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다시 공방으로 들어간 라온이 금결석 위에 손을 얹었다. 만화공과 글래시아를 동시에 운용하여 금결석의 틈에 오러를 밀어 넣었다.
우우우웅!
먹물을 빨아들이는 도화지처럼 돌 전체에 붉고 푸른 오러가 스며들어 찬란한 빛을 뿜어냈다.
"이 빛과 색이라면 현철과…어?"
발칸이 금결석에 다가가다가 눈을 부릅떴다.
붉은 열기와 푸른 냉기 사이로 새로운 빛이 새싹처럼 돋아나더니, 세 가지 기운이 처음부터 하나인 것처럼 나선으로 모여들어 상서로운 금빛 광채를 뿜어냈다.
뿌드드득!
깨지지 않는다는 금결석에 거미줄 같은 금이 그어지고, 금색 서기는 더욱더 짙어졌다.
콰아아앙!
결국 금결석이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조각나 부서지고, 그 안에서 영롱한 광채를 뿜어내는 작은 쇠구슬 하나가 튀어나왔다.
"허억!"
발칸은 그 구슬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금결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다니!"
제170화
라온은 바스러진 금결석 조각들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방금은 만화공과 글래시아만 움직인 게 아니야.'
직접 움직인 두 가지 기운만이 아니라, 허리 뒤편에 매고 있는 진혼검의 요기까지 금결석에 스며들었다.
그 세 가지 기운이 금결석 내부에 흘러갔을 때 마지막으로 움직인 건 불의 고리.
심장을 휘도는 여섯 개의 고리가 공명하며 만화공과 글래시아 그리고 요기를 합일시키려 했고, 그 강대한 힘을 견디지 못해 금결석이 깨져버린 것이다.
"으음…."
발칸은 번쩍이는 구슬을 주우며 손을 떨었다.
"내 평생에 금결이 스스로 움직이는 걸 보는 건 처음이다."
그의 오색으로 번쩍이는 금결을 보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이렇게 당황하는 발칸은 처음 보았다.
"이게 금결이군요."
라온은 발칸이 쥔 구슬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괜히 금속의 왕이 아닌지 반짝이는 구슬에서 신묘한 기운이 흘러내렸다.
"그래. 이 녀석이 모든 기운을 증폭시킨다는 금결이다. 이게 이렇게 빛난다는 건 네 기운이 마음에 들었…."
"으허헉!"
발칸이 금결을 내밀며 말을 할 때 옆에 눕혀놓았던 하랜이 벌떡 일어나서 기어왔다.
"내, 냉기와 열기를 동시에 사용하다니 너 대체 뭐야! 금결석은 어떻게 부순 거고!"
그는 잘게 쪼개진 금결석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기절한 줄 알았는데."
맞은 곳이 아프다고 발버둥 치길래 잠시 기절시켜놨는데, 하필 금결석이 깨질 때 일어났던 것 같다.
"영감! 대체 무슨 괴물을 데리고 온 거야!"
"닥치고 앉아!"
"커헉!"
발칸이 하랜의 뒤통수를 후려쳐서 바닥에 무릎을 꿇렸다.
"너 어디 가서 오늘 본 거 말하고 다니면 정말 내 손으로 대가리를 깨버릴 거다."
"아, 아니…. 아들한테 너무 살벌한…."
"시끄럽고 빨리 대답이나 해!"
"안 해! 어디 말할 곳도 없고!"
하랜이 빽 소리를 지르며 환자 좀 패지 말라고 소리쳤다.
"이 녀석이 멍청하지만, 입 하나는 무겁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발칸이 금결을 손바닥에서 굴리며 옅게 웃었다.
"알겠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학도 익히지 않은 몸으로 툴란 왕국의 왕자와 기사들을 홀로 막아섰던 걸 보면 나름 믿을 만한 구석이 있긴 했다.
"남의 약점을 잡는 치사한 짓은 안 해!"
하랜이 툴툴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직 아픈지 뒤통수를 쓱쓱 문지르고 있었다.
"그럼 계속하지. 조금 전 넌 냉기와 열기 그리고 또 하나의 기운을 움직였지?"
"예. 다만 제가 움직인 건 아니고…."
라온이 허리 뒤편에 차고 있는 진혼검을 빼서 앞으로 내밀었다.
"요검인가…."
발칸은 한 번 본 것만으로 진혼검이 요기를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예. 쿠베러드 장인께서 만드신 검입니다."
"뭐? 그놈이 요검을 만들었다고?"
그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진혼검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 꽉 막힌 녀석이 어떻게 요검을 만들다니…."
"사정이 있었습니다. 대륙 남부에 있는 시렌 마을에서…."
라온이 눈을 내리감으며 쿠베러드가 진혼검을 만들었던 사연을 말해주었다.
"그랬군. 그렇다면 이해가 돼."
발칸은 이제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 검은 자고 있는 건가?"
"제가 부탁하거나 백혈교를 만나지 않는 이상 조용히 있습니다."
오늘 스스로 움직인 걸 제외하면 진혼검은 잠이 든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꼭 백혈교에게 복수하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는 것처럼.
-미물이 힘을 모아 봤자다. 본왕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바로 짓누를 정도의 저급한 격밖에 되지 않아.
라스는 진혼검을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우우웅!
진혼검이 웃기지 말라는 듯 검신을 떨며 요기를 일으켰다.
-흥!
라스는 코웃음을 치며 진혼검의 요기를 냉기로 짓눌러 버렸다.
-이게 바로 격의 차이이니라. 본왕에게 부탁한다면 복수를 대신 이루어 주마.
'힘에서 밀리면 격이 낮은 거야?'
-당연하다. 힘이 곧 격이자, 존재의 급이니라.
'그럼 너도 나보다 격이 낮네.'
-그, 그게 무슨 소리냐 본왕이 어째서 인간 따위에게!
'너 항상 나한테 밀려서 찌그러지잖아.'
-어억….
할 말이 없는지 라스가 입을 떡 벌렸다.
'급 낮은 마왕님. 쭈구려 계십쇼.'
라온은 진혼검을 쓰다듬어주며 라스을 굽어보았다.
-이, 이 자식!
라스는 참지 못하고 냉기와 분노를 일으켜 마나 회로를 밀고 들어왔다.
고오오오!
라온은 그 강대한 공격을 불의 고리와 만화공, 글래시아로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내며 진혼검을 검집에 넣었다.
"요검은 '요사하다'라는 기질을 담고 있는 검이다. 다만 그 사용에 따라 요검은 신검이 될 수도 있고, 마검이 될 수도 있지."
"결국 제게 달렸다는 뜻이군요."
"그래. 그 검에 어린 원한은 내게도 보일 정도로 짙다. 그 기운에 먹히지 않고, 이름대로 진혼을 이루고 본래의 길로 갈 수 있게 네가 도와주거라."
"알겠습니다."
라온이 진혼검을 꽉 잡아준 뒤 허리에 찼다.
"너라면 할 수 있을 게다."
발칸이 부드럽게 웃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흥, 누가 보면 저쪽이 아들인 줄 알겠네."
하랜이 팔짱을 낀 채 입을 삐죽였다.
"시끄러!"
"으윽!"
발칸이 눈을 부라리자, 하랜이 어깨를 움츠린 채 옆으로 물러났다.
"라온. 이걸 한 번 만져보겠느냐."
발칸이 손에 쥐고 있던 금결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까와 달리 오색 빛은 없었고 시꺼먼 색이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금결을 손에 쥐었다.
우우우웅!
손을 데자마자 금결에서 다섯 가지 빛이 번쩍이면서 검명처럼 청명한 소리와 떨림을 일으켰다.
"허억!"
"허, 역시…."
하랜이 경악하여 손을 떨었고, 발칸이 헛웃음을 흘렸다.
"왜 이러는 거죠?"
"금결이 네 기운에 빠져든 것이다. 널 주인으로 삼고 싶다는 뜻이지."
"설마 자아가 있는 겁니까?"
"자아까지는 아니다. 꽃이 태양을 향해 잎을 벌리듯 본능적인 거다."
"음…."
라온이 입맛을 다시며 금결을 보았다. 지금 라스를 막아내기 위해 내부에 세 가지 기운을 휘돌리고 있는데, 금결은 그 기운들이 마음에 드는지 계속 빛과 떨림을 일으켰다.
"이걸 제 검에 넣어도 되겠습니까? 값은 얼마라도…."
"필요 없다. 이 녀석아."
발칼이 피식 웃으며 손을 저었다.
"이미 주인이 정해진 물건이니, 네게 주는 건 상관없어. 다만 양이 좀 부족하다."
"양…."
그의 말이 맞다. 손 하나로 쥘 수 있는 크기의 구슬이었으니, 단검을 만들기에도 부족한 양이다.
"검을 만들기는커녕 네 기운에 맞는 금속 두 가지를 조화시키기에도 적은 양이지."
"조화라고 하신다면…."
"너는 냉기와 열기를 모두 사용하지 않느냐. 그 두 기운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금속을 섞고, 그 사이를 금결로 마무리하는 게 최고의 방법이다. 열기 쪽은 화인철이 있고, 냉기 쪽은 은형철이 있지만, 그 둘을 접합시킬 금결이 모자라."
발칸이 아쉽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은형철 말고, 이거 써도 돼요!"
조용히 있던 루난이 가슴에 안고 있던 냉혈이 든 상자를 내밀었다.
"제 검을 만들고도 남은 건 전부 라온에게 줄게요."
"저, 정말인가? 이건 냉혈 중에서도 상급인데…."
"괜찮아요,"
그녀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냉혈을 주겠다고 말했다.
"본인이 괜찮다면 상관없지만…."
발간이 고개를 끄덕이고 라온을 보았다. 무슨 관계냐고 묻는듯한 표정이었다.
"동료입니다."
라온은 어깨를 으쓱였다.
"커흠, 그럼 금결과 지열만이 남았군."
발칸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허리를 폈다.
"일단 금결은 내가 한 번 알아보마. 너희는 스켈레이 산에 가서 지열이 낮아진 이유를 보고와 다오."
"알겠습니다. 그럼 안내인 한 명만…."
"거기 있잖느냐. 할 일 없는 놈이."
그가 기어서 밖으로 나가려던 하랜을 가리켰다.
"억!"
"그놈이 어려서부터 빨빨거리며 주변을 돌아다녀서 지리 하나는 잘 알고 있다. 데리고 가라."
"아, 내가 왜 가요! 지금 굉장한 영감이 떠올라서 일을 하려고…."
"씁."
"가, 가겠습니다!"
하랜이 벌떡 일어나 고개를 끄덕였다.
"루난."
"응."
라온은 루난과 함께 공방 밖으로 나갔다.
"다녀오겠습니다."
"문제를 해결할 필요까지는 없으니, 조심해서 다녀와라."
"예."
고개를 끄덕이고 뒤를 돌았다.
-이 자식아! 언제까지 무시할 것이냐!
'무시 안 했어.'
온몸을 찔러오는 냉기와 가슴을 울컥이게 만드는 분노를 어떻게 무시하겠는가. 세 가지 기운을 휘돌리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견디고 있을 뿐이었다.
-좋다! 오늘 아주 끝장을 보자! 네놈에게 본왕의 격이 얼마나 드높은지 알려주겠노라!
'소용없어.'
라스가 가진 기운을 모조리 일으켜서 마나회로에 만든 벽을 공격했지만, 만화공과 글래시아를 더 견고하게 가다듬어 모조리 차단했다.
쿠구구구!
신체 내부에서 수 싸움과 힘 싸움이 동시에 이루어졌지만, 라스는 그중 하나도 이기지 못했다.
-크으윽! 본왕은 포기하지 않는….
녀석이 남은 기운까지 폭발시키려 할 때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분노>의 방해를 견뎌내셨습니다.]
[감각 능력치가 1포인트 상승했습니다.]
[대범한 모습으로 고통을 견뎌내셨습니다.]
[체력 능력치가 1포인트 상승했습니다.]
라스의 패배를 선언하는 심판의 등장이었다.
-또? 이런 빌어먹으으으을!
라스가 까무러치며 뒤로 자빠졌다.
'격이 낮으면 쭈구려 계시라구요.'
라온은 팔찌 위에 널브러진 라스를 보며 차게 웃었다.
* * *
"흐흐흥."
리메르가 콧노래를 부르며 가주전 알현실 문을 두드렸다.
"가주님!"
평소와 달리 글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안에서 로엔이 나와 고개를 숙였다.
"가주님은 잠시 외출하셨습니다."
"예? 그 양반 외출하면 죽는 병 걸렸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리메르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을 허우적댔다.
"저도 직접 움직이신 건 오랜만에 봅니다."
로엔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디 가셨는데요?"
"목적지는 밝히지 않으시고, 잠시 나갔다가 저녁쯤 돌아온다고 하셨습니다."
"그냥 보내면 안 되죠! 가주님에게 무슨 일이 생…길 리가 없구나."
리메르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글렌을 건드릴 사람도 없고, 만약 건드렸다간 지옥을 보게 될 것이다.
"천검대주와 함께 움직였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 그러면야."
천검대주는 자신과 로엔처럼 글렌과 처음부터 함께 한 무인이자, 초강자다. 그녀와 함께 갔다면 믿을 수 있었다.
"가주님은 무슨 일로 찾아오신 겁니까?"
"이런저런 보고를 하려고 왔죠. 라온과 루난이 떠났고, 버렌은 틀어박혀 있고, 마르타는 열심히 수련하고 있다고…."
"그게 다라면 제가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리메르가 돌아가려던 로엔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다, 단주 월급을…."
"그건 미리 지급되었을 텐데요."
"가불로 주셨으면. 아니면 돈을 조금만 빌려주셔도 됩니다!"
"음, 사실 가주님께서 전언을 하나 남기고 가셨습니다."
로엔이 빙긋 웃으며 리메르의 손을 뗐다.
"전언이요?"
"혹시라도 리메르 님이 가불 이야기를 하거나, 돈을 빌려달라고 한다면 직접 찾아가서 '따스한 대화'를 하실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대, 대화…."
리메르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뒤로 물러섰다. 말이 대화지. 분명 주먹이 먼저 날아올 게 뻔했다.
"로엔 님. 우리 사이에 그 정도는 비밀로 해주실 수는 있잖아요."
"물론입니다. 저는 얼마든지 비밀로 해드릴 수 있죠, 하지만…."
로엔이 슬쩍 위를 가리켰다.
"저분들은 괜찮을까요?"
"아…."
리메르가 천장에 숨어 있는 천검대 검사들을 살펴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천검대는 글렌의 말만 듣는다. 말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그 현재를 즐기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맞는 건 나중. 재미는 현재이니. 저는 나중의 대화를 선택하겠습니다."
리메르는 물러나지 않고, 손을 뻗었다.
"흐음, 제가 가불을 해드려도 그분에게 따는 건 불가능하실 텐데."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이 무인 아니겠습니까!"
"후후."
로엔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옅게 웃으며 리메르의 손에 금화 주머니를 올려주었다.
"감사합니다! 오늘 승전보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리메르는 몸을 돌리고 보법까지 사용하여 가주전을 빠져나갔다.
"사신이 보이는군."
로엔은 멀어지는 리메르의 등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왠지 사신의 그림자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로엔이 다시 알현실의 문을 열며 웃음기가 섞인 음성을 흘렸다.
"지금쯤이면 도착하셨으려나."
* * *
하랜은 라온과 루난을 이끌고 스켈레이 산을 올랐다.
"조용히 올라오십시오. 큰 소리가 들리면 주변의 몬스터가 몰려올 테니까."
몬스터가 오지 않는 지리는 훤하게 꿰고 있지만, 소리에 민감한 녀석들이 있어서 조용히 올라가야 했다.
'그건 그렇고….'
슬쩍 뒤를 돌아 라온을 보았다.
'금결이 직접 선택한 검사라니.'
금속 중의 왕이라고 하더라도 생명 없는 철일 뿐이다. 어떠한 혼도 깃들지 않은 철 조각이 직접 주인을 고르고 싶다고 진동을 일으킨 건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음, 그건 어떻게 할 거요?"
대장장이의 전설 같은 광경을 보았기 때문일까. 한참 어린 녀석이지만 이젠 반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거라뇨?"
라온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와 내기한 거 있지 않습니까."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무엇이든 들어주기로 한 거니까."
"그, 그렇다고 해도 너무 심하거나 오래 걸리는 건…."
"그런 것까지 다 포함해서 '무엇이든'이죠."
"이익, 그런 건 받아들일 수 없소! 내기 한 번으로 목줄을…."
하랜이 고개를 흔들려고 할 때 라온이 검을 뽑았다. 서늘한 기운을 뿜어내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자, 잠깐! 거절 좀 했다고 칼을 휘두르는 게 어디 있어! 다 할게! 다 한다고… 으헉!"
손으로 앞을 막고, 눈을 감았지만, 고통은 없었다. 머리 위로 끈적한 흙탕물 같은 것이 몇 방울 떨어졌을 뿐이다.
"뭐…."
눈을 뜨니, 라온의 검에 녹색 핏물이 흐르고 있었고, 옆에는 거대한 파리 형태의 괴물 세 마리가 반으로 갈라진 채 죽어 있었다.
"레, 레드 플라이…."
사막이나 화산지대처럼 열기가 깃든 땅에 사는 곤충형 몬스터로 생명체의 체액을 빨아먹는 지독한 놈들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하랜이 넙죽 고개를 숙였다. 자신을 공격하는 줄 알았는데, 뒤에 있던 레드 플라이를 막아주었던 거였다.
"안내인이 죽으면 귀찮아지니까요."
라온은 아무렇지도 않게 살벌한 말을 흘리고선 미소를 지었다.
'무. 무서운 놈이야.'
방금 그 한 수로 목숨을 구해주었음은 물론 허튼소리 하지 말라는 경고까지 날렸다. 17살이 할 수 있는 심리전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녀석들."
하랜이 레드 플라이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본래 이쪽에는 오지 않는데…."
지금 가는 길은 10여 년 넘게 몬스터가 다니지 않던 곳이다. 한 마리도 아니고 3마리가 함께 나타난 건 이상한 일이다.
"지열에 변화가 생겼듯이 몬스터들의 생태에도 변화가 생겼을 겁니다."
뒤에 있던 라온이 앞으로 나오며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는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이곳의 지리를 모르지 않습니까."
"지리는 모르지만, 기운은 느낄 수 있으니까요. 어디에서 문제가 생겼는지 알 거 같습니다. 꽤 심각하긴 하네요."
그는 스켈레이 산 위쪽을 올려보고서 눈매를 좁혔다.
"루난. 뒤를 지켜줘."
"응."
인형이라고도 생각될 정도로 조용하던 은발의 검사가 고개를 까딱였다.
"그럼 다시 출발하죠."
라온이 앞장서서 걸어갔다. 말도 하지 않았고, 지도를 보여주지도 않았건만, 이 복잡한 곳에서 그는 화산의 열기가 내려오는 지맥을 똑바로 따라갔다.
'허.'
하랜이 헛바람을 흘렸다.
'여기서 문제가 무엇인지를 느꼈다고?'
이곳에서 평생을 산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데, 처음 온 녀석이 어디서 문제가 발생했는지 알았다고 하니 입이 떡 벌어졌다.
'거, 거짓말이겠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라온의 발걸음에는 자신이 넘쳤다. 한 번의 흐트러짐도 없이 산을 똑바로 올라갔다.
놀라운 건 그것만이 아니다.
라온은 주변의 모든 기척을 느끼는 것이기라도 한지, 몬스터가 나타나면 기다렸다는 듯 일검에 목을 갈랐다.
흉폭하기로 이름 높은 지카 오크가 도끼 한 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목이 달아났고, 불을 내뿜는 플레임 스네이크 역시 몸통이 여덟 조각으로 갈라져 낙엽처럼 떨어졌다.
뒤에 있는 루난이라는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열기의 독을 가지고 있는 그레이 스콜피온 다섯 마리가 동시에 달려들었지만 강렬한 냉기를 뿌려 단숨에 얼려버렸다.
'17살에 이 수준이라니. 이게 진짜 지그하르트인가?'
하랜이 마른침을 삼켰다. 리메르처럼 나사가 빠진 인간만 보다가 어리지만 제대로 된 지그하르트의 무인을 보니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 영감탱이가 왜 제대로 봐두라고 한 이유를 알 거 같네.'
아버지가 라온과 루난에게서 눈을 떼지 말고 지켜보라고 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저 어린 녀석들의 무력을 보자, 당장 망치를 잡고 아무 쇠라도 두드리고 싶었다.
하랜은 정말 오랜만에 머릿속에서 도박이라는 단어를 지우고, 망치를 쥐고 있는 것처럼 손아귀를 꼼지락거렸다.
* * *
라온은 산을 오르고, 몬스터를 베면서도 계속 쾌검의 구결을 떠올렸다.
'뭔가가 모자라.'
연성검술, 광아검, 만화공의 검술, 조금 전에 만났던 툴란 왕국의 왕자 타르칸의 검술에서도 쾌의 구결을 뽑아내 머리에 그렸지만, 원하는 속도의 쾌검이 나오지 않았다.
'무엇이 부족한지 모르겠어.'
구결과 검술의 형태를 살짝만 더 다듬으면 극한의 쾌검식이 탄생할 것 같은데 그게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크라락!"
우측에서 지카 오크 네 마리가 나타나 거대한 도끼를 세운 채 돌진해왔다. 인간을 단숨에 찢어버리겠다는 살기로 가득했다.
촤아악!
라온은 손목을 살짝 올린 채 사선으로 검을 그었다. 검극에서 피어난 기운이 공간을 갈라버릴 것처럼 떨어져 내렸다.
"크라라라…."
오크들은 자신에게 닿지도 못하고 땅에 머리를 처박고 쓰러졌다. 표정을 보면 본인들이 칼에 베인 것도 모른 채 죽은 것 같았다.
감각이 뛰어난 지카 오크가 베인 줄도 모를 정도로 빠른 검격이었지만, 라온의 눈빛은 아쉬움을 담고 있었다.
'속도도 속도지만, 방향이 틀어졌어.'
