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검대의 라테인이다."
평범한 키에 평범한 외모, 말투마저 평범한 녹발의 남자가 씩 웃었다.
다만 무력은 범상치 않다. 단전에 가득 찬 기운이 용암처럼 들끓고 있었다. 이자 역시 아이언드처럼 벽을 넘어선 괴물이었다.
"네 성격을 종잡을 수가 없어서 솔직하게 말하지. 전검대는 널 원한다. 이쪽으로 온다면 최선을 다해서 키워주마."
"키워주신다는 건 어떤 의미입니까?"
"말 그대로다. 무력, 정신력 혹은 인맥이나, 원하는 자리도 만들어 줄 수 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투자해주지."
라테인은 가볍게 웃으며 모든 면에서 도와줄 수 있다고 말했다. 분위기 자체는 리메르처럼 가벼웠지만, 이자는 실제로 가벼운 성정이라기보다는 그 가벼움을 연기하는 것 같았다.
"그럼 제가 당신에게 주어야 하는 건 무엇입니까?"
"...."
라테인이 미소가 살짝 굳어졌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죠. 당신이 그렇게까지 해서 절 원하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세상이 돌아가는 걸 잘 알고 있네. 그저 재능만 있는 꼬마는 아니라는 건가. 더 마음에 드는군."
목소리도 변했다. 경쾌함을 담아내던 음성에 비틀림이 실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쪽도 네게 원하는 게 있지만 그걸 지금 말해줄 수는 없지. 궁금하면 전검대로 찾아와라. 네가 싫어할 만한 게 아니라는 건 장담하지."
그는 본래의 가벼운 표정과 목소리로 돌아가며 가지고 온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작은 선물이다. 전검대에 온다면 이런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장비들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팅해주지."
그는 그 말을 남기고 별관을 나섰다.
-있는 척하는 놈이지만 속이 텅 비었느니라. 볼 것도 없군.
라스는 허접한 놈이라고 코웃음을 쳤다.
'너한테 안 허접한 놈이 어디 있겠냐.'
라온은 정원을 벗어나는 라테인을 보다가 뒤를 돌았다. 자신의 방을 넘어 별관 복도까지 선물들이 가득 차 있었다.
"생각보다 좀 많은데."
리메르와 버렌의 말을 듣고, 어느 정도 사람들이 올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로 몰릴 줄은 몰랐다.
무력 단체만이 아니라, 정보 단체, 행정 단체, 거의 나오지 않는 호법전까지 움직였다. 선물이 너무 많아서 별관이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우후후후!"
"호호호!"
즐거움을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웃음소리에 위쪽을 보았다. 실비아와 헬렌이 얼굴에 웃음꽃을 피운 채 선물을 정리하고 있었다.
"살다 보니 이런 일이 다 있네요."
"별관에 이렇게 많은 손님이 온 건 처음이야."
"다 라온 님이 잘난 덕분이죠."
"그러게 이런 게 자식 덕을 본다는 건가?"
"마님의 복이죠. 복."
실비아와 헬렌. 아니, 저 둘만이 아니라 시녀들도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평소 무시만 받고, 욕받이를 하던 별관이 화제의 중심에 섰고, 그걸 이뤄낸 게 라온이라는 것만으로 행복해하는 것 같았다.
-입이 아주 귀에 걸렸구나.
'저들이 좋아하면 나도 좋거든.'
거짓말이 아니다. 실비아와 헬렌 그리고 시녀들이 행복해하면 자신도 행복하고 기뻤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그저 감정이 그렇게 움직였고, 그렇게 따라갔다.
-이런 사소한 일로 좋아하다니, 네놈은 크게 되기 글렀느니라. 본왕은 그 어떠한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그건 헛소리지.'
-헛소리라니! 본왕만큼 냉정한 존재가 어디 있다고! 쓰는 힘도 냉기가 아니더냐!
'그게 제일 미스테리야.'
사소한 도발에도 걸려드는 다혈질이 어떻게 냉기를 사용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본성은 탐식에, 다혈질이지만, 쓰는 기운은 냉기라니 어그러짐도 이런 어그러짐이 없다.
-이 건방진. 본왕의 본체 앞에서는 쭈구리고 일어서지도 못할 놈이….
'그럼 본체 가져오세요."
-끄으윽….
라온은 이를 라스를 놀려주고, 방으로 들어가 선물이 쌓인 벽으로 다가갔다.
'뭐가 있나 좀 볼까.'
방 안에 있는 선물을 열어보았다. 대부분은 장갑이나, 부츠, 벨트, 검의 수실이나, 검병을 묶는 끈처럼 전투에 사용하는 물품이었다.
물건들을 대충 정리한 뒤 책상에 있는 세 상자를 보았다. 직접 만났던 대주들이 보낸 선물이었다.
'이건….'
먼저 아이언드가 보낸 작지만 고급스러운 상자를 열었다. 안에 얇은 장갑이 들어 있었는데, 눈으로 보아도 다른 것과는 질이 다른 물건이었다.
장갑을 껴보았다. 손에 아무것도 착용하지 않은 듯 가벼우면서도 손에 딱 달라붙었다. 검을 쥐는 감각도 맨손과 비슷할 정도인데, 질기기는 검으로도 잘 베이지 않았다.
"괜히 직접 찾아온 게 아니었군."
이런 물건을 그저 선물용으로 보내는 걸 보면 정말 자신을 데려가고 싶은 것 같았다.
"이쪽은…."
이번에는 세레나가 주고 간 상자를 열었다. 이쪽은 부츠다. 갈색 가죽 부츠가 들어 있었는데, 무게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와…."
부츠를 신자, 몸무게도 줄여주는 듯 몸이 가벼워졌고, 조금 더 높게, 멀리 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쪽도 범상치 않은 장비였다.
마지막으로 라테인이 주고 간 상자를 열었다. 금색 반지가 들어 있어서 손가락에 끼어보았다.
'근력 강화인가….'
엄청나다고 할 정도의 차이는 아니지만, 확실히 힘이 더 강해진 듯한 감각이었다. 근력 강화 마법이 걸린 반지인 것 같았다.
"나쁘지 않네."
확실히 대주들이라 그런지 선물들이 보통 수준이 아니다. 장비들의 상태를 확실히 체크 하려고 할 때 문에서 세 번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대답 없이 문이 열리고, 주디엘이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선택식에 나올 단체를 조사해왔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책자 하나를 내밀었다. 이전처럼 직접 만들어 온 것 같았다.
"고마워."
라온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책자를 쭉 살펴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가문에 속한 대부분의 단체가 적혀 있었다. 모르던 내용도 꽤 많아서 흥미롭게 읽었다.
"선택식에 대해 조사하면서 알게 된 건데 미신 같은 게 하나 있더군요."
"미신?"
"예. 선택식에 참여한 모든 무력 단체의 수장에게 선택을 받는 검사는 예외 없이 가주가 되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현 가주님도 모든 단체의 선택을 받았다고 적혀 있더군요."
"가주라…."
딱히 가주가 목표는 아니었기에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라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디엘. 네 생각은 어때? 어디가 제일 낫다고 보지?"
책자를 다 읽은 뒤 주디엘을 보았다.
"일단 저희의 선택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직계나 직계를 따르는 방계 단체는 가기 힘들죠. 그 외의 선택을 찾아야 합니다."
"저희라…."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야."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던 주디엘이 저희라는 말을 사용하여 그저 조금 대견했을 뿐이다.
"사실 지그하르트에서 핏줄이 가진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말할 필요도 없죠. 무력 단체의 상위는 대부분 직계가 가져가니까요. 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곳이 몇 군데 있습니다."
주디엘이 책자의 중앙 부분을 펼쳤다.
"먼저 아이언드가 이끄는 백련대. 전장을 제집처럼 노니는 실전형 검사들이 주로 소속되어 있고, 많은 임무에 나갑니다. 아이언드의 무력은 직계에게도 밀리지 않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녀는 이쪽도 괜찮다며 책장을 넘겼다.
"두 번째는 어제 찾아왔던 세레나가 대주로 있는 공검대. 예리하고, 날카로운 검술을 주로 사용합니다. 그녀는 욕심이 많은 만큼 많은 임무와 의뢰를 받아 날로 명성을 높이고 있습니다. 오늘 왔던 전검대는 조금 계산적이기는 하지만 일단 나서면 실패 없이 모든 임무를 처리했습니다. 그리고…."
주디엘은 책자를 움직여가며 추천할만한 단체들을 하나씩 읊었다. 다만 결국 갈만한 곳은 아이언드와 세레나, 그리고 라테인이 이끄는 단체였다.
"리메르 교관은 인원이 적은 곳으로 가라고 하던데, 그래야 공을 세울 일이 많다고."
라온은 리메르가 했던 말을 전했다. 물론 잘생겼느니, 도박을 잘하느니 했던 헛소리는 모두 제외했다.
"그것도 맞는 말입니다. 규모가 작은 곳은 그만큼 여러 곳으로 지원을 나가고, 단원의 대부분의 임무에 참여할 수 있기에 공을 세울 기회가 많습니다. 물론 그만큼 위험하고 바쁘겠죠."
"그렇군."
실비아를 직계로 만들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실적을 쌓아야 한다. 큰 곳에 가서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느니, 작은 곳에 가서 많은 임무에 참여하고, 다른 단체에 지원을 나가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럼 작은 곳도 자세히 알아볼까요?"
"아니, 알아볼 필요 없어."
라온이 책자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저었다.
"갈 곳은 정해져 있거든."
그 도박쟁이가 그렇게 노골적으로 홍보를 해줬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고맙게도 선물만 넘치게 받았네."
라온은 가득 쌓인 선물들을 보며 빙긋 웃었다.
* * *
선택식 당일.
대연무장에는 유례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비번이나, 휴가를 받은 인원들도 휴식을 취하지 않고 연무장으로 나와 꽉꽉 찬 자리에 엉덩이를 비집고 앉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평범한 수련생과는 격이 다른 성장세를 보인 5 연무장의 수련생들의 어떤 단체로 갈지가 지그하르트 내부 초유의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특히. 그 괴물 기수의 수석인 라온 지그하르트.
하분 성에서 어린 검귀와 화벽이라는 이명을 얻고, 돌아오자마자 중무전을 때려 부순 그가 어디로 갈지는 도박이 이루어질 정도로 모두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지금 대연무장에 모인 사람 중 절반은 라온의 선택식을 보기 위해서 온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관객석이 가득 차서 미어터지려 할 때 연무장의 단상 위쪽으로 사람들이 올라온다.
강대한 기파와 섬뜩한 위엄을 두른 검사들의 가슴에는 모양도 색도 다른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단주 혹은 대주. 지그하르트의 진정한 힘이라는 무력 단체의 수장들이 높디높은 단상 위에 차례로 앉기 시작했다.
라온에게 직접 찾아갔던 아이언드나, 세레나만이 아니라 중무전이나, 진무전, 성현전 같은 직계 전주들도 단상 위에 세워진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서로를 견제하는 듯 약간의 안부 인사만 나눈 뒤 아래의 연무장을 굽어보았다.
"다들 라온을 노리고 있죠?"
대주와 단주들이 누구를 데려갈지 생각을 정리할 때 경쾌한 음성이 들려왔다. 전검대주 라테인이다. 단상 위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직접 보고 오니까. 더 대단하더군요. 무학을 익히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기세가 옅은데, 내부의 완성도는 이미 마스터에 근접한 수준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더 강해질 겁니다. 가주님만이 아니라, 원로들도 관심을 가지는 이유를 알겠어요."
직계 출신 대주들은 불편한 듯 인상을 찡그렸지만, 외부 출신 대주들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그 아이는 내가… 아, 오늘의 주인공이 들어오네."
라테인은 말을 멈추고, 문을 넘어오는 5 연무장의 검사들을 가리켰다. 그들은 검붉은색 예복에 지그하르트의 휘장을 달고, 연무장 중앙으로 차례차례 걸어왔다.
그 끝에 라온이 있었다. 금색 수실이 달린 검붉은 예복을 입고, 태양 빛이 어린 듯한 붉은 눈동자를 빛내는 그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라온이다!"
"라온 지그하르트."
"무슨 놈의 얼굴이…."
"더 강해진 느낌인데?"
"설마 또?"
"17살에 부단주급이면 불가능한 일까진 아니지."
대주들은 라온의 외모에 감탄하고, 그가 피워내는 검과 같은 섬뜩한 예기에 경악했다. 그들의 눈빛은 각자 다른 의미로 먹잇감을 노리듯 새파랗게 번들거렸다.
* * *
대연무장에 입장한 라온은 다른 검사들과 함께 연무장 중앙으로 향했다.
"라온!"
"도련님!"
"라온 님!"
우측 끝에서 이름을 부르며 환호하는 실비아와 시녀들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고서 검사들의 가장 앞에 섰다.
"라, 라온 님. 결정하셨어요?"
도리안이 쫙 벌린 손가락을 파르르 떨었다.
"결정은 일단 우리가 아니라, 저쪽이 하는 거지."
라온이 단상 위에서 이쪽을 내려다보는 단주와 대주를 가리켰다.
"그래도 마음은 정하셨을 거 아니에요."
"대충은."
"어디에요?"
"저기엔 없어."
"네?"
그 말에 도리안만이 아니라,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루난과 마르타, 버렌도 움찔 놀랐다.
"없어?"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 다 왔는데!"
"그래. 무력 단체의 수장은 외부에 나가 있는 월하전만 제외하면 다 와 있다고! 설마 행정 쪽으로 가려는 건 아니지?"
세 사람 아니. 검사들 모두가 옆으로 다가와서 어디로 갈 건지를 캐물었다.
"너 무슨 생각이야!"
"또 무슨 미친 짓을 하려고!"
"평범하게 좀 가자."
"미친 짓은 내가 아니라, 그 게으른 인간이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라온은 달려드는 검사들을 진정시키며 픽 웃었다.
"게으른 인간? 리메르 교관?"
"그 도박쟁이가 왜?"
"기다려보면 재밌는 일이…음!"
살짝 힌트만 주려고 할 때 뒤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 가문의 주인 북패왕 글렌 지그하르트의 절대적인 기파다. 성장할수록 더 강하게 느껴지는 그의 기세에 오싹 소름이 돋아 올랐다.
"지그하르트의 진정한 하늘! 북패왕 글렌 지그하르트 가주께서 입장하십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천검대의 외침에 연무장에 있는 모두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저벅.
글렌은 연무장을 울리는 그 거대한 목소리를 발걸음 하나로 짓누르며 단장의 중심으로 올라가 금빛 옥좌에 앉았다.
"모두 일어서라."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던 대주들도 신입 때로 돌아간 듯 웅장한 목소리로 감사하다고 외쳤다.
"아, 그, 그럼 지금부터 5 연무장 졸업생들의 선택식을…."
"잠깐."
사회자가 선택식의 시작을 알리려고 할 때 글렌이 손을 들어 올렸다.
"아직 한 놈이. 아니, 한 명이 안 왔다."
"예? 어? 졸업생 43명은 전부 왔습니다."
사회자는 직접 숫자를 세보고, 이상이 없다고 말했다.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다."
글렌은 단상 아래가 아니라, 단상 위. 대주와 단주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예? 저쪽도 숫자는 이상 없…."
"아, 미안 내 자리야."
사회자가 당황하며 서류를 확인할 때 좌측의 담벼락 위로 녹색 질풍이 치솟았다. 붉은 머리를 휘날리는 훤칠한 남성이 담벼락을 가볍게 박차고 단상 위로 단번에 올라섰다.
"리메르!"
"감히!"
"네놈이 여길 왜 오는 것이냐!"
"지금 이곳은 단주와 대주만이 올 수 있는 자리다!"
카룬과 발데르를 비롯한 직계의 대주들이 죽일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알지. 그래서 온 거야."
리메르는 여유롭게 발을 까딱이고,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리메르가 아니라, 광풍단의 단주 리메르 님이라고 부르도록."
"헉!"
"다, 단주?"
"단주가 되었다고?"
그의 선언 같은 말에 대연무장의 모두가 당황하여 눈을 부릅떴다.
'저 사람은 이런 날도 늦는군.'
다만 라온은 알고 있었다는 듯 피식 웃었다. 모두가 모였으니, 진짜 선택식의 시작이었다.
제164화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냐!"
카룬이 자리에서 일어나 리메르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네가 어떻게 단주가 될 수 있다는 말이냐!"
그만이 아니라, 단상 위에 있는 대주와 단주 모두가 이해할 수 없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들 그러십니까. 단주가 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요."
리메르는 카룬을 마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어려운 일이 아니지. 하지만 네놈처럼 단전이 망가진 폐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소싯적에 해놓은 게 워낙에 대단해서 폐인이 되었어도 단주 역할 정도는 할 수 있겠더라구요."
"우연으로 광혈귀를 잡았다고 네가 예전처럼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장기전을 할 수도 없는 반쪽짜리 주제에!"
카룬은 이 자리에 리메르가 있는 것 자체를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워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건 알고 있는데, 이미 결정 난 사항입니다."
"누가 결정을 했다는 것이냐!"
"뻔하잖아요."
리메르가 히죽 웃으며 중앙에 놓인 옥좌를 가리켰다.
"그의 말이 맞다. 내가 허락했다."
글렌이 느긋할 정도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주가 될 정도의 능력이 있는 건 확인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아버지! 칼질 좀 한다고 저 도박쟁이를 단주에 끼워 넣었다간 가문 망신만 시킬 겁니다! 저놈이 하는 짓이 망나니나 다름없습니다!"
발데르가 의자를 부술 듯 거칠게 일어서서 리메르에게 삿대질을 했다.
"발데르. 내가 허락했다고 말했다."
"으읍…."
글렌의 눈빛이 무저갱처럼 깊게 가라앉았다. 그 시선을 마주한 발데르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굽혔다.
"크윽…."
홀로 이 공간을 압도하는 기세에 카룬도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직접 광풍단주의 무력을 확인하고, 허가한 일이다. 불만이 있다면 내게 직접 찾아오도록."
"으음…."
