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미친놈처럼 보이겠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나는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거울에 비친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누구냐. 내 이름이 뭐지?"
그래, 내 이름 이호열.
클 호에 기쁠 열.
딸만 셋.
딸부잣집 막내아들로 태어난 나를 보고 크게 기뻐하신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내 이름.
하지만 머리와는 다르게 입에선 전혀 다른 이름이 튀어나온다.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그것도 어느 나라의 귀족 이름인지도 모를.
괴상망측하게 길기만 한 이름이...!
갑자기 뭐 전생이라도 깨우친 거 아니냐고?
"차라리 그랬으면 좋았을 것을...."
아니, 그런 판타지스러운 전개가 아니란 걸 알고 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묘하게 날카로워진 눈매.
눈에 띄게 다부져진 체격.
마지막으로 눈앞에 떠오른 글자까지.
이건 각성이었다.
내가 플레이어가 됐단 소리였다.
그래, 거기까진 이해할 수 있었다.
문제는 플레이어가 된 내 모습과 해괴한 이름이었다.
"아무리 봐도 이건 10여 년 전...."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정확하게는 12년 전.
그러니까 15살.
중2병을 앓던 무렵.
내가 키운 캐릭터가 분명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심히 좆된 모양이구나."
마치 귀족이라도 된 것처럼 고상하게.
***
쪼르륵─
망했다.
그런 감정과 다르게 내 행동엔 여유가 넘쳤다.
찬장에서 쓰지도 않던 찻잔을 꺼냈다.
평상시엔 입에 대지도 않던 녹차를 우려냈다.
그러고는 테이블에 앉아 녹차를 음미했다.
"향이 나쁘지 않구나."
...무슨 사극 찍는 것도 아니고.
내가 말하고 있지만, 말투 한번 거북하다.
어쨌거나 직감할 수 있었다.
행동도 말투도 각성의 영향으로 달라졌다는 것을 말이다.
플레이어 각성.
나와는 상관이 없는 말인 줄만 알았다.
그야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으니까.
"...하기야 10여 년 전 일이었으니."
아르카나 대륙 전기.
13년 전.
출시 이후로 단 한 번도 정상에서 내려오지 않은 가상현실 게임.
아니, 게임을 넘어 또 하나의 인생이라 불리는 그 게임.
[세계 각지에 미확인 건축물 출현... 아르카나 서비스 종료와 관련 있나?]
그런 아르카나가 현실이 됐다.
[세계 곳곳에서 괴생물체 출현... 네티즌 日, "아르카나 몬스터가 확실하다." 논란 일파만파]
그런 현실에 아르카나의 몬스터들이 나타났다.
[신인류 출현? 괴생명체 맨손으로 쓰러트려....]
그런 현실의 몬스터를 사냥할 수 있는.
아르카나 캐릭터의 능력을 각성한 플레이어들도 등장했다.
그 대격변 이후로도 수년의 시간이 흐른 게 지금이었다.
아르카나 대륙 전기가 현실이 됐다니.
그 소식을 군대에서 처음 접했을 땐 흠칫했다.
-하씨. 이럴 줄 알았으면 안 접는 건데.
한때 불침번을 서며 그런 상상을 하기도 했었다.
왜냐니.
플레이어들은 말 그대로 영웅이었으니까.
[플레이어, '금빛섬광' 네임드 몬스터 '장군, 세키르' 격퇴!]
[균열 클리어 보상금만 대략 50억 원....]
[밀착 인터뷰 : 대참사를 막은 플레이어, '남태민'편]
하지만 그뿐이었다.
-사실 각성한다고 해도 별 볼 일 없겠지만.
나는 아르카나 대륙 전기를 채 1년도 플레이하지 못하고 접었으니까.
거기엔 현실적인 문제가 컸다.
접속기 가격만 해도 무려 천만 원.
월 이용료도 수십만 원에 육박했으니까.
"...얘들아, 미안하다."
"괜찮아요. 아버지. 저희한테 미안하실 필요 없으세요."
"흑흑. 엄마도 너희를 볼 면목이 없구나."
"아, 진짜 엄마까지 왜 그래?"
"우리도 호열이도 다 컸어. 뭘 걱정해."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집에 압류 딱지가 붙었던 날 이후.
나는 아르카나 대륙 전기는 물론, 게임에 대한 관심은 완전히 끄고 살아온 것이다.
그건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도 마찬가지.
좋으나 싫으나 어쩔 수 없이 공부만 하게 됐고 그 결과가 현재였다.
꽤 괜찮은 직장에 꽤 괜찮은 자취방.
주말마다 본가를 왕래하는 한가로운 일상.
넉넉하진 않아도 큰 욕심은 없으니 그럭저럭 괜찮은 삶.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냐?"
머리가 지끈거린다.
애써 찻잔을 기울여 본다.
일단, 빌어먹을 사극 말투는 그렇다고 치고 넘어가자.
중요한 건 내가 플레이어로 각성했다는 것이다.
10여 년, 정확하게는 12년 전.
아르카나 대륙 전기에서 육성했던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란 캐릭터가 나, 이호열에게 덧씌워졌다는 소리다.
그런 인터뷰를 흔히 봤었다.
-각성 후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라면.... 역시 캐릭터와 동화됐다는 느낌이랄까요? 정말, 현실의 저와 게임 속 캐릭터가 하나로 합쳐진 기분이 들어요. 대충 빙의라고 할까?
-뭐, 빙의라고 해도 게임 속 캐릭터를 플레이하던 것도 저였으니까요. 내가 플레이했던 캐릭터가 빙의해 봤자 크게 달라진 건 없겠죠.
-그래도 덕분에 현실의 몬스터를 보고도 겁먹지 않을 수 있는 거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른 게 있다면 나는 그 플레이 시점이 무려 10여 년 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10여 년 전의 내가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라는 캐릭터에 '심하게' 몰입했었단 것도 다른 점이겠지.
"맛있군."
입맛까지 바뀔 정도로 말이야.
...진짜 돌아버리겠네.
이것도 아르카나의 캐릭터 정보가 덧씌워진 덕분인가?
잊고 있던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의 설정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중2병에 걸렸던 내가 만든, 방대한 설정이 말이다.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그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다.
위대한 가문의 후계자였으나 악마에게 그 가문이 몰락.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인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이하 그랑펠은 그 악마에게 복수하기 위해 악마 사냥꾼의 길을 걷게 됐다.
길게 늘어진 은발 머리, 수려한 외모가 특징이며 평상시 언행에는 그 신분의 고귀함이 느껴지는 말투를 사용한다.』
쓸모도 없는 걸 이렇게 구체적으로....
진짜 미치겠다, 과거의 나란 새끼!
정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손발이 오그라드는 설정이었다.
당연하게도 내가 설정을 짰다고 한들, 게임에 반영되는 건 조금도 없다.
설정이라고 해봤자 공책이나 메모장에 끄적거린 게 전부였으니까.
그래서 설정에도 나와 있지 않은가?
몰락한 귀족이라고.
가진 게 쥐뿔도 없는 1레벨, 초보자부터 시작하니까.
그냥 그럴싸하게 몰락했단 설정을 붙인 것뿐이었다.
그래, 저 긴 설정에서 진실은 하나밖에 없단 말이다.
악마 사냥꾼의 길을 걷게 됐다는 것.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클래스 : 악마 사냥꾼]
하지만 과거의 나는 설정에 심취해서 아르카나를 플레이했었다.
쉽게 말해 아르카나에서 그랑펠의 삶을 연기했단 소리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미친놈이 따로 없지만....
그때는 중학생, 그것도 2학년이었으니까.
이젠 웃고 넘어갈 추억으로 여길 수 있었단 말이다.
"...추억이라. 그립군."
그런데 그 잊고 싶은 추억이 현실이 된 것이다.
젠장, 편두통이 심해진다.
누가 내 낯 뜨거운 꼴을 볼까 봐 우려스럽다.
...아니, 잠깐.
나 당장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내가 출근해서 정상적으로 업무를 볼 수 있을까.
그, 사회생활이라는 게 말이다.
쉽지가 않다.
하루에도 몇 번씩 고개를 숙이고, 자존심을 버려야 하는 일이 속출한다.
그런데 그랑펠의 설정에 영향을 받아서 입맛까지 달라진 내가.
과연 험난한 사회에서 하루라도 버틸 수 있을까?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는 고귀하다. 상대가 누구든 그는 절대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그의 자긍심은 더없이 무거우며 흔들리지 않는다. 설령 그 무게에 가라앉아 익사하는 한이 있더라도.』
...부장님 면상에 커피라도 안 뿌리면 다행이겠군.
월급보다 합의금이 더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겠어.
고상한 티타임 끝에 나는 결론을 내렸다.
"언제까지 고개를 숙일 수도 없는 노릇이지."
이번에도 말이 헛나왔는데, 아무튼.
쉽게 말해서 직장을 그만두겠단 소리였다.
앞으로는 플레이어로 살아가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누가 보면 갑작스러운 결정이 아닌가 싶겠지.
하지만 나는 합리적인 판단을 내린 것뿐이다.
생각해 봐.
이런 상태론 어떤 직장을 가도 민폐만 끼칠 게 당연했다.
그러는 동안 통장 잔고는 눈에 띄게 줄어들겠지.
빌어먹을 귀족 입맛.
즐기지도 않던 티타임 비용까지 지출에 추가될 판이니까.
생활비가 더더욱 절실해진 것이다.
결국, 먹고 살기 위해선 플레이어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소리다.
물론, 큰 욕심은 없다.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레 주제 파악이란 걸 하게 됐으니까.
그랑펠에 과몰입하던,
스스로를 특별한 사람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중2병 환자는 더 이상 없다.
그저 먹고 살 수 있을 정도.
그럼 플레이어로 활동해도 목숨이 위험한 일은 없지 않을까?
일단, 검색을 해보자.
나는 플레이어의 세계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었다.
딱히 그들을 동경하며 살지 않았으니까.
먹고 살기에 바빠 별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거지.
그래도 돈 많이 버는 거, 그거 하나는 부러웠는데.
"...흐음."
수십, 수백, 수천억.
말 그대로 억 소리가 끊이질 않는 플레이어들의 기사.
하지만 나는 기사를 읽으면서도 심드렁했다.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에게 재물이란 덧없는 것이었다. 위대한 가문의 후계자로 태어나 풍요로움의 끝을 맛보았던 그가 부귀영화에 집착할 이유는 없었다.』
이것 역시도 저 빌어먹을 설정의 영향이겠지.
그래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탐욕에 눈이 멀어 목숨을 걸 일은 없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전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나는 나약하군."
...이래서 몹 한 마리나 제대로 잡을 수 있을까.
파티에 꼽사리라도 낄 수 있으려나, 걱정이 앞섰다.
현실에 출몰하는 몬스터들의 수준이 장난이 아니었다.
지금의 나로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와 진짜 아슬아슬했네ㅋㅋ
-평균 레벨 200대 파티가 간신히 공략한 거지?
-갈수록 수준 높아지는 거 보소ㄷㄷ
-랭커들은 오히려 좋아할듯? 경험치 많이 주잖아
한 동영상의 댓글이었다.
플레이어 파티의 평균 레벨이 무려 200이란다.
나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 55]
고작 55레벨.
내 레벨은 10여 년 전 그대로였다.
당시에는 랭커까진 아니어도 그래도 꽤 높은 축에 속했는데....
세월이 참 야속하다.
하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도 있었으니까.
"왜 난 그렇게 헛된 시간을...."
쓸데없이 무게 잡는 혼잣말을 뱉기도 잠깐.
나는 불현듯 검색창에 '악마 사냥꾼'을 검색했다.
"잠깐, 잊고 있었군."
악마 사냥꾼의 육성법...!
하도 오래전 기억이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당시, 악마 사냥꾼은 제한된 방식으로만 캐릭터를 육성할 수 있었단 사실을.
다른 클래스들이 사냥을 통해 레벨을 올리던 것과 다르게 악마 사냥꾼은 퀘스트를 통해 레벨을 올려야 했으니까.
"Skill"
천적관계
은 마스터리
사격 마스터리
동시 사격
구마의식
대다수의 퀘스트가 악마를 퇴치하는 것이었다.
거기엔 악마 사냥꾼이란 클래스의 한계가 컸다.
───────
천적관계 : 악마족과 전투 시 전투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
악마를 상대할 때는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지만, 그게 아니면 나사가 빠진 능력치. 그래서 적정 레벨의 사냥터에선 명함도 내밀 수 없는 클래스.
그게 바로 악마 사냥꾼의 현실이었다.
그렇다면 악마를 사냥하면 되는 것 아닌가?
누군가 묻는다면.
그 당시 아르카나에는 악마족 몬스터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답할 수 있었다.
악마 사냥꾼이 악마와 조우할 수 있는 건 오직 퀘스트를 수행할 때뿐이었으니까.
그 탓에 악마 사냥꾼은 당시에도 비인기 직업이었다.
"하지만 그건 과거일 뿐이지."
그래, 10년 하고도 2년이었다.
새로운 악마 사냥꾼의 육성법이 나오고도 남았을 시간이란 말이다.
아르카나가 현실이 된 지금, 육성법을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기엔 무리가 있겠지만.
그래도 참고 정도는 할 수 있을 테니까.
좋아.
각성 이후 지끈거리던 머릿속이 차차 정리되기 시작한다.
...차를 마셔서 그런가? 아님 말고.
어쨌든, 정보화 시대에 태어난 게 다행이다.
손가락만 움직여도 원하는 정보를 찾을 수 있다니.
검색창에 '악마 사냥꾼'을 입력.
검색 결과를 둘러보는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검색 결과가 떠올랐다.
"악크샨 기지가 궤멸? 전부 사망했다니."
대체 10년 사이에 아르카나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
.
악크샨 기지.
그곳은 악마 사냥꾼들의 본부였다.
전직 퀘스트를 수행하고, 훈련 퀘스트를 거쳐 악마 사냥꾼 클래스로 거듭나는 곳이 악크샨 기지란 말이다.
그런데 그 악크샨 기지가 모종의 이유로 파괴됐고 NPC마저 전멸했단다.
그로 인해 악마 사냥꾼으로의 전직도 불가능해졌단다.
"그것도 한참 전 일이라고?"
...잠깐, 그럼 나는?
악마 사냥꾼의 새로운 육성법은 어디 간 건데!
온갖 커뮤니티를 뒤지던 나는 깨닫고 말았다.
"설마."
-옛날이 그립다 그땐 악마 사냥꾼이란 클래스도 있었는데
-ㄹㅇ? 처음 들어봄
-ㅋㅋ그때 악마 사냥꾼이 얼마나 쓰레기 캐릭터였는데
-저도 키웠다가 캐삭하고 다시 키웠음요ㅋㅋ
-간지만 나지 성능이 개구렸음ㅋㅋ
검색을 할수록 그 설마가 확신이 됐다.
아무래도 현재 악마 사냥꾼 클래스인 플레이어는 단 한 명도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 내가 플레이어로 각성했으니까....
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이럴 수가."
과거의 내가, 내 취향이 원망스럽다.
아무리 멋에 죽고 사는 중2병이라도 그렇지.
성능을 조금이라도 생각했으면 덧이라도 났던 거냐고.
"머리가 아프구나."
갑자기 너무 많은 정보를 받아들인 탓이겠지.
아무래도 휴식이 필요했다.
그렇게 생각한 내가 스마트폰을 내려놓으려던 때였다.
문득, 게시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근데 이럴 줄 알았으면 악마 사냥꾼 계속 키울걸
"?"
어떤 사연이 있길래.
저런 게시글을 올린 걸까.
호기심에 게시글을 눌러봤다.
그리고 흠칫했다.
"새로운 업데이트로 악마족이 정식으로 추가됐고, 그때부터 균열의 난이도가 급상승했다. 악마족만 없었어도 현실의 플레이어들이 목숨을 잃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뭐, 악마족이 추가?
그 악마들이 현실에서도 활개를 치고 있다고?
'이거 어쩌면....'
머릿속에서 가능성이 떠오른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무엇보다 나보다 레벨이 훨씬 높은 플레이어들도 악마족 때문에 고전하고 있는 모양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주제 파악과 다르게.
나는 중얼거리고 말았다.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의 긍지는 모순적이게도 악마의 앞에서 가장 드높아진다.』
"영광으로 여겨라."
『그 어떤 악마의 유혹과 기만, 시련도 그랑펠의 고고한 긍지에는 흠집조차 낼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지옥에 처박아 줄 테니."
◈ 2화. 교육이 필요하다면 (1)
아르카나가 현실에 범람한 이후.
한국의 상징은 '마법사의 탑'이 됐다.
"네, 저는 지금 마법사의 탑 앞에 나와 있습니다!"
"우와. 저게 몇 미터야? 저런 게 하루아침에 생겨났다니."
"잠깐, 저거 초신성들 아니야? 랭커들을 위협한다는?!"
마법사의 탑.
모든 마법사들의 성지.
아르카나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장소.
그런 마법사의 탑이 서울에 솟아난 뒤.
뒤따라온 파급력은 말로 다 하기 힘들 정도였다.
[마탑 효과? 랭커들이 한국에 몰려든다.]
[마탑의 마법사들, "우린 새로운 지식을 갈구할 뿐. 우호적인 관계 원한다."]
[마탑 관광 여행 인기... 작년 대비 관광객 3,000% 폭증]
"한국을 찾은 이유요? 당연히 마탑 때문입니다. 장거리 텔레포트부터 마법 부여까지. 마탑에서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가 상당하거든요. 그래서 저희 샤이닝 길드는 당분간 한국에 머무를 생각입니다."