빠름만을 생각했다가는 정확한 위치를 베지 못하고, 반격의 빌미를 주게 된다. 빠름과 정확성은 자석처럼 함께 움직여야 했다.
라온은 쾌검의 구결을 하나하나 조합하고 엮어내며 지열의 흐름을 따라 산을 올랐다.
그렇게 반나절 가까이 산을 오르고 나서야 아래에서 느꼈던 폭발할 정도로 거대한 기운이 웅크리고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긴 너무 많이 올라갔다니까요. 항상 지맥에 문제가 있던 곳은 좀 더 아래…."
"조용히."
평소 문제가 있다는 곳으로 가자는 하랜의 입을 막고 앞을 가리켰다.
쿠구구구.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산등성이 중앙에 날카로운 바위를 층층이 쌓아놓은 듯한 작은 바위 언덕이 있었다. 언덕은 호흡하는 것처럼 아주 천천히 꿀렁거렸다.
"음? 여기에 저런 언덕이 있었던가?"
하랜은 이상하다며 턱수염을 긁적였다.
"언덕이 아니니까."
라온은 호흡을 고르며 검을 뽑았다. 살기를 일으킨 순간 언덕이 몸을 일으키며 강대한 불꽃의 폭풍을 일으켰다.
콰아아아아!
산등성이 전체로 퍼져나간 막대한 불꽃의 파동 위로 무언가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두 개의 뿔이 달린 드래곤의 머리에 거북이의 등껍질을 두른 거대한 화마의 존재였다.
고오오오!
저물어 가는 태양을 가린 채 시뻘건 안광에서 뿜어지는 기세는 이미 몬스터의 그것을 한참 뛰어넘어 있었다.
"레, 레드 드래곤 터틀!"
거대한 괴물과 눈을 마주친 하랜이 본이도 모르게 뒤로 자빠졌다.
"저, 저렇게 큰 건 처음인데. 무슨 몬스터가 산만하냐고!"
그는 말도 안 된다며 입술을 덜덜 떨었다.
"산만 한 레드 드래곤 터틀이라…."
검을 어깨에 걸친 라온의 두 눈에 푸른 서기가 번쩍였다.
"얻을 게 많겠는데."
제171화
"쯧."
미르탄 마을을 한 바퀴 돌고 공방으로 향하는 발칸이 혀를 찼다.
'하긴 여기에 금결이 있을 리 없지.'
금결로 무구를 제작하는 건 대장장이에게 꿈과도 같은 일이다. 마을의 누군가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진즉에 무언가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럼 어쩐다…."
발칸이 본인의 공방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녀석의 검은 평범한 걸로는 안 되는데.'
라온은 화속성 오러와 수속성 오러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특별한 검사다. 그 두 가지 기운 모두를 증폭시키기 위해서는 금결만으로 검을 만들던가, 금속 두 개를 조합한 뒤 그사이에 금결을 엮어야 한다.
루난이라는 아이가 냉혈을 준다고 했으니 금속은 충분하지만, 금속을 연결할 금결이 너무 부족했다.
'복잡하군.'
성격상 대충 상황에 맞추거나, 어설픈 검을 만드는 짓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못 한다. 어떻게 해서든 검사에게 맞는 최고의 검을 만들어야 한다.
"흐음, 경매라도 참여해야 하나."
상업 도시의 카멜룬 지하 경매라면 금결이 나올 가능성도 있다.
'그 녀석에게는 미안하지만, 시간이 조금 더 걸려도 제대로 된 검을 만들어주는 게 좋겠지.'
일단 라온을 돌려보낸 뒤에 금결을 구해서 다시 부르기로 마음먹고 공방의 문을 열었다.
"음?"
발칸이 인상을 찌푸렸다. 문을 잠가서 텅 비어 있어야 할 공방 안에 키가 큰 금발의 남성이 서 있었다.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영업 안 하니… 허억!"
나가라고 말하려던 발칸은 남성의 얼굴을 보자마자 혼이 빠져나간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부, 북멸왕을 뵙습니다!"
너무 놀라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공방에 홀로 있던 남자는 이 땅의 주인 글렌 지그하르트였다.
"오랜만이오."
글렌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부드러운 기운이 일어나 자신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런 과한 인사는 할 필요 없소."
"가, 감사합니다."
발칸이 고개를 꾸벅였다. 글렌을 여러 번 보았지만 만날 때마다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다시 망치를 잡았다고 해서 와보았소. 젊은 시절의 열기를 되찾은 듯하니 부럽구려."
글렌이 벽과 테이블 위에 가득한 철 조각을 쓸어내리며 눈을 빛냈다.
"부끄럽습니다. 다 늙고 나서야 제가 정말 무엇을 원했는지를 깨달았을 뿐입니다."
"정말 원하는 것을 알았다면 그걸로 좋은 일이오. 나이 따위는 중요하지 않지. 축하하오."
"감사합니다."
발칸이 다시 허리를 굽혔다.
'더 강해지신 건가.'
글렌의 기질 자체가 이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졌다. 또 하나의 벽을 넘어선 것 같았다.
'이젠 어떤 경지에 오르셨는지도 모르겠군.'
셀 수 없이 많은 강자를 보아온 자신의 눈으로도 글렌의 격이 느껴지지 않았다. 저 구름을 넘어 하늘의 끝에 도달한 느낌이다.
"오랜만에 검을 봐주었으면 해서 들렸소."
글렌이 허리에 차고 있던 검붉은 색 검집을 내밀었다. 검부터 검집까지 직접 만들었던 진천검이었다.
"알겠습니다."
발칸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진천검을 뽑았다.
치이잉!
어둠을 오려낸 듯한 시꺼먼 칼날이 오싹할 정도의 예기를 피워낸다. 대륙 제일이라 칭해도 부족하지 않을 완성도. 이 검이 바로 발칸이 만들어낸 최고의 명검 진천검이었다.
"음."
발칸은 스스로 만들어낸 걸작을 차가운 눈으로 훑어내렸다.
"확실히 심마를 벗어났구려."
글렌이 진천검을 살피는 발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천을 보는 눈이 달라졌소."
"저도 방금 느꼈습니다."
예전에는 자괴감이 들어 진천검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지만, 지금은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 검과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다.
"어떤 것 같소?"
"완벽합니다. 검신 전체를 금결로 만들었으니, 손상된 부분도 전혀 없습니다."
발칸은 검을 닦는 비단을 가져와 아래부터 위까지 천천히 닦아 내렸다. 다시 보아도 부족함이 보이지 않는 검이다.
"사실 제가 심마를 벗어난 이유는 가주님의 손자 덕분입니다."
"손자?"
"라온 말입니다."
"음…."
"그 아이는 냉기에 고통받으면서도 매일 같이 숯가마에 찾아와 지독할 정도의 열기를 버텨냈습니다. 평생 화로 앞에서 사는 대장장이들도 견디지 못한 열기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았죠."
발칸이 어린 라온의 모습을 떠올리며 옅게 웃었다.
"그 아이의 열정과 노력을 보니, 제 옛날 모습과 목표가 떠오르며 자연스레 심마를 벗어날 수 있었죠. 수많은 검사를 봐왔기에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 아이는 높이 올라갈 겁니다."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글렌은 별 관심 없다는 듯 차가운 말을 흘렸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지금까지 가라앉아 있던 그의 입꼬리가 살짝 꿈틀거렸다.
'저런 표정을 지으시다니.'
철면 같았던 글렌의 입매가 살짝 올라가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다 끝났습니다."
발칸이 진천검을 다 닦은 뒤에 검집에 넣어 글렌에게 돌려주었다.
"고맙소."
글렌이 진천검을 다시 허리에 찼다. 단순히 검을 착용할 뿐이었지만, 너무도 우아하여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럼 값을 치러야겠지."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발칸은 필요 없다고 말하며 손을 빠르게 저었다.
"나를 염치도 없는 사람으로 만들지 마시오."
글렌이 허공에 손가락을 긋자, 금빛으로 공간이 갈라졌다. 그는 그 안에 손을 넣은 뒤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목갑을 하나 꺼냈다.
"이건…."
"내게는 별 필요 없는 물건이니 받으시오."
"가, 감사합니다."
발칸이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꾸벅이고 상자를 받았다. 예상과는 달리 꽤 무거웠다.
"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오."
"그럼… 허억!"
발칸은 글렌을 보았을 때보다 더 놀라서 손을 파르르 떨었다.
"그, 금결!"
상자 안에는 금결이 들어 있었다. 자신에게 있던 것보다 더 큰 크기의 금결이.
"이걸 왜…."
당장 필요한 물건이기는 하지만, 검을 조금 봐준 것으로 이런 귀한 물건을 받을 수는 없었다.
"말했잖소. 내게는 필요 없는 물건이라고."
"하…."
발칸이 금결을 보며 숨을 골랐다.
"평소라면 절대 받지 않겠지만, 지금은 꼭 필요한 곳이 있습니다."
"필요한 곳?"
"라온의 검에 넣을 금결이 필요했는데, 차라리 잘 되었습니다. 곧 라온이 돌아올 테니, 그 녀석에게 가주님이 내리는 선물로…."
"오다가 주웠소."
글렌이 퉁명스럽게 답했다. 오가다 주었다니, 자신의 귀에 이상이 생긴 줄 알았다.
"예에?"
"오다가 주웠으니, 생색내고 싶지 않소."
"아니, 그게…."
"오다가 주웠소."
"아무리 그래도…."
"오다가 주웠다니까."
글렌이 처음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 알았다. 금결을 준 걸 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아, 알겠습니다. 그럼 이, 익명으로 하겠습니다."
"이것도 받으시오."
글렌이 두 번째로 작은 상자를 넘겨주었다.
"이건 또 무슨…."
"몸의 기운을 북돋아 주는 작은 영약이오. 복용이 쉬우니, 그저 삼키기만 하면 되오."
"이런 것까지 받을 수는 없습니다!"
발칸이 목갑을 돌려주려고 했지만, 글렌은 이미 공방을 벗어나 있었다.
"나중에 또 봅시다."
그는 가볍게 손을 흔들고 그 자리에서 허깨비처럼 사라졌다.
"허…."
발칸이 손에 든 글결과 영약을 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뭐가 뭔지 모르겠군."
* * *
"쿠오오오오!"
레드 드래곤 터틀이 포효를 터트리며 발을 굴렀다. 산에 진동이 일고, 바닥에서 솟구친 염화의 벽이 퍼져나갔다.
후우우웅!
라온은 십(十)자로 검풍을 내리쳐 전방에서 뻗어 나오는 불꽃을 갈라버리고 시야를 열었다.
'꽤 뜨거운데.'
화속성 저항력이 있는 자신에게도 열기가 영향을 미칠 정도다. 익히 알고 있던 레드 드래곤 터틀의 화력이 아니었다.
-당연한 일인데, 뭘 그리 놀라는 것이냐.
라스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지금까지 지열이 낮았다는 건 저 거북이가 몇 주 동안 땅에 주둥이를 대고 열기를 흡수해왔다는 뜻이다.
'그게 가능한 건가?'
-본래라면 열기를 담다가 그릇이 터졌겠지만, 저놈은 그걸 견디고 진화한 거지. 거의 하급 영물이라고 봐도 될 정도이니라.
'하급 영물이라….'
-저 거북이의 육체에는 네놈의 검도 먹히지 않을 테니, 잘 싸워 보거라.
라스는 얄밉게도 팔찌 위로 머리만 내민 채 키득거렸다.
'어디 보자고. 먹히는지 안 먹히는지.'
라온이 만화공을 끌어 올리며 레드 드래곤 터틀을 향해 내달렸다.
"쿠오오오!"
레드 드래곤 터틀은 식사를 방해한 것에 화가 났는지 긴 주둥이를 벌렸다. 무저갱 같은 목구멍에서 시뻘건 화염을 토해냈다. 플레임 브레스였다.
콰아아아아!
일반적인 레드 드래곤 터틀의 브레스라면 어렵지 않게 견딜 수 있지만, 저 괴물의 브레스는 숨쉬기 힘들 정도의 열기를 담고 있었다.
"흐읍!"
라온이 진각을 밟으며 검을 내질렀다. 검신에 어린 만화공의 기운이 나선으로 회전하며 시뻘건 톱날을 형성했다. 만화공 십화 회천이었다.
콰아아아앙!
라온과 레드 드래곤 터틀 사이에서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어나며 열기가 깃든 용오름이 일어났다.
쯧.
라온이 짧게 혀를 찼다. 전력을 다한 회천과 맞먹을 정도라니, 무시무시한 위력이었다.
'다만 어설퍼.'
갑자기 화력이 강해졌기 때문일까. 놈은 힘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했다. 회천을 꺾어 브레스의 방향을 비튼 뒤 가람 보법을 밟았다.
화악!
불꽃의 벽을 가르고 뻗어나가는 왼발. 찰나의 순간에 레드 드래곤 터틀의 옆구리가 보였다.
육체에 깃든 가속력을 그대로 담아 위에서 아래로 검을 내리쳤다. 바위조차 부숴버릴 맹렬한 검격이 레드 드래곤 터틀의 허리에 쏟아졌다.
푸아아악!
세차게 뻗어나간 칼날이 레드 드래곤 터틀의 살을 얇게 가르고, 붉은 피를 뿌렸다.
"쿠오오오오!"
레드 드래곤 터틀이 짜증 어린 비명을 지르고 주둥이를 뻗어왔다. 입에서 뿜어지는 화염을 피한 뒤 다시 검을 내리치려고 할 때였다.
찌이이잉!
레드 드래곤 터틀의 전신이 붉은빛으로 물들고, 조금 전 베었던 상처가 실로 꿰맨 듯 맞물렸다.
"가, 갑각화야! 치면 안 돼! 검이 부러질 거다!'
뒤에서 하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각화.'
갑각화는 레드 드래곤 터틀의 특성 중 하나로 등껍질과 같은 강도를 피부에 옮겨 오는 방어 능력이었다.
'그래도 가야 해.'
공격하지 않는다면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다. 만화공의 불꽃을 검신에 가득 담아 내리쳤다.
쩌어어어엉!
막강한 반탄력에 검이 뒤로 튕겨 나갔다. 살이 아니라, 수없이 두드린 쇳덩이를 친 듯한 감각. 그저 화력만이 아니라, 방어 능력마저 비할 수 없이 강해진 것 같았다.
"크오오오오!"
고통이 없는 건 아닌지 레드 드래곤 터틀이 살벌한 눈빛을 발하며 발을 굴렀다. 대지가 사정없이 갈라지며 불기둥이 치솟았다.
화아아아아아!
레드 드래곤 터틀이 끊임없이 불꽃을 뿜어내자, 나름 열기에 내성이 있는 스켈레이 산의 수풀과 나무들이 불타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걷잡을 수 없는 산불이 일어날 것이다.
"루난!"
"응!"
루난은 그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는 듯 하랜의 멱살을 쥐고 옆으로 빠져서 냉기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화아아아아!
은빛 냉기가 눈송이처럼 쏟아지며 퍼져나가는 화염을 지워냈다.
-본왕이 말했잖느냐. 저 거북이도 네놈처럼 돌연변이다. 쉽게 꺾지는 못할 것이야.
'오히려 좋아.'
-뭐?
'연습 상대로 딱이라고.'
라온이 웃음을 흘리며 레드 드래곤 터틀의 우측으로 짓쳐 들었다.
"쿠오오오오!"
레드 드래곤 터틀이 포효하며 뿜어내는 불꽃을 흘려낸 뒤 만화공을 가라앉히고 글래시아를 운용했다. 차디찬 냉기가 깃든 칼날에 쾌의 구결을 담았다.
캬아아앙!
은빛으로 떨어져 내리는 검격이 레드 드래곤 터틀의 피부를 조금 더 가르고 들어갔지만 역시나 갑각화를 완전히 부수지 못하고 밀려났다.
"크르르륵!"
레드 드래곤 터틀이 분노한 듯 몸을 마구 휘저으며, 긴 꼬리를 내리쳐왔다. 꼬리에 휘감긴 불꽃의 철퇴가 대지를 터트렸다.
'공격이 단순해.'
열기와 위력은 받아치기 어려울 정도지만, 그 궤도가 단순하다. 그저 눈으로만 쫓는 움직임. 폭발하는 불기둥을 밀어내며 레드 드래곤 터틀의 후방으로 다가갔다.
치이이잉!
새로운 쾌검의 구결을 조합하여 두 번째 검격을 쏟아냈다. 검신에서 미끄러지듯 피어난 냉기의 선이 열기로 번들거리는 레드 드래곤 터틀의 피부를 노렸다.
찌지직!
레드 드래곤 터틀의 인지를 벗어난 속도의 검격이 놈의 살을 조금 더 깊게 파고들었다. 그 거대한 육체에 비하면 너무도 작은 상처였지만, 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크아아아!"
레드 드래곤 터틀이 육중한 몸을 들어 올림과 동시에 꼬리를 미친 듯이 휘둘렀다.
쾅! 콰아앙!
화염에 타오르는 꼬리가 대지에 닿을 때마다 산이 무너질 듯 흔들리고, 밟을 곳이 사라져 구석으로 몰렸다.
"크르륵!"
레드 드래곤 터틀이 승리를 했다고 생각했는지 히죽이며 두 번째 브레스를 토해냈다.
콰아아아아아!
모든 것을 녹여낼 것 같은 화염의 숨결이 닿기 직전. 라온이 주먹보다도 작은 땅을 밟고 앞으로 나아갔다. 태화보. 밟을 공간만 있다면 어디든 이동할 수 있는 절대의 보법이 불타는 대지를 질주했다.
"크어어어어!"
레드 드래곤 터틀이 다급히 브레스를 멈추고, 꼬리를 휘두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꼬리가 움직이기도 전에 전력을 다한 극쾌의 검격이 그 앞에 닿아 있었으니까.
쩌어어엉!
꼬리에도 갑각화가 걸려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베는 건 무리였지만 한층 발전한 쾌검식에 이전보다는 확연히 커진 상처가 돋아났다.
치이이익!
직선으로 갈라진 상처에서 붉은 핏물이 치솟았다.
"키아아아악!"
레드 드래곤 터틀이 재빠르게 몸을 돌려 앞발을 휘둘렀다. 바위가 그대로 떨어지는 듯한 압력과 뼈조차 녹여버릴 열기가 동시에 짓쳐 들었다.
'이 정도야.'
뒤늦게 뻗어내지만 먼저 닿는 건 냉기의 검이다. 레드 드래곤 터틀의 앞발이 힘과 속도를 받기 전에 튕겨냈다.
"크르르르!"
그 거대한 육체가 뒤로 밀려난다. 작디작은 인간에게 막힌 것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날카로운 눈동자에 지독한 살의가 어렸다.
"이게 다는 아니지?"
라온이 입에서 허연 김을 뿜어내며 들뜬 미소를 흘렸다.
"난 아직 할 게 많아."
저 단단한 몸에 새로운 쾌검결을 박아넣을수록 검이 빨라지고 강해지는 게 느껴진다. 더 발전할 구석이 무궁무진했다.
"크오오오오!"
레드 드래곤 터틀이 하늘을 올려보며 괴성을 질렀다. 대지에서 용암처럼 끈적한 화염이 치솟아 놈의 육체를 휘감았다.
화아아아아!
바닥에서 솟구친 어마어마한 화력의 불꽃이 레드 드래곤 터틀의 전신을 뒤덮었다. 존재의 격 자체가 크게 상승했다. 저게 지열을 먹어 치운 놈의 진짜 모습인 것 같았다.
-많이도 처먹었구나.
'그러게.'
그동안 대지의 열기를 아주 쪽쪽 빨아먹었는지 느껴지는 기파가 마스터급에 가까웠다.
"가, 가지 마! 저 괴물을 베려면 강기 정도는 써야 한다고!"
초를 치는 하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제없다고 손을 흔들어주고, 자세를 낮췄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싸우면 그만이야."
라온이 거칠게 땅을 박차고, 화염 그 자체가 된 듯한 레드 드래곤 터틀을 향해 돌진했다.
* * *
레드 드래곤 터틀이 불타는 앞발을 휘두른다. 도달하기 전에 먼저 검을 그어 튕겨냈다. 뇌리에 하나의 구결이 돋아난다.
화염의 철퇴를 매단 꼬리를 향해 검을 올려 쳤다. 강대한 충격이 어깨를 짓눌렀지만 앞으로 나아갔다. 구결이 하나 지워진다.
등껍질에서 타오르던 불꽃이 소나기가 되어 쏟아졌다. 지금까지 그려온 쾌검식을 모조리 퍼부었다. 두 개의 구결이 사라지고, 네 개의 구결이 어우러진다.
불과 얼음의 부딪침에 수증기가 온 세상을 뒤덮었다. 눈으로 보고 움직여서는 늦는다. 집중하는 건 감각. 만화공을 감각의 바다처럼 운용하며 냉기의 칼날을 뻗어냈다.
소름이 끼칠 정도의 집중력이 돋아난다. 나와 적의 호흡. 그 모든 흐름이 피부에 와닿았다.
불꽃을 베고, 철퇴를 베고, 등껍질을 베었다.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검이 빨라지고, 냉기가 짙어진다. 구결이 뒤섞이고 어우러져 이제 무엇을 펼치는지조차 잊어버렸다.
크르르륵….
태양조차 가렸던 레드 드래곤 터틀은 그 큰 덩치가 무색하게도 작고 얇은 검에 연신 밀려났다. 본능만을 담은 괴수의 눈동자에 두려움과 공포가 어렸다.
"크아아아아아아!"
레드 드래곤 터틀이 포효를 터트리며 온 대지에 불꽃을 일으켰다. 목을 뒤로 젖혔다가 뻗으며 쌓아둔 화염의 숨결을 모조리 토해냈다.
화아아아아!
지금까지가 장난이었다는 듯 시야 전체가 요동치는 화염으로 가득 찼다.
찌이잉!
불의 고리가 공명하며 세상이 느리게 흐른다.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쾌검의 구결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뇌리에 벼락이 내리쳤다.
