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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성공적으로 자재를 확보해서 복귀했다.

오가는 길의 안전만 확보하면 몇 차례 더 가서 나머지 물건들도 가져오게 될 듯하다.

"이 녀석은 여기 가둬 놓도록 하겠습니다."

철물 창고지만 철물만 있지는 않았다

나무로 만들어진 물건들도 있었다.

나무판자들을 엮어서 적당한 사이즈의 관 같은 것을 만들었다.

거기에 괴물, '맥'을 넣었다.

크르륵!!

그새 요리의 효과가 풀렸는지 날뛰는 녀석.

하지만.

"어허, 조용."

꽁.

크에엑.

본체는 연약하기 그지없다.

근처에 조종할 만한 철만 없으면 무력한 괴물.

식량도 철인 듯하니, 잘 관리한다면 문제없겠지.

그런 뒤.

트럭의 뒷문을 열었다.

전리품이다.

자재들을 확인하기 위해 공병들이 모여들었다.

"우와."

"뭐야 이거, 그냥 철들이 아닌데요?"

"미친, 무슨 재료의 강도가...!"

다들 감탄하고 있는데,

이공우 상병이 다가왔다.

"저희를 믿고 자재 확보를 우선시해 준 점, 감사합니다."

"고마워할 건 없고. 너희가 말한 대로 자재를 확보했으니, 우리 역할은 끝이야. 이제부터는... 알지?"

"예. 저희 역할이죠."

씨익 웃는 녀석

"기깔난 물건들로 만들어 보겠습니다."

자재들을 들고 어디론가 향하는 녀석들.

생활관 뒤편의 공간이 꽤 넓은 편이니 거기서 작업을 시작하려는 모양이다.

작업에 필요한 듯 몇몇 차량을 그쪽으로 끌고 가는 것도 보인다.

그 차를 슬쩍 보았다.

그리고.

[하급 식재료 감별]

[알루미늄]

[글라스화이버]

[기능성 세라믹]

.

.

.

또다시 특성이 발동했다.

'차량에 쓰이는 재료들 리스트라. 관심도 없던 걸 알게 됐네.'

발동한 특성은 식재료 감별.

이름 그대로 식재료를 감별하고 분석해 주는 능력이다.

본래라면 알루미늄이니 세라믹에는 발동할 턱이 없던 능력.

내가 가진 스킬과 특성은 요리사라는 직업에서 비롯된 것.

당연히 요리에 관련된 것으로 한정된 경우가 대다수였다.

'이제는 아니란 거지.'

창고에서 철물들을 봤을 때도 발동했던 특성.

그때는 뭔가 했지만, 이제는 이유도 알 것 같다.

철판을 통한 요리에 성공했을 때.

[요리의 새 지평을 발견하였습니다!]

[보상이 주어집니다.]

같은 문구가 나왔었다.

뭔가 길고 거창한 메시지들.

그 뒤에 나온 보상은 단 한 줄.

[식재료의 한계가 사라집니다.]

"아마 이게 원인이겠지."

창고에서는 다른 일로도 바빠서 확인하지 못했다.

저 보상도 대체 이게 뭔가 하고 넘겼었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말도 안 되는 보상이군...."

식재료의 한계가 사라졌다는 것.

그건 내 능력의 제한 중 하나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식재료 감별]

[요리사의 눈]

등등.

내 스킬들은 요리, 혹은 식재료에만 적용되는 것들이 많다.

뭐... 내 직업이 요리사니까.

당연한 제약이라고 생각했던 부분.

하지만 일반적으로 요리 재료로 여겨지지 않는 철판.

그걸 통해 요리를 한 결과.

식재료의 한계....

즉, 내 능력의 제약 중 하나가 사실상 사라져 버린 것이다.

'요리 자체에 큰 도움이 되진 않겠지.'

내 요리의 주 고객층은 부대원들이다.

알루미늄이니 기능성 세라믹이니.

이런 것들의 요리가 가능해진다고 해서 부대원들한테 먹일 수도 없는 노릇.

"하지만, 요리사의 눈은 약점을 파악하게 해 주는 능력이기도 해."

어디까지나 식재료를 상대로만 발동했던 능력.

괴물들의 종류가 다양한 만큼 무생물인 적이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럴 경우에도 요리사의 눈이 발동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게 된 것은 의의가 크다.

"그리고 특히 사기인 점은... 식재료 감별이지."

말이 식재료 감별이지.

제한이 없어진 지금.

이 특성은 모든 물건을 감별할 수 있는 특성으로 변한 셈이다.

비슷한 특성을 가진 공병들도 자재에 한해 감별 특성이 발휘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제한 없는 감별 특성은 정보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가져올 수 있을 터.

확신할 수 있다

이번 작전의 목표는 자재 확보였고 기대 이상의 질의 자재 확보도 성공했다만.

가장 큰 보상은 바로 이거라고.

* * *

그로부터 며칠 뒤.

"완성됐습니다!"

"어?"

다음 메뉴를 고민 중이던 내게 공병들이 찾아왔다.

주변 산에서 뜯어온 산나물로 쌈밥이라도 해 줄까 하던 참이었는데.

"완성됐다는 건, 드디어 작업이 끝난 거냐?"

"옙. 그동안 시끄럽게 해서 죄송했습니다."

요 며칠.

이 녀석들의 작업 소리 덕에 낮에 관사는 꽤 시끄러웠다.

괴물들이 꼬이진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할까.

'그러고 보니, 관사 뒤쪽에서 작업하고 있어서 자세히 본 적은 없었지.'

대충 차량들을 강화하겠다는 얘기만 들었었지.

작업 중인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나는 기대감을 품고 공병들을 따라 이동했다.

부대에서 사용하던 승합차나 승용차들.

혹시 그것들이 장갑차처럼 변신해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그런데.

"짠!"

"어떻습니까, 신 병장님!"

자신만만하게 자신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공병들.

"어? 어어."

확실히 대단했다.

대단하긴 한데....

"뿔이 있네...?"

멀쩡하던 승합 차량의 전면부.

커다란 뿔이 달려 있었다.

측면이나 바퀴에는 날카로운 창날 같은 것이 붙어 있기까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비주얼.

그래, 마치.

'매X액스냐고.'

37화 비어 있는 마트들 (1)

'매X액스냐고.'

군데군데 뿔이나 가시, 창날 등이 나 있는 차량들.

지나칠 정도로 세기말적인 디자인이다.

그 모습을 보며 어이없어하고 있자니.

"충성! 신 병장님 오셨습니까."

이공우 상병이 다가왔다.

어깨를 피며 자랑스럽게 묻는 녀석.

"어떻습니까. 저희 작품이."

"그. 뭐라 해야 하나."

대단해 보이긴 한다.

좀 여러 가지 의미로 말이지.

"하하. 디자인이 좀 그렇긴 하죠?"

내 눈치를 슬쩍 보더니 허허 웃으며 말하는 녀석.

열심히 만들었을 물건을 혹평하는 건 좀 그렇다만.

이 디자인을 녀석 쪽에서 먼저 언급할 줄은 몰랐다.

"솔직히 말하면 그래. 너희 취향이냐?"

"설마요. 성능 중시입니다."

그 말을 듣고 차량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여전히 뿔과 가시로 도배된 차량.

...이게 성능 중시라고?

"뭐. 들어 보십쇼."

차에 붙어 있는 가시 같은 것을 툭툭 건드리는 녀석.

"차량들을 개조하기 전에 공병들끼리 잠깐 회의를 했습니다. 그때 저희는 이 차량들의 목적은 도로 주행이 아니란 결론을 내렸죠."

"도로주행용이 아니라면?"

"음? 그야 당연히 전투용 아니겠습니까."

아.

"총격전이 위주였던 기존의 전쟁하고는 상황이 여러모로 달라졌다는 것도 고려해야만 했죠. 적들이 총을 든 병사에서 발톱을 지닌 괴물로 변했으니까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거기에 대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거기까지 설명을 듣고 나니 한 가지는 납득이 갔다.

발톱을 지닌 괴물을 상대하기 위한 설계라면.

"이 가시들. 괴물의 접근을 막는 용도인 건가."

"정확하십니다."

중세의 전쟁터 풍경 같은 것을 떠올렸다.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해 날카로운 창 같은 거로 방진을 짜놓든가 했다지.

현대전으로 비교해도 비슷한 게 있다.

부대 경계의 펜스에 두르는 가시철조망 같은 것.

이 가시와 창날들이 그 용도라는 거겠지.

"공격용으로도 기능할 겁니다. 보십쇼. 이 차량을 타고 괴물들 사이를 내달리면.... 저기 옆에 난 창날들 보이시죠? 저게 적들을 사사삭."

손으로 무언가를 베는듯한 제스처를 취하는 이공우 상병.

확실히 꽤 날카로워 보이는 날들이다.

저기에 걸리면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일 거다.

"뭐. 리자드처럼 단단한 몬스터한테는 쥐뿔도 안 먹히겠지만요."

...까지는 아닌가?

괴물 중에는 워낙 튼튼한 녀석들도 많으니까.

"그래도 좀비들 정도라면 '좀/비'로 만들고도 남을 겁니다. 아니라도 거슬리게 하는 정도는 충분하겠죠."

"확실히 상대하기 까다로워 보이긴 하네."

"바리케이드와 전차의 역할을 겸한다고 생각하면 될 겁니다."

처음에는 영화 홍보용 차량인가 싶었던 모습.

하지만 생각해 보니, '매X액스'의 차량 역시 전투용으로 개조된 차량들이었던가.

성능 위주의 디자인이라는 것이 빈말이 아닌 셈이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가능한 선에서 방음 작업까지 모두 마쳤습니다."

"매X액스 차량이면 괴성을 지르고 다녀야 하는 거 아닌가?"

"예?"

"아. 아무것도 아냐."

무심코 속마음이.

"크흠, 아무튼. 무음까지는 무리라고 해도 소음을 상당히 줄였으니, 괴물들의 어그로 걱정도 조금 줄어들 겁니다. 방호력은 기본이구요."

"그건. 확실히 대단한걸."

그 후에도 이공우 상병의 설명이 계속되었다.

"그래서 이 부분은-."

"그런 부분까지 고려했다고?"

나로서는 상상도 못 했던 세세한 부분들.

그 하나하나에 실전을 고려한 세심한 고민이 담겨 있었다.

설명을 듣기 전에는 그저 우스꽝스럽게 보였던 차량.

하지만 설명을 다 듣고 나니.

이만큼 믿음직스러운 차량들이 있을까 싶어졌다.

"결국 전부 자재가 좋아서 가능했던 거죠. 자재 확보 쪽으로 결정을 내려 주신 덕분입니다."

"덕은 무슨."

그러고 보니.

자재 얘기를 하니까 떠오르는 게 있다.

"그 녀석은 어떻게 됐어?"

"아, 한번 보시겠습니까?"

이 자재들을 강화한 주체.

공병들이 데리고 간 것까지는 알았지만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아직 몰랐다.

"이쪽입니다."

공병들을 따라 이동하자.

관사 구석에 작은 목조 건물이 하나 있는 것이 보였다.

급조한 것 치고 나름 튼튼해 보이는 건물.

"조심하십쇼. 꽤 사납습니다."

끼익.

그 문을 열자.

-캬아아아아아악!

안쪽에서 날카로운 괴성이 들려왔다.

일전에 붙잡아 온 그 괴물 녀석.

-캬악! 캬아아아악!!!

나름대로 위협을 하려는 것일까.

솜뭉치 같은 몸을 힘껏 부풀리는 괴물.

하지만.

'전혀 위협이 되지는 않네.'

그래 봐야 녀석의 본체는 작고 연약하다.

새끼 고양이가 하악질 하는 정도의 위협 정도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이 안에서 기르고 있던 거야?"

"옙. 그다지 강한 녀석은 아니다 보니, 문단속만 잘하면 탈출은 못 하는 것 같더라구요."

나는 계속해서 하악질을 해대는 괴물을 무시하고 목조 건물 안쪽을 둘러봤다.

기본적으로 텅 비어 있는 작은 간이 건물.

안에는 저 괴물을 제외하면 철판 몇 개가 굴러다닐 뿐이었다.

"저 철판들은 저렇게 놔둬도 되는 거냐? 이 녀석 적대심이 상당한 것 같은데."

"예. 저희도 나름 조사를 해 봤습니다만. 저 정도 철판으로는 큰 위협이 안 되는 것 같더군요."

"흠."

이 괴물.

[맥]은 철물을 강화하는 힘이 있다.

거기다가 주식 역시 철물.

"위협적이지 않은 수준의 철물을 넣어 두면. 그중 일부는 식사로 섭취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 이것도 보시면, 갉아 먹은 자국이 보이시죠?"

"그러네."

"하지만 먹는 양이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게 중요한 점입니다만."

들고 있는 철물을 통통 두드리는 녀석.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맥의 마력으로 강화된-.]

"먹다 남긴 나머지 철판들은 이렇게, 마력으로 강화를 시키더군요."

"저렇게 넣어 두기만 하면 강화된 자재를 주기적으로 얻을 수 있다는 건가."

"예. 아마 본능적인 영역인 것 같습니다."

강화된 자재들은 각성자들의 공격조차 버텨 낼 정도의 강도를 지닌다.

간단한 목조 건물과 강화할 재료들을 넣는 것만으로도 그런 자재들의 확보가 가능하다니.

"말도 안 되는 효율이군."

"그렇죠. 당장은 강화 속도가 빠르진 않습니다만, 나름대로 최적화시키려고 노력해 보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자재가 쌓이기 시작하면 장벽 같은 걸 지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더군요."

"장벽이라."

