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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전투는 아무런 위기도 없이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전투에서 승리했으니.

전리품의 시간이 시작됐다.

"보십쇼! 여기, 쌀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신선식품류는 다 썩어서 못 써먹겠습니다만, 포장된 반찬류는 가져가도 될 것 같군요."

"얼마 만에 보는 라면이냐."

식량.

"휴지, 휴지다!"

"다행이다.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게 됐어...."

생필품.

"약국이 아니다 보니 기본적인 상비약류밖에 없긴 합니다만."

"지금은 이 정도로도 감지덕지죠. 뭣보다 붕대나 알코올을 확보한 게 크고."

의약품.

"쓰읍... 하...."

"이 맛이 그리웠어."

담배를 포함한 기호품까지.

'대박이다.'

100명이 넘는 단체 인원을 고려하면 이것들도 언제 소진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급한 불은 끌 수 있다.

아니.

'그러고도 한참을 남을 양이잖아?'

구석에서 멍하니 있는 두 남매.

그 볼이라도 한 번 꼬집어 주고 싶어질 정도!

부대원들이 물건들을 차량으로 옮기는 사이.

"신 병장님?"

"어어. 왔어?"

"말씀하신 빈 병들. 가져왔습니다."

"오. 고맙다."

"아뇨. 고마우실 건 없습니다만...."

나는 일부 병사들에게 부탁해 빈 병을 좀 챙겨 왔다.

"이걸 어디에 쓰시려고?"

"음. 보면 알 거야."

병사들이 챙겨다 준 빈 병.

나는 거기에.

푸욱....

바닥에 퍼져 있는 은회색 젤리.

[파란의 물방울]들을 주워 담았다.

"신영준 병장님? 설마 그것도 요리에 쓰시려고 그러는 겁니까?"

"오. 너 좀 예리한데."

"으엑...."

기겁하는 병사들.

그러면서도 각자 한 손에 병을 쥐더니 바닥에 쭈그려 앉는다.

같이 젤리들을 주워 담기 시작하는 녀석들.

"만졌을 때 느낌도 그렇고. 암만 봐도 젤리같이 생겼는데... 이런 걸 쓰는 요리도 있답니까?"

"레시피야 만들면 되는 거니까. 뭐, 나도 만들어 봐야 하겠다만."

모르긴 몰라도.

무려 의태 능력을 가지고 있던 괴물이다.

"잘만 요리하면 대단한 걸 만들 수도 있을 것 같거든."

그러고 있자니.

"영준아."

"응? 무슨 일이야, 형."

멀리서 민재 형이 다가왔다.

조금 전까지 간만에 담배를 맛보고 있었던 듯 담배 냄새가 풍기는 형.

"이 녀석들도 재료로 쓸 생각인 거냐."

"일단은? 결과물이 생각보다 별로라도 손해 보는 건 없을 테니까."

"음. 그렇다면... 잠깐 이리로."

"응?"

민재 형이 부르는 곳으로 향하자.

그곳에는 마법사 조의 병사 몇 명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이야?"

"저 안쪽을 보면 알 거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조금 더 접근하자.

병사들이 둘러싸고 있던 것이 보였다.

"...이거 설마."

"네 예상대로다."

지금까지 주워 담고 있던 것과 비슷한 은회색 젤리.

차이가 있다면.

"살아 있는 건가."

"어쩌다 보니."

코어가 멀쩡하게 남아 있다는 것.

활발하게 움직이지는 못해도,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어쩌다 보니? 죽이면 죽였지. 왜 이런 상태가 된 건데?

"으음. 나나 마법사들은 근접전에는 자신이 없으니까. 일단은 각자의 마법으로 공격하니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 수는 있더군. 그렇게 전투에 가세했는데...."

"코어에 마법을 때려 박지는 못하니 죽이지는 못하고, 이렇게 제압만 돼 버렸다?"

"그런 셈이지. 혹시 요리할 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흠.

나는 요리사의 눈으로 얻은 '손질법'을 떠올렸다.

[혹자는 슬라임의 아종으로 분류하기도 하나, 본체인 코어만 멀쩡하면 복원되는 그 특성상 슬라임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의견이-.]

'코어 쪽이 핵심이고 나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한 느낌이란 말이지.'

그렇다면.

코어 쪽이 영양가도 집중돼 있지 않을까.

"챙기자."

"예?"

"살아 있는 괴물을 챙겨도 되는 겁니까?"

"이 녀석들. 공격 수단은 어디까지나 저 은회색 젤리 쪽이었어. 코어는 약점일 뿐이었고."

본체는 코어.

하지만 거기에 전투 능력은 없다는 거겠지.

"본체 쪽에 영양가가 집중돼 있을 거 같기도 하고. 신선한 채로 남길 수 있으면 남기고 싶네."

"으음. 병장님 판단이 그렇다면야."

민재 형과 마법사들이 제압한 괴물은 몇 마리가 더 있었다.

녀석들의 코어까지 병에 담고 입구를 밀봉했다.

...이 녀석들, 이대로 관리한다고 말라 죽거나 하진 않겠지?

그렇게 일을 모두 마무리하고 난 뒤.

차량에 탑승해 부대로 복귀하려 할 때쯤.

"...."

수연, 수혁 남매의 모습이 보였다.

여전히 멍하니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모습.

"왜 그래? 정신 나간 사람처럼."

"...그 괴물들. 진짜 순이 아줌마 정도로 강했어요."

"아아, 그랬던 것 같더라."

"그렇게 강하던 순이 아줌마가, 수십 명이 있었는데도 상대가 안 되다니...."

"응?"

"아, 아뇨."

동생의 손을 꼭 쥐고 말하는 수연.

"좋은 거래였던 것 같아서요."

피식.

"우리도 덕분에 얻은 게 많아. 윈윈이라는 거군."

"약속대로, 저희도 부대원으로서 합류시켜 주시는 거죠?"

"그래. 다만, 무임승차는 안된다."

보호하에 두는 것과 합류하는 것은 다르다.

"조만간 너도 무기를 들어야 할 거다. 아마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야."

어린애라고 보호해 줄 수만은 없다.

이런 세상이 되어 버렸으니까.

우리가 지켜 주고 싶어도 지켜 주지 못하는 상황도 생길 수 있다.

스스로를 지킬 힘을 키워야만 한다는 것.

"생존자 그룹에 있을 때도 무임승차는 안 했어요."

"저, 저도요!"

"큭큭. 그러냐."

그러고 보니.

나한테 도끼를 휘두르던 폼이 꽤 매서웠지.

이 녀석들은 좋은 병사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적어도 1인분은 할 수 있게 만들어야겠지.

물론 각성 절차는 최대한 안전하게 진행해야겠지만.

그러고 보니.

완전하진 않다고 하나 관사라는 임시 본거지도 생겼고.

차량의 개조를 통해 이동의 제약이 비교적 줄어들었다.

식량을 비롯한 생필품도 오늘 얻은 걸로 한동안은 버틸 수 있을 테니.

음.

여유가 조금 생겼네.

그렇다면.

"말 나온 김에 내일부터 시작할까."

"...네?"

드디어.

각성자를 늘릴 때가 온 것 같다.

43화 탈영병 (1)

의기양양한 채 차량을 타고 관사로 복귀했다.

그러자.

"충성."

관사를 수비하고 있던 병사들이 마중을 나왔다.

"다녀오셨습니까."

"오냐. 그동안 관사에는 별일 없었고?"

"예. 그보다. 결과는 어떻게?"

우리는 물자 확보를 위해 작전을 떠났던 것.

관사를 지키던 병사들은 결과가 궁금해 참지 못하겠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아...."

"크흠."

병사들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퍼져 나갔다.

"그. 뭐냐. 작전이 다 쉽게 풀리리란 법 있겠습니까? 다들 너무-."

"한 번에 다 옮기긴 무리더라고."

"아쉬워하지 말고- 예?"

피식.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은 병사들을 뒤로 한 채.

나는 뒤로 손을 뻗어 개조된 트럭의 짐칸을 열었다.

끼익.

그러자.

"뭐, 뭐야!"

"이 양은 도대체...!"

실망한 표정들이 순식간에 경악으로 바뀌었다.

"너무 많아서 끌고 간 차량들로 한 번에 옮기긴 무리더라고. 미안하지만 너네도 내리는 데 고생 좀 해 줘야겠다."

"그, 그런 의미였습니까?"

최대한 많이 옮기기 위해 그득그득 채워 둔 물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관사를 지키느라 사정을 모르던 병사들은 어안이 벙벙해진 모습.

"이만한 물자들이 전부가 아니라니. 도대체 어떻게...."

"운이 조금 좋았거든."

슬쩍 고개를 돌리자.

다른 차량에서 내리고 있는 수연, 수혁 남매가 보였다.

"우와아...."

"구경은 나중에 시켜 줄 테니까. 일단 들어가자."

이상아의 손을 잡고 관사 안쪽으로 이동하는 남매.

그러는 와중에도 관사의 모습이 신기한지.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정말이지 운이 좋았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사실 이번 작전은 실패하는 게 정상이었다.

물자를 얻고자 방문했던 마트는 이미 다른 생존자들로 인해 거덜 난 상황이었으니까.

본래라면 작전은 실패.

우리는 빈손으로 복귀했어야 했겠지만.

거기서 저 아이들을 만났고.

그들에게서 들은 정보 덕에.

'대박이 났지.'

상당한 양의 식량.

그리고 생필품.

의약품에, 덤으로 담배나 술 같은 기호품까지.

덕분에.

우리 부대의 생활에는 약간 여유가 생겼다고 봐도 될 것 같다.

"미안하지만. 쉬고 있던 애들은 물건 내리는 것 좀 도와줄래?"

"예. 다들 불러오겠습니다!"

"그리고. 조장들은 잠깐 모이자."

그러니 드디어.

몸집을 키울 때가 왔다.

* * *

관사 건물들 중 한 방.

그곳에 우리 길드의 조장급 인사들이 모였다.

나는 그들을 뒤로하고 슬쩍 창문 밖을 쳐다봤다.

"미친, 담배다."

"아! 담배는 일단 인당 한 갑씩만 가져가시랍니다!"

"한 갑이라도 어디야. 강제 금연하게 된 지 한 달이 넘었는데."

"난 담배 안 피우는데."

"어? 그럼 나한테 주면 안 되냐? 내가 나중에-."

가져온 물자들을 옮기고, 분배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확보한 식재료의 양도 상당해. 기본적인 수준이라지만 의약품도 챙겼고."

"대충 봐도 한동안은 놀고먹어도 되겠는데요?"

모여 있는 조장들의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말마따나.

괴물을 사냥해 얻었던 고기들도 남아 있는 상황.

아무것도 안 해도 당분간은 문제가 없을 정도의 식량이었으니까.

그러나.

"이럴 때야말로 여유를 부려선 안 돼."

여유가 생긴 것과는 별개로.

우리가 여유 부릴 상황은 아니잖냐.

내 말을 들은 서수혁 상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여유가 생겼을 뿐, 장기적인 문제는 여전하니 말입니다."

"응. 여유가 생긴 지금, 오히려 이때를 이용해서 힘을 키워야 한다고 본다."

"힘을 키운다는 말씀은?"

"그동안 미뤄 뒀던 일을 할 때가 온 거지."

내 말을 듣고 가장 큰 반응을 보인 것은, 다름 아닌 서수혁 상병이었다.

기대로 가득 찬, 반짝거리는 눈을 한 채 나를 바라보는 녀석.

"그, 그 말씀은 혹시."

"그래."

나 역시 그에 응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각성자를 늘린다."

"...아. 아아. 그 얘기셨군요."

그러자.

인상이 급격하게 찌푸려지는 서수혁 상병.

"응? 왜 그래."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니.

아닌 게 아닌 표정인데?

내 의문에 대답해 준 것은 전광일 상병이었다.

"큭큭. 수혁이 녀석. 탄약 확보 얘기가 아니라 실망한 겁니다."

"...조용히 해라."

"탄약 확보?"

"아, 정말 아닙니다. 그보단 각성자를 늘리는 쪽이 효율이 좋겠죠."

서수혁 상병은 사수들의 조장.

그리고 우리 부대 최초의 사수 각성자다.

하지만 지금 우리 부대는 탄약이 거의 고갈된 상태.

힘을 기른다는 얘기에, 당연히 총알을 보충하는 쪽을 생각했나 보다.

우리 부대의 화력 핵심을 차지하는 사수들.

그 대부분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이란 걸 생각하면 그쪽도 해결해야 할 문제는 맞다만.

당장은 이렇다 할 방법이 없으니까.

반면.

다른 이유로 안색이 어두워진 사람도 있었다.

"후우...."

이상아 조장이었다.

서수혁 상병의 경우와 달리.

이쪽이 이러는 이유는 알만했다.

"많이 걱정되나?"

"저를 믿고 따라와 줬던 사람들인걸요. 걱정이 안 될 리가 있나요."

각성자 늘리기.

누굴 영입한다는 건 당연히 아니고.

부대에 머무는 생존자들을 각성시키는 작업을 말한다.

그리고 그 대상이 되는 생존자들.

그들은 대부분 그녀의 그룹에 속해 있던 이들이니까.

이미 각성자였던 그녀와 범죄자 5인을 제외해도 20여 명.

이만한 인원을 각성시키지 않고 놀려 두고 있던 것 자체가 손해를 보고 있던 일이다.

"후우... 사고가 없으면 좋겠는데요."

각성하기 위해선 괴물의 숨통을 직접 끊어야만 한다.

상당한 위험을 동반하는 일.

실제로 박태준 병장 같은 경우에는 걷지 못하는 중상을 입기까지 했으니까.

그녀의 걱정도 이해는 갔다.

"걱정 마십쇼. 부대에서는 숱하게 했던 일입니다."

우려 섞인 표정의 이상아를 향해 전광일 상병이 말했다.

겁먹은 병사들을 닦달할 때와는 꽤 다른 태도.

"처음에는 부대원 중에서도 사고가 나기도 했습니다만, 그동안 우리 병사들도 괴물을 제압하는 노하우가 생겼으니까요. 위험한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런가요?"

"옙. 믿고 맡겨만 주십쇼. 뭣보다, 신 병장님이 하자고 하신 일 아닙니까."

어.

거기서 갑자기 내 이름이 왜 나오냐.

"이번에도 보셨죠? 완벽하게 의태한 괴물들.... 암만 봐도 평범해 보이는 냉장고인데 그걸 집어서 공격하라고 명령했을 때! 의심하지 않고 따르니까 웬 은색 슬라임이 딱!"

"그거야. 대단하긴 했죠."

"그 후에도 평범해 보이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집어서 괴물이라고 알려 주셨고 말입니다. 저희는 그냥 신 병장님이 공격하라는 부분으로 공격만 하면 되지 않았습니까?"

내 얘기를 하면서 자기 가슴을 쿵쿵 두드리는 녀석.

"이번에도 비슷할 겁니다. 신 병장님 시키는 대로만 하면 다 잘될 거라는 거죠."

듣는 내 입장에선 꽤 어이없는 논리였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확실히 그러네요!"

그거에 또 넘어가는 사람이 있다니.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하고 넘어가야 하나, 이건?

"광일아. 선임 이름 막 팔기 있냐."

"헤헤. 전 신 병장님만 믿습니다. 충성 충성."

"어휴. 말을 말자."

장난스럽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걱정이 많은 이상아를 위로해 주려고 한 말이었으니.

'사실 이런 게 이 녀석의 원래 성격인데 말이지.'

기본적으로 순하고 자상한 녀석.

그런 녀석이 광전사스러운 모습을 보일 때면....

솔직히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내가 이 순한 녀석에게 몹쓸 짓을 한 건 아닐까 하고.

'아니. 지금은 그런 생각하지 말자.'

그런 건 생존이 확실하게 확보된 뒤에나 해야 할 생각이니까.

우울해질 여유 따윈 없단 말이지.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각성자를 늘리는 일.'

조장 회의가 끝난 뒤.

이상아 조장과 함께 생존자들을 찾아갔다.

그들에게 각성에 대한 얘기를 전하자.

"드디어 우리 차례가 왔구나."

덤덤하게 중얼거리며 대답한 것은 박씨 할아버지였다.

"병사들이 함께할 테니까. 위험한 일은 없을 겁니다."

"알고 있다. 오히려 이날만을 기다려왔지."

"예?"

"아무런 힘 없이 보호받기만 하는 처지도 썩 편하진 않거든."

위험을 동반하는 작업.

꺼리는 반응이 대부분일 것이라 생각한 것과는 반대의 반응이었다.

"나이 먹고 은퇴했을 때도 느꼈다만. 할 일 없이 놀아 봐야 심심하기만 하더구나."

"그렇습니까?"

"이제야 뭐라도 일을 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맘이 편할 지경이다."

피식.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다니. 각성하고 나시면 지금이 좋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빡세게 굴려 드려야겠네요."

"...요즘 것들은 노인 공경이란 단어를 모르나?"

뭐.

박씨 할아버지와의 농담은 뒤로하고.

다른 생존자들은 그와는 달리 조금은 긴장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엄마아...."

"괜찮아. 엄마가 같이 있을 테니까. 아저씨들 말 잘 듣자?"

"누나... 괜찮을까?"

"마트에서 저 군인 분들이 얼마나 강한지 봤잖아?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거야. 게다가."

어린 아이와, 부모.

심지어 얼마 전에 부대에 합류한 남매까지.

그 중, 각성을 거부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이해하고 있는 거겠지.

"우리도 저 군인 분들 처럼 강해지려면.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이니까."

야생이나 다름없게 변한 세상.

이제는 자기 자신을 지킬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 * *

관사는 외곽 중에서도 외곽에 위치해 있는 건물.

주변도 사실상 깡촌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런 관사의 주변을.

"발견했습니다."

"드디어."

수십 명의 병사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몇 마리지?"

"운이 좋군요. 세 마리입니다."

"산에서 내려올 때 마주했던 괴물 중 하나입니다. 신 병장님이 알려 준 공략법도 유효할 것 같습니다."

