로 리메르를 노려보았다. 허튼짓을 하면 바로 베겠다는 표정이었다.

"단순히 대련하고 싶을 뿐이야. 그렇지만."

리메르가 양손을 들어 올리며 빙긋 웃었다.

"작은 내기 정도는 괜찮지?"

"내기?"

"그래. 20번의 대련을 진행하고, 승자에게 보상을 주는 거지."

"하, 너희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호, 믿음이 꽤 큰데?"

"물론이다. 저 아이들은 오웬에서도 정예로 키워진 수련 기사들이니까!"

타르탄 공작이 자부심이 어린 눈빛으로 수련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잘됐네."

리메르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진녹색 안광이 선명하게 빛났다.

"우리 애들을 믿는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42화

"자, 주목!"

리메르가 단상 위로 올라가 손뼉을 쳤다. 수련에 빠져 있던 수련생들이 모두 고개를 들었다.

"저분들 보이지?"

그는 연무장 우측에 서 있는 오웬 왕국의 기사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오웬 왕국의 손님들이 우리에게 대련을 신청하셨다."

"대, 대련이요?"

"이렇게 갑자기?"

수련생들은 생각지도 못한 대련이라는 단어에 당황하여 입을 떡 벌렸다.

"갑자기? 뭘 갑자기야. 내가 항상 말했잖냐. 검사란 자다가 일어나도 바로 검을 휘두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리메르는 혀를 차며 너희는 아직 멀었어라고 중얼거렸다.

"으음!"

"그래도 오웬 왕국인데…."

"조금 준비하고 싸우는 게 나, 낫지 않을까요?"

리메르의 조언에도 수련생들의 긴장 어린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다만 전혀 다른 생각을 한 수련생도 있었다.

버렌과 마르타는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의 눈빛으로 오웬 왕국의 수련 기사들을 하나씩 훑어보았다.

루난은 앞에서 떠들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고 수련만 계속했다.

"흐흐!"

수련생들의 당황을 즐기던 리메르의 시선이 라온에게 향했다. 넌 어때라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흠…."

라온이 쓱 고개를 돌려 오웬 왕국의 수련기사들을 살폈다.

'대련이라….'

기사라면 모를까 수련 기사 중에 자신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저 중심에 있는 왕자라면 가람보법과 연성 검술의 조화를 연습하기에 나쁘지 않은 상대였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리메르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진하게 치솟았다.

"모두 동의했으니, 시작해도 되겠네. 인원은 20명이다. 그리고…."

리메르는 수련생들에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낮췄다.

"내 월급 전부 내기에 걸었으니까. 무조건 이겨라. 지면 진짜 뒤진다."

"어엉?"

"예? 그, 그게 무슨…."

"대련을 준비해라!"

수련생들이 입을 쩍 벌렸다. 따지려고 했지만 리메르가 먼저 몸을 돌리며 교관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예!"

교관들은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수련생들을 퍼뜨리고 연무장의 중앙에 대련을 위한 판과 장치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하."

라온은 그 모습을 보며 픽 웃었다.

'이거였군.'

며칠동안 리메르가 평소와 다른 행동을 했던 게 모두 이 대련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오웬 왕국의 사절단이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지금의 대련을 준비했을 것이다.

'대단하다니까.'

아직 검사나 기사의 자격을 얻지 못한 아이들이라고 해도 육황끼리의 대련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저리 물 흐르듯 대련을 진행하다니 리메르는 역시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

"집합."

라온은 뒤를 돌며 모두를 불러 모았다.

"응."

지금까지 그 누구의 말에도 신경 쓰지 않았던 루난이 검을 멈추고 가장 먼저 다가왔다.

"쯧."

"...."

버렌과 마르타. 수련생들도 루난의 옆에 섰다. 라온을 중심으로 5 연무장의 수련생 모두가 원을 그리고 모였다.

"들었듯이 대련은 이미 결정됐다. 20명을 뽑아야 하니, 지원할 사람은 거수하도록."