세계 최고, 샤이닝 길드가 한국에 지부를 창설했다.
그 샤이닝을 따라 세계 각국의 대형 길드들도 한국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이 낼 어마어마한 세금은 기본.
플레이어들이 넘쳐나니 몬스터에 의한 피해도 줄어드는 게 당연했다.
나날이 밝아지는 대한민국의 미래!
하지만 아르카나에서 넘어온 건 마탑만 있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빛이 있다면 어둠도 있는 법.
'젠장. 나는 플레이어가 돼서도 들러리 신세야?'
'나도 저렇게 잘나가고 싶었다고!'
'부럽다. 배가 아파서 죽이고 싶을 만큼 부러워.'
그래, 악마는 그 어둠에 숨어 살고 있었다.
"처음엔 영 적응하기 힘들었는데. 보면 볼수록 아르카나 대륙보다 우리 악마족이 행동하기 좋은 곳이란 말이야? 시기, 질투, 비관,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끊이질 않잖아!"
이런 환경이라면 상급 악마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겠어.
"언젠간 나도 마왕들처럼...!"
황홀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던 하급 악마, 임프.
녀석이 먹잇감을 포착했다.
다섯 명의 플레이어들이었다.
"이번엔 저 녀석들로 하자."
어제 갖고 놀다가 죽인 연놈들을 떠올려 본다.
처절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아주 듣기 좋았었지.
그 새끼들보다 어리숙해 보이는 게 쉬운 먹잇감 같았다.
*
나까지 딱 다섯.
'그래도 다행인가.'
하긴 고레벨 플레이어만 각성하란 법은 없었으니까.
커뮤니티엔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플레이어를 찾는 구인 글이 많았다.
아무래도 솔플은 위험하니까.
게다가 이건 현실이다.
죽으면 게임 오버가 아니라 그대로 끝.
사망이라는 뜻이다.
"저기 보이네요. 균열."
손가락이 향한 곳은 지하철 출구.
아직 출근 시간이라 그런지 인파가 상당했다.
사직서를 쓰지 않았으면 나도 저기 있었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까 어느새 출구에 다다랐다.
...플레이어들의 시야가 이랬구나.
오직 플레이어의 눈에만 보이는 균열.
지하철 출구를 가로막고 있는 '막'이 보였다.
그 막을 뚫고 승강장으로 향하는 직장인들.
보다시피 평범한 사람들은 균열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 덕분에 지금처럼 사회가 굴러갈 수 있는 거겠지.
[놀의 지하창고]
[적정 레벨 : Lv35~40]
[붕괴 진행도 : 19.8%]
'균열 정보도 볼 수 있구나.'
붕괴 진행도가 100퍼센트가 되면 균열이 무너지고 몬스터가 현실에 풀려났다.
대격변 이후 초창기.
플레이어도, 균열에 대한 지식도 부족할 땐 균열이 붕괴되고 몬스터가 풀려나는 일이 많았다.
그로 인한 인명 피해는 말하기도 싫을 정도였고.
희생이 있었기에 현재 플레이어들은 별다른 규제 없이 균열을 공략할 수 있었다.
균열이란 시한폭탄.
그곳에 접근할 수 있는 건 오직 플레이어밖에 없었으니까.
"진행도를 보면 먼저 들어간 플레이어들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래도 최선을 다해보자구요! 자, 딱 담배 한 대만 피우고. 정확하게 5분 뒤에 진입하겠습니다."
...약간 떨리는데?
어쩔 수 없는 반응이다.
그야 나는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당장 팔자에도 없던 몬스터를 사냥하게 생겼으니까.
긴장이 되는 게 당연하다.
'이럴 땐 또 다행이다 싶다.'
하지만 그건 오로지 기분 탓에 불과했다.
그야 내 신체에선 조금의 떨림도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더없이 꼿꼿한 목.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어깨.
자신감으로 또렷한 시선까지.
...지하철에 귀족 납시었군.
누가 봐도 오늘 처음 균열에 진입하는 플레이어로는 보이진 않겠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긴장해서 좋을 건 하나도 없을 테니까.
게다가 첫 경험이란 걸 생각해서 참여한 파티가 아니던가?
[적정 레벨 : Lv35~40]
현재 내 레벨은 55였다.
아무리 악마 사냥꾼이 어중간한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레벨 차이가 15나 되는데.... 괜히 쫄아있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자자, 그럼 들어가실까요?"
"잘 부탁드립니다!"
"같이 고생해 보자고요!"
금세 5분이 지난 모양이었다.
의욕을 끌어올리는 파티원들.
누나만 셋.
심지어 그 누나들이 전부 연년생이다.
자매들의 전쟁에서 중립국으로 살아남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먹어온 눈칫밥이 몇 그릇인데.
그 짬밥으로 상사들에게 예쁨받던 나다.
나도 눈치껏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주 고상한 목소리로.
"내가 있으니 그대들은 걱정할 것 없다."
...잠깐, 누가 누굴 걱정해?!
그러나 헛나온 말을 주워 담을 순 없었다.
"...예?"
젠장, 파티원들이 흠칫하는 게 눈에 보인다.
이러다가 쪽팔려서 돌아가시겠다, 진짜.
그랑펠, 빌어먹을 내 흑역사야.
.
.
.
가만히 있으면 절반이라도 간다는 말도 있다.
되도록 입은 다물고 있는 게 좋겠군.
그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곧 균열에 진입하자 달라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출퇴근길, 매일 보던 지하철의 모습이건만.
어딘가 모를 이질감이 느껴졌다.
앞서가던 파티의 리더, 남철민이 혀를 찼다.
"에스컬레이터가 녹슬어서 걸어가야겠네요. 아, 여기 계단 좀 많은데.... 그냥 몸풀기한다고 생각하고 내려갑시다!"
그 말에 에스컬레이터를 바라보는데.
정말이잖아?
녹슨 에스컬레이터.
지하 저편에서 풍겨오는 습하고, 불쾌한 냄새.
간간이 들리는 짐승의 하울링까지.
'이건 놀의 울음소리인가.'
과연, 균열의 영향을 받아 지하철도 그에 맞는 환경으로 변화한 모양이다.
폐허가 된 지하철역에 접근할 수 있는 건 플레이어뿐이었다.
물론, 균열이 붕괴되면 현실의 지하철도 이런 모습으로 바뀌겠지.
"슬슬 장비들 챙기시고."
"입구가 썰렁한 걸 보면 먼저 진입한 파티가 있나 본데요?"
"확실히 그런 것 같네요. 근데, 뭐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여기가 환승역이라 그런가 꽤 크거든요? 루트만 잘 선택하면 다른 파티랑 안 겹치게 사냥할 수 있을 겁니다."
역시 파티를 구하길 잘했다.
혼자 왔으면 어리바리 탔을 텐데 말이야.
나는 인벤토리를 열어서 장비를 점검했다.
'...이건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55레벨.
지금은 저레벨에 불과할지 몰라도 당시엔 꽤나 높은 레벨에 속했다.
당시에 장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단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내가 누구던가?
멋에 살고, 멋에 죽던 중2병.
멋진 장비를 구하기 위해 용돈까지 투자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어쨌든, 그 폼생폼사 덕분에 현재 내 장비의 수준은 상당히 호화로운 축에 속했다.
[무명 대장장이의 명작 : 은제 단검]
[등급 : 레어]
[제한 : Lv.50]
[효과 : 언데드족, 악마족에게 추가 피해를 준다.]
[설명 : 실력은 출중하지만, 명성이 부족한 대장장이의 명작이다.]
그중에서도 이 단검이 기억에 남아있다.
경매장에서 굉장히 비싼 값을 주고 샀던 기억이 있는데....
설명에도 나와 있듯 당시에 굉장히 유명하던 대장장이 플레이어가 제작한 장비였다.
누군지는 몰라도 계속 아르카나를 플레이했으면 지금쯤 틀림없이 굉장히 유명한 대장장이가 됐겠지.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그래서 무기가 달랑 이거 하나뿐이야?!
이건 낭패다.
은제 무기는 내구도가 상당히 빈약했다.
사냥할 때마다 내구도가 하락하고 그 수리비로 적잖은 골드가 지출되던 기억이 생생했다.
그때는 골드였지만 지금은 현금이 나간다는 소리였다!
활이 있긴 했지만, 화살이 고작 다섯 발.
그것도 전부 은화살뿐이었다.
내구도를 걱정하는 마당에 은화살을 사용할 수도 없는 노릇.
나는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최대한 덜 싸우는 방향으로 가야겠는데.'
적어도 새로운 무기를 구할 때까진 말이야.
[놀의 지하창고-식료품 저장소에 진입하셨습니다.]
이곳에서 새로운 무기라고 해봤자 놀들이 사용하는 조잡한 무기밖에 없겠지.
그래도 그걸 사용하는 게 아까운 은제 무기를 사용하는 것보다 낫다.
'아무리 그래도 레벨의 격차가 있으니까.'
그렇게 판단했던 나는 전투가 시작되고 후회했다.
'...진짜 이호열 이 자식아!'
아무리 은제 무기가 멋있어도 그렇지.
실용적인 무기 하나 챙겨두는 게 그렇게 어려웠냐?!
"크르르렁!!"
개 인간, 놀.
현실의 녀석들은 아르카나에서 본 것보다 훨씬 빠르고 영악했다.
지하철역에 적응이라도 한 건지.
복잡한 지하철역의 지형지물을 활용해서 우리를 습격해 왔다.
슈슉─!
시야의 사각에서 화살이 날아들었다.
간신히 피해낸 마법사, 서정연이 소리쳤다.
"놀 궁수! 저기 자판기 뒤에 숨었어요!"
어째 우리 파티보다 역할 분담이 제대로였다.
나는 남철민 쪽을 바라봤다.
'...요샌 이렇게 파티 사냥하나?'
직접 들은 건 아니지만, 남철민의 클래스는 누가 봐도 탱커였다.
커다란 방패와 판금 갑옷이 그걸 증명한다.
하지만 어째서인가.
남철민은 파티를 보호하기는커녕 대열을 이탈한 상태였다.
'잘 모르겠지만 상황이 좋지 않아.'
내가 밥값을 못 하는 상황.
마법사, 서정연은 우리 파티의 유일한 원거리 딜러였다.
나는 그녀의 말대로 자판기 쪽을 바라봤다.
과연, 자판기 뒤엔 두 마리의 놀 궁수가 있었다.
'화살을 재장전 중이구나.'
지금이 기회인가?
머리를 굴려본다.
그래, 기회다.
놀 궁수는 근접 전투력이 형편없다.
녀석들을 쓰러트리면 화살을 빼앗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전투력이 형편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게다가 이쪽은 이런 전투가 10여 년만이란 말이다.
또각─
하지만 그런 고민이 무색하게.
나는 유유히 걷고 있었다.
내 걸음걸이엔 여유가 넘쳤다.
마치 놀들 따윈 내게 접근조차 할 수 없다는 듯.
당당하게 놀 궁수를 향해 걷고 있는 것이다.
그래, 머리로는 온갖 변수와 위험성을 따지고 있었지만.
몸은 솔직했다.
나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은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놀 무리에게 겁을 먹기에는.
내게 덧씌워진 그랑펠의 자신감이 너무나도 컸던 것이었다.
"저, 저기요? 위험해요! 무기도 없...?"
문득, 귓가에 서정연의 고함이 들린 듯했다.
하지만 끝까지 듣진 못했다.
내가 듣지 못한 건지.
서정연이 말꼬리를 흐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크르릉!!"
송곳니를 드러낸 채.
적의를 드러내는 놀 두 마리.
또각─
나는 가뿐하게 그들에게 접근한 뒤.
또각─
두 녀석의 콧잔등을 주먹으로 가격했다.
그 일련의 동작에는 여유를 넘어서 기품이 느껴졌다.
그런 내 시야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내가 말했다.
"아무래도 훈육이 덜 된 모양이구나."
마치 키우는 사냥개를 나무라는 것처럼.
"내키진 않지만, 경우에 따라선."
그건 아득히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고압적인 귀족의 태도였다.
"체벌도 필요한 법이지."
...깨, 깨갱!!
◈ 3화. 교육이 필요하다면 (2)
성난 놀들의 발톱과 이빨을 피하고.
주먹을 내지른다.
그 간단한 동작을 반복하고 있을 뿐.
하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내 행동에는 조금의 군더더기도 없다는 것을.
피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공격이 빗나가면 그대로 물어뜯기는 건가?
과다출혈로 사망하는 게 아닐까?
사람이라면 응당 품을 수밖에 없는 생각.
그 걱정을 완전히 무시한 그랑펠의 정신과 육체.
『그의 자긍심은 더없이 무거우며 흔들리지 않는다. 설령 그 무게에 가라앉아 익사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설정'이 보잘것없는 악마 사냥꾼의 능력치를 백분, 아니 그 이상으로 표출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쯤 되니 나도 놀라울 정도였다.
'정말 중증 중2병이었구나. 나는.'
정말 목숨보다 멋이 우선인 위험한 놈이었어.
하지만 그 설정의 영향이라고 한들.
결국, 나의 맨손 격투 실력은 형편이 없었다.
'격투에 관한 스킬은 습득하지 못했으니까.'
퍽─
이쪽은 온 힘을 다해 내지른 주먹이거늘.
"크, 크릉!"
놀에겐 유의미한 피해를 주지 못했다.
...이거 장기전으로 가면 불리한 거 아닐까?
'내구도가 아깝지만 사용하는 수밖에 없나.'
머리로는 정말 이성적인 판단을 내렸건만.
내 행동에는 변화가 없었다.
처량하구나.
내 처지가 마치 호수 위의 백조 같았다.
타인이 보기엔 내 모습이 정말 놀들을 훈육하는 것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나는 진지하다.
백조가 호수에 떠 있기 위해 물갈퀴를 휘젓듯.
나도 최선을 다해 피하고,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그 속과는 무관하게 태평한 말이 튀어나왔지만.
"아직도 훈육이 부족한 것인가?"
그때였다.
서정연의 고함이 들려왔다.
"캐스팅 끝났어요! 피하세요!"
그녀의 지팡이에서 솟구치는 화염.
또각─
나는 이번에도 역시 기품이 넘치게 걸었다.
날아드는 마법은 파이어 애로우.
내가 마법사에 대해 아는 건 없다만.
저게 하급 마법이란 건 안다.
무엇보다 투사체 속도가 느렸다.
저래서야 빗나갈지도 모르겠군.
짐작하고 다음 행동을 생각하는데....
어째서인가, 놀들이 움직이지 않았다.
"깨, 깨갱!"
축 처진 꼬리.
으르렁거리는 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내가 그 모습을 보고 말했다.
"역시 들개에게 훈육은 비효율적이군."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내가 말하면서도 정말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결국 제 얼굴에 침 뱉기가 아니던가.
자중하자, 이호열.
다 과거의 업보다.
"아싸, 맞았다!"
불끈─
서정연이 주먹을 쥐어 보인다.
보고 있다가는 또 어떤 개소리가 튀어나올지 몰라.
나는 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화르륵─!
놀들이 불타 사라진 자리엔 아이템만 남아있었다.
[조잡한 화살]
[등급 : 노말]
[제한 : 없음]
[효과 : 없음]
[설명 : 조잡한 화살이다.]
[조잡한 호신용 장검]
[등급 : 노말]
[제한 : Lv.30]
[효과 : 공격 시, 낮은 확률로 상태이상 '광견병' 발생]
[설명 : 날이 무뎌져 공격력이 떨어진다.]
파티를 맺게 되면 기본적으로 경험치는 공유.
아이템은 그 기여도에 따라 습득 우선권을 가지게 된다.
물론, 그 시스템이 적용되는 건 레어 등급 이상의 아이템부터다.
그러니까 이건 눈치 볼 것 없이 챙기면 된다는 거지.
'화살은 서른두 발인가.'
당장은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다.
화살이야 다른 놀 궁수를 사냥하고 수급하면 될 테니까.
나는 인벤토리에서 활을 꺼내 들었다.
확실히 손에 감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
사격 마스터리 (21%) : 사격의 정확도가 상승한다.
───────
숙련도는 고작 21퍼센트.
'사냥보단 퀘스트를 수행하는 데 급급했으니까.'
궁수 계열 클래스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치겠지.
하지만 스킬이 존재한다는 것부터가 주먹으로 싸우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서정연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와, 활도 다룰 수 있으세요?"
당연하다.
주무기라 할 게 활밖에 없었으니까.
다른 파티원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엥? 무도가 계열 아니셨어요? 방금 주먹질하시는 게 영락없이 무술 같았는데. 그 뭐냐. 그래! 태극권인가? 막 공격을 흘리고, 받아치시는 게 딱 그거 같았는데!"
그건 태극권이 아니라 발버둥이었다.
"어쨌든 다행입니다. 원거리 딜러가 정연 씨밖에 없어서 신경 쓰이던 참이었는데."
그래, 나도 이제야 안심이 된다.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건만.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뭐라고 그랬더라?
내가 있으니 그대들은 걱정할 것 없다고?
'폼 잡는 것도 정도껏이지. 내가 그럴 입장이냐?'
또 그따위 개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아서.
다행스럽게도 화제는 곧바로 옮겨갔다.
대검을 치켜든 남자, 최정훈이 중얼거렸다.
"그건 그렇고, 오늘 저 형 왜 저래? 형! 철민이 형!!"
