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푸흐.... 벌써 2성, 두 번째 진화라고? 자네, 각성한 게 두 달 정도 전이라고 하지 않았나?"
위험천만한 싸움을 하고 난 뒤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클람은 공대를 관두고 하대를 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는 당혹스러움과 놀라움이 고스란히 실려 있었는데.
반면 무노는, 다시 한번 진화하며 새롭게 거듭난 몸의 들끓는 에너지를 느끼면서도 환호성을 지르는 대신 고개를 숙인 채 거듭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충동을 이기지 못해 넋이 나갔었습니다."
클람의 갑옷은 거의 거덜이 났고, 그 팔다리에는 관통상이 가득했다.
가장 많이 다친 오른팔은 거의 넝마처럼 보일 정도.
4성의 기사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입지 않아도 될 피해를 입은 것이다.
그럼에도 클람은 웃기만 했다.
"...뭐, 이런 천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감수할 만했지. 시간 지나면 나을 정도의 부상이야. 대수롭지 않아."
일반인에겐 중증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할 만한 중상이겠지만, 다행히 그는 4성 기사.
그것도 세간에서 가장 안정적이라 여겨지는 '신체 전반에 관한 능력 상승' 특성을 가진 강체술사였으니까.
하지만 무노는 더욱 고개를 숙이기만 했다.
'내가 정신 똑바로 차렸으면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적이었다.'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 믿었던 악마포식자가 일순간 자신의 정신을 잠식하고 말았다.
그렇게 된 이유도 짐작할 수 있었다.
'힘, 즉 경지의 상승. 내가 그걸 바라고 있었으니까.'
마법사와 싸울 때만큼은 극히 충동적으로 변하는 악마포식자가 자신의 바람에 호응하며, 몸이 통제를 벗어나 버린 것이다.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돼.'
욕심에 취해서 어처구니없게 비명횡사할 수도 있었던 상황이다.
다행히 클람이 있었기에 목숨을 건졌고, 무사히 진화를 마쳤다.
...크게 배웠다.
"면목 없습니다. 이 실수, 아니 이 은혜는 꼭...."
"아. 아, 괜찮다니까? 어쨌거나 적들은 처리했지 않나. 그런데 자네, 그건 아티팩트인가? 아무래도 그게 마법을 어떻게 했던 것 같은데? 혹시 마법사를 상대하기 위한 아티팩트인 건가?"
그나마 다행이라면, 클람은 그 마법사들이 발작하며 반응하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
생명의 은인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미안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촤르륵.
그의 의지에 따라 팔다리의 보호대가 손목과 발목만을 감싸는 크기로 줄어들었다가.
이내 또다시 손끝과 발끝에서 어깨와 허벅지까지 감싸는 부분 갑옷 형태로까지 자유롭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호오?"
사실 클람과 마찬가지로, 무노 역시 속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이게 이렇게 될 수도 있다니. 상상은 했는데.'
폭증한 신체 능력과는 별개로 또 하나의 큰 무기를 얻은 기분이었다.
기본적으로는 투박한 갑옷의 형태가 유지되지만, 전보다는 조금 더 자유롭게 변형이 가능한 것 같았다.
쇠사슬은 너비를 조절하거나, 추를 더 크거나 작게, 혹은 더 날카롭게 만들 수도 있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건틀릿은 일반적인 것보다 훨씬 부드러워 보이고, 전투 부츠는 아예 본 적도 없는 특이한 형태로군."
클람의 말대로, 갑옷의 기본 형태 자체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건 참....'
건틀릿은 전생에 일할 때 쓰던 독특한 디자인의 보호 장갑처럼 보였고, 발쪽의 보호대 역시 당시 신었던 안전화가 연상되는 형태로 변해 있었다.
손발의 갑옷이 깨져 나가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떠올린 이미지가 진화한 보호대의 형태를 결정지은 듯한데.
재산이 몸 하나뿐이라 특별히 신경 써서 좋은 제품을 썼던 전생의 장갑과 안전화가 고스란히 복원되어 있는 모습이, 이상한 감회를 불러일으켰다.
'무의식에까지 박혀 있었다는 건가. 참....'
손목과 발목의 위쪽은 이 시대의 갑옷치고도 투박한 형태였지만, 장갑과 신발에 해당하는 부분은 유독 정교하게 다듬어진 듯 보이는 특이한 모양이었다.
인체공학적 설계가 반영된 전생의 그 고급 제품을 떠올리게 하는, 현생의 기준으로 보면 꽤나 특이한 디자인의 장갑과 신발.
그것이 투박한 팔다리 갑옷과 연결되어 있으니, 그 부조화가 어쩐지 살벌하고 묵직한 인상을 주는 듯했다.
"꽤나 무게가 나가 보이는데?"
"아뇨. 별로...."
쿵. 쿵.
"...좀 나가네요. 하. 하."
보란 듯이 땅을 굴러 보인 무노의 입가에 어색한 웃음이 걸렸다.
'이거 금속일 텐데....'
착용감은 공기처럼 가볍게만 느껴지는데, 실제로는 무게가 꽤 나가는 듯했다.
인체공학적 설계 수준이 아니라, 그냥 내 몸 같은....
아, 그럴 만한가?
'이것들은 진짜 내 몸이나 다름없으니까.'
강철보다 훨씬 단단하지만 잘리면 내가 통증을 느끼고, 의지대로 움직이는 또 하나의 신체.
어째 점점 인간에서 멀어지는 것 같기도 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뭐, 좋은 일이지.'
신체 무게가 늘어났는데 행동에는 지장이 없으니, 그 또한 고스란히 전투력의 성장으로 이어질 것이다.
무력이 능력이 되고 곧 신분이 되는 이 세상, 자신이 꿈꾸는 삶을 위해서도 힘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니.
게다가 경지의 성장과는 별개로 전생에 쓰던 것처럼 익숙한, 아니 그것들보다 훨씬 편하고 든든한 장갑과 신발도 얻었다.
'진짜 편하다....'
이것으로 불편하기만 했던 이 시대의 건틀릿이나 부츠와는 영영 이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정말로 기쁜 일이었다.
물론.
"아아, 부럽네그려. 아, 자네 아버지 말이야...."
자신의 생명을 구해 주다 큰 부상을 입었으면서도 굳이 화제를 돌려서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하는 클람.
이 훌륭한 기사와 인연을 맺은 일보다는 못하지만 말이다.
32화. 클람
"헤이, 헤이!! 거기 부랑아들, 스톱."
"살고 싶으면 말만 내놓고 꺼져라. 꼴을 보니 어디서 굴러먹다 온 패잔병 같은데."
"아, 거기 어린놈. 너는 그 팔다리 갑옷도 벗어 놓고 가."
한적한 관도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일단의 무리.
하나같이 날카로운 무기와 그럴듯한 갑옷을 갖춘 십여 명의 도적 떼를 보는 클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무리 관도를 벗어나서 길을 틀었다지만, 우리 트리안에 강도 떼가 있다고?"
"장비가 꽤 정리되어 있네요. 몬스터 잡던 용병들이 종종 강도 떼로 돌변한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그 경우가 아닐는지요?"
두 사람이 전혀 겁을 먹지도 않고 서로 태연하게 대화를 하자, 앞으로 나선 강도들의 두목이 순간 주춤했다.
'한 수 있는 놈들인가? 설마....'
두목의 시선이 다시 목표들의 위아래를 훑었다.
갑옷인지 거적때기인지 모를 거덜 난 금속 쪼가리를 대충 걸친 뒤쪽의 중년인은, 안색도 파리한 데다 사지를 피투성이 붕대로 칭칭 감싸고 있었고.
팔다리에 꽤나 특이하게 생긴 장비를 걸친 어린놈 역시, 정작 몸통을 가리는 갑옷은 박살이 나 있었으며 옷가지 여기저기에 피가 묻어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두 필의 말을 타지도 않고 끌면서 관도를 걷는 모습까지.
'말도 못 타는 놈들이 기사일 리는 없고....'
그렇기에 중년인이 등 뒤에 맨 창과 어린놈의 대검도 그저 허세용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었다.
어딘가에서 몬스터 토벌에 실패하고 간신히 살아남은 용병의 잔당이라는 판단.
그런데.
"용병이라? 목격자라도 남으면 평생 수배가 될 텐데.... 그럼 여태 목격자도 남기지 않고 다 죽였단 얘기거나, 이게 첫 시도라는 말인데...."
파리한 안색의 중년인이 자신의 위아래를 훑어보는 순간, 두목은 왜인지 모를 섬뜩함을 느꼈다.
그리고.
"뭐, 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쓰레긴데, 여기서 다 치워버리면 되죠."
어린놈이 섬뜩한 웃음을 지으며 한 발 앞으로 나서는 순간에는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서려다가.
'기껏해야 스무 살도 안 된 놈인 것 같은데....'
뒤늦게 자신의 추태를 깨닫고는 뿌드득 이를 갈았다.
그리고 그것은 주변의 일행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둘 다 조져!"
"패잔병 새끼들이 감히...!"
"죽여!!"
"말은 다치지 않게 해!"
열다섯 명에 달하는 용병, 아니 강도들이 저마다 무기를 들고 고함을 지르며 달려드는 순간.
푸른 머리 중년인, 클람의 입에서 한탄이 나왔다.
"내가 살다가 트리안에서 이런 꼴을 보게 될 줄이야...."
"저희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죠. 특히 클람 님이요. 말도 못 탈 정도잖아요."
"쓰읍. 젊어서 좋겠다. 아니, 네 회복력은 젊은 걸로 설명이 안 되는데."
"그거야...."
씩 웃은 무노는 그대로 대검을 뽑아 들었고.
"...특별함이죠."
쿵.
파아아악.
발밑에 깊게 팬 발자국 하나만을 남겨 놓은 채, 그 자리에서 바람처럼 사라졌다.
'확실히....'
급속도로 좁혀지는 거리.
확 커지는 강도들의 눈동자를 보며 무노는 비릿하게 웃었다.
'...달라.'
마법사들과의 전투 직후에는 부상 때문에 체감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꿰뚫린 등의 상처들도 거의 아문 지금은, 변한 육체의 힘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꽉 쥔 대검이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해 부르르 떨릴 정도로.
'이런 놈들한테는 과분하지만....'
적어도 한 번쯤은 변한 능력을 제대로 테스트해 봐야 할 것 같았는데, 바로 지금이 기회인 듯했다.
우선은.
'가속.'
쿵.
카리나와 대련할 때 한 번 쓰고는 그대로 쓰러졌던, 가문의 비기 중 핵심이 되는 기술.
본래는 체내의 지방과 단백질을 폭발적으로 소모했어야 할 그 기술이, 소량의 열량과 막대한 마력을 연료 삼아 온전히 발휘되었다.
"가아앙체에에...!"
경악한 눈빛으로 소리를 지르는 강도들의 말소리가 아주 느리게 들려올 때.
무노의 몸은 이미 그들의 전면을 스쳐 지나가며 대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스가가각.
파아아아아앙.
무기를 휘두르려 하는 놈, 뒤돌아서서 도망가려 하는 놈, 이도 저도 못 한 채 어정쩡한 상태로 굳어 버린 놈.
그 모든 놈들에게 공평하게 한 번씩 대검이 휘둘러졌다.
그 결과.
콰드드드득.
"...술사. 빌어먹...."
"컥...."
털썩.
쿵.
두목을 비롯한 소수만이 비명이라도 남겼을 뿐.
대다수는 그대로 두 쪽으로 쪼개져 나뒹굴었다.
