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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 ☆

의식이 끝나자 모인 트롤들은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제단을 걸어 내려오며 아틸카가 레펜하르트에게 살짝 목례를 했다.

"와 주셨군요, 권왕이여."

"탄생의 의식을 참관하는 영광을 어찌 놓치겠는가?"

진심 어린 레펜하르트의 대답에 아틸카가 혀를 내둘렀다.

"정말 권왕께선 진정으로 우리의 문화를 이해하고 있군요. 처음 보는 인간이라면 기겁하며 야만적이라 소리쳐도 이상하지 않을 터인데."

레펜하르트는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사실은 전생 때 한번 그랬었다. 기껏 친구로 삼은 아틸카가 심장이 뽑히는 걸 보고 얼마나 기겁했던가? 당장 양손에 뇌격과 불꽃을 머금고 다 죽여 버리겠다고 설쳐 대기도 했다.

다행히 금방 아틸카가 되살아나 오해를 풀었지만, 그때 놀랐던 기분은 여전히 기억에 생생하다.

"하하, 뭐, 이래저래 들은 것이 있어서...."

시리스가 아틸카를 보며 핀잔을 던졌다.

"아유, 깜짝 놀랐잖아요. 미리 언질이라도 주시든가."

"어? 미리 설명 안 해 주셨습니까?"

아틸카가 눈을 껌뻑이며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레펜하르트가 차분하게 대꾸했다.

"선입견 없이 받아들이길 바랐지."

하지만 어째 눈치를 보니, 자기도 기겁했으니 남들도 당해 봐야 한다는 심보 같기도 했다.

아틸카는 슬쩍 눈을 가늘게 떴다. 레펜하르트가 휘파람을 불며 딴청을 피웠다.

그때 이니야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아틸카에게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스티리아 일족의 수장, 이니야라고 합니다."

"아, 이번에 새로 이주해 오셨다는...."

이니야가 엘프의 예법으로 인사를 건넸다. 아틸카도 트롤의 예법대로, 양손을 모아 합장하며 답했다.

"대자연의 뜻을 따르는 자, 구루 아틸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인사를 나눈 뒤 이니야가 품을 뒤적거려 뭔가를 꺼냈다. 제법 커다란 상자였다. 그것을 내밀며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이웃이 되었으니 친하게 지내야겠지요. 그래서 가벼운 선물을 준비해 왔답니다."

아틸카가 살짝 놀란 얼굴로 상자를 받아 들었다.

이제껏 많은 엘프와 오크, 드워프들이 안타레스 백국에 모였지만 인사는 해도 딱히 서로 간에 선물을 하거나 하는 경우는 없었다. 이는 인간의 풍습이지 그들의 풍습이 아닌 것이다. 이종족들에게 선물을 주는 행위는 대단히 큰 호의를 보이는 경우에나 있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선물받아 기분 나쁠 이유는 절대 없다.

아틸카가 상자를 열어 보았다. 광택이 도는 새하얀 천이 상자 가득 들어 있었다. 현재 이니야가 입고 있는 옷과 같은 재질, 바로 스티리아 일족이 자랑하는 스노우 엘븐 실크였다.

아틸카가 감탄을 터트렸다.

"허어, 이런 귀한 것을...."

흙을 빚어 대부분의 물품을 마련하는 트롤들에겐 천이 제일 귀한 물건이었다. 뭐, 워낙 재생력이 높다 보니 의복이라 봤자 비부만 가리는 정도로 충분해 크게 천 쓸 일이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래저래 쓸 일이 있긴 한 것이다. 가죽이야 짐승을 죽여 얻는 치 떨리는 야만적인 물품일 뿐이고.

그냥 천도 아닌, 귀한 엘븐 실크를 받은 아틸카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눈에 띠게 호감을 보이는 아틸카를 보며 이니야는 속으로 씩 웃었다.

'됐다!'

이 트롤이 레펜하르트와 친분이 깊다는 소리는 이미 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여기까지 왔다. 자고로 장수를 잡으려면 말부터 노리라 하지 않았던가? 벌써부터 착실히 주변 인물 공략에 들어가고 있는 이니야였다.

아틸카와 이니야가 사이좋아 보이니 레펜하르트도 흐뭇해졌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시리스만 홀로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 저 여자, 점점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이 참, 내가 왜 이러지?'

아틸카도 10년 넘게 세상을 떠돈 자, 결코 눈치가 없지 않다.

'호오?'

바로 레펜하르트와 시리스, 이니야 사이에 떠도는 묘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정확히는 레펜하르트는 멍하니 있고, 그냥 두 여자 사이에서만 감돌고 있었지만.)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아틸카가 슬쩍 레펜하르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틸카도 2미터의 장신이라 충분히 어깨동무가 되었다.

그 상태로 아틸카가 속삭이듯 말을 건넸다.

"권왕이여."

"왜 그러나, 아틸카?"

"제가 트롤들 사이에 전해지는 노래를 하나 들려 드리지요."

어리둥절해하는 레펜하르트를 향해 아틸카가 조용히 곡조를 뽑았다.

해와 달은 함께 뜰 수 없으니

낮이 가야 밤이 오는도다.

얼음과 불이 함께하면 재앙이 닥치니

현명한 자여

상생과 상극은 한 끗 차이임을 알라.

"아시겠습니까, 권왕이시여?"

레펜하르트는 눈을 껌뻑였다.

'미안, 뭔 소린지 전혀 모르겠어....'

하긴 이 양반, 예전부터 뭐 좀 물어볼라치면 만날 이런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곤 했다. 괜히 레펜하르트가 마켈린하고만 주로 상담을 한 것이 아니었다. 분명 아틸카도 현명하긴 한데, 좀 현명함이 지나치다 보니 일반인(?)인 레펜하르트로서는 도저히 알아먹을 수 없는 대답이 많았던 것이다.

하여튼, 뭔가 충고를 한 것 같기는 하다. 뭔 소리냐고 되물어 봐야 또 뜬구름 대답만 돌아올 것이 빤한지라 레펜하르트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유념하도록 하지."

시찰도 끝났고 의식도 보았으니 레펜하르트는 백왕성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시리스와 이니야도 자연스레 그 뒤를 따랐다. 마을 밖에 묶어 둔 말들에게로 향하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아틸카가 히죽 웃었다.

"좋을 때다~."

2

안타레스 백왕성의 집무실.

오늘도 레펜하르트는 업무에 열심이었다. 한창 그가 이종족들의 생활에 대한 보고서들을 처리하고 최종 결재를 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똑!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계신가요, 레펜하르트 님?"

곧이어 문이 열리며 커다란 쟁반을 든 엘프 미녀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레펜하르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이니야."

안타레스 백국에 합류한 이래, 이니야는 틈만 나면 레펜하르트를 찾아오곤 했다. 그나마 스티리아 일족이 엘븐 포레스트에 정착하는 초반엔 그래도 사흘에 한 번 정도였는데, 요새는 아예 거의 백왕성에 거주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도 자주 찾아오다 보니 이젠 레펜하르트도 그러려니 하는 표정이었다.

"오늘은 또 어쩐 일로?"

방실방실 웃으며 이니야가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응접실의 테이블 위에 그녀가 요리를 차렸다. 향긋한 소스를 뿌려 구운, 스티리아 엘프들의 특제 요리법으로 만든 농어구이였다.

살아왔던 환경 덕분에 단하임 일족이 고기 요리에 능하듯, 스티리아 일족은 생선 요리에 능했다. 신선한 과실과 맑은 이슬만 먹고 살았다는 엘프 조상들이 보았다면 땅을 치고 통곡했을 일이겠지만, 오지에서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엘프의 식습관도 상당히 변화를 겪은 것이다.

"너무 일만 하시면 몸 축난답니다. 식사라도 거르실까 싶어 조촐하나마 음식을 좀 들고 왔어요."

요리를 차린 뒤 이니야가 레펜하르트의 팔을 잡아끌며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레펜하르트가 어색해하며 자리에 앉았다.

"아, 예...."

사실은 식사 같은 거 거른 적 없다. 밥때 되면 시리스가 세 끼 꼬박꼬박 챙겨 주는데 굶을 일이 뭐가 있겠는가?

물론 전생 때야 정신없이 바쁘다 보면 식욕을 잃어 가끔 끼니를 거르거나 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의 이 무식한 육체는 언제 어디서 무슨 상황에 닥친다 해도 결코 식욕을 잃는 일이 없는 것이다. 차라리 업무 보면서 같이 먹음 먹었지, 식욕 없다고 상 물리는 일 따윈 지금의 그에겐 결코 존재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어쨌거나 기껏 가져온 요리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 마침 식사 때가 다 되기도 해서 레펜하르트도 감사히 받아들였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농어구이를 입에 넣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이니야가 은근히 물었다.

"입에 맞으시나요?"

레펜하르트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훌륭합니다. 특히 소스의 배합이 절묘하군요."

이니야는 속으로 쾌재를 울렸다. 호감도 올려 보려고 일부러 요리 들고 왔는데, 아무래도 표정을 보니 꽤 먹힌 것 같았다.

이 농어구이, 사실 이니야가 만든 것은 아니었다. 평생 검만 휘둘러 온 그녀가 요리 따위 할 일이 언제 있었겠는가? 당연히 일족의 여인 시켜서 요리한 걸 자기가 만든 것인 양 들고 왔을 뿐이다.

하지만 레펜하르트가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지. 그녀가 슬쩍 곁에 앉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인간들 속담에, 예쁜 여자와는 3년 동안 행복하지만 요리 잘하는 여자와는 30년 동안 행복하다는 이야기가 있다더군요."

은근슬쩍 노골적인 화제를 꺼내 드는 이니야였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 속담도 있긴 하지요."

딱히 그가 둔해서라기보다는, 눈치채지 못할 이유가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계속 포크질을 하며 태연하게 말을 건넸다.

"아, 참. 타리야 양에게도 잘 먹었다고 좀 전해 주십시오."

'헉!'

그렇다. 레펜하르트는 이미 전생 때에도 스티리아 일족에게 음식 많이 얻어먹어 본 적이 있는 것이다. 이 소스 맛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저들 중 제일가는 요리사 엘프, 타리야의 솜씨임이 틀림없다.

무심코 나온 레펜하르트의 발언에 이니야가 뜨끔해하며 딴청을 피웠다.

'...어떻게 알았지?'

새삼 그녀는 감탄했다.

'역시 현명한 지혜의 소유자!'