남철민을 부르는 것이었다.
남철민은 어느샌가 개찰구를 넘어간 상태였다.
그가 손짓했다.
"뭐해? 빨리 안 오고들?"
서정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원래 평소에도 저러세요? 제가 파티 사냥 경험이 많은 건 아닌데.... 탱커분께서 저렇게 혼자 앞서가시는 경우는 잘 본 적이 없어가지구...."
방패와 철퇴로 무장한 전사.
한성욱도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부터 이런 호흡이면 곤란한데 말입니다."
"하, 진짜 죄송합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철민이 형이 원래 저런 양반이 아니거든요? 근데 오늘따라 왜 저러지? 이따가 제가 한번 잘 말해볼게요."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그럴 만도 하겠지.
게임에서도 문제가 되는 행동을,
목숨이 달린 균열 안에서 한 셈이었으니까.
"그래도 철민이 형이 동선은 잘 잡았네요. 다른 파티랑 만나면 시간만 버리는 건데."
"...근데, 혼자만 너무 멀리 가신 거 아니에요?"
"그러게요. 제가 불러볼게요. 형! 철민이 혀ㅇ...?!"
슈슈슉─
그건 기습이었다.
매복하고 있던 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둘....
전부 열 마리였다.
아슬아슬하게 화살은 빗겨나갔지만, 수적으로 열세였다.
남철민이 합류한다고 해도 정확하게 배의 차이.
"철민이 형! 아니, 형!!"
그런데 남철민에겐 합류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최정훈의 얼굴이 붉어져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니, 씨발. 왜 그러는 건데!! 야, 남철민!!"
플랫폼으로 향하는 계단.
남철민은 그곳에서 놀에게 포위당한 우리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나는 그 눈동자를 바라봤다.
초점이 불분명한 새까만 눈동자.
어째서인가.
그 눈동자가 반갑게 느껴졌다.
'...뭐지? 아는 사람도 아닌데?'
반가움을 느낄 게 아니라 원망할 타이밍 아닌가?
그러나 그런 의문과 무관하게 나는 행동하고 있었다.
스윽─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은 정석적인 자세.
마치 양궁선수가 활시위를 당기듯.
나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채 놀들을 겨눴다.
슈슉─
활시위를 놓는 그 순간까지.
내 호흡에는 약간의 흔들림도 없었다.
"깨갱!"
헤드샷.
정확하게 머리에 명중.
단발에 쓰러지는 놀 전사 한 마리.
그런데도 기쁨의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랑펠이 차기 가주로서 가장 먼저 몸에 익힌 건 사사로운 것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것이었다.
클라우디 가문의 가주의 자리는 조금의 동요도 용납되지 않는 그런 자리였다.』
고작 놀을 쓰러트리고 기뻐한다?
그건 그랑펠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거겠지.
나 또한 같은 입장이었다.
슈슉─
또 한 번 헤드샷.
'남은 건 여덟 마리.'
나는 다시금 화살을 활시위에 걸었다.
놀들도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크르릉!!"
놀 전사들이 달려들었다.
최정훈과 한성욱이 놀 전사를 저지했다.
각각 두 마리의 놀 전사를 막아선 두 사람.
하지만 수적인 열세를 극복할 순 없었다.
"빌어먹을...! 조심해요!"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놀 전사가 두 마리.
활시위를 장전하는 놀 궁수가 두 마리 남았다.
마법을 캐스팅하던 서정연이 울먹거렸다.
"저기, 저는 어떻게 해야...?"
놀 전사들은 나와 서정연을.
놀 궁수는 최정훈과 한성욱을 노리고 있었다.
어떤 선택을 해도 피해가 따른다.
서정연은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무심하게 답했다.
"놀 궁수를 맡기겠다."
그와 동시에 내 손끝에서 화살이 떠났다.
적중.
서정연을 향해 달려들던 놀 전사가 쓰러졌다.
덕분에 서정연은 성공적으로 캐스팅을 끝마쳤다.
"제발.... 맞아라!!"
화르륵─!
파이어 애로우가 놀 궁수를 향해 뻗어 갔다.
동족과 뒤엉킨 최정훈과 한성욱.
두 사람을 맞히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던 놈들은 파이어 애로우가 날아드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열기를 느꼈을 땐 이미 늦었다.
이제 남은 건 나를 향해 달려드는 놀 전사였다.
"크르릉!!"
내겐 '속사' 스킬이 없었다.
화살을 재장전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도 내겐 놀에게서 획득한 호신용 장검이 있었다.
어떻게든 휘둘러서 막아내면 시간을 벌 수 있겠지.
그러나,
"유감이지만."
내가 들어 올린 건 검이 아닌 오른쪽 다리.
고고하게 뻗은 다리가 그대로 놀 전사의 머리를 후려쳤다.
퍽─!
첫 전투 때와 마찬가지로.
역습을 당한다는 선택지는 내 머릿속에 없었다.
그렇기에 내 육체로 표출될 수 있는 극한의 반응 속도.
"깨, 깨깽!!"
구둣발에 그대로 나가떨어진 놀 전사를 향해.
"내게 피를 튀기는 건 허락하지 않겠다."
푸슉─!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활시위를 당겼다.
.
.
.
나를 제외한 다른 이들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하아. 진짜 뒈지는 줄 알았네."
"매복하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근데 왜 말씀을 안 해주신 거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시선이 여전히 계단 위에서 우릴 지켜보고 있는 남철민을 향했다.
누구보다 화가 나는 건 최정훈이겠지.
"씨발. 형, 우리한테 뭐 감정 있어?"
그가 씩씩거리며 남철민에게 다가갔다.
그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씨발. 이건 영락없이 형이 우릴 함정에 빠트린 거잖아! 그래, 실수라고 쳐. 매복한 지 몰랐다고 쳐. 근데 왜 거기서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는 건데? 어?! 뭐라고 말 좀 해봐! 주둥이가 달렸으면!"
가까워지는 두 사람.
가만히 나눴다간 싸움이 날 게 뻔했다.
서정연과 한성욱이 최정훈을 양쪽에서 말렸다.
"이해는 되는데, 조금 진정하시죠."
"그래요. 여기서 싸워봤자 좋을 거 없잖아요."
"아니, 가만히 있어 봐요. 이건 나랑 형 문제니까. 형! 야, 남철민! 너 내가 형, 형 불러가면서 따라다니니까 진짜 뭐라도 된 줄 알았냐? 씨발, 제 동생 아니면 좆도 아닌 새끼가...."
나는 한 발짝 물러나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하하하! 크하하하하하!"
그 순간, 남철민이 웃음을 뱉었다.
동시에.
지지직─
희미하게 빛나던 전등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실성했나. 왜 갑자기 쳐 웃고 지랄인데?"
"하하하하! 하아.... 역시 재밌다니까."
"이게 재밌어? 씨발, 진짜 말 다 했냐?!"
나는 깜빡거리는 조명 속에서 남철민을 응시했다.
이해할 수 없는 기행.
파국으로 치닫는 주변의 분위기.
초점이 없는 새까만 눈동자.
그 눈동자를 보고 느꼈던 반가움.
결정적으로.
이 순간, 내 시야에 떠오른 글자까지.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
천적관계 : 악마족과 전투 시 전투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
또각─
나는 남철민을 바라보며 말했다.
"역시 너는 악마가 맞군."
◈ 4화. 악마 사냥꾼 (1)
반신반의했다.
'악마는 현실에서도 이런 식으로 출현하는 건가?'
...어째, 10년이 지났는데 발전이 없잖아?
지금의 전개가 악마 사냥꾼의 퀘스트와 비슷했으니까.
하지만 메시지가 떠오르는 순간 확신이 생겼다.
악마가 남철민의 몸을 차지했다.
순간, 머릿속에 커뮤니티의 정보들이 떠올랐다.
-진짜 악마족이 문제임
-깡레벨도 높은데 더 까다로운 게 상태이상 ㅆㅂ
-마법사나 사제 클래스는 그나마 정신력이 높으니까 버티는데 우리 같은 전사들은 버프나 포션 없으면 진짜 샌드백밖에 안됨요
확실히 현실의 악마는 까다로운 몬스터였다.
10여 년 전.
내가 퀘스트에서 조우했던 악마들과 똑같으리란 법도 없겠지.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악마 앞에서 그런 사사로운 가늠에 빠져있을 수 없다는 것을.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의 긍지는 모순적이게도 악마의 앞에서 가장 드높아진다.』
그래, 남철민에게 빙의한 악마가 어떤 녀석인지.
레벨이 몇이나 되는지.
어떤 상태이상을 유발하는지도 알 수 없다.
또각─
하지만 내 시야는 그 어느 때보다 선명했다.
올곧게 뻗는 걸음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악마와 조우한 이 순간, 나는 냉랭한 음성으로 말했다.
"역시 너는 악마가 맞군."
내 선언에 좌중이 경악에 휩싸였다.
최정훈이 말을 더듬었다.
나와 남철민을 번갈아 가며 보다가 뒷걸음질을 쳤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 악마라뇨?"
"악마족...!! 역시 불길한 느낌이 들었어요."
"잠깐, 악마족이면 저희들이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그 충격 속에서 남철민.
아니, 악마는 폭소했다.
"하하하하! 빨리도 알아차린다, 병신들아!!"
악마는 이 상황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즐겁겠지.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은 악마의 힘이 되니까.
"너희 인간들은 말이야. 너어어무우~ 가식적이야."
그러나 나는 그 떠벌거림을 들어줄 마음이 없었다.
"품격이 떨어지는군."
그런 내 손에는 어느새 은제 단검이 들려있었다.
"애초에 악마처럼 열등한 족속에게 품격이란 게 존재하는지도 모르겠지만."
물론, 악마에게도 명백한 상하는 존재했다.
악크샨에서 전직 퀘스트를 수행하며 지겹게 듣는 게 바로 그것이다.
하급, 중급, 상급.
그 위로는 '진명의 악마'들이 있으며 더욱 아득히 위로 올라가면 악마들의 왕을 자처하는 '마왕'들이....
그러나 말했다시피.
『그 어떤 악마의 유혹과 기만, 시련도 그랑펠의 고고한 긍지에는 흠집조차 낼 수 없다.』
그랑펠.
즉, 나에겐 모두가 똑같은 악마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내 행동에 망설임은 없었다.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
천적관계 : 악마족과 전투 시 전투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
천적 관계가 발동된 지금.
내 신체 능력은 비약적으로 상승한 상태였다.
슥─!
간결하고 재빠르게.
남철민의 목덜미를 향해 단검을 찔러넣었다.
팅─!
과연, 판금 갑옷인가.
목덜미 틈새까지 방어할 줄은 몰랐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너 미친 새끼구나? 나보다 더한 새끼 아니야? 방금까지 사이좋게 굴던 사이에 다짜고짜 칼을 휘둘러? 씨발, 뭐 이런 새끼가...?!"
그러나 나는 허락하지 않았다.
"나와 대화하려고 들지 마라."
"...뭐, 뭣?!"
"나는 사냥감과 말을 섞지 않는다."
슥─!
판금 갑옷을 은제 단검으로 뚫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그 이음새를 노리는 게 맞겠지.'
악마 앞에서 나는 본능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신체의 능력도, 두뇌의 회전도 확실히 놀을 상대할 때와는 다른 차원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푹─!
안쪽 팔꿈치에 은 단검을 찔러넣었다.
[스킬, '구마의식'이 발동됩니다.]
'구마의식의 효과가 어디까지 유효할지 알 수 없지만 상관없다.'
그 메시지가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내가 악마에게 유효타를 입혔단 소리였다.
악마가 소스라치게 놀라 몇 발자국 밀려났다.
"미친!! 은이잖아!!! 씨발, 너 뭐 하는 새끼야?"
대답 대신 다시금 단검을 휘둘렀다.
옆구리의 이음새.
무릎의 이음새.
그리고 목덜미의 작은 틈새까지.
울컥─
그 상처들에서 검은 피가 쏟아졌다.
악마가 말했다.
"미친 새끼.... 피 나는 거 안 보여?! 이러다가 진짜 이 새끼가 죽어버린다고. 나를 죽이면 이 녀석도 죽는다고!! 아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가 이 새끼랑 같이 죽을 거야. 내가 혼자 죽을 것 같아?!"
나는 반가움에 속으로 웃었다.
'어떻게 대사까지 10년 전이랑 똑같냐?'
응, 안 속아.
스킬, [구마의식]이 발동 중일 때 악마 사냥꾼의 공격은 오직 악마에게만 피해를 입힌다.
아무리 오래된 일이라고 해도 그 기본적인 상식까진 잊진 않았다.
내가.
그러나 내 얼굴에.
그 속내가 비치는 일은 없었다.
"사냥감은 그저 사냥당하기만 하면 될 뿐이다."
푹─!
*
"형, 너무 무리하지 말고. 위험한 균열은 되도록 피하고."
"알겠어. 자식아."
"농담 아니야. 요새 분위기 흉흉하잖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냥 우리 길드 들어오는 게 어때? 굳이 균열을 돌지 않아도 플레이어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왜, 분석관이라든가."
그저 못나게 살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형제인데, 좀 많이 다르네요."
"동생 얼굴에 먹칠 안 하려면 더 분발해야겠는데?"
"태민이 또 보스 레이드 성공했다며? 축하한다고 전해주라."
형보다 잘난 아우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남철민은 멋대로 움직이는 자신을 보며 생각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균열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기억이 흐릿했다.
다만, 떠올랐던 메시지만큼은 분명히 기억났다.
[하급 악마, 임프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정신력이 너무 낮습니다.]
[상태이상 : 빙의가 발생합니다.]
'...임프라고?'
200레벨의 악마족 몬스터, 임프.
남철민은 악마족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동생, 남태민에게 보고 들은 것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남철민은 이를 악물었다.
'들어가면 안 돼! 전멸이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 다른 파티. 다른 파티의 도움을 받는다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말이 튀어나왔다.
"근데, 뭐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여기가 환승역이라 그런가 꽤 크거든요? 루트만 잘 선택하면 다른 파티랑 안 겹치게 사냥할 수 있을 겁니다."
말 그대로 자신이 파티원들을 사지로 몰고 있었다.
"철민이 형! 아니, 형!!"
계속되는 돌발행동.
결국, 최정훈을 비롯한 파티원들은 놀 무리에 포위당했다.
'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움직여라.
제발 움직여.
도와줘야 한다고.
그러나 남철민은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저 우두커니 서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씨발. 왜 그러는 건데!! 야, 남철민!!"
다 자신의 잘못이었다.
자신의 능력 부족이었다.
무력감에 남철민의 마음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태민아, 정말 네 말대로 해야 했나 봐.'
그리고 그게 임프가 바라던 바였다.
남철민은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의식의 끈을 놓아버렸다.
들리는 건 오직 희미한 목소리뿐이었다.
"야, 남철민! 너 내가 형, 형 불러가면서 따라다니니까 진짜 뭐라도 된 줄 알았냐? 씨발, 제 동생 아니면 좆도 아닌 새끼가...."
그래, 최정훈의 말이 전부 맞았다.
자신은 그것밖에 안 되는 놈이었다.
"하하하. 크하하하하하."
그 뒤로 들린 건 오직 웃음소리뿐이었다.
나약한 자신을 비웃는 것만 같은 임프의 웃음소리.
그런데, 끊이지 않을 것 같던 그 비웃음이 멎어들었다.
"역시 너는 악마가 맞군."
...악마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어떻게?
그 말에 남철민은 다시금 의식의 끈을 붙잡았다.
그러자 시야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보였다.
'...임프를 압도하고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악마족이 까다로운 이유는 높은 레벨 때문만이 아니다.
악마들은 수시로 상태이상을 유발하기 때문이었다.
[공포], [절망], [피폐]....
그 악랄한 상태이상에 대응하기 위해선 높은 정신력 스탯.
혹은 그조차도 무시할 정도로 압도적인 레벨 격차가 필요하단 말이다.
'...근데, 이 남자는 대체 뭐지?'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이건 싸움이 아니었다.
그래, 사내의 말대로였다.
일방적인 '사냥'이었다.
임프가 울부짖는 소리가 남철민의 귓가에 울렸다.
남철민은 생각했다.
'...임프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고?'
그렇다면 나는 죽겠다.
남철민은 결심했다.
자신 때문에 파티원들이 사지에 빠졌다.
임프에게 몸을 빼앗겼다고 한들, 변명이 될 순 없겠지.
악마는 나약한 인간을 노린다고 들었으니까.
그것조차 자신의 탓이었다.
'죽어서라도 밥값은 해야 하지 않겠어?'
안 그러냐, 정훈아? 태민아?
다행스럽게도 사내에겐 조금의 망설임도 없어 보였다.
'유감스럽게도 그쪽에겐 은혜를 갚을 방법이 없겠습니다.'
남철민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푹─!
사내의 단검이 목덜미에 꽂힘과 동시에.
무언가 몸에서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끔뻑─
...어째서인가, 눈이 떠졌다.
"...?"
곧 지하철의 천장이 보였다.
지직거리던 전구가 빛나고 있었다.
눈이 부셔 찌푸려질 정도로 환하게.
그 가운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하지 않았나?"
그건 더없이 여유로워,
기품이 묻어나오는 음성이었다.
"내가 있으니 그대들은 걱정할 것 없다고."
*
[하급 악마, '임프'를 처치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다.
그 메시지의 개수를 세어보니 총 12개였다.