벌건 대낮에 말 두 필이라는 횡재를 노렸던 강도들의 최후는, 그토록 허무했다.
"쓰읍...."
그렇다고 이렇게 반항도 못 해 보고 쓰러지나.
'아직 실험해 볼 게 좀 남아 있었는데.'
우우우웅.
강도 떼를 순식간에 쓸어 버린 후, 무노는 대검의 진동과 손안의 미약한 저항감을 느끼며 입맛을 다셨다.
'차라리 급소를 노리지 말고 갑옷째로 잘라 볼 걸 그랬나? 아니, 그랬으면 대검이 박살 났겠지. 가뜩이나 지난 전투 때 상했는데....'
일방적인 학살이나 다름없던 전투를 복기하며 최선의 수를 생각해 보려는데.
그 생각을 읽은 듯, 클람이 피식 웃으며 말을 걸었다.
"너무 약해서 이상해?"
"예, 뭐 조금요. 이놈들, 어떻게 이런 실력으로 강도질을 하고 있었을까요?"
"이런 실력밖에 안 되니까 강도질이나 하는 거겠지. 인성이 썩은 놈들이 칼밥 먹는 방식이랄까. 결국은 언제가 됐건 이렇게 비참하게 죽게 된다는 걸 생각지 못하는 바보들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 말에 무노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 세상에서 강도나 살인, 강간 등 강력범죄에 대한 처벌은 무조건 사형이었다.
범죄자를 감옥에 가두고 교화시킨다는 말랑말랑한 감성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인 것이다.
'애초에 그럴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나라도 거의 없지.'
뭐, 인간을 계급으로 나누는 세상에서 누가 죄수의 인권을 생각하겠냐마는.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람이 돌이킬 수 없는 가혹한 처벌을 받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무노는 전생보다 이 시대의 형벌 제도가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어린아이를 강간해 돌이킬 수 없는 장애를 안겨 준 놈이 고작 십수 년 동안 감옥에서 살다 풀려나는 일은 없으니까 말이다.
'아닌가? 그런 놈이 고위 귀족이나 왕족이면 아예 감방에 안 갈 수도 있는 세상인데....'
만약 그런 놈을 만나면, 난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
'그냥 쳐 죽이고 어떻게든 뒷수습을 해? 아니면 은밀히...?'
스스로의 성격을 알기에, 그냥 모른 척 지나간다는 선택지는 아예생각지도 않았다.
하지만 계급제인 이 세상에서 귀족이나 왕족을 건드렸다가는, 전생에 상사를 무작정 들이박았을 때처럼 회사에서 쫓겨나는 수준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마음에 안 든다고 섣불리 덤볐다가 인생 종 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어쩌지...?'
들이박을 때 박더라도 내 인생을 지킬 방법이 뭐가 있을까.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며 시작된 상념이 현생의 인생관으로까지 이어지기 시작할 때.
"어쨌건 제법 인상적이었다, 무노. 그거 '가속'이지?"
이어진 클람의 말이 그의 정신을 다시 현실로 끌어들였다.
"예? 아, 잘 아시네요."
"당연하지. 라이언 녀석이 쓰는 걸 본 것만 해도 몇 번인데. 근데 그 녀석은 3성급이 된 다음에나 가속 쓰기 시작했었는데?"
"어, 그게...."
"거기다 왜 넌 안 홀쭉해지냐? 라이언은 가속 한 번 쓰고 나면 몸이 반쪽이 돼서, 막 돼지 한 마리를 통으로 잡아먹고 그랬었는데...."
정신없이 쏟아지는 말에 무노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클람을 바라보았다.
"어.... 음...."
백작의 손님이라고 꼬박꼬박 존대하던 사람이 갑자기 자신을 편하게 대하는 게 너무 어색하게 느껴진 것이다.
자연스레 또 속마음이 툭 하고 튀어나왔다.
"...말씀 편하게 잘하시네요. 진작 그러시지."
"이놈아! 목숨 한 번 살려 줬으면 손님 대우는 이미 넘치게 해 주고도 남았지. 이젠 그냥 후배 아들이다!"
"그, 전부터 그렇게 대해 달라 말씀드렸습니다만."
"시끄러. 나도 나만의 원칙이 있단 말이다. 아무튼, 뭐 어떻게 한 거냐? 너 지금 거의 질풍, 카리나 녀석 수준이었어. 아무리 가속을 썼어도 넌 아직 2성급이잖아? 에너지 소모도 별로 없는 것 같고."
...이런 사람이었나.
새삼 그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 사람은 다 복잡하게 사는 겁니다.
틀린 말 같지 않았다.
'나도 내가 가진 비밀을 완전히 다 말하지 못하듯이.'
궁금해 미치겠다는 눈빛의 클람을 본 무노는 피식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티가 안 나서 그렇지, 에너지 많이 씁니다. 아버지랑 좀 다를 뿐 오래 유지하지도 못하고요."
"그러냐? 난 또 네가 드라센 대검술의 단점을 완전히 극복한 줄 알았는데...."
그 말이 아버지의 얼굴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 드라센 대검술은 분명 강력하지만, 두 가지 단점이 있다.
- 한 번에 소모되는 에너지양이 너무 많다는 것과, 그 극단적인 신체 변화 탓에 고수들에게는 동작이 쉽게 읽힌다는 점.
-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지만, 여전히 답이 보이지는 않아. 단점이 곧 장점으로 연결되는 만큼 근본적인 원리를 건드릴 수도 없고.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웃으며 대답하면서도, 무노는 어쩌면 자신이 그 완성을 향하는 길을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력(魔力). 이 세상의 올바른 섭리를 흐트러트리는 불길한 힘.
자신은 결코 마법사나 악마가 아닌데도, 휴식을 취하고 영양분을 섭취하는 것만으로도 그 힘이 적절히 회복된다.
심지어 품고 있는 마력은 겉으로 아예 티가 나지 않기도 했으니.
아버지가 비기를 쓸 때에 비하면, 온몸이 극적으로 부풀어 오르거나 근육이 팽창 또는 수축하는 변화도 비교적 작았다.
이를 잘만 활용한다면, 언젠가는 드라센 검술의 완성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리고 만약 그것을 마력 없이 사용하는 요령까지 알아 낸다면.
'어쩌면 가문의 은혜를 갚을 수 있을지도....'
상상만으로도 뛸 듯이 기뻐하는 아버지의 얼굴이 그려졌다.
문득 이어진 상념에서 오랫동안 고민하던 문제에 대한 단서가 보인 순간.
무노는 새로운 길을 발견한 성취감에 자신도 모르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사람을 죽여 놓고 웃는 건 좀 아니지. 마치 살인을 즐기는 것 같지 않느냐."
클람이 피식 웃으면서 초를 치기 전까지는.
"...재미없습니다."
"그러냐.... 나름 회심의 농담이었는데."
"그런 거 궁리하실 시간에 부상 회복하게 좀 쉬시죠? 원래 예정대로라면 내일쯤 도착해야 하는 거였잖습니까."
"널 구하다가 입은 부상인데..."
커흑.
그, 그랬지.
"...죄송합니다. 업어 드릴까요?"
"됐다. 저 시체들이나 좀 치워라. 놈들 눈치 못 채게 한다고 기껏 길을 틀었는데, 저 쓰레기들 때문에 발각될라."
"예."
"가능하면 갑옷도 다 벗기고 곱게 화장해서 뿌리는 게 좋겠지."
"예?"
"...이것도 농담이다."
"...."
이 사람은 농담을 할 때 안 할 때를 구별 못 하는 건가.
'아니, 그 전에 애당초 왜 이렇게 재미없는 농담을....'
무노는 어이없는 눈으로 클람을 바라볼 뿐이었다.
"커흠. 뭘 그렇게 봐? 콘넬까지 3일쯤 걸릴 듯한데, 그때까진 나도 얼추 싸울 수 있을 정도는 회복될 거다."
"...예."
"아니, 네가 비정상적인 거라니까? 난 재생력 특화된 놈을 본 적도 있는데, 그놈도 2성 땐 너 정도는 아니었어!"
"...예."
"진짜라니까?"
"...예."
"너 아까부터 대답에 성의가...."
"...예"
"물어본 거 아니거든!?"
"...예."
"하, 놔.... 너 자꾸 이럴 거냐?"
"...예."
"야!?"
크고 작은 트러블을 겪으며 급격하게 가까워진 두 기사.
그들이 트리안 산하 콘넬 자작령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정확히 3일 뒤였다.
33화. 콘넬
달빛 가득한 하늘 아래.
고요한 숲의 공터에서 무노가 조용히 허공에 손을 내밀어 보았다.
노상의 강도 떼를 때려잡은 지 고작 사흘이 지난 지금, 그의 부상은 완벽히 나아 있었다.
등에서 배까지 꿰뚫렸던 상처도 이제는 흔적만 남았을 정도였으니.
스스로도 믿지 못할 회복력에 감탄하면서, 무노는 다시금 자신의 힘을 테스트하기 위해 집중했다.
'최대한 부피를 줄여서....'
스르륵.
의지가 생기는 순간, 어깨까지 올라온 투박한 갑옷 형태의 보호대가 손목 부근만을 감싸는 크기로 줄어들었다.
막 각성하였을 때에 비해 정확히 절반 정도 되는 면적.
'좋아. 그럼 다시....'
그가 크기를 늘이자는 생각을 하자마자 보호대는 다시 어깨까지 올라오는 형태로 변했고.
스르륵.
그것은 팔과 다리의 나머지 보호대들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그러면서도 팔다리를 움직이는 관절부에는 아무런 저항감도 느껴지지 않았고.
도적 떼를 처리하며 얻은 가죽 갑옷이 훨씬 무겁게 느껴질 정도로 무게감도 없었다.
'형태 변화가 자유로워. 그럼 이것도....'
촤르륵.
팔다리의 보호대, 아니 이제는 팔다리 갑옷이라 불러야 마땅할 검은 금속에서 자연스레 쇠사슬들이 튀어나왔다.
특별히 힘을 주어 휘두르지 않아도 그의 의지대로 뻗어 나간 쇠사슬들은 그대로 허공에 떠서 주변에 사슬의 벽을 만들어 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 검은 금속의 갑옷과 쇠사슬은 그의 몸이나 다름없었으니.
'아니, 다름없는 게 아니라 진짜 내 몸이지. 그때부터....'
순간적으로 어린 시절 아버지가 애검, 슬레이어로 사슬을 잘라 내려 했던 때의 끔찍한 통증이 떠올랐다.
당시 반쯤 잘렸던 쇠사슬 마디가 마치 베인 상처가 낫듯 며칠 동안 천천히 아무는(?) 것을 보았을 때, 무노와 아버지는 이 쇠사슬이 그의 신체 일부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5m가 넘는 쇠사슬들을 팔다리에 달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정말 막막하기만 했었다.
그때 남몰래 얼마나 울었던가.
'지금이야 크기를 조절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망정이지.'
무노는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또 다른 몸, 쇠사슬을 천천히 움직여 보았다.
쇠사슬과 그 끝의 추에 닿는 공기의 느낌이 이전에 비해서 훨씬 더 선명하게 와닿았다.
기다란 쇠사슬의 끝마디까지 자신의 감각이 미치는 것이다.
'길이는 최대 대략 20m. 전보다 두 배 이상 늘었고.'
쿵.
가볍게 움직여 본 쇠사슬 추가 땅을 푹 패게 하는 것을 보니 절로 미소가 나왔다.
'실리는 힘도 얼추 두 배 이상. 이 정도면 그냥 타격용으로 써도 충분하겠어.'
