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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7화. 한없이 깊은 어둠 (3)

탐험가 연맹.

드높은 명성과 위상은 아르카나 대륙에서부터.

대격변 이후, 현재까지도 유효했다.

그들이 높은 평가를 받는 데엔 AAU의 영향이 컸다.

"아르카나에 관한 정보를 알고 있다고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정보를 통해 변수를 예측할 필요가 있죠. 그런 면에서 연맹 탐험가들은 전문가. 그들이 현실에 나타난 게 어쩌면 인류에겐 큰 축복일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탐험가 연맹은 AAU를 비롯해 인류에게 많은 협조를 했다.

오직 자신들만 알고 있는 아르카나 대륙의 정보들을 인류에게 전달했으니까.

물론, 맨입은 아니었다.

탐험에 미쳤다고 한들.

이해관계 따지는 것 하나만큼은 투철한 그들.

그 대가로 많은 것을 받아 챙겼지만 말이다.

덕분에 플레이어들 사이에선 악명 아닌 악명이 퍼질 수밖에.

"탐험가? 당연히 있으면 좋지. 그런데 애매한 탐험가는 오히려 방해만 되는 수준이고, 연맹 탐험가 중에서도 상위권은 돼야 데리고 다닐 의미가 있는데.... 그분들 몸값이 장난이 아니시잖아?"

돈을 쓸어담다시피 하는 랭커들도 치를 떨 정도!

덕분에 상위 길드들은 아예 탐험가 클래스를 보유한 플레이어들을 찾아내, 뒤늦게라도 그들을 육성하는 이들도 있었다.

차라리 그게 싸게 먹히겠다는 견적이 나온 탓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사건은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탐험가 연맹,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오직 텟퍼른 탐사뿐... 보수는 필요하지 않다."]

천하의 탐험가 연맹이 무급 선언을 한 것이었다.

[탐험가 연맹장 파비앙 들롱, "이호열 플레이어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

그것도 모자라 아주 공손한 자세로 나선 것이었다.

누구보다 황당한 반응을 보인 건 탐험가 연맹과 접점이 있었던 랭커 플레이어들이었다.

무언가 애매한 표정을 짓는 플레이어들.

"이, 이걸 통쾌하다고 해야 해? 씁쓸하다고 해야 해?"

이건 태도가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은가!

연맹장, 파비앙 들롱.

그 콧대 높은 곱슬머리 왕재수가 저런 공손한 말을 할 줄도 알았다니! 그러나 마냥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도 양심에 찔리는 일이었다.

그야 파비앙의 상대는 호열이었으니까.

-솔직히 나는 파비앙 저러는 거 약간 이해됨 ㅇㅇ

-그니깐 쌓아둔 명성치가 차원이 다를 텐데

-그냥 이호열이 한 일만 봐도 견적 나오지ㅋㅋㅋㅋ

-ㄹㅇㅋㅋ막말로 이호열이 텟퍼른 퀘스트 받은 지금이 탐험가 연맹한테는 절호의 기회일걸?? 그래서 저렇게 저자세로 나가는 거지ㅋㅋㅋ

-...그럼 저것들 설마 버스 타려고 저러는 건가???

그 시각, 유스라 왕국.

탐험가 연맹 본대.

고위 연맹 탐험가들이 자리에 착석해 있었다.

오가는 시선 속에 흐르는 미묘한 신경전.

'텟퍼른 미궁 탐사에 참가하는 건 나다.'

'분명, 견제하려고 들겠지.'

'설령 얻을 게 없다고 해도 실적이 필요하다.'

연맹장, 파비앙은 그 눈빛들에 담긴 뜻을 알아차렸다.

'다들 꿍꿍이가 있군. 그중엔 내 자리를 노리는 자도 있고.'

코앞으로 다가온 차기 연맹장 선거.

감투에 연연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파비앙은 자신의 자리를 쉽게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그야 파비앙은 자신이 있었으니까.

두득─

가볍게 고개를 돌리는 파비앙.

"참고로 나 또한 텟퍼른 미궁 탐사에 참가할 생각이네."

"...!!!"

파비앙의 선언에 동공이 휘둥그레지는 연맹 탐험가들.

그럴 만도 했다.

파비앙이 외부 활동에 나서는 건 정말 간만이었으니까.

누군가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선거철이 다가오니 마음이 급해지신 모양입니다?"

명백한 도발.

그러나 파비앙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급하기는. 몇 년을 쉬었어도 나는 아직도 내가 최고의 탐험가라고 자신하네만? 다만, 표를 쥐고 계신 그대들의 생각은 다를 수 있으니까. 나의 건재함을 증명하기 위한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을 뿐이라네."

꼴깍─

마른침을 삼키는 탐험가들.

'허세가 아니다.'

나이로는 중년을 넘어선 파비앙이었지만, 외모를 비롯해 그의 육체는 여전히 최전성기에 머물러 있었다.

가볍게 몸을 푸는데 드러나는 근육들이 증거겠지.

"또한 텟퍼른 미궁 탐사엔 연맹의 명예가 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마탑과 라이언 하트 기사단, 뮤온까지. 그들이 자신들의 건재함을 보여줬던 것처럼. 탐험가 연맹도 나설 필요가 있다는 말이네."

흐르는 침묵.

모두가 파비앙의 말에 담긴 뜻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플레이어 몇몇은 아예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최정예로 나서겠다는 소리잖아?'

'우리까지 순서가 돌아올 일은 없겠군.'

'...젠장, 이호열 버스 좀 타보나 싶었는데.'

'빌어먹을 레벨아.'

자신의 참전 선언으로 끝난 회의.

원탁에 홀로 남은 파비앙은 어깨를 으쓱였다.

"요즘 신인들은 패기가 없어요. 패기가."

장난스럽게 중얼거렸다.

"탐험가가 언제부터 연맹에 의존했다고."

파비앙에겐 신념이 있었다.

자고로 탐험가란 고집이 있어야 한다고.

누구에게도 굽혀지지 않는 고집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회의에 참석한 이들에게선 그 신념이 보이지 않았다.

"이래서야 적성에도 안 맞는 짓을 또 하게 생겼군."

이곳이 아르카나 대륙이었다면.

파비앙은 연맹장 자리를 미련 없이 내려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모험가들의 세계.

저런 못 미더운 이들에게 탐험가 연맹의 미래를 맡길 순 없었으니까.

"그나저나 대단하시군."

모험가, 이호열.

어둠의 정령을 통해 텟퍼른에 미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냈다고 했던가?

미궁이라, 누군가에겐 대수롭지 않은 정보일지 몰라도 파비앙에겐 더없이 큰 정보였다.

아르카나 대륙에서 공략한 미궁만 하더라도 수백 개.

파비앙에겐 미궁의 전문가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는 경험이 있었으니까.

게다가 이호열, 그가 누구인가?

"적어도 늙은이 목숨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악마들의 왕, 마왕 압살을 이뤄낸 사내.

그와 동시에 마탑의 수석 마법사이자 유스라 왕국의 실세. 그것도 모자라 성지, 뮤온의 구원자이며 세계수의 씨앗을 싹 틔우고....

"...마지막으로 한없이 깊은 어둠이란 이명까지."

이 모든 게 정녕 한 사람이 해낸 업적이 맞단 말인가?

파비앙은 자신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10대 불가사의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단 말이지."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기대됐다.

과연, 이호열은 어떤 사내일까?

그러나 그런 파비앙의 기대는.

"파비앙 연맹장님. 답신이 도착했습니다."

"답신이라면?"

"이호열 경께서 보내오신 서신입니다."

"오오, 고맙네."

호열에게서 되돌아온 서신을 받아든 순간, 무너져 내렸다.

휘황찬란한 금박 장식 종이.

이건 자신이 보냈던 그 서신이었다.

"...음?"

보냈던 서신이 그대로 되돌아왔다?

불길한 예감.

파비앙이 흠칫하며 서신을 펼쳤다가 경악했다.

"!"

그야말로 고상한 필체.

자신이 보냈던 서신 아래에.

호열의 답신이 적혀있었으니까.

──────

절차에 따라서 보다 상세한 목적을 제시하도록.

──────

"...절차? 목적?"

단 한 줄.

아니, 추신까지 합쳐도 고작 두 줄.

──────

추신. 불필요한 사치는 좋지 않다.

──────

"사, 사치?"

격식을 더없이 중시하는 호열.

취향에 맞춰 값비싼 금박 용지를 택했건만.

사치를 지적받을 줄이야.

아니, 그걸 넘어서 구체적인 목적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파비앙은 어이가 없어서 중얼거렸다.

"...벌써부터 쉽지 않군, 이거."

간만에 느끼는 긴장감.

자신도 모르는 사이.

파비앙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

"불합격. 그 목적이 불분명하다."

사실 이유는 짐작이 간다.

마탑을 비롯해 다른 아르카나 세력들이 활약하고 있는 현재.

탐험가 연맹 쪽도 뭐라도 해야 한다고 느낀 거겠지. [텟퍼른 미궁]이라면 적성에도 맞겠다, 적절한 기회라고 판단한 건지도 모르는 일.

그러나 모든 것은 절차에 따라서.

뭐든 확실하게 해야 한다는 거지.

나중에 딴소리를 할 수 없도록.

하다못해 출탑 신청서도 목적을 분명히 해야 했으니까 말이야.

"벤쉬 윌리엄. 그대는 지겹지도 않은 모양이군."

불합격.

나는 벤쉬의 출탑 신청서를 재껴 버리곤 생각했다.

그래도 목적만 제대로 제시한다면....

'역시,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게 좋겠지.'

미궁.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부터 악명 높았던 콘텐츠.

온갖 악랄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물론.

등장하는 몬스터들도 네임드몹 수준으로 까다로웠다.

경우에 따라선 비슷한 적정 레벨의 [던전]보다 난이도가 빡세다고 했겠다....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게 당연하지.'

악마족의 활동이 줄어든 지금.

[천적관계]가 발동될 확률도 낮았으니까.

'자신이 없다. 자신이.'

그런 의미에서 탐험가 연맹보다 우수한 지원군은 없으리라.

물론, 마탑의 마법사를 우르르 끌고 간다면야.

미궁 따윈 어떻게든 공략할 수 있겠다만.

"혼자서도 충분하다."

...충분하긴 개뿔. 입만 살아서는.

하여튼, 보다시피.

이 드높은 긍지께서 사적인 용도로 마탑의 마법사들을 움직이는 걸 용납할 수 있을 리가 없겠지.

일단, 텟퍼른과 탐험가 연맹에 관한 생각은 그쯤에서 접어뒀다.

'더 이상 고민하는 건 의미가 없다.'

이미 탐험가 연맹 쪽에 답신은 전달했고.

[텟퍼른 미궁] 균열은 아직 떠오르지도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당장은.

─수석의 무게 (반복)▼

내가 짊어진 무게에 충실하자.

나는 퀘스트 목표를 확인했다.

수많은 목표 중 새롭게 떠오른 목표.

●원탁 회의를 성공적으로 진행하라. (진행 중)

원탁 회의.

탑주와 원로 마법사.

그리고 수석 마법사만이 참석했던 과거의 원탁 회의가 아니다.

애초에 열고 싶어도 열 수가 없지, 그건.

탑주는 사정상 부재중.

원로 마법사도 다섯 중 달랑 한 명만 남아있었으니까.

그랬다.

과거의 원탁 회의가 아닌.

새로운 원탁 회의라는 것이다.

마탑이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변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읊조렸다.

"시간은 오후에 즐기는 차와도 같다."

쉽게 말해서 시간은 금이란 뜻인데....

...평범하게 말하면 어디 덧이라도 나는 건지.

어쨌든 내 사전에 지각이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걸음을 옮겼다.

원탁 회의가 열리는 크리스탈 홀을 향해.

*

웅성웅성─

크리스탈 홀엔 좀처럼 소란이 가시지 않았다.

이런 자리는, 행사는 모두에게 처음이었으니까.

마탑의 햇병아리, 견습 마법사들.

정말 병아리가 주위를 둘러보는 것처럼 그들은 쉴 새 없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견습 마법사를 대표해 이 자리에 참석했건만. 얼마 되지 않는 체면을 유지할 수 없었다.

"...와, 저게 벨리에 선임 마법사님!"

"나 처음이야. 선임 마법사들을 한자리에서 보는 건!"

"진짜 다들 되게 멋지시다아!"

스무 명의 선임 마법사.

전원이 크리스탈 홀에 착석해 있었으니까.

이런 건 정기 학회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진짜 다른 애들이 엄청 부러워하겠지?"

"그니깐!"

"부러울 게 뭐 있어? 다음 회의 때 참석하면 되는데."

"아아, 그랬지! 쉽게 적응이 안 되네."

새로운 원탁 회의엔 견습, 숙련, 선임, 수석, 원로.

마탑의 모든 마법사가 계급에 관계없이 참석할 수 있었다.

견습 마법사들과 다르게.

마탑의 물을 조금이라도 더 마신 숙련 마법사들.

가늘게 뜬 눈.

지브릴은 크리스탈 홀의 공기를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다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물음에 몇몇 숙련 마법사들이 나서서 대꾸했다.

"확실히 오늘도 아리따우시군요. 지브릴 양...."

"아니, 그런 아부는 됐고. 원탁 회의에 관해서요."

"아앗, 죄송합니다."

마탑의 모든 마법사가 한곳에 모이는 회의라니.