"예. 지금도 흘러들어 오는 괴물들을 상대하기 위해 병사들이 24시간 보초를 서고 있지만. 장벽을 만들게 된다면 병사들의 고생도 훨씬 줄어들 겁니다."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공병들.

나는 그들의 설명을 들으며 슬쩍 괴물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크르르륵....

여전히 몸을 부풀리고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는 녀석.

지금 공병들의 방식도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머릿속에 드는 한 가지 생각.

'으음.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것 같기도 한데 말이지.'

살기를 드러내고 있는 저 괴물.

우리가 일방적으로 녀석을 착취하는 형태.

녀석 입장에서는 화낼 만도 하지.

어찌 됐든 우리는 이득을 보는 상황이다.

지금도 나쁘지는 않다만.

더 괜찮은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싶어진단 말이지.

사실 구체적인 방법도 하나 떠오르는 게 있긴 한데.

'...뭐. 지금도 충분히 잘 굴러가고 있으니까.'

굳이 내가 손을 댈 필요는 없으려나.

'만약 손을 댄다고 한다면 나중에.'

새 방법을 시도해야 할 상황이 나왔을 때 해도 늦지는 않을 테니까.

* * *

공병들이 자재를 활용하는 동안.

다른 부대원들도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꾸준히 주변 정찰도 하고. 나름대로 물자 확보도 시도해 봤습니다만...."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하나.

"대단한 건 하나도 없었네요."

"뭐 어쩌겠어."

우리가 자리 잡은 관사는 안 그래도 군 단위의 소도시인 인제군.

거기서도 한참 외진 곳에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애초에 사람이 없던 지역이라는 뜻.

장점이 없지는 않다.

사람이 없던 만큼 좀비도 적고.

사냥감을 찾으러 돌아다니는 괴물의 숫자도 비교적 적은 것 같다는 점 정도.

'기동 요새'를 사용하지 못하는 지금.

안전이라는 측면에서는 당장은 꽤 괜찮은 임시 거점이란 말이지?

'문제는 자원이지.'

식량이나 기름.

거기에 각종 의약품까지.

생존에 필수적인 물품들.

그런 물건들은 당연히 수요가 있는 곳....

즉.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에 몰려 있기 마련이다.

'이 관사 근처하고는 영 연이 없다는 뜻.'

그렇다고 먼 거리를 가는 것도 위험이 크다.

덕분에 지금까지는 주위의 안전 확보에 의의를 둔 작전만 이뤄졌지만.

"공병들의 차량 개조가 끝났다."

이제는 아니다.

"성능이 생각보다 괜찮아. 좀 더 적극적으로 활동을 개시해도 될 정도로."

"드디어 뭐라도 해 볼 수 있겠군요."

자재 확보를 서두른 이유는 이후의 활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공병들의 차량 개조가 끝난 지금.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

"이 근처라면. 아마 마트가 하나 있을 거예요."

말을 꺼낸 것은 생존자들의 대표인 이상아였다.

그녀는 이 주변에서 실제로 생활하던 현지인.

외출 때나 가끔 나오던 우리보다는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겠지.

"여기예요. 저도 자주 다니진 않았지만, 여기에 작은 마트가 있는 걸 지나가면서 많이 봤거든요."

"비교적 외곽이네. 안전하다고 말하긴 그렇지만."

"군내에 진입하는 것보단 낫겠죠?"

지도의 한 구석을 가리키며 말하는 그녀.

거리로 보나 위험도로 보나, 나름대로 괜찮은 목적지 같았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음?"

걱정스러운 듯 말꼬리를 흐리는 그녀.

주변에 위험한 요소라도 있는 건가 싶었으나.

"'우리에게 필요한 물건들이 남아 있을까?' 하는 거죠."

"아."

"그것도 그렇군요."

괴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지 두 달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지상의 생존자들 역시 치열하게 생존 투쟁을 벌이고 있었을 터.

"이 마트는 그나마 안 알려진 곳이긴 하지만, 그래도 주변에 살던 사람들은 이용하던 곳일 테니까요."

"다른 생존자들이 이미 거쳐 갔을 가능성이 크다. 그건가."

"그렇죠."

힘들게 찾아가 봤자 비어 있을 가능성도 크다는 뜻.

하지만.

"가능성이 0은 아니니까."

밑져야 본전이라는 거지.

부대는 원정을 준비에 들어갔다.

* * *

교외의 작은 마트.

비교적 가까운 편이라고 하나 무작정 걸어가기에는 애매한 거리.

어차피 물자를 옮기려면 필요하니까.

이번에 개조를 마친 차량을 바로 투입하기로 했다.

차량을 타고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중.

몇 차례인가 좀비 무리와 조우했으나.

"꽉 잡으십쇼!"

쾅!

도로에 서 있던 두 마리의 좀비.

그 좀비들이, 개조된 차량 전면부의 창날들에 갈려 나갔다.

"맙소사."

"하하. 좀 식은땀 나긴 하는군요."

운전하던 병사가 말했다.

얼굴을 보니, 약간 안색이 창백해져 있는 병사.

도로에 있는 사람 형체에 돌격한다는 행위.

'기존의 상식을 부정하고 저질러야 하는 일이니까.'

꽤 긴장했었나 보다.

아무튼 중요한 건.

'차량 성능은 확실하다는 거지.'

방금 좀비를 치었는데도 주변에서 괴물이 몰려오는 낌새는 없었다.

공병들이 말한 소음을 줄였다는 부분도 확실하다는 뜻이겠지.

도로의 상황이 과거와 다르게 좋지 않다는 점이나.

몬스터 무리와 조우하게 된다면 얘기가 또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 걸리기는 하지만.

이동의 제약이 크게 해소되었다고 봐도 될 것 같다.

"저기예요."

그렇게 이동을 개시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차 앞쪽이 개판 됐는데요."

"으, 징그러워라."

좀비들을 갈아 버린 차량 전면부는 기괴한 고깃덩이와 썩은 피로 더럽혀진 상태였다.

꽤 충격적인 비주얼.

"아니. 봤을 때 징그러운 것 정도는 상관없지."

"진짜 징그러운 건 저걸 닦아내야 한다는 거죠."

다행히 병사들도 잔인한 풍경에는 꽤 익숙해진 상태.

오히려 청소해야 할 때 귀찮음을 떠올리고 있을 정도였다.

'저런 거에 익숙해진다는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괜히 생각해 봐야 머리만 아픈 일.

차량에서 내려 각자의 장비를 점검하는 병사들.

나는 그들을 보고 말했다.

"다들 지급한 전투식량은 가지고 왔지?"

"옙."

"3번으로. 먹자."

병사들에게는 내가 만든 육포가 전투식량으로 지급된다.

나는 그중에서도 요리의 효과에 따라 종류를 구분했다.

3번 요리의 효과는 익히 경험한 것.

[요리에 깃든 마력이 영향을 줍니다.]

[일시적으로, 특성 - '예민한 청각(열화)'을 획득합니다.]

"으, 벌써 귀가 아픈 것 같은데요."

"다들 큰 소리 내는 건 자제하자고."

'귀 큰 알라우르'의 요리다.

청력을 어마어마하게 끌어올려 주는 효과를 가진 요리.

이 능력을 활용한다면 좁은 장소로 들어간다고 해도 적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겠지.

모든 병사가 육포를 입 안에 넣은 것을 확인한 뒤.

"진입한다."

끼이익-

반쯤 부숴진 상태의 유리문을 살짝 밀며 마트 안쪽으로 진입했다.

안쪽에서 괴물이나 좀비가 튀어나올 경우도 각오한 상태였으나.

"으음."

"이건."

그렇게 문을 열고 들어간 마트의 안쪽.

걱정했던 괴물이나, 좀비는 없었다.

문제는.

"깔끔하네요."

"뭐. 어느 정도는 예상했잖아?"

괴물이나 좀비만 없는 게 아니었다는 것.

"허. 저기 보십쇼. 그 와중에 장난감 같은 건 남아 있네요."

"살아남는 게 급급한 와중이잖아. 그런 거 챙길 이유는 없지."

장난감이나 가전제품 등.

생존에 필수가 아닌 물품들을 제외한 모든 물건이 이미 털린 상태였다.

그 와중에 한 병사가 마트의 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 좀 봐. 펫푸드 코너도 텅텅 비었어."

"예? 펫푸드는 왜?"

"그것도 딱히 생존에 필수는 아닌 거 아닙니까."

몇몇 병사가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그건 밥 굶을 일 없던 우리 부대에서나 해당되는 일.

"맛이 문제지, 사람도 먹을 수는 있잖냐."

"아."

"굶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니까. 인간용이든 동물용이든 먹을 수만 있다면 감지덕지라는 거지 뭐."

사실 우리도 비슷하다.

펫푸드나 괴물의 고기나.

일반적인 인간은 입에 댈 생각을 잘 안 할 테니까.

"혹시 필요한 물건이 남아 있을지도 몰라. 샅샅이 뒤진다."

"옙."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

혹시라도 남아 있는 물건 중에 쓸 만한 게 있을 수도 있다.

병사들은 흩어져서 탐색에 들어갔다.

"여기. 좀비 시체입니다."

병사 중 한 명이 구석에 쓰러져 있는 좀비를 발견했다.

마트의 직원이었던 걸까.

마트의 로고가 그려진 앞치마를 입고 있는 좀비.

"어. 좀비한테 시체라는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넘어가고. 다른 특이사항은 없나?"

"음. 머리통이 도끼 같은 거에 찍힌 상처가 있는데요."

"도끼라. 이미 다녀간 생존자가 처리한 건가."

이상아가 우려한 대로였다.

시간이 지날 대로 지났으니까.

이미 다른 이들이 찾아와 좀비들을 처치하고 물건들도 털어 간 모양.

"탈탈 털어 갔네요."

"우리가 부대에서 농성하는 동안 지상의 생존자들도 놀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어쩔 수 없지."

조금 아쉽기는 하다만.

조사하면서도 아마 남은 물건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슬 복귀 명령을 내릴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때였다.

...바스락

'소리!'

어디선가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크지 않은 작은 소리.

본래라면 듣지 못하고 넘어갔을 테지만.

특성으로 강화된 감각을 피해갈 수는 없다.

'신 병장님.'

'그래. 나도 들었어.'

주위를 둘러보던 병사들 모두가 발걸음을 멈추고 섰다.

멀리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거는 병사들.

모두가 같은 특성을 얻은 상태라는 걸 이해하고 있기에 가능한 대화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질문에는 조금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특성의 힘은 강력하다.

작은 소리였지만 이미 그 진원지까지 파악된 상태.

'정육점 코너 안쪽.'

그곳에 있는 작은 철문.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안쪽이다.

문제는....

무언가가 있는 건 확실하다만.

그걸 굳이 건드려야 하는가, 하는 점.

'저 녀석. 일부러 소리를 죽이고 있는 것 같지?'

'그런 것 같습니다.'

한번 들려온 소리 이후로는 다른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일부러 기척을 죽이고 있다고 보는 게 맞겠지.

소리를 죽이고 자신의 기척을 감추고 있는 존재.

적이 없다고 방심한 사냥감을 공격하는 종류의 괴물일지도.

기척을 감추면서 행동하는 괴물.

굳이 기척을 감추는 데는 이유가 있을 터.

'기습이 아닌 전면전에는 취약한 괴물일 가능성이 크겠지.'

아니라면 당당하게 정면에서 사냥을 나섰겠지.

'처리하고 가자.'

'예.'

그냥 못 본 척 지나가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괴물이 나중에 다른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는 일.

처리할 수 있을 때 처리해 두는 게 유리하겠지.

말을 들은 병사들 몇 명이 근처로 다가왔다.

망치를 치켜든 전사 한 명이 나를 바라봤다.

나는 허리춤에서 식칼을 꺼내 든 뒤.

'부숴 버려.'

녀석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러자.

"흡!"

콰아아앙!

강하게 내려친 망치가 문을 쳐부쉈다.

부서진 문 안쪽으로 나와 병사들이 빠르게 몸을 들이밀었다.

그 순간이었다.

슈욱!

방 안에 있던 무언가가 나를 향해 내리쳤다.

'위쪽!'

하지만 나 역시 대비하고 있던바.

내게 내리친 물건을 향해 식칼을 휘둘렀다.

서걱.

나무 같은 질감의 물건이 잘려 나가는 소리와 감각.

공격을 막아 냈다고 판단한 나는 공격이 날아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떤 괴물인지는 몰라도, 약점만 파악한다면 이길 수 있어.'

공격을 가한 형체를 향해 시선을 돌리자마자.

스킬, [요리사의 눈]을 발동했다.

그런데.

[이미 손질법을 깨달은 재료입니다.]

[이미 조리법을 깨달은 재료입니다.]

[요리사의 눈이 발동하지 않습니다.]

'...뭐?'

기대했던 스킬은 발동하지 않았다.

대신에 발동한 것은 다른 쪽.

[식재료 감별]

[영장류 - 인간종]

"...영장류 - 인간?"

눈앞에 나타나는 메시지.

그 뒤쪽을 바라보자.

두 명의 인영이 보였다.

아직 어린 나이로 보이는 한 쌍의 남녀.

그중 나를 공격한 여자 쪽이 입을 열었다.

"도, 동생만은 잡아먹지 말아 주세요."

뭔 소리야, 이게.

38화 비어 있는 마트들 (2)

불빛 하나 없이 어두운 공간.

그 안에서.

"우웁."

앳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쉿. 수혁아. 조용히."

"으, 으응. 누나. 미안."

또 다른 목소리가 나와 주의를 준다.

주의를 준 목소리의 주인.

수연은, 자신의 동생 수혁을 보며 생각했다.

'얘는 정말... 대답하는 소리를 내는 것도 위험한데.'

무심코 올라오는 짜증.