고작 임프 한 마리를 잡았는데, 무려 12레벨이 상승한 것이었다.
뭐야, 이거. 실화냐.
나는 임프와의 전투를 떠올려 봤다.
말 그대로 경험치를 쏟아내다시피 한 임프의 레벨을 가늠해 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차라리 임프보다 놀 쪽이 까다로운 상대였다.'
놀의 레벨은 고작 30레벨대였다.
그렇다면 뜻하는 바는 간단하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고 말했는데.'
이건 이미 내 기대치를 아득히 넘어섰잖아?
아무래도 악마 사냥꾼과 악마족의 '천적관계'는 내 예상보다 훨씬 확고한 모양이었다.
'하급 악마라서 그런 건가.'
어중간한 격차로는 거스를 수 없을 정도로 말이지.
메시지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스킬, '은 마스터리'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
은 마스터리 (24%) : 은제 무기에 추가 공격력과 특수 효과를 부여합니다.
───────
은제 단검으로 임프를 처치한 덕분에 스킬의 숙련도가 대폭 상승했다.
19퍼센트였던 숙련도가 단숨에 24퍼센트가 된 것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임프는 아이템을 드롭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쉬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대신 막대한 경험치를 얻었기 때문인지.
그게 아니라면 부귀영화에 연연하지 않는 그랑펠의 설정 탓인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런 것보다는.'
어쨌거나 뱉었던 말을 지켰다는 게 더 중요했다.
"말하지 않았나? 내가 있으니 그대들은 걱정할 것 없다고."
...못 지켰으면 진짜 쪽팔려서 죽었을 테니까.
나는 경험을 통해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랑펠이란, 흑역사를 뒤집어쓴 내 행동은 교정할 수가 없다는 것을.
목숨이 걸린 위기의 순간에서도.
꼿꼿하던 고개가 그를 증명했다.
그러니까 내가 적응할 수밖에 없다는 소리겠지.
다행스럽게도 내 적응력은 꽤 괜찮은 편인 듯싶었다.
"크흐흑. 감사합니다. 정말. 이 은혜는 제가 반드시...!"
"형, 괜찮아요? 참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후우. 다행입니다. 정말."
"와. 대박...!!"
내게 쏟아지는 부담스러운 시선들.
우러러보는 듯한 그 눈빛을.
나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 반응이 마치 당연하다는 것처럼.
나는 그저 생각했다.
'싸가지 하고는.'
요즘 젊은것들은 버릇이 없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니까?
*
──────────
제목 : 오늘 4호선 균열 공략 후기욧!! ><
작성자 : 정여늬
──────────
내용 : 오늘 공략은 진짜 큰일 날 뻔 했어요ㅠㅠ 파티장님이 임프한테 빙의되셔가지구ㅠㅠㅠ 진짜 저희 파티 전멸하는 줄 알았어여ㅠㅠ 근데 파티원 중에 엄청나게 강하신 분이 계셔가지구 임프를 진짜 막 때려잡아주셔서 살았어요!! 파티장님 죄송하고 고맙다고 막 울구 불구ㅠㅠㅠ
──────────
댓글 :
─군필여고생 컨셉충 정여늬 또 왔네ㅋㅋ 이젠 컨셉질도 모자라서 주작까지 하냐?
─주작도 좀 성의있게 하자 정연아 아무리 그래도 놀 파티에서 임프를 잡는 스토리는 너무 개연성이 떨어지지 않냐?
─하다못해 이름이라도 붙여주든가 그냥 파티원이래ㅋㅋ
─저기요 진짜 주작 아니거든요 ㅡㅡ? 그리고 이름도 물어보고 싶었는데… 진짜 님들도 봐야지 알아요 막 쉽게 말을 걸 수 없는… 뭐라고 그래야 하지? 막 포스가 있으셨다니까요?! 우리랑은 눈높이 자체가 다르신 느낌???
-??? 뭔 개소리야
368레벨.
플레이어 랭킹 11위.
남태민은 게시글을 읽다가 헛웃음을 뱉었다.
"그래서 형. 나더러 이걸 믿으란 거야? 진짜로?"
그 앞에는 그의 친형, 남철민이 있었다.
"응. 진짜야, 그거."
남철민의 얼굴은 더없이 진지했다.
"내가 임프에게 빙의됐다는 그 파티장이거든."
"뭐, 뭐라고?"
◈ 5화. 악마 사냥꾼 (2)
과연, 프리랜서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도 해가 지지 않았다니.
샐러리맨 시절엔 누릴 수 없던 광합성의 기회다.
마음 같아선 곧바로 햇살이 비치는 침대로 뛰어들고 싶었건만.
탁─
나는 걸쳤던 옷가지를 가지런히 옷걸이에 걸었다.
그것도 모자라 곧바로 화장실로 직행.
샤워기를 틀었다.
쏴아아─!
빌어먹을 귀족의 규율과 규칙!
이 피곤한 일상에도 슬슬 적응되어 가고 있다는 게 더 짜증이 난다.
그래도 좋게 좋게 생각하자.
청소가 지겹지 않게 느껴지는 건 확실히 좋은 일이었다.
"먼지가 많군."
...아무리 그래도 집안에서까지 마스크를 끼고 청소를 하는 건 유난스럽게 느껴졌지만.
청소까지 끝마치고 나니 해가 저물었다.
'그래, 내 팔자에 광합성은 무슨.'
곧바로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배달 음식이나 간편식으로 대충 끼니를 해결하던 나는 더 이상 없었다.
새벽 배송으로 도착한 신선한 식재료.
능숙한 솜씨로 다듬어 만들어 내는 요리들.
어떻게 귀족이 청소와 요리에 능통한 것인가?
묻는다면 그랑펠은 몰락한 귀족이었으니까.
"나쁘지 않군."
이 또한 먹고 살기 위해서 습득했다는 설정인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랑펠의 고고한 긍지는 손에 물을 묻히는 것 따위로 꺾이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선 귀찮으면서도 고마운 성격이다.
'어쨌거나 만들어 먹는 게 몸엔 더 좋을 거 아냐.'
실제로 나는 절제된 생활의 효과를 몸으로 느끼고 있다.
언제나 꼿꼿하게 편 덕분에 사라진 허리 통증을 비롯.
만성 피로, 불면증, 현대인이 달고 사는 자질구레한 질병들도 말끔하게 사라졌다.
물론,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니지.
거울을 바라보자 형광등에 머리카락이 빛났다.
'누가 보면 흰머린 줄 알겠네.'
클라우디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은발.
그 설정대로 내 머리카락이 은빛으로 탈색되어 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 은발 머리칼이 지금의 외형과는 꽤 잘 어울려 보인다는 것 정도일까.
쪼르륵─
나는 녹차를 우린 뒤 티타임을 가졌다.
'하나에 50원짜리 녹차로 유난이다. 진짜.'
생각하면서도 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근 며칠간 차를 즐기며 여유를 즐기는 법을 배웠으니까.
이 또한 그랑펠의 드높은 자존감의 영향이겠지.
'그래, 뭐가 됐든 먹자마자 컴퓨터 앞에 앉는 습관보다는 낫겠지.'
덕분에 생각하는 시간도 늘어났다.
그래서일까.
나는 꽤 그럴싸한 가능성에 도달할 수 있었다.
"...흑역사가 현실의 내게 영향을 끼친다."
하나둘, 내가 그랑펠의 설정을 자각할 때마다 그것들은 현실이 됐다.
그렇다면 설정상, 클라우디 가문 역사상 최고의 천재로 칭송되던 그랑펠의 '재능' 또한 실현되지 않았을까?
『그랑펠의 재능은 한 가지에 국한되지 않았다.
명석한 두뇌는 기본.
타고난 마법적 재능은 웬만한 마법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 흉내 낼 수 있을 정도였다. 더 나아가 그에 뒤지지 않는 육체의 잠재력까지.
그랑펠이 불과 7세의 나이에 가문의 후계자로 선택된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떠올릴수록 정말 중학교 2학년스러운 발상이다.
그냥 좋은 거, 멋있는 건 다 때려 박았잖아?
"심히 부끄럽군."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내 흑역사가 부끄러워서인지.
과한 찬사가 낯부끄러워서인지.
그건 차차 확인해 보면 알게 될 일이겠지.
그러기 위해선 몇 가지 시험이 필요했다.
"편리한 시대로군."
스마트폰으로 넷튜브에 접속.
나는 플레이어들의 영상을 검색했다.
과연, 있는 놈들이 더하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네.
수백만 구독자를 보유한 플레이어들의 채널이 떠올랐다.
-균열 공략 실황 17화 ─ 그리핀의 둥지
-플레임 위자드가 어떤 스킬을 사용하냐고?
-비전투직 클래스 연금술사의 하루는? Vlog편
하나같이 그 조회 수가 어마어마했다.
이해는 됐다.
일반인들은 균열에 접근은커녕 균열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도 없으니까.
몬스터를 사냥하는 균열 속 플레이어들에게 흥미가 생기는 건 당연하겠지.
물론, 균열이 붕괴되면 현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볼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재난이지, 더 이상 구경거리가 될 순 없었다.
나는 적당한 동영상 하나를 선택했다.
"?"
재생하려던 찰나, 문자가 날아왔다.
그 번호를 확인하니 남철민이었다.
딱히 번호를 교환한 적은 없지만 구인 글을 보고 내가 먼저 남철민에게 연락했었으니까.
그에게 내 번호가 남아있던 거겠지.
...무슨 말이 이렇게 길어?
긴 내용의 문자를 요약하자면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것도 당장, 그게 안 된다면 내일이라도.
이런, 목적은 알 수 없지만 곤란하다.
"집중을 요하는 작업이다."
유감이지만.
이건 내 플레이어 인생이 뒤바뀔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나는 짧게 답장한 뒤 영상을 재생했다.
스킬과 마법이 난무하는 보스 레이드 영상.
한참 동안.
그 영상을 꼿꼿한 자세로 지켜보던 내가 입을 열었다.
"충분하겠군."
*
청담동 소재의 고급 식당.
남철민과 남태민.
형제는 약속 장소에서 대기 중이었다.
"나는 아직도 반신반의하다."
"절반이나 믿어주는 거야? 못난 형을? 고맙네."
"형, 자꾸 그렇게 말할래?"
남철민은 남태민이 발끈하자 웃음을 터트렸다.
'그땐 왜 몰랐을까.'
자랑스러운 동생, 태민이.
"사람마다 다 그 재능이라는 게 다른 거야. 나는 무식하게 게임만 했던 거고. 형은 그저 플레이할 시간이 부족했던 것뿐이었잖아. 아르카나에 대한 지식엔 나보다 형이 더 빠삭할걸? 장담해."
그런 녀석이 자신을 진심으로 인정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런 동생에게 열등감이나 가졌다니.
남철민은 진심으로 자신의 미련함이 부끄러웠다.
"장난이야. 장난."
"하도 속을 알 수 없는 양반이라 믿어야 하는지...."
"그래도 내가 한 입으로 두말은 안 한다. 제대로 해볼 거야, 분석관."
"그 말, 녹음해도 돼?"
"그러든가."
"하아, 이걸 진짜 믿어?"
남철민은 플레이어를 그만두겠다고 결심했다.
남태민의 제안을 받아들여 길드의 분석관으로 활동할 생각이었다.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건 당연하게도 임프에게 몸을 빼앗긴 경험 덕분이었다.
'내 부족함은 진작 알고 있었다. 그것보단.'
절망 속에서 자신을 구해줬던 사내.
그에게 은혜를 갚을 길이 이 길밖에 없었거든.
그는 그저 임프를 물리친 게 아니었다.
마음을 다잡고 나아갈 수 있게.
자신을 구원해 준 것이었다.
남철민도 그에게 걸맞은 보답을 하고 싶었다.
"이쯤 되니까 궁금해진다. 형이 플레이어를 잘못 볼 일은 없고.... 진짜 임프를 사냥했다는 거지? 그것도 압도적으로?"
남태민의 질문에 남철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압도적이라고 하기도 부족하지. 뭐라고 해야 하나? 그 임프와 싸우는 도중에도 상태이상은커녕 조금도 긴장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거든."
"형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근데, 이해가 안 되네?"
남태민은 답답해서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왜 그런 플레이어가 저렙 균열에 들어간 걸까?"
그 이유야 간단했다.
당시 사내, 호열의 레벨은 55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나 남태민과 남철민이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순 없었다.
남태민이 미간을 찌푸리곤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전투도 솔직히 의문이야. 상태이상에 저항했다는 건 정신력 스탯이 어마어마하다는 건데.... 그 사람, 단검으로 싸웠다면서? 마법이 아니라."
"맞아."
"아르카나에 수천 개의 클래스가 있다지만, 도저히 짐작이 안 된다."
절레절레.
남태민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답답한 것과 가능성은 별개였다.
"...그러니까 반드시 영입해서 알아보고 싶어지네?"
무엇보다 형이 인정한 플레이어가 아니던가?
남태민이 11위 랭커가 될 수 있었던 덴 남철민의 도움이 컸다.
보스의 패턴 분석부터.
길드의 운영 방향성.
새로운 플레이어의 영입까지.
형의 도움이 없었다면 자신은 이 자리에 올라서지 못했을 것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뭐, 고마운 마음도 크고."
게다가 그런 형을 도와줬단다.
그러니까 남태민은 그런 고마움을 담아서 영입 계약서를 작성했다.
그 계약서를 다시금 살피던 남태민은 혀를 찼다.
"우리 신입들, 아니 간부들도 절대 못 보게 해야겠다."
"왜? 보면 난리 날 정도야?"
"당연하지. 이건 뭐, 우리 쪽이 손해만 보는 장사야."
그러나 그만큼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겠지.
남태민은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편안한 마음으로 답신을 기다렸다.
지이잉─
"답장 금방 왔네. 뭐래?"
진동이 울린 순간에도.
남태민은 태평하게 오렌지 주스를 들이켰다.
"...곤란하다는데?"
"?!"
주르륵─
그런 남태민의 입에서 주스가 흘러내렸다.
"뭐, 뭐, 뭐?! 어디 봐봐!!"
믿기지 않아서 직접 문자를 확인하니 더욱 가관이었다.
-곤란하다.
딱 네 글자였다.
그 기나긴 문자에 대한 답신이었다.
그러나 남태민이 누구던가?
그는 그 짧은 문자에서 낌새를 포착했다.
"...거절이 아니라 곤란하다는 거잖아."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역시, 다른 길드에서 먼저 제안을 받은 건가?"
플레이어는 많지만, 가치 있는 플레이어는 귀하다.
길드들이 루키 영입에 혈안이 된 이유였다.
무엇보다 대한민국에서는 될성부른 플레이어를 영입하는 게 더욱 어려워졌다.
서울에 솟아난 [마법사의 탑].
덕분에 내로라하는 대형 길드들이 전부 서울에 머물고 있었으니까.
남태민의 가늘어진 눈매는 그 경쟁자들을 향한 것이었다.
"이 새끼들아. 아무리 그래도 서울은 우리 집 안방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 '가온'.
그러나 세계로 나가면 그 위치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기도 벅차다.
남태민은 그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한 명의 플레이어라도 빼앗길 순 없었다.
"형, 좀 구체적으로 말해줘 봐."
"뭘?"
"그 남자가 어떻게 생겼냐고. 여차하면 직접 발로 뛰어가면서 모셔 와야 할 것 같아서 그래."
"어떻게 생겼냐니...."
그 말에 남철민은 기억 속의 사내를 떠올렸다.
와이셔츠에 슬랙스, 그것도 모자라서 구두까지.
"첫인상은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었지."
균열 안에서는 제대로 아이템을 착용하긴 했지만....
누가 봐도 균열을 공략하러 왔다기엔 부적절한 복장이 아니었던가?
게다가 구두는 끝까지 그대로 신고 있었다.
그러나 균열에서 사내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놀과 뒤엉켜서 육탄전을 벌이는 순간.
함정에 빠져 포위를 당한 순간.
심지어 임프와 직면한 순간에도.
사내에겐 변화가 없었다.
그 모든 것을.
마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태도였다.
"...근데, 그걸 말로 표현하기가."
고심하는 남철민에게 남태민이 물었다.
"무슨 환상의 동물이라도 봤어? 왜, 설명도 못 해?"
...환상의 동물?
그 소리에 불현듯 떠올랐다.
"...그래!"
현시대의 대한민국에 존재하지 않았기에 본 적도 없었지만.... 이보다 사내의 모습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단어도 없으리라.
"귀족 같았어. 그것도 굉장히 고귀한."
"...엥?"
*
"충분하겠군."
그건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였다.
영상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머릿속에 어지러이 흘러가는 생각들이 있었다.
그건 멋있다, 부럽다, 따위의 원초적인 감정이 아니었다.
나는 마법을 보고 '분석'하고 있었다.
"!"
머릿속에 마법의 개념이 떠올랐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겠지.
그 근본을 따지자면 저건 마법이 아닌 스킬이었으니까.
그러나 내게는 보였다.
뒷받침할 충분한 마력만 충족된다면 저 마법을 발현할 수 있다는 확신이...!
당연하게도 그건 '이호열'의 재능이 아니었다.
"아직 머리가 굳진 않은 모양이지."
클라우디 가문, 역사상 최고의 천재.
그랑펠의 재능이 확실했다.
물론, 아직 속단하기에는 이르다.
그러나 가능성을 봤으니 투자해 볼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게다가 그 가능성은 여러 곳으로 열려있었다.
마법뿐만 아니라, 검술, 궁술....
