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 이제 이 원 안에 들어오세요. 제가 감응하는 물과 땅, 바람과 불의 원소를 전부 코어에 담았으니, 선은 밟지 말고 조심해서요."
라스미아가 네 가지 색으로 빛나는 커다란 원 안에서 무노를 향해 손짓했다.
말로만 듣던 정령진 같았는데, 그 화려한 빛깔을 보니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지나치게 본격적인데....'
괜히 자신도 모르게 마나를 각성해 버리는 건 아닐까.
마나 각성 → 몸 안의 마기와 충돌 → 시밤쾅!
하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상상되었다.
"하. 하.... 그냥 제게 재능이 있는지 확인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며 나온 질문.
그에 라스미아는 웃으며 손짓했다.
"괜찮아요. 정령술의 '씨앗 심기'는 강체술의 각성처럼 위험하지 않으니까요."
...뭘 심어?
그게 나한테는 너무 위험할 것 같단 말입니다.
차마 내뱉을 수 없는 마음의 소리를 다시 한번 삼킬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거절할 방법이 없을까 눈을 또르르 굴리다 보니, 적당한 핑계가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까. 그 정령술을 쓰려면 계산도 잘해야 하고, 머리도 좋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제가 그런 쪽으로는 영 자신이 없는...."
"무슨 헛소리에요, 그건?"
...아니구나.
전생에 무슨 창작물에서 봤는데. 아, 그건 마법이었나? 여기 마법이랑은 좀 달랐지만....
기껏 떠올린 핑계가 소용이 없자 머릿속으로 딴생각을 하며 현실을 도피해 보려 했지만, 라스미아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들어오세요. 얼른."
재촉하는 그녀의 모습이 그에게는 사신의 손짓처럼 느껴졌다.
꿀꺽.
"어. 더 생각해 보니, 중요한 일일수록 좋은 컨디션에서 해야 하지 않을까요?"
"예?"
"전 여태 전투와 노숙을 거듭했고 아까도 큰일 치렀으니, 솔직히 많이 피곤해서요. 이대로 누우면 움직임도 없이 하루는 잘 수 있을것 같습니다."
일단 한번 뒤로 미루면 그 후에는 어떻게든 핑계를 대서 거절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아! 그럼 더 좋죠. 원래 모든 힘이 빠져나가고 마음마저 텅 비었을 때 정령과의 감응이 가장 쉽게 된답니다."
...X발.
그냥 솔직히 불어? 공도 좀 세웠는데 이해해 주지 않을까?
아냐. 그래도 가능한 한 비밀로 하기로 아버지와 약속을 했는데.
아니, 그래도 이건 생명의 위기 같은데....
온갖 잡념들이 머릿속에 복잡하게 뒤섞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보기보다 겁이 많네요, 무노 경."
"헙!?"
휘이이이잉.
갑자기 불어온 바람이 그의 몸을 정령진 안쪽으로 끌어들였다.
'젠장!'
위기일발의 순간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벗어나자고 라스미아와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상대는 4서클의 마법사도 아닌, 4클래스의 정령사.
'차라리 마법사면 몰라.'
4성 기사와 맞먹는 초인을 힘으로 어쩔 수는 없을뿐더러.
'그랬다가는 악마의 종자로 낙인찍히겠지. 젠장.'
결국 무노는 눈을 감고 이를 악물며,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필사적으로 몸 안의 마력을 통제했다.
그런데.
우우우우웅.
"오오! 역시!"
감탄하는 듯한 라스미아의 목소리와 함께 스며들어 오는 따스하고 포근한 기운들은, 예상과는 달리 노곤한 몸의 피로를 씻어 주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게 마기랑 섞이면 폭발한다고?'
몸 안에서 마력과 서로 반발하기는커녕, 마기와 아주 비슷한... 아니, '똑같은 느낌'만 들 뿐이었다.
'어째서?'
그 이질적인 자연스러움은 곧 다른 의문으로 이어졌다.
내 몸 안에 있는 마기가 마나와 똑같다?
'아니, 그럼 잠깐....'
여태껏 떠올리지 못했던 근본적인 의문.
'내가 쓰는 에너지가, 마기가 맞나?'
마기를 포식하며 쌓아 온 기운이니, 당연히 그건 마기일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이상하긴 했다.
'내가 그놈들처럼 마기를 감추는 방법을 아는 것도 아닌데, 다른 사람들이 못 느끼는 것도 말이 안 되긴 하지.'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 스며들어 오는 힘과 자신의 몸 안에 있는 힘이 같은 '마나(Mana)'라면.
자신은, 악마포식자는 마기를 포식해서 마나를 생산한 것이 된다.
'그건 더 말이 안 되지 않나?'
마기가 세상의 이치를 흐트러트리고 자연을 오염시킨다는 것은 정령의 탑과 신전의 공통적인 주장이다.
그렇기에 마도 제국을 제외한 다른 왕국들이 마법사를 아예 배척하고, 받아들이더라도 많은 제약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 마기는 마나를 오염시킨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들어 보지 못했었는데....
'...안 될 건, 없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순간.
- 크크크.
악마포식자의 웃음소리가 뇌리와 가슴속에 퍼지는 것 같았다.
정답이라는 듯이 호응하는 느낌.
'하.... 괜히 긴장했네.'
그 순간부터 긴장이 풀린 무노는, 몸을 파고드는 에너지를 오히려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위해 애썼다.
정확한 방법은 몰랐기에 그저 스며드는 에너지를 향해 환영의 뜻을 전하는 것뿐이었지만.
"잘하고 있어요. 좀 더!"
라스미아의 반응을 보니 그리 틀린 선택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이내.
우우우우웅.
무노의 몸 안으로 파고든 네 가지 색깔의 기운이, 그중에서도 그에게 가장 잘 호응하는 갈색의 기운으로 모두 물들었다.
"호오. 땅의 원소 쪽에 재능이...!?"
라스미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갈색의 기운은 다시 한번 변화를 거쳐 회색으로 바뀌었다.
"엑!?"
그녀의 놀란 목소리에 괜히 심장이 덜컥하는 것 같았지만.
이내 집중해서 찬찬히 살펴보니, 그 단단하고 차가운 기운이 자신에게는 든든하게만 느껴졌다.
"씨앗 심기부터 세분화 원소? 이런 경우가 진짜 있다고...?"
라스미아의 당황하는 목소리가 이어질 때.
그 회색의 단단한 기운은 이내 무형의 씨앗으로 변해 무노의 심장 부근에 그대로 자리 잡았다.
자연스레 눈을 뜨는 순간, 그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라스미아와 시선이 마주쳤다.
"정말 아예 단일 원소 씨앗이 자리를 잡았네요. 거참."
무슨 뜻인지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공자, 아니 무노 경은 정말 저를 놀라게 하는군요."
그녀의 미소와는 별개로, 무노는 지금 새삼스럽게 든든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짐작이 가고 있었으니.
"그냥 공자라고 하셔도 됩니다. 아니면 그냥 무노라고 부르셔도 되고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아니, 그래도 정식 기사한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 분이잖아요. 클람 경에게도 아저씨라 부르는데요, 뭐. 괜찮습니다."
"아.... 하하. 그래. 그럼 편하게 말할게. 사실 나도 이게 편해. 아우, 어린애한테 존대하려니 닭살이.... 푸하하하."
가녀린 체격의 라스미아가 호탕하게 웃는데, 어쩐지 그녀에게는 그런 모습이 더 어울려 보였다.
"아무튼 잘됐어. 지금 너는 땅 속성 중에서도 아마 금속 원소에 특화된 씨앗이 심어진 상태야. 시작부터 이렇게 되는 경우는 나도 말로만 들어 봤는데."
"나쁜 겁니까?"
신기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라스미아의 눈빛에 자신도 모르게 불쑥 물었다.
그런데.
"음. 뭐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 좋다고 할 수도 없지만."
애매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게 무슨?"
"일반적으로 정령술은 자연과 친숙하고 그 힘에 두루 능통한 이들이 배우는 이능력이야. 그래서 일반적인 정령사는 나처럼 물, 불, 바람, 땅의 4대 원소 중 하나를 택해서 클래스(Class)를 정하고 다른 원소와 친화력을 높이거나, 세부 원소를 파고들어서 경지를 높이거든. 그런데...."
"그런데?"
"간혹 너처럼, 시작부터 4대 속성도 아니고 그 하위 속성 한 가지에 집중된 씨앗이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어."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제대로 성장하면 그 한 가지 원소의 지배력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는 최강의 정령사가 되는 거고...."
"오!?"
"대신 다른 원소 지배력이 전무한 반쪽짜리 정령사가 되는 것이기도 하지."
"...어?"
애매한 평가였지만, 생각해 보니 굳이 나쁠 것 같지도 않았다.
거기다 금속이라면.
'내 능력하고도 딱이지.'
몸으로 연결된 사슬과 갑옷. 그리고 의지만으로 금속을 움직이는 능력.
거기에 이제는 마나로 금속 원소를 지배하는 능력까지 보태진 것이니.
"이제 너는 심장에 새겨진 무형의 씨앗을 싹 틔우거나, 뿌리를 내리는 것부터 시작하면 돼. 어느 한쪽이라도 성공한다면 그때부터 바로 1클래스의 정령사가 되는 거야."
"예?"
"물론 그러자면 꽤 긴 시간 동안 마나를 축적해야겠지만, 씨앗이 심어진 이상 네가 정신을 집중하기만 하면 마나는 천천히 모일 거야. 혹시 명상하는 법도 필요하면 가르쳐 줄까?"
"아, 아니 괜찮습니다. 그냥 될 거 같거든요."
"...뭐?"
라스미아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사실 그녀의 설명을 들은 순간부터, 그 씨앗을 어떻게 발현시키면 될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이미 마나는 그 안에 꽤 많이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
'깨어나라!'
그의 의지에 따라 금속 조종 능력이 금속의 씨앗을 자극하는 순간.
콰지직.
그의 마음속에서만 들리는 파열음과 함께.
마나가 스며든 씨앗이 발아하여 심장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 무형의 회색 뿌리는 심장에서부터 모든 뼈, 혈관, 근육을 무시하거나 아우른 끝에 신체의 가장 말단, 두 발의 끝까지 가 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그는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금속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능력이 단숨에 몇 배로 증폭된 느낌.
"아니!? 어떻게 벌써...?!"
경악하는 라스미아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이거 잘하면 될 거 같은데....'
무노는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그 금속들을 한데 모으기 시작했다.
39화. 첫 번째 스펠
츠츠츠츠츠.
무노가 서 있는 땅이 서서히 회색으로 물들더니.
쿵.
그가 발을 구르자마자, 그 위로 기다란 회색의 금속 줄기 비슷한 것이 튀어나왔다.
"1클래스에 벌써 이런 지배력을...?"
라스미아의 놀란 목소리는 그저 귓가에 흘러갈 뿐.
한껏 정신을 집중한 무노는 눈앞으로 튀어 오른 금속 덩어리의 아래쪽 끝을 잡고 의지를 더욱 강화했다.
'변해라!'
상상하는 것은 그가 알고 있는 최고의 검.
츠츠츠츠.
손에 잡힌 뭉툭한 금속 줄기의 끝이 30cm가량의 탄탄한 손잡이로 변해 가고, 그 윗부분은 멋들어진 크로스가드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 위쪽으로는.
쩌저저정.
1m 50cm에 가까운 날카로운 검날이 순식간에 형성되었다.
형태가 굳어지는 순간, 무노의 손에서 흘러 들어간 마나가 그 검을 짙은 검은색으로 물들이는데.
우우우우웅.
검은 광택이 나는 거대한 투 핸디드 소드가 순식간에 만들어진 것이다.
"후아...."
무노는 자신이 만들어 낸 커다란 검을 보며 심호흡을 깊게 했다.
형태는 아버지의 아티팩트이자 애검인 슬레이어를 그대로 모방했지만, 손잡이부터 검날까지 까만색으로 물든 것이 그것과는 다른 독특한 매력을 풍겼다.
그리고 의지로 벼려진 검날은 슬레이어만큼은 못해도, 그가 아는 웬만한 검날보다 날카롭게 느껴졌다.
일정량의 마나가 흘러 들어간 결과, 강도 역시 일반적인 강철 검보다는 훨씬 단단해졌다는 것을 느낌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마나의 소모도 생각보다 적었다.
이게 내 '칼'이다.
스스로의 의지와 힘으로 만들어 낸 칼.
"마음에 들어."
싱긋 웃으며 혼잣말을 하는 순간, 허탈한 감정이 진하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씨앗을 심자마자 바로 뿌리를 내리고, 스펠까지 완성해? 어떻게...."
멍한 표정의 라스미아.
그녀를 보는 순간, 절로 감사한 마음에 고개가 숙어졌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큰 배움을 얻었습니다."