세상을 가르는 하나의 선. 그 무엇보다 빠르고, 그 누구보다 먼저 닿을 수 있는 극쾌의 일섬이었다.
깨닫기 전에 먼저 손이 나아간다. 작렬하는 불꽃의 폭풍 앞에 은빛 궤적이 솟아올랐다.
라온 지그하르트 류 검식.
제1형 서리연.
라온의 검에서 명멸하는 푸른빛이 시뻘건 세상을 갈랐다.
제173화
라온의 첫 번째 검식 서리연은 쏟아지는 불꽃세례를 베어내고도 한발 더 나아갔다.
푸카아악!
비틀어져 열리는 시야 속에서 레드 드래곤 터틀의 목젖에서 가는 핏줄기가 터져 나왔다. 서리연의 참격이 레드 드래곤 터틀의 인지를 넘어서 놈의 목을 베어버린 것이다.
"크으으으!"
당황한 레드 드래곤 터틀이 상처를 감추고 뒤로 물러서려고 했지만, 의미 없는 행동이다. 서리연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검식이 아니니까.
콰아아아아아!
푸른 궤적 위로 은빛 나선이 질주한다. 글래시아의 순수한 냉기가 서리연의 흐름을 따라 레드 드래곤 터틀의 목을 꿰뚫었다.
"그르르륵…."
냉기의 칼날 역시 극쾌. 첫 번째 못지않은 속도의 검격에 레드 드래곤 터틀은 반응조차 못 하고 그대로 목을 헌납했다.
콰아아.
레드 드래곤 터틀의 목에서 뿜어지는 붉은 핏물이 대지를 태우는 불꽃을 가라앉혔다.
쿠우우웅!
결국 레드 드래곤 터틀은 그 거대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졌고, 허공에는 놈의 목을 갈랐던 얼음의 폭포수만이 남았다.
"후우…."
라온은 화상 입은 피부를 글래시아로 가라앉히며 얼음의 칼날을 보았다.
서리연.
연(淵)이란 폭포 아래에 있는 웅덩이를 말함이다. 폭포에서 떨어질 때 한 번.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치솟은 물이 다시 쏟아질 때 두 번. 그 두 번의 낙하를 담아낸 것이 바로 서리연이라는 검식이었다.
빠르면서도 정확했고, 속성의 칼날까지 숨겨져 있었다. 장담할 수 있다. 마스터라고 해도 초입 수준이면 이 검격을 완벽하게 막아내지 못할 것이다.
-이익….
라스는 이렇게 쉽게 끝날 줄 몰랐던지 낮은 신음을 흘렸다.
-저 멍청한 거북이 자식! 너무 빠르게 강해져서 어떻게 힘을 사용해야 하는지 모른다. 차라리 저 껍질에 숨던가! 그냥 힘만 내뿜는 멍청한 짓만 했느니라!
'맞는 말이야.'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드 드래곤 터틀의 기운은 마스터에 필적했지만, 싸움법은 본래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녀석이 자신의 힘을 온전히 다뤘다면 훨씬 힘들었을 것이다.
-운 좋은 줄 알아라. 그놈이 그 불길을 제대로 이용했다면 네놈은 홀라당 타버렸을 테니까.
'운이 나쁜 거지.'
-뭐?
'그런 강한 놈이랑 싸우면 내가 더 강해질 수 있었을 테니까.'
-정말이지 미친놈이로다….
라스가 질린다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검식은 어땠어?'
-나쁘지 않았다.
'오?'
-인간치고는. 본왕에게 그런 허접한 검을 썼다간 단번에 얼려버릴….
라스가 놀리듯이 이죽거릴 때 눈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검식을 창안하셨습니다.]
[칭호<어린 대종사>가 생성되었습니다.]
[중상격의 몬스터를 쓰러뜨렸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2포인트 상승합니다.]
새로운 검식을 만들어내고, 영물급이 된 레드 드래곤 터틀을 쓰러뜨려서 능력치가 올랐다는 메시지였다.
-이게 무슨!
라스가 말이 안 된다는 듯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세 살짜리도 만들 허접한 검술로 어떻게 대종사의 칭호를 받는다는 말이냐!
녀석의 어깨 위로 분노의 냉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거기다! 저 레드 드래곤 터틀은 기껏해야 중격이다! 기운이 좀 강했을 뿐이지 상대하기 어려운 놈이 아니었단 말이다!
라스가 분노를 터트리든 말든 상관없이 시스템은 줄 건 주고 사라져버렸다.
-끄으윽, 시스템을 너무 단순하게 만들었어!
'단순하다고?'
-빠르게 강해지기 위해서 결과만을 따지도록 만들었는데, 이렇게 꼬일 줄은 몰랐다.
'흐음….'
라온은 이를 가는 라스를 보며 피식 웃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난 고마울 뿐이지.'
라스 덕분에 누구도 상대 안 될 정도의 속도로 강해지고 있다. 호구처럼 아낌없이 넘겨주는 시스템과 라스에게 감사할 뿐이다.
<어린 대종사>
스스로 무학을 창안한 어린 무인에게 주어지는 칭호.
능력 : 직접 만든 무학을 사용할 시 위력이 강화되고, 오러의 소모가 감소한다. 타인의 무학을 더 상세하게 관찰할 수 있다.
어린 대종사라는 이름답게 아직 부족할 수 있는 무학의 위력을 강화해주고, 상대를 관찰하여 더 많은 것을 얻으라는 뜻의 칭호 같았다.
앞으로도 많은 무학을 만들어야 하니 굉장히 마음에 드는 능력이었다.
-망할….
라스는 칭호를 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내가 말했잖아. 여기서 많은 것을 얻을 거라고.'
라온은 검을 집어넣으며 라스를 툭 쳤다.
-인생을 날로 먹는 놈 같으니….
라스는 발작이라도 일으킬 것처럼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라온."
루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평소와 같이 맹한 눈을 한 루난과 구역질이라도 할 것처럼 창백한 낯의 하랜이 달려왔다.
"그, 그걸 정말 잡다니…."
하랜은 숨이 끊어진 레드 드래곤 터틀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거의 반쯤 혼이 빠져나간 표정으로 어떻게 베었는지를 물어왔다.
"싸우는 방법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닙니다."
서리연은 수속성의 검식이고, 글래시아로 정화한 냉기의 순도는 대륙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짙다. 아무리 지열을 빨아먹어서 강화된 레드 드래곤 터틀이라도 견디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 그럼 처음부터 그 기술로 잡지. 왜 이렇게 시간을 끈 겁니까?"
하랜은 완벽하게 말을 높이고 있었다. 더 이상 아이로 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아까는 방금 검술을 쓸 수 없었습니다."
"예? 그게 무슨…."
"저 녀석의 목을 뚫은 검술. 조금 전에 만든 겁니다."
"어억!"
솔직하게 말해주자 하랜이 턱을 달달 떨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 루난을 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랜은 아예 무릎을 꿇었다.
"미친…."
하랜이 눈을 부릅뜬 채 손가락으로 레드 드래곤 터틀을 가리켰다.
"그러면 그전까지는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조건 달려든 거라는 겁니까?"
"뭐 강해질 길도 보였고, 정 안 되면 수십 번, 수백 번 쳐서라도 잡으면 되는 거니까요."
서리연이 완성되지 않았어도 상관없다. 시간이 더 많이 걸렸겠지만 결국 레드 드래곤 터틀을 쓰러뜨렸을 테니까.
"허어…."
하랜이 주저앉은 채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감탄한 것 같기도 했고, 이해되지 않는 것 같기도 했으며,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기도 했다.
"음음."
루난은 손가락으로 레드 드래곤 터틀을 툭툭 건들면서 입을 살짝 내밀었다. 냉기를 좋아하니, 계속 열기만 뿜어냈던 놈에게 살짝 짜증 내는 것 같았다.
'라스.'
-본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됐고. 아까 영물이라고 했지. 그러면 내단 같은 것도 있으려나?'
몬스터 혹은 짐승이 종족의 격을 벗어나면 몸속에 내단이라는 것을 만든다. 그걸 복용하면 오러의 양이 늘거나 육체가 강해지기 때문에 부르는 게 값인 보물이었다.
-본왕은 영물이라고 봐도 될 정도라고 했지. 영물이라고 하지 않았다. 거기다….
라스가 히죽 비웃음을 흘렸다.
-저 거북이는 불꽃과 등껍질을 강화하는데 모든 기운을 소모했다. 저 안에서 얻을 건 단단한 껍질뿐이니라.
녀석은 네놈의 운으로도 이건 별수 없다며 키득댔다. 실망했다고 착각한 것 같았다.
'그거면 충분해.'
라온이 옅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새로운 검식을 만들었고, 칭호를 얻었으며, 능력치까지 올랐다. 전리품으로 저 레드 드래곤 터틀의 사체까지 있으니 생각 이상의 소득이다.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아…어?'
루난의 옆으로 다가가 레드 드래곤 터틀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만화공이 잔불처럼 일어나며 레드 드래곤 터틀의 내부에 있던 강대한 화속성의 마나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손아귀가 떨릴 정도로 막대한 양의 마나가 흡수되며 등골 사이로 오싹한 희열이 찾아왔다.
[만화공(4성)이 레드 드래곤 터틀의 화기를 흡수했습니다.]
[만화공의 성취가 상승합니다.]
[대량의 화기로 인해 모든 능력치가 5포인트 상승합니다.]
[화속성 저항력이 4성으로 상승합니다.]
레드 드래곤 터틀의 내부에 있던 열기를 모조리 빨아들이자마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후우!"
떨리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능력치로 많은 부분이 치환되었지만 마나회로에 아직 상당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이걸 모두 받아들인다면 한층 더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내단 그 이상의 소득이군.'
-이, 이게 무엇이야! 줬는데, 왜 또 주는 것이냐! 조금 전에 능력치와 칭호를 받았는데!
'아까 건 내가 싸워서 이긴 거고. 지금은 만화공이 스스로 움직여서….'
-그 입 닫아라!
라스가 냉기로 만든 손아귀로 땅을 후려쳤다.
-세상이 왜 이러는 것이냐! 이건 아니잖아! 세상이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어둠으로 물든 스켈레이 산의 중턱에 분노의 마왕이 터트린 절규가 울려버렸다.
-왜 죄다 이놈에게 못 줘서 안달이냐고!
* * *
"으음…."
하랜은 죽은 레드 드래곤 터틀의 껍데기와 피부를 만져보며 신음을 흘렸다.
'이걸 베었다니.'
평생을 대장장이로 살아왔기 때문에 알 수 있다.
이 불꽃 거북이의 거죽의 강도는 단단하기 그지없다는 현철과 맞먹는다. 강기가 아니라면 수없이 두드려야 할 두께지만 저 미친놈은 그걸 한 번의 검기로 베어버렸다.
'물론 그냥 검기는 아니지만.'
수속성의 검기. 그것도 한 번을 휘둘러 두 번을 베는 정신 나간 검술이었지만 결국 검기는 검기다.
무슨 짓을 했기에 겨우 검기로 저리 성장한 레드 드래곤 터틀을 베었는지 모르겠다.
다만 정말 놀라운 건 그게 아니다.
하랜이 입술을 깨물며 지맥을 정비하는 라온을 바라보았다. 옷은 반 이상 탔고, 전신이 꺼멓게 그을려 있었다.
'싸우면서 성장했다는 점.'
저 지독한 열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견디면서 싸우고 강해져서 레드 드래곤 터틀을 베었다는 게 더 놀라웠다.
화상을 입어 고통이 심할 텐데, 일말의 티도 내지 않는다. 솔직히 말해서 저런 괴물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그저 흔한 온실 속의 천재인 줄만 알았는데….'
17살에 저 무력. 지그하르트에서 태어나 정해진 루트대로 살아온 온실 속 화초라고 생각했는데 아주 큰 착각이었다.
조금 전의 살벌한 전투와 가라앉은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녀석은 깊고 짙은 진흙탕을 넘어온 녀석이다.
"후우…."
오랜만에 심장이 두방망이질 친다. 저기 있는 괴물에게 내가 만든 무구를 입혀주고, 그가 대륙에 우뚝 서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사라졌던 열정이 다시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그럼 돌아가죠."
라온이 레드 드래곤 터틀에게 다가갔다. 왼손과 오른손을 동시에 올려 레드 드래곤 터틀을 목을 들었다.
"그, 그걸 들어?"
죽고 나서 갑자기 쪼그라들었지만 웬만한 팔두마차보다 큰 크기다. 검술만이 아니라, 근력도 인간의 격을 벗어나 있었다.
쿠구구구!
라온은 이대로 들고 가려는 듯 레드 드래곤 터틀을 끌기 시작했다. 저걸 든 것도 놀라웠지만 가져가려는 게 더 경악스러웠다.
"자, 잠깐! 사람들을 불러서 옮기는 게…."
"괜찮아요."
라온이 루난에게 눈빛을 보냈다.
"루난. 좀 도와줘."
"응."
두 사람이 동시에 손을 뻗어서 바닥에 냉기를 뿌렸다. 산등성이부터 저 아래까지 말끔한 빙판이 생성되었다.
"아저씨. 위에 타요."
"예에?"
"이 녀석을 타고 내려갈 거니까. 루난처럼 거북이 위에 올라가시라구요."
"어, 미, 미끄럼틀?"
"맞아요."
라온이 거북이 등껍질을 잡고 앉아 있는 루난을 가리켰다. 표정 변화는 없지만, 볼이 살짝 빨개진 걸 보니, 이 얼음 미끄럼틀을 기대하는 것 같았다.
"아, 알겠습니다."
하랜은 마른침을 꿀꺽 삼기고 레드 드래곤 터틀 위에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그럼 갑니다."
라온은 뒤로 가서 레드 드래곤 터틀을 빙판으로 밀어버렸다. 이 산의 주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초대형 몬스터가 한낱 썰매가 되어 아래로 쓸려 내려갔다.
"우어어억!"
맹렬한 바람에 입이 자동으로 벌어지고 비명이 터졌다.
'미, 미친놈이야! 진짜 미친놈들이라고!'
하랜은 따가울 정도의 바람을 느끼며 다짐했다. 뒤에 있는 저 어린 미친놈만큼은 절대 건들지 않기로.
'근데 내기에서 졌잖아!'
난 좆됐어!
* * *
라온이 떠난 산등성이가 가늘게 내려다보이는 언덕.
글렌은 뒷짐을 진 채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레드 드래곤 터틀을 바라보았다.
"천검대주."
그의 부름에 나무 뒤에 있던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보라색 머리카락을 뒤로 질끈 묶고, 등에 검을 차고 있는 눈매가 가는 여검사였다. 덩치가 작았고, 얼굴은 20대 초반이라고 봐도 될 정도였지만, 그녀가 바로 글렌과 수십 년을 함께 한 천검대주였다.
"어떻게 보았지?"
"그 게으름뱅이가 아끼는 이유를 알겠군요."
천검대주가 레드 드래곤 터틀을 타고 내려가는 라온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재능입니다. 특히 마지막의 검격은 직접 만든 것 같더군요."
"그래. 레드 드래곤 터틀과의 전투는 그 검술을 위한 연습이었던 모양이다."
"마스터 이전에 직접 검술을 만드는 건 처음 보았습니다. 대종사의 기질입니다."
천검대주는 아직도 허공에 그려져 있는 냉기의 궤적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무인들이 직접 무학을 창안하는 건 아무리 빨라도 마스터를 넘어야 하건만 라온은 익스퍼트 최상급에 첫 번째 검술을 만들어냈다. 놀랍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거기다 레드 드래곤 터틀의 몸에 남아 있던 열기를 흡수하는 능력까지 있던데, 저게 전에 말씀하셨던 만화공의 능력입니까?"
"그래. 경지에 오른 만화공이 레드 드래곤 터틀 내부의 열기를 그대로 흡수한 거다."
"여러모로 감탄이 나오는 아이입니다. 그저 재능만을 이용하는 게 다가 아니라, 역경을 뚫어내는 힘도 있어요. 어디에 가든 제 역할을 할 겁니다."
"뭐, 그렇게까지 특별한 건 아니지. 적당히 뛰어난 정도다."
글렌은 천검대주가 보이지 않게 앞을 보며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냉정하기로 소문난 천검대주에게 감탄을 자아내는 라온이 기껍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마스터의 벽도 반 이상 넘은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부터가 진짜 고난이지만 저 아이라면 20살쯤에 그 벽을 깰 수 있을 것 같군요."
천검대주는 산 아래까지 미끄러져 내려가는 라온을 보며 가는 눈매를 더 얇게 좁혔다.
"지그하르트 역사상 최연소 소드 마스터가…."
"음, 20살 전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예?"
"저 아이라면 약관이 되기 전에 마스터에 도달할 것이라고."
"그에게 남아 있는 벽은 천재라고 빨리 넘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나는 저 아이의 천재성만 가지고 말하는 게 아니다."
글렌이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 뒤를 돌았다.
"저 아이는 너무 빠르게 올라와서 벽을 뚫어내는 게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가주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그 게으름뱅이 도박꾼이 칭찬하는 게 이해되는 재능과 실력이지만, 마스터는 아직 멀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라온은 수련을 시작한 이후 한 번도 새벽 수련을 거르지 않았다. 연무장이 닫히면 별관에서 수련했고, 임무에 나가 불침번을 서면서도 검술을 연습한 녀석이다. 노력과 천재성이 있었으니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지."
"어…."
천검대주가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글렌이 이 정도로 많은 말을 하는 것도, 그게 남에 관한 말인 것도 처음이었다.
은근히 손주 자랑을 하다가 트집 잡는 사람과 말싸움을 하는 팔불출 할아버지 같았다.
"확실하다. 빠르다면 내년. 늦어도 내후년에는 마스터에 오를 것이다."
"조, 조금 전에 그리 특별한 건 아니라고…."
"크흠, 생각보다 조금 늦었구나. 이만 돌아가자."
글렌은 어둑해진 하늘을 올려다보고서 가볍게 땅을 박찼다. 그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라 지그하르트가 있는 방향으로 쏘아졌다.
"...."
천검대주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 도박쟁이의 느낌이 드는 거지…."
* * *
쿠구구구!
작은 망치 소리 정도만 들려오는 미르탄 마을의 저녁. 이 평화로움과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진동이 마을 전체를 울렸다.
"뭐, 뭐야!"
"지진이야?"
"요즘 지열도 약하던데 이젠 진동까지 와?"
늦은 저녁을 먹던 마을 사람들은 진동을 느끼고 다급하게 밖으로 뛰어나왔다.
"지, 지진이 아니야."
그중 한 명이 마른침을 삼키고 마을 아래를 가리켰다.
"뭐? 지진이 아니면…허억!"
"저, 저게 무슨!"
"으아아악! 레드 드래곤 터틀!"
"저 괴물이 왜 마을에 있어!"
"저, 저렇게 큰 건 처음 보는데…."
사람들은 거대한 레드 드래곤 터틀을 보고 입을 떡 벌린 채 뒷걸음질 쳤다. 달려서 도망가려는 대장장이도 있었다.
"이 바보들아. 살아 있는 게 아니야!"
처음으로 목격한 사람이 레드 드래곤 터틀의 아랫부분을 가리켰다. 옷이 다 타버린 금발의 청년이 레드 드래곤 터틀을 끌고 있었다.
"허억!"
"저, 저걸 잡았다고?"
"저거 누구야!"
"그 아이잖아! 전 촌장이 무기를 만들어주겠다던!"
"허어, 저런 괴물을 잡다니, 전 촌장이 노망난 게 아니었어…."
"히, 힘도 장사야. 저 크기를 어떻게 들었지?"
대장장이들은 레드 드래곤 터틀을 가지고 올라가는 라온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흠."
라온은 양옆으로 길게 늘어선 대장장이들을 보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서커스단의 퍼레이드를 구경하는 아이들 같았다.
"자, 잠깐만! 그 시체 나한테 팔 생각 없나? 잘 쳐주겠네!"
"어딜 새치기를 하는 거야! 내가 사지! 금화 500개에 무구 10개를 주겠네!"
"이쪽은 전부 금화로 내지. 금화 2,000개 어떤가!"
언덕을 중간쯤 올랐을 때 대장장이와 상인들이 몰려와 시체를 팔라고 앞을 막아냈다.
"어이! 뭣들 하는 거야!"
라온이 손을 저으려고 할 때 미는지 안 미는지 모를 정도의 힘만 주고 있던 하랜이 앞으로 나와 상인과 대장장이들을 밀쳤다.
"금화 500개? 2,000개? 그런 푼돈으로 어딜 후려치려고! 이분이 우리 아버지 손님인 거 몰라? 앙?"
"아니, 그게…."
"여기서 장사 접고 싶으면 계속해봐."
그 말에 상인과 대장장이들이 슬쩍 뒤로 물러섰다. 조금 더 가격을 높이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하랜의 살벌한 눈빛에 손을 내렸다.
"가시죠!"
하랜이 집사라도 된 듯 손으로 가장 위에 있는 발칸의 대장간을 가리켰다.
"고맙습니다."
라온은 피식 웃으며 레드 드래곤 터틀을 끌고 언덕을 올랐다. 루난이 뒷부분만 바닥을 살짝 얼려서 위까지 끌고 갈 수 있었다.
"으음…."
진동을 느꼈는지 발칸도 밖에 나와 있었다. 레드 드래곤 터틀을 위에서 아래로 훑어내리는 그의 눈동자가 탁 풀려 있었다.
"그, 그게 문제였나?"
"예. 지열을 빨아먹고 있어서 잡아 왔습니다."
"저 정도 크기의 레드 드래곤 터틀은 처음 보는군. 해츨링인 줄 알고 깜짝 놀랐다."
"크기만 컸던 게 아니야! 화력도 지랄맞게 강했다고!"
하랜이 손을 쭉 뻗었다.
"쪼그라들어서 그렇지 아까는 더 컸어. 영감이 그걸 봤어야 했는데."
그는 아쉽다고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열이 어긋난 부근을 정비해 놓았으니, 내일이나 모레면 지열이 안정화될 겁니다."
라온이 공방 앞의 공터에 레드 드래곤 터틀을 내려놓고 손을 탁탁 털었다.