과연 자신이 선택한 남자다운 놀라운 혜안이란 생각이 들었다. 뭐, 이쯤 되면 슬슬 지혜의 범주도 아닌 것 같지만 한번 씌워진 콩깍지는 모든 것을 합리화시키고 있었다.

"그,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네...."

총총 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가는 이니야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 꼭 도망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이 자리에서 도망갈 이유가 없었다.

"뭐지?"

의아해하다가, 레펜하르트는 그냥 신경 끄고 식사에 열중했다. 그때 다시 문이 열리며 이번엔 평소처럼 시리스가 식사를 들고 왔다.

"어서 와, 시리스."

입가에 소스를 묻힌 채 레펜하르트가 손을 들었다. 시리스가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조용히 물었다.

"어머나? 벌써 식사 중이시네요?"

"응, 이니야가 갖다 준 거야. 그것도 내려놔. 같이 먹자."

별생각 없이 레펜하르트가 테이블에 손짓을 했다. 제라드에게서 수련을 받을 시절엔 오크 일개 중대 단위의 솥단지도 싹싹 비웠던 몸이다. 까짓것 2인분쯤이야 얼마든지 먹어 치울 수 있었다.

그런데....

"오호? 이니야 씨가 왔다 갔었군요?"

테이블 위에 식사를 내려놓으며 시리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순간 레펜하르트는 움찔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시리스의 표정이 대단히 살벌했다.

분명 입가는 웃고 있는데 눈이... 눈이....

'왜 저러지?'

"그럼 맛있게 드세요."

차분하게 요리를 내려놓은 뒤 시리스가 사뿐사뿐 방을 나섰다.

"어? 같이 안 먹어?"

"배 안 고파요."

쾅!

문이 대단히 거칠게 닫혔다. 레펜하르트는 당황했다. 왠지 시리스가 화가 난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화낼 만한 짓을 저지른 기억이 없었다.

"음...."

레펜하르트는 진지하게 전후 상황을 파악했다. 그리고 마법사답게 합리적인 결론을 내렸다.

"바람이 좀 세게 불었나 보군."

☆ ☆ ☆

집무실을 빠져나온 이니야는 흐느적흐느적 걸음을 옮겼다.

얼굴이 연신 화끈거렸다.

'하아, 들킨 걸까? 눈치채고도 모른 척해 준 걸까? 부끄러워....'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리호리한 엘프 남자가 그녀를 보며 물었다.

"이니야 님, 표정을 보니 일이 잘 안 풀린 것 같군요?"

그는 이니야의 부관, 세르펠이었다. 이니야의 심복으로 그녀가 수장이 된 이래 50년 넘게 곁에 머무른 충성스러운 수하다.

"그렇게 저 인간 남자가 좋으십니까?"

회랑 저편을 보며 세르펠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이니야가 싸늘한 눈으로 세르펠을 바라보았다.

"흐음."

호리호리하면서도 날렵한 체구에 여인처럼 우아한 미모를 지닌 세르펠은 스티리아 일족 사이에서도 제법 인기가 많은 편이다.

이니야가 갑자기 세르펠을 등 뒤에서 껴안았다. 등 뒤로 풍만한 가슴이 와 닿는데도 세르펠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잠시 후 이니야가 혀를 차며 몸을 뗐다.

"넌 이렇게 껴안아도 전혀 흥분이 되지 않아."

세르펠이 진지하게 대꾸했다.

"만약 흥분하셨으면 울면서 반항했을 겁니다."

이니야는 아련한 눈으로 회랑 저편, 레펜하르트의 집무실을 바라보았다. 그의 우람한 가슴팍을 떠올리기만 해도 절로 가슴이 두근거린다.

'역시 달라.'

역시 일족의 남자들은 아무리 좋게 봐 주려 해도 전혀 흥분이 되지 않는다. 이니야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해야 그분의 마음에 들 수 있을까?"

"남의 요리로 사기 치는 것보다는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차분하게 대꾸하는 세르펠을 향해 이니야는 눈을 흘겼다. 이 충성스러운 수하는 다 좋은데 너무 말을 고르지 않는 버릇이 있었다.

"그는 강력한 전사입니다. 이니야 님의 장점을 충분히 알아봐 줄 거라 봅니다만."

"그럴까?"

물론 입은 좀 험해도 세르펠은 충성스러운 부하였다. 당연히 수장인 이니야의 행복을 마음 깊이 빌고 있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여기저기 정보를 모아 두기도 했다.

"이건 들은 이야기인데...."

세르펠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레펜하르트 님은 완벽한 권사이지만, 한 분야는 유독 취약하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특별히 그 분야를 신경 쓰고 계시다고...."

이니야가 고양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호옹?"

☆ ☆ ☆

백왕성 중턱의 레펜하르트 전용 연무장.

그곳에 지금 두 남자가 웃통을 벗은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흐읍!"

숨을 멈추며 러스가 낮은 자세로 태클을 들어간다. 순간 레펜하르트가 두 다리를 뒤로하며 러스의 등을 눌러 태클을 막았다. 러스가 이내 레펜하르트의 허리를 잡고 다리를 노리자 바로 손을 밀어 다리를 빼며 재차 자세를 잡는다.

교착 상태가 되자 러스가 칭찬을 건넸다.

"많이 좋아지셨군요, 형님."

몸을 떼며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그래? 확실히 이젠 좀 개념을 알 것 같아."

테스론에게 호되게 당한 후, 레펜하르트는 틈만 나면 러스를 상대로 그라운드 기술에 대해 배워 왔다. 지금도 업무 중간에 짬을 내어 대련 중이었다.

러스가 어깨를 매만지며 말했다.

"이제 슬슬 저는 형님 상대하기가 힘에 부치네요. 역시 육체적 차이가 너무 커서...."

예전에야 워낙 문외한이라 그 좋은 육체 가지고도 테스론에게 농락당했지만, 어느 정도 그라운드 레슬링에 조예가 있으면 근력 자체도 훌륭한 무기가 되는 것이다.

"이 정도면 테스론과 맞붙을 수 있을까?"

"글쎄요, 제가 아는 그라운드 기술도 그냥 기사들이 기초적으로 배우는 것에 불과해서, 제대로 된 카르지안 유술가를 상대로라면 어떻게 될지는 모릅니다."

"으음, 전문가를 초빙해야 하려나?"

그렇게 레펜하르트가 고민하던 때였다. 연무장에서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가르쳐 드릴까요?"

"아, 이니야 씨."

러스가 이니야를 보고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요새 이니야는 아예 백왕성에 방 하나 잡고 자기 집처럼 돌아다니고 있어, 이렇게 갑자기 연무장에 나타나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게다가 오러 유저다 보니 이미 이니야의 존재 자체는 아까부터 감지하고 있었다.

연무장 안으로 들어서며 이니야가 레펜하르트에게 물었다.

"저도 그라운드 기술은 조금 알고 있는데, 한번 대련해 보시지 않겠어요?"

"에, 그게...."

레펜하르트는 당황하며 이니야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그녀는 평소처럼 털토시를 착용하지 않은 간단한 옷가지만을 걸친 단순한 차림이었다. 슬슬 날씨가 더워져 그런지 날씬한 팔다리도 시원하게 내놓고 있다.

저런 차림의 여인과 엉겨 붙어 그라운드 레슬링을 하라고? 맨살이 그대로 닿을 텐데?

레펜하르트가 당황하며 중얼거렸다.

"남녀가 유별한데 어찌...."

"무인에게 남녀 구별이 어디 있나요?"

진지한 그녀의 반문에 레펜하르트는 말을 더듬었다. 확실히 이건 상대를 전사로 인정치 않는 무례한 발언이다.

"그, 그렇지요, 죄송합니다."

러스가 눈을 빛내며 뒤로 물러났다. 안 그래도 이니야와 칼켄이 싸울 때 옆에서 구경하며 참 건진 게 많았다. 이번에도 한 건 올리나 싶어 러스가 대련을 부추겼다.

"해 보시죠, 형님. 그녀의 실력은 대단합니다. 칼켄 공과 맨손 체술로도 밀리지 않았으니까요."

레펜하르트가 새삼 놀란 눈으로 이니야를 바라보았다.

"그래?"

이니야가 연무장 가운데로 자리를 옮겼다. 전사다운 자세로 탈바꿈한 이니야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진지하게 대련에 임해 주세요."

화르륵!

은빛 오러가 불길처럼 타올라 이니야의 전신을 감쌌다. 그 강렬한 기세에 레펜하르트도 감히 경시할 수 없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인사를 건넨 뒤 레펜하르트도 오러를 끌어 올렸다. 연무장 좌우로 금빛과 은빛의 오러가 소용돌이친다. 순간 레펜하르트가 몸을 날렸다.

"헙!"

대지를 밟으며 그가 펀치를 길게 찔러 넣었다. 파워와 스피드를 평소의 절반 정도로 줄인 일격이 이니야의 어깨를 노리며 뻗어 갔다.

펀치가 막 이니야에게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빙긋 웃으며 그녀가 몸을 뒤로 뉘였다. 동시에 레펜하르트를 향해 양다리를 활짝 벌린다.

"어?"

대단히 야한 자세라 레펜하르트가 순간 얼굴을 붉힐 때였다.

"흡!"

숨을 멈춘 채 이니야가 양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며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어라라?"

돌진하던 레펜하르트가 기세를 멈추지 못하고 바로 앞으로 엎어져 버린다. 이니야가 허리를 감은 양다리를 그의 어깨 위로 들어 올렸다. 종아리와 허벅지를 이용해 레펜하르트의 목을 조르기 시작한다. 삼각 조르기가 제대로 들어간 것이다.

구경하던 러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거, 카르지안 유술이잖아? 엘프가 어디서 저런 인간의 기술을 배운 거지?'

게다가 기술의 정확성과 스피드도 놀라운 수준이었다. 정통 카르지안 유술가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어 보였다.

"으음!"

단숨에 목이 죄이자 레펜하르트가 빠르게 반격에 나섰다.

이젠 그도 예전처럼 그라운드 기술에 전혀 문외한인 것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기술이 들어올 줄 몰라 잠시 허를 찔렸지만, 바로 상대의 다리 사이로 손을 넣어 경동맥을 보호했다.

하지만 그 동작마저도 이니야에게는 다음 기술을 걸기 좋은 자세일 뿐이었다.