"아.... 그래. 내가 뭘 해 준 건지 나도 모르겠다만...."
"제가 원래부터 마나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도 제대로 인식 못 했었는데요."
말이 될 만한 설명을 적당히 주워섬겨 보는데.
"뭐? 그, 그런 경우도 있다고 들어보긴 했는데. 하, 정말 이게...."
다행히 그런 경우가 있긴 했나 보다.
"어이가 없네. 선천 마나 보유자에 특수 속성에. 하. 진짜...."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혼자 중얼거리던 라스미아는 이내 피식 웃더니 다가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렇게 되면, 바로 탑에 보고해도 되겠어."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겁니까?"
"너도 정령사의 길을 가다 보면, 어느 순간 성장이 막히는 때가 올 거야. 그리고 그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정령의 탑에서 수련하는 거지. 고위정령사를 만나 가르침을 받는 것도 좋지만, 이곳 북방에서야 평범한 정령사조차 보기 힘든 것이 현실이니까."
"아...."
무노에겐 그 말이 대번에 이해가 갔다.
스스로 한계를 깨고 나아가 더 나은 존재로 거듭난다는 기쁨, 그 황홀한 법열(法悅)은 강체술로 진화하여 성장할 때도 느껴 보았었으니.
"아무튼, 그게 네 첫 번째 스펠이구나. 시작부터 검이라니, 기사답다고 해야 할까."
"예?"
"정령사는 스스로 주문(Spell)을 만들어 가는 거야. 보통은 첫 번째 스펠에서부터 가지를 치듯 다음 단계로 뻗어 나가기 마련이고. 그래서 그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스펠을 만들 때 주의사항을 들어야 하는데, 너는 뭐 말도 하기 전에 그냥 주문을 만들어 버리니."
"아. 그게, 저, 죄송합니다."
그 맥락 없는 사과에 라스미아가 푸훗 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뭐, 죄송할 것까지는 없어. 일반적인 정령사에게 그런 최하급 아티팩트 수준의 검이 첫 번째 스펠인 건 최악이겠지만, 너에게는 딱 맞는 것이잖니."
"아...."
최하급이라는 수식어가 저렴하게 느껴지긴 해도, 일단 아티팩트 수준이라 평가되는 것만으로도 인정을 받은 기분이었다.
일반적으로 제련해서 만든 검으로는 넘볼 수 없는 수준이라는 뜻이니까.
손안에 꽉 쥔 검에서 느껴지는 충족감에 다시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고.
쿵.
파아아아앙!
가볍게 발걸음을 내디디며 세로로 휘둘러 본 검이 너무나 매끄럽게 공기를 터트렸다.
"다행히 고정형의 퍼스트 스펠이니 마나 소모도 거의 없겠지만, 그래도 예비용 검은 들고 다니도록 해. 적어도 3클래스는 되어야지 퍼스트 스펠을 계속 유지할 마나량이 될 거야. 그땐 소모량보다 회복력이 커지니까. 무슨 의미인지 알겠니?"
"...예."
"그리고 스펠을 쓸 때...."
라스미아는 자신이 알려 줄 수 있는 정령술의 기초를 다 쏟아 내기라도 하듯 긴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그 말을 듣고 있는 무노는 조금의 괴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냥 계속 유지될 것 같은데?'
그의 퍼스트 스펠, '칼(Blade)'은 처음 발현한 것임에도 어쩐지 익숙하기만 했다.
마치 평소에 항상 달고 다니는 보호대와 사슬과도 같았다.
즉 '칼'에 흘러 들어간 마나는, 그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또 하나의 몸속을 노니는 느낌인 것이다.
그것은 아마.
'내 초능력과 시너지 효과가 나서인 것 같은데.'
애초에 정령술의 씨앗이 금속으로 고정된 것도 그 초능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 나는 사슬의 악마, '&%@#'. 속박하고 억압하는 자.
그가 집어삼킨 악마 때문이던가.
'뭐, 어느 쪽이건 내겐 좋은 일이다.'
솔직히 강경 일변도의 드라센 대검술만 쓰게 되면 검이 금방 닳기 마련.
실제로 그가 드라센에서 들고나온 튼튼한 대검도 고작 두 번의 전투만으로 이가 많이 나가 있었다.
그중 한 번의 상대가 거의 손도 안 가는 강도 떼였음을 감안하면, 무기 소모는 꽤나 큰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드라센 대검술은 당연하게도 대검을 사용하는 검술이고,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해 그중에서도 특히 커다란 투 핸디드 소드에 가까운 무기를 사용하는 쪽으로 발전되었다.
'그렇다고 투 핸디드 소드를 여러 개나 짊어지고 다닐 수도 없고.'
그런데 이 '칼'이라는 주문 하나만으로도 그 부담이 사라지고, 아티팩트 급 무기가 생긴 것이다.
그것이 고작 1클래스, 정령술에 첫발을 내디딘 상태라는 것을 고려하면.
"스펠을 하나하나 만들어 갈수록 정령사의 경지는 심화되고, 또 다른 속성에 닿으면서 다음 경지에 도달하는 게 가능해지는 거야. 너 같은 경우라면, 더욱 세밀하게 금속 속성을 파고드는 것이 되겠지만...."
라스미아의 말대로, 향후 자신이 발전함에 따라 훨씬 좋은 '칼'로 거듭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수련 과정은 심화.... 흠, 흠. 내가 너무 말이 많았지? 정령과의 소통을 온전히 즐기지도 못하게. 마음이 급했나 봐. 너에겐 정령술의 길만 있는 것도 아닌데."
"아닙니다.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그럼 일단, 보고하는 것부터 도와줄래? 네 스펠도 통신구 앞에서 한번 보여 주고."
"...예?"
"말했잖아. 또 다른 정령사를 키워 내는 것은 정령사의 공적이 된다고. 나는 이제 네 덕분에 다시 탑에 들어가게 될 거야."
"그런데 외람된 말씀이지만, 왜 정령사의 수를 늘리는 게 공적이 됩니까? 보통 그런 비전이면 감추는 게 맞을 것 같은데...."
"옛날에는 그랬다는데, 이제는 아냐. 마도 제국 때문에 세상의 균형이 흐트러져 가는 지금, 한 명의 정령사라도 더 만들어 내서 그 균형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 탑의 지시이자 우리 정령사의 의무이니까."
"예?"
"너도 세상을 구성하는 원소, 정령과 소통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느끼게 될 거야. 우리가 마법사를 왜 증오하는지도 말이지. 뭐, 그건 그거고. 자, 일단 가자."
잠시간 섬뜩하게 눈을 빛낸 라스미아가 이내 그를 강제로 잡아끌었고.
결국 무노는 콘넬의 통신구 앞에서, 처음 보는 흰 수염 할아버지 앞에서 다시금 '칼'의 스펠을 시연해 보여야만 했다.
그리고 바로 그날 오후.
"각하! 저, 다 때려치우고 탑으로 돌아갑니다!"
[뭐!?]
라스미아는 정령의 탑으로 가겠다고 에녹 트리안에게 선언하듯 보고했고.
영지의 유일한 정령사를 잃어버리게 생긴 백작이 필사적으로 그녀를 붙잡은 끝에, 이 사태를 해결할 때까지만이라는 전제를 붙여 그 결단을 유예시켰다.
그리고 콘넬에 더 이상 마기를 지닌 존재가 없음을 확인한 무노는, 클람과 라스미아와 함께 다시 트리안으로 향했다.
물론 조사단장인 티넬과 다른 기사들은 콘넬에 그대로 남았다.
- 놈들이 드라센에서 일을 벌일 때, 콘넬의 기사들도 동조했었다고 들었다.
- 마기사가 아니더라도, 은밀히 손잡은 놈들이 있을지 몰라. 좀 더 확인해 봐야 한다.
- 영주가 죽은 영지도 수습해야 하고.
그렇기에 트리안으로 돌아가는 일행은 그 셋뿐이었지만.
4성 기사와 4클래스의 정령사가 마기를 꿰뚫어 보는 것으로 알려진(?) 무노와 함께하는 일행은, 이 시대 기준으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었다.
사교, 악마교의 습격을 대비하기에도 충분할 정도로.
하지만.
트리안으로 향하는 나흘 동안, 그들은 그 어떤 습격도 받지 않았다.
"강도라도 나왔으면 좋겠네...."
'칼'을 쓰고 싶어서 근질근질한 무노가 일행의 눈총을 받을 정도로.
물론 단순히 새로 얻은 힘을 시험해 보고 싶은 치기 어린 마음만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놈들, 최대한 빨리 처리해야 하는데.'
힘을 얻어 갈수록, 자유로운 삶이 가까워지는 기분이긴 했지만.
현생의 탄생 때부터 이어진 악연을 뿌리 뽑지 않고서는 속 시원하게 세상에 나설 수가 없을 것 같았으니까.
* * *
"그러니까 말씀드렸잖습니까. 제가 혼자 밖에 돌아다니기라도 해야 놈들이 나올 거라니까요?"
평온하기만 한 야영지, 석양이 저물어 가는 공터에서 무노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답답한 마음을 한껏 호소해 봤지만, 그를 보는 클람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더군다나.
"정령술까지 익혔으니 간이 부은 건 이해한다만, 저번의 전투를 기억하거라. 넌 나 없으면 죽었었어."
치명적으로 급소를 후려갈기는 팩트 폭행에는 반박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적당한 거리에서 따라오시라니까요. 아저씨가 안 되면 라스미아 아줌...."
어떻게든 클람을 설득하고 싶었던 무노가 다른 방안을 내밀어 보려던 그때, 서늘한 살기가 그의 뒤통수를 엄습했다.
"죽. 고. 싶. 니!? 뭐?"
살기만이 아니었다.
목 앞에 바람의 칼날이 들이닥치는 것이 이제는 정령사이기도 한 그에겐 너무나도 잘 느껴졌는데.
'...편하게 대하라면서. 씨.'
꿀꺽.
하지만 속마음을 그대로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탑으로 곧바로 돌아가려다 발목을 잡힌 라스미아가 하루하루 신경질적으로 변해 가고 있는 것을 곁에서 직접 지켜봤으니.
지금은 기어야 할 때였다.
"...'누님'이라도 멀리서 저를 지켜보시면 되잖습니까. 제가 아무리 먹음직스러운 미끼라도, 이런 식이면 물고기가 물겠냐고요. 이미 놈들도 손해를 꽤 봤을 텐데."
"어머, 얘는. 그렇다고 누님이라고 할 것까지야...."
화내다 갑자기 웃지 마요.
'무서우니까. 진짜로....'
어쩐지 이 남매는 캐릭터가 갈수록 첫인상과는 달라지는 것이 공통점인 것 같았다.
클람 역시 좋으면서 싫은 척하는 동생을 떨떠름한 표정으로 째려보다가, 다시 무노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네 뜻은 알겠다만, 각하께서 그걸 허락하지 않으신다. 좀 더 정확히는, 라이언이 각하를 통해 반대하는 거지. 네 아. 버. 지. 가."
"끄응...."
역시 무작정 그냥 질러야 했을까.
부모님의 사랑이 오히려 장애물이 될 줄은 예상조차 못 했다.
'드라센에서는 미끼 작전 수락했으면서.'
그래 놓고는 막상 연달아 너무 큰 물고기가 물리자, 아무래도 아버지께서 부성애가 솟구치신 모양이었다.
답답했지만, 티넬이 그의 미끼 작전을 허락하지 않는 이유는 또 있었다.
굳이 작전 같은 걸 쓰지 않아도 될 만한 일이 그사이에 밝혀진 것이다.
그것도 꽤나 놀라운 방향으로.
"그런데 트리안의 첩자가 대공자라는 것 정말 사실입니까?"
"각하께서 우리의 진짜 경로를 말한 것이 대공자님뿐이라고 하니...."
"거참 이상하네요."
"그래. 그래서 문제다."
트리안의 다음 영주, 아이언 왕국 북부의 지배자가 될 사람이 미치지 않고서야 마법사와 손을 잡을 리가 없다.
'그리 멍청해 보이지는 않았는데.'
첫인상은 최악이긴 했지만, 교활하면 교활했지 사리 분별도 못 할 것처럼 보이진 않았었다.
"그러니까 각하께서 너를 기다리고 계신 것이야. 사제나 정령사도 뚫어보지 못한 놈들의 수법을 밝혀낸 네가 트리안에 도착하기를."
"대공자에게선 마기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 확인해 보라는 거지. 진짜 첩자가 따로 있다면 그놈을 찾고. 그게 먼저다."
애초에 트리안을 나서기 전에 백작 주변 인물들을 다 살펴보고 올 걸 그랬다.
당시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이 일을 귀찮게 만들었다.
'이제라도 돌아가서 첩자를 발견하게 되면 다행이지만.'
그게 쉬울까?
"...각하께서 바라시는 것은 아마 대공자의 결백을 제가 증명해드리는 거겠지요?"
