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기마대가 마을에 들어섰다. 레펜하르트 앞에 도착하자 기마대 전원이 하마下馬한 뒤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아스레일 이하 안타레스 기사단 전원, 지금 도착했습니다!"
고개 숙인 검은 머리의 미청년을 바라보며 레펜하르트가 빙그레 웃었다.
"늦었군, 아스레일 경."
송구스러워하며 아스레일이 얼굴을 붉혔다.
"죄송합니다, 백왕님. 최대한 빨리 말을 달렸으나...."
원래 출발은 다 같이 했었다. 그런데 레펜하르트가 시간이 없다며 시리스만을 대동한 채 먼저 앞서 가 버린 것이다. 고개 숙인 안타레스 기사 한 명이 지친 얼굴로 혀를 내둘렀다.
"아니, 어떻게 말 타고 달리는 우리보다 두 발로 뛰는 저분들이 더 빠르지?"
"그러게, 권왕님이야 그렇다 쳐도 시리스 경조차 이 정도라니...."
애초에 실력보다는 성격 보고 뽑은 안타레스 기사단이다 보니 기마술이 좀 떨어지는 면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엄청난 능력인 건 분명하다. 기사들이 존경스러운 눈으로 레펜하르트와 시리스를 바라보았다.
마을을 둘러보며 아스레일이 말했다.
"이미 다 처리해 버리셨군요."
불타 버린 마을과 죽은 마을 사람들, 그 속에 끼어 있는 박살난 용병들의 시체를 보며 아스레일이 안색을 굳혔다. 아무리 적이라지만 지나치게 참혹해 보이는 것이다.
설마하니 자신의 선택한 주군이 살육을 즐기는 성품이었던가? 살짝 근심하는 어조로 아스레일이 물었다.
"이들은?"
"벼멸구인가 메뚜기인가 하는 용병단이라더군."
레펜하르트의 대답에 아스레일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로커스트 용병단의 악명은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왜 이토록 잔인하게 손을 썼는지도 바로 납득이 갔다. 자신이라도 로커스트 용병단을 만났다면 결코 사정을 봐주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죽어도 싼 놈들이었군요."
뒤이어 또 한 무리의 기사단이 말을 몰고 다가왔다. 이 마을이 속한 영지의 주인, 갈린 남작과 그의 기사들이다. 남작을 보며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도망친 마을 사람들은 어찌 되었습니까?"
"나의 기사들이 돌보고 있습니다. 레펜하르트 공께서 서둘러 준 덕에 반 정도는 살아남을 수 있었구려."
마을의 참상에 침울해진 얼굴로 갈린 남작이 대답했다. 그리고 죽은 로커스트 용병단의 시체를 보며 혀를 찼다.
"그나저나 체타스 남작이 독이 올랐군. 이 흉악한 놈들까지 고용했다니... 이들이 어떤 놈들인지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그러는 동안 안타레스 기사 한 명이 레펜하르트와 시리스를 위해 두 필의 말을 끌고 왔다. 갈린 남작이 레펜하르트에게 권했다.
"일단 진지로 돌아가시지요. 뒤처리는 제 기사들이 할 것입니다."
"그럽시다."
레펜하르트가 말에 올라타자 다른 이들도 일제히 말머리를 돌려 마을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3
체타스 남작은 크로방스 왕국 남부의 유력 귀족들 중 하나였다.
비옥한 토지로부터 나오는 소출, 그리고 교역 도시 자루드 덕에 체타스 남작가는 대대로 크로방스 왕국 내에서 손꼽히는 부호였다. 지닌 무력 역시 상당해서 칠백 명의 병력과 쉰 명의 기사를 수하로 두고 있었다. 작위는 낮지만 오러 유저 그란디아드 경과 인척 관계를 맺고 있어 귀족들 사이의 권세도 꽤나 높았다.
그리고 인접한 갈린 남작가의 오랜 앙숙이기도 했다.
이웃이나 다름없는 두 가문이지만 사이는 결코 좋지 못했다. 전통의 귀족가인 체타스 남작가는 상인 출신인 신흥 귀족 갈린 남작가를 인정하지 않았다. 천한 놈들이 돈으로 작위를 샀다며 경멸하곤 했다.
그 분위기가 수하들에게도 전해져, 두 가문은 언제나 사소한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그때마다 세력이 약한 갈린 남작가가 굴욕을 무릅쓰고 뒤로 물러섰기에 큰 전쟁으로 번지지 않았을 뿐이다.
문제가 터진 것은 크로방스 왕위 계승 전쟁 후였다.
새로운 국왕, 유벨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기 위해 많은 귀족들이 왕도 크로틴을 찾았다. 그리고 그 속에는 갈린의 후계자인 베르랑트와 체타스의 후계자, 자크도 있었다.
내전 속에서 체타스 남작가는 그란디아드 경을 믿고 중립을 표했다가 뒤늦게 유벨 군에 가담했다. 반면 갈린 남작은 처음부터 유벨 국왕을 지지했고 그 대가로 당당히 공신의 반열에 들었다. 그렇다 보니 더 이상 두 가문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게 된 것이다.
수도에서 오랜 숙적, 자크를 만난 베르랑트는 생각했다.
-이제는 더 이상 체타스 남작가에게 꿀릴 이유가 없다!
그래서 평소와 다르게 당당히, 귀족다운 태도로 자크를 대했다.
하지만 자크에겐 여전히 베르랑트는 천한 출신일 뿐이었다. 태도가 변한 베르랑트를 보며 크게 분노했다.
-이 천한 놈이 주제도 모르고!
당연히 시비가 붙었다. 말싸움이 오가고, 분위기가 격해지며 결국 결투로 이어졌다.
문제는, 방심한 자크가 베르랑트의 검에 찔려 죽어 버렸다는 것이었다.
사실 귀족들 사이의 결투는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것, 그리고 그 결투의 결과는 승복하는 것이 귀족들 사이의 예의다.
하지만 어디 세상 일이 논리대로 돌아가는가?
-갈린의 천한 놈이 감히 내 아들을 죽였단 말이냐! 내 갈린의 모든 핏줄을 이 땅에서 말살해 버리리라!
후계자를 잃은 체타스 남작은 극도로 흥분해 병력을 일으켰다. 유벨 2세가 중재에 나섰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제 갓 왕위에 오른 데다가 내전까지 치룬 이후라 아무래도 왕의 권위가 예전만 못했다.
그리고 체타스 남작에게는 나름대로의 명분도 있었다. 상대를 귀족으로 인정치 않으니, 결투의 결과 또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모든 군사를 일으키고 막대한 금액을 들여 천여 명의 용병들을 고용한 체타스 남작은 곧바로 갈린 남작령을 침공했다.
아무리 공신 반열에 올랐다지만 당장 갈린 남작가의 세력이 커진 것은 아니다. 힘을 키울 시간이 없었던 갈린 남작에게는 암담한 상황이었다. 재력도 무력도 체타스 남작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영지전이 시작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영지의 절반 이상을 체타스 남작군이 휩쓸어 버렸다. 평소 형제처럼 지내던 인근의 다른 귀족들도 소용이 없었다. 도움을 청해도 다들 체타스 남작 뒤에 있는 오러 유저, 그란디아드 경을 두려워 해 못 본 척할 뿐이었다. 가문을 보전하기 위해 굴욕적인 조건으로 협상을 해 보기도 했지만, 그것마저 거절당했다.
영지 곳곳이 참혹하게 짓밟히는 절망적인 상황, 갈린 남작이 자결을 진지하게 고민할 때였다.
예상외의 장소에서 구원의 동아줄이 내려왔다.
대단히 크고 굵고 질기고 단단한, 황금빛 동아줄이었다.
☆ ☆ ☆
칼바람이 불어오는 체타스 남작령 내의 한 들판.
수백 명의 용병들이 단 한 명의 사내에 의해 사방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연환 기격탄!"
황금빛 오러가 쏟아지며 방패를 뚫고 갑옷을 우그러뜨린다. 거구의 용병들이 낙엽처럼 사방팔방 나가떨어진다.
용병들 사이를 돌진하며 사내가 전신의 오러를 폭발시켰다.
"흐아아압!"
금빛의 오러가 폭풍이 되어 용병대를 밀어붙였다. 폭풍이 수십, 수백의 펀치와 킥을 동반하며 용병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팔다리가 부러지고 근육이 터지고 살이 찢어지며 세상이 온통 붉게 물들었다. 비명이 메아리가 되어 들판을 메우고 또 메웠다.
"커억!"
"으악!"
"사, 살려!"
이들은 체타스 남작가에 고용된 용병들이었다. 한때는 갈린 남작령을 사정없이 유린하며 승승장구하던 체타스 남작군, 하지만 지금은 후퇴에 후퇴를 거듭해 도로 체타스 남작령까지 밀린 처지였다.
전부 눈앞의 저 황금빛 거한 때문이었다.
"권왕 레펜하르트!"
후방에서 서 있던 체타스 남작가의 기사대장, 가란드가 그를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저 빌어먹을 작자는 왜 갑자기 이 일에 끼어들었단 말이냐!"
가란드는 전장을 둘러보았다. 용병들의 사기가 눈에 보이게 꺾여 가고 있었다.
당연했다. 황금빛 오러를 보란 듯이 뿜어 대는, 창칼도 통하지 않는 저 압도적인 괴물을 상대로 대체 누가 용맹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설 수도 없는 처지였다. 정석대로라면 여기서 대장인 가란드가 직접 나서서 상대의 위세를 꺾어야 하겠지만, 솔직히 겁나긴 그도 마찬가지다.
'저런 괴물을 무슨 수로 상대하라고!'
대신 용병들에게 미끼를 던졌다.
모두 들어라! 저자에게 작은 상처만 내도 금화 천 닢을 내리겠다!"
금화 천 닢이면 부호인 체타스 남작에게도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하지만 권한도 없는 주제에 가란드는 호언장담을 해 버렸다. 어차피 지금은 그런 세세한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까짓것, 나중에 오리발 내밀면 된다.
"금화 천 닢이라고?"
"상처만 내는 정도라면야!"
침착하게 생각하면 거짓이란 걸 모를 리 없거늘, 금화 천 닢이라는 소리에 용병들의 표정이 금세 바뀌었다. 역시 칼 밥 먹고 사는 놈들답게 생각이 얕은 것 같았다.
말을 탄 용병 몇 명이 눈을 번득이며 창을 들고 레펜하르트에게로 돌진했다.
"이랴!"
아무리 이름 높은 오러 유저, 권왕이라지만 상대는 두 발을 땅에 디딘 상태다. 돌진하는 기마의 힘으로 밀어붙이면 작은 상처 정도야 내지 못할 것도 없다!
"죽어라아아아아!"
흙먼지를 일으키며 기마병들이 사방에서 창을 찔러 온다. 레펜하르트가 그들을 노려보며 차갑게 중얼거렸다.
"돈으로 생명을 거래하는 자들...."
찔러 오는 창칼을 비껴 스치며 레펜하르트가 기마병 사이로 파고들었다. 실로 완벽한 회피 기법이었다. 그동안 러스며 타시드, 아틸카를 상대로 열심히 수행해 온 그였다. 이제 이 정도 공격쯤 마음만 먹으면 쉽게 피할 수 있었다.
"자신의 생명이 가벼이 여겨진들 억울해 하진 못하리!"
고함을 지르며 레펜하르트가 몸을 띄웠다.
단숨에 마상 위의 용병들과 눈높이를 맞춘 뒤 그대로 주먹을 뻗는다. 오러를 실은 강렬한 훅이 용병들의 머리통을 일제히 분쇄해 갔다.
콰콰콰쾅!
머리 잃은 주인을 실은 말들이 울부짖으며 전장 여기저기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뒤를 중갑을 걸친 용병들이 도끼며 해머를 들고 나타났다.
"한 대!"
"한 대만 때리면 돼!"
"그러면 금화 천 닢이다!"
탐욕에 물든 눈으로 용병들이 일제히 공격을 가한다.
"멍청한 놈들!"
레펜하르트는 용병들의 머리 위를 타고 넘으며 그대로 대지에 발차기를 꽂아 넣었다.
"아발란시 킥!"
폭발과 함께 오른발이 꽂힌 대지가 진동했다.
쿠쿵!
오러의 파동이 땅거죽을 갈아엎으며 원형으로 퍼져 나갔다. 마치 눈사태라도 일어난 것처럼 거대한 대지의 파도가 용병들을 뒤덮었다. 주위에 포진해 있던 수십 명의 용병들이 흙더미에 파묻혀 휩쓸려 갔다.
파묻힌 오른발을 뽑은 뒤 레펜하르트가 허공에 주먹을 들었다. 용병들을 향해 우렁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 정도로 이 권왕을 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더냐!"
압도적, 참으로 압도적인 무력이었다. 흙더미 속에서 허우적대던 용병 하나가 절규를 터트렸다.
"빌어먹을! 이런 말은 없었잖아!"
결국 공포에 질린 용병들이 무기를 버리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걸 보며 레펜하르트가 오른손을 들어 손짓했다. 곧바로 그의 등 뒤에서 한 무리의 기마대가 나타났다. 아스레일 경이 이끄는 안타레스 기사단이었다.
"안타레스 기사단! 적들의 잔당을 처리하라!"
명령이 떨어지자 아스레일이 검을 뽑아들고 외침을 터트렸다.
"전원 돌격! 주군께 그대들의 용맹을 보여라!"
"와아아아!"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서른 기의 기사들이 일제히 용병들의 뒤를 덮쳐갔다. 그뿐이 아니었다. 용병들의 좌측에서도 또 다른 기사단이 맹렬히 돌진하고 있었다.
"뒤처지지 마라, 갈린의 기사들이여! 이것은 우리의 전쟁이다!"
"가족을 짓밟은 더러운 자들이다! 모두 죽여라!"
안 그래도 영지를 짓밟히고 울분에 차 있던 터였다. 다들 복수심에 가득 차 야수처럼 체타스 남작군의 옆구리를 치고 들어갔다.
순식간에 체타스 남작군의 진영이 붕괴되며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다급해진 가란드가 말머리를 돌리며 소리쳤다.
"후퇴! 전원 후퇴하라!"
패주하는 체타스 남작군을 뒤로한 채 레펜하르트는 진지로 돌아갔다. 시리스가 그에게 다가와 커다란 조끼와 망토를 건넸다.
"수고하셨어요, 레펜하르트 님. 이제 뭐 좀 걸치세요. 보는 제가 다 춥네요."
때는 바야흐로 호수가 얼어붙는 한겨울, 그런데 지금 레펜하르트는 우람한 상체를 그대로 드러낸 상태인 것이다.
계면쩍어하며 레펜하르트가 옷가지를 받았다.
"아, 응. 그래야지."
"아무리 단련되어서 추위를 모른다지만, 왜 그렇게 벗고 다니는 거예요? 한겨울인데."
옷을 걸치는 그를 보며 시리스가 입술을 삐죽였다. 레펜하르트가 머리를 긁었다.
"아니, 살다 보니까 아무래도 이게 편해서...."
레펜하르트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말하다 보니 절로 자괴감이 들었다.
'아아, 어쩌다 보니 짐 언브레이커블 계승자의 길을 완벽히 따라 걷고 있구나. 하지만 진짜 편한 걸 어쩌라고?'
살다 보니 절로 깨달을 수 있었다. 괜히 역대 짐 언브레이커블의 무인들이 한겨울에도 조끼나 망토만 걸치고 다녔던 것이 아니었다. 벗거나 입기 쉽고 가격도 싸고, 찢어져도 수선이 쉬우니 절로 취향이 이쪽으로 가 버린다.
조끼를 입은 레펜하르트에게 망토를 마저 걸쳐 주며 시리스가 투정을 부렸다.
"아무리 그래도 챙겨 입을 건 좀 입고 다니세요. 보기 흉하잖아요."
"휴, 흉하다니... 너무하잖아?"
레펜하르트는 울상을 지었다. 역시 시리스는 근육질보다는 마르고 날씬한 쪽이 취향이었던 것인가? 하긴, 대부분의 여자들이 저런 취향이긴 하다.
"흥!"
시리스가 혀를 날름 내밀며 딴청을 피웠다. 망토를 걸치던 레펜하르트가 문득 생각났는지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내 대사 어땠어? 좀 권왕 같았어? 권사답게 행동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봐 주려나 모르겠네."
"그, 그거요?"
시리스는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솔직히 말하면 듣다가 오글거려 죽는 줄 알았다. 자기 입으로 '이 권왕을 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더냐!'라고 하다니?
하지만 원래 무인들이 내뱉는 일명 '호탕한' 외침이란 게 다 저런 식인 법이다. 딱히 트집 잡을 것도 없어 시리스는 순순히 동의했다.
"네, 충분히 '짐 언브레이커블'의 계승자 같았어요. 훌륭했어요."
"어째 칭찬인지 욕인지...."
아리송해하는 레펜하르트의 곁으로 갈린 남작이 다가왔다. 전장의 기사답게 중무장을 한 차림이었다.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갈린 남작이 감격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뭐라 감사의 말을 건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레펜하르트 공. 그대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승리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겸양을 표하며 레펜하르트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동맹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일 뿐입니다."
☆ ☆ ☆
네다스 협곡을 넘은 안타레스-갈린 연합군은 하루 만에 체타스 남작의 본성, 훈다르가드에 도달했다. 진지를 구축한 연합군이 바로 성을 포위하고 총공세를 가했다. 궁병들이 성을 향해 잇달아 화살을 날리고 투석기가 연달아 성벽에 바위를 쏘아 냈다.
"1차, 발사!"
휘이이잉....
콰아앙!
거대한 바윗덩이가 훈다르가드의 성벽을 강타하며 지축을 흔들었다. 지휘관인 갈린의 기사, 그로스텐이 또다시 소리를 질렀다.
"2차, 발사!"
이번엔 각도가 좀 높았는지, 투석된 바위가 성벽 위쪽의 병력을 덮쳤다. 바위에 깔린 병사들이 비명을 터트리며 죽어갔다.
그 틈에 사다리며 갈고리 밧줄을 든 병사들이 성벽 아래로 달려가 타고 오를 준비를 했다. 훈다르가드의 병사들도 밧줄을 끊고 끓는 기름을 붓는 등 열심히 반격에 나섰다.
이미 영지전의 수준을 넘어선, 그야말로 본격적인 공성전이었다.
원래 영지전이라는 것은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까지는 잘 가지 않는 법이다. 어느 정도 승패가 갈렸을 때 국왕이나 고위 귀족이 중재에 나서게 되고, 그럼 진 쪽에서 적당히 배상금을 지불하고 전투를 끝내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처음부터 국왕의 중재마저 무시하고 일으킨 전쟁이었다. 괘씸죄가 있는데 이제 와서 유벨 2세가 중재를 해 줄 리 만무한 것이다.
그리고 체타스 남작은 갈린 남작가를 아예 몰살시키려는 생각으로 총력전을 벌였다. 기사뿐 아니라 갈린의 영지민들까지 잔혹하게 짓밟았다. 이미 중재를 할 단계는 한참 지나 버렸다.
여기까지 온 이상, 양 가문 중 하나가 지도에서 사라지기 전에 이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그로스텐 경이 병사들을 독려하며 고함을 질렀다.
"공격! 공격하라!"
"와아아아!"
화살 비가 연달아 훈다르가드의 하늘을 뒤덮었다. 투석기들이 쉴 새 없이 바윗덩이를 성벽으로 던져 댔다.
투석기 옆에 서서 전장을 바라보며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다들 잘하고 있군."
항상 선두에 서던 평소와 달리, 그는 지금 후방에서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아무리 동맹이라지만 이 전쟁의 주체는 엄연히 갈린 남작가다. 적어도 마지막 쐐기는 저들이 박아야 한다. 여기에서까지 레펜하르트가 선두에 서 버리면 그야말로 주객전도, 갈린 남작가의 체면이 말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시리스와 안타레스 기사단만 출전시키고 이렇듯 뒤로 물러나 있었다. 어차피 승리는 결정된 거나 다름없으니, 느긋하게 지켜보는 중이었다.
"가자! 안타레스의 기사들이여!"
저 멀리 아스레일 경이 수하를 독려하며 밧줄을 타고 성벽을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다른 기사들도 눈에 불을 켜고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이번에야말로 주군께 우리의 용맹을 보이자!"
안 그래도 그동안 계속 레펜하르트가 선두에서 설친 탓에 뒤처리밖에 못 맡은 안타레스 기사단이었다. 다들 잔뜩 흥분해 사다리며 밧줄을 타고 성벽을 공략하고 있었다.
밧줄을 연달아 당기며 성벽을 타오르는 아스레일의 머리 위에 거무튀튀한 물체 하나가 나타났다. 끓는 기름을 담은 솥이었다.
때마침 성벽 밑으로 도달한 시리스가 다급히 경고를 던졌다.
"조심해요, 아스레일 경!"
고개를 든 아스레일의 안색이 굳었다. 끓는 기름이 그의 머리 위로 쏟아지기 직전이었다. 아스레일이 재빨리 방패를 들어 몸을 가리며 화상을 각오할 때였다.
시리스가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내 친구, 님피아! 나를 위해 흘러 줘요!"
물방울이 응집되며 푸른 여인의 형상으로 변했다. 물의 정령, 님피아가 손짓을 하자 쏟아지던 끓는 기름이 허공으로 역류하며 도로 성벽 위를 덮쳤다.
기름을 뒤집어쓴 병사들이 악을 써 댔다.
"으악!"
"이거 왜 이래?"
"앗 뜨거어어어!"
공세가 뜸해진 틈을 타 기사들이 맹렬히 성벽 위로 올라갔다.
님피아를 거둔 뒤 시리스도 사다리를 타기 시작했다. 공격이 집중적으로 가해졌지만 사라나를 소환해 허공으로 몸을 피하며 앞장서 성벽을 주파한다. 백금발의 엘프 소녀가 성벽 위로 모습을 드러내자 병사들이 공포에 찬 외침을 터트렸다.
"신월의 검사다!"
성벽 위에 오른 시리스가 두 자루 시미터를 뽑아 맹렬히 휘두른다. 은색 검광이 병사들 사이를 휩쓸며 소용돌이가 되어 불어닥친다.
창칼을 수수깡처럼 베어 버리는 그 검광 앞에 사기를 잃지 않는 이는 없었다.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팔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후우우...."
성벽 위를 장악한 뒤 시리스가 잠시 숨을 고를 때였다. 갑자기 등 뒤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뎀 피르 아스타르나, 광휘여, 내 손에 임해 적을 치는 징벌자가 될지니! 루미너스 퍼니쉬먼트!"
굵은 섬광이 대기를 찢으며 그녀를 덮쳐 갔다. 화들짝 놀라며 시리스가 허공으로 공중제비를 넘었다.
"윽!"
섬광이 성벽 위를 파헤치며 길게 파괴의 흔적을 남겼다. 성벽 일부가 통째로 무너질 정도로 엄청난 파괴력이었다.
연달아 세 번이나 몸을 날려 간신히 공격을 피한 시리스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루미너스 퍼니쉬먼트라면 7서클의 광계 주문이다.
'7서클의 고위 마법사? 체타스 남작 휘하에 이 정도 실력자가 있었나?'
성벽 저편에서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금발의 청년이 그녀를 향해 실소를 흘렸다.
"신월의 검사라... 엘프 암컷 주제에 이름 하나는 그럴싸하게도 붙었군."
시리스는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 청년을 본 순간 본능적으로 불쾌한 기분이 들면서 소름이 돋는다.
"계약은 레펜하르트, 그자뿐이지만...."
청년이 오른손을 들며 중얼거렸다.
"덤으로 저것도 처리해 주지."
☆ ☆ ☆
들어 올린 오른손을 내리치며 청년, 제이드가 시동어를 외쳤다.
"매스 포톤 레이!"
수십 줄기의 황색 섬광이 시리스의 사방을 점유하며 비처럼 쏟아졌다. 도저히 피할 곳이 없다. 뒤로 몸을 날리며 그녀가 다급하게 외쳤다.
"테라투스! 나를 위해 일어서 줘요!"
박살 난 성벽 속에서 거대한 흙거인이 몸을 일으켰다. 소환된 테라투스가 시리스를 감싸며 모든 섬광을 대신 맞았다. 포톤 레이가 흙거인의 전신을 사정없이 파헤치기 시작했다.
제이드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쭈? 이걸 막아? 저게 정령술이란 건가?"
결국 흙거인은 모든 공격을 막아 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전신이 부서지기 직전이었다. 마법에 실린 파괴력이 보통이 아니란 증거다. 힘을 잃은 테라투스가 결국 무너져 내리며 흙으로 되돌아갔다.
간신히 위기를 넘긴 시리스가 혀를 내둘렀다.
'아슬아슬했어. 설마 저런 고위 마법사가 있었다니....'