그랑펠의 재능은 한 곳에만 발현된 게 아니었으니까.
장하다, 과거의 이호열.
그래, 기왕 설정할 거면 멋있고 좋은 건 다 때려 박아야지.
어차피 쪽팔린 건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흑역사 앞에서 당당해지자.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은 알게 됐으나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검술, 궁술, 마법....
당장 진로를 정해봤자 딱히 득이 될 건 없었으니까.
그건 악마 사냥꾼이라는 애매한 클래스의 특징 때문이었다.
하지만 애매하다는 말이 꼭 모든 게 단점일 때만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래, 모든 게 장점일 때도 애매하다는 말이 나올 수 있잖아?
그게 아니더라도 당장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는 게 좋겠지.
"그렇다면."
슬슬 아껴뒀던 스탯 포인트를 투자하자.
[보유 포인트 : 12포인트]
나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 6화. 클래스 퀘스트 (1)
아르카나의 스테이터스 시스템은 간결한 편이다.
초기 스탯은 전부 1포인트에서 시작.
레벨 업마다 1포인트가 주어진다.
플레이어는 클래스의 특색에 맞게 원하는 스탯에 포인트를 배분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상태창을 바라봤다.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67]
[능력치]
근력 : 21 / 민첩 : 26 / 마력 : 11 / 행운 : 1
[보유 포인트 : 12]
당연하게도 악마 사냥꾼은 클래스 고유 능력치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도 모자라 잡스럽게 투자된 스탯까지.
'이건 어쩔 수가 없었지.'
당시 악마 사냥꾼은 이렇다 할 육성법이 존재하지 않았거든.
성능은 제쳐놓더라도 절대적인 플레이어의 숫자 또한 적었으니까.
애매한 클래스답게 모든 능력치를 애매하게 투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어째, 지금 와서도 딱히 달라진 건 없지만.'
이건 몰라서가 아니라 가능성을 열어두기 위한 거니까.
그런 생각의 차이가 존재하니 괜찮겠지.
나는 포인트를 투자했다.
[능력치]
근력 : 23 / 민첩 : 28 / 마력 : 18 / 행운 : 1
[보유 포인트 : 1]
근력과 민첩에 각각 2포인트.
상대적으로 낮았던 마력에 7포인트를 투자하자 1포인트가 남았다.
원래라면 나머지 1포인트도 마력에 투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가.
고작 1포인트에 불과한 행운이 눈에 밟혔다.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인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이하 그랑펠은 그 악마에게 복수하기 위해 악마 사냥꾼의 길을 걷게 됐다.』
"...."
불현듯 그 설정이 떠오르는 이유는 왜일까.
그저 멋대로 써 내려간 그랑펠의 설정이었지만 지지리 운도 없지.
행운이 고작 1포인트에 불과해서 그런 역경을 겪었나, 싶을 정도로 기구한 인생이란 것이다.
거기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는 건 아니다.
느끼는 게 이상한 일이지 않을까.
그랑펠, 그의 설정을 감당하고 있는 것은 나였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연민에 가까웠다.
[보유 포인트 : 0]
앞으로 고생할 나에 대한.
겸사겸사 그랑펠의 기구한 삶에 대한 연민.
'연민치고는 꽤 큰 투자라고, 이건.'
그야 아르카나에서 행운 스탯에 대한 취급은 그다지 좋지 못했으니까.
행운은 근력 같은 다른 스탯들처럼 직관적인 체감이 없는 스탯이었기 때문이었다.
흔히 하는 말로 가성비가 떨어진다는 표현이 맞겠지.
비전투직, 그것도 극히 한정적인 클래스들만 행운에 신경을 썼다.
그것조차 핵심 스탯은 아니었던 기억이 있었다.
행운 : 2
고작 1포인트였지만.
생각하기 나름 아니겠어?
행운이 두 배가 됐다고 생각하자.
물론, 지지리 없는 운이 배가 되어봤자 티는 나려나 싶지만.
.
.
.
그러나 배가 된 행운의 효과는 곧바로 드러났다.
그것도 명백하게.
다음 날 새벽.
"...?"
눈을 뜬 내게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퀘스트라고?
*
아르카나가 게임이던 시절.
퀘스트는 흔한 것이었다.
"아 또 잡퀘야."
"그냥 거절해. 보상도 별로 아님?"
"친밀도가 떨어지잖아. 어떻게 올린 친밀도인데."
"그거 연계 퀘스트까지 가봤자 포션 몇 병 주는 게 끝이잖아. 나 같으면 그 시간에 사냥이나 더 하겠다. 득템 하나만 해도 포션 값도 넘게 벌걸?"
보상과 난이도를 따져가며 골라서 수행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아르카나가 현실이 된 지금.
퀘스트는 고레벨 플레이어들의 특권이 됐다.
그 이유야 간단했다.
퀘스트를 주는 NPC들이 현실에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마법사의 탑이 솟아남과 동시에.
그 안에 상주하는 마법사 NPC들도 함께 현실에 나타났다.
그것처럼 현실엔 아르카나의 NPC들이 존재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내 평생 이런 일을 겪게 될 줄이야."
"이곳이 모험가님들의 세계군요. 어둠 속에서 반짝거리는 게 아름다워요."
우리와 마찬가지로 NPC들도 대격변에 적응해 갔다.
"언제까지 두고 볼 수만 있을 순 없겠군."
"균열! 아무리 봐도 그게 이 문제의 원인이라고!"
"더 이상 모험가님들의 세계에 폐를 끼칠 순 없어요."
그 환경에 맞는 새로운 퀘스트를 플레이어에게 내어줬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새로운 퀘스트를 수행할 수 있는 건 고레벨 플레이어들뿐이었다.
"흠, 아무리 봐도 자네는 수련이 부족해 보이는데?"
"아무래도 모험가님에겐 무리일 것 같군요."
"그 부탁은 이미 다른 모험가님께서 들어주셔서...."
현실의 퀘스트는 상위 플레이어들과 하위 플레이어들의 격차를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
때문에, 플레이어들이 퀘스트에 민감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야, 균열에서 돌발퀘 하나 떴다는데?!
-ㄹㅇ? 어디임? 나도 바로 간다
-진짜 돌발퀘에 달려가는 처지가 서럽다ㅠㅠ
-이럴 줄 알았으면 회사 때려치우고 아르카나만 했지 에효 고렙들은 연계 퀘스트 깨고 랭커들은 메인 퀘스트 건드리기 시작했는데 우린 뭐냐??
...그래, 그게 새로운 상식이란 말이다.
나는 퀘스트창을 다시금 확인했다.
[클래스 퀘스트 : 반격의 서막]
"...클래스 퀘스트라니."
뭔데, 이거?
클래스 퀘스트.
내게는 그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그냥 봤을 때 클래스, 악마 사냥꾼과 관련된 퀘스트 같긴 한데....
퇴마, 훈련, 명상 등등.
문득, 악크샨에서 수행하던 퀘스트들이 떠올랐다.
'아니, 그건 평범한 퀘스트였어.'
클래스라는 거창한 수식어가 붙어있지 않았단 말이다.
당연하게도 나는 고민하지 않았다.
곧바로 검색창에 클래스 퀘스트를 검색했다.
-성기사 클래스 랭킹 1위, '가이버'.
클래스 퀘스트 시작....
성기사 클래스 최초로 플레이어 랭킹 10위권 진입 가능해질까?
기대의 목소리 커져....
그에 대한 정보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클래스 퀘스트.
그건 같은 클래스를 가진 수많은 플레이어 중.
오직 단 한 명에게만 주어지는 퀘스트였다.
그 퀘스트의 내용은 각기 달라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 거창한 퀘스트가 어째서 내게 떠올랐는지 말이야.
"정말 나밖에 남지 않은 모양이군."
[클래스 퀘스트 : 반격의 서막]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악마들에게 반격의 때가 왔음을 알려라.
─악마를 처치하라. (성공)
그래, 악마 사냥꾼은 나밖에 없었으니까.
그 대단한 클래스 퀘스트가 내게 떠오른 것이었다.
퀘스트가 시작된 건 퀘스트창에도 나와 있듯 내가 악마, 임프를 쓰러트린 덕분인 듯싶었다.
...이거 보고 있자니 욕망이 생긴다.
대충 기사를 읽은 것뿐이지만.
클래스 퀘스트의 보상은 척 봐도 대단한 것 같았다.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기사가 뜨고, 랭킹 10위권에 진입할 수 있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을 보면 말이야.
그러나 그 욕망이 표출되는 일은 없었다.
그야 당연하지 않은가?
그랑펠에게 이 모든 것은 지극히 당연하였으니.
악마를 처치했던 것.
그로 인해 클래스 퀘스트의 주인공이 된 것.
그 클래스 퀘스트를 성공하고 거머쥐게 될 보상까지.
그랑펠....
아니, 나는 그 모든 게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설렘으로 두근거리기는커녕.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뛰는 심장박동이 그 증거다.
나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지극히 소시민적이던 내 가치관이 뒤바뀌고 있어.'
정말 위대한 가문의 후계자가 된 것처럼 말이지.
그러나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플레이어로, 더욱이 악마 사냥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그랑펠의 설정은 내게 필수적인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이것 하나만큼은 명심하자.
"...과거에 빠져있기에는 나는 아직 젊다."
그랑펠은 내 흑역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 흑역사는 몰입하는 게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그렇게 다짐한 내 시야 속 퀘스트창이 점멸했다.
"!"
새로운 퀘스트 목표가 떠오른 것이다.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불현듯 떠오르는 악크샨 기지에서의 기억.
'...잠깐, 이 퀘스트 설마?'
이건 수많은 악마 사냥꾼 플레이어들이 계정을 삭제하게 만들었던, 그 악랄하고 고통스러운 퀘스트잖아?!
나는 탄식했다.
아무래도 행운의 약빨이 다한 모양이다.
그러나 그 감정 또한 겉으로 표출되지 않았다.
"...1포인트 더 투자할 걸 그랬군."
가엾구나, 이호열.
역시, 빌어먹을 설정 탓에 고생하는 건 나뿐이었다.
*
악크샨 기지.
악마 사냥꾼들의 주둔지.
그렇게 말했을 때, 모르는 사람이 보면 굉장히 있어 보이겠지.
멋에 환장한 나도 그에 속아 악마 사냥꾼이란 클래스를 선택했었으니까.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그 실상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열악한 시설!
노가다 퀘스트와 별다를 게 없는 전직 퀘스트!
의욕을 증진시키기는커녕 윽박만 질러대는 NPC들까지!
물론, 거기엔 그럴싸한 이유가 덧붙여 있었다.
"악마는 인간의 탐욕을 호시탐탐 노린다. 그렇기에 악마 사냥꾼은 언제나 청렴해야 한다."
"강인한 육체에 강인한 정신이 깃드는 법이다. 악마 사냥꾼이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강인한 육체를 만드는 게 우선이다!"
"악마 사냥꾼으로 살다 보면 예상치 못하게 목숨을 잃는 것은 흔한 일이지. 악마들은 남겨진 이들의 상실감 또한 노리고 있으니, 악마 사냥꾼들에게 과한 유대감은 독이 된다. 나와 친하게 지내려고 하지 마라."
...크고 나서 생각해 보니까 어이가 없는 설정이었다.
괜히 인기가 없던 게 아니라니까?
그러나 과거의 나는 그 설정을 듣고 오히려 악마 사냥꾼이란 클래스에 더더욱 매료됐다.
온갖 불합리함을 참아내고 결국엔 악마 사냥꾼이란 클래스를 쟁취했단 소리였다.
'...정말 중증 중2병이었단 소리지.'
개고생을 하고 있으니까 별생각이 다 나는군.
"후우─"
나는 팔굽혀펴기를 계속했다.
팔뚝이 마비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클래스 퀘스트 : 반격의 서막]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악마들에게 반격의 때가 왔음을 알려라.
─악마를 처치하라. (성공)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진행 중) ▼
'뭐라도 좀 바뀌어야 하는 거 아니냐?!'
클래스 퀘스트라잖아.
단 한 명밖에 수행할 수 없는 퀘스트라면서?
근데 어떻게 시작부터 악크샨 기지의 퀘스트와 다를 게 없냐고!
게다가 이건 가상현실이 아니라 진짜 현실이었다.
훈련량에서 오는 후유증을 감당하는 건 나의 몫이란 소리였다.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진행 중) ▲
●20KM 달리기 (성공)
●팔굽혀펴기 1,000회 (진행 중)
●턱걸이 500회 (성공)
●버피 테스트 300회 (성공)
오늘로써 일주일이었다.
저 퀘스트 목표는 날마다 갱신됐으니까.
일주일째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저 훈련량을 소화해 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근육통이 사라질 생각을 않는 게 당연하지!
그러나 나의 투정은 머릿속에 머물다가 사라질 뿐이었다.
마치 이 퀘스트만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나는 성실하게 목표를 달성해 나갔으니까.
『그랑펠의 드높은 긍지란, 가문이란 배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타고난 것이었다. 그 어떤 시련 앞에서도 변하지 않는, 말 그대로 하늘이 내린 천성.』
그러니까 나는 성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랑펠에게 성실이나 근면하다는 설정을 붙인 기억은 없었다.
중2병 환자가 성실하고 근면하면 그것도 나름대로 이상한 일 아니겠는가.
모든 것은 그 잘나신 긍지를 지키기 위해서일 뿐.
파르르─
바람 한 점 없이 쾌청한 날씨.
통증으로 후들거리는 팔뚝을 보고도.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부는군."
이렇게 뻔뻔하게 말할 수 있는 거겠지.
그러나 확실한 건 이 긍지란 게 없었다면.
'...절대 못 했겠지?'
나는 고작 하루도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 달리기에서 진작 포기했을걸?
"마지막이군."
...어쨌거나 장하다, 나.
오늘도 노가다 퀘스트를 성실하게 수행했구나.
그런 내게 평소와 다른 메시지가 떠올랐다.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그 말에 나는 시스템창을 열었다.
인벤토리는.... 그대로.
그 대신 상태창이 점멸하고 있었다.
나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
레벨은 그대로였지만 스탯에 변화가 있었다.
...클래스 퀘스트, 호들갑 떨 만하잖아?
◈ 7화. 클래스 퀘스트 (2)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67]
[능력치]
근력 : 23 / 민첩 : 28 / 마력 : 18 / 행운 : 2
[보유 포인트 : 0]
다행히도 그랑펠의 명석한 두뇌는 직전의 수치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덕분에 스탯의 변화가 한눈에 보였다.
[능력치]
근력 : 25 / 민첩 : 30 / 마력 : 18 / 행운 : 2
[보유 포인트 : 0]
근력과 민첩이 무려 2포인트씩 상승했다.
...이렇게 받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크다, 이건.
4포인트의 스탯 상승이라는 건.
레벨이 무려 4단계나 올랐다는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계산하고 넘어갈 게 아니다.
'정작 레벨은 그대로니까.'
나는 같은 레벨의 플레이어보다 무려 네 걸음.
아니 그 이상 앞서나갈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스탯을 올려주는 아이템의 가격을 생각해 보자.
'고작 1포인트만 올려줘도 수백만 원, 그 이상부터는 1포인트당 가격이 널뛰기했었지.'
어쩌면 이건 내 직장인 시절, 연봉을 가지고 와도 부족할 정도의 보상일지도 몰라.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나는 퀘스트창을 바라보다가 흠칫했다.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스탯을 상승시켜 준 퀘스트가 반복 퀘스트란다.
물론, 퀘스트의 보상이 지금과 똑같으리란 법은 없다.
하지만 단 1포인트라도 훈련을 통해 능력치를 상승시킬 수 있다면...!
이건 할 수 있을 때마다 반복해서 수행해야 하는 퀘스트였다.
그쯤 되니까 이해가 됐다.
클래스 퀘스트를 시작했단 것만으로도 기사가 쏟아지고, 랭킹 최상위권을 노려볼 수도 있겠단 말이 나왔는지를 말이야.
나는 퀘스트창을 바라봤다.
─악마를 처치하라. (성공)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첫 퀘스트 보상부터 이 정도니까....'
연계 퀘스트의 보상으로는 어떤 게 기다리고 있을까?
사람이라면 응당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안 된다.'
그러나 나는 기대하지 않았다.
이것만큼은 그랑펠의 영향이 아니라 온전히 나의 의지였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그래, 주제 파악을 잊어선 안 된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순수하게 기뻐해도 되지 않을까?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지난 일주일간의 고된 훈련의 후유증이 아직도 몸에 남아있었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땀으로 흠뻑 젖은 셔츠와 슬랙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은 두 다리.
그러나 나는 조금의 지체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의 모습이 그랑펠이라는 나, 이호열의 흑역사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대체 긍지가 뭐길래. 무엇 하나 솔직하게 표현할 수 없는 걸까.
나는 생각하다가 생각할 것도 문제라 관뒀다.
사춘기가 다 그렇지. 뭐.
.
.
.
스탯이 올랐다.
육체의 피로가 말끔하게 사라지는 부가 효과 같은 건 없었다.
그러니까....
집으로 돌아온 나는 수전증처럼 떨리는 손으로 식사를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메뉴에는 흠잡을 것 없다.
닭가슴살과 신선한 채소.
호밀빵까지 곁들인 아주 양질의 식사.
문제는 칼질이었다.
뚝뚝─
나는 삐뚤빼뚤 썰린 채소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뻔뻔하게도 말했다.