"그렇지."
대공자의 혐의를 벗기지 못한다면, 트리안에서는 혼란이 지속될 테니까.
하지만 정말 대공자가 결백하다면, 놈들을 쫓을 단서가 더는 남지 않게 된다.
그럼 그때는....
'정말로 혼자서라도 미끼 작전을 실행해야지.'
클람의 걱정과는 달리 그게 무모한 일이라 생각지는 않았다.
'그때와 지금의 난 또 달라.'
무노는 만들어진 지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등 뒤의 '칼'을 툭 건드려 보았다.
- 음? 그게 어떻게 계속 유지되는 거니?
라스미아가 아직도 신기하게 보는 그의 최초의 스펠.
우우웅.
잘게 울리는 칼의 진동에,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40화. 첩자?
"트리안에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충!"
경례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클람과 라스미아.
성문을 지키던 기사가 두 남매의 앞에서 검을 들어 올리며 자리를 비켜서자.
도열한 트리안의 병력이 상인들의 출입을 막고 있는 그 너른 길로, 세 마리 말이 터벅터벅 걸어 들어갔다.
그 광경은 자연히 모두의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는데.
더구나 셋 다 보기 드문 파란 머리와 검은 머리였고.
특히 검은 머리의 젊은 기사는 팔다리에 투박하고 특이한 갑옷까지 장착한 데다가 온통 새까만 검까지 등에 매고 있었으니.
"기사님들인가?"
"그것도 꽤 높은 신분 같은데."
"저기 검은 머리 청년은 굉장히 어려 보이는데?"
"어디 도련님인가 보지. 복장도 범상치 않고...."
"이 북방에 검은 머리 귀족이 있나? 동방이나 남방의 나라도 아니고."
무노는 상인들이 나누는 대화를 한 귀로 듣고 흘리며 악마포식자의 감각으로 다시 주변을 훑었다.
'아직도....'
슥 둘러본 이곳에서는 여전히 마기를 가진 자가 보이지 않았다.
'정말 포기한 건가.'
혹시나 습격이 있을까 신경을 곤두세우며 트리안까지 왔는데,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이 묘하게 찝찝했다.
그가 애머스를 처리한 후 드라센에 다음 마법사가 나타나기까지는 사흘밖에 안 걸렸었고.
클람과 함께 관도에서 습격을 받은 건 트리안에서 출발한 지 고작 하루 만의 일이었다.
그간의 패턴을 생각하면, 이미 놈들이 덤비고도 남을 시간이 한참 지났다는 얘기다.
'포기한 건 아닐 거야. 클람, 라스미아 남매가 함께하고 있어서겠지?'
그렇게 생각해야 그나마 납득이 될 것 같았다.
놈들이 포기하고 숨어 버렸다는 가정은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 크레이멀이 하수인이라면, 그 배후는 세븐스타다. 그렇게 가정하면 너무 위험하고 말도 안....
아버지나 에녹 백작의 걱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아무리 초인 중의 초인인 세븐스타라 해도, 결국 한 명의 인간일 뿐이다.
국가의 중요 전력쯤으로 취급받는 거물이 고작 자신을 잡으러 직접 나설 리도 없고.
'내가 그 배후를 직접 때려잡을 필요는 없어. 간간이 모습을 드러내는 놈들을 엮어서 본거지를 찾아내면, 왕국에서 직접 그 뿌리를 뽑고 싶어서 안달 낼 테니까.'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은 오직 미끼. 조금 더 보태자면 대어가 아닌 피라미들을 해체할 칼날 정도면 충분했다.
'아쉽지만....'
고작 그 정도의 역할로 원한을 갚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다.
'아직은 내 힘이 모자라니까.'
우드득.
움켜쥔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것과는 별개로, 그 정도 현실 인식쯤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행은 그와는 생각이 많이 다른 것 같았다.
"촌스럽게 두리번거리지 말고 얼른 따라오거라. 갈 길이 급하니."
"오라버니도 참. 평생 드라센에서 산 아이잖아요. 트리안이 화려하게 느껴지겠죠."
...그럴 리가.
일행이 성문을 지나자 무노의 시선이 시장 골목으로 돌아갔다.
- 수도에서 온 제... 으음, '그 나라'산 비단 있어요!
- 남부의 싱싱한 과일...!
- 정력에 좋은 렌탄의 고기가 단돈...!
와글와글.
물론 드라센처럼 가죽이나 식료품만 파는 것이 아닌 수많은 사람이 북적이는 커다란 시장은 그 자체로 볼거리라 할 만했다.
그러나.
'그래 봤자 좀 큰 재래시장 정도지.... 신기한 물건이 좀 있는.'
무노의 시선이 시장 한가운데 전시된 3개의 뿔이 달린 몬스터의 커다란 머리에 잠깐 머물렀다.
'저건, 아직도 마기가 좀 남아 있네. 누가 잡은 거야 대체....'
쯧.
인구 천만의 도심에 살던 전생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니, 잘해야 십만이 될까 말까 한 판타지 세상 도시의 시장은 화려하기보다는 번잡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래도 이 일이 더 급해, 무노!"
"예. 갑니다."
아무리 훑어봐도 마기가 느껴지는 이는 없었다.
물론 마법사나 그 하수인이 시장에서 물건이나 팔고 있겠냐마는, 도무지 오지 않는 입질에 무노의 마음은 조금씩 답답해질 뿐이었다.
그가 그렇게 일행을 따라 내성을 향해 들어갈 때.
그 감각이 닿지 않는 시장의 한구석에서, 그런 무노를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그에게 임무를 전하라. 정말 놈이 '장막'을 뚫어 보는지 확인한다."
"예. 하지만 정말 이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지금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놈의 능력을 확인할 기회이기도 하다. 성공하면 좋고, 실패하더라도 북방에 혼란을 더하게 된다. 이조차 그분의 뜻이니 토 달지 마라."
"...예."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 그림자들의 목소리는 골목 안에서 메아리치다가 금세 사라졌다.
* * *
"그래, 고생했다. 모에노 그 녀석이 마법사였다니, 참 세상이 어찌 되려고 그런 황당한 일이...."
거의 보름 만에 다시 만난 에녹 백작은 그사이 살짝 늙은 듯 보였다.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들었던 산맥 같은 분위기 대신, 사방을 어둡게 억누르는 음울한 기운을 사방으로 뿌려 대고 있었는데.
그게 비유가 아니라 진짜 현상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에녹 트리안이라는 덩치 큰 노인을 중심으로 주변 공간이 회색으로 물들어 가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실제로 그에게 무언가를 보고하던 행정관이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다가 우당탕 엉덩방아를 찍는 것이 보였다.
"죄송합니다. 가, 각하."
"아닐세. 자넨 들어가 봐."
"가, 감사합니다!"
식은땀을 흘리던 행정관이 반색하며 후다닥 사라질 때.
무노는 신기한 눈으로 그런 백작의 모습과 주변의 기운을 눈에 담고 있었다.
'전에는 몰랐는데, 저것도 마나다. 마나가 주인의 감정에 따라 주변에 영향을 끼치는 거야.'
6성 기사, 여섯 번의 진화를 끝낸 초인이라면 자연스럽게 마나가 생기는 것일까.
아니면, 트리안에 내려오는 비전이 있다거나.
'백작도 정령사거나.'
셋 중 하나일 것 같은데, 차마 대놓고 물어볼 분위기는 아니었다.
'아마 비전 같은 거겠지?'
- 드라센 가문의 선조께선 이 폭식의 강체술과 드라센 대검술로 세븐스타에 오르셨던 분이다.
아버지에 말이 사실이라면, 그 조상님은 세븐스타가 되고도 끝내 마나를 다루지 못했었다는 뜻이 된다.
아니면 본인은 다루게 되었더라도 그걸 비전으로 남기지는 못했다거나.
드라센 대검술의 단점을 보완할 길을 찾고 있는 그로선 호기심이 일었다.
'악마포식자야 남에게 전할 수 없다 해도, 어딘가에는 마나를 생성하는 비결이 적힌 비전이 있지 않을까?'
가문에 은혜 갚기 프로젝트의 일환.
부모님이야 그럴 필요 없다 하시지만, 스스로가 떳떳해지는 데 그보다 좋은 방법이 없을 테니 관심이 안 갈 리가 없다.
'하지만 설령 그런 비전이 존재한다 한들, 외부인에게 알려 줄 것은 아니겠....'
"무노, 무노 드라센!"
끝없이 이어지던 상념은 귓가를 울리는 중후한 목소리에 단숨에 깨어져 나갔다.
"아. 예!?"
"아까부터 불렀는데 무슨 생각을 그리하느냐? 젊은 녀석이 할애비 약 올리려고 일부러 딴청 부리는 게냐? 아니면, 그새 격이 올랐다고 유세라도 떠는 거냐?"
피식 웃는 백작의 모습은 좀 전의 음울한 분위기를 이미 많이 덜어 낸 상태였다.
어쩌면 벌써 무노가 2성에 다다랐다는 사실이 그나마 그의 기분을 좋게 만든 걸지도 몰랐다.
"그럴 리가요. 그냥 다른 생각을 좀 하느라.... 죄송합니다. 다시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어떻게 벌써 두 번째 진화를 했는지, 그 경험담을 묻고 있다. 네 녀석에게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만, 고작 열여섯에 두 번째 진화를 했다면 또 얘기가 다른 거니까. 이 할애비의 궁금증을 풀어 줄 수 있겠느냐?"
"그게 마법사들과 싸우다 보니, 그냥...."
"목숨을 건 격전이 사람을 성장시키기는 하지만, 이미 진화를 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녀석이 또 도약하는 건 정말 특이한 경우인데...."
"제가 재능이 넘치나 보죠."
"푸하하. 이 녀석 정말...."
딴에는 적당히 뻔뻔하게 넘어가려 한 거였는데, 옆의 클람이나 라스미아의 표정은 확 굳어 있었다.
'뭐, 이게 그렇게 큰 실례야? 이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살짝 당혹스러웠는데.
클람이 굳은 얼굴로 백작에게 따지듯 물었다.
"할애비라니요, 각하? 설마 무노를 정식 손자로 인정...."
"쓸데없는 소리! 가뜩이나 케인 녀석과 로안나 때문에 머리가 아프구만, 네 녀석까지 헛소리를 할 셈이냐!?"
"하지만 각하...."
"그만! 내 딸이 인정한 아들이다. 공식 석상도 아니고 우리끼리 있는 자리에서 그 호칭 하나 때문에 이러쿵저러쿵하지 말거라."
엄연히 따지자면 외손주가 맞긴 한데, 양자라는 사실 때문에 정식으로 받아들여지긴 어려운 모양이었다.
'귀족이라는 게, 참....'
새삼스레 입에 쓴맛이 도는 듯한데.
"아니, 그래도...."
"네 녀석도 빨리 장가가서 아들 낳으면 손자 대접해 주마. 손녀면 더 좋고. 쯧쯧. 곧 오십인 놈이 아직도 장가갈 생각 안 하고 동생 탓만 하고 있으니...."
"제가 언제...!"
"아니, 오라버니! 아직도 내 핑계 대고 있어요?!"
"하? 네가 울면서 내 결혼식엔 꼭 참석하겠다고 했잖느냐! 하나뿐인 가족이라고! 그런 녀석이 30년 뒤에 나타나 놓고 그게 할 소리냐!?"
"30년이 아니라 25년... 아니, 진짜 결혼 못 한 걸 내 탓으로 치는 거야!?"
갑자기 대화의 주제가 클람 남매의 다툼으로 넘어가 버려 황당했다.
'이게 과연 40대의 대화인가....'
역시 이 남매는 신기하다.
무노가 중년 남매의 어이없는 다툼을 혀를 차며 바라보고 있는데.
백작이 거기에 기름을 부었다.
"그래. 라미 너는 시집도 안 간 녀석이 30년간 몸담고 있던 그 탑인지 뭔지에 또 가겠다면서 집 나간다는 소리를 하고 있고?"
"30년이 아니라 25년... 아니, 각하! 언제든 보내 준다고 약속하셨잖아요!"
"내가 네 녀석한테 투자한 게 얼마인데 고작 몇 년 써먹고...."
"뭐? 또 간다고!? 너 미쳤냐!? 시집갈 생각을 해야지, 가뜩이나 못생긴 애가...!"
"오라버니, 나랑 똑같이 생겼거든!? 아니, 자기나 장가가야지. 왜 나한테...."
"쯧쯧. 철딱서니 없는 것들...."
...할배요.
'할배도 지금 굉장히 비슷해 보이거든요.'
무노는 차마 뱉어 낼 수 없는 마음의 소리를 억지로 삼키며, 이제는 흥미진진한 눈으로 그들의 다툼을 지켜보았다.
과연 이 난장판은 어디까지 이어질까 싶을 때.