시리스는 경각심을 높이며 땅을 박찼다. 마법사를 상대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아예 마법을 외울 시간을 주지 않는 것!
"하앗!"
맑은 기합을 터트리며 상대에게 돌진한다. 질풍처럼 달려오는 그녀를 보며 제이드가 인상을 썼다.
"건방진!"
그의 양손이 빠르게 수인을 맺었다.
"에어 봄! 웨이트 디스토션!"
공기가 압축되었다가 강렬하게 폭발하며 돌풍을 일으킨다. 돌풍이 돌진하는 시리스를 밀어붙였다.
풍압에 밀린 시리스가 자세를 가다듬으려는 찰나, 뒤이은 웨이트 디스토션이 그녀의 무게 감각을 일그러뜨렸다.
"윽!"
신음을 흘리며 시리스가 무릎을 꿇었다. 보이지 않는 거인이 양어깨를 강하게 짓누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를 가리키며 제이드가 시동어를 이었다.
"레이 바인드!"
빛의 밧줄이 생성되어 시리스의 사지를 꽁꽁 얽맨다. 제이드가 입가에 살벌한 미소를 띠었다.
"자고로 날뛰는 년은 족쇄를 채워 두어야 하는 법이지."
느긋하게 수인을 맺으며 최후의 일격을 준비한다.
"만물이여, 재가 되어라...."
그때였다. 순간 시리스가 무릎을 펴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두 팔을 떨쳐 빛의 밧줄을 끊어 냈다.
"하아압!"
전신을 대지의 정령력으로 감싸 감각을 되돌린 뒤 실프를 불러 마력의 밧줄을 끊은 것이다. 마법을 깬 시리스가 자세를 잡고 재차 제이드에게 달려들었다.
'윽?'
당황한 제이드가 허겁지겁 마법을 완성시켰다.
"인시너레이트incinerate!"
붉은 불길이 작열하며 시리스의 눈앞을 가득 메웠다. 어찌나 화력이 강력한지 시야가 일그러져 보일 정도였다.
시미터를 앞으로 교차하며 그녀도 마주 외쳤다.
"이그나시스!"
불의 거인이 불꽃의 숨결을 받아치며 열기를 흩뿌렸다. 불기둥이 성벽 위쪽으로 높게 솟구쳤다. 고온의 열기로 인해 주위의 석재가 버터처럼 녹아내리며 기묘한 형상으로 화했다.
콰아아앙!
열풍이 사방으로 불었다. 얼굴을 가리며 시리스가 뒷걸음질을 쳤다. 배리어를 쳐 여파를 막아 내며 제이드가 이를 갈았다.
"이것까지 막아?"
고작 엘프 따위에게 연달아 마법이 막히다니? 자존심이 상한 제이드가 마력을 끌어 올리며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북풍의 바람이여! 검풍이 되어 내 적을 쳐라! 프리즌 블레이드 스톰!"
제이드 주위로 눈보라가 일어나며 수십 개의 얼음의 칼날이 나타났다. 섬뜩한 냉기의 칼날이 회전하며 소용돌이친다. 주위의 성벽이 하얗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시리스도 정령술로 반격에 들어갔다.
"가라! 샐러맨더!"
십여 개체의 불도마뱀이 허공을 날아 얼음의 칼날 회오리를 강타한다. 폭음이 연달아 울렸다. 순간 시리스의 안색이 굳었다.
'안 통해?'
샐러맨더들은 칼날에 다가가는 족족 갈리면서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얼음의 칼날에 깃든 냉기가 너무 강해 샐러맨더 정도의 화력으로는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시리스는 뒤로 물러났다.
'제길....'
이그나시스 정도라면 통할 것도 같지만, 이그나시스는 저자의 마법을 막느라 힘을 소진해 버려 당장은 재소환할 수가 없다.
위이이잉!
섬뜩한 절삭음을 내며 칼날의 소용돌이가 그녀의 전신을 노리고 쇄도해 온다. 급한 김에 시리스는 양손의 시미터를 휘둘러 칼날을 쳐 냈다.
타타탕!
그때마다 시미터 위로 얼음이 엉겨 붙었다. 시미터의 예기가 사라지며 급격히 무거워진다. 당황하는 시리스를 보며 제이드가 이죽거렸다.
"후후, 칼잡이들에겐 이 수법이 참 잘 통하지."
"윽!"
묵직해진 시미터를 든 채 시리스는 인상을 썼다. 하도 얼음이 달라붙어, 이제는 더 이상 검의 형상조차 아니었다.
'어쩌지?'
다급해하며 그녀는 머리를 굴렸다. 언제나 써 오던 실프를 검에 깃들이는 술수, 절삭력을 높이는 그 수법은 현 상황에서 소용이 없었다.
불의 정령력을 검에 깃들여야 한다. 하지만 아직 그녀의 정령 제어술은 실프를 깃들게 하는 것 정도가 한계다.
고민하던 시리스가 갑자기 빠드득 이를 갈았다.
"에라! 어차피 결과만 같으면 되는 거잖아!"
그녀가 고함을 질렀다.
"나와! 샐러맨더!"
또다시 불도마뱀이 화르륵 허공에 생성되었다. 정령의 친구, 엘프의 부름에 따라 소환된 두 마리 샐러맨더가 명령을 기다리며 그녀 곁에 머문다. 샐러맨더를 향해 갑자기 시리스가 넙죽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
눈을 껌뻑이며 불도마뱀들이 어리둥절해할 때였다. 고개를 든 시리스가 양손의 시미터를 그대로 샐러맨더의 꼬리를 푸욱 찔러 버렸다!
꾸엑!
불도마뱀들이 눈을 크게 떴다. 뭐, 실제로 소리를 낸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로 표정이 대단히 강렬하다. 두 샐러맨더 모두 '뭐임? 이게 뭐임?' 하는 얼굴로 시미터에 꿰여 바동대기 시작했다.
미안해하면서도 시리스가 활짝 웃었다.
"됐다!"
시미터로 샐러맨더를 꼬치처럼 꿰어 강제로 화염검화시킨 것이다. 불꽃의 시미터를 양손에 쥔 채 그녀는 다가오는 냉기의 칼날을 후려갈겼다.
쾅! 쾅! 콰앙!
폭음이 연달아 울리며 냉기의 칼날이 여지없이 부서져 녹아내린다. 기대했던 대로 샐러맨더의 화력이 시미터에 더해지니 저 가공할 냉기 앞에서도 충분한 위력이 나와 주었다.
시리스는 잇달아 검을 휘두르며 얼음의 폭풍을 부숴 갔다. 물론 그 와중에 시미터에 꽂혀 버둥대는 샐러맨더의 애처로운 몸부림은 애써 무시했다. 제이드가 입을 쩍 벌렸다.
"...엘프는 정령의 친구라며? 그래서 정령술을 쓴다며?"
정령술에 대해 잘 모르긴 해도 저건 좀 아닌 것 같았다. 저러고도 정령과 친구라고? 설사 노예라도 저렇게까지 막 대하진 않을 것 같았다.
"저러고도 정령술이 돼?"
사실은 세계수의 총애를 받는―좀 사기성이 짙지만― 시리스이기에 가능한 짓이었다. 평범한 엘프가 저런 짓 했다간 당장 정령 친화력이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제이드가 어이없어하는 사이 시리스는 모든 얼음의 칼날을 분쇄해 버렸다. 불꽃의 시미터를 양손에 쥔 채 그녀가 다시 앞으로 뛰쳐나갔다. 제이드도 연달아 마법을 구사해 접근을 저지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불의 정령력이 깃든 쌍검이 마법을 모조리 파훼해 버린다.
'이, 이거 생각보다 더 까다롭잖아?'
그렇게 계속 뒤로 물러서며 마법을 구사하던 중이었다. 제이드의 등 뒤로 무엇인가가 닿았다. 성벽의 축대였다.
물러설 자리가 없어진 제이드를 향해 시리스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몸을 날렸다. 시미터를 높이 쳐들고 강렬한 검격을 흩뿌린다.
"하앗!"
불길이 일렁이며 두 줄기 참격이 머리 위로 쇄도해 온다. 제이드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시리스가 승리를 확신하며 눈을 빛낼 때였다.
"블링크!"
펑!
갑자기 눈앞에서 제이드의 모습이 사라졌다. 두 줄기 참격이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헉?"
놀라며 시리스는 눈을 깜빡였다. 분명히 코앞에 있던 상대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등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젠장, 고작 엘프 따위에게 블링크 부츠까지 써 버리다니...."
☆ ☆ ☆
시리스는 고개를 돌렸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제이드가 인상을 구긴 채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가 신고 있는 부츠, 그 표면에 빛의 문양이 떠올라 희미하게 점멸하는 것이 보였다.
'저거 설마... 공간을 이동하는 아티팩트?'
정말 공간을 뛰어넘는 권능을 지닌 기물이라면 마갑 엘드라드처럼 대륙 전체에 명성이 자자한 아티팩트일 터였다.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그녀가 시미터를 내리쳤다.
"가라! 샐러맨더!"
검에 꽂혀 있던 샐러맨더가 쏙 빠지며 날아갔다. 샐러맨더가 저만치 떨어진 제이드를 향해 몸을 던졌다. 막 샐러맨더가 적중하려는 순간....
펑!
또다시 제이드가 사라지며 샐러맨더가 바닥에 충돌해 폭발했다. 그는 어느새 좌측에 나타나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소용없다, 엘프 계집."
틀림없었다.
공간 이동, 그것도 개체 공간 이동이 가능한 은의 시대 아티팩트였다.
시리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마음껏 공간을 이동하며 강력한 마법을 쏘아 대는 고위 마법사를 대체 무슨 수로 막으란 말인가?
게다가 제이드가 가진 아티팩트는 저 블링크 부츠뿐이 아니었다.
"엘프 따위에게 쓰기엔 아까운 것이지만...."
제이드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된 이상 아낄 이유가 없지."
손에 낀 장갑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섬뜩한 예감이 등골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성보다 본능이 먼저 움직여, 시리스는 자기도 모르게 뒤로 펄쩍 뛰었다.
사악!
섬뜩한 음향과 함께 날카로운 빛의 원반이 날아와 그녀가 서 있던 자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두꺼운 성벽 상단이 절단되며 스르륵 아래로 미끄러졌다.
경악한 얼굴로 시리스는 잘린 성벽을 바라보았다. 절단면이 어찌나 매끄러운지, 얼굴이 비칠 정도였다. 이 정도로 엄청난 절삭력이라니?
'마법? 오러?'
어느 쪽이건 어마어마한 위력이다.
오른손에 낀 장갑을 들어 보이며 제이드가 자랑스레 중얼거렸다.
"단절의 검."
부우웅!
장갑으로부터 섬광이 솟구치며 검의 형상으로 변했다. 시리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단순한 검 형태의 빛, 하지만 속에 깃든 기운이 어찌나 강한지 보고만 있어도 절로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재주껏 막아 봐라."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또다시 제이드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공간을 뛰어넘어 시리스의 등 뒤로 돌아간 뒤 바로 빛의 검을 휘두른다. 시리스도 잽싸게 몸을 틀어 피했지만 조금 늦었다. 옷자락이 찢어지며 핏물이 튀었다.
"으윽!"
신음을 흘리며 그녀는 참격을 날려 반격에 나섰다. 하지만 그 자리에 이미 제이드는 없었다. 어느새 옆으로 돌아가 검을 휘둘러 후속타를 날린다. 또다시 핏물이 튀어 오른다.
연속으로 공간을 뛰어넘으며 제이드는 사정없이 시리스를 압박해 갔다. 정신없이 밀리는 그녀의 전신에 점점 상처가 늘어났다.
"이이익!"
고통과 굴욕감으로 시리스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상대의 검술이나 움직임 자체는 별것 없었다. 그냥 평범하게 체술을 익힌 마법사 정도 수준일 뿐이다. 하지만 저 빌어먹을 공간 이동이 곁들여지니 도저히 잡을 수가 없다. 간신히 치명타를 피하는 것만이 현재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쳇, 잘도 피하네."
갈대처럼 휘청대면서도 용케 급소를 지키는 시리스를 보며 제이드는 혀를 찼다. 그리고 손가락을 까닥여 마법을 발동시켰다.
"홀드 슬로우!"
하위 서클 주문이지만 잠깐이나마 움직임을 억제하기엔 충분했다. 순간적으로 시리스의 움직임이 멎었다.
"제법 설쳤다만, 이젠 끝이다."
꼼짝도 못하는 시리스를 향해 제이드가 빛의 원반을 쏘아 냈다. 조금 전 성벽을 갈랐던 그 절삭의 빛이었다.
위이이잉!
빛의 원반이 괴상한 소음을 흘리며 날아온다. 다급해진 시리스가 시미터를 교차해 앞을 막았다.
타탕!
요란한 금속음과 함께 두 자루 시미터가 박살이 나 버렸다. 흩어진 섬광의 파편이 그녀의 전신을 뚫고 지나갔다. 전신을 덮쳐 오는 고통에 시리스가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가녀린 육체가 피투성이가 되어 비참하게 나가떨어진다. 쓰러진 시리스는 바닥을 기며 신음을 흘렸다.
도저히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전신에서 흐르는 피가 성벽을 붉게 물들였다.
"으, 으윽...."
"하하핫! 개처럼 기는 걸 보니 이제 좀 엘프년답구나!"
통쾌한 듯 웃으며 제이드가 손을 들어 마법을 준비했다. 최후의 일격만큼은 자신의 마법으로 직접 처리하고 싶었다. 불길이 일렁이며 이내 거대한 화구로 변해 갔다.
"건방지게 내 마법을 막아 냈겠다?"
화구가 점점 커지며 마력의 열기를 내뿜는다. 압축되고 압축된 폭염의 힘이 당장이라도 터질 듯 일렁인다.
시리스의 눈동자에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자기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한 사람의 이름이 터져 나왔다.
'레펜하르트 님!'
2
"시리스!"
성벽을 바라보며 레펜하르트는 눈을 부릅떴다. 시리스가 웬 정체불명의 마법사에게 사정없이 밀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괜찮게 상대하는 것 같더니, 마법사가 빛의 검을 휘두르기 시작하자 곧바로 몰려 패색이 짙어진다.
'별 위험 없을 줄 알았는데 어디서 저런 놈이 튀어나온 거야!'
초조해하며 레펜하르트는 발을 동동 굴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시리스를 홀로 전장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저곳으로 달려가 그녀를 돕고 싶지만....
'젠장! 거리가 너무 멀어!'
예전의 레펜하르트, 10서클의 대마도사였던 그라면 그냥 허공을 날아 단숨에 성벽까지 주파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속으로 하늘을 나는 비행 마법, 플라이는 8서클의 고위 주문이었다. 지금 레펜하르트가 쓸 수 있는 것은 5서클의 단순 부유 주문, 레비테이션뿐이다.
그렇다고 지금부터 열심히 달려가 봤자 시간을 맞추지 못할 것이 뻔하고.
"그, 급하다...."
레펜하르트는 다급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해서였다.
그때 그의 눈에 거대한 투석기가 들어왔다.
"저거다!"
눈을 빛내며 레펜하르트는 투석기로 달려갔다. 막 바위를 장전하고 있던 기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권왕님?"
"잠시 빌리겠다!"
고함을 지르며 레펜하르트가 투석기 위로 뛰어올랐다. 가볍게 걷어차는 것만으로 장전되어 있던 바위가 붕 떠올라 옆으로 날아가 버렸다. 바위가 있던 자리에 착지하는 그를 보며 병사들이 당황해 물었다.
"에엑?"
"권왕님, 지금 뭐 하시는 거...."
"서, 설마?"
아무런 대꾸도 없이 레펜하르트가 팽팽히 당겨진 밧줄을 향해 수도를 뻗었다. 황금빛 오러의 칼날이 쏘아져 밧줄에 깊이 파고들었다.
타아아앙!
밧줄이 끊기며 투석기가 강렬한 힘으로 장전한 탄환을 허공에 쏘아 냈다. 물론 여기서 그 탄환은 바로 레펜하르트 자신이다.
슈우우웅!
바람을 가르며 레펜하르트의 거구가 단숨에 훈다르가드의 성벽까지 날아가기 시작했다. 적도 아군도, 그 순간 모두 기겁하며 고함을 질렀다.
"저, 저거!"
"뭐 하는 짓이야!"
"저런 미친!"
☆ ☆ ☆
"마그마 플레어!"
제이드의 마법이 발동되었다. 쏘아진 화염구가 폭염을 일렁이며 격류가 되어 거칠게 밀어닥쳤다. 흐릿해진 시리스의 눈동자 위로 이글거리는 불길의 강이 선명히 비쳤다.
끔찍한 열기가 전신을 찌른다. 이미 사지는 마비되어 움직일 수가 없다. 정령을 부를 힘조차 남지 않았다.
시리스는 죽음을 각오하며 눈을 감았다.
"...."
불길의 강이 성벽을 타고 흐르며 그녀를 덮치기 바로 직전....
휘이이익!
파공음이 울리며 하늘에서 황금빛 유성이 떨어졌다.
쿠우웅!
유성이 성벽을 강타하며 지축을 뒤흔들었다. 놀란 시리스가 눈을 번쩍 떴다. 철탑 같은 거한이 어느새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레, 레펜하르트 님?"
잠시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분명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야 할 그가 어떻게 이 자리에? 죽음에 임박해 환각을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동시에 불길의 강이 두 사람을 덮쳤다.
콰아아아아!
"이리 와, 시리스!"
허겁지겁 시리스를 품에 껴안고 레펜하르트는 몸을 돌렸다. 전신의 오러를 끌어 올리며 등으로 모든 열기를 막아 낸다.
화르르륵!
작열하는 불길이 레펜하르트와 시리스를 휘감으며 성벽 위를 가득 메웠다. 지독한 열기가 성벽 위를 벌겋게 달구었다.
잠시 후 화염이 사그라지며 레펜하르트가 시리스를 안은 채 몸을 일으켰다. 저 강력한 불길도 짐 언브레이커블의 오러를 뚫지는 못했던 것이다.
오러를 운용해 시리스의 전신을 지혈하며 그가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아?"
멍하니 시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죽을 줄만 알았으니 아직 제정신일 리가 없었다. 아직도 심장이 미칠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자신이 어디에 안겨 있는지를 깨달았다. 순간 시리스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게 물들었다.
"...!"
노예 시절 이런저런 치욕을 당하긴 했지만, 항상 초반에 반품당한 덕에 실제로 남자를 접한 적은 없는 시리스였다. 이렇게 남자 품 안에 깊숙이 안겨 보긴 처음인 것이다.
그것도 그냥 남자 품인가? 오늘도 변함없이 레펜하르트는 웃통을 까고 있었다. 쉽게 말해 맨살, 근육의 열기가 고스란히 닿는다는 소리다. 사춘기 소녀에겐 참으로 부담스러운 포옹이 아닐 수 없다.
"내, 내려주세요...!"
"응? 어, 그래."
바동대며 시리스는 레펜하르트 품에서 빠져나왔다. 오러의 치유력 덕인지 그럭저럭 두 다리로 설 수 있었다. 화끈거리는 얼굴로 그녀가 눈을 흘겼다.
'또 벗고 왔어! 또!'
"...?"
갑자기 째려보는 시리스의 태도에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표정을 풀었다. 부끄러워서 잠시 저런 태도를 보이긴 했지만 어쨌건 위기의 순간 바람같이 나타나 그녀를 구해 주지 않았는가? 솔직히 감동스럽긴 했다.
"고마워요, 레펜하르트 님...."
"당연한 걸 가지고 뭘...."
멋쩍어하며 레펜하르트는 성벽 안쪽에 그녀를 앉혔다. 그리고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아까부터 합공할 기회를 노리던- 그러나 워낙 제이드와 시리스가 살벌하게 싸워 대는 탓에 감히 끼어들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만 있던 아스레일을 불렀다.
"아스레일 경! 시리스를 부탁하네!"
"네! 백왕님!"
달려오자마자 아스레일이 힐링 포션을 꺼내 시리스에게 건넸다. 상처를 치료하는 그녀를 향해 레펜하르트가 달래듯이 말했다.
"그럼 잠깐만 쉬고 있어, 금방 처리하고 올 테니까."
레펜하르트의 시선이 금발의 청년에게로 향했다. 청년이 그를 노려보며 눈을 빛냈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권왕 레펜하르트!"
☆ ☆ ☆
"등장 한번 요란하기도 하군. 역대 권왕들이 무식하단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눈앞의 청년 마법사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인상을 썼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왠지 얼굴이 익숙했다.
'어라? 묘하게 낯이 익은데?'
겉보기엔 더없이 선량해 보이는 반반한 외모, 하지만 표정을 지으면 인상이 확 바뀌어 냉철하고 음흉해 보이기까지 한다. 저 이중적인 인상의 소유자를 그는 전생에서 본 적이 있다.
새파랗게 젊은 모습이라 미처 몰랐는데 막상 인식하고 나니 확실히 알겠다. 틀림없는 그 자다.
마나의 축복을 받았다는 빛의 마도사.
레펜하르트를 제외하고는 대륙 최강의 마법사였던 자.
대륙의 모든 마법병단을 이끌며 지긋지긋하게 그를 괴롭힌 전생의 숙적 중 하나.
'제이드 아크라이트?'
순간 레펜하르트의 얼굴에 당혹의 빛이 맴돌았다.
'저자가 어째서 여기에?'
보아하니 체타스 남작에게 고용된 것 같은데, 어째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가 아는 제이드라면 굳이 이 먼 크로방스 왕국까지 와서 용병 노릇을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태양탑을 거의 떠나질 않아 일반인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뿐, 이 시대의 제이드는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꽤나 유명 인사였다.
신성 바슈탈론 제국의 명문가, 대대로 대마법사를 배출한 아크라이트 가문의 차남으로 어릴 적부터 영재 교육을 받은 엘리트, 20대 중반에 이미 7서클의 경지에 올라 대륙의 모든 마법사들의 부러움을 산 천재 마법사가 바로 그였다.
하필 동시대에 레펜하르트라는 희대의 괴수가 있어 서른 살 이후에는 완전히 묻혀 버렸지만, 이때만 해도 제이드는 그 뛰어난 재능으로 태양탑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가문도 빵빵하고 재능도 출중하니 고작 돈 때문에 전장을 돌아다닐 이유가 없었다.
'여행이라도 다니다가 잠시 몸을 의탁한 건가?'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이내 상념을 거두었다.
상황이야 어찌 되었건 지금 눈앞에 제이드가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저놈이 시리스를 죽이려 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참으로 기묘한 우연이란 생각이 들었다. 전생에서 시리스를 죽인 자가 또다시 그녀의 목숨을 노린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이드를 노려보는 싸늘한 눈빛 속에 섬뜩한 살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제이드가 싸늘한 목소리로 외쳤다.
"사적인 원한은 없지만 계약은 계약, 죽어 줘야겠다! 권왕!"
그리고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돌풍이 화염을 동반하며 피어올랐다.
"파이어 캐논!"
십여 개의 화염 탄환이 불꽃의 궤적을 남기며 날아들었다. 레펜하르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파이어 캐논은 고작 4서클의 폭염 주문, 이 정도라면 굳이 스파이럴 가드를 쓸 필요도 없었다.
"헙!"
간단한 기합과 함께 황금빛 오러가 전신을 감싸며 화염 탄환을 모조리 튕겨 내 버렸다. 비웃음을 흘리며 레펜하르트가 제이드를 노려보았다.
"어이가 없군. 이 정도로 오러 능력자를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나?"
8서클 이상의 대마법사만이 오러 유저와 견줄 수 있다는 것이 대륙의 상식이다. 전생에서야 레펜하르트 다음가는 최강의 마법사였겠지만 지금의 제이드는 7서클의 고위 마법사일 뿐이다. 나이에 비해 월등한 경지이긴 하지만 오러 유저 중에서도 수위에 드는 권왕을 상대하기엔 미흡하다.
물론, 제이드도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단절의 검!"
제이드가 곧바로 오른손을 뻗어 빛의 원반을 날렸다. 파이어 캐논은 처음부터 거리를 벌리기 위한 눈속임이었던 것이다.
새애애액!
빛의 원반이 섬광의 궤적을 남기며 레펜하르트를 직격한다. 그 속에 깃든 가공할 기운에 레펜하르트는 순간 기겁했다. 좌측으로 몸을 비틀며 황금빛 오러를 전력으로 끌어 올려 회전시킨다.
"스파이럴 가드!"
파지지직!
금색의 소용돌이와 빛의 원반이 서로 갈리며 핏물이 튀었다. 빛의 원반이 레펜하르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 성벽을 치즈처럼 절단해 버렸다.
'헉? 스파이럴 가드가 깨졌어?'
놀란 눈으로 레펜하르트는 어깨의 상처를 바라보았다. 하산한 이래 이렇게 쉽게 상처를 입어 보긴 처음이었다. 오러로 상처를 지혈하며 레펜하르트가 제이드의 손을 바라보았다.
