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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62

54화 전조(1)

54. 전조(1)

'해선'의 시작은 형제가 운영하는 작은 길드였다.

조성찬과 조동원

형 조성찬은 리더십이 뛰어났고 지휘에 대한 감각이 탁월했다.

동생 조동원은 전투에 대한 재능, 센스가 뛰어났다.

이 둘의 힘을 합쳐 길드를 운영하자 점차 규모가 커졌고, 마침내 다른 길드와 연합해 서울의 한 지역을 차지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사실 길드에서 구역이란 것은 그저 상징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서울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길드가 뛰어남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이자 명예였다.

"그런 해선 길드가 완전히 무너지다니, 의외네요..."

조동원의 이야기를 들은 한재문이 생각에 잠겼다.

"길드원들은 얼마나 남았어요?"

"대부분 죽거나 부상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형님은 정진 길드에 붙잡혀 있습니다."

"사람이 죽어도 정부에서는 별 제제가 없었나 보군요..."

"예."

"재문아. 요즘 세상에 누가 그런 일에 신경이나 쓰겠어?"

강현의 말대로 였다.

적어도 능력자에 관한 일에서는 정부는 손을 뗀 지 오래다.

대로 한복판에서 칼부림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경찰은 능력자 간의 다툼에 끼어들지 않았다.

"정진 길드는 갑자기 상승한 능력을 이용해 자신과 연합을 맺은 다른 길드를 모두 먹어 치웠습니다.

"..."

"그리고 그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확실히 이번에 10대 길드 순위에 수호자 길드가 빠지고 정진 길드가 들어갈 것이란 말이 기정사실이긴 해요..."

한재문의 말에 수호자의 부길드장 한시환이 인상을 구겼다. 그러나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었기에 딱히 반박할 수도 없었다.

"저번에 그놈들이 강해진 게 무슨 약 때문이라고 했나?"

"맞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그 약물이란 것이 본격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했습니다."

"본격적이라니?"

"정식적으로 허가받지 않은 약이지만 암암리에 고가에 거래되고 있습니다. 접근도 쉬워서 일반인들도 손을 댈 정도고요."

조동원의 설명에 강현이 턱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능력이 상승되는 약이라면 일반인들도 탐을 낼 만 하지."

성인 중 무려 절반에 가까운 이들이 각성을 한 상태이다.

이들 중 능력자 허가를 받고 던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소수지만, 그런 이들이 아니라도 대가 없이 신체 능력을 상승시키는 약에 관심이 없을 수는 없었다.

"정진 길드는 이 약물이 본격적으로 유통되기 전부터 복용해 왔습니다. 분명 생산자와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을 겁니다."

"확실히 그렇겠네요."

조동원의 설명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이제 길드를 일으키는 건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저 형님만 무사히 구하면 됩니다."

"으음..."

"비록 저희를 도와주시는 것이지만, 분명 강현 님께도 이득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미 소고기를 먹으며 돕기로 약속했었지만, 조동원은 행여나 강현이 생각을 바꿀까 불안했다.

"알겠어요. 그렇게 하지 않아도 어차피 도우려 했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감사합니다!"

**

정진 길드의 사무실.

"왜 이번 주 수입이 이것뿐이야?!"

길드장 홍채연이 보고서를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정진 길드의 모든 지표는 말 그대로 수직 상승 중이었으나 홍채연의 눈에는 차지 않는 듯했다.

얼굴에 종이 뭉치를 맞은 남자는 순간 욱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최근 들어서 더 괴팍해졌어.'

홍채연은 원래도 성격이 그리 온화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 능력이 상승하고 길드의 세력이 커지자 예전보다 훨씬 더 지랄 맞게 성격이 변한 상태였다.

"길드원들에게 더 던전을 돌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리고 길드장님..."

"또 뭐야?"

"강현이 병원에서 퇴원했다고 합니다."

"내가 그까짓 놈 신경까지 써야 돼?"

"아닙니다... 혹시나 해서 보고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나가!"

"예..."

고개를 숙이고 뒤돌아 선 남성의 얼굴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길드원들한테는 또 뭐라고 말해야 하나...'

최근 들어 성격이 변한 것은 홍채연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길드원들 또한 점점 다혈질로 변하고 있었다.

그 증상은 능력 상승의 폭이 큰 길드원일수록 더욱 심각했다.

'정말로 약물의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는 건가?'

처음 약물을 구입할 때 판매자는 부작용에 대해 경고했었다.

-능력 상승에 따른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부작용이요?

-예. 아직은 문제가 없습니다만, 차후에 어떤 일이 생길지는 저희도 확실히 모릅니다.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능력이 상승한다는 것만 확인되면 바로 입금할 테니.

그러나 욕망에 눈이 먼 홍채연은 부작용 따위는 고려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길드는 승승장구하고 엄청난 기세로 커지기는 했다.

하지만 남자의 걱정은 깊어질 뿐이었다.

'최근 들어 사건 사고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단순히 새로운 길드원들을 받아들이면서 생기는 현상이라 생각했지만...'

남자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정말 약물 때문이라면 큰일이야. 더 이상 그것을 복용해서는 안 돼.'

그는 단순히 사무를 보는 사람이었기에 굳이 비싼 약을 섭취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것에 대해 섭섭하게 느꼈지만 지금은 오히려 다행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더 험한 일이 벌어지기 전에 얼른 길드를 떠야겠어.'

**

"일단 가장 중요한 목표는 조성찬이라는 남자를 구하는 거다."

"예."

"뭐, 죽었으면 어쩔 수 없고."

강현의 말에 밝아졌던 조동원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굳이 그거까지 말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도움을 청하는 입장이기에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리고 약물을 확보한다."

"끝입니까?"

"끝이지. 뭐가 더 필요해?"

"아닙니다."

"오케이. 그런데 한시환 씨는 왜 따라와요?"

"아, 그게..."

강현의 물음에 한시환이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수호자 길드의 모토가 인류의 수호니까요. 그런 위험한 약물이 남용되는 것을 방관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굳이 같이 움직일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그, 그리고 어쩌면 박세현 길드장님 과도 연관이 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길드장님도 돌아가시기 직전에 급격한 능력 상승이 있었으니까요."

사실 본래 목적은 강현의 활동을 지켜보는 것이었으나, 당황한 한시환이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잠깐... 이거 그럴듯한데?'

그런데 막상 말을 내뱉고 나니 정말 박세현과 연관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류를 수호하기 위해 항상 강해지는 것을 열망했던 그라면, 약물에 손을 댔을 가능성도 있었다.

"대신 방해는 하지 마시고 같이 움직이실 때는 제 말에 잘 따라 주셔야 합니다."

"예."

"그리고 도중에 다치거나 하셔도 책임 못 집니다."

"알고 있습니다."

한시환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여준 강현이 스마트 폰을 들었다.

"그전에 일단 정보를 모으자."

"방법이 있습니까?"

"방법은 무슨. 그냥 신태길 팀장이랑 최동우 형님한테 전화해서 물어보는 거지."

잠깐의 통화 연결음이 들리고, 전화 너머로 신태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은 잘 나으셨습니까?

"예. 가진 게 몸밖에 없는데요. 뭐."

-이번에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던전 공략에 대한 보상은 나중에 이야기하고 일단 궁금한 게 있어서 전화했어요."

-말씀하시죠.

"정진 길드라고 알아요? 최근 상승세가 장난 아니라던데.

-예. 알고 있습니다.

"그 길드가 약쟁이들 소굴이라 하던데. 아는 거 없어요?"

-약쟁이..?

뜬금없는 단어에 신태길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쟁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요즘 먹기만 하면 능력이 올라간다는 약이 있다던데."

-아! 그렇지 않아도 최근 그런 약물이 유통된다는 보고는 들었습니다. 그런데 워낙 일들이 많아서 신경 쓰지는 못했습니다.

"으흠..."

-사실 지난번에 던전 테러를 일으킨 일당을 잡느라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마저도 꼬리가 잘려서 여의치 않은 상황이긴 하지만요.

"알겠어요. 제가 그거 관련해서 조사 좀 하려는데 필요하면 지원 부탁할게요."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요.

-예.

통화를 종료한 강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딱히 소득이 없으십니까?"

"그렇네."

그 이후로 최동우에게도 연락을 취했지만 그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정진 길드와 해선 길드의 다툼은 나도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네. 하지만 길드 간의 문제에 연합이 사사건건 개입하는 것은 좋은 모습이 아니야. 미안하지만 이 일은 자네가 개인적으로 조사해줬으면 좋겠어.

결국 원하는 정보를 얻지 못한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어쩔 수 없지."

"..."

"이렇게 된 이상 예정대로 정공법으로 간다."

"저, 정공법이요? 역시 생각해둔 것이 있으셨군요?!"

무언가 거창한 단어에 조동원이 기대감에 찬 눈빛을 보내왔다.

"그냥 가서 박살내고 뺏어야죠."

"..."

"별 수 있어요? 이 바닥이 원래 그런 걸."

"푸흐흡. 벌써부터 재미있을 것 같아!"

강현의 말에 안유성이 실실거리며 웃었다.

"역시 강현 님이십니다. 정공법이란 자고로 정면 돌파를 말하는 거죠."

"암. 그렇고말고."

"..."

한재문과 한시환, 조동원이 조용히 눈빛을 교환했다.

'이것들 정상이 아니야...'

**

E등급 던전 '죽은 자들의 마을'

정진 길드가 점유 중인 던전으로 언데드 몬스터가 나오는 곳이었다.

원래 언데드 던전은 상당히 인기가 없는 축에 속했다.

부산물이 적어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의 언데드들은 일정 확률로 귀금속을 드랍했기 때문에 정진 길드에서 각별히 관리하고 있었다.

"뭐 좀 나왔어?"

"반지랑 팔찌 해서 10개 정도 나왔습니다."

"고작 10개? 장난쳐? 그거로는 할당량도 못 채우잖아?!"

"죄송합니다."

"그럼 죄송할 짓을 하지 말아야지!"

죽의 자들의 마을을 관리하는 간부 이필규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남겨 먹지는 못하더라도 길드에 상납할 것 정도는 챙겨야 할 것 아니야. 이 병신들아!"

"으억!"

이필규에 발길질에 얻어맞은 남자가 배를 부여잡고 바닥을 굴렀다.

"후우, 됐어. 내가 직접 움직인다. 개같은 새끼들. 이래서 잡것들은 도움이 안 돼."

거침없이 내뱉어지는 욕설에 길드원들의 눈빛이 살벌해졌지만, 아무도 감히 덤벼들 생각은 하지 못했다.

'별 것도 아닌 주제에... 나도 약만 더 받았으면..!'

이필규는 간부라는 이유로 지부에 할당된 약물 대부분을 가져갔다.

통칭 '몬스터 파워'라 불리는 알약은 말 그대로 먹는 순간 몬스터들처럼 강한 힘을 가지게 해 줬다.

길드에서는 각 지부의 인원에 맞춰 극소량을 할당했는데 이필규는 자신의 몫을 넘어서 다른 길드원의 약에도 손을 댔다.

길드원들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힘이 부족했기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고, 아주 훈훈한 게 보기 좋아?"

그때였다.

갑자기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모두의 고개가 돌아갔다.

"누구냐!?"

그러자 껄렁껄렁하게 걸어오는 낯선 남자가 보였다.

"나다. 이 새끼야. 아무리 일을 못해도 길드원한테 그렇게 폭력을 휘두르면 쓰냐?"

자신을 노려보는 이필규에게 강현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빈정거렸다.

"뭐하는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여긴 정진 길드 영역이다."

"그래서?"

"죽고 싶지 않으면 꺼져라."

"뭐야? 협박까지!? 이거 완전히 못써먹을 놈이네!"

강현이 계속해서 빈정거리자 이필규의 목에 핏대가 올라섰다.

"생각이 바뀌었다. 당장 가진 걸 다 내놔. 그럼 목숨은 살려주지."

이필규가 신호하자 단숨에 길드원들이 강현을 포위했다.

그들은 이러한 일을 한두 번 해본 것이 아닌 듯 매우 익숙해 보였다.

"하여간 이놈들은 개성이 없어."

"...?"

"늘 같은 패턴이야."

열 명이 넘는 인원들에게 포위당했지만 강현은 전혀 긴장감이 없어 보였다.

"배, 배데스 길드?"

순간 뒤쪽에 있던 한 길드원이 강현의 등판에 적힌 Badass 글자를 보고 중얼거렸다.

"지부장님! 이놈 배데스 길드 옷을 입고 있습니다!"

"배데스고 뭐고 그게 중요해?! 그냥 족쳐!"

이필규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냥 족치면 되지. 누군지가 중요하겠냐."

55화 전조(2)

55. 전조(2)

"아니. 그러니까. 얼른 그 홍인가 뭔가 하는 길드장한테 가라고."

"예에..?"

"가서 내가 하는 말 잘 전해."

"예!"

"자, 천천히 말해줄 테니까 잘 따라 해."

이빨이 모조리 털리고 뺨이 잔뜩 부어오른 이필규가 미친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부터."

"어늘브터."

"이 던전은"

"이 든즈는"

"배데스 길드 꺼다."

"배드스 글드 끄다."

이필규는 필사적으로 따라했지만 얼굴이 잔뜩 부어 발음이 되지 않았다.

듣고 있던 강현이 이필규의 뺨을 후려쳤다.

-짜악!

"왜, 왜으..,"

바닥에 처박힌 이필규가 세상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눈물을 흘렸다.

"발음이 왜 그렇게 구려? 그래서 뭐 전달이나 되겠어?"