백작이 갑자기 판을 엎었다.
"에잉! 둘 다 그만두거라. 조카뻘 아이 보기 부끄럽지도 않느냐!"
...자기가 기름 부어 놓고.
아쉬운 마음을 숨기며 백작을 바라보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제야 본론이 나왔다.
"다시 묻겠다, 무노야. 네가 라미나 사제들도 눈치채지 못한 마법사의 술수를 깨트렸다는 게 사실이냐?"
"예. 사실입니다."
"허어.... 보고를 받았을 때 정말 당혹스러웠던 게 그것 때문인데...."
대답이 너무 당당했는지, 혼란한 백작의 시선이 철없는 중년 남매를 향하는데.
"확실합니다."
"저희도 확인했습니다."
여전히 서로를 보며 으르렁거리던 남매가 그때만큼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쓴웃음을 지은 백작의 시선이 다시 무노에게 돌아왔다.
"들어도 믿을 수가 없지만, 믿어야겠지."
상식적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인데, 실제로 일어났으니 믿겠다.
대충 그런 의미인 것 같았다.
"그게 다른 사람에게도 가능한 방법이더냐?"
"아, 아마 아닐 겁니다. 순전히 감으로 느끼는 거라서...."
악마포식자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할 순 없으니 적당히 말을 흐렸지만, 다행히 백작은 거기서 더 파고들지 않았다.
"역시 그렇군. 후. 뭐, 오면서 얘기를 들었겠지만, 먼저 내 아들과 그 주변을 확인해 줘야겠다. 너희들이 콘넬을 향하다가 습격을 받았다는 경로. 내가 그것을 공유한 것은 케인 녀석뿐이니까."
그 말을 하는 순간 백작의 음울한 기운이 더욱 커지는 느낌을 받았지만, 무노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케인 대공자님은 이미 전에 한 번 뵀습니다. 분명히 마법의 흔적은 없었습니다."
그 말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을까.
백작이 조금은 안도하는 듯했다.
"...그래. 그나마 다행이구나."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주변을 음울하게 물들이던 기운이 조금 줄어드는 게 보인 것이다.
'가만, 이거 나만 보이나?'
그럼에도 막상 클람이나 라스미아는 미동도 없는 것을 보니, 새삼 묘한 생각이 드는데.
"아무튼 케인 녀석뿐만 아니라, 그 녀석과 가까운 주변 인물들까지 다 살펴보거라. 미리 얘기는 해 놨으니 반발은 없을 게야."
백작의 확신 어린 목소리가 오히려 그를 찜찜하게 만들었다.
처음 트리안에서 백작을 만나기 전 스쳤던 케인의 음흉한 모습을 떠올려 보면.
'반발이 없을 리가 없을 것 같은데.'
어쨌건, 이 상황에서 다른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바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래. 먼 길 왔는데, 쉴 시간도 주지 않아 미안하다. 추후에 확실히 보상해 줄 테니. 조금만 힘써 다오."
오, 보상.
백작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허튼소리는 하지 않을 테니, 기대해도 좋을 듯했다.
거기다.
"너희들도 무노와 함께해 주거라. 지금은 이 아이에게 힘을 실어줘야 하니."
"예. 각하."
든든한 원군까지 지원받았으니, 발걸음은 더욱 가벼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센의 애송이가 내 식솔들을 수사하겠다는 거냐? 지금?"
케인 트리안의 태도는, 예상 그대로였다.
41화. 찾았다
"드라센의 애송이가 내 식솔들을 수사하겠다는 거냐? 지금?"
케인 트리안의 표정은 완벽하게 구겨져 있었다.
이미 얘기를 해 놨다던 백작의 말이 무색해지는 반응.
그에 클람이 한숨을 내쉬며 뭐라 입을 열려는 순간.
"에녹 트리안 백작님의 지시를 거부하시겠다는 겁니까?"
뒤쪽에 있던 무노의 목소리가 먼저 울려 퍼졌다.
그에 케인의 얼굴이 더욱 구겨지는데.
"그냥 각하께, '대공자님이 싫다고 하시는데요?'라고 전해 드리면 되나요?"
그 빙글빙글 웃는 표정이 거슬렸는지 그는 살벌한 눈으로 무노를 노려보았다.
"절차를 묻는 거다, 절차를! 감히 통지도 없이 그냥 찾아오다니...!"
"그러니까, 아무리 각하의 명령이라도 대공자님의 허락을 받고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말이죠? 그대로 전해 드려요?"
"...너, 어디서 작위도 없는 건방진 애송이가...!"
"기사 작위라면 있습니다만? 그것도 각하께서 직접 하사하신 건데요."
무노가 품속에서 은빛 신분패를 꺼내 들며 빙긋 웃음을 지어 보이는 순간.
"너, 너, 네놈...."
케인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붉어졌다.
'재밌네.'
이래서 사람은 줄을 잘 서야 한다고 하는 건가.
트리안의 최고 권력자를 등에 업은 기분이 아주 상쾌했다.
물론 조금 이상하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어깃장을 놓는다고?'
하지만 일행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너, 어쩌려고...."
"적당히 해."
...왜 나한테, 씁.
무노는 클람과 라스미아가 속삭이듯 하는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생각할수록 이상했으니까.
'이렇게 멍청한 놈일 리가 없는데?'
고작 애송이의 도발에 이렇게 갑자기 흥분할 정도의 인간이었다면, 아버지가 그리 주의하라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백작이 그 속 좁은 성격을 염려하면서도 영지의 실무를 맡길만한 똑똑함이, 지금의 놈에게선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법에 걸린 것 같지는 않고....'
그는 자연스레 시선을 옮겨 케인의 주변을 훑었다.
"네놈이 지금은 아버지를 믿고 그리 방자하게 나선다만, 일이 끝났을 때 어찌 될지는 상상하고 지껄이는 말이렷다?"
가까스로 분노를 참아 낸 듯 떨리는 목소리로 나직이 뱉는 말은 들은 대로 오만했지만.
정작 무노의 귀에는 그의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가짜...도 아닌 것 같고.'
아무리 살펴봐도 놈에게서는 마법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는 건, 주변에서 똑똑하다 평가받는 케인이 이렇게 뻔한 무리수를 두고 있다는 뜻.
분명 그러는 이유가 있을 텐....
'음?'
그때, 놈의 주변인 가운데에 무노의 감각에 걸리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인상이 일그러지는 순간.
[무노, 시종 중에....]
바람에 실려 온 라스미아의 목소리가 그 짐작을 확인시켜 줬다.
"네놈, 지금 나를 무시...!"
"이상하네요. 이렇게 과민 반응을 하시는 게. 혹시 여기에 잘 보여야 할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
애써 냉정을 연기하던 케인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한 박자 늦게 고함을 질러 보지만, 주변의 시선은 이미 무노의 눈을 따라 옆에 늘어서 있는 시종들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러자 그중 다른 이들과 함께 고개를 숙이고 시립해 있던 중년의 시종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시종의 몸이 번쩍하고 빛나며 사라지는가 싶더니, 그 자리에 인상 좋아 보이는 뚱뚱한 중년인이 나타났고.
그 옆에 서 있던 경비병은 번뜩이는 하프 플레이트 메일을 입은 주름 가득한 백발의 매부리코 노기사의 모습으로 변했다.
"허허. 이거 공식적인 방문이 아닌 터라 잠시 면피하려던 것이 젊은 공자님 눈에 띄었군요. 죄송합니다, 콜리드 님. 제가 괜히 숨자고 해서...."
"괜찮다. 나도 동의했으니."
뚱뚱한 중년인이 같이 나타난 노기사에게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무노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드라센의 천재 기사라더니, 혹시 정령의 축복까지 받으셨습니까? 아니면 역시나 트리안의 폭풍... 님이시려나."
라스미아를 슬쩍 바라보는 능글맞은 중년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질 때.
"아슬란 공작가? 대공자님, 이게 무슨...?"
클람은 인상을 찡그리며 그 중년인과 노기사, 그리고 케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눈앞에 나타난 매부리코 노기사의 갑옷과 중년인의 고급스러운 로브에 보란 듯이 찍힌 회색의 방패 문양이 그 소속을 나타내 주고 있었으니.
하지만 정작 그들의 정체를 가려낸 장본인인 무노는 속으로 깜짝 놀라고 있었다.
그에겐 애초에 수준조차 짐작이 안 가는 저 중년인의 '빛의 정령술'을 발견할 능력이 없었다.
그가 발견한 이질감은 당연히 '사냥감'에 관한 것. 그저 조금 짙다 싶던 마나의 향기 속에 숨어 있었던 이질적인 에너지.
바로, 저 노년의 기사에게서 감지된 마기였다.
'마기가 확실하게 느껴지는데, 다른 게 더 신경에 거슬린다. 이건....
마기사.
혹자는 마병(魔兵) 혹은 마졸(魔卒) 등으로 폄하하여 부르는, 악마와 계약한 강체술사.
느껴지는 마기는 일전에 보았던 4서클 마법사보다 약했다.
하지만 강체술 수준은 섣불리 짐작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심지어 클람이나 아버지보다 더 묵직하게 느껴지는 질량감이라니.
그렇다면 적어도....
'5성. X발....'
거기다.
'약이라도 했나? 눈이 왜 저래?'
노년의 기사의 크고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자신을 직시하는 것을 본 무노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저자의 정체를 당장 여기서 까발렸다가는 정말 난리가 날 것 같았다.
저 기사와 정령사가 우리의 적이라면.
'이건 할배한테 알려야 해.'
복잡해지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억지로 그들을 무시하고 케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그 아슬란 공작가 소속 기사님과 정령사분이 여기엔 무슨 일로 오셨을까요, 대공자님?"
하지만 케인은 그저 썩은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고, 대신 뚱뚱한 중년인이 다시 나섰다.
"아, 케인 백작.... 아, 아직은 아니시죠? 케인 공자님께서 따님과 본 가문 사이의 혼사를 청하셨었는데, 그 일이 틀어지는 바람에 제가 확인차 들렀던 겁니다."
아.
그제야 로안나에게 들었던 가문의 이름이 새삼 떠오르는데.
무노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신경질적인 표정의 클람이 먼저 나섰다.
"우리 각하의 허락도 없이 말이오? 그것도 5성 기사와 4클래스의 정령사가!? 이건 대놓고 트리안과 싸우자는 거 아닌가!"
그의 고함 소리에는 분노와 긴장감이 서려 있었는데.
중년인은 고개를 숙여 보이며 대답했다.
"그거야 일반적인 귀족 가문에서나 그렇겠지요."
"그게 무슨 헛소리...!"
"무려 북부의 방벽이라 불리시는 에녹 트리안 백작님께서, 저희가 숨어든다고 어찌 되시겠습니까? 그걸 알기에 케인 공자님도 수락하신 겁니다."
"...하."
"뭐 그래도 저희가 잠행한 이유를 굳이 물으신다면, 존경해 마지않는 북부의 방벽, 에녹 각하를 이미 어긋난 일 때문에 번거롭게 해드리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케인 공자님?"
"크흠. 그렇다."
"공자님! 그렇다 해도, 이것은 명백히 결례입니다. 각하께서 아슬란에 따지고 들 만한...!"
"물론! 제 주군께서도 성의를 다해 사과 표시를 하실 겁니다. 그 전에 먼저 이 환술사 라즈만이 여러분께, 트리안을 기만하려 했던 것을 대표로 사죄드립니다."
솔직히 납득할 수 없는 논리였지만, 저들이 이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오자 클람은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사과의 표시는 확실해야 할 거요."
"물론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콜리드 님?"
"당연한 일이다. 대아슬란 가문의 아량은 그리 옹졸하지 않으니. 그대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놈들이 숨어 있었나 싶었지만.
이 상황에 더 따지고 드는 것은 싸우자는 거다.
그리고 정말 싸우게 되면.
'피 보는 건 우리다. 씁.'
다행히 클람은 더 이상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는데.
이 상황에서 케인이 얼굴을 슬쩍 붉히며 이를 악무는 모습을, 무노는 놓치지 않았다.
'저놈이 속 좁은 건 확실하고.'
그러니 공작가의 사절(?)이 보는 앞에서 면을 세우고 싶었을 것이다.
그가 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헛짓거리였지만, 전생에도 하등 쓸모없어 보이는 체면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은 있었다.
'한심하긴....'
그리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당장 저 마약이라도 한 것 같은 마기사의 살짝 맛이 간 눈동자가 더 신경 쓰였으니까.
'안전하게 저자를 처리하려면, 이 상황을 백작 영감님한테 전해야 해.'
다만, 그러면서 살짝 걱정이 되는 것은.
어찌 백작에게 전한다 쳐도, '저 수법'으로 정체를 감추고 있는 자를 무슨 증거로 마기사로 지목하냐는 것이었다.
만약 저자가 남들 앞에서 끝까지 마기의 흔적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진짜 곤란해진다.