'...은의 시대 아티팩트? 시리스가 당했던 그 빛의 검인가?'
그것도 유서스가 쓰는 마검 엘드란의 최강 기술, 엘드릴의 빛에 필적할 위력이다. 심지어 발동 시간은 거의 찰나, 저 단순해 보이는 디자인의 장갑은 엘드란보다도 더 고위의 아티팩트였던 것이다.
"맙소사, 어디서 저런 걸?"
놀란 레펜하르트의 표정에 제이드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제 아무리 권왕이라도 위대한 고대의 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제이드가 빛의 원반을 연달아 쏘아 냈다. 감히 대적하지 못하고 레펜하르트는 정신없이 몸을 날리며 공격을 피했다. 당혹해하며 레펜하르트가 표정을 구겼다.
'제이드가 이런 엄청난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단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
하지만 마냥 놀라고만 있을 수는 없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반격에 나선다. 원반의 공격을 피해 몸을 날리며 주먹을 강하게 뻗어 낸다.
"연환 기격탄!"
오러의 탄환이 연달아 날아가 제이드를 노렸다. 제이드가 왼손으로 수인을 맺으며 시동어를 외쳤다.
"힘의 장막, 나를 지키는 방패가 되라! 안티악 배리어!"
검푸른 빛의 장막이 제이드를 감싸며 기격탄을 모조리 막아 냈다. 폭음이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역시 오러 유저는 마법사에 비해 원거리 공격이 약한 편이라, 기격탄이 배리어를 뚫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덕분에 공격이 좀 늦춰지긴 했다. 이 틈에 레펜하르트가 거리를 좁혔다.
"먹어라! 가스트리젠!"
살기를 흘리며 레펜하르트는 바로 제이드를 향해 오른발을 길게 뻗었다. 황금빛 오러가 포탄처럼 쏘아져 가공할 충격파를 낳았다.
콰앙!
단숨에 배리어가 깨지며 오러가 제이드를 직격하려는 찰나였다.
"블링크!"
펑!
연기와 함께 제이드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동시에 등 뒤에서 인기척이 감지됐다. 레펜하르트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제이드는 10여 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의 신발이 희미한 빛을 내는 걸 보며 레펜하르트는 다시 한 번 놀랐다. 단절의 검은 몰라도, 저 신발은 그도 잘 알고 있는 아티팩트였다.
"...블링크 부츠?"
전생의 일이었다. 시리스, 타시드와 함께 한창 대륙의 오지에서 살아가는 이종족들과 조우하며 10서클의 경지를 개척하던 레펜하르트에게 어느 날, 정체불명의 암살자가 나타났다.
그 암살자의 실력 자체는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리스도 타시드도 그 암살자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그가 지닌 은의 시대 유물이 하나같이 듣도 보도 못했던 엄청난 기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 암살자가 쓰던 아티팩트 중 하나가 바로 저 단거리 공간 이동의 권능을 지닌 블링크 부츠다.
'저걸 어떻게 제이드가 신고 있는 거지?'
당황하면서도 레펜하르트는 곧바로 몸을 날렸다. 포탄처럼 쏘아져 제이드의 코앞까지 쇄도, 강렬한 수도를 내리친다.
하지만 또 헛손질이었다. 다시 제이드가 공간 이동으로 멀리 도망친 것이다. 멀어진 그를 향해 바로 기격탄을 날려 보았지만, 이내 배리어에 막혀 버린다.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굳었다. 아까는 거리가 멀어서 미처 몰랐는데....
'시리스가 당한 이유가 이거였군.'
지금 그녀의 실력이라면 상대가 7서클 마법사라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터,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밀렸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후후, 일단 거리를 벌리면 전사 따위 마법사의 상대가 될 수 없지...."
거리를 벌린 제이드가 느긋하게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캐스팅을 마치며 비릿한 미소를 짓는다.
"프리즌 블레이드 스톰!"
얼음 칼날의 폭풍이 눈보라를 뿌리며 레펜하르트를 뒤덮었다. 오러를 전신에 휘감은 채 레펜하르트가 연달아 주먹을 날려 칼날을 부숴 갔다.
하지만 그의 오러로는 칼날은 막아도 냉기는 막지 못했다. 얼음 파편이 전신에 달라붙으며 조금씩 온몸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점점 레펜하르트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새애액!
또다시 빛의 원반이 연거푸 날아왔다. 몸을 비틀며 레펜하르트는 간신히 공격을 피해 냈다. 피하는 것이 고작, 도저히 반격은 불가능했다. 제이드가 조롱을 던졌다.
"그런 얼어붙은 몸으로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까?"
블링크 부츠로 거리를 벌린 뒤 마법으로 움직임을 봉쇄하고 단절의 검으로 숨통을 끊는 것. 그가 오러 유저를 상대하는 필승법이었다. 이걸로 암살했던 오러 유저의 숫자만 무려 셋, 제이드는 승리를 확신했다.
'저 엘프 계집은 정령술 때문에 마법이 막혔지만 오러 유저인 권왕이라면 이 패턴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때였다. 갑자기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쳇, 웬만하면 안 쓰려고 했는데...."
두 손을 가슴으로 모으더니 나직하게 읊조린다.
"이곳은 나의 영역, 그 어떤 흐름도 허락하지 않으리. 디스펠 에리어."
보이지 않는 마력장이 펼쳐지며 제이드의 마법에 간섭해 들어갔다. 이내 눈보라가 사그라지며 냉기가 눈에 띠게 수그러지기 시작했다. 얼어붙었던 레펜하르트의 전신이 이내 자유로워졌다.
제이드가 경악해 입을 쩍 벌렸다.
"마, 마법?"
☆ ☆ ☆
제이드는 눈을 껌뻑거렸다. 눈앞의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우락부락한 근육질, 무식하기로 대륙 제일이라는 저 짐 언브레이커블 정통 계승자의 전신에서 보이지 않는 마력장이 짙게 피어오르고 있다. 아무리 봐도 7서클인 자신과 비교해 전혀 뒤떨어지지 않아 보인다.
'말도 안 돼! 권왕이 마법도 쓴다고?'
혹여 자신이 모르는 무슨 은의 시대 유물의 힘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제이드도 촉망받는 천재 마법사, 상대가 마법사인지 아티팩트 사용자인지도 구별 못 할 정도는 아니다. 분명 방금의 디스펠 에리어는 저자, 레펜하르트가 직접 구현한 것이었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제이드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차갑게 웃었다. 권왕으로 행세하고 있으니 대놓고 마법을 쓸 생각은 물론 없었다. 하지만....
"뭐, 티만 안 나면 되지."
대놓고 불꽃이며 전격 펑펑 날리는 요란한 마법은 쓰지 않는다. 적당히 상대의 마법을 방해할 정도면 충분하다. 그럼 멀리서 보았을 때 레펜하르트가 마법을 쓰는지 오러를 쓰는지 무슨 수로 구별하겠는가?
"타앗!"
레펜하르트가 몸을 날려 제이드에게 돌진했다. 그제야 화들짝 정신이 든 제이드가 재차 마법을 준비했다.
"서, 서먼 웹!"
마법의 거미줄이 머리 위로 펼쳐진다. 레펜하르트가 거미줄을 가리키며 마주 외쳤다.
"캔슬레이션!"
마법의 거미줄이 단숨에 허공에서 소멸했다. 기겁한 제이드가 마법을 이었다.
"라이트 바인드! 리퀴드 위드 비스코시티liquid with viscosity!"
빛의 밧줄이 뻗어 나가고 강한 점성을 지닌 액체가 레펜하르트의 발치로 던져졌다. 하지만 그것도 발동되기가 무섭게 이내 취소되어 버렸다. 다급해진 제이드가 단절의 검을 휘둘렀다.
"타앗!"
네 개의 빛의 원반이 허공을 갈랐다. 날아오는 빛의 원반을 향해 레펜하르트가 양손을 크게 펼쳤다.
"리플렉트 미러!"
마법의 거울이 생겨나며 빛의 원반들이 모조리 반대편으로 튕겨 나갔다. 레펜하르트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위력이야 엄청나지만 어쨌건 속성은 빛이잖아? 그렇다면 반사시킬 수 있지."
처음 본 아티팩트지만 명색이 마왕이었던 레펜하르트다. 단절의 검의 발동 원리는 보자마자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엄청난 고열의 섬광을 발생시켜서 표적을 가르는 수법, 하지만 파괴력을 전달하는 매개는 어디까지나 빛이다. 즉, 빛을 흩어 버리거나 반사시키는 식으로 대응하면 이렇듯 저렴한(?) 마법으로도 방어가 가능한 것이다.
"...."
기가 막혀 제이드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단절의 검조차 막아 내다니? 7서클의 마법사인 자신보다도 저 우락부락한 권사가 더 세련된 마법 운용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머리가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내가 미친 거냐, 아니면 세상이 미친 거냐....'
레펜하르트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제이드에게 돌진해 갔다. 연속으로 블링크 부츠를 발동해 거리를 벌리며 제이드는 계속 마법을 쏘고 단절의 검을 휘둘렀다. 불꽃과 전격, 냉기, 그리고 빛의 원반들이 잇달아 쏘아졌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계속 마법은 봉쇄하고 단절의 검은 리플렉트 미러로 반사시키며 끈질기게 제이드를 추적했다. 나중에는 일일이 파훼하기 귀찮아졌는지 괴상한 짓까지 서슴지 않았다.
"에라이, 디스펠 펀치!"
무슨 수를 쓴 건지, 주먹에 디스펠 매직을 걸고 그걸로 발동된 마법을 일일이 후려갈기기 시작한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마법이었다.
'아니, 저런 건 대체 어디서 가르치는 거야?'
사실은 한창 마법을 쓰다 흥이 오른 레펜하르트가 무심코 새로운 주문을 개발한 것이지만 제이드가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어쨌거나 제이드는 정신없이 도망치고 있었다. 마법도, 단절의 검도 통하지 않으니 이제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계속 블링크 부츠만 죽어라 발동했다.
펑! 펑! 펑!
잡힐 만하면 바로 몸을 빼 버리는 제이드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구겼다.
'아, 저 블링크 부츠 골치 아프네. 예전에는 별것 아니었는데.'
전생에서 저 블링크 부츠를 상대할 때는 별문제가 없었다.
그때 블링크 부츠를 사용하던 암살자는 지금의 제이드보다도 더 많은 아티팩트로 전신을 무장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미 10서클의 마법사였던 레펜하르트에겐 전혀 힘든 상대가 아니었다.
'AMP 쇼크웨이브 한 방이면 간단히 처리할 수 있는데, 쓰지를 못하니... 쩝.'
10서클 궁극 주문, AMP 쇼크웨이브(Arcane Magic Pulse Shockwave).
레펜하르트 본인이 직접 창안한 이 주문은 세계의 마나, 그 근원의 흐름에 간섭해 정해진 반경 내의 모든 마도기를 정지시킬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있었다.
적아를 구별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평범한 마도구건 은의 시대 유물이건 초고도의 아티팩트건 이 주문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심지어는 저 지저 태양 마그림조차도 일시 정지시킬 정도로 위력적인 마법이었다. 그 후 기겁한 레펜하르트가 바로 재가동시키긴 했지만.
아무리 어마어마한 은의 시대 아티팩트로 무장하고 있어 봤자 저 마법 한 방이면 그냥 침몰인 것이다. 그래서 당시엔 진짜 간단히 암살자를 처리할 수 있었다. 붙잡힌 암살자가 자살하는 통에 배후를 캐묻지는 못했지만, 그자가 가지고 있던 아티팩트는 즐겁게 회수해 시리스며 타시드에게 나누어 준 기억이 있다.
'거참, 시리스가 쓸 때는 참 약점 많다며 투덜거린 물건인데 정작 내가 상대하니 엄청 짜증... 응?'
구시렁대던 레펜하르트의 표정이 문득 밝아졌다. 그러고 보니 저 블링크 부츠, 분명 약점이 있었다. 아니, 많았다!
"흐음!"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레펜하르트가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제이드의 머리를 노리고 길게 킥을 뻗는다. 이번에도 블링크 부츠를 이용, 제이드가 20미터 후방으로 공간을 뛰어넘었다.
그 순간 레펜하르트가 발을 뻗은 자세 그대로 대지를 깊게 찔렀다.
"아발란시 킥!"
콰아아앙!
반파된 성벽이며 흙더미들이 일제히 진동하며 원형으로 크게 퍼져 나갔다. 높이만 족히 3미터는 되는 무자비한 대지의 파도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훈다르가드의 남쪽 성벽 위를 뒤덮기 시작했다. 막 새로운 장소로 이동한 제이드가 눈을 부릅떴다.
"컥!"
시야 가득 거대한 흙의 해일이 밀려온다. 다시 블링크를 쓸 틈조차 없었다. 순식간에 흙더미가 제이드를 휩쓸고 지나갔다.
콰콰콰콰!
파문의 중심에 서서 레펜하르트가 히죽 웃었다.
"여기 깔짝, 저기 깔짝 나타나 봐야 통째로 쓸어버리면 장땡이잖아?"
3
"으으으...."
흙더미에 파묻힌 제이드가 꿈틀대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참으로 비참한 몰골이었다. 전신 의복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흙투성이인 것이, 실로 문자 그대로 거지꼴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동정심 따위는 들지 않는다. 잽싸게 다가가 레펜하르트가 대뜸 수도를 휘둘렀다.
황금빛 오러의 칼날이 제이드의 두 발목을 뎅겅 잘라 버렸다.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악!"
피를 흘리며 제이드가 바닥을 뒹굴었다. 실로 잔혹한 손속,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태연했다.
"이 귀찮은 부츠부터 못 쓰게 해야지."
고통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제이드가 고개를 들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크, 크윽! 이런 수법을 쓸 줄이야...."
몇 번이나 블링크 부츠를 써 왔지만 이런 약점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이제까지 오러 유저를 상대할 땐 일단 거리를 벌리고 마법을 날리는 시점에서 거의 승패가 결정 났었으니까.
위력은 강해도 오러 유저는 마법사에 비해 다양한 상황에 대응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여러 마법이 복합적으로 적용되면 오러만으로는 빠져나오기가 힘든 것이다. 실제로 레펜하르트도 마법을 쓰기 전까지는 어찌할 방도를 못 찾고 있지 않았는가?
물론 그것뿐이면 시간이 지나면서 오러 유저도 어떻게든 반격의 기회를 찾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발이 묶인 상대에게 날아가는 것이 바로 방어 불가능의 섬광, 단절의 검이다.
딜레이 없이 이동과 공격이 가능한 두 아티팩트의 사기적인 성능 앞에 제이드가 상대했던 모든 오러 유저들은 맥없이 쓰러져야만 했다. 그렇다 보니 블링크 부츠의 약점을 깨달을 만큼 오래 싸운 상대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레펜하르트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거 사실은 댁이 시리스에게 자주 쓰던 방법인데....'
전생의 제이드는 시리스가 블링크 부츠를 쓸 때마다 각종 광역 마법을 옅게 깔아 그녀의 움직임을 제한하곤 했었다. 그걸 살짝 응용했을 뿐이다.
한마디로 자기 수법에 당했다고나 할까?
"으으으...."
제이드의 혈색이 점점 새하얘졌다. 잘린 양 발목에서 쉴 새 없이 피가 꿀럭꿀럭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대로 놔두면 과다 출혈로 죽을 터, 레펜하르트는 잠시 고민하다가 오러를 뿜어 제이드의 양 발목을 지혈했다. 사실은 이대로 죽게 놔둘 생각이었지만....
'그러기엔 좀 찜찜하단 말이지.'
딱히 제이드가 죽게 놔두기에 아까운 인재라거나 해서는 아니었다.
사이러스나 카르사스와 달리 제이드는 천성이 오만하고 잔인했다. 전생에서도 겉으로만 빛의 마도사라며 선량하게 굴 뿐, 뒤로는 온갖 사악한 짓을 저질렀다고 들었다.
시리스를 죽인 일이야 전생의 사건, 이 시대의 제이드에게 죄가 없다손 쳐도 현재의 인상만으로도 전혀 호감이 가질 않는 것이다.
신경이 쓰이는 건 저 단절의 검과 블링크 부츠였다.
'이 블링크 부츠가 원래 제이드의 것이었다면... 혹시 전생의 그 암살자는 아크라이트 가문과 관련이 있었던 건가?'
AMP 쇼크웨이브 덕분에 쉽게도 해치우긴 했지만, 사실 그 암살자의 장비는 보통이 아니었다. 던전 탐사자로 이름 높았던 당시의 레펜하르트조차도 처음 보는 고도의 권능을 가진 기물들이었다. 그걸 연구해 새로운 10서클 마법을 창안할 수 있었을 정도였으니, 결코 일개 암살자가 지니고 있을 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래서 당시엔 기이하게 여기고 나름 조사를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암살자가 자살을 해 버려 단서가 너무 적었고, 이후로 그런 사건이 또 일어나지도 않아서 결국 전말을 알아내지는 못했다. 굉장한 아티팩트를 발견한 자가 그걸 꼭 학회에 발표하라는 법은 없으니까, 몰래 챙겨두고 암살업을 행했으려니 하고 짐작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시공을 초월해 다시 단서를 만난 것이다. 더구나 이 단서는 그때와 달리 아직 살아 있다.
'잘됐네. 진지로 끌고 가서 본격적으로 심문을 해 봐야겠다.'
꿈틀대는 제이드를 내려다보며 레펜하르트는 히죽 웃었다. 그에게는 그 어떤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도 입을 열게 만드는 탁월한 고문법, '짐 언브레이커블 특제 구타 수행'이 있는 것이다.
'덤으로 요 얄미운 제이드를 마음껏 두들길 수까지 있으니 일석이조지.'
레펜하르트의 사악한 생각이 전해진 걸까?
제이드가 신음을 흘리며 정신을 차렸다.
"으윽...."
"죽이진 않겠다. 이것저것 물어볼 것이 많거든."
싸늘한 상대의 음성에 정신이 번쩍 든다. 제이드는 다급히 품속을 뒤졌다.
'도, 도망쳐야 해....'
원래 임무에 실패한 은의 암살자들은 자살하는 것이 원칙, 하지만 다행히도 그에게는 든든한 배경이 있었다.
제이드가 손을 벌벌 떨며 작은 깃털 하나를 꺼냈다. 미리 지정된 좌표라면 아무리 먼 공간이라도 뛰어넘어 '한 번은' 이동시켜 주는 아티팩트, 귀환의 깃털이었다.
온갖 고대의 유물을 독점한 은의 현자 내에서도 몇 개 없는 귀하디귀한 물건으로, 사실 제이드의 지위로는 감히 손댈 수 없는 금기 유물이다. 그의 형, 수호자 아크라이트를 통해 몰래 챙겨 둔 것이다.
'제길, 세 개밖에 없는 걸 이런 데서 쓰게 될 줄이야....'
이를 갈며 제이드가 귀환의 깃털을 발동시켰다.
파앗!
빛이 발하며 눈앞의 제이드가 사라져 버렸다.
"이건 또 뭐야?"
블링크 부츠 말고도 이런 권능을 가진 아티팩트를 또 가지고 있었던가? 놀란 레펜하르트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어느 곳에도 제이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감각권을 넓혀 찾아보아도 반경 100미터 내에 전혀 감지가 되지 않는다.
"다이만 터미널처럼 대규모 시설도 아니고, 휴대가 가능한 장거리 공간 이동 아티팩트라니...."
레펜하르트는 감탄을 흘렸다. 전생에서도 저 정도 기물은 본 적이 없었다.
"저 작은 깃털에 설마 쌍방향 좌표를 모두 지정해 공간을 이을 정도의 용량이 있을 리가 없는데... 음, 포털이 열린 게 아니라 그냥 본인이 사라졌었지? 그럼 다이만 터미널처럼 공간을 접어서 연결하는 게 아니라, 차원 변환으로 시전자 주위의 공간을 도려내 통째로 마나 흐름에 실어 보내는 방식인가? 하지만 그럴 경우 시전자의 안정성에 문제가... 아니, 그건 서바이벌 마법으로 처리가 가능하겠군. 그래도 마력 전환에 문제가 생길 텐데...."
레펜하르트는 열심히 머릿속에서 가설을 짜 맞췄다. 아무리 귀환의 깃털이 초월적인 아티팩트라지만 그 역시 10서클의 궁극 마법사, 꽤나 근접하게 원리를 파악할 수 있었다.
문득 레펜하르트가 혀를 찼다.
'아니, 지금 이론 고민할 때가 아니잖아? 제이드 놓쳐 놓고 지금 뭐 하고 있냐, 나.'
누가 마법사 아니랄까 봐, 신기한 마도구 봤더니 이내 그쪽으로 신경이 쏠려 버린 것이다. 살짝 자괴감을 느끼며 레펜하르트는 일단 상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나 제이드가 다른 단서라도 하나 남기지 않았나 해서였다.
과연, 저만치 떨어진 흙더미에 작은 주머니 하나와 금속성 물질이 반쯤 파묻혀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아발란시 킥에 휘말려 흘린 모양이었다.
금속을 주워 든 레펜하르트가 인상을 썼다.
처음 보는 물건이 아니었다.
'이건....'
거대한 나무 사이로 각종 신수神獸들이 정교하게 세공된 은빛 엠블렘.
'전생에서 그 암살자 품에서 나왔던 거랑 똑같이 생겼군.'
또다시 공통점이 발견됐다. 게다가 이 엠블렘은 아크라이트 가문의 문장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애초에 레펜하르트 역시 전생에서 이미 알아보았을 것이다.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거냐?'
점점 궁금한 점만 늘어 간다. 놓친 제이드가 새삼 아쉬워졌다. 캐묻고 싶은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아크라이트 가문을 따로 조사해 봐야겠군.'
그래도 이번엔 전생과 달리 단서가 남아 있다. 백국으로 돌아가면 정보를 좀 수집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레펜하르트는 일단 엠블렘을 챙겼다. 그리고 주머니도 열어 보았다. 이 안에도 뭔가 단서가 있을지 모르니까.
순간 그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오옷! 금화다!"
누런 황금빛이 주머니 가득 반짝이고 있었다. 무한의 주머니로 중량을 감소했음에도 이렇게 묵직하니 족히 몇만 닢은 되는 듯했다. 전부 크로방스 왕국의 금화인 걸 보면 아마도 제이드가 체타스 남작에게 받은 의뢰금인 모양이다.
"나 하나 잡으려고 이런 거액을 투자했냐? 돈도 많구먼, 체타스 남작."
레펜하르트의 입가에 흐뭇해하는 미소가 떠올랐다. 제이드를 놓쳤다는 아쉬움이 싹 가셨다.
"이 정도면 모자라는 백국의 재정을 상당수 메울 수 있겠는데? 카를이 좋아하겠군."
다행히 크로방스 왕국의 흉년이 끝나 곡식 값은 다시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현재 안타레스 백국은 이래저래 돈 들어갈 일투성이였다.
그동안 구출한 이종족들의 수는 슬슬 천 명을 넘어섰다. 수하로 들어온 인간들의 숫자도 수백 명이었다. 흉년을 피해 온 유민들도 많았다. 너무 짧은 기간에 인구가 팍 늘어 버리니 생산이 소비를 따라가질 못하는 것이다.
카를이 유능하게 행정을 처리하는 데다 안타레스 백국이 아직까지는 국가라기 보단 일개 영지 규모라 레펜하르트의 사비로 어떻게든 모자란 부분을 충당하고 있었지만, 점점 돈이 마르는 것이 사실이었다.
적어도 이종족들이 자리를 잡고 생산 체계를 갖출 때까지 버틸 만큼 재원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레펜하르트가 바쁜 와중에도 굳이 이번 전쟁에 참전한 이유였다. 체타스 남작령, 특히 교역 도시 자루드를 차지하면 모자란 재정을 상당히 채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전황은 어찌 되었나?"
금화 주머니를 품에 챙긴 뒤 레펜하르트는 훈다르가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 ☆
마법사 제이드가 신월의 검사를 물리치며 체타스 남작군의 사기도 잠깐 올랐다. 하지만 그 사기는 권왕에 의해 마법사가 패해 버리자 이내 다시 바닥까지 떨어졌다.
저 전설의 무인, 권왕은 듣던 것 이상으로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일단 등장부터가 상식 밖이었다. 투석기에 탄 채 성벽을 날아오다니? 어찌 인간의 육신으로 저런 짓이 가능하단 말인가?
게다가 마법사는 그냥 패한 것도 아니었다. 권왕의 손에 의해 '소멸'되어 버렸다. (상황을 모르는 이들 눈에는 저렇게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람을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녹여 버리는 그 모습은 병사들을 공포에 질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다들 무기를 버리고 사방팔방 도망치기 시작했다.
"으허허헉!"
"사람 살려어어!"