섣불리 실험할 수는 없지만, 길이가 늘어나고 힘이 강해진 만큼 단단해지기도 한 것 같았다.
'어쩌면 이제는 슬레이어로도 쉽게 안 잘릴지도...?'
그리고.
쿵.
가볍게 구른 발에서 느껴지는 육체의 힘까지.
단순히 육체 능력뿐만 아니라 몸을 움직이는 감각 또한 성장했고, 또 하나의 몸이라 할 수 있는 갑옷과 쇠사슬도 여러모로 강화되었으니.
지금이라면 이전의 자신이 둘이 덤비더라도 가볍게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미소가 나오는 순간, 무노는 어깨에 멘 대검을 꺼내 들었다.
쿵.
앞으로 내딛는 발걸음에 땅이 슬쩍 패자마자.
파아아아앙.
우우우웅.
번개처럼 휘둘러진 대검이 전방의 공기를 찢어 버리고.
촤아아악.
파바방.
가상의 적을 상대로 뻗어 나간 쇠사슬이 중거리의 허공을 강타했다.
동시에 전방을 향해 돌진한 무노가 그대로 뛰어오르는 순간.
파박.
네 가닥 쇠사슬의 추가 일제히 바닥을 짚으며, 육체의 힘만으로는 닿지 못할 높이까지 그의 몸을 밀어 올렸다.
파아아앙.
한순간에 지상에서 20여 미터까지 솟구친 몸.
'좋다, 좋아!'
하늘 위에 뜬 보름달이 바로 머리 위까지 다가온 것 같은 고양감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하하하하하!"
파바바바방.
무게 중심을 옮길 데가 없는 허공에서 그저 근력만으로 휘두르는 대검이 살벌하게 허공을 찢을 때.
쿵.
파바박.
네 가닥 쇠사슬은 그의 몸이 착지하기도 전에 다시 땅을 튕기며 그의 몸을 밀어 올렸고.
근처 나무의 가지나 줄기를 휘어 감거나 디뎌 가며, 허공에서 입체적인 기동까지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아자자자자자!"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전능감.
모든 동작 하나하나가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짜릿한 흥분을 선사했다.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원수인 사교도를 쫓고 있다는 사실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도 전부 잊었다.
그렇게 황홀경을 얼마나 거닐었을까.
짝짝짝.
공터의 구석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불침번을 선다고 해 놓고, 달밤의 체조에 빠져 너무 흥을 냈나 보다.
휘두르던 검을 황급히 멈춘 무노의 몸이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촤르륵.
쿵.
쇠사슬을 회수하며 최대한 조용히 착지하려 했지만, 늘어난 갑옷의 무게가 아직 몸에 익지 않았던 탓에 묵직한 소리와 함께 깊은 발자국을 만들고 말았다.
무노는 그 미숙함을 눈에 새겨 둔 채, 자신의 잘못으로 잠을 깨운 일행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흥에 취해 소란을 피웠습니다."
"아니, 아니야. 어차피 나도 잠이 오지 않았으니까. 좋은 구경 했어."
그와는 다르게 여전히 안색이 창백한 클람이 피식 웃음을 짓는데.
"그런데 그거, 단순히 마법사용 아티팩트가 아닌데?"
이어진 한마디가 무노를 움찔하게 만들었다.
안 그래도 목숨을 구해 준 은인에게 숨기는 게 있어서 찜찜했었는데.
'그냥 솔직히 말해?'
순간적으로 갈등하던 순간.
클람이 감탄하듯 그를, 아니 그의 팔다리 갑옷을 바라보며 말을 보탰다.
"그 정도면 그냥 백병전 전용 아티팩트라 봐도 무방하군. 어지간한 1, 2성 기사는 반항도 못 하고 죽겠는데?"
"아...."
"대체 라이언이 어디서 그런 아티팩트를 얻었는지 모르겠네. 부럽구나. 녀석도, 아티팩트의 주인이 된 너도. 그 쇠사슬, 네 개가 한 세트인 거냐?"
이어진 질문에는 안도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약간 씁쓸하기도 했다.
'이렇게 강해졌는데....'
하긴, 4성 기사인 클람의 입장에서 이제 고작 2성에 불과한 자신의 움직임이 눈에 찰 리는 없었다.
도적 떼를 상대로 '가속'을 썼을 때도 카리나와 비교당했을 정도였으니.
그나마 아티팩트라 거짓말해 놓은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는 감탄해 주는 게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죠? 세트라고 봐야죠. 전부."
"이름은?"
"예?"
"그 정도의 성능을 지닌 아티팩트에 설마 이름도 없지는 않을 거 아니냐."
"그게, 그...."
"흠. 알려주기 싫으면 됐다. 그냥 계속 궁금해하지 뭐...."
"흑...기사."
"뭐?"
"흑기사입니다."
말을 하면서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자신도 모르게 지어낸 이름이 너무 유치하게 느껴졌으니까.
그나마 처음에 떠오른 중2병 감성 가득한 단어를 그대로 뱉어 내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흑기사? 아티팩트 이름이?"
"예. 뭐, 그렇게 지었습니다. 까맣다 보니."
"네가 지었다고?"
"...어, 예."
"잘 지었구나. 잘 어울려."
엥?
'당신이 괜찮다니까 왠지 더 이상한 이름 같잖아.'
젠장.
"아, 그런데 몸은 좀 어떠십니까? 혹시 상처 때문에 잠을 못 주무시는 건 아닌가요?"
자신의 거짓말로부터 시작된 대화가 너무 길어지려 하자, 무노는 황급히 말을 돌렸는데.
"괜찮아. 내일 도착할 때쯤이면 일단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거의 아물 것 같아. 물론 너처럼 과격하게 움직이려면 며칠 더 있어야겠다만."
클람의 신기하다는 눈초리가 이번에는 자신의 몸을 향하자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 하하, 저야 덜 다쳐서...."
"그렇다고 4성 기사인 나보다 회복이 빨라? 재생 계열도 아니라면서?"
"그, 제가 원래 좀 특이 체질이었습니다."
이래서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는다고 하는 것일까.
오직 호의로 자신을 대해 주는 이에게 자꾸 거짓말을 하려다 보니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런데.
"...뭐 그렇다고 치자꾸나."
빙긋 웃으며 돌아서는 클람의 모습을 보니, 어쩌면 이 중년의 기사가 다 짐작하면서도 모른 척해 주는 건가 싶기도 했다.
'여러모로 존경할 만한 사람 같아.'
물론 그래도.
"그런 특이 체질이면, 두 쪽으로 갈라지면 막 두 명이 되고 그런 거 아니냐?"
이런 재미없는 농담을 하는 것은 영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럴 땐 무시가 답이었다.
"얼른 주무시죠. 내일 저녁 성문이 닫히기 전에는 콘넬에 들어가자고 하셨잖습니까."
"네가 깨웠으면서 농담도 안 받아 주냐?"
"아깐 원래 잠이 안 왔다면서요?"
"아깐 아까고!"
"그게 뭔 소리에요!"
"뭐긴! 개소리지!"
"하...."
...존경은 개뿔이.
무노는 그렇게, 혼자 키득거리며 웃는 푸른 머리 중년인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싶은 충동을 애써 참아 내야만 했다.
* * *
다음 날.
다그닥. 다그닥.
비로소 말을 탈 수 있게 된 클람이었지만, 속보로 이동하는 내내 표정이 좋지 않았다.
"어으. 아직 곳곳이 쑤시네."
엄살을 부리고는 있지만, 평범한 사람이라면 죽었거나 평생 장애를 안고 갈 만한 부상이 고작 5일 만에 얼추 회복된 것을 보면 그 역시 확실한 초인이었다.
"그래도 피가 터지지는 않네요. 확실히 아문 것 같습니다. 속도 더 올리시죠."
"매정한 녀석...."
"해 지기 전에 도착하자고 한 건 클람 경입니다."
"클람 경 말고, 형이라고 부르라니까! 자식이, 거리감 느껴지게...."
헛웃음이 나왔다.
"거, 처음 만났을 때랑 캐릭터가 너무 다른 거 아닙니까...."
"말했잖아! 손님 대접은 이미 넘치도록 했다고."
"뭐, 저야 좋습니다만.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당연하지! 사나이들끼리 생사의 순간을 함께 넘었으면 형 동생 할 만하지!"
"그럼 저희 아버지한테 존댓말 하셔야 할 텐데...."
"아.... 크흠, 음. 생각해 보니, 아무리 전우끼리라도 위계 질서는 있어야지."
피식.
딴청을 부리는 클람의 태도는 트리안에서의 첫인상과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지만, 차라리 이런 모습이 더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도착한 콘넬 성의 분위기는, 예상과는 사뭇 달랐다.
"뭐야...?"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클람이 인상을 찌푸렸다.
석양이 질락 말락 한 늦은 오후.
관례상 항시 열려 있어야 할 콘넬의 북쪽 성문은 완전히 닫혀 있었고.
20m 가까이 되는 듯한 높은 성벽에는 여기저기 부서진 곳이 눈에 띄었다.
"북부와 남부의 교역로 역할을 하는 성이라면서요? 드나드는 상인들도 많을 거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뭔가 잘못된 것 같다. 일단 가 보자꾸나."
히이이이잉!
아무도 없는 관도에서 말을 달리는 클람에게서는, 얼마 전까지 장난을 치던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두두두두두.
그들이 성문에 가까워질 때쯤.
어느새 횃불이 올라온 성벽 위에서, 갑자기 그들을 향해 화살이 날아왔다.
파바바바박.
그나마 몸을 맞히려는 뜻은 없었던 듯, 화살은 그들의 한참 앞쪽 지면에 박혔다.
히이이이잉!
경고의 의미가 확실한 신호.
그들은 그대로 말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문을 열어라! 트리안 기사단의 부단장, 클람 로즈안이 일행과 함께 조사단을 돕기 위해 왔다!"
신분패를 치켜든 클람이 소리를 지르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성벽 위에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 신분패를 던져라. 확인해 보겠다.
성벽 위에서 들려온 대답은, 그들의 인상을 확 찌푸리게 만들었다.
34화. 이놈 봐라?
"뭐라...?"
클람이 꺼내든 신분패는 새하얀 은빛으로 반짝반짝 빛이 났다.
아무리 보는 눈이 없다 한들, 귀중한 물건이라는 것은 알 수 있을 정도로.
심지어 그런 걸 보통 여행자나 상인들이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거기다 일행은 고작 둘인데 이렇게까지 경계하다니.
"당장 성문을 열어라!"
- 그럴 수 없다. 콘넬은 지금 비상경계 중이다. 신분패를....
그 말이, 중상을 입고 5일 넘게 노숙했던 기사의 인내심을 완전히 날려 버렸다.
"쌍!"
순간적으로 말 위에서 뛰어오른 클람의 몸이 한순간에 십여 미터 높이의 성벽 위로 날아올랐다.
"엑!?"
저 양반이?!
그 돌출 행동에 깜짝 놀란 무노 역시 반사적으로 성벽 위를 향해 몸을 날렸는데.
피이이잉!
팡!
성벽 위에서는 이미 적의 침입을 알리는 듯한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파박.
히잉!
거기다 바람처럼 가볍게 날아오른 클람과는 달리, 무노는 말이 비틀거리는 충격을 남기면서 도약했는데도 5m가량밖에 솟구치지 못했다.
'젠장.'
콰직.
파바박.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사슬을 꺼내기 싫었던 그가 성벽을 딛고 점프하기를 두 차례.
그리고 나서야, 콘넬의 기사로 보이는 이의 목에 창날을 갖다 대고 있는 클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세븐스타인 줄 알아!? 둘이서 성을 공략하게!? 대체...!"