"나는 무조건 나간다."

"마찬가지. 다 날려버려서라도 나갈 거야."

버렌과 마르타가 동시에 손을 들어올렸다.

"라온도 할 거야?"

"그래."

"그럼 나도 할게."

루난은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들었다. 그 뒤로 수련생 10명 정도가 손을 들어 올렸다.

"...."

"으음…."

다만 다른 수련생들은 섣부르게 손을 들어 올리지 못하고 눈치를 보고 있었다.

'겁을 먹은 건가.'

오웬 왕국의 수련 기사들은 정식 작위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도 갑옷을 입고 있었다.

자신의 실력에 완연한 자신이 없는 상태에서 당당하게 서 있는 수련 기사들의 위압감에 몸과 마음이 굳은 것 같았다.

"쯧."

귀찮지만 수석의 자리에 있으니, 수련생들을 움직이는 것도 자신의 역할이었다.

"저들이 당당해 보이나?"

라온은 대련을 준비하는 오웬 왕국 수련 기사들을 가리켰다.

"그게 좀 그렇잖아."

"위험해 보이기도 하고요."

수련생들은 슬금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련 기사들의 손을 자세히 봐라."

"응?"

수련생들의 시선이 라온의 손가락을 따라 수련 기사들의 손으로 향했다.

"음?"

"사, 살짝 떨리는 거 같은데?"

"같은데가 아니라, 떨리고 있어…."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다."

수련생들은 다른 수련 기사들의 손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저들이 멋들어진 갑옷을 입고 있는 건 맞지만, 대련 전의 떨림과 긴장을 숨기지 못하는 수련생일 뿐이다."

"아…."

"즉, 너희와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생각을 하는 아이라는 거지."

라온이 몸을 돌리고 수련생들을 바라보았다.

"겁먹을 필요 없다. 너희는 다른 육황이나, 오마에 절대 밀리지 않는 훈련을 해왔어. 배운 대로 싸우면 꼴사납게 지는 일은 없을 거다."

"으음!"

"하, 하긴 우리만큼 수련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

"훈련하며 흘린 피와 땀은 누구에게도 안 밀리지."

라온이 진중한 목소리로 전하는 인정에 수련생들의 눈동자에 생기와 투지가 타올랐다.

"다시 묻겠다. 대련에 나가고 싶은 사람은 거수해라."

훅하는 바람 소리와 함께 수련생 모두가 손을 들어 올렸다.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버렌과 루난, 마르타를 포함한 20명의 수련생을 뽑았다.

뽑힌 수련생도, 뽑히지 않은 수련생도 이전과는 전혀 다른 기세로 오웬 왕국을 보았다.

'귀찮군.'

어린아이들을 챙겨주는 건 생각보다 귀찮은 일이다.

다만 수련생들과 시간, 공간을 공유하다 보니, 약간이나마 정이 들었나 보다. 아예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럼 대련 순서를 정하겠다. 첫 번째는 마르타. 할 수 있겠지?"

"조지고 올게."

마르타가 큼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봉은 수련생들의 사기를 끌어 올릴 수 있는 위치였기 때문에 5 연무장에서 두 번째로 강한 마르타가 가는 게 맞았다.

"그 뒤로…."

수련생들의 대련 순서를 하나하나 정했다. 루난이 18번째, 버렌이 19번째 그리고 마지막이 자신이었다.

"준비가 끝났으면 가운데로 모여주십시오."

"가자."

라온은 리메르의 얄미운 목소리를 들으며 연무장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 * *

마르타는 대련장 위에 올라온 수련 기사를 보고 턱을 모로 틀었다. 잘 닦인 은빛 갑옷, 큼지막한 덩치는 완연한 기사를 생각나게 했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자신을 힘으로 짓눌러버린 그 망할 놈에 비하면 조금도 커 보이지 않았다.

"타르스요."

덩치 큰 수련 기사가 검집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꾸벅였다.