반면 권왕의 무위를 견식한 갈린-안타레스 연합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역시 전설적인 무인이라며 경외 가득한 시선을 레펜하르트에게 보냈다.
"권왕님의 뒤를 따라라!"
"가자! 갈린의 용사들이여!"
이내 훈다르가드의 성문이 뚫리고 갈린-안타레스 연합군이 성내 곳곳으로 쳐들어갔다. 성내 곳곳에서 양측 기사와 병사들이 무기를 휘두르며 전투를 벌였다. 물론 쓰러지는 쪽은 대부분 체타스 남작군이었다.
'진짜 끝났군.'
이제 더 이상의 이변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어차피 체타스 남작의 목은 갈린 남작에게 양보할 생각이었다. 굳이 더 끼어들 필요가 없었다.
안심하며 레펜하르트는 시리스에게 걸어갔다. 그녀를 호위하고 있던 아스레일이 군례를 올렸다.
"다친 데 없으십니까, 백왕님?"
대충 고개를 끄덕여 준 뒤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몸은 괜찮아?"
시리스가 몸을 일으키며 팔다리를 움직여 보였다. 그 비싼 힐링 포션을 물처럼 바른 덕인지 대다수의 상처가 아물어 있었다.
"전투는 무리지만 거동에는 지장 없어요."
안도하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시리스가 질문했다.
"그자는요?"
"도망쳐 버렸어."
"쳇...."
시리스는 분한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 이상한 신발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당하진 않았는데...."
실력이 아니라 장비 때문에 밀렸으니 억울할 법도 하다. 레펜하르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등 뒤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그래도 좋은 건 건졌어. 선물 줄게."
순간 아스레일은 기겁했다. 레펜하르트가 꺼내 든 것은 발목부터 뎅강 잘린 한 쌍의 발이었다. 잘린 지 얼마 안 됐는지 부츠 위에 묻은 핏자국이 채 마르지도 않았다.
아니, 시리스 경이 아무리 시체에 익숙한 전사라지만 그래도 여성인데 선물이랍시고 지금 잘린 발목을 내밀고 있는 건가?
아니다, 이건 진짜 아니다.
"저기, 백왕님...."
불타는 충성심으로 아스레일은 레펜하르트를 만류하려 했다. 수하된 몸으로 존경하는 주군이 사람들 앞에서 뺨 맞는 꼴을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시리스가 반색을 하며 잘린 발목을 받아 들었다.
"앗! 이건 그자가 쓰던 아티팩트!"
그러더니 좋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레펜하르트를 올려다보며 묻는다.
"정말 제가 이걸 써도 되나요?"
"그럼! 어차피 내 발엔 맞지도 않아."
호탕하게 대꾸하는 레펜하르트를 향해 시리스가 눈망울을 반짝였다. 정말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스레일은 입을 쩍 벌렸다. 주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실로 거기서 거기였다.
"...."
사실 두 사람이 딱히 잔인한 성품이라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어릴 적에는 혹독한 스펠라트 사막에서 자랐고 그 후로도 노예로 살아온 시리스였다. 언제나 물품 부족에 시달리며, 없이 살아온 인생이었다. 시체가 신었건 거지가 신었건 신발은 신발, 그녀의 사고방식으로는 거리낌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레펜하르트도 강력한 아티팩트, 블링크 부츠에 온통 정신이 집중된 탓에 다른 사소한 일―예를 들면 부츠 안에 잘린 발이 들어 있다든가?―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 마법사들은 일단 마법에 관련만 되면 어지간한 건 다 무시해버리는 버릇이 있었다.
하지만 모르는 이들의 눈에는 실로 괴상하게 보일 뿐이다. 지나가던 갈린 남작가의 병사들이 그 모습을 보고 수군대기 시작했다.
"헐, 잘린 발목을 선물이랍시고 주고 있어."
"여자도 그거 받고 좋아하고 있어."
"뭐야, 저 사람들 무서워...."
적의 일부를 잘라서 여성에게 선물하다니, 과연 짐 언브레이커블의 권왕답게 취향 한번 살벌하다며 병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레펜하르트는 아무것도 모른 채 쓸 만한 무구 건졌다며 마냥 좋아하고 있었다.
블링크 부츠를 벗긴 뒤 레펜하르트는 제이드의 잘린 발목을 아무렇게나 던졌다. 그리고 시리스에게 손짓했다.
"자, 신어 봐, 시리스."
"의외로 제 발에도 딱 맞네요?"
"이 블링크 부츠는 어느 정도 사이즈 조절 기능도 있거든. 나처럼 발 크기가 너무 차이 나면 안 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갈린 남작군은 훈다르가드를 계속 점령해 가고 있었다. 이윽고 첨탑 창문으로 기사 한 명이 잘린 목을 들고 나타났다.
기사가 우렁찬 목소리로 승리의 선언을 외쳤다.
"체타스 남작의 목을 베었다! 우리의 승리다!"
☆ ☆ ☆
사소한 시비가 발단이 되어 일어난 두 가문의 전쟁은 안타레스 백국의 힘을 업은 갈린 남작가의 압승으로 끝났다.
체타스 남작은 목이 베여 효수되었고 가문의 남자들도 모두 죽음을 당했다. 국가 간 전쟁이 아니라 영지전이었기에 여성과 아이들은 귀족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모든 재산과 권력을 빼앗기고 영지 변경으로 쫓겨났다. 전형적인 몰락 귀족이 된 것이다.
체타스 남작령은 계약했던 대로 둘로 나뉘어 갈린 남작가와 안타레스 백국이 차지했다. 백국 남부과 인접한 동쪽 절반, 글로텐 산맥부터 카탄 들판까지의 지역이 새로운 안타레스 백국령이 되었다.
기존의 안타레스 백국은 워낙 작아서, 이름만 백국이지 실은 어지간한 자작령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실제로도 원래는 자작령이었고.
반면 체타스 가문 쪽은 비록 작위는 가장 하위의 남작이지만, 전통 귀족 폰테론 후작가의 방계였기에 영지 크기는 어지간한 백작령을 능가했다. 그렇다 보니 절반만으로도 영토가 세 배 이상 늘어났다.
사실 레펜하르트가 마음만 먹었으면 체타스 남작령 전부를 집어삼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를이 만류했다. 급격한 성장은 주변 귀족들의 반발을 살 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갈린 남작에게 절반을 양보하는 대신 이종족에 대한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레펜하르트가 바라는 것은 정복이 아니라 인식의 변화였다. 무리하게 땅 욕심 부리는 것보다는 갈린 남작가라는 든든한 우방을 만들어 놓는 것이 나았다.
"어차피 교역 도시 자루드를 차지해서 실속은 제대로 챙겼으니까."
자신의 집무실에 앉아 레펜하르트는 화려한 금박의 양피지를 펼쳤다. 유벨 2세가 보낸 칙령이었다.
-체타스 남작은 국왕의 권위를 무시하고 정당한 결투조차 승복지 않은 채 멋대로 전쟁을 일으켰으니 그 죄가 매우 크다. 그 간악한 자를 징치한 안타레스 백작의 공을 치하하니, 자루드와 카탄의 동쪽이 안타레스 백국의 영토임을 크로방스 국왕의 이름으로 인정하노라.
안 그래도 레펜하르트에게 호감이 지대한 유벨 2세가 바로 영지전의 결과를 인정해 정당성을 부여해 준 것이다. 이제 법적으로도 새로운 영토는 문제없이 그의 것이 되었다.
"이 정도면 기틀은 충분히 마련되었겠지."
양피지를 접으며 레펜하르트는 몸을 일으켰다.
'자, 이제 외부의 일들이 대충 정리가 되었고... 당분간은 내실을 다지는 데 전념해야겠군.'
대부분의 행정은 카를에게 전담해 버렸지만 그래도 신경 써야 할 일은 꽤 많았다.
새로운 영지 통합에 대한 처리 문제도 있고, 아크라이트 가문에 대한 정보 수집도 해야 한다. 학대받는 이종족들을 구출해 안타레스 백국에 정착시키는 일도 있다.
"그리고 사방신의 유물을 찾으려면 서클도 좀 더 올려야지."
사방신의 유물을 감추고 있는 고대 결계를 파훼하기 위해선 최소 8서클 이상의 마법이 필요하다. 한번 마나 드레인을 거하게 시전한 덕에 현재 레펜하르트의 몸은 이미 마력 허용량이 꽉 찬 상태였다. 여기서 마나 드레인을 더 걸어 봤자 또 마력이 오르지는 않는 것이다. 일단은 명상을 통해 그릇 자체를 키울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이종족들을 구출하는 틈틈이 근처 던전들을 털어 은의 시대 유물들도 제법 모아 두었다. 시간을 들여 차분히 마력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창밖을 내다보며 레펜하르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래저래 바쁘구먼. 나도, 안타레스 백국도...."
제27장 눈의 여왕
1
만물이 싹트는 봄, 황량하던 페틀랜드에도 혹독한 추위를 이겨 낸 새싹들이 푸름을 과시하며 여기저기 돋아나고 있었다.
글로텐 산맥으로부터 동쪽으로 넓게 펼쳐진 이 광활한 초원은 농경을 하기엔 지나치게 척박한 곳이어서 국가적 규모의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인접한 크로방스나 바실리 왕국도 이 땅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페틀랜드와 두 나라 사이엔 글로텐 산맥과 라키드 산맥이라는 험준한 지형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차지해 봐야 크게 득 될 것도 없는 땅인데 관리하는 데 드는 수고는 몇십 배, 데스트란드 정도는 아니지만 몬스터의 출몰 역시 잦은 편이니 욕심부릴 이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이곳은 대대로 유목 민족들의 영역이었다.
말과 양을 키우며 초원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는 이들은 소규모 부족 단위로 페틀랜드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가끔 유목 민족들을 통일시켜 비옥한 땅으로 쳐들어가겠다는 야심찬 이들이 나오긴 했지만, 전부 중간에 가로막힌 글로텐, 라키드 산맥에 의해 좌절해야 했다. 저 두 산맥은 페틀랜드의 유목민들을 지켜 주는 방패인 동시에, 그들을 이곳에 가두어 두는 담장이었다.
쳐들어올 놈들도 없고, 쳐들어갈 일도 없으니 당연히 뭉쳐야 할 필요성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오랜 세월 페틀랜드는 부족 간의 작은 분쟁은 있을지언정 거대한 전쟁은 벌어진 일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페틀랜드는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대규모 전쟁을 앞두고 있었다.
페틀랜드 중부, 엎드린 늑대를 닮았다 해 울프마운틴이라 불리는 거대한 돌산을 뒤로한 채 일만의 군세가 집결해 있었다. 페틀랜드 전역에서 모인 유목 민족들로 이루어진 인간의 군세였다.
병력 선두에 선 장수, 유목 민족의 임시 수장으로 선출된 랑고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말머리를 함께 하고 있는 중년 전사, 랑고트와 함께 페틀랜드에서 손꼽히는 대부족의 족장인 펠리페도 굳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과연 우리가 저 괴물들을 이길 수 있을지...."
랑고트도 펠리페도, 용맹하기로 이름 높은 페틀랜드의 전사들이었다. 아니, 원래 페틀랜드의 유목민치고 용맹하지 않은 자는 없었다. 거친 자연 속에서 삶을 이어 가는 유목 민족들은 농경민족에 비해 전투에 능하고 용맹하며 난폭하다.
하지만 지금 모인 이들의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눈앞에 있는 저들은 그들보다 훨씬 더 전투에 능하고 용맹하며 난폭한 자들이었으니까.
지금 페틀랜드의 유목민들 눈에 비치고 있는 것은 들판 저편에 도열한, 수천의 오크로 이루어진 거대한 군대의 모습이었다.
☆ ☆ ☆
다이어울프에 탄 채 칼켄은 등 뒤의 군세를 바라보았다. 사천 명 정도의 무장한 오크들이 질서 정연하게 도열해 있었다. 푸른 곰 부족을 비롯, 대륙의 오지에서 모여든 오크 부족들의 전사들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탈카타가 이끄는 검투사 출신의 오크 천여 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레이 오크 하나가 다이어울프를 몰아 칼켄에게 다가왔다. 회색빛 피부에 건장한 육체를 지닌 중년 오크였다.
중년 오크가 오크 군대를 보며 감격의 목소리를 냈다.
"이 정도로 많은 형제들과 함께 전투에 임하는 건 처음이오, 카루가 칼켄."
"나 역시 마찬가지라오, 카루가 하다툼."
회색 솔개 부족의 족장, 하다툼을 바라보며 칼켄이 동감이란 표정을 지었다. 이런 많은 형제들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다니, 언제나 오지에서 숨어 살던 그에겐 실로 꿈같은 일이었다.
"과연 레펜하르트 형제는 약속을 지켰소."
맞은편에서 녹색 피부의 거대한 오크 하나가 거대한 배틀보어battle boar를 타고 다가왔다. 일반 멧돼지의 몇 배나 되는 크기의 마물을 수족처럼 부리는 그는 그린 오크 계열인 흙 멧돼지 일족의 족장, 킨지르였다.
킨지르가 오크 군대를 보며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정말 마법 같은 일이군. 산 너머 인간의 군대를 신경 쓸 필요가 없다니...."
예전에는 감히 이렇게 많은 오크들이 모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오크들이 모이려 할 때마다 산맥 너머에서 몇 배나 되는 인간의 대군이 몰려와 그들을 노예로 잡아갔으니까. 아무리 강맹한 오크 전사들이라도 마법사를 앞세운 인간들의 공격에는 힘없이 쓰러져야만 했다.
"음, 레펜하르트 형제가 마법사인 것은 사실이지만...."
쓴웃음을 지으며 칼켄이 말을 이었다.
"이건 마법이 아니라 외교라는 것이오, 카루가 킨지르."
킨지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뭐요?"
"인간들끼리 서로 의견을 조율하는 방식이오."
하다툼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럼 호투의 의식을 하면 되잖소?"
"호투의 의식과는 다른 것 같소. 인간은 칼의 노래를 듣지 못하기에 굉장히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더군. 오크들도 나중에는 저걸 해야 할 거라던데... 마누라는 좀 이해하는 모양인데 난 영 뭔 소린지 모르겠더만."
현재 스탈라는 참전하지 않고 안타레스 백국에 남아 있었다. 킨지르와 하다툼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필요하다, 이거지."
"그런데 그거 배우면 훌륭한 전사가 못 된다던데?"
"그럼 우리도 무기아비처럼 외교아비란 걸 따로 키울 필요가 있겠군."
칼켄이 오크 군세 저편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것은 저들에게 배우면 될 것이오. 우리의 인간 형제들에게."
사천의 오크들, 그 옆에는 천 명 정도의 인간 군대도 함께 있었다. 사이러스와 아스레일 경이 이끄는 안타레스 백국의 인간 병사들이었다.
아스레일이 대열 선두에 서서 페틀랜드 군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마법으로 증폭된 목소리가 초원의 하늘 위를 쩌렁쩌렁 울린다.
"안타레스의 깃발 아래 항복하라! 충성을 맹세하는 자들은 좋은 대우를 약속하겠다!"
☆ ☆ ☆
안타레스 백국에 자리를 잡은 푸른 곰 부족은 글로텐 산맥 동쪽으로 계속 세력을 넓혀 갔다. 또한 데스트란드에서 함께 삶을 이어 가던 다른 오크 부족들에게도 전령을 보내 합류를 권했다.
칼켄은 오크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은 투사였기에 그의 전언에는 무게가 있었다. 그린 오크 계열이었던 흙 멧돼지 일족과 그레이 오크 계열의 회색 솔개 부족이 제일 먼저 응답을 하고 글로텐 산맥으로 모였다. 그 뒤로도 하얀 이리 부족이며 검은 코요테 부족 등 데스트란드에 살던 대부분의 오크들이 새로운 대지, 살기 좋은 땅을 찾아 글로텐 산맥으로 모여들었다.
오크들이 대거 준동하자 페틀랜드의 인간들도 바로 반응했다.
처음에는 평소처럼 대했다. 원래 데스트란드의 오크들이 대규모로 페틀랜드까지 나타나는 일은 제법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당장 인접한 크로방스와 바실리 왕국의 귀족들에게 연락했다.
-오크 노예들 잔뜩 모여 있음. 와서 수거해 가세요.
이러면 항상 왕국의 귀족들이 기사와 마법사를 잔뜩 끌고 나타나 오크들을 해치우고 노예로 잡아가곤 했다. 그 와중에 페틀랜드의 유목 민족도 짭짤한 부수입을 얻을 수 있었으니 심지어 돈벌이 잔뜩 나타났다며 좋아하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이번엔 어째 상황이 달랐다. 모든 귀족들이 하나같이 유목 민족들의 제의를 거절한 것이다.
-그것들 노예 아님. 깃발 못 봤냐, 깃발?
귀족답게 우아하고 화려한 필체로 써진 답변이긴 했지만, 어쨌건 요약하면 저런 내용이었다. 그제야 페틀랜드의 인간들은 현 상황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저 오크들은 하나의 문장을 새긴 깃발을 들고 있었다.
보통 사자나 용 같은 걸 문장으로 삼는 반면 저 깃발의 문장은 좀 특이했다. 네 귀퉁이를 녹색, 회색, 적색, 청색으로 나누고 가운데 황금빛 주먹(!)이 덜렁 박혀 있는 것이다. 실로 촌스러움의 극에 달한 문장이라 하겠다.
뭐, 덕분에 알아보기 쉽기는 했다. 소문에 둔한 페틀랜드인들이라도 권왕 레펜하르트가 안타레스 백국을 세웠다는 이야기 정도는 들었으니까.
이제까지와 다르게 저 오크들의 준동은 명백히 안타레스 백국의 영토 전쟁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크로방스 왕국의 귀족 입장에서 개입할 수 없었다.
현 크로방스 국왕 유벨 2세가 레펜하르트를 얼마나 총애하는지 모르는 귀족은 없었다. 그리고 내전을 통해 안타레스 백국에 얼마나 오러 유저가 많은지도 똑똑히 확인했다. 감히 일개 영주 한둘이 덤빌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바실리 왕국의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처럼 오크들이 준동하는 것이면 인간의 위협이 되니 처리하겠다는 명분이라도 있지만, 이번엔 엄연히 영토 확장 전쟁 아닌가? 위험은 큰 반면 이득도 명분도 없다.
그러는 동안에도 오크들은 착실히 세력을 넓혔다. 이미 글로텐 산맥의 산악 민족들은 전부 안타레스 백국의 세력하에 들어가고, 페틀랜드까지 그들의 손길이 뻗쳐 왔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페틀랜드의 유목 민족들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회의가 열렸다. 초원 전역에 흩어져 있던 각 부족의 족장들이 한데 모여 대책을 논의했다.
글로텐 산맥에 인접한 이들, 즉 권왕에 대한 소문에 밝은 자들은 항복하자는 의견을 냈다. 거리가 먼 이들은 힘을 모아 싸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결국 주전파가 승리해 모든 유목 민족들이 한데 뭉쳤다. 그 숫자는 자그마치 일만, 페틀랜드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군이었다.
☆ ☆ ☆
"안타레스의 깃발 아래 항복하라! 충성을 맹세하는 자들은 좋은 대우를 약속하겠다!"
아스레일 경의 음성에 랑고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웃기지 마라! 우리는 초원의 자유민들! 결코 누군가의 밑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랑고트가 고개를 돌렸다. 페틀랜드의 병사들에게 고함을 터트렸다.
"싸우자! 초원의 아들들이여! 우리의 자유를 위해!"
병사들도 사기를 드높이며 소리를 질러댔다.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자유를 위하여!"
우렁찬 외침이 초원을 뒤흔든다. 그 모습을 말 위에서 지켜보던 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숭고한 외침이군."
자유를 부르짖는 저들은 확실히 압제자에 대항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숭고하긴 한데... 이제까지 계속 남의 자유 억압해 노예로 팔아먹은 놈들이 외칠 소리는 아니지."
말하다 말고 러스는 문득 실소를 흘렸다. 이제는 이종족들을 사람으로 생각하는 데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이렇게까지 변한 자신이 신기할 정도였다.
오크들 앞에 선 칼켄이 자신의 대검을 뽑아 들고 소리를 질렀다.
"형제들이여! 그대들은 준비되었는가?"
천지를 뒤흔드는 포효가 돌아왔다.
"준비되었습니다! 카루가 칼켄!"
수많은 오크들이 한마음이 되어 소리쳤다. 울부짖는 오크들의 외침 속에서 칼켄이 목청을 돋웠다.
"오랜 굴욕의 세월이었다! 이제 그 세월을 돌이킬 때가 왔다!"
부우웅!
선명한 녹색의 오러가 대검을 타고 흐르며 사방을 밝힌다. 뒤이어 선두 여기저기서 또 다른 블레이드 오러가 솟구쳤다.
흙 멧돼지 부족의 족장, 킨지르.
회색 솔개 부족의 족장, 하다툼.
투혼의 축복을 받은 오크의 족장들이었다.
러스도 검을 뽑았다. 창공처럼 푸른 오러가 롱 소드를 타고 선명하게 흘러내렸다.
초원의 하늘을 찌르며 칼켄이 전투 개시를 선언했다.
"전원 돌격!"
전투의 외침을 터트리며 오크 전사들이 용맹스레 전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다이어울프를 탄 오백여 명의 오크 전사들은 천지를 쓸어버릴 듯한 기세로 페틀랜드군에 돌진해 갔다. 그 뒤를 수천의 오크 보병들이 뒤따랐다. 아직 스피리츠 웨폰을 터득하지 못해 전사로는 인정받지 못한 이들, 하지만 그렇다 해도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인간 기사 수준의 힘을 지닌 이들이다.
선두에 선 것은 세 명의 오크 투사, 칼켄과 킨지르 그리고 하다툼이었다. 저마다 형형색색의 블레이드 오러를 내세우며 무자비한 기세로 적진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섬뜩한 파괴의 빛을 보며 랑고트는 절로 침을 꿀꺽 삼켰다.
"제길... 안타레스 백국에는 오러를 쓰는 오크들이 있다더니 정말이었군."
용병들처럼, 거칠기는 해도 체계적인 무술을 갖지 못한 페틀랜드인들에게는 오러 유저가 없었다.
랑고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마법사들을 모시게! 어서!"
이내 페틀랜드군 전면에 열 명의 마법사들이 나타났다. 마법사들이 저마다 수인을 맺으며 캐스팅을 시작했다.
"워 라가스 에프레 아페인...."
"잠의 모래, 허공을 흘러...."
"내 손길에 이끌려 이곳에 떨어지노라...."
이들은 모두 페틀랜드군이 고용한 마법사들이었다. 왕국 귀족들의 협조를 받지 못하니 자체적으로 마탑에 거액을 주고 초빙한 것이다. 산 너머 왕국민들과 달리 오크와 비교적 자주 부딪치는 페틀랜드인들은 오크가 얼마나 마법에 취약한지 잘 알고 있었다.
"제 아무리 오러 유저라도 오크는 오크일 뿐, 마법 앞에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기대감 어린 눈으로 랑고트는 전황을 지켜보았다. 마법사들이 전원 동시에 마법을 발동했다.
"매스 슬립!"
광역 수면 주문이 선두에 선 세 오크 투사들을 덮치며 광범위하게 퍼져 갔다. 그때, 전장 속에서 우렁찬 기도문이 들려왔다.
"알 포트여, 당신의 종이 기원하노니 이들의 정신을 지켜 주소서!"
군세 곳곳에서 희미한 은빛이 번쩍이며 보이지 않는 항마의 힘이 군대 전체로 스며들었다. 발동된 마법이 항마의 힘에 가로막혀 사그라졌다.
랑고트가 기겁하며 외쳤다.
"뭐, 뭐야?"
그제야 랑고트의 눈에 오크들 사이에 있는 또 다른 종족의 모습이 보였다.
드워프였다.
알 포트를 섬기는 그랜드 포지의 드워프 신관 십여 명이 군대 사이사이에 껴서 저들을 가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드워프 신관들이 연달아 기도문을 이으며 항마의 장벽을 넓게 펼쳐가기 시작했다.
"알 포트여, 당신의 베일이 허공을 감으시어 사이한 미혹에서 벗어나게 하시니...."
알 포트의 축복이 삼천 명의 오크들 전체에게 천천히 퍼져 나갔다.
드워프 신관의 숫자는 고작 십여 명 정도였지만, 이게 무슨 엄청난 마법 면역력을 부여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인간 수준의 마법 저항력만 깃들게 하는 것이다. 십여 명만으로도 충분히 오크 군세 전부를 감당할 수 있었다.
마법사들이 당황해 소리쳤다.
"이봐! 말이 틀리잖소!"
"매스 슬립만 날려도 간단히 침몰한다더니!"
랑고트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 이런!"