"허, 이런 괴물을 잡아놓고 하는 말이 고작 그거라니. 예전부터 평범한 짓은 하지 않는다니까."
발칸이 라온의 평온한 눈을 보고 헛바람을 흘렸다.
"들어와라."
그가 공방 안을 가리키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쪽도 준비가 끝났다."
제173화
라온은 발칸을 따라 공방 안으로 들어갔다. 잡동사니가 널려 있던 테이블 위에 세 개의 상자가 있었다.
"이 상자들이 준비입니까?"
"그래."
발칸이 옅게 웃으며 첫 번째 상자를 열었다. 금결석에서 나왔던 금결이 들어 있었다.
"두 번째도 네가 이미 본 거다."
두 번째 상자에서는 예전 북망산 숯가마에서 만들었던 금탄이 들어 있었다. 5년이 지났는데도 작은 생채기 하나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발칸이 살짝 입맛을 다시고서 세 번째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첫 번째 상자에 들어 있던 것보다 조금 더 큰 금결이 들어 있었다.
"…구하셨군요."
라온은 세 번째 금결을 보며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저걸 구했을 줄은 몰랐는데.'
금결은 가장 귀한 금속이다 보니, 미르탄 마을에 있지도 않고, 있다고 해도 넘겨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다른 곳에서 구해와야 하나 걱정했는데, 발칸은 이 짧은 시간에 금결을 구해놓았다. 괜히 대륙의 칭호가 붙은 대장장이가 아니었다.
"에엥?"
하랜이 세 번째 상자의 금결을 보며 고개를 크게 틀었다.
"이게 마을에 있었다고?"
그는 이상하다고 중얼거리며 금결을 툭툭 건드렸다.
"이 정도 크기의 금결이 있었다면 내가 모를 수가 없는데. 영감. 이거 진짜 여기서 구한 거 맞아?"
"마, 맞다."
발칸은 살짝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진짜 이상한데, 표정이 왜 그래? 이거 누구한테 얻은…."
"시끄럽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하랜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끄억! 또 왜 때려!"
하랜은 머리를 부여잡고 뒤로 물러나 비명을 질렀다.
"이러다 진짜 돌대가리 된다고!"
"네놈은 원래 돌대가리라 괜찮아!"
발칸이 하랜을 걷어차고 물러나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금결은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라온이 세 번째 상자에 든 금결을 보며 물었다. 처음 가지는 검이다 보니,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훔치거나, 뺏은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라."
"장인께서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걸 준 사람에게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이, 익명의 후원자다. 본인의 신분을 밝히고 싶지 않다더군."
"익명의 후원자?"
"네 정체와 사정을 듣고 후원하고 싶다고 했다."
"혹시 나중에 이상한 요구를 한다던가…."
"그럴 사람이 아니다. 내 이름을 걸고 장담하지. 네가 이 금결을 받는다고 해도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거다."
발칸은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듯 손을 저었다. 식은땀을 흘리고 있긴 했지만, 표정은 당당했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알겠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발칸 정도 되는 장인이 이상한 짓을 벌일 리가 없었다. 비밀이 있는 것 같지만 일단은 믿기로 했다.
"음, 그리고…."
발칸이 아래에 있던 큰 상자를 열었다. 루난이 가져온 냉혈이 2개로 나뉘어 있었다.
"루난."
그는 그중 큰 냉혈과 테이블 위에 있던 금탄 하나를 루난에게 넘겨주었다.
"이걸 가지고, 바로 아래에 있는 촌장의 공방으로 가거라. 미리 말을 해놓았으니, 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게다."
발칸이 언덕 바로 아래에 있는 마름모꼴 형태의 공방을 가리켰다.
"지열이 돌아오려면 이틀 정도 걸린다고 했으니, 미리 가서 네가 원하는 검의 크기와 형태를 잡아놓거라."
"네."
루난은 냉혈과 금탄 하나를 챙기고 일어섰다. 나가기 전에 라온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라는 신호 같았다.
"다녀와,"
"응."
라온이 웃으며 손을 흔들자, 루난은 기분이 좋은지 폴짝 뛰어서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그럼 이제 네 차례다."
발칸이 상자들을 덮고 라온을 보았다.
"전에 너는 꺾이지 않는 검사가 되고 싶다고 했었다. 그 생각은 아직 유효한가?"
"물론입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목표는 변하지 않았을뿐더러 더 견고하게 세워졌다. 원하는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누구에게도 꺾이지 않아야 한다.
"일관된 모습이 좋군."
발칸이 피식 웃으며 테이블 위에 빨간색 철을 올려놓았다.
"이게 화인철이다. 네 검의 반쪽이 될 철이지. 냉혈에는 조금 부족하지만 새로운 재료를 더하면 될 것 같구나."
"새로운 재료라고 하신다면…."
"네가 가져온 거북이가 있잖느냐."
그는 공방 안에서도 보이는 레드 드래곤 터틀의 시체를 가리켰다.
"저걸 이용하면 화인철이 냉혈에 밀리지 않는 재료가 될 거다. 냉혈에 화인철 그리고 중심을 잡을 금결까지. 제대로 된 검이 탄생하겠군."
발칸이 주먹을 꽉 말아쥐며 미소를 지었다.
"이제 네가 원하는 형태를 말해보아라."
"이것과 비슷했으면 좋겠습니다."
라온은 가지고 온 검을 꺼내서 내밀었다. 두껍지도, 얇지도 않고 일반적인 검보다 손가락 하나 정도 긴 검. 앞으로 수많은 검술을 배우고, 익혀야 하기에 자신의 검은 모든 검술 속성을 사용할 수 있는 만검의 형태여야 했다.
"만검이라. 하긴, 네게는 잘 어울리겠구나."
발칸이 눈매를 좁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럼 이틀 뒤 새벽에 다시 와라. 열기가 돌아오는 그때부터 작업을 시작하지."
"그럼 이틀 뒤에 뵙겠습니다."
라온은 발칸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루난이 걱정되었는지 곧바로 촌장의 공방으로 향했다.
"아부지."
하랜은 라온의 등을 보다가 다시 공방으로 들어갔다.
"뭐냐. 징그럽게 왜 그렇게 부르는 게냐."
발칸이 오물이라도 묻은 듯한 표정으로 손을 저었다. 저 녀석이 아버지라고 부른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부탁이 있슴다."
하랜이 무릎을 꿇었다.
"부탁?"
"나도 그 검을 만드는 걸 돕게 해주쇼."
"네가 미친 것이냐."
"나도 내가 미쳤다고 생각해.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치면 정말 끝날 거라고!"
"하루종일 술 퍼먹고, 도박질만 하던 놈이 무슨 작업에 참여하겠다고!"
"제발 부탁해! 잡일이라도 좋아. 검에 닿지 못해도 좋아! 그저 그 공방 안에라도 있게 해줘!"
그는 피가 나도록 머리를 땅에 박았다.
"너… 라온의 무얼 보고 온 것이냐."
"그릇."
고개를 든 하랜의 눈빛에서 탁한 빛이 지워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없었던 거대한 그릇을 봤어."
"음…."
"그 그릇이 더 두껍고 단단해지는데, 내 힘을 보태고 싶어! 제발 도와줘!"
"후우."
발칸은 진지함이 깃든 하랜의 눈과 눈을 마주치며 옅은 숨을 내쉬었다.
"이틀 뒤 새벽이다. 그때까지 몸에 남은 술 냄새와 어긋난 정신을 바로 잡고 와라. 그리고 라온이 거부한다면 바로 쫓아낼 거다."
"알겠어! 고마워!"
하랜은 넙죽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나 참."
발칸은 2년 만에 뛰는 하랜을 보며 피식 웃었다.
"정신을 차리길 바랐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군."
그는 밝은 불이 들어온 촌장의 공방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라온에게 빚이 하나 생긴 건가…."
* * *
지그하르트 남부에 있는 카지노 입구.
흐흐흥.
리메르가 콧노래를 부르며 걸어 나왔다. 오전에만 해도 어깨에 가득하던 쭈구리 기질은 사라지고, 개선장군 같은 당당함만 가득했다.
"으흠."
리메르는 손에 든 금화 주머니를 보며 히죽 웃었다.
"이게 잘 된 건지 모르겠네."
항상 돈을 따가는 그 영감이 없어서 오랜만에 다른 사람들에게 찰지게 돈을 땄다. 이 정도라면 한동안 등 따숩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돈부터 갚고… 아니지! 내일 더 따고, 더 불려서 돌려주면 되잖아."
그는 모든 도박꾼들이 하는 정신 나간 소리를 중얼거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내일도 오늘의 끗발만큼만…."
"어이, 도박쟁이."
리메르가 주점으로 가려 할 때 뒤에서 날카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퉁명스러움 한 국자에 정 한 스푼이 담긴 이 목소리는…."
뒤를 돌아보자 팔짱을 낀 천검대주가 서 있었다.
"우리 천검대주 아니야!"
"네놈에게 줄 정은 눈곱만큼도 없으니, 헛소리하지 마."
천검대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와! 오랜만이네!"
"흥."
리메르는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었고, 천검대주는 콧방귀를 끼었다.
"오늘 좀 땄는데, 한 잔 어때? 내가 살게."
그는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다 대며 주점에 가자고 말했다.
"일단 대화 좀 하지."
"대화 좋지. 임무에 대해서나 좀 말해봐."
"따라와."
천검대주가 손가락을 까딱이며 번화가 외곽으로 이동했다.
"여기에는 별거 없는데, 그냥 주점에서 말해도 되잖아."
"닥치고 오기나 해."
"우리 귀염둥이 천검대주께서 오늘 왜 이리 날카로우실까?"
"그 귀염둥이에게 목이 날아가야 입을 닥치려나?"
"으윽."
리메르가 목을 쓰다듬으며 침을 꼴깍 삼켰다.
"어디까지 가! 내일도 열심히 따려면 일찍 자야 한다고!"
"다 왔어. 여기니까."
천검대주는 아무도 없을 만한 번화가 뒤편의 공터에서 멈춰 섰다.
"여기서 무슨 대화를… 억."
리메르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천적의 기운이 느껴진다. 온몸이 경고를 보내온다. 당장 도망치라고.
"서, 설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곳에 없어야 할 사람. 이곳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그 남자가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가, 가주님!"
글렌 지그하르트가 서늘한 눈빛을 발하며 자신을 굽어보고 있었다.
"내 경고를 무시했더군."
"아니, 그게…."
"그래서 '대화'를 하러 왔다."
"대화하자는 사람의 눈빛이 아닌데요…."
당장 살을 씹어먹을 듯한 글렌의 서늘한 눈빛이 온몸을 짓눌렀다.
"대화가 꼭 말만 있는 게 아니지 않느냐. 몸의 대화도 있지."
글렌이 천천히 손을 올렸다.
쿠르르릉!
훤하게 뚫린 밤하늘에 시꺼먼 먹구름이 돋아나는 신비가 이루어졌다.
"후우, 잠시만요."
리메르는 당황하지 않고 여유롭게 손을 들어 올렸다.
'이럴 줄 알고 있었지.'
로엔에게 돈을 빌릴 때부터 이런 상황을 예측했었다. 예측했으니, 당연히 그에 대한 대비책도 마련되어 있었고.
'난 바보가 아니거든.'
멍청하게 저 벼락을 그냥 맞아 줄 생각은 없었다. 준비한 방법을 사용한다면 멀쩡하게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
"제 말 좀 들어주시지요."
리메르는 진정하라고 말하며 손을 천천히 내렸다.
"라온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글렌은 명실상부 손자 바보다. 라온의 이야기를 꺼낸다면 그도 멈출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북멸왕을 막을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 녀석이 뭘 하는지 듣고 싶다면 일단 구름부터 지우시고… 어?"
리메르가 입을 떡 벌렸다. 없어지거나, 가늘어져야 할 하늘의 먹구름이 더 짙어지고, 붉은 뇌광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 이러면 안 되는데?'
이게 아니라고!
"가, 가주님! 라온이라니까요! 라온이 어딜 갔는지. 무얼 하려는 건지 다 알려드릴게요! 라온 좋아하잖아!"
다급하게 외쳐보았지만 글렌의 눈빛은 더 차갑게 가라앉았고, 뇌기를 머금은 구름은 사라지긴커녕 무시무시한 벼락을 만들어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저 손자 바보가 이런 반응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제 남은 방법은 도망뿐이었다.
"젠장!"
리메르가 극성의 보법을 밟아 물러서려 했지만 어느새 움직인 천검대주가 앞을 가로막았다.
"야! 저거 맞으면 진짜 뒈져!
"잘 가. 도박쟁이."
천검대주가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음과 동시에 하늘이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콰르르릉!
리메르는 쏟아지는 벼락 줄기를 보며 손에 든 금화 주머니를 떨어뜨렸다.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 * *
이틀 뒤 새벽.
마을의 지열이 돌아온 것을 확인한 라온은 발칸의 공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발칸 혼자 있을 거라 생각했던 공방에는 하랜이 자리 잡고 있었다. 미역처럼 휘날리던 머리를 빡빡 밀고, 눈동자에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이틀 만에 보는 것 치고는 극적인 변화였다.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잡일을 시켜도 좋고, 없는 사람 취급해도 좋습니다. 제발 이 공간에만 있게 해주십시오."
그가 깊게 머리를 숙였다. 진심인지 목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왜죠?"
"무언가를 깨달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라온이 발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 마음대로 해라. 저놈이 있든 없든 난 상관없으니까."
"음, 그럼 잡일 정도는 시키죠."
어차피 하랜은 정신 차리게 한 뒤 광풍단 전용 대장장이로 쓸 생각이었다. 여기서 무언가를 깨닫는다면 이득이었다.
"고맙구나. 고마워."
발칸은 라온의 어깨를 두드리며 옅게 웃었다. 대륙 장인도 혈육의 정은 떼지 못했는지 고맙다는 말에 진심이 묻어나왔다.
"그럼 시작하자. 얼마나 걸릴지 나도 모르겠으니까. 하랜!"
"예!"
하랜이 공방으로 달려 들어가 화로에 불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치솟는 온도. 지열이 회복한 덕분에 공방의 열기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다.
"여기 있는 두 금속에 네가 사용하는 오러를 밀어 넣어라."
발칸이 테이블 위에 있는 냉혈과 레드 드래곤 터틀의 등껍질로 강화한 화인철을 가리켰다.
"예."
라온이 테이블 앞으로 다가가 화인철과 냉혈을 잡았다. 냉혈에는 글래시아, 화인철에는 만화공의 기운을 동시에 주입했다.
치이이이이익!
화인철은 타오르는 듯이 붉어지고, 냉혈은 아무도 밟지 않은 새벽의 설원처럼 새하얗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찌지직!
더 짙고 순수한 오러를 밀어 넣어 빛과 열을 올리려고 할 때, 음습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범인은 뻔했다.
'라스,'
-왜, 본왕이 도와주고 있지 않느냐.
라스의 냉기 때문인지 맑은 은빛을 발하던 냉혈에 탁기가 끼기 시작했다.
-네놈은 너무 빨리 강해진다. 본왕이 중간에서 균형을 잡아주도록 하지.
이틀 전 레드 드래곤 터틀을 잡고 얻은 보상에 화난 걸 지금 풀려는 듯 계속해서 탁한 기운을 뿜어냈다.
'후우….'
라온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이 어설픈 마왕에 대한 대비를 해놓기 잘했다.
'미르탄 마을 외곽 드워프의 망치라는 주점이 있어.'
-무슨 망치? 갑자기 헛소리를….
'그 주점에 우탄 돼지 통구이라는 음식을 파는데, 껍질은 쿠키처럼 바삭하고, 살결은 야들야들 부드러우며 소스에는 50가지 재료를 넣어 진하기 그지없다더군.'
-워….
라스는 그 말을 듣자마자 냉기를 밀어 넣는 걸 멈추고 입에서 냉기로 된 침을 줄줄 흘렸다.
'요즘 네가 조용히 있어서 그거나 먹고 가려고 했는데, 그냥 가야겠네.'
-보, 본왕은 관대하다. 네놈이 좋은 검 좀 얻는다고 본왕을 위협할 리가 없지.
녀석이 허리에 손을 척 올렸다. 시원한 웃음을 흘리며 탁기를 빼내기 시작했다.
-그, 그런데 그 주점에는 언제 갈 것이냐?
'검을 다 만들면.'
-크흠, 본왕은 자비롭게 기다리고 있겠노라.
라스는 대답을 듣자마자 팔찌로 들어갔다. 안에서 군침을 흘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참 쉽다니까.'
라온은 피식 웃고서 라스의 기운을 지우고 다시 두 금속에 오러를 끝까지 밀어 넣었다.
"거기까지."
구멍 난 항아리에 물을 담듯이 금속에 오러를 밀어 넣고 있을 때 발칸이 손을 들었다.
"금속에 어린 기운을 보니, 네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보이는구나."
발칸은 두 금속에 담긴 기운을 느끼고서 크게 탄성을 흘렸다.
"충분하다. 이제 뒤에 가 있거라."
"예."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다. 발칸은 두꺼운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화로 속에 첫 번째 금탄을 던져 넣었다.
콰아아아아아!
손가락 두께였던 아지랑이가 팔뚝만 한 크기로 부풀고, 화로의 열기가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거세졌다.
"후욱!"
"크으으윽!"
평생을 화로 앞에서 살았던 발칸과 하랜도 그 열기에 신음을 흘릴 정도였다.
뒤에 떨어진 자신에게도 자극이 올 정도의 열기였으니, 두 사람은 화상을 입는 듯한 고통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발칸은 두 덩이의 금결을 화로 속으로 던지고 뒤로 손을 뻗었다.
"정신 차리고, 화인철부터 가져와!"
"옙!"
발칸은 하랜에게 화인철을 받아 화로의 중간에 집어넣었다.
쿠구구구구!
어마어마한 열기가 작열하며 새빨간 쇳덩이를 녹이기 시작했다.
"다음!"
"예!"
발칸이 화로에서 반쯤 녹은 화인철을 꺼낸 후 냉혈을 화로에 집어넣었다. 강대한 열기 속에서 한 줄기 순수한 냉기가 피어난다.
"이제 한 번에!"
"옙!"
발칸과 하랜이 어중간하게 녹은 화인철과 냉혈을 동시에 화로에 집어넣었다.
화로조차 녹여버릴 듯한 강대한 화력에서도 화인철과 냉혈은 쉽사리 녹지 않았다.
우우우웅!
한참을 지져 쇳덩이들의 형태가 무너졌을 때 발칸이 두 금속을 꺼내고 망치를 들었다.
쩡! 쩡! 쩡!
발칸의 망치질이 시작된다.
강하지도, 빠르지도, 느리지도, 어긋남도 없다. 태어났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호흡하듯 일정한 소리와 일정한 흐름. 수십 년 동안 외길을 걸어온 장인의 망치질이 열기로 가득 찬 공방을 울렸다.
꿀꺽.
라온은 혼이 깃든 망치질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절대의 경지에 오른 검사가 검을 휘두르는 것처럼 망치 소리를 들을 때마다 머리털이 곤두섰다. 눈을 떼지도, 숨을 쉬지도 못한 채 그저 발칸의 망치질만을 바라보았다.
쿠구구구!
망치질이 흐름을 타기 시작했을 때 만화공이 스스로 일어나 화려한 춤을 추고, 글래시아가 올곧이 서서 우아한 노래를 부른다.
쩡! 쩡! 쩡!
두 기운은 발칸의 망치질과 호흡 하는 것처럼 전신의 마나 회로를 질주하며 스스로가 가진 기운을 끝없이 증폭시켰다. 제대로 통제하기도 힘들 정도의 폭주였다.
"후욱."
라온은 참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지금 해야 할 건….'
어설프게 두 기운을 운용해보았자, 폭주를 막기 힘들다. 지금은 그 바탕을 다져야 할 때다.
치이이잉!
만화공과 글래시아를 모두 내려놓고, 불의 고리를 운용했다.
여섯 개의 불의 고리가 진동하며 폭주하는 기운을 부드럽게 가라앉으며 여유를 되찾기 시작했다.
쩡! 쩡! 쩡!
금속이 아니라, 혼을 직접 두드리는 듯한 발칸의 망치 소리에 맞춰서 불의 고리와 만화공, 글래시아가 한 몸처럼 움직였다.
쩌엉! 쩌엉!
이전보다 조금 더 힘이 깃든 망치 소리. 발칸이 세 번째 금속 금결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금결과 호흡하는 건 불의 고리다. 금속의 왕의 울음에 답하듯 여섯 개의 고리를 공명하며 강물처럼 도도한 흐름을 펼쳐냈다.
불의 고리, 만화공, 글래시아의 기운이 끝없이 이어지며 다 흡수하지 못했던 레드 드래곤 터틀의 열기가 버터처럼 전신으로 녹아내렸다.
근육과 뼈가 더 단단하게 여물고, 마나 회로와 단전이 약동하며 더 크게 부풀었다.
쿠구구구.
라온은 외부의 기와 내부의 기가 보이지 않는 선으로 이어진 듯 공명하는 희열을 느끼며 깊은 연공 속으로 빠져들었다.
쩌엉! 쩌엉! 쩌엉!
발칸 역시 라온과 다르지 않았다. 집중을 넘어선 극한의 몰입. 푸른 눈동자에 귀화를 피워내며 끝없이 쇠를 두드렸다.
혼이 담긴 망치질이 계속되자, 화인철과 냉혈 그리고 금결이 본래 하나의 금속이었던 것처럼 어우러지며 섬뜩할 정도의 검은빛을 뿜어내는 칼날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제174화
여덟 살에 공방에 들어왔다.
열둘에 망치를 잡았고, 열넷에 처음 검을 만들었다.
사실 그건 검이 아니었다. 달군 쇠를 두드려 얇게 핀 고철일 뿐이었다.
정말 무기라고 부를 만한 검을 만든 건 열다섯 겨울. 이름난 검사가 마음에 든다며 손에 금화를 쥐여 주었다.
망치질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며 아버지의 만류를 거절하고, 직접 공방을 열었다.