'네가 이렇게 만들었잖아! 이 개xx xx xxx xx...'

이필규의 마음속에서 한국 욕설의 진수가 현란하게 펼쳐졌다.

그러나 목숨은 소중했기에 가슴속에 묻어둘 수밖에 없었다.

'소문은 들었지만 이거 완전 제대로 또라이야!'

다른 길드원들은 그 모습을 보며 그저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내가 뭐 대단한 부탁 하는 게 아니잖아. 그냥 가서 너희 길드장한테 말을 전하라는 건데 그게 힘들어? 응?"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한시환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즐기고 계신 것 같은데... 저 혼자만의 생각입니까?"

"으음... 그게..."

함께 서있던 조동원은 차마 직접 말하지는 못하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진 건 왜 이렇게 없는 거야? 쓸 만한 게 하나도 없네. 뭐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어요."

이들로부터 강탈한 아이템을 살펴보던 강현이 쓰레기를 버리듯이 바닥에 내던졌다.

"아무튼 내가 한 말 그 홍 씨한테 잘 전해. 알겠지?"

"예..."

"이 던전 배데스 길드가 가져간다고. 너네도 이런 식으로 빼앗은 거니까 불만 없을 거 아냐?"

강현의 질문에 정진 길드원들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꺼져."

말이 떨어지자마자 놈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렸다.

"야."

"히익!"

강현이 그중 한 남자를 붙잡았다.

놈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마냥 비명을 내질렀다.

"여기 이 쓰레기 데리고 가야지. 그냥 가면 어떡해?"

남자가 시선을 옮기자 원망스러운 눈빛을 한 채로 끅끅대는 이필규가 보였다.

"나, 나드 데르가주..."

**

"뭐라고? 다시 말해봐..."

보고를 받은 홍채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강현이 '죽은 자들의 마을'을 습격해서 강제로 점거했다고 합니다."

"잘 안 들려서 그러는데, 다시 말해 볼래?"

자리에서 일어난 홍채연이 남자에게 다가왔다.

"가, 강현이 죽은 자들을 마…"

"닥쳐. 닥쳐! 닥쳐어!"

"..."

"그 미친놈은 갑자기 왜 시비를 거는 거야!? 왜에에!"

최근 높아만 지던 그녀의 히스테리 수치가 극으로 치솟았다.

사무실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던 홍채연이 겨우 숨을 고르고는 말을 이었다.

"하아, 그래서 원하는 게 뭐래? 원하는 게 있을 거 아냐?"

"그…"

"그냥 이유 없이 와서 설치는 건 아닐 거 아니야?!"

"예예! 맞습니다. 조성찬의 신병과 함께 가지고 있는 '몬스터 파워'를 모조리 넘기랍니다."

"뭐...?"

요구사항을 들은 홍채연의 눈이 살벌하게 치켜떠졌다.

"조성찬 같은 병신 넘기든 말든 관심 없어. 이제 괴롭히는 것도 지겨워지던 참이니까."

"..."

"그런데, 몬스터 파워를 넘겨?"

"예..."

"그게 얼마짜리인 줄은 알아? 지가 뭔데 그걸 넘기라 말라야?!"

"다른 던전도 모조리 박살나고 싶지 않으면 얼른 넘기랍니다. 죽은 자들의 마을에서 내일 12시 정각까지 기다리겠다고..."

터무니없는 말에 홍채연은 화도 나지 않았다.

'지가 무슨 경찰이야 뭐야?'

경찰도 아닌 주제 갑자기 사건에 개입한 것도 모자라서, 값비싼 약까지 넘기라고 한다.

횡포도 이런 횡포가 없었다.

"조선시대 탐관오리도 이것보단 나았겠어..."

잠시 허탈한 표정을 지은 홍채연이 말을 이었다.

"길드 얘들 중에서 정예로 준비해둬. 50명 정도."

"예?"

"내가 두 번 말해야 돼?"

"하지만 길드장님... 아무리 길드의 전력이 상승했다지만, 상대는 강현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놈에 대한 소문을 종합하면 완전히 차원이 다른 괴물로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

"이렇게 조폭처럼 내 집안을 휘젓고 다니는 놈을 그대로 둬라? 건드리기 위험한 놈이니까?"

"그건 아니지만..."

남자가 우물쭈물 하자 홍채연이 책상을 내려쳤다.

-콰앙!

"잔말 말고 준비시켜."

치켜떠진 그녀의 눈이 점차 붉게 물들어갔다.

**

"맥주 좀."

"여기 있습니다."

강현은 신성아가 건네준 맥주 캔을 받아 단숨에 비워 냈다.

"크으... 조만간 얼음 관련 마법이나 하나 배워야겠어."

여름은 진작 끝나고 한창 단풍이 드는 계절이었다. 그러나 강현은 밍밍하게 식은 맥주를 마시는 것은 영 달갑지 않았다.

'이제 삼십 분도 남지 않았는데... 괜찮은 거야?'

그 모습을 바라보는 조동원의 눈이 불안하게 떨렸다.

자신은 가족의 목숨이 달려 있는 일인데, 너무 태평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분명 강한 것은 맞지만...'

물론 그도 한차례 강현의 실력을 보기는 했었다.

하지만 정진 길드가 본격적으로 준비를 하고 부딪쳐 오면 아무리 강현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크크큭. 오네요."

"예. 저기 끝에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안유성이 먼저 말을 하고 신성아가 뒤를 이었다.

'뭐가 온다는 거야?'

둘의 말에 조동원이 열심히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곱게 이야기만 하지는 않겠네. 어차피 예상했지만."

마지막으로 말을 한 강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풀었다.

'진짜 오잖아?!'

잠시 후, 조동원의 눈에도 무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수십 명의 무장한 능력자들.

정진 길드의 마크인 붉은 검이 그려진 갑옷을 입은 자들이 이곳을 향해 오고 있었다.

"형!"

그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완전히 만신창이가 된 조성찬이 보였다.

바닥에 질질 끌려오는 조성찬의 모습에 조동원이 눈이 뒤집혔다.

"가만히 있어요."

당장 뛰쳐나가려는 조동원을 강현이 붙잡았다.

"하지만...!"

무언가 말을 하려던 조동원은 강현의 눈을 보고 멈춰섰다.

한없이 가라앉아 있는 눈.

불과 몇 초 전까지 장난치고 있던 사람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

마침내 두 집단이 서로의 눈동자를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다.

-털썩

정진 길드는 쓰레기를 던지듯 조성찬을 집어던졌다.

"끄으으..."

가까이서 본 조성찬의 상태는 훨씬 심각했다.

그가 능력자가 아니었다면 당장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

조동원은 분했지만 일단 응급 처치가 중요했기에 조심스럽게 형을 뒤로 옮겼다.

"조성찬을 넘겼으니 이제 던전에서 물러가라."

길드원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약은?"

"조성찬의 주머니에 넣어 뒀다."

강현이 한시환에게 눈짓을 했다.

한시환은 잠시 멈칫거렸지만 군말 없이 조성찬의 품을 뒤져 약을 찾아냈다.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요."

강현에 손에 들린 약은 병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알약과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장난해? 고작 세 알?"

"그 약이 한 알에 얼마인 줄이나 알고 지껄이는 거냐?!"

"내가 분명 가지고 있는 거 다 넘기라고 했을 텐데."

"이 자식이!"

자신들을 무시한다는 생각에 정진 길드원이 잔뜩 흥분했다.

그는 당장 뛰쳐나가려 했지만 뒤에서 자신을 붙잡는 손길에 멈추었다.

"부길드장님..."

"일단 기다려."

정진 길드의 부길드장 우진형.

그는 순수 무력이라면 길드 내에서 한 손에 꼽을 정도로 강력했다.

'왜 이렇게 떨고 계시지?'

하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쨍그랑...

우진형은 잊을 수 없었다.

눈을 감을 때마다 강현의 손에서 자신의 검이 박살나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그는 끊임없이 노력했다.

사냥에 박차를 가해 레벨을 올렸고 약의 복용량도 늘렸다.

덕분에 단기간에 엄청나게 강한 힘을 손에 넣었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왜 이렇게 몸이 떨리는 거야!?'

다시 강현을 마주하자 그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스멀스멀 공포가 몸을 옭아맸다.

"거기 너. 나 알지?"

순간 강현과 우진형의 눈이 마주쳤다.

"모, 모릅니다...! 아니 모른다!"

당황한 우진형이 존댓말이 내뱉었다.

주위의 길드원들이 이상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어디서 개구라야? 너 나 알잖아. 좋은 말로 할 때 가지고 있는 약 다 가져와."

"이런 미친놈이! 이분은 정진 길드 부길드장이시다. 너 같은 양아치 새끼가 함부로 말할 분이 아니야!"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로 우진형의 전신이 떨려왔다.

그는 당장에라도 옆에서 소리치는 멍청이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정자인지 정진인지 모르겠고. 마지막으로 말한다. 약 넘겨."

강현이 마치 맡겨 놓기라도 한 듯이 손을 내밀며 약을 요구했다.

계속되는 뻔뻔한 태도에 우진형도 점차 화가 나기 시작했다.

'저 놈은 그냥 시비가 걸고 싶은 거야!'

우진형이 보기에 강현은 그저 시비가 걸고 싶은 것 같았다.

아마 가진 약을 전부 넘겼어도 어떻게든 싸움을 걸어왔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만해?! 나 우진형이라고!'

아무리 강자의 말이 법인 세상으로 변했다지만, 저건 도가 지나친 행동이다.

우진형은 세상에 정의가 살아있음을 보여주리라 다짐했다.

"씨발! 죽여!"

우진형이 외치는 순간, 안타깝게도 그는 보지 못했다.

강현이 만족한 듯이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을.

**

"인간이 아니야..."

수호자 길드의 한시환은 입을 벌린 채로 멍하니 서있었다.

초점이 없어 보이는 그의 눈동자에는 수십 명 사이를 휘젓고 다니는 안유성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끄아아아!"

"크악!"

안유성의 메이스가 휘둘러질 때마다 비명과 함께 무언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방에서 공격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안유성은 마치 뒤에도 눈이 달려 있는 사람처럼 모든 공격을 피해냈다.

"안유성이란 남자도 저 정도였을 줄이야."

던전에서는 안유성의 모습을 자세히 지켜볼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저 강현을 졸졸 따라다니는 부하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어떤 의미로 강현보다 더 괴물이군."

그런 한시환의 시선이 움직여 강현을 향했다.

"아니. 저건 악마다..."

강현의 싸우는 모습을 보며 한시환이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혹시 싸움이 시작되면 한시환 씨와 조동원 씨는 뒤로 빠져 있어요.

-하지만….

-쓰읍. 따라오는 대신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죠?

-알겠습니다...

-그리고 신성아, 안유성. 너네는 가능하면 죽이지 말고 제압해.

-왜요?

강현의 말에 안유성이 불만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으음... 그냥 하라면 해. 인마! 네가 무슨 피에 미친 살인마 뭐 그런 거야? 어? 그래도 사람인데 함부로 막 죽이고 그러면 못써!

-쳇.

그때의 상황을 생각하던 한시환이 허탈하게 웃었다.

"대체 누가 누구보고 피에 미친 살인마라는 건지..."

강현은 무기를 착용하지 않고 놈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강현의 말로는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지금 보이는 모습으로는 절대 아니었다.

"저건 그냥 손으로 때리는 걸 즐기는 거야..."

무기를 쥐지 않은 강현은 완전히 광전사처럼 싸웠다.

분명 강현도 대부분의 공격을 피하고 있었지만 안유성처럼 모든 공격을 완벽하게 피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강현은 적들이 공격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두 주먹을 움직이기 바빴다.

"크하악!"

한 남자의 턱에 강현의 주먹이 작렬했다.

엄청난 충격에 그의 이빨들은 독립을 선언하며 뛰쳐나왔고, 본인은 대신 중력을 무시하고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주먹을 날린 강현의 손은 건틀릿이 끼워져 있는 것이 아닌, 맨손이었다.

"크하하하하!"

"분명 즐기고 있는 거라고..."

**

"전멸입니다..."

"뭐..?"

순간 홍채연은 보고를 올리는 남자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50명 중 50명. 모두 중상입니다. 몇몇 놈들은 정말 겨우 숨만 붙어있는 상태라 어쩌면 평생…."

"그만. 그만해."

"예."

"그만하라고!"

"예..."

홍채연은 완전히 미친 사람처럼 책상을 두들기며 비명을 질렀다.

-쾅쾅쾅쾅!

"그만, 그만, 그만, 그만해 이 씨발 새끼야아아!!!"

"..."

"도대체 이유가 뭐야? 응? 그 개새끼가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냐고?!"

남자의 멱살을 붙잡은 홍채연이 당장에도 답하지 않으면 후려칠 기세로 그를 바라봤다.

"잘 모르겠습니다..."

"조성찬도 넘기고 약도 주고 다 했잖아! 그런데 왜? 왜에에!?"

-콰직, 콰직!

인벤토리에서 도끼를 꺼낸 홍채연이 사정없이 책상을 내려쳤다.

"하아, 하아..."

보고를 하던 남자는 그 광기 어린 모습에 침을 삼켰다.

'완전히 미쳤어... 미쳤다고!'

전부터 우려한 약물의 부작용이 본격화된 것이 분명했다.

그는 두려움에 떨며 어떻게 하면 길드를 떠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그래. 원하는 대로 해주지."

"예..?"