"나쁘지 않네."

"그러면."

"그래. 저걸로 간다."

산개하며 논밭 근처를 돌아다니던 3마리의 괴물.

병사들이 그 근처를 포위하듯이 접근한다.

그리고.

크륵!?

공격!

카아아악.

숫자로도 이쪽이 우위.

사냥에 변수는 없었다.

"전투 종료!"

"소음을 듣고 접근 중인 몬스터는?"

"없는 것 같습니다."

"좋아 그러면."

슬쩍 병사들 사이를 본다

그러자.

병사들 사이에서 보호받던 사내가 나온다.

"제 차례군요."

"어렵진 않을 거다."

사내는 나보다 연상의 남자였지만.

이제는 부대의 후임이 될 터.

조금 어색하지만, 말을 놓기로 했다.

그를 향해 다른 병사들이 입을 열었다.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십쇼."

"만약 문제가 생기면 우리가 바로 달려들 테니. 침착하게 물러나시면 됩니다."

"예."

병사들이 그에게 대검이 꽂힌 총을 건넸다.

총검을 쥔 그가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긴장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만 사실...."

"예?"

괴물을 향해 칼날을 향하며 말하는 그.

"신기할 정도로 침착한 상태입니다. 걱정 마시죠."

[침착한 감정의-.]

푸욱.

"세상에."

그 사냥 과정을 지켜보던 이상아 조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이런 식으로 각성할 수 있다니, 상상도 못 했는데."

"음? 이게 그렇게 신기한 방법인가?"

"생존자 그룹을 이끌던 시절엔 각성법을 모르기도 했지만... 알게 된 지금 봐도 그래요."

괴물과의 교전 자체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

심지어 그 괴물을 산 채로 제압한다니.

엄청난 리스크를 동반하는 행위다.

그렇기에 생존자들은 괴물을 피해 숨어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생존자 사이에 각성자 숫자가 적은 것은 그런 생존 방식의 탓도 크겠지.

"이렇게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괴물을 사냥한다는 일 자체가 신기하다기보단 말도 안 되잖아요."

하지만 우린 그와는 정반대.

오히려 적극적으로 괴물을 찾아다니고 있으니.

"각성자가 100명이 넘으니까 이런 짓도 가능한 거지."

그룹에 각성자가 둘이면 많다고 하는 생존자와 달리.

100명이 넘는 각성자를 보유한 우리라서 가능한 일.

사실 좀 무식하다 할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무식할지언정 효과적이라는 게 포인트지.'

각성은 굉장히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빙결 마법사, 라는데요?"

"언니도 마법사야? 나는 화염 마법사래."

박씨 할아버지와 같은 방을 사용했던 자매.

두 사람은 쌍으로 마법사로 각성했다.

그 모습을 본 마법사조 병사가 중얼거렸다.

"그러면 마법사조도 후임이 생기는 겁니까? 드디어 저도 막내 탈출-."

"당장은 그렇겠지. 근데 알지? 기수도 기수지만 이제부터는 실력 위주로 가게 된다는 거."

"...따라잡히지나 않게 조심해야겠군요."

그리고 방금 말이 나왔던 인물.

박씨 할아버지는.

"대장장이, 라는군."

"대장장이요?"

"이 나이에 초보 대장장이라는 직업을 달게 되다니. 클클."

내 칼을 갈아 줄 때도 뭐 하는 분인가 싶긴 했다만.

설마 대장장이 같은 직업을 얻게 될 줄이야.

아무래도 원래 그쪽 일을 하셨던 사람인 건가.

'생산직이 늘어난 건 호재다.'

전투직과 달리 생산직은 큰 단체일수록 힘을 발휘한다.

우리 길드에서도 톡톡히 활약할 수 있겠지.

그렇게 각성이 순조롭게 진행되던 중.

"어? 신 병장님."

"무슨 일이야?"

"잠깐 와 주십쇼."

주변을 정찰하던 병사 한 명이 무언가를 발견한 듯.

뒤에 있던 나를 불렀다.

그를 향해 몇 발자국 걸어가자.

멀리서부터 어떤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카앙....

쾅....

병장기들이 부딪히는 듯한 소리.

그리고.

-크아악!

-형님!

사람들의 목소리까지.

낯선 상황이기는 하다만.

이 상황을 이해하는 것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생존자들인가."

가까이 가자, 그 모습도 보이기 시작했다.

괴물과 교전 중인 생존자 그룹.

그룹에서 떨어져나와 둘만 남았던 수혁 수연 남매와 달리 나름대로 규모가 있어 보인다만.

"아. 저 괴물은 저렇게 상대하면 안 되는데."

"약점을 전혀 모르는 것 같습니다."

"흠."

괴물을 상대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우리야 상대할 만한 괴물이라고 해도, 각성자가 많아야 한둘인 생존자들에게는 엄청난 위협일 테니.

"어떻게 할까요."

병사들이 나를 보며 물어왔다.

"구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저렇게 소리를 내면서 싸우고 있잖습니까. 전투에 개입했다가 소리를 듣고 온 다른 괴물들까지 몰려오면...."

병사들의 의견도 반으로 나뉘는 느낌이었다.

일단은 구하고 보자는 의견과, 위험하니 지나쳐야 한다는 의견.

예전이었다면 전자의 의견이 대부분이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이 단체의 생존을 우선시하다 보니.

후자 쪽이 미세하게 많은 느낌.

하지만.

"어차피 각성하려면 괴물을 사냥해야 하잖냐."

각성 과정은 거의 다 마무리되어 가는 상황.

각성을 마치지 못한 생존자도 이제 몇 명 남지 않았다.

가급적 빠르게 마무리하고 싶은 작업.

마침 저쪽에서 생존자를 습격 중인 괴물은 숫자도 적어 보인단 말이지.

최고의 사냥감.

굳이 놓칠 필요는 없겠지.

"다들. 무기 들자."

"예! 병장님이 무기 들라신다!"

"충성 충성!"

명령을 내리자.

지나치자는 의견을 내던 병사들도 군말 없이 무기를 꺼내 들었다.

-제기랄, 다들 도망쳐! 3번 포인트에서 다시 만나는 거다!

-도망치라니, 이런 장소에서 어떻게 도망을...!

-내가 시간을 끌 테니 어떻게든-.

-자, 잠깐만요!

"2, 3번 분대는 오른쪽 녀석을 맡아라! 명심해, 숨통은 끊지 마!"

"예!"

"나머지는 나랑 같이 왼쪽 녀석을 맡는다!"

병사 중 일부가 반대쪽으로 향하고.

나는 가까이 있는 괴물을 바라보았다.

코끼리를 닮은 거대한 괴수.

그 이빨은 날카롭고 근육질의 육체는 덩치에 비해 민첩했다.

하지만.

[특성 - '요리사의 눈'이 발동합니다.]

[이미 조리법을 깨달은 대상입니다.]

녀석은.

이미 사냥해 본 적이 있단 말이지.

나는 녀석을 향해 몸을 내던졌다.

그리고 녀석의 약점을 향해 식칼을 찔러 넣었다.

푸욱-

이 녀석의 약점은 저 코.

그곳에 내장이 몰려있다 보니.

칼침 한 방이면 전투 불가 수준의 치명타가 된다.

구워어어어어-.

전투 능력이 대단하지 않은 나라도 상대할 만한 적이라는 뜻.

쿠웅.

"오오. 신 병장님."

"나이스샷이였슴다."

"니들은 요리사한테 싸움 맡기고 지켜보고 있기냐?"

"에이, 방금 그거 보면 아무도 요리사라고 생각 안 할걸요."

저 녀석은 약점이 확실한 괴물이었다.

약점을 모른다면 꽤 난적이겠지만, 안다면 오히려 간단한 부류.

내가 아니라도 여기 있는 부대원들이라면 누구라도 쉽게 처치할 수 있었겠지.

그걸 알기에 다른 부대원들은 가벼운 분위기였으나.

"뭐, 뭐야"

"저 거대한 괴물이 일격에...?"

그 약점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사뭇 대단한 일처럼 보인 것 같다.

괴물과 전투를 치르던 생존자들이 경악하며 이쪽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음.

각성을 위해 한 일이기는 하지만.

"다들 괜찮으십니까? 걱정 마십쇼. 이 녀석은 확실히 제압했으니-."

그래도 생존자들을 도운 것도 사실.

고맙다는 칭찬 한마디 정도는 듣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히끅."

"구, 군복이다."

...뭔가.

"제기랄."

"여우를 피했다고 생각했더니. 호랑이를 만나냐."

"쉿! 다들 조용히 해. 괜히 도발하지 말고."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반응.

이건 고마워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우릴 두려워하고 있는 건가.'

인상이 찡그려질 수밖에 없었다.

이쪽의 각성을 빠르게 마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지만.

그래도 도와준 것은 도와준 것.

그런데도 이 반응이라니.

'예의가 아니지 않나?'

그때였다.

"아, 아저씨."

"비켜 보거라. 내가 얘기를 해 볼 테니."

생존자 그룹 한가운데서 한 중년 남성이 나왔다.

들리는 대화에 의하면 아마도 이 그룹의 리더 격인 게 아닐까.

앞으로 나온 그를 향해 내가 말을 꺼내려던 찰나.

사내 쪽이 먼저 긴장이 역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타, 탈영병들이 우리한테는 무슨 볼일이오!"

경계심이 가득 담긴 말.

그런데.

신경 쓰이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우리는 탈영병들에게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소. 그러니 그냥 돌아가시오!"

탈영병이라니?

44화 탈영병 (2)

"타, 탈영병들이 우리한테는 무슨 볼일이오!"

탈영병이라니.

나는 불만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목숨을 구해 준 상대한테 하는 첫 말이 그겁니까?"

"...아. 크흠."

그제서야 우리가 자신들을 구해 준 것을 깨달은 건지.

헛기침하는 중년 사내.

"예, 예의가 아니었군그래. 내 사과하겠소. 실수한 것뿐이니 오해하진 않아 줬으면 좋겠구려."

"오해라."

내 쪽에서 오해할 만한 게 있었나? 싶다.

오히려 저쪽이 뭔가를 제대로 오해하고 있다면 모를까.

그런 생각에 중얼거린 말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일까.

"...목숨을 구해 준 건 정말로 고맙소! 감사를 표하지. 하지만... 아까 한 말은 정말 거짓말이 아니오. 우리는 당신들한테 내줄 것이 아무것도-."

"아니, 오해는 그쪽이 하고 계신 것 같은데."

내줄 것이 없다니.

'애초에 뭘 받을 생각도 없었어요. 이 양반아.'

그렇게 설명을 하려고 했으나.

"우리는-."

"제발, 한 번만 그냥 보내 주시오...."

"...."

이 아저씨.

분명 대화를 하겠다고 나왔던 것 같은데.

전혀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고 느끼는 건 나뿐인 걸까.

난 한숨을 내쉰 뒤 큰소리로 외쳤다.

"저희는!"

"히, 히익!"

"...탈영병이 아닙니다."

갑갑해서 살짝 목소리를 올리자 위축되는 사내.

조금 미안한 감정도 들지만.

이러지 않으면 계속 대화가 진행되지 않을 것 같단 말이지.

지금은 막사를 떠난 상태긴 하지만.

막사에 남아 있는 부대원들과도 연락 중이고, 명목상의 부대 지휘관인 김 중위와도 함께하고 있다.

군부대로서의 규율 역시 남아 있는 상태.

탈영병이라고 부르는 건 좀 억울하지.

"그. 탈영병이라는 단어가 불쾌했다면 사과하겠소. 그러면 뭐라고 불러야 할지. 어르신들?"

"아니, 단어가 불쾌하고 뭐고가 아니라. 진짜로 탈영한 게 아니라니까."

도무지 대화가 진전이 안 되네.

그때.

"그 병사가 하는 말은 모두 사실이니. 한 번만 믿어주시죠."

부대원들 사이에서 한 남자가 나오며 말했다.

김 중위.

423대대의 현 최고 지휘관이었다.

"당신은...?"

"안녕하십니까. 김현석 중위라고 합니다."

"뭐, 뭐라고?"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군복에 붙은 계급장을 내보이며 말을 잇는 김 중위.

"대한민국 육군 지상작전사령부 소속 제12 군단 예하 직할부대. 423방공대대 소속 중위. 김현석이라고 합니다."

"중위? 설마. 간부란 말이오?"

"예. 본래는 직책은 중대장이었습니다만, 지금은 명목상이나마 대대장 대리를 맡고 있습니다."

부대원들의 평가야 폐급 간부였다지만.

김 중위는, 겉으로 봤을 때는 정훈교육용 자료 영상에 나와도 될 법한 인물.

참군인의 표본같은 외모를 가졌다.

일단은 일개 병사가 아닌 간부에 해당하는 중위라는 직위도 그렇고.

부대에서야 무시당하던 양반이지만, 말빨이나 정치력은 또 수준급.

이런저런 요소들이 맞물리자.

"저, 정말 정규군이란 말인가."

"세상에."

"진짜 군인이었어? 탈영병이 아니라?"

그제서야 우리가 탈영병이 아니란 걸 믿게 된 듯.

생경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생존자들.

'...내가 대화할 때랑은 꽤 다른 흐름이구만.'

그러고 보니.

수연, 수혁 남매에게 말을 걸었을 때도 나를 영 무서워했지.

정작 이상아 조장과는 꽤 빨리 친해졌고.

김 중위의 인상이 좋은 것도 있기야 하겠지만.

이거 설마.

'내 첫인상이 별로인건가?'

그러고 보니 가끔 인상이 날카로운 편이라는 얘기를 듣긴 했다.

섬세한 마음에 약간의 상처를 받아, 가만히 서 있자니.

김 중위가 슬쩍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끄덕.

나와 눈이 마주치자 슬쩍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

'여긴 나한테 맡겨 줘라, 영준아.'

뭐 그런 뜻 아닐까.

'생각해 보니. 김 중위를 포섭한 것에는 그런 목적도 있긴 했지.'

지휘관이라는 그의 직책을 생각해 보면.

각성시키면 괜찮은 직업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가장 우선이기는 했다만.

되새겨 보니.

저렇게 유사시에 부대의 대표로서 나설 수 있다는 점 역시, 김 중위를 살려 둔 주목적 중 하나였다.

나 역시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믿고 맡길 테니.

어디 한번 마음대로 해 보시라고.

"오히려 의문이로군요."

내 허가가 떨어지자.

김 중위는 곧바로 사내와 대화에 들어갔다.

"왜 저희를 탈영병이라고 생각하신 건지."

"응?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거요?"

"예. 오히려 생존자분들이라면 군인들을 발견하면 보호를 요청할 줄 알았습니다만."

"아아. 하긴. 보통같은 상황이라면 그런 반응이 정상적이였겠군."

"지금은 보통같은 상황이 아니라는 얘기로 들리는군요. 이유를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으음. 어려울 건 없소만."

김 중위의 질문은 나 역시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군복을 입고 있으니 군인이라 생각하는 건 자연스럽겠지만.

'다짜고짜 탈영병이라니. 너무 갔잖아.'

중위의 질문에 사내가 입을 열었다.

"알다시피 세상이 이 꼴이 나고 많은 사람이 죽었소."

"그렇죠. 안타까운 일입니다."

"동의하오. 하지만 죽은 이들은 죽은 이들이고, 우리처럼 어떻게든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었지. 그리고 그렇게 살아남은 이들은 한 가지 의문을 품게 됐다오."

우리가 입은 군복을 바라보며 말하는 그.

"군인은 대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느냐, 하는 의문을."

"...."

당연한 일이다.

세상에 괴물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학살하고 다니는 상황.

국민들을 지켜야 할 군인들이 활동해 마땅한 사태.

나는 슬쩍 이상아 조장 쪽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어깨를 으쓱하는 그녀.

당장 그녀부터가 저런 의문을 품었던 이들 중 하나.

그룹을 이끌고 군부대를 찾아 이동하기로 결정했던 케이스였으니까.

"그리고 알게 됐지."

그러나.

아무래도 그녀와 같은 사례는 드물었던 모양이다.

"모든 군부대는 전멸했다는 걸 말요."

"...지금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군부대는 전멸했소. 적어도 이 일대의 군부대는 모두."

대화를 나누고 있던 김 중위는 물론.

뒤로 물러나 그 얘기를 듣고 있던 부대원 전원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전멸이라니.

"그게 정말입니까?"

"아니. 정말 모르는 거요?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요."

"일단은 전자입니다. 계속하시죠."

너희들이 당사자면서 왜 모르냐는 태도.

하지만 정말 처음 듣는 얘기인 우리로서는 다음 얘기를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크흠. 어떻게든 이 환경에 적응한 뒤. 몇몇 사람들은 알고 있는 군부대를 찾아갔소. 뭐, 강원도에는 넘쳐나는 게 군부대 아니오? 다들 알고 있는 부대가 한둘씩은 있었고, 찾아가는 데도 성공했지."

여기까진 이해가 간다.

이상아의 그룹 역시 그중 하나였으니.

그런데.

"하지만 그들이 발견한 것은 저항 중인 군인들이 아니었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잇는 사내.

"군인들은 전멸하고. 괴물들에게 점거당한 부대들뿐이었지."

"...그게 무슨."

"이유는 모르겠소만, 군부대에는 특히나 강력한 괴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하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닌 수십, 수백 마리가."

소름이 돋는다는 듯 양팔을 비비는 사내.

"우리 그룹 역시 한 부대를 찾아갔었소. 한 마리 한 마리가 그동안 본 괴물들보다 강력해 보이는 괴물들. 그런 괴물들이 수백 마리씩 몰려 있는 풍경이란...."

"...."

"군인들이 우리처럼 불시에 습격을 당했다고 한다면 이겨 내지 못한 것도 이해가 갈 수밖에 없을 정도였소."

모든 군부대의 전멸.

그 얘기만 들었을 때는 무슨 소린가 싶었지만.

방금 한 말에는 짐작 가는 부분이 있었다.

나만 그런 것도 아니었는지.