경동맥으로 옮겨진 레펜하르트의 왼손을 도리어 밀어내더니 바로 몸을 뒤틀며 반동을 이용해 자세를 바꿨다. 그러자 이번엔 레펜하르트가 자기 팔뚝으로 자기 목을 조르는 꼴이 되어 버렸다.

"캑캑!"

숨이 막힌 레펜하르트가 억지로 힘을 써서 이니야를 떼어 냈다. 그러자 그 힘을 이용해 몸을 빙글 돌렸다. 단숨에 두 남녀의 자리가 뒤바뀌며, 이니야가 레펜하르트의 배를 깔고 올라탔다.

마운트 자세를 취한 채 이니야가 레펜하르트를 내려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소감이 어떠냐는 표정이었다.

레펜하르트가 진심으로 감탄을 건넸다.

"대단한 실력이군요!"

"감사합니다."

인정받은 것이 기뻤는지 이니야가 활짝 웃었다. 레펜하르트는 혀를 내둘렀다.

'와, 뭐가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르겠는데 그냥 밑으로 깔려 버렸네.'

그렇다고 이니야가 레펜하르트보다 강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이 상태로도 레펜하르트는 이제 마음만 먹으면 빠져나갈 방법이 있었다. 굳이 마법이나 스파이럴 가드가 아니더라도, 근력 자체가 월등한 이상 힘으로 밀어붙이면 되는 것이다.

예전에야 어느 방향으로 힘을 써야 할지 몰라서 당했지만, 이제 그도 관절기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은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디까지나 기술을 배우기 위한 대련이다.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가야 합니까?"

"몸을 옆으로 뒤틀면서 오른 무릎을 드세요. 그리고 제 무릎을 밀면서...."

이니야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 방법대로 몸을 움직이자 자연스럽게 몸이 빠져나간다. 안 그래도 고민이었는데 타이밍 좋게 이런 달인을 만나게 되다니.

"정말 그대를 만나 다행이군요, 이니야."

저 말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이니야의 표정이 순간 새빨개졌다.

"카르지안 유술은 어디서 배우신 겁니까?"

"예전에 엘프인 걸 숨기고 대륙의 강자를 찾아 떠돌아다녔던 적이 있지요. 그때 연이 닿았답니다."

엘프 여성은 가슴이 작다는 것이 대륙 전체에 퍼진 정설이다. 그렇다 보니 긴 귀를 가리고 인간에게 나올 수 없는 보랏빛 머리칼만 염색하면, 풍만한 가슴의 소유자인 이니야를 엘프라고 알아보는 이들이 없었던 것이다.

이니야가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계속해 볼까요?"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은 엉겨 붙은 채 계속 기술을 교환했다. 그 와중에 오러를 이용, 상대의 흐름을 제어하려는 시도도 꾸준히 이어졌다.

참으로 값진 경험이었다. 그라운드 기술뿐 아니라 오러의 운용법 역시 배울 점이 컸다. 땀을 흘리며 그는 정신을 집중하고 계속 이니야의 가르침대로 몸을 움직였다.

문득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이것이 카르지안 유술입니까?"

"네, 이것이 카르지안 유술이랍니다."

레펜하르트의 가슴에 안긴 채 이니야가 나긋나긋하게 대꾸했다.

"그런데...."

레펜하르트가 살짝 의아해하며 질문을 이었다.

"카르지안 유술에 이렇게 가슴을 더듬는 기술도 있습니까?"

어째 기술 공방을 계속하며 이상하게 자꾸 이니야가 그의 가슴팍이며 복부, 팔뚝을 더듬었던 것이다. 아무리 고민해도 저 손짓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니야가 배시시 웃었다.

"이건 레펜하르트 님의 육체 포텐셜을 측정하는 거랍니다."

"아, 그렇군요."

과연, 카르지안 유술과는 관계없는 것이었구나.

납득하며 레펜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아하던 부분이 싹 날아가며 다시 머리가 맑아진다. 정신을 집중하며 그는 다시 대련에 임했다.

그리고 잠시 후.

"이니야."

"네?"

"포텐셜을 좀 자주 측정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보다 정확한 측정을 위해서랍니다."

"그렇군요...."

뭔가 살짝 수상하긴 한데, 딱히 또 흠잡을 부분은 없는 대답이었다. 가르침을 받는 성실한 제자의 자세로, 레펜하르트는 그냥 납득하고 계속 대련에 임했다.

레펜하르트는 열심히 이니야와 대련을 했다. 물론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다 보니 거의 바닥에 깔려 나뒹굴 뿐이다.

그리고 이니야는 실실 웃고 있었다.

'아, 복근도 정말 강철처럼 탄탄해!'

"이, 이니야. 왠지 웃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만."

"레펜하르트 님이 빨리 배우시니 기뻐서요."

"...."

☆ ☆ ☆

시리스는 씩씩대며 회랑을 걷고 있었다.

'이니야라는 저 여자 뭐야? 레펜하르트 님은 또 뭐고?'

걸음을 옮기다보니 항시 마법을 수련하던 앞뜰이 나온다. 시리스는 투덜대며 나무 아래 설치된 의자가 풀썩 주저앉았다.

그렇게 뚱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저만치서 머리를 곱게 땋아 올린 작은 소녀가 다가왔다. 외모는 어린 주제에 가슴만은 풍만한, 드워프 처녀 틸라였다.

틸라가 시리스를 보더니 빙그레 웃으며 다가왔다.

"어머나, 시리스? 왜 그리 화가 났어요?"

"화 안 났어요."

틸라가 놀리는 목소리로 시리스의 뺨을 쿡 찔렀다.

"양 뺨을 그렇게 부풀리고 씩씩대면서 대답해 봤자 설득력 없어요."

"...우웅."

곁에 앉아 틸라가 슬쩍 물었다.

"역시, 그 이니야라는 분 때문에 그런 거죠?"

안색이 확 바뀌는 시리스를 보며 틸라는 속으로 웃었다.

질투다. 역시 질투하는 거다.

'귀엽네.'

아직 사춘기 소녀인 시리스에 비해 틸라는 어엿한 성인 드워프, 실제로 살아온 세월도 30년 이상 차이 난다. 이 어린 엘프 소녀를 보며 틸라가 달래듯 말을 건넸다.

"거봐요. 레펜하르트 님 정도면 정말 멋있는 남자라니까요?"

"...레펜하르트 님이 멋있어요?"

시리스가 뜨악한 얼굴로 반문했다.

그녀는 엘프였고, 엘프다운 심미관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레펜하르트가 좋은 사람이고 소중한 사람이긴 하지만 멋있냐고 하면 그건 좀....

'만날 웃통 벗고 가슴 씰룩거리면서 돌아다니는 사람이 대체 무슨 멋?'

틸라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레펜하르트 님? 무지 멋있잖아요? 우리 일족 여자들도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수염만 기르셨으면 완벽한데 아쉽게 면도를 하셔서...."

드워프에게 남자다움이란 넓은 어깨와 두꺼운 가슴팍, 레펜하르트는 드워프 기준에도 훌륭하게 멋진 남성이었다.

"으음...."

기가 막혀 고개를 젓는 시리스를 향해 틸라가 은근히 말을 이었다.

"오크들 사이에서도 얼마나 레펜하르트 님이 인기가 좋은데요? 오크 여자들이 만날 이런 말 한다잖아요? 우리 남편이 레펜하르트 님 반만 되었어도 얼마나 좋을까~라며."

"...아니, 그건...."

시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오크들이야 원래 근육 충만하면 장땡인 종자들이니 당연한 것 아닌가?

"그리고 실란 씨 목표도 레펜하르트 님 같은 멋진 남자가 되는 거잖아요?"

실란이야 예전부터 근육 예찬론자였으니 그렇고.

"인간 하녀들 사이에서도 인기 좋아요, 레펜하르트 님. 플로라나 다른 엘프 분들도 은근 노리는 눈치던데...."

다른 이종족들은 그렇다 치고 인간 하녀와 엘프들에게도 인기 좋단 소릴 듣고 나니 슬슬 시리스의 표정도 변했다.

"그, 그래요?"

생각해 보니 확실히 플로라나 다른 엘프 여인들처럼 레펜하르트와 오래 함께 지낸 이들은 호감을 보이는 것 같았다.

실제로 백왕성 내의 하녀들이나 엘프 여인들에게 레펜하르트는 인기가 많았다. 겉보기와 달리 레펜하르트는 굉장히 점잖아서, 절대 일개 하녀에게도 손을 뻗거나 하질 않는다. 일단 초반의 인상만 넘기고 나면 듬직하고 성실하며 능력 좋은 남자인 것이다. (사실 레펜하르트만큼 능력 좋은 남자도 세상에 흔치 않다.)

레펜하르트가 워낙 대놓고 시리스를 아끼는 것이 보여서 다들 멀리서만 바라볼 뿐이지, 인기 자체는 상당한 편이다.

'어, 사실은 레펜하르트 님 되게 멋있는 건가?'

뭔가 주위에서 다 멋있다고 하니 막 혼돈이 온다. 틸라가 실소를 흘리며 시리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시리스...."

그리고 은근히 그녀를 부추겼다.

"이대로 있다가는 후회할걸요?"

"후, 후회는 무슨...."

당황하는 시리스를 보며 틸라가 고개를 저었다.

"저 이니야라는 아가씨, 대시가 심상치 않아요. 남자는 저러다가 앗 하는 순간 넘어가 버린다고요."

"넘어가든 말든 저랑은 아무 상관이...."

"게다가 그 아가씨, 가슴도 크던데. 남자는 특히 저런 취향에 약하거든요?"

정확히는 드워프 남자들이 저런 취향에 약한 것이지만, 어쨌건 인간 남자도 딱히 다르진 않다. 정곡을 찌른 틸라의 말에 시리스의 안색이 더더욱 굳었다.

시리스는 무심코 자기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뭐, 봉긋하고 귀여운 가슴이었다. 하지만 이니야와 비교하면 상당히 부실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끄응...."

낑낑대는 시리스를 귀엽다는 듯 지켜보다가 틸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카를과 데이트가 있어서 이만 가 볼게요."

"카를 씨 오늘 업무 다 끝내셨나 봐요? 아까 레펜하르트 님이랑 운동하시던데."

틸라가 문득 양손으로 뺨을 가리며 얼굴을 붉혔다.

"네, 안 그래도 레펜하르트 님이랑 운동하게 된 이후 점점 듬직해져서 어찌나 멋있는지!"