"강현 그 자식이 원하는 대로 해준다는 거야. 지금 당장 자금이 되는 대로 모든 약을 구입해. 그리고 얼마 전에 말한 신약이란 것도 알아보고."

"예..."

"강현. 네가 그렇게 바란다면 어쩔 수 없지."

숨을 헐떡이던 홍채연이 도끼를 바닥에 내려찍었다.

-콰앙!

"전쟁이야."

56화 분노 신드롬(1)

56. 분노 신드롬(1)

'죽을 자들의 마을' 사건으로부터 보름이 흘렀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동안 대한민국은 완전히 다른 나라라고 생각될 정도로 변해 있었다.

-최근 잇달아 발생하고 있는 강력 범죄 사건에…

-오늘 또다시 능력자가 난동을 부렸습니다. 인천에 위치한 한 술집에서 벌어진…

-던전을 돌지 않는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범죄가 급증하고 있어요.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튜토리얼을 1단계 이상 통과한 각성자라는 거죠.

대한민국은 분노와 공포에 휩싸였다.

사회 전반에 걸쳐 폭력, 살인과 같은 강력 범죄 수치가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었다.

누군가 죽고 다치는 끔찍한 사건들이 하루에도 수십 건씩 쏟아졌다.

-불법 약물의 오용을 정부에서는 더 이상 묵과하지 않겠….

-정부에서 약물과의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현재 전국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이 약은 일명 '몬스터 파워'라고 불리며….

통칭 '분노 신드롬' 이라 불리는 이 현상을 막기 위해 정부는 칼을 빼들었다.

계엄령을 선포한 것이다.

그로 인한 파장은 엄청났다.

수많은 정재계 고위 인사들이 약물 복용 혐의로 잡혀갔으며, 이름만 대면 알만한 거대 길드들이 차례대로 무너졌다.

-이번에 망한 길드가 몇 개임?

-이게 나라냐?

-정부가 이정도로 대담하게 진행할 줄은 몰랐어요.

-잘한 거지. 지금 눈먼 칼빵 맞을까봐 집 앞에도 못나갈 지경이야.

-정진 길드는 어쩐지 세력이 급속도로 커진다 했더니 약쟁이 소굴이었네 ㅉㅉ

뉴스 기사를 보던 홍채연의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파지직

그녀의 손안에 있든 스마트폰이 스파크를 일으키며 한 줌의 고철로 화했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거야..?"

자신이 한 것이라고는 그저 강해지기 위해 노력한 것 밖에 없었다.

"나는 목숨을 걸고 몬스터와 싸워왔어... 그런데 너희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버러지 같은 인간들은 자신 덕에 안전한 삶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 조차 잊은 것 같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올라가면 최고가 될 수 있었는데... 왜 나를 방해하는 거야? 왜!? 꺄아아아악!"

홍채연이 비명을 지르며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던졌다.

이미 대부분의 사람이 떠난 길드 사무실에서 그녀를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게 다 강현 때문이야... 그 개 같은 놈이 나를 방해해서 그런 거라고..."

목표를 찾아 헤매던 그녀의 적의가 한 사람에게 모였다.

"강현, 강현만 아니었으면!"

**

"으아아! 씨발! 왜 나한테만 지랄이야?!"

"뭐가요?"

안유성과 함께 게임을 하던 강현이 잔뜩 흥분해서 키보드 샷건을 내려쳤다.

"왜 나만 계속 쏘냐고? 옆에 너도 같이 걷고 있었잖아?!"

"형이 잡기 쉬워 보였나 보죠."

"안 해! 안 한다고!"

아무도 하라고 시킨 적이 없었지만 강현이 괜히 생떼를 부렸다.

"누가 같이 게임하자고 했나? 자기가 와서 시켜 달라 해놓고선."

"뭐 인마?!"

"형은 그냥 재능이 없어요. 괜히 더 스트레스받지 말고 치워요."

그러는 사이에 안유성은 또 다른 적을 잡아냈다.

붉은색으로 '24 kill' 이라 쓰인 안유성의 모니터를 보자 강현은 괜히 더 열이 차는 느낌이었다.

"너 잘났다. 새끼야!"

결국 컴퓨터를 끈 강현이 다급하게 냉장고를 열어젖혔다.

"후우..."

수북이 쌓여 있는 맥주를 보자 조금 마음이 안정되는 느낌이었다.

이제 어지간히 마셔서는 취기조차 느끼지 못하는 몸이 되었지만, 그저 기분을 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크으... 좋다! 배도 고픈데 밥이나 먹으러 가자."

"그냥 시켜 먹죠."

"나 소고기 먹고 싶어."

"쯧, 귀찮게."

마침내 마지막 적을 죽이고 '치킨이다!'라는 글귀가 모니터에 떠오르자 안유성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응?"

그때였다.

갑자기 안유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육감이 강하게 경종을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형, 잠깐만."

"왜?"

"빨리 나와요!"

강현은 사무실 중앙에 서있었다.

그곳은 거대한 통유리로 되어 있어 서울의 풍경이 한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나오지 말래도 나갈 거야 인마."

"지금 당장 나오라고요! 저는 먼저 갑니다!"

"미친놈. 뭐라는 거야?"

안유성은 다급히 사무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멍하니 그 모습을 강현의 앞이 일순간 밝아졌다.

"어..?"

다급히 뒤를 돈 강현.

그의 눈에 전방을 가득 메우는 거대한 불구덩이가 들어왔다.

'새끼. 나도 데려가지...'

괜히 애꿎은 안유성을 욕했다.

-콰앙!

불구덩이가 강현을 덮치자 엄청난 폭음과 함께 사무실이 통째로 터져나갔다.

-쾅! 쾅! 콰아앙!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생각했는지 마법들이 연달아 몰아쳤다.

그렇게 약 1분 동안 쏟아진 마법이 끝나자 사무실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타닥, 타닥

고요한 사무실에는 무언가가 타오르는 소리만 들려왔다.

"으아아아!"

-쿠궁.

그 모든 공격을 정면에서 맞고도 용케 살아남은 강현. 그가 몸을 뒤덮은 건물 잔해를 밀치며 소리를 질렀다.

"어떤 개새끼들이야?! 잡히면 죽인다!"

약 10개월의 시간 동안 강현은 정말 많은 일을 겪었다.

그런데 던전 밖, 그것도 공개적인 장소에서 대규모 테러를 당한 적은 단연코 처음이었다.

"후우..."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자 완전히 폐허가 된 사무실이 보였다.

"어제 샤워실 설치했는데..."

한때 샤워실이었던 곳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였다.

입구에서 안유성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야이 새끼야! 이럴 거면 제대로 말을 해줬어야지! 그걸 홀랑 혼자 튀냐?!"

"형. 저는 분명 나오라…. 푸하하! 꼴이 말이 아니네요!? 하하하하!"

안유성은 배를 부여잡고 끅끅거리며 웃어댔다.

"아휴, 저 또라이... 됐고. 옷이나 좀 구해와 봐."

"알겠어요. 크큭, 큭..."

"그만 웃어. 미친놈아!"

강현은 완전히 검댕이가 되어 있었다.

입고 있던 옷이 이미 타버렸는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

-이게 칼로 베어도 흠집도 나지 않고 불에도 타지 않는 엄청난 신소재라고 합니다.

신성아가 자신만만하게 외쳤던 가죽 재킷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하아, 엄청난 신소재는 무슨..."

강현이 툴툴거리며 몸에 묻은 재를 털어내자 하나의 예술품처럼 균형 잡힌 몸매가 드러났다.

"그래도 신성아가 없어서 다행이네."

안유성이야 죽을 걱정이 없지만, 만약 신성아가 사무실에 있었으면 크게 다쳤을지도 몰랐다.

마침내 불에 탄 육체의 재생이 끝나고,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였다.

"끄으... 끄어어어..."

"뭐야?!"

갑자기 사무실 구석에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기, 길드장니임..."

신음 소리의 정체는 저녁까지 남아 야근을 하던 한재문이었다.

'나도 좀 챙겨 이 나쁜 새끼들아...'

한재문은 몸이 아픈 고통보다 아무도 자신을 걱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눈물이 흘러나왔다.

"오, 재문아! 너도 있었지. 그래도 살아서 참 다행이다. 야."

'시발... 빨리 구급차나 불러요...'

다행히도 한재문의 바람은 금세 이뤄졌다.

-애애애앵!

얼마 지나지 않아 사이렌 소리와 함께 경찰차, 소방차, 구급차를 대동한 수많은 공무원들이 현장에 도착한 것이다.

그리고 소식을 들은 신태길 팀장 또한 강현을 찾아왔다.

"하아... 이건 또 무슨 일입니까?"

신태길은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봤는데 좀 웃어요. 안 그래도 나도 짜증 나니까."

강현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을 받았다.

"짐작 가는 곳은 있습니까?"

"무슨 짐작이요."

"그러니까. 어디 원한을 사거나 한 적이 없냐는 말입니다. 이런 일을 이유 없이 벌이진 않았을 테니."

신태길의 질문에 강현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없습니까?"

"기다려 봐요. 몇 개인지 세는 중이니까."

"됐습니다..."

강현을 얕잡아 보고 말았다.

저 인간에게는 원한 관계가 없는 곳을 묻는 게 맞았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신태길이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인명피해가 없다는 건 천만다행입니다."

"그건 그렇죠."

"이번 사건을 일으킨 놈은 정부에서도 철저하게 조사할 테니 강현 씨는 일단 기다리시죠."

"됐어요. 누군지 알 것 같으니까."

"예?"

"저기 뻔히 써 놨네."

강현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자 수백 장의 종이가 휘날리는 것이 보였다.

신태길이 그중 하나를 집어 들자 붉은색으로 쓰인 정진(精進)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설마 정진 길드 소행입니까?"

"그런 것 같네요. 그때 그냥 작살을 냈어야 하는 건데. 쯧."

그날 이후로 조용히 지내기에 강현은 자신에 대한 관심을 끊은 줄만 알았다.

"이번에는 완전히 고개도 못 들게 확실히 밟아줘야겠어."

"그렇지 않아도 약을 복용한 길드들을 쫓는데 인력이 부족해 도움을 요청하려던 차였습니다."

"다른 곳은 별 관심 없는데요?"

"정진만 해결해 주셔도 됩니다."

신태길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말이에요."

하늘을 보던 강현이 중얼거렸다.

"정진이라는 말. 노력해서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 아니에요?"

"맞습니다."

"..."

"그리고 몸을 깨끗이 하고 마음을 가다듬는다는 뜻도 있습니다."

"푸흡! 참나. 어이가 없네. 하하하하!"

강현이 손에 들린 종이를 갈기갈기 찢으며 광기에 젖은 웃음을 흘렸다.

**

"어떡할 거야?"

"무슨 말씀이신지."

"당신 때문에 이렇게 됐잖아! 하루아침에 길드도 잃고 이제 나는 범죄자 집단의 수괴가 됐다고!"

완전히 눈이 붉게 물든 홍채연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저는 분명 약의 부작용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홍채연 씨는 그걸 알고도 약을 구입했죠."

"이딴 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갈 거란 걸 알았으면 나도 약을 사진 않았을 거야. 그러니 네가 책임져 줘야겠어."

홍채연이 신호를 보내자 그녀의 뒤에 서있던 정진 길드원들이 한순간에 남자를 포위했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가야 하지 않겠어? 지금 가지고 있는 약 전부 내놔."

"약을 원하시면 돈을 지불하셔야 합니다."

"꺄하하하! 장난해? 지금 이 상황에 돈을 달라고?"

광기에 젖은 그녀의 말에 호응하듯 다른 길드원들도 거칠게 웃음을 토해냈다.

"지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우리는 더 이상 뒤가 없어."

"..."

"그러니까 살고 싶으면 약을 내놓는 게 좋을 거야."

"착각하고 있는 건 홍채연 씨. 당신입니다."

"뭐..?"

"약을 만들어서 팔고 있는 저희가 이 정도 상황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까?"

남자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어디선가 나타난 능력자 수십 명이 정진 길드원을 포위했다.

"하, 우리 정진 길드야. 지금은 그중에서도 정예만 모여 있다고. 감당할 수 있겠어?"

"자의식 과잉이 심각하시군요. 약의 부작용에 그런 것도 있는지는 몰랐습니다. 흥미롭네요."

"이익...! 전부 죽여!"

명령을 내리며 홍채연이 남자를 향해 도끼를 휘두르려 했다.

"뭐야..!"

하지만 무언가에 붙잡힌 그녀의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게 왜이래?!"

"고작 약 몇 알 먹고 뭐라도 된 것처럼 나대는 꼴이라니. 도저히 못 봐주겠군."

순간 내내 존댓말을 하던 남자의 태도가 돌변했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던 그가 모자를 벗자 날카로운 인상의 미남이 모습을 드러냈다.

"넌 뭐야? 무슨 짓을 한 거야?!"

당황하는 홍채연을 보며 모습을 드러낸 남자, 최민준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하도록 해. 아무런 가치도 없는 쓰레기나 다름없던 너희들을 이렇게 유용하게 이용해 줬으니 말이야."

"이거 풀지 못해!?"

"덕분에 충분한 데이터를 모을 수 있었다."

"뭐라는 거야!?"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말에 홍채연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죽은 뒤에 남은 시체까지 깔끔하게 이용해 줄 테니 영광으로 알아라. 마지막까지 인류를 위해 숭고하게 희생되는 것이니까."

"꺄아아아!"

57화 분노 신드롬(2)

57. 분노 신드롬 (2)

"몬스터 파워를 복용한 이력이 있거나, 복용 중이신 분들은 자진 신고 바랍니다!"