하지만 다시 소리를 죽이고 있는 동생의 모습을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짜증에서 자괴감으로.

'동생한테 짜증이나 내고 있고. 뭐 하는 짓이야 이게.'

스트레스가 쌓였다고 해도 그러면 안 됐는데.

후회되지만 사과의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목소리를 내는 일은 위험하니까.

사소한 대화가 무슨 문제일까 싶기도 하겠지만.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죽어 간 사람들을 실제로 보았다.

어느 날 나타나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한 괴물들.

그중에는 소리에 민감한 괴물도 많았다.

.

.

.

다시 적막만이 흐르는 어둠 속.

슥-

그녀는 자신의 앞에 무언가를 내미는 기척을 느꼈다.

'다 먹었구나.'

동생이 식사를 끝냈다는 신호.

남은 식량을 그녀에게 넘겨준 것.

그녀는 손을 뻗어 동생이 넘긴 캔을 받았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내용물을 꺼낸 뒤.

입으로 옮겼다.

'우읍.'

순간적으로 치밀어오르는 역함.

동생이 잘 참은 게 새삼 대견하게 느껴질 정도.

꿀꺽.

어떻게든 침을 삼켜 목구멍으로 넘겼다.

눈에는 작은 눈물이 고였다.

'맛없어....'

남매가 먹고 있는 음식은 일반적인 음식이 아니었다.

펫푸드.

가격이야 인간용보다 비싼 것도 있다고 하나.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맞춰 만들어지지는 않은 요리들.

사회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던 시절이라면 입에도 대지 않았을 것이다.

맛은 그렇다 치더라도 문제는 건강.

인간을 위한 음식이 아닌 만큼, 어떤 병을 유발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다만.

'지금은 펫푸드라도 있어서 다행이지.'

어떻게든 식사를 계속해나가며.

그녀는 과거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녀와 동생이 속해 있던 그룹.

그 그룹이 마트를 털었을 때의 기억을.

'가방이 꽉 찼어요. 더 이상 담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힘겹게 마트 내의 좀비들을 모두 처리한 뒤.

그녀와 그룹원들은 가능한 한 많은 물자를 챙기기로 했다.

'이것들은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까운걸.'

'응? 아재. 이 펫푸드 말하는 거요?'

'펫푸드가 뭐 어때서? 요즘은 사람도 먹을 수 있게 나온다던데.'

'아니. 그게 말이 그렇단 거지....'

문제는 더 이상 챙기기 힘들 정도의 상황이 되었을 때.

이미 더 챙기기는 힘든 상황이었지만 한 남자가 펫푸드에 꽂힌 것.

잠깐의 실랑이를 거친 일행.

'그만! 그만! 여기서 계속 머무르는 게 더 위험해요.'

그룹의 리더였던 여성이 나섰다.

'그래도. 나무껍질이라도 씹어먹어야 할 판인데. 이것들을 다 두고 가는 건 너무 아깝잖소.'

'그러면 이렇게 하죠. 어차피 당장 들고 가기는 불가능하니까. 근처에 숨겨 두는 걸로.'

'그런 거라면 뭐... 찬성입니다.'

'나중에 이 근처에 다시 오게 됐을 때 챙기면 된다는 건가. 으음. 나쁘지 않구만.'

그렇게.

이 창고의 구석진 곳에 보이지 않게 숨겨 두었던 펫푸드들.

그녀와 동생이 굶어 죽지 않을 수 있던 이유였다.

하지만 과거를 떠올리니.

기분은 괜히 더 울적해졌다.

'순이 아줌마... 철이 오빠....'

그녀와 동생을 지켜 주던 사람들.

모두가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살아남은 것은 그녀와 동생뿐이었다.

-도망쳐라, 수연아.

-아, 아저씨! 하지만....

-잔말 말고 어서!

훌쩍....

'아차.'

무심코 흘러나온 울음소리에 당황한 그녀.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숨을 참아야만 했다.

'지난 일이야. 지난 일에 연연하다가 지금이 위험해지면 안 되는 거니까.'

슬쩍 눈물을 닦은 수연은 마음을 다잡았다.

죽은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든.

중요한 것은 그녀와 동생이 살아남았다는 사실.

거기에 집중해야지.

다만 문제가 있다면.

이 상황도 오래가지는 못할 것 같다는 것.

'이 식량들도 얼마 안 남았어. 이것들도 다 떨어지면....'

짧은 상상.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다.

남매가 이 창고 안에 틀어박히기로 한 뒤.

그녀가 가장 두려웠던 것은 불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둠이나, 구석에서 썩어 가는 좀비의 시체 따위가 아니었다.

'숨을 참고 있을 때 들려오는 작은 소리들.'

밖에서 작게 들려오는 소리들.

그 대부분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묘하게 질질 끄는 듯한 소리.

인간의 성대에서 나올 수 없는 무거운 괴음성.

코끼리라도 지나가는 건가 싶을 정도로 무거운 발소리까지.

'괴물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녀는 언젠가 이 은신처를 떠나야 할 날을 상상했다.

그리고 두려움에 떨어야만 했다.

'지켜 주던 사람들도 이제는 없어.'

식사를 마치고 잠든 듯한 동생의 온기를 느끼며 생각한다.

'나랑 수혁이랑. 둘이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생존자 그룹에 속해 있을 때는 그래도 달랐다.

힘든 생각은 그룹을 이끌던 어른들이 판단해 주었다.

힘든 일은 그녀와 동생도 같이 해야만 했지만.

그래도 어른들이 함께라는 건 꽤 든든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죽어 나가는 것을 눈앞에서 본 지금.

남은 것은 아직 어린 남동생.

그리고 차가운 감촉의 소방 도끼 하나뿐.

그녀는 도저히 이 세상을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다.

남은 식량마저 모두 떨어지고 나면.

좋든 싫든 그녀와 동생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터.

괴물들에게 잡혀 고통스럽게 죽을 일밖에 남지 않겠지.

'...그렇게 고통스럽게 죽을 바에야. 차라리.'

그녀는 도끼의 손잡이를 슬며시 매만졌다.

아파트를 탈출할 때 쥐고 나왔던 소방용 도끼.

마트를 탈환할 때 쪼갠 좀비의 피가 아직도 묻어있다.

그 도끼의 날을 슬며시 손목 쪽으로 들이댔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게 느껴진다.

내려치기만 한다면.

마땅한 의료도구도 없는 지금.

확실하게 죽을 수 있다.

하지만.

'그만하자.'

약간의 고민을 거친 그녀는 도끼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녀 혼자였다면 고통스럽지 않은 길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혁이도 같이 있으니까.'

동생이 함께 있었다.

같이 죽는 선택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동생의 목을 직접 벤다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최악의 상황이 오더라도.'

대신에 그녀는 각오를 다졌다.

'수혁이만큼은 지키자.'

다른 어른들이 자신들을 지키다 죽은 것처럼.

그렇게 다짐하며 마음을 정리하던 그때.

...끼이이익.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가 마트에 들어왔어...?'

터벅터벅.

'....'

'....'

많은 발소리.

작게 들려오는 소리들.

'뭔가 목소리 같은 것도 들리는데...'

그 소리도 너무 작아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평범한 인간들이었다면 저렇게 작은 소리로 대화할 리는 없을 테지.

그녀는 소리를 최대한 죽였다.

어느새 눈을 뜬 동생 역시 숨을 죽이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경우가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모두가 별문제 없이 떠나갔다.

'이번에도 조용히 버틴다면.'

그때.

자세가 살짝 불편했던 것일까.

동생이 아주 살짝 몸을 뒤척였다.

스륵.

수군거리는 목소리보다도 작은 소리.

그녀도 이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뚝.

'...어?'

마트에서 들려오던 작은 소리들.

발소리, 작은 목소리들까지.

동생이 약간 몸을 뒤척인 직후.

순식간에 모두 사라졌다.

그녀는 직감했다.

'소리에 예민한 괴물...!'

그토록 경계한다고 경계해 왔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작 옷자락 스치는 소리에 반응하다니.

뚜벅.

뚜벅.

일시에 멈췄던 소리가 다시 나기 시작했다.

발걸음 소리.

규칙 없이 떠돌던 직전까지와는 달리.

이번에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는 규칙성이 있었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 마음을 다잡은 게 얼마 되지 않은 참.

'그 최악의 상황이... 너무 빨리 왔잖아.'

속으로 한탄한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소방도끼를 양손으로 쥐었다.

최악의 상황이 오더라도 동생만은 지킨다.

오래되지 않은 결심.

그렇기에 지키고자 하는 의지도 크게 남아 있었다.

결심을 실행할 때가 빠르게 왔다.

그녀는 문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문이 열리는 순간 도끼를 내려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콰아아앙!

열리기는커녕.

산산이 조각나 버린 문.

문을 부술 정도라면 그녀가 이기기에는 무리가 있는 괴물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할 여유는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형체를 향해 반사적으로 도끼를 내리친다.

그리고.

서걱-

손잡이 채로 잘려 나가는 도끼.

절망에 빠지려던 찰나.

눈앞의 형체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은 익숙한 모습.

'구, 군인?'

하지만 그 입에서 나온 말을 듣자 생각이 바뀌었다.

"영장류... 인간종?"

군인같이 생긴 존재.

하지만 인간종이라니.

영장류라니?

사람이라는 단어라면 모를까.

같은 사람한테 쓸 만한 단어는 아니다.

'애초에. 수혁이가 낸 작은 소리만 듣고 이쪽으로 왔잖아. 그런 청력을 가진 인간이 있을 리가 없어.'

생각해 보면 수상한 부분이 더 보였다.

예를 들면, 손에 쥔 식칼이라든가.

정말로 군인이라면 총을 들면 들었지, 저런 식칼을 들고 있을 이유는 없으니까.

그렇다는 건.

'인간의 형태를 한 괴물.'

강함을 보면 그쪽이 납득이 간다.

그녀는 급하게 말했다.

"도, 동생만은 잡아먹지 말아 주세요."

인간형 괴물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들.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적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확실하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정도였다.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상대의 표정이 급격하게 일그러졌다.

* * *

먹지 말라니.

평소라면 무슨 헛소린가 싶었을 말이지만.

'하필이면 찔리는 게 있단 말이지.'

내 머릿속에는 영장류의 손질법.

그리고 조리법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먹는다라.'

실제로 시도하려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아마 앞으로도 없겠지.

그럼에도 먹지 말아 달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솔직히 흠칫했다.

내 머릿속에 존재하는 손질법이 떠오를 수밖에 없으니.

하지만, 보아하니.

내 머릿속을 알고 한 말인 것 같지는 않은데.

"그.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은데."

"네?"

"안 잡아먹습니다."

평범하게 말을 걸자 오히려 놀란 듯 움찔하는 소녀.

나는 침착하게 그 모습을 관찰했다.

식재료 감별에는 인간으로 나왔으니.

일단 괴물일 리는 없고.

'중학생인가? 아니면 고등학생?'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딱 봐도 학생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

교복을 입고 있지는 않다만.

괴물이 나타난 날은 주말이기도 했으니 그게 당연한 거겠지.

'얘는 그렇다 쳐도. 뒤에 남자애는 아예 초등학생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데.'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괴물과 좀비가 넘쳐 나는 세상.

그런 세상을 돌아다니기엔 너무나도 취약해 보이는 두 사람이 아닌가.

"신 병장님?"

"무슨 일입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내 뒤를 이어 다른 병사들 역시 무기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설마 생존자들입니까."

"어.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우리가 들었던 소리. 괴물이 아니었나 보군요."

다른 병사들의 모습을 본 두 아이가 흠칫하는 것이 보였다.

아차 싶어진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최대한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려고 노력했으나.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아도 됩니-."

움찔움찔.

"우리는 평범한 군인이니까-."

흠칫흠칫.

"...."

이거.

잘못하면 내 마음이 상처받겠는데.

"신 병장님."

그때.

누군가 뒤에서 나를 불렀다.

전광일 상병이었다.

"아직 어린애들 같습니다."

"어어. 그래 보이네."

"애들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쇼. 평범한 군인이라고 해 봐야, 그게 어디 편하게 대할 만한 존재는 아니지 않겠습니까."

"아."

그 생각을 못 했네.

'하긴. 현역 군바리인 우리 입장에서나 군인이 평범한 거지.'

군인이란 게 편한 존재는 아닌 게 보통이지.

어른들이야 주위 사람이나 본인이 군대를 다녀온 경우가 많으니 그렇지도 않다만.

저 둘은 아직 어린 나이로 보인다.

살벌한 무기를 들고 군복을 입은 험악한 아저씨들.

편안하게 느껴지기는 힘든 조합인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상아 조장."

"네. 여기 있어요."

소리를 듣고 문밖에 모여 있던 부대원들.

그 사이에서 이상아 조장이 몸을 드러냈다.

"일단은 여기서 가장 부드러운 인상일 테니까. 잘 좀 달래 줘."

"네. 원래 제 업무도 생존자 관리였으니까요. 맡겨만 주세요."

아직 여유가 없어 다른 생존자들의 각성은 미뤄진 상황.

그녀는 여기서 유일하게 생존자 출신의 각성자였다.

같은 입장이었던 데다가 그나마 인상이 부드러운 편이니까.

우리보다는 좀 더 다가가기 쉽겠지.

"얘들아, 이리 오렴."

"...."

"괜찮아. 해치지 않으니까."

나와 다른 병사들이 멀찍이 떨어져 있는 사이.

그녀는 어떻게든 남매로 보이는 두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오는 데 성공했다.

그녀가 애들을 잘 진정시켜 주길 기대해야겠지.

"휴...."

"저는 애들 상대가 껄끄러워서."

이상아가 아이들을 데리고 이동하자.

남아 있던 병사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나도 애들 상대를 잘하는 편이 아니긴 하다만.