시리스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확실히 요 근래 카를의 덩치가 상당히 커지긴 했다. 수염도 더 덥수룩해졌다.

'...그게 듬직?'

시리스가 보기엔 슬슬 원숭이에서 고릴라가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외모만 보면 재상이 아니라 무슨 전장을 누비는 장수, 그것도 돌진밖에 모르는 무식한 맹장으로밖에 안 보인다.

덕분에 안타레스 백국은 본의 아니게 전투 국가로 이름이 높았다.

지배자는 권왕이요, 재상은 고릴라에, 명성을 떨친 계기도 전쟁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서로 좋다니 별문제는 없겠지만....'

자리를 뜨며 틸라가 다시금 뒤를 돌아보았다.

"자! 시리스! 저런 굴러온 돌에 지지 말아요! 파이팅!"

그렇게 응원을 보낸 뒤 틸라는 앞뜰을 떴다. 멍하니 시리스는 떠나는 틸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지지 말라고?'

혼란했던 머릿속이 조금씩 정리되어 갔다. 점차 그녀의 얼굴에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누차 말하지만, 시리스는 은근히 승부욕이 강하다....

3

레펜하르트는 자기 방 카펫 위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후우우...."

가부좌를 튼 채 레펜하르트가 길게 심호흡을 했다. 호흡을 하며 내면을 관조, 체내의 마력을 움직여 안정화시킨다.

그는 지금 매일같이 행하는 마법사의 일과, 명상meditation을 통해 마력의 그릇을 높이는 중이었다. 음식도 과하게 먹으면 체하듯 마력을 높이는 것도 한꺼번에 되는 일이 아니었다. 마력이 올라가는 수준에 맞춰 그릇, 즉 허용량 역시 따라 넓혀야만 했다.

마나 드레인을 통해 마력은 언제든지 흡수할 수 있지만 그릇을 넓히는 것은 역시 시간이 드는 문제인 것이다. 이미 지저 태양 마그림을 통해 체질을 바꾸는 편법까지 써 버렸으니, 남은 것은 그저 정석대로 차분히 명상에 임하는 길뿐이었다.

잠시 후 레펜하르트가 눈을 떴다. 체내의 마력을 감지하며 그가 한숨을 쉬었다.

"꽤 마력이 모이긴 했지만 그래도 8서클의 경지는 요원하군, 아직."

고위 서클로 갈수록 필요로 하는 마력량도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

5서클까지는 금방 금방 되더니 6서클쯤에는 마나 드레인까지 시도해서야 겨우 필요한 마력을 채웠고, 7서클이 되니 이젠 흡수하는 마력을 체내 허용량이 따라와 주지 않는 수준까지 되었다.

레펜하르트가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에이, 서두를 필요는 없지. 지금 나이에 이 정도만 해도 사실은 엄청난 건데."

자꾸 전생의 자신과 비교해서 그렇지 현재 레펜하르트는 오러 빼고 단순히 마법사로만 봐도 엄청난 수준이다. 그와 비슷한 나이의, 천재라 불리며 마법사들의 칭송을 받는 제이드조차도 아직 7서클의 경지가 아닌가?

애초에 마나 드레인으로 마력을 쑥쑥 올릴 수 있다는 것부터가 사기다. 외부의 마력을 흡수해 영구적으로 자신의 마력으로 변환하는 경지는 9서클 대마법사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마력 키우는 시간은 대폭 줄이고 오직 그릇을 키우는 데만 주력하고 있으니, 지금도 이미 레펜하르트는 다른 마법사들보다 두 배 가까이 빠르게 마력이 오르고 있었다.

'뭐 이 정도면, 전생 때 진짜 내 육체의 절반 정도 효율은 나와 주니까.'

역시 아쉽긴 아쉽다. 테스론의 육체로도 이 경지까지 왔는데, 진짜 그의 육체였다면 지금쯤 얼마나 빨리 전생의 경지를 회복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이내 레펜하르트는 미련을 버렸다.

'됐다. 지난 것에 미련 가져 봐야 뭐하나? 솔직히 이 육체도 좋은 점 많은데, 뭘.'

확실히 그가 마왕 대신 권왕으로 나선 덕에 얻은 것들은 적지 않다. 특히 평판 부분은 결코 전생의 육체였다면 얻지 못했을 것이다.

'시간이 걸려서 그렇지 이 육체로도 10서클에 못 오르진 않을 테고. 뭐, 전생에 비해 연산력이 떨어져 캐스팅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레펜하르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덕분에 새로운 마법도 몇 개 창안할 수 있었으니까.'

그가 작게 시동어를 외웠다.

"인챈트 피스트, 플레임 엔 라이트닝."

양손에서 불꽃과 뇌격이 번뜩였다. 그 상태로 레펜하르트는 허공에 주먹질을 하며 작게 소리쳤다.

"폭염권!"

퍼엉!

펀치가 공간을 때리며 작은 폭발을 일으켰다.

레펜하르트가 왼손을 내질렀다.

"뇌격권!"

파지지직!

뇌전이 주먹을 따라 허공으로 흘러가며 방전한다.

제이드와 싸울 때의 일이었다. 상대의 마법을 일일이 해제하는 것이 짜증 난 레펜하르트는 무심코 디스펠을 주먹에 부여하는 새 마법을 개발해 버렸다.

이는 마법사의 사고방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법사는 머리를 써서 보다 고도의 마법을 구사하는 것을 지고의 가치로 삼는다. 보통은 마법 해제하는 속도와 빈도수를 더 높이려 하지 저런 식으로 생각하진 않는 것이다.

일일이 해제하는 것이 귀찮다? 저런 식으로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마법사로의 자격이 없단 소리다. 저것은 어디까지나 무인의 사고방식이다. 그래서 여태까지는 저런 식으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무심결에 써먹어 보니 효과가 꽤 괜찮았다. 그래서 틈나는 대로 머리를 굴려, 다른 마법도 손발에 부여하는 새로운 운용식을 창안해 본 것이다.

처음부터 보조 마법 쪽은 신경 쓰지 않았다. 괜히 드래곤 스케일이나 스톤 스킨 같은 보조 마법을 레펜하르트가 사용치 않는 것이 아니다. 그거 걸어 봤자 오러는 고사하고 이 육체 자체의 방어력만도 못하니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강화 주문이라면 감히 마법사가 따라가지 못하는 신관들의 신성 주문보다도 오러로 인한 강화 효과가 더 좋으니, 마법사의 보조 주문은 오러 유저에겐 걸어 봤자다.

그래서 보조 마법 쪽은 포기하고 원소 속성 마법을 깃들이는 수법 쪽으로 개발해 보았는데....

"타아앗!"

허공에 폭염권과 뇌격권을 연달아 날려 본다.

휙! 휙! 휘휙!

대충 만들어 본 건데 제법 안정적으로 마력과 오러가 합일해 흐르고 있다.

펑! 펑! 파지지직!

주먹을 거두며 레펜하르트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나쁘지 않군."

오러는 순수한 위력은 강하지만 다양한 수법에 대한 대응성은 마법에 비해 떨어진다. 이 수법이라면 그 부분을 상당히 보완할 수 있다. 그리고 마법사의 마법은 다양성은 뛰어나지만 그만큼 상황에 맞춰 시전하는 데 딜레이가 있다. 반면 이 수법은 그런 딜레이를 없애 준다.

이런 식이라면, 마법을 오러 유저의 반사 속도로 날릴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남들이 보기엔 그냥 주먹질이니까 마법사란 점도 안 들킬 테고 말이지. 아마 그냥 아티팩트의 힘을 썼다고 믿겠지?"

흐뭇해하며 새 마법을 이래저래 구사하던 중이었다. 문득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쓰며 방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 너머에서 대단히 익숙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곧바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레펜하르트 님~!"

레펜하르트가 한숨을 푹 쉬었다.

'또 왔네, 저 아가씨.'

☆ ☆ ☆

방에 들어서자마자 이니야가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

"명상이 끝나신 것 같아 잠시 실례했어요. 시간 괜찮으신지?"

실제로 그녀는 벌써 방 밖에서 10분째 기다리고 있었다. 오러 유저의 뛰어난 기감으로 레펜하르트가 명상 중임을 알아채고, 착하게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숨소리마저 죽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다가 슬슬 끝난 것 같아 방으로 난입한 것이다.

"아, 예."

대꾸를 하며 레펜하르트는 이니야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깨 위에 커다란 무엇인가를 짊어지고 있었다.

"이니야."

"네, 레펜하르트 님."

"...뭡니까, 그거?"

"응? 모르시나요? 침상이랍니다."

"아니, 침상인 건 아는데...."

이니야가 짊어지고 있는 것은 나무로 짠 간이 침상이었다. 그 크기가 어마어마해, 보통 침상 두 배는 되어 보였다.

레펜하르트의 이마에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저걸 저 가녀린 여인이 가볍다는 듯 들고 있으니 참으로 어색했다. 물론 오러 유저이니 저 정도쯤이야 무겁지도 않겠지만 그래도....

'저걸 왜 여기 들고 왔는데?'

황당해하는 레펜하르트 앞에 이니야가 침상을 내려놓았다. 힘 조절을 절묘하게 했는지, 그 큰 침상을 내려놓는데도 쿵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이니야가 손목을 꺾으며 명랑하게 말했다.

"많은 일을 하시는 분은 그만큼 몸을 신경 쓰셔야지요. 제가 마침 예전에 전신 마사지를 좀 배운 바 있어서요."

"...에?"

레펜하르트는 눈을 껌벅였다. 마사지? 웬 마사지?

침상을 가리키며 이니야가 손짓을 했다.

"누워 보세요. 피로에 좋답니다."

"저, 별로 안 피곤한데요...."

실제로 이 육체에 들어앉은 이후, 어지간해서는 피로가 뭔지조차 모르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레펜하르트다.

"사양치 마세요. 자, 이리로...."

이니야가 부드러운 손길로 레펜하르트의 손목을 잡았다. 분명 손짓은 참 나긋나긋한데, 잡힌 손목은 무슨 바위 사이에 끼인 느낌이었다. 절대 안 놓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레펜하르트가 둔해도, 상대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아무것도 못 느낄 정도는 아니다. 그가 머리를 긁으며 그동안 몇 번이나 던진 질문을 또 던졌다.

"이, 이니야.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건지...."

이니야도 몇 번이나 했던 대답을 또 했다.

"저희 일족을 받아 주시고 세계수까지 부활시켜 준 은인이시잖아요. 단순한 감사의 표현이랍니다."