도로에서 군인들이 확성기를 들고 떠들고 있었다.

-몬스터 파워 신고 포상금 최대 5억.

곳곳에 붙어있는 전단지들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더했다.

마치 전쟁이라도 벌어진 듯한 삭막한 풍경.

"흐음..."

"무슨 일 있으십니까?"

"갑자기 소고기가 먹고 싶어서."

그런 모습에도 강현은 별다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도착입니다."

길을 걷던 강현과 신성아가 한 빌딩 앞에 멈춰 섰다.

"뭐야? 여기 맞아?"

신태길을 통해 확인한 정진 길드의 사무소 위치는 분명 이곳이 맞았다.

그러나 빌딩은 큰 화재가 있었던 듯 불에 탄 흔적이 그대로 남은 채로 방치돼 있었다.

"꼬리를 자르고 도망간 것 같습니다."

"확실히 그렇군요."

신성아가 말을 한시환이 받았다.

"하긴 이런 상황에 아직도 남아 있다면 그게 이상한 거겠지."

강현도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온 것이었다.

"어떡하실 겁니까?"

"뭘 어떻게 해. 들어가서 뭐 남은 거라도 있나 찾아봐야지."

이대로 돌아가면 정진 길드를 뒤쫓을 만한 아무런 단서가 없었다.

강현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폐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푸후! 내 사무실도 태워먹더니 지들 길드 건물까지 불장난을 해놨네."

"켈록, 켈록!"

허공에 떠다니던 재들이 입으로 들어오자 강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온통 까맣게 그을린 건물 내부는 스산한 모습이었다.

마치 건물이 사람의 방문을 거부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여기 뭐가 남아 있겠습니까?"

인상을 쓰며 한시환이 말했다.

"한시환 씨는 그냥 가셔도 돼요."

"아닙니다..."

"아니 그냥 가셔요. 왜 자꾸 따라오는 겁니까?"

"..."

한시환이 우물쭈물하며 대답하지 못하자 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일단 계속 가보죠."

강현의 목표는 정진 길드가 이용하던 5층과 6층이다.

굳이 다른 곳을 둘러보지 않고, 강현은 곧장 5층으로 올라갔다.

"여기는 더 심하네."

화재의 진원지는 아마 정진 길드가 이용하던 이곳 5층인 것 같았다.

아래보다 훨씬 심하게 불에 탄 흔적이 있는 내부는 멀쩡한 집기들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기다려."

주위를 둘러보며 걷던 강현이 갑자기 일행을 멈춰 세웠다.

"무슨 일이십니까?"

"희미하지만 마력이 느껴져. 이쪽이다."

강현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야."

마침내 마력이 풍겨오는 곳에 도착한 강현. 그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강현을 반기는 것은 초췌한 몰골을 한 여성이었다.

벽에 몸을 기댄 채로 앉아있는 여성은 전신이 피투성이였다.

게다가 몸에 푸른 핏줄이 튀어나온 것이 상당이 괴기스러웠다.

"죽었나?"

"아직 안 죽었다."

순간 여성이 고개를 들며 강현을 응시했다.

그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는데, 강현은 어디선가 비슷한 모습을 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예상대로 이곳을 찾아왔구나. 강현."

"내가 요즘 유명인사라서 알아보는 사람이 많긴 한데, 나는 댁이 누군지 몰라."

"나는 홍채연이다."

홍채연이 당당한 표정으로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그게 누구지? 너는 알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둘의 대화를 들은 한시환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정진 길드의 길드장이잖아 이 멍청이들아...'

홍채연의 감상도 다르지 않았는지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

이내 헛웃음을 삼킨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정진 길드의, 쿨럭! 길드장이 바로 나다."

"네가!?"

"그래. 내가 홍채연... 쿨럭, 쿨럭!"

"됐어! 그만 말해!"

순간 강현의 표정이 돌변했다.

'이놈 설마 나를 걱정하는 건가?'

홍채연은 위독해 보이는 자신이 걱정돼 말을 삼가라는 것인 줄 알았다.

"네 이름 같은 건 안 궁금하고, 씨벌. 지난번에 불꽃놀이는 고마웠다. 덕분에 아주 화끈하게 놀았어?"

"하하... 미친놈이란 말은 들었는데 이 정도인 줄은 몰랐네. 크큭... 켈록, 켈록!"

큰 소리로 웃던 홍채연이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였다.

"어어, 아직 죽으면 안 돼!"

"후우, 나도 이야기를 끝내기 전엔 죽을 생각이 없으니 걱정하지 마."

"..."

"일단 지난번 일은 미안해. 내가 약 때문에 정신이 없었거든."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살고 싶다고 빌어봐야 소용없어."

"그럴 생각 없으니 닥쳐. 말하기 힘드니까."

"그래."

이미 홍채연은 당장 죽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다만 그녀의 정신력이. 마지막까지 불타오르는 분노가 강제로 생명을 부여잡고 있을 뿐이었다.

"본론만 이야기하면, 우리는 전부 놀아난 거야. 약을 공급하는 놈들한테 말이지."

"..."

"최민준! 최민준 그 개새끼 때문에 내 길드가 망했어! 길드원도 다 죽어버렸다고!"

담담하게 말하던 홍채연이 갑자기 흥분하며 벽을 후려쳤다.

그 충격에 단숨에 건물 외벽이 부서지며 바람이 들어왔다.

'저거 아직 죽으려면 한참은 남은 것 같은데...?'

아직 정정해 보이는 그 모습에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진정하고 계속 이야기해봐."

그러나 이야기는 계속 들어야 했기에 강현은 조심스럽게 홍채연의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하아... 그래. 그 최민준이라는 놈. 그리고 그놈을 따르는 정신 나간 부하들까지. 누구 하나 강하지 않은 놈이 없었어. 결국 내 길드원은 모조리 죽었고, 나만 겨우 이렇게 도망쳤지."

"그래그래."

"특히 최민준이라는 놈은 완전히 괴물이야. 아마 한세연이나 최동우가 와도 어쩌지 못할 그런 괴물 말이야... 켈록!"

강현은 이야기가 빙빙 둘러가는 느낌에 답답했지만, 홍채연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로 했다.

'괜히 말 걸었다가, 또 흥분하면 안 되니까.'

홍채연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내 말은 놈들이 단순히 약이나 파는 삼류 조직이 아니란 거다! 최민준의 목적은 시시한 뒷세계 정복 따위가 아니라 훨씬 더 크, 크으윽... 캬아!"

말을 하던 홍채연이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그녀의 피부에 올라온 핏줄이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꾸물꾸물 움직이고 있었다.

"야! 벌써 가면 안 돼! 이야기는 끝내라고!"

"허억, 허억! 얕잡아 보지 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다행히 핏줄이 다시 가라앉고, 숨을 헐떡이던 홍채연이 안정을 되찾았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염치없지만 복수를 해줬으면 좋겠어."

"뭐?"

"내가 죽고 나면 내 장비를 가져가."

"그건 걱정하지 마."

"그리고 최민준에 대한 정보를 넘겨줄 테니 네가 그 개새끼를 죽여줘."

"그건 생각해 보고."

마지막까지 빈정거리는 강현의 모습에 홍채연은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라 생각했기에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최민준이 있는 곳은…"

그렇게 몇 분간 이야기가 이어지고, 마침내 모든 말을 끝낸 홍채연이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죽을, 수, 있겠어..."

말을 하는 홍채연의 목소리가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크륵, 켁! 크르륵!"

그리고 바닥에서 쓰러진 그녀가 몸을 뒤틀며 괴성을 내질렀다.

"주.. 켁, 주겨... 케륵! 죽여어!!!"

피눈물을 쏟아내는 홍채연을 지켜보던 강현이 우르그의 거대 망치를 꺼내 들었다.

'그래도 미운 정이라는 게 있으니 까...'

"깔끔하게 보내준다."

'웨인의 비기'과 '거인의 힘'을 사용한 강현이 망치를 힘껏 들어 올렸다.

-후드드득....

엄청난 무게가 위태로운 건물 바닥을 짓누르자 돌가루들이 떨어져 내렸다.

"혹시 다시 태어나면 말이야..."

"케엑, 켁!"

홍채연은 강현의 마지막 말을 들으려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그를 바라봤다.

"약쟁이는 되지 마라."

"케륵..! 나, 나쁜 새끼..."

홍채연의 원망스러운 눈빛을 마주한 강현이 전력으로 망치를 내려쳤다.

-콰아앙!

**

건물 밖으로 나온 강현이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망치를 내려친 충격에 건물 일부가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헛걸음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예."

"정진 길드의 길드장이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어?"

소음을 듣고 몰려든 군인들이 부산을 떨었다.

잠시 그들을 지켜보던 강현은 이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쓸 만한 반지도 챙겼고 말이야."

나름 거대 길드의 길드장이어서 그런지 홍채연은 굉장히 다양한 아이템을 지니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강현은 자신에게 꼭 맞는 아이템을 찾아 매우 들떠있는 상태였다.

이름 : 카미엘의 반지

등급 : B

내구도 : 500/500

설명 : 여성의 몸으로 최고의 무투가에 오른 카미엘이 착용하던 반지. 평생 동안 단련하며 그녀와 함께해온 반지에는 그녀의 근성과 집념이 담기게 되었다.

능력 : 미친개, 체력 8 스텟 증가

*미친개 – 미친개는 한번 물면 죽기 전까지 놓아주지 않는다.

투박한 모양의 반지를 보자 장신구라기보다 흉기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장신구라기엔 비정상 적으로 높은 내구도도 그러한 생각을 하는데 일조했다.

"아니. 다 좋은데 말이야. 이 미친개라는 게 뭔 말이야?"

"뭔가 문제 될 만한 게 있습니까?"

"이것 좀 봐."

카미엘의 반지를 받아 든 신성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 님에게 어울리는 능력이군요."

"좋아해야 되냐?"

"예."

"하아... 됐어. 그래서 이게 무슨 능력 같아?"

"말 그대로 이빨로 '앙' 문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신성아가 평소답지 않게 손짓까지 동원해서 '앙' 이라는 표현을 했다.

"앙?"

"예. 앙."

"그, 그래. 크흠..!"

어쨌거나 그 말이 사실이라면 강현은 카미엘이라는 여성의 인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고의 무투가가 아니라 그냥 길거리 파이터 같은데..."

일단 특수 능력을 제외하더라도 체력이 8이나 증가한 다는 것은 크나큰 소득이다.

강현은 기존에 착용하던 D등급 반지를 빼고 카미엘의 반지를 착용했다.

"크으... 좋네!"

기존에 착용하던 반지가 체력을 2 증가시켜 주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상승폭은 6 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강현은 신체 능력이 크게 상승한 것이 느껴졌다.

▫이름 : 강현

▫칭호 : 튜토리얼 졸업자 외 3개

▫레벨 : 58

▫상세 능력치 :

·근력 28 (+4)(+2)

·순발력 27 (+3)

·체력 29 (+3)(+8)

·마력 30 (+3)(+4)

·추가 스텟 : -

▫고유 능력 : 부활

▫능력 : 중급 검술(D), 하급 방패술(E), 최하급 석궁술(F), 하급 체술(E), 최하급 둔기술(F), 마력감지(E), 독 내성(F)

▫스킬 : 분노의 사자후(C), 상급 육체 재생(A), 일도양단(D), 거인의 힘(B), 마력폭발(D), 웨인의 비기(D), 엔트리아의 외피(D)

이로서 체력 스텟이 가장 먼저 40에 도달했다.

이제 거인의 힘을 사용해서 전력으로 날뛰어도 이전처럼 몸이 버티지 못하는 현상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이런 게 템빨이구만?"

사실 강현은 지금까지 아이템에 대한 것을 꽤나 도외시해왔다.

이미 지니고 있는 것들로 충분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실질적으로 스텟을 대폭 증가시켜주는 장비를 착용해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좀 더 적극적으로 스킬이나 아이템을 구해야겠어."

"좋은 생각입니다."

"그래. 일단은 돌아가자."

강현은 임시 아지트로 삼은 안전가옥을 향해 걸었다.

장소는 제공은 물론 신태길이었다.

"그나저나 한시환 씨는 왜 계속 따라와요?"

"예?"

"왜 새끼오리 마냥 졸졸 따라오냐고요. 수호자의 부길드장 아니에요?"

"맞습니다."

강현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부길드장이면 이것저것 일도 많고 바쁠 것 같은데 이렇게 한가하게 다녀도 되는 거예요?"

"크흠흠..."

"왜 네가 찔려하는 건데?"

강현의 말에 신성아가 괜스레 헛기침을 했다.

"하아...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한 가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해보세요."

길을 걸으며 한시환 큰 다짐을 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수호자 길드는 사실상 끝났습니다."

"..."

"처음의 원대하고 숭고했던 정신과 목표는 사라지고 이제는 탐욕만이 남았죠. 그래서 저는 저를 따르는 길드원들을 데리고 새로운 길드를 창설할까 합니다!"

"훌륭하네요. 바쁘시겠네. 가 봐요 그럼."

강현이 일말의 영혼도 담지 않은 말을 내뱉으며 손을 휘저었다.

"예. 그런데 굳이 그럴 필요 없이 배데스 길드에 들어가는 것도 생각…."

"됐어요."

"아니, 그게 아직 저도 강현 씨가 저희와 어울리는 사람인지 고민 중이고..."

"됐다고요."

"강현 씨! 잘 모르시는 것 같아 말씀드립니다. 사실 저와 제 동료들 정도면 어느 길드에 들어가도 환대받을 만한…."