"때론 색다르게 손질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유달리 삐뚤게 썰린 당근 조각을 들고선 말을 잇는다.
"이건 마치 밤하늘의 별을 형상화한 것 같군."
어련하시겠어.
어째 갈수록 뻔뻔해지는 느낌이지만.
이 또한 적응해야 하는 것이었다.
말했다시피 내 얼굴에 침 뱉기밖에 더 되겠어?
...그래도 변명거리 하나 정도는 만들어 두자.
예전 같았으면 5분 내로 해치웠을 메뉴였다.
호밀빵을 반으로 가르고 그 안에 닭가슴살 샐러드를 넣는다.
샌드위치로 간단하게 끼니를 때울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양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쥐고 아주 우아한 식사를 했다.
팔뚝이 덜덜 떨리는 바람에 닭가슴살 샐러드를 테이블에 흘리고 말았지만.
"...독살."
작은 실수조차 나의 긍지는 허락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부분에 농약이 남아있던 모양이군."
나는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머리를 다쳤단 변명은 어떨까?'
무슨 스탠딩 코미디 찍는 것도 아니고!
역시, 미친놈 보듯 하는 것보단 동정의 시선이 낫지 않을까?
보는 눈이 없어 천만다행인 식사가 끝난 뒤.
나는 곧바로 테이블 위의 종이뭉치를 집어 들었다.
거기엔 내가 넷튜브 영상을 보며 써 내려간 마법의 개념이 적혀있었다.
내가 적은 거지만 볼 때마다 어이가 없단 말이야?
'무엇보다 이게 이해된다는 게 더 어이가 없어.'
──────
마법이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게 아니다.
대상을 『탐색』하고.
대상에 『간섭』하여.
『발현』하는 것이다.
대다수의 마법은 마나를 탐색하고 간섭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마력은 그 마나를 탐색하고, 간섭하는 데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
──────
나름대로 그럴싸했다.
단순하게 '스킬'로 분류되는 게 아니라,
정말 『마법』이란 개념이 존재하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뭐, 내가 맞게 이해한 건지는 모르겠다만.'
나는 영상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탐색』과 『간섭』의 과정까지 이해한 상태였다.
그러나 나는 아직 마법을 『발현』하지 못했다.
마력에 스탯을 투자했음에도 넷튜브 영상 속,
마법을 발현하기엔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 마법사는 레벨이 300에 가까웠으니까.'
마력도 그와 비슷한 수치인 게 당연하겠지.
물론, 단순하게 마력이 부족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 또한 긍지를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인지.
지금의 나로서는 알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내 마력이 저 마법사 수준까지 올라서길 바라는 것도 양심이 없는 일이었으니.
결국 보다 쉬운 마법을 『탐색』,
『간섭』하는 수준까지 파고들 수밖에 없단 소리였다.
'팔자에도 없는 공부를....'
영상 속 마법 하나를 분석하는 데 걸린 시간, 사흘.
또 다른 마법을 분석하려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그런 감정과 별개로 내 행동엔 망설임이 없었다.
나는 다시금 넷튜브에서 영상을 재생.
곧바로 빈 종이에 글자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적응이 되면 시간 또한 단축되겠지."
부디 이 자신감이 허세가 아니기를.
뱉은 말을 지킬 수 있기를 간절히 빌면서.
*
저녁 8시.
국제기구, Anti Arcana United.
AAU 한국 지부 사무실의 전등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빌어먹을, 목요일."
그 야근은 매주 목요일마다 이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성현준은 책상에 납작 엎드렸다.
목요일마다 과거가 그리워졌다.
아르카나가 아직 게임에 불과하던 그 시절이.
"어디 갔냐고. 내 워라밸아!!"
세계 최고의 가상현실게임, 아르카나 대륙 전기.
그 아르카나를 개발한 '코스모'에 취직했을 땐.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았다.
코스모가 어떤 회사인가?
CEO, 레이먼 션부터 워라밸의 신봉자.
그러면서도 연봉은 동종 업계 최고 수준으로 챙겨주는.
모든 개발자에게는 꿈의 직장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CEO가 행방불명이 되면서 모든 게 바뀌었다.
아르카나는 더 이상 게임이 아닌 현실이 됐다.
코스모가 문을 닫는 건 시간문제였다.
임원부터 말단, 하다못해 청소부까지.
행방불명된 CEO를 제외한 모든 코스모의 직원들은 세계 각국의 법정을 제집처럼 드나들듯 했다.
그 기나긴 재판 끝에 내려진 건 증거불충분.
그리고 지금이었다.
"...진짜 레이먼, 넌 내 손에 잡히면 죽을 줄 알아라."
성현준은 AAU 한국 지부에 강제로 취직했다.
그래, 감사할 따름이다.
요즘 같은 취업난 시대에 공기업에 한 자리를 챙겨주다니.
그것도 경험을 살려 국제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감사함과 억울함은 별개의 감정이었다.
성현준이 옆자리의 선배에게 물었다.
"선배, 그래도 이번 주까진 신규 업데이트 없겠죠?"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8시까지 공지 없는 거 보면 없는 거 맞겠죠?"
신규 업데이트.
그건 아르카나의 현실 침식을 다르게 표현한 말이다.
현실에 덧씌워져 가는 아르카나의 모습들.
신규 업데이트보다 적절한 표현도 없을 테지.
당연하게도 그 업데이트의 여부를 성현준과 같은 처지의 동료가 알 순 없었다.
"낸들 아냐. 그 변덕이 워낙 심해야지."
알고있는 건 레이먼밖에 없지 않을까.
그렇게 짐작할 뿐.
레이먼은 죽지 않았을 테니까.
그 증거가 여태까지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아르카나의 공식 홈페이지였다.
아르카나의 홈페이지 덕분에 세상은 플레이어들의 레벨과 랭킹을 알 수 있었다.
어떤 플레이어가 어떤 균열을 클리어했는지도 알 수 있었고, 그를 통해 플레이어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할 수도 있었다.
그 홈페이지가 있었기에 세상은 굴러갈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길래.
성현준은 벅벅 머리를 긁었다.
"레이먼 그 인간은.... 아니지, 사람이 맞긴 한가? 어쨌든. 대체 뭣 때문에 이런 짓거리를 하는 걸까요? 악취미라니까요? 목요일마다 야근이라니. 아직도 아르카나를 서비스하고 있는 느낌이라고요."
그러나 그 투덜거림조차 오래가지 못했다.
어디서라고 할 것도 없었다.
사무실 곳곳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하씨. 업데이트 떴어!"
"아, 진짜. 나 내일 연차 써놨는데."
"안 되겠다. 나 사직서 쓰고 레이먼 이 새끼 잡으러 간다."
그래, 근 한 달 동안 업데이트가 없었으니까.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성현준은 느릿하게 일어나 아르카나 공식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동료들의 말대로 정말 홈페이지에 업데이트 내역이 업로드되어 있었다.
그 작성자는 당연하게도 레이먼이겠지.
"...이런 미친?"
"이, 이거 실화야?"
"아니, 레이먼 이 새끼 제정신이야?!"
업데이트 내역을 읽어나가던 이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건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업데이트였다.
『여러분 곁으로 새로운 악마가 찾아옵니다.
신규 균열, '백작가의 성채'가 추가됩니다.
신규 네임드 몬스터, '아스큐라 백작' : Lv.430
신규 균열, '백작가의 영지'가 추가됩니다.
신규 몬스터가 추가됩니다.
'아스큐라 백작의 심복' : Lv.390
'아스큐라 백작의 기사' : Lv.350
'아스큐라 백작의 병사' : Lv.300
신규 균열, '영지의 외곽'이 추가됩니다.
신규 몬스터가 추가됩니다.
'피로 물든 맹수들' : Lv.220~Lv.250
'피로 물든 산적' : Lv.230』
"아스큐라 백작을 벌써 꺼내왔다고?"
무려 430레벨의 네임드 몬스터였다.
현재 플레이어 랭킹 1위, 스칼의 레벨이 고작 401이란 말이다.
무려 30레벨의 격차.
심지어 아스큐라 백작은 악마족 몬스터였다.
성장형 몬스터.
무지막지한 상태이상.
현실에 풀려난 악마족의 특성까지 생각한다면....
"...선배, 이건 클리어하라고 업데이트한 게 아니잖아요?"
신규 균열은 절대 클리어할 수 없을 것이다.
"맞아. 이건 그냥 손가락 빨고 지켜보고 있으란 소리야."
이게 게임이던 시절의 업데이트 내역이면 상관없었다.
플레이어들에게 밸런스 패치를 어떻게 하는 거냐고.
욕이야 조금 얻어먹겠지만.
결국 플레이어들은 수십 수백 번씩 죽어가며 공략법을 발견해 낼 테니까.
하지만 이건 현실이었다.
죽으면 그대로 끝나버리는.
더 나아가 균열을 공략하지 못하면 저 끔찍한 악마가 현실에 풀려나 버리는.
끔찍한 현실이란 말이다.
따르르─
곳곳에서 전화가 빗발친다.
그러나 누구 하나 전화를 받는 이가 없었다.
다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랭커들이 힘을 합쳐도 어려울까요?"
"해봐야 알겠지만 쉽지 않겠지. 너도 알다시피 악마족이 물량으로 들이받는다고 쓰러트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잖아?"
"그 마탑의 NPC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그 NPC들이 잘도 움직이겠다. 내가 아는 설정상, 마탑의 마법사들이 움직이는 건 마탑에 위기가 찾아왔을 때뿐이야. 지구가 멸망하든 어떻게 되든. 마탑만 멀쩡하면 움직이지 않을 거야, 그것들은."
성현준이 말했다.
"그럼 백작은 일단 제쳐놓고. 다른 몹들은 어떨까요?"
"길드, 그것도 연합으로 움직여야 시도라도 해볼 수 있겠지."
"해결책이 전혀 없는 건 아니겠네요. 외곽이나 영지 균열에서 잡몹들을 사냥하고 레벨을 올려서. 백작이 있는 성채 균열에 도전하면 되는 거니까요!"
"글쎄, 시간이 될까? 균열이 붕괴되는 게 빠를 것 같은데."
"...."
성현준은 할 말을 잃었다.
정말, 방법이 없는 걸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따르르─
"일단, 전화부터 받아보자."
선배의 말에 성현준은 멍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흥분한 기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집중이 되질 않았다.
"...죄송합니다. 지금으로선 말씀드릴 게 없습니다."
*
이른 새벽.
"?"
테이블에 앉아 종이를 채워나가던 내 시야가 점멸했다.
"!"
[클래스 퀘스트 : 반격의 서막]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여.
악마들에게 반격의 때가 왔음을 알려라.
─악마를 처치하라. (성공)
─나약해진 육체를 단련하라. (반복)
─흡혈귀를 사냥하라. (진행 중) ▼
흡혈귀라.
나는 펜을 내려놓았다.
"열등한 족속이 귀중한 시간을 방해하는구나."
나지막이 읊조렸다.
"이에 관한 책임을 물어 엄중히 처벌하겠다."
◈ 8화. 단순하구나
플레이어 커뮤니티는 난리가 났다.
─업데이트 실화냐? ㄹㅇ 밸런스 개조졌네
─밸런스만 조진 게 아니라 우리도 조져질 것 같은디??
─아ㅋㅋ우리가 아스큐라 백작을 어캐 잡냐고 레이먼 미친련아ㅋㅋ
아니, 꼭 커뮤니티까지 들어갈 필요도 없었다.
뉴스에서도 신규 업데이트에 관한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AAU는 아스큐라 백작이 흡혈귀, 그러니까 악마족 몬스터라고 밝혔습니다."
"대형 길드들도 난색을 보이고 있습니다. 위험성이 명백한 균열에 섣불리 진입할 수는 없다는 태도입니다."
나는 뒤늦게 업데이트를 확인했다.
그리고 경악했다.
'...뭐, 레벨이 430?!'
430레벨이면 현재 랭킹 1위보다 높은 거잖아?
열등한 족속이라 했던 발언을 취소하고 싶어진다.
그것도 모자라서 악마족이란다.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악마족은 상대하기 까다로운 몬스터였다.
악마족을 안전하게 공략하기 위해선.
그보다 최소 10레벨은 앞서야 한다는 것이 일종의 상식이었다.
그러니까.
'이걸 공략하라고 업데이트한 거야?'
이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이제야 난리가 난 세상이 이해가 됐다.
손해를 볼 게 뻔하니, 대형 길드들도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하겠지.
그런데 그렇게 서로 눈치를 보다가 균열이 붕괴하기라도 해봐라.
그땐 정말 지옥문 열리는 거지.
물론, 나는 충분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
천적관계 : 악마족과 전투 시 전투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
천적관계.
악마 사냥꾼의 클래스 스킬의 효과가 내 생각보다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하지만 임프는 고작 200레벨에 불과하지 않았던가.
그 배가 넘어가는 레벨의 아스큐라 백작을 사냥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나, 이호열의 머리가 내린 결론에 불과하다.
이 순간, 내 심장은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뛰고 있었다.
그래, 어떤 악마가 됐든 상관없다는 박동이었다.
『그 어떤 악마의 유혹과 기만, 시련도 그랑펠의 고고한 긍지에는 흠집조차 낼 수 없다.』
임프나 흡혈귀나.
더 나아가서 마왕 앞에서도.
이 오만한 긍지는 결코 꺾이는 법이 없겠지.
말 그대로 폼생폼사, 죽음을 재촉하는 설정이시다.
물론, 나는 멋을 추구하다가 비명횡사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최대한 가늘고 길게.
그게 내가 바라는 삶이다.
'아니, 잠깐만.'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내 머리도 할 수 있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퀘스트 창.
─흡혈귀를 사냥하라. (진행 중) ▲
●사냥이 시작됐음을 알려라. (진행 중)
그 퀘스트 목표를 보고 있자니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들.
나는 악마 사냥꾼의 악마 사냥 방식을.
다시금 기억해 내고 말았으니까.
그 덕분에 확신이 생겼다.
'그때처럼 퀘스트를 따라가면....'
정말 흡혈귀를 사냥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확신이 말이야.
순간, 머릿속에 그려지는 꽃밭.
아스큐라 백작을 쓰러트려서 얻게 될 경험치는 얼마나 될까.
혹시라도 좋은 아이템을 주진 않을까?
아차, 클래스 퀘스트 보상도 잊어선 안 되겠지.
그러나 내 입꼬리엔 미동조차 없었다.
내가 상상한 화려한 꽃밭도, 그랑펠에겐 스쳐 지나가며 보게 되는 가문의 정원보다도 못한 것이었으니까.
쉽게 말하자면 그 모든 게 지극히 당연하단 소리였다.
마땅히 거머쥘 것이란 뜻이었다.
─신규 균열 위치 떴다!!! 러시아라는데?!!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번거롭게 숨어든 것까지 고려해 가중 처벌하지."
*
마법사의 탑.
그 내부는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신비로웠다.
"미친. 겉보기랑 딴판이잖아?!"
마치 다른 물리법칙이 적용되고 있는 것처럼 광활한 내부.
그 내부를 장식한 셀 수 없이 많은 서적들.
그중에서도 장관은 그 중앙에서 빛나고 있는 '포탈'이었다.
"러시아라니. 마탑 없었어 봐.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역시 마스터 판단이 옳았다니까? 우리야 빠르게 한국에 자리를 잡아서 다행이지. 왜, 일본이나 중국 길드 봐봐. 괜히 고집부리다가 비행기 타고 러시아 가게 생겼잖아."
"내려서도 문제일걸? 공항에서 차 타고 다섯 시간은 걸린다던데."
포탈.
대규모 순간이동 마법.
그 효과를 봐도 알 수 있듯 고위 마법에 속했다.
플레이어들 중에서도 포탈을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은 한 손에 꼽을 정도로.
물론, 플레이어들의 포탈을 마탑의 포탈과 비교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언제 이런 마법 써보냐."
"만렙 찍어도 불가능할걸?"
"...만렙? 아르카나에 만렙이 있어?"
"없지. 그러니까 평생 불가능할 거라고."
"야, 이거 말하는 꼬라지가."
플레이어들의 포탈은 이동 수단이 아닌 긴급탈출 수단에 불과했으니까.
포탈을 유지하는 데 소모되는 마력이 장난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우리가 언제 이렇게 포탈을 펑펑 타보겠냐?"
마탑이 제공하고 있는 포탈도 원래는 공짜로 이용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이 변했듯 마탑도 변한 것이었다.
그 포탈 주변엔 많은 인파가 몰려있었다.
무엇보다 많은 관심을 받는 건 단연 '가온'이었다.
"가온은 이번 아스큐라 백작의 공략법을 발견한 건가요?"
"다른 길드들보다 먼저 원정을 결정하신 이유가 뭡니까?"
"가온이 공략에 실패해도, 그를 통해 얻은 정보를 다른 길드와 공유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세계 5위.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 가온.
길드 마스터, 남태민은 쏟아지는 질문에 대답했다.
"유감이지만 공략법은 없습니다. 언제부터 우리가 공략법을 따져가며 균열에 도전했다고.... 다른 길드보다 먼저 원정을 결심한 이유? 당연히 경쟁에서 앞서가기 위해서입니다."
그 자리답게 남태민의 말엔 자신감이 넘쳤다.
"그리고 뭐? 우리가 실패해도 공략 정보를 다른 길드에게 공유? 유감이지만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인류의 평화를 위한 일이다, 뭐다 지껄일 텐데. 꼬우면 우리처럼 직접 균열에 도전하라고 말해주고 싶네요. 그게 진짜 평화를 위한 거지. 안 그래요?"