대규모 전쟁을 해 본 적이 없어 미처 생각지 못했다. 이들은 단순한 오크 무리가 아니라 엄연히 안타레스 백국군이다. 오크들의 저 약점을 레펜하르트가 모를 리 없으니, 당연히 대비책을 세우지 않을 리 없는 것이다.
"으히히힉!"
"사람 살려!"
공포에 질린 마법사들이 이내 등을 돌리고 뒤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비싼 돈 주고 초빙하긴 했지만 이들은 고작해야 4, 5서클의 정규 마법사에 불과했다. 애초에 고위 마법사는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이런 오지까지 오지 않는다.
"크아아아아!"
전투의 포효를 외치며 오크들이 순식간에 해일처럼 페틀랜드군을 덮쳤다. 곳곳에서 금속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선두에 서서 적진으로 뛰어들며 칼켄이 외쳤다.
"가라! 용맹한 전사의 후예여! 위대한 조상들께서 우리를 가호한다!"
오크들이 저마다 자신의 조상의 이름을 외치며 무기를 휘둘러 댔다.
"마우툼이 나를 지켜보신다!"
"발루트여! 그대에게 저들의 피를 바칩니다!"
원래 오크들은 믿는 신이 없다.
그들이 믿고 따르는 것은 위대한 조상들의 가르침, 선조의 영혼이 하늘에서 자신들을 가호한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오크들에게는 신관이 없었다. 또 체질상 마법사도 있을 수 없었다. 항마력이 전혀 없으니 당연히 마력을 다룰 수도 없는 것이다. 뭐, 설사 항마력이 있다 해도 오크 머리로 마법을 구사하는 것은 아무래도 불가능하겠지만.
"바탈라! 당신의 아들을 지키소서!"
조상들의 가호를 외치며 오크들은 페틀랜드군을 유린해 갔다. 아스레일 경이 이끄는 안타레스의 인간 병사들도 화살로 원호했다. 수백 자루의 스피리츠 웨폰이 허공을 누비고 화살비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페틀랜드군 역시 용맹한 전사들답게 목숨을 내건 채 싸웠지만 승기는 점점 안타레스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시작한 전투는, 해가 지기도 전에 끝이 났다.
점점 시체가 늘어가고 도망자가 폭등해 대열이 붕괴되며 결국 랑고트를 비롯한 지휘관 대부분이 전사하자 페틀랜드군은 백기를 내걸었다.
랑고트의 목을 든 채 칼켄이 전장 전체에 선언했다.
"함성을 외쳐라! 우리가 승리하였다!"
오크 전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던졌다. 스피리츠 웨폰에 의해 또 하나의 자신처럼 움직이는 수백 개의 무기들이 하늘에 떠올라 허공에 고정됐다.
오크들이 가슴을 활짝 폈다.
"으아아아아!"
펼쳐진 찬란한 검의 하늘 아래, 끝없는 승리의 포효가 터져 나왔다.
☆ ☆ ☆
어둠이 짙게 깔린 페틀랜드의 초원, 그 위에 수백 개의 군막이 세워져 불을 밝히고 있었다. 전부 몬스터의 가죽을 무두질해 만든, 오크들 특유의 가죽 군막들이었다.
각 부족의 문양이 그려진 그 군막들은 임시로 설치한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견고해 보였다. 그리고 실제로 이 군막들은 오크들이 평소 거하는 집과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유목 생활을 주로 하는 오크들은 평소에도 이런 이동형 가옥에서 거한다. 이들에게 집은 언제나 들고 다닐 수 있는 가구의 하나일 뿐, 애초에 임시 가옥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이다.
가죽으로 만든 막사라지만 그 강도나 편이성은 어지간한 인간의 가옥 못지않았다.
부드럽게 무두질된 가죽은 초원의 한기를 효과적으로 막아 주고 내부의 열기를 효율적으로 보존한다. 내구성 역시 뛰어나 대부분의 가죽 막사가 대대로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을 정도다. 그 기술력은 인간 무두장이들이 감히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이었다.
드워프들이 돌과 금속을 다루는데 뛰어나듯이, 오크들은 가죽을 다루는 데 그 어떤 종족보다도 뛰어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 가죽 막사뿐 아니라 다른 가죽 세공 용품 역시 대단한 성능을 자랑한다. 강철 갑옷과 무기는 당연히 드워프제가 최고겠지만, 가죽 갑옷이나 다른 가죽 제품들은 오크들의 기술을 따라갈 이들이 없다.
이미 하나의 마을이나 다름없는 거대한 병영, 그 속에서 오크와 안타레스의 인간 병사들이 술과 노래로 승리를 축하하고 있었다.
"으하하하!"
"오오! 로버트! 한 잔 들게!"
"자네도 들지, 우투눈!"
술 좋아하기로는 드워프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종족, 신관들도 그 속에 껴서 신 나게 술을 들이키는 중이었다.
"달로스 신관님! 술 드십쇼!"
"좋지! 얼마든지 주시게!"
이미 친해질 대로 친해진 이들은 종족을 막론하고 화통하게 전우애를 나누며 승리의 기분을 마음껏 만끽하고 있었다. 그 속에는 흥분한 칼켄과 킨지루, 하다툼, 그리고 러스과 아스레일의 모습도 보였다.
회색빛 피부가 붉어지도록 마신 하다툼이 러스를 향해 잔을 내밀었다.
"카루가 러스! 그대 세다! 존경한다! 내 술 받아라!"
상대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하다툼은 어색한 공용어를 쓰고 있었다. 칼켄과 달리 아직 그나 킨지르는 의사 번역의 목걸이를 받지 못한 것이다.
러스가 고개를 저으며 사양의 뜻을 밝혔다.
"으음, 이미 많이 마셨소."
하다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술 싫어하나?"
"싫소."
실제로 술을 즐기지 않는 러스이기에 그는 솔직하게 대꾸했다.
만약 인간이 이런 식의 답변을 받았다면 바로 안색이 굳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다툼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안됐다. 이 좋은 걸 모르다니. 하지만 강하니까 됐다."
러스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오크들은 단순해서 싫다면 그냥 싫은가 보다 하고 넘어간다. 상대가 자신을 무시했다고 여긴다거나 하는 그런 '넘겨짚기'는 하지 않는다. 이 얼마나 대하기 쉬운 족속들이란 말인가?
이번엔 킨지르가 커다란 고깃덩이를 든 채 물었다.
"고기는 좋나?"
"많이 먹었소."
"그럼 내가 먹는다."
우걱우걱!
고기를 씹고 호탕하게 다시 술을 마신다. 아스레일이 잔을 내밀었다.
"난 술 좋아하오."
하다툼이 좋다며 술을 따라 준다. 술잔을 들이키며 아스레일은 빙그레 웃었다.
그도 처음엔 이런 오크들의 태도에 꽤 놀랐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적응이 되었다. 이들은 인간처럼 체면이나 가식을 차리지 않는 것이다.
아스레일이 웃자 다른 오크들도 따라 웃었다. 킨지르가 주먹을 들며 말했다.
"전사 아스레일. 그대 좀 약하지만 술 세다. 좋다!"
그리고 장난치듯 아스레일의 얼굴에 펀치를 날렸다. 순간 아스레일이 움찔하는 찰나, 러스가 손을 뻗어 자연스럽게 그의 주먹을 가로막았다.
"인간에겐 이러면 안 되오, 킨지르 경."
"응? 왜?"
순간 대답이 궁해져 러스는 고민했다. 당연한 걸 당연치 않게 여기는 이들에게 대체 뭐라고 설명해 줘야 하나?
그때 아스레일이 먼저 답을 줬다.
"인간은 콧대가 높아서 이러면 모욕으로 여기오."
붙임성 없는 러스와 달리 아스레일은 오크들과도 친분을 쌓으려 꽤 애를 쓰고 있었다. 레펜하르트의 수하 기사로서의 당연한 의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보니 이런 일도 제법 당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화도 나고 그랬지만, 이제는 익숙해져 태연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 그렇군."
역시나, 킨지르는 순순히 납득하며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다. 전사 아스레일. 내가 실수했다."
한 부족의 족장이지만 실수했다고 생각하면 바로 사과한다. 잘못을 인정할 경우 상대가 자신을 업신여길까 걱정한다거나 하는 '복잡한' 사고 따윈 오크에겐 없다.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포로들 상태도 봐야 하니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아스레일이 손을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재 페틀랜드군 포로 관리는 전적으로 그가 맡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같은 인간인데 오크들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
굳이 도망치는 이들은 붙잡지 않았지만, 그렇다 해도 현재 안타레스 백국군이 사로잡은 포로의 숫자는 이천여 명에 육박했다. 이들은 당분간 강제 노역으로 대가를 치른 뒤 자유로운 백국의 국민으로 살게 될 것이다.
아스레일이 자리를 비우고도 나머지는 계속 승전 분위기를 즐겼다. 한참 즐겁게 술잔을 주고받던 중이었다.
"으잉?"
갑자기 칼켄이 오른쪽 눈을 치켜떴다.
"어라?"
"뭐지, 이 기운은?"
킨지르와 하다툼, 러스도 동시에 안색을 굳혔다. 전원이 병영 저편의 어둠 속으로 고개를 돌렸다.
숙영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초원 너머에서 희미한 기운이 와 닿고 있었다. 말이 희미한 기운이지, 이 정도로 떨어진 거리에서도 느껴질 정도면 보통 강렬한 기운이 아니다.
러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대단히 알아보기 쉬운 기운이었다.
'오러 능력자? 이 근처에 우리 말고도 오러 능력자가 있었나?'
게다가 강렬하기는 한데 적의는 전혀 없다. 그냥 자신들을 부르는 듯한 느낌?
딱히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오러 유저인 러스는 본능적으로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칼켄이며 킨지르, 하다툼 역시 비슷한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
"누구지?"
"우리 부르는데?"
킨지르와 하다툼이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며 어둠 저편을 응시했다. 칼켄이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웃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 봅시다."
다른 오크 투사들도 히죽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럽시다."
"투혼의 축복을 받은 전사라면 만날 가치가 있지."
아직 적인지 아군인지도 모르면서, 그저 강한 전사일 것 같다는 이유만으로 대뜸 병영을 이탈하려는 것이다. 참으로 단순한 작자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러스도 그동안 꽤나 이들에게 물든 상태, 그가 실소를 흘리며 검을 들고 일어났다.
"저도 궁금하긴 하군요. 갑시다."
2
네 사람은 느긋한 걸음걸이로 숙영지를 떠났다. 우두머리들이 갑자기 병영을 떠나는데도 오크들은 아무도 궁금해하거나 하지 않았다. 저 강력한 투사들이 넷이나 몰려다니는데 그 무슨 위험이 있어 저들을 해하겠는가?
기운은 숙영지로부터 1킬로미터쯤 떨어진 돌산, 울프마운틴에서 흘러오고 있었다. 늑대의 앞발에 해당하는 울프 마운틴 초입부에 서서 칼켄이 고개를 들었다.
돌산 사이로 좁게 드러난 협곡, 그 가운데에서 확연한 존재감이 감지된다. 칼켄이 대검을 뽑아 들고 소리쳤다.
"나오라! 우리를 부른 이, 투혼의 축복을 받은 자여!"
선명한 녹색의 오러가 대검을 타고 흘러 허공을 찔렀다. 광채가 어둠을 사르며 사방을 밝혔다.
협곡 사이의 어둠, 그 속에서 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청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대들이 안타레스 백국의 오크들인가요?"
"그렇다!"
칼켄의 대답에 상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의 정체는 눈처럼 흰 피부에 청색 눈동자를 지닌 아름다운 미녀였다. 몸에는 광택이 도는, 재질을 알 수 없는 새하얀 천 옷을 걸치고 있고 팔다리에는 짐승 털가죽으로 만든 토시와 부츠를 착용하고 있다. 달리 갑옷 같은 것은 입지 않아 부드러운 육체의 곡선이 여실히 보인다.
날씬한 팔다리에 잘록한 허리, 풍만한 가슴. 그리고 차갑고 요염한 인상.
여색에 별 관심이 없던 러스조차도 순간 두근거릴 정도로 매력적인 미모였다.
여인이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놀랍군요. 오크가 이토록 공용어 발음에 능통하다니."
머리 뒤로 질끈 묶은 여인의 보랏빛 머리칼, 그 사이로 드러난 길고 뾰족한 귀를 보며 러스가 놀라 중얼거렸다.
"에, 엘프?"
엘프가 오러 유저란 사실에 놀란 것이 아니었다. 무심코 러스는 미녀의 가슴으로 시선을 옮겼다. 실례인 줄 알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뭔 엘프가 저리 가슴이 풍만하단 말인가? 분명 엘프인데 가슴만 드워프가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원래 엘프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몸매가 날씬해 저렇게 가슴이 큰 경우가 거의 없는 것이다.
칼켄과 킨지르, 하다툼도 저마다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물론 러스와 놀라는 관점은 좀 달랐지만.
"어? 엘프다."
"호오? 엘프에게도 투사가 있었나?"
"엘프들은 겁이 많아 전사가 별로 없다던데?"
말없이 여인이 네 사람에게 다가오며 허리에서 검을 뽑았다. 별 다른 장식이 없는 날카로운 세검, 그 칼날 위로 은빛의 블레이드 오러가 서늘한 기운을 뿜으며 흘러내렸다.
우우웅!
"하앗!"
갑자기 엘프 여인이 날카로운 기합을 터트리며 칼켄을 습격했다!
"헙!"
기다렸다는 듯이 칼켄도 블레이드 오러를 휘두르며 반격에 나섰다. 상대가 당연히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 당황하지도 않는 표정이었다. 은색 오러와 녹색 오러가 마주치며 전광이 튀어 올랐다.
콰아아앙!
부딪힌 오러가 파문을 일으키며 협곡의 절벽을 뒤흔들었다. 칼켄이 상대의 검을 밀치며 호쾌하게 소리쳤다.
"이 정도로는 내 검을 꺾을 수 없다, 엘프 투사여!"
오러와 오러의 대결은 칼켄의 우세였다. 단숨에 녹색 오러가 여인의 오러를 파고들며 깊숙이 베어 간다. 여인이 공중제비를 넘어 피하며 연달아 검을 찔렀다. 은빛 블레이드 오러가 화살처럼 쏟아져 칼켄의 전진을 막았다. 아쉬워하며 칼켄이 검을 거두어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제야 러스가 다급한 표정으로 롱 소드 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적이었나?"
그때 여인이 그를 돌아보더니 날카롭게 소리쳤다.
"둘의 싸움입니다! 끼어들지 마세요!"
"뭐, 뭐가 어째?"
순간 러스는 기가 막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자기가 먼저 덤벼놓고 끼어들지 말라니?
그런데 정작 킨지르와 하다툼은 납득하는 얼굴이었다.
"암, 끼어들면 안 되지."
"둘의 싸움인데."
"...아니, 그래도 괜찮은 겁니까?"
상대의 정체도 모르고 통성명조차 없었는데 이상하단 생각도 안 하나?
러스의 의문에 하다툼과 킨지르가 뭐가 그리 신기하냔 듯 말했다.
"그냥 지나가던 엘프 투사인가 보지."
"오러 유저가 그냥 오다 가다 만날 만큼 흔한 직업은 아니오만...."
"여자, 살기 없다. 그냥 한바탕 싸우고 싶은 듯."
"아니, 댁들이야 그럴지 몰라도 엘프는 그렇게 호전적인 성격이 아닐 텐데...."
대꾸하다 말고 러스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그럴 법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애당초 호전적이지도 않은데 오러 유저씩이나 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대부분의 엘프야 호전적이지 않겠지만 저 엘프 미녀도 그렇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 와중에도 칼켄과 엘프 여인은 신나게 검을 주고받고 있었다.
"껍질 벗기기!"
고함을 터트리며 칼켄이 여인의 좌우로 대검을 휘둘렀다. 거대한 드레이크나 히드라의 껍질을 벗길 때 주로 쓰는, 한 호흡에 좌우 사연격을 날리는 연속 참격이 여인의 사지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흡!"
순간 숨을 멈추며 여인이 세검으로 연달아 원을 그렸다. 검광이 원형으로 흘러내리며 칼켄의 공격을 부드럽게 흘려 버렸다. 상대의 힘을 이용해 공격의 궤도를 바꾼 것이다.
보고 있던 러스가 감탄사를 흘렸다.
"대단한 검술이다!"
오러가 실린 칼켄의 대검을, 그것도 연속 참격을 저리도 깔끔하게 흘릴 수 있다니?
저 여인의 검술이 보통이 아니란 증거였다. 러스도 칼켄의 공격을 저렇게 오직 검술만으로 흘릴 자신은 없었다. 그였다면 오러를 운용해 공격력 자체를 흩는 수법을 썼을 것이다. 효과야 같겠지만 훨씬 체력, 오러 소모가 큰 수법이다.
여인이 세검을 교묘히 찔러가며 반격에 나섰다. 은빛 블레이드 오러가 춤을 추며 허공 가득 빛의 궤적을 그렸다. 세검이 칼켄의 전후좌우를 어지러이 누비며 그를 압박해 갔다.
"하아아앗!"
수십 개의 은빛 검광의 꽃이 초원 위로 흐드러지게 피어올랐다. 칼켄이 강맹한 일격을 날려 꽃봉오리를 떨어트릴 때마다 또 다른 검화劍花가 피어나 공격을 가로막는다. 상대의 허점을 노리고, 칼날을 타고 검을 흘리며 급소만을 노려 대는 엘프 여인의 기술은 오크들의 그것과 확실히 달랐다. 훨씬 기교적이고 세련되고 복잡한 검술이다.
저 엘프 여인은 검술만 놓고 보면 칼켄은 물론, 스탈라보다도 우위에 있었던 것이다.
기대에 차 러스가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안 그래도 슬슬 검술 자체에 대해 고민하던 차다.
'오! 오늘도 한 건 건지나?'
날도둑 하나가 자신의 검술 야금야금 빼먹고 있다는 사실은 추호도 모른 채, 여인은 계속 검격을 날렸다. 뒤로 밀리던 칼켄이 문득 회심의 미소를 짓더니 갑자기 대검을 발치로 뻗었다.
"으랏차! 어금니 막기!"
칼켄의 대검이 그를 중심으로 땅 위에 크게 원을 그린다. 파인 선을 따라 녹색 오러가 폭발하듯 터져 나오며 오러의 장벽이 위로 솟구쳤다. 솟구치는 오러의 흐름이 세검의 연격을 모조리 튕겨 버렸다.
타타탕!
"하하핫!"
호통하게 웃으며 칼켄이 대검을 휘둘러 오러의 칼날을 연달아 뿜어냈다. 녹색의 블레이드 오러가 대지를 파헤치며 날아들었다. 상대의 복잡한 검술에 끌려 다니던 칼켄이 그냥 속편하게 대규모 파괴로 밀어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대의 공격은 날카롭지만 두껍지 않구나!"
상황이 일변했다.
오러의 칼날을 계속 흘리며 여인은 계속 뒤로 물러났다. 검술은 그녀가 분명 우위에 있었지만, 오러 운용 능력은 별 차이가 없고 오러양은 아무래도 칼켄이 월등했다. 막대한 오러양으로 밀어붙이니 도저히 반격의 틈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여인은 세밀한 검의 흐름으로 녹색 오러를 죄다 흘리며 상처 없이 물러서고 있었다. 도저히 이대로라면 쉽사리 승부가 가려지지 않을 것 같았다.
칼켄이 감탄하며 뻐드렁니를 드러내 웃었다.
"강하군, 엘프 투사!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상대의 찬사에도 여인은 그저 싸늘한 표정만을 고수할 뿐이었다. 칼켄이 자신의 대검을 두 손으로 받쳐 들더니 곧게 세웠다.
"좀 더 놀아 보자!"
대검을 허공으로 던지며 칼켄이 표효를 터트렸다.
"가라! 나의 맹우, 마그눔!"
☆ ☆ ☆
2미터가 넘는 대검이 녹색 오러를 머금은 채 허공을 갈랐다. 날아든 대검이 허공에서 선회하며 녹색 오러탄을 쏘아 댔다. 머리 위 공격에 당황하며 여인이 손을 뻗었다.
부우웅!
은빛의 방패가 생성되며 오러탄을 일제히 막아 냈다. 그 틈에 칼켄이 돌진했다. 땅을 파헤치며 달려가 두 주먹을 연거푸 뻗어 낸다.
"맨주먹 비늘 깨기!"
허공으로 내뻗은 두 주먹에서 녹색 오러가 포탄처럼 쏘아졌다. 여인이 몸을 뒤틀어 피하자 빗나간 오러탄이 협곡 내 절벽에 적중했다. 굉음이 울리며 절벽 일부가 무너져 바윗덩어리가 굴러떨어졌다.
우르르릉!
머리 위로 파편이 떨어지는데도 킨지르며 하다툼, 러스 등 세 오러 유저는 피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약속이라도 한듯 동시에 머리 위로 손을 뻗어 오러의 장막을 펼친다.
퉁, 퉁, 투퉁!
비 오는 날 우산이라도 쓰듯, 대수롭잖게 파편들을 막아 내며 하다툼이 중얼거렸다.
"저 양반 신 났네."
킨지르도 눈을 빛내며 대꾸했다.
"그러게 말이오. 나중에 나도 한판 붙을 수 있을까? 재밌어 보이는데."
과연 호전적인 오크의 수장들다운 태도였다. 뭐, 러스라고 딱히 심정이 다른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은 나도 붙어 보고 싶은데... 건질 것 되게 많을 것 같은데....'
그러는 동안, 엘프 여인에게 접근한 칼켄이 펀치를 날리기 시작했다. 넘실거리는 녹색 오러를 가득 머금은 주먹이 연거푸 내질러졌다.
"가죽 다지기!"
좌우 훅에 뻗어 치는 스트레이트가 여인의 전신을 노리고 쇄도해 온다. 놀라운 반사신경으로 여인은 허리를 틀고 머리를 숙이며 계속 공격을 피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의 세검은 계속 칼켄의 급소를 예리하게 찔러 갔다.
쿠우우웅!
주먹에 깃든 녹색 오러와 세검에 깃든 은빛 오러가 뒤섞이며 폭풍이 되어 휘몰아쳤다. 흩어진 오러의 파문이 절벽 좌우를 연이어 부수며 가공할 파괴의 흔적을 남긴다. 두 오러 유저가 맞붙은 탓에 슬슬 이 주변은 이미 더 이상 협곡도 아니었다. 좁은 골짜기 사이로 뻥 뚫린 공터가 생겨 버렸다.
기합을 토하며 칼켄이 왼팔을 크게 휘둘렀다.
"허업!"
웅장한 레프트 훅이 여인의 턱을 노리고 날아든다. 간신히 공격을 피하는 여인의 등 뒤로 칼켄의 애검, 마그눔이 찔러 온다. 상대가 둘이 되어 버리니 완전히 상황이 기울어 버렸다. 스스로 허공을 날면서 오러를 쏘아 대고 칼날을 휘두르는 마그눔의 움직임에 여인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오크들의 전승 기술이군, 역시 까다롭네."
갑자기 여인이 공중제비를 넘으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 상태로 세검에 손을 댄 체 나직이 중얼거린다.
"로시아, 샤이드. 내 검에 깃들렴."
사아아아....
순간 칼켄은 당황했다. 여인의 세검, 은빛의 블레이드 오러를 통해 싸늘한 한기가 퍼져 나오고 있었다.
"어? 이거 정령술?"
물의 정령 로시아와 어둠의 정령 샤이드가 은빛 오러에 깃든다.
두 정령력이 섞이며 강렬한 냉기로 화한다.
은빛의 오러가 냉기를 띤 입자로 변하며 눈보라가 되어 칼켄에게 몰아쳤다. 갑작스러운 냉기에 칼켄의 사지가 얼어붙으며 돌진 속도가 늦추어졌다.
구경하던 러스가 혀를 내둘렀다.
'오러에 원소력을 깃들일 수 있다니!'
원래 오러란 것은 기본적으로 생명의 기운, 그 근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형태를 변화하고 파괴나 치유 등의 속성을 띨 수는 있어도 원소력까지는 불가능하다. 시리스가 검에 정령력을 깃들여 구사하는 것은 자주 보았지만, 설마 오러에도 가능했을 줄이야.
'어? 그럼 저건 나는 못 쓰는 거잖아? 쳇.'
감탄하던 러스가 대놓고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하도 베껴 댔더니 슬슬 양심의 가책도 못 느끼는 모양이었다.
"신기한 기술! 하지만 이 정도라면... 하아압!"
얼어붙은 칼켄이 오러를 전신에 두르며 냉기를 떨쳐 냈다. 얼음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되며 반짝거렸다.
이 틈에 여인이 세검을 칼켄의 대검, 마그눔에게 던졌다.
"얼어붙어라!"