"뭔가, 평범한 애들 같은 느낌은 아니었지."

"예?"

의아해하는 병사들.

그러고 보니 다른 녀석들은 못 봤으려나?

부서진 방문 너머로 들어가자마자 나에게 내리쳐진 도끼.

'사람 하나 죽이기엔 충분한 무게와 위력이었지.'

장작 같은 걸 패 본 경험도 없을 평범한 아이가 휘두를 만한 도끼질은 아니었다.

모르긴 몰라도....

"죽일 기세로 내리치는 도끼질에 익숙한 것 같더라. 모르긴 몰라도 좀비 몇 마리는 잡아 본 게 아닐까."

"나도 비슷한 생각이다."

민재 형이 내 말을 거들고 나섰다.

"아까 광일이는 군인을 무서워하는 걸 수도 있다고 말했지?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라. 그냥 모르는 사람이라 무서워한다기보다는."

슬쩍 아이들이 있는 쪽을 바라보는 민재 형.

"정체 모를 적을 경계하는 눈치였어."

"그쪽이 맞을지도. 아니면 둘 다거나."

적을 경계한다라.

이제야 초, 중학생쯤 돼 보이는 녀석들한테 어울리는 말은 아니긴 하다만.

'이런 세상이니까.'

애들도 마냥 애처럼 남아 있기는 힘들다.

뭐 그런 거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통.

데구르르....

별생각 없이 옮긴 발걸음에 무언가가 걸렸다.

슬쩍 바닥에 시선을 옮기자.

"이건?"

아이들이 자리 잡고 있던 창고.

그 바닥에 굴러다니는 뚜껑 따진 캔들이 보였다.

내용물이 깨끗하게 비워져 있는 작은 캔들.

나는 발을 뻗어 그중 하나를 살짝 기울였다.

그러자.

캔에 적힌 로고가 보였다.

'....'

강아지 세 마리가 해맑게 웃는 그림이 그려진 로고가.

39화 비어 있는 마트들 (3)

강아지 세 마리가 그려진 캔.

그 그림의 의미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펫푸드.

"저 아이들. 이걸 먹고 지냈나 보군요."

"그런 것 같지?"

마트를 조사할 때 펫푸드 코너마저 싹 다 털려 있는 것에 놀랐는데.

그 행방이 꽤 빨리 발견된 셈이다.

"어린애들 같던데. 괜히 딱하군요."

내 옆에 선 병사 한 명이 말했다.

우리야 운이 좋아서 그동안 밥을 굶지는 않았다만.

지상에서는 식량이 갈수록 귀해지고 있다고 들었다.

오죽하면 생존자들이 가장 많은 장소가 저 군내.

좀비와 괴물, 그리고 식량이 가장 많은 장소일 정도니까.

저 아이들 입장에서는 펫푸드라도 있는 게 다행인 일이었겠지.

"그래도. 괴물이 나타난 지 아직 반년도 안 됐는데."

세상이 벌써 이 정도로 바뀌다니.

새삼스럽게 놀라게 된다.

정황상 어린애들이 제대로 된 음식도 먹지 못하고 숨어 있었던 모양.

솔직히 인간인 이상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생각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신영준 병장님. 잠깐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서수혁 상병이 나를 불렀다.

무슨 얘기를 할지는 짐작이 된다.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따라 구석으로 이동했다.

슬슬 요리의 효과로 부여되었던 '예민한 청력'의 효과도 사라진 참.

서수혁 상병이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 애들, 어떻게 할 생각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예상했던 질문.

지상에 내려와서 처음으로 마주한 생존자.

우리는 그 처우를 결정해야만 했다.

"네 생각은 어떤데."

"어린애들이고, 불쌍해 보이기도 합니다만."

한숨을 내쉰 뒤 말하는 그.

"그거랑, 우리가 보호할 수 있느냐하고는 별개의 문제라고 봅니다."

"그렇지."

지상에 내려온 뒤.

우리는 어찌어찌 관사라는 임시 거점에 자리를 잡긴 했다.

하지만.

단적으로 말해 여유가 있지는 않았다.

'식량이 있다곤 해도 몬스터의 고기뿐이니까. 이마저도 추가로 수급하지 못하면 줄어만 갈 뿐이고.'

이미 먹는 입이 100개 이상.

식량이 줄어드는 속도도 생각보다 빠르다.

임시로 삼은 거점조차 말 그대로 임시.

제대로 된 거점으로써의 안정성은 솔직히 말해 없었고.

오죽하면 합류해 온 생존자들은 아직 각성도 못 하고 있을 정도일까.

'생존자를 보호한다는 면으로만 따지면. 423대대에 머무르던 시절보다도 환경이 좋지 않아.'

적어도 423대대는 거점으로써의 역할은 충분했으니까.

"게다가. 어린아이들 같더군요. 혹시 이동을 하게 된다고 하면 체력 문제도 생기겠죠. 특히 병에라도 걸린다면 문제가 커질 겁니다."

"힐러들의 치유 능력도 만능은 아니니까 말이지."

사제와 치료사가 있다고는 하지만 이들도 한계는 있다.

강력한 치료 스킬에는 횟수 제한이 존재하니까.

일반적인 질병 등의 치료는 가능하나 의약품이 없는 지금은 그마저도 쉽지는 않았다.

내가 요리 재료가 없으면 요리사로서의 능력을 반도 활용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

의약품이 모자란 지금은 그들의 치료 능력도 완전하지 못한 것.

그렇게 한 명이라도 질병에 걸린다면.

그건 한 사람의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한 사람의 병으로 인해 단체의 행동에 족쇄가 채워지는 셈.

이미 받아들인 생존자들 가운데에 어린 아이가 섞여 있기는 하지만.

그 숫자가 늘어나는 것은, 그만큼 위험이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생존자를 수용하고 인원을 늘리는 일은 분명 언젠가 해야 할 일이지만, 꼭 지금 해야 하는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흠."

당장 저 둘은 문제없이 보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다음에 만나는 다른 생존자들은?

상황이 개선된 뒤라면 모를까.

그들 모두를 보호할 수는 없는 일이란 말이지.

"고민 좀 해 볼게."

"현명한 선택.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쉽게 정할 일은 아니라 생각한 나는 고민에 빠졌다.

슬쩍 눈을 돌려 마트의 다른 곳들을 둘러본다.

여전히 혹시라도 쓸 만한 게 있지 않을까 뒤지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다른 병사들도 이 녀석과 비슷한 의견이 많을 테지.'

딱히 다른 녀석들이 이기적인 성격이라든가 그래서는 아니다.

그저 최근 지켜본 결과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것뿐.

부대에서 함께 싸우며 부대원들 간의 전우애는 꽤 탄탄해졌다.

서로 의견이 갈릴 수는 있어도 동료라는 의식은 확고해진 상태.

이건 장점이 있지만, 단점도 있다.

아군에 대한 감정이 강해진 반면.

그 외의 것들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줄어들었다는 것.

'지상에 내려온 지도 며칠 지났어. 하지만 병사 중 누구도 다른 사람을 구출하러 가자느니 하는 얘기를 꺼내지 않았지.'

저 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당장은 안타깝게 여기는 병사들도 있어 보인다만.

굳이 피해를 감수해가며 그 둘을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병사는 소수일 확률이 높다.

'그런 점까지 고려한다면. 두고 떠나는 게 옳아.'

저 아이들은 우리가 오기 전까지도 어떻게든 숨어서 생존해 있었으니까.

우리가 보호하지 않아도 나름의 노하우로 더 버틸 수도 있겠지.

하지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바닥에 굴러다니던 펫푸드들.'

가격은 결코 싸지 않다.

개나 고양이 등을 위한다는 측면에서는 확실히 가치 있는 음식들이었겠지.

하지만.

'인간을 위한 음식은 아니야.'

맛은 뭐 둘째로 친다고 해도.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는 일이니까.

특히나 먹을 것이 중요한 어린 나이.

이대로 두고 가면 남은 사료들로 허기를 채워야 할 터.

...음.

결정했다.

"일단 밥이나 좀 먹여 볼까."

"예?"

고민을 해 본다며 입을 다문 내가 갑자기 한 말이 저거다 보니.

"밥을 먹인다니, 무슨 소리십니까?"

서수혁 상병은 당황스럽다는 반응이었다.

"설마. 보호하에 들이자는 얘기를 하려는겁니까?"

"그런 건 아니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보낼 때 보내더라도 밥 한 끼 정도 먹이고 보내자는 거지."

"으음."

식재료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만.

애들 한 끼 먹일 정도도 없냐고 하면 또 그 정도는 아니니까.

"...애매하게 잘해 주는 게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잘라 낼 거라면 확실히 잘라 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딱히 쟤들한테 잘해 주고 싶다거나 그런 이유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거든."

"그럼 무슨 이유로-."

"요리사로서의 자기만족."

"예?"

안쓰럽기도 하고.

인간으로서 좀 도움을 주고 싶기도 하다만.

"그런 게 중점이었다면 안 이랬을걸."

사실 그쪽이 메인이 아니란 말이지.

한 끼 먹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일단은 나도 요리사이다 보니.

'불편하단 말이지.'

제대로 된 요리가 아닌 펫푸드.

그걸로 배를 채우는 사람을 보니 영 갑갑하고 불편하다는 게 문제였다.

밥 한 끼 먹이고 보내겠다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그냥 심기가 불편해진 나.

나의 자기만족을 위한 일.

"자기만족이라니...."

내 설명을 들은 서수혁 상병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때.

"그럼 어쩔 수 없군."

"음?"

옆에서 대화에 끼어든 것은.

이민재 병장이었다.

"내가 할 말은 아니긴 한데. 좀 말려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지. 네가 길드장이기도 하고. 식량 관리도 네 업무다. 내가 말릴 권리도 없고. 네가 편한 대로 하는 게 맞겠지."

이어지는 이민재 병장의 말에.

서수혁 상병은 고개를 숙이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너는 병사들 멘탈 관리한다고 이래저래 고생했다만, 정작 네 스트레스 관리는 잘 안 되던 것 같아서 걱정이었다."

민재 형은 내게 조언을 해 주는 입장.

나도 조언을 귀 기울여 듣는 편이다만.

"네가 심경 불편해지는 일을 2인분 식사로 해결할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딜이지. 편한 대로 해라. 길드장."

아무래도 민재 형이 가장 우선시하는 건 길드장인 내 판단인 모양이다.

'조금 의외네.'

세부적인 계급 차이가 있을 뿐.

우리 부대원들은 김 중위를 제외하면 모두가 병사 출신이다.

사회 나가면 서로 반말할 관계.

당연히 그 상하 관계가 엄격하지는 않다고 생각해 왔다.

길드장 자리 역시 마찬가지.

그냥 고생만 하는 완장에 불과하다고 생각해 왔는데.

'그렇지도 않다는건가.'

몇몇 병사들은 길드장의 권위라는 걸 존중하는 모양.

그렇지 않고서야, 내 마음 편해지자고 하는 결정을 존중해 줄 리가 없으니까.

"수혁이도. 상관 없겠지?"

"길드장으로써의 판단이 그렇다면야. 제가 끼어들 여지는 없겠죠."

뭐 어찌 됐든 상관없겠지.

결국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지지해 준다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나는 마음 편하게 하고 싶은 일을 하러 가기로 했다.

요리 준비를 하러.

* * *

잠시 뒤.

나는 한 손에 큰 그릇을 들고 마트의 구석으로 향했다.

"군단장님?"

그런 내 모습을 발견한 누군가가 내게 다가왔다.

이상아 조장.

그리고 직전에 조우한 생존자 남매.

그들이 그곳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나름 분위기를 풀어 둔 것일까.

소소하게 대화가 오가고 있던 듯한 모습.

하지만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움찔.

'허허. 애들은 어렵구만.'

분위기를 풀고 뭐고.

여전히 나를 경계하는 아이들.

내 섬세한 마음에 약간의 스크래치가 생겨났다.

내가 그렇게 무섭게 생겼나?

하지만 뭐.

이젠 별 상관없다.

'이번엔 대책을 마련해 왔거든.'

나는 들고 온 그릇을 그 앞에 내려다 놓았다.

그리고 그 그릇의 뚜껑을 열자.

"배고프지?"

파아아-

진한 고기 향이 마트 안에 퍼져 나간다.

"요리를 좀 가져왔으니. 먹도록 해."

다행히 조미료는 꽤 남아 있는 상태.

애들이 좋아할 만한 입맛으로 달게 졸인 간장찜이다.

재료가 된 고기가 뭔지는 뭐 밝힐 필요는 없을 테니 넘어가기로 하고.

'예로부터 애들 꼬시는 데는 먹는 게 최고라더라.'

사탕 준다고 모르는 아저씨 따라가지 말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만큼 먹을 것의 유혹이 강력하기에 나오는 말.

"...."

하지만 내 기대와 달리.

두 아이는 바로 젓가락을 쥐지는 않았다.

맛이 없어 보이나? 싶기도 했으나 그것도 잠시.

주륵....

요리를 바라보는 남자아이의 입에서 군침이 줄줄 흐르는 게 보였다.

반짝거리는 눈빛도 그렇고.

엄청 먹고 싶어하는 눈치긴 한데.

아무래도 경계심이 남아 전력으로 자제하고 있는 모양.

"독 같은 거 안 들었으니까. 먹어도 돼."

"...."

"안 먹으면 가져간다? 먹을 사람이 없으니, 버리든가 해야겠네."

"아...."

그제서야 조심스럽게 젓가락을 드는 아이들.

경계심이 장난 아니구만.

조심스럽게 젓가락으로 고깃덩이를 집어서 입에 넣었다.

그러자.

"...!!!"

말은 없었지만.