폐쇄의 상징.

과거의 마탑에선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지브릴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출탑도 그렇고. 확실히 마탑이 변하고 있어요."

물론, 반겼으면 반겼지.

싫어할 일은 절대 아니었다.

그냥 이 변화의 계기가 궁금하다는 것뿐.

지브릴이 잠자코 있던 클레의 팔뚝을 찔렀다.

쿡─

"지, 지브릴?"

"역시, 이것도 그분의 영향이겠죠? 클레 양?"

"하하, 그렇지 않을까요?"

"확실히 보통이 아니시군요."

왜, 멀리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었다.

불과 직전에 있던 출탑에서 벌어진 일만 하더라도.

마탑을 뒤흔들기엔 충분했으니까.

"어둠의 정령을 복종시키시다니."

선임, 페이얀을 포함.

정령학파 숙련, 견습 마법사들이 단체로 나섰던 출탑.

다양한 계급의 마법사들이 출탑에 나섰기에.

그날 [텟퍼른 울타리]에서 벌어졌던 사건은 마탑의 모두가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웅성웅성─

그러니까 소란 속에서.

"한없이 깊은 어둠이라고...."

"정령이 그렇게 부를 정도면 대단한 거지?"

"한없이 깊은 어둠.... 왠지 어울리신다. 그치?"

"심지어 검까지 되게 잘 다루셨다고 들었어."

한없이 깊은 어둠.

호열의 이명(異名)이 계속해서 언급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선임 마법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저마다 페이얀을 보고 한마디씩 건네는 선임 마법사들.

"선임 중에서 가장 먼저 출탑에 나선 것도 모자라서 좋은 구경까지 하고 오셨군요, 페이얀 선임."

"출탑 목적 달성에 더불어 어둠의 정령에 관한 정보도 얻으셨으니. 다음 정기 학회에 관한 걱정은 덜어내셨겠군요? 부러워요."

여러모로 이 수석님의 덕을 크게 봤으니까.

페이얀은 입을 우물거리며 멋쩍게 웃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네요. 하하."

화염마법학 선임, 벤쉬 윌리엄.

그는 아예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하기도 했다.

"대체 출탑 목적서를 어떻게 작성하신 겁니까, 페이얀 선임? 저는 사실 좀 억울합니다. 저보다 간절하게 출탑을 바라는 선임이 또 어디에 있다고! 보세요. 작성한 출탑 신청서만 하더라도 벌써 수십 장...!"

물론, 그 수다는 오래가지 못했으니.

천적, 마티스가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벤쉬 윌리엄, 그대는 침묵을 배울 필요가 있겠군."

"...."

발동이 걸렸다 싶으면 좀처럼 멈추지 않는 벤쉬의 신세 한탄.

페이얀은 마티스에게 감사의 눈짓을 전했다.

마티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어둠의 정령이라.'

흑마도학과 정령학의 유일한 교집합.

그러나 페이얀과 마찬가지로.

설령 흑마도학을 정립한 마티스라고 해도 어둠의 정령에 관한 지식은 많지 않았다.

다만, 호열이 녀석을 복종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짐작할 수 있었다.

'...어둠은 더욱 깊은 어둠에 잠식된다.'

흑마법의 성질에 관해 나눴던 대화.

아마도 수석께서는 그 대화를 기억하고 계셨던 거겠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흑마법에 관한 이호열 수석의 잠재력은 측정할 수 없다.'

상상을 초월하는 '적합한 마력량'.

대체 어떤 과거를 지니고 계시길래.

그런 적합한 마력을 보유하시게 된 것인가.

마티스는 한때, 그 점을 우려하기도 했었다.

말했다시피.

어둠은 더욱 깊은 어둠에 잠식된다는.

흑마법의 성질을 마티스는 누구보다 알고 있었으니까.

'...흑화(黑化).'

만약, 호열의 적합한 마력이 폭주한다면....

그 후폭풍은 상상하기 싫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마티스에게 그런 우려는 사라졌다.

그야 목격하지 않았던가?

-"세니오스 원로 마법사...."

『만년설이 잠든 곳』.

그곳에서 세니오스를 애도하던 호열의 모습을.

그래, 이호열 수석은 누구보다 무게추를 잘 잡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흔들리지 않는 자세가 그 증거겠지.

마티스가 생각을 끝마치던 순간.

또각─

크리스탈 홀에 청아한 구두 소리가 울렸다.

호열과 마르셀로.

마지막으로 두 수석이 원탁 회의에 참석한 것이었다.

그 등장만으로 잦아드는 소란.

모두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집중됐다.

...꼴깍─

그런데 어째서인가.

호열의 눈매가 평소보다 훨씬 가라앉아 있었다.

차분한 것을 넘어서 냉랭하게 보일 정도로.

.

.

.

...이제 와서 조용히 해도 소용없다.

밖에서부터 다 들렸던 말이다.

나더러 '한없이 깊은 어둠'이라 소곤대던 소리가!

진지하게 우려가 된다.

나, 쪽팔려서라도 제 명에 못 살지 않을까?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속내가 티가 나지 않는다는 것.

나는 마르셀로에게 태연히 말하며 걸음을 옮겼다.

"시작하지."

즐기기에는.

한없이 깊은 어둠이라는 호칭이 내게는 너무 버겁다.

피할 수도 즐길 수도 없다면 최대한 빨리 끝내자....

◈ 128화. 텟퍼른 미궁 (1)

마르셀로는 크리스탈 홀 중앙에 섰다.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마법사의 시선.

이런 자리가 처음도 아니건만.

어째서일까.

'감회가 남다르군.'

모험가들의 세계에 떨어지고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변화의 계기는 호열이겠지.

마르셀로는 호열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나는 그대의 탐색 과정에 군더더기가 존재한다고 생각되는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마르셀로 수석 마법사?"

피식─

지금 와서 생각해 봐도 작은 웃음이 흘러나올 정도로.

충격적인 첫 등장이 아닐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수석의 자리를 감당하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다.

그러나.

'경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를 마탑으로 이끈 것에 대한 후회는 조금도 없었다.

호열이 아니었다면.

카림제바를 비롯한 악마 숭배자들의 기만을 알아차리지도.

마탑의 원죄도 바로 잡지 못했을 테니까.

물론, 꼭 그런 거창한 사건들이 아니었더라도.

'제 짐을 나눠 짊어주신 것도 알고 있습니다.'

사전 검증, 정기 학회, 선임들 사이의 관계 개선까지.

덕분에 여러모로 신경 쓸 거리가 줄어들었으니까.

자신에게 휴식 시간이 생긴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왜, 인품은 여유에서 비롯된다는 말도 있지 않았던가?

전보다 성격이 유해졌다.

눈에서 독기가 빠지신 것 같다.

자신을 향한 소문들이 그 증거겠지.

'경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마르셀로는 호열의 생각을 짐작할 수 없었다.

경께서는 어찌.

악크샨의 생존자이면서 마탑을 위해 나설 수 있는 것인가?

마찬가지로 성전(聖戰)의 원수라고 할 수 있는 여신교를 너그럽게 포용할 수 있는 것인가?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아도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상관없겠지요.'

그러나 의문이 우려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마르셀로는 목격했었으니까.

세니오스의 죽음을 애도하던 호열의 모습을.

-"세니오스 원로 마법사...."

자신보다 먼저 세니오스 님을 찾으셨을 줄이야.

불필요한 의문이 사라질 정도의 행동이었다.

그러니까 마르셀로에게 걱정은 없었다.

'저는 안심할 수 있습니다.'

경이라면 틀림없이 마탑을 다시 세울 수 있으시리란 사실. 더 나아가 자신의 연구 또한 성공적으로 끝마치실 수 있으리란 믿음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단 한 가지, 미련이 남는다면....

'탑주님을 다시 뵐 수 없다는 것엔 조금 미련이 남는군요.'

그러나 마르셀로는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는 것을.

그러니까.

'경께서 나아가실 길을 여는 것.'

많지 않은 시간.

자신의 할 일을 해내야 했다.

마르셀로, 자신이 짊어져야 할 수석의 무게였다.

마르셀로는 호열의 말을 떠올렸다.

-"숨기는 것은 긍지에 어긋나는 일이라 생각하네."

그래, 경의 말씀대로.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이내, 마르셀로가 입을 열었다.

"마탑의 대역죄인, 카림제바를 비롯한 3인의 원로 마법사. 그들의 처분 과정에 관한 이야기로 원탁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그에 앞서 원로 마법사, 세니오스 님을 위한 묵념으로 개회를 대신하겠습니다."

.

.

.

치유학 선임 마법사, 벨리에 유시아.

그녀는 마탑을 맴도는 비장감을 알아차렸다.

"...결국, 알게 됐어."

원탁 회의에서 모든 사실이 밝혀졌다.

모든 사실을 미리 알고 있던 벨리에였거늘.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받았던 충격의 여파가 다시 느껴질 정도였다.

"다들."

그런 의미에서 숙련, 견습 마법사들이 받았을 충격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벨리에는 알고 있었다. 마탑의 마법사, 모두가 보통내기가 아니란 사실을.

견습 마법사.

마탑 내부에서나 햇병아리 취급을 받았지.

그 능력들은 저들이 마탑 입성 전.

숱하게 들었던 평가만 봐도 알 수 있겠지.

마도 가문의 자랑, 대마법사의 환생, 순수한 재능의 원석....

숙련 마법사들은 또 어떠한가?

그들은 당장 아르카나 대륙에서 손꼽히는 마법사들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는 수준을 갖추고 있다.

그 전공에 따라서는 하나의 도시를 파괴할 수도, 다시 세울 수도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선임 마법사는 인간보다 초인(超人)으로 분류하는 것이 옳겠지.

벨리에, 자신도 자각하고 있었다.

자신을 비롯한 선임들의 마법은 평범한 이들의 상상을 초월한 수준이라는 것을.

마탑은 그런 곳이었다.

엄청난 잠재력을 가진 이들.

혹은 그 잠재력을 개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

또는 그 잠재력을 이미 꽃피운 이들이 모인 집단.

"당장이야 혼란스러울지 몰라도...."

견습, 숙련, 선임까지.

모든 과정을 겪어온 벨리에이기에.

그들의 심정을 헤아려 볼 수 있었다.

결국엔 자신과 같은 감정을 가지게 되리라는 것을.

그래, 마탑을 기만한 악마.

또한 아르카나 대륙을 쑥대밭으로 만든 그들을 두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하겠지.

이 순간, 마탑에 맴도는 비장감도 바로 그 때문이리라.

그러니 한편으로는 우려될 수밖에 없었다.

집결한 마탑의 힘.

그 강대한 힘에는 막중한 책임이 따를 테니까.

그런 마탑의 힘이 옳지 않게 쓰였을 때를 생각한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해져 벨리에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당장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마르셀로, 그리고 이호열 수석.'

현재 마탑엔 두 공동 수석이 존재했으니까.

잘근─

벨리에가 입술을 깨물었다.

"당장은...."

벨리에는 알고 있었다.

마르셀로에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그래서 자신을 대신할 수 있는 인물, 호열을.

수석으로 추대했다는 사실도.

'...그 정도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어.'

마르셀로, 우리가 봐온 세월이 몇 년인데.

천하의 마르셀로가 선택한 호열이었다.

처음에는 몰라도 지금 와선 의문 따윈 들지 않았다.

이호열 수석께서 보여주신 능력이야, 말하면 입만 아플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겉과는 다른 내면까지."

단 한 번도 숙인 적이 없던 뻣뻣한 고개.

그런 고개를 숙인 채.

홀로 세니오스를 애도하던 이호열 수석.

벨리에는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마르셀로 수석님. 과연, 수석다우신 안목이네요."

옳은 판단이겠지.

마르셀로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이었을 거야.

그러나 벨리에에게는 아니었다.

"...나도 내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을 하는 것뿐."

그런 벨리에가 이내 웃음을 거뒀다.

깃털펜을 집어 들었다.

사각─

무언가를 정성껏 적어나갔다.

그래도 한 가지는 다행이었다.

"클레, 덕분에 걱정거리 하나는 덜었군요."

깃털펜을 쥐자 떠오르는 숙련 마법사, 클레의 조언.

-"무엇보다 그 목적! 목적이 중요하신 것 같았어요!"

출탑 신청서.

출탑의 목적을 적어가던 벨리에가 나지막이 말했다.

"이호열 수석. 당신께서 어떻게 여기실지는 몰라도. 제게 이보다 중요한 목적은 없습니다."

──────

수석 마법사, 마르셀로 시무아르드.

시무아르드 마도 가문에 전승되는 시한부의 저주.

그 해주(解呪)에 관한 연구.

──────

*

젠장, 기운이 빠진다.

사실 원탁 회의에서 내가 한 거라고는.

크리스탈 홀에 가만히 앉아있기밖에 더 있었느냐마는.

...정신적 충격이 크다는 말이지.

나에 대한 뒷담화를 그렇게 적나라하게 들을 줄이야!

누가 짐작이나 했단 말인가?

누군가는 묻겠지.

커뮤니티, TV, 심지어는 혈육들과의 단톡방에서도.

한없이 깊은 어둠인가, 뭔가 하는 이야기로 떠들썩한데.

왜 그리 엄살이냐고.

'그거랑 이거는 엄연히 다르다.'

굳이 비유하자면....

이건 마치 공과 사를 잘 구분하던 직장에 사생활이 뿌려진 듯한 기분.