옆에서 얘기를 듣고 있던 병사 중 한 명이 찡그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리자드들."

어째서인지.

우리 부대를 집중적으로 공격해 왔던 괴물들.

멸망의 날.

녀석들의 습격이 시작되고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부대원들의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

생각해 보면.

리자드는 상당히 강력한 괴물이었다.

산맥의 부대 근처에는 리자드 외의 다른 괴물들이 존재하지 않았단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

그 일대는 녀석들이 지배하고 있던 것일 테니.

실제로.

지상에 내려와서 만난 괴물들 중, 리자드보다 강하다 싶은 괴물은 극히 드물었다.

그나마 철물 창고를 지키고 있던 '맥' 정도일까.

'약점을 파악하고. 각성자를 늘려가며 싸운 덕에 겨우 살아남은거지.'

약점을 모르는 상태였다면.

아니, 안다고 해도 각성자를 늘리는 방법을 빨리 깨닫지 못했다면?

한 마리를 상대하는데 수십 발의 총알이 필요한 괴물.

며칠 안 가서 탄약이 고갈되고, 부대는 전멸했겠지.

"영준이가 아니었다면, 우리 역시 '전멸한 군부대'에 포함됐겠군."

민재 형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병사들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하긴, 맨몸으로 리자드를 사냥해서 각성법을 깨달은 것도...."

"리자드의 약점을 파악한 것도 신 병장님이었죠. 리자드들의 단단한 비늘을 생각하면, 각성자들도 리자드의 방어력을 뚫지 못했을걸요. 사실 약점 부위를 제외하면 지상에서 만난 어떤 괴물들보다도 위협적인 녀석들이었으니."

"거기에다 생각해 봐. 신 병장님 요리가 없었다면 우리도 치프틴이 쳐들어온 날 전멸했을 거다."

"지금 생각하니 우리가 도마뱀들의 한 끼 식사가 되지 않은 게 기적이었군요. 신 병장님이 없었다고 생각하면, 으으."

크흠.

틀린 말은 없긴 한데 그래도 뭔가 민망하네.

"왜 군부대에만 그런 강력한 괴물들이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소. 듣기로는 규모가 큰 부대일수록 더 강력한 괴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 같은데.... 덕분에 최근 생존자들은 군부대가 있는 곳은 접근조차 안 하는 게 기본이지."

우리도 여러 가지 요소들이 겹치면서 겨우겨우 살아남은 거다.

다른 모든 군부대가 우리와 비슷한 상황이었다면.

우리처럼 운 좋게 여러 요소들이 갖춰진 게 아니고서야.

살아남기는 힘들었겠지.

"군부대 전멸은 그러려니 할 수 있었소. 사실 괴물들이 나타났는데도 조용했던 시점에서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니까."

"그 말씀은."

"진짜 문제는 다른 부분이오."

말을 끊은 그가 다시금 불안한 눈빛으로 우리 부대원들을 훑었다.

"탈영병들이지."

우리를 탈영병이라 생각한 이유는 여기서부터였다.

"솔직히 아직도 당신들을 믿기 힘들 지경이오만."

"저희가 공격할 생각이 있었다면 진작에 하지 않았겠습니까? 계속 말씀하시죠."

"크흠, 딱히 틀린 말도 아니군. 군부대들이 괴물의 공격에 전멸하는 와중에 어떻게든 부대를 버리고 도망치는 데 성공한 병사들이 있었소. 군인이었으니, 당연히 총 같은 강력한 무기도 쥐고 있었지. 그 총을 좋은 곳에 썼으면 좋았겠소만."

"아니었나 보군요."

"아쉽게도. 괴물이나 좀비가 아닌 인간을 향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소."

괴물의 습격에서 어떻게든 도망쳐 나온 군인들.

군부대로서의 규율이 허울이나마 남아 있는 우리와는 달리.

부대를 버리고 도망친 그들에게는 거리낄 것 따위는 아무것도 없을 터.

그런 와중에 손에는 총이 들려 있다면?

살아남기 위해 할 일이야 정해져 있는 것 아니겠는가.

약탈.

사내는 고개를 절레절레 휘저으며 말을 이었다.

"총을 든 탈영병들에게 물건들을 약탈당한 생존자들이 한둘이 아니오. 아니, 차라리 물건만 약탈당하면 그나마 양반이지. 가끔은 사람까지 데리고 가서는...."

"...."

"사실은 이 근처에서도 탈영병이 목격됐다는 소문이 있었소. 우리도 가급적 돌아가려고 했지만. 다른 길목은 좀비 무리가 막고 있는 탓에 어쩔 수 없이 이 근처를 지나게 됐지."

그 와중에 우리와 마주쳤으니.

"군복만 보고 십중팔구 그 탈영병들일 거라고 생각했소. 미안하오."

"아뇨, 충분히 이해합니다."

사내의 설명이 끝난 뒤.

김 중위가 은근한 말투로 말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희는 탈영병이 아닙니다. 그리고...."

물자에는 여유가 생겼다.

생존자들을 각성자로 만드는 작업도 진행 중.

이야기를 들어 보면 이들은 큰 문제는 없는 그룹 같기도 하니.

"저희는, 같이 싸울 수 있는 전력을 찾고 있습니다."

힘이 될 수 있는 이들이라면.

지금 상황이라면 수용할 만하다고.

김 중위는 그렇게 판단한 것 같았다.

"같이 싸운다니, 보호해 주는 게 아니오?"

"본래라면 그래야겠지만, 저희도 타 부대와의 연결이 끊긴 뒤에는 여유가 없어서요. 전시의 민간인 모병 정도가 되겠군요."

"모병이라...."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저희와 합류하신다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은 확실히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각성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지만.

"총기라도 보급해 준다는 말인가."

"비슷합니다."

저쪽은 총으로 이해하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이겠지.

뭐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겠지.

제안을 들은 사내는 잠깐 고민에 빠진 듯했다.

한참을 생각하던 그가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일단은 묻고 싶소만. 모병이라고 한다면, 우리에게 선택권은 있는 거요?"

"당연하죠. 강제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미안하지만 답은 거절이오."

약간은 의외였지만.

이어지는 그의 말을 들으니 이해가 갔다.

"당신들이 탈영병은 아닐 수도 있겠지. 그렇다고 해도 처음 보는 집단인 건 다름이 없소. 그런 이들에게 갑자기 몸을 맡기는 건 너무 큰 도박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여러분께 위해를 끼칠 생각은 없습니다만."

"이해해 주시오. 우리로서는 당신들을 신뢰하긴 어렵소. 탈영병이 아닐 확률도 100%가 아닌 판국이고.... 솔직히 그 탈영병들 탓인지, 군인들에 대한 인식 자체가 그렇게 좋지 못하거든. 우리는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소."

"그러시군요."

더 이상 설득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김 중위.

이런 세상에서 살아남아 온 이들이다.

그들만의 생존 법칙이 정립되어 있어도 이상하진 않은 일.

그 규칙으로 결정한 일을 설득으로 되돌리기는 힘들겠지.

"미안하오. 혹시라도 이 일로 앙심을 품지는 않았으면 좋겠소만."

"설마요. 선택은 본인들의 자유니까요. 이런 일을 문제 삼을 생각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죠."

"그건 다행이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내.

혹시라도 우리가 앙심을 품지는 않을까 진지하게 걱정했던 모양.

"그러면. 혹시 앞으로는 어떻게 행동하실 예정이신지요."

"아? 그걸 말 안 했던가?"

민감한 질문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만.

그는 말해 주기 어렵지 않다는 듯 가볍게 입을 열었다.

"사실, 우리가 탈영병들의 목격 정보가 있는 이쪽으로 굳이 발길을 옮긴 이유가 있다오."

"예? 무슨 이유길래."

"이쪽에 엄청난 양의 물자를 확보한 그룹이 있다는 소문이 있거든."

소문?

"웬 생존자 그룹이 어디 정부의 비밀 벙커 같은 거라도 털었는지, 식량도 많고 무기도 풍족하다더군. 대신에 사람이 적은 게 문제라는 것 같소. 괴물들을 피해 숨어 지내는 일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그 무기와 식량을 나눠 주는 대신 함께할 생존자들을 찾고 있다는 소문이오."

식량도 많고 무기도 많고.

그걸 그냥 나눠 준다고?

좋다 못해 혀가 녹아 버릴 정도로 달달한 조건인데.

"의심스러울 정도로 좋은 조건 같습니다만... 그 소문은 믿을 만한 겁니까?"

"글쎄. 사실 100% 믿을 만한 정보란 게 지금 세상에 어디 있겠소? 어쩌면 당신들하고 합류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말했다시피, 군인들보다는 동료를 찾는 생존자들 쪽이 조금 더 신용이 간다오. 이 소문은 생존자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한 얘기기도 하고."

"...알겠습니다."

"미안하오. 목숨을 구해 준 일은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 은혜는 꼭 갚으리다."

결국.

지상에서 처음으로 조우한 규모 있는 생존자 그룹과의 대화는 여기서 끝났다.

"살펴 가십시오. 가시려는 목적도 잘 이루시길 빌겠습니다."

"당신들도. 잘 살아남기를 빌겠소."

떠나가는 길에도 흘깃흘깃 뒤를 돌아보는 사람들.

우리가 변심해서 공격해 오지 않을까 걱정하는 거겠지.

생존을 위해서라면 저런 경계심은 필요할 테니.

생존자들이 떠나간 뒤.

"영준아, 어땠냐."

"잘하셨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상황이 있으면 김 중위님이 나서 주시는 게 좋겠네요."

"하하, 바지사장 역할은 자신 있으니 얼마든지 맡겨다오. 대신, 그. 뭐라고 해야 하나."

생존자들과 대화할 때와 달리 영 우물쭈물하는 김 중위.

뭘 말하려는지는 알 것 같았다.

"...앞으로 3일간은 김 중위님 식사만 한 끼 더 해 드리겠습니다."

"3, 3일씩이나? 고맙다! 정말 고마워!"

김 중위가 내게 복종하는 이유는 [행복한 감정]의 요리 때문이다.

정확히는 내 요리가 주는 행복한 감정에 중독이 되었다고 해야 하나.

이번에는 일을 잘했으니 포상을 줘도 되겠지.

"그나저나."

"생각보다 심각할 수 있겠는걸요."

병사들의 표정은 영 좋지 않았다.

생존자들의 각성 작업은 마무리되어 가고 있는 참이다.

늦어도 이틀 내로 끝나겠지.

'하지만. 우리가 지상에 내려온 목적은 세력을 키우기 위함이 크다.'

지상에는 더 많은 생존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을 수용하고, 각성자로 만들려는게 당초의 계획이었으나.

'밖에는 이미 규모가 큰 생존자들도 많을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진 않았지.'

의외로, 대부분의 생존자들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괴물들이 너무 강하니까.'

규모를 키우려면 각성자가 늘어나야한다.

평범한 생존자들은 생존에 큰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하지만, 각성자를 마냥 늘리기에는 괴물들이 너무 강했다.

좀비를 통해 각성할 수 있다고는 하나, 그 확률은 랜덤인 듯.

좀비를 잡고 각성한 이들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자연히 생존자들도 소규모로 활동할 수 밖에 없게 된 것.

'그 적은 규모의 생존자들을 어떻게든 수용해서 덩치를 키워야 한다. 이건데.'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이 부분은 걱정이 없었다.

생존자들을 설득할 때는 군인이라는 이미지가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

그런데.

"그 소중한 이미지를, 팍팍 까먹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 그거지?"

정작 우리가 흡수해야 할 생존자들은 오히려 다른 소문에 이끌려 그쪽으로 몰리고 있다는 듯.

세력 확장이 목적인 우리에게 있어서 이건 꽤 큰 문제다.

"영준아, 이 문제는 가급적 빨리 해결해야 할 것 같다."

"이민재 병장님 말씀대로입니다. 군인들에 대한 인식이 시시각각 나빠지고 있다니. 우리한테도 좋을 게 없지 않겠습니까."

"나도 알긴 아는데."

문제는.

"그 탈영병 녀석들이 어디 있는지를 알아야 해결을 하든 말든 하지 않겠냐."

당장 어떻게 해결하기는 어렵겠지.

하지만 문제 자체는 확실히 파악했다.

녀석들의 위치를 파악하는 대로.

최대한 빠르게 해결해야겠지.

* * *

그런데.

"어이! 거기 아저씨들!"

"...?"

"사람도 많아 보이는데, 가진 거 있으면 다 내놓고 가쇼."

그 순간이.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45화 탈영병 (3)

강원도 한구석에 세워져 있는 낡은 건물.

정상적이었던 시절의 흔적은 거의 사라진 건물의 한 방에서.

한 남자가 총기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기름 묻은 천으로 총기를 손질하는 남자.

그때.

남자가 있는 방에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 왔다."

"진영이 왔냐."

둘은 친근한 사이인 듯.

서로를 보고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조금 특별한 점이 있다면....

둘 다 군복을 입고 있다는 점 정도일까.

"장사는 어때, 잘됐냐?"

"오늘도 공쳤다."

"...쯧."

"슬슬 이 근처에서 활동하긴 힘들겠어."

방에 들어온 남자.

진영은 총기를 구석에 세워 두고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소문이 난 것 같아."

"무슨 소문?"

"뭐긴? 여기 탈영병들이 있다는 소문이지."

"...야. 우리 입으로 우리를 탈영병이라 해야겠냐."

"틀린 말도 아닌데 무슨. 그런 게 신경 쓰일 거면 애초에 튀질 말았어야지."

"큼."

총기를 내려놓은 진영은 낡은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대규모 생존자 그룹이 생긴다는 소문만 듣고 그쪽으로 가는 길목인 이쪽에 자리 잡은 건 좋았는데. 우리에 대한 소문이 돌 수도 있다는 걸 간과했어."

"괴물이랑 좀비 때문에 돌아다니기도 힘든데 무슨 소문이 이렇게 빨리 도는 거야?"

"어쨌든 일이 개같이 돼 버렸어. 제기랄. 얼마 전에 노예 녀석도 죽어 버려서. 다음에 만나는 생존자 중 한 명 끌고 오려 했더니."

"그러니까 굳이 죽이진 말자고 내가...."

"아! 갑자기 생존자들 발길이 뚝 끊길지 내가 알았냐고."

진영의 고함에.

둘 사이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

잠시 뒤.

총기를 손질하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야."

"아, 노예 죽인 건 내가 미안하다고 저번에도 사과했잖아."

"그거 말고 인마."

"엉?"

지친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남자.

"소문이 나서 근처에 오는 사람도 없다고 했지?"

"어. 아주 개같은 상황이지."

"그러면... 슬슬 이 짓 그만두는 건 어때."

"뭐?"

동료의 말.

진영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으나.

"언제까지 이렇게 약탈이나 하고 지낼 순 없잖아. 우리는 총도 있겠다. 어디 사람 없는 산 같은데 틀어박혀서 적당한 땅만 차지하고, 농사짓고... 그러면 먹고 살 수는 있지 않겠냐."

아무래도 잘못 들은 게 아닌 듯.

진영은 잠깐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잠시 뒤.

헛웃음을 내뱉은 진영이 말했다.

"야. 너 미쳤냐?"

"뭐가."

"하... 이 대가리에 꽃밭 핀 새끼."

짜증나는 듯 머리를 헤집는 진영.

"총? 좋지. 덕분에 우리가 먹고살고 있는 거니까. 근데, 너도 알잖냐. 총소리가 얼마나 큰지."

"...."

"산에서 농사나 짓자고? 그러다가 괴물이 찾아오면?"

"어지간한 괴물은 총으로 처리하면-."

"한 마리는 총으로 잡는다고 치자. 그 총소리 듣고 몰려오는 괴물들은 어쩌려고?"

"그건."

"설마 벌써 잊은 거냐? 부대에 몰려왔던 그 괴물들."

진영은 자기 입으로 꺼낸 말임에도.

자신의 피부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불과 한두 달 전의 이야기.

멀쩡하던 그들의 부대에, 갑작스럽게 침공해 온 괴물들.

갑작스러운 습격에 부대원들 대다수가 사망했다.

생존자들은 무기를 들고 저항했지만.

'쥐뿔도 안 먹혔지.'

외부와의 연결도 끊겼다.

그대로라면 전멸할 게 뻔했을 상황.

부대원들이 갈피를 못 잡고 건물에서 농성을 시도할 때.

진영을 비롯한 몇몇 병사들은....

다른 생각을 품었다.

총알을 최대한 확보한 뒤.

차량을 훔쳐 괴물들의 포위망을 뚫고 도망쳐 나온 것.

'솔직히 뒈질 뻔했지만.... 운이 좋았어. 거기 있어도 죽는 건 똑같았을 테니까.'

진영과 함께 탈출을 감행했던 동료 중 생존자는 반도 되지 않았으니까.

그들이 탈출함으로써 진영과 동료들이 경비하던 방향의 수비는 완전히 뚫려 버렸겠지.

어차피 얼마 안 가 전멸했을 부대였겠지만.

아마도 그 속도를 꽤 앞당기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영은 생각했다.

'뭐 어쩌라고? 내가 아니었어도 누군가는 도망치려 했을 텐데.'

그럴 바에야 자신이 먼저 도망친 게 무슨 잘못이겠는가.

이미 다른 부대원들의 뒤통수를 치고 나온 상황.

그들은 더 이상 거리낄 게 없었다.

"그때처럼 괴물들이 몰려들면 답도 없어. 농사 같이 눈에 띄는 짓은 자살행위라고. 그에 비해...."

씨익 웃으면서 말하는 진영.

"인간을 상대로 하는 건 얼마나 편하냐?"

총을 쏘면 소음으로 인해 괴물들이 몰려온다.

하지만.

"인간을 상대로는 쏠 필요도 없으니까."

총을 보여 줘도 상관없이 덤벼들 좀비, 괴물 등과는 다르다.

총.

21세기에서 가장 대표적인 힘의 상징.

그 위력은 인간들의 뇌리에 이미 단단하게 각인되어 있는바.