맛있는지 없는지는 안 물어봐도 될 것 같았다.

'아이답다고 해야 하나. 표정이 극적으로 변하는 게, 보는 맛이 있네.'

고기를 한입 물더니 놀라는 표정을 짓는 동생 쪽.

그러고는 계속해서 젓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나 쪽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꽤 놀란 눈치.

'그럼. 누가 만든 요린데.'

당연히 맛있게 먹어야지.

처음엔 쭈뼛거리던 아이들의 식사가 제대로 시작되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나는 편하게 먹으라고 슬쩍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본 이상아 조장이 나를 따라 나왔다.

"애들 분위기는 어땠어?"

식사 중인 아이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뒤.

이상아 조장에게 물었다.

"일단 대화를 할 정도는 됐어요. 아무래도 좀 오해가 있었던 것 같더라구요."

"오해라니?"

"우리가 괴물인 줄 알았나 봐요."

"뭐?"

괴물이라니.

"우리... 아니, 내가 그렇게 험악하게 생겼나?"

"푸흡. 그런 게 아니라. 인간형 괴물이나, 남의 모습을 훔치는 괴물 같은 것도 있을 수 있잖아요?"

"아."

"그런 류의 괴물일 수 있다고 생각했나 봐요."

다른 인간을 경계하는 것치고도 묘하게 날카롭다 싶더라니.

그런 이유였나.

"왜, 군단장님 능력으로 부대원들의 청력이 귀신같이 강화됐잖아요? 그 아이들 위치도 소리로 감지한 거였구요."

"그런 청력을 가진 인간이 있을 수가 없다, 뭐 그런 건가."

"네."

인간형의 괴물이라니.

우리 부대에 찾아왔던 범죄자들이 떠올랐다.

'아니, 녀석들은 직업이 좀 그럴 뿐 일단 인간이긴 했지.'

그런 이들도 내부의 적으로 섞여 들어온다면 엄청난 위협으로 자라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술 더 떠서 인간의 모습을 한 괴물까지 존재한다는 건가.

"상아 조장은 그런 괴물은 만난 적 없겠지?"

"그렇죠. 소문으로 들은 적도 없네요."

우리 부대에서는 그나마 지상의 정보에 자세한 게 그녀와 생존자들.

하지만 그것도 한 달은 전의 이야기.

"저희가 산을 오른 것도 한 달은 지난 일이니까요. 그 사이에 생존자들 사이의 정보도 꽤 갱신됐나 보더라구요."

단 두 달 만에 문명이 파괴되었다.

한 달이며 그 기간의 절반이고.

그녀가 가지고 있는 정보는 분명 유용하다만.

조금은 구버전인 부분이 있다고 이해해야겠지.

"아무튼, 어떻게든 얘기를 하고 나니 지금은 적어도 괴물은 아니라고 믿어 주는 것 같아요. 아예 경계하지 않는 수준까진 무리였지만요."

"그 정도라도 어디야. 수고했어."

슬쩍 식사 중인 아이들 쪽을 바라보니.

-누나, 이거 너무 맛있다! 그지?

-으응. 그러네.

이제는 눈치도 안 보고 식사 중인 아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편안한 마음의 특별 소스]

긴장해서야 밥도 잘 안 넘어갈 것 같아서 넣은 약간의 소스.

그 영향도 꽤 크겠지.

그때.

여전히 신나서 고기를 씹고 있는 아이들.

그중 동생 쪽과 눈이 마주쳤다.

"어때. 맛있냐."

"마, 맛있어요."

눈이 마주쳤는데 그냥 무시하기도 뭐해, 말을 걸었더니 대답이 나왔다.

대답을 들을 정도라니.

이 정도면 장족의 관계 개선인걸.

"그거 사실 이 형이 한 요리다?"

"아저씨가요?"

아, 아저씨?

이 자식이.

그렇게 시답잖은 얘기를 하자니 누나 쪽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맛있어요. 잘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라는 말이 조금 늦긴 했지만, 이 정도라도 어디인가.

그렇게 말하는 누나 쪽의 눈시울이 약간 붉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간 힘든 일도 많았다는 거겠지.

크흠.

"혹시 모자라면 말해. 재료가 고기뿐이라서 미안하지만. 당장은 고기는 꽤 넘쳐 나니까."

멋쩍어진 나는 그렇게 말했다.

애들 둘 배불리 먹일 정도는 문제없으니까.

"고기만 많다뇨...?"

그런데 내 말을 들은 누나 쪽은 조금 의아한 듯한 얼굴이었다.

"보통은 육류를 못 구해서 고생하던데. 여러분들은 반대인 건가요?"

"뭐.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네."

먹을 거로 꼬신 게 성공한 덕에 나름 편안해진 분위기.

나도 편하게 답해 주기로 했다.

"사실 이 마트에 온 것도 육류 외의 다른 식재료나 필요한 물건들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거든."

"아...."

"아쉽게도 실패해 버렸지만 말이야."

어깨를 으쓱하며 얘기하자 고개를 끄덕이는 누나 쪽.

방금 얘기를 듣고 생각하는 바가 있는 것일까.

젓가락 속도가 느려진 모습이었다.

'동생도 좀 그렇지만, 누나 쪽은 생각이 많은 스타일 같네.'

이런 세상이라 저런 태도가 필요해진 것인지.

아니면 원래도 저런 성격이었을지는 모르겠다만.

* * *

그렇게 식사는 무난하게 끝났다.

잘 먹는 모습을 보니 괜히 기분이 좋았다.

불편했던 부분도 잘 해결되었고.

이제는 진지한 얘기를 할 때.

"이름이 어떻게 되니?"

"저는 이수연. 동생은 수혁이에요."

"그래. 수연이. 잠깐 오빠... 큼. 아저씨랑 얘기 좀 하자."

나는 허리춤의 주머니를 열었다.

그리고 그 내용물들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받아."

"네? 이건...?"

"이상한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녀에게 건넨 것은 육포였다.

내가 만들어 둔 전투식량.

"뜯어보면 알겠지만. 간단하게 만든 육포들이야. 나름 맛도 좋을걸."

"식량을 그냥 주신다는 건가요?"

"아까도 말했지만, 당장 고기는 넘쳐 나서."

다른 병사들에게서도 조금 받아 와 육포의 양은 많은 편이었다.

전투식량으로써 제조된 만큼 유통기한도 없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니까 잘 들어."

"네? 아, 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이 육포들은 다른 걸 먹다가 도저히 버티기 힘들 때 먹도록 해. 크기는 작지만, 열량은 높은 음식이거든. 반 개만 먹어도 충분할 거다."

내가 가리킨 쪽은 전투에 도움이 되는 특성이 달린 육포들이었다.

하지만 이 아이들에게 스탯 증가는 적용되지 않을 확률이 높으니.

저 펫푸드만 먹기 도저히 힘들 때.

혹은 식량이 다 떨어졌을 때 먹어 버리는 편이 좋겠지.

"그리고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이 육포들은 평상시에는 먹지 마. 아예 어디다 숨겨 놔도 좋아."

"그러면 언제 먹으란 건가요?"

"여기를 떠날 때."

이쪽은 능력치 증가나 전투력과는 별개.

생존자들에게도 도움이 될 만한 특성이 담긴 육포들이었다.

청력을 증가시켜 주는 알라우르의 요리가 대표적인 예.

"여기서 숨어 지내다가 더는 버틸 수 없게 돼서 이동해야 할 때. 그때 먹도록 해. 도움이 될 거다."

"군인분들이 저희를 보호해 줄 수는 없는 건가요?"

이 말이 나올 것 같았지.

하지만 답은 정해져 있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좀 어려울 것 같다."

"왜죠?"

"군인이라곤 해도 우리도 다른 부대와의 연락이 모두 끊긴 상황이야. 지상에 마련한 거점도 불안정하지. 여기서 다른 불안 요소를 추가하긴 어려워."

"...."

"미안하지만, 일단은 그 식량들과 함께 최대한 버티도록 하렴. 언젠가 우리의 상황이 안정되면 다시 이 근처를 찾을 테니-."

조금 가슴 한구석이 찔리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그렇게 말을 이어 가던 찰나.

"아는 곳이 있어요."

가만히 듣고 있던 수연이 입을 열었다.

비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가는 그녀.

"무슨 소리를."

"다른 식재료를 구하고 싶어서 여기에 오셨다면서요. 결과는 실패였구요."

"흠."

그 얘기를 듣고 나서야 그녀가 하려는 말이 예상이 갔다.

"원하시는 재료들을 구할 수 있는 곳이 있어요. 거리도 멀지 않아요."

"갑자기 그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 위치를 알려 드리는 대신, 조건이 있어요."

조건이라.

즉.

"거래를 하자?"

"...네."

허.

갑자기 거래를 제안하다니.

마냥 애라고만 생각하고 대하던 아이.

하지만 평범한 꼬마는 아닌 것 같다던 느낌이 적중했나 보다.

갑자기 이런 당돌한 모습을 보여 올 줄이야.

조금은 황당하다만.

피식.

"재밌네."

약간은 흥미롭기도 하다.

나는 일단 대화에 응해 주기로 했다.

40화 마트의 귀신 (1)

"그 위치를 알려 드리는 대신, 조건이 있어요."

당돌하게 거래를 걸어오는 그녀.

심지어 그 거래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이었다.

당장 식재료나 의약품 등이 모자란 건 사실이니까.

'아까 내가 한 말을 기억해 뒀던 건가.'

고기만 많고 다른 물건들이 없다는 얘기.

애라고 생각해 가볍게 흘린 얘기를 기억해둔 모양.

그때 말하지 않고 숨겨 놓다가 이제 와서 말한 이유도 알 만하다.

'우리가 자신들을 보호해 줄지 어떨지, 간을 보고 있던 거겠지.'

그러다가 우리가 떠나려던 모습을 보였으니.

그때 아껴뒀던 카드를 꺼내 들었다.

뭐 그런 거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니 영악하기 그지없다.

애라고 생각해서 봐줬다간 오히려 큰일 날 수도.

나도 조금 더 신중하게 접근하기로 했다.

"일단 들어나 보자. 네가 말하는 조건은?"

"저희를 보호해 주세요."

뭐.

그거 말곤 없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만.

"네 쪽이 제시한 조건은 확실히 매력적이긴 한데, 이미 말했다시피 힘들다. 애초에... 네 말을 온전히 믿어도 되는지도 모르겠고."

"믿지 못하시는 건 이해해요. 하지만 정말-."

"아, 그것도 있지만, 그게 다가 아니야. 너희를 위한 부분도 있지."

그녀의 말을 끊은 나는 설득에 들어갔다.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우리는 주로 숨어서 활동하는 생존자들과는 단체의 성격이 달라."

"그건, 무슨 의미인가요?"

"우리는 점차 세력을 키워 나가는 게 목표거든."

당장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것이 목적인 생존자들과 달리.

우리는 그 너머를 목표로 삼고 있다.

"...세력을요?"

"뭐, 당장은 좀 고생하고 있지만."

바뀌어 버린 세상.

그 세상이 제시하는 법칙은 [점령전]이다.

세력을 키우고, 땅을 점령하라.

그게 이 게임의 룰인 이상.

당장은 어떨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세력을 키워야 하는 건 분명한 사실.

"그 과정에서 괴물이나 좀비와의 교전도 자주 일어나겠지. 사람이 많아지는 건 좋은 일만 있는 게 아니야. 그만큼 적들의 시선에 노출되기도 쉽다는 뜻이니까."

당장 지금 거점으로 삼고 있는 관사만 해도 그렇다.

전투를 상정하고 만들어지지는 않은 건물.

언제고 괴물들의 눈에 띄어 전장으로 바뀌어도 이상하지 않다.

"우리를 따라오는 것보다 여기 숨어 있는 게 더 안전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

"안전이 확보된 뒤에 다시 합류하겠다고 하면 그때는 받아 줄 수도 있어. 혹시 넘겨준 식량이 부족한 것 같다면 약간 더 얹어 줄 수도 있고."

거래하려면 일단 조건을 명확하게 밝혀야 하지 않겠냐.

우리를 따라오는 게 여기 숨어 지내는 것보다 안전하다고 확신하기 힘들다.

그 부분을 알려 주려 한 것이었으나.

"그래도 싫어요."

대답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쪽이 더 안전할지도 모르고, 나중에 우리 상황이 안정되면 그때 다시 찾아온다고 해도?"

"네."

"흠."

꽤 확고한 생각인 듯.

이쯤 되니 궁금해진다.

"이유라도 들어 보자. 그렇게까지 우리한테 합류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뭐지?"

"그건...."

단순히 안전한 세력에 합류하고 싶다던가.

그런 이유라면 우리가 그렇게까지 훌륭한 선택지는 아닐 터.

그걸 설명해 줬는데도 굽히지 않는 걸 보면 조금 의아했다.

내 질문을 들은 이수연은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숨을 크게 들이쉬며 답했다.

"...끔찍했거든요."

"뭐?"

"이 안에서 숨어 지내는 거요."

무슨 이야기인가 싶었으나.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꽤 어두운 것이었다.

"아세요? 혹시라도 밖에서 우리를 눈치챌까 봐 사방의 문을 닫아 놓고, 인기척을 들킬까 무서워 움직이지도 못해요. 그리고. 아무것도 안 보이고, 움직이지도 않고... 그러고 있다 보면 귀가 밝아지더라고요."

그때를 떠올리는 듯.

아이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올 때마다 고민했어요. 저게 무슨 소리일까. 괴물일까? 저 괴물이 우리를 발견한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죽는 건가? 하구요."

"...."

"그렇게 하루를 버티고 잠들다가도, 정체 모를 소리가 들려오면 저절로 눈이 떠져요. 숨을 죽이고, 수혁이랑 같이 벌벌 떨면서 소리가 멀어지기만을 빌어야 했죠."