처음으로 만든 검을 사간 검사가 점차 명성을 쌓아갔기 때문인지 손님들이 끝없이 밀려 들어왔다.
공방을 확장하고, 미숙한 대장장이를 받아들여 일거리를 늘렸다. 수많은 단체에 무기를 납품하며 어린 나이에 돈을 갈퀴로 긁어모았다.
공방은 점차 커졌고, 금화는 산처럼 쌓여갔다. 점차 망치를 잡는 날은 줄어들고, 밖으로 나다니며 돈만 쓰고 다니는 시간이 많아졌다. 젊다 못해 어린 나이에 성공한 인생. 그야말로 모두가 부러워할 삶이었다.
그렇게 인생을 즐기며 살고 있을 때 사고가 터졌다.
시한에 맞추느라 제대로 검수하지 못하고 대량으로 납품한 검과 방패의 품질에 문제가 생겨서 몬스터를 토벌하러 간 병사들이 죽거나 크게 다친 것이다.
왕국에서는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요구해왔고, 그동안 모은 재산의 대부분 바쳐서 간신히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었다.
십여 년 동안 쌓아둔 돈이 날아갔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내가 만든 어설프게 만든 무기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는 것.
지금까지 만들어 온 건 장사 도구가 아니라, 사람의 목숨을 살리고 죽이는 무기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장사꾼이 아니라, 대장장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제야 아버지가 왜 빨리 공방을 떠나는 걸 반대했는지 이해가 갔다. 실력은 있지만, 정신이 갖춰지지 않아 이런 사고를 치리라 예상하신 것이다.
그날 이후로 매일을 술로 지새웠다. 마시고, 마시고 또 마셨다.
술을 마시지 않고서는 내 무기 때문에 죽은 사람들이 생각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주정뱅이로 십 년을 살며 얼마 남지 않은 재산도 다 까먹고 목숨을 끊자고 생각하며 폐허가 된 공방으로 돌아갔다.
직접 세운 공방에서 죽으려고 할 때 화로 위에 올려진 망치가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가 처음 사주신 망치. 10년 넘게 잡아 온 망치이니, 마지막으로 잡아보고 죽자고 생각했다.
망치를 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울음이 터졌다. 그 사건 이후로 쌓인 감정이 폭발한 듯 홀로 주저앉아 하루종일 울부짖었다.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흐느낀 후에 일어섰다. 신기하게도 죽겠다는 마음은 눈물과 함께 지워졌다.
아버지의 망치를 쥐고, 녹이 슨 화로에 불을 지폈다. 타오르는 불꽃 속에 고철과 잡념을 집어넣었다.
내게 남은 것은 망치질을 하고 싶다는 욕구 하나였다.
쇠를 두들겼다.
쇠를 두들겼다.
쇠를 두들겼다.
돈, 명성, 감정, 삶 그 모든 것을 용광로에 녹이며 그저 쇠를 두들겼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흐르고 정신을 차려보니, 내게는 대륙 장인이라는 칭호가 붙어 있었고, 대륙 최강이라 불리는 무인에게 검을 만들어 주었다.
젊은 날의 후회를 넘어 대성을 이뤘고, 가정까지 생겼다.
이제 만족스러운 삶을 즐기기만 하면 되건만 무언가가 부족했다. 알 수 없는 결핍이 마음에 구멍을 만들었다.
그건 심마였다. 진천검 이상의 검을 만들 수 없다는 절망이 전신을 짓누른 것이다.
오랜 기간 잡아 온 망치를 다시 내려놓고, 금탄을 만들겠다는 핑계를 대며 도망쳤다.
노력하고 있다는 자기 위안을 하며 십 년 동안 허무한 세월을 보냈다.
슬슬 다 포기하려고 돌아가려 할 때 금발의 꼬맹이가 찾아왔다.
나이에 비해 키도 작고, 바싹 말랐지만,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불을 느끼겠다고 하기에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어차피 견디지 못할 건 뻔했으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금발의 꼬맹이는 숙련된 대장장이들도 학을 떼고 도망간 열기를 몇 달 동안 버티며 결국 오러를 만들어냈다.
전설의 금탄이 탄생했지만, 자신의 눈이 쫓는 건 금탄이 아니라 그 꼬맹이였다.
누군가에게 검을 만들어 주고 싶다는 열망이 몇십 년 만에 생겨나 먼저 무기를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이후 몸을 만들고, 정신을 가다듬으며 5년을 보냈고, 그 꼬맹이가 찾아왔다. 기꺼울 정도로 성장한 꼬맹이는 여러 인연을 거쳐 최고의 재료와 상황을 만들어 왔다.
검을 만드는 당일. 금탄으로 화로의 열기를 극한으로 키운 뒤 쇳덩이들을 집어넣었다.
천천히 녹아내리는 금속들을 보며 마음의 불순물을 태웠다.
진천검을 넘겠다는 야망, 죽기 전에 최고의 작품을 남기고 싶다는 열망마저 불길 속에 녹였다.
그 아래에 남은 건 쇠를 두드리고 싶다는 대장장이의 본능이었다. 화로에서 잡념과 함께 녹여낸 쇳덩이를 꺼내고 망치를 들었다.
쇠를 두드렸다.
쇠를 두드렸다.
쇠를 두드렸다.
50년 전 홀로 폐허가 된 공방에서처럼 내가 누구인지조차 잊어버리고, 그저 쇠를 두드렸다.
칼날처럼 다듬은 집중력에 답하듯 결이 다른 세 종류의 철이 뒤섞이며 천천히 검의 모습이 드러났다.
짙은 흑색. 금결로 만들었던 진천검처럼 검신 전체가 흑색이었다.
검을 화로에 집어넣었다가 꺼내 다시 두드렸다. 점차 형태가 잡히고, 날이 세워졌지만, 검신을 덮은 검은빛은 지워지지 않았다.
크란 가루를 뿌리고 다시 화로에 넣었다. 분명 설원처럼 하얗게 반짝여야 할 검은 아직도 검은빛을 지우지 못했다.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이게 마지막 작품이 되어도 좋았다. 시간조차 잊고 계속 망치를 내리쳤다.
만검의 형태가 잡히고, 소름이 돋을 정도의 예기를 뿜어냈지만, 칼날을 덮은 검은 빛은 그대로였다.
"모르겠군."
수십 년 동안 망치를 들고, 철을 두드린 자신도 이 검이 완성된 것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가 없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우우우웅!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채 망치를 내렸을 때 검이 홀로 울음을 터트렸다. 주인과 호흡하는 검명과는 다른 울림. 주인을 부르는 울부짖음이었다.
"아, 아부지!"
"기다려."
당황한 하랜을 뒤로 물리고, 검의 울음을 지켜보았다. 검이 거친 진동과 함께 허공에 떠올랐다.
고오오오.
스스로 떠오른 검은 끈이 달린 것처럼 공방의 끝에 앉아있는 라온에게 천천히 날아가기 시작했다.
우우웅!
거꾸로 선 검은 라온의 코앞까지 이르러 다시 한번 울음을 터트렸다. 힘을 다한 듯 바닥에 떨어지려 할 때 죽은 듯 앉아있던 라온이 손을 뻗어 검을 잡았다.
찌이이잉!
라온의 손에 붙잡힌 검이 강렬한 진동을 일으킨다. 흔들림이 격해지며 검신에 묻어 있던 검은빛이 재가 되어 흩날리고, 눈처럼 새하얀 검신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번쩍!
태양을 비친 설원처럼 찬란한 빛이 검신에서 아롱질 때 라온이 눈을 떴다. 푸름과 붉음. 각기 두 색이 그의 눈을 가득 채우며 신비로운 광명을 뿜어냈다.
그제야 깨달았다.
저 검은 그야말로 라온을 위해 태어난 검이라고.
* * *
라온은 손에 잡힌 검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처음 잡아보지만, 신기할 정도로 손에 딱 달라붙는다. 잃어버린 반쪽은 찾은 기분이다.
우우우우웅!
검을 쥐고 있는 것만으로 만화공과 글래시아의 기운이 달아오른다. 금결과 화인철 그리고 냉혈에 있다는 오러 증폭 능력이 훨씬 강해진 것 같았다.
"허, 나 참."
발칸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검이 스스로 주인을 찾겠다고 날아가는 건 나도 처음 보는구나."
"아…."
그 말이 사실이라는 걸 단숨에 깨달았다. 검이 스스로 날아오지 않았다면 자신의 손에 이 검이 잡혀 있지 않았을 테니까.
"완성되지 않은 줄 알았지만, 주인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완성되었구나."
발칸이 탄성이 어린 숨을 뱉어냈다.
"그게 네 검이다. 라온 지그하르트. 너만을 따르고, 너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검이야."
그는 홀린 듯한 눈으로 백색으로 반짝이는 검신을 훑어내린 뒤에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의 최고 걸작이지."
"이 녀석이 진천검보다도 위라는 겁니까?"
"그건 다른 이야기다. 진천검의 재료는 모두 금결이니까. 이긴다고 하기는 힘들지. 다만 나의 모든 것이 들어간 검은 진천검이 아니라, 아직 이름이 없는 그 검이다. 그때로 돌아가 그저 망치만을 두드렸어."
발칸은 원과 한을 풀었다며 홀가분하다고 중얼거렸다. 잘 모르겠지만 옛날 일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혹시 생각해둔 이름이 있나?"
"아뇨. 아직 없습니다."
"그럼 내가 지어줘도 될까?"
"물론입니다."
라온이 발칸과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검을 만든 장인이 이름을 붙이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진천은 하늘을 울린다는 뜻이다. 그러니 너는 제천(提天)이 어떠하냐."
"하늘을 이끈다는 뜻입니까?"
"그래. 꺾이지 말고, 네 스스로 하늘을 이끌어 보아라. 그 검이 함께 한다면 가능할 것이야."
"거만한 이름이지만 마음에 드는군요."
"다행이구나."
발칸과 라온이 검을 보며 함께 미소를 지었다.
'제천검.'
라온이 검을 꾹 잡을 때 눈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레드 드래곤 터틀의 열기를 모두 흡수하셨습니다.]
[불의 고리의 성취가 상승합니다.]
[만화공의 성취가 상승합니다.]
[글래시아의 성취가 상승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3포인트 상승합니다.]
내부에서 정리되지 않은 기운을 받아들였다는 메시지였다. 다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최초로 자신만의 무기가 만들어졌습니다.]
[전설급 무구 <제천검>이 당신을 주인으로 여깁니다.]
[모든 능력치가 2포인트 상승했습니다.]
처음으로 자신의 무기를 가졌다며 능력치를 상승시켜주었다.
올라간 능력치, 그리고 성취가 상승한 불의 고리와 오러들로 미루어봤을 때 마스터의 벽을 칠부능선 가까이 넘었다. 이제 그 벽 너머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 남지 않았군.'
늦어도 내년에는 마스터의 벽을 부술 수 있을 것 같았다.
'앞으로도….'
-끄으윽!
라온이 기대감에 주먹을 움켜쥘 때 팔찌에서 라스가 불쑥 튀어나왔다.
-또! 또 시작이니라!
분노가 치민다는 듯 메시지를 보며 눈을 부라렸다.
-본왕의 본체를 얼마나 거덜 내야 속이 시원한 것이냐! 너란 놈은
'투탄 돼지 통구이.'
-어? 음?
'투탄 돼지 통구이가 우릴 기다리고 있다.'
-끄으응….
투탄 돼지 통구이라는 말을 하자마자, 라스의 뾰족한 냉기가 솜털처럼 가라앉기 시작했다.
-비, 빌어먹을.
화가 나지만 통구이를 기대하며 꾹 참는 것 같았다. 분노로 위장취업 한 탐식의 마왕다운 모습이었다.
"너도 수고했다."
발칸이 벽에 등을 기대고 있는 하랜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도, 라온도 몰입해 있었는데, 네가 그 집중을 깨지 않고 움직여준 덕분에 살았어. 빨빨거리며 잘 돌아다니더구나."
"쯧, 좋은 말 많은데, 빨빨거린다가 뭡니까."
하랜이 인상을 찌푸리며 툴툴거렸다.
'확실히.'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발칸과 자신 둘 다 몰입해 있는 상황에서 집중을 깨지 않으며 적시적소에 움직이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발칸이 칭찬한 대로 하랜에게는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
"수고하셨습니다."
"크흠…."
라온이 눈인사를 보내자, 하랜은 민망한지 귀밑머리를 긁적였다.
"화, 환기 좀 시키죠! 이틀 동안 여기에만 갇혀 있었더니 아주 뒤지겠… 억!"
그는 꽉 닫힌 철문을 활짝 열다가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문 앞에는 은발을 왼쪽 어깨로 내린 루난이 있었다. 눈이 살짝 빨간 걸 보니 꽤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끝났어?"
루난은 품에 처음 보는 은빛 검을 안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도 끝났나 보네."
"응."
루난이 품에 안고 있던 검을 뽑아서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처럼 은빛을 띠는 고고해 보이는 칼날에 서늘한 예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보기만 해도 굉장한 명검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검집에는 푸른 꽃잎이 흩날리는 모습이 새겨져 우아함까지 깃들어 있었다. 루난의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살짝 볼이 빨간 걸 보니, 굉장히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딱 그 녀석다운 검이다. 제대로 만들었군."
발칸은 루난의 검에 감탄하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 네 검집은 레드 드래곤 터틀의 등껍질로 만들 생각이다. 화려하면서도 단단하게 붙여서 몽둥이처럼 쓸 수 있게 해주마."
그는 확연하게 지친 모습을 보이면서도 걱정 말라는 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랜. 너도 도와라."
"응. 아니, 예! 알겠습니다!"
하랜이 맡겨달라는 듯 꽉 움켜쥔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감사합니다."
라온이 일어서서 발칸과 하랜에게 고개를 숙였다.
"장인님을 만난 기연 덕분에 이런 검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기연?"
되묻는 듯한 발칸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 검을 만들기 위한 재료 중에 우연히 얻은 게 있더냐. 저 아이가 네게 냉혈을 준 것도, 금탄이 만들어진 것도, 내가 검을 만들기로 마음먹은 것도 전부 너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라는 사람…."
"제천검은 기연이 아니라, 너의 인연으로 만든 것이다."
발칸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지금까지 걸어온 네 길을 잘못되지 않았어. 앞으로도 정진하거라."
인연이라는 단어 그리고 잘못되지 않았다는 말이 가슴을 울린다. 전생의 지옥 같은 삶마저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네."
라온은 떨리는 입술을 깨문 채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 * *
이틀 뒤.
라온의 허리에는 제천검이 납검된 검집이 달려 있었다. 여명과도 같은 금빛과 노을의 검붉은색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하늘을 이끄는 검을 담는 검집의 모습으로는 제격이었다.
그저 단단하기만 했던 레드 드래곤 터틀의 등껍질로 이런 작품을 만든 발칸과 하랜에게 감탄이 나왔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라온이 공방 앞에 있는 발칸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쉽군. 조금 더 있어도 되는데."
"곧 임무가 시작될 테니, 부단주로서 준비를 해놔야 할 거 같습니다."
"하긴 단주가 그 망나니이니, 네가 바쁘긴 하겠어."
발칸이 세상이 말세라며 혀를 찼다.
"예. 그렇죠."
라온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건 이제 어떻게 할 셈이냐."
발칸이 공방 안에 있는 레드 드래곤 터틀의 등껍질과 손톱, 발톱, 이빨을 가리켰다.
"나는 이제 힘들어서 저걸로 뭘 할 기력이 없다."
그가 부채질하듯 손을 저었다. 그 말이 거짓은 아닌 게 검과 검집을 만든 이후 그는 10년은 늙은 것처럼 주름이 늘었다.
"죄송합니다."
"사과할 필요 없다. 내가 검을 만들고 싶었을 뿐이니까. 충분히 만족했고."
발칸이 가감 없이 웃었다. 미련이 없어진 표정이었다.
"그럼 저건…."
"제게 맡겨주십시오!"
라온이 말을 하려고 할 때 뒤에 있던 하랜이 앞으로 펄쩍 뛰며 나왔다.
"제가 맡겨주신다면 저 재료들로 최고의 무구를 만들어 내겠습니다."
그 말을 하며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난 모르겠구나."
발칸은 네 마음대로 하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내기 아직 정산하지 않았죠?"
"히익!"
하랜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비명을 질렀다.
"뭐든 들어주기였으니, 조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마음에 찰 검을 만들 때까지 광풍단 전속 대장장이로 일하세요."
라온은 진중한 빛이 돋아나기 시작한 하랜의 눈을 보며 웃었다. 하랜은 발칸이 인정할 정도의 재능이 있고, 지난 나흘간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으니, 분명 뛰어난 야장이 되어 줄 것이다.
그런 그를 광풍단의 전속 대장장이로 쓴다면 큰 도움이 될 게 확실했다.
"무, 무조건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랜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첫 임무를 드리겠습니다. 레드 드래곤 터틀의 재료들로 34명의 검사들이 사용할 기본 방어구를 만들어 주세요."
"기본 방어구…."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얼마든지요."
그가 믿어달라는 듯 씩 웃었다.
"나도 살펴보마. 이 멍청이가 제대로 일을 하는지 안 하는지."
발칸이 하랜의 머리를 통통 치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또 올게요."
라온과 루난은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인 뒤에 새로운 검을 잡고 언덕을 내려갔다.
"흠…."
발칸은 그런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다음에 보았을 때 얼마나 발전할지 기대가 되는구나."
마스터가 가시권에 든 17살짜리 검사라니, 그의 이름이 알려진다면 대륙 전체가 뒤흔들릴 것이다.
앞으로 라온이 휘두를 제천검의 위용이 기대되어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아부지! 거기서 뭐해! 빨리 와서 도와달라고! 이거 혼자 못 들어!"
공방 안에서 하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2년 동안 폐인으로 살던 녀석이 고작 나흘만에 정신을 차리고 예전의 자신 같은 열정을 보이니, 힘이 없어도 웃음이 나왔다.
라온은 고맙다고 했지만 정말 고마운 건 이쪽이었다.
"알겠다. 알겠어!"
발칸은 멀어지는 라온과 루난에게 무운을 빌어주고,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는 공방으로 들어갔다.
* * *
라온은 루난과 함께 미르탄 마을 구석에 있는 드워프의 망치로 향했다. 하랜의 말대로 유명한지 마을 외곽에 있었는데도 내부에 많은 사람이 있었다.
-후욱, 향부터가 끌리는구나. 그 50가지 재료로 만들었다는 소스의 향이 느껴지느니라.
라스는 입구에서부터 흥분하여 혀를 날름거렸다.
'좀 진정해.'
-며칠 만에 제대로 된 음식을 먹는 건데 진정하게 생겼느냐. 절대 가만히 있지 못하느니라.
'그럼 좀 참아. 곧 먹을 테니까.'
라온은 라스를 억지로 잡아서 진정시키고 주점으로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점원이 달려나와 방긋 웃었다.
"두 분이신가요?"
"네."
고개를 끄덕이자, 안쪽 자리로 안내해주었다.
"주문을 뭘로 하시겠습니까?"
점원은 메뉴판을 건네주고 공손하게 손을 모았다.
"뭐 먹을래?"
"라온 먹는 거."
루난은 같은 걸로 시켜달라는 듯 눈만 깜빡였다.
"그러면 투탄 돼지 통구이 2인분으로…."
"아, 정말 죄송합니다."
점원이 이마를 찡그리며 고개를 숙였다.
"재료가 떨어졌습니다."
"재료가 떨어져요?"
"최근에 레드 드래곤 터틀을 잡았다는 소식 때문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와서 재료가 동이 났습니다."
-어어억!
재료가 떨어졌다고 하자마자 라스의 목에서 기이한 소리가 울렸다.
"음, 그럼 재료는 언제쯤…."
"못해도 일주일은 걸릴 거 같습니다."
미안하지만 여기까지다. 일주일이나 기다릴 수는 없으니까.
-대, 대체 왜….
라스의 전신에서 냉기의 불꽃이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대체 왜 본왕이 먹으려고만 하면 없는 것이냐!
'어쩔 수 없잖아. 재료가….'
-다 네놈 때문이지 않느냐! 네가 그 거북이를 데리고 와서 이 사달이 벌어졌어! 진작 다 팔아버리던가!
'음….'
라온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건 맞는 말이라 대꾸할 수가 없었다.
'다른 걸로라도 풀어줘야겠네.'
투탄 돼지 통구이 대신 다른 음식이라도 먹어야 라스의 기분이 조금이나마 풀릴 것 같았다.
"그럼 추천하시는 메뉴가 있나요?"
"통구이만큼은 아니지만 꽤 유명한 메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죠?"
"대장장이 정식! 따뜻한 양파 스튜에 부드러운 빵, 달콤한 소스를 덮은 닭볶음까지. 맛이 없을 수가 없는 메뉴죠!"
"어…."
라온이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라스가 가장 싫어하는 게 정식이었는데, 식단마저 하분 성과 똑같았다.
-정식. 또 정식. 어딜 가든 정식이 있으니라….
'그거야 당연히….'
-닥쳐!
예상대로 라스의 눈에서 시퍼런 뇌전이 폭발했다.
-이런 제기랄! 다 짜기라도 한 것이냐! 어떻게 메뉴까지 그 망할 성의 정찰병 정식과 똑같은 것이냐!
녀석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악을 내질렀다.
-세상이 본왕을 미워하느니라!
제175화
라온은 새로운 검을 소중하게 끌어 안은 루난과 투탄 돼지 통구이를 먹지 못해서 삐진 라스를 데리고 지그하르트에 복귀했다.
이제 소속이 있다 보니, 별관에 가기 전에 먼저 5 연무장에 들렀다. 저녁 식사 시간이라 검사들을 보이지 않았고, 리메르 혼자 단상 위에 대자로 누워 있었다.
"단주님. 검을 만들고 복귀했습니다."
"어? 어어."
리메르가 술 취한 사람처럼 어기적거리며 일어섰다. 가기 전에 비해 얼굴이 비쩍 말랐고, 이곳저곳에 붕대를 감고 있었으며, 붉은 머리칼은 불에 탄 듯 그을렸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일은 무슨."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며 손을 저었지만, 표정에서 다 티가 난다. 아무래도 도박장에서 사고 쳤다가 누군가에게 된통 당한 것 같았다.