게다가 그 사생활이 떠올리기도 싫은 끔찍한 흑역사...!

그러나 고통스러워 하는 심정과 다르게 내색은 없었으니.

휘이휘이─

나는 티스푼을 휘저으며 잘도 지껄였다.

"타인의 평가는 중요치 않다."

한마디면 충분하지, 굳이 말을 덧붙였다.

"중요한 것은 가슴 속의 긍지뿐."

...정말 한치의 부끄러움도 없구나.

과거의 내가 존경스럽다.

진심으로.

그러나 이놈의 평정심 덕분에.

지금의 내가 이렇게 온전히 살아있을 수 있던 거겠지.

봐라, 지금만 하더라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뻔뻔하게 서적을 들추고 있지 않은가?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다."

평상시처럼 그럴싸한 소리나 내뱉으면서 말이야.

그래, 심히 부끄럽기는 하다만....

내가 이랬던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앞으로도 이럴 게 뻔한데.

'...한없이 깊은 어둠. 익숙해지도록 노력해 보자.'

그래, 신세 한탄을 하기에는.

지금 당장 눈앞에 닥친 일만 생각하기에도 급급하다.

나는 찻잔을 기울이며 퀘스트로 시선을 옮겼다.

[10대 불가사의 퀘스트 : 텟퍼른의 미궁]

아르카나 대륙 10대 불가사의, 텟퍼른.

텟퍼른의 미궁을 파훼하고.

텟퍼른의 실체를 세상에 알려라.

현재까지 밝혀낸 불가사의 : 0개 / 10개

─텟퍼른의 미궁을 목격하라. (진행 중)

과거엔 막막했겠지.

정기 업데이트에 [텟퍼른의 미궁] 균열이 떠오를 때까지 태평하게 찻잔이나 기울여야 하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야. 그러나 내게는 경험이 있었다.

[마왕성] 균열.

그 정기 업데이트를 예측했던 경험이 말이야.

덕분에 약간은 확신이 생겼다.

'정기 업데이트는 랜덤이 아니다.'

규칙성이 존재한다는 뜻.

그랑펠의 언어로 말하자면.

"모든 것엔 절차가 존재하는 법."

그래, 정기 업데이트에도 나름의 절차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아마도 아르카나 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 중.

가장 큰 사건이 정기 업데이트에 떠오를 확률이 높지 않을까?

[마왕성] 균열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니까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미궁이라. 마주할 날이 머지않았군."

[텟퍼른 미궁].

빠르면 당장 이번 주 정기 업데이트에 떠오르겠군.

추측의 근거는 더없이 충분하다.

마왕 압살.

그 덕분에 아르카나 대륙에서 악마들의 활동은 일시적이나마 잠잠해진 상태였으니까. 대사건이라 부를만한 일이 일어날 확률은 낮겠지.

'철저한 준비가 필수야.'

[텟퍼른 울타리].

그곳에서 당장의 전력은 점검했다.

450레벨, 텟퍼른 허수아비에 둘러싸여서도 버틸만 했었지.

나사 빠진 클래스.

악마 사냥꾼치고는 나도 나름대로 강해졌구나, 실감이 든다.

'뭐, 스탯 덕이 절반 이상이겠지만.'

클래스 퀘스트에 귀하시다는 비약초까지.

발버둥 친 것에 비해서 효율이 떨어지지 않나,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주제 파악을 하자, 호열아. 내 클래스는 언제까지나 악마 사냥꾼이다.

"모든 것엔 장단이 있지."

남 얘기하듯 하지도 말자.

결국, 내 얼굴에 침 뱉기.

내 이야기였으니까.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악마 사냥꾼.'

언제나 주제 파악을 잊지 않았으니까.

진작부터 살 구멍을, 우물을 파왔단 말씀.

[텟퍼른 미궁].

말했다시피 [천적관계]가 발동될 확률은 낮겠지. 말뿐이 아니라 정말 만반의 준비가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기만 해도 든든해지는 아이템이 하나가 있지.

[흡혈귀 백작의 오브]

[등급 : 유니크]

[제한 : Lv.400]

[효과 : 공격 시, 높은 확률로 추가 피해 적용.]

[설명 : 흡혈귀의 혈액으로 가득 찬 오브다. 마력과 접촉할 때마다 그 혈액이 터져 나와 대상에게 피해를 준다.]

아스큐라에게서 획득했던 전리품.

무려 400레벨.

그 제한 레벨을 보고 기겁했던 과거가 떠오른다.

이런 걸 써먹을 때까지 살아있을 순 있을까, 생각했는데....

드디어 그런 날이 왔다.

'추가 피해량은 크지 않다.'

그러나 모든 것은 활용하기 나름이다.

그 효과가 공격마다 높은 확률로 적용된다면.

단순하게 공격의 횟수를 늘리면 되는 간단한 일이다.

'적은 피해량도 누적이 되면 말이 달라지니까.'

그런 [스킬]은 흔치 않겠지만.

내게는 『마법』이 있다.

한 마디로 꼼수로 아이템의 성능을 몇 배 이상 끌어낼 자신이 있다는 거지. 사실 마음 같아서는 마왕의 전리품. 에픽 등급의 악마 아이템도 써먹을 수 있다면 든든할 텐데....

[악에 물든 일각의 지휘봉]

[피로 그려진 망각의 지도]

[악의로 불타는 눈동자]

악마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그래도 혼자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무엇보다 철저한 이해관계로 엮이게 된 탐험가 연맹이 있었으니까.

[미궁]에 있어서만큼은 그들만 한 전문가가 없다고 하니 안심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깃털펜을 쥐었다.

"기회는 쉽게 오지 않는 법이지."

스스스─

깃털펜을 휘갈기며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그대들 또한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게 철저히 준비하도록."

*

탐험가 연맹장, 파비앙 들롱.

"오오!"

다시금 되돌아온 서신.

확실하게 목적을 밝힌 것도 모자라 욕심을 부리지 않은 덕분일까? 서신에는 텟퍼른 미궁 동반 탐사를 승낙하겠다는 호열의 서명이 담겨 있었다.

그래, 거기까진 좋았다....

뒷내용을 읽던 파비앙이 중얼거렸다.

"...철저한 준비?"

그냥 준비도 아니고 철저한 준비라니.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순간, 파비앙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

탐험가에게 요구되는 첫 번째 자질, 눈치.

파비앙은 눈치껏 그 뜻을 짐작해봤다.

눈을 지그시 감고.

가장 먼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봤다.

"나는 한없이 깊은 어둠이다...."

엄청난 업적을 세운 모험가다....

그런 호열의 입장에서 철저한 준비란 대체 무엇일까?

파비앙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으니 별수 없군."

연맹의 보물(寶物)을 꺼낼 수밖에.

연맹 차원에서 보관하고 있는 수많은 마도구들.

마탑의 수석 마법사인 호열 앞에서 마도구 자랑을 한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꼴밖에 더 되겠느냐마는.

탐험가 연맹의 마도구는 특별했다.

'탐험에 있어서만큼은 특출난 효과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 능력만큼 귀하신 몸들.

그래서 보물로 보관되어 대대로 내려져 내려오는 마도구들이었거늘. 그럼에도 파비앙은 결단을 내렸다.

호열이 남긴 메시지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

그대들 또한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게 철저히 준비하도록.

──────

파비앙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배려 아닌 배려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기회를 주었으니 그에 보답하라는 뜻일 터.

간만에 긴장감이 느껴졌다.

파비앙은 어깨를 으쓱였다.

"실망시키면 안 되니. 몸 상태를 최대한 끌어올려야겠구만."

그러던 중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온 추신.

──────

추신. 시간은 오후에 즐기는 차와도 같다.

──────

...뭣?

혹시 수수께끼인가?

파비앙은 가늘게 눈을 뜨고 그 뜻을 헤아려보았다.

"...혹시 시간의 중요성을 말씀하시는 건가?"

그런 뜻 같았거늘.

파비앙은 반신반의했다.

그야 추신으로 시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건.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는 소리였으니까.

"그 텟퍼른 미궁이 언제 나타날 줄 알고...?"

의문이 들었지만 파비앙은 고개를 저었다.

철저한 준비에 의문 따윈 포함되지 않았을 테니까.

이내, 파비앙이 연맹의 보물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흠칫하고 말았다.

"...설마 보물의 존재까지 알고 계셨던 건가?"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겠지.

보물의 존재는 오직 탐험가 연맹장과 연맹 간부 몇몇만이 알고 있는 극비 정보였으니까. 제아무리 호열이라고 해도, 거기까진 알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파비앙의 그런 생각은 며칠을 가지 못했다.

목요일.

유스라 왕국.

황금 송아지 주점.

벽면을 장식한 움직이는 그림.

TV를 통해 정기 업데이트 소식이 전해졌으니까.

"파비앙 연맹장님. 텟퍼른 미궁 균열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

호열이 시간의 중요성을 강조한 뒤.

불과 며칠 뒤에 떠오른 텟퍼른 미궁.

설마 그는 이 모든 전개를 예상하고 있던 것인가?

"대체 어떻게?"

한없이 깊어서일까?

정말이지, 그 능력의 한계를 짐작할 수 없었다.

파비앙의 이마에 다시금 식은땀이 흘렀다.

◈ 129화. 텟퍼른 미궁 (2)

[텟퍼른 미궁]

[적정 레벨 : Lv.500~?]

[붕괴도 : 0%]

정기 업데이트로 생성된 [텟퍼른 미궁] 균열.

이호열, 어둠의 정령, 한없이 깊은 어둠, 텟퍼른 미궁까지.

근 일주일간 이어져 온 관심이 드디어 최고조에 이르렀다.

유심히 상황을 지켜보던 AAU.

대한민국 지부장, 박민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말이 되는 검색량이냐, 수겸아?"

말 그대로 지붕을 뚫고 치솟아오른 트래픽량.

'아르카나 미궁' 키워드의 검색 횟수였다.

타다닥─

두들기는 키보드 자판.

검색량에 기여하던 윤수겸이 대꾸했다.

"퀘스트를 받은 건 우리 호열 씨밖에 없지만, 어째 다들 눈독을 들이고 있는 분위기인 것 같습니다.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니까요, 이것도."

두 상사 사이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성현준.

그가 적당히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르카나 대륙 10대 불가사의니까 말입니다."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

개발진이었던 이들이 10대 불가사의를 모를 순 없었다.

아르카나의 개발자였다면 모르는 게 이상할 정도로 거대했던 떡밥.

"호들갑 떠는 게 아니라 진짜 월드급 퀘스트니까요."

그랬다.

10대 불가사의, 하나하나가 아르카나 대륙을 넘어 월드에 영향을 끼칠 정도.

그러니까 현시점에선 공개될 콘텐츠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박민재가 애써 예리하게 뜬 눈을 번뜩였다.

"이호열의 수준이 그쯤에 도달했다는 거겠지."

"맞습니다. 추정 레벨이 최소 900레벨이니까요."

"잠깐, 그럼 다른 플레이어들이 끼어들면 안 되는 거 아냐?"

무섭지도 않은 건가?

자신들의 목숨이 걸린 일인데 말이야.

성현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쵸. 어떻게 호열 님이랑 경쟁을 하겠다고."

"...뭐? 호열 님?"

"저거 나한테는 호멘호멘 하지 말라고 하더니만?"

못 들은 척.

성현준은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미궁이니까 희망을 걸어보는 모양이더라고요."

"맞습니다. 미궁은 평범한 사냥터 같은 게 아니니까요."

"뭐, 공략 방법만 알면 깰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아르카나에서 미궁을 공략하는 데엔 여러 가지 방법이 존재했다.

예를 들자면 극과 극.

설치된 모든 함정을 파훼하고 공략, 생채기 하나 없이 미궁을 빠져나올 수도 있었고.

함정을 전부 건드리고,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도 모조리 때려잡고 빠져나오는 방법도 있었으니까.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가만히 앉아있으면 되니까요."

심지어는 제자리에 멈춰서 대기하는 방법도 있었지.

아르카나가 게임에 불과하던 시절에도 경험치는 귀중했으니까.

공략을 포기하고 다른 플레이어가 미궁을 공략할 때까지 대기한 뒤 본전이라도 건지는 방법도 있었단 소리였다.

"흐음, 그런 복잡한 계산들이 있었구만?"

하여튼 플레이어들의 사고방식이란.

어째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은 이 기분.

박민재가 혀를 내두르기도 잠깐.

윤수겸이 한마디를 거들었다.

"게다가 적정 레벨이 500레벨이니까요. 플레이어들 평균 수준에 비하면 높기는 해도.... 그동안 봐온 균열들이 워낙 악랄했어야 말이죠."

"뭣보다 거슬렸던 악마족도 없을 확률이 높고요!"

"...그런가?"

수겸이와 성현준 사원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하필 걸려도 개발 착수도 안 했던 텟퍼른이 떠오를 게 뭐냐.'

나이를 먹어 노파심만 늘어난 덕분일까?

박민재의 눈에 유달리 거슬리는 정보가 있었다.

바로 [텟퍼른 미궁]의 적정 레벨.

"야, 수겸아."

"네? 말씀하세요, 지부장님."

"그.... 미궁은 원래 적정 레벨이 저랬지?"

"물음표요? 원래부터 그렇죠."

말했다시피 미궁엔 다양한 공략법이 존재한다.

선택지에 따라서 공략 난이도가 널뛰고는 하니까.