"아, 아닙니다."
눈앞에서 전주 두 명이 기세만으로 찌그러지는 것을 보았기에 다른 대주와 단주들은 벌어지려던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제 좀 조용해졌네."
"후욱!"
"이익…."
리메르는 좋다며 히죽 웃었고, 카룬과 발데르는 그를 노려보며 소리 나도록 주먹을 말아쥐었다.
"가주님. 제 소개를 좀 해도 되겠습니까?"
"소개?"
"예. 신입검사들이 저를 알긴 하지만, 광풍단을 어떻게 운용하고, 무엇을 할지를 말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짧게 끝내라."
"옙!"
리메르는 글렌에게 고개를 숙인 뒤 단상의 끝에 섰다.
"반갑다. 광풍단주다."
라온은 담담하게 고개를 들어 리메르를 보았고, 버렌을 비롯한 다른 검사들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저 가볍고, 경박한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를 두려워했다.
"지금까지 너희를 가르쳤던 교관의 모습은 잊고, 신입 단주로만 생각해주길 바란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와 눈빛은 진중했고, 어조는 격식 넘쳤다.
"너희들은 이미 들어가고 싶은 단체를 어느 정도 정해놓았을 것이다. 그 선택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 대주들의 명성, 무력 단체의 힘, 다양한 지원 혹은 뛰어난 무학까지. 하지만!"
리메르의 침착한 말에 검사들은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5년간 봐왔지만 거의 처음 보는 진지한 모습이었기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것들은 이곳의 선배들이 깔아놓은 도로이고, 너희는 그 도로에 올라탈 뿐이다. 그런 상태에서 강한 단체에 속해봤자, 이룰 수 있는 건 어설픈 명성과 업적밖에 없다. 모두가 경탄할 만한 업적들은 전부 너희들의 선배가 가져갔으니까."
그의 말은 의외로 정확한 사실을 꼬집고 있었다. 벌써 무력 단체에 속한 듯 웃음을 짓던 검사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난 너희들에게 그런 것을 줄 수 없다. 광풍단은 며칠 전에 만들어졌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하지만 이곳은 완성되지 않았다는 장점이 있다."
"완성되지 않았다는 장점?"
"그게 무엇입니까?"
리메르의 말에 빠져든 검사들이 앞으로 나왔다.
"광풍단에서 너희들이 이룰 수 있는 것들이 이미 우뚝 선 단체들보다 훨씬 많다는 점이다."
"이룰 수 있는 것…."
마르타가 홀린 듯 눈을 빛냈다.
"우리의 여정은 위험할 것이고, 임금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몇 달간 어둠이 지속될 테고, 위험은 끊이질 않겠지. 안전하게 살아 돌아온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 모든 위험과 고난을 이겨냈을 때 우리는 영광과 명예를 가질 수 있다."
영광과 명예. 어떻게 보면 허구적인 단어였지만, 그 말을 듣는 검사들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반짝였다.
"나와 함께 한다면 내 뒤에 서서 너희들을 굽어보는 자들처럼 위대한 업적을 세우고,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게 만들어주겠다."
리메르가 손을 뻗었다. 텅 빈 손이었지만, 값비싼 보석과 장비를 내밀었던 대주들의 손보다 훨씬 매력적으로 보였다.
"가, 가주님. 너무 길어집니다."
"예, 그만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검사들을 빼앗길까 봐 조급해진 대주들이 리메르를 노려보며 말했지만, 글렌은 별다른 반응 없이 눈을 내리감았다.
"나만큼 너희를 잘 아는 사람은 없다. 누구보다 강하게 만들어주마! 나를 믿고 따라와라.
리메르는 그 말을 외치고서 본래의 자리에 돌아가 주저앉았다. 의자가 없어서 단상에 걸터앉았음에도 그의 웅혼한 기세는 줄지 않았다.
"이거…."
"어, 어떻게 하지?"
"갑자기 확 끌리는데…."
"으음!"
검사들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갑작스럽게 끌리는 곳이 나타나 생각이 정리가 안 되는 듯했다.
"...."
반면 라온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평온한 눈빛이었다. 지금의 이 상황과는 본인은 아무 상관 없다는 듯 담담하게 서 있을 뿐이다.
"크흠…."
리메르는 그런 라온을 보며 눈매를 찡그렸다.
'다른 애들한테는 잘 먹힌 것 같은데, 저 녀석은 표정이 왜 저래.'
가장 중요한 녀석이 저렇게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 속이 갑갑해졌다.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지만, 넌 꼭 와줘야 한다고!'
광풍단의 목적 자체가 라온을 성장시키기 위해서 만든 단체이니, 그가 꼭 와주어야 한다. 녀석이 오지 않는다면 광풍단의 의미가 없다.
'거기다….'
리메르가 입술을 깨물었다.
'도박에 전 재산을 걸었단 말이야!'
라온이 어떤 단이나 대를 고를지가 초유의 관심사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도박도 굉장히 유행하고 있었다.
라온이 기본의 단체가 아니라, 새로운 단을 고른다고 걸었기 때문에 녀석은 무조건 광풍단에 와주어야 한다.
'제발! 그거 날리면 나 진짜 뒈져! 도토리만 먹고 살아야 한다고!"
리메르는 거친 숨을 뱉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평소에 하지도 않던 신에게 기도까지 하며 라온이 이곳에 오기만을 바랐다.
"왠지 오늘 교관님 멋있어 보이는데?"
"그러니까. 저런 모습이 있을 줄은 몰랐어."
"영광과 명예.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줄이야."
"저게 진짜 모습 아닐까? 이제 보니 눈빛도 깊고…."
신입 검사들은 우수에 잠긴 리메르의 모습을 보며 감탄을 흘렸다. 그의 머릿속이 도박으로 가득 찼다는 걸 보았다면 침과 욕을 뱉었겠지만, 다행히 그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한 명이 있긴 했지만, 그는 이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
* * *
라온은 리메르와 눈을 마주치고 옅은 미소를 흘렸다.
'꿍꿍이가 있군.'
리메르의 표정을 보니, 폼만 잡는 게 아니라 자신이 들어오기를 절절하게 바라고 있었다.
그가 단을 만들어서 올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 정도로 자신을 영입하고 싶어 할 줄은 몰랐다.
'도박이라도 걸었나 보네.'
저 양아치스러운 엘프 교관이 진지할 때는 도박뿐이다. 아무래도 자신이 본인의 단에 들어가는 것에 전 재산을 걸었을 것 같다.
'뭐, 그렇다고 해도 아까의 그 발언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리메르가 본인과 함께 영광과 명예를 얻자는 말은 확실히 무인의 가슴을 움직였다. 예상보다 많은 검사들이 광풍대로 갈 것 같았다.
-처음으로 저 귀때기의 말이 마음에 드는구나.
라스는 리메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암. 마족이라면 남의 명성에 기대서는 안 되지. 본인의 능력으로 시련과 고난을 뛰어넘어야 강해질 수 있느니라.
'우린 마족이 아닌데?'
-그건 중요하지 않느니라.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그저 성에만 박혀 있지 않고 마계 전역을 돌며 다른 왕들과 싸움을….
"지금부터 선택식을 시작하겠습니다! 호명된 신입 검사는 단상 앞으로 나와주십시오!"
라스가 주절거리기 시작할 때 사회자가 선택식의 시작을 알렸다.
-저, 저놈 감히 인간 주제에 본왕의 말을 끊어?
'가야겠네.'
라온은 잘 됐다고 중얼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마르타 지그하르트. 앞으로 나와주십시오!"
마르타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다가 라온의 옆에서 잠시 멈췄다.
"난 광풍단으로 가겠어. 저 망나니 교관은 안 믿지만, 내가 해야 할 일에 가장 도움이 될 거 같으니까."
그녀는 그 말을 바람처럼 흘리고서 앞으로 나갔다.
"마르타 지그하르트를 받아들이고 싶은 수장은 거수하여 주십시오."
사회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단상 위에 선 대주와 단주들이 손을 들어 올렸다.
데니어 지그하르트만이 아니라, 이전에 자신을 찾아왔던 아이언드나 세레나 역시 그녀를 원하는 듯 단번에 손을 들었다.
"흠!"
리메르는 여전히 똥폼을 잡으며 손가락 두 개만 들어 올렸다.
"저는 광풍단에 들어가겠습니다."
마르타는 본인을 원하는 단체들을 전부 훑어내린 뒤 인상을 찡그리며 리메르를 가리켰다.
"음…."
데니어가 잠시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렇게 될 걸 예상한 듯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부터 마르타 지그하르트의 소속은 광풍단입니다! 모두 축하의 박수를 보내주십시오!"
"우와아아아!"
"도전하는 모습이 좋다!"
소속이 확정되자, 관객석에 있던 사람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다음 루난 슬리온. 앞으로."
루난이 고개를 끄덕이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 역시 라온의 옆에 멈춰서서 잠시 뜸을 들였다.
"라온. 광풍단?"
"글쎄."
"응."
두리뭉실하게 대답했지만, 속마음을 알아차린 듯 루난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난 슬리온을 받아들이기 원하는 수장은 거수하여 주십시오."
로칸 슬리온을 필두로 많은 수장들이 손을 들었다. 마르타보다 더 많은 숫자. 루난을 마르타보다 편하게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큰 착각이지.'
루난은 조용해 보이지만 실제 고집은 마르타 이상이다. 받아들인다면 고생 꽤나 하게 될 것이다.
"루난 슬리온. 네 차례다. 가고 싶은 단체를 선택하도록."
루난은 고개를 끄덕이고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곳에는 옅은 미소를 짓는 리메르가 있었다.
"루난 슬리온의 소속은 광풍단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루우우우우나아아안!"
로칸 슬리온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질렀지만, 루난은 멍한 눈빛으로 고개를 꾸벅이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렇게 선택식은 계속되었고, 본래부터 가고 싶었던 곳이 확실하게 정해져 있던 10명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신입 검사들이 광풍단을 선택했다.
리메르가 괴짜지만 사람을 키우는 능력 하나는 확실하다는 걸 겪었고, 그의 말대로 그들만의 영광과 명예를 얻어 새로운 역사를 쓰고 싶었던 것 같다.
물론 모두가 선택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어? 왜 저, 전 손든 사람이 없습니까? 이거 뭔가 잘못된 거 아니에요?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아, 안 보이나?"
도리안이 단상 위를 향해 손을 마구 흔들었지만, 그를 데리고 가겠다고 거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겁이 많아서 하분 성에서도 맨날 도망만 쳤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인 것 같다.
"이거 너무하네! 잠깐만요! 보급대도 안 들었잖아! 작은 실수 좀 했다고 정말 너무하십니다!"
"작은 실수? 보급품을 모조리 들고 나르려고 해놓고?"
보급대의 수장인 중년인이 차가운 눈빛으로 혀를 찼다.
"이, 이런 일이 있다니…."
도리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배 주머니를 쓰다듬으며 턱을 떨었다.
"신입 검사 도리안을 받을 사람이 없다면 이대로 종료…."
"후우, 이게 스승의 책임감인가."
사회자가 도리안의 선택식을 끝내려 할 때 리메르가 한숨을 내쉬며 손을 들어 올렸다.
"우왁! 저기요! 저 광풍단에 들겠습니다!"
"크흠, 도리안의 소속은 광풍단으로…."
"감사합니다!"
도리안은 여전히 배 주머니에 손을 올린 채 고개를 꾸벅이고 돌아갔다.
"도련님! 살았어요! 앞으로 리메르 님을 평생 스승으로 모실 겁니다!"
"그러냐…."
"네! 아아, 스승의 은혜는…."
녀석은 이상한 노래를 부르며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다음 버렌 지그하르트. 앞으로."
"예."
버렌은 녹색 눈에 진중함을, 묵직한 걸음에 자신감을 뿜어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광풍단이 끌리는 건 사실이지만, 난 처음 목표대로 가겠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당당하게 단상 앞에 섰다. 많은 수장들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지금까지 중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것 같았다.
"버렌 지그하르트를 받아들이고 싶은 수장들은 거수하여 주십시오."
사회자의 말에 단상 위 사람들이 우르르 손을 들어 올렸다.
"어?"
대부분의 수장들이 거수하여 기뻐해야 할 버렌의 표정은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굳어져 있었다.
"아, 아버지. 왜…."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믿고 있고, 가고 싶었던 중무전의 수장. 카룬이 차가운 눈빛만 발할 뿐 손을 들어 올리지 않았으니까.
"으음…."
"뭐, 뭐지?"
"버렌이 눈에 차지 않는다고?"
"무력과 정신이 저리 출중한데…."
사회자나 다른 수장들도 이 상황에 당황했는지 카룬과 버렌을 번갈아 보며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버, 버렌 지그하르트는 거수한 수장 중 한 명을 선택하도록."
사회자가 단체를 고르라고 말했지만, 버렌은 움직이지 않았다. 축 내린 어깨를 떨며 그의 아버지만을 바라보았다.
"...."
라온은 아들이 아니라, 쓰레기를 보는 듯한 카룬의 눈동자를 살피며 비웃음을 흘렸다.
'역시 저 인간은 존경할 만한 사람이 아니야.'
버렌은 그의 아버지가 존경스럽다고, 훌륭하다고 했지만, 저자는 존경을 받을 만한 인간이 아니다. 밴댕이 이상으로 속이 좁은 협잡꾼에 불과하다.
-의외로군. 저 눈깔이의 무력과 성격은 눈에 띌 정도로 성장했는데.
'그 성격이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성격?
'버렌이 처음에 보여주었던 그 냉정하고, 기계 같은 성격이 대범하고 여유롭게 변한 게 마음에 들지 않겠지.'
전생에서 데루스라는 괴물을 보았기에 확신할 수 있다. 카룬은 장기 말로 사용해야 할 아들이 본인의 의지로 움직이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버렌. 선택하도록."
"...."
사회자가 말을 해도 버렌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섯을 세지. 그 안에 선택하지 않는다면 네 소속은 정해지지 않는다. 하나, 둘, 셋, 넷…."
사회자가 버렌을 배려하며 시간을 끌었지만, 녀석은 그저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후우, 다섯. 버렌 지그하르트의 소속은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아…."
끝났다는 말에도 버렌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검사들이 나와서 데리고 가고 나서야 부서진 인형처럼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럼 저놈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
'한 달 안에 소속을 결정해야 해. 직접 찾아가서.'
-참 별일이 다 있구나.
미운 정이라도 들었는지 라스는 조금이지만 버렌이 걱정되는 것 같았다.
"오늘의 마지막 순서입니다. 5 연무장의 수석 라온 지그하르트. 앞으로!"
라온은 사회자의 우렁찬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고 앞으로 걸어갔다.
* * *
카룬 지그하르트는 비틀거리며 들어가는 막내아들을 보며 이마를 찡그렸다.
'쓸모없는 녀석.'
자신이 아들에게 원하는 모습은 친구든, 스승이든 찔러 죽일 수 있는 독기를 가진 검이지,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인간이 아니다.
그런 독기와 악의를 가질 수 있게 키워놨는데, 수석 자리도 차지하지 못한 머저리가 되어 돌아왔다. 저런 건 더 이상 자신에게 필요 없었다.
"이야, 독하시네요."
옆에서 들려온 짜증 나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리메르가 히죽 웃고 있었다.
"뭐라?"
"버렌의 무력과 정신력은 말할 것도 없고, 생존 시험을 통해서 인간적으로 성장했는데, 쳐다도 보지 않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게 문제다."
카룬이 코웃음을 쳤다.
"자식이란 내 분신일 뿐이다. 정신적 성장 따위는 필요 없어. 시키는 일을 그대로 따르면 그만이다."
"와, 재수 없는 발언."
"네놈 때문이다."
리메르가 피식 웃자, 카룬을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네놈이 맡은 이후로 버렌이 망가졌으니까."
"저건 망가진 게 아니라, 성장한 겁니다. 중무전주님 눈깔이 잘못되신 거 아닌가요?"
"네놈…."
두 사람의 불편한 기운이 경합하며 단상 위에 기이한 기운을 흘러내렸다.
"둘 다 입 닫아라."
"음…."
"죄송합니다."
글렌의 시선이 닿자, 카룬과 리메르가 침음을 삼키며 동시에 기세를 꺼뜨렸다.
"마지막이니 집중하도록."
그는 쓸쓸하게 걸어가는 버렌을 보며 눈매를 좁히다가 반대편에서 앞으로 나오는 라온을 바라보았다.
"이번 선택식 최고의 대어가 나왔네요."
리메르는 언제 입을 다물었냐는 듯 바로 말을 시작했다.
"하지만 직계분들은 손을 안 들겠죠?"
"뭐?"
"그게 무슨 말이지?"
직계와 직계를 따르는 방계 출신 수장들이 눈을 흘겼다.
"이번 연수 때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리메르는 누군가를 놀리듯이 긴 손가락을 빙글 돌렸다.
"연수 후반기부터 중무전이 라온을 겁내서 무조건 물러나기만 했다고. 부단주, 단주, 대주들을 모조리 빼고, 라온이 무엇을 하든 놔두었다고 하던데. 그거 라온에게 털릴까 봐 겁나서 그랬다고 소문이 쫙 퍼졌던데요."
그는 턱을 살짝 들어서 직계들을 내려다보는 듯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 직계분들이니 라온을 받아들이기 무서우시겠죠? 손을 안 드셔도 저는 추우웅분히 이해합니다."
"너 이 새끼!"
"리메르!"
"정말 미쳐버린 것이냐!"
카룬과 발데르를 비롯한 직계들이 벌떡 일어섰다.
"아직 선택식이 안 끝났는데, 그러시면 안 되죠."
리메르가 슬쩍 옆을 가리켰다. 글렌에게서 불편한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으음…."
"이익…."
직계들은 이를 악물고 다시 자리에 앉았지만 리메르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걸 멈추지 않았다.
'망할 새끼….'
카룬은 입술을 꾹 깨문 채 단상 앞에 선 라온을 보았다. 스승과 제자 둘 다 지랄맞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장 때려죽이고 싶었다.