자신이 손을 써서 제압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니까.
'백작이 강제로라도 손을 써서 제압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장막을 깰 수 있어. 모에노 때처럼. 하지만 어떻게?'
심각한 고민거리가 생겼다.
하지만.
'일단 눈에 들어왔는데 그냥 보낼 순 없지.'
문득 마주친 눈동자, 살짝 붉게 달아오른 노기사의 눈빛은 아무리 봐도 정상으로 보이지가 않았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어떻게든 해 봐야 했다.
"뭐, 공작가의 불청객은 대공자님이 알아서 접대하시고요. 어쨌든 저는 각하께서 시키신 대로 뭘 좀 여쭤봐야겠습니다. 케인 공자님, 저와 클람 님이 콘넬로 떠나던 날에 그 경로를 누구한테 공유하셨는지 얘기해 주시죠."
물론 그 질문의 답은 이미 나온 것 같긴 했다.
"네놈이 이 상황에서 감히...."
케인이 이를 악물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것이 보였지만, 지금 저 속 좁은 놈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무노는 케인을 바라보면서도, 그 옆의 매부리코 노인 기사에게 온통 신경을 쏟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 사죄의 의미로, 저 젊은 청년에게 한 수 가르쳐 주고 싶구만."
날카로운 인상의 그 매부리코 노인, 마기사 콜리드가 어이없는 말을 꺼냈다.
"...예?"
이게 무슨 급발진인가.
"아직 스물도 안 되어 보이는데, 두 번의 진화를 한 듯하군. 듣던 것보다 더해. 인생의 선배로서 젊은 천재에게 좀 더 넓은 세상을 보여 주고 싶음이야."
갑자기 웬 미친 소리인가 싶었다.
뜬금없는 소리도 정도껏 해야지.
'듣던 것보다 더하다니?'
마치 자신을 안다는 듯 말하는 것도 찜찜하기만 했다.
'아니, 알겠지. 놈들의 하수인이라면.'
하지만 그렇다 쳐도 느낌이 영 이상했다.
점점 집요하게 자신을 따라붙는 눈빛이, 전생에 한 번 보았던 마약쟁이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정말 마약을 한 건 아닐 테고. 아니, 마기가 마약보다 더한가? 진짜 미친 건 아니겠지?'
애써 불안감을 감춰 보는데.
"예? 콜리드 경? 갑자기 무슨?"
그 제안이 이상하게 느껴진 것은 저쪽 편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하지만 콜리드가 눈짓하는 순간, 정령사 라즈만은 어색하게 웃으며 무노를 돌아보았다.
"아, 아무튼 좋은 기회입니다, 공자. 콜리드 경은 5성의 벽에 20년 동안이나 막혀 있었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수련하여 결국 진화를 이뤄 낸 기사의 귀감이니, 분명 크게 배울 만한 점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 20년 동안 막혀 있어서 혼을 팔았.... 어?'
속으로 비웃다 보니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저런 말을 자랑스레 한다?
좀 전의 반응도 그렇고.
설마....
"...모르나?"
"예?"
"아, 아닙니다."
생각해 보면 케인은 마법사와 손을 잡을 이유가 없다.
속 좁은 그놈이 멍청하기까지 한 게 아니라면 말이다.
'상식적으로 케인은 모른다고 봐야 해.'
그럼 이 정령사는?
'모르겠어. 한패인지 아닌지.'
확신 없는 도박을 걸어 볼 만한 상황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핑계를 대려던 순간.
문득 라스미아가 했던 말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 정령과 소통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느끼게 될 거야. 우리가 마법사를 왜 증오하는지도....
정령사라면 당연히 마법사를 증오하게 된다는 말.
확인이 필요했다.
"...저에 대해 아십니까?"
"당연하지요. 드라센의 천재 기사. 지금 북부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이름 아닙니까. 이렇게 몰래 잠행해서 뵙게 된 것도 인연이 아닐까 합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뚱뚱한 아저씨, 라즈만의 침이 좀 튀는 것은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제가 요즘 마법사들과 얽혀서 곤란해진 것도 아시고요?"
"예? 아, 들었습니다. 그 저주받을 것들이 이 북방에...."
그 순간 라즈만의 눈에 스친 혐오의 빛은 짧지만 확실하게 느껴졌다.
만약 그것이 연기라면, 라즈만은 세기의 대배우일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그런데 저 노인네가 마기사인데, 저와 싸움을 붙이시는 겁니까?"
"...예!?"
그 발언에 환술사, 라즈만의 눈이 확 커지고.
'정말 모른다!'
무노의 마음에 확신이 드는 순간.
스각.
그 라즈만의 목이, 거짓말처럼 갑자기 허공으로 떠올랐다.
'이런 미친...!?'
상상을 뛰어넘는 극단적인 상황에 순간적으로 얼어붙고 말았는데.
시간이 느려진 듯 천천히 쓰러지는 라즈만의 시체 뒤로,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매부리코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완연히 붉게 달아오른 눈으로 섬뜩한 미소를 짓는 얼굴.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닌 자의 눈빛이었다.
'정말 미친놈...!?'
광인, 노인의 롱소드가 순식간에 눈앞으로 들이닥쳐 오는데.
그 옆에서 클람이 창을 꺼내 들고, 라스미아가 몸에서 새하얀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 아주 느리게 보였다.
그리고.
쾅!
아찔한 충격이 덮쳐 왔다.
42화. 콜리드
콜리드 맥도웰.
그도 한때는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었다.
열아홉의 나이로 첫 각성을 이루어 냈을 때는 말이다.
그리고 스물다섯 살에 두 번째 진화를 이루었을 때도 수재 소리는 들었다.
하지만 서른세 살에 세 번째 진화를 했을 때는 아슬란 기사단에서 평범한 축에 들 뿐이었고.
오십이 되어 가까스로 네 번째 진화를 이뤘을 때, 이미 그는 은퇴 예정 기사 명단에 들어가 있었다.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버텼다.
은퇴를 미뤄 가며 미칠 듯이 수련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20년이 지나도록 다섯 번째 진화는 이룰 수가 없었다.
그사이 기사단장이었던 동기는 제자에게 직위를 넘기고 명예로운 은퇴까지 했다.
자연히 여전히 기사단에 남아 있는 그에게 눈총이 돌아왔다.
- 저 늙은이는 왜 은퇴하지 않고....
- 민폐야, 민폐.
- 70세 기사가 말이 돼?
그 누구보다 노력하며 살아온 인생이라 자부했다.
하지만 그 결과로 남은 것은 모멸감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은밀히 다가온 검은 손길을 잡게 되었다.
- 아슬란 공작가의 정보만 전해 주시면 됩니다.
- 장막은 어떤 사제나 정령사도 꿰뚫어 보지 못할 겁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검은 손길은 웃으며 달콤한 대가를 약속했다.
그리고 그때 고개를 끄덕인 것만으로도, 그는 평생 넘지 못했던 다섯 번째 벽을 넘어섰다.
구닥다리 취급을 받던 그가 갑자기 기사들의 귀감이 되었다.
끝없이 노력한 끝에 자신의 한계를 부순 기사라던가?
그렇게 그는 은퇴를 해도 모자랄 나이에 명예 부단장직을 얻었고.
가문의 중요 인물 중 한 사람으로 대우받기 시작했다.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무서웠다.
- 너와 같은 기사들을 포섭하라.
늦은 나이에 영화를 얻게 해 준 검은 손길은 더 이상 그에게 존대하지 않았고.
평생을 몸담아 온 가문에 독을 퍼트리는 것을 명령했다.
거부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뚝' 하고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때부터 드문드문 기억을 잃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손에 피가 묻어 있거나 주변의 모든 것이 부서져 있거나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자 가문은 그를 외부로 돌리기 시작했다.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더는 중요한 일을 맡기지 않겠지.'
하지만 그 후에도, 그에겐 검은 손길의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 떨어졌다.
- 반드시 생포하라. 가능하면 놈이 홀로 있을 때를 틈타.
- 야밤을 노리되, 놈이 장막을 뚫어 보는 것까지 확인하라.
처음에 이 명령이 떨어졌을 때, 다시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자신이 평생을 몸담아 온 아슬란 공작가를 배신하게 되는 것도 모자라, 북부의 지배자인 트리안 백작가와 싸움을 붙이게 되는 일이라는 것을 직감했으니까.
하지만 이미 혼을 팔아 계약을 맺은 순간부터 그는 자유의 몸이 아니었다.
한탄하면서도 그저 '주인'의 명령을 따르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지였다.
평생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한계를 쉽게 넘어선 대가를 다시 한번 피부로 느끼면서 놈을 기다렸는데.
목표물을 처음 보는 순간, 그는 명령과 별개로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죽이고 싶다....'
보자마자 알았다. 사전에 들은 정보와는 달리 벌써 2성 이상의 경지에 오른 놈이라는 것을.
열여섯에 각성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질투심이 끓어올랐지만 참을 수 있었다.
그런 천재들이야 종종 있어 왔으니까.
그런데.
'벌써 2성? 아니면 3성? 말도 안 돼!'
들어 본 적도 없는 성취. 그 놀라움은 곧 살의로 변질되었다.
저런 놈이 있다니, 말도 안 된다.
이건 세상이 잘못된 거다.
'그게 아니면 내 인생이....'
너무 무가치해진다.
그래선 안 된다.
그래, 이건 세상이 잘못된 거다.
'죽인다. 반드시 죽인다!'
그때부터 목표물, 무노 드라센을 보는 콜리드의 눈길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 생포하라.
- 알아내라.
'명령'은 여전히 혼에 새겨져 있었지만, 뇌가 망가지고 분노에 휩싸여 이성이 흐려진 그는 그 명령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목표물은 곧 적.
그러니까, 적은....
'...죽인다.'
그때, 희미하게 남아 있던 이성이 좋은 계책을 속삭여 줬다.
"...한 수 가르쳐 주고 싶구만."
그런데 주변의 반응이 이상했다.
내가 또 무언가를 실수한 것일까?
상관없었다.
어떻게든 구실만 만들면 되니까.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억지로 달랬다.
그런데.
"저 노인네가 마기사...."
목표물이 반드시 숨겨야 하는 비밀을 말하는 순간.
두근.
머릿속이 붉게 물드는 기분이 들었다.
두근.
모든 것이 끝났다.
두근.
아니야. 다 죽이면....
두근.
다 죽이면 된다!
광기에 완전히 잡아먹히는 순간, 콜리드는 등을 보이고 있는 정령사 라즈만의 목을 치고는.
"죽어!!"
목표물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쾅!
'큭!?'
무노는 아찔한 충격 속에서 왼팔의 갑옷이 반쯤 박살 나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느려진 듯한 시간 속에서 간신히 팔을 들어 올렸으니, 5성 기사의 검격을 막아 낸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다만 문제라면, 그 갑옷은 평범한 갑옷이 아니라 그의 몸 일부라는 것.
'으으으윽!'
머릿속이 새하얘지며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그 순간 왼팔의 뼈도 함께 부러졌지만, 갑옷이 부서진 것만큼 아프진 않았다.
단단한 만큼 어긋났을 때 더 통증이 큰 것일까.
정신이 아득해지는 고통 속에서도, 다행히 몸은 훈련한 대로 반응했다.
뒤로 몸을 날리면서 자세를 낮추고, 그대로 오른손으로 등 뒤의 대검을 뽑아 들었다.
그때 간신히 회복된 시야에 들어오는 부러진 검.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온 적의 무기는 반토막이 난 상태로도 여전히 살벌한 속도를 자랑하고 있었다.
'꺼져라!'
이를 악물며 '능력'을 발현해 그 궤도를 위로 틀고.
고개를 더욱 숙이며 그대로 몸을 비틀어, 우에서 좌로 번개처럼 대검을 그어 내렸다.
그러나.
"하?"
순간 위로 어긋나려 하던 검은, 코웃음과 함께 억지로 궤도를 다시 비틀더니 그의 첫 번째 스펠 '칼'과 맞부딪쳤다.
꽈아아아앙!
"큭!?"
"컥!"
쿵. 쿵.
뒤로 튕겨 나가는 찰나, 다행히 아티팩트는 아니었는지 산산이 부서져서 흩어지는 적의 검이 보였다.
속으로 안도하는 것도 잠시.
뻐어억.
어느새 코앞에 광기 어린 노인의 얼굴이 다가와 있었다.
"죽...!!"
악을 쓰며 일그러지는 적의 표정과 자신의 턱밑에서 솟구치는 주먹.
검을 휘두르기에는 너무 가까운 거리라, 무노는 반사적으로 팔꿈치를 내려찍었다.
하지만.
"...어!"
쾅!
우드득.
주먹을 내리찍은 팔꿈치가 그대로 위로 튕겨 올라가며 오른쪽 어깨뼈가 나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빌어먹을, 이게 말이....'