"아저씨! 스톱!!"
뒤늦게 등장한 그의 외침에 병사들이 움찔한 순간.
무노는 이미 클람에게 다가가 그의 창을 꼭 붙들고 있었다.
클람이 정말 찌르기야 하겠냐마는, 콘넬의 병력들에게 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 줘야 했으니까.
다행히.
"아저씨? 킁. 뭐, 답답한 호칭보단 한결 낫구나."
클람 역시 바로 호응하듯 창을 내렸다.
딴에는 멋있게 다시 창을 메는 모습을 보여 주려는 것 같았지만, 무노의 눈에는 한심해 보일 뿐이었다.
왜냐하면.
"다리에 상처 터졌습니다. 자중 좀 하시지...."
"뭐? 윽. 젠장!"
거의 아물었던 오른쪽 종아리의 관통상에서 번져 나오는 핏물을 인식한 클람이 인상을 구길 때.
무노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콘넬의 기사를 향해 물었다.
"트리안에서 왔다는 걸 더 증명해야 합니까?"
"하, 하지만 당신들 차림새가 기사라기엔...."
아!
기사의 말을 듣고서야 무노는 시선을 내려 자신의 몰골을 살폈다.
트리안에서 출발할 때 차려입었던 갑옷들은 마법사들과의 싸움에서 넝마가 되어 버린 지 오래.
그나 클람이나, 지금은 며칠 전에 처리한 도적 떼의 소지품에서 얼추 몸에 맞는 것을 찾아 입은 상태였다.
상대적으로 초라할 수밖에 없는 무장에 더해, 무노의 경우엔 팔다리에 흔히 보기도 힘든 투박한 형태의 검은색 갑옷까지 두르고 있었으니.
충분히 수상해 보일 만하긴 했다.
"하. 클람 아저씨, 신분패 좀 확실히 보여 주세요. 올라온 김에."
"안 그래도 그러려던 참이다."
피 묻은 붕대를 더욱 꽉 조여 맨 클람이 번진 핏물을 조금 닦아 내더니 다시 꺼낸 신분패에 묻혔다.
그러자.
번쩍.
은은하게 빛난 신분패가 그 앞으로 사람 상체만 한 회색 장미의 환영을 불러냈다.
"오!?"
"뭐, 뭐야!"
"와!?"
주변을 둘러싼 병사들이 탄성을 내지를 때, 무노 역시도 놀란 눈으로 그 회색 장미의 환영을 바라보았다.
'홀로그램?'
신분패에 저런 기능이 있었어?
놀라운 건 놀라운 거였지만, 황당하기도 했다.
"이게 가능했으면, 아까 밑에서 보여 줘도 되지 않았습니까?"
"...이건 피 묻혀야 돼. 일부러 상처 낼 생각은 없었단 말이다."
움찔한 클람이 궁색한 변명을 내뱉을 때.
콘넬의 기사는 살짝 커진 눈으로 홀로그램(?)을 바라보더니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군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인상을 조금 편 클람이 곧장 되물었다.
"그럼, 대체 왜 콘넬에서 성문을 통제 중인지 좀 설명해 줄 수 있나? 들은 바가 없는데."
"아, 그게...."
기사가 뭐라 말하려 할 때,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오라버니."
하늘 위에서 들린 목소리에 자연스레 모두의 고개가 들리는데.
푸르고 긴 머리를 휘날리는 여인이 새하얀 바람을 휘감고 성벽 위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마법?'
마법 외의 이능력을 본 적 없는 무노는 본능적으로 등 뒤의 대검을 잡으려다가.
"라미!?"
클람의 반가워하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멈칫했다.
"또 마법사 놈들인 줄 알고 식겁했네요. 왜 이렇게 거칠게 들어오세요? 답지 않게."
눈가와 미간의 옅은 주름에서 연륜이 엿보이는 중년의 미인은 싱긋 웃으며 클람을 타박했다.
'파란 머리? 오라버니? 설마?'
인정하긴 싫지만 클람 역시 꽤나 미남이었으니 자연스럽게 그녀의 정체가 추측되었다.
그리고 마법이 아닌, 저런 형태의 이능력이라면.
"...정령술?"
"처음 보는 기사님이네요. 어려 보이시는데, 흠. 저는 정령사 라스미아예요. 여기 있는 클람 오라버니의 동생이기도 하답니다."
"무노 드라센입니다. 트리안에서부터 클람 경과 동행했습니다."
"아, 트리안의 신입 기사가 아니라... 음? 잠깐, 무노 드라센이라면 최근에 유명해진 그 젊은 천재.... 맞나요?"
눈을 빛내는 정령사를 보며 무노는 어색하게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천재라니....'
전생에도 현생에도 아등바등 살아남기에만 바빴던 자신에겐 과분한 찬사라는 생각에 괜히 부끄럽기만 했으니까.
그런데 그 말에 클람이 더욱 크게 맞장구쳤다.
"그놈 맞다. 오히려 소문이 축소된 감이 있지. 천재 정도가 아니라 아주 괴물이야."
"오! 그래요...?"
"저기, 지금 비상사태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랬지. 라미, 설명 좀 해 주거라. 대체 무슨 일이냐?"
얼굴에 금칠을 해 주는 것이 도통 익숙하지 않은 무노가 바로 화제를 바꾸는 데 성공했지만.
그 직후에도 정령사 라스미아는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십니까?"
"느낌이 미묘하게.... 아, 아니에요. 착각이겠죠. 뭐."
"...??"
무노가 어리둥절해할 때.
라스미아는 다시 클람에게 시선을 돌리며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라버니도 아시다시피, 조사단은 모에노 콘넬 자작이 마법사와 내통했다는 확신을 가지고 이곳에 왔어요. 하지만 한동안은 어떤 혐의점도 찾지 못했죠. 그러다가...."
라스미아의 말은 빠르게 이어졌다.
조사단은 마법사의 직접적인 흔적을 찾진 못했지만, 행정 감사를 통해 콘넬에서 거액의 예산이 외부로 빼돌려졌다는 것을 알아 냈다고 한다.
때문에 행정관인 가이온과 영주인 모에노 콘넬 자작을 함께 심문하기 시작했는데.
조사단과 콘넬의 중요 인물들이 모두 모인 그 자리에서, 그 가이온이라는 행정관이 갑자기 엄청난 마력을 폭발시켰다고.
그리고 그 때문에.
"...티넬 님께서 저를 감싸다가 중상을 입으셨고, 폭발에 같이 휩쓸린 모에노 콘넬 자작은 아직도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동시에 마법사들이 성내에서 산발적으로 테러를 일으킨 탓에 기사들과 병사들의 피해가 커졌습니다. 또 가이온을 쫓는 과정에서 우리 쪽 기사 릭스와 론도 사망했고요."
"뭐 티넬 님이!? 아니, 그래서 놈은...!?"
"...놓쳤습니다."
"뭐?! 너는 대체 뭘 했는데? 아니, 애초에 왜 정령사가 마법사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거냐?"
부릅뜬 클람의 눈을 본 라스미아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부끄럽지만, 놈은 이상한 마도구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마력을 너무 완벽하게 숨겨서 사제님들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더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무노는 눈을 빛낼 수밖에 없었다.
'역시....'
여태 긴가민가했지만, 이제는 확실해졌다. 적어도 마력을 숨긴 놈들의 정체를 밝혀내는 데에는 사제나 정령사보다 자신이 더 뛰어나다는 것을.
"...4서클의 마법사로 보이는 놈이 자신의 손가락을 희생해 가면서 연달아 수준 이상의 마법을 퍼붓는 통에 그만...."
그 말을 듣고 있던 모든 사람의 얼굴이 굳어지자.
"그, 그래도 놈의 손가락이 다 날아간 것은 확인했으니, 다시 등장하더라도 그만한 힘을 내지는 못할 겁니다."
황급히 보탠 라스미아의 변명에도 무거운 분위기는 풀리지 않았다.
"다시 등장한다면 말이지. 그래서 이렇게.... 하.... 각하께는 보고했느냐?"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으로 뒤늦게 경계 태세를 강화한 게 아니냐는 비난이 은연중에 섞여 있었지만, 라스미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날 바로 보고드렸어요."
"모에노 자작의 혐의는?"
"폭발에 휩쓸리던 당시의 태도와 지금 상태를 보면, 자작극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실제로 생명이 위험하니까요."
"혐의가 없다?"
"아직 죽지 않았다뿐이지, 기적이 없는 한 회생이 어려울 거라고 사제님들이 결론을 내린 상태에요. 혐의점이 있다 없다를 말하기 전에, 무의미해진 거라고 봐야죠."
"빌어먹을...."
클람이 분한 듯 욕설을 내뱉는데, 무노의 심정도 다르지 않았다.
'놈들을 쫓을 선이 끊긴 건가? 아니, 아니야. 놈들이 나를 노리는 한....'
저절로 이가 갈릴 때.
"일단 티넬 님께 가지. 그 후에 통신구를 연결해 줘. 나도 각하께 따로 보고드릴 일이 있으니."
"안 그래도 너무 늦으셔서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오라버니야 당연히 무사할 거라 믿고 있었지만...."
라스미아는 말끝을 흐리며 무노에게 시선을 돌렸다.
...난 잘못됐을 수도 있다?
한숨이 나왔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걱정이었으니.
"같이 가시죠. 일단 클람 님도 완전한 상태가 아니니 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음?"
"신경 쓰지 마라. 이 정도 부상이야 기사에게는 일상이니. 그리고 무노, 아까는 아저씨라더니 그새 또 님이냐?"
"거, 존칭이 그렇게 거슬립니까? 아. 저. 씨."
"그래, 그래야지. 사람 섭섭하게."
역시나 당최 이해 못 할 사람이다.
무노는 다시 한숨을 내쉬며 성벽을 내려가는 클람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오라버니께서 공자를 꽤나 마음에 들어 하시나 봐요. 보통은 친구 혹은 죽여야 할 적한테만 반말하시는데."
라스미아가 한마디 보탠 말에 무노는 그저 웃고 말았지만.
뒤쪽에 있던 콘넬의 기사의 얼굴은 하얗게 질릴 수밖에 없었다.
* * *
"으...? 클람?"
안내를 받고 들어선 내성 구석의 너른 방 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상체에 붕대를 둘둘 감은 채 침상에 누워 있는 '작고 굵은' 사내였다.
키는 160cm가 될까 말까 한 듯했지만, 신장에 비해 기이할 정도로 넓은 어깨와 근육질 체구는 그야말로 단단해 보인다는 말이 어울리는 인상을 주었다.
그런 남자가 반백의 갈색 수염을 쓰다듬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거 부끄러운 꼴을 보이는구만...."
"괜찮으십니까?"
"거참, 여전하구만 자넨. 그런데 저기 일행은...."
"무노 드라센. 라이언의 아들입니다."
클람의 말에 따라 무노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자, 창백한 티넬의 얼굴에 살짝 놀란 기색이 보였다.
"아. 그 천재 양아.... 흠, 그래. 만나서 반갑네. 초면에 이 꼴이라 좀 부끄럽네만. 끙."
티넬이 몸을 일으키는 것을 힘겨워하자, 사방이 막힌 방 안에서 갑자기 불어온 바람이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고맙네, 라스미아."
"별말씀을요. 그런데 여전히 차도가...."
"지독한 마법이야. 마력이 상처에 맴돌면서 사라지질 않아. 자네 말대로 저주의 힘도 더해진 마법 같아."
"...죄송합니다. 제가 도움이 못 돼서."