'겁? 이 내가 겁을 먹었다고?'
리메르가 말했던 겁먹고 물러났다는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런 벌레에게 겁을 먹을 리가 있겠는가. 훗날 놈을 죽이기 위해서 불필요한 부딪침을 피하려 했을 뿐이었다.
'망할….'
한 번 머리에 떠오르자, 라온 놈이 중무전에서 부순 물건들과 제자들이 줄줄이 생각났다.
'좋다. 들어주지.'
카룬은 라온에게 거수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혹시라도 라온이 온다면 뼈와 살 그리고 핏방울 하나까지 이용하고 죽여버리면 그만이다.
"라온 지그하르트를 받아들이기 원하는 수장분들은 거수하여주십시오."
천둥벌거숭이 같은 라온이 다시 한번 멍청한 짓을 하기를 바라며 눈을 내리감고 손을 들어 올렸다.
'음?'
소리가 사라진 것처럼 주변이 고요했다. 자신이 손을 들었다면 이것과 반대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어야 했다.
'무슨 일이….'
카룬이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라온은 덤덤한 표정이었지만, 관객과 검사들은 입을 떡 벌린 채 단상 위를 보고 있었다.
"허억!"
주변을 돌아보자마자 신음이 터졌다. 자신만이 아니다. 손을 올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직계의 수장들이 눈을 부릅뜬 채 거수하고 있었다.
이 단상 위에 있는 모두가 라온을 원한다며 손을 들어 올린 것이다.
"이 무슨…."
"지그하르트에 내려오는 전설 중에 이런 게 있었죠."
카룬이 당황하여 손을 내리려 할 때 리메르에게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선택식에서 모두의 선택을 받은 검사는 훗날 가주가 된다."
그가 진중한 녹색 눈동자를 빛내며 히죽 웃었다.
"제 제자를 챙겨주어 감사합니다."
제165화
라온은 고개를 들어 단상을 보았다. 하늘을 받치는 기둥처럼 올라간 수장들의 손. 단상 위에 있는 모두가 손을 들어 올렸다.
마스터 이상의 경지에 오른 가문의 강자들이 자신을 원하여 동시에 손을 올리는 장면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장관이었고, 오싹할 정도의 희열을 전해주었다.
'이건 예상 못 했는데.'
데니어는 어느 정도 예측했지만, 카룬이나 발데르까지 손을 들어 올릴 줄은 몰랐다. 다만 놀란 건 자신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대연무장에 일순간 침묵이 감돌았다.
이곳이 있는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광경에 당황하여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 전부라고…?
"대주와 단주 모두가 손을 들었어!"
"이거 오늘 처음 아니야?"
"오늘이 아니라, 현 가주님 이후에 처음이라고!"
"서, 선택식을 계속 봐왔지만 모든 수장이 손을 들어 올린 건 한 번도 없었어…."
"그 전설…."
간신히 정신을 차린 검사들이 라온과 대주들을 번갈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전설? 맞네. 이거 그 전설이잖아!"
"가주의 전설이 드디어…."
"그럼 저 녀석이 가주가 된다고? 직계도 아닌 방계인데?"
"사실 피는 직계잖아."
"저 녀석이 가주…."
"그게 무슨 전설이야! 미신이지!"
소수의 검사들이 대주들의 손을 보며 전설이라고 중얼거리자, 곧 연무장 전체에서 가주의 전설이라는 단어가 들끓었다.
'전설?'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전설이라고 하니, 얼마 전에 주디엘이 말해주었던 미신이 생각났다.
단상 위에 있는 모든 수장이 손을 들어 올리면 그 검사는 반드시 가주가 된다는 전설. 현 가주인 글렌 역시 선택식에서 모두의 손을 들어 올리게 만들었다고 했었다.
'그런 게 의미가 있나.'
그건 현실이 아니라, 미신일 뿐이다. 거기다 가주에는 별 관심 없다. 실비아를 직계로 올리고, 데루스에게 복수만 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라온은 시선을 돌려 중앙에 있는 글렌을 보았다. 평소와 같이 아무 반응도 없는 냉막한 인상이지만, 이상하게 따스하게 보였다. 꼭 대견하다고 칭찬을 하는 것처럼.
'음….'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그런 느낌이 씻은 듯 사라졌다. 자신의 착각이었나보다.
'그럼 그렇지.'
라온은 피식 웃으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룬이나, 직계들은 당황스러운 듯 들어 올린 손을 파르르 떨며 리메르를 보고 있었다.
'도박쟁이 교관님이 무언가를 했나 보네.'
정말 죽일 듯이 노려보는 걸 보니, 리메르가 직계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이런 상황을 만든 것 같았다.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저런 놈이 왜 맨날 도박에서 졌다고 울고 오는 것이냐.
라스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눈매를 좁혔다.
'나도 모르겠어.'
도박에 질 구석이 안 보이는데, 매일 같이 잃고 오는 것을 보면 좋아는 하지만 체질이 아닌 것 같다.
"이런다고 뭐가 달라질 거라 생각하느냐. 전설? 어차피 미신일 뿐이다."
"그래. 그따위 미신을 누가 믿는다고!"
카룬과 발데르는 가주의 전설은 미신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리메르에게 눈을 부라렸다.
"미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안 믿는 사람도 많겠죠. 하지만 이곳에 있는 모두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생각이 박혔습니다."
리메르는 손을 쭉 펼쳐서 관객석 전체를 가리켰다.
"라온이 정말 전설의 인물이고, 훗날 가주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거 하나만으로 오늘 일은 충분합니다. 뭐, 손해 본 것도 없고."
"크윽!"
"리메르…."
"네놈은 곱게 죽지 못할 거다. 내가 그리 만들 것이야."
그가 여유롭게 웃자, 카룬과 발데르 그리고 직계 라인의 수장들이 이를 바득 갈았다.
"뭐, 그건 나중 일이고. 어이 사회자 양반! 이제 진행 좀 하지? 팔 아프다고!"
"아, 예!"
입에서 침을 흘리고 있던 사회자가 본인의 뺨을 두들기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라, 라온 지그하르트는 원하는 단체를 선택해주십시오!"
사회자는 본인도 모르게 처음으로 신입 검사에게 존댓말을 했다.
"흐음…."
라온은 왼쪽 끝에 있는 라테인부터 우측 끝에 있는 리메르까지 단상 위에 있는 수장들을 차례로 살폈다.
아이언드나, 세레나처럼 자신을 절실히 원하는 사람도 있었고, 오면 좋고 아니면 말고라 생각하는 중립적인 대주들도 있었으며, 리메르의 계략에 넘어가 어색하게 손을 들고 있는 직계들도 있었다.
"제발! 제발! 제발!"
그리고 조금 전의 여유는 어디 간 채 양손을 꼭 모아서 제발 오라고 고사를 지내는 리메르도 있었다.
"흐음…."
라온은 일부러 리메르를 보지 않고 아이언드와 세레나, 라테인이 있는 좌측을 보며 고민하듯 턱을 긁적였다.
"허억!"
리메르가 자신의 시선을 돌리려는 듯 비명을 질렀지만, 그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았다.
[라, 라온!]
입맛을 다시며 선택을 하려는 척하자 리메르에게서 오러 메시지가 날아왔다. 옆에 있는 대주들에게 들키지 않게 하려고 기척을 죽여서 속삭이는 듯한 음성이었다.
[야 임마! 광풍단으로 와야지! 어딜 보는 거야!]
그의 음성에서 절실할 정도의 다급함이 느껴졌다.
[여긴 너희들을 위해서 만든 곳이라니까! 실적과 무력을 동시에 쌓을 수 있도록 계속 움직일 거라고!]
꽤 매혹적인 이야기였지만 아직 대답하지 않았다.
[네가 수석으로서 이끌던 친구들도 대부분 여기 있잖아. 오면 바로 부단주부터 시작이야! 네가 하고 싶다는 거 다 하게 해줄게! 다른 곳은 볼 필요 없어! 명예와 영광이 바로 네 앞에 있다!]
리메르가 평소와 달리 속사포처럼 말을 늘어놓았다. 불안함이 그대로 느껴진다. 지금이 바로 모두를 농락한 낚시꾼을 다시 낚을 때였다.
[교관님.]
라온이 글래시아를 이용하여 리메르에게 오러 메시지를 보냈다. 오히려 리메르보다도 더 은밀하게 목소리가 전해졌다.
[어, 그래! 우리 라온! 이제야 내 말이 귀에 들어오는구나!]
[저를 걸고 도박하셨죠?]
[....]
강물처럼 이어지던 리메르의 말이 처음으로 뚝 끊겼다.
[그, 그럴 리가 있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도박에….]
[다 알고 있으니, 솔직하게 말씀하시지 않으면 백련대로 갈 겁니다.]
[해, 했다. 했어! 미안하다….]
[한 건 상관없습니다. 다만 그걸 전부 가져가시지는 않겠죠?"
[....]
그의 말이 두 번째로 끊겼다.
[그게… 이 단체를 운영한다는 건 돈을 좀 써야 하잖아. 거기다 우리는 시작이라서 돈 들어갈 데가 많….]
[가주님이 그런 쪽으로는 칼 같으셔서 충분한 자금을 주셨을 텐데요. 제가 한 번 여쭤볼까요?]
[아니! 아니야! 절대 아니다!]
리메르가 고개를 맹렬하게 저었다. 저 모습을 보니 그 자금의 일부도 도박에 들어간 게 분명했다.
"라온 지그하르트. 고민이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선택할 시간이다."
사회자가 재촉하듯 손을 올렸다.
"하나, 둘…."
그가 숫자를 세자 불안했는지 리메르의 목소리가 커졌다.
[라, 라온! 이제 시간이 얼마 없어!]
[딴 돈의 절반만 주시죠.]
[저, 절반이나 주면 내가 먹을 게 별로….]
[그럼 다 놓치시는 거죠. 전 세레나 대주가 있는 공검단으로 가겠습니다.]
"셋…."
[라, 라온! 내가 널 전설의 인물로 만들어 줬잖냐!]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감사합니다.]
솔직히 아직 가주에는 욕심이 없어서 큰 의미는 없었다.
[그 정도가 아니야 인마! 전설이라고! 전설…!]
[전설은 전설이고, 계산은 계산이죠.]
"넷…."
라온은 사회자가 넷이라는 숫자를 부를 때 완전히 우측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알겠다! 절반! 절반을 주마! 이 지독한 자식!]
[콜.]
"다서…."
"결정했습니다."
라온은 단상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숙인 뒤 리메르를 보았다.
"전 광풍단에 들어가겠습니다."
"광풍단! 단상의 모두 수장들에게 선택을 받은 라온 지그하르트의 소속은 광풍단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모두 박수를 보내주십시오!"
"와아아아아!"
"라온!"
"도련님!"
가장 먼저 환호가 나온 건 별관 식구들이 있는 방향이었다. 그들은 전설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무사히 선택식이 끝난 것에 기뻐하고 있었다.
"우와아아아아!"
"안 오는 줄 알고 식겁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너만 믿을게!"
함께 광풍단에 들어간 검사들도 박수와 환호를 보내며 어깨를 두드렸다.
"소속이 정해진 신입 검사들은 단상을 향해 검례를 취해주십시오!"
라온과 신입 검사들이 검을 뽑았다. 태양 빛을 받은 칼날을 가슴으로 끌어당겨 검례를 취했다.
검날 사이로 글렌과 눈이 마주쳤다. 재밌다는 듯 그의 입가가 아주 살짝 올라가 있었다.
'저 사람이 웃는다고?'
말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역시나 그의 표정은 처음 본 냉막함 그대로였다. 오늘 왜 자꾸 헛것을 보는 건지 모르겠다.
"이것으로 오늘 선택식을 마칩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리온은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5 연무장의 동료들을 살폈다.
대부분 기뻐했지만, 그중 한 명. 버렌은 모든 것을 잃은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음….'
다시 단상 위를 보았다. 버렌의 아비인 카룬은 실망한 아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자신과 리메르만을 노려보며 눈을 부라렸다. 아들에게 시련을 주려는 게 아니라, 정말 본인의 마음에 들지 않기에 버렌을 거절한 것이다.
'차라리 잘 됐어.'
훗날 카룬을 믿다가 배신을 당하느니, 지금 그가 어떤 인간인지 알고 일어서는 게 훨씬 나았다.
라온은 버렌이 주었던 고급스러운 금빛 수실을 쓸어내리고서 뒤를 돌았다.
입술을 깨물고 있는 버렌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 쳤다. 흔들리는 그의 눈빛을 마주하고 나지막하게 입을 뗐다.
"기다리고 있겠다. 네 목표로서."
* * *
가주전 알현실의 분위기는 평소와 달랐다. 글렌은 즐거운 듯 입매를 살짝 올리고 있었고, 리메르는 똥 씹은 표정으로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재밌더구나."
글렌이 턱을 살짝 올리며 더 짙은 미소를 그렸다.
"단상 위의 수장들을 조롱하던 네가 라온에게는 역으로 농락을 당하다니. 웃음을 참기 어려웠어."
그는 라온과 리메르의 오러 메시지를 들은 듯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녀석이 은혜도 모르고…."
"예전부터 느꼈지만, 그 아이는 가주가 되고 싶은 욕심이 없다."
"예? 그럴 수가 있나?"
"그래. 전혀라고 느껴질 정도로 가주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없지. 있는 거라고는 실비아를 직계로 올리겠다는 목표뿐이다."
글렌이 기껍다는 듯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실비아를 직계로 올리겠다고 선언했던 라온의 당당한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만 생각하면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그런 착한 녀석이 나한테는 왜 그런답니까?"
"본인을 이용해서 도박했으니, 당연한 일이지. 절반만 가져가는 걸 다행으로 여겨라."
"진짜 눈치 더럽게 빠르다니까요. 도박한 걸 어떻게 알았지?"
"똥파리가 똥을 그냥 지나가겠느냐. 내 눈에도 뻔히 보인다."
"또, 똥파리라뇨! 이 광풍단의 단주님을 너무 우습게 보시는 거 아닙니까?"
"광풍단의 단주님이 바람처럼 얻어터지면 재미있겠군."
"아닙니다. 저 똥파리 맞습니다!"
글렌의 손이 올라가자마자 리메르가 허리를 직각으로 굽히고 파리처럼 손을 비볐다.
"근데… 버렌은 어떻게 할까요?"
리메르의 눈동자가 진흙에 박힌 듯 어둑한 빛으로 가라앉았다. 버렌은 건방지지만 소중한 제자다. 홀로 소속을 정하지 못한 그 아이가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카룬을 필요 이상으로 조롱한 이유도 버렌의 축 내려간 어깨 때문이었다.
"무력과 정신력에 인성까지 성장했는데, 카룬이 아예 받지 않을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마에 미쳐있던 시절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그런지 속 좁은 녀석이 되었지. 다만 검사를 선택하는 건 수장 고유 권한이다. 그건 나라도 통제할 수 없어."
맞는 말이다. 아무리 가주라고 해도 수장이 받기 싫어하는 검사를 억지로 넣을 수는 없다. 설사 넣는다고 해도 버렌만 더 초라해지게 될 거다.
"그러면…."
"네가 버렌을 데려가라. 변화한 그 아이의 성격이라면 광풍단에서도 잘 지낼 수 있겠지."
"제가 그런데 보모는 아니라서…."
"쓰읍."
"옙! 버렌의 상처가 아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글렌이 혀를 차는 소리를 내자마자, 리메르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고 라온을 가주로 만들겠다는 건 진심이었던 모양이구나."
"물론이죠. 오늘 일로 가문 검사들의 머리에 라온이 가주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작게나마 박혔을 겁니다. 이건 훗날 그 어떤 지위나, 실적보다 큰 힘이 되어 줄 겁니다."
"그렇겠지. 다만 그만큼 많은 견제를 받게 될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글렌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역시 라온처럼 모든 수장의 선택을 받았고, 그 이후로 시작된 수많은 견제 때문에 목숨이 위험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걸 이겨내지 못한다면 가주가 될 자격이 없겠죠. 그리고…."
리메르의 눈빛이 기대감의 불꽃으러 번쩍였다.
"그 아이는 위기를 이겨내는 데 도가 튼 녀석입니다. 절대 우리를 실망시킬 일은 없을 겁니다."
"흠, 그거야 보면 알겠지."
글렌의 말은 퉁명스러웠지만, 그 음성에는 리메르에 못지않을 정도의 다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도박장에 가겠군. 거기서 돈을 받자마자 카지노로 갈 테고."
"그, 그럴 리가요. 선택식 준비를 하느라, 피곤해서 좀 쉴 생각입니다."
리메르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꾸벅이고 뒤를 돌았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식은땀을 닦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조손이 다 귀신이네. 귀신이야.'
* * *
라온은 선택식이 끝난 후 별관으로 돌아가지 않고, 지그하르트 남부의 번화가로 향했다. 낡았지만 가장 큰 주점에 자리를 잡고, 딱 일반인 수준으로 기척을 죽였다.
"그 소식 들었나? 라온 지그하르트가 선택식에서 전설을 재현했다는 거?"
"들은 게 아니라, 직접 봤지! 라온을 데려가려고 모든 수장들이 손을 들어 올린 모습은 장관이었네. 평생 잊을 수 없을 거야."
"크으, 나도 봤어야 했는데!"
"그럼 이제 라온이 다음 대 가주가 되는 건가?"
"그건 그냥 전설일 뿐이잖아. 실제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
"하긴 지금 가주 후보들이랑 나이 차이가 좀 나긴 하니까."
"그래도 가능성은 차고 넘치잖냐. 17살에 익스퍼트 최상급에 오른 지그하르트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고!"
"곧 마스터에 오를 거라는 소문도 있으니, 그 전설이 현실이 될 수도 있겠어. 방계에서 나오는 지그하르트의 가주라. 난 마음에 들어!"
이 주점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기대감을 가지는 건 그리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꽤 즐거웠다.
"그런데 도박은 어떻게 됐지? 라온이 광풍단으로 가는 걸 맞춘 사람이 있나?"