현격한 격의 차이가 느껴지는 순간.
다시 코앞에 다가온 주먹을 향해 그가 머리라도 들이박으려 할 때.
파아앙.
적의 주먹이 날아오던 자리에, 날카로운 금속 창날이 파공음을 내며 파고들었고.
동시에 팔을 거둔 미친 노인네의 측면에서, 광풍이 몰아쳤다.
콰아아아앙!
한순간에 튕겨 나가는 적의 모습이 보이는 순간.
익숙한 등이 시야를 가로막았다.
"괜찮냐!?"
"안 괜찮...!"
"잡아!"
"안 끝났어!!"
꽈아아아앙!
"크르르. 죽인...!"
집무실의 벽을 박살 내고 나가떨어진 듯했던 미친 노인네가 다시 돌진해 오는데.
황당하게도 놈의 손에는 어느새 무노의 '칼'이 들려 있었다.
'저 새끼가!?'
까드득.
절로 이가 갈렸다.
곧 다시 번개처럼 클람과 노인이 정면에서 충돌할 때.
'죽어 봐라!'
무노는 그 절묘한 타이밍에 '칼'을 취소시켰다.
스르륵.
회전하며 짓쳐 오는 창을 그대로 쳐 내려던 검은 대검이 순식간에 금속의 가루가 되어 흩날리고.
당황한 노인의 광기 어린 눈동자가 확 커지는 순간.
아무 방해도 받지 않게 된 창은 그대로 노인의 몸을 꿰뚫...을 뻔했다.
스각.
파아아아앙.
노인이 옆구리의 갑옷과 살을 한 움큼 뜯겨 가며 황급히 몸을 비틀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얕은 부상을 감수하고 목숨을 부지한 그 판단력은 그가 확실히 클람보다 높은 수준의 강체술사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감히 누구 제자한테!!"
날카로운 고음이 퍼지며 뒤이어 사방을 몰아친 바람의 칼날은 온전히 피해 낼 수 없었다.
카가가가가각.
"캬악!"
쾅!
노인은 기합과 함께 사방으로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며 저항했지만.
라스미아가 불러일으킨 바람의 칼날은, 노인의 갑옷을 거의 거덜 내 버리고 전신에 수십 갈래의 자상을 만들어 냈다.
"크르르."
바람 칼날을 모두 흩어 내고도 짐승 같은 신음소리와 함께 비틀거리는 노인.
누가 봐도 승부가 기울었다 생각할 만한 상황.
그러나 그 광인의 행동은 역시나 상식을 벗어났다.
"죽인다...!"
쾅!
거세게 디딘 대리석 바닥에 확실한 족적과 핏자국을 남기며 또다시 무노를 향해 돌진해 오는 적.
잠시간 방심했던 정령사 라스미아가 다시 흠칫할 때.
여전히 대비하고 있던 클람은 그대로 무노의 앞을 가로막으며 창을 내찔렀다.
쾅.
"방해...!"
콰드드드득.
"...하지 마!"
쾅!
'미친...!?'
광기에 잡아먹힌 노인은, 창에 그대로 복부를 꿰뚫리면서도 클람과의 거리를 좁혀 그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터무니없이 무모한 수의 교환.
황급히 몸을 날리려 했던 클람은 그대로 머리 왼쪽에 강력한 충격을 받고 뒤쪽으로 날아가 나뒹굴었다
반대로 치명상을 입은 상태로도 마지막 방해물을 치운 콜리드의 얼굴에는 섬뜩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쾅.
이내 자신에게 뛰어든 목표물이 복부를 관통한 창을 후려쳐 등 뒤로 튀어 나가게 만들 때도.
촤르르륵.
목표물의 양다리에서부터 이어져 바닥에서 솟구친 두 가닥 검은 쇠사슬이 갑자기 자신의 발목을 휘어 감을 때도.
신선하지만 의미 없는 발악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흥!"
코웃음과 함께 다시 놈에게 돌진하려는 순간, 갑자기 힘이 쭉 빠지는 게 느껴졌다.
"크...?"
부상 때문일까?
하지만 저 증오스러운 놈을 끝장낼 힘은 분명 남겨 뒀는데?
붉은 눈동자에 의문이 어리는데.
그러다 이내 마기가 빠져나가면서 정신이 조금 맑아진 그는, 자신의 힘이 완전히 빠진 것이 아니라 그저 '계약'하기 전 수준으로 떨어진 것임을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눈앞에 목표물 정도는 끝장낼 수 있을 터였다.
...몸 상태가 멀쩡할 경우에 말이다.
'어떻게...?'
그의 특성은 신체 활성화를 통한 순간 전투력 강화와 재생 능력.
하지만 5성에서 4성으로 하락한 콜리드는, 복부를 헤집어 놓은 거대한 관통상을 무시하고 전투를 강행할 수 있는 초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용납할 수 없어....'
그 상황에서도 지극한 열등감에서 비롯된 분노가 망가진 뇌를 자극해 그의 육체를 움직였다.
쿵.
"용납할 수...."
콜리드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조금 전과는 달리, 많이 힘이 떨어진 발걸음을.
"...없다."
하지만 붉은 기가 조금 사라진 그의 눈동자에는 이제 광기 대신 허무함이 감돌고 있었고.
푸슈슉.
솟구치는 핏물은 그의 기력을 급격하게 빼앗고 있었다.
하지만.
"미친 늙은이가...!"
콰콰콰콰콰.
쿵.
날카로운 고함 소리와 함께 날아든 바람의 칼날들이 자신의 온몸을 다시금 난도질하는 동안에도, 콜리드는 본능적으로 그 공세에 저항하며 한 발 한 발 전진했다.
쿵.
"어떻게...."
파바바바박.
"대체 어떻게...!!?"
흉측하게 망가진 얼굴로 악을 쓰는 콜리드.
그 앞에는, 어느새 구겨진 표정의 무노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 미친 늙은이의 헛소리야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할 필요도 없지만.
적의 속을 뒤집을 만한 대답은 알 것 같았다.
"이렇게!"
콰드득.
부러진 뼈가 억지로 붙는 소리와 함께.
검고 두꺼운 장갑을 두른 주먹이, 일그러진 콜리드의 얼굴을 거세게 후려쳤다.
쾅!
43화. 근원마나?
쾅!
주먹 끝에서 느껴지는 더러운 촉감이 이 순간만큼은 반가웠다.
털썩.
머리가 박살 난 채 쓰러지는 적의 시체.
"크...."
안도감에 순간적으로 비틀거리는 무노의 몸에서 우드득 소리가 울리며, 부러지고 어긋났던 뼈가 다시 맞춰졌다.
통증은 상당했지만 참을 만했다.
그저 집어삼킨 마기의 상당수가 박살 난 왼팔 갑옷을 비롯한 몸의 부상을 회복하는 데 쓰이는 것이 아까울 뿐.
그래도 그가 삼킨 마기, 아니 정확히는 마나로 변환된 마기가 부상 치유에도 쓰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그럴 만한 가치는 있었다.
게다가 부상을 치유하고 남는 에너지만으로도 기량이 꽤나 크게 상승할 것 같았으니.
'내가 내 능력에 대해서도 아직 다 모르는 게 웃기지만....'
그래도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알아가며 성장하는 느낌이 나쁘지는 않았다.
물론.
'흠 정도 나는 것은 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완전히 깨어지니 뼈가 부러진 것보다 아프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단점(?)도 재차 확인했지만.
아찔했던 생명의 위기를 무사히 넘긴 것에 대한 안도감이 가장 컸다.
하지만 그 태평한 감상의 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마기를 잡아먹은 후 생성되는, 신체를 치유하고 그 능력을 근본적으로 끌어 올려 주는 마나가 다른 것과 본질적으로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고찰하려던 찰나.
"뭘 멍하니 보고 있어! 빨리 사제 불러!"
아!
라스미아의 고함 소리가 그 집중을 깨트렸다.
"클람!"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푸른 머리 기사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이런...!'
적을 쓰러트린 뒤 마음을 놓고 있던 스스로를 자책하며 클람을 향해 달려가는데.
거슬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누구한테 감히 명령을...!"
"닥치고 사제부터 부르라고! 아니면 네놈부터 찢어 죽여 버릴 테니까!!"
격전이 끝날 때까지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던 케인이, 고함을 지르는 라스미아에게 삿대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 새끼가....'
첫인상부터 좋지 않았던 놈에 대한 평가가 수직으로 낙하하는 순간.
콰드드득.
치밀어 오르는 분노로 자신도 모르게 움직인 마나가, 쓰러진 콜리드의 부서진 갑옷 조각을 빨아들여 금속 비수를 만들어 냈다.
그 순간 자연스럽게 휘둘러진 팔.
슈각.
파아아아아앙.
금속 조종 능력에 의해 정확하게 날아간 작은 '칼'은 케인의 귀를 스치며 그 뒤쪽 벽에 틀어박혔다.
우우우웅.
"헙!?"
화들짝 놀란 케인의 푸른 눈동자가 자신의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간 비수를 향할 때.
"이런 미친놈이...!"
무노는 자신의 정령술을 활용할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는 것을 기뻐할 새도 없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닥치고! 사제부터 불러! 여기서 클람이 잘못되면 네가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아!?"
그 목소리가 케인의 말을 먹고 그의 얼굴을 더욱 붉게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하지만.
'빌어먹을....'
마기를 다루는 놈답게 벌써 썩어 들어가기 시작한, 머리 없이 쓰러진 콜리드의 시신과 목이 잘린 정령사 라즈만의 시체를 본 그는 더 이상 발작하지 못했다.
자존심 때문에 대거리를 하기는 했지만, 지금 상황이 상당히 심각하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으니까.
"젠장! 사제를 불러라! 최대한 빨리!"
그제야 그의 호위 기사들이 움직였고, 바닥에 엎드린 채 갑자기 시작된 재앙이 끝나길 빌고 있던 시종들조차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이게 대체 무슨....'
당혹감에 흔들리는 케인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연신 구르고 있을 때.
라스미아는 클람의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핏물을 지혈하고 있었다.
"괜찮아. 상처가 깊지 않아. 파이진 않았어. 괜찮아. 괜찮을 거야...."
연신 중얼거리는 라스미아의 표정은 도리어 괜찮지 않아 보였다.
'그렇게 싸워도 결국 남매라는 거겠지.'
다만 그러면서도 바람을 움직여 클람의 호흡을 돕고 핏물을 컨트롤하는 신기한 재주를 보이고 있었다.
'바람과 물에 대한 지배력인가.'
주변의 환경을 이용하는 정령술의 특성이 응급 처치에도 활용되는 모습.
다만 무노는 그것을 보면서 의문이 생겼으니.
"마나로 직접 치유는 안 되는 겁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지금 이게 장난으로...!"
어이없는 소리에 버럭 고함을 지르던 라스미아는 무노의 진지한 눈빛을 보며 급격히 말끝을 흐렸다.
"너, 상처는?"
"예? 저, 저는 그렇게 나았...거든요."
그 대답과 정말 멀쩡해 보이는 그의 몸 상태가 라스미아를 혼란에 빠트렸다.
"어떻게!?"
"어떻게라고 물으시면, 저야 할 말이...."
무노 역시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빠른 회복이 마나 덕분일 거라고 추측하고 있었는데, 라스미아의 반응을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았으니까.
"너, 금속의 정령사잖아!"
"그게 왜...."
"고장 난 장비 수리하는 것도 아니고, 몸을 고치는 게 말이 돼? 네 몸이 금속이야!?"
"그야 말이...."
...된다.
왜냐하면 그의 몸 일부는 확실히 금속이었으니까.
하지만.
'갑옷 말고도 팔과 어깨뼈도 회복됐는데? 설마 나 온몸이 금속 취급...?'
에이, 내가 무슨 터미네이터도 아니고.
아무리 그래도, 자신이 사용하는 금속의 마나가 몸의 상처를 치료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정작 갑옷을 회복하는 데에 소모된 건 마기를 삼키고 변환된 마나였으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안 되지만, 전 한정적인 상황에서는 생명을 회복시키는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것 같은데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네가 근원마나라도 쓴다는 말이...!"
우드득.
다급한 상황에서 다시 고함을 지르려던 라스미아는, 살짝 파여 있던 클람의 두개골이 무노가 손을 대는 동시에 복원되는 것을 보며 또 말끝을 흐렸다.
반대로 무노의 안색은 환해졌다.
'된다!'
자신이 아직 흡수하지 않고 남겨 뒀던 마나, 라스미아가 근원(Origin)마나라 표현한 그 기운이 클람의 몸을 치유하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
물론 그 효율은 자신의 부상을 치유하는 것보다 훨씬 떨어졌기에, 남아 있던 근원마나가 대부분 소비되었지만.
그는 그 힘이 클람의 손상된 두개골 안쪽의 뇌까지 확실히 회복시켰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으로 확신이 들었다.