싸늘한 외침과 함께 세검이 마그눔과 충돌했다. 녹색 오러가 냉기의 오러와 충돌하며 서로 상쇄된다. 반투명한 얼음이 세검을 타고 솟아나 마그눔의 전신을 뒤덮어 버렸다.
퉁!
엉겨 붙어 얼음덩어리가 된 두 검이 땅으로 뚝 떨어졌다. 서로의 무기가 무효화된 걸 보며 칼켄이 히죽 웃었다.
"이러면 둘 다 맨손인가? 실수했구나, 엘프 투사!"
스피리츠 웨폰을 봉인한 그 기술은 분명 대단하다. 하지만 양쪽 다 맨손이면 신장 2.3미터에 두꺼운 근육으로 뒤덮인 칼켄과, 가녀린 저 엘프 여인의 승부는 뻔할 뻔 자다.
"타아아앗!"
승리를 확신하며 칼켄이 전신의 오러를 끌어 올렸다.
"하아아앗!"
엘프 여인도 마주 보며 은빛 오러를 전신에 휘감았다.
두 오러 유저가 서로를 향해 몸을 날렸다. 칼켄이 두 주먹을 휘두르며 고함을 터트렸다.
"가죽 다지기!"
수십 발의 펀치가 여인의 전방을 모조리 점유한다. 여인이 버들가지처럼 한들거리며 모든 공격을 피해 냈다. 사뿐히 스텝을 밟으며 공격을 피함과 동시에 은빛 오러를 머금은 수도로 예리한 반격에 나선다.
"호오?"
칼켄은 잠시 놀랐다. 맨손임에도 불구하고 저 여인의 기량은 그에 뒤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러스가 눈을 반짝였다.
'이야, 검술을 저런 식으로 하면 바로 맨손 체술이 돼 버리는구나. 저 발놀림은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칼켄이 강의 극치라면 엘프 여인의 움직임은 유의 극치.
연달아 공방을 주고받으면서도 쉽사리 승패가 갈리지 않았다.
녹색 섬광과 은빛 궤적이 허공을 어지럽게 수놓으며 흐르고 꺾이고 막히며 맹렬히 부딪친다.
콰콰콰쾅!
오러가 허공에서 충돌하며 파공음을 울렸다.
"후후, 이 정도로 재미있는 싸움은 정말 오랜만이군."
칼켄이 목을 매만지며 전의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잔뜩 흥분한 그를 향해 갑자기 여인이 손을 내저었다.
"그만 싸우죠."
막 몸을 날리려던 칼켄이 실망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왜? 재미있는데 더 싸우지?"
엘프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협곡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검에 깃든 두 정령이 떠나며 얼음이 녹아내렸다. 손짓을 하자 세검이 허공을 날아 다시금 그녀의 손에 잡혔다.
검을 허리에 차며 그녀가 차분하게 질문을 던졌다.
"이 정도면 저를 증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나요?"
☆ ☆ ☆
이미 여인에게는 조금의 전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김이 샌 칼켄도 자신의 대검을 거두었다. 회수한 마그눔을 등 뒤에 차는 칼켄을 향해 문득 여인이 물었다.
"저는 전사인가요?"
어째 좀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눈을 껌벅거리다 칼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그대는 훌륭한 전사, 아니 투사다!"
연유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저 엘프 여인은 충분히 강력한 투사였다. 인정치 않을 이유가 없었다.
여인이 다시 물었다. 이번엔 칼켄뿐 아니라 킨지르와 하다툼까지 시선에 둔 질문이었다.
"오크들의 신뢰를 받으려면 한바탕 싸워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저는 당신들에게 신뢰를 보였습니까?"
오크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저 엘프 여인은 칼켄과 검과 주먹을 맞대며 자신을 증명했다. 전사의 긍지와 영혼을 가졌음도 확인했다.
합창이라도 하듯 세 오크 투사들이 일제히 말했다.
"당연히 그러하다!"
"그대는 이제 우리 자매다!"
"강한 자매를 만나게 되어 기쁘다!"
오크들의 얼굴에 호의의 표정이 가득 떠올랐다. 엘프 여인이 안도한 듯 중얼거렸다.
"오랜 이야기 속이라 조금 미심쩍었는데, 다행히 맞는 것 같군."
그제야 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지금 설마 호투의 의식 한 거였습니까?"
여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러스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대뜸 왜 싸우나 했더니....'
엘프란 종족이 합리적이라는 소리는 들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직설적으로 들이댈 줄은 몰랐다. 보통 통성명 정도는 먼저 하잖아?
오크들도 그 생각은 한 모양이었다. 칼켄이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푸른 곰 부족의 칼켄이오."
다른 이들도 각자 자신을 소개했다.
"나 흙 멧돼지 부족 킨지르."
"회색 솔개 부족 하다툼이다."
여인이 가슴에 손을 얹으며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이니야. 스티리아 일족의 수장입니다."
그리고 협곡 위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들은 저의 일족들."
협곡 위에서 사람 그림자가 하나 둘 나타났다. 순간 칼켄이며 러스 등, 이 자리의 모든 오러 유저들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어라?"
"저기 저렇게 사람들이 많았었어?"
협곡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족히 수백 명은 되어 보였다. 하나같이 이니야처럼 새하얀 피부에 푸른 눈동자, 보랏빛 머리칼을 지닌 엘프들이었다. 복장 역시 비슷해 털가죽과 흰 천을 섞어 입고 있다.
저렇게 많은 인원이 숨어 있었는데 오러 유저인 자신들이 눈치채지 못하다니?
러스가 살짝 눈을 찡그리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미 깊은 밤이라 잘 보이진 않지만, 희미하게 그들의 주위로 미묘한 어둠이 감돌고 있었다. 그래, 시리스의 그것과 왠지 비슷한 느낌이다.
'정령술로 기척을 감춘 것인가?'
시선을 돌린 이니야가 다시 말했다.
"우리 일족은 세계수의 부활자를 만나기 위해 북쪽의 동토에서 이곳까지 왔습니다. 안타레스의 투사들이여, 우리를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3
페틀랜드 북부의 이름 없는 동토.
오랜 세월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그곳에 눈과 얼음으로 이루어진 마을이 있었다. 우뚝 솟은 얼음 기둥 사이로 눈 벽돌을 쌓아 만든 수십 채의 가옥들, 동토의 햇살이 반짝여 마치 마을 전체가 아름다운 유리 공예품처럼 보인다. 인간의 눈을 피해 살아가는 엘프들, 스티리아 일족의 보금자리였다.
마을 곳곳에서는 보라색 머리칼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엘프들이 저마다 각자의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집을 수선하고 채취한 생선과 해초를 말리거나 가죽을 무두질하는 등, 바쁜 모습이었다.
그 풍경 속을 한 남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매끈한 검은 머리칼을 허리까지 드리운 굉장한 미남자였다.
남자가 흑요석 같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마을 여기저기를 살폈다. 해초를 다듬던 엘프 여인 하나가 그를 보더니 반색을 했다.
"어머나! 레펜하르트 님!"
그는 대륙 역사상 최연소로 9서클을 마스터한, 대마법사 레펜하르트였다.
서른 살에 9서클에 입문해 세상을 놀라게 한 레펜하르트는 결국 서른다섯에 마법의 극에 다다르는 데 성공했다. 근 100년 이래 대륙에 9서클의 종사자가 아닌 '마스터'가 나타났던 건 몇 년 전 천수를 누리고 죽은 라스틸 공국의 대마법사 드레자뿐이었다. 그조차도 9서클을 마스터한 것은 나이 일흔이 넘어서였으니 대륙의 모든 마법사들이 이 엄청난 위업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이들이 레펜하르트의 행보에 주목했다.
이미 20대 후반에 대마법사가 되었을 때부터 그를 초빙하려는 나라는 많았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계속 마법의 경지를 올리고 싶다는 이유로 모든 제의를 거절하고 던전 탐사자로 남았었다.
이제 더 이상 오를 경지가 없는 9서클 마스터가 되었으니, 과연 그가 어느 나라로 향할지 관심이 집중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레펜하르트는 9서클 마스터가 되자마자 홀연히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온갖 억측이 나돌았다. 세상에 무심해져 은거했다는 설, 너무 젊은 나이에 마스터가 되어 그 부작용으로 사망했다는 설, 그를 두려워한 마법 학파에서 몰래 암살했다는 설 등등.
하지만 사실 레펜하르트는 시리스, 타시드와 함께 오지에 사는 이종족들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9서클을 마스터하고도 레펜하르트의 마법에 대한 열망은 식지 않았다. 보다 높은 경지가 있을 거라 믿으며 계속 세상을 떠돌았다.
그 와중에 그는 한 던전에서 각 이종족들의 전통 문화가 담긴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비록 단순한 묘사에 불구했지만, 그 개념만은 레펜하르트가 상상하던 것과 일치했다.
예전 같았으면 학파에 발표하고 명성을 얻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레펜하르트는 더 이상 명성이 필요 없는 수준이었다. 귀찮은 중간 과정 생략하고 바로 오지에서 살아가는 이종족들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세인들의 인식 속에서 사라진 지 3년, 그는 현재 새로운 정령술 이론을 배우기 위해 스티리아 일족의 마을에 머무르고 있었다.
레펜하르트를 본 다른 엘프 여인들도 눈을 빛내며 그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머?"
"레펜하르트 님이다."
"추우실 텐데 어쩐 일로 밖에 나오셨어요?"
비록 시기는 여름이라지만 여전히 밤만 되면 얼음이 어는 곳이다. 털가죽 옷을 두툼히 껴입어도 모자랄 판이건만, 그는 간단한 붉은 로브만을 걸치고 있었다.
레펜하르트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여러분. 저는 마법의 힘이 있어 이 정도 추위에는 끄떡없답니다."
9서클의 생존 주문, 서바이벌을 항시 전신에 걸어 놓고 있는 그는 사막이나 설원에서도 추위나 더위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아예 불구덩이 안으로 들어가거나 매서운 눈보라가 직접 불어닥치지 않는 한 저 주문이 깨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레펜하르트가 웃음을 짓자 엘프 여인들의 새하얀 얼굴 위로 홍조가 역력히 떠올랐다. 잘 말린 생선을 내밀며 한 엘프 소녀가 수줍은 듯 몸을 꼬았다.
"저기, 이것 좀 들어 보시겠어요?"
그러자 다른 여인들이 소녀에게 눈을 흘겼다. 자신들도 저마다 한마디씩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이것도 드세요, 레펜하르트 님!"
"이건 추우실까 봐 제가 만든 팔 토시인데...."
말린 생선이며 고기, 털가죽 토시 등을 내밀며 여인들은 호들갑을 떨었다. 두 팔에 이런저런 물품들이 자꾸 쌓인다. 하지만 여기서 상대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은 큰 모욕, 레펜하르트가 쩔쩔매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가,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이는 못 먹어요. 아, 토시는 감사히 쓰겠습니다."
물건을 받아 들고 허둥대는 그를 보며 엘프 여인들이 까르르 웃었다. 몇몇 여인들은 팔짱을 끼거나 목을 껴안기까지 했다. 다들 상대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호감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실제로 레펜하르트는 충분히 매력적인 남자였다.
매끄러운 흑발에 매서우면서도 세련된 눈매, 실제 나이는 30대 후반이지만 겉보기엔 10년은 젊어 보인다. 그의 미모는 가히 경국지색이라 할 만해서, 미모로 먹고산다는 엘프들이 보기에도 굉장한 것이다.
엘프를 대하는 태도 역시 들어 왔던 인간과는 전혀 달랐다. 저 인간 마법사는 같은 엘프 남성과 비견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이지적이고 우아했다.
"그럼 고맙게 쓰겠습니다, 여러분."
감사를 표한 뒤 레펜하르트가 받아 든 물건들을 무한의 주머니로 담았다. 순식간에 그 많은 물건들이 부피도 얼마 안 되는 작은 주머니 안에 모조리 들어갔다.
"그럼 이만...."
신기해하는 엘프 여인들에게 가볍게 목례한 뒤, 레펜하르트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보며 여인들이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레펜하르트 님...."
"인간인데도 어쩜 저리 멋질까?"
"게다가 그 강한 마법의 힘은 또 어떻고?"
걸음을 옮기는 레펜하르트 곁으로 한 엘프 여인이 다가왔다. 허리까지 드리운 백금발에 갈색 피부를 지닌, 스티리아 일족과 확연히 다른 외모를 지닌 차분한 인상의 미녀였다.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불만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인기 좋으시네요, 레펜하르트 님?"
고개를 돌아보며 레펜하르트가 히죽 웃었다.
"응? 왜? 질투해, 시리스?"
"흥! 질투는 무슨...."
하지만 표정이 아주 질투가 철철 넘치는 것이, 레펜하르트를 힐긋거리는 다른 여인들을 볼 때마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있다.
레펜하르트가 실소를 흘리며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알잖아? 나한테는 너 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가볍게 뺨에 키스.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시리스의 표정이 눈에 띠게 누그러졌다.
"우웅...."
애써 양 뺨을 부풀리는 것이 귀엽기 그지없다.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레펜하르트가 물었다.
"타시드는 지금 뭐 한대?"
"오늘도 대련이죠, 뭐. 타시드야 오러 유저만 보면 못 붙어 봐서 안달이잖아요?"
"하긴... 부지런하네."
레펜하르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산책 적당히 했으니 다시 숙소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등 뒤에서 그를 불렀다.
"마법사 레펜하르트."
상대를 확인한 레펜하르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 이니야?"
스티리아 엘프들의 수장인 이니야가 직접 그를 찾아온 것이다. 타시드와의 대련을 끝낸 모양이었다.
"어쩐 일로 이곳까지 오셨소?"
이니야가 손에 든 서류를 들어 보이며 쌀쌀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대와 약속한 것을 끝마쳤어요."
"그럼 그냥 날 불러도 되었을 것을...."
"볼일이 있는 자가 상대를 찾아가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요?"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을 고수한 채 이니야가 주변의 엘프 여인들을 주욱 둘러보았다. 그녀의 차가운 시선이 닿자 한창 몽롱한 표정을 짓던 여인들이 화들짝 놀라 다시 생업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이니야가 나직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인기 좋네요?"
그녀는 일족 여성들의 인기를 한 몸에 담고 있는 이 눈앞의 인간 마법사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 인간 마법사가 나타난 것은 2주일 전의 일이었다.
불쑥 나타나 엘프들의 전통을 알고 싶다고 찾아온 그를, 당연히 스티리아 일족은 경계하며 죽이려 했다. 인간에게 자신들의 은신처가 발각되었으니 살려 둘 수가 없었다.
하지만 레펜하르트는 공격을 받는 와중에도 결코 반격하지 않았다. 대신 텅 빈 설원에 강력한 마법을 선보여, 자신이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엘프들을 적대시하지 않음을 분명히 보였다. 단하임 일족을 만났을 때와 똑같은 짓을 한 것이다.
10서클의 경지에 든 레펜하르트의 마법은 실로 경악할 만한 것이었다. 단 한 방의 마법에 반경 100여 미터의 만년설이 모조리 갈아 만든 빙수가 되어 버렸다.
그 굉장한 파괴력 앞에, 이니야도 상대가 마음만 먹으면 모든 스티리아 일족을 몰살시킬 만한 힘이 있음을 인정치 않을 수 없었다. 스티리아 일족도 단하임 일족처럼, 상대에게 적의가 없음을 알고 경계심을 누그러뜨렸다.
이후 레펜하르트는 스티리아 일족의 오랜 숙적, 북해의 마물 에티알피스를 처리해 자신이 스티리아 엘프들의 친구임을 또 한 번 증명했다.
거대한 범고래의 형상을 한 저 강력한 마물은 오러 유저인 이니야조차도 애를 먹던 놈이었다. 저 마물에게 죽어 간 스티리아 엘프들도 부지기수, 그런 마물을 해치워 주니 모든 엘프들이 경계를 푼 것은 물론 일족의 은인으로 여기며 크게 호의를 보이게 되었다.
문제는 어째 호의가 점점 과해지는 것 같다는 것이지만.
"아니, 일부러 유혹하거나 한 것도 아닌데...."
왠지 비난하는 것 같아 레펜하르트는 머쓱해하며 뺨을 긁었다.
안 그래도 점점 다른 엘프 남자들의 시선이 따가워져 영 찜찜하던 참이었다. 아무리 일족의 은인이라지만 엘프도 아니고 인간 남자가, 갑자기 나타나 여성들의 인기를 몽땅 쓸어 담고 있는데 기분 좋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아가씨는 참 냉랭하단 말이지.'
문득 레펜하르트는 눈앞의 미녀를 새삼스레 바라보았다.
스티리아 일족의 수장, 이니야 엘 에네밀러스.
그녀는 50년 전 수장이 된 이래 줄곧 홑몸을 고수하며 고고하게 일족을 이끌고 있었다.
어떤 엘프 남자도 그녀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언제나 싸늘하고 냉혹한 태도만을 보여 일족 사이에서 붙은 별명이 눈의 여왕이란 말도 들었다.
심지어 모든 엘프 여인들이 애정의 눈빛을 보내는 레펜하르트에게조차도 줄곧 차가운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조금 태도를 누그러뜨릴 땐 오러 유저인 타시드와 대련할 때뿐이다. 미남자인 레펜하르트보다 오크인 타시드에게 더 호감을 보이다니... 뭐, 그래 봤자 싸늘하긴 마찬가지라 한겨울이 초겨울 됐다 정도지만.
'그야말로 타고난 전사란 이야기겠지?'
어차피 시리스가 아닌 다른 여성에겐 전혀 관심이 없으니 별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래저래 해 준 것도 많은데 이토록 냉랭한 시선만 받고 있으니 영 신경이 쓰이긴 했다.
이니야가 고개를 저으며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나의 일족이지만, 참 이해할 수 없군요. 그래 봤자 그저 거죽 속에 뼈와 살이 있을 뿐이거늘."
나름 외모에 자신 있던 레펜하르트에게 참으로 박한 평가였다. 쓴웃음을 지으며 그가 대꾸했다.
"현명한 이여, 그대는 상대의 외모 이상의 것을 보는 혜안慧眼을 지녔겠지만 모든 이들이 그런 것은 아니라오."
"흐응...."
고개를 끄덕이며 이니야가 서류를 건넸다.
"어쨌건, 이것이 그대가 원한 우리들의 비전이에요."
레펜하르트가 반색을 하며 서류를 펼쳤다. 그가 이니야에게 바랐던 정령술에 대한 비전, 그것을 엘프어로 적은 것이다.
서류를 가볍게 훑어보며 레펜하르트가 연신 고마워했다.
"단하임 일족의 전승은 대체로 불과 바람의 정령 쪽에 편중되어 있어 모자란 부분이 많았지. 정말 고맙소."
"어디까지나 약속한 보답일 뿐이에요."
이니야가 눈을 빛냈다.
"이제 약속대로 세계수를 부활시켜 줄 수 있나요?"
"이 이론대로 마법을 완성하게 된다면...."
뚫어져라 서류를 살펴보던 레펜하르트가 품에서 작은 보석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것은 제네로스. 세계수의 정이 담긴 고대의 유물."
푸른 광채가 도는 새알만 한 크기의 보석, 그것을 들어 보이며 레펜하르트가 확신에 차 말했다.
"이것이 씨앗이 되어 새로운 희망을 싹트게 해줄 것이오."
☆ ☆ ☆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레펜하르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록 그때와 장소도, 육체도, 시간도 다르지만 저 희망에 찬 엘프들의 얼굴만은 여전했다.
"다들 훌륭히 마을을 재건하고 있군."
글로텐 산맥 중턱에 위치한 거대 수림, 엘븐 포레스트.
그 중앙에 심어진 세계수 제룬팅을 중심으로 새로운 엘프들의 마을이 건설되고 있었다.
계속 세계의 마나를 흡수하며 성장한 제룬팅은 슬슬 그 높이만도 100여 미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거목이 되어 있었다. 옛 세계수 엘븐하임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세계수라는 위명에 걸맞은 굉장한 크기였다.
숲 위로 넓게 뻗어 나간 제룬팅의 가지들,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거목을 능가하는 그 굵은 가지 아래 수십 명의 엘프들이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가벼운 한숨, 구름이 되어
구름, 비를 내리리.
강이 흘러 대지를 적셔
생명 품어 상생하는 숲이 되리라.
노랫가락에 맞춰 세계수의 가지에서 새로운 새싹이 돋아나고, 이내 거대한 나무가 되어 지상으로 향한다. 굳건한 뿌리가 땅으로 파고들어 디딤돌이 되고, 줄기 안쪽에 공간이 생겨 벽과 기둥이 된다. 가지가 뻗어 나가 서로 얽히며 대들보가 되어 지붕을 얹는다. 줄기 위로 자연스러운 나무옹이가 생겨나 창문이 되고 문이 된다.
비는 내리고, 강은 흐르고
대지는 생명 품어, 숲이 자라고
숲은 생명지어, 만물을 낳네.
만물이 죽어 대지에 안겨
숲은 스러지며 강이 마르니
비, 구름 되어 또다시 오르리.
세계수를 정령의 노래로 변형시켜 가옥으로 삼는, 엘븐하임 시절부터 전해진 엘프들의 전통적인 건축 방식이었다. 오랜 세월 오지에서 살아가던 단하임 일족이었지만 노래로 전승하며 이 옛 방식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세계수 제룬팅의 주변은 이런 형태의 가옥이 수십 채씩 세워져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제룬팅을 향해 정령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은 단하임 일족뿐만이 아니었다. 대륙 각지에서 구출한 엘프 노예들, 그녀들 역시 세계수의 존재에 힘입어 슬슬 정령을 다루는 기초 정도는 터득한 후였다. 수백의 엘프들이 정령력을 모으니 꽤나 빠르게 마을의 기틀이 갖춰지고 있었다.
물론 이렇게 세계수를 변형했다 해서 바로 집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세밀한 부분은 역시 손을 봐야 했기에 엘프들 일부는 가옥 여기저기 달라붙어 망치와 끌로 자잘한 가지며 외벽을 다듬고 있었다. 미리 잘라 둔 목재를 가공해 가구며 식기들을 만드는 엘프들도 보였다.
그 옛날 엘븐하임의 엘프들은 세계수를 이용해 집을 짓고, 나무를 깎아 세련된 목공예품을 만들어 사용하곤 했다. 오랜 세월 오지에서, 또는 노예로서 살아온 이들임에도 핏속에 옛 조상들의 손재주가 남아 있는지 기초적인 목공 기술만을 배우고도 하나같이 훌륭한 솜씨를 자랑했다.
착착 자신들의 마을을 건설하는 엘프들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흐뭇해했다.
"이 정도면 엘프들도 충분히 자리를 잡았군. 문제는 남녀 성비가 너무 안 맞는다는 건데...."
현재 엘븐 포레스트의 성비율은 남자 1에 여자 10 정도다. 엘프란 종족 자체가 귀족들의 하녀나 성노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보니 구출한 엘프들 대부분은 여성이었던 것이다.
엘프 노예는 워낙 생산 단가가 높다 보니 노예상인들은 엘프 남자 노예는 잘 키우지 않았다. 키워 봐야 제값도 못 받으니 씨받이용만 남겨 놓고 태어나는 족족 죽여 버리는 일이 흔했다. 그래서 현재 대륙의 엘프 노예들 절대다수가 여성뿐이었다.
엘프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심각한 문제겠지만....
"그거야 내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으니까."
어깨를 으쓱거리며 레펜하르트는 계속 마을 여기저기를 거닐었다.
일을 하다 말고 그를 발견한 엘프 여인들이 두려움 섞인 눈으로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앗, 레펜하르트 님...."
"아,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긴 하는데, 두 눈에 겁먹은 기색이 역력하다. 그냥 고개만 끄덕 숙이며 애써 시선을 외면하고 자기 할 일에 열중한다. 그나마 그것도 성숙한 여인들이나 그렇지, 아직 어린 엘프 소녀들은 아예 레펜하르트가 보이자마자 지레 겁먹고 집 안으로 숨고 있었다.
후다닥!
도망치는 엘프 소녀를 보며 곁에서 따라 걷던 시리스가 피식 웃었다.
"와, 레펜하르트 님. 정말 인기 없으시네요."
근육질 거구인 현 레펜하르트의 외모는 아무래도 엘프들의 미적 감각에 심각하게 반하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아무리 그가 자신들의 은인이라는 걸 알아도 본능적으로 부담스럽다 보니 태도가 절로 움츠러들게 된다.
반면 시리스를 바라보는 눈은 그야말로 여신 엘디아를 대하는 듯했다.
"앗! 시리스 님! 어서 오세요!"
"싱싱한 과일을 땄는데 한번 맛보... 어머나, 레펜하르트 님?"
시리스를 보고 진심으로 인사를 건네던 엘프들이 레펜하르트를 보고 흠칫하는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뭔가 전생 때와는 상황이 참 달랐다.
"으으음...."