"마르타 지그하르트."

마르타는 이름을 밝히고서 발을 어깨의 절반 너비로 벌렸다.

"성장하지 않은 육체가 무섭도록 단련되어 있군. 좋은 승부를 부탁하겠소."

타르스라 이름을 밝힌 수련 기사는 마르타의 단아한 외모와 작은 체구에도 방심하지 않고 그녀의 기운을 파악했다. 괜히 수련 기사 중 선봉으로 나온 게 아니었다.

"좋은 승부? 어차피 얻어터질 텐데, 똥폼 잡지 말고 덤벼."

마르타는 코웃음을 치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흠."

타르스가 콧김을 내뿜으며 검을 뽑았다. 일반적인 기사의 검보다 두꺼운 대검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보기보다 입이 험하군. 검술도 그 정도 되기를 바라겠소."

"주절주절 말 많네. 안 오면 내가 간다!"

마르타가 땅을 박참과 동시에 검을 뽑았다. 새하얀 칼날이 달아오른 열기를 갈랐다.

"멍청한!"

타르스 차가운 눈빛을 빛내며 대검을 그대로 내리쳤다. 둔탁한 대검의 날에서 강렬한 풍압이 치솟았다.

화아아악!

묵직한 바람이 마르타의 육체를 짓누르려는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번쩍였다.

쿠웅!

마르타는 진각을 밟으며 검을 올려 쳤다. 폭포를 오르는 연어처럼 풍압을 가르고 대검과 맞부딪쳤다.

쩌어어엉!

쇳덩이가 터지는 듯한 굉음이 울리고 타르스의 대검이 튕겨 나가 땅에 꽂혔다.

"허억!"

타르스가 깜짝 놀라 뒤로 몸을 뺐지만, 마르타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바로 따라붙어서 검면으로 타르스의 복부를 후려쳤다.

"끄르륵!"

배를 얻어맞은 타르스는 거품을 뿜어내며 뒤로 넘어갔다.

"힘으로 싸우는 놈이 일격에 모든 걸 담지 않다니 한심하네."

마르타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검을 집어넣고, 몸을 돌렸다.

"마르타 승리!"

리메르는 흡족한 웃음을 그리며 마르타쪽의 손을 들어 올렸다.

"흐음…."

라온은 마르타의 뒷모습을 보며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변했지만, 변하지 않았군.'

자신에게 패한 이후 마르타가 검술에 부드러움을 담으리라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녀는 부드러움을 추가하는 게 아니라, 힘과 속도를 더 올려서 위력을 강화했다.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단순함이다.

'꺾이지 않는 의지인가.'

마르타의 타협하지 않는 성격은 분명 그녀를 더 높은 곳으로 이끌 것이다.

'꽤 재밌는데?'

-재미? 어린 개미들의 싸움을 보고 있는 게 재밌나? 본왕이 볼 때는 지루하기만 하다.

'개미들도 항상 어린 것만은 아니니까.'

-한심하군.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어린 마족들을 불러다가 대련을 시켰을 때도 이런 허접함은 보이지 않았… 컥!

라온은 꽃팔찌를 건드려서 라스의 입을 다물게 한 후 다음 대련을 기다렸다.

'난 재밌으니까. 조용히 좀 해.'

* * *

마르타가 최고의 시작을 선보였지만, 오웬 왕국의 수련 기사들은 만만치 않았다.

정예만 온 것인지 5 연무장의 수련생들과 승리와 패배를 번갈아 하며 접전을 벌였다.

그렇게 17번의 대련이 진행되며 5 연무장의 수련생들은 8승 9패의 결과를 만들었고, 18번째 루난의 차례가 되었다.

"루난 네 차례야."

"응."

루난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대련장으로 올라갔다.

대련장 위에는 루난과 비슷한 키의 여성 기사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에델리아."

"루난 슬리온."

루난과 에델리아는 각자 기사와 검사의 예의를 차리고서 마주 섰다.