"아씨, 됐다니까!"

결국 강현이 화를 참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동안 강현이 싸우는 모습을 봤던 한시환이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예에... 알겠습니다..."

이내 고개를 떨어뜨린 한시환이 등을 돌리고는 터덜터덜 걸어갔다.

"우리는~ 인류의 수호자~ 수호자 길드~"

한시환이 부르는 것은 수호자 길드의 길드가(歌)였다.

길드장 박세현이 무려 유명한 작곡가에게 의뢰해서 제작한 노래.

처음에는 거부감을 가지던 길드원들도 나중에는 곧잘 따라 부르고 했던 추억의 노래였다.

"악당들아 물러서라~"

인류를 지키다는 길드의 신조, 창설 이념과도 잘 부합되는 노래는 소속감을 높이고 정신을 고양시키는 힘이 있었다.

"쯧쯧..."

그런 한시환을 바라보던 강현이 입을 열었다.

"충격이 커서 미쳤나 보네."

"예. 확실히 제정신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 됐어."

"앞으로 길드 사무실 출입을 통제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러자. 그런데 우리 이제 길드 사무실 없잖아?"

"아..."

강현의 말에 신성아가 입을 벌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이제 돌아가자."

"예."

그때였다.

"으아아아아아!"

"응?"

갑자기 들려오는 비명에 강현의 고개가 돌아갔다.

"한시환?"

조금 전 노래를 부르며 떠났던 그가 비명을 지르며 돌아오고 있었다.

"도와주세요오!"

"뭐하는... 씨발! 저게 뭐야?!"

그 뒤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침을 흘려가며 한시환을 쫓고 있었다.

58화 분노 신드롬(3)

58. 분노 신드롬(3)

강현이 일으킨 소란으로 인해 정진 길드 건물에는 수많은 군인들이 모여 있었다.

"민간인들이 난동을 부리고 있습니다!"

"뭐!?"

한창 건물 내부를 살피던 군인들은 한시환과 등장한 광인들의 모습에 당황하며 확성기를 들었다.

"거기 정지! 정지하십시오!"

완전히 눈이 붉게 물든 사람들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닥치는 대로 주변의 사람들을 공격하며 더욱 속도를 올렸다.

"꺄아아아!"

"으아악!"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손도 써보지 못하고 생죽음을 당했다.

몇몇 사람들은 능력자인 것인지 무기를 꺼내 드는 것이 보였지만, 그들의 운명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죽어!"

한 능력자가 찌른 창이 광인의 배를 관통했다.

일반인이라면 단번에 힘이 풀리고 절명할 만한 공격이었지만,

"크르르르.... 크악!"

"으아아악!"

광인은 창에 꿰뚫린 채로 몸을 앞으로 밀어붙이며 결국 능력자의 목을 물어뜯었다.

"으, 으아아!

-타앙, 탕!

그 광경을 보고 공포를 이기지 못한 군인이 총을 발포했다.

"어떤 미친놈이 명령도 없이 발포해?!"

"죄, 죄송합니다!"

"미쳤어? 위에서 보고 떨어질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컥!"

한심한 소리를 내뱉던 중대장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목이 잘려나갔다.

"다 죽여!"

"으아아!"

-탕탕탕!

순식간에 펼쳐진 아수라장.

혼란 속에서 신성아는 신속하게 자리를 옮겨 지원 사격을 가했고, 한시환은 거대 길드의 부길드장이라는 직함에 부끄럽지 않게 선전했다.

"가만히 있어!"

[분노의 사자후가 발동됩니다]

[모든 적들의 사기와 능력치가 감소했습니다]

그리고 강현은 한 남자에게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남자는 양 손가락이 기괴하기 길어진 상태였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상당히 날카로웠다.

그리고 그 흉측한 손을 어린 여자아이를 향해 휘두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애는 건들면 안 돼. 새꺄!"

"크아악!"

깔끔한 날라 차기에 얼굴이 적중당한 남자가 단숨에 강화 유리창을 박살내며 건물 안으로 날아갔다.

"오빠가 좀 바쁘니까 알아서 엄마 찾아가라. 응?"

"흑, 흑...! 으아아앙!"

강현이 다급히 아이의 등을 떠밀었으나 이제 10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는 서럽게 울기만 할 뿐이었다.

"크아아아!"

그 사이 건물로 처박혔던 남자가 다시 밖으로 뛰쳐나왔다.

"뭐야? 벌써 회복했어?"

"으아아앙!"

"크아아!"

총체적 난국이었다.

아이는 울고, 미친 남자는 침을 질질 흘리며 달려온다.

"이런 씨발!"

결국 빌게인의 장검을 꺼내 든 강현이 재빨리 검을 찔러 넣었다.

목에 검이 박힌 남자는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촤아아!

강현이 검을 뽑아내자 사방에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딸꾹...!"

생전 처음 보는 그로테스크한 광경에 아이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딸꾹질을 했다.

"쓰읍! 눈감아!"

다급히 아이를 안아 든 강현이 건물 안쪽에 내려두고는 구석진 곳을 가리켰다.

"저기서 오빠가 찾으러 올 때까지 가만히 있어야 돼. 알겠지?"

"..."

아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초점 없는 눈으로 강현을 응시하고 있었다.

"옳지. 착하다. 그럼 오빠 간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완전히 혼란에 빠진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끄아아아!"

"죽어! 죽어어! 크하하하!"

눈이 붉게 변한 이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모두 미쳐 있었다.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공격했고, 때로는 저들끼리도 치고 박기도 했다.

이 광인 집단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인간을 넘어선, 괴물과 같은 신체능력을 가졌다는 것이다.

"으아아아! 오지마!"

-투다다다!

총탄에 의해 온 몸에 구멍이 나도 살아 움직이는 것은 기본이고,

"캬아아!"

-스걱!

신체가 완전히 변해 몬스터나 다름없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나는 왜 항상 가는 곳마다 개판이지?"

"키에에엑!"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던 강현에게 한 여성이 달려들었다.

-피슉

"켁!"

하지만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목에 박히고, 바닥에 쓰러졌다.

"땡큐."

손을 들어 신성아에게 인사를 한 강현이 앞으로 달렸다.

"어차피 갱생의 여지가 없는 놈들이야."

살인에 대한 거부감에 핑계를 대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었다.

수호자 길드의 박세현.

정진 길드의 홍채연.

모두 최상위권에 위치한 능력자들이지만 결국 이겨내지 못하고 괴물이 되고 말았다.

"애초에 약 같은 거에 손대지 말았어야지."

"케에엑!"

강현의 말에 반박하듯 한 남자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왔다.

-콰직!

달려드는 남자의 머리를 붙잡은 강현이 그대로 남자의 머리를 아스팔트에 처박았다.

"마력폭발."

-콰아앙!

강현의 손아래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고, 남자의 머리가 단숨에 터져나가 한 줌 핏물이 되었다.

"그러니까. 얌전히 죽어."

**

-도저히 집 밖에 나갈 수가 없다. 이틀 째 처박혀서 라면만 끓여먹고있음 ㅋㅋㅋ

-라면이라도 사놨네? 나는 집에 반찬 아무것도 없어서 쌀만 먹고 있다

-근데 이제 슬슬 나가도 괜찮지 않아요?

-슬슬 나가서 배때지에 구멍 날 때쯤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대규모 폭동으로 인해 또 한 번 대한민국이 뒤집혔다.

집단적으로 광기에 빠지며 무차별적인 폭력을 가하는 사람들.

그나마 계엄령이 선포된 상황이라 군인들이 대기하고 있었다는 것이 불행 중의 다행이었다.

-혹시 강현 영상 보신 분?

-나 봤음. 완전 간지 작살이던데ㅋㅋㅋ

-간지 작살은 ㅈㄹ 완전 또라이 같더만.

-ㅇㅇ 솔직히 영상보니까 좀 무섭더라. 너무 잔인함.

-근데 그 상황에 사람 가려가면서 조심스럽게 움직일 수도 없는 거고, 좀 거칠더라도 당연한 거지.

-ㄹㅇ 위선자 새끼들. 지들은 뒤도 안보도 도망쳤을 것들이.

-물타기 오지네.

-뜬금포인데 가죽 재킷 은근히 멋지더라.

-그게? ㅋㅋㅋㅋ 취향 독특하네.

스마트 폰을 보던 강현이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뭔가 허전한데..."

잠시 고민하던 강현이 열심히 스마트폰을 두들겼다.

-나 강현 지인인데, 실제로 보면 존잘임.

그제야 강현이 만족한 듯이 웃었다.

"강현님."

"어, 어!?"

갑자기 신성아가 부르자 당황한 강현이 말을 더듬었다.

"누가 찾아왔습니다."

"누군데?"

"한시환 부길드장입니다."

"나 업무 중이라고 바쁘다 해."

"예."

다시 업무에 집중하려던 강현이 이내 스마트폰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아... 흥이 깨졌어."

잠시 회장님 의자에서 빙그르르 돌던 강현은 다시 스마트 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신태길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일 안해요?"

-예?

"인터넷에 제 악플 다는 놈들 싹 다 쳐내요!"

-저 바쁩니다. 끊겠습니다.

"미안해요. 농담이에요. 크크크."

강현은 어째서인지 신태길의 목소리만 들으면 장난을 치고 싶어 졌다.

-용건이 뭡니까?

"고급 정보 물어왔는데 반응이 너무 싸하시네."

-강현 씨. 저 정말로 바쁩니다. 부탁드립니다.

"아, 알겠어요. 알겠어. 매정하기는..."

강현은 표정을 고치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정진 길드의 해체와 그 배후에 있던 최민준이라는 남자에 대한 것이었다.

-정말 놀랍군요...

"제가 한 건 했죠?"

-예. 고생하셨습니다. 그동안 주위만 겉돌고 핵심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마우면 부탁 좀 할게요."

-댓글 조작 같은 거만 아니면 괜찮으니 말씀하시죠.

"독이 필요해요."

-독... 말입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신태길의 목소리에서 당황이 느껴졌다.

"예. 아주 극독으로. 가능하면 신체나 장기가 녹아내린다거나 하는 종류가 좋겠어요. 왜 그 생화학 무기 그런 거 있잖아요?"

-그걸 도대체 어디에 쓰려고 하시는 겁니까...

"남한테 해코지하려는 거 아니니까 좀 구해줘요."

-하아...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또 있습니까?

"내성과 관련된 스킬, 능력 정보 있어요?"

-내성, 내성이라...

이번에는 신태길도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했다.

-내성에 관련된 능력은 아주 귀합니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거래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그럴 것 같았어요."

-일반인들은 존재조차 모르는 내용인데 용케 구하셨나 봅니다. 독이 필요한 이유도 그것 때문입니까?

"그렇죠. 그러니까 다른 것도 좀 구해줘요. 지난번 C등급 던전도 그렇고 내가 많이 도와주잖아요."

-후우...

잠시 한숨을 내쉰 신태길이 말을 이었다.

-그런 귀한 물품들은 단순히 돈이 많다고 구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물론 돈도 필요하지만요.

"나 돈 잘 벌어요. 얼마나 필요한데요?"

-최소 수백억.

갑자기 등장하는 비현실적인 금액에 강현의 눈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씨발! 뭐가 그렇게 비싸요?!"

-스킬과 능력을 습득하는 아이템은 원래 비쌉니다. 수억에서 수십억 정도는 흔하죠.

"아니 그건 수백억이라면서요?"

-그것도 최소입니다.

"하아, 그건 정부에서 내주면 안 되겠죠?"

-알면서 묻지 마십시오. 그럼 끊겠습니다.

신태길은 강현이 대답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 양반이 왜이래? 오늘따라 쓸데없이 까칠하네."

-띵동

그때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띵동

"누구야?"

"한시환 부길드장입니다."

강현의 물음에 신성아가 답했다.

"왜 안 열어줘?"

"지난번에 강현 님께서 열어주지 말라고..."

어렴풋이 신성아와 그런 대화를 나눈 것 같기는 했다.

-띵동, 띵동, 띵동!

머리를 울리는 듯한 소음에 심술이나 있던 강현이 괜히 더 짜증을 냈다.

"한 번만 누르지 왜 자꾸 누르고 지랄이야!?"

"형. 머리를 박살내면 벨을 못 누르게 할 수 있어요. 제가 할까요?"

안유성도 제법 짜증이 났었는지 게임을 내팽개치고 인벤토리에서 메이스를 꺼내 든 생태였다.

"후... 들어오라 해."

"예."

신성아가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열자 비에 홀딱 젖어있는 한시환이 보였다.

"후우! 비도 오는데 밖에 세워두시고 너무한 거 아니…."

다급히 집안으로 들어와 불평을 하던 한시환.

그는 살벌하게 치켜떠진 강현의 눈을 보고는 말을 멈추었다.

"아니죠. 비도 오는데 예의 없이 초인종 눌러서 죄송합니다."

"알면 됐어요. 무슨 일이에요?"

"그게…."

한시환이 무언가 말을 하려던 그때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띵동, 띵동!

"야. 나가서 저거 박살 내버려."

"뭐를요?"

"당연히 초인종이지 또 뭐가 있어?"

"아니에요."

안유성이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하아... 일단 문이나 열어봐."

강현의 말에 신성아가 문을 열자 의외의 인물이 집으로 들어왔다.

"강현님! 반갑습니다!"

바로 해선 길드의 조성찬, 조동원 형제였다.

"여기는 무슨 일이에요? 아니, 그보다 다들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예요?"