"광풍단은 아닌데, 제3의 단체에 간다고 건 사람이 하나 있지."
"그게 누군데?"
"가끔 와서 돈 잃던 중년인인데, 이번에 초대박을 쳤더라고. 배당이 장난이 아니야."
라온은 도박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제대로 찾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음? 잘못 안 거 아니냐? 그 귀때기는 빨간 머리잖아.
'리메르 교관이 이번 내기의 관련자인데, 본모습으로 왔을 리가 없잖아. 변장한 거야.'
리메르는 이번 도박의 당사자라고도 할 수 있는 단주다. 그런 그가 직접 도박에 참여한다면 여기저기서 불평이 나올 테니, 분명 변장하고 왔을 것이다.
-눈치 하나는 정말 끝내주는구나.
'리메르 교관을 하루 이틀 본 게 아니니까.'
라온은 피식 웃으며 리메르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30분 정도 시간을 죽이고 있자, 주점 안쪽 문이 열리고, 큼지막한 주머니를 짊어진 청발의 중년인이 나왔다.
"와아아아아아!"
"축하한다!"
"대체 얼마나 딴 거야!"
"난 언제 저렇게 벌어보냐? 진짜 부럽네."
"잘 먹고 잘살아라!"
주점 사람들은 청발의 중년인을 향해 박수를 보내고 환호를 해주었다.
"기분이다! 오늘 술값은 전부 내가 낸다!"
그 중년인은 그 환호에 보답하듯 주점 카운터에 금화를 쌓아두고 밖으로 나갔다.
"이야아아아아!"
"돈 쓸 줄 아는 사람이네!"
"또 오라고!"
"다음에도 부탁한다!"
지그하르트 내부이고, 치안이 워낙에 좋아서 그런지 그의 돈을 노리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공짜 술과 안주에 즐거워하기만 했다.
딱 한 사람만 제외하고.
라온은 옅게 웃으며 중년인의 뒤를 따라 나갔다.
"흐흥!"
푸른 머리칼의 중년인은 기분이 좋은 듯 콧노래를 부르며 번화가의 중심으로 향했다. 방향을 보니, 카지노에 가는 것 같았다.
우우웅.
라온은 오러의 밀도를 조절하여 기척을 바꾸는 암살자의 기술을 사용한 채로 그를 따라갔다. 한참을 쫓자 추적이 귀찮은 듯 중년인이 걸음을 멈췄다.
"요즘도 멍청한 도적이 있네. 귀찮으니 빨리 덤… 허억!"
중년인이 뒤를 돌아보았을 때 라온이 머리에 쓰고 있던 로브를 벗었다.
"왜 그리 놀라십니까?"
"아, 아니…."
"절 아시나 봅니다."
"모르는데?"
중년인은 휘파람을 불며 눈동자를 돌렸다. 전혀 표정을 숨기지 못한다.
저러니 도박에서 잃기만 하지….
"장난은 이쯤 하시죠. 교관님. 아니, 단주님."
"크으, 너 대체 어떻게 안 거냐. 아니, 무슨 수로 쫓아온 거야!"
중년인이 이를 갈며 얼굴에 손을 올렸다. 평범한 중년인의 얼굴이 사라지고, 경악이 가득 담긴 리메르의 얼굴이 드러났다.
"전에 한 번 말씀해주셨지 않습니까. 여기서 이런 내기 도박을 하고 노신다고."
라온이 멀어진 주점을 가리켰다. 예전 6 연무장 수련생들과 밥을 먹을 때 리메르가 저곳에서 가끔 내기 도박을 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문에서부터 추적하면 걸릴 게 뻔하니까."
"젠장! 내 망할 주둥이가!"
리메르가 악을 지르며 본인의 입술을 후려쳤다.
-귀때기. 본왕은 이해하느니라. 이 자식 한 번 들으면 잊어먹질 않느니라. 괴물이다. 괴물!
라스가 공감한다는 듯 자신을 보며 이를 갈았다.
"벼, 변장은 어떻게 안 거냐. 무슨 개코라도 돼?"
"뻔하죠. 내기에서 새로운 단체에 걸 건 사람은 단주님 뿐이니까요. 그리고…."
라온이 리메르의 단전을 가리켰다.
"단주님의 내부에서 움직이는 경쾌한 바람 같은 기질은 속이지 못해요."
"그, 그걸 느낀다고? 다른 마스터라도 알아차리기 힘들 텐데?"
리메르는 말도 안 된다며 눈을 부릅떴다.
"제가 감각이 좋지 않습니까."
"젠장, 그놈의 초감각!"
그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악을 질렀다.
"다 알겠는데, 여긴 왜 온 거야. 내가 반을 주겠다고 했잖아. 그냥 기다리고 있으면 되잖냐!"
"저거."
라온이 리메르가 가려던 카지노를 가리켰다.
"저기 가서 불려서 주겠다고 헛생각을 하실까 봐. 찾아왔습니다."
"누, 누가 그런 미친 생각을 하겠어!"
리메르가 평소와 달리 어색하게 껄껄 웃었다.
'저 귀신 같은 놈!'
할아버지고 손주고 사람 심리를 읽는데 도가 텄다. 저 조손들 때문에 머리털이 다 빠질 것 같았다.
"여기서 주시죠. 절반."
"그, 내가 따서 주면 2배가 4배가 되고, 4배가 8배가 되는 마법이…."
"절반. 지금."
"크윽…."
리메르는 눈물을 꾹 삼키고서 보자기에 있든 금화의 절반을 넘겨주었다.
"이건 제가 가질 게 아니라, 광풍단의 공금으로 사용하겠습니다. 여기에 단주님의 돈만 들어간 게 아닌 것 같으니까요."
라온이 금화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금화 개수를 보니, 단을 준비하기 위한 자금도 들어간 것 같았다. 리메르에게 전부 맡겼다간 오늘 모조리 사라졌을 것이다.
"허허…."
리메르는 다 포기한 듯 풀린 눈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무력만 잘난 줄 알았는데, 심계와 깐깐하기는 글렌보다 더했다.
"내, 내가 부단주를 잘 뽑기는 했나 봐. 마음이 아주 든든하네!"
"허튼짓하지 않으시도록 앞으로도 단주님을 잘 모시겠습니다."
서늘하게 웃는 라온의 모습을 보자, 등줄기로 소름이 돋아 올랐다.
'이거 내가 내 무덤을 판 거 같은데….'
제166화
해가 뜨지 않은 새벽.
라온은 가벼운 짐을 챙겨서 별관을 나섰다. 방향은 평소와 같은 5연무장. 글렌의 배려 덕분에 광풍단은 수련생 때 머물렀던 5 연무장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크흠, 꼭두새벽부터 움직이는 건 똑같군.
라스는 하품을 쩌억 하며 새벽 공기보다 차가운 냉기를 뱉어냈다.
-네가 수련을 하든 말든 상관없다만, 아침은 좀 챙겨 먹었으면 하는데.
'연무장 가서 먹으면 되잖아.'
-거긴 맛이 별로지 않느냐. 음식의 맛과 신선함은 별관이 최고이니라.
그 말도 틀리지는 않았다. 요새 물이 오른 유아와 헬렌의 요리 실력 덕분에 별관에서는 매일 같이 맛 좋은 신메뉴가 나오지만, 5 연무장의 식사는 훈련을 위해 짠맛과 단맛, 매운맛을 줄여 맛 자체는 떨어졌다.
'훈련을 위해서는 이쪽이 더 좋아.'
음식의 맛은 평상시에 즐기면 되고, 수련할 때는 가벼운 식사로 배만 채우면 그만이다. 빨리 강해져서 할 일을 줄여나가야 하는데, 언제 맛만 즐기고 있겠는가.
-한심하군.
라스가 쯧쯧 혀를 차며 턱을 모로 틀었다.
-네놈은 풍류라는 것을 모른다. 무식하게 강해지기만 하지, 낭만이라는 것이 없느니라.
'낭만 없는 놈이니까. 앞으로 나딘 빵으로만 배를 채우면 되겠네.'
-나, 나딘 빵?
녀석은 당황한 듯 푸른 눈을 부릅떴다. 맛은 없고, 식감은 고무이며, 배만 차는 나딘 빵은 라스의 천적과도 같은 음식이었다.
-지, 지금 본왕을 협박하는 것이냐!
'협박이 아니라, 낭만 없는 놈이라 편한 대로 움직일 뿐이야.'
-감히 인간 따위가 마계의 군주를 협박하다니!
무시무시한 냉기가 전신으로 차오른다. 라스가 넘겨주었던 분노들이 감정의 틈을 찢고 나와 영혼의 이곳저곳을 지지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예전보다 훨씬 더 강해진 냉기와 분노에 걸음이 저절로 멎었다. 막대한 기운이 벽을 뭉개면서 달려들어 손발이 덜덜 떨렸다.
-네놈이 성장하듯 본왕도 성장한다. 까불다가는 큰 코 다칠….
'그 말은 잘못됐어.'
라온이 주먹을 쥐어서 떨리는 손을 억지로 멈췄다.
-뭐라?
'네가 성장하는 것 이상으로 내가 성장했으니까.'
불의 고리를 공명시켰다. 여섯 개의 고리가 청명한 울림을 만들어내며 분노를 짓누르고, 만화공과 글래시아가 마나 회로를 질주해오는 라스의 냉기를 찢어발겼다.
-크윽! 아직이다! 본왕의 전력은 이게 아니야!
라스는 포기하지 않고, 더 짙은 냉기와 분노를 끌어 올렸다. 영혼에 박혀 있는 분노 25를 믿는 듯 비처럼 냉기를 떨어뜨렸다.
쿠구구구!
분노가 25나 되어 확실히 그냥 버티기는 버거운 수준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성장한 불의 고리로 그 악의로 찬 기운을 가라앉히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라스와 힘겨루기를 하며 연무장 앞에 도착했을 때 눈앞으로 메시지가 올라왔다.
[<분노>의 방해를 견뎌냈습니다.]
[체력이 1포인트 상승합니다.]
메시지가 나오자마자 라스가 악을 지르며 떨어져 나갔다.
-제에에엔장!
라스는 본인의 패배를 믿고 싶지 않은 듯 허공에서 허우적댔다.
'체력 좋지.'
라온이 메시지를 끄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라스에게서 능력치를 얻으니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내가 이겼으니, 오늘부터 식사는 나딘 빵 하나다.'
-자, 잠깐! 잠깐만 기다려라!
녀석이 바람처럼 달려와 어깨에 내려앉았다.
-보, 본왕이 다 잘못했느니라! 차라리 굶어라! 그 빵만은 안 된다! 그건 배만 부르게 하는 죄악에 가까운 음식이니라!
라스가 발작을 일으킬 것처럼 몸을 떨었다.
'앞으로 잘해. 또 까불면 한 달 동안 나딘 빵이니까.'
-크윽, 본왕이 미식가만 아니었다면 네놈의 마수에 걸리지 않았을 텐데. 고귀한 영혼을 가진 죄인가….
'미식가가 아니라, 대식가겠지.'
라온은 라스의 헛소리를 수정해주고, 연무장 문을 열었다.
"어?"
당연히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수련생들. 아니, 이제 광풍단의 단원이 된 검사들이 모여 있었다.
"도련님!"
배 주머니에서 과자를 꺼내 먹던 도리안이 히죽 웃으며 달려왔다.
"늦으셨네요?"
"너희들이 빨리 온 거 같은데?"
평소 이 시간이라면 5 연무장에 아무도 없어야 정상이었다.
"라온. 늦었어."
아침잠이 많은 루난도 어느새 연무장에 나와 있었다. 눈 비비며 다가와 소매를 잡았다.
"흥."
익숙해진 콧소리에 옆을 보니, 마르타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그녀까지 33명. 자신을 포함한 광풍단 전부 연무장에 나와 있었다.
"왜들 이렇게 빨리 온 거야?"
"오늘이 창단식이잖아!"
"오늘부터 광풍단의 전설이 시작될 텐데, 기대돼서 잠을 잘 수가 없더라구요!"
"크으, 이제야 진짜 검사가 되는구나."
광풍단원들은 앞으로의 미래가 기대된다는 듯 주먹을 움켜쥐며 미소를 흘렸다.
"흐음…."
라온은 광풍단원들의 들뜬 눈빛을 마주하며 입맛을 다셨다.
'기대했다가 피 볼 텐데.'
어제 리메르를 보고 확신했다. 그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리메르도 단주가 되었으니, 무언가 변할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큰 착각이었다.
"그럼 단주님 오실 때까지 각자 수련이나 하고 있어."
"옙!"
"알겠어!"
광풍단원들은 활짝 웃고서 연무장 곳곳에 퍼져 수련하기 시작했다. 가끔 들려오는 잡담에는 앞으로의 임무와 실적에 대한 기대가 가득 담겨 있었다.
"으함…."
"...."
라온은 하품하는 루난과 날카로운 눈으로 하늘을 보는 마르타까지 확인한 후 빈 공간으로 향했다.
'나도 시작해볼까.'
수련검을 뽑아 들고, 연성검술을 펼쳤다. 숨 쉬는 것만큼이나 익숙한 검로였지만, 불의 고리와 만화공 그리고 검술의 성장으로 이젠 상승 검술보다 더한 위력이 피어났다.
콰아아아!
강물처럼 도도하게 질주하던 연성검술의 기세가 거세게 차오른다. 멈추지 않는 흐름은 그대로였지만 그 위력과 속도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쿠구구구!
뭉툭한 수련검에서 퍼진 오러의 파도가 5 연무장 전체를 울렸다.
"우와아…."
"저, 저게 연성검술이라고?"
"나도 똑같이 배웠는데, 이 차이는 뭐지?"
"미, 미쳤어. 최상급 검술이라고 해도 믿겠네."
"검술의 등급은 결국 사람이라더니. 결국 재능이…."
검사들은 연무장 전체에 영향을 주는 라온의 연성검술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눈 감고도 펼칠 수 있는 초식이었지만, 라온의 손에서는 처음 보는 절대의 검술처럼 압도적인 파동이 일어났다.
"또 멍청한 소리를 하네."
마르타는 허공으로 솟구치는 라온의 기운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너희들이 더 높은 수준의 검술을 쫓을 때 저 녀석은 오직 연성검술만을 수련했어. 재능의 차이 이상으로 수련의 차이가 벌어졌을 뿐이다."
그녀는 마지막에 '나 역시 멍청했지'라는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수련검을 뽑았다.
"와아."
루난은 라온이 그어내는 검의 궤적을 모두 담아낼 것처럼 보라색 눈동자를 빛냈다.
"으흠. 여전하시네."
도리안은 수련은 안 하고 꺼낸 과자를 계속 씹어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검사들이 각자 시간을 보내며 단주인 리메르를 기다렸지만, 그는 예상대로 제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하하! 처, 첫날이니까."
"그래. 그렇게 멋진 연설을 하셔놓고, 많이 늦으실 리가 없지."
"맞아. 조금만 기다리면 곧 오실 거야."
"달라졌을 단주님을 믿자고."
검사들은 그렇게 말하며 한 시간을 더 기다렸지만 리메르의 모습은 연무장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고, 곧 오겠지? 아마도?"
"그 자식. 아니, 그 엘프도 양심이 있다면 와야지!"
"그렇게 멋진 말로 꼬셨으면 좀 달라졌을 거야."
검사들이 이를 바득 갈며 억지로 참고 있을 때쯤 연무장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오셨다!"
"단주님!"
"너무 늦었…어?"
리메르에게 달려가던 검사들이 걸음을 멈추고, 입을 떡 벌렸다.
어제만 해도 진중한 빛을 발하며 멋짐을 뿜어내던 붉은 머리 엘프는 하루 만에 100년은 늙은 듯 바싹 말라버렸다.
"대, 대체 무슨 일이…."
"단주님! 괜찮으십니까?"
"으허헉! 단주님!"
검사들은 좀비처럼 비틀거리는 리메르를 부축하며 입술을 떨었다.
"아, 안녕…."
리메르는 기력이 아예 없는지 눈동자는 허공만을 훑었고, 손은 갈대처럼 허우적댔다.
"쯧."
라온은 그 모습을 보며 짧게 혀를 찼다.
'다 잃었군.'
표정을 보니 뻔하다. 어제 반만 남은 돈을 불리겠답시고 카지노에 가서 모조리 잃은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저 인간이 저리 망가질 리가 없었다.
'미리 빼두길 잘했어.'
어제 절반을 가져가지 않았다면 자신의 돈도 먼지가 되었을 거라 생각하니 끔찍했다.
'근데 그 카지노에 대체 누가 있는 거지?'
표정 관리를 못 하기는 하지만, 리메르는 눈썰미도 좋고, 얍실하며 능글맞은 사람이다. 매번 누구에게 잃는 건지 이젠 궁금해졌다.
"후웁…."
리메르가 단상의 중심으로 올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 지금부터 광풍단의 창단식을 여, 열겠다. 우리의 목표는 내 돈. 남들이 걷지 않은 명예와 내 돈. 너희들은 앞으로 실적과 내 돈…."
위엄있고, 장엄해야 할 창단식 연설에 자꾸 이상한 단어가 끼어든다. 리메르의 표정을 보니, 본인도 모르게 줄줄 나오는 것 같았다.
"목표가 내 돈?"
"명예와 내 돈?"
"실적과 내 돈?"
"저 인간 설마…."
광풍단원들도 이제 약간의 상황을 파악한 듯 표정이 굳어졌다.
"망할…. 내가 왜 여기에 왔지?"
마르타가 입술을 꾹 깨문 채 리메르를 노려보았다.
"하암."
루난은 아무 상관 없다는 듯 하품하며 눈만 꿈뻑였다.
"…우리 광풍단은 그렇게 운영이 될 것이다."
리메르도 정신을 차렸는지 더 이상 내 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얼굴은 더 창백해졌다.