그 기세엔 몰려든 기자단도 흠칫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당당한 태도와 다르게 남태민의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
이번 원정에 가온은 많은 것을 걸었으니까.
'성과를 내야 한다.'
마법사의 탑 때문에 세계 각국의 대형 길드들이 대한민국에 유입됐다.
정부나 국민의 입장에선 좋은 일일지도 모르겠지.
가온에게는 아니었다.
대한민국에서의 그들이 입지가 나날이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가온의 움직임은 다른 길드들에게도 자극이 됐다.
취재진들이 웅성거렸다.
"...어? 잠깐, 샤이닝 길드잖아?"
세계 1위.
명실상부 최강의 길드, 샤이닝.
그들이 원정대를 이끌고 마탑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래, 그렇게들 나오셔야지."
샤이닝이 움직였다.
다른 길드들도 따라나설 게 분명했다.
남태민에게 몰렸던 기자단이 샤이닝 쪽으로 옮겨갔다.
그제야 다가온 남철민이 동생의 어깨를 두드렸다.
"조급할 필요 없어. 어쨌거나 장기전이 될 거니까."
"알고 있어. 그냥 좀 의욕이 생겼을 뿐이야."
"그나저나 첫 출근부터 다이나믹하다. 나도 정말."
"형, 그냥 일복 터졌다고 생각해."
남철민은 가온 길드의 분석관으로서 이번 원정에 참여했다.
처음부터 이런 거창한 공략에 참여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분석관으로서의 업무엔 충실했다.
낙하산까진 괜찮아도.
구멍 난 낙하산 소리를 들을 순 없었으니까.
"길드원들한테는 브리핑 끝냈어."
"브리핑?"
"그래, 이번 신규 균열은 배치가 굉장히 특이하거든."
남철민은 태블릿 PC를 꺼냈다.
거기엔 세 개의 동그라미가 겹쳐서 그려져 있었다.
남철민은 손가락으로 가장 바깥쪽 동그라미를 가리켰다.
"이게 영지의 외곽 균열이야. 보기 좋으라고 동그라미로 그린 게 아니라 정말 동그란 형태로 수백 개의 균열이 발견됐어."
"...수백 개? 잠깐, 그럼 그 안쪽 동그라미는?"
"그건 백작가의 영지 균열. 크기가 좀 더 작지? 그 숫자는 대략 30개 정도야."
"그럼, 제일 안쪽 원이 백작가의 성채겠구나."
남철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장 안쪽 성채 균열에 아스큐라 백작이 있는 거지."
"잠깐, 어째 모양이 진짜 성 같은데...?"
"그러니까. 그래서 이런 생각도 들더라고."
"?"
슥─
남철민이 태블릿을 터치했다.
다음 화면으로 넘어가자 웬 중세 시대의 성이 떠올랐다.
"만약, 균열이 붕괴되면 정말 아스큐라 백작의 성이 소환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
"...형, 그래도 그건 너무 나간 거 아니야?"
"안 될 게 뭐 있어? 마탑도 생겨나는 판국에."
"...."
남태민은 대꾸할 수 없었다.
형의 말엔 딱히 틀린 부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확실한 건 균열이 붕괴되고.
정말 아스큐라 백작의 성이 소환된다면....
"...공성전으로 넘어갈 가능성 있는 거 아냐?"
"그래, 나도 그게 걱정이야."
"이런 미친. 지금도 간당간당한데?!"
아르카나에서 공성전은 수비 측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이 경우에서 수비 측은 당연하게도 아스큐라 백작.
남태민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땐 정말 공략 불가 돼버리는 건데."
남철민은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형제는 잠깐, 침묵했다.
남태민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저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좋은 생각."
"형도 의욕적으로 해봐."
"첫 업무부터 너무 막중해서 그래."
남철민에게도 할 말은 있었다.
"당장은 루키 영입에만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고. 다시 계약서 조정하고, 다시 정중하게 문자를 작성하고 있는데. 갑자기 업데이트가 떠버리는 바람에...."
여기서 남철민이 말하는 루키는 당연하게도 호열이었다.
사실 이 순간에도 남철민은 호열에게 신경이 쓰였다.
남태민도 마찬가지였다.
"씁. 플레이어 하나하나가 소중한 게 이번 공략인데."
"그러니까 내가 비율 좀 올리자고 했잖아!"
"형, 9.5 대 0.5였어. 우리가 0.5였다고! 더 올릴 비율이 어딨어? 집도 사주고, 차도 사주고. 활동비도 지원해 주는데. 비율이 저 모양이면 회수하는 데 10년도 넘게...."
"아, 몰라. 너 때문이야."
티격태격 싸우기도 잠깐.
"어쨌거나, 슬슬 준비하자."
드디어 포탈에 진입할 때가 왔다.
그렇게 말한 남태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준비 끝났어?"
"분석관이 준비할 게 뭐 있다고."
"아니, 형 담배 안 피우고 오냐고."
"아, 담배?"
남철민이 싱긋 웃었다.
"끊었어. 이게 근심이 사라지니까 손이 안 가더라고."
*
나는 옷장을 열었다.
신규 균열의 위치는 러시아.
현재 러시아의 평균 기온은 대략 섭씨 2도.
두꺼운 옷을 고르는 게 마땅하다.
그러나 나는 정장 차림이었다.
이 또한 격식과 품격에 죽고 못 사는 설정 탓이겠지.
적응하자,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도 다행이야.
몇 안 되는 재킷이 꽤 두꺼웠다.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점검했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은발이었던 것처럼.
머리카락에 검은 기는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얼굴도 바뀌었다.
머리카락처럼 이목구비가 뒤바뀔 순 없었지만, 눈매가 바뀐 덕분일까.
얼굴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이전과는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체구는 훈련 퀘스트를 반복하며 더욱 탄탄해졌다.
넉넉했던 정장이 맞춤복처럼 맞았다.
고귀하신 입맛 덕분에 식단까지 철저하게 지켰으니까.
눈에 띄는 근성장도 당연한 거겠지.
나는 거울 속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나로군."
그래, 이 달라진 모습 또한 나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다른 누구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건 나, 이호열의 흑역사였으니까.
그 사실을 알기에 내 행동에 망설임은 없다.
준비는 끝났다.
나는 러시아로 간다.
그러기 위해 마법사의 탑으로 향했다.
...잠깐만.
"잊어버릴 뻔했군."
구두를 신고 현관문을 나서려던 나는 멈춰 섰다.
찬장을 열고 보리녹차 티백을 한 움큼 챙겼다.
재킷 안주머니에 잘 챙겨 넣었다.
...그래, 티타임에 죽고 못 사는 것 또한 나겠지.
물론, 티백만 있다고 녹차를 우릴 수 있진 않았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나는 『탐색』하고 『간섭』하여 『발현』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 내가 『마법』을 발현하는 데 성공했다는 소리였다.
나는 테이블 위에 있는 찻잔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찻잔 또한 필요 없다."
찻잔 옆 차곡차곡 쌓아 올린 종이뭉치가 그 증거다.
.
.
.
나는 마탑에 도착했다.
찬란하게 빛나는 포탈을 바라봤다.
"!"
플레이어 중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이가 한 손에 꼽힌다는 고위 마법, '포탈'.
그것도 대마법사에 비견되는 마탑의 NPC들이 발현한 포탈이다.
그런데.
'어째서지?'
내 눈에는 저 고위 마법이,
넷튜브에서 봤던 '발화'보다 단순하게 보이고 있었다.
◈ 9화. 유감스럽게도 (1)
나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역시.... [스킬]과 『마법』은 다른 건가?'
나는 발화를 발현했을 때 무언가 이질감을 느꼈다.
그 습득 과정에는 다름이 있어도 결국 발화는 스킬이었다.
발현할 수 있게 됐다면 스킬 목록에 발화가 생성되어야 한다는 소리.
그러나 내 스킬 목록은 여전히 단출했다.
"Skill"
천적관계
은 마스터리
사격 마스터리
동시 사격
구마의식
그것은 다른 마법을 발현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경험과 지금의 경험.
거기에서 나는 한 가지 가설에 도달했다.
[스킬]과 『마법』은 완벽하게 다른 개념이다.
그 둘을 다른 선상에 두고 보니 이해가 됐다.
'고작 발화 마법 하나를 발현하는 데 걸린 시간과 노력이 얼마나 됐지?'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설정에 맞지 않는다는 것 하나만큼은 알 수 있었다.
왜, 보는 것만으로 마법을 곧장 발현할 수 있었다던.
그 중2병다운 그랑펠의 설정 말이야.
나는 입을 열었다.
"과연, 충분히 그럴만했군."
이번만큼은 방어기제가 아니었다.
완벽하게 다른 [스킬]과 『마법』.
그런데 스킬을 마법으로 보고 이해하려고 하니, 그만한 고생이 들어가는 것이 마땅했다.
안 되는 걸 하려고 하니까 머리가 깨지려고 했던 거지!
'...근데 스킬을 마법으로 바꿔서 발현하는 데 성공한 거잖아?'
그런 의미에서 클라우디 가문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는 설정은 그대로 덧씌워진 모양이었다.
나는 포탈을 바라봤다.
과연, 넷튜브로 스킬을 지켜보던 때와는 달랐다.
펜과 종이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머릿속에 『탐색』, 『간섭』까지의 과정이 그려졌다.
발화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경지의 마법, 『포탈』.
나는 저 고위 마법을 정말 발현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발현하는 데엔 막대한 마력이 필요하다.
당장은 시도조차 해볼 수 없겠지.
그러나 그 사실을 알게 됐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시선을 옮겨 마법사의 탑의 전경을 둘러봤다.
앞으로 들를 일이 많겠는데, 여긴?
마음 같아선 지나가는 마법사 NPC 하나를 붙잡고 부탁하고 싶었다.
내게 마법을 보여달라고.
너무 어려운 것 말고 하급 마법부터 차근차근.
물론, 콧대 높은 마탑의 거주민들께서 내 부탁을 들어줄 일은 없겠지.
게다가 나는 지금이 그럴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흡혈귀를 사냥하라. (진행 중) ▲
●사냥이 시작됐음을 알려라. (진행 중)
"내게 가르침 따윈 필요 없다."
...덧붙여서 이 고귀한 긍지가 부탁이란 행동을 용납하는 일은 없겠지.
명령이라면 모를까.
정말이지, 피곤한 성격이다.
나는 곧 포탈 너머로 걸어 들어갔다.
또각─
더없이 오만한 걸음으로.
.
.
.
휘이잉─
...빌어먹을, 역시 춥다.
녹차 티백 챙길 정신에 핫팩이라도 챙길걸!
그대로 팔짱을 끼고, 발이라도 동동 구르고 싶어지는 추위였다.
그러나 부탁조차 하지 않는 이 몸이시다.
그런 격 떨어지는 행동을 할 수 있을 리 없지.
나는 금방이라도 후들거릴 것 같은 다리로 잘도 걸어갔다.
시야가 바뀌고 보이는 것은 울창한 숲.
그곳에는 이미 많은 인파가 모여있었다.
"네! 저는 지금 러시아, 신규 균열 앞에 나와 있습니다."
언론사 취재진들.
"자, 형님들이 원하시는 균열로 들어가겠습니다. 몇 번?"
넷튜버 플레이어들.
"상황은 어때. 괜찮아? 어, 영상은 잘 송출되고 있어."
외부에 캠프를 차린 길드까지.
과연, 이번 아스큐라 백작 균열에 쏟아지는 관심을 한눈에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일단, 대다수가 경쟁자들이라고 해야겠지.
어쨌거나 내 퀘스트 목표는 흡혈귀를 사냥하는 것이었으니까.
날고 기는 길드와 플레이어들과의 경쟁.
솔직히 말해 그들보다 먼저 아스큐라 백작을 쓰러트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겠지.
머릿수는 물론, 레벨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났으니까.
그러나 내겐 자신감만큼은 충만했다.
이 자신감이 제발 근거 있는 자신감이기를....
나는 바라며 가까운 균열로 걸음을 뗐다.
"아이, 잠깐만."
"?"
"저기요! 우리 상도덕 좀 지킵시다."
그런 나를 막아 세운 건 어떤 남자였다.
동그란 얼굴이 인상적인 남자.
남자는 손에 카메라가 연결된 삼각대를 쥐고 있었다.
넷튜버구나.
남자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내가 요 정도 페이스를 기억 못 할 리는 없고.... 신입이죠? 컨셉은 신선하네. 뭐, 균열 속 샐러리맨 그런 컨셉인가? 아무튼. 이 균열은 제가 리뷰할 거니까 다른 균열 알아보세요. 훠이훠이."
샐러리맨 콘셉트의 신입 넷튜버라.
반박하기 힘든데?
확실히 내 차림이 그렇게 보일 법도 하겠다.
일단, 누가 봐도 균열 공략하러 온 플레이어처럼은 안 보여.
하지만 제대로 봐라.
내가 댁처럼 카메라를 들고 있나.
그렇게 대답해 주고 싶어도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비켜라."
"뭐, 뭐요?!"
"지금 내겐 인내심이 남아있지 않다."
러시아의 매몰찬 바람보다 냉랭한 음성.
그건 '나는 너무 추워 견딜 수 없어요.'라는 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선에서 가장 상냥하게 표현한 것이었다.
"혀, 형님들 보셨죠? 요즘 신입들 싸가지 진짜 장난 아니라니까요?! 네? 얼굴을 보니까 제가 무조건 잘못했다고요? 아니, 누님! 누님까지 그렇게 말씀하시면...."
당황한 남자를 뒤로하고 균열 앞에 섰다.
[영지의 외곽]
[적정 레벨 : Lv.240~270]
[붕괴 진행도 : 9.7%]
현재 내 레벨은 67.
적정 레벨에 무려 200레벨가량 미달.
그런 균열 앞에서 나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균열 안이라면 이 추위를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길드 랭킹 32위, 버서커.
길드 마스터, 레오니 벨루치는 하얀 미간을 구겼다.
"씨발, 진짜 뭐 이래?"
현재 레오니는 348레벨.
그녀는 플레이어 랭킹 100위 권에 위치한 랭커였다.
그 위치에 걸맞게 레오니에겐 수많은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 균열은 이제까지와는 달랐다.
정말이지, 엿 같았다.
레오니는 쌍검을 휘둘렀다.
스왁─
분명 다리를 베었건만.
눈동자가 새빨간 저 늑대는 조금도 멈칫거리지 않았다.
"이 똥개가!"
스스슥─
쌍검에서 끊이지 않고 쏟아지는 검격!
곧 늑대가 쓰러졌다.
당연한 일이다.
[피로 물든 늑대 : Lv.230]
무려 100레벨의 차이.
고작 230레벨짜리 몬스터가 그녀의 공격력을 감당할 순 없을 테니까.
레오니는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했다.
확실하게 쓰러트렸고, 확실하게 경험치도 받았다.
그런데, 이 찝찝한 기분은 뭐지?
"...얘들아. 나만 그러냐?"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레오니.
그러나 그 심각한 얼굴도 지금의 배경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제멋대로 자른 주홍빛 단발머리조차 소화해 내는 귀염상.
여리여리한 골격.
누가 이 외모만 보고 알아차릴 수 있을까?
이게 광전사, 버서커 길드의 마스터라니.
"또 뭐가요."
"언니 또 또 날카로운 척한다?"
"진짜 하나도 안 무서움."
그러니까 길드원들은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의 얼굴이 귀여운 탓도 있었지만.
평소 날카로운 척하는 것치곤 레오니의 촉이 그다지 좋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훈훈한 분위기는 항상 오래가지 못했지만.
"아니, 씨발. 존나게 찝찝하다니까?!"
입을 여는 순간, 이렇게 깨는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
농담이 아니라 매일 봐도 충격적인 반전이었다.
길드원들이 한숨을 뱉었다.
"...그래. 이래야 우리 언니지."
"근데 뭐가 찝찝한데요? 왜, 공략이 너무 쉬워서?"
"똥촉 발동 걸림."
레오니가 콱─ 주먹을 치켜들었다.
"아니, 쉬운 건 당연하지! 짜샤! 우리 레벨이 몇인데."
"언니. 말조심은 못 해도 손버릇까진 가지 말자, 우리."
"잔소리는 꺼지시고요. 아니, 너희 이런 몹 봤냐고?!"
퍽─
레오니가 바닥에 널브러진 늑대를 걷어찼다.
"얘네 뒤질 때까지 아파하는 기색이 1도 없잖아."
"뭐, 그냥 악마라서 그런 거 아니야?"
"콱씨. 우리가 악마 처음 잡냐? 임프 소리 지르는 거 못 들어봤어?"
...잠깐만, 듣고 보니까 정말 그랬다.
레오니를 비롯한 버서커 길드의 최정예 30인.
그들은 [영지의 외곽] 균열에 입장하고 약 3시간가량 사냥을 계속했다.
그 과정에서 [피로 물든 맹수들]과 [피로 물든 산적]을 수십 마리는 처치했을 텐데....
"...너희 얘네가 비명지르거나 낑낑거리는 거 들어봤냐?"
되돌아보니 정말 듣지 못했다.
길드원들이 대꾸하지 않자, 레오니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래도 찝찝해. 이 새끼들 뭔가 있어."
"그래서 그 뭔가가 뭔데요."
"아니, 씨발.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언니, 듣고 보니까 확실히 이상하기는 한데.... 그래도 별다른 거 없지 않을까? 뭣보다 확실한 게, 잡아서 경험치도 확실하게 받았잖아."