과거에도 그 적정 레벨이 물음표로 표기되는 시스템이었다.

그래, 단순한 시스템상 표기에 불과했는데....

'그냥 미궁이 아니고 10대 불가사의다.'

개발진이었던 자신들조차.

상세한 설정까지는 기억하지 못하는.

아득히 먼 훗날의 콘텐츠.

박민재는 우려될 수밖에 없었다.

[적정 레벨 : Lv.500~?]

저 물음표의 최대치는 얼마쯤 될까?

이호열, 그의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나,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어도 되는 거냐?'

박민재, 그가 나름의 고민에 빠진 와중.

성현준의 들뜬 목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어라? 잠시만요. 호열 님이랑 탐험가 연맹이랑 이야기가 잘 끝난 모양인데요? 탐험가 연맹이 움직이기 시작했대요! 근데, 그냥 연맹 탐험가가 아니라 파비앙이 직접 나섰다는데요?!"

...뭐라고 파비앙?!

그 파비앙이 움직여?

내가 알고 있는 그 파비앙 들롱을 말하는 게 맞나?

박민재가 흠칫해서 되물었다.

"전설의 탐험가이자 탐험가 연맹장 파비앙 들롱?"

"네! 그 파비앙이 맞습니다!"

"...이런 미친."

파비앙 들롱!

일명, 전설의 탐험가.

10대 불가사의를 포함.

아르카나 대륙에 숨겨진 떡밥들에 누구보다 가까운 사내.

그렇기에 마탑과 마찬가지로.

시스템적인 이유로.

탐험가 연맹장이란 자리에 묶여있을 수밖에 없던 그였다.

그런 파비방 움직이기 시작했다니!

그것도 이호열과 함께 텟퍼른 미궁을 공략하기 위해서.

박민재가 헛웃음을 뱉었다.

"이래서야 진짜 노파심이었는데, 그래?"

.

.

.

연맹장, 파비앙을 포함한 3인의 연맹 탐험가.

그들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아보는 건.

역시나 같은 연맹 소속의 탐험가 플레이어밖에 없었다.

──────

제목 : 바퀴처럼 끈질긴 중계! 떴다 텟퍼른 미궁!

──────

유스라 왕국.

탐험가 연맹 본대 앞.

"잘 보이시나요?"

박휘강의 카메라가 파비앙을 비롯한 탐험가들의 모습을 담았다.

시청자들이 무어라 반응을 하기도 전, 박휘강의 흥분된 목소리가 이어졌다.

"파비앙 연맹장님이 움직이시다니요! 저도 탐험가 연맹에 발을 들이고 나서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인데요. 연맹장님도 모자라서 아론, 롬버스 씨까지!"

아론과 롬버스.

그동안 활동하지 않았던 파비앙을 제외.

탐험가 연맹에서 가장 높은 실적을 기록했던 두 탐험가.

-뭐임?? 대단한 사람들임???

-아니 딱 보면 모르냐? 당연히 대단하신 양반들이겠지

-일단 장비 생긴 것부터 심상치 않음ㅋㅋ

-ㄹㅇ 뭐냐 탐험가 장비 맞냐? 가슴이 웅장해진다

아직 텟퍼른 미궁엔 진입조차 하지 않았건만.

벌써부터 들썩거리는 채팅창.

박휘강은 눈치껏 한 줄로 요약을 끝마쳤다.

"한마디로 최정예 중에서도 최정예!"

탐험가 연맹 최정예 전력들이 [텟퍼른 미궁] 균열을 공략하기 위해 나섰다!

그건 어느 정도 상황을 예상하고 있던 플레이어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미치겠네. 파비앙이 움직일 수도 있는 캐릭터였어?"

"우리랑은 얼굴도 맞대지 않는 양반이 저런 자세로 나온다고?"

"아니. 파비앙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저 두 사람!"

랭커들에게도 파비앙은 미지의 존재였으니.

자연스레 화살이 향하는 쪽은 두 사람.

아론과 롬버스 방향이었다.

"둘 다 몸값으로 악명 높잖아?"

탐험가 연맹의 간부이자 실적 또한 한두 손가락에 손꼽히는 두 사내.

그래, 저들의 비싼 몸값이야 모르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몸값을 떠나서 저 두 사람. 보통 싸가지가 아니니까."

혀를 내두르는 이는 길드 랭킹 5위, 보헤미안.

길드 마스터, 가이버였다.

성지, 뮤온 사건의 여파로 길드 랭킹이 한 단계 추락.

그 순위가 이나즈마와 뒤바뀐 보헤미안이었거늘.

가이버는 그 경험을 소중하게 여겼다.

랭킹보다 중요한 건 주제 파악이다.

교훈 덕분에 상황을 침착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다들 기억하지? 한창 세컨드 썬이랑 던전 공략 경쟁 붙었을 때 말이야. 우리도, 세컨드 썬도. 적자를 무릅쓰고 저 두 사람을 영입했었잖아."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대격변 전 얘기잖아, 그거."

"어떻게 잊겠냐. 내가."

그날의 치욕을!

아론과 롬버스는 능력만큼이나 자존심이 강했다.

보헤미안과 세컨드 썬이 경쟁이 붙었던 것처럼.

두 사람 사이에서도 경쟁이 붙었었다는 이야기.

덕분에 두 탐험가 사이에서 휘둘리던 두 길드였다.

"내가 그날 깨달았지. 내가 다시 탐험가 연맹에 손을 벌리면 그때는 사람 새끼가 아니라 개자식이라고. 대격변 이전의 일이라 망정이지. 만약 이후였다면...."

두 탐험가들의 자존심 싸움 때문에 사망, 강제로 로그아웃 당했던 양측의 길드원들이 몇 명이었던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가이버였으니까.

치를 떠는 한편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자발적으로. 무급 선언까지 하고 나선 건 좋은데 말이야."

...이호열, 정말 괜찮을까?

말했다시피.

탐험 앞에서 탐험가들의 광기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

게다가 탐험가들은 두뇌 회전이 빠르다.

던전이나 미궁처럼.

자신이 갑인 위치에선 권한을 멋대로 휘두른단 뜻이다.

'그런 피곤한 족속을 셋이나 통제할 수 있을까?'

호열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도리도리.

가이버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누가 붙여준다고 해도 거절한다."

탐험가들한테 떠밀려서 본전도 못 찾을 게 뻔하겠지.

"...가이버, 진심이야?"

"응? 진심이지. 당연히."

"솔직하게 부러워하셔도 이해합니다. 마스터."

"뭐?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다친 건 팔인데. 머리라도 다친 것처럼 마음에도 없는 소릴."

"아니, 잠깐만. 말이 심하네. 너?"

그러나 가이버의 영양가 없는 해명은 오래가지 못했다.

"!"

이내, [텟퍼른 미궁] 균열 앞에서 마주친 호열과 세 명의 탐험가.

그들의 첫 만남이 넷튜버들의 전파를 타고 세상에 중계됐으니까.

호열을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는 아론과 롬버스.

그리고 연맹장, 파비앙까지.

"...실화냐?"

그 광경이 가이버에겐 다시금 주제 파악을 하게 되는 계기가.

동시에 [텟퍼른 미궁] 균열 앞에서 진입을 망설이던 플레이어들에겐 용기가 됐다.

"그래. 정 빡세면 우리 가만히 있자, 그냥."

"그치? 우리가 못 깨도 이호열이 클리어해 줄 거니까."

"어허. 이호열이 뭐냐. 하여튼 말버릇. 호열 님이시지."

웅성웅성─

[텟퍼른 미궁] 균열 목전.

수많은 인파, 그들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관심.

간만에 탐험이라 그런가.

아니면 지나친 관심 때문일까.

파비앙은 무거워진 어깨를 가볍게 풀었다.

'새삼 느끼지만 피곤한 세상에 살고들 있군. 모험가들은.'

자유가 없는 세상이라니, 질색이었다.

그러고는 시선을 옮겼다.

호열에게로.

그의 뒤를 따르는 수많은 이명(異名)과 업적.

대체 어떤 사내일까?

놀라움과 별개로 이날만을 기다려온 파비앙이었거늘.

과연, 그 기다림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마치 혼자만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우선 저 복장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아르카나 대륙의 것도, 그렇다고 모험가들의 차림새도 아니었다.

미궁 진입을 앞둔 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격식과 품격이 넘치는 차림새.

그보다 놀라운 건 태도였다.

"안부는 서신으로 충분히 나눴으니 생략하도록 하지."

탐험가 연맹장인 자신을 편히 대하는 것?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는 유스라 왕국에서만큼은 국왕, 하쿠나에 버금가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유스라에 자리를 잡은 탐험가 연맹이니 저런 태도야 납득할 수 있었다.

'아니, 유스라 왕국에서 탐험가 연맹이 받고 있는 배려를 생각하면.... 이보다 더한 하대라고 해도 너그럽게 받아들여야지.'

그러니 파비앙이 놀란 건 사소한 말투 때문이 아니었다.

'...대단하군.'

부담감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시선과 자세.

파비앙은 주변의 기류를 다시금 살폈다.

호열이 등장하는 순간.

그에게 집중된 인파들의 관심과 시선들.

자신의 입으로 말하기는 조금 민망했지만....

아르카나 최고의 탐험가인 자신이 받았던 관심보다도 몇 배는 부담스러운 수준이었다.

'카메라라고 했었지.'

게다가 저 작은 기계, 카메라가 세상 모든 이들에게 실시간으로 이곳 상황을 전달한다고 했었나.

말 그대로 세계가 호열을 지켜보고 있다는 말이었거늘.

'대단하단 말로 부족할 정도로 대단해.'

막대한 관심 속에서도 그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것이 그가 혼자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것 같다고 느껴진 이유겠지.

파비앙은 헛웃음을 뱉었다.

'이거 철저한 준비가 무색해지는군.'

미궁의 전문가는 자신이었거늘.

오히려 호열과 함께 해서 다행이라 여기고 있는 꼴이라니.

이러면 안 되겠지.

파비앙이 정신을 다잡던 순간.

"진입하지."

"...!"

이내, 평가에 화답하듯 호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끄덕─

서로서로 눈빛을 교환.

파비앙을 비롯한 연맹 탐험가들이 걸음을 옮겼다.

파비앙이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결정에 후회하지 않으시도록.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

다행이다.

우리만 미궁에 진입하는 건 아닌가 보네.

역시, 돕고 사는 현대 사회다.

'마왕을 잡는 것도 아니고 달랑 넷이선 조금 그렇지.'

마왕성과 미궁.

적정 레벨은 마왕성 균열 쪽이 300레벨이나 위였다.

하지만 나한테는 [텟퍼른 미궁] 쪽이 훨씬 부담스러운 균열이란 말이다.... [천적관계]의 발동 유무가 그 이상으로 중요했으니까.

'그래도 안심이 되네.'

그런 의미에서 든든하다, 탐험가 연맹.

만반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나의 노파심 섞인 서신을 대충 읽지 않았다는 건가?

일단, 착용한 장비들부터 장난이 아니었다. 그랑펠의 심미안으로도 흠잡을 곳이 없다는 것.

그 장비들의 수준이 최소 [명품]급은 된다는 거겠지.

물론, 우려됐다고 해도.

지금처럼 내색할 순 없었겠지만.

그래도 덕분에 나는 더욱 당당하게 입을 열 수 있었다.

"진입하지."

[텟퍼른 미궁]

[적정 레벨 : Lv.500~?]

[붕괴도 : 0.1%]

발을 들이는 동시에.

순식간에 뒤바뀌는 풍경.

한 가지 다행이라면 [텟퍼른 균열]이 생성된 장소가 허허벌판이라는 것.

균열은 현실과 아르카나 대륙이 절반씩 섞인 [『기이』]의 공간이니까.

'예를 들어 환승역에 생성됐어 봐.'

가뜩이나 복잡한 미궁에 지옥철 환승역이 뒤섞인 풍경?

상상만으로도 끔찍해진다, 진심으로.

그런데....

아무래도 안도하기는 한참 일렀던 모양인데?

서서히 밝아지는 시야.

드러나는 텟퍼른 미궁의 풍경.

그와 동시에 떠오르는 메시지와 스산한 음성.

[텟퍼른 미궁에 진입한 어리석은 자여.]

[이곳에 부귀영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당장 이곳을 떠나라.]

"...목소리!"

"파비앙 씨, 들으셨습니까?"

"들었네. 시작부터 쉽지 않구만, 이거."

반응을 보니까 미궁에서도 흔한 연출은 아닌 모양이다.

파비앙, 아론, 롬버스가 흠칫하기도 잠깐.

마지막 메시지가 들려왔다.

[죽고 싶지 않다면.]

...꼴깍!

파비앙 일행이 침 넘기는 소리가 나한테까지 들린다.

시작부터 경고라니.

애써 억누른 노파심이 다시금 샘솟는다, 이거.

그러나 내색은 없다.

성격을 떠나서 내게는 아직 '믿을 구석'이 있었으니까.

나는 언제나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이엘."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하이엘.

그런 하이엘의 곁에서 일렁이는 검은 형체, 어둠의 정령.

녀석이 나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한없이 깊은 어둠이여. 그대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고 뭐고 다 좋은데.

"한없이 깊은 어둠...!!"

듣는 사람도 있는데.

미궁에서라도 그 호칭만은 어떻게 좀 안 될까?

가슴 속에서 애원이 메아리치기도 잠깐.