"에…. 현 인원이 33명이니까. 3개 조로 나누겠다. 1번 조장은 마르타 지그하르트, 2번 조장은 루난 슬리온. 3번 조장은 일단 공석으로 두고. 라온 지그하르트는 부단장의 위치에서 단원을 지휘한다. 앞으로 공적인 자리에서는 존댓말을 사용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조를 부르겠다. 먼저 1조에는 세트라이, 얀덴…."
리메르는 죽어가는 목소리로 검사들의 조를 하나하나 불러주었다.
"공석으로 있는 3번 조장은 누구입니까?"
"곧 들어올 모자란 놈의 자리다."
그 들어올 놈이 누구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광풍단의 첫 번째 임무를 말해주겠다. 너희들은 오늘부터…."
리메르가 입맛을 쩝 다시며 단상 아래에 있는 검사들을 살폈다. 검사들은 침을 꼴깍 삼키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쉬어라."
"예?"
"쉬, 쉬라니요!"
"이제 만들어졌는데 쉬어요? 그게 무슨!"
잠깐 휴식을 취하라는 말이 아니라, 아예 쉬라고 하자 검사들이 눈을 부릅뜨고 앞으로 달려 나왔다.
"쉬는 게 쉬는 거지. 뭐긴 뭐야."
리메르는 혼이 반쯤 빠져나간 탁한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돈을 몽땅 잃은 충격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
라온은 그 모습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그 녀석이 없으니 조금 불편하긴 하네.'
이럴 때 앞에 나서서 리메르의 멱살을 쥐던 버렌이 보이지 않으니 상황이 귀찮게 흘러갔다. 그가 없는 게 아쉽다는 생각이 들 줄은 몰랐다.
-본래 세상이란 그런 것이다. 있을 때는 그 소중함을 모르지.
'음?'
라스에게서 나오기 힘든 말이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사실 그 눈깔이 정도는 없어도 그만이지만, 본왕이라는 위대한 존재가 없어졌으니 세상은 지금 슬픔에 잠긴 것이나 다름없느니라. 조만간 망하게 될지도….
이번에는 좋은 말 좀 하나 싶었는데, 결국 본인 자랑이다.
다만 녀석은 마계가 아니라, 세상이라는 말을 했다. 슬로스 때도 그렇고 마계의 마왕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아 나도 몰라. 알아서들 해."
리메르는 배를 째라는 듯 단상 위에 드러누웠다.
"이이익!"
"이 엘프가 정말…."
"내가 미쳤지!"
검사들은 맹한 눈을 한 리메르를 노려보며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후우…."
라온이 한숨을 내쉬고 리메르에게 다가갔다.
"쉬라는 건 조만간 임무에 나갈 테니, 그에 대한 준비를 해 두라는 말씀이시죠?"
"어, 그거. 그거야. 역시 부단주네."
리메르가 풀린 눈동자로 고개를 끄덕였다.
"단주님의 말을 전하겠다. 쉬라는 말은 단순히 휴식을 취하라는 게 아니라, 앞으로의 임무를 위한 준비를 하라는 뜻이다. 우리끼리 사용할 신호와 검진을 비롯한 전투와 전략을 재정비할 시간을 가져라."
라온의 진중한 목소리에 검사들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근데 단주님은 왜 저러는 겁니까?"
"어디 아프신 건가?"
"어제 단주님이 도박장에서 돈을 잃으셔서…."
"야! 인마!"
사실을 말하려고 하자, 리메르가 어깨를 잡았다. 창백한 얼굴은 여전하지만, 손아귀에는 힘이 넘쳤다.
"소, 소문이라는 게 말 한번 잘못하면 이상하게 퍼지거든. 이런 건 좀 조심해서 말해줘…."
"그렇군요."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검사들을 보았다.
"어제 단주님이 도박장에서 '전 재산'을 잃으셔서 지금 상태가 좋지 않다. 지금부터는 내가 지휘한다. 먼저 기본적인 신호부터 시작한다. 전부 수련복으로 환복하고 다시 모이도록."
"아…."
"어쩐지…."
"요즘 조용하다 했지."
"쯧."
검사들은 라온의 뒤에 있는 리메르를 한심한 눈으로 흘낏 본 뒤에 탈의실로 향했다.
"단주님."
라온은 뒤를 돌아 리메르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말을 잘못해서 이상한 소문이 퍼지면 안 되니까. 모든 사실을 솔직하게 말해주었습니다."
"어억…."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턱이 바닥에 닿도록 입을 벌렸다.
"그, 그런데 내가 어제 도박장에 가서 다 잃은 건 어, 어떻게 알았냐? 너 먼저 갔잖아."
"똥파리가 똥을 그냥 두겠습니까. 뻔하지요."
"누가 똥파리야!"
리메르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똥파리라는 말은 글렌이 자신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말이었다.
'이 인간 같지도 않은 조손들이 세트로!'
* * *
중무전 서쪽에는 별채가 하나 있다. 한참 동안 관리되지 않아 먼지만 가득한 그 별채에는 오랜만에 사람의 손길이 닿고 있었다.
"여긴 참 오랜만이군요."
카룬 대신 어려서부터 버렌을 키워온 집사 티아스가 거미줄로 가득한 벽난로를 치우며 빙긋 웃었다.
"...."
버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측 기둥을 바라보았다. 기둥 아래에는 어린아이가 그린 듯한 낙서가 있었다. 남자와 여자 그리고 어린 소년이 손을 잡은 그림이었다.
"그 그림은…."
티아스가 눈매를 좁혔다. 그건 어렸을 적 이곳에 왔던 버렌이 그렸던 낙서였고, 그가 바라던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이 담긴 그림이었다.
버렌은 웃고 있는 그림 속의 아이와는 반대되는 눈빛으로 낙서를 쓰다듬었다.
먼지에 붙어나오는 색소 조각들이 아릿하게 떨어져 내렸다. 어느새 그림 속 아이는 사라지고, 손이 떨어진 두 남녀만이 그 안에 남았다.
"티아스."
버렌이 고개를 돌렸다. 따스한 바람이 깃든 듯한 녹색 눈동자는 잿빛처럼 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혼자 있고 싶어. 먼저 돌아가서 쉬어."
그는 그리 말한 뒤에 청소도 하지 않고 불이 꺼져 시꺼먼 방으로 들어갔다.
"도련님…."
티아스가 피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어려서부터 그를 봐왔지만, 지금처럼 허무를 담은 눈동자는 처음이다. 살아갈 목표 그 자체를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라온 도련님에게 지셨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때는 오히려 복수를 다짐하며 더 열을 냈었는데, 지금은 장작이 모조리 타버린 듯 죽은 눈을 하고 있었다.
'이제 19일 남았나.'
선택식 이후 20일 동안은 선택받지 않은 신입 검사가 소속을 정할 수 있는 추가 등록 기간이다. 버렌만 움직이면 받아줄 곳이 여럿이지만 그는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시간이 얼마 없군.'
버렌이 지금의 감정을 스스로 극복하길 바라지만 그건 힘들지도 모른다. 카룬에게 인정받는 건 그의 삶의 가장 우선적인 목표였으니까.
'홀로 일어서지 못하신다면 도움을 청할 수밖에.'
자신으로서는 버렌을 일으킬 수 없다.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티아스는 스스로 다짐하며 폐허처럼 더러워진 별채를 계속해서 청소했다.
* * *
선택식이 끝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 시간 동안 라온은 검사들의 수신호 체계를 정비하고, 33명이 함께 싸울 수 있게 검진의 안정성을 가다듬었다.
검사들도 실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단체 수련과 개인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콰앙!
라온과 검사들이 새벽 수련을 끝내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연무장 문이 거칠게 열렸다. 리메르다. 제시간에 온 것으로 모자라 검붉은색의 제복을 멋들어지게 입은 채 단상 위로 올라갔다.
"틈만 나면 시비를 거는 녀석이 없으니 좋기도 하면서 심심하기도 하네."
리메르는 부서질 듯 흔들리는 문을 보며 입맛을 쩝 다셨다. 누구를 이야기하는 건지 알고 있었기에 광풍단원들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뭐,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고."
그는 특유의 손뼉을 쳐서 검사들의 시선을 모았다.
"수신호와 검진도 어느 정도 완성이 되었으니, 이젠 개인적인 준비를 할 때다."
"개인적인 준비요?"
"수련은 매일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게 아니야."
리메르가 고개를 크게 저었다.
"이제 질 떨어지는 보급 장비를 버리고, 지그하르트 검사로서 당당하게 개인 장비를 챙길 때라는 거지. 개인 검과 제복을 입을 때가 되었다."
그가 본인이 입고 온 지그하르트 제복을 쓸어내렸다.
"일단 제복은 개인 커스텀으로 만들어지니까. 오화단에 가서 직접 주문하도록. 처음에는 공짜니까. 넣을 수 있는 옵션은 전부 넣어."
리메르는 두 번째로 허리춤의 검을 툭 쳤다. 평소에 사용하던 보급용 검이 아니라, 광혈귀를 벨 때 사용했던 명검이었다.
"검도 마찬가지. 선물을 받거나, 물려받아 놓고 지금까지 쓰지 못했던 검을 사용해도 되고, 새로운 검을 만들어도 된다. 남은 대기 기간 동안 알아서 준비하도록!"
"예!"
광풍단원들이 연무장이 떠나갈 정도로 웅장하게 대답했다.
"드디어 나의 다크 피닉스를 쓸 수 있게 되었군."
"후우, 대화운검을 쥐고 싸울 수 있다니, 벌써 들뜨네."
"나의 본검 슈퍼 학사르가 피 맛을 보고 싶어서…."
대부분의 검사들은 미리 검을 준비해두었는지 코웃음도 안 나오는 이름을 중얼거리며 히죽거렸다.
"흐음…."
"부단주는 이쪽으로 와라."
라온이 제복을 어떻게 맞출지 고민할 때 리메르가 손짓을 했다.
"너에게도 연락이 왔다."
"연락이라면…."
"그 영감이 너를 불러오라고 하더군."
리메르가 영감이라고 말하니, 한 사람이 생각났다. 만화공을 익힐 때 지독한 열기의 가마를 지키던 고집 센 노인 발칸. 대장장이의 정점에 오른 그의 웅혼한 눈빛이 떠올랐다.
"발칸 님 말씀이십니까?"
"맞아. 그 영감이다."
리메르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의 때가 왔다더군."
제167화
라온의 눈이 저 멀리 보이는 북망산으로 향했다. 붉은 눈에 비치는 건 현재가 아니다. 리메르를 따라간 숯가마에서 발칸과 처음 만났던 그 날이다.
'그분 덕분에 만화공을 익힐 수 있었지.'
5 연무장에서 홀로 오러를 익히지 못해 불안해할 때 그의 숯가마에서 힌트를 얻어 만화공을. 그것도 단번에 2성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금탄이 나와서 발칸에게 고맙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정말 고마운 건 이쪽이었다.
'검을 만들어주신다는 약속을 기억하셨다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할 말이 없다. 금탄은 우연의 산물이었지만, 자신은 발칸 덕분에 만화공을 익히고, 냉기마저 손에 넣었으니까.
하지만 발칸은 그 약속을 잊지 않고 다시 연락을 해왔다. 뭐라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고마웠다.
"갈 테냐?"
리메르도 라온의 시선을 따라 북망산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가야죠."
라온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기연을 놓칠 수는 없으니까.'
대장장이 중 최고의 경지에 오른 자들을 대륙 장인 혹은 대장인이라 칭한다. 드워프와도 맞먹는 실력을 가졌다는 대륙 장인이 직접 검을 만들어준다는데 거절할 리가 있겠는가.
"확실히 지금의 너라면 꽤 재밌는 검이 만들어질 거 같네."
리메르는 라온의 눈과 팔, 단전을 쭉 훑어내리고 히죽 웃었다.
"그럼 대장장이들의 마을로 가라. 그 영감이 거기서 몸을 만들고 있으니까."
"몸을 만드신다구요?"
"제대로 된 검을 만들려면 체력이 필요하거든. 너를 위해 몸을 만들고 있더라고. 미르탄에 가면 깜짝 놀라게 될 거야."
"미르탄…."
들어본 곳이다. 지그하르트 세력권의 끝에 위치한 마을로 지열이 강해서 많은 대장장이들이 터를 잡고 좋은 무기와 장비를 만든다고 했었다.
"저기 근데 라온…."
리메르가 눈동자를 뒤루룩 굴렸다.
"그 영감 소개해준 게 누구인지 기억하지?"
"단주님이시죠."
"그래! 그걸 잊으면 절대 안 되지. 나님 덕분에 무려 대륙 장인의 검을 얻게 되었으니까!"
그는 전부 본인의 덕분이라며 턱을 치켜올렸다. 사실 발칸이 검을 만들어주는 건 리메르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 덕분이었겠지만 일단은 말을 아꼈다.
"그래서 말인데 그… 네가 가져간 금화 중에 조금만. 아주 일부만 나한테…."
"안 됩니다."
라온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너, 너무 차가운 거 아니야? 그래도 난 단주라고!"
"도박을 안 하신다고 약속하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죠."
"아, 안 할게! 도박장 근처에도 안 가!"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지. 단주님은 못 믿습니다."
"흐윽, 진짜 안 가는데, 정말 술값이 없어서 그러는 건데…."
"허…."
주저앉아 흐느끼는 리메르를 보고 헛웃음이 나왔다. 이 사람이 정말 지그하르트의 광검이라 불리던 검사가 맞나 싶었다.
"하아…."
라온이 고개를 절래절래 젓고, 품에서 금화 10개를 꺼내 내밀었다.
"이 정도면 한동안 술값으로 충분하실 겁니다."
"오오! 충분하지! 충분해!"
리메르가 벌떡 일어나 금화를 챙겼다. 당연히 눈가에 눈물 자국 따위는 없었다.
"그럼 다들 지시한 대로 제복이랑, 검을 구해서 다시 보자. 오늘은 먼저 간다!"
그는 보법까지 사용하여 순식간에 연무장 담벼락으로 올라갔다.
"아, 라온! 미르탄은 지그하르트만 이용하는 곳이 아니니까. 조심해서 다녀와라!"
리메르가 손을 빙글 돌리고서 번화가가 있는 장소로 부리나케 뛰어갔다. 멀리서 이번에는 복수한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거 도박장에서 날려 먹겠군.
라스가 리메르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혀를 찼다.
'뻔하지.'
-그걸 알면서도 주는 거냐?
'이건 시험이었어.'
-시험?
'그래. 저 모습을 보았으니, 다시는 저 사람에게 돈을 맡기지 않을 거거든.'
라온은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리메르는 모를 것이다. 본인의 행동이 본인의 발목을 부러뜨릴 정도로 잡게 될 거라는 걸.
"라온."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루난이 맹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보고 있었다.
"검 만들러 갈 거야?"
"그렇게 됐어."
"나도 같이 가."
"너도 검을 만든다고?"
"응."
루난은 아버지인 로칸 슬리온에게 검을 선물 받을 거라 생각했기에 예상외였다.
"아빠가 검을 만들 수 있는 재료를 줬어. 라온도 나눠줄게."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선물인가 뭔가를 나눠준다고 말했는데, 그게 검을 만드는 재료인 것 같았다.
"내일 바로 갈 건데 괜찮겠어?"
"응!"
"그럼 내일 아침에 여기서 보자."
"응."
루난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서 연무장을 나갔다. 바로 준비하러 가는 것 같았다.
-아이스크림 소녀의 표정이 많이 밝아졌군.
'그러게.'
그날 이후로 시리아를 만나지 않았는지 루난의 감정 표현은 조금씩 늘어났다. 물론 자신 앞에서만 보여줘서 남들은 모르겠지만.
'나도 가야겠군.'
검을 만들기 전에 먼저 제복 의뢰부터 해야 할 것 같았다.
라온은 연무장에 남은 검사들과 함께 오화단으로 향했다.
* * *
"후후."
고귀함과 간드러짐이 섞인 듯한 웃음. 라온은 바로 앞에서 입을 가린 채 웃고 있는 중년의 귀부인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검사들과 함께 오화단으로 찾아왔지만, 어느새 전부 떨어지고, 자신은 오화단주의 사무실에 홀로 들어오게 되었다.
제대로 소개도 해주지 않고, 바로 단주의 사무실에 집어넣다니, 여기도 정상적인 곳이 아니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광풍단의 부단주님을 직접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오화단주 시란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자신을 알고 있었는지 우아함이 깃든 자세로 허리를 숙였다.
"광풍단의 라온이 오화단주님을 뵙습니다."
라온은 당황스러운 마음을 지우고, 정중하게 고개를 꾸벅였다.
"이렇게 가까이서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군요. 지그하르트 분들이 외모로도 유명한 건 알고 있지만, 라온님 같은 분은 처음이에요. 실비아 님도 대단하셨지만, 정말 감탄만 나오네요. 후후."
시란은 자신의 얼굴을 요리조리 살펴보며 끝없이 감탄을 흘렸다. 예술 작품 보듯이 눈을 빛내니 부담스러워 죽을 맛이었다.
"…제복을 만들려고 왔습니다."
이대로 놔두었다간 오늘 집에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아서 뒤로 물러나며 이곳에 온 목적을 밝혔다.
"아, 물론이죠. 리메르 님에게 들어서 알고 있어요. 혹시 원하시는 디자인이 있을까요?"
시란이 본인의 뒤에 있는 마네킹을 가리켰다. 화려함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바른 듯 눈에 심하게 띄는 제복들이 가득했다.
"저는 저렇게 화려한 것보다는 단순한 형태가 좋습니다. 대신 기능은 여러 가지로…."
"음, 너무 아쉬운데요?"
시란이 입맛을 다시며 다시 다가왔다.
"얼굴이 너무 화려하셔서 심플한 제복을 입으시면 디자인이 죽어버려요. 그건 검에 죽는 것보다 더 아쉬운 일이죠."
"그런 건 별 상관없습니다."
"제작자인 제가 상관있어요. 예술은 예술로서 승화시키는 법. 디자인을 제게 맡겨주시면 그 얼굴을 최대한 살릴 수 있게 만들어 드릴게요!"
시란은 춤을 추듯이 방을 휘돌며 방긋 웃었다.