총구를 들이밀고 협박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알아서 고개를 조아리고 물건들을 내뱉는 생존자들.

최근 인간들 사이에 나타나기 시작한 초능력자들이 있어도 마찬가지다.

초능력자고 뭐고.

몸에 구멍 나면 죽는 건 똑같으니까.

"적어도 이 상황이 해결될 때까지 버틸 만한 물자는 확보해야 해. 그전에는 뒈져도 이 짓 못 그만둔다. 맘에 안 들면 분위기 흐리지 말고 너만 따로 나가, 이 새끼야."

"...아니."

으르렁대며 말하자.

총기를 닦고 있던 남자가 대답했다.

"내가 잘못 생각했네. 이미 부대원들도 우리가 죽인 거나 다름없는데, 이제 와서 양심 같은 걸 챙길 이유는 없지."

"잘 생각했어, 인마. 하. 이 새끼 갑자기 뭐 잘못 먹은 건가 했네."

"아, 말 한 번 잘못했다고 겁나 쏘아 대네."

"내가 미안했다. 됐냐?"

진영의 설득으로 인해 나름대로 잘 마무리된 대화였으나.

정작 당사자인 진영은 다르게 생각했다.

'이 새끼, 아직도 좀 흔들리고 있는 것 같은데.'

동료 중 한 명이 혼자 양심에 찔려서 떠난다던가.

그런 건 상관없다.

문제는 총과 총알.

그 일부라도 가지고 간다면 큰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이들의 목숨줄이나 다름없는 물건들이니까.

진영은 잠시 고민한 뒤 결정을 내렸다.

'혹시라도 도망갈 위험이 있는 녀석이니, 그전에 적당히 죽여 버리는 게 낫겠어.'

평상시에도 흔들리는 모습을 가끔 보인 동료다.

그 점을 빌미로 몰아간 뒤 죽인다면.

다른 동료들도 어느 정도 이해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야. 한창 대화하는 중에 미안한데."

건물의 발코니에서 망을 보던 동료가 말했다.

"저기. 누군가 오고 있다."

"뭐?"

바로 조금 전에 소문이 난 것 같다는 얘기를 하던 참이었다.

그런데도 이 근처를 찾아오는 생존자가 있다니.

"소문을 못 들은 녀석들인가?"

"다른 지역에서 막 이쪽으로 온 놈들일지도."

그러나.

"큭큭.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

안 그래도 최근에는 장사가 영 안 되던 참이다.

오히려 잘된 일 아니겠는가.

"이번에는 노예로 쓸 만한 인간도 몇 명 챙기자고."

"아니. 잠깐."

"응?"

"자세히 보니까. 뭔가 이상해."

망원경으로 정찰하던 동료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군인 같은데."

"뭐?"

진영은 동료의 망원경을 빼앗은 뒤 눈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저 멀리서 군복을 입은 사내들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진짜잖아?"

"우리 부대 녀석들은 아닌 것 같아. 본 적 없는 얼굴이었어."

"우리 같은 탈영병일지도."

"저쪽도 군인들이라면 그냥 보내는 게 낫겠군."

진영의 동료들 역시 그 군복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같은 탈영병이라면 총을 가지고 있을 테니 협박도 통하지 않을 터.

동료들은 김샜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아니."

진영의 생각은 달랐다.

"잘 봐. 저 녀석들. 총이 없잖아."

"음?"

그의 말대로.

군복을 입은 일행들은 망치나 칼 같은 걸 들고 있기는 했으나.

총을 든 사람은 없었다.

"정말이야? 군인들인데 총이 없는 건 뭐지."

"우연히 외출을 나왔다가 괴물들한테서 살아남은 녀석들이거나 그런 거겠지."

"그렇다면...."

"뭘 망설여?"

진영은 방구석에 세워 둔 자신의 K2 소총을 쥐며 말했다.

"니들은 여기서 적당히 위협만 하고 있어."

"네가 가려고?"

"탈영하기 전엔 내가 막내였잖냐. 내가 가 줘야지."

K2를 어깨에 걸친 그는 건물에서 내려갔다.

건물의 입구로 나오자.

저 멀리서 다가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접근하는 군복을 입은 인원들.

진영은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거기 아저씨들!"

"...?"

"가진 거 있으면. 다 놓고 가지."

* * *

'얘는 또 뭐야?'

처음 건물에서 생존자가 나올 땐 무슨 일인가 싶었다.

하지만 저 입고 있는 군복.

건들거리며 들고 있는 총.

마지막으로 직접 한 말까지.

"아까 만난 생존자들이 말했던 탈영병 같습니다."

"존재를 알게 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만나게 되네."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탈영병.

난 녀석의 얼굴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할까.'

그냥 무시하고 지나간다... 라는 선택지는 없겠지.

저쪽도 우리가 가진 물자들을 원하는 모양이고.

게다가.

안 그래도 가급적 빨리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녀석들.

"민재 형."

"무슨 일이냐."

"우리. 총을 든 병사들 상대로 이길 수 있나?"

"흠. 고민해 봐야 할 주제로군."

산맥에서 탈출을 시도할 때.

좀비가 된 병사들의 총알을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

총에 맞은 병사의 말에 의하면 죽을 만큼 아프다고 하던가.

하지만 우리 군복도 보통 물건은 아니라서.

충격은 남을지언정 관통되지는 않았었지.

저 녀석들이 사수로 각성한 녀석들이라면 모르겠지만....

보아하니 그런 느낌도 아니고.

"흠. 상황에 따라 다를 것 같다."

"예를 들면."

"우리가 부대를 방어할 때처럼 충분한 시야와 거리가 확보된 상태에서 방어를 굳히고 있는 군인들이라 한다면 뚫기는 힘들겠지."

"그러면, 한 명은 정면. 나머지 인원들은 100m 이내의 건물에 있으면?"

"몰라서 묻는 거냐?"

민재 형은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건물 안에서는 총의 사거리도 줄어들지."

"음."

"반면 우리 병사들은 어지간한 거리는 순식간에 좁힐 수 있고."

"결론만 말하자면?"

"압승이 예상된다."

뭐어.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좋아, 다들 들었지?"

"""예!"""

"다들 전투식량 꺼내자."

곧바로 전투식량을 꺼내는 병사들.

그런 우리를 지켜보던 탈영병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어이, 아저씨들."

"정면의 녀석은 내가 제압한다. 나머지는 건물로 진입해. 김 중위님, 신호 주십쇼."

"갑자기 뭘 꺼내는-."

"하나, 둘...."

"뭐?"

총을 보여 주면 우리가 쫄아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모든 능력치가 소폭 상승-.]

이쪽이 대놓고 식사를 하는데도 멍하니 지켜보는 녀석.

"셋!"

그를 향해.

나와 병사들이 달려들었다.

"무, 무슨!?"

당황한 탈영병 녀석이 그제서야 총을 바로 잡았다.

그 총구가 우리를 향해 겨누어지려 했으나....

애초에.

너무 가까웠다.

"컥...!"

"총을 들고 협박하려면 거리를 두셨어야지."

일반인들이었다면 총을 든 상대에게 달려들어 제압한다는 선택지 자체가 없었겠지.

하지만 이쪽은 전원이 각성자.

내 요리와 김 중위의 지휘까지 겹쳐진 지금.

어지간한 거리는 없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녀석의 총을 멀리 쳐 낸 뒤.

녀석 본인은 바닥에 내치며 제압했다.

"놔, 이 개새-!"

"어허. 진정해요. 아저씨."

탈영병 쪽에서도 나름대로 저항해 보는 듯했으나.

꽈악.

"무, 무슨 힘이...?"

각성자들의 신체 능력은 일반인의 그것을 아득하게 상회한다.

전투직이 아닌 나라도 성인 남성 정도는 가볍게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좀 진정되십니까."

"크, 크큭... 너. 요즘 나타난다는 초능력자인가 보군."

"응?"

바닥에 깔린 녀석은 진정되기는커녕.

오히려 내 쪽을 흘겨보며 히죽거렸다.

"그래. 갑자기 그런 힘을 얻었으니, 자신감이 생겼을 만도 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넌 그래도 괜찮겠지만. 네 동료들은 어떨까?"

내가 눈앞의 탈영병을 제압한 사이.

나머지 병사들은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건물 안에는 내 동료들이 10명 가까이 있다. 전원이 총으로 무장한 상태지."

"흠."

"내가 제압당한 걸 봤을 테니, 다들 방비를 단단히 하고 있을 거다."

바닥에 얼굴을 비비면서도 키득거리는 녀석.

"너 같은 초능력자야 어떻게 될지 몰라도, 건물 안에 들어간 녀석들까지 무사할까?"

아.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건가 했더니.

"고작 그거였어?"

그때였다.

-저 새끼들이 진영이를 제압했다.

-미친. 죽여 버려!

탈영병들이 머무는 것으로 보이는 건물.

그 건물의 발코니에 있던 탈영병 하나가 이쪽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흐흐... 네 동료들은 결코 쉽게 죽지 못할 거다. 특히 너. 너는 내가 특별히 공을 들여서 괴롭혀 줄 테니...."

"민재 형."

헛소리를 지껄이는 녀석은 무시하고.

나는 민재 형을 바라보았다.

"뭐 해? 제압 안 하고."

"안 그래도 슬슬 나서려던 참이었다."

내 말을 들은 민재 형의 손가락이 하늘을 향했다.

발코니의 탈영병을 향하는 손가락.

"십만 볼트."

파지직!

-커, 커어....

장난스러운 말 한마디와 함께 뿜어지는 푸른 전격.

그 전격에 직격당한 탈영병이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녀석이 쥐고 있던 총 역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뭐...?"

당황한 듯 흔들리는 눈동자.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건물 안에서 들려오는 고함 소리.

-쏴, 쏴도 되는 거냐? 괴물들이 몰려올 텐데....

-멍청아! 지금이 그런 걸 따질, 커헉.

-미친. 설마 전부 초능력자라고?

그중 대부분은.

탈영병들의 비명으로 채워졌다.

"흠. 대충 정리됐나 보네."

"...."

"아. 아저씨. 아까 뭐라고 했지? 내가 바빠서 미처 못 들었는데."

10명 이상의 탈영병들.

그들을 제압하는 데 걸린 시간은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46화 탈영병 (4)

"그러니까. 부대에 괴물이 나타났고, 거기 있어 봐야 전멸할 게 뻔하다고 생각한 너희들은 탈출을 감행했다?"

"예, 예...."

건물의 한구석.

총을 빼앗기고 쓰러진 탈영병들을 병사들이 심문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방어가 뚫려서 전멸할 다른 부대원들에 대해서는, 어차피 죽을 거 조금 더 빨리 죽는 정도라 생각했고. 맞나?"

"마, 맞습니다."

"아주 쓰레기들이네, 이거."

빡!

심문을 진행하던 병사가 탈영병의 머리통을 내려쳤다.

대상이 후임이었다면 눈살 찌푸려질 광경이었겠다만.

'별생각은 안 드네.'

저 녀석들은 같은 부대원들을 모조리 죽음으로 몰고 간 탈영병들.

오히려 저 정도는 당해도 싸지.

"뭐. 어차피 다 죽을 목숨이었다는 건 알겠다. 어차피 탄약이 고갈되면 끝이었을 테니."

"예? 아, 아뇨. 탄약은 많았어요."

"뭐? 그럼 왜 다 죽을 목숨이라고 생각한 건데."

"그... 총알로도 죽이기 힘든 괴물들인 데다가, 워낙 숫자가 많아서요...."

계속되는 심문.

나와 다른 병사들은 멀찍이 떨어져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녀석들을 제압하는 데 걸린 시간은 5분 이하.

솔직히 말해.

우리도 놀랄 정도의 결과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총을 든 군인들이었는데."

"우리가 이렇게 강했나?"

자신들이 한 일임에도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의 병사들.

각성하고 시간이 꽤 지났다만.

지금까지 괴물을 상대로만 싸웠을 뿐, 인간을 상대한 적은 없었단 말이지.

총을 든 군인들은 현대 무력의 상징 같은 존재.

그걸 이렇게 쉽게 제압했다니.

그야 놀랄 만도 하다.

"우리도 그동안 레벨이 많이 올랐고, 영준이의 요리로 얻는 버프량도 장난이 아니니까. 당연한 결과지."

"어, 그런 겁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이길 만한 싸움이긴 했습니다만, 감회가 새롭긴 하군요."

물론 착각하면 안 된다.

우리가 제압한 것은 총을 든 탈영병들.

제대로 된 체계와 방어선을 구축한 군대는 아니었으니까.

제대로 된 군대가 상대라면 아무리 각성자 100인이라도 힘도 못 쓰지 않았을까 싶다.

뒤에서 우리가 잡담을 나누는 사이.

탈영병들의 심문은 계속 진행되었다.

"그나저나. 총알이 넘쳐난단 건 무슨 소리야?"

심문하던 병사의 입에서 흥미로운 주제가 나왔다.

그도 그럴 게.

우리는 총알이 거의 다 고갈된 상태란 말이지?

나야 그나마 신경을 덜 쓰고 있는 편이라지만.

사수 조의 병사들은 꽤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녀석들은 오히려 여유가 넘쳐 보였지.'

탈영병들의 제압이 끝난 뒤.

나는 병사들과 함께 건물을 대충 둘러보았다.

그렇게 발견한 것은.

어마어마한 양의 물자들.

식량이나 기름 등은 물론.

'상당한 양의 총알까지.'

식량 등은 약탈을 통해 얻은 물건이라고 쳐도.

탄약 쪽은 약탈로는 설명이 안 된다.

우리 부대 화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사수 각성자들.

그들이 탄약 고갈로 제힘을 내지 못하고 있는 지금.

탄약에 관한 정보는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평범한 부대에서 상비하고 있는 탄약이 많아 봐야 얼마나 많다고 총알이 넘쳐난다는 거야? 그러고 보니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탄약만 해도 상당한 양이던데."

"그게...."

그런데 그 입에서 나온 대답은.

기대 이상의 것이었다.

"저희 부대가 탄약 보급소라서요."

탄약 보급소.

"탄약 보급소? 그게 뭔데."

"예. 그, 탄약대대라고도 하는데... 쉽게 말해 근처 부대로 보급해야 할 탄약들을 관리하는 부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탄약창하고는 다른 거냐?"

"탄약창의 하위호환이라고 보시면 되죠. 관련 업무를 해 본 적 없으신 분들이면 모르실 만도 합니다."

"자세한 위치는?"

"그. 여기서 그렇게 멀지 않은데...."

탄약대대라니.

그 이야기를 들은 병사들의 시선이 탈영병에게 집중되었다.

"이거 잘하면."

"탄약 문제. 한 번에 해결할 수도 있겠는데요."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의 사정도 한결 나아진다.

총알을 소모하고, 소리가 크다는 단점도 있지만.

사수들의 화력은 그 단점을 무마할 만큼 대단한 것이었으니까.

그때.

'어, 저 녀석은....'

모여 있는 탈영병들.

그중 한 명이 구석으로 슬쩍슬쩍 몸을 옮기는 것이 보였다.

탄약에 대한 얘기가 나와서일까.

탈영병의 이야기에 집중하던 다른 병사들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너, 잠깐 정지...."

딱 봐도 수상한 거동을 보이는 탈영병.

녀석을 내가 저지하려던 순간.

"다, 다들 꼼짝 마!"

녀석이 몸을 일으키며 소리를 질렀다.

놈의 양손에 들려 있는 것은.

권총. 그리고....

한쪽 손에 들린 권총은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반대쪽 손.

"수류탄이라."

그 물건들을 본 나는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무기는 다 뺏은 거 아니었나?"

"예. 몸에 지니고 있는 건 전부 압수했었는데...."

"쯧, 방 안에도 숨겨 둔 게 있었나 보네. 저쪽 근처 조사한 녀석들은 나중에 나 좀 보자."

"죄, 죄송합니다!"

방의 조사를 담당했던 병사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다들 꼼짝 말라고 했지!"

"...."

"너희들이 총을 쏘기도 전에 붙을 수 있는 괴물들인 건 나도 알지만. 수류탄까지 버틸 수 있을까? 내가 핀을 뽑는 순간 이 방 안에 있는 녀석들은 다 뒤지는 거야."

"그러면 너도 몸 성히 넘어가긴 힘들 텐데?"

"어차피 뒈질 거, 다 같이 뒈지는 게 낫지. 안 그래?"

문제는 저 녀석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인데.

보아하니 상당히 미친놈 같다.

난 슬쩍 녀석이 입고 있는 군복을 바라봤다.

명찰에 적힌 이름은 황진영.

지상에서 우리를 협박하고, 내가 직접 제압했던 바로 그 녀석이었다.

그때.

"신 병장님."

"어."

"제가 처리할까요."

내 뒤에 서 있던 광일이가 슬쩍 다가와 말했다.

전광일 상병의 신체 능력은 부대에서도 압도적인 수준.

...솔직히 이 녀석이라면 수류탄이고 뭐고 어떻게든 해결할 것 같기도 한데.

"잠깐만."

"예?"

나는 광일이를 만류했다.

광일이 녀석은 의아해 보이는 태도였으나.

"한 번은 기회를 줘야지."

나는 잠자코 녀석이 하는 짓을 지켜봤다.

"뭐 해, 이 새끼들아! 빨리 총 챙겨!"

황진영은 여전히 우리를 향해 권총을 겨누고 수류탄을 들고 있는 상태로 소리쳤다.

그러자 무릎 꿇고 심문을 받던 탈영병들이 몸을 일으켰다.

"잘했어!"

"진영이 이 새끼. 믿고 있었다!"

"큭큭, 전세 역전이로구만."

탈영병들은 구석에 따로 모아 둔 총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그때.

난 녀석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들."

"엉?"

"후회 안 할 자신 있냐?"

내 딴에는 나름.

기회를 주려고 한 것이었으나.

"큭큭. 이제야 좀 쫄리시나 봐?"

"안 할 자신 있으시다. 이 개같은 새끼."

"후회는 무슨.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봐?"

방금까지 무릎을 꿇고 세상 공손하게 굴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

이래서야.