곧 시야가 점멸했다.

[10대 불가사의 퀘스트 : 텟퍼른의 미궁]

새로운 퀘스트 목표가 떠올랐다.

◈ 130화. 텟퍼른 미궁 (3)

[10대 불가사의 퀘스트 : 텟퍼른의 미궁]

아르카나 대륙 10대 불가사의, 텟퍼른.

텟퍼른의 미궁을 파훼하고.

텟퍼른의 실체를 세상에 알려라.

현재까지 밝혀낸 불가사의 : 0개 / 10개

─텟퍼른의 미궁을 목격하라. (성공)

─미궁 심층부에 도달하라. (진행 중)

갱신된 목표는 미궁 심층부에 도달하는 것.

뭐, 예상하지 못한 목표는 아니군.

미궁에 진입한 이상, 미궁을 파훼하기 위해선 반드시 그 심층부에 도달해야만 했으니까.

겸사겸사 퀘스트도 수행하는 느낌이려나.

"...저게 정령인가?"

처음 보면 놀랄 만도 하지.

그 외관이 워낙 심미적이시니까.

하이엘과 어둠의 정령을 넋이 나간 듯 바라보던 탐험가들.

"경, 지금부턴 저희에게 맡겨주시겠습니까?"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파비앙이었다.

'그놈의 호칭.'

초면부터 호열 경이라니.

실례가 아닌 듯하면서도 내게는 실례인 호칭이었거늘.

이해할 수 있었다.

'탐험가 연맹은 유스라 왕국 소속이니까.'

내 입으로 말하긴 또 그렇지만.

어쨌든 나는 유스라 왕국에서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적어도 유스라 왕국 소속인 연맹 탐험가들이 내게 공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당연하단 말이다.

그래서인가.

나는 너그럽게 대꾸했다.

"그대들의 활약을 지켜보겠네."

파비앙과 두 사내가 앞으로 나아갔다.

살포시─

손을 뻗어서 높게 솟아오른 벽면을 살피는 이들.

함정을 탐색하는 거겠지.

그래도 경험이 있다고, 나도 알아볼 순 있다.

함정이라면 혓바닥을 대는 정도로 맛을 봤었으니까.

[퀴른베르크 기계탑] 균열에서 말이지.

'물론, 그때랑은 느낌부터 다르긴 하다.'

기계탑의 함정은 오직 악마를 사냥하기 위한 함정들.

그 은제 함정과 비교했을 때.

이곳, 텟퍼른 미궁의 함정은....

'아직 보진 못했지만, 훨씬 악랄하겠지.'

일단, 경고 메시지부터 심상치 않았었다.

[텟퍼른 미궁에 진입한 어리석은 자여.]

[이곳에 부귀영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당장 이곳을 떠나라.]

[죽고 싶지 않다면.]

근데, 원래 없다고 하면 있는 법이고.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지는 법이거든.

이런 메시지가 내게만 떠오른 건 아니겠지.

'진입한 플레이어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걸?'

분명, 텟퍼른 미궁에 뭔가가 있을 거라고.

시작부터 메시지가 떠오른 걸 보니까.

보통 전리품이 숨겨져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초입부터 호들갑을 떨고 있겠지들.

'나도 똑같이 생각하지 않았을까.'

청렴결백의 화신.

그랑펠의 피곤한 성격.

그리고 어둠의 정령과 만나지 않았더라면 말이야.

"파비앙 씨, 함정의 수준이 보통이 아닙니다."

"단순한 기계 장치가 아니군. 마력이 깃들어 있어."

"...마력이지만 보통 마력 같아 보이진 않습니다. 마도구가 반응하지 않는 걸 보면 말입니다."

"과연, 불가사의라는 건가."

"까다로워. 과연, 연맹의 보물을 챙겨오길 잘했군."

힐끗─

함정을 발견한 파비앙이 나를 바라보았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거냐고 눈치를 주는 건가?

괜히 찔렸지만 나는 시선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야 이미 철면피를 깔고서는 선언했으니까.

그대들의 활약을 지켜보겠다고.

'그래서 만반의 준비를 하라고 했잖아. 내가.'

나랑 함께하기 위해선.

나의 거품을 감당하기 위해선.

많은 준비가 필요할 것이다.

친절하게 서신까지 적어서 전달했거늘.

'그래도 양심상 마냥 날로 먹을 순 없겠지.'

과대평가를 기어코 현실로 만들어 내는 피곤한 성격...!

남에게 오롯이 의존하는 성격은 더더욱 못됐으니.

만반의 준비라는 거.

이쪽도 나름대로 했다는 뜻이다.

'체력이 초인 수준이 돼서 망정이지.'

그런 의미에서 마탑에 미궁 관련 서적이 존재하지 않았던 건 천만다행이었다.

미궁에 관한 지식까지 머릿속에 집어넣을 여유는 또 없었으니까.

나는 내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준비를 떠올렸다.

'미궁이나 함정에 관한 지식은 없지만.'

[텟퍼른 미궁]에 관한 정보를 얻어낼 순 있었거든.

나는 어둠의 정령을 바라봤다.

.

.

.

"내가 그대들을 초대한 이유는 간단하네."

마탑의 수석 집무실.

달칵─

나는 찻잔을 세팅하며 말했다.

"어둠의 정령에 관한 두 선임의 의견을 듣기 위함이네."

밝혀진 바가 지극히 적은 어둠의 정령.

어떤 서적을 뒤져보아도 이미 알고 있는 그 이상의 정보는 존재하지 않았다.

인터넷에 검색해 볼 필요도 없었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일반 정령에 관해서도 아는 게 없었으니까.

그래서 초대한 두 선임, 마티스와 페이얀이었다.

"초대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네, 저도 영광인데.... 저, 먼저 목 좀 축여봐도 될까요?"

"들지."

곧장, 찻잔을 드는 페이얀.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쓴 법.'

대부분의 비약초는 사람이 먹을 맛이 못 된다.

애초에 차보다는 약에 가까운 식물들이었으니까.

나야 비루한 스탯을 보완하기 위해 꾸준히 섭취하고 있다만....

괴물 같은 선임 마법사들에게 비약초 따윈 필요하지 않겠지.

접객용으로 비약초 차는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

그래서 준비한 차였다.

"...씁, 뭔가 오묘한 풍미네요? 홍차랑은 다른 게."

많이 먹어본 사람이 잘 안다는 건가?

대식가인 페이얀은 바로 알아맞힌 모양이었다.

'그래, 오묘한 맛이겠지.'

그거 개당 300원짜리 고급 녹차 티백이거든.

어째서 티백 녹차를, 그것도 고급으로 대접했는가.

거슬러 올라가자면 새벽 배송에서 할인 쿠폰까지 설명해야 했으니.

나는 미간을 찌푸리는 페이얀을 뒤로 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대들은 텟퍼른에 어둠의 정령이 출현한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뜨뜨─

먼저 입을 연 건 차를 원샷하려던 페이얀이었다.

페이얀이 황급히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아시다시피 까다로운 어둠의 정령 출현 조건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관해선 역시나 드릴 말씀이...."

"책망하고자 그대를 부른 게 아니라네, 페이얀 롯."

"...네?"

그때도 말했지만, 누구의 책임도 아니었지.

어둠의 정령이 출현한 건.

그저 우연이 겹쳤을 뿐.

마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페이얀 선임. 이호열 수석께서는 텟퍼른이 어째서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하는 장소가 되었는지. 그 이유를 우리에게 묻고 계신 것이라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게 그 말이었다.

마티스, 역시 흑마법학 선임답다.

흑역사로 시커메진 내 속내를 잘도 알아보는구나.

"아, 그런 말씀이셨다면...."

페이얀은 멋쩍게 웃다가 말을 이었다.

"무계약 상태의 정령은 자신이 눈을 뜬 장소에 머무는 습성이 있습니다. 이질적인 어둠의 정령이지만.... 그 기본 성질까지 다르진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어둠의 정령이 아마도 텟퍼른에서 태어난 정령이 아닐까, 예상하고 있습니다."

"마티스,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제 생각도 페이얀 선임과 같습니다."

흑마법학의 창시자.

마티스가 자신의 해박한 지식을 늘어놓았다.

"무계약 상태의 정령이 자연에서 필요한 마력을 충당하듯. 어둠의 정령 또한 자연에서 적합한 마력을 수급해야만 할 겁니다."

"그렇죠. 어쨌거나 정령이니까요."

"텟퍼른이 더없이 적합한 장소였다는 것이겠지요."

쉽게 말하자면.

텟퍼른에 적합한 마력이 넘실거릴 거란 말이군.

마티스의 추측에 나는 탄식을 삼켰다.

...이거 괜히 불가사의 퀘스트가 아니었구나.

'적합한 마력은 과거와 배경에서 비롯되는 것.'

분명, 텟퍼른과 얽힌 사연이 있을 거란 얘기겠지.

마티스가 정중하게 말을 이었다.

"어둠의 정령과 대화를 나눠보시는 것이 적합한 마력의 근원을 알아내는 데에 도움이 되시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어떤 사연이 얽혀있다고 한들. 경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테지만 말입니다."

나를 과하게 신뢰하고 있구나, 마티스 선임.

그러나 마티스가 마냥 착각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 흑마법과 적합한 마력의 성질.

'어둠은 더욱 짙은 어둠에 파묻힌다.'

마티스는 나의 적합한 마력을 심히 고평가하고 있었으니까. 제아무리 텟퍼른이라고 해도 내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하는 거겠지.

'결국, 어둠의 정령과 대화를 나눠보는 게 최선이겠군.'

대화는 그쯤에서 끝났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두 선임.

마티스의 뒤를 따라 집무실을 빠져나가던 페이얀이 문득 입을 열었다.

"...저기 이호열 수석님."

"?"

"혹시 아까 그 차, 어떻게 하나만 얻을 수 있을까요?"

페이얀은 넉살 좋게 웃어 보였다.

"뭔가 오묘한 맛이라서 한 잔만 더 마셔보고 싶어서요."

대식가라서 300원짜리 녹차도 맛있게 느끼는 건가.

마음 같아서는 몇 개라도 내어주고 싶었건만.

그 타이밍이 애석하게도.

"유감스럽게도 그럴 순 없겠군."

티백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거든.

그러나 이놈의 긍지와 격식께서.

솔직하게 내가 마실 예정이라 내어줄 수 없다고.

사실대로 말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덕분에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카페인 과다 섭취는 수면에 방해가 된다."

"...네? 카페인? 무슨 폐인이요?"

.

.

.

누가 들으면 내가 카페인 과다 섭취 때문에 잠을 못 자는 줄 알겠군. 다시 떠올려 봐도 뻔뻔함에 혀가 내둘러지는 대화. 그러나 그 또한 만반의 준비였다.

나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텟퍼른에 관해 궁금한 것이 있다."

텟퍼른.

그 이름이 나오기 무섭게 어둠의 정령이 답했다.

"그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없이 깊은 어둠이여."

과연, 마티스의 말대로였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치로군.

나는 함정 해제에 집중한 파비앙 일행을 바라봤다.

'저쪽에도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정보겠지.'

같은 배를 탄 마당에 숨길만 한 정보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텟퍼른의 과거를 알고 싶다, 어둠의 정령이여."

*

시야에 떠오른 메시지.

미궁에 메아리치듯 울리는 목소리.

정신을 차린 플레이어들이 대화를 나눴다.

"다들 들었지?"

"뭐가 없다고. 당장 떠나라고 하는 거 보니까...."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지! 역시 진입하길 잘했는데?"

많게는 길드와 파티.

적게는 혼자서 진입한 플레이어들.

길드나 파티 단위로 진입한 플레이어들은 큰 문제가 없었지만, 홀로 진입한 플레이어들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그 대부분은 넷튜버 플레이어들이었다.

"아니, 형님들. 저 혼자라니까요? 인간적으로 어떻게 전력질주를 합니까! 어떤 함정이 어디서 튀어나올 줄 모르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파티라도 하나 구하는 건데...!"

"이게 미궁은 그 스타트 지점이 각자 다르다고 들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저 혼자는 아니겠죠? 저처럼 혼자 진입한 플레이어도 있겠죠?"

그들과 마찬가지로 넷튜버 플레이어.

박휘강은 시청자들에게 상황을 전달했다.

역시나 탐험가의 지식이 빛을 발했다.

"미궁에 출구는 하나여도 입구는 여러 개니까요! 저를 포함해서 플레이어들이 각자 떨어진 위치가 다르단 거죠! 네? 호열 님은 못 보는 거냐고요? 아뇨! 또 미궁 심층부부터는 결국 다 만나게 되어있어서요."

-그럼 심층부까지 가야 된다는 거임???

-휘강이 혼자서 가능하냐??

-안 될 것 같으면 걍 포기하자 ㅇㅇ

-ㄹㅇ 호열 님이 클리어하실 때까지 버티는 것도 방법임

시청자들이 하는 말은 언제나 맞는 말이 대부분이었지만....

박휘강은 다짐했었다.

이번만큼은 조금 노력이란 걸 해보기로 말이다.

'호열 님의 업적을 세상에 알릴 기회야.'

내가 한 일을 세상이 모르게 하라!

마치 그런 좌우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해 온 호열이었다.

간단한 인터뷰에서도, 기자 회견에서도 호열은 자신의 업적을 뽐내거나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심지어는 마왕성 균열을 클리어하셨을 때도....'