"...."

루난은 검조차 뽑지 않고, 평소처럼 멍한 눈으로 에델리아를 보았다.

"그 맹한 눈 왠지 마음에 안 드네."

에델리아가 콧등을 찡그리고서 루난을 향해 돌진했다. 창처럼 세운 검 끝에 붉은 화염이 치솟았다.

후우욱!

화염의 오러. 에델리아가 작은 체구로도 후반에 나온 이유를 보여주는 한 수였다.

"불은 싫어."

루난은 거의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입을 내밀며 검을 뽑았다.

화아아!

은빛 칼날보다 더 새하얀 서리가 허공을 뒤덮었다.

찌이잉!

화염의 검과 냉기의 검이 맞부딪치며 새하얀 수증기가 치솟았다.

루난은 가람보법을 밟아 냉기와 연기 사이로 몸을 숨겼다.

"냉기 따위 지워버리면 그만이야!"

에델리아는 검신 위에 차오른 불꽃을 횃불처럼 휘둘러 냉기와 연기를 동시에 지워버렸다.

"거기!"

그녀는 냉기 사이의 일렁임을 놓치지 않고 검을 내질렀다.

"어?"

에델리아가 눈을 부릅떴다. 검 끝에는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고, 검에 꿰뚫린 허공은 텅 비어있었다.

"윽!"

그녀는 목 부근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에 마른침을 삼키고 고개를 돌렸다.

치이잉.

루난이 시퍼런 눈빛을 발하며 에델리아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었다.

"…졌어."

에델리아는 입술을 깨물고 검을 떨궜다.

루난은 그녀의 목에 대고 있던 검을 치워 검집에 넣었다.

"좋은 싸움…어?"

에델리아가 손을 내밀었지만 루난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려가서 라온의 앞에 섰다.

"봤어?"

"보법이 익숙해졌네. 잘했어."

"응."

루난은 고개를 꾸벅이고서 라온의 옆에 푹 주저앉았다.

라온은 루난의 차가운 기세를 느끼며 옅게 웃었다.

'내 보법을 실전에서 사용하다니.'

이번에 루난이 사용한 보법은 혼자 수련할 때 연습했던 가람보법의 은신형이었다.

약간의 조언만 해줬을 뿐인데, 루난은 그것만으로 색다른 응용보법을 만들어냈다.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는데도 저리 잘 따라오는 걸 보니, 괜히 뿌듯했다.

"양쪽 9승 9패라. 이거 재밌게 돌아가네요. 그럼 19번째 대련을 시작하겠습니다."

리메르는 흥미로운지 히죽히죽 웃으며 버렌과 수련 기사를 불렀다.

"흐음…."

라온이 입맛을 다셨다.

'꽤 강하네.'

버렌과 마주 선 수련 기사의 자세는 안정되어 있고, 눈빛에 정광이 흐른다. 삼왕자를 제외한다면 지금까지 본 수련 기사 중 가장 강했다.

두 사람의 무력은 비슷했다. 순간의 실수로 결과가 정해질 수준. 저쪽에서도 비밀병기라고 할 법한 수련 기사를 내보낸 것 같았다.

"수련 기사 세툰 카젤이라고 합니다."

"수련생 버렌 지그하르트입니다."

수련 기사와 버렌은 서로에게 정중한 인사를 한 뒤 검집에 손을 올렸다.

"19번째 대련을 시작한다!"

리메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련장에서 두 사람이 동시에 사라졌다.

콰앙!

보법으로 땅을 박차고 나선 버렌과 세툰이 중앙에서 검을 맞부딪쳤다.

'알고 있군.'

두 사람도 아는 것이다. 서로의 힘이 호각이며 방심하는 순간 바로 끝난다는 것을.

쩡! 쩌정!

버렌의 검은 빠르면서 정확했고, 세툰의 검은 무겁고 강했다.