"그럴 필요 없네. 상급사제도 해소하지 못한 저주를 4클래스의 정령사가 어찌하겠나. 시간 지나면 사라지겠지."
담담히 대화를 나누는 티넬과 라스미아를 본 무노가 눈을 빛내며 바로 앞으로 나섰다.
"마력이 문제라면, 제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음? 자네가?"
"마법을 상쇄할 만한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거든요."
이 거짓말이 이젠 입에 밴 것 같아 찜찜하기도 했지만, 보란 듯이 내민 오른손의 전투 장갑은 주변의 시선을 확실히 끌어모았다.
"뭐? 그런 귀물을? 아니, 잠깐만...."
반색하던 티넬은 갑자기 잠시 인상을 찌푸리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네. 이건 적어도 4서클, 어쩌면 5서클 이상의 저주야. 안티매직 아티팩트라면 귀한 만큼 한계도 뚜렷할 텐데, 괜히 자네 아티팩트를 망가트릴 수도 있어."
"충분할 겁니다. 아마...."
성장하기 전에도 4서클 마법을 일부나마 삼켰던 그였다.
두 번째 진화를 끝낸 지금이라면, 흔적만 남은 마법 정도야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을 터였다.
"맡겨 보시죠, 티넬 님. 저흰 오는 길에 마법사의 습격을 받았는데, 그때도 저 아이가 먼저 눈치챘었습니다. 저 아이는, 그리고 저 아티팩트는 확실히 믿을 만합니다."
"...그래?"
여전히 미심쩍은 눈치의 티넬.
하지만.
"그럼 조심스레 부탁 좀 해도 되겠나?"
이내 그가 미안한 얼굴로 헛기침을 하며 그리 말하자, 무노는 웃으며 그의 어깨를 짚었다.
그리고.
츠으으으으.
무노의 눈에만 확실히 보이는 검은 연기가 그의 전투 장갑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지는 즉시.
라스미아가 그를 놀란 표정으로 바라봤고.
"오!?"
티넬은 탄성을 질렀다.
지켜보는 이들은 몰라도, 당사자인 5성급 기사는 금세 육체의 변화를 눈치챈 것이다.
"이렇게 쉽게? 자네, 대단한 보물을 가졌군."
"...뭐. 운이 좋았습니다."
"크으. 혹시, 이거 한 번 더 가능하겠나?"
"예?"
"모에노 콘넬 자작, 그자도 사경을 헤매고 있을 테니까 말이야. 저주만 어떻게 하면 사제들이 치료할 수 있지 않을까?"
티넬이 안광을 빛내며 내놓은 제안에, 듣고 있던 모든 이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렇군요."
"그럼 혹시...."
"모에노가 정신을 차린다면, 그 빌어먹을 마법사 놈들의 꼬리를 다시 잡을 수도 있겠지. 놈이 정말 관련이 있건 없건 말이야."
이 자리에서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무노는, 곧바로 콘넬의 기사들을 통해 모에노 콘넬의 방으로 안내받았다.
그리고.
'...얼씨구? 이놈 봐라?'
사경을 헤매는 모에노 콘넬 자작의 모습을 본 순간, 기묘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35화. 넌 그 하찮은 놈한테 뒈지는 거라고
"그런데 이 젊은 분이 트리안 부기사단장...?"
"그럴 리가요. 오라버니는 통신실로 가셨습니다, 칼튼 경."
"아, 예. 역시 그렇군요. 그럼 이분은...."
"무노 드라센 경입니다. 드라센 가문의 첫째 공자시죠."
"아? 그런데 왜...."
"쉿. 지켜보시죠."
등 뒤에서 오가는 라스미아와 기사의 대화를 한 귀로 듣고 흘리며, 무노는 침대 위의 중년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목소리도 조심해 주셔야 합니다. 보시다시피...."
환자의 수발을 들던 늙은 시종의 조심스러운 한마디도 무시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모에노 콘넬 자작에게 감각을 집중했다.
커다란 침대 위에 창백한 안색으로 누워 있는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인.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는 채로 전신의 2/3가 붕대로 뒤덮여 있었는데, 얼핏 삐져나온 상처만 보면 심각한 화상을 입은 것 같았다.
들은 대로 정말 사경을 헤매고 있는 듯한 모습이지만.
무노의 감각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 잘 차려진 밥상....
아냐!
다시금 준동하려는 악마포식자를 억지로 억누르며, 무노는 차가운 눈으로 자작을 살폈다.
'껍질만 다쳤어....'
심장 박동이나 숨소리가 불규칙하고 체온이 높아져 있는 등, 겉으로 보이는 바이탈 사인은 확실히 중환자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자작의 몸 안에서는 은밀하게 감춰진 진득한 마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리고 그 마기가 육체의 생명력을 '숨기고' 있다는 것도.
마치 상처가 악화되려 할 때만 조금씩 생명력을 북돋으며 생명을 유지시키고 있는 듯한 상태.
그 원리를 꿰뚫어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자작의 상태를 잘못 진단할 수도 있을 듯했다.
티넬의 경우처럼 마기가 회복을 방해하는 것으로 말이다.
"그날 이후로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계십니다."
"흐음...."
시종의 말은 무노를 오히려 코웃음 치게 만들었다.
'깨어 있어. 뇌는 멀쩡해.'
자작의 온몸에 마기가 진득하게 어려 있기에 그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건 거의 마기가 만들어 주는 생체 지도랄까.
자작의 뇌에서 내려진 신호에 따라 마기가 움직여 생명력을 조절하는 과정까지 보일 정도였다.
'경지는 3서클 정도.'
자신에겐 이렇게 자세히 파악되는데, 사제나 정령사가 눈치채지 못했다?
"라스미아 님, 자작의 몸에서 마기가 느껴지십니까?"
그 질문에 라스미아가 여전히 묘한 눈으로 무노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마법을 시전하거나 직접 마력을 활용하는 마법사가 있어야 구별할 수 있습니다. 잔흔 정도로는 힘들어요."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정령사는 세상을 구성하는 정령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라지거나 멀어지려 하는 것을 보고 마력의 유무를 판단합니다. 아까 공자가 티넬 님의 몸에서 마기를 뽑아낼 때도...."
"사제님들은요?"
"아, 그분들도 저희와 비슷하지만 좀 더 직접적이죠. 신성력 자체가 마법에 반응하고 적대감을 부추긴다고 하더라고요."
정확한 건 알 수 없지만, 그 대략적인 설명만으로도 이 상황이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자신은 마기의 존재 자체를 직접 느낀다.
그에 비해 정령사나 사제는 한 단계를 더 거쳐서 마력을 가려낸다는 말이니.
'놈들에겐 정령력이나 신성력이 반응하지 않게 마력을 숨기는 수법이 있는 거야.'
그 원리를 대충이나마 이해하고 나니, 자작의 몸 안에 흐르고 있는 마기의 특정 패턴이 눈에 들어왔다.
"왜 그러시는 거죠?"
"아, 아닙니다."
무노는 콘넬의 기사 칼튼을 경계하며 말을 삼켰다.
그리고 다시 자작을 바라보았다.
이놈들의 수법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게 자신뿐이라는 것을 확인하며 묘한 쾌감도 느껴졌지만, 또 다른 의문도 들었다.
본래 마법사는 육체가 허약하기 마련이다.
놈들이 다루는 마기(魔氣)가 세상의 이치를 거스르는 힘인 데 반해, 정작 그 육체는 이 세상의 이치에 따라 만들어진 인간의 그것이니까.
혹자는 그게 고위마법사의 유일한 약점이라 말할 정도로 널리 알려진 상식이었다.
만약 누군가가 일부러 가사 상태를 몇 날 며칠 동안 유지한다면, 멀쩡하던 몸도 고장이 날 것이다.
그런데 원래부터 육체가 허약한 마법사가 그런 짓을 한다면, 그 부작용이 어디까지 갈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한다라....'
하긴 뭐....
눈앞에 사신의 칼날이 떨어질 상황이라면 못할 것도 없을 것 같긴 했다.
'그래. 죽은 척이라도 해야지.'
아마 드라센 발(發) 폭풍이 지나가고 난 다음에 어떻게든 회복해서 다시 귀족 행세라도 하고 싶은 것일 터였다.
그래도....
"사흘이 넘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럼 섭식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영주님 몸을 조심스레 일으켜 입 안으로 수프와 물을 조금씩 흘려서 드시게 하고 있습니다. 그나마도 절반 이상은 뱉어 내시지만...."
시종이 안타깝다는 얼굴로 자작을 내려다보는 꼴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무노는 저도 모르게 본심이 흘러나왔다.
"...지독한 놈이네."
"공자?"
"말을 가려 해 주시오, 공자. 아무리 조사단이라도...."
기사 칼튼의 분노 섞인 말은 깔끔히 무시했다.
굳이 기다릴 필요는 없을 것 같으니.
"당장 깨울 수 있을 것 같은데, 깨워도 됩니까?"
"예?!"
담담히 내뱉은 말에 모두가 놀랄 때.
"깨워도 된다는 말로 알겠습니다."
촤르륵.
'일단 도망 못 치게.'
무노의 오른손에서 쇠사슬이 튀어나와 침대에 누운 모에노 자작을 일순간에 칭칭 휘어 감았다.
"무슨...!?"
"뭐 하시는 겁니까!?"
라스미아와 기사가 기겁하는 것을 무시하고, 무노는 정신을 집중했다.
당장이라도 놈의 마기를 전부 집어삼키고 싶어 하는 악마포식자를 애써 컨트롤하기 위하여.
'지금 삼키는 건 안 돼. 눈과 귀가 너무 많아.'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마기를 자극하는 것도 가능했다.
이를테면.
'마기를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는 저 수법을 흐트러트리는 것.'
츠으으으.
악마포식자의 힘이 극히 제한적으로 움직이며 마기의 흐름을 건드렸다.
정확히는 외부에 기운이 노출되지 않도록 만들고 있는 마기의 패턴을 흐트러트린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안 돼!!"
시체처럼 누워 있던 모에노 콘넬이 상반신을 벌떡 일으키며 비명을 질렀다.
"허!?"
"영주님!?"
"어떻게!?"
놀란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는 순간, 자작의 몸에서 이제는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소름 끼치는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 나왔다.
"어...!"
"마법사!?"
"설마 영주님이...!"
그 목소리를 들은 모에노가 충혈된 눈으로 무노를 노려보았다.
이미 모든 것이 들통났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네놈, 네놈이 감히 그분의 수법을...!?"
비명 같은 고함 소리를 배경 삼아, 모에노의 전신에서 검은 불꽃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3서클의 마법사가 온전히 전력을 발휘해도 잡을 자신이 있는 게 지금의 무노였다.
"흥...."
우우우웅.
무노의 코웃음과 함께 뻗어 나간 검은 쇠사슬은 적의 그런 발악조차 무시하듯, 발현되려던 마법의 패턴을 그대로 흐트러트렸다.
"아닛!?"
"...별것도 아닌 게."
"어떻게!? 어떻게...!!?"
곧바로 분쇄되는 마법.
파르르 떨리는 모에노의 얼굴이 그의 절망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그리고 강제로 흐트러진 마법은 이내 그 주인에게 강력한 반동을 돌려주었다.
우우우웅.
"커헉."
털썩.
"쿨럭. 쿨럭."
창백해진 안색으로 연신 피를 토해 내는 모에노.
전신에 화상을 입고 붕대를 감은 환자가 각혈까지 하고 있음에도, 그를 간병하던 시종조차 그 근처에 가지 않았다.
"어, 어떻게 영주님이...."
"주군...."