그런 부분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냥 숨어지내는 게 더 안전할 수도 있다, 정도만 생각했지.

'새삼 깨닫게 되는구만....'

부대에 있던 우리는.

지상의 생존자들에 비하면 사정이 좋았던 것이라고.

그녀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상상하시는 것 그 이상으로 끔찍한 매일이었어요. 단 하루도 자살 생각이 나지 않은 적이 없을 정도로. 이런 날을 더 지내게 된다면 정신에 문제가 생겨서 죽는 게 빠를 거예요."

"흠."

"훗날 전투에 휘말려 죽는다고 해도, 아저씨들을 따라가는 게 오래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무래도 저쪽의 의지는 확고한 것 같다.

더 이상 설득해도 의미는 없겠지.

그렇다면 문제는 이쪽이다.

애들 쪽에서 합류하고 싶다고 해도 우리가 거절하면 그만인 일.

문제는 저쪽에서 걸어온 조건.

"물건들이 있는 장소를 안다라."

그것도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나는 슬쩍 뒤를 돌아 이상아 조장을 바라보았다.

"...."

그녀 역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생각해?"

"그야, 아무리 작은 동네라고 해도 마트나 창고 같은 게 하나뿐만은 아니니까요. 여기 말고도 다른 장소들도 많긴 하죠. 수연이가 말하는 장소가 어딘지 짐작도 안 갈 정도로."

"하지만 이상아 조장은 그 많은 장소를 거르고 이 마트로 오자고 했지. 그럴 만한 이유도 있었던 것 아닌가?"

"그건 그렇죠? 이 마트는 그나마 작고 외진 곳에 있어서 방문하는 사람들이 얼마 없었거든요. 다른 곳들은 여기보다 더 유명하고 아는 사람도 많을 거예요."

즉.

"대부분은 이미 생존자들이 거쳐 갔을 확률이 높으니, 그렇다면 차라리...."

"그나마 물건들이 남아 있을 확률이 높은 곳으로 안내하겠다?"

"그런 셈이죠."

그녀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겠지.

애초에 이 마트도 공략이 어렵거나 하는 건 없었다.

이미 사람들이 거쳐 갔기에 물자가 없던 게 문제.

"미안하지만 그렇다는군. 네가 안다는 그곳도 이미 누군가가 다녀갔을 확률이 높을 테니, 우리한테는 그다지 가치가-."

"아뇨. 아니에요."

고개를 저으며 반박하는 소녀.

"거기 물건들은 온전히 남아 있어요. 전부는 아닐지 몰라도 대부분은 남아 있을 거라고 확신해요."

"그걸 어떻게 알지?"

"제가 직접 봤으니까요."

"뭐?"

의외의 말에 이상아 조장과 내가 놀라는 사이.

소녀가 말을 이었다.

"거기서 어른들이 모두 죽었거든요."

* * *

수연이 말한 사정을 간단하게 줄이면 이랬다.

"너희 그룹이 물자를 얻기 위해 그곳에 방문했고, 너와 동생을 제외하면 전멸했다?"

"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물건들이 남아 있다는 말의 근거가 되기는 한다.

정말 남아 있는 걸 봤다는 거니까.

'어린애 둘이 아직까지 살아남았다는 게 조금 신기하긴 했지.'

처음부터 둘이서 행동한 게 아니었다면 납득이 된다.

생존자 그룹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생존해 왔고.

얼마 전, 그들을 잃었다는 얘기니까.

"잠깐."

그때.

이상아 조장이 슬쩍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그 그룹에 속해 있다던 사람들, 누구누구인지 알려 줄 수 있니?"

"...? 네. 일단 저희 둘이랑, 리더로는-"

수연의 설명이 이어졌다.

설명을 다 들은 이상아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 사람들인가?"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니구요. 건너 건너서 이름 정도는 들어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네요."

생존자들은 숨어지내야 하는 그 특성상 규모를 키우지는 못해도 나름대로 마주칠 때마다 정보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그러는 와중에 들어본 적이 있는 그룹이었던 모양.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 곰곰이 생각하던 그녀가 말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한데, 거기 리더였던 각성자가 상당히 강한 각성자였다고 들었어요. 그 외에도 각성자가 한 명 더 있었다고."

"아. 순이 아줌마 얘기가 맞을 거예요. 전사로 각성했던.... 두 번째 각성자는 철이 오빠 얘기일 거예요."

전사라.

이상아 조장만 해도 꽤 잘 싸우는 편이다만.

결국 그녀의 직업은 나와 마찬가지로 생산직.

순수 전투 직군에는 미치지 못한다.

순수한 전투직인 전사.

그쪽으로 각성한 그 순이라는 여성이 이끌던 그룹은, 이상아가 이끌던 그룹보다 강했을 가능성이 크겠지.

심지어 강한 거로 소문이 있을 정도의 전사.

거기에 각성자는 한 명도 아닌 둘이었다고.

"그런 그룹이 전멸했다는 건가."

그냥 생존자들의 죽음이라면 모르겠다만.

각성자가 둘이나 포함된 그룹의 전멸은 마냥 경시하기 힘들다.

물론 각성자가 비각성자보다 많은 우리 길드가 그 생존자들과 비교될 정도는 아니겠지.

하지만 그 그룹을 전멸시킨 존재가 얼마나 강할지는 알 수 없다.

최소한 각성자 둘을 썰어 버릴 수 있을 정도.

최대로는 우리 길드조차 쓸어버릴 정도일지도.

철물 창고에서 만났던 괴물, '맥' 역시 어마어마하게 강력했다.

그런 수준의 몬스터가 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맥은 그나마 뭘 먹여서 정리하기라도 했지.

먹는다는 개념이 없는 몬스터가 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그리고.

수연의 사연을 들은 나는 한 가지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한 가지 묻자."

"네. 뭐든지."

"그 장소를 우리한테 알려 주겠다는 게 네가 건넨 조건이지."

"맞아요. 여러분들한테도 충분할 정도로 많은 물건이 분명히 있었어요."

뭐 거기까지만 들으면 꽤 매력적이긴 한데 말이지.

"그런데 그 조건. 정말 우리 이득을 위한 일이냐?"

"네?"

듣자 하니.

두 남매와 그 그룹원들은 꽤 각별한 사이였던 모양이다.

그룹원들이 모두 죽어 나가면서 저 둘을 살렸다고 할 정도니.

그런데 그녀가 안내한다는 장소는 그룹이 전멸한 곳.

그렇다면.

"네 복수에 우리를 이용하려고 하는 건 아니냐고 묻는 거다."

"...!"

"잠깐만요. 군단장님?"

내 말을 듣고 당황한 것은 수연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끼어들려는 상아를 제지하며 말했다.

"이건 중요한 부분이야. 정보를 주고받는 거래라면 무조건 확인해야 할."

"...정말 거짓말한 건 하나도 없어요! 거기에 물자들이 쌓여 있다는 얘기도, 가서 보시면 확인할 수 있을 거예요."

"다른 게 전부 사실이라고 해도, 동기가 거짓이라면 거래에 응하긴 힘들지."

수연이 알고 있다는 장소는 안전한 곳이 아니다.

적어도 각성자 둘을 죽여 버릴 수 있는 괴물이 자리 잡고 있을 장소.

그런 곳에 대한 정보를 굳이 우리에게 넘기려고 한 것.

그룹원들의 복수를 바라는 마음에 위험한 장소로 우리를 몰아넣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고.

어찌 확신할 수 있을까.

내 질문을 들은 수연은 허점을 찔리기라도 한 듯 말문이 막힌 모습이었다.

그녀의 시야가 갈 곳을 잃고 허공을 맴돌았다.

"...솔직히 말하면."

잠시 뒤.

생각을 정리한 듯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복수하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에요."

"수, 수연아?"

"흐음."

"그만큼 저희한테 잘해 준 사람들이었으니까요."

그런 일이라면.

우리는 이 거래에 응할 수 없다.

오늘 만난 생존자의 복수를 위해 길드가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러나.

그녀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옛날에요."

"뭐?"

"지금은 아니에요. 복수 따위는 바라지도 않죠."

"그건 또 의외로군. 왜지? 그냥 상황을 모면하려고 하는 말은 아닐 테고."

"그야."

옆에 앉아서 이 대화를 듣고 있던 동생.

수혁에게 시선을 두는 수연.

"수혁이하고 저는, 살아남았으니까요."

"음?"

"저희를 지키려고 죽은 사람들도 있었어요. 죽은 사람들의 복수에 집착하다가 그 사람들이 목숨 바쳐 살린 우리가 죽는다면."

"...."

"그건 그 사람들의 행동을 아무 의미 없게 만드는 일이잖아요. 목숨까지 바친 일을 그렇게 허무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나와 눈을 마주친 수연이 단호하게 말했다.

"제 목표는 하나예요. 저하고 수혁이의 생존. 최악의 상황이라도 동생만은 살리는 것. 여기서는 죽더라도 정신병 같은 거로 죽는 게 빠를 테니까요. 그 정보도 어디까지나 거래 조건으로 유용하다 생각해 말했을 뿐이에요. 복수 같은 의도는 없었어요."

"흐음."

"정말이에요. 믿어 주세요."

최우선 목표는 생존.

살아남기라.

"나랑 비슷하네."

"네?"

다짜고짜 거래를 제안할 때는 너무 당돌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저 부분은 마음에 들었다.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에 가장 좋은... 동료로 삼기에는 최적의 마인드.

그녀의 말마따나 지나간 것에 집착해서 피해를 보면 본말전도인 셈이니까.

"조건을 하나 바꾸자."

"뭐, 뭐죠."

"보호하에 들이는 건 어렵다. 누군가를 보호해 줄 여유 따윈 없거든."

"그러면 거래에 무슨 의미가-."

"부대에 합류해라."

내 제안을 들은 수연은 그게 무슨 의미냐는 표정이었다.

합류와 보호의 차이가 뭐냐 싶겠지.

하지만 옆에서 듣고 있던 이상아는 그 의미를 깨달은 듯 한숨을 내쉬었다.

"소년병이라니.... 꼭 그래야 해요?"

"본인이 강하게 바라고 있기도 하고, 각성만 한다면 어린 건 문제가 되지 않을 테니까. 위험한 전투에서 굴릴 생각도 없고."

애초에 이상아가 이끌던 생존자 그룹에도 어린아이들이 있다.

그 아이들도 언젠가 각성시킬 예정이었으니.

거기에 포함된다고 생각하면 큰 손해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보호하에 들이는 게 아닌, 각성자로서 부대원이 되는 것.

그 정도라면 충분히 수용 가능한 안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저희를 받아주신다는 거겠죠?"

"일단은. 너도 보호만 받는 게 아니라 함께 싸워야 한다는 게 차이겠지만."

"그런 거라면 상관없어요. 어른들과 함께할 때도 딱히 놀고만 있지는 않았거든요."

"좋아."

거래 성립이다.

"그럼 일단, 네가 말한 그 장소에 대한 정보부터 듣자. 아니, 그보다는 어른들을 죽였다는 괴물들에 대한 정보가 먼저인가."

"아, 그게...."

"음?"

그룹을 전멸시킨 괴물에 대한 정보를 묻자 망설이는 그녀.

그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그걸 모르겠어요."

"모르다니?"

"어른들이 모두 죽어 나가는 걸 눈앞에서 봤지만. 괴물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거든요.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갑자기 몸에 구멍이 뚫리고 베이면서 사람들이 죽었죠."

"뭐?"

그녀가 설명하는 내용은.

본 적은 없지만 조금 익숙한 개념을 떠오르게 했다.

...마치.

"귀신이라도 나타난 것처럼요."

41화 마트의 귀신 (2)

"마치 귀신이라도 나타난 것처럼요."

수연의 설명을 들은 나와 상아의 표정이 멍하게 변했다.

귀신이라니.

...진짜로?

* * *

수연이 말한 목적지는 이번에 우리가 방문한 곳과 비슷한 마트였다.

차이가 있다면 규모가 더 크다는 점 정도일까.

"사실 저희도 그만한 마트의 물건들이 멀쩡하게 남아 있다는 걸 의아하게 생각하긴 했어요."

"수상하게 여길 만도 했을 텐데, 굳이 발을 들이밀었다는 건가?"

"수상하다고 해서 돌아갈 정도로 여유가 있지는 않았거든요."

규모가 큰 만큼 위치도 잘 알려진 마트.

생존자들이 그런 곳을 털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는 법.

정확히는 털지 못한 거겠지.

"초입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다들 어느 정도 안쪽으로 진입했다 싶은 순간."

"사람들이 갑자기 죽어 나갔다. 그거군."

"네."

여기까지가 수연에게 들은 이야기.

나는 두 남매에게는 일단 휴식을 권했다.

그리고 부대원들의 곁으로 돌아와 오간 대화를 들려주었다.

"그렇게 해서. 부대에 합류시켜 주는 조건으로 정보를 받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혼자 결정한 셈이라 미안하게 됐네."

"아뇨. 뭐 신 병장님이 결정하신 일이면 큰 문제는 없지 않겠습니까?"

"막내 늘어나면 좋죠, 뭐. 애들이라는 게 좀 걸리긴 하지만."

사실상 새로운 부대원을 늘리겠다는 결정.

혼자 결정할 일은 아니었나 싶어서 살짝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만.

다행히도 부분은 다들 이해해 주는 분위기였다.

나라는 인간에 대한 신뢰도 조금은 영향을 줬겠지.

하지만 아마 주요인은 그게 아닐 것이다.

부대 일 외에는 꽤 무관심하고 매정해진 병사들이지만.

그 전우애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우리 부대에 소속되어 있느냐, 아니냐.