기회를 준 의미는 없다고 봐야겠네.

후우.

나는 한숨을 내쉬며 광일이의 이름을 불렀다.

"광일아."

"옙. 상병 전광일."

"처리하자."

후임에게 내린 명령.

그 명령에 대한 대답은.

'충성!'

이나.

'예!'

따위가 아니었다.

"그르륵...."

짐승이 우는 듯한 기괴한 소리.

부대 최강의 전사이자, '광전사' 각성자인 전광일 상병.

광기가 녀석의 몸에 퍼져 나가고.

쿠우웅!!

그 거대한 몸체가 탈영병을 향해 쇄도했다.

"내가 장난하는 줄 알았나 보지!?"

그 모습을 본 진영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핑!

정말로 수류탄의 핀을 뽑고 높이 던지는 녀석.

미친.

설마 진짜로 던질 줄은 몰랐는데.

"미, 미친 새끼!"

"진짜로 뽑으면 어쩌자고!"

"좆까, 새끼들아! 죽으려면 차라리 같이 죽자고!"

그 모습에는 같은 탈영병들도 당황한 눈치였다.

수류탄이 터진다면 이 방 안에 있는 모두가 성치 못할 게 뻔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뭐. 별 상관없겠지."

지켜보는 나로서는.

딱히 위험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크워어어어어!!!"

짐승 같은 괴성과 함께 질주하는 전광일 상병.

녀석의 손이 허공의 수류탄을 향했다.

높이 던져진 수류탄이었으나.

저 몸체로 가능한가 싶은 기괴할 정도의 탄력으로 높이 뛰어오른 전광일 상병.

마치 장난감을 낚아채는 강아지처럼.

간단하게 수류탄을 낚아챈 녀석은....

"크륵!"

수류탄을 창문 밖으로 던져 버렸다.

퍼어어엉-

건물 밖으로 던져진 수류탄이 폭발했다.

엄청난 폭발음과 풍압이 멀리 있는 우리에게까지 느껴졌다.

"미친 괴물 새끼!"

그 모습을 본 황진영은 전광일 상병을 향해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탕, 타앙-

"크륵...!!!"

"초, 총알도 안 먹힌다고?"

돌격소총의 총알도 버텨 냈는데, 권총 따위야.

우리가 입은 군복을 뚫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콰앙!

결국.

황진영이란 이름의 탈영병은 광일이의 손에 머리를 붙잡힌 채.

벽에 처박히고 말았다.

"...어?"

"뭐, 뭐야."

"무슨 일이 있던 거야...?"

광일이가 몸을 날리고 황진영을 제압할 때까지 걸린 시간은 채 5초도 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순식간에 뒤바뀐 상황.

총을 쥐러 이동하던 탈영병 녀석들이 당황스러운 눈치로 중얼거렸다.

"크르륵!"

"어, 어어...."

"오, 오지 마!"

승기를 되찾았다 생각했을 때의 의기양양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괴성을 내며 자신들을 노려보는 광일이의 눈빛에 압도당한 탈영병들.

"큭, 큭큭... 이런 미친, 괴물 새끼들."

벽에 처박혀 얼굴을 비비고 있는 탈영병.

황진영이 말했다.

"나름 마지막 발악이었는데, 쥐뿔도 안 통하는군."

"시도는 좋았다. 하지만 상대를 가려서 했어야지."

여기 있는 병사들이 우리가 아닌 평범한 군인들이었다거나.

하다못해 광일이가 없었거나 하면 꽤 유효한 공격이었을 수도 있다만.

애초에 그딴 짓이 먹힐 상대가 아니었다는 거다.

"큭큭... 이렇게 된 이상 마음대로 해라."

"음?"

그나저나.

이 진영이라는 녀석.

아까부터 묘하게 잘난 척이 심하단 말이지.

그래봐야 결국 탈영병 주제에.

"저기요 아저씨."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해라."

"아니, 아까부터 중2병인지 뭔지는 모르겠는데."

아직도 상황 파악이 덜 된 모양.

끝까지 기죽지 않겠다는 듯 구는 녀석에게.

난 지금 상황을 조금 알려 주기로 했다.

"당신들 처우를 결정하는 건 우리가 아닐 것 같아."

"...뭐?"

그때였다.

저 멀리서부터.

묘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카아악....

크륵.

끼에에에에에에-

"이 소리는?"

"몰려오고 있는 소리지."

"모, 몰려오다니?"

당당한 척 굴던 녀석이 묘하게 초조한 태도로 되물었다.

난 오히려 어이가 없어져서 되물었다.

"우리는 뭐, 총이 없어서 안 쏘고 다니는 줄 아나?"

"무슨 소리를-."

"총소리를 내는 것도 자제해야 할 마당에. 수류탄까지 던져? 뭔 미친놈들인가 했네."

"아."

권총만 해도 상당한 소음.

거기에 수류탄까지 터트리다니.

호들갑을 이만큼 떨어 댔으니.

괴물.

좀비.

이놈 저놈 할 것 없이, 죄다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지 않을까?

"이, 이봐. 아니, 저기요."

그제야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지 깨달은 듯.

탈영병들이 묘하게 비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요. 아재."

"우,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한 번만 좀 살려 주십쇼."

다 같이 죽을 작정으로 수류탄을 던지던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

"같은 군인이잖습니까. 제발. 같은 처지인 사람들끼리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 살려만 주신다면 이 은혜. 꼭 갚을 테니-."

"수류탄 던지고 뭐고 한 건 다 진영이 저 녀석이 한 짓입니다! 저희는 항복했잖아요!"

"...미친놈들."

다른 탈영병 녀석들까지 거기에 가세해 목숨 구걸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기회를 줄 때 받았어야지."

그들을 향해.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이민재 병장.

"미안하지만. 탈영병은 즉결 처형이 원칙이다."

"무슨?"

"직접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라는 뜻이야."

그렇게 말하자.

탈영병 중 한 명이 악에 받친 소리로 외쳤다.

"그, 그러는 너희는 뭐 다른 줄 아냐!"

"당연히 다르지."

난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 뒤.

뒤로 돌아 우리 쪽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김 중위님!"

그러자.

병사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김 중위.

"영준아. 불렀니."

그 모습을 본 탈영병들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주, 중위?"

"간부까지 있다고?"

"...설마. 저 녀석들은 탈영병들이 아닌 건가?"

"설마. 노예로 잡아 온 생존자 녀석들도 말했잖아. 다른 군부대도 모조리 전멸했다고. 그렇게 괴물들이 몰려오는데. 살아남은 녀석들이 있을 리가...."

같은 처지니 뭐니 할 때 혹시나 했다만.

우리가 자기들 같은 탈영병인 줄 알았나 보지.

난 녀석들을 무시한 채 김 중위에게 말했다.

"김 중위님. 명령 내려 주십쇼. 퇴각 명령으로."

"알겠다. 전원, 최대한 안전하게 퇴각하라!"

김 중위가 소리를 지르자.

아군 병사들의 몸 안에 기묘한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지휘의 함성 - '퇴각 명령'이 울려 퍼집니다.]

[효과 대상자들의 전장 이탈 행위에 보너스가 부여됩니다.]

몰려들고 있을 괴물들.

녀석들을 모조리 상대할 여유 따위 있을 리가 있나.

바로 몸을 빼려고 준비했을 때.

"아, 안 돼."

누군가 내 발목에 매달렸다.

익숙한 얼굴.

아까까지 벽에 얼굴을 비비고 있던 황진영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말했다.

"아까는 같이 죽으려고도 하더니. 이제 와서?"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라고 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목숨 구걸이라.

맘 같아선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두고 싶었으나.

동시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얼마 전.

두 후임이, 내 눈 앞에서 괴물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본 이후에 생긴.

작은 강박 같은 것.

'괴물이 인간을 살해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은데.'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다.

하지만.

차라리 탈영으로 인한 벌을 받게 하면 받게 했지.

이대로 무력하게 괴물들에게 살해당하게 방치하는 것은.

그것대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차피 기회를 줘도 못 받아먹을 놈들이지만.'

딱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도록 하지.

타악.

"먹어라."

"이, 이건?"

내가 그들의 눈앞에 던진 것은.

얼마 전에 갓 만든 육포.

전투식량이었다.

'각성자가 아닌 녀석들이니. 능력치 상승은 적용되지 않겠지만.'

특성정도라면 적용이 될지도 모르는 일.

이 녀석들을 살리는 건 내게는 불가능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거라도 던져 준 뒤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하는 것뿐.

'이 녀석들이 살고자 하는 의지만 충분하다면.'

저 육포를 주운 뒤.

입에 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깊은 죄책감의-]

육포에는 이미 [특별소스]를 뿌려 놓은 상태.

저걸 먹고 어떻게든 살아남는다면.

"먹고서. 너희 죄를 인정한다면. 우리 부대를 찾아와라."

그 후에는, 죄책감으로 인해 몸부림치게 될 터.

그렇게 찾아온 녀석들에게, 탈영병에게 합당한 벌을 준다.

그럴 생각이었으나.

"흐, 흐흐. 육포라니."

"죽기 전에 배나 채우라는 뜻인가?"

내 전투식량의 효과를 모르는 그들로써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던 듯.

기껏 건네준 전투식량을 내팽개치고 흐느끼는 녀석들.

"사, 살려 달라는 부탁은 안 할게."

그리고.

그중 몇 명은, 이런 말을 꺼내 왔다.

"그러니까, 차라리. 차라리 죽여 주면 안 될까?"

이 녀석들이 구걸한 것은.

목숨이 아니었다.

"주, 죽는 건 피할 수 없겠지. 원래라면 부대에서 죽었어야 하는 목숨인 데다가... 너희들에게 모든 걸 빼앗긴 이상. 여기서 어떻게든 살아남는다고 한들, 오래 살지 못할 테니까."

"...."

"하, 하지만. 죽는 방법이라도 선택하고 싶거든. 적어도 괴물한테 잡아 먹히는 것만큼은 싫어."

죽음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죽음에도 종류가 있다.

우리의 손에 의해 처형당한다면.

적어도 고통의 순간은 길지 않겠지.

하지만.

'괴물과 좀비들에게 산 채로 잡아먹히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

총살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통과 공포의 시간이 될 거다.

"그러니. 제발...."

"사, 살려 달라는 것도 아니잖아! 죽여 달라는 것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거잖아!"

이들은 그런 식의 죽음만은 피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었다.

'이렇게 빨리 포기한다고?'

나는 살아남기 위해 온갖 짓거리를 다 해 왔다.

살아나갈 구멍이 안 보인다면, 구멍을 파서라도 만들어 낼 각오였지.

하지만.

저 녀석들은, 살기 위해 발버둥 쳐 볼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건, 살아남는 것.'

이 녀석들이 내 부대원들이었다면.

그렇게 다그쳤겠지만.

'이 녀석들은. 내 부대원이 아니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뒤에 있는 병사들에게 말했다.

"아까 광일이가 쳐 낸 권총들."

"예."

"저 방구석에 어딘가에 굴러다니고 있겠지? 그건 두고 간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차피 여기서 탈출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총알도 얼마 없으니. 그 권총으로 약탈을 할 수 있을 리도 없고."

이번에는 탈영병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탄창에는 총알이 남아 있을 테니. 어떻게 쓸지는 너희들이 알아서 정해라."

"아, 아아."

"괴물을 죽이는 데 쓰든, 다른 걸 죽이는 데 쓰든. 마음대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권총이 있다면.

적어도 편하게 죽는 것은 가능하겠지.

그리고.

만약에, 정말 만약에다만.

'살아남고 싶은 의지가 있는 녀석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권총이 있다면.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특히.

'저들이 방구석에 내던진 저 전투식량을 먹는다면.'

살아남을 가능성은 결코 0이 아니겠지.

'구멍은 마련해 줬다.'

의지를 가지고 그 구멍을 빠져나올지.

그냥 편안한 죽음을 택할지는, 녀석들 개개인의 몫.

나는 발에 매달린 녀석을 내친 뒤.

부대원들과 함께 방에서 나왔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알겠...."

최대한 빨리 건물을 빠져나가려고 몸을 날리던 중.

타앙....

"...."

위에서 들려오는 권총 소리.

괴물이 몰려오기도 전에 들려온 소리가 뭘 의미하는지.

이곳의 병사 모두가 알고 있었다.

'멍청한 자식.'

기껏 살아남을 구멍을 마련해 줬음에도.

공포에 짓눌려, 그 구멍을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다니.

'몇 명이나 죽음을 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나약한 녀석들은, 어차피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

"영준아! 서둘러야 한다!"

"탈영병 녀석들보다야 낫겠지만, 우리도 위험합니다!"

속이 쓰리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이미 죽음을 택한 녀석들을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우리는 저 녀석들과 다르다.'

단순히 탈영자냐, 아니냐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남을 의지를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

울려 퍼지는 권총의 소리를 들으며.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나는 절대. 저렇게 죽지는 않는다.'

나만의 식당을 열 수 있는 그 날까지.

기필코 살아남으리라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사방에서 몰려들고 있을 괴물들.

녀석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 건물에서 멀어져야만 했다.

각성자들의 신체 능력.

거기에 김 중위의 버프까지 겹쳐졌지만.

"이걸로는 모자라겠네."

"예?"

"그럼 어떻게 합니까!"

괴물들이 도착하기 전에 완전히 도주하는 것은 힘들어 보였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어떻게 하냐는 병사의 질문에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다들. 전투식량 꺼내."

"예?"

"아끼고 아껴 왔던...."

이런 상황에 답이라곤 하나뿐이지 않겠냐.

"요리지."

나는 품 안에서 요리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아껴 왔던 전투식량 시리즈.

그중에서도 아직 한 번도 먹어 보지 못한 녀석.

[하급 요리사의 정성이 담긴 가벼운 발 슬레이파의 육포]

방금 탈영병 녀석들에게도 던져주었으나, 스스로 내던져 버린.

'살아남기 위한 구멍'을.

47화 탄약대대 (1)

산맥의 부대 막사를 떠난 뒤.

가장 많은 괴물들과 조우한 때가 언제냐 하면.

뭐니 뭐니 해도, 산맥을 내려오던 바로 그때였다.

'좀비가 된 병사들이 쏜 총. 그 소리를 듣고 온갖 괴물들이 몰려왔었지.'

묘하게 지금 상황과 겹쳐진다만.

그땐 정말 살아남은 게 기적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살아남으며 얻은 것도 없지는 않았다.

부대에서 탈출해 지상에 도착했다는 점 외에도.

'엿듣는 알라우르' 등.

유용한 괴물들의 고기를 확보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하급 요리사의 정성이 담긴 가벼운 발 슬레이파의 육포]

'가벼운 발 슬레이파.'

총소리가 울려 퍼진 뒤.

가장 먼저 우리를 습격했던 괴물 중의 하나였다.

푸른 털의 늑대 같은 외모.

특이한 점이 있다면 다리가 4개가 아닌 6개가 달려 있다는 점 정도일까.

아군 전사들의 방진을 가볍게 뛰어넘었을 때는 정말 간이 떨어지는 줄 알았지.

그리고.

녀석의 고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는.

너무나도 뻔히 예상이 가는 바 아니겠는가.

[요리를 섭취하였습니다.]

[민첩이 상승합니다.]

[요리에 담긴 '가벼운 발 슬레이파'의 마력이 몸 안에 스며듭니다.]

[일시적으로, 특성 - '슬레이파의 준족(열화)'을 획득합니다.]

[특성 - 슬레이파의 준족(열화)]

[여섯 개의 다리에 마력의 대부분이 집중된 마수, 슬레이파들만이 타고나는 특성입니다. 오우거만 한 덩치를 가진 우두머리 슬레이파들은 특유의 여섯 개의 다리를 통해 그 덩치에서 나올 수 없는 속도와 움직임을 내고는 합니다.]

[각력이 큰 폭으로 상승합니다. 걸음 속도, 점프의 높이까지. 인간을 초월한 마수의 영역에 근접합니다.]

[다만, 열화된 탓에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다리가, 너무 가볍습니다!"

"각성하고 나서도 이런 느낌은 처음인데...!"

효과는 즉각적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그 이동 속도가 차원이 달랐기 때문.

단순히 내 요리 하나의 효과는 아니었다.

'김 중위의 버프와 내 요리의 버프는. 묘하게 상성이 좋단 말이지.'

관사까지 퇴각하는 행위에 보너스가 부여되는 김 중위의 버프.

거기에 내 요리 효과가 겹쳐진 결과.

그 시너지는 버프 중 하나만 적용되었을 때의 두 배 정도가 아니었다.

3배, 아니 4배는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

그 결과.

전속력으로 달리는 우리의 속도는.

고속도로를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차량들.

그 이상이었다.

"저기, 괴물들이 접근 중입니다!"

건물을 벗어나 달리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멀리서 소리를 듣고 접근 중인 괴물들이 보였다.

그러나.

"괴물들이 멀어지고 있습니다!"

"미친, 벌써!?"

우리의 속도가 너무 빠른 탓에.

달려들던 괴물들은 순식간에 따돌려지고 저 멀리 멀어져야만 했다.

"카하!"

그렇게 내달리다 보니.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훅훅 바뀌어 나가는 풍경까지.

'묘한 해방감.'

세상이 이 꼴이 되었으니.

나도 사람인 이상 스트레스가 쌓일 수밖에 없었다만.

달리면서 느껴지는 상쾌함.

그 기분에, 쌓여 왔던 스트레스마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이 정도면 쫓아오는 괴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신 병장님. 이번 요리 진짜 대단함다!"

"나도 알아 인마!"

같이 내달리는 병사들도 나와 비슷한 기분인지.

묘하게 텐션이 오른 듯한 느낌이었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관사까지는 그냥 달려서 복귀한다!"

"예!"

"먼저 가 있을 테니, 병장님은 천천히 오십쇼!"

"뭐 인마?"

아무튼.

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슬레이파의 고기는 꽤 양이 있는 편이니까.