'이 동네에는 왜 정상이 아무도 없는 거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놈의 집구석에는 정말 제대로 된 사람을 찾기 힘들었다.
"후우, 알겠습니다. 그럼 화려하지만, 최대한 간편하게 해주시고, 기능은 가벼우면서 움직임에 불편함이 없게 만들어 주십시오."
"기능 쪽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어요. 검기에도 몇 번은 버틸 수 있도록 운령사를 최대한 촘촘히 사용하니까요."
"운령사…."
운령사는 운령이라는 나방을 이용해서 만드는 실에 마법적인 가공을 하여 그 강도를 최대한으로 올린 기물이다.
그 실로 옷을 만든다면 검이 잘 들어가지 않고, 사대속성에도 저항력이 생겨서 부르는 게 값인 보물이었다.
"그러면 꽤 비쌀 텐데요?"
"본래는 급소 부위에만 운령사를 사용하지만, 리메르 님이 추가금을 내셨기에 광풍단원분들의 제복에는 운령사가 최대한 많이 들어간답니다. 웬만한 부위는 전부 운령사로 덮일 거예요."
"단주님이?"
"이건 비밀이라고 하셨는데, 그래도 부단주님은 알고 계시는 게 좋을 거 같아서 말씀드렸어요."
시란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비밀을 지켜달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렇군요.'
리메르는 미리 이곳에 돈을 주면서 가장 좋은 제복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 것 같다. 도박에 미친 건 맞지만 그 이상으로 제자들을 아끼는 것도 확실했다.
'하여튼 미워할 수 없다니까.'
라온은 시란이 꺼내놓은 운령사 뭉치를 보며 옅게 웃었다.
"그럼 치수를 좀 잴게요."
시란이 줄자를 가지고 라온에게 다가왔다. 그의 팔과 다리를 만지며 길이를 재는 그녀의 표정이 나무껍질처럼 굳어졌다.
'뭐지?'
팔과 다리의 길이와 근육의 밀도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조화를 이뤘다.
이 일을 하며 수많은 사람의 체형을 확인했지만, 이리도 육체가 완벽함에 가까운 인간은 글렌 이후 처음이었다.
더 놀라운 건 아직 라온의 몸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점.
라온은 아직 성장판이 닫히지 않았음에도 완벽한 무인의 몸에 근접해 있었다.
오러도 없이 중무전 무인들을 꺾었다기에 믿지 않았는데, 이런 신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힘과 속도를 발휘할 수 있을 테니까.
놀라운 건 무력만이 아니다.
눈빛과 오러도 완벽하게 그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17살에 이런 무력을 가진 검사는 지그하르트 역사상 처음이었다.
'그 전설이 헛것이 아니었단 말이지?'
선택식에서 나온 가주의 전설.
오화단의 주인이자, 원로원의 중진 중 한 명인 시란은 글렌에 이어 두 번째로 목격한 가주의 전설을 생각하며 옅게 웃었다.
'정말 이 아이가 입을 가주의 코트를 만들게 될지도 모르겠네.'
* * *
다음날 새벽.
라온은 어제보다도 이른 시간에 5 연무장으로 나왔다. 이전과 달리 연무장은 텅 비어 있었다.
-크흠, 한동안 별관의 식사를 못 할 텐데, 아침이라도 먹고 가면 안 되는 것이냐.
라스가 배를 쓰다듬으며 입맛을 다셨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새로운 미식을 찾는 것도 좋잖아?'
-새, 새로운 미식?
'그래. 미르탄은 야장들의 마을이다 보니,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서 나름 발전되어 있거든. 거기서 괜찮은 식당을 찾는 것도 재밌지 않겠어?'
-음! 나쁘지 않군. 알겠노라.
사실 지금 별관에서 식사하는 것과 미르탄에서 식당을 찾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였지만, 라스는 알겠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음식만 끼어들면 사고회로가 좁아지는 위장취업 마왕다웠다.
"그러면…."
라온은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어둑한 하늘을 올려보며 검을 뽑았다.
평소처럼 연성검술로 시작하지 않고 그보다 더 기본으로 내려가 수평 베기와 수직 베기, 찌르기를 차례로 연습했다.
촤아아악!
검신에 어린 강대한 힘이 찬 공기를 가르고 라온의 의지를 펼쳐냈다. 쾌. 빠름이라는 무학의 기본 원리가 담긴 검격이 허공을 사정없이 갈랐다.
'나쁘지 않군.'
연성검술이나, 가람보법 모두 균형이 잘 잡힌 무학이었기에 그동안 쾌검을 깊게 파고들지 않았음에도 빠름을 담아낼 수 있었다.
-요즘은 왜 빠름을 추구하는 것이냐.
라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근 홀로 있을 때마다 쾌검만 연습하니,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이걸 써먹을 구석을 찾아보려고.'
라온이 검날 위로 글래시아의 기운을 피워냈다.
-글래시아를 운용할 방법을 연구하는 건가?
'그래.'
만화공으로 강함과 변화, 그리고 환상을 검에 담아냈으니, 글래시아로는 그와 관계가 한참 떨어진 빠름을 운용해보고 싶었다.
-흥. 머리를 제법 썼다만 인간이 글래시아를 그리 쉽게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라스가 주제를 모른다며 혀를 찼다.
'네가 말해줬잖아. 글래시아를 사용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상상력이라고. 계속 머리로 그린다면 가능하겠지.
-끄으윽! 제엔장!
비웃던 라스가 예전의 발언을 후회하는지 스스로 입을 후려쳤다.
'이 녀석은 거짓말을 하지 않지.'
라스는 제대로 된 그림만 그린다면 글래시아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했었다. 그렇다면 검술의 속성을 발전시키는 것도 분명 가능할 것이다.
고오오오!
글래시아를 운용하자 바닥으로 은빛 서리가 깔리기 시작했다.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를 다시 몸속으로 가뒀다.
글래시아의 심상을 통해 그리는 건 오직 속도. 바람조차 베어버릴 쾌검을 바라며 광아검의 초식 중 가장 빠른 경류아의 구결을 담아 검을 내뻗었다.
콰아아아아!
마나 회로를 질주하던 글래시아의 냉기가 폭발하듯 터져 나오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검격을 뻗어냈다.
하지만 진짜는 그게 아니었다. 지나간 검의 궤적 위로 은빛 선이 이어졌다.
강대한 힘과 속도가 담긴 검격이 먼저 쏘아지고, 그 뒤로 글래시아가 만들어낸 냉기가 따라간다.
한 번의 휘두름으로 2번의 쾌검격이 이루어지는 신묘한 검술이었다.
-허….
라스조차 놀란 듯 눈을 부릅떴다.
-서, 설마 이걸 생각한 것이냐.
'아니. 우연이야.'
그저 글래시아의 냉기를 이용하여 쾌검을 운용해보고 싶었을 뿐이다. 2단으로 이루어지는 공격은 생각지도 못했다.
'전생에서 사용했던 기술 때문인가.'
암살자로 살아갈 때 검 뒤에 은밀한 오러를 숨기는 암경을 자주 이용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잘만 이용하면 큰 도움이 되겠어."
라온은 서리가 피어나는 검과 허공에 깔린 얼음 조각들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단은 이중검격으로 이름을 지어놓자.'
훗날 제대로 이름을 지어주기로 하고 임시로 이중검격이라는 검술명을 만들었다.
"라온."
연무장 밖에서 루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잠이 덜 깼는지 힘이 빠져 있었다.
후우욱.
라온은 만화공으로 허공에 핀 얼음 조각들을 지우고, 은색 상자를 든 루난을 향해 걸어갔다.
새로 성장할 길을 찾은 그의 얼굴은 떠오르는 햇살을 담은 듯 화사하게 아롱졌다.
"가자."
제168화
데니어 지그하르트가 주인으로 있는 현무전의 화중정원.
수채화 빛의 꽃과 나무가 조화롭게 가다듬은 정원의 중심에서 마르타와 데니어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
마르타는 데니어의 시선을 받아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현무전으로 불러주셨는데, 광풍단에 들어갔으니 화내셔도 할 말이 없어요."
그녀는 발끝을 내려보며 모은 손을 꽉 쥐었다.
"괜찮다."
데니어는 상관없다는 듯 옅게 웃었다.
"누구보다 네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내가 널 이해해주지 못하면 안 되겠지."
"…죄송해요."
"죄송은 됐고, 오랜만에 왔는데 얼굴도 안 보여주고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아, 아버지."
마르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항상 차갑게 가라앉아 있던 검은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렇게 예쁜 얼굴로 왜 그렇게 찡그리고 있는 게냐."
데니어가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마르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윽…."
마르타는 대답하지 않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데니어는 아무것도 없는 자신을 거두고 친딸처럼 키워준 사람이다. 그 앞에서만큼은 감정을 속일 수가 없었다.
"막내딸이 다른 곳에 간 건 아쉽지만, 현무전과 백혈교가 부딪칠 일이 별로 없는 건 사실이니, 네가 광풍단에 들어간 것도 충분히 이해한다."
데니어가 마르타의 눈을 지그시 내려보았다.
"너는 네 스스로 복수하고 싶은 게로구나."
"네."
마르타가 처음으로 힘 있게 대답했다.
"제 손으로 엄마를 찾고, 그놈들을… 죽이고 싶어요."
"복수를 해도 네 생각만큼 시원하고, 기분 좋기만 하진 않을 거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거야."
"그래도 해야 해요. 무슨 짓을 해서라도 꼭!"
"그런가."
데니어는 옅은 한숨을 뱉으며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검집 채로 뽑아 마르타에게 내밀었다.
"청운이라는 이름의 검이다. 날카로움은 말할 필요도 없고, 파마의 기운이 있어 정신을 맑게 유지해주지."
"네? 이걸 왜…."
"네 졸업 선물이다."
"저, 저는 현무전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마르타가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청운은 데니어가 가장 아끼는 검 중 하나. 이런 보물을 넘겨주실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비가 딸에게 선물을 주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냐."
"아…."
데니어는 마르타에 손에 청운검을 건네주고서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잡았다.
"광풍단은 신규 단체이니, 기본 임무는 물론이고 이곳저곳에 많은 지원을 나가게 될 거다. 그 모든 것들이 네 격을 세워줄 경험이 될 테니, 임무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하거라."
"알겠습니다."
마르타가 손에 움켜쥔 청운검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검을 준 대가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약속 하나 하자꾸나."
"약속이요?"
그녀가 데니어의 입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 검의 대가라면 무슨 말이 나와도 받아들여야 했다.
"너나 나나 바쁘더라도 반년에 한 번씩은 꼭 얼굴을 보고 식사를 하자꾸나."
"하아, 정말…."
"대답해야지?"
"알겠어요."
마르타가 화사한 웃음을 피워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광풍단이 보았다면 까무러칠 정도로 밝은 미소였다.
"그리고 항상 라온에게서 시선을 떼지 말거라."
데니어가 마르타에게서 손을 떼며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그 아이의 무력과 판단력은 부대주급에 필적한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테니, 항상 지켜보고 그가 왜 그렇게 움직였는지를 생각하도록 해라."
맞는 말이다. 라온은 15살에 녹전귀를 베고, 17살에 부단주인 호라인을 꺾었으니까. 그를 보고 있으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를 정도로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제가 그 녀석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요?"
마르타가 청운의 검병을 꾹 잡은 채 데니어의 눈을 보았다. 스스로 당당해지기 위해서라도 라온과 같은 위치에 서고 싶었다.
"솔직히 말해서 힘들지. 네 재능은 지그하르트 직계에도 밀리지 않는다만 그 아이는 그 지그하르트 직계에서도 드물디드문 수준의 재능이니까. 하지만…."
데니어가 빙긋 웃으며 몸을 돌렸다.
"불가능한 건 아니야. 지그하르트의 검사로서 많은 경험을 겪으며 네 토대를 다져라. 라이벌이 바로 옆에 있으니, 꾸준히 정진한다면 언젠가는 때가 올 것이다."
"네."
마르타가 큼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에게 진 이후로 그를 매일 봐왔기에 관찰하는 것 하나는 자신 있었다.
"절대 놓치지 않을게요."
"그렇다고 너무 보다가 반하지는 말고. 피가 이어지지 않았어도 가족이잖냐."
"아, 아버지!"
"농담이다. 농담."
데니어는 손을 빙글 돌리고 현무전으로 들어갔다.
"끄응…."
마르타가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그녀의 귓불은 본인도 모르게 살짝 붉어져 있었다.
* * *
미르탄으로 출발한 라온과 루난은 첫째 날 밤을 이름 모를 작은 숲에서 보내고 있었다.
"루난. 여기서 쉬고 있어. 난 주변을 좀 둘러보고 올 테니까."
"응."
라온은 루난에게 손을 흔들어 준 뒤 숲속으로 들어갔다.
-식은 음식조차 맛있다니, 파인애플 소녀의 요리 솜씨는 날이 갈수록 느는구나.
라스는 파인애플과 살라미 햄이 들어간 유아 특제 햄버거를 먹고서 입맛을 쩝쩝 다셨다. 표정을 보니 크게 만족한 것 같았다.
-다만 양이 좀 부족 하느니라. 햄최열인 이 몸에게는 한참 부족해.
'햄최열?'
-그것도 못 알아듣다니, 유행에 뒤떨어지는구나. 햄버거를 최대 열 개까지 먹는다는 말이니라.
'별걸 다 줄이는군.'
이젠 마왕이 아니라, 동네 꼬마 같았다.
라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나무 사이의 간격이 적당히 떨어진 공터에 자리를 잡고 검을 뽑았다.
-주변을 둘러본다더니 결국 수련이냐. 지겹도다.
'글래시아로 경계를 했으니까.'
주변 경계와 탐색은 이미 글래시아로 끝냈다. 지금은 새벽에 연습했던 이중검격을 더 다듬고 싶었다.
'그걸 써볼까.'
이동하면서 연성검술과 광아검에서 쾌의 구결만을 따로 뽑아냈었다. 오직 빠름만을 추구하는 구결을 외우며 검을 휘둘렀다.
촤아아악!
라온의 막강한 육체 능력과 쾌의 구결만으로 엮어낸 새로운 검술이 어우러지자 밤이 녹아내린 어두운 하늘을 비틀어내는 듯한 검격이 솟구쳤다.
'빨라.'
오러를 많이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익스퍼트 하급 정도는 단숨에 목을 날릴 수 있는 속도였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건 이 수준이 아니었다.
고오오오!
라온이 글래시아를 극성으로 끌어올리며 검을 뒤로 젖혔다. 꽉 조여진 근육과 마나 회로를 내달리는 글래시아의 냉기를 폭발시키며 검을 그었다.
콰아아아아!
눈으로 겨우 포착할 정도의 검격이 지평선을 따라 질주하고, 맹렬하게 얼어붙는 냉기의 파도가 그 뒤를 따라 허공을 수놓았다.
단 한 수로 라온의 앞에 수평으로 흐르는 얼음의 폭포가 생겨났다. 수속성 저항력이 있어도 몸이 뜯겨 나갈 정도의 위력이었다.
"생각보다 더하네."
그저 새롭게 만들 쾌의 구결을 다듬었을 뿐인데, 그 속도와 위력이 오전과는 비할 수 없이 강해졌다. 이대로 계속 발전시킨다면 실전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자신만의 검술이 만들어질 것 같았다.
'기본 검술을 계속 연습해놓은 보람이 있네.'
기본 검술에는 대부분의 검술 속성이 얕게 들어가 있다. 남들이 고급 검술을 배우고 있을 때 그 얕은 물에 잠수까지 한 보람이 있었다.
'어때?'
-크흠, 조, 조금 하는구나. 아주 조금! 본왕이 인정할 정도는 아니고, 정말 눈곱만큼!"
라스는 인정하기 싫은지 조금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러면 눈곱이 눈덩이가 될 정도로는 만들어봐야겠지.'
라온은 피식 웃으며 글래시아의 냉기가 동이 날 때까지 새로운 쾌검을 연습한 뒤에 루난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늦어서 미안. 새로운 검술을 좀 시험해보느라."
"응. 알아."
루난은 그게 뭐 별거냐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그거 재밌어서 지루하지 않았어."
"설마 느꼈다고?"
루난의 경지로는 아직 느낄 수 없는 거리였는데, 어떻게 알았다는지 모르겠다.
"정글에서 새로운 눈을 열었거든. 나중에 라온도 알려줄게."
그 말을 하며 아주 작아서 보이지 않을 정도의 미소를 지었다.
'새로운 눈?'
루난이 다녀온 카탐 정글의 주민들은 오러 없이도 먼 곳의 기척을 느낄 수 있다던데, 그 능력을 말하는 것 같았다.
"다 했으면 아이스크림 먹자."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배낭에서 구슬 아이스크림 상자를 꺼내 내밀었다.
-오오! 역시 본왕의 첫 번째 시녀!
라스가 입에서 냉기를 줄줄이 뿜어내며 아이스크림들을 쭉 살폈다.
"너부터 골라."
"응."
루난은 민트초코를 골라서 입에서 쏙 넣었다. 맛있는지 하얀 뺨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크흠, 미, 민트초코를 고르다니….
라스가 민트초코가 사라진 공간을 보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보, 본왕이 아이스크림 소녀라서 봐주는 것이니라. 다른 놈이었다면 당장 머리를 내리쳤을 것이야!
'웃기고 있네. 공짜로 얻어먹으면서.'
라온은 혀를 차고서 검은색과 하얀색이 뒤섞인 신상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었다.
"허…."
달콤한 아이스크림 사이에 바삭한 쿠키가 박혀 있어서 서로 결이 다른 단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허어어….
라스는 새로운 맛에 전율을 느꼈는지 파리가 들어가도 될 정도로 입을 떡 벌렸다.
-이 무슨 마신의 장난인가! 인간계에 이런 맛이 남아있었다니!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노라!
이번만큼은 라스의 호들갑이 이해되었다. 실제로 이 아이스크림은 눈이 번쩍 떠질 정도로 맛이 좋았으니까.