클리어도 평범한 클리어가 아니었다.

무려 세 개의 마왕성 균열을 '압살'했다 부를 정도로.

겨우 10분 만에 클리어했던 호열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박휘강은 진심으로 생각했다.

'세상은 조금 더 호열 님의 수고를 알 필요가 있다.'

그저 호멘.

속으로 주문을 외운 박휘강이 심호흡했다.

그러고는 외쳤다.

"저기 혹시 저랑 파티 맺으실 분 계신가요?"

"...어? 보세요, 형님들. 저 혼자 아니라니까요."

"제 클래스는 탐험가입니다! 미궁에선 도움이 될 겁니다!"

"...탐험가? 와씨, 다행이다!!"

"저도! 저도 끼워주세요!"

순식간에 모여든 플레이어들.

하나같이 제각각이었다.

박휘강처럼 넷튜버 플레이어도 있었고, 혼자서 진입할 만한 실력을 갖춘 고레벨 플레이어도, 심지어는 초신성으로 얼굴이 알려진 이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 출신이 무슨 상관이랴.

어차피 이들의 목적은 하나였다.

"힘을 합쳐서 심층부까지 나아가 보자구요!"

물론, 보통 미궁도 아니고 10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텟퍼른 미궁].

당연하게도 그 첫걸음부터 호락호락하지 않았으니. 박휘강의 파티를 포함, 미궁 곳곳에서 고함이 들려왔다.

"뭐, 뭐야? 미궁 벽에 금이 가고 있는데?"

"저기요오? 휘강 씨. 이거 무너지는 거 아니에요?!"

"잠깐만요, 형님들! 벽 안에 뭔가 있는데요?"

"으아아아악! 벽 안에서 뭔가 움직인다!!"

.

.

.

웅성웅성─

텟퍼른 미궁에 존재하는 수많은 스타팅 지점.

그러나 침묵이 흐르는 유일한 지점은 호열과 파비앙 일행이 진입한 장소뿐이었다.

파비앙이 누구던가? 아르카나 대륙 최고의 미궁 전문가이자 살아있는 탐험가의 전설.

"후우.... 함정은 해제했습니다."

간만에 실전이었지만 육체에 새겨진 감각은 무뎌지지 않았다.

물론, 만반의 준비 덕을 많이 보긴 했다.

마도구가 아니었다면 호열 경 앞에서 체면을 제대로 구길 뻔했으니까.

'평범한 미궁 수준이 아니야.'

누군가 전리품을 숨겨둔 장소, 미궁.

그 전리품을 회수할 때의 동선도 계산하여 지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함정으로부터 안전한 지름길이 숨겨져 있다든가.

함정을 쉽게 해체할 수 있는 규칙이 있다든가.

그래, 그것이 일반적인 미궁의 상식이었다.

그러나 텟퍼른 미궁에 그런 요소는 존재하지 않았다.

정말로 누구의 접근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모든 함정이 해체하기 벅찰 정도로 정교했다.

'...어쩌면 그 목소리가 사실일지도 모르겠군.'

부귀영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당장 이곳을 떠나라.

죽고 싶지 않다면....

낌새를 알아차린 건 파비앙뿐만이 아니었다.

"아론, 어떻게 생각하냐?"

"...파비앙 씨, 당신도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물론, 나도 위화감을 느끼고 있네."

파비앙은 의문에 휩싸였다.

부귀영화를 보관하기 위함이 아니라면.

텟퍼른은 어째서 이런 미궁을 만들었단 말인가?

"그야말로 불가사의."

상식선에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둠의 정령이 풀어내기 시작했으니까.

"텟퍼른은 지키고자 했었다. 모든 것을."

그래, 텟퍼른의 진실을.

"...!!!"

이야기를 경청하던 파비앙, 아론, 롬버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이야기. 그래, 이 순간 침묵이 흐르는 이유는 바로 그 진실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호열의 표정엔 일말의 변화조차 없었다.

이내, 호열이 입을 열었다.

"그대들의 긍지를 내가 알게 되었다. 텟퍼른이여."

그리고 충격적인 말을 뱉었다.

"파비앙, 지금부터 나는 함정을 정면돌파하겠다."

"...?"

"그대들은 그대들의 긍지에 따라 행동하게나."

...갑자기?

함정을 정면돌파?

게다가 긍지라니?

송글송글.

파비앙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경,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

.

.

무슨 말이긴.

한 줄로 요약하자면 간단하다.

'텟퍼른은 아르카나 대륙을 위해 자신들을 희생했다.'

덕분에 죽고 못 사는 긍지께서 발동이 걸렸단 말이지.

역시 쉽게 가는 법이 없구나.

그래도 다행이었다.

아직 반납하지 않은 마도구가 '하나' 있어서 말이야.

여유를 부릴 새는 없었다.

나는 곧장 마탑 가넷 홀에서 대여한 마도구를 착용했다.

펄럭─

◈ 131화. 거창하구나

[명품-백색(百色)의 겉날개]

[등급 : 유니크]

[제한 : Lv.350]

[효과 : 착용 시, 사용자가 발현하는 속성 마법을 저장. 저장할 수 있는 마법의 개수는 겉날개의 색에 비례하며 저장된 마법을 발현 시, 마력 소모량이 30퍼센트 감소. - 현재 저장된 속성 마법의 수 : 100개]

마왕성 균열 진입을 앞두고 대여했던 마도구.

절차에 죽고 못 사는 내가.

왜 아직까지 아이템을 반납하지 않고 지니고 있는 거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내게는 당당한 이유가 있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다시 빌린 거니까.'

[돌개바람의 증표].

[명품-벼락 맞은 나뭇가지 완드].

[명품-백색(百色)의 겉날개].

나는 마탑, 가넷 홀에서 대여한 아이템을 반납하다가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하나 정도는 보험으로 남겨두는 편이 좋겠다고.

주제 파악이라는 내 특기를 발휘한 거지.

'[천적관계]도 없는데 아이템이라도 제대로 챙겨야 해.'

셋 중에서 내가 택한 아이템은 당연하게도 백색의 겉날개.

무엇보다 그 성능이 가히 사기적이었으니까.

다른 아이템들의 효과도 상당했지만.

'겉날개가 아니었다면....'

나는 마왕, 플라우로스를 절대 쓰러트릴 수 없었겠지.

'효과를 보면 유니크 등급인 게 이상할 정도야.'

마도구의 대여를 연장하는 데 절차상 문제는 없었다.

내가 누구인가?

낙하산에서 이제는 나름 인정받는 수석 공동 연구자.

물론, 수석의 권한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애초에 [명품-백색(百色)의 겉날개]를 필요로 하는 마법사는 없는 모양이었다.

-"반납된 마도구도 많습니다. 천천히 둘러보시는 게...?"

가넷 홀의 숙련 마법사가 그렇게 권해올 정도로 말이야.

다른 마도구?

좋지.

좋은 수준을 넘어서 나도 제발 좀 써보고 싶다.

근데 하나같이 레벨 제한이 좀 심각하게 높아서 말이야.

펄럭─

결국, 내게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다는 것.

나는 겉날개를 망토처럼 어깨에 얹었다.

겉날개가 살아있는 것처럼 어깻죽지에 달라붙었다.

정말 날개라도 돋아난 듯한 착각이 든다.

그랑펠의 심미안으로도 보아도 더없이 흡족한 자태.

'...나, 너무 명품만 좋아하는 거 아닌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만.

뭐, 그래도 이 정도면 남는 장사다.

나는 스탯창의 변동을 확인했다.

[이름 : 그랑펠 클라우디 아르페우스 로미오]

[칭호 : 최후의 모험가]

[클래스 : 악마 사냥꾼]

[레벨: 425]

[능력치]

근력 : 71 / 민첩 : 76 / 마력 : 387 / 행운 : 6 / 심미 : 中

[보유 포인트 : 0]

겉날개를 착용한 덕분에 [심미]가 下에서 中으로 다시 상승했다.

[천적관계]가 없을 땐 사소한 스탯 하나라도 아쉬운 법.

구질구질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챙길 건 챙겨야지.

"저게 마탑의 마도구...!"

물론, 다른 이들이 나의 복잡한 속내를 알아차릴 순 없었으니.

파비앙 일행에겐 감탄한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상황이 상황인지라 다들 곧장 정신을 차렸지만.

"...가 아니라 경. 함정을 정면돌파하시겠다니요!"

.

.

.

"텟퍼른은 고대의 도시였다."

"...!!!"

어둠의 정령의 말은 시작부터 놀라웠다.

연맹 탐험가, 아론과 롬버스는 헛웃음을 뱉었다.

자신들을 포함.

그렇게나 많은 탐험가가 매달렸던 텟퍼른이거늘.

제대로 된 단서 하나 얻지를 못했었던 과거.

"이런 식으로 텟퍼른의 비밀을 알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꼬리 늘이지 마라, 아론. 나까지 기운 빠지니까."

"일단 정숙해 보게나, 둘 다."

사실 파비앙의 심정도 두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탐험마다 그 방식이 다르다고 해도.'

이젠 정령의 도움을 받는 탐험이라니.

자신조차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으니까.

그러나 파비앙의 두뇌는 냉철했다.

그는 현실적으로 상황을 판단했다.

'일반적으로 미궁 탐사에 걸리는 시간은 최소 일주일 이상이다.'

그러나 이곳은 평범한 미궁이 아닌 아르카나 대륙 10대 불가사의 [텟퍼른 미궁]이다.

못해도 몇 배에 달하는 시간이 소요되겠지.

'...아니, 우리가 파훼할 수 있긴 할까?'

지금만 하더라도 함정 하나를 해제하는 데 수십 분이 소요됐다.

자신을 포함, 세 명의 탐험가가 달라붙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시간조차 충분하지 않았다.

왜, 시간은 오후에 즐기는 차와 같다고 했었나?

호열 경이 말했던 것처럼.

'이곳은 아르카나 대륙이 아닌 균열이니까.'

상승하는 균열 붕괴도까지 고려한다면....

파비앙은 빠르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계획했던 방식으로는 불가능하겠군."

그런 의미에서 어둠의 정령의 말은 유심히 들어둘 필요가 있었다.

텟퍼른에 관한 정보는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테니까.

"그들은 '깨워선 안 될 존재'를 깨우고 말았다."

...그런데 깨워선 안 될 존재라니?

"이 지하 깊숙한 곳에서."

"...!"

번뜩!

그 말에 파비앙의 직감이 곤두섰다.

텟퍼른 미궁,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느꼈던 위화감.

보물도 명예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미궁이 지어진 이유는 대체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드디어 머릿속 의문들이 맞물리기 시작했다.

파비앙이 작게 중얼거렸다.

"...깨워선 안 될 존재를 봉인하기 위해서였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모든 것이 맞아떨어졌다.

설계자조차 파훼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함정도.

지나치게 비효율적인 구조도.

미궁에 울리던 음울한 목소리까지도.

-당장 이곳을 떠나라. 죽고 싶지 않다면.

파비앙이 쓰게 웃었다.

"경고가 아니라 다정한 우려였단 말인가?"

과연, 전설의 탐험가.

파비앙의 직감은 정확했다. 어둠의 정령이 말을 이어나가자, 아론과 롬버스가 침음을 삼켰다. 그러고는 함정이 숨어있는 벽면을 바라봤다.

"단순하게 엿먹일라고 마법을 걸어둔 게 아니었어."

"마법도 보통 마법이 아니지. 흑마법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 유지되는 것은 흑마법밖에 없으니까."

어떤 마도구를 사용한다고 해도.

마력에서 발현되는 마법은 영구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

그러나 '적합한 마력'에서 발현되는 흑마법은 다르다.

적합한 마력은 과거와 배경에서 비롯되는 것.

파비앙이 감상을 뱉어냈다.

"비극이군."

구체적인 사연은 알 수 없지만.

깨워선 안 될 존재를 깨운 텟퍼른.

그들은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아르카나 대륙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미궁을 만들어 깨워선 안 될 존재를 봉인하고, 자신들을 희생해서 지금까지. 미궁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흑마법의 제물이 된 것이었단 말인가?

마찬가지로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아론.

그가 미궁의 벽에 손을 얹었다.

"그럼 벽 안에서 느껴지던 인기척이?"

영원히 잠들지 못하는 텟퍼른의 주민들이란 말이었다.

불가사의에 이런 비밀이 숨어있었다니.

침묵─

생각에 빠진 파비앙 일행이 입을 다물었다.

물론, 호열의 폭탄선언 덕분에 정적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가 아니라 경. 함정을 정면돌파하시겠다니요!"

호열과 어둠의 정령이 나눈 대화였다.

곁에서 엿들었던 자신들도 알아들은 텟퍼른의 진실이었다. 경께서 오해하셨을 리가 없었거늘.... 허나 누가 봐도 빈말이 아닌 듯한 행동이 이어졌다.

또각─

호열이 날개를 흩날리며 걸음을 옮겼으니까.

"텟퍼른의 긍지를 내가 잇겠다는 소리라네, 파비앙."

"...긍지라 하시면?"

깨워선 안 될 존재를 미궁에 봉인한 것?

'그렇다면 이 봉인을 더욱 견고히 하시겠다는 뜻인가?'

그러나 호열의 대답은 예상보다 훨씬 충격적이었으니.

"깨워선 안 될 존재. 그 원흉을 제거하면 되는 일이다."

"...!!!"

.

.