보통 사람이라면 느낄 수밖에 없는, 불쾌하고 혐오스럽고 공포스러운 기운.
그 기운을 온몸에 두른 모에노 콘넬 자작은, 그의 심복이었던 이들조차 거부감을 느끼게 만들었으니까.
그리고.
"내통한 것도 아니고, 본인이 마법사? 어떻게 이렇게 감쪽같이...!?"
마법사를 가장 적대하는 이능력자 중 하나인 정령사는 놀란 모습 그대로 굳어 버렸다.
지금 이 자리에서 여유로운 자는 오직 한 명.
"뭘 그리 놀라십니까? 그 행정관 행세를 했던 놈도 감쪽같이 속였었다면서."
마법사를 쇠사슬로 묶은 무노는 씨익 웃고는, 피를 토하는 자작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이내 금속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양식의 검은 전투 장갑 주먹이, 중환자의 머리를 강타했다.
뻐어억.
"꺽...!"
쿵.
털썩.
자작의 몸이 침대 옆으로 날아가 종이 인형처럼 바닥에 나뒹굴 때.
무노는 뒤에서 여전히 멍한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는 기사를 향해 손짓했다.
혹시나 해서 경계하고 있긴 했지만, 자작을 제압할 때도 칼튼은 자신을 공격하지 않았고 지금도 진심으로 놀라는 것을 보니 확실히 놈과 한패는 아닌 듯했다.
"칼튼 경? 사제님들을 불러 주시죠?"
"왜, 왜?"
"왜긴요. 치료해야죠."
무노가 피식 웃으며 가리킨 곳.
모에노 콘넬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빨리 안 데려오시면, 이놈 죽을 것 같은데요?"
그 말을 들은 것처럼 움찔거리며 경련하는 모에노 자작의 몸.
'네가 그렇게 만들었잖아...!'
기사, 칼튼은 차마 목구멍까지 차오른 목소리를 뱉어 내지 못하고 뒤돌아서 뛰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 * *
"...자네가 정말 큰 역할을 해 줬어."
티넬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수습할 사람이 그밖에 없었기에, 간신히 회복해 가는 몸을 이끌고 대전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무노를 향한 짧은 찬사를 내뱉은 그는 포박되어 대전 한가운데에 눕혀진 중환자, 모에노 콘넬 자작을 바라보았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과 핏자국이 가득한 옷.
제대로 무릎 꿇리지도 못할 만큼 몸이 상해서 눕혀 놓은 죄인.
사제들이 하루 동안 거죽의 상처만 치료해 놓은 모에노는 지금도 반 시체 상태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조금 살살 제압하지 그랬나."
"놈이 마법을 쓰려다 역류해서 내상을 입은 것뿐입니다."
무노의 변명을 들은 티넬은 티 나게 오목하게 들어간 모에노의 한쪽 머리를 보며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머리가 파이는 내상도 있냐.'
하지만 혈기 넘치는 젊은 청년을 굳이 더 탓하고 싶지도 않았다.
"글로스 사제님. 자작, 아니 이 죄인이 의식을 차린 것은 확실합니까?"
그 질문에 죄인의 옆에 서 있던 늙은 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라 신성력이 온전히 적용되지는 않았지만, 다행히 고위마법사는 아니라서 화상은 제대로 치유할 수 있었습니다. 정신은 멀쩡할 겁니다."
마법사.
"허...."
사제의 확언에 주변에 모인 콘넬의 인물들 사이에서 동시에 한탄이 터져 나왔다.
그런 그들 중 한패가 있을까 봐 무노가 빠르게 훑었지만, 더 이상 마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현실을 받아들인 티넬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죄인, 아니 한때는 같은 주군을 모시던 자신의 동료를 바라보았다.
"이게 자네가 10년 전 토벌에 소극적이었던 이유였던가? 모에노, 귀족인 자네가 왜 굳이 마법에 손을 댔지? 그 끝이 파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
조사단의 지휘부와 콘넬의 가신들이 모두 지켜보는 대전에서 티넬의 목소리만이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그에 움찔하던 모에노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랄...."
귀를 기울여도 듣기 힘든 희미한 목소리.
"뭐?"
티넬의 반문에 눈을 감고 있는 모에노의 목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쿨럭.
"지랄... 개, 소리.... 하지 마라. 티넬."
쿨럭. 쿨럭.
울컥 피를 토해 낸 모에노가 누운 상태로 간신히 머리를 들었다.
무리의 가운데에 선 티넬을 노려보는 충혈된 눈. 그 안의 광기를 모두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하? 뭐라고? 제정신이냐 모에노? 지금 네 처지를 몰라서 그따위 소리를 하느냐?"
티넬의 어이없다는 목소리가 울려 퍼질 때.
"안다. 아니까 하는 말이다.... 어차피 죽을 거...!"
창백하던 얼굴이 갑자기 상기된 모에노가 이를 악물며 고함을 질렀다.
"한낱 군소 왕국 중 하나였던 데우스 왕국은 마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대륙을 좌지우지하는 제국이 되었다! 마법은 그저 힘일 뿐이다, 힘!! 그걸 사용하는 게 뭐가 나쁘단 말이냐! 어리석은 놈들!"
"하...."
"그래서 이 왕국이 발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빌어먹을 촌 동네가 더 거지 같은 것이고!"
"미친 소리를...."
"나는 그냥 출세를 원했을 뿐이다! 힘을 원했을 뿐이야! 그것으로 트리안에 공헌하고자 했어. 왕국에 도움이 되고자 했을 뿐이라고!"
처절한 목소리가 점점 더 크게 울려 퍼질 때.
"푸하하하하하!"
그 옆에서 바로 광소가 터져 나왔다.
"미친 새끼. 뭐? 힘일 뿐이다? 네놈이 가담한 조직이 인체 실험을 하거나 인간을 제물로 바친다는 걸 몰라서 하는 소리냐?"
까드득 이를 가는 무노의 목소리에 모에노는 코웃음을 쳤다.
"흥. 하찮은 것들의 희생으로 모두가 발전할 수 있다면 못 할 게 뭐냐! 그 고루한 발상이 이 나라를 망친 것이다!"
이미 사는 것을 포기한 모에노는 발작하듯 소리를 질렀다.
완전히 미친 자의 행태였다.
본디 미친 자에게는 논리가 통하지 않는 법.
그러나.
"그 하찮은 것 중 하나가 나였다."
논리가 아닌 일차원적인 감정은 미친 자에게도 전달되기 마련이다.
무노의 지극한 분노가 모에노의 정신을 살짝 돌아오게 만들었고.
"...뭐?"
"그러니까, 넌 오늘 그 하찮은 놈한테 뒈지는 거라고."
"그런...!?"
그제야 파리하게 질린 모에노의 안색을 보며, 무노는 주먹을 휘둘렀다.
쾅!
36화. 자백
쾅!
단숨에 모에노의 머리를 깨트릴 듯했던 검은색 강철 주먹은 그 앞을 막아선 은빛 건틀릿에 가볍게 잡혔다.
요란한 소리와는 달리, 클람은 무노의 전력이 담긴 주먹을 큰 힘 들이지 않고 받아 냈고.
곧 무노의 손을 가볍게 밀어 내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진정해라. 처형은 어디까지나 각하의 뜻에 따라야 한다."
쯧.
"알겠습니다."
좀 전까지 격분하던 무노였지만, 혀를 차며 돌아선 그의 표정은 어느새 평상시처럼 돌아와 있었다.
모에노의 어이없는 변명을 들은 순간 끓어오르던 분노는 악마포식자의 살기에 이미 파묻혀 버렸으니.
악마포식자를 의식에서 분리해 통제하는 동안, 그 분노 역시 순식간에 가라앉아버린 것이다.
'이것도 정상은 아니야.'
무노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며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유년기의 고통스러운 경험 덕에 얻게 된 특기에 부작용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낀 것이다.
조금 혼란스러웠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런데 무노, 아까 그건 무슨 말이냐? 그 하찮은 것 중 하나가 너였다?"
아, 이런.
"...그건,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보다는 지금 이 자가 더 중요할 텐데요."
"그렇지."
무노가 애써 화제를 돌리자, 다행히 클람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티넬이 냉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모에노. 곱게 죽고 싶다면, 아는 걸 다 털어놓는 게 좋을 거야. 남은 가족들이라도 살리고 싶다면 말이다."
무노의 살기에 굳어 있던 모에노가 그제야 흠칫하며 티넬에게 시선을 돌렸다.
클람에게 막힌 무노의 주먹질이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는지, 충혈된 눈이 광기로 번들거리는 것은 여전했지만 씰룩거리는 입술은 할 말을 고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굳이 드라센에서 군터 경을 데려오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모에노. 옛 동료를 '해체 전문가'에게 던져 주고 싶지는 않아."
읭?
이어진 티넬의 말에 무노가 헛웃음 지을 때, 모에노는 티가 나게 움찔했다.
그 위협이 제대로 먹혔다는 뜻이다.
'진짜? 군터 그 양반.... 대체 무슨 짓을 하면서 산 건데?'
마치 옆집 아저씨처럼 친근하게 대하던 사람의 살벌한 이면을 상상해 본 무노가 괜히 찜찜해할 때.
모에노가 억지로 상체를 일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끄응...."
그는 자신의 시선을 받은 콘넬의 가신들이 일제히 눈을 돌리는 것을 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심지어 그 안에는 그의 자식들과 부인까지 있었다.
'장막'이 깨어지고 흘러나오는 마기 때문일까, 아니면 대전의 바닥을 뒹구는 자신의 처참한 몰골 때문일까.
평소와 너무도 달라진 가솔들의 태도가 다시금 자신의 처지를 깨닫게 만들었다.
'저놈만 아니었어도....'
분노한 모에노는 다시 한번 무노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이내.
"...약속해라, 티넬. 내 자식들은 살려 주겠다고."
그의 입에서 모든 걸 포기한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연좌제가 기본인 이 시대 귀족들의 생리에서는 그조차 파격적인 조건이었지만.
티넬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각하께서는 자비로우시다. 알 텐데?"
"내 사람에게만 자비로우시지. 배반자에게는 잔혹하시고."
"그걸 알면서...? 하.... 내가 적극적으로 건의하겠다. 믿어라."
그 말을 들었음에도 모에노의 입은 한동안 달싹이기만 했다.
그는 무언가 불안한 듯 다시금 사방을 둘러보다가, 이내 자신을 외면하거나 노려보는 사방의 적의 어린 시선 속에서 고개를 푹 숙이며 말을 꺼냈다.
"...가이온이 내게 접근한 것은 10년 전 그때, 사교도의 생사가 화두로 떠오르기 직전이었다. 무능력자였던 내게 재능이 있다 말하며 접근해 왔지...."
그렇게 시작된 모에노 콘넬의 이야기는 절절한 자기 고백이나 다름없었다.
초인들이 판을 치는 이 란트라 대륙에서 약골로 태어나 가문의 비기도 잇지 못했으면서, 외동아들이란 이유만으로 자작이 된 모에노.
그는 항상 무능력자라는 열등감과 가문을 유지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슴에 품고 살아왔다.
그랬기에 그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고 말한 가이온의 말을 의심하면서도 결국엔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가 정령술의 기초라 말하며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사실 마법의 기초였다. 처음에는 몰랐지...."
마력을 일깨우기 위해 외신과 마주했을 때는, 싫어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어쩌면 알았다 하더라도 그대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뭐?"
"티넬. 너 같은 놈들은 내 마음을 모를 테지. 저기 저 실험체 놈이나 저 잘나신 정령사처럼 재능이 넘치는 자들은 절대로 이해 못 해!!"