"또 돈 잃고 난동을 부리신 겁니까."
"이, 잃기는 무슨! 이번에는 땄어!"
"그런데 왜 그 모양이 되신 겁니까."
"못된 노인네가 있어서…."
리메르는 바닥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못된 노인네?"
"그래. 아주 사악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지. 속을 드러내지 않고, 남이 잘되는 꼴을 못 봐…크흑!"
"네…."
라온은 라스의 말을 들을 때처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제천검을 만들어 오는 동안 리메르는 또 한심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 같다.
"하암…."
루난은 지루한지 하품까지 하고 있었다.
"일단 보고했으니 돌아가 보겠습니다."
"잠깐!"
리메르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가려 할 때 그가 손을 들어 올렸다.
"너희 검을 써보기는 했어?"
"받자마자 복귀했는데, 써봤을 리가 없죠."
"그럼 한 번 써봐야지."
그는 씩 웃으며 라온의 허리춤에 걸려 있는 제천검을 가리켰다.
"너희도 알다시피 내가 검을 보는 눈이 좀 있잖냐."
"모르는데요."
"어, 어쨌든 내가 봐줄 테니까. 한 번 뽑아봐."
라온은 고개를 저었지만, 루난은 검을 자랑하고 싶은지 바로 검을 뽑았다.
치이잉.
샛노란 달빛을 받은 은빛 검신이 어둑한 연무장을 밝혔다.
"오호!"
리메르가 루난의 검을 쭉 훑어내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냉혈로 만든 검다운 예기와 냉기야. 제대로 만들었군."
그는 루난의 검을 이리저리 살피며 탄성을 흘렸다.
"미르탄의 현 촌장이 두드린 모양인데? 무늬가 딱 그 영감 취향이야."
검을 잘 본다는 말이 진짜인지 그는 단숨에 제작자까지 파악했다.
"검의 이름은?"
"설화."
"이름도 좋고. 균형이 완벽해서 네 검술과 오러에도 잘 맞겠어. 좋은 검을 얻은 걸 축하한다."
리메르는 검신 중앙에 그려진 꽃을 보고 빙긋 웃었다.
"고마워요."
루난은 리메르의 칭찬이 마음에 드는지 설화를 꼭 끌어안았다.
"이제 네 차례다."
리메르가 라온을 보며 빨리 검을 꺼내라는 듯 손짓을 했다.
"알겠습니다."
라온이 제천검을 뽑았다. 시리도록 아름다운 검신에서 진중한 기운과 서늘한 예기가 동시에 피어올랐다.
"어…?"
웃고 있던 리메르의 표정이 굳어진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듯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그… 영감이 또 괴물을 만들어냈군."
리메르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어처구니가 없는지 신음을 흘리며 제천검을 노려보았다.
"만검을 담는 형태에 극상의 예기와 묵직한 기운이 실렸어. 오러 증폭 능력 이상의 기이한 힘이 깃들어 있다."
그는 이런 검은 오랜만에 본다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아무리 너라고 해도 초년 검사가 지니기엔 부담스러울 정도로 대단한 검이다. 이름이 뭐지?"
"제천검입니다."
"하늘을 이끄는 검이라. 솔직히 말해서 내가 지금까지 봐온 검 중에 열 손가락 안에 들 것 같다."
지금 리메르는 게으른 도박쟁이에 불과하지만, 이전의 그는 수많은 전장을 헤쳐온 불굴의 검사다.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최고의 칭찬이나 마찬가지였다.
"음, 둘 다 잘 맞는 검을 얻은 것 같네. 축하한다."
리메르가 라온과 루난을 번갈아 보며 박수를 보냈다.
"그럼 이제 써봐야지?"
"쓰다니요?"
제천검을 넣으려고 할 때 리메르가 고개를 저었다.
"오러를 증폭시키는 효과가 있는 명검을 기검이라 하는데, 너희가 가진 검은 모두 기검이다. 아직 그 효과가 익숙하지 않을 테니, 지금 여기서 한 번 써봐."
그는 연무장 중앙으로 가라는 듯 손짓했다.
라온과 루난은 그 손짓을 따라 연무장 가운데로 이동했다.
"기검에는 결이라는 게 있다. 마나 회로처럼 검 내부에 오러가 지나가는 선이 있고, 그 선을 통해 오러를 넣는다면 너희들이 가진 오러가 증폭되어 뿜어지지. 한 번 해봐."
"네."
루난이 고개를 끄덕이고, 설화에 오러를 집중했다. 은빛 칼날 위로 꽃가루 같은 서리가 흩날리며 그녀의 기세가 크게 증폭되기 시작했다.
"와…."
루난 역시 본인의 기세에 놀란 듯 흐린 눈에 반짝이는 빛이 올라와 있었다.
"역시 잘하는군. 오러 소모가 심하지만, 더 강한 위력의 검세를 펼칠 수 있을 거다. 수련을 통해서 네가 어느 정도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확실하게 알아둬."
리메르가 루난에게 고개를 끄덕여 준 뒤에 라온을 보았다.
"너는 왜 안 하냐?"
"전 그런 거 없습니다."
"뭐?"
"검에 마나 회로 같은 거 없다구요."
"그게 말이 돼? 그렇게 강한 기운을 가진 검이?"
"진짜입니다. 그냥 잡으면 바로 기운이 증폭됩니다."
라온이 어깨를 으쓱였다. 거짓말이 아니다. 제천검을 쥐고 오러를 끌어 올리기만 하면 바로 기운이 증폭되었다.
바로 증폭되다 보니, 오러 소모가 심해지지도 않았다.
"어? 어어?"
리메르는 말도 안 된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저, 정말로?"
"정말입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제천검에 오러를 주입했다. 만화공의 불꽃이 선명하게 타오르며 검신을 휘감았다. 예전보다 그 크기와 열기가 훨씬 진해졌다.
"미친…."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휘적거리며 다가왔다.
"내가 한 번 잡아봐도 될까."
"네."
"고마워. 한 번 보고… 아 뜨거!"
리메르가 제천검을 잡으려고 한 순간 검병 부분에서 불꽃이 치솟았다.
"주, 주인도 가려?"
그는 열기에 닿을 뻔한 손을 뒤로 물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에고가 있는 거야?"
"그건 아닙니다."
라온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장인께서 말씀하시길. 금결에 남아 있던 본능이 제 오러만을 쫓는다고 했습니다. 에고라기보다는 그저 주인의 오러만을 원하는 본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넌 그걸 알면서!"
"불을 뿜을 줄은 몰랐습니다. 장인님은 잡으실 수 있었으니까요."
정말이다. 주인이 아닌 사람이 잡았다고 불을 뿜어댄 것 처음이었다.
"허, 참 별일이 다 있군."
리메르는 자신의 손에 잡혀 있는 제천검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오러를 운용해서 억지로 만질 수 있지만, 귀찮은지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검에 깃든 오러 증폭 능력도 정상적인 수준이 아닌 것 같은데, 네가 할 수 있는 최대로 검사를 만들어봐라."
검사는 얇게 저민 검기 다발을 검에 두르는 무학의 기예 중 하나다. 검강에는 한참 떨어지지만 검기보다는 뛰어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라온이 전력으로 끌어 올린 만화공의 기운을 제천검에 담아냈다.
우우우웅!
청아한 검명이 어둠이 깔린 연무장에 울려 퍼지며 칼날 위로 선명한 화염의 오러가 치솟았다. 유형화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닌 수준. 검이 태양처럼 스스로 열기를 뿜어내는 것 같았다.
"미…친…."
리메르는 타오르는 칼날을 보며 턱을 떨었다.
"이게 검사라고? 거의 검강 수준이잖아!"
"음."
라온은 검에서 치솟은 유형화 되어가는 불길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전력의 오러를 담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이 정도로 기운을 증폭시켜줄 줄은 몰랐다.
"잠깐 그대로 들고 있어봐라."
리메르가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칼날에 바람이 깃든 녹색의 오러가 가득 모여들었다. 자신의 검에 담긴 것처럼 검사를 한참 뛰어넘은 기운이었다.
"정면에서 쳐볼 테니, 막아."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자, 리메르가 수직으로 검을 내리쳤다.
치이이잉!
라온은 떨어지는 광풍의 검격을 향해 제천검을 쳐올렸다.
콰아아앙!
적검과 녹검이 정면에서 맞부딪치며 무시무시한 열풍이 연무장 전체로 번져갔다.
후우우욱.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 열기 속에서도 라온과 리메르는 서로의 검을 바라보았다.
"그 영감탱이. 지독한 검을 만들어냈군."
리메르는 불길이 살짝 줄어든 라온의 검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 정도라면 검강도 몇 번은 막을 수 있을 거다. 뭔 놈의 검이… 아니, 잠깐!"
그가 벙찐 눈으로 검을 보다가 손을 떡 올렸다.
"이거 검만 좋은 게 아닌데? 너 그사이에 또 강해져서 온 거냐?"
"어쩌다 보니…."
"어떻게 검을 만들러 갔는데, 네가 강해져서 오는 거야! 너 대체 뭐 했어!"
"거북이 좀 잡고, 검을 만드는 걸 조금 도왔죠."
"거, 거북이? 거북이를 잡아?"
리메르는 이해되지 않는지 거북이라는 단어를 멍하니 중얼거렸다.
"허…."
그는 제천검에서 타오르는 불꽃의 오러와 진중한 눈빛의 라온을 보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내가 대체 뭘 키우고 있는 거지?"
괴물이 괴물을 만났어….
* * *
로베르트 가문의 음지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루샤인 산의 지하 공동.
108명의 아이들이 앉아있던 공동에 남은 사람은 30명이 채 되지 않았다.
다만 아이들의 눈빛은 이전과 달리 독기를 품은 듯 뻘겋게 물들었고, 살기가 깃든 숨결을 뱉어내고 있었다.
"좋군."
데루스 로베르트는 아이들이 피워내는 살기를 안주로 즐기며 와인을 들이켰다.
"가주님."
가슴에 세 개의 작대기가 있는 덩치 큰 복면인이 그 앞에 부복하고 머리를 숙였다.
"지시하신 대로 아이들을 걸러냈습니다. 독종만 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숫자는 어떻게 줄였지."
"한 방에 세 사람을 집어넣고 한 명만 나올 수 있게 했습니다. 말하자면 작은 고독 항아리였죠."
고독이란 항아리 속에 수많은 독충을 넣고, 한참 뒤에 뚜껑을 열어 가장 지독한 독을 가진 곤충 하나를 만드는 주술이다.
라온의 실패 이후 로베르트의 그림자는 더 지독한 방법으로 아이들을 키웠다.
"고독이라, 괜찮은 생각을 했구나."
"감사합니다!"
데루스의 칭찬에 복면인이 머리를 땅에 박았다.
"눈빛들이 마음에 들어."
그는 살기가 가득 깃든 아이들의 눈동자를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교육은 얼마나 따라가지?"
"지금까지의 기수 중 최고입니다. 빠른 녀석은 벌써 교관 수준의 암살기술을 익혔습니다."
"역시 직접 피를 봐야 본능이 살아나는 모양이군. 다음 기수에도 같은 방법을 쓰도록."
"예!"
칭찬을 받았다는 생각에 복면인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그 라온 이상으로 성장할 거라 생각되는 아이들도 세 명이나 있습니다."
"라온 이상이라…."
데루스가 검은 가죽 장갑을 벗고, 손등을 위로 들었다.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검흔이 은은한 조명을 받아 시꺼먼 구멍을 드러냈다.
"그 세 녀석이 이런 걸 할 수 있다는 말이지?"
그의 기세가 섬뜩할 정도의 예기를 뿜어내는 가시가 되어 이 지하 공동 전체를 짓눌렀다.
"아, 아니 그건…."
복면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라온을 따라잡을 암살자들을 키우라고 해서 그렇게 말을 했을 뿐인데, 그는 역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안 되겠지. 그놈은 그림자에서 역대 최고의 실적을 올린 암살자였고, 내가 상처까지 입혔으니까."
"그, 그놈 정도의 살기는 모르겠지만, 암살기술만큼은 놈을 능가하게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런가."
"예! 믿어 주십시오!"
"알겠네."
데루스가 차게 웃으며 일어섰다. 그대로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뚝.
그의 손등에 벌어진 검흔에서 소름 끼치도록 새빨간 피가 떨어졌다. 이어서 허리에 차고 있던 순백의 검이 낮은 울음을 터트렸다. 흡사 누군가에게 이를 드러내듯이.
"어…."
복면인은 처음 보는 현상에 당황하여 손을 떨며 뒤로 물러섰다.
"이교."
"아, 예!"
"북방을 조사하러 간 그림자들에게 연락은 왔나?"
"특이사항이 있긴 하지만 아직 정리되지 않아서 조금 더 모은 뒤에 수석 집사에게 보고하려고 했습니다."
"특이사항?"
데루스가 당장 말하라는 듯 턱을 살짝 틀었다.
"지그하르트의 광검이라 불리던 리메르가 복귀했다는 소식입니다. 정확한 단체 이름은 모르겠지만, 단주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쓸데없는 건 됐다. 한 번 날개가 꺾인 새는 다시 날아오르지 못해. 그 라온이라는 아이와 글렌에 대한 것은?"
"아직 특별한 건 없습니다. 아무래도 라온이라는 아이는 소문과 달리 특별한 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흐음…."
그는 손등에서 흘러내려 바닥을 적시는 핏물을 털어버리고, 아직도 낮은 울음을 흘리는 검을 보았다.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고개를 드는 데루스의 눈동자가 시퍼렇게 가라앉았다.
"리메르 따위에 대한 보고는 필요 없으니, 글렌과 직계들의 움직임이나 확실하게 조사해."
* * *
라온은 기검에 대해 알려줬으니까 돈 좀 빌려달라는 리메르를 떼놓고 별관으로 돌아왔다.
미리 소식을 들었는지, 별관 내부는 침이 고이는 음식 냄새로 가득했다.
-흐어어….
라스는 배가 부풀어 오를 정도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흥분이 깃든 음성을 흘렸다.
-이 향이다! 투탄 돼지 통구이를 먹지 못한 때부터 본왕은 오늘만을 기다리고 있었느니라!
녀석은 강아지처럼 냄새를 쫓아 허공을 부유했다.
"어서 와!"
"도련님!"
"다녀오셨어요?"
실비아와 시녀들이 주방에서 나오며 방긋 웃었다.
"다녀왔어."
"그 검이야?"
그녀는 허리춤에 매달린 제천검을 보며 눈을 빛냈다. 당장 보고 싶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어쩌다 보니 과분한 걸 받게 되었어."
라온은 검집을 툭 치며 옅게 미소 지었다.
"그 정도야? 그럼 조금 이따가 모두가 있는 곳에서 보여줘. 지금은 밥부터 먹자."
그녀는 빨리 씻고 오라며 손짓했다.
-뭘 그리 멍하니 서 있는 것이냐.
라스가 어깨를 마구 두드렸다.
-빨리 씻고, 식당으로 달려가라! 본왕은 더 이상 못 기다리겠느니라!
'알겠다. 알겠어.'
라온은 어깨를 북처럼 두드리는 라스를 밀어내고, 세면을 끝낸 뒤 식당으로 향했다.
한층 넓어진 식당에 시녀들이 앉아있었고, 식탁 위에는 가지각색의 음식들이 가득 깔려 있었다. 평소 좋아하는 스튜와 닭튀김부터 처음 보는 음식들도 많이 보였다.
-라, 라온. 저기 저 돼지 통구이 같은 것부터 먹어라! 어서!
'아직 앉지도 않았어!'
라스는 이미 정신을 놓았는지 의자에 앉지도 않았는데, 음식부터 먹으라고 재촉했다.
라온은 한숨을 내쉬고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진수성찬이네."
"네가 처음으로 너만의 검을 가진 날이잖아. 이런 날 축하를 안 하면 언제 하겠어."
실비아는 팔을 쫙 벌려서 음식들을 가리키며 방긋 웃었다.
"오늘도 헬렌이랑 유아가 대부분 만들었어. 둘이 모이기만 하면 음식 이야기를 하고, 맛있는 걸 만들어대니까. 먹다가 죽겠다니까."
"아이디어가 많기도 한데, 그게 전부 유용해요. 유아는 가수가 아니라, 셰프가 되어도 크게 될 아이예요."
"헤헤…."
헬렌과 실비아의 칭찬에 유아가 부끄러운 듯 양 갈래머리를 잡아 얼굴을 가렸다.
"유아야. 오늘 메인 요리는 직접 소개해줘."
"아, 네! 저기 가운데 있는 돼지 구이는 껍질은 기름에 튀기고, 살은 데쳐서 바삭함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맛볼 수 있을 거예요. 소금이랑, 소스가 있으니까. 취향에 맞게 드시면 되고, 그 옆에 있는 스튜는 파인애플이랑 사과를 갈아 넣어서 소고기랑….
유아는 본인이 만든 음식들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대부분이 평소에 자신이 많이 먹는 음식 재료들로 만든 요리들이었다.
"그럼 식기 전에 먹자!"
"잘 먹겠습니다!"
라온은 시녀들의 식사 인사에 립싱크만 하고서 스푼을 들었다.
-돼지구이부터 먹어라! 껍질을 바싹하게 튀긴 게 본왕이 먹지 못한 투탄 돼지 통구이가 생각나느니라!
'일단 수프와 스튜로 배부터 따끈하게 데우고.'
-이런 멍청한! 미식의 미 자도 모르는 놈! 일단 맛있는 것부터 먹는 것이 진리….
'난 멍청하니까. 오늘은 수프와 스튜로만 배를 채우련다.'
라온이 인상을 찌푸리며 개인 그릇에 스튜를 한가득 펐다. 정말 스튜만으로 배를 채우겠다는 듯 팍팍 퍼서 삼켰다.
-자, 잠깐! 잠깐만!
라스가 분노했을 때보다 더 창백하게 질려서 라온의 손목을 잡았다.
-본왕이….
'본왕이?'
-본왕이 자, 자….
'자?'
-잠을 좀….
'그럼 가서 자.'
-끄으윽! 잘못했느니라! 그러니 저 돼지구이부터 먹어다오!
녀석은 한참 동안 맛 좋은 음식을 먹지 못했다며 손을 싹싹 비볐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
라온은 물러가라고 손짓하고서 두꺼운 돼지구이를 소금에 살짝 찍어 입에 넣었다.
"오."
바로 감탄이 흘러나온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다. 그 뒤로는 부드러운 버터의 풍미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평소 미식을 따지지 않는 자신조차도 계속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허어….
라스는 돼지구이의 맛에 감동했는지 선 채로 기절하여 입을 부르르 떨었다.
-신. 신이니라. 본왕은 방금 마신을 영접하였노라. 무엇을 하는 것이냐! 본왕이 마신께 문안 인사를 드릴 수 있도록 더 먹지 않고!
녀석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며 어서 더 먹으라고 재촉했다.
'점점 심해지는데. '
라온은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서 돼지구이를 소스에 찍어서 먹었다.
'이것도 좋네.'
속이 촉촉하고, 겉은 바삭한 돼지고기와 매콤한 소스가 어우러지니 또 다른 맛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소스가 취향이었다.
-소스도 괜찮지만, 본왕은 순수한 맛이 있는 소금이 더 좋구나.
'난 소스.'
-이래서 무식한 놈들이 안 되는 것이니라. 요리라는 건 그 순수한 맛을 즐겨야….
'이제 안 먹어.'
-아악, 보, 본왕이….
라온은 라스와 투닥거리며 모두와 함께하는 식사 시간 자체를 즐겼다. 역시 자신이 가장 마음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곳은 여기 밖에 없었다.
-크흠, 만족하느니라.
라스도 즐거웠던지 볼록 솟아오른 배를 통통 두드렸다.
-본왕이 몸을 얻는다면 저 파인애플 소녀와 아이스크림 소녀는 꼭 챙겨줄 것이니라.
녀석은 유아를 보며 기꺼운 미소를 지었다.
"오늘도 소고기가 앞에 놓여 있었는데, 나중에 마르타에게 고맙다고 전해주렴."
실비아는 입을 닦으며 라온에게 소고기가 들어간 스튜를 가리켰다.
"그리고 놓고 가지만 말고, 밥 먹고 가라고 해."
이제 그녀도 마르타가 고기를 놓고 가는 걸 알아차린 것 같다. 꼭 데려오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음? 소고기 소녀가 다녀갔다고?
라스는 맛이 좋았던 소고기 산적과 스튜를 번갈아 보며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어쩔 수 없지. 소고기 소녀도 챙겨주겠노라. 본왕의 세 시녀는 세상이 멸망해도 데리고 가겠노라.
녀석은 인심 썼다는 듯 세 사람은 꼭 살리겠다고 중얼거렸다.
지랄한다.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라스가 또 발작을 일으킬까 봐 참았다.
"이제 라온의 검을 구경해봐야지."
실비아의 손짓에 시녀들의 시선이 모두 라온의 허리로 향했다.
"그렇게 보고 있으니 부끄럽긴 한데…."
라온이 천천히 일어서서 제천검을 뽑았다. 곧게 뻗은 검신이 식당의 주황빛 조명을 받아 또 다른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와아아아!"
"멋있다…."
"축하드려요! 도련님!"
시녀들은 검이 멋있다며 박수를 치고 환호를 보냈다.
"새, 생각보다 더 굉장한 검을 얻은 것 같네."
실비아는 제천검의 가치를 읽었는지 붉은 눈동자에 놀라움이 실려 있었다.
"유아야."
"아, 네."
헬렌의 부름에 유아가 다가와 하얀 상자를 내밀었다. 열어보자, 금색과 빨간색의 선이 이어진 수실이 들어 있었다.
"다 같이 만든 거예요."
"아…."
수실에 연결된 줄의 개수는 지금 식당에 있는 사람의 숫자와 같았다. 모두 하나씩 만든 것 같았다.
"…고마워."