생각해 보면 이곳은 정부에서 비밀리에 제공한 안전가옥이었다.

아무나 오고 싶다고 올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닌 것이다.

"저는 신태길 팀장한테 물어봤습니다."

"저희는 한시환 씨한테 물어서 왔습니다."

결국 신태길이 알려줘서 이 사태가 벌어졌다는 뜻이었다.

"그 양반 오늘따라 굉장히 마음에 안 드네."

한숨을 내쉰 강현이 불청객들을 바라봤다.

"일단 왔으니 들어와요. 이렇게 세워두는 것도 예의가 아니니까."

불청객들을 거실로 안내한 강현이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왔다.

"마실게 이것밖에 없으니 그냥 마셔요."

"아,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신성아, 안유성 이렇게 항상 셋만 있다가 갑자기 사람이 많아지니 집이 좁은 느낌이 드네."

"크흠..."

강현은 갑자기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한재문이 자신을 바라보며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어쩌라고?"

"흠흠..."

한재문은 강현이 노려보자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너 때문에 까먹었잖아!"

"죄송합니다..."

사과를 하는 한재문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갔다.

'나쁜 새끼. 맨날 나한테만 뭐라해...'

59화 특훈(1)

59. 특훈(1)

"이제 본론을 이야기하죠."

모두 자리에 앉아 강현이 먼저 말했다.

"왜 찾아온 겁니까? 한시환 씨부터 말해요."

"예. 배데스 길드에 가입을…."

"됐습니다. 다음 거기 조성찬, 조동원 형제는?"

"저희도 길드에 가입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역시나 예상한 대답이었다.

강현도 그저 확인 차원에서 물어본 것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우선 한시환 씨."

"예!"

"길드에 가입하고 싶은 인원이 총 몇 명이예요?"

"저를 포함해서 10명입니다. 다들 바른 인성에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건 됐고, 원래 수호자 길드의 모토가 인류의 수호라면서요?"

"예."

"거기 전에 보니까 약간 광신도 느낌도 나던데요."

"그, 그건..."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박세현이 있던 시절.

그들은 정말 자신이 인류의 수호자라고 믿었으니까.

"한시환 씨랑 같이 오는 길드원들은 길드 내에서도 아주 진성이죠?"

"예... 그런 것 같습니다..."

대답을 들은 강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기 앉아서 게임하는 놈이랑 여기 있는 신성아가 그런데 관심이 있어 보여요?"

"..."

"우리는 그런 숭고한 뜻을 가지고 뭉친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저 강해지고 싶어서. 그리고 혼자 다니면 심심하니까? 이 정도의 이유로 모인 거라고요."

강현의 말에 한시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지난 며칠 동안 봐왔기 때문에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힘이 없으면 정의도, 인류의 수호도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 불과하단 것을 깨달았습니다."

"..."

"하지만 강현 님과 함께 한다면 분명 지금보다 더 강해질 수 있을 겁니다. 결과적으로 저희의 목표도 달성할 수 있겠죠."

"솔직한 건 마음에 드네요."

자신의 목적을 숨김없이 이야기하는 모습에 강현이 피식 웃었다.

"거기 해선 길드원 분들은?"

"우선 지난번 도움에 대한 감사 인사를 제대로 전하지 못한 것 같아 다시 말씀드립니다."

"뭘 그렇게까지…."

"저희 목숨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차분한 인상의 조성찬이 고개를 바닥에 닿을 정도로 숙였다.

동생인 조동원은 우락부락하고 열정적인 모습이었는데, 상당히 대비되는 느낌이었다.

"인사는 됐고, 길드에 들어오려는 목적이 뭐예요? 전에 말했듯이 정진 길드는 이미 끝났어요."

"예. 알고 있습니다. 제가 배데스 길드에 들어가려는 것은 복수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면?"

"강현 님과 함께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꽤나 오글거리는 대사.

강현은 괜히 맥주 입에 털어 넣었다.

"얼굴에 금칠할 거라면 집어치워요. 가산점 없으니까. 차라리 저기 한시환 씨처럼 빨아먹고 싶다. 나는 이런 솔직한 대답을 더 좋아합니다."

강현의 말에 한시환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굳이 저렇게 표현해야 하나...?'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기에 딱히 반박하지는 못했다.

"그럼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강현 님과 함께한다면 더 높을 곳으로 올라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원래라면 저희는 도달하지 못했을 높은 곳이요."

"높은 곳이라..."

"저희 형제는 고아입니다. 친척들도 모두 버려서 보육원에서 자랐죠. 그래서인지 어릴 적부터 이런 세상을 보란 듯이 눌러버리고, 올라서자고 항상 다짐했습니다."

조성찬의 말의 말에 강현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겉으로 보기엔 동생이 나서서 할 것 같았는데, 역시 형은 형이네요. 좋습니다."

"그러면?"

"모두 길드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슬슬 길드 규모를 키워야 하나 생각 중이었거든요."

길드 규모를 키운다는 말에 한재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 사무직은 안 뽑으시나요?"

"왜? 혼자서 충분하지 않아?"

"그게..."

"돈이 부족하면 말해 더 줄 테니까."

한재문이 고개를 저었다.

돈은 지금도 충분했다.

조만간 스트레스성 탈모로 치료비가 제법 나갈 것 같기는 했지만 말이다.

"돈은 괜찮습니다... 제발 직원 좀 뽑아주시면 안 될까요? 하루에 메일만 수백 통에 전화는 셀 수도 없이 많이 오고 또…"

"알겠어. 돈은 신경 쓰지 말고 네가 알아서 모집하고 뽑아. 앞으로 재문이는 사무장으로 승진이다!"

"축하드립니다."

"재문이 형. 축하해요."

강현의 선언에 신성아와 안유성이 영혼 없는 축하를 건넸다.

강현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쳤다.

-짝, 짝, 짝, 짝...

'너희는 진짜 나쁜 놈들이야...'

어쩐지 놀리는 듯한 느낌에 분했지만, 한재문은 평소처럼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감사합니다..."

"자, 그러면 하던 이야기를...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

"너 때문에 또 까먹었잖아. 인마!"

"죄송합니다..."

한재문을 다그친 강현이 겨우 하려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맞아. 우선 길드 가입 환영하고, 길드에 들어오면 몇 가지 지켜야 할 게 있어요."

"예."

강현의 말에 모두가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 누구보다 강해진다."

"두 번째. 쓸 데 없는 시비는 걸지 않는다."

"마지막 세 번째. 은혜든 원한이든 받은 만큼 돌려준다."

강현은 처음 길드를 창설할 당시 안유성과 신성아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며 이들에게 다시 설명했다.

"여기까지 이해 안 가는 거 있어요?"

"없습니다."

"호칭은 알아서 하시고 저는 길드원들에게 공평하게 반말을 하고 있으니 여러분들한테도 똑같이 할 겁니다. 불만 있으면 지금 이야기해요."

잠시 기다린 강현은 아무런 말이 없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제 본론을 이야기해야겠네."

"본론 말입니까...?"

갑작스러운 강현의 말에 모두가 의문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돈 많은 사람?"

**

"던전 공략 횟수를 늘려야 합니다."

"기업 후원을 받는 게 어떻습니까?"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던전을 클리어하는 시스템을 도입하면…"

안전가옥은 순식간에 회의장으로 변모했다.

회의 주제는 '어떻게 하면 떼돈을 벌까?' 였다. 구체적으로는 1000억 이상이었다.

"그렇게 해서 언제 돈을 벌 거야? 여기서 나보다 던전 많이 돈 사람 있어?"

"없습니다."

"그런 내가 지금까지 모은 게 겨우 30억 정도인데, 어느 세월에 1000억을 모을 건데?"

이제 던전 사태가 벌어진 지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30억은 엄청난 금액이었고, 강현은 이제 돈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내성 관련 스킬을 필두로 유용한 스킬, 좋은 아이템을 구매하려면 천문학적인 돈이 필요했다.

"흐음... 강현 님."

그때 신성아가 손을 들었다.

"말해."

"길드 굿즈(Goods)를 만들어서 판매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굿즈?"

전혀 새로운 이야기에 강현이 흥미를 보였다.

"무슨 아이돌이나,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관련 상품 팔고 그런 거지?"

"예."

"그게 돈이 돼?"

"분명 돈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다들 너처럼 아무 생각 없이 수천만 원을 날리는 호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고작 세 벌을 만드는데 수천만 원이 들어간 길드 재킷을 떠올리며 강현이 미심쩍은 눈빛을 보냈다.

"크흠, 아닙니다."

"굿즈라 그거 괜찮은데요?"

"좋습니다!"

강현의 예상과는 달리 안유성과 한재문의 반응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애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 몇 개 판다고 돈이 되겠어?"

"굿즈를 시작으로 사업 규모를 점차 키운다면 분명 던전을 도는 것 이상의 수입이 나올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망하면?"

"다시 던전을 돌면 되지 않습니까?"

신성아가 얼굴에는 왜 그런 당연한 걸 묻냐고 쓰여 있었다.

"그냥 안유성 네가 돈 좀 주면 안 되냐?"

"싫은데요. 그리고 집에서 딱히 귀여움을 받는 처지는 아니라서."

"쳇."

"어쨌든 돈을 벌려면 사업을 해야 하는 건 맞아요. 이렇게 던전만 돌아서 언제 1,000억을 모을 생각이에요?"

"..."

"누나 말대로 굿즈 판매를 시도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그쪽이 나름 고부가가치 산업이고 홍보는 이미 충분히 되고 있으니."

안유성의 차분한 말에 강현이 토끼눈을 떴다.

"네가 이렇게 긴 문장을 차분하고,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다?"

"..."

"부잣집 도련님이라 그런지 돈 이야기 나오니까 갑자기 초롱초롱해지네. 이거."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강현의 말에 안유성이 미소를 지었다.

"제 육감이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거라고 알려줬거든요. 크큭."

앞으로의 일이 기대되는지 안유성이 낄낄 거리며 웃었다.

"그러면 굿즈 판매는 신성아, 안유성 그리고 재문이가 알아서 계획하고."

-탕!

구석에서 업무를 보던 한재문이 키보드를 내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현은 무시했다.

"그리고 말이야. 이건 내가 생각해 온 건데, 길드에서 자체적으로 아이템을 판매하자."

"아이템 말입니까?"

"어. 내가 지금까지 모은 게 꽤 되거든?"

강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한쪽 구석으로 이동했다. 그리고는 인벤토리에 보관하고 있던 아이템을 하나 둘 꺼내기 시작했다.

"세상에..."

"저게 뭐야!?"

강현의 품에서 아이템이 끝도 없이 쏟아지자 사람들의 눈에 경악이 차올랐다.

"이걸 다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뭐... 그냥 여기저기 사냥하다 보니 모인 거지."

"형. 여기 B등급 무기도 있는데요? 이거 어디서 났어요?"

현재까지 B등급 아이템을 구하는 방법은 튜토리얼에서 얻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 안유성이 집어 든 B등급 장비는 분명 강현의 것이 아니었다.

"알면서 묻지 마. 인마."

수백 종의 아이템을 멍하니 바라보던 한시환이 문득 고민에 휩싸였다.

'혹시 나는 지금 아주 잘못된 길로 빠져든 건 아닐까..?'

인류의 수호자가 아닌 파괴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두는 순간이었다.

"어쨌든 레이더 사이트에서 판매하면 수수료가 많이 붙잖아. 아이템 물량도 많고, 높은 등급의 장비도 있으니까 우리가 따로 판매하는 게 어떤가 싶네."

"역시 강현 님이십니다. 미리 이런 준비까지 끝마쳐 놓으신 상태였군요."

"그렇지..."

신성아의 진심 어린 아부에 강현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너네도 필요한 거 있으면 좀 챙겨가."

"예? 정말입니까?!"

갑작스러운 파격 제안에 한시환, 조성찬의 눈이 번뜩였다.

"지금 너희 수준으로는 같이 D등급 다니는 것도 버거워. 그러니까 필요한 거 잔뜩 챙겨서 던전 좀 돌아."

"예..."

"지금 각자 레벨이 몇이야?"

"46입니다."

"저는…"

이미 예상은 했지만 막상 이들의 레벨을 듣자 강현은 한숨이 나왔다.

한시환 46 레벨

조성찬 39 레벨

조동원 42 레벨

분명 평균을 넘어서는 고레벨임이 분명했지만 강현과의 차이가 너무 심했다.

강현 58 레벨

안유성 53 레벨

신성아 46 레벨

안유성은 강현이 본 역대급 재능충이기에 패스.

신성아는 나름 자신의 캐릭터가 확고하며, 강현과 함께 있는 동안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다.

"너희들이랑은 같이 사냥하기 힘들겠다. 도움은커녕 버티기도 안 될 거야."

"..."

"도대체 지금까지 뭘 한 거야? 신성아보다 레벨이 낮으면 어쩌자는 건데?"

강현의 말에 모두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냥 너희가 이상한 거야. 이 괴물들아!'

자신들도 지금까지 쉬지 않고 던전을 공략해 왔다.

특히 한시환 같은 경우는 한때 한국 5대 길드에 들어갔던 수호자 길드에서 길드장 다음으로 레벨이 높은 사람이었다.

심지어 그곳의 길드장 박세현도 죽기 전의 레벨은 고작 51에 불과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면 레벨이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거야?'

당장 멱살이라도 잡고 묻고 싶은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현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내일부터 특훈에 들어간다."

"예?"

60화 특훈(2)

60. 특훈(2)

강현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이놈들을 굴려야 빠르게 레벨업을 시킬까?"