뭐냐, 이 과거와의 극단적인 괴리감은? 딱히 여인들의 인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참 뭐랄까....
"에휴우우...."
레펜하르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랜만에 과거의 육체가 그리워졌다. 그때는 진짜 자신이 한 발만 나서도 수많은 엘프 여인들이 여기저기서 추파를 던졌었는데....
'에잉, 빌어먹을 테스론 놈!'
애꿎은 테스론을 욕하며 레펜하르트는 계속 마을을 시찰했다. 마을 저편에서 아직 어린 엘프 아이들이 한 여인을 앞에 두고 나란히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단하임 일족의 샤일렌이었다. 레펜하르트의 요청에 따라 노예로 살던 이들에게 엘프의 전승과 정령의 노래, 그리고 전통 문화를 가르치기 위해 초빙된 이들 중 한 명이다.
샤일렌이 소녀들을 향해 낭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원래 우리 엘프들은 숲의 보호자였단다. 세계수 엘븐하임의 가호 아래 모든 엘프들은 영원한 행복 속에서 살고 있었단다. 모든 동물들은 엘프의 친구였고 모든 나무에서 과실이 열려 끝없이 양식을 공급해 주었지."
아이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이야기를 경청한다. 샤일렌은 말을 이었다.
"우리는 위대한 요정의 후예란다. 너희들은 결코 그 긍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
"네, 샤일렌 언니!"
"잊지 않을게요!"
"엘프다운 긍지를 가지고 살 거예요."
아이들이 입을 모아 새처럼 지저귄다. 시리스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샤일렌 언니!"
"어머나, 세렌디? 레펜하르트 님도 오셨네요?"
샤일렌도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레펜하르트를 가리키며 샤일렌이 아이들에게 말했다.
"얘들아, 인사드리렴. 우리를 구해 주고 마을을 마련해 주신 레펜하르트 님이셔."
아이들이 빤히 레펜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안 그래도 미모도 높기로 유명한 엘프의 아이들이다. 정말이지 인형처럼 귀엽고 예쁘다. 레펜하르트가 허리를 살짝 숙이며 온화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었다.
"얘들아, 안녕?"
허리를 살짝 숙이자 아이들 머리 위로 먹구름이라도 낀 것처럼 그림자가 짙게 깔렸다. 솥뚜껑만 한 손바닥이 하늘을 가리자 아이들의 표정이 이내 창백해졌다.
아이 몇몇이 울음을 터트렸다.
"흐, 흐흑...."
"으아아앙!"
역시 아직 어린 아이들에게 레펜하르트의 존재는 좀 많이 부담스러웠던 모양이었다. 시리스가 잽싸게 그를 뒤로 밀치며 핀잔을 던졌다.
"레펜하르트 님! 왜 애들을 울리고 그래요?"
"...내가 뭘 했는데?"
존재 자체가 죄란 말이냐! 뭔가 무한히 서러워져 레펜하르트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원래 아이들은 한 명이 울면 왠지 다 같이 우는 법, 바로 울음바다가 터졌다.
"우에에엥!"
"으앙!"
"레, 레펜하르트 님. 일단 자리를 좀 피해 주심이...."
샤일렌이 난처해하며 레펜하르트의 등을 떠밀었다. 흐느적흐느적 자리를 떠나는 레펜하르트의 뒷모습은 그야말로 쓸쓸함, 그 자체였다.
안쓰러워 시리스가 그를 달랬다.
"어쩌겠어요, 엘프들이 보기엔 레펜하르트 님은 좀 무섭게 생겨서...."
"...."
"물론 저는 안 무섭지만요."
"흑흑. 고맙다, 시리스. 역시 나한텐 너밖에 없다."
시리스의 어깨에 머리를 얹은 채 레펜하르트가 반쯤 넋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피식거리며 시리스가 레펜하르트의 머리를 토닥여 주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예요."
레펜하르트는 다시 허리를 폈다. 좌절은 좌절이고, 어쨌거나 시찰은 계속해야지.
마을을 둘러보며 그가 중얼거렸다.
"슬슬 자리를 잡았군. 노예 출신 엘프들도 어느 정도 적응을 한 듯하고."
"다들 정령술도 기본적인 건 구사하게 되었고요."
"페틀랜드 쪽으로 영토도 꽤 넓어졌으니...."
이미 전령을 통해 칼켄이 이끄는 백국군이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리도 들었다.
사실 지금의 안타레스 백국은, 크로방스 왕국 내의 영지만 치면 그냥저냥 흔한 백작령 수준이지만 글로텐 산맥너머까지 포함하면 그 넓이가 작지 않았다.
원래부터 이종족들 대부분은 왕국 내 영지가 아니라 외부, 산악 지대와 숲 속에 살고 있었다. 인간이 살기에는 힘든 지역이지만 엘프나 오크, 트롤, 드워프들이 살기엔 상당히 적합한 것이다. 수시로 군사를 일으켜 주변 몬스터들도 상당히 토벌한 상태였다.
오크는 이미 글로텐 산맥과 페틀랜드 여기저기에 부락을 꾸린 지 오래다. 유목 생활을 했던지라 자리를 잡는 것도 제일 빨랐다. 드워프들은 광산을 뚫고 화전을 일구며 마을을 세웠고, 트롤들도 슬슬 마을을 꾸릴 정도의 숫자가 모였다.
엘프들의 보금자리, 엘븐 포레스트의 인구도 슬슬 삼백여 명, 일시 이주한 단하임 일족 일부까지 포함하면 거의 사백 명 가까이 됐다. 상당한 인구지만 오크나 드워프에 비하면 그래도 굉장히 적었다. 워낙 숫자가 많은 오크나, 아예 부족 단위로 노예 생활을 하는 드워프와 달리 엘프들은 귀족 하나 털어 봐야 구할 수 있는 숫자가 대부분 한두 명, 많아 봐야 열 명뿐인 탓이었다.
턱을 매만지며 레펜하르트가 중얼거렸다.
"역시 차탄 공국을 공격해야 해."
대부분의 엘프들은 그곳에서 노예로 자라 전 대륙으로 유통(?)된다. 보다 많은 엘프들을 구하려면 본거지를 노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던 중이었다.
병사 하나가 말을 탄 채 마을을 질주하며 그들에게 달려왔다. 카를이 보낸 전령이었다. 전령이 하마한 뒤 레펜하르트에게 무릎을 꿇었다.
"백왕님을 뵈옵니다!"
"무슨 일이냐?"
"칼켄 경의 소식을 전하러 왔습니다."
"응? 전투 이긴 거? 그 이야기는 이미 들었는데?"
의아해하는 레펜하르트에게 전령이 품속에서 한 줌의 서신을 꺼냈다.
"새로운 소식이 있습니다."
서신을 건네며 전령이 말을 이었다.
"회군 중인 칼켄 경이 처음 보는 엘프 무리를 만났다고 합니다. 스티리아 일족이라고 하는데 자세한 것은 전서에...."
"이니야가?"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들의 수장 이름이 이니야라고 하던데...."
전령이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서신을 펼치며 레펜하르트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물러가거라."
"넵!"
전령을 보낸 뒤 레펜하르트는 서신을 살펴보았다. 이니야가 이끄는 사백 명의 스티리아 일족이 안타레스 백국군을 따라 글로텐 산맥을 건너오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서신을 힐끔거리며 시리스가 물었다.
"이니야? 아는 사람이에요?
"전생에."
간략히 답하며 레펜하르트는 서신을 품에 챙겨 넣었다.
"뭐, 시찰도 대충 다 했고. 일단 백왕성으로 돌아가자, 시리스."
4
봄꽃이 활짝 핀 백왕성의 뒤뜰 연무장.
레펜하르트가 우렁찬 고함을 터트렸다.
"자, 휴식 끝! 다시 12회 1세트로 2회, 시작!"
외침에 따라 두 사람이 허리를 매만지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적발의 아름다운 소년과 검은 머리에 수염을 얼굴 가득 기른 20대 청년이었다.
레펜하르트가 적발의 소년을 가리키며 말했다.
"실란, 너는 중량 그대로 1세트 추가해서 3세트 해."
숨을 고르며 실란이 대꾸했다.
"후아, 후아... 네, 레펜 씨."
실란이 레펜하르트에게서 전문적으로 근육 운동을 시작한 지도 슬슬 1년이 넘었다. 키도 상당히 자라고 근육도 붙은 실란은 더 이상 10대 초반의 어린 소년이 아니었다. 이제는 누가 봐도 10대 후반의 미소녀라 인정할 정도로 자라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왜 아직도 미소녀냐고! 아우....'
많이 변하긴 했지만, 그래도 워낙 원판이 비실비실하다 보니 여전히 갈 길이 먼 것이다. 한 살 더 먹어서 이젠 스무 살이 되었는데 아직도 겉보기엔 여자애와 별 차이가 없으니 슬슬 좌절할 법도 하다.
하지만, 실란은 투덜댈지언정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저 불굴의 정신력이 바로 그의 신성력을 키운 원동력 아닌가?
전혀 변화가 없었던 예전에도 포기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하루가 다르게 신체가 변화하고 있으니 좌절할 이유가 없었다.
"으랏차!"
의욕 가득한 얼굴로 실란이 역기를 들었다.
말이 좋아 역기지 그냥 막대기 끝에 조약돌 두 개 달아 놓은, 참으로 귀엽게 생긴 도구였다. 그걸 든 채 허리를 굽혔다 펴는 전신 운동, 데드리프트를 열심히 시행한다.
"영차! 영차!"
레펜하르트는 시선을 돌려 이번엔 검은 수염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카를, 자네는 2회 그대로. 대신 중량을 한 단계 올려."
아직 신장이 더 자라야 하는 실란은 과도한 중량보다는 횟수를 늘리는 쪽이 좋다. 하지만 이미 성인인 카를은 중량을 올려서 자극을 줘야 근육이 크고 두꺼워지는 것이다.
카를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백왕님."
카를도 역기를 들고 데드리프트를 실시했다. 이번엔 정말 역기란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막대기 양쪽 끝에 묵직한 바위 두 개가 묶여 있었다.
"허어업!"
실란이야 그렇다 치고, 요즘은 카를도 레펜하르트에게 직접 단련을 받고 있었다.
정무로 바쁜 와중에도 그가 이리 운동에 매달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사, 살려면 힘을 키워야 해!'
드워프 장인의 눈물 어린 반대에도 불구, 카를과 틸라는 점점 깊은 사이가 되어 갔다. 양쪽 다 성인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밤을 함께하는 사이로까지 발전했다. (외모야 어쨌건 틸라는 분명히 혼기 꽉 찬 드워프 처녀다.)
그리고 그제야 카를은 유벨 녀석이 왜 그리 하체가 강했는지 절로 실감해 버렸다.
'틸라 양, 난 이제 밤이 무섭소....'
역기를 들어 올리며 카를이 아련한 눈으로 봄 하늘을 바라보았다.
강해야 했다.
강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다.
기사 중의 기사라 불리며 결코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그조차도 드워프 전사의 강인한 힘(?)은 감당키 어려웠던 것이다.
"헛, 둘! 헛, 둘!"
열심히 역기를 움직이는 카를을 보다 말고 레펜하르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가르침 오래 받은 실란은 괜찮은데, 역시 카를은 익숙하지 않은 운동이라 그런지 단점이 남아 있었다.
"이봐, 카를. 순발력을 쓰면 안 된다니까 그러네?"
기사로서의 수련만 해 온 카를이다 보니 역기를 들면서도 무심코 무기를 휘두를 때처럼 순발력과 반동을 자연스레 써 버린다. 기사로서야 좋은 단련이겠지만, 근력을 키우는 데는 좋지 않은 습관이다.
운동은 어디까지나 그 목표에 맞게 정확히 행해야 하는 법.
보다 못한 레펜하르트가 윗옷을 벗은 뒤 제일 무거운 역기를 들고 시범을 보였다.
"자, 이렇게!"
강철 같은 척추 기립근이 구렁이처럼 꿈틀댄다. 우람한 이두근과 삼두근이 여실히 힘줄을 드러낸다. 터질 듯한 구릿빛 대흉근은 참으로 사람 몸이라기보다는 잘 주조된 청동상 같아 보인다.
실란이 부러움 가득한 눈길을 보냈다.
'와, 언제 봐도 죽인다! 난 언제쯤 저렇게 되나?'
뭐, 평생을 해도 저리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꿈꾸는 것은 죄가 아니지.
그렇게 열심히 레펜하르트가 두 사람을 가르치고 있을 때였다. 연무장 저편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지금 바로 전갈을 올릴 테니 회견실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됩니다요."
시종이 누군가를 열심히 만류하는 목소리.
"괜찮습니다. 볼일이 있는 자가 상대를 찾아가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요?"
그리고 청아한 여인의 답변.
레펜하르트는 눈을 치켜떴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응? 이니야?"
그러고 보니 오늘 중으로 스티리아 일족의 수장이 백왕성에 도착할 거란 예정을 들었다.
오후쯤 올 거라 생각했는데 좀 일찍 도착한 모양이었다. 인간의 예의범절에 어두운 오지의 엘프답게, 접견이니 뭐니 하는 형식 이해 못 하고 바로 레펜하르트가 있는 곳까지 들이닥친 것이다.
'하긴 저 아가씨, 전생 때도 저랬지.'
잠시 후 연무장을 통하는 회랑에 두 사람이 나타났다. 연신 송구스러워하는 시종과 보랏빛 머리칼을 허리까지 길게 드리운 아름다운 엘프 미녀였다.
시종에게 돌아가라 손짓한 뒤 레펜하르트는 슬쩍 옆으로 말을 건넸다.
"카를, 실란. 잠시 자리를 비켜 줄래?"
눈치껏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인 뒤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둘만 남게 되자 이니야가 오른손을 어깨에 올리며 정중히 자신을 소개했다.
"스티리아 일족의 수장, 이니야라고 합니다, 인간의 왕이여."
레펜하르트도 왼손을 어깨에 올려 엘프의 예법대로 화답했다.
"반갑습니다, 스티리아 일족의 수장이여, 안타레스 백국의 백왕, 레펜하르트입니다."
☆ ☆ ☆
눈의 여왕, 이니야.
전생의 레펜하르트에게 정령술을 가르쳐 준 이이기도 하고, 안타레스 제국을 건국했을 때 함께 싸웠던 동맹이기도 한 그녀가 지금 예전과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앞에 서 있었다. 여전히 싸늘하고 냉혹하고,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다.
투명한 푸른 눈동자를 응시하다 문득 레펜하르트가 얼굴을 붉혔다. 운동 중이다 보니 그는 현재 간단히 바지만을 걸친, 그러니까 짐 언브레이커블 기준의 평상복 차림이었다.
"이거 옷차림이 예의에 맞지 않군요. 미처 오셨다는 소식을 받지 못해서...."
이니야가 우아하게 고개를 저었다.
"전사다운 차림입니다. 신경 쓰지 않아요."
"아, 그렇게 봐 주시면 다행입니다만...."
쩔쩔매며 레펜하르트는 슬쩍 이니야의 눈치를 보았다.
'으음, 역시 이 아가씨는 좀 껄끄러워....'
전생에서도 이니야는 영 태도가 차가워 레펜하르트와 동맹으로서 관계 맺긴 했지만 친분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사천왕을 만났을 때처럼 그리움을 느끼거나 반가울 정도의 사이는 아닌 것이다.
'하지만 강력한 아군인 것만은 분명하지.'
이니야는 현존하는 엘프 중 유일한 오러 유저였다.
호전적인 성격도 아니고 전사로서의 재능도 낮은 편인 엘프들 사이에선 오러 유저가 잘 나오지 않았다.
정령술은 다른 종족의 비전과 달리 엘프라면 누구나 익힐 수 있는 보편화된 능력에 가깝다. 오크나 드워프, 트롤들처럼 전사나 주술사가 따로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수만 존재하면 모든 엘프들은 정령술사가 될 수 있다.
딱히 전사만을 고집하는 엘프가 없다 보니, 자연스럽게 오러 유저의 숫자도 다른 종족에 비해 적은 것이다.
그런 엘프들 속에서 홀로 오러를 다루는 이니야의 무력은 압도적이었다. 세계수가 부활한 뒤로는 다른 엘프들처럼 정령술 역시 익숙하게 다루니 감히 상대할 자가 없었다. 이후 검술에 정령술, 그리고 마법까지 익힌 시리스가 그녀를 능가하기 전까진 명실공히 이니야가 엘프 중 최강자였다.
그런 이니야가 먼저 안타레스 백국을 찾았으니 이는 실로 백국의 홍복이다.
'역시 열심히 소문 퍼트린 보람이 있구먼.'
속으로 기뻐하며 레펜하르트가 진지하게 말했다.
"안타레스 백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우리에겐 그대와, 그대의 일족을 위한 숲 역시 마련되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한 번 정중히 고개를 숙인 이니야가 갑자기 눈을 반짝였다.
레펜하르트는 잠시 움찔했다. 왠지 전생에서는 본 적 없던 열기가 그녀의 푸른 눈동자 가득 떠올라 있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왕이여."
"예?"
"저희는 세계수의 부활을 느끼고 이곳으로 왔습니다. 그 세계수가 이 땅에 위치하고 있더군요."
"아, 네."
순간 이니야의 표정이 무서울 정도로 진지해졌다.
"그래서 묻겠습니다. 그대가 정녕 세계수를 부활시킨 자입니까?"
레펜하르트가 세계수 니힐렌과 제룬팅을 연동시키며, 그 영향력은 전 대륙으로 퍼져 나갔다.
오지에서 살아가며 미약한 정령술만을 구사하던 엘프들도 하나 둘 변화가 생겼음을 감지했다. 평소와 달리 정령술의 위력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 가니 느끼지 못할 수가 없었다.
페틀랜드 북쪽의 동토에서 살던 이니야 역시 세계수의 부활을 느꼈다.
다른 엘프와 달리 그녀는 오러 유저였다. 오러 유저 특유의 예민한 감각과 정령술이 결합하니, 세계수가 위치하는 장소에 대한 대략적인 방향과 거리까지 감지할 수 있었다.
지도를 통해 세계수의 위치를 짐작한 이니야는 바로 그 땅의 주인, 안타레스 백국에 대해 정보를 모았다. 오지에 살고 있어 쉽지는 않았지만, 소문이 워낙 파다하게 퍼져 있어 제법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안타레스 백국이 이종족들을 후대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녀는 결단을 내렸다.
모든 일족을 이끌고 세계수 곁으로 향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 와중에 만난 것이 칼켄과 백국군이었다.
레펜하르트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이니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세계수를 부활하려면 강력한 마법의 힘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여겼습니다만...."
칼켄이며 러스로부터 세계수를 부활시킨 자가 백국의 왕, 레펜하르트란 소리는 들었다. 그가 진정으로 이종족을 사람처럼 대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결단이 옳았음을 기뻐하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만나 보니, 어째 상당히 상상했던 것과 달랐다.
그녀가 예상한 것은 야리야리하고 강퍅한 인상의 인간 마법사였는데....
"그대는 아무리 보아도 강인한 전사로만 보이는군요...."
이니야는 충격받은 얼굴로 레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원체 짐 언브레이커블이 유명하다 보니 칼켄도 러스도, 어련히 알고 있으려니 싶어 정작 레펜하르트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을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쓴웃음을 지으며 레펜하르트가 오른손을 들었다.
"저는...."
오른손에 황금빛 오러가 솟구쳤다.
이니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녀의 감각은 틀리지 않았다. 이자는 분명 오러 유저였다.
이번엔 레펜하르트가 왼손을 들었다. 희미한 보랏빛 영기가 손끝에 맴돌았다. 마법사의 마력장이었다.
"오러 유저이자 마법사입니다."
외부에는 비밀이지만 동맹이 될 이종족에게야 감출 필요가 없는 일이다. 레펜하르트는 그렇게 자신의 오러와 마법을 모두 선보였다.
이니야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믿을 수 없군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레펜하르트는 피식 웃었다. 뭐 이런 일 한두 번 겪어 본 것도 아니고....
그때 이니야가 사뿐사뿐 다가오더니 레펜하르트의 팔뚝을 살며시 매만졌다. 그녀의 입에서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토록 위대한 지혜가, 이토록 위대한 육체 안에 담겨 있다니...."
레펜하르트는 당황했다. 말투도 말투거니와, 전생의 모든 기억을 더듬어 봐도, 이니야의 저런 표정은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얼레? 이 아가씨 표정 왜 이래?'
뭔가 전생 때와 상당히 반응이 다른 것이다.
이니야가 고개를 들어 레펜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눈의 여왕이라 불릴 정도로 차갑고 냉혹했던 푸른 눈동자, 그 속에 기이한 열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이니야가 그를 불렀다.
"저기...."
몽롱한, 레펜하르트가 이니야에 대해 몰랐다면 다정함이라 착각했을 정도로 끈적끈적한 목소리였다.
본능적으로 레펜하르트가 긴장하던 찰나, 그녀가 질문을 던졌다.
"혹시 성혼하셨나요?"
레펜하르트의 턱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네?"
☆ ☆ ☆
사실 이니야는 딱히 남자를 싫어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리 냉정하거나 싸늘한 성격도 아니었다.
그녀는 전사였다.
그것도 오러를 발현할 정도로 무武에 매진한 전사였다.
그렇다 보니 남자라면 응당 넓은 가슴과 두꺼운 팔뚝, 듬직한 근육질이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취향 한번 뻑적지근하다 하겠다.
다른 스티리아 일족의 엘프 남자들은 그녀가 고고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니야는 단순히 엘프 남성들의 말라비틀어진 몸이 용납이 되지 않을 뿐이었다.
아니, 남자 주제에 계집처럼 희멀건해서 팔다리는 가늘고 얼굴은 예쁘장하다니! 그러고도 무슨 남자란 말이냐! 심지어 엘프 남자는 종족 특성상 수염도 나지 않는 것이다.
죄다 계집처럼 예쁘장, 예쁘장, 예쁘장....
무술의 경지를 올리기 위해 젊은 시절, 정체를 숨기고 대륙을 떠돌았던 이니야는 인간이며 드워프, 오크 전사들도 자주 만난 바가 있었다. 그 강력한 전사들과 비교하면 엘프 남자들은 죄다 멸치였다. 이건 뭐, 도저히 남자로 보이질 않았다.
레펜하르트는 모르고 있었지만, 전생에서 그녀가 그를 무시한 이유도 간단했다.
그냥, 그 미끈한 얼굴이 너무, 너무, 너무(!) 보기 싫었을 뿐이다.
그래서 대놓고 말하지 않았는가?
-나의 일족이지만, 참 이해할 수 없군요. 그래 봤자 그저 거죽 속에 뼈와 살이 있을 뿐이거늘.
전생의 레펜하르트는 저걸 무슨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는 현자다운 태도로 이해했는지 모르겠는데, 실제 의미는 단순했다. 뼈와 살만 있고 근육이 없어 꼴 보기 싫다는 소리였을 뿐이다.
이니야가 보기엔 동족 남자들보단 차라리 오크가 나을 정도였다. 오크 전사들은 적어도 목 아래는 근사하니까.
하지만 오크들은 목 위쪽이 도저히 용납이 안 됐다.
얼굴도 얼굴이거니와, 오크들은 너무 무식했다. 이니야는 '진정한 무인이라면 문무 겸비!'라는 격언의 신봉자였다. 진정한 남자라면 응당 뛰어난 육체에 걸맞은 뛰어난 지혜와 지식 역시 겸비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뭔가 전사와 남자의 용어 정의를 심각하게 혼동하는 것 같지만, 이니야에겐 어차피 저 두 단어는 이음동의어였다.
동족 남자들은 목 아래쪽이 용납이 안 되고, 다른 종족 남자들은 목 위쪽이 용납이 안 된다.
그런 의미로, 그녀는 본의 아니게 노처녀로 수십 년을 늙어 가고 있었다. 뭐, 엘프에겐 노화라는 개념이 없으니 여전히 인간으로 치면 20대 중반의 청춘이겠지만.
그런데 드디어 그녀 앞에 이상적인 남자가 나타났다!
오크 전사를 가볍게 압도하는 완벽한 육체! 그야말로 꿈에서도 못 그리던 근육의 향연!
게다가 세계수를 부활시킬 정도로 지고한 지식과 지혜의 소유자!
이 얼마나 문무 겸비의 극에 다다른 자란 말인가!
얼굴도 저 정도면 흡족하기 그지없었다. 워낙 전생이랑만 비교해서 그렇지 원래의 테스론, 즉 지금의 레펜하르트도 꽤 잘생긴 얼굴인 것이다. 충분히 남자다운 호방함이 엿보이는 얼굴이다. 그리고 애당초 비교 대상이 오크 아닌가? 오크에 비하면 누구든 천상의 미남이었다.
완벽한 이상형이었다.
더 바랄 나위가 없었다.