라온은 조금 민망해서 턱을 긁적이다가 모두에게 고개를 숙였다.
"인사는 됐으니 달아봐."
"맞아요. 잘 어울리나 보고 싶어요."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검집에 수실을 달았다. 금색과 검붉은색이 어우러진 검집과 모두가 만든 수실이 연결되자 거칠면서도 귀족스러운 멋이 살아났다.
"앞으로도 네가 너만의 길을 걷기를 바라며 만들었어."
"길…."
"가문도, 우리도 생각할 필요도 없어. 네가 옳다고 생각한 길을 가렴."
실비아가 다가와 꼭 안아주었다. 이젠 자신보다 키가 작아졌지만, 그녀의 품은 여전히 따스했다.
"그리고…."
그녀가 말을 이으려고 할 때 현관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익! 오랜만에 가족끼리 감동적인 시간을 보내는데 누구야!"
"아, 제가 나가볼게요!"
문과 가까이 있던 유아가 달려 나갔다. 잠시 후 돌아온 그녀가 당황한 듯 마른침을 삼켰다.
"저, 저기…."
"왜? 누군데?"
유아는 현관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떨었다.
"중무전에서 오신 분이래요."
제176화
-이제 디저트를 먹어야 하는데, 어떤 놈이 방해하는 것이냐!
라온은 버둥거리는 라스를 던져두고, 로비로 나갔다. 회색 머리칼을 곱게 넘긴 노인이 서 있었다.
'이름이 티아스였던가.'
중무전의 집사 중 하나로 버렌을 담당해서 수련생 시절에 자주 보았던 사람이었다.
"라온 도련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티아스가 손을 꼭 모은 채 고개를 숙였다.
"그러네요."
라온이 마주 고개를 숙였다. 많이 마주치고, 서로 머리를 숙였지만, 이렇게 육성으로 인사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라온은 식당 쪽에서 얼굴만 빼꼼히 내민 실비아와 시녀들의 시선을 등으로 가리면서 물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티아스가 주름진 눈매를 파르르 떨었다.
"정말 염치없지만, 지금 도움을 청할 사람이 라온 도련님밖에 없습니다."
라온은 고개를 숙이는 티아스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버렌 때문이군요."
"맞습니다. 선택식 이후 버렌 도련님은 별채에 들어가서 나오질 않으십니다."
고개를 들어 올리는 티아스의 눈동자에 씁쓸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틀 뒤면 신입 검사 추가 등록 기간이 마감되는데도 나올 생각을 안 하십니다."
그는 이 상황이 절망스러운지 말라붙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금 버렌 도련님을 일으킬 수 있는 분은 라온 도련님뿐입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티아스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현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왜 제가 버렌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신 거죠?"
"버렌 도련님은 평소에 라온 도련님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하십니다. 본인을 우물에서 꺼내주고,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라고 하시며 언젠가 꼭 따라잡아 그 빚들을 갚을 거라 다짐하셨습니다."
"...."
정신을 깨워준 은인, 목숨을 구해준 보답 그리고 따라잡겠다는 말. 전부 버렌이 매일 하던 말이었다. 의외로 안과 밖이 똑같은 녀석이었던 것 같다.
"그런 라온 님이기에 버렌 도련님을 끌어낼 수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티아스는 무릎을 꿇은 채로 머리를 숙였다.
"이러지 마세요."
라온은 바들바들 떠는 티아스의 어깨를 붙잡았다.
'도움이라….'
전생이라면 티아스가 뭐라고 하든 도와주지 않았을 거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하지만 라온 지그하르트로 살며 많은 것을 느꼈다.
'인연.'
냉혈이라는 보물을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넘겨준 루난. 마찬가지로 귀한 금탄과 금결을 아낌없이 사용하고, 모든 기력을 바쳐서 검을 만들어준 발칸. 그들이 말했던 인연이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선택식 전에 버렌이 예복이 비어 보인다며 보석이 달린 수실을 주었던 게 생각났다. 보석에 연결된 수식처럼 그와 자신 사이에는 작은 인연의 끈이 하나 정도는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후우…."
라온이 무릎을 꿇고 티아스와 눈을 마주쳤다.
"알겠습니다. 한번 해보죠."
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최소한의 도움은 주고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 잘했어!"
실비아가 뒤에서 다가와 등을 두드렸다.
"도와줄 수 있으면 도와줘야지."
그녀는 아들 하나 잘 키웠다며 뒤에 있는 시녀들을 돌아보며 방긋 웃었다.
"캬아!"
"역시 도련님!"
헬렌과 시녀들은 힘을 내라는 듯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티아스가 연달아 고개를 숙였다.
-고개 숙이는 걸 참으로 좋아하는 인간이다. 본왕의 마음에 쏙 드느니라.
라스는 본인이 인사를 받는다고 생각하는지 허리에 손을 척 올렸다.
-하지만 디저트 시간을 방해한 건 용서할 수 없느니라!
좋다더니, 금세 화를 낸다. 참 이해할 수 없는 성격이었다.
"그럼 가죠."
"바, 바로 가주시는 겁니까?"
"지금 가서 정신을 차리게 만들어야 추가 등록 기간이 끝날 때쯤에는 나오겠죠."
라온이 티아스를 일으켜 세웠다.
"아, 알겠습니다!"
티아스는 안내하겠다며 벌떡 일어나서 별관 밖으로 나갔다.
"다녀올게."
"잘하고 와."
"다녀오세요. 도련님!"
실비아와 시녀들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디저트가 아직인데….
배가 푸른 라스만 홀로 식당 쪽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역시 눈깔이는 도움이 안 되는 놈이니라!
* * *
라온은 티아스를 따라 북망산 아래에 세워진 중무전 별채로 향했다. 중무전의 별채라 그런지 자신이 사는 별관보다 훨씬 컸다.
"이곳은 주인님이 도련님께 검술을 가르쳐 주셨던 곳입니다. 이제 주인님은 오시지 않지만, 도련님은 가끔 들러서 쉬다 가셨죠."
"중무전주와의 추억이 남은 곳이라는 거군요."
"맞습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 와서 문을 잠그시고 나오질 않으십니다."
"알겠습니다."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고 문 앞으로 다가갔다. 별채 안에서 버렌의 기척이 느껴졌다.
"버렌."
내부에서도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에 오러를 실어 버렌을 불렀다. 한참을 불러도 안에서는 응답이 없었다.
"흐음."
라온은 입맛을 쩝 다시고 별채를 쭉 훑어내린 뒤 티아스를 보았다.
"여기 좀 부숴도 됩니까?"
"예? 아… 예!"
티아스는 그 뜻을 알아차린 듯 입술을 깨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끄러워질 테니, 조금 떨어져 계세요."
"알겠습니다."
그는 머리를 꾸벅이고 열 걸음 정도 물러섰다.
"후우."
라온은 별채의 문 앞에 서서 크게 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악당이 좀 되어야겠군."
피식 웃고서 별채의 문을 걷어찼다.
콰아앙!
힘을 억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과 벽이 산산조각으로 터지고, 별채가 크게 뒤흔들렸다.
"이익!"
모락모락 솟구치는 회색 먼지 속에서 당황한 버렌이 튀어나왔다.
"무슨 짓이야!"
"두더지를 끄집어내려면 땅부터 파야지."
"두더지? 너 대체…."
대답하지 않고, 힘을 꽉 준 손을 휘둘렀다. 손등에 닿은 별채의 기둥과 벽이 진흙처럼 뭉개졌다.
"하지 마!"
버렌이 무너진 벽에서 튀어나오며 악을 질렀다.
"넌 날 볼 때마다 따라잡겠다고 떠들어댔었지."
라온이 차갑게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막고 싶으면 덤벼."
그 말을 하며 이번에는 왼쪽 벽을 걷어찼다.
콰아아앙!
거인의 철퇴를 맞은 듯 벽에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하지 말라고!"
버렌이 달려들어 주먹을 내질렀다. 흥분에 가득 찬 주먹. 어떠한 무학도, 흐름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뻐어억!
라온은 손등으로 가볍게 쳐낸 후 버렌의 복부에 주먹을 박아넣었다.
"크헉!"
버렌은 배를 부여잡고, 뒷걸음질 쳤다. 쓰러질 것처럼 다리가 휘청거렸다.
"검을 가져와서 제대로 덤벼."
라온이 코웃음을 치며 버렌을 걷어찼다.
퍼어어엉!
버렌은 버틴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날아가 다시 별채에 처박혔다.
쿠구구구!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뒤흔들리는 별채에서 검을 든 버렌이 걸어 나왔다.
"크으윽! 망할 놈이!"
버렌이 오러를 극성으로 운용하며 검을 뽑았다. 바람이 깃든 오러가 그의 전신을 휘감으며 강대한 기파를 펼쳐냈다.
라온은 버렌의 기운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확실히 성장했군.'
따라잡겠다고 했던 게 그저 허세만은 아니었는지 오러의 크기와 질이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이전의 나와는 다르니까!"
버렌이 이를 악물고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좌측으로 짓쳐 들어 검을 내뻗었다. 빠르기와 속도 모두 예전과는 격이 달라졌지만, 자신은 그 이상으로 성장했다.
쩌어엉!
제천검의 검집으로 버렌의 검격을 가볍게 막아냈다.
"흐읍!"
버렌은 예상했다는 입술을 꾹 깨물고서 다음 검격을 날렸다. 처음보다 더 빠르고 웅장한 검식이 세찬 파도처럼 이어졌다.
쩌어엉!
라온은 물길처럼 연결되는 버렌의 검격을 검집만으로 모조리 차단하고 그의 옆구리를 후려 찼다.
뻐어어억!
불의의 공격에 당한 버렌이 비명을 토하며 바닥에 처박혔다.
"크허헉!"
버렌은 충격에 비틀대면서도 눈을 부라리며 일어섰다. 그리고는 호흡을 고르며 검을 겨눈다. 이런 상황에서도 흥분했던 마음을 침착하게 가라앉히는 걸 보면 확실히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달 자격이 있는 녀석이었다.
"지금부터가 진짜다."
그가 검을 양손으로 잡고 오러를 끌어 올렸다. 폭주하듯 솟구치는 기세. 하지만 그저 기운만 강해진 게 아니다. 조금 전의 오러와는 다른 기운이 버렌에게서 스멀스멀 피어났다.
"삭풍검."
그 말과 함께 버렌의 모습이 허공에 녹아내린다. 순간이동을 하는 것처럼 찰나의 순간에 다가와 검을 내리쳐왔다.
'빨라.'
감각이 아니었다면 놓쳤을 정도의 빠르기. 지금부터가 진짜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이미 감각에 잡혔다면 속도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쩌어어엉!
라온은 버렌의 검격을 향해 가볍게 검을 쳐올렸다. 이번에도 버렌의 검격은 자신의 공간을 뚫고 들어오지 못했다.
찌이이잉!
하지만 버렌의 검에서 기이한 기운이 치솟으며 검집에 두른 오러를 가르기 시작했다.
"이건…."
버렌의 검을 두른 오러가 작은 알갱이처럼 변해 끝없이 회전하고 있었다. 이 오러의 회전력으로 자신의 오러를 찢어버린 것 같았다.
"아무리 너라도 삭풍검을 막을 수는 없을 거다!"
버렌은 자신감을 되찾은 듯 원을 그리는 보법을 밟으며 삭풍검이라는 검술을 펼쳐냈다.
평소처럼 단단하면서도 웅장한 검세에 삭풍이라는 기운이 담기니 톱날 앞의 나뭇조각처럼 만화공의 오러가 갈려 나갔다.
"그렇군."
라온은 서늘한 미소를 그리며 검을 휘돌렸다.
"이제 알겠어."
"허세 부려 봤자다!"
버렌이 발을 구르고 검을 사선으로 그어 내렸다. 지금 펼칠 수 있는 삭풍검의 절기로 라온의 허리를 노렸다.
쩌어어엉!
라온은 이번에도 정확한 순간에 검격을 차단했다. 하지만 소용없다. 삭풍검은 방어한 오러를 뜯어버리니까.
'도망치면 바로 쫓아야…음?"
라온이 물러날 거라 생각하고 따라잡을 준비를 했는데, 그는 한 발도 움직이지 않고, 삭풍검을 그대로 견뎌냈다.
"어, 어떻게!"
버렌이 입을 떡 벌렸다. 회전하는 삭풍검의 검격이 라온의 오러를 가르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있었다.
'분명 돌아가고 있는데?'
모래 알갱이 같은 오러가 거칠게 회전하고 있건만, 라온의 오러는 조금도 갈라지지 않았다.
"너 뭘 한 거야!"
"간단해."
라온이 당황하는 버렌을 보며 피식 웃었다.
"네 오러가 내 오러를 갈라내기 전에 새로운 오러를 밀어 넣었을 뿐이야. 네 회전과 반대 방향으로."
강물에 칼질해 봐야 물이 다시 차오르듯, 오러가 갈라지기 전에 새로운 오러를 밀어 넣어 삭풍검이라는 검식을 막아낸 것이다.
"그, 그렇게 빨리 오러를 운용한다고?"
버렌의 눈동자가 파랑을 맞은 돛단배처럼 흔들렸다.
"사, 삭풍검조차 안 먹히다니…."
"삭풍검이 안 먹힌 게 아니라, 네가 약한 거다."
"커헉!"
라온이 입술을 떠는 버렌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 삭풍검이라는 기술의 회전이 더 빠르고, 컸다면 내가 아무리 오러를 밀어 넣어도 갈라졌겠지. 이건 네 숙련도의 문제다."
"으윽!"
"고작 그 정도 성취로 나를 꺾겠다고 말하고 다닌 건가."
"그건…."
버렌은 고개를 숙인 채 턱을 바르르 떨었다.
"내 검집조차 벗기지 못하면서 따라잡는다니, 선택받지 못했다고 다 포기한 채 꼬리를 말고 도망친 녀석 답네."
"네가 뭘 안다고 떠드는 거냐!"
"그래. 난 네가 중무전주와 무슨 감정으로 엮여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하나는 알아."
라온이 엉망진창이 된 별채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 개집에만 처박혀 있다면 그는 널 절대 돌아보지 않을 거라는 걸."
"크윽…."
버렌이 반박하지 못하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네가 나한테 삶의 목표를 말해주었으니, 나도 내 목표를 하나 말해주지."
"목표?"
"내 목표는 어머니를 다시 직계의 위치로 올리는 거다."
"미친!"
버렌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건 불가능해! 너를 싫어하는 직계들, 그리고 상위 방계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아."
라온은 불신을 비치는 버렌의 눈을 마주하며 미소를 지었다.
"실적. 그들의 입을 모두 다물게 할 정도의 실적이 있다면 가능해. 그래서 난 가장 많은 임무를 뛰게 될 광풍단을 골랐다. 물론 너처럼 힘들다고 처박혀 있다면 평생 걸려도 불가능하겠지."
"아…."
라온에게 그런 목표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는지 버렌이 손을 떨었다.
"넌 네 아버지와 마주 보고 인정받고 싶다고 말했지?"
"그, 그래. 하지만 다 끝났어. 아버지는 냉정하신 분이야. 이제 돌아 봐주시지 않을 거다…."
"네 아버지와 마주 보는 방법은 하나가 아니야."
라온은 이마를 찌푸린 버렌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뭐?"
"네 아버지가 널 돌아보게 하지 말고, 네가 그를 넘어 앞으로 가라. 네가 앞서가면서 뒤에서 따라오는 중무전주를 돌아보는 거다. 그러면 그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지."
"아버지를 뛰어넘으라고? 그건 불가능해!"
"이것도 불가능. 저것도 불가능. 평생 그렇게 살 거냐?"
"그, 그건…."
"어렵겠지. 분명 죽을 정도로 힘들 거다. 하지만 정말 불가능할까?"
"...."
되묻는 말에 버렌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최약체에서 가장 강해진 산증인이 바로 앞에 있었으니까.
"네 목표와 내 목표 중 뭐가 더 힘들까?"
"...."
이번에도 버렌은 입을 떼지 못했다. 라온을 싫어하는 직계와 상위 방계는 셀 수 없이 많다. 그들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 라온의 목표가 더 불가능에 가까운 건 당연했다.
"도끼를 휘두르지 않으면 나무는 쓰러지지 않는다. 그대로 처박혀 있을지. 지금이라도 나와서 도끼를 쥘지는 네 선택이다."
라온이 뒤를 돌았다. 별관으로 돌아가려다가 멈춰서 슬쩍 고개를 돌렸다.
"나와 루난은 검을 만들었고, 마르타는 검을 받았다. 모두 앞으로 걸어가고 있지. 선택한다면 빨리하는 게 좋을 거야. 나중에는 걷고 싶어도 걸을 길이 없어질 테니까."
머리를 숙인 버렌을 두고, 티아스가 있는 나무 둔치 근처로 향했다.
"죄송합니다. 제겐 이런 거친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라온은 멀리 떨어져 있던 티아스에게 다가가 머쓱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그저 감사드릴 뿐입니다."
티아스가 손을 모은 채 허리를 굽혔다. 그의 주름진 목이 부르르 떨렸다.
"그럼."
라온은 눈물을 글썽이는 티아스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주고서 별관으로 향했다.
티아스는 돌아가는 라온의 등에 한 번 더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무릎 꿇은 버렌을 보았다.
"아…."
절망에 잠겨 있던 그의 눈동자에 작은 빛이 피어나고 있었다.
* * *
뿌드득.
버렌이 손아귀에 피가 나도록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이 멍청한 새끼!'
강해지자고, 성숙해지자고 그렇게 다짐해놓고 정작 성장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라온의 말대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척을 하기 위해서 그저 입으로만 주절거렸을 뿐이다.
스스로가 너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은 아직도 5 연무장에서 아집에 휩싸여 있을 때와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그 당시보다 더 겁쟁이가 된 것 같았다.
"직계가 된다고?"
헛웃음이 나왔다. 지그하르트의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불가능하다고 떠들 그 목표를 라온은 진지하게 말했다. 그리고 녀석이 말하니 정말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대단한 놈이야.'
자신은 아버지께 선택받지 못한 절망감에 방에 처박혀 지냈는데, 방계에서 직계로 올라간다니. 같은 나이라고는 상상도 되지 않는 정신력이었다.
'아버지보다 앞에 가서 뒤를 돌라니….'
앞서가는 아버지를 돌아보게 만들려고만 했지, 아버지를 추월한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그런 발상 자체가 라온과 자신의 차이를 만드는 것 같았다.
'그래. 어디 한번 해주마.'
이렇게 된 이상 아버지를 추월하고 그가 후회하는 걸 꼭 봐야겠다. 라온이 직계로 올라가는 것에 비하면 아버지를 따라잡는 건 훨씬 쉬운 일이었으니까.
'기다리십쇼.'
꼭 찾아갈 테니까.
* * *
북망산 중턱에 서 있던 리메르가 휘파람을 불었다.
"대박!"
그는 별채를 떠나는 라온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어설픈 조언이나 해줄 거라 생각했는데, 상처를 후벼판 뒤에 약을 발라줄 줄은 몰랐는데요."
"음…."
글렌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라온이 저런 식으로 버렌을 끄집어낼 거라고는 생각 못 한 듯 침음성을 흘렸다.
"신기하단 말이죠. 어떨 때는 어리숙하기 그지없는데 또 어떨 때는 저보다 더 세상을 많이 아는 것 같고."
리메르는 깍지 낀 손으로 머리를 잡으며 히죽 웃었다.
"내가 다 잘 가르친 덕분인가. 역시 스승을 잘 만나야…."
"네놈 제자이기 이전에 내 손자이니라."
"에이, 그래도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건 저죠."
"저 아이를 더 많이 챙겨준 건 나다."
"뒤에서 챙겨주면 누가 알아준답니까?"
"알아주기를 바란 게 아니니, 몰라도 상관없다. 그저 내가 원해서 한 일이다."
글렌이 리메르를 노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허억…."
뒤에서 조용히 서 있던 천검대주가 글렌의 반응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처음 보는 가주의 모습에 당황한 것 같았다.
"크흠!"
글렌은 천검대주의 눈빛을 느끼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어쨌든 버렌이 곧 일어나긴 하겠네요. 저랑 내기 하나 하실래요?"
"내기?"
"예. 버렌이 언제 일어나는지. 모레까지가 추가 등록 기간이니까. 전 내일 일어난다에 다음 달 월급을 걸겠습니다."
리메르는 손가락을 흔들며 무릎을 꿇은 버렌을 가리켰다.
"그럼 나는 오늘에 걸지."
"한번 말하면 끝인 거 알죠?"
"물론이다."
글렌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오늘은 이제 얼마 남지도…헉!"
입을 가리고 웃던 리메르가 신음을 흘렸다.
"저, 저 녀석 왜 벌써 일어나! 얌마! 좀 더 누워 있어!"
버렌은 검을 쥔 채로 일어나서 별채로 다가갔다.
"으아아아아!"
그는 괴성을 지르며 별채를 향해 남은 오러를 모조리 쏟아부었다.
콰아아아앙!
라온의 의해 반쯤 부서졌던 별채가 폭삭 무너졌다.
"후우…."
버렌은 할 일을 했다는 듯 시원한 표정으로 중무전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티아스가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
"가, 가주님? 저희 아직 내기 확정을 안 했…."
"리메르."
"아, 예!"
"네가 하나 착각한 게 있다."
"착각이요?"
방긋 웃던 리메르의 눈은 글렌의 다음 말을 듣고, 지옥을 마주한 듯 시꺼멓게 굳어졌다.
"넌 이미 다음 달 월급을 가불 받았다. 지금 날아간 건 다음 달이 아니라, 다다음달 월급이다."
"어억! 젠장!"
이제야 상황을 깨달은 리메르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멍청이."
천검대주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저 진짜 먹고살 돈도 없어요! 이제 애들도 안 빌려준다구요!"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지."
"방법이요?"
"임무를 완수한 후에 포상을 받아라."
글렌이 멀어지는 라온과 버렌을 차례로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광풍단에 첫 번째 임무를 내리겠다."
제177화
"갑자기 임무라니, 제 예상보다 조금 빠르네요."