가장 좋은 방법은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이는 것이다.

그러나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자신과 달리 이들은 까딱하면 정말 죽는다.

"하다못해 육체 재생 스킬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야."

이번에 수호자 길드원 중에 한 명이 비슷한 스킬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

E등급의 '중급 자가 치유' 라는 스킬이었는데 효과를 들어보니 강현이 가진 육체 재생 스킬의 하위 호환 같았다.

"후우... 한시환 팀장."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던 강현이 한시환을 불렀다.

"예. 길드장님."

한시환은 새로 만든 공략 1팀의 팀장의 직위를 가지게 됐다.

사실 수호자 길드원들을 한데 모으고 대장 자리를 준 것에 불과했지만, 그는 만족한 듯했다.

"이번에 온 친구들 중에 치유 스킬 가진 애가 하나 있다고 했지?"

"예. 안연하라고 하는데 정말 착하고 성실한 친구입니다."

"착하고 성실한 건 관심 없고. 그 친구 레벨이 몇이야?"

"21입니다."

"하아... 예상은 했지만."

직접적으로 전투에 가담하는 일이 적으니 레벨이 낮을 거라 예상은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했다.

"치유 스킬은 B등급, 튜토리얼에서 받은 거라고?"

"맞습니다."

"그런데 레벨이 그렇게 낮아서야, 몇 번 치료하지도 못하고 마력이 바닥나서 헐떡대겠네."

"..."

정곡을 찌르는 말에 한시환이 입을 꾹 다물었다.

"운동, 수련으로도 스텟이 올라가는 건 알지?"

"예... 들어는 봤습니다."

들어본 적은 있지만 한시환은 믿지 않았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스텟이 오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마력도 다른 스텟이랑 마찬가지로 하다 보면 늘어나거든?"

"예? 마력이 말입니까?!"

근력, 체력이 늘어나는 것도 믿지 않았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서 마력까지 성장이 가능하다고 한다.

"저 길드장님. 그게 사실 확실한 정보인지도 모르는데..."

"내가 지금껏 그렇게 올린 스텟만 20은 되는데 무슨 소리야?"

"예?! 레벨업 없이 그냥 올린 게 그 정도란 말입니까?"

단순히 괴담으로 취급하던 일을 보란 듯이 해내는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아니, 이건 해내는 걸 넘어서서 완전히 초과 달성이잖아!?'

믿을 수 없는 말에 한시환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도대체 방법이 뭡니까? 게다가 20을 올렸다니. 들리는 소문으로는 한두 개가 고작이라 했는데..."

"방법이랄 게 뭐 있어. 그냥 죽어라 하는 거지. 진짜 죽을 지경이 되면 스텟이 하나씩 오르거든.

무슨 난리를 피우면 남들은 하나도 올리기 힘든 스텟을 20이나 올렸다는 말인가.

한시환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말이었다.

"사실 스텟이 높을수록 올리기 힘들기는 한데... 어떻게 보면 그 안연하라는 친구가 레벨이 낮은 게 행운일 수도 있겠어."

강현의 머릿속에 앞으로의 계획이 차곡차곡 들어서고 있었다.

"좋아. 길드원 전부 소집시켜."

"알겠습니다."

대화가 끝나고 나가려는 한시환을 강현이 붙잡았다.

"그런데 말이야."

"예?"

"신태길 팀장한테 새 사무실 알아봐 달라 한건 어떻게 됐어?"

"괜히 말했다가 욕만 먹었습니다."

"쯧. 알겠어. 내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야겠네."

**

D등급 던전 '골렘의 무덤'

이곳은 오직 한 종류의 몬스터만 등장하는 단순한 던전이었다.

골렘. 그것도 폐기 직전의 온전치 못한 골렘이다.

그럼에도 이 던전이 D등급에 랭크된 이유는 분명했다.

골렘은 아주 강력하니까.

-콰아앙!

4m에 이르는 골렘이 휘두른 주먹이 대지에 작렬했다.

사방에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시야가 가려졌지만 능력자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가만히 있다가 한 대라도 맞으면 골로 가는 거야! 더 빠르게 움직여!"

전투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던 강현이 열심히 소리쳤다.

"으아아!"

조성찬과 조동원 그리고 한시환을 필두로 한 수호자 길드원 출신 전원이 정신없이 움직였다.

"고작 골렘 하나 처치하는데 그렇게 꾸물거려서 잘도 세상을 수호하겠다. 이 자식들아!"

강현은 일부러 수호자 길드원의 자존심을 계속 긁었다.

분노가 전투에 어떤 원동력이 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쿠르르릉

마침내 골렘이 완전히 파괴되고 길드원들이 한숨 돌리려는 찰나, 갑자기 땅이 진동했다.

-쿵, 쿵!

"뭐야? 또야?"

"젠장! 우리 보고 죽으라는 거야 뭐야? 이러면 언제 쉬라고?!"

곳곳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지만 강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다음엔 두 마리다. 살고 싶으면 뛰어!"

길드원들이 모인 곳까지 골렘을 유인하는 임무를 마친 신성아가 강현의 옆에 나란히 섰다.

"임무 마치고 복귀했습니다."

"어, 어... 그래."

어쩐지 즐기고 있는 것 같은 그녀의 모습.

'괜찮겠지...'

사실 강현도 이 상황이 즐거웠다.

"지금 가서 한 마리 더 몰아올래?"

"알겠습니다."

강현과 사악한 미소를 주고받은 신성아가 다른 골렘을 유인하기 위해 다시 움직였다.

**

"헤엑, 헤엑... 더는 못해."

"그냥 죽여!"

열 번째 골렘을 파괴시킨 능력자들이 바닥에 대자로 들어 누웠다.

"하아..."

그중에서 가장 강한 한시환도 숨을 몰아쉴 지경이었으니 다른 길드원들의 상태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아주 그냥 평화에 찌들었네? 이딴 식으로 해서 세상을 수호하니 뭐니 떠들어 댔던 거야?"

"이익!"

"그러는 당신은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맞아! 지금까지 한 거라곤 뒤에서 구경한 게 다잖아!"

계속해서 강현이 자존심을 건드리자 몇몇 길드원들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베난디의 숲'에서 강현의 활약을 본 이들은 얌전히 있었지만, 나머지 길드원들은 강현의 전투를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호오, 이것들 봐라?'

강현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우르그의 거대 망치를 꺼내 들었다.

"뭐, 뭐야? 들었으면 어쩔 건데?"

"이것들이 길드장에 대한 예의가 없네."

"죄송합니다..."

한시환이 달려와 사과를 했지만 수호자 길드원들은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 부길드장님! 우리가 애초에 왜 저런 양아치 같은 놈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겁니까?!"

"맞습니다. 그냥 우리끼리 길드를 만들어도 충분히 잘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때 또다시 골렘의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잘 봐 둬라. 아가들아."

마침내 골렘을 몰고 온 신성아가 강현의 옆을 지나쳤다.

"수고했어. 오늘 고생이 많네."

"별 거 아닙니다."

"저건 내가 잡을 거니까 놔둬."

"예."

'웨인의 비기'와 '거인의 힘'을 활성화한 강현이 앞으로 걸어갔다.

-쿵, 쿵!

골렘과의 거리는 30여 미터 남짓. 거대한 골렘이라면 한순간에 달려올 만한 거리였다.

"으라야아아아!"

[분노의 사자후가 발동됩니다]

[골렘은 공포를 느끼지 않습니다.]

[적들의 능력치가 일부 감소했습니다]

강현이 엄청난 굉음을 토해냄과 동시에 우르그의 망치를 전력으로 집어던졌다.

'나.. 날았어?'

한눈에 봐도 인간이 들 수 있을만한 무게가 아닌 망치가 엄청난 속도로 골렘을 향해 날아갔다.

-콰아아앙!

몸의 정 중앙에 우르그의 망치를 맞은 골렘이 폭탄이 터진 것처럼 박살나며 수백 개의 파편으로 흩어졌다.

"..."

"고작 이런 잡몹 몇 마리 잡았다고 쉬어?"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 길드원들의 벌어진 턱이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사, 사기 아니야?!"

"저게 사실은 엄청 가벼운 망치가 아닐까?"

"야이 멍청아. 가벼운 망치를 맞았다고 골렘이 한방에 박살 나냐?"

잠시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졌지만 강현이 박수를 쳐서 이목을 모았다.

"불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나한테 덤벼서 이기면 길드장 자리 두말없이 내준다."

"..."

"그때까지는 전부 닥치고 내 말에 따라."

"..."

"대답이 없어?"

"예..."

길드원들이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앞으로는 절대 쉬지 마라. 쉬지 않고 움직이다가 정말 죽겠다 싶으면! 그래도 움직여."

"..."

"그래서 이제 도저히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다 싶을 때...!"

강현이 잠시 말을 끊고는 길드원들을 둘러봤다.

"그때가 되면 내가 직접! 움직이게 해 주지."

"...?"

"몇 대 맞다 보면 없던 힘도 샘솟을 거야."

강현의 사악한 미소를 보는 길드원들의 눈에 공포가 차오르고 있었다.

**

강현의 막무가내 특별 훈련 2일 차.

고작 하루 만에 완전히 탈진한 길드원들은 좀비가 된 것처럼 어기적거리며 던전 앞에 모여들었다.

"오늘도 골렘인가...?"

"제발... 살려줘."

"멍청이들아. 여긴 어제랑 다른 장소잖아. 이곳은…."

D등급 던전 '헤이로스 산맥.'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등장하는 몬스터는 단순했다.

바로 모두의 친구 고블린들이 등장하는 곳이었다.

"지섭이는 안 오는 거겠지?"

"당연하지 골렘한테 맞아서 죽다 살았는데 어떻게 오냐."

권지섭은 어제 골렘의 공격에 당해 빈사상태에 이른 능력자였다.

다행히 목숨을 건질 수는 있었지만, 한동안 던전에서 보기는 힘들 것이다.

"야야, 온다."

멀리서 'BadAss'를 그려진 요란한 밴(van)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윽고 던전 앞에 멈춰 선 밴에서 지옥의 악귀가 내려왔다.

"다들 간밤에 푹 쉬었지?"

"예에..."

"지각한 간 큰 놈은 없는 것 같네. 좋아. 그래야지."

그리고 그 뒤로 안연하와 권지섭이 함께 밴에서 내려왔다.

"뭐, 뭐야?"

"권지섭 너 괜찮아?"

"어..."

어딘가 넋이 나가 있는 듯한 모습.

게다가 함께 내리는 안연하 또한 굉장히 초췌해 보이는 것이 정상은 아닌 것 같았다.

"다들 박수! 이 친구들 의지가 아주 뛰어나. 고작 하루 만에 이렇게 부상을 털고 일어났다니까?"

강현의 말에 지난밤이 떠오른 안연하와 권지섭이 몸서리쳤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아...'

**

하루 전날.

골렘 던전에서 종일 치유 스킬을 반복했던 안연하는 완전히 지친 상태였다.

때문에 던전 공략이 끝나고 곧바로 집으로 향하려던 안연하를 강현이 붙잡았다.

"무슨 일이세요..?"

"어디가? 이 친구 고쳐줘야지."

강현이 가리킨 방향을 보자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는 권지섭이 보였다.

"저도 그러고 싶지만 오늘은 마력이 다 떨어져서... 게다가 저 정도 심각하게 뼈가 부서진 부상은 잘못 치유하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어요."

안연하는 단순히 집에 가기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마력이 떨어진 것도, 저런 부상은 자칫하면 뼈가 잘못 붙어 몸에 이상이 생길 수 있다는 것도 모두 사실이었다.

"여기 치유 전문가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예? 어디에..?"

강현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리고 마력 부족은 나도 잘 아는데, 진짜 마력이 바닥나면 걷기도 힘들거든? 내가 보기에 너는 아직 여유가 충분해."

"..."

그 누구도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마력을 쏟아붓는 짓은 하지 않는다.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고, 몸에 강한 탈력감이 와서 회복이 훨씬 더뎠기 때문이다.

"죄송하지만, 저 오늘 정말 평소 이상으로 열심히 했는데요?"

"처음 길드에 들어오면서 했던 약속 기억하지?"

"네."

"길드에 있는 이상 무조건 내 말을 따른다. 그게 싫으면 떠난다."

"..."

"네가 패배자가 되든 말든, 한시환이랑 떨어져 살든 난 신경 쓰지 않아."

안연하가 한시환과 사귀는 사이라는 것은 길드 내에서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비밀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강현은 일부러 한시환을 언급하며 안연하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러니 나가려면 언제든 나가. 나는 붙잡지 않으니까."

그 이후에 벌어진 끔찍한 일은 정말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강현은 권지섭의 몸에 손을 집어넣어 강제로 뼈를 끼워 맞추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스킬 사용을 강요했다.

"끄아아아아!"

권지섭이 고통에 몸부림쳤지만 압도적인 완력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음, 여기 뼈가 이렇게 모였고... 좋아."

이따금 혼자서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고개를 주억거리던 강현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각을 벌였다.

-빠각!

겨우 이어 붙인 권지섭의 뼈를 다시 박살 낸 것이었다.

"끄아아아아아! 씨바아알!"

결국 비명을 내지르던 권지섭이 혼절했지만 강현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거 다시 치료해야 돼."

"허억, 허억... 예에..."

완전히 탈진 상태였던 안연하도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강현의 말에 따라 치유를 반복했다.

그렇게 밤새도록 이어진 대 수술 끝에 권지섭은 하루 만에 몸을 움직이는 기적을 보이게 된 것이다.