아예 외부인이면 모를까.

부대원이 되는 방향이라고 한다면 꽤 관대해지는 거겠지.

하지만.

진짜 문제는 다른 쪽이란 말이지.

"그... 영입은 상관없는데 말입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병사들.

그중 한 명이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손을 들며 말했다.

"그거. 진짜 귀신은 아니겠죠?"

"...."

"신 병장님?"

"...."

"빠, 빨리 아닐 거라고 해 주십쇼! 무섭잖습니까!"

"아니. 그렇게 말해도 말이지."

사람들이 모두 죽어 나가는 동안 괴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는 이야기.

얘기만 들어보면 정말 귀신이라도 나타났나 싶다.

설마 정말 그러겠나 싶은 마음도 약간은 있지만.

"솔직히 이런 상황이니까. 진짜 귀신이 나타났다고 해도 난 믿길 것 같거든?"

군부대만큼 귀신에 관한 소문이 자주 도는 곳도 없다.

실제로 근무 후 생활관으로 돌아와 자기가 귀신을 봤다고 호들갑을 떠는 병사들도 종종 있었다.

그럴 때.

예전의 나였다면.

-니가 잘못 본 거겠지 인마. 무슨 애도 아니고. 귀신이 세상에 어딨냐.

하고 넘겼겠지.

하지만 괴물이 나타나기 시작한 지금의 나는.

"좀비도 돌아다니는 세상이 돼 버렸으니까. 솔직히 귀신이 나온다고 해도 그럴 수도 있겠다~ 싶네."

"그, 그런...."

이렇게 된단 말이지.

내 대답을 들은 병사들의 얼굴이 가지각색으로 바뀌었다.

덤덤한 녀석도 있고 살짝 찡그린 녀석들도 있지만.

"크, 크흠."

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하게 변한 녀석들도 있는 게 문제.

"거 뭐냐."

"거기 꼭 가야만 하겠습니까?"

"...너네 왜 떨고 있냐?"

"누, 누가 떨었다고 그러십니까!"

전투에는 상당히 익숙해진 병사들.

하지만 그것과 귀신이니 뭐니 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엄청난 실력의 싸움꾼도 공포영화는 혼자서 못 보고 그런 일도 왕왕 있다지 않은가.

부대원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비교적 덤덤한 병사들도 있었지만.

몇몇 병사는 안색이 창백해지고 몸을 벌벌 떨기까지 하는 모습.

어지간히도 무서운 모양이었다.

그때.

"너희들이 그러고도 사내자식이냐!"

한 병사가 소리를 질렀다.

이제는 익숙해진 거대한 덩치.

"괴물과의 목숨 건 싸움도 버텨 내던 녀석들이 맞느냔 말이다! 리자드의 입 안에 칼을 쑤셔 박던 그 깡은 다 어디로 가고!"

"저, 전광일 상병님?"

전광일 상병이었다.

"해병대는 귀신도 때려잡는다고 했다. 유령이고 뭐고 우리의 용기로 물리칠 수 있을 거란 말이다!"

"우리가 해병대는 아니잖습니까...."

"...저분. 우리가 공포영화 볼 때는 무섭다고 도망치시던 전광일 상병 맞냐?"

"어. 아닐 수도 있겠다 싶은데요."

원래는 부대의 누구보다도 겁이 많던 녀석.

지금 저러는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갔다.

'크흠. 정신치료의 부작용이....'

내가 과도한 '용기'의 요리를 주입한 게 원인이겠지.

요리의 효과는 분명 끝났을 터.

하지만 그 후유증이라고 해야 하나.

아예 공포가 거세되어 버린 것 같다.

그래도 본래 성격이 유순한 편이라 평상시에는 문제가 없었다만.

"위대한 대한의 건아가 새끼 사슴같이 쫄아 있다니! 이 무슨 추태란 말이냐!!!"

부대원들이 쫄아 있는 걸 보니 정신치료의 부작용이 제대로 돋아 버린 모양.

광일이의 윽박에 안 그래도 겁이 많던 병사들은 아예 울상이 되어 버렸다.

그때.

"진짜 유령이라고 정해진 건 아니지."

분위기를 진정시킨 것은 이민재 병장이었다.

"그저 보이지 않게 적을 처치할 수 있는, 유령처럼 보이는 현상을 일으킬 뿐인 괴물일 가능성도 있으니까. 유령이라고 확신하는 것도 좋지 않다고 본다."

"그렇습니까? 설명만 들으면 유령 말고는 떠오르지 않는데요."

"그건 우리가 가진 상식으로 대상을 보려고 하니까 그런거고."

습관적으로 담배를 꺼내려 주머니를 뒤지는 민재 형.

하지만 담배도 다 떨어진 지 오래라.

머쓱해진 듯 헛기침을 한 그가 말을 이었다.

"크흠, 생각해 봐. 이미 나타난 괴물들 대부분이 우리의 상식에서 벗어난 녀석들이다. 애초에 괴물이 나타난다는 상황부터 그렇지."

"으음. 그건 그렇죠."

"괴물의 정체를 우리가 가진 상식과 추상적 이미지만으로 확신하려고 들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오히려 진짜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워질 테니까. 녀석들이 우리 상식선에서 나타나 줄 정도로 상냥하지도 않을 테고."

그 말대로.

직접 본 것도 아니고 들은 이야기만으로 적의 정체를 확신하는 것은 위험한 일.

결국은.

"직접 가서 겪어 보는 수밖에."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

그 외에 답은 없겠지.

"생각보다 일이 복잡하게 됐지만. 아무것도 없이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바로 차량 시동 걸어 놓겠습니다."

개조 차량이 있는 덕에 가까운 거리의 이동은 문제가 없었다.

결정했으면 망설일 시간도 아깝지.

부대원들은 신속하게 이동을 준비했다.

합류하기로 한 두 남매 역시 마찬가지.

그들을 차량에 탑승시키기 위해 데리고 나온 순간.

"...히끅."

"응? 무슨 일이야?"

"아, 아뇨. 생각했던 그런 차가 아니라서."

"아."

차량의 비주얼이 좀 그렇긴 하지.

그래도 금방 마음을 추스르고 차량에 탑승하는 남매.

"출발한다."

"출발하시랍니다!"

수연에게 들은 장소를 향해 차량들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옆자리에 앉은 수연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이 보였다.

"신경 쓰이는 거라도 있나?"

"네? 아뇨. 그게...."

불안한 듯 창밖의 차량들을 보는 수연.

"탱크 같은 건 없나 해서요."

우리가 군인이다 보니.

당연히 탱크 같은 것도 있는 줄 알았나 보네.

"아쉽지만 그런 건 없어."

"네?"

"탱크 같은 건 없다고. 저기 보면 레토나라고, 아쉬운 대로 군용 차량은 있긴 한데."

"그, 그러면. 지금 가는 곳의 괴물은 어떻게 해결하시려고요?"

"음? 정체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병사들이 직접 처리해야겠지."

"네에?"

내 대답에 기겁한 수연이 말했다.

"무, 무리예요!"

무리라니.

"그곳의 정보를 주면서 가 보라고 권한 건 너였는데?"

"그야, 저는 군인분들이시니까 다른 방법이 있을 줄 알고...!"

"다른 방법이라니?"

"탱크라든가, 미사일이라든가... 안에 귀신이 있다고 해도 장소 자체를 부순다면 귀신도 사라지지 않을까 해서-."

흠.

군인이 무언가를 해결한다고 하면 그런 이미지일 수도 있겠다 싶다.

근데 어쩌냐.

"아까도 말했지만, 탱크니, 미사일이니. 아쉽게도 그런 건 없어."

"...!!!"

산꼭대기에 자리 잡은 소규모 레이더 부대.

탱크 같은 게 있겠냐.

아, 대공포는 있긴 했다만 그걸 가지고 내려올 수도 없고.

"애초에 그런 식으로 공략하면 그 마트 자체가 초토화될 텐데? 우리 목적인 마트의 물건들도 확보하지 못할 것 아냐."

"앗. 그, 그건."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까.

안색이 창백하게 변하는 수연.

"그, 그러면. 제가 꺼낸 얘기라서 미안하지만요, 차라리 들어가지 않는 게...."

"우리도 여유가 있지는 않거든.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적이라면 모를까, 보기도 전에 물러나긴 아쉽지."

"...말했잖아요! 각성자가 두 명이나 있었는데 모두 죽었다고."

"음. 위험하긴 하겠지. 그런데 있잖냐."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것 같다.

남매가 속해 있던 생존자 그룹을 전멸시킨 장소.

자신이 그곳을 안내한 탓에 우리까지 비슷한 꼴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거겠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적.

정말 귀신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도 자신이 없지는 않거든."

* * *

수연의 안내를 따라 도착한 3층짜리 대형 마트.

그 마트를 발견한 우리의 첫 감상은 이랬다.

"...오히려 기괴하군요."

기괴함.

그런 감상이 나온 이유도 간단했다.

"너무 멀쩡하잖아."

아이러니하게도.

지나치게 멀쩡한 그 모습이 오히려 기괴하게 느껴졌던 것.

수연이 말했던 '털리지 않았다' 정도가 아니었다.

"불만 켜지지 않은 거지, 이건...."

"옛날 마트 모습이 그대로군요."

멸망의 날에 괴물들이 등장한 지 두 달이 넘었다.

그 후로는 붕괴된 사회의 모습만을 봐 왔던 우리.

이 멀쩡한 모습은 오히려 기괴하게만 느껴졌다.

"안에 있는 존재가 어떤 녀석이길래."

"정말 귀신같은 녀석이라 손도 대지 못하거나,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병사들이 나를 보며 묻는다.

해 줄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

"뭘 어떻게 해? 그땐 튀어야지."

"예에?"

"꼭 귀신이 아니라도, 공략 불가능한 수준의 괴물로 판단되면 당연히 튈 거다. 혹시 모르니까 운전병들은 계속 시동 걸어 놓고 있어."

"꽤 치사하심다?"

"전략적이라고 해라."

'맥'은 뭘 먹기라도 했으니 공략의 여지가 있었다만.

귀신한테 뭘 먹일 수도 없잖아?

당연히 튀어야지.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최악의 경우고."

벌써 최악을 생각해서 쫄아 있을 필요는 없지.

"붙어보기 전엔 모른다고 본다."

"그것도 그렇군요."

내 말을 들은 병사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전투에도 꽤 초연해진 모습.

문제는.

"귀, 귀신이면 정말 퇴각하셔야 합니다...!"

여전히 벌벌 떨고 있는 소수의 녀석들이겠지.

"이, 이 겁쟁이 자식들이...!"

"너부터 좀 진정해, 인마."

"하지만 신 병장님...."

그 모습을 본 전광일 상병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저런 정신상태로는 제대로 싸우지도 못할 겁니다."

"그건 그렇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차라리 열외를 시키는 게 나을지도 모릅니다만."

녀석 말대로.

저렇게 쫄아 있어야 전투에 도움이 되진 않겠지.

하지만 화낸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잖냐.

애초에.

이럴 때를 위해서 지급한 물건이 있으니까.

나는 잔뜩 쫄아 있는 녀석들을 포함.

대기 중인 병사들에게 말했다.

"다들. 전투식량 꺼내."

"예, 옙!"

허리춤의 주머니에서 전투식량을 꺼내 드는 병사들.

"1번으로 먹는다. 실시."

"...식사 맛있게 하십쇼!"

우리 부대 고유의 전투태세.

전투식량 취식이 이루어졌다.

이번에 먹도록 명령한 것은 1번.

사실 특별한 건 아니고.

우리에겐 가장 익숙한 녀석이다.

[하급 요리사의 용기가 담긴 리자드 고기 육포]

"큭큭. 귀신 사냥이라."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육포를 베어 문 병사들의 표정이 급격하게 바뀌었으니까.

"좀비 놈들도 지겨워지던 참이었는데 잘됐군."

"그르륵...."

"적은 어디인가! 나를 만족시킬 만한 녀석은 있는가!"

"끼요오오옷!"

"그래, 그래. 다들 열의에 찬 모습 보기 좋아."

용기가 그득그득 들어찬 병사들.

"누나.... 군인 아저씨들이 이상해...."

"워, 원래 저런 분들이었나요?"

"음. 위험한 전투가 있을 수 있으니까, 그전에 정신을 고양시키는 거지."

전투식량을 먹지 않은 두 남매가 조금 의아해했지만.

대충 둘러대자 그런 건가? 하고 넘어가는 모습.

나는 한껏 달아오른 병사들을 보며 말했다.

"들어가자."

"끼에에에에에엑!!!"

"전장으로!!!"

쾅!

용기백배한 상태로 문을 박차고 진입한 병사들.

하지만 그 기세가 무색하게도.

"조용하군."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는 마트.

주변에서는 우리 병사들의 거친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일단 더 진입한다."

"예!"

그러던 중.

"앗."

"...?"

"뭔가 이상해요."

"뭐가?"

뒤에서 따라오던 남매 중 동생 수혁이 말했다.

"여기, 철이 형이 쓰러졌던 곳인데...."

"뭐?"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여기서 죽었다던 생존자들

그들의 시체도 보이지 않는다니.

명백한 이상 현상.

"다들 잠깐 정-."

정지 명령을 내리려고 했으나.

다른 병사들은 두려움 없이 안쪽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딨느냐. 내 적은 어디에... 커헉."

내 바로 앞을 걷고 있던 병사.

녀석이 갑자기 고통에 찬 소리를 냈다.

'습격!'

파악!

나는 급하게 팔을 뻗어 녀석의 어깨를 잡은 뒤.

내 뒤쪽으로 내던졌다.

"의무병, 군종병!"

"예!"