"아, 예...."

감사의 표현치고는 좀 농도가 짙은 것 같지만... 원래 스티리아 일족이 스킨십이 흔한 일족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자, 이리로...."

이니야가 레펜하르트를 침상으로 이끌었다. 오러 유저다 보니 힘이 참 만만치 않았다. 손을 빼려면 레펜하르트도 오러를 발동해야 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상대가 이렇게 호의를 보이는데 오러까지 발동해 가면서 거절하는 것도 상황이 웃기고....

맥없이 끌려가며 레펜하르트는 연신 아리송해했다.

'이상하네, 이거 혹시....'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이내 머릿속에 떠오른 야릇한 상념을 지웠다.

'에이, 설마.'

혹시나 하기엔 그는 너무 이니야를 잘 알고 있었다. 눈의 여왕이라 불리던 그녀가 얼마나 남자를 혐오하는지도 익히 보아 왔다.

'절대 그럴 리가 없지, 암.'

아무래도 상황이 전생과 다른 탓인 듯하다고 레펜하르트는 생각했다.

'확실히, 전생 때에는 서로 주고받았던 동등한 관계지만 지금은 일방적으로 내 쪽에서 은혜를 베푸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전생의 이니야에게서 배운 정령술로 그는 10서클의 경지를 올리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그 은혜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은혜를 베푼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시대의 이니야 입장에서는 충분히 감사할 법한 것이다.

'상대가 감사를 표하는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고민을 멈추고 레펜하르트는 속 편하게 침상에 누웠다. 이니야가 품에서 작은 병을 꺼내더니, 그 속에 담긴 기름을 양손에 찰박찰박 발랐다.

"...그건 또 뭡니까?"

이니야가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필라넨스 교단의 특제 마사지 오일이라더군요."

처음에는 실란이 경쟁자인 줄 알고 눈을 부라렸던 이니야였다. 하지만 직설적인 성품답게, 그녀는 실란을 향해 대놓고 자신의 속내를 보였다. (저 직설적인 성품을 레펜하르트 앞에선 못 보인다는 게 과연 사랑에 빠진 여자다운 점이라 하겠다.)

"그대가 레펜하르트 님이 마음에 둔 이임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 역시 그를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실란은 버럭 외쳤다.

"오해다!"

안 그래도 일파만파로 퍼지는 소문 탓에 요즘은 자다가도 경기 일으키는 실란이었다. 가끔은 레펜하르트 곁에서 곱게 신부복 입고 결혼식 올리는 악몽도 꾸곤 했다.

당장 이니야의 손을 마주 잡고 외쳤다.

"저는 사랑의 여신, 필라넨스를 섬기는 종! 그 사랑, 제가 응원해 드리지요!"

레펜하르트가 시리스를 얼마나 아끼는지는 실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시리스 본인은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것이다. 게다가 레펜하르트도 분명 시리스를 아끼긴 하지만, 뭔가 남자답게 '작업'을 건다거나 하는 눈치는 전혀 없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새로운 사랑이 싹트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는 게 실란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누가 됐든 상관없어! 저 인간 장가보내기 전까진 이 소문은 그치지 않아!'

실란 입장에서는 상당히 절실한 문제였다....

실란은 진지하게 어째서 저런 소문이 퍼졌는지 이니야에게 차근차근 설명했다. 실란을 혐오스러운 눈으로 보던 이니야도 이야기를 듣고 나서 눈빛이 많이 부드러워졌다.

그녀의 생각과 달리, 실란은 올곧게 남자다움을 추구하는 훌륭한 소년이었던 것이다.

타고난 천형(?)에도 좌절하지 않고 꿋꿋이 운명에 맞서 열심히 역기를 드는 실란의 태도는 실로 전사의 귀감이라 할 만했다. 근성 없는 일족 남자들에게 좀 본받으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속내를 털어놓은 두 사람은 당장 친해졌다. 둘 다 취향이 비슷하니 말도 참 잘 통했다.

사랑의 프로페셔널, 필라넨스의 신관인 실란은 남자에게 작업 들어가는 요령을 상당히 많이 알고 있었다. 직접 본인이 행해 본 것이 아니라 죄다 이론뿐이라는 게 좀 문제긴 했지만, 어쨌건 이니야는 실란으로부터 인간 남자를 유혹하는 많은 수법을 배울 수 있었다.

즉, 그동안 이니야가 했던 짓은 죄다 실란이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이니야 정도 미녀가 저렇게 열정적으로 달라붙었으니, 솔직히 레펜하르트도 전생의 기억이 없었더라면 넘어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손에 들린 이 병 역시, 실란이 특별히 신성력까지 퍼부어 가며 만들어 준 필라넨스 교단 특제 마사지 오일이었다.

오일을 바른 뒤 레펜하르트의 어깨를 주무르며 이니야가 물었다.

"어때요? 시원하세요?"

"에...."

레펜하르트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시원하고 자시고, 마사지 받는 기분도 안 들었다. 이 강철의 육체는 이니야의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조물락거리는 정도론 느낌도 안 드는 것이다.

이니야도 금방 그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우우웅!

이니야의 양손에 은빛 오러가 뿜어 나왔다.

"자, 이젠 좀 시원하세요?"

"시원하네요."

오러까지 동원해 가며 마사지를 하니 그제야 레펜하르트도 좀 '느낌'이 왔다. 그렇게 이니야가 레펜하르트의 등을 꾹꾹 오러로 눌렀다. 이니야의 얼굴 가득 홍조가 떠올랐다.

'이야, 등짝 갈라진 거 봐. 멋있다아....'

가끔 입가의 침도 닦아 가며 그녀는 열심히 레펜하르트의 육체를 만끽(?)했다. 물론 침상에 엎드린 레펜하르트는 당연히 이니야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볼 방법이 없었다. 그냥 감사히 상대의 호의를 받아들일 뿐이다.

그때, 방문이 거칠게 열리며 백금발의 엘프 소녀가 들어왔다. 뭔가 각오를 단단히 다진 표정으로 시리스가 방 안을 훑어보았다.

"...."

방 안의 광경을 보며 시리스는 애써 표정을 간수했다. 어차피 이니야가 마사지해 주러 레펜하르트를 찾았다는 소리는 시종에게 이미 들었다.

대충 예상했던 광경이었다. 전혀 놀랄 이유가 없었다.

시리스가 매서운 눈으로 이니야를 노려보았다. 엎드린 레펜하르트 위에 올라탄 채 열심히 등을 매만지고 있는데, 표정이 아주 가관이다.

'별명이 눈의 여왕이라며? 눈 다 녹았냐?'

실제로 눈 다 녹고 봄이 온 듯한 모습이긴 하다.

이니야도 시리스를 바라보았다. 상대의 눈빛을 본 순간 이니야의 표정이 굳었다.

'어머? 이 아이 혹시....'

여성의 감이 경종을 울린다. 실란이 사실은 연적이 아님을 알고 안심했던 이니야였다. 그런데 여기에 복병이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레펜하르트는 마음에 둔 이가 있다고 분명히 이야기했었다!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들었다.

"아, 시리스? 무슨 일이야?"

어색하게 걸음을 옮기며 시리스가 대꾸했다.

"아, 이니야 씨를 도우려고 왔어요."

"그래?"

웬일로 쟤가 안 하던 짓을? 잠깐 의아했지만 레펜하르트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다시 침상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니야를 도우러 왔다라... 같은 엘프 검사라서 친하게 지내나 보지?'

허공에 이니야와 시리스의 시선이 마주쳤다.

파직!

전격이 튀었다. 물론 진짜 튀었다는 소린 아니고 말이 그렇다는 거다.

"어머나, 시리스 양. 마사지에 대해 배운 적이 있으신가 봐요?"

"없지는 않죠."

실제로 시리스는 노예로 자라던 시절, 주인께 봉사하기 위한 온갖 기법을 강제로 주입받은 바 있다.

'이쪽은 전문가에게 배웠어!'

틸라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지지 말아요~.'

승부욕을 불태우며 시리스는 레펜하르트의 등을 바라보았다.

항상 보아 왔던 익숙한 등이었다. 넓고 강인하고, 듬직한....

순간 시리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모, 못 하겠어!'

평소엔 별생각 없었는데 정작 의식을 하고 나니 미친 듯이 부끄러웠다. 이니야가 어떻게 저런 짓을 저리도 대담하게 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갈 지경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물러서는 것은 패배를 의미할 뿐!

시리스는 눈을 감고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떨리는 손을 레펜하르트에게 뻗었다. 그리고 그의 오른손을 슬쩍 잡았다.

조물조물조물....

시리스는 열심히 손 마사지를 시도했다.

이게 현재의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 ☆ ☆

레펜하르트의 방과 마주하는 거실의 창문.

그곳에서 실란이 흐뭇한 눈으로 방 안을 지켜보고 있었다. 레펜하르트를 가운데 둔 두 엘프 여성을 바라보며 실란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무릇 사랑은 쟁취하는 것."

개인적으로는 오래 알고 지낸 시리스가 잘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크다. 하지만 사랑의 여신, 필라넨스의 신관에게 결코 사람의 마음을 인위적으로 사랑에 빠지게 하는 것은 금물인 것이다.

그저 사랑에 빠진 남녀에게 조언을 주고 진정한 행복으로 이끄는 것이 그의 사명.

그래서 실란은 두 여인을 동등하게 응원하고 있었다.

"누가 되었건 진정한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대외적 멘트고, 속마음은 좀 달랐다.

'아무나 빨리 좀 연결되라. 나 좀 살게.'

앞에선 꾹꾹.

옆에선 조물조물.

마사지를 하는 이니야와 시리스의 눈빛이 점점 매서워진다. 힐끔 시리스를 돌아보며 이니야가 입술을 삐죽였다.

'밥상 다 차려 놨더니 어디 멋대로 포크를 얹으려고?'

침상 가져온 것도 그녀고, 마사지 오일 챙겨 온 것도 그녀다.

시리스가 콧방귀를 켜며 고개를 돌렸다.

'흥!'

엎드려 있던 레펜하르트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몸은 분명 편한데... 왜 이리 오한이 들까?'

얼어붙은 한겨울의 호수에서 물장구를 쳐도 한기 하나 못 느끼는 이 짐 언브레이커블의 육체에 오한이 들게 하려면 어지간해선 힘들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이내 신경을 껐다. 어쨌건 기분은 좋았으니까.

"흐음...."