"이거 이름이 뭐야?"
"쿠키앤크림."
-쿠키앤크림이라. 그 이름은 본왕의 영혼에 새겨졌느니라! 아아, 위대한….
라스는 찬송가라도 부를 것처럼 손을 모은 채 쿠키앤크림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거."
루난은 아이스크림 상자를 집어넣고, 연무장에 가져왔던 은색 상자를 꺼냈다.
"이게 뭔데?"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상자를 열었다. 새벽 내 쏟아진 눈을 뭉친 듯한 새하얀 쇳덩이가 상자 안을 밝혔다.
"냉혈이라는 철이야."
루난이 냉혈을 손가락으로 툭툭 만지면서 말을 이었다.
"이걸로 검을 만들면 냉기를 사용하는 검사에게 큰 도움이 된대. 라온에게도 나눠줄게."
"이걸 나눠 준다고?"
"응."
루난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보답해야 하니까."
그러면서 조금 더 깊어진 미소를 지었다.
"허…."
헛웃음이 나왔다. 보기만 해도 어마어마한 보물이라는 걸 알 수 있는데, 그걸 나눠준단다. 조건도, 이유도 없이 그저 보답하겠다고 했다.
'내가 무엇을 했다고….'
시리아를 한 번 물러나게 한 대가는 넘치게 받았다. 계속 챙겨주는 루난이 고맙지만,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렵군.'
라온이 고개를 숙였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알아갈수록 어려운 것 같다.
다만 받으면 그만큼 돌려주어야 한다는 건 알고 있다.
'나도 무언가 해줄 수 있는 걸 찾아야겠어.'
라온은 냉혈을 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틀 뒤.
라온과 루난은 미르탄 마을 입구에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포도덩굴처럼 좌우로 꼬여 있는 언덕길 사이로 둥글거나, 각이 지거나 혹은 기묘하게 비틀어진 공방들이 가득했다.
개성 넘치는 형태의 대장간들이 자유롭게 펼쳐진 이곳이 바로 야장들의 마을 미르탄이었다.
'생각보다 덥지는 않네.'
미르탄은 휴화산 스켈레이 바로 밑에 세워져 있어서 북쪽에 있음에도 따스하다고 했는데, 다른 곳과 큰 차이는 없었다.
'사람이 많군.'
마을 안으로 들어가자 리메르의 경고처럼 지그하르트 검사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마을 사람과 상인, 다른 곳에서 온 검사들로 마을이 가득 차 있었다.
쩌엉! 쩌어엉! 쩌정!
공방으로 꽉꽉 들어찬 언덕길을 오르자, 이곳저곳에서 망치와 풀무질, 용광로에서 불을 일으키는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땀을 줄줄 흘리며 바쁘게 일하는 장인들을 보자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더 열심히 살면 죽느니라.
'난 아직 최선을 다 안 한 거 같아서.'
-네놈 말고 본왕이 죽는다. 잠을 못 자겠으니, 수련 좀 적당히 해라!
라스가 툴툴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미르탄까지 오는 도중에 불침번을 서며 쾌검 연습을 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던 것 같다.
"라온. 우리 어디로 가?"
"글쎄…."
라온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모두 극도로 집중한 채로 일하고 있어서 말을 걸기 쉽지 않았다.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나 고민하며 움직일 때 우측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안녕?"
고개를 돌리니, 곰방대를 물고 있는 남성이 히죽 미소를 지었다. 불에 그을렸는지 피부는 갈색이었지만, 장인 특유의 강직함은 없었고, 가벼운 기세만 가득했다. 이곳에 와서 본 사람 중 가장 할 일이 없어 보였다.
"공방을 찾나 보네?"
"그렇습니다."
라온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미르탄 토박이인 내가 하나 추천해줄까? 재능이 넘치고, 모든 물건을 대작급으로 내놓는 명장을 아는데."
"음…."
발칸과 약속이 된 자신과 달리 루난의 검을 만들 사람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알아둬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게 누구죠?"
"하랜."
"못 들어본 이름인데…."
"아직 크게 뜨지 않았거든. 곧 난리가 날 테니. 미리 잡아두는 게 좋을 거야."
"음, 그분은 어디에 있죠?"
"여기!"
그가 씩 웃으면 엄지손가락으로 본인을 가리켰다.
"내가 바로 미래의 대륙 장인 하랜이다!"
"...."
라온, 루난 그리고 라스까지 한심한 눈으로 하랜을 흘겨보았다.
"거기 예쁜 여검사님. 그런 눈으로 보지 말고 한 번 맡겨 보슈. 검기가 보통이 아니니, 나 정도는 되어야 그 수준에 맞춰줄 수 있을 거야."
말이 완전 허세는 아닌지, 하랜은 기세를 드러내지 않은 루난의 실력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물론 내 실력까진 눈치채지 못했지만.'
라온은 피식 웃으며 그가 나온 공방을 살폈다. 용광로의 불은 꺼져 있었고, 바닥은 너저분했으며 천장에는 거미줄이 가득했다.
"쯧, 됐습니다."
혀를 차고서 루난을 데리고 나왔다.
"아, 잠깐! 저것만 보면 곤란해! 나보다 실력 좋은 사람 여기에 없다니까?"
"괜찮습니다. 제가 만날 분이 당신보다 무조건 뛰어나니까요."
"웃기고 있네! 누군데! 이름이 뭐야!"
"발칸 님입니다."
"바, 발칸? 크하하하하!"
하랜이 배를 잡고 웃으며 땅을 굴렀다.
"그 꼰대 영감이 너희를 만나주기나 할 거 같아? 그 인간은 4년 전부터 지그하르트의 가주만 기다리고 있었다고. 너희들은 그 영감 얼굴도 못 봐!"
그는 문전박대 수준도 안 될 거라고 떠들어댔다.
"그냥 나한테 맡겨. 돈이 좀 비싸긴 한데, 정말 좋은 물건을 만들어 줄 테니까. 이 기회를 놓쳤다간 후회할걸?"
"됐으니, 발칸 님의 공방이 어디에 있는지나 알려주시죠."
"말을 못 알아듣네. 안 된다고. 제툴 왕국의 왕족들이 매일 같이 찾아와도 얼굴 한 번 안 비치는 영감이 너희들에게 잘도 문을 열어주겠다."
그는 시간 낭비하지 말라며 손을 저었다.
"그럼 내기 하나 할까요?"
"내기?"
"저희가 발칸 님의 공방에 들어가면 제가 이기는 거고, 말씀대로 얼굴도 못 본다면 당신이 이기는 걸로 하시죠. 조건은 상대가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주는 걸로"
"내기할 필요도 없지만 좋아!"
발칸이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멍청한 놈 하나가 낚싯바늘을 물었군.
라스는 또 희생양이 늘었다고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 조건은 간단해. 저 여검사의 검을 내가 만들겠다. 재료도, 가격도 내 마음대로 해서!"
하랜이 멍하니 선 루난을 가리켰다. 히죽이며 손을 비비는 모양새가 딱 삼류 양아치 같았다.
"흠…."
이런 곳에서 루난의 검을 만들고 싶지 않았지만, 질 수가 없는 내기였다.
"루난."
"괜찮아."
루난은 이유도 듣지 않고, 믿겠다는 듯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라온이 루난에게 싱긋 웃어주고서 하랜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하죠. 제 조건은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좋다! 내가 안내하지. 가자!"
하랜이 앞장서서 언덕을 올랐다. 당당한 표정을 보니, 절대 지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어이, 하랜! 오늘은 웬일로 해 떨어지기 전에 일어났냐?"
"이 시간에 술에 안 취한 걸 보니까.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이제 일 좀 제대로 해! 공방이 썩어간다! 이놈아!"
장인들은 하랜을 보며 쯧쯧 혀를 차거나, 정신을 차리라고 외쳐댔다. 그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이 남자가 이 마을의 망나니라는 것을.
"이 친구들이 영감이 나오게 할 수 있다길래. 데려다주는 중이니까. 다 닥쳐!"
하랜이 이마를 팍 찡그렸다.
"그건 안 되지. 무슨 수로 전 촌장을 봐."
"헛 시간 쓰지 말고, 우리한테 와! 싸게 해줄 테니까!"
"10일 연속으로 찾아온 왕족들도 머리털 하나 못 봤는데. 어떻게 들어가."
"쓸데없는 짓 말라고!"
구경꾼들과 장인들도 발칸을 볼 수는 없다며 손을 저었다.
"들었지? 지금 와서 물러달라고 해도 안 돼."
"그런 말 안 할 테니, 빨리 가기나 하시죠."
"건방지긴…."
하랜은 입을 삐죽이고서 마을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세워진 공방 앞에 멈춰 섰다. 대접을 엎어둔 것처럼 반원형 건물이었고, 중앙에는 꽉 닫힌 두터운 철문이 하나 있었다.
쩡! 쩡! 쩡!
공방 내부에서 일정한 속도와 힘으로 쇠를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악기를 연주하는 듯한 농익은 망치 소리만으로 장인의 실력이 느껴졌다.
"크흠. 아아."
하랜이 목을 가다듬었다. 지금까지 들려준 목소리가 아니라, 톤을 높여서 아예 다른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본인의 정체를 숨기려는 것 같았다.
"어이 전 촌장! 손님 왔어! 댁 찾는 손님 왔다고!"
그가 철문을 부술 것처럼 두들겼지만 안에선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손님 왔다고! 문 열어!"
"쯧, 돌아가라. 지금은 손님을 받지 않아."
그제야 내부에서 발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전보다 굵어졌지만, 그의 목소리가 확실했다.
"봐. 올 필요도 없다고 했잖냐. 일단 선수금부터 받도록 하지. 일단 그 상자부터 줘봐."
하랜은 키득거리며 루난이 든 상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럴 줄 알았어."
"괜히 대륙 장인이 아니야. 고집이 쇠심줄이라니까."
"왕족이 왔어도 문을 안 열어줬는데, 저 꼬마들이 무슨 수로 들어가."
"괜히 저 망나니에게 돈만 생기겠네."
뒤따라온 구경꾼들이 그럴 줄 알았다며 혀를 찼다.
"제가 해보죠."
라온은 손을 펼친 하랜을 지나 문 앞에 섰다.
"아, 소용없다고! 영감 방해하지 말고 이쪽으로…."
"어르신."
라온은 북망산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발칸의 웃음을 그리며 말을 이었다.
"꺾이지 않는 마음을 세우고 왔습니다."
그 나지막한 음성에 계속해서 울리던 망치 소리가 우뚝 멈췄다.
쿠구구구!
대륙이 무너져도 닫혀 있을 것 같은 철문이 활짝 열리고, 강렬한 열기와 함께 발칸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 가득한 주름살은 여전했지만, 눈빛에는 생기가 넘쳤고, 부푼 근육이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드디어 왔군."
"오랜만입니다."
라온과 발칸은 달라진 서로를 마주하며 반가움이 깃든 미소를 지었다.
"어어? 어어억?"
하랜은 라온과 발칸을 번갈아 보며 찢어질 정도로 입을 벌렸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이야! 저 영감탱이가 왜 나와!"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본인의 뺨을 꼬집었다.
"저, 정말 나왔어!"
"어억! 진짜 손님이 올 때까지는 문을 안 연다고 했는데?"
"저, 저 청년이 누구길래. 발칸 님이 저런 표정으로…."
뒤를 따라온 구경꾼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모두 깜짝 놀라서 헛숨을 들이켰다.
"싱겁게 끝났네요."
라온은 경악하는 하랜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내기는 제 승리입니다."
"이익!"
하랜이 입술을 꾹 깨물고 뒷걸음질 칠 때 발칸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정지."
"읍!"
그 말에 하랜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우뚝 멈췄다.
"네 녀석. 작업은 안 하고, 여기까지 왜 온 것이냐."
"치, 친절하게 안내를…."
"헛소리! 실력 키울 생각은 안 하고 되먹지도 않는 호객행위나 했겠지!"
"아, 아버지. 그게 아니라!"
"닥치거라!"
아버지라 부르는 걸 보니, 하랜은 발칸의 아들이었던 모양이다.
심부름을 시키거나, 만든 물건 중에 괜찮은 걸 받으려고 했는데, 발칸의 아들이라면 여러모로 쓸모가 있을 것 같다.
'호구가 하나 늘었군.'
라온이 발칸에게 멱살이 잡힌 하랜을 미소를 지었다.
제169화
라온과 루난은 발칸의 안내를 받아 그의 공방으로 들어갔다. 지금까지 계속 작업을 해왔는지 내부는 용광로에서 뿜어진 열기로 가득했다.
"거기 앉아라."
발칸이 공방 구석에 놓인 작은 테이블과 의자를 가리켰다.
"영광으로 알아. 아버지의 공방에 들어간 외부인은 2년 만이니까."
하랜이 옆자리에 털썩 앉으며 팔짱을 꼈다.
"더럽히지 말고, 시끄럽게 굴지도 말고 조용히 있다가… 억!"
발칼이 인상을 찌푸리며 하랜의 귀를 잡아당겼다.
"아악! 아버지! 왜 이래요!"
"네가 제일 시끄럽다. 손님들이 있는데 네놈이 거길 왜 앉는단 말이냐! 가서 차나 가지고 와!"
그 말과 함께 하랜의 머리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끄아아악! 말로 좀 해요!"
"네가 말로 들어 먹을 놈이냐."
"어휴! 이놈의 집구석 나가든가 해야지."
하랜이 얻어맞은 머리를 마구 비비며 공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혹시라도 저놈이 실례했다면 내가 사과하마."
발칸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까딱였다.
"본래 저 정도 망나니는 아니었는데, 도박쟁이 한 놈을 만나고 저 모양 저 꼴이 되었다."
"도박쟁이요?"
"그래. 너도 잘 아는 그 엘프 놈 말이다."
"응?"
"예?"
잘 아는 엘프라는 말에 라온과 루난이 동시에 귀를 쫑긋 세웠다. 도박까지 나왔으니, 생각나는 사람이 딱 한 명뿐이었다.
"저, 저희 단장이 무슨 사고를 쳤기에…."
"단장? 그놈이 이제 단장이 되었다는 것이냐."
"예."
"하아. 말세로구나."
"대체 리메르 단장이 뭘 하고 간 겁니까."
"리메르. 그놈이…."
발칸이 허공을 올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놈이 내 멍청한 아들 녀석과 도박해서 모조리 졌다!"
"...."
라온의 눈동자가 탁 풀렸다. 지금 자신이 들은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도박해서 이긴 것도 아니고, 졌다는데 왜 화를 낸다는 말인가.
"으음?"
루난도 드물게 이마를 찡그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 멍청이가 리메르를 이긴 후에 본인에게 도박 재능이 있는 줄 알고, 망치를 내팽개치고 도박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가진 재산을 모조리 날려 먹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려서 망나니로 살고 있지."
"아!"
이제야 발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하랜이 리메르와의 도박에서 전부 이긴 뒤 본인에게 도박 재능이 있다고 착각을 하고, 도박에 빠졌다는 뜻이었다.
-즉, 호구 중의 호구를 이기고 본인에게 재능이 있다고 착각했다는 말이로군.
라스가 코웃음을 쳤다.
'하여튼….'
솔직히 리메르의 잘못은 아니지만, 그가 관계되면 항상 문제가 일어나는 것 같다. 불운과 불행을 이끌고 다닌다고 할까.
"리메르가 몇 판만 졌어도 저렇게 망가지지는 않았을 텐데, 어떻게 15판을 내리 졌던 건지 모르겠다! 그래놓고 하랜을 데리고 다니며 좋지 않은 건 다 가르치고 다녔어!"
발칸이 분하다는 듯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라온은 뭐라 할 말이 없어서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하아, 그래. 뭐,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 됐고."
그가 한숨을 푹 내쉬고서 라온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도박쟁이에게 듣기는 했지만 아주 제대로 컸군."
"단장님이 제 이야기도 했습니까?"
"그 망할 놈이 네 이야기를 해줄 테니, 돈 좀 빌려달라고 했었다."
"...."
리메르의 일대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목을 똑바로 세울 수가 없었다.
"제, 제가 죄송합니다. 그 인간이 얼마나 빌렸죠?"
라온은 당장 갚겠다는 듯 금화가 든 주머니를 꺼냈다.
"되었다. 그 정도는 상관없어. 다만 듣던 것 이상이구나. 쌓아 올린 검기가 이미 벽을 반 이상 넘었어. 5년 만이 이 정도라니, 기껍기 그지없다."
발칸이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리메르를 이야기할 때는 죽일 듯 인상을 찌푸렸고, 라온을 이야기할 때는 미소를 흘렸다.
"그런데 이쪽의 검사는 누구지?"
발칸의 시선이 루난을 향했다.
"제 동료입니다. 검을 만들고 싶다고 해서 함께 왔습니다."
"루난 슬리온이에요."
루난은 바로 일어나서 고개를 꾸벅였다.
"슬리온 가문답게 검기가 날카롭다 못해 차가울 정도로군. 지금 지그하르트에는 인재밖에 없는 건가."
발칸은 루난의 기운을 읽고서 탄성을 터트렸다.
"내가 지금 미르탄의 촌장을 소개해주지. 그 친구라면 네가 어떤 검을 원하든 완벽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게다."
"고맙습니다."
루난이 다시 한번 고개를 꾸벅였다.
"그럼 바로 제작을 시작하시는 겁니까?"
"그러고 싶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문제라고 하신다면…."
"지금 미르탄 마을 주변의 지열이 평소보다 많이 내려간 상태다. 보통 일주일이면 원상태로 돌아오는데, 2주가 지난 지금도 계속 지열이 낮은 상태지."
발칸이 발로 땅을 툭툭 두드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서였군.'
미르탄 마을은 북쪽에 있는데도 꽤 덥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와보니 지그하르트보다 조금 열기가 있을 뿐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지열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지열이 낮으면 금탄을 사용한다고 해도 원하는 온도를 맞추기 힘들어. 아무래도 스켈레이 산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다."
"이번 주까지도 지열이 돌아오지 않으면 지그하르트에 지원을 요청하기로 했잖아. 그냥 부르라고."