가끔 스트레스 쌓인다 싶을 때는 이렇게 뛰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 * *

같은 생각을 한 내가 미친놈이지.

"끄아아아...."

부대에 복귀한 뒤.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고통에 신음하며 쓰러지기였다.

[슬레이파의 준족(열화)]

요리를 통해 얻는 특성들.

그 효과는 탁월하다만.

뒤에 (열화)가 붙는 게 문제.

[다만, 열화된 탓에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민한 청각(열화) 때와 마찬가지.

이번에도 부작용이 존재한다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이전에는 곧바로 부작용이 나타나 뭘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만.

이번엔 몰랐지.

슬레이파라는 괴물은 다리가 여섯 달린 괴물.

그 특성을, 이족보행인 우리가 사용한 결과.

"그, 근육통이."

"끄아악...."

"의무병, 살려 줘...."

"끄으. 의무병도 앓아누웠답니다."

"미친...."

특성의 효과가 끝나자마자 몰려오는 엄청난 근육통.

나와 병사들은 죄다 앓아누워야만 했다.

'그냥 괴물들만 따돌리고 천천히 걸어올걸....'

다리 근육에 부담이 갈 정도의 속도를 계속해서 낸 결과.

중간부터 천천히 걸어왔다면 이 정도는 아니었겠지.

제기랄.

앞으로 이 요리는 어지간하면 봉인이다.

* * *

나와 부대원들이 앓아눕고 몇 시간이 지난 뒤.

"커, 커헉."

몇 명의 탈영병이 우리의 뒤를 따라 관사에 도착했다.

생존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스탯과 달리.

특성은, 평범한 생존자들에게도 영향을 준다.

이 녀석들 역시, 우리와 같은 '준족'을 가지고 도망칠 수 있었던 것.

"우, 우리가 잘못했어. 용서해 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짙은 죄책감]의 요리를 먹은 결과.

죄책감에 휩싸인 채, 우리를 찾아온 녀석들.

'이 녀석들이 가지고 있는 죄책감은. 아마도 내 요리에 의한 것.'

요리의 효과가 끝나는 순간.

저 죄책감 역시, 약간의 잔재만을 남기고 사라질 확률이 높다.

"역시 농사나 짓고 살았어야 했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농사? 이건 또 뭔 소리래."

당장은 진심으로 회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어디까지 진짜 본인의 감정인지는 알 수 없다.

저 모습에 마음이 흔들릴 이유는 없다는 것.

"상태는 어떤 것 같아?"

"이 녀석들. 각성자가 아니더군요. 특성의 부작용도 다른 병사들보다 심합니다. 아마 몇 주는 정신도 못 차리고 누워 있어야 할 겁니다."

앓아누운 의무병 대신.

병사들을 간호하던 군종병.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신중수 일병이 말했다.

"탈영병들에 대한 얘기는 들었습니다. 이 녀석들. 그냥 탈영만 한 거라면 그나마 봐줄 만합니다만."

"그래. 사람들한테 총을 들이밀었지."

그 부분은 용납할 수 없는 죄.

군대의 체계가 제대로 돌아갈 때라면, 이들은 총살감이었겠지.

하지만.

"일단은 치료해 줘."

"예?"

"그리고. 깨어나면 나 부르고. 밥 한 끼는 먹여야겠으니까."

"밥이라니. 이 녀석들이 뭐가 이쁘다고 그러십니까?"

"이뻐서 그러는 게 아니거든."

"...?"

"오히려 반대지."

그냥 총살이라니?

'그건 좀 아깝잖냐.'

애초에.

이 녀석들의 죗값을 생각한다면, 평범한 죽음이 오히려 자비가 될 수도 있다.

미안하지만.

나는 성격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라서.

"그렇게 편하게 보내 줄 수는 없지."

이 녀석들에게는.

죽음보다 더한 벌을 줄 예정이다.

[교화의 요리사]

[짙은 회개심의 특별 소스]

우리 부대의 영구 막내로서.

여생을 개같이 구르게 될 벌을.

생존을 위한 편안한 방법으로 약탈을 선택하고.

그 방법이 막히자, 결국에는 편안한 죽음을 선택한 다른 녀석들과 달리.

'적어도 이 녀석들은. 살기 위한 노력은 했다.'

살아남기 위한 의지가 있다는 것.

우리 부대에 합류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충족했다고 봐도 될 테지.

"안 그래도 인력난에 허덕이고 있던 참이거든."

그 인력난을 불러일으킨 장본인들이, 바로 이 탈영병들.

그 책임은 져야 하지 않겠냐.

장담하는데.

'너희 남은 군생활. 절대 편하진 않을 거다.'

* * *

나와 다른 부대원들이 앓아누워 있는 동안.

모든 부대원이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마지막 각성 작업.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누워만 있어서 미안하네."

"아뇨. 푹 쉬고 계십쇼."

원래도 관사의 수비 병력과 각성 작업을 담당하던 병력은 나뉘어 있었으니까.

각성 작업을 맡은 병사들도 로테이션을 돌리고 있었고.

멀쩡한 상태의 병사들은 계속해서 생존자들을 각성시켜 나갔다.

애초에 막바지에 달해 있었던 각성 작업.

그 마지막에 남은 것은.

일전에 마트에서 만났던 이수연, 이수혁 남매였다.

나름 군부대에 기원을 둔 길드다 보니.

각성도 부대에 합류한 짬순으로 진행됐거든.

"내가 직접 못 도와줘서 미안하지만. 거기 형들, 아니. 아저씨들이 하란 대로만 하면 될 테니까. 끄어. 걱정 말고."

"푸흡. 오히려 군단장님이 좀 걱정이네요."

"킥킥."

다행히 남매는 그다지 긴장하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들이 보고를 마치고 떠난 지 몇 시간이 지났을 때쯤.

각성 작업이 완전히 마무리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길드 : 강철 군단]

[군단장 : 신영준]

[부단장 : 이민재, 전광일, 서수혁, 이상아, 박태준]

[군단원 : 128인]

길드 정보창의 인원수가 달라져 있었으니까.

"감회가 새롭네."

산맥을 떠날 당시의 군단원은 정확히 100인이었다.

아슬아슬하게 '길드' 규모에 해당하는 단체.

그 숫자가 이제는 128인으로 늘어났다.

이제 우리 부대에 '생존자'는 없는 셈이다.

모두가 군단의 일원으로서 자리 잡았으니까.

그로부터 며칠 뒤.

부대원들의 근육통이 어느 정도 사라졌을 때쯤.

"근무 중인 인원 빼고 전원 집합했습니다."

"각성자로서 회의에 참가하는 건 처음이라, 좀 떨리는군요."

"뭐 별 차이 있겠습니까? 편하게 계십쇼."

아침 점호 시간.

부대원들 전원이 회의를 위해 모였다.

관사의 낡은 정자.

그 앞에 선 나는 헛기침을 한 뒤 말했다.

"흠흠. 일단, 가장 중요한 작업이었던 생존자들의 각성 작업이 마무리됐다. 다들 수고 많았어."

말을 하면서 모여 있는 병사들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한때는 생존자로서 한구석에 뭉쳐 있던 이들.

그들은 이제 각 조의 조원으로서 곳곳에 퍼져 있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이상아가 만든 군복을 입고 서 있는 모습.

"부대의 전력이 순식간에 증가했겠네요."

"그렇지. 그것도 상당히."

단순히 사람이 20명 늘었다든가.

그렇게 표현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각성한 직업들도 다양하니까. 더 많은 시너지가 생겼을 거야."

내 버프와 김 중위의 버프가 서로 중첩되어 더 큰 효과를 내는 것과 마찬가지.

다양한 직업의 각성자들은 모이면 모일수록 큰 시너지를 내는 법이니까.

"그렇게 전력이 확충된 지금. 제안하고 싶은 일이 있다."

"예?"

"뭡니까?"

말을 꺼내기 전에.

슬쩍 서수혁 상병 쪽을 바라보았다.

별다른 기대는 없다는 듯 팔짱을 끼고 얘기를 듣고 있는 녀석.

그 표정이 바뀌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탄약 확보다."

"...예?"

서수혁 상병의 눈이 휘둥그레하게 변했다.

워낙 무뚝뚝한 녀석이다 보니 알 수 있었다.

저 녀석.

지금 엄청 흥분한 상태라고.

"타, 탄약 확보라니. 진심이십니까?"

"하지만, 어떻게."

서수혁 상병뿐만이 아니었다.

사수로 각성한 병사들.

총의 소음과 더불어 탄약이 고갈되어 가는 상황이라.

영 힘을 못 쓰고 있었지.

탄약 보충에 대한 소식을 듣고 흥분할 만도 하다.

'그러고 보니 다들 근육통에 앓아누운 터라 설명을 못 해 줬나?'

생존자들과 탈영병들에게 들은 정보.

의아해하는 사수들을 향해 그 이야기를 해 주기로 했다.

"이 근처에 탄약 보급소가 있거든."

"예?"

"탄약 보급소라니...."

내 말을 이어받아 설명을 시작한 것은 김 중위였다.

"ASP라고도 한다."

Ammunition supply point.

탄약 보급소.

혹은 탄약대대라고 불리는 부대.

"부르는 명칭은 많지만 역할은 단순해. 인근 부대에 보급하기 위한 탄약들을 보관하는 부대지."

각자의 업무만 하던 병사들은 모르는 경우도 많았지만.

김 중위는 그래도 나름 중대장이었다는 걸까.

"이번에 얘기가 나온 탄약대대는 우리 대대의 탄약 보급을 맡던 곳이기도 해서 말이지. 난 몇 번 가 본 적도 있다."

"예?"

"그런 곳을 알고 있었다면 왜 진작에 말씀을 안 하시고."

"지금까지 탄약을 구할 만한 여유는 없었으니까. 안 그래도 각성이 마무리되면 한번 건의해 보려 했지. 가까운 부대와 합류하는 건 어떠냐는 식으로 말이야. 설마하니...."

한숨을 내쉬는 김 중위.

"그 부대가 전멸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전멸이라니."

"탄약대대뿐만이 아니야. 우리를 제외한 부대들은 대부분 전멸했다는 것 같다."

추가적인 설명이 이어졌다.

우리 부대에 쳐들어온 리자드.

그것과 비슷한 괴물들이 다른 부대들도 공격한 것 같다는 이야기.

"그러고 보니...."

부대원들 사이에서 가는 목소리가 나왔다.

바로 며칠 전에 각성한 남매 중 하나.

이수연이였다.

'그러고 보니 쟤는 이상아 조장보다도 최근까지 생존자로 활동했지.'

그 덕분일까.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군부대가 전멸했다는 얘기?"

"아, 그 연장선 같은 얘기지만요. 규모가 큰 부대일수록, 강한 괴물들이 나타난 것 같다던가. 뭐 그런."

흠.

듣고 보니, 그럴 것도 같다.

'강한 부대일수록 더 강력한 괴물이 나타나야만 부대를 전멸시킬 수 있을 테니까.'

우리 부대를 습격한 리자드들도 강력하긴 했다만.

그들이 습격한 게 군단 본부 같은 곳이었다면 어떻게든 막아 내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면 좀 이상한 부분이 있다.

'아니, 애초에 중간에 마주쳤던 생존자들이 해 줬던 얘기부터 말이 안 되지.'

모든 군부대가 유독 강력한 몬스터 무리의 습격을 받았고.

덕분에 모든 군부대가 전멸했다고?

거짓말이거나 헛소문으로 치부하기엔.

실제로 지상에 내려와 맞부딪친 몬스터들 대부분이 리자드 무리에 비하면 강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저 '맥' 정도가 더 강했을 수준.

그런데 거기서 더 나아가서.

강한 군사력을 지닌 부대일수록 더 강력한 괴물들이 나타났다고?

'몬스터들이 강자와의 싸움을 즐기는 전투광일 리도 없고.'

유독 군대에만 강한 괴물들이 나타난다니.

'그런 우연이... 있을 리가 없지.'

결코 우연으로 치부할 수 없는 현상.

난 여기서 어떠한 의도를 느꼈다.

인류를 공격하기 위해.

그 무력의 핵심인, 군부대를 먼저 제압하고자 하는.

'뚜렷한 악의.'

머리가 아파지는 얘기다.

갑자기 나타난 괴물들이나, 각성 같은 것도 그렇고.

그 원인이 분명히 존재할 터.

당장 그 원인에 대해 알 수는 없었다.

그나마 힌트가 있다면.

[월드 이벤트 - 점령전이 진행 중입니다.]

저 점령전.

이 세상이 우리에게 점령전을 수행하라고 하고 있으니.

그걸 해 나가다 보면, 뭔가 가닥이 잡히지 않을까 하는 것 정도.

점령전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결국 힘을 키워야 한다.

탄약 확보 역시 그 일환.

"탄약대대의 위치는 이곳이다."

김 중위가 군사지도를 펼치며 말했다.

그 위치를 본 몇몇 병사들이 의문을 표했다.

"음?"

"뭔가, 영역이 좀 넓은데요?"

군사지도에 나타난 면적이 상당히 넓었기 때문.

"에이. 설마 저기가 다 군부대겠-."

"군부대 맞다."

"...."

"ASP는 실제로 면적이 상당하거든. 험한 산 위에 있어서 규모도 작은 편이던 우리 부대하고는 비교하기도 어렵겠지."

김 중위의 말을 들은 병사들이 아연했다.

"어. 조금 전에 부대 규모가 클수록 나타난 괴물들도 강하다든가, 그런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여긴 얼마나 강한 괴물이 있다는 겁니까."

"음. 그건 모르는 일이지."

병사들과 달리.

김 중위는 비교적 태연한 얼굴이었다.

"말했잖아? 여기는 '탄약대대'라고. 우리 부대는 '방공대대'고."

"그건."

"부대 편제상으로는 우리 부대하고 같은 대대급이란 거야."

저만한 면적의 부대가 고작 대대급이라니.

"탄약창이나 탄약 보급소의 특징이라고 보면 된다."

김 중위의 설명이 이어졌다.

"특히 여긴 전방에서 쓰이는 온갖 화기의 탄약들이 거쳐 가는 곳이거든. 보관하는 양도 상당하지."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탄약들은 폭발할 가능성이 크고, 혹시라도 잘못하면 연쇄 폭발로 이어질 수 있으니까. 보관할 때도 각 탄약 간의 거리가 가까우면 안 되거든. 덕분에 건물 하나하나가 크고, 다른 건물들과의 거리도 먼 편이야."

오호.

그럼 저 면적은 그저 넓기만 할 뿐.

건물 밀도는 오히려 낮다는 건가.

"아마 탄약대대에 상주하는 인원수를 생각하면 우리 부대랑 비슷할 정도일 거야. 우리가 비교적 작은 대대란 걸 감안해도 큰 차이는 없겠지."

"그렇다면."

"탄약대대에 나타난 괴물들도 우리 부대에 나타난 괴물들하고 비슷한 수준일 확률이 높겠지. 아. 물론 생존자들 사이에 돌았다는 '강한 부대일수록 강한 괴물' 설이 사실일 경우의 얘기지만."

김 중위의 설명이 끝났으나.

부대원들은 영 석연치 않다는 표정이었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저 강철 리자드 같은 괴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는 건데."

"방어전도 아니고. 우리가 공격하는 측이라면. 흠...."

"위험하다 판단되면 후퇴하면 그만이니까. 그리고. 사실 탄약을 얻으려는 이유가 전부는 아니거든."

"예?"

이쪽은 실용적인 목적과는 거리가 멀긴 하다만.

큰 이유 중의 하나긴 하다.

"우린 여전히 군인이니까."

다른 군부대가 어떤 식으로 전멸했는지 확인하고.

빼앗긴 군부대를 탈환해야지 않겠는가.

'쯧. 탈영병 녀석들에게 부대에 나타났다는 괴물에 대해 들었다면 좋았을 텐데.'

한참 심문을 진행하던 중에 그 사달이 나 버린 탓에.

가장 중요한 정보를 못 물어본 게 아쉽게 됐다.

지금은 '열화된' 특성의 부작용으로 영향으로 기절해 있는 녀석들.

의무병의 말에 의하면 몇 주는 누워 있을 것 같다던가.

녀석들을 깨워서 묻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몇 주의 시간을 허비하기에는, 하루하루가 중요한 시기다.

"흠. 탄약대대에 방문한다면 한 가지 제안이 있는데."

김 중위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몇 번 방문해 본 적도 있다고 했지.

"여기. 이 산 있지?"

"예. 이 산이 뭐가 어떻길래 그러십니까."

지도를 가리키면서 말하는 김 중위.

그 입에서 나온 말은 꽤 놀라운 것이었다.

"사실. 여기서 내려다보면 탄약대대의 일부가 보이거든."

"...정말입니까!?"

"확실해. 우리 부대에서 탄약대대로 갈 때는 이 산길을 거치는데, 그때마다 보였던 풍경이니까. 착각할 리가 없지."

사실이라면 굉장히 유용한 정보다.

부대 안쪽의 사정을 대충이라도 볼 수 있다면 위험이 대폭 감소할 테니까.

거기다가.

"으음. 안쪽을 보고 갈 수 있다면."

"바보야, 그게 전부가 아니잖아."

"뭐?"

"신 병장님 눈!"

"...아!"

내가 가진 스킬.

[요리사의 눈]을 통해 괴물의 약점을 미리 파악할 수도 있을 테니.

"어? 그렇게 생각하면."

"충분히 할 만하겠군요."

위험하다고 생각하던 병사들의 의견도 바뀌었다.

"누구 다른 의견 없나?"

"...."

"좋아."

타 군부대와의 연락이 두절된 지 3달 가까이 된 시점.

드디어.

다른 부대에 방문할 때가 왔다.

* * *

공병들에 의해 개조된 차량에 탑승한 우리는 탄약대대 근처로 이동을 개시했다.

김 중위가 말했던 대로.

탄약대대의 풍경이 눈 안에 들어왔다.

그런데.

"...어."

"뭐랄까."

거기서 보인 풍경은

조금 의외의 것이었다

"너무 조용한데요?"