.

깨워선 안 될 존재.

어째 이름부터 상당히 박력이 넘치시는데?

다시금 균열의 정보를 떠올려 본다.

[적정 레벨 : Lv.500~?]

이제야 적정 레벨이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군.

월드급 퀘스트인 10대 불가사의에 얽힌 녀석이니까.

최소 네임드, 최대 보스몹쯤 되지 않을까.

'젠장, 내 팔자야.'

그런 의미에서 정말이지, 이놈의 긍지가 원망스럽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모든 것을 자애롭게 살피지 않고는 못 배기시는.

그랑펠의 귀족적인 긍지가 말하고 있었다.

"텟퍼른은 이제껏 그들의 책무를 다했으니."

고대의 도시, 텟퍼른이 온전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스스로 흑마법의 숙주이자 제물이 되어 잠들지 못한 채 미궁을 지켰던 텟퍼른의 생존자들. 그대들에겐 편히 잠들 수 있는 자격이 있노라고.

나의 빌어먹게 피곤한 긍지에 시스템도 감동했다는 건가?

퀘스트창이 점멸하고 있었다.

새로운 퀘스트 목표가 갱신됐다.

─텟퍼른의 미궁을 목격하라. (성공)

─미궁 심층부에 도달하라. (보류)

─심층부에 잠든 '깨워선 안 될 존재'를 처치하라. (진행 중)

하다 하다 시스템도 감동하는 긍지라니.

...개뿔.

나는 냉정하게 판단했다.

'균열이 생성된 이상. 만나게 되는 건 필연적이었을 거야.'

'깨워선 안 될 존재'.

녀석은 심층부에 봉인되어 있을 테니까.

녀석을 처치하지 않는다면 균열은 어차피 클리어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어둠의 정령과 나눈 대화가 무의미했던 건 절대 아니다.

'뭐랄까. 매를 맞게 될 사실을 먼저 알게 된 거지.'

그래도 대비할 여유가 생겼다고 좋아해야 했건만.

'마냥 좋아할 수도 없는 상황인데, 이거.'

일반몹과 네임드몹은 차원이 다르다.

그런 네임드몹과 보스몹은 또 한 차원이 다르다.

최소 네임드, 최대 보스몹일 게 뻔한 '깨워선 안 될 존재'를 처치해야만 하다니.

[천적관계]가 켜지지 않은 지금, 내겐 상당히 부담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내 걸음에 망설임은 없었다.

나는 미궁 저편을 향해 나아갔다.

파비앙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 벽이 무너질 겁니다. 흑마법의 제물이 된 텟퍼른의 주민들이...!!"

가라앉지 않고는 못사는 무거운 긍지 때문에?

아니면 고아하게 흩날리는 백색의 겉날개 때문에?

그것도 아니라면 하이엘, 그리고 어둠의 정령이 곁에 있어서?

아니, 핵심은 그런 게 아니다.

나는 알고 있었으니까.

'어둠은 더욱 짙은 어둠에 종속된다.'

흑마법의 성질을.

흑마도학.

선임 마법사, 마티스 딘 카를이 현대에 들어서야 개념을 정립한 이질적인 마법. 그 역사가 짧은 흑마법이지만, 그에 관한 나의 지식은 충분하다.

마티스가 누구인가?

마르셀로가 두각을 나타내기 이전, 누구보다 수석의 자리에 가까웠던 마법사.

그 말이 뜻하는바.

그의 능력은.

그가 집필한 흑마도학 서적엔 부족한 바가 없다는 말이다.

나는 마탑에 존재하는 그런 흑마도학 서적을 단 한 권도 빠짐없이 독파했단 말이다.

콰직─

거침없이 발을 내디딘 탓이겠지.

발동된 함정.

무너져 내리는 벽을 보며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미궁 전체에 『흑관』을 발현한 것인가? 그렇군. 단순한 미궁으로 녀석을 봉인하기엔 무리가 있었던 거겠지. 그대들이 무엇을 우려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중급 흑마법, 흑관.

효과는 대상의 오감(五感) 중 일부를 앗아가는 것. 텟퍼른 미궁에 발현되어 있는 흑관은 오직 하나의 대상, 깨워선 안 될 존재를 향하고 있었다.

이내,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검은 형상.

"그 흑관을 유지하기 위해선 막대한 양의 적합한 마력이 요구됐겠지. 그를 충당하기 위해 그대들의 육체를 제물로 『흑의 계약』을 맺은 것일 터."

상급 흑마법, 흑의 계약.

쉽게 설명하자면 강령술의 일종.

다른 것이 있다면 마력과 적합한 마력의 차이. 그리고 네크로멘서의 강령술과 다르게 흑의 계약은 살아있는 대상에게도 발현할 수 있다는 것 정도.

내 말에 파비앙이 머뭇거렸다.

"경, 그 말씀은.... 텟퍼른의 주민들이 이 미궁에 갇힌 녀석을 영원히 봉인해 두기 위해서. 자신들의 육체를 흑마법의 제물로 바쳤다는 소리십니까?"

끄덕─

하이엘이 나를 대신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텟퍼른.

불가사의답게 그 사연 한번 우중충하시다.

그러나 어떤 결과를 초래했건. 그들이 아르카나 대륙에 혼란을 가져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목숨을 희생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으니까.

이놈의 긍지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도 이해가 된다.

그러니까 납득한 지금.

더 이상의 징징거림은 없었다.

"...떠나라. 죽고 싶지 않다면. 떠나라."

남아있는 것은 오직 생전의 원념뿐.

『흑의 계약자』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머릿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떠나라. 죽고 싶지 않다면. 떠나라."

"...떠나라. 죽고 싶지 않다면. 떠나라."

"...떠나라. 죽고 싶지 않다면. 떠나라."

그러나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저들의 긍지를 알고 있다.

저들의 원념 또한 알고 있다.

"내가 그대들의 마음을 알았다."

깨워선 안 될 존재라고 했겠다.

정체가 뭔지는 몰라도 그 호칭부터 거창하니 대단한 녀석이겠지.

그런데 말이야.

이쪽도 호칭 하나만큼은 뒤지지 않을 만큼 거창해서 말이지.

한없이 깊은 어둠.

...뒤지고 싶을 정도로 거창해서 문제거든, 오히려.

고오오─

나는 그 이명에 걸맞게 적합한 마력을 끌어올렸다.

어둠의 정령과 감응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텟퍼른 미궁, 전체가 나의 적합한 마력에 감응하기 시작했다.

구구구궁─!

미궁에 울리는 진동.

파비앙 일행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파, 파비앙 연맹장!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그러나 경청할 여유는 내게 없다.

흑역사 때문인가, 아니면 그랑펠의 우울한 배경 설정 때문인가. 그 근원은 알 수 없지만,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솟구치는 적합한 마력.

이걸 제어하는 데만 하더라도 벅차단 말이다...!

그러나 언제나처럼 내게 동요는 없었으니.

이내, 나를 향해 다가오던 흑의 계약자들이 멈춰 섰다.

그와 동시에 시야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텟퍼른 흑의 계약자에 대한 지휘권을 획득하셨습니다.]

그들이 이전까지와는 다른 말을 뱉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과오를 바로 잡을 기회가 왔도다."

*

쿠구구궁─!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진동하는 텟퍼른 미궁.

곳곳에서 플레이어들의 비명이 울렸다.

그러나 진짜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흔들린다고 끝나는 게 아니야!"

"미궁 벽에서 몹이 튀어나올 거라고!"

"미친! 어떤 자식이야? 트롤한 새끼 빨리 튀어나와라!"

각자 미궁에 떨어진 위치는 달랐지만, 모두가 전투태세를 취했다.

클래스 탐험가, 변변찮은 전투 능력을 자랑하는 박휘강도 호신용 단검을 치켜들었다.

"미리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송출이 고르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일반적인 미궁이 아니다.

직감은 했었지만, 이 정도로 급격한 변화가 있을 줄은 몰랐다.

역시 아르카나 대륙 10대 불가사의라는 건가? 임시로 뭉친 파티원들도 각자 소감을 뱉어냈다.

"한두 마리 튀어나왔을 때도 진땀을 뺐는데."

"...백 마리도 넘겠죠?"

"백 마리만 되겠어요? 아주 그냥 미궁 전체가 무너지고 있는 것 같은데."

"형님, 누님들. 오늘이 제 제삿날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저승길 노잣돈이라도 후원 좀...."

"아니, 거기 진짜 재수 없는 소리 할 거예요?!"

"뭐요? 그쪽이 나한테 육개장 값이라도 보태줬습니까?"

쿠구궁!

말다툼이 과열되려던 찰나.

적절한 타이밍에 무너진 미궁.

그러나 삼켜 넘겼던 마른침이 무색하게도.

"...어라?"

[텟퍼른 흑의 계약자].

생김새부터 음울한 몬스터들이 달려들지 않았다.

아니, 적대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완전히 몸을 돌린 채 반대 방향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저쪽은...?"

미궁의 심층부.

깨워선 안 될 존재가 봉인된 곳.

그리고 '한없이 깊은 어둠'이 발을 들인 그곳을 향해서.

◈ 132화. 투정 (1)

"이, 이게 무슨 일일까요?"

넷튜버의 직업병.

박휘강이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채팅창이 장단을 맞췄다.

-왜 뭔데뭔데???

-휘강아 카메라 좀 앵글 좀 맞춰봐!!!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아

-설마 우리 호열 님 뜨셨음?! 그저 호멘

"아니요. 호열 님이 나타나신 게 아니라...."

터치와 동시에 전환되는 카메라 앵글.

비로소 시청자들의 화면에 떠오른 [텟퍼른 흑의 계약자]들.

-ㅁㅊ 뭐가 저렇게 많냐? ㄷㄷㄷㄷ

-ㄹㅇ 암것도 못하고 개복치사 했겠는디??

-근데 쟤네 어디 가는 거임???

말 그대로 대군.

물량에 놀라기도 잠시, 시청자들도 위화감을 알아차렸다. [텟퍼른 흑의 계약자], 녀석들은 추가 업데이트 내역에도 명시되어 있었던 몬스터가 분명했거늘.

"왜 아까랑 다르게 공격을 안 하는 거야?"

"나한테 물어봐도 내가 알겠냐?"

"형님들. 괜히 아까운 포션까지 마셨습니다. 어떻게 포션값 후원 좀."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후우─

일단, 곳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박휘강은 아직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탐험가의 직감이라는 게 있었으니까.

"이건 함정을 건드린 수준이 아니에요."

쿠구구구궁─!

이 순간에도 미궁은 무너져내릴 것처럼 진동했다. 누군가 작정하고 트롤링을 했다고 쳐도, 미궁 전체를 뒤흔들 정도의 장치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 터.

"그 이상의 사건이 벌어진 게 확실한데...."

평상시라면 생각하느라 골치 꽤나 썩였겠지.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떠오르는 가능성은 단 하나뿐.

[텟퍼른 미궁] 균열엔 호열이 있었으니까.

'...맞아, 호열 님이 퀘스트를 수행 중이시잖아!'

[텟퍼른 울타리] 균열에서 벌어졌던 사건.

호열과 어둠의 정령과의 대화.

그 장면이 전파를 타는 바람에 둘의 대화를 두고 온갖 분석이 끊이지 않았었다. 한없이 깊은 어둠이 호열의 클래스가 확실하다, 뭐다....

하지만 확실한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다.

-"오직 그대만이 이 텟퍼른의 미궁을 풀 수 있다."

호열이 텟퍼른 미궁과 관련된 퀘스트를 받았다는 것.

꼬리에 꼬리를 무는 추리 끝.

박휘강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거 호열 님이 벌이신 일 같아요."

-뭐? 호열 님이?

-호열 님이 트롤링을 했다는 말이냐?

-신성모독이다!!

"아니요. 이건 트롤링이 아니에요!"

[텟퍼른 흑의 계약자]들의 행동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마치 함정을 건드린 것처럼.

몹들이 깨어나긴 했지만, 공격을 해오진 않았다.

그저 어딘가를 향해.

정확히는 미궁 심층부를 향해 움직이고 있을 뿐.

'호열 님이 진행 중이신 퀘스트의 일부가 아닐까?'

결론이 나왔지만, 박휘강은 입을 다물었다.

과도한 추측일지도 몰라.

혹시라도 호열 님에게 폐가 될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다른 이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는 데에.

부연 설명은 필요치 않았다.

첫 등장 때부터 같은 대사만 반복하던 [텟퍼른 흑의 계약자].

그들의 대사가 바뀌었으니까.

"...오랜 기다림 끝에 과오를 바로 잡을 기회가 왔도다."

"!!!"

하나가 아니었다.

모든 흑의 계약자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박휘강을 포함, 서로 눈빛을 교환하는 플레이어들.

그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열었다.

"이것도 퀘스트의 일부인 거야!"

"뭔 놈의 퀘스트 스케일이...?"

"진짜 누구는 잡퀘 하나 받기도 어려운데!"

대체 어떤 퀘스트를 진행 중이길래.

미궁 전체를 뒤흔들고, 이만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걸까?

부러움을 떠나 같은 플레이어로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타이밍에 누군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저희도 따라가 볼까요?"

[텟퍼른 흑의 계약자]들이 깨어나고 움직이면서 함정을 걱정할 필요는 없어졌다.

정말, 말 그대로 저들의 뒤를 따라간다면....

"미궁 심층부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미궁 심층부.