두 검사는 상대를 짓누르기 위해 스스로가 가진 장점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여 검을 내리쳤다.

그야말로 접전. 수련생만이 아니라, 검사들마저 대련에 빠져들었다.

피이익!

버렌의 어깨에서 피가 튀고, 세툰의 흉갑이 쩍 갈라졌다.

검사와 기사는 피가 흐르고, 살이 뜯어져도 검을 놓치지 않았다.

생사대적이라도 만난 것처럼 상대의 약점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트드득!

세툰의 묵직한 검격에 뒤로 밀려난 버렌이 이를 악물었다. 검을 세우고, 오러를 전력으로 끌어올렸다.

"흡!"

세툰도 버렌의 기운을 느끼고 단전의 오러를 모조리 운용했다.

"흐아압!"

버렌이 바람에 몸을 실어 나아갔고, 세툰은 두 다리를 땅에 박은 채 검을 내리쳤다.

콰아앙!

대련장이 뭉개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회색 연기가 치솟았다.

잔돌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두 사람의 움직임이 멈췄다.

후우웅!

리메르는 콧노래를 부르며 손을 뻗었다. 녹색 바람이 불어와 대련장의 연기를 밀어냈다.

버렌과 세툰은 주먹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멈춰 섰고, 두 사람의 검은 반으로 갈라져 땅에 박혀 있었다.

"어?"

"저, 저렇게 되면…."

"비긴 거잖아."

수련생들의 말대로 두 사람은 더 이상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체력과 오러를 모조리 사용해 사지를 덜덜 떨고 있었다.

"19번째 대련은 무승부!"

리메르의 선언을 들으며 버렌이 억지로 몸을 세워 대련장을 내려왔다.

"젠장…."

그는 이를 악문 채로 인상을 구겼다.

"잘했다. 저 수련 기사 오웬 쪽에서 가장 강했어."

"그게 무슨 소용이냐.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걸고 나갔다면 무조건 이겼어야 했어!"

버렌은 말아쥔 주먹으로 땅을 내리쳤다. 힘이 없어서 피부가 찢겨나갔다.

"흐음."

라온은 버렌과 싸웠던 세툰을 보았다. 그 역시 분했는지 점잖았던 표정이 나무껍질처럼 구겨져 있었다.

'명예라….'

전생이고, 현생이고 살기 위해 바빴기 때문인지 아직도 명예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그럼 승패를 결정할 마지막 대련을 시작하겠습니다!"

리메르의 경쾌한 음성을 들으며 일어섰다.

"걱정하지 마."

라온은 입술을 구기는 버렌을 돌아보았다.

"내가 이길테니까."

"...."

버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나름대로 믿는다는 표현 같았다.

라온은 몸을 돌려 대련장으로 올라갔다. 명예 따윈 모르겠지만, 모두가 한마음이 되었으니 이겨줄 생각이다. 아니, 이기고 싶었다.

"지그하르트의 직계인가?"

대련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삼왕자가 검병을 두드리며 고개를 틀었다.

"아닙니다. 방계입니다."

"쯧, 버리는 말과 싸우게 되다니."

방계라고 하자 삼왕자의 이마가 구겨졌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무력을 알아보지 못한 상태였다.

"제안이 있소."

삼왕자는 라온을 쳐다보지도 않고 리메르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떤 제안이십니까?"

"저쪽의 둘."

그가 대련장을 지켜보는 루난과 마르타를 가리켰다.

"제대로 힘을 쓴 거 같지도 않은데 내가 이자를 꺾으면 재대련을 하는 게 어떻겠소?"

"흐음…."

리메르가 떨리는 턱을 긁적였다. 표정을 보니 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

"뭐, 그렇게 하죠. 이.기.신.다.면요."

"그럼 저들에게 몸을 풀라고 하시오. 금방 끝날 테니까."

삼왕자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그러게 빨리 끝나겠네."

라온의 눈동자에 서늘한 한기가 번뜩였다.

내가 이기겠지만.

4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