방년 백마흔다섯 살, 순진한 엘프 처녀의 가슴에 드디어 춘풍이 불었다. 보고만 있어도 막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붉어졌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기분이었다.
이니야는 결심했다.
'이 남자를 기필코 붙잡아야 해!'
상대가 엘프가 아닌 인간이라는 점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는 동족 남성들에게 충분히 절망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물은 것이다.
"저기... 혹시 성혼하셨나요?"
"...."
레펜하르트는 멍하니 이니야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에 살짝 떠오른 홍조, 촉촉이 젖은 눈망울, 다정한 목소리에 사근사근한 태도까지.
눈앞의 이 엘프 여인이 자신이 기억하는 이니야가 맞나 싶은 의심조차 들었다. 순간 기억을 의심해 인공 주마등을 잠시 펼쳤을 정도였다.
'펼쳐 보니 분명 이니야가 맞긴 맞는데.'
하지만 왜 이렇게 기억과 다른지는 도저히 모르겠다.
'내가 시공 회귀한 탓에 뭔가 영향을 받아 성격이 바뀐 건가?'
당황하면서 레펜하르트가 조심스레 대답했다.
"아,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마음에 둔 상대는 있지만...."
이니야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토록 완벽한 남자를 주변 여인들이 가만둘 리가 없었다.
"역시 그렇군요...."
그녀가 각오를 다진 표정으로 재차 레펜하르트에게 질문했다.
"하지만 아직 성혼하신 건 아니지요?"
"아, 예."
아리송해하며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니야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아!"
"...?"
멍한 레펜하르트를 향해 이니야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번엔 일족의 수장다운 태도를 취했다.
"저희 일족을 받아 주신 것,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스티리아 일족은 앞으로 그대의 동맹으로 흥망성쇠를 함께할 것이며 이 맹세는 영원히 변치 않을 것입니다."
레펜하르트도 정신을 차리고 정식으로 동맹을 선포했다.
"안타레스 백국 역시, 스티리아 일족을 영원한 동맹으로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다."
그렇게, 스티리아 일족은 정식으로 안타레스 백국의 소속이 되었다.
맹세를 교환한 뒤 이니야가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그럼 저는 이만 일족에게 돌아가 보겠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찾아뵐 테니 잘 부탁드립니다."
"아, 예."
배시시 미소를 건넨 뒤 이니야가 사뿐사뿐 연무장을 떠났다. 전생의 기억과 달리 참으로 움직임이 미묘하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으면 교태 부린다고 착각할 수도 있었을 것 같았다.
회랑을 떠나는 이니야의 뒷모습을 보며 레펜하르트는 머리를 긁적였다.
"거참... 뭐였지, 방금은?"
☆ ☆ ☆
회랑을 따라 이니야는 차분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조금 전 만난 인간 남자를 떠올렸다.
열기가 느껴지는 듯한 우람한 가슴, 그녀 하나쯤은 가볍게 품을 수 있을 듯한 넓은 어깨, 강인한 팔뚝과 허리까지....
새삼 다시 떠올리니 너무 멋있어서 정신이 혼미해진다. 순간 이니야가 휘청거리며 벽에 손을 기댔다.
"아, 안 돼. 정신 차려야지."
학학거리며 애써 이니야는 숨을 골랐다.
그때, 회랑 저편에서 적발의 소년 하나가 걸어왔다. 실란이었다. 카를은 업무가 있어 정무실로 떠났지만, 그는 회견이 끝나면 다시 레펜하르트와 운동을 할 수 있을까 싶어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니야를 본 실란이 눈을 깜빡였다.
'아, 저 사람이 새로 온 그 엘프 수장인가 보네?'
역시 엘프답게 굉장한 미녀란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새로운 백국의 가족이 되었으니 인사를 해야겠다 싶어 실란이 졸랑졸랑 이니야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그러자 이니야의 표정이 섬뜩할 정도로 사나워졌다. 뭐냐,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이 혐오스러울 정도로 계집같이 생긴 아이는?
실란이 움찔하면서도 자기소개를 이었다.
"저, 저는 필라넨스를 섬기는 종, 실란이라고 합니다만...."
이름을 듣는 순간 이니야의 눈빛이 더더욱 매섭게 빛났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는 대꾸도 않은 채 실란의 위아래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뭔가 납득했다는 표정을 짓더니,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지지 않을 거예요."
"...네?"
황당해하는 실란을 이니야는 차갑게 노려보았다. 안 그래도 백국으로 오며 오크 병사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그 이야기 속에는 이 어린 성자에 대한 소문도 있었다.
'이 소년이 바로 레펜하르트 님이 마음에 둔 이....'
어느새 그녀는 자연스럽게 레펜하르트에게 님 자를 붙이고 있었다.
콧방귀를 켜며 이니야가 도도하게 고개를 돌렸다.
"흥!"
그리고 바로 회랑 저편으로 걸어가 버린다. 그 뒤에서, 사정 모르는 실란은 그저 눈만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
제28장 라이벌
1
트롤 구루, 아틸카는 대륙 각지에서 동족을 구해 내는 한편 숨어 사는 일족들을 찾아 백국으로 이주하기를 권했다.
물론 설득이 쉽지는 않았다. 인간이 트롤을 얼마나 가치 있는 몬스터로 보고 있는지는 트롤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땅으로 일족을 모두 옮긴다는 것이 결코 쉬운 결정일 리 없었다.
하지만 예전부터 트롤들을 구해 내며 대륙을 떠돌았던 아틸카의 발언에는 그만큼의 무게가 있었다. 안타레스 백국의 소문 역시 결단을 내리는 데 한몫했다.
결국 소규모로 인간의 눈을 피해 살아가던 수백 명의 트롤 부락이 글로텐 산맥으로 이주해 왔다.
엘븐 포레스트로부터 남쪽으로 20킬로미터쯤 떨어진 또 다른 수림.
그곳에서 백여 명의 트롤들이 열심히 거주지를 짓고 있었다. 이미 세 개의 마을이 완성되었고, 지금 또 하나의 마을이 차근차근 형태를 갖추는 중이다.
트롤들의 숲, 그 한가운데 생긴 거대한 공터에는 이미 수십 채의 움막집이 완성되어 있었다. 전통적인 트롤의 가옥답게 땅을 1미터가량 깊숙이 판 뒤 낮은 벽을 쌓고 그 위에 지붕을 쌓은 반지하 형태의 움막이었다.
마을을 거닐던 시리스가 트롤들의 가옥을 살펴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와아, 집들이 굉장히 예쁘네요?"
움막이라고 해서 결코 초라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흙을 개어 벽을 쌓고 구운 기와를 얹은 지붕, 온갖 형형색색의 도자기들로 내부를 장식하고 외벽이며 바닥에는 아름다운 문양의 타일이 붙어 있다. 마을 전체가 장난감처럼 아기자기하고 다양한 색채를 품고 있었다.
게다가 가장 놀라운 것은 모든 창문에 유리가 끼워져 있다는 점이었다.
유리는 상당히 비싼 물건이라, 보통은 대영주나 왕족만이 쓰는 물건이다. 오죽하면 스테인드글라스라는 형식이 탄생했겠는가? 저 스테인드글라스라는 게 겉보기엔 아름답지만, 사실은 투명한 판유리나 색유리를 쓰기에는 너무 단가가 비싸다 보니 자잘한 유리 조각을 붙여 창문으로 만들다 생겨난 기법인 것이다.
"...백국에서도 유리를 쓰는 건물은 기껏해야 백왕성이나 신전 정도인데 여기는 누구나 유리를 쓰다니...."
시리스의 감탄에 함께 걷던 레펜하르트가 별것 아니란 듯 대답했다.
"전통적으로 흙을 다루는 기술이 발달되어 있고, 주술력으로 지질 성분을 변환시킬 수 있는 트롤들에게는 유리 제조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거든."
현 시대엔 잊혔지만, 드워프의 문화가 돌과 철로 대변되듯 다른 종족들에게도 각자 특별한 문화가 있다.
엘프들은 실을 자아 천을 짜고 나무를 깎아 공예품을 만드는 데 대단히 뛰어나다.
오크들의 무두질과 가죽 세공 솜씨는 어느 종족보다도 월등하다.
그리고 트롤들은 전통적으로 흙을 다루는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이는 자연의 흐름을 숭상하는 트롤들의 주술 문화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엘프들이 숲의 아이들, 숲의 정령으로 불린다면 트롤은 그야말로 숲 자체였다. 엘프들도 숲의 성장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만 나무를 베어 사용하지만, 자연의 흐름을 따르는 트롤들은 아예 한낱 나무 한 그루조차도 베지 않는다. 엘프들이 자연 친화적이라면 트롤들은 자연 동화적 성격에 가까운 것이다.
그래서 트롤들은 흙으로 집을 지으며, 대부분의 가재도구 역시 도자기를 구워 마련한다. 트롤들의 옹기며 도자기, 유리 공예품은 놀랍도록 정교하고 우수해 감히 인간들과 비교할 수조차 없는 수준이었다.
원시적인 감각을 그대로 살려 자연을 품어 내는 트롤들의 도자기는 일개 식기라 할지라도 다른 종족이 보기엔 놀라운 예술품이다. 심지어는 트롤들이 요강으로 썼던 도자기가 인간 세상에 흘러 나가 보물로 취급받으며 귀족의 식기로 사용된 적도 있을 정도다.
"인간은 그저 자신들이 가장 문명적이라 믿고 있지만, 사실 그들이 못 보는 세상 속에 얼마나 뛰어난 예술이 숨어 있는지...."
한탄하듯 중얼거리며 레펜하르트는 계속 걸음을 옮겼다. 그를 본 몇몇 트롤들이 가볍게 목례를 건넸다. 레펜하르트가 이종족 마을을 시찰하는 일은 종종 이루어졌기에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거나 하지 않았다.
하지만 몇몇 트롤―특히 여인들―은 꽤나 흥미로운 눈으로 레펜하르트 일행을 보고 있었다.
언제나와 같은 시찰이지만, 오늘의 그에겐 평소와 다른 점이 있었던 것이다.
"백왕님 오셨네?"
"어머나, 오늘은 옆에 아가씨가 한 명 더 붙어 있잖아?"
"백왕님도 꽤 하시네?"
자고로 남의 연애사는 종족을 막론하고 모든 여인네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법.
트롤 여인들이 깔깔대며 레펜하르트의 좌우, 시리스의 반대편에 선 보랏빛 머리의 엘프 미녀를 바라보았다.
그 엘프 미녀는, 레펜하르트가 설명을 할 때마다 손을 모으고 연신 감탄사를 터트리고 있었다.
"정말 지식이 대단하세요. 감탄했어요."
"아, 예...."
레펜하르트는 멍하니 자신의 왼편에 선 엘프 여인, 이니야를 바라보았다.
평소처럼 시리스를 대동하고 이종족 마을 시찰을 나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니야가 나타나 자신도 동행시켜 달라며 졸랐던 것이다. 이 땅에 정착하게 된 이로서, 이웃에 사는 이들과 친분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별로 이상한 이유도 아니어서 레펜하르트도 흔쾌히 동행을 허락했다. 그리고 이렇게 트롤들의 마을로 오게 된 것인데....
"어머나, 저건 또 뭔가요?"
이니야가 트롤 마을 한편을 가리키며 질문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레펜하르트의 오른팔에 팔짱을 낀다. 팔뚝을 통해 풍만한 그녀의 가슴이 여실히 느껴진다.
얼굴을 붉히며 레펜하르트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아, 저건...."
그곳에서는 십여 명의 트롤 주술사들이 커다란 웅덩이에 진흙을 가득 담고 발로 밟고 있었다.
흙만짐이라 불리는 트롤 구루들이 연신 흙을 개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주술의 노래를 부른다. 흙의 성분이 변화하며 점점 회색빛으로 변해 간다.
슬그머니 팔을 빼며 레펜하르트가 대답했다.
"저건 오푸스 세멘테리움이라 하는 겁니다. 트롤들만이 만들 수 있는 저들의 전통 건축 재료지요. 주술력으로 성분이 변해 만들어지는 세멘테리움은 빠른 시간 안에 돌처럼 단단히 굳기 때문에 가옥의 기둥이나 제단을 만들 때 쓰곤 한답니다. 유리처럼 주술사들만이 만들 수 있어서 트롤들에게도 제법 귀한 물건입니다."
설명을 마치며 레펜하르트는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흙의 성분을 변환하는 트롤의 저 주술은 일견 별것 아니어 보이지만 현 시대의 마학으로는 있을 수 없는 기적이었다.
3대 금기인 시간과 공간, 그리고 물질.
그중 물질 그 자체를 변환시키는 엄청난 기술인 것이다. 그가 10서클의 경지에 오르게 된 큰 공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저 트롤들의 주술 기법이랑 지저 태양 마그림을 연구해서 만든 주문이 바로 뉴클리어 버스트였으니까. 원소 변환을 저리 간단히 해 버리다니, 정말 대단하단 말이야?'
뭐, 트롤들이야 이론도 모른 채 그냥 저지르고 있는 거지만.
원래 주술이란 것은 마법처럼 체계화되어 원인과 과정을 규명하는 것이 아닌, 그저 행위와 결과만을 중시하기에 주술사 본인도 왜 저렇게 되는지는 모른다.
"그렇군요. 다른 종족에 대해 이런 깊은 이해를 가시고 계시다니, 대단하세요, 레펜하르트 님."
이니야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찬사를 흘린다. 그리고 눈빛을 초롱초롱 빛내며 그를 바라본다. 정말이지 예전과 태도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냥 레펜하르트라 부르십시오, 이니야."
"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제가 부르고 싶어 부르는 것이니까요."
아무래도 꿋꿋이 저 호칭을 고집할 생각인 것 같았다. 전생엔 제국 황제까지 올랐을 때도 절대 경칭 안 붙이던 아가씨가 왜 이러냐, 갑자기?
아무래도 그가 시공 회귀를 한 탓에 성격이 꽤나 변한 모양이라 생각하며 레펜하르트는 뺨을 긁었다.
'거참, 적응 안 되네.'
다른 상황이었다면 이쯤에서 '이 아가씨가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나?'라는 생각도 할 법했겠다. 하지만 감히 그런 생각은 떠올리지도 못하는 레펜하르트였다. 워낙 전생 때의 냉대가 기억 깊숙이 박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스티리아 일족은 원래 스킨십이 잦았다. 워낙 추운 곳에서 살다 보니 자연스레 스킨십이 흔한 문화로 발전한 것이다. 실제로 전생 때에도 이니야를 제외한 다른 엘프 여인들은 대수롭지 않게 레펜하르트를 껴안거나 하는 일이 흔했었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흐음, 이번 시간대의 이니야는 상당히 성격이 활발해진 것 같군.'
반면, 워낙 더운 곳에서 살다 보니 부부가 아니면 부모 자식 간에도 거의 스킨십이 없었던 단하임 일족의 소녀는 계속 눈을 흘기고 있었다.
'뭐야, 저 여자?'
시리스는 입술을 삐죽이며 이니야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 ☆ ☆
엘프 중에서도 오러 유저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경지가 칼켄과 맞상대할 정도란 소리를 들은 시리스는 바로 이니야를 찾았다. 검사로서 그런 위대한 동족을 만나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름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이니야와 첫 대면을 했을 때.
"아, 당신이 그 유명한 신월의 검사?"
"단하임 일족의 시리스 발렌시아입니다."
선배에 대한 예우로 시리스가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이니야도 어깨에 손을 얹으며 통성명을 했다.
"스티리아 일족의 이니야라고 해요."
그리고 시리스를 보며 눈웃음을 친다.
"당신이 레펜하르트 님께서 '딸처럼' 아끼신다는 그 소녀로군요."
기분 탓인지 특정 단어가 강조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시리스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묘하게 이니야의 태도가 거슬렸다.
이니야가 눈을 내리깔며 시리스의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미소를 띠웠다.
"흐응...."
그리고 시리스의 가슴을 힐끔 보더니 미묘하게 웃는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무지하게 기분이 나쁘다.
"그럼 이만."
승리자의 표정을 지은 채 이니야는 사뿐사뿐 방을 나갔다. 뒤에 남은 시리스의 표정이 한껏 구겨졌다. 이유도 모르게 패배한 기분이었다.
'뭐야! 저 여자!'
...참고로, 시리스는 은근히 승부욕이 강하다.
"레펜하르트 님, 저건 뭔가요?"
"아, 저건...."
트롤 마을을 거닐며 이니야는 계속 레펜하르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때마다 착실하게 슬쩍 옆으로 붙거나 팔짱을 끼거나 한다. 저 '작태'를 보고 있자니 왠지 가슴 한구석에서 뜨거운 뭔가가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흥!"
콧방귀를 뀌며 시리스는 애써 시선을 외면했다.
'상관없잖아? 뭐, 내가 레펜하르트 님과 연인 관계도 아니고.'
그런데 왜 이리 기분이 나쁜지 모르겠다....
그렇게 시리스가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깡마른 트롤 한 명이 그들에게 달려왔다. 아틸카처럼 푸른 피부 전신에 기묘한 문양을 그린, 트롤 구루였다. 그가 트롤어로 말을 건넸다.
"탄생의 의식이 곧 시작합니다, 인간의 왕이여. 참석해 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모든 트롤 마을들이 그렇듯, 이곳의 중심에도 커다란 제단이 세워져 있었다.
세멘테리움만으로 만든 거대한 벽돌을 층층이 쌓아 올린 높이 10미터 정도의, 지구라트라 불리는 이 제단은 트롤의 문화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건축물이었다. 대부분의 전통 의식이 바로 이 지구라트에서 행해졌다.
횃불이 촘촘하게 켜진 지구라트 주위, 거기에 백여 명의 트롤들이 열을 맞춰 모여 있었다. 구루의 인도에 따라 제단 밑에 도착한 레펜하르트와 시리스, 이니야가 주위를 둘러보며 신기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원시적이고 주술적인, 신비롭기까지 한 기운이 제단을 둘러싼 채 은은히 흘러나온다. 두 엘프를 향해 레펜하르트가 작게 속삭였다.
"이제부턴 경건한 자세를 지켜야 합니다. 탄생의 의식을 참관하는 것은 트롤들에게 있어 크나큰 호의, 진정한 친구로 인정받았다는 증표니까요."
시리스와 이니야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호기심 가득한 그들의 눈에 제단을 오르는 한 트롤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상아 같은 어금니가 달빛을 받아 반짝인다. 전신에 새긴 문양에서도 희미한 빛이 나오고 있다. 아틸카가 제단 위를 오르자 트롤들이 손을 들고 기괴한 노래를 불러 댔다.
"아...."
시리스도 이니야도, 자기도 모르게 가슴에 손을 모았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왠지 가슴 속이 뭉클해지는 기분이었다.
둥, 둥, 둥, 둥.
달밤 가득 북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트롤들의 노래가 점점 커져 갔다.
제단 위에 오른 아틸카가 손을 들었다.
노래가 멈췄다.
아틸카가 트롤어로 외쳤다.
"미래를 담은 일족의 여인들, 우리의 희망이여. 이 자리에 나와 위대한 축복을 받으소서!"
제단 밑에서 젊은 트롤 여인 십여 명이 나타났다.
하나같이 살짝 배가 나온 임산부들이었다. 배가 부푼 정도를 보아선 아직 10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은 듯했다. 트롤은 인간과 달리 스무 달 동안 태내에 아이를 갖기에 저 정도면 만삭이라고 할 수는 없다.
트롤 임산부들이 차례로 제단 아래 도열한다. 무섭도록 진지한 분위기라 시리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 아틸카가 지구라트 위쪽에 설치된 돌 제단 위에 몸을 뉘었다.
다른 트롤 구루 한 명이 나타나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짐승의 뼈를 깎아 만든 날카로운 골제 검이었다.
트롤들의 노래가 재개되었다. 북소리가 점점 더 높고 빨라지기 시작했다.
둥둥둥둥둥둥!
심장 박동처럼 요란한 북소리가 대기를 뒤흔든다.
트롤 구루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아틸카 틸카타 라티라!"
단검이 누운 아틸카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
"앗!"
시리스가 기겁하며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아틸카의 가슴으로 붉은 선혈이 분수처럼 솟구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달려가려는 그녀를 레펜하르트가 제지했다.
"기다려!"
"네?"
손목을 잡힌 시리스가 당황하며 레펜하르트를 돌아보았다. 그녀처럼 경거망동하진 않았지만 이니야 역시 안색이 창백해진 후였다. 두 엘프를 번갈아 보며 레펜하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죽은 게 아니야."
두 사람이 다시 제단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놀랐다.
아틸카의 가슴으로부터 솟구친 선혈, 그것은 땅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허공에 맴돌며 거대한 피의 구를 형성한다. 그 아래, 트롤 구루가 천천히 손을 뻗어 아틸카의 심장을 꺼냈다.
두근! 두근! 두근!
뽑힌 심장이 여전히 요동치며 강렬한 생명력을 보인다.
둥! 둥! 둥!
심장 박동에 맞춰 북소리가 우렁차게 울린다.
뽑힌 심장을 조심스레, 보물처럼 양손에 들고 트롤 구루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생과 사가 혼재하니 그 속에 희망이 있어
희망이 미래가 되어 어두운 앞길을 밝히네.
트롤 구루가 뽑힌 심장을 임산부들에게 들고 갔다.
임산부들 앞에 서서 심장을 강하게 움켜쥐니, 심장이 터지며 핏물이 임산부들의 부푼 배를 차례로 적셨다. 피의 축복을 받은 임산부들이 저마다 무릎을 꿇고 감사를 표했다.
이것이 트롤들의 '탄생의 의식'이었다.
트롤은 너무도 강력한 재생력 때문에 정상적으로 잉태를 할 수가 없다. 그들의 재생력은 성인이 되고서야 생겨나는 것, 그래서 어미의 재생력을 태아가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강력한 트롤 주술사가 자신의 심장을 바쳐 태아에 축복을 내리면 그의 주술력이 열 달간 아이를 보호해 무사히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준다.
고대의 원시적인 트롤들은 마치 사마귀처럼, 잉태한 어미가 아비를 잡아먹으며 그 힘으로 태아를 보호했다. 그러나 주술의 힘을 얻은 후로는 이렇게 아비의 희생 없이도 무사히 아이를 낳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대신 고대에는 한 배에 일고여덟씩 임신하던 것이 지금은 인간처럼 한둘씩 임신을 하게 되었다는 차이점도 생기긴 했지만.
"그래도 그때마다 주술사가 죽으면 곤란하지 않나요?"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시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레펜하르트가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쉿, 계속 지켜봐."
잠시 후, 허공에 솟구친 혈액이 다시 아틸카의 구멍 난 가슴으로 흘러들었다. 심장이 뽑힌 아틸카의 가슴에서 피와 살이 솟아 나왔다. 솟은 피와 살이 서로 엉키며 심장을 재생하기 시작했다.
시리스가 기가 막힌다는 듯 뇌까렸다.
"맙소사, 트롤의 재생력이 저 정도일 줄이야...."
"진정한 구루만이 가능한 일이지."
강력한 재생력을 가져 팔다리가 잘려도 재생하는 트롤이라지만 섬세한 내장 기관의 재생은 아무래도 힘들다. 하지만 주술의 힘을 이용하면 손상된 내장 기관까지도 어느 정도 재생이 가능하며, 진정한 구루의 경지에 오른 트롤은 심장이 뽑혀도 이렇듯 살아날 수 있었다.
아틸카 정도 경지라면 설사 목이 베이고 뇌가 파괴되어도 재생이 가능했다. 그 정도 되는 구루의 생명을 앗는 방법은 모든 주술력을 소진시키거나, 아니면 전신을 불살라 재로 만드는 법뿐이다. 전설에 따르면 주술의 극에 달한 구루는 자연으로 회귀해서도 자아를 잃지 않는 위대한 영이 되어 재 속에서 부활할 수 있다지만 그런 경지는 아틸카로서도 아득한 수준이다.
'그래서 전생의 테스론은 아예 스파이럴 가드로 아틸카를 산산이 갈아 버렸었지.'
아픈 기억이 떠올라 레펜하르트는 인상을 썼다. 애써 상념을 접으며 그는 계속 의식을 지켜보았다.
이니야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까, 깜짝 놀랐어요...."
"그럴 겁니다. 꼭 인신 공양처럼 보여서, 다른 종족들은 상당히 트롤에 대해 오해를 하기도 하지요."
이윽고 아틸카가 눈을 떴다.
그가 제단에서 일어나 오른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건재함을 과시하는 아틸카를 보며 트롤들이 환호를 터트렸다.
"아틸카! 아틸카! 아틸카!"
아틸카가 양손을 펼치며 유리 팔찌를 서로 부딪쳤다. 맑은 소리를 내며 그가 선언했다.
"탄생의 의식이 무사히 거해졌도다! 이로써 또다시 미래가 펼쳐졌으니 모두 축복하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