그곳에서 균열에 진입하며 엇갈렸던 플레이어들과 재회할 수 있을 터.

그중엔 틀림없이 호열이 있겠지. 미궁의 전리품을 떠나서 이 순간만큼은 순수하게 궁금증이 솟구칠 수밖에 없었다.

"전,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요. 뭘 하고 계신 건지!"

호열의 활약을 지켜보고 싶었다.

박휘강의 파티뿐만 아니었다.

미궁에 진입했던 모든 플레이어.

그들이 떨어졌던 스타팅 지점.

"저것들을 따라가면 미궁 심층부까지 갈 수 있단 거지?"

"거기엔 이호열이 있을 거고."

"그럼 이호열이 대체 무슨 짓을 벌이는 건지도 확인할 수 있을 거고?"

판단이 서는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우르르─!

각 스타팅 지점, 플레이어들이 [텟퍼른 흑의 계약자]들의 행렬에 따라붙었다.

과연, 추측대로.

함정은 더 이상 발동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이놈의 미궁, 뭐가 이렇게 깊어?"

"이건 진짜 클리어하라고 떠오른 균열이 아닌데."

"일반적인 속도였으면 균열이 붕괴할 때까지 클리어는커녕 심층부까지 도달하지도 못했겠는데?"

혀를 내두르면서도 지하로, 더 깊은 지하로.

걸음을 서두른 끝에 플레이어들은 도달했다.

텟퍼른 미궁 심층부에.

그리고 목격했다.

"...저, 저게 뭐야?"

미궁의 암벽.

벽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무언가'를.

"...보석인가? 근데 움직이는 것 같기도 하고?"

"형님들, 저거 방금 움찔거리지 않았어요?"

"잠깐. 저거 설마, 눈동자인가?"

"야씨. 미친 소리 하지 마. 무슨 눈동자가 저렇게 커?!"

너무나도 커서 단번에 알아보지 못할 정도.

그건 부정하고 싶을 정도의 크기였다.

족히 십 미터는 넘길 것 같은 동공이라니.

누군가 말을 더듬는다.

"...저게 동공이면 본체는 얼마나 크다는 건데?"

바짝─!

깨닫는 순간, 전신에 소름이 돋아났다.

일순간,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아르카나의 보스몹들. 이렇게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는 몬스터가 있었던가? 기억을 되짚어 봐도 딱히 떠오르는 녀석이 없었다.

시끌시끌─

타 스타팅 지점에서 도착한 플레이어들.

"거봐. 내가 늦었다고 했지."

"그러네. 다른 쪽 상황도 우리랑 마찬가지였던 건가?"

"와씨. 뭐가 이렇게 많아?"

"...야, 잠깐만."

그들도 하나둘씩 거대한 동공과 마주했다.

아직 상태이상 메시지가 떠오른 것도 아니었건만.

플레이어라면 곧장 알 수 있었다.

"내가 미궁 초입부터 이상하다 했다!!"

"뭐, 적정 레벨 500? 아주 지랄을!"

"애초에 이호열이 진입했을 때부터 알아봤어. 나는!"

우리들의 수준으로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니다.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러니까 시선은 자연스레 호열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의심하는 건 아닌데. 가능할까요?"

이호열.

추정 레벨, 최소 900레벨.

그러나 제아무리 호열이라고 하더라도.

저 녀석을 상대할 수 있을까?

마주치자마자 녀석의 크기에 압도된 탓.

플레이어를 포함, 지켜보는 이들은 불안감이 들었다.

"보스몹은 차원이 달라. 레벨에서 우위라고 해도 스탯 자체가 일반 몬스터랑은 차원이 다르니까. 그런데 저게 이호열보다 레벨이 낮으리란 법도 없잖아...."

게다가 지금 호열의 전력은 백 퍼센트가 아니었다.

호열, 개인의 전력엔 변함이 없겠지만.

호열을 따르는 세력.

마탑.

라이언 하트 기사단.

그림자 용병단.

여신교단 성기사단까지.

이번엔 그 압도적인 세력이 함께하지 않았으니까.

"이호열과 동행한 건 달랑 탐험가 셋."

물론, 전설의 탐험가 파비앙을 포함해 셋 모두가 평범한 탐험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탐험가는 엄연히 비전투 클래스였다.

전투에 있어선 큰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단 뜻이다.

두뇌 회전이 빠른 몇몇 플레이어가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가 합류하면 되잖아요? 호열 님한테."

"그래, 당연히 합류해야지. 어차피 한배를 탄 건데."

"맞아. 어차피 녀석을 쓰러트려야 하니까. 그런데...."

...솔직하게 우리가 도움이 될까?

잘은 몰라도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인가?

거대한 동공에 초점은 없었다.

그저 눈을 뜨고 있을 뿐.

그럼에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미궁의 암석 아래로 언뜻 드러난 녀석의 피부 조직.

"내 수준으론 솔직하게 생채기도 못 낼 것 같은데?"

플레이어들은 최악을 상상했다.

만약, 녀석의 동공에 초점이 돌아오고.

그 시선이 자신들을 향한다면....

"젠장, 벌써부터 쫄리는데. 이거."

몸과 머리가 따로 논다는 게 이런 기분인가?

송골송골─

애써 장비를 다잡은 손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

그러나 플레이어들은 하나를 간과하고 있었다.

바로 이곳.

미궁 심층부를 향해 모여든 [텟퍼른 흑의 계약자]의 존재를.

흑의 계약자, 일렁거리는 검은 형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미궁의 좁은 통로 탓에 숫자를 정확하게 헤아릴 수 없었다.

드넓은 심층부에 들어서자 그들의 숫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아니, 정확히는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의 머릿수였다.

"수천, 아니 일만은 될 것 같은데요?!"

이미 몸을 휘감은 불안감 탓일까.

누군가가 작게 중얼거렸다.

"...저것들 갑자기 돌변하면 어떡하지?"

"어떡하긴, 다 뒈지는 거지."

"이제 와서 도망가기도 늦었어. 정신 차려 다들."

꼴깍─

저절로 넘어가는 마른침.

그러나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

각자 다른 갈림길에서 쏟아져 나온 탓에, 혼잡하게 섞여 있던 흑의 계약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와 열을 맞춰 대형을 갖춰갔다.

"...뭐야, 갑자기?"

'격식'과 '절차'에 충실한 듯한 행동.

가장 먼저 알아차린 건 역시나.

눈치가 빠른, 그러면서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던 박휘강이었다.

'호열 님. 호열 님은 어디 계시지?'

역시, 호열이 흑의 계약자를 움직인 게 분명하다!

박휘강이 심층부를 두리번거렸다.

흑의 계약자와 플레이어로 혼잡한 미궁 심층부.

그 속에서 호열을 찾겠다니.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와 다름없어야 했건만.

"...찾았다."

박휘강은 단번에 호열을 찾았다.

믿음의 힘으로?

아니, 그런 게 아니었다.

어두컴컴한 미궁 심층부.

그곳에서 찬란한 후광을 뿜는 형체.

[백색(百色)의 겉날개].

백 가지의 속성 마법이 깃든 겉날개가 펄럭이며 그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는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 빛을 반사하는 은빛의 머리카락까지.

"호열 님!"

호열의 존재감은 절망에 빠진 미궁 속에서도 찬란했으니.

그 모습은 마치 한없이 깊은 어둠.

그 속에서 빛나는 한 줄기의 빛.

박휘강이 그런 호열의 모습을 자세히 보기 위해 스킬, [탐험가의 시선]을 발동했다가 흠칫했다. 잘못 봤나, 싶어서 눈까지 끔뻑거려 봤거늘.

호열의 손에 들린 저건 아무리 봐도....

"...찻잔?"

모락모락─

그것도 김이 피어나는 찻잔이었다.

*

달칵─

흔들림 없는 목과 팔의 각도.

절제된 자세로 기울이는 찻잔.

...난데없이 티타임이라니.

남들이 보기엔 어떻게 보일까.

됐다, 이젠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그래, 생각하면 나만 괴로워지는 거다. 호열아....

[6시간 동안 마력 재생력이 소폭 상승합니다.]

이른바 울며 비약초 먹기.

나는 거대한 동공을 바라봤다.

녀석이 바로 '깨워선 안 될 존재'였다.

과연, 전설의 탐험가란 명성은 어딜 가지 않는다는 거겠지.

파비앙은 녀석의 동공을 보자마자 정체를 특정했다.

"가죽으로 봐선 뱀 혹은 도마뱀. 그러나 이 정도의 크기라면...."

꼴깍─

천하의 파비앙이 식은땀을 훔치며 말을 이었다.

"역시, 드래곤과 관련된 녀석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파비앙의 박학다식이 때론 내게 상처가 된다.

...드래곤이라니!

온갖 발버둥을 쳐서 간신히 마왕을 쓰러트렸더니 이젠 용과 마주하게 됐다.

이젠 확신할 수 있다. 이게 다 [행운]에 스탯 포인트를 투자하지 않아서다, 진짜로...!

'최종 콘텐츠잖아, 드래곤은.'

드래곤.

강함을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간단했다.

『걷잡을 수 없는 피해를 남긴 용마대전(龍魔大戰)의 교훈은 명확했다. 설령 마탑조차도 불멸의 존재, 드래곤과는 맞설 수 없다는 것....』

다른 것도 아니고 마탑에서 읽었던 서적에 그렇게 적혀있었으니까.

과장이 아니겠지. 그러니까 파비앙이 식은땀을 흘리는 것도 이해가 된다.

"경,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요. 이 정도의 규모를 자랑했던 고대 도시, 텟퍼른이 모든 걸 희생하면서까지 녀석을 봉인하려고 했던 이유를 말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드래곤은 악마가 아니다.

[천적관계]가 발동될 일은 없다는 것이다.

아니, 발동돼도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마탑, 전체가 덤벼도 이길 수 없는 존재라니까?

당사자였던 마탑이 패배를 교훈으로 삼아서.

책으로 남겼을 정도였단 말이다.

...아무래도 심히 좆된 것 같구나.

과거의 나였다면 그렇게 내뱉었을지도 모른다.

근데, 말이야.

나도 이젠 공백기가 무색할 정도로 적응이 좀 됐거든.

눈치가 생겼단 거다.

'저건 드래곤이 아니야.'

확신할 수 있는 이유?

나는 퀘스트에도 급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10대 불가사의 퀘스트 : 텟퍼른의 미궁]

아르카나 대륙 10대 불가사의, 텟퍼른.

텟퍼른의 미궁을 파훼하고.

텟퍼른의 실체를 세상에 알려라.

현재까지 밝혀낸 불가사의 : 0개 / 10개

─텟퍼른의 미궁을 목격하라. (성공)

─미궁 심층부에 도달하라. (보류)

─심층부에 잠든 '깨워선 안 될 존재'를 처치하라. (진행 중)

만약, 정말 드래곤과 관련된 퀘스트였다면.

이건 10대 불가사의 퀘스트로 분류되지 않았겠지.

월드급이 아니라 정말 월드 퀘스트로 떠올랐을 거란 말이다.

[월드 퀘스트 : 세계수의 씨앗]

세계수 퀘스트처럼.

그러니까 나는 내심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잖아?

아이템 장비부터 비약초 도핑까지 말이야.

마음 같아선 파비앙 일행들까진 챙겨주고 싶었는데.

"그대들에게 내어줄 수 있는 차가 없어 아쉽군."

다행히도 파비앙은 멋쩍게 웃어넘겼다.

"아닙니다. 우려하실 것 없습니다. 사실 권하셔도 무언가를 섭취할 정신이 없어서 말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동감입니다."

다들 그렇게 말해주니까 덜 미안해지네.

게다가 이곳엔 나와 파비앙 일행만 있는 게 아니었다.

왜, 보이는 것처럼 나와 함께 균열에 진입했던 플레이어들이 있다.

그리고 아르카나 대륙의 평화를 위해. 자신들을 희생했던 긍지 넘치는 텟퍼른의 백성이 있다.

[텟퍼른 10,890인의 흑의 계약자]

[현재 상태 : 명령 대기]

그리고 나는 알고 있다.

깨워선 안 될 존재.

저게 진짜 드래곤인지 뭔진 알 수 없어도, 어쨌거나 녀석이 멀쩡한 상태가 아니라는 걸 말이야. 그건 텟퍼른 백성들의 희생으로 유지되고 있는 『흑관』 덕분이었다.

'녀석은 오감을 빼앗긴 상태.'

[실명], [침묵], [마비] 등등....

온갖 상태이상을 달고 있단 소리였다.

이 순간, 초점 없이 깜빡거리고 있는 동공이 그 증거.

그리고 내게는 『흑관』의 효과를 더욱더 강하게 만들 수 있는 '적합한 마력'이 충만하다. 그러니까 나는 언제나처럼 당당하게 입을 열 수 있단 말이다.

"깨어나선 안 될 존재여."

그와 동시에 끌어올리는 적합한 마력.

청각을 빼앗겨 듣지도 못할 테지만.

나는 말을 이었다.

"잠투정이라면 내가 받아줄 테니. 어디 마음껏 날뛰어 보거라."

...하여튼, 입방정.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드래곤과 관련된 녀석을 얌전히 날뛰게 둘 순 없다...!

그런 나의 처절한 의지가 메시지로 떠올랐다.

[깨워선 안 될 존재에게 '공포'가 발생합니다.]

◈ 133화. 투정 (2)