기분 좋은 신음을 흘리며 그는 머리를 식혔다.

앞으로도 가야 할 길이 멀고, 해야 할 일이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막간의 여유를 즐기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

'아, 평화롭구나.'

등 뒤에서 무슨 풍운조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짐작도 못 한 채, 한때의 평화를 즐기고 있는 레펜하르트였다.

4

광채가 도는 금속 벽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방.

그 한가운데 거대한 수조가 놓여 있었다. 온갖 마법적 문양이 빛을 발하는 그 수조 속에 벌거벗은 한 남자가 잠겨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날렵한 체구를 지닌 잘생긴 20대 중반의 청년이었다.

청년의 양 발목 아래는 붉은 근섬유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멀쩡한 발에서 피부만 벗긴 것 같은 외양이다. 수조 앞에 선 은발의 소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제이드의 부상은 슬슬 완치가 되었군."

소녀, 은의 현자 중에서도 최고위층에 자리한 수호자 세렐라인은 수조에서 눈을 뗀 뒤 고뇌하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권왕이 마법의 경지 또한 그렇게 높을 줄이야."

수조 안에 들어 있는 청년은 암살자의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도망쳐 온 제이드였다. 평소라면 임무를 실패한 데다 블링크 부츠도 적에게 빼앗기고, 심지어 금기 물품인 귀환의 깃털까지 빼돌린 사실이 발각되었으니 사형을 당해도 모자라다.

하지만 세렐라인은 슬그머니 제이드의 기록을 지우고 그를 회복 수조에 넣어 잘린 두 발을 재생시키는 쪽을 택했다. 수호자 아크라이트의 동생이기도 한 제이드이기에 아무래도 일반 암살자들처럼 입을 막기엔 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게다가 저 나이에 7서클에 든 강력한 마법사는 은의 현자 내에도 흔치 않았다. 은의 현자는 분명 강력한 집단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고대의 유물을 독점한 덕이지 구성원 개인이 강해서는 아닌 것이다.

저 정도 인재를 쉽게 포기하는 것은 은의 현자 입장에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호자 아크라이트도 장남이기 때문에 수호자 역을 물려받았을 뿐이지, 마법사로서의 경지는 제이드보다 밑이었으니까.

세렐라인은 수조 속 제이드의 상패를 살폈다.

"오늘쯤이면 깨어나긴 하겠지만, 역시 당장은 써먹을 수 없겠지?"

잃어버린 신체조차 재생해 주는 이 회복 수조는 분명 굉장한 물건이었지만, 대신 회복될 때까지 의식을 잃은 채 계속 수조 안에 담겨 있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제이드가 회복 수조에 들어간 지도 슬슬 두어 달째, 다시 깨어난다 해도 제 상태를 되찾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써먹을 수 있어도 어차피 문제는 남아 있고.'

소녀가 고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설사 제이드가 완전히 제 컨디션을 되찾는다 해도 그를 다시 레펜하르트에게 보낼 수는 없었다.

아무리 강력한 오러 유저나 마법사, 신관이라도 은의 현자에겐 별문제가 되는 대상이 아니었다. 수많은 세월, 인류를 뒤에서 조정해 온 은의 현자에겐 각자 그에 걸맞은 마법 도구가 있었으니까. 암살자는 그 무기를 정해진 매뉴얼대로 사용해 적을 해치우면 되었다.

하지만 고위 마법과 오러 유저를 동시에 소화하는 이는 역사 속에서도 극히 드물었던 것이다. 저런 상대라면 한두 명의 암살자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수의 암살자를 보낼 수도 없잖아.'

세렐라인은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암살자를 많이 보냈다가는 은의 현자의 존재가 드러날 수도 있다. 게다가 레펜하르트 곁에는 강력한 오러 유저가 다수 존재한다. 암살을 재시도하기엔 리스크가 너무 크다.

그자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은의 현자가 아닌 다른 집단이 필요했다. 원래부터 권왕을 죽여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어 대대적으로 살해 소식이 알려져도 은의 현자를 의심치 않을 또 다른 집단이.

'역시 그자의 도움을 받아야 하나? 칫, 외부인이라 웬만하면 피하려고 했는데.'

있기는 있었다.

레펜하르트에게 원한을 품고 있어 그와 맞상대하더라도 전혀 상황이 어색하지 않은, 이미 한번 붙어 보기까지 한 자들이 있었다. 결국 권왕 일행에게 패하고 도망치긴 했지만 그들에게 은의 현자의 힘을 실어 주면 충분히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리더, 레펜하르트와 마찬가지로 오러와 고위 마법의 힘을 동시에 지닌 그 흑발의 남자를 떠올리며 세렐라인은 결심했다.

"아무래도 현자 레스틴을 찾아야겠다."

☆ ☆ ☆

산기슭에 세워진 한 귀족가 저택.

그 앞마당에서 흑발의 남자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스파이럴 블레이드!"

싯누런 오러가 소용돌이치며 검을 타고 허공을 찔렀다. 대기가 요동치며 굉음을 울린다. 곁에서 보고 있던 필레나가 손뼉을 쳤다.

"대단해, 테스론! 그 정도 위력이면 권왕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거야!"

테스론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멀었다. 아직도 멀었어."

필레나의 표정이 도로 시무룩해졌다. 테스론이 한숨을 쉬었다.

'휴우... 거기서 어떻게든 해치웠어야 했는데....'

저번에는 카르지안 유술을 이용해 허점을 찌를 수 있었다. 그 좋은 기회를 놓쳤으니, 결과적으로 친절하게 약점만 짚어 준 꼴이 되어 버린 것이다. 레펜하르트도 바보가 아닌 이상 그 약점을 그대로 지니고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고 다른 약점을 노릴 만큼 상대에게 약점이 많은 것도 아니고.

'역시 기량 자체를 높이는 방법밖에 없는가....'

이 저택은 이라나드 공작에게 받은 테스론의 거주지였다. 레펜하르트에게 패하고 도주한 테스론 일행은 그동안 이곳에서 설욕의 날을 기다리며 실력을 키우고 있었다.

앞마당 저만치에서 흑색 갑주를 걸친 스테반이 맹렬히 검을 휘두른다.

"타아앗!"

시꺼먼 흑색 기운이 참격이 되어 허공을 갈랐다. 황금 갑주를 걸친 유서스가 마법을 발동하며 공격을 막았다. 한참을 그렇게 정신없이 공방을 주고받던 중이었다. 유서스가 거리를 벌리며 칭찬을 건넸다.

"좋은 일격이었소, 스테반 경."

검을 거두며 스테반이 고개를 저었다.

"유서스 경 덕분입니다. 이제 이 갑옷을 다루는 수법이 몸에 익은 기분입니다."

두 사람은 잠시 숨을 돌렸다. 가냘픈 엘프 여인 한 명이 음료를 들고 와 시중을 들었다.

"드세요, 주인님."

음료를 받아 든 뒤 스테반이 말을 이었다.

"물수건도 좀 가져오너라, 렐시아."

"네."

그녀는 스테반의 슬레이어, 렐시아였다. 스테반이 테스론 일행에 합류해 버서커 아머를 다루게 된 후로 렐시아는 더 이상 예전처럼 스테반의 전투 보조를 하지 않고 저택에서 잡일을 하며 대기하고 있었다.

일반 기사 이상의 솜씨를 지닌 그녀였지만 그래도 테스론 일행에 비하면 수준이 너무 낮았던 것이다. 이들 중 제일 약한 크리스틴이라 해도 렐시아를 제압하는 데 10초면 충분하다. 전투에 전혀 도움이 되질 않으니 데리고 다닐 이유가 없었다.

"여기 있습니다, 주인님."

렐시아가 건넨 물수건으로 땀을 닦은 뒤 스테반이 재차 말했다.

"그럼 다시 가겠습니다, 유서스 경."

자세를 잡으며 유서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오시오!"

"타아앗!"

재차 대련에 임하는 저 두 기사를 보며 테스론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저들도 나름 강해지긴 했지만....'

꾸준히 마법을 수행한 필레나는 슬슬 6서클 후반의 경지에 들었다. 스테반도 버서커 아머에 충분히 능숙해졌다. 세이어의 성기사, 크리스틴 역시 실란을 되찾겠다는 불타는 의지로 꾸준히 힘을 키우는 중이다.

그래, 다들 꽤 강해지긴 강해졌다.

문제는 그보다 테스론이 훨씬 강해졌다는 점이었다.

'역시 마도구에 의지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

유서스를 보며 테스론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그는 마법 없이도, 오러 유저만으로도 황금기사 유서스를 훨씬 능가하는 수준에 다다라 있었다.

유서스는 사실 마검사로서는 이미 완성이 된 상태다. 마갑 엘드라드는 아무리 수련을 한다 해도 그 위력이 더 강해지거나 하지는 않는다. 이대로 전략이나 전술적으로 경험을 쌓아 강해질 수는 있겠지만, 지닌 기량 자체는 그대로다.

진정한 강자인 테스론과 편법을 쓴 그의 동료들은 성장 속도가 너무 차이 나는 것이다.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상황이 너무 절망적이었다.

유서스와 스테반은 마도구의 힘을 빌리고 있고, 미안한 말이지만 크리스틴은 다른 이들에 비해 수준이 너무 낮다. 뛰어난 성기사인 것은 분명하지만 초인의 대열에 낄 정도는 아니다.

그나마 믿을 만한 것은....

'필레나 정도인가?'

테스론이 이리저리 돌봐 준 덕이라고는 해도, 필레나 나이에 6서클 중반에 들었으면 보통 뛰어난 재능이 아니었다. 전생의 제이드만은 못하지만, 어디 가서 천재 소리 듣기엔 충분하다.

'하지만 저 정도로는 어림도 없고.'

그래 봤자 그 괴물 같은 사천왕과 검성 사이러스에 비교하면 딱히 뛰어난 재능이랄 것도 없다.

마왕은 착실히 전생의 수하를 찾아 힘을 키우고 있다. 그들은 모두 미래를 통해 결과가 보장된 진정한 강자들이다.

이대로 시간이 주어진다면 분명 테스론 일행도 더 강해질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만큼 상대도 강해진다. 그리고 결과는 보나마나 저쪽의 압승이다. 예전엔 양쪽 모두 발전 단계이기에 그나마 비슷했지만 재능의 차이가 월등하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불리할 수밖에 없다.

암담한 기분 속에서 테스론은 다시 검을 들었다. 그리고 오러를 끌어 올렸다.