뒤로 던져진 녀석의 허리 부근에는 무언가에 찔린 상처.

그곳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뭐 하냐! 빨리 치료 안 하고!"

"알겠습니다!"

"나머지 병사는 그대로 정지! 습격에 대비해라!"

"정지, 정지!"

"다들 정지하라십니다!"

명령에는 충실하게 따르는 병사들.

"크읍...."

"조금만 참으십쇼."

내 뒤에서는 허리에 구멍 뚫린 병사가 상처를 치료받고 있었다.

녀석의 바로 뒤에서 걷고 있던 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똑똑히 봤다.

문제는.

'분명 적은 없었는데도... 무언가에 찔렸어.'

그게 무엇이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는 것.

"똑같아...."

그때.

뒤에서 따라오던 수연이 말했다.

무슨 말인지는 더 듣지 않아도 알만했다.

'생존자 그룹이 전멸할 때랑 똑같다. 그런 거겠지.'

정말 같은 상황이라면.

공격이 여기서 끝나지는 않을 터.

나는 긴장한 상태로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

.

.

"...뭐지?"

공격은 이어지지 않았다.

"...아까 한 말."

"네, 네?"

"다시 설명해 봐."

나는 주변의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은 채.

수연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서 있었던 일. 더 자세하게 설명해 보라고."

"아, 그게, 더 자세하게 말하라고 하셔도... 정말 그게 다예요. 앞서가던 순이 아줌마가 공격당하고... 나머지 사람들이 급하게 도망가면서 다들 무언가에 공격당해서."

흠.

하지만 우리에게는 추가적인 공격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황.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도망치지 않고 정지했다는 점 정도인가?'

공격이 이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한 나는 침착하게 상황을 살폈다.

내 바로 앞이 병사 녀석이 찔린 자리.

바닥에는 밑에는 피가 약간 튀어 있었다.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는다.

특징이라면.

근처 선반과 많이 가깝다는 것 정도...?

그때.

[특성 - 식재료 감별이 발동합니다.]

주변을 유심히 살피고 있어서 그럴까.

특성이 발동했다.

[식재료 감별]

[알루미늄]

[폴리아미드]

녀석이 찔린 장소는 과자 코너.

지난번 일로 내게 요리 재료의 한계는 사라졌고,

식재료가 아닌 과자 봉투의 성분 또한 감별이 가능해졌다.

물론 과자 봉투에 대한 정보를 안다고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는데.

[삼나무]

[폴리에틸렌테레프탈레이트]

[파란의 물방울]

[알루미늄]

.

.

.

...어라?

뭔가.

'이상한 게 섞여 있었는데?'

다시 한번 그 주변을 살폈다.

이번엔 내가 적극적으로 특성을 사용하며.

그리고 보이는 문구.

[파란의 물방울]

그 문구가 나타나는 대상은.

두 눈 씻고 봐도 평범해 보이는 과자 봉투 하나였다.

과연.

"그런 거였구만?"

42화 마트의 귀신 (3)

[식재료 감별]

[파란의 물방울]

[품질 : 상]

이 문구가 나타나는 대상은.

다름 아닌 흔하디흔한 과자 봉투.

뭐시기의 물방울이라.

과자 봉투에 붙어 있을 이름은 아니지.

나는 그 앞으로 슬쩍 몸을 옮겼다.

당당하게.

"야."

"예?"

"신 병장님? 부르셨습니까?"

과자 앞에 선 내가 그렇게 말하자.

엉뚱하게도 근처를 경계하던 병사들이 대답한다.

미안하지만 그쪽은 조금 무시하고.

"야 인마."

"뭐 하시는...."

"음, 이 자식 꽤 뻔뻔한데?"

"예?"

과자 봉투를 정확히 가리키며 식칼을 들이밀고 말한다.

"너, 들켰어, 인마."

그 순간이었다.

파아아악!!!

과자 봉투가 기괴하게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회색 가시 같은 것이 튀어나와 내 머리통을 노렸다.

"뭐, 뭐야!"

"신 병장님!?"

내 기행을 지켜보고 있던 병사들도 그 모습을 보고 당황했으나.

'예상하고 있다면 피하기도 어렵진 않지!'

나는 그 가시를 피하고.

오히려 과자를 향해 식칼을 휘둘렀다.

물컹.

그 감촉은 뭐랄까.

젤리를 베는 것과 비슷했다.

그러자.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주르륵....

평범해 보였던 과자 봉투의 모습이 변했다.

은회색의 젤리 같은 것이 과자 코너의 선반에서 흘러내렸다.

"신 병장님? 이게 대체, 뭡니까 이건?"

"귀신의 정체."

"예?"

귀신은 무슨.

이렇게 보니 어이가 없다.

"눈에 안 보일 만도 하네. 이 정도로 잘 숨어 있어서야."

"아까부터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희는 잘...."

"의태다."

['요리사의 눈'이 발동합니다]

['하급 요리 비결 - 파란의 물방울의 손질법'을 획득합니다.]

[파란의 물방울의 손질법.]

[파란의 물방울은 주변 환경을 모방해 사냥감을 유인하는 습성을 지닌 마도 생명체로서-.]

[의태하지 않은 원래의 형태는 다량의 액체로 이루어진 은회색의 몸체와 마력이 집중된 중심부의 본체, 코어로 이루어져 있다. 혹자는 슬라임의 아종으로 분류하기도 하나, 본체인 코어만 멀쩡하면 복원되는 그 특성상 슬라임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의견이 주류-.]

[손질의 핵심은 물방울의 본체나 다름없는 중심부의 코어로서-.]

"귀신 같은 게 아니야. 소름 돋을 정도로 주변 환경에 녹아드는 의태 능력이지."

"이 젤리 같은 게 말입니까?"

"그래.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뿐이지, 사실 똑똑히 보이고 있던 거다. 그게 주변 사물들하고 똑같았을 뿐."

주변의 환경에 완벽하게 동화된 뒤.

근처를 지나가는 적을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공격하는 것이다.

우리가 멈춰 섰을 때 추가적인 공격이 이뤄지지 않은 이유도 간단.

마침 주변에 이 녀석들이 없었던 것뿐이겠지.

'주변에 의태한 상태로 방심하게 한 후에, 깊숙한 곳까지 유인해서 사냥을 시작하는 건가.'

보이지 않는 공격에 당황해 사냥감이 도망칠 때.

환경에 동화되어 있던 이 녀석들은 마치 함정처럼 주변을 달리는 인간들을 공격하는 거다.

남매가 살아남았던 것은 어른들의 희생도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이 녀석들이 숨은 곳을 거치지 않았던 점이 크겠지.

운이 좋았다는 거다.

그리고....

"저 녀석들은 운이 나쁜 거고."

불과 얼마 전에도 했던 말을 반복하게 된다만.

몸을 숨기고 은신하는 적?

애초에 강하다면 그럴 이유가 없다.

굳이 저렇게 작전을 써야 한다는 건.

'전면전에는 자신이 없다는 뜻!'

나는 병사들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약점은 간단하다! 이 녀석들의 투명한 몸 중심부에 검은색 젤리 같은 게 있을 거야! 그것만 처치하면 끝이다!"

"예? 아니, 말은 쉽습니다만."

"어떤 게 그 괴물인지 모르면 약점을 알아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건 나한테 맡기고."

눈앞의 선반에 다른 괴물은 없다는 걸 확인한 뒤.

위의 과자들을 바닥에 흩뿌린 나는 그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매장 전체를 바라보았다.

[알루미늄]

[글라스화이버]

[필라멘트]

[합성섬유]

[파란의 물방울]

"광일아!"

"예! 상병 전광일!"

"네 옆에 있는 유제품 냉장고! 공격해!"

"뒤져라!"

부대원들에게는 요리를 통해 만든 '용기'가 남아 있는 상황.

괴물의 정체를 들은 병사들은 여전히 조금 당황스러운 듯했으나.

명령이 내려지자,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행동에 들어갔다.

의문조차 없이 냉장고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전광일 상병.

그러자.

푸우욱.

냉장고 안쪽으로 쑥 들어가는 전광일 상병의 주먹.

"뭔가 있구나!"

그 손이 밖으로 나왔을 때.

녀석의 주먹에는 검은색 구체.

저 괴물의 코어가 쥐어져 있었다.

콰직.

손아귀 힘으로 코어를 박살 내 버리는 녀석.

그러자 냉장고 자체가 회색빛 젤리로 변하며 바닥에 늘어졌다.

"처리했습니다!"

"잘했어, 자식아! 다음, 병민이!"

"이병 이병민!"

"니 앞에 테이블! 갈겨!"

"충성 충성!!!"

콰직.

마트 안에 쌓여 있는 물건들.

그 물건들 사이사이에 숨어들어 정체를 숨기고 있던 괴물.

녀석들이.

파직.

콰악.

물컹....

한 마리씩.

코어를 잃고 흐물거리며 바닥에 퍼져 나갔다.

"...신 병장님은 대체."

"이것들을 어떻게 알아보시는 거지?"

괴물들을 처치하면서도 직전까지 알아보지 못하던 병사들.

그들이 나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그 시선에 답할 여유는 없어서.

"다음은 한일이!"

그나마 스킬인 요리사의 눈과 달리 식재료 감별 특성은 마력을 소모하지 않아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또 기절했을 것 같다.

그렇게 상당한 숫자의 '파란의 물방울'을 처치했을까.

파아아아악.

갑자기.

매장 전체에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 뭐지?"

"뭐긴 뭐야. 저기 좀 봐."

"아."

그 소리의 정체는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곳곳에 물건으로 의태해 숨어 있던 괴물.

"숨어 있어 봤자 의미 없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거지."

녀석들이.

의태를 풀고 은회색의 본체를 드러냈다.

"맙소사."

"이 안에 이렇게나 많이 숨어 있었다니."

의태를 모두 풀자.

눈앞에 나타난 것은 못해도 수십 마리의 거대한 젤리 형태의 괴물들.

녀석들이 너무 강력한 개체라고 한다면.

이전에 '맥'을 상대했을 때처럼 어떻게든 입 안에 내가 만든 요리를 쑤셔 넣어야 했겠지.

하지만.

"의태를 풀어서 뭐 어쩌자고?"

"오히려 편하게 사냥할 수 있겠군!"

이 녀석들은 그 의태 능력이 문제일 뿐.

그렇게 강하진 않다.

망설임 없이 사냥하려 달려들려던 그때.

"어, 어어?"

"이 녀석들. 또 뭔가로 변신하려 합니다!"

모든 젤리가 출렁이는가 싶더니.

그 형태가 크게 변화했다.

그 모습은 우리에겐 꽤 익숙한 것.

"사람, 인가?"

"여성형인 것 같습니다만."

칼과 방패를 들고 있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정도의 여성.

여자라고는 하나 꽤 근육이 있어 보인다.

조금 신기한 점은.

칼과 방패를 빼면, 그 복장은 지극히 현대인스러웠다는 것 정도일까.

해진 양복을 입은 커리어 우먼의 형태였다.

"순이 아줌마...."

그 모습을 본 수연이 중얼거렸다.

뭐?

"저게 그 순이 아줌마라고?"

"예?"

"...아줌마라기엔 좀 젊어 보이는데요?"

"그 뭐냐, 애들한테는 스무 살만 넘어도 아줌마란 거 아니겠습니까."

순이 아줌마.

수연이 속해 있던 생존자 그룹 리더의 이름이었다.

"분명. 전사직 각성자였다고 했지."

"네."

과연.

"숨어 있는 건 의미가 없고, 젤리 형태로는 싸우기도 힘드니."

"전투에 어울리는 모습을 취했다는 거군."

굳이 저 모습을 취한 데는 이유가 있겠지.

직접 사냥한 개체의 모습만을 취할 수 있다던가?

굳이 구색만 갖추려고 변신한 것은 아닐 테니.

아마도 저 형태가 녀석이 취할 수 있는 형태 중 가장 강한 모습이란 거겠지.

"모르긴 모르지만. 전투력도 원본하고 비슷하게 가는 거 아닐까?"

"저 숫자가 말입니까...?"

눈앞에 보이는 괴물의 숫자는.

이쪽과 비슷하거나, 저쪽이 약간 더 우위.

즉.

우리는 동등한 숫자의 전사직 각성자를 상대한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거다.

"멍청한 짓을 했네."

"빠, 빨리 도망쳐야...."

"응? 우리가 왜?"

"순이 아줌마는 각성자라구요! 심지어 저렇게 많다니. 도망치는 것도 무리일지도...."

그러고 보니.

저 여성은 생존자들 사이에선 나름 강하다는 소문도 돌았다던가.

전투에 특화된 전사직 각성자.

그런데 미안하지만.

"큭큭, 이제야 조금은 재밌게 됐구나!"

"우리를 좀 더 즐겁게 만들어 봐라!"

콰직.

파아아앙....

그 대단하다는 각성자를 흉내 낸 몬스터는.

아군 병사들의 손에 썰려 나가고 있었다.

"...어?"

"그러니까 말했잖냐."

그 모습에 할 말을 잃은 수연에게 태연하게 말했다.

"멍청한 짓이었다고."

복사할 거면 광일이를 복사하든가 했어야지.

생존자들 사이에서 강한 것으로 유명했던 전사직 각성자라고?

"우리 병사들이 질 만한 요인이 단 하나도 없는 단어잖아?"

괜히 산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내려온 것이 아니다.

리자드를 잡으며 키운 레벨.

백 명의 각성자가 서로 겨루며 키우고 실전에서 갈고닦은 전투 기술.

총알조차 버텨 내는 리자드의 가죽으로 만든 장비들.

거기에, 내 요리를 통한 버프까지.

미안하지만.

고작 유명한 각성자 한 명이 따라잡기엔.

격의 차이가 너무 크거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