다시금 버럭 고함을 지르던 모에노는 이내 날카롭게 쏟아지는 시선을 보며 멈칫했다.
"실험체?"
티넬이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린 그 말에 무노가 괜히 뜨끔해하던 그때.
모에노는 자신의 처지를 자각한 것인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처음에는 능력이 생긴 것이 마냥 기뻤다. 게다가 가이온은 마력을 숨기는 수법이 있으니 들킬 일도 없다고 말했었다. 정령사나 사제들만 잘 피하면 된다고...."
"음?"
인상을 찡그리는 사제와 정령사들을 보며 모에노는 피식 웃었다.
"그때의 '장막'은 그 정도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일반인이나 강체술사의 눈을 가릴 정도. 그래, 10년 전 그 토벌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랬지."
모에노가 마력을 막 각성했을 무렵부터, 트리안에서 모종의 실종 사건이 터지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트리안 영지 전체의 분위기가 살벌해졌고, 에녹 트리안이 적극적으로 사건을 수사하기 시작했을 때는 모에노도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다.
아직 마법사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았던 당시에도, 그는 그 사건이 자신에게 손을 내민 가이온과 그 일당들의 짓일 것이라 본능적으로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뒤였다.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내가 죽거나 가문이 멸망할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각하의 눈을 가리기 위해 거짓 정보를 퍼트리기도 했었는데...."
"네놈...!?"
클람이 발작하듯 반응한 순간, 티넬이 손을 들어 막았다.
그리고 모에노는 그런 옛 동료들의 모습을 보며 탄식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게 의미가 없어졌지. 각하는 얼마 되지 않아 가이온이 말한 '실험실'을 전격적으로 습격했으니까. 솔직히 각하가 어디서 그 정보를 얻었는지 아직도 궁금해."
"실험실? 본거지가 아니라?"
인상을 찌푸린 티넬의 목소리에 모에노는 피식하며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곳이 '조직'의 중요 거점이긴 했지만, 본거지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분'이 있는... 컥!? 끄으윽!?"
그때, 순순히 이야기를 털어놓던 모에노의 몸이 갑자기 발작하듯 튀어 올랐다.
"끄르륵!?"
그의 두 눈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 부풀어 오르고 머리까지 조금씩 커져 가던 어느 순간.
"잡아!"
티넬의 외침과 함께, 라스미아의 전신에서 돌풍이 일어나 모에노의 몸을 향해 쏘아졌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촤르르륵.
어디선가 튀어나온 검은 쇠사슬이, 그런 모에노의 몸을 휘감았다.
"어디서 개수작을...!"
코웃음을 친 무노는 그대로 모에노의 마력을 흡수하려 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가장 중요한 말을 듣기도 전에 모에노가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때.
휘이이이잉!
한발 늦게 모에노의 전신을 덮친 새하얀 바람이 그 쇠사슬 주변을 감쌌다.
드러나는 효과는 마법과 비슷하지만, 마력과 확실히 다른 따스함과 포근함이 느껴지는 힘.
'이게 정령술....'
새삼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 때, 무노는 자신을 바라보는 라스미아와 눈이 마주쳤다.
갑자기 눈이 확 커진 그녀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지금은 거기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어쩌지?'
정령술이 그대로 쇠사슬에 부딪치고 있는 상황에서 마력을 빨아들이면 라스미아가 바로 눈치챌 것 같았으니까.
다행히 그 상황을 클람이 해결해 주었다.
"라미, 그냥 둬! 마법사용 아티팩트다! 무노에게 맡겨!"
"아. 예, 알겠어요."
휘이이이이잉.
새하얀 돌풍이 다시 사방으로 흩어지는 순간.
'지금!'
모에노의 몸에서 마력이 거침없이 빨려 들어왔고, 그에 따라 악마포식자가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하는데.
막상 무노의 표정은 그리 좋지가 않았다.
'어?'
3서클 마법사의 마력을 통째로 빨아들이는데도, 이전에 비해 기량이 증가하는 느낌이 많이 들지 않았다.
한번 마법에 사용된 마력은 흡수하더라도 바닥난 마력을 보충하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경험상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에노의 심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서클'의 본원 마력을 흡수하는데도 기량의 증가 폭이 미미했다.
2서클과 3서클 마법사를 하나씩 잡아먹고 격을 뛰어넘었던 악마포식자가, 이제는 3서클 하나를 '고작'으로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심각한 문제는.
'이건 모에노의 마법이 아니다?'
모에노의 눈과 머리를 부풀어 오르게 하고 있는 마력이 악마포식자의 힘에도 끌려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마법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모에노의 전력에 비해서도 아주 작은 마력일 뿐이었는데.
그 작은 마력이 마치 악마포식자의 힘을 비웃듯,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모에노의 머리를 터트리려 하고 있었다.
"끄아아아악!"
이게 어떻게 된 걸까.
어째서 저 미약한 마력을 처리하지 못하는 걸까.
당황스러웠지만, 현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젠장. 못 막습니다! 피하세요!"
마법의 정체를 알 길이 없는 무노가 고함을 지르고.
기사들이 비능력자들의 앞을 막아서며 방패를 세우고 갑옷을 눌러쓰는 순간.
"아악!"
퍼어어어어엉!
모에노의 단말마와 함께 그의 머리가 일순간에 터져 나가며, 그 잔해가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다행히 특별한 마법이 더 담기지는 않았는지, 위험한 폭발이 일어난 건 아니었지만.
한순간에 피와 뇌수를 뒤집어쓴 사람들은 그 끔찍한 광경에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피에 익숙하지 않은 일부 가신들은, 자신들이 모시던 주군의 비참한 최후에 슬퍼하기보다 속을 게워 내기에 바빴다.
"악!"
"우웩."
"으웨웩. 저게, 무슨...."
"끔찍...."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아악...."
남편의 처참한 최후를 보며 그대로 눈을 까뒤집고 기절하는 귀부인도 있었다.
"어머니!"
얼추 성년 즈음으로 보이는 자작가 아들들의 외침을 들으면서도, 무노는 머리가 날아간 모에노의 시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째서...?"
능력을 각성한 이래, 그는 자신이야말로 마법과 마력에 극상성을 가진 천적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그 확신이 처음으로 깨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을 폭사시켜서 비밀을 지킨다.... 그놈들다운 짓이군. 젠장."
티넬의 말대로, 거의 잡은 줄 알았던 원수의 꼬리가 다시 멀어졌다는 것이다.
"하...."
한탄하는 그의 어깨 위로 은빛 건틀릿이 얹어졌다.
"어떻게 된 거냐, 무노?"
"제 능.... 큼, 아티팩트의 힘이 통하지 않는 마력이 있었습니다. 아주 작은 마력이었는데, 그게 자작의 머리를 터트린 것 같습니다."
"놈의 몸 안에 다른 마력이 있었다?"
"예. 무슨 마법인지는 모르겠지만...."
"됐다. 그걸 알면 네가 마법사겠지. 그나저나 이걸 어쩐다? 티넬 님, 일단 보고부터 할까요?"
"으음. 그래야겠지. 이후의 일은 각하의 판단에 따른다. 콘넬 가문의 처분 역시도."
티넬의 시선이 쓰러진 어머니를 부축하는 모에노의 아들들을 바라보았다.
설령 선처를 받는다 해도, 저 아들들이 다시 이 영지를 이어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보다 중요한 문제는.
"이 잔당들을 어디서 다시 찾아야 하느냐인데.... 그런데 본거지가 아니라 실험실? 설마...."
사교 무리의 배후가 있을 거라는 무노의 주장이 티넬에게까지 전해지진 않았는지, 모에노가 최후에 토해 낸 말이 그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든 것 같았다.
"방법은 있습니다."
"음?"
"놈들은 결국 저를 노릴 테니, 낚시를 하시면 됩니다."
무노의 뜬금없는 말에 티넬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게 무슨 말이지?"
"처음에 드라센에서 놈들의 습격을 받은 것도 저고, 지금 마력을 숨기고 있던 모에노를 잡아낸 것도 접니다. 그러니 놈들은 앞으로도 저를 노리겠지요. 저를 미끼로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추천드립니다."
"하...."
이 젊은 청년의 혈기를 칭찬해야 할까, 나무라야 할까.
티넬이 당혹감 속에서 인상을 찡그릴 때.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정령사, 라스미아가 그 터무니없는 말을 꺼낸 청년을 불렀다.
"무노 공, 아니 무노 경. 잠깐 저와 얘기 좀 할까요?"
37화. 정령술
[13번이, 장막을 뚫어 보는 것 같다?]
"예. 그래야만 이 모든 상황이 설명됩니다."
통신용 수정구를 보며 고개를 숙이는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
뭉툭하게 손을 감싼 붕대는 금방이라도 핏물이 떨어질 듯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지만, 남자는 무표정하기만 했다.
[13번의 능력이 뭐였지?]
"금속 조종 능력이었습니다."
[능력의 변이...일리는 없고, 역시 '바쳐졌을' 때 무언가 변화가 있었던 거겠지. 좀 더 자세한 정보는 없나?]
"그게, 크레이멀 주교가 이식했던 사슬이 평상시에는 보이지 않다가, 갑옷 같은 것에서 갑자기 튀어나온다는 정보가 수집되었습니다."
[음? 흠.... 금속 조종 능력이 형태 변환과 압축까지 가능해졌나 보군. 하지만 그건 내가 원하던 대답이 아니야.]
"그 사슬이 데빌메탈로 만들어졌다는 자료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마기에 특별한 반응을 보일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말이 데빌메탈이지, 마도구를 만들기 위한 기본 공정이 더해진 사슬일 뿐이다. 고작 그런 걸 잘 다루게 되었다고 내 장막을 뚫어 볼 수 있다고 말하는 거냐?]
담담하게 이어진 반문 한마디.
하지만 그에 대한 남자의 반응은 극적이었다.
"그,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절대! 요, 용서를!!"
쿵. 쿵.
계속 무표정하던 남자가 황급히 탁자 아래에 엎드려 머리를 바닥에 찍었다.
쿵. 쿵.
그리고 그의 머리에서 흥건한 핏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할 때 즈음에서야, 탁자 위 수정구에서 나직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놈이 장막을 뚫어 보는 것은 확실한 것이냐?]
그제서야 계속해서 머리를 찧던 남자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확실하진 않사오나, 그렇게 가정하면 모든 상황이 설명됩니다."
[...그런가. 역시 크레이멀이 녀석을 바쳤을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해. '그 핏줄'에 흥미를 느끼지 않을 외신(外神)은 없을 텐데, 제물로 받지 않고 오히려 힘을 준 건가? 신기한 경우란 말이야. 대체 어떤 외신인 건지, 지금 와서는 알 방법이 없으니....]
외신이 제물로 바쳐진 이를 받지 않고 오히려 힘을 준다?
마법사의 상식을 박살 내는 발언이었지만, 남자는 더 이상 수정구의 목소리에 토를 달지 않았다.
오히려.
[흐음. 그때 크레이멀을 버리지 말았어야 했나?]
스스로 반성하는 듯한 그 말에 핏대를 올리며 반박했다.
"아닙니다! 만약 직접 관여하셨다면, '용검 공작'의 시선을 끄셨을 겁니다. 조직의 붕괴를 막기 위한 현명하신 결단이었습니다."
[그래, 그랬지. 역시나 그 늙은이가 문제란 말이야. 하찮은 강체술사 나부랭이가 너무 거슬려....]
"그거야 용검(龍劍, Dragonic Sword) 때문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세븐스타라 해도 용검 없이는...."