'마기를 잡아먹고 바로 생성되는 마나는 생명의 힘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라스미아가 말하는 근원마나란, 그런 생명의 힘을 가진 마나를 가리키는 것일 터였다.
그렇기에 그대로 흡수할 경우엔 자신의 상처가 회복되거나 신체 능력이 상승하고, 아니면 이렇게 남을 치유할 수도 있는 것이다.
4서클 마법사 수준에 육박하는 5성 마기사의 마기가 졸지에 허공으로 날아간 것이 되었지만.
'뭐 어때, 생명의 은인을 살렸는데.'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물론.
"너, 너 어떻게...?"
이 상황이 라스미아에게는 혼란스럽기만 한 것 같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무노로서도 약간 아쉽긴 했다.
그 과정에서 다른 것도 깨달았으니까.
"이게 그러니까요...."
그의 시선이 박살이 났던, 이제는 완전히 회복된 왼팔 갑옷을 향했다.
아무리 이젠 내 몸이라지만, 금속이기도 한데.
'통증만 좀 참고 금속 마나를 조종했어도 빠르게 치유됐을 거야. 씁....'
아마 그랬다면 시간이 좀 더 걸리기는 했겠지만 말이다.
괜히 갑옷에 쏟아 부은 근원마나가 아까워졌지만, 수업료를 지불한 셈 치기로 했다.
"...이거, 그러니까 제 아티팩트는 마법사나 마기사를 쓰러트리고 나서 그 마기를 분해합니다. 그래서 말씀하신 그 근원마나라는 걸 만들어 내는 것 같아요."
이제는 이 아티팩트 핑계가 거의 만능 거짓말이 된 것 같았다.
그러나 라스미아는 이번에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말도 안 돼. 그런 게 가능할 리가.... 대체 언제부터 그런 게 됐어?"
"저도 이 효능을 안 건 지금이 처음입니다만."
"그럼 그건 보통 아티팩트가 아니라 초월등급.... 그럴 리가. 아, 혹시 네가 정령기사가 되어서 그런 건가? 희한한 전승은 많이 듣긴 했지만, 대(對)마법사용 아티팩트와 이런 시너지가 난다는 말은...."
혼란에 빠진 라스미아는 스스로의 상식 안에서 억지로 논리를 꿰맞추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정말 클람 님은 괜찮아진 것 맞습니까?"
"아. 맞다!"
거짓말이 또 다른 거짓말을 낳기 전에 화제를 돌리려 꺼낸 말에, 라스미아가 바로 반응했다.
그녀는 다시 클람의 눈꺼풀을 들어 보고 맥박을 체크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덕분에 확실히 고비를 넘긴 것 같아. 고맙다, 무노."
"별말씀을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놀라운 일이야. 역시나 정령기사 전승을 다시 연구해 봐야 하나?"
그 정령기사에 대한 희한한 전승이 뭔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것을 물을 때가 아니었다.
"근데 괜찮겠습니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저도 케인 대공자한테 험한 소리를 좀 하긴 했는데."
아까는 열 받아서 케인에게 뒤 없이 지르긴 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살짝 찜찜한 것이다.
그러나.
"흥. 이 상황에 가장 큰 책임이 누구한테 있을 것 같아? 그놈은 각하께서 어찌 나올지나 걱정해야지."
뒤이어 나온 라스미아의 말은 그 부담을 크게 덜어 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웃으며 얘기를 나눌 때쯤이야.
갈색 사제복을 입고 법관을 쓴 노사제가 황급히 집무실로 뛰어 들어왔다.
"자비로운 대지의 어머니께 은혜를...."
불려 온 노사제는 여러 교단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많은 대지모신 '루' 의 사제.
사람을 치유하는 데에는 보통 생명과 동물의 신 '르'의 사제가 최고라 하지만, 지금은 대지모신의 사제만으로도 충분했다.
번쩍.
스아아아아아.
늙은 사제의 등 뒤에서 다섯 장의 빛의 날개가 흐릿하게 빛나더니, 그의 손에서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자 클람의 머리의 상처가 급속히 아물어 가는 것이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오...!"
이게 진짜 되는 거였구나.
마치 시간을 거스르는 듯한 놀라운 기적.
근원마나로 상처를 치유하는 것과는 아예 계열이 다른 듯한 회복 능력이었다.
'이거 사제만 빨리 왔어도, 근원마나는 내가 다 흡수했어도 됐을 것 같은데. 쯧.'
사제가 행사하는 기적을 생전 처음 본 무노는 놀란 눈으로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리다가.
이내 자신을 힐긋거리는 많은 눈길을 의식하고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래, 나 촌놈이다. 그래서 신기한데 뭐....'
차마 내뱉을 수 없는 말을 속으로 꿍얼거리는데.
"치유됐습니다. 다행히 심각한 부상은 아니었으니, 곧 의식을 차릴 것입니다."
사제의 웃음기 어린 말에 지켜보던 이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심각한 부상이 아니긴. 아까는 진짜, 하....'
새삼 근원마나가 아까워 입을 삐죽이는데.
"네가 더 수고했어. 내가 알아."
"아뇨. 뭘."
라스미아가 그런 그의 등을 두드리며 웃음 지을 때.
주변의 분위기가 다시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케인, 상황이 심각한 건 알고 있겠지? 따라오거라."
"...예"
그사이 연락을 받고 이곳에 와서 치료를 지켜본 에녹 트리안 백작.
그가 무서운 눈으로 자신의 장남을 바라보며 손짓하자, 케인은 참혹한 얼굴로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은밀히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는 두 중년 남자.
딴에는 몰래 웃은 것 같은데, 주변인들이 모두 그 두 사람을 바라보는 상황에서 티가 안 날 리가 없었다.
'심각한 척 연기라도 할 것이지.'
케인을 닮은 에녹의 차남과 삼남의 모습을 보며 무노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게 가족 맞아?'
- 아슬란 공작가의 기사가 마기사였고, 트리안에서 암살을 시도하다 죽었다.
이렇게만 생각해도, 지금 벌어진 사건의 후폭풍이 엄청날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터인데.
웃는다?
'이 상황에서 마냥 좋아하는 것을 보면, 진짜 멍청한 거야. 둘째 셋째는 확실히 깜도 되지 않아.'
물론 차기 가주 후보로서의 역량을 떠나 집안에 이렇게 큰 문제가 생겼는데 웃는다는 것은 인성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생각도 짧고, 인성도 글렀고. 집안이 아주 개판이네.'
솔직히 케인의 딸인 로안나는 범상치 않은 인재가 확실했다.
하지만 그 공녀 역시 평범한 딸이나 손녀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니.
제대로 된 가족이란 느낌이 들지 않았다.
산이나 바다 같은 느낌을 주는 에녹 트리안 백작이지만, 확실히 자식 농사는 잘못 지은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아닙니다. 일단 클람 아저씨가 괜찮다니까 다행이네요."
"다행은 무슨...."
별거 아니란 듯 코웃음을 치는 라스미아.
클람이 완전히 회복하기 전까지만 해도 초조해하던 모습은, 이제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 변화가 조금 웃기기는 했지만.
"이제부터가 진짜 큰일 난 거지. 아슬란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을 텐데.... 일이 커졌어."
그런 그녀가 꺼낸 얘기는 마냥 웃고 넘길 만한 게 아니었다.
아슬란 공작가.
아이언 왕국에 오직 둘밖에 없는 공작 가문 중 하나로.
왕국 유일의 세븐스타인 용검 공작 카일 드래건이 가문의 세를 키우지 않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아슬란은 사실상 왕국 최고의 가문이나 다름없었다.
트리안처럼 척박한 북부가 아닌 수도 남부에 터를 잡아 거대한 영지와 농지를 바탕으로 막대한 부와 세력을 축적한 가문.
그리고 현 국왕의 정실 왕비와 세 번째 후궁을 동시에 배출한 최고의 외척 가문이었다.
한마디로, 왕실을 제외한 어떤 귀족 가문도 쉽게 거스를 수 없는 왕국의 주류 세력이라는 의미였다.
"어떻게 나올까요?"
"일단 우리가 그 미친 늙은이의 썩은 시체를 들이밀어도 부인하고 보겠지. 오히려 가문의 명예를 욕보이는 자작극으로 매도할 테고, 자연히 배상을 요구하겠지. 5성 기사와 4클래스 정령사가 죽은 대가를."
"몰래 잠입한 건 그들이었잖습니까. 심지어 정령사는 그 늙은이가 죽였는데."
"그걸 우리가 증명할 길이 없지. 증인도 증거도 다 조작했다고 할 테고. 거기다 잠행도 케인 대공자가 초청한 거였다고 우길 게 뻔해. 실제로 그것만큼은 사실과 다르지 않을 테고."
"그렇...겠죠."
"그렇다고 우리 쪽에서 다 양보할 수도 없어. 억울한 건 억울한 거니까. 각하께서 물러서지 않을 거야.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흐음. 그럼...."
"재수 없으면, 트리안과 그 휘하 가문이 다 얽히는 큰 사건으로 번질 수 있어. 각하께서 수습을 잘하셔야 할 텐데."
트리안을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어 했던 사람 같지 않게, 라스미아의 눈빛은 심각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 예상대로, 이 사건은 막대한 후폭풍을 몰고 왔다.
44화. 참을 이유 있나요?
트리안에서 벌어진 참변에 대해 유감을 표하며, 진상 조사를 위해 본 가문에서 조사단을 파견하고자 한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트리안의 적극적인 협조를 기대하며....
아슬란 공작가에서 트리안에 전해진 메시지.
그에 트리안의 수뇌부에 비상 소집령이 내려졌다.
메시지의 내용만 보면 별문제가 없었지만.
그 조사단으로 온다는 인원들이 문제였다.
쾅.
"낙뢰검(落雷劍)을 비롯한 아슬란 기사단 최정예가 거의 다 온다는 건 싸우자는 뜻 아닙니까!? 이 빌어먹을 것들이 감히 우리 트리안을 뭘로 보고!"
2m 10cm로 알려진 키와 그에 걸맞은 어깨. 근육질 털북숭이 거한이 신경질적으로 발을 굴렀다.
생김새만 보면 어딘가 산속에서 여행자들 주머니나 털면서 멧돼지 뒷다리 뜯어먹고 살 것 같지만.
이 거대한 남자가 바로 트리안 기사단의 단장, 로베로 카이탄이었다.
거대한 워해머를 바람개비처럼 휘두르며 전장을 초토화시키는 트리안의 5성 기사이자, 전장의 폭풍이라는 멋들어진 이명으로 알려진 자.
하지만 트리안 내부에서 불리는 별명은.
"으휴, 저러니까 두목 소리를 듣지...."
두목.
옆에 있던 라스미아가 질겁하며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무노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 웃을 뻔했다.
"흥분하지 마라, 로베로."
"죄송합니다, 각하. 하지만...."
"그만하고. 놈들의 속셈이 뭘지, 다들 각자 생각하는 바를 털어놔 봐. 콜리드의 시신은 이미 신전을 통해 마기의 잔해가 많다고 공증을 받아 놨으니 참고하고."
에녹 트리안의 시선이 영주 집무실에 모인 이들을 쭉 훑었다.
기사단장 로베로 카이탄과 아직은 얼굴이 창백한 부기사단장 클람 로즈안, 그리고 그와 같은 부단장인 호리호리한 체구의 여기사 클로이 롬멜.
그 뒤로 늘어선 트리안 기사단의 수위 기사들 열두 명과 정령사인 라스미아.
거기에 트리안 영지의 행정관이자 클로이 롬멜의 아버지인 릭 롬멜 남작과 다섯 명의 관리까지.
사태의 책임을 물어 근신 처분을 받은 케인 대공자를 제외한, 사실상 트리안 영지 무력의 중추이자 핵심 수뇌부가 모두 모인 자리에.
'난 왜....'
무노가 껴 있었다.
이 사건의 발단이자 단초를 제공했으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괜히 부담스럽기도 했다.
'악마교 놈들 쫓아야 하는데, 하필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렇게 커진 일이라면 드라센의 공자로서도 무시할 수 없는바.
차라리 대응책을 고민하는 자리에 자신이 있는 것이 나은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다행히 한동안은 그저 대화를 지켜보면 될 것 같았다.
다른 이들은 당장 자신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았으니까.
"각하께서도 무시할 수 없는 6성 기사가 굳이 자리를 비워 가며 트리안의 심장부에 찾아온다는 겁니다. 심지어 5성급 부단장 둘과 4성급 정예 넷까지 대동한다니, 이건 누가 봐도 숫자를 맞춘 거지요. 대놓고 시비를 걸 생각인 것 같습니다."
조용히 지켜보던 부단장 클로이 롬멜이 불쑥 꺼낸 말에 모두의 안색이 굳어졌다.