"그건 맞는데. 촉이 있다니깐?!"
길드 랭킹이 언제나 30위.
그 위아래로 간당간당한 이유가 있다니까?
우리 길드는 마스터의 위엄이 바닥에 떨어졌다.
"진짜 날 뭘로 보고...."
레오니가 먹히지도 않을 역정을 내려던 순간이었다.
멀찌감치 떨어진 숲에서.
-깨, 깨갱!
그런 소리가 들려왔다.
"...!"
희미하지만 마치 짐승이 낑낑거리는 소리 같았다.
순간, 레오니에게 쏟아지는 시선.
"...야, 너네 그, '그럼 그렇지' 하는 그 눈빛 뭔데?!"
균열에 입장한 플레이어가 몇 명인데.
걔들이 내는 소리일 수도....
-아, 아우우우우!
그러나 처량하게 이어지는 하울링이 쐐기를 박았다.
이젠 눈빛이 아니라 말이 튀어나왔다.
"그럼 그렇지."
"역시 이래야 우리 언니지."
"하씨. 또 뭐가 어디에서 틀린 건데?"
왜 쟤들은 낑낑거리고 울부짖는 거지?
억울한 마음, 궁금한 마음이 반반이었다.
레오니는 길드원들을 이끌고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어차피 합류하는 편이 낫잖아? 어쨌든, 같이 균열을 공략하는 처지인데."
사실 [영지의 외곽]은 몸풀기나 다름없는 균열이었다.
악마족 몬스터가 등장한다고 해도, 이번 공략에 참여한 길드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클리어할 수 있겠지.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되는 건 모든 외곽 균열을 클리어한 다음.
[백작의 영지] 균열부터다.
"...대체 어떤 자식들이길래."
그 과묵한 놈들을 겁에 질려 울부짖게 만든 거람?
레오니는 몇몇 예상 후보를 꼽았다.
'일단, 샤이닝이랑 가온은 제외. 걔네는 우리가 피했으니까.'
랭킹 1위와 5위.
그 두 길드랑 붙어봤자 고래 꼬리 짓에 터지는 새우밖에 더 되겠어?
그런 생각으로 그들과는 멀리 떨어진 균열에 진입했던 버서커 길드였다.
그렇다면 남은 후보는 많지 않았다.
"딱 보니까 세컨드 썬, 아니면 보헤미안. 둘 중 하나겠네."
하지만 말했다시피.
레오니의 촉은 그다지 좋지 못하다.
"...?"
울음소리를 쫓아 도착한 곳엔 길드 따윈 없었다.
그곳엔 달랑 사내 한 명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내의 모습이 레오니만큼이나 배경과 어울리지 않았다.
정장 차림도 모자라 구두까지 갖춰 신은 모습.
하지만 무엇보다 가관인 건.
그런 사내의 손에 웬 찻잔이 들려있단 점이었다.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김.
보는 것만으로도 따끈해 보이는 찻잔이.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내의 모습이 조금도 부자연스럽게 보이지 않았다.
배경과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 사내에게서는 여유로운 분위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티타임을 만끽하는 모양새였다.
꼴깍─
"...뭐 하는 미친놈이야, 저건?"
그 이질적인 풍경에 레오니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 레오니에게 사내가 말했다.
"유감이지만."
더없이 단호한 목소리로.
"그대들에게 내어줄 차는 없다."
.
.
.
따뜻하다.
이제야 좀 한기가 가시네.
티타임의 소중함을 알게 된 지금.
나는 안주머니의 녹차 티백을 소중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꼴깍─
목마른 척 해봤자 줄 건 없다는 말이다.
─흡혈귀를 사냥하라. (진행 중) ▲
●사냥이 시작됐음을 알려라. (성공)
●사냥당하는 공포를 느끼게 하라. (진행 중)
◈ 10화. 유감스럽게도 (2)
균열에 진입하자 숲의 풍경이 뒤바뀌었다.
흡혈귀, 아스큐라 백작의 영지.
타락한 땅과 러시아의 침엽수림.
그 두 공간이 정확하게 반반씩 뒤섞인 듯한 모습.
...풍경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미친, 더 춥잖아?!'
나무가 썩어버린 탓이었다.
찬바람이 정통으로 따귀를 때리는 것 같았다.
"!"
그러나 친절하게도.
얼어 뒈지지 말라는 배려인가.
나는 곧바로 몸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크으르르르...!!"
[피로 물든 늑대 : Lv.230]
아스큐라 백작의 피에 감염된 늑대.
과연, 그 레벨답게 움직임이 빨랐다. 비슷하게 생긴 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러나 흡혈귀의 피로 타락한 덕분에 그 종족이 '악마족'이 됐다.
[스킬, '천적관계'가 발동됩니다.]
너만 빠른 게 아니란 말이다.
또각─
달려드는 늑대의 공격을 가뿐하게 회피.
나는 퀘스트의 목표를 떠올렸다.
'사냥이 시작됐음을 알려라.'
그저 악마 한 마리를 사냥하면 목표 달성이다.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그대로 몸을 회전.
엇갈려 지나가는 늑대를 공격했다.
당연하게도 무기는 은제 단검.
슥─
"크릉!"
예리한 검날이 녀석의 뒤 허벅지를 갈랐다.
그 상처에서 거뭇한 피가 흘러나왔다. 그 반응을 보아하니 임프와는 달랐다.
아프다고, 고래고래 소치를 치던 임프와 달리 별다른 반응이 없는 것이다.
'레벨 때문이 아니다.'
늑대는 임프보다 20레벨이 높았다.
그러나 레벨이 오른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12레벨에 더해 클래스 퀘스트를 통해 상승한 스탯을 계산하면....
방금의 내 공격은 늑대에게 적잖은 피해를 줬겠지.
그 증거가 눈에 보였다.
늑대는 뒷다리를 절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빨을 드러내는 건 여전하다....
나는 그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리석게도 충성하는 대상을 잘못 골랐군."
저건 아스큐라 백작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겠지.
물론, 말이 그렇다는 거지.
정말, 저 늑대가 아스큐라 백작에게 충성한다는 게 아니고.
그냥 아르카나에서 흡혈귀의 설정이 그렇다는 소리다.
-나는 흡혈귀를 싫어한다. 비열하기 때문이지. 녀석들은 악마 주제에 무리를 거느리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 피로 대상을 타락시켜 강제로 자신을 섬기게 한다는 것이다. 인간을 혐오하면서 인간처럼 살길 바란다니.
떠오르는 악크샨에서의 NPC와의 대화.
나는 그 NPC의 말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우둔하구나. 악마답게."
아스큐라 백작.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녀석!
자고로 귀족이라는 건 말이야.
남들에게 추앙을 받고, 커다란 성채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귀족이 아니란 말이다. 무엇보다 가슴 속에 긍지란 게 있어야 한단 말이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숭고한 긍지.
손에 물을 묻혀도 꺾이지 않는 품격.
근육통에도 굴하지 않는 당당함.
얼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패딩 따윈 입지 않는 그런 똥고집.
왜, 어디 사는 누구처럼 말이지.
스왁─
전투는 길지 않았다.
속으로는 아스큐라 백작, 그랑펠을 동시에 씹고 있었지만.
이 순간, 내 시야는 그 어느 때보다 냉철했다.
"나는 너 같은 족속을 혐오한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5레벨이 상승해서 72레벨이 됐다.
레벨 업에 필요한 경험치가 급격히 늘어나는 게 체감이 된다.
나는 점멸하는 퀘스트창을 확인했다.
─흡혈귀를 사냥하라. (진행 중) ▲
●사냥이 시작됐음을 알려라. (성공)
●사냥당하는 공포를 느끼게 하라. (진행 중)
첫 목표를 달성하자 곧바로 다음 목표가 떠올랐다.
사냥당하는 공포를 느끼게 하라.
과연, 클래스 퀘스트답다.
'악마 사냥꾼 아니면 알아듣지도 못하겠네.'
악마들이 공포를 느끼게 하라니?
이게 뭔 개소린가 싶겠지.
그러나 내게는 악마 사냥꾼으로서의 경험이 있었다.
괜히 최후의 악마 사냥꾼이 아니란 것이다.
-인간을 지금껏 생존하게 만든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공포다. 공포를 느낄 수 있기에 인간은 자신보다 강한 적을 피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것은 퀘스트 도중.
NPC들이 끊임없이 늘어놓던 정신론.
-그러나 악마 앞에서 인간은 생존을 가능케 하는 공포란 감정을 활용할 수 없다.
그때는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는데 말이야.
-그러니 악마를 사냥하기 위해선 공포를 극복해야 한다. 더 나아가 놈들에게 되돌려줘야 한다. 이 순간, 너희는 사냥당하고 있다는 공포를!
이제야 좀 알 것 같네.
그 정신론 수업 뒤로는 악랄한 퀘스트가 이어졌다.
지금 떠올리면 어떻게 성공했나 싶은 담력 테스트가 계속됐었지.
거기서 포기한 플레이어들도 꽤 많았었다.
물론, 그 당시 나는 무서울 게 없던 중2병.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그 훈련을 통과했다는 소리다.
푹─!
그래, 나를 떨게 하는 건 악마 따위가 아니다.
훌쩍.
러시아의 차디찬 시베리아 고기압이란 말이다....
.
.
.
그리고 지금이었다.
나는 티타임을 가졌다.
찻잔이 필요 없다고 했던 이유.
그건 내가 찻잔을 발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널려있던 바위를 탐색하고 간섭하여 그를 재료로 찻잔을 발현해 냈다.
이 또한 넷튜브에서 보고 깨달은 『마법』이었다.
정확히는 [연금술 스킬]이었지만.
'발화'와 마찬가지로 그랑펠의 두뇌를 빌려 마법으로 변환했다는 소리였다.
고작 찻잔과 물 데우기라니.
며칠 동안 머리를 굴린 것치곤.
그 사용법이 지극히 소소하다 싶은 느낌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은 이 온기가 너무나도 소중하다....
*
"그대들에게 내어줄 차는 없다."
...뭔데? 줘도 안 마실 거거든?!
레오니는 진지하게 속삭였다.
"...쟤 넷튜버야?"
절레절레─
길드원들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뭐. 루키인가? 그것도 아니면 초신성?"
절레절레─
길드원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그럼 뭐야, 저거? 랭커는 아닌데."
레오니는 인상을 구겼다.
완전히 헛짚었잖아?
하지만 이건 자신의 촉 탓이 아니었다.
누가 예상이나 했겠냐고. 늑대를 처량하게 울부짖게 만든 게 고작 플레이어 한 명이었을 줄이야. 게다가 그 차림새 또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슥─
레오니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복장을 확인했다.
그래, 아무리 수준이 낮은 균열이라고 해도 자신처럼 장비는 제대로 착용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게다가 이 균열엔 악마족이 득실거리잖아?
상태이상 저항력을 높여주는 장신구도 한 개쯤은 착용하는 게 상식이었다.
그런데.
'...정장? 구두우우우?!'
그것도 모자라서 저 남자는 찻잔을 들고 있었다.
그 어떤 상황이 와도 찻잔은 포기할 수 없다는 듯.
손으로 굳게 붙잡고 있었다.
"씹, 얼탱이 없네."
레오니는 짜증이 솟구쳤다.
그래, 뭐. 세상은 넓고 플레이어도 많다.
이런 플레이어가 있으면 저런 플레이어도 있는 거겠지.
그건 스스로에 대한 짜증이었다.
'자존심 상하네. 씨발.'
그 과묵하던 몬스터들이 저 남자 앞에선 공포에 질렸단 소리잖아?
뭐, 전투를 지켜본 게 아니라 이유까진 알 수 없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경쟁심이 들끓는다.
"흥."
소리를 내고, 안 내고가 뭐가 중요하겠어?
먼저 쓰러트리고, 먼저 클리어하는 게 중요하지.
레오니는 더 이상 사내에게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또 졌어. 씨."
...물론, 남자는 아까부터 이쪽에 신경을 끄고 있었지만.
이쯤 되니까 슬슬 궁금해진다.
대체 저 찻잔에 담긴 차가 뭐길래.
이런 환경에서도 한가로이 차를 즐길 수 있는 걸까.
'...맛있는 건가?'
츄릅─
레오니는 침을 삼켰다가 정신을 차렸다.
-그대들에게 내어줄 차는 없다.
진짜로 치사해서 안 마실 거거든?!
레오니가 몸을 돌리며 말했다.
"가자."
"아까는 합류하는 편이 낫겠다면서요?"
"됐어. 맘 바뀌었어."
"에이~ 언니, 삐졌구나? 차 안 준다고 해서?"
"조용히 해라. 줘도 안 마신다고 했지, 내가?"
"...언제?"
몇몇 길드원들이 사내를 돌아보고는 말했다.
"그래도 위험하지 않을까요? 혼자잖아요."
"합류하자고 물어라도 보는 게 어때? 뭐, 저쪽도 아는 정보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됐거든? 자신감이 넘치시니까, 균열에 정장이랑 구두까지 신고 들어오셨겠지. 게다가 저 싸가지 봤잖아? 차도 안 주는데 정보를 잘도 알려주겠다야."
"...뭐야, 삐진 거 맞잖아."
콱씨─
레오니는 주먹을 들었다가 말을 이었다.
"잘하면, 나 정도는 될 거야."
"뭐가.... 설마, 레벨이?!"
"응. 뭐, 신상 공개 안 한 랭커들 중 하나일지도 모르지."
레오니의 말에 길드원들이 술렁거렸다.
"하긴 스칼부터가 제대로 얼굴을 비춘 적이 없으니까...."
플레이어 랭킹 1위, 스칼.
그도 베일에 싸인 플레이어 중 하나였다.
레오니는 손사래를 쳤다.
"됐고. 경쟁자라고 생각해. 몸풀기 제대로 하고 좋지. 뭐."
과연, 레오니의 촉은 굉장히 무뎠다.
어떻게 된 게 맞춘 게 하나도 없었다.
80레벨이 채 되지 않는 호열의 레벨도.
이 균열을 몸풀기라고 생각한 것도.
스와악─!
"!"
공기를 찢는 듯한 소음.
그건 화살이었다.
레오니가 그 소리를 알아차렸을 때.
화살은 이미 길드원 하나의 어깻죽지에 꽂혀있었다.
"다들 전투태세로 준비! 힐러는 부상자를 치료해!"
과연, 길드 랭킹 32위의 버서커.
기습을 당했지만, 그들은 능숙하게 태세를 변환했다.
그런데....
"대, 대장.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은데요?!"
어둠 속에서 빛나는 붉은빛.
그 붉은 눈동자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호크아이!"
시야가 극도로 확대되는 궁수 클래스의 스킬.
주변 일대를 확인한 길드원이 상황을 보고했다.
"사방이 피로 물든 산적이야. 완벽하게 포위당했어. 그건 그렇고 대장.... 저 녀석들 못해도 200마리는 될 것 같은데?"
버서커 길드의 인원은 총 마흔다섯.
머릿수로는 확실한 열세.
게다가 피로 물든 산적은 인간형 몬스터였다.
상대하기 까다롭단 소리였다.
"그래, 이래야 신규 업데이트답지!"
"슬슬 본격적으로 시작인가?"
"귀찮게 찾아다닐 필요도 없고. 좋네."
하지만 레오니와 버서커 길드는 전투에 익숙했다.
그 길드 명부터가 괜히 버서커, 광전사가 아니란 말이다.
레오니가 쌍검을 들어 올렸다.
"온다. 얘들아."
한 차례, 화살 세례를 막아낸 뒤 돌진한다.
레오니는 그럴 계획이었다.
그 머릿수가 많다고 한들, 레벨의 격차는 무시할 수 없다.
탱커들은 충분히 공격을 받아낼 수 있겠지.
레오니는 그 틈을 노려 포위망을 돌파할 생각이었다.
'충분하다.'
레오니는 그렇게 견적을 냈다.
그런데, 잠깐.
불현듯, 레오니는 뒤를 돌아봤다.
'...쟨 어떻게 하냐?'
고개를 돌자 그곳엔 사내가 있었다.
레오니는 경악했다.
"저거, 진짜 정신 나갔네?!"
분명 화살이 쏟아지는 걸 봤을 텐데도.
여전히 찻잔을 꼭 부여잡고 있는 사내가.
*
나는 찻잔을 들고 사태를 지켜봤다.
화살이 플레이어의 어깨를 꿰뚫었다.
사방에서 느껴지는 기척을 보아하니 포위를 당했다.
그 숫자를 고려했을 때, 내게 쏟아질 화살도 적지 않다.
당연하게도.
내겐 저기 플레이어들처럼 화살을 막아낼 판금 갑옷도, 방패도, 대신해서 막아서 줄 동료도 없었다.
그러나 괜찮다.
그 순간, 내게 화살이 날아들었다.
슈슈슉─!
나는 바닥까지 비워진 찻잔을 바라봤다.
"야외에서 즐기는 차도 나쁘지 않군."
그것은 근거가 있는 자신감이었다.
『탐색』 대상은 손에 쥐고 있는 찻잔.
『간섭』까지의 과정이 마치 일련의 동작처럼 부드럽다.
그러니까 나는 마법을 『발현』했다.
"사소하게 사용했다고 한들."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의 형태가 바뀌어 간다.
후두두둑─
이내, 화살들이 부러져 발밑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 위력까지 하찮은 것은 아니다."
◈ 11화. 인내심의 한계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