[그만.]
"죄, 죄송합니다."
[지금은 13번의 회수가 먼저다.]
"계획을 밀어붙이시는 겁니까?"
[그래. 하지만 괜히 무리수를 둘 필요는 없겠지. 콘넬과 연결된 선을 모두 끊고 한동안 자중하는 게 나아. 그리고 지금의 소란이 잦아들 때쯤, 확실한 전력을 투입해서 13번을 회수해야겠어.]
"...확실한 전력이라 하시면?"
[장로급을 보내야지. 그 드라센이라는 시골 영지를 초토화시켜서라도 놈을 확보한다.]
그 말에 남자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장로님들께서 제 말을 들으실 리가 없습니다. 만약 그분들이 진노하시면...."
[네가 전할 필요는 없다.]
"예? 아, 그럼 직접...."
로브를 입은 남자가 안도의 기색을 내비치는 순간.
수정구 속 그림자는 새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죽은 자가 말을 전할 수는 없으니까.]
"예!?"
눈을 부릅뜬 채 던진 그 반문이 남자의 마지막 말이었다.
뻐어어어어엉.
어떠한 전조 증상도 없이 순식간에 머리가 터져 나간 시체는, 더 이상 목소리를 낼 수 없었으니까.
[너 역시 콘넬에 연결된 선이 아니더냐.]
머리가 사라진 시체 위로 담담한 한마디가 울려 퍼지더니.
쩌저저저적.
퍼어엉!
요란한 소리와 함께 수정구가 폭발했다.
그렇게 수정구의 빛마저 사라진 암실에는, 짙은 혈향과 어둠만이 남아 끝없는 침묵을 이어 갔다.
* * *
"무노 공, 아니, 무노 경. 잠깐 저와 얘기 좀 할까요?"
악마교를 쫓을 방법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와중에 뜬금없이 들려온 말.
무노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예? 갑자기 무슨?"
그의 반문에 라스미아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경의 용기와 희생정신은 잘 알겠어요. 하지만 어차피 결정은 각하께서 하시는 거랍니다. 더는 우리가 할 일이 없으니, 일단은 티넬 님과 오라버니가 이 난리를 수습하도록 잠시 자리를 피하자는 거죠. 무노 경도 피곤할 텐데요."
눈웃음까지 치며 그리 말하는 라스미아의 태도가 조금 의아하게 느껴졌다.
'지금 피곤한 게 문제인가? 그놈들 쫓을 궁리부터 해야지.'
그런데 티넬은 한숨과 함께 손짓하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시게. 어린 친구가 고생해서 콘넬에 오자마자 또 큰일을 했는데, 쉬어야지. 라스미아 님, 대신 부탁하겠소이다."
"예. 그럼."
아, 그렇긴... 했지.
티넬의 말을 듣고서야, 무노는 갑자기 피로감이 밀려오는 걸 느꼈다.
생각해 보니 정말 여태 앞만 보고 달려온 느낌이 든 것이다.
그렇게 그는 일단 휴식을 취하기 위해 라스미아의 안내를 따랐다.
하지만 그녀는, 막상 대전을 나서자마자 태도가 확 바뀌었다.
"이거 보이죠?"
대전을 나선 라스미아의 첫마디.
그녀는 손바닥 위로 회오리치는 새하얀 바람을 무노의 눈앞에 들이밀고 있었다.
"예. 뭐, 이렇게 선명히 보여 주시면 당연히...."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리 대답하자마자, 라스미아는 안색이 환해지며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역시!!"
뭐가 역시인데?
과하게 반짝이는 눈동자가 너무 부담스러웠다.
"무노 경은 정령술에 재능이 있어요! 이거 정말 특이한 경운데!! 아하하하! 이럴 수가!"
"...뉘예!?"
상상도 하지 못한 말에 무노의 혓바닥이 꼬였다.
"바람이 어떻게 눈에 보이겠어요? 보통은 안 보여요! 거기다 제가 정령술 펼쳤을 때 마나도 느끼는 것 같던데요? 맞죠!?"
마나(Mana).
자연의 힘, 혹은 세상을 구성하는 원소의 본질이라 일컬어지는 에너지로.
세상의 이치를 흐트러트리는 악마의 힘인 마기(魔氣)와 대비되는 개념.
...이라고 들어 알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밑도 끝도 없는 전개에 그가 당혹스러워할 때.
라스미아는 신난 듯 말을 이었다.
"제가 바람을 불러일으켜서 모에노 자작을 압박하려 했을 때, 무노 경의 표정이 변하던데요? 제 바람에서 무슨 느낌 안 받았어요?"
"아. 뭐, 따스하고 포근한 느낌을 조금...."
"그게 마나예요! 역시! 맞았어! 이런 신기한 경우가...!"
계속 자신의 손을 잡고 방방 뛰는 라스미아의 모습은 어쩐지 정말로 기뻐 보였다.
'뜬금없이 정령술이라니....'
마기를 삼키고 활용까지 할 줄 아는 자신에게, 어떻게 그 정반대의 힘에 관한 재능이 있겠는가.
'아마 마기를 감지할 수 있다 보니 그에 반대되는 힘도 잘 느낀 거겠지.'
아니, 설령 자신에게 진짜로 그런 재능이 있다고 한들 라스미아가 왜 이렇게 좋아하는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하는데.
"강체술사가 정령술 쪽에 재능이 있는 경우는 진짜 드문 경우인데, 있었어도 보통은 진화하는 와중에 사라지거든요. 진화는 결국 강체술사의 비원(悲願)에 맞춰 몸이 바뀌는 거니까, 거기에 맞지 않은 재능은 사라지기 마련인 건데...."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들을 듣고 나서야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저, 저는 아마 생각하시는 것과 조금 다른 경우일 것 같은...."
"무노 경은 정령술을 배울 수 있어요! 그리고 새로운 정령사를 발견해서 전파한 공로라면, 저도 마지막 공적이 채워져서 다시 '탑'에 들어갈 수 있어요!"
이미 라스미아는 눈을 반짝이며 폭주하고 있었다.
자신을 보고 있지만, 동시에 그 너머의 무언가를 바라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탑? 아, 정령의 탑...이겠지?'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아이언 왕국에서 남쪽의 데우스 마도 제국을 지나, 더욱 남쪽의 흑인들의 나라를 지나면 나온다는 세상의 끝.
거대한 바다와 맞닿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 위에 존재한다는, 정령사들의 성지이자 중심지.
특히 아이언 왕국은 그곳에서 너무 먼 탓에 정령사가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제가 정령술을 배우면...."
"제가 탑에 들어갈 수 있는 티켓이 완성되는 거죠. 다른 공적은 다 채웠거든요!"
중년의 여자가 소녀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은 심히 부담스러웠다.
자신이 그녀의 기대를 깨트릴 것을 알고 있기에 더욱.
"으음, 저기 근데 그럼 일단 이 손 좀 놓고...."
"어머나. 내 정신 좀 봐. 호호호. 실례했어요. 너무 기뻐서 그만...."
후다닥 물러서며 배시시 웃는 라스미아의 모습에는 정말 나이에 맞지 않는 순수함이 보였다.
다른 의미로는, 간절함.
열변을 토하던 자신을 갑자기 불러낸 것도 그 때문이었겠지만.
그래도 괜한 기대가 커지기 전에 싹을 잘라 내는 것이 서로를 위한 일일 것 같았다.
"죄송하지만, 아마 제게 그런 재능은 없을 겁니다."
물론.
"예? 그럴 리가요. 바람의 색채가 보이고, 마나도 느낀다면서요?"
라스미아는 인정하지 않았다.
"저기 그게, 아마도 제가 마기에 되게 민감한 터라 그 반대되는 에너지도 느낀 것 같습니다. 이 아티팩트 효과까지 더해져서 말이죠."
촤르륵.
쇠사슬까지 뽑아내 보이며 강조해 보는데.
"예? 그게 그거 아닌가요?"
통하지가 않았다.
"예?"
"원래 마나에 민감한 사람은 마기에도 민감해요.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요."
"...예?"
"아무리 아티팩트의 효과라 한들, 정령사나 사제까지 속인 수법을 뚫고 마기를 느낄 정도면 그만큼 마나에도 민감할 거라는 말이에요."
"...에?"
실제로 마기를 느끼는 건 아티팩트가 아니고 순수한 내 능력이다.
그렇다면...?
"일단, 기초라도 배워 보는 건 어때요? 정령기사나 성기사라는 이름은 많이 들어 봤죠? 그 흔하지 않은, 특별한 계통의 초인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릴 수 있어요! 아니 뭐, 이름 날리는 데 관심이 없더라도 정령술 배워 둬서 나쁠 건 없잖아요. 이 나라에 정령술사가 얼마나 귀한지 알죠? 땅의 원소만 잘 다뤄도 어딜 가든 먹고 살...."
"자, 잠깐!"
숨도 안 쉬고 쏟아 내는 라스미아의 말에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다만 그 와중에도 한 가지 사실만큼은 확실히 그의 흥미를 끌었는데.
"마기를 잘 느끼면, 마나도 잘 느낀다고요?"
"예!"
그 단호한 대답에 무노는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성기사나 정령기사로서 또 하나의 이능을 다룰 수 있게 되면, 자신이 꿈꾸는 삶에 한층 더 가까워질 테니까.
다만 하나 걸리는 것이 있었으니.
"근데, 그럼 마법과 정령술을 동시에 배운 사람도 있습니까?"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몸 안에 어쩔 수 없이 마력을 품고 살고 있는 자신의 상황을 빗대어 질문을 던졌는데.
"예...? 그럼 죽죠?"
그 모든 희망을 와장창 부숴 버리는 대답이 들려왔다.
38화. 금속의 정령술
"신성력과 마나, 그리고 마기는 서로 상충하니까요. 몸이 터져 나가지 않으면 다행...."
"됐습니다, 그럼."
한순간에 부풀었던 기대감은 허무하게 팍 사그라들었다.
마력을 집어삼키고 그것을 에너지원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자신이다.
'차라리 마법을 배우면.... 아니, 아니지. 미쳤냐. 정신 차리자.'
문득 떠오른 삿된 생각은 기겁하며 털어 버렸다.
그랬다간 이 왕국에서 못 산다.
아니, 솔직히 왕국에서 못 사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가족들한테 버림받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애초에 마법을 배우기 위한 전제부터가 문제였다.
- 마법을 배우려면 악마와 계약을 해야 한다.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신의 머릿속에서 살던 악마.
몸을 내놓으라며 속삭이던 그놈의 목소리가 아직도 선한데, 무슨....
"...음, 무노 경?"
"예?"
"설마 마법을 배우고 있는 건...?"
"에에이! 미쳤습니까!?"
라스미아의 질문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버럭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순간 아차 싶었지만.
오히려 라스미아가 먼저 사과했다.
"아. 죄송해요. 제가 말도 안 되는 모욕적인 말을...."
생각해 보니, 마법 얘기에 기겁한 게 아이언 왕국민의 정상적인 반응 같긴 했다.
"크흠. 저도 소리 질러서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에요. 그래도 정령술은 한번 배워 보시는 게 어때요? 시도해 봐서 나쁠 건 없을 텐데."
죽는다면서요, 아지매?!
목구멍까지 솟구쳐 오른 마음의 소리는 차마 뱉어 낼 수가 없었다.
너무 과한 거부 반응을 보이면 다시 의심을 살 수 있으니.
"아. 예. 그럼. 시도만 해 보죠. 시도만."
남몰래 주먹을 꽉 쥐며,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하는 시늉만 해야 한다.
반드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