괴물에 의해 점거당했다던 부대.

그 안쪽은.

이상할 정도로 텅텅 비어 있었다.

48화 탄약대대 (2)

"너무 조용한데요?"

몬스터가 점거하고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탄약대대의 분위기는, 너무나도 고요했다.

"탈영병들의 말에 의하면, 탄약대대가 몬스터들하고 교전을 치른 건 분명한데."

"몬스터들이 군인들만 정리하고, 대대를 떠났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생각해 보면.

군부대라는 게 딱히 살기 좋은 환경은 아니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거점일 뿐. 괴물들이 그런 걸 고려하진 않을 테니.'

군인들의 생활에 필요한 모든 보급도 외부에서 들여와야 하는 공간.

몬스터들이라고 살기 좋은 환경인 것도 아닐 테니.

떠났을 확률도 있기야 하겠지만....

"아니, 그럴 것 같지는 않아."

"예? 이유가 뭡니까?"

"반쯤은 감이다."

우리가 근무하던 423방공대대를 습격한 리자드 무리.

치프틴을 쓰러트리면서 그 공세는 어느 정도 잦아들었지만.

'하루에도 열 마리 이상의 리자드가 꾸준히 부대를 공격해 왔지.'

치프틴과의 싸움을 생각하면, 리자드들은 멍청한 종족은 아니다.

병력을 모으고 적이 약해진 틈을 노리는 전략을 구사할 정도의 종족.

각성자가 늘어나며 방비를 갖춘 부대에 몇 마리씩 공격해 봐야 의미가 없다는 것 정도는 깨달을 수 있었을 터.

그럼에도 자살이나 다름없는 공격을 계속 강행했다.

기괴하기까지 한 집착.

어째서일까.

"군부대에는 유독 강력한 괴물들이 나타났다고 했지?"

"그렇지."

"괴물들이 부대를 점거할 필요가 없다면. 그 강력하다는 괴물들 입장에서 굳이 군대를 습격할 이유도 없잖아?"

아무리 강한 힘들 가진 괴물들이라고 한들.

굳이 위험한 군부대를 골라서 습격해야만 하는 이유는 없으니까.

하지만 녀석들은.

어째서인지 그렇게 했다.

"분명 의도가 있을 거야."

일전에 느꼈던 부분이 다시금 떠오른다.

인류를 공격하고자 하는 정체불명의 악의.

그것이 실존한다고 한다면.

"인류의 무력을 억제하려 하겠지."

"...."

"군인들이 죽었다고 해도, 정작 무기들이 모여 있는 군부대가 비어 있다면 결국은 살아남은 인간들이 그 무기를 이용해 재기를 노릴 수 있을 거야. 인류의 무력을 억제하려 한 모종의 의지가 실존한다고 한다면. 군부대를 쉽게 다시 탈환할 수 있도록 두지는 않을 것 같거든."

방심은 금물.

조용한 저 부대 안에, 어떤 괴물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피해갈 생각은 없다만.'

슬쩍 주변 눈치를 살폈다.

내 얘기를 들은 병사들은 꺼림칙한 표정이었다.

강적이 도사리고 있을 게 확실하다고 얘기한 셈이니까

"괜찮아 이것들아. 리자드들도 잘만 잡았잖냐."

"그렇지만. 부대에서 방어전을 치르던 때와는 다르지 않습니까."

이번엔 최소한 리자드들과 비슷한 세력을 상대로 우리가 공성전을 치러야 하는 셈이니까

확실히 쉽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공격하는 쪽에도 유리한 게 하나 있지."

"...? 뭡니까?"

"공격 타이밍을 정할 수 있다는 거."

부대에 불이 꺼진 순간 공격을 감행한 리자드들도 그랬으니까

슬쩍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간.

"진입은. 점심 식사 후에 한다."

가시 돋친 차량 중 하나의 트레일러를 열었다.

'취사 트레일러.'

공병들이 만들어 준 이동식 주방.

군부대를 공략하는 일이니까.

지금까지처럼 전투식량으로 때울 수는 없잖아.

"오랜만에 실력 발휘 좀 해 볼까."

* * *

정오가 조금 넘은 시각.

"꺼억...."

"아, 더럽게 진짜."

"헤헤. 죄송함다."

배부르게 식사를 마친 우리는 지금.

탄약대대의 정문 부근에 도착해 있었다.

넓은 부지를 자랑하는 탄약대대.

그 주변은 죄다 논밭이었고, 부대는 펜스로 둘러싸여 있었다.

우리 부대만큼은 아니지만 이곳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외진 장소.

난 슬쩍 탄약대대의 정문을 바라보았다.

본래라면 창살에 바리케이드 등으로 닫혀 있어야 하는 게 정상이지만.

"박살이 나 버렸군."

"그러게 말입니다."

괴물의 습격을 받아 입구의 바리케이드는 산산조각이 난 모습.

이제 보니 펜스 곳곳에도 커다란 구멍이 나 있거나, 아예 뜯겨 나간 곳도 보였다.

그러나.

전투의 흔적만 많을 뿐.

어째서인지 괴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진입해 보는 수밖에. 김 중위님!"

"어어."

"몇 번 와 보셨다고 하셨죠? 탄약고까지 가는 길은 아십니까?"

일단 우리의 제1 목표는 탄약의 확보.

다른 건물들은 무시하고 탄약고로 향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김 중위는 약간 얼굴을 찡그리며 답했다.

"알긴 아는데... 우리 부대가 보급받던 탄약고는 상당히 안쪽에 있어서. 일단 가까운 탄약고도 알긴 안다만."

"그럼 일단 가까운 쪽으로 안내해 주십쇼."

나와 병사들은 부대 정문의 잔해물들을 치운 뒤.

김 중위의 안내에 따라 탄약대대 내부로 진입했다.

단.

모두가 걸어서 진입한 것은 아니었다.

부릉....

전체적으로 날카로운 창날 등으로 무장한 전투차량들.

험악한 외형에 비해 소리는 극도로 적은 차량들이 느린 속도로 병사들의 보폭에 맞춰 전진했다.

'이동식 바리케이드.'

산맥을 내려올 당시 차량을 이용하고자 한 방법.

그때는 괴물의 손에 차량이 박살이 나며 실패로 돌아갔지만.

차량의 강화가 끝난 지금.

이제야 그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저기 보십쇼."

"음?"

"뭔가 날카로운 물건에 베인 듯한 흔적이...."

그렇게 김 중위의 안내를 따라 안쪽으로 진입하던 중.

한 병사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말했다.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자.

헌병들이 근무했을 법한 건물.

거기에 새겨진 커다란 베인 자국이 보였다.

"저건 대체."

"얼마나 큰 대검이여야 저런 흔적을 낼 수 있는 거야...?"

베인 자국이 흔적의 전부는 아니었다.

건물 이곳저곳에 보이는 총알 자국들.

탄약대대의 병사들이 저항한 흔적이겠지.

마치 전쟁 후의 도시를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괴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니.'

의문을 품은 채 넓은 탄약대대 부지 안쪽으로 들어가자.

부대 안쪽.

산에 걸쳐져 있는 묘한 구조물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기다."

겉으로 봤을 때는 산을 뚫고 들어가는 터널처럼 보이는 건축물들.

탄약고였다.

"여기까지 오면서 교전 한 번 없다니."

"하하. 이거 괜히 쫄았던 거 아닙니까?"

탄약고의 모습을 본 병사들이 말했다.

"내 생각이 틀렸던 건가?"

이쯤 되니 그런 생각도 들었다.

모든 군부대를 전멸시키려는 의지라든가, 뭐라든가.

어쩌면 그런 건 없던 게 아닐까.

그냥 우연히 괴물들이 군부대를 습격했을 뿐.

그 괴물들은 살기에 좋지도 않은 이 땅을 버리고 이동해 버린 게 아닐까, 하고.

"보십쇼. 탄약고 문도 잠겨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빨리 탄약부터 챙기죠?"

가벼운 발걸음으로 탄약고의 커다란 철문으로 향하는 병사들.

그들이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댄 순간.

갑자기 의문이 하나 생겨났다.

'탄약고 문이 잠겨 있지 않다고?'

본래라면 두꺼운 잠금장치로 잠겨 있어야 할 탄약고.

그 잠금장치가 해제된 채 문만 닫혀 있는 모습.

괴물들과 교전을 위해 탄약이 필요했을 테니, 열어 놓은 거라면 이해가 간다만.

그러면 아예 열려 있거나 해야지.

닫혀 있는데도 잠금장치만 열려 있을 이유가 있나...?

"그럼... 열겠습니다."

"잠까-."

"하나, 둘!"

뭔가 이상함을 느낀 내가 손을 뻗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두꺼운 철문에 다가간 병사들이 문을 열었다.

쿠구구구궁....

두꺼운 철문이 먼지를 떨어트리며 열렸다.

그 탄약고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우리가 기대한 탄약과 포탄 따위가 아니었다.

"어. 이건."

"거미줄?"

온통 거미줄로 뒤덮인 공간.

단순히 시설을 오랫동안 관리하지 않았다고 내려앉은 수준이 아니다.

본래 탄약고가 어떤 형태인지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

그 구석구석에는 하얀색 거대한 구체가 보였다.

'알, 인가?'

그것이 거대한 알 같다고 느꼈을 때.

하얀색 알의 외부에 실금이 가해졌다.

찌지직....

찍.

까드득-

무언가가 깨지고.

부서지고.

움직이는 듯한 소리.

이윽고.

투두둑.

깨진 알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캬아아아아악-!"

"뭐, 뭐야!?"

"제기랄!"

불길할 정도로 새하얀 몸체를 지닌 괴물.

마치 커다란 거미같이 생겼지만.

'평범한 거미는 절대 아니겠지!'

탄약고 안쪽 곳곳에 퍼져 있던 알들을 깨고 뛰쳐나오는 거미들.

녀석들이 문을 열었던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

"김 중위님! 일 안 하십니까!"

"저, 전투태세!"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하고 있는 김 중위의 이름을 부르자.

이제는 자동반사 같은 느낌으로 소리를 지르는 김 중위.

[지휘 명령 - 전투태세가 울려 퍼집니다!]

[아군의 전투 능력이 10% 상승합니다.]

[일시적으로, 모든 아군들에게 특성 - 전투태세가 부여됩니다.]

[특성 - 전투태세]

[일정 규모 이상의 아군과 진형을 구축해 전투에 임할 시, 전투 효율이 증가하며 전투로 인한 혼란에 면역을 지닌다.]

괜히 지휘관이라는 직업이 아니다.

본인의 전투 능력은 바닥을 기지만, 광범위로 퍼지는 버프.

"적인가."

"안 보인다 했더니, 여기 숨어 있었나 봅니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당황했던 병사들이었지만.

김 중위의 버프로 인해 혼란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무기를 뽑아 들고 공격에 대응하는 병사들.

"큭!"

"숫자가 상당하다!"

"...힘든 전투가 되겠어."

괴물의 공격을 받아친 병사가 말했다.

탄약고 안에 가득 차 있던 알들에서 튀어나온 괴물들.

그 숫자는 못 해도 수십.

잘하면 백 마리에 가깝지 않을까 싶을 정도.

'추측이 맞다면, 최소한 리자드 급의 괴물.'

그게 저 숫자라니.

공격을 막아 내고 있는 병사들 역시 긴장할 수밖에 없는 양이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병사들의 뒤에 가만히 서 있었다.

우리를 향해 달려든 거미 녀석들.

그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엄청난 숫자의 괴물들.

상대하기 위해선 그 약점을 파악하는 게 먼저일 테니까.

'거미... 같이 생기긴 했다만. 전혀 다르군.'

거미와 달리 잔털 하나 없이 매끈한, 갑각 같은 몸체.

크기는 인간의 허리까지 오는 대형견만 했다.

다리의 개수도 8개가 아닌 10개.

'아니... 저 앞다리 두 개는 다리가 아닌 건가?'

다른 다리들과 달리.

가장 앞에 달린 두 개의 앞다리는 잘 만들어진 칼을 보는 것처럼 날카로웠다.

그렇게.

짧은 관찰을 마치자.

[요리사의 눈이 발동합니다.]

[하급 요리 비결, '불완전한 아라크론의 흰거미' 손질법을 깨달았습니다.]

녀석의 손질법이 뇌리에 떠올랐다.

그런데 신경 쓰이는 문구가 하나.

'불완전한?'

[완전한 수정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불완전하게 태어난 아라크론의 흰거미.]

[성체가 되면 고기가 질겨져 요리하기 힘들어지지만, 유체 상태의 개체는 특유의 부드러움으로 별미로 여겨져 많은 미식가들의 사랑을 받는다.]

[단, 성체와 달리 유체의 살점은 많이 무른 편이기에 조리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살점이 뭉개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손질하는 것이 핵심으로써, 우선 식용으로 유용하지 않은 앞발을 잘라 낸 뒤-.]

거기에 이어진 '손질법'의 내용까지.

'하.'

이 녀석들.

완전한 형태가 아니잖아?

탄약고를 가득 메울 정도의 거미 무리들.

못해도 리자드와 비견될 괴물들이라는 정보에, 저 숫자.

처음에는 보기만 해도 두려울 정도의 위압감이었으나.

"신 병장님!"

"약점 같은 건 없는 겁니까!?"

약점을 묻는 병사들.

그들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없어도 될 것 같은데."

"예에?"

100마리의 괴물들.

하지만 우리 측의 각성자는 125인.

거기에 김 중위의 버프까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우리 부대만의 전투태세.'

나는 슬쩍 상태창을 열어 보았다.

최하단에 빛나고 있는 문구가 보였다.

[적용 중인 버프]

[요리 : 하급 요리사의 정성이 들어간 괴수 불고기 백반]

[모든 능력치가 대폭 상승합니다.]

[모든 특성 효과가 소폭 상승합니다.]

['하급 물리 저항' 효과가 적용됩니다.]

['하급 공격력 상승' 효과가 적용됩니다.]

['하급 마력 상승' 효과가 적용됩니다.]

[포만감이 최대로 채워진 상태입니다.]

[효과의 지속 시간이 연장됩니다.]

산맥에서 내려온 뒤.

쓸 만한 식재료는 모조리 소모한 탓에, 내가 할 수 있는 요리는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기껏해야 고기를 말려서 만드는 육포, 즉 전투식량.

그 외에는 고기볶음 정도.

하지만 식재료를 충분히 확보한 지금.

본격적으로 힘을 준 요리의 효과는, 고작 전투식량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고작 불량품들 따위는 상대도 안 될 정도로.'

그 효과는 곧바로 체감할 수 있었다.

적의 공격을 막아 내느라 바쁘던 병사들이었으나.

"뭐야, 이 녀석들."

"생각보다 할 만하잖아!"

이쪽이 더 강하단 것을 눈치챈 순간.

반격이 시작되었다.

"전사조! 전장으로!"

"사수조, 사격 개시!"

"사수나 마법사들은 조심해! 안쪽은 탄약고다!"

"화염이나 전기 계열들은 빠져 있어!"

강력한 버프를 온몸에 두른 군인들.

그에 맞서 탄약고 안에서 뛰쳐나오는 거미 괴물들.

그 전투 결과는.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

.

.

양민 학살 정도.

그 모습을 보니 알 수 있었다.

산맥에서 내려온 뒤.

이런저런 전투를 겪으며 부대원들의 레벨도 증가해 왔던바.

거기에 새로운 각성자들의 합류로 인한 시너지까지.

우리 부대.

'생각보다 훨씬. 강한가 본데?'

49화 탄약대대 (3)

두두두두....

퍼벙....

키야아악....

한없이 고요하던 87탄약대대.

그 한구석에서.

갑작스러운 큰 소리와 진동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로 인해.

스르륵....

깊은 곳에서 잠들어 있던 여왕.

그녀가 눈을 떴다.

'샤아아아...'

새하얗고 거대한 동체가, 어둠 속에서 몸을 일으킨다.

다만.

온전한 모습은 아니었다.

'샤악...'

몸을 일으키면서도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는 여왕.

그 몸은 군데군데가 그을려 있었으며, 상처에서는 기괴한 고름이 흘러나왔다.

군데군데가 그을리고, 베이고, 상처 입은 여왕.

고통을 억누른 채 눈을 뜬 여왕이, 감각을 퍼트리자 느껴진 것은....

...!!

수없이 많은 아이들의 죽음.

큰 전투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다.

지난 전투에서, 여왕은 자신의 아이들 대부분을 잃었다.

거기에, 여왕 자신까지 중상을 입어야만 했고.

잃어버린 아이들을 대신한 새로운 아이들이 태어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다.

여왕의 상처 또한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게다가 느껴지는 바로는.

지금의 침략자들은 직전의 적들보다 강력한 존재들인 것 같았다.

피해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지금.

더없이 위협적인 적들이기도 했다.

'샤아아악.'

종족의 존망이 걸린 위기.

그 지도자로서, 여왕은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전력의 손실이 큰 지금, 적들을 상대하는 건 손해가 큰 행위.

-승리한다고 해도, 먹잇감이 조금 늘어날 뿐, 이득은 적다.

-위험은 최소화해야만 한다.

짧은 시간에 모든 판단을 마친 여왕은, 잠들어 있는 아이들을 깨웠다.

적들을 피해 이동하기 위해.

종족의 명운이 쇠락하기 전이라면.

자존심이 걸려서라도, 결코 하지 않았을 선택이었으나.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것은, 종의 생존.

여왕으로서의 자존심 따위.

종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여왕이었다.

그러나.

[인간종의 무력 시설을 침공하고, 점거하라.]

[누구에게도 빼앗겨선 안 된다.]

여왕의 뇌리에.

한 가지 상념이 박혀 들었다.

'샤아아아아악...!'

종을 멸망으로 이끌 명령.

여왕은 강력하게 저항하려 했으나.

[누구에게도 빼앗겨선 안 된다.]

[누구에게도 빼앗겨선 안 된다.]

[누구에게도 빼앗겨선...]

[누구에게도...]

그녀의 저항 따위는 가볍게 무시한 채.