리메르는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온이 버렌을 일으켜 세웠으니까."
글렌은 점차 걸음이 당당해져 가는 버렌을 가리켰다.
"그럼 저희가 할 임무는 뭡니까?"
"본래 다른 단에 넘기려 한 임무인데, 지금의 광풍단이 처리하기에 나쁘지 않을 것 같구나."
글렌이 뒤를 돌았다. 모든 것을 꿰뚫는 붉은 눈으로 리메르를 굽어보았다.
"포르반은 알고 있겠지?"
"물론이죠."
포르반은 지그하르트와 발카르 왕국 사이에 있는 중립 도시다. 아름다운 호수가 있고, 큰 강이 지나고 있어서 교역과 관광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 포르반에서 실종 사건이 연달아 이어지고 있다."
"실종…."
리메르가 실종이라는 단어를 중얼거리며 눈매를 좁혔다.
"본래 실종은 자주 있는 일이지만, 그 숫자가 줄어들질 않고, 조사하던 병사나, 고용한 기사와 용병들도 사라졌다고 하니, 보통 일은 아닌 모양이다."
"기사까지 실종될 정도면 심각하네요."
실종 자체가 그리 드문 일은 아니지만, 그걸 조사하는 병사들까지 사라진 건 기이한 일이었다.
"집단 인신매매나 비밀 세력 혹은…."
"오마 중 하나일 수도 있겠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글렌의 말에 리메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나 병사까지 건드릴 정도면 뒤를 생각하지 않는 미친놈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광풍단의 임무는 포르반에 가서 실종자들을 구하고, 실종의 이유를 제거하는 것이다. 할 수 있겠나?"
"명을 받들겠습니다."
장난기로 가득 차 있던 리메르의 녹색 눈동자가 끝이 보이지 않는 심해처럼 깊게 가라앉았다.
"언제 출발하면 되겠습니까."
"내일."
"예에? 버렌이 내일 돌아온다고 해도 아직 정비가 안 끝났는데, 너무 갑작스러운…."
"사건이 벌어진 지 벌써 많은 시간이 지났다. 하루라도 빨리 막는 게 좋다. 그리고 출발하기 직전에 알려주는 건 네 녀석이 자주 하는 짓이 아니더냐."
"어억!"
글렌은 당황하는 리메르를 보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믿고 있겠다. 광풍단주."
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북망산을 내려갔다.
"가문을 망신시키고 돌아오면 내가 직접 목을 베어주지."
천검대주는 퉁명스러운 말을 흘리고는 글렌을 따라갔다.
"흐음…."
리메르는 두 사람을 보며 손을 휘휘 저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할 건 별로 없잖아?"
그는 글렌이 알면 벼락을 떨어뜨릴 말을 중얼거리며 주점으로 향했다.
"잘난 부단주에게 다 떠넘기면 되겠구만."
* * *
다음날.
라온은 별관에서 새벽 수련을 마친 뒤에 5 연무장으로 향했다.
광풍검진의 완성도를 어떻게 끌어 올릴까 생각하며 연무장의 문을 열었을 때 검사들이 입구에 우르르 모여 있었다.
"왜 여기에 모여 있어?"
"부단주님! 저길 보세요!"
어벙하게 서서 과자를 먹고 있던 도리안이 다가와 연무장을 가리켰다. 평소보다 깔끔하게 정돈된 연무장의 중앙에 버렌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라온이 버렌의 뒤통수를 보며 피식 웃었다. 오늘 저녁이나 내일쯤 오지 않을까 했는데, 버렌은 예상보다 빨리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역시 정신력이 강한 녀석이다.
"새벽부터 와서 연무장을 전부 다 치우고, 저렇게 무릎을 꿇고 있었대요."
도리안은 무슨 비밀 이야기를 하는 듯 속삭였지만, 주변에도 다 들렸다.
"광풍단에 넣어달라고 온 거 같은데, 어떻게 하실 거예요?"
"단원을 넣고 말고는 단장님이 결정하시는 거니, 나는 모르지."
리메르라면 분명 넣을 테지만.
"이제야 마빡에 피가 돌다니, 참 한심해."
마르타는 버렌을 보며 혀를 찼다. 말투는 퉁명스러웠지만, 욕이 없는 걸 보면 나름 반가워하는 것 같았다.
"...."
루난도 반가운 듯 설화를 안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구경 났어?"
라온은 연무장 안쪽으로 들어가 검사들을 돌아보았다.
"곧 단주님이 오실 텐데, 훈련 준비가 하나도 안 됐잖아! 빨리 움직여!"
"아, 예!"
"알겠습니다."
멍하니 있던 검사들이 탈의실 쪽으로 달려갔다.
라온도 무릎을 꿇고 있는 버렌에게 신경을 쓰지 않고, 연무장에서 몸을 풀었다. 버렌도 이쪽을 보지 않고, 텅 빈 단상만을 바라보았다.
-아는 척도 안 하는 거냐.
라스가 너무한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은 아는 척 안 하는 게 돕는 거야.'
버렌이 마음을 크게 먹었다고 해도 부끄러울 거다. 이럴 때는 모른 척하는 게 도와주는 일이다.
"정렬."
"정렬."
라온은 검사들을 연무장에 모은 뒤 리메르를 기다렸다. 잠시 후 훈련 시간이 되기 직전 연무장 문이 쾅 하고 열렸다. 지각하지 않았을 때 문을 걷어차고 들어오는 요상한 버릇은 그대로였다.
"좋은 아침!"
리메르는 휘적이는 걸음으로 단상 위로 올라갔다.
"근데…."
그는 버렌을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쟤는 왜 저러고 있다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고, 버렌은 고개를 들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과 달리 그의 눈동자는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수련생 시절로 돌아간 듯 눈빛에 날이 서 있었다.
"저를 광풍단에 받아주십시오."
버렌은 절을 하듯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받아주지 않는다면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머리로 땅을 짓눌렀다.
"흐음…."
리메르가 턱을 긁적이며 입맛을 다셨다.
"너무 늦은 것 같은데, 부단주가 보기에는 어때?"
"버렌의 잔소리가 그립다고 말씀하셔놓고 왜 제 의견을 물어보십니까. 자리까지 비워두셨지 않습니까."
라온이 덤덤한 목소리로 3번 조장 자리가 공석이라고 중얼거렸다.
"얌마! 그런 걸 말하면 멋이 떨어지잖아!"
리메르가 당황하여 손을 흔들었다.
"어차피 받으실 거 빨리 받으세요. 저 녀석에게 가르쳐 줄 게 산더미니까."
"정말이지. 도움이 안 된다니까."
그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버렌 앞으로 다가갔다.
"조금 늦게 왔지만, 우리가 함께한 세월이 있으니, 거절할 수는 없겠지. 널 광풍 3조의 조장으로 받아들이겠다."
리메르는 씩 웃으며 버렌의 어깨를 잡았다.
"그런데 가입비는 얼마나 가져왔니?"
검지와 엄지로 동그라미를 그리는 그의 모습은 도박에 미친 자의 심리상태가 어떤지를 그 자체를 보여주었다.
"와…."
"정말 사람인가?"
"사람은 아니지. 엘프잖아."
"어우, 꼴사나워."
라온 그리고 광풍단의 모두는 그 어느 때보다 한심한 눈빛으로 리메르를 바라보았다.
"끄응…."
버렌은 리메르에게 잘 보여야한다는 것도 잊고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아, 장난이야. 장난!"
리메르는 웃으며 버렌을 일으켜 세웠다. 기막을 펼치고 그의 귀에 한 마디를 속삭였다.
"농담 아닌 거 알지? 적절한 성의 표시를 가지고 단주실로…."
유일하게 그 소리를 들은 라온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운 눈빛으로 리메르를 쏘아보며 다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도박과 돈에 있어서는 저 엘프를 믿지 않기로.
* * *
라온은 버렌을 따로 불러서 지금까지 진행된 교육 내용을 모두 알려주었다. 검진과 신호 모두 복잡했지만, 녀석은 몇 시간도 지나기 전에 그 모든 것을 외워버렸다.
"외웠다고 해도 실제 검진을 운용할 때는 다를 거야. 확실히 연습해놔."
"알겠습니다."
버렌은 그 깐깐한 성격답게 바로 존댓말을 사용했다. 수련생 때로 돌아간 듯 눈빛이 날카로웠다.
"그럼 3조와 검진 연습을 좀 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그는 도전적인 눈빛으로 물어왔다. 라온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나도 수련 좀 해볼까.'
"주목!"
라온이 개인 수련을 하려고 할 때 리메르가 단상 위에서 손뼉을 쳤다.
"모두 모여."
도박광이라고 해도 단주는 단주. 그의 부름에 광풍단 전원이 단상 앞으로 모여들었다.
"어느 정도 정리도 끝난 것 같으니, 본론을 말하마."
"본론?"
"무슨 본론?"
리메르는 단주가 된 이후 교관 때보다 더 놀고먹었기 때문에 검사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에게 첫 번째 임무가 들어왔다."
"임무!"
"정말입니까?"
"드디어!"
임무라는 말에 광풍단원들의 눈에 열기가 차올랐다.
"어떤 임무입니까?"
버렌이 손을 들고 질문했다. 역시 저 녀석이 있어야 편하다.
"포르반 마을에서 연쇄 실종 사건이 벌어졌다고 한다. 실종자를 찾고, 그 원흉을 제거하는 게 우리의 임무다."
"오오!"
"실종자 수색…."
"원흉 제거!"
"이제야 진짜 지그하르트 검사 같네."
"긴장되는데…."
하급 몬스터 토벌 때와 달리 있어 보이는 임무였기 때문에 검사들 모두의 눈에 기대감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출발은 언제입니까?"
"추, 출발 시간? 이게 출발 시간이 좀 빨라."
리메르는 쉽사리 말을 하지 못하고 뜸을 들였다.
"언제입니까?"
"오늘 저녁."
오늘 저녁이라는 말에 기대감을 풀던 검사들 모두가 입을 떡 벌렸다. 아무리 빨라도 내일이라 생각했는데, 오늘 저녁이라는 말에 광풍단원 전체가 경악했다.
"크으윽, 당신이란 인간은 정말이지!"
오늘은 조용히 지내겠다고 한 버렌이 이를 갈며 뛰쳐나올 정도였다.
"실종 사건이 급한 건 알지만 훈련도 아니고 임무인데, 준비할 시간을 좀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특히 버렌은 오늘 들어왔습니다."
"아니, 내 말을 좀 들어봐."
라온의 날카로운 말에 리메르가 다급하게 손을 저었다.
"촉박한 임무는 맞지만, 오늘은 진짜 내 탓이 아니라고! 위에서! 저 위에서 어젯밤에 내려왔어! 나랑 상관없어!"
그가 손가락으로 가주전을 가리켰지만 그쪽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이고! 그래요?"
"눼눼. 그러시겠죠."
"아주 대단하시네요."
검사들 모두는 리메르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흥! 차라리 개똥이 약이 된다고 믿겠노라.
라스도 멍청한 핑계를 댄다며 혀를 찼다. 그 라스조차도 믿지 않을 정도로 리메르라는 사람의 신뢰는 바닥을 기고 있었다.
"아, 진짜라고!"
"단주님. 어차피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일단 준비부터 하겠습니다. 광풍대는 두 시간 내로 임무 준비를 마치고 다시 이곳으로 모인다. 포르반은 대륙 중앙 부근에 위치해 있으니, 두꺼운 옷은 많이 챙기지 말도록."
"예!"
라온의 지시를 들은 검사들이 부리나케 연무장을 나섰다.
"진짠데, 진짜라고…."
홀로 남은 리메르는 멍하니 서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양치기 소년의 마음인가….'
* * *
연쇄 실종이라는 다급한 문제였기 때문에 광풍단원은 최대한 빠르게 준비를 끝내고, 바로 포르반을 향해 출발했다.
라온과 검사들은 말을 타고 전력으로 달리면서 중간중간 휴식 시간에 광풍진이라 명명한 새로운 검진을 계속 다듬었다.
버렌이 광풍진에 적응을 끝내고, 3조를 지휘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무렵 포르반에 도착할 수 있었다.
포르반은 북쪽의 지그하르트와 대륙 중앙의 오웬 왕국, 발카르 왕국 사이에 위치한 중립 도시로 세르티라는 아름다운 호수와 레이블 강이 지나서 관광과 교역으로 유명하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일단 시장에게 가서 사정 청취부터 한다."
이동에도 꽤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라온과 검사들은 도시를 구경할 새도 없이 도시 중앙 대로를 타고 올라가 시청으로 향했다.
성처럼 고고한 자태의 시청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문이 열리고, 로브와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나왔다. 왼쪽 가슴에 새겨진 네 개의 오브. 발카르 왕국의 표식이었다.
"어?"
계속 뒤에서 농땡이를 치던 리메르는 가장 앞에 있는 적발의 중년인을 보고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모렐?"
"리메르?."
모렐이라 불린 중년인 역시 리메르를 알아본 듯 이마를 찡그렸다.
'모렐 카잔인가….'
라온은 키가 조금 작은 적발의 중년인을 보고 눈매를 좁혔다.
'어쩐지 가진 기운이 범상치 않다 했어.'
모렐 카잔은 수많은 화속성 마법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발카르의 명성 있는 마법사였다. 살라만이라는 마법단을 운용하는데, 모렐의 뒤에 있는 자들이 살라만 소속인 것 같았다.
"지그하르트가 여긴 무슨 일이지?"
"그러는 너희는 왜 여기 있는 건데?"
"임무 때문이다."
"우리도 임무 때문인데. 볼일 다 봤으면 비켜."
"너! 너어!"
리메르가 입구에서 비키라는 듯 손짓을 할 때 발카르 왕국의 마법사들 사이에서 보라색 머리칼의 여성이 튀어나와 라온의 앞에 섰다.
"라온 지그하르트! 이 사기꾼 자식!"
그녀는 당장에 달려들 것처럼 눈을 부라렸다.
"음? 누구시더라?"
라온은 평온한 눈빛으로 분노를 담은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도, 도련님. 그때 그 왕녀잖아요."
도리안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카멜룬 경매장에서 만난 싸가지."
그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이곳에 고수가 아닌 사람이 없었기에 모두가 싸가지라는 단어를 들었다.
"아, 그 왕녀님."
라온이 피식 웃었다. 물론 앞의 마법사가 발카르 왕국의 왕녀 제이나라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일부러 까먹은 척했는데, 도리안 덕분에 제이나를 더 열받게 만든 것 같았다.
"사기꾼 주제에 또 나를 모욕하는군."
레이나가 금방이라도 마법을 뿌릴 것처럼 마나를 일으켰다. 그녀의 주변으로 푸르고 붉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났다.
"모욕? 무슨 모욕을 했다는 거지?"
"네놈이 지그하르트의 직계라고 속였잖느냐!"
"난 내 입으로 직계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
"그, 그건…."
제이나 역시 그걸 알고 있었는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네, 네가 분위기를 그렇게 몰아서…."
"분위기? 분위기로 속는다면 그 사람이 이상한 거 아닌가? 난 거짓말한 적이 없는데, 어쩌라는 거지?"
"이익! 닥쳐! 속임수를 써놓고 뭐가 그리 당당해!"
"속임수를 안 썼다니까. 혼자 착각해놓고 나한테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이이익!"
라온이 어깨를 으쓱이자, 제이나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왕녀님께 함부로 말하지 마라!"
제이나를 조금 더 자극할까 고민할 때 그녀의 뒤에서 키가 훤칠한 금발의 사내가 나왔다.
빨간색 무복을 입고, 어깨에는 로브를 망토처럼 걸친 기이한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머리에 덕지덕지 바른 기름 때문에 굉장히 느끼한 모양새였다.
'전투 마법사인가.'
다만 외모와 달리 그의 복장은 발카르가 자랑하는 전투 마법사의 의복이었다. 저 남자는 모렐이 키우는 전투 마법사인 것 같았다.
"제이나 님이 발카르의 왕녀이신 걸 알고도 조롱하다니! 목숨이 두 개라도 되는 것이냐!"
그는 로브를 손으로 펼치고 중앙으로 나왔다. 멋을 내려는 것 같았지만, 정말 없어 보였다.
"뭐래. 귓속말을 훔쳐 듣는 쥐새끼 같은 것들이."
마르타가 팔짱을 낀 채로 코웃음을 쳤다.
"음."
"...."
"으으, 마, 망했다!"
버렌은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았고, 루난은 관심 없다는 듯 설화만 안고 있었으며, 이 사태를 만들어낸 도리안은 라온의 뒤에 숨어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쥐새끼? 대놓고 말했으면서 무슨 귓속말이야!"
"누가 들으래?"
"극지에서 사는 무식한 검사 놈들!"
"툭 치면 부러질 허약한 마법사 놈들!"
광풍단과 살라만은 금방이라도 싸울 것처럼 서로를 노려보며 기세를 끌어 올렸다.
"실종자 수색 임무인가."
모렐은 싸움이 벌어지기 직전의 상황에도 여유롭게 리메르만 보았다.
"그걸 묻는 걸 보니, 너희도 마찬가지겠네."
"실종자 수색은 우리가 끝낸다. 너희는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 돌아가라."
모렐은 파리를 쫓듯 손을 휘휘 저었다.
"다 크지도 못한 애송이들이나 데리고 다니면서 뭘 하겠다고."
그는 광풍단원을 차례로 훑어내리며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거야 해봐야 아는 일이지."
리메르는 버렌을 놀릴 때 사용하는 능글맞은 미소를 흘렸다.
"그럼 이렇게 할까?"
모렐은 입술을 깨물고 있는 제이나 왕녀를 보고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애들끼리 가벼운 대련을 해서 진 쪽이 이긴 쪽의 말을 따르는 거 어때?"
살라만이 광풍단보다 나이와 경험이 위라는 걸 알고 기세를 잡겠다는 듯 대련을 하자고 말했다.
"대련? 갑자기?"
리메르가 눈썹을 찡그렸다. 자신이 없다는 듯한 표정이지만, 라온은 그가 어색한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저러니 도박에서 지고 다니지.'
하지만 모렐에겐 통한 것 같다. 그의 미소가 짙어졌다.
"자신 없으면 이대로 물러나던가."
"임무를 받았는데 칼도 못 뽑아보고 돌아갈 수는 없지. 좋다!"
리메르는 쩝 입맛을 다시고 광풍단을 쭉 돌아본 뒤에 중앙에 서 있는 라온을 가리켰다.
"라온. 너로 정했다!"
"하아…."
라온이 한숨을 내쉬고 앞으로 나갔다.
"단주님! 제가 나가겠습니다!"
앞에서 까불던 금발의 전투 마법사가 앞으로 나왔다. 표정을 보니, 왕녀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는 것 같았다.
"이닐드. 너라면 충분하겠지. 믿겠다."
"예! 절대로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모렐이 청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발카르의 왕국의 전투 마법사이자, 염화의 뱀 모렐의 제자 이닐드다. 왕녀님이 네게 당한 모욕을 갚겠다!"
이닐드는 최대한 멋져 보이는 표정과 자세로 라온에게 손가락을 겨누었다.
"미안하지만."
라온은 차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것 때문에 싸우는 게 아닌데, 자리를 잘못 찾아온 거 아닌가?"
"그, 그건…."
이닐드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로 입술을 깨물었다.
"거기다 저 싸가지. 아니 왕녀가 뭘 했는지는 알고 옹호하는 건가?"
"왕녀님께서 잘못하셨을 리가 없다!"
그는 그 말을 하며 왕녀의 눈치를 살폈다.
"마법사면서 생각 없이 사는군."
라온이 헛웃음을 흘렸다. 미모든, 지위든 왕녀에게 단단히 빠진 게 분명했다.
"나에 대한 모욕은 얼마든지 참겠지만, 왕녀님을 모욕한 건 참지 못한다!"
"방금은 왕녀가 아니라, 널 욕한 건데?"
"닥쳐라!"
이닐드는 왕녀만이 아니라, 루난과 마르타도 힐끔거렸다. 아무래도 예쁜 여자의 관심은 모두 좋은 것 같았다.
"이 자리에서 널 쓰러뜨리고, 이번 임무에서 너희 모두를 하인으로 쓰겠다!"
"하인이라…."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좋네."
"네 이름을 밝혀라. 나는 전투 마법사답게 정정당당한 승부에서 너를 꺾고…."
"싸우자고 나온 놈이 혓바닥이 드럽게 기네. 입 튀어나온 애들은 원래 저래?"
마르타가 이닐드를 보며 이죽거렸다.
"으으…."
"…."
왕녀는 이닐드를 보지도 않고 라온에게만 이를 북북 갈고 있었고, 루난은 처음부터 아예 관심이 없었다.
"으음…."
이닐드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여자들 앞에서 멋을 부르러 나왔다가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당황한 것 같았다.
"가, 각자 세력을 대표하는 대결이다. 네가 누구인지, 무엇을 할 것인지를 밝혀라! 나는 발카르의 전투 마법으로 널 상대하겠다!"
마르타에게 조롱을 받아도 이닐드는 똥폼을 잡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 기름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손가락을 겨누었다.
"말이 많긴 하네."
라온이 짧게 혀를 찼다. 아무래도 저 녀석은 좀 맞아야 정신을 차릴 것 같았다.
"도리안."
"옙!"
라온의 부름에 도리안이 번개처럼 다가왔다.
"몽둥이."
"옙!"
도리안이 배 주머니에서 오크가 들고 다닐 만한 커다란 몽둥이를 꺼내주었다.
"어?"
"뭐, 뭐야!"
"왜 주머니에서 저런 몽둥이가 나와!"
"허억…."
구경을 하던 사람들은 평범해 보이는 주머니에서 거대한 몽둥이가 나온 걸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자신을 밝히고, 무엇을 할지를 말하라고 했지?"
라온은 도리안에게 몽둥이를 받아 어깨에 걸쳤다.
"내 이름은 라온 지그하르트. 지금부터 몽둥이로 널 패겠다."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덤벼."
머리에 똥만 찬 놈들은 예로부터 몽둥이가 약이었다.
제17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