우우웅!

싯누런 오러가 검 끝에 맺혀 찬란히 빛난다.

테스론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캘러미티 혼."

오러 파문이 일어나며 검 끝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1중첩, 2중첩....

타앙!

순간 가공할 거력이 손아귀를 뒤덮은 탓에 테스론은 신음을 흘리며 검을 놓쳤다.

"크으윽!"

검이 허공을 날아 저만치 처박혀 부르르 떨었다. 이내 끌어 올린 오러의 파문이 사그라졌다. 테스론의 표정이 험악하리만치 일그러졌다.

"제기랄!"

안 된다. 이 육체로는 도저히 안 된다.

그토록 고민하고 노력했지만 이 육체로는 도저히 짐 언브레이커블의 기량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기껏해야 스파이럴 가드를 검으로 바꿔 펼치는 것이 전부였다.

테스론이 지닌 진정한 최강의 일격, 캘러미티 혼은 도저히 이 저주받을 육체로는 구현할 수가 없다!

"빌어먹을!"

가슴이 터질 듯 답답해 테스론은 허공을 향해 욕설을 내뱉었다. 필레나가 안절부절 못하며 다가와 그를 달랬다.

"진정해, 테스론. 아직 포기할 필요는 없잖아? 조금만 더 시간을 들이면...."

"시간! 그 시간이 우리 편이 아니란 말이다!"

테스론은 머리를 싸맸다. 이러는 동안에도 마왕은 착실하게 전생의 경지를 회복하고 있을 터였다.

그가 아직 9서클일 때까지는 괜찮다. 그때까지는 그래도 어떻게든 방법이 있다.

하지만 10서클, 그 끔찍한 경지에 다다르게 되면 지옥이 펼쳐진다.

'일단 그가 10서클에 들어 버리면 은의 현자의 힘으로도 어떻게 손쓸 도리가 없어져!'

전생에서 은의 현자는 암흑제국을 상대로 아무것도 하질 못했다. 레펜하르트의 가공할 10서클 마법 때문이었다.

은의 현자가 가장 두려워한 마법은 산맥을 순식간에 평지로 만드는 '뉴클리어 버스트'도, 하늘의 별을 강림시키는 '미티어 폴'도, 1만의 이계의 악마를 동시에 불러내는 '헬 오브 더 월드'도 아니었다.

'그 빌어먹을 AMP 쇼크웨이브!'

일단 터지기만 하면 위력 고하를 안 가리고 모든 마도구를 정지시켜 버리는 저 가공할 마법 앞에 은의 현자는 무력하기 그지없었다. 어떤 강력한 고대의 유물도 한 방에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심지어 그렇게 되면 마왕에게 금지된 아티팩트를 빼앗기기까지 한다. 그리고 마왕은 그 금지된 아티팩트를 연구해 또 새로운 10서클 마법을 개발해 버린다!

그래서 전생 때 은의 현자는 감히 마왕 근처에 얼씬도 할 수가 없었다. 만약 정체를 들키기라도 한다면, 은의 현자란 조직이 있어 온갖 고대 유물을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왕에게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한 방에 모든 것을 털려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저런 처지다 보니 당시 은의 현자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 고위층으로서의 영향력을 이용해 진정한 실력자를 모으고 대규모 군세로 마왕을 몰아붙이는 것이 전부였다. 진정한 실력자, 아티팩트의 힘을 빌리지 않는 진짜 강자가 아니고서는 마왕과 맞서 싸울 수 없었다.

물론 저것 역시 대단한 위업이긴 하지만, 그 과정에서 대체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던가? 그 끔찍한 지옥을 또다시 재현할 수는 없다.

지금이다. 아직 아티팩트를 쓸 수 있는 지금밖에 기회가 없다.

그런데 도저히 실력이 늘지 않는다. 테스론 자신도, 그리고 그의 동료들도....

절망에 빠진 테스론을 보며 필레나가 울상을 지었다.

"우웅...."

"미안하다. 너무 답답해서 그랬어."

테스론이 한숨을 쉬며 그녀를 달랬다. 이게 무슨 꼴인가, 아무리 시간을 되돌려 젊어졌다지만 엄연히 손녀뻘인 아이를 울리다니.

"아니야, 괜찮아."

눈물을 닦으며 필레나가 억지로 웃었다. 테스론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후우, 어쩔 수 없지. 어떻게든 방법을 찾는 수밖에."

그때, 저택 저편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현자 레스틴?"

"응?"

의아해하며 테스론은 고개를 돌렸다. 생전 처음 들어 보는 목소리였다.

언제 나타났는지, 은발의 소녀가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저는 수호자 세렐라인. 은의 현자의 이름으로 그대에게 협조를 요청합니다."

☆ ☆ ☆

"...그리하여 암살자가 실패한 이상, 그를 노려도 세인들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명분이 필요합니다. 현자 레스틴, 그대는 예전부터 권왕과 은원 관계라 들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대의 협조를 받고 싶어요."

테스론만을 따로 대동한 채, 세렐라인은 차분한 어조로 설명을 마쳤다. 이야기를 들은 테스론의 표정이 밝아졌다.

'드디어 은의 현자 내부에서도 마왕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기 시작했구나!'

하지만 아직도 암살자를 보내 처리하려고만 하는 걸 보면 마왕의 진정한 무서움에 대해선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뭐, 현재의 정보로만 보면 저리 나오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세렐라인이 필레나며 저만치 떨어진 유서스와 스테반, 크리스틴을 힐끔 보더니 질문을 던졌다.

"저들이 그대가 택한 은의 협력자들이겠지요, 현자 레스틴?"

"그렇습니다."

은의 현자에겐 임무에 필요할 경우 다섯 명까지 협력자를 구할 권한이 있었다. 은의 협력자들은 비록 조직에 정식으로 속하진 못하지만, 은의 현자의 존재에 대해 알 권리가 있으며 이들의 협력을 통해 은의 현자는 인류 수호 임무를 보다 수월하게 행할 수 있다.

"저들은... 신뢰할 만한 이들인가요?"

세렐라인이 살짝 걱정을 표시했다.

유서스는 원래부터 대대로 은의 협력자로 일해 온 테네스 가문의 후계이니 별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처지가 달랐다.

은의 현자의 존재는 절대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 될 기밀 중의 기밀, 그런 만큼 협력자를 고르는 것도 대단히 신중해야 한다. 그나마 스테반은 귀족 가문이라 명예를 걸고 비밀을 지킬 것이라 믿어지고, 크리스틴은 세이어의 성기사라서 그냥 눈감아 준 것뿐이었다.

반면 필레나는 미천한 출신의 마법사, 아무래도 신뢰가 가질 않았다.

"그녀가 혹여 은의 현자에 대해 함부로 입을 놀릴 가능성은 없나요?"

테스론은 슬그머니 필레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테스론이 마법을 써서 주위 음성을 차단했기에 이들의 대화는 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았다.

"그럴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녀는 신뢰할 수 있습니다."

테스론은 확신을 가지고 대답했다. 필레나가 얼마나 자신에게 빠져 있는지는 테스론 본인이 더 잘 알았다.

'혹시 흔들린다 싶으면 그땐 벗겨놓고 꾹 눌러주면 되지.'

자고로 여자는 남자에게 안기고 나면 몸도 마음도 바치는 법이라고 테스론은 굳게 믿고 있었다. 이제까지야 양심의 가책(?)이 있어 건드리지 않고 있지만, 슬슬 육체도 제법 굳건해졌으니 그녀를 안을 자격이 충분했다. 전혀 문제없었다.

실로 마초의 극에 다다른 사고방식이라 하겠다. 하지만 세렐라인은 좀 달리 이해한 것 같았다.

"그대 역시 현자의 이름을 받은 자. 그대가 그리 판단했다면, 그 판단을 믿어야겠지요."

문득 세렐라인이 은빛 눈동자를 치켜뜨며 다시 말했다.

"현자 레스틴, 제 협조 요청에 아직 답을 안 했습니다. 그대와 그대의 협력자들은 저를 도울 의향이 있나요?"

테스론이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은의 현자가 손을 뻗어 주었지만 그는 대뜸 이 손길을 붙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기엔 아직 이쪽 실력이 너무 약했다.

"마음은 간절하지만 아직은... 저희 힘으로는 레펜하르트 일당들을 상대하기 힘듭니다."

"응? 어째서죠?"

세렐라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테스론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저 강력한 아티팩트를 가지고도 우리는 패했습니다. 아무리 장비가 좋아도 실력에서 밀리니, 한동안은 좀 더 실력을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자 세렐라인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요."

그리고 명쾌한 해답을 내놓았다.

"그럼 더 강력한 장비를 주면 되겠네요."

"...."

순간 테스론은 깨달음을 얻은 표정이 되어 입을 쩍 벌렸다.

그는 무인이었다. 아무리 레펜하르트의 두뇌를 얻어, 전생에 비해 보다 사유의 범위가 넓고 깊어졌다지만 기본적으로 무인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보통 전사는, 이쯤 되면 실력 부족을 탓하지 장비 더 달라는 생각은 차마 안 하는 법이다. 그래서 은의 현자 금기 물품을 탐내던 테스론도 저런 식으로는 미처 머리가 돌지 않았다.

반면 수호자 세렐라인은 창고에 온갖 아티팩트 가득 쌓아 놓은 은의 현자의 중추다.

실무자와 관리자의 사고방식의 차이인 것이다.

"그, 그러면 되겠군요, 음...."

황당해하는 테스론을 향해 세렐라인이 조용히 말을 건넸다.

"그럼, 그대의 협력자를 데리고 따라오세요. 쓸 만한 것이 있나 찾아보도록 하죠."

☆ ☆ ☆

온갖 마력등이 불을 밝히는 새하얀 강철의 복도.

테스론과 세렐라인은 둥근 원반을 탄 채 복도를 지나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며 테스론이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지? 정말 은의 현자의 저력은 그 끝을 모르겠군.'

저택에서 테스론이 동료들을 불러 모았을 때의 일이다.

사람들이 모이자 세렐라인은 대뜸 작은 보석 하나를 꺼내 땅에 박았다. 보석은 빛이 발하며 이내 커다란 마법진으로 화했다. 그 커다란 마법진 위에 서니 광채가 시야를 가렸고, 다음 눈을 떴을 때 그들은 이미 처음 보는 장소에 와 있었다.