트리안에 5성급 기사는 단장이 유일하고, 4성급은 두 명의 부단장뿐이다.
거기에 딱 맞춘 듯 급마다 머릿수를 두 배씩 늘렸다는 건 아무래도 아슬란 가문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함이 틀림없었다.
"시비라.... 신전이 이미 콜리드를 마기사로 단정 지었는데도?"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신전의 공증을 인정하지 않는다?"
"저희 가문에서 수작을 부린 거라 주장하겠죠."
에녹이 짐짓 모른 체하며 꺼낸 질문에, 클로이는 확정 짓듯 답했다.
혹시나 이해하지 못한 이들을 위한 설명일 것이다.
그리고 본론은.
"가장 쉽게 생각하면, 그것을 트집 잡아 결투 신청을 하려는 걸 수도 있죠. 최악의 경우는 낙뢰검이 각하께...."
쾅.
"클로이! 말 가려서 하게!"
로베로가 다시금 신경질적으로 발을 구르며 고함을 질렀지만, 에녹 백작은 오히려 피식 웃어 보였다.
"흥분하지 마라, 로베로. 그래 주면 나야 고마운 거지. 레녹 아슬란의 얼굴이 구겨지게 만들어 줄 수 있을 테니까."
백작의 그 자신감 어린 발언에 휘하 기사들도 한마디씩 보태기 시작했다.
"하긴, 에반 오르구스는 6성급에 올라 낙뢰검이라는 별명을 얻은 지 고작 3년 정도밖에 안 됐으니...."
"우리 각하께는 어림없지."
"이참에 아슬란의 콧대를 주저앉혀 봅시다!"
고위강체술사끼리의 전투일수록 진화의 방향성에 따라 상성이 극히 갈릴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좌중의 누구도 에녹 트리안의 패배를 점치지 않았다.
북부의 방벽이라는 이름은 왕국에서 용검 공작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위에 놓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클로이의 추론은 오히려 신빙성이 떨어졌다.
"모두 조용. 가능성 있는 일을 의논합시다. 그자가 미치지 않고서야 각하께 결투 신청을 할 리 없잖습니까."
릭 롬멜 남작이 딸의 발언으로 인해 들뜬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하지만 그 와중에.
"시비 걸 거면 딴 사람한테 걸겠지...."
뒤늦게 울려 퍼진 목소리에, 좌중의 시선이 한곳으로 몰렸다.
...엑?
"무노, 무슨 말이냐?"
그 어느 때보다 길게 느껴진 약 2초간의 정적 끝에 백작이 입을 열자.
무노는 대답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게.... 그 낙뢰검이라는 사람, 아슬란 기사단장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작정하고 시비를 걸 거면, 같은 기사단장끼리 결투하자고 하지 않을까요? 각하보다 훨씬 만만할.... 아, 절대 로베로 님을 무시해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만...!"
그 말에 로베로 카이탄의 안색이 형편없이 구겨졌지만, 그는 '흥' 하며 콧김을 내뿜을 뿐 달리 반론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불명예스러운 짓을...."
"이미 부단장 중에 마병(魔兵)이 나온 마당에, 그 정도야 무슨 문제겠습니까."
"...최악의 가정이지만, 일리가 있습니다."
웅성웅성.
진화의 횟수, 즉 별(星)에 빗대어 나누는 등급에 익숙한 기사들은 직위에 따라 결투가 성사될 가능성을 떠올리지 못했었다.
그런데 무노가 그 맹점을 찔렀으니 납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거기다.
"만약 그냥 등급에 맞춰서 결투를 한다 해도, 단장님과 우리 부단장들은 두 번씩 결투를 해야 합니다. 이거 문제군요."
불쑥 튀어나온 클람의 말에 기사들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들이 정말 결투 신청하러 오는 게 아닐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의견이 너무 그쪽으로 몰리는 것 같습니다."
릭 롬멜 남작이 화제를 전환하려 했지만, 이미 좌중의 머릿속에는 거의 동일한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다.
- 싸움은 피할 수 없다.
"릭, 최악의 경우와 최상의 경우를 상정해 보자. 뭐, 최상의 경우같은 게 존재하겠냐마는."
"최상의 경우는 그들이 신전의 공증을 납득하고 돌아가는 것이겠지만, 확률은 거의 없다고 보셔도 될 겁니다. 그렇게 돌아가면, 세상 사람들은 아슬란이 트리안에게 양보했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그 말인즉, 사건의 진실이 어찌 됐건 가문의 명예 때문이라도 아슬란은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는 뜻.
"최악은?"
역시 결투겠지.
무노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릭 롬멜 남작은 상상치도 못한 말을 꺼냈다.
"그들이 저희 주장을 받아들이는 척하다가, 힘을 합쳐 각하를 암습하는 경우입니다. 물론 이 또한 가능성은 작습니다만...."
"엑!?"
무노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지만, 다른 이들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애초에 각하께서 중앙 정계에 진출하려 하셨던 게, 레녹 아슬란을 경계하기 위한 거였다. 알 사람은 다 알아."
"아...."
라스미아의 말을 듣고서야 저 극단적인 가정도 납득이 갔다.
그사이 흰 콧수염을 기른 노인, 릭 남작이 무노를 힐끗 보고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가장 그럴듯한 가능성은, 클로이 경 말대로 그들이 결투를 신청해 오는 겁니다. 우리 트리안의 실질적인 전력을 저하시키기 위함일 테죠. 주목표는 아무래도 로베로 단장과 부단장들이겠고요."
"그깟 마기사 한 놈 죽었다고...."
"그들에게는 마기사가 아닌 5성급 인재였을 겁니다. 명예 부단장이라고 했으니까요. 더구나 정보를 수집해 보니, 기사단 수련생들에겐 그 콜리드를 기사의 귀감이니 뭐니 하며 선전하는 중이었다는군요."
"뭐?"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면 언젠가는 한계를 돌파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노력은 무슨. 악마에게 혼을 팔아서겠지."
에녹 트리안은 코웃음을 쳤지만, 분명 웃고 넘길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 귀감이 사실 마기사였다고 주장해 봤자, 아슬란은 인정하지 않을 터이니.
"5성급 인재가 죽었으니 그 이상 이자를 받아 가겠다, 그 말이겠네? 흐, 아슬란 새끼들. 각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죽더라도 낙뢰검의 팔 하나는 박살 내고 죽겠습니다. 놈들이 더 큰 손해 보게 만들어 줘야죠, 뭐!"
쿵.
로베로가 그 덩치만큼 흉흉한 기세를 뽐내며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도 호응하지 않았다.
그 말 자체가 이미 패배를 전제로 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섣불리 죽는다는 말 하지 마라, 로베로. 그렇게 목숨 던지라고 전쟁터에서 오줌 지린 겁쟁이를 사람 만들어 놓은 거 아니니까."
불쑥 던져진 백작의 한마디가 좌중에 웃음기를 돌게 만들었다.
"크흠.... 아, 아니 각하. 그, 소싯적 얘기를 왜...."
저 덩치가 오줌을 지렸다고?
무노가 기사단장의 어이없는 과거사에 피식 웃음을 짓는데.
그 로베로의 커다란 눈망울이, 왜인지 자신의 눈치를 보는 듯 흘깃거리는 것이 보였다.
아니, 잠깐. 이건 나를 보는 게 아니라....
"으.... 저 곰탱이...."
라스미아가 부르르 치를 떨더니 로베로의 시선을 피해 무노의 등 뒤로 피했다.
그러자 저 커다란 남자가 울적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하. 이건....
"...인기 많으시네요."
"놀리면 죽여 버린다. 평생 나 좋다는 남자 못 봤는데, 하필 하나 있는 게 저런...."
아....
새삼 입맛이 씁쓸했다.
라스미아가 나이에 비해서는 많이 어려 보이고 예쁜 편이라 생각했었는데.
다시금 갑자기 문화 차이를 체감하게 된 느낌이랄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그래도 못생긴 남자는 싫다는 거냐....'
현생에서는 제법 잘생긴 편이라고 거울을 보며 자찬했던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으니까.
혹시 나도 여기 기준으로는 못생긴 걸까?
어머니는 잘생겼다고 했는데?
설마 그게 고슴도치 사랑?
순간 자신감이 하락했고.
"...남자는 적당히 생기기만 하면, 덩치 크고 강하면 좋은 거 아닙니까?"
나름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를 인용해 현생의 일반적인 남성관을 들이대 봤지만.
"그것도 정도껏이어야지. 저게 정상으로 보이냐?"
돌아오는 대답은 차갑기만 했고.
졸지에 '저게' 되어 버린 순정남에게 속으로 애도를 보내며, 무노는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여기선 남자는 얼굴이 아니지.'
능력, 즉 힘이다.
비유가 아닌, 진짜 '힘'.
그가 자신도 모르게 괜히 주먹을 쥐며 스스로 힘을 점검해 볼 때.
"자. 어찌 됐건, 그럼 가장 확률 높은 일에 대한 대처 방안을 생각해 보자."
쿵.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내 사람을 허무하게 잃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럴 바엔 차라리 아슬란과 전쟁을 하고 말 테다. 그러니 단장과 부단장들, 세 사람의 희생을 전제로 하겠다는 말은 아예 꺼내지도 말도록."
백작이 서슬 퍼런 기세를 내보이며 좌중의 분위기를 주도했다.
그리고.
"무노, 젊은 피인 네 녀석부터 말해 보거라."
그 시선이 뜬금없이 자신을 향했다.
더 이상 현실 도피는 할 수 없는 상황.
'쩝....'
무노는 그냥 생각나는 대로 답했다.
"놈들이 시비를 거는 것 자체는 확정이라 봐야 하는 거겠죠?"
"그렇다고 본다."
"그럼, 선수를 치는 건 어떻습니까?"
"뭐?"
"어차피 시비 걸 거 알고 있는데 왜 기다립니까? 먼저 시비 걸죠, 뭐."
"...어?"
옆에 있던 라스미아가 멍한 얼굴을 보일 때.
"사실 억울한 건 기습을 당한 저고, 트리안 아닙니까? 참을 이유 있나요?"
이어진 한 마디는, 좌중의 투지를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45화. 칼린? 카린?
[콜리드가 예상과 달리 폭주했다?]
"죄송합니다. 노예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죄...."
[아니, 됐다. 어차피 불량품이지 않았느냐. 하필 벽을 넘기 직전의 놈을 노예로 만드는 바람에 연결도 흔들리고 정신도 불완전하고....]
"하지만...."
그런 자를 노예로 삼았기에 아슬란에 사람을 심기 쉬웠다.
...는 반론은 할 수가 없었다.
[됐다. 덕분에 아슬란과 트리안이 치고받을 구실을 만들었으니, 불량품치고는 잘했다. 그보다, 그놈의 능력에 대한 확인은?]
5성급 마기사를 잃은 것보다, 실험체의 능력 확인이 중요하다?
통신구 앞에 고개를 숙인 그림자는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대답은 바로 나왔다.
"예, 확실합니다. 노예의 마기를 알아본 것을 확인했습니다."
[정말 장막을 뚫어 본다라. 허허.... 어떻게....]
통신구 속에서 나오는 웃음소리가 그칠 때까지 그림자는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러다 잠시 후.
[이로써 놈을 확보해야 할 명확한 동기가 더해졌다. 그러니 계획도 변경한다.]
"예? 계획을 변경한다 하시면?"
[상황이 바뀌었으니 당연한 일이지. 네가 직접 나서라.]
"제가요?!"
그림자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벌떡 들 수밖에 없었다.
로브의 후드 밑으로 흘러내린 빨간 머리와 둥근 얼굴이 드러나고, 수정구 속 인물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분'의 미간이 좁혀지는 것을 본 그림자는 황급히 다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막후의 작업만으로는 내 후계자가 될 수 없다, 카린. 아슬란에서의 작업도 더는 네가 손댈 필요가 없을 텐데?]
"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것은 네게 주는 기회다. 이중 장막을 전개할 수 있는 너이기에 맡길 수 있는 임무지. 놈이 이중의 장막도 꿰뚫어 볼 수 있는지 확인도 할 겸.]
설마 나조차 놈을 테스트하기 위해 던지려는 것인가 싶을 때.
[너라면 그조차 이용할 수 있지 않겠느냐. 내 생각이 틀렸느냐?]
스승의 도발에, 카린은 그대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입니다."
[실험체를 회수하고, 동시에 분란을 키워라. 하지만 잊지 마라. 실험체의 회수가 먼저다.]
"예."
다시 구하기도 힘든 내 5성급 노예보다, 고작 실험체가 먼저?
심지어 조직의 계획을 변경하면서까지 임무를 내린다는 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지만.
[단, 최악의 경우라면, 살려서 회수하지 않아도 된다.]
이런 조건이 붙는다면 얘기가 달랐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붉은 머리 그림자의 입가에는 분명 미소가 어려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