"너희들도 부상에 대해서 걱정하지 마. 한 번에 죽지만 않으면 내가 다 고쳐줄 테니까."

웃으면서 말하는 강현의 얼굴에서 악마가 보였다.

61화 특훈(3)

61. 특훈(3)

다음날.

훈련은 한층 더 위험해졌다.

그동안 지켜만 보던 안유성과 신성아도 오늘은 전투에 가담했다.

"혼자 싸워서는 안 됩니다! 세 명씩 뭉쳐서 사각을 없애요!"

조성찬은 듣던 대로 사람들을 이끌고 지휘하는 것에 뛰어났다.

'해선'이라는 제법 큰 길드의 수장으로 있으면서, 그가 쌓아왔던 경험은 상황이 변한 지금도 여전히 빛을 발했다.

"알겠습니다!"

고작 하루가 지났지만 조성찬을 대하는 길드원들의 태도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처음에는 그의 말에 거부감을 가지던 이들도 이제는 군말 없이 지시를 따르고 있었다.

"케라라라아웃!!"

"케륵, 케륵!"

이제는 꼴도 보기 싫은 고블린들이 징글징글하게 쏟아져 나왔다.

원래도 많은 개체수를 상대해야 하는 던전이지만, 강현이 잔뜩 몰이를 해온 탓에 평소보다 훨씬 많은 적들이 모여들었다.

"으아아! 이러다가 정말 죽겠어."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씨발! 내가 왜 이런 고생을..!"

길드원들은 아직 어제의 피로도 제대로 풀지 못한 상태였다.

피곤한 육체는 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끄아아! 죽어!"

하지만 그들의 정신은 갈수록 날카로워졌다.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은 엄청난 속도로 변화하고 있었다.

"야야! 거기 누구야?! 위험하잖아!"

난전 도중 한 길드원이 진형을 이탈했다.

그가 포위될 위기에 차하자 관망하고 있던 강현이 자리를 박차고 달려갔다.

"비켜! 이 지겨운 것들아!"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떠오른 강현이 고블린의 머리를 밟았다.

"케에엑!?"

그리고 고블린의 머리를 징검다리처럼 건너며 내달렸다.

-퍽, 퍽, 퍼억!

"켁!"

영문도 모르고 강현의 디딤돌이 된 고블린 중 일부는 목이 꺾여 그대로 절명했다.

"조심해!"

마침내 길드원의 근처에 도착한 강현. 그의 눈에 고블린에게 포위돼 꼬치가 될 위기에 처한 길드원이 들어왔다.

'이대로라면 늦는다.'

강현은 우선 마력구를 던져 고블린들을 물리기로 했다.

판단은 짧았고 행동은 빨랐다.

"마력 폭발!"

-콰과과광!

"으아악! 저까지 휘말립니다!"

"눈 똑바로 뜨고, 정신 차려!"

길드원이 마력 폭발에 휘날리는 먼지 속에서 허우적댔다.

-푸슉!

결국 허둥지둥 대는 그의 옆구리에 날카로운 창이 틀어박혔다.

"끄아아아악!"

"켈켈!"

교묘하게 갑옷으로 보호받지 못한 곳을 찌른 창은, 단번에 길드원의 살가죽을 파고들었다.

"끄아아! 살려줘!"

옆구리에 구멍이 난 길드원이 패닉에 빠져 비명을 질러댔다.

"징징거리지 좀 마라."

-스걱!

길드원을 찌른 고블린이 단숨에 허리를 중심으로 이등분되었다.

강현은 부상을 입은 길드원을 붙잡았다.

"으, 으으..."

"몸에 구멍 처음 나봐? 왜 이렇게 애새끼처럼 굴어?!"

강현은 부상을 입은 남자를 다독이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다그쳤다.

"네가 아프다고 질질 짜면 저기 고블린들이 '미안하다-!' 하면서 사과라도 할 것 같아?"

강현의 말에 길드원이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시발. 남 일이라고 막말하는 거야?!'

그의 몸에 조금이라도 힘이 남아있었다면 강현의 면상을 후려치는 것에 사용했을 것이 분명했다.

"하아, 하아..."

"보니까 내장은 안 다쳤네. 당장 죽을 일은 없으니까 정신 차리고 움직여!"

"..."

남자가 원망 가득한 눈으로 강현을 노려봤다.

"쳐다보면 어쩔 건데? 엿같으면 덤벼! 이기면 너 길드장 시켜 줄게!"

"으으..."

"억울해? 짜증나? 그럼 가서 고블린 죽이고 더 세져서 와! 새꺄!"

"으아아아아!"

분노의 힘은 대단했다.

방금 전까지 빌빌거리던 연약한 아이가 단숨에 불타는 눈을 가진 전사가 되었다.

"이건 뭐야..?"

갑자기 자신의 옆에 나타나서는 고블린을 학살하는 남자를 보고 당황한 안유성이 중얼거렸다.

"좋아. 훌륭해."

그제야 강현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이어진 고블린 사냥은 결국 코어에 도달하고 나서야 끝이 났다.

"말도 안 돼. 하루 만에 코어 공략이라니..."

"우리가 이걸 해냈다는 거야?"

비록 메인 코어가 아닌 노말 코어였지만, 그렇다고 해도 3일 이상은 걸리는 것이 정석이다.

항상 완벽한 대형을 갖춘 채로 안전을 최우선으로 던전을 공략하던 이들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느낌이었다.

"도대체 하루 만에 얼마나 벌은 거야?"

D등급 노말 코어의 포상은 4000만 원.

오늘은 그냥 내버려둔 마정석과 사체를 제대로 수거했다면 수익이 1억에 도달했을지도 몰랐다.

"와! 진짜 수거팀만 꾸리면 돈 버는 거 금방이겠는데?

"아무리 돈이 좋아도 그렇지. 이 짓을 또 하고 싶냐?"

"그건 그래..."

던전 밖으로 나온 이들은 하나같이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피와 땀에 찌들어 꾀죄죄한 모습.

평소라면 샤워가 간절했겠지만 지금은 당장 바닥에 엎어져 자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오늘 던전 공략으로 번 돈은 한시환 팀장에게 줄 테니 너희들끼리 알아서 써."

갑작스러운 강현의 선언에 모든 길드원들이 환호했다.

"그리고 오늘 보니까 불만이 많은 놈들이 있던데 확실하게 말한다. 똑바로 들어."

이어지는 강현의 말에 환호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하기 싫으면 당장 때려치우고 꺼져."

"..."

"나는 강요 안 하니까 집어치우라고. 그래서 방구석 수호자를 하던 여포를 하던 시발 아주 마음대로 해."

"..."

"내일부터는 나오고 싶은 놈만 나와라."

"그렇게 무책임하게 말하면 어떡합니까?!"

강현의 말에 한 길드원이 반발했다.

"너희가 원해서 왔으면서 나한테 뭘 책임지라는 거야? 네들이 던전에서 죽어도, 불구가 돼도, 나는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아."

"그게 무슨..."

"대신! 이거 하나는 약속한다."

"..."

"강해질 수 있다."

강해진다.

그 말에 길드원들이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너희들이 원하는 게 그거잖아? 강해져서 인류를 수호하겠다고 말하고 다녔다면서?"

말을 하는 강현의 몸에서 무언가가 뿜어져 나와 모두를 압도하는 것만 같았다.

"인류를 수호한다고 떠들어 대던 놈들의 각오가 어느 정도인지 지켜볼 거야."

그렇게 할 말을 끝낸 강현은 혼자서 밴을 타고 돌아갔다.

"갔네..."

"갔어."

허망하게 그 모습을 보던 길드원들에게 한시환이 다가왔다.

"너희들은 어떡할 거야?"

그의 말에 길드원들이 고민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저 남자를 따라가는 게 맞는지, 이게 올바른 건지..."

"저희 수호자 길드가 그런 뜻으로 모인 건 맞지만 이건 좀 심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수호자 길드 출신들은 모두 죽은 박세현의 추종자나 다름없었다.

인류를 수호한다는 사명감에 뭉친 자들이란 뜻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신념을 가졌어도 자신의 목숨이 소중하지 않은 자는 없었다.

"먼저 저부터 말씀드리자면, 저는 끝까지 강현 님을 쫓아갈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성찬, 조동원 형제가 앞으로 나서서 말을 했다.

"저희 형제는 야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는데 이곳만 한 길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

"이 말은 강현 님에게도 똑같이 했습니다만,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시더군요."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요?"

"그때 제가 들은 말을 그대로 전하자면 이렇습니다."

잠시 목을 가다듬은 조성찬이 강현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내가 무슨 같잖은 충성심 같은걸 기대할 것 같아요? 그쪽이나 나나 서로 이용할 만큼 이용하고 필요가 없으면 떠나도 돼요. 내 뒤통수 후려치는 것만 아니면 뭘 하든 내버려 둘 테니까 알아서 해요."

"하하하!"

한시환은 정말 강현다운 답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저는 서로 이용할 만큼 이용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수호자 길드 출신 여러분들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요."

"말씀 감사합니다."

조성찬의 말이 끝나고, 수호자 길드원들의 고민은 한층 더 깊어졌다.

"나는 너희들이 나를 믿고 여기까지 따라와 준 것만 해도 고맙게 생각해. 어떤 선택을 하던지 원망하지 않을 거야."

한시환이 길드원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말했다.

"부길드장님..."

"솔직히 나도 강현이란 남자에 대해 많은 의문이 드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나는 강해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지킬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

"..."

"정의는 내가 강해진 다음에야 찾을 수 있는 거야."

"예."

"그리고 이제 나는 수호자 길드 부길드장이 아니잖아. 그냥 팀장님이라 불러."

수호자 길드원들은 생각했다.

자신들이 수호자 길드에 들어갔던 이유. 개인의 목적. 그리고 신념.

모든 것들이 소용돌이치며 머리를 혼란스럽게 했다.

[인류를 수호한다]

오글거리고 웃기는 말이라고 비웃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진지하게 그 문장에 반해 길드에 들어갔고, 결국은 유일하게 그것을 지키는 한시환을 따라 변해버린 길드를 떠났다.

'어쩌면 변해버린 건 길드가 아니라 우리일지도 모르지...'

재능이 있었고, 노력을 했다.

충분히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우러러봤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그들이 하찮게 느껴졌다.

인류의 수호자인 자신들은 남들과 다른 위대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인류를 수호한다]

그들을 이끌었던 위대한 신념.

그것은 어느새 그들을 오만하게 만들고 스스로를 좀먹고 있었다.

-인류를 수호한다고 떠들어 대던 놈들의 각오가 어느 정도인지 지켜볼 거야.

강현의 마지막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

안전가옥으로 돌아가는 밴 안.

창밖을 보고 있던 강현에게 신성아가 말을 걸었다.

"강현님."

"어."

"내일 저들이 얼마나 나올까요?"

"왜? 걱정돼?"

"조금 그렇습니다. 어제, 오늘. 조금 심하게 대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신성아의 말에 강현이 미소를 지었다.

"안유성 네가 생각하기엔 어떤 것 같아?"

"관심 없어요."

"좀 성의 있게 대답해 봐 인마."

"어차피 얼마 안 가서 다 죽을 것 같던데. 관심 가져서 뭐하려고요."

"너한테 질문을 한 내가 미친놈이지."

안유성에게 정상적인 대답을 바란 것이 실수였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내가 저들에게 심하게 대한 건 맞아."

"따로 이유가 있으십니까?"

"그냥 제 몸 하나 못 지키는 놈들이 인류를 수호하니 뭐니 호들갑 떠는 꼴이 마음에 안 들잖아."

"..."

이어지는 말을 기다리던 신성아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다입니까?"

"어. 그게 다인데?"

솔직히 강현도 자신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까지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돈을 목적으로 확장했던 길드다.

그냥 저들을 받아서 던전을 돌게 하고, 거기서 나오는 이윤을 챙긴다.

그것으로 끝인 관계였다.

자신이 시간을 버려가면서 저들과 함께 던전을 돌고 감정을 소모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분명 그럴 건데...'

어째서인지 강현은 저들을 쉽게 대하고 싶지 않았다.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야. 왜 그런 걸 묻고 그래? 괜히 기분 다운되잖아."

"죄송합니다."

"아냐. 지금 몇 시지?"

"저녁 7시입니다."

"소고기나 먹으러 가자. 맥주도 한잔하고."

"좋습니다."

강현의 제안에 신성아가 미소를 지었다.

"너는 어쩔래?"

"저 미성년자인데요."

"아니 지랄은 진짜."

지금도 믿기지 않지만 안유성은 원래대로라면 한창 대학교 1학년을 즐겨야 할 때이다.

그마저도 빠른 년생이라 사실은 19살이나 다름없었다.

"생긴 건 대마초를 달고 살 것 같은 놈이 이상한데서 고지식하네?"

"형. 저는 그런 거에 의지하지 않아도 충분히 즐거워요."

뜬금없는 행복 선언.

강현이 당황한 표정으로 안유성을 바라봤다.

'이렇게 긍정적인 인간인지 이제 알았네. 마냥 또라이인 줄만 알았는데... 하긴 얘도 갓 학교를 졸업하고 게임을 좋아하는 20살일 뿐이니까.'

강현은 그동안 자신이 안유성을 오해했음을 깨닫고 반성했다.

"하, 메이스가 무언가를 박살날 때의 쾌감은... 아마 세상 모든 마약을 가져다 놔도 이기지 못할 거예요. 크크큭!"

"어휴, 씨발... 말을 말아야지."

62화 질긴 악연(1)

62. 질긴 악연(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