사방이 순백의 강철 벽이었다. 마치 신전이나 왕궁처럼 보이는 커다란 홀, 그곳에서는 이미 다른 이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렐라인의 수하인 것 같았다.

유서스며 다른 이들은 그 수하를 따라 신전 귀퉁이의 방으로 안내되었다.

"저들에게도 걸맞은 장비가 주어질 것입니다. 현자 레스틴, 그대는 이리로."

그렇게 세렐라인을 따라 신전 반대쪽으로 향하니 이 강철의 복도가 나타났다. 그 후 테스론은 세렐라인과 함께 떠다니는 원반, 플로팅 디스크를 타고 복도를 지나는 중이었다.

"수호자 세렐라인, 혹시 제게도 뭔가 장비를 줄 생각입니까?"

"물론입니다."

세렐라인의 대꾸에 테스론이 미심쩍다는 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는 이미 오러 유저입니다. 딱히 마갑의 힘을 빌리는 경지는 지났습니다만...."

아무리 강력한 보조 마법이 걸린 마도구라도 그 한계는 평범한 오러 유저와 대등한 수준에 불과했다. 애당초 생명기, 오러는 시전자의 육체에 맞게 최적화되어 극대의 효율을 보이는 기운이다. 어떠한 마법이나 신성 주문을 퍼부어도 타인의 것인 한, 오러보다 더 나은 효율을 보이진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테스론도 다른 동료들을 마도구로 강하게 만들 생각은 할지언정 정작 본인은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다.

"어떠한 마법으로도 오러 유저 이상의 효율을 보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전생과 달리 그는 이제 고위 마법사이기도 했다. 이 정도 이론쯤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아니면 은의 시대에는, 엄청나게 초월적인 마학 기술이 있어 그 불가능조차도 깨 버렸던 건가?

기대하는 테스론을 향해 세렐라인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입니다. 아무리 은의 시대라 할지라도 마법으로 오러 이상의 효율을 내진 못했지요."

테스론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아니, 그럼 뭘 어쩌겠다고?

세렐라인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은의 시대 고대인들은 다른 방법을 강구했지요."

두 사람이 탄 플로팅 디스크가 복도 끝을 지났다. 아득하게 거대한 어둠의 공간이 나타났다.

"마법으로 인간의 힘을 끌어 올리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인간의 육체로는 불가능해요."

플로팅 디스크가 아래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강하 감각에 테스론이 흠칫하던 찰나, 세렐라인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은의 시대 고대인들은 골렘을 이용했습니다. 골렘은 확실히 인간의 힘을 능가하는 출력을 보였지요. 하지만 이것도 문제가 있었어요."

플로팅 디스크가 어둠 속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낭랑한 소녀의 목소리가 어둠 속을 은은히 울렸다.

"골렘은 분명 강했지만, 움직임이 너무 단순하고 둔해서 성능에 비해 성과를 못 올렸습니다. 그래서 고대인들이 생각한 것이, 골렘에 사람을 태우는 것이었습니다."

우우웅.

약한 소음과 함께 플로팅 디스크가 바닥에 착지했다. 세렐라인이 원반에서 내렸다. 테스론도 어리둥절해하며 따라 바닥을 밟았다.

"마차를 마부가 조종하듯, 조종사가 골렘 안으로 들어가 직접 움직이니 확실히 골렘의 약점은 보완되었습니다. 그래도 역시 너무 크고 무거워 비효율적이긴 마찬가지였지요. 그래서 점점 골렘의 경량화를 시도했습니다."

세렐라인이 손가락을 튀겼다.

창창창!

소리가 울리며 어둠 여기저기서 빛이 솟아났다. 몇 줄기의 라이트가 어두운 공간 한가운데를 비췄다.

"그렇게 오랜 세월 개량되고 개량되어, 고대인들은 결국 극도로 경량화된 골렘의 제조까지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니 이젠 골렘의 성능을 사람이 따라갈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오러를 다루는 전사만이 그 골렘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내리쬐는 라이트의 중심, 그곳을 바라보며 테스론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회색빛의 강철 거인이 그곳에 서 있었다.

얼핏 보기엔 장식해 놓은 갑옷처럼 보인다. 하지만 기사들의 풀 플레이트 메일과 달리, 저 강철 거인은 불필요한 장식이라곤 전혀 달려 있지 않았다. 매끈한 동체는 인체와 거의 흡사해, 전신의 근육을 고스란히 재현한 듯 기능적인 모습이었다. 투구 역시 두 눈 부위만 뚫려 있을 뿐, 이목구비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회색빛 동체 위로 아로새긴 금빛의 문양만이 이것이 평범한 갑옷이 아님을 증명할 뿐이다.

세렐라인이 강철 거인 앞으로 걸어갔다.

"이것이 바로 오러 유저를 위한 고대의 아티팩트."

거인을 올려다보며 그녀가 무심한 어조로 설명을 이었다.

"전장 240센티미터에 중량 180킬로그램. 동력원은 오리하르콘 리액터. 경량화 처리된 아다만티움 외골격에 진금 엘드릴로 마학 회로를 연결하고 미스릴 케이블을 이용해 오러와 연동되는 구동 근육을 구현한...."

세렐라인이 빙글 몸을 돌렸다

"오로지 오러 유저만이 움직일 수 있는 장착형 골렘, 아다만드릴 슈트입니다."

테스론은 멍한 얼굴로 강철 거인에게 다가갔다. 그가 접근하자 위잉 하는 소리가 울리며 거인의 외골격이 차례로 벗겨졌다.

철컹, 철컹.

금속음과 함께 거인의 내부가 드러난다. 세렐라인이 손짓했다.

"착용해 보세요. 그냥 갑옷을 입는 느낌으로 하면 됩니다."

"아, 예...."

테스론은 조심스레 강철 거인의 내부에 팔다리를 집어넣었다. 바로 외골격이 닫히며 전신의 감각이 거인과 동조하기 시작했다.

"이, 이건...."

테스론은 당황하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단순히 갑옷을 입은 감각이 아니었다. 이 갑옷 자체가 자신의 육체가 된 것처럼 미묘하게 감각이 틀어진다. 세렐라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러를 발동해 보세요."

기합을 터트리며 테스론은 전신의 오러를 끌어 올렸다.

"허업!"

화르륵!

강철 거인이 된 테스론의 전신에서 싯누런 오러가 불길처럼 타올랐다. 테스론은 경악해 감탄사를 흘렸다.

"이럴 수가...."

아다만드릴 슈트 자체가 그의 육체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모든 오러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테스론은 걸음을 옮겼다. 자연스럽게, 조금의 어색함도 없이 이 금속의 육체도 함께 발을 디딘다.

쿵!

단상 위에서 내려오는 테스론을 보며 세렐라인이 경고를 날렸다.

"조심하세요! 당장은 신체 감각이 뒤틀어져 움직이기 힘들 겁니다. 당분간 아다만드릴 슈트에 감각을 적응해야 해요!"

테스론은 히죽 웃었다.

"그런 건 필요 없습니다, 수호자 세렐라인."

갑자기 테스론이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2.4미터의 강철 거인이 제비처럼 가볍게 떠오르더니 공중에 연속으로 발차기를 날린다.

파바바바밧!

대기가 찢어지는 소음 속에서 세렐라인이 놀라 중얼거렸다.

"이럴 수가, 착용하자마자 저렇게 빨리 적응할 리가 없는데...."

테스론이 바닥에 착지했다. 가볍게 무릎을 굽혀 힘을 분배하니 그 거대한 거인이 내려앉음에도 불구하고 쿵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아다만드릴 슈트의 투구 속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하...."

감각에 적응해야 한다고? 그런 건 필요 없다. 이 감각은 테스론에겐 너무도 익숙한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전생의 그가 지녔던, 거대한 강철의 육체 그 자체다! 언제나 그리워하고 아쉬워했던 진정한 그의 육체! 그것과 전혀 감각이 다르지 않다!

"하하핫!"

통쾌한 웃음을 터트리며 테스론이 두 팔을 벌렸다. 그리고 고함을 질렀다.

"스파이럴 가드!"

아다만드릴 슈트의 회색빛 외골격 위로, 누런 오러의 회오리가 힘차게 소용돌이쳤다.

테스론이 허공에 주먹을 뻗었다.

"스트레이트 캐논!"

오러의 장막이 어둠을 사르며 화끈하게 날아올랐다.

'된다! 이거면 돼!'

오러양이 모자라다 보니 역시 전생과 비교하면 위력이 약하긴 했지만, 그래도 틀림없는 짐 언브레이커블의 기술이었다.

"그렇다면...."

희열 속에서 테스론은 살짝 무릎을 굽혔다. 오른 주먹을 허리 뒤로 빼고 전신의 오러를 한 점에 응축시킨다. 오러의 고리가 오른팔 위로 계속 떠오른다.

1중첩, 2중첩, 3중첩, 4중첩... 5중첩!

'지금의 오러양으론 5중첩이 한계인가?'

우우우우우웅!

탁한 황색 오러의 파동이 당장이라도 터질 듯 요동친다. 하지만 겹치고 겹친 이 파괴력 앞에도 이 아다만드릴 슈트는 끄떡없이 모든 반발력을 감당하고 있었다.

테스론이 눈을 빛내며 허공에 주먹을 찔러 넣었다.

"캘러미티 혼!"

우르르릉!

뇌성이 울렸다. 이 거대한 어둠의 공간 위로 싯누런 빛의 기둥이 찬란한 광채를 뿜으며 솟아 나갔다. 공간이 일그러지며 공간 자체가 지진이라도 만난 것처럼 뒤흔들렸다. 주위 사물을 붙잡은 채 세렐라인이 비명을 터트렸다.

"꺄아아악!"

콰아아아아앙!

어두운 공간 저 너머에서 강렬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세렐라인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5중첩 캘러미티 혼이 이 공간을 지키는 결계조차 부숴 버린 것이다.

"맙소사, 저런 위력이라니...."

아무리 아다만드릴 슈트가 초월적인 아티팩트라지만, 이건 상상을 아득히 넘어서는 위력이었다. 수호자인 그녀조차 경악할 정도로....

주먹을 뻗은 채 테스론이 광소를 터트렸다.

"으하하하!"

테스론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검은 눈동자 위로 불길이 일렁거렸다.

"기다려라, 레펜하르트! 진정한 짐 언브레이커블의 힘을 보여 주마!"

<9권에서 계속>

9권

제29장 뿌리 깊은 나무는 뿌리부터 말려 죽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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