하랜이 테이블 가운데에 찻잔과 주전자를 쿵 내려놓으며 옆에 앉았다.
"그럼 제가 다녀올까요?"
라온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려 스켈레이 산을 보며 말했다.
"음, 그러면…."
"뭐? 아서라!"
발칸이 입을 떼기도 전에 하랜이 손을 휘휘 저었다.
"이 여검사라면 모를까. 너 같은 녀석은 가자마자 죽어. 거긴 열기를 먹고 사는 몬스터들이 가득하니… 커억!"
"네 눈은 옹이구멍이냐?"
발칸이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뱉으며 하랜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네가 가줄 수 있겠느냐?"
"저와 루난이면 가문에서 지원을 나온 것과 별 차이 없을 겁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난 역시 익스퍼트이니, 산의 몬스터를 정리하는 정도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아 그만 좀 때려요! 이 녀석이 대체 누군데요!"
"이 아이가 지그하르트의 미래다."
"예? 에엑?"
머리를 문지르던 하랜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지그하르트의 미래? 자, 잠깐만 그럼 영감이 말했던 약속이…."
"그래. 너희들이 제멋대로 가주님이라고 착각했지만, 내가 약속을 한 검사는 이 녀석이다."
"어? 아,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 설마 이 어린 녀석이 익스퍼트 상급 이상이라고?"
"네놈이 2년 동안 도박에 빠지지만 않았어도 충분히 느꼈을 것이다."
발칸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이익!"
하랜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럼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안내인 정도만…."
"아, 그 전에 할 일이 있다."
발칸이 손을 들어 일어서려는 라온을 막아섰다.
"너희에게 맞는 재료부터 알아놔야 작업이 빠르거든."
"재료요?"
"검술에도 종류가 많듯이 쇳덩이에도 수많은 종류가 있다. 너희들의 오러와 기질에 맞는 쇠를 찾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작업이지. 하랜! 금결석을 가져와라!"
"내가 하인도 아니고 시키는 대로… 으윽!"
차를 홀짝이던 하랜은 발칸의 부리부리한 눈을 보자마자, 다시 안으로 들어가서 가운데에 손자국이 찍힌 금이 간 돌을 하나 가지고 나왔다.
"이 돌 속에는 금결이라는 이름의 철이 들어 있다. 세상 그 어떤 기운이라도 증폭시켜주는 금속의 왕이지."
"금결…."
들어본 적 있었다. 부르는 게 값이라 돈이 있어도 사지 못하는 전설급의 급속이 바로 금결이었다.
"금결로 만든 이 금결석은 오러를 먹고, 검사에게 가장 적합한 금속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지. 한 번 해보겠느냐."
"금이 가 있는데 오러를 넣으면 깨지는 거 아닙니까?"
"절대 안 깨지니 걱정할 필요 없다."
"알겠습니다."
라온이 금결석에 손을 올리려다가 우측을 보았다. 흥미가 있는지 루난의 눈이 처음으로 반짝였다.
"루난. 너부터 해볼래?"
"응."
금결석을 밀어주니 루난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에 손을 얹고, 그 틈으로 오러를 밀어 넣어라."
루난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의 중앙에 손을 얹은 뒤 오러를 집어넣었다.
우우웅!
금결석의 갈라진 틈에서 옅은 은빛이 몽글몽글 새어 나오고, 돌 위로 냉기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흐음."
발칸은 돌을 툭툭 만져보고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러도 특별하군. 이렇게 순수한 냉기는 오랜만에 보는구나."
그는 루난에서 손을 떼도 된다고 말하며 턱을 긁적였다.
"가장 좋은 건 냉혈. 그게 안 된다면 은형철이라고 냉기를 잘 받아들이는…."
"냉혈 있어요."
루난이 품에 꼭 껴안고 있던 상자를 앞으로 내밀었다.
"호오!"
발칸은 루난에게 받은 상자를 열어보고 탄성을 흘렸다.
"이 크기와 강도. 완벽하군. 냉혈 중에서도 상급이야. 좋은 검이 나오겠구나."
그는 냉혈을 만져보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 네 차례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라온이 금결석에 손을 얹다 말고 하랜을 보았다. 나가라고 눈빛을 보냈지만….
"왜! 잘생긴 사람 처음 봐?"
그는 눈싸움을 하자고 생각했는지 오히려 더 노려보았다.
"너 나가라잖냐!"
발칼이 테이블 옆에 있던 나무 조각을 하랜에게 던졌다.
"아오! 진짜! 오러가 무슨 비밀이라고!"
"시끄러우니까. 문 앞이나 지키고 있어!"
"망할 영감탱이!"
하랜은 투덜거리면서도 공방 밖으로 나가 문 앞에 섰다. 일단 시키면 말은 잘 듣는 성격인 것 같았다.
"저리 멍청하게 보여도 본래 망치질에 열정과 재능도 있던 놈이다. 네 검을 만들고 나면 저놈의 머리를 깨서라도 정신 차리게 만들 생각이다."
"확실히 재능은 있어 보입니다."
그렇게 놀아 놓고, 루난의 검기를 알아차렸다는 건 보통의 능력으로 안 되는 일이다. 발칸의 아들답게 하랜에겐 확실한 재능이 있을 것이다.
"그럼 시작해라."
"예."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금결석에 손을 얹었다. 발칸은 자신에게 불과 냉기의 오러가 동시에 있다는 걸 어느 정도 눈치챘을 테니, 그에게는 보여도 상관없었다.
철그렁.
금결석에 두 가지 오러를 주입하려고 할 때 밖에서 다수의 기척이 느껴졌다.
"정말 문이 열렸잖아…."
"우리가 열흘 동안 찾아와도 얼굴 한 번 보여주지 않더니, 어린놈에게 문을 열었다는 게 사실이오?"
"이건 우리를 무시한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소!"
"제툴 왕국이 우습게 보이는 거냐!"
분노가 실린 목소리와 갑옷의 쇳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이곳에 오면서 계속 들었던 제툴 왕국의 기사들인 것 같았다.
"아, 왜들이래. 손님을 받고 안 받고는 우리 영감 맘이지!"
"닥쳐라! 제툴 왕국을 무시해놓고, 그냥 조용히 넘어갈 거라 생각한 것이냐!"
"무시가 아니라, 예약한 손님이 온 거라니까! 이거 영업방해니까. 돌아들 가십쇼!"
하랜은 의외로 도망치지 않고, 문 앞에 서서 기사들을 가로막았다.
"후우, 귀찮아서 안 만난 건데 일이 이렇게 되는군."
"커헉!"
발칸이 한숨을 내쉬고 나가려고 할 때 하랜이 비명을 토해내며 안쪽으로 날아왔다.
"크윽, 저 자식들이…."
하랜이 바로 일어서려 했지만 비틀거리고 다시 자빠졌다. 강한 충격을 받은 건 아니지만, 턱과 배를 얻어맞아 중심을 못 잡았다.
"쯧, 잠시 나갔다가 오마."
"저도 가겠습니다."
라온은 인상을 찌푸린 발칸과 함께 공방 밖으로 나갔다. 왼쪽 가슴에 세검의 문양이 그려진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살벌한 눈으로 이쪽을 본다. 예상대로 제툴 왕국의 기사들이었다.
"설마 이 애송이라고?"
가운데 서 있는 20대 중반의 청발 청년이 이를 바득 갈았다. 느껴지는 기파가 상당하다. 익스퍼트 중상급에 오른 강자였다.
"발칸 장인! 너무하십니다! 저희에겐 얼굴조차 보여주시지 않고, 이런 어린 녀석을 선택하셨다는 겁니까!"
"선택이 아니라, 약속이오. 나는 5년 전에 이 아이에게 검을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었으니까."
"오, 오 년 전? 그때는 아예 꼬마였을 거 아닙니까!"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쯧.
라온은 얼굴이 붉어진 기사들을 보며 혀를 찼다.
'곱게 컸군.'
저들의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열흘 동안 찾아와도 얼굴 한번 못 본 대륙 장인이 어린 검사에게 문을 열었다고 하면 열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속으로 삼켜야 할 일. 화가 난다고 찾아와서 지랄을 떨면 본인만이 아니라, 왕국의 이름에도 먹칠하는 것이 된다.
제툴이라는 이름까지 꺼내고 저러는 걸 보면 어리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대체 저 애송이의 무얼 보고 검을 만들어주겠다고 하신 겁니까!"
"듣는 사람 짜증나게 왜 자꾸 애송이 거려."
라온이 눈썹을 내리며 앞으로 나왔다.
"어린놈은 빠져라! 네놈이 낄 자리가 아니니까!"
"빠질 사람은 너겠지."
"뭐?"
"주인이 예약된 손님의 주문을 받겠다는데, 아무 상관 없는 너희들이 왜 감 내놔라, 배 내놔라하는 거냐고."
"그, 그건…."
"주인의 아들까지 후려 패면서 무엇을 얻겠다고 여기에 버티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닥쳐라! 발칸 장인의 검은 지고의 예술. 너 같은 버러지가 가져가야 할 물건이 아니다!"
중앙의 청년이 이를 갈며 앞으로 나왔다.
"네 이름을 밝혀라!"
"그럼 네가 누구인지부터 소개해야지."
"무엄하다!"
"이분이 누구이신 줄 알고!"
청년의 옆에 있던 기사들이 당장에 달려들 것처럼 기세를 피워냈다.
"여긴 제툴이 아니라, 지그하르트의 영역이다. 줄무늬 자랑을 하려면 다른데 가서 해."
"크윽!"
"이놈이!"
"그만."
청년이 검을 뽑으려는 기사들을 만류하고 앞으로 나섰다.
"그리 말하는 걸 보니, 지그하르트 소속이겠군. 나는 제툴 왕국의 왕자 타르칸. 제툴의 청색매다!"
타르칸이 턱을 치켜 올리며 말을 이었다.
"지그하르트도 지그하르트 나름. 난 네게서 아무런 가치도 느끼지 못하겠다!"
"흐음."
라온이 타르칸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왕자였군.'
20대 중반에 익스퍼트 중상급에 오른 왕자이니 머리에 열이 차서 달려드는 것도 이해는 갔다.
다만 아주 약간 이해가 간다는 거지 봐준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제툴은 쾌검과 정검으로 유명했지.'
갑옷에 그려진 세검이 괜히 박힌 게 아니듯 제툴은 빠르고, 정확한 검술로 이름 높았다.
'검술 좀 뽑아먹어 볼까.'
이렇게 된 거 저 왕자를 도발해서 제툴 왕국 검술의 묘리를 얻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저놈도 호구가 되는 건가….
라스는 옅은 미소를 지은 라온을 보고 어깨를 떨었다.
"왕자? 하는 짓이 더러워서 건달인 줄 알았는데, 제툴 왕국은 후계자를 그따위로 키우나 보네?"
라온은 왕자를 모욕하듯 빙글거렸다.
"다, 닥치고 네 이름이나 말해!"
"라온 지그하르트다."
"라온? 못 들어 봤는데. 역시나 방계인가."
"그런데?"
"하, 직계도 아닌 방계, 그것도 명성 하나 없는 놈이 어찌 발칸 장인의 검을 받는다는 거냐!"
지그하르트는 외부에 정보를 퍼뜨리는 가문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분 성의 명성도 이름이 아니라, 어린 검귀나 화벽이라는 이명으로 퍼져서 이들이 자신을 모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직접 시험해보던가."
"뭐?"
"내게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직접 시험해보라고."
"바라던 바다!"
타르칸이 잘 되었다는 듯 검을 뽑았다. 일반적인 장검보다 얇고 날카로운 검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내가 이긴다면 여기서 당장 물러나라."
"그럼 내가 이긴다면 무릎을 꿇고 건방 떤 걸 사과하도록."
"얼마든지. 하지만 그럴 일은 없다!"
"덤벼. 선수를 양보하지."
"이 자식!"
라온이 손가락을 까딱이자, 타르칸이 눈을 부라리며 땅을 박찼다. 가슴으로 쏘아지는 섬전 같은 검격. 검술을 허투루 닦은 건 아닌지 화를 내면서도 첫 공격이 깔끔했다.
캬앙!
라온은 불의 고리를 휘돌려 다가오는 타르칸의 검을 끝까지 지켜보다가 튕겨냈다.
"흥. 한수는 있다는 건가."
타르칸이 코웃음을 치며 무릎을 살짝 굽힌 뒤 연속으로 검을 뿜어냈다. 빗줄기가 대지를 스치듯 빠르면서도 유기적인 흐름을 휘감겨 있었다.
컁! 캬앙! 캬갸걍!
라온은 공명하는 여섯 개의 불의 고리와 극한으로 단련한 안력으로 타르칸이 이루어내는 쾌의 검격을 낱낱이 분해했다.
'빠름에 정확함을 섞었어. 오직 급소만을 노리는 상승의 검술.'
타르칸이 뿜어내는 검격은 그저 빠른게 다가 아니었다. 작은 급소에 칼날을 박아 넣는 정확성까지 이뤄내고 있었다. 폭급한 성격과 달리 명문의 검술을 제대로 익혔다.
"어디까지 막나 보자!"
제 실력을 발휘하기로 한 건지 타르칸에게서 피어나오는 기세가 급격히 늘어나고, 검날에서 뿜어진 기운이 빛살이 되어 떨어져 내렸다.
쿠우우웅!
위력만이 아니라, 검의 속도가 한층 더 빨라졌다. 허공이 갈라지는 듯한 재빠른 검격이었다.
"후우우…."
라온은 끝없이 쏟아지는 타르칸의 검술을 종이 한 장 차이로 막아내며 새롭게 만드는 쾌검의 구결을 다듬었다. 이 정도로 빠름만을 추구하는 검술은 보지 못했기에 큰 공부가 되고 있었다.
"왕자님!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지쳐서 검도 제대로 못 들고 있어요!"
"끝을 내십시오!"
제툴 왕국의 기사들이 왕자를 응원하며 미소를 지었다. 라온이 타르칸의 검을 피부에 닿기 직전까지 살펴보다가 막았기에 옆에서는 압도하는 것처럼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싸우는 타르칸은 죽을 맛이었다.
'이, 이놈 대체 뭐야!'
처음에는 거의 기세가 느껴지지 않아서 가볍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앞에서 검을 맞대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무슨 철벽을 때리는 듯 놈과 검을 부딪칠 때마다 손아귀가 찢어질 것처럼 아렸고, 손목이 부러질 듯 흔들렸다.
'거기다….'
처음에는 쾌검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는 것 같더니, 지금은 자신보다 더 빠르게 검을 움직였다. 착각이겠지만, 이놈은 이 결투를 통해 발전하는 것 같았다.
'빨리 끝내야겠어.'
타르칸이 이를 악물고 남은 오러를 모조리 끌어 올려 검과 팔에 휘감았다. 검을 휘두르는 부위에 오러를 집중한 뒤에 한순간에 폭발시켰다. 조르킨 검술의 절기, 일주살이었다.
치이이잉!
자신의 눈으로도 보기 힘든 쾌속의 검격이 라온의 가슴을 향해 쏘아졌다.
'이건 절대 못 막…어?'
타르칸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당황할 거라 생각했던 라온의 입술이 가늘게 말려 올라가 있었다.
"이런 걸 기다리고 있었어."
그 소름 끼치는 음성과 함께 라온의 손이 벼락처럼 치솟았다.
쩌어어엉!
라온의 검에 얻어맞은 타르칸의 검이 유리처럼 부서져 허공에 흩날렸다.
"아…."
타르칸이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라온의 검이 훨씬 나중에 움직였는데 먼저 닿다니, 마스터에게서나 나올 법한 극쾌의 검격이었다.
"잘 배웠다."
"배, 배워? 무엇을 배웠… 커헉!"
타르칸이 턱을 떨며 고개를 내렸을 때 라온의 검이 그의 주둥이를 후려쳤다.
빠아악!
턱과 입을 동시에 후려 맞은 타르칸이 옥수수 알갱이 같은 이빨 네 개를 뿜어내고 쓰러졌다.
"와, 왕자님!"
"이런!"
"이, 이게 뭐 하는 짓이냐!"
호위 기사들이 달려와 왕자를 안아 들고, 라온에게 검을 겨누었다.
"정당한 승부 아니었나. 왜 검을 겨누는 거지?"
"그, 그건…."
"으윽…."
기사들의 눈은 파도를 맞은 돛단배처럼 흔들렸다. 왕자가 졌다는 걸 아직도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불만이 있다면 지그하르트에 와서 나를 찾아라. 물론 그 전에…."
라온이 축 늘어진 타르칸을 가리키며 눈매를 좁혔다.
"깨어나면 내게 찾아와 무릎을 꿇고 사과부터 하라고 해. 그걸 잊진 않았겠지?"
"크으…."
"두고 보자…."
기사들은 피나도록 입술을 깨물다가 등을 돌렸다.
'두고 본다라….'
저들은 제툴 왕국이라는 배경을 믿겠지만 자신의 뒤에도 지그하르트라는 거대한 이름이 있다. 머리에서 열이 빠진다면 찾아올 생각도 못 할 것이다.
"너…. 그 왕자의 검에서 쾌검을 배운 거냐?"
발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배웠다기보다는 참고를 좀 했습니다."
"허, 못 본 사이에 괴물이 다 되었군."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이제 다시는 찾아오지 못할 겁니다."
라온이 검을 집어넣으며 옅게 웃었다.
"흠, 네 배려가 고맙다만 네가 이렇게 나설 필요는 없었다.
"예? 뭘요?"
"나와 내 멍청한 아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저들의 시선을 전부 네가 가져가지 않았느냐."
"음…."
라온이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발칸은 일부로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반복한 걸 알고 그럴 필요 없었다고 손을 저었다.
"전에는 감정 없는 인형 같더니, 인간적인 면도 배우고 온 건가."
발칸이 피식 웃으며 라온의 등을 두드렸다.
"들어가자. 네 녀석에게 무엇이 어울리는지 빨리 확인해보고 싶구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