폭발적으로 밀려들어 오는 상념의 파도.

그것은 여왕의 이성을 지워 버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잠시 뒤.

그녀의 뇌리에 자리 잡은 것은, 종의 멸종에 대한 공포 따위가 아니었다.

순수한 분노.

그리고 적의.

'샤아아악!!!'

여왕은 상처 입은 몸을 일으키고, 지난 전투에서 살아남은 성체의 아이들을 깨웠다.

누구에게도 빼앗겨서는 안 되는 땅.

그곳을 침범한 침략자를, 제거하기 위해.

* * *

거미 괴물들과의 전투가 마무리된 뒤.

"으아. 거미줄."

"끄으. 먼지도 장난 아닌데요."

우리는 돔형 탄약고의 안쪽을 제대로 뒤지기 시작했다.

온통 잿빛 거미줄에 뒤덮여 있어 원래의 모습을 찾기도 힘들 지경이었던 탄약고.

하지만 어떻게든 그 먼지 쌓인 거미줄을 치워 내자.

"보십쇼! 포탄들입니다!"

"역시!"

우리가 탄약대대를 방문한 최대 목표.

탄약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상태도 멀쩡한 것 같은데요?"

"그야 뭐. 거미줄 밑에 깔려 있었으니."

"저 철물창고에 있던 녀석도 아니고. 괴물들이 탄약을 가지고 있어 봐야 뭐 하겠어."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정체불명의 포탄.

포병 출신 녀석들은 뭔지 대충 아는 듯한 느낌이었으나.

취사병 출신인 내 눈에는 그냥 포탄일 뿐이었다.

애초에 진짜 중요한 것은 다른 쪽.

"여기, 5미리 탄이다!"

"와아아아!"

우리 병사들이 사용하는 주력 화기는 K2.

그 K2의 탄약인 5.56mm 탄환을 발견한 것.

"초, 총알이다."

"그것도 이렇게 많이."

"크흑. 잘못하면 총검술이나 익힐 뻔했는데."

사실 나한테는 별 감흥은 없는 일이다.

나야 가진 특성이 '단도 숙련' 뿐이니.

총은 어디까지나 보조 무기일 뿐이란 말이지.

하지만 사수 계열의 각성자들에겐 많이 달랐나 보다.

거의 뭐 축제 분위기잖아?

"설마 저 정도로 좋아할 줄이야."

"아. 신 병장님은 모르셨나 봅니다?"

"모르다니. 뭘?"

"사수 각성자분들. 그동안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었슴다. 총알이 떨어질 때마다 머리카락이 몇 움큼씩 빠져나가서 원형탈모가 온 사람도 몇 명 있을 정도니, 할 말 다 했죠, 뭐."

"...."

"탈영병들한테 탄약통 얻어 오셨을 때도 사수조는 분위기가 장난 아니었다더라구요."

그 정도였다니.

하긴.

사수들의 조장인 서수혁 상병은 꽤 무뚝뚝한 편이지만.

그런 녀석이 탄약 확보 얘기를 듣자마자 표정이 바뀌었을 정도다.

다른 녀석들은 훨씬 심했겠지.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이 탄약고에 있는 양만 해도 상당한데.'

탄약고 옆에는 비슷하게 생긴 이글루식 탄약고들이 거리를 두고 늘어서 있었다.

그곳들까지 모두 감안한다면.

글쎄.

모르긴 몰라도 사수들이 연사를 당겨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을까.

산맥의 부대를 지킬 때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사수들.

녀석들의 화력이 돌아온 이상.

우리 부대의 화력은 최소한 1.5배 이상은 늘어난 셈이다.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지.'

사수들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총은 일반인도 사용할 수 있는 무기니까.'

탄약이 충분한 지금.

423대대에서 가져온 총기들과, 이 탄약대대에 남아있는 총기들의 양을 더하면 상당한 숫자가 될 터.

총기들은 각성 전의 생존자들에게 들려 줄 수도 있다.

각성 전의 생존자들이, 충분히 괜찮은 전력으로 활약할 수 있게 되는 것.

그렇게만 된다면.

생존자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빠르게 전력을 키울 수도 있지 않을까.

다만.

탄약고 안에서 발견한 모든 것들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우, 우와악!"

"신 병장님, 여기 좀 와 주십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탄약고를 둘러보던 중.

한쪽 구석을 둘러보던 병사들이 갑자기 소란을 떨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급하게 다가가자.

"이건."

탄약고 한구석.

거미줄에 둘둘 말려있는 고치 같은 것들이 보였다.

그중 하나.

병사가 뜯어서 내용물을 열어 놓은 듯한 고치.

그 안에 있는 것은.

"...사람이군."

* * *

"의준아, 결과는 어때?"

고치 안에서 발견된 인간들.

나는 급하게 우리 부대의 의무병을 불러 상태를 살폈다.

"아무래도, 탄약대대에서 근무하던 병사들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죽었습니다."

"...."

"몇 주 전까지는 살아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만."

"뭐?"

죽으면 죽은 거지.

얼마 전까지 살아 있었을 수도 있다는 건 무슨 얘긴가 했으나.

"어디서 들은 얘긴데. 거미는 먹이를 바로 잡아먹지 않고 마취한 뒤 보존해 둔다고 하더군요."

"굳이 죽이지 않고 보존한다니. 왜?"

"신선도를 유지하려는 거죠."

설명을 듣자.

군인의 시체가 이곳에 있는 이유가 이해가 갔다.

"먹이를 신선한 상태로 보관한 뒤에. 새끼들에게 양질의 먹이로 제공하는 겁니다."

탄약고 안에 널려 있던 거대한 알들.

그리고 썩지 않은 시체들.

알에서 깨어날 새끼들을 위해 식량을 마련해 둔 것이다.

"그렇게 마취된 상태라고는 해도. 아무런 영양분도 공급되지 않은 채로 한 달 가까이 있었던 셈이니까요. 생명 활동은 이미...."

"이해했다."

괴물에 의해 살해당한 인간들의 시체.

이런 걸 볼 때면 부대에서 처음 습격을 받은 날이 생각난다.

내 눈앞에서 죽은 후임들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쯧."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일단은 군번줄만 챙기고 물러난다. 시체들은 한곳에 모아두고."

"예."

"부대 탈환이 제대로 끝나고 나면. 정식으로 장례를 치러 줘야겠지."

그 후.

우리는 구석의 고치를 몇 개 더 열어 보았다.

그러자 나온 것은 또 다른 군인들.

"뭐야, 이건."

"몬스터 같은데요?"

그리고.

정체 모를 괴물들의 시체들이었다.

"이 괴물들도 그, 식량 대용인가 뭔가이려나요?"

"그렇겠지. 그나저나. 탄약고를 괴물들이 부화장으로 쓰고 있다니."

"하지만 지금까지 지나쳐 온 건물들에는 아무것도 없었잖아요? 왜 탄약고에만...?"

이상아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다른 곳은 모두 조용한데도 탄약고에만 알을 낳아 둔 이유.

나는 왠지 답을 알 것 같았다.

"탄약고가 이 부대 내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니까."

현대전에 있어서, 탄약은 어쩌면 식량보다도 더 중요할지도 모르는 물자다.

그 안에 보관하는 물건들의 중요성만큼, 탄약고는 철저히 안전하게 만들어진다.

우리가 있던 423대대 같은 일반적인 부대는 낡은 창고 건물에 총알을 쌓아 두고 때우는 경우도 있겠지만.

"하지만 이곳은 탄약 보급소잖아."

온갖 중화기, 대포, 미사일의 탄약들을 보관하는 장소.

그 탄약들의 중요성도 중요성이지만.

적이 탄약 보급소를 공격한다면 목표는 역시 탄약일 수밖에 없는 일.

침입해 왔을 때 가장 먼저 노릴 장소이기도 하단 말이지.

그렇기에 탄약고는 공중에서 봤을 때는 산의 일부처럼 보이도록 위장한다.

단단한 철문.

동굴 형태의 건물까지.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안전하다는 게 느껴질 정도인 장소.'

괴물들의 눈에도 비슷했겠지.

소중한 알을 외적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보였을 것이다.

"어. 그렇다는 건."

"반대로 말하면, 탄약고를 열 때마다 괴물이 튀어나올 확률이 높단 거네요?"

탄약고를 안전한 장소로 여기고 부화장으로 썼다면.

둥지로 쓰지 않을 이유도 없긴 하지.

"괜찮지 않습니까? 이번 전투는 말 그대로 일방적이었는데요."

"이런 괴물들, 몇 마리가 늘어나도 거뜬합니다!"

병사들이 기세 좋게 외쳤다.

확실히 그 말대로.

전투가 끝났음에도 우리 측은 가벼운 경상자만 몇 명 있을 뿐이다.

그마저도 사제와 치료사에 의해 완벽히 치료된 상태.

한껏 쫄았던 것과 달리 아군의 피해는 전무한 수준이다.

하지만.

"이번에 싸운 괴물들만 있다면 말이지."

"예?"

내 스킬.

'요리사의 눈'으로 알아낸 정보에 의하면.

'이 녀석들은, 유체에 불과하단 말이지?'

아기라고 하기도 뭐하다.

태어나기 전에 수정을 거치고 있던 수정란쯤의 위치인 듯하니.

'중국에서는 알에서 태어나기 직전의 병아리로 하는 요리 같은 게 있다던가?'

실제로 '요리사의 눈'이 제시하는 조리법도 그와 유사했다.

병아리와 다른 점이라면.

위협을 느끼자 직접 알을 깨고 나올 정도의 흉포함.

"이 녀석들의 성체는, 위험할 수도 있어."

"하지만, 아직 만나 보지도 않은 성체를 두려워할 필요가 있나?"

"뭐, 그 말도 맞지."

위험할 수도 있을 추측뿐.

위험한지 확인이 된 것도 아니니까.

그게 두려워서 여기서 물러날 필요도 없고.

"옆의 탄약고로 이동한다."

"예!"

내 명령에 따라 병사들이 다음 탄약고로 향했다.

그곳 역시 비슷하게 부화장이 되어 있는 상태였으나.

[경험치를 획득하셨습니다.]

"가뿐하네."

"한 번 싸워 본 녀석들이라. 아까보다도 쉬운 것 같슴다."

일방적인 학살이 재현될 뿐이었다.

"헤, 헤헤. 이렇게 탄약이 많다니."

"저 녀석들. 좋아 죽으려 하는구만."

그렇게 확보한 탄약의 양도 상당했다.

게다가 소총용 탄약만 중요한 게 아니다.

"이 포탄들, 잘하면 전투차량에 달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흠. 나쁘지 않겠는데요."

전쟁 병기 제조에 특화된 공병들.

녀석들은 여기서 얻은 포탄들을 이용할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모든 일이 생각보다도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부대를 습격한 괴물들은 다른 지역보다 강하다.

그 얘기를 듣고 많이 긴장했다만.

'이 정도라면....'

그렇게 안일한 생각이 머리를 지나친 순간.

쿠구구구구궁.

"어?"

"뭐야. 지진인가?"

갑자기.

부대 전체에 커다란 진동이 울려 퍼졌다.

당연히 지진이라도 일어난 건가 했으나.

-샤아아아아아아아악!!!

직후에 울려 퍼진 소리가.

방금의 진동이 평범한 지진이 아니었음을 알렸다.

* * *

"뭐, 뭐야!?"

"이 소리는 대체."

탄약대대의 중심에서 울려 퍼진 정체 모를 괴성.

그리고.

[아라크론의 마지막 여왕, 카틀라냐가 분노를 표출합니다.]

그 소리와 함께 눈앞에 나타나는 메시지.

[여왕의 분노가 전장을 뒤덮습니다!]

['아라크론의 흰 거미' 종족의 전투 능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아군의 전투 능력이 대폭 저하됩니다.]

익숙한 형식의 메시지.

방금 울려 퍼진 괴성이 어떤 것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피어...!"

423대대를 습격한 리자드 치프틴.

혹은 김 중위가 사용하는 지휘의 함성과 같은 종류의 능력.

적들의 능력을 위축시키고 아군을 강화하는 광역 버프다.

게임에서 으레 볼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니 신기할 건 없다만.

문제는.

"피어라니."

"이, 이렇게 광범위한 피어가 말이 됩니까!?"

그 괴성을 지른 괴물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

'소리가 크긴 했지만 가까이에서 난 건 아닌 것 같았어.'

상당한 거리가 있음이 확실함에도 불구.

우리에게 영향을 끼칠 정도의 피어라는 것.

"이거 위험하겠는데."

슬쩍 몸을 움직이자.

이전보다 약간 무거워진 것이 느껴진다.

'디버프가 작용하고 있는 거다.'

단순히 우리에게 적용된 디버프뿐이라면 문제는 없겠지.

하지만.

['아라크론의 흰 거미' 종족의 전투 능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문제는 저것.

이 정도로 광범위한 범위에 퍼진 피어.

'저 버프를 받을 괴물의 숫자는 대체 얼마나 된단 거야?'

그 의문은 곧바로 해소되었다.

두두두두두두두-.

피어가 퍼져나감과 동시에 들려오는 진동 소리.

"바로 옆이다!"

진동 소리의 진원지는 바로 옆쪽이었다.

우리가 아직 문을 열지 않은 다른 탄약고.

아니.

"괴물 녀석들의 부화장에서 난 소리군."

"그러면 방금 그 진동은...."

"알을 깨고 나오고 있다는 거겠지."

이윽고.

쿵! 쿵!

탄약고 안에서부터 들려 오는 커다란 소리.

탄약고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주변에 늘어선 상당한 숫자의 탄약고.

그 안에 있던 괴물들이 모두 알을 깨고 나온 뒤.

문을 부수고 뛰쳐나오려 하고 있다는 거다.

"아니. 그야 몇 마리 늘어나도 거뜬할 거라곤 했습니다만!"

"몇 마리 정도가 아니라 몇십 배는 되겠어.'

아무리 우리 부대가 강해졌다고 해도 그렇지.

그 정도로 늘어나면, 조금 많이 곤란하다.

"김 중위님! 뭐 하십니까!"

"아, 응! 전원 전투 태세!"

[지휘의 외침이 울려 퍼집니다.]

[여왕의 분노를 일부 무마합니다. 능력치 저하치가 감소됩니다.]

이제는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버프가 나오는 버프 자판기가 되어 버린 김 중위.

그러나 그 버프의 효과를 확인한 나는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능력치를 올리기는커녕. 저하된 능력치를 깎는 정도가 전부라."

"미, 미안하다."

"아뇨. 김 중위님을 탓하는 건 아닙니다."

방금 울려 퍼진 피어가 그만큼 강력하단 뜻.

이 정도라면 김 중위만으로 부족하다.

"전광일!"

"예, 상병 전광일!"

전사조를 지휘하던 전사조장.

광일이를 불렀다.

"김 중위론 모자랄 것 같다! 광일이, 너도 해!"

"예!"

뭘 하라는 건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명령을 받은 광일이 녀석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크허어어어어어엉!"

짐승 같은 괴성을 내질렀다.

['광기의 함성'이 울려 퍼집니다.]

[아군에게 최하급 혼란이 적용됩니다.]

[지휘의 외침이 최하급 혼란을 무마합니다.]

[아군에게 중급 능력치 상승이 적용됩니다.]

['여왕의 분노'를 일부 무마합니다.]

['여왕의 분노'의 능력치 저하 효과가 사라집니다.]

광일이 녀석은 치프틴과의 전투에서 피어 계열의 스킬을 얻었다.

다만.

애초에 버퍼 계열인 김 중위나 나와는 다르다.

'광일이 녀석은 전사직이니까.'

그럼에도 버프 계열의 스킬이 있기는 하지만.

녀석의 피어는 지속 시간도 길지 않고, 횟수 제한도 주에 3회 정도.

게다가, 단독으로 사용하면 최하급 혼란을 준다는 디버프까지 엮여 있다.

아낄 수 있으면 가능한 한 아껴야 하는 능력이다 보니 지금까지 쓴 적은 없었다.

바로 지금 같은 순간을 위해.

'디버프는 모두 제거했다. 당장은 이 정도가 최선이야.'

그때.

쿵... 쿵....

쿠웅!

커다란 소리와 함께 바로 옆의 탄약고 문이 부서져 나갔다.

그 안에서 거미 괴물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전장으로!"

"군단의 승리를 위하여!!!"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던 부대원들이 거미들과 격돌했다.

광일이와 김 중위의 피어 덕에 우리 측의 능력치 저하는 사라졌다만.

추가적인 버프는 나의 전투식량을 통한 버프밖에 없는 수준.

엄청난 전투력 감소.

반대로 적들은 버프를 받아 전투력이 향상된 상태.

"쯧."

버프를 제외한 전력 자체는 우리 측이 앞선다.

당장 튀어나온 괴물들 정도라면 문제는 없겠지.

쿵....

쿵....

하지만 다른 탄약고 건물들에서도 괴물들이 뛰쳐나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쩌면.

이 부대 곳곳에 퍼져 있는 괴물들이 우리를 사냥하기 위해 몰려오고 있지 않을까?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괴물들을 한 번에 상대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해.'

그렇다면.

나는 결심을 내리고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전원, 최대한 천천히 물러나면서 차량에 탑승한다!"

"신 병장님!?"

"차량에 탑승하라니, 갑자기 왜...!"

전투 중인 병사들이 의아한 듯 물었다.

우리 측의 버프는 미비하고 적측의 버프는 많다.

더군다나 수적으로도 곧 열세가 될 게 분명한 상황.

그렇다면.

"상황을 바꿔야지 않겠냐."

분명 우리 쪽이 여유롭던 전투.

하지만 한 번에 뒤집혀 버린 상황.

이 사달을 낸 장본인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아라크론의 마지막 여왕, 카틀라냐가 분노를 표출합니다.]

저, 마지막 여왕이라는 이름의 괴물.

피어를 퍼트리며 우리를 사냥하려는 장본인.

그녀의 분노가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으니.

그렇다면.

"대장부터 부수는 게 정석이